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 고가도로 | [서울시 기록 영상] 청계천 복원 이렇게 진행됩니다. 27023 투표 이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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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업명: 2020년 멀티미디어 기록물 디지털화사업
2. 사업일자: 2020. 4. 27. ~ 2020. 11. 30.
3. 이관: 시민소통기획관 시민소통담당관
4. 입수: 서울기록원
5. 제작시기: 2003년
6. 내용
– 청계천 복원 공사과정 시뮬레이션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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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기록원 웹사이트 문의( https://archives.seoul.go.kr/user-guide/inquir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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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아직도 청계천고가도로의 흔적이? | 서울시

청계천고가도로는 1960년대 이후 대한민국의 고속성장과 근대화 및 서울 발전의 상징적 시설물 중 하나이다. 1990년대에 들어 급증하는 교통체증과 노후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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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ediahub.seoul.go.kr

Date Published: 12/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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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으로 만나는 대한민국 > 경제·산업 > 고가도로 – 콘텐츠 목록

1967년 10월 14일 착공한 삼일고가도로는 1967년 8월 15일 착공한 청계고가도로의 일부 구간에 해당하는데, 당시 국내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던 삼일빌딩이 있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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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theme.archives.go.kr

Date Published: 11/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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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만들기] 20. 청계고가도로 | 중앙일보

김현옥 서울시장은 부임 이듬해인 67년 봄 문득 “미아리고개~청계천~신촌.홍제를 잇는 유료 고가도로를 건설하면 서울시내 차량 소통이 훨씬 원활해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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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joongang.co.kr

Date Published: 6/1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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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기록 영상] 청계천 복원 이렇게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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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청계 고가도로

  • Author: Archives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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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5.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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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고가도로(淸溪高架道路)는 서울특별시 중구 주자동에 위치한 남산1호터널과 성동구 마장동을 잇는 총연장 5.8km의 고가도로였다. 1969년 3월 22일 용두동 – 삼일로 구간이 먼저 개통하였으며, 용두동 – 마장동 구간은 1970년 8월, 마지막으로 삼일로 – 남산1호터널 구간이 1976년 8월 15일에 개통되면서 전 구간이 완성되었다. 이후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고속 성장과 근대화를 상징하는 건축물로 오랫동안 자리매김하였으나 도시 경관 저해, 복개 하천인 청계천의 오폐수로 인한 악취, 고가도로 노후화 등 여러 문제로 인해 2003년 6월 30일을 끝으로 철거되었으며, 현재는 옛 교각 일부만이 상징적 의미로 보존되어 있다.

명칭 [ 편집 ]

1967년 서울시에서 건설부에 제출한 고가도로 계획안에 따르면 공식 명칭은 ‘서울시 고가고속도로’였다.[1] 1차 구간이 준공된 이후에는 삼일빌딩에서 이름을 딴 삼일고가도로(3.1고가도로)로 명명하였으나,[2] 1984년 11월 16일 서울시는 고가도로가 청계천 복개 위에 세워진 구조물임을 인용하여 청계고가로(靑溪高架路)로 명칭을 변경하였다.[3]

이후 언론에서는 청계고가도로, 삼일고가도로 두 명칭을 혼용하여 사용하다가 마장동 ~ 삼일빌딩(청계2가) 구간은 청계고가도로, 삼일빌딩 ~ 남산1호터널 구간은 삼일고가도로로 구분하여 사용하였다.[4][5]

개요 [ 편집 ]

1950년대 중반의 청계천은 한국 전쟁 직후의 서울시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슬럼지역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추진된 것이 청계천 복개사업이었다.

청계천 복개사업은 일제 강점기나 1955년에도 일부 이루어졌지만, 청계천이 본격적으로 복개된 것은 1958년부터였다. 1958년 5월부터 1961년 12월까지는 광교 ~ 청계6가(동대문 야구장 부근) 구간, 1965년부터 1967년까지는 청계6가 ~ 청계8가(신설동) 구간, 1970년부터 1977년까지는 청계 8가 ~ 신답철교 구간이 복개되었다. 그리고, 이 복개된 청계천 위에 청계천고가도로가 건설되게 된다.

청계고가 건설 당시 서울시 도시계획국장 등을 지낸 서울시립대 손정목 명예교수는 저서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외국사절들과 워커힐로 곧장 달려가기 위해 이 고가를 설치하였다는 비화를 소개한 적이 있다.

청계천 주변의 판잣집들은 복개과정에서 철거되고, 그 자리에는 맨션 · 상점가가 건설되었다. 이 과정에서 청계천 주변에 살던 많은 사람들은 봉천동, 신림동, 상계동 등으로 강제로 이주당했다.

중구 광교에서 동대문구 용두동에 이르는 길이 5 ~ 6km, 폭 16m의 청계고가도로는 1967년 8월 15일에 착공하여 1976년 8월 15일에 완공되었다. 청계고가도로 아래의 도로는 청계천로라고 불렸으며, 청계고가는 당시 교통을 분산시키고 교통흐름을 빠르게 하는 근대화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1980년 중반 이후 자가용 보급으로 인해 차량이 급격히 많아지고 고가 주변의 양복 · 전기부품 등의 도매상가에서 상하차 작업을 하는 주차차량이 청계천로에 넘치면서 심각한 교통 정체를 일으키는 곳이 되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 도로가 낡아져 노후화 문제로 시달리게 되었고, 2002년 7월부터는 안전문제 때문에 대형차의 진입이 금지되었다. 이 때문에 청계고가를 철거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났고, 일부 환경단체를 중심으로 청계천의 복개 역시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2002년 취임한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은 청계고가 철거를 청계천 복원 사업과 연계해 2003년 6월 30일에 고가를 폐쇄한 후 청계고가도로를 철거하였고, 2003년 7월 1일부터 2005년 10월 1일까지 3,600억원을 들여 청계천의 복개를 뜯어내고 청계천 복원 사업을 시행하였다.

배경 [ 편집 ]

청계천 복개 사업의 연장선 [ 편집 ]

전시적 도시 건설의 일환 [ 편집 ]

역사 [ 편집 ]

일제강점기 [ 편집 ]

청계천 준설 사업 [ 편집 ]

1918년부터 일본 제국은 경성의 급격한 인구 증가에 따른 불량한 위생 환경을 정비하기 위해 남촌[주 1] 일대 지류와 청계천 본류 등 개천 준설을 실시하였는데, 콜레라와 장티푸스 등의 전염병을 예방하고, 준설을 통해 하천 소통을 원활히 하여 도심부 침수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6][주 2]

청계천 복개 사업과 중단 [ 편집 ]

당시의 기술 수준을 고려할 때, 하천 복개는 준설보다 하천 오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으로 인식되고 있었으나, 예산의 부족으로 인해 바로 현실화되지는 못했다. 1930년대 후반에 들어서 법정 도시계획(경성시가지계획)이 수립됨에 따라 청계천의 복개가 진행될 수 있었다.[7]

더 나아가 1935년 경성부의 토목과장이었던 마치다 쿠스오(町田久壽男)는 청계천을 전면적으로 복개하여 도로를 건설하고 그 위로 고가철도를 놓는 구상을 발표하였다. 이러한 구상은 1936년 시행될 경성부의 시역 확장[8]으로 인해 늘어날 교통 수요를 감당하고, 용산과 영등포에 조성된 공업 단지에서 생산되는 군수품을 만주 일대로 빠르게 수송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이렇게 계획된 도로와 철로는 경성과 의주 또는 경성과 원산 간 부설된 도로와 철도를 보완하기 위한 역할도 수행할 수 있었다.[9] 토지 수용비를 필요로 하지 않는 청계천 위에 도로와 철도를 놓겠다는 계획은 재정 문제로 인해 조선총독부 철도국이 거부하면서 좌초되었다.[10]

1940년, 중일 전쟁으로 인한 군수물자 운송과 방공책을 대비한 경성부 계획에 청계천을 복개하여 그 위에 전차 궤도를 부설하고, 공습에 대비하여 지하철을 만든다는 구상이 포함되었다.[11] 그러나 이 계획은 군수물자 부족으로 인해 무산되었다.[10] 이후 1942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예산이 부족해지자 청계천의 준설 및 복개 사업이 중단되었다.[12]

1940년대 ~ 1950년대 [ 편집 ]

잇따른 준설 시도와 실패 [ 편집 ]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인 1949년 가을, 서울시는 광복 이후 처음으로 청계천 준천을 시도하였다.[13] 그러나 해외 귀국 동포들과 월남한 사람들에 의해 서울 인구가 폭증하면서 청계천변에 무허가 판잣집이 대거 지어졌고,[주 3] 이로 인해 공사에 난항을 겪어 무산되었다.[15] 그로부터 6년 뒤인 1955년에 서울시가 재차 청계천 준설을 시도하였으나,[16] 서울시와 내무부 치안국과의 상충된 입장으로 인한 충돌[17][18]에서 드러난 서울시의 미비한 행정력과 청계천변 소매상들의 반발[16]로 인해 청계천 입구에서 관수동 일대까지 준설하는 데 그치고 동대문시장 동쪽으로는 작업이 진행되지 못했다.

청계천 복개 사업 재개와 난항 [ 편집 ]

청계천 복개 공사가 진행되는 모습 (1960년)

1957년 허정이 서울시장으로 부임하면서 상황이 변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는 서울시 시정 과제 중 하나로 청계천 복개 사업을 꼽았다. 자세한 내용을 살펴보면, 1958년 3월 연내에 광교 ~ 주교동[주 4] 구간을, 1959년에는 동대문 오간수교까지의 구간을 복개하고, 복개 공사와 더불어 청계천변 무허가 판자 점포를 철거하는 것을 주된 골자로 하는 내용이었다.[19] 광교에서 주교동까지의 구간은 1958년 연말까지 복개 공사가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나,[20][21] 이후 구간의 복개 사업은 순탄하게 진행되지 못했다. 복개 공사를 위해서는 무허가 건물의 철거 및 이전이 선결되어야 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다시 서울시와 경찰의 조치가 상충되는 등의 행정의 난맥상이 드러나면서 사업이 제대로 진척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22]

이런 가운데 1959년 6월 허정 시장이 경질되고 임흥순 시장이 부임하면서 청계천 복개에 대한 시정은 다시 뒤바뀌게 되었다.[23] 서울시는 평화시장 원래 자리에 상가로 신축하는 것을 조건으로 복개 비용의 일부를 평화시장 상인들이 부담하는 것으로 합의하였고 그에 따라 복개 공사를 3개월 간 중단하기에 이르렀다.[24] 이후에도 1960년 5월까지 천변의 무허가 건축물을 철거하고 오간수교까지 복개를 완료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였으나 선거 등 정치적 이유로 인해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25] 4·19 혁명 이후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는데, 신임 김상돈 시장과 시의회, 기존 서울시 공무원 간 극심한 대립이 이어지면서 행정적 마비 상태를 지속하였기 때문이었다.[26]

1960년대 [ 편집 ]

복개도로 개통과 구간 연장 [ 편집 ]

5·16 군사정변을 계기로 공사는 다시 원활하게 진행되었다. 1961년 7월 서울시는 청계천변 무허가 건물 철거와 하천 복개 사업을 재개했고, 같은 해 12월 5일 오간수교에서 청계천 복개도로 개통식을 거행하였다.[27] 1962년 7월, 서울시는 오간수교부터 제1청계교[주 5]까지 총 연장 520m 구간을 도로로 복개할 계획을 세웠다. 이 사업에서 시 재정이 아닌 민간 자본을 유치하여 공사를 시행하고 복개 구간을 시에 기부하는 대신, 복개 도로변의 일정한 대지를 사업자에게 양도하려는 계획을 세웠다.[28]

고가도로 건설 구상과 구체화 [ 편집 ]

복개된 청계천 위에 고가를 건설하는 계획은 김현옥 서울시장의 취임 이후인 1960년대 중반부터 구체화되었다. 1966년 10월, 서울특별시 도시계획국장이었던 주우원은 서울시의 늘어난 교통량으로 인해 발생한 교통 대란을 해결할 방법을 제시하였다. 그는 노면교통의 효율성을 높이는 것을 골자로 하는 교통 개선안을 제시하였는데, 이를 위해서는 시내의 일반적인 교통을 담당할 도로와 도심을 통과하는 교통을 처리하는 도로를 분리하여 설치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도심을 관통하는 교통을 처리하는 역할로 고가도로를 선택하였다. 그는 고가도로가 도심을 동서로 관통하는 연장 2.4km의 도로여야 하고, 고가도로와 기존 도로를 연결하기 위해 도심에 3개소의 입체교차로와 20여 개소의 램프를 설치할 것을 제안하였다.[29]

고가도로에 대한 서울시의 공식 입장이 처음 드러난 것은 1966년 12월 30일 서울시민회관[주 6]에서 열렸던 서울시 시정종합보고에서였다. 김현옥 당시 서울시장은 공익건설 사업의 일환으로 고가도로 건설을 진행할 것이라고 언급하였고,[30] 구체적으로는 청계천에 복개도로와 고가도로를 건설하겠다고 밝혔다.[31]

1967년 3월경 김현옥 서울시장은 김수근 당시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주 7] 부사장에게 고가도로 건설을 위한 자문을 구하였다.[33] 김수근이 작성한 조감도[34]에 따르면, 그는 종로를 중심으로 하여 성장하는 단핵 방사형 도시 구조였던 서울을 종로-여의도-마포-인천으로 이어지는 선형 구조로 바꾸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서울에서 인천까지 동서로 길게 뻗은 간선도로에 직교하는 선형 축을 설정하여 하나의 도시 단위로 이해하려는 원리를 제시하였는데, 이러한 계획은 그의 스승이었던 단게 겐조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35] 이 계획에서 청계고가도로는 서울 도심부를 관통하는 동서 간선도로의 한 축을 담당하도록 설계되었다.[36] 김수근이 제시한 구상도를 바탕으로 서울시는 청계고가도로 건설 조사 용역을 발주하였고, 이에 따라 1967년 5월 신촌에서 마장동까지의 공사 구간을 확정하는 계획서가 서울시에 제출되는 등[37] 고가도로 공사와 관련한 내부적인 논의가 이루어졌다.[38]

용두동 ~ 삼일로 구간 교각 공사가 진행된 모습

고가도로 건설 시작 [ 편집 ]

1967년 6월 14일, 서울시는 언론을 통해 3년에 걸쳐 공사비 63억 원을 투입하여 청계천 위에 자동차전용 고속고가도로를 짓는다는 내용을 발표하였다.[34] 당시 계획에서는 청계고가도로가 두 구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첫 번째 구간은 연희IC를 기점으로 하여 서대문과 광교, 동대문을 지나 마장동으로 이어지는 노선으로, 간선 연장 10.5km, 도로 폭 24m의 6차선 도로였고, 두 번째 구간은 독립문을 기점으로 하여 사직터널, 중앙청, 동대문, 퇴계로, 서울역, 서대문, 독립문으로 다시 돌아오는 순환 노선으로, 총 연장 10km의 도로였다.[39][40] 이 중 첫번째 안인 관통형 고가도로만 실제 공사에 착수하였으며, 두 번째 안이었던 환형 고가도로는 우선순위에 밀려 계획이 무산되었다.[41]

재정난으로 인한 계획 변경과 1차 개통 [ 편집 ]

당초 계획에 따라 1967년 7월 시비(市費) 2억 원을 들여 기초 작업에 착수할 예정이었으나[42] 재정적 문제로 인해 착공되지 못하였고,[41] 한 달 뒤인 1967년 8월 15일 추경 예산이 확보되기 전임에도 불구하고 광화문 중부소방서 옆에서 고가도로 기공식을 일단 진행하였다.[40][43] 다음 날인 8월 16일 서울시는 고가도로 건설비 2억 원을 포함한 2차 추경 예산안을 확정하여 총리실에 신청하였고,[44] 이후 10월에 열린 임시국회에서 국정감사와 예산 심의를 거쳐 원안 그대로 통과되어 자금 조달이 가능해짐에 따라 10월 14일부터 교각 공사를 시작하게 되었다.[45][46]

1968년 서울시는 고가도로 건설을 위한 예산이 부족해지자 전년도와 마찬가지로 예산안에 고속도로 예산 10억 원을 신청하였으나 전액 삭감되며 공사 중단 위기를 겪었지만[47] 시 당국에서 시유지 매각, 개발 이익, 세수 확보 등 여러 대책을 강구하여 예산을 마련하여 공사를 강행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처 확보하지 못한 예산은 국외 차관을 통해 자금을 마련하려는 계획을 세웠다.[48]

재원 조달을 위한 서울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청계고가도로 건설 계획은 착공 도중 몇 차례 수정되었다. 숭례문에서 광화문까지 이르는 도로가 영구보존도로로 지정되면서[49] 세종로를 관통하여 연희IC까지 연결하려는 계획에 차질을 빚게 되었고, 결국 1968년 8월 14일 청계로-세종로-서대문-연희동에 이르는 원안을 폐기하게 되었다. 대신 삼일로에서 두 갈래로 하뉘어 하나는 퇴계로와 서울역을 거쳐 아현 입체교차로로 연결하고, 다른 하나는 마포대교와 연결하는 것으로 계획을 수정하였다. 그러나 이마저도 예산 확보의 어려움과 자재 수급 불안으로 인해 실현될 수 없게 됨에 따라 용두동-삼일로 구간을 우선 개통시키고 나머지 구간은 향후 건설하기로 결정하였고,[50][51] 1969년 3월 22일 용두동-삼일로 구간이 먼저 개통되었다.[52]

1969년 9월 촬영한 청계고가도로의 모습

도시계획 변화에 따른 계획 수정 [ 편집 ]

이후 대내외적인 상황 변화로 인해 청계고가도로의 건설 계획은 다시 변경되었다. 1967년 11월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서울-인천을 축으로 하여 개발하는 기존의 서울 도시계획과 배치되는[53] 서울 – 부산 간 고속도로를 건설할 것을 밝혔다.[54] 이후 경부고속도로의 기점을 제3한강교로 결정하게 되면서[55] 강남개발의 중요성이 높아졌고, 서울의 기본 구조 또한 서울 도심지역과 한강 이남을 연결하는 계획으로 변화하였다.[56]

또한 대외적으로는 1.21 사태와 울진·삼척 무장 공비 침투 사건이 잇달아 발생함에 따라 군사적 긴장이 높아지면서 김현옥 서울시장은 유사시 군사적 목적으로도 겸용할 수 있는 시설을 짓는 「서울시 요새화 계획」을 발표하였다.[57] 이 계획에는 남산1호터널과 남산2호터널의 착공도 포함되었는데,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청계고가도로의 삼일로 구간과 남산1호터널을 연결하려는 계획을 1969년 11월 20일 발표하였다.[58] 이러한 이유로 기존 계획 구간 중 삼일로 – 아현입체교차로 구간은 백지화되었다.

연표 [ 편집 ]

1966년 12월 30일 : 서울시의 고가고속도로 건설 계획 표명

1967년 6월 14일 : 청계고가도로 건설 계획 공식 발표

1967년 8월 15일 : 용두동 ~ 삼일로 구간 착공

1969년 1월 7일 : 「서울시 요새화 계획」 발표

1969년 3월 22일 : 용두동 ~ 삼일로 구간 개통

1969년 11월 20일 : 삼일로 ~ 남산1호터널 연결 계획 발표

1986년 7월 12일 : 충무로2가 ~ 용두동 6.9km 구간을 자동차 전용도로로 지정 [59]

2003년 7월 1일 : 충무로2가 ~ 용두동 6.9km 구간을 자동차 전용도로에서 해제[60]

노선 [ 편집 ]

청계고가도로 폐쇄 직전인 2003년 6월 30일을 기준으로 함.

시설물 IC : 나들목(Interchange) JC : 분기점(Junction)

( ■ ): 자동차 전용도로 구간

종류 이름 접속 노선 소재지 비고 서울특별시도 제27호선 삼일대로와 직결 IC 퇴계로2가 램프 서울특별시도 제27호선 (삼일대로)

소파로 서울특별시 중구 IC 영락교회 앞 램프 서울특별시도 제27호선 (삼일대로) 남산1호터널 방향 진출만 가능

마장동 방향 진입만 가능 IC 광교(청계2가) 램프 서울특별시도 제50호선 (청계천로) 남산1호터널 방향 진입만 가능

마장동 방향 진입만 가능 IC 청계3가 램프 광교 방향 진출만 가능

마장동 방향 진입만 가능 IC 청계6가 램프 광교 방향 진입만 가능

마장동 방향 진출만 가능 IC 청계7가(평화시장 앞) 램프 광교 방향 진출만 가능

마장동 방향 진입만 가능 IC 청계8가(삼일아파트) 램프 광교 방향 진입만 가능

마장동 방향 진출만 가능 JC 청계램프 서울특별시도 제30호선 (내부순환로) 성동구 성산 방향 진출입 불가능 서울특별시도 제50호선 청계천로와 직결

운행 제한 [ 편집 ]

청계고가도로는 구조 보전 및 차량운행 위험방지를 위해 1997년 5월 15일부터 승용차 이외의 차량이 통행할 수 없게 제한했다.[61] 이후 2001년 1월 1일 자동차관리법이 개정되어 기존 승용차의 기준에 10인승 이하 승합차도 포함되면서 2001년 4월 1일부터 기존에 등록된 10인승 이하 승합차도 통행할 수 있게 변경하였다.[62]

관련 항목 [ 편집 ]

각주 [ 편집 ]

내용주

↑ 청계천 이남 일대를 부르는 명칭이다. 일제강점기에는 남촌 지역을 중심으로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여, 조선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북촌과 대비되었다. ↑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당시 청계천이 범람하면서 도심부가 침수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 [14] 천변에 거대한 판자촌 이 형성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로 준설이 중단됨에 따라 하천에 퇴적물이 계속 쌓이면서 바닥이 높아져 하천 바닥에 판잣집의 기반이 되는 기둥을 박는 것이 쉬워졌기 때문이다. ↑ 지금의 종각 을지로4가 일대에 해당한다. ↑ 지금의 청계7가 ~ 다산교에 해당한다. ↑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 81-3번지에 위치했었으며, 화재 로 인해 철거되었다. 이후 같은 자리에 세종문화회관 이 건립되었다. ↑ [32] 대한민국의 종합기술 용역업체로, 1965년 5월 건설부 산하 국영기업 인 한국종합기술공사로 창립한 것이 그 시초이다.

참조주

[사진은 말한다] 청계고가도로, 1973년 5월 12일

31빌딩 옥상에 올라가 청계고가도로를 촬영했다. 당시만 해도 31빌딩은 서울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옥상에서 보니 고가도로 주위로 높은 건물이 없어서 동서남북이 뻥 뚫린 듯 잘 보였다. 청계고가도로는 충무로에서 시작해 동대문구 용두동으로 연결되는 도로로 1971년 8월 15일 개통됐다. 청계천에서 왕십리 방면으로 직선으로 뻗은 도로다. 이 고가도로는 러시아워가 따로 없이 극심했던 서울시 교통 체증을 일부 완화해주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설치 후 30년이 지난 2000년대 들어 고가도로 노후화 문제가 제기됐다. 청계천은 서울시의 모든 물이 모여들면서 왕십리 살곶이다리 근처에서 중랑천과 합쳐지고 서쪽으로 흘러 한강으로 유입된다. 고가도로 때문에 하천 정화가 쉽지 않아 악취가 풍기기도 했다.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이 도심을 가르는 ‘살풍경’이 도시 미관을 해친다는 불만도 많았다. 고가도로는 이명박 서울시장 때 철거(2003년)가 시작돼 두 달 사이에 완전히 걷어내졌다.[전민조 다큐멘터리 사진가][ⓒ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청계천/ 청계고가도로 .. 설치와 철거

위의 그림은 제가 강의시 종종 사용하는 산업혁명을 바라보는 시선을 정리한겁니다.

일제 강점기….

조선의 청년들은 농촌을 떠나 일자리가 있는 서울 (당시 이름은 경성)로 몰려 듭니다. 그결과 서울이 인구 70만 명의 대도시가 되면서 청계천변의 교통과 위생 문제가 악화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인공 하수도가 따로 없어 생활하수가 청계천을 거쳐 한강으로 흘러갔고, 이 과정에서 분뇨와 토사가 쌓여 하천 바닥이 높아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당시는 푸세식변소 였으니까 청계천변은 냄새가 진동 했을 겁니다. 양심의 거리낌 없이 변소의 오물을 청게천에 흘러가게 도랑을 파고 버린것이죠.

그런데 일본인들은 남쪽지류에 많이 살았다고 합니다. 1918년부터 일제는 홍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준설작업을 하게 됩니다. 그러던 일제는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 전쟁이 길어지자 서울을 병참기지화하여 승기를 잡고자 결심을 하게 됩니다. 신속한 물자 수송을 위해 서울 중심을 가로지르는 청계천을 복개, 도로를 넓히기 시작 한 겁니다. 이에 일제는 1937년부터 1942년까지 광화문우체국 앞의 대광통교에서부터 영풍문고가 있는 광통교 인근까지 구간에 걸쳐 청계천을 복개합니다. 지금생각하면 매우 짧은 거리이지만 당시는 대 공사 였을것 같아요. 이공사에 조선인들이 강제 징용 되었겠죠?

한강의 대부분 하천은 서쪽으로 흘러요. 물론 한강도 서쪽으로 흘러서 황해(서해)에 합류하죠. 반면에 청계천은 유일하게 동쪽으로 흘렀는데 복개가 되면서 세상의 빛에 차단 됩니다. 1945년 해방을 즈음하여 청계천에는 토사와 쓰레기가 하천 바닥을 뒤덮고 있었으며, 천변을 따라 어지럽게 늘어선 판자집들과 거기에서 쏟아지는 오수로 심하게 오염되었다고 합니다.

해방의 기쁨도 잠시.

철저히 준비한 북한군은 기습공격을 감행하며 서울은 순식간에 북한의 수중에 들어갑니다. 아직도 북한은 우리의 주적인데 요즘 언론을 보면 동포라는 개념을 더 강조하는 것 같아서 안보전선에 이상기류가 감지되고 있어요. ㅠㅠ

3년간 (1950~1953)의 전쟁이 끝나고 생계를 위하여 서울로 모여든 피난민들 중 많은 사람들이 청계천변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반은 땅 위에, 반은 물위에 떠 있는 판자집은 그렇게 탄생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태국/ 라오스/ 말레이지아등에 가보면 강가에 떠 있는 빈민들의 판자촌이 떠오르죠? 그런 모습이었을 겁니다.

청계천은 악취로 인해 대표적인 서울의 슬럼지역으로 인식이 되었습니다.

<청계천 10년> ①’흉물’ 고가 철거 후 도심 명소로 변신

개발 시대 상징에서 ‘역사, 문화, 환경’의 상징으로 탈바꿈불완전한 생태 복원·밀려난 청계천 상인 지원 부족 지적도

청계천의 옛모습 청계천 맑은내다리와 다산교 사이 하천변에 청계천의 옛모습을 타일에 전사해 부착해 놓았다. 2015. 1. 17. (전재원=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황희경 이정현 기자 = 다음 달 1일은 ‘도심의 흉물’이었던 서울 청계천 고가도로가 철거되고 콘크리트로 덮여 있던 청계천에 다시 물길이 흐르기 시작한 지 10년째 되는 날이다.

청계천은 1411년(태종 11년) 홍수 위험을 줄이기 위해 치수사업이 이뤄지면서 우리 역사에 처음 등장한다. 이후 주변에 시전 상가 등이 생겨나면서 도성 주민들의 일상생활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청계고가 상판 제거 작업 (서울=연합뉴스) 다음 달 1일은 청계천이 복원된 지 10년째 되는 날이다.

그동안 청계천에는 2005년 10월 1일 복원 후 1억 9천만명의 내·외국인이 방문했으며 내년 초 2억명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된다.

청계고가도로가 공사시작 한 달을 앞둔 2003년 7월24일 인부들이 중장비를 동원해 일부구간의 상판을 제거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 강점기 서울이 인구 70만명의 대도시가 되면서 청계천변의 교통과 위생 문제가 악화하기 시작했다. 인공 하수도가 따로 없어 생활하수가 청계천을 거쳐 한강으로 흘러갔고, 이 과정에서 분뇨와 토사가 쌓여 하천 바닥이 높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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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37년 무교동 일대를 복개(覆蓋·구조물로 하천을 덮어 씌우는 것)했다. 해방 후 수많은 피란민과 월남한 사람들이 서울로 몰려들면서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이에 서울시는 청계천 전면 복개 결정을 내리게 된다. 도시 미관을 좋게 하는 것 외에 도로가 부족한 현실에서 교통문제까지 해결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1958년 시작된 복개 사업은 1977년에야 전면 복개가 마무리됐을 정도로 장기간 이뤄졌다. 1976년에는 자동차 전용도로인 청계고가도로까지 개통돼 하천으로서 청계천은 완전히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2002년 서울시장 선거를 앞두고 당시 이명박 후보가 청계천 복원을 공약으로 내세우면서 청계천 복원 가능성이 처음 논의되기 시작했다.

이 후보는 당시 청계고가의 안전 문제 등을 거론하며 청계천 복원을 주장했다. 청계고가는 급격한 개발 성장기 도심과 서울 동북부를 잇는 국내 최초의 도심고속화도로로 역할을 했다. 하지만 안전점검 결과 노후화가 진행되면서 붕괴의 위험까지 있는 것으로 지적돼 여러 차례 보수공사를 한 상태였다.

청계천 복원공사 기공식 (서울=연합뉴스) 2003년 7월1일 서울 광교 청계고가 시점에서 열린 청계천 복원공사 기공식에서 역사적인 공사의 대장정을 알리는 불꽃이 청계고가 상공을 수놓고 있다.

환경단체 등과 많은 시민은 여기에 찬성했다. 그러나 청계고가도로 철거 후 교통혼잡을 우려한 사람들과 주변 상권에 미칠 영향을 걱정한 청계천 주변 상인들의 반대도 거셌다.

서울시장에 당선된 이 시장은 2002년 7월1일 취임 당일 청계천복원추진본부를 설치하는 등 특유의 ‘추진력’으로 청계천 복원 사업에 박차를 가했다. 2003년 7월 복원 계획을 발표한 이후 8개월 만인 2004년 2월 청계천 복원의 큰 그림인 ‘청계천 복원 기본계획’이 확정됐다.

청계천 복원에 따른 도심 교통혼잡 완화를 위해 중앙전용버스 전용차로 등을 도입해 대중교통체계를 전면 개편한다는 방침도 함께 발표했다.

청계천 복원 사업은 이후 상인들의 반발과 청계천 복개 구조물 아래에서 발견된 문화유적의 처리 문제 등을 놓고 여러 난관에 봉착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2005년 10월 2년3개월간의 대역사(大役事)를 끝내고 물길이 흐르는 청계천이 다시 시민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래픽> 청계천 22개 복원다리

(서울=연합뉴스) 이재윤 기자 = 다음 달 1일은 ‘도심의 흉물’이었던 서울 청계천 고가도로가 철거되고 콘크리트로 덮여 있던 청계천에 다시 물길이 흐르기 시작한 지 10년째 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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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 tuney.kr/LeYN1 트위터 @yonhap_graphics

청계천이 돌아온 이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차량이 다니던 길은 연평균 1천800만명의 내·외국인이 찾는 도심의 명소가 됐고 다양한 문화행사가 열리는 서울의 상징적인 공간이 됐다.

동아일보사부터 신답철교까지 5.8km 구간을 걸을 수 있게 됐고 청계천을 헤엄치는 다양한 물고기와 주제별 녹지공간도 시민 곁으로 돌아왔다.

조선시대 도성에서 가장 큰 다리였던 광통교(廣通橋)도 1910년 종로∼남대문 전차 선로 복선화 공사로 도로 밑에 묻힌 지 95년, 청계천 복개 이후 47년 만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청계천은 개발 시대 상징에서 ‘역사, 문화, 환경’의 상징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어두운 면도 존재한다.

<그래픽> ‘청계천 복원 10년’ 주요 통계

(서울=연합뉴스) 이재윤 기자 = 다음 달 1일은 ‘도심의 흉물’이었던 서울 청계천 고가도로가 철거되고 콘크리트로 덮여 있던 청계천에 다시 물길이 흐르기 시작한 지 10년째 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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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 tuney.kr/LeYN1 트위터 @yonhap_graphics

청계천은 원래 물이 없는 마른 천(乾川)이었던 탓에 한강물을 끌어다 써야 한다. 물을 끌어다 쓰는 데 드는 전기료 등 연간 75억원의 관리비가 투입되고 있고 ‘콘크리트 어항’이란 비판도 계속 나오고 있다.

기습 폭우라도 내리면 행인이 고립되거나 물고기가 집단 폐사하는 등 아직 완전한 ‘생태 복원’은 이뤄지지 못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청계천 복원공사로 갈 곳을 잃게 된 상인들을 위해 조성된 송파구 문정동의 복합쇼핑센터 ‘가든파이브’도 계속 문제가 되고 있다.

청계천 복원공사로 밀려난 청계천 상인들을 입주시키기 위해 서울시와 SH공사가 조성한 가든파이브는 당시 ‘동양 최대’ 규모를 자랑했다. 그러나 고분양가와 임대료 때문에 청계천 상인들은 정작 입주를 꺼렸다. 이후에도 오랫동안 상권이 활성화되지 않아 비싼 임대료를 물고 입주한 상인들은 이중고를 겪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나마 남아있는 100여명의 청계천 상인들은 올해 1월 청계천 이주상인에 대한 특별분양 기간이 끝나면서 더는 우대를 받을 수 없게 돼 반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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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아직도 청계천고가도로의 흔적이?

서울시는 매월 ‘이달의 미래유산’을 선정해 홍보하고 있다. 9월의 미래유산은 청계천 복원공사 이전의 역사를 기억하는 ‘청계천고가도로 존치기념물’, 대한민국 최초 신약 ‘활명수’, 대한민국 의회정치의 상징인 ‘국회의사당’이다.

필자는 그중에서도 지금은 사라진 ‘청계천고가도로’가 제일 기억에 남는다. 청계천 복원의 의미를 되새기며 청계천고가도로 존치기념물을 찾았다. ‘존치교각’은 철거 당시 개발시대의 자랑과 애환을 기억하기 위해 비우당교와 무학교 사이의 교각 중 온전한 형태 하나, 일부 파손된 것 하나, 기둥만 남은 것 하나씩을 남겨둔 것이다. 2013년에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등재된 바 있다.

이후 존치교각이 청계천 미관을 해친다고 지적하며, 철거에 대한 시민의견도 있지만 주변 환경과 이질적인 풍경 자체가 오히려 지역적 특색이 될 수 있다며 유지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시민도 있다. 청계천고가도로는 1960년대 이후 대한민국의 고속성장과 근대화 및 서울 발전의 상징적 시설물 중 하나이다. 1990년대에 들어 급증하는 교통체증과 노후화, 슬럼화 문제 및 청계천 복원계획 등으로 청계고가도로는 2006년에 철거를 완료했다.

청계천고가도로 존치기념물은 미래를 위한 멋진 그림과 이야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코로나19가 하루빨리 사라져 조금 더 자유롭고 편하게 누릴 수 있길 바란다.

기록으로 만나는 대한민국 > 경제·산업 > 고가도로

2014년 2월 8일 오후 1시가 조금 지나가자 종근당빌딩 앞 아현고가도로 입구엔 시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다음날이면 철거가 시작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질 아현고가도로 위를 마지막으로 걸으며 추억을 간직하기 위해서였다.

1966년 급성장하는 서울의 시장이 된 김현옥은 ‘도시는 선이다’라는 구호 아래 고가도로의 건설을 추진했다. 그는 재임하자마자 대대적인 건설사업을 벌여 서울의 풍경을 바꿔나가기 시작했는데, 1967년부터 추진된 고가도로 건설계획도 그 중에 하나였다. 1960년대 들어 서울의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교통문제도 심각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김현옥 시장은 서울의 도시공간을 입체화하여 자동차가 마음 놓고 시속 60km 이상으로 달릴 수 있는 고가도로의 건설을 계획하였다.

서울시 고가도로 건설사업계획(1967)

그러나 고가도로 건설계획에 대해 당시 많은 전문가들은 극심하게 반대했다. 전문가들은 고가도로는 대중·대량 교통수단이 아닌 자동차 전용도로에 불과하여 교통난 완화수단으로 최선의 방안이 아니며, 고가도로의 기능상으로도 도심관통은 불합리하다는 점 등을 지적했다. 또한, 일부 전문가들은 지하철 도입이 우선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불도저’라는 별명을 갖고 있던 김현옥 시장은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건설을 강행하였으며, 1968년 9월 19일 우리나라 최초의 고가도로인 아현고가도로를 개통하기에 이른다.

마포구 아현동에서 중구 중림동을 잇는 940m의 아현고가도로가 개통된 후, 1969년 3월 22일 길이 870m의 삼일고가도로가 개통되었다. 1967년 10월 14일 착공한 삼일고가도로는 1967년 8월 15일 착공한 청계고가도로의 일부 구간에 해당하는데, 당시 국내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던 삼일빌딩이 있는 삼일로 위를 지나가기에 붙여진 명칭이다. 1970년 8월 15일 서울역고가도로가, 1971년 8월 15일 총길이 5,650m의 청계고가도로가 속속 개통하면서 서울시 근대화의 상징이 되었다.

우리는 건설한다_서울역 고가도로 개통(1970)

1960년대 후반부터 착공되어 개통되기 시작한 서울의 고가도로는 이후 서울 시내 곳곳에 계속 건설되면서 점차 부산 등 전국 각지에도 건설되었다. 속도와 효율, 도심을 가로지르는 논스톱의 스피드를 즐길 수 있는 고가도로는 발전하는 서울의 모습을 상징하며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시민들에게는 익숙한 풍경이 되었다.

그러나 30~40년을 사용한 고가도로들은 점차 기능의 효율성보다 문제점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가장 큰 문제는 도시 미관을 해칠 정도로 노후화되어 시민의 안전을 위협하고 있으며, 병목현상으로 인한 교통체증은 애초의 고가도로의 목적을 무색하게 했다. 더불어 고가도로 주변의 슬럼화도 철거 이유가 됐다. 또한 서울을 ‘걷기 좋은 도시’로 만들기 위한 서울시의 변화된 정책으로 고가도로는 하나 둘씩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다.

서울역전 고가도로 전경(1970) 청계천고가도로(2003) 청계천 고가도로 철거(2003)

1990년대까지 활발하게 건설되던 고가도로는 2002년 동대문구 전농동 떡전고가도로를 시작으로, 2003년 청계고가도로, 2008년 광희고가도로, 2012년 홍제고가도로, 2013년 혜화고가도로와 서빙고고가도로, 2014년 약수고가도로 등이 차례로 철거되었다.

(집필자 : 조정미)

[서울 만들기] 20. 청계고가도로

청계천이 복개되자 도로의 너비가 50m로 넓어졌다. 1960년대까지 서울에서 가장 폭이 넓은 도로였다. 김현옥 서울시장은 부임 이듬해인 67년 봄 문득 “미아리고개~청계천~신촌.홍제를 잇는 유료 고가도로를 건설하면 서울시내 차량 소통이 훨씬 원활해질 수 있지 않을까”하고 생각했다. 金시장은 건축가 김수근씨에게 자신의 구상을 설명하고 설계 스케치를 부탁했다. 때마침 일본 도쿄(東京)에 64년 올림픽을 대비한 고가도로가 건설돼 편리성을 인정받고 있었다. 일본에서 공부한 김씨는 도쿄 고가도로 설계 등을 참고해 만든 고가도로 조감도를 金시장에게 보였다. 金시장은 67년 8월 8일 ‘유료 고가도로 건설계획’을 발표했다. 청계천을 거쳐 동북쪽으로는 미아리, 서쪽으로는 서대문~홍제동, 서대문~신촌, 서대문~의주로~삼각지를 연결하는 유료 고가도로를 69년까지 완공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 계획을 보고 ‘엉뚱하지만 기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67년 말 현재 서울시에 등록된 차량은 2만5천6백80대였으며, 이 중 자가용은 4천75대에 그쳐 굳이 고가도로를 건설하지 않아도 차량 소통에는 지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계획이 발표되자 전문가들과 언론이 반대하고 나섰다. 주로 외곽지역 교통을 원활히 하기 위해 만드는 고가도로를 도심에 건설하는 것은 부적절하며, 오히려 지하철 건설이 바람직하다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유료 고가도로 건설 계획은 크게 후퇴했다. 무교동~신문로~서대문로터리를 거쳐 신촌과 홍제동에 이르는 당초 계획과 달리 신촌은 커녕 서대문로터리까지도 못 가고 광교에서 공사가 끝났다.

이같이 계획이 크게 축소됐지만 金시장이 절대 양보할 수 없는 곳이 있었다. 광교에서 청계천을 거쳐 용두동에 이르는 구간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주로 청계고가도로를 이용해 워커힐을 뻔질나게 찾았다.

청계고가도로 건설공사는 70년 양택식 시장이 부임 후에도 계속됐다. 1호터널이 뚫린 남산과 연결되고, 청계천 7가에서 마장교까지 연장됐다. 朴대통령의 워커힐 나들이가 훨씬 편리해졌다.

청계고가도로가 지난 7월 철거 직전의 모습을 갖춘 때는 71년 8월 15일이었다. 본선 길이 5.86km에 25개 램프의 길이가 2.58km에 달했다. 청계고가도로는 교각이 세워질 때부터 투박한 인상을 줬다. 이는 ‘적은 비용으로 많은 양을 짓는다’는 金시장의 건설철학에 따라 비싼 수입 철근.철판은 적게 쓰는 대신 값싼 시멘트를 많이 쓴 것이 가장 큰 원인이다. 개통 후 이용 차량의 급증으로 뻔질나게 벌어진 ‘땜질식 보수’도 한몫했다.

복개도로를 들어내고 복원한 인공 청계천에 잠자리나 개똥벌레가 찾아올지는 두고봐야 할 것이다. 청계천의 너비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양쪽 10m씩 도로를 내고 나면 청계천의 너비는 30m를 못 넘는다. 청계천 양쪽으로 재개발 고층건물이 들어서면 탁 틔인 시원한 공간을 확보하기도 어려울 것 같다.

손정목 서울시립대 명예교수

정리=신혜경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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