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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교회 되게 하소서 – 주일설교 – 기둥교회(Pillar Church)
[목회기도] 생명 주신 하나님! 예수 믿음으로 구원받게 하시고, 교회에 나와, 혹은 코로나 19로 인해 각자의 처소에서 영상으로라도 예배하게 하심 …Source: pillar.or.kr
Date Published: 8/2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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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교회 되게 하소서 (5/26) – 설교
수원새빛교회,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매교동 위치, 이부호 목사 시무. … 설교. 이런 교회 되게 하소서 (5/26). 2019-06-08 17:26:42. 사무실2. 조회수 227.
Source: suwonsb.org
Date Published: 12/2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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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교회가 되게 하소서 – Daum 블로그
그리고는 정성을 다해 설교를 준비했습니다. 주일이 되자 목사님은 흥분된 가운데 마을 사람들을 기다렸지만 막상 예배가 끝났을 때까지 예배에 참석한 …
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12/1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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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일의 설교] 이런 교회가 되게 하소서!(계 3:7~13) – 기독신문
주님께서 칭찬하는 교회됩시다 말씀은 절대 순종하며 결코 예수님을 배반하지 말아야“내가 속히 오리 … [이주일의 설교] 이런 교회가 되게 하소서!(
Source: www.kidok.com
Date Published: 3/7/2022
View: 9070
이런 교회 되게 하소서(20.04.19)
이런 교회 되게 하소서(행 2:42-47) – 교회창립 123주년 기념주일 –. 오늘은 우리 영종중앙교회의 창립 123주년 기념주일이다. 1897년 4월 20일, …
Source: yjchurch.kr
Date Published: 10/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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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기도제목: 이런 교회 되게 하소서!
알림과 나눔. 월요일 기도제목: 이런 교회 되게 하소서! 2020-09-12 13:03:35. 전주강림교회. 조회수 244. ◎ 예배가 살아있는 교회 * 온 교우들이 예배에 더욱 적극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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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2/2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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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런 교회가 되게 하소서 – 뉴스앤조이
예수 그리스도를 못보는 우리의 위선을 회개하고, 이후로는 그리스도의 부활생명과 하나님 백성 사이에 말씀과 감격, 회개와 환희가 일어나는, …
Source: www.newsnjoy.or.kr
Date Published: 5/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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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설교] 이런 교회가 되게 하소서 – 국민일보
[오늘의 설교] 이런 교회가 되게 하소서 … 데살로니가 교회는 말씀을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고(살전 2:13) 열린 마음으로 …Source: m.kmib.co.kr
Date Published: 3/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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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창립] 이런 교회 되게 하소서 (마 16:13-20) – 기멀전
이런 교회 되게 하소서 (마태복음 16:13-20) 지난 주일에 읽었던 본문을 다시 읽었습니다. 오늘로 스믈 여섯살 된 우리교회가 조금 전에 불렀던 찬송 …
Source: godpeople.or.kr
Date Published: 12/2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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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이런 교회 되게 하소서 설교
- Author: Beecompany 비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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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14. 1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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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의 소리(윤삼중 목사의 외침)
이런 교회가 되게 하소서
성경본문: 엡4:11-16절
미국 오클라호마의 작은 마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이 마을에 목사님이 새로 부임하여 오셨는데 이 분은 도착하자마자 매우 의욕적으로 집집마다 심방을 다니며 오는 첫주일에는 꼭 교회에 나오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리고는 정성을 다해 설교를 준비했습니다. 주일이 되자 목사님은 흥분된 가운데 마을 사람들을 기다렸지만 막상 예배가 끝났을 때까지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은 불과 두 손으로 꼽을 정도로 적었습니다. 다음날 목사님은 지방 신문에 큰 광고를 내었습니다. “우리 교회가 죽었습니다. 따라서 담임 목사로서 장례식을 치르려 하오니 모두 참석해 주시기 바랍니다” 마을 사람들은 신문을 보고 모두 놀라고 의아해 하다가 주일이 되자 동네 사람들이 교회로 찾아왔는데 교회의 강대상 위에는 관이 있었고, 그 위에는 아름다운 꽃이 장식되어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종교 의식에 따라 장례식을 거행하였고, 그는 마지막으로 떠나시는 분에게 조의를 표하라고 하였습니다. 조객들은 차례로 앞으로 나와 관을 들여다보고는 송구스러운 표정으로 물러났습니다. 그 관속에는 큰 거울이 들어 있어서 그 관을 들여다보는 사람은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 각자가 본 죽은 교회는 바로 자신이었던 것입니다. 그 사건이 있은 후에 성도들은 영적으로 깨어나서 새로운 믿음을 가지게 되었고,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살아 있는 교회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에 5만개가 넘는 교회가 있습니다. 신기한 것은 5만개가 넘는 교회들 중에 단 하나도 똑같은 교회가 없습니다. 모든 교회가 하나님의 집이고,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되는 교회이지만 이상하리만큼 같은 교회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교회마다 색깔이 각각 다른 이유는 교회의 구성원들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떤 교회가 되느냐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시느냐로 결정되지만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시는가를 결정하는 것은 교회 구성원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 교회의 성도들의 생각과 수준이 그 교회의 색깔을 만들어내며, 미래의 교회를 결정짓게 만듭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하나님이 계획해 놓으신 그림대로 거룩하고 건강한 교회를 만들어가는 것이 우리의 소원입니다. 하나님께 칭찬받고 상급받은 교회를 만들어가는 것이 제 꿈입니다. “주여, 우리 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게 하소서. 주린 영혼에게는 갓 구워낸 생명을 나누어 주는 교회, 목마른 영혼에게는 달콤한 생수 같은 교회, 우리가 삶의 현장에서 지쳤을 때 찾아와서 새 힘을 얻을 수 있는 교회, 그냥 지나가다 들려도 또 오기 싶은 교회, 말씀이 살아 있고, 좋은 찬양이 있고, 사랑이 넘치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주여, 우리 교회는 시가 있고, 음악이 있고, 그림이 있고, 깊은 묵상이 있고, 노래가 있고, 춤이 있고, 웃음이 있고, 사랑이 있고, 용서가 있고, 화해가 있고, 우리가 살아가면서 느낄 수 있는 모든 희로애락을 다 담아 낼 수 있는 교회가 되게 하소서. 주여, 우리 교회가 죄악으로 어둔 심령들에게 빛을 비추어서 그리스도의 빛된 삶을 살게 하시고, 썩어 가는 세상에서 소금으로 부패와 타락을 막을 수 있는 사명을 감당하는 그런 교회가 되게 하소서” 하나님이 소원하시는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하나님이 계획해 놓으신 교회의 청사진이 어떤 모습입니까?
1.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가는 교회입니다.(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교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의 청사진, 하나님의 그림이 무엇입니까? 12절에 보면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여기서 나오는 ‘봉사의 일’ 이라는 것은 목회 사역(ministry) 입니다. 즉 봉사의 일은 사역자가 해야 할 일입니다. 목회자가 성도들을 온전하게 세우는 이유는 성도들로 하여금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기 위함입니다. 즉 교회는 세우는 주체는 목회자 혼자하는 것이 아니라 온 성도들과 함께 동역자가 되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함께 그리스도이 몸을 세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목회 사역입니다. 사도행전 1:17절에 보면 마치 일곱집사들이 했던 사역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 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몸”은 바로 오늘날 교회입니다. 요즘 용어로 표현한다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는 일은 목회자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성도들과 함께 해야할 일입니다. 목회자는 성도들을 영적으로 준비시켜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사역자’ 로 만드는 직책인 것입니다. 초대교회 때 지역 교회를 지켜냈던 사람들은 다름아닌 소위 일반 성도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집을 열어서 교회를 세우고, 그들이 스스로 성도들을 돌봐주고, 세워주는 사역을 했습니다. 성경은 우리 모두가 왕같은 제사장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거룩한 사명을 부여해 주셨습니다. 목회자의 역할은 그 거룩한 소명을 따라 성도들에게 자신의 사명을 깨닫게 하여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성도들이 교회를 사랑하며, 하나님이 주신 재능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사역자’ 로 준비시키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각종 직분을 주셨는데 그 직분이 무엇입니까? 11절을 보면 오늘날 교회의 직분과 초대교회 당시 직분은 많이 다를 수가 있습니다. 11절은 초대교회 안의 다양한 직분을 보여줍니다.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와 교사”가 초대교회의 직분이었습니다. 물론 예루살렘교회는 12사도 외에 7명의 집사를 세웠습니다. 스데반 집사는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했고, 빌립집사는 사마리아 등지를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에베소서를 보면 당시 교회 안에 어떤 ‘직분자’들이 있었는가를 보여주는데, 가장 먼저 사도를 꼽고, 그 다음이 선지자입니다. 또 그 다음은 복음 전하는 자와 목사와 교사입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목회자를 훈련하는 기관이 없었기에, 교회 안에서 신앙의 모범이 되는 사람을 택하여 이런 직분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현대교회는 목회자를 양성하는 신학교가 있고, 신학을 공부한 사람에게 과정을 거치게 하고 안수하여 ‘목사직’을 줍니다. 그리고 일반 성도들에게는 집사, 권사, 장로라는 직분을 줍니다.
지상교회 가운데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를 얻은 안디옥 교회를 연구해 보면 안디옥교회는 좀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였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5명의 지도자의 이름이 나오는데 지도자들만 보아도 다양한 공동체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안디옥교회의 5명의 지도자를 살펴보면 먼저 “바나바”가 나옵니다. 바나바는 나이가 많이 든 사람이었고 부자였습니다. 그는 교회에 땅을 헌금할 정도로 헌신된 사람이었습니다. “니게르”라는 시므온이 나옵니다. 여기서 “니게르”라는 말은 니그로를 말합니다. 그는 흑인이었다는 말입니다. 시므온은 북아프리카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낮은 지위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 다음에 “구레네 사람 루기오”가 나옵니다. 그는 바울의 친척으로 안디옥에서 이방인들에게 최초로 복음을 전한 사람입니다. 그 다음에 헤롯의 젖동생 “마나임”이 나옵니다. 그는 귀족으로 높은 지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 다음은 “사울”이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알다시피 사울은 탁월한 지식을 갖고 있었던 엘리트 출신이었습니다. 이렇게 안디옥교회는 여러 인종과 여러 계층이 모인 그런 교회였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계층이 모이면 반드시 문제가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서로 사랑하며, 섬겨주는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그래서 안디옥 교회는 건강한 교회요, 좋은 교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각종 직분을 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12절을 보면 그 직분을 주신 목적을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직분자가 할 일은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성도들이 봉사의 일을 하도록 이끄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로서, ‘지체에게 주어진 사명을 충실하게 감당토록’ 하는 일입니다. 교회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며, 은사와 역할과 기능이 다를 수 있습니다. 각자의 은사와 재능에 따라 교회의 봉사의 일을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가는 신비로운 곳입니다. 우리 몸을 사지백체(四肢百體)라고 표현합니다. ‘사지’는 팔다리를 말합니다. 그리고 ‘백체’란 백 개의 지체가 있다는 말이라기보다는 지체가 많다는 뜻입니다. ‘백’이라는 말은 숫자 100을 의미하지만, ‘굉장히 많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만큼 우리 몸의 지체는 다양합니다. 하지만 그 다양한 지체가 모두 한 몸을 이루고 있습니다. 손을 손대로, 발은 발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머리의 명령을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몸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려면 머리의 명령에 복종하여 움직여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기 위해 부름 받았습니다. 교회 안의 모든 직분은 머리되신 예수님의 통치와 인도를 받아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하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는 일에 헌신하고 충성해야 합니다.
2.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는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성장하는 교회입니다.(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성장하는 교회)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 청사진이 무엇입니까? 13절에 보면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 구절을 쉬운성경으로 보면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지식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께서 충만하신 정도에까지 도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하나가 될 때 온전한 사람을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온전한 사람 즉 장성한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성장하고 자라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여기서 “장성”이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텔레이오테스” 인데 그 뜻은 온전한 분량에 이르는 것 또는 지정된 목표에 도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란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그리스도의 성품을 본받고 제자로서의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고 그 목표에 달하기 위해 꾸준히 성장해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땅에서의 삶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거룩입니다. 거룩이란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성장하는 것 즉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그를 닮아져가고 그를 본받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온전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죄인이며 불완정한 존재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상처와 가시를 가지고 있습니다. 멀리 있으면 보이지 않는 가시들이 가까이 가면 갈수록 상대방을 찌릅니다. 이런 상처와 가시를 제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인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그 분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장성”이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텔레이오테스” 인데 그 뜻은 온전한 분량에 이르는 것 또는 지정된 목표에 도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란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그리스도의 성품을 본받고 제자로서의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고 그 목표에 달하기 위해 꾸준히 성장해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땅에서의 삶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거룩입니다. 거룩이란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성장하는 것 즉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그를 닮아져가고 그를 본받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온전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죄인이며 불완정한 존재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상처와 가시를 가지고 있습니다. 멀리 있으면 보이지 않는 가시들이 가까이 가면 갈수록 상대방을 찌릅니다. 이런 상처와 가시를 제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인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그 분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우리는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가 될 때 진정으로 섬기는 자, 작은 자, 돕는 자가 되어집니다. 내 중심으로 신앙생활하면 하나 되지 못합니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십니다. 머리 중심으로 하나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영광 받으시게 하기 위해 나를 포기 할 때 하나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늑대와 같은 사탄 마귀가 우리 교회를 무너뜨리고 공격해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뭉쳐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될 때 어떤 고통과 핍박과 어려움도 이겨낼 뿐만 아니라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될 것이다. 2)영적인 미숙아에서 벗어나 자라나야 합니다. 오늘 14절 말씀에서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어린아이는 믿음이 자라나지 않는 영적인 미숙아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태어난 어린 생명이 성장하지 않는다면 심각한 문제입니다. 어린아이 신앙은 사람의 말과 행동에 따라 신앙이 요동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풍조가 어떻게 변할 지라도 믿음만은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날마다 성장하며, 자라나야 합니다. 3)우리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나기 위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할 뿐만 아니라 성도들 간에 서로 연결되고,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 한 몸, 한 지체가 되었으니 이제는 서로 돕고 사랑으로 협력해야 합니다. 손과 발이 협력해야 합니다. 눈과 귀가 협력해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든든하게 서가게 하는 길입니다.
어떤 청년이 진심으로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긴 노력 끝에 결혼을 위한 준비를 마치고 반지를 준비해서 그녀의 집으로 가는 중이었습니다. 너무나 기쁘고 흥분되는 마음에 청년의 걸음은 점점 빨라지더니, 있는 힘껏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더 빨리 청혼하고 싶은 마음에 앞도 잘 살피지 않고 정신없이 달렸습니다. 하지만 청년이 도착한 여인의 집은 굳게 잠겨 있었습니다. 여인은 얼굴도 내비치지 않고 다른 사람을 통해 청년과 만나고 싶지 않다는 차가운 말을 전했습니다. 며칠 후에 여인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괴로워하던 청년에게 여인이 보낸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나는 그날 당신을 기다리며 창문 밖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당신이 우리 집을 향해 달려왔을 때 저는 정말로 기뻤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얼마나 급했던지 마주 오던 누추한 옷차림의 한 여성과 부딪혀 넘어지게 하고는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그대로 오는 당신을 안타깝게 지켜보았습니다. 약한 사람을 배려할 줄 모르는 사람과 어떻게 결혼을 하겠습니까?” 이렇게 사랑을 잃은 청년은 영국의 유명한 수필가인 [찰스 램]입니다. 그 이후 찰스 램은 누구에게나 친절하려고 노력했고, 자신의 잘못으로 사랑을 잃었지만 인생의 소중한 것을 배웠다고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아끼고 배려하고, 사랑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워가는 지름길입니다. 자신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고, 섬겨주고, 사랑해 줄 때 좋은 교회가 되어져 갈 것입니다.
3.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연결되고, 결합되어 그의 몸을 자라게 하는 교회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의 청사진은 어떤 모습입니까? 16절에 보면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의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이 구절을 공동번역 성경으로 보면 “우리의 몸은 각 부분이 자기 구실을 다함으로써 각 마디로 서로 연결되고 얽혀서 영양분을 받아 자라납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도 이와 같이 하여 사랑으로 자체를 완성해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 연합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 하나가 되어 돕고 섬길 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우리는 절대로 혼자 성장하거나 자라나지 못합니다. 오늘 16절 말씀에서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서로 사랑의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까지 계속 자라나야 합니다. “이제 늙어서 믿음생활도 힘들어!” 맞는 말일까요? 틀렸습니다. 겉사람은 늙었지만 속사람은 더 젊어질 수 있는데 성령의 지배를 받지 않고 겉 사람의 지배를 받기에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은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더 밝고 맑아야 합니다. 15절을 보면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우리는 사랑 안에서 범사에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나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분량까지 성장하기 위하여 땀과 눈물과 피를 흘리기까지 충성해야 합니다. 우리의 시간과 재능과 물질을 아낌없이 투자해야 합니다. 그때에 나의 믿음이 성장할 뿐만 아니라 우리 교회는 큰 나무로 자라나게 될 것입니다.
초대 교회는 로마의 강한 힘 앞에서 약한 사람들이 모여서 오직 주님의 말씀을 신뢰하며 전적으로 기도하는 공동체였습니다. 초대교회는 부흥회, 전도총동원주일, 이웃초청 잔치 같은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교회는 날마다 부흥하고 성장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아무리 크나큰 세상의 핍박이 있었지만 약한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며 서로 사랑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가기 때문입니다. 어느 정도 사랑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었는지에 대하여 행4:32절에서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고 하였습니다. 한마음과 한 뜻으로 연결되어 사랑을 나눌 때 교회는 핍박 속에서도 더욱 더 든든히 세워지며 성장하고 부흥하였습니다.
어떤 청년이 목사님에게 한 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그 목사님이 “핵무기?”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에이즈”, “아닙니다.” “그럼, 뭔데?” 그 청년은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은 어리석은 사람이 소신 있게 사는 것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이 소신 있게 살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됩니까? 괴롭힘을 당합니다. 푼수 같은 사람이 소신 있게 살면 어떻게 됩니까? 민폐를 끼치게 됩니다. 어리석은 사람이 열심만을 앞세운 채 나아가면 럭비공처럼 어디로 튈지 알 수 없습니다. 사울이 주님 만나기 전에 소신 있는 어리석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열심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열심은 잘못된 열심이었습니다. 방향이 잘못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면서 오히려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는데, 일등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신자들을 다 잡는 것으로 성이 차지 않아, 다메섹이라는 곳까지 원정을 가서 신자들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결국 사울의 이러한 소신 있는 행동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자신을 십자가의 원수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거룩한 성도는 소신있게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인간적인 소신은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려야 합니다. 성도는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며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의 소신대로 움직이는 교회는 문제 있는 교회입니다. 날마다 소신과 소신이 부딪히기 때문에 바람 잘 날 없습니다. 싸움이 끊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자기 소신이 분명해도 말씀이 아니라고 하고 성령님께서 아니라고 하면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내가 하기 싫은 일도 성경이 하라고 하면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와 제 아내는 닮았다는 소리를 많이 듣습니다만 솔직히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목구비가 다 다르게 생겼습니다. 사람의 외모가 각기 다른 것처럼 사람은 배경이나 성격 등 모든 부분에서 다릅니다. 그런데 이렇게 다른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가 교회인 것입니다. 같은 것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긴다는 것뿐입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지만 조화로운 교회가 되는 비결이 있습니다. 용광로 안에 다양한 모양의 철들이 들어가지만 용광로에 들어간 철들은 자기 모양을 고집하지 않고 다 녹아서 하나가 됩니다. 그리고 새로운 모양으로 재탄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용광로에 들어간 철과 같이 되어야 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죽여야 합니다. 높아지고자 하는 마음도 내려놓고 내 주장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합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이 사시는 것입니다. 무지개는 일곱 빛깔입니다. 그런데 일곱 빛깔이 각각의 색깔을 가지고 있지만 혼란스럽지 않습니다. 지저분하지 않습니다. 조화롭게 빛을 발합니다. 공동체에서 다른 사람의 빛깔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조화롭고 아름답습니다. 나와 다르다고 판단하고 정죄하면 안 됩니다. 다름을 인정하고 자기의 빛을 내도록 해주면 무지개처럼 아름다워지는 것입니다. 갈3:28절에 보면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고 말했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가 하나 되려면 모두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의 뜻을 받아드리면 예루살렘 교회처럼, 안디옥교회처럼 하나 된 교회, 조화로운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주일의 설교] 이런 교회가 되게 하소서!(계 3:7~13)
주님께서 칭찬하는 교회됩시다
말씀은 절대 순종하며 결코 예수님을 배반하지 말아야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계 3:11)
▲ 박기준 목사
어느 전철 안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청년 두 사람이 심하게 다투고 있습니다. 그 광경을 본, 점잖은 신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여보게들 왜 그렇게 싸우나, 여기가 국회인가? 교회인가?” 오늘날 현대인들이 교회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교회를 바라보면서 “저 교회는 참 좋은 교회야”, “저 교회는 문제가 많은 교회야” 라고 나름대로 평가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은 그 어떤 사람의 평가보다 더 정확하게 우리 교회를 평가하고 계시다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을 보면, 예수님은 소아시아에 있던 7개의 교회에 대해서 칭찬을 하시며 책망도 하시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빌라델비아 교회는 오직 칭찬만 받은 교회로 소개됩니다. 주님께서 이 교회를 칭찬만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늘 우리 교회는 어떤 교회가 될 때 주님께 칭찬받는 교회가 될 수 있을까요?
첫째, 어떤 환경에서도 말씀이라면 순종하는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실 때 무엇을 보실까요?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삼상 16:7). 그 사람의 믿음을 보십니다(마 9:2). 그리고 그 믿음을 쓰십니다(마 9:29).
이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쓰실 때 외적인 크기나 재정 상태를 보시는 게 아니라, 그 교회의 믿음을 보십니다(계 2:13). 그 교회 성도들이 정말 주님을 사랑하는지, 그리고 주님의 말씀이라면 순종하는지를 보십니다. 그리고 그런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주님이 보실 때 빌라델비아 교회는 이런 교회였습니다. 8절을 보면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주님이 보실 때 작은 능력을 가진 교회였습니다. 당연히 사람들도 그렇게 보았을 겁니다. 다시 말해서 빌라델비아 교회는 소수가 모인 교회였고, 교회 구성원들도 그 당시 사회적인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9절을 보면 사탄의 회당이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교회를 핍박하는 유대인들의 모임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신앙적 핍박과 환난도 겪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교회는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말씀을 지키는 교회였습니다. 여러분! 과연 좋은 교회라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좋은 교회의 기준은 많은 성도가 모이는 것일까요? 아니면 수천 명이 들어갈 수 있는 큰 예배당을 갖고 있는 것일까요? 좋은 교회는 사람이 보는 외형적인 조건에 의해서 결정될 수 없습니다. 좋은 교회의 기준은 어떤 환경에서도 말씀을 지키는 교회입니다.
요즘 교회마다 심각한 문제는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성도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휴가철이 되면 가족들과 함께 휴가 가야 간다고 주일을 성수하지 않습니다. 김장철에는 김장해야 한다고 주일을 성수하지 않습니다. 명절에는 명절이라고 또 주일을 지키지 않습니다. 주일 낮 예배는 본당에서 모이지만 오후예배나 밤 예배는 교육관에서 모여야 합니다. 낮 예배 시간에 그 많던 성도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출애굽기 31장 13절을 보면,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게 함이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주일은 주님의 날이며(레 19:30), 하나님과 나 사이에 영원한 언약인데(출 31:16), 이미 주일성수의 믿음을 잃어버린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가요?
주중에 예배의 자리를 지키는 성도들은 얼마나 될까요? 새벽기도회에는 누가 나와서 기도의 자리를 지키고 있나요?
“나중에, 그리고 환경이 되면 말씀대로 살겠습니다”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부터 작은 능력을 가진 부족한 모습이라도 말씀대로 살려고 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이 기뻐하시고 칭찬하시는 성도! 그런 교회가 될 것을 확신합니다.
둘째, 어떤 환경에서도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는 교회입니다.
8절 마지막 부분을 보면, 예수님은 이 교회를 향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핍박과 환난이 심했기 때문에, 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주님의 이름을 배반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데 교회를 향해, 옷을 더럽힌 자들이 있다고 지적하셨는데, 여기서 옷을 더럽혔다는 것은 믿음이 변질된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빌라델비아 교회는 비록 작은 능력을 가진 교회였지만, 주님을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교회들도 이런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적당하게 세상과 타협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굳게 지켜야 합니다.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빌라델비아 교회와 같이 어떤 환경에서도 말씀에 순종하는 교회,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는 교회, 세상과 구별된 교회가 됨으로 주님의 기쁨이 되고 칭찬받는 교회가 되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는 교회, 주님의 눈과 마음이 머무는 교회, 주님이 인정하시며 은혜와 복을 주시는 교회가 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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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교회 되게 하소서(20.04.19)
이런 교회 되게 하소서(행 2:42-47)
– 교회창립 123주년 기념주일 –
오늘은 우리 영종중앙교회의 창립 123주년 기념주일이다. 1897년 4월 20일, 영종 사람인 하춘택, 하성택 형제와 정송후, 정영후 형제가 인천내리교회에서 예수님을 믿고, 고향인 영종에 돌아와 자기 집 사랑방에서 예배한 것이 우리교회의 시작이다. 우리교회는 지역복음화와 세계복음화를 위해 힘쓰고 있다. 우리교회의 모델은 사도행전 속 초대교회, 예루살렘교회이다. 초대 예루살렘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1. 경건생활에 힘쓰는 교회(42)
본문의 말씀대로 경건을 설명한다면 사도의 가르침을 받는 것과 기도에 힘쓰는 것이다. 사도의 가르침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구원사역, 즉 복음에 대한 가르침이다. 또한 초대교회가 역동적일 수 있었던 것은 기도의 힘이다. 진정한 경건생활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는 것과,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말씀과 기도는 신앙생활과 교회생활의 기본이고 기둥이다. 말씀과 기도로 경건생활에 힘쓰라.
2. 사랑으로 교제하는 교회(42)
우리교회가 바라고 추구하는 예루살렘교회의 두 번째 특징은 사랑의 교제이다. 교제는 신약성경 전체에서 강조되는 교회의 기능 중 하나이다. 교제는 정신적 교제뿐 아니라 물질적 교제를 포함한다(고후 6:14, 롬 15:26). 교제의 또 다른 모습은 성찬과 애찬이다. 성찬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영적 교제이며, 애찬은 성도들이 함께 모여 식탁을 통해 나누는 물질적 교제이다(46). 사랑으로 교제하는 교회가 되라.
3. 하나님과 사람에게 인정받는 교회(47)
예루살렘교회는 백성에게 칭송받았고 하나님께도 인정받았다. 하나님은 예루살렘교회에 많은 성도를 맡겨 주셨다. 빌립보교회는 바울에게 인정받고 칭찬받는 교회였다(빌1:3-5). 데살로니가교회 역시 바울에게 인정받고 칭찬받는 교회였다(살전 1:2-3). 빌라델비아교회는 예수님께로부터 인정받고 칭찬받았다(계 3:8). 이런 교회들처럼 우리 영종중앙교회도 하나님과 사람에게 인정받는 교회가 되라.
오늘은 교회 창립 123주년 기념주일로 지키며 ‘이런 교회 되게 하소서’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묵상했다. 우리교회는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하는가? 첫째, 경건생활에 힘쓰는 교회이다. 둘째, 사랑으로 교제하는 교회이다. 셋째, 하나님과 사람에게 인정받는 교회이다. 우리 영종중앙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기를 바란다.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가 합심하여 이런 아름다운 교회를 만들어 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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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교회의 도래
<제 3교회의 도래(The coming of the third church)> 이것은 무명의 시제, 월버트 뷸만(Walbert Büehlmann)이 세계교회의 역사적 운명을 두고 예언한 글이었습니다. 뷸만은 희랍정교회를 상징으로 ‘제1교회’라 했습니다. 로마 가톨릭의 절대적 교권주의에 저항하면서, 교회의 자주권을 높이 들었던 제1교회! 제1교회는 초대교회가 구현한 예배 전통을 지금까지 보전해온 유산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뷸만은 제1교회를 ‘아침에 지는 별’이라 불렀습니다. 살아 숨 쉬는 생명력을 잃어가는 교회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역사로부터의 단절이었습니다. 제1교회는 영성의 이름으로 반역사적이며 반개혁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제1교회는 영성과 역사 사이의 단절로 자신을 영적 고립주의의 수렁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제1교회의 위험성은 세계 모든 교회! 아니 오늘의 한국교회를 위협하고 때로는 유혹하는 독소일 수도 있습니다.
2000년의 교회사에는 1500여 년을 주도해온 교회가 있었는데 뷸만은 이를 ‘제2교회’라 했습니다. 제2교회는 놀랍게도 전 세계 로마 가톨릭교회와 유럽과 미국을 주도해온 개신교회를 모두 포함하는 기독교 왕국(Christian Empire)입니다. 제2교회는 신앙의 이름으로 세상을 정복하고, 그 중심에 기독교 왕국을 세워 온 전투적 교회(The Church Militant)입니다. 승리주의의 표상이 된 제2교회! 무조건 크고 강한 조직과 제도 그리고 건축으로 세상을 압도하여 온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가톨릭 사제이면서도 그는 냉철한 언어로 제2교회를 ‘아침에 사라지는 달’이라고 비유합니다. 처음 사랑을 버린 교회라는 것입니다. 세계 정복과 그 중심에 기독교 왕국을 세우는 것이 마치 하나님나라 실현인 것처럼 착각하여 모든 에너지를 쏟아온 제2교회! 그런데 바로 비만증 때문에 또 다시 역사로부터 단절되면서 고립주의에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뷸만은 그의 붓끝을 21세기로 돌리고 있습니다. 20세기에서 발화되어 21세기로, 아니 제3의 밀레니엄으로 치솟는 교회 하나가 등장하고 있다고 흥분하였습니다. 남미교회·아프리카교회·아시아교회를 묶어 그는 ‘제3교회’라 했습니다. 그런데 제 3교회는 ‘별은 지고’, ‘달마저 사라져가는’ 미명! 미명을 헤치고 떠오르는 ‘태양’이라고 불렀습니다. 제3교회는 21세기를 비출 지상의 마지막 희망이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긴긴 가난을 씹어오고’, ‘온갖 착취와 압제에 시달렸으며’, ‘죽음의 질병’에도 불구하고 오염되지 않은 영성과 열정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의 한국교회가 제3교회로서의 가능성이 살아있다면! 그것은 고난의 영성이 1000만 그리스도인들의 영혼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까지 세계 교회의 비밀을 풀이한 뷸만은 제3교회를 두고 대단히 중요한 신앙적 충고 하나를 던졌습니다. 제3교회는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영성과 제도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제3교회가 지평에 떠오르는 태양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두 가지를 동시적으로 회복해야 한다는 경고입니다. 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신앙’이고 다른 하나는 ‘그 부활 신앙이 역사와 인간의 아픔을 치유하는 힘’입니다. ‘부활’, ‘신앙’은 제3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존재론적 사건이며, 그 부활 신앙으로 인간의 아픔을 치유하는 Praxis는 교회의 존재론적 양식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였습니다. 이념이나 제도에 의한 Praxis가 아니라 부활에 의한 치유와 변화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제3교회로의 발돋움
여기서 저는 우리가 그토록 사랑하고 아끼는 오늘의 한국교회가 제3교회로 발돋움을 하기도 전에 그 문턱에서 주저앉을지도 모르는 심각한 위기를 보고 있습니다. 그 위기는 ‘교인 감소’라는 현상에서, ‘신학교육의 난맥’에서, ‘보수와 갈등’에서 그리고 ‘목회자들의 자질’에서 얘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의 고민은 이것들을 넘어서 신앙 깊은 곳에 자리 잡아온 ‘이원론’, 교묘하게 위장된 이원성을 추적하는 데 있습니다. 부활절 연합예배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을 만민이 경험하고, 그리스도가 주관자가 되어야 하는 하나님나라 잔치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는 이 거대한 행사를 누가 주관하며, 누가 단상 윗자리에 앉는가라는 가장 하찮은 일에 노예가 되어 사실상 그리스도의 부활생명을 거부하고 있는 ‘종교꾼‘으로 전락했습니다.
목회자들은 목회자이기 전에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날마다 씨름하면서 바로 그리스도의 생명이 이 땅의 온갖 아픔을 치유하는 생명의 힘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하지만 오늘의 한국교회는 부활의 주님을 교묘히 거부한 채, 그 틈새에 목회자가 예배의 주역이 되었으며,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둔갑해 버렸습니다. 우리는 제3교회로 가기도 전에 제2교회의 타락을 그대로 모방하는 종교집단으로 변모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어찌 그리스도의 몸이라 부르는 교회 안에 ‘세습’이라는 말과 행동이 가능하다는 것입니까?
현존속에 부재
신약 성경 4복음서와 사도행전에는 연속적이면서도 비연속적이며, 비연속적이면서도 연속성을 가진 두 개의 공동체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 공동체는 ‘12제자’입니다. 12제자 공동체의 특성은 ‘자생 그룹’도, ‘자발적 집단’도 아니라 처음부터 ‘주님으로부터 부름 받은 내부 공동체’라는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부름은 처음부터 장차 모든 민족을 불러 모으실 하나님의 종말론적 회집(Eschatological Gathering)을 미리 경험하고 또 증언하는 종말론적 내부 공동체이었습니다.
어부의 직업을 과감히 포기했다는 것! 사람 낚는 어부로 부름 받았다는 것! 영원한 그 무엇에 생명을 건다는 그것은 처음부터 종말론적이었습니다. 그리고 12제자는 임박한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하시는 그리스도에게서 영원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병든 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그리스도의 손끝에서 이 세상 모든 권력과 사탄의 권세까지도 압도하는 하나님나라의 권세를 보았으며, 세리와 죄인 그리고 창녀까지도 초청하여 식사를 나누는 식탁 공동체에서 제자들은 장차 펼쳐 질 하나님나라 메시야 잔치를 미리 보았습니다. 이것은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증언하기 위한 공동체 훈련이었습니다.
그리고 12제자는 하나님의 세계로 파송되어 증인이 되어야하는 ‘보내심’의 훈련에로까지 이어졌습니다. 하나님나라 증인 공동체로서 갖추어야 했던 ‘부르심·세우심·보내심’이라는 3중 구조를 완벽하게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토록 완벽한 12제자 공동체가 한 순간에 깨지고, 부서지고, 흩어져 버렸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완벽한 공동체가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어둠 앞에서 한 순간 추락하고 깨지고 말았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12제자도, 공동체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제자 공동체는 허상이고 허구였습니다. 이 미스터리를 두고 앙리 노엔(Henri Nouwen)은 ‘Absence in Presence’라는 말로 풍자했습니다. ‘현존속의 부재’라는 뜻입니다. 함께 있었으나 함께 있지 아니한 아이러니, 이것이 십자가 앞에서 무너진 12제자 공동체의 실상이었습니다. 3년이라는 긴 세월, 그것도 밤과 낮으로 몸으로 함께 한 3년, 하나님나라의 부름을 받고, 증인으로 세움 받으며, 파송의 훈련을 거치면서 주님과 함께 있었으나 (현존)제자들은 그 누구도 주님을 주님으로 본 사람은 없었습니다. 우리는 그 원인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것은 정치적 욕망 때문이었습니다. 눈이 가려졌던 것입니다.
저는 또 다시 한국교회의 위기를 보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위기는 ‘현존속의 부재’의 위기라고 명명할 수 있습니다. ‘좋으신 하나님’만을 노래하며 거대한 교회와 형식을 가꾸어가는 동안,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한국교회는 한순간 무너질지도 모르는 위기가 있습니다. 지도자로부터 시작하여 수많은 젊은 목회자들 속에 파고드는 화두가 한마디로 성공적 목회라면 그 뒤에는 정치적 욕망이 눈을 가리고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수없이 부르고, 주님의 영광을 노래 하지만, 우리는 ‘내 성공’에 눈이 어두워 사실상 주님을 보지 못 할뿐 아니라 주님과 교인사이를 갈라놓고 그 자리에 내가 군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2제자 공동체와 오늘의 한국 교회는 현존속의 부재라는 닮은꼴의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4복음서와 사도행전에는 또 다른 공동체 하나가 등장합니다. 예루살렘에 태동된 초대교회라는 ‘교회(Ecclesia)공동체’입니다. 놀랍게도 초대 교회 공동체는 깨지고 부서지고 흩어졌던 11제자와 맛디아 그리고 120문도가 다시 모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제 8일, ‘주님의 날’에 그들은 가정에서 하나님을 예배하였습니다. 사도들의 가르침과 함께 떡을 떼고 주의 만찬을 나누는 공동생활이었습니다. 그리고 전도에 힘쓰고, 필요에 따라 재산을 공유하고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일에 모두가 헌신하였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고, ‘세우심’이 있었으며, ‘보내심’이 있었기에 제자들이 체험했던 3중구조가 살아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초대교회 공동체는 제자 공동체의 연장은 아니었기에 비연속적이지만, 3중 구조의 공동체 체제에서는 연속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 공동체와 초대교회 공동체 사이에는 한 가지 결정적인 차이점 하나가 깔려있었습니다. 제자 공동체에는 항시 주님이 함께 계셨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에는 주님께서 몸으로 함께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몸으로 계시지 아니한 그분이 그들 가운데 임재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부재 속의 현존이었던 것입니다. 부재 속의 현존이라는 역설이 초대교회의 미스터리였습니다.
부활사건으로 새롭게 된 공동체
여기서 우리는 핵심적인 신학적 질문 하나를 던져야 하는 중요한 자리에 왔습니다. 이 질문은 “무엇이! 그 무엇이 깨지고 흩어진 12제자 공동체를 다시 불러 모아 예루살렘 초대교회라는 새로운 공동체로 태동시켰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여기에 함께하는 모든 목회자 한 사람의 신앙 양심 앞에 던지는 존재론적 질문이기도 한 것입니다. 질문에 대한 신학적인 응답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한국교회의 미래와 그 운명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 어떤 누구를 비판하거나 비난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학적 진술 앞에서는 솔직해야 할 것입니다.
‘무엇이 12제자 공동체와 초대 교회 사이를 이었느냐?’라는 질문 앞에 로마 가톨릭교회는 단호히 ‘베드로’라고 부르며, 베드로부터 이어지는 사도 계승이라 대답합니다. 반대로 이 질문 앞에 경험론자들은 ‘마가의 다락방의 뜨거운 체험’이라 대답합니다. 그러나 이 질문 앞에 하나님의 구원사에서 성경을 읽는 신앙과 신학은 그 무엇은 ‘베드로’와 ‘뜨거운 체험’ 이전에 일어난 엄청난 사건이라고 대답합니다.
성경은 그것을 ‘죽음을 이기시고 죽음을 삼키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이라고 증언합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부활절 예배를 두고 누가 주최할 것이냐? 누가 단상 높은 자리에 앉을 것이냐로 다툼질이나 하는 종교꾼들의 놀이 대상이 아닙니다. 부활하심은 제자뿐 아니라 ‘죽음’의 권세를 꺾으신 하나님의 생명의 완성이었기에, 부활은 우주적이며, 전 인류적이며, 전 역사적이며, 전 시간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흩어졌던 제자들이 죽음의 도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것은 죽음까지도 하나님의 생명을 만났기 때문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선생님과의 만남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생명!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이는 영원히 죽지 않는 하나님의 생명! 이 생명 안에 복음이고 기쁨의 좋은 소식이었습니다.
사도행정 2장에 나오는 베드로의 설교의 처음 Key Word는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라는 부활 신앙고백이었습니다. 깨지고 흩어진 12제자를 초대교회 공동체로 이어간 그 무엇은 부활사건이었습니다. 여기서 부활 사건은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존재론적 사건이고 근거가 되었습니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가 펼치신 인류 구원 드라마의 주역으로서 이 역사와 우리 가운데 임재 하십니다.
결론으로 내리고자 합니다. 십자가에서 흩어졌던 부활에서 태동 된 초대 교회 공동체! 그들이 드린 예배는 한마디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사는’ 종말론적 사건이고 경험이고 감격이고 변화였습니다. 사도로부터 배운 가르침은 주님의 말씀과 십자가 그리고 부활하심과 다시 오실 날의 소망이었습니다. 그들이 나눈 떡과 주의 만찬은 미리 맛보는 종말론적 행위였습니다. 재산을 나누어주고,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일은 하나님나라에는 부자도 가난한 이도 없는, 아니 모든 이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영접되는 예시적 행위였습니다. 그러기에 초대교회는 부활을 증언하고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서 경험하고 또 대망하는 부활의 후속 사건(Noetic Event)였습니다. 부활이 고백되고 경험되고 증언되는 한 교회는 비로소 교회일 수 있었습니다.
이런 교회가 되게 하소서
한국교회는 여러 가지 위기적 징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21세기 하나님의 창조인 지구촌을 비출 제3교회입니다. 저는 한국교회를 하나님께서 남겨두신 남은 자 공동체라고 믿습니다. 1000만을 헤아리는 그리스도인의 영혼 깊은 곳에 남겨두신 고난의 영적 가능성이 살아있는 한, 하나님께서는 한국교회를 다시 세우실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목회자들입니다. 목회란 하나님께서 하시는 구원 사역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가 목자라고 착각하고 목청을 높이고 있습니다. 험한 말·쌍스러운 말·반말을 섞어가며 텔레비전에서, 강단에서 목청을 높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누가 잘하나 식의 엄청난 ‘목회성공 서바이벌 게임’에서 이기기 위해 목숨 걸고 새로운 프로그램·성공 모델들을 찾아 전국뿐 아니라 미국·남미·싱가포르를 헤매고 있습니다. 그러는 동안 하나님과 교회 사이의 만남과 응답이라는 감격과 기쁨을 사실상 가로 막고, 단절시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소박하지만 어려운 포기부터 우리 시작하십시다. ‘교인 만들기’, ‘우리교회 교인 만들기’, ‘내 교인 만들기’ 목회를 포기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미래의 나의 목회는 신자 하나하나를 하나님 백성으로 세우는 목회로 전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막혔던 하나님의 목회가 다시 시작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회가 시작되는 그곳에, 우리 목회자들은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 사이의 증언자로, 대변자로 서서 하나님을 증언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대변하는 통로로 길을 예비하는 자로 다시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
이때부터 예배는 그 횟수와 형식을 넘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부르심 앞에 하나님의 백성 모두가 응답하는 종말론적 사건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사는 예배의 회복이 일어날 것입니다. 목회자가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 사이의 중보자 되기를 포기하고, 철저한 증인으로 변신하는 그 순간부터 ‘설교’는 형식과 횟수를 넘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증인이 되고, 하나님의 백성은 목회자에게 응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응답하는 종말론적 사건이 될 것입니다.
성만찬은 신비적인 연합과 함께 하나님나라를 미리 맛보는 종말론적 축제가 되며, 교육은 하나님 백성 모두를 하나님나라 증인으로 세우는 훈련이 되며, 선교와 봉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세계를 치유하는 섬김이 될 것입니다.
한국교회와 목회자는 우리 안에 선악과 다가오는 ‘온갖 비본질적인 것들’, ‘생명 없는 것들’에 메여왔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못보는 우리의 위선을 회개하고, 이후로는 그리스도의 부활생명과 하나님 백성 사이에 말씀과 감격, 회개와 환희가 일어나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임재하시는 목회로 전환해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한국교회를 다시 드시고 지구촌을 비추는 등불로 인 치실 것입니다. 목사님이 서 계신 자리는 거룩한 땅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곳에 임재하시고 역사하시기 때문에 목회자가 아니라 증언자가 되어 돌아가십시오.
은준관 /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총장
[오늘의 설교] 이런 교회가 되게 하소서
데살로니가 교회는 고난 속에서 믿음을 지키고 성장한 교회입니다. 교회 안에는 일을 만드는 자들과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거짓교리를 가르치는 잘못된 교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혼란에 빠져듭니다. 이에 따라 바울은 교회의 참 신앙을 격려하고 종말적 징조들을 잘 설명하며 잘못된 교리를 바로 잡기 위해 디모데를 보냅니다. 본문 데살로니가 교회를 통해 이 시대의 건강한 교회는 어떤 교회인지 알아보고자 합니다.
먼저 깨어 있는 교회입니다. 믿음이 무엇이고 믿음을 통하여 어떤 비밀한 일이 일어나는 지 아는 교회가 깨어있는 교회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말씀을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고(살전 2:13) 열린 마음으로 받았습니다(행 17:11). 그 결과 말씀이 데살로니가 교회와 교인들 사이에 역사했습니다.
건강한 교회는 사랑의 수고가 있는 교회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곳입니다. 그리스도를 닮아가지 않으면 교회의 사명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위해 모든 것을 다 주셨습니다(롬 8:32). 사랑받을 가치가 없는 데도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그 받은 은혜와 사랑을 몸소 실천하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도 힘든데 어디에 신경 쓰느냐고 헌신할 수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 교회는 서로 관심을 가지고 보살펴 주며 위로하였고 공급하고 베풀었습니다.
건강한 교회는 소망의 인내가 있는 교회입니다. 헬렌 켈러는 앞이 막히고 뒤가 막히고 옆이 막힐 때 하나님이 하늘 문을 여신다고 했습니다. 그는 극한 핍박과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재림을 사모하며 인내하고 기다렸습니다. 아니 버티며 살았다는 표현이 더 맞습니다.
요즘 우리 주변을 보면 경제적, 가정적, 신앙적인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많이 봅니다. 지금 어려움에 처해 있습니까. 여호사밧이 주님만 바라 본 것처럼 주님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현재의 고난이 장차 우리에게 도래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하신 말씀을 붙드시길 바랍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게 하심을 보며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품고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인내하시기를 바랍니다. 천국은 확실히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계십니다. 우리의 헌신이 천국에서 해같이 빛날 그날을 고대하면서 임마누엘의 약속을 붙잡으시길 바랍니다.
끝으로 주의 말씀을 각처에 전하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다. 교회다운 교회는 복음을 전하고 제자를 삼는 교회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삶의 우선순위를 주님께 두고 우리 모두 하나가 돼야 합니다. 예수를 전하는 교회와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복음의 배달부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하나가 돼 이런 교회와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태진 목사(용인서부교회)
[교회창립] 이런 교회 되게 하소서 (마 16:13-20)
이런 교회 되게 하소서 (마태복음 16:13-20)
지난 주일에 읽었던 본문을 다시 읽었습니다. 오늘로 스믈 여섯살 된 우리교회가 조금 전에 불렀던 찬송 ‘이런 교회 되게 하소서’의 내용처럼 되어지길 소원합니다. 이런 교회가 실제로 있었으니 사도행전의 처음 교회들, 특히 예루살렘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 교회는 지금처럼 조직이 탄탄하고 시설 좋은 예배당에서 드리는 예배가 아니었지만 모일 때마다 기쁨이 넘치는 교회, 말씀과 기도와 사랑이 뜨거웠던 교회였습니다. 비록 핍박과 고난이 있었지만 그 냉혹한 환난의 비바람을 넉넉히 이기고도 남는 위로와 평화가 있던 교회였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 부활과 승천을 목격한 증인들이었으니 분명한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살던 성도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 초대교회가 흠없이 완벽한 교회였다는 말은 아닙니다. 워낙 급하고 강하게 몰아치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미처 감당치 못한 성도들에게서 미숙한 점들도 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회개하며 예수를 구주로 믿고 영접한 성도들의 수는 날마다 더해졌고 교회는 급속도로 확장되었습니다. 은혜가 충만하여 내 마음이 평안하니 이웃을 이해하고 용서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하나님 나라가 그들 가운데 있으니 세상 욕심과 미련이 사라지고 날마다 기쁜 천국의 생활이었습니다.
이런 은혜를 체험하기 전에는 내 앞가림에 바빠 다른 사람 돌아볼 여유가 없었고 용서와 이해가 부족하며 내것 먼저 챙기느라 각박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강하게 움직이시니 사람들이 변하고 사회가 새롭게 바뀌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즐거움으로 내놓은 물질은 가난한 이웃들에게 나누어져 예루살렘교회 성도들 중에 생활이 어려워 고통 당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교회는 이웃들에게 칭찬을 들었고 주님은 믿는 사람들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특징은 한 마음으로 모여 예배하고 교제하며 나누고 섬김 그리고 성도의 수가 날마다 늘어나는 것 등입니다. 그런데 교회의 평화와 행복은 그렇게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나사렛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면 그를 따르던 무리들도 자동적으로 흩어지리라 기대했던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오순절 이후 폭발적으로 확장되는 교회를 보고 긴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을 그대로 두면 전에 나사렛 예수를 따르던 것보다 그의 제자들을 따르는 군중이 더 많아져 세력이 강해지면 폭동이 일어날 위험이 있다 판단했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했던 과거의 책임을 추궁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있었습니다. 그러다 군중들이 데모를 일으키면 로마 당국이 군대를 파견하게 되고 로마군대가 간섭하기 시작하면 그동안 누려왔던 성전 자치권도 빼앗기고 어쩌면 성전이 문을 닫을 수도 있다는 위기의식입니다.
그래서 주동자로 보이는 베드로와 사도들을 잡아 가두고 매를 때리며 다시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말하지도 말고 아무 것도 가르치지 말라 협박하였습니다. 사도들이 체포되고 심문을 당하면서 축제 분위기에 젖었던 예루살렘 교회에 환난의 그림자가 덮쳐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계속 증거하였고 교회는 갈수록 더 성장하였으며 심지어 제사장들 중에도 십자가의 복음에 굴복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결국 스데반 집사의 순교사건을 시점으로 대대적인 핍박이 일어났고 사도들 외에 성도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유대와 사마리아와 모든 땅으로 흩어졌습니다. 이것이 사도행전 2장부터8장에 걸쳐 기록된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태동과 성장 그리고 핍박과 흩어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루살렘교회는 사도들을 통해 세우신 주님의 첫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왜 그 교회가 꽃이 다 피기도 전에 핍박으로 흩어짐을 당했을까요? 이왕 교회를 세우셨으면 계속 승리하는 교회로 보존하시고 성도들을 편안하게 지켜주지 않고 핍박자들의 손에 무참히 깨져 흩어지도록 방치하셨을까요?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하셨는데 주님의 교회가 일 년도 버티지 못하고 흩어지도록 그냥 두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도행전을 읽는 독자들에게 아쉬움과 의문이 드는 부분입니다.
마태복음 28장을 보면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하셨고, 사도행전 1장에는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교회를 세우신 목적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하는 믿음을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함께 나누며 그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삼고 이 세상에 대하여 주님의 증인으로 살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이 교회가 맡은 가장 기본적인 사명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 교회는 열심히 모이고 세상으로 흩어져 주의 증인으로 살아야 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와 사도들은 예수님의 간절한 당부 가운데 첫 단계에 머물러 거기 안주하려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예루살렘에만 모여 왕성한 교회를 이루고 아직 더 큰 세상을 향한 흩어짐을 시도하지 않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다른 사도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전도하여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제자로 삼아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주의 이름으로 날마다 모여 예배하며 사랑의 떡을 나누었습니다. 음식만 나눈 것이 아니라 재산도 팔아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며 정말 재미있고 따뜻한 교인들끼리의 모임이 되었습니다. 거기에 가면 천국 복음이 있고 은혜로운 찬송이 있습니다. 뜨거운 기도와 기적 체험이 있고 따뜻한 교제가 있으며 생활고로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성도들의 모임에 가면 모든 피로와 고민과 걱정을 다 떨쳐버릴 수 있으니 삶의 위로가 됩니다. 그래서 더 잘 모이고 교인들끼리 똘똘 뭉쳤습니다.
교회란 본래 이런 모임이어야 합니다. 거기서 나의 존재감을 발견합니다. 내가 여기 모여 있는 사람들과 하나이구나. 나와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나와 같은 신앙을 고백하며 같은 소망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여기가 내가 있을 곳이구나! 교회는 이런 감동을 주고 받는 모임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끌려 또 가고 싶고 보고 싶어 다음 주일이 빨리 왔으면 하고 기다리는 성도들의 모임이어야 합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을 드린 것처럼 우리 교회만 주님의 교회가 아니라 주의 이름으로 모이는 세상의 모든 교회가 주님의 교회입니다. 한 주인을 모시고 같은 마음으로 예배하며 섬기고 교제하는 교회라면 우리 교회를 떠나 어느 다른 지역의 교회에 가더라도 거기서 내 집과 같은 따뜻한 환영과 소속감 그리고 책임감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윈리상으로는 이해가 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어쩌다 다른 교회를 방문하면 보통은 예배만 드리고 도망치듯 자리를 뜨게 됩니다. 처음 방문한 교회에서 누군가 친절하게 말을 걸어주면 기분이 좋은 사람도 있지만 왠지 부담스러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도 아는 척을 하지 않고 자기들끼리 하하호호 재밌게 교제하고 있으면 외돌톨이가 된 나는 못올 곳에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한쪽 구석에 홀로 머물렀다가 뻘쭘하여 쓸쓸한 마음으로 교회 문을 나서기도 합니다. 목사인 저도 다른 교회를 방문했을 때 그런 느낌을 받는데 교우 여러분은 저보다 훨씬 더 힘들 때가 많을 겁니다.
그러고 보면 이런 썰렁한 분위기는 누구의 탓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부족함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이 된 성도들은 교회를 찾아온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표현할 특권과 책임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처음 보는 사람끼리도 금방 하나가 될 수 있는 연결고리가 있습니다. 그분이 교회의 주인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주 안에서 모든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그것이 잘 안됩니다. 개인의 성격이나 그 교회의 분위기, 문화와 풍습 등 많은 이유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모이는 교회, 흩어지는 교회라는 관점에서 생각하면 교회의 본질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 모두에게 어색함의 원인이 있습니다. 모이는 것은 그런대로 잘 하는데 흩어짐의 원리가 잘 실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맘이 통하는 우리끼리만, 우리 교인들끼리만 우리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편안하고 안전한 우리의 모임에 누군가 새 얼굴이 들어오면 일단 마음이 움추러 들고 방어막을 쌓습니다. 우리 모임의 평안이 낯선 사람 때문에 흩어질까 염려되어 거리를 두고 경계합니다.
그래서 교회에 처음 방문한 사람이 먼저 나서서 누구를 찾아가 말을 걸기도 힘들고 기존 멤버들 역시 선뜻 낯선 사람들에게 다가가지 않으려 합니다. 교역자들은 직분을 앞세우고 처음 방문한 사람에게 교제의 악수를 먼저 청할 수 있지만 일반 성도들에게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래서 새가족반 일군들을 훈련시켜 그분들로 하여금 의무적으로라도 다가가 환영하고 교제의 악수를 청하게 합니다.
이것이 현대 교회에만 있는 현상일까요? 예루살렘 초대교회에도 이런 모습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가장 먼저 세움을 받고 보냄을 받은 사도들도 그랬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19 20) 하셨는데 사도들은 아직 ‘가서’라는 말씀을 시행하지 못하고 예루살렘에 ‘모여’ 자기들끼리만 성령충만하였습니다. 자기들과 비슷한 사람들, 동족 유대인들에게는 열심으로 복음을 전하고 친절했지만 그 울타리를 벗어나 이방인에게는 마음이 굳어졌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언제쯤 예루살렘을 벗어나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으로 나가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우선 예루살렘을 복음으로 완전히 정복하고 그 다음에 밖으로 나가야지 하는 전략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사도들이 꼭 그 때와 시기를 알지 못하여 예루살렘에만 머물러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베드로의 태도입니다.
베드로가 이방인 군대 장교 고넬료의 집에 가서 복음을 전할 때 일어난 성령의 역사를 목격하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가운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행10:34, 35) 그리고 말씀을 전할 때에 말씀 듣는 모든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보고 놀랐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베드로가 모든 민족을 위해 보냄을 받은 사도였지만 아직까지 유대인이라는 혈통과 선민의식, 전통에 묶여 이방인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고넬료의 가정이 성령충만함을 받는 광경을 목격한 후 비로소 주님의 뜻을 깨달았고 베드로의 고정관념이 깨진 것입니다. 주님의 교회는 예루살렘에만 세워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더 큰 세상, 모든 민족에게 전해질 만민을 위한 복음이었으니 교회는 처음부터 이 복음을 들고 흩어져야 할 사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교회는 이 사명을 시작하지 못하고 모이는 일에만 힘썼습니다.
베드로만 그랬습니까? 베드로가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 말씀을 전하고 교제했다는 말을 들은 다른 사도들과 예루살렘의 교인들이 베드로를 책망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고넬료 가정에서 경험한 일을 자세히 보고하자 처음에는 싸늘하게 반응했던 사람들이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인정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가로 막혔던 담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무너지고 하나가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교회의 주인께서 이런 일을 하라고 사도들에게 사명을 주시고 보내셨음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예루살렘에 큰 핍박이 일어났을 때 성도들이 사마리아와 각 나라로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핍박이 무서워 무작정 도망쳤다는 말이 아닙니다. 흩어져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했습니다. 빌립 집사는 사마리아 성으로 내려가 복음을 전파했는데 빌립의 설교를 듣고 그가 행하는 기적을 본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말을 들은 예루살렘교회 지도자들이 이것이 과연 사실인가 확인하기 위해 베드로와 요한을 파견하였습니다. 두 사도가 사마리아인들을 위해 기도할 때 고넬료의 집에서 있었던 것처럼 그들도 성령을 받기 시작합니다. 사마리아를 향한 복음의 문이 이렇게 열린 것입니다.
그뿐입니까? 하나님은 빌립 집사를 광야로 보내어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왔다가 본국으로 돌아가는 이디오피아의 여왕 신하 간다게를 길에서 만나 복음을 전하게 하심으로 아프리카를 향한 복음의 문을 여셨습니다. 자발적으로 흩어지지 않고 열심히 모이기만 할 때 하나님은 이런 방식으로 교회를 흩어지게 하셨습니다. 흩어지는 교회의 사명을 더 확실하고 빠르게 이루시려고 예수님이 하신 또 한 가지 큰 일이 있습니다. 예루살렘교회를 무너뜨리고 성도들을 흩어놓는데 최고의 악역을 맡았던 사울을 불러 변하여 새사람이 되게 하신 주님은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임명하여 아시아와 유럽으로 보내셨습니다.이것이 예루살렘교회를 흩으신 주님의 뜻입니다.
교회는 이름 그대로 부름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런데 그 모임은 흩어지기 위한 모임입니다. 흩어짐을 잘하기 위해 먼저 잘 모여야 합니다. 모임을 통해 위로와 힘을 얻고 사명을 새롭게 하며 주인의 뜻이 무엇인지 분명한 지도를 받아 세상으로 흩어집니다. 모임이 없이 교회라는 이름이 어울리지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교회의 제도와 조직이 타락하는 것을 반대하여 무교회주의를 선언하고 교회를 해체해야 한다 주장합니다. 죄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면 타락하고 조직과 제도가 썩어 문드러져 냄새가 나며 지탄을 받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 교회의 머리가 되어주시고 나를 따르라 하십니다. 예수님이 교회를 세우신 이후 오늘까지 이땅에 교회가 없었던 적은 없습니다.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파괴하고 말살하며 부정하려 했지만 그럴수록 주님의 교회는 더욱 강해졌고 번성했으며 세계를 향해 퍼져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교회의 운명이며 본질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며 생명은 살아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존재하는 한 교회도 함께 합니다.
우리 교회가 지난 26년 동안 그렇게 존재해 왔으며 주님이 허락하시는 한 주님 다시 오시는 날까지 계속 모이고 흩어짐의 사명을 다할 것입니다. 저 사람이 목사, 장로, 집사라는구만… 저 사람이 우리교회 교인이라며? 하고 우리를 주목하는 이웃들과 함께 직장과 학교와 동네에서 지내며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주님의 교회를 세워가는 사람들입니다.
한국 교회보다 모이기를 잘하는 교회가 지구상에 또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교우들에게 한국에서 모이는 집회의 절반만이라도 모여봅시다 한다면 과연 몇 분이나 따라올 수 있을까요? 그런데 이렇게 잘 모이는 것처럼 교회는 잘 흩어져야 함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한국 교회가 모이는 열심 만큼 흩어지는 교회의 사명을 제대로 수행한다면 장담하건대 얼마 가지 않아 대한민국 전체가 뒤집어져도 몇 번 뒤집어질 것이며 지금처럼 불신자들로부터 따가운 눈총을 받지도 않을 겁니다.
그런데 교인들이 혹시라도 세상에 물들고 실패할까 두려워 교회에 붙잡아 놓으려는 것처럼 일주일 내내 예배와 모임에 나오라고 바쁘게 불러냅니다. 세상은 더럽고 타락했으니 물들지 말고 코드가 통하고 말이 통하는 천국 백성끼리 뭉치자는 겁니다. 그래서 세상 곳곳으로 흩어져 전도자의 삶을 살아야 할 사명을 약화시킵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일까요? 흩어져야 합니다. 자발적으로 흩어지지 않고 우리끼리만 뭉치고 즐거워하며 편안함을 누리다 보면 고인 물에 벌레가 생기고 구르지 않는 돌에 이끼가 낍니다.
교회의 주인은 그런 모습을 원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때로는 핍박이라는 채찍을 들어 강제로 흩으시기도 합니다. 모여 힘을 얻었으면 빨리 흩어져 나가야 하는데 그냥 눌러앉아 ‘아멘 할렐루야’하고 안주하려고 하면 여러 방식으로 교회를 흩어놓으십니다. 교인들끼리 다투며 갈라지기도 합니다. 참 가슴 아픈 모습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그래야 서로 건강한 신앙을 지킬 수 있기 때문에 갈라놓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나누려고 자발적으로 나가면 그보다 더 행복할 수 없지만 마음을 닫고 멈춰 있으면 모진 아픔을 주면서라도 흩어져 나가게 하십니다.
우리 교회는 예배당이 없어 주일예배 한 번 드리고 일주일 내내 흩어져 지내야 하는 이민교회입니다. 뭉쳐있고 싶어도 있을 곳이 없어 흩어져야 하는 교회입니다. 흩어져 있을 때 여러분의 가정에서, 학교에서, 연구실과 직장에서 만나는 이웃들에게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곳에 오래 머물고 싶어도 귀국해야 하며 다른 나라로 떠나야 할 때가 옵니다. 우리 교회는 사람들을 많이 모으는 교회라기 보다는 많이 흩어보내는 사명을 가졌습니다. 그렇다면 흩어질 바에야 잘 흩어지고 흩어져 사는 현장에서 주님의 사람들로 잘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저도 우리 교회 식구들이 지금보다 더 많이 늘어나면 좋겠습니다. 많이 모이면 힘이 납니다. 찬양도 힘차고 기도도 뜨거우며 말씀을 들을 때 아멘으로 화답하면 더 힘이 납니다. 교회가 무슨 일을 할 때 으샤으샤 힘을 모아 신나게 일했으면 참 좋겠습니다.이곳에 있는 모든 한인들이 예수를 믿고 교회로 모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일단 열심히 모여야 교회의 일차적인 사명을 잘하는 것입니다. 숫자도 얼마 되지 않는 우리 교회 가족들이 주 안에서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한 마음으로 모이기에 힘쓰는 교회가 되기 바랍니다. 그리고 흩어져 살 때 부름 받은 성도답게 삽시다.
저는 목사로서, 여러분은 이 교회의 성도로서 나를 당당하게 소개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삽시다. 나 때문에 교회에 누를 끼칠까 조심스럽고 예수님 이름에 먹칠할까 부끄럽다 여기는 분이 있다면 누가 되고 먹칠 할 일 하지 않으면 됩니다. 말은 참 쉽지요? 잘 아는 것을 실천하면 되는데 무엇이 아쉽고 아까운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어렵게 여겨집니다. 주님은 나같은 사람 위해 그 귀한 생명도 버리셨는데 나도 주님을 위해 뭔가 버려야 하지 않을까요? 용기있게 버리고 포기해 봅시다. 그러면 달라진 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나 때문에 주님을 만나고 믿는 사람이 생기는 기적도 일어납니다. 얼마나 보람있고 행복한 일입니까?
오늘 성찬식에 참여하는 세례교인 여러분, 주님이 나를 위해 몸을 찢어 피흘려 생명을 나눠주신 것처럼 여러분도 주님을 위해 그리고 남을 위해 그렇게 사십시다. 나를 찢어주고 나눠주며 다른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그 귀한 일에 지금보다 더 분발하고 자발적으로 동참합시다. 우리가 한 자리에 모여 주의 성찬을 나누며 하나가 됨처럼 흩어져서는 이 세상을 밝히고 섬기는 주의 지체들로 힘써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때로는 주님의 이름을 위해 자발적으로 손해도 보시고 욕도 드시며 아픔을 겪어보기도 합시다. 그래서 한 영혼이 주님 앞으로 돌아와 우리와 함께 주님의 교회를 이룰 수만 있다면 우리는 꼭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의 은혜에 참으로 감사하는 성도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이 저와 여러분이 따라야 할 주인의 뜻이며 교회를 세우신 주님의 소원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런 교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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