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복음 7 장 설교 | [조정민 목사 설교]때가 아직 이르다(요한복음7장1-9절) 10624 좋은 평가 이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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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직교회 주일예배
설교자: 조정민 목사
날 짜: 2014년 11월 9일
제 목: 때가 아직 이르다
본 문: 요한복음 7장 1-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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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요한복음 7장 1절에 보면,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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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민 목사 설교]때가 아직 이르다(요한복음7장1-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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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요한 복음 7 장 설교

  • Author: svcforhy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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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7. 1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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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7장,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 구조 해설 설교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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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정체를 밝히셨으며, 7장에서도 예수님은 계속해서 자신이 생수의 강이심을 선언하시며, 참 만족과 기쁨의 근원이 예수님께 있음을 선언하십니다. 7장의 말씀을 읽고 구조와 해설, 설교 주제를 정리하였습니다.

요한복음 7장,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요한복음 7장,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7장의 구조

1절-9절, 기다리시는 예수님

유대인들은 예수님에 대해 적대감을 보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자 하나님의 아들이며 세상에 생명을 주러 오셨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예수님의 형제들 역시 예수님을 믿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유대 지역으로 어서 가라고 재촉하였지만, 예수님은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다며 갈릴리에 머물러 계십니다.

10절-13절, 수군거리는 유대인들

후에 초막절을 맞이하여 예수님께서 유대 지역에 올라가셨습니다.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 수군가렸습니다. 그리고 그들 각자가 내리는 예수님에 대한 평가는 천차만별이었습니다.

14절-24절, 유대인들을 책망하시는 예수님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예수님은 성전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교훈을 선포하셨으며 천국 복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놀라운 말씀에 유대인들은 모두 깜짝 놀랐습니다. 그 가운데에서 예수님을 비난하는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철저하게 지킨다고 말하지만, 예수님께서 보시기에는 외모로만 판단하는 외식주의자들에 불과한 사람들이었습니다.

25절-30절, 우리가 알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떠나지 않으시고 성전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모습을 보고서 사람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나사렛 출신임을 모두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아는 지식은 매우 피상적일 뿐입니다.

31절-36절, 우리는 모른다

금방까지 예수님의 정체에 대해 알고 있다고 말했던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듣고서 모른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때가 지나면 아버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대해 유대인들은 그 뜻을 전혀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37절-44절, 내게로 와서 마시라

명절이 끝나갈 때, 예수님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큰 소리로 사람들을 초청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와서 마시라는 예수님의 이 초청의 말씀은, 성령님께서 곧 오실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지에 대해 논쟁하고 있을 뿐입니다.

45절-52절,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아랫사람들이 예수님을 잡아 오지 않자, 유대 지도자들은 그들에게 왜 잡아 오지 않았냐고 책망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에 아랫사람들이 미혹되었는가 묻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자기들의 지식과 믿음으로 예수님을 판단하여 주님의 어떤 말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7장의 해설

1절-52절,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요한복음에는 갈등을 보여 주는 이야기들이 수두룩하게 나타납니다. 여기 있는 각각의 이야기들은 예수님께로 가서, 예수님의 삶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또 우리의 믿음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깨달음을줍니다. 그렇다면 적대감의 근본 원인은 무엇일까요? 각각의 논쟁에 대하여 예수님이 주시는 답변을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그 답변들이 내포하는 복합적인 의미에서 추가로 얻을 수 있는 통찰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만일 강화(講話)에 명절 이름이 언급되어 있다면,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서 배우는 것과 유대인들의 명절 준수는 어떤 관계가 있을 수 있을까요? 무리들의 반응 가운데서 우리의 모습을 발견했습니까? 왜 그렇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떤 논쟁이, 어떠한 이유로 그들을 나뉘게 했을까요? 예수님은 어떤 약속을 주셨습니까? 이런 질문에 대한 답변은 우리의 기도와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다줄 수 있을까요?

25절-36절, 당국자들은 이 사람을 참으로 그리스도인 줄 알았는가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출신 배경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권위와 능력을 믿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알고 믿는 사람에게는 늘 기쁨과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셨듯이, 우리도 이 세상에 보내셨다는 것을 믿는 사람은 결코 환경에 따라 열등감이나 좌절감에 빠지지 않습니다.

37절-39절,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본문의 이 말씀들은 얼마나 큰 언약입니까? 이 구절들에 내포된 복합적인 의미는 이사야 55장과 요한복음 19:34, 그리고 요한계시록 7:17과의 관계 속에서 깊이가 더해지게 됩니다.

14절-24절, 단순한 설교가 잘 이해됩니다

501년에 아를의 주교가 된 카이사리우스(caesarius)는 설교 시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교부들의 기법으로 여러분에게 성경올 강해한다면 고등 교육을 받은 소수에게만 영적 자양이 공급되고 나머지 회중은 굶주리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간곡히 부탁드립니다만, 설교자가 촌스러운 말을 써야만 주님의 온 교회가 영적 자양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면 교

육을 많이 받으신 분들은 그 말을 참고 들어 주십시오. 교육을 받지 못한 시람은 자신을 교육받은 사람의 경지로 끌어올릴 수 없기 때문에 후자가 전자의 수준으로 자신을 낮춰 적응해야 합니다. 교육받은 사람은 단순한 설교를 잘 이해할 수 있지만, 단순한 사람은 상류충에게 전하는 내용을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말씀을 단순하고 쉽게 전하셨습니다. 생활 주변에서 흔히 볼수있는 현상, 물건, 습관 등을 활용하여 말씀을 전하셨는데, 이는 모든 이에게 하나님 말씀이 쉽게 전해지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7장의 설교주제

내 때가 이르지 않았다(1절-9절)

수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이는 초막절이 가까워지자, 예수님의 형제들은 예수님께 “예루살렘에 올라가라”라고 재촉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진짜 그리스도인이라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자리에서 자신을 드러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형제들조차 예수님에 대해 정확하게 알지 못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내 때가 이르지 않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때는 우리의 때와 다릅니다. 예수님의 때는 결정적인 순간을 의미하며,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는 그때, 우리 모두가 구원을 받게 되는 그때를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때를 이룰 그 때를 믿음으로 기다리고 있습니까? 주님의 시간을 기대하고 있습니까?

메시아를 만날 수 없는 사람들(32절-36절)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이익에 방해가 될까 봐, 예수님을 잡아들이기 위해 아랫사람들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예수님의 때가 되지 않았기에, 아랫사람들은 빈 손으로 돌아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욕심과 생각에 갇혀 예수님을 바로 보지 못했습니다. 자신들의 지식에 갇혀 예수님을 오해하고 거부하여 구원의 기회를 놓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믿음을 통하여 예수님을 찾았고 만났으며 영생의 기쁨을 누리는 복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복을 놓치지 않도록 계속해서 주님을 붙드시겠습니까?

우리를 부르시는 예수님(37절-39절)

초막절 축제의 절정은 실로암 연못에서 물을 길은 물통을 멘 제사장을 따라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이 제단을 돌면서 시작됩니다. 모두가 실로암 연못의 풍성한 물을 바라보고 있지만, 그 물들은 완전한 만족을 주지 못하는 일시적인 물일 뿐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자신이 실로암 연못 물로는 결코 채울 수 없는 영원한 생수의 강임을 선언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초청에 응하고 주님 앞에 나아오는 자들은 성령님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다함없는 풍성한 은혜를 성령님의 인도하심 안에서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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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7장 1~13 ‘내 때’와 ‘너희 때’- 노벨(Alfred Bernhard Nobel)의 값진 삶

요한복음 7:1~13

‘내 때’와 ‘너희 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요 7:6)

요즘 사람들은 100세 시대라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100세까지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2020년 통계청 수치를 보면 80세까지 사는 것도 큰 복입니다. 75세까지 살 확률 54%, 80세 30%, 85세 15%, 90세 5%입니다. 건강하게 살 수 있는 평균 나이는 76~78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백 년, 천 년 살 것처럼 눈에 쌍심지를 켜고 입에 게거품을 물고 살아갑니다. 그러면 짧은 삶을 어떻게 살아야 의미와 가치가 있을까요?

헬라어에 ‘때’란 단어가 셋이 있습니다. 크로노스(χρονοζ)와 카이로스(καιροζ), 그리고 호라(ὥρα)입니다. ‘크로노스’는 몇 년 몇 월 몇 시와 같은 시간입니다. ‘카이로스’와 ‘호라’는 하나님의 때를 가리키는데, ‘호라’는 바꿀 수 없는 하나님의 때를 말하고, 카이로스는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기 위한 가장 좋은 시간을 뜻합니다. 요한복음 2장 4절의 ‘내 때’의 때는 바꿀 수 없는 호라(ὥρα)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내 때’는 카이로스(καιροζ),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시간입니다. 초막절에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형제들의 권유에 따라 올라가시지 않고 하나님 사역에 가장 좋은 시간을 택하여 올라가십니다. 예수님께서 짧은 생애에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역을 완성하실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때를 따라 사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내가 원하는 때를 좇아 살지 말고 하나님의 때를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1. 예수님을 믿지 않는 형제들(요 7:1~5)

예수님은 유대에 가시지 않고 갈릴리에서 조용히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복음을 전하신 것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의 3대 명절 중 하나인 초막절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초막절은 유월절, 오순절과 함께 3대 명절 중 하나입니다. 초막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장막 생활을 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12세 이상의 남자들은 예루살렘에 올라가 절기를 지켰습니다. 그들은 감람나무와 종려나무 등의 가지로 집을 만들어 7박 8일 동안 이곳에서 지냈습니다(레 23:39~43). 그들은 임시초막에 머물면서 광야 기간에 만나로 먹여주시고 반석에서 물을 내어 마시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고, 초막같은 이 세상에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지냈습니다.

초막절은 9, 10월에 올리브, 포도, 무화과 등을 거두어들이는 시기와 겹치므로 추수 감사절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날을 일명 수장절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추수한 곡식으로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즐겼습니다(신 16:13~17). 역사학자 요셉푸스(Josephus)는 많은 절기 중에 가장 거룩하고 성대한 축제라고 했습니다. 그는 “이 축제는 보지 않고는 누구도 그 축제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라고 했습니다.

초막절이 다가오자 동생들도 마음이 들떠 하던 일을 멈추고 예루살렘에 올라갈 준비를 하느라고 야단이었습니다. 머리에 무스를 바르고, 구두에 광을 내고, 하얀 와이셔츠에 빨간 나비넥타이를 매어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예루살렘에 올라갈 준비를 하지 않고 전도만 하셨습니다. 이를 보다 못한 동생들은 예수님께 충고했습니다.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이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요 7:3~4)

이 말을 풀어보면 “형님, 촌구석에서 전도만 하고 계시면 어떻게 됩니까?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한번 펼치고 드러내셔야 하지요. 형님, 답답합니다.” 동생들은 구름 떼같이 사람들이 모이는 축제 기간에 예루살렘 중앙에서 큰 능력으로 자신을 나타내라고 압력을 넣었습니다.

동생들의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대권을 잡으려면 중앙무대에서 대중의 지지를 받아야 합니다. T.V.에도 출현하고 기자회견도 하여야 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매스컴을 타지 못하면 출세할 수 없습니다. 여하튼 출세하려면 중앙무대로 진출해야 합니다. 그래서 “말이 태어나면 제주도로 보내고 자식이 태어나면 서울로 보내라.”라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동생들이 예수님을 예루살렘으로 가라고 하는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형님 예수님의 덕을 보아 자신들도 좀 출세하고자 함입니다. 그들의 가문은 뼈대가 있는 다윗 왕손 가문입니다. 그런데 몰락하여 갈릴리 나사렛에서 다 쓰러져가는 초가삼간에서 목수 일로 막노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 잃어버린 가문의 영광을 되찾고 싶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 가난과 초가삼간을 벗어나 맨션아파트에서 살고 싶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 출세하여 세상에서 ‘여봐라’ 하며 살고 싶었습니다. 이는 유독 이들의 생각만은 아닐 것입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모두에게 이런 갈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동생들은 빵을 쫓아다니는 무리와 다를 바 없습니다. 왜냐하면, 무리는 예수님을 이용하여 빵을 얻고자 했다면, 동생들은 예수님을 이용하여 명예를 얻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 대상이 다를 뿐입니다.

지금도 개중에는 예수님을 이용하여 명예를 얻고자 하고,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이용하여 물질을 얻고자 하고,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이용하여 권력, 예수님을 이용하여 어떤 사람은 남편감, 어떤 사람은 신부감,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이용하여 돈을 벌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근본 문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 믿지 않은 데 있습니다.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요 7:5)

보통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긍정한다, 인정한다, 의지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믿는다는 것은 그 인격과 그의 존재를 전폭적으로 믿고 신뢰하고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행함이 다 옳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동생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인격과 존재를 믿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알지 못했습니다. “등잔 밑이 어둡다(燈下不明)’라는 말처럼, 그들은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믿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왜 예수님을 믿지 못했을까요?

이는 그들이 세상 영광을 구했기 때문입니다. 세상 욕심과 세상 영광은 영적인 눈을 멀게 하고, 영적인 생각을 막히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되고,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하려면 세상 영광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을 박아야 합니다.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라고 했습니다.

2.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느니라(요 7:6~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요 7:6)

예수님은 유대로 올라갈 것을 요구하는 동생들의 제안에 세속사인 ‘너희 때’와 구속사와 관련된 ‘내 때’를 대조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때가 늘 준비되어 있다’는 것은 언제든지 자기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장소에 가서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자기 뜻과 자기 때를 따라 살므로 자기 마음대로, 자기 계획대로 예루살렘에 올라가 축제를 즐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잘 드러낼 수 있는 가장 적합한 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가장 좋은 시간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행진할 때, 자기들이 가고 싶은 아무 때나 행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밤에 불기둥이 멈출 때 따라서 멈췄고, 낮에 구름 기둥이 움직일 때 행군했습니다. 하나님은 40년간 그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사는 법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때를 따라 사는 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성도라면 하나님의 뜻을 좇아, 하나님의 때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믿지 않는 자와 대조되는 삶입니다. 믿지 않는 자들은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자기 유익을 따라 계획하고, 자기 계획에 맞춰 자기 유익을 따라 살아갑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영광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향해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 8:5~6,13)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잘 드러낼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하나님 때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때 어떤 일을 당하게 됩니까?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아니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 증언함이라.”(요 7:7)

형제들은 자기 뜻과 자기 계획대로, 자기 가치관대로, 자기 유익을 좇아 살아가므로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이 원하는 삶을 살지 않고 세상 일들을 악하다고 하시므로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세상이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우리가 과거 나의 가치관과 계획과 생각대로 살 때 세상이 나를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친구들에게는 잘 나가는 사람 중의 하나였습니다. 친구들 따라 술 마시고 춤추고 놀아주니 누가 미워하겠습니까? 어디를 가나 인기짱입니다. 세상을 따라 살면 우리를 미워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좇아 살면 세상은 우리를 박해합니다. 우리가 변하여 세상에서 소금과 빛으로 살면 세상은 우리에게 적대감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의 가치관대로, 성경의 원리를 따라 살면 박해를 받습니다. 이때 우리는 조금도 이상히 여길 필요 없습니다. 성경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 3:1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전도서에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전 3:1)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기한(καιρὀς)’은 우리의 의지로 때와 시기를 조절할 수 없는 하나님의 권한에 속한 한정된 시간을 말합니다. 우리가 낳고 죽는 것을 내 의지와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까? 낳고 죽는 것을 조절할 수 있습니까? 이는 하나님의 뜻과 의지 속에 있습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은 하루 24시간, 1,440분입니다. 이 정해진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실패와 성공이 판가름이 납니다. 요한 웨슬리는 하루를 5분 간격으로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는 1분도 헛되이 보내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스위스의 한 노인이 80 평생을 돌이켜 보며 자신의 시간을 헤아려 보았더니, 80평생 중에 26년간 잠을 잤고, 21년간 노동했고, 6년간 식사에 허비했고, 약속을 기다리는데 기다린 시간을 5년을 허비했고, 5년간을 혼자 낭비했고, 아이들과 노는데 26일, 세수하는데 28일, 넥타이를 매는데 18일, 담뱃불을 붙이는 데 12일을 허비했습니다. 그가 행복을 누렸던 시간은 46시간에 불과했습니다.

이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있습니까? 만일 우리가 80년을 산다면 평생을 스마트폰과 TV 시청과 골프 등으로 30년을 허비하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성경은 인생을 70으로 보았고, 길면 80이라고 했습니다(시 90:10). 우리는 하루 24시간, 1,440분이라는 제한된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말고 영원하고 가치 있는 것에 사용해야겠다고 다짐해야 하겠습니다.

때는 중요합니다. 때의 중요성을 아는 사람은 시간을 아무렇게나 헛되이 보내지 않습니다. 노벨(Alfred Bernhard Nobel)이 값진 삶을 살게 된 일화가 있습니다. 노벨의 형이 죽었는데, 신문에 노벨이 죽은 것으로 잘못 기사가 실렸습니다. 노벨의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죽음의 상인, 사망’이라는 기사였습니다. 그는 자신에 대한 그 기사를 읽는 순간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나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 또한 돈 많은 사람, 죽음의 다이너마이트를 팔아 부자가 된 정도로 알려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제 내가 죽었을 때 사람들이 “저 사람은 위대한 삶을 살았다.”라는 평가를 받아야 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이너마이트를 만들어 모은 돈을 모두 인류의 발전에 공헌한 이들을 위해 노벨상을 만드는데 기여했습니다. 그는 죽음의 때를 생각하고 가치 있는 일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요 9:4)

우리가 살아가면서 실패하는 것은 하나님의 때가 아니라 내 때에 맞춰서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때를 맞춰 사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떤 사람을 살아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매사 하나님의 뜻과 때를 분별하여 하나님의 때를 선택하여 살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뜻과 때를 분별하고, 인내하며 기다릴 수 있어야 합니다.

3. 은밀히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예수님(10~13)

예수님은 동생들이 모두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을 때 조용히 말씀을 가르치시다가 명절 중간쯤 혼자 조용히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형제들과 함께 올라가면 앞뒤에서 나팔을 불며 야단법석을 떨기에 하나님의 일을 하실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조용히 혼자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들레지 않고 조용히 하나님의 일을 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 자신을 드러냈습니다. 기도하더라도 자기를 드러내고, 금식하더라도 드러내고, 남을 돕더라도 자기를 드러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조용히 갈릴리에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한 영혼을 귀히 여기고 사랑하셨습니다.

요즘은 목소리가 큰 사람이 이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큰 소리를 잘 냅니다. 내가 잘났다며 각을 세우고 자기를 내세웁니다. 말도 튀고, 글도 튀고, 옷차림도 튀고, 광고도 튀고, 책 제목도 튑니다. 뭔가를 보여 주기 위해 사실보다 과장하고 거짓으로 꾸밉니다. 일부 선교사들이 선교 후원비를 받으려고 사역을 과대 포장하여 페이스북과 카톡에 올린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역자들 또한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해 과대 포장하여 선전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종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사 42:2)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역사 방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종은 겉으로 외치지 않습니다. 대화를 독점하지 않고, 그 소리가 거리에 들리지 않습니다. 온유하고 겸손합니다. 과장하지 않습니다. 종은 맡은 일을 조용히 일합니다. 조금도 자기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실현 가능성 없는 일을 벌여놓고 요란하게 광고를 내지만, 종은 그런 사람들과 달리 한 사람을 귀히 여기고 조용히 기도하고 복음을 전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소금과 빛은 말없이 조용히 자기를 녹여 어두운 세상을 밝게 비추고 세상의 부패를 방지하며 맛을 냅니다. 하나님의 역사 또한 가리면 가릴수록, 은밀하면 은밀할수록 더욱더 드러나고 빛을 냅니다. 바울은 일생 주님만을 드러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상)

바울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내 안에 사신다고 고백했습니다. 종은 이름이 없습니다. 종은 주인의 이름만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종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목적이 자기 뜻을 성취하고 자기를 실현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드러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이의 기본자세입니다.

영국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실낙원(Paradise Lost)》의 저자 존 밀턴(John Milton)의 무덤과 흉상이 있습니다. 죤 밀턴의 흉상 밑에는 딱 한 줄, ‘《실낙원》의 작가 존 밀턴’이라고 쓰여있습니다. 그런데 그 밑에 흉상을 세운 사람 윌리엄 밴손은 33개의 단어로 열거되어 있습니다. 혹 윌리엄 밴손이 우리의 모습은 아닌지요?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마 6:1)

구제와 기도와 금식은 성도의 덕목입니다. 이 덕목의 요소는 은밀함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람들로부터 인정과 칭찬을 듣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의를 행할 때 어떤 모양으로든지 자신의 의를 나타내고자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사람의 인정과 칭찬을 받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상을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상급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상급을 받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그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심을 믿는 것입니다(히 11:6).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형식적인 삶보다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자기를 드러내지 말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드높이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때를 좇아 살려면 분별력과 용기를 가지고 하나님의 때를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때를 선택하려면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시간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짐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때를 잘 선택하고 들레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20200311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 (요한복음 7장 10-18절) – 코너스톤장로교회

http://thececc.com/wp-content/uploads/2020/03/20200311.mp3 유대인의 3대 절기인 초막절이 되자, 예수님의 형제들은 예수님께 공개적으로 드러내 유대로 가라고 요구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자신은 갈릴리에 머물겠다고 말씀 하십니다. 바로 이 장면이 문제가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제 살펴본 본문과 연결해 본다면,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7장 8절에는 이번 명절에는 예루살렘에 안 올라가시겠다고 말씀하신 후, 10절에서는 자신이 말씀하신 것과 다르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의 행동이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내용상의 모순이거나, 예수님 스스로 말과 행동이 다른 것도 아닙니다. 8절에서 예수님의 형제들은 예수님께서 공개적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가라고 요구 했으나, 예수님은 그러한 방식으로 올라가지 않겠노라고 말씀하신 것이죠. 10절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님은 형제들의 기대나 바람과는 다르게 공개적으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은밀하게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십니다. 10절에 예수님께서 은밀히 가셨다는 말은 비밀스럽게 어떤 일을 하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다른 순례자들과 떨어져서 성 안으로 들어가셨다는 의미 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은밀하게 행동하신 것은 아직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 즉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기 때문 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기 위하여 순종하고 계셨습니다.

초막절 명절을 맞이하여 수도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방문객으로 넘쳐 났습니다. 어딜 가나 사람들의 입에는 ‘예수’의 이름이 오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은 장안의 화제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보기를 원했고, 그를 만나기 위해 찾아 다녔습니다. 민심은 반으로 나눠 졌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병든 자를 치료하고 귀신을 쫓아내는 일을 하기에 좋은 사람이라고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안식일 계명을 준수하지 않고,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하게 여겼다고 말하며 예수님을 이단 혹은 사기꾼이라 말하며 비난했습니다.

무리 중에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본 사람도 있었고, 그에 대한 소문을 들은 사람들도 있었기에 예수님에 대하여 호의를 가진 자도 있었고, 예수님이 메시아일지도 모른다는 믿음을 가진 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이나 제사장과 같은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를 미워했기에, 사람들은 이들이 두려워 공공연하게 말하지는 못하고, 뒤에서 수군거리고 있는 분위기였습니다. 유대인들이 계속해서 예수님을 찾아 헤매었으나 찾지 못했고, 무리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수군거렸지만 그를 보지 못했습니다.

초막절은 본래 7일간 계속되는 명절 입니다. 그러나 하루가 더 추가되어 총 8일간 축제가 이어졌습니다. 14절을 보니 예수님께서 명절의 중간에 무리 가운데 나타나셨으니, 초막절이 시작된 지 4-5일째 되는 날로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명절 중간이다 보니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몰리는 시기 입니다. 14절에 예수님께서 성전에 올라가 가르치셨다는 말씀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성전에서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당당하게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계시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본문 말씀에 기록되어 있지 않아, 우리는 예수님의 설교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이 얼마나 대단했는지요, 당시 예수님의 가르침을 귀로 듣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그의 권위 있는 말씀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더 놀라워했던 것은 예수님이 나사렛이란 조그마한 촌동네 출신이고, 그의 아버지가 당시 천하고 가난한 직업으로 여겨졌던 목수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 입니다. 15절 말씀을 보십시오. “(요 7:15) 유대인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 유대인들은 여섯 살이 되면 회당에서 율법을 배웁니다. 오늘날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가 있듯이, 예루살렘에는 ‘서책의 집’, ‘설명의 집’, ‘연구의 집’이란 교육 기관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기관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은 대부분 학비를 감당할 수 있는 유대 엘리트 층의 자제들이었습니다.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서 예수님은 정규 교육도 받지 못했을 터인데, 그가 이와 같이 지혜롭고 권세가 있는 은혜로운 가르침을 베풀자 사람들은 놀랄 수 밖에 없었던 것이죠.

이들은 예수님이 랍비가 되기 위한 정규 교육과정도 다니지 못했다는 점을 앞세워 예수님의 가르침에 정통성이 없다고 깎아 내렸습니다. 무리가 자신의 가르침을 듣고 수군거리자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습니다. 16절 입니다. “(요 7:16)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예수님은 비록 공적인 교육을 받은 기회는 없었지만, 그의 가르침에 권세가 있고 은혜가 충만했던 이유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 입니다.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의 가르침은 랍비들의 전통에서 왔으나, 예수님의 교훈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온 것이기에 전혀 다른 가르침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자신의 가르침을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주장하고 또한 하나님께서 그를 보내셨다고 말씀하시자, 비난하던 무리들은 예수님을 보고 또 다시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그를 더욱 미워했습니다. 이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17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7:17)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예수님은 누구라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려고 한다면 자신의 가르침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알 수 밖에 없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진심으로 좇아 거룩한 삶을 살고자 한다면, 예수님의 교훈과 가르침이야말로 거룩한 삶에 대하여 가장 적절한 방도를 제공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가르침이 결코 자신의 영광이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교훈은 모두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전한 것이며, 그로 인해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원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바른 동기와 바른 마음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을 가르치는 자신의 교훈에는 그 어떠한 거짓이나 불의가 없다고 당당하게 말씀 하셨습니다.

우리는 어제 새벽에 갈릴리에 머무시는 예수님을 보며, 예수님께서 크고 작은 일을 행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결정 하셨음을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가르치거나 말씀을 전하는 것에 있어서도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르셨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에 집중하시고 또 그렇게 살아가셨습니다.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입거나 시험에 든 사람은 없을까요? 성도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은혜 가운데서 새로운 힘을 주고, 격려하며 위로하는 말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을 통해 오늘 우리가 만나는 모든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요한복음 7장 강해] 24. 오직 예수 (신앙과 반항)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사람에게는 ‘반항심’이라는 것이 있다. 여기서의 반항심은 좋은 의미로 반항심이 아니라, 나쁜 의미의 반항심이다. 권위에 대해 반항하고 싶어하는 그런 마음이다. 자식이 부모에게 도전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아내가 남편에게 그 권위에 맞서려는 것, 제자들이 스승을 대적한다. 백성이 통치자에게 도전장을 내민다. 이런 일들이 우리 주위에 비일비재하다.

이런 마음이 왜 태어날 때부터 마음에 자리 잡고 있을까?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의 권위에 저항했던 아담이 우리에게 물려준 아주 좋지 못한 유산이 아닐까? 어떤 사람들은 이와 같은 반항의식을 미화시켜서 심지어 “위대한 사람은 반항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들으면 그럴듯하다. 카무스라는 사람은 “나는 반항한다. 그럼으로 존재한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반항심을 미화시키려고 하지만, 이는 고약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인간이 가장 악랄하게 반항한 대상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에게 반항한 것이다. 예수님이 본인이 하나님의 아들, 생명이라고 하자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히고 말했다.

오늘 요한복음 7장을 두고 생각을 해보려고 한다. 예수님께 반항하는 사람들이 여러 가지 실례를 통해서 등장한다. 이 사람들을 설교로 소개하는 이유는 “나는 이런 사람은 되어서는 안되겠다”라는 생각을 가지게 할 이유다. 이런 신앙생활을 하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기 위해서다. 우리 나름의 반성, 결심, 결단을 우리 주님께서 기대하는 마음에서 주신 것일 것이다. 5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6장에서는 갈릴리에서 사역하신다. 6장에서 사역을 하시던 갈릴리는 봄철이었다. 그때는 갈릴리가 참으로 아름다울 때다. 정말 백합화가 기가 막히기 아름답다.

이렇게 밀과 보리가 누렇게 익어가는 아름다운 계절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리에서 사역을 하셨다. 그러다가 오늘 7장으로 오니 때가 가을로 바뀐다. 초막절을 통해서 알 수 있다. 9~10월이라는 것이다. 그 반년 동안 사역하신 내용에 대해서 마태복음 12장 이하가 말해주고 있다. 우리가 이미 6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6장 마지막에서 예수님은 시험기를 맞이한다. 임금 삼으려던 예수님께서 하신 설교를 듣고 상당수가 예수의 곁을 떠났다. 지도자에게 있어서 주위에서 사람들이 떠나는 것만큼 외롭고 적적한 것이 없다. 그리고 예수님은 사람들을 보고 항상 좋은 이야기만 한 것은 아니셨다. 책망도 하셨다. 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미 “7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아니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함이라”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람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그 죄를 책망하니, 아픈 데를 찔린 받은 사람들이 좋아할 일이 없다. 그렇게 혼자 남으신 예수님. 이제는 마음 놓고 갈 곳도 없다. 갈릴리는 익숙한 곳이기에 사람들의 존중을 받고 인지도를 누리고 했던 것일 텐데, 이제는 그곳도 편한 곳이 아니게 되었다. 예루살렘에서는 예수님을 죽이려는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예수님의 이와 같은 입장을 우리가 보면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기억난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느니라”

참 딱한 처지에 있는 예수님 앞에 초막절이 가까워 온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생활을 할 때의 역사를 잊어버리지 말고 기억하자는 의미에서 그 절기를 지킨다. 그리고 그곳에서 축복하셨던 하나님을 기억하자는 의미에서 지키는 절기. 초막절을 통해 감사를 올리는 절기다. 이런 대절기 때는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 7장 안에 등장하는 사람들을 보자. 먼저 예수님의 형제들을 살펴보자.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의 4형제다. 이 형제들이 같은 어머니 마리아 밑에서 동거 생활을 했던 것이다. 5절에 보면 이들은 한 사람도 예수를 믿는 사람이 없었다. “5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 이러라” 누구보다도 예수를 믿어야 할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를 믿지 못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종의 모습으로 오셨지만, 하나님이시다. 그 안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다. 그런데 왜 형제들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던 것이다. 또한, 예수님은 수많은 이적을 행하시며, 창녀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도 했다. 시편 저자가 말한 것처럼, 가정에서도 참 힘들었을 것이다.

7장 초두에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빈정거리는 듯한 부분이 나온다. 예수님의 인기가 떨어지면서 형제들 또한 그 부담을 가지고 있다. 예수를 보니 마음이 편하지 못하였다. 그러고 보니 초두에 나오는 말은 “세상을 구원하겠다고 하는 말이 지방에서만 묻혀서는 되겠는가? 이 기회를 왜 놓칩니까? 올라가서 그 인기를 회복해 봅시다.” 한 번 세상에 자기를 PR(홍보)을 하고 싶다면 중앙으로 가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는 빈정거리는 말이었다. 형제들의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그들의 말에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다”라는 말로 대신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설익은 기회로 행동하시지 아니하시며, 보이지 않는 시계를 하나님의 명령을 통해서 본다. 분명한 타이밍으로 주님은 움직이신다.

형제들에 대해서 우리는 보았다.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 비아냥거리는 그들. 우리는 이 형제들을 보면서 우리는 마음에 기도해야 한다. ‘이런 사람들이 되지 않게 하소서’ 아직도 교회 안팎에서 보면, 예수를 가장 잘 믿어야 할 처지에 있는 사람이 가장 못 믿는 경우가 있다. 목사의 자녀들이 신앙에서 겉도는 것과도 같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가끔 보면, 그 믿음의 집안의 자녀들이, 남편이 왜 믿지 못하는지 알 수가 없다.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신 사람들이 끝까지 안 믿는다는 것은 ‘마음에 반항심을 가지고 있다’라는 것이다.

결심하라. 나는 예수의 형제처럼 되고 싶지 않다고. ‘고치자’. 성령께서 우리에게 그런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기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루살렘으로 가면, 그곳에서 예수님께 시비를 거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학벌을 따지는 사람이었다. 당시 남을 가르치려면 ‘랍비’라는 칭호를 가져야 했다. 예수님은 랍비가 아니었다. 지금도 있는 랍비 학교, 거기에 입학한 사람들은 ‘굉장히 공부를 많이 한다.’ 그곳은 졸업도 학위도 없다. 단지 주위 동료들이 ‘인정’해줘야 랍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거기에서 10, 20대의 랍비가 나오면 참으로 대단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학력이 없다.

사도 바울이 가끔 “나는 가말리엘 문하”였다고 말하는 것은 사람들이 그만큼 어디서 공부했느냐가 그 당시 사람들에게 빠르게 인정받을 수 있는 수단이었다. 선생이 가말 리 엘이면, “대단한 곳에 배웠다”라고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그런 것이 없었으며, 마음속에 반항심이 있던 사람들은 반항했다. 16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이는 즉, 예수님의 학벌은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제66과: 요한복음 7장

요한복음 7:1~13 예수께서 초막절에 참여하시다

다음 질문을 칠판에 쓴다. 예수님에게는 형제자매가 있었는가?

학생들에게 그 질문에 답해 보라고 한다. 필요하다면, 요셉과 마리아에게는 예수님 이후에 태어나 예수님과 같은 가정에서 그분과 함께 양육받은 자녀들이 있었다는 점을 학생들에게 이해시킨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리아와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지 요셉의 아들이 아니므로, 이들은 예수님의 이부 형제자매들이었다.(마태복음 13:55~56 참조)

예수님과 같은 가정에서 자란다는 것이 어떠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여러분이 예수님과 함께 자란다면 그분을 믿기가 더 쉬웠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왜 그런가? 아니면, 왜 그렇지 않은가?

요한복음 7장에서 예수님의 “형제들”(요한복음 7:3, 5) 중 일부가 그분을 어떻게 여겼는지를 알 수 있다고 설명한다. 여기서 형제들은 아마도 예수님의 이부 형제들을 가리킬 것이며, 또한 다른 가까운 친척이 포함될 수도 있다.

몇몇 학생에게 요한복음 7장 1~5절을 돌아가며 소리 내어 읽어 달라고 한다.

5절에서는 예수님의 형제들에 대해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한 학생에게 십이사도 정원회의 브루스 알 맥콩키 장로가 기록한 다음 글을 소리 내어 읽어 달라고 한다.

이미지 “그리스도의 신성과 그분의 복음에 담긴 구원의 권능에 대한 간증이 가족이라고 해서 자동으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 그들이 같은 가정에서 자라며 요셉과 마리아의 자애로운 영향력을 받았음에도, 그리고 예수님의 가르침과 성역, 기적들을 알고 있었음에도, 가장 가까운 친척인 그들은 이 시점까지는 아직 그분을 메시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나중에 개종한 것이 분명하다.(사도행전 1:14)”(Doctrinal New Testament Commentary, 3 vols. [1965–73], 1:437)

예수님의 가족 중 일부가 그분의 가르침과 기적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그분을 믿지 않았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요한복음 7장에는 예루살렘에서 열린 초막절 축제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다.(요한복음 7:2 참조) “가장 성대하고 가장 즐거운 축제로”(후기 성도판 영문 성경 Bible Dictionary, “Feasts”) 여겨진 이 8일 간의 축제 기간에, 많은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으로 가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굽의 속박에서 벗어나 광야에서 임시로 지은 오두막, 즉 초막에 살며 체류하던 시기에 하나님께서 내려 주셨던 축복들을 기념했다.(레위기 23:39~43 참조) 유대인들은 또한 그해에 수확한 과실과 곡식에 대해 감사를 드리고 경축했다.(출애굽기 23:16 참조)

맥락과 내용 이해하기 복음을 가르치고 배우는 일의 기초 중 한 가지는 경전 구절의 맥락과 내용을 이해하는 것이다. 맥락이란 특정한 성구, 사건, 또는 이야기를 둘러싼 상황이나 배경을 포괄하는 용어이다. 내용이란 본문에 나오는 줄거리, 인물, 사건, 설교, 그리고 영감에 찬 설명 등을 포괄하는 용어이다. 학생들이 경전의 맥락과 내용을 이해하도록 도와준다면, 그들은 영감받은 저자들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깨달을 수 있도록 준비될 것이다.

3~4절에 따르면, 예수님의 형제들은 그분이 무엇을 하기를 원했는가?

요한복음 7장 6~10절에 대한 요약으로, 예수께서는 그 축제에 가는 것을 지체하셨으나 자신의 형제들에게는 가도록 권하셨다고 설명한다. 축제가 시작된 후, 예수께서는 은밀히 그곳에 가셨다. 예루살렘에 있는 일부 유대인 지도자들이 그분을 죽이고자 했으나 예수께서는 자신이 아직 죽을 때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었다.

한 학생에게 요한복음 7장 11~13절을 소리 내어 읽어 달라고 한다.

예루살렘에 있던 사람들은 각각 예수님에 대해 어떤 말들을 하고 있었는가?

예수님 시대와 마찬가지로 우리 시대에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있다고 설명한다. 일부 사람들은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온 인류의 구주라는 사실을 안다. 그분을 믿고 그분의 복음이 참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그분의 가르침이 참되다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다. 학생들에게 요한복음 7장을 계속 공부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주이시고 그분의 가르침이 참되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지 찾아보라고 한다.

5.4 요한복음 7장 1-53절(37-39) 생수의 근원이신 예수님

생수의 근원이신 예수님

요한복음 7장 1-53(37-39)

예수님은 초막절을 앞두고 형제들과 예루살렘에 내려가는 일에 대해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형제들은 예수님께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자가 어디 있느냐고 하며 예루살렘에 올라가 사람들에게 보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때가 되지 않았다고 하시며 자신은 올라가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예수님은 따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고 유대인의 절기인 초막절을 지키셨습니다. 예수님의 등장에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의견이 분분해 졌습니다. 좋은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과 백성들을 미혹하게 하는 자라고 하며 죽이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혼란한 기간을 모두 마치고 초막절의 큰 날에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외치시기를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또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구약에서 예언했던 참 선지지라고 했지만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었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는 말씀을 듣도록 합시다.

계속되는 예수님의 파격적인 행동으로 인해 유대인들의 미움을 샀습니다. 이러한 미움은 극기야 예수님을 죽이려는 마음으로 발전했습니다. 그래서 1절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는 이유 때문에 예수님은 갈릴리에서만 다니시고 유대지역으로는 다니려 하지 않으셨다고 요한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이 두려워 유대지역으로 다니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는 아직 당신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때는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사역 초기부터 죽으시기 전까지 계속해서 말하고 있는 때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죽으실 때입니다. 그래서 본문 6절도 8절도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때를 생각하신 것은 아직 전해야 할 복음과 제자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이 땅에서 사역하실 때도 그 때를 준비하며 사셨다면 지금도 주님은 다시 오실 때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지금 당장 오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분이 아직 재림하시지 않는 이유는 아직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때는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고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맡겨주신 영혼을 마지막 한 사람까지 찾을 때까지인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유대인의 중요한 절기인 초막절이 다 되어갔습니다. 이에 형제들은 예수님께 나아와 “당신이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라고 하였습니다.

형제들이 이렇게 말함은 형제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형제들의 눈에 예수님은 자신을 드러내기를 원하는 자로 보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을 버려 영혼들을 구원하려는 것이 목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형제들은 그렇게 오해 한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면서 스승이신 예수님의 절대적인 의도인 영혼구원에만 관심이 가져야 함에도 자신을 높이고 영화롭게 되는 것에 관심을 갖고 그것을 추구하는 이들이 많음을 봅니다. 이러한 모습은 주께서 원하셨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나타나심은 당신의 나타나심을 통해 당신에게 나아온 자들이 영혼의 구원을 얻기를 원하셨던 것뿐인 것입니다.

그래서 6장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셨을 때 사람들이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하자 예수님은 그들을 피해 산으로 가셨던 것입니다. 사람들의 인기를 원하고 높임받기를 원하신 분이 아니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을 따르는 이 땅의 모든 성도, 즉 제자들은 예수님이 가셨던 낮고 천한 길, 섬기고 낮아지는 삶,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께서 가셨던 영문 밖으로 기꺼이 나아가는 사역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대화가 시작된 이유가 유대인의 절기인 초막절이 가까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세 가지 중요한 절기를 지켰습니다. 유월절 또는 무교절, 맥추절 또는 오순절, 초막절 또는 수장절이라는 절기였습니다. 거기에 에스더 사건을 계기로 부림절을 지켰고 헬라의 셀류쿠스 에피파네스에 의해 오염되었던 성전이 마카비혁명을 통해 정화되었던 사건을 기념하며 지켰던 수전절이 있었습니다.

이 중에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었던 절기는 바로 초막절입니다. 이 초막절은 현대교회의 추수감사절에 해당되는 절기입니다. 초막절 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3대 절기는 모두 농사와도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유월절은 첫 보리를 추수하여 드리는 절기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유월절은 1월 14일에 지키고 그 다음날인 15일부터 7일간 무교절을 지키게 되는데 이 무교절의 첫날을 초실절 또는 요제절이라 하여 첫 번째로 추수한 보리를 새벽에 드리게 됩니다.

이 때부터 보리를 계속해서 추수하고 오십일 후인 맥추절이 되면 보리는 모두 추수가 끝나고 밀 추수가 한창 진행됩니다. 이 오순절이 처음 시작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시내산에 도착한 때가 오십일 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이 절기가 농사와 관련하여 추수의 절정에 이르게 되는 때인데 이것이 신약에 와서는 성령강림절이 되어 영혼들을 본격적으로 추수하게 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리고 7월 15일이 되면 초막절을 지키게 됩니다. 이 절기를 농사와 관련하여 말할 때는 수장절이라 하여 모든 추수를 끝내고 창고에 들인 후에 드리는 절기인 것입니다.

이 절기들을 농사와 관련하여 다시 정리하면 유월절에 보리를 첫 추수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맥추절에 밭에서 나는 작물들의 추수가 절정에 이르고 포도와 올리브 등의 과일들까지 모두 추수하여 창고에 들인 후에 지키는 절기가 수장절 즉, 초막절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초막절의 특색은 포도원 무도회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초막절에 포도원에 모여 풍성하게 수확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포도원에서 무도회를 가졌습니다. 사사기에 이 축제가 등장합니다. 사사기 21장에 보면 베냐민 지파가 다른 지파들과의 전쟁에서 모두 죽고 600명만 남았을 때 그 중에 400명은 길르앗에서 시집 안간 여인들을 잡아다가 결혼을 시켰고 200명은 포도원 무도회에서 무도회에 참석했던 여인들 중 200명을 납치해서 결혼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러한 축제는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 더 보편화되고 예루살렘에서 축제로 정착했습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이 초막절을 맞아 예루살렘을 순례하여 축제에 참가하는 사실은 장차 모든 민족과 나라 중에서 당신의 백성들이 모여 구원에 참여하게 될 것을 예표 하는 절기로 발전했습니다(슥14:16).

이 초막절은 7일간 지켰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이 7일간 거하게 될 초막을 지었습니다. 이 초막을 지을 때 주의 사항은 벽면은 무엇으로 해도 괜찮지만 천정은 나뭇잎과 풀로 하되 엉성하게 하여 하늘이 보여야 했습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초막을 짓고 살던 것을 기억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가장 풍성한 계절에 가장 어려웠던 광야와 그 곳에서 돌보아주셨던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초막을 만들고 7일을 거하는 동안 종려나무 가지들을 묶어 기쁨의 상징인 “룰라브”라는 축제의 장식물을 만들어 매일 “할렐”인 시편 113편부터 118까지 부르는 동안 휴대했습니다. 그리고 매일 시편 118편 1절 초두인 “여호와께 감사하라”라는 구절을 낭독할 때마다 이 종려나무를 높이 흔들어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기쁨을 표시하였습니다.

또한 밤마다 거행되는 촛불 축제가 벌어졌습니다. 제사장들은 초막절 기간 내내 매일 저녁마다 일곱 갈래로 뻗은 4개의 커다란 촛대에 불을 붙여 성전의 전 지역을 밝게 비추게 했습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그들의 조상이 광야에서 방황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밤중에 불기둥으로 인도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구원의 은혜를 기념하고 이를 즐거워하는 의식이었습니다. 이 때 순례자들은 피리 곡조에 맞추어 횃불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 축제는 밤새도록 계속되었습니다.

또한 예루살렘 성전 동쪽 문에서 거행되는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표현하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이 의식은 초막절 기간 동안 제사장들은 새벽마다 동쪽 문으로 가서 해가 뜨는 순간에 성전을 바라볼 수 있도록 서쪽을 향해 서서 다음과 같이 간절한 마음으로 구절을 낭송했습니다. “우리의 조상들은 여호와의 전을 등지고 낯을 동으로 향하여 동방 태양에 경배했지만(겔 8:16), 우리의 얼굴은 주께로 향하여 있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외치는 이유는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는 원인 중의 하나가 젊은이들이 성전을 등지고 태양신을 섬겼었는데 이것을 기억하며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과 관련된 하나의 행사가 더 있었습니다. 그것은 매일 아침에 드려지는 헌수식이었습니다. 초막절 기간 동안 제사장들은 매일 아침마다 줄을 지어 성전에서부터 실로암 못까지 행진하였으며 실로암에서 황금항아리에 물을 담아 제단으로 가져왔습니다. 이 때 백성들은 그 행렬을 따르면서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그리고 그 물은 제단으로 가져와 제단을 한 바퀴 돌고 제단에 부어드렸습니다.

이렇게 제단을 돌 때 제단에는 평소에 없던 것이 하나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것은 줄기에서 꺾이면 곧 바로 시들기 시작하는 특징을 가진 버드나무 가지였습니다. 이렇게 버드나무 가지를 세워놓은 제단을 실로암에서 길러온 물을 가지고 돌고 백성들은 호산나를 외쳤는데 이렇게 하는 이유는 첫 번째로 광야에서 갈증에 시달릴 때 호렙산 반석에서 물을 내어 먹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치 버드나무 가지처럼 자신들의 목마름을 해갈시켜 달라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초막절이 지나면 오랜 건기가 끝나고 농사철이 시작되는데 이 때 비를 풍성하게 주셔서 농사가 잘 되게 해 달라는 의미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예수님은 동생들을 올려 보낸 후에 나중에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은 형제들이 올라가야 한다고 할 때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나는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8)”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셨던 주님은 10절에 보면 뒤에 따라 올라가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올라가셔서 성전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이 때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과 율법논쟁을 벌이고 죽이고자 했습니다. 반대로 예수님을 보고 말씀을 듣고서 예수님을 믿는 이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주님께서 명절의 마지막 날에 사람들 앞에서 서서 외치시는 일이 있었습니다.

37절과 38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사람들은 실로암에서 떠온 물을 따르면서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우리가 들은 이 호산나 외침이 익숙한 때와 장소는 예수님께서 나귀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입니다. 나귀 타시고 입성하신 예수님을 사람들은 종려나무가지를 꺾어 바닥에 깔고 겉옷을 바닥에 펴며 외치기를 ‘호산나’라고 했었습니다. ‘호산나’라는 단어의 뜻은 ‘구하옵나니 우리를 구원하소서’입니다. 이렇게 유월절 어린양으로 입성하셨던 예수님께 사용되었던 이 ‘호산나’라는 말은 원래 초막절에 사용되었던 말인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백성은 건기를 마치고 우기가 시작 될 때 바짝 말라 먼지를 날리는 자신들의 밭에 비를 내려 달라는 말로 ‘호산나’라는 말을 사용한 것입니다. 이 건조함 속에 비를 내리셔서 우리를 구원해 달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이렇게 호산나 행렬의 마지막에 제단에 물을 부었습니다. 그 제단에는 매일 아침마다 꺾어다 놓은 버드나무가 말라가고 있었는데 그 버드나무는 자신들의 땅과 삶에 물이 없어 말라가고 있는 현실을 상징합니다. 그와 같은 자신들에게 물을 주셔서 구원해 달라고 하는 기도의 표현인 것입니다.

이렇게 7일 동안 행사를 한 후에 마지막 8일째가 되면 잔치가 벌어집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 8일은 축제의 날입니다. 이 팔일은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안식 후 첫날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예수님께서 부활의 날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이 8일째를 오늘 본문에서는 큰 날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날에 예수님은 사람들 가운데 서서 외치시기를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의 절기 마지막 날에 외치신 말씀은 몇 가지 의의를 갖습니다.

먼저는 자신의 목마름을 인식하는 자들을 향한 외침인 것입니다. 본문에서 유대인들이라고 칭함을 얻는 바리새인과 서기관, 그리고 대제사장들은 영적인 목마름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종교 사회적 기득권으로 만족하며 자신들의 종교적 행위자체로 만족한 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종교적 선입관을 버리고 구약에서 예표 한 메시야를 기다리며 예수님의 행하심과 말씀하심에 영향을 받아 예수님께 나아온 모든 자들은 목마른 자인 것입니다. 성경 전체를 통해 보면 이 목마른 자는 하나님의 선물을 받은 자입니다. 그러니까 6장에서는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자(6:39)이며 들을 귀가 있는 자이며 창세전부터 택하심을 입은 자인 것입니다.

이 땅의 사람들은 육신의 것에 목마름을 날마다 느껴 이 땅의 것들을 취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계속해서 채우지만 채워지지 않음을 느끼지만 그 채워지지 않는 원인을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채울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그것을 위해 달려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땅의 것들로 채워지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그것을 무엇으로 채워하는지를 아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들은 목마른 자입니다. 그래서 이들을 가리켜 마태복음 5장의 산상수훈 초반에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인생의 목마름을 세상 것으로는 해결하지 못함을 아는 자인 것입니다. 그런 자는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와 성도가 아닌 자는 평소에는 알지 못하나 인생에 기근이 닥쳤을 때는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성도가 아닌 사람은 인생의 기근을 만나며 그것을 해결하려고 세상으로 나가고 성도는 그것은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 그 동안 멀어졌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더 밀접하게 하는데 힘을 쓰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 앞에 나온 자들에게 주님은 약속을 주고 계십니다. 그것은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께 나온 자 속에서 생수가 넘치기 위해서는 그 속에 생수가 채워져야 한다는 전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 속에 생수가 근본적으로 공급되지 않고서는 그 속에서 생수가 흘러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속에 생수를 채운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을 39절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3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생수가 공급된다는 말은 믿는 것이고 믿는 것은 성령이 주입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는 자 속에서 생수가 흘러넘치기 위해서는 성령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성령을 성경은 말하기를 “예수의 영”이라고 말하고 있고 요한복음 14장에서는 “다른 보혜사”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생수가 넘친다는 말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과 그 성령이 주실 그리스도의 생명력이 넘칠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떠다 제단에 부었던 실로암의 물은 바로 자신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실로암이란 말은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보내심을 받은 자였습니다. 매번 제단에 붓는 물이 이스라엘의 기근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 기근과 목마름을 해결해 주시는 분임을 분명하게 말씀해 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1장에서는 말씀으로 오신 주님을 말씀하고 있다면, 2장 가나혼인 잔치 사건을 통해서는 창조자이신 주님과 성전정결 사건을 통해 성전의 주인이신 당신을 알려주셨습니다. 3장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통해서는 당신을 영생을 주시기 위해 대속해 주시는 분으로 나타내셨고, 4장 사마리아여인과의 대화를 통해서는 당신이 예배를 받으실 분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5장 데베스다 연못가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주님은 자신은 생명의 주인임을 말씀하셨고, 6장 벳세다 광야에서 오병이어 표적을 통해서는 당신이 생명의 떡이심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을 통해서는 당신이 생수의 근원이심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생수의 근원이십니다. 구약에서 이미 수도 없이 예표 했습니다. 예레미야서 2장에서는 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하시면서 “생수의 근원인 나를 버렸다”고 하셨고 에스겔서와 스가랴서에서는 성전에서 흐르는 물을 말씀하시면서 그 물이 모든 생명을 살릴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생수의 근원이신 예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세상에 다니며 그것들이 목마름을 해결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을 버리고 오직 예수님께 나아가 영혼의 만족함을 얻고 그 은혜가 넘쳐 주변에게 생명을 공급하는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020/07/20(월) “요한복음 7:14-24” / 작성: 강요섭

본문 요한복음 7장 14-24절

찬송가 452장 ‘내 모든 소원 기도의 제목’

주목받는 것은 항상 유쾌하지만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때론 다른 사람들의 공격에 노출되어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향해 모이는 초막절 또는 수장절이라고 하는 이 절기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고 있던 사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셨습니다. 특히 초막절이 되면 제단에 물을 붓는 행사가 진행이 되었는데 이때 유대인들 가운데는 부어지는 물처럼 한량없이 성령을 부어주실 말세의 시대를 기다리며 메시야를 대망하는 마음이 커져갔습니다. 그래서 베데스다 못에서 병자를 걷게 하여 주신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는 일파만파 퍼져갔을 것이며 그가 메시아인가에 대한 호기심과 동시에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신 사건으로 곱지 못한 시선 또한 그림자처럼 따라다녔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명절의 분위기가 무르익어가는 중간 예수님은 성전에 나타나 가르침을 시작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그 가르침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과 그들의 반응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 나오는데 이 내용은 신앙의 형식주의에 빠진 우리들에게 큰 울림을 줍니다. 함께 살펴보시겠습니다.

예수님의 교훈(14-18절)

(14-15) 이미 명절의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사 가르치시니 유대인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

예수님께서 초막절 중간에 성전에 올라가서 가르침을 시작하시자 그 가르침을 들은 여러 유대인들은 놀랍게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그 가르침이 다른 서기관들과는 다르게 권위 있는 자와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여기서 ‘글’이라는 단어는 ‘그라마’ 곧 ‘문자’의 의미도 가지고 있지만 좀 더 확장해보면 ‘학문’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당시 유명한 랍비들은 제자들을 가르치고 또 그 가르침을 계승한 랍비들은 또 다른 제자들을 가르치며 율법해석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떤 유명한 랍비에게 속하여 가르침을 받으신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가르침의 깊이와 넓이가 비교할 수 없었기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또 반대로 생각하면 당신이 성전에서 어떤 권위로 가르침을 하느냐에 대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당신은 어떻게 배우지도 않고 이런 놀라운 가르침을 할 수가 있소?’, ‘당신의 가르침은 놀랍긴 하지만 족보도 없는 가르침이지 않소?’ 이 양면성을 두 가지 다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 질문에 예수님은 이렇게 답하십니다.

(16-18)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교훈이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의 것이라고 천명하시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는 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곧 하나님의 뜻과 일치함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많은 랍비와 스승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지 않고 자신의 교훈과 생각을 더하여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사람들을 가르치고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것과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온전히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며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드러내는 것만 자신의 사명으로 생각하시기에 거짓됨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말씀을 증거 하는 자가 어떠한 자세로 말씀을 증거 해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할 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영광을 구하여 하나님의 교훈위에 많은 인본주의적인 가르침을 섞고 사람들이 박수칠만한 시대의 사상을 섞어 듣는 이들이 열광하고 빠져들 만한 가르침을 전합니다. 이런 가르침은 듣기에 너무나 달콤하고 마음에 위로와 평안을 주는 듯하지만 실제로 우리의 신앙에 좋은 변화를 가져오지 못합니다. 이는 마치 병원에 갔는데 실제적 치료는 하나도 하지 않고 마취주사를 맞는 것과 같으며 식재료는 상태가 좋지 않음에도 각 종 식품첨가물로 그럴듯한 맛을 내어 입에는 달콤하나 몸에는 좋지 않은 음식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 가르침을 계속 받다보면 결국 신앙에 병이 드는 현상이 발생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 속에 진리가 전해져 사람들이 들으면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돌아보게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을 갈망하게 하며 또한 반대로 진리의 편에 서지 않으려는 자들에게는 분노를 일으킬 정도로 그 진리의 빛이 선명하였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누군가의 권위에 기대어 말씀을 전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세상에 많은 사람들은 자기 의견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자신보다 높은 사람 혹은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고 있는 사람의 말을 빌어 ‘권위에 호소’하는 방법을 사용하곤 합니다. 이는 굉장히 간편하며 강력한 논증의 한 방법입니다. 그러나 어디서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은 성경은 모든 권세를 부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다른 어떤 권위에 의존하지 않는 진리라는 사실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권세를 부여하시고 지식을 깨닫게 하시고 지혜를 주시고 세상의 근본원리를 세우신 분이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보다 더 높고 권세 있는 분이 없으시기에 어떤 다른 사람의 말의 권위를 빌려오지 않으시고 그저 그 말씀, 진리 자체를 선포하셨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 많은 사람들은 수많은 권위에 휘둘리며 살아갑니다. 수많은 학문적 데이터에 휘둘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동조하는 시대의 사상에 휘둘리고 자신보다 뛰어난 지식인의 말에 휘둘리고 과학적 근거와 역사가 있는 기관들의 말에 휘둘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시대마다 유행하는 주류의 가치관과 사상이 계속 변해왔다는 것을 압니다. 또한 밝혀진 과학적 사실들보다 아직 우리 인류가 모르는 게 더 많다는 것을 압니다. 한 인간이 어떤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쌓았다고 해서 그가 인간사회의 모든 부분을 전문적으로 판단할만한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또한 많은 권위 있는 기관들이 그들이 추구하는 이상보다 때로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진리를 왜곡시키는 일들이 인류역사에 반복되어 왔다는 것도 압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런 가변적이고 제한적인 권위아래 우리의 영혼과 인생을 거는 것이야 말로 도박이 아니겠습니까? 오히려 가변적이고 무지의 영역이 더 많은 인간의 사상과 지식이 아니라 천지의 모든 것이 변해도 변치 않으며 선포된 모든 것이 인류의 역사상 다 이루어진 그리고 반드시 이루어질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의 영혼과 인생을 걸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자신의 말을 누군가의 권위에 기대어 전하지 않으셨지만 그 가르침은 아버지 하나님께 받아 전한 진리 그 자체였습니다. 우리는 그 복음의 말씀에 우리의 인생을 걸어야 합니다.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19-24절)

이제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들에게 질문을 던지십니다.

(19-21)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하매 너희가 다 이로 말미암아 이상히 여기는도다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었는데 왜 지키지 않고 나를 죽이려 하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느냐고 물으며 예수님이 귀신이 들렸다고 이야기 합니다. 실제로 귀신들린 사람의 특징 중 한 가지가 상황에 맞지 않는 말이나 알아들을 수 없는 헛소리를 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안식일에 베데스다 연못의 병자를 고쳐주신 사건으로 인해 유대인들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고 자신을 죽이려 하는데 너희는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왜 지키지 않는 것이냐고 되물어 보시는 것입니다. 또한 이어서 그들의 모순을 지적하십니다.

(22-24)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행했으니 (그러나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조상들에게서 난 것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행하느니라 모세의 율법을 범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 한 것으로 너희가 내게 노여워하느냐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 하시니라

레위기 12장 3절에 보시면 ‘여덟째 날에는 그 아이의 포피를 벨 것이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표식을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하심으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몸에 각인시켜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자녀가 태어나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온전하게 인정되어지기 위하여 안식일이 되어도 할례를 행하곤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 사례를 들고 오셨냐면 어린 아이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온전하여 지기 위해 하루를 지체하지도 않고 안식일과 겹치면 할례를 우선했는데 38년간 고통가운데 어려움을 겪은 하나님의 자녀의 전신을 건전하게 만든 것이 왜 문제가 되느냐는 질문을 던지기 위함이었습니다. 법과 법이 충돌할 경우에는 상위법이 우선 적용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들이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는 안식일 계명보다 율법의 근본정신인 생명과 사랑의 법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예수님께서는 자가당착에 빠진 그들에게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고 말씀을 전하십니다. 여기서 ‘외모’라는 단어는 ‘옵시스’라는 단어인데 ‘모양새, 외관’을 의미합니다. 한 마디로 겉으로 보이는 것에 마음을 빼앗겨 공의롭지 못한 판단을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판단할 때 기준들을 보면 다 배경에 관한 것입니다. ‘갈릴리 사람’, ‘학벌 없음’, ‘마리아의 아들 목수’ 지역, 학벌, 부모, 직업 모두 아무런 후광효과가 없던 예수님을 보면서 오로지 배경으로 보여지는 것으로만 판단한 것입니다. 그리고 심지어 오늘 이 사건도 38년 동안 고통 받던 자의 몸과 마음과 삶이 회복되어지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을 행하신 예수님과 함께 기뻐하기는커녕 보여지는 것 곧 ‘안식일에 병자를 고쳤다’라는 것만으로 예수님을 죄인으로 몰아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겉으로 보여지는 모양새로만 사람과 사건을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도 얼마나 많은 순간 보여지는 것으로 사람과 사건을 판단합니까? 우리는 겉으로 보여지는 것으로 선입견을 가지게 되기에 굽은 판단을 하는 일들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때론 눈을 감는 것이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예가 바로 ‘블라인드 채용’입니다. 누군가의 조건과 배경을 보지 않고 누가 이 직무에 최적합한 사람인지 실력을 알기 위해선 때론 눈을 감는게 더 판단에 유리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사람 자체보다 그 사람이 걸치고 있는 사회적 옷을 기반으로 보이지 않게 속으로 그 사람의 가치를 매기고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교회라고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야고보서 2장 3-4절 말씀에는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고 말씀합니다. 만약 우리가 이런 외모로 판단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면 예수님께 나아오는 어린 아이를 막아선 제자들처럼 우리 또한 한 영혼이 주님께 나아가는데 걸림돌로 존재하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가치관이 건강하지 않은 연약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어린 아이를 따듯하게 맞아주시며 가까이 하신 것처럼 우리도 누군가를 사람 대 사람으로 따듯하게 품어줄 수 있기를 기도 하십시다.

또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행하려 할 때에 겉으로 드러난 의미만이 아니라 그 의도까지 파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배움을 할 때 두 종류의 학생이 있습니다. 시험만 잘 보기 위해 암기만 하는 학생과 배움 그 자체를 위하여 원리를 이해하려는 학생입니다. 처음에는 암기만 하는 사람이 더 성적도 잘 나오고 잘 하는 듯 보이지만 시간이 지라면서 실력이 자라는 건 후자의 학생입니다. 조금만 응용을 하는 문제가 나오면 단순암기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원리를 이해한 학생은 자기가 응용을 하면서 문제를 만들 수도 있는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답만 외웠습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말씀을 일과 노동만 하지 않으면 되는 것으로 정답을 외웠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은 단순히 소극적으로 노동을 그치는 것만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생명을 살리고 사랑을 실천하시는 예수님을 보며 죽이려 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에 이런 얄팍한 암기위주의 신앙은 없는지 돌아보십시다. 해야 할 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리스트로 정해서 정답을 외우고 그것에 맞지 않는 사람은 모두 X표를 치며 정죄하고 있지는 않은지, 혹은 그 사람의 의도와 목적은 외면한 채 보여지는 결과만으로 그 사람과 사건을 평가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십니다. 그래서 신앙의 답만 외우는 형식주의를 버리고 정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그 마음을 깨닫기 위해 애쓰고 거기서부터 우리의 삶을 세워나가는 거룩한 주님의 사람들로 살아 가십시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보여지는 것으로 예수님을 무시하고 그 치유를 정죄했던 사람들처럼 우리의 삶에도 다른 누군가를 보여지는 것으로만 판단하고 정죄했던 우리의 연약함을 주님께 고백합니다. 제자들의 눈에 중요해 보이지 않았던 어린 아이를 소중히 여기시고 가까이 하셨던 주님처럼 우리 또한 많은 사람을 환대하고 가까이 하게 하시고 또 형식주의에 매몰되어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암기하는 것에서 멈추지 아니하고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알고 느끼고 행하는 주님의 백성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을 구주로 믿기 어렵게 만들었던 조건은 무엇이었을지 생각해보고 나 또한 그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있지는 않은지 묵상해 봅시다.

2. 안식일에 일했다고 예수님을 정죄했던 유대인들을 보며 혹시 최근 나와 다른 누군가의 삶을 보며 쉽게 정죄하고 판단한 적은 없는지 돌아보며 묵상해 봅시다.

3. 성경말씀을 읽고 설교말씀을 들을 때에 시대의 사상과 어떤 권위의 영향력으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을 오히려 지나간 구닥다리 가치관으로 여긴 적은 없는지 묵상해 봅시다.

4. 말씀을 읽을 때 공식처럼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리스트를 만들고 지키기에만 급급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배우고 느끼기에는 부족하지 않았는지 돌아보며 묵상해 봅시다.

(작성: 강요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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