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혼례 | 인륜지대사, 혼례이야기 / Ytn 사이언스 24738 투표 이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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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륜지대사, 중요한 의례로 불리던 혼인.
혼(婚)은 남자가 저녁에 여자를 맞이하러 간다는 뜻이며 인(姻)은 여자가 중매쟁이를 통해 남자를 만나 시집을 보낸다는 의미로 남자와 여자가 부부가 되는 일이다.
가장 오래된 제도 중 하나 혼례.
혼례는 고대에서부터 국가에서 장려하는 제도였으며 당시 매우 중요한 자원이었던 인력으로 노동력과 결합해 가족 구성원을 늘리고, 자손을 번성하는 등 노동력을 확보하는 방법이었다.
이후 신라시대에 이르러 혼례는 제도적 성격을 갖추게 되었다.
비교적 자유로웠던 혼인 풍습은 고려 말, 주자학의 전래로 큰 변화를 맞게 된다.
주자가례에 입각한 혼례 절차가 도입된 것이다.
엄격한 유교 국가였던 조선에 이르러 혼례는 중매쟁이를 통해 이루어지게 된다.
결혼 당사자의 학풍과 가문을 보는 것은 당시 혼례의 기본이었다.
중매인을 통해 집안 어른들이 혼인을 결정했기에 이를 증빙할만한 문서는 전통 혼례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혼례 당사자가 잘 살 수 있도록 행운을 비는 의식들 또한 주요하게 다뤄졌다.
전통 혼례에서는 사주를 주고받는 중요한 의식이 있다.
혼인을 위해 신랑이 생년월일시를 적은 사주단자를 신부 집으로 보내게 되는 것.
사주를 볼 때에는 음양오행을 살피게 되는데 이 음양오행은 동양의 근원적 사상 체계다.
혼인 절차에 필요한 문서를 전달할 때 사용한 함과 보자기.
우리 전통 문화에서 보자기는 물건을 포장하는 일 뿐 아니라, 중요한 물건을 저장하는 생활용품이기도 하다.
보자기를 구부리고, 돌리고, 묶는 과정에서 마찰이 생기고 이로 인해 매듭이 만들어지게 된다.
혼례 속에 숨은 음양오행과 보자기의 과학적 비밀을 찾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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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례(婚禮)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혼인을 행할 때 수반되는 모든 의례와 그 절차를 지칭하는 용어.혼례. … 혼례가 보다 체계화하고 형식을 갖추게 된 것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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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encykorea.aks.ac.kr

Date Published: 7/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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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혼인의례와 혼례복에 관한 스토리텔링 원천자료 분석

일반세속에서 행한 혼례는 육례. 절차로 구성되어 혼담, 납채, 연길, 납폐, 대례,. 우귀 순이다(정연학, 2011). 조선시대 반친영에. 의한 양반가의 혼인절차는 혼례 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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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koreascience.or.kr

Date Published: 2/2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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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시대 결혼제도

조선시대 결혼제도. 1) 유교적 결혼관의 확산. ⚬ 독신의 금지. – 반드시 결혼해야 하는 시대. – 불효 중에 후손이 없는 일이 가장 큰 불효라고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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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artnstudy.co.kr

Date Published: 10/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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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조선시대 혼례

  • Author: YTN 사이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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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7. 7. 26.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sQj4KA3UbOM

혼인이란 원칙적으로 남녀 두 사람의 사회적으로 인정된 성적(性的) 및 경제적인 결합이다. 그러나 두 개인은 각각 하나의 가족 속에서 자라왔고, 하나의 가족구성원으로서 특정한 지위를 가진다는 의미에서 혼인은 두 개인의 결합에 의해서 생기는 두 가족의 사회적 결합이기도 하다.

사회에 따라서 개인의 결합을 강조하는가 하면 가족간의 결합을 보다 강조하기도 한다. 개인의 결합을 강조하는 사회에서는 개인간의 의사가 혼인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고, 혼인과 동시에 두 개인은 독립된 가계(家計)를 영위한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혼례가 별로 중요시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절차도 비교적 간소하다.

반면 혼인의 가족적 결합을 강조하는 사회에서는 반대의 현상을 보인다. 혼인할 때 두 개인의 의사보다는 가족의 의사가 강하게 반영되고, 혼인한 뒤에도 공동가계(共同家計)의 한 부분을 형성한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의례 그 자체를 중요시하며 격식을 따라야 혼인이 인정된다. 특히, 동양에서는 이러한 혼인이 지배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따라서, 혼인을 통해서 두 가족간의 권리와 의무가 잘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혼례는 두 개인이 결합하여 부부가 되었음을 사회적으로 인정하는 의례일 뿐 아니라 두 가족의 권리와 의무의 표현이기도 하다. 혼례는 크게 볼 때 통과의례(通過儀禮) 중의 하나이다.

통과의례란 인간이 태어나서 일생을 통하여 출산·성인식·혼인식·장례식 등 사회적 지위와 인정을 받기 위하여 거쳐야만 하는 의례를 말한다.

혼례는 크게 두 영역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혼례식만을 말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양가(兩家)가 혼담(婚談)이 오가기 시작하면서 혼인과 관련된 모든 행위를 말한다. 전자는 좁은 의미의 혼례이고, 후자는 넓은 의미의 혼례가 된다.

현재 혼례식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넓은 의미의 혼례는 그 기본구조가 변하지 않고 그대로 지속되고 있다. 다만 우리의 전통적인 혼례가 유교적인 혼례 이전의 내용과 절차에 유교적인 혼례를 습합시켜서 지역에 따라 어느 방식을 강조하느냐에 따라 차이를 보이고 있다.

우리 나라 혼례의 역사는 우리 민족이 이 지구상에서 생활을 영위해온 역사만큼이나 긴 것이 될 것이다. 그것은 인류가 태초부터 혼인을 하였고, 이에 관련한 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혼례는 하나의 풍속이기 때문에 어떤 시기에 어떻게 변화하고 발전하였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혼인제도에 비추어 삼국시대에는 불교식의 화혼례(花婚禮)가 많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삼국시대에 불교가 성행하였고 상례(喪禮)도 불교식이 많았기 때문에 혼례도 불교식을 따랐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특히, 상류사회에서는 불교식을 따랐을 것으로 생각된다.

혼례의 여러 절차 중에서 사주(四柱)를 보내고, 택일(擇日)을 하며, 송복(送服)과 함(函) 보내는 것 등은 비록 조선조의 그것과 같지는 않더라도 예로부터 행해졌을 것이다.

특히, 신랑의 초행(醮行)·재행(再行)·전안지례(奠雁之禮)·동상례(東床禮), 신부의 우귀(于歸)와 현구례(見舅禮) 등은 그 기반이 삼국시대부터 이미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삼국지(三國志)』 위서 동이전(東夷傳)에 의하면 신부집에서 혼례를 행하고 신부가 자녀를 출산하여 성장한 뒤에야 시가로 간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때 이미 신랑의 초행과 재행이 있었으며, 신부의 우귀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안지례는 목안(木雁), 즉 나무기러기를 놓고 신랑이 절을 하는 의식인데, 목안에 관한 의례와 풍속은 동북아시아 여러 민족에게 분포된 하나의 풍속이므로 우리 나라에서도 상당히 오래된 풍속임을 알 수 있다. 동상례와 현구례 또한 비록 중국식 명칭으로 표기되었다 하더라도 신랑다루기와 폐백으로 불려온 우리의 옛풍속이다.

이 밖에도 대례상(大禮床)의 상차림 내용이나 합근지례(合卺之禮)·교배지례(交拜之禮)의 내용도 주자(朱子)의 『가례(家禮)』 영향 이전 즉, 고려 이전에 이미 행하여졌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주자의 『가례』에 없으면서도 예로부터 전승해왔기 때문이다.

혼례가 보다 체계화하고 형식을 갖추게 된 것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인 것 같다. 이미 고려말에 주자의 『가례』를 수용하면서 그 바탕을 갖기는 하였다. 그러나 지배계층의 예로 규정되어 시행된 것이 조선 초기인 데 반해 일반서민의 예로 확산된 것은 조선 말기인 것으로 보인다.

주자의 『가례』가 고려 말기에 들어와서 정몽주(鄭夢周)의 건의에 따라 지배계층에서 준수할 것을 적극 권장한 점과, 조선 초기에 완성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대부·사·서인의 관혼상제가 기록된 점, 조선시대의 중기에 예서(禮書)가 한글로 번역되어 보급된 점 등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일제시대 이후, 이러한 가례에 익숙하지 않거나 서구적 교육의 영향을 받은 계층에서는 지나치게 형식적인 전통적인 혼례를 반대하고 이른바 신식결혼식을 만들게 되었다.

신식결혼은 1890년대에 생긴 ‘예배당결혼’이 처음이었다. 이와 함께 1900년대에는 불교계에서도 불식화혼법(佛式花婚法)이 등장하였으며, 1930년대에는 계명구락부(啓明俱樂部)를 중심으로 오늘날의 예식장에서 행하는 사회결혼(社會結婚)이 보급되었다.

이러한 변화와 함께 조선총독부에서 1934년에 발표한 「의례준칙」과 1961년의 「의례준칙」, 1969년의 「가정의례준칙」은 전통혼례의 변화를 초래하게 하였다.

조선총독부의 「의례준칙」은 주자의 『가례』를 중심으로 하였으며, 1969년의 「가정의례준칙」은 1961년의 「의례준칙」이 별다른 효과가 없자 처벌규정을 추가하여 발표한 것이다. 특히, 이 준칙은 사치스러운 약혼식과 청첩장의 남발, 혼인잔치, 호화롭고 번잡한 혼례식 등을 엄격히 규제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아이가 법적으로 성인이 되는 시기는 16세였다. 16세 이상의 남성은 장정으로서 국가에서 부과하는 역을 담당하였다. 노비를 매매할 때도 15세 이하와 16세 이상은 가격 차이가 있었다. 16세 이상이 되면 성인 노동력으로 인정받았던 것이다.

반면 15세 이하는 ‘나이가 차지 않은 아이(年未滿兒)’로 일컬어졌으며, 강도나 살인이 아니면 수금되지 않았고, 강도죄를 저지르더라도 자자형(刺字刑)이 면제되었다. 살인 사건의 증인도 될 수 없었다. 오늘날 만 14세 이하를 형사상 미성년자로 파악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예제상(禮制上) 아이가 어른이 되는 의식은 관례와 계례였다. 남자아이는 상투를 틀고 여자아이는 비녀를 꽂는 의식이다. 관례와 계례는 어른이 되는 통과 의례로서 아이에게 어른으로서의 책임감을 일깨우는 의식이었다.

관례는 상투를 틀고 옷을 갈아입는 가례(加禮), 술을 마시는 초례(醮禮), 자를 지어 주고 관을 씌우는 자관자례(字冠者禮) 세 단계로 이루어진다. 이 중 가례는 초가(初加), 재가(再加), 삼가(三加) 세 번의 의식을 치르는데, 매번 다른 종류의 관, 옷, 신발을 바꾸어 착용해야 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큰 부담이 되었다. 부유한 집에서는 화려한 옷을 준비하여 성대하게 의식을 치르기도 하였지만 가난한 집에서는 옷을 제대로 갖추는 것도 쉽지 않을 만큼 경제적인 부담이 되었다.

<혼인식>

김홍도가 그렸다고 전하는 평생도 여덟 폭 가운데 혼인식 장면이다. 신랑이 혼례를 치르러 신부 집으로 가고 있다. 16∼19세기 양반가의 혼인 적령기는 17∼19세였고, 남성의 혼인 연령이 여성보다 빠르게 낮아졌다.

그리하여 예서(禮書)에서는 관례와 계례를 사례(四禮)의 하나로 중요하게 다루고 있지만 실제로 계례는 거의 시행되지 못하였으며, 관례도 나이와 상관없이 혼례 전에 행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일찍이 관례를 치른 이숙길이나 계례를 치른 이숙희는 그리 일반적인 사례가 아니었다. 따라서 사회적으로 성인으로 공인받는 의식은 혼인이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조선시대에 법적으로 혼인이 가능한 나이는 남자 열다섯 살, 여자 열네 살이었다. 만일 부모 중 한 사람이 지병이 있거나 쉰 살이 넘었다면 열두 살만 되면 결혼을 시킬 수 있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상당한 조혼(早婚)이다.

실제 혼인을 한 나이는 시기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다. 16∼19세기 양반가의 혼서(婚書)를 분석한 바에 따르면 여성의 초혼 연령은 16세기 만 17.75세에서 19세기 만 17.15세로 낮아지며, 남성의 초혼 연령도 17세기 17.31세에서 19세기 15.68세로 낮아졌다. 여성보다는 남성의 혼인 연령이 빠르게 낮아지는 것은 그만큼 빨리 후손을 보려는 부모의 의지가 강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흔히 이야기되는 꼬마 신랑은 그리 일반적인 것은 아니었다. 대체로 17∼19세가 혼인 적령기였다고 하겠다. 이것은 중국과 유사 하지만 서유럽의 23∼28세, 일본의 20.5세에 비하면 상당한 조혼이다.

조선시대의 혼례는 전래의 관습과 유교적 예제를 결합하여 의혼(議婚), 납채(納采), 연길(涓吉), 납폐(納幣), 초례(醮禮), 우귀(于歸)의 과정으로 시행되었다. 각 과정에서 양가는 혼서를 주고받았다.

의혼은 양쪽의 부모가 자녀들을 혼인시키기로 약속을 하는 과정이다. 배우자는 대개 지인(知人)의 자녀이거나 지인이 소개한 사람이었다. 어느 경우건 부모가 직접 나서지 않았으며 중간에 중매를 두어 혼담을 진행시켰다.

양쪽 부모가 혼인을 시키기로 결정하면 비로소 본격적인 혼인 준비가 시작되었다. 맨 먼저 신랑 집에서 신랑의 사주(四柱)를 적은 단자(單子)를 보낸다. 사주 단자는 사성(四星), 강서(剛書), 강의(剛儀), 경첩(庚帖)이라고도 한다. 종이를 접어 가운데에 신랑의 생년월일과 태어난 시(時)를 적는다. 오른쪽에는 혼주의 이름을 적고, 왼쪽 칸에는 보내는 날짜를 적었다. 봉투나 뒷면에 사성(四星)이라고 썼다.

신랑 집에서는 사주를 보내면서 허혼(許婚)에 대한 감사를 전하고 택일(擇日)을 청하는 편지도 함께 보냈다. 이를 납채서(納采書)라고 한다. 납채서는 일정한 투식이 있는데, 내용은 혼인을 하게 된 것이 집안의 경사라고 인사하고 신랑의 사주 단자를 보내며 택일을 청한다는 것이다.

[사성 단자] 사성(四星) 월성 후인 김기헌 (수결) 신사 8월 21일 자시 기유 11월 초 2일 [납채서] 삼가 생각컨대 초겨울에 부모님 모시고 존체(尊體)의 동지(動止)가 편안 하십니까? 우러러 지극히 궁금하옵니다. 저는 그저 그럭저럭 지내고 있습니다. 다만 혼사는 나이를 묻는 데에 이르렀으니 저희 집안의 경사이고 행운입니다. 사주 단자를 말씀에 따라 적어 올립니다. 이만 줄입니다. 살펴 주십시오. 임신년 10월 7일 삭녕 최효숙

신랑의 사주 단자를 받은 신부 집에서는 두 사람의 사주와 집안 사정 등을 고려하여 혼인 날짜를 잡았다. 이것을 연길(涓吉)이라고 한다. 신랑 집에 혼인 날짜를 알리는 연길 단자에는 혼례식을 가리키는 전안(奠雁) 날짜만 적기도 하고 함을 들이는 납폐 날짜를 함께 적기도 하였다.

신부 집에서는 연길을 보내면서 납폐서(納幣書)에 대한 답서도 보냈다. 이것을 납기서(納期書)라고 하였다. 사주 단자를 받은 것을 집안의 경사라고 사례하고 신랑의 옷을 짓기 위한 치수를 보내 줄 것을 청하는 내용이다. 신랑 집에서는 신랑의 옷 치수를 적어 보내면 신부 집에서 신랑의 옷을 마련하였다.

[연길 단자] 연길(涓吉) 납폐(納幣) 신묘 12월 11일 신축 길(吉) 전안(奠雁) 동일 신묘 11월 초7일 이(李) 수결(手決) [납기서] 편지를 받고 초여름에 존체의 동지가 만중하시다니 매우 위로됩니다. 혼사는 이미 사주 단자를 받고 이제 택일하여 올리게 되었으니 어찌 첫째 가는 경사가 아니겠습니까? 옷제도를 회시해 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만 줄입니다. 살펴 주십시요. 기유년 4월 7일 연일 정철기 올림 [납기서에 대한 답서] 안동 권병명 재배 엎드려 은혜로 쓴 글을 받고 삼가 살피건대 봄을 맞이하여 그대의 생활이 모두 좋으시다니 우러러 간절히 위로됩니다. 재종 집안의 혼사는 이미 길일을 택하였으니 어찌 받아들이지 않겠습니까? 장제(章製)는 말씀하신대로 지어 올립니다. 이만 줄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그대께서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삼가 절하며 답장을 올립니다. 임자 2월 7일

택일을 한 후 혼례식까지는 대개 한두 달밖에 걸리지 않았다. 혼인 날짜를 잡고 나면 양쪽 집안은 혼례 준비로 분주해진다. 신부 집에서는 혼수와 함께 잔치에 필요한 각종 물품을 준비하였고, 신랑 집에서는 여러 가지 혼수와 더불어 신부 집에 보낼 함을 마련하였다. 이 기간에 신랑은 관례를 치렀다.

혼례식 전에 신랑 집에서는 신부 집에 함을 보낸다. 이것을 납폐라고 하였다. 함 속에는 허혼과 택일에 대한 감사의 뜻을 전하는 납폐서를 함께 넣었다. 일반적으로 혼서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 납폐서를 가리킨다. 납폐는 원칙적으로는 혼례 날짜를 받은 후에 바로 행해야 하지만 혼례 전날이나 혼례날 당일에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번거로움을 피해 의식을 간소화한 결과이다.

[납폐서] 삼가 생각건대 한 겨울에 존체의 기후는 모두 복되신지요. 저의 아들 한필이 나이는 이미 장성하였으나 아직 배필이 없었는데 존자(尊慈)의 허락을 입어 따님을 아내로 주시니, 이에 선인(先人)의 예에 따라 삼가 사람을 보내 폐백(幣帛)을 올립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굽어 살펴 주십시오. 이만 줄이오며 삼가 글을 올립니다. 정유년 11월 초5일 경주 김흥경 올림

<초례하는 모양>

19세기 말에 기산(箕山) 김준근(金俊根)이 그린 풍속화이다. 초례상을 마주 하고 신랑과 신부가 서 있는 모습이다. 혼례를 초례라고도 하였다.

함진아비를 먼저 보낸 후 신랑은 혼인 시간에 맞추어 신부 집으로 향하였다. 거리에 따라 전날 미리 출발하기도 하고 혼례 당일 출발하기도 하였다. 신부 집에 도착한 후 잠시 쉬었다가 혼례를 행하는데, 혼례 시간은 대개 저녁 무렵이었다.

혼례는 초례라고 하는데, 홀기(笏記)에 따라 전안례(奠雁禮), 교배례(交拜禮), 서천지례(誓天地禮), 서배우례(誓配偶禮), 근배례( 杯禮)의 차례로 행하였다.

전안례는 신랑이 기럭아비와 함께 와서 신부 어머니에게 기러기를 드리는 의식이며, 교배례는 신랑과 신부가 초례청(醮禮廳)에서 상면하여 교대로 절을 하며 백년해로(百年偕老)를 약속하는 의식이다. 교배례가 끝나면 천지신명에게 혼인 서약을 하는 서천지례를 행하고, 배우자에게 결혼 생활에 성실할 것을 맹세하는 서배우례를 행한다.

혼례식의 마지막 절차는 근배례로, 합근례(合 禮)라고도 한다. 조롱박 하나를 나누어 두 개로 만든 표주박으로 신랑 신부가 술을 마시는 의식이다. 표주박은 둘이지만 합치면 하나가 되는 것처럼 따로 태어났지만 일심동체(一心同體)의 부부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혼인 후 사흘째가 되면 신랑은 자신의 집으로 돌아와 부인을 맞이하였다는 것을 고하고 평소처럼 자신의 집에서 머문다. 그 후 한 달 여가 지나면 신랑은 다시 처가로 가서 한 달가량 머물다 돌아왔고, 다시 두세 달이 지난 후에 세 번째로 처가를 찾아갔다. 이른바 초행(初行), 재행(再行), 삼행(三行)이라고 하는 의식 절차이다.

그 후 길일을 받아 신부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이를 우귀(于歸), 우가(于家)라고 한다. 혼례식 후 신부가 시가에 들어갈 때까지의 기간은 매우 다양하였다. 10여 년이 지나 자식들이 한참 자란 후에 시가로 들어가거나 분가(分家)를 하기도 하고, ‘삼일우귀(三日于歸)’라고 하여 혼례 후 이틀을 묵고 신랑과 함께 바로 시가로 들어가기도 하였다. 또 해넘이, 달넘이라고 하여 해가 바뀌거나 달이 바뀐 후에 우귀를 한 경우도 있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시기가 내려올수록 그 기간이 짧아졌다. 현대에도 신부 쪽에서 결혼식을 치르고 신혼여행 후에 처가에 먼저 들르는 것은 우귀 풍습이 남아 있는 것이다.

<시집으로 가는 신부 행차>

혼례 후 신부가 시집으로 살러 가는 우귀 의식을 그린 풍속화의 밑그림이다. 혼수를 머리에 인 여종 여럿이 앞장섰다. 여성의 혼수 준비는 시댁에 들어가는 우귀까지 지속되었다.

조선시대 혼례는 오늘날의 전통 혼례와 달리 신랑의 부모나 가족이 혼례식에 참여하지 않았다. 따라서 신부는 대개 우귀할 때까지 시부모를 뵐 기회가 없었다. 신부가 시가에 들어가면 시부모와 친척을 뵙는 의식을 행하는데, 이를 현구고례(見舅姑禮)라고 하였다. 오늘날의 폐백과 같은 의식이다.

[필자] 박현순

조선시대 결혼, 혼인 풍습

조선시대 혼례

혼인은 남녀가 예를 갖추어 부부가 되는 제도로

남녀 구별이 엄격했던 유교사회 조선시대 때는

중매결혼이 일반적으로 행해졌습니다.

혼인은 크게 3단계, 의혼(議婚)·대례(大禮)·후례(後禮)로 나누어집니다.

1. 의혼(議婚)

양가가 중매인을 통한 혼사를 의논하면서 대례를 행하기의 전과정으로

​납채, 연길, 송복, 납폐를 포함합니다.

납폐 : 민속촌 전시자료

2. 대례(大禮)

의혼이 지나면 예식인 대례가 치러지는데 신랑이 신부집에 가서 행하는 모든 의례를 대례라 합니다.

즉 결혼식입니다. 결혼식 날 남자는 관복을 입었고 여자는 활옷을 입었습니다.

관복 출처 : e 뮤지엄 활옷 – 국립대구 박물관 답사 자료 활옷은 조선시대 공주와 옹주가 입던 대례복으로 조선시대 중기 이후 여자의 혼례복으로 많이 사용하였습니다.

신랑이 혼례식을 치르러 신부집으로 가는 초행 ​ ​ 김홍도 초행 / 출처 – 국립 중앙박물관 ​ 앞은 청사초롱을 든 동자의 모습, 나무기러기(목안)을 든 기럭아비, 신랑과 유모가 말을 타고 뒤따르고 있네요.

대례 절차는 전안례, 교배례, 합근례 순이며

신랑이 신부집에 나무 기러기를 혼주에게 바치는 전안례

사랑을 상징하는 기러기, 이러한 특성 때문에 나무를 깎아 만든 기러기(목안)를 혼례의 첫 의식으로 전하였습니다. 이미지 – 민속촌 전시자료

신부의 집 마당이 혼례 장소였는데요.

마당에 멍석을 깔고

나무 기러기와 대추, 밤 등을 올려놓은 혼례상을 중앙에 두었고 사회자의 역할을 하는 사람(집사)만 있을 뿐 주례사는 없었습니다.

이미지 자료 – 국립민속박물관 혼례상에는 신랑과 신부를 상징하는 수탉과 암탉, 화합을 상징하는 솔가지, 밤과 대추 등이 있었어요.

교배례 신랑과 신부가 부부의 예로 절을 하는 교배례

합근례 신랑과 신부가 술잔(합한주)을 나누는 합근례

가장 중요한 혼례 의례, 서로 술잔을 나누는 것은 부부의 화합을 의미합니다.

신방​ 혼례식을 마친 신랑과 신부가 첫날을 보내는 신방

민속촌 전시자료 / 옛날엔 이렇게 살짝 엿보는 모습도 있었네요.

​동상례 그 다음날 점심 무렵에 신부 집안사람들이 신랑을 거꾸로 매달아 신랑에게 어려운 질문을 내어 맞추지 못하면 방망이로 발을 때리는 동상례, 동상례는 지역에 따라 다루는 방법이 다릅니다.

저는 미혼인데 요즘 이런 의식이 없어져서 다행입니다. ㅎㅎ

동상례: 민속촌 전시자료

3. 후례

혼례의 중심인 대례가 끝나면 신랑집에서 행하는 의례로

우귀(于歸), 현구례(見舅禮), 근친(覲親)으로 나누어집니다.

우귀 대례가 끝나면 신부가 신랑의 부모님께 인사를 하러 가는데 이를 신행이라고도 하며 결혼식 당일이나 3일 후에 가기도 했습니다. 3일 후에 신랑이 집으로 돌아가게 되면 첫날은 신부의 집에서 자고, 둘째 날은 이웃 마을에서 자고, 셋째 날 신부와 함께 신랑집으로 갑니다.

이미지 – 민속촌 전시자료

신부가 탄 가마 주위로 하님과 짐꾼이 동행합니다.

현구례 신부가 시가 어른들에게 절을 하는 것을 이르며, 폐백이라고도 합니다.

신부집에서 장만해온 밤, 대추, 닭고기, 육포 등을 상위에 올려놓고 술을 따라 올리며

어른들께 큰절을 합니다.

근친 시집에서 생활하는 신부가 처음으로 친정에 가서 어버이를 뵙는 일을 지칭합니다.

이렇게 신부가 친정에 다녀오면 비로소 혼례가 끝나게 됩니다.

참고 자료: 한국민속촌 답사, 국립대구 박물관 답사, 국립민속박물관, 문화재청, e 뮤지엄

조상들은 어떻게 혼례를 치렀을까요?

조상들은 어떻게

혼례를 치렀을까요?

■ 우리 조상들의 여러 가지 결혼 풍습

▲ 우리나라의 전통 혼례식을 치르는 현대인들의 모습(출처: 에듀넷)

우리는 흔히 ‘시집간다, 장가간다’라는 표현을 사용하곤 하는데요, 이것은 우리 조상들의 결혼 풍습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여자가 남자의 집으로 들어가는 ‘시집간다’는 표현과 남자가 장인의 집으로 간다는 의미인 ‘장가간다’는 표현이 사용되었음을 미루어 볼 때, 결혼에 관한 다양한 풍습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삼국지]의 고구려 편에서 우리 고유의 결혼 풍습인 장가들기에 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혼인하는 경우, 구두로 미리 약속하면 여자 집에서 본채 뒤편에 작은 별채를 짓는데 그 집을 ‘사위집’이라 부른다.”

이는 고구려의 독특한 혼인 풍습인 ‘서옥제’에 대한 설명입니다. 여기서 ‘서옥’이란 ‘사위집’의 한자 표현입니다. 농경사회였던 옛날에는 노동력이 매우 귀했습니다. 처가에서 딸을 시집보내면 노동력의 손실이 생기기 때문에 이를 보상하기 위해 사위가 일정기간 신부의 집에서 노동력을 제공하던 풍습이 있었습니다.

또, 중매를 통한 결혼 풍습도 있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혼서’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것은 신랑집에서 예단과 함께 신부집으로 보내는 편지로, 중매를 통해 혼인 상대의 조건과 의중을 알아본 후 서로 뜻이 맞으면 납폐함에 담아 혼서를 보냈다고 합니다. 귀족사회에서의 결혼은 개인의 결합이기보다는 가문과 가문의 결합이었기 때문에 중매인을 통한 혼례절차가 이루어지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평민들 사이에서는 자유연애가 주로 이루어졌습니다.

▲ 혼서와 납패함(출처: 에듀넷)

지금은 일부일처제이지만 옛날에는 여러 부인을 두는 다처제도 존재하였습니다. 여성이 남성과 정식 혼인을 한 경우는 처가 되지만, 남성과 함께 살면서도 정식 부인의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경우 첩이라고 합니다. 처는 가문의 일원으로 인정받지만 첩은 그렇지 않았으며 첩의 자식은 서자라고 하여 사회 진출에 차별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다처제는 재산 상속 관련 분쟁이 종종 일어나 1413년 3대 왕 태종이 두 번 혼인하는 것을 금지시키면서 차츰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다처제뿐만 아니라, 이혼 및 재혼과 관련한 풍습도 변하였는데 조선 초기까지는 여성의 재혼이 금지되지 않았지만 1477년 과부재가금지법이 만들어지면서 차츰 여성의 재혼을 금지하게 되었습니다.

조선은 성리학을 중요시 여겼던 나라로 성리학자인 주자가 만든 [주자가례]를 생활 지침으로 여겼습니다. 성리학자들은 중국의 문물제도를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혼인 풍습에 있어서도 성리학에 따라 부계 중심의 가문의 결합을 중시하였습니다. 1435년 왕실에서는 신랑이 신부집에 가서 신부를 데리고 와 본가에서 혼례식을 올리는 방식인 친영례를 시도하였고 이후 사대부들 사이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는 신랑이 신부 집에서 혼례를 치르고 처가에서 3일 정도 머물렀다가 시댁으로 가는 반친영이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예로부터 혼인을 가족의 결합으로 중시했기 때문에 혼인의례가 매우 신중하고 복잡합니다. 먼저 양가가 중매인을 통해 서로 의사를 조절하는 것을 ‘의혼’이라고 합니다. 의혼을 통해 서로의 의사가 확인되면 신랑이 신부집에 가서 대례를 치릅니다. 신랑이 혼인의식을 치르기 위해 처음 신부의 집으로 가는 것을 ‘초행’이라고 합니다. 신랑 신부가 처음으로 맞절을 하며 식을 거행하는 것을 ‘초례’라고 하며 예식을 치르는 곳을 ‘초례청’이라고 합니다.

▲ 초행과 초례(출처: 에듀넷)

혼례를 마친 신부는 친정을 떠나 시댁으로 가게 되는데, 이를 ‘신행’이라 합니다. 신행 후 신부는 미리 준비해 온 대추, 밤, 술, 과일 등을 올리고 시댁의 어른에게 절을 하는데, 이를 ‘폐백’이라 합니다. 신부의 절을 받은 시부모는 자식을 많이 낳고 잘 살라는 의미로 신부에게 대추와 밤을 던져줍니다. 전형적인 폐백은 절차가 복잡하고 까다롭지만, 오늘날에는 결혼식 혼례 후 예식장에 마련된 폐백실에서 간소하게 진행되는 경우가 많답니다.

▲ 오늘날 폐백의 모습(출처: 에듀넷)

혼례 시 사용하는 나무기러기는 짝이 죽어도 다른 상대를 찾지 않고 따라 죽거나 평생 혼자 사는 새로 여겨진 기러기의 상징물입니다.

▲ 나무기러기(출처: 에듀넷)

[자료출처: 에듀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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