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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KERS WORSHIP
마커스 목요예배 실황 [19.10.31]–
\” 오직 믿음으로 \”
–
| Worship Leader 소진영 |
| Inst. |
Piano 권미성 | Aux Keys 박찬민
E.Guitar 임선호 | B.Guitar 정진웅 | Drums 김다니엘
| Vocal |
Sop 김진영 김민지 | Alto 박은미 이예지 | Tenor 김이환 박이레
| FOH Engineer 박유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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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예배 안내 / 초청사역 문의 / 재정후원 신청
마커스워십。 www.markersworshi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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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ship at 맑은샘광천교회 www.kwangchun.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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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일의 설교]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롬1:16∼17)
바울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선언합니다. 이 구절은 하박국 2장 4절을 인용한 말씀으로 의인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이요 …
Source: www.kidok.com
Date Published: 4/25/2022
View: 5063
통합검색 – 다국어 성경 Holy-Bible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번역비교] [유사말씀].
Source: www.holybible.or.kr
Date Published: 10/8/2021
View: 7790
[오늘의 설교]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 국민일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Source: m.kmib.co.kr
Date Published: 11/20/2021
View: 6806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4, 롬1:16-17, 갈3장 …
말씀 :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600여 년 전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강포하고. 분쟁과 패역이 가득하여 제 …
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7/13/2022
View: 1280
히브리서 10:38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KRV: 개역한글.
Source: www.bible.com
Date Published: 5/17/2021
View: 7560
[칼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 Korea Times
신약성경에 3번이나 인용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합 2:4) -. 바울이 두 번,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인용 했고, 히브리 저자도 한번 인용 …
Source: chicagokoreatimes.com
Date Published: 4/13/2021
View: 8914
신학자료 –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우리의 구원은 행위가 아니라 은혜로 얻는 것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약속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가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
Source: researchheresy.com
Date Published: 2/15/2021
View: 915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 성구 명상 < 성경 ...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고 하박국은 말합니다. 구약성경에서 의롭다는 말은 어떤 관계의 요구를 이루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
Source: www.kcjlogos.org
Date Published: 10/16/2021
View: 2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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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
- Author: MARKERS WORSH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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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19. 11. 27.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CPtcTV3xEMU
[이 주일의 설교]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롬1:16∼17)
하나님 주신 위대한 은혜의 선물 ‘믿음’으로 살아갑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이원태 목사(안동옥동교회)
안동에는 고택이 많습니다.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고택이 안동에 있는 임청각입니다. 임청각은 1519년 조선 중종 때 ‘이명’이라는 사람이 낙동강가에 건립한 건물로 99칸으로 된 양반집입니다. 북으로는 산을 등지고, 남으로 강을 향한 풍경이 너무 좋아 조선시대 수많은 묵객들이 찾았습니다. 보물 제182호로 지정된 임청각은 안채, 사랑채, 행랑채는 물론 별당, 사당, 정원을 갖춘 전형적인 상류주택으로 500년의 세월을 지켜오고 있습니다.
또한 임청각은 고성 이씨 종택이자, 우리나라 독립운동을 대표하는 명소입니다. 이곳에서 독립운동가 10명이 나왔습니다. 임시정부 첫 국무령을 지낸 석주(石州) 이상룡(1858∼1932) 선생의 생가로도 유명합니다. 일제강점기에 이곳에서 나라를 찾고자 항거했던 독립운동가들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짧은 인생, 하루에도 숱한 갈림길 앞에 서지만, 언제나 주님께 방향을 맞추어 살아내야 합니다. 21세기 첨단시대를 살아가면서도 인간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사람은 어디서 와서 무엇 때문에 살다가 어디로 가는가?”
아무리 과학이 발달하고 철학적으로 고민해도 이 질문에 시원한 대답을 주는 것은 오직 성경뿐입니다. 오직 성경만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를 명확하게 대답해줍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셨습니다(창 1:27). 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은 자들입니다(엡 2:1). 우리는 죄 아래 팔린 자들입니다(롬 7:14).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입니다(엡 2:3). 이러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요 14:6). 예수님이 세상의 구원자이십니다.
올해는 종교개혁 503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중세의 교회는 역사상 가장 강력한 힘을 가졌습니다. 교황의 힘은 세상의 왕보다 강력했으며, 거의 모든 사람은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그러나 교회 역사가들은 중세시대를 어둠의 시대, 암흑시대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가장 부패했던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베드로 성당을 짓기 위해 면죄부까지 판매함으로써 예수님의 십자가를 모독했습니다.
루터 당시의 교황 레오10세는 100년 동안 끌어오던 베드로 성당의 완공을 위해 1506년부터 속죄권 판매를 재개하여 막대한 공사비를 충당하게 했습니다. 판매의 촉진을 위해 판매수익의 반액은 지방 감독이 차지하고, 판매 책임자는 판매량에 따라 보상을 받게 하고 나머지는 교황청으로 보내도록 했습니다. “속죄권을 사는 사람은 즉시 죄의 용서를 받을 것이요, 연옥에 있는 자를 위해 속죄권을 사면, 그 은화가 헌금함 속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그 순간에 천국으로 올라가게 된다”고 선전했습니다. 사람들은 속죄권을 사기 위해 줄을 섰으며, 중세교회는 극도로 부패하기 시작합니다.
이 얼마나 비성경적인 모습입니까? 그러므로 16세기 종교개혁은 교회가 성경의 가르침대로 돌아가야 한다는 데서 출발합니다. 마르틴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로마가톨릭의 타락하고 부패한 모습을 보고 비텐베르크의 성곽 교회인 슐로스키르헤 문(門)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이면서 개혁은 시작됐습니다.
본문의 말씀은 로마서 전체의 핵심 구절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압축하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분명하게 고백합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말씀은 중세시대 종교개혁의 불씨가 되었던 말씀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바울신학의 핵심으로 로마서에 8번 나옵니다. 그런데 로마서에서 ‘의’라는 명사가 단독으로 쓰이는 경우는 33번이나 됩니다.
히브리인들에게 ‘의’라는 개념은 ‘관계적 개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의의 개념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사용될 때도 관계적 개념으로 적용됩니다. 바울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라고 말합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의가 성도의 믿음에 있어서 시작에서 완성까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어거스틴은 이 믿음에 대하여 “그리스도를 만나 고백하는 믿음”이라고 말하고, 칼빈은 “복음을 받아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는 초보적인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선언합니다. 이 구절은 하박국 2장 4절을 인용한 말씀으로 의인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이요, 또한 믿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여기 ‘살리라’는 단어는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사용된 ‘영생’이라는 표현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결국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은 영생의 삶이 영원히 존속됨을 말씀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위대함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복음의 위대함을 가르쳐줍니다. 우리는 복음의 위대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복음의 위대함을 깨달은 우리는 종교개혁의 정신을 이어가야 합니다. 중세시대에 성경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리적 타락과 윤리적 부패를 보면서 외쳤던 그 외침이 오늘 나의 가슴에도 살아 있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을 어떻게 실천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첫째, 오직 성경(Sola Scriptura)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평생 붙들고 살아야 할 신앙은 성경입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진행하면서 가장 힘쓴 것이 성경의 번역이었습니다. 라틴어를 독일어로 번역하여 누구든지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리하여 성경 말씀에 기초한 신앙생활이 가능하도록 했습니다. 루터의 고백입니다. “나의 신앙은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에 사로잡힌 포로이다.” 링컨도 이런 고백을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오직 성경에 기초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로 살아야 합니다. 종교개혁 503주년을 맞이하면서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소망이요, 생명이심을 온전히 믿어야 합니다. 베드로의 신앙이 나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찬송가 288장 가사처럼 “나 사는 동안 끊임없이 구주를 찬송하리로다” 오직 그리스도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 오직 은혜(Sola Gratia)로 살아야 합니다. ‘은혜’라고 하는 것은 자격 없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말합니다. 십자가 구원보다 더 큰 은혜가 있을까요? 우리가 연약할 때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이 은혜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일상이 날마다 새로워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넷째, 오직 믿음(Sola Fide)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영생을 얻는 것은 우리의 행위나 지식이나 물질로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선물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 평생을 오직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섯째, 오직 주만 영광 받으심(Soli Deo Gloria)으로 살아야 합니다. 성도의 즐거움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 돌림에 있습니다.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웨스트민스터 소요리 1문답)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오직 주만 영광 받으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중세 어둠의 시대에도 개혁자들은 오직 복음을 외쳤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 오직 그리스도로(Solus Christus), 오직 은혜로(Sola Gratia),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오직 주만 영광 받으심으로(Soli Deo Gloria) 살아가는 영적인 지도자와 그리스도인들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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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설교]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먼저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주님을 주님이라고 시인하며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힘쓰길 바랍니다. 우리가 모두 주님 안에서 부족함 없는 삶을 누리길 소망합니다.구약에는 이런 대목이 등장합니다. 우선 선지자가 묵시의 경고를 받은 하박국 2장 4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아울러 로마서 1장 17절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자, 그렇다면 지금은 어떤 시대일까요. 창세기 1장 2절 말씀이 떠오릅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창세기 말씀처럼 지금은 많은 이가 깊은 어둠 속을 헤매고 있는 시기입니다. 현재 세계 인구는 78억명 정도로 추산됩니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문명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이가 수두룩합니다. 먹을 양식과 오염되지 않은 물을 구할 수 없는 사람도 많습니다.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해 세상을 등지는 이도 적지 않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코로나19 탓에 수많은 사람이 고통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왜 이런 세상을 살아야 하는 걸까요. 답은 성경에서 찾아야 합니다.아모스 8장 11절에는 이런 말씀이 등장합니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이런 말씀은 하늘의 양식인 예수 그리스도의 영과 그가 남긴 말씀의 가치를 사람들이 허투루 여기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기회주의에 매몰돼 입으로만 주님을 외치는 세태를 경고하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우리는 모두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분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죽은 자들 속에서 주님과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해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보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이런 고백을 통한 영적 각성이 시급한 시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만 의지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주님은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방식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 6:9~13)아버지 하나님께 이 기도를 드려야 되는 때라고 생각합니다. 빌립보서 2장 5절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리고 이어지는 빌립보서 2장 8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십자가에서 죽은 뒤 부활하신 예수님을 영접한 이들은 깨달은 바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깨달은 지혜를 얻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끌어주겠노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깊은 어둠을 말씀의 빛으로 밝혀나가야 할 것입니다.유진각 목사(열린교회)◇열린교회는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소속으로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며 말씀 중심의 목회를 실천하고 있는 교회다. 개척한 지 2년 6개월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복음 확장을 위해 힘쓰고 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4, 롬1:16-17, 갈3장, 히10:38)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4, 롬1:16-17, 갈3장, 히10:38)
2014.06.15 오후예배
준비찬양 예수 이름으로
보혈을 지나
멈출 수 없네
그 사랑 얼마나 (또는 여기에 모인 우리)
찬양이 언제나 넘치면
하나님의 사랑을 사모하는 자
성경봉독 하박국 2:4
특송 79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말씀선포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찬송 369 죄짐 맡은 우리 구주
주기도문
말씀 :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600여 년 전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강포하고
분쟁과 패역이 가득하여 제 멋대로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고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를 올리면, 자신들이 할 바를
다한다고 생각했지요.
이런 죄악 속에 있는 남 유다를 보고 여기 하박국 선지자는 합1:2-3 보면
내가 (그렇게) 부르짖어도 듣지 아니하시니 “주여,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라고
원망 섞인 어조로 ‘어찌하여 나로 하여금 이 시대에 악인이 의인을 에워싸는 꼴을 보게 하시느냐’고 하나님께 따지며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시편37:8에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고 하셨는데도 말이지요
이러는 하박국 선지자를 보면 꼭 적국 니느웨를 향해 가서 외치라는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고 그 반대편으로 도망갔다가 바다에 제물로 받쳐져
큰 물고기 안에 사흘 동안 있으면서, 주의 은혜에 감사하고 결국 사흘 동안
걸어서 니느웨로 가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요나 선지자가 떠오릅니다.
반면 이런 백성들을 보고 돌이키기를 눈물로 호소했던 예레미야 선지자도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을 종으로 세워 이스라엘을
철저히 진멸하시고 끝내 70년간 바벨론으로 끌려가 포로생활을 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이미 하나님께서는 170여 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지금의
이란지역에서 일어날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에게 이례적으로 기름을 부으셔(사45장) 구원해 주실 것까지 예비해 놓으셨다는 사실에 진정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전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진대,
당시의 이스라엘은 노아의 방주 때처럼 부패와 타락으로 하박국1:4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니, 하나님께서 나서셔야 할 것
아닙니까? 왜 잠잠하시나이까?’ 라는 하박국이 호소에
하나님께서는 위에서 살펴본 대로 내 이방 바벨론을 세워서라도 유대를 심판하겠노라고 경고를 하시지요.
왕궁은 불타고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며 아주 철저히 땅은 황폐화되지만,
실상 70년 동안 그 땅은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역대하36:18-21)
그러자 하박국이 다시 하나님께 반문합니다.
1장13-17절,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어찌(하필이면) 포악한 바벨론을 들어 의인인 이스라엘을 징벌할 수
있습니까?
주변 여러 나라를 무자비하게 멸망시키는 것이 옳으니이까? 라고요.
이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교만과 불의, 우상숭배와 거짓스승 등
너희 죽은 율법과 위선에 가득 찬 제사는 도무지 생기가 없어.
의롭지 못한 것은 바로 너희들이야! 내가 바벨론을 들어 너희를 응징하고 난 다음에 그 바벨론도 이방인이지만 고레스를 나의 종으로 세워서 너희들을
해방시킬거야…그러니 너는
이 묵시를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고,(2:2)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이사야, 예레미야, 다니엘서)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니, 비록 더딜지라도 (너희는)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2:3)고 약속하십니다.
여기 고레스 왕은 왕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갈라디아서 3:22-24절,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믿는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주려
함이라.
이같이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갈3:11)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몽학선생)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바로 이것이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께 받은 묵시라는 생각이 안 드시나요?
그러자 비로소 하박국이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확신을 갖게 되고, 주께 기도와 찬송을 드리게 됩니다.(합3장)
이 말씀은 신약성경 3곳에서 인용되는데 중요하기 때문에
로마서1:16-17절만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복음이
믿는 모든 자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권능이기 때문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그리스인(이방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믿음에서 믿음까지 계시되어 있나니
이것은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6-17, KJV역)
어떻습니까? 이 말씀을 보고 카톨릭 신부였던 루터는 종교개혁을 하였으며,
18C 영국의 성공회 출신 존 웨슬리 선교사는 미국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선상에서 이 말씀을 보고 깨달아 영국의 복음주의 운동을 일으켰답니다.
이 말씀은 성경 전체를 대변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도 진정 성령님의 도움으로 나의 뜨거운 가슴에 믿음의 열매가 삶 속에 드러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갈라디아서 5장22-23절에 성령의 열매로 충성이 있지만, 헬라어 원의미로는
믿음을 뜻합니다. 이처럼 믿음도 우리가 살아가면서 깨닫고 맺어야 할
하나님의 의요 은혜입니다. 믿음이 내 뼈속까지 베어 있어야 내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는 순종도 충성도 뒤따르게 되는 것이지요.
이런 하나님을 하박국 선지자는 찬양 합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주의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3:2)
그의 광명이 햇빛 같고 광선이 그의 손에서 나오니 그의 권능이 그 속에
감추어 졌도다.(3:4) (마치 예수님의 등장을 예견하듯 하지요?)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3:17-18, 사61:10)고
고백합니다.
여기 믿음은 무엇입니까?
믿음장이라고 하는 히브리서11장 1절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셨습니다.
하박국은 정한 때에 장차 일어날 일들을 보지는 못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기뻐하며,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실 줄로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지요.(3:19)
성경엔 16명 정도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살게 한 의인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의인의 조건이 무엇입니까?
이들은 한 결 같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렸고,
반드시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과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는 반드시 상 주실 것이라는 걸 믿었습니다.(히11:6)
또한 이 세상은 잠시 머물다 가는 나그네요,
이제는 하늘에 있는 본향을 더 사모하였습니다.(히11:13-16)
아벨은 양의 첫 열매로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으며,
에녹은 어떤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하여 죽지 않고 올라갔으며,
노아는 산꼭대기에 미친 놈 소리를 들어가면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시키시는 대로 1,2년도 아니고 100년을 뚝딱뚝딱 3층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란 아브라함은 어땠나요?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며 장래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가나안 땅으로
나아갔으며, 하늘의 무수한 별들을 보라는 하나님의 언약을 믿었는바
100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단산한 사라와 합방하여 이삭을 낳았고,
어떻게 얻은 자식인데 하나님께서 외아들을 번제물로 받치라고 명하시자
일언방구도 없이 사흘을 걸어 모리 산에 올라 하나님께서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믿고 드립니다.(창22:1-14, 약2:21)
‘이 믿음 더욱 굳세라~! 주가 함께 하신다.
어둔 밤에도 주위 밝은 빛 인도하여 주신다.’이 얼마나 대단한 믿음입니까?
모세와 다윗의 삶은 어떠했습니까?
특히 욥은 사탄의 시험으로 열 자녀와 모든 재산을 다 잃고,
자신의 육신에 욕창이 와 만신창이가 되어도
하나님을 욕하지 않으며 하박국과는 달리 불평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내가 날 때부터 알몸이었고, 지금까지 누린 과거의 삶에 감사하며,
지금 나에게 이러한 고난과 불행을 주시는 데에는 분명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어찌하여 악인이 생존하고 장수하며 세력이 강하냐?고 의문을 갖지만,
그들의 날을 행복하게 지내다가 (결국에는) 잠깐 사이에 스올(지옥)에
내려갈지라.(욥21:7-14) 라고 자신합니다.
지금 세월호 침몰과 신출귀몰한 유병언 일가를 보면서 이 세상도 이처럼
불공평하고 정의롭지 못하다고 우리는 혹 푸념하고 있지 않나요?
요나나 하박국 선지자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욥의 경우처럼 나의 인생이란 굴곡에서도 하나님의 의는 길게
보아야 합니다. 성급하게 판단하지 말고 뚜벅뚜벅~ 걸어야 합니다.
비록 현실에 있어서는 악인이 의인을 삼키는 것 같지만, 언젠가는 정녕
마지막 심판 날에는 나의 믿음대로 하나님의 의는 이루어질 것이다…그러면 하나님은 정의로우시고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공평한 저울과 추로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신다는 확신이 듭니다.(사5:16, 11:4-5, 시9:8, 41:10, 48:10)
그러면서 욥이 놀라운 말을 하지요~!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욥19:25-26)
이게 무슨 뜻인가요?
마치 장차 올 예수님을 나의 대속자로 알고,
부활하여(또는 나의 육체로부터) 하나님을 볼 것이라는 소망을 피력합니다.
악인의 이기는 자랑도 잠시요, 사곡한 자의 즐거움도 잠간이라.(욥20:5)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다.(욥23:10)라고
자신합니다. 저는 욥기를 보면 소름이 돋습니다.
어찌 저리 의연할 수가 있을까? 하나님께서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게
하시고, 또한 욥은 순종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았구나하고 느껴지지요.
마15:22-28 가나안 여인이 마귀 들린 딸을 위해 예수님을 좇을 때에
그 모진 수모와 멸시에도 ‘개들도 자기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빵 부스러기를 먹나이다.’함으로써, 예수님께서 “네 믿음이 크도다.
네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리라.”고 그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십니다.
또한 마태복음 8장 5-13절을 보면, 중풍병으로 누워있는 하인을 고치기
위해 한 백부장이 예수님 앞에 나아와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셔도 내 하인이 낫겠나이다.‘
예수님은 간구하는 그 겸손함을 보시고, 놀랍게 여겨 “네 믿은 대로
될지니라.”하시죠. 믿음대로가 아니고 네가 믿은 대로입니다.
이것이 바로 살아 있는 믿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눅7:1-10, 요4:43-54)
우리 성도님들은 지금 자신의 믿음이 살아 있는 믿음인지 죽어 있는
믿음인지, 행위가 따른 믿음인지 행위 없는 믿음뿐인지 살펴보세요!
여기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은 믿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야고보서에서 보듯 행동하는 믿음까지 요구합니다.(약2:14-26)
야고보는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임을 확신하기에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4, 롬1:17, 갈3장, 히10:38)
라는 바울 서신과는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 같으나, 전혀 아닙니다.
단지 야고보는 믿음을 바탕으로 한 그리스도인들의 구원의 열매로 실제적인 행함을 더욱 강조한 것이지요. 즉, 1장에 믿음으로 시작하여 2장에서는 그에 따른 행위를 강조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생활지침서인 셈이지요.
특히 여기 행함이란 그 무엇보다도 사랑과 자비를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약1:27, 2:8, 13-16, 3:17-18)
네가 보거니와 (아브라함의) 믿음이 그의 행위와 함께 일하고,
행위로 믿음이 완전하게 되지 아니하였느냐?”(약2:22)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갈3:6-7)
결국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음을 믿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실체를 믿음으로써, 우리 삶의 기반이 되고 기준이 되며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보이지 않는 것의 본질이 하나님이라면, 우리 삶의 현상은
그 믿음으로 살아지고 그 믿음에서 의당 선한 행동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좀 어렵나요?
이를테면 ‘하나님은 내 안에 살아 계시고 하늘나라는 실제 존재 한다’는
믿음이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으니 내 주를 본 적은 없으나
다시 오실 것을 믿고 바라는 것이 진정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실생활은 그 모두가 신뢰를 바탕으로 이루어집니다.
나 자신은 물론, 내 가정, 내 일터와 국가가 모두 서로간의 믿음이 없으면
하루하루를 꾸려가기가 어렵습니다.
특히나 부부지간에 신뢰가 무너지면, 사소한 것부터 모든 것에 불신이 쌓여
삐걱대고 어긋나기 시작합니다.
시편 37편 3절 여호와를 신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거리로 삼을지어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조금 더 볼 까요! 전 아주 37이라는 숫자를 좋아 합니다.
워낙 성경에서 제3일, 제7번 째 등등 숫자적 의미를 강조하는 것도 있지만,
제가 예수님을 몰랐을 때부터 은연중에 저의 아이디도 ‘열린37’로 만들고,
제가 10을 벌면 7은 남을 위해, 3은 내 가정을 위해 쓴다는 의미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여기 시편 37편을 아주 좋아합니다.
이 37편은 내 주변이 궁핍할 때, 특히 내 믿음이 곤궁할 때, 내 마음이
한없이 아프고 초라할 때 묵상하면
제 마음에 물밀듯, 제 배안에 생수의 강이 넘쳐흐르는 것을 느낍니다.
이 믿음 역시 말씀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이고, 성령님의 은사이기에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입니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
잠시 후에는 악인은 없어지리니, 네가 그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의인의 적은 소유가 악인의 풍부함 보다 낫도다.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영원히 살리니,
의인의 입은 지혜로우며 그의 혀는 정의를 말하며,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의 걸음은 실족함이 없으리로다.
여호와를 바라고 그의 도를 지키라.
온전한 사람을 살피고 정직한 자를 볼지어다.
모든 화평한 자의 미래는 평안이로다.(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고, 믿음의 은혜가 들어감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범죄자들은 함께 멸망하리니 악인의 미래는 끊어질 것이나,
의인들의 구원은 여호와로부터 오나니 그는 환난 때에 그들의 요새이시로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도와 건지시되, 악인들에게서 건져 구하심은
그를 의지한 깨닭이로다.(4-40절)
로마서 3장23-24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이 이르지 못하더니 ,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되었느니라.
디모데후서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을 받으리라.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얼마나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받으셨습니까?
모진 산고의 고통 끝에 한 생명이 태어나듯이
나 하나 죽어 한 알의 밀알이 된다면, 그 씨앗은 싹이 트고 자라고 또 자라
많은 결실을 맺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날마다 나의 자아를 죽이고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로 내 마음 안에 작은 성전을 지어 간다면,
이 세상에 두렵고 무서워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마라나타~~~!!! 이미 내 속에 예수님은 와 계십니다.
주님의 뜻에 따라 그 믿음 굳건히 붙잡고 하루하루 삶 속에서도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인규
우리의 구원은 행위가 아니라 은혜로 얻는 것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약속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가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얻을 수가 없기 때문에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다. 만일 누군가가 우리의 공로와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가르친다면, 그는 예수의 죽음을 헛되게 하는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결과가 된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21)
최근에 구원론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극단적인 주장이 두가지가 자주 거론되고 있는데, 첫째는 소위 구원파로 불리는 단체의 구원론으로서 소위 도덕폐기론적인 구원론으로 더 이상 죄문제와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견해이며, 둘째는 행위구원론자의 구원론으로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함이 있어야만 구원을 받는다는 주장이다.
이 두가지 구원론은 서로 극단적이며, 동시에 우리 정통교회에서 반드시 주의하여야만 하는 잘못된 두가지의 이단적인 구원론이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라고 말하고 있다. 바울이 말한 “하나님의 의”는 “우리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전가받는 의”가 분명할 것이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 쉬운 듯하면서 설명을 하라고 하면 상당히 어려운 말이 된다. 전자의 [믿음]과 후자의 [믿음]은 같은 의미일까? 본문에는 두개의 전치사, “에크”와 “에이스”가 언급되어 있다.
“에크”는 대개의 경우 출발(from)을 말하며, “에이스”는 도착의 방향(to)을 가리키므로 본문은 “믿음에서(from) 믿음으로(to)” 라고 해석되어져야 한다. 과연 출발이 되는 전자의 믿음은 무엇이며, 도착의 방향이 되는 후자의 믿음은 무엇일까?
이 성경에 대한 가장 보편적인 해석은 전자와 후자의 믿음을 동일한 것으로 보며, “오직 믿음”을 강조하기 위하여 강조적인 문학적인 표현기법을 사용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믿음으로부터 시작하여 믿음에 이르기까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믿음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영원부터 영원까지”라는 말은 영원성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우리나라 속담에도 시종일관이라는 말이 있으며, “처음부터 끝까지”라는 말은 강조적인 표현을 나타낸다.
하지(Hodge)는 ”이러한 표현은 역설체(力說體)로서 오직 믿음으로만 의를 받는다는 의미이다“라고 해석한다. 또 케제만(E. Kesemann)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 표현이 셈어적이며 수사학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악에서 악으로’ (렘 9:3), ‘죽음에서 죽음으로’(고후 2:16), ‘영광에서 영광으로’(고후 3:18)등에서 드러난다. 이 어법은 위치상 주어는 될 수 없고 또한 사실상 동사와 연결될 수도 없다. 이것은 논리상 앞의 말들과 다만 간접적인 연관을 가지고 있을 따름이다. 이것은 ‘오직 믿음으로만’의 의미에서 깨뜨려지지 않는 연속성을 드러낸다. 보다 정확히 말해서 ‘새로운 세계의 차원’을 분명히 드러낸다. 하나님의 의의 계시는 복음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항상 오직 믿음의 영역에서만 실현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공동번역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라고 번역하였고, 현대인의 성경은 “오직 믿음으로만”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표준새번역은 개역성경과 같이 성경을 그대로 직역하여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합니다”라고 번역하고 있다. 또 NIV 영어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by faith from first to last)라고 번역하고 있다.어쨌든 하나님의 의는 오직 믿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믿는 자를 의롭다고 하시는 것에 대해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 3:9).
그리스도인들은 자력으로 의인이 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의로운 존재로 간주하시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의는 내면적이며 실제적인 변화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의 변화이며 신분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다이스만(A. Deissmann)은 “그리스도 안에서 고소를 당한 인간에 대한 법정고소가 취하된다. 그는 정죄가 아니라 자유로 판정된다. 이러한 무죄석방이 바울의 이신칭의이다”라고 말한다.
또 렌스키(R. C. H. Lenski)는 “그의 인격의 변화가 아니라 오히려 그와 하나님의 관계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다. 그가 비록 의롭지는 않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의로운 존재로 간주하신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 즉 “칭의”라는 용어가 헬라어로 사용된 것은 디카이오오(의롭다하다), 디카이오마(의로움, 심판)인데, 그 중에서 ”디카이오시스“라는 단어는 헬라의 법정용어로서 ”무죄선언“을 뜻한다고 한다.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은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 4:6-8).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다윗의 말을 인용하여,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고, 그 죄를 인정치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칭의란 죄가 없기 때문에 무죄선언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죄선언을 내려주는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에 기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칭의란 죄가 없는 자의 무죄석방이 아니라, 죄가 있지만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의롭다고 인정을 하여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교통사고를 내서 감옥에 갇혔는데, 그 피해자에게 모든 배상을 해주고 합의를 하여, 내가 석방되어 풀려났다는 것이 바로 무죄선언이다. 즉 죄책이 면제된 것이며, 그렇다고 하여 죄성 자체가 없어진 것은 아니다.
그래서 마틴루터는 “기독교인이란 의인이며 동시에 죄인이다”라고 말하였다.
다이스만은 “우리는 칭의에 관한 바울의 사상에서 현재적 소유의 의식과 미래의 충분한 소유의 기대 사이에 역동적 긴장을 본다”라고 말하였는데, 의롭다는 무죄선언은 현재적이지만, 그 궁극적인 칭의에 대한 판정은 미래의 연장선에 놓여진다는 것이다.
마틴로이드존스는 거듭난 자의 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데, 위에서 언급한 두가지의 극단적인 견해를 모두 배제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사실 저는 아직도 이 삶과 이 세상에 있습니다. 저는 여전히 이 몸 안에 있는 죄와 싸우고 있습니다. 따라서 요한은 다음과 같이 진술합니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3). 소망을 가진 자는 이렇게 해야 합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고전 9:27)이라고 바울이 말한 것처럼, 다시 소망을 가진 자는 수동적으로 주님만을 바라보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저는 저의 ‘땅에 있는 지혜를’(골 3:5) 죽입니다. 이것이 바로 논제입니다. 이 모든 진리는 주어졌고, 성령의 능력은 제 안에서 역사하시며, 저는 그것을 하도록 격려를 받으며, 그것을 행하기를 원하는, 이것이 바로 성화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죄를 완전히 제거했다거나 죄로부터 완전히 구원받았다고 말하는 모든 것들을 반드시 거절해야만 합니다, 아울러 우리는 동일하게 반동의 원리 또한 거절해야만 합니다”(로이드존스, 성령하나님, 기독교문서선교회, 330쪽).
마틴 루터는 로마서 1장17절을 읽고 훗날 그의 일기에서 “나는 그 때에 나에게 천국 문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고 기록한다. 마틴 루터는 무릎으로 성당계단을 오르는 고행을 통하여서도 죄의식을 버리지 못했으며, 하루에도 몇 번씩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하여도 아직도 죄가 남아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신비주의적인 명상을 통해서도 죄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소위 구원파라고 불리는 이단들은 마틴 루터와 마틴 로이드존스, 요한 웨슬레를 인용하며 그들 모두가 구원파와 동일한 깨달음을 느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과연 마틴 루터나 웨슬레, 마틴 로이드존스가 죄문제가 모두 해결되었으니, 더이상 죄와 아무 상관이 없으며, 죄를 회개할 필요가 없다는 도덕폐기론을 주장하였을까? 전혀 그렇지 않으며, 구원파는 극단적으로 치우친 구원론을 주장하며, 그들은 기본적인 신학적인 뿌리조차 없는 사람들이다.
올더 스케이트 집회에서 롬 1:17을 들으며 회심을 깨달았던 요한 웨슬레가 과연 도덕폐기론을 주장하였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그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들의 성화적인 과정을 남들보다 더욱 강조하던 사람이었다.
성경은 우리에게 죄가 없다고 말할까? 성경은 우리가 죄가 없다고 하면 스스로 속이고 진리가 그 안에 없다고 말하고 있다. 소위 구원파 교회들은 회개는 하지 않지만 자백은 하여야 한다고 말하는데, 죄가 없는데도 자백을 하라는 것인가? 성경은 죄가 없다고 하는 자들은 진리가 그 안에 없다고 말한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8-10).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항에 동의하여야만 한다
– 우리는 오직 믿음을 말미암아(through)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by) 구원을 받는다(엡2:8).
– 우리는 이미(already) 구원을 받았지만, 그러나 아직(but not yet) 최종적인 구원을 받은 것은 아니다. 우리의 구원은 나 자신의 주관적인 단정이 아니라 믿음의 객관적인 확증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고후 13:5).
–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하여 죄사함을 받았지만, 죄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have no part with me)이 결코 아니다(요 13:8).
바울은 로마서1장17절에서 “믿음에서 믿음으로”라는 중복적인 표현으로 오직 믿음을 강조하면서 “기록된 바”라는 말을 인용하는데, 그것은 구약의 하박국을 인용한 것이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는 정직하지 못하도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합2:4).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구약의 하박국 구절은 바울을 통하여 로마서 1장17절에 인용되어지며, 갈 3:11과 히 10:38에도 인용되어진다. 사람의 마음은 교만하며 정직하지 못하다. 의인은 없으며 하나도 없다는 말씀과 같은 의미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바울은 과연 인간의 행함과 공로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였을까? 바울은 에베소서 2:8을 통하여 믿음으로 얻는 구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바울은 시대적이며 역사적인 상황 속에서 하박국 예언자를 통하여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그와 함께 하였던 성령의 감동으로 발견하게 된 것이다. 하박국 선지자를 통하여 성령께서 주셨던 그 감동이 바울의 영적지각을 통하여 로마서1장 17절을 기록하게 하였고, 그 성령께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마틴 루터와 요한 웨슬레에게 뜨거운 회심과 감동을 주었던 것이다.
하박국이란 히브리어 이름이 “껴안다”(하박크)라는 뜻임이 결코 지나칠 우연은 아닌 것 같다.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하박국 2:1-4).
기다림의 의미
인간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기다림입니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 역시 기다림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점점 더 폭력적으로 치닫는 것은 기다림이라는 가장 중요한 덕목을 더 이상 배우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태어나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이 바로 이 기다림입니다.
기다림을 배우지 못하면 정상적인 인간으로 살아가기가 어렵게 됩니다. 우리는 그것을 요즘 아이들을 보며 깨달아야 합니다. 요즘 아이들은 이전 역사에서는 볼 수 없었던 각별한 돌봄 속에 성장합니다. 여간해서는 배고픔이라든가 더러움 같은 것을 배우게 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그만큼 풍요로워지고, 그만큼 여유로워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풍요로워지고 여유로워진 만큼 인간은 가장 기본적인 덕목인 기다림을 배우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우리 사회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조급하고 폭력적인 사회가 되었습니다. 다른 이를 배려하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 되었고, 능력과 소유를 사용해 가급적 기다림을 줄이는 것이야말로 자유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갑질이 만연하고, 인간관계는 그만큼 파괴되고, 쾌락은 있지만 행복이 없는 삶 속으로 속수무책 현대인들이 던져지고 있습니다. 특히 스마트폰은 기다리기 싫어하고, 무언가 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인간들에게 즉석에서 많은 문제들을 해결해 주는 간편한 휴대용 하나님이 되었습니다.
이런 현대의 삶 속에서 즉석에서 문제를 해결해 주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는 사랑의 하나님을 믿는 것은 그야말로 어리석은 일이 되었습니다. 문제 목사들과 교회들 때문에 교회가 쇠퇴하고 있다고 많은 이들이 생각하지만 그 근본적인 이유는 더 이상 현대인들이 기다림을 배우지 않고, 기다림 자체를 무능력과 동일시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기다림이 무엇인가를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줌으로써 하나님의 창조의 복원에 앞장서야 합니다.
영적인 기다림은 단순히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일 뿐 아니라 믿음의 시금석이며 참된 믿음으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영적 성숙의 과정입니다.
하박국서의 핵심 메시지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은 자신들의 의로움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의인의 의인됨은 우리가 신학에서 말하는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 이전에 삶의 방식의 문제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믿음은 곧 기다림입니다. 그 막연하고 고통스러운 기다림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신뢰는 시가 되고 꽃이 됩니다. 그것이 마침내 찬양으로 터져 나오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이며 영광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우리를 그곳으로 안내합니다.
구조와 배경
하박국서는 “선지자 하박국이 묵시로 받은 경고라”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하박국서에는 선지자 자신과 그의 시대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1:6을 보면 갈대아 사람들이 언급됩니다. 여기서 갈대아 사람은 바벨론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하박국서의 연대는 바벨론이 아시리아를 와해시키고(주전 612년) 고대 근동의 패권을 잡은 주전 600년대 초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3:13에서 왕이 그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주전 598년의 첫 번째 예루살렘 함락 사건이 아직 반영되지 않고 있습니다. 하박국은 주전 600년경, 즉 나훔(주전 650) 이후, 예레미야와 동시대에 활동한 인물로 보입니다.
하박국서의 핵심 구절은 로마서와 히브리서에도 기록된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2:4)입니다. 이 구절은 하박국서의 핵심일 뿐 아니라 구약 성경 전체를 대표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탈무드에도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613개의 계명을 주었다. 다윗은 그것을 11개(시15편)로 줄였고, 미가는 3개(6:8)로 이사야는 2개(56:1)로 줄였다. 그러나 하박국은 그것을 단 하나로 요약하였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의로운 자는 그분의 뜻이 확실한 때나 의심스러울 때나 언제든지 신실하게 그분의 뜻을 기다려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의인에게는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하박국서는 하나님께서 세상(유다)의 불의를 벌하지 않으시고 방관하시는 것에 대한 선지자 하박국의 탄원으로 시작합니다(합 1:2-4). 하나님은 하박국에게 갈대아 사람들을 통해 유다의 불의를 심판할 것이라고 미리 알려 주십니다(합 1:5-11). 이에 대해 하박국의 두 번째 탄원이 이어집니다(합 1:12-17). 하박국은 “악인이 의인을 치는 것”이 과연 정당한지를 따지듯 묻습니다. 그러자 이 책의 핵심 메시지가 담긴 하나님의 응답이 주어집니다.
하박국의 통보 (1절)
1절은 하박국의 통보로서 선지자의 단호한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하박국은 파수하는 곳에 서 있습니다. 지금 그는 좋은 소식을 목이 빠지게 기다리는 파수꾼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파수꾼은 소식을 알리는 자입니다. 성 앞에 적국이나 지원군이 나타나면 이를 곧바로 성 안의 지휘부에 알리는 임무를 맡은 사람입니다. 하박국은 자신을 그런 파수꾼으로 묘사하면서 하나님이 위기에 처한 유다를 구하러 나타나실 것을 기대합니다. 이 표현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드러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불굴의 믿음과 의지를 갖고 기다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기다리지만 않고 그는 하나님께 항의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나의 질문”이라는 말에는 그런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질문이란 단어는 “항의, 비난, 논쟁”이라는 뜻입니다. 이 어휘들은 상대방의 잘못을 따지며 대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선지자가 지금까지 하나님께 불만을 토로한 내용을 가리킵니다. 바벨론이 유다를 무자비하게 짓밟는 것을 하나님께서 그냥 바라보시겠느냐는 것입니다. “불의한 자”를 통해 어찌 하나님의 선택한 백성을 치실 수 있느냐는 비난조의 항의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파수하는 곳과 성루는 성벽 위에 세워진 망대나 요새를 가리킵니다. 파수하는 곳과 성루는 멀리 내다볼 수 있는 높은 자리로서 전략적인 위치입니다. 이곳은 사방을 볼 수 있도록 열려 있습니다. 거기서 하박국은 하나님의 응답을 들으려는 것이 아니라 보려고 합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보려고 하나님을 향한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그분이 나타나시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불굴의 의지야말로 인간에게 필요한 신뢰의 증표입니다. 모든 것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을 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인간의 반응입니다.
인간은 늘 즉각적인 변화와 자신이 원하는 대로의 가시적 성취를 기대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믿음은 그 너머를 향하도록 인간을 이끌어갑니다. 아무런 변화가 없어도, 가시적인 성취가 없어도, 자기의 뜻이 반영되지 않아도, 모든 것을 선의 도구로 삼으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끝까지 신뢰하는 것, 이것이 바로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인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배워야 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인간의 반응으로서의 사랑인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그런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박국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만한 망대로 올라가 그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가 그렇게 하는 것은 그분이 응답하실 것을 확실히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선지자를 실망시키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명령 (2-3절)
하박국은 마침내 하나님의 답변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그저 질문에만 답하신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일을 보여 주시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박국에게 당신이 보여 주신 것을 기록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을 기록하는 것은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한 준비입니다. 공간적, 시간적으로 말씀의 전달 범위를 넓혀 주며, 영향력 또한 확장됩니다.
하나님은 이 말씀을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누구나 어려움 없이 읽을 수 있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박국이 할 일은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백성들 앞에서 외치고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그것을 똑똑히 읽을 수 있도록 판에 쓰는 것이었습니다. 하박국의 사역은 문서 사역이 되었습니다. 그 판은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성전 경내에 붙여질 것이며 모든 사람이 보았을 것입니다.
그 내용 가운데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다.”라는 말씀이 들어 있습니다. 정한 때라는 말은 여인이 잉태한 후 아이를 낳을 시점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단어는 비록 하나님의 계시가 지시하고 약속한 시간이 너무 길고 때로는 오지 않을 것처럼 느껴질지라도 때가 되면 당연히 아이를 낳는 것처럼, 하나님의 정한 때 역시 반드시 온다는 확신을 담고 있습니다. 하박국서에서 쓰인 묵시는 후대의 묵시문학적 관점에서 선택된 단어가 아닙니다. 그것은 더 후대에 가서야 나타납니다. 이곳에서 쓰인 묵시, 혹은 종말이라는 단어는 아주 근접한 미래에 일어날 사건을 말합니다. 따라서 정한 때와 종말이라는 말은 갈대아 사람으로 인한 곤경이 머지않아 종식될 것임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정한 때나 종말은 하나님이 정한 시간이라는 점입니다. 인간의 소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 하에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이 인간에게 믿음이 요구되는 지점입니다.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의 가장 중요한 일이 이곳에서 선포됩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며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간단한 이 몇 마디 말이 우리에게는 가장 힘들고 어려운 과제입니다. 동시에 진정한 희망의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기다림을 통해 우리가 변화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단순히 책임을 면하기 위해 가능한 뒤로 미루는 인간들의 궁여지책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주도되는 섭리의 과정입니다.
하나님의 격려 (4)
마침내 하나님의 응답이 주어집니다. 4절의 “그”는 바벨론을 가리킵니다. 하나님도 당연히 바벨론의 마음이 교만하고 정직하지 못한 것을 알고 계십니다. 이 말씀에서 관심은 심판의 도구로 사용되는 바벨론이 아니라 심판의 대상인 유다입니다. 그래서 4절의 핵심은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히브리어로 ‘에무나’입니다. 이 단어는 단순한 믿음이라기보다는 인내, 성실, 진실, 신실 등을 포함해 광범위한 의미를 가집니다. 여기서 ‘에무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가리킵니다.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고 하박국은 말합니다. 구약성경에서 의롭다는 말은 어떤 관계의 요구를 이루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신실함으로써 얻어집니다. 의인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지키고 그 언약의 가르침과 약속을 굳게 붙잡는 사람이며, 흔들리지 않는 굳센 마음으로 거기에서 벗어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떤 시험과 심판의 때에도 살아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여기서 더 구체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벨론에 대한 심판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반드시 올 것입니다. 비록 더디 오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절대 포기하지 말고 믿음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벌할 때 필요한 경우에는 이방 권력을 사용하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사용된 세속적 권력에 반드시 종말이 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대적의 외압으로부터 벗어날 때가 이미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정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 권력이 오만하면 할수록 하나님이 꺾으실 날이 가까이 오는 법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때까지 인내하며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불의와 무질서, 고통과 상실을 경험하더라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끝까지 인내하며 일편단심으로 성실하고 충성스러워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박국의 모든 질문들은 이 말씀,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로 모두 풀렸습니다. 그것은 한 단계를 더 거쳐 찬양으로 이어집니다.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찌니라.”
그 단계는 바로 침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온전한 신뢰 관계로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침묵의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그것은 소크라테스의 아포리아를 지나 진리의 근처 어디에선가 반드시 마주치는 인간 지성의 한계이며 인간 존재 자체의 한계입니다. 그것은 비단 신앙의 삶 속에서만 경험하는 인간의 한계가 아닙니다. 진리를 탐구하는 철학자들이나 과학자들도 만나게 되는 깊은 세계로의 관문입니다. 아인슈타인도 그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는 그 경험을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감정은 신비다. 그것은 모든 진정한 예측과 과학의 원천이다. 이 감정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최고의 지혜와 가장 빛나는 아름다움으로 현현하지만 우리의 둔한 능력으로는 그것의 가장 원시적인 형태밖에 파악할 수 없는 불가해한 것이 정말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것….. 이런 앎과 느낌이야말로 모든 진정한 종교성의 핵심이다. 오직 이런 의미에서만 나는 독실하게 종교적인 사람이다.”
아인슈타인은 인격화된 근대의 신을 옹호한 것이 아니었지만, 그의 말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얼마나 심각한 오해와 착각에 빠져 있으며, 진리를 망각한 인간에게 주어지는 형벌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인간이 놓지 말아야 할 마지막 끈은 과학자 포퍼가 말했듯이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입니다. 장자(莊子) 역시 “사람이 아는 것은 그가 알지 못하는 것에 미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비극은 자신이 모든 것을 안다는 자만에서 비롯됩니다. 장자의 말대로 인간이 아무리 많이 알아도 인간이 알지 못하는 것에 미치지 못합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지식을 다 합해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할 수 있는 말은 여전히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입니다.
지금 하박국 선지자는 바로 그 침묵에 도달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을 향해 말합니다.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찌니라.”
비록
마침내 세상의 모든 결핍들을 오히려 은혜로 받아 기쁨의 찬양을 부르기에 이릅니다. 기다림이 낳은 찬양입니다. 기다림이 맺은 열매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찬양이기도 합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7-18).
‘비록’의 신앙,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 그리고 ‘죽으면 죽으리이다’의 신앙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랜 기다림 속에서도 주님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은 사람들이 침묵이라는 신비의 관문을 지나 마침내 창조의 목적을 이루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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