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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월 4일 주일설교
설교제목 :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며
성경말씀 : 빌립보서 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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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2:3-7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 – Bible.com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 …
Source: www.bible.com
Date Published: 4/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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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 네이버 블로그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겸손과 순종의 마음,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빌립보서2:1~11) 오늘 말씀은 읽을 때는 은혜가 넘쳤지만
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9/12/2021
View: 3606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라 (빌 2:3-4) – 기독정보넷
본문 말씀을 보면,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에 보면 겸손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겸손이라는 말을 원어의 뜻을 …
Source: www.cjob.co.kr
Date Published: 4/1/2022
View: 6621
누군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길 수 있냐? ”고 묻는다면.. – 기독일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립보서 2:3)
Source: kr.christianitydaily.com
Date Published: 8/11/2021
View: 9064
2019년 2월 17일 주일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kpcw)
아내를 자기 보다 낫게 여겨야 합니다. 영어의 표현중에 “my better half”라는 말이 있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말할 때 사용하는“나 보다 더 나은 나의 반쪽”이라는 뜻 …
Source: m.kpcw.net
Date Published: 7/4/2021
View: 3423
(빌립보서 2:1-11) 남을 낫게 여기고
속사람이 그리스도로 거듭나는데 말입니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려면 천하에 둘도 없는 의인이시면서 하나님의 의 앞에 죄인인 자들의 주장 앞에 죄인이 …
Source: www.elphis.or.kr
Date Published: 6/6/2021
View: 4504
빌립보서 – 대한성서공회
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 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Source: www.bskorea.or.kr
Date Published: 7/1/2022
View: 8428
사회의 원리 – 마음의 두가지 유형
겸손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나아가서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높이는 사실의 마음이다. 예수그리수도께서 친히 세상에 오심 즉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임하심의 본질 …
Source: nocr.net
Date Published: 12/18/2021
View: 4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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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며
- Author: 인천순복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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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18. 2. 5.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vP4pYA-44cg
빌립보서 2:3-7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빌립보서 2:3-7 KRV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KRV: 개역한글 번역본 취소 성경 언어 한국어 언어 바꾸기 {{#items}} {{local_title}} {{/items}} ← 언어 취소 {{#items}} {{local_name}} {{/items}}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겸손과 순종의 마음, 주님 마음 내게 주소서(빌립보서2:1~11)
오늘 말씀은 읽을 때는 은혜가 넘쳤지만
묵상을 해보니 왜 이리 힘들기만 한지..
아마도 이 말씀이 내 삶을 뚫고 들어와 내 삶을 다스리는 데는
그만큼 어렵고 힘들고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뜻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3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며..”
그러면서..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처음엔 하나님을 사랑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시작했다가도
다른 사람과 비교되기 시작하면
점점 다툼이 되고 자랑이 되고 허영이 되어 버렸을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
또..
겉으론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며 겸손한 척 했지만
속으론 나보다 남을 낮게 여기며 교만하기 짝이 없었던 적은 또 얼마나 많았는지..
어디 그 뿐인가요..
“4각각 자기 일을 돌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하라”
내 일을 다른 사람이 돌봐주기는 원하면서
다른 사람의 일을 돌봐주는 것은 은근 슬쩍 모른척 외면했던 적은 얼마나 많았으며
또 하나님의 기쁨을 충만케하기보다
나 자신의 기쁨을 충만케했던 적은 얼마나 많았던지..
“5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게다가 수시로
예수님의 마음과 내 마음 두 마음이 서로 갈등하다,,
결국은 예수님의 마음에 순종하는 것이 아닌..
나 편하자고 내 마음에 순종해버렸던 적이 대부분이 아니었던지요..
그런데 오늘..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심에도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6절)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7절)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시며 곧 십자가에 죽으셨다는(8절)..
이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이 세상에서 잘 살든 못 살든
이렇게 숨쉬며 살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데..
예수님은 어떻게 죽기까지 낮추시고 복종하며 마침내 지옥까지 내려가는 십자가 죽음을 이룰 수 있었을까..하는 생각이 들면서..
오늘은 날 위해
죽기까지 낮추시고 복종하신
그 완전하신 겸손과 순종을 이루신
예수님의 위대하신 이름 앞에
참으로 무릎 꿇어 감사하며
경배와 찬양과 영광을 계속 올려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도하기
그렇습니다 주님
하나님의 본체이심에도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으시고
자기를 비우시고
자기를 낮추시고
마침내 죽기까지 복종하시며 십자가에 죽으신..
그 완전하신 겸손과 순종을 이루신
예수님의 이름 앞에
오늘은 진심으로 무릎 꿇어
감사와 경배와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아무 일에든지 다툼과 허영을 버리지 못했고
겸손한 척했지만 교만하기 짝이 없었고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기보다
나보다 남을 낮게 여기며 살았고
내 일은 다른 사람들이 돌봐주길 원하면서
다른 사람 일 돌봐주기는 모른척 무시해버렸고
주님의 기쁨보다 내 기쁨을 충만케 했고
예수님의 마음보다 내 마음에 순종했던..
참으로 겸손한 것도 순종하는 것도 아니었던
불완전하고 한심하기 짝이 없였던 내 모습..
이 시간 모두 회개하오니
이런 내 모습 부디 불쌍히 여겨주셔서..
이제부터는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완전하신 겸손과 순종을 이루신
예수님 모습 닮아가는 제가 되도록 도와주세요
다른 무엇보다..제게..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이 주님 마음 내게 많이 부어 주셔서
그리스도인으로서 갖추어야할 최고의 덕목인 겸손함을
날마다 조금씩 더해 갈 수 있는 제가 되도록 도와주세요..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이 말씀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그리고 발끝까지 내려와
남은 나의 삶을 온전히 지배하고 다스려 주시길..
날마다 조금씩 조금씩..
예수님의 겸손하신마음 닮아가는 제가 되길..
간절히 소원하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라 (빌 2:3-4) > 설교자료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라 (빌 2:3-4)목요일 저녁이었습니다. 유월절을 하루 앞둔 목요일 저녁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저녁 식사를 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식사하기 전에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손과 발을 깨끗이 씻는 일이었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 나오는, 갈릴리 가나에서 있었던 혼인잔치 이야기를 보면, 거기에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두 세 통 드는 물항아리가 있었다는 얘기가 나오죠? 결례라는 것은 청결하게 하는 예식, 세정식을 뜻하는 말인데, 유대인들은 그렇게 외출하고 나서 돌아왔을 때나 식사 전후에 손발을 씻는 결례의식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먼지가 많은 기후에서 사는 사람들이 손발에 묻은 먼지를 씻어내는 위생상의 문제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밖에서 접촉한 부정한 것들을 제거한다고 하는 종교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 의식을 소중하게 여겼습니다.그래서, 제자들이 목요일 저녁에 다락방에 모였을 때도 식사를 하기 전에, 손과 발을 깨끗이 씻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손발을 자기가 알아서 직접 씻는 것이 아니라, 어느 집에 가게 되면, 그 집에 있는 하인이 씻어주거나, 아니면, 지체 높은 손님이, 상대적으로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의 집에 왔을 때는 그 집주인이 발을 씻겨 주었습니다. 그런데, 다락방에 모였을 때는 특별히 예수님과 제자들의 발을 씻겨줄 만한 사람이 없어서, 제자들 가운데서 누가 해야 되는데, 누가 해야 되겠습니까? 우리가 흔히 쓰는 말로, 제일 짠밥이 낮은 제자가 해야 됩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아무도 발을 씻으려고 들지 않았습니다. 발을 씻게 되면, 자기가 제일 하수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니까,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는 수석 제자니까, 제일 거드름을 피우면서 누가 빨리 자신의 발을 씻어주기를 바라고 있었을 것입니다. 안드레, 야고보, 요한은 “그래도 우리가 제일 먼저 된 제자들이니까, 우리 ‘밑에 선’에서 알아서 기어야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버티고 있었을 것입니다. 마태는 ‘그래도 내가 세리였었는데…’, 빌립은 ‘내가 그래도 나름대로 똑똑한 사람인데…’ 그렇게 생각하면서 아무도 발을 씻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은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스승이신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하나씩 씻겨주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겸손을 가르치셨고, 섬김의 도를 직접 몸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제자들이 그렇게 예수님께서 발을 씻겨주시기 전에, 자신들이 직접 발을 씻지 못한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들은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옆에 있는 저 녀석보다는 내가 더 낫지.” “저 친구보다는 내가 나이도 많고 경륜이 있지.” “저 양반보다는 내가 그래도 많이 배웠잖아.”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그래도, 제자들이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지 못해서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큰 악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습니다. 오로지 예수님만 수고하시는 그 수고에 그쳤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를 보면,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지 못함으로 인해서 많은 심각한 문제들이 발생되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부부싸움을 해서 남편이 아내를 때려서 숨지게 하는 사건! 왜 일어납니까? 아내가 남편을, 남편이 아내를 자기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여기지 못해서입니다. 사람을 붙잡아다가 팔아 넘기고, 인권을 유린시키고, 폭력을 휘두르고… 이런 모든 일들이 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지 못해서 벌어지는 일들입니다. 내 생명보다도 남의 생명을 더 귀중하게 여긴다면 이런 일들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지금 인도땅은 힌두교가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고, 기독교 인구는 3%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왜 그렇게 됐습니까? 이런저런 영향들이 있었겠지만, 간디의 영향도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간디가 남긴 말 가운데서 “나는 예수 그리스도는 좋아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아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입니다.”라는 유명한 말이 있죠? 왜 그런 말이 나왔습니까? 기독교인들은 사랑을 말하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간디가 영국에 유학을 갔을 때에도 영국 사람들은 간디를 혈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을 하고 무시했습니다. 간디가 버스에 탔을 때도 여기는 백인들이 타는 곳이지, 너 같은 인간이 타는 곳이 아니라면서 뺨을 때리고 버스에서 내리게 했습니다.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영국 사람들은, 간디를 무시하고, 그를 자신들보다 나은 사람으로 여기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한 결과, 지금 인도땅에는 기독교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 위선적인 종교를 누가 받아들이겠습니까? 말로는 사랑을 얘기하면서, 사람을 무시하는 이중적인 종교를 어떻게 참 종교로 여길 수 있겠습니까? 인도는 예수님의 제자 도마가 인도에 가서 복음을 전했다고 전해지고 있기 때문에, 2천 년이라는 선교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아직도 기독교인구가 3%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만큼 잘못했기 때문입니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지 못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잘못으로 인해서, 그 10억도 넘는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라고 하면 치를 떨면서, 그들은 힌두교의 신들을 섬기면서 멸망의 길로 가고 있습니다.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지 못하는 것, 다른 사람들을 나보다 못한 사람으로 여기는 태도가 별 것 아닌 작은 일 같지만, 그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라, 이렇게 엄청난 악영향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이제 오늘 본문 말씀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에 보면 겸손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겸손이라는 말을 원어의 뜻을 살려서 해석해 보면, 『자신을 자기의 가치 이하로 낮게 여기는 마음 자세』를 가리키는 말이 됩니다. 그리고, 이 말은 굽실거리며 복종하는 노예의 모습을 나타낼 때 사용하던 말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헬라인들은 겸손이라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겸손해야 한다는 말씀도 많이 듣고, 겸손이라는 것을 좋은 미덕으로 여기면서, 겸손한 사람을 높여주지만,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랬듯이, 그들은 겸손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겸손한 모습으로 있으면,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면, 내가 다른 사람보다 못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 되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무시를 받게 되니까, 어떻게든 자신이 보다 높은 사람으로 여겨지게 되기를 바랬습니다.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겸손한 마음으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라고 권면했던 것입니다. 본문 뒤에 있는 말씀에서도 볼 수 있듯이, 예수님은 하나님과 본체이셨지만, 겸손히 인간이 되셨다는 것을 얘기하면서, 예수님의 그런 놀라운 겸손함의 모습처럼, 너희들도 서로 겸손하게 살라고 권면을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당시 빌립보교회는 유대인들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고, 여러 계층, 여러 색깔의 사람들이 섞여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여러 가지 문제들이 생겨났고, 서로 하나가 되지 못했습니다. 헬라파 사람들이 “이렇게 합시다!” 얘기를 하면,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은 또 자기들의 입장에서 “그렇게 하는 것보다는 이렇게 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자기들의 이익을 관철시키려고 들고,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도 자신들의 주장을 하면서 교회에 크고 작은 분란들이 끊이지 않았습니다.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였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나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로 이해하고 존중해 주어야 되는데, 나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틀린 사람들’로 이해를 했습니다. 자기만 옳고 다른 사람들은 전부 틀렸다는 것입니다.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를 뿐인데,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니까, 분란이 계속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일에 관한 가장 좋은 처방이 바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일이었습니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기만 하면, 다툼이 일어날 이유가 없었고, 교회 안에 일치와 하나됨이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그래서, 우리들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사람들이 되기 위해서는 해야 할 일들이 있는데, 먼저는, 남이 나보다 나은 점이 있다는 사실을 먼저 인정해야 됩니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은 다른 사람이 나보다 나은 점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이 됩니다.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에게는 알게 모르게, 그래도 내가 남보다 낫다는 그런 교만한 생각들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특별히 공부를 많이 하고, 가진 재산이 많고, 많은 권력을 갖고 있지 않아도, 모두가 다 마음 한 구석에는 내가 이런 점에 있어서는 남들보다 낫다고 하는 그런 자존감들이 다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기 위해서는 내가 남들보다 뭔가 나은 점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다른 사람이 나보다 나은 점이 비록 하나라고 하더라도, 분명히 나은 점이 있다는 것을 먼저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제가 남들보다 나은 사람이라고 여기다가,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게 된 계기가 하나 있었습니다. 제가 한 때는 참 교만했었습니다. 교만할 것도 없는 사람이고, 겉으로 남들 보기에는 겸손한 척 하면서 인사할 때도 남들보다 더 고개 숙여서 인사하고, 겸손한 태도를 보여줬었지만, 속 마음으로는 ‘그래도 내가 남들보다는 낫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참 교만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엔 왜 그랬었느냐면, 예전에 교육전도사로 섬기던 교회에서는 제가 최고의 남자 전도사였었습니다. 저보다 더 잘하는 남자 전도사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남자 목사님이 두 분 계셨고, 저를 제외하고는 모두 여자 전도사님들만 계셨거든요. 전임 여자 전도사님이 두 분 계셨고, 교육전도사님 두 분도 모두 여자분이셨고, 남자 전도사는 유일하게 저 혼자였기 때문에, 저를 능가하는 그 어떤 남자 전도사님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그러다 보니까, 본의 아니게 상당히 교만해져 있었습니다. 그러던 가운데, 저의 교만이 하루 아침에 깨어졌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면, 주일 오후 찬양예배를 마치고 나서, 교회 옆에 있는 학교 운동장에 가서 작은 체육대회 아닌 체육대회를 하게 됐습니다. 청년들도 많이 와서 구경을 하고, 꽤 많은 분들이 부부동반으로 같이 모여서 족구를 하게 됐는데, 저도 교역자팀 일원으로 족구시합을 하게 됐습니다. 저희 교역자팀에는 다들 치마 입으신 여자 전도사님들밖에 안 계셔서 목사님 두 분하고 저랑, 관리 집사님, 이렇게 4명이 팀을 이뤄서 족구시합을 하게 됐는데, 그런데, 사실, 저는 제 기억으로는 제가 족구를 처음해 본 것이 군대에 가서였습니다.군대에 가기 전에는 족구를 할 기회도 없었고, 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군대에서 처음으로 족구를 해봤는데, 처음 해 본 사람이 잘 할 리가 있겠습니까? 엄청나게 욕을 먹으면서 한 게임만 하고 쫓겨났습니다. 그리고는 제대할 때까지 한 번도 족구를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교회 옆 학교 운동장에서 족구를 했을 때가 태어나서 두 번째나, 세 번째 해 본 족구시합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때에도 제 실력이 어땠을지는 충분히 짐작을 하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공이 날아와도 제대로 받아서 살리지도 못하고, 어쩌다가 공격기회가 와도 공격이 아니라 오히려 실점을 하고, 서브를 해도, 네트에 걸리거나 경기장 밖으로 나가버리고… 그렇게 해서 그날 아주 망신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되고 나니까, 자존감이 그냥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고, 그 일로 인해서 한 달 정도를 꿈에도 그 일이 나오고 하면서… 하여튼 참 괴로웠었습니다.그러던 중에, 길을 가게 됐는데, 어떤 사람이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뭔가 좋지 못한 행동을 하는 것을 보게 됐습니다. 그래서, 겉으로 대놓고 욕은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뭐 저런 기본도 안 된 양반이 다 있냐”고 하면서 온갖 욕을 다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에 운동장에서 족구했던 일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러면서, “그래. 그래도 저 사람은 나보다 족구는 잘 하겠지.” 이렇게 생각하게 됐습니다. ‘뭐 저런 사람이 다 있나?’ 그렇게 욕을 하다가도 그래도 생각해 보면, ‘저 사람은 그래도 나보다 족구는 잘 하겠지. 저것은 저렇지만, 그래도 나보다 어떤 것은 더 낫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보다 더 나은 면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됐습니다. 그렇게 되고 나니까, 내가 교만할 것도 없고, 남을 비판할 것도 하나도 없었습니다. “나는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남들보다 나을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은 그것은 좀 나보다 못한 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람은 그 사람 나름대로 이 부분에 있어서는 나보다 낫구나.” 그것을 인정하게 되면, 우리는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평화하고 다른 사람을 존중히 여기면서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그리고, 우리는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나보다 나은 점이 무엇인지를 발견해 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남을 나보다 나은 자로 여기지 못하는 것은, 먼저는, 남이 나보다 나은 점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려고 들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선은 기본적인 작업으로 다른 사람에게는 분명히 나보다 나은 점이 있다는 것을 인정을 해야 하고, 그리고 나아가서는 다른 사람에게서 나보다 나은 점이 무엇인지를 자꾸 찾아내고 발견해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다른 사람에게 나보다 나은 점이 있다는 것을 인정은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서 나보다 나은 점을 발견을 하지 못해서, 나보다 낫게 여기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결혼 안한 젊은 사람들은 절친한 친구 사이가 그럴 수 있을 것이고, 어른들 가운데서는 특히, 부부사이가 그런 것 같습니다. 상대방에 대해서 너무 잘 알고 있고, 특별히, 단점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나보다 나은 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잘 발견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자꾸 상대방을 나보다 못한 사람으로 여기면서 무시를 하게 되고 그래서, 부부싸움으로까지 번지게 되고, 심한 경우에는 이혼까지 하게 됩니다.저도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보다 나은 점이 있다는 것은 족구사건을 통해서 잘 배워서 당연히 인정을 하지만, 저희 집사람에게서 저보다 나은 점을 발견하고, 저보다 낫다고는 잘 생각하지 않습니다. 키도 저보다 작고, 공부도 제가 더 잘 했고, 힘도 더 쎄고, 제가 다 나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기를 키우면서 느끼는 것은, 정말 어머니라는 존재는 위대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저는 힘은 더 쎄다고 하지만, 아기를 10분 동안 안지도 못하는데, 저희 집사람은 그 무거운 놈을 한 시간 동안 안고서 재우기도 하고, 밤에도 계속 일어나서 기저귀도 갈아주고, 울 때마다 안아서 달래고 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고, 저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리고, 잘 찾아보면, 저희 집사람이 저보다 기억력도 좋고, 사람들에게 친근감 있게 얘기도 잘 하고… 또……….. 더 있는지는 잘 모르겠고, 그렇게 두 가지 정도는 적어도 저보다는 나은 것 같은데, 그렇게 계속해서 나보다 나은 점을 찾아나가야 상대방을 정말 나보다 나은 사람으로 여기게 될 수 있습니다.어느 교회에 한 권사님이 계셨습니다. 그 분은 그 신앙에 있어서 상당히 교만한 분이셨습니다. 특히, 자신은 새벽에 1시간 동안 기도한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다른 사람들을 나보다 나은 사람으로 여길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저 사람은 왜 저렇게 기도도 하지 않고, 신앙생활을 저렇게 밖에 못할까.” 그렇게 비판만 하게 되다 보니까, 다른 사람들에게서 자기보다 낫다는 것을 전혀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특히, 그 권사님은 자신이 라이벌처럼 생각하는 한 집사님이 있었는데, 그 집사님도 정말 훌륭한 신앙을 가진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보기에는 그 집사님보다는 자신이 훨씬 더 나은 것 같은데, 사람들이 그 집사님을 더 인정해 주는 것 같으니까, 그 집사님이 꼴보기 싫고 미워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새벽기도 마치고 나서 큰 소리로 1시간이나 기도하고 가는데, 그 집사님은 20분 밖에 기도를 하지 않으니까, 적어도 기도생활에 있어서만큼은 자신이 훨씬 낫다고 생각했습니다.그런데, 어느 날, 그 권사님이 실수로 시계를 잘못 보셔서 새벽에 1시간이나 일찍 새벽기도를 드리러 가게 됐습니다. 그런데, 보니까, 아직 4시도 안 됐는데, 벌써 와서 기도하고 계신 분이 계셨습니다. 그 분은 바로 권사님이 라이벌로 생각하고 있던 그 집사님이었습니다. 그 집사님은 하루에 20분만 기도한 것이 아니라, 새벽기도를 마치고 나서 기도하는 시간만 20분이었고, 새벽기도 전에 이미 1시간을 기도하는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알고 보니까, 저녁에도 저녁마다 나와서 기도하신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그 권사님은 그 사실들을 알게 되고 난 뒤로는, 그 집사님을 자신보다 더 나은 분으로 알아서, 존중하고 존경하고, 자신의 신앙적인 교만들을 회개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겸손히 잘 섬기는 권사님이 되셨다고 합니다.원하기는, 우리들도 다른 사람에게서 나보다 나은 점을 발견하지 못해서, 다른 사람보다 내가 잘 난 것처럼 여기면서 교만하게 살아갈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서 나보다 나은 점을 계속해서 발견해 나가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서 나보다 나은 점들을 더 많이 발견해 나갈수록 우리는 더 겸손해지게 될 것이고,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사람들이 더 많아질수록 하나님의 나라가 더 확장되어져 나가게 될 것입니다.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생활 속에서 남을 나보다 나은 존재로 대우해 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나보다 나은 점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나보다 나은 점을 발견해 나가면서, 우리는 실생활 속에서 정말 나보다 나은 사람으로 대우해 주면서 살아가야 합니다.잘 알려진 이야기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죠? 옛날에 돌쇠라는 이름을 가진 푸줏간 주인이 있었습니다. 푸줏간 주인은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천민들 가운데서도 더 천한 취급을 받는 백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지체 높은 양반들은 당연히 그런 천민들을 벌레 보듯이 했습니다. 하루는, 양반 두 사람이 그 돌쇠에게 고기를 사러 갔습니다. 먼저 온 양반은 상당히 거만한 말투로, “야 이놈 돌쇠야, 고기 한 근만 다오.”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돌쇠는 고기 한 근을 썰어주었고, 이어서 또 다른 양반은, “여보게, 김서방! 나도 고기 한 근만 주게나.” 그렇게 얘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두 양반 모두 고기를 한 근씩 샀는데, 서로 비교를 해보니까, 고기의 양이 엄청나게 달랐습니다. 그래서, 먼저 고기를 산 양반이, 왜 이렇게 고기 양이 차이가 나느냐고 호통을 치면서 따졌습니다. 그랬더니, 돌쇠가 하는 말이, “그것은 고기를 썬 사람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앞엣 것은 돌쇠놈이 썬 것이고, 뒤엣 것은 김서방이 썰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게 대답했다는 잘 아는 이야기가 있습니다.그처럼, 우리는 상대방이 나보다 못하다고 여기면서, 남들을 무시하는 모습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직장에서도 여직원을 포함해서 부하직원들에게 함부로 반말을 하고, 하인 대하듯이 하고, 가정에서도 남편이 아내를 무시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되고, 또, 아이들도 알 것은 다 아는데, “어른들 얘기하시는데 애들이 뭘 안다고 그래?” 그렇게 말을 하면서 자녀들을 무시하는 경우들을 보게 됩니다. 교회에서도 교회의 직분은 역할의 차이에 따른, 역할상의 직분인데, 수직적인 계급처럼 인식을 해서, 소위 말하는, 높은 직분을 가진 분들은 그렇지 못한 분들에 대해서, 그들을 나보다 나은 사람으로 여기지 못하고, 나보다 못한 사람으로 대우하려고 하는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의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교회에서나, 정말 남을 나보다 낫게 생각하는 정도가 아니라, 실제적으로 나보다 나은 사람으로 대우해 주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제가 주일 저녁에 처음으로 전했던 말씀이 “하나님 나라의 핵심가치”라는 제목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핵심가치는 바로 사람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우리도 사람들을 존중하고 사랑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말씀을 드렸었는데, 오늘 말씀은 그 말씀의 속편이자 완결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겨야 할 이유는, 하나님 나라의 핵심가치가 사람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면서 사람들을 존중하고 겸손하게 섬기며 사는 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를 이 땅 가운데 확장시켜나가는 일입니다. 우리 기독교의 핵심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우리가 어떻게 사랑할 수 있습니까? 눈에 보이는 우리 이웃들을 사랑함으로써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핵심가치인 사람들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랑할 수 있습니까? 다른 사람들을 나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내가 미워하고 있는 그 사람도, 하나님은 그 사람도 사랑하셔서 그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주셨다는 것을 기억하고, 내가 미워하는 사람마저도 그 사람에게서 나보다 나은 점을 발견하고, 그 사람을 나보다 더 나은 존재로 대우해 주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를 품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원하기는, 하나님 나라의 핵심가치는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정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가운데 임하게 되기를 소원한다면, 다른 일보다도,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허락하신 사람들을 나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여기면서 그들을 존중하고 사랑함으로, 우리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더 확장되어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가운데 임하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누군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길 수 있냐? ”고 묻는다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립보서 2:3)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긴다는 것” 정말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만일 누군가 이렇게 물어본다면 제 자신, 목사이지만 “그럴 수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을 낫게 여긴다는 것은 솔직히 내 생각과 사람들에 대한 평가와 기준이 허용하는 정도까지만 일 때가 많습니다. 때론 내 입장과 상황이 손해를 보지 않고 적당하게 체면을 유지하는 정도이지요. 그래서 상대방이 도에 지나치는 행동을 하거나 정말 형편 없는 모습을 보일 때는 이 성경 구절을 문자 그대로 적용하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감정을 묻지 않습니다. 우리의 생각도 묻지 않습니다.
다만 남을 낫게 여기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를 빌립보서 2:5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남을 낫게 여겨야 되는 이유..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만이 이유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 무엇인지 그 다음에 빌립보서 기자는 설명을 덧 붙였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의 마음은 우리를 낫게 여기시기 위해(구원을 위해) 십자가까지 복종하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생각해 봅니다. 남을 위해 십자가를 지겠다는 마음이 내게 있었는가? 솔직히 얼굴이 붉어집니다.
지난 목요일 생명의 삶 예화를 읽다가 마음에 다가와 지면에 옮깁니다. 이 예화의 얘기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삶의 현장의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초등학교 4학년때, 어머니 고향인 미국으로 긴 여행을 떠났다. 낯선 나라에서 외롭게 사신 어머니와 혼혈아로 한국 학교를 다닌 내게 선물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미국인 기독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날 좋아할까? 생김새가 비슷하니 놀리는 아이들은 없을지도 몰라!’
첫 수업은 철자 수업이었다. “앞줄부터 시작이야. 스프링!” 선생님 말씀에 맨 앞 줄 아이가 대답했다. “에스 피 알 아이 엔 지!” “좋아. 다음! 요셉이는 앞으로 나와 봐.” 영어는 들을 줄만 알지, 철자를 모르는 나는 숨고만 싶었다. “얘들아, 선교사님 자녀인 요셉이는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어를 아주 잘 한단다. 요셉아, 선생님 이름을 한국어로 써 줄래?”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칠판에 한글을 또박또박 적자,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내 이름도 써 줘!” 친구들의 이름을 적을 때마다 아이들은 박수를 했다.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얘들아, 요셉이가 한국어를 참 잘하지? 너희도 선교사가 되려면 다른 나라 말을 이렇게 잘해야 한단다.”
[삶으로 가르치는 것만 남는다]/ 김요셉. 생명의 삶 9월 4일자 예화에서 인용.예화에서 우린 낯선 나라에서 온 학생을 위해 학생의 마음으로 배려했던 선생님의 따뜻한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작은 배려가 우리의 삶을 조금은 더 따뜻하고 풍성하게 해 줄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 교우들이 이 마음으로 한 주간을 호흡하고 살아가게 될 것을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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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2:1-11) 남을 낫게 여기고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의와 뜻이 자기 본성이 되어 그 본성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삶의 모습이라는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복음의 합당한 삶은 오직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마음 안에서 본성이 되었다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a christ)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속사람’이라는 것과 ‘겉사람’이라는 것이 나옵니다. 속사람은 본성이고 내용이며, 겉사람은 형식이고 행동이며 삶의 모양입니다. 겉사람은 어떻게 보면 실체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 사람의 모든 정체성이 겉사람으로 가늠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겉사람은 본질이 아닙니다. 그 안에 어떤 것이 있는지, 그 속사람이 무엇인지가 겉사람으로 나타나는 것이기에 본질은 속사람인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마음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한 것이 그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이 속사람인 사람은 겉사람 즉 그 사람의 행동과 삶의 모양이 그리스도와 같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본 받아 사는 것을 신앙이고 믿음이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라고 여긴다고 할 때 그것을 이루는 것은 그 속사람, 그 심령, 그 본성이 그리스도를 품고 그리스도와 같아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행동이나 다짐으로 되지 않습니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스스로 어떻게 조절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 자기가 마음먹은 것을 잘 지키는 사람이 있습니다만 그것은 지키는 것이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뜻한 것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어기려 해도 되지 않는 지경이 된 것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온전하고 완성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려면 다짐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거듭나야 하는 것입니다. 본성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굳이 교회에 가지 않더라도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는 말을 들을 수 있고, 또 적지 않은 사람이 그렇게 겸손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더러는 자기 다짐으로 적어도 남 앞에서는 그렇게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그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고,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며, 그런 삶은 스트레스가 심하므로 해소할 힐링도 필요한 것을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은 근본 사람의 본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본성이므로 그리스도로 거듭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지 않는다면 온전히 이룰 수 없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지 못할까요? 심지어 밥만 먹고 운동만 하는 선수들의 경기를 보면서 선수들을 보고 야유를 합니다. 남이 쓴 글에 댓글은 천하제일 비평가인 듯 댓글을 답니다.(정작 자신은 자신의 생각을 A4용지 한 장의 글로도 쓰지 못하면서) 이런 행동들은 모두 자기 안에 의로운 기준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몸은 드리지 않으면서 자기 의만 주장하기 때문에 남이 나보다 못한 사람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운동경기를 관람하면서 실수하는 선수를 보고 야유합니다. 때로 옆에서 ‘너는 저 선수보다 못하면서 왜 야유냐?’라고 하면 ‘선수는 밥 먹고 운동만 하는데 잘해야지.’라고 답합니다. 명답 같지만 참 죄스러운 답입니다. ‘밥 먹고 운동만 하는 선수도 실수할 정도로 어려운 것이 운동’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들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육신을 드려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려면 ‘성경에서 그러라고 하니 죽어서 천국가려면 그래야지!’라는 각오나 다짐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려면 남을 낫게 여길 이유가 자기 안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속사람이 그렇지 않은데 겉사람만 신념으로 견딘다고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속사람이 바뀌어야 하는데, 자기 속에는 자신만의 기준이 떡하니 버티고 있으면 제 아무리 대단한 신념을 가지고 있어도 결국에는 “은혜를 원수로 갚아??”라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려면 우선 자기 안에 있는 자기 의로움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일단 자리가 나고 그릇이 비워져야 그리스도의 마음이든 무엇이든 채울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먹어도 우리 마음을 어떻게 하지 못하는 것은 새롭게 먹은 마음보다 먼저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마음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냥 비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둠은 물러가라 외친다고 물러가는 것이 아니라, 빛이 없기 때문에 어두운 것이듯, 사람이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자신의 의로움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온전한 의로움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려면 먼저 선악과의 문제부터 해결해야 합니다. 스스로 선하고 악한 것에 대한 기준을 가지고서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길 방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가끔씩 자신이 추구하는 선의 기준에서 앞선 사람을 보고 낫게 여기기는 합니다. 돈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부자가 그렇듯. 그러나 문제는 사람이 가진 선악의 기준은 단 하나가 아니기에 한 가지 기준으로 낫게 여기던 사람도 또 다른 기준으로는 비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로 볼 때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은 오직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사람,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만의 영역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마음은 자기 스스로의 기준으로 선악을 판단하지 않는 사람으로 거듭나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가지신 마음, 하나님의 의의 기준을 가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의를 버리고 하나님의 의를 가졌기에 사람을 자기 기준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 보기 때문에 자신보다 낫게 여길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마음은 의인이 죄인을 위하여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그 마음은 어느 한 구석도 남을 무시하거나 업신여기는 마음이 없는 마음입니다. 마음 안에 남을 나보다 못하게 여기는 마음을 한 올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죄인을 위해서 죄인이 되기까지 자기 육신을 드릴 수 있는 사람이나 법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가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하고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건물을 청소하는 청소부로 청소부 경력이 없는 새로운 신입 청소부가 왔습니다. 경력이 있는 청소부가 신입과 짝을 이루어 청소를 하러 갔습니다. 그러면 보통은 경력자가 신입이게 ‘여기 저기 닦고 구석구석 닦으라.’ 말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법이 하나 있습니다. 신입에게 청소하라고 하고, 신입이 잘 수습하지 못한 것을 따라 다니면서 해결하는 법도 있습니다. 신입이라도 그 눈에 더럽고 깨끗한 것 정도는 볼 수 있다는 사실만 알면 그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입이기에 모르는 그 건물 청소의 룰은 직접 보여주는 수고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의인이 죄인을 위하여 죄인되는 세계의 법, 곧 그리스도의 법입니다.
그런 그리스도의 마음과 법이 있다면 자연스럽게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상대보다 내가 더 가지고 더 의로워도 그것을 상대를 섬기는 것에 사용하는데 상대를 무시할 이유가 없고, 다툼이 있을 이유가 없으며, 세상의 사람들이 죄로 여기는 어떤 죄도 자신이 범할 이유나 법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빌립보서 2장 1-11절 말씀의 본질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이신 그리스도의 정체성, 그것이 본성과 속사람이 되면 나타나는 겉사람의 모습이 그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말씀의 본질은 그 마음, 그 속사람과 심령이 그리스도의 정체성으로 거듭난 생명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 그것은 노력이나 다짐이나 신념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마 자신이 조금만 솔직하다면 그 정도는 인정할 것입니다. 그것마저 인정이 되지 않는다면 엄청난 세월이 걸릴 것입니다. 속사람이 그리스도로 거듭나는데 말입니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려면 천하에 둘도 없는 의인이시면서 하나님의 의 앞에 죄인인 자들의 주장 앞에 죄인이 되어 자기 육신을 드린 그리스도의 마음, 그것이 자기 본성이 되고, 속사람이 되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Translation by Google)
(Philippians 2: 1-11) He heals others
The living worthy of the gospel is that the righteousness and the will of God is the nature of a person who lives by his nature. The proper life of the gospel is only with the mind of Christ. Having the heart of Christ means that the identity of Christ has become a nature in the heart, and that is what it is to be a Christ.
In the Bible, it is called ‘inner man’ and ‘outward man’. The inner person is nature and content, the outer person is form, action, and the shape of life. The outer person seems to be an entity in some way. It is because all the identities of the person are measured by the outward person. But the outer person is not the essence. The essence is the inner man, because it is what appears in it, and what the inner person is, as an outer person.
That is why the Apostle Paul asked to have the heart of Christ in his heart. If the mind of Christ is the inner man, then the outward person, the behavior and life of the person, will be like Christ. When we think that living in Christ is faith, belief, and taking the cross and following Jesus, it is the inner, the spirit, and the nature of Christ to be like Christ and to be like Christ.
This is not an act or commitment. It is because the mind of man is not controlled by oneself. It is not that the word “My resolutions never last more than three days.” is wrong. Sometimes there is a man who keeps his mind well, but it is to keep and to try. It must be something that can not be done that it really means something is done. It is because it is perfect and complete. It does not require commitment, but to be born again. The nature must change.
Even if we do not go to church, we can hear people say, “Make others better than us.” Some people try to live that modestly, and some people do so at least in front of others. But as everyone knows, it is a very difficult job, a lot of effort is needed, and everyone knows that life is stressful and healing is needed. That is why it is not the nature of the fundamental person to consider others better than I do. It is the nature of Christ that if it is not born of Christ, it can not be achieved if it does not have the heart of Christ.
So why do not people think of someone better than me? Even boobs are eating and exercising, watching athletes watching and watching the players. The comments are written as if they were the best critics in the world (because you can not write your own thoughts on a single sheet of A4 paper). All of these actions have a righteous standard in you. He does not offer his body, but he claims to be his own, so he looks like someone else.
People look at the athletic games and look at the players who make mistakes. Sometimes I say, ‘Why are you hateful because you are not like that player?’ And he replies, ‘The player should be good at eating and exercising.’ It is a correct answer, but it is a sinful answer. It is because I do not think that ‘Athlete who is eating enough to eat and exercising is too difficult to make mistakes’. And that will not happen. Because I did not offer my body.
If you want to be better than me, you do not need to be determined or committed to be ‘dead in heaven’ to say it in the Bible. ‘ If you want to be better than me, you have to be in yourself for the good of others. It is not that the inner person is not someone who thinks that someone who is outsiders can endure with their own faith. In order to do so, the inner person must change, and if he has his own standards in his own way, he will end up with a “great grace” if he has any great faith in him.
Therefore, if you want to be better than me, you must first abandon your righteousness in yourself. It is because once the seat is set and the bowl is empty, it can fill the heart of Christ or anything. What we can not do with our minds is because we have a mind that we think is right before the new one. And it’s not just getting emptied. It is because darkness is not going back out to shout, but darkness because there is no light, and man has his righteousness which he claims to be right is not met with perfect righteousness.
Therefore, in order to make others better than me, we must solve the problem of good and evil. Because there is no way for me to have better standards than myself with the standards of self-good and evil. Sometimes I see people who are ahead of the line of good that they seek. Just like the rich people who think that money is all about life. But the problem is that the standard of good and evil that a man has is not one, so he who criticizes one criterion is criticized by another standard.
In this sense, the mind that takes care of others better than I am is only a person who is born of Christ, who is born again of Christ. For the heart of Christ is to be born again as a man who does not judge good and evil by his own standards. Christ is the heart of God, the standard of God’s righteousness. Because you have forsaken your own righteousness and have the righteousness of God, you can be considered better than yourself because you see God as righteous, not by your own standards.
Also, the heart of Christ is the heart of Jesus, who has been a sinner and sinner for the sinner. The mind is a mindless heart that ignores or ignores any corner. If you have a heart in your heart that makes you feel less than me, there is no man or law that can give you your body until you become a sinner for sinners. So the apostle Paul asked me to be better than me and to have the heart of Christ.
A new cleaner came to the cleaner who cleaned the building. Caregiver janitor went to clean with pair of new person. Then you will usually say, ‘Wipe it all around here and clean it everywhere’ so you are a newcomer. But there is another law. It is also advisable to clean up the new entrant, and follow up with the new entrant. If you know that you are new enough to see enough dirty and clean things in your eyes, you can. And the rules of cleaning the building that you do not know because you are new are to do the labor to show yourself. This is the law of the world, the law of Christ, in which the righteous is sinners for sinners.
If there is such a mind and law of Christ, I can not help but think that it is better than me. There is no reason to ignore the opponent, no reason to argue, no reason for the world’s people to commit sin, and no reason to commit sin. This is the essence of Philippians 2: 1-11. It is the identity of the Christ that Jesus is, and the appearance of the outer person when it becomes the nature and the inner man. Therefore, the essence of this statement is that the heart, the inner person and the spirit should be the life regenerated by Christ’s identity.
To make someone better than me, it does not come from effort, commitment or conviction. Perhaps if you are a little honest, you will admit that. It will take a great deal of time if it is not even recognized. The inner man is born again to Christ. If you want to be better than me, you can only be a person who is a righteous person in the world and who is a sinner before the righteousness of God and who gives his body, that is, his nature, and that he is the inner man.
[빌립보서 2:7 ]제 2 장
그리스도의 겸손
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2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그는 근본 하나님의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또는 형체 또는 보류
7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또는 본체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살라
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14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15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16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생명의 말씀을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헬 , 생 또는 붙들어
17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18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 하라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또는 하느니라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
19 내가 디모데 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의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20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21 그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22 디모데 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23 그러므로 내가 내 일이 어떻게 될지를 보아서 곧 이 사람을 보내기를 바라고
24 나도 속히 가게 될 것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25 그러나 에바브로디도 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
26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가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
27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셨고 그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
28 그러므로 내가 더욱 급히 그를 보낸 것은 너희로 그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며 내 근심도 덜려 함이니라
29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HANGL NOCR
성경이 가르치는 교회론적 인간관계의 가장 핵심은 바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라는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유기적인 사랑의 결사체이기 때문에 교회에서의 교제 즉 성도의 교제의 가장 기본적인 관계 방식은 바로 남의 나보다 낫게 여기라는 가르침에서 시작된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전적으로 자발적인 결사체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자원하는 심령으로 참여하는 가장 개인적이면서 가장 자유롭고 동시에 가장 사회적인 결사체이다. 교회는 잘난 자가 못난자를, 가진 자가 못가진 자를, 있는 자가 없는 자를 섬겨야 하는 운명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모든 구성원이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자원적이고 자발적인 자유로운 동감의 결사체로 이해되어야 한다. 교회는 그래서 모든 사회중에 가장 탁월하고 모범적인 사회이다. 본질적으로 사회란 모든 개인의 자발적인 참여를 기초로하는 자유로운 동감의 결사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동감의 원리에서 인간은 본질적으로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관찰적 지혜를 가지고 있다. 이는 바로 성경이 가르치는 인간의 사회적 관계의 본질적 원리다. 이러한 원리는 다음 세가지로 살펴보고자 한다.
1. 인간의 모든 사회적 관계의 기초에서 인간의 행위는 궁극적으로 두가지 유형으로 압축된다. 첫째는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이고 두번째는 나를 남보다 낫게 여기는 것이다. 우리는 첫번째 유형을 겸손이라고 부르고 두번째 유형을 교만이라고 부른다. 즉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행위방식을 겸손이라고 하고 나를 남보다 낫게 여기는 행위 방식을 교만이라고 한다. 겸손의 정점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고 교만의 정점에는 사탄이 있다. 이런 점에서 예수그리스도와 사탄은 두가지 사회의 모형이다. 그리고 인간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목표로하는 사회와 사탄을 목표로하는 사회의 싸움이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과 나를 남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의 싸움이 바로 성경이 가르치는 인간의 삶속에서 치열하게 진행되는 영적 전쟁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기초적 원리에 따른 사회 즉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며 겸손한 인간관계를 기초로 해서 개인의 자발적이고 자원적이며 자유로운 동감의 참여에 의해서 실현되는 사회이며 오늘날 교회의 본질로서 이해된다. 반면에 사탄은 나를 남보다 낫게 여기며 교만한 인간관계로서 지배와 정복을 목적으로 강제적이고 집단적으로 동원되는 본질적으로 비사회적인집단적 유형이다. 예수그리스도는 본질상 하나님이요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전혀 죄가 없는 분이지만 피조물인 사람의 모습으로 나서 본질적으로 죄로 멸망할 사람의 운명을 동감적으로 경험하며 인간을 사망과 운명의 처절한 지옥에서 자신의 혹독한 저주의 십자가의 고난으로 해방하였다. 예수는 인간의 저주를 스스로 담당하면서 반대로 저주의 삶을 살아야하는 인간의 운명을 복된 존재로 변화시켰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는 승리자가 되어서 모든 피조물에게 영광을 얻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립보서 2장 5절 -11절)
예수 그리스도의 이런 삶을 본받아서 항상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이 바로 겸손이다. 겸손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나아가서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높이는 사실의 마음이다. 예수그리수도께서 친히 세상에 오심 즉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임하심의 본질은 나를 남보다 못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데 있다. 내가 남보다 낮아지는 것은 남보다 내가 못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이 나보다 낫기 위해서이다. 참으로 남을 유익하고 행복하게 만드는 마음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겸손의 다른 얼굴은 바로 사랑이다. 겸손한 사람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며 남을 행복하게 유익하게 만들어준다. 그것이 동시에 바로 나의 행복이요 유익이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런 사람 즉 겸손한 사람에게 반드시 복을 주고 그를 영화롭게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않고 자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이 그것이 바로 사랑의 시작이고 이러한 사랑은 다름 아닌 자발적이고 자원하는 마음의 자유로운 동감의 결사체인 사회의 본질적 관계이다. 그래서 교회는 동감의 결사체요 사랑의 결사체요 그리스도의 모습을 따라 사는 그리스도의 교제의 모임이다.
반면에 사탄은 피조물이면서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 자기를 하나님보다 더 높여 부르고 스스로 저주에 떨어진 존재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 밑에 빠치우리로다”(이사야 14장 12-15절) 그는 그리고 날마다 하나님 앞에 다른 사람을 무고하며 참소하는 자이며, 남이 나보다 나은 것을 결코 참지 못하며 반드시 자기를 최고로 생각하는 병적인 강박과 집착에 시달린다. 사람의 교만한 마음에 사탄의 유혹을 받아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려는 욕심을 품고 먹지 말았어야 할 선안과를 먹음으로서 사망의 형벌을 받게 되었다. 아담은 하나님처럼 되기 위해서 즉 만물을 창조하시되 보기에 좋게 창조하신 하나님의 세계를 자신을 것으로 참칭하려는 욕심에서 스스로 하나님처럼 창조자요 입법자가 되기 위해서 선악과를 먹었지만 결과는 자신이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고 벌거벗은 존재라는 사실에 사망이라는 형벌까지 감수해야만 하는 파멸가 저주의 존재로 전락하게 된것이다.
그래서 이제 인간은 죄의 충동에 따라서 말할수 없는 수치와 모멸감을 느껴, 세계를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하나님이 주신 청지기로서의 왕적 수임을 오직 자신의 욕구와 소유를 채우려는 지배와 권력의 집단적 광기로 착각하며 어둠속에서 거칠며 고독하게 방황하게 된다. 이러한 인간의 타락의 근본에는 바로 스스로 하나님으로 참칭하며 멸망의 가증한 저주로서 사탄의 욕심이 있는 것이다. 이런 마음은 교만한 마음이요 교만한 마음은 반드시 추락한다. 자신만 추락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의 몰락을 야기시킨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언 16장 18절)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누가복음 10장 15절). 성경이 가르치는 가장 큰 악은 바로 교만이다. 욕심, 그것이 얻으려고 발버둥치는 것이 바로 교만이다. 그리고 외식이란 교만의 다른 얼굴일 뿐이다. 근본적으로 외식은 교만 중에서도 가장 교만한 것이며 자신을 겸손하게 보이려고 위장한 교만이라는 점에서 가장 악독한 교만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외식에 대해서 그렇게 무섭게 저주를 한것이다. 외식이란 그리스도의 옷을 입은 사탄의 마음이다.
2.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바로 교만의 자리에서 겸손의 자리로 이행을 말한다. 겸손한 자는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자이고 교만한 자는 나를 남보다 낫게 여기는 자이다. 예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이렇게 가르친다:”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태복음 7장 1-5절) 이 가르침은 일차적으로 바리새인에게 다음으로는 모든 인간의 일반적 삶에 대해서 말하는 진리의 교훈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신의 눈에 들보를 넣고 다니면서 다른 사람의 눈에 티를 보고 사는 존재이다. 자기 눈의 들보는 인식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눈에 티를 말하면서 산다. 눈에 티만 들어있어도 얼마나 아플까 그런데 자기 눈에 널판지를 넣고 다니면서 그 아픔은 알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눈에 티의 아픔에 대해서 말한다. 또 자기 눈은 들보로 완전히 가리워져 아무것도 보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의 눈에 티는 어떻게 그렇게 잘보는지…사실 들보로 가리워져 있으면 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밝은 눈으로도 보기 힘든 티를 다른 사람의 눈에서 찾아 내는 불합리성 이게 인생이란 것이다. 사실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자기 눈을 덮고있는 관념을 따라서 판단하면 사는 것이 인생이다. 들보와 티의 비교는 양과 질적인 면을 다 포함한다.
먼저 양적인 면에서는 당연히 사람이 자기의 마음을 아니 자기의 잘못은 아주 많이 알지만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적다. 즉 정직한 자라면 인간은 타인의 허물보다 자신의 허물을 훨씬 많이 보게 된다. 왜냐하면 자기의 마음은 자기가 알기때문에 자기의 허물과 죄가 얼마나 많은지 스스로 깨닫게 된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죄가 머리털보다 많다”(시편 40장 12절)고 말한다. 정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보는 자라면 자신의 얼마나 죄인인가를 잘 알것이다. 그런데 욕심으로 가리워진 사람의 마음은 자신의 죄를 보지 않고 오직 남의 죄를 찾기에 바빠서 다른 사람의 눈에 티끌같은 죄를 찾으려고 안달이다. 들보처럼 커다랗게 허다히 늘린 자신의 죄는 보지 않고 세밀히 살펴야 겨우 보일듯 말듯한 남의 죄를 찾으며 헤아리고 판단하는 것이다. 자신의 눈은 들보에 가리워서 앞도 보이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의 눈에 티를 뺀다고 야단들이다. 이것이 바로 나를 남다보 낫게 여기는 교만한 마음이 행동하는 유형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회개하지 않은 인생은 바로 이렇게 행동한다.
교만한 마음은 결코 자신을 알지 못한다. 언제나 자기는 남보다 높은 자리에 서서 다른 사람을 밑으로 내려다 보기 때문에 자신의 자리를 알지 못한다. 그 양과 크기에 있어서 들보만큼 큰 허물을 가졌으면서도 자신을 알지 못하고 남의 티만한 허물을 헤아리고 판단하는 거짓되고 무정하고 잔인하고 포악한 마음이 바로 교만중의 교만 바로 외식이다. 그리고 그것은 철저하게 허위의식이다. 사실에 기초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관념으로 욕심으로 회칠한 관념의 세계다. 교만은 언제나 지배와 권력의 소유에 내몰리는 강박으로 우겨쌈을 당한 관념과 표상의 세계이다. 성경은 이러한 원리에 따라서 증거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요한복음 9장 39-41절)
이것이 바로 들보와 티의 질적인 차원이다. 즉 들보는 사실에 입각해서 엄청난 크기의 허물을 가지고도 자신의 허물에 가리워서 오히려 타인의 티끌만한 죄를 찾는다는 역설이다. 즉 눈에 들보가 있다면 아파서 눈을 뜨지도 못할것이요 동시에 들보의 크기에 가려서 아무것도 볼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들보를 가진 눈은 그 크기의 아픔도 느끼지 못하고 스스로 가리워서 보이지도 않으면서 밝은 눈으로도 찾기 힘든 작은 티를 본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즉 스스로 헤아리고 판단하는 것이다. 결코 사실에 근거하지 않고 자신의 욕심에 따라서 생겨난 관념을 따라서 주장한다. 이것이 바로 죄의 근거다. 결코 하나님이 아니면서 스스로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면서 사는 인생의 비극이다. 사람은 자신을 스스로 자신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면서 자신과 세계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며 스스로 판단하고 헤아리고 자신의 방식으로 스스로 입법자로 자처하면서 수많은 허물과 오류를 감추고 세계와 다른사람을 판단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먼저 자신의 눈에 들보를 빼고 나서 밝히 보이면 그때에 비로소 다른 사람의 눈에 티를 뺄수 있을 것이다. 먼저 세상을 사실에 따라서 관찰하는 눈을 가지면 바르게 판단하고 헤아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바로 잡을 수 있을것이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수는 없는 법 먼저 스스로 사실에 따라 밝히 보고 그다음에 눈이 어둡거나 보지 못하는 자, 즉 관념에 의해서 왜곡된 삶을 사는 자를 바르게 인도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인에 비교해 볼때 그리스도인에게는 관념의 삶에 사실의 역전이 일어난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바 사실에 따라 보고 산다는 것외 다른 것이 아니다. 자신의 욕심과 죄에 이끌려서 자기 뜻대로, 즉 관념에 따라서 임의로 살다가 하나님이 만들고 정하신 세계의 질서를 보고 관찰하고 사실에 따라서 사는 삶으로 변화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요 회개이다. 만물의 자신을 중심으로 보고 살다가 이제 하나님을 중심으로 보고 사는 것으로 이동하게 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되면 이제 사실을 관찰하게 되므로 비로소 인간은 자기 눈의 들보를 보게 된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예레미야 17장 9절) 그리스도인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성령의 조명을 받아 자신의 마음을 관찰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성령이 보혜사로서 하시는 일중의 하나 즉 바로 죄에 대해서 책망하시는 일이다 이제 밝은 눈으로 보니 자신의 눈에는 들보가 있고 마음에는 엄청나게 많고 큰 허물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알게 되므로 작은 티끌만을 보게 되는 다른사람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된다. 그런즉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본질적인삶의 자세이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티가 있고 내눈에는 들보가 있다는 것을 사실로 인식한 삶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이기 때문이다. 내가 사실은 남보다 낫지만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라는 명령을 지키려고 노력한다는 생각을가진 사람이라면 그는 아직 사실을 제대로 관찰하지 못한 사람이며 여전히 교만한 자요 외식하는 자이다. 자기가 남보다 나은데 남이 나보다 나은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바로 교만 중에 교만 바로 외식이기 때문이다.
들보와 티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서 우리는 이제 아무도 판단할수 없게 된다. 즉 나는 들보로 가리워져서 볼수 없는 눈이니 다른 사람의 눈에 티를 볼수는 없기 때문이며, 나의 허물은 들보만큼 크기때문에 남의 티끌만한 허물을 판단할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사실의 차원에서 남의 나보다 낫게 여기는 삶이 시작되며 이는 사실의 삶이며 겸손한 삶이 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 사실에 있어서 정직과 겸손이다 정직한 자는 내가 남보다 큰 죄인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다는 가르침에 따라서 내가 하나님에게 더 큰 용서를 받은 사람이 되고 더 크게 용서 받은 사람은 더 큰 은혜를 받은 것이요 더 많은 빚을 탕감받은 것이고 그래서 더 많이 감사하고 더 많이 봉사하고 헌신하는 마음을 자발적으로 갖게 된다. 이렇게 자발적으로 헌신된 마음이 모여서 이루어진 자유로운 결사체로서의 동감의 사회가 바로 그리스도의 마음에 기초한 그리스도의 교회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사랑이다:”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린도전서 13장 4-7절) 교회는 겸손과 사랑의 자발적 결사체이면 자유로운 동감의 사회이다.
3. 위에 말하여진 사실에 기초해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먼저 자신의 일을 돌아보고 그 다음에 남의 일도 돌아보아 그리스도의 기쁨이 되게 하는 사랑의 마음이 말하여져야 한다. 교만이란 자신을 낫게 보이려는 허영심에 근거하고 이런 곳에는 반드시 분쟁이 생긴다. 분쟁은 다툼으로 시작하여 마침내 엄청난 재난을 가져오기도 한다. 역사는 얼마나 많은 분쟁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가? 겸손한 마음 즉 남을 나보다도 낫게 여기며 자신의 일을 충실히 하면서 다른 사람의 일에도 무관심하지도 않고 동감적으로 즉 우는 자와 함께 울고 웃는 자와 함께 웃으며 자유로운 양심에 따라 다른 사람의 삶에 동감적으로 참여하면서 다른 사람의 일을 적극적으로 돌아보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의 연대를 실현하는 것이 교회가 가진 진정한 사회적 결사체적 본성이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의 마음이 그 마음에 새겨진 동감적 존재이다.
비록 죄로 말미암아 이 동감이 엄청난 붕괴를 겪었지만 그럼에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회복되어질 때 인간은 하나님의형상으로서 동감의 삶을 사회적으로 실현하는 존재가 된다. 나의 눈에 들보를 인식하고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며 자신의 일을 하면서 남의 일에 동감적으로 참여하면서 다른 사람의 유익에 기여하면서 전체의 삶의 유기적으로 실현하고, 무엇을하든지 남의 유익을 구하며 덕을 세우는 사랑의 정신을 따라 그리스도의 자발적 결사체로서 자발적이고자유로운 삶과 다른 사람에게 동감하는 마음을 양육하는 일이 바로 성도의 어머니이자 하나님 나라의 가장 탁월한 사회적 주체인 교회의 본분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본성에 있어서 하나의 사회이며 이러한 인간의 자발적인 결사체인 교회는 겸손과 사랑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수직적으로는 하나님과 수평적으로는 예수와 및 함께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과 교제하는 사회이며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형상인 모든 사람을 사실과 동감의 삶으로 변화시키고 전 피조세계를 행복의 연대로 실현해가는 사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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