포도 나무 가지 비유 | 성경 이야기 / 포도나무 비유 / 요한복음 15장 / 영아부 / 유치부 빠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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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는 서로 뗄 수 없는 절대적인 결합관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서로 떨어지면 다른 것은 고사하고 생명 자체를 잃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와 주님의 관계를 이처럼 생명의 관계로 설명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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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아부, 유치부 어린이들을 위한
요한복음 15장 1절에서 8절의 포도나무 비유 이야기입니다

위 영상을 교회에서나 선교 등의 목적으로 사용할시 저작권에 대한 요청이 필요합니다.
사용은 무료지만 댓글로 요청해주시기 바랍니다.
설교 자료는 제 블로그에 있습니다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babe7979\u0026logNo=222396850535\u0026navType=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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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비유설교(4) 포도나무 비유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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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3/2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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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말씀하신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 (요한 15장) – JW.ORG

예수께서는 자신이 포도나무이고 아버지는 경작자, 제자들은 가지라고 말씀하신다. 제자들은 어떻게 열매를 맺고 예수의 친구가 되고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를 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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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jw.org

Date Published: 11/2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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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나무 비유의 의미 (요 15:1-8) – 기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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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godpeople.or.kr

Date Published: 1/1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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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나무와 가지 – 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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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kmib.co.kr

Date Published: 7/2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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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포도나무와 그 가지의 비유! (요 15:1-11)

포도나무와 그 가지의 비유! (요 15:1-11) 미국의 아이젠하워 전대통령에게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1959년에 소련의 흐루시초프가 정상회담을 하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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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7/1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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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 – 포도나무의 비유 – 그리스도의교회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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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thechurch.kr

Date Published: 6/2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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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ristiandaily.co.kr

Date Published: 3/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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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다 성경』의 ‘포도나무 비유’ 해석, 유감 – 드림투게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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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thedreamtogether.com

Date Published: 4/1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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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이야기 / 포도나무 비유 / 요한복음 15장 / 영아부 / 유치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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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포도 나무 가지 비유

  • Author: 하늘나라기차
  • Views: 조회수 1,60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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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0. 10. 18.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udvIBi5g56U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요 15:1~10)

오늘 저녁에 우리가 함께 나눌 예수 그리스도의 비유의 복음은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가 되겠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믿고 따른 자들과 자신의 관계를 비유로 설명하기를 즐기셨습니다. 그 중에서도 요한복음에는 주로 그 관계성을 “나는 ….이다”라는 표현으로 설명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에도 보면 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를 예수님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과의 관계로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포도나무는 예로부터 팔레스틴에서 가장 귀중한 작목중의 하나로 성경 속에서도 가장 많이 등장하고 있으며 누구든지 친근하게 접할 수 있는 나무이며 열매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싶이 포도나무는 나무 자체로서는 별 가치가 없습니다. 나무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땔나무로도 적합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 열매인 포도는 우리 삶에 있어서 유익하고, 사람들이 즐겨 먹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삶 가까이에 있는 이 포도나무를 통해서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포도나무이고 우리가 그 가지라는 비유’는 이 관계가 보통의 관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관계는 생명적 관계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둘의 연결은 생의 유지와 풍성을 가리키며, 이둘의 분리는 결국 생명의 소멸과 결국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나무는 가지가 있어야 그 잎을 통하여 광합성 작용을 하게 되고 나무가 숨을 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지가 아무리 좋아도 나무 줄기에 의해서 생명의 수분이 공급되지 않는다면 그가지는 말라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는 서로 뗄 수 없는 절대적인 결합관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서로 떨어지면 다른 것은 고사하고 생명 자체를 잃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와 주님의 관계를 이처럼 생명의 관계로 설명하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들께서는 오늘 이 시간도 주님과 자신을 이처럼 생명의 관계로 이해하고 계십니까?

뗄레야 뗄 수 없는, 절대로 떨어져서는 안되는 관계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필요하시며 우리는 주님이 필요한 그러한 존재들인 것입니다.

모든 문제는 이 관계의 문제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 관계가 나빠지면 모든 것이 나빠지고 이 관계가 좋아지면 모든 관계가 좋아 집니다.

예수과 형통하면 모든 것과 형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와 성도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우리는 그 지체입니다. 몸에서 떨어져나간 지체는 아무 쓸모가 없는 혐오스러운 존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와 그리스도는 이러한 생명의 관계에 있습니다. 가지가 아무리 모든 조건을 갖추었다고 해도 나무줄기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그것은 쓸데없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자신이 아무리 능력을 가지고 있고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예수님에게서 떨어져나가면 예수 그리스도와 긴밀한 생명의 관계를 상실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습니까?

예수님은 참 포도나무라고 하셨습니다.

참 포도나무라는 표현은 거짓 포도나무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실재적으로 나무자체가 좋지 못한 종자여서 아무리 가지가 열과 성을 다해서 노력을 한다고는 하지만 좋지 못한 열매를 맺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열과 성을 더하면 할 수록 더욱 열매는 나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에 비유한다고하면 잡종의 포도나무 들포도나무가 아니라 좋은 포도나무라는 사실입니다.

이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우리는 참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참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들입니다.

포도나무가 좋은데 그가지 좋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가지고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 무엇이든 구하면 필요한대로 다 공급하는 것과 같이 예수님은 자기 안에 거하는 사람들이 열매 맺는 삶을 위하여 무엇이든지 필요하면 공급하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내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7)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이 열매를 맺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 것이 있습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있습니까? 걱정하지 말고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자기를 위해서 구하고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위하여 구하기 때문에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포도나무의 가지가 포도열매를 맺는데 필요한 것이어서 구하는 양분을 어찌 포도나무가 그것을 거절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기 위해서 필요한 은사를 구하는데 하나님께서 거절하실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가지가 할일은 열매를 맺는 일입니다. 열매맺지 아니한 가지마다 찍어 불에던진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만물은 그 역할과 구실이 있는 것입니다. 그 역할과 구실을 다하지 못할 때는 결국 역할을 잘 하는 것의 방해만 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심판을 받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한 나무에 여러 가지가 있는 그 가지 중에 하나가 열매는 맺지 않고 영양분만 빨아들이면서 다른 가지의 열매까지 충실하지 못하게 한다면 틀림없이 그 가지를 잘라낼 것입니다.

“내 아버지는 농부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고 이를 깨끗이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가지는 제 마음대로 놓여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농부이신 아버지의 관리와 심판과 결정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는 일에 싫증을 느끼는 순간부터 이미 열매에 대한 소망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여기서 부터 많은 부작용들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열매를 맺고자 하는 열의, 뜨거움이 있어야 합니다.

성도가 교회에 싫증을 느끼는 순간부터 모든 신앙적인 병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포도나무의 가지가 열매를 맺는다면 그것이 포도가 분명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과 관계를 맺고 하나님과 연결된 가지같은 우리들은 어떤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이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안에 거하리라”(10)고 하셨습니다.

성경비유설교(4) 포도나무 비유

성경비유설교(4) 포도나무 비유(요15:1-11)

● 포도는 예로부터 이스라엘의 가장 중요한 작물 중의 하나로, 성경 속에서 도 가장 많이 등장하며 친근하게 접할 수 있는 과수이다. 포도는 코카서스 지방과 카스피해 연안이 원산지로서 BC3,000년 무렵부터 재배하였다. 한국에는 고려시대에 중국에서 들여온 것으로 추측되며 《조선왕조실록》 등에도 포도에 관한 기록이 실려 있다. 그러나 본격적인 재배는 1906년 서울 뚝섬에 원예모범장을 설립하면서 시작되었다. 크게 유럽종·미국종·교배종으로 나뉜다. 유럽종은 품질이 우수하고 건조에 잘 견디지만 추위와 병충해에 약하다. 미국종은 유럽종보다 품질은 떨어지지만 추위와 병충해에 강하다. 한국에서는 주로 추위와 병충해에 강한 미국종과 교배종을 심는데, 한국에서 가장 많이 재배하는 품종은 캠벌리로서 자줏빛을 띤 검정색으로 알이 중간 크기이며 8월 중순부터 하순에 걸쳐 익는다.

포도는 세계 과일 생산량의 1/3을 차지하며 과일 가운데 1위이다. 주요 생산국은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이며 총생산량의 약 35%를 생산한다. 포도는 당분(포도당·과당)이 많이 들어 있어 피로회복에 좋고 비타민 A·B·B2·C·D 등이 풍부해서 신진대사를 원활하게 한다. 그밖에 칼슘·인·철·나트륨·마그네슘 등의 무기질도 들어 있다. 알칼리성 식품으로서 근육과 뼈를 튼튼하게 하고 빈혈에 좋고 바이러스 활동을 억제하여 충치를 예방하며, 레스베라트롤이라는 항암 성분이 있어서 암의 억제에도 효과가 있다. 신경세포를 만드는 신경효소의 활동과 효능을 증진하여 알츠하이머병이나 파킨슨병 등의 퇴행성 질병을 예방하는 데도 도움을 준다.

● 포도나무는 다른 나무나 받침대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스스로 뻗어서 하늘로 오르지 못한다. 그러나 조건이 나빠서 땅을 기거나 태양을 향해 치솟지 못하면 이내 말라버리거나 열매를 맺더라도 시고 떫어서 먹을 것이 못된다. 포도송이가 잘 열리려면 자주 가지치기를 해야 하고 햇볕을 많이 쬐어야 한다. 잎은 넓적하며 양떼나 소들이 즐겨 먹는다.

포도나무는 땅에서 물을 빨아 올리고 하늘과 공중에서 햇빛과 대기를 흡수하여 포도즙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래서 고대로부터 젊음과 영생 및 다산의 상징이요, 포도잎은 신을 나타내는 표의문자의 기호였다. 창조의 여신에 빗대어지기도 했다.

● 요한복음 15장은 문맥상으로 보면, 13장부터 17장까지 이어지는 최후의 만찬과 고별설교의 일부분이다. 다른 복음서에는 나와 있지 않고 요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는데, 복음서 가운데 제일 마지막에 기록된 요한복음에는, 다른 복음서에서 빠져있는 부분들을 주로 기록했기 때문에 이처럼 다른 복음에서 없는 내용들이 많이 들어있다. 반면 다른 복음서에서는 공통적으로 나온 내용들이 요한복음에는 빠져있기도 하다. 예를 들면,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의 기도는 중요한 내용이지만, 공관복음에 중복되어 있기 때문에 요한복음에서는 과감하게 생략되어 있기도 하다.

14장 마지막 절에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는 말씀으로 인해 본장과 16장(혹은 17장까지)의 말씀과 기도를 하신 장소가 어디인지에 대해 많은 추측이 있어 왔다. 최후의 만찬을 마치신 예수께서 다락방을 떠나 겟세마네로 가시면서 주위에 있는 포도원을 보시고서, 혹은 게세마네 동산으로 가시는 도중에 있는 성전 문에 새겨진 포도나무 문양을 보고 이 교훈을 주신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14-17장을 최후의 만찬을 베푼 다락방에서 행하신 ‘다락방 설교’로 묶어서 보고 있다.

‘내가 참 포도나무요’라는 ‘나는 ~이다’라는 표현은 요한복음에서 특이하게 사용된 것인데, 이것을 예수의 ‘자기 선언’이라고 말한다. 이같은 표현은 이적과 함께 연결되어 나타나기도 하는데, (1)오천 명을 먹이신 표적(요6:4-13) 이후에 ‘나는 생명의 떡이라’(요6:35)라고 선언하고 있으며, (2)나면서부터 소경된 자를 고치신 표적(요9:1-7) 이후에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3)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요11:1-44) 이후에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요11:25)라고 선언한다. 이처럼 이적과 선언이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는 경우도 있으나 나머지는 본문처럼 직접적으로 이적과 관련되지 않고 단순히 ‘나는 ~이다’라고 선언하고 있다. 물론 본문도 굳이 연결시키자면, 요2장에 나오는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최초의 이적과 연결시킬 수도 있겠으나, 억지로 연결시킬 필요는 없다. ‘나는 참 포도나무다’는 선언 외에 ‘나는 선한 목자다, 나는 양의 문이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는 7개의 선언이 요한복음에는 나온다.

‘내가 참 포도나무요’라고 시작되는 요15장은 예수님과 성도들의 관계, 성도들 상호간의 관계, 그리고 성도들과 세상의 관계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을 차례대로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내용을 통하여 강조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삶’이다. 다시 말해서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야말로 풍성한 삶의 열매를 맺을 수 있고, 또한 서로 사랑하게 될 뿐만 아니라 세상의 그 어떤 핍박에 대해서도 믿음을 굳게 지키고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이 가운데서도 예수님과 성도들의 관계에 대해 언급하는 본문은 포도나무의 비유로 이루어져 있다. 즉,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참 포도나무에, 그리고 성도들을 포도나무의 가지에 비유함과 동시에 성부 하나님을 포도원 농부에 비유하심으로써, 상호간의 연합 관계에 대하여 교훈하신 것이다. 아마도 예수께서는 당시의 팔레스틴 지방에서 많이 재배되고 있던 포도나무와 관련된 비유를 통하여 제자들에게 영적인 진리를 좀더 명확하고 실감있게 전달하려 하셨을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하나님을 농부로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도나무로 비유하는 표현들은 구약성경에도 종종 등장한다. 하지만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기대와는 달리 좋은 포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불량한 ‘들 포도나무’로 표현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그 안에 술 틀을 팠었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혔도다(사5:2).”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찜이뇨(렘2:21).”

이에 반해 예수께서는 자신을 ‘참 포도나무’에 비유하심으로써, 불순종과 타락의 모습을 보인 구약의 이스라엘과는 달리 온전한 순종과 헌신을 하나님께 바칠 새 이스라엘의 모범으로 자신을 계시하셨다. 그리하여 포도나무의 가지로 비유되는 성도들은 참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생명적 연합을 이루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풍성한 영적 열매들을 삶속에서 맺을 수 있다는 사실을 교훈하고 있다. 그리고 아울러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 영적인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예수님 안에 거할 때만 가능하다는 교훈도 함께 가르치고 있다.

● 그러면, 포도나무 비유 혹은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교훈은 무엇인가? 그것을 발견하기 위해 우리는 다음과 같이 질문할 수 있다.

왜, 가지인 우리들은 예수라는 참 포도나무에 반드시 붙어있어야만 하는가? 본문을 살펴보면, 그 이유는, 그에게 붙어있어야만 과실을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4,5절). 그리고 7절을 보면, 그에게 붙어있어야만 기도를 응답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과실을 많이 맺어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며,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어야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인데, 그게 뭐 대단한 진리요 교훈이냐는 것이다. 다시 말해, 본문을 통해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은,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라, 참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로서 마땅히 열매를 맺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만일 그렇지 않고, 마땅히 맺어야 할 열매를 맺지 아니하면, 농부되신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실 것이며, 제해진 가지들은 말렸다가 불에 던져져 태워버림을 당할 것이라고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 자신은 참 포도나무인 예수께 붙어있는 가지인지 한 번 자문해 보기 바란다. 나의 삶 속에서 어떤 향기로운 열매를 풍성하고 맺고 있는가? 추수감사절에 강단을 장식해 놓은 과일이나 채소류 가운데 보면 포도향이 제일 강력하다. 다른 과일보다 유독 포도에 날파리들이 많이 꼬인다. 그 이유는 포도의 향기와 그 맛이 다른 과실보다 월등하기 때문이다. 신앙인으로서 여러분의 어떤 삶의 모습에 다른 사람들이 감동을 받고 있는가? 여러분의 삶에 어떤 향기가 입소문을 타고 사람들에게 번져가고 있는가?

그리고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포도나무 가지처럼 그렇게 향기롭고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이 성도로서 당연히 해야할 일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선한 일을 최선을 다해 감당하되, 그것을 자랑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행한 선행을 남들이 알아주기를 얼마나 고대하는지 모른다. 그래서 내가 행한 멋진 일들을 몰라주면 속상해 하고 불평, 원망하기까지 한다.

왜 주님께서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교훈하셨겠는가? 억지로 오리를 가자고 하면 왜 십리까지 가라고 말씀하셨을까? 우리가 진실로 참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들이라면, 당연히 향기롭고 풍성한 포도송이를 주렁주렁 매달아야 할 것이며, 또 주 안에 있으면 열매는 자연스럽게 열리는 것이기 때문에, 신앙인으로서 내 삶의 열매는 결코 나를 내세워 자랑할 것이 못된다는 사실이다. 그저 겸손한 마음으로 나를 통해 역사하시는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 제자로서의 자세라는 것이다.

● 또한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교훈 한 가지를 발견하게 되는데, 다름 아니라, 가지치기에 관한 것이다. 포도농사를 비롯 과수농사 짓는 분들이 가장 공들이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과정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과수의 가지를 치는 작업이다.

가지치기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오랜 경험에서 나오는 고도의 전문적인 작업이다. 과수농사의 결과를 결정짓는 중요한 작업이다.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그 자체로서 쓸모없을 뿐 아니라 뿌리에서 빨아올리는 영양분을 쓸데없이 소모함으로 열매를 맺는 가지에 있어서도 풍성한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한다. 따라서 그대로 두면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한다. 따라서 좋은 열매를 더욱 풍성케 하기 위해서는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나, 나무를 병들게 할 수 있는 가지를 잘라버려야 한다.

그래서 영적 농부되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동안 수없이 기회를 주고 수많은 선지자를 파송하여 돌이키려 했으나 영적인 열매를 맺지 못한 육적 이스라엘을 가차없이 심판하고 제거해 버리셨던 것이다.

좋은 열매를 얻기 위해 가지치기를 잘해야 한다. 훌륭한 운동선수는 불필요한 동작을 하지 않는다. 그 순간에 가장 적합한 동작을 만들기 위해 운동선수들은 얼마나 노력하는지 모른다.

훌륭한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는 생활 속에서 가지치기를 잘해야 한다. 나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복되고 성공적인 삶을 이끌어 가는데 불필요한 가지들이 있음을 인정하고 가지치기를 잘 하기 바란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의 우리 인생은 그리 길지 않고, 우리의 힘도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가지를 치지 아니하면 제대로 된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쓸데없이 힘만 빼는 가지들이 무엇인가? 신앙인답게 사는 방해되는 모든 것들을 제거하기 바란다. 그래야 풍성한 열매가 여러분의 삶 속에서 맺히기 시작한다.

●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것인가? 어떻게 해야 성도들이 주 안에 거하고 주님의 말이 우리 안에 있어, 열매를 풍성히 맺으며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면 그 기도에 응답해 주신다는 말인가? 9절 이하의 말씀은 이 물음에 답을 하고 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온전히 하나로 결속되는 것인가? (9-11절 읽기)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기 위해 성도는 그의 ‘사랑’안에 거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그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인가? 10절에 보면 주님의 계명 즉 말씀을 지키는 것이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 계명이 무엇이냐? 바로 사랑의 계명이다. 예수님께서 몸소 실천해 보여주신 사랑의 계명! 자기를 낮추고, 자신을 배반하는 자를 용서하고 오히려 섬기기까지 하며, 결국에는 자기를 희생하는 사랑! 바로 이 사랑의 계명을 지키라는 것이다. 그 계명을 지키는 것이 참으로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요, 이것이 바로 주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는 것이요, 이것이 바로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비결이다.

오늘 나의 삶 속에 풍성한 열매가 부족한가? 그것은 달리 표현하면, 내가 지금 주님께서 명령하신 ‘사랑의 계명’을 제대로 실천하고 있지 못하다는 증거이다. 내 생활에 기쁨이 사라져 버렸는가? 주일 예배도 드리고 죄 짓지 않고 선량하게 살려고 노력함에도 불구하고, 삶이 기대되고 매일매일이 벅차고 즐겁고 기쁘지 않다면, 자신에게 반문해 보자. 내가 지금 주님의 사랑의 계명을 제대로 실천하고 있는가?

불신자들과 똑같이 내 욕망대로 내 감정대로 내 경험과 내 지식만 가지고, 판단하고 반응하고 처신해서는 복음적인 삶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예수께서 앞서가시며 보여주신, 자신을 죽임으로써 남을 살려내는 희생과 섬김의 삶을 따라가지 아니하면, 아무리 교회 다녀도, 참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것 같아도 열매는 맺히지 않는다. 기도의 응답도 없고, 기쁨도 없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

우리의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순간에도 우리를 부르고 계신다. 어떡하시렵니까? 마른 가지처럼 버려져 불 가운데 던져지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풍성한 열매를 맺고 기도에 응답받으며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사시기 원합니까? 날마다 주님과 교통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는 동산교회 교우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 (요한 15장)

예수께서는 충실한 사도들과 마음을 터놓고 대화를 나누면서 격려하고 계십니다. 밤이 깊어 어쩌면 자정이 지났을 것입니다. 이제 예수께서는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한 가지 비유를 드십니다.

예수의 말씀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나는 참포도나무이며 내 아버지는 경작자이십니다.” (요한복음 15:1) 이 비유는 여러 세기 전에 이스라엘 민족에 관해 기록된 말과 비슷한데, 그 민족은 여호와의 포도나무라고 불렸습니다. (예레미야 2:21; 호세아 10:1, 2)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그 민족을 곧 버리실 것입니다. (마태복음 23:37, 38) 그러므로 지금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내용은 새로운 것입니다. 이 비유에 나오는 포도나무는 예수입니다. 아버지께서는 기원 29년에 예수에게 성령으로 기름부으셨을 때부터 이 포도나무를 경작해 오셨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포도나무가 예수만을 상징하는 것이 아님을 이렇게 알려 주십니다.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모두 [내 아버지가] 없애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하게 손질하여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여러분도 내 안에 머물러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이며 여러분은 가지입니다.”—요한복음 15:2-5.

예수께서는 자신이 떠난 후에 돕는 자인 성령을 보내 주겠다고 충실한 사도들에게 약속하셨습니다. 51일 후에 사도들과 그 밖의 사람들은 성령을 받을 때 포도나무의 가지가 됩니다. 그리고 “가지”는 모두 예수와 결합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예수께서 설명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가 그 안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나를 떠나서는 여러분이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가지”들 즉 충실한 제자들은 예수의 특성을 본받고, 하느님의 왕국에 대해 사람들에게 열정적으로 알리고, 더 많은 제자를 삼아서 많은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예수 안에 머물러 있지 않아서 열매를 맺지 않는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내 안에 머물러 있지 않으면, 그는 밖으로 던져”질 것이라고 설명하십니다. 그 반대 상황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이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 말이 여러분 안에 머물러 있다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을 청하십시오. 그러면 그것이 여러분에게 이루어질 것입니다.”—요한복음 15:5-7.

이제 예수께서는 이미 두 차례나 언급하신 내용을—자신의 계명을 지키는 것을—다시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4:15, 21) 그분은 제자들이 그 계명을 지키고 있음을 뚜렷이 나타낼 수 있는 주된 방법을 이렇게 알려 주십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것과 같이, 여러분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호와 하느님과 그분의 아들을 사랑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예수의 말씀은 이러합니다. “내 계명은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친구를 위해 자기 생명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내가 명령하는 것을 행하면 여러분은 나의 친구입니다.”—요한복음 15:10-14.

몇 시간만 있으면 예수께서 자신에게 믿음을 나타내는 모든 사람을 위해 생명을 바침으로 사랑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분의 본에 감동을 받아 그와 같이 서로를 희생적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이런 사랑을 보일 때 그들이 누구인지가 드러날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미 이렇게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사랑이 있으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 여러분이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요한복음 13:35.

사도들은 예수께서 그들을 “친구”라고 부르시는 점에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렇게 부르는 이유를 설명하십니다. “나는 여러분을 친구라고 불렀습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모두 여러분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소중한 관계가 아닙니까! 예수의 절친한 친구가 되어 아버지께서 예수에게 말씀하신 것을 알게 되다니 말입니다. 하지만 이런 관계를 누리려면 “계속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예수의 이런 말씀대로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내 이름으로 무엇을 청하든지 아버지께서 그것을 여러분에게 주실 것입니다.”—요한복음 15:15, 16.

이 “가지”들 즉 제자들 가운데 사랑이 있으면 앞으로 닥칠 일을 인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세상이 제자들을 미워할 것이라고 경고하시면서 또 위로가 되는 말씀도 하십니다. “세상이 여러분을 미워하면 여러분보다 먼저 나를 미워했다는 것을 아십시오. 여러분이 세상에 속해 있다면 세상은 여러분을 자기의 것으로 여겨 좋아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기] ··· 때문에 세상이 여러분을 미워합니다.”—요한복음 15:18, 19.

예수께서는 세상이 제자들을 미워하는 이유를 더 설명하십니다. “그들은 내 이름 때문에 여러분을 대적하여 그 모든 일을 할 것입니다. 그들이 나를 보내신 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예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죄가 있는 이유는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 때문이라고 그분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 누구도 하지 못한 일을 그들 가운데서 하지 않았다면 그들에게 죄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나를 보고도 나와 나의 아버지를 미워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미워하기 때문에 실제로 예언이 성취됩니다.—요한복음 15:21, 24, 25; 시편 35:19; 69:4.

다시 한 번 예수께서는 돕는 자인 성령을 보내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 강력한 힘은 그분의 모든 제자가 받을 수 있고, 그들이 열매를 맺는 데 즉 “증언”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요한복음 15:27.

포도나무 비유의 의미 (요 15:1-8)

포도나무 비유의 의미(요 15:1-8)

가을이 점점 깊어 갑니다. 벌써 안뜰에 벼 베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올 해도 하나님의 은혜로 풍성한 가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 풍성한 가을에 우리의 삶과 신앙생활에도 아름다운 열매가 가득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이 포함된 요한복음 14-16장은 ‘다락방 강화’라고 하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날 밤, 다락방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최후의 만찬을 행하신 후, 겟세마네 동산으로 기도하러 가시기 전까지 긴 시간 동안 제자들에게 주신 가르침의 내용입니다.

이 다락방강화에는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 내용이 거의 다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누구신지, 성령께서 오실 것과 제자들이 핍박을 받지만 승리할 것 등, 앞으로 제자들이 사명을 감당하는 삶을 사는데 필요한 모든 중요한 가르침이 다 담겨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예수님 자신과 제자들의 관계를 농부와 포도나무와 포도나무의 가지의 비유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포도원’ 또한 ‘포도나무’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사 5:7절에서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라고 했고, 예레미야 선지자는 렘 2:21절에서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호세아 선지자는 호 10:1절에서 “이스라엘은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라”고 표현했습니다.

시편 기자도 시 80:8절에서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다”고 하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도나무에 비유했습니다. 이처럼 포도나무는 이스라엘의 상징이요, 표상이었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포도나무였습니다. 하나님은 그 나무에서 열매를 기대하셨으나 포도나무였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사 5:4절에서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음은 어찌됨인고” 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을 지적했고, 호세아 선지자도 이스라엘을 가리켜 “헛된 포도나무”라고 탄식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타락해 버린 이스라엘의 상태를 대조시켜서 자신을 참 포도나무라고 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에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고 합니다. 여기 “참”이란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로만 포도나무지 포도나무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참 포도나무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이 포도나무 비유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5절에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처럼 예수님은 포도나무와 가지의 유기적 관계를 통하여, 예수님과 성도와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과 생명의 관계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내 속에 예수 생명이 약동하고 있는 것이 곧 믿음의 삶입니다. 포도나무 가지는 나무에 붙어 있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성도가 있을 곳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서 떨어져서는 결코 살 수 없듯이, 성도가 예수님을 떠나서는 결코 살 수 없습니다. 이것은 삶과 죽음의 문제가 결정되는 중요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에는 “거하라”는 말이 11번이나 표현하고 있습니다. 4절에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6절에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져 마르나니”라고 했습니다. 7절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고 했습니다.

“거하라”는 말은 “머물라”는 뜻으로 “이미 있는 자리에 머물라”는 뜻입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님을 떠나지 말고 붙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와 성도 사이의 생명적인 관계를 표시하는 말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16절 말씀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택하여 주님 안으로 불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특별히 우리를 은혜의 자리, 구원의 자리로 불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자리에서 절대로 떠나지 않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교회에 다니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직분 맡은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 의식에 참여하거나 구제와 봉사에 힘쓰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참으로 그리스도께 붙어 있는 자,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가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의 근원이 되시고 창조주이신 하나님, 우리의 구원의 주님이신 그리스도와 정말 끊임없는 교제를 이루며, 그 안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죄가 무엇입니까? 제일 무서운 죄는 주 안에 거하지 않는 것, 주님을 떠나 사는 것입니다. 믿음 없이 사는 것이 죄입니다. 주님 붙들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주님 떠나서 내가 주인 되어 사는 것이 가장 무서운 죄입니다.

오늘 본문 6절에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고 했습니다.

포도농사를 지으면 더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 연약한 가지나 불필요한 가지는 제거할 수밖에 없습니다. 팔레스틴의 더운 날씨와 뜨거운 바람은 잘려진 가지들을 바짝 마르게 합니다. 그러한 가지들은 불에 살라지게 됩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떠난 자의 삶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예수님을 떠나면 마지막에는 뜨거운 지옥의 심판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마 3:12절에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고 했습니다.

어느 집사님이 “지옥에 가기 위해서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할까요?”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희한한 전도지를 만나는 사람마다 돌리고 다녔습니다. 이 전도지를 주면서 집사님은 “그 뒷면을 보세요.”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별 내용이 씌어 있지 않고 “아무 것도 없다.”라는 큰 글씨만 새겨져 있었습니다. 지옥을 가기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할 일이 없고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간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결단이 없으면,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오는 시간이 없이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면 지옥은 저절로 가게 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영적인 무관심 속에서 지옥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잠재의식 안에서 지옥이라는 단어를 완전히 떠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마음 깊은 곳에서 어쩌면 내가 지옥에 갈지도 모른다는 무의식적인 공포가 그 영혼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플라톤은 “누가 감옥이 없기를 제일 바라겠는가? 그것은 거기에 가야할 사람들이다.”라고 했습니다. 누가 지옥이 없기를 제일 바라겠는가? 그것은 지옥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철저한 무관심 속에서도 인간의 의식 밑바닥에 남아 있는 지옥의 공포는 그 영혼을 붙들고 괴롭히고 있습니다. 포도나무에 가지에 붙어 있지 않는 가지는 불에 사라지는 것 외에는 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반드시 예수님에게 붙어 있어 천국을 생명을 소유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포도나무가 무엇 때문에 있습니까? 포도나무는 열매를 맺기 위해 있습니다.

겔 15:3-4절에 보면 “그 나무를 가지고 무엇을 제조할 수 있겠느냐 그것으로 무슨 그릇을 걸 못을 만들 수 있겠느냐 불에 던질 땔감이 될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포도나무는 오로지 열매를 맺기 위해서 있는 것인데, 만일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하면 도대체 어디에 쓸모가 있겠는가?”하는 말입니다.

사실 포도나무는 재목으로서는 아무 쓸데가 없는 나무입니다. 포도나무는 꽃이 피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 꽃은 아주 볼품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연료로 쓸 만한 가치도 없습니다. 금방 타 버리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포도나무는 열매를 맺을 때 존재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그 당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의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던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습, 그들은 이미 이 땅위에 있어야 할 의미를 상실하고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경고를 보십시오. 눅 3:7절 이하에 보시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자신이 세례 베푸는데 오는 것을 보고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고 했습니다. 도끼는 심판을 의미합니다.

예수님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 5:13절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고 했습니다. 짠맛을 잃어버린 소금은 더 이상 가치가 없습니다. 아무데도 쓸데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들의 발에 밟힐 뿐입니다.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이 땅에 있어야 할 이유를 잃고 있었던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무시무시한 심판을 선언하셨다면, 바로 그 하나님이 오늘 우리의 열매 없는 삶을 어떻게 보실까요?

바꿔 말해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우리가 아무 열매를 맺지 못했다면, 그리고 하나님과 나 사이의 끊임없는 교제를 통해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인격으로 변화되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일을 행하지 않는다면, 맛을 잃어버린 소금처럼 그 존재의 의미를 상실했을 때 우리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생각하면 두렵기 그지없습니다.

오늘 본문 8절에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고 했습니다. 열매를 맺는다면 누가 좋아할까요? 열매를 많이 맺은 포도나무는 주인이 기뻐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더욱더 놀라운 건 예수님의 제가가 된다는 것입니다. 너무나도 놀라운 말씀입니다. 여기에 한 가지 더 말씀하십니다.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했습니다. 이 결실의 계절에 풍성한 열매를 통하여 하나님과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약속된 복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포도나무의 비유로 우리와의 관계를 말씀해 주십니다.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붙어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들은 제거를 당하게 되고, 뜨거운 불에 사라지게 됩니다. 예수님이 없다면 우리들은 지옥불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포도나무에 꼭 붙어 있어 물과 양분을 얻는다면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가 있습니다.

어느 시골의 한 마을이 극심한 가뭄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시냇물은 모두 말랐고 논바닥은 쩍쩍 균열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높은 산꼭대기에 있는 나무들은 여전히 잎이 푸르고 싱싱하지만 시냇가에 있는 나무들은 모두 말라 죽은 것입니다. 산꼭대기의 나무들은 평소 수분이 부족했기 때문에 수분을 얻기 위해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혹독한 가뭄에도 왕성한 생명력을 보였습니다. 수분이 충분한 시냇가의 나무들은 땅의 겉 표면에 뿌리를 박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뭄을 견디지 못하고 말라 죽은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어디에 붙어 있습니까? 꼭 예수님께 붙어 있어 예수님을 통하여 영양을 공급받아 왕성한 생명을 유지하길 바랍니다. 그리고 풍성한 열매를 많이 맺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가을에 저와 여러분이 이러한 축복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포도나무와 가지

본문 : 요한복음 15장 1~17절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예수님은 자신과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를 포도나무와 농부로 비유하십니다.포도나무와 농부는 아주 밀접한 관계입니다. 농부는 나무를 정성껏 돌봅니다.물을 주고 벌레를 잡아주고 필요하면 약도 주면서 나무를 건강하고 잘 잘자라게 합니다.농부가 그렇게 수고하는 이유는 포도열매 때문입니다.많은 열매를 수확해서 이익을 남기는 게 농부의 큰 기쁨이며 목적이지요,그러니 만약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그 나무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포도를 거둘 수 없다면 농부의 모든 수고가 다 헛될 것입니다. 그러면 포도열매는 어디에서 나올까요?포도는 나무의 가지에서 열립니다. 나무 위로 무성하게 뻗어 있는 수많은 나무 가지에서 열매가 나옵니다.농부는 더 많은 열매를 얻으려고 가끔씩 가지치기를 합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잘라버리고 열매를 잘 맺는 가지를 더욱 깨끗하게 다듬어 줍니다.가지는 나무에 붙어 있을 때에만 열매를 위해서 기대하지만 잘라지면 죽은 가지가 됩니다.잘라진 가지는 이제 더 이상 쓸모 없으니 뗄감으로 불에 던져 버립니다. 포도나무는 항상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으며 나무가지는 나무에 붙어 있을 때에만 소망이 있습니다.가지가 스스로 열매를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지는 나무에 붙어 있기만 하면 됩니다.그러면 가지는 저절로 열매가 나옵니다. 굳건하게 흔들리지 않고 약해지지 않고 잘 붙어 있는게 가지에게는 최선입니다.가지인가 나무인가 구별 없이 가지가 포도 나무의 일부가 되게 하는 것은 나무 때문입니다.나무에서 떨어지는 날은 불 속에 던져져 불쏘시개로 끝나버립니다. 그러니 가지는 죽기살기로 나무에 붙어 있어야만 합니다.“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예수님은 자신이 포도나무이며 우리가 바로 그 가지라고 비유하고 있습니다.포도나무와 가지를 연상해 보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 아주 명확하게 답이 나옵니다.예수님께 붙어 있기만 하면 됩니다. 무얼해서 되는 게 아니라 예수님께 붙어 있기만 하면 저절로 열매가 나옵니다.열심히 죽기 살기로 예수님께 붙어 있는 것! 우리에게는 그것이 가장 중요합니다.포도나무가 되느냐 불쏘시개가 되느냐의 문제이니까요. 가지는 열매가 없으면 불에 던져져서 죽음으로 종료가 됩니다.그러면 열매는 무엇일까요?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갈 5:22)입니다.우리의 인격이 성령으로 변화되면서 나오는 것들입니다. 농부가 열매를 바라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열매를 바라십니다.이 열매는 성령으로 만들어 지는 것이며 예수님께 붙어 있으면 저절로 나옵니다.이 열매가 없으면 우리는 불에 던져집니다. 예수님은 이 열매를 위해서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열매는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가 서로 사랑 하는 것으로 완성됩니다.사랑하는 것은 어렵지만 예수님 안에 붙어 있으면 저절로 되어 지겠지요,예수님은 이것을 위해서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하십니다.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그곳에 거하는 것이 어떤 느낌일까 묵상해 봅니다.그곳은 나를 맡기기에 믿을 만한 안전하고 두려움 없이 거할 수 있는 곳입니다.

[스크랩] 포도나무와 그 가지의 비유! (요 15:1-11)

포도나무와 그 가지의 비유! (요 15:1-11)

미국의 아이젠하워 전대통령에게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1959년에 소련의 흐루시초프가 정상회담을 하기 위해 미국에 왔는데 회담 날짜가 마침 주일이었답니다. 그 날 아침에 아이젠하워는 흐루시초프에게 전화를 걸어서 같이 교회에 가자고 권했습니다.

당연히 흐루시초프는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아이젠하워는 1시간 30분만 기다려 달라고 하고는 예배에 참석한 후에 회담장으로 갔다는 것입니다.

당시 초강대국이었던 소련의 지도자를 이런 식으로 대한다는 게 상상이나 할 수 있는 일입니까? 그런데 아이젠하워는 예배를 위해 그렇게 한 것입니다. 실제로 아이젠하워는 평생 동안 주일예배를 말할 수 없이 귀하게 여기며 살았다고 합니다.

아이젠하워는 군인으로, 정치가로 크게 성공한 사람입니다. 놀라운 지도력으로 세계 제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끌었고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으며 8년 동안 대통령직을 수행했던 그런 사람입니다.

어떻게 아이젠하워가 이런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다니엘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다니엘은 당시 세계 최강국인 바벨론과 메대에서 최고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 이유가 뭡니까? 조금의 흠도 없이 하나님을 섬기려고 애썼기 때문입니다. /아멘!/

다니엘은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기도하면 사자 굴에 던져진다는 것을 알고도 목숨을 걸고 기도시간을 지켜 기도했습니다. 다니엘은 이렇게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섬겼기 때문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그런 인물이 된 것입니다.

아이젠하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그렇게 귀하게 여겼기 때문에 존귀한 인물이 되고 놀라운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할/

우리들도 이런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전 중심, 예배 중심으로 살면 하나님이 우리를 높여 주십니다. 예배가 축복의 통로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우리 모두 바른 예배자로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미국의 서부 개척시대에 동부에 있는 사람들이 서부에는 황금이 많이 나온다고 하니까 황금을 캐기 위해서 마차를 타고 밤낮 없이 서부로 뛰어갑니다. 한사람보다도 더 앞서가야 황금을 더 많이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지도 아니하고 쉬지도 아니하고 밤낮으로 달렸습니다.

동부에서 서부까지 걸어가면 얼마나 뭔 길입니까? 오다가 말이 쓰러져 죽고 사람들도 지쳐서 병들어 죽고 간혹 서부에 도착한 사람도 너무나 과로했기 때문에 병이 들어 죽곤 했습니다.

그러나 죽지 않고 서부에 도착해서 하나님도 잃어버리지 않고 황금도 얻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철저한 청교도들이었습니다. 동부에서 출발해서 열심히 밤낮으로 뛰어 가다가도 주일이 되면 여행을 멈추고 말도 쉬게 하고 가족들이 다 모여서 말씀을 읽고 기도하고 찬양하고 예배를 드리고 쉬었습니다.

성경말씀에 성수 주일을 하라는 말씀을 그대로 지켰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토요일까지 열심히 말을 달리다가 주일날은 휴식하고 안식했기 때문에 몸도 쉬고 영도 살찐 꼴을 먹고 심신이 건강해서 서부에 도착해서 신앙도 잃지 않고 그들은 황금도 발견하고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한 축복을 받게 되었답니다. /할/

▶가을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벌써 나뭇잎들이 화려한 오색단풍으로 물들어가고 있습니다. 가을은 뭐니뭐니해도 추수의 계절입니다. 그래서 어느 계절보다도 열매가 풍성합니다. 농부는 이 열매 때문에 그토록 수고를 하는 것입니다.

또 지금은 풍성한 과일이 참 많이도 나와 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포도를 참 좋아합니다. 지난 추석대 김복진안수집사님이 포도를 사 가지고 와서 우리 정말 맛있게 잘먹었습니다. 아직까지는 포도가 많이 나와 있습니다. 포도가 들어가기 전에 누가 또 좀 사오시기 바랍니다. /할/

오늘 저는 제가 좋아하는 포도의 계절에 예수님의 그 유명한 포도나무와 그 가지의 비유를 통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할/ ◀제목소개!▶

①요한복음의 특징 일곱 가지가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특징 중의 하나가 예수께서 친히 ‘나는 무엇이다’라는 선언이 7번이나 나옵니다. ‘헬’어로는 ‘에고 에이미’이며, 영어로는 ‘I am’입니다.

⑴요8:12절에서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빛이 없으면 모든 생물체는 성장이 없습니다.

⑵요6:35절에서 ‘나는 곧 생명의 떡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육신은 밥을 먹어야 살 듯이 영혼은 말씀의 떡이신 예수를 먹어야 삽니다. 한마디로 예수 없이는 우리에게 생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⑶요10:9절에서 ‘나는 양의 문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양은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은 양의 모든 문이 되십니다. 예수님을 통해야만 우리의 문이 열리고 우리의 문제가 해결을 받게 됩니다.

⑷요10:11절에서 ‘나는 선한 목자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목자와 양의 관계로 설명하셨습니다.

⑸요11:25절에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부활이십니다. 그러므로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고,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게 됩니다. /아멘!/

⑹요14:6절에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세상에는 길이 많이 있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의 길을 찾아야 합니다. 주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⑺오늘 본문에서는 ‘나는 포도나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는 무엇이다’ 라는 표현은 다른 복음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표현입니다. ‘나는 빛이다, 생명의 떡이다, 선한 목자다, 나는 양의 문이다. 내가 곧 길이다. 포도나무다’라는 표현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보편적이고 쉬운 말입니다. 누구나 알기 쉬운 비유로 설명하셨습니다.

또 한 가지 특징은, 이 모두가 인간의 삶에 있어서 절대적인 것들입니다.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것이 아니라 없으면 안 되는 것들입니다. 인간은 물이 없으면 살아갈 수가 없고, 빛이 없어도 그렇고, 먹을 양식이 없어도 안 됩니다.

우리가 포도나무 가지라면 줄기가 없으면 안 됩니다. 줄기 없는 가지는 곧 말라 버리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그러하다는 것을 설명하고 계십니다. /할/

②당시의 배경을 생각해 봅니다.

오늘 예수님이 포도나무를 비유로 말씀하신 배경에 대하여 학자들은 여러 가지로 추측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있었던 집에 밖에 있는 포도나무 가지가 창문 사이로 들어온 것을 보시면서 말씀하셨을 것이라고 시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어떤 분은 달빛이 비취는 포도원을 내다보시면서 말씀을 하셨을 것이라도 하고, 또 어떤 분은 당시 창문에 새겨져 있는 포도나무를 상상하시면서 말씀하셨을 것으로도 생각을 했습니다.

또 어떤 신학자는 예수님의 일행이 겟세마네 동산을 향해 가시는 도중 포도원을 보시면서 말씀하셨을 것이라고도 추측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가까운 곳에서, 실질적인 곳에서 비유를 알기 쉽게 말씀하셨습니다. 산에서 말씀을 증거 하시다가 새를 보시고,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산의 백합화를 보시더니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고 교훈 하십니다. 멀리 씨 뿌리는 자를 보시더니 씨 뿌리는 자의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이 포도나무 비유도 아마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시다가 포도원의 포도를 보시고 말씀하신 것이 아닌가 저도 그렇게 생각이 듭니다.

오늘 비유에서 주님이 자신을 참 포도나무라고 하셨습니다. 포도나무 줄기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그 포도나무 줄기에 붙은 가지라고 했습니다. 생명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그 포도나무를 관리하는 농부라고 하셨습니다. 이 비유가 참 단순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자신을 그냥 포도나무라고 하지 않고 참 포도나무라고 하셨습니다. 포도나무도 포도나무 나름입니다. 포도도 생산지나 브랜드에 따라 다 다릅니다. 미국의 캘리포니아에서 나온 포도를 최고로 꼽는다고 합니다.

렘2:21절에 보면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찌 됨이냐’고 합니다. 처음엔 명품 종자를 심었는데, 나중에 보니 돌 포도나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포도나무는 목재나 땔감으로도 적절하지 않습니다. 오직 열매입니다. 열매를 얻기 위해 농부가 포도나무를 심고 가꾸는 것입니다.

사실 전에 우리는 다 불순종의 자녀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농부이신 아버지 하나님이 명품 포도나무인 주님께 접붙임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중생을 한 것입니다.

8절에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우리가 열매를 풍성히 맺으면 농부이신 하나님이 큰 기쁨을 누리시고, 우리는 명실상부한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열매를 많이 맺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포도원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결산할 날이 오래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할/

▶또 이 비유는 신비로운 비유입니다. 포도나무와 가지는 생명적인 연결입니다. 포도나무와 가지와의 생명적 관계에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하는 신비로운 관계로 비약하는 설명입니다.

식물학적으로 보면, 가지가 없는 줄기가 없고 줄기가 없는 가지는 살수가 없습니다. 잘 아는 대로 나무에는 원줄기와 가지가 있고 가지에는 잎이 있습니다. 잎은 가지에 붙어서 태양열을 받아 줄기에게 주고, 또한 줄기는 뿌리에서 오는 진액을 받아 잎으로 연결시켜 서로 의존하고 삽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줄기가 먼저입니다. 서로 같이 연결되어 있지만 가지는 몇 개 끊어져도 줄기는 살 수 있지만, 줄기를 끊으면 가지는 다 말라 버립니다. 원줄기는 생명의 근원으로서, 예수가 우리의 생명 줄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아멘!/

③예수님만이 참 포도나무이십니다(1).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그냥 포도나무가 아니라 `참’포도나무라고 하십니다. 말하자면 거짓 포도나무가 있다는 뜻이 깔려 있습니다. 이단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 포도나무 비유는 구약에서도 많이 사용된 비유입니다. 시80:8절을 보십시다.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열방을 쫓아내시고 이를 심으셨나이다’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와서 열방을 쫓아내고 심으셨다고 합니다. 누구를 말합니까?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을 포도나무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사5:2절에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그 안에 술틀을 팠었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 포도를 맺혔도다’

이스라엘을 포도나무로 비유하면서 참 종자로 심었는데 악한 가지가 되었다는 탄식이십니다. 이것은 전 인류에 관한 이야기도 됩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모양대로 선하게 지은 아담이 그만 범죄하므로 악한 자가 된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참 포도나무’는 잡종이 아닌 순종으로 순전한 포도나무라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은 좋은 포도나무, 참 포도나무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는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할/

④깨끗한 가지만이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2-3).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우리 모두는 주의 보혈로 정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정결을 지켜야 합니다. 여기 ‘깨끗하다’는 것은 ‘정결한 것, 순수한 것, 순결한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여기 깨끗하다는 것은 ‘마음의 청결’을 의미합니다.

신앙생활은 마음공부입니다. 욕심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내려놓을 것들이 우리들에게 참 많습니다. 주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하셨는데 이 말은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마음의 청결은 ‘회개’라고 하는 통로를 반드시 거쳐야 합니다. 우리 사람들은 누구나 다 아담과 하와의 후예들이기 때문에 원래 죄악으로 부패되어 있고, 타락하여 있고, 죄로 더러워져 있습니다. 그러기에 누구든지 회개하지 않고는 깨끗해 질 수가 없습니다.

눅15:7절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또 마3:8절에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고 하셨고, 욥42:6절에서 ‘내가(욥)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이 모습을 보신 하나님께서 욥에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욥에게 그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회개의 중요성을 이렇게 강조하셨습니다. /할/

⑤누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까?

⑴주안에 있는 자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본문1-8절까지 보시면 주님은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듯이 ‘내 안에 거하라’는 말을 5번이나 하고 계십니다. 요한복음 전체에 무려 40번이나 나옵니다. 얼마나 중요한 말씀이면 강조, 강조, 강조하고 계십니까?

‘내 안에 거하라’ 무슨 말씀입니까? 이 말의 단어적인 뜻은 ‘머무르다’는 말입니다. 곧 이 말은 ‘끊임없는 교제 가운데 계속적인 수액을 공급받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또 ‘내 안에 거하라’는 말은 ‘내 안에 있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이 땅에 태어날 때 길거리 아무 데서나 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품안에 태어납니다. 국가라고 하는 품, 가정이라고 하는 품에서 태어나고 자라납니다.

또 일생을 살면서 작고 큰 학교, 기관, 조직, 직장의 품에 들어가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품을 무시하고 품을 떠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 품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품이든지 그 품안에서 사는 삶에 훈련과 적응이 절대 필요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품안에 안기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안에 있으면서도 그 안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안에 있으면서도 언제나 밖에 사는 사람, 그러니까 한 가족의 품에 있으면서도 언제나 밖에서 맴도는 사람,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언제나 교회밖에 맴도는 사람이 있습니다.

인사이드가 있고 아웃사이드가 있습니다. 그런데 품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 안에서 기쁨과 사랑을 얻습니다. 그러나 품밖에 있는 사람들은 모든 것이 불만이고 불평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 이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환경에서 좋은 대우를 받아도, 마음이 떠난(밖에 있는)사람은 싫고, 짜증나고 괴롭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어려울지라도 그 품안에서 즐거워하고 감사하면 축복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주님과 하나 되는 삶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는 것은 주님 안으로 들어오는 삶과 같습니다. 쉽게 말하면 나의 삶이 죄악 세상을 떠나서 예수님과 하나 되어 그 안에서 은혜로 살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문에서 우리가 주안에 있는 것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것을 비유하는 말입니다. 가지가 아무리 능력이 있더라도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능력이 없더라도 붙어 있는 가지는 열매를 맺습니다.

물고기가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물밖에 있으면 소용이 없고 능력이 없어도 물 속에 있는 것이 많은 영양분을 받아 삶의 풍성함을 누릴 수가 있게 됩니다.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식탁에서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들여주는 신앙적인 교육입니다.

어느 날 영리하기로 이름난 여우 한 마리가 바닷가에 갔습니다. 여우는 동물 중에서 머리가 좋다는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그 여우는 바다 속의 물고기들에게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물고기 여러분, 바다 속은 위험하니까 뭍에 올라와서 우리와 함께 삽시다. 어부들이 그물을 쳐서 여러분을 잡으려고 한답니다. 또 큰 고기들이 여러분을 잡아먹을는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육지에 올라오면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어요.’

물고기 대표들은 모여서 회의를 했습니다. 갑론을박, 좀처럼 회의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여우는 머리가 영리하니까 그 말에 일리가 있다는 주장에서부터 바다 속에 사는 것이 위험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잘 살아오지 않았느냐는 반론이 대립되었습니다.

고기들은 오랜 숙의를 거듭한 끝에 여우의 제안을 거절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물고기 대표는 물 위로 얼굴을 내밀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우님, 우리를 생각해주는 것은 고맙지만 우리는 물 속에 사는 것이 마음 편합니다.’

유대인들은 저녁식탁에서 자녀들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준 아버지는 계속해서 이런 질문을 합니다. ‘물고기가 뭍에 나오면 어떻게 되지?’ 어린이들은 금방 알아듣습니다. 물고기가 육지에 올라오면 말라죽게 된다고 대답을 합니다.

‘바로 그거야.’ 아버지의 교훈은 계속됩니다. ‘유태인은 유태인으로 살아야지 어떤 유혹이 있더라도 유태인임을 저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민족은 하나님이 선택해주신 선민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단다.’ /할/

어린이의 마음속에 분명하지는 않지만 무엇인가 가슴을 울려주는 감동과 각성이 있게 됩니다. 무서운 교훈입니다. 이렇게 해서 유태인은 유태인으로서의 신분과 유태인의 정신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을 어린 마음속에 심어준다고 합니다. /아멘!/

여러분! 우리도 예수를 떠나면 아무리 능력이 많더라도 열매를 맺을 수가 없지만, 부족하거나 연약할지라도 주님 안에 들어가면 주님이 주시는 창조의 은혜를 받습니다. 만물을 창조하신 주님! 능치 못하심이 없으신 그분 안에서는 무엇이든지 부족함이 없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할/

그런데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도 그 안에 풍성함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분명히 내가 그 안에 살고 있지 못하는 증거입니다. 아직도 옛 생각을 끊지 못한 삶은 절대로 열매를 맺을 수가 없고 풍성한 은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분 안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분 안에 기쁨이 있고, 그분 안에 은혜가 있고, 열매가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할/

이때부터 우리 주님이 우리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십니다. 본문의 강조 점은 가지인 우리는 포도나무 줄기에 붙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멘!/

⑵왜 가지는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합니까? 왜 성도는 주님께 붙어 있어야 합니까?

㈀붙어 있어야 살기 때문입니다.

포도나무는 가지가 잎 피고, 꽃 피고, 열매 맺는데 필요한 모든 자원을 공급할 절대적인 책임이 있습니다. 가지가 땅 속에 있는 습기와 양분을 직접 끌어올리지는 못합니다. 가지는 다만 포도나무에 붙어 있기만 하면, 나무가 그 뿌리로 땅 속에 깊이 내려 생존과 결실에 필요한 모든 자원을 충분히 가지에 공급해 줍니다.

주님께서도 분명히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가지인 우리의 영적인 생활, 육신적인 생활, 금세와 내세의 생활, 그밖에 모든 생활에 필요한 충분한 자원을 공급할 책임이 주님께 있습니다. /믿/아멘!/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 하나님의 방법대로하지 않고, 인간적인 방법대로 살다가 낭패와 실망을 당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과 분명히 다른 세계 속에 사는 존재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당부하십니다. 마4:4절에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바울은 롬1:17절에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믿음이 도대체 무엇이냐는 질문입니다. 여러 가지로 해석이 나옵니다 만은 가장 바른 답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믿고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아멘!/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과는 달리 새로운 세계에서 믿음과 말씀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하면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자원을 공급해 주십니다.

㈁그렇다면 붙어있는 자에게 어떤 자원을 주실 까요?

㈎죄 사함의 자원을 공급하십니다. 여러분 죄 사함은 우리 주님의 보혈로밖에 씻겨지지 않습니다.

㈏치료의 자원을 공급해 주십니다. 주님은 이 땅에 치료자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영혼에 병든 사람, 육신에 병든 사람, 그밖에 모든 생활에 병든 사람들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영원토록 동일하셔서 지금도 치료의 사역을 행하십니다.

여러분! 이 세상 어떤 병과 씨름하고 계십니까? 영혼의 병입니까, 육신의 병입니까, 생존의 병입니까, 주님께 의지하십시오! 출15:26절에 ‘나는 너희를 치료하시는 여호와임이니라’ /아멘!/

㈐무궁한 축복의 자원을 공급해 주십니다.

㈑천국의 자원을 공급해 주십니다.

㈒삶의 일체의 자원을 공급해 주십니다. /믿/

우리는 줄기를 떠난 가지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물을 떠난 고기는 상상 할 수도 없이 죽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을 떠난 사람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줄기 떠난 가지는 죽은 가지인 것처럼, 주님을 떠난 사람은 살았으나 죽은 잡니다. 예수는 생명줄이십니다. /할/

▶비행기가 하늘을 날고 있습니다. 그 비행기에는 조종사, 과학자, 목사, 그리고 배낭을 가지고 여행하는 청년 모두 4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비행기가 고장이 나서 추락하고 있었습니다.

그 비행기에는 공교롭게도 구명대가 3개밖에 없었습니다. 평소에 훈련이 잘 되어 있는 조종사가 재빨리 구명대 한 개를 매고 바다로 뛰어 내렸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두개를 세 명의 손님에게 던졌습니다. 그 다음 과학자가 ‘나는 국가가 필요로 하는 과학자니 살아야 한다’고 하면서 하나의 구명대를 매고 뛰어 내렸습니다.

그 다음에 목사가 하나밖에 안 남은 구명대를 청년에게 주면서 말합니다. ‘여보게 젊은이 주님을 믿나?’ 청년이 대답합니다. ‘죄송합니다. 아직 주님을 믿지 않습니다.’ 목사는 구명대를 청년에게 주면서 ‘그러면 자네가 가지고 뛰어 내리게! 나는 주님을 믿으니 지금 죽어도 천국을 가네! 자넨 살고 나면 꼭 주님을 믿게나! 나는 자네를 지옥에 보내고 싶지 않네’

이때 청년이 태연하게 말합니다. ‘목사님! 염려하지 마십시오! 과학자가 제 배낭을 붙들고 뛰어 내렸습니다.’ 제가 왜 이 이야기를 자주 합니까? 사고 난 비행기에 구명대가 생명 줄인 것처럼, 고장 난 인간, 죄로 말미암아 죽어야 할 우리 모두에게 생명 줄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자는 말씀입니다. .

그렇습니다. 줄기 떠난 가지는 살아 있는 것 같으나 죽은 가지인 것처럼, 주님을 떠난 사람은 살아있는 것 같으나 죽은 사람들입니다. /믿/

그래서 주님은 6절에서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무슨 말씀인가? 이는 주님께 붙어 있지 아니한 사람은 지옥 불에 들어감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가장 큰 문제는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전도 명령을 내리신 것입니다. 이 세계에서 좀 가난하게 살아도 괜찮습니다. 지위가 좀 낮아도, 육신이 좀 아파도 큰 문제 아닙니다. 문제는 주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은 요3:18절에서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주님께 붙어 있어야 삽니다. 그래서 줄기에 붙어 있는 가지처럼 붙어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할/

⑶붙어 있어야 축복을 받습니다.

가지는 줄기에 붙어 있어야 줄기로부터 영양을 받아 결실을 맺게 됩니다. 붙어 있어야 살고 붙어 있어야 받습니다. 떨어지면 죽고 떨어지면 받지 못합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줄기에 붙어 있는 가지는 수분을 공급받습니다. 영양을 공급받습니다. 모든 것을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떨어진 가지는 공급을 받고 싶어도 받을 수가 없습니다.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는 어떤 축복이 있습니까?

㈀’스스로’ 되는 ‘저절로’의 원리 속에 살게 됩니다. 원리라는 말은 사물의 근본이 되는 이치라는 말입니다. 어떤 일에 있어서 먼저 그 원리를 아는 일이 중요합니다. 원리를 알면 모든 일이 쉽습니다. 예수안에 잇으면 스스로, 저절로 되어지는 원리 속에 살게 됩니다.

㈁감옥 문이 스스로 열려지는 원리입니다. 행12:1-10 말씀을 보면 베드로는 감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간절히 하나님께 빌었다고 했습니다.

놀라운 것을 헤롯이 베드로를 끌어내어 처형하려는 바로 그 전날 밤에 주의 천사가 자고 있는 베드로를 깨웁니다. 베드로의 손에서 쇠사슬이 벗어집니다. 급히 띠를 띠고 신을 신으라고 합니다. 그리고 천사를 따라가는데 베드로는 그때까지 환상을 보는 줄로 알았습니다. 놀라운 것은 파수꾼들이 지키고 있는데도 모릅니다.

더 놀라운 것은 베드로가 굳게 닫힌 쇠문이 있는 곳에 이르니까, 행12:10절에 보면 ‘이에 첫째와 둘째 파수를 지나 시내로 통한 쇠문에 이르니 문이 저절로 열리는지라’고 했습니다. 문이 저절로 열려졌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연 것이 아닙니다. 간수가 연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우연도 아닙니다. 쇠사슬이 벗겨지고 쇠문이 저절로 열리게 된 것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순전한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입니다. /아멘!/

㈂바다가 갈라지는 원리입니다. 모세가 홍해에서 이 기적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오병이어의 원리입니다. 수 많은 군중들이 배불리 먹고도 열두 광주리를 남겼습니다.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스스로, 저절로의 원리 속에 살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스스로 열매 맺어지는 원리입니다. 4-5절에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8절에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열매 맺는 삶, 축복입니다. 생활의 열매, 사업의 열매, 수고한 대가의 열매, 오늘 본문의 더 귀한 열매는 성도의 선한 행실의 열매를 요구하고 계십니다. 성령의 바람으로 이루어지는 열매, 주님은 열매로 그 사람을 안다고 하셨습니다. /할/

▶여러분, 축복의 열매를 내다보기 전에 먼저 내 자신의 내적 변화의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내 자신이 먼저 변하여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 가야 합니다. 성령의 열매가 바로 주님의 성품을 닮아 가는 열매입니다.

갈5:22-24절에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가운데 가장 먼저 기록된 것이 사랑의 열매입니다. 사랑이란 가장 소중한 열매이기에 성령의 열매 가운데 첫 번째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열매가 첫 번째 이지만 사랑은 모든 열매의 전부이기도 합니다. 나머지 모든 것이 다 사랑 안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할/

▶미국에 이민해서 살고 있는 한인 2세가 명문 콜롬비아대학 의과대학에 지원을 했습니다. 공부도 잘해서 SAT 시험에 만점을 받았습니다. 집안 형편도 부유해서 무난히 합격되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불합격 통지서가 날아왔습니다.

불합격 사유란에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귀하의 성적은 아주 우수합니다. 가정형편이나 여러 조건들도 만족스럽습니다. 그런데 귀하의 서류 어디를 보아도 헌혈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남을 위해서 헌혈한 경험도 없는 귀하가 어떻게 환자를 돌볼 수 있겠습니까? 귀하는 의사가 될 자격이 없습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은 생명을 다루는 의사가 될 자격이 없듯, 사랑의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에게 있어서도 사랑이 없으면 그의 신앙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요일4:7-8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아멘!/

오늘 본문 10절에서도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할/

▶외적으로 영혼구원의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영혼구원에 대하여 하나님은 매우 시급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딤후4:1-2절에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 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 쓰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냥 두면 그 영혼이 지옥의 구렁텅이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영혼 구원은 시급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의 전략은 항상 내일로 미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이라고 하시는데 사탄은 자꾸만 다음으로 미루도록 미혹하고 있습니다.

우리 한번 우리 주님의 말씀 앞에 깊은 고민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⑷붙어 있어야 기도의 응답을 받습니다. 7절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께 구하면 기도 응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⑸주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9-10절에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이 사랑은 위로부터 온 것입니다.

⑹주님의 기쁨을 받을 수 있습니다. 11절에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 이 기쁨은 세상 그 누구라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요16:22절에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시골에 가난한 한 할머니가 살고 있었습니다. 모처럼 동네 아주머니를 따라 교회에 갔다가 하나님을 믿으면 소원 성취할 수 있다는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 할머니는 그 설교를 듣자마자 기쁨으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큰 돌 하나, 작은 돌 하나를 앞에 주어다가 놓고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이 돌 두 덩어리가 금 덩어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큰 것은 하나님께 헌금하고 작은 것은 제가 쓰겠습니다. 할머니는 밤새도록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나 돌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왜 소원 성취가 되지 않았습니까? 주안에 기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욕심의 기도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할 수 있는 기도는 다 응답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세상은 불경기라고 아우성칩니다. 모든 분야가 다 그렇지만 특별히 의류 업계는 더더욱 심하답니다. 그런데 요즘 그런 불경기 가운데서도 크게 성장하고, 의류 업계의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 E-Land 창시자 박 성수 장로님에 대한 간증을 들었습니다.

지금의 회사가 점점 커져서 언더우드, 브렌따노, 헌트 등의 계열회사도 창업했습니다. 그분이 개업 예배를 드릴 때 그는 철저히 하나님 중심으로 가게를 운영하기로 서약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나는 하나님만 의지합니다. 하나님 날 도와주셔서 이 사업을 축복하여 주옵소서. 이익은 선교에 사용하겠습니다. 500만원으로 시작된 이 사업이 10년 후엔 1000억이 되게 하옵소서’

그리고 그는 철저히 하나님 중심으로 사업을 했습니다. 기도로 시작하여 기도로 끝냈습니다. 그랬더니 사업이 점점 커져 갔습니다. 드디어 E-Land의 상품을 특허하고 본사를 세우고 대리점을 모집했습니다.

그리고 주일 성수하지 않는 대리점은 물건을 공급하지 않았습니다. 십일조를 하지 않는 대리점도 끊었습니다. 이렇게 사업하는 그를 하나님은 크게 축복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개업 예배 때의 기도를 응답해 주셨습니다. 10년 후인 1989년에 정확히 천억이 되었답니다. 90년도엔 3,800억이 되었고, 91년엔 7,000억이 되었습니다. 줄기에 붙어 있는 가지가 모두에게 공급하는 것처럼 주님께 붙어 있는 성도에게는 모두를 공급하여 주셨습니다. /할/

⑺붙어 있어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입니다. 시계는 시간을 가르쳐 주라고 만든 것입니다. 자동차는 굴러가라고 만들었습니다. 시간을 가르치지 못하는 시계는 시계도 아닙니다. 굴러가지 않는 자동차는 자동차도 아닙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 사람은 성도가 아닙니다. 8절입니다.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김활란 박사는 우리나라 여성의 거성입니다. 그는 일생 하나님을 잘 섬기다가 가신 분입니다. 그가 세상 떠나기 3일 전에 김옥길 총장에게 ‘내가 사흘 후에 갈 터이니 내 일생을 정리해다오, 옷은 의대 의상학과로 보내고, 생활도구는 식당으로 보내라, 내 집을 학교 관계 처로 사용하라, 고려 청자는 박물관으로 보내라, 평생 살면서 죄 안 지려고 노력은 했지만 그러나 나도 모르게 지은 죄가 있을지도 모르니 신문 광고를 내라. 내가 미쳐 용서를 구하지 못하고 떠난다고 말해다오!’

김 박사는 이 말을 마치고 3일 후에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이 유언을 조선일보에 실었습니다. 얼마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까? 그래서 주님은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제자 되는 길도 주안에 거할 대 자격이 주어집니다. 제자란 ‘배우는 자, 따르는 자’란 뜻으로 성경에 259번이나 언급하고 있습니다. /할/

⑻그렇다면 우리가 포도나무에 꽉 붙어 있어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가 될 수 있습니까?

우리가 몸으로 포도나무 가지에 붙어 있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는 것은 포도나무인 교회가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교회를 당신의 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골1:18절에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그러므로 우리가 포도나무에 붙어있다는 증거로써는 몸인 교회에 등록을 하고 교회에 들어와서 성도가 되고 세례를 받고 성찬예식에 참여하고 십일조 드리고, 성수주일하고 이러한 신앙생활을 하므로 몸 된 교회에 교통이 있을 때 나는 포도나무의 몸인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있는 가지라는 확신을 가질 수가 있게 됩니다.

교회 밖에서는 예수님과 아무런 상관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몸이 교회인데 몸에 붙어 있기 위해서는 몸에 들어와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는 교회에 나가지 않고 혼자서 예배드리고 혼자 천당 간다고 그러는데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렇게 되지를 않습니다.

몸이 바로 교회인데 교회 들어와야 포도나무의 본체인 몸에 붙어 있게 되고 또 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그리고 성찬에 참여하게 되고 봉사하고 성수 주일을 하는 이러한 신앙의 행위를 통해서 육신적으로 포도나무인 가지에 우리가 붙어있게 되는 것입니다. /아멘!/

오늘 포도나무 비유의 결론은 16절입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우리로 하여금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기 위해 내가 너희를 참 포도나무의 가지로 택했다는 것입니다. /할/

여러분,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교회의 목사는 포도나무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저를 의지하면 안 됩니다. 저는 여러분을 포도나무가 되시는 예수님에게 접붙임을 받아 떨어지지 않도록 위하여 기도하는 역할밖에 하는 게 없습니다.

이단은 교주가 ‘내가 포도나무다.’고 그럽니다. 그러나 다 가짜입니다. 이 땅에는 포도나무가 없습니다. 포도나무는 한 분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고, 풍성한 축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모두 ‘주안에 잘 붙어 있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할/ (2013년 10월 6일 대예배 설교)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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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 비유에서 나무의 뜻은?

기독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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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15장에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한다는 비유를 설명하면서 예수님은 내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포도나무를 교회라고 적용 해석하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나님과 날마다 함께하는 삶속에 교회를 통해야 하는 것도 있지만 세상의 교회가 완전하지 않기에 잘못 이해하면 교회에 충성하게 되는 부분이 있을 것 같습니다. 나아가 시편133장의 형제와 동거함에 대한 말씀을 요한복음15장과 연결 해석하는 것도 옳은지 궁금합니다. 주님 안에 거한다는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설명해주세요. [답변] 예수님이 어떤 영적 진리를 가르칠 때에 자주 사용하셨던 비유의 역할을 정확히 아셔야 합니다. 어디까지나 예수님이 강조하려는 진리를 알기 쉽게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역할로 그칩니다. 비유 자체의 단어, 문구, 문장 등을 따로 떼어서 그것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강조하거나 예수님이 결론으로 내려준 진리보다 앞세우면 아주 잘못된 해석입니다. 이런 비유의 해석 원리를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른다.”는 한국 속담에 비추어서 설명해 왔습니다. 다시 반복하자면 기역 자의 모양이 낫과 비슷하다는 뜻이지 낫에 대해서 설명하려는 의미가 아닙니다. 낫은 단지 기역 자 모양과 같은 여러 예들 중에 하나로 누구나 익히 알기에 대조한 것뿐입니다. 동일한 맥락에서 예수님은 신자라면 당신 안에 거해야 하는데 어떻게 거해야 하는지 알기 쉽고 또 정확하게 이해시키려고 포도나무를 예로 든 것입니다. 포도나무는 예수님이고 가지는 신자를 상징합니다. 크게 세 가지 의미를 지닙니다. 첫째, 모든 나무 가지는 당연히 그 나무에 붙어 있기 마련입니다. 둘째 다른 나무에 붙은 가지는 당연히 다른 열매를 맺습니다. 셋째 포도나무에 가지로 붙어만 있으면 포도열매는 자연히 열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4절)고 비유 안에서 이미 설명해주었습니다. 포도나무는 당시 유대 땅에 무화과와 함께 가장 흔한 나무로 그 생태를 제자들이 익히 알고 있으며 또 열매가 풍성히 열린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비유에 등장시킨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비유의 포도나무 가지처럼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슨 일을 하든 오로지 예수님의 보호 인도만 구하면서 그분의 말씀대로 따르며 자기에게 맡기신 소명을 실천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럼 당연히 성령이 역사하여 저절로 복음의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이를 확대 적용하면 교회에 충성하는 것도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의 한 가지 부분적인 모습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바로 포도나무라는 것은 질문자님이 이미 예리하게 지적하셨듯이 조금 잘못된 해석입니다. 신자들을 교회 일에 묶어두려는 의도가 개입되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어떤 조직체 개별 교회라도 결코 완전하지 않습니다. 거기다 더 근본적인 잘못이 있습니다. 교회도 비유에 적용하면 가지일 뿐 나무 자체가 결코 아닙니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기에(골1:18) 교회는 그 머리(포도나무)에 붙은 가지입니다. 그리고 목사, 집사, 교사, 전도자 등으로 직분만 다르지 동등한 신분과 위치에서 함께 모여서 봉사하는 모든 성도는 교회라는 큰 가지에 붙은 잔가지들입니다.(엡4:11,12) 따라서 교회가 정말로 예수님을 머리로 모셔야, 순전한 참복음이 성경의 진리대로 선포 실현되어야만 큰 가지라도 되는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담임 목사가 교회의 머리가 아니며 다른 모든 성도와 함께 잔 가지일 뿐입니다. 이런 원리는 신자가 속한 모든 공동체에 다 적용됩니다. 신자 가정의 머리도 아버지가 아니고, 사장이 신자인 직장의 머리도 사장이 아니며 오직 그리스도입니다. 교회와 마찬가지로 가정과 직장은 예수님이라는 포도나무에 붙은 큰 가지이며 아버지 어머니 자식들이나 사장 전무 부장 직원들은 그 직분만 다르지 똑 같은 신분과 위치를 지닌 잔가지들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의 성경적인 뜻은 세상에서 불려 나와서 예수님만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신자들의 모임입니다. 또 그래서 예수님은 조직체 교회만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슨 일을 하든 포도나무인 당신에게 가지로 붙어 있으라고 명한 것입니다. 성령이 저절로 맺게 해주는 복음의 열매를 드러내려면 오히려 불신자들과의 만남이나 모임에서 세속의 흐름을 거역하고 예수님에게 더더욱 온전히 붙어있어야 할 것입니다. 시편133편을 요15장과 연결해서 해석하는 것이 옳은지 물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설명했는지 모르기에 딱 잘라서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모든 성경구절은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인데다 계시된 진리들이 동일하게 그분의 뜻이라 상호 연결해 해석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정확한 뜻이 상호 일치해야 하든지, 만약 다르다면 어떤 측면에서 서로 연결되는지 구체적인 설명이 따라야합니다. 간단하게 시편133편이 어떤 의미인지 살펴봅시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먼저 형제의 연합하여 동거함이 아주 아름답다고 찬양했습니다.(1절) 그리고 3절 후반에 거기서 여호와는 영생이라는 복을 명령했다고 결론 내립니다. 그 사이의 2절과 3절 전반부는 연합하여 동거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눈에 보이는 사물에 비유한 것입니다. 그럼 “거기가 어디인지” 따져봐야 합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고 있는 그 장소입니다. 구약에서 형제는 단순히 가족이나 이웃을 넘어서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인 이스라엘 동족 전부를 말합니다. 그리고 동거는 함께 살고 있다, 남아 있다. 끝까지 견뎌낸다 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문맥에서 의미는 이스라엘 동족 전부가 함께 살 수는 없기에 동일한 믿음 안에서 끝까지 하나가 되어 견디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그런 곳에 하나님이 영생의 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셨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 시편의 제목을 “다윗의 시 곧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고 붙여놓았습니다. 그러나 바로 앞의 132편과는 달리 “여호와의 처소”나 “전능자의 성막” 같이 성전을 뜻하는 표현이 전혀 없습니다. 단순히 형제들이 온전한 사랑으로 섬기는 그곳이라고만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 활동에 충성하는 것을 강조하는 시가 아니라 성도들이 온전한 믿음으로 서로 섬길 때에 영생이 약속으로 주어졌다는 것을 강조하는 시입니다. 이 시편을 다윗이 저작한 의도와는 다른데도 단지 한두 단어의 의미가 서로 비슷하다고 해서 교회라는 조직체와 직접 연결시키는 것은 무리한 적용입니다. 아주 짧은 시편인데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묘사와 내용이 아름답고 은혜로워서 성전 예배에서 찬송가로 사용했던 것입니다. 2021/3/25 * 이 글은 미국 남침례교단 소속 박진호 목사(멤피스커비우즈한인교회 담임)가 그의 웹페이지(www.whyjesusonly.com)에 올린 것을 필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입니다. 맨 아래 숫자는 글이 박 목사의 웹페이지에 공개된 날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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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다 성경』의 ‘포도나무 비유’ 해석, 유감

류모세, ‘열린다 성경: 절기 이야기’ 다시 읽기

성경 속 대화는 말하는 이나 듣는 이 사이에 깊게 형성된 공감대를 짚어내야만 실감 있게 그 이야기나 대화를 이해할 수 있다. 그중 하나가 이른바 예수님의 ‘포도나무 비유’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한 15:5)

이 포도나무 비유를 접하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성경이 보증하는 최고의 포도 산지인 헤브론이다. 해발고도도 1,000미터 안팎에 이르는 지역으로, 겨울철에 다른 지역보다 비나 눈도 많이 내린다. 이스라엘에서 포도나무 과수원이 있는 곳은 ‘어디에서나’는 아니었다. 유대 산지 헤브론이나 북부 골란고원 등 특별한 지역이었다, 그것은 포도나무가 자라기에 좋은 자연 환경 덕분이었다. 농업기술이 발달한 지금도 아무데서나 포도원을 운영하고 있지 않다. 적당히 거친 자연 환경과 바람이 많이 불어주고 일조량이 많고 일교차가 큰 곳이 포도원 농사의 적격지이다.

‘제거해 버린다’는 ‘들어주신다’(?) 요한복음 15:2절 말씀은 성서시대 이스라엘에서의 포도 농사법에서 나온 독특한 표현이다. 포도나무의 특징은 길게 뻗어나가는 가지에 있다. 오늘날 포도 재배에서는 ‘Y’자 철사를 박아놓기 때문에 포도나무 가지는 철사를 따라서 감아 올라가면서 원없이 자랄 수 있다. 그러나 성서시대 이스라엘에서는 오늘날의 포도 재배법과 상황이 전혀 달랐다. 철사가 귀했으므로 포도 가지는 뱀처럼 땅을 기어갈 수밖에 없었다. – 류모세, 열린다 성경: 절기 이야기 성경의 비밀을 푸는 절기 이야기, 두란노, 2009년, 114쪽

그러나 헤브론 지역 등의 포도나무와 가지의 모양은 우리의 생각과는 다른 모습이다. 그곳의 포도나무는 정말 특별하다. 포도나무는 굵고 단단한 고목(?) 수준인 것에 비하면 가지는 그야말로 작고 가늘고 연약하게만 보인다. 그런데도 그 연약한 가지에서도 튼실한 포도를 맛볼 수 있다.

또한 포도원지기들은 수년간 포도나무를 다듬고 가꾸면서 포도나무의 모양을 Y자 또는 T자에 가까운 형태로 다듬어 놓았다. 자연스럽게 지지대 역할을 하도록 한 것이다. 또한 위의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포도나무 가지가 땅으로만 쳐지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땅에 닿은 포도 가지는 열매를 제대로 맺을 수 없다는데 있다. ‘우기’에는 땅에 닿은 부분이 습기로 인해 썩고, ‘건기’에는 자체적인 뿌리를 내리다 보니 본 뿌리에서 영양분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 류모세, 열린다 성경: 절기 이야기 성경의 비밀을 푸는 절기 이야기, 두란노, 2009년, 114쪽

류모세, 열린다 성경: 절기 이야기 성경의 비밀을 푸는 절기 이야기, 두란노, 2009년

포도원 농사는 봄철부터 시작한다. 계절적으로는 건기이다. 이스라엘은 겨울 우기와 여름 건기로 구분한다. 포도나무 농사는 건기에 시작하여 건기에 마무리된다. 그런 점에서 류모세 목사가 묘사하는 우기에는 땅에 닿은 (포도나무 가지) 부분이 습기로 인해 썩는다는 생각은 다시 생각해봐야할 해석이다.

헤브론의 맛좋고 실한 포도는 그 가지의 힘이 아니라 튼실한 포도나무 덕분에 열매를 맺는 것이다.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예수님과 그 무리들은 이 본문을 이해했을 것이다. 이처럼 예수의 제자들도 예수의 힘(존재) 때문에 실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살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의 비유는 철학적, 현학적이거나 이른바 영적인 이해를 필요로 하기보다, 다분히 일상적인 이해와 공감대를 바탕으로 주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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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에 대한 정보 포도 나무 가지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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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주제에 대해 자주 검색하는 키워드 성경 이야기 / 포도나무 비유 / 요한복음 15장 / 영아부 / 유치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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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이야기 #/ #포도나무 #비유 #/ #요한복음 #15장 #/ #영아부 #/ #유치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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