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7장 강해 | [하루 한 장] 욥기7장_내 인생이 바람 같음을 답을 믿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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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0. 30 [하루 한 장]“내 인생이 바람 같음을” (욥7장)
설교자 : 홍융희 목사(분홍목사)
부산 성민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http://sungminch.com
말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서
욥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합니다
그러다 하나님을 향해서
원망의 말을 쏟아놓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욥은 하나님을 향한 그의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너무 힘든데 어떻게 합니까
죽을 것 같은데 어찌 견딥니까
참을 수 없는 아픔 중에서
불평을 하든 원망을 하든
하나님을 향하는 우리의 말들을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들어주시고 받아주시고
우리에게 응답해 주십니다
지금 욥은 내 인생이 한낱
바람 같음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인생이 하나님 앞에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에노스이며
그렇기에 우리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힘든 날들을 살아갑니다
참을 수 없는 고통의 날들
끝을 알 수 없는 아픔의 날들이
우리를 어렵게 만듭니다
그러나 기억합시다
우리의 인생의 참 주인은
여전히 하나님이십니다
내 인생의 주관자는 오직 한 분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하나님을 붙잡읍시다
그러면 살 것입니다
영원히 그분의 평강 가운데
우리가 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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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욥기 7장 강해

  • Author: 홍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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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7.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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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07(수) “욥기 7:1-21” / 작성: 정한조

본문 욥기 7:1-21

찬송가 391장 ‘오 놀라운 구세주’

오늘 본문인 7장은 4-5장에 있었던 엘리바스가 욥에게 퍼부은 정죄에 대한 욥의 반론과 하소연의 뒷부분입니다.

단 하루 만에 모든 재산과 자녀를 잃고, 온 몸에 악성종양이 뒤덮여 있는 욥에게, 엘리바스가 욥에게 했던 말의 근거는 자업자득과 인과응보였습니다. “나는 잘 모르지만 네가 하나님께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 고난을 당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엘리바스는 하나님을 ‘권선징악(勸善懲惡)’의 하나님으로만 생각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죄를 용납하지 않으시고, 삶을 따라서 상을 주시는 분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전부는 결코 아닙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권선징악만의 하나님이셨다면, 우리는 모두 이 자리에 있지 못할 것입니다. 이미 저주를 받고 형벌을 받았을 것입니다.

욥의 말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1-6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이 땅에 사는 인생에게 힘든 노동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그의 날이 품꾼의 날과 같지 아니하겠느냐 종은 저녁 그늘을 몹시 바라고 품꾼은 그의 삯을 기다리나니 이와 같이 내가 여러 달째 고통을 받으니 고달픈 밤이 내게 작정되었구나 내가 누울 때면 말하기를 언제나 일어날까, 언제나 밤이 갈까 하며 새벽까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는구나 내 살에는 구더기와 흙덩이가 의복처럼 입혀졌고 내 피부는 굳어졌다가 터지는구나 나의 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니 희망 없이 보내는구나

‘이 땅에 사는 인생에게 힘든 노동이 있다’는 것을 예전에 사용했던 개역한글성경에서는 ‘세상에 있는 인생에게 전쟁이 있다’고 표현했습니다. ‘힘든 노동’이라 표현한 이 단어는 하나님을 표현하는 말 중에 하나인, ‘만군의 여호와’라고 할 때에 ‘만군(萬軍)’에 쓰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힘든 노동’보다 ‘전쟁’이 더 적절하고도 훨씬 더 실감나는 번역입니다. 노동에 뛰어든 사람은 힘들거나 적성에 맞지 않으면, 퇴직하거나 이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쟁에 나간 병사가 힘들거나 적성에 맞지 않다고 해서 부대를 나가게 되면, 탈영이 되고, 아군의 총에 맞아 죽게 될 것입니다. 그만큼 전쟁은 강제적입니다. 또한 노동은 나의 시간을 팔고서 그 대가로 돈을 받아서 생계를 유지합니다. 하지만 전쟁터로 나간다는 것은 내 생명을 파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동 현장보다 전쟁터가 훨씬 더 절박합니다.

그만큼 욥은 자신의 상황이 힘들고 절박하다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든 짧게 끝나는 것이면 힘들어도 버텨볼만 합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계속될 때에는 쉽지가 않습니다. 지금은 건설노동자들의 작업시간이 오전8시부터 오후5시까지로 정해져 있지만, 이렇게 시행된 것이 그렇게 오래된 일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그들의 노동시간은 해 뜰 때부터 해질 때까지였습니다. 고대에는 더욱 그러하였습니다. 그래서 종이나 품꾼은 매일매일 해가 지는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해가 져야 종은 일을 그치고 비로소 쉴 수가 있고, 품꾼은 임금을 받아서 먹거리를 살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종과 품꾼이 해지는 시간을 기다렸다면, 욥은 해 뜨는 시간을 학수고대했습니다. 자신에게 임한 고통으로 인해서 잠을 이룰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수개월동안 고통 가운데서 잠자리에 들 때마다 빨리 아침이 오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잠자리에서 이리저리 몸을 뒤집는 전전반측(輾轉反側)하고 있는데, 그런 욥을 친구들이 이해해 주지 못했던 것입니다. 아니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욥은 자신의 매일이 ‘베틀의 북’같다고 합니다. 베틀의 북은 베를 직조할 때의 틀로서 가로로 굉장히 빨리 지나갑니다. 욥은 4절에서는 언제 밤이 다 지나갈까 하며 새벽까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한다고 했었습니다. 즉 시간이 아주 천천히 가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배틀의 북과 같이 빨리 지나간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그 초점이 ‘속도’에 있지 않고, ‘의미’에 있습니다. 그렇게 긴 밤을 하얗게 지새우며 보냈는데, 돌아보니 빨리 지나간 것 같기는 한데, 여전히 그 지난 세월이 자신에게는 아무런 희망을 주지 못하는 무가치했던 시간으로 여겨진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욥은 이렇게 독백합니다. 7-8절입니다.

내 생명이 한낱 바람 같음을 생각하옵소서 나의 눈이 다시는 행복을 보지 못하리이다 나를 본 자의 눈이 다시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고 주의 눈이 나를 향하실지라도 내가 있지 아니하리이다

욥은 자신의 생명이 ‘한낱 바람’과 같다고 고백합니다. 들판에서 서 있으면 이쪽에서 저쪽으로 바람이 훅 불고 갑니다. 그것이 자신의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낱 바람’을 개역한글성경에서는 ‘한 호흡’이라고 번역했는데, 그것이 더 깊이 와 닿습니다. 즉 욥은 자신의 인생이 “후-”라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은 다시는 행복(좋은 것)을 보지 못하게 될 것 같다고 합니다. 즉 이제는 자신 앞에는 끝없는 불행만이 전개될 것 같고, 앞으로는 험한 꼴만 볼 것 같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를 아는 사람들이 자기를 다시 보지 못하고, 하나님께서도 자신을 찾으실 때도 자신이 없을 것이라고 하는 것은, 이제 자신은 별로 살고 싶지도 않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제 욥의 하소연은 하나님에게로 향합니다. 11-12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그런즉 내가 내 입을 금하지 아니하고 내 영혼의 아픔 때문에 말하며 내 마음의 괴로움 때문에 불평하리이다 내가 바다니이까 바다 괴물이니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나를 지키시나이까

고대 사람들에게 ‘바다’는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돌보시는 것을 표현할 때에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다(사43:2)”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바다 괴물’은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고, 세상을 혼란시키는 존재를 대표’합니다. 욥은 하나님께 자신은 그렇게 산 적이 없는데, 자기를 바다처럼 다른 사람들을 삼키는 존재로, 바다 괴물처럼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는 존재로 여겨, 자기를 감시하느냐고 하소연하는 것입니다.

욥의 하소연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17-19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크게 만드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순간마다 단련하시나이까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내가 침을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

욥의 이 하소연과 비슷한 표현인데, 정반대의 의미의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시편 8:4-5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인간이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셨다”라는 고백은 너무 엄청납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은 무한한 질적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차이는 인간과 하루살이와의 차이보다 억 만 배의 억 만 배보다 큽니다. 시편기자의 이 고백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너무 존귀하게 만드셔서 감동하고 감격하는 것입니다.

반면의 욥의 고백은 “하나님 제게 신경을 꺼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저를 좀 놔 주십시오. 내가 침을 삼킬 정도의 시간이라도 맘 편하게 살게 해 주십시오”의 비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함부로 살도록 내버려 두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왜냐하면 존귀하게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일 설교 말씀을 통해서 확인했듯이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도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유대교의 주류에 편입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서 213km나 떨어진 다메섹까지 그리스도인들을 색출하려 연행하려고 가던 그를 돌려세우시고, 주님의 사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또한 아라비아 광야에서 3년, 고향 다소에서 13년 동안 침거하고 있던 그를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바나바와 더불어 안디옥 교회의 공동담임으로 불러내시고, 또 전도자로 불러내셨습니다. 전도자로 살면서도 풍토병에 걸리기도 하고, 돌에 맞아 죽은 것으로 여김을 받아 버려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바울을 내버려두시지 않으심으로 말미암아 그는 신묘막측한 은혜의 지도와 불가사의한 섭리의 지도를 그리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사순절 셋째 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을 핏값을 주고 구속(救贖)해 주신 주님이 바로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 우리도 구속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주셨습니다.

혹 우리의 삶에 힘듦이 있을지라도, 사도 바울과 같이 우리도 우리의 삶을 온전히 주님께 걸고, 주님과 함께 걷고 달리십시다. 사도 바울의 인생 지도가 찢어지지도, 색이 바래지도, 삭아 없어지지도 않게 만들어 주신 주님께서 우리의 인생지도도 동일하게 엮어지게 할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심어주신 삶의 자리에서 신묘막측한 은혜의 지도와 불가사의한 섭리의 지도를 그려 가시는 한 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욥이 “내가 무엇이라고 아침마다 찾아오셔서 단련하시며, 왜 나를 향한 눈을 떼지 않으십니까? 내가 침을 삼키는 동안만이라도 내버려두실 수 없습니까”라고 하소연해도, 그 모든 과정이 욥으로 하여금 신묘막측한 은혜의 지도와 불가사의한 섭리의 지도를 그리고 있기 때문임을 압니다.

혹 우리의 삶에도 크고 작은 고달픔과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그 모든 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새롭게 하고 계시는 것이며, 우리가 우리의 삶을 주님께 걸고 주님을 목적으로 삼고 살면, 우리의 인생 지도도 찢어지지도 않고, 색이 바래지도 않고, 삭아 없어지지 않음을 잊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오늘도 주님의 십자가와 십자가의 주님으로 인해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영원한 주류로 살아가는 한 날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에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오늘 본문의 말씀을 찬찬히 다시 읽고 그 내용을 정리해 보십시오.

2. 욥은 자신의 인생이 힘든 노동(전쟁)과 같다고 고백했습니다. 당신의 삶에서 그와 같았던 때는 언제였습니까?

3.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침을 삼킬 여유도 주시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느낀 때는 언제였습니다. 그 때의 일(상황)은 어떻게 정리가 되었습니까?

4. 하나님께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심어주신 삶의 자리에서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작성 : 정한조)

[욥기 7장 강해설교말씀] 욥-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욥 7: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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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7장에서는 욥의 탄식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힘들고 지친 인생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욥이 갑자기 닥친 시련에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육적인 고난이 너무나 심하기 때문에 죽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생명을 가져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육체적인 고통이 왔을 때 괴롭습니다. 하나님께 의문이 생깁니다. 열심히 살았는데 왜 나에게 이런 육체의 시련이 왔을까?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욥-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욥 7:1-21)

[1-5절] 세상에 있는 인생에게 전쟁이 있지 아니하냐? 그 날이 . . . .

욥은 계속 말한다. “세상에 있는 인생에게 전쟁(차바)[힘든 노동](BDB, NASB, NIV)이 있지 아니하냐? 그날이 품꾼의 날과 같지 아니하냐? 종은 저물기를 심히 기다리고 품꾼은 그 삯을 바라나니 이와 같이 내가 여러 달째(야르케 솨웨)[헛된 달들 동안](욥이 고난받은 기간) 곤고를 받으니 수고로운 밤이 내게 작정되었구나. 내가 누울 때면 말하기를 언제나 일어날꼬, 언제나 밤이 갈꼬 하며 새벽까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는구나. 내 살에는 구더기와 흙 조각이 의복처럼 입혔고 내 가죽은 합창(合瘡)되었다가(라가)[굳었다가] 터지는구나.”

세상에는 평안이 없다. 모세는 인생의 7, 80년 생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라고 말했다(시 90:10). 주께서는 인생을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이라고 표현하셨다(마 11:28). 욥은 여러 달 동안 혹독한 고난을 경험하고 있었다. 세상에 고난이 있는 까닭은 근원적으로는 인간의 죄로 인해 땅이 저주를 받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아담에게 “땅은 너로 인해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고 말씀하셨다(창 3:17).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평안을 주셨다(마 11:28; 요 14:27). 또 하나님께서는 장차 참된 안식의 세계인 천국을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실 것이다(롬 14:17).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은 이미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서 안식을 누린다(히 4:9-11).

[6-10절] 나의 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니 소망 없이 보내는구나. . . .

욥은 또, “나의 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니 소망 없이 보내는구나. 내 생명이 한 호흡 같음을 생각하옵소서. 나의 눈이 다시 복된 것을 보지 못하리이다”라고 말한다. 천을 짜는 베틀의 북은 쉴 새 없이 빠르게 움직인다. 욥은 자신의 날들이 베틀의 북보다 빠르다고 표현한다. 인생의 삶은 쏜살같이 빠르고 흐르는 물같이 신속하다. 모세는 7, 80년의 일생이 날아가듯이 신속히 간다고 말하였다(시 90:10). 한 주간이 빨리 지나가고 한 해가 빨리 지나가며 어느덧 황혼이 찾아온다.

또 욥은 자신의 삶이 소망이 없고 한 호흡 혹은 바람(루아크) 같고 복된 것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삶은 짧고 허무하다. 다윗은 시편 39편에서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니이다.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말하였다(시 39:5-6). 야고보서를 쓴 야고보는 우리의 생명을,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라고 표현하였다(약 4:14).

욥은 본문에서 또, “나를 본 자의 눈이 다시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고 주의 눈이 나를 향하실지라도 내가 있지 아니하리이다. 구름이 사라져 없어짐같이 음부[무덤]로 내려가는 자는 다시 올라오지 못할 것이오니 그는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겠고 자기 처소도 다시 그를 알지 못하리이다”라고 말한다. 인간의 삶이 짧고 덧없이 빠르기 때문에, 사람이 죽고 나면 다른 사람들이 그를 지상에서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다. 죽음으로 인생의 지상의 삶은 끝난다.

[11-16절] 그런즉 내가 내 입을 금하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 . . .

욥의 고통은 영혼의 고통이었다. 그는 “그런즉 내가 내 입을 금하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아픔을 인하여 말하며 내 영혼의 괴로움을 인하여 원망하리이다. 내가 바다니이까? 용[바다 짐승, 바다 괴물, 고래]이니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나를 지키시나이까?”라고 말한다. 그는, ‘내 마음의 아픔’ ‘내 영혼의 괴로움’에 대해 말한다. 그는 몸의 고통뿐 아니라, 마음과 영혼의 고통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의 이유를 알지 못할 때, 또 믿음이 약해지거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를 때 생기는 고통이다. 그는 자신이 모든 것을 포용하는 바다인가, 또는 풍랑을 두려워하지 않는 바다 짐승인가라고 묻는다.

또 욥은 침상에서도 평안치 못했다. 그는 “혹시 내가 말하기를 내 자리[침대]가 나를 위로하고 내 침상이 내 수심(愁心)을 풀리라 할 때에 주께서 꿈으로 나를 놀래시고 이상(異像)으로 나를 두렵게 하시나이다”라고 말한다. 침상은 하루하루 피곤한 인생에게 휴식의 공간이다. 그러나 욥은 침상에서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무서운 꿈으로 인해 놀라고 이상(異像)으로 인해 두려움을 가졌다.

이러한 고통 중에서 욥은 죽는 것을 소원하여 말한다. “이러므로 내 마음에 숨이 막히기를 원하오니 뼈(에쳄)[아마 ‘뼈의 쑤심’] (BDB)보다도 죽는 것이 나으니이다. 내가 생명을 싫어하고 항상 살기를 원치 아니하오니 나를 놓으소서. 내 날은 헛것이니이다.” 그는 이미 자기 생일을 저주하였었다(욥 3:1). 또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멸하기를 기뻐하시고 그 손을 들어 그를 끊으시기를 사모하였었다(욥 6: 8-9). 이제 그는 몸의 고통보다 숨이 막혀 죽는 것을 원한다.

[17-19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크게 여기사 그에게 . . . .

욥은 하나님께서 인생을 살피신다고 말한다. 그는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크게 여기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아침마다 권징하시며(파카드)[살피시며] 분초마다 시험하시나이까?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나의 침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귀중하게 여기시고 마음을 두신다. 시편 8:4도,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라고 말하며, 시편 144:3도,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알아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관대 저를 생각하시나이까?”라고 말한다. 사람은 죄가 많고 부족한 존재인데, 하나님께서는 그를 귀중하게 여기시고 선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아침마다, 분초마다 살피시고 시험하신다. 그는 사람을 잠시라도, 침 삼킬 동안이라도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섭리는 전 포괄적이다. 그는 우리의 모든 삶,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신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않는다(시 121:4). 시편 139:1-4는,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라고 말한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다고 말씀하셨다(마 10:30). 요한계시록 2:23에서, 주께서는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이 수고로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참 평안을 누리자. 또 우리는 영원하고 충만한 안식의 세계인 천국만 사모하자.

[20-21절] 사람을 감찰하시는 자여, 내가 범죄하였은들 주께 . . . .

욥은 “사람을 감찰하시는 자여, 내가 범죄하였은들 주께 무슨 해가 되오리이까?”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감찰하시는 하나님’(창 16:13)이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우리의 생각을 아시고 우리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우리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고 우리의 혀의 말을 다 아신다(시 139:2-4).

후반부의 원문은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이다(MT, KJV). 세상에 죄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욥은 자신의 부족과 죄를 인정한다. 또 그는 죄의 보상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느낀다. 하나님의 엄격한 공의 앞에 의인은 아무도 없다. 욥기 34:21은, “하나님은 사람의 길을 주목하시며 사람의 모든 걸음을 감찰하신다”고 말한다. 또 히브리서 4:12-13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고 말한다.

성도는 오직 하나님의 용서와 진심의 순종으로 조금 의로운 삶을 산다. 그러나 욥은 지금 하나님께서 그의 죄를 용서치 않으시고 그를 주목하셔서 그의 심령으로 무겁고 피곤하게 하신다고 말한다. “어찌하여 나로 과녁을 삼으셔서 스스로[내 자신에게] 무거운 짐이 되게 하셨나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내 허물을 사하여 주지 아니하시며 내 죄악을 제하여 버리지 아니하시나이까? 내가 이제 흙에 누우리니 주께서 나를 부지런히 찾으실지라도 내가 있지 아니하리이다.” 하나님의 용서가 아니고서는 사람은 자신의 죄에 대해 아무 해결책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용서를 간청한다.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는 이 빠른 세월의 흐름 속에서 헛된 세상일에 시간을 다 쓰지 말고 세월을 아끼고 지혜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며 오직 믿는 일과 주 안에서 선한 일들에 힘쓰자(엡 5:15-17).

우리는 평안할 때, 즉 심령의 평안, 몸의 건강, 물질적 여유, 침상에서의 평안이 있을 때, 하나님께 감사하며 열심히 살자. 그러나 고난이 올 때 우리는 욥을 기억하고 또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자.

우리는 무익한 존재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귀중히 여기시고 우리의 모든 삶을 살피심을 감사하며, 오직 믿음으로 살고 또 선하게만 살자.

우리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부족투성이의 죄인임을 인정하자. 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죄와 칭의를 감사하며 천국을 사모하자.

[고린도전서 1장 헬라어 원문 강해]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문안 인사(고전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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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강해 설교) 사람이 무엇이기에(욥기 7:17-21, 사도행전 20:7-12) – 사람이 사는 집

욥은 처음부터 정직하고 순전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자였습니다. 이것이 욥기 1장 1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욥이 무엇인가 부족하다고 생각하셔서 사단에게 말한 것이 아니라 사단에게 욥을 너무나 자랑하고 싶어서 그리고 욥이 누구인지를 알리고 싶어서 사단의 시험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람 욥은 기도할 때 어떻게 기도했을까요? 욥기 7장은 사실은 친구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머물러서 기도하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 앞에 온전하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자의 기도, 저는 오늘 이 기도가 하나님 앞에 머물러있는 자들의 기도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7장 17절부터 21절에 있는 말씀을 보면 욥은 하나님 앞에서 체면을 말하지 않습니다. 욥은 하나님 앞에 조금 괜찮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너무 힘들다고 죽을 것 같은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고 솔직하게 정직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오늘 우리들의 기도여야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조차도 가면을 쓰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자기에게 뭔가 있는 것처럼 있어야 되는 것처럼 또 다른 사람들이 듣고서 어떻게 생각할지를 의식하면서 기도합니다. 그러다보니까 내면을 솔직하게 드러내어 기도하지 못하고 여전히 무엇인가 하고 있는 것처럼 자신이 꽤 괜찮은 사람인 것처럼 기도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욥은 7장 17절에서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하나님이 왜 사람에게 마음을 두셨고 왜 하나님은 사람을 감찰하고 계신 것입니까? 욥은 사람에게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솔직한 그 마음을 얘기합니다. 하나님이 왜 보잘것없고 쓸모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을 늘 감찰하고 계십니까? 마음에 두신 그것 때문에 하나님은 말씀으로 나를 권징하고 계시고 인생 속에서 나를 단련시키고 계시고 어느 순간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는데 왜 그렇게 하십니까? 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날마다 감찰하고 계시고 우리 인생에서 눈을 떼지 않으시는 그 분이 왜 나만 야단치고 계시는 것처럼 또 나만 화살을 맞고 있는 것처럼 나를 왜 과녁으로 삼으셨고 완전히 내 죄악을 제거하지 않으시고 여전히 그 죄 때문에 내가 죽을 것 같은 그 속에서도 여전히 남아있지 못하는 인생을 왜 나에게 허락하셨습니까? 라고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욥의 기도를 들으면 믿음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을 이야기하고 있으면서 여전히 죄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 원망하고 불평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욥이 가장 밑바닥에 가지고 있는 믿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나를 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나를 마음에 두고 계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힘들고 어렵고 죄 가운데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죄 때문에 나를 멀리하시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나를 마음에 두고 계시고 여전히 나를 감찰하고 계시다는 확신의 믿음이 있습니다.

지난주에 모세의 기도 바울의 기도 예수님의 기도를 얘기했습니다. 모세가 믿음이 없어서 자기가 하나님의 생명책에서 지워진다고 할지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기를 원한다고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확신, 그래서 그것이 끊어진다고 할지라도 라고 하는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확신 때문에 아니 하나님이 나를 잡고 있는 그 확신 때문에 기꺼이 자신의 것을 내어던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도 똑같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끊어진다할지라도 골육지친들이 하나님 앞에서 구원받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 라고 하는 이 원망과 한탄의 소리가 사실은 하나님이 그런 순간에도 끝까지 그 손을 놓지 않으시겠다고 하는 그 확신 가운데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벼랑 끝에 서 있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앞으로 갈 수도 없고 뒤로 물러설 수도 없습니다. 뒤로 물러서면 패배하는 것 같고 앞으로 나가자니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을 것 같고 도대체 신뢰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고 한 군데도 발을 디딜 곳이 없는 그 상황 속에서 오늘 욥의 기도든 모세의 기도든 바울의 기도든 예수님의 기도든 벼랑 끝에 서서 주님 앞에 모든 것을 맡기면서 뛰어내리는 기도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멀리하시면서 죄 때문에 나를 죽일 것 같은 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이 나를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내면의 깊은 사랑이 흐르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우리에게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믿기 시작해서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반응하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축복하시고 나를 인도하시고 어떤 순간 속에서도 나를 보호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처음부터 인도하고 계셨고 하나님이 나를 처음부터 보호하고 계셨고 하나님이 나를 처음부터 축복하고 계셨다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인생을 살다 뒤 돌아보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무엇인가 잘한 것이 있어서 하나님 앞에 인도받고 보호받고 축복받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 인생의 시간 속에서 살다보니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사건을 만나고 어떤 사람을 만나고 또 어떤 사람을 통해서 인생의 바닥에 가보니까 사실은 하나님이 나를 먼저 사랑하셨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먼저 나다나엘을 부르실 때도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먼저 보셨습니다.

나다나엘은 주님이 누구이신지를 몰라서 메시야가 누구이신지를 몰라서 여전히 고민하고 고뇌하고 있었는데 주님이 먼저 보셨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먼저 깨달아서 내려가서 당신이 메시야입니까? 라고 물은 것이 아니라 주님이 고뇌하고 있는 나다나엘을 먼저 보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내가 먼저 보아야지만 내가 먼저 들어야지만 내가 먼저 뭔가를 해야지만 하나님 앞에 보호받고 인도받고 축복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은 나를 먼저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로마식 악수처럼 내가 손을 놓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그 손을 먼저 잡고 계셨기 때문에 내가 손을 놓고 있는 그 상황 속에서도 아니 가장 깊은 죄 가운데 있는 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그 손을 놓지 않으시고 먼저 그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끔 싸우고 나서 먼저 얘기하면 지는 것 같아서 끝까지 말을 안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먼저’입니다. 그 사람이 생각하기 이전에 먼저 하는 것이 사랑의 모습,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말하기도 전에 먼저 용서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그 사랑을 우리에게 먼저 보여주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그 사랑을 깨닫는 것이지 내가 하나님 때문에 용서 받고 하나님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하나님의 마음은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부터 떠나는 것(요일2:16)’

이것이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정과 욕에서 떠나는 것은 아버지의 사랑을 통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를 고아처럼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셔서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라고 말씀하게 하시고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를 주라고 시인할 수 없는 그 능력을 우리에게 주셔서 아버지의 사랑을 우리 가운데 두셨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는 사랑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주는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오늘 우리에게 주시고 있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무엇이든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이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의 마음이었습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인생 속에서 자기 스스로 무엇인가 하려고합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뒤집어쓰시겠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책임지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내가 다 책임지고 내가 다 좌지우지해서 인도하고 이루고야 마는 그런 인생이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아가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 가운데 있음을 고백하고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 번째는 아버지의 사랑, 먼저 하신 사랑은 시작부터 마침까지 모든 순간순간 마다 하나님이 하시는 사랑입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계 22:13)’

여호와 이레, 하나님께서 준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알고 계셨고 하나님이 사람들을 다 붙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필요에 따라서 물질을 풍성하게 공급해주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얘기합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에 마지막은 인간이 해야 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마지막조차도 하나님이 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버지가 하시는 것에 대해서 보면서 같이 공감하고 본 것에 대해서 증언하는 증인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번에 중국에 갔더니 중국을 품을 수 있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이제는 동작구가 아닙니다. 놀라운 것은 조선족 목사님들이 중국어를 못하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특별히 연변에 있는 분들은 중국어를 외국어처럼 하고 사셨습니다. 한족은 조선족 보다 못하다는 생각을 하고 산다고 합니다. 한족은 더럽고 미개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용정교회를 나오신 분들인데 이분들이 갑자기 중국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중국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저는 중국에서 중국말을 배워야 된다는 그 말이 이해가 안 됐습니다. 3년 동안 일반 한족들이 다니는 교회를 다니시면서 중국어를 배워서 한족들을 전도하고 한족교회를 세우시는 것입니다. 물론 지하에 있는 가정교회입니다.

그 중에 한 목사님이 자신은 한국에 있는 총신대학교에 가고 싶어서 하나님 앞에서 5년을 기다렸는데 하나님이 다 막으시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화가 나서 목회를 그만뒀답니다. 그리고 장사를 하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연변에서 성도는 정말 먼 거리입니다. 그리고 그 곳에는 아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1년 전에 그 곳에서 목회를 시작하신 목사님을 만나러 성도에 가셨다고 합니다. 성도에서도 목회할 마음은 생기지 않았는데 그 옆에 있는 중경이라는 도시에 갔는데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도시라는 마음이 생기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3년 동안 개척을 준비하는데 하나님께서 정확하게 사람들도 붙여주시고 정확하게 공동체를 만들어주셔서 그 분이 지금 한족교회 목회를 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셨다고 간증을 하셨습니다. 자기는 아무것도 준비한 것이 없었는데 중경이라는 도시에 들어가는 순간에 하나님이 주신 도시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 곳에서 40명에서 50명 정도 되는 한족교회를 하고 계십니다.

중국 사람들은 한 번 믿기 시작하면 굉장히 성실하다고 합니다.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합니다. 깊은 관계가 맺어지고 나서 성실하게 다니기 시작하고 성실한 것뿐만 아니라 한 사람이 믿기 시작하면 온 가족을 다 데리고 나온다고 합니다. 처음에 눈에 뭐가 씌었는지 중경이 너무 아름다워 보였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도시라고 생각하고 목회를 하셨는데 이제 10년 쯤 되니까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은 도시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중경을 통해서 또 다른 소수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의 고백이 바로 여호와 이레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정직하게 내 마음을 표현할 때 우리 가운데서 일하시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욥이 기도합니다. ‘나는 하나님이 마음에 두고 감찰하는 존재이다.’ 눈동자와 같이 우리를 지켜주시는 하나님이 계시는 존재가 자신이라고 욥이 기도합니다.

사도행전 20장에서 사도바울이 말씀을 전할 때 두기고라는 청년이 졸고 있습니다. 졸고 있었던 것뿐만 아니라 졸다가 떨어져서 죽었습니다. 게으른 자, 말씀을 듣지 않고 자기 것에 스스로 넘어져서 쓰러져 죽은 사람, 집중하지 않은 사람, 딴 짓 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우리가 얘기합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20장 말씀을 잘 읽어보시면 두기고의 이야기가 이렇게 끝납니다.

‘사람들이 청년을 데리고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더라.’

두기고가 너무나 게으른 사람이고 집중하지 못하는 사람이고 딴 짓하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두기고를 보면서 왜 그렇게 했느냐고 손가락질을 하면서 두기고처럼 살지 말아야겠다고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오늘 말씀에 보면 이상하게 위로받았다는 것입니다. 그 청년을 통해서 위로받았다는 것입니다.

두기고는 유티코스라는 이름인데 이 이름은 그 당시 종의 이름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만복이, 만득이 정도로 불리는 천한 사람의 이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하찮은 사람의 이름이 우리들의 연약한 인생의 모습이고 피곤하고 지친 인생의 모습입니다. 졸다가 떨어져 죽었는데도 사도바울이 그를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합니다. 유티코스, 두기고가 지친 인생의 모습으로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다가 졸음 때문에 떨어져서 죽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졸고 있는 두기고를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몸을 그대로 받았습니다. 그 위에 엎드려서 그 몸을 안습니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그것이 바울의 체휼의 기도였습니다. 그리고 올라가서 떡을 떼어 먹습니다. 그를 살리고 나서 그는 다시 떡을 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의 이야기와 두기고의 이야기를 함께 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두기고를 향한 기도가 연약한 모습, 게으른 모습으로 치부하는 것이 아니라 연약하지만 그를 하나님의 몸으로 받아서 다시 부활의 이야기로 승화시키고 있는 부활의 믿음이 그 안에 있는 것입니다. 두기고를 통해서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연약한 모습조차도 주님이 쓰실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위로 받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욥과 같이 또는 두기고와 같이 인생의 고난과 슬픔 가운데서도 기도합니다. 그 기도는 고상한 기도가 아니라 지치고 힘든 인생의 이야기들을 주님 앞에 보여주면서 다시 부활할 수 있도록 부활의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주님이 우리를 안고 체휼의 기도를 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인생 가운데서 힘들고 어려울 때 사람이 무엇이기에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보호하시고 축복하실까? 이런 생각을 할 때 마다 세 가지를 신앙의 원리로 가지고 살기를 원합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을 능력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성품으로 보는 것입니다.

욥은 분명히 하나님을 잘 믿고 있었는데 애매한 고난이 왔습니다. 그 때 그가 생각했던 것이 하나님은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능력이 있으시다면 그렇게 하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욥은 그렇게 고백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사람에게 마음을 두시고 사람이 무엇이기에 그렇게 감찰하고 계실까? 하나님의 부재와 인생의 고난 가운데서 이기고 견딜 수 있는 비결은 하나님의 능력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시작과 마지막을 하나님께서 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어떤 상황, 어떤 사건, 어떤 사람을 만나든지 하나님은 지금 이곳에서 최대의 사랑과 최고의 사랑과 최선의 방법으로 우리를 끌고 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기대면 하나님의 부재 가운데 있는 것 같은데 나를 가장 최고로 최대로 최선의 뜻으로 끌고 가신다는 하나님의 성품에 기대고 하나님을 쫓아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들을 바치라고 했을 때 몰렉의 제사 앞에서 그런 하나님 믿기 싫다고 했다면 여호와 이레라고 하는 하나님의 준비하심에 대한 신앙의 고백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성품을 바라봤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기대고 그 아들을 끌고 가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욥과 같은 소망의 기도를 드리기를 원합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사람에게 마음을 두시고 감찰하고 계십니까? 내가 누구이기에 나에게서 눈을 Ep지 않으시고 바라보고 계십니까? 하나님 아버지는 한 번도 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한 번도 내 손을 놓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한 번도 나를 저주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주님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5. 3. 8

히브리어 욥기 7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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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로 차바 레에노쉬 알 알레 아레츠 웨키메 사킬 야마우

개역개정,1 이 땅에 사는 인생에게 힘든 노동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그의 날이 품꾼의 날과 같지 아니하겠느냐

새번역,1 인생이 땅 위에서 산다는 것이, 고된 종살이와 다른 것이 무엇이냐? 그의 평생이 품꾼의 나날과 같지 않으냐?

우리말성경,1 “사람이 땅에서 사는 것이 고해가 아닌가? 그 삶이 품꾼의 삶과 다를 바가 무엇이겠는가?

가톨릭성경,1 인생은 땅 위에서 고역이요 그 나날은 날품팔이의 나날과 같지 않은가?

영어NIV,1 “Does not man have hard service on earth? Are not his days like those of a hired man?

영어NASB,1 “Is not man forced to labor on earth, And are not his days like the days of a hired man?

영어MSG,1 “Human life is a struggle, isn’t it? It’s a life sentence to hard labor.

영어NRSV,1 “Do not human beings have a hard service on earth, and are not their days like the days of a laborer?

헬라어구약Septuagint,1 ποτερον ουχι πειρατηριον εστιν ο βιος ανθρωπου επι της γης και ωσπερ μισθιου αυθημερινου η ζωη αυτου

라틴어Vulgate,1 militia est vita hominis super terram et sicut dies mercennarii dies eius

히브리어구약BHS,1 הֲלֹא־צָבָא לֶאֱנֹושׁ [כ= עַל] [ק= עֲלֵי]־אָרֶץ וְכִימֵי שָׂכִיר יָמָיו׃

성 경: [욥7:1]

주제1: [계속되는 욥의 답변(2)]

주제2: [인생의 허망함을 토로하는 욥]

󰃨 전쟁이 있지 아니하냐 – `전쟁’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차바'(*)는 `군대’,`전쟁’, `부역'(사 40:2)등의 뜻을 가진다. 본문은 군대에 지용된 자가 무거운 고역을 강제적으로 해야하듯 인간 역시 고역스러운 삶을 영위해 나가야 되지 않느냐는 의미이다. 한편 여기에서 욥은 인생 일반을 취급함으로써 자신의 현재 고통스런 삶의 정황을직접 드러내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그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인생 일반의 고통이라기 보다는 현재 자신의 고통의 심각성이라 할 수 있다. 즉 그의 현 상황은 군인이 강제적(의무적)으로 힘든 고역을 수행해야 하듯, 자신에게 주어진 재난(1:13-1 9)을 필연적으로 감당해야 했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욥의 현재 상황은 주인(하나님)에게고용되어 하루의 노동량(욥의 경우에 있어서는 이를 `재난’으로 볼 수 있겠다)을 묵묵히 감당해야만 하는 `품군'(본절 하반부)이나 다름 없었다.

케에베드 이쉬아프 첼 우케사키르 예카웨 파올로

개역개정,2 종은 저녁 그늘을 몹시 바라고 품꾼은 그의 삯을 기다리나니

새번역,2 저물기를 몹시 기다리는 종과도 같고, 수고한 삯을 애타게 바라는 품꾼과도 같다.

우리말성경,2 종이 땅거미 지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것같이, 품꾼이 하루 품삯을 애타게 기다리는 것같이

가톨릭성경,2 그늘을 애타게 바라는 종, 삯을 고대하는 품팔이꾼과 같지 않은가?

영어NIV,2 Like a slave longing for the evening shadows, or a hired man waiting eagerly for his wages,

영어NASB,2 “As a slave who pants for the shade, And as a hired man who eagerly waits for his wages,

영어MSG,2 Like field hands longing for quitting time and working stiffs with nothing to hope for but payday,

영어NRSV,2 Like a slave who longs for the shadow, and like laborers who look for their wages,

헬라어구약Septuagint,2 η ωσπερ θεραπων δεδοικως τον κυριον αυτου και τετευχως σκιας η ωσπερ μισθωτος αναμενων τον μισθον αυτου

라틴어Vulgate,2 sicut servus desiderat umbram et sicut mercennarius praestolatur finem operis sui

히브리어구약BHS,2 כְּעֶבֶד יִשְׁאַף־צֵל וּכְשָׂכִיר יְקַוֶּה פָעֳלֹו׃

성 경: [욥7:2]

주제1: [계속되는 욥의 답변(2)]

주제2: [인생의 허망함을 토로하는 욥]

󰃨 종은 저물기를 심히 기다리고 – 고대 히브리 사회에 있어서 품꾼의 노동 시간은 엄격히 규정되어 있지 않았다. 날이 밝거나 해가 뜰 때 일을 시작하여 해질 무렵에 그것을 끝냈다. 따라서 품꾼에게 있어서 해가 저무는 것은 단순히 일의 종결 시간을 뜻하는 것 이외에 고역스러운 노동에서 해방되어 안식과 평화가 시작되는 것을 알리는 것이기도 했다. 여기서 욥은 고난의 때가 속히 끝나기를 소망하는 자신의 심경을 노동시간이 속히 끝나기를 염원하는 품꾼의 심경에 비유하고 있다.

켄 혼할티 리 야르헤 솨웨 웨렐로트 아말 민누 리

개역개정,3 이와 같이 내가 여러 달째 고통을 받으니 고달픈 밤이 내게 작정되었구나

새번역,3 내가 바로 그렇게 여러 달을 허탈 속에 보냈다. 괴로운 밤은 꼬리를 물고 이어 갔다.

우리말성경,3 나도 몇 달 동안 허무한 일을 당하고 비참한 밤이 나를 위해 정해졌다네.

가톨릭성경,3 그렇게 나도 허망한 달들을 물려받고 고통의 밤들을 나누어 받았네.

영어NIV,3 so I have been allotted months of futility, and nights of misery have been assigned to me.

영어NASB,3 So am I allotted months of vanity, And nights of trouble are appointed me.

영어MSG,3 I’m given a life that meanders and goes nowhere– months of aimlessness, nights of misery!

영어NRSV,3 so I am allotted months of emptiness, and nights of misery are apportioned to me.

헬라어구약Septuagint,3 ουτως καγω υπεμεινα μηνας κενους νυκτες δε οδυνων δεδομεναι μοι εισιν

라틴어Vulgate,3 sic et ego habui menses vacuos et noctes laboriosas enumeravi mihi

히브리어구약BHS,3 כֵּן הָנְחַלְתִּי לִי יַרְחֵי־שָׁוְא וְלֵילֹות עָמָל מִנּוּ־לִי׃

성 경: [욥7:3]

주제1: [계속되는 욥의 답변(2)]

주제2: [인생의 허망함을 토로하는 욥]

󰃨 내가 여러 달째 곤고를 받으니 – 히브리 원문을 직역하면 `내가 공허한(무익한) 달들을 부여받았다'(NIV, I have been allotted months of futility)이다. 여기서 욥이 자신의 지난 날들을 `무익한’ 것으로 묘사한 이유는 고난을 타개하려는 그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재난이 자신에게 닥친 이후로 그것을 모면하기 위해 여러모로 노력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재산과 소유는 여전히 상실된 채로 있었으며 자손 또한 다시 낳을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육체의 질병은 더욱 가중되고(5절), 설상가상으로 믿었던 친구들과의 관계마저 갈등을 겪게 되었다. 따라서 욥은 이제 절망의 벽에 부딪혀 지나간 날들이 마치 열매없는 무용지물과 다름없었음을 토로하고 있다.

임 솨캅티 웨아말티 마타이 아쿰 우믿다드 아레브 웨사바티 네두딤 아데이 나쉐프

개역개정,4 내가 누울 때면 말하기를 언제나 일어날까, 언제나 밤이 갈까 하며 새벽까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는구나

새번역,4 눕기만 하면, 언제 깰까, 언제 날이 샐까 마음 졸이며, 새벽까지 내내 뒤척거렸구나.

우리말성경,4 내가 누울 때 ‘내가 언제나 일어날까? 밤이 언제 끝날까?’ 하지만 새벽까지 이리저리 뒤척인다네.

가톨릭성경,4 누우면 ‘ 언제나 일어나려나?’ 생각하지만 저녁은 깊어 가고 새벽까지 뒤척거리기만 한다네.

영어NIV,4 When I lie down I think, ‘How long before I get up?’ The night drags on, and I toss till dawn.

영어NASB,4 “When I lie down I say, ‘When shall I arise?’ But the night continues, And I am continually tossing until dawn.

영어MSG,4 I go to bed and think, ‘How long till I can get up?’ I toss and turn as the night drags on–and I’m fed up!

영어NRSV,4 When I lie down I say, ‘When shall I rise?’ But the night is long, and I am full of tossing until dawn.

헬라어구약Septuagint,4 εαν κοιμηθω λεγω ποτε ημερα ως δ’ αν αναστω παλιν ποτε εσπερα πληρης δε γινομαι οδυνων απο εσπερας εως πρωι

라틴어Vulgate,4 si dormiero dico quando consurgam et rursum expectabo vesperam et replebor doloribus usque ad tenebras

히브리어구약BHS,4 אִם־שָׁכַבְתִּי וְאָמַרְתִּי מָתַי אָקוּם וּמִדַּד־עָרֶב וְשָׂבַעְתִּי נְדֻדִים עֲדֵי־נָשֶׁף׃

성 경: [욥7:4]

주제1: [계속되는 욥의 답변(2)]

주제2: [인생의 허망함을 토로하는 욥]

전신에 퍼진 피부병(2:7,8)으로 인해 전전반측(轉轉反側)하는 욥의 참담한 심경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밤은 휴식과 평안의 시간이요, 잠은 하루 동안의 피로와 고통을 풀어주는 묘약(妙藥)이다. 욥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시간들이 여느 사람보다 더욱 필요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대부분의 낮 시간 동안에 친구들과 변론함으로써 심신이 지쳐 있었을 것이며, 또한 추한 몰골을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 속히 밤이 오기만을 기다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밤은 더 큰 형극의 시간이었다. 여느 병과 마찬가지로 그의 몸의 질병은 밤에 더욱 기승을 부렸기 때문이다(13-15절). 이러한 육체적 고통 이외에도 욥은 자신이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지 않나하는 영적 회의와 갈등 때문에도 불면의 밤을 보내야 했을 것이다.

라바쉬 베사리 림마 웨기쉬 웨구쉬 아팔 오리 라가 와임마에스

개역개정,5 내 살에는 구더기와 흙 덩이가 의복처럼 입혀졌고 내 피부는 굳어졌다가 터지는구나

새번역,5 내 몸은 온통 구더기와 먼지로 뒤덮였구나. 피부는 아물었다가도 터져 버리는구나.

우리말성경,5 내 몸은 벌레와 흙먼지로 옷 입었고 내 살은 곪아 터졌다네.

가톨릭성경,5 내 살은 구더기와 흙먼지로 뒤덮이고 내 살갗은 갈라지고 곪아 흐른다네.

영어NIV,5 My body is clothed with worms and scabs, my skin is broken and festering.

영어NASB,5 “My flesh is clothed with worms and a crust of dirt; My skin hardens and runs.

영어MSG,5 I’m covered with maggots and scabs. My skin gets scaly and hard, then oozes with pus.

영어NRSV,5 My flesh is clothed with worms and dirt; my skin hardens, then breaks out again.

헬라어구약Septuagint,5 φυρεται δε μου το σωμα εν σαπρια σκωληκων τηκω δε βωλακας γης απο ιχωρος ξυων

라틴어Vulgate,5 induta est caro mea putredine et sordibus pulveris cutis mea aruit et contracta est

히브리어구약BHS,5 לָבַשׁ בְּשָׂרִי רִמָּה [כ= וְגִישׁ] [ק= וְגוּשׁ] עָפָר עֹורִי רָגַע וַיִּמָּאֵס׃

성 경: [욥7:5]

주제1: [계속되는 욥의 답변(2)]

주제2: [인생의 허망함을 토로하는 욥]

󰃨 내 살에는 구더기와 흙 조각이 의복처럼 입혔고 – 여기서 `구더기'(*, 라마)는 흰 색의 길고 미끄러운 형태의 벌레로서(Quain’s, Dictionar of Medicine, vol. 1,p.512), 욥의 피부가 곪은 데에서 기생한 것으로 추측된다(17;14). 그리고 `흙 조각’은 (1) `때'(공동번역), (2) `피부로부터 나오는 흙덩이'(Keil & Delitzsch), (3)`먼지'(KJV, dust ; RSV, dirt), (4) `상처의 딱지'(NIV, scabs ; Lange, `굳어진 꺼풀’)등 다양하게 해석된다. 여기서는 기와 조각으로 긁고(2:8), 종기가 나서 지저분하게된 욥의 몸을 비유한 것으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한편 본문의 묘사에 근거해 볼때 욥의 질병의 상태가 상당히 악화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 내 가죽은 합창되었다가 터지는 구나 – 이는 욥의 피부가 어느 정도 아물었다가(RSV, hardens) 다시 터지는 것을 가리킨다. 욥은 자신의 몸에 피부병이 발병한 이래로 여러 달이 흐르는 동안(3절) 이러한 과정을 여러 차례 거쳤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본문을 원문에 따라 정확히 번역하면 `나의 살갗이 깨어진다. 그리고 곪는다’ 인데,이것 역시 종기가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곪아 터지고 그 위에 새 살이 돋아나는 피부병의 일반적 증상을 가리킨다.

야마이 칼루 민니 아레그 와이크루 베에페스 티크와

개역개정,6 나의 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니 희망 없이 보내는구나

새번역,6 내 날이 베틀의 북보다 빠르게 지나가니, 아무런 소망도 없이 종말을 맞는구나.

우리말성경,6 내 인생이 베틀의 북보다 빠르게 지나가니 소망도 없이 끝나고 마나 보네.

가톨릭성경,6 나의 나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게 희망도 없이 사라져 가는구려.

영어NIV,6 “My days are swifter than a weaver’s shuttle, and they come to an end without hope.

영어NASB,6 “My days are swifter than a weaver’s shuttle, And come to an end wiYout hope.

영어MSG,6 My days come and go swifter than the click of knitting needles, and then the yarn runs out–an unfinished life!

영어NRSV,6 My days are swifter than a weaver’s shuttle, and come to their end without hope.

헬라어구약Septuagint,6 ο δε βιος μου εστιν ελαφροτερος λαλιας απολωλεν δε εν κενη ελπιδι

라틴어Vulgate,6 dies mei velocius transierunt quam a texente tela succiditur et consumpti sunt absque ulla spe

히브리어구약BHS,6 יָמַי קַלּוּ מִנִּי־אָרֶג וַיִּכְלוּ בְּאֶפֶס תִּקְוָה׃

성 경: [욥7:6]

주제1: [계속되는 욥의 답변(2)]

주제2: [인생의 허망함을 토로하는 욥]

󰃨 베틀의 북 – 원문을 직역하면 `베틀짜는 사람의 북'(KJV, NIV, RSV, a weaver’s s-huttle)이다. 이것은 베를 직조할 때 실을 엮는 틀로서 대단히 빠르게 좌우로 움직인다. 이는 찰나(刹那)같은 인생의 덧없음을 비유한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욥의 고백은 4절의 말과 상충되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4절에서 욥은 자신의 날이 더디 간다고 토로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병중에 있는 자들은 그 기간을 매우 길게 느끼기 마련이다. 따라서 본절은 세월의 빠름에 그 초점이 있기 보다는 그 덧없음(허무)에 초점을 맞추고 해석하여야 한다. 즉, 본절에서 욥은 아무런 성과(회복)없이 보낸지난 몇달(3절)이 자신에게는 전혀 희망을 주지 못하는 절망과 무가치의 시간이었음을 나타내고 있다(본절 하반부).

제콜 키 루아흐 하야이 로 타슙 에니 릴오트 토브

개역개정,7 내 생명이 한낱 바람 같음을 생각하옵소서 나의 눈이 다시는 행복을 보지 못하리이다

새번역,7 내 생명이 한낱 바람임을 기억하여 주십시오. 내가 다시는 좋은 세월을 못 볼 것입니다.

우리말성경,7 내 인생이 바람임을 기억해 주십시오. 내 눈이 다시는 좋은 것을 보지 못할 것 같습니다.

가톨릭성경,7 기억해 주십시오, 제 목숨이 한낱 입김일 뿐임을. 제 눈은 더 이상 행복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영어NIV,7 Remember, O God, that my life is but a breath; my eyes will never see happiness again.

영어NASB,7 “Remember that my life is but breath, My eye will not again see good.

영어MSG,7 “God, don’t forget that I’m only a puff of air! These eyes have had their last look at goodness.

영어NRSV,7 “Remember that my life is a breath; my eye will never again see good.

헬라어구약Septuagint,7 μνησθητι ουν οτι πνευμα μου η ζωη και ουκετι επανελευσεται ο οφθαλμος μου ιδειν αγαθον

라틴어Vulgate,7 memento quia ventus est vita mea et non revertetur oculus meus ut videat bona

히브리어구약BHS,7 זְכֹר כִּי־רוּחַ חַיָּי לֹא־תָשׁוּב עֵינִי לִרְאֹות טֹוב׃

성 경: [욥7:7]

주제1: [계속되는 욥의 답변(2)]

주제2: [인생의 허망함을 토로하는 욥]

󰃨 내 생명이 한 호흡 같음을 생각하옵소서 – `호흡’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루아흐'(*)는 `바람'(KJV, wind) `공기’, `영’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짧은 기간을 상징함과 아울러 허무와 덧없음을 의미한다(시 78:39; 전 1:14; 사 41:29; 렘 5:13). 아마 욥은 자기 병이 치유 불가능하다고 예견했을 것이며, 따라서 죽음만이 그것을 모면하는 유일한 방책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한편, 본절에서부터 욥의 변론의 분위기가 전환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즉, 6:1-7:6까지의 욥의 변론은 엘리바스와 그 친구들을 상대로 한 것이었으나 본절에서 부터는 하나님을 향하고 있다. 그리고 전자가 대화(dialogue)형식이었다면 후자는 독백(soliloquy) 형식을 띠고 있다.

󰃨 복된 것 – 좁게는 (1) 그의 질병이 완치되는 것(2:8, 9)을, 넓게는 (2) 그의 건강, 소유(1:3), 자손(1:2) 등이 이전 상태로 회복되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것은 5장에서 엘리바스가 욥에게 약속한 축복(5:17-27)과 동일하다. 그러나 욥의 현재 상황은그 같은 축복을 회복할 가능성이 전무(全無)하였다. 이로써 욥은 끝없는 절망의 심연에 빠지게 되었다.

로 테슈레니 에인 로이 에네카 비 웨에넨니

개역개정,8 나를 본 자의 눈이 다시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고 주의 눈이 나를 향하실지라도 내가 있지 아니하리이다

새번역,8 어느 누구도 다시는 나를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눈을 뜨고 나를 찾으려고 하셔도 나는 이미 없어졌을 것입니다.

우리말성경,8 지금 나를 보는 눈이 더는 나를 못 보고 주의 눈이 나를 찾아도 내가 더는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가톨릭성경,8 저를 바라보던 이의 눈은 저를 보지 못하고 당신의 눈이 저를 찾는다 하여도 저는 이미 없을 것입니다.

영어NIV,8 The eye that now sees me will see me no longer; you will look for me, but I will be no more.

영어NASB,8 “The eye of him who sees me will behold me no more; Your eyes will be on me, but I will not be.

영어MSG,8 And your eyes have seen the last of me; even while you’re looking, there’ll be nothing left to look at.

영어NRSV,8 The eye that beholds me will see me no more; while your eyes are upon me, I shall be gone.

헬라어구약Septuagint,8 ου περιβλεψεται με οφθαλμος ορωντος με οι οφθαλμοι σου εν εμοι και ουκετι ειμι

라틴어Vulgate,8 nec aspiciet me visus hominis oculi tui in me et non subsistam

히브리어구약BHS,8 לֹא־תְשׁוּרֵנִי עֵין רֹאִי עֵינֶיךָ בִּי וְאֵינֶנִּי׃

성 경: [욥7:8]

주제1: [계속되는 욥의 답변(2)]

주제2: [인생의 허망함을 토로하는 욥]

󰃨 나를 본 자 – 원문을 정확하게 옮기면 `지금 나를 보는 자'(NIV, (the eye) that now see me)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나를 보아왔던 자'(KJV, him that hath seen me)로 번역하는 것이 전후 문맥에 훨씬 더 잘 어울린다. 전자의 견해를 취할 경우 본문은 욥을 위로하러 온 친구들을 가리키며, 후자의 견해를 따를 경우는 지금까지 욥을 알고 지내왔던 모든 사람들을 지칭한다.

󰃨 주의 눈이 나를 향하실지라도 내가 있지 아니하리이다 – 전절(前節)에서 욥은 친구들과의 사별(死別)을 토로한데 이어, 여기에서는 하나님과의 단절을 토로하고 있다. 즉, 욥은 죽음이 현세에 있어서 인간관계의 단절 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제도 종결시키는 것으로 보았다. 이런 측면에서 그는 죽음을 모든 것을 종결시키는 것으로 이해하였던 것 같다. 한편 우리는 본문을 `죽음의 종결성’이란 측면에서만 살필 것이 아니라 `구원에 대한 욥의 갈망’이란 차원에서도 살펴보아야 한다. 즉, 욥은 자신에게 재난이 닥친 이후로 줄곧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해 왔다. 이러한 그의 염원은 “내가 친히 그(하나님)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급하구나”(19:27)라는 고백 속에 여실히 드러난다. 그런데 현재 욥의 상황은 이러한 그의심적 염원 상태와 정반대로 전개되어 구원의 여하한 가능성 조차 상실되어 가고 있다. 육체적 질고가 악화되어 가는 것과 동시에 하나님께 대한 신뢰도 희박해져 간다. 즉, 현재 욥은 영적.육적 생명의 위급함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칼라 아난 와예랔 켄 요레드 쉐올 로 야알레

개역개정,9 구름이 사라져 없어짐 같이 스올로 내려가는 자는 다시 올라오지 못할 것이오니

새번역,9 구름이 사라지면 자취도 없는 것처럼, ㉠스올로 내려가는 사람도 그와 같아서, 다시는 올라올 수 없습니다. / ㉠또는 ‘무덤’ 또는 ‘죽음’

우리말성경,9 구름이 사라져 없어지듯이 무덤으로 내려가는 자는 돌아오지 않는 법입니다.

가톨릭성경,9 구름이 사라져 가 버리듯 저승으로 내려간 이는 올라오지 못합니다.

영어NIV,9 As a cloud vanishes and is gone, so he who goes down to the grave does not return.

영어NASB,9 “When a cloud vanishes, it is gone, So he who goes down to Sheol does not come up.

영어MSG,9 When a cloud evaporates, it’s gone for good; those who go to the grave never come back.

영어NRSV,9 As the cloud fades and vanishes, so those who go down to Sheol do not come up;

헬라어구약Septuagint,9 ωσπερ νεφος αποκαθαρθεν απ’ ουρανου εαν γαρ ανθρωπος καταβη εις αδην ουκετι μη αναβη

라틴어Vulgate,9 sicut consumitur nubes et pertransit sic qui descenderit ad inferos non ascendet

히브리어구약BHS,9 כָּלָה עָןָן וַיֵּלַךְ כֵּן יֹורֵד שְׁאֹול לֹא יַעֲלֶה׃

성 경: [욥7:9]

주제1: [계속되는 욥의 답변(2)]

주제2: [인생의 허망함을 토로하는 욥]

󰃨 음부로 내려가는 자는 다시 올라오지 못할 것이오니 – `음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쉐올'(*)은 `비었다’, `깊다’를 의미하는 동사 `솨알'(*)에서 유래하였다. 고대 히브리인들은 `음부’를 죽은 자의 영혼이 내려가는 어두운 지하 세계로 인식했던 것 같다(창 37:35; 민 16:30, 33; 시 55:15; 사 5:14). 그런데 본절에 기초해 볼 때 욥이 음부 세계에 관해 어떤 관념을 가졌는지 정확히 추측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본서는 그 분류상 시가 문학(詩歌文學)에 속하며, 따라서 죽음과음부 세계에 대한 욥의 묘사 역시 교리적 성격보다는 시적.비유적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서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죽은 자의 영혼은 음부에서 지속, 고정되며 현세로 되돌아오거나 다른 세계로 이동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죽음과 음부 세계에 대한 욥의 이러한 관념은 죽은 이후에도 영혼이 지속된다고 믿은 고대 팔레스틴, 특히 애굽인들의 내세관과도 밀접히 연관된다. 그러나 그들이 죽은 자의 영혼이 현세를 왕래한다고 믿은 반면, 욥은 이 양자(兩者)사이의 단절성을 믿었다는 측면에서 그의 내세관은 이방의 그것과 구별되며, 신약의 내세관의 한 토대를 형성했다 하겠다(마18:9; 눅 16:19-31; 계 20:10).

로 야슈브 오드 레베토 웨로 얔키렌누 오드 메코모

개역개정,10 그는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겠고 자기 처소도 다시 그를 알지 못하리이다

새번역,10 그는 자기 집으로 다시 돌아오지도 못할 것이고, 그가 살던 곳에서도 그를 몰라볼 것입니다.

우리말성경,10 그가 다시는 자기 집에 돌아오지 못하고 그가 있던 자리도 더는 그를 알지 못할 것입니다.

가톨릭성경,10 다시는 제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가 있던 자리도 그를 다시는 알아보지 못합니다.

영어NIV,10 He will never come to his house again; his place will know him no more.

영어NASB,10 “He will not return again to his house, Nor will his place know him anymore.

영어MSG,10 They don’t return to visit their families; never again will friends drop in for coffee.

영어NRSV,10 they return no more to their houses, nor do their places know them any more.

헬라어구약Septuagint,10 ουδ’ ου μη επιστρεψη ετι εις τον ιδιον οικον ουδε μη επιγνω αυτον ετι ο τοπος αυτου

라틴어Vulgate,10 nec revertetur ultra in domum suam neque cognoscet eum amplius locus eius

히브리어구약BHS,10 לֹא־יָשׁוּב עֹוד לְבֵיתֹו וְלֹא־יַכִּירֶנּוּ עֹוד מְקֹמֹו׃

성 경: [욥7:10]

주제1: [계속되는 욥의 답변(2)]

주제2: [인생의 허망함을 토로하는 욥]

󰃨 자기 처소도 다시 그를 알지 못하리이다 – 음부 세계와 현세와의 단절성을 의인법적 표현을 통해 묘사하고 있다(8절 주석 참조). 고대 팔레스틴인들은 죽은 자의 영혼이 생전에 그가 살던 집이나 아끼던 물건에 도로 돌아온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애굽인들은 영혼이 육체에 돌아온다고 믿었다. 그들이 미이라를 만들어 무덤속에 보관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욥은 이방 세계에 살았으나 그들의 이 같은 종말관과는 뚜렷이 구분되는 관념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감 아니 로 에헤사크 피 아답베라 베차르 루히 아시하 베마르 나프쉬

개역개정,11 그런즉 내가 내 입을 금하지 아니하고 내 영혼의 아픔 때문에 말하며 내 마음의 괴로움 때문에 불평하리이다

새번역,11 그러나 나는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습니다. 분하고 괴로워서, 말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습니다.

우리말성경,11 그러므로 내가 입을 다물지 못하겠습니다. 내 영이 이렇게 고통을 받으면서 말하고 내 영혼이 이렇게 쓰라려 하면서 원망할 것입니다.

가톨릭성경,11 그래서 이 몸은 입을 다물지 않겠습니다. 제 영의 곤경 속에서 토로하고 제 영혼의 쓰라림 속에서 탄식하겠습니다.

영어NIV,11 “Therefore I will not keep silent; I will speak out in the anguish of my spirit, I will complain in the bitterness of my soul.

영어NASB,11 “Therefore, I will not restrain my mouth; I will speak in the anguish of my spirit, I will complain in the bitterness of my soul.

영어MSG,11 “And so I’m not keeping one bit of this quiet, I’m laying it all out on the table; my complaining to high heaven is bitter, but honest.

영어NRSV,11 “Therefore I will not restrain my mouth; I will speak in the anguish of my spirit; I will complain in the bitterness of my soul.

헬라어구약Septuagint,11 αταρ ουν ουδε εγω φεισομαι τω στοματι μου λαλησω εν αναγκη ων ανοιξω πικριαν ψυχης μου συνεχομενος

라틴어Vulgate,11 quapropter et ego non parcam ori meo loquar in tribulatione spiritus mei confabulabor cum amaritudine animae meae

히브리어구약BHS,11 גַּם־אֲנִי לֹא אֶחֱשָׂךְ פִּי אֲדַבְּרָה בְּצַר רוּחִי אָשִׂיחָה בְּמַר נַפְשִׁי׃

성 경: [욥7:11]

주제1: [계속되는 욥의 답변(2)]

주제2: [하나님께 호소하는 욥]

󰃨 내 입을 금하지 아니하고…말하며…원망하리이다 – 본문은 앞으로 전개될 욥의 변론(불평)에 대한 서론격으로서, 욥이 현재 겪고 있는 고난의 심각성으로 인해 심중(心中)에 있는 불만을 기탄없이 하나님께 털어놓겠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욥의 연설(演說)은 얼핏 보기에 매우 경거 망동(輕擧妄動)한 것처럼 보인다. 특히, 본절 이하에서 전개되는 욥의 하나님께 대한 질문에는 이러한 인상이 더욱 짙게 풍긴다. 그러나 면밀히 살펴보면 욥의 이러한 언사(言辭)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주권과 유일성, 그리고 인격성에 대한 확고한 신뢰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욥은 자신에게 재난을 주셨던 분이 하나님이었듯이 그것을 거두어 줄 수 있는 분도 오직 하나님 한 분뿐임을 인식했으며(하나님의 주권), 또한 그분을 고난에 처한 인간(욥)의 소리를 들어 주시는 분으로 확신했던 것이다(하나님의 인격성). 만일 이러한 확신이 없었다면 욥은 고난 중에 차라리 영원히 침묵해 버렸거나 아니면 자살 등의 방법으로 고난을 종결시켜 버렸을런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욥의 말들을 고통에 대한 불평과 비난만으로 볼 것이 아니라 고난에 처한 한 인간의 신앙적 갈등의 토로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하얌 아니 임 탄닌 키 타심 알라이 미쉬마르

개역개정,12 내가 바다니이까 바다 괴물이니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나를 지키시나이까

새번역,12 내가 ㉡바다 괴물이라도 됩니까? 내가 깊은 곳에 사는 ㉢괴물이라도 됩니까? 어찌하여 주님께서는 나를 감시하십니까? / ㉡히, ‘얌’ ㉢히, ‘타닌’

우리말성경,12 내가 바다입니까, 아니면 바다의 괴물입니까? 주께서 왜 나를 감시하십니까?

가톨릭성경,12 제가 바다입니까? 제가 용입니까? 당신께서 저에게 파수꾼을 세우시다니.

영어NIV,12 Am I the sea, or the monster of the deep, that you put me under guard?

영어NASB,12 “Am I the sea, or the sea monster, That You set a guard over me?

영어MSG,12 Are you going to put a muzzle on me, the way you quiet the sea and still the storm?

영어NRSV,12 Am I the Sea, or the Dragon, that you set a guard over me?

헬라어구약Septuagint,12 ποτερον θαλασσα ειμι η δρακων οτι κατεταξας επ’ εμε φυλακην

라틴어Vulgate,12 numquid mare sum ego aut cetus quia circumdedisti me carcere

히브리어구약BHS,12 הֲיָם־אָנִי אִם־תַּנִּין כִּי־תָשִׂים עָלַי מִשְׁמָר׃

성 경: [욥7:12]

주제1: [계속되는 욥의 답변(2)]

주제2: [하나님께 호소하는 욥]

󰃨 내가 바다니이까 – 어떤 학자는(Delitzsch, Hirzel) 본문의 `바다'(*, 얌)를 나일강으로 보기도 한다. 그 증거는 사 19:5에 쓰인 히브리어 `얌’이 나일 강을 가리키는 것으로 단정지어 해석할 필요는 없다. 다만 팔레스틴 지역에서 흔히 발견되는 큰 강(예를 들면, 티그리스 강, 유프라테스 강, 나일 강 등)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관개 시설이 발전되지 않은 고대 사회에서 이들 강들은 우기(雨期)때에 삽시간에 흘러 넘쳐 주변 지역에 막대한 손실을 주었다. 특히, 상류 지역에 홍수가 날때에는 강바닥이 패이고 강둑이 유실되기까지 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우천시에 특별한 신경을 써서 강 수의(首位)를 관찰하고 그에 따른 대비책을 강구해야 했다. 이처럼 흉용하고 격랑하는 바다를 지켜보는 것같이 욥은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一擧手一投足)이 하나님으로부터 감찰 받고 있다는 사실을 토로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감찰(보호)이 도리어 현재의 욥에게 있어서는 부당한 처사로 여겨졌다. 왜냐하면 첫째, 그는 `바다’와 같이 취급될 만한 하등의 잘못이 없었기 때문이다. 즉, 강물이 흘러 넘쳐 인명과 재산에 손실을 주는 것과 같은 죄악을 저지르지 않았다. 도리어 그는 하나님과(1:1, 8) 사람 앞에서(4:3, 4) 공의와 선행을 실천하였다. 둘째, 그는 바다와 같이 거칠고 제어할 수 없는 성향(性向)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의인(1:1)이었으며, 더구나 바다와는 구별되는 이성적 피조물이었다. 이상의사실에 비추어 볼 때 본절에서 욥은 (1)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만한 죄악을 저지르지 않았으며(자기의 주장), (2) 따라서 현재 자기에게 가해지는 하나님의 행위는 부당하며(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의심), (3) 자신은 그 같은 행위(재난)를 흔쾌히 수납(受納)하거나 끝까지 인내할 수 없다는 심경을 나타내고 있다 하겠다.

󰃨 용이니이까 – 여기서 용은 (1) `고래'(KJV, a whale), (2) `심연의 괴물'(NIV, themonster of the deep), (3) `악어'(Delitzsch), (4) `용'(Lange), (5) `큰 짐승'(박윤선) 등 다양하게 해석된다. 이중 어느 것이 정확하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용’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타닌'(*)이 `뱀'(출 7:9, 10, 12; 신 32:33; 시91:13), `큰 물고기'(창 1:21), `악어'(겔 29:3; 32:2), `용'(사 27:1; 51:9; 렘 51:34) 등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용은 전절에 나타난 `바다’와 마찬가지로 그 성질이 난폭하고 거세어 인간이 제어하기 힘든 바다의 큰 생물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할 듯하다. 욥은 어부(漁夫)가 큰 바다 괴물을 잡을때 그 시선을 집중하며, 때로는 매로 때리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자신을 너무 혹독하게(또는 부당하게)다루고 있다고 항변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항변 속에서도 욥은 여전히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지키시며 삶을 주관하고 계심을 확신하고 있다.

키 아말티 테나하메니 아르시 잇사 베시히 미쉐카비

개역개정,13 혹시 내가 말하기를 내 잠자리가 나를 위로하고 내 침상이 내 수심을 풀리라 할 때에

새번역,13 잠자리에라도 들면 편해지겠지, 깊이 잠이라도 들면 고통이 덜하겠지 하고 생각합니다만,

우리말성경,13 내가 내 침대가 나를 편하게 해 주겠지, 내 보금자리가 내 원망을 받아 주겠지 하면

가톨릭성경,13 ‘ 잠자리나마 나를 위로하고 침상이나마 내 탄식을 덜어 주겠지.’ 생각하지만

영어NIV,13 When I think my bed will comfort me and my couch will ease my complaint,

영어NASB,13 “If I say, ‘My bed will comfort me, My couch will ease my complaint,’

영어MSG,13 If I say, ‘I’m going to bed, then I’ll feel better. A little nap will lift my spirits,’

영어NRSV,13 When I say, ‘My bed will comfort me, my couch will ease my complaint,’

헬라어구약Septuagint,13 ειπα οτι παρακαλεσει με η κλινη μου ανοισω δε προς εμαυτον ιδια λογον τη κοιτη μου

라틴어Vulgate,13 si dixero consolabitur me lectulus meus et relevabor loquens mecum in strato meo

히브리어구약BHS,13 כִּי־אָמַרְתִּי תְּנַחֲמֵנִי עַרְשִׂי יִשָּׂא בְשִׂיחִי מִשְׁכָּבִי׃

성 경: [욥7:13]

주제1: [계속되는 욥의 답변(2)]

주제2: [하나님께 호소하는 욥]

󰃨 내 자리가 나를 위로하고 내 침상이 내 수심을 풀리라 할 때 – 극난(極難)한 고통 중에 잠시나마 평안과 위로를 받고자 염원하는 욥의 심경이 의인법적 표현을 통해 드러나 있다. 그의 병은 발병(發病)한 지 이미 수개월이 지났다(3절). 이 기간 동안 욥은 병이 회복되기를 간절히 소원하였다. 그러나 병이 회복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낮에는 자신의 추한 모습을 세인(世人)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 속히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밤 역시 그가 갈구하던 평안을 가져다 주지 못했다. 도리어 전신에 퍼진 피부병이 밤중에 발작(發作)을 더 심하게 일으켜 그는 속히 날이 새기를 기다려야 할 형편이 되었다(4절). 어느 한 순간에도 영육의 평안을 갖지 못했다는 욥의 고백속에서 그가 겪은 고통의 실상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웨힡타타니 바할로모트 우메헤제요노트 테바아탄니

개역개정,14 주께서 꿈으로 나를 놀라게 하시고 환상으로 나를 두렵게 하시나이다

새번역,14 주님께서는 악몽으로 나를 놀라게 하시고, 무서운 환상으로 저를 떨게 하십니다.

우리말성경,14 주께서는 꿈속에서 두렵게 하시고 환상으로 무섭게 하십니다.

가톨릭성경,14 당신께서는 꿈으로 저를 공포에 떨게 하시고 환시로 저를 소스라치게 하십니다.

영어NIV,14 even then you frighten me with dreams and terrify me with visions,

영어NASB,14 Then You frighten me with dreams And terrify me by visions;

영어MSG,14 You come and so scare me with nightmares and frighten me with ghosts

영어NRSV,14 then you scare me with dreams and terrify me with visions,

헬라어구약Septuagint,14 εκφοβεις με ενυπνιοις και εν οραμασιν με καταπλησσεις

라틴어Vulgate,14 terrebis me per somnia et per visiones horrore concuties

히브리어구약BHS,14 וְחִתַּתַּנִי בַחֲלֹמֹות וּמֵחֶזְיֹנֹות תְּבַעֲתַנִּי׃

성 경: [욥7:14]

주제1: [계속되는 욥의 답변(2)]

주제2: [하나님께 호소하는 욥]

심신의 질곡에 빠진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수면과 평안이다. 욥 역시 이러한 것을 얻기 위해 잠자리에 들었다(13절). 그러나 그가 얻은 것은 단잠과 휴식이 아닌 불쾌하고 무서운 꿈이었다. 혹자는 본문에 나타난 `꿈’과 `이상’을 사단의 역사(役事)로 주어진 것으로 해석한다(Adam Clarke). 사단이 욥을 칠 수 있는 전권(全權)을 하나님께로 부여받았다(1:12; 2:6)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이 해석이 전혀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욥의 병고(病苦)로 인한 자연스런 현상(후유증)으로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심각한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 특히 정신적 갈등을 동반하는 병자에게는 악몽(惡夢)과 환영(幻影)이 자주 보여지기 때문이다. 어쨌든 욥은 병중에서 안식과 평안을 취하기 위해 잠을 청했으나 도리어 악몽으로 인해 불면의 밤을 보내야 했던 것이다.

와티베할 마하나크 나프쉬 마웨트 메아츠모타이

개역개정,15 이러므로 내 마음이 뼈를 깎는 고통을 겪느니 차라리 숨이 막히는 것과 죽는 것을 택하리이다

새번역,15 차라리 숨이라도 막혀 버리면 좋겠습니다. 뼈만 앙상하게 살아 있기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우리말성경,15 내가 질식되기를 바라며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싶습니다.

가톨릭성경,15 제 영혼은 이런 고통보다는 숨이 막혀 버리기를,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습니다.

영어NIV,15 so that I prefer strangling and death, rather than this body of mine.

영어NASB,15 So that my soul would choose suffocation, Death rather than my pains.

영어MSG,15 That I’d rather strangle in the bedclothes than face this kind of life any longer.

영어NRSV,15 so that I would choose strangling and death rather than this body.

헬라어구약Septuagint,15 απαλλαξεις απο πνευματος μου την ψυχην μου απο δε θανατου τα οστα μου

라틴어Vulgate,15 quam ob rem elegit suspendium anima mea et mortem ossa mea

히브리어구약BHS,15 וַתִּבְחַר מַחֲנָק נַפְשִׁי מָוֶת מֵעַצְמֹותָי׃

성 경: [욥7:15]

주제1: [계속되는 욥의 답변(2)]

주제2: [하나님께 호소하는 욥]

󰃨 뼈보다도 죽는 것이 나으니이다 – 성경에서 `뼈’는 인간의 육체적 생명을 가리킬때 주로 사용되었다. 그 실례로 아담이 하와를 `뼈 중의 뼈'(창 2:23)로, 라반이 야곱을 `나의 골육'(창 29:14)으로 언급한 것을 들 수 있다(삼하 5:1; 사 38:13 등). 그런데 본절에서는 욥이 오랜 질병으로 말미암아 몹시 수척해진 상태를 비유한 것이다.

마아스티 로 레올람 에흐예 하달 밈멘니 키 헤벨 야마이

개역개정,16 내가 생명을 싫어하고 영원히 살기를 원하지 아니하오니 나를 놓으소서 내 날은 헛 것이니이다

새번역,16 나는 이제 사는 것이 지겹습니다. 영원히 살 것도 아닌데, 제발, 나를 혼자 있게 내버려 두십시오. 내 나날이 허무할 따름입니다.

우리말성경,16 나는 사는 게 싫습니다. 영원히 살 것도 아닌데 나를 혼자 내버려 두소서. 내 인생이 허무하기 짝이 없습니다.

가톨릭성경,16 저는 싫습니다. 제가 영원히 살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저를 내버려 두십시오. 제가 살날은 한낱 입김일 뿐입니다.

영어NIV,16 I despise my life; I would not live forever. Let me alone; my days have no meaning.

영어NASB,16 “I waste away; I will not live forever. Leave me alone, for my days are but a breath.

영어MSG,16 I hate this life! Who needs any more of this? Let me alone! There’s nothing to my life–it’s nothing but smoke.

영어NRSV,16 I loathe my life; I would not live forever. Let me alone, for my days are a breath.

헬라어구약Septuagint,16 ου γαρ εις τον αιωνα ζησομαι ινα μακροθυμησω αποστα απ’ εμου κενος γαρ μου ο βιος

라틴어Vulgate,16 desperavi nequaquam ultra iam vivam parce mihi nihil enim sunt dies mei

히브리어구약BHS,16 מָאַסְתִּי לֹא־לְעֹלָם אֶחְיֶה חֲדַל מִמֶּנִּי כִּי־הֶבֶל יָמָי׃

성 경: [욥7:16]

주제1: [계속되는 욥의 답변(2)]

주제2: [하나님께 호소하는 욥]

󰃨 내가 생명을 싫어하고 – 여기서 `생명’은 문자적으로 `목숨’, `삶’을 의미하기도 하며, 동시에 현재 처한 욥의 상황을 비유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처럼 욥이 자신의 생명(삶)을 혐오한 것은 (1) 질병의 악화(5절), (2) 정신적(신앙적) 고통의 심화(13-15절), (3) 회복의 가능성 전무(全無)(7,8절) 등이 그 원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듯 욥이 강력하게 삶을 저주하고 죽음을 희구한 것은 역설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구원을 간구하는 욥의 고투를 반증한다고 볼 수 있다.

󰃨 나를 놓으소서 – 절망의 한계 상황에 빠져 있으면서도 원초적 신앙을 견고히 고수하고 있는 욥의 자세를 드러내 주는 표현이다. 즉, 욥은 자신의 현재 고난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았으며, 따라서 그것을 탈출할 수 있는 방도는 오직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확신했다. 다시 말하자면 욥에게 삶(축복)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었듯이, 그에게 죽음을 허락할 수 있는 분도 역시 하나님이심을 확신했던 것이다. 이는 욥이 생사(生死)의 주관자로서의 하나님의 주권을 철저히 인정했음을 드러내 준다. 이 같은 욥의 신앙은 일찍이 그가 사단의 시련을 받았을 때부터 피력되었으며(1:21), 그의 질병이 진행되는 과정 중에서도 보여졌었다(6:4). 이처럼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손길이 자신을 감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야 말로 성도의 참신앙이라 하겠다.

마 에노쉬 키 테갇델렌누 웨키 타쉬트 엘라우 립베카

개역개정,17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크게 만드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새번역,17 사람이 무엇이라고, 주님께서 그를 대단하게 여기십니까? 어찌하여 사람에게 마음을 두십니까?

우리말성경,17 사람이 무엇인데 주께서 그를 크게 생각하시고 그에게 그렇게 많은 관심을 쏟으십니까?

가톨릭성경,17 사람이 무엇이기에 당신께서는 그를 대단히 여기시고 그에게 마음을 기울이십니까?

영어NIV,17 “What is man that you make so much of him, that you give him so much attention,

영어NASB,17 “What is man that You magnify him, And that You are concerned about him,

영어MSG,17 “What are mortals anyway, that you bother with them, that you even give them the time of day?

영어NRSV,17 What are human beings, that you make so much of them, that you set your mind on them,

헬라어구약Septuagint,17 τι γαρ εστιν ανθρωπος οτι εμεγαλυνας αυτον η οτι προσεχεις τον νουν εις αυτον

라틴어Vulgate,17 quid est homo quia magnificas eum aut quia ponis erga eum cor tuum

히브리어구약BHS,17 מָה־אֱנֹושׁ כִּי תְגַדְּלֶנּוּ וְכִי־תָשִׁית אֵלָיו לִבֶּךָ׃

성 경: [욥7:17,18]

주제1: [계속되는 욥의 답변(2)]

주제2: [하나님께 호소하는 욥]

본문은 시 8:4; 히 2:6-8과 내용상 유사하다. 그러나 본문은 다음과 같은 점에 있어서 시편 기자 및 히브리서 기자의 고백과 다르다. (1) 동기(상황) : 욥의 고백은 견딜 수 없는 고난의 와중에서 나온 것으로서 절망과 한탄조의 성격을 띤다. 그러나 시편과 히브리서 기자의 고백은 하나님의 은총과 섭리에 대한 기쁨과 감사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2) 의도 : 욥의 고백은 실로 비천한 존재인 인간을 지속적으로 감찰하시는 하나님(19절)에 대한 원망의 토로이다. 그러나 시편과 히브리서 가지의 고백은 실로 보잘 것 없는 인간을 마치 하늘의 천사보다도 더 특별히 여기사 권고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께 대한 찬양이다. 요컨대 욥에게 있어서는 현재 자신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관심과 눈길이 도리어 견딜 수 없는 고통의 불화살과도 같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욥은 현재 자신이 당하고 있는 고난의 하나님으로부터 기인했으며(6:4), 그분의 눈길(관심)이 존속하는 한 그가 유일한 탈출구로 인식한 죽음(3장)마저도 불가능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 크게 여기사 – 여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테가텔레누'(*)는 `창대케하다'(창 12:2), `더 크게 하다'(왕상 1:37), `(명성, 지위 등을)존귀하게 하다'(대상29:25), `(키를)자라게 하다'(사 44:14)등 다양하게 쓰였다. 여기서는 `존귀하게 하다'(magnify)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할 듯하다. 벌레와 같이 작은 존재(25:6; 시 84), 하나님과 비교할 때 메뚜기 같이 미천한 존재(시 90:10; 전 8:8)인 인간이 이렇듯 존귀함을 받는 것이 인간의 무한한 축복일진대 욥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도리어 불평과 원망의 요소가 되어버렸다는 고백속에서 우리는 그가 당한 고난의 심각도를 추측해 볼수 있다.

󰃨 마음을 두시고 – 히브리 관용법에 따르면 이 표현은 `관심을 기울이다'(pay heed to), `배려하다’등의 뜻이다(출 7:23; 삼상 4:20; 시 48:13, 14).

왙티프케덴누 리브카림 리르가임 티브하넨누

개역개정,18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순간마다 단련하시나이까

새번역,18 어찌하여 아침마다 그를 찾아오셔서 순간순간 그를 시험하십니까?

우리말성경,18 왜 그렇게 아침마다 감시하시고 순간마다 시험하십니까?

가톨릭성경,18 아침마다 그를 살피시고 순간마다 그를 시험하십니까?

영어NIV,18 that you examine him every morning and test him every moment?

영어NASB,18 That You examine him every morning, And try him every moment?

영어MSG,18 That you check up on them every morning, looking in on them to see how they’re doing?

영어NRSV,18 visit them every morning, test them every moment?

헬라어구약Septuagint,18 η επισκοπην αυτου ποιηση εως το πρωι και εις αναπαυσιν αυτον κρινεις

라틴어Vulgate,18 visitas eum diluculo et subito probas illum

히브리어구약BHS,18 וַתִּפְקְדֶנּוּ לִבְקָרִים לִרְגָעִים תִּבְחָנֶנּוּ׃

캄마 로 티쉬에 밈멘니 로 타르페니 아드 빌레이 루키

개역개정,19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내가 침을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

새번역,19 언제까지 내게서 눈을 떼지 않으시렵니까? 침 꼴깍 삼키는 동안만이라도, 나를 좀 내버려 두실 수 없습니까?

우리말성경,19 주께서 언제까지 나를 떠나지 않으시겠습니까? 침을 꼴깍 삼키는 동안만이라도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으시겠습니까?

가톨릭성경,19 언제면 제게서 눈을 돌리시렵니까? 침이라도 삼키게 저를 놓아주시렵니까?

영어NIV,19 Will you never look away from me, or let me alone even for an instant?

영어NASB,19 “Will You never turn Your gaze away from me, Nor let me alone until I swallow my spittle?

영어MSG,19 Let up on me, will you? Can’t you even let me spit in peace?

영어NRSV,19 Will you not look away from me for a while, let me alone until I swallow my spittle?

헬라어구약Septuagint,19 εως τινος ουκ εας με ουδε προιη με εως αν καταπιω τον πτυελον μου εν οδυνη

라틴어Vulgate,19 usquequo non parces mihi nec dimittis me ut gluttiam salivam meam

히브리어구약BHS,19 כַּמָּה לֹא־תִשְׁעֶה מִמֶּנִּי לֹא־תַרְפֵּנִי עַד־בִּלְעִי רֻקִּי׃

성 경: [욥7:19]

주제1: [계속되는 욥의 답변(2)]

주제2: [하나님께 호소하는 욥]

󰃨 나의 침 삼킬 동안 – 18절에 나타난 `아침마다’, `분초마다’와 동의어이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면 본문은 18절의 그것보다 더 세분된 시간을 가리킨다. 즉, `침 삼킬동안’은 식별할 수 없을 정도의 매우 짧은 시간을 뜻한다. 이렇게 볼 때 18절에서 시작된 과장법적 표현이 본절에서 더욱 강화된 것으로서 매순간마다 고통을 당해야 하는 욥의 절규가 생생하게 들리는 듯하다.

하타티 마 에프알 라크 노체르 하아담 라마 삼타니 레미프가 라크 와에흐예 알라이 레맛사

개역개정,20 사람을 감찰하시는 이여 내가 범죄하였던들 주께 무슨 해가 되오리이까 어찌하여 나를 당신의 과녁으로 삼으셔서 내게 무거운 짐이 되게 하셨나이까

새번역,20 사람을 살피시는 주님, 내가 죄를 지었다고 하여 주님께서 무슨 해라도 입으십니까? 어찌하여 나를 주님의 과녁으로 삼으십니까? ㉣어찌하여 나를 주님의 짐으로 생각하십니까? / ㉣마소라 사본 가운데 일부와 고대 히브리의 서기관 전통과 칠십인역을 따름. 대다수의 마소라 사본에는 ‘내가 나에게 짐이 됩니다’

우리말성경,20 오 사람을 감시하시는 분이여, 내가 죄를 지었다 해도 그것이 주께 무슨 일이 되겠습니까? 주께서 왜 나를 과녁으로 삼으셔서 내가 내 자신에게 짐이 되게 하십니까?

가톨릭성경,20 사람을 감시하시는 분이시여 제가 잘못했다 하여도 당신께 무슨 해를 끼칠 수 있습니까? 어찌하여 저를 당신의 과녁으로 삼으셨습니까? 어찌하여 제가 당신께 짐이 되었습니까?

영어NIV,20 If I have sinned, what have I done to you, O watcher of men? Why have you made me your target? Have I become a burden to you?

영어NASB,20 “Have I sinned? What have I done to You, O watcher of men? Why have You set me as Your target, So that I am a burden to myself?

영어MSG,20 Even suppose I’d sinned–how would that hurt you? You’re responsible for every human being. Don’t you have better things to do than pick on me? Why make a federal case out of me?

영어NRSV,20 If I sin, what do I do to you, you watcher of humanity? Why have you made me your target? Why have I become a burden to you?

헬라어구약Septuagint,20 ει εγω ημαρτον τι δυναμαι σοι πραξαι ο επισταμενος τον νουν των ανθρωπων δια τι εθου με κατεντευκτην σου ειμι δε επι σοι φορτιον

라틴어Vulgate,20 peccavi quid faciam tibi o custos hominum quare posuisti me contrarium tibi et factus sum mihimet ipsi gravis

히브리어구약BHS,20 חָטָאתִי מָה אֶפְעַל לָךְ נֹצֵר הָאָדָם לָמָה שַׂמְתַּנִי לְמִפְגָּע לָךְ וָאֶהְיֶה עָלַי לְמַשָּׂא׃

성 경: [욥7:20]

주제1: [계속되는 욥의 답변(2)]

주제2: [하나님께 호소하는 욥]

󰃨 사람을 감찰하시는 자여(*, 하 아담 노첼) –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의 부성애적(父性愛的) 관심과 그의 백성에 대한 철저한 보호를 나타낼 때 주로사용되었다(사 27:3). 이 표현이 성경에서는 `지키는 자'(시 25:10), `보호자'(시31:23), `포도원지기'(사 27:3), `파숫군'(렘 31:6), `상직군'(27:18)등으로 사용되었는 바, 이는 공히 인간의 모든 행위와 사고를 지배하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내 준다. 그런데 욥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이 도리어 부담과 불평의 요소가 되었다. 왜냐하면 감찰하시는 주가 계시는 한 그는 자기의 뜻대로 죽음을 택할수도, 그리고 현재의 고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욥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지속적인 감찰은 도리어 그이 불안과 고통을 가중시키는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 내가 범죄하였은들 주께 무슨 해가 되오리이까 – 본문은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해석된다. (1) 하나님과 견주어 볼 때 극히 미천한 존재인 인간(욥)의 범죄가 초월적이고 광대하신 하나님(시 145:3)께 아무런 영향이 끼치지 않는다. 즉,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거룩하시고 존귀하신 까닭에 인간의 선악간의 행위(22:2-4; 35:5-8)에 의해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욥의 신앙에 비추어 볼 때 타당한 것으로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욥은 하나님께서 죄를 싫어하시며, 조그마한 범죄라도 하나님의 분노를 야기하기에 충분한 것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즉, 그는 죄의 심각한 본성을 알고 있었다. (2) 욥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요구하는 수준이 너무 높다고 탄식하고 있다. 다른 누구보다 철저히 경건 생활에 전력했던 욥이 그토록 큰 환난을 당한 데대해 깊은 의구심을 타나낸 말이라는 것이다. 이는 문맥상 비교적 타당하게 여겨진다.

우메 로 팃사 피쉐이 웨타아비르 엩 아오니 키 앝타 레아파르 에쉬카브 웨쉬하르타니 웨에넨니

개역개정,21 주께서 어찌하여 내 허물을 사하여 주지 아니하시며 내 죄악을 제거하여 버리지 아니하시나이까 내가 이제 흙에 누우리니 주께서 나를 애써 찾으실지라도 내가 남아 있지 아니하리이다

새번역,21 어찌하여 주님께서는 내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시고, 내 죄악을 용서해 주지 않으십니까? 이제 내가 숨져 흙 속에 누우면, 주님께서 아무리 저를 찾으신다 해도, 나는 이미 없는 몸이 아닙니까?

우리말성경,21 주는 왜 내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시고 내 죄를 없애 주지 않으십니까? 이제 내가 흙먼지 속에 누울 것입니다. 주께서 아침에 나를 찾으셔도 내가 더는 없을 것입니다.”

가톨릭성경,21 어찌하여 저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십니까? 어찌하여 저의 죄악을 그냥 넘겨 버리지 않으십니까? 제가 이제 먼지 위에 누우면 당신께서 찾으셔도 저는 이미 없을 것입니다.

영어NIV,21 Why do you not pardon my offenses and forgive my sins? For I will soon lie down in the dust; you will search for me, but I will be no more.”

영어NASB,21 “Why then You not pardon my transgression And take away my iniquity? For now I will lie down in the dust; And You will seek me, but I will not be.”

영어MSG,21 Why don’t you just forgive my sins and start me off with a clean slate? The way things are going, I’ll soon be dead. You’ll look high and low, but I won’t be around.”

영어NRSV,21 Why do you not pardon my transgression and take away my iniquity? For now I shall lie in the earth; you will seek me, but I shall not be.”

헬라어구약Septuagint,21 και δια τι ουκ εποιησω της ανομιας μου ληθην και καθαρισμον της αμαρτιας μου νυνι δε εις γην απελευσομαι ορθριζων δε ουκετι ειμι

라틴어Vulgate,21 cur non tolles peccatum meum et quare non auferes iniquitatem meam ecce nunc in pulvere dormiam et si mane me quaesieris non subsistam

히브리어구약BHS,21 וּמֶה לֹא־תִשָּׂא פִשְׁעִי וְתַעֲבִיר אֶת־עֲוֹנִי כִּי־עַתָּה לֶעָפָר אֶשְׁכָּב וְשִׁחֲרְתַּנִי וְאֵינֶנִּי׃ ף

성 경: [욥7:21]

주제1: [계속되는 욥의 답변(2)]

주제2: [하나님께 호소하는 욥]

󰃨 내 허물…내 죄악 – 이 말은 지금까지 전개된 욥의 고백과 정면으로 상충되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욥은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엘리바스가 욥의 범죄를 의심했을 때에도 자신은 결코 그같은 의심을 받을 만한 행위를 하지 않았음을 거듭 주장한 바 있다(6:24). 따라서 본문은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1) 욥의 변론의 범죄 : 욥은 고통을 토로하는 중에 심한 독설(毒舌)을 여러 차례 토로하였다(3장). 이러한 언설(言說)은 그의 친구들에 의해 비신앙적인 것으로 지적받았을 것이며, 그로 인해 욥은 자신의 말이 신앙의 길에서 일면 이탈되었음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2) 인간의 원초적 죄성 : 욥이 무흠한 이물로서 `자신의 의'(자기 의)를 주장하기는 하였으나(6:24)원론적 측면에서 볼 때 그를 포함한 모든 인생이 결코 하나님 앞에서 의로울 수 없음을 직시하였다(9:2). 물론 이러한 그의 인식이 인간의 철저한 부패성과 죄성을 인식하는 차원, 그리고 행위가 아닌 전적으로 신앙을 통해서 의로울 수 있다고 하는, 이른바 이신 득의(以信得意)의 단계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본질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서 죄인일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죄성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 이제 흙에 누우리니 – 이 구절에 비추어 볼 때 욥은 날로 악화되어 가는 병고로 인해 자신의 죽음이 임박해 있는 것으로 생각했음에 틀림없다. 한편 `흙에 눕다’는 표현은 `자다’, `흙으로 돌아가다'(창 3:19)는 표현과 더불어 인간의 죽음을 나타내는 히브리 관용 어법 중의 하나이다. 나를 부지런히 찾으실지라도 내가 있지 아니하리이다. 아직껏 욥은 하나님께서 언젠가는 자신을 구원해 주실 것으로 믿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 구원의 시기가너무 늦을 것이라는 예감, 그래서 자신은 그 구원을 입지 못하고 음부로 내려갈 것(6-10절)이라는 생각이 욥을 절망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욥은 지금, 현재의 하나님의 구원을 대망한 반면, 하나님의 편에서 볼 때는 욥에게 주어진 시련이 아직 끝나지 않은 고로 그 구원을 베푸실 시기가 돌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자면 욥에게 주어진 사단의 시험(2:4-6)이 온전히 성취된 다음에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풀 계획을 갖고 계셨다(42:8). 바로 이러한 차이점 때문에 욥의 신앙은 긴장 상태에 놓여있었다. 그러나 욥은 계속되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자신이 고난받고 있는 바로 그순간에도 하나님께서 침묵속에 그를 섭리하고 계시며, 구원을 준비하고 있음을 확신했어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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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답한 마음을 고백하는 욥, 욥기 7장 1절-10절, 욥의고난 욥기강해 욥기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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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은 여전히 답답하고 억울합니다. 자신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천지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욥은 자신의 답답함을 쏟아 놓습니다. 하지만 그는 답답함 속에서도 우리와는 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욥이 답답함을 쏟아 내면서도 가졌던 마음들에 대해 욥기해석하고 욥기설교로 요약합니다.

성경 : 욥기 6장 14절-20절, 개역개정성경

14 낙심한 자가 비록 전능자를 경외하기를 저버릴지라도 그의 친구로부터 동정을 받느니라 15 내 형제들은 개울과 같이 변덕스럽고 그들은 개울의 물살 같이 지나가누나 16 얼음이 녹으면 물이 검어지며 눈이 그 속에 감추어질지라도 17 따뜻하면 마르고 더우면 그 자리에서 아주 없어지나니 18 대상들은 그들의 길을 벗어나서 삭막한 들에 들어가 멸망하느니라 19 데마의 떼들이 그것을 바라보고 스바의 행인들도 그것을 사모하다가 20 거기 와서는 바라던 것을 부끄러워하고 낙심하느니라 21 이제 너희는 아무것도 아니로구나 너희가 두려운 일을 본즉 겁내는구나 22 내가 언제 너희에게 무엇을 달라고 말했더냐 나를 위하여 너희 재물을 선물로 달라고 하더냐 23 내가 언제 말하기를 원수의 손에서 나를 구원하라 하더냐 폭군의 손에서 나를 구원하라 하더냐 24 내게 가르쳐서 나의 허물된 것을 깨닫게 하라 내가 잠잠하리라 25 옳은 말이 어찌 그리 고통스러운고, 너희의 책망은 무엇을 책망함이냐 26 너희가 남의 말을 꾸짖을 생각을 하나 실망한 자의 말은 바람에 날아가느니라 27 너희는 고아를 제비 뽑으며 너희 친구를 팔아 넘기는구나 28 이제 원하건대 너희는 내게로 얼굴을 돌리라 내가 너희를 대면하여 결코 거짓말하지 아니하리라 29 너희는 돌이켜 행악자가 되지 말라 아직도 나의 의가 건재하니 돌아오라 30 내 혀에 어찌 불의한 것이 있으랴 내 미각이 어찌 속임을 분간하지 못하랴

강해설교 : 답답한 심정을 고백하는 욥

인생을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의 아픔을 당해보지 않는 사람은 진정한 고통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아픔만큼 성숙해지는 법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랑해 보지 못한 사람은 사랑을 받는 방법도 알지 못합니다.

본문에서 욥의 마음은 고통의 절정을 달리고 있습니다. 친구들의 한 마디 한 마디가 그에게는 고통이었으며, 지금의 현실은 그의 정신을 어리접게 만들 정도입니다. 그래서 욥은 극한적인 고통의 상황 속에서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욥의 심정은 어떠합니까?

1 품삯을 고대하는 품꾼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욥기 7:1 이 땅에 사는 인생에게 힘든 노동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그의 날이 품꾼의 날과 같지 아니하겠느냐

욥은 자신의 고통을 마치 품삯을 간절히 원하는 일꾼의 심정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즉, 빨리 날이 저물어 들판에서 일하는 수고를 끝나기를 바라는 일꾼처럼, 빨리 고통의 때가 지나가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신앙의 행동에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급이 있습니다. 욥은 괴로움 속에서 인내하는 믿음의 상급을 바라 보았기에, 품꾼같은 심정이라고 자신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2 현재 고난을 극복하는 소망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욥기 7:2 종은 저녁 그늘을 몹시 바라고 품꾼은 그의 삯을 기다리나니

욥은 여러 달 동안이나 환난과 고통을 겪으면서 살아오고 있습니다. 온몸의 퍼져버린 각종 피부병, 살이 곪아 터지는 고통, 옷감을 짜는 ‘베틀의 북’처럼 소망없이 보내는 삶의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하지만 욥의 마음은 거기에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욥은 현재 자신이 겪고 있는 아픔의 고통을 벗어나려는 것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신앙의 가치를 찾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삶이 진정 가치있는 인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바울이 말한바 ‘연단은 소망’을 낳는다는 말씀을 우리에게 미리 삶으로써 보여 주고 있습니다.

3 사후의 세계를 긍정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욥기 7:7 내 생명이 한낱 바람 같음을 생각하옵소서 나의 눈이 다시는 행복을 보지 못하리이다

욥이 지금 말하고 있는 7절의 주장은 허무주의나 현실도피주의가 아닙니다. 얼핏보면 현실을 외면하는 소리인 것 같지만, 욥은 ‘이 땅에서의 삶과 영원한 삶의 비교’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말도 죽음을 통한 현재의 고통을 벗어나길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성도의 영광은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늘 나라에 있는 것입니다.

욥과 같은 고난을 겪지 않았다면, 욥의 심정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그가 했던 본문의 말들을 통하여 얼마나 힘들었는지에 대해 짐작할 뿐입니다. 하지만 욥은 어려움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지켰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던 욥의 모습을 기억하며, 삶의 고난과 고통 속에서도 믿음을 지켜야 함을 배웁니다.

오늘 본문의 욥기해석을 정리하여 욥기강해 욥기설교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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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강해

욥기 강해 김효성 목사 2022년 2월 26일 수정 자료 내려받기 머리말 주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 바울의 증거대로(마 5:18; 요 10:35; 갈 3: 16; 딤후 3:16),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라는 고백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기본적이고 중요하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진술대로(1:8), 우리는 성경의 원본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고 그 본문이 “그의 독특한 배려와 섭리로 모든 시대에 순수하게 보존되었다”고 믿는다. 이것은 교회의 전통적 견해이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은 야곱 벤 카임이 편집한 제2 랍비 성경(봄버그판)을 표준적 마소라 본문으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성경은 성도 개인의 신앙생활뿐 아니라, 교회의 모든 활동들에도 유일한 규범이다. 오늘날처럼 다양한 풍조와 운동이 많은 영적 혼란의 시대에,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묵상하기를 원하며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뜻을 알기를 원한다. 성경을 가지고 설교할지라도 그것을 바르게 해석하고 적용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올 것이다(암 8:11).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오고 있다고 본다. 많은 설교와 성경강해가 있지만, 순수한 기독교 신앙 지식과 입장은 더 흐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요구되는 성경 해석과 강해는 복잡하고 화려한 말잔치보다 성경 본문의 바른 뜻을 간단 명료하게 해석하고 적절히 적용하는 것일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성경책 한 권으로 충분하다. 성경주석이나 강해는 성경 본문의 바른 이해를 위한 작은 참고서에 불과하다. 성도는 각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성경을 읽어야 하고, 성경주석과 강해는 오직 참고서로만 사용해야 할 것이다. 제목 차례 1장: 욥이 재산과 자녀를 잃음 2장: 욥이 자기 건강까지 잃음 3장: 욥이 자기 생일을 저주함 4장: 엘리바스–죄 없이 망한 자가 없다 5장: 엘리바스–하나님의 징계는 복되다 6장: 욥–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았다 7장: 욥–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 8장: 빌닷–네 자녀들이 범죄했기 때문이다 9장: 욥–하나님과 쟁변할 자 없다 10장: 욥이 하나님께 탄원함 11장: 소발–욥에게 회개를 촉구함 12장: 욥–하나님께서는 악인의 형통을 허용하셨다 13장: 욥–나의 허물과 죄를 알게 하소서 14장: 욥–인생은 그림자같이 신속하다 15장: 엘리바스–악인은 일평생 고통을 당한다 16장: 욥–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다 17장: 욥–의인은 그 길을 독실히 행함 18장: 빌닷–악인의 빛은 꺼진다 19장: 욥–나의 구속자가 살아계시다 20장: 소발–악인은 하나님의 벌을 받는다 21장: 욥–어찌하여 악인이 형통한가? 22장: 엘리바스–악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23장: 욥–나의 가는 길을 그가 아신다 24장: 욥–하나님께서 악인의 심판을 지연하신다 25장: 빌닷–사람은 하나님 앞에 의롭지 않다 26장: 욥–하나님의 지식과 능력은 측량할 수 없이 크다 27장: 욥–악인은 하나님의 보응을 받는다 28장: 욥–지혜는 고귀하다 29장: 욥–옛날은 복되었다 30장: 욥–그러나 지금은 고난 중에 있다 31장: 욥–나는 의롭게 살았다 32장: 엘리후가 말을 시작함 33장: 하나님은 자신을 다 알리지 않으심 34장: 하나님은 불의하지 않으심 35장: 사람의 선악은 하나님께 영향을 주지 못함 36장: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공의로우심 37장: 하나님은 능력이 크심 38장: 하나님께서 자신을 증거하심 39장: 동물 세계가 주의 손 안에 있음 40장: 네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41장: 온 천하의 것이 내 것이다 42장: 욥의 회개와 회복 서론 욥기의 저자 는 전통적으로 욥 자신이거나 모세라고 본다. 1) 어떤 학자들은, 욥의 사건이 족장 시대의 것일지라도, 욥기는 솔로몬 시대에 쓰였다고 보며, 2) 또 어떤 이들은 심지어 욥기가 욥과 그 친구들의 실제의 대화를 쓴 역사가 아니고 하나의 드라마라고 하지만, 욥기는 희곡이 아니고 역사적 내용이다. 풀(Poole)은 말했다. 본서는 허구나 비유가 아니고 참된 역사이다. 그것은 우리가 거기에서 장소들, 인물들, 사물들과 그 상황들에 대한 정확하고 명확한 진술들(2:11; 42:14 등)을 가진 그 책의 전체 문맥으로부터, 또 에스겔 14:14와 야고보서 5:11같이 그를 경건과 인내의 참되고 두드러진 예로 말하는 성경의 후대 저자들로부터 충분하게 분명하다. 3) 욥기 내용은 모세 이전 주전 2천년경의 족장 시대에 적합하다. 그것은 특히 욥의 오랜 수명(약 200세 이상) 4) 이나 제사 방식과 이스라엘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 등에서 추론할 수 있다. 또 욥기의 배경은 이방 세계이다. 욥기는 ‘하나님’이라는 명칭을 112회 사용하지만( 엘 54회, 엘로아흐 41회, 엘로힘 17회), 여호와라는 명칭은 32회만 사용한다. 5) 또 구약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17회밖에 나타나지 않는 ‘전능자’( 솻다이 )라는 명칭이 본서에서는 31회나 사용된 것도 특이하다. 이런 점들은 욥기의 내용이 족장 시대의 사건이고 그 시대에 쓰여졌음을 보이는 것 같다. 욥은 ‘우스 땅’에 사는 자이었다(1:1). 우스 땅은 에돔 지역이었다고 본다(애 4:21). 헬라어 70인역의 욥기 끝에는 욥을 아브라함의 5대손인 에돔 사람(에서의 자손)이라고 증거하는 흥미로운 내용이 있다. 그의 이름은 전에는 요밥이었고, 그는 아라비아 아내를 취하여 엔논이라는 이름의 아들을 낳았다. 또 그 자신은 에서의 아들들 중 하나인 그의 아버지 자레와 그의 어머니 보소라의 아들이었으므로 그는 아브라함의 5대손이었다. 또 이들은 에돔을 다스리는 왕들이었고 . . . . 또 그에게 온 친구들은 에서의 자손들 중 데만 사람들의 왕 엘리파스와 소캐 사람들의 군주 발닷과 미내 사람들의 왕 소발이었다. 6) 욥기의 주요 내용 은 욥의 고난과 회복이다. 본서의 특징적 진리 는 고난이다. 성도가 당하는 고난에는 (1) 죄에 대한 징벌로 받는 고난이 있다. 그것은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공의이다. 그러나 성도에게는 (2) 특정한 죄에 대한 징벌이 아니고 단지 신앙 인격의 훈련을 위한 고난도 있다. 욥의 고난은 그런 고난이었다. 사도 바울이 당한 고난(고전 4:11-13; 고후 6:6-10; 11:23-27)도 이런 고난이었다. 의인에게는 고난이 많다. 그것은 어떤 특정한 죄의 징벌이 아니고 단지 그의 인격의 단련을 위해 주시는 고난이다. 성도는 이런 고난을 각오해야 한다(마 5:10-11; 행 14:22; 빌 1:29; 골 1:24; 딤후 3:12).

1장: 욥이 재산과 자녀를 잃음 1-5절, 의인 욥 [1절]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우스 땅’은 에돔 지역이었던 것 같고(애 4:21), 욥은 아브라함 시대 사람이거나 그의 몇 대 자손이었던 것 같다. 7) 본문은 욥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말한다. ‘순전하다’는 원어( 탐 )는 비교적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인격을 가리킨다. 노아가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고 증거할 때(창 6:9), ‘완전한’이라는 말도 같은 뜻이다. 또 성경이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는 자이어야 한다고 말할 때도(딤전 3:2) 같은 뜻이다. 우리는 성경말씀에 비추어 또 자기 양심에 비추어 책망할 것이 없는 삶을 살기를 힘써야 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4:4에서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다”고 간증하였고,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3:21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는다”고 말했다. 또 욥은 정직하였다. ‘정직함’은 올바름, 기준에 맞음이라는 뜻이며 의롭다는 말과 같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대로 바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아야 한다. 또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였고 악에서 떠난 자이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경건의 본질이요(잠 1:7) 그럴 때 사람이 악을 떠날 수 있다(잠 16:6). 노아나 다니엘도 그러했다. [2절] 그 소생은 남자가 일곱이요 여자가 셋이며. 욥은 많은 자녀들을 두었다. 자녀 출산은 하나님의 뜻이다. 창세기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물론, 자녀를 안 주시는 경우도 있다. 노아는 500세 이후에 세 아들을 낳았다(창 5:32). 아브라함도 100세에 한 아들을 얻었다. 그러나 자녀 출산은 하나님의 일반적 뜻이다.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다(시 127:3). 자녀 출산과 양육은 비록 힘든 일이지만 복되고 보람 있는 일이다. 욥은 자녀들을 낳아 기르면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우리는 수고롭고 복잡한 삶의 현실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 한다. 에녹도 그러하였다. 창세기 5:21-22,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3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독신(獨身)은 신앙생활하기에 좋을 수 있다. 그러나 정상적 신앙생활은 현실도피적 생활이 아니다. 정상적 신앙생활은 현실 속에서 수고하면서 사는 생활이다. 그것은 결혼한 사람들이 자녀들을 낳아 기르며 가정을 이끌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생활이다. 가정은 사회의 기본 단위이며 성도의 일차적 경건 훈련의 장소이다. 자녀는 가정에서 경건한 부모를 통해 하나님을 경외함과 그 계명대로 의롭고 선하게 사는 법을 배운다. 성도는 가정에서 믿음과 사랑, 겸손과 인내, 순종과 용서 등을 연습한다. 가정에서 잘 생활하는 자가 바르고 좋은 인격이 된다. 사도 바울은,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교훈했다(엡 6:1, 4). [3절] 그 소유물은 양이 7천이요 약대가 3천이요 소가 5백 겨리[1천]요 암나귀가 5백이며 종도 많이 있었으니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라. 욥은 물질적 부요함이 있었다. 세상의 모든 재물은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며 하나님의 소유물이며 재물의 복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에게도 복을 주시므로 그가 창대하고 왕성하여 거부(巨富)가 되어 양과 소가 떼를 이루었었다(창 26:12-14).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순종하는 자들에게 몸의 소생과 토지 소산과 가축들의 새끼의 복을 약속하셨다(신 28:4). 그러나 물질적 부요는 신앙생활에 큰 방해물이 되는 경우가 많다. 주께서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며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고 말씀하셨다(마 19:23-24). 왜냐하면 부자는 마음이 해이해지고 교만해지고 하나님 대신 돈을 의지하기 쉽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하였다(딤전 6:9-10). 그러나 욥은 부자이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경건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했고 교만치 않고 세상을 사랑하지 않았고 재물에 종노릇하지 않았다. 그는 욥기 31:24에서 “내가 언제 금으로 내 소망을 삼고 정금더러 너는 내 의뢰하는 바라 하였던가”라고 고백할 수 있었다. 욥은 동방 사람들 중 가장 큰 자이었다. 동방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후처의 자손이나(창 25:1-6), 아브라함의 여종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의 자손이나(창 25:12-18), 에서의 자손을 가리킬 것이다(창 36장). [4-5절] 그 아들들이 자기 생일이면 각각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그 누이 셋도 청하여 함께 먹고 마시므로 그 잔칫날이 지나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욥의 자녀들은, 아마 다 성장한 후에도, 생일이면 각각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누이들까지 청하여 함께 먹고 마셨다. 그들은 형제들 간에 우애가 좋았다. 욥의 가정은 부모와 자녀 간에 또 형제들 간에 사랑과 순종과 우애가 있는 모범이 되는 가정이었다. 그런데 욥은 그 잔칫날이 지나면 자기 자녀들이 혹시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염려하여 그들을 집으로 불러 성결케 하였고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하나님게 번제를 드렸다. 욥은 죄의 심각성과 성결의 필요성을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경건과 거룩함과 온전함뿐 아니라, 자녀들의 경건과 거룩함과 온전함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육신적 차원에서 자녀들을 위할 뿐 아니라, 영적 차원에서 자녀들을 위했다. 그는 자녀들의 구원과 신앙 인격을 위해, 죄 짓지 않게 하기 위해, 혹 지은 죄를 씻음 받게 하기 위해 힘썼다. 그는 부모로서 열 명의 자녀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그러했다. 본문은 “욥의 행사는 항상 이러하였더라”고 말한다. 그는 한두 번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그의 행사가 항상 그러하였다. 그것은 참된 자녀 사랑이다. 부모에게 주는 성경 교훈의 핵심은 자녀들을 바르게 양육하라는 것이다. 잠언 22:6은,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교훈하였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의인 욥은 모든 성도들에게 본이 된다. 첫째로,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였고 온전하였고 정직했고 악을 떠났다. 우리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온전하고 정직하고 악을 떠나야 한다. 둘째로, 욥은 많은 자녀들을 낳아 기르면서도 하나님을 잘 섬겼다. 우리도 우리의 자녀들을 잘 기르면서 하나님을 잘 섬겨야 한다. 셋째로, 욥은 물질적 부요함 속에서도 하나님을 잘 섬겼다. 물질적 부요는 많은 경우 신앙생활에 시험거리가 되지만, 욥은 그렇지 않았다. 우리도 물질적 여유가 있든지 없든지 간에 하나님을 잘 섬겨야 한다. 넷째로, 욥은 자녀들의 경건함과 온전함과 거룩함을 위하여 힘썼다. 부모의 첫 번째 의무는 자녀들을 경건하고 거룩하고 선한 인격이 되도록 지도하는 것이다. 우리도 우리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며 가르치자. 6-22절, 욥이 재산과 자녀들을 잃음 [6-7절]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왔는지라.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땅에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왔나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천사들을 가리킨다. 욥기 38:7은 하나님께서 땅의 기초를 놓을 때 새벽 별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쁘게 소리하였다고 말한다. 사탄은 타락한 천사들 중 하나이다. 그의 죄는 교만이었다(딤전 3:6). 사탄은 실재(實在)한다. 그는 에덴 동산에서 뱀 속에 들어가 하와를 범죄케 하였다. 요한계시록 12:9는 그를 ‘큰 용, 옛 뱀’이라고 불렀다. 사탄은 땅에 두루 돌아다니며 활동한다. 그는 세상 사람들을 죄 짓게 하고 성도들과 하나님의 일들을 대적하고 어지럽히며 파괴시킨다. 그는 거짓말쟁이요 살인자이며(요 8:44) 다윗을 격동시켜 인구조사를 하게 하였고(대상 21:1)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대적하였다(슥 3:1). 그는 예수님을 시험한 자요(마 4장)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복음을 깨닫지 못하고 믿지 못하게 하며(고후 4:4) 세상의 죄악된 유행과 풍조를 조장한다(엡 2:2). 그는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벧전 5:8). 그는 온 천하를 꾀는 자이다(계 12:9). 사탄의 권세는 크다. 그는 이 세상 임금(요 12:31), 이 세상 신(고후 4:4), 공중에 권세 잡은 자(엡 2:2)라고 불리우며 요한일서 5:19는 온 세상이 악한 자 안에 처해 있다고까지 말한다. 그러나 사탄은 마침내 지옥에 던지울 것이다. 요한계시록 20:10은, 세상 나라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최종적으로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운다고 예언하였다. [8절]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욥은 하나님의 보시기에 순전하고 정직하고 경건하고 악에서 떠난 자이었다. 즉 그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의인이었다. 사람의 판단과 평가는 완전치 못하다. 사람은 다른 이의 중심을 알지 못하고, 그의 외모만 보기 쉽다. 그러므로 어떤 이들은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귀한 종 바울을 비난하고 욕하고 악평하였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평가가 아니고 하나님의 평가이다. 잠언 16:25는,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고 말한다. 구약성경은 열왕들의 역사를 기록할 때, 그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자이었는지, 악한 자이었는지를 기록하였다. 솔로몬은 늙었을 때 하나님 앞에서 온전치 못하였다(왕상 11:4). 아사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고(왕상 15:11), 오므리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왕상 16:25), 아하시야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왕상 22:52). 열왕기상하에는 29번, 역대하에는 11번, 총 40번 ‘하나님 보시기에’ 혹은 ‘하나님 앞에서’라는 표현이 나온다. 8)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지 말고 정직하고 의롭고 선하게 살아야 한다. 또 우리는 남을 볼 때도 외모만 보지 말고 그의 중심을 살펴보려 하고 그의 신앙 인격을 유의해 보아야 한다. [9-11절]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사탄의 비난은, 욥이 까닭 없이, 순수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고 물질적 복 때문에 섬긴다는 것이다. 욥이 하나님을 섬기는 동기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물질적 복 때문인가? 그러면 물질적 복이 없으면 하나님을 섬기는 일도 중단될 것이다. 그가 물질적 복을 받지 못하면 하나님도 버릴 것이다. 하나님 때문에 고난을 받거나 순교하는 것은 상상도 못할 것이다. 그런 신앙은 고난을 견디기 어렵고 순교는 아예 불가능할 것이다. 성경은 순수한 신앙을 가르친다. 예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6:24). 씨 뿌리는 비유 중에, 돌밭에 떨어진 씨는 환난과 시험에 넘어지는 경우를 가리켰다(마 13:20-21). 사도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고 말했다(행 14:22). 또 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고 말했고(빌 1:29), 또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해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해 죽는 자도 없다고 말하였다(롬 14:7). [12절]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단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 하나님께서는 사탄에게 욥의 소유물을 주관하는 권세를 주셨다. 손은 힘을 상징한다. 사탄은 세상의 것을 상당히 주장한다. 그는 욥의 모든 재산을 없애고 모든 자녀를 죽이기도 하였다. 누가복음 4:6에 보면, 사탄은 예수께 말하기를, 나에게 절하면 천하만국의 권세와 영광을 너에게 주리라, 이것이 나에게 주어진 것이므로 내가 나의 원하는 자에게 그것을 준다고 하였다. 사탄은 상당한 권세를 가졌다. 그러나 사탄은 오직 하나님의 허락 속에서만 또 하나님의 허락하신 한계 안에서만 그 권세를 가지며 그것을 사용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에 유일한 주권자이시다. 그는 사탄과 악령들도 주장하신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많은 귀신들을 쫓아내셨다. 귀신들은 심지어 돼지 속에 보내시기를 그에게 간구하였었다(마 8:31). 세상 끝에 하나님께서는 사탄과 악령들을 지옥에 던져 넣으실 것이다(계 20:10).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고난을 허락하심은 유익케 하시는 깊은 뜻이 있다. 사람은 평안할 때 교만해지고 해이해지고 범죄하거나 탈선하고 세상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천국을 잊어버리기 쉽다. 그러나 사람이 고난을 당하면 세상의 헛됨을 알고 죄를 멀리하고 더 거룩해지며 하나님만 더 사모하고 의지하며 천국을 소망하게 되고 또 무엇보다 겸손해진다(시 119:67, 71; 고후 1:8-9; 12:7). [13-22절] 하루는 욥의 자녀들이 그 맏형의 집에서 식물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실 때에 사자가 욥에게 와서 고하되 소는 밭을 갈고 나귀는 그 곁에서 풀을 먹는데 스바 사람이 갑자기 이르러 그것들을 빼앗고 칼로 종[종들]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 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그가 아직 말할 때에 또 한 사람이 와서 고하되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양과 종[종들]을 살라 버렸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 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그가 아직 말할 때에 또 한 사람이 와서 고하되 갈대아 사람이 세 떼를 지어 갑자기 약대에게 달려들어 그것을 빼앗으며 칼로 종[종들]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 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그가 아직 말할 때에 또 한 사람이 와서 고하되 주인의 자녀들이 그 맏형의 집에서 식물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시더니 거친 들에서 대풍이 와서 집 네 모퉁이를 치매 그 소년들 위에 무너지므로 그들이 죽었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 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한지라.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赤身)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赤身)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욥은 하루아침에 큰 재앙을 당했다. 하루는 욥의 자녀들이 그 맏형의 집에서 식물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실 때에 사자들이 욥에게 와서 스바 사람이 습격하여 소와 나귀을 빼앗고 종들을 죽였다고 말했고, 또 하나님의 불이 내려와 양과 종을 불살랐다고 말했고, 또 갈대아 사람들이 습격해 약대들을 빼앗고 종들을 죽였다고 말했다. 또 한 사람이 와서 거친 들에서 대풍(大風)이 와서 집이 무너져 자녀들이 다 죽었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때 욥은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말하였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赤身)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욥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이며 그가 주관하심을 인정하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렸다. 그는 이 모든 일에서 범죄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향해 어리석게 원망치 않았다. 열 정탐꾼의 불신앙적 보고를 받고 밤새도록 통곡하며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였던(민 14:1) 이스라엘 백성과는 너무 달랐다. 욥의 신앙과 의로운 인격은 고난 가운데서 더욱 빛났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세상에서 사탄과 악령들과 싸운다. 사탄과 악령들은 이 세상을 주관하며 때때로 성도들에게 시험과 고난을 준다. 그러나 우리는 사탄과 악령들이 오직 하나님의 허락 안에서만 우리에게 고난을 줌을 알고 그것들을 두려워하지 말자. 둘째로, 우리는 물질적 복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를 믿고 그를 섬기며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고 그의 뜻과 계명에 순종하여 그 앞에서 바르게 살자. 셋째로, 우리는 재산과 자녀들을 잃었으나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찬송하며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을지니이다”라고 말한 욥처럼, 고난 중에도 하나님을 원망치 말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며 그가 주시기도 하고 취하시기도 함을 인정하고 하나님께만 찬송과 영광을 돌리자. 2장: 욥이 자기 건강까지 잃음 [1-3절] 또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서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와서 여호와 앞에 서니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땅에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왔나이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격동하여 까닭 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오히려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켰느니라. 욥에게 닥친 재앙은 사탄이 준 것이지만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된 것이며 욥은 그런 고난 속에서도 그의 순전함과 믿음을 굳게 지켰다. [4-5절]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그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지라. [그러나]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사람은 생명이 귀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희생해도 자기 생명이 보존되면 만족하지만, 몸이 병들어 죽을 지경이 되면, 믿음을 버리고 하나님께 욕할 것이라고 사탄은 주장한다. 사탄은 끝없이 변론하고 반론하고 주의 종들과 성도들을 비난하고 공격하는 송사쟁이이다. [6절]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를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지니라. 하나님께서는 깊으신 뜻 가운데서 사탄의 활동 범위를 정해 어느 정도 허용하신다. 그는 사탄에게 욥의 건강을 치도록 허락하셨다. [7-9절] 사단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게 한지라.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하나님의 허락을 받은 사탄은 악한 피부병으로 욥을 쳤다. 심각한 악창이 그의 온 몸에 났다. 욥은 몸이 너무 가려워서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조각으로 몸을 긁었다. 그때 욥의 아내는 남편을 동정하거나 위로하기는커녕 그를 몹시 구박하였다. 그러나 욥은 믿음 없는 아내의 구박에도 낙망치 않고 더욱 믿음으로 나아갔다. 참 신자는 돛단배와 같다. 돛단배는 바람이 있어야 앞으로 잘 나아간다. 참된 신자는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 그의 믿음이 더욱 빛난다. 그는 더욱 하나님께로 나아가며 그에게 기도하고 그를 의지하고 그의 계명을 지킨다. [10절]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 이것은 그가 앞에서 말한, “주신 자도 하나님이시요 취하신 자도 하나님이시라”는 고백(1:21)보다 더 진전된 고백이다. 욥은 모든 일이 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임을 전제하고 사람이 하나님께 복을 거저 받았으면 재앙도 받을 수 있다고 말하였다. 만일 사람이 하나님께 복 받는 것을 좋아한다면, 재앙 받을 때 원망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너무 자기 중심적이며 심히 이기적인 태도일 뿐이다. 욥의 고백은, 사람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처분에 겸손히 순응해야 함을 보인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극히 크신 지혜와 의와 선으로 사람의 모든 일을 섭리하심을 믿어야 하고, 고난 중에도 참고 기다려야 한다. [11-13절] 때에 욥의 친구 세 사람이 그에게 이 모든 재앙이 임하였다 함을 듣고 각각 자기 처소에서부터 이르렀으니 곧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라. 그들이 욥을 조문하고 위로하려 하여 상약(相約)하고 오더니 눈을 들어 멀리 보매 그 욥인 줄 알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그들이 일제히 소리질러 울며 각각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7일 7야를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곤고함이 심함을 보는 고로 그에게 한 말도 하는 자가 없었더라. 욥의 친구 세 사람은 욥의 소식을 듣고 그를 위로하러 서로 약속하고 왔다. 데만 사람 엘리바스는 에서의 자손이며(대상 1:45), 수아 사람 빌닷은 아마 아브라함의 후처(창 25:2) 혹은 첩(대상 1:32) 그두라의 자손일 것이다. 그들은 경건하고 존귀한 자들이었다고 보인다. 그들은 욥의 고난이 심각함을 알았다. 욥은 사람들이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쇠약했다. 그들은 일제히 소리질러 울며 겉옷을 찢었고 하늘을 향해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렸다. 사람이 괴로움이 심하면 겉옷을 찢는다. 르우벤은 구덩이에 요셉이 없음을 보았을 때 겉옷을 찢었었다(창 37:29). 또 욥의 친구들은 7주야를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한 말도 못하였다. 욥의 큰 고통은 이렇게 묘사되고 증거되었다. 그러나 욥의 고통의 기간은 긴 것 같지 않다. 첫 번째 재앙은 하루에 되었고(13절) 두 번째 재앙은 첫 번째 후, 몇 일 안 되어서이었고, 친구들의 방문도 두 번째 재앙 후, 얼마 되지 않아서였던 것 같다. 욥기 3장부터 42장까지의 내용은 방문하여 7일 후, 하루 동안의 일이라고 본다. 그러면 욥의 고난은 몇 달 정도이었던 것 같다(욥 7:3).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사탄의 활동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범위 안에서만 이루어진다. 사탄은 하나님께 나아와 욥을 비난하면서 그의 몸의 건강을 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시기를 구하였다. 사탄은 끊임없이 성도들을 비난하고 시험하며 오늘날도 세상을 두루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벧전 5:8). 그러나 우리는 사탄과 악령들의 활동들까지도 주관하시는 주권적 섭리자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만 의지하자. 둘째로, 우리는 고난 당할 때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고, 오직 우리 자신을 살펴 회개할 바를 찾으며 입으로라도 범죄치 말아야 한다. 우리는 태어날 때 벗은 몸으로 와서 죽을 때 벗은 몸으로 간다.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다. 우리가 이 세상 사는 동안 하나님의 복을 받은 것과 같이 때때로 하나님의 재앙을 받는다 해도 우리는 하나님께 원망하거나 그를 비난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3장: 욥이 자기 생일을 저주함 [1-10절]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 욥이 말을 내어 가로되 나의 난 날이 멸망하였었더라면, 남아(男兒)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었더라면, 그 날이 캄캄하였었더라면, 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마셨더라면, 빛도 그 날을 비취지 말았었더라면, 유암[어둠]과 사망의 그늘이 그 날을 자기 것이라 주장하였었더라면, 구름이 그 위에 덮였었더라면, 낮을 캄캄하게 하는 것이 그 날을 두렵게 하였었더라면, 그 밤이 심한 어두움에 잡혔었더라면, 해의 날 수 가운데 기쁨이 되지 말았었더라면, 달의 수에 들지 말았었더라면, 그 밤이 적막하였었더라면, 그 가운데서 즐거운 소리가 일어나지 말았었더라면, 날을 저주하는 자[자들] 곧 큰 악어를 격동시키기에 익숙한 자[자들]가 그 밤을 저주하였었더라면, 그 밤에 새벽 별들이 어두웠었더라면, 그 밤이[그 새벽이] 광명을 바랄지라도 얻지 못하며 동틈을 보지 못하였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이는 내 모태의 문을 닫지 아니하였고 내 눈으로 환난을 보지 않도록 하지 아니하였음이로구나. 욥의 친구들이 욥을 방문한 지 7일 후에, 욥은 입을 열어 자기 생일을 저주하였다. 그는 차라리 그 날이 없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하며 또 그 날의 새벽이 밝아오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사람은 평안할 때 자기의 생일을 중요하게 여기며 서로의 생일을 축하하기도 한다. 그러나 심각한 고통 중에서는 생일이 결코 기쁜 날이 아니다. 생일의 저주는 이 세상의 삶의 헛됨을 잘 보여준다. 8절의 ‘날을 저주하는 자들 곧 큰 악어를 격동시키기에 익숙한 자들’은 마술사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것은 욥이 그들을 인정한다는 뜻이라기보다 사람들의 일반적 생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본다. [11-19절]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었던가. 어찌하여 내 어미가 낳을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무릎이 나를 받았던가. 어찌하여 유방이 나로 빨게 하였던가. 그렇지 아니하였던들 이제는 내가 평안히 누워서 자고 쉬었을 것이니 자기를 위하여 거친 터를 수축한 세상 임금들과 의사들(counselors)[모사들, 조언자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요 혹시 금을 가지며 은으로 집에 채운 목백들( 사림 )[방백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며 또 부지중에[버려진] 낙태한[낙태된] 아이 같아서 세상에 있지 않았겠고 빛을 보지 못한 아이들 같았었을 것이라. 거기서는 악한 자가 소요를 그치며 거기서는 곤비한 자가 평강을 얻으며 거기서는 갇힌 자가 다 함께 평안히 있어 감독자의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거기서는 작은 자나 큰 자나 일반으로 있고 종이 상전에게서 놓이느니라. 욥은 또 그가 어찌하여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않았고 살아서 엄마의 젖을 빨며 살았는가라고 말한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평안히 누워서 자고 쉬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또 그는 거기에는 거친 터를 수축한 세상의 임금들과 모사들이 있고 금은으로 집에 채운 존귀한 자들도 있었을 것이며 또 자신이, 태어날 때 죽어서 난 아이들처럼 되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또 거기에는 악한 자들의 소란스러움도 없고 수고하고 피곤한 자들에게 평안이 있고 감옥에 갇힌 자들에게도 평안이 있을 것이며 종들에게는 자유함이 있다고 말한다. [20-26절] 어찌하여 곤고한 자에게 빛을 주셨으며 마음이 번뇌한 자에게 생명을 주셨는고. 이러한 자는 죽기를 바라도 오지 아니하니 그것을 구하기를 땅을 파고 숨긴 보배를 찾음보다 더하다가 무덤을 찾아 얻으면 심히 기뻐하고 즐거워하나니 하나님에게 둘러 싸여 길이 아득한 사람에게 어찌하여 빛을 주셨는고. [이는] 나는 먹기 전에 탄식이 나며 나의 앓는 소리는 물이 쏟아지는 것 같구나. [이는] 나의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나의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미쳤음이로다]. 평강도 없고 안온도 없고 안식도 없고 고난( 로게즈 )[격동, 소동]만 임하였구나. 욥은 몸의 극심한 고통 중에서 죽음과 무덤을 심히 사모한다. 사람은 극심한 고난 중에 죽음을 사모하게 된다. 욥의 처지는 매우 고통스런 처지이었다. 그는 음식을 먹기 전에 탄식소리가 나며 그의 앓는 소리는 물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그의 두려워하는 것이 그에게 임했고 그의 무서워하는 것이 그의 몸에 미쳤다. 그에게는 평안이나 평온함이나 안식이 없고 격동과 소동만 있었다. 사람은 고난 중에 죽음을 사모한다. 선지자 엘리야도 그러했다. 그는 바알의 선지자들과 갈멜산 대결에서 승리하고 그들을 다 죽였으나, 엘리야가 한 일을 아합 왕에게서 들은 왕후 이세벨이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 같게 하리라”고 통보하자, 두려워 자기 목숨을 위해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며 말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왕상 19:4).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고난이 많고 허무한 세상을 사랑하지 말자. 요한일서 2:15-17,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실상 헛되다(전 1:2; 12:8). 둘째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과 천국만 소망하자. 시편 39:5-7, [다윗도]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니이다.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천국은 이 세상보다 더욱 사모할 만하다. 고린도후서 4:18, [바울도]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고린도후서 5: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우리가 천국의 복됨을 안다면, 우리는 돈과 명예와 쾌락에 이끌려 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살 수 있다. 4장: 엘리바스–죄 없이 망한 자가 없다 [1-6절]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대답하여 가로되 누가 네게 말하면 네가 염증이 나겠느냐? 날지라도 누가 참고 말하지 아니하겠느냐? 전에 네가 여러 사람을 교훈하였고 손이 늘어진 자면 강하게 하였고 넘어져 가는 자를 말로 붙들어 주었고 무릎이 약한 자를 강하게 하였거늘 이제 이 일이 네게 임하매 네가 답답하여 하고 이 일이 네게 당하매 네가 놀라는구나. 네 의뢰가 경외함에 있지 아니하냐? 네 소망이 네 행위를 완전히 함에 있지 아니하냐?[너의 경외함이 네 확신이 아니며 네 행위를 완전히 함이 네 소망이 아니냐?(NASB, NIV)] 본장은 욥의 친구 중 데만 사람 엘리바스의 말이다. ‘염증이 난다’는 원어( 라아 )는 ‘참을 수 없다. 조급하다’는 뜻이라고 본다. “누가 네게 말하면 네가 염증이 나겠느냐?”는 말은 “누가 네게 말하면 네가 조급하지 않겠느냐?”는 뜻 같다. 엘리바스는 욥이 자기 생일을 저주하는 말을 듣고 그의 생각을 말하지 않고 참고 있을 수가 없었다. 엘리바스는 전에 욥이 여러 사람을 교훈하였고 ‘손이 늘어진 자’ 즉 힘이 빠진 자를 강하게 하였고 ‘넘어져 가는 자’ 즉 낙망하여 넘어져 가는 자를 말로 붙들어 주었고 ‘무릎이 약한 자’를 강하게 하였다고 말한다. 또 그는 “그러나 이제 이 일이 네게 임하니 네가 답답하여 하고 이 일이 네게 당하니 네가 놀란다”고 말한다. 사람은 누구든지 어려움 당한 이웃을 위로하기는 쉬우나 막상 자신에게 그런 어려움이 닥쳤을 때 그것을 이기기는 쉽지 않은 것 같다. 엘리바스는 또 욥에게 “너의 경외함이 네 확신이 아니며 네 행위를 완전히 함이 네 소망이 아니냐?” (NASB, NIV) 라고 말한다.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할 때 장래를 확신케 되고 행위를 완전히 할 때 장래를 소망케 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는 형통함과 평안함이 있다. 시편 25:12-13,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뇨? 그 택할 길을 저에게 가르치시리로다. 저의 영혼은 평안히 거하고 그 자손은 땅을 상속하리로다.” 또 행위를 완전히 하는 자에게는 소망이 있다. 잠언 4:18,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 잠언 10:9, “바른 길로 행하는 자는 걸음이 평안하려니와.” [7-11절]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다 하나님의 입기운에 멸망하고 그 콧김에 사라지느니라. 사자의 우는 소리와 사나운 사자의 목소리가 그치고 젊은 사자의 이가 부러지며 늙은 사자는 움킨 것이 없어 죽고 암사자의 새끼는 흩어지느니라. 엘리바스는 또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라고 말한다. 그는 정직한 자는 망하지 않으나 악을 계획하고 행하는 자는 재앙을 당할 것이며 하나님의 공의로운 보응을 받을 것이며 사자같이 강한 자라도 하나님께서 그를 징벌하시고 그는 엎드러지고 말 것이라고 말한다. 악한 자들은 망할 것이다. 시편 1:6,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시편 11:6, “악인에게 그물을 내려치시리니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이 저희 잔의 소득이 되리로다.” 잠언 13:9, “의인의 빛은 환하게 빛나고 악인의 등불[기쁨과 행복]은 꺼지느니라.” 잠언 14:11, “악한 자의 집은 망하겠고 정직한 자의 장막은 흥하리라.” 섭리자, 심판자 하나님의 공의의 보응은 신약성경도 여전히 증거하는 성경 진리이다. 로마서 2:6-8,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갈라디아서 6:7-8,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썩는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12-21절] 무슨 말씀이 내게 가만히 임하고 그 가는 소리가 내 귀에 들렸었나니 곧 사람이 깊이 잠들 때쯤하여서니라. 내가 그 밤의 이상(異像)으로 하여 생각이 번거로울 때에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러서 모든 골절이 흔들렸었느니라. 그때에 영이 내 앞으로 지나매 내 몸에 털이 주뼛하였었느니라. 그 영이 서는데 그 형상을 분변치는 못하여도 오직 한 형상이 내 눈앞에 있었느니라. 그때 내가 종용한[조용한] 중에 목소리를 들으니 이르기를 인생이 어찌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 사람이 어찌 그 창조하신 이보다 성결하겠느냐? 하나님은 그 종이라도 오히려 믿지 아니하시며 그 사자라도 미련하다 하시나니 하물며 흙집에 살며 티끌로 터를 삼고 하루살이에게라도 눌려 죽을 자이겠느냐? 조석[아침부터 저녁] 사이에 멸한 바 되며 영원히 망하되 생각하는 자가 없으리라. 장막 줄을 그들에게서 뽑지 아니하겠느냐? 그들이 죽나니 지혜가 없느니라. ‘하루살이에게라도’(19절)는 구절은 ‘하루살이 혹은 나방(moth) 앞에서도’ (KJV, NASB) 라는 뜻이라고 본다. ‘장막 줄’(21절)이라는 원어( 이스람 )는 ‘그들의 탁월함’ (KJV) 혹은 ‘그들의 장막 줄’ (NASB, NIV) 이라는 뜻이라고 본다. 장막 줄이 뽑힌다는 말은 장막을 거둔다는 뜻으로 사람의 육신의 죽음을 묘사한 것이라고 본다. 엘리바스는 사람이 아무리 의롭고 거룩하다 하여도 창조자 하나님보다 의롭고 거룩할 수 없다고 말한다. 욥도 비슷한 말을 하였다. 욥기 9:2, “내가 진실로 그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 수아 사람 빌닷도 “그런즉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부녀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라고 말했고(욥 25:4), 엘리후가 욥에게 노를 발하며 그의 부족을 지적할 때도 그가 하나님보다 자기를 의롭다고 하였기 때문이었다(욥 32:2). 사람은 실상 하나님 앞에서 의(義)를 내놓을 것이 없는 죄인이다. 그는 죄성을 가진 누추한 피조물이다. 더욱이, 사람은 흙으로 지어진 연약한 존재이며 조만간 죽을 존재이고 그의 삶은 덧없이 짧고 허무하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다(사 40:6; 벧전 1:24). 또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거룩하시고 의로우셔서 인생을 공의로 심판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자신의 부족과 허무를 깨닫고 겸손히 하나님만 경외하고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살고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하나님과 천국과 영생만 사모해야 한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우리의 행위를 완전케 하자. 그것이 성경의 교훈이요 거기에 소망과 평안이 있다. 잠언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시편 119:1, “행위 완전하여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잠언 4:18-19,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거쳐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 둘째로, 사람은 범죄하면 망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의 법칙이다. 시편 1:6,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시편 11:6, “악인에게 그물을 내려치시리니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이 저희 잔의 소득이 되리로다.” 잠언 13:9, “악인의 등불은 꺼지느니라.” 잠언 14:11, “악한 자의 집은 망하겠고.” 로마서 2:6,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그러므로 우리는 범죄치 말아야 하고 모든 죄를 멀리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우리는 거룩하신 완전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와 부족, 또 비천과 허무를 깨닫고 겸손히 하나님만 의지하고 소망해야 한다. 사람이 아무리 훌륭하다 하더라도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는 보잘것없는 피조물이며 연약한 죄성을 가진 존재이다. 우리에게는 의가 없다. 사람의 행위는 부족하고 불완전하다. 그러므로 비록 우리가 모든 죄를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명령만 순종하며 그의 말씀대로 의롭게 산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부족한 존재이며 우리의 의는 누더기옷과 같음을 알고 겸손해야 한다. 5장: 엘리바스–하나님의 징계는 복되다 1-16절, 고난 중에 하나님을 의지하자 [1-2절] 부르짖어 보아라. 네게 응답할 자가 있겠느냐? 거룩한 자[천사들] 중에 네가 누구에게로 향하겠느냐? [이는] 분노가 미련한 자를 죽이고 시기( 키느아 )[화](BDB)가 어리석은 자를 멸하느니라[멸함이니라]. 사람이 왜 분노하고 화를 내는가? 그것은 모든 일을 하나님께 다 맡기지 않고 교만하고 욕심을 부리고 불만하고 미워하고 시기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한마디로,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기 때문에 사람은 분노하고 화를 내는 것이다. 그러나 분노와 화는 미련하고 어리석은 자들의 특징이며 그것은 그들에게 해가 되게 한다. 그것은 오늘날 의학 상식으로 알려진 바와 같이 사람의 몸의 질병들의 원인이 되며 결국 사람을 죽게 만든다. 또 그것은 사람으로 마귀의 시험에 떨어지기 쉽게 만든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4:26-27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고 말하였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모든 일을 맡기고 그 마음에 온유와 겸손, 자족함과 이웃 사랑이 있으면, 분노와 화를 많이 줄일 수 있고 또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다. 여기에 사람이 건강하게 사는 길도 있다. 즉 사람이 건강하려면,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떠나야 하며(잠 3:7-8), 마음을 평안하게 하며 과로하지 말고 적당한 노동이나 운동을 하고 음식을 골고루 섭취하되 가급적 소식(小食)을 해야 한다. [3-5절] 내가 미련한 자의 뿌리박는 것을 보고 그 집을 당장에 저주하였노라. 그 자식들은 평안한 데서 멀리 떠나고 성문에서 눌리나 구하는 자가 없으며 그 추수한 것은 주린 자가 먹되 가시나무 가운데 있는 것도 빼앗으며 올무가 그의 재산을 향하여 입을 벌리느니라. 미련한 자는 그 자녀들도, 그 재산도 다 복되지 못하다. 사람은 다 미련한 죄인이므로 하나님의 은혜로 지혜를 얻지 못하면 그 자신도, 그의 자녀도, 그의 재산도 복되지 못할 것이다. [6-7절] [비록]( 키 ) 재앙은 티끌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요 고난은 흙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아니지만](KJV),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 모든 사람들의 고난과 불행은 타고난 것과 같다. 그것은 첫 사람 아담과 하와의 범죄에 기인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여자에게 잉태와 해산의 고통을 선언하셨고 아담에게는 땀 흘리는 수고의 삶을 선언하셨다. 또 땅은 그로 인해 저주를 받았다(창 3장). 인간의 삶은 그 자체가 고난이며 고난으로 충만하다. 욥은 인간의 삶을 전쟁이나 품꾼의 날에 비교하였고, 또 인생이 괴로움이 가득하다고 말하였다. 욥기 7:1, “세상에 있는 인생에게 전쟁( 차바 )[힘든 노동]이 있지 아니하냐? 그 날이 품군의 날과 같지 아니하냐?” 욥기 14:1, “여인에게서 난 사람은 사는 날이 적고 괴로움이 가득하며.” 야곱은 자신이 지나온 130년을 ‘험악한 세월’이라고 표현하였고(창 47:9), 하나님의 종 모세는 “우리의 연수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라고 고백하였다(시 90:10). 사람의 참된 평안과 영생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있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고(마 11:28), 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고 말씀하셨다(요 14:27). [8-11절] 나 같으면 하나님께 구하고 내 일을 하나님께 의탁하리라. 하나님은 크고 측량할 수 없는 일을 행하시며 기이한 일을 셀 수 없이 행하시나니 비를 땅에 내리시고 물을 밭에 보내시며 낮은 자를 높이 드시고 슬퍼하는 자를 흥기시켜[일으켜] 안전한 곳에 있게 하시느니라. 창조자 하나님께서는 크고 측량할 수 없는 일들, 기이한 일들을 셀 수 없이 많이 행하셨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그가 행하신 기이한 일들로 가득하다. 시편 104:24는, “여호와여, 주의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저희를 다 지으셨으니 주의 부요가 땅에 가득하니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거대한 우주를 운행하시고 천지만물을 주관하신다. 그는 수없이 많은 짐승들과 새들과 물고기들을 기르시고 먹이신다. 시편 104:27은, “이것들이 다 주께서 때를 따라 식물 주시기를 바라나이다”라고 말한다. 인간 사회에서의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도 그러하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택자들의 구원 계획을 가지고 인류 역사를 섭리하신다. 그는 아브라함을 불러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셨다. 그는 요셉의 생애를 섭리하셨고, 모세의 생애를 섭리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많은 기이한 일들을 행하셨다. 그는 엘리야와 엘리사를 통해, 또 다니엘과 세 친구들에게 기이한 일들을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고 그의 기적, 죽음, 부활을 통해 복음을 확증하셨고 신약교회를 세우셨고 자기 백성에게 천국의 산 소망을 주셨다. 그는 오늘날 우리 개인의 영육의 삶도 섭리하신다. 그는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 로마서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12-14절] 하나님은 궤휼한 자의 계교를 파하사 그 손으로 하는 일을 이루지 못하게 하시며 간교한 자로 자기 궤휼에 빠지게 하시며 사특한 자의 계교를 패하게 하시므로 그들은 낮에도 캄캄함을 만나고 대낮에도 더듬기를 밤과 같이 하느니라. 하나님께서는 간교한 자들, 세상적으로 지혜로우나 심령이 비뚤어져 있고 패역한 자들의 계획과 계교를 다 파하신다. 그는 그것들을 다 헛되게 하신다. 그러므로 시편 9:15-16은, “열방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짐이여, 그 숨긴 그물에 자기 발이 걸렸도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알게 하사 심판을 행하셨음이여, 악인은 그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얽혔도다”라고 말하였다. 또 고린도전서 3:19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 있는 자들을 자기 궤계에 빠지게 하신다고 말하였다. 하나님께서는 형들이 아버지 몰래 요셉을 팔아버린 일이 드러나게 하셨다. 그는 모르드개와 유다 민족을 죽이려던 하만의 계획도 헛되게 하셨고 도리어 그와 그의 동료들이 죽임을 당케 하셨다. 또 그는 은 30에 주님을 배신했던 가룟 유다의 계획을 헛되게 하셨다. 유다는 그가 받은 돈을 유대 지도자들에게 도로 갖다준 후에 목매어 죽었다. 예수께서는 저 악한 유대 지도자들과 또 주님을 배신한 제자에 의해 십자가에 내어준 바 되었으나 삼일 만에 부활하셨다. [ 15-16절] 하나님은 곤비한( 에브욘 )[궁핍한] 자를 그들의 입의 칼에서, 강한 자의 손에서 면하게 하시나니 그러므로 가난한 자가 소망이 있고 불의가 스스로 입을 막느니라.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의 처분이며 또한 긍휼의 처분이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하고 고난으로 인해 도움이 필요한 성도들을 결코 버려두지 않으시며 악한 자들의 입과 손에서 건져내어 주실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정당한 일 외에는 분노하지 말자. 우리는 교만과 욕심과 불만과 미움과 시기를 버리고 모든 일을 다 하나님께 맡기고 온유와 겸손, 의와 선, 사랑과 자족함으로 살자. 둘째로, 사람은 고난의 삶을 사는 존재이다. 엘리바스는 사람이 고난을 위해 났다고 표현한다. 세상의 고난은 근원적으로 죄에서 왔다. 우리는 오직 사람의 참 평안과 영생이 되신 구주 예수님 안에 거하자.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공의로 악을 벌하시는 기이한 일을 행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을 행치 말고 악인들의 계획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공의로운 섭리자이신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의 계명대로만 행하자. 17-27절, 하나님의 징계는 복되다 [17절]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경책을 업신여기지 말지니라. 하나님께 징계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다. 왜냐면 하나님의 징계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라는 표이기 때문이다. 잠언 3:12,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같이 하시느니라.” 히브리서 12: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징계는 유익이 많다. 우선, 하나님의 징계는 우리로 죄를 멀리하고 거룩한 삶을 살게 만든다. 시편 119:67은,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라고 말하고, 시편 119:71은,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고 말한다. 또 히브리서 12:10-11은,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라고 말한다. 모든 고난은 우리로 하나님만 의지하며 소망하게 만드는 유익이 있다. 시편 39편에 보면, 다윗은 죽을병에 걸렸을 때 땅의 것이 그림자같이 헛됨을 깨닫고 고백하기를,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라고 고백하였다(시 39:6-7). 사도 바울도 아시아에서 극심한 환난을 당하고 사형 선고를 받은 것과 같은 죽을 고생을 하였을 때 이를 통해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는 법을 배웠다(고후 1:8-9). [18-20절] [이는]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 손으로 고치시나니[고치심이니] 여섯 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 기근 때에 죽음에서, 전쟁 때에 칼 권세에서 너를 구속하실 터인즉. 하나님의 징계는 징계 자체로 끝나지 않고 유익을 주시고 회복의 은혜를 주신다. 부모는 자녀를 훈계하고 책망하고 벌을 주고 또 필요한 경우 매도 들지만 그의 잘못을 바로 잡아 주려 함이며 매를 때린 후에도 상처에 약을 발라준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매를 때리시고 고통을 내리시지만, 그 고통을 물리쳐 주시고 그 고통에서 우리를 건져 주시고 회복시켜 주신다. 징계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다. 개인이나 세상의 최종적 심판은 무서운 것이지만, 현실의 삶의 여정에서 받는 하나님의 징계는 감사한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여섯 가지 환난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우리에게 미치지 못하게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여섯 번이나 일곱 번 잘못을 해서 징계를 받아도 회개하면 구원해주시고 재앙을 거두어 주신다. 사람은 부족해서 실수하고 그 실수를 반복하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을 아시고 오래 참으시고 우리가 진심으로 회개할 때 고쳐 주시고 구원해 주신다. 주께서는 세 번이나 그를 부인했던 베드로가 통회자복했을 때 그의 큰 실수를 용서하시고 그에게 찾아오셨고 그에게 “내 양을 치라”는 사명을 다시 주셨다. 주께서는 그의 부활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던 믿음 없는 도마에게도 찾아와 그의 믿음을 새롭게 해주셨다. 주께서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서로 용서하라고 교훈하셨다(마 18:22). 이것이 죄인들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이다. 하나님께서는 또 우리를 기근으로부터 지키시고 건져주신다. 시편 33:18-19는 “여호와는 그 경외하는 자 곧 그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 저희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며 저희를 기근 시에 살게 하시는도다”라고 말한다. 모든 생물들이 다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때를 따라 먹을 것 주시기를 바란다(시 104:27). 하나님께서는 공중의 새를 먹이시고 기르시는 자이시다(마 6:26). 그는 까마귀 새끼가 그를 향해 부르짖으며 먹을 것이 없어서 오락가락할 때에 그것을 위해 먹을 것을 예비하시는 하나님이시다(욥 38:41). 또 하나님께서는 전쟁 때에도 우리를 칼 권세에서, 즉 오늘날 말로 하면 총알이 빗발치며 포탄이 여기저기서 터지는 상황에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건지신다. 그러므로 사무엘상 23:14는,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기 위해 많은 군사들을 동원하여 매일 찾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그의 손에 붙이지 않으셨다고 증거한다. [21절] 네가 혀의 채찍을 피하여 숨을 수가 있고 멸망이 올 때에도 두려워 아니할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람들의 비난의 말들로부터도 피하여 숨게 하신다. 시편 31:20은, “주께서 저희를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구설(口舌)의 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라고 말한다. 또 하나님께서는 멸망이 올 때도 피할 길을 주신다. 시편 91편의 저자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피난처가 되셔서 새 사냥꾼의 올무와 극한 염병에서 건지실 것이므로 성도는 흑암 중에 행하는 염병과 대낮에 황폐케 하는 파멸을 두려워 아니한다고 고백하였다(시 91:1-8). [22절] 네가 멸망과 기근을 비웃으며 들짐승을 두려워 아니할 것은. 성도는 멸망과 기근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어떤 종류의 멸망이든지, 어떤 정도의 심한 굶주림이든지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돌보심과 공급하심을 믿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징계로 고난을 주시지만, 그는 우리가 진실히 회개할 때 그 고난으로부터 우리를 건져주실 것이다. 또 성도는 들짐승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리와 늑대, 또는 멧돼지 등의 들짐승들은 농작물을 해치고 사람도 해친다. 신명기 32:24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한 징벌로 들짐승들을 보내실 것을 경고하셨다. 에스겔 선지자는 반복해서 하나님께서 징벌의 방법으로 칼과 기근과 사나운 짐승과 온역을 보내실 것을 예언했다(겔 5:17; 14:21; 33:27). 에스겔 14:21,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네 가지 중(重)한 벌 곧 칼과 기근과 사나운 짐승과 온역을 예루살렘에 함께 내려 사람과 짐승을 그 중에서 끊으리니 그 해(害)가 더욱 심하지 않겠느냐?”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회개하며 순종하는 자기 백성을 들짐승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하시고 지켜주실 것이다. [23절] 밭에 돌이 너와 언약을 맺겠고 들짐승이 너와 화친할 것임이라. 밭의 돌들은 땅을 농사짓기에 적합하지 않게 만든다. 또 날카롭고 뽀족한 돌들은 밭갈 때 사람의 손과 발을 상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밭에 돌이 우리와 언약을 맺게 하실 것이다. 또 들짐승도 우리와 화목케 하실 것이다. 들짐승이 우리에게 위협이나 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에스겔 34:25는 하나님께서 회복의 시대에 악한 짐승을 그 땅에서 그치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24절] 네가 네 장막의 평안함을 알고 네 우리[양우리]를 살펴도 잃은 것이 없을 것이며. 장막의 평안함이란 가정과 가족들의 평안함, 즉 가족들의 건강과 일용할 양식이 있음과 환경적 평안과 가족들 간의 화목 등을 가리킬 것이다. 그것들은 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복을 거두시면, 가족들에게 질병과 궁핍과 불화가 찾아올 것이다. 또 양우리를 살펴도 잃은 것이 없다는 것은, 양들이 질병에 걸려 죽거나 사나운 짐승에게 찢겨 죽는 일이 없이 다 건강하다는 뜻이다. 그것은 오늘날의 말로 우리의 직장과 사업에 또 가정의 물질생활에 어려움이 없이 평안한 것을 말한다. 땀흘려 일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의무이지만, 그 수고의 대가를 누리고 물질적 유여함을 유지하는 것은 하나님의 복이다. 신명기 28:4-5는,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면, 몸의 소생과 토지의 소산과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25-27절] 네 자손이 많아지며 네 후예가 땅에 풀 같을 줄을 네가 알 것이라. 네가 장수하다가 무덤에 이르리니 곡식단이 그 기한에 운반되어 올리움 같으리라. 볼지어다, 우리의 연구한 바가 이 같으니 너는 듣고 네게 유익된 줄 알지니라. 자손들의 수적 번창은 하나님의 복이다. 다산(多産)은 하나님의 복이다(시 127:4-5). 자녀들은 하나님의 기업이며 상급이다(시 127:3). 또 병약함 속에 겨우 연명함이 아니라 상당한 건강 속에 장수(長壽)함은 하나님의 복이다. 하나님께서는 부모 공경에 대해 장수의 복을 약속하셨다(출 20:12). 잠언 16:31은 백발이 영화의 면류관이라고 말했고, 잠언 20:29는 늙은 자의 아름다운 것이 백발이라고 했다. 사람이 일생을 살며 원숙한 인격자가 되어 임종을 맞는 것은 복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의 징계는 복되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표이며 또 유익이 많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를 거룩케 만들고 믿음 있게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고 달게 받아 거룩하고 믿음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또한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회개하는 자에게 회복의 은혜를 주신다. 그는 일곱 가지 환난에서 우리를 건져 주시고 기근과 전쟁과 사람들의 비난과 들짐승에게서 우리를 지켜 주신다. 그는 마침내 우리의 가정에 평안을 주시고 생업에 복을 주시며 물질적 여유를 주시고 장수(長壽)와 다산(多産)의 복을 주신다. 셋째로,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일을 주권적으로 섭리하시고 공의로 다스리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부족은 철저하게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바르게 살기만 힘써야 한다. 6장: 욥–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았다. [1-7절] 욥이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분한( 카아스 )[고통](NASB, NIV)을 달아보며 나의 모든 재앙을 저울에 둘 수 있으면[좋겠도다. 이는 그것이] 바다 모래보다도 무거울 것이라[것임이로다]. 그럼으로 하여 나의 말이 경솔[성급]하였구나(BDB, NASB). [이는] 전능자의 살이 내 몸에 박히매 나의 영이 그 독을 마셨나니 하나님의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여 치는구나. 들나귀가 풀이 있으면 어찌 울겠으며 소가 꼴이 있으면 어찌 울겠느냐? 싱거운 것이 소금 없이 먹히겠느냐? 닭의 알 흰자위가 맛이 있겠느냐? 이런 것을 만지기도 내 마음이 싫어하나니 못된 식물같이 여김이니라. 욥의 고난은 재산의 상실, 자녀들의 죽음, 몸의 병이었다. 이것은 전능자의 화살이며 하나님께서 주신 두려움이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고난이었다. 즉 욥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인정했다. 욥은 하나님께서 주셨다가 하나님께서 취하셨다고 고백했었고(1:21),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재앙도 주신다고 고백했었다(2:10). 그러면 해결책도 하나님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재앙에서 그를 구원하실 수 있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형편을 회복시키실 수 있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복을 다시 주실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신명기 32:39에서,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와 함께 하는 신이 없도다.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 없도다”라고 말씀하셨다. [8-9절] 하나님이 나의 구하는 것을 얻게 하시며 나의 사모하는 것 주시기를 내가 원하나니 이는 곧 나를 멸하시기를 기뻐하사 그 손을 들어 나를 끊으실 것이라. 욥은 극심한 고통 중에 하나님께서 자기 생명을 끊으시고 데려가시기를 간구하였다. 그는 사람의 생명이 하나님의 것이며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사람이 스스로 자기 목숨을 끊어서는 안 됨을 알고 있었으므로 하나님께 간구한 것이다. [10-13절] 그러할지라도[나를 죽게 하실지라도] 내가 오히려 위로를 받고 무정한[무자비한, 혹독한] 고통 가운데서도 기뻐할 것은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지( 카카드 )[부인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내가 무슨 기력이 있관대 기다리겠느냐? 내 마지막이 어떠하겠관대 오히려 참겠느냐? 나의 기력이 어찌 돌의 기력이겠느냐? 나의 살이 어찌 놋쇠겠느냐? 나의 도움이 내 속에 없지 아니하냐? 나의 지혜( 투쉬야 )[건건한 지혜 혹은 영속적 성공]가 내게서 쫓겨나지 아니하였느냐? 욥은 혹독한 고통 중에서도 위로를 받고 기뻐한다고 고백하였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요 기쁨이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하지 않은 까닭에 얻은 위로와 기쁨이었다. 시편 119편의 저자도 “[하나님의 말씀은] 나의 곤란 중에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음이니이다,” “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내 고난 중에 멸망하였으리이다”라고 고백하였다(시 119:50, 92). 성도에게는 위로와 기쁨의 비밀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위로와 기쁨이다. 사도 바울은 마게도냐 교회 교인들이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도 넘치는 기쁨을 가졌고 극한 가난 속에서도 풍성한 연보를 했다고 증거하였다(고후 8:2). [14-15절] 피곤한 자 곧 전능자, 경외하는 일을 폐한 자를 그 벗이 불쌍히 여길 것이어늘[고난 당하는 자를 그 벗이 불쌍히 여길 것이어늘, 그는 전능자 경외하기를 폐하도다.] 나의 형제는 내게 성실치 아니함[거짓되이 행함]이 시냇물의 마름 같고 개울의 잦음 같구나. 욥은 지금 고난 당하고 있으나 그를 위로하러 온 그의 친구들은 그를 불쌍히 여기지 않고 그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폐한 자와 같고 (KJV, Poole) , 마치 우기(雨期) 외에는 말라 있는 시내(와디 wadi라고 부름)와 같다. [16-23절] 얼음이 녹으면 물이 검어지며 눈이 그 속에 감취었을지라도 따뜻하면 마르고 더우면 그 자리에서 아주 없어지나니 떼를 지은 객들이 시냇가로 다니다가 돌이켜 광야로 가서 죽고[그 길들은 굽어지고 없어지는도다](KJV, NASB) 데마의 떼들이 그것을 바라보고 스바의 행인들도 그것을 사모하다가 거기 와서는 바라던 것을 부끄리고[바라던 것 때문에 부끄러워하고] 낙심하느니라. 너희도 허망한 자라. 너희가 두려운 일을 본즉 겁내는구나. 내가 언제 너희에게 나를 공급하라 하더냐? 언제 나를 위하여 너희 재물로 예물을 달라더냐? 내가 언제 말하기를 대적의 손에서 나를 구원하라 하더냐? 포악한 자의 손에서 나를 구속(救贖)하라 하더냐? 욥의 친구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일진대 고난 당하는 친구를 동정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상대방의 마음과 그의 고통스런 처지를 이해하고 같은 마음과 감정을 가져야 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라”고 교훈하였고(엡 4:32), 사도 베드로는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체휼하며[같은 감정을 가지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라”고 교훈했다(벧전 3:8). 그러나 욥의 친구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우리도 이웃을 잘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다. [24-27절] 내게 가르쳐서 나의 허물된 것을 깨닫게 하라. 내가 잠잠하리라. 옳은 말은 어찌 그리 유력한지, 그렇지만 너희의 책망은 무엇을 책망함이뇨? 너희가 말을 책망하려느냐? 소망이 끊어진 자의 말은 바람 같으니라. 너희는 고아를 제비 뽑으며 너희 벗을 매매할 자로구나. 욥은 자기를 향한 자기 친구들의 책망이 잘못된 책망이라고 말한다. 그는 남의 허물을 구체적으로 지적함이 없는, 단지 추측만 가지고 하는 막연한 책망은 잘못이라고 말한다. 그는 “내게 가르쳐서 나의 허물된 것을 깨닫게 하라”고 말한다. 책망은 확실한 잘못에 근거해야 한다. 또 그는 남의 말꼬리나 잡는 책망도 잘못이라고 한다. 절망하는 자의 말은 바람 같은데 그 말꼬리나 잡고 책망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한다. 또 그는 그들의 책망이 동정심이 없는 책망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너희는 고아를 제비뽑으며 너희 벗을 매매할 자”라고 말한다. 우리가 남을 책망하려면 그의 허물을 정확히 알고 그것을 지적하며 책망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결코 상대방의 말꼬리나 잡는 자가 되지 말고 그의 말의 중심내용에 대해 논하며 잘못된 점을 책망해야 할 것이다. 또 우리의 책망은 동정심을 가진 책망이어야 할 것이다. [28-30절] 이제 너희가 나를 향하여 보기를 원하노라. 내가 너희를 대면하여 결코 거짓말하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돌이켜 불의한 것이 없게 하기를 원하노라. 너희는 돌이키라. 내 일이 의로우니라. 내 혀에 어찌 불의한 것이 있으랴. 내 미각이 어찌 궤휼을 분변치 못하랴. 욥은 자기 친구들 앞에서 자신의 의로움에 대해 확신하며 말한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4장에서 자신이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다고 고백하였다. 고린도전서 4:4,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우리는 우리의 이성과 양심의 판단에 스스로 자책할 것이 없을 때 담대함을 얻을 것이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3:21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라고 말했다.

욥기 6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알자. 우리는 우리의 현실이 주권적 섭리자 하나님께서 주신 현실인 줄 알자. 우리는 우리의 고난을 남의 탓으로만 돌려 원망과 불평을 하지 말자.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자. 둘째로, 우리는 죄를 멀리하고 양심에 거리낌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의로운 삶을 삶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자. 잠언 28:1,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니라.” 우리는 의를 행함으로 고난 중에도 기쁨과 위로를 얻고 담대히 살자. 셋째로, 우리는 계산적이고 이해타산적이거나 기회주의적이지 말고, 변함 없는 참 사랑과 동정심을 가지고 고난 당하는 이웃을 불쌍히 여기고 위로하고 구제하고 선을 베풀자. 또 우리는 남에게 잘못된 권면이나 책망을 하지 말고 바른 지식과 동정심을 가지고 권면하고 책망하자. 7장: 욥–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 [1-5절] 세상에 있는 인생에게 전쟁( 차바 )[군대, 전쟁, 봉사, 힘든 노동](BDB, NASB, NIV)이 있지 아니하냐? 그 날이 품군의 날과 같지 아니하냐? 종은 저물기를 심히 기다리고 품군은 그 삯을 바라나니 이와 같이 내가 여러 달째( 야르케 솨웨 )[헛된 달들 동안] 곤고를 받으니 수고로운 밤이 내게 작정되었구나. 내가 누울 때면 말하기를 언제나 일어날꼬, 언제나 밤이 갈꼬 하며 새벽까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는구나. 내 살에는 구더기와 흙 조각이 의복처럼 입혔고 내 가죽은 합창(合瘡)되었다가( 라가 )[굳었다가] 터지는구나. 세상에는 평안이 없다. 모세는 시편 90:10에서 “우리의 연수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라고 말했다. 주께서는 사람들을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이라고 표현하셨다(마 11:28). 욥은 여러 달 동안 혹독한 고난을 경험하고 있었다. 욥이 고난 당한 기간은 여러 달이었다고 보인다. 세상에 고난이 있는 까닭은 첫 사람의 죄로 인해 땅이 저주를 받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아담에게 “땅은 너로 인해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고 말씀하셨다(창 3:17).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평안을 주셨다. 요한복음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또 하나님께서는 장차 참된 안식의 세계인 천국을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실 것이다(롬 14:17).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죽은 자들은 이미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서 안식을 누린다. 히브리서 4:9-10,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6-10절] 나의 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니 소망 없이 보내는구나. 내 생명이 한 호흡 같음을 생각하옵소서. 나의 눈이 다시 복된 것을 보지 못하리이다. 나를 본 자의 눈이 다시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고 주의 눈이 나를 향하실지라도 내가 있지 아니하리이다. 구름이 사라져 없어짐 같이 음부[무덤]로 내려가는 자는 다시 올라오지 못할 것이오니 그는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겠고 자기 처소도 다시 그를 알지 못하리이다. 천을 짜는 베틀의 북은 쉴새없이 빠르게 움직인다. 욥은 자신의 날들이 베틀의 북보다 빠르다고 표현한다. 인생의 삶은 쏜살같이 빠르고 흐르는 물같이 신속하다. 모세는 7, 80년의 일생이 날아가듯이 신속히 간다고 말하였다(시 90:10). 한 주간이 빨리 지나가고 한 달이 빠르게 가고 한 해가 빨리 가며 어느덧 인생의 황혼기가 찾아온다. 또 욥은 자신의 삶이 소망이 없고 한 호흡 혹은 바람( 루아크 ) 같고 복된 것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삶은 짧고 허무하다. 다윗은 시편 39편에서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니이다.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말하였다(시 39:5-6). 야고보서 4:14는 우리의 생명을,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라고 표현하였다. 욥은 자신이 조만간 죽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삶이 짧고 덧없이 빠르기 때문에, 사람이 죽고나면 다른 사람들이 그를 지상에서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다. 죽음으로 사람의 땅 위의 삶은 끝난다. [11-16절] 그런즉 내가 내 입을 금하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아픔을 인하여 말하며 내 영혼의 괴로움을 인하여 원망하리이다. 내가 바다니이까? 용[큰 바다 짐승]이니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나를 지키시나이까? 혹시 내가 말하기를 내 자리[침대]가 나를 위로하고 내 침상이 내 수심(愁心)을 풀리라 할 때에 주께서 꿈으로 나를 놀래시고 이상(異像)으로 나를 두렵게 하시나이다. 이러므로 내 마음에 숨이 막히기를 원하오니 뼈( 에쳄 )[아마 ‘뼈의 쑤심’](BDB)보다도 죽는 것이 나으니이다. 내가 생명을 싫어하고 항상 살기를 원치 아니하오니 나를 놓으소서. 내 날은 헛 것이니이다. 욥의 고통은 영혼의 고통이었다. 그는 ‘내 마음의 아픔’ ‘내 영혼의 괴로움’에 대해 말한다. 그는 육체의 고통뿐 아니라, 마음과 영혼의 고통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의 이유를 알지 못할 때, 또 믿음이 약해지거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를 때 생기는 고통이다. 그는 자신이 모든 것을 품는 바다인가, 또는 풍랑을 두려워하지 않는 큰 바다 짐승인가라고 묻는다. 또 욥은 침상에서도 평안치 못했다. 침상은 하루하루 피곤한 인생에게 휴식의 공간이지만, 욥은 침상에서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무서운 꿈으로 인해 놀라고 이상(異像)으로 인해 두려움을 가졌다. 이러한 고통 중에서 욥은 죽는 것을 소원하여 말한다. 그는 이미 자기 생일을 저주하였었다(욥 3:1). 또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멸하기를 기뻐하시고 그 손을 들어 그를 끊으시기를 사모했었다(욥 6:8-9). 이제 그는 몸의 고통보다 숨이 막혀 죽는 것을 원한다. [17-19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크게 여기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파카드 ד������������)[살피시며] 분초마다 시험하시나이까?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나의 침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귀중하게 여기시고 마음을 두신다. 시편 8:4도,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라고 말하며, 시편 144:3도,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알아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관대 저를 생각하시나이까?”라고 말한다. 사람은 죄가 많고 부족한 존재인데, 하나님께서는 그를 귀중하게 여기시고 선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아침마다, 분초마다 살피시고 시험하신다. 그는 사람을 잠시라도, 침 삼킬 동안이라도 내버려두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섭리는 포괄적이다. 그는 우리의 모든 삶,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살피신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신다(시 121:4). 시편 139:1-4는,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라고 말한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다고 말씀하셨다(마 10:30). 요한계시록 2:23에서, 주께서는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고 말씀하셨다. [20-21절] 사람을 감찰하시는 자여, 내가 범죄하였은들 주께 무슨 해가 되오리이까? 어찌하여 나로 과녁을 삼으셔서 스스로[내 자신에게] 무거운 짐이 되게 하셨나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내 허물을 사하여 주지 아니하시며 내 죄악을 제하여 버리지 아니하시나이까? 내가 이제 흙에 누우리니 주께서 나를 부지런히 찾으실지라도 내가 있지 아니하리이다. 하나님께서는 ‘감찰하시는 하나님’(창 16:13)이시다. 그는 우리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우리의 생각을 아시고 우리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우리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고 우리의 혀의 말을 다 아신다(시 139:2-4). 20절 중간의 원문은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이다 (MT, KJV) . 세상에 죄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욥은 자신의 부족과 죄를 인정한다. 또 그는 죄의 보상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느낀다. 하나님의 엄격한 공의 앞에 의인은 아무도 없다. 욥기 34:21은, “하나님은 사람의 길을 주목하시며 사람의 모든 걸음을 감찰하신다”고 말한다. 또 히브리서 4:12-13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고 말한다. 성도는 오직 하나님의 용서와 진심의 순종으로 조금 의로운 삶을 산다. 그러나 욥은 지금 하나님께서 그의 죄를 용서치 않으시고 그를 주목하셔서 그의 심령으로 무겁고 피곤하게 하신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용서가 아니고서는 사람은 자신의 죄들에 대해 아무 해결책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용서를 간청한다.

욥기 7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이 수고로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참 평안을 누리자. 주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고(마 11:28) 또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은 참 평안을 주신다고 말씀하셨다(요 14:27). 천국은 영원하고 충만한 참된 안식의 세계이다. 둘째로,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는 이 빠른 세월의 흐름 속에서 헛된 세상일에 시간을 다 쓰지 말고 세월을 아끼고 지혜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며(엡 5:15-17) 오직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과 하나님께서 뜻하시고 기뻐하시는 선한 일들에 힘쓰자. 그것은 전도, 참 교회 건립, 바른 신학교 건립, 교회 내의 구제 등의 일들이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부족한 죄인이며 무익한 존재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귀중히 여기시고 우리를 잠시라도 버려두지 않으시고 우리의 모든 삶을 살피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과 천국의 복을 주셨음을 감사하며, 평안할 때, 즉 심령의 평안, 몸의 건강, 물질적 여유, 침상에서의 평안이 있을 때, 구주 예수님을 확신하고 또 정직하고 선하고 진실하게만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거룩함과 도덕적 온전함이다. 사람이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여러 가지 고난을 당하지만, 그때에라도 우리는 욥을 기억하고 또 우리를 위해 고난 받으신 예수님을 기억하며 잘 참고 감당하자. 8장: 빌닷–네 자녀들이 범죄했기 때문이다 [1-7절] 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어느 때까지 이런 말을 하겠으며 어느 때까지 네 입의 말이 광풍과 같겠는가? 하나님이 어찌 심판을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 네 자녀들이 주께 득죄하였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붙이셨나니[만일 네 자녀들이 주께 죄를 범하였고 주께서 그들을 그 죄(죄책 혹은 죄의 형벌)에 붙이셨다면](KJV, NASB), 네가 만일 하나님을 부지런히 구하며 전능하신 이에게 빌고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그는] 정녕 너를 돌아보시고 네 의로운 집으로 형통하게 하실 것이라.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빌닷은 욥의 자녀들이 범죄함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벌하여 데려가신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빌닷의 말은, 욥의 가정에는 해당되지 않으나, 사람이 범죄하면 하나님께서 벌하여 데려가신다는 것은 일반적 진리이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시므로 사람의 죄에 대해 벌하신다. 그는 사람이 범죄할 때 그나 그의 자녀를 죽이기도 하신다. 주께서는 요한계시록 2:23에서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사람은 회개해야 한다. 사람이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용서하시고 받으시고 회복시키실 것이다. 잠언 28:13,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요한계시록 3: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또 회개하는 자는 현재 미약할지라도 장차 심히 창대케 되는 복을 누릴 것이다. [8-10절] 청컨대 너는 옛시대 사람에게 물으며 열조의 터득한 일을 배울지어다. ([이는] 우리는 어제부터 있었을 뿐이라. 지식이 망매하니[없으니]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와 같으니라[같음이니라].) 그들이 네게 가르쳐 이르지 아니하겠느냐? 그 마음에서 나는 말을 발하지 아니하겠느냐? 옛시대 사람의 말과, 열조의 터득한 일은 옛길, 검증된 길이며 선한 길이다. 신명기 32:7에서, 모세도,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비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이르리로다”라고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옛날부터 사람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셨다. 그는 에녹에게, 노아에게, 아브라함에게, 모세에게, 다윗에게 자신을 나타내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만나며 그의 음성을 들었던 경건한 선조들의 증언과 지혜는 유익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서도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고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다(렘 6:16). 옛적 길, 선한 길이 있다. 그것이 옛신앙, 보수신앙이다. 그것은 과거에 매이거나 미래지향적 태도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시대가 바뀌어도 바뀌지 않는 것이며 어느 시대에나 가감해서는 안 된다. 기독교는 시대마다 변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진리의 변질을 경계해야 한다. 사도들을 통해 전해진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은 없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1:7-8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보수신앙은 귀한 것이다. 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 2:15에서 “이러므로 형제들아,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전해진 내용]을 지키라”고 말했다. 성경은 옛날부터 주신 하나님의 말씀의 저장소이다. 우리는 그 말씀을 보수해야 한다. [11-13절] 왕골( 고메 )[파피루스 나무]이 진펄이 아니고 나겠으며 갈대가 물 없이 자라겠느냐? 이런 것은 푸르러도 아직 벨 때 되기 전에 다른 풀보다 일찍이 마르느니라.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의 길은 다 이와 같고 사곡한( 카네프 )[불경건한] 자의 소망은 없어지리니. 빌닷은 하나님을 잊어버린 불경건한 자를 파피루스 나무나 갈대에 비교한다. 그것들은 진펄이나 물에서 왕성히 자라지만 아직 푸르를 때 다른 풀보다 일찍 말라버린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불경건한 자는 하나님 대신 사람이나 돈이나 세상 권력을 의지하는데, 사람은 악하고 연약하고 변하며 돈은 있다가 없어지고 세상 권력도 허무하다. [14-19절] 그 믿는 것이 끊어지고 그 의지하는 것이 거미줄 같은즉 그 집을 의지할지라도 집이 서지 못하고 굳게 잡아도 집이 보존되지 못하리라. 식물이 일광을 받고 푸르러서 그 가지가 동산에 벋어가며 그 뿌리가 돌무더기에 서리어서[감기어서] 돌 가운데로 들어갔을지라도 그곳에서 뽑히면 그 자리도 모르는 체하고 이르기를 내가 너를 보지 못하였다 하리니 그 길의 희락은 이와 같고 그 후에 다른 것이 흙에서 나리라. 악인들의 믿는 것은 거미줄 같다. 또 그들은 한때 왕성한 것 같아도 곧 자취를 찾을 수 없이 뽑히는 식물과 같다. 그래서 이사야 2:22는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라고 말했고, 또 잠언 23:5는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고 했고, 시편 20:7은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고 했다. 하나님 대신에 사람과 돈과 재물을 의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20절] 하나님은 순전한 사람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악한 자를 붙들어 주지 아니하신즉. ‘순전한 사람’이라는 원어( 탐 )는 ‘완전한 자, 온전한 자,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라는 뜻이다.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의 뜻과 계명대로 사는 자를 가리킨다. 그런 자가 ‘의인’이다. 성경은 노아나 욥이나 다니엘을 ‘의로운 자’라고 부른다(창 6:9; 욥 1:1; 겔 14:14, 20). 하나님께서는 그를 재앙 가운데 버려두지 않으시고 그를 도우시고 건지시고 그에게 능력을 베푸신다. 시편 34:19는,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라고 말하고, 또 시편 37:25는,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라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는 붙들어 주지 아니하신다. 그는 악한 자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시고 그를 재앙에서 건져주지 않으신다. [21-22절] 웃음으로 네 입에, 즐거운 소리로 네 입술에 채우시리니 너를 미워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입을 것이라 악인의 장막은 없어지리라. 하나님께서는 의인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풍성히 주신다. 시편 4:7에서 다윗은,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라고 고백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창 12:3). 하나님께서는 의인을 미워하는 자를 미워하시고 그런 자로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신다. 그는 그런 악인들의 장막을 없어지게 하실 것이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의 징벌을 알고 죄를 심각히 여기며 죄를 회개하기를 힘쓰자. 범죄치 않는 것이 우리의 첫 번째 기도 제목이어야 한다. 범죄하는 부모와 자녀들은 망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이다. 이것은 옛날부터 검증된 진리이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지식의 제한성을 인정하고 옛길을 주목하고 참조하고 연구하되 성경을 힘써 읽고 연구하고 믿고 행하자.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세상 것을 의지하는 불경건한 자가 되지 말고 늘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 앞에 살고 그와 교제하자. 넷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 안에서 정직하게, 즉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이 살고 또 하나님께서 주시는 충만한 기쁨을 누리자. 9장: 욥–하나님과 쟁변할 자 없다 1-15절, 하나님을 바로 알고 믿고 순종하자 [1-2절] 욥이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진실로 그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 욥은 친구들이 옳은 말을 한다고 말한다. 그들의 말은 진리이지만, 단지 그 적용이 적절치 않았다. 그러나 욥은 사람이 어찌 하나님 앞에서 의롭겠느냐고 반문한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에게 도덕적 표준이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다 죄인이다.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과 같다(사 64:6). 이 세상에 의인은 하나도 없다(롬 3:10).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롬 3:20-22). 그러나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 안에서 의롭게 살아야 한다. 주께서는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5:20). 그 의는 그리스도의 속죄의 의뿐 아니라, 성도들의 성심의 율법 준행도 포함한다. [3-4절] 사람이 하나님과 쟁변하려 할지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리라. 하나님은 마음이 지혜로우시고 힘이 강하시니 스스로 강퍅히 하여 그를 거역하고 형통한 자가 누구이랴. 사람은 하나님과 변론하려 할지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유한한 죄인인 인생이 어떻게 거룩하시고 무한하신 하나님과 말로라도 다툴 수 있겠는가? 인생은 오직 겸손히 하나님을 경외하고 기도하며 그의 말씀을 묵상하고 지키고 실천하려고 힘써야 할 뿐이며, 하나님과 다투며 변론하려 해서는 안 된다. 또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지혜로우시고 힘이 강하시다. 그러므로 사람이 마음을 굳게 하고 하나님을 거역한다면, 그는 결코 형통한 자가 될 수 없다. 복의 근원 되신 하나님을 대적하고 거역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와 오는 세상에서 결코 아무 좋은 것도 기대할 수 없다. [5-7절] 그가 진노하심으로 산을 무너뜨리시며 옮기실지라도 산이 깨닫지 못하며 그가 땅을 움직여 그 자리에서 미신즉 그 기둥이 흔들리며 그가 해를 명하여 뜨지 못하게 하시며 별들을 봉하시며.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죄악에 대하여 노하시면 지진을 주셔서 산을 무너뜨리시고 옮기시며 땅을 움직이실 것이다. 성경은 이 세상 종말의 징조들 중의 하나로 지진을 말한다(마 24:7; 계 16:17-20).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재앙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해를 명하여 뜨지 못하게 하시며 별들을 봉하기도 하신다. 그는 낮에도 어두움을 주실 수 있고 역사상 그런 일들이 있었다. 출애굽기 10:23에 보면, 애굽에 내린 열 가지 재앙들 중 아홉 번째 재앙에서 하나님께서는 애굽 온 땅에 3일 동안 캄캄한 흑암을 주셨었다. 또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정오부터 오후 3시까지 온 땅에 어두움이 임했었다(마 27:45). [8-11절] 그가 홀로 하늘을 펴시며 바다 물결을 밟으시며 북두성과 삼성과 묘성과 남방의 밀실을 만드셨으며 측량할 수 없는 큰 일을, 셀 수 없는 기이한 일을 행하시느니라. 그가 내 앞으로 지나시나 내가 보지 못하며 그가 내 앞에서 나아가시나 내가 깨닫지 못하느니라. 하나님께서는 하늘을 홀로 창조하셨고 바다도 주장하신다. 또 그는 북두성(곰 자리)과 삼성(오리온 자리)과 묘성(황소 자리)과 남방의 밀실(밀집된 별 자리들)을 만드셨으며 측량할 수 없는 큰 일을, 셀 수 없는 기이한 일을 행하신다. 그는 하늘의 별들을 주관하는 자이시며 또 기적을 행하는 자이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많은 기적들을 행하셨음을 증거한다. 그러나 그는 살아계시고 지금도 활동하고 계시지만 영이시므로 그의 지나가심과 활동을 사람들이 알 수 없다. [12절] 하나님이 빼앗으시면 누가 막을 수 있으며 무엇을 하시나이까 누가 물을 수 있으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다. 그는 천지만물을 주셨고 우리의 생명을 주셨고 우리의 가족을 주셨다. 그는 우리의 건강을, 재물을, 우리나라를, 그리고 우리의 모든 좋은 환경여건을 주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빼앗으시기도 하신다.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의 소유물이므로 하나님께서는 그 주신 모든 것을 빼앗으실 수 있다. 그는 주로 사람들의 죄를 징벌하실 때, 주신 것을 빼앗으신다. 그러나 간혹 성도들의 훈련을 위해 무엇을 빼앗기도 하신다. 그는 생명을 빼앗아 죽게도 하시고, 가족을 빼앗아 고아와 과부가 되게도 하시고, 건강을 빼앗아 아프게도 하시고, 재물을 빼앗아 가난하게도 하신다. 그는 국가를 빼앗아 나라 없는 설움을 당케도 하시고, 좋은 환경을 빼앗아 고난을 당하게도 하신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빼앗으시는 것, 곧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재앙을 피하거나 막아낼 수 없다. 그는 단지 하나님의 은혜로 그 고난을 참고 견딜 수 있을 뿐이다. 하나님께서 죽이시면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고 가족을 취하시면 고아와 과부가 될 수밖에 없고 건강을 취하시면 아플 수밖에 없고 재물을 취하시면 가난할 수밖에 없고 나라를 취하시면 방랑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하나님께 항의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주권자이시다. 그는 신명기 32:39에서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와 함께 하는 신이 없도다.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 없도다”라고 말씀하셨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1:11에서 하나님을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라고 표현하였다. [13-15절] 하나님이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시나니 라합[큰 바다 짐승]을 돕는 자들[라합의 동류들]이 그 아래 굴복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감히 대답하겠으며 무슨 말을 택하여 더불어 변론하랴.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감히 대답하지 못하고 나를 심판하실 그에게 간구하였을 뿐이며. 하나님의 공의의 진노는 참으로 두렵다. 큰 바다 짐승과 그 동류들이라도 하나님 앞에 다 굴복할 것이다. 하물며 연약한 인간인 우리가 하나님의 그 위엄 앞에 어떻게 서서 감히 하나님 앞에 무어라고 대답하며 변론할 수 있겠는가. 비록 우리가 의로울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대답할 수 없고 우리를 심판하실 하나님, 엄위하신 그에게 간구할 수 있을 뿐이다. 욥은 하나님의 엄위하심, 하나님의 능력, 특히 하나님의 두려운 진노를 알고 있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행위들의 의(義)가 내세울 것이 없는 의(義)임을 인정하고 있다. 사람의 의는 하나님 앞에 보잘것없다. 사람은 자신의 행위의 의로 하나님 앞에 담대히 서지 못한다. 신약성경이 밝히 증거하는 바와 같이,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 빌립보서 3:9는,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고 말했다. 또 히브리서 10:19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다”고 말한다. 우리의 자랑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뿐이며 우리의 담대함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뿐이다. 물론 순종의 삶은 더욱 평안과 담대함을 줄 것이다(요일 3:21-22).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엄위하신 절대주권자이심을 알자. 하나님께서는 지혜와 힘이 강하시다. 그는 주권적 섭리자이시며 엄위하신 심판자이시다. 그러므로 사람은 그를 거역할 수 없고 그와 다툴 수 없다. 그가 빼앗으시면 막을 자가 없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의 의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뿐임을 알자. 욥은 친구들의 말대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인정한다. 사람의 행위들은 하나님 앞에서 부족투성이이며 완전하게 의롭지 못하다. 셋째로, 비록 우리의 의가 구주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얻은 의이지만, 우리는 이 세상 사는 동안 창조자, 섭리자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모든 말씀들에 순종하며 믿음으로 얻은 의 안에서 의롭게 살아야 한다. 16-24절, 고난 중에 하나님만 바라보자 [16절] 가령 내가 그를 부르므로 그가 내게 대답하셨을지라도 내 음성을 들으셨다고는 내가 믿지 아니하리라. 욥의 말은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기를 힘써야 한다. 주께서는 항상 기도하고 낙망하지 말라고 교훈하셨다(눅 18:1). 사도 바울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교훈했고(살전 5:17) 또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말했다(빌 4:6-7). 기도는 성도의 특권이며 영적 호흡과 같다. 또 욥은 기도 응답을 부인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 올리는 우리의 기도는 응답된다. 기도는 응답을 받는 데 가치가 있다. 시편 65:2는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고 증거한다. 주께서도,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말씀하셨고(마 7:7-8), 또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고 약속하셨다(요 14:14). 욥의 말은 우리가 기도 응답을 받을 때 교만치 말아야 함을 보인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마치 우리만 특별히 사랑하시는 것처럼 생각하지 말고 특히 과장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비천한 피조물이며 부족하고 누추한 죄인이다. 그러므로 기도 응답을 받았어도, 우리의 부족한 점들을 생각하면 감히 무엇을 자랑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께 겸손과 두려움으로 감사해야 할 뿐이다. 기도 응답은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 때문에 영적 교만에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17-19절] 그가 폭풍으로 나를 꺾으시고 까닭 없이 내 상처를 많게 하시며 나로 숨을 쉬지 못하게 하시며 괴로움으로 내게 채우시는구나. 힘으로 말하면 그가 강하시고 심판으로 말하면 누가 그를 호출하겠느냐? 욥은 자신이 당하는 큰 고통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 중에라도 불평하거나 낙심치 말고 그 고난이 하나님께로서 왔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를 호출한다’는 원어( 요이데니 )는 ‘나를 호출한다’는 뜻이다 (MT, BDB, KJV) . 9) 본문은, 내가 호출을 당하여 엄위하신 하나님과 대면하여 말하지 못할 것이라는 뜻이라고 보인다. [20절]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내 입이 나를 정죄하리니 가령 내가 순전할지라도 나의 패괴함을 증거하리라. 욥은 고난 중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부족을 느낀다. 엄격한 기준으로 보면, 나는 죄인이며 내 속에는 사악함과 부패성이 있다는 것을 그는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사실상 항변할 자격도, 항변할 담력도 없는 인생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 고난이 하나님의 징계라 할지라도 그것을 달게 받고, 또 훈련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참고 견뎌야 한다. 베드로전서 4:12-13은,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힘과 위로를 주신다. [21절] 나는 순전하다마는 내가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내 생명을 천히 여기는구나[멸시하리로다]. “나는 순전하다마는”이라는 말은 문맥상 “나는 순전할지라도”라는 뜻 같다 (KJV, NIV) . ‘순전함’이라는 원어( 탐 )는 ‘완전함, 흠 없음’이라는 뜻이다. 욥은 양심에 가책되는 것이 없는 순전한 삶을 살았다. 욥기 6:10,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욥기 6:29, “너희는 돌이키라. 내 일이 의로우니라.” 욥기 9:20,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내 입이 나를 정죄하리니 가령 내가 순전할지라도 나의 패괴함을 증거하리라.” “내가 나를 돌아보지 않는다”( 로 에다 나프쉬 )라는 원문은 “나는 나의 영혼을 알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것은, 그가 지금 왜 이런 처지에 있는지, 그 이유가 무엇인지 또 그 결말이 어떨지 알지 못한다는 뜻이든지, 혹은 앞절과 더불어 그가 자신의 온전함과 의를 하나님 앞에서 주장할 수 없다는 뜻이든지, 혹은 뒤따르는 구절과 함께, 고난 중에 심히 피곤해서 자신의 생명을 돌아보며 존중할 힘이 없다는 뜻일 것이다. 욥은 자신의 건강이 회복될 가망성이 없고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에 살고 싶은 의욕도 버리고 있었다. 욥은 욥기 6:8-9에서 “하나님이 나의 구하는 것을 얻게 하시며 나의 사모하는 것 주시기를 내가 원하나니 이는 곧 나를 멸하시기를 기뻐하사 그 손을 들어 나를 끊으실 것이라”고 말했고, 7:15-16에서는 “이러므로 내 마음에 숨이 막히기를 원하오니 뼈[뼈의 쑤심]보다도 죽는 것이 나으니이다. 내가 생명을 싫어하고 항상 살기를 원치 아니하오니 나를 놓으소서. 내 날은 헛것이니이다”라고 말하였다. [22-24절] 일이 다 일반이라. 그러므로 나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순전한 자나 악한 자나 멸망시키신다 하나니 홀연히 재앙( 쇼트 )[매, 채찍]이 내려 도륙될[사람들을 죽일] 때에 무죄한 자의 고난( 맛사 )[절망(BDB, KB, NASB, NIV) 혹은 시련(KJV)]을 그가 비웃으시리라. 세상이 악인의 손에 붙이웠고 재판관의 얼굴도 가리워졌나니[그가 그 재판관들의 얼굴을 가리우셨으니] 그렇게 되게 한 이가 그가 아니시면 누구이뇨?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의인에게도 고난과 재앙을 내리신다. 그는 악인에게 주시는 것과 비슷하게 의인에게도 고난을 주신다. 의인도 자연적 재해나 교통사고 등을 당한다. 또 악한 세상에서 의인이 불의한 재판을 받고 고통을 받기도 한다. 또 보통은 그 재난이 욥의 경우처럼 일시적이지만, 어떤 경우는 순교의 죽음으로 끝나기도 한다. 세상 사람들이 보면 성도에게 닥친 이런 고난은 이해하기 어려운 불행 같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또는 영생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큰 일이나 큰 불행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성도가 고난 중에도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증거하고 믿음을 증거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사람이 그를 믿는 것이, 그리고 진리가 진리이기 때문에 그것을 믿는 것이 참 믿음이며 순수한 믿음이다. 그러므로 주 예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6:24). 그러나 많은 경우에,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악인들을 공의로 심판하신다. 그는 의와 선을 행하는 자들에게는 평안과 복을 주시고, 불의와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는 재앙과 화를 주신다. 그러므로 그는 사람들로 하여금 공의로 세상을 다스리시고 선악을 심판하시고 보응하시는 하나님께서 계심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 시편 58:11은, “때에 사람의 말이 진실로 의인에게 갚음이 있고 진실로 땅에서 판단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하리로다”고 말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고 또 기도 응답을 믿어야 하지만, 기도 응답을 받았을 때에 자신이 누추한 존재임을 알고 자랑치 말고 교만치 말고 겸손히 처신해야 한다. 둘째로, 모든 고난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며 때때로 의인에게도 고난이 있으므로, 우리는 고난 중에 섭리자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난을 달게 받고 자신에게 어떤 부족과 죄가 없는지 살피고 생각 나는 죄가 있으면 고백하고 버리기를 결심하며 참고 인내하며 하나님만 바라고 하나님의 긍휼과 위로와 힘과 구원을 구해야 한다. 25-35절, 고난의 해결책 [25-26절] 나의 날이 체부(遞夫)( 루츠 )[달리는 자](NASB, NIV)보다 빠르니 달려가므로 복을 볼 수 없구나. 그 지나가는 것이 빠른 배 같고 움킬 것에 날아 내리는 독수리와도 같구나. 욥은 고난 중에 자기의 날들이 빨리 지나간다고 말한다. 그는 그의 날들이 달리는 자보다 빠르며 빠른 배와 같고 먹이를 낚아채려 내려오는 독수리와 같다고 말한다. 시편 39:5는 사람의 일생을 손넓이 만하며 없는 것 같다고 말했고, 시편 90:5는 그것을 잠깐 자는 것 같고 아침에 돋는 풀 같다고 했다. 시편 90:10은 사람의 날들이 날아가듯이 신속히 간다고 말한다. 세월은 화살 같고 흐르는 물과 같다. 야고보서 4:14는 우리의 일생을 잠깐 보이다고 없어지는 안개라고 말했다. 욥은 그 고난의 날들의 빠른 흐름 속에서 행복한 일들을 볼 수 없었다. 사람의 일생은 고난의 길이다. 우리의 세월도 빠르게 지나가고 있다. 우리는 이 빠른 세월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떤 삶이 인간의 정로(正路)요 복된 삶인가? 에베소서 5:15-17은,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고 말한다. 그러면 주의 뜻이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고 섬기는 것이다. 성경의 요점은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라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하나님을 찬송하고 기도에 항상 힘써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성경에 명하신 선한 일들에 힘쓰는 것이다. 그것은 전도와 구제를 포함하여 하나님과 이웃들을 위한 선한 봉사의 일들에 힘쓰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선한 일을 하게 하시기 위함이다(딛 2:14). [27-28절] 가령 내가 말하기를 내 원통함을 잊고 얼굴빛을 고쳐 즐거운 모양을 하자 할지라도 오히려 내 모든 고통을 두려워하오니 주께서 나를 무죄히 여기지 않으실 줄을 아나이다. 욥은 고난에 대하여 두 가지 가능한 대책을 언급한다. 하나는 그의 원통함 혹은 불평을 잊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자신의 얼굴빛을 기쁘고 즐겁게 하는 것, 즉 마음을 기쁘게 가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대책은 잠시 도움이 되거나 많이 수련하면 약간은 도움이 될지 모르나, 참된 대책이 되지는 못한다. 그것은 불완전한 대책일 뿐이다. 계속 그의 몸이 아프고 계속 그의 환경이 심히 어려운데, 어떻게 그것이 참된 대책이 되겠는가? 그는 그의 모든 고통을 두려워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무죄(無罪)히 여기지 않으실 줄을 안다고 말한다. 즉 하나님께서 그를 죄인처럼 고통 가운데 버려두실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망각이나 인위적 기쁨은 대책이 되지 못한다. 그러면 참된 대책, 완전한 대책은 어디에 있는가? 참되고 완전한 대책은 하나님의 도우심에 있다. 하나님께서 그의 심령에 참된 평안과 위로를 주셔야 가능하고, 하나님께서 그의 몸의 건강을 회복시켜 주시고 그의 환경을 회복시켜 주셔야 그의 고통이 그칠 것이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참 대책, 완전한 대책이 되신다. 주께서는 친히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셨다(요 14:27).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축원하였다(살후 3:16). [29-31절] 내가 정죄(定罪)하심을 입을진대 어찌 헛되이 수고하리이까? 내가 눈 녹은 물로 몸을 씻고 잿물로 손을 깨끗이 할지라도 주께서 나를 개천에 빠지게 하시리니 내 옷이라도 나를 싫어하리이다. 욥은 본문에서 인간의 죄책(罪責)의 문제를 말한다. 욥은 자신이 당하는 고난이 하나님의 정죄(定罪)하심이라고 표현한다. 죄인에게 고난의 징벌을 주시듯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고난을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고난을 벗어나려는 모든 수고, 예를 들어 망각하는 것이나 마음과 얼굴을 기쁘고 즐겁게 가지는 것 등이 헛될 것이다. 또 그는 자신이 눈 녹은 물로 몸을 씻고 잿물 즉 비누로 손을 깨끗이 씻을지라도 주께서 그를 개천에 빠지게 하실 것이라고 표현한다. 그것은 그가 인간의 죄악된 본성이 가지는 죄악된 생각, 죄악된 감정, 죄악된 말, 죄악된 행위들을 완전히 벗어버리지 못함을 나타내는 것 같고, 더욱이 하나님께서 주신 고난이 그것을 증거한다는 뜻일 것이다. 그래서 그는, 깨끗한 옷을 더러운 몸에 입지 않듯이, 그의 옷이라도 그의 죄악된 몸을 싫어할 것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면 사람의 고난의 해결책, 사람의 죄책의 해결책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사람 속에나 사람의 행위나 노력에 있지 않다. 사람의 고난의 해결책은 오직 평안의 하나님 안에 있고, 사람의 죄책의 해결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사역에 있다. 사도 바울은 담대히 말하기를,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고 하였다(롬 8:33-34). [32-33절] 하나님은 나처럼 사람이 아니신즉 내가 그에게 대답함도 불가하고 대질하여 재판할 수도 없고 양척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도 없구나. 욥은 하나님께서 육신이 아니시고 영이시며 크신 위엄을 지니신 영이시므로 단지 육신적으로 대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의 위엄 앞에서 감히 대답할 수 없다고 말한다. ‘대질하여 재판할 수 없다’는 말은 ‘함께 법정에 갈 수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원고가 되시고 욥이 피고가 되든지, 아니면 욥이 원고가 되고 하나님께서 피고가 되시든지 간에, 그가 법정에 가서 자신의 고난의 정당성을 따져볼 수 없다는 뜻일 것이다. 또 그 둘 사이에 판결할 자도 없다고 말한다. [34-35절] 주께서 그 막대기를 내게서 떠나게 하시고 그 위엄으로 나를 두렵게 하지 아니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리하시면 내가 두려움 없이 말하리라. 나는 본래 그런 자가 아니니라. 35절 후반절의 “나는 본래 그런 자가 아니니라”는 원문( 키 로-켄 아노키 임마디 )은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구나”라는 뜻이다 (MT, KJV, NASB) . 욥은, 하나님께서 고난의 막대기로 그를 치셨고 그를 누르시며 그 위엄으로 그를 두렵게 하시므로 하나님의 위엄 앞에서 그에게 감히 무슨 말씀을 할 수 없다고 말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 막대기를 그에게서 떠나게 하시면 그가 무엇을 말할 수 있겠으나 지금 그의 처지는 그렇지 않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욥의 심적 고통과 방황의 해결책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께서 그 고난과 징계의 막대기를 거두시는 데 있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의와 평강을 주시는 데 있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빠른 세월의 흐름 속에서 오직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지혜롭게 살자.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경건하게 살고 또 하나님과 이웃들을 위해 선한 일들을 힘쓰는 것이다. 둘째로, 고난 중에 망각이나 심리적 노력은 참된 해결책이 못 된다. 고난 중에 하나님의 도우심만 참 해답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참된 평안과 위로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셋째로, 인간의 고난의 해결은 오직 주권적 섭리자 하나님 안에 있고, 인간의 죄책의 해결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에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고난을 거두어주셔야 우리가 평안을 얻을 수 있으며 모든 고난의 근본 원인인 우리의 죄책은 예수님의 대속으로 해결되었다. 넷째로, 성도는 고난 중에 참으며 겸손히 하나님만 바라고 의지하며 기도해야 한다. 시편 62:1,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 기도는 성도의 특권이며 복이다. 10장: 욥이 하나님께 탄원함 [1-2절] 내 영혼이 살기에 곤비하니 내 원통함을 발설하고 내 마음의 괴로운 대로 말하리라. 내가 하나님께 아뢰오리니 나를 정죄하지 마옵시고 무슨 연고로 나로 더불어 쟁변하시는지 나로 알게 하옵소서. 욥은 극심한 고통 중에서 하나님께서 그를 그 고난 중에 두신 이유가 무엇인지를 질문하며 그것을 알기를 원한다. [3-4절] 주께서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학대하시며 멸시하시고 악인의 꾀에 빛[호의의 빛]을 비취시기를 선히 여기시나이까? 주의 눈이 육신의 눈이니이까? 주께서 사람의 보는 것처럼 보시리이까? 욥은 하나님께서 악한 꾀를 품는 악한 자들을 징벌하지 않으시고 호의를 베푸시는 것 같음에 대해 묻는다. 또 그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외모로 보고 악한 자를 선한 자로 잘못 판단하기 쉬우나,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다르지 않으신가라고 반문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중심을 보시고(삼상 16:7) 공의로, 완전하게 판단하실 것이다. [5-7절] 주의 날이 어찌 인생의 날과 같으며 주의 해가 어찌 인생의 날과 같기로 나의 허물을 찾으시며 나의 죄를 사실(査實)[실상을 조사]하시나이까? 주께서는 내가 악하지 않은 줄을 아시나이다. [그러나] 주의 손에서 나를 벗어나게 할 자도[자가] 없나이다. 욥은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달리 사람의 일생의 모든 일들을 단숨에, 완전히, 정확하게 파악하시고 판단하시며, 그래서 자신이 악하지 않음도 아실 것이지만, 자신이 현실의 고난을 피할 수 없다고 말한다. [8-9절] 주의 손으로 나를 만드사 백체를 이루셨거늘 이제 나를 멸하시나이다. 기억하옵소서. 주께서 내 몸 지으시기를 흙을 뭉치듯 하셨거늘 다시 나를 티끌로 돌려보내려 하시나이까? 욥은 하나님께서 친히 손으로 사람을 만드셨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맨 처음에 흙으로 사람의 몸을 만드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을 죽게 하시면, 그 몸은 다시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10-11절] 주께서 나를 젖과 같이 쏟으셨으며 엉긴 젖처럼 엉기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가죽과 살로 내게 입히시며 뼈와 힘줄로 나를 뭉치시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출산케 하시는 것은 신비로운 일이다. 사람의 몸과 신체기관의 시작은 참으로 신비롭다. 엉긴 젖 같은 작은 수정란이 어떻게 정교한 몸과 몸의 각 기관이 되는지 참으로 신비롭다. 사람의 몸은 9,000억개 이상, 아마 수조 개의 세포들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또 사람의 몸에는 200개 이상의 뼈들과 600개 이상의 근육들이 있다고 한다. 또 눈, 귀, 코, 입 외에 약 130개의 많은 기관들이 여러 계통들을 구성한다고 하는데, 예를 들면, 위와 식도와 내장과 간 등으로 구성된 소화기 계통, 코와 폐 등으로 구성된 호흡기 계통, 피와 심장 등으로 구성된 순환기 계통, 임파와 호르몬 등으로 구성된 내분비 계통, 뇌, 척추, 신경 등으로 구성된 신경계통, 그리고 비뇨기 계통 등이 그러하다고 한다. 사람의 몸의 구조는 참 정교하다. [12절] 생명과 은혜를 내게 주시고 권고하심으로 내 영을 지키셨나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몸뿐 아니라 생명을 주셔서 살아 움직이게 하셨는데, 그것은 그 몸 속에 영을 주셨기 때문이다. 영 혹은 영혼은 사람의 생명 원리이다. 그것이 몸과 결합되면 몸은 산 자가 된다. [13절] 그러한데 주께서 이것들을 마음에 품으셨나이다. 이 뜻이 주께 있은 줄을 내가 아나이다. ‘이것들’은 하나님께서 욥에게 주신 고난의 일들, 현재의 재앙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일들을 섭리하신다. [14절] 내가 범죄하면 주께서 나를 죄인으로 인정하시고 내 죄악을 사유치 아니하시나이다. 욥은 자신이 범죄한 적이 없다고 말하지 않고, 자신이 범죄한 적이 있으나 하나님의 죄사함을 믿었음을 보인다. 그러나 지금 그는 고통 중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죄를 사해주셨는지 의문을 가진다. [15절] 내가 악하면 화가 있을 것이오며 내가 의로울지라도 머리를 들지 못하올 것은 내 속에 부끄러움이 가득하고 내 환난을 목도함이니이다. 욥은 자신이 악하면 화를 받을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하는데도 머리를 들 수 없다. 왜냐하면 그에게 많은 환난과 부끄러움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왜 이런 일이 있는 것인가? [16-17절] 내가 머리를 높이 들면 주께서 사자처럼 나를 사냥하시며 내게 주의 기이한 능력을 다시 나타내시나이다. 주께서 자주자주 증거하는 자를 갈마들여[번갈아 가며] 나를 치시며 나를 향하여 진노를 더하시니 군대가 갈마들어[번갈아 가며]( 칼리포스 웨차바 )[교대(交代)들과 군대가](원문) 치는 것 같으니이다. 욥은 머리를 높이 들고 하나님께 호소하고 항변하지만, 주께서는 사자처럼 그를 대하시고 그의 기이한 능력을 그에게 나타내신다. 주께서는 그의 친구들로 번갈아 가며 그를 치게 하시며 그를 향해 진노를 더하시며 군대가 번갈아 가며 치는 것같이 하신다. 의인도 때때로 고난을 당하고 그 고난의 이유를 잘 모를 때가 있다. [18-19절] 주께서 나를 태에서 나오게 하셨음은 어찜이니이까? 그렇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기운이 끊어져 아무 눈에도 보이지 아니하였을 것이라. 있어도 없던 것같이 되어서 태에서 바로 무덤으로 옮겼으리이다. 욥은 극심한 고난 중에서, 왜 자신을 태어나게 하셨는가라고 하나님께 질문한다. 그가 차라리 태어날 때 죽어서 태어났더라면 아무 눈에도 보이지 않았을 것이며 있어도 없던 것같이 되어 태에서 곧바로 무덤으로 옮겼을 것이라고 말한다. [20절] 내 날은 적지 아니하니이까? 그런즉 그치시고 나를 버려두사 저으기[조금이라도] 평안하게 하옵시되. 욥은 고난 중에 자신의 일생이 짧음을 더욱 느낀다. 다윗도 죽음 앞에서 인생이 손넓이만큼 되고 없는 것같이 짧다고 고백하였다(시 39:5). 욥은 이 짧은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시는 고난을 그치시고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손길을 거두시고 자신을 버려두셔서 조금이라도 평안을 얻게 해달라고 소원한다. 이 수고로운 세상에서 참 평안은 오직 창조자와 섭리자이신 하나님께로부터만 온다. [21-22절] 내가 돌아오지 못할 땅 곧 어둡고 죽음의 그늘진 땅으로 가기 전에 그리하옵소서. 이 땅은 어두워서 흑암 같고 죽음의 그늘이 져서 아무 구별( 세데르 )[질서]이 없고 광명도 흑암 같으니이다. 욥은 그가 돌아오지 못할 땅 곧 어둡고 죽음의 그늘진 땅으로 가기 전에, 즉 그가 죽기 전에 그렇게 해달라고 소원한다. 무덤은 흑암의 땅이며 거기에는 아무런 질서가 없다. 무질서와 혼돈뿐인 곳이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경건하고 의롭게 살다가 당하는 고난을 참고 악인의 형통에 대해 불평치 말아야 한다. 우리는 평소에 오직 바르고 선하게만 살면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기다리자. 둘째로, 우리는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신비한 창조물임을 알고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킴으로 영광을 돌리자. 셋째로, 우리는 우리의 고난의 이유를 잘 모르는 때에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선한 뜻과 목적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 이사야 50:10, “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뇨?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지어다.” 로마서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넷째로, 우리는 짧은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만 참 평안을 주심을 알고 하나님께 기도하자. 요한복음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데살로니가후서 3:16,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 주는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실지어다.” 11장: 소발–욥에게 회개를 촉구함 [1-6절] 나아마 사람 소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말이 많으니 어찌 대답이 없으랴. 입이 부푼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함을 얻겠느냐? 네 자랑하는( 바드 )(공허한, 쓸데없는)(BDB) 말이 어떻게 사람으로 잠잠하게 하겠으며 네가 비웃으면 어찌 너를 부끄럽게 할 사람이 없겠느냐? 네 말이 내 도는 정결하고 나는 주의 목전에 깨끗하다 하는구나. 하나님은 말씀을 내시며 너를 향하여 입을 여시고 지혜의 오묘로 네게 보이시기를 원하노니 이는 그의 지식이 광대하심이라. 너는 알라. 하나님의 벌하심이 네 죄보다 경하니라. 소발은 욥이 자기의 말이 정결하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다고 말한다고 증거하며 하나님의 벌하심이 그의 죄보다 경하다고 말한다. 그의 말은 일반적으로는 맞는 말이지만, 욥의 경우에는 맞지 않다. 욥의 고난은 그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 아니었다. 욥기는 그가 까닭 없이 고난을 당하였다고 말한다(욥 2:3; 42:7-8). [7-9절] 네가 하나님의 오묘를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온전히 알겠느냐? 하늘보다 높으시니 네가 어찌 하겠으며 음부[지옥]보다 깊으시니 네가 어찌 알겠느냐? 그 도량( 밋다 )[크심]은 땅보다 크고 바다보다 넓으니라. 사람은 하나님 자신과 그의 지혜와 지식을 다 알 수 없고, 또 그의 섭리의 모든 일들, 그 목적과 그 방법도 알 수 없다. 시편 145:3,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광대하심을 측량치 못하리로다.” 전도서 3: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전도서 8:17,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살펴보니 해 아래서 하시는 일을 사람이 능히 깨달을 수 없도다. 사람이 아무리 애써 궁구할지라도 능히 깨닫지 못하나니 비록 지혜자가 아노라 할지라도 능히 깨닫지 못하리로다.” 로마서 11: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고린도전서 1: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하시는 일들에 대해 우리 자신의 지혜로 알 수 없고 오직 성경말씀을 통해 또 하나님의 성령의 깨닫게 하심으로 조금 알 수 있을 뿐이다. [10-12절] 하나님이 두루 다니시며 사람을 잡아 가두시고 개정(開廷)하시면[법정을 여시면] 누가 능히 막을소냐? 하나님은 허망한 사람을 아시나니 악한 일은 상관치 않으시는 듯하나 다 보시느니라. 허망한 사람은 지각이 없나니 그 출생함이 들나귀 새끼 같으니라[들나귀 새끼가 사람으로 태어난다면, 허망한 사람이 지혜가 있으리라](NASB). 하나님께서는 주권적 섭리자이시다. 그가 하시는 일들을 아무도 막을 수 없다. 또 그는 모든 사람들의 모든 행위들, 특히 사람의 모든 악한 행위들을 보시고 판단하시고 보응하신다. 그러나 들나귀 새끼가 사람으로 태어날 수 없듯이, 허망한 사람은 지혜와 지식이 없다. [13-14절] 만일 네가 마음을 바로 정하고[가다듬고, 준비하고] 주를 향하여 손을 들 때에 네 손에 죄악이 있거든 멀리 버리라. 불의로 네 장막에 거하지 못하게 하라. 우리가 마음을 가다듬고 하나님께 우리의 소원을 아뢸 때 우리 손에 죄악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을 멀리 버려야 하고 회개해야 한다. 우리는 손을 깨끗이 해야 한다. 우리는 죄악을 멀리해야 한다. 또 우리는 죄와 불의가 우리의 장막에 거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사람은 자기 집에서부터 바르게 해야 한다. 아간은 멸망할 물건을 장막 땅 속에 묻었다가 온 가족이 멸망을 당하였다(수 7장). 아나니아 부부는 함께 하나님과 사도 베드로를 속이다가 즉사하였다(행 5장). [15절] 그리하면 네가 정녕 흠 없는 얼굴을 들게 되고 굳게 서서 두려움이 없으리니. 사람이 죄를 지으면 얼굴을 못 든다. 죄를 짓고도 얼굴을 드는 자가 있다면 그는 뻔뻔한 자이거나 위선적인 자일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죄를 멀리하고 의를 행하면 담대함을 가질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을 행하는 자는 불안함이나 두려움이 없을 것이다. 담대함의 비결은 의를 행하는 데 있다. 잠언 28:1,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니라.” 요한일서 3:21,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죄는 양심에 불안을 가져오지만, 의는 양심에 평안과 담대함을 준다. [16-17절] 곧 네 환난을 잊을 것이라. 네가 추억할지라도 물이 흘러감 같을 것이며 네 생명의 날이 대낮보다 밝으리니 어두움이 있다 할지라도 아침과 같이 될 것이요. 사람은 자신의 죄 때문에 환난을 당하는 경우가 많다. 악인에게는 평안이 없다(사 48:22). 그러나 우리가 손을 깨끗이 하고 악을 철저히 회개하면 하나님께서는 환난에서 우리를 건져주실 것이다. 우리는 곧 환난을 잊을 것이며 추억할지라도 물이 흘러감 같을 것이다. 지금 환난이 강물처럼 부닥쳐온다 할지라도, 그것은 비가 그치면 곧 말라버리는 골짜기같이 곧 지나갈 것이다. 죄를 버리고 의를 행하는 자는 평안을 얻고 행복한 삶을 누릴 것이다. 그의 생명의 날이 대낮보다 밝을 것이며 어두움이 있다 할지라도 아침과 같이 될 것이다. [18-19절] 네가 소망이 있으므로 든든할지며 두루 살펴보고 안전히 쉬리니 네가 누워도 두렵게 할 자가 없겠고 많은 사람이 네게 첨을 드리리라. ‘첨을 드린다’는 원어( 킬라 , 피엘형)는 ‘호의를 구한다’는 뜻이다. 성도는 소망이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소망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키시고 도우시며 좋은 길로 인도하신다. 성도를 두렵게 할 자가 없고 도리어 그에게 호의를 구하는 자가 많을 것이다. [20절] 그러나 악한 자는 눈이 어두워서 도망할 곳을 찾지 못하리니 그의 소망은 기운이 끊침이리라. ‘기운이 끊친다’는 말은 영혼의 호흡이 끊어진다는 뜻으로 죽는다는 말이다. 악한 자는 불경건하고 악하고 회개치 않는 자를 가리킨다. 악한 자는 눈이 어두워 재앙을 피하여 도망할 곳을 찾지 못한다. 그는 재앙을 피할 수 없고 거기에서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악인은 소망이 없다. 악인의 소망은 절망이다. 그의 소망은 기운의 끊침 곧 죽음뿐이다. 잠언 10:25, “회리바람이 지나가면 악인은 없어져도 의인은 영원한 기초 같으니라.” 잠언 24:16,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의 벌하심은 우리의 죄보다 가볍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에게 내리시는 징계는 실상 그들의 죄보다 가볍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징계를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말고 그것을 달게 받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회복을 구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을 다 알 수 없고 오직 성경에 근거하여 작은 지식을 가질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무한하시고 또 그의 하시는 모든 일들도 측량할 수 없다. 또 그는 사람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위를 정확히 다 아시고 공의로 다스리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며 그가 주신 성경을 읽고 배움으로써 하나님을 알기를 힘써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며 그에게 기도할 때 우리의 손에 죄가 없고 우리의 집에 죄가 없어야 담대함을 얻는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각과 마음과 말과 행실을 다 아시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품거나 또 우리 집에 죄가 있으면 우리의 양심을 불안하고 두렵게 하실 것이다. 넷째로, 죄는 불행과 재앙의 원인이지만, 죄를 회개하고 의와 선을 행하는 자들에게는 평안이 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모든 죄를 버리고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의와 선을 행하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환난으로부터 구원을 얻고 우리의 삶에 기쁨과 평안을 얻을 것이다. 12장: 욥–하나님께서는 악인의 형통을 허용하셨다 [1-5절] 너희만 참으로 사람이로구나. 너희가 죽으면 지혜도 죽겠구나. 나도 너희같이 총명이 있어 너희만 못하지 아니하니 그 같은 일을 누가 알지 못하겠느냐? 하나님께 불러 아뢰어 들으심을 입은 내가 이웃에게 웃음 받는 자가 되었으니 의롭고 순전한 자가 조롱거리가 되었구나. 평안한 자의 마음은 재앙을 멸시하나 재앙이 실족하는 자를 기다리는구나[편안한 자는 발이 미끄러지는 자들을 위해 준비된 재앙을 멸시하는구나](NASB). 욥은 자신의 경건과 도덕적 삶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응답을 받았음을 증거한다. 그는 자신의 의로움과 순전함을 확신한다. 그러나 그는 지금 실족하는 자같이 재앙을 당하고 있고 또 지금 친구들에게 조롱과 멸시를 받고 있다고 말한다. [6절] 강도의 장막은 형통하고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자가 평안하니 하나님이 그 손에 후히 주심이니라. 소발은 앞장에서 욥의 재앙이 그의 죄의 결과이므로 죄를 회개하라고 욥에게 말했는데, 욥은 이제 그의 권면을 반박한다. 모든 재앙이 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면 왜 강도의 장막이 형통하고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자가 평안한가라고 반문한다. 과연, 세상에는 악인이 평안하고 형통한 일들이 있다. 시편 73편도 악인의 평안과 형통에 대해 말한다.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이라.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하도다”(시 73:4-5, 12, 14). [7-8절] 이제 모든 짐승에게 물어 보라. 그것들이 네게 가르치리라. 공중의 새에게 물어 보라. 그것들이 또한 네게 고하리라. 땅에게 말하라. 네게 가르치리라. 바다의 고기도 네게 설명하리라. 욥은 악한 자들이 형통하다는 것은 자연계도 아는 진리라고 말한다. 자연계는 강한 것들이 약한 것들을 잡아먹는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세계이다. 사자와 호랑이는 약한 짐승들을 잡아먹고, 독수리나 매는 약한 새들을 잡아먹고, 상어 같은 큰 물고기들은 작은 물고기들을 잡아먹는다. 그러나 그 강한 것들은 평안한 것 같고 형통한 것 같다. [9-12절] 이것들 중에 어느 것이 여호와의 손이 이를 행하신 줄을 알지 못하랴. 생물들의 혼( 네페쉬 )[생명](NASB, NIV)과 인생들의 영( 루아크 )[호흡](KJV, NASB, NIV)이 다 그의 손에 있느니라. 입이 식물의 맛을 변별함같이 귀가 말을 분변하지 아니하느냐? 늙은 자에게는 지혜가 있고 장수하는 자에게는 명철이 있느니라. 이 모든 자연계의 현상은 하나님의 손이 행하신 것들이다. 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들, 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것들이다. 인간 세계에서 악한 자들이 활개치고 일시적으로 형통한 것도 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이며 다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일들이다. 이런 도덕적 무질서는 창조 세계의 본래의 모습은 아니다. 인간이 범죄하고 타락한 이후, 세상은 본래의 도덕성과 질서를 잃어버렸고 악화되어 이렇게 혼란스러운 세상이 된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이 있고 천국에서는 완전한 의와 질서가 있을 것이지만, 세상에서는 악인이 형통한 일들이 있다. 이것은 단지 권선징악(勸善懲惡)의 도덕 개념으로는 이해되거나 설명되지 않는다. [13-25절] 지혜와 권능이 하나님께 있고 모략과 명철도 그에게 속하였나니 그가 헐으신즉 다시 세울 수 없고 사람을 가두신즉 놓이지 못하느니라. 그가 물을 그치게 하신즉 곧 마르고 물을 내신즉 곧 땅을 뒤집나니 능력과 지혜가 그에게 있고 속은 자와 속이는 자가 다 그에게 속하였으므로[속하도다.] 모사(謀士)[고문들]를 벌거벗겨 끌어가시며 재판장으로 어리석은 자가 되게 하시며 열왕의 맨 것을 풀어[푸시며] 그들의 허리를 동이시며 제사장들을 벌거벗겨 끌어가시고 권력이 있는 자를 넘어뜨리시며 충성된 자의 말을 없이 하시며 늙은 자의 지식을 빼앗으시며 방백들에게 멸시를 쏟으시며 강한 자의 띠를 푸시며 어두운 가운데서 은밀한 것을 드러내시며 죽음의 그늘을 광명한 데로 나오게 하시며 만국을 커지게도 하시고 다시 멸하기도 하시며 열국으로 광대하게도[크게도] 하시고 다시 사로잡히게도 하시며 만민의 두목들[우두머리들]의 총명을 빼앗으시고 그들을 길 없는 거친 들로 유리하게 하시며 빛 없이 캄캄한 데를 더듬게 하시며 취한 사람같이 비틀거리게 하시느니라. 개인들의 생사화복(生死禍福)과 국가들의 흥망성쇠(興亡盛衰)는 다 지혜와 권능, 모략과 명철이 충만하신 하나님께 달려 있다. 영원하신 창조자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에서 유일하신 주권적 섭리자이시다. 그는 그가 창조하신 자연만물을 주관하시고 인간 나라를 주관하신다. 이사야 45:7,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다니엘 4:17, “인생으로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며 또 지극히 천한 자로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알게 하려 함이니라.” 또 세상에는 악인들이 형통하고 의인들이 고통 당하는 일들이 있다. 세상에는 인간의 도덕적 기준에 맞지 않는 일들이 있다. 또 세상에는 인간의 능력 밖의 일들, 즉 사람이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 그런 것들은 다 주권자 하나님의 손 안에서 되어지는 것들이다. 전도서 7:13,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욥은 자신의 경건과 도덕적인 삶을 확신하고 있다. 그러나 세상에는 악인의 형통함이 있다. 이것은 개인의 생사화복과 국가의 흥망성쇠를 홀로 다 주관하시는 주권적 섭리자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도덕적 무질서로 인해 당황하거나 낙심치 말자.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작정과 섭리를 믿고 그의 공의로운 심판도 믿자. 우리는 오직 경건하고 성경의 교훈에 절대순종하고 의롭고 선하게만 살자. 의인은 결국 승리할 것이며 악인은 결국 망할 것이다. 13장: 욥–너희는 다 쓸데없는 의원들이다 [1-12절] 나의 눈이 이것을 다 보았고 나의 귀가 이것을 듣고 통달하였느니라. 너희 아는 것을 나도 아노니 너희만 못한 내가 아니니라. 참으로 나는 전능자에게 말씀하려 하며 하나님과 변론하려 하노라. 너희는 거짓말을[거짓말로] 지어내는 자( 토펠 )[바르는 자]요 다 쓸데없는 의원이니라. 너희가 잠잠하고 잠잠하기를 원하노라. 이것이 너희의 지혜일 것이니라. 너희는 나의 변론을 들으며 내 입술의 변명을 들어 보라. 너희가 하나님을 위하여 불의를 말하려느냐? 그를 위하여 궤휼을 말하려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낯을 좇으려느냐?[그를 위해 편벽됨을 보이려느냐?](NASB, NIV) 그를 위하여 쟁론하려느냐? 하나님이 너희를 감찰하시면 좋겠느냐? 너희가 사람을 속임같이 그를 속이려느냐? 만일 가만히 낯을 좇을진대[편벽됨을 보일진대] 그가 정녕 너희를 책망하시리니 그 존귀가 너희를 두렵게 하지 않겠으며 그 위엄이 너희에게 임하지 않겠느냐? 너희 격언은 재 같은 속담이요 너희의 방어하는 것은 토성(土城)이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바르게 이해하고 파악해야 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진리를 바르게 적용해야 한다. 사람이 아무리 바른 말, 좋은 말이라도 잘못 적용하면, 그것도, 계속 잘못 적용하면, 그는 거짓말로 바르는 사람이 되고 쓸데없는 의원과 같이 될 것이다. 또 그의 말은 불의하고 거짓된 말이 되고, 남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재 같은 속담’이 되며 흙으로 쌓은 ‘토성’(土城)이 될 것이다. [13-19절] 너희는 잠잠하고 나를 버려두어 말하게 하라. 무슨 일이 임하든지 내가 당하리라. 내가 어찌하여 내 살을 내 이로 물고 내 생명을 내 손에 두겠느냐?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소망이 없노라(MT, ASV). 10)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변백[변호]하리라. 사곡한[불경건한] 자는 그의 앞에 이르지 못하나니 이것이[혹은 ‘그는’](KJV) 나의 구원이 되리라. 너희는 들으라.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설명을 너희 귀에 담을지니라. 보라, 내가 내 사정을 진술하였거니와 내가 스스로 의로운[의롭다 함을 얻을] 줄 아노라. 나와 변론할 자가 누구이랴. 그러면 내가 잠잠하고 기운이 끊어지리라. 욥은 친구들의 지적과 책망에 대하여 자신이 의롭다고 주장한다. 18절, “보라, 내가 내 사정을 진술하였거니와 내가 의롭다 함을 얻을 줄 아노라.” 그는 앞에서도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였었다. 욥기 9:21, “나는 순전하다마는.” 10:7, “주께서는 내가 악하지 않은 줄을 아시나이다.” 또 12:4에서, 그는 자신을 “의롭고 순전한 자”라고 표현하였다. 욥은 또 하나님께서 자신을 죽이실지라도 자신은 하나님을 의뢰하겠다고 말한다. 15절, “비록 그가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의뢰하리라. 그러나 나는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변호하리라.” 또 욥은 자신의 구원을 기대한다. 16절, “불경건한 자는 그의 앞에 이르지 못하나니 이것이[혹은 ‘그는] 나의 구원이 되리라.” 그는 자신이 불경건한 자가 아니며 하나님께서 그의 구원이 되시리라고 믿고 있다. [20-28절] 오직 내게 이 두 가지 일을 행하지 마옵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얼굴을 피하여 숨지 아니하오리니 곧 주의 손을 내게 대지 마옵시며 주의 위엄으로 나를 두렵게 마옵실 것이니이다. 그리하시고 주는 나를 부르소서. 내가 대답하리이다. 혹 나로 말씀하게 하옵시고 주는 내게 대답하옵소서. 나의 불법과 죄가 얼마나 많으니이까? 나의 허물과 죄를 내게 알게 하옵소서. 주께서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우시고 나를 주의 대적으로 여기시나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날리는 낙엽을 놀래시며 마른 검불을 따르시나이까? 주께서 나를 대적하사 괴로운 일들을 기록하시며 나로 나의 어렸을 때에 지은 죄를 받게 하시오며 내 발을 착고[차꼬]에 채우시며 나의 모든 길을 살피사 내 발자취를 한정하시나이다. 나는( 웨후 )[그는](KJV) 썩은 물건의 후패함 같으며 좀먹은 의복 같으니이다. 욥은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행하심을 알고 그가 그의 손을 자기에게 대어 죽게 하지 마시고 그의 위엄으로 자기를 두렵게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면서(21절) 자기에게 주신 고난의 이유를 알기를 원한다. 욥은 자신의 죄 문제를 생각한다. 그는 “나의 불법과 죄가 얼마나 많으니이까? 나의 허물과 죄를 내게 알게 하옵소서”라고 말하며(23절), 또 “주께서 나를 대적하사 괴로운 일들을 기록하시며 나로 나의 어렸을 때에 지은 죄를 받게 하시오며”라고 말한다(26절). 욥은 또한 자신의 비천함을 고백한다. 그는 자신을 ‘날리는 낙엽’과 ‘마른 검불’이라고 표현하고(25절), 자신이 ‘썩는 물건의 후패함’과 같고 ‘좀먹은 의복’ 같다고 말한다(28절). 사람은 병으로 죽음의 문앞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자신에 대한 바른 가치 평가를 한다.

욥기 13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성경을 자세히 읽고 기도 중에 묵상함으로써 바르게 해석해야 할 뿐 아니라, 또한 그것을 자신에게와 이웃에게 적절하게, 바르게 잘 적용해야 한다. 성도가 비록 진리를 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잘못 적용한다면 그는 거짓말하는 자와 같고 병도 고치지 못하는 쓸데없는 의원과 같을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자책할 것이 없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욥은 자신의 의로움을 계속 주장했다(9:21; 10:7; 12:4). 그는 평소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대로 바르고 선하게 살았음이 분명하다. 비록 그도 사람이기 때문에 실수와 부족이 없지 않았겠지만, 그때마다 그는 하나님의 긍휼과, 제사로 상징된 중보자의 의를 의지하며 회개하고 죄씻음을 받았을 것이다. 사도 바울도 자책할 것이 없는 삶을 살았다. 고린도전서 4:4,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셋째로,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고난 중에 자신을 성찰하고 우리의 죄를 살피고 자신의 비천함을 깨닫고 오직 모든 일을 하나님께 의탁하고 오래 참고 하나님 중심으로만 살아가자. 우리가 범죄치 않고 믿음으로 바르게만 살면 우리는 고난의 회복을 곧 경험할 것이다. 14장: 욥–허무한 인생을 쉬게 하소서 [1-2절] 여인에게서 난 사람은 사는 날이 적고 괴로움이 가득하며 그 발생함이 꽃과 같아서 쇠하여지고 그림자같이 신속하여서 머물지 아니하거늘. 욥은 인생의 삶이 짧다고 말한다. 여인에게서 난 사람은 사는 날이 적다. 인생은 짧다. 욥은 또한 인생의 삶이 괴로움이 가득하다고 말한다. 모세도 “우리의 연수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라고 말했다(시 90:10). 욥은 또한 인생의 삶이 꽃과 같이 쇠한다고 말한다. 이사야 40:6, 8,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며,”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욥은 또 인생의 삶이 그림자같이 신속하다고 말한다. 성경은 다른 곳들에서도 인생이 그림자와 같이 머무름이 없다고 말한다(대상 29:15; 시 39:6; 144:4). 시편 90:10,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3-4절] 이와 같은 자를 주께서 눈을 들어 살피시나이까? 나를 주의 앞으로 이끌어서 심문하시나이까?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 욥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허무한 존재인 인생을 눈을 들어 살피시며 주의 앞으로 이끌어서 심문하시는가라고 묻는다. 또 그는 인생이 다 죄로 인해 더러워진 존재이며 이런 인생에게서 어떻게 깨끗한 것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엄격히 심판하시면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깨끗한 사람이 하나도 없다. 모든 인류가 다 깨끗지 못하며 죄성을 가진 죄인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성경이 밝히 증거하는 바이다. 창세기 8:21,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레위기 12장에 의하면, 여인은 출산 후 속죄제물로 자신을 속죄해야 하였다. 그것은 인간이 죄 가운데 출생하는 죄인임을 나타낸다. 시편 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예레미야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로마서 3:10-12,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5-6절] 그 날을 정하셨고 그 달수도 주께 있으므로 그 제한을 정하여 넘어가지 못하게 하셨사온즉 그에게서 눈을 돌이켜 그로 쉬게 하사 품꾼같이 그 날을 마치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일생을 다 정하셨다. 그는 우리가 언제 태어나서 언제 죽을지를 다 정하셨다. 하나님의 정하신 그 제한된 날들 동안 우리는 세상에 살고 그 날이 끝나면 죽는다. 하나님의 정하신 그 제한을 아무도 넘어가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벨사살 왕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고 주장하셨다(단 5:23).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언제든지 그의 정하신 때에 불러가실 수 있다(눅 12:16-20). 이제 욥은 하나님께서 품꾼 같은 삶을 사는 자신에게 생이 마칠 때까지 평안 주시기를 소원한다. 평안의 삶은 세상에서 가장 복된 삶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로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였다(시 4:8).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은 참 평안을 주셨다(요 14:27).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 3:16에서,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말했다. [7-12절] 나무는 소망이 있나니 찍힐지라도 다시 움이 나서 연한 가지가 끊이지 아니하며 그 뿌리가 땅에서 늙고 줄기가 흙에서 죽을지라도 물 기운에 움이 돋고 가지가 발하여 새로 심은 것과 같거니와 사람은 죽으면 소멸되나니 그 기운이 끊어진즉 그가 어디 있느뇨? 물이 바다에서 줄어지고 하수[강]가 잦아서 마름같이 사람이 누우면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하늘이 없어지기까지 눈을 뜨지 못하며 잠을 깨지 못하느니라. 나무는 찍힐지라도 소망이 있어 다시 움이 나서 연한 가지를 내지만, 사람은 죽으면 소멸되는 것 같다. 시냇물이 말라 버림같이 사람이 죽으면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러나 신약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죽은 자들의 몸의 부활의 때가 있다. 사람은 죽고 마는 존재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에 하늘이 없어지고 잠자는 자들이 잠을 깨듯이 죽은 자들이 무덤에서 일어날 것이다(요 5:28-29). [13-15절] 주는 나를 음부[무덤]에 감추시며 주의 진노가 쉴 때까지 나를 숨기시고 나를 위하여 기한을 정하시고 나를 기억하옵소서. 사람이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 나는 나의 싸우는[고난의] 모든 날 동안을 참고 놓이기를[변화가 오기까지](KJV, NASB) 기다렸겠나이다[기다리겠나이다]. 주께서는 나를 부르셨겠고[부르시겠고] 나는 대답하였겠나이다[대답하겠나이다]. 주께서는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아껴 보셨겠나이다[사모하시리이다]. 욥은 사람의 죽음을 음미하면서도 몸의 변화의 날이 오기를 기다린다. 그것은 몸의 부활과 영생의 소망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에 가능한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의 주님이시다. [16-17절] 그러하온데[‘이는’(KJV, NASB) 혹은 ‘그러나’(ASV)] 이제 주께서 나의 걸음을 세시오니[세시오며 주는] 나의 죄를 살피지 아니하시나이까?(KJV)[살피지 아니하시나이다](NASB) 내 허물을 주머니에 봉하시고 내 죄악을 싸매시나이다. 욥은 하나님께서 내리신 고난 중에 자신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는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욥이 세상에서 걷는 걸음들 즉 그의 행위들을 다 살피시고 의와 불의, 선과 악을 판단하시고 보응하신다. [18-22절] 무너지는 산은 정녕 흩어지고 바위는 그 자리에서 옮겨가고 물은 돌을 닳게 하고 넘치는 물은 땅의 티끌을 씻어버리나이다. 이와 같이 주께서는 사람의 소망을 끊으시나이다. 주께서 사람을 영영히 이기셔서 떠나게 하시며 그의 얼굴빛을 변하게 하시고 쫓아 보내시오니 그 아들이 존귀하나 그가 알지 못하며 비천하나 그가 깨닫지 못하나이다. 오직 자기의 살이 아프고 자기의 마음이 슬플 뿐이니이다. 욥은 사람의 일생과 죽음을 묘사한다. 그것은 마치 산이 무너져 흩어지고 바위가 그 자리에서 옮겨가고 물이 돌을 닳게 하고 넘치는 물이 땅의 흙을 씻어버림 같다. 사람의 일생이 긴 것 같지만, 결국 산이 무너지고 바위가 옮겨지듯이, 무너지고 옮겨진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일을 하신다. 사람은 임종이 가까우면 얼굴빛이 변하여 창백해지고 그의 아들이 존귀하든지 비천하든지 알아 보지 못하고 자기 살이 아프고 자기 마음이 슬플 뿐이다. 사람은 그렇게 임종을 맞는다.

욥기 14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이 짧고 괴로움 많고 쇠해지고 신속히 가는 삶 속에서 영원하신 하나님을 알고 영원한 천국을 얻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거기에 인생의 참 가치가 있다. 둘째로, 모든 사람은 더러운 죄인이다. 죄는 사람들의 불행의 근본 원인이며 죄 문제의 해결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밖에 없다. 사람의 죄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주 예수님의 보혈로만 씻음 받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공로를 감사하자. 셋째로, 사람의 일생은 하나님의 작정하신 길임을 알고 죽음을 염려하지 말고 날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힘써 일하고 또 하나님의 평안을 누리자. 우리는 죽을 때 죽을 것이지만, 그때까지 충성해야 한다. 넷째로, 사람은 죽지만, 장차 몸의 부활이 있고 영생이 있다. 욥은 자신의 변화의 날, 곧 몸의 부활의 날을 소망한다. 신약성경은 우리의 몸의 변화의 날 곧 몸의 부활의 날을 밝히 증거한다. 고린도전서 15:42-44, 51-52,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우리는 사도신경의 고백대로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는다. 예수께서는 부활의 첫열매가 되셨다. 15장: 엘리바스–악인은 일평생 고통을 당한다 1-16절, 가증하고 부패한 인생 [1-6절]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대답하여 가로되 지혜로운 자가 어찌 헛된 지식으로 대답하겠느냐? 어찌 동풍으로 그 품에 채우겠느냐? 어찌 유조(有助)치 아니한[도움이 되지 않는] 이야기, 무익한 말로 변론하겠느냐? 참으로 네가 하나님 경외하는 일을 폐하여 하나님 앞에 묵도(黙禱)하기를 그치게 하는구나. 네 죄악이 네 입을 가르치나니 네가 간사한 자의 혀를 택하였구나. 너를 정죄한 것은 내가 아니요 네 입이라. 네 입술이 너를 쳐서 증거하느니라. 엘리바스는 욥에 대해 여러 말로 잘못된 비난을 쏟아내었다. 그는 욥의 말이 ‘헛된 지식,’ ‘무익한 말,’ ‘불경건한 말,’ ‘간사한 자의 혀’라고 비난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이 죄의 형벌을 받는 것이라고 말했고 욥은 자신의 고난이 어떤 특정한 죄 때문이 아니라고 변호했던 것인데, 엘리바스는 계속 욥을 정당하지 않게, 그릇되이 비난한 것이다. 참된 성도도 친구들에게 이런 오해를 당할 수 있다. 욥의 고통은 경제적, 가정적, 신체적 고통뿐 아니라, 친구들의 비난까지 겹친 것이었다. 그러나 모든 고난이 어떤 특정한 죄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욥기에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요 욥기의 중심적 교훈이다. 우리는 친구에게 바른 조언을 주어야지 잘못된 조언을 주거나 그를 함부로 정죄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경우에 맞는 말을 해야 한다(잠 25:11). 또 잘 알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불확실한 주관적 판단을 하지 말고 하나님의 완전한 판단에 맡기는 것이 옳다(고전 4:5). [7-10절] 네가 제일 처음 난 사람이냐? 산들이 있기 전에 네가 출생하였느냐? 하나님의 모의(謀議)[은밀한 회의](NASB)를 네가 들었느냐? 지혜를 홀로 가졌느냐? 너의 아는 것이 무엇이기로 우리가 알지 못하겠느냐? 너의 깨달은 것이 무엇이기로 우리에게는 없겠느냐? 우리 중에는 머리가 세기도 하고 연로하기도 하여 네 부친보다 나이 많은 자가 있느니라. 엘리바스는 욥의 확고한 지식과 신념에 대해 반박하면서 그 친구들 가운데는 나이 많은 자도 있고 심지어 욥의 부친보다 나이 많은 자가 있으며 나이 많은 자들은 젊은 자보다 지혜와 지식이 더 많은 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는 옳은 말이다. 레위기 19:32는, “너는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라”고 말했다. 욥도 “늙은 자에게는 지혜가 있고 장수하는 자에게는 명철이 있느니라”고 말했다(욥 12:12). 르호보암은 그 부친 솔로몬의 생전에 그 앞에 모셨던 노인들의 조언하는 바를 버리고 그와 함께 자라난 소년들의 조언을 따라 포학한 말로 백성에게 대답하며 행함으로 이스라엘 왕국의 분열을 초래하였다(왕상 12:6-20). 그러나 진리의 지식과 바른 판단력은 반드시 연령에 비례하지는 않는다. 시편 119:100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지키는 자가 노인보다 더 명철하다고 말했다. 주께서는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라고 기도하셨다(마 11:25). 예수님 당시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은 나이가 많고 세상 경험도 많은 자들이었지만, 그 심령이 무지하고 완고하고 부패하였으며 하나님의 아들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였다. [11-13절] 하나님의 위로와 네게 온유하게 하시는 말씀을 네가 어찌 작다 하느냐? 어찌하여 네가 마음에 끌리며 네 눈을 번쩍여 네 영으로 하나님을 반대하고 네 입으로 말들을 내느냐? ‘하나님의 위로와 네게 온유하게 말씀하시는 말씀’은, 친구들이 욥에게 한 충고들, 즉 그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 엘리바스는 자기들의 충고를 하나님의 위로와 온유한 말씀이라고 말하며 욥이 왜 그것들을 무시하느냐고 꾸짖는다. 그러나 사실상 욥의 친구들의 충고들은 하나님의 위로나 온유한 말씀이 아니었다. 또 ‘네 눈을 번쩍여’라는 표현은 불쾌하고 적대적인 마음을 눈으로 표현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는 욥이 그런 눈빛을 하면서 그의 영으로 하나님을 반대하고 그의 입으로 말들을 낸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상 욥은 하나님을 대적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고난의 이유를 알지 못하여 괴로워하고 친구들의 잘못된 조언 때문에 마음이 상하였던 것뿐이다. 욥의 말은 친구들을 반대한 것이지 하나님께 대항하는 것은 아니었다. 엘리바스가 욥의 말들을 하나님을 반대하고 대적하는 불경건한 말로 이해한 것은 큰 잘못이었다. 사람은 하나님의 진리를 바르게 알지 못하거나 상대방의 마음을 바르게 알지 못할 때 이런 실수를 하게 되고 상대방을 잘못 평가하거나 정죄하게 된다. 다윗은 그를 대적하는 악한 자들이 종일 그의 말을 곡해하였다고 말했었다(시 56:5). 또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고 하셨다(요 16:2). [14-16절] 사람이 무엇이관대 깨끗하겠느냐? 여인에게서 난 자가 무엇이관대 의롭겠느냐? 하나님은 그 거룩한 자들을 믿지 아니하시나니 하늘이라도 그의 보시기에 부정(不淨)하거든 하물며 악을 짓기를 물마심같이 하는 가증하고 부패한 사람이겠느냐? 엘리바스는 사람이 깨끗하지 못하며 악을 짓기를 물마심같이 하는 가증하고 부패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수아 사람 빌닷도 그와 비슷하게 욥기 25:4-6에 말하기를,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부녀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 하나님의 눈에는 달이라도 명랑치 못하고 별도 깨끗지 못하거든 하물며 벌레인 사람, 구더기인 인생이랴”고 하였다. 사람은 그 죄성과 그 결과로 인한 심한 비천함과 불행을 볼 때 가히 벌레와 구더기에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의 전적 부패성은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의 실패에서, 또 사사시대의 반복된 범죄에서, 또 구약의 이스라엘 왕국의 멸망에서 밝히 증거된 진리이다. 특히 선지자 예레미야는 사람의 마음이 만물보다 심히 부패했고 선을 행하기에 무능함을 증거하였다(렘 17:9; 13:23). 욥은 절대적 의미에서 자신이 깨끗하고 의롭다고 말한 것이 아니었다. 욥은 자신의 죄악됨에 대해 욥기 14:4에서,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라고 분명히 말했다. 욥이 자신을 의롭다고 말한 것은 단지 자신이 하나님 앞에 큰 벌을 받을 만한 어떤 특정한 죄가 없다는 것을 뜻하였다. 평소에 욥은 하나님 앞에서 양심적으로나 이성적으로 거리낄 것이 없었다. 엘리바스가 증거한 사람의 부패성은 진리이지만, 그가 그것을 욥에게 적용하려 한 것은 무리하였고 적절치 않았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친구들에게 바른 조언을 주는 자가 되자. 엘리바스는 욥의 다른 친구들과 같이 욥에 대해 잘못된 비난을 쏟아내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나 남에 관해 잘 알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맡기자. 또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낙심치 말자. 둘째로, 우리는 평소에 노인들을 공경하고 그들의 조언을 존중해야 하지만, 그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귀히 여기고 열심히 읽고 연구하고 묵상하고 지키자. 노인들은 보통 오랜 삶의 경험 속에서 상당한 지혜와 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항상 올바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셋째로, 우리는 바른 성경 지식과 이웃에 대한 진실한 사랑을 가지고, 또 오직 사실에 근거하여 사람과 사물을 바르게 이해하고 판단하자. 또 그런 판단에 근거해서 친구들에게 바른 조언을 주는 자가 되어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사람의 전적 부패성과 무능력을 알자. 사람은 깨끗지 못하며 물마심같이 악을 행하며 가증하고 부패한 존재이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다(렘 17:9).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택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께 늘 감사하며 충성하자. 17-35절, 악인은 일평생 고통을 당함 [17-19절] 내가 네게 보이리니 나를 들으라. 내가 본 것을 설명하리라. 이는 곧 지혜로운 자들이 그 열조에게서 받아 숨기지 아니하고 전하여 온 것이라. 이 땅은 그들에게만 주셨으므로 외인은 그들 중에 왕래하지 못하였었느니라. 엘리바스는 지혜자들이 그 열조로부터 받아 숨기지 않고 전해준 것, 곧 사람의 전통적 지혜의 말을 욥에게 말하고자 한다. “이 땅은 그들에게만 주셨으므로 외인은 그들 중에 왕래하지 못하였었느니라”는 말은 그 열조들의 지혜가 외부의 것과 섞이지 않고 순수하게 보존되고 전달되어졌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전통은 완전하지 못하다. 그것은 좋은 것도 있으나 좋지 않은 것도 있다. 심지어 교회적 전통도 그러하다. 교회 역사는 교회의 부패를 증거한다. 예수님 당시에도, 바리새인들은 떡 먹을 때에 손을 씻는 장로들의 유전을 지켰으나 부모 공경에 대한 하나님의 계명은 소홀히 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그들은 주의 제자들이 떡 먹을 때 손을 씻지 않는다고 그들을 비난하였다. 그때 주께서는 책망하시듯이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거늘 너희는 가로되 누구든지 아비에게나 어미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마 15:3-6). [20-24절] 그 말에 이르기를 악인은 그 일평생에 고통을 당하며( 미스콜렐 )[고통으로 몸을 뒤틀며] 강포자의 햇수는 작정 되었으므로( 니츠페누 )[혹은 ‘저장되었으므로’] 그 귀에는 놀라운( 페카딤 )[두려움의, 두려운 일들의](KJV, NASB, NIV) 소리가 들리고 그 형통할 때에 멸망시키는 자가 그에게 임하리니 그가 어두운 데서 나오기를 바라지 못하고[자신이 어두운 데서 나오리라고 믿지 못하고] 칼날의 기다림이 되느니라. 그는 유리하며 식물을 구하여[양식을 위해 방황하며] 이르기를 어디 있느냐 하며 흑암한 날이 가까운 줄을 스스로 아느니라. 환난과 고통이 그를 두렵게 하며 싸움을 준비한 왕처럼 그를 쳐서 이기리니. 엘리바스가 전하는 열조들의 지혜의 말은 악인이 일평생 고통을 당한다는 것이다. 악인은 일평생 고통으로 몸을 뒤틀며 강포자는 그 죽음의 날이 언제 찾아올지 모르나 다 작정되어 있다. 악인의 귀에는 두려운 일들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린다. 그는 형통할 때에 멸망시키는 자가 그에게 임할 것이다. 악인은 자신이 그 환난에서 회복될 것이라고 믿지 못하며 칼날을 기다리다가 죽음을 맞을 것이다. 또 그는 양식이 부족하여 그것을 얻으려 방황하며 재앙의 날이 가깝다는 것을 안다. 환난과 고통은 그를 두렵게 하고 싸움을 준비한 왕처럼 그를 이길 것이다. 악인에게 질병, 기근, 전쟁 등 육체적, 경제적, 사회적 재앙이 있다는 것은 레위기 26장과 신명기 28장에 기록된 하나님의 진리이며 하나님의 공의의 원리이다. 잠언 10:24, “악인에게는 그의 두려워하는 것이 임하거니와.” 악인들에게는 평안이 없다(사 48:22; 57:21). 단지, 이 진리가 욥의 경우에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뿐이다. [25-27절] 이는 그 손을 들어 하나님을 대적하며 교만하여 전능자를 배반함이니라. 그는 목을 굳게 하고 두터운 방패로 하나님을 치려고 달려가나니 그 얼굴에는 살이 찌고 허리에는 기름이 엉기었고. 본문은 악인이 고통을 당하는 이유를 말한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을 향하여 그 손을 들며 전능자를 향해 거만하게 행하기 때문이다. ‘교만하여 배반한다’는 원문( 이스갑바르 )은 ‘거만하게 행한다’는 뜻이다 (BDB, NASB) . 고의적 불경건은 대단히 큰 죄악이다. 하나님께서는 의와 선의 근거이시며 이유이시다. 모든 죄는 불경건에서 나온다.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악을 떠난다(잠 16:6). 그러나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그 대신 자기 자신을 높이고 의지하며 거기에서 모든 죄가 나온다. 사람이 창조주이시며 전능자이신 하나님을 대적하다니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본문은 또 악인이 목을 굳게 하며 자기 방어물로 무장하며 하나님을 향해 달려들듯이 대적한다고 표현한다. 27절은 악인이 거만하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까닭을 말한다. “[이는](원문) 그 얼굴에는 살이 찌고 허리에는 기름이 엉기었음이니라.” 악인이 거만하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은 그가 몸이 건강하고 물질적 여유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사람이 몸이 아프고 물질적 어려움이 있으면 겸손히 하나님을 찾지만, 몸이 건강하고 물질적 여유가 있으면 자기 만족에 빠지고 영적으로 둔해지고 죄에 대한 감각이 무디어져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리에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창조자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일이다. [28-30절] 그는 황무한 성읍, 사람이 살지 아니하는 집, 돌무더기가 될 곳에 거하였음이니라[거하는도다]. 그는 부요하지 못하고 재산이 항상 있지 못하며 그 산업( 민람 ) 11) 이 땅에서 증식하지 못할 것이며 흑암한 데를 떠나지 못하리니 불꽃이 그 가지를 말릴 것이라. 하나님의 입김에 그가 떠나리라. ‘흑암한 데’는 환난과 재앙을 가리키며, ‘불꽃’은 하나님의 진노의 불꽃을 가리키며, ‘가지’는 사람의 자녀들이나 그가 벌여놓은 일들을 가리킬 것이다. 엘리바스는 악인의 보응에 대해 말한다. 악인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황무한 성읍, 사람이 살지 않는 집, 돌무더기가 될 곳에 거할 것이다. 그가 사는 도시와 성읍이 황폐할 것을 말한다. 또 악인은 비록 지금 부요함을 누리고 상당한 재산과 소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그것이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그의 부요함은 끝나고 그의 재산은 항상 있지 못하며 그의 소득도 땅에서 쇠하여질 것이다. 즉 그의 경제적 유여함이 끝나고 궁핍이 찾아올 것이라는 뜻이다. 악인은 환난과 재앙을 떠나지 못하며 그것이 항상 그를 따라다닐 것이다. 또 하나님의 진노의 불꽃은 그의 자녀들이나 그가 벌여놓은 일들을 쇠잔케 할 것이다. 그리고 악인은 마침내 하나님의 입김, 곧 그의 진노의 입김으로 멸망하고 말 것이다. 악인의 보응은 확실하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율법에서 말씀하신 바이다. 그것은 또한 사람이 양심으로 느끼는 바이며 또 삶 속에서 때때로 경험하는 바이다. [ 31-35절] 그는 스스로 속아 허망한 것을 믿지 말 것은 허망한 것이 그의 보응이 될 것임이라. 그의 날이 이르기 전에 그 일이 이룰 것인즉 그 가지가 푸르지 못하리니 포도열매가 익기 전에 떨어짐 같고 감람 꽃이 곧 떨어짐 같으리라. 사곡한( 카네프 )[불경건한] 무리는 결실이 없고 뇌물을 받는 자의 장막은 불탈 것이라. 그들은 악한 생각을 배고 불의( 아웬 )[헛된 것]를 낳으며 마음에 궤휼[거짓]을 예비한다 하였느니라. 엘리바스는 계속 악인의 보응에 대해 말한다. 본문은 악인이 스스로 속아 허망한 것을 믿다가 허망한 결과를 당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가 가졌다고 생각한 것은 결국 다 공허해질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과 징벌이다. 만일 그가 처음부터 그것의 헛됨을 깨달았다면 그는 세상 것들에 대한 생각과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과 영원한 천국과 영생을 크게 여기며 사모하였을 것이다. 악인은 ‘그의 날’ 곧 그의 번창하고 성공하는 날이 이르기 전에 ‘그 일’ 곧 하나님의 공의의 보응을 받게 될 것이다. 그의 자녀들이나 그가 벌여놓은 일들은 잘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마치 포도나무에서 익지 않은 열매가 떨어지는 것 같고 감람나무에서 감람 꽃이 떨어지는 것 같을 것이다. 악인은 잘되는 것 같다가 멸망할 것이다. 악인들은 불경건하고 뇌물을 받는 자들인데 결실이 없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선하고 복된 열매를 맺지 못한다. 또 그들의 장막, 그들의 집과 가정은 불탈 것이다. 그들은 악한 생각을 마음에 품고 헛된 것을 행하며 또 거짓된 것을 마음에 준비할 뿐이다. 의인과 악인의 삶은 판연히 다르고, 악인은 공의의 보응을 받을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사람의 전통들은 완전치 못하다. 심지어 교회의 전통도 완전치 못하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정확무오한 유일의 규칙은 오직 신구약성경뿐이다. 하나님의 말씀만 완전하다(시 19:7-8).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의 전통이나 교회의 전통을 너무 중시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오직 성경말씀만 굳게 지켜야 한다(살후 2:15). 둘째로, 악인은 일평생 고통을 당한다. 악인에게는 질병, 기근, 전쟁 등 육체적, 경제적, 사회적 재앙이 있다. 악인에게는 평안이 없다. 구원받은 우리는 악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을 알고 악인에게 고통과 두려운 일이 따름을 알고, 모든 악을 버리고 의와 선만 구하며 행해야 한다. 셋째로, 악인이 고통을 당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향해 교만하게 행하며 목을 굳게 하고 하나님을 대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만하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교만과 거만을 버리고 자신이 피조물이며 늘 부족한 존재임을 인식하고 오직 겸손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과 교훈을 힘써 배우며 실천해야 한다. 넷째로, 악인은 스스로 속아 허망한 것을 믿다가 허망한 결과를 당하며 그의 거처하는 곳은 황폐해지고 그의 경제적 유여함도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악인은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과 보응을 받을 것이며 그와 그의 가족과 그의 산업은 쇠잔해지고 멸망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악인의 심판받음과 그의 환경적, 경제적 환난과 재앙을 알고, 그의 현재의 일시적 형통을 부러워하거나 불평하거나 낙심하거나 위축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이 세상의 것들에 큰 가치를 두지 말고 모든 욕심과 악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과 영원한 천국과 영생에 큰 가치를 두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만 살아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평안과 형통을 누릴 것이며 장차 천국에 넉넉히 들어갈 것이다. 16장: 욥–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다 [1-3절] 욥이 대답하여 가로되 이런 말은 내가 많이 들었나니 너희는 다 번뇌케 하는( 아말 )[고통을 주는] 안위자로구나. 허망한 말이 어찌 끝이 있으랴. 네가 무엇에 격동되어 이같이 대답하는고. 욥은 친구들이 ‘[그를] 번뇌케 하는 혹은 고통을 주는 안위자’라고 표현한다. 그의 친구들은 고난이 죄의 형벌이라는 생각만 가지고 그 생각을 욥에게 줄곧 적용하였다. 그들의 충고는 욥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고 도리어 고통을 더하였다. 죄에 대한 징벌은 하나님의 진리이지만, 욥의 고난은 단순히 신앙 인격의 성숙을 위한 것이었다. [4-5절] 나도 너희처럼 말할 수 있나니 가령 너희 마음이 내 마음 자리에 있다 하자. 나도 말을 지어 너희를 치며 너희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 수 있느니라. 그래도 입으로 너희를 강하게 하며 입술의 위로로 너희의 근심을 풀었으리라( 카사크 )[덜었으리라](KJV, NASB, NIV). 욥은 만일 친구들이 자기 같은 처지에 있다면, 자기도 그들을 비난하며 책망하며 그들을 향해 머리를 흔들며 그들을 멸시할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욥은 자신이 그렇게 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가상적으로 말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때에도 자신은 입으로 그들을 위로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사랑은 우리가 우리의 고난 당하는 형제나 이웃을 위로하는 것이다. [6절] 내가 말하여도 내 근심이 풀리지 아니하나니 잠잠한들 어찌 평안하랴. 사람이 잠잠히 있는 것보다 다른 사람들과 말하는 것이 보통 그의 마음의 근심을 푸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문제의 해결이 없이 그의 근심을 완전히 없애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욥은 심각한 고난 중에서 친구들에게 말해도 평안을 얻지 못하고 있다고 고백한다. [7절] 이제 주께서 나를 곤고케 하시고 나의 무리를 패괴케 하셨나이다. ‘나의 무리’라는 원어( 아다시 )는 욥의 가족들과 종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 (BDB, NIV) . ‘패괴케’라는 말은 ‘황폐케’라는 뜻이다.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곤고케 하셨고 자기 가족들을 황폐케 하셨다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믿고 있었다. [8절] 주께서 나를 시들게 하셨으니 이는 나를 향하여 증거를 삼으심이라. 나의 파리한 모양이 일어나서 대면하여 나의 죄를 증거하나이다. 욥은 자신이 심신으로 쇠잔케 된 것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말하며 그의 파리한 모습이 그를 대적하여 증거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그가 고난 중에 자신의 죄를 생각하게 된다는 뜻일 것이다. 원문에는 ‘나의 죄’라는 말은 없다 (KJV, NASB, NIV) . 우리는 욥처럼 고난 중에 “내게 무슨 죄가 있는가?” 하고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9-14절] 그는 진노하사 나를 찢고 군박(窘迫)하시며 나를 향하여 이를 갈고 대적이 되어 뾰족한 눈으로 나를 보시고 욥은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마치 사나운 짐승처럼 그를 찢으시며 대적하신다고 말한다. ‘군박하다’는 원어( 사탐 )는 ‘대적하다’는 뜻이다. 또 욥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향해 이를 가시고 뾰족한 눈으로 보신다고 말한다. 뾰족한 눈은 동정 대신 미움의 마음을 나타낸다. [10-11절] 무리들은 나를 향하여 입을 벌리며 나를 천대하여 뺨을 치며 함께 모여 나를 대적하는구나. 하나님이 나를 경건치 않은 자에게 붙이시며 악인의 손에 던지셨구나. ‘입을 벌린다’는 말은 남을 비난한다는 뜻일 것이다. 그의 친구들은 그를 위문하기 위해 와서는 그를 혹독하게 비난했다. 그들은 차라리 오지 않았으면 더 나았다. 이웃 사람들도 그를 천대하여 뺨을 치며 함께 모여 그를 대적했다. 욥은 또 하나님께서 그를 경건치 않은 자에게 붙이시며 악인의 손에 던지셨다고 말한다. 그것은 욥의 소들과 나귀들과 약대들을 탈취해간 이웃 나라 백성들을 가리킨다고 보인다. [12-14절] 내가 평안하더니 그가 나를 꺾으시며 내 목을 잡아던져 나를 부숴뜨리시며 나를 세워 과녁을 삼으시고 그 살( 라브 )[궁수]로 나를 사방으로 쏘아 인정 없이 내 허리를 뚫고 내 쓸개로 땅에 흘러나오게 하시는구나. 그가 나를 꺾고 다시 꺾고 용사같이 내게 달려드시니. 욥은 평안히 지냈던 자신에게 닥친 이 혹독한 고난이 주권적 섭리자이신 하나님께서 그에게 내리신 것임을 확실하게 증거한다. [15절] 내가 굵은 베를 꿰어매어 내 피부에 덮고 내 뿔을 티끌에 더럽혔구나. 굵은 베는 꺼칠하고 감촉이 좋지 않다. 구약 성도들은 금식할 때 보통 굵은 베옷을 입었다. 욥이 굵은 베옷을 입은 것은 그의 고통과 탄식을 나타낸다. 또 욥은 자신의 뿔, 곧 힘이 티끌에 더럽혔다고 말한다. 욥은 힘도 없었고 존영도 잃어버렸고 그의 명예도 더러워졌다. [16절] 내 얼굴은 울음으로 붉었고 내 눈꺼풀에는 죽음의 그늘이 있구나. 사람이 마음의 고통이 심해 많이 울 때 그의 얼굴도 붉게 상기된다. 또 욥은 자기의 눈꺼풀에는 죽음의 그늘이 있다고 표현한다. 그것은 그가 많이 울어 그 눈이 쇠해졌고 그의 기력도 쇠하여 곧 죽을 사람처럼 눈꺼풀이 감기게 되었다는 뜻일 것이다. [17절] 그러나 내 손에는 포학( 카마스 )[‘강포, 악행’]이 없고[내 손에 악행이 없음에도 불구하고](Gesenius) 나의 기도는 정결하니라. 앞에서도 여러 번 말했지만, 욥은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도, 자신이 악하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또 그는 나의 기도는 정결하다고 말한다. 그는 고난 중에도 기도를 쉬지 않았다. 그는 계속하여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그가 기도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믿음을 증거한다. 믿음이 없는 자는 하나님께 기도하지 못한다. 또 욥은 정결한 기도 즉 거짓과 위선의 말로가 아니고 진실과 진심의 말로 한 기도를 하였다. [18절] 땅아, 내 피를 가리우지 말라. 나의 부르짖음으로 쉴 곳이 없게 되기를 원하노라. 욥은 자신이 남의 피를 흘린 잘못이 있다면 그것을 감추지 않기를 원한다. 또 그는 그의 부르짖음으로 쉴 곳이 없게 되기를 원한다. 그는 고난 중에 낙심치 않고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 기도하였다. [19절] 지금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 나의 보인이 높은데 계시니라. ‘보인(保人)’[변호자] (KJV, NASB, NIV) 이라는 원어( 사헤드 )는 ‘증인’( 에드 )과 동의어이다 (BDB) . 욥은 하나님의 감동 가운데 하늘에 계신 그의 변호자가 그를 위해 증거하실 것이라고 말한다. [20-22절] 나의 친구는 나를 조롱하나 내 눈은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고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와 인자와 그 이웃 사이에 변백하시기를 원하노니 수년이 지나면 나는 돌아오지 못할 길로 갈 것임이니라. 욥의 친구들은 그를 조롱하고 있으나 욥은 낙망치 않고 하나님을 바라며 눈물로 호소한다. “하나님, 저의 중심을 살피시고 제가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살고 바르고 선하게 살고자 애쓴 것을 증거하여 주옵소서.” 욥은 죽기 전에 하나님의 바른 판단을 받기를 원한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친구를 번뇌케 하고 그에게 고통을 주는 위로자가 되지 말고, 바른 말로 충고하고 권면하되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가지고 참된 위로로 위로하는 자가 되자. 둘째로, 우리는 고난 중에 욥처럼 하나님께서 주권적 섭리자이심을 믿고 우리에게 고난의 현실을 주신 이도 하나님이시요 그것을 거두실 이도 하나님이심을 알고 인내하며 하나님만 바라며 의지하며 살자. 셋째로, 우리는 평소에 불의와 강포와 악행을 버리고 하나님의 계명과 교훈대로 정직하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고 또 까닭 없이 당하는 고난 중에 낙망치 말고 인내하며 계속 진실한 기도를 하나님께 올리자. 넷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계신 우리의 증인이시며 변호자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때로 사람의 오해와 비난 속에서도 오직 하나님께서 아시고 판단하실 것을 믿고 그에게만 의탁하며 호소하자. 17장: 욥–의인은 그 길을 독실히 행함 [1절] 나의 기운이 쇠하였으며 나의 날이 다하였고 무덤이 나를 위하여 예비되었구나. 욥은 기운이 쇠했고 살날이 다했고 무덤에 들어갈 일만 남았다고 말한다. 중한 병에 걸린 자들이 겪는 심적 과정일 것이다. [2절] 나를 조롱하는 자들이 오히려 나와 함께 있으므로 내 눈이 그들의 격동함을 항상 보는구나. 그를 조롱하는 자들이 그와 함께 있고 그의 눈이 그들의 격동함을 항상 보는 것은 그를 더욱 피곤하고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3절] 청컨대 보증물을 주시고 친히 나의 보주(保主)가 되옵소서. 주 외에 나로 더불어 손을 칠 자[나를 보증할 자]가 누구리이까? 욥은 심신의 고통 속에서 오직 하나님께서 그의 보증자가 되셔서 보증물을 주실 것을 기도한다. 자신이 죄 때문에 고난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거해 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이다. [4절] 주께서 그들의 마음을 가리워 깨닫지 못하게 하셨사오니 그들을 높이지 아니하시리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친구들의 마음에 아직 깨달음을 주지 않으셨다. [5절] 친구를 지적하여 해를 받게 한 자의 자식들은 눈이 멀지니라. 본절은 “친구들에게 아첨의 말을 하는 자의 자식들은 눈이 쇠할 것이라”는 뜻이든지 (KJV), “자기 소득을 위해 친구들을 비난하는 자와 그의 자식들은 눈이 쇠할 것이라”는 뜻일 것이다 (NASB). [6절] 하나님이 나로 백성의 이야깃거리가 되게 하시니 그들이 내 얼굴에 침을 뱉는구나. 건강하고 부요할 때는 그 앞에 친근히 하고 그를 무시하지 못하던 사람도 그가 재산과 자녀와 건강을 잃으니 그를 떠나가고 그를 비웃고 그를 멸시하는 것은 흔히 세상에서 볼 수 있는 일일 것이다. [7절] 내 눈은 근심으로 하여 어두워지고 나의 온 지체는 그림자 같구나. 그의 온 지체가 그림자 같다는 말은 그의 사지백체가 쇠해져서 그의 어두어진 눈으로 보기에 그림자같이 희미하다는 뜻이거나, 그의 몸이 쇠해져서 그림자같이 죽어 없어질 것 같다는 뜻일 것이다. [8절] 정직자는 이를 인하여 놀라고 무죄자는 사곡한 자[불경건한 자] (NASB, NIV)를 인하여 분을 내나니. 욥은 자신을 정직자와 무죄자로 표현하고 그를 비방하는 자들을 불경건한 자로 표현하며, 자신이 그들로 인해 분을 낸다고 말한다. [9절] 그러므로[그러나 nevertheless](NASB, NIV) 의인은 그 길을 독실히 행하고[굳게 붙들고] 손이 깨끗한 자는 점점 힘을 얻느니라. 욥은 자신의 고난의 현실을 인해 놀라고 친구들의 공박에 대해 화와 분이 나지만, 자신을 ‘의인’과 ‘손이 깨끗한 자’라고 말하면서 스스로 자신의 길을 굳게 붙들기를 원하며 점점 힘을 얻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참된 성도들에게 큰 위로가 된다. [10-11절] 너희는 다 다시 올지니라. 내가 너희 중에서 지혜자를 찾을 수 없느니라. 나의 날이 지나갔고 내 경영, 내 마음의 사모하는 바( 모라쉐 )[품은 생각]가 다 끊어졌구나. 욥은 친구들이 다 무지하다고 말한다. 또 그는 자신의 날이 지나갔으며 그의 계획과 마음에 품은 생각이 다 끊어졌다고 말한다. 그가 계획하고 그 마음에 생각했던 바는 그의 건강과 행복 등을 포함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 모든 것들이 다 끊어졌다. 그는 이제 자신이 오직 죽음 앞에 서 있음을 느끼고 있다. [12절] 그들은 밤으로 낮을 삼고 빛이 어두운 데 가깝다[어두움 앞에서 빛이 가깝다](NASB, NIV) 하는구나. ‘그들’이라는 말은 악인들을 가리키든지 (NIV) 아니면 그가 마음에 생각했던 바(‘그것들’)를 가리킬 것이다 (Amplified Bible) . 후자라면, 내 마음에 품은 생각들이 밤부터 낮까지 계속된다는 뜻일 것이다. 그런 뜻이라면, 후반부의 ‘어두움’은 심적 고통을 가리킬 것이다. [13-15절] 내 소망이 음부로 내 집을 삼음에 있어서 침상을 흑암에 베풀고 무덤더러 너는 내 아비라, 구더기더러 너는 내 어미, 내 자매라 할진대 나의 소망이 어디 있으며 나의 소망을 누가 보겠느냐? 흙 속에서 쉴 때에는 소망이 음부 문으로 내려갈 뿐이니라. 욥은 이제 죽음을 생각할 뿐이다. 그렇다면, 죽음만 생각하게 되는 자에게 무슨 소망이 있겠는가? 사람의 소망이 죽음으로 다 깨어지는 것이 아닌가? 고난 가운데 있는 욥의 심정과 심리는 절망적이었다.

욥기 17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욥은 고난 중에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았다. 그는 참으며 하나님만 바라보았기 때문에 그에게 호소하였다. 우리는 고난 중에 참고 하나님만 바라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문제들의 해답이시다. 고난 받는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과 인내이다. 주께서는 그의 재림 전에 있을 대환난 시대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셨고(마 24:11-13), 요한계시록은 대환난 때에 성도들에게 필요한 덕이 인내와 믿음이라고 교훈하였다(계 13:10). 둘째로, 욥은 의인이 그 길을 독실히 행한다고 말했다. 참된 성도는 때때로 이유 없는 고난에 떨어지고 그런 현실 때문에 놀라고, 또 그를 오해하고 비방하는 자들로 인해 마음이 상하고 화가 날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는 그때에도 자기 길을 굳게 붙들고 바르게만 살아야 한다. 셋째로, 욥은 인간적으로 매우 절망적인 상태에 있었다. 죽음의 문 앞에 선 인생에게 무슨 소망이 있겠는가? 그런 자를 위로할 말이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죽은 자의 부활과 영생의 복된 소망을 주셨다. 사람에게 참 소망은 하나님께서 주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천국과 부활과 영생뿐이다. 18장: 빌닷–악인의 빛은 꺼진다 [1-2절] 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여 가로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말을 찾겠느냐? 깨달으라. 그 후에야 우리가 말하리라. 빌닷이 욥에 대해 ‘너희’라고 말하지만, 그가 말하는 대상은 욥이다. “말을 찾는다”는 원어( 키네츠 )는 “말에 올무를 놓는다”는 뜻이다 (BDB, NASB) . 빌닷은 욥이 친구들의 말에 올무를 놓는다고 비난한다. 그는 욥에게 심지어 “깨달으라”고까지 말하며 그를 무지한 자로 몰아댄다. 그러나 그는 욥에게 바르게 말한 것이 아니었다. [3절] 어찌하여 우리를 짐승으로 여기며 부정(不淨)하게 보느냐? ‘부정(不淨)하게 본다’는 원어( 타마 )는 ‘부정(不淨)하게 여긴다’ (KJV) 는 뜻도 있으나, ‘어리석게 여긴다’(게세니우스, BDB, NASB, NIV )는 뜻이 더 적절해 보인다. 욥은 친구들에 대해 17:4에서 “주께서 그들의 마음을 가리어 깨닫지 못하게 하셨다”고 말했었다. [4절] 너 분하여 스스로 찢는 자야, 너를 위하여 땅이 버림을 당하겠느냐? 바위가 그 자리에서 옮기겠느냐? “너 분하여 스스로 찢는 자”라는 원문은 “자신의 분노 중에 자신을 찢는 자”라는 뜻이라고 보인다 (KJV) . 사람들은 하나님의 공의의 섭리에 불평하고 대항하여 분노를 품고 자신을 찢고 상하게 만든다. 애굽에서 나왔던 이스라엘 선조들은 광야에서 항상 하나님을 향해 불평하고 원망하며 멸망을 자초하였다(민 11:1; 14:1-3; 20:4; 21:5). 물론 그것은 욥의 경우에는 적절치 않았다. “너를 위하여 땅이 버림을 당하겠느냐? 바위가 그 자리에서 옮기겠느냐?”는 말은 하나님의 공의가 불변적이라는 뜻이라고 보인다. [5-6절] 악인의 빛은 꺼지고 그 불꽃은 빛나지 않을 것이요 그 장막 안의 빛은 어두워지고 그 위의 등불은 꺼질 것이요. 빛과 불꽃은 기쁨과 행복을 가리킬 것이다. 악인의 기쁨과 행복은 사라질 것이다. 그의 가정의 기쁨과 행복도 사라질 것이다. 잠언 13:9는 “의인의 빛은 환하게 빛나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느니라”고 말했고, 잠언 24:20도 “대저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고 말했다. 악인의 기쁨과 행복은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7절] 그 강한 걸음이 곤하여지고 그 베푼 꾀에 스스로 빠질 것이니. 악인들은 일시적으로는 그 걸음이 강한 것 같고 그의 베푸는 꾀가 형통하게 될 것 같아 보이지만, 그의 강한 걸음은 곧 곤하여지고 그는 자기가 베푼 꾀에 스스로 빠질 것이다. [8-10절] 이는 그 발이 스스로 그물에 들어가고 얽는 줄을 밟음이며 그 발뒤꿈치는 창애에 치이고 그 몸은 올무에 얽힐 것이며 그를 동일 줄이 땅에 숨겼고 그를 빠뜨릴 함정이 길에 베풀렸으며. 악인이 스스로 망하는 까닭은 그의 발이 스스로 자기가 만든 그물에 들어가고 올무의 줄을 밟기 때문이다. 빌닷은 그를 동여맬 줄이 땅에 숨겨 있고 그를 빠뜨릴 함정이 길에 베풀려 있다고 말한다. 악인은 자기의 올무에 자기가 걸린다. 모르드개를 달아 죽이려고 자기 집 뜰에 높은 장대를 만들었던 하만은 자신이 거기에 달려 죽임을 당하였다(에 7장). 또 다니엘을 모함해 사자굴에 던져 죽게 하려 했던 동료들은 그 처자들과 함께 사자굴에 던지워 죽었다(단 6장). [11-12절] 무서운 것이 사방에서 그를 놀래고 그 뒤를 쫓아 올 것이며 그 힘은 기근을 인하여 쇠하고 그 곁에는 재앙이 기다릴 것이며. 악인에게는 도적이나 강도나 무서운 짐승이나 무서운 질병과 큰 사고 같은 무서운 것이 임하여 사방에서 그를 놀래며 그 뒤를 쫓아올 것이다. 잠언 10:24는, “악인에게는 그의 두려워하는 것이 임하거니와”라고 말한다. 악인의 힘은 기근으로 쇠해질 것이며 그의 곁에는 무서운 재앙이 기다릴 것이다. [13절] 그의 백체가 먹히리니 곧 사망의 장자가 그 지체를 먹을 것이며. “그의 백체가 먹히리니”라는 원문은 “그것이 그의 피부의 부분들을 먹으리니”라는 뜻이다 (MT, NIV) . 원문에서 ‘그것’은 그에게 임한 재앙을 말할 것이다. 재앙이 그의 피부의 부분들을 해할 것이며 마침내 그는 죽음에 이르게 될 것이다. [14절] 그가 그 의뢰하던 장막에서 뽑혀서 무서움의 왕에게로 잡혀가고. 그 의뢰하던 장막에서 뽑힌다는 말은 가족들의 안정을 잃어버린다는 뜻이며, 또 ‘무서움의 왕’에게 잡혀간다는 말은 평안을 잃고 극한 두려움에 떨어진다는 뜻이라고 보인다. [15-16절] 그에게 속하지 않은 자가 그 장막에 거하리니 유황이 그 처소에 뿌려질 것이며 아래서는 그 뿌리가 마르고 위에서는 그 가지가 찍힐 것이며. “그에게 속하지 않은 자가 그 장막에 거한다”는 원문은 “그에게 속한 것은 아무것도 그의 장막에 거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든지 (BDB, NASB) , 혹은 “그것[무서움의 왕]이 그 장막에 거하므로 그것이 더 이상 자기 것이 아니리라”는 뜻일 것이다(게세니우스). 유황이 그 처소에 뿌려질 것이라는 말은 그 집이 완전히 불태워지고 완전히 멸망할 것이라는 뜻이라고 본다. 악인은 그와 그 가정이 일시적으로 번창하는 것 같아도 결국 자신도, 그의 자녀들도 다 멸망할 것이다. [17절] 그의 기념[기억]이 땅에서 없어지고 그의 이름이 거리에서 전함이 없을 것이며. 의인들의 기억은 세상에 오래 남고 후세의 사람들에게 전해지지만, 악인들의 기억은 땅에서 빠르게 사라지고 그의 이름은 거리에서 다른 사람에게 전함도 없을 것이다. 멸망의 예(例)로 경계를 삼는 것 외에는, 아무도 그를 기억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18-19절] 그는 광명 중에서[광명에서] 흑암으로 몰려 들어가며 세상에서 쫓겨날 것이며 악인들은 세상에서 일시적으로 기쁨과 행복을 누리지만 곧 불행 속으로 몰려 들어가며 또 세상에서도 쫓겨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심판 전까지 세상을 적어도 양심 있는 자들에 의해 어느 정도 유지되게 하실 것이며, 악인들이 세상에서 쫓겨나게 하실 것이다. [19절] 그는 그 백성 가운데서 아들도 없고 손자[자손]도 없을 것이며 그의 거하던 곳에는 한 사람도 남은 자가 없을 것이라. 악인은 대를 이을 자들이 없을 것이며 또 그가 부요하였을 때 그의 집에 머물었거나 드나들던 많은 사람들도 다 그를 떠날 것이다. [20-21절] 그의 날을 인하여 뒤에 오는 자가 앞선 자의 두려워하던 것 같이 놀라리라. 불의한 자의 집이 이러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의 처소도 그러하니라. 건강하고 부요하고 행복했던 자가 어떻게 그렇게 완전히 망할 수 있는지 이전 사람들도, 후대 사람들도 놀랄 것이다. 이와 같이, 불의하고 악한 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는 자기 자신만 망할 뿐 아니라 또한 그의 집과 가정도, 가족들까지도 멸망할 것이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믿음 없고 무지한 자처럼 하나님의 섭리에 불평하거나 대항하지 말고 그의 섭리를 항상 긍정하고 순응하자. 사람은 하나님의 섭리의 온전함을 다 이해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모든 섭리는 지극히 지혜로우시고 공의로우시며 선하시다. 둘째로, 악인들은 일시적으로 강하고 형통한 것 같으나, 그들의 빛은 꺼지고 그들의 기쁨과 행복은 곧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하게 살지 말고 오직 경건하고 선하고 진실하게만 살아야 한다. 셋째로,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고(사 48:22) 질병, 사고 등의 무서운 것들이 임할 것이다. 그러므로 악인들은 악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하고, 의인들은 주 안에서 바르고 선하게만 살아야 한다. 넷째로,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시다. 우리 모두는 그것을 기억하고 모든 종류의 악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고 선을 행해야 한다. 19장: 욥–나의 구속자가 살아계시다 [1-6절] 욥이 대답하여 가로되 너희가 내 마음을 번뇌케 하며 말로 꺾기를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너희가 열 번이나 나를 꾸짖고 나를 학대하고도 부끄러워 아니하는구나. 내가 과연 허물이 있었다 할지라도 그 허물이 내게만 있는 것이니 너희가 참으로 나를 향하여 자긍하며 내게 수치될 행위가 있다고 증명하려면 하려니와 하나님이 나를 굴하게 하시고 자기 그물로 나를 에워싸신 줄은 알아야 할지니라. 우리는 바른 충고라도 한두 번 한 후 그가 그것을 듣지 않으면 더 이상 할 것이 없을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 아닌 사람은 없겠으나 욥은 사람 앞에서는 지적받을 잘못을 한 적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의롭게 살려고 애쓴 자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고난을 주셨고 욥은 친구들이 그 사실을 바르게 알기를 원한다. [7-12절] 내가 포학[해]을 당한다고 부르짖으나 응답이 없고 간구할지라도 신원함[판단받음]이 없구나. 그가 내 길을 막아 지나지 못하게 하시고 내 첩경에 흑암을 두셨으며 나의 영광을 벗기시며 나의 면류관을 머리에서 취하시고 사면으로 나를 헐으시니 나는 죽었구나[갔구나]. 내 소망을 나무 뽑듯 뽑으시고 나를 향하여 진노하시고 원수같이 보시는구나. 그 군대가 일제히 나아와서 길을 수축하고 나를 치며 내 장막을 둘러 진쳤구나.” 욥은 하나님께서 그의 부르짖음을 듣지 않으셨고 공의로 판단치 않으시고 그를 향해 진노하시며 그에게 큰 재앙을 내리셨다고 말한다. 그는 이제 자신이 죽은 자와 같고 소망이 없다고 말한다. [13-17절] 나의 형제들로 나를 멀리 떠나게 하시니 나를 아는 모든 사람이 내게 외인이 되었구나. 내 친척은 나를 버리며 가까운 친구는 나를 잊었구나. 내 집에 우거한 자와 내 계집종들은 나를 외인으로 여기니 내가 그들 앞에서 타국 사람이 되었구나. 내가 내 종을 불러도 대답지 아니하니 내 입으로 그에게 청하여야 하겠구나. 내 숨을 내 아내가 싫어하며 내 동포들도 혐의하는구나[내 형제들에게도 싫어함을 받는구나](BDB, NASB, NIV). 하나님께서는 욥의 형제들과 친지들과 가까운 친구들로 그를 멀리 떠나게 하시고 그의 집에 우거한 자들과 그의 종들과 여종들까지도 그를 무시하고 박대하며 또 그의 숨결을 그의 아내와 그의 형제들도 싫어하게 하셨다. 욥은 고통에 더하여 이런 무시와 따돌림을 당했다. [18-22절] 어린아이들이라도 나를 업신여기고 내가 일어나면 나를 조롱하는구나. 나의 가까운 친구들이 나를 미워하며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돌이켜 나의 대적이 되었구나. 내 피부와 살이 뼈에 붙었고 남은 것은 겨우 잇꺼풀뿐이로구나. 나의 친구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기라. 나를 불쌍히 여기라.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구나.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처럼 나를 핍박하느냐? 내 살을 먹고도 부족하냐? 어린아이들도 그를 업신여겼고 그를 조롱하였고 그의 가까운 친구들은 그를 미워하며 그의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의 대적이 되었다. 그는 피부와 살이 뼈에 붙었고 남은 것은 겨우 잇꺼풀뿐이었다. 욥은 하나님의 손이 그를 치셨다고 말하면서 친구들에게 하나님처럼 그를 핍박하거나 비난하지 말고 그를 불쌍히 여기라고 말한다. 까닭 없이 고난받는 친구에게 필요한 것은 불쌍히 여김과 위로의 말이다. [23-24절] 나의 말이 곧 기록되었으면, 책에 씌어졌으면, 철필과 연으로 영영히 돌에 새겨졌으면 좋겠노라. 욥은 족장시대의 사람으로 추정되는데, 그의 시대에 글자와 기록하는 방법이 있었고 책이 있었고 돌에 새기는 일이 있었음을 보인다. 욥의 소원대로 그의 일들은 자세히 욥기라는 책에 기록되었다. [25절]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救贖者)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이것은, 욥의 구속자(救贖者)시요 우리의 구주이신 메시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생활하실 것을 증거하는 놀라운 예언의 말씀이다. 이것은 성령의 감동으로 주신 참으로 놀라운 지식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으로 성취되었다. 요한복음 1:14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도 메시아의 오심에 대한 사실을 알게 하셨다. [26절]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육체 밖에서’라는 원어( 밋베사리 )는 ‘내 육체로부터’(from my flesh) (NASB) , ‘내 육체로’(in my flesh) (KJV, NIV) , 혹은 ‘내 육체 밖에서’(apart from flesh)( BDB, NIV 난외주) 등으로 번역할 수 있다. ‘내 육체로’ ‘내 육체로부터’는 아마 ‘부활하여’라는 뜻을 내포할 것이다. 그것은 부활 신앙과 부활 소망을 보인다. ‘내 육체 밖에서’는 ‘영으로’라는 뜻일 것이다. 즉 이 구절은 욥이 죽어 그의 몸이 썩는다 할지라도, 장차 부활하여 성육신하신 하나님, 신적 메시아를 볼 것이라는 뜻이든지, 영으로 하나님이신 그를 볼 것이라는 뜻일 것이다. [27절] 내가 친히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급하구나.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않는다”는 말은 “다른 사람이 아니고 내 눈이 보리라”는 뜻이라고 본다 (KJV, NASB, NIV) . 욥은 자기를 구원하실 구주의 살아계심을 확신한다. 또 “내 마음이 초급하다( 칼라 )”는 원문은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쇠하다”는 뜻이다 (BDB, KJV, NASB) . 욥은 자기 눈이 메시아를 볼 것을 확신한다. 그러나 그는 또한 지금 마음의 쇠약함이 있음을 고백한다. [28절] 너희가 만일 이르기를 우리가 그를 어떻게 칠꼬 하며 또 이르기를 일의 뿌리가 그에게 있다 할진대. 원문에는 ‘그에게’라는 말이 ‘나에게’( 비 י������ )라고 되어 있으나 그것은 말하는 욥의 입장에서 표현된 것이라고 본다. 또 ‘일’은 친구들의 비난이나 욥의 고난을 가리킬 것이다. 친구들은 욥을 비난하고 공박하고 있다. 그들은 그들의 비난의 근원이나 욥의 고난의 원인이 욥 자신에게 있다고 말하는 것일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들의 비난이 욥의 잘못 때문, 즉 욥이 자신을 의롭다고 여기기 때문이라는 뜻이거나, 욥이 자기의 잘못 때문에 고난을 받는다는 뜻일 것이다. [29절] 너희는 칼을 두려워할지니라. 분노는 칼의 형벌을 부르나니 너희가 심판이 있는 줄을 알게 되리라. 욥은 친구들의 비난이 하나님 앞에서 잘못이며 하나님의 분노와 심판을 피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의 분노를 ‘칼’ 혹은 ‘칼의 형벌’이라고 표현한다. 그는 친구들이 하나님의 분노와 심판을 두려워해야 하며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고쳐야 한다고 암시한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성도는 때때로 이유를 알지 못하는 고난을 당하지만, 낙심치 말고 끝까지 하나님만 의지하고 참고 기다리며 바르게만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섭리는 의롭고 선하기 때문이다. 둘째로, 성도는 그의 친했던 친구들이나 심지어 그의 가족들이 그를 무시하고 멀리하는 절망적 고난 중에서도 그 고난이 하나님께로부터 왔고 그것을 극복하는 길도 하나님께 있음을 알고 또 사람에게 가치를 두지 말고 하나님께만 두고 그를 의지하고 참고 기다려야 한다. 셋째로, 욥의 구속자(救贖者)이시며 우리의 구속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구속(救贖)을 이루셨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고 40일 만에 승천하셔서 지금도 살아 계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히 13:8). 그는 지금도 살아 계셔서 그가 구속하신 자들을 위해 중보하신다. 로마서 8:34,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우리는 우리를 죄와 죽음과 지옥 불못에서 건지시는 하나님의 구원과, 예수께서 우리의 구속자이심을 확신해야 하고, 오직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믿고 그것만 두려워하고 범사에 의와 선을 행해야 한다. 20장: 소발–악인은 하나님의 벌을 받는다 [1-5절] 나아마 사람 소발이 대답하여 가로되 그러므로 내 생각이 내게 대답하나니 이는 내 중심이 초급함이니라. 내가 나를 부끄럽게 하는 책망을 들었으므로 나의 슬기로운[깨닫는] 마음이 내게 대답하는구나. 네가 알지 못하느냐? 예로부터 사람이 이 세상에 있어 옴으로 악인의 이기는 자랑도 잠시요 사곡한( 카네프 )[불경건한] 자의 즐거움도 잠깐이니라. 소발은 욥의 말이 자기를 부끄럽게 하는 책망의 말로 들리지만, 그의 깨닫는 마음으로 그에게 대답하겠다고 말한다. 그는 옛날부터 이 세상에 내려오는 진리를 말한다. 그것은 악인의 이기는 자랑이 잠시이며 불경건한 자의 즐거움도 잠깐이라는 진리이다. 악하고 불경건한 자들이 일시적으로 이기는 것 같고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는 것 같으나 그들의 결말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6-9절] 그 높기가 하늘에 닿고 그 머리가 구름에 미칠지라도 자기의 똥처럼 영원히 망할 것이라. 그를 본 자가 이르기를 그가 어디 있느냐 하리라. 그는 꿈같이 지나가니 다시 찾을 수 없을 것이요 밤에 보이던 환상처럼 쫓겨가리니 그를 본 눈이 다시 그를 보지 못할 것이요 그의 처소도 다시 그를 보지 못할 것이며. 악인은 일시적으로 그 지위가 심히 높아져서 하늘에 닿고 구름에 미칠지라도 마침내 자기의 똥처럼 영원히 망할 것이며, 꿈같이 지나가므로 그를 본 자들이 그를 찾을지라도 볼 수 없을 것이다. [10-11절] 그의 자녀들이 가난한 자에게 은혜를 구하겠고 그도 얻은 재물을 자기 손으로 도로 줄 것이며 그 기골[뼈들]이 청년같이 강장하나 그 기세가 그와 함께 흙에 누우리라. 악인의 자녀들은 궁핍해져서 가난한 자에게 은혜를 구할 것이며 그 자신도 자기가 번 재물을 자기 손으로 도로 돌려줄 것이며 그가 한때 육체적으로 강건했으나 그 강건함과 기운도 쇠잔해질 것이다. [12-16절] 그는 비록 악을 달게 여겨 혀 밑에 감추며 아껴서 버리지 아니하고 입에 물고 있을지라도 그 식물이 창자 속에서 변하며 뱃속에서 독사의 쓸개가 되느니라. 그가 재물을 삼켰을지라도 다시 토할 것은 하나님이 그 배에서 도로 나오게 하심이니 그가 독사의 독을 빨며 뱀의 혀에 죽을 것이라. 악인의 악은 자기에게 독이 될 것이다. 그가 비록 악을 달게 여겨 혀 밑에 감추며 아껴서 버리지 않고 입에 물고 있을지라도 그 식물이 창자 속에서 변하며 뱃속에서 독사의 쓸개와 같이 쓰게 되고 독이 될 것이다. 그가 재물을 삼켰을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배에서 도로 나오게 하심으로 다시 토할 것이다. 악인의 악은 결국 자신에게 독이 되어 그를 죽게 만들 것이다. 이웃을 미워함이나 속임이나 도적질하거나 탈취하는 것 등이 다 그러할 것이다. [17-19절] 그는 강 곧 꿀과 엉긴 젖이 흐르는 강을 보지 못할 것이요 수고하여 얻은 것을 도로 주고 삼키지 못할 것이며 매매하여 얻은 재물로 즐거워하지 못하리니 이는 그가 가난한 자를 학대하고 버림이요 자기가 세우지 않은 집을 빼앗음이니라. 악인은 물질적 복을 누리지 못하며 ‘꿀과 엉긴 젖[뻐터나 크림]이 흐르는 강’ 즉 복된 환경(출 3:8; 신 32:13-14)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는 자기가 수고하여 얻은 것을 도로 주고 자신이 먹고 즐기지 못할 것이며, 매매하여 얻은 재물도 자기에게 즐거움과 행복이 되지 못할 것이다. 악인이 망하는 이유는, 가난한 자를 학대하고 버리는 일이나 자기가 세우지 않은 집을 빼앗은 일 등의 악행 때문이다. [20-21절] 그는 마음에 족한 줄을 알지 못하니[편안함이 없으며] 그 기뻐하는 것[원하는 것]을 하나도 보존치(혹은 [재앙으로부터] 건지지) 못하겠고 남긴 것이 없이 몰수히 먹으니 그런즉 그 형통함이 오래지 못할 것이라. 악인은 편안함이 없고 그 원하는 것을 재앙으로부터 건지지 못하겠고 먹을것도 남지 않고 그의 형통함이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22-23절] 풍족할 때에도 곤액[재난]이 이르리니 모든 고통하는 자의 손이 그에게 닿으리라. 그가 배를 불리려 할 때에 하나님이 맹렬한 진노를 내리시리니 밥 먹을 때에 그의 위에 비같이 쏟으시리라. 악인은 풍족함을 누릴 때 갑자기 재난들이 닥치며 모든 고통하는 자들도 손을 펴 그에게서 무엇을 취하려 할 것이다. 또 그가 배불리 먹으려 할 때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가 비처럼 그에게 내릴 것이다. [24-25절] 그가 철 병기를 피할 때에는 놋활이 쏘아 꿸 것이요 몸에서 그 살을 빼어 낸즉 번쩍번쩍하는 촉이 그 쓸개에서 나오고 큰 두려움이 그에게 임하느니라. 악인은 하나님의 재앙을 피할 수 없고, 그 재앙은 그에게 치명적이며 큰 두려움이 될 것이다. 그 재앙으로 그는 죽음에 이를 것이다. [26-29절] 모든 캄캄한 것이 그의 보물을 위하여 쌓이고 사람이 피우지 않은 불이 그를 멸하며 그 장막에 남은 것을 사르리라. 하늘이 그의 죄악을 드러낼 것이요 땅이 일어나 그를 칠 것인즉 그 가산(家産)이 패하여 하나님의 진노하시는 날에 흘러가리니 이는 악인이 하나님께 받을 분깃이요 하나님이 그에게 정하신 산업이니라. 악인에게는 절망적 어두움이 임하며 하나님의 불이 그를 멸하며 하늘과 땅이 그의 죄악을 드러내며 그와 그의 가산을 없앨 것이다.

욥기 20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악인은 일시적으로만 형통하여 자랑도 하고 즐거움도 누린다. 우리는 일시적인 세상의 형통과 영광이나 육신적 즐거움을 구하지 말고 또 부러워하지도 말아야 한다. 둘째로, 악인은 불의하게 재물을 모으며 가난한 자를 학대한다. 우리는 돈에 종이 되거나 돈을 사랑하지 말고 특히 불의하게 얻는 소득을 좋아하지 말고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고 구제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셋째로,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은 공의롭고 철저할 것이다. 악인에게는 평안과 형통이 없을 것이다. 악인의 악행은 매우 공의롭고 철저한 벌을 받을 것이다. 우리는 모든 악을 버리고 선만 행해야 한다. 21장: 욥–어찌하여 악인이 형통한가? [1-7절] 욥이 대답하여 가로되 너희는 내 말을 자세히 들으라. 이것이 너희의 위로가 될 것이니라. 나를 용납하여 말하게 하라. 내가 말한 후에 또 조롱할지니라. 나의 원망이 사람을 향하여 하는 것이냐? 내가 어찌 초급(焦急)[조급]하지 아니하겠느냐? 너희는 나를 보아라, 놀라라, 손으로 입을 가리우라. 내가 추억하기만 하여도 답답하고 두려움이 내 몸을 잡는구나. 어찌하여 악인이 살고 수(壽)[장수]를 누리고 세력이 강하냐? 하나님의 공의에 비추어 보면, 악인은 죽어야 하고 단명(短命)해야 하고 세력이 소멸되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즉시 시행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최종적으로는 시행될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섭리는 반드시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다 알지 못한다. 어떤 때는, 아니, 빈번하게 악인이 건강하게, 오랫동안 살고 그 세력도 강하다. 하나님께서 악인의 심판을 지연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로,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와 오래 참으심 때문이다. 둘째로, 그것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셔서 마지막 심판 때에 불평할 수 없게 하시기 위함이다(롬 2:4). 셋째로, 그것은 악인을 다른 사람의 심판과 징계의 도구나 최종심판을 이루시는 도구로 사용하시기 위함이다. 잠언 16:4,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그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도 심판의 도구로 쓰셨다. 그러나 악인들은 마침내 멸망할 것이다. [8절] 씨가 그들의 앞에서 그들과 함께 굳게 서고 자손이 그들의 목전에서 그러하구나. 악인들은 그 자녀들이 번창하고 성공하는 경우가 있다. 오늘날 말로 하면, 그들은 좋은 학교에 진학하고 좋은 직장에 취직한다. [9절] 그 집이 평안하여 두려움이 없고 하나님의 매가 그 위에 임하지 아니하며. 악인에게 가정적 평안이 있고 하나님의 징벌이 없는 경우도 있다. 욥은 욥기 12:6에서도 “강도의 장막은 형통하고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자가 평안하니 하나님이 그 손에 후히 주심이니라”고 말하였다. [10절] 그 수소는 영락 없이 새끼를 배게 하고 그 암소는 새끼를 낳고 낙태하지 않는구나. 목축업은 옛날 근동 거주민들의 주업이었다. 가축의 출산은 기업 번창의 주된 요소이었다. 본문은 악인의 기업이 쇠하지 않고 번창하는 것을 말한다. 오늘날 말로 하면, 그들이 매월 타는 봉급이 증가하고 그들이 경영하는 기업의 순이익이 증가하는 것을 말한다. [11절] 그들은 아이들을 내어보냄이 양떼 같고 그 자녀들은 춤추는구나. 악인들은 자녀들을 많이 출산하여 잘 기르며 그들의 자녀들에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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