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신발 | 조선시대 신발의 모든 것/살면서 꽃신을 신어본적이 있으세요?/ 4대째 전통 신을 만들고 있는 장인/ 기다림의 미학 화혜장 안해표/ 다큐에세이 그사람/부산Mbc 20201031 방송 2191 명이 이 답변을 좋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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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일자 : 2020년 10월 31일
프로그램 : 다큐에세이 그 사람 화혜장 안해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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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어떤 독특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고, ‘화’를 제외한 신발을 총칭하는 일반적 의미를 갖는다 … (1) 전통시대의 신 문헌에서 찾을 수 있는 신의 기원은 조선 정조 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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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encykorea.aks.ac.kr

Date Published: 4/2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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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6/2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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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가죽신을 만드는 화혜장 – 지역N문화

조선시대에 신분이 높은 사람들은 가죽으로 만든 ‘갖신’을 신었다. 이러한 전통 가죽신을 만드는 장인이 ‘화혜장’이다. 전통 신발 제작은 가죽을 주재료로 하여 수십 번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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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신발의 모든 것/살면서 꽃신을 신어본적이 있으세요?/ 4대째 전통 신을 만들고 있는 장인/ 기다림의 미학 화혜장 안해표/ 다큐에세이 그사람/부산MBC 20201031 방송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조선 시대 신발

  • Author: 부산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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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0. 10. 30.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rcAFloF7TSI

조선시대 양반은 어떤 신발을 신었을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조선시대 사람들은 바지저고리와 치마, 배자와 두루마기 같은 한복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신은 무얼 신었을까요? 물론 백성이야 짚신과 마로 삼은 미투리(麻鞋)를 신었지만, 양반들이 신는 신으로는 목이 긴 ‘화(靴)’와 목이 짧은 ‘이(履)’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화보다 더 많이 신었던 ‘이(履)’에는 태사혜, 당혜, 운혜, 흑피혜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먼저 태사혜(太史鞋)는 코와 뒤에 태사라 하는 흰 줄무늬를 새긴 남자용 신입니다. 흔히 사대부나 양반계급의 나이 많은 사람이 평상시에 신었는데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는 고종이 신었다는 태사혜 한 켤레가 있지요. 조선 말기에 와서는 임금도 웅피혜(熊皮鞋, 곰가죽 신)나 녹피혜(鹿皮鞋, 사슴가죽 신) 아닌 태사혜를 신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문무백관들이 조정에 나갈 때는 검정 가죽으로 지은 흑피혜(黑皮鞋)를 신었지요.

또 당혜(唐鞋)는 조선시대 부녀자가 신던 갖신을 이릅니다. 코와 뒤꿈치에 당초(唐草) 무니를 놓아 만든 마른 신으로, 안은 융 같은 푹신한 감으로 하고 거죽은 가죽을 비단으로 싸서 만들었지요. 이 밖에 부녀자들은 구름무늬가 수놓아진 운혜(雲醯)도 신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어떤 이들은 한복에 고무신을 신습니다. 그러면서 고무신이 한복의 기본인 줄 아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고무신은 일제강점기에 들어온 것으로 전통한복의 격에 맞는 것은 아니며, 태사혜를 개량한 갖신을 신어야 한복과 어울릴 것입니다.

조선시대 남.여 신발

조선시대 신

조선시대에 나타난 신을 크게 나누어 보면

장화처럼 목이 있는 것이 화(靴)요, 목 없이 고무신 형태를 띤 운두가 낮은 것이 혜(鞋)다.

화는 옛날 문무대관들이 관복을 입을 때나 각종 예복과 함께 신던 신발이다.

혜는 여자 신발이 많은데, 당혜(唐鞋) 운혜(雲鞋) 온혜(溫鞋) 등이 그것이다.

이를 재료면에서 보면 피혁제, 초 ·마제(草麻製), 포백제(布帛製), 유제(鍮製:놋쇠 제품), 지제(紙製), 목제(木製) 등을 들 수 있다.

궁혜는 궁중용이고, 앞코에 당초문이 있는 당혜는 양가집 부녀자들이 신었으며, 구름 문양의 운혜는 여염집 부녀자들이 신었다.

궁중이나 양가에서는 가죽이나 비단으로 만든 흑피혜나 당혜 등을 신었고, 평민들은 짚신이나 나막신 등을 신었다.

갑오개혁이후 서양의 구두가 등장했고, 1920년대부터는 고무신과 운동화를 주로 신었으며, 오늘날에 이르러 다양한 형태의 구두가 생겼다.

여자의 신

당혜(唐鞋).궁혜(宮鞋).운혜(雲鞋, 溫鞋). 징신. 미투리. 짚신.나막신

수혜=꽃신

광복이후(光復以後)

수를 놓은 신. 수혜(繡鞋)는 신 전체에 아름다운 무늬로 수놓은 신목이 짧은 신의 하나로 꽃신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 三國史記》 신라 색복조(色服條)에 흥덕왕복식금제(興德王服飾禁制)를 보면, 계수·금라(錦羅)·세라로 만든 신을 금한다는 기록이 있어 수를 놓은 신발이 신라시대에 이미 유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수혜는 고려시대를 걸쳐 조선시대까지 애용되었으며 사대부가의 젊은 부녀자들이 주로 신었다.

개화기 이후에도 일반 부녀자들이 혼인할 때 시댁에서 반드시 장만해 주었다고 한다. 꽃신은 신행을 가거나, 외출할 때 잠깐씩 신는 신발로 아껴두었던 것이다.

수혜는 베를 여러 겹 붙인 위에 청홍색의 무늬 있는 비단을 두르고 다시 바탕색과 반대되는 색실로 국화·송죽(松竹)·당초(唐草) 등의 무늬를 주로 수놓았다.

화문(花紋)에는 여러 가지 있었는데 수혜를 만드는 장(匠)에게 부탁하여 자기 취향에 맞는 꽃무늬를 선택할 수 있었다고 한다.

꽃신 가죽신은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것으로 가죽신은 겉모양을 보아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버선같이 목이 달려있고 하나는 목이 없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가죽신을 화(靴)라고 하지만 전래의 가죽신 중에는 높이가 짚신 높이만 한 것이 있고 부녀자의 신에는 목이 없는 것이 있다. 버선 위에 신는 탓으로 외모는 버선과 비슷하여 신코가 버선코 모양으로 코끝이 곡선을 그리고 있다. 관원들의 관복차림에는 반드시 검은 가죽신을 신도록 규제했었다. 가죽신은 북방지방에서 일찍 발달하였다.

이 꽃신은 가죽위에 무늬가 염색된 초록빛 비단을 덧대고 신 안쪽에는 편안한 질감의 깔창을 깔아 놓았다. 코끝은 버선코 모양으로 뾰족하고 바느질의 성실함이 돋보인다. 남.여구분

당혜(唐鞋)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부인들이 신는 가죽신으로서, 통일신라시대에 중국 당(唐)에서 전해진 뒤 조선 말엽까지 신었다.

당혜는 울이 깊고 앞 코가 작은 가죽신으로 흔히 앞 코와 뒤꿈치 부분에 꼬부라진 눈을 붙이고 그 위에 덩굴무늬를 새겼으며 남녀가 다 신었다.

밤색 비단을 덧댔고 앞코와 뒷축에는 하얀 가죽을 댔다. 밑부분의 징 부분은 녹이 슬었으나 각진 원 모양이 잘 남아있다.

안에는 푹신한 감을 대고 겉은 비단으로 가죽을 싸서 만들었으며 코와 뒤꿈치에 당초무늬가 있다. 형태는 지금의 고무신과 비슷하며 오른쪽 왼쪽 구별이 없어 오랜 시간 동안 걷기는 불편하였다.

당혜(唐鞋)는 여자들의 갖신으로 코와 뒤꿈치에 당초문(唐草紋)을 장식하여 만들었다.

가죽 위에 무늬 있는 비단으로 싸서 만들었기 때문에 당혜라고 불렀고, 주로 사대부가의 여인들이 신었다. 신코와 뒤축에 눈을 새겨 붙이며 흰색 선을 두르고, 울타리와 눈의 배색은 정해진 것을 따랐는데, 연분홍 바탕에 초록색 눈, 노란 색 바탕에 남색 눈, 남색 바탕에 다홍 눈등으로 하여 색상 조화를 이루었다.

홍색 바탕에 청색 무늬를 놓은 것은 ‘청목댕이’라고 하여 조금 나이든 여성들이 신었고, 청색 바탕에 홍색 무늬를 놓은 것은 ‘홍목댕이’라 하여 젊은 층에서 주로 착용하였다.

온혜=운혜는 여염집 부녀자가 신었고 당혜는 양갓집 부녀자가 신었다.

운혜 (雲鞋)

앞부리와 뒤꿈치에 구름무늬를 장식한 여자의 신.

홍색의 화문단(花紋緞)으로 만든 운혜(雲鞋)이다.

운혜는 구름무늬를 장식한 여성용 신의 하나로 조선시대 상류계급의 부녀자가 신었다.

온혜는 여염집 부녀자가 신었고 당혜는 양갓집 부녀자가 신었다.

겉은 보통 홍색 비단으로 하고 안은 융으로 한다.

신코와 뒤축에 녹색비단을 대고 그 위에 남색 비단으로 구름무늬를 장식한다.

제비부리 같이 생겨서 ‘제비부리신’ 또는 ‘온혜(溫鞋)’라고도 한다. 신코와 뒤꿈치에 삼각형의 붉은 비단을 대고 구름무늬를 수놓아 장식하기도 한다.이 운혜는 밑바닥은 가죽을, 앞볼과 뒤축에 징을 박아 놓았다. 코와 뒤축의 장식단은 색이 너무 바래서 판별 할 수가 없다.

짙은 분홍색 비단으로 만들고 안은 융(絨)으로 만들었다. 홍색의 화문단(花紋緞)으로 만든 운혜(雲鞋)이다.

이 운혜는 진분홍법단眞粉紅法緞으로 만든 왕실이나 반가班家 여인들의 신발이다. 신발의 코와 뒷꿈치에 녹綠색으로 봉의 눈 모양을 장식했다. 바닥에 징이 있으며 길이가 22.5cm이다.

재료:가죽 조선시대

여성용 신의 하나이다. 마른신의 일종으로 앞부리와 뒤꿈치에 구름무늬가 있다. 일명 온혜(溫鞋)라고도 한다.

남.여구분

진신(油鞋) =징신

들기름에 절여 만든 진땅에 신는 가죽신.

바닥에 징을 달아서 징신이라 하기도 하며, 비오는 날에 신는 신이라 하여 진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가죽에 들기름을 입혀 방수가 되게 했고 바닥에 있는 징은 진흙이 신발에 묻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을 한다.

사용되는 가죽은 탄탄한 소가죽·말가죽·개가죽 등을 사용했다.

밑창에 박은 징은 가장자리에만 두 줄로 박은 것이 있고 중간 부분까지 촘촘히 박은 것도 있다. 징은 방침(防浸)과 신 수명을 길게 하고 진흙이 달라붙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을 한다.

진신은 진 땅에 신는 가죽신이다. 진신은 생가죽을 기름에 절여서 만든 신으로서 유혜(油鞋), 이혜(泥鞋)라 하기도 했고 징을 박았다 하여 `징신`이라 하기도 했다.

만드는 방법은 생가죽을 들기름에 절여 물이 스며들지 않고 오래 견디도록 여러 겹을 겹쳐서 바닥을 만든다. 신등의 가장자리는 역시 가죽으로 백비(가죽신의 창이나 울 속에 넣는, 넝마 따위를 여러 겹으로 두껍게 붙인 것)를 쳐서 안으로 감쳤으며, 봉임법은 청올치실로 견고한 박음질법을 쓰고 있다.

밑창에 징을 박기도 하였는데, 가장자리에만 두 줄로 박은 것이 있고, 중간 부분까지 촘촘히 박은 것도 있다. 징은 지름 0.7cm 정도의 원형 돌기로 만들어 밑창의 둘레에 촘촘히 박고, 앞바닥 가운데와 뒤꿈치 중간에는 세로 1cm, 가로 2cm 정도의 반원형이나 사분원 모양의 얇은 쇠붙이 징을 박았다. 이 징은 방침(防浸)이 잘되어 신의 수명을 길게 하고, 진흙이 달라붙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을 한다.

진신은 조선시대 양반 계층에서 비가 올 때나 땅이 젖었을 때 신었다. 신발 모양은 남자신은 태사혜(太史鞋) 모양이며, 여자신은 당혜(唐鞋)나 운혜(雲鞋)와 같았다.

진신은 삼국시대 이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우중(雨中)에 신는 신발로 일반화되었는데, 1920년경부터는 값싸고 경제적인 고무신의 등장으로 진신이 자취를 감추게 된다.

유혜(油鞋)

유혜는 진 땅에서 신도록 만든 신으로 물이 배지 않게 들기름에 절인 가죽으로 만들었다.

신발의 표면, 특히 코부분은 가죽이 떨어져 나가 얼룩져 있다. 신발의 내부, 가장자리도 때가 많이 타있고 얼룩져있고 신발바닥의 징 역시 마모 정도가 심하다.

남.여구분

나막신

비가 올 때 신던 나무로 만든 신.

중국에서는 극(솔)이라 하였고, 한국에서는 목혜(木鞋)라 부르다가 조선 후기부터 나막신이라 하였는데 최남선(崔南善)은 ‘나무신’이 와전된 것이라 하였다.

처음에는 편편한 나무바닥에 끈을 매어 발가락이나 발끝에 걸고 다녀 일본의 게다(下蝕)와 비슷하였으나, 차차 발달하여 다른 신 모양과 같아지고 다시 여러 가지 맵시를 내게 되었다. 일본의 게다는 한국의 나막신, 중국의 극이 원류이다.

조선시대의 경우 대개 소나무·오리나무를 파서 신과 굽을 통째로 만들었는데, 남자용은 좀더 투박하였으며, 여자용은 측면에 여러 가지 무늬를 그리거나 코를 맵시있게 팠다. 굽 끝에는 중국의 극처럼 쇠로 된 발을 붙여 닳는 것을 막기도 하였다.

재료는 다양하게 사용되었는데 특히 오동나무와 버드나무로 만든 것을 제일로 쳤다. 나무의 속성이 마르면 터지기 쉬우므로 밀을 녹여 겉에다 칠해서 납극을 만들어 신기도 하였다. 나막신은 상하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신었는데 굽이 높아서 비나 눈이 올때는 좋으나, 무겁고 활동적이 못되어 말을 탈 때나 먼길을 갈 때는 신지 않았다. 맑은 날에도 많이 신었으며 특히 어린 남자아이가 신었던 채극은 진신으로서뿐만 아니라 마른신으로도 신었다.

나막신의 종류에는 굽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었는데 굽이 있는 것은 비가 오거나 흐린 날에 신는다. 이 나막신은 굽이 없다.

나무로 파서 만들고 굽을 달아 비오는 날 신게 된 신.

보통은 높은 굽을 달아 진땅에 다니기 좋게 하였다. 그것이 닳으면 다시 새 굽을 바꿔 달아서 오래오래 신었다.

재료는 다양하게 사용되었는데 특히 오동나무와 버드나무로 만든 것을 제일로 쳤다. 나무의 속성이 마르면 터지기 쉬우므로 밀을 녹여 겉에다 칠해서 납극을 만들어 신기도 하였다.

나막신은 상하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신었는데 굽이 높아서 비나 눈이 올때는 좋으나, 무겁고 활동적이 못되어 말을 탈 때나 먼길을 갈 때는 신지 않았다. 이렇듯 널리 신겨지다가 1910년 이후 고무신이 등장하자 많은 사람들이 편리하고 질긴 고무신을 신게 되어 차츰 쇠퇴하여 1940년대를 전후하여서는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남.여공용

미투리

미투리는 삼이나 모시 또는 노끈(실·삼껍질·헝겊·종이따위로 가늘게 꼰 줄)따위로 삼은 신을 말하며 짚신보다는 정교하게 짜여진 고급품이나 가죽과 비단으로 만든 신들이 출현하면서 점차 천시되었다.

재료로는 삼·왕골·청올치·백지·면사·견사 등이 사용되었다. 6날∼8날에 총을 50∼60개 세워 바닥이나 총이 아주 정교하고 날씬한 형태이다. 일반적으로 서민층의 남녀가 사용하였고, 섬세한 제품만이 다소 양반계층에서 편복에 사용되었다.

남자의 신

흑피혜(黑皮鞋).목화(木靴).태사혜(太史鞋).발막신. 짚신

목화(木靴)

목화는 원래 왕(王)과 문무백관(文武百官)이 관복을 입을 때 신던 목이 긴 신이다.

반장화(半長靴)와 비슷하며 목이 길고 넓다. 장화 모양을 내기 위하여 발목까지 나무를 대었다.

바닥은 나무이고, 목은 전(氈)·가죽·융·금단(錦緞) 등으로 겉을 싸고 솔기에는 붉은빛의 선을 둘렀다.

비슷한 모양의 신으로는 조선시대 무관들이 신었던 수화자(水靴子), 흑피화(黑皮靴), 고려 초기 악공들이 신은 적피화(赤皮靴), 무용인들이 신은 오피화(烏皮靴) 등이 있다.

흰 천으로 겉을 싼 것은 백화(白靴)라고 하는데, 고려시대는 고분벽화에 말을 탄 사람과 춤추는 사람, 음식을 나르는 여인 등이 신고 있어서 천인계급이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나 조선 세종 때는 왕족과 벼슬아치들이 신었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목화를 일정한 신분계급만 신도록 하였으며, 조선 중기와 후기에는 상복(常服), 말기에는 공복(公服) 차림에 신었다. 혼례 때는 서민들도 신었다.

남.여구분

목화는 조선시대 중·후기에 왕과 문무관리들이 관복을 입을 때 신던 목이 긴 마른신으로, 신 목이 길어 반장화 같이 생겼다. 이를 우리말 식으로 표현하고자 ‘목화’라 하기도 하였고, 바닥을 나무로 만들고 그 위에 다시 가죽으로 감싸는 데서 ‘목화(木靴)’라 하기도 하였다.

태조(太祖)원년(1302)에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서 관복을 입도록 상계(上界)하여 품계에 따라 포(袍)의 색, 대(帶)의 종류, 홀(笏)등에 차등을 두어 제정하고 화(靴)만은 모두 검은색 화를 신도록 하였다.

백관의 신은 관복과 함께 『경국대전』에서 완성을 보게 되었다. 백관들의 조복과 제복에는 흑피혜를 신었고, 이 제도는 국말 『대전회통』에도 그대로 제도화되었다. 하지만 국말에 와서 조복에는 목화를 착용한 사진이 많이 있는데, 이 목화는 공복의 흑피화, 상복의 협금화 대신으로 착용되었다.

제복의 신발인 흑피화(祭靴, 祭鞋)는 국말까지 계속 신었는데, 형태는 일반 혜와 같으며 운두가 낮고 가장자리에 흰 선을 둘렀고, 신코가 넓적하며, 한가운데에 너비 약 3cm 정도의 흰 선을 대었고, 벗겨지지 않게 양쪽에서 끈이 달려 있다.

이 목화는 임진왜란 이후 철릭이 융복(戎服)으로 입혀지면서부터는 철릭에도 갓과 함께 착용되었다.

목화는 그 형태나 장식에 일정한 규정이 없어 시대에 따라 약간씩 다른데, 검은 녹피(鹿皮)나 아청(鴉靑)공단(貢緞) 또는 융(絨)으로 만들고 안은 백공단으로 하며 가장자리에는 홍색 선을 둘렀다. 후에는 전(氈)으로 내장하고 외부는 청금(靑錦)선으로 둘러 화자(靴子)의 밖으로 보이게 하였고 고급품은 금단(錦緞)으로 꾸몄다.

조선 중·후기 관복에 신던 신의 하나로 수화자(水靴子)라고도 한다.

바닥은 나무나 가죽이고 신목은 천으로서 전(氈)이나 가죽·융 또는 금단(錦緞)으로 겉을 씌우고 솔기에는 선을 둘렀으며, 모양은 반장화와 비슷하여 목이 길고 넓적하다.

《임하필기(林下筆記)》에는 완전히 가죽으로 만들던 것을 뒤에 전으로 내장하고 청금선을 둘러 밖에 보이게 하고 고급품은 금단으로 꾸미며 장화의 모양을 유지하기 위하여 발목까지 나무를 대어 목화라고 불렀으며 상복에 신었다고 하였다. 또한 흰색 천으로 겉을 싼 백화(白靴)를 백목화라고 하는데, 상대(上代)의 백화 착용은 벽화에 나타난 기마인(騎馬人)과 무용도(舞踊圖)중 여인이 백화를 신은 것을 볼 수 있다.

또 음식을 나르는 여인이 백화를 신고 있어 수렵 때 외에는 천인계급에서 신은 것으로 추측된다. 그 뒤 세종 때 태상왕상에 문무백관·종친·부마가 백화를 사용한 기록이 있고 상중(喪中)에 목화를 대신하여 백목화를 사용하였다.

외피(外皮)는 짙은 청색의 무명이며 내피(內皮)는 굵은 베로 되어 있다. 혜 부분은 4조각으로 된 4합(四合) 목화이다.

신목 부분 상단 4.5cm 내려온 부분에 백피(白皮) 선을 넣어 주어 금(衿)과 같은 효과를 내었다. 신목 입구에 갈색 가죽으로 선[도리]을 둘러 주었다. 창이 얇게 되어 있으며 가죽으로 된 밀창이 앞 코까지 올라와 굽어져 있다.

이러한 모양은 국말 사진 자료에서 착장 모습이 관찰된다. 만듦새가 정교하지 않으며 재질로 미루어 하급관리용으로 보인다.

태사혜(太史鞋)

주로 남자들이 신던 운두가 낮은 신의 하나.

우리나라 신발의 종류는 신발의 형태에 따라 크게 운두가 낮은 신인 이(履)와 발목 위까지 올라오는 화(靴)로 나뉜다. 혜(鞋)는 운두가 낮은 신의 한 종류로 비단이나 가죽으로 만든 고급 신발이었다.

혜(鞋)는 재료와 문양에 따라 다양하게 이름지어졌는데 태사혜(太史鞋), 운혜(雲鞋) 등은 문양에 따라 지어진 이름이고 녹피혜(鹿皮鞋는) 재료에 따라, 궁혜(宮鞋)는 용도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태사혜는 신의 코 끝 부분에 태사문(太史紋)이 장식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항상 신의 앞부분과 뒤축에 대칭이 되도록 넣었다.

남자용 신에는 선이 크고 대담하게 들어가고 여자용에는 작고 아담하게 넣었다. 태사혜 뿐 아니라 당혜와 바닥에 징이 박힌 진신(징신), 나막신 등에도 태사문을 넣었다.

신목이 있는 화(靴)에 대하여 혜(鞋)는 목이 없고 운두만 있는 신으로, 조선시대에는 리(履)에 속하는 혜가 대표적인 신발이었다.

남자 마른신의 일종이며, 사대부나 양반계급의 나이든 사람이 편복에 신었고, 조선시대 말기에는 왕도 평상복에 착용하였다.

신은 날씨에 따라 진신과 마른신으로 구별하기도 하는데, 비가 오거나 땅이 진 곳에 신으면 진신이고, 맑은날 마른땅에 신는 신은 마른신이라고 한다. 태사혜는 신울(발을 감싸는 부분)은 비단이나 가죽으로 하고 밑둘레는 밀랍을 칠한 굵은 실로 꿰맸으며 신코와 뒤축 부분에 흰 줄무늬[太史紋]를 새겼다. 바닥에 잔 징을 박은 것도 있다.

어린이들의 태사혜는 일명 ‘초립동’이라고도 하였는데, 연두빛 바탕에 당홍 당수복문돠 태사문을, 아니면 당홍 바탕에 연두문을 놓기도 하였다.

화려한 꾸밈새와 정교한 형태로 보아 새신랑이나 초립동이가 편복(便服)에 신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녹색의 모본단으로 만들었고, 코와 뒤꿈치에 남색의 회장이 둘러져 있으며, 바닥에 징을 박았다.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남자들이 신던 가죽신으로 위에 비단을 붙이고 신코와 뒷축에 줄무늬를 새겼다.

소아혜

상류층 갓난 아이들이 신었던 신발로 몸체는 가죽으로 만들고, 겉에는 비단을 씌웠다.

신코와 뒤축에는 태사문(太史文)을 새겨 넣었다. 조선시대에는 혜(鞋)가 대표적인 신이 되었다.

아기태사혜

이 태사혜는 어린이용으로 진옥색 문단(紋鍛)에 황색으로 태사문을 장식하였다. 안에는 융을 대고 바닥은 가죽으로 하였다.

흑혜(黑鞋)

조선시대 문무백관들이 제복에 신었던 신발이다.

별다른 장식이 없으며, 융을 주재료로 했기 때문에 푹신한 것이 특징이며 밑바닥은 단창이고 형태는 포혜(布鞋)와 비슷했다.

운두가 낮은 마른신(乾鞋)의 하나로 표면에는 문양 장식이 없다. 가장자리를 옷감이나 가죽으로 대고 밑둘레는 밀랍으로 칠한 굵은 실로 꿰맨다. 또한 가죽으로 된 밑창에 촘촘하게 징을 박아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 신은 조선시대 사대부나 양반 계급의 고령자가 편복(便服)에 신었으며, 한말에는 왕도 평상복에 착용하였다.

흑혜는 검은 가죽으로 만든 마른신으로 조선시대 문무백관들이 조복과 제복에 신었던 신발이며 흑피혜(黑皮鞋)라고도 한다.

백관(百官)이 착용한 신은 『경국대전 經國大典』에 나타나 있는데 조복과 제복에는 각 품이 동일하게 흑피혜를 신도록 하였다. 이는 『대전회통 大典會通』에도 그대로 제도화되었다. 그러나 조선 말기에 제복에는 그대로 흑피화(祭靴)를 신었으나 조복에는 화자(靴子)를 착용한 사진이 남아 있다. 한편 조선 후기의 초상화를 보면 유학자(儒學者)들이 편복(便服)과 함께 흑혜를 신기도 하였다.

흑혜의 형태는 일반 혜(鞋)와 같으며, 운두가 낮고 신코가 넓적하며 가장자리에 흰색 선을 둘렀다. 조선시대 말기에는 신이 벗겨지지 않게 양쪽에 끈을 달기도 하였다.

흑혜는 모양이 태사혜(太史鞋)와 같으나 태사문(太史紋)이 없다.

이 흑혜는 가죽으로 만들었으며, 볼 부분과 발바닥 부분에 둥근 징들이 박혀 있다.

소가죽과 흑색 우단(羽緞)으로 울을 만들었고, 앞 뒤 축 중심선에 흰색 선을 쳤다.

녹피혜(鹿皮鞋)

사슴가죽으로 만든 신으로, 이 유물은 주로 편복(便服) 차림에 신던 마른신의 하나로, 모양은 태사혜(太史鞋)와 같으나 특별한 장식이 없다. 사슴의 가죽을 사용해서 만들었기에 녹비혜(鹿皮鞋)로 불리웠다.

운두가 낮은 신발로 신분이 높은 사람이 착용하였던 고급신이다. 흰 가죽부분이 그대로 깨끗하게 남아있다. 밑바닥의 징을 박은 구멍이 신발 위에까지 뚫려있으며 녹이 슬어있고 밑바닥의 징에는 별모양의 무늬가 찍혀있다.

마른신의 한 종류. 발막신은 맑은날 마른땅에 신는 마른신으로, 운두가 낮은 신인 ‘혜(鞋)’이다. 상류계급의 사대부 남자들 특히 노인들이 신었던 신발 중 하나인데, 노인들이 신어 ‘발막’이라고 하였다.

발막신은 조선후기에 뾰족했던 신코가 넓적해지면서 운두가 낮아 코에서 운두에 이르는 부분이 각이 지는 형태로 정착되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형태는 뒤축과 코에 꿰맨 솔기가 없고, 코끝이 뾰족하지 않고 넓적하다.

신의 바닥이 정면에서 보일 정도로 위로 올라갔고, 신 울타리 부분은 거의 직선에 가까운 형태이다. 또한 표면에는 경분(輕粉)을 칠해 내구성을 높였다. 발막신의 재료는 사슴가죽, 노루가죽, 양가죽 등이 사용되었으며, 회색이나 검정색으로 무늬는 거의 없었다.

발막신

운두가 낮은 신발로 신분이 높은 사람이 착용하였던 고급신 이다. 남자용이며 신발바닥 앞과 뒤에 징이 박혀 있다.

백피혜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사람들이 상중(喪中)에 신던 신발이다.

여기에 있는 것은 여자용으로 남자의 앞코는 편평한테 비해 여자의 앞코는 위로 올라가 있다. 상중에 신던 신발이어서 특별한 무늬는 나타나 있지 않는다.

남.여공용

짚신

볏짚으로 삼은 신발로 짚신은 우리나라 고유의 대중적, 실용적 신발로 미투리, 초혜(草鞋),망리(芒履)등으로 불린다.

짚신의 재료는 짚이 일반적이었으나 삼,왕골,부들등도 사용되었다. 만드는 방법은 우선 짚으로 새끼를 한 발정도 꼬아 4줄로 발바닥 크기 정도로 날을 한다. 다음으로 양쪽을 다시 짚으로 꼬아 총을 꿰어 두르면 신기에 알맞은 짚신이 된다.

짚신은 만드는 방법과 재료에 따라 짚신,고운짚신,엄짚신,부들집신,왕골짚신, 미투리,삼신,절치,탑골치 등으로 불린다.

짚신의 역사는 약 2천여 년 전 마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신라시대의 유물인 짚신 모양의 이형토기(異形土器)는 오늘날의 짚신과 별로 다를 바 없다. 짚신은 가는 새끼를 꼬아 날을 삼고, 총과 돌기총으로 올을 삼아서 만드는데 여자용은 총을 가늘고 곱게 하고, 엄지총은 물들인 짚을 섞어 만들기도 하였다.

옛날에는 사서(士庶)를 막론하고 짚신이 평상화로 사용되어 농가에서는 농한기에 머슴들이 사랑방에 앉아 몇 십 켤레씩 짚신을 삼아 식구들의 수요에 충당하고, 시장에 내다 팔아 용돈으로 썼다. 지금도 초상집 상제들은 짚신을 신는 풍습이 있다.

갖신

대한제국(大韓帝國)

갖신은 신발의 재료에 따라 붙여진 이름으로 가죽으로 만든 신의 통칭이다.

신분에 따라 쓰이는 재료로 귀천을 구분하였다. 천한 사람은 소가죽신을 신고 귀한 사람은 사슴가죽신을 신었다고 한다. 또한 조선시대에 갖신이 이전(履廛), 화전(靴廛), 종루(鐘樓)나 소가죽의 창을 파는 이저전(履低廛)을 통하여 일반에 널리 유통되면서 가죽이 품귀현상을 빚자 일반인의 갖신금지령이 내려지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착용되었던 갖신에는 기름을 들이지 않고 마른 땅에서 신는 ‘마른신’과 가죽에 기름을 먹여 만든 ‘진신’이 있다. 진신은 주로 비가 올 때 사용되었으며 유혜(油鞋)라고도 하고 바닥에 징이 박혀 있어 징신이라고도 한다. 마른 신은 태사혜, 당혜, 운혜, 온혜 등이 있는데 그 무늬에 따라 이름이 지어졌다. 물론 이러한 신발은 겉을 가죽이 아닌 헝겊으로 만들기도 하였다. 가죽신의 주된 재료는 쇠가죽, 말가죽, 사슴가죽, 당나귀가죽 등의 가죽과 부속으로 삼베, 헝겊, 밀을 먹인 면사와 명주실, 징 등을 사용한다.

가죽제의 단화형태인 혜(鞋)와 함께 발목이 높은 신발인 화(靴)가 있다. 화(靴)는 주로 의례적인 차림에 사용되었으며 후대에 오면 화(靴)보다 혜(鞋)를 일반적으로 신게 되었다. 혜(鞋)는 앞코가 둥글고 대부분 가선이 되어있으며 오늘날의 고무신과 유사한 형태이다. 이 갖신은 바닥을 고무로 대고 뒤축에 낮은 굽을 덧대었다.

종이신

종이로 노를 꼬아 만든 신.

둥구니신

산간지방에서 눈오는 날 미끄럼방지를 위해 나무덩굴, 짚 등으로 만든 신발

설피

산간 지대에서, 눈에 빠지지 않도록 신 바닥에 대는 넓적한 덧신. 칡, 노, 새끼 따위로 얽어서 만든다.

역사

『양서梁書』 제이전諸夷傳과 『남사南史』 동이전東夷傳의 신라조에 ‘화靴’를 ‘신侁’이라 한 기록을 통해 ‘신’의 어원을 추정한다. 우리나라의 신은 목이 있는 화靴와 목이 없으며 둘레가 낮은 혜鞋와 리履로 분류할 수 있다. 화는 습기와 추위를 막아 주어 주로 말을 타고 사냥을 하는 북방민족이 많이 신었고, 리는 농사를 짓는 남방민족이 흔히 신었다고 이여성李如星의 『조선복식고朝鮮服飾考』에서 설명하였다. 생태 환경적 측면에서 보면, 농경 문화권의 남방 지역에서는 혜와 리가, 북방의 기마유목 문화권에서는 화가 공존하면서 착용되었다.

상고시대 부여에서는 가죽신[革履]을, 마한에서는 풀을 재료로 한 초리草履와 혁교답革蹻蹋을 신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가죽과 풀을 재료로 하여 신을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풀을 재료로 한 초기의 신발은 처음에는 발을 보호하는 뜻에서 신바닥을 엮은 데에 몇 개의 날을 세워 겨우 발에서 벗겨지지 않을 정도로 조잡하였던 것이 점차 짚신, 부들신, 지초혜紙草鞋, 마혜麻鞋, 갈피혜葛皮鞋, 세초혜細草鞋, 분혜粉鞋로 발전되었다.

고구려 때는 누런 가죽신인 황혁리黃革履, 검은 가죽신[烏皮靴], 붉은 가죽신[赤皮靴]을 신었으며, 여기에 의복과 관冠, 신을 모두 금과 비단으로 장식하였음을 기록과 고분벽화를 통해 알 수 있다. 고구려인은 화려한 재료의 의복에 목이 길거나 짧은 형태의 신을 함께 착용하였다. 백제의 <양직공도梁職貢圖>에서 볼 수 있는 화와 오혁리烏革履의 기록을 통해 백제와 신라도 고구려와 비슷했음을 알 수 있다. 백제와 신라의 고분에서 발견된 금동리金銅履는 삼국시대 지배계층이 신었던 특수한 신이다. 옆에 장식이나 구슬이 달려 있고 바닥에 스파이크 형태의 못이 박혀 있는 신이다. 이와 같은 금동리는 제전이나 의식 때 착용하여 지배자의 위엄을 나타내거나 부장 시 함께 신겨져 신분을 표현하는 등 상징적인 신이다. 그런데 통구通溝지역 삼실총 제2실 서벽 무사도武士圖의 무사를 보면 운두가 얕고 앞의 코가 뾰족하여 전형적인 리 형태에 바닥에는 스파이크 형태 못이 박혀 있는 신을 신고 있다. 고구려는 산과 나무가 많은 지역인 데다 겨울에는 빙설로 덮이고 산길이 미끄러워 이와 같은 쇠못이 달린 신은 실용적인 용도로도 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통일신라는 화에 화대靴帶가 붙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신라 흥덕왕 복식금제服飾禁制의 기록을 보면 화대의 재료는 은문백옥隱文白玉, 뿔[犀], 놋[鍮], 철鐵, 동銅 등이었다. 신목에 다양한 금속장식이 있는 화대를 달아 신을 고정하였는데 귀인부터 서민까지 규제를 두었다. 이밖에 리履는 남녀 공용으로 착용했는데 비단, 가죽, 삼 등으로 만들되, 역시 제한을 두어 착용토록 하였다. 신라는 이민족의 다양한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당唐과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외래적인 요소가 유입되었고, 이러한 개방적인 미적 풍조가 복식에 표현되면서 한층 화려하고 다양한 형태의 신이 착용되었을 것이다.

고려 초기에는 신라의 제도에 따랐다. 고려에 왔던 송나라 사절 서긍徐兢이 지은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진사, 산원, 인리, 방자 등의 하급 관리는 가죽신 또는 가죽으로 만든 구리句履을 신었다고 한다. 또 고려 서민들의 신은 혁리革履, 오혁구리烏革句履, 조구皁屨, 초구草屨(짚신)를 신었는데, 초구의 형태는 앞쪽이 낮고 뒤쪽이 높아 그 모양이 괴이하나, 전국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다 신는다고 되어 있어 고려인은 주로 네모난 형태의 짚신 또는 가죽신을 신은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백관의 공복제도가 공표되어 조복朝服과 제복祭服에 흑피혜黑皮鞋를 착용하고, 공복公服에는 1~9품까지 흑피화黑皮靴를 신고, 상복常服에는 1~3품 당상관만 협금화挾金靴를 신도록 하였다. 흑색의 가죽으로 된 화는 공적 용무에 사용되었고, 혜는 평상시와 공무에 신을 수 있었다. 따라서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가죽으로 된 화는 관리들의 관복에 사용되었고, 혜는 공석과 평상시에 공용으로 신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조선 말기에는 목화木靴가 관복용으로 통일 대체되었다. 이 목화는 19세기에 등장하는 명칭으로 목이 있는 신의 표음 용어로 해석된다.

신 鞋履 — Google Arts & Culture

한국의 신은 크게 북방 기마 유목 민족의 신에서 유래된 목이 긴 ‘화靴’와 남방 농경 문화권에서 발달한 운두가 낮은 ‘리履’로 나뉜다. 우리나라 신에 대한 문헌기록은 고대에서부터 나타난다.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동이東夷전에는 부여에서 가죽신을, 마한에서는 짚으로 만든 신을 신었다는 기록이 있다. 고구려의 신은 고분벽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신분과 성별에 상관없이 화와 리를 착용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화靴’는 주로 사대부 남자들이 관복官服과 융복戎服에 착용하는 신으로 정착되었고, ‘리履’는 보통 ‘혜鞋’로 불리며 남녀 모두 일상복에 신었다. 이러한 신발은 의복과는 달리 주로 전문적인 장인匠人에 의해 제작되어 그 정교한 모양새에서 숙련된 솜씨를 엿볼 수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조선시대 관복에 착용하는 목화木靴, 제혜祭鞋와 같은 예복용 신발과 상류계층에서 가죽과 비단으로 만들어 평소에 신었던 태사혜, 당혜와 운혜, 진땅에 신었던 기름먹인 유혜油鞋와 나무를 깎아 만든 나막신, 서민의 대표적인 신이었던 짚신 등 다채롭게 발달한 전통 신발을 선보인다. 차림새를 완성하였던 신발을 통해 선조들의 다양한 삶의 방식에 대하여 보다 깊이 이해하고, 우리 복식服飾의 조화로운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신라시대에는 ‘선[洗]’이라고 표기하였는데 ‘洗’은 원음소전절(原音蘇典切) ‘si{{%131}}n’과 비슷한 음을 가졌던 것 같다. 따라서, 신은 다른 의복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생활의 필요에 따라서 생긴 자연발생적인 산물이다. 원시시대의 신은 뚜렷한 어떤 형태를 갖춘 것이 아니고, 짐승의 가죽이나 초목을 이용하여 만든 것으로 발을 보호하기 위한 지극히 간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생활문화가 발달되면서 의복에 사회적 의미가 부여되자 신은 실용적인 목적뿐만 아니라 의례적·장식적 목적으로도 제작되어 다양한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우리 나라의 경우 신은 그 형태상으로 보아 ‘화(靴)’와 ‘이(履)’로 나눌 수 있다. ‘화’는 화(靴)라고도 쓰며, 북방계통에서 유래된 신으로 ‘이’에 신목[靿]이 붙어 있는 지금의 장화 같은 것으로 긴 신을 말한다. 방한·방침에 적당하여 북방족 계통에서 발달하였다.

‘이’는 신목이 짧은 신의 총칭으로 혜(鞋)·비(扉)·극(屐)·구(屨)·석(舃)·갹답(蹻踏) 등을 포괄한다. 어떤 독특한 형태가 있는 것은 아니고, ‘화’를 제외한 신발을 총칭하는 일반적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이는 남방족계통의 신이다. 결국 신도 의생활 측면에서 볼 때는 기본복식과 함께 성장(盛裝)에 빠져서는 안 되는 족의로서 의생활의 독립된 한 분야로서 독특한 발전을 해왔다.

성별·신분·복식·직업·재료·형태에 따라 그 종류가 다양하다. ‘화’와 ‘혜’를 중심으로 그 재료에 따라 종류를 구별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① 피혁제(皮革製):석·흑피화(黑皮靴)·협금화(俠金靴)·수화자(水靴子)·목화(木靴)·기자화(起子靴)·사피화(斜皮靴)·동화(童靴)·백화(白靴)·단화(短靴) 등이 ‘화’에 속하고, 흑피혜·분투혜(分套鞋)·투혜(套鞋)·사피혜·피초혜(皮草鞋)·당혜(唐鞋)·운혜(雲鞋)·발막신·징신 등이 ‘혜’에 속한다.

② 초마제(草麻製):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신으로, 짚신[草履]에는 왕골짚신·부들짚신·고은짚신·엄짚신 등이 있었고, 미투리[麻履]에는 삼신·절치·탑골치·무리바닥·지총미투리 등이 있었다.

③ 포백제(布帛製):사(紗)·나(羅)·능(綾)·단(緞)을 재료로 하여 만든 당혜·운혜·태사혜 등이 있었다(이것의 원바탕은 가죽인데 겉을 포백으로 대었기 때문에 포백제로 취급한다).

④ 유제(鍮製):놋쇠로 만든 신으로 ‘유혜’ 또는 ‘놋신’이라고 하며, 특수층에서 비올 때 신었다.

⑤ 지제(紙製):종이로 만든 신이다. 지혜(紙鞋)는 일반적으로 천한 사람들이 신었다. 지총미투리는 이 중 고급품의 하나라 할 수 있다. 조선 숙종 때 지혜를 신는 것을 법으로 금하여 점차 소멸되어 갔으나, 순조 때까지 존속되었던 것으로 기록에 남아 있다.

⑥ 목제(木製):목극(木屐))이라고 하며 ‘격지’ 또는 ‘나막신’이라고도 불린다.

(1) 전통시대의 신 문헌에서 찾을 수 있는 신의 기원은 조선 정조 때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 五洲衍文長箋散稿』 중의 「의복재봉변증설 衣服裁縫辨證說」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글에 기록되어 있는 바에 따르면 중국 황제(黃帝) 때 어측(於則)이 처음으로 ‘비’·‘이’를 만들었는데, 풀로 만든 것은 ‘비’, 마(麻)로 만든 것은 ‘구’, 가죽으로 만든 것은 ‘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문헌에 나타난 우리 나라의 가장 오래된 신으로는 부여의 혁탑(革鞜), 마한의 짚신·초교(草蹻)·초교답(草蹻蹋) 등을 들 수 있는데, 가죽이나 풀을 사용하여 만든 것으로서 이들은 이미 완전한 형태로 한층 진보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상대에 있어서의 신은 그 형태상으로 보아 대체로 두 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다. 그것은 ‘화’와 ‘이’로서 이 중에 어떤 것이 먼저 나타난 것인지는 속단하기 어렵다. ‘화’와 ‘이’를 구별하여 문헌에 나타난 자료를 중심으로 역사적 고찰을 해보면 다음과 같다.

① 화:후당(後唐) 마고(馬稿)의 『중화고금주 中華古今注』에는 조무령왕(趙武靈王)이 신목이 붙은 화를 처음으로 착용하였는데, 말탈 때 편리한 서호(西胡)의 것이라 하고 있다.

심괄(沈括)의 『몽계필담 夢溪筆談』 권1에도 활동에 편한 호복(胡服)이 북조(北朝) 이래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착용된 것으로 되어 있어, 화는 중국의 것이 아니고 호풍(胡風)을 수입, 모방해서 착용하였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 나라 상대에 있어서는 고구려의 쌍영총(雙楹塚) 후실(後室) 북벽과 동벽 벽화의 구인행렬도(九人行列圖) 가운데 3인이 화를 착용하고 있으며, 무용총(舞踊塚)의 벽화 무용도(舞踊圖)에는 백화를 신은 여인의 모습이 그려져 있어 이미 당시에 화가 일반화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화는 수렵할 때를 제외하고는 주로 천인계급에서 착용된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 때의 화는 삼국시대에서는 볼 수 없었던 화대(靴帶)가 붙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삼국사기』 권33 복색조(服色條)에는 화대의 재료로 은문백옥(隱文白玉)·무노뿔·상아·놋쇠·철·구리 등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어 화대의 귀금속장식이 유행하였음을 알려준다. 통일신라시대의 화는 귀족·평민을 가리지 않고 착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송나라의 신종(神宗)이 화를 보내온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1품에서 9품까지 공복(公服)에 흑피화를, 당상관은 평상복에 협금화를 신는다는 기록이 『경국대전』 의장조(儀章條)에 있다. 조선 말기에는 흑피화 대신 목화가 많이 착용되었다.

② 이:『통전 通典』 동이조(東夷條)에 삼국 이전 부여·마한에서 짚신을 신었다는 기록이 있다. 고구려시대에는 상류계급에서 황혁리(黃革履)를 신었다. 고구려 무용총 오벽(奧壁) 벽화에는 주인이 황혁리를 신고 있으며 대접을 받는 승려인 듯한 사람은 흑색리를 신고 있다. 백제에서는 왕복에 오혁리(烏革履)를 신었다. 신라시대에는 경주 식리총(飾履塚)에서 포백(布帛)·사제(絲製)의 신들이 발견된다.

이의 유물로는 나주 반남면 옹관묘 출토의 금동리(金銅履), 금관총 출토 금동식리(金銅飾履), 경주 식리총 출토의 금동리, 공주 무녕왕릉 출토의 금동식리 등을 볼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흥덕왕 복식금제(服飾禁制)에 보면 진골에서 4두품까지 사(絲)·마(麻)·나(羅)·피제(皮製)의 신을 신었고, 평민은 나를 금하고 피마제만 사용하였다.

『고려사』와 『고려도경 高麗圖經』을 참고하여 보면 고려시대에는 의종 때 명나라 태조가 보낸 제관복(祭冠服) 가운데 흑리가 있고, 국사(國師)는 오혁구리(烏革句履)를 신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경국대전』에 의하면 백관조복에 1품에서 9품까지 흑피혜를 신었다.

이상에서 ‘화’와 ‘이’에 대하여 살펴보았는데 이를 요약하면, 삼국시대에는 이를 귀족계급에서 주로 신었고, 통일신라시대에서는 화와 이가 병용되었다. 고려 초에는 이를 주로 사용하다가 고려 말에 화를 많이 사용하였고, 조선시대에는 혜를 대표적인 신으로 사용하고 화는 상류계급에게만 허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이와 화의 이중제도(二重制度)는 조선 말까지 그 전통을 이어왔으며, 개화기 이후 서양의 구두 등 새로운 신발들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우리 나라 신의 기본구조를 이루면서 발전하여 왔다.

(2) 근대 이후의 신 1880년(고종 17) 개화파 정객들과 일본·미국 등지로 나갔던 외교관들이 구두를 사 신고 돌아오고, 뒤이어 갑오경장이 단행되고 양복이 공인되면서 고종과 엄비(嚴妃)가 구두를 신게 되자, 1895년경부터 상류귀족사회에서 구두를 신는 사람들이 늘기 시작하였다.

최초로 등장한 남성들의 구두는 예복과 함께 신었던 이른바 버튼부츠(button boots)였다. 이것은 신발목이 발 위까지 오고 발등 부분부터 버튼이 달려 잠그게 된 장화형의 신발이다. 여성의 구두로는 굽이 낮은 이브닝 슈즈(evening shoes)·오페라 펌프스(opera pumps)·후디드 힐(hooded heel)·스태크 힐(stack heel) 등이 전파되었다.

1898년 우리 나라 최초의 양화점을 이규익(李圭益)이 개점하였으나, 일년에 고객이 4∼5명에 불과하여 3∼4년 후에 폐점하였다. 그 후 이를 박덕유(朴德裕)가 인수하여 40년간 경영하였다.

또 1908년부터 일본에서 고무신이 수입되었다. 1910년에는 검정 에나멜구두가 등장하였고, 1912년에는 인천을 중심으로 혁신화(革新靴 : 新式靴·改良新靴·便利靴·輕便靴·經濟靴)가 만들어졌다.

1919년에 평양에 고무신 공장이 설립되었고 1920년에는 이병두(李丙斗)·최규봉(崔奎鳳)에 의해 외코신의 고무신으로 개량되었다. 또 같은해에 ‘대륙고무공업소’가 한국인에 의해 설립되었다.

1939년에는 고무가 군수품으로 조달되면서 고무신 공장이 폐업되어 고무신이 매우 귀해졌다. 이 때에 왕골구두가 만들어졌다. 전라북도의 ‘고려슬리퍼조합’의 여성 고려화(高麗靴)는 왕골로 만든 굽이 있는 신발로 미국·오스트리아·프랑스 등으로 수출까지 되었다.

1950년 전쟁으로 고무신제조는 다시 침체를 맞이하였고 미국의 구호물품 속의 양화(洋靴) 등으로 구두·케미화·운동화 등의 착용이 증가하였고, 한복 착용이 줄어들면서 고무신 착용이 점차 줄었다. 5·16이후 신생활복의 권장으로 양장이 일상복이 되면서 다양한 구두의 착용이 더욱 증가되었다.

1960년에는 힐이 달린 고무신이 등장하여 한복에 구두를 신기도 하였다. 1970년대 이후 경제 성장과 생활수준의 향상 및 86서울아시안 게임과 88서울올림픽으로 레져 붐이 확산되고 스포츠에 관심이 증대되면서 스포티한 복장에 맞는 운동용 구두 및 운동화 착용이 증가되었다.

또 1996년 한복입기운동이 확산되면서 생활한복에 어울리는 전통양식의 고무신 구두가 보급되고 있다. 신발은 더 이상 단순히 발을 보호하는 개념으로서의 도구가 아닌 의복과 함께 패션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았고 실용과 멋을 강조할 수 있는 의복의 일부로 간주되게 되었다.

우리 나라에는 예로부터 신과 관련된 민속이 많이 전래되고 있다. 반가운 손님이 오면 짚신을 거꾸로 신고 나가는 관행 등이 있었으며, 짚신장가보내는 풍속이 있는데, 처녀귀신이 시집 못 간 한(恨) 때문에 이승을 떠돌아 다니며 해를 끼칠까 우려하여 그 처녀가 살았을 때 신던 짚신을 동네총각에게 신어주길 청하면 총각은 그 신을 신어주는 것이 관습처럼 되었다. 이를 ‘짚신장가갔다.’고 하며 이것으로써 처녀귀신의 한이 풀린 것으로 인식되었다.

한편 짚신은 여성의 성기를 상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이와 관련된 속신이 많이 생겨났다. 앞의 짚신장가보내는 풍속도 이와 어느 정도 관련되는 것으로 보이며, 또한 여성의 성기를 상징하는 짚신을 빌려 신어서는 안 된다고 하여 짚신의 별칭을 ‘불차(不借)’라고 하였다.

우리 나라에서는 질병과 귀신에도 암수의 구별이 있다고 보았는데, 암병귀[病鬼]에 의한 전염병이 돌면 남자의 성기를 상징하는 방아공이나 다듬이 방망이를 엮어 동네 입구나 집앞에 걸어두었고, 수병귀에 의한 전염병이 돌면 짚신을 엮어 문앞에 걸어두었다. 짚신을 삼을 때 짚신총을 내는 것을 보고 부부금실을 점치는 것도 이와 관련된 속신이다.

그리고 설날밤에는 하늘의 야광귀(夜光鬼)가 인간세상에 내려와 발에 맞는 신이 있으면 신고 가는데, 이때 신을 야광귀한테 잃어버린 사람은 일년 동안 재수없다고 하여 설날밤에 신을 숨겨놓는 풍속이 있었다.

신에 대한 속담으로는 ‘신 벗고 따라가도 못따른다.’, ‘신 신고 발바닥 긁기’, ‘짚신감발에 사립(絲立) 쓰고 간다.’, ‘짚신에 정분(丁粉) 칠하기’, ‘짚신장이 헌신 신는다.’, ‘나막신 신고 대동(大同) 배 쫓아간다.’, ‘짚신에 구슬 담기’ 등이 있다.

[뉴스 속의 한국사] 부츠처럼 목 길면 ‘화’, 단화처럼 생기면 ‘혜’라고 했죠

신문은 선생님 [뉴스 속의 한국사] 부츠처럼 목 길면 ‘화’, 단화처럼 생기면 ‘혜’라고 했죠 [우리 조상들의 신발]

양반은 가죽으로 만든 ‘화’와 ‘혜’… 서민은 짚신과 나막신 신었죠

조선시대 신발 짓는 장인 ‘화혜장’, 중앙관청 ‘공조’에 소속되기도

최근 명품 브랜드들이 한 켤레에 100만원이 넘는 운동화를 내놓아 화제입니다. 한 켤레에 100만~200만원이라니 믿기지 않죠? 유명 연예인들이 신으면서 인기가 높아져 10~20대 일반인들에게도 큰 인기를 얻고 있다고 해요. 일부 한정 판매 운동화를 사기 위해 많은 사람이 밤을 새워가며 줄을 서는 모습이 뉴스에 나오기도 합니다. 이런 한정판 운동화는 몇 배 이상 웃돈을 받고 되파는 게 가능해서 그렇다고 해요. 신발로 패션 감각을 뽐내는 사람들이 많은데요, 우리 조상의 신발 문화는 어땠을까요?

◇신발 목이 길면 ‘화’, 목이 짧으면 ‘혜’

중국 역사서 ‘삼국지 위서 동이전’ ‘후한서’ 등을 보면 삼국시대 이전부터 한반도에서는 짚신을 신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통일신라에서는 가죽신을 만드는 화전(靴典)과 탑전(鞜典), 미투리나 짚신을 만드는 마리전(麻履典) 등의 관청을 두어 왕실과 의례에 필요한 신발을 생산하기도 했어요.

본격적으로 신발 발전사를 볼 수 있는 것은 고려·조선시대부터입니다. 고려시대 이후로 신분과 성별에 따라 재료, 문양, 색 등이 다양하게 발달하는 모습이 보이거든요.

먼저 형태를 보면 목이 긴 신발과 목이 짧은 신발 두 가지로 크게 나뉩니다. 장화나 부츠처럼 목이 긴 신발은 화(靴), 고무신처럼 목이 짧은 신발은 혜(鞋)로 불렀어요. ‘화’는 사냥을 하며 말을 타던 북방 유목민들이 주로 신던 신이고, ‘혜’는 주로 농사를 지으며 살던 남방 지역 사람들이 신던 신이어서 우리나라의 지리나 기후 조건으로 두 계통의 신이 함께 존재하며 발달했다는 연구도 나오고 있어요.

▲ ①부츠와 닮은 조선시대의 ‘화(靴)’입니다. 조선시대 문무백관은 관복을 입을 때 이런 ‘화’를 신었어요. ②신발 목이 낮은 조선시대의 ‘혜(鞋)’입니다. 가죽 등으로 만든 상류층의 신발이었죠. ③삼국시대부터 평민 등이 즐겨 신은 짚신. ④조선시대 사대부가 즐겨 신었던 ‘태사혜’입니다. 조선 중기부터 양반층에 크게 유행했는데, 앞뒤로 장식된 문양을 ‘태사문’이라고 합니다. /국립민속박물관·국립고궁박물관 신발 재료는 앞서 말한 가죽과 짚뿐 아니라 비단이나 삼, 모시 같은 천이나 나무 등이 있었는데 가죽이나 비단을 이용해 만든 각종 ‘화’와 ‘혜’는 주로 상류층에서, 짚으로 엮어 짠 짚신이나 삼으로 만든 미투리, 나무로 만든 나막신 등은 주로 서민층에서 신었습니다.

조선 후기 실학자 한치윤이 쓴 ‘해동역사’에는 “고려의 신발은 무두질한 가죽으로 발에 맞추어 만들어 신었고, 묶지 않았다. 가난한 자는 소가죽, 부자들은 사슴 가죽을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고려 중기에 송나라 서긍이 기록한 ‘고려도경’에는 “짚신의 모양은 앞쪽이 낮고, 뒤쪽이 높아 그 모양이 남다르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짚신을 신었다”는 기록도 있지요. 조선시대 양반들은 삼이나 왕골로 섬세하게 삼은 짚신을 주로 신었다고 합니다.

상류층이 즐겨 신었던 ‘혜’는 용도에 따라 디자인이 달랐다고 합니다. 나라의 관리들이 경축일이나 나라의 제사 때 조복이나 제복을 입을 때 신은 검은 가죽으로 만든 흑피혜, 양반들이 평상시에 즐겨 신은 가죽신 태사혜, 여인들이 신던 신으로 가죽 몸체에 비단을 씌우고 앞코와 뒤에 당초무늬와 구름무늬를 새긴 당혜와 운혜 등이 대표적입니다.

◇신발 만드는 장인 ‘화혜장’

조선시대에는 ‘화’를 만드는 장인은 ‘화장(靴匠)’, ‘혜’를 만드는 장인은 ‘혜장(鞋匠)’, 이를 통틀어 ‘화혜장(靴鞋匠)’이라 불렀어요. 가죽을 다루어 신을 만든다 하여 순우리말로는 갖바치라고도 불렀지요.

화혜장은 국가 관청 소속으로 신발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조선시대 중앙관청인 공조(工曹)에 화장 6명과 혜장 6명, 상의원(尙衣院)에 화장 10명과 혜장 8명이 소속됐다고 합니다.

이런 전통 ‘화’ ‘혜’와 일반 백성들이 즐겨 신었던 짚신 등은 1920년대 고무신이 등장하면서 점차 사라졌습니다. 1960년대 이후로는 운동화와 구두 등에 밀려 지금은 거의 그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게 됐습니다. [‘발로 만들었다’는 우스갯소리… 조선시대 갖바치에서 유래?] 벽초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을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이 신은 옥견이가 발로 맨든 것이야.” 신발 만듦새가 나쁘다는 뜻으로 한 말인데요. 홍명희는 책에서 ‘이옥견이라는 가죽신 잘 짓기로 유명한 사람이 있어 조선시대 서울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잘하는 것을 보면 옥견이의 신 솜씨 같다고 말했다’고 설명합니다. 반대로 잘 못 만든 신발은 ‘옥견이가 손이 아니라 발로 만들었다’라고 한 것이죠.

이옥견에 대한 기록은 조선 중기 유몽인이 쓴 설화집 ‘어우야담’에 등장합니다. 민간 설화를 모은 책이라 역사적 사실인지는 불분명하지만요. 이 책에 따르면 이옥견의 할아버지는 세종의 후궁이 낳은 아들로 왕족이었지만, 역모에 가담했다는 누명을 쓰고 죽습니다. 가문이 몰락하자 이옥견은 가죽신을 만들며 생계를 이어나갔는데, 신발 만듦새가 뛰어나 장안의 화제였답니다. 이후 왕실의 피가 흐른다는 게 밝혀지면서 당시 임금 성종이 왕족 신분을 인정해줬다고 해요. 이옥견은 왕족 신분을 인정받아 비단옷 입고 수레를 타고 조정을 드나들게 됐습니다. 이옥견은 길에서 나이 많은 갖바치를 만나면 수레에서 내려 큰절을 했다고 합니다. 과거 갖바치 시절을 잊지 않았다는거죠.

지호진 어린이 역사 저술가 기획·구성=양지호 기자

조선시대 임금님들의 허리띠는 특별합니다. 기능성보다는 왕의 권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추어 제작하였지요. 바로 ’옥대(玉帶)’입니다. 비단으로 싸고 옥으로 만든 장식을 붙였다고 해서 옥대입니다. 옛날에는 왕은 물론 조정 신하들이 일종의 근무복인 공복(公服)을 입을 때 허리에 두르는 허리띠를 통해 관직의 고하를 나타냈습니다. 허리띠의 재질과 문양을 보면 지위의 고하를 알 수 있었지요. 그래서 간혹 고관대작 중에서는 밋밋한 장식의 허리띠를 둘러 자신의 소박함을 오히려 드러내곤 했다고 합니다.

옥대의 ’옥’을 자세히 보면 용이 다섯 발톱의 발로 여의주를 쥐고 있는 형상입니다. ’오조롱(五爪龍)’의 상징물로 왕을 나타낸 것인데, 특별한 점은 옥을 깎아 만든 용문양의 뒤판에 금박을 입혔다는 것입니다. 금박 판 위에 옥 문양을 대었으니, 먼 걸음에서도 허리띠가 번쩍번쩍 빛났을 왕을 쉽게 알아보게 한 것입니다.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곤룡포의 앞가슴과 양어깨에는 금색 실의 용 무늬가, 그리고 허리띠에는 빛이 옥 문양의 사이를 뚫고 금박 판에 반사되었던 왕의 모습을….

조선 중기와 후기에는 왕과 문무 관리들이 관복을 입을 때 목이 긴 신발을 신었습니다. 그것이 ’목화(木靴)’입니다. 나무를 깎아 만든 나막신으로 오해하지는 마세요. 목화에서 ’화(靴)’는 목이 길어 장화 같은 신발을 말하며, 발목이 낮은 신발에는 ’리(履)’ 라는 한자를 씁니다. 왕의 목화는 바닥은 나무로 하고 겉은 검은 사슴가죽, 아청색 금단, 융(絨) 등으로 만들고 안은 흰 공단으로 하며 가장자리에는 홍색 선을 둘렀습니다. 사슴 가죽은 부드럽고 질기지요. 혹시라도 왕이 미끄러질까봐 목화 바닥에는 굵은 실로 열십자 (+)를 그어 놓았습니다. 영친왕이 남긴 목화는 마른 땅을 밟을 때 신었던 건신발인데, 왕들이 진창을 밟을 일은 별로 없었겠지요. 그렇지만, 혹시 모를 일이어서 건신발이라해도 바닥의 종이 가죽은 기름을 먹이고 겉의 틈새는 석회를 발랐다고 합니다. 한편, 왕이 입고 쓰고 신고하는 물품들은 상의원(尙衣院)이란 부서에서 만들었습니다. 상의원은 임금의 의복과 궁내의 일용품, 보물 따위의 관리를 맡아보던 관아로, 고종 32년(1895년) 그 명칭이 상의사(尙衣司)로 바뀌었습니다. 자 그럼, 옥대와 목화의 사진을 큼지막하게 뽑아 게재할 것이니 차례로 감상하세요.

글 = 정계옥 / 국립고궁박물관 유물과학과장

88년 문화재청 학예연구사로 시작해 여성으로는 드물게 익산 미륵사지, 나주 복암리 고분, 함안 성산상성, 창녕 송현동 고분 발굴 작업에 참여한 발굴 전문가다. 전국문화유선분포지도를 제작하고, 매장문화재지리정보 GIS를 구축하는 등의 업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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