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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김, #워싱턴어머니, #마가복음_10:45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시지만 섬김을 받으려 오신 것이 아니라 목숨까지 버리면서까지 섬기려고 오셨습니다.
과연 나는 최고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섬김을 기쁨으로 할 수 있을까요?
섬김을 받고 싶어 열심히 일하고 돈을 벌고 있는 건 아닌가요?
진정한 섬김이란 어떤 것인지 워싱턴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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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분의기적]은 2012년부터 예화를 통해 쉽고 재미있게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는 글입니다. 매일 아침 묵상글을 만나고 싶으신 분들은 아래 링크로 가입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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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섬김의 삶을 닮자 < 오늘의 말씀 < 말씀 < 기사본문
본문은 예수님께서 3년 동안 이스라엘 전역을 다니시면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 유월절 절기에 유월절을 지키러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 …
Source: www.ingn.net
Date Published: 8/2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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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혁 칼럼] 섬김의 삶과 사역 – 크리스천투데이
예수님에게 있어서 섬김은 모든 죄인들과 병자들을 어루만져 주심으로 나타났고,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로마 군인들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
Source: www.christiantoday.co.kr
Date Published: 8/8/2021
View: 5837
섬김 : 예수님의 마음으로 – Daum 블로그
예수님의 십자가가 바로 이러한 방식을 보여 주는 섬김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인간은 그 죄 값 …
Source: m.blog.daum.net
Date Published: 8/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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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따라가기(3) ? 섬김의 본
그러나 예수님은 성자형의 지도자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 아브라함 링컨, 성 프랜시스, 테레샤, 간디 같은 분들이 이런 유형에 속할 것 …
Source: www.imr.co.kr
Date Published: 5/1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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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섬김을 본 받는 성도 / 마 20:28 – 기멀전
섬기는 삶은 교만을 버린 겸손한 삶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을 섬길 줄 아는 사람입니다. 또한 형제와 이웃을 섬길 줄 아는 사람입니다. 자기보다 …
Source: godpeople.or.kr
Date Published: 6/11/2022
View: 1762
예수님의 섬김의 본
제목 : 예수님의 섬김의 본본문 : 요한복음 13장 1-20절설교 : 고택원 목사.
Source: www.bogeumnews.com
Date Published: 6/22/2022
View: 5364
Sermon – 섬김의 본이 되시는 주님
섬김은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자들을 향한 주님의 명령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다 씻긴 후에 그 밤의 사역에서의 교훈을 정리해주십니다. “새 …
Source: palomarkc.org
Date Published: 7/4/2022
View: 722
섬김의 본을 받으라 (요 13:1~17) – 기독정보넷
아무리 성경 지식이 많고, 교회생활을 오래 하고, 봉사를 많이 할지라도,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마음 깊이 체험하지 못했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Source: www.cjob.co.kr
Date Published: 9/10/2022
View: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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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예수님 의 섬김
- Author: 3분의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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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20. 6. 30.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weYnANfzgJ8
[가정예배 365-4월 9일] 예수님의 섬김
말씀 :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은 오늘 본문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고난을 겪기 전 목요일에 제자들과 만찬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은 저녁 식사를 하던 중 자리에서 일어나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선생으로서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이렇게 한 것은 제자들도 그렇게 하라고 본을 보이신 것이라고 하십니다.(요 13:12~15) 예수님은 왜 이런 본을 보이셨을까요.제자들의 마음과 태도 때문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난과 죽임을 당할 것을 들었지만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자신들의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 세상 권력을 갖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왼쪽 또는 오른쪽에 서게 될 것을 다투며 지냈습니다.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의 마음을 아시고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 나라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섬김입니다. 하나님 나라 왕 예수님은 섬기는 자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섬김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누군가를 섬기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섬길 수 있었던 것은 제자들을 지극히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 전에 예수님의 마음에 대해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요 13:1)고 전했습니다.사랑하시니 섬기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만찬에서 떡과 잔을 갖고 그것이 자신의 살과 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받아먹으라 하십니다. 이것은 결국 자신이 십자가에서 유월절 어린양처럼 죽을 것을 미리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을 섬기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막 10:45)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신을 비워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자신을 낮춰 죽기까지 복종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빌 2:6~8) 예수님이 왜 이렇게 낮아지셨습니까. 그것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섬겨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랑과 섬김으로 새롭게 태어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높아지려 했던 제자들의 모습을 보시며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며 하나님의 나라의 섬김이 무엇인지를 친히 보여주셨습니다. 또 유월절 만찬을 통해서 십자가에서 죽는 섬김으로 많은 사람을 구원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세상의 방식처럼 크고 높은 자로서의 삶을 버리고 어린아이와 같이 지극히 작은 사람까지 섬기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기도 : 사랑의 아버지, 이 고난주간에 이기적이고 높아지려 하던 우리 모습을 보기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섬김을 배우게 하시고 그분이 살아간 삶을 따르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주기도문김치성 목사(대구영안교회)
예수님의 섬김의 삶을 닮자
▲ 고병수 목사/창곡교회 담임
본문은 예수님께서 3년 동안 이스라엘 전역을 다니시면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 유월절 절기에 유월절을 지키러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도중에 있었던 일입니다.
예수님의 3년간의 전도사역은 참으로 놀라운 기간이었습니다. 회당에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고, 백성들의 병과 약한 것을 고쳐주셨으며(마 3:23), 무리들이 예수님의 가르치는 것에 권위가 있다는 평을 내놓을 정도였습니다(마 7:29~). 예수님의 인기는 이스라엘에서 하늘을 찔렀습니다.
사람들은 이분은 우리가 고대하던 메시아 즉 구원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메시아 구세주는 자기들을 지배하는 로마제국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이스라엘이 온 만국 가운데 가장 강대한 나라가 되게하고, 온 천하만국을 다스릴 왕이 되는 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전국을 다니면서 행하신 일들을 보면 넉넉히 그런 일을 하실 메시아로 보였습니다.
예수님이 이제 공생애 3년을 마치고 맞이하는 유월절 절기에 제자들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자기 때가 되었다 하시니 제자들 생각에는 이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 로마제국을 그의 능력으로 물리치고 천하를 다스릴 왕이 되시려나 하고 생각하고 기대하게 된 것입니다.
이 때에 예수님의 12제자 중에 형제간인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나와서 특별한 부탁을 합니다. ‘주님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37)라고 했습니다. 이런 광경을 다른 열 제자가 지켜보고 화를 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복음서에 보면 서로 누가 더 높으냐 하고 분쟁이 일어났다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12제자를 불러 놓고 42~45절에 교훈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모든 인간을 위해 섬기는 삶을 사시고 그를 따르는 제자 된 자들에게 너희도 섬기는 자로 살아야 한다는 삶을 모범으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왜 주님은 우리에게 섬기는 자로 살아야 한다고 교훈하시고 섬김의 삶을 보여 주셨습니까?
# 진정한 인간 사랑의 삶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은 우리가 다 잘 알듯이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하신 것입니다.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온 것은 하나님은 사랑이심을 보여 주러 오신 것입니다(요일 4:16, 요 3:16, 빌 2:5).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기에 그를 평생 섬기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사랑하는 자에게 군림하지 않고 그의 종이 되어 섬기는 것입니다. 군대 사단장이 호령하다가도 집에 가서 손자와 놀면서 손자가 “할아버지 말 타고 싶어” 하면 할아버지가 손자의 말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사람을 구원하는 가장 선한 역사 이뤄내셨습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가장 훌륭한 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사람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죽을 형편에 있는 자들을 살려 내는 일입니다. 병들어 죽을 자를 살려 내는 일, 절망에 처한 자를 소망으로 살려 내는 일, 죄에 빠져 영원한 지옥 갈 자를 구원하는 일 이 모든 일이 가장 선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섬긴다는 말의 뜻은 보살핀다. 도와준다. 필요를 공급하여준다는 뜻입니다. 선진국일수록 장애인들을 위한 배려가 잘 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점점 이런 제도가 이루어져 가고 있지만 이런 정신이 성경에서 온 예수님의 섬김의 정신인 것입니다.
# 존경 받고 높임 받는 길
주님은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라’(43)고 교훈하십니다. 역사 속의 훌륭한 인물로 존경받는 모든 자는 다 인류를 섬긴 자들입니다. 인류 역사 속에 독재자, 폭군, 나뿐 놈으로 평가 받는 자들은 권세를 가지고 백성 위에 군림하며 탄압하고 탈취하고 억압하는 자들입니다. 백성을 섬기는 지도자가 있어야 그 나라는 복된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정치인들이 백성을 섬기려는 자세로 정치해야 나라가 바로 섭니다. 기업인들이 자기의 이익을 가지고 백성을 섬기려는 철학으로 살아가야 살기 좋은 나라가 됩니다. 권력, 지식, 재물 등을 가진 자들이 그것을 가지고 자기 자신을 높이는 일에 쓰지 말고 모든 자를 섬기는 일에 쓰는 것이 온 세계를 평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직장에서 항상 섬기는 자로 살기를 힘쓰시기 바랍니다.
섬김 : 예수님의 마음으로
섬김 : 예수님의 마음으로
본문: 마 20:25~28
25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우리에게는 섬김에 대한 두 마음이 있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셨습니다. “식탁에 앉아서 먹는 자가 큰 자냐 아니면 그것을 위해서 준비하는 자가 큰 자냐?” 물론 앉아서 먹는 자입니다. “너희는 둘 중 무엇을 원하느냐?” 제자들에게는 앉아서 먹고 마시는 자가 되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제자들과 다릅니까? 아닐 것입니다. 우리도 앉아서 먹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섬긴다’는 말이 좋은 말이어도, ‘그것은 약자나 낮은 자가 하는 것’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래서 때로 기피하며 싫어하기까지 하는 표현이 ‘섬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이 ‘섬김’이라는 말은 매우 소중한 말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정치인이 되려고 하면, “나라를 위해서 섬기겠다”고 말합니다. 기업인들도 “고객들을 섬기겠다”고 말하고, 동사무소나 구청 등의 창구에도 곳곳에 ‘섬기겠습니다’라는 말이 쓰여 있습니다. 섬김이라는 말을 부담스러워하면서도 왜 곳곳에서 이 말을 애용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사람이면 누구나 섬김을 받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심리를 거꾸로 이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방향성에 따른 세 가지 삶의 방식이 있습니다.
‘섬김’이라는 말의 진정한 뜻은 성경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 의미가 드러납니다. 이 말에 대해 나누기 전에 우리는 먼저 우리의 삶의 방식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인생에는 세 가지 삶의 방식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나는 살아야 되겠고 너는 죽어야 되겠다’입니다. 이것은 죄인 된 인간의 본성이자 특성입니다.
첫 인간 아담에게서부터 이런 삶의 태도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 먹었던 아담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물으십니다.
… 내가 네가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창세기 3:11)
아담은 어떻게 대답했을까요? 그는 “제가 먹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하며 용서를 빌지 않았습니다.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창세기 3:12)
첫 인간 아담은 자신이 살기 위해 아내를 죽이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책임을 아내에게 전가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되돌아볼 기회를 상실하고 만 것입니다. 인간의 악한 본성을 그대로 반영하는 삶의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공격적이 되어 싸우고 다투는 이유는 바로 ‘나는 살고 너는 죽었으면 좋겠다’는 이 삶의 방식 때문입니다.
두 번째 삶의 방식은 ‘나도 살고 너도 살자’입니다. 하나님은 ‘나는 살고 너는 죽어야 되겠다’는 태도로 살아가는 죄인 된 인간에게 열 가지 계명,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십계명의 후반부를 보면 모두 인간관계에 대한 것들입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그래서 가정을 깨지 말라. 남의 것을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으로 남을 속이지 말라.’ 이 모든 것들은 결국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하라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살면 너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의 핵심은 상생(相生), 즉 서로 사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최고의 삶의 태도입니다. 그런데 이 마음으로 사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세 번째는 인간이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네가 살기 위해 내가 죽겠다’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태복음 20:28)
예수님의 십자가가 바로 이러한 방식을 보여 주는 섬김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인간은 그 죄 값으로 죽을 수밖에 없지만, 죽어야 할 그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예수님이 대신 죽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섬김의 마음을 이 땅에서 우리에게 보여 주는 분들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어머니들입니다. 어머니는 자녀를 낳게 되면 처녀 때 가졌던 꿈을 모두 내려놓고 자녀를 키우는 것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어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기도와 사랑과 섬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을 가장 닮은 사람이 바로 어머니들입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섬김은 한 사람에게 제한되어 있고, 그 사랑과 헌신도 왜곡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섬김은 어떻습니까? 온 인류를 살아나게 했습니다.
삶에 있어 방향성은 매우 중요합니다. 방향성은 무엇입니까? 곧 삶의 태도입니다. ‘나는 살아야 되겠고 너는 죽어야 되겠다’는 인간의 악한 본성을 넘어서서, ‘너도 살고 나도 살자’로 향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네가 살기 위해서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태도를 갖는다면, 그 삶의 자리에는 항상 생명이 시작되고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결코 쉽지가 않음을 우리는 매일의 삶에서 경험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통해 제자들은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면, 특별히 복음서에 나타난 제자들을 보면 놀랍게도 그들에게는 친구나 이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열두 명의 제자들이 함께 있었지만, 각자는 늘 혼자였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자기 자신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자기 문제에만 집착한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다른 제자들보다 더 잘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더 큰 명예와 존경, 인기를 얻을 수 있을까?’ 이것이 제자들의 생각이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내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변화될 것을 기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정말 변화되었습니다. 언제 변화되었습니까? 사도행전이 시작되면서 변화되었습니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면서, 그들의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으로 바뀌고 그들의 꿈이 하나님의 꿈으로 바뀌었습니다. 새로운 역사를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과거에는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는 것’이 첫 번째 목표였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사람이 되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묻고 그것을 이루는 것이 인생의 첫 번째 목표가 되었습니다. 자기중심적이던 인생의 목적과 목표가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은 이 땅에 선한 영향력과 지도력을 발휘하는 하나님의 사람들로 서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에서 나타나는 복음서와는 다른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신앙의 삶의 살아갈 때, 그리스도인들은 두 번의 영적인 혁명을 경험해야 합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혁명입니다. 주인이 바뀌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렸을 때 교회에 오는 것은 비교적 쉽습니다. 엄마나 아빠가 교회에 가라고 하면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서른이 되고 마흔이 되고 쉰이 되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믿는다는 것은 엄청난 삶의 혁명입니다. 보통의 용기와 결단으로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30대, 40대가 들면 우리의 인생을 한 번씩 흔드십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키시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기반을 뒤흔들어 내 인생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확인이 바로 첫 번째 혁명입니다.
두 번째 영적 혁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셔서 성령이 나를 인도하시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통해 예수님의 성품을 깨닫고 닮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딸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불교처럼 무아경지에 들어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내가 더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에서는 지상에서도 ‘나’라는 자아가 있고, 천국에 가서도 ‘나’라는 자아가 소중합니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주님의 이름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가만히 보면, 주님의 일을 한다고 우쭐거리며 내 이름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분명 주님을 높이려고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내 이름이 드러나지 않으면 화가 나는 것을 경험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내가 더 큰지 네가 더 큰지 한번 해 보자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까?
이런 마음은, 성령께서 임하셔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라는 근본적인 사실을 가르쳐 줄 때 변화됩니다. 제자와 아들과 딸은 다릅니다. 아들과 딸에게는 자율성이 있습니다. 부모에게 헌신할 때에도 자발적으로, 기쁨과 감사로 헌신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깨닫게 하고, 내 속에 충만한 기쁨을 넣어 줍니다. 그리하여 자원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향해 나갈 수 있게 합니다. 바로 이런 때 두 번째 혁명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을 통해서 예수 님의 제자들이 세상을 향해 담대히 나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섬김의 길을 방해하는 장애물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것을 잘 알고 있어도 섬김의 길을 가기란 쉽지 않습니다. 섬김의 길을 가로막는 일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는, 경쟁 사회 속에서 나타나는 승리주의입니다. 승리주의가 무엇입니까? 모든 것이 승부이며, 승부는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우리는 섬김을 실천하는 자리에서도 승리주의에 붙들려 있습니다. 심지어 많은 사람들은 인생을 이렇게도 표현합니다. ‘인생은 승부다. 그러므로 반드시 이겨야 된다. 이기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
배구나 탁구, 테니스 경기를 보면 제일 먼저 하는 것이 ‘서브’입니다. 공격하는 쪽이 상대편 코트에 공을 쳐 넣어 상대방이 받아치게 하는 것입니다. 단어로만 보면 ‘서비스’, 곧 섬긴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승리주의와 함께 묶이니 상대가 수월하게 공을 받기 힘들도록 서브를 합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런 서브를 보며 옆에 있던 사람들이 “저 서브 참 멋있네”라고 이야기한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못된 서비스인데 말입니다.
테니스 프로 선수들은 시속 200킬로미터가 넘는 속도로 공을 칩니다. 서브를 할 때도 그러합니다. 이 공은 상대 선수가 라켓을 갖다 대지 못할 정도입니다. 이런 서브나 그렇게 하여 득점하는 일을 ‘서비스에이스’라고 부릅니다. 일등 서비스라는 것입니다. 상대가 치지도 못하게 하는 서브가 왜 일등 서비스입니까? 서브가 승리주의와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높아지고 이겨야 된다는 것이 정치·경제·사회의 경쟁원리 속에 깊이 숨겨져 있습니다. 정치인들이 뭐라고 말합니까? ‘국민들을 위해서 섬긴다’고 이야기합니다. 얼마나 자주 국민을 입에 담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결국엔 자기 구미에 맞게 움직이고 따라오는 국민들만 그들의 국민입니다. 처음에는 섬김으로 시작했지만 나중에 권력을 잡으면 섬기겠다던 국민 위에서 군림하는 정치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것은 모두 예수님이 보여 주신 섬김을 파괴하는 요소 중 하나입니다.
섬김을 방해하는 두 번째 요소는 천박한 자본주의입니다. 기업은 ‘고객을 섬긴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고객을 섬긴다면서 기업들이 끊임없이 연구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고객의 돈을 끄집어 낼 수 있을까?’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섬김의 목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섬기는 기업’이라는 캐치프레이즈(catch phrase)를 내놓는 것도 고객의 마음을 기쁘게 하여 돈 버는 방법을 찾아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서비스에는 요금이 따라옵니다.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서비스 개념입니다. 때로는 육체적 쾌락을 위한 산업을 ‘서비스 산업’이라고 부르면서, 그 유혹의 서비스가 사람들의 영혼을 돈과 맞바꾸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섬기는 일과 돈이 맞물려 돌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돈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섭습니까? 자녀들이 어렸을 때, 구두를 닦는 일이나 설거지를 부탁하면 아이들이 곧잘 합니다. 그런데 다 끝내고 나서 아이들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수고했으니 돈을 달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가정에서조차 섬김이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반대급부를 요구합니다.
진정한 섬김은 오직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섬김의 길을 갈 수 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보여 주신 길을 바라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한 것이 아니라 섬기려 함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내가 온 것은’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파송하셔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는 파송의식이 명백히 있었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릅니다.
이 세상에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나를 파송하셨다. 나의 건강, 나의 직업, 나의 사회적 직분, 나의 돈, 나의 달란트를 가지고 세상으로 나아가겠다. 내가 이것들을 가지고 세상에서 사람들을 섬기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겠다’는 마음이 있어야 우리에게서 진정한 섬김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 파송의식이 없었다면 예수님이 어떻게 3년의 공생애를 살아가실 수 있었겠습니까?
성품이 좋아서 남을 섬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파송의식이 있어야, 남편으로서 아내로서 직장인으로서 기업인으로서 정치가로서 전문가로서 하나님이 나를 이곳에 보내셨다는 의식이 있어야 섬김의 역사를 이루어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멈추어야 할 오해가 있습니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야 지도자가 된다는 생각입니다. 결코 아닙니다. 지도력은 섬길 때 생기는 것입니다. 섬기는 마음이 있는 자리에 사람들이 모여들게 되어 있습니다. 섬기는 사람은 다른 말로 ‘에너자이저’가 됩니다. 에너지를 주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 사람이 옆에 있으면 기분이 좋고, 그 사람이 옆에 있으면 일이 잘되고, 그 사람을 보면 밝은 미래가 그려질 때, 사람들은 그 사람을 지도자로 세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낮은 자가 되라. 네가 크고자 하느냐? 섬기는 자가 되라’고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섬김이 진정한 지도력과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높은 직분을 주시면, 권력을 가지게 허락하시면 그때 잘 섬기겠다고 하나님께 기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제게 예수님의 마음을 품게 하셔서 지금 이 자리에서 사람들을 바르게 섬길 줄 아는 사람이 되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보여 주신 ‘섬김’의 자리를 사모합시다.
우리 소망교회 성도님들은 이런 마음으로 교회에서 또 교회 밖에서,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섬김 그 자체의 기쁨으로 애써 왔습니다. 자랑스러운 우리 성도님들의 모습을 잠시 보겠습니다.
– 영 상- (영상 글귀)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나 자신만을 위해서 살았던 적이 많았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이웃의 슬픔과 아픔을 돌아볼 줄 아는 마음 주시기를 원합니다.
주님, 우리가 이웃을 섬길 때 더욱 겸손하기 원합니다. 나의 섬김이 자랑이 되지 않게 하시고 나의 희생이 공로가 되지 않게 하소서.
힘 있는 자보다 먼저 가난하고 소외된 자를 찾게 하시고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곳에 가장 먼저 달려가게 하소서.
내가 원하는 곳에 가기보다는 내가 필요한 곳에 가게 하시고 내가 빛나는 자리가 아닌 주님을 빛나게 하는 자리에 있게 하소서. 소망교회는 18개의 제직부서, 권사회, 남선교회, 여전도회, 24개의 공동체, 모든 교육부서가 한마음이 되어 이웃을 향한 섬김과 나눔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게 하셔서, 우리 주위에 소외되고 낙심하고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며 격려할 줄 알고, 우리의 시간과 정성과 재물을 내놓을 줄 아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게 하시옵소서.
소망교회는 소외된 이웃을 위한 선교와 봉사,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한 의료, 장학, 군/경찰, 문화 선교와 탈북자 자녀를 위한 미래소망스쿨, 서부노인요양센터와 베데스다, 그리고 재난지역 긴급구조 등을 통해 하나님이 맡기신 섬김과 나눔의 사역을 잘 감당해 나갈 것입니다.
섬길 때 우리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그리고 내 속에 보람이 생깁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세상을 향해 나갈 수 있다면, 내 주위의 삶이 바뀌고 우리 사회가 바뀌게 될 것입니다. 교회에서 하는 이 섬김의 모임에 참여해 주시기를 권합니다. 그리고 세상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을 가슴에 품고 이웃을 돌아볼 줄 아는 그런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섬기려 오셨습니다. 우리가 그 예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 세상에 파송하셨음을 다시 깨닫게 하시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이 땅을 섬기며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세워 나가는 주님의 아들들 딸들이 다 되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김지철 목사(소망교회)
▣ 갈릴리공동체 성경공부 모임 안내
1. 일시: 매주 일요일(주일) 17:00- 18:30
2. 교육목적: 하나님 나라 건설과 확장에 쓰임받는 일꾼 양성(제자훈련)
3. 강사: 한태완 목사 외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분(마3:17, 습3:17)
당신을 초대합니다. 함께 모여 하나님 나라와 의(義), 그리고 우리나라와 교회를 위해 기도합시다. 갈릴리 공동체는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다양한 은사와 재능을 평생 마음껏 발휘하여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봉사할 기회를 드릴 것을 약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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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의: 02- 959- 3049
2) 후원계좌: 국민은행 083702- 04- 169089(갈릴리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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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섬김을 본 받는 성도 / 마 20:28
제 목 : :예수님의 섬김을 본 받는 성도
본 문 : 마 20:28
이 름 : 강성찬 목사 (전주동부교회)
세베대의 두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기를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라고 합니다. 그 때 예수님의 대답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하시고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십니다.
교육하는 교회, 선교하는 교회, 봉사하는 교회라는 목표아래 담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자는 표어를 정하고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달로 정하였습니다. 생활 목표는 예수님의 섬김을 본 받는 성도입니다. 이 시간 생활 목표인 예수님의 섬김을 본 받는 성도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상고 하며 은혜를 사모 하고자 합니다.
부모님께 순종하여 받드시는 섬김
(눅 2:51)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고 합니다.
예수님은 고향 집에서 어머니와 아버지와 함께 살면서 어머니와 아버지께 순종하며 부모를 받드러 섬겼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섬겼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순종하면서 섬겼다는 사실입니다. 효도는 순종하는 일입니다. 부모를 기쁘시게 하는 일은 순종입니다. 그래서 엡6:1에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고 했습니다.
바울 사도도 (딤전 5:8)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고 합니다.
옛날 농촌에 한 가정이 사는데, 부인은 교회를 잘나가는 집사님이고, 그 교회 여전도회 회장입니다. 그런데 남편은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거기에다 자기 아내가 교회만 갔다 오면 때리고, 난리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가정에는 자녀도 5남매나 있었지만, 남편은 노름하고, 사람 때리고, 주색잡기나 하고, 가정 살림은 하나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 여 집사님이 집안 살림을 꾸려나가며 아이들을 키워나가야 했습니다. 어느 날 목사님이 심방을 가셨는데, 그 남편이 그 모습을 보고 책을 잡아 병원에 입원할 정도로 때리고, 핍박하여 교회도 못나갈 정도로 괴롭게 했답니다. 그렇게 매일 맞아가면서도 불평하나 하지 않고, 신앙 생활하면서 열심히 살아갔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 집사님이 40대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버렸습니다. 그때 남편이 정신이 번쩍 납니다. 집안 살림을 보니 막막합니다. 장례도 할 수 없습니다.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는 그때, 목사님께서 광고하셔서 먹고 살수 있도록, 양식과 연탄도 도와 주고 장례를 인도해주셨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 사람이 자신이 과거에 했던 행동을 생각하면, 부끄럽고, 죄스럽습니다. 결국 미안한 마음에 “이제부터 교회를 나가야겠다!” 결심하고 예배라는 예배는 다 참석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니 교인들이 “아내 죽더니 정신 차리고 하나님 믿네!”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 믿고 교회 나온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가 죽으면 지옥 가는 문제 때문에 교회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아내와 목사님, 그리고 교회에 감동해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안 믿는 친척이나 가족에게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갑니다. 예수 믿으셔야 합니다.” 라고 전도해도 나오지 아니하는 일이 있는가 하면 삶에 감동을 받을 때 나오는 일들도 있습니다.
일군을 세울 때에도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딤전 3:7)라고 합니다.
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요12:9,11)고 합니다.
영적으로 죽었던 우리가 거듭나 빛과 소금의 사역을 감당 하며 섬김의 사역을 다 할 때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역사가 함께 할 줄 믿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겸손의 섬김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에 수건을 허리에 동이시고 대야에 물을 떠다가 그 거룩한 손으로 더러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너희들도 이와 같이 행하게 하려 본을 보였노라 하시고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요13:15,16)고 합니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아래 사람을 섬기고, 상전이 종을 섬기면 복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복을 받으려면 형제와 이웃을 섬기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 4:11)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 4:20)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요일 3:14) 고 합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내가 영생을 얻었는지 못얻었는지 알게 된다고 합니다.
요한서신에서 형제는 예수 믿고 구원받은 신자들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같은 생명을 받은 성도들은 믿지 않는 형제, 친척들 보다 더 반갑고 사랑스러워야 정상입니다. 이유는 육신의 형제는 육신의 피가 같지만 믿음의 형제는 예수님의 피가 성도들 속에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신자들이 밉고 꼴 보기 싫다면 진정 거듭났는지 다시 한번 살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피를 가진 사람들끼리 서로 끌어당겨 주고 일으켜 세워주고 얼싸안아 주어야 합니다. 서로 섬기지 않는 곳은 지옥이요 서로 섬기는 곳은 천국이 됩니다.
사람들의 삶의 모습은 다양합니다.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와 알베르 까뮤는 모두 노벨상 수상자입니다. 슈바이처 박사는 박사 학위만도 네다섯 가지나 되는 사람인데 아프리카 람바레나에 가서 흑인 문둥병자들을 치료해 주며 그의 삶을 바쳤습니다. 그가 아프리카 적도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모두 그를 미쳤다고 했었습니다. 그는 노벨 상금으로 아프리카에 병원을 짓고 흑인들을 치료해 주며 생애를 보냈는데, 사람들은 오늘날 그를 20C의 태양이라고 불렀습니다. 까뮤는 상금을 가지고 한적한 교외에다 멋있는 별장을 짓고 신나게 승용차를 타고 별장으로 가다가 전주를 들이받고 직사해서 그의 생애를 마치고 말았습니다.
남을 섬기는 생활이 바보 같고 어리석어 보이고 밑지는 생활 같아도 이것이 보람 있는 생활이요 복된 생활입니다. 남을 섬기고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사람은 자기도 행복해집니다.
이러한 섬김의 삶을 위해서는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빌2:3)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서로 섬기는 곳입니다. 특별히 교회에서 앞서 일하는 일군들은 섬김의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섬길 줄 모르는 사람은 섬김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섬길 줄 모르는 사람이 섬김을 받으면 교만해져서 패망하고 맙니다. 섬기는 삶은 교만을 버린 겸손한 삶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을 섬길 줄 아는 사람입니다. 또한 형제와 이웃을 섬길 줄 아는 사람입니다.
자기보다 높은 사람을 섬기는 것은 쉽습니다. 자기보다 힘이 센 사람, 권력이 많은 사람, 돈이 많은 사람을 섬기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 아래 있는 사람을 섬기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체면과 자존심의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그리스도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발을 닦아주기 위해서는 무릎을 꿇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낮은 곳에서 행해야 합니다. ‘낮아져라, 겸손하라, 버려라, 종이 되라……’. 이런 말들은 기득권을 가진,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주신 말씀입니다. 자기의 권세를 자랑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선생과 주가 된 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더 이상 낮아 질래야 낮아질 수 없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 말이 필요가 없습니다. 많이 알고 있기 때문에, 더 많이 배웠기 때문에, 더 많이 가졌기 때문에, 더 힘이 세기 때문에, 섬김에 장애가 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선행이 왜 문제가 되었습니까? 그들은 자신들을 낮추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의 선행을 남들에게 선전함으로 자신들의 경건성과 의를 과시하려 했기 때문에 주님께 책망을 받은 것입니다. 낮은 자리 남들의 시선이 머물지 않는 자리, 모두가 싫어하는 곳에서 섬김의 도를 실천하는 참 제자들이 됩시다.
십자가에서 희생하심으로 섬김
마가복음 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주님은 얼마든지 영광 중에 왕 노릇하실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계시면서 한번도 그 능력으로 자신의 유익을 구한 일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이름과 그 능력이 입 소문으로 전해지면서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는 은연중에 예수님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곳을 피하셔서 산 속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우리가 잘 섬기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를 포기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나의 작은 이기심이, 알량한 자존심이 우리의 생각을 사로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포기해야 기쁨으로 섬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섬기기 위해 우리 자신을 포기할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셨습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빌2:7,8)라고 한 말씀입니다. 이 말을 동일시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공감한다는 말과도 일치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같아지셨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를 섬기고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와 똑같은 몸을 입고 오셔서, 우리와 똑같이 고난도 당하시고, 시험도 당하셨습니다. 그 이유를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 4:15)고 합니다.
우리 연약함을 공감하시는 분이라고 합니다. 우리와 똑같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땅 끝 오지에 가서 주의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들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전혀 다른 문화에 적응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특별히 오지에 사는 사람들은 음식을 통해서 서로의 공감대를 형성하는데,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음식들을 먹고사는 사람들의 습관을 따른다는 것은 너무나 어렵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찾아 나오는 무리를 보시고 목자 없는 양이 유리하며 방황하는 것처럼 민망히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민망히 여기셨다는 것은 창자가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과 같은 아픔이라고 주석가들은 말합니다. 우리가 남을 섬기기 위해 우리는 섬기려고 하는 사람과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들과 우리 자신을 동일시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알버트 슈바이처의 저서인 ‘아프리카의 이야기’에는 여러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지만 읽으면 마음이 괴로운 사연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는 이런 내용도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어느 산중에서 맹수에 쫓기고 있는 토인이 한 사람 있었는데 그것을 본 같은 아프리카인은 그 쫓기고 있는 사람이 어느 부족에 속한 종족인가를 살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자기 부족의 한 사람인 것이 확인되면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고 그 사람을 구출하기 위해서 온갖 희생을 감수하지만 만약에 그 사람이 다른 종족으로 인식이 되면 전혀 무관심하게 그냥 지나쳐버린다는 것입니다. 이 철저한 너와 나의 구별은 부족의 한계에서 너무도 선명해지는 것이 아프리카 토인의 당연한 윤리라고 합니다.
우리는 엄격히 보면 <나>이외에는 모두 타인입니다. 가족도 친구도 모두 타인에 불과합니다. 오직 나는 나 하나만의 생존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만을 위해서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정말 우리가 이렇게만 살아간다면 우리는 우리만의 행복이 있으리라고 믿어도 좋겠습니까? 정말 이것이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사실이겠습니다.
너 없는 나 그리고 나 없는 너. 이것은 외롭고 무기력합니다. 우주의 광대무변한 그 속에 한 점 먼지에 불과한 이 지구에 살면서 우리가 세계가족을 형성하지 못하고 살아간다면 그것은 너만의 불행도, 나만의 불행도 아닌 우리의 공통적인 비극이 아닐 수 없겠습니다.
슈바이처의 아프리카 관찰 중에서 생사의 기로에서 쫓기는 인간의 고귀한 생명을 구하는 데까지 부족의 구별부터 한다는 그것만으로도 미개한 민족이라는 치욕스러운 낙인을 받아 마땅하다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도 우리의 생활 주변에서 그 아프리카의 미개한 토인과 같은 생각으로 지나왔던 길목은 없었던가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대수롭지도 않게 마음을 아파하는 인간애의 애끓는 가슴도 없이 그냥 어떤 비극 앞을 지나쳐 버린 그런 무감각한 우리의 발길이 어느 길목에 남지 않았던가 하고 말입니다.(슈퍼 바이블-너와 나)
신자들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 섬겨야 합니다. 칼빈은 “왕이라도 섬김이 없이는 진정으로 의롭게 다스릴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 다같이 섬기는 자가 됩시다.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합시다.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깁시다. 섬김의 본을 보이신 예수님을 본 받아 섬기는 모두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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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김의 본이 되시는 주님
요 13:1-17 섬김의 본이 되시는 주님
서점에 나오는 책들을 주제별로 분류할 때 종교서적이든 일반서적이든 제일 많이 팔리는 책은 리더십에 관한 것입니다. 작게는 가정에서부터 크게는 나라에 이르기까지 리더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리더의 역량에 따라 맡은 그룹이나 조직을 세울 수도 있고 허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리더가 리더 되려면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자세 또한 중요합니다. 믿는 자로서 리더는 거룩한 영향력을 발휘해야겠고 믿는 자로서 따르는 자들도 올바른 따름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본문을 보니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그분의 실천은 본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 자처한다면 예수님의 본을 따르는 것이 당연합니다. 교회나 삶이 현장에서 예수님을 보여주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분주하지만 진정한 예배자가 되려고 하고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묵묵히 맡겨진 일을 다하고 있습니까? 오늘 예수님은 섬김의 리더십을 통하여 우리 모두가 본받고 실행해야 할 제자도를 보여주십니다.
세족에 나타난 주님의 사랑
요한복음이 21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2장까지는 예수님이 행하신 일곱 개의 표적이 언급됩니다. 13장부터 시작되는 후반부는 일곱 개의 표적을 본 제자들을 믿음으로 확실히 세우기 원하셔서 말씀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는 행위로 제자들을 양육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요 12:26)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하며 그의 행함을 본받으며 따라가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장에는 제자들과 함께 하신 예수님의 마지막 사역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돌아가야 할 시간이 온 것을 아셨지만 제자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끝까지 보여주기 원하셨습니다.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 13:1). 제자들은 알지 못하였지만, 그 밤이 예수님에게는 제자들과 함께 하는 마지막 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마지막 저녁식사를 나누셨습니다.
공관복음에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장면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반면에 요한은 다락방에서 있던 최후의 만찬에 대하여 특별히 언급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사복음서를 종합해보면 발을 씻기시는 사건이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일어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식사를 마치시면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 가서 기도하시고, 종교지도자들이 보낸 하속들에 의하여 체포되고 밤새도록 심문을 당하고 아침에는 십자가에 달리십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하루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것과 곧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이 더욱더 사랑스럽게 느껴지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자로 알고 예수님을 믿습니다. 물론 제자들은 삼 년을 한솥밥을 먹고 지내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하시는 일들도 보아왔지만 아직도 예수님과 그의 사역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상태입니다. 누가복음 22:24를 보면 제자들 사이에 누가 더 크냐 하며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서로 한 자리 차지하겠다고 다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한심한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식사를 나누시다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십니다. 식사 중에 왜 일어나시는지 궁금해 하며 제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예수님께로 쏠립니다.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신 예수님은 직접 물을 떠다가 대야에 담으시고 가까이 앉아 있던 제자들부터 발을 씻기시고 씻긴 발을 수건으로 닦아 주십니다. 제자들은 영문도 모르는 채 엉거주춤한 자세로 자기의 발을 내맡기며 예수님이 하시는 것을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그들 중에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할 베드로도, 심지어 예수님을 팔아넘길 배반자 가룟 유다도 있었습니다. 모든 제자들이 자기를 버리고 도망할 것을 아셨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할 일, 곧 사랑으로 그들을 섬기는 일을 행하셨습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은 광야인지라 먼지가 많습니다. 그래서 길을 걷고 나면 샌들을 신고 있는 발에 흙먼지가 덮이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집에 들어가면 그 집의 종이 손님의 발을 씻기는 것이 관습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면서 종이 하는 일을 하십니다. 다른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침묵과 충격 속에 바라보던 베드로는 그 손길이 자신에게 이르자 자기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한다고 합니다. 아마 그는 예수님의 손까지 붙잡고 만류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높으심과 자신의 비천함을 아는 자들이 가지는 당연한 반응입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예수님의 씻어주심이 없이는 소망이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과 예수님께서 곧 당하실 죽음의 의미를 알지 못했으며, 그 죄 씻음을 통하여 온전한 영적 연합이 이루어짐을 알지 못했습니다. 주님의 뜻을 모르는 가운데 보여주는 사양은 겸손이 아니라 도리어 교만이 됩니다. 주의 일을 맡겨도 부족함을 이유로 습관적으로 사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또 다른 일을 맡겨도 같은 이유로 사양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 믿음이 자라고 하나님의 일을 함으로 하나님의 복이 임합니다. 자꾸 사양만 한다면 도리어 불순종이요,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지 않겠다는 자세입니다. 부족하지만 하나님이 능력을 주시면 해 보겠습니다. 이러한 겸손한 자세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베드로의 만류에 예수님은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다고 하십니다.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는 문자적으로 ‘너는 일부분도 나와 함께 공유하지 못한다’ 즉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깜짝 놀라 말합니다. “주여 내 발 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시옵소서” 하면서 손과 머리를 예수님께 내밀었을 것입니다. 얼핏 보면 그의 대답이나 요청이 멋있어 보이지만 그의 반응은 충동적입니다. 주님의 뜻을 몰랐기 때문에 겸손한 것처럼 보였지만 주님의 은혜를 거절했던 것이며, 손과 머리를 씻겨 달라는 것은 적극적인 신앙 같으나 이기적인 욕심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 당시 잔치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집에서 목욕을 하고 옵니다. 그러니 몸은 이미 깨끗한 것이요 오는 동안에 발에 묻은 먼지만 잔치 집에서 씻으면 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죄 용서함을 받고 깨끗함을 받아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그의 구속의 피로 목욕을 했지만 구원을 받은 후에도 여전히 세상의 흙을 묻히며 살아갑니다. 마음으로 (시기, 질투, 욕심), 말로 (혈기, 비방, 거짓말), 행동으로 (폭력) 짓는 죄들이 있습니다. 죄 사함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의로 값없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구원 받은 자로서 날마다 발 씻음, 곧 성화의 삶이 필요합니다. 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날마다 우리 삶 속에서 죄로 인하여 더러워진 부분들을 주님 앞에 내어놓고 씻음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비우면 비울수록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더 풍성하게 경험하게 됩니다.
가룟 유다를 향한 주님의 사랑
세족을 통해 선생이 제자를 섬기는 겸손한 사랑, ‘끝까지의 사랑’을 보여주셨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안타까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마귀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향한‘끝까지의 사랑’을 방해합니다. 요한복음 12장에는 자기 오빠를 살려주신 예수님께 감격하며 마리아는 비싼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향유에 젖은 발을 씻기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장사를 예비하는 최상의 헌신의 행위를 보여주는데도 가룟 유다는 옆에서 못 마땅해 합니다. 그 향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며 마리아에게 면박을 줍니다. 유다가 진정으로 가난한 자들을 생각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그가 회계를 맡았기에 마리아가 향유 판돈을 드렸다면 그 중의 얼마를 자기 수중에 넣었을 텐데 그렇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마리아에게 엉뚱하게 분풀이하였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것을 옆에서 다 지켜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유다의 배신을 아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발도 정성껏 씻고 닦아주셨습니다. 주님은 다른 제자들 앞에서 그를 지목하지 않고 스스로 회개하고 돌아서기를 원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손길은 유다의 양심을 찔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뿐입니다. 유다는 사탄의 충동질을 따라 예수님을 팔 생각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26절에 “한 조각을 찍으셔다가 가룟 시몬의 유다에게 주시니”를 보면 예수님께서 ‘끝까지의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제공하신 포도주에 적신 한 조각의 떡은 예수님께서 흘리실 피와 찢기실 살을 상징합니다. 유다는 예수님이 주신 한 조각을 받았지만 먹지는 않았습니다. 유다는 이를 받아들고 배반의 길로 달려갔습니다. 21절에 보면 예수님의 심령이 “괴로워” 하십니다. 요한복음 11장 33절에도 “비통히 여기시고” 하면서 같은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 표현 속에서 예수님은 가룟 유다에 대해 인간으로서 느끼신 배신감과 연민의 정을 모두 드러내십니다. 유다는 회개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배반하였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자살로서 생을 마쳤을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도 면목 없는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베드로를 향한 주님의 사랑
예수님의 죽으심과 사랑에 대해 무지한 것은 유다만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 예수님은 식사를 하시면서 당신이 이룰 하나님의 영광을 말씀하시고 제자들이 마땅히 서로 사랑하여야 할 것을 가르치셨지만 베드로가 실패할 것도 예고하십니다. 이곳에서 예고된 베드로의 실패 이야기는 요한복음 후반부를 엮어가는 중요한 맥이 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드릴 수 있다고 큰소리쳤지만, 그는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실패한 베드로도 사랑하셨습니다. 그의 실패는 21장의 디베랴 바닷가의 회복(21:15-19)을 통해 반전됩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예수님의 사랑에로의 초정에 베드로가 응함으로 회복을 경험하며 주님의 사역을 이어받아 수행합니다.
본문에 나타난 주님의 모습을 보면서 어떤 점을 본받아야 합니까?
1) 주님처럼 올바른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세족은 말이 아닌 행위로 예수님의 깊은 뜻을 전달하는 일종의 설교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중생의 죄 씻음 후에도 매일매일 저지르는 죄를 예수님의 보혈로 씻어야 합니다. 세족에는 “내가 죄를 씻어주는 사람이다, 죄를 씻기 위해 세상에 왔다, 너희의 어떤 허물도 용서하고 씻어주시겠다”고 하시면서 발을 씻는 제자들과 깊은 사귐을 가지시려는 주님의 배려가 담겨 있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세족을 거부하는 것은 예수께서 자신의 생명을 내려놓기까지 하며 주시는 사랑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아름다운 관계를 가졌던 것처럼 우리도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를 비추어보며 주님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순종하며 주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2) 주님처럼 섬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이유는 그들을 사랑하셔서 섬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그들의 발을 씻기신 이유에 대해 설명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13-14절). 섬김은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자들을 향한 주님의 명령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다 씻긴 후에 그 밤의 사역에서의 교훈을 정리해주십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34절). 예수님은 ‘디아코노스’ 곧 ‘섬기는 자’로서 새 계명, 곧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계명을 제자들의 발을 씻고 닦는 행위를 통하여 실제로 보여주셨습니다.
4절의 겉옷을 ‘벗고’에 쓰인 단어와 10:11절에 선한 목자가 자기 목숨을 ‘버린다’는 같은 단어입니다. 즉 세족의 행위가 십자가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병든 자와 죄인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사역이 제자들을 통해 계속해서 이어지기를 원하셨습니다. 세족 사건은 예수님의 살과 제자들의 살이 맞닿고 마음과 마음이 통하며 깨끗함과 회복됨의 느낌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교육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러한 겸손의 본을 보이셨다면 우리들도 예수님이 하신 행동을 기억하며 더 겸손히 섬기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말을 너무 많이 하는 편입니다. 전도도 말로만 하고, 사랑도 말로만 하고, 하나님의 말씀도 말로만 가르치게 됩니다. 자기 몸으로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본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죄사함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거나 믿음으로 그 은혜를 경험하지 못한 채 행하는 겸손이나 섬김은 한계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의 온갖 죄와 허물을 정결케 하셨다는 감격은 우리로 하여금 자발적인 섬김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예수님을 본받아 제자들은 수건을 허리에 두르고 주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영광 받는 날에 주님으로부터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칭찬을 받으며 예비하신 상급을 받게 됩니다.
3) 주님처럼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 곁을 떠나셔야 합니다. 그 기간 동안 제자들이 힘써 행할 것이 있는데 그것이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을 통해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하고 있음을 세상에 보여주어야 합니다. 요한복음은 제자의 사랑이 예수님과의 연합을 통해 우러나는 것이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모든 사랑의 모델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제자들의 사랑은 이런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아 세상에 나타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새 계명을 주십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죽어야 살고, 포기해야 얻고, 섬겨야 섬김을 받고, 용서해야 용서를 받는 사랑입니다. 너와 나를 구분하지 않고 다 주고도 아쉬워하는 사랑입니다. 머리로만 사랑이 아니라 허리를 수그리고, 손과 발을 움직이고, 자기의 지갑을 여는 사랑입니다. 그럴 때 모든 사람이 우리를 예수님의 제자라고 인정할 것이고, 그 때 예수님도 우리를 자신의 제자로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가 사랑으로 하나 되는 모습 속에서 세상은 예수님의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섬김의 현장(가정, 이웃, 학교, 직장 등)으로 부르십니다.
살다 보면 크고 작은 많은 상처들이 생깁니다. 가정에서, 이웃에게서, 사업하면서, 교회에서 받은 상처, 때로는 남들에게 털어놓기 거북한 상처들이 있습니다. 그 상처 때문에 마음 아파하고 몸까지 쇠약해집니다. 과부사정은 과부가 안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아픈 상처가 주님의 은혜를 통하여 위로와 치료함을 받았다면 우리들은 “상처받은 치료자”(wounded healer) 들이 되어 상처를 가진 이웃과 함께 아파하고 섬기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감추고 싶은 과거를 가진 수가성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 마음의 상처를 치료받은 후 물동이를 던져두고 동네 사람들에 전도하러 뛰어갔습니다. 나면서 소경된 자가 예수님으로부터 치료함을 받고 주변의 핍박 속에서도 주여 내가 믿나이다 담대한 고백을 했습니다. 성전 미문에 앉아 있던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거지가 주님의 능력으로 치료함 받고 걸으며, 뛰며 하나님의 찬송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주변에 상처받은 자들이 팔로마 한인 교우들의 간증과 섬김을 통하여 치료함 받이야 합니다. 온 교우들이 예수님의 권면을 좇아 서로의 발을 닦아주는 섬김의 자세를 가질 때 저희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공동체가 될 것을 확신합니다.
“인자가 섬김을 받으려 온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예수님은 그의 생애 마지막까지도 제자들에게 겸손과 섬김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섬김의 절정은 십자가상의 대속의 죽음으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끝까지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십자가는 끝까지 언약을 지키시는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세족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섬기는 본을 보여주시고 삶을 항상 거룩하게 지키며 살아가야 함을 교훈하십니다. 예수님은 17절에서 ‘알고 행하는 자의 복’을 소개합니다.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함을 알고 행하는 것’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곧 겸손한 섬김이 복이란 뜻입니다. 복이 되는 겸손은 높은 위치에서도 낮은 자를 진정으로 섬길 수 있는 행위인데 이것을 예수님께서 보여주셨습니다. 이제 성숙된 제자들이라면 서로 발을 씻기며 남들을 섬겨야 합니다. 앞에서 이끄는 자나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하나가 되어 서로 섬기며 나아가는 그룹이나 교회는 소망이 있습니다. 서로 섬김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고 그로 인하여 아름다운 사역의 열매들과 하나님의 구체적인 축복들이 삶의 현장에서 풍성하게 나타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섬김의 본을 받으라 (요 13:1~17) > 설교자료실
섬김의 본을 받으라 (요 13:1~17)오늘 살펴볼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나누시던 자리에서 있었던 일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세상을 떠나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을 아셨습니다.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고 무덤에 장사되셨다가 삼일 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실 것을 미리 다 아셨습니다.제자들은 십자가의 참혹함을 생각만 해도 치를 떨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고난 이후에 받으실 영광을 내다보시고 기뻐하셨습니다. 이제 이 세상을 떠나갈 시간이 점점 다가오는 그 때에 예수님께서 관심을 두고 행하신 것은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1절에 보니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고 했습니다.예수님의 삶은 사랑 없이는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그 사랑은 자기의 목숨을 희생하는 사랑입니다. “14)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 “13)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 15:)고 하셨습니다.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행복자인 가장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주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된 것보다 더 위대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신앙생활이란 결국 독생자를 아낌없이 희생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깨달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 달려 고난당하셨다는 사실을 실감나게 이해하는 것입니다.아무리 성경 지식이 많고, 교회생활을 오래 하고, 봉사를 많이 할지라도,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마음 깊이 체험하지 못했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이 없는 지식, 사랑이 없이한 교회생활, 사랑으로 하지 않은 봉사는 그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뿐 다른 사람들을 유익하게 하거나 교회에 덕을 세우지 못합니다. 사랑이 없는 구제는 자기의 선함을 사람들 앞에 보이기 위한 위선적인 행동에 불과합니다.성경은 사랑의 위대함에 대하여 자주 언급합니다. 잠언 10장 12절에 이르기를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고 했습니다. 마음속에 미움이 가득한 사람은 남의 허물을 들추어내어 다투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사랑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모든 허물을 가려줍니다. 그러기에 사도 베드로는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8)고 말씀했습니다.오늘날 우리 사회는 하루도 빠짐없이 끔찍한 사건들이 연속적으로 발생하고 있습니다. 왜 날이 갈수록 사람들이 점점 더 악해져 가는 것일까요? 범죄사회학에서는 범죄의 원인을 사회 환경적인 요인으로 돌리지만 그것은 올바른 진단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본질적으로 볼 때,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는 것이 범죄의 원인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이에 대하여 로마서 13장 8절 이하에 이르기를 “8)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9)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찌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10)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고 했습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합니다.그뿐 아니라, 성경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서 사랑을 신앙의 본질과 관련시킵니다. 요한일서 4장에 보니 “7)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8)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고 말씀했습니다.믿음이 있는 사람인지, 믿음이 없는 사람인지를 아는 가장 결정적인 방법은 그 사람이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외하는 하나님은 사랑이 한량없으신 분이신데,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믿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사랑의 성품과 사랑할 능력이 그 사람 속에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실을 알고 생활 속에서 사랑을 실천하는데 힘써야 합니다. 사랑을 하는데도 연습이 필요합니다.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을 터득해 나가야 합니다. 사랑의 표현으로서 가장 본질적인 것은 섬김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 주님의 생애는 한 마디로 섬김의 삶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기에 빌립보서 2장 6절로 8절에 이르기를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했습니다.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으니 얼마나 낮아지신 것입니까? 그러므로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지셨다고 한 것입니다. 종은 신분만 낮은 것이 아니라 그 마음도 낮아야 합니다. 그래야 주인을 섬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낮고 천한 인간으로 오신 정도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인류를 대속하시려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셨습니다. 죄로 멸망할 인생들을 구하시려고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그야말로 섬김의 극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나누시는 자리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행동을 통한 귀한 가르침을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이제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로 올라가시면 제자들만 이 세상에 남겨질 것인데, 그 때 그들이 만방에 나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대신하려면 예수님의 마음을 가질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그 날 밤에 예수님께서는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아주셨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제자가 스승의 발을 씻겨드려야지, 어떻게 스승이 제자들의 발을 씻길 수 있단 말입니까? 당시 유대인들은 주로 끈이 달린 센달을 신고 다녔습니다. 길은 포장이 되어 있지 않아서 한번 외출하고 돌아오면 발에 흙먼지로 범벅이 되어 반드시 물로 씻어야 했습니다.부자 집에서는 종이 주인이나 손님의 발을 씻겼습니다. 우리나라에는 발을 씻기는 습관이 없지만, 상식적으로 남의 발을 씻기는 것은 천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에 피치 못할 사정으로 남의 발을 씻기게 되었더라도 모욕감을 느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몸소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겸손을 대합니다.오늘날 사람들은 겸손을 하나의 장식품처럼 이용합니다. 사람들의 칭찬을 받기 위해 일부러 겸손한 척합니다. 상관 앞에서는 겸손하게 행동하지만 동료나 부하들에게는 교만하게 굽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겸손은 꾸며낸 겸손이 아니라 본심에서 우러나온 겸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마 11:29)고 하셨습니다.꾸며낸 겸손은 금방 탄로가 납니다. 도금한 것은 언젠가 벗겨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진심으로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 마음을 주관해 주셔야 합니다. 빌립보서 2장 5절에 이르기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품을 때 겸손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한국인들으로서 조만식 선생을 존경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 분은 3ㆍ1운동에 가담했다가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고, 이승훈 선생이 세운 오산학교에서 교장으로 일한 적도 있습니다. 일제 때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순교하신 주기철 목사님은 조만식 선생의 제자였습니다. 조만식 선생은 독실한 기독교인에다 교회 장로님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주기철 목사님이 조 장로님이 시무하는 평양 산정현교회의 담임 목사로 부임했습니다.어느 주일날, 주 목사님이 설교를 하려는데 무슨 일인지 그제야 조 장로님이 헐레벌떡 들어왔습니다. 당시는 다 마루 바닥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던 때라 신을 벗어서 신발장에 넣으려고 하는데 주 목사님이 “조 장로님, 예배시간에 늦었으니 거기 신발 들고 서 계십시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좀 심한 처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그러나 조만식 장로님은 아무 말 없이 신발을 들고 설교가 끝날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고 합니다. 설교 후에 주 목사님이 “조 장로님, 앞에 나와 기도하십시오” 그러자 조 장로님이 앞에 나와 이 같이 기도했다고 합니다. “주여 장로가 주일을 소홀히 여겼습니다. 하나님을 경홀히 여기고 예배를 방해한 죄를 회개합니다. 또 목사님 마음을 상하게 한 것을 회개합니다” 바로 이것이 겸손입니다. 만일 조 장로님이 겸손하지 않은 사람이었다면 주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단단히 시험에 들었을 것입니다. “명색이 오산학교의 은사요 교회 장로인 나를 성도들 앞에서 그렇게 모욕을 주다니, 내가 그래도 조선에서 알아주는 명사인데 대접을 그렇게 소홀히 하다니” 그러나 조 장로님은 조금도 그런 내색을 하지 않고 진심으로 자기의 실수를 회개했습니다.예전에 어느 대학 교수 한 분이 권면을 받고 교회학교 교사로 봉사하게 되었는데, 다른 선생님들과 잘 어울리면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수련회 때 특강을 부탁하면 해박한 지식을 동원해서 유익하고 재미있게 강의를 했습니다. 저는 그 분이 한 번도 대학교수인 척 하지 않은 것을 보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닮은 겸손한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그러나 같은 대학교수라도 교만한 사람은 교회학교 교사로 봉사하라고 하면 노골적으로 싫은 기색을 보입니다. ‘이래 뵈도 내가 대학교수인데 그래 아이들이나 가르치라고, 나를 어떻게 알고 그러는지 모르겠다. 내가 명색이 박사인데 이제 갓 신학교를 나온 전도사의 말을 들으라고’ 하면서 불만을 터뜨립니다. 아는 것이 많든 적든, 나이가 많든 적든, 교회에서는 그런 것을 가지고 자기를 내세우면 안 됩니다.사랑하는 성도님들, 교회는 하나님께서 임재하셔서 통치하시는 곳이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권위 앞에서 잠잠해야 합니다. 자기를 내세우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를 섬겨야 합니다. 목회자와 성도들이 겸손으로 서로를 섬겨야 합니다. 교회에서 귀한 직분을 맡은 사람일수록 더욱 몸을 낮추고 섬기는데 힘써야 합니다. 교회의 직분은 그 어느 것 하나, 대접 받기 위한 것은 없습니다. 오히려 섬기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섬길 마음이 없으면 직분을 받지 말아야 합니다.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다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으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열 두 제자 뿐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은 누구나 다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그러므로 스승이신 예수님의 겸손을 본받아 행해야 마땅합니다. 우리 속에서 교만한 생각이 고개를 쳐들 때 우리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님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그러나 겸손한 사람이 되려면 힘쓰고 애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 속에는 겸손히 남을 섬기기보다는 내가 먼저 대접을 받으려는 성향이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본받으려면 우리의 교만한 기질을 죽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과 같은 위대한 분도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고 하였습니다.우리의 옛 성품을 완전히 죽여 없애야지, 적당히 억눌러 놓으면 언젠가 눌렸던 용수철이 튀어 오르듯이 옛 기질이 폭발하고 맙니다. 그리하여 그 동안 쌓아놓았던 성과를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옛 기질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야 합니다.또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상전이신 예수님께서도 이처럼 섬기셨는데 하물며 예수님의 종 된 우리가 섬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신약성경을 보면, 사도들은 항상 자기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 1장 1절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이라고 자신을 소개합니다. 베드로후서 1장 1절에 보면 사도 베드로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라고 자신을 소개합니다. 계시록 1장 1절에서 사도 요한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 요한”이라고 했습니다.후대에 믿는 우리는 사도들에게 큰 빚을 진 자들입니다. 사도들은 가정도, 직업도 버리고, 안일한 생활에 대한 미련도 버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생애를 바쳤습니다. 사도들의 생애는 철저하게 섬기는 삶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을 제외하고 모든 사도가 자기들의 목숨을 순교의 제물로 바쳤습니다. 따라서 이처럼 거룩한 사도들이 자기들을 종으로 자처했다면 부족한 우리로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지 않겠습니까?한편,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섬기는 삶과 더불어 구속의 진리를 가르치기 위함이었습니다. 한 사람씩 발을 씻기다보니 시몬 베드로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말하기를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하니,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수긍하지 않고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선생이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고 하시니, 시몬 베드로가 말하기를 “주여 내 발 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고 하셨습니다.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이미 목욕한 자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미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원죄와 우리가 범한 자범죄를 다 용서 받았습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8장에는 “1)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하였습니다.그러면 발을 씻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성화를 위해서 매일같이 자신을 반성하고 지은 죄를 회개함으로 용서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에도 종류가 있습니다.요한일서 5장 16절로 18절에 이 같이 말씀합니다. “16)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17)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18)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그리스도인들도 이 땅에 사는 동안 알게 모르게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짓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훼방하고 배교하는 죄를 짓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목욕한 사람과 같아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도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허물과 죄를 범합니다. 그것은 마치 목욕한 사람이 발을 더럽힌 것과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외출했다가 집에 돌아오면 발을 씻듯이 우리는 매일 지은 죄를 나중으로 미루지 말고 회개함으로 항상 정결한 마음상태를 지켜나가야 하는 것입니다.우리가 자기 죄를 인정하고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그와 동시에, 회개할 때 우리의 교만한 마음이 겸손한 마음으로 바뀝니다. 이렇게 볼 때, 그리스도인에게 회개생활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자칫 교만한 생각을 하면서 지내다가도 회개하는 시간, 교만을 버리고 다시금 겸손한 마음을 회복하게 됩니다.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 회개하는 것을 보면서 “무슨 죄를 그렇게 많이 졌기에 매일 눈물을 흘리면서 회개하느냐?”고 말합니다. 그것은 저들이 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때와 얼룩으로 더러워진 옷에는 오물이 튀어도 별 표시가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깨끗하게 세탁한 흰옷에는 아주 작은 오물만 튀어도 선명하게 드러납니다.우리의 마음도 이와 같습니다.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의 마음은 죄로 더럽게 얼룩져 있으므로 죄에 대하여 예민하게 반응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죄를 짓고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합니다. 반대로,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보혈로 그 양심이 정결케 되었으므로 아주 작은 죄를 범했을지라도 곧 바로 양심에 가책을 느끼고 회개합니다. 회개하지 않고 버티려고 하면 할수록 고통을 느낍니다. 다윗은 시편 32편에서 고백하기를 “3)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4)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5)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고 했습니다.겸손과 회개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함께 하는 것입니다. 죄를 범하고도 회개하지 않으면 사람이 교만하게 변합니다. 죄는 사람을 교만하게 만듭니다. 그 이유는 죄의 본질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이든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은 교만한 정신에서 나온 것입니다.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한 것도 사단의 말을 듣고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교만한 정신을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교만한 정신을 갖고서는 하나님을 올바르게 섬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남들 섬길 리 만무합니다. 그러나 교만은 패망의 선봉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사랑하는 성도님들, 디모데후서 3장에 보면 교만은 말세 사람들의 특성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것은 말세가 되면 사람들이 그만큼 하나님을 멀리 떠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만한 정신이 지배하는 세상을 보면서 이 시대가 말세임을 알아야 합니다.이러한 때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할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을 본받아 섬김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밤이 어두울수록 빛의 존재가 더욱 드러나듯이, 우리는 섬김의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빛을 나타내야 합니다.그리고 우리는 주님의 몸 된 교회에서 섬김의 삶을 실천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들을 섬길 때 우리 교회는 더욱 사랑이 넘치는 신앙의 공동체가 될 것이요 이를 본 불신 이웃들이 과연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다르다고 할 것입니다. 아무쪼록 주님을 본받아 섬김의 삶을 실천함으로써 불의한 이 세상에 사랑이 충만한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켜 나가는 데 쓰임 받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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