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복음 14 장 설교 | [조정민 목사 설교]길과 진리(요한복음14장1-7절) 답을 믿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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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직교회 주일예배
설교자: 조정민 목사
날 짜: 2015년 2월 8일
제 목: 길과 진리
본 문: 요한복음 14장 1-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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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13(목) “요한복음 14:1-14” / 작성: 정인철

본문 요한복음 14:1-14 찬송가 447장 ‘이 세상 끝날까지’ 지상 사역의 마지막, 곧 죽음으로 나서는 길목에서 전하시는 예수님의 고별메시지는 요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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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100church.org

Date Published: 5/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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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4장 1절-14절, 걱정과 근심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오늘의 매일성경큐티 본문인 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님은, 아무런 걱정과 근심하지 말라고 위로해 주십니다. 그 이유를 큐티하면서 새벽설교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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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otfreak.tistory.com

Date Published: 2/3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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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별 설교 –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요한복음 14:1-3)

오늘 저는 성찬주일을 맞이해서 요한복음 14장 1절로 3절에 근거하여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먼저, 우리 주님께서 이 말씀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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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ission.bz

Date Published: 11/20/2022

View: 898

[요한복음 14장 주일설교말씀] 성령을 약속하심(요 14:1-31)

요한복음 14장에서는 길과 진리가 되시는 예수님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가면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신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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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cdk153.tistory.com

Date Published: 3/2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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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4장 1-6절 말씀 묵상

요한복음 14:1-6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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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ogeumnews.com

Date Published: 2/2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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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장: 요한복음 14~16장

요한복음 14~16장에는 하나님 아버지가 40차례 이상 나온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고 경외하며 모든 일에서 그분에게 순종한다는 사실을 제자들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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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urchofjesuschrist.org

Date Published: 12/2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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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4장8-14절 강해설교 “보고, 믿고, 그리고 기도로”

요한복음 14장8-14절 강해설교 보고, 믿고, 그리고 기도로 김산덕 12장 12절에 들어서면서, 예수께서 마침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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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confesschurch.com

Date Published: 6/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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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민 목사 설교]길과 진리(요한복음14장1-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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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요한 복음 14 장 설교

  • Author: svcforhy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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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7. 12. 26.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4jHEgGINJhA

2020/08/13(목) “요한복음 14:1-14” / 작성: 정인철

본문 요한복음 14:1-14

찬송가 447장 ‘이 세상 끝날까지’

지상 사역의 마지막, 곧 죽음으로 나서는 길목에서 전하시는 예수님의 고별메시지는 요한복음 13장에서부터 시작되어 14장에서도 계속 이어집니다. 자신의 죽음을 앞에 두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자신의 생애와 사역의 의미를 요약하면서 자신이 아버지께로 떠나가는 것이 제자들에게 유익이 됨을 설명하십니다.

요한복음 14장은 다른 사복음서에서는 병행구절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기록입니다. 많은 학자들은 이 메시지가 예수님과 제자들의 최후의 만찬, 곧 주의 만찬에서 이뤄졌다는데에 지지합니다. 그러나 요한은 다른 세 개의 복음서들과는 다르게 이 만찬에 대한 아무런 명시 없이, 예수님의 떠나심(1-14)과 다시 오심(15-31)에 대한 설교를 기록함으로써, 예수님의 떠나심으로 인해 제자들은 슬픔에 젖어 낙심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기쁨 속에서 살아야 할 것임을 전달하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자신들의 삶을 바쳤던 제자들, 그들은 예수님의 떠나심으로 인해 충격과 절망으로 빠져들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미리 준비시키고자 이 고별메시지를 전달하셨던 것이었습니다.

서언(1-3절)

요한복음 13장 36-38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향해 부정적인 예언을 하셨습니다. 이로 인해 베드로 뿐 아니라, 다른 제자들까지도 모두 심리적으로 위축이 되었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운명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근심에 싸여 있을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은 격려의 메시지를 전하셨습니다.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한글 성경은 예수님의 이러한 대답을 명령문으로 번역했으나, 일부 변역본에는 평서문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너희는 하나님을 믿고 있고 나를 믿고 있다’는 해석입니다. 헬라어는 평서문과 명령문의 형태가 같기 때문에 무엇으로든 해석은 가능하지만, 문맥에서 볼 때, 한글 성경과 같이 명령문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적절해보입니다.

제자들의 마음에 근심을 일으키는 것은 임박해오는 예수님의 죽음, 곧 예수님의 떠나심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떠나시면 이 땅에 자신들만이 남아 있다고 불안해 할 수 있었지만 예수님의 떠나심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2-3)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예수님께서는 떠나시어 제자들을 위한 거처를 마련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거할 곳에 해당하는 헬라어 ‘모네’는 통상적으로 대저택, 맨션(mansion)을 의미한다고 해석해 왔습니다. 흠정역이라 불리는 KJV(킹제임스버전)도 이를 맨션으로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17세기 영어에서 맨션은 수수한 가옥을 뜻하는 용어였습니다. 더구나 ‘모네’는 요한복음에서 ‘거주하다’, ‘머무르다’의 의미로 자주 사용되는 중요한 동사인 ‘메네인’의 명사형으로써, 장소적인 ‘거처’나 ‘자리’ 혹은 ‘지위’로 해석되는 것이 매끄럽게 여겨집니다. 하지만, ‘모네’를 장소적인 의미보다는 ‘메네인’ 동사의 행동 또는 그 상태를 의미하는 ‘거함’으로 보는 것과 이를 더 구체적으로 해석해서 하나님과의 ‘교통’을 의미한다고 해석합니다. 따라서 거할 곳이라는 의미는 하나님과 교제를 할 수 있는 곳으로 해석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며, 하늘에 대궐과 같은 집이 예비되어 있다는 해석은 적어도 이 본문을 예로 들어 말하기는 힘들어 보입니다.

또한 ‘아버지 집에’로 해석된 헬라어 ‘엔 테 오이키아 투 파트로스’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성전으로서의 ‘교회 공동체’로 보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의 거처, 곧 하늘의 거처, 천국으로 보기도 합니다. 구약성경과 유대교의 전통적인 이해로 후자가 더 많은 지지를 받습니다. 그러나 둘은 서로 상충되어 보이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신약성경 저자들의 사고가 하나님의 거처로 불리는 성전은 교회 공동체와 일치할 뿐 아니라, 하늘의 거처, 곧 천국과도 일치되기 때문입니다.

종합해서 볼 때, ’아버지의 집에 거할 곳이 많다’는 구절의 의미는 성전의 성취인 교회 공동체와 성전의 원형인 하늘에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자리가 많이 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2절의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는 구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러한 자리를 마련해 주기 위해 가신다는 의미로 이해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가신다’는 말에 의미 또한 해석이 쉽지 않습니다. ‘가신다’는 말씀은 이후에 ‘다시 와서 영접하여 데리고 갈 것이다’는 말씀과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가심’은 예수님의 죽으심이라는데에 큰 이견은 없으나, ‘다시 오심’에 대한 해석은 나뉩니다. 먼저, ‘다시오심’은 ‘부활’을 지칭한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그럴 경우, 예수님의 영접함은 부활 이후 교회에서 경험될 예수님과 아버지, 그리고 제자들 사이의 상호 내주하시는 상황을 의미한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다른 시각은 ‘다시 오심’이 ‘성령의 오심’을 지칭한다는 의견입니다. 또한 이는 14장의 문맥 가운데 16절에서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실 것이라는 약속과 23절의 삼위일체의 내주에 대한 약속, 26절의 보혜사와 예수님과의 관계 등으로 미루어 타당성이 있어 보입니다. 이는 제자들이 보혜사 성령의 내주하심을 통해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아버지와의 교제를 하도록 해주실 것이라는 약속을 의미한다는 3절 후반부의 약속도 매끄럽게 이어집니다. 또 다른 시각에서 ‘다시 오심’은 ‘재림’을 지칭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주장들을 모두 종합하여, ‘다시 오심’이 예수님의 부활, 성령의 오심, 재림을 종합적으로 지칭한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요한은 자신의 기록물들 안에서 한 단어를 이중적 혹은 다중적으로 자주 사용을 해왔기 때문에, 포괄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마지막 입장은 수용가능해 보이며, 학자들로부터 가장 많은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예루살렘을 포함하여 이스라엘 전역을 함께 거닐었던 제자들, 그들은 예수님과 숱한 식사를 함께 하며 교제하고, 예수님 사역의 현장에서는 신기한 이적들도 직접 목도하고 경험했습니다. 자신들의 기존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절대로 누릴 수 없는 행복을 주님과 함께 하면서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삶을 놓고 주님의 손을 잡는 것을 후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놓고 싶지 않았던 주님의 손을 이제 놓으라고 주님꼐서 말씀하셨습니다.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였습니다. 그만한 절망과 공허함은 이 세상에서 또한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손을 놓아야만 더 큰 주님의 뜻이 펼쳐진다고 주님은 말씀하시며, 그들에게 믿음으로 격려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떠나가는 자리가 공허함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제라는 더 큰 것으로 채워지게 될 것이라고 고별메시지를 통해 더 큰 소망을 허락해주셨습니다.

우리 또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손을 붙잡고 살아감으로써, 부가 더해지고 건강이 더해짐으로, 덩실덩실 춤을 추는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주님께서는 이것이 다 빠진 공허함의 자리에서도 “나와의 교통을 사모하며 살아갈 수 있겠냐?”고 물으실 수 있습니다. 우리 믿음의 자리가 이 질문에도 “네, 하나님. 하나님이 주신 삶이기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힘이 되어주신다면, 기꺼이 오늘도 살아가겠습니다.”라고 고백하며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빠진 공허함의 자리를 하늘 소망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떠나심(4-14절)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어디로 가시는지를 제자들이 알고 있다고 말씀하셨지만, 도마는 조금 더 명확하게 설명해 달라고 묻습니다. 도마는 예수님께서 가시는 목적지도 모를 뿐더러, 그곳에 가기 위해 어떤 길을 택해야 하는지도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은 십자가로 향하는 길이었으나, 제자들은 아직까지 알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에게는 여전히 불분명한 길이고 모호한 대답이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전체의 신학을 아우르는 가장 훌륭한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길, 진리, 생명, 이 세 개의 용어들 중에서 강조점은 길에 있습니다.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기 위해 나아갈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님 한 분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다른 사람이 이 일을 대신 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만이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예비히신 곳으로 인도 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진리’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권위 있는 대리인이요 계시자이기 때문에, 다른 누구와 비교가 안될만큼 하나님을 완벽하게 계시할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예수님은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따라서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계시자로써 역할을 가장 잘 담당할 수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 곧 예수님이라는 길을 통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중보자되시는 예수님은 하나님께 이르는 유일한 길, 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창조하신 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유일한 길로써, 곧 하나님의 진리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중보자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아는 것은 곧 아버지를 아는 것이 되었으며, 예수님을 본 것 또한 아버지를 본 것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 가운데 빌립은 또 다시 질문을 합니다. 아버지를 자신들에게 보여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빌립은 요한복음 1장 18절에서 말씀한 아무도 하나님을 보지 못했다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을 보는 것은 사람의 능력을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시내산에서의 모세도 하나님을 보고 싶었지만, 거절받아 제한적으로만 볼 수 있었습니다(출 33:18-23). 그런데 사실 빌립은 성육신하신 완전한 하나님을 이미 대면하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지금 사람이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제자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성육신 하신 하니님, 곧 예수님께 아버지를 보여달라는 빌립에게 아주 단호한 어조로 분명한 메시지를 담아 말씀해주셨습니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빌립에게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봄으로써 하나님을 보고 있다고 직선적으로 설명하셨습니다. 이는 요한이 자신의 복음서에서 말하는 기독론, 곧 예수님에 대한 핵심적인 메시지였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유능하고 똑똑한 랍비나 좋은 길로 인도해주는 안내자가 아니었습니다. 또한 어떤 목적지를 가기 위한 수단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곧 하나님으로써 그 자체가 목표이자,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이어가셨습니다.

(10-11)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요한복음 1장의 내용과 중첩이 되는 메시지입니다. 아들과 아버지의 궁극적인 연합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사람의 모습을 취하신 완전한 하나님이었습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서 설명한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대사입니다. 정당하게 권위를 부여받은 대사는 그를 보낸 사람의 이름으로 말하고 그와 같은 권한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이러한 해석은 한계를 갖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하나님께 종속되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동등된 인격으로,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 예수님은 하나님 안에 계시는 완전한 연합의 상태임을 암시하는 메시지였습니다.

지금까지 이어진 예수님의 메시지는 제자들을 향한 위로에서 출발된 것이었습니다. 즉, 제자들에게 용기와 위로를 주기 위한 메시지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이 지상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일들을 이제 제자들이 이어가라고 격려하며 말씀하십니다.

(12-1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예수님 안에서 능력을 행하신 하나님께서 이제 앞으로는 제자들 안에서도 그 능력을 행하시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이러한 능력을 행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 기도해야 한다고 함께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능력이라고 할 때, 신유나 축귀와 같은 기적을 생각하지만, 이는 그 의미를 축소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동안 행해 오셨던 일은 기적 뿐 아니라, 겸손, 섬김, 사랑까지도 행하셨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그것보다도 더 큰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더 큰 일이라는 것은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보다 더 효과가 큰 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능력이 그들 속에 거하게 되어, 더 많은 사람들에게까지 전해지게 되는 것을 시사하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떠나가고 시작되는 일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의 삶에서 예수님께서 빠지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빠진 자리를 성령님께서 채워주시면 제자들의 사역에는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물론 주님이 그들의 삶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니라, 그들의 구함, 곧 기도 옆에서 그들과 함께 큰 일을 이루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이어가면서 신앙에 더하기는 비교적 쉬울 수 있으나 빼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과 삶이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뺄 것을 빼야 하고, 놓아야 할 것을 놓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확신이 드는 것도 주님께서 놓으라는 타이밍에는 놔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한 믿음을 요구하고, 어마어마한 용기를 요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힘으로 버겁다고 느껴질 때에는 예수님께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도우심에 기대야 합니다.

우리가 한가지 부족한 것을 온전히 내려놓고자 힘이신 주님을 의지하며 살아갈 때, 주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을 이전과는 달라지게 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작은 변화를 통해 그보다 더 큰 우리의 가정과 직장, 교회와 사회가 더욱 새롭게 세워져가게 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채우고 채우기 위해 주님께로 달려왔던 저희의 인생, 저희들의 목표를 아셨기에, 그토록 아낌없이 채워주셨던 은혜가 참으로 컸음을 고백하며 감사의 기도를 올립니다. 채워지고 채워졌던 그 은혜가 이제는 빼고 뺌으로 세상 가운데로 흘려보내야 하는데, 움켜쥔 손이 잘 펴지지가 않습니다.이 손을 펼 수 있는 믿음과 용기를 저희들에게 허락해주시옵소서.

그리고 이 펼친 손에 더 의미 있는 것들로 채워주사, 저희들의 삶을 변화시켜주옵소서. 또한 저희의 펼친 손으로부터 흘러가는 하나님의 은혜가 온 땅으로 흘러가, 우리의 가정과 직장을 변화시키고, 우리의 교회와 사회를 회복하는데 사용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불안한 상황에도 믿음으로 순종했을 때, 당신의 삶에 성령의 평안함을 느끼셨던 경험이 있었는지를 묵상해 봅시다.

2. 길이신 주님은 만나 진리와 생명을 소유하게 되었던 처음 신앙의 마음가짐을 기억하며 묵상해 봅시다.

3. 예수님의 말씀에도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했던 도마와 빌립은 솔직한 마음으로 예수님께 질문하며 구하고 답을 얻었습니다. 말씀을 묵상하며 막히는 일이 있을 때, 어떻게 이 막힘을 해결했는지를 묵상해 봅시다.

4. 주님을 당신의 힘으로 삼아 이 세대 속에서 ‘그보다 큰 일’을 행하기 위하여 어떤 결단을 하시겠습니까?

(작성 : 정인철)

요한복음 14장 1절-14절, 걱정과 근심하지 마십시오 – 매일성경큐티 새벽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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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만찬자리에서 곧 떠나신다는 말씀을 들었던 제자들은 근심과 걱정에 사로잡힙니다. 하지만 오늘의 매일성경큐티 본문인 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님은, 아무런 걱정과 근심하지 말라고 위로해 주십니다. 그 이유를 큐티하면서 새벽설교로 준비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절-14절, 걱정과 근심하지 마십시오

요한복음 14장 1절-14절, 걱정과 근심하지 마십시오

설교 전 찬송

새 찬송가 382장, 너 근심 걱정 말아라 / 새 찬송가 235장, 보아라 즐거운 우리 집

이별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학생의 졸업은 새로운 출발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또한 이별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떠난다는 것, 헤어진다는 것이 섭섭한 일이지만, 이별 후에 더 좋은 일이 찾아오기도 한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이별 역시 그러했습니다.

곧 떠나신다는 예수님

예수님은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하시는 도중에, 갑자기 폭탄 발언을 하셨습니다. 2절과 같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모든 성도들을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기 위해 떠나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근심과 걱정에 휩싸이게 되는데, 이 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위로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떻게 위로해 주십니까?

요한복음 14장 1절-14절, 걱정과 근심하지 마십시오

1.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라.

첫째,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라”라고 말씀하시며 위로해 주셨습니다. 3절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4: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비록 지금 예수님이 제자들을 떠나시지만, 그 이유가 아버지 하나님의 집에 가셔서 모두가 거할 집을 준비하러 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집 값이 올라도 문제고 떨어져도 문제인데, 감사하게도 하나님의 나라에 우리의 집을 마련해 주시니 우리는 아무런 염려가 없습니다. 이 땅을 떠나게 되어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집이 있으니, 죄 많은 이 세상에 미련을 가질 이유도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근심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에 있는 나의 집에 들어갈 그 때까지, 오직 예수님만을 의지하며 주님만 붙들며 살아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2. 내가 곧 길이다.

둘째, 예수님은 자신이 곧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비하신 거처로 이끄시겠다고 말씀하시자, 도마는 그 길을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5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4:5,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도마는 아마도 진짜 길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로 가는 그 길이 바로 자신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은혜의 말씀인 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 가는 그 길이요 그 진리요 그 생명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천국에 계신 하나님께 갈 수가 있습니다. 비록 근심과 걱정이 우리를 어렵게 한다 할지라도,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전혀 걱정 근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천국으로 인도하는 길이신 예수님과 함께하는 오늘이 되시길 바랍니다.

3. 내가 곧 하나님이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자신을 보았다면 하나님 아버지를 본 것과 같다고 말씀하시며, 자신이 곧 하나님이라 선언하십니다. 9절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4: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도 알고 본 것이라고 말씀하시자, 빌립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아버지를 보여 주소서”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나를 본 것이 아버지를 본 것이며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내가 하나이다”(요 10:3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대로, 예수님은 창조주이시며 우리의 왕이신 하나님이심을 기억하며 오늘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이 그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본문을 통하여, 모든 이들을 위한 처소를 준비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구원에 이르는 길이 되시며, 하나님과 자신이 동일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분, 우리의 창조주이시며 주인이십니다. 예수님만을 의지하며 예수님의 손을 붙잡고 살아가는 오늘이 되시길 바랍니다.

함께 할 기도

우리의 위로자요 구원자이신 주님을 기억하게 하소서.

우리 민족에게 참된 평안과 하나됨을 주옵소서.

우리 가정이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되게 하소서.

복음 전해야 할 그 사람이 생각나게 하소서.

참고할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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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요한복음 14:1-3)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요한복음 14:1-3)

오늘 저는 성찬주일을 맞이해서 요한복음 14장 1절로 3절에 근거하여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먼저, 우리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게 된 배경을 설명해 드리면 이렇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당하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나누는 자리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허리에 동이신 후, 대야에 물을 담아가지고 오셔서 제자들의 발을 한 사람씩 씻겨주셨습니다. 그러신 다음에, 몹시 번민하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놀라서 서로 쳐다보며 누구를 가리켜 말씀하시는지 의심했습니다. 그 때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 바로 곁에 앉아 있는 요한에게 머릿짓을 하며 누구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지 여쭈어 보라고 했습니다. 요한이 예수님께 다가앉으며 나직하게 “주님, 그게 누굽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 빵조각을 적셔서 주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다” 하시고, 한 조각을 찍어다가 가룟 유다에게 주셨습니다. 유다가 그 빵을 받고나자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기를 “네가 할 일을 속히 하라”고 하시니 유다가 일어나 밖으로 나갔습니다. 대제사장들에게 예수님을 팔아넘기려고 나간 것입니다.

유다가 나간 후에, 예수님께서는 “내 사랑하는 제자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있는 것도 이제 잠시뿐이다. 내가 가면 너희는 나를 찾아다닐 것이다. 일찌기 유대인들에게 말한 대로 이제 너희에게도 말하거니와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말하기를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하니,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말하기를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하니,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새벽닭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모른다고 할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지금 여러분이 제자 중 하나가 되어 그 자리에 앉아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마음을 짓누르는 무거운 분위기를 느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제 곧 제자들의 곁을 떠나실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그것도 십자가에 달려 고난당하여 죽으시는 방법으로 말입니다. 그러니 제자들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5)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느냐 묻는 자가 없고 6)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요 16:) 하신 대로, 제자들은 근심이 가득해서 다른 생각은 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떠나시다니…’ 제자들은 이런 일이 생기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너무나 엄청난 일을 만나서 그들은 넋을 놓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제자들이 먹고 살 문제 때문에 걱정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근심하게 만든 것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가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던 그들의 꿈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어디를 가든지 나사렛 예수의 제자인 것이 알려진 마당에 스승을 잃고 나면 무슨 면목으로 사람들을 대할 수 있을까요? 그뿐 아니라,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세상에서 그들이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한단 말입니까? 생각하면 할수록 제자들의 근심은 깊어만 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본문에 나오는 주님의 제자들이 한 근심과는 차원이 다르긴 하지만, 우리도 사노라면 근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그 근심의 원인을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내가 무엇 때문에 근심하고 있는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근심에도 종류가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주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근심하는 것이라면 그런 근심은 가치 있는 근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주님과 더 친밀한 교통을 나눌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있을까? 이런 일로 근심한다면, 그런 근심은 우리에게 유익한 결과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반면에,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근심은 이방인들이 하는 것이니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에 보니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 7:)고 했습니다.

한편, 제자들의 마음에 근심이 가득한 것은 그들이 주님께 자기들의 모든 것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적에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님을 좇았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은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주님을 좇았습니다. 마태는 세관에서 사무를 보던 중에 부름을 받자 곧바로 사표를 쓰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한 분으로 만족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주님과 함께라면 어디든지 갈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내 곁을 떠나도, 내 모든 소유가 다 없어져도, 예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면 조금도 아쉬울 것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소망이요 삶의 목적이요 모든 것이 되시는 예수님이 그들을 떠나신다고 하시니 어찌 당황하고 근심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다 아셨습니다. 그러므로 수난을 앞두신 마당에도 친절하게 제자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1)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3)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주님께서는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그들을 떠나시는 이 절박한 문제를 앞두고 어떻게 근심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주님께서 불가능한 일을 언급하신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하기만 하면 충분히 근심하지 않고 어려움을 극복해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통해서 근심을 해결하는 비결이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첫 번째로,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을 믿지 않느냐, 그러면 하나님을 믿는 것처럼 또 나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사실이지, 우리가 무슨 일을 만나서 근심하는 까닭은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왜 근심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믿음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지만,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온전히 믿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를 만나면 걱정하고 근심하는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선민 이스라엘 자손에게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호 6:3)고 했습니다. 그렇게 호소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의 죄에 빠진 것이 하나님에 대하여 올바로 알지 못한데 그 원인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되 성경에 계시하신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성경에 계시하신 하나님은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능치 못하심이 없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전지하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생각과 사정을 다 아시며,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도 다 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랑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독생자까지 아낌없이 내어주신 하나님이십니다. 언제나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와 같으신 하나님을 믿으시면 “아멘!” 하십시다.

성경에 이르기를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시 55:22)고 했습니다. 그런즉 하나님을 믿고 성도님들의 모든 짐을 맡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은 믿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믿지 못하겠다’는 말은 성립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아니면 하나님께로 올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하심은 하나님을 믿듯이 예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사회는 불신풍조가 만연합니다. 국민들이 정부의 정책을 믿지 못하고, 법원의 판결을 믿지 못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평생직장으로 알았던 회사도 못 믿고, 부부간에도 믿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서로를 불신하고 의심하고 경계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의심하는 상태로는 진정한 인간관계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믿을 수도 없는 것이 그랬다가는 나중에 큰 낭패를 볼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언제까지나 믿을 수 있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희생하신 구세주이십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언제라도 믿을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을 믿고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는데 두 소경이 따라오며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불러 말씀하시기를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주여, 그럽습니다”하니, 예수님께서 저희 눈을 만지시며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셨고 그들은 즉시로 눈을 뜨고 보게 되었습니다.

열두 해 혈루증 앓던 여인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내가 그 옷가에 손만 대어도 나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여인은 병약한 몸을 이끌고 많은 사람에게 에워싸여 길 가시는 예수님의 뒤로 다가가서 그 옷가에 살며시 손을 대었습니다. 그 순간에 이 여인의 혈루병이 완전히 낫고 말았습니다. 때에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 하시니 다 아니라 할 때에 베드로가 말하기를 “주여 무리가 에워싸고 미나이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고 하셨습니다. 이에 여자가 스스로 숨기지 못할 줄을 알고 떨며 나아와 엎드려 손 댄 이유와 곧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시기를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 날 많은 사람이 주님의 옷을 스쳤지만 한 사람도 능력을 체험하지 못했는데, 이 여인이 믿음으로 손을 대었을 때 불치의 병이 고침 받는 기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지 못한다면 그 원인은 다른 데 있지 않고 믿음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주님께 나의 삶을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겠다고 마음먹어야 합니다. 나의 목적 달성을 위하여 주님을 이용하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우리의 삶을 주관해 달라고 맡겨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믿음이 있을 때 주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믿음은 사랑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랑이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나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믿지는 못하겠습니다.” 이런 논리는 성립될 수 없습니다.

이 시간 성도님들의 모든 문제를 다 주님께 내어 맡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불가능하게 보이는 일이라도 우리가 주님을 믿는 한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고, 갈릴리 풍랑을 잔잔케 하신 주님께서 우리가 당면한 모든 문제에 최선의 해결책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두 번째로,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떠나실 것이라고 하셨을 때 근심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세상을 떠나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하셨습니다. 그를 믿고 따르는 자들의 영원한 처소를 예비하기 위해서 제자들을 떠나 천국으로 가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지난날 한국인들은 서독에 광부로, 중동에 기술자로 가서 돈을 벌었습니다. 한국에 남아있던 가족들은 그들의 남편과 아버지가 더 나은 삶을 위해서 돈을 벌려고 외국에 간 것을 알았기에 어려움을 견딜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의 영원한 행복을 위해 천국에 가셨음을 알기에 근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목적 없이 떠도는 인생이 아니라 하늘 본향을 바라보고 행진해 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다리고 계시는 천국이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지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절에 보니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지금 주님께서는 천국에서 우리를 위한 거처를 준비하고 계신 줄 믿습니다.

성경에 보면, 구원 받은 성도들은 임금의 궁전에서 잔치를 즐기게 되나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러 가신 것은 주님께서 친히 우리의 구원을 보장하셨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이 그들을 떠나시더라도 근심하지 말라고 하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요즘 우리나라는 부동산 문제로 홍역을 치루고 있습니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부동산 정책을 진두지휘하는데도 문제가 좀처럼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 원인은 간단합니다. 가구 수는 많은데, 집이 모자라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깁니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집 걱정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공해로 오염된 이 땅이 아닌 하늘에다 거할 집을 준비해 두셨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은금이 풍부하고 우양이 많은 큰 부자였지만, 일생동안 천막을 치고 살았습니다. 집을 짓고 살 줄 몰라서가 아니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니 “9)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께서는 삶이 피곤하고 근심거리가 생길 때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영원한 천국의 처소를 생각하시고 다시금 마음에 힘과 용기를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로,

주님께서 우리를 데리러 다시 오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불변하는 약속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재림에 관해서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27)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 29)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30)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31)저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마 24:)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열 처녀 비유’ ‘달란트 비유’ ‘므나 비유’ ‘무화과나무 비유’ 등은 다 주님의 강림에 관한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공회에서 심문을 받으실 때, 대제사장이 묻기를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고 하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마 26:64)고 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장에 보면, 부활하신 주님께서 감람산에서 제자들을 비롯해서 500여 신자들이 보는 데서 승천하실 때에 저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말하기를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밧모섬에 유배생활을 하고 있던 사도 요한에게 환상 중에 나타나셔서 말세에 관한 계시를 보여주신 후에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계22:20)고 하셨습니다. 이 외에도 신약성경 여러 곳에서 주님의 강림에 대한 약속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의 강림이 그토록 성도들에게 큰 위로와 소망이 되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주님께서 강림하실 그 때에 성도들의 부활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절로 17절에 보면 “16)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고 하였고, 고린도전서 15장 51절로 53절에는 “51)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52)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53)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 말씀합니다. 지금 우리의 몸은 쉽게 병들고 늙고 깨어지고 결국은 죽는 몸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때에는 병들지 않고 늙지 않고 깨어지지 않고 죽지 않는 영광스러운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강림은 이 죄악 세상의 종말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 나라들을 심판하시고, 성도들을 영원한 나라로 인도해 들이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인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하나님 아버지와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영원토록 행복하게 살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사노라면 마음에 근심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몸과 마음이 피곤해 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한 때에, 지금까지 말씀해 드린 대로, 하나님을 믿을 뿐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여러분의 모든 짐을 다 맡기십시오. 아무리 어려운 문제라도 전화위복의 결과를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영원한 처소를 예비하러 가셨으며 처소를 예비하시면 다시금 우리를 데리러 오실 것을 생각하시고 위로와 용기를 얻으시기 바랍니다. 신령한 부활의 몸을 입고서 영원한 천국에서 하나님을 모시고 살 것을 생각할 때 모든 근심이 일순간에 사라지고 마음에 기쁨과 소망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그런즉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성도님들의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도님들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출처/김양인목사 설교 중에서

[요한복음 14장 주일설교말씀] 성령을 약속하심(요 14: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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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4장에서는 길과 진리가 되시는 예수님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가면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신다고 했습니다. 성령님이 오시면 예수님을 믿게 하시고 복음을 전파하게 하십니다.

성령을 약속하심(요 14:1-31)

1-14절, 제자들을 위로하심

[1-2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가 떠나신다는 말씀 때문에(요 13:36) 근심하는 마음을 가졌던 것 같다. 그러나 그런 근심을 이기기 위해 그들은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했다. 또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천국의 소망과 위로를 주셨다. ‘내 아버지 집’은 하나님께서 계시는 천국을 가리킨다. 새 하늘과 새 땅은 단지 영들만의 세계가 아니고 새로워진 물질세계일 것이다. 주의 말씀대로 천국에서 우리는 새 포도나무의 열매를 먹을 것이다(마 26:29). 주께서는 제자들을 위해 그 아름답고 복된 천국을 준비하시러 가실 것이다.

[3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천국이 다 준비되면 주 예수께서는 다시 오실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 말씀을 성령 강림의 일로 보고 주께서 있는 곳에 있게 된다는 말씀은 성도가 죽은 후에 주께서 계신 천국으로 인도함을 받는 것을 가리킨다고 보았지만, 그의 재림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성도가 죽은 후에 그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과도기적 상태이고 마지막 날에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에 나타날 영광스러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성도의 참 소망이며 위로이다. 에녹과 엘리야도 거기에 들어갔고 승천하신 예수님도 거기에 들어가셨다. 예수께서는 단지 영이 아니시고 신령한 몸 즉 변화된 몸을 가지고 계신다. 그 몸은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몸이시지만 자유롭게,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몸이셨다. 지금 주 예수께서 계신 곳은 단순히 영들만의 세계가 아니고 영육으로 복된 세계이다.

[4-5절] 내가 가는 곳에[어디로 가는지 너희가 알고 또](전통본문)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제자들은 천국은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으니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으나 천국 가는 길은 모른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과 구주로 믿는다면 그들은 그가 영생의 길이요 천국 가는 길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도마는 천국에 대해서도, 천국 가는 길에 대해서도 무지하였다.

[6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께서는 자신이 곧 천국 가는 길임을 증거하셨다. 죄인들은 그를 통해 구원을 받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또 그는 자신이 진리라고 말씀하셨다. 죄인들은 그를 통해 하나님과 구원을 안다. 또 그는 자신이 생명이라고 말씀하셨다. 그가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의(義)로 말미암아 죄인들은 영생을 얻는다. 천국 가는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시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 아버지께로, 곧 천국으로 갈 수 있다. 그는 죄인들을 위한 유일한 중보자이시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말했고(행 4:12), 또 사도 바울도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증거하였다(딤전 2:5).

[7-9절]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기노스케테)[알고 있고] 또 보았느니라.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주님의 말씀대로, 사람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복된 길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이시다. 히브리서 1:3도 예수께서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고 증거하였다. 빌립이 그의 말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아버지를 보여 주시기를 구하였을 때, 예수께서는 자신을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증거하셨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신성(神性) 즉 신적 본질에 있어서 동일하시다.

[10-12절]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주의 말씀은 아버지와 아들 간의 본질적 일체성을 나타낸다. 그것은 또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神性)을 말한다.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스스로 하시는 것이 아니고 그 안에 계신 아버지께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이것을 믿으라고 말씀하셨다. 아버지와 아들께서는 인격적 구별은 있으나 본질적으로 하나이시다. 또 그는 만일 그의 말을 믿지 못하겠으면 그의 행하시는 일을 인해 그를 믿으라고 말씀하셨다. 그가 행하신 기적들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들이었다. 그의 기적들은 그의 참된 신성(神性)을 증거하였다.

주께서는 또한 제자들에게 그들이 그의 행한 일도 행할 것이라는 놀라운 약속도 주셨고, 또 제자들이 그가 행하신 일보다 더 큰 것도 행할 것이라는 더욱 놀라운 말씀도 하셨다. 과연 제자들은 주께서 승천하신 후 나아가 복음을 전할 때 많은 기적을 행하였고, 심지어 베드로는 한 번 설교할 때 3천명의 영혼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일이 있었다. 그것은 주 예수께서 행하신 일보다 더 놀라운 일이었다. 그것들은 다 주께서 하늘에서 보내주신 성령의 능력으로 행한 일이었다. 그러한 일들은 주의 말씀의 성취일 뿐 아니라, 그의 신성을 더욱 확증하는 일들이었다.

[13-14절]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주께서는 또 제자들에게 그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우리의 중보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담대히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고 그러면 주께서는 응답하실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그의 십자가의 공로와 의(義),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얻게 된 하나님 자녀의 특권 등으로 기도하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주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대하여 “내가 시행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신 자이시다. 그는 영원하신 하나님 아들이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주의 재림과 천국 소망으로 위로를 받자. 본문은 주께서 그들을 떠나신다는 말씀을 듣고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주신 위로의 말씀이다. 주께서는 제자들을 위해 거처를 준비하기 위해 하늘로 올라가실 것과 다 준비되면 다시 오실 것을 말씀하셨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하늘로부터 다시 내려오실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재림은 끝이 아니고 천국을 위한 과정에 불과하다. 그는 구원받은 우리 모두를 천국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둘째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이 천국 가는 유일한 길이 되신다. 그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죄인들은 그를 통해, 오직 그를 통해서만, 즉 그를 영접하고 믿음으로만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고 천국으로 갈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이 천국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시며 구원의 진리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시다. 베드로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말하였고(행 4:12), 바울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말했다(딤전 2:5).

셋째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신적 구주이시다. 주께서는 사람들에게 친히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셨다. 그는 그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셨다. 또 그는 자신과 아버지를 동일시하셨다. 그는 그의 행하신 기적들이 그것을 증거한다고 말씀하셨다. 우리 구주 예수님은 신적 구주이시다. 신적 구주 예수께서 지금도 우리와 함께하신다.

넷째로, 신적 구주이신 주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의 응답을 약속하셨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그것은 항상 잔고가 충분한 직불카드와 같다. 기도는 구원받은 성도의 특권이다.

15-31절, 성령을 약속하심

[15절]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지키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가리킨다. 제자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그의 계명을 지켜야 할 것이다(21, 23, 24절). 이제 주 예수 그리스도의 큰 관심은 그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신약교회는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

[16-17절] [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파라클레토스)[위로자(KJV), 돕는 자(NASB)]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거하게](전통본문)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파르)[혹은 ‘곁에’]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주 예수께서는 또 다른 보혜사께서 오실 것을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제자들의 위로를 위해 또 그들의 사랑 실천하는 일을 돕기 위해 필요한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보혜사이시다. 그러나 이제 그가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것이며 ‘다른 보혜사’ 곧 성령께서 오실 것이다. 그는 영원토록 제자들과 함께 거하실 것이다. 그것은 신약 성도들에게 놀라운 특권이 아닐 수 없다.

성령께서는 진리의 영이시다. 그는 진리만 말씀하실 것이며 결코 거짓을 말하지 않으실 것이다. 세상은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고 받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거하시고 그들 속에 계실 것이기 때문에 제자들은 그를 알 것이다. 그가 “저는 너희 곁에 거하심이요”라는 말씀은 예수님 자신을 가리킨 듯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의 영은 성령과 본질적으로 동일하시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계실 때, 성령께서는 이미 그들 곁에 계신 것과 같다. 그러나 그는 장차 그들 속에 계실 것이다.

[18-19절]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예수께서는 과연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그들에게 오셨고 승천하신 후에도 성령으로 오셨고(매튜 풀) 장차 재림하심으로 오실 것이다(어거스틴, J. C. 라일). 문맥적으로, 이 말씀은 성령의 오심에 가장 맞는 것 같다. 주께서는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하신 후에도 모든 사람들에게 보이신 것이 아니고 오직 제자들에게 보이셨다(행 10:41). 또 그가 승천하신 후에 세상은 그를 더 이상 보지 못하지만, 성도들은 죽은 후에도 천국에서 주를 뵈올 것이다.

[20절]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예수께서 부활하시는 날에, 제자들은 그가 아버지 안에 계심, 즉 그의 신성(神性)을 깨닫게 될 것이며, 성령께서 오시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또 그들은 주의 신성에 대한 지식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들 간의 연합에 대해서도 알게 될 것이다. 물론, 예수님과 성도들의 연합은 하나님과 사람의 본질적 연합이 아니고 사람이 하나님의 생명에 연합되고 그의 풍성한 은혜를 받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성도들은 전지전능한 신이 될 수 없으나,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 안에 살 것이며 장차 천국에서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21-24절]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가룟인 아닌 유다가 가로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는 자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이며 그런 자를 하나님께서는 더욱 사랑하실 것이요 주께서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주님 자신을 나타내실 것이다. 우리가 그를 거역하고 있었을 때 그가 우리를 사랑하셨다면, 우리가 그를 사랑하며 그의 계명을 지켜 행할 때 우리를 얼마나 더 사랑하시겠는가? ‘자신을 나타내신다’는 것은 성령께서 오셔서 함께하심을 가리킨다고 본다. 주를 사랑하며 순종하는 자는 성령 충만의 복을 누릴 것이다.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하리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신자 속에 오셔서 거하심을 가리킨다고 보인다.

[25-26절]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예수께서는 얼마 후 제자들을 떠나실 것이지만 또 다른 보혜사께서 그들에게 오실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이시다.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롬 8:9)이시며 ‘아들의 영’(갈 4:6)이시다. 또 성령(프뉴마–중성명사)을 가리키는 ‘그가’(에케이노스)라는 남성 지시대명사는 성령의 인격성을 증거한다. 성령께서는 제자들에게 모든 진리를 가르치시며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 그는 성경을 잘 이해하도록 가르치시는 가장 좋은 선생님이 되실 것이다.

[27절]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예수께서는 또 제자들에게 평안을 주신다. 주 예수님은 ‘평안의 주’이시다(살후 3:16). 하나님의 나라는 평안의 나라이다(롬 14:17). 주께서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르다. 세상의 평안은 일시적이고 불완전하지만, 주님의 평안은 영속적이고 완전하다. 성도는 이 평안으로 죄와 마귀의 시험과 고난의 현실을 이길 수 있다.

[28절]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면 나의 아버지께로 감을[간다는 말을 인해](전통사본)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

이 말씀은, 그가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 복되고 영광스러운 일이요 또 제자들에게 유익한 일이기 때문에 그들이 기뻐해야 한다는 뜻이다. 과연 예수께서 승천하시는 것은 자신에게 복되고 영광스러운 일이요 그의 제자된 우리들에게는 유익한 일이다. “아버지는 나보다 크시다”는 말씀은 신적 본질에 있어서가 아니고, 인성(人性)을 취하신 중보자로서 자신보다 크시다는 뜻일 것이다(매튜 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신적 본질에 있어서는 하나님과 동일하시고 동등하시다.

[29-31절] 이제 일이 이루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이룰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이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저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의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하시니라.

‘이 세상 임금’은 사탄을 가리킨다. 욥기 1-2장에 기록되어 있듯이, 온 세상의 주권자 하나님께서는 그의 깊으신 뜻 가운데 사탄에게 어느 정도의 권한을 주셨다. 그래서 사탄이 세상에서 어느 정도 활동하는 것이 현실이다. 사탄이 와서 악인들을 격동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게 할 것이다. 이제 그때가 가까웠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를 사랑하며 그의 뜻대로 택자(擇者)들의 대속(代贖)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실 것이다. 죽음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지만 그는 위축하지 않고 아버지의 명하신 바를 묵묵히 다 행하실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 주께서는 이 점을 네 번이나 반복해서 강조하셨다(15, 21, 23, 24절). 그의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해야 하고 그러므로 그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 속에 오신 성령께서 누구이신지 알아야 한다. 성령께서는 주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후에 주님 대신 ‘다른 보혜사’로 오셨다. ‘보혜사’는 ‘위로자’ ‘돕는 자’라는 뜻이다. 또 성령께서는 진리의 영이시다. 거짓말과 이단 사설이 가득한 세상에서 그는 우리를 진리의 지식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또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시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시고 다시 오시겠다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성령의 오심을 암시했다고 본다.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오시는 영이라고 불리었다. 또 그는 다른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롬 8:9)과 ‘아들의 영’(갈 4:6)으로 불리신다. 우리는 다시 삼위일체의 신비를 본다. 우리가 성령님을 모시고 있다는 것은 이와 같은 깊은 뜻이 있다.

셋째로, 우리는 우리 속에 거하시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은 큰 유익을 날마다 체험해야 한다. 그는 우리 안에 항상 거하신다. 그는 죄와 마귀의 시험과 환난이 많은 세상에서 우리에게 위로를 주시고 힘을 주시고 우리의 길을 지도하신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동거하며 동행하며 그의 도우심으로 성화를 이룬다. 로마서 8:13-14,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갈라디아서 5:16,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또 주께서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에게 날마다 평안을 주신다. 데살로니가후서 3:16,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 주는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하실지어다.” 우리는 이런 큰 유익들을 날마다 체험하자.

[사도행전 11장 주석 성경말씀] 안디옥 교회의 설립(행 1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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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4장 1-6절 말씀 묵상

요한복음 14:1-6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베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4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5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니까.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어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이 거처를 예비하러 가신다고 하셨는데. 가시는 길은 죽음을 통과하여 가는 길 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통과 하지 않으셔도 되셨지만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희생의 제물로 드려졌습니다. 그 죽음은 우리들이 바라는 자연사가 아닌 처형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결혼 풍습은 정혼을 하고 나서 신랑은 거처를 만들러 갑니다

신랑이 거처를 다 만들면 신부를 데리러 와서 결혼식을 하게됩니다.

예수님도 우리들의 신랑이 되시니 거처를 만드시러 가시는 것 입니다.

하늘나라는 광활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거처할 집을 만들어야 하시기에 예수님이 가신다고 하시며 너희가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안다고 하시자 도마가 묻습니다. 예수님 어디로 가시는지 그 길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

죽음의 시간은 하나님이 정하시는 시간이기에 우리들은 언제 갈지, 어디로 가는지를 모릅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에서는 자기의 생각을 반영하여 살 수 있지만, 사후의 세계는 하나님이 온전히 통치하시는 영역입니다. 우리들의 죽음의 순간에 천사가 영접하러 오거나 사탄의 부하인 마귀가 데리러 옵니다.

그러니 우리들이 그 길을 알 수가 없습니다. 보이지도 않는 길을 찿으려고 할게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께 맡기면 됩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자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길은 예수님을 통하여야만 갈 수가 있습니다.

세상에서의 길도 잘 찿지 못하여 광야같은 인생길을 좌충우돌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이 어떻게 사후의 길을 알아서 찿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세상의 길을 하나님과 예수님,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사후의 길도 당연히 예수님을 통하여 예비됨을 알 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도마는 이미 사도로 선택이 되었고 인증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그 길로 당연히 갈 수가 있습니다. 제자들의 죽음의 형태는 비록 처형이라는 형태였지만 그 길은 바뀌지가 않았습니다. 보이지 않는 길로 근심하지 말고 알려 주신 예수님의 길을 따라 가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제26장: 요한복음 14~16장

지상 성역 마지막 날 저녁에 마지막 만찬을 드신 후, 구주께서는 요한복음 14~16장 에 기록되어 있듯이 제자들을 가르치셨다. 구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랑, 순종, 성신에 관한 지극히 중요한 진리들을 전하셨다. 그 진리들은 제자들이 구주의 체포와 십자가형 사건에 대비되고, 구주의 왕국에서 지도자 역할을 하도록 준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브루스 알 맥콩키(1915~1985) 장로는 이때 주님께서 전하신 가르침에는 “왕국에 대한 몇 가지 신비로운 비밀, 감춰진 몇 가지 심오한 교리들, 영의 권능으로만 이해할 수 있는 몇 가지 사항들”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말했다.(The Mortal Messiah: From Bethlehem to Calvary, 4 vols.[1979–81], 4:73) 성신이 우리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설명하는 구주의 이 말씀은 경전을 통틀어 성신에 대해 가장 분명하게 설명하는 가르침 중 하나이다.

요한복음 14:1~3.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선지자 조셉 스미스(1805~1844)는 구주께서 요한복음 14장 2절에서 하신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라는 말씀을 다음과 같은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너희가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가 되도록 하기 위해 ‘내 아버지 왕국에는 많은 왕국이 있도다’라고 되어 있어야 합니다. …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의 순서에 따라 해의 왕국의 율법에 순종하는 자들을 위한 거처가 있으며, 그 율법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다른 거처가 있습니다.”(교회 회장들의 가르침: 조셉 스미스[2007], 219쪽) 십이사도 정원회의 쿠엔틴 엘 쿡 장로는 구주께서 구원의 계획의 일부로서 온 인류를 위해 “[많은] 거할 곳”, 즉 영광의 왕국들을 준비하셨다며 이렇게 설명했다. “조셉 스미스가 계시를 받고 교회를 조직했을 당시, 대다수의 [기독교] 교회들은 구주의 속죄가 인간들 대부분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지 않는다고 가르쳤습니다. 일반적인 통념은 소수만이 구원을 받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장 끔찍하고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끝없는 고통의 파멸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선지자 조셉에게 계시된 위대한 교리를 통해 구원의 계획이 이생에서 그리스도에 대해 듣지 못한 사람들과 책임질 수 있는 연령 이전에 사망한 아이들 및 이해력이 없는 자를 비롯한 온 인류에게 적용된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로 말미암아 모든 영들은 태어날 때부터 궁극적으로 부활하는 축복을 받게 될 것이고, 영과 육신은 재결합하여 이 지상에서의 상태를 초월하는 영광의 왕국을 상속받게 될 것입니다.[교리와 성약 76:89 참조] 예외는 사탄과 그의 천사들과 같이 하나님을 의도적으로 거역한 자들에게 적용됩니다.[이사야 14:12~15; 누가복음 10:18; 요한계시록 12:7~9; 교리와 성약 76:32~37 참조]”(“우리 아버지의 계획—모든 자녀들에게 충분한 계획”, 리아호나, 2009년 5월호, 36~37쪽) 후기 성도판 영문 성경 조셉 스미스 역에는 영어의 if라는 단어가 when으로 수정되어 있어서 구주의 의도를 분명하게 밝혀 준다. “내가 가면, 너희를 위해 거처를 예비하겠노라. 그런 후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Joseph Smith Translation, John 14:3)

요한복음 14: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요한복음 14:6) 그분은 자신이 길을 안다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 아버지께로 간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배우는 것 이상의 일을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우리는 그분을 따르고 그분과 같이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 “길”(그리스어 hodos)은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데 사용되는 도로를 말하며, 또한 행동 방침이나 “인생의 길”을 의미하기도 했다. 브루스 알 맥콩키 장로는 요한복음 14장 6절의 중요성에 관해 이렇게 설명했다. “그분은 길이시다. 구원은 그분이라는 길 안에서, 그리고 그분이라는 길을 통해서 온다. 구주께서는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14:6) 그분은 진리이시다. 그분이 그 거룩한 속성의 화신이시기 때문이다. (앨마서 5:48) 그리고 그분은 생명이다. 생명의 빛이 그분에게 중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분과 그분의 권능 없이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못할 것이다. 그분이 생명의 빛을 거두어 가시면 그 즉시 사망이 승리를 거두게 된다. 그분 없이는 불멸의 삶도, 끝이 없는 영광의 삶인 영생도 없다.”(Mormon Doctrine, 2nd ed. [1966], 832) 이미지 목자의 눈으로 보는 베들레헴 풍경, 알 라운즈. 길이 그려진 이 그림은 예수께서 자신을 “길”이라고 하신 가르침을 형상화한 것이다. 칠십인의 로렌스 이 코브리지 장로는 요한복음 14장 6절을 인용하며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길”처럼 따르도록 권면했다. “행복과 성취를 위한 길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그분이 그 길이십니다. 다른 모든 길은 그것이 어떤 길이건 무슨 길이건 간에 어리석은 길입니다. … 우리는 주님을 따르고 그분의 권능을 부여받아 화평, 빛, 힘, 지식, 자신감, 사랑과 기쁨을 얻을 수 있거나, 아니면 어느 길이든 무슨 길이든 다른 어떤 길로 가 그분의 도움과 권능 및 인도를 받지 못하는 어둠, 혼란, 의구심, 슬픔과 절망의 삶을 홀로 살 수도 있습니다. 자 이제 제가 묻겠습니다. 어떤 길이 더 쉽습니까? … 행복과 성취를 위한 길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 길이십니다.”(“길”, 리아호나 ,2008년 11월호, 34, 36쪽)

요한복음 14:7~11; 16:25.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요한복음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실 때 자주 하나님 아버지를 언급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요한복음 14~16장에는 하나님 아버지가 40차례 이상 나온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고 경외하며 모든 일에서 그분에게 순종한다는 사실을 제자들이 알기를 바라셨다. 예수께서는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라는 빌립의 간청에 응하여, 당신을 아는 것이 곧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것이라고 설명하셨다.(요한복음 14:8~11 참조) 십이사도 정원회의 제프리 알 홀런드 장로는 우리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알고, 사랑하고, 순종할 수 있도록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 주셨다며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예수님의 속죄의 고통과 희생을 포함하여 그분께서 말씀하시고 행하신 모든 것에서, 우리의 영원하신 하나님 아버지가 누구시며, 어떤 분이신지, 또 모든 시대와 나라에 걸쳐 그분의 자녀들에게 얼마나 완벽하게 헌신하셨는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말과 행동에서 그분의 아버지, 즉 하늘에 계시는 우리 아버지의 참된 본질을 보여 주시고 우리가 그것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만들도록 노력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최소한 부분적으로나마 그렇게 하신 이유는 그 당시나 현재의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아버지를 더욱 깊이 사랑하고, 그분에게 더 온전하게 순종하도록 하기 위해 그분을 보다 완전히 알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그분을 알도록 하기 위한 최후의 조치로, 그분의 형상으로 창조된 그분의 독생자며 완전한 아들을 지상으로 보내셔서, 일상의 도전 속에서 인간들 가운데에 살며 봉사하게 하셨습니다. … 예수님은 … 하나님께서 언제나 모든 인간들을 사랑해 오셨으며, 앞으로도 사랑하실 것처럼 인간들도 그들의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라고 간청하러 오셨던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이미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권능, 하나님의 거룩함 그리고 하나님의 분노와 심판까지도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도 그들은 자녀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그 뜻깊은 헌신을 아직 충분히 알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주린 자를 먹이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며, 위선자를 꾸짖고 신앙을 호소하는 것,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자비롭고 은혜로우며, 노하기를 더디 하고, 오래 참고 선함으로 가득 찬’ 하나님 아버지의 길을 보여 주시는 것이었습니다.[Lectures on Faith (1985), 42] 그분의 생애를 통해, 특히 그분의 죽음을 통해 그리스도께서는 ‘이것이 내가 너희에게 보여 주는 내 자신의 자비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니라’라고 선언하고 계십니다.”(“하나님의 위대하심”, 리아호나, 2003년 11월호, 70~72쪽)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를 인간에게 보여 주기 위해 오셨다는 진리에 대해 더 알아보려면, 요한복음 1:18 주해를 참조한다. 이미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 델 파슨 더 나아가서, 조셉 에프 스미스(1838~1918) 회장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이라는 말씀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아버지의 본체의 ‘형상’이십니다.(히브리서 1:3) 그는 인간으로서, 바로 완전한 인간으로서 이 지상을 걸으셨으며, 그의 제자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하셨습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요한복음 14:9) 우리가 사려 깊고 경건한 마음으로 대한다면 이 구절만으로도 우리는 그 문제를 풀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그의 아버지의 본체의 형상(즉, 닮았다는 것)이요, 또한 그의 아버지는 인간의 형상이었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필멸의 지상 생활 동안뿐만 아니라 그의 탄생 이전 그리고 부활 이후까지도 하나님 아들의 형상이었기 때문입니다. 14세 소년이었던 조셉 스미스가 그의 첫번째 시현을 보았을 때, 아버지와 아들은 이러한 두 개체의 형상으로 그에게 나타났던 것입니다.”(교회 회장들의 가르침: 조셉 에프 스미스[1998], 334쪽)

요한복음 14:12.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그분보다 더 큰 일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면 깜짝 놀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Lectures on Faith[신앙 강좌]에서는 이 말씀을 구주께서 요한복음 17장 20~24절에서 주신 가르침과 연관을 지으면 더 잘 이해된다며 이렇게 설명한다. “이 모든 말씀이 합쳐져서 영화롭게 된 성도들의 상태를 분명하게 설명해 준다. 즉, 그들은 예수께서 하셨던 일을 해야 하며, 그분이 그들 가운데서 하셨던 일보다 더 큰 일을 해야 한다. 바로 그 때문에 그분이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셨다. 그분은 그들이 이런 일을 때맞춰 해야 한다고는 말씀하지 않으신다. 하지만 그들은 더 큰 일들을 해야만 하는데, 왜냐하면 그분이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셨기 때문이다. … 그분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이 해야 했던 더 큰 일은 영원한 세상에서 행해져야 했다. 그분은 그 영원한 세상으로 가셨고, 그곳에서 그들은 그분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Lectures on Faith [1985], 77–78)

요한복음 14:15~24 이 성구들에서는 우리가 순종한다면,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방법으로 우리에게 사랑을 나타내 보이실 것이라고 언급되어 있는가?

요한복음 14: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구주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라고 하신 말씀은(요한복음 14:15) 우리가 계명을 지킬 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보이는 일이 됨을 가르쳐 준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조셉 비 워스린(1917~2008) 장로는 이렇게 설명했다. “주님을 사랑할 때, 순종은 더 이상 짐이 되지 않습니다. 순종은 즐거움이 됩니다.”(“큰 계명”, 리아호나, 2007년 11월호, 30쪽)

요한복음 14:16~23, 26; 15:26; 16:7. “보혜사”는 성신과 예수 그리스도의 칭호임 흠정역 성경의 신약전서에서 “보혜사”로 번역된 그리스어 paraklētos는 요한의 기록에만 나타난다. 이 단어를 구성하는 para는 “곁에”를 의미하며, klētos는 “부름을 받은 자”를 의미한다. paraklētos란 도우미, 중재자, 옹호자로서 누군가의 곁으로 부름을 받은 이를 뜻한다. 요한의 기록에서, paraklētos라는 칭호는 성신과 예수 그리스도 모두에게 적용된다. 구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떠난 후, 그들이 홀로 남겨지지 않을 것이며 그들에게 도움을 줄 성신의 동반을 받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요한복음 14:16, 26; 15:26; 16:7 참조) 구주께서 제자들에게 “또 다른 보혜사”인(요한복음 14:16; 기울임체 추가) 성신을 보내겠다고 하신 약속은 구주 본인도 하나의 보혜사임을 의미하였다. 선지자 조셉 스미스는 그 두 보혜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두 보혜사가 언급되었다. 하나는 오순절에 주어진 성신으로, 모든 성도는 신앙과 회개, 침례를 행한 후에 성신을 받는다. 이 첫째 보혜사는 성신이다. … 경전에 언급된 다른 보혜사는 커다란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이며, 아마도 이 세대 사람들은 거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갖고, 죄를 회개하며, 죄 사함을 받기 위해 침례를 받고, (안수례로) 첫째 보혜사인 성신을 받고 나서 하나님 앞에서 계속 겸손하고, 의에 굶주리고 목마르며, 하나님의 모든 말씀대로 생활한다면, 이윽고 주님께서는 그에게 아들아, 네가 높이 올려질 것이니라 하고 말씀하실 것이다. 주님께서 그를 철저하게 검증하시고 어떤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자신을 섬길 결의가 확고하다는 것을 알게 되실 때, 그 사람은 자기 부름과 택함을 확실히 하게 될 것이며, 그런 후에는 요한복음 14장 12~27절에 기록되어 있듯이, 주님께서 성도들에게 약속하신 다른 보혜사를 받는 특권을 얻게 될 것이다. 16, 17, 18, 21, 23절을 주목해 보자. … 그렇다면 이 다른 보혜사란 무엇인가?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이것이 바로 그 내용의 핵심을 이루는 골자이다. 어떤 사람이 이 마지막 보혜사를 얻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그에게 임하실 것이다. 즉, 이따금씩 그에게 나타나실 것이며, 그분이 하나님 아버지를 그에게 나타내 보이실 것이며, 그분들은 그와 함께 머무실 것이다. 또한 여러 하늘의 시현이 그에게 열릴 것이고, 주님께서 그를 대면하여 가르치실 것이며, 그는 하나님 왕국의 여러 신비를 완전히 알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History of the Church, 3:380–81)

요한복음 14:18, 23.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구주께서는 죽음을 맞이하기 전날 저녁에 제자들에게 자신이 한동안 그들 곁을 떠나게 될 것이라고 거듭 말씀하시면서, 자신이 그들을 버려두는 것은 아니라며 그들을 안심시키셨다. 그분은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다.(요한복음 14:18) 제프리 알 홀런드 장로는 제자들의 필멸의 삶에서 구주께서 위안을 주시고 그들과 동반하시는 여러 가지 방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예수님이 그토록 길고 외로운 길을 온전히 홀로 걸으셨기에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분의 고독한 여정은, 그 여정의 축소된 모형의 고독한 길 위를 우리가 걸을 때 위대한 동반자들을 가질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늘 아버지의 자비로운 보살핌, 그분의 사랑하는 아들의 변함 없는 동반, 비할 데 없는 성신의 은사, 하늘의 천사들, 휘장 양편의 가족들, 선지자와 사도들, 교사, 지도자, 그리고 친구들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와 그분의 복음의 회복으로 인해, 우리의 지상 생활에는 이 모든 것들을 포함한 다양한 동반자들이 함께합니다. 갈보리 동산에서 울려 퍼진 것은, 간혹 우리가 그렇게 느낀다 할지라도, 우리가 절대 혼자 아무 도움도 없이 남겨지지 않을 것이라는 진리입니다. 우리의 구속주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내 아버지와 내가] 너희에게로 [가서] … 거처를 [너희]와 함께 하리라.’[요한복음 14:18; 또한 23절 참조]”(“함께한 자가 아무도 없었더라”, 리아호나, 2009년 5월호, 88쪽)

요한복음 14:26.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구주께서는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에 제자들을 가르치시면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는 성신을 보내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요한복음 14:26) 성신이 하는 중요한 역할 중 두 가지는 우리를 가르치고 우리가 배운 것을 생각나게 하는 것이다. 고든 비 힝클리(1910~2008) 회장은 이렇게 가르쳤다. “성신은 진리를 증거하는 분으로, 인간이 서로에게 가르칠 수 없는 것들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 모로나이는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또 성신의 권능으로 너희는 모든 것의 참됨을 알게 되리라.’(모로나이서 10:4~5)”(“아버지와 아들과 성신”, 성도의 벗, 1998년 3월호, 8쪽) 칠십인 정원회의 일원으로 봉사하던 시절에 글렌 엘 페이스 장로는 우리에게 오는 영적 증거는 이따금 우리가 진리를 기억하도록 돕는 성신이라며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종종 그 [영적 증거의] 느낌은 기억과 같습니다. 우리는 전세에서 이 복음에 대해 처음 배웠습니다. 망각의 휘장을 거쳐 이 지상에 왔지만 우리 모두의 영에 숨겨진 기억 속에는 전세에서의 흔적들이 남아 있습니다. 성신은 그 휘장을 젖히고 잠자고 있던 기억을 깨울 수 있습니다.”(“알고 계십니까?”, 리아호나, 2007년 5월호, 79쪽)

요한복음 14:27; 16:33.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필멸의 생애 끝자락에 서신 구주께서는 제자들이 앞으로 여러 해 동안 많은 시련에 직면하리라는 것을 아셨다. 그래서 그분은 제자들에게 마지막 말씀으로 평안을 약속하시고,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셨다.(요한복음 14:27; 16:33 참조) 십이사도 정원회의 엠 러셀 밸라드 장로는 진정한 평안을 얻는 유일한 방법은 구주를 믿는 신앙을 통해 찾을 수 있다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영광스럽지만 두려운 속죄의 과정을 시작하시기 몇 시간 전에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에게 이처럼 중요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요한복음 14:27) 그분께서 사랑하는 동료들에게 세상이 인정하는 종류의 평화, 곧 다툼과 혼란이 없는 안전과 무사함을 약속하고 계십니까? 분명히 역사 기록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초대 사도들은 남은 생애 동안 내내 시련과 박해를 많이 경험했습니다. 아마도 그러한 이유 때문에 주님은 평안에 대한 약속에 다음과 같은 말씀을 덧붙였을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한복음 14:27) 그분은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한복음 16:33; 강조체 추가) 평안, 곧 참된 평안, 여러분이 온 영혼으로 참되다고 느끼고 있는 그런 평안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분을 믿는 신앙을 통해서 옵니다.”(“왕국의 평화로운 것”, 리아호나, 2002년 7월호, 99쪽) 하워드 더블유 헌터(1907~1995) 회장은 고난 가운데에서 평안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알기 위해 구주를 본보기로 삼을 수 있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는 모두 우리 생애에서 어떤 역경을 겪게 됩니다. 저는 우리가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것은 사납고, 손상을 입힐 수 있고, 파괴적일 수 있습니다. 어떤 것은 우리를 위해 구원의 힘을 갖고 계신 사랑의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약화시키기까지 합니다. …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한복음 16:33) 이때에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요한복음 14:27) 그분은 자신의 생애와 성역을 통해 평안을 말씀하셨으며, 그분이 무덤에서 나오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처음 하셨던 인사 말씀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요한복음 20:19) 그러나 예수님은 슬픔과 고통과 번민과 운명의 시달림을 받으셨습니다. 그분이 짊어지셨던 무거운 짐은 말로 표현할 수도 없으며, 선지자 이사야가 그분이 ‘간고를 많이 겪었[다]’고 표현한 것을 이해할 만한 지혜를 가진 사람도 없습니다. (이사야 53:3) 주님의 배는 거의 전 생애 동안 요동쳤으며, 적어도 사람의 눈에는 그 배가 갈보리 해안의 절벽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나 버린 것만 같았습니다. 우리는 필멸의 눈으로 생을 바라보라는 권고를 받지 않습니다. 우리는 전혀 다른 어떤 일이 십자가 위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영적인 관점으로 압니다. 아무리 폭풍우가 사납게 휘몰아쳐도 구주의 입술과 마음에는 평강이 있었던 것입니다. … 그러한 평강이 우리와 함께하기를 간구드립니다.”(“주여 큰 폭풍우 일고”, 성도의 벗, 1985년 1월호, 36쪽)

요한복음 14:28~31. 다락방에서의 마지막 말씀 마지막 만찬을 했던 다락방을 떠나기 전에 예수께서는 자신이 사도들을 떠나 하나님 아버지에게로 가실 것이고, 또한 다시 오시리라는 것을(부활 이후의 성역을 언급하심) 그들에게 거듭 상기시키셨다.(요한복음 14:28 참조) 그분은 루시퍼는 자신을 이길 힘이 없다고 증언하셨다.(조셉 스미스 역, 요한복음 14:30[경전 안내서] 참조) 그분은 자신이 지상 성역을 완수하여, 온 세상이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알게 할 것이라고 선언하셨다.(요한복음 14:31 참조) 구주께서 전하신 마지막 설교의 나머지 부분은 다 함께 겟세마네로 가는 길에서 주어졌다.

요한복음 15:1~8. “나는 참포도나무요” 구주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과 당신의 관계에 대해 가르치고자 포도나무의 비유를 사용하셨다.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은 보통으로 포도나무와 포도원을 비유로 사용했기 때문에(이사야 5:1~7; 예레미야 2:21; 호세아 10:1; 야곱서 5장 참조) 제자들은 그 비유를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제임스 이 탈매지(1862~1933) 장로는 구주께서 사용하신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는 지상에 사는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께 의지하듯이, 어떻게 제자들이 그분에게 완전히 의지했었는지를 가르쳐 준다며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보다 더 훌륭한 비유는 세상의 문헌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성임받은 주님의 종인 그들은 주님과 함께하지 않으면 마치 나무에서 절단되어 버린 가지처럼 무력하고 쓸모없는 것이었다. 가지는 뿌리로부터 흡수하는 자양분 있는 수액에 의해서만 열매를 맺게 되지만 일단 절단되거나 부러져 버리면 시들어 땔감밖에는 되지 못하게 되는 것과 같이 그들도 거룩한 사도의 직분에 성임되었을지라도 계속 그리스도와 굳건한 관계를 맺고 있을 때에만 강한 자로서 선행을 많이 행할 수 있었다. 그리스도가 없었던들 그들은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한 갈릴리 사람들, 곧 몇 명의 어부, 한 명의 세리, 그 외에 남다른 재능을 갖지 못했던 사람들에 불과했으며, 그들 모두가 진실로 약점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었던가?” (예수 그리스도, 604쪽) 이미지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요한복음 15:4)

요한복음 15:4~5. “내 안에 거하라 …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에서 구주께서는 우리가 그분 안에 “거[해야]” 함을 강조하시기 위해 거하다라는 단어를 요한복음 15장 1~10절에서 반복적으로 사용하셨다. 제프리 알 홀런드 장로는 구주께서 가르치신 개념을 이해할 수 있도록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내 안에 거하라’[요한복음 15:4]라는 말은 킹 제임스판 성경의 우아한 영어로 이해하기 쉬운, 아름다운 개념이지만 ‘거하라[abide]’라는 말은 지금은 영어에서 많이 쓰이는 단어가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다른 언어로 번역된 이 구절을 듣고 주님께서 주신 이 권고에 대해 더 큰 감사를 느꼈습니다. 스페인어로 그것과 유사한 표현은 ‘permaneced en mi’입니다. 영어 동사인 ‘abide’처럼 permanecer는 ‘남아 있다, 머물다’라는 뜻이지만, 저와 같은 [영어 사용자는] 영어의 ‘permanence(영속성)’와 같은 어원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머물라—그러나 영원히 머물라’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 세상 모든 사람에게 외치는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오십시오, 그러나 와서 남으십시오. 확신과 인내를 가지고 오십시오. 여러분을 위해, 여러분 뒤에 올 모든 세대들을 위해 영원히 오십시오. …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한복음 15:5]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믿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의미하므로, 우리는 그분 안에 영원히, 단단히, 굳건히, 영원토록 ‘거[해야]’ 합니다. 복음의 열매가 우리 생활을 꽃피우고 축복하기 위해 우리는 우리 모두의 구주,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거룩한 이름을 지닌 그분의 교회에 단단히 묶여 있어야 합니다. 그분만이 우리 힘의 참 근원이며 또 영생의 유일한 근원[이십니다.]”(“내 안에 거하라”, 리아호나, 2004년 5월호, 32쪽)

요한복음 15:10.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요한복음 15장 10절에 기록되어 있듯이,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계명을 지키면 자신의 사랑 안에 거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또한 요한복음 14:15, 21, 23 참조) 우리 시대에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비슷한 약속을 주셨다. “하나님의 계명 지키기에 충실하고 부지런하라. 그리하면 나는 나의 사랑의 팔로 너를 안아 주리라.”(교리와 성약 6:20)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녀들을 그토록 지극히 사랑하는 분이시기에 그들이 계명을 지키는지 여부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이 그분의 율법에 대한 순종 문제에서 우리를 면제시켜 줄 것이라 여긴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댈린 에이치 옥스 장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모든 자녀를 사랑하시며, 전 인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들 모두에게 많은 은사를 부여하신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가장 큰 축복”을 받기 위해 그분의 계명을 지켜야만 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참으로 완전합니다. 그래서 그분은 계명에 순종하라는 애정 어린 요구를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는 것만이 우리가 그분처럼 온전해지는 유일한 방법임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의 가장 큰 축복은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에 순종할 때 받습니다. 현대에 받은 계시에서 확실한 가르침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이전에 하늘에서 변경될 수 없게 선포된 율법이 있어 모든 축복은 이에 근거를 두나니—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어떠한 축복을 얻을 때에는 그것이 근거를 두고 있는 그 율법을 순종하였음으로 얻게 되는 것이니라.’(교리와 성약 130:20~21) … 만일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한다면 하나님 아버지나 그분의 성스러운 아들이 사랑으로 계명을 대신하는 것으로 여기신다고 추론하지는 않을 것입니다.”(“사랑과 율법”, 리아호나, 2009년 11월호, 27~28쪽)

요한복음 3:13~15. 예수 그리스도는 진정한 우정의 본보기이시다 구주께서는 고난과 죽음을 맞이할 때가 가까이 다가오자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자신의 친구라고 말씀하시며,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친구라고 설명하셨다.(요한복음 15:14) 구주께서 하신 말씀은 또한 진정한 우정의 표본이신 그분이 온 인류를 위해 치르실 커다란 희생을 예시하였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설명하셨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한복음 15:13) 그분은 그 일을 막 하시려던 참이었다. 고든 비 힝클리 회장은 구주께서 궁극적인 우정의 행위로서 우리를 위해 치르신 희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수님은 저의 친구이십니다. 저에게 그처럼 많은 것을 준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한복음 15:13) 그분은 저를 위해 그분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분은 영생의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하나님만이 이 일을 하실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분의 친구가 되기에 합당하기를 원합니다.”(“나의 간증”, 리아호나, 2000년 7월호, 85쪽) 칠십인 회장단으로 봉사하던 시절에 말린 케이 젠슨 장로는 요한복음 15장 13~14절에 나오는 구주의 말씀을 언급하면서, 교회 회원들에게 진정한 우정을 보여 주신 구주의 모범을 따르라며 이렇게 권고했다. “그리스도의 우정을 축복으로 받아 왔으니 그분이 우리에게 보여 주신 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참된 친구가 되어 주기를 간구합니다. 친구가 될 때보다 더 그리스도를 닮을 때는 없을 것입니다. 저는 … 친구들의 무한한 가치에 대해 간증드[립니다.] … 저는 우리가 스스로 우정을 내보일 때 하나님의 사업과 그분의 자녀들의 행복과 진보에 가장 의미 깊은 공헌을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우정: 복음 원리”, 리아호나, 1999년 7월호, 76쪽)

이미지 열두 사도를 성임하시는 그리스도, 해리 앤더슨

요한복음 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요한복음 15장 16절은 교회의 권세에 대한 교리가 언급된 중요한 성구이다. 구주께서 하신 이 말씀은 그분의 교회에서, 여러 직분에서 봉사하도록 누가 부름을 받아 성별 될지를 결정하는 분은 주님이심을 보여 준다. 고든 비 힝클리 회장은 이 원리가 현재의 교회 지도자 직분에 어떻게 반영되는지를 다음과 같이 전했다. “충실한 교회 회원이라면 교회 직책에 출마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보다 ‘우리는 사람이 복음을 전파하고 그 의식을 집행하기 위해서는 예언에 의하여 또 권세 있는 자에 의한 안수로써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아야 함을 믿[습니다.]’ (신앙개조 제5조) 주님 자신도 그분이 택하신 십이사도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요한복음 15:16)” (“교회는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성도의 벗, 1993년 1월호, 54, 59쪽)

요한복음 15:18~21.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기 때문에] … [사람들이]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구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이 이생을 살면서 “나를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부터(요한복음 15:21) 종종 박해를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로버트 디 헤일즈 장로는 비난과 박해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권고했다. “이 생의 큰 시험 가운데 하나는 우리의 믿음이 의심받고 비난받을 때 [옵니다.] 그러한 순간에 우리는 주먹을 치켜들고 공격적으로 반응하고 싶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한 발 물러서서, 기도하고 구주의 모범을 따를 수 있는 중요한 기회입니다. 예수님 당신께서도 세상으로부터 멸시받고 거절 당하셨음을 기억하십시오. … 그러나 우리가 우리를 비난하는 자들에게 구주께서 하셨던 것처럼 대응한다면, 우리는 좀 더 그리스도처럼 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그분의 사랑을 느끼고 그분을 따르도록 권유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같은 방법으로 대응하는 것은 미리 원고를 준비하거나 어떤 정해진 공식에 따라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주께서는 모든 상황에서 다르게 대응하셨습니다. 사악한 헤롯왕과 대면하셨을 때 그분은 침묵을 지키셨습니다. 빌라도 앞에 서셨을 때에는 자신의 신성과 목적에 대해 간단하고도 강력하게 간증하셨습니다. 성전을 더럽히고 있던 돈 바꾸는 사람들을 대하실 때는 성스러운 것을 보전하고 보호하기 위해 그분의 신성한 책임을 행사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분은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시며(누가복음 23:34) 비할 데 없이 자비롭게 대응하셨습니다. … 선지자 조셉 스미스는 그의 생애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의] 용기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는 … 보복을 하거나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인내와 인정으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함으로써 구주의 모범을 따랐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용기입니다. 우리가 보복하지 않을 때, 즉 다른 뺨을 돌려대고 화를 참을 때, 우리도 역시 구주의 모범을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악마를 무찌를 수 있는 유일한 힘이고 우리를 비난하는 자들에게 비난을 돌리지 않고 대응하는 방법인 그분의 사랑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약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용기입니다.”(“그리스도인의 용기: 제자로서의 대가”, 리아호나, 2008년 11월호, 72쪽)

요한복음 15:18~25 구주께서 하나님 아버지에게로 돌아가시고 나면 제자들은 어떤 대우를 받게 될 것인가? 왜 세상 사람들은 제자들을 그런 식으로 대하겠는가?

요한복음 15:22~16:6. “그들이 …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예수께서는 사도들에게 자신이 죽음과 부활을 겪고 나면, 그들이 성신의 권능으로 나아가 당신을 증거하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셨다. 그들이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고, 구주를 증거할 때 생기게 될 부정적인 결과는 어떤 것인가?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 그들이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요한복음 16:2~3) 요한계시록으로 알려진, 요한이 세계사에 대해 광범위하게 본 시현은 그와 유사한 비극적 상황이 수세기 동안 지속된 대배도의 일부분이었음을 알려 준다.(요한계시록 6:9 참조)

요한복음 16:7~11 이 성구들에는 성신의 어떤 역할들이 설명되어 있는가? 성신이 이런 방법 중 하나로 여러분을 도와준 적은 언제인가?

요한복음 16:12~13.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구주께서는 마지막 설교를 마치시면서, 성신이 그들에게 와서 “[그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요한복음 16:13) 이 말씀은 하늘의 계시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더불어 끝나지 않았음을 분명히 알려 준다. 성신은 모든 경륜의 시대에 구주의 참된 교회를 인도하며, 또한 진리를 찾고 하나님의 뜻에 준하여 삶을 살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을 인도한다. 십이사도 정원회의 리차드 지 스코트 장로는 성신이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도록 우리가 성신을 구해야 한다며 이렇게 설명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여러분이 어려움에 부딪치고 능력의 한계를 넘어서는 결정을 올바르게 내려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행복의 계획을 세우실 때 여러분이 필멸의 생애 동안 겪을 어려움과 결정에 대해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그 방법을 예비하셨습니다. 그러한 도움은 성신을 통한 영적인 인도로 옵니다.”(“영적인 인도를 얻음”, 리아호나, 2009년 11월호, 6쪽) 댈린 에이치 옥스 장로는 우리가 성신의 인도를 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어떻게 성신을 우리의 인도자로 삼을 수 있습니까? 우리는 계명을 통해 지시받은 대로 매주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청결한 손과 순결한 마음으로 성찬을 취함으로써 우리의 성약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교리와 성약 59:8~9, 12 참조) 오직 이 방법을 통해서만 우리는 ‘항상 그의 영과 함께 하[게]’ 되리라는 신성한 약속을 받을 수 있습니다.(교리와 성약 20:77) 그 영이 바로 성신으로서, 그분의 사명은 우리를 가르치고, 진리로 인도하고, 아버지와 아들을 증거하는 것입니다.(요한복음 14:26; 요한복음 15:26; 요한복음 16:13; 제3니파이 11:32, 36 참조)”(“속지 마십시오”, 리아호나, 2004년 11월호, 46쪽) 이미지 성신의 은사, 라일 베즈. 성신의 은사는 안수례를 통해 주어진다.

요한복음 16:20~22.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다음에서 쿠엔틴 엘 쿡 장로는 필멸의 삶에서 겪는 시련은 이따금 슬픔을 수반한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구주의 제자들이 그랬듯이, 구주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이해할 때 오래 지속되는 큰 기쁨을 찾을 수 있다. “우리로 하여금 기뻐하도록 해 주는 근원은 구원의 계획을 이해하는 데 있습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구주께서 지상 생활을 마감해야 할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세상의 죄를 짊어져야 할 때였습니다. 그분은 자신이 알고 계시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위해 제자들을 준비시키시면서 그들에게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복음 16:16) 그들은 아직 부활을 이해할 만큼 준비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구주께서는 부드러운 말로써 자신은 떠나지만 다시 돌아올 것이며, 그들에게 자신이 떠날 때 슬프겠지만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요한복음 16:22) 구주의 죽음이 슬픔을 가져왔듯이, 인생의 변화, 즉 죽음, 질병, 가난, 부상 등은 종종 불행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도 늘 슬픔과 비탄을 가져옵니다. 삶이란 쉬운 게 아니며, 그렇다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겪는 시련과 환란을 덜 받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긴 하지만, 구주께서 이루신 부활과 속죄와 더불어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누릴 영생의 약속은 압도적으로 중요한 것이기에 기뻐하지 않는다는 것은 구주께서 주신 이같은 은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뜻일 것입니다. 기쁨이란 우리의 삶 가운데 영이 임할 때 옵니다.(앨마서 22:15 참조) 영이 임하면, 우리는 구주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을 기뻐하게 됩니다.”(“기뻐하라!”, 성도의 벗, 1997년 1월호, 28쪽)

요한복음 16:25.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구주께서 하나님 아버지를 드러내시는 것에 관하여 더 알아보려면, 요한복음 14:7~11; 16:25 주해를 참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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