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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 체제를 비판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을
납치하고 살해하려 했던 끔찍한 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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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납치 사건 – 나무위키
1972년 10월 유신 후 이듬해인 1973년 8월, 대한민국 중앙정보부가 유신 반대운동을 주도하던 재야 정치인 김대중에게 저지른 납치 및 살인미수 사건 …
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9/8/2022
View: 3211
김대중 납치 사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김대중 납치 사건(金大中拉致事件)은 일본에 망명 중이던 대한민국의 정치인 김대중이 1973년 8월 8일 오후 1시경 일본 도쿄도의 그랜드팰리스 호텔 2210호실에서 …
Source: ko.wikipedia.org
Date Published: 9/3/2022
View: 8754
김대중납치사건(金大中拉致事件)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도쿄에서 ‘한민통’ 결성을 며칠 앞둔 1973년 8월 8일, 통일당 당수 양일동을 만나러 그랜드팔레스 호텔로 간 김대중은 괴한들에 의해 납치되었다. 이후 선박 용금호에 감금 …
Source: encykorea.aks.ac.kr
Date Published: 10/16/2022
View: 5318
김대중납치사건-유신체제를 뒤흔든 뇌관 – 오픈아카이브
김대중납치사건은 유신체제가 막 어둠의 장막을 드리우고 모든 것이 숨을 죽이고 있을 때 발생했다. 이 사건은 박정희 대통령이 자신의 정적을 제거하려 했던 최악의 …
Source: archives.kdemo.or.kr
Date Published: 11/2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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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납치사건 – 국가기록원
김대중 납치사건은 박정희 정부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일본 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야당지도자인 김대중씨를 일본 내 중앙정보부 요원들을 동원하여 조직적으로 납치 …
Source: www.archives.go.kr
Date Published: 2/13/2022
View: 3125
김대중 납치사건과 박정희 저격사건 – 한국학술지인용색인
Korea-Japan Relations in the 1970s: Kim Dae Jung Knapping Incent and the Assassination Attempt on Park Chung Hee – 한일관계;김대중 납치사건;박정희 저격 …
Source: www.kci.go.kr
Date Published: 12/17/2022
View: 7062
[역사속 오늘리뷰] 8월 8일 김대중 납치 사건 발생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973년 8월 8일 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납치 사건이 발생했다. 김 전 대통령은 1972년 10월 유신 이후 유신 반대 운동을 …Source: www.financialreview.co.kr
Date Published: 2/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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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김대중 납치 사건
- Author: SBS NOW / SBS 공식 채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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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20. 1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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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납치 사건
김대중 사건은 여기로 연결됩니다. 1980년 은 여기로 연결됩니다. 1980년 신군부 의 거짓 사건에 대해서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김대중 납치 사건(金大中拉致事件)은 일본에 망명 중이던 대한민국의 정치인 김대중이 1973년 8월 8일 오후 1시경 일본 도쿄도의 그랜드팰리스 호텔 2210호실에서 대한민국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납치되었다가, 5일 만인 8월 13일에 서울 동교동 자택 근처에서 발견된 사건이다.
사건의 배경 [ 편집 ]
제3공화국 [ 편집 ]
이 부분의 본문은 이 부분의 본문은 대한민국 제3공화국 입니다.
3.15 부정선거를 자행한 자유당 이승만 정권은 4·19 혁명으로 몰락하였다. 과도기 권한대행 체제를 거치며 출발한 제2공화국은 5·16 군사쿠데타로 박정희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11개월 만에 단명하고 말았다. 반공, 친미, 경제개건 등을 공약으로 내세웠던[1] 군사정권은 언론을 탄압하고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시킨 상태에서[2] 공화당 조직작업을 진행하였다. 이어 헌법을 개정하여 직접선거와 대통령 중심제의 정부 체제를 만들었다.[3] 1963년 10월, 박정희는 출마하지 않겠다던 약속을 깨고 대선에 나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11월에 진행된 총선에도 군사정권에 참여했던 많은 군인들이 군복을 벗고 출마하여 국회의원이 되면서 공화당의 승리로 마감되었다. 1963년 12월 17일, 박정희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제3공화국이 출발하였다.[4]
제7대 대통령 선거 [ 편집 ]
연임에 성공한 박정희가 삼선개헌을 추진하자 전국적으로 개헌반대 시위가 들끓었다.[5] 야당 역시 극렬히 반대했으며 여당 내에서 조차 반대가 있었다. 박정희는 1968년 5월 ‘국민복지회 사건’을 이용하여 당내 반대파인 김종필 지지세력을 제거하는등[6][7] 여러 편법을 동원하며 반대세력을 무마시켰다. 또한 1969년 9월 14일 새벽에 개헌안을 기습 날치기로 통과시켜 대선 출마의 근거를 마련하였다.[8] 한편, 김대중은 1970년 9월에 진행된 전당대회에서 경선을 통하여 김영삼을 누르고 신민당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9]
유세기간 중 김대중은 이번에 정권교체에 실패할 경우, 박정희가 영구 집권을 위해 총통제를 실시할 것이며,[10] 계획에 대해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며 지지를 호소하였다. 김대중과 박정희의 양자대결 구도로 진행된 선거는 야당 후보인 김대중이 정책 대결을 이끌며 선전하였다.[11][12] 그러나 1971년 4월 27일에 치뤄진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였던 박정희 대통령에게 94만표 차이로 석패한[13][14] 와중에, 대선 전후 기간 동안 김대중에게 불미스러운 사건이 자주 일어났다.
폭발물 사고 [ 편집 ]
1971년 1월 27일, 동교동 자택 마당에서 사제 폭발물이 폭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15] 당시 김대중은 야당 대통령 후보 자격으로 방미중이었다.[16] 대선을 목전에 두고 제1야당의 대통령 후보 집에서 발생한 사건이라 국회까지 나서서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등 정국이 경색될 조짐을 보였다. 경찰은 김대중의 집에서 일하는 가정부 조행덕(22세)의 진술을 근거로 김대중의 조카 김홍준(당시 15세)을 구속하였다.[17] 김홍준은 장난삼아 한일이라 자백하였다. 그러나 이틀 후 벌어진 구속적부심 심사에서 김홍준은 범행 사실 자체를 부인하고 경찰의 위협과 가혹행위 때문에 허위 자백을 했다고 진술을 번복하였다. 법원은 구속 소명자료가 불충분하다며 석방을 결정했다.[18]
교통 사고 [ 편집 ]
대통령 선거가 끝나자마자 같은 해 5월 25일에 치러지는 제8대 국회의원 선거를 위한 유세가 진행되었다. 지원유세에 나섰던 5월 24일, 김대중이 탄 차량과 14톤 대형 트럭이 충돌하는 사고가 발생했다.[19][20] 원래는 목포에서 비행기를 타고 수원으로 이동할 계획이었으나 결항으로 인해 차량을 이용하여 광주로 이동하던 중에 사고가 일어났다. 김대중은 이 사고로 인해 양팔 정맥과 골반 관절 부위에 부상을 당했으며[21] 사망하기 전까지도 이때의 사고를 당시 정권의 암살 시도였다고 주장했다. 일련의 사건 사고로 인해 신변에 위협을 느낀 김대중은 교통사고 후유증과 지병을 치료하고자 일본을 왕래하기 시작했다.
유신과 도미 [ 편집 ]
1972년 10월 11일, 김대중은 1971년 5월에 있었던 교통사고로 다친 고관절 치료를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 게이오 대학병원에 입원 치료하며 지내던중[22][23] 10월 17일 비상계엄령과 동시에 10월 유신이 선포되자 김대중은 귀국을 포기하고 망명을 선택했다. 귀국한다해도 계엄하에 국회가 강제해산되었고 정치활동이 금지된 상황에서는 아무런 투쟁활동도 할 수 없는 반면에, 해외에서 박정권의 독재와 싸우는 것이 여러모로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24] 유신 직후부터 김대중은 일본과 미국을 오가며 외신을 통해 유신 체제를 비판, 규탄하였고 1973년 7월 6일 미국 워싱턴에서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라는 단체를 조직하여[25] 초대의장으로 취임해 교포 사회를 중심으로 반정부 투쟁을 벌이기 시작한다.
한편, 박정희 정부는 10월 유신을 선포하기 전인 1972년 5월,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을 평양으로 몰래 보내 김일성 그리고 김영주 조직지도부장과 회담을 가지도록 했다.[26] 또한 김영주 부장을 대리하여 박성철 제2부수상이 5월 29일부터 6월 1일까지 서울을 답방하여 이후락 부장과 2차례, 박정희와 한 차례 회담을 가졌다. 그 결과 7월 4일에 조국통일 촉진을 위한 원칙에 대한 합의가 담긴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며 남북간 평화 분위기가 조성되었는데, 10월 유신이 있기 전에도 정부에서 북한에 먼저 통보를 해주게 된다.[27]
사건 경위 [ 편집 ]
습격과 납치 [ 편집 ]
워싱턴에서 미주 한민통을 조직한 김대중은 일본 지부를 조직하기 위해 1973년 7월 10일 일본에 입국하였다.[25][28] 도쿄의 히비야 공원에서의 반(反)박정희 집회 참가를 앞두고 8월 7일에 도쿄 팰리스 호텔 501호에 투숙하고 있었다.[29][30] 8월 8일 오전에 택시로 이동하여[31][32] 그랜드 팰리스 호텔 2211호에 머물고 있던 양일동 민주통일당 대표와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33] 오후 1시 경 대화가 끝나고 방을 나오던 도중 괴한들에게 습격을 당했고, 비어 있었던 2210호실에 감금되었다.[34] 김대중은 이 방에서 마취약을 투여받아 의식을 잃은 상태로 납치되었다.
수장 시도 [ 편집 ]
김대중을 넘겨받은 용금호[35]에 있던 자들은 급히 출항한 뒤 김대중을 배밑 쪽 선실로 끌고가서 몸을 새롭게 묶기 시작했다. 손발을 꼼짝 못하게 묶고 눈에는 테이프를 여러 겹 붙인 다음 그 위에 다시 붕대를 감았다.[36] 그리고 오른손목과 왼발목에 각각 수십 킬로그램이 되는 돌을 달았다. 마지막으로 등에 판자를 대고 몸과 함께 묶으며 “던질 때 풀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묶어” 등의 말을 주고 받았다. 당시 상황에 대해 김대중 전 대통령은 “발은 밧줄로 양쪽을 묶어서 당기려고 해도 끄떡도 않았다. 바다에 던질 계획을 하는데 솜이불을 붙여야 안 떠오른다고 했다.[36] 그리고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하는데 어떻게 하면 상어가 먹기 좋다는 말도 하더라”라고 증언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꼬꼬무, 서울방송)에 따르면, 당시 김대중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세례명:토마스 모어)로서 예수님께 간절히 “국민들이 불쌍하니 살려달라”면서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강제귀국과 방면 [ 편집 ]
김대중이 바다에 수장될 위험이 있는 상황에 처해 있을 때 동해 일본측 해안에서 해상자위대 함정이 추격해 왔다. 사건이 발각될 것을 우려한 괴한들은 계획을 변경하여 김대중을 8월 13일 밤 10시경에 서울의 동교동 자택 근처에 있는 주유소 근방 뒷골목에 풀어주었다.[37] 김대중은 그의 자서전에서 “나는 집 문 앞에 이르러 이제 막 퇴근해서 돌아오는 가장들처럼 초인종을 눌렀다”고 하였다.[38] 항간에는 중정부장 이후락이 윤필용 사건으로 잃은 신임을 만회하기 위해 저지른 무리수 또는 과잉충성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김대중은 여러 차례 박정희가 이 사건을 직접 지시한 것이라고 주장했다.[39]
사건 이후 [ 편집 ]
사건을 조사한 일본 경찰은 납치 현장에 주일 한국 대사관의 1등 서기관 김동운 중앙정보부 요원의 지문을 발견했다고 밝혔다.[40] 이에 따라 일본 정부의 양해 없이 김대중을 납치해 강제로 한국으로 압송한 것은 일본의 주권을 침해한 것이라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1973년 8월 23일에 열린 참의원 법무위원회에서는 한국 정보기관의 관여 혐의, 주권 침해 여부, 김대중의 재도일(再渡日), 일본의 수사 상황 등을 정부 측에 물었다. 이에 대해 다나카 이사지 법무성 장관은 “나의 제6감으로 볼 때 이 나라 비밀 경찰의 소행이 틀림없다”라고 발언했다. 하지만 오히라 마사요시 외무성 장관은 사건에 대해 단정할 수는 없으며, (한국 정부의)해명 이후 일본의 태도를 결정하겠다고 답변했다. 이 사건으로 납치사건에 대해 동아일보를 비난한 논조를 올린 요미우리 신문은 대한민국 문교부로부터 1973년 8월 26일부로 요미우리 신문 서울지국에 대한 전면 폐국 명령을 받았다.
이어 한국 정부는 1973년 8월 25일 한국 대사관의 이상진 정무담당참사관을 통해 ‘일본 국회 등의 논의나 신문의 보도 등에서 한국 정부의 직원이 사건에 개입되어 있는 듯한 내용을 전개하는 것은 유감’이라는 뜻을 전달했다. 그러자 다나카 법무성 장관은 이러한 태도를 가리켜 “매우 괘씸한 변명이다”라고 지적하며, ‘한국 정부의 그러한 태도는 우리 국회에 대한 중대한 간섭’이라고 비판했다.
주일공사 김재권은 주일 대사관 일등 서기관 신분으로 위장하고 있던 김동운에게 공작 계획의 수립을 지시했다. 김동운의 계획안을 접수한 차장보 이철희와 해외공작국장 하태준은 해외공작단장 윤진원과 함께 계획을 검토했다. 김대중을 그랜드팔레스호텔에서 직접 납치한 사람들은 이미 여러 자료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해외공작단장 윤진원, 주일대사관 참사관 윤영로, 일등서기관 홍성채·김동운, 이등서기관 유영복·유충국 등이며 일등서기관 한춘은 현지정찰임무를 수행했다. 이들 ‘행동대원’은 젊은 말단직원들이 아니었다. 당시 직급으로 윤영로와 한춘은 이사관인 2급 갑, 홍성채·김동운·유영복은 부이사관인 2급 을, 유충국만 서기관인 3급 갑으로 모두 상당히 고위직에 이른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납치 현장에 수많은 유류품과 지문을 남겨놓는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다.[41]
정보부원들은 원래 양일동이 묵는 2212호의 건너 옆방인 2210호실을 예약했는데 마침 앞방인 2215호실의 문이 열려 있어 두 방에 나눠서 요원들이 대기했다. 그중 2215호에 우연히 이북 담배가 있었다는 것이고, 다량의 유류품을 남기게 된 것은 복도에서 김대중을 배웅 나온 통일당 김경인 의원과 마주쳐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2210호실에 있던 납치대원들이 급하게 김대중을 끌고 내려가면서 2215호실에 있던 감시조가 뒤처리를 해줄 것이라 생각했는데, 감시조는 2210호실 상황을 보지 않고 그냥 빠져나왔다. 어쨌든 납치는 성공했고, 중앙정보부원들은 일본 경찰의 감시망을 따돌리고 도쿄를 빠져나와 무사히 공작선 용금호가 대기중인 오사카에 도착하여 김대중을 국내로 실어 보냈다.
윤진원은 이 무렵 마음속으로 심한 갈등을 겪고 있었다. 자신의 손으로 처리해야 한다면 토막 살인을 하기에도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자기 손으로 김대중을 살해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큰 부담이었다. 김대중이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윤진원도 이후락도 박정희도 모두 자기 손에 피를 묻히기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1976년 말이나 1977년 초에 중앙정보부에서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KT사건 관여인사 일람표’를 보면, 윤진원에 대해서는 사후관리 방안으로 ‘복직 또는 취직 알선’이라고 한 반면, 김동운에 대해서는 본인이 보직 변경을 희망하므로 상응한 보직을 부여할 것을 건의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김동운은 형식적인 해임 후 바로 복직되었음을 알 수 있다. 김동운은 해직 1년 후에 복직되어 8국 부단장에 임명되었으나 두 달 후 일본이 이 사실을 알고 항의해 원남동에 사무실을 얻어 직책도 없이 부이사관급 대우를 받으며 8년 동안 근무하다가 1982년 말 퇴직했다.[42]
이어 1973년 9월 5일, 경시청은 주일 한국 대사관의 김동운 일등서기관을 용의자로 지목했다. 일본 야당 측에서는 “한국 정부의 주권 침해에 대해 강력히 대응할 것”을 요청했으나 일본 정부 측은 “지금은 진상 규명이 첫째로, 현 단계에서는 주권 침해라고 볼 수 없으며, 지금과 같은 한국과의 관계를 변경할 생각은 없다”라고 답변했다.
1973년 9월 17일 한국 정부는 《김대중 납치 사건 수사 자료》를 발표하고, “용금호에 대해 면밀히 조사했으나, 현재까지 김대중 납치 용의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라고 일본 정부에 회답했다. 이어 9월 21일에는 일본 국회에서 내각 불신임안이 제출되었으나 부결되었다. 이 불신임안의 제출 이유에는 김대중 납치 사건이 포함되었다.
1973년 11월 1일, 한국 정부는 납치 사건에 대한 주일 한국 대사관 직원의 관여 혐의를 인정하고 사의를 표명하려는 의향을 표명했으며, 김동운 일등서기관을 면직시켰다. 같은 날 박정희 대통령도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에게 납치 사건에 대해 공식 사과했다. 다음날 김종필 대한민국 총리가 일본을 방문해 다나카 총리와 회담을 가졌다.[43][44] 이듬해인 1974년 8월 6일 일본 수사당국은 수사 보고서를 발표해 김대중 납치 사건의 범인 중 한 사람으로 김동운 일등서기관을 지목했다. 이에 한국 정부는 1974년 8월 14일에 그의 혐의에 대해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고 일본 당국에 통보했다.
다음날에는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일본에서 출생·성장한 재일 한국인 문세광이 박정희 대통령의 암살을 시도했다. 이로 인해 영부인 육영수가 피격되어 사망했으며, 시나 에쓰사부로 자유민주당 부총재가 9월 19일 일본 정부의 특사로 저격 사건의 진사를 위해 한국을 방문,[45] 박정희 대통령과 회담을 가졌다.
1974년 10월 25일에 일본 당국은 한국 정부의 수사 결과는 납득할 수 없다며 상세한 설명을 요구했다. 한국 정부는 이 요청에 따라 1975년 7월 22일에 수사결과에 대해 다시 회답하면서, 사건 후 김동운 일등서기관의 직위 해제 이후 수사를 진행했지만 바람직한 결과를 얻을 수 없어 1975년 8월 14일에 수사를 중단했으며, 이후 비밀리에 수사를 진행했으나 혐의를 입증할 증거가 없어 불기소 처분을 했으며, 이후 도쿄에서 그의 언동이 품위에 어긋난다고 보여 공무원의 지위를 박탈했다는 요지를 통보했다.
일본 정부는 이러한 회답에 1975년 7월 23일에 미야자와 기이치 외무성 장관이 한국을 방문하여 양국의 정기 회담 개최에 합의하고 다음날 귀국했다. 귀국 즉시 미야자와 외무성 장관은 김대중 납치 사건의 결말이 지어졌다고 발언했다.
그러나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미국 의회에서 ‘김대중 납치 사건은 한국 중앙정보부의 범행’이라고 발언하면서 사건이 다시 불거졌다. 이어 1977년 7월 1일에 일본 교토통신과의 회견에서 증언을 두고 신빙성이 의심스럽다고 발언한 후쿠다 다케오 일본 총리를 비난하면서, “한일 두 정부가 반성하지 않고 계속해서 나의 명예와 신뢰성에 상처를 입혀 김대중 납치 사건의 진상에 대한 양국 국민의 눈을 가리려 한다면, 더욱 상세한 사실을 밝혀 양국 정부의 죄상을 고발하겠다”라고 밝혔다.
1987년 납치사건을 주도한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이 사건의 전말에 대해 인터뷰를 한 신동아 10월호의 인쇄 작업을 안기부가 막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락의 인터뷰가 한일간 외교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신동아 기자들은 이에 항의하며 철야 농성을 벌였고 동아일보 측에서 이 사건을 보도하여 유력 외신들에게도 이 사건이 보도되는 등 파문이 확대되었고 결국 안기부 측이 방침을 철회하면서 일단락되었다.[46]
하지만 1998년 공개된 중앙정보부의 김대중 납치계획 문건인 일명 KT공작 계획문서를 보면 살해 계획은 없었고, 일본에서 서포터를 받고 유신반대운동을 했던 김대중을 일본에서 납치 동교동 자택까지 강제로 끌고 온다는 것이 중앙정보부의 원래 계획으로 알려졌다.[47]
그러나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에 따르면 납치공작의 구체적 방안으로 살해계획이 추진됐는지에 관해 “초기 공작계획 수립 당시 ‘야쿠자’를 동원, 암살하는 방안과 납치 후 외교배낭 편으로 ‘반입’하려는 계획이 논의된 적이 있다는 관련자들의 진술에 의거, 공작목표는 살해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다만 암살계획이 하달돼 일정단계에까지 진행되다 목격자 출현 등 상황변화로 인해 실행이 중지됐거나, 현지 공작관의 판단에 따라 살해계획을 포기하고 단순납치로 변경됐을 가능성도 있다고 설명했다.
게다가 1973년 5월 5일 김대중에게 보내진 익명의 편지에 따르면 “최근 정확한 소식에 의하면 선생님을 암살하려는 테러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내용이 들어있어 정말로 암살할 계획이 없었는지는 알 수 없다.[48][49]
2006년 2월, 대한민국 외교통상부는 1947년부터 1974년 사이의 비공개 외교문서를 공개하였다. 이로 인해 당시 납치 사건과 관련된 많은 내용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같이 보기 [ 편집 ]
참고 자료 [ 편집 ]
《전후일본외교사》, 이리에 미치마사, 1983년
《김대중 납치사건 진실규명》,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 2007년. (이곳 과 이곳에서 문서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외부 링크 [ 편집 ]
김대중납치사건(金大中拉致事件)
도쿄에서 ‘한민통’ 결성을 며칠 앞둔 1973년 8월 8일, 통일당 당수 양일동을 만나러 그랜드팔레스 호텔로 간 김대중은 괴한들에 의해 납치되었다. 이후 선박 용금호에 감금된 채 동해로 강제 압송되었다가, 129시간 만에 8월 13일서울의 자택 부근에서 풀려났다. 당시 이 사건을 조사한 일본 경찰청은 납치 현장에서 주일한국대사관 1등 서기관의 신분으로 일본에 머물던 김동운 중앙정보부 요원의 지문을 채취하는 등 증거를 확보하여 관련자 출두를 요구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관련 사실을 완강히 부인하고 관련자 출두 등 협조를 거부하였다. 이에 따라 이 사건은 한국 공권력에 의한 일본 주권의 침해라는 한일 간의 외교문제로 비화하였고 양국 관계는 교착상태에 빠졌다. 또한 북한이 8월 28일 남북회담 중단을 발표하는 등 남북관계 진전에도 영향을 미쳤다.
김대중납치사건-유신체제를 뒤흔든 뇌관
1.납치
1972년 가을, 김대중은 고관절 치료를 위해 일본에 가 있었다. 그는 비상계엄령 하에서 유신헌법이 통과된 소식을 접하고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곧장 성명을 발표했다. “이번 계엄령 선포는 반민주적인 조치이다. 나는 민주적 자유를 원하는 조국의 동포들과 더불어 기필코 박 대통령의 영구 집권을 저지할 것이다.”
김대중은 귀국을 미룬 채 일본에 머물며 반독재 민주화투쟁의 전면에 나섰다. 그는 잇따라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해외 언론에 한국의 독재 상황을 긴급히 알렸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순회강연을 통해 한국의 폭압적인 정치 현실을 폭로했다. 김대중은 미국에서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회의(한민통)를 결성하여 유신반대운동에 박차를 가했다.
1973년 7월, 일본으로 돌아온 김대중은 한민통 일본 지부 결성에 힘을 쏟았다. 한국 정보부의 감시는 더욱 심해졌다. 7월 18일, 김대중은 계간 《세계》지의 편집장 야스에 료스케와 대담을 가졌다. 김대중은 이 대담에서 박정희 독재체제에 관해 신랄하게 비판했다. 야스에 편집장이 “선생님의 신념은 무엇입니까?” 하고 묻자, 김대중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캄캄한 밤이라도 내일 아침이면 태양이 반드시 다시 뜬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나는 악마가 지배하는 지옥에 떨어져도 신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 그리고 나의 신앙은 역사이다. 나는 역사에서 정의는 절대로 패배하지 않는다는 것을 믿는다. 또한 나에게 유일한 영웅은 국민이다. 국민은 최후의 승리자이며, 양심의 근원이다. 나는 이런 신념하에 살고 있다.”
김대중은 도쿄의 하라다 맨션에 머물고 있었다. 그 맨션은 야마노테센(山手線)의 다카다노바바(高田馬場) 역에서 도보로 3분 정도 걸리는 번화가에 위치해 있었다. 12층 건물의 1층에는 도시은행과 찻집이 있었다. 그 주상복합 건물의 11층 7호실이 김대중의 사무실 겸 주거 공간이었다. 스무 평가량 되는 1107호실 입구에는 ‘한국민주제도 통일문제연구소 도쿄사무소’ 라는 조그만 간판이 걸려 있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하라다 맨션 주변에는 낯선 사내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 김대중을 감시하는 중앙정보부 요원들이었다.
1973년 8월 8일, 도쿄의 여름 날씨는 몹시 무더웠다. 습기를 밴 공기는 무겁고 눅눅했다. 그날 오전, 김대중은 그랜드 팰리스 호텔 2211호실로 갔다. 그는 그곳에서 민주통일당의 양일동 총재, 김경인 의원과 점심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친 김대중이 방에서 막 나올 때, 대여섯 명의 건장한 남자들이 복도를 막아섰다. 그들은 다짜고짜 김대중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누구냐? 당신들은 어디서 왔는가?”
그들은 김대중의 입을 틀어막고는 옆방 객실로 거칠게 밀어붙였다.
“우리는 서울에서 왔다. 국제 문제니까 조용히 해라. 곧 끝날 테니 기다려라.”
납치범은 한국인이었다. 그들은 마취제를 적신 손수건을 김대중의 코에 대고 눌렀다. 김대중은 마취되었지만 완전히 의식을 잃지는 않았다. 납치범들은 김대중을 차 뒷좌석에 태운 채 호텔 밖으로 나왔다. 차는 전속력으로 달려 고속도로를 빠져나갔다.
“의원님이 왜 이렇게 안 내려오시지? 이상하다. 한번 올라가 보세.” 호텔 아래층에서 대기하고 있던 비서들이 객실로 황급히 뛰어 올라갔다. 텅 빈 방에는 권총 탄창과 종이 봉지, 배낭과 로프, 휴지 따위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비서들은 옆방에서 공포에 질린 채 감금돼 있던 양 총재와 김 의원을 발견하고는 풀어주었다. 두 의원은 곧장 일본 경찰에 신고했다. “긴급 뉴스 속보입니다. 한국의 김대중 의원이 괴한들에게 납치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일본 NHK 방송이 김대중납사건을 매 시간마다 신속히 보도하기 시작했다. 이 보도가 나가자마자 일본은 물론이고 전 세계가 커다란 충격에 휩싸였다.
괴한들이 모는 차는 바닷가에 도착한 뒤 멈춰 섰다. 납치범들은 김대중을 결박한 채 부둣가로 끌고 갔다. 파도가 철썩이는 소리, 갈매기가 끼룩끼룩 우는 소리가 들렸다. 납치범들은 김대중의 머리 위로 보자기를 뒤집어씌운 뒤 모터보트에 태웠다. 가톨릭 신자인 김대중은 곧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성호를 그었다. 그때, 누군가가 복부를 걷어찼다. 극심한 고통이 찾아왔지만 비명도 지를 수 없었다. 보트가 출발한 지 한 시간 정도 지났을 때, 납치범들은 김대중을 커다란 배에 옮겨 태웠다. 그들은 김대중의 온몸을 꽁꽁 묶은 뒤 무거운 추를 매달았다.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기도하는 것 말고는 달리 할 게 없었다.
그때, 거짓말처럼 김대중의 눈앞에 예수님이 나타났다. 보자기를 뒤집어쓴 까닭에 모든 것이 캄캄했지만, 이상하게도 예수님이 잘 보였다. 그는 예수님께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예수님, 저를 살려주십시오. 저에게는 우리나라 국민들을 위해 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 그때, 눈앞에서 강렬한 붉은 불빛이 번쩍였다. 배가 심하게 기우뚱거렸다. 하늘 어딘가에서 프로펠러 소리가 들려왔다.
“비행기가 나타났다!” 선실에 있던 사람들이 갑판으로 우르르 올라갔다. 배가 전속력으로 달렸다. 그 바람에 김대중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배의 속도가 늦춰질 무렵 누군가가 속삭였다. “김대중 선생님 맞지예? 지는 1971년 대선 때 부산에서 선생님께 투표를 했습니더. 선생님은 이제 살았습니데이.” 경상도 말씨였지만 친절한 어감이었다. 그 남자가 머리에 둘렀던 붕대를 잠깐 풀어주었다. 김대중은 재빨리 바다와 배 이곳저곳을 휘둘러보았다. 납치범들은 남쪽 바닷가에 배를 정박시켰다. 그들은 김대중을 조그마한 건물 2층으로 끌고 갔다. 거기서 군복 바지를 입은 남자가 부동자세로 누군가에게 보고를 했다.
그날 오후, 납치범들은 김대중을 차에 태운 채 고속도로를 한참 달렸다. 납치범들은 김대중을 어느 골목길에 내려주고는 붕대를 풀어주었다. 달빛이 밤거리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곳은 동교동 뒷골목이었다. 사건 발생 129시간 만인 8월 13일 밤 10시경이었다. 납치된 지 엿새째 되던 날, 사지에서 돌아온 김대중은 비로소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다.
2. 김대중의 귀환 이후 휘몰아친 유신반대운동
박 정권은 김대중을 다음날부터 집에 가두었다. 기약 없는 가택연금의 시작이었다. 동교동 집을 빙 둘러 경찰 병력이 에워쌌다. 골목 어귀에는 여러 개의 감시초소가 만들어졌다. 중앙정보부는 외부인의 동교동 출입을 철저히 막았다. 가족들의 전화사용도 금지했다. 초등학교 3학년인 셋째 아들 홍걸이가 등교할 때도 감시 요원들이 따라붙어 미행했다.
8월 15일, 일본에서는 김대중이 부재중이었지만 예정대로 한민통 일본 지부가 결성되었다. 히비야 공원에서 열린 이 집회는 ‘김대중 씨 사건 진상 규탄회의’로 바뀌었다. 회의장을 가득 메운 3천여 명의 참석자들은 “박 독재 타도, 민주회복!”을 드높이 외쳤다. 국회에서는 김대중납치사건 진상규명을 위해 유일하게 정일형 박사가 유신정권에 대항했다. 그는 “머리 위에 태양이 있는 것은 자명한 이치다. 이 사건도 하늘에 태양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 아닌가?”라고 말하며 박 정권을 질타했다.
이 무렵 국내의 민주인사들은 김대중의 연금을 풀어달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미국과 유럽, 일본의 저명한 정치인들도 박 정권에 대해 강하게 항의했다. 하지만 박 정권은 마이동풍이었다. 감시초소는 오히려 일곱 군데로 늘어났고, 기동대원들은 3천 명으로 불어났다. 박 정권은 무력을 동원해 동교동을 철통같이 감시했다.
김대중납치사건은 국민들의 유신반대운동에 불을 붙였다. 민주주의의 빙하기가 지속되던 1973년 8월, 김대중납치사건 이후 국민들의 불만과 저항이 돌출되기 시작했다. 박정희는 자신의 정적을 현해탄에 영원히 수장시키려다 도리어 거대한 저항운동에 부딪혔다. 당국의 극심한 탄압 속에 한동안 주춤했던 대학생들이 이 사건을 계기로 반독재민주화투쟁의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1973년 10월 2일, 서울대 문리대생들이 유신반대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당국은 강경조치로 일관해 180명 연행자 가운데 20명을 구속, 22명을 제적하고 18명을 자퇴시켰으며 56명을 무기정학에 처했다. 그러자 유신반대투쟁은 서울대의 각 단과대로 번져나갔다. 전국의 각 대학들이 이 운동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대학생들이 경찰들과 투석전을 벌이자 이 시위에 고등학생들까지 동참했다. 민주화운동은 서울에서만 국한되지 않고 전국 단위로 확대되었다.
1973년 12월 24일, 윤보선 전 대통령, 장준하 등 재야인사와 야당 정치 지도자, 종교 지도자 등 30여 명이 공화당 정부의 인권탄압을 규탄하며 개헌서명운동을 벌였다. 박 정권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민주 회복을 위한 1백만인 개헌 청원 운동’이었다. 서명운동이 시작된 지 10일 만에 서명 참가자가 30만 명을 넘어섰다. 박 정권의 영구집권 음모를 저지하기 위한 움직임은 급류를 탔다.
1974년 1월 8일, 박 정권은 긴급조치 1, 2호를 잇따라 발동했다. 개헌 운동을 무력으로 막기 위한 조치였다. 이 조치에 따라 재야인사와 종교인, 정치인, 학생을 비롯한 백만인개헌청원운동의 주요 인물들이 줄줄이 잡혀갔다. 장준하, 백기완 등 주요 인사들이 비상군법회의에서 징역 15년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지학순 주교는 7월 15일과 23일에 유신반대 성명과 양심선언을 발표해 반유신운동의 초석을 놓았다. 언론인과 지식인들이 유신체제의 폭력 앞에 침묵할 때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가 발표한 양심선언은 사회적으로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
중앙정보부는 민주화운동 세력을 더욱 와해시키기 위해 ‘민청학련사건’을 발표했다. 박 정권은 민청학련의 배후에 ‘인혁당’이 존재한다는 흑색선전으로 공포정치를 펴나갔다. 1975년 4월 9일, 사법 당국은 인혁당 관련자 8명을 사형판결이 확정된 지 18시간 만에 전격적으로 사형을 집행했다. 이 사건은 세간을 거대한 충격 속에 빠뜨렸다. 국제법학자회는 이 사형집행을 ‘사법살인’이라고 칭하고 이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하여 박 정권의 비민주적 처사를 맹렬히 비난했다.
김대중납치사건을 계기로 시작된 유신반대운동은 살벌한 공안정국을 뚫고 세찬 물결을 이루기 시작했다. 새 학기가 시작되자 서울대, 이화여대, 성균관대 등 대학가에서는 “유신독재 퇴진”, “유신헌법 개정”, “중앙정보부 해체” 등 구호를 외치며 반정부 시위를 벌여나갔다. 재야인사와 야당 지도자, 종교계 인사들은 이 사건 이후 본격적으로 유신반대운동을 벌여나갔다.
김대중납치사건은 유신체제가 막 어둠의 장막을 드리우고 모든 것이 숨을 죽이고 있을 때 발생했다. 이 사건은 박정희 대통령이 자신의 정적을 제거하려 했던 최악의 몸부림이었다. 하지만 김대중납치사건은 얼어붙은 산하를 일깨우는 새벽닭의 울음소리였다. 결과적으로, 이 사건은 유신체제를 뒤흔든 뇌관으로 작용했다.
글 박선욱(시인, 평전작가) 1959년 나주 출생. 1982년 시 〈누이야〉외 3편이 실천문학 제1회 신인작품으로 당선되어 등단했으며 이후 대표작으로 《그때 이후》《다시 불러보는 벗들》《세상의 출구》《회색빛 베어지다》 등의 시집과 《채광석 평전》《김대중 평전》《황병기 평전》《윤이상 평전》 등의 인물평전이 있다.
김대중 납치사건은 박정희 정부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일본 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야당지도자인 김대중씨를 일본 내 중앙정보부 요원들을 동원하여 조직적으로 납치 강제귀국 조치함으로써 발생한 사건이다. 이를 계기로 한일관계는 급속히 냉각하였다. 일본사회에서는도쿄 한복판에서 벌어진 이 납치사건이 일본의 주권을 심각하게 침해한 것이며 박정희 정권에 의한 반인권적·빈민주적 행동으로 비추어져 반한 여론이 들끓게 되었다.
이 사건에 대해 일본은 한국정부에게 강력하게 항의하는 한편, 수사에 나서 진상규명을 위한 활동에 들어갔다. 한편 박정희 정부는 이 사건의 수습과 해결을 위해 일본과의 정치적 결착에 나서게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김종필 총리를 일본의 다나카 당시 총리에 보내 사건에 대한 유감의 뜻을 전달함과 동시에 한일간 친선우호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이 사건을 종결시킬 것을 제안하였다. 이에 다나카 수상도 대국적인 견지에서 이 사건을 더 이상 사법적인 문제로 다루지 않을 것을 약속하였다. 이른바 박정희·다나카의 정치적 타협으로 김대중 사건은 봉합되었다. 당시 일본 사법당국은 김대중 납치사건이 대체로 김동운 등의 한국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감행되었다는 증거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사법적 추궁을 하지 않은 채 한일 정권의 수뇌부들에 의한 정치적 타협으로 사건을 종결시켰다. 이른바 한일간 정치적 유착 흑막의 한 부분을 보여주는 사건이라고도 할 수 있다.
[박정희 친서]
다나까 가꾸에이 日 총리에게
다나까 가꾸에이 日 총리에게
각하, 본인은 각하의 탁월하신 영도하에 일본 국민이 일익 번영과 행복을 누리고 있음에 대하여 경의와 경하의 뜻을 표하는 바입니다. 한일 양국은 가장 가까운 인방으로서 과거의 모든 불행한 역사를 청산하고 새롭고 꾸준한 노력으로 양국 국민 사이의 우의가 돈독해지고 양국 정부간에서 정치, 경제, 사회 및 문화의 모든 분야에 있어서 상호 유익한 협력관계가 날로 증진되고 있음은 매우 기쁜 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최근 의외에도 김대중 사건이 야기되어 일시적이나마 양국 사이에 물의가 생긴 것은 대단히 불행한 일이며 본인은 각하와 귀 국민에게 유감의 뜻을 표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양국간의 기본적이고도 전통적인 선린우호관계에 어떠한 균열도 초래되어서는 안될 줄 생각합니다. 또 양국 간에서 다시는 유사한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최대의 노력을 경주함으로써 상호 신뢰와 우호를 증진하는데 더욱 기여하고자 합니다. 한일 양국간의 긴밀한 관계에 비추어 본인은 김종필 국무총리를 파견하여 한일 양국의 관계 증진을 위한 현안 문제들을 협의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를 기회로 한국과 일본 양국간의 선린 우호 협력관계가 우리 양국의 공동 노력으로 일층 발전되어 나갈 것을 바라는 바입니다. 각하의 건승을 기원합니다.
각하, 본인은 각하의 탁월하신 영도하에 일본 국민이 일익 번영과 행복을 누리고 있음에 대하여 경의와 경하의 뜻을 표하는 바입니다. 한일 양국은 가장 가까운 인방으로서 과거의 모든 불행한 역사를 청산하고 새롭고 꾸준한 노력으로 양국 국민 사이의 우의가 돈독해지고 양국 정부간에서 정치, 경제, 사회 및 문화의 모든 분야에 있어서 상호 유익한 협력관계가 날로 증진되고 있음은 매우 기쁜 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최근 의외에도 김대중 사건이 야기되어 일시적이나마 양국 사이에 물의가 생긴 것은 대단히 불행한 일이며 본인은 각하와 귀 국민에게 유감의 뜻을 표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양국간의 기본적이고도 전통적인 선린우호관계에 어떠한 균열도 초래되어서는 안될 줄 생각합니다. 또 양국 간에서 다시는 유사한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최대의 노력을 경주함으로써 상호 신뢰와 우호를 증진하는데 더욱 기여하고자 합니다. 한일 양국간의 긴밀한 관계에 비추어 본인은 김종필 국무총리를 파견하여 한일 양국의 관계 증진을 위한 현안 문제들을 협의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를 기회로 한국과 일본 양국간의 선린 우호 협력관계가 우리 양국의 공동 노력으로 일층 발전되어 나갈 것을 바라는 바입니다. 각하의 건승을 기원합니다.
[다나까 수상 친서]
[다나까 수상 친서]
김대중씨 사건으로 일한 양국간의 우호관계에 한때 분규가 발생된 것은 실로 유감된 일이었읍니다. 일본정부로서는 이 사건에 이치에 맞고 내외의 납득을 받을 수 있는 해결을 희구하여 왔음은 승찰 하시는 바와 같습니다. 금번 한국측이 소요되는 제 조치를 취하신 외에 특히 김 국무총리를 아국에 파견하시어 대통령 스스로의 유감의 뜻을 친서로써 우호관계 증진에의 기대를 말씀하시어 오신 것을 고맙게 생각합니다. 이로써 본 사건은 외교적인 결착을 짓고, 일한관계에 공정하고도 순조로운 발전이라는 양국민 공통의 염원이 달성되는 것을 절실히 기원합니다. 김대중씨 사건으로 일한 양국간의 우호관계에 한때 분규가 발생된 것은 실로 유감된 일이었읍니다. 일본정부로서는 이 사건에 이치에 맞고 내외의 납득을 받을 수 있는 해결을 희구하여 왔음은 승찰 하시는 바와 같습니다. 금번 한국측이 소요되는 제 조치를 취하신 외에 특히 김 국무총리를 아국에 파견하시어 대통령 스스로의 유감의 뜻을 친서로써 우호관계 증진에의 기대를 말씀하시어 오신 것을 고맙게 생각합니다. 이로써 본 사건은 외교적인 결착을 짓고, 일한관계에 공정하고도 순조로운 발전이라는 양국민 공통의 염원이 달성되는 것을 절실히 기원합니다.
관련 자료로 박대통령과 다나카 총리 사이에서 교환된 친서(외교문서 공개 분)를 소개한다.
[역사속 오늘리뷰] 8월 8일 김대중 납치 사건 발생
사진=김대중 도서관
[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973년 8월 8일 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납치 사건이 발생했다. 김 전 대통령은 1972년 10월 유신 이후 유신 반대 운동을 펼쳤다.이에 중앙정보부가 김 전 대통령의 납치해서 살인을 하려고 하다가 미수에 그쳤다. 일본에 체류하던 김 전 대통령을 납치해서 먼 바다에 빠뜨려 죽이려고 했던 사건이 온세상에 알려지면서 유신정권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러면서 유신독재 반대투쟁은 더욱 거세졌고, 그것이 결국 훗날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과 연결이 된다.
10월 유신 반대했던 김대중
김 전 대통령은 당시 야당 정치인으로 1972년 10월 유신 단행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혔다.
김 전 대통령은 1972년 10월 11일 교통사고 후유증 치료 및 일본 정계 인사들과 만나기 위해 도쿄를 방문했다. 그런데 같은 달 17일 10월 유신이 선포되면서 그대로 해외 망명을 결심했다. 그것은 10월 헌법이 초법적인 내용이 많았기 때문에 대한민국에 남아있으면 김 전 대통령은 제거 1순위였다.
이에 김 전 대통령은 일본에서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약칭 한민통을 결성하고 초대 의장으로 취임해 미국과 일본의 교포 사회를 중심으로 반정부 투쟁을 이어갔다.
박정희 정권으로서는 눈엣 가시가 됐다. 이에 중앙정보부는 김 전 대통령의 배우자 이희호 여사를 통해 김 전 대통령의 국내 정치활동을 보장할테니 귀국하도록 설득을 했다. 하지만 자신의 손발을 묶어 놓을 것이 뻔하다면서 거절을 했다.
납치의 그날
1973년 8월 8일 오후 1시, 일본 도쿄 그랜드 팰리스 호텔 객실 2212호에는 민주통일당 당수 양일동, 김 전 대통령의 조카뻘이자 국회의원이었던 김경인과 함께 점심식사를 하면서 담소를 나눴고, 이후 자유민주당 중의원 키무라 토시오와의 면담을 위해 약속장소로 향하던 김 전 대통령은 괴한 5명에 의해 납치됐다. 범행 현장에는 백두산 담배, 배낭, 휴지, 노끈, 마취제, 탄창 등의 유류품이 남아있었다.
지하주차장으로 향하던 도중 엘리베이터에서 일본인 남녀와 마주친 김 전 대통령은 일본어로 “납치된다. 살려주시오”라고 소리쳤지만 야쿠자 싸움인줄 알고 외면했다고 한다.
괴한들은 안가에서 김 전 대통령의 옷을 작업복으로 갈아입히고, 눈과 입을 포장용 테이프로 막고, 다시 차에 태워 1시간 정도 달려서 바닷가에 이르렀다. 그리고 모터보트에 태워서 중앙정보부 공작선 536톤 용금호에 태운다.
사진=연합뉴스
김대중 찾아라
용금호 사람들은 김 전 대통령을 배밑 선실로 끌고 가 손발을 묶고, 눈에는 테이프를 여러 번 붙인 다음 붕대로 감았다.
이때 이들은 손발을 묶으면서 “던질 때 풀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묶어” 혹은 “솜이불을 씌워 던지면 떠오르지 않는다”는 말을 주고 받았다.
용금호가 전속력으로 항해하던 중 김 전 대통령은 번적하는 불빛과 함께 굉음을 느꼈고, 선실에 있는 사람들은 “비행기다”고 외쳤다.
해당 비행기는 미국 CIA 연락을 받은 일본 해상보안청 소속이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일본 정부에서는 일본 자위대 비행기나 해상보안청 헬기가 출동한 기록이 없었다.
따라서 해당 비행기가 미국 CIA인지 일본 정부인지 아니면 제3의 비행기인지 아직도 명확하지 않다.
다만 미국 CIA는 김 전 대통령의 납치 소식을 듣고 김 전 대통령의 소재 파악에 들어갔다. 당시 CIA 한국 지부장이었던 도널드 그레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김 전 대통령이 납치된 이후 24시간 동안은 미국의 눈치를 보기 때문에 그 이전에 찾아야 한다고 조언했고, 도널드 그레그 본인은 중앙정보부에 전화를 걸어 “김대중을 죽이지 말라”고 경고했다고 전해졌다.
용금호에 어떤 전화가 걸려왔고, 전화를 받은 선원들은 김 전 대통령의 복면을 벗기고 손을 풀어주면서 마실 것을 줬다.
8월 11일 부산항 도착
김 전 대통령은 8월 11일 부산항으로 추정되는 항구에 도착한 후 8월 13일 서울 동교동 자택 근처에서 풀려났다.
그 이후 김 전 대통령은 남산을 직접 언급하지 않았지만 누가 납치를 했는지를 모든 사람들이 알아듣게끔 진술했다.
이로 인해 중정은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김 전 대통령의 사저에 기자 및 외부인 접촉을 차단했다. 또한 일본에도 수사를 이유로 김 전 대통령을 보낼 수 없다고 통보했다.
박정희 정권은 정부 개입설을 부정했지만 중정의 한 고위 간부가 이후ᅟᅡᆨ에게 “무슨 일을 그리 서툴게 해서 일을 시끄럽게 키웠냐”고 하자 이후락은 “야! 사람이 사람 잡는 게 그리 쉬운 줄 알아?”라고 발칵 화를 내서 중정의 소행임이 드러났다.
일각에서는 일본 정부를 무마하기 위해 다나카 당시 일본 총리에게 거액의 정치자금을 제공했다는 주장이 있었다.
재미 언론인 문명자씨는 1977년 우리 정부가 한진그룹 조중훈 회장을 통해 다나카에게 돈을 제공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오마이뉴스가 익명의 국정원 진실위 관계자 인터뷰를 인용해 김대중 사건 직후 조중훈이 별다른 이유 없이 대통령에게 불려간 일이 있었다는 기사를 보도했다.
이 사건은 훗날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과 연결됐다.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약칭 한민통을 결성한 것을 북한의 사주에 의해 이뤄진 것이라면서 사형을 언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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