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빈성씨 사주 | 역사상 가장 슬픈사랑 조선 정조의 의빈성씨(옷소매 붉은끝동) 후궁사주 110 개의 정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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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소매 붉은 끝동의 주인공 정조가 사랑한 의빈성씨의 사주입니다.
현대에 태어났을때를 적용해서 만들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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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빈성씨는 정조를 사랑했을까? 의빈성씨 사주풀이

의빈 성씨는 주관이 매우 강하고 강직한 성격이다. 앞뒤가 다르지 않고 마치 칼같이 깔끔하다. 계산적이 면이 전혀 없다.의빈성씨 시간을 몰라서 3주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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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1/1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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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대왕이 겪었던 궁중의 여자들. (펌) – 200606~202109 역학 …

유일하게 의빈성씨를 선택했지만 너무도 슬픈 로맨스로 끝나버림 … 1786년(병오년_갑인대운) 아들 잃음, 의빈성씨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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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2/1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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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블라: 의빈성씨는 정조를 사랑했을까? – Blind

20부른건 안봐준다는 말… 주변인들 사주를 보게되니 자꾸 선입견을 갖게되서. 작성일2021.12.06. 좋아요수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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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teamblind.com

Date Published: 12/2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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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빈 성씨 이야기 – 네이버 블로그

태정태세문단세예성연중인명선광인효현숙경영정순헌철고순. 성덕임은 성윤우의 딸로 태어난다. 아버지 성윤우는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인 홍봉한의 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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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2/1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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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빈 성씨 – 나무위키

정조의 뜻에 따라 의빈 성씨와 문효세자의 사당도 한 영역에 세워졌다. 정조 말년에 제사궁(祭祀宮)을 의빈궁(宜嬪宮)이라 했고 고종(高宗) 연간에는 칠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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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11/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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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가 유일하게 사랑했던 비운의 여인 – 의빈 성씨

… 이산’으로우리에게 조금 인지도가 있는 의빈 성씨하지만 드라마에 나온 의빈 성씨에 관한 내용은허구가 많음극 중 한지민이 도화서의 화원이라던지 이건 다 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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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instiz.net

Date Published: 9/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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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빈 성씨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의빈 성씨(宜嬪 成氏, 1753년 8월 6일 (음력 7월 8일) ~ 1786년 11월 4일 (음력 9월 14일))는 조선 제22대 왕 정조(正祖)의 후궁이며, 문효세자의 어머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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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2/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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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덕임 의빈 성씨는 임신중독이 사망 원인이었을 것 – 스토리블럭

요즘 인기 최고인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은 성덕임이라는 궁녀의 이야기를 그린 동명의 “역사소설”을 MBC에서 드라마로 편성한 작품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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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creavart.tistory.com

Date Published: 11/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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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주가 정조 여인에 대한 사랑도 깊었는가 | 삶과 술

술을 피하는 신하들에게 이런저런 명분으로 억지로 마시게 해서 쓰러뜨리곤 했던 정조가 아니던가. 어떻게 그가 후궁 의빈 성씨에게 이런 애틋한 사랑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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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soollife.com

Date Published: 3/2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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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가장 슬픈사랑 조선 정조의  의빈성씨(옷소매 붉은끝동) 후궁사주
역사상 가장 슬픈사랑 조선 정조의 의빈성씨(옷소매 붉은끝동) 후궁사주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의빈성씨 사주

  • Author: 문봉명리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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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2. 1. 20.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FwmeCJT8Etw

의빈성씨는 정조를 사랑했을까? 의빈성씨 사주풀이

정조 의빈 성씨 이야기를 꽤 흥미롭게 봤는데 그들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 옷소매 붉은 끝동이 드라마로 제작 결정되었다고 한다. 정조의 구애를 궁녀의 신분으로 거절한 정조의 첫사랑 의빈 성씨 결국 정조의 아이를 임신한 채로 사랑하는 아이를 잃은 슬픔을 안고 비극적으로 죽은 그녀의 사주를 풀어보겠다. (로맨스라기에는 너무 잔혹사)

의빈성씨 사주

의빈 성씨는 주관이 매우 강하고 강직한 성격이다. 앞뒤가 다르지 않고 마치 칼같이 깔끔하다. 계산적이 면이 전혀 없다.의빈성씨 시간을 몰라서 3주만 보고 말하자면 남자를 뜻하는 관이 없다. 관이 없다는게 남자가 없다는 것이아니고 사주상에 뚜렷하게 원하는 남성상이 없고 관에 몸을 맞추지 않는 성향을 가졌다고 말 할 수 있다. 의빈성씨 사주에서 남자는 불을 형상을 하고 있는데 의빈성씨 사주가 금이 많아 일견 차가워 보일 수 있으나 가장 더운 한여름 태생으로 불이 불편하다. 관이 좋은 역할을 해주는 것은 분명 하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심리가 한여름에 불과 같다는 것이다. 오히려 차갑게 식혀주는 동료들이 편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또한 동료들과 자기가 가진 걸 필연적으로 나눠야만 하는 사주이다.

의빈 성씨는 여러 번 임신하고 아이를 낳았지만 결국 한 명의 자식도 남기지 못했는데 신기하게도 이게 사주에 정확히 나와있다. 도식 되었다고 표현하는데 내 자식, 내 몸, 내가 움직이는 팔다리, 내 건강을 뜻하는 글자인 식신이 편인이라는 놈에게 붙잡혀버리는 것을 뜻한다.

흔히 밥상을 엎는다고 표현하는데 사주에 이게 있는 사람은 자식을 두기 어렵거나, 수술수가 있거나 몸에 흉터가 있거나, 적성을 찾기 어렵다. 의빈 성씨 사주에서는 자식을 극하는 걸로 볼 수 있다. 월지 월간에 간여지동으로 서있는 강한 편인이 자식인 식신을 극하고 있다. 만약 현대를 사는 비슷한 사주를 풀이해준다고 해도 이 부분은 변하지 않는다. 자잘한 1 년운은 잘 맞아떨어지지 않을 때도 있는데(대운의 영향이 더 크기 때문에) 이렇게 사주 명식에 크게 쓰여있으면 어떤 식으로든 발현이 되더라.

정조사주

정조의 사주는 로맨티스트 사주이다. 년간의 정재를 상관이 요란하게 생하고 있다. 상관은 표출하는 성분이고, 재성을 생한다. 재성은 여자이다. 그는 많이 표현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왕으로는 이례적으로 그렇게 사랑 글을 줄줄이 남겼나 보다. 날카로운 상관이 눈에 띄는데 정조가 얼마나 달변가에 가림 없이 말했을지 얼마나 자기 잘난 맛에 살았을지 상상이 간다ㅋㅋ

정조의 사주에서 여자를 뜻하는 글자인 재는 두 개인데 년간에 정재가 일찍이 어릴 때 만났던 첫사랑 의빈 성씨로 보인다. 그런데 이 정재가 ‘공망’이 들었다 공망은 비어있다는 뜻이다. 있으나 없다는 뜻이고 그래서 의빈 성씨를 보냈나 보다.

있는 그대로의 사주를 읽을 뿐인데도 이게 나타나니 이래서 사주 보는 것을 못 멈추겠다. 년간의 정재(의빈 성씨)는 상관의 열렬한 생을 받고 있고 시간의 편재(수빈 박 씨로 보인다)는 관(자식)을 열심히 생하고 있는 모습도 정조의 심리와 그녀들과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제목으로 돌아와서 의빈 성씨가 정조를 사랑했냐는 질문에는 전적으로 사주에 의존해서 개인적인 생각을 말하자면 의빈 성씨의 정신세계에 정조는 들어갈 수 없었다. 그녀에겐 관의 자리가 없고 주관이 강하며 자신의 생각으로 살았을 것이다.

의빈 성씨가 느끼는 감정에서 정조는 한여름에 불이다. 반면 의빈 성씨에게 자식은 한여름에 물이다 얼마나 갈구하고 소중할까 자식을 따라갔다는 정조의 말이 과언이 아니다.

정조대왕이 겪었던 궁중의 여자들. (펌)

정조

임신년 경술월 기묘일주

담담한 성격. 완벽주의. 여자를 멀리함. 술을 좋아함.

가까운 신하가 후사 문제에 대해서 운을 띄우자 맘대로 되지가 않는다고 한숨.

유일하게 의빈성씨를 선택했지만 너무도 슬픈 로맨스로 끝나버림

1762년(임오년_신해대운) 아버지 사망

1776년(병신년_계축대운) 즉위

1782년(임인년_계축대운) 아들 얻음

1786년(병오년_갑인대운) 아들 잃음, 의빈성씨 죽음

1790년(경술년_갑인대운) 순조 태어남

1800년(경신년_을묘대운) 승하

사도세자

을묘년 무인월 임진일주

정조의 아빠~

사람들은 노론의 정치야합때문에 죽었다고 하는데… ㅋ

울 조선이 (들으면 비하라고 생각될수도) 그렇게 트릭이 많을 만큼 많은 세력들이 정치세력을 구사한건 아님.

음모론으론 사도세자가 정치 희생양이라고 하는데

그냥 사도세자는 엄청 예민한 아버지를 두고, 적성에 안 맞는 세자를 해야해서 정신 이탈한 사람일뿐

혜경궁 홍씨

을묘년 계미월 병술일주

정조의 엄마

혜경궁한테 사도세자는 엄청 부담스러운 사람이였을듯 함

사람들은 정치적인 여자, 집안을 위한 여자, 야망이 많은 여자라고 하지만…

똑똑한 아들 살려보자고 애쓴 거 보면 불쌍.

효의왕후

계유년 갑자월 계사일주

정조의 정비

드라마로는 정조랑 엄청 의리의리 했다고 하지만~

그렇게 친하지 않았다고 들음.

워낙 정조가 여자에 대해서 담담해서 그런것도 있지만,,,

원빈 홍씨의 간택예를 덥다고 받지 않고 생깐 기록이 있는데

성격이 보통은 아니였을거 같음.

야사로는 의빈성씨를 죽였다는 말이 있던데 … 그건 가능성 없어보임.

아무튼 이런 저런 얘기가 기록에 있는거 보면 살가운 성격은 아님.

정조나 중전이나 담담, 냉철 했을 거 같음.

조선판 쇼윈도 부부

너는 너 일 해라. 나는 내 할 일 할테니까. 같은?

의빈성씨(유일한 승은)

계유년 기미월 신유일주

1762년(임오년_경신대운) 입궁

1766년(병술년_신유대운) 승은거절

1781년(신축년_임술대운) 승은

1782년(임인년_임술대운) 문효세자 생산

1783년(계묘년_임술대운) 빈으로 승격

1786년(병오년_계해대운) 문효세자 졸, 의빈성씨 임신상태에서 졸

정조가 유일하게 성은을 내린 여자. 정조는 자기의 합을 깨주는 충이 있는 여자들한테 끌린 듯…

원래는 혜경궁 홍씨(정조엄마)가 심심해서 양녀처럼 키우려고 데려온 애임. (홍씨집 청지기 딸)

원래 그 시대에는 후궁들이 너무 한가하니까 ~ 거기다 옹주들도 빨리 시집가고 하니 심심했을듯

데려와서 딸처럼 키우고

옹주들(정조 누이)이랑 글연습라거나 소설필사 했다고 함.

보통 나인들은 아니였던 거임…

그러니 엄마한테 문안인사가면 의빈성씨가 있고~

참하고 똑똑하고 이쁘니 담담한 정조도 눈이 가겠지?

그래서 정조가 세손때 승은을 입히려고 했는데 ~~ 거절당함. (14살 때임. 정조는 15살 ㅋㅋㅋㅋ 패기넘치내)

왕의 승은을 거절하면 죽음인데……….. 거절함 ㅋ

정조는 15년 후에 다시 의빈한테 승은을 내리려고 했는데 ~

다시 거절함ㅋㅋㅋㅋ

그러자 정조가 열받아서 의빈의 시종을 벌을 내림. (시종까지 있는거 보면 보통 나인&상궁은 아니겠지만)

그러자 의빈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임.

그렇게 왕자(문효세자)를 낳고…. ~ 정조의 첫 아들 ㅠㅠㅠㅠ

~딸을 낳고,,,,했지만…

다 죽음.

그 후에 왕자를 가졌지만 해산도 못하고 돌아가심. (갑신년에 졸)

문효세자 죽고 … 죽고 싶다고 ~ 살 의미가 없다고 많이 그랬다고 함. ㅠㅠㅠㅠㅠ

원빈 홍씨(간택)

병술년 갑오월 을미일주

홍국영의 동생.

갑자기 죽음.(1779년 기해년)

홍국영이 원빈의 죽음에 효의왕후가 있다고~ 개거품 물었지만~~ 궁궐에 있는 일을 뭐….

홍국영이 나댄것도 있지만 ~ 왕후가 홍국영을 안좋아했으니….

원빈을 좋게 볼 순 없을 거 같음……

후궁인데 세자빈급의 가례와 … 조정과 약방의 문안, 죽고 시호를 어떻게 하냐? 라는 …. 후궁으로는 이례적인 일들이 많았음.

+암턴 효의왕후가 드라마에서 처럼 겁나 착한건 아닌거 같다는 생각이 듬.. 냉철하고 예를 중요시 했을 거 같음.

화빈 윤씨(간택)

기록 없음

산실청을 세웠지만 상상임신이였다고

수빈 박씨(간택)

경인년 신사월 갑신일주

1787년 (정미년_경진대운) 간택

1790년 (경술년_기묘대운) 차남(순조) 낳음

1793년 (계축년_기묘대운) 숙선옹주 낳음

1800년 1월(음력) (경신년_무인대운)차남 세자로 책봉

1800년 6월(음력) (경신년_무인대운)정조 승하, 아들 보위에 오름

1821년 (신사년_병자대운) 늦가을 병에 걸림. 증상이 심해짐

1822년 (임오년_병자대운) 졸

역시 충, 원진을 좋아하는 정조 답게 ~

신묘원진, 신묘암합

원래는 시집갈라고 했는데 그때 폭우가 내림. 그래서 집담벼락이 다 쓸려내려가고

시집 보낼 여력이 안되니까 간택에 참가 시킴.

그러다 간택됨. 집안이 세력이 미미해서 그런지 플러스 점수 받은 것도 있음ㅇㅇ

정조가 수빈 박씨를 현빈(현명하다)라고 칭할 만큼 좋아함. ~ 검소하고 청탁 겁나 싫어했다고 함

정조가 수빈 박씨의 친정에 안부 편지를 쓸 만큼 좋아한거 같음

정조의 후계자 순조를 낳음

+++

정순왕후

을축년 정해월 정축일주

1759년 (기묘년_기축대운) 왕비 책봉

1800년 (경신년_계사대운) 수렴청정(4년 동안)

1801년 (신유년_계사대운) 신유박해 일으킴. 천주교 탄압

1803년 (계해년_계사대운) 수렴청정 거둠

그 후 – 순조의 장인에 의해 정순왕후의 세력이 축출 당함

1805년 (을축년_계사대운) 졸

영조의 비

정조의 새할머니ㅋ;

조선을 리셋한 무서운 여걸

정조시대도 끝이나구~

출처: 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divination&no=6157529&exception_mode=recommend&page=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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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빈 성씨 이야기

태정태세문단세예성연중인명선광인효현숙경영정순헌철고순

성덕임은 성윤우의 딸로 태어난다.

아버지 성윤우는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인 홍봉한의 집에서 일을 도와주는 하인이었고,

10살이 되던 해 덕임은 혜경궁 홍씨의 처소 궁녀로 입궁하게 됨.

덕임이 입궁하던 해에 사도세자가 죽는 임오화변이 일어났고,

그 이후 아들 이산은 혜경궁 홍씨를 떠나 다른 궁궐에서 자라게 되었으며

곧이어 딸들도 시집을 가 궁궐을 떠났음.

혜경궁 홍씨는 자신의 자녀들(1남 2녀)의 나이가 비슷한 친정집 하인의 딸 덕임을 예뻐하며 잘 길러주었다고 함.

딸들인 청연공주 청선공주 역시 덕임과 친하게 지냈으며

이들은 ‘곽장양문록’이라는 소설을 함께 필사하기도 했음.

정조는 그런 덕임을 마음에 두어서

세손시절이었던 15살에 고백을 한 적도 있었음

그러나 덕임은 세손의 고백을 거절하는데, 그 이유는

세손빈이 아직 임신을 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감히 자신이 승은을 입냐며

울면서 못한다고 사양했고, 세손은 덕임을 이해해줌.

세손은 영조의 뒤를 이어 정조로 즉위하게 되고,

세손빈 역시 효의왕후로 즉위하게 됨

효의왕후는 세손빈시절부터 시할아버지 영조가 매우 예뻐했고, 심성이 착한 사람이었으나

정조로부터 사랑은 받지 못했음.

첫 고백을 거절당한 이후로도 정조는 덕임을 계속 마음에 두었으나

정실부인 효의왕후는 끝까지 임신을 하지 못했음.

정조는 그동안 덕임을 후궁 반열에 계속 올려두었고

15년만에 다시 고백을 하였는데 덕임이 또 거절함.

사실, 일개 후궁이 왕의 명령에 불복을 하는 것은 사형에 처해질 수도 있는 중죄였음에도

정조는 덕임에게 죄를 묻지 않았으나,

할수없이 덕임의 하인에게 벌을 내리면서까지 덕임의 마음을 돌리려고 애썼음

또한, 당시 왕은 원하는 여자가 있다면 강제로라도 후궁으로 만들 수 있었지만

정조는 그렇게 하지 않고 나름대로 덕임을 기다려 준셈.

스물여덟살이 되던 해, 덕임은 결국 정조의 마음을 받아주고 후궁이 된다

약 2년간 2번의 유산을 겪은 후에 첫 아들 문효세자를 낳은 덕임.

혜경궁 홍씨는 친히 몸종과 유모를 보내 덕임의 출산을 도왔고,

정조는 덕임을 직접 정한 ‘의빈’에 칭하며, 정 5품에서 정 1품으로 승진시켜줌.

그리고 2년후 딸까지 낳는 경사를 누렸으나

딸은 안타깝게 생후 2개월만에 사망하고 만다.

혜경궁 홍씨는 첫손자 문효세자를 아주 예뻐하였으며

의빈 성씨 역시 문효세자를 잘 기르는 한편,

여전히 아이를 낳지 못한 효의왕후와도 아주 친밀하게 지냈다고 함

효의왕후 역시 세자를 낳은 의빈 성씨를 질투하지 않고 사이 좋게 지냄

15년간 짝사랑했던 의빈 성씨에게서 아들까지 낳은 정조가 문효세자를 얼마나 예뻐했을까

그러나 문효세자는 5살의 나이로 홍역을 앓다가 죽고 만다

문효세자 사망 당시 셋째를 임신하고 있던 의빈 성씨 역시 홍역을 앓기 시작했고

만삭의 상태로 34살의 짧은 생을 마감했음

의빈 성씨는 죽기 하루 전날 정조에게

앞으로는 효의왕후에게도 자주 들러 아들을 낳을 것을 간청하며

그러면 자신도 지하에서 기뻐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함.

효의왕후는 의빈 성씨의 죽음을 매우 슬퍼했고

정조 역시 의빈 성씨의 죽음을 매우매우 슬퍼했다

정조는 문효세자와 100보 거리에 의빈 성씨의 묘를 만들었고

직접 ‘어제의빈묘지명’을 비롯해 묘표를 작성했으며

죽은지 3년 후에도 제축문, 치제제문, 유제축문 등을 쓰며

그녀의 죽음을 애도했음

그리고 정조는 문효세자와 의빈 성씨 묘에 몇 번이나 거동하였고,

이때문에 용산구 효창동에 ‘거둥고개’ 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함

아래는 정조가 의빈 성씨를 기리며 직접 쓴 글 중 일부

“나는 다음과 같은 명을 내린다. 빈의 장례를 위로하고 어루만져 달랜다. 빈은 사랑과 인정이 많고 지극히 옳은 말을 하며, 몸은 정중하게 행동했다. 이에 하늘로부터 감응을 받아 지극히 좋은 복을 받아야만 하는데 그 은덕에 대한 보답도 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버렸다. 저 고요한 율곡의 무덤은 문효세자의 무덤이니 서로 영원히 지킬 것이다. 생각건대 대대손손 배회 하며 애석해할 것이다.”

​”내가 죽음을 슬퍼하며 아까와함은 특별히 빈의 죽음 때문만은 아니다. 빈이 세상을 떠난지 세 달이 되는 경인에 고양군 율목동 임좌(묏자리)의 언덕에 장사를 지냈는데 문효세자의 묘와 백 걸음 정도 떨어져 있다. 이는 빈의 바람을 따른 것인데 죽어서도 빈이 나를 알아준다면 바라건대 장차 위로가 될 것이다. 내가 빈의 언행을 표본으로 하여금 기록하여 광중(시체가 놓이는 무덤의 구덩이 부분)에 묻고 묘비에 요점만 간단하게 요약해서 썼다. 찾아오는 사람이 빈의 현명함을 애석해 하도록 할 따름이다. 사랑하는 빈의 불행한 운명은 위에 적힌 사실과 같다.”

“갑자기 빈이 뱃속의 아이와 함께 세상을 떠났다. 뱃속의 아이 또한 세상을 떠나버렸으니 문효세자의 남은 흔적과 향기는 쓸어버리듯이 사라져버렸다. 장차 내가 어찌 구하고, 어디에 기대고, 끊어질 듯이 아프고 비통하며 비참한 마음을 어찌 위로하고, 어찌 달래겠는가? 이에 있어서 지금의 슬픔이 거의 예전의 일보다 심하다. 내가 슬퍼하는 마음이 어찌 오직 빈의 죽음에 대한 슬픔뿐이겠는가?”

“이제 장차 빈을 문효세자의 곁에 보내서 장례를 치르는데 이는 빈의 한결같은 소망이다. 무덤이 아주 가까워졌으나 넋은 막힘없이 잘 통하여 끝난 세상을 원통하게 울면서 사별한다. 이로써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서로 영원히 헤어지는 한을 위로한다.

너 또한 내가 슬픔을 잊을 수 없다는 것을 슬퍼할 것이다. 그러한가? 그렇지 않은가? 아아! 슬프도다. 바라건대 부디 흠향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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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빈 성씨(宜嬪 成氏, 1753년 8월 6일 (음력 7월 8일[4]) ~ 1786년 11월 4일 (음력 9월 14일[5]))는 조선 제22대 왕 정조(正祖)의 후궁이며, 문효세자의 어머니이다.

개요 [ 편집 ]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이름은 덕임(德任)이다. 영조 때 입궁했고 청선공주, 청연공주, 궁녀 영희, 경희, 복연과 고전소설 《곽장양문록》을 국문 필사했다. 정조의 유일한 승은 후궁으로 정조가 내린 승은을 두 번 거절하고 나서 후궁이 되었다. 정조와의 사이에서 문효세자와 옹주를 낳았다. 사후 의빈 성씨의 소망대로 효창원 왼쪽 산등성이에 묘소가 조성되었고 일본에 의해 서삼릉 후궁 묘역으로 이장되기 전까지 어머니와 아들의 무덤이 백 걸음 떨어진 곳에 나란히 있었다.[주 1] 공식적으로 궁호를 받은 기록은 없으나, 정조 때 의빈궁(宜嬪宮)이라는 칭호를 받았고 고종 때 칠궁(七宮)에 위패가 봉안되었다. 순종 때 제사 제도가 개정되어 칠궁에서 폐지되었으나 명칭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생애 [ 편집 ]

초년기 [ 편집 ]

출생 및 집안 배경 [ 편집 ]

의빈 성씨(宜嬪 成氏)의 본관은 창녕이고 이름은 덕임(德任)이며 1753년(영조 29년) 음력 7월 8일에 증 찬성 성윤우(贈 贊成 成胤祐)와 증 정경부인 부안 임씨(贈 貞敬夫人 扶安 林氏)의 딸로 태어났다.[6]

《어제의빈묘표》와 《어제의빈묘지명》에 따르면 의빈의 신분과 집안은 한미했다. 고조부 성경(成景)은 군자감 정(정3품)의 자리까지 올랐으나, 증조부 성근립(成謹立)과 조부 성수산(成壽山)은 평생 관직에 오르지 못했다. 1787년(정조 11년) 이전에 성근립은 판결사(정3품), 성수산은 좌윤(종2품)에 증직 되었고 1787년(정조 11년)에 각각 이조참판(종2품), 이조판서(정2품)로 다시 추증되었다.[7]

아버지 성윤우[주 2]는 정조의 외조부가 되는 영풍부원군 홍봉한(洪鳳漢)[8], 승지 한준증(韓俊增)의 청지기로 지낸 적이 있고 미포아문의 고직으로 있기도 했다.[9] 1753년(영조 29년)에 교련관으로 무관직에 올라[10] 1754년(영조 30년)에 경복궁 가위장이 되었고[11] 1755년(영조 31년)에 절충장군(정3품)[12], 가선대부(종2품)를 거쳐[13] 1761년(영조 37년)에 첨절제사(종3품)가 되었다.[14]

성윤우는 장흥 마씨(長興 馬氏)와 초혼을 하고 부안 임씨(扶安 林氏)와 재혼하고 단양 지씨(丹陽 池氏)와 삼혼을 했다. 《창녕성씨세보》와 《창녕성씨상곡공파보》에 따르면 장흥 마씨는 1775년(영조 51년)에 사망했다.[15] 그러나 1769년(영조 45년)에 성윤우가 사망하자 장흥 마씨, 부안 임씨와 합장 되었고[16] 사망연도가 미상인 단양 지씨는 춘성군에 묘가 조성되었다. 따라서 장흥 마씨의 사망연도는 오류인 것으로 보인다.

외조부 임종주(林宗胄)는 통례원 인의(종6품)였는데[17]1786년(정조 10년) 11월 이후에 통덕랑(정5품)으로 증직 되었다. 어머니 부안 임씨는 의빈 성씨가 4살이 되는 1756년(영조 32년)에 3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8]

첫째 오빠 성담(成湛)은 무과에 합격했지만 1783년(정조 7년)에 무관직을 제수받기 전에 사망했고[19], 둘째 오빠 성협(成浹)은 절충장군(정3품)[20], 셋째 오빠 성완(成浣)은 부사용(종9품)[21], 막냇동생 성흡(成洽)은 만호(종4품)의 자리까지 올랐다.[22] 넷째 오빠 성숙(成淑)은 무과에 합격하지 못했다. 조카들 중에서는 성국민(成國民)은 현감(종6품)[23], 성도민(成道民)은 선략장군(종4품)[24], 성순민(成舜民)은 첨정(종4품)[25]이 되었다.

궁녀 입궁 [ 편집 ]

황윤석의 《이재난고》에 따르면 아버지 성윤우가 홍봉한의 청지기였던 인연이 계기가 되어 1762년(영조 38년) 이후에 입궁했고[26] 혜경궁 홍씨가 친히 길렀다. 다른 원인으로는 성윤우가 전포아문 관리와 7천 냥을 범포해서 거의 죽을 지경이 되자 혜경궁 홍씨가 의빈 성씨를 거두었다고 한다.[27]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는 이와 같은 사건이 나오지 않는다. 성윤우는 1761년(영조 37년) 6월에 첨절제사가 되었고 다음 달에 하직했다.

궁녀 생활 [ 편집 ]

첫 번째 승은 거절 [ 편집 ]

1765년(영조 41년)에 정조는 여색을 가까이 했고[28] 그해 11월부터 병을 앓기 시작했다. 감기, 복통, 피부질환, 담증, 번열, 현기증, 식은땀 등의 증세를 겪고 1766년(영조 42년) 6월이 지나서야 쾌차했다.[29] 그해에 정조가 승은을 내리자 울면서 “세손빈(효의왕후)이 아직 아이를 낳고 기르지 못했으니 감히 명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하고 죽음을 맹세하며 사양했다. 이에 정조는 의빈의 뜻을 받아들이고 종용하지 않았다.[30]

1769년(영조 45년)에는 평소에 담벽증을 앓고 있었던[31] 아버지 성윤우가 사망했다.[32]

《곽장양문록》 필사 [ 편집 ]

1773년(영조 49년)에 청연공주, 청선공주, 궁녀 영희, 경희, 복연과 고전소설 《곽장양문록》(전 10권 10책)을 국문 필사하였다. 이 소설은 필사 시기가 알려진 소설 가운데 최고로 오래된 필사소설이며, 의빈이 필사한 부분의 하단에는 ‘의빈 글시’라고 표기되어 있다.[33]

후궁 생활 [ 편집 ]

두 번째 승은 거절 후 승낙 [ 편집 ]

황윤석의 《이재난고》에 의하면 1780년(정조 4년) 12월에 의빈 성씨로 추정되는 나인이 임신한 지 여러 달 되었고[34] 1781년(정조 5년) 7월에는 의빈 성씨가 임신 중이었다.[35] 반면에 정조의 《어제의빈묘지명》에서는 합궁한 달에 바로 문효세자를 임신했다.[36] 즉, 원빈 홍씨와 화빈 윤씨가 간택되고 나서 1781년(정조 5년)에 정조가 다시 승은을 내리자 의빈 성씨는 거듭 사양했다. 이에 정조가 의빈의 하인을 꾸짖고 벌을 내리자 정조의 승은을 받아들였다.

후궁 봉작 [ 편집 ]

“하교하신 대로 소용궁(昭容宮)에게 올릴 빈호(嬪號)에 대한 일로 좌의정 이복원, 우의정 김익에게 가서 물으니, ‘철(哲) 자, 태(泰) 자, 유(裕) 자, 흥(興) 자, 수(綏) 자가 좋을 듯하나 감히 하나로 적시하여 대답하지는 못하겠습니다.’ 하였습니다.” 하여, 하교하기를, “의(宜) 자로 하라.” 하였다.[37] 하였다.

1782년(정조 6년) 8월 26일 전에 상의(정5품)가 되었고[38] 문효세자가 태어난 당일에 소용(정3품) 봉작을 받았다.[39] 12월에 작호(爵號)를 올리는 일을 도목정사(관리의 치적을 심사하여 면직하거나 승진 시킴)에서 거행했고[40] 1783년(정조 7년)에 의빈(정1품)으로 진봉했다. 정조는 좌의정 이복원(李福源)과 우의정 김익(金熤)에게 빈호를 의논해서 정하라고 했으나[41] 직접 ‘의(宜)’자로 정했다.

문효세자와 옹주 출생 [ 편집 ]

왕자(王子)가 탄생하였다. 임금이 승지와 각신(閣臣)들을 불러 보고 하교하기를, “궁인(宮人) 성씨(成氏)가 태중(胎中)이더니 오늘 새벽에 분만하였다. 종실이 이제부터 번창하게 되었다. 내 한 사람의 다행일 뿐만 아니라, 머지않아 이 나라의 경사가 계속 이어지리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으므로 더욱더 기대가 커진다.‘후궁은 임신을 한 뒤에 관작을 봉하라.’는 수교(受敎)가 이미 있었으니, 성씨를 소용(昭容)으로 삼는다.” 하니, 신하들이 경사를 기뻐하는 마음을 아뢰었다. 임금이 이르기를, “비로소 아비라는 호칭를 듣게 되었으니, 이것이 다행스럽다.” 하였다. 또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을 불러 보았는데, 모두가 말하기를, “하늘에 계신 조종께서 우리 나라를 돌보시어서 남아가 태어난 경사가 있었습니다. 더구나 이 달은 우리 선대왕께서 탄생하신 달이고 우리 전하께서 탄생하신 달인데다가 왕자께서 또 이 달에 탄생하셨으니, 경사에 대한 기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대신이 뜨락에서 문안을 올리려고 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인데, 명호(名號)를 정하기 전에 뜨락에서 문안을 드리는 것은 근거할 만한 전례가 없다. 더구나 을묘년에도 이러한 예가 없었으니, 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42] 하였다.

1782년(정조 6년) 8월 26일에 공조판서 서유경(徐有慶)을 권초관(捲草官)으로 삼았다.[43] 9월 7일에 호산청이 설치되었고 인시(새벽3시~5시)에 창덕궁 연화당에서 문효세자를 낳았다.[44] 연화당은 선정전 동쪽에 있고[45] 청기와 등을 사용한 인경궁의 전각들을 옮겨놓은 건물 중 하나여서 매우 웅장하고 화려했다.[46] 이날 혜경궁은 본가에서 데려온 유모 아지와 몸종 복례를 호산청으로 보내서 해산을 돕게 했다.[47] 정조는 “비로소 아비라는 호칭을 듣게 되었으니, 이것이 다행스럽다.”, “많고 많은 일 중에 이보다 더 기쁜 일은 없었다.”라고 심경을 밝혔다.[48] 호산청 의관 강명길(康命吉), 변관해(卞觀海), 탕약서원 신정희(申正希), 범경문(范慶文), 의녀 설매(雪梅), 일애(日愛)에게 벼슬을 임명했고[49] 9월 13일에 호산청을 철수했다.[50]

내가 이르기를, “조금 전에 순산(順産)하여 딸을 얻었다. 아들이 있는 데다가 또 딸이 생겼으니, 내가 참으로 기쁘다.”

하니, 김사목이 아뢰기를,

“신들도 이루 말할 수 없이 경사스럽고 기쁘게 생각합니다.” 하였다.[51] 하였다.

1784년(정조 8년) 윤 3월 20일 묘시(새벽 5시~아침 7시)에는 옹주를 낳았다. 잠깐 사이에 의빈이 옹주를 낳은 까닭에 호산청은 옹주가 태어나고 나서 설치했다.

문효세자 책봉 [ 편집 ]

문효세자는 태어난 지 100일이 안 된 1782년(정조 6년) 11월에 원자로 책봉 되었다.[52] 1784년(정조 8년) 7월에는 왕세자로 책봉 되었고[53] 8월에 정조가 문효세자를 위해 지은 창덕궁 중희당[54]에서 왕세자 책봉 예식을 거행했다.[55]

자녀 요절 [ 편집 ]

옹주는 1784년(정조 8년) 5월에 궁궐 밖으로 피우(避寓) 했는데 5월 12일 신시(오후 3~5시)에 경기(驚氣)로 갑자기 사망했다.[56] 이날 정조가 “나는 잊겠다. 어찌 슬픔을 이길 수 없겠는가. 다만 자궁(慈宮, 혜경궁)께 슬픔을 끼친 것이 매우 걱정스럽다.”라고 말한 것을 볼 때 혜경궁 홍씨가 손녀의 죽음을 무척 슬퍼한 것으로 보인다.[57] 정조는 옹주를 잃은 슬픔으로 5월 13일에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58] 옹주의 장례는 당시 정조의 총애를 받고 있는 무관 임율(任嵂)이 주관했다.[59]

문효세자는 1786년(정조 10년) 5월 3일에 홍역을 앓아서 의약청을 설치했다.[60] 증상이 호전되어서 5월 6일에 의약청을 철수하고[61] 정조는 고유제, 사면령, 과거 실시, 조세 탕감을 지시하고 의약청에 상을 내렸다.[62] 그러나 5월 10일부터 증세가 심해졌고 다음 날인 5월 11일 미시(오후 1~3시)에 창경궁 자경전 동쪽 행각에서 사망했다.[63]

5년 동안 외척이었던 본가 [ 편집 ]

의빈 성씨의 본가 창녕 성씨는 한때 외척이었지만 두각을 드러낸 인물이 없고 의빈과 문효세자가 1786년(정조 10년)에 사망해서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아버지 성윤우(成胤祐)는 1769년(영조 45년), 첫째 오빠 성담(成湛)은 1783년(정조 7년)에 사망했다. 넷째 오빠 성숙(成淑)은 정조의 《어제의빈묘지명》에서 의빈 성씨에게 오빠가 두 명 있다고 한 점으로 보아 일찍이 사망했다. 백부 성윤조(成胤祚)는 1728년(영조 4년)에 훈련주부(종6품)로 임명된 이후 공식적인 기록이 없고 숙부 성연지(成淵祉), 사촌 성호(成灝), 성연(成淵) 또한 뚜렷한 행적을 찾을 수 없다.

1782년(정조 6년)에 문효세자가 태어난 지 일주일이 지나자 셋째 오빠 성식(成湜)은 정조로부터 “지금으로서는 외인(外人)과 내통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어영청 군교 직위에서 파면당하고[64] 호조서리가 되었다.[65] 외척이 된 성식을 왕을 호위하는 군영인 어영청에 두는 대신, 호조에 두는 것이 알맞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1789년(정조 13년)에 부사용(종9품)이 되었고 그해 11월 이후에 성완(成浣)으로 개명했다.[66]

1784년(정조 8년)에 문효세자가 왕세자로 책봉되자 둘째 오빠 성협(成浹)과 성식(成湜)은 동궁의 내례(승정원, 액정서에 속한 하인)가 되었다.[67] 성협은 훗날 절충장군(정3품)이 되었다. 같은 해에 막냇동생 성흡(成洽)이 무과에 합격했다.[68] 1798년(정조 22년)에 교련관이 되었고[69] 1801년(순조 1년)에는 만호(종4품)의 자리에 올랐다.[70]

고모 창녕 성씨는 공조판서 정방(鄭枋)의 첩, 언니 창녕 성씨는 홍낙성(洪樂性)의 첩이어서 의빈 성씨와 정방, 홍낙성은 인척 관계였다. 정방은 1784년(정조 8년)부터 부총관, 한성 좌윤, 참판, 판의금부사 등 짧은 기간 동안 여러 직위를 거쳐 1786년(정조 10년)에 공조판서(정2품)가 되었다.[71] 정방의 조카 정복환(鄭福煥)은 1786년(정조 10년)에 부안 현감(종6품)이 되었고[72] 1787년(정조 11년)에 홍문관 교리(정5품)가 되었다.[73] 당대 사람들은 정방과 정복환이 의빈과 인척 관계여서 각각 공조판서와 홍문관 교리가 되었다고 웃었다.[74] 홍낙성은 영조부터 정조 재위 기간 동안 각별한 신임을 받았고 1783년(정조 7년)에 좌의정(정1품)이 되었다.[주 3]

1786년(정조 10년)에 의빈의 조카 윤동철(尹東喆)이 의빈묘전감(宜嬪墓典監)에 선발되었다. 1799년(정조 23년)부터는 윤동철의 아버지 윤광은(尹光殷)이 직임을 맡았다.[75] 그런데 1806년(순조 6년)에 묘소의 남쪽 길가에 줄지어 심어 둔 큰 버드나무 10그루를 함부로 찍어 내다 팔아버렸다. 윤광은은 처벌받았고 1807년(순조 7년)에 사망했다.[76] 1808년(순조 8년)에는 윤동철의 아들 윤인석(尹仁錫)이 의빈 성씨의 친속인데 아직 은택을 입지 못하고 있다며 격쟁 원정(擊錚原情, 일반 백성이 호소하는 문서를 직접 국왕에게 제출)을 냈다. 순조는 원정(原情)을 시행하지 않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 지었다.[주 4]

1874년(고종 11년)에는 무과 천거제에서 삭제되었던 의빈의 본가가 숙빈 최씨, 영빈 이씨의 본가와 함께 복구되었다.[77] 무과에 합격한 성윤우의 5대손 성원진(成元鎭), 성영준(成永俊), 6대손 성낙소(成樂韶), 성낙호(成樂頀)은 음관으로 벼슬이 더 올랐다.

본가 증직 [ 편집 ]

1784년(정조 8년)에 형조 판서 조시준(趙時俊)[78], 영의정 서명선(徐命善)이 문효세자 사친의 본가를 증직해야 된다고 했으나 《속대전》에 왕세자의 사친 3대를 추증한 사례가 없어서 보류되었다. 1785년(정조 9년)에 좌의정 홍낙성이 다시 추진하자 정조는 왕세자 사친의 부친을 추증하는 것이 근거할 만한 문적은 있지만 알 수 없는 점이 많고, 선조가 내렸던 하교는 일시적이었을 것이라며 보류했다.[79] 이외에도 홍봉한의 경우는 어디에 추증해야 하는지, 문효세자는 효의왕후의 아들로 삼았으니 세자 사친의 부친에 대한 추증은 중요한 관계가 없다는 등의 이유로 매번 허락하지 않았다.[80] 12월에 홍낙성이 또 아뢰자 정조는 급한 것이 아니니 내년 봄을 기다려서 하는 것이 좋겠다고 재차 미루었다.[81] 1786년(정조 10년)에 문효세자가 사망하고 나서 좌의정 이복원(李福源)이 왕세자의 사친 본가를 증직하는 것은 법전에 나와 있고, 곧 《선원보략》을 수정하니 문효세자의 사친 본가를 추증해야 된다고 하자 그제야 정조가 승낙했다.[82] 이후 증조부 성근립은 이조참판(종2품), 증조모 충주 유씨는 정부인, 조부 성수산은 이조판서(정2품), 증조모 김해 김씨, 창원 황씨는 정부인에 증직 되었다. 아버지 성윤우는 좌찬성(종1품), 어머니 부안 임씨는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다. 다만 의빈의 전어머니 장흥 마씨와 새어머니 단양 지씨가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화빈 윤씨와의 관계 [ 편집 ]

화빈 윤씨는 정조가 1780년(정조 4년)에 후궁 간택을 주저하는 시기[83]에 삼간택을 거쳐 자경전(慈慶殿)에서 가례를 올리고 입궁했다. 1780년(정조 4년)에 임신을 해서 1781년(정조 5년)에 산실청을 설치했지만 끝내 아무 소식이 없었다.[84] 1782년(정조 6년)에 의빈 성씨가 문효세자를 낳자 화빈 윤씨의 인척 서명선(徐命善)은 정조에게 문효세자의 원자 정호를 주청했다. 1784년(정조 8년)에 의빈 성씨가 옹주를 낳고 문효세자가 왕세자로 책봉되자 화빈의 입지는 완전히 사라졌다. 하지만 의빈 성씨는 왕세자의 생모지만 정1품 빈이라서 무품 빈인 화빈 윤씨보다 우위에 설 수 없었다.

그런데 문효세자가 태어나고 원자로 책봉된 후에도 화빈의 산실청은 유지되고 있었다. 대사간 신응현(申應顯)이 이에 대해 상소를 올리자 정조는 “나라에 큰 경사가 있으니 신하들은 기뻐하고 다행스러워하는 마음만 있어야 하는데 어린 원자를 농락하고 알 수 없는 말을 하여 조정을 의혹 시킨다.”는 이유로 벼슬 명부에서 삭제했다.[85] 이후 1787년(정조 11년)에 이 문제가 다시 제기되었다. 산실청이 30개월 동안 유지되었다는 영의정 김치인의 말을 근거로 보면 화빈의 산실청은 1781년(정조 5년) 1월부터 1783년(정조 7년) 7월까지 존속되었다. 정조는 1782년(정조 6년) 때와는 다르게 신하들의 주청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화빈의 고모부 조시위(趙時偉)는 1780년(정조 4년) 이후로 임금의 외척을 자칭하면서 조정 일을 제멋대로 좌지우지하고, 문효세자의 출생 때는 “호칭 정하는 일을 그렇게 서두를 것 없다.”라는 발언[86], 화빈의 산실청 문제 등으로 제주도에 위리안치되었다.[87]

그 외 당시에 의빈 성씨가 방중술을 써서 문효세자를 낳았다[88], 화빈 윤씨는 목이 쉬도록 울면서 의빈을 원망하고 효의왕후를 시기한 죄로 가두고 궁호(宮號)를 강등할지 의논했다는 소문이 돌아다녔다.[89] 1786년(정조 10년)에는 자현(子懸, 임신 중에 태기가 고르지 못하고 위로 치밀어 답답하고 숨이 차는 증상)을 앓는 의빈이 화빈에게 독살 당했고 화빈은 그 죄로 내쳐졌다는 소문마저 퍼졌다.[90]

이를 토대로 의빈 성씨와 화빈 윤씨는 서로 우호적인 관계가 되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사망 [ 편집 ]

의빈은 마음이 약해서 칠정(七情, 마음의 병) 증세가 있는데 문효세자 사망 이후 중병에 걸렸고 본궁으로 피접을 떠났다가 조금 나아지자 다시 돌아왔다.[91] 정조는 매일 의빈이 씻는 모습을 보고, 약을 제조하고 달일 때는 항상 검열했으며 약봉지와 약그릇은 모두 침실 안에 보관하고 쓰는 등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1786년 9월 14일 미시(오후 1시~3시)에 창덕궁 중희당에서 임신 9개월[92]의 몸으로 사망했다.

사인 추정 [ 편집 ]

《어제의빈묘지명》과 《이재난고》에 기록된 의빈의 증세는 대부분 임신중독증의 증상(해산할 달에 기력이 가라앉음, 정신 혼미, 사지가 뻣뻣해짐, 명치 부위의 통증 등)과 일치한다. 임신중독증의 원인 중 하나가 노산인데 의빈 성씨는 당시로서는 매우 늦은 나이인 34세에 출산을 앞두고 있었다. 임신중독증은 치명적인 경우 사망에 이를 수 있는데, 의빈 성씨 역시 결국 졸서했다.

독살설 [ 편집 ]

1786년(정조 10년) 11월 20일에 상계군(常溪君)이 의문사 하고[93] 12월 1일에 정순왕후는 의빈과 문효세자는 온갖 증세가 처음부터 괴이 했는데 이는 은언군이 아들 상계군을 왕으로 세우려고 독살 했다고 주장하며 진상이 밝혀지기 전까지 식음을 전폐하겠다는 언문 교지를 내렸다.[94] 이후 구선복(具善復)이 상계군(常溪君)을 추대 하려 했던 사실이 드러나면서[95] 구선복은 능지처사 되고[96] 은언군(恩彦君)은 강화도로 유배 되었다.[97] 12월 27일에 손용득(孫龍得)은 내관 이윤묵(李允默)이 의빈을 독살했다는 의혹스러운 소문이 파다하다고 했다. 정조는 의빈의 약을 조제하고 달일 때 반드시 직접 검열했기 때문에 근거 없는 말이라고 했다. 이에 손용득은 유배형을 받았고[98] 이윤묵은 당시 이미 유배 중이었다.[99] 또한 민간에서는 화빈 윤씨가 독을 썼다는 소문도 있었다.[100]

사후 [ 편집 ]

예장 [ 편집 ]

“의빈(宜嬪) 성씨(成氏)가 졸(卒)하였다. 하교하기를, “의빈의 상례(喪禮)는 갑신년의 예에 따라 후정(後庭)의 1등의 예로 거행하라.” 하였다. 처음에 의빈이 임신하였을 때 약방 도제조 홍낙성이 호산청(護産廳)을 설치하자고 청하자, 출산할 달을 기다려 하라고 명하였는데, 이때 이르러 병에 걸려 졸(卒)한 것이다. 임금이 매우 기대하고 있다가 그지없이 애석해 하고 슬퍼하였으며, 조정과 민간에서는 너나없이 나라의 근본을 걱정하였다. 홍낙성이 아뢰기를, “5월 이후로 온 나라의 소망이 오직 여기에 달려 있었는데 또 이런 변을 당하였으니, 진실로 어쩔 줄을 모르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병이 이상하더니, 결국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이제부터 국사를 의탁할 데가 더욱 없게 되었다.” 하였다. 이는 대체로 의빈의 병 증세가 심상치 않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무슨 빌미가 있는가 의심하였다고 하였다.”[101] 하였다. 이는 대체로 의빈의 병 증세가 심상치 않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무슨 빌미가 있는가 의심하였다고 하였다.”

정조는 김치인(金致仁), 김상철(金尙喆), 서명선(徐命善), 홍낙성(洪樂性) 등이 있는 자리에서 “의빈의 죽음이 참으로 몹시 슬프고, 잘 자고 잘 먹어도 마음은 놀랄만한 변화가 없어서 걱정된다.”라고 심경을 밝혔다.[102] 정조는 의빈의 상례(喪禮)를 영빈 이씨의 전례대로 후궁 1등의 예로 거행하라고 했지만, 그 해에 흉년이 들었고 문효세자를 예장할 때와 칙명을 전달하는 사신의 행차 때 많은 돈을 써서 나랏돈에 손을 댈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더군다나 호조 재력마저 탕진되어서 도감(都監)을 세우지 못하고[103] 모든 비용을 절감하여 호조와 전의감에 특별히 따로 설치하여 예장을 거행하되 절차는 영빈 이씨의 규례를 따랐다.[104][105] 9월 16일 묘시(오전 5시~7시)에 의빈을 입관하고 안현(安峴)의 본궁(本宮)에 빈소를 마련했다.[106][107] 11월에 궁(宮)과 묘(墓)의 제향이 정해지고[108] 11월 20일에 효창원(孝昌園) 왼쪽 언덕 임좌(壬坐)의 자리에 장사 지냈다.[109] 예장 때 박명원(朴明源), 서유녕(徐有寧), 서용보(徐龍輔), 김사목(金思穆), 서유방(徐有防) 등 정조의 신임을 받는 신하들이 대거 참여했고 이복원(李福源), 조경(趙璥), 김종수(金鍾秀), 김재찬(金載瓚) 등이 만사(挽詞)를 지었다.

묘소 [ 편집 ]

의빈 성씨는 문효세자와 사적으로는 모자지간이나, 종법으로는 문효세자가 효의왕후의 양자여서 사친에 불과했다. 하지만 정조는 의빈의 바람대로 1786년(정조 10년) 9월에 의빈의 묘산(墓山)을 효창묘 왼쪽 산등성이로 정했고, 11월에 효창묘(孝昌墓)와 백 걸음 떨어진 곳[110]에 의빈묘(宜嬪墓)를 조성했다.[111] 이후 효창원과 의빈묘 소속이 소란을 피우는 문제가 생기자 정조는 “달리 소중히 여기는 것을 안다면 그들이 어찌 감히 이와 같이 한단 말인가. 이후로는 경계를 나누지 말고 효창묘의 소속으로 하여금 의빈묘를 겸관하게 하라.”라고 했다.[112] 숙종이 숙빈 최씨의 묫자리를 명선공주와 명혜공주의 묘 근처로 정한 내관(內官) 장후재(張厚載)를 파직 시키고 다시 정하라고 했던 일과 비교하면 이례적이었다.[113] 본래 효창원(孝昌園) 영역은 지금의 효창동, 청파동, 공덕동 일대로 묘역이 굉장히 넓고 송림이 울창했고 의빈묘(宜嬪墓)는 곡장이 삼면으로 둘러져 있고 혼유석, 명등석, 망주석 한쌍, 문인석 한쌍, 묘상표석, 비각, 제각이 있었다.

정조는 1787년(정조 11년)부터 1790년(정조 14년) 5월까지 의빈의 무덤 및 사당을 여러 차례 방문했다. 하지만 1790년(정조 14년) 7월에 순조가 태어난 이후로는 더 이상 방문하지 않았다. 문효세자의 무덤과 사당도 마찬가지였는데 순조의 후계 정통성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1829년(순조 29년)에 효창묘에서 동쪽으로 99보 떨어진 곳에 영온옹주의 묘가 마련되었고[114], 1854년(철종 5년)에 영온옹주의 생모 숙의 박씨의 묘가 효창묘 내에 조성되었다. 1870년(고종 7년)에는 효창묘가 효창원(孝昌園)으로 승격되었다.[115] 그러나 일제강점기인 1938년에 숙의 박씨의 묘가 서삼릉 후궁묘역으로 이장되고 1939년에 영온옹주의 묘가 서삼릉 왕자·왕녀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뒤이어 1940년에 의빈묘(宜嬪墓)는 서삼릉 후궁 묘역으로, 1944년에 효창원(孝昌園)은 의령원(懿寧園) 앞으로 이장되었다.[116]

사당 [ 편집 ]

1786년(정조 10년)에 창덕궁과 가까운 한성부 북부 안국방(서울 종로구 안국동)에 사당 의빈묘(宜嬪廟)가 세워졌다. 정조는 인정을 헤아려 사도세자(장조)의 사당 경모궁(景慕宮) 남쪽 담장 밖에 있는 문효세자의 사당 문희묘(文禧廟)를 의빈묘 서쪽 담장 밖으로 옮겼고, 1789년(정조 13년)에 모자의 사당이 한 곳에 있게 되었다. 1870년(고종 7년)에 대수가 다 되어 문희묘는 정조의 동복형 의소세손의 사당 의소묘(懿昭廟)로 이봉 되었다.[117]

1786년(정조 10년)에 의빈 성씨의 궁(宮)과 묘(墓)의 제향은 영빈 이씨의 전례를 따랐다.[118] 다만 정조가 공식적으로 의빈에게 궁호를 내린 기록은 없으나 1787년(정조 11년)에 정조가 의빈궁(宜嬪宮)이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했다. 또한 당시 유우량(劉佑良)은 의빈궁의 청지기였으니[119] 1787년(정조 11년)부터 의빈의 제궁(祭宮)은 의빈궁(宜嬪宮)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의빈에 대한 궁(宮)의 확립된 호칭이 없어서인지 의빈방(宜嬪房), 의빈묘(宜嬪廟), 의빈궁(宜嬪宮)을 혼용했다. 1790년(정조 14년)에 간행한 《문희묘영건청등록》의 <정당이하제처 도설(正堂以下諸處 圖說)>에는 의빈의 사당을 의빈묘(宜嬪廟)로 기록했고 간혹 의빈궁(宜嬪宮)이라고 지칭했다.[120]

의빈궁(宜嬪宮)이 공식적으로 기록된 문서는 1797년(정조 21년) 이후에 완성한 《제물등록》이다. 의빈궁은 명일(명절, 국경일 총칭)에 육상궁(숙빈 최씨), 선희궁(영빈 이씨)와 작헌례(사당·능원에 술잔을 올리는 예식)를 같은 예법으로 지냈다. 숙빈 최씨는 영조의 사친이고 영빈 이씨는 정조의 생부가 되는 사도세자의 사친이나 의빈 성씨는 문효세자의 생모였다. 당시에는 유빈 박씨가 낳은 순조가 원자(元子)로 있어서 의빈은 후사 없이 사망한 후궁일 뿐인데 삼궁(三宮)에 속해서 제사를 지낸 일은 이례적이었다.[121] 1799년(정조 23년)에 편찬한《사전사례편고》에는 의빈궁묘가 덕흥궁묘(덕흥대원군), 대빈궁묘(희빈 장씨), 선희궁묘(영빈 이씨)와 사궁(私宮)에 속해 있다고 기록했다. 1816년(고종 6년)의 《평안도내각읍소재각궁방각사전답급이생환기사결성책(平安道內各邑所在各宮房各司田畓及泥生環起査結成冊)》, 1865년(고종 2년)에 편찬한 조선시대 마지막 법전 《대전회통》과 1867년(고종 4년)에 완성한 《육전조례》등에 기록되었다.

따라서 1787년(정조 10년)에 의빈(宜嬪)이라는 호칭 자체로 사당을 의빈궁(宜嬪宮)으로 정하고 1797년(정조 21년) 이후에 정립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정조 이후에도 의빈궁(宜嬪宮), 의빈묘(宜嬪廟), 의빈방(宜嬪房)이라는 명칭을 두루 사용했다. 비슷한 예로 희빈 장씨(옥산부대빈)은 대빈(大嬪)이라는 호칭 자체로 사당을 대빈궁(大嬪宮)으로 정했는데 희빈궁(禧嬪宮), 희빈묘(禧嬪廟), 대빈방(大嬪房)이라고 하기도 했다.[122]

1786년(정조 10년)에 의빈의 빈소를 안현의 본궁에 차려서 안현궁(安峴宮)으로 부르기도 했다. 그 예로 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았던 곳이 한성부 남부 회현방 송현에 있어서 송현궁(松峴宮)이라고 했다.[123] 1793년(정조 17년) 황해도 은율현에 있는 안현궁의 궁방[124], 1807년(순조 7년)에 정순왕후의 국장 과정을 담은 《효안전일기》[125], 1832년(순조 32년)에 안현궁의 하인에 대한 일[126], 1879년(고종 16년)에 쓴 《지각관청일기》[127], 1894년(고종 31년)에 간행한 《의판》[128], 1904년(광무 8년)에 수정한 순조의 국장 과정을 담은 《효성전일기》[129] 등에서 안현궁으로 지칭하기도 했다. 안현궁은 의빈궁의 이칭 격이나 일반적이지는 않았다.

제향 [ 편집 ]

1870년(고종 7년)에 제사를 지내는 대(代)의 수가 다 되어서 의빈 성씨의 신주는 희빈 장씨, 정빈 이씨, 영빈 이씨의 신주와 함께 육상궁(숙빈 최씨)의 별묘에 봉안했다. 의빈의 사당과 한 영역에 있던 문효세자의 사당 문희묘는 백부 의소세손의 사당인 의소묘(懿昭廟)에 합쳐서 봉안했다. 1873년(고종 10년)에 저경궁(인빈 김씨), 대빈궁(희빈 장씨), 육상궁(숙빈 최씨), 연호궁(정빈 이씨), 경우궁(유빈 박씨), 선희궁(영빈 이씨), 의빈궁(의빈 성씨)을 ‘궁(宮)’으로 명칭했다.[130] 1898년(광무 2년)에는 이 궁(宮)을 칠궁(七宮)으로 확립했다.[131]

폐궁 [ 편집 ] [132] 〈개정한 제사 제도〔享祀釐正〕〉 저경궁, 대빈궁, 연호궁, 선희궁, 경우궁에 봉안한 신위는 육상궁 안에 각별히 신주의 방을 만들어 합사하고, 폐궁(廢宮)의 경우 연호궁을 제외하고 모두 국유로 이속시킨다. 신위를 이안하는 절차는 궁내부에서 따로 이를 정한다. 의빈궁(宜嬪宮), 경수궁(慶壽宮), 영소묘(永昭廟), 문희묘(文禧廟)에 봉안한 신위는 매안(埋安)하고 해당 궁과 사당은 의빈궁을 제외하고 모두 국유로 이속시킨다. 다만 의빈궁과 경수궁의 묘소에는 영소묘와 문희묘의 원소(園所) 예에 따라 1년에 한 번씩 제사를 지내고, 매안 절차는 궁내부에서 따로 이를 정한다.

1908년(융희 2년)에 제사 제도가 개정되어서 국왕의 사친을 봉안한 사당이 아닌 의빈궁은 칠궁에서 폐궁되었고 신주는 무덤 앞에 묻혔다. 다만 의빈궁이라는 명칭은 유지되었고[133] 1년에 한 번씩 효창원(문효세자)과 의령원(의소세자)의 예를 따라서 제사를 지냈다.

정조 어제문(正祖 御製文) [ 편집 ]

의빈 성씨가 사망하자 정조는 묘표(墓表)와 묘지명(墓誌銘)을 손수 지었다. 전면대자(前面大字)는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 음기(陰記, 비석 뒷면에 새긴 글)는 서용보(徐龍輔)가 썼다. 비석은 1786년(정조 10년) 11월에 세워졌다.[134]

의빈 성씨는 문효세자 의 어머니이다. 문효가 병오(1786년, 정조 10년) 5월에 죽고 여섯 달이 흘러 갑신(1786년 9월 14일)에 빈 또한 세상을 떠났다. 석 달이 지나서 경인(1786년 11월 20일)에 고양군 율목동에 있는 문효세자의 묘 왼쪽 산등성이 임좌지원에 장사 지냈다. 빈은 문효를 잃고 나서 항상 죽기를 바라더니 마침내 그 소원을 이루어 이제 효창묘 곁에 묻혔으니, 빈은 장차 한을 풀고 문효의 혼백을 위로하겠는가? 오호, 슬프도다. 빈은 나면서부터 맑고 총명하여 겨우 생후 만 1년이 갓 되자 성명과 자를 능히 구별했다. 용모는 단정하고 성품은 곧고 깨끗하고 단정하며, 인지하고 온화하고 부드러웠다. 열 살(영조 38년, 1762년)이 넘어서 선발되어 궁중에 들어갔는데 척리가(임금의 내척·외척)의 부인들이 벌열(나라에 공로와 벼슬 경력이 많음) 혈통으로 알았다. 타고난 기품이 훌륭하고 뛰어나게 달라서 자기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일 줄 알고 검소하고 절약했다. 심지어 도회지(인구가 많고 번화한 지역)에서의 의리를 명백히 구별하고 조금도 변치 않고 굳게 지켰다. 처음 승은을 내렸을 때 눈물을 흘리고 울면서 내전(효의왕후)이 아직 귀한 아이를 낳아 기르지 못하여 감히 받아들이기 매우 황송하다며 죽음을 맹세하고 명을 따르지 않았다. 나는 감동하고 더는 가까이하지 못했다. 15년 뒤에 널리 후궁을 간택하고 나서 다시 승은을 내리자 빈은 또 고사했다. 이에 빈의 하인을 꾸짖고 벌을 내린 뒤에야 비로소 명을 따랐고 당석(자기 차례가 돌아온 날 밤에 잠자리에서 모심) 한 달에 임신을 하여 임인(1782년, 정조 6년) 9월에 왕세자가 태어났다. 이 해에 소용(정 3품)이 되었고 금세 품계가 올라 의빈이 되었는데 왕위를 이을 왕세자로 인해서였다. 이로부터 더욱 스스로를 낮추고 정성스럽게 예를 갖추고 내전을 섬겼다. 시침(임금을 모시고 잠)을 할 때에는 말하기를 “이제부터 국세를 의탁할 데가 있으나 위에 내전이 있고 또 빈어(화빈 윤씨)가 있습니다.” 라고 했다. 이에 또 감히 매 때마다 당석이 잘못되었다고 간절히 사양하며 피했다. 내전(효의왕후)은 문효세자를 아들로 받아들였는데 가령 양육하는 데 있어서는 생모가 필히 임하는 것이 국조에서 전해오는 정례였다. 빈은 사려 하며 감히 마음대로 결정하거나 처리하지 않고 오직 내전의 말을 따랐고, 내전은 빈으로 하여금 스스로 기르게 하여 조금 더 장성하기를 기다렸다. 빈이 문효세자를 보살필 때는 오직 조심스럽게 하여 5년 동안 한결같이 밤이 오면 새벽을 밝힐 때까지 불을 끄지 않았고 잘 때는 옷을 벗는 일이 없었다. 나날이 몸소 비천한 일을 하고 문효세자에게는 극진히 말하고 존중히 여기며 공경했다. 누군가가 너무 지나치다고 하면 말하기를 “저군(왕세자)이고 내전(효의왕후)의 아들입니다. 어찌 감히 내가 낳은 자식이라고 스스로를 높이겠습니까?” 하였다. 거처는 겨우 비바람을 가릴 만하고 의복과 음식은 될 수 있는 대로 검소했다. 빈은 “제가 오늘날 지체가 높고 귀한 것은 분수에 넘치는데 더욱 스스로를 자랑하고 제멋대로 군다면 어찌 제 몸에 재앙이 들지 않을 것이며, 동궁(문효세자)을 위해 복을 아끼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1786년, 정조 10년) 5월의 변고(문효세자가 홍역으로 사망)가 일어난 때에 능히 이치로 하여금 마음을 추스르고 말과 얼굴빛에 드러내지 않았다. 사람들이 혹 괴이하게 여겨 어찌 개의치 아니하냐고 물어보니 “몸은 제 것이 아닙니다. 지금 보는 나라는 위태함이 위엄이 머리카락과 같습니다. 다행히 제가 임신을 했지만 만약 제가 삼가지 않고 방자하게 마음대로 슬퍼한다면 마땅히 나라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하였거늘, 어찌 그리 병에 걸렸단 말인가? 병의 증세는 의술과 약으로 다스릴 수 없었다. 해산할 달에 기력이 가라앉았고 날마다 목욕을 하였는데 내가 직접 가서 보고 살폈다. 정신은 혼미하여 어지럽고 사지는 움직일 수 없으나 나를 대할 때는 기운을 내서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메아리처럼 응답을 하였다. 임종하기 전날 저녁에 내가 몸소 방문하자 갑자기 처량해지더니 말보다 눈물이 앞섰다. 내가 꾸짖으며 말하기를 “평소에 근심하는 태도로 나를 보지 않았거늘 지금은 무엇 때문인가?” 하였다. 빈이 말하기를 “내전(효의왕후)께 아들을 낳는 경사가 있기를 살아있는 내내 기원해왔습니다. 종사를 위해서 천신이 다시 임신한 것은 다행이지만 제 마음은 견디지 못할 만큼 근심하고 두려워했습니다. 이때에 복이 분수에 넘쳐서 병이 들고 심해졌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슬프지 않으나 다만 오래도록 지녀온 소원을 아직 이루지 못하였는데 죽을 고비에 임하자 애달픕니다. 바라건대 정전에 나아가 부지런히 대를 이을 아들을 구한다면 장차 경사가 찾아올 것이니, 죽어서도 즐겁고 좋아할 것입니다.” 하였다. 나는 힐책하려다 감동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에 일어나 옷을 바르게 하고 자리에 나아가서 내가 들어가서 보니 이미 어찌할 수가 없었다. 내전(효의왕후)은 빈이 진실로 나라를 위했다며 정성스럽게 말했는데 거짓됨이 없었다. 지난날을 생각하건대 어찌 아닐 수 있었겠는가? 이와 같이 죽음을 잊지 아니하고 맛보는 일과 언행을 조심했는데 빈의 죽음을 슬퍼하고 정성껏 임하는 태도와 마음은 매우 친밀하여 자매를 잃은 마음이었다. 온 궁 안 사람이 모두 빈의 죽음을 한탄하여 한숨 쉬고 슬퍼하며 애처로워했고 통곡하며 부르짖었다. 빈이 작위를 받고 나서 나는 더욱 엄하게 단단히 단속해서 이따금 사람이 견디지 못 할 때가 있었는데, 빈은 그러한 일에 처하면 하나의 뜻으로 기쁘고 좋게 받들고 따랐다. 일이 혹 더욱 은혜에 해당하면 두려움으로 움츠러들어서 멀리하고 견지 했으니 자못 겸손했다. 빈의 선산 터가 이롭지 못하여 의논하여 이장하자고 하자 빈이 간언하기를 “천한 집안일에 번잡하게 관청 비용을 쓰는 것은 참으로 사사로운 의견이 아닌지라 더욱이 감히 편안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이는 매우 중요하고 꼭 필요해서 그만둘 수 없는 일이니 바라건대 스스로 의복을 팔아서 이장에 드는 비용에 보태라.”라고 일렀다. 동궁(문효세자)의 외가 사친은 증 찬성(정 1품)에 추증하지만 나는 전에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5월에 문효세자가 세상을 떠난 후에야 비로소 교지를 내렸는데 빈은 두려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자기 집안사람에게 지나치다고 청하였다. 빈은 분황(죽은 사람에게 벼슬이 추증되면 행하는 의식)의 예를 말리면서 이르기를 “증직은 나라의 법전에 기재되어 있어 감히 받지 않을 수 없으나 또 어찌 감히 장대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처럼 나는 빈을 매양 애석하게 여겨 따뜻한 밥과 모시를 은수(임금이 공이 높은 사람에게 베푸는 특별한 혜택) 했는데 도리어 궁의 후궁만도 못하였다. 비록 자기 자신을 굽히고 의지를 꺾어 검소함을 따랐으나 오히려 가난하고 군색함을 염려하며 궁중 사람에게 늘 너그러이 빌려줬다. 결국에 가서는 세상을 떠나자 상자에는 남은 비단이 없어서 염습할 때 모두 시장에서 가져왔고, 생전에 은 수저를 만들지 않아서 반함(염습 할 때 죽은 사람의 입에 구슬과 씻은 쌀을 물림)을 할 때 버드나무로 대신 했다. 궁인들이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지며 말하기를 “참으로 알겠도다. 빈이 검약을 지킨 진정한 청빈함이 마침내 이에 이른단 말인가.” 하였다. 빈에게는 오리버니가 두 명 있는데 곤궁하여 스스로 살아가지 못하였으나 사사로이 주는 일이 없었다. 내가 말하기를 “조정의 관작은 진실로 부당하고 법에 지나치게 벗어나서 남발하는데 너만 유독 남는 녹봉으로 배고픔과 추위를 돕지 않는구나.” 하였다. 빈이 걱정하는 모양으로 대답하기를 “궁방이 세워진 이후 한 물건도 제멋대로 쓰지 않았는데 어찌 감히 사가의 천한 사람에게 재물의 은덕을 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그리하여 빈의 장례 때 친족은 다른 사람에게서 옷과 신발을 빌렸다. 후궁 사친은 관직명이 없으면 궁중 출입이 허락되지 않으나, 빈에게는 오래전부터 본궁에서 접견하도록 했었다. 빈이 본궁으로 나가 살면서 사친과 여러 해 동안 격조하고 방문하지 못하게 하였다. 빈은 “올 때 임금에게 여쭈고 아뢰어 뜻을 받들지 아니 하고서는 감히 불러내어 만날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무릇 형제가 몹시 가난하여 어찌할 수가 없어서 가족 간에 서로 비호하고 덮어주기를 바라면 빈은 오랫동안 떨어져 지내려고 했다. 단란함은 이 사람의 상정이거늘 어찌하여 다른 사람과 홀로 다르단 말인가. 내가 명을 내리면 단 한 가지 일도 멋대로 하지 않고 조심히 정성껏 지켰는데 이는 실지로 사실을 경험하였다. 궁궐에서 지낸 지 20여년인데 여태까지 눈을 부릅뜨고 다른 사람을 보는 일이 없었다. 일이 혹 어려워서 말다툼을 일으키는 실마리에 놓이면 의심스럽게 접근하여 반드시 자세한 사정을 알아내서 스스로 타당함에 이르렀다. 나는 보통 때 바깥 말을 안으로 가지고 들어오지 않았고 빈 역시 집안일을 바깥으로 갖고 나가지 않았으며 서로 말없이 술잔을 주고받았다. 내가 혹 가서 머무르면 부리는 궁중의 여종은 감히 할 수가 없어서 모두 두려워하며 숨었으나 빈은 그전에 자신을 삼가고 엄격하게 아랫사람들을 통솔하고 부지런히 가르쳤다. 또한 길쌈에 민첩하고 요리 솜씨가 훌륭하고 여가에는 글을 하였는데 문장 역시 범상치 않았다. 수리 학문을 배우면 자세히 알고 연구하여 깨달아 식견이 더욱 지혜가 열려 도를 깨우쳤다. 이르는 곳마다 분명하니 비단 재능과 기예를 완전히 갖추었을 따름이다. 아, 빈의 장사 때 내가 반드시 비명(碑銘)을 짓는데 어찌 빈의 재주와 용모를 잊지 아니하겠는가? 나는 궁중의 하인을 부리는 데 있어서 혹독하고 가혹하며 급사(給事)가 내 명을 받드는 데 있어서 마음에 들 때가 적었다. 빈을 후궁 반열에 둔지 20년이 되는데 훈칙을 명심하고 한 치의 실수도 하지 않았다. 응대를 할 때는 신중하고 법도를 저절로 지켰으며 밤낮으로 부지런함이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으니 이는 뛰어난 현인도 참으로 행하기 어렵도다. 본분을 삼가 지키고 신분의 엄격함을 명확하게 하였고, 청탁을 경계하고 통렬하게 끊었다. 이루어 놓은 것을 지킬 때 물이 가득 찬 그릇을 드는 것처럼 조심하고 경계하였는데 이것은 더욱 어려운 것이다. 이제 의리와 관계된 것이 크게 옳고 그름이 분명하나 감히 말할 수 없고 일의 형세를 처리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이면 오랫동안 정성을 쌓았다. 있는 힘을 다해 물러서지 않고 곧바로 나아가서 하고 있는 의리로 하여금 마침내 극히 바른 데로 돌아가게 하였으니 이는 책을 읽은 사대부가 쉽게 갖추지 못하는 바이다. 만약 그러한 사람이 있다면 일에 능하고 절개와 지조가 있다고 하여 널리 전해지고 당대의 미담이 될 것이다. 후일 빈의 상론(고인의 언행 및 인격을 평가)은 이와 같다. 빈의 출신은 한미하고 가난하여 스승으로부터 배움을 말미하지 못하고 후궁이 되었으나 배우지 않아도 알았다. 거듭하여 내전(효의왕후)을 위해 몹시 마음을 쓰고 우러난 정성은 귀신도 가히 감동할 만하고 쇠와 돌도 뚫을 수 있을 것이다. 한 몸의 존귀는 일찍이 임금의 은덕을 입은 영광만으로 즐거워할 수 없다는 것을 잊지 않았다. 매우 간절한 마음으로 청하고 반드시 스스로 정성을 다하여 내전을 따르니 마침내 죽음에 임해서는 서글프게 울면서 평생 따르겠다고 간절히 바랐다. 비록 옛날에 죽음으로서 간언하는 충성심이나 배에 칼을 꽂는 정성도 이보다 심할 순 없을 것이다. 덕성을 가진 마음가짐은 온전히 본연의 성품에서 나온 것임이 분명하다. 마땅히 어진 아들을 낳아 영광된 왕세자를 이어받는 공을 세워서 나라 형세가 태산 반석과 같음을 우러르게 되었으니 경사를 길러 왕족이 번창해야 하나 국운이 불행하고 하늘의 뜻이 크게 어그러져 갑자기 올해 여름에 상변을 당했다.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무슨 관계인지 뱃속에 있는 아이와 하루아침에 저승으로 돌아가니 빈의 행적은 장차 이 세상에서 형상과 자취가 아주 없어질 것이다. 뛰어나게 우뚝한 말과 행실을 내가 기록하지 않는다면 누가 전하겠는가. 아주 없어질 것이 명백하니 애석하다. 이는 빈에게 한이 될 뿐만 아니라 문효에게도 한이 될 것이다. 마침내 대략 찬차(시문 따위를 가려 뽑아서 차례를 정함) 했는데 나도 모르게 말이 길어졌도다. 그대 빈은 계유년(1753년, 영조 29년) 생이고 득년 34세이다.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문효세자이고 딸은 해를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빈의 본관은 창녕이고 비조는 고려의 중윤 인보(仁輔)다. 인보의 아들 송국(松國)은 문하시중이고 증손 여완(汝完)은 우리 왕조(조선)에서 검교정승 문정공이다. 여완의 첫째 아들은 석린(石璘), 둘째 아들은 석용(石瑢)이다. 셋째 아들 석인(石因)은 예조판서 대제학을 지냈고 시호는 정평인데 즉 빈의 선조다. 그러나 명성이 중도에 쇠진한 동안 보계(譜系)를 잃었다. 7대조 만종(萬種)은 제릉(태조 원비 신의왕후의 능묘) 참봉이고 고조부 경(景)은 군자감 정이다. 아버지 증 찬성 윤우이고 어머니 증 정경부인 부안 임씨는 통례원(조선시대 국가 의례를 관장한 관서) 인의 종주(宗胄)의 딸이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하늘을 따라 정중히 행동하고 말로서 사람을 감동하게 하였다. 돈독한 행실에 입은 지극히 옳은 말을 했으나 복록과 덕을 받지 못하였으니 아마도 운명인가보다. 저 고요한 율천은 문효가 잠든 곳이니 서로 영원히 지켜줄 것이다. 생각하건대 오랜 세월동안 배회하고 탄식할 것이다. 수록대부 금성위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 신 박명원이 임금의 명을 받들어 전면을 삼가 쓰다.

통정대부 이조참의 겸 규장각 검교 직각 지제의 신 서용보가 임금의 명을 받들어 음기(비석 뒷면에 새긴 글)를 삼가 쓰다.

숭정기원 후 세 번째 돌아온 병오(1786년, 정조 10년) 11월 모 일에 세우다. 숭정기원 후 세 번째 돌아온 병오(1786년, 정조 10년) 11월 모 일에 세우다.

내가 즉위한 지 10년째 되는 병오 9월 갑신에 의빈 성씨가 세상을 떠났고 이해 5월에는 문효세자를 잃었다. 빈이 임신하여 해산할 때가 가까워졌는데 마침내 세상을 떠났다. 죽기 전날 저녁에 옷깃을 여미고 눈물을 흘리면서 나에게 고하기를 “국가의 종사지망(아들을 많이 낳고 싶은 소망)이 정전이 아니라 천신으로 하여금 있는데, 천신이 병에 걸려 위독해진 것은 이 어울리지 않는 재앙입니다. 지금부터 이후로 자주 정전에 나가시어 대를 이을 아들을 부지런히 구하면 곧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하였다. 대개 내전(효의왕후)이 지금까지 아들을 낳고 기르지 못한 것을 평상시에 근심하고 탄식하였다. 처음 승은을 내리자 간절히 사양하고 감히 시침을 들 수 없다고 하기에 틈을 타서 풍자를 해도 한결같게 매우 간절했었다. 목숨이 실가닥처럼 위태로운 사이에도 다시 기운을 내고 힘을 다하여 완연히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하니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여 나도 모르게 얼굴빛을 고치고 허락했다. 내가 보니 예로부터 지금까지 첩은 부귀영화를 누리면 언제나 정실이 자기를 싫어하고 핍박한다고 하여 정실을 업신여기고 본분을 무시했다. 죽을 고비에 이르면 걱정이 되어 부탁을 하지 않는 일이 드물고 자기 식솔을 부탁하는데 연연하거늘 빈은 죽은 후에 총애를 받는 영광을 바라지 않았다. 자기 스스로를 높여 영화로워지지 않았고 죽음을 슬퍼하지 않고 한결같이 마음과 힘을 다하여 내전만을 알고 반드시 그 소원을 이룰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한 어짊이 어찌 쉽겠는가. 문효세자는 빈의 소생이다. 빈은 스스로 왕세자의 어머니라 하여 더욱 겸손하고 양보하는 자세를 갖추었고 거처하는 곳은 수리하지 않았으며, 의복과 음식은 될 수 있는 대로 검약했다. 말하기를 “내가 오늘이 있는 것은 내가 감히 바라지 않았으니, 이는 전보다 더욱 조금이라도 크고 사치하게 벌리려 하고자 한다면 내 몸에 재앙이 올 것이니 이는 논할 겨를이 없다.” 하였다. 이 어찌 동궁을 위해 복을 아끼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엄격하게 단속하여 은총을 내린 적이 없었다. 때때로 감당할 수 없었을 터인데 전혀 내색하지 않고 칙령을 조심스럽게 지키고 경계를 조심하면서 벌벌 떨었으며 시종일관 마음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궁궐에서 지낸 지 20여 년인데 혹여라도 다른 사람을 흘겨보지 않았다. 특별히 내전이 친애하여 내전은 빈의 죽음에 곡을 하고 매우 슬퍼하고 몹시 그리워하였으니, 남들보다 어진 점 또한 많지 않겠는가? 빈은 영종 29년 계유 7월 8일에 태어났고 향년 34세이다. 본관은 창녕이고 고려 중윤 인보(仁輔)가 비조이다. 중윤의 아들은 문하시중 송국(松國)이고 증손은 검교정승 문정공 여완(汝完)인데 우리 왕조(조선)에서 높은 벼슬을 이어받아 세상에서 명망 있는 집안이 되었으나, 그 뒤 번창하던 집안이 중간에 쇠퇴하였다. 제릉 참봉 만종(萬種)이 막혀있던 벼슬길을 열어주었고 다시 삼대를 거쳐 군자감 정 경(景)이 관직에 올랐는데 바로 빈의 7대조와 고조부가 된다. 증 찬성 윤우(胤祐)와 증 정경부인 부안 임씨는 빈의 부모인데 추증한 은전(나라에서 은혜를 베풀어 내린 혜택)은 문효세자의 외가이기 때문이다. 저 여항의 비천한 땅에서 뛰어나고 현명한 사람이 나서 왕세자를 낳고 은총을 받아 빈의 작위를 받은 것은 우연이 아닌 듯하였다. 문효세자의 묘에 흙이 채 마르기 전에 빈 또한 뱃속의 아이와 갑자기 세상을 떠났는데, 나의 마음이 애통하고 마음이 아픈 것은 빈의 한 몸 만을 위해서는 아니다. 돌아간 지 석 달이 지나고 경인에 고양군 율목동 임좌 자리에 안장되었고 문효의 묘와 백 보 정도 떨어져 있는데 빈의 소원을 따랐다. 죽어서도 안다면 애오라지 아주 가까이 위로가 될 것이다. 내가 빈의 언행의 본말을 묘지명으로 지어 무덤 속에 넣고 비석에 그 대략을 쓰노니, 뒤 사람들로 하여금 어진 빈을 애석하게 여기고 그 운명의 불행을 슬퍼하게 할 따름이다.[135]

정조가 의빈 성씨의 죽음에 대해 직접 지은 어제 제문이고 1786년(정조 10년) 11월 7일[136]에 작성했다.[137]

정조가 의빈 성씨의 죽음에 대해 발인부터 3년 탈상 후 담제까지 제사 때마다 지은 어제 제축문(御製 祭祝文)의 서식을 적었다.[138]

의빈 성씨의 상장례를 모두 마치고 탈상한 후 1년 동안 지낸 각종 제사 때 정조가 작성한 어제 축문을 모은 것이다.[139]

조상 [ 편집 ]

창녕 성씨(昌寧 成氏) 상곡공파 허백당계[140]

의빈 성씨의 조상 11대 조부 : 예조판서 대제학 성현(禮曹判書 大提學 成俔, 허백당, 1439 ~ 1504)

11대 조모 : 증 정경부인 한산 이씨(贈 貞敬夫人 韓山 李氏) – 상례 이숙(相禮 李塾)의 딸

10대 조부 : 예조판서 대제학 성세창(禮曹判書 大提學 成世昌, 1481 ~ 1548)

10대 조모 : 정경부인 전주 이씨(貞敬夫人 全州 李氏) – 장양부정 이주(長陽副正 李儔)의 딸

10대 조모 : 정경부인 고성 이씨(貞敬夫人 固城 李氏) – 참판 이육(參判 李陸)의 딸

9대 조부 : 증 참판 성해(贈 參判 成諧, 1497 ~ 1556)

9대 조모 : 평산 신씨(平山 申氏) – 사성 신엄(司成 申儼)의 딸

9대 조모 : 철성 이씨(鐵城 李氏) – 판관 이황(判官 李滉)의 딸

8대 조부 : 현감 성자심(縣監 成子深)

8대 조모 : 평산 신씨(平山 申氏) – 진사 신유(進士 申裕)의 딸

7대 조부 : 제릉 참봉 성만종(齊陵 參奉 成萬種) [주 5]

7대 조모 : 전주 이씨(全州 李氏)

6대 조부 : 성운(成䉙)

6대 조모 : 경주 김씨(慶州 金氏) – 증 영의정 김응무(贈 領議政 金應武)의 딸

5대 조부 : 노사직 성숙양(籚司直 成叔良)

5대 조모 : 대구 백씨(大邱 白氏) – 계공랑 백수(啓功郎 白壽)의 딸

고조부 : 군자감 정 성경(軍資監 正 成景)

고조모 : 김해 김씨(金海 金氏) – 진사 김이남(進士 金爾南)의 딸

증조부 : 증 이조참판 성근립(贈 吏曹參判 成謹立, 1639 ~ 1709)

증조모 : 증 정부인 충주 유씨(贈 貞夫人 忠州 劉氏, 1645 ~ 1705) – 유효천(劉孝天)의 딸

가족관계 [ 편집 ]

조부 : 증 이조판서 성수산(贈 吏曹判書 成壽山, 1668 ~ 1749) [141]

조모 : 증 정부인 김해 김씨(贈 貞夫人 金海 金氏, 1674 ~ 1698) – 통덕랑 김몽설(通德郎 金夢說)의 딸

조모 : 증 정부인 창원 황씨(贈 貞夫人 昌原 黄氏, 1677 ~ 1747) – 현감 황상(縣監 黃晌)의 딸 백부 : 성윤조(成胤祚) 백모 : 밀양 박씨(密陽 朴氏) – 현감 박성진(縣監 朴成震)의 딸 사촌 : 성호(成灝) 사촌 올케 : 경주 김씨(金海 金氏) – 김후석(金厚錫)의 딸 사촌 : 성연(成淵) 사촌 올케 : 청송 심씨(靑松 沈氏) – 심억(沈億)의 딸 아버지 : 증 찬성 성윤우(贈 贊成 成胤祐, 1709 ~ 1769) 전어머니 : 장흥 마씨(長興 馬氏, 1715 ~ ?) – 직장 마시행(直長 馬時行)의 딸 [주 6] 친어머니 : 증 정경부인 부안 임씨(贈 貞敬夫人 扶安 林氏, 1722 ~ 1756) – 통덕랑 임종주(通德郞 林宗胄)의 딸 새어머니 : 단양 지씨(丹陽 池氏)

의빈 성씨의 형제·조카·일가 친척 오빠 : 성담(成湛, 1741 ~ 1783) – 무과(武科) 새언니 : 성주 이씨(星州 李氏, 1739 ~ 1770) – 통덕랑 이후방(通德郞 李后芳)의 딸 새언니 : 전주 이씨(全州 李氏, 1751 ~ 1799) 조카 : 현감 성국민(縣監 成國民, 1766 ~ 1809) 질부 : 강릉 유씨(江陵 劉氏, 1768 ~ 1809) – 유창연(劉昌淵)의 딸, 동지중추부사 유계조(同知中樞府事 兪啓祚)의 손녀 조카 : 성희민(成羲民, 1780 ~ 1809) 질부 : 전주 이씨(全州 李氏) – 이학기(李學基)의 딸 오빠 : 절충장군 성협(折衝將軍 成浹, 1742 ~ 1810) 새언니 : 강릉 최씨(江陵 崔氏) 새언니 : 단양 문씨(丹陽 文氏) 조카 : 선략장군 성도민(宣略將軍 成道民) 질부 : 밀양 박씨(密陽 朴氏) – 박춘식(朴春植)의 딸 조카 : 성호민(成皥民) 질부 : 청주 한씨(淸州 韓氏) – 한종휴(韓宗休)의 딸 오빠 : 부사용 성완(副司勇 成浣, 1743 ~ 1806) – 성식(成湜)에서 개명 새언니 : 청주 한씨(淸州 韓氏, 1742~1794) 조카 : 첨정 성순민(僉正 成舜民, 1763 ~ 1849) 질부 : 단양 우씨(丹陽 禹氏) – 우세주(禹世疇)의 딸 조카 : 성덕민(成德民, 1782 ~ 1828) 질부 : 의령 남씨(宜寧 南氏, 1780 ~ 1812) – 남격(南格)의 딸 조카 : 창녕 성씨(昌寧 成氏, 1776 ~?) 질서 : 조상주 (趙尙周) – 한양 조씨(漢陽 趙氏) 오빠 : 성숙(成淑) 새언니 : 미상 조카 : 성여민(成與民) 언니 : 창녕 성씨(昌寧 成氏) 형부 : 강덕순(康德淳) – 승평 강씨(昇平 康氏) 언니 : 창녕 성씨(昌寧 成氏) 형부 : 윤귀영(尹貴永) – 파평 윤씨(坡平 尹氏) [주 7] 조카 : 윤인석(尹仁錫) 동생 : 만호 성흡(萬戶 成洽, 1762 ~ ?) – 무과(武科) 올케 : 금천 나씨(錦川 羅氏) – 나성찬(羅星燦)의 딸 조카 : 성준민(成俊民) 숙부 : 성연지(成淵祉) 고모 : 창녕 성씨(昌寧 成氏) 고모부 : 정희규(鄭熙揆) – 연일 정씨(延日 鄭氏) 고모 : 창녕 성씨(昌寧 成氏) 고모부 : 임성징(林聖徴) – 임천 임씨(林川 林氏)

창녕 성씨(昌寧 成氏) 족보 미등록 고모 : 공조판서 정방(工曹判書 鄭枋, 1707~1789)의 첩 [142] 언니 : 영의정 홍낙성(領議政 洪樂性, 1718∼1798)의 첩 [143] 6촌 언니 : 정득환(鄭得煥, 1735 ~ 1771) [144] 의 첩 [145]

왕가(王家 : 전주 이씨)

시조부 : 제21대 영조대왕(英祖大王, 1694 ~ 1776, 재위 1724 ~ 1776)

시조모 : 정성왕후 서씨(貞聖王后 徐氏, 1692 ~ 1757)

시조모 : 정순왕후 김씨(貞純王后 金氏, 1745 ~ 1805)

생시조모 : 소유영빈 이씨(昭裕暎嬪 李氏, 1696 ~ 1764) 시부 : 추존 진종 소황제 (眞宗 昭皇帝, 1719 ~ 1728) 시모 : 추존 효순소황후 조씨 (孝純昭皇后 趙氏, 1715 ~ 1751) 생시부 : 추존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 1735 ~ 1762) 생시모 : 추존 헌경의황후 홍씨(獻敬懿皇后 洪氏, 1735 ~ 1815) 남편 : 제22대 정조선황제 (正祖宣皇帝, 1752 ~ 1800, 재위 1776 ~ 1800) 장남 : 문효세자 (文孝世子, 1782 ~ 1786) 장녀: 옹주 (翁主, 1784년 윤달 3월 20일 ~ 1784년 음력 5월 12일) 셋째 : 복중 사망 – 1786년 음력 10월 출산 예정 [146]

관련 장소 [ 편집 ]

거둥고개 [ 편집 ]

서울특별시 용산구 효창동에 있는 고개로서, 정조가 효창원(孝昌園)에 거둥할 때 넘던 고개였던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본래 의빈묘(宜嬪墓)와 효창원(孝昌園)이 한 영역에 있어서 정조는 효창원을 갈 때 의빈묘도 함께 방문했었다.[147]

홍예동 [ 편집 ]

서울특별시 마포구 신공덕동에 있던 마을로서, 지금은 효창공원이 된 정조의 맏아들 문효세자와 그의 생모인 의빈 성씨의 묘소인 효창원으로 가는 길목에 있던 마을 이름이었다. 효창원의 봉분을 멀리서 보면 홍예(무지개)처럼 보이기 때문에 홍예분(紅霓墳)이라고도 하였다.[148]

의빈이 등장한 작품(현대) [ 편집 ]

소설 [ 편집 ]

연도 제목 역할 2005년 《비단속옷》 성연 2005년 《영혼의 방아쇠를 당겨라》 강건희 2007년~2008년 《이산 정조대왕》 성송연 2017년 《우아한 환생》 의빈 성씨 2020년 《궐에서 사랑을 찾다》 성화리 2021년 《옷소매 붉은 끝동》 성덕임

드라마 [ 편집 ]

예능 [ 편집 ]

뮤지컬 [ 편집 ]

연도 주최 주관 제목 역할 배우 2016년 수원시 수원시립공연단 《정조-만천명월주인옹》 성선우 홍민아

판소리 [ 편집 ]

연도 주최 주관 제목 역할 배우 2017년 수원시 수원문화재단 《정조가》 성덕임 신유진

만화 [ 편집 ]

날짜 장르 제목 소제목 작가 역할 2018년 5월 26일 네이버 웹툰 《조선왕조실톡》 311. 너같은 여자 처음이다 무적핑크(변지민) 성덕임

같이 보기 [ 편집 ]

외부 링크 [ 편집 ]

각주 [ 편집 ]

성덕임 의빈 성씨는 임신중독이 사망 원인이었을 것

요즘 인기 최고인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은 성덕임이라는 궁녀의 이야기를 그린 동명의 “역사소설”을 MBC에서 드라마로 편성한 작품인데요. 원작은 로맨스보다는 역사소설에 가깝다는 평이 있습니다. 고증된 내용과 더불어 구성이 치밀하다는 평을 많이 받는 소설입니다. 현재 상종가인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 역시 드라마의 구성이 잘 되어 있어서 로맨스와 역사성, 허구성이 잘 어우러져서 있을 법한 이야기로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주인 공인 성덕임은 정조의 첫사랑이자 후궁으로 정조의 유일한 승은을 입은 후궁이라고 하는데요. 승은을 입고 몇년 되지 않아 사망합니다. 아이를 가진 상태에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고 알려져 있죠.

드라마의 내용이 그저 달달한 로맨스가 아닌 것이 원작 소설의 영향이 큰 것 같습니다. 역사성을 각색하여 역사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인물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면이 소설과 드라마의 중요한 포인트가 되고 있는데요. 요즘 나오는 많은 드라마들이 역사속의 인물들에게 현대의 인물상을 투영시켜서 당시의 사회성 속에서도 인간으로서의 고민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덕임이 정조의 승은을 세번이나 고사한 것은 드라마나 소설속에서 나오는 표현처럼 가늘고 길게 살고 싶었기 때문이든, 스스로의 “나”를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든 그저 국가 중심의 사회에서 부속품에 불과한 개인이 아니라 온전한 한 사람으로서 갖는 고민이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어쨌든 성덕임 – 의빈 성씨는 옷소매 붉은 끝동 15화 마지막에서도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결국 승은을 받아들이고 후궁이 됩니다. 중인이 궁녀가 되기도 하고 궁녀는 관노비가 되는 것이라고도 하는데요. 원해서 궁녀가 되기도 하겠지만 팍팍한 삶이 궁녀라는 결코 쉽지 않은 직업을 선택하게 만드는 대부분의 원인일 것 같습니다. 어쨌든 성덕임은 가늘고 길게 살고픈 궁녀였으나 거절 끝에 결국 후궁이 되고 후궁으로서의 소임을 다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 정조가 다른 후궁은 쳐다도 안봤다는 썰이 있던데 사실인지.. – 두번이나 유산을 하게 되고 이후 낳은 아이들이 문효세자와 옹주가 있는데요. 옹주를 낳고 의빈성씨는 많이 기뻐하였다고 하지만 두달만에 옹주가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후 문효세자도 홍역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구요.

후궁의 삶이라는 것이 참 … 왕자를 낳으면 품계가 올라가는 구조더라구요. 아들도 낳고 딸도 낳아서 정조가 매우 기뻐했다고 하지만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원래 성덕임 – 의빈 성씨는 마음이 여리고 약했다고 합니다. 드라마에서는 성덕임이라는 인물은 자기애가 강하고 강단있는 인물이지만 실제로는 꼭 그렇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너무 빠른 기간에 유산, 임신, 출산을 반복하다 보니 몸이 견디지 못했다고도 하구요. 임신 8개월인가 9개월인가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사망했다고 하는데, 임신중독증이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합니다.

임신중독증과 관련된 자료를 찾아보면 면역질환과도 관련이 있는 것 같아요. 루프스나 항인지질 항체가 있으면 임신중독증을 조심해야한다고 하는데요. 고혈압, 당뇨 역시 임신중독증 우려가 있다고 하네요. 임신하고 태반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태반에 기능 이상이 있으면 산모의 혈관을 타고 독성물질이 쌓이는 것이라고 해요. 실제로 임신중독증은 여러 증상이 있겠지만 몸이 많이 붓는 부종이 생깁니다. 고혈압, 소변에 단백뇨가 나오는 것과 함께 임신중독증 진단을 받게 된다고 하는데요. 저희 친척 중에도 임신중독으로 고생하신 분이 계셔서 임신중독의 위험성에 대해서 알고 있었는데 개그맨 이수근씨의 부인이 임신중독으로 신장이 크게 망가져 수술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잘 알려진 이야기이죠.

의빈성씨가 일찍 세상을 떠남으로써 고지식한 정조도 큰 충격에 빠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정조도 오래 살지 못했고 이후 조선의 운명은 점차 쇄락의 길로 접어들게 되구요. 그런 것 보면 왕비와 후궁의 왕자 생산에 대한 스트레스는 장난이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옷소매 붉은 끝동은 17회로 편성이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평균시청률이 10% 중반대로 고공행진 중이구요. 앞으로 승은을 입은 성덕임과 또다른 파란만장한 삶, 권력다툼과 왕으로서의 정조의 고뇌도 그려질텐데요. 실제 이유가 어떻든 고사하고 고사하다가 결국 승은을 받아들인 성덕임 – 의빈 성씨가 본인의 삶이 그렇게 짧게 마감할 수 밖에 없던 것을 이미 알고 있던 것은 아닐지… 안타깝네요.

어쨌든 간만에 완성도 있는 드라마 재미 있게 잘 보고 있습니다. 이준호씨와 이세영님의 연기 그리고 주변 인물들을 연기하는 연기자분들의 연기도 찰떡같아 재밌습니다.^^ 드라마 덕후가 되어가는 것 같네요. ㅎㅎ

옷소매 붉은 끝동 OST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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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주가 정조 여인에 대한 사랑도 깊었는가

박정근 칼럼

애주가 정조 여인에 대한 사랑도 깊었는가

박정근

(대진대 영문과 교수, 윌더니스 문학 발행인, 소설가, 시인)

술꾼인 정조가 어떤 사랑을 추구했을까. 참 흥미로운 질문이다. 그의 절대적인 사랑을 받았던 궁녀 덕임을 어린 사춘기부터 사랑하여 신분의 차이로 한사코 거부하던 그녀를 후궁으로 맞아드린 정조는 조선의 왕 사이에서 가장 낭만적인 사랑을 구가했다고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물론 그의 사랑은 낭만적인 과정임에도 불구하고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한다. 정조의 영원한 사랑인 덕임, 이후에 후궁 의성 성씨가 만삭의 몸으로 죽음의 길로 떠나자 애통해 하며 쓴 시를 읽어볼 필요가 있다.

바람 부는 소리에 슬퍼하여 밤에 술잔을 올리노라

네가 홀연히 죽어서 보고 싶다고 해도 볼 수 없구나!

나는 글로써 너를 보내노라

이 시가 술에 취하지 않으면 집에 돌려보내기 않는 호남아 정조의 시라고 보기에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다. 술을 피하는 신하들에게 이런저런 명분으로 억지로 마시게 해서 쓰러뜨리곤 했던 정조가 아니던가. 어떻게 그가 후궁 의빈 성씨에게 이런 애틋한 사랑을 품을 수 있단 말인가. 정조는 후궁 의빈 성씨가 죽은 후에도 그녀를 무척 못 잊어 사랑의 상실로 고통을 겪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바람이 부는 소리를 임의 속삭임으로 들었던 것일까. 그녀를 모신 영정에 술을 올리는 모습은 수많은 여성을 왕의 권위로 농락하는 다른 왕들과 확실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정조는 의빈 성씨에 대한 사랑도 애주가답게 술을 올림으로써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죽음으로 인해서 부재한 연인은 술을 올린다 한들 돌아올 수 없다. 정조는 죽음이 연인의 복귀를 가로막는 현실을 안타까워한다. 그는 죽음이 가져온 육체적 한계를 시로 극복하고자 한다. 그는 시 속에 그의 사랑을 담아 저승에 있는 연인에게 전하고자 했던 것이다.

정조는 왕세손의 신분이었을 때부터 궁녀 덕임을 무척 사랑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는 영조 38년에 궁녀로 입궁하여 헌경왕후가 기르다시피 한 궁녀 덕임을 사랑했다. 그러나 그녀는 겸손의 탓인지 그의 프러포즈를 사양했다. 감히 왕세자의 구애를 거절한 덕임이라는 여인의 곧은 심성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녀는 영조 49년에 국문소설을 “곽장양문록”을 필사할 정도로 지적 호기심이 강했던 여인이었다. 하지만 정조가 왕이 되어 내린 승은을 다시 거부했다가 분노를 표시하자 어쩔 수 없이 그의 사랑을 받아들여 후궁이 되었다.

의빈 성씨의 행운은 거침이 없는 듯 했다. 그녀는 왕자와 옹주를 연이어 출산하여 정조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정조는 너무 기쁜 나머지 “조금 전에 순산하여 딸을 얻었노라. 아들을 생산한 데 이어 딸이 생겼으니 참으로 기쁘기 한량없도다”라고 기쁨을 표현하였다. 하지만 신이 그녀의 행복을 시샘이라도 했던 것일까. 그녀가 낳은 문효세자와 옹주가 모두 너무 이른 나이에 죽고 말았다. 그뿐만 아니라 정조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의빈 성씨는 1786년(정조 10년)에 창덕궁 중희당에서 만삭의 몸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후세의 역사가들이 애주가 정조를 최고의 로맨티스트로 칭송하는 이유는 의빈 성씨의 아름다움에 대한 그의 애틋한 사랑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정조는 그녀가 죽은 이후에도 생시의 사랑을 일관되게 보여주기에 그의 사랑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것이다. 정조는 의빈 성씨의 묘표에 그녀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시를 지어 표현하였다.

빈은 절망하여 문효를 따라 죽기를 항상 소원하더니

드디어 문효의 무덤 옆으로 떠나갔구나.

빈은 비로소 해원하고 문효의 혼백을 위로할 수 있겠는가?

아아, 슬프구나.

폭주가로 알려진 정조가 빈에 대한 채울 수 없는 사랑을 이미 저승으로 떠난 후에도 묘표뿐만 아니라 묘지명에도 적었다. 그는 빈이 죽은 지 세 달이 되는 시점에 고양군 율목동 묏자리 언덕에 장사를 지내며 묘지명에 “죽어서도 빈이 나를 알아준다면 원컨대 장차 위로가 되리라”고 적었다. 그렇다면 호탕하게 술을 마시던 정조를 두고 폭주가라고 분류하는 것은 그를 정확하게 정의할 수 없다고 본다. 그야말로 정조는 역대 어느 왕도 보여주지 못한 낭만주의적 성격을 지녔었다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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