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바 브로디 도 | [ 빌립보서 강해 : 기뻐하라 ] 11 존귀한 에바브로디도 모든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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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일 : 2019-12-15
설교자 : 최병락 담임목사
제 목 : 시리즈 11 존귀한 에바브로디도
본 문 : 빌립보서 2:25-30
구 분 : 주일설교 / 빌립보서 강해 / 기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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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바브로디도는 누구인가? Who is Epaphroditus? – 패스티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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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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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귀한 사람 – 에바브로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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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바브로디도와 같이 죽기에 이르러도 – 평강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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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2:25-30 KRV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나의 쓸 것을 돕는 자라 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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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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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빌립보서 강해 : 기뻐하라 ] 11 존귀한 에바브로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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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에바 브로디 도

  • Author: 강남중앙침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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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ikes: 624649 Like
  • Date Published: 2019. 12. 15.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Ge9h8iZB-gk

사도 바울은 여기서 주를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한 두 사람을 소개하고 있다. 그들은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인데 바울이 아끼고 사랑한 동역자들이었다. 바울은 이들이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주를 위해 섬겼는지에 대해 자랑스럽게 말해 주고 있다. 그들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며 복음을 위해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는 충성된 일꾼들이었다. 이들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일꾼들이 어떠한 모습으로 주님을 섬겨야 하는지에 대해 좋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I. 디모데의 연단(19~24절)

바울은 먼저 디모데를 속히 빌립보 교회로 보내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라”(19절).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그 당시 빌립보 교회의 형편을 알 필요가 있다.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이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서 몹시 걱정하고 염려하였다(학자들 중에는 바울이 이 때 ‘에베소’ 또는 ‘가이사랴’에 갇혔다고 주장하나 여기서는 일단 전통적인 견해를 따라 ‘로마’로 보고 주해하고 있다. 빌립보서의 저작 장소에 대해서는 G. F. Hawthorne, Philippians, Waco: Word Books, 1983, pp. xxxvi~xliv를 참조하라). 그래서 그들의 지도자인 에바브로디도를 급히 바울에게로 보내었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의 운명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맡기고,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기를 바란다는 초연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빌 1:19~21). 그러면서 아직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해야 할 일이 남아 있기 때문에, 자기는 죽지 않고 살아서 빌립보 교회로 가게 될 것을 주 안에서 확신하고 있다(22~26절).

사도 바울은 이제 도리어 빌립보교회를 위해 걱정하고 있다. 빌립보교회는 바울의 운명에 대해 심히 걱정하고 염려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교역자인 에바브로디도가 떠나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바울은 지금 그들의 형편이 어떤 지를 알고 또한 그들을 안심시킬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다. 그래서 자기와 함께 있는 디모데를 속히 그들에게 보내고자 한 것이다. 바울이 이렇게 디모데를 속히 보내기를 바라는 것은 빌립보 교회의 사정을 앎으로 자기도 안위(安慰)함을 받으려 함이라고 한다. 여기서 ‘안위함을 받는다’(유프쉬케오)는 것은 ‘좋은 기분이 되다, 즐거운 마음이 되다’(be of good heart)는 의미이다. 그리고 ‘자기도’ 안위함을 받고자 함이라 하는 것은 ‘빌립보교회성도들’이 먼저 마음의 평안함을 얻고 이를 통해 또한 ‘사도 바울’도 평안함을 얻기를 원한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바울과 빌립보교회사이에는 서로 남을 위해 걱정해 주고 서로 남 때문에 위로를 받는 아름다운 관계에 있었다.

이어서 20절에서는 왜 디모데를 보내기 원하는가에 대한 이유가 나와 있다. 그것은 “뜻을 같이 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기서 ‘뜻을 같이 하여’(이소프쉬코스)는 ‘같은 마음의, 한 뜻의’(like-minded)란 뜻이다(cf. 빌 1:27). 그리고 여기서 ‘생각하다’(메리므나오)는 것은 ‘염려하다’(worry about)는 뜻이다. 바울과 디모데는 빌립보교회성도들을 위해 진실히 염려하고 걱정하였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염려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마 6장).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25절)고 하셨으며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다(34절). 그런데 사도 바울은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고 하였다(고후 11:28). 따라서 우리는 ‘염려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 아니라 ‘무엇을 위하여’ 염려하는가 하는 것이 문제임을 알 수 있다. 곧 ‘세상 일’을 위하여 염려하는 것은 잘못이지만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은 옳은 것이요 마땅히 해야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어서 바울은 왜 빌립보 교회를 위해 진실히 생각할 자가 디모데 밖에 없는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해 주고 있다.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였다”(21절). 그들은 다 ‘자기 일’을 구(求)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않았다. 곧 ‘세상 일’을 추구하고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하지 않았다. 이것은 그들의 삶의 근본 목표, 궁극적 지향점이 잘못 되었음을 말한다. 이렇게 ‘근본 목표’가 잘못된 사람에게는 주의 일을 안심하고 맡길 수 없다. 이런 사람은 주의 일을 하면서도 자기의 이익이 걸린 결정적인 문제에 가서는 자기의 유익을 좇고 만다. 그래서 자기의 조그만 유익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대세(大勢)를 좇으며 시류(時流)에 야합한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에게 유익(有益)이 되는 범위 내에서는 열심히 주의 일을 하기도 하지만, 자기에게 손해(損害)가 되는 일은 결코 하지 않는다. 자기에게 손해가 되는 줄 알면서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묵묵히 그 손해를 감수하는 자는 드물다. 그러나 디모데는 어떠한 경우에도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며 주님의 교회를 생각하는 진실한 교역자였다.

그러면 디모데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그는 바울이 2차 전도 여행 때 루스드라에서 얻은 제자였는데, 어머니는 믿는 유대인이요 아버지는 헬라인이었다(행 16:1). 그는 거짓이 없는 순수한 믿음을 가진 자였으며 눈물의 사람이었다(딤후 1:4, 5). 그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칭찬받았으며(행 16:2), 바울이 아끼고 사랑한 제자였다(고전 4:17). 이 디모데에 대해 사도 바울은 본문 22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비에게 함 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여기서 ‘연단’(練鍛)’이란 말의 원어는 ‘도키메’인데, 이 단어는 다음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첫째는 ‘연단 받음’이란 의미이다(고후 8:2의 ‘시련’). 이는 곧 시험을 견딘다는 ‘동작’의 개념이다. 둘째로 이 단어는 또한 ‘시험을 잘 견뎌낸 상태, 연단 받은 결과’를 나타낸다(롬 5:4, 고후 2:9; 9:13;13:3). 우리나라의 개역판 성경에는 ‘연단’ 또는 ‘증거’로 번역되어 있다. 여기 빌립보서에서는 이 두 번째 의미로 사용되었다(cf. S. Greijdanus, De brief van den apostel Paulus aan de gemeente te Philippi, Amsterdam: H. A. van Bottenburg, 1937, p.239). 같은 맥락에서 라이트푸트는 ‘증명된 인격’(approved character)으로 설명하고 있다(J. B. Lightfoot, Saint Paul’s Epistle to the Philippians, Grand Rapids: Zondervan, 1953, p.121)

그러면 디모데는 어떻게 행하였는가? 이에 대해 바울은 “그가 자식이 아비에게 함 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해 수고하였다”고 한다. 먼저, 그는 “자식이 아비에게 함 같이” 하였다. 이것은 그가 사도 바울을 대할 때 어떠한 마음과 태도로 임하였는가를 보여 준다. 그는 바울을 대할 때 마치 아버지에게 하듯 극진한 존경(尊敬)과 예의(禮義)를 가지고 대하였다. 이것은 교회에서도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대할 때 취해야 할 태도이다. 주 안에 있다고 해서 예의도 없고 존경도 없는 것은 아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한다고 했다(고전 13:5). 곧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규례와 범절이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유교적 예의범절과는 다른 기독교적인 예(禮)와 규례(規例)를 뜻한다. 그 중심은 ‘사랑’과 ‘겸손’과 ‘상호 존중’이다. 이러한 디모데의 극진한 태도에 대해 바울도 디모데를 자기가 낳은 자식처럼 아끼고 사랑했다. 그래서 그를 ‘주 안에서 사랑하는 신실한 아들(자식)’이라고 불렀다(고전 4:17). 이처럼 기독교 윤리는 상호적이다. 어느 한편의 절대적 희생과 충성을 강요하는 일방적 윤리가 아니라 서로 베풀고 도와주는 ‘상호 윤리’이며,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주 안에서의 윤리’이다.

그리고 디모데는 복음을 위해 ‘종노릇하였다’(에둘류센)고 한다. 여기서 ‘복음을 위해’라는 것은 섬김의 대상을 말한다. 디모데의 섬김의 대상은 사도 바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었다. 디모데는 ‘바울과 함께’ 복음을 위해 섬겼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는 유교와 다르다. 유교에서는 부모를 직접적인 섬김의 대상으로 삼지만 기독교에서 궁극적 섬김의 대상은 하나님이시다. 부모에 대한 효도도 하나님을 섬기는 궁극적 목표 아래 위치해야 한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고 말한다(엡 6:1). 곧 하나님의 말씀과 법도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나면서까지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옳지 않다(행 4:19, 5:29). 디모데가 바울에게 충성한 것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전적으로 수고하고 있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성도들이 목사에게 충성하는 것도 목사가 ‘복음을 위해’ 수고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목사가 복음을 위해 수고하지는 아니하면서 오직 ‘목사이기 때문에’ 순종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것은 형식적인 권위주의에 불과하며 교회 안의 갈등만 증폭시킬 뿐이다. 참된 순종은 목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헌신적으로 수고할 때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어서 바울은 ‘자기의 계획과 확신’에 대해 말한다. 그는 자기 일의 형편을 보아서 디모데를 속히 보내기를 바라며(23절), 또한 자기도 속히 그들에게 갈 것을 주 안에서 확신하고 있다(24절). 빌립보교회성도들을 보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빌 1:8) 자기가 속히 갈 것이라는 확신(確信)을 주고 있다. 이처럼 사랑은 어려운 장애물을 뛰어넘게 하며 환난 가운데서도 소망과 확신을 준다.

II. 에바브로디도의 헌신(25~28절)

그리고 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서 온 ‘에바브로디도’(Epaphroditus)에 대해 말한다(25~28절). 이 이름은 로마 제국 시대에 아주 흔하였다. 이 이름을 줄인 형태는 ‘에바브라’(Epaphras)이다. 그러면 빌립보서에 나오는 ‘에바브로디도’는 골로새서(1:7, 4:12)와 빌레몬서(23절)에 나오는 ‘에바브라’와 동일 인물인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이에 대해 학자들은 대개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 주된 이유는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의 교역자인데 반해 에바브라는 골로새의 교역자였기 때문이다(Lightfoot, Philippians, p.61f., Greijdanus, Philippensen, p.242). 그러나 초대 교회 당시에도 사정에 따라 교회 사역지를 옮겨 다니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만일 에바브로디도가 골로새에서 봉사하다가 나중에 빌립보로 옮겨서 봉사했다고 볼 수만 있다면, 이 둘은 동일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골로새에서 봉사하던 ‘에바브라’가(골 1:7;4:12) 나중에 로마의 옥에 바울과 함께 갇혀 있었기 때문에(몬 1:23),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다. 따라서 이 문제는 일단 제쳐 두기로 하자. 어쨌든 빌립보서에 나오는 에바브로디도는 진실로 그리스도께 헌신된 사람이었으며, 복음을 위해서라면 자기 목숨도 돌보지 않는 귀한 주의 종이었다.

사도 바울은 먼저 에바브로디도를 빌립보 교회로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였다고 말한다(25상). 디모데를 보내기 전에 급히 에바브로디도를 보내야 할 필요성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의 그러한 생각을 말하면서 그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 소개해 주고 있다.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군사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나의 쓸 것을 돕는 자라”(25하). 여기서 우리는 에바브로디도를 소개하는 다섯 개의 문구를 보게 된다(원어로 볼 때). 곧 ‘나의 형제’, ‘함께 일하는 자’, ‘함께 군사된 자’, ‘너희 사자’ 그리고 ‘나의 쓸 것을 돕는 자’이다. 여기서 처음에 나오는 ‘나의’는 첫 세 개에 다 연결되며, 이 세 개는 내용상 서로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그래서 첫 세 개를 하나로 묶을 수도 있다.

어쨌든 바울은 에바브로디도에 대해 복음을 위해 함께 수고하는 ‘동역자’임을 강조하고 있다. 바울에게는 높고 낮은 권위 의식이나 계급 의식은 없었다. 오직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하여 함께 수고하고 노력한다는 ‘동역자’(同役者) 의식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높고 존귀한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모두 다 섬기는 종에 불과한 것이다. 하나님이 멀어지고 은혜가 떠나갈수록 인간들끼리 서로 높고 낮음을 따지고 싸우게 된다. 그리고 ‘너희 사자(使者)’란 문자적 의미 그대로 ‘너희가 보낸 자’란 뜻이다. 원어 ‘아포스톨로스’(apostolos)는 대개 ‘사도’(使徒)로 번역되지만 여기서는 원래의 의미 그대로 ‘보냄 받은 자’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에바브로디도는 열 두 제자와 같은 사도가 아니라, 빌립보 교회에서 봉사하다가 그 교회의 대표로 보냄을 받아 바울에게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울은 에바브로디도에 대해 구체적으로 그는 ‘나의 쓸 것을 돕는 자’라고 말한다. 빌립보 교회는 옥에 갇혀 있는 바울을 위해 그가 필요로 하는 물건들을 에바브로디도 편에 보내었다(빌 4:18). 그리고 에바브로디도 자신은 바울을 시중 들며 섬겼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그의 봉사를 예배적 용어로 설명하고 있다. 곧 여기서 ‘돕는 자’란 원어로 ‘레이투르고스’(leitourgos)인데 이 단어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라는 의미로 많이 사용된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여기서 빌립보 교회가 사도 바울을 위해 물품을 보내 주고 또한 에바드로디도를 보내어 돕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행해진 ‘거룩한 섬김’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하나님을 위해 행한 일은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향기로운 예물이 되는 것이다(마 25:40 참조).

이어서 바울은 에바브로디도가 어떠한 상태에 있는지를 말해 준다.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26절). 그는 먼저 빌립보교회성도들을 ‘간절히 사모(思慕)하였다’고 한다(26절). ‘사모한다’(에피포떼오)는 것은 심히 보고 싶어하는 것을 말한다. 부모가 어린아이를 보고 싶어하듯이 성도들을 보고 싶어하는 간절한 마음을 말한다. 사도 바울도 빌립보교회성도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모한다’고 하였다(1:8). 이처럼 초대 교회 교역자들은 성도들을 진심으로 사랑하였으며, 떠나면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다. 이것이 참된 사랑이다.

그리고 에바브로디도는 “자기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하였다”고 한다(26절). 그는 자기가 병든 것 때문에 근심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병든 것을 교회 성도들이 듣고 근심하는 것을 인하여 근심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사랑의 진면목을 보게 된다. 사랑이란 자기를 위해 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다(고전 13:5). 에바브로디도는 자기의 건강에 대해서는 조금도 염려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성도들의 염려를 걱정하였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사랑의 모습인가? 자기 자신은 온전히 비우고 오로지 성도들의 유익만을 생각하는 그에게서 참 교역자의 모습을 보게 된다.

에바브로디도가 어떤 처지에 있었는지에 대해 바울은 다음절에서 좀더 설명해 주고 있다. “저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저를 긍휼히 여기셨고 저뿐만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27절). 그가 무슨 병에 걸렸는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그는 바울을 돕기 위해 빌립보에서 급히 달려온 데다가 감옥에서 바울을 시중 드느라고 무리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다른 원인에 의해 갑자기 병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는 병이 들어 거의 죽게 되었다. 원어 표현에 의하면 그는 ‘죽음에 가까웠다’고 한다. 즉 그는 거의 다 죽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저를 긍휼히 여기셔서 살려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않고 헌신적으로 섬기는 그를 죽음에서 건져 주신 것이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에바브로디도만 긍휼히 여기신 것이 아니라 또한 바울도 긍휼히 여기셨다고 한다. 왜냐하면 에바브로디도의 병에 대해 바울이 옆에서 몹시 근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병이 나았을 때 에바브로디도만 안심한 것이 아니라 곁에 있던 바울도 기뻐하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오로지 다른 사람의 안녕과 행복을 생각하는 이타적인 두 사람을 보게 된다. 서로 다른 사람을 위해 걱정하며 다른 사람을 인하여 기뻐하는 참 사랑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리고 나서 바울은 그를 급히 빌립보로 보내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내가 더욱 급히 저를 보낸 것은 너희로 저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며 내 근심도 덜려 함이니”(28절). 에바브로디도를 급히 보내었다고 했는데, 여기서 ‘보내었다’(에펨프사)는 단어의 시상(時相)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이다. 이것을 바울이 이 편지를 쓰고 있을 당시에 이미 보내었다는 의미로 이해한다면, 그 당시에 그는 벌써 떠나고 없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이것을 편지를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그를 이미 보내었다는 의미(즉 서신상의 아오리스트)로 이해한다면, 바울이 편지를 쓰고 있을 당시에 그는 바울과 함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 경우라면 에바브로디도가 이 편지를 가지고 갔을 가능성이 크다. 전자의 경우라면 바울의 편지를 가지고 갈 또 다른 사람이 필요하게 되는데, 이것은 아무래도 부자연스럽다고 생각된다. 바울이 편지를 써서 어떤 교회로 보낼 때에는 대개 그곳으로 가는 믿을 만한 사람 편으로 보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롬 16:1, 2, 고전 4:17, 엡 6:21, 22, 골 4:7 등).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에바브로디도가 이 편지를 가지고 갔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된다.

바울이 에바브로디도를 급히 보낸 목적은 빌립보교회성도들로 하여금 저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며 또한 바울 자신도 근심을 덜려 함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근심을 던다’는 것은 원어상 ‘고통을 면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의 평안을 얼마나 바라고 있었던지 그 교회의 근심이 자기에게는 고통이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이처럼 교회의 염려를 자기의 아픔으로, 교인의 근심을 자기의 고통으로 여기는 교역자가 참으로 훌륭한 교역자이다. 마찬가지로 교역자의 어려움을 온 교회의 염려와 근심으로 여기는 교회도 참으로 좋은 교회이다.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오는 에바브로디도의 모습을 보고 기뻐하는 성도들과 이로 인하여 안도하는 바울의 모습,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다. 참 사랑은 서로 보고 싶어하는 것이며, 다른 사람의 기쁨을 인하여 함께 즐거워하는 것이다. 자기 교인이 보고 싶지 않고 만날까 봐 두려운 사람은 아직 참 목자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 그는 아직도 직업적으로 가르치는 스승에 불과하며 자녀를 기르는 아비는 아니다(고전 4:15). 그 이유는 해산하는 수고를 하지 않아서 그렇다(갈 4:19). 한 영혼을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한 목자라야 그 성도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III. 빌립보 교회의 취할 태도(29,30절)

이어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대한 당부의 말을 하고 있다.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저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29절). 여기서 ‘영접한다’(프로스데코마이)는 것은 어떤 사람을 환영하고 환대하는 것을 말한다. 목숨을 돌아보지 않고 사명을 충실히 감당한 교역자를 따뜻하게 맞아들이는 것은 빌립보 교회가 마땅히 취해야 할 태도였다. 그것도 의무감에서나 형식적으로가 아니라 모든 기쁨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으로 맞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또한 “이런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고 당부하고 있다.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않고 주를 위해 헌신하는 지도자는 드물고 하나님 앞에서 매우 귀하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을 몰라보고 무시한다. 그러나 성도들이 이런 자들을 알아주고 귀하게 여겨야 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무리 믿음이 좋은 주의 종이라도 때때로 위로와 격려가 필요하다. 하나님의 위로만이 아니라 성도들로부터도 격려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길에는 많은 외로움과 고통과 좌절이 따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주의 일에 힘쓰는 종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에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 마음으로 뿐만 아니라 구체적으로 말과 행동으로 표현하도록 힘써야 한다(딤전 5:17 참조).

이어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에바브로디도에게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저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30절). 에바브로디도는 “죽음에 가까이 다가갔으나”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않았다. 여기서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않았다’는 것은 원어에 의하면 ‘목숨을 걸었다, 목숨을 두고 모험했다’는 뜻이다. 그는 자기의 목숨을 잃을 각오를 하고 모험을 감행하였다. 그는 무엇을 위해 그렇게 하였는가? 위험한 암벽을 등반하는 데 목숨을 걸었는가? 공중 낙하를 위해 목숨을 걸었는가? 아니다. 그런 것은 사회나 인류를 위해 별 가치가 없는 모험이다. 우리가 ‘가치 있는 일’을 위해 모험하는 것이 중요하다. 에바브로디도는 ‘그리스도의 일 때문에’ 목숨을 걸었다. 지상 최대의 과제인 복음을 위해 목숨을 걸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고 보람된 일을 위해 목숨을 건 모험을 감행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모험은 가치가 있는 모험이요 목숨을 버린다 해도 아깝지 않는 모험이었다.

에바브로디도가 이렇게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헌신적으로 봉사한 목적은 바울을 “섬기는 그들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었다. 이것은 빌립보교회성도들이 보낸 물품이 부족하여서 에바브로디도가 몸으로 보충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풍족하게 받았다고 말한다(빌 4:18). 그렇다면 ‘부족함을 채운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이러하다. 빌립보교회성도들이 다 와서 바울을 섬기기를 원했으나 멀리 떨어져 있는 관계로 에바브로디도가 대표로 와서 바울을 섬기게 되었다. 그래서 에바브로디도는 모든 성도들이 다 섬기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고 자기 힘에 지나도록 열심히 섬겼다는 것이다. 아마도 자기 몸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무리해서 섬기다 보니 병이 났을 것이다. 그래도 그는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계속 바울을 위해 섬겼다. 그러다 보니 그의 병세가 악화되어 죽음 직전에까지 이르렀으나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그를 살려 주셨던 것이다.

마치는 말

우리는 여기서 주님을 사랑하는 두 종의 헌신적인 자세를 볼 수 있다. 복음을 전하다가 옥에 갇혀 있는 사도 바울까지 합치면 세 사람이다. 이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라면 자기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행 15:26).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해서라면 결박당할 뿐만 아니라 죽는 것도 각오한 사람들이었다(행 21:13). 그들은 한 마디로 순교를 각오한 신앙이었다. 이러한 ‘순교 신앙’이 그들로 하여금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게 했으며, 유대인들과 로마 제국의 어떠한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하게 하였다. 에스더의 “죽으면 죽으리라”는 신앙이 그들에게 있었기에 어떠한 위험과 난관도 그들을 막지 못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이러한 신앙이 그립다.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충성하는 교역자들과 또한 그들을 알아주고 존귀히 여기는 성도들이 그립다. 오늘날 교회는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와 같은 헌신된 종들을 기다리고 있다. 그런 종들이 많이 나타날 때 주님의 교회는 아름답게 빛날 것이며, 성도들은 즐거움으로 그를 따를 것이다. 무엇보다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크게 기뻐하시고 그들의 이름을 영원히 기억하실 것이다.

하늘꿈교회 <예피>

존귀한 사람 – 에바브로디도

* 빌 2:25-30(신약 320쪽) *

{당신은 존귀한 사람입니다. 당신안에 잠자는 거인을 깨우시기 바랍니다.}

Ⅰ. 에바브로디도의 인적사항

➀ 에바브로디도의 뜻 : “사랑스러운”➁ 빌립보 교회의 교인

➂ 빌립보 교인들의 사랑을 많이 받은 자

Ⅱ. 시대적 배경

에바브로디도가 등장할 당시에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을 때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로마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에게 선물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에바브로디도를 선물을 전달하는 전달자로 보내게 됩니다. 선물을 받은 바울은 에바브로디도에게 빌립보 사정을 다 듣고 나서 빌립보 교회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게 됩니다. 바울의 편지를 전달하게 되는 사람이 에바브로디도가 됩니다.

Ⅲ. 에바브로디도의 특징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교회의 교인이었습니다. 빌립보 교회가 바울에게 있어서는 아주 특별한 교회였습니다. 바울이 2차 전도여행 때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보고 유럽으로 건너가게 됩니다.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이 빌립보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빌립보에서 큰 낭패를 보게 됩니다. 바울이 기도하는 곳에 가는 길인데 점치는 귀신들린 여종이 쫓아오면서 계속 비아냥거리면서 방해를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인데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입니다.” 라고 외치면서 몇 날 몇 일을 괴롭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에게 나오라고 명하자 그녀에게서 귀신이 나오게 됩니다. 그랬더니 그 여종의 주인이 돈 벌이가 없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화가 난 주인은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서 관아에 넘기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관아에서 옷을 찢기고 매를 맞고 옥에 가두게 됩니다. 참으로 황당한 일이었지요.

성령의 인도함을 받았는데 곤역을 치르게 된 것입니다. 물론 그 감옥에서 기도하고 찬양하던 중에 성령의 인도함으로 감옥에서 출옥하게 됩니다. 그러나 바울의 이러한 경험은 잊을 수 없는 경험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빌립보를 떠나게 되는데 그 이후에도 두 세 번에 걸쳐서 빌립보를 더 들리게 됩니다. 그리고 3차 전도 여행의 말미에는 예루살렘에서 포로로 잡힌 후에 로마로 압송되어 가게 됩니다.

훗날 로마에서 감옥에 갇히게 된 바울은 매우 힘든 시기를 보내게 됩니다. 그러던 와중에 빌립보 교회가 로마의 감옥에 있는 바울에게 선물을 보내게 됩니다. 이 때 이 선물을 가지고 간 사람이 에바브로디도입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단순히 선물을 전달하는 사자로서의 역할만 감당한 것이 아니라 로마에 머물면서 바울과 동역을 하면서 바울의 필요를 채워준 인물이었습니다.

1. 바울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부자연스러운 감옥에 있는 동안 자신을 도와 함께 동역을 이룬 에바브로디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평가를 합니다.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

2:25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

빌립보 교회의 파송을 받아 바울을 돕게 된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에게 아주 특별한 존재였습니다. 바울이 격어본 에바브로디도는 참으로 소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여러 가지 수식어를 붙이고 있는 것입니다.

① 나의 형제 :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자신의 형제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바울과 함께 신앙을 공유하면서 하나님 가족의 일원이 되어서 깊은 애정을 같이 나누는 사람을 말합니다. 나의 형제라고 부른다는 것은 얼마나 깊은 친밀도가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당대의 최고 지도자인 방울이, 그리고 빌립보 교회의 영적 지주와 같은 바울이, 빌립보 교회의 초대 목장이 되었던 바울이 에바브로 디도를 이렇게 높이 평가하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평가입니다. 이는 바울이 에바브로디도를 얼마나 신임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나의 형제라고 칭함을 받을 정도로 에바브로디도는 바울과 각별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입니다.

② 함께 수고함 : 함께 수고한다는 말은 ‘쉬네르곤’으로서 동역자를 의미합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바울과 함께 협력하는 동역자 였다는 것입니다. 로마의 감옥에 있으면서도 바울과 더불어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쉬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어떠한 방법을 사용했는지 자세히 우리에게 언급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함께 동역을 하는 귀한 사람임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③ 함께 군사 됨 : ‘군사’라는 표현의 의미를 잘 생각해 보세요. 군사는 적들과 싸우는 것입니다. 에바브로디도를함께 군사된 자라고 표현하는 것을 보면 바울의 로마의 감옥에서도 얼마나 곤역을 치르고 있는지를 잘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곳에서도 많은 적대자들이 있었을 것이고, 방해꾼들이 있었을 것이고, 적 그리스도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함께 고난을 당하면서도 그 어려움을 함께 이견낸 인물로 속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④ 사자 :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교회가 먼 여행을 떠나는 대표자로서 에바브로 디도를 세웠음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를 대표하는 인물이었음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의 권위를 부여받고 대표자로 바울에게 온 사람입니다.

⑤ 나의 쓸 것을 돕는 자 :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의 쓸 것을 돕는 자였습니다. 그는 바울을 위해 봉사하는 봉사자의 역할을 다 한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에바브로 디도에 대한 많은 수식어를 붙여가며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는 에바브로디도가 얼마나 바울의 신임을 많이 받고 있는지를 우리에게 잘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를 형제로, 함께 수고하는 자로, 함께 군사 된 자로, 빌립보 교회의 사자로, 그리고 바울의 쓸 것을 잘 도운자로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적용,

우리는 흔히 누군가를 소개받을 때 그 사람의 이력을 소개 받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학벌이 어떻고, 어디서 어떤 일을 했고, 무슨 직책을 맡았고 하는 것을 소개 받을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참으로 믿을 만한 사람 바울의 신임을 받고 소개받은 것보다 더 큰 신뢰를 가지로 오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이력이 화려해도 영향력있는 사람의 소개를 받는지 그렇지 않은지가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함께 동역하는 사람들과 좋은 동역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함께 일하는 사람의 인정을 받고 소개를 받는 사람이 될 정도로 신실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2. 믿음의 형제를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입니다.(26)

에바브로 디도는 바울의 섬기기 위해서 와서 열심히 섬기면서도 빌립보교회에 대한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식을 줄 몰랐습니다. 그래서 항상 빌립보에 있는 믿음의 형제들을 간절히 사모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사모하다’라는 말은 ‘에피포돈’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이는 갓난 아이가 어미의 젖을 간절히 원할 때 쓰는 용어입니다. 이는 에바브로디도가 빌립보 교인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보고싶어 했는지를 잘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믿음의 형제들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열정을 가지고 있었던 분입니다.

2:26-27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가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 /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셨고 그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

한 번은 에바브로디도가 바울과 함께 있는 동안에 심한 병에 걸렸습니다. 그 병이 무슨 병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주 심한 병입니다. 거의 모든 사람이 죽을 병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에바브로디도는 자신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병들었다는 소식을 빌립보 교회의 교인들이 듣고 얼마나 걱정할까하는 걱정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 때문에 빌립보 교인들이 낙담하지는 않을까? 실족하면 어떻게 하나! 이런 걱정이 먼저 앞서는 것입니다. 이는 자신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에 근심을 가져오게 되고 누가 될 까봐 걱정하는 마음입니다.

이는 에바브로디도가 믿음의 형제인 교회의 동료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잘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에바브로 디도의 사랑은 가식이 아닙니다. 진심입니다. 마치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 같은 사랑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모의 심장으로 걱정하고 사모하고, 사랑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사랑은 진심이었습니다.

이 마음을 보셨는지 하나님은 에바브로 디도를 긍휼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에바브로디도의 병을 고쳐 주신 것입니다. 에바브로디도의 병이 고쳐진 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에바브로디고의 병이 고쳐진 것은 당사자와 바울과 모든 교회의 큰 기쁨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기쁨의 소식을 빌립보 교이들에게도 보여주기 위해서 빌립보서를 부지런히 써서 에바브로디도편에 붙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아름다운 사랑이 오고가는 것은 에바브로디도의 진실된 사랑의 마음이 전달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적용

그렇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진심으로 뜨겁게 사랑한다면 그 사람은 녹아질 것입니다. 녹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적대자의 마음, 원수의 마음을 녹일 수 있는 것은 사랑뿐입니다. 마음이 굳어버리고, 냉담한 사람의 마음을 녹이는 것도 사랑의 힘입니다. 진심이 통한다면, 정말 그 사람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전해진다면 누구도 그 사랑의 온기에 녹아내리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도 에바브로디도처럼 진심으로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됩시다.

3. 존귀한 사람입니다.

바울은 에바브로디도편에 편지를 들려서 빌립보교인들에게 보내면서 마지막으로 에바브로디도를 소개합니다.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고 이와 같은 자를 존귀히 여기라

그렇습니다. 바울은 에바브로디도가 존귀한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를 존귀히 여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참으로 귀한 인물이라는 말입니다. 참으로 존경하고 그를 귀중한 사람으로 대우하라는 말입니다.

에바브로디도 같은 사람은 보배 중에 보배고, 보석 중에 보석이라는 말입니다. 에바브로디도는 그러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에바브로디도는 자기가 맡은 일에 목숨을 아끼지 않고 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그는 그리스도의 일에 목숨을 아끼지 않은 사람입니다.

빌2:30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에바브로디도는 그리스도의 일을 감당하는 일에는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이렇게 어려움에 처해있는데 빌립보 교회가 바울을 섬기는 것이 미약하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에바브로디도는 자신이 매우 미얀한 마음을 가진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주의 종을 섬긴 것입니다. 목이 축이나고 병을 얻어 죽기에 이르렀어도 이 일을 포기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 에바브로 디도의 희생은 죽기까지 희생한 고귀한 희생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참으로 존귀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빌립보 교이들에게 권면하기를 그를 존귀히 여기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 아프리카 수단을 떠난 둘로스 호는 홍해를 따라 항해하던 중 2005년 4월 12일 수단 아래에 위치한 지부티에 입항했다. 한 미국인 선교사 가정이 우리를 방문했다. 그는 둘로스 호 기도 모임에서 기막힌 얘기를 해주었다. 그가 간 지역은 그리스도인이 불과 몇 명밖에 없었는데 한 명씩 실종 되어 갔다고 했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예수 믿는 사람들을 데려다가 작은 컨테이너 속에 가두고 핍박을 한다고 했다. 그 마을에 마지막으로 남은 그리스도인이 있었다. 그는 여덟 살짜리 아들에게 어느 날 아빠가 없어질지도 모르는데 그때는 울지 말고 기뻐해야 한다고 일러두었다. 그리고 어느 날 아이들이 잠을 자다 새벽에 깼는데 아빠가 보이지 않았다. 여덟 살짜리 형은 아빠가 울지 말고 기뻐하라고 한 말을 기억하고 동생과 함께 마을을 다니며 기쁠 때 지르는 아프리카식 노래를 불렀다. 동네 사람들은 아이들의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인가 하여 모여들었다. 아이들은 아빠가 없어졌다고 말했다. 동네 사람들은 그런데 왜 기쁨의 노래를 부르냐고 물었다. 아이들은 아빠의 말을 전했고, 그들은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미국인 선교사가 그 얘기를 우리에게 전해 줄 때까지도 아이들의 아빠는 돌아오지 않았다. 우리는 울먹이는 마음으로 그가 무사히 돌아올 수 있기를 기도했다.

알버트 웰스 2세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인의 헌신은 복잡하지 않다. 희생할 때 희생한다고 느끼지 않으며 자신을 내어 줄 때 무엇을 잃는다고 느끼지 않는다. 만족은 자신을 부인하는 것과 정비례한다. 그러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위해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헌신은 안전이 보장 될 때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뼈가 갈아 없어진다 할지라도, 우리가 목숨이 마지막 순간 주님 때문에 경각에 놓여 있다 할지라도 그 일을 포기하지 않은 것 그리고 어떠한 결과에도 감사하는 것 그것이 참된 헌신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존귀한 사람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 존귀한 피를 흘리고 간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이어 존귀한 피를 흘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처럼 우리 모두 존귀한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적용

여러분 우리는 어떠한 사람입니까? 사리에 밝아서 기회를 잘 타는 사람입니까? 인기에 편승하는 사람은 아닙니까? 쉬우면서도 자신이 잘 드러나는 일을 좋아하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마음은 어디에 있습니까? 주님의 일에 있습니까? 주의 영광에 있습니까? 아니면 나의 영광과 나의 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까?

우리도 에바브로디도처럼 주의 일에 목숨을 아끼지 않고 헌신하여 존귀한 인물이 되기를 바랍니다.

Ⅳ 결론

1. 사람의 인정과 추천을 받을 만한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2. 형제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3. 존귀히 여김을 받을 만큼 주의 헌신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에바브로디도와 같이 죽기에 이르러도

제 19-44호

에바브로디도와 같이 죽기에 이르러도

빌 2:19-30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갇힌 지 벌써 오래되어 병들었지만, 오히려 빌립보 교회를 자기 가족, 자기 목숨보다도 귀하게 관심 가지고 사랑했습니다. 빌립보 교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혹시 석방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마저 포기하고, 자신을 대신해서 연단 받고 많이 고생한 믿음의 아들, 디모데를 빌립보 교회에 보내려고 했습니다(빌 2:23-24). 그러나 순간으로 변경되어 에바브로디도를 보내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1. 목숨을 걸고 일한 사람입니다.

빌립보 교회가 로마 감옥에 갇혀 있는 사도 바울을 위해 헌금하기로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의 이단자요, 나라의 역적으로 오해받고 로마 감옥에 있고,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이 세운 교회라고 해서 말할 수 없는 환난과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운데 헌금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때 에바브로디도가 열변을 토하면서 믿지 않는 자와 교회 사이의 중보 역할을 잘 했습니다. 마침내 교회가 헌금을 해서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보낸 것입니다(빌 4:18). 그리고 빌립보 교회로 바로 돌아간 것이 아닙니다. 막역한 친구라도 좋지 못한 일이 생기면 순간으로 등을 돌리는 것이 인간 아닙니까? 빌 2:30의 공동번역은 에바브로디도에 대하여 “그는 여러분이 나에게 미처 해 주지 못한 것을 해 주려고 목숨을 걸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일하다가 죽을 고비를 겪은 사람입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많은 신학자들은 “최전선에 선 사람이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에바브로디도가 병들었습니다. 그 병세가 심해서 죽을병이라는 것입니다(빌 2:27). 그리스도의 일을 위해서, 바울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않고 섬기다가 얼마나 지쳤겠습니까? 그러나, 그 병든 중에도 감옥에 갇혀 있는 사도 바울을 위로하고 섬기고, 받들고 잔심부름까지 다 했습니다. 자기 목숨보다 사도 바울을 더 사랑한 것입니다. 피곤이 지나쳐서 병이 들고 죽을 지경이지만, 우선순위는 ‘주의 일’에 두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로 병이 나았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던 빌립보 교인들은 근심했습니다. 에바브로디도를 보내는 것은 ‘네가 건강을 회복됐으니 빌립보 교인들 눈앞에서 다 보여 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빌립보 교회에게 에바브로디도를 ‘주 안에서 기쁨으로 맞아들이고, 아주 존귀한 사람으로 알고 영접하라’고 했습니다(빌 2:28-30).

2. 인생 역전을 맛본 사람입니다.

‘에바브로디도’라는 이름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사랑과 미(美)의 여신인 ‘아프로티테’에서 따온 것입니다. 헬레니즘 문화권에서 속해 있는 당시 빌립보 지역에서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섬겼던 여신입니다. 에바브로디도는 이방 여신을 섬기는 이교도의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바울을 만난 후로부터 살아 계시는 유일신,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을 믿게 됐습니다. 가정이 뒤집어졌습니다. 이방 여신의 이름을 통해서 인생을 시작했던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을 만나서 신앙의 형제가 되고, 동역자가 되고, 십자가 복음 전선에서 사도 바울과 같이 복음의 아주 훌륭한 군사가 됐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은 그 누군가를 만남으로 우리 인격이 다시 한 번 형성됩니다. 그래서 인생 여정에서 누구를 만나는가는 매우 중요합니다. 진정한 ‘인생 역전’은 우리 하나님과, 하나님이 함께하는 충성된 동역자,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영육 간에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동지를 만나면 그 인생관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3. 다섯 가지 새 이름을 얻었습니다.

에바브로디도의 이름의 뜻은 ‘매력 있는 자, 아담한 사람, 사명의 사람’입니다. 그 이름대로 다 됐습니다. 사도 바울은 기도하는 가운데 에바브로디도에게 다섯 가지의 별명을 주었습니다(빌 2:25). 첫째, 에바브로디도는 ‘나의 형제’라고 했습니다. 영적인 형제를 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사는 자를 말합니다(마 12:46-50, 눅 11:27-28). 여기 ‘나의’란 소유격 수식어는 우연히 붙여진 것이 아닙니다. 믿음도, 마음도, 뜻도, 교회를 사랑하고 남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고 기도하는 것도 하나입니다.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얻었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을 얻었습니다. 참된 친구, 참된 형제입니다. 두 번째, ‘함께 수고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손발을 놓지 않고 일하는 일꾼입니다. 사도 바울이 사형 당하게 되면 같이 사형 당할지도 모르는 죽음을 각오하고 받든 분입니다. 목숨을 걸고 한 용감한 수고입니다(빌 2:30). 또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교회를 진심으로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늘 깨어서 교회의 아픈 부분을 기도해 주는 기도의 대장이었습니다. 주님의 뜻을 위해서 항상 깨어 있는 자입니다(골 4:2-3, 고전 15:57, 히 11:6). 깨어 있는 자가 믿습니다. 깨어 있는 자가 교회를 사랑합니다. 깨어 있는 자가 교회 위해서 일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함께 군사 된 자’라고 했습니다. 바울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 복음 확장을 위해서 된 신령한 군사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할 때 그대로 믿었습니다. 오늘날 현대 교회에 에바브로디도와 같은 사람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좋은 군사란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딤후 2:4). 에바브로디도는 생명을 걸고 나라를 지키고 교회를 지키는 사명감으로 일하는 사람입니다. 네 번째, 빌립보 교회의 ‘사자, 대사’라고 했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공신도가 아주 높은 사람입니다. ‘대사’라는 히브리어는 ‘변호사’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참 진실한 마음, 거짓이 없는 진리의 마음 가지고 변론할 때 사람들이 다 굴복합니다. 올바른 중보자, 변호사 같은 사람이 있을 때, 교회가 환해지고 덕을 쌓게 되고 신용이 있게 됩니다(요 14:26, 15:26). 마지막으로 ‘조력자, 조수’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무대가 화려하고 출연진이 훌륭하다고 해도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언제나 주연으로 일하고, 나타날 때는 조연입니다. 공은 많이 세우되, 교회의 공으로 돌리고 하나님께 영광 돌립니다. 여기 ‘나의 쓸 것을 돕는 자’라는 말씀은, 단순히 도와주는 게 아니라 바울과 함께하면서 헌신적이고 눈물겨운 수고, 복음을 위해서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는 가운데 불평, 불만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가가 있어야 일하지만, 에바브로디도는 그러한 사람이 아닙니다. 일전 한 푼 받지 못하고 헌신, 봉사한 것입니다.

결 론 : 우리교회에 에바브로디도와 같은 일꾼만 있다면 세계를 뒤집어 놓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위해서 날마다 내 속에 짓눌리는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고후 11:28). 그것은 고생이 아니라 삶에 아름다운 꽃이고 열매입니다. 열매가 맺히면 많은 사람이 따먹는 흐뭇한 복음을, 생명을 나눠 주는 것처럼, 에바브로디도 같은 성도가 되어서 교회를 위해서 늘 짓누르고 고통을 당하는 신앙의 성숙함으로 마음먹는 대로, 그 소원대로 되는 축복된 역사가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빌립보서 2:25-30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나의 쓸 것을 돕는 자라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 저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저를 긍휼히 여기셨고 저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빌립보서 2:25-30 KRV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나의 쓸 것을 돕는 자라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 저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저를 긍휼히 여기셨고 저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더욱 급히 저를 보낸 것은 너희로 저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며 내 근심도 덜려 함이니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저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저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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