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 의 은사 | [존 파이퍼] 예언의 은사는 무엇인가? 모든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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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7. 6.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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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의 은사란 어떤 것입니까?

질문

예언의 은사란 어떤 것입니까?

답변

예언의 은사는 고린도전서 12:10과 로마서 12:6에 나오는 성령의 은사 중 하나입니다. 두 구절에서 “예언을 하는 것” 또는 “예언”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대변하는 것”, 혹은 하나님의 신성한 뜻을 선포하거나 그 목적을 해석하거나,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하나님의 진리를 어떤 식으로든 알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언의 은사를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으로 오해합니다. 미래에 대해 아는 것이 예언의 은사의 한 측면이기는 하지만 이 은사는 예측(“예견”)이 아니라 선포(“선언”)의 의미가 더 많았습니다.성경을 선포하는 목사나 설교자는 하나님의 권고를 전한다는 점에서 “예언자”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신약 성경이 완성됨에 따라 예언은 새로운 계시를 선포하는 것에서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완전한 계시를 선포하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유다서 3절에서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주신 믿음”에 관해 말합니다(강조 포함). 즉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은 영원한 것이며 성경 외의 계시에서 오는 어떤 것을 추가하거나 개선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또 베드로후서 2:1에서 선지자에서 선생으로 전환되는 부분에 주목하십시오. “백성 가운데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강조 포함). 베드로는 구약 시대에는 선지자들이 있었지만 이제 교회에는 선생들이 있을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사람들에게 선포할 하나님의 새로운 계시를 받는다는 의미에서 예언의 은사는 성경이 완성됨에 따라 중단되었습니다. 그 당시 예언은 계시적인 은사로 사용되었고 그로 인해 사람에게 덕을 세우고 권면하며 위로를 주었습니다(고전 14:3). 지금의 예언의 은사는 가르치는 은사와 더 유사한 것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합니다. 이전과 비교하여 바뀐 것은 오늘날에는 하나님의 진리가 말씀 안에서 온전히 드러나 있다는 것으로, 초대 교회 당시에는 말씀이 온전히 완성되지 않았습니다.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메시지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어젯밤에 흥미로운 꿈을 꾸었어요”라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어젯밤에 제게 꿈을 주셨으니 당신은 그것에 순종해야 합니다”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사람의 말이 기록된 말씀과 동일하게 또는 그 이상으로 간주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오직 성경의 말씀을 붙잡고 그 말씀에만 순종하도록 헌신해야 합니다.

예언의 은사란 무엇인가?

성경 예언의 은사란 무엇인가? 백혜명 ・ URL 복사 본문 기타 기능 공유하기 신고하기 http://www.thegloriatimes.org/news/articleView.html?idxno=54 [성령은사] 예언의 은사란 무엇인가? – 글로리아타임스 [성령은사] 예언의 은사란 무엇인가?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프로페테이아)을”(고전 12:10). 최근의 어느 기도회에서 한 자매님이 말했다. … www.thegloriatimes.org

예언의 은사란 무엇인가?

구요한 목사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프로페테이아)을”(고전 12:10).

최근의 어느 기도회에서 한 자매님이 말했다. “우리가 기도하고 있는 동안에 내 마음속에 성난 두 얼굴이 말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는데 마치 불이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다른 자매가 대답했다. “아마 한 얼굴은 저였을 것입니다. 저는 이 방에 있는 어떤 사람에게 쓸데없는 말과 나쁜 소문을 퍼뜨려 갈등을 조장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잠시 후 마음속에 그림을 본 처음의 자매가 이렇게 말했다. “아마 다른 얼굴은 저였을 것입니다. 저도 쓸데없는 소문을 퍼뜨리고 있었으니까요.”

위는 미국 전(前) 트리니티 복음주의신학교의 조직신학 교수이자 현 피닉스신학교 교수인 웨인 그루뎀(Wayne Grudem) 박사가 예언의 은사에 대해 말하기 위해 꺼낸 서두이다.

기도회에서 일어난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일부에서는 이런 것들을 예언이라고 부르며 개발, 훈련 및 사용을 적극 권장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직통 계시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예언이나 직통 계시를 받는 사람들을 (불건전한) 신비주의자로 매도한다.

과연 오늘날에도 예언의 은사가 존재하는가? 예언의 은사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떤 기능을 가지고 있는가?

성경의 권위에 종속되는 예언의 은사

사도 바울은 고전 14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변할 것이요 만일 곁에 앉은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거든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고전 14:29-31).

▲ 오늘날의 예언에 대해 성경적 신학적 경험적으로 잘 설명해 놓은 책이 바로 웨인 그루뎀의『예언의 은사』이다

웨인 그루뎀1)은 신약이 말하는 예언의 은사란 “우리 마음 (또는 생각) 에 하나님이 즉흥적으로 주신 것을 전달하는 것”이라고 정의하면서, 오늘날의 예언은 성경의 권위에 종속되는 것으로서 안위와 권면으로 교회의 덕을 세우고 (고전 14:3), 회개와 전도를 하는 것 (고전 14:25) 이 그 주된 기능이라고 주장한다.

위의 성구에 의하면 ‘예언’과 ‘계시’는 동의어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예언이나 계시는 모두 하나님께서 직접 주시는 것이다. 그루뎀은 고전 14장의 자세한 주석을 통해 오늘날에도 예언의 은사가 지속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예언이나 환상을 보는 자들을 무조건 신비주의자로 정죄하고 이단시하는 개혁·보수신학에 제동을 건다. 그루뎀 교수는 특히 예언의 은사를 부정하는 존 맥아더2)의 견해를 강렬하게 반박한다.

동시에 그는 오늘날의 예언은 기록된 성경 말씀과 같이 정확무오한 것이 아니라 오류의 가능성도 있으므로 분변해야 할 것을 주장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자신의 예언을 과신하는 자들에게도 따끔한 경고가 된다.

오늘날의 예언은 기록된 성경말씀과 어떤 상관이 있는가?

오늘날의 예언은 우리들이 통상적으로 말하는 하나님의 말씀 즉 절대적인 신적 권위를 가지며 오류의 가능성이 없는 기록된 성경 말씀과는 다른 것이다. 오늘날의 예언은 오류의 가능성이 있다.

다음은 웨인 그루뎀의 견해를 요약한 것이다.

이 때문에 사도 바울은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고전 14:29)라고 말하며 또한 “예언을 멸시하지 말며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살전 5:20-21)고 말한다.

하나님은 실수를 하지 않으시며 우리에게 틀린 계시를 주시지 않지만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실수를 한다. 또한 어떤 경우에는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아닌지를 정확하게 구분하지 못하고, 또한 하나님이 주신 것일지라도 제대로 해석하는 것이 어려우며 (예, 행 10장에서 베드로가 받은 보자기 속의 동물 환상), 더 나아가서 우리의 생각 때문에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일부 사람들이 자기가 받은 계시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라고 하는 것은 구약의 예언을 잘못 이해한데서 생긴 오류이다. 오늘날의 계시는 성경에 기록된 구약의 계시와는 다르다.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모세, 예레미아나 에스겔 같은 선지자들의 입에 하나님의 말씀을 두셨다고 기록한다(신 18:18-20; 렘 1:9; 겔 2:7).

구약의 선지자들이 전한 말씀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라고 했다. 구약에서 선지자들이 말하고 기록한 예언은 절대적인 신적인 귄위를 가진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계시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의 권위를 ‘보증’해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한 예언은 ‘하나님의 감동’을 받은 예언이며 전 시대를 위해 성경에 기록된 말씀들이다(딤후 3:16).

신약에서도 구약의 선지자들같이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기록한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선자자가 아니라 사도들이다.

신약의 사도들 (및 일부 사도의 지도하의 제자들)이 구약의 선지자들같이 절대적인 신적 권위를 가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기록했다(고전 2:13; 갈 1:8-12). 베드로는 구약의 선지자들과 신약의 사도들을 동격에 두고 있다. “곧 거룩하신 선지자의 예언하신 말씀과 주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하노라”(벧후 3:2).

신약에는 사도나 사도의 위임을 받은 일부―마가, 누가―만이 완전히 영감된 성경을 기록했다. 그러나 예언의 은사를 가진 신자들은 예루살렘(행 11:27), 안디옥(행 13:1), 두로(행 21:4), 가이사라(행 21:8-9), 로마 (롬 12:6), 고린도(고전 14장), 에베소(엡 4:11) 및 데살로니가(살전 5:20) 등 전 교회에 골고루 흩어져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신약이 말하는 예언과 성경에 기록된 예언의 성격을 구분한 그루뎀은 절대적인 신적인 권위를 가지며 오류의 가능성이 없는 성경말씀과 오류의 가능성이 있는 사적인 계시의 두 가지로 구분한다.

이렇게 주장하면서 그루뎀은 ‘하나님께서는 계시를 두 가지 통로를 통해 교회에 주신 적이 없다’는 리차드 개핀(Richard Gaffin)3)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그루뎀에 의할 때 개핀의 주장은 어떠한 성경 구절의 지지도 받지 못하는 독단적인 주장이다.

달라스 신학교 구약학 교수 출신인 잭 디어(Jack Deere)4)도, 기록된 말씀이나 직접적인 음성을 통해 지금, 이곳의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것보다 기록된 성경에 대한 “자신의 해석”에 집착하는 성경 이신론자들(Bible deists)5)의 오류를 책망한다. 이들은 자신도 모르게 성경을 우상화하여 성경을 기록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라고 그는 주장한다.6)

예언의 은사는 지금도 계속된다

미국 필라델피아 소재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번 포이트레스(Vern Poythress) 7)교수는 그루뎀과 개핀의 견해를 비교 평가하면서 사소한 오류를 지적한 후 전체적으로 그루뎀의 팔을 들어준다. 포이트레스에 의하면 많은 개혁, 보수신학자들이 ‘계시’라는 말을 전문적인 용어로 지나치게 좁게 정의하여 ‘특별 계시는 곧 성경말씀’이라고 단정지어 버리기 때문에 개핀과 같은 실수를 저지른다고 비판한다.

성경에는 ‘계시 또는 계시하다’라는 말이 항상 정확무오한 성경말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다.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는 것(롬 1:18), 신자들이 하나님을 아는 것(마 11:25), 하나님을 더욱 잘 알아 가는 것 (엡 1:17) 등의 의미로 사용된다.

저명한 신약 신학자인 D. A. 카슨(Carson)도 조직신학자가 사용하는 좁은 의미의 계시와 성경이 말하는 넓은 의미의 계시의 정의를 혼동하는 오류에 빠지지 말 것을 경고한다.8)

더군다나 포이트레스는 아무런 성경적 근거 없이 고전 14장1절과 살전 5장20절이 명확하게 인정하는 예언의 은사를 부정하는 조직신학자들의 횡포를 나무라면서 성경 말씀에 충실할 것을 경고한다.

포이트레스는 또한 예언의 은사가 틀릴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위험하므로 오늘날 예언의 은사를 부정해야 한다면 개신교가 인정하는 66권의 성경을 말하는 정경(正經, Canon)이 완성되지 않은 초대 교회 당시의 예언이 더욱 위험했을 것이라고 반문한다. 왜냐하면 오늘날에는 거울을 삼을 정경이 있지만 그 당시에는 정경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예언을 제대로 분변할 견제기능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 논리로 사도들이 초대교회 당시에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예언의 은사가 필요했다면 오늘날 사도들과 비슷한 상황에서 교회를 개척해야 하는 오지나 성경 반입이 허용되지 않은 지역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에게도 똑같이 예언의 은사가 필요하지 않은가? 라고 그는 반문한다.

포이트레스는 덧붙여 쟁쟁한 개혁신학자들이, 그루뎀이 말하는 예언의 은사를 직접 체험한 사실을 제시한다. 예를 들어 그는 저명한 개혁 신학자인 R. C. 스프롤(Sproul)에게 하나님께서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을 인용한다.

포이트레스는 더 나아가서 오늘날의 예언을 권면적인 것(고전 14:3), 정보제공적인 것(고전 14:25), 즉흥적인 것(고전 14:26, 30), 명령적인 것(행 21:4) 등으로 구분한다.

수년 전, 한국의 교회성장연구소가 부산에서 제일 큰 수영로교회의 담임목사인 정필도 목사와 인터뷰한 내용이 오디오 테이프에 실렸다. 정 목사는 자타가 공인하는 장로교회의 목사이다. 그는 교회성장에 관한 질문에 대해, 수 차례에 걸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한 것이 교회성장에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오늘날 하나님의 음성을 부정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단어

예언(prophecy), 예언하다(prophesy)는 말은 헬라어로 프로페테이아(명사), 프로페튜오(동사)인데 프로페튜오는 프로(앞으로, 내다, 대신)와 페미(말하다)의 합성어에서 생겼다. 따라서 예언하다는 말은 “전하다, 미리 말하다, 대신 말하다”는 뜻이다. 이처럼 예언은 하나님을 말씀을 전하는 대언(forth-telling)과 말 그대로 미래의 일을 말하는 예언(fore-telling)으로 구분한다.

• 대언.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예언을 통해 자녀에 대한 하관심과 사랑을 전달한다. 대언을 통해 안위, 권면, 책망, 심판 및 인도의 말씀을 주신다.

• 예언. 미래에 일어날 사건을 미리 예고해 주시거나 그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 즉 비전을 주신다.

예언의 은사란 무엇인가?

몇 가지 정의를 살펴보자.

“우리 마음 (또는 생각)에 하나님이 즉흥적으로 주시는 것을 사람의 언어로 전달하는 것이다” –웨인 그루뎀.9)

“예언의 은사는, 모인 사람들이나 그들 중의 소그룹이나 또는 개인에게, 신적인 기름부음을 받은 언어로 하나님이 즉각적으로 주시는 메시지를 받아서 전달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어떤 사람들에게 주신 특별한 능력이다” –데이빗 파이치(David Pythes). 10)

“예언의 은사는 신적인 기름부음을 받은 언어로 하나님이 즉각적으로 주시는 메시지를 받아서 전달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어떤 사람들에게 주신 특별한 능력이다” –피터 왜그너(C. Peter Wagner). 11)

위의 두 사람의 정의는 거의 똑같다고 할 수 있다.

“예언의 은사는 신자들을 권면하고 건덕하고 안위하고, 불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확신시키기 위해 하나님이 주시는 (예측적인 것은 물론 설명적인) 진리를 표현하는 능력이다” –로버트 클린턴(Robert Clinton). 12)

예언의 은사의 기능과 유익

예언은 상황이나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전하는 것이다. 피조물이자 타락한 사람은 상황이나 본인은 물론 다른 사람에 대해 정확하게 인식할 수 없다. 아무리 신앙이 성숙하고 성경 지식이 있더라도 하나님이 보시는 만큼 상황이나 사람을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더군다나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를 제대로 알 수가 없다.

물론 우리가 매일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고 예배하고 봉사하고, 일이 이루어지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지만, 반드시 이런 방법을 통해서만 자녀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을 나타내시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예언의 말씀을 통해서도 이런 것들을 나타내신다. 그런 점에서 예언의 말씀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유익이 있다.

-예언은 덕을 세우고 권면하고 안위한다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고전 14).

힘들고 피곤하고 지쳐있을 때 예언의 말씀은 덕을 세우고 권면하고 안위한다. 어떤 자매는 남편을 잃고 혼자 삶을 꾸리면서 자녀들을 양육하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다. 삶에 회의를 느끼고 살 의욕을 잃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교회의 모임에 열심히 참석하고 봉사활동도 하지만 집에 혼자 있을 때 밀려닥치는 고독감을 견디기가 어려웠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은 뜻밖의 말씀을 주셨다. “순희야(가명임),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 줄 아느냐? 두려워 말고 놀라지 말라, 내가 항상 너와 함께 하느니라. 내가 너의 친구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이후 그녀의 삶은 좌절과 낙심에서 벗어나 소망과 기대로 바뀌어졌다.

하나님이 우리 개개인의 형편과 처지를 아실 뿐만 아니라 개별적으로 사랑과 관심을 갖고 계신다는 그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많은 문제가 해결되고 심령이 치유 받는다.

-예언은 우리의 생각, 관점을 바꾼다

Y 자매는 평범한 가정 주부다. 자녀들도 성장하여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잡은 후 각자 인생을 살기에 바쁘고 이제 집에는 자기와 남편만이 남아있다. 오십 대 초반에 접어든 그들은 경제적으로는 별 문제가 없는데 단 한 가지 남편이 아직 예수님을 개인적인 구세주로 영접하지 못했다.

비록 둘은 한 지붕 아래 살지만 공통적인 화제도 드물고 친밀감도 결여되어있었다. 남편의 회심을 위해 수년에 걸쳐 기도했지만 아무런 열매가 없었다. 남편은 남편대로 남편 대접을 제대로 해주지 않는다고 불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Y 자매는 하나님의 음성듣기 세미나에 참석하여 하나님의 음성듣기 훈련을 받은 후 남편에 대해 주님께 물어보았다.

“주님, 주님은 제 남편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직도 주님을 모르고 죄악 가운데 빠져 있습니다. 그런 남편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라.”

“아직 주님을 영접하지 않았는데 주님의 아들이라뇨?”

“이제 곧 내 품으로 돌아올 것이다.”

“속히 좀 해주십시오. 주님, 믿지 않는 남편 때문에 제가 얼마나 힘든 줄 아십니까?”

“나는 내 품을 떠난 너를 오랫동안 기다리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는 줄 아느냐?

그런데 너는 왜 못 기다리느냐? 그를 위해 기도하고 자비를 베풀어라.”

불신자 남편, 술이나 담배에 찌들린 남편을 하나님이 심하게 책망이라도 하실 줄 알았는데 주님은 그런 남편을 보고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하시다니! Y 자매는 너무나 감격하여 남편을 하나님의 자녀처럼 잘 대해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이 자기도 이제 세상 죄악에서 벗어나 예수님을 알 때가 된 것 같다면서 순순히 교회를 따라나섰다. 그 남편이 일 년 후에는 집사까지 되었고 자기보다 더 뜨겁게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다. 하나님은 불신자 남편에 대한 아내의 생각을 바꾸심으로써 남편을 변화시키신 것이다.

예언 사역을 하다 보면 이런 경우를 자주 만난다.

언젠가 어떤 자매의 부탁을 받고 그의 십대 아들을 위해 내적치유를 하기로 했다. 약속된 날에 그 집을 향해 거의 두 시간 가까이 운전해 가는 동안 기도했더니, 하나님은 “아들이 문제가 아니라 어미가 문제다”라는 생각을 주셨다. 혹시 잘못 듣지 않았나 해서 계속 기도해 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그 집에 도착하여 그 아들과 마주 앉아 여러 가지 질문을 하고 상담을 했지만 이 아들은 생각과 판단이 건전하고 믿음에 서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운전 중에 하나님이 주신 생각대로 어머니를 불러 상담을 했더니 그제야 그녀는 수십 년 동안 혼자만 마음속에 간직해 온 남편과의 갈등로 인한 여러 가지 상처를 토로했다. 그래서 아들 대신 어머니를 위해 몇 시간 동안 치유기도를 했다. 하나님은 언제나 정확하시다. 만일 하나님이 주시는 생각을 분변하지 못했다면 헛수고만 했을 것이다.

-예언은 우리를 책망하고 훈계한다

언젠가 상담 중에 어떤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데 습관적으로 어떤 죄를 짓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숨기고 있었는데 하나님이 알게 해주신 것이다. 그래서 “나에게 이런 모습이 보인다. 이것이 당신하고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깜짝 놀라면서 자백했다. “사실은 제가 그 때문에 고민하고 있었는데 하나님이 지적해 주셨군요. 당장 고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무식한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하리라”(고전 14:24-25).

그러나 남을 책망할 때는 조심해야 한다. 영적 권위도 없고 훈련도 받지 않은 사람이 책망, 훈계하는 말을 함부로 하면 많은 문제를 일으키므로 지혜를 구해야 한다.

-예언을 통해 기도 제목을 받는다

언젠가 기도하는 중에 나도 모르게 유창하게 기도하는데 그 내용이 전혀 내가 생각한 것들이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성령이 주장하여 기도하게 하신 것이다. 이런 기도를 ‘성령 안에서 하는 기도’(엡 6:18; 유 20; 롬 8:26 이하 참조)라고 한다.

오늘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중보기도 사역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기도 제목조차 하나님이 주시는 경우가 있다. 이들은 이런 기도를 ‘예언적 기도’(prophetic prayer), 또는 ‘예언적 중보기도’(prophetic intercession)라고 한다. 예언을 해주는 기도가 아니라 기도 제목을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예언적으로 받아서 하는 기도를 말한다.14)

평신도 사역자인 돈 블럭(Don Bluck)은 예언적 기도에 대해 “주님은 금방 일어날 일을 나에게 보여주시면서 그것들을 위해 기도하기를 원하신다. 나는 하나님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은사를 주신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중보기도 장군들’ 모임의 신디 제이콥스(Cindy Jacobs)는 예언적 중보기도란 “성령님이 일반적으로 사전 지식이 별로 없는 어떤 상황이나 환경을 위해 성령님의 강권에 의해 기도하는 것을 말한다. 이때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에 있는 것을 기도한다”고 말했다.

자신을 위한 기도제목을 주신 경우는 예언적 기도이고 남을 위해 중보기도하라고 주신 기도는 예언적 중보기도라고 한다. 하나님은 주의 사자들에게 이런 기도 제목을 더러 주셨다(삼하 24:18-25; 욥 42:7-9; 사 7:10-25 등).

사실 예언적 기도란 말이 생소하여서 그렇지 역사적으로 수많은 기도의 용사들은 ‘성경으로 기도'(praying the Scriptures)하기를 실천해왔다. 성경으로 기도하기란 성경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 약속, 책망, 인도하심 등을 기도하는 것이다. 조지 뮐러는 항상 성경책을 펴놓고 기도했고, 설교왕 찰스 스펄전도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약속을 가지고 하나님께 간구했고, 기도의 용사 E. M. 바운즈는 말씀으로 인한 믿음을 바탕으로 한 기도를 강조했고, 앤드류 머레이는 매일 말씀을 많이 보면서 기도할 것을 강조했다.

결국 예언적 기도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기도이다. 바벨론의 포로가 된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은 본토로의 귀환을 약속하셨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그들에게 이 말씀이 성취되기를 구하라고 말씀하셨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찌라 내가 그들의 인수로 양떼 같이 많아지게 하되”(겔 36:37).

하나님은 어떤 일을 단독으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을 통해서 일하신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몇 날이 못되어 성령 세례를 받고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내 증인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행 1:5, 8). 이 말씀을 받은 그들을 어떻게 행동했는가? 늘 성전에 모여서 하나님을 찬미하고 일심으로 간절히 기도한 결과 오순절에 약속하신 성령이 임했다(눅 24:53. 행 1:5. 8; 2:1-4).

이런 기도야말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기도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기도는 하나님이 이루어주기로 작정하시고 기도하게 하신 것이기 때문에 첫째 반드시 응답이 오고 둘째 비록 오랜 세월에 걸쳐 기도하더라도 항상 새로운 기분과 능력으로 기도할 수 있다.

언젠가 필자는 교회에 필요한 일꾼을 보내달라고 기도했다. 이런 은사 있는 사람, 저런 은사 있는 사람을 보내달라고 기도했다. 그랬더니 하나님은 기도 제목을 바꾸셨다. “은사있는 사람이 오면 행세나 하고 말썽만 부린다. 은사는 모든 사람에게 있기 마련이므로 충성하고 순종하는 사람을 보내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셨다. 너무나 고마운 말씀이었다. 그 다음부터는 당연히 그렇게 기도했다.

언젠가 자고 있는데 새벽 3시경에 갑자기 주님이 깨우셨다. 이런 일은 가끔 있는 일이라서 피곤하기도 하여 약간 짜증 섞인 목소리로 “누구를 위해 기도할까요?”라고 했더니 “N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셨다. 나중에 알고 보았더니 N은 그 당시 마음 아픈 일이 많아서 상당히 힘든 중이었다.

-목회 상담의 통찰력을 제공한다

어떤 교인의 집을 심방하기 전에 새벽기도 때 받은 말씀을 전해주었다. 필자는 교우의 집에 심방 갈 때는 새벽기도 때 충분히 회개하여 마음 판이 깨끗해 있을 때 그 사람들을 위해 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간단하게 적어서 전한다.

전할 때 미리 해주는 말이 있다.

“하나님이 ~님을 위해 주시는 말씀을 적어보았습니다. 좋은 말씀은 ‘아멘’으로 받으시면 되고 혹시 ‘책망’하시는 말씀이 있으면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한 채찍으로 생각하고 받으셔서 고치거나 회개하시면 됩니다. 받으시겠습니까?”라고 질문하여 “예”라고 하면 전해준다.

그날 그 집사에게 주신 말씀은 “너는 성격이 강하고 고약하니 고치도록 하라. 너는 성격이 강하고 고약하니 고치도록 하라 . . .”였다. 나는 혹시나 언짢은 표정을 짓지 않을까 저으기 염려했는데 그 집사는 “맞아요, 저는 그 성격을 고쳐야 해요. 목사님 말씀 잘해주셨어요”라고 대답했다. 만일 이런 전달 과정이 없이 다짜고짜 전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십중팔구 그 집사는 기분 나뻐했거나 시험 들어 교회를 떠났을 것이다.

-예언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확인해 준다

필자도 어떤 중대한 결정 사항에 관한 것일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한 번 들었다고 바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통로를 거쳐서 확인한다. 때로는 같은 말씀을 계속 주시는 것을 통해, 때로는 은사가 있는 사람에게 자세한 정보는 주지 않고 단지 “~에 대해 기도해 보라”고 요청하여 동일한 말씀을 듣는 것을 통해, 때로는 내 영이 증거하는 것을 통해 확인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을 때까지 25년에 걸쳐 무려 7~8회의 말씀을 주셨는데 대부분이 처음에 주신 말씀을 확인, 확대 및 구체화 하는 말씀들이었다. 우리가 어떤 사역을 하거나 어떤 기도 응답은 받았는데 실제로 눈에 보이는 열매가 없으면 좌절하고 낙심할 때가 많다. 특히 오랜 세월에 걸쳐 이루어지는 약속에 대해서는 회의와 낙심, 희망과 기대가 교차되기도 한다. 하나님은 이런 때에 이전에 주신 말씀을 다시 확인하는 말씀을 주셔서 새로운 힘과 용기를 주신다.

또한 확인은 분별과도 관련이 있다. 왜냐하면 내가 받은 말씀이 과연 하나님의 말씀인지를 분별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언은 우리의 마음을 시험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요구하셨다. 이삭이 어떤 아들인가? 아브라함이 100세 때 낳은 아들이 아는가? 요즈음 늦둥이가 유행이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귀엽다고 하는데, 100세에 얻은 (언약의)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니 기가 찰 일이 아닌가?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기 위해 칼을 내려치려는 순간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2).

하나님의 원래 의도는 이삭을 죽이는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이 애지중지하는 이삭마저 하나님을 위해 기꺼이 바칠 수 있는가 하는 마음을 시험하신 것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섬기고 믿음이 있다고 하는데 과연 그렇다면 100세에 얻은 독생자 이삭마저 바칠 만큼, 말로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할 믿음이 있는가를 시험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시험하는 것을 하트 테스트(heart test)라고 한다(대하 32:31 참조). “사람의 일이 제 눈에는 모두 잘돼 보여도 야훼께서는 속 생각을 헤아리신다”(잠 16:2; 한글 킹 제임스).

‘속 생각’이란 마음의 동기(motives)를 말한다. 아브라함은 실제로 이삭을 바칠 결단을 함으로써 하나님의 하트 테스트에 합격하여(약 2:21), 다시 한 번 열국의 아비가 된다는 약속을 재확인 받았다(16-17절).

우리는 자신이 생각하는 만큼 자신을 잘 모른다. 더군다나 우리 마음을 잘 모른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렘 17:9-10).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내 영광, 내 축복을 위해 일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인간의 의로 하나님의 일을 하고 조금 잘되면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보다는 내 영광을 취하기가 쉽다.

하나님이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유다의 히스기야왕에게 죽음을 선포했을 때 히스기야는 낯을 벽으로 하여 여호와께 기도하여 생명을 15년이나 더 연장받는 축복을 얻었다. 하나님은 그 징조로 일영표 위에 나타난 해 그림자가 십도나 물러가는 징조를 주셨다(왕하 20:1-11). 이 사실을 전해 들은 바벨론의 부로닥발라단 왕은 축하하기 위해 사자를 통해 편지와 예물을 보냈다.

하나님이 적국의 왕을 충동질하여 축하 사절을 보내게 하신 것은 히스기야의 마음이 어떤한가를 아시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바벨론 방백들이 히스기야에게 사자를 보내어 그 땅에서 나타난 이적을 물을 때에 하나님이 히스기야를 떠나시고 그 심중에 있는 것을 다 알고자 하사 시험하셨더라”(대하 32:31).

그런데 이때 히스기야는 어떻게 행동했는가? 자신의 생명을 연장시키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는커녕 히스기야는 적국 왕의 사자들에게 왕궁에 쌓여있는 막대한 재물과 무기를 과시함으로써(왕하 20:12-13), 시험에 떨어졌다. 히스기야의 교만에 진노하신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그 모든 재산이 바빌론에 옮김 바되고 그 몸에서 난 자식들은 사로잡혀 환관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다(왕하 20:15-18).

하나님은 수시로 하트 테스트를 통해 우리 마음속에서 순수하지 않은 것, 동기가 불순한 것을 하나하나 드러내신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인간의 마음이란 것이 얼마나 거짓되고 부패한 것인가를 절감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면서도 스스로 속아 자신의 영광을 취한 적이 얼마나 많은가?

자신이나 자신의 사역에 대해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시는가를 예언의 말씀을 통해 한 번 물어보라. 뜻밖의 말씀에 놀라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필자는 성령운동비판자들이 제발 이런 하나님의 음성을 한번이라도 들어보기를 바란다.

-예언은 우리를 인도한다

예언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만남, 새로운 사역, 새로운 사업, 새로운 방향 설정이나 중대한 결정을 내릴 수 있다.

필자가 전임사역자로 부르심을 받은 과정이 그렇다. 출석 교회의 담임목사가 거의 6개월 전에―나에게는 전혀 그런 생각이 없었을 때―나에게 목사로서의 소명이 있다고 말했다. 그가 어떤 식으로 알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초자연적인 성령의 역사로 알았을 것이다. 또한 어느 집사도 기도 중에 나에게 소명이 있다고 아내에게 여러 번 말했고 아내도 금식기도 중에 나에게 소명이 있음을 확인하고 나에게 여러 번 이야기했다.

그때 필자는 변호사가 되기 위해 공부하고 있었는데 아내는 나의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저런 공부가 아니고 신학을 해야 되는데’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필자도 법학을 공부하면서도 오히려 성경말씀 읽기에 더 치중한 것 같다. 말씀을 보면 글자가 살아서 꿈틀거리기도 하고 내 앞으로 튀어나오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다가 필자도 금식기도를 통해 주님이 나를 전임사역자로 부르셨다고 확신한 후 로스쿨을 그만두고 신학교에 입학했다. 물론 이때는 필자가 예언의 말씀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다른 사람들이 받은 것이다.

또 어떤 경우는 성경 말씀을 읽는 중에 감동을 받고 그것을 평생의 사역으로 섬긴 사람도 있다. 5만번 기도 응답을 받은 조지 뮐러는 어느 날 성경을 묵상 하던 중 “그의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시 68:5)라는 말씀이 그의 마음에 너무나 와 닿았다. 이후 그는 영국에 고아원을 열어서 기도 하나만으로 평생에 걸쳐 수천 명의 고아를 먹여 살리는 사역을 감당했다.

이처럼 하나님은 예언의 말씀을 통해서,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또는 환경이나 사람을 통해서 우리를 새로운 길로 인도하신다. 새로운 사역, 새로운 사업, 새로운 만남으로 인도하신다.

-예언은 강력한 영적 정찰 무기이다

예언의 은사, 지식의 말씀의 은사, 영분별의 은사는 보통 같이 열리는데 마귀의 책략을 사전에 알 수 있는 강력한 영적 무기이다. 이런 은사가 없으면 마귀가 무슨 짓을 하는지 잘 모른다. 그러나 이런 은사가 있으면 엘리사가 멀리서도 아람 왕의 대화를 알고, 영안이 열려 마귀의 책략을 알게 되고, 어떤 사람이나 어떤 장소에 어떤 영이 역사하는지를 알게 된다.

그러면 마귀의 발판이 되는 죄를 회개하고 방언이나 전투기도를 통해 영을 좇아낸다. 이것은 영적 전쟁을 하는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하는 방식이다. 반대자들은 이런 초자연적 은사가 없으니까 영적 전쟁의 개념도 모르고 반대만 하는 것이다.

예언의 은사가 임하는 방법

예언의 은사가 어떻게 임하는가?

비판자들이 이것을 잘 모르기 때문에 자기 수준에서 점쟁이가 점치는 것처럼 이해한다.

맞다. 점쟁이든 하나님의 자녀든 초월적인 능력이나 음성이 임하는 방법은 비슷하다.

비록 점쟁이는 아니더라도 사람이라면 누구나 꿈을 꾸거나 갑자기 어떤 생각이나 모습이 떠오르거나 육감이 작동하는 경험이 있을 것이다. 예언의 은사도 이런 식으로 임한다. 성경 이해와 마찬가지로 훈련의 정도, 신앙 성숙도의 정도에 따라 정확도가 달라질 수가 있다.

은사가 임하는 방법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보여주시거나 들려주시는 경우도 있지만 은사가 있거나 기름부음이 강하게 임하면 대화식도 가능하다.

-환상이나 꿈을 통해

이렇게 오는 경우 해석이나 적용에 각별한 조심을 해야 한다.

-내적 음성

세미한 음성 또는 불쑥 들어오는 생각이나 단어를 통해. 이런 경우가 대부분이다. 내적 음성 듣는 것이 훈련되면 대화도 가능해 진다. 엘리야가 들은 음성이다.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왕상 19:12).

이런 음성은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듣는데 귀로 듣는 것 만큼 또렷하다.

-계속 이어지는 말을 통해

내적 음성이나 세미한 음성을 통해 말씀을 주실 경우 어떤 핵심적인 단어나 문장을 주시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여기에 그치지 않고 말을 계속하거나 기록하면 예언의 말이 이어지는 경우가 있다.

예언하다의 히브리어는 나바(예언하다), 나비(선지자)인데 이 말은 “거품이 일듯 부글부글하다”(bubble up), “입에 거품을 내며 지껄이다”(boil forth)는 뜻이 있다.13) 필자가 대학을 다닐 때 어느 교수는 강의에 집중하면 입에 거품을 내며 열변을 토했다. 마찬가지로 성령에 감동되어 예언하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거품을 내며 지껄이는 수도 있다. 구약 당시 선지자들이 아마 이런 모습으로 예언을 한 것같다.

물론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더 신령한 것은 아니다. 한두 마디나 문장을 전해주더라도 핵심을 찌르는 경우가 있고 수십 분을 말해도 변죽만 올리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예언 사역자의 기름부음의 정도, 신학적이고 신앙적인 성숙의 정도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다.

그런데 아무래도 여자들이 남자보다 말을 잘하니까 오랫 동안 전하는 경향이 있다.

어떤 자매는 한 시간 이상 전하는 경우도 있었다. 거두절미하고 알맹이를 보면 한 두 가지인데 이런 양념, 저런 치장을 하고, 같은 말을 다른 말로 표현하고, 내용을 반복하다보니 한 시간도 금방 지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오래하면 듣는 사람의 집중력이 떨어지므로 반드시 좋은 방법이라고는 할 수 없다.

-주시는 말씀의 기록이나 녹음을 통해

오늘날 예언 사역자의 책임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남에게 예언해 줄 때 반드시 녹음할 것을 권장한다. 예언의 말씀은 어느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이루어질 수도 있고, 또 바쁘다보면 잊어버리기 쉽고,나중에 예언의 신빙성이나 책임 문제도 따르기 때문이다.

또한 기록해 놓거나 녹음해 놓고 계속 읽거나 들으면서 그 예언이 이루어지게 해달라면 기도하면 상황이나 환경에 매이지 않고 믿음이 늘 새로워지는 것을 많이 체험한다.

어떤 경우 예언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예언이 틀릴 수도 있고 받은 사람이 순종하지 않아서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예언을 듣는 자는 중요한 내용이라면 반드시 여러 사람을 통해 확인을 받을 것이며 그것이 하나님의 예언임이 확실하면 꼭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예수님이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말씀하셨듯이 예언의 말씀에 믿음을 화합하여 끝까지 인내하는 자만이 풍성한 결실을 맺을 수가 있다(마 13:18-23 참조). 이미 밝힌 바와 같이 개인 예언은 대부분이 조건적인 것이므로, 출애굽한 이스라엘 제 일 세대가 비록 가나안 땅에 들어간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지만 불평과 불순종으로 인해 그 열매를 누리지 못했듯이, 예언의 말씀을 멸시하여 방치하거나, 잘 간직하다가 환란이 올 때 쉽게 넘어지거나, 세상 재미에 빠져 소홀히 하면 예언의 말씀을 무효화시킬 수 있다.

예언의 은사와 다른 은사들

“8.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9.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들) 고치는 은사(들)를, 10.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들을)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고전 12:8-10).

-예언의 은사와 지혜의 은사, 지식의 은사

예언은 과거의 일은 물론 미래의 일까지 포함하는 포괄적인 내용을 전달하지만 ‘지혜의 말씀’은 어렵고 힘든 상황에 봉착했을 때 순간적인 지혜-바리새인의 올무를 지혜롭게 잘 피하신 예수님의 경우-를 말한다.

‘지식의 말씀’은 주로 과거의 일에 대한 ‘정보(information)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인에게 “지금 남자는 네 남편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여 그 여인의 회개를 촉구하시는 지식의 말씀을 전하셨지만(요 4:18), 아나니아는 사울 청년이 앞으로 어떤 일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받았다(행 9:15-16). 물론 사울이 직가에 있으며 지금 기도 중이라고 알려주신 것은 지식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행 9:11).

-예언의 은사와 방언 통역의 은사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고전 14:5).

통역된 방언은 예언의 효과를 가진다. 언젠가 어떤 자매가 방언하는 것을 통역한 적이 있는데 그 자매는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방언을 통해 계속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 해석을 들은 자매는 큰 위로를 받았다.

차이점은 무엇인가?

물론 한 성령의 역사이지만 방언은 사람이 하나님께 하는 말이고(고전 14:2), 예언은 하나님이 주시는 말이란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

지식의 말씀의 은사와 지혜의 말씀의 은사는 거의 동시에 작동하는 경우가 많다. 지식의 말씀의 은사가 ‘무엇'(what)을 말해준다면, 지혜의 말씀의 은사는 ‘어떻게'(how)를 말해 준다. 즉 전자는 내용을 후자는 전달 방법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나니아는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바울이 어디에 있으며 그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할 것인가까지 알게 되었다(행 9:11-19). 선지자 나단도 다윗의 죄악을 고할 때 죄악의 내용은 물론 전하는 방법까지 알게 되었다(삼하 12:2-14). 요셉은 바로의 꿈을 해석했을 뿐만 아니라 대처할 방법까지 제시해 주었다(창 41:25-36).

언젠가 어떤 자매를 상담할 때 그 자매가 상당히 ‘인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자매에게 확인하기 위해 물었더니 대답을 하지 않았다. 혹시 내가 잘못 들었나 해서 반복해 물어보았더니 이 자매는 그제야 마지못해 “그럴지도 모르죠”라고 시인했는데 나는 나중에 “아차”했다.

비록 지식의 말씀은 맞았지만 지혜롭게 전하지 못한 것이다. 필자가 자신의 아픈 부분을 드러내니 시인도 못하고 그렇다고 부인도 하지 못해 고심했던 것이다. 이후 필자는 어떤 사람에 대해 부정적인 단어나 생각이 떠오르면, 먼저 이 말을 지금 당장 전해야 하는가(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다른 방법으로 전할 수 있는가(보다 완곡한 표현이나 긍정적인 표현으로), 아니면 본인 자신이 직접 알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이것이 바로 지혜의 말씀을 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본인이 직접 알게 해달라고 기도한 경우 놀랍게도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본인 스스로 자신의 결점이나 잘못을 고백하는 경우가 있다.

-지혜의 말씀의 은사와 예언의 은사

예언의 은사를 통해 상담자는 내담자의 과거는 물론 미래의 일까지 알 수 있다. 이때 특히, 지식의 말씀을 전할 때와 마찬가지로, 예언의 말씀을 전할 때 지혜를 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즉 예언의 말씀을 언제, 어떤 방식으로 전할 것인가에 대한 지혜를 구해야 한다.

특히 초보자나 영적 권위가 없는 평신도는 책망하거나 미래의 중대한 결단이나 방향 설정에 대한 예언은 삼가해야 한다. 말썽 많았던 미국 ‘캔사스시 예언자들’이 주로 이 분야에서 실수를 많이 한 것 같다.

-지식의 말씀의 은사, 예언의 은사, 영 분별의 은사

과거나 미래에 대한 정보나 예언은 틀릴 가능성이 있으므로 분변해야 하고 또한 원천이 어떤 영인가를 분변해야 한다(고전 14:29; 살전 21: 요일 4:1).

그러나 실제로 사역할 때는, 육해공군이 합동작전을 벌이듯, 지식의 말씀의 은사를 통해 문제의 근원을 발견하고, 영 분별의 은사를 통해 영을 분별하고, 지혜의 말씀의 은사를 통해 말씀을 지혜롭게 전달하고, 치유사역의 경우, 방언을 하면서 성령의 임재를 불일듯하고, 믿음의 은사를 확신하고, 능력 행하는 은사나 신유의 은사를 사용하여 치유함으로써 여러 가지 은사가 한꺼번에 작동한다고 할 수 있다.

예언의 은사는 설교나 가르치는 은사가 아니다

칼뱅 이래로 많은 기적중지론적 개혁주의자, 보수주의자들은 예언의 은사는 설교하는 은사, 가르치는 은사라고 이해한다. 과연 이런 해석이 옳은 것일까? 성경에 보면 성경 자체가 하나님의 예언을 기록한 책이며(벧후 1:20, 21; 3:2; 계 1:3), 성경 기록이 끝났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직접적인 계시로서의 예언을 사라졌다는 가정 아래 이런 해석을 한 것 같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된다.

첫째 만일 이것이 바른 해석이라면 고전 14:1의 적용에 문제가 생긴다.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전 14:1).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특별히 예언하려고 하라”는 “특별히 설교하고 말씀을 가르치려고 하라”는 의미가 된다. 이 구절은 전체적인 신자를 향한 명령인데, 만일 이들대로의 주장이라면 지금 현재 절대다수의 신자들이 설교하고 가르치라는 명령에 불순종하고 있는 결과가 된다. 하기야 직통 계시적인 예언을 구하지도 않으니 순종하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지만.

둘째 성경은 예언하다와 설교하다(전파하다) 또는 가르치다를 분명하게 구분한다.

은사의 종류를 말하는 고린도전서 12장에서도 선지자와 교사를 구분한다.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고전 12:29).

마지막으로 만일 이들의 주장이 옳다면 고전 14:29-30 적용에 문제가 생긴다.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이들은 분변할 것이요 만일 곁에 앉은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거든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찌니라.”

이들의 주장대로라면 설교하거나 가르치는 자는 한 번에 둘이나 셋이 해야 하고 다른 이들은 그들이 설교나 가르침을 제대로 했는지를 분변해야 한다. 또한 곁에 앉은 다른 이가 설교하고 가르칠 일이 있으면 먼저 하던 사람은 금방 중지해야 한다. 과연 그런가? 결론적으로 예언의 은사는 설교나 가르침의 은사가 아니라는 말이다.

예언의 분별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고전 14:29).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19-22).

사람은 영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도 듣지만 마귀의 음성이나 자신의 음성도 듣는다. 자신의 음성을 듣는다는 말은 본인이 오래 동안 어떤 생각이나 소원을 품으면 꿈이나 환상,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 등으로 들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현대의 예언은 성경 말씀에 비추어 제대로 분별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많은 사람들이 분별볍과 사용법을 제대로 배우지 않으니까 ‘캔사스시 예언자들’처럼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다. 자동차가 위험하니까 운전면허와 교통규칙이 있듯 예언의 은사도 유익한 만큼 분별법과 사용법을 잘 배워야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여기서는 지면 관계상 기초적인 분별법만 제시해 본다.

-예언은 하나님의 속성(성품)에 위배되어서는 안 된다.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

-예언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이루어졌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님이 주신 것은 아니므로(신 13:1-3), 다른 것을 종합해서 분별해야 한다.

-예언은 성경 내용에 위배되어서는 안 된다.

-예언을 통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람이 증진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주신 예언은 뒷 맛이 평안하고 기쁨이 온다. 비록 책망하는 것이라도 거룩한 통회는 있지만 염려, 불안은 없다.

-오늘날의 직접 듣는 하나님의 음성, 꿈, 환상을 통한 예언은 틀릴 가능성이 있으므로 분별되어야 한다. 분별하기 위해서는 최소 2~3명이 그 주제에 대해 분별해야 한다.

-특히 결혼, 출산, 시험 합격, 사업 성공이나 휴거 날짜(이것은 비성경적이다) 및 전쟁 예언 등은 잘 맞지 않으므로 이런 예언을 하는 사람은 각별히 유의하거나 자제할 필요가 있고, 예언을 받는 당사자도 지나친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 좋다.

하나님이 주시는 예언이 왜 틀리는가?

비판자들은 예언이 틀리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성경 해석은 왜 교단이나 사람마다 틀리는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장 9절은 ‘성경의 어느 한 구절의 참되고 완전한 의미는 한 가지’라고 말하는데, 왜 교단이나 사람에 따라 해석이 천차만별인가? 동일한 성경을 해석하면서 왜 어떤 사람은 기적이 계속된다고 주장하고 다른 사람은 기적이 중지되었다고 해석하는가? 이런 경우 성경이 틀린 것인가, 해석이 틀린 것인가? 당연히 후자이다.

예언도 마찬가지다. 예언은 여러 가지 이유로 틀린다. 예언을 잘못 받을 수도 있고 해석을 잘못할 수도 있다.

첫째, 예언자가 예언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거나 적용하기 때문이다.

성경 해석도 신학적 소양을 제대로 갖춘 신학자나 목회자가 하는 것과 신앙의 초보자가 하는 것에는 차이가 많다. 또한 신학자나 목회자라고 해서 다 맞는 것은 아니다.

예언도 마찬가지로 해석을 잘못하는 경우가 많다.

어떤 예언자가 자기가 출석하는 교회의 한 장로에 대한 환상을 보았다.

환상 중에 그 장로가 보이고 옆에 금고 문이 열려 있고 돈 다발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예언자는 즉시 그 장로는 교회의 재정 장로이므로 교회의 공금을 유용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 장로의 사무실에 도둑이 들어와서 금고문을 열고 돈을 훔쳐간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므로 예언을 받는 자는 해석에 각별히 유의해야 한다.

이런 일은 오늘날의 예언은 물론 성경의 예언에서도 생기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를 통해 큰 민족을 이루겠다고 약속하셨다(창 12:2). 큰 민족을 이루려면 먼저 아들이 있어야 했다. 그런데 10년이 지나도 아들이 생기지 않고 아브라함과 아내 사래는 나이가 들어 출산조차 불가능해졌다.

당시에 아들이나 상속자를 가지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자연적 출산, 입양 및 첩이나 대리모를 통한 출산이다. 그래서 자연적 출산이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하고 아브라함은 집의 청지기인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 상속자인가 하고 하나님께 문의했더니 하나님은 ‘그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라고 하셨다(창 15:2-4).

약속을 받은 지10여 년이 지나도 아내 사래가 출산하지 못하자 아브라함은 사래의 몸 종인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았지만 그는 아브라함의 상속자가 아니었다(창 16).

아브라함이 약속을 받은 지 24년이 지났고 아들은 이스마엘 뿐이었으므로 아브라함은 그가 상속자라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은 그제야 ‘사래를 통해 날 자가 상속자’라고 하시면서 일년 후에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창 17:19).

아브라함이 몇 가지 실수를 한 것은 ‘하나님이 네 몸에서 날 자’라고 하셨지 ‘너와 사라를 통해 날 자’라고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즈음의 예언도 비슷하다. 두루뭉실하게 주시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해석이나 적용이 틀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예언자는 예언을 제대로 듣고 보는 것은 물론 제대로 ‘해석’하고 ‘적용’하는 지혜도 구해야 한다. 동시에 다른 사람과 함께 분별하고 확인하는 과정이 꼭 필요하다.

그런데 한두 번 맞았다고 해서 자기의 예언을 지나치게 과신하여 함부로 선포하고 행동하다가 틀리는 경우가 많으므로 유의해야 한다.

둘째, 예언은 신학 프레임의 영향을 받는다

특히 ‘휴거날짜 예언’이나 ‘전쟁 예언’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거의 절대 다수가 세대주의 종말론자들이다. 예언은 하나님이 주시지만 모든 것을 분명하게 주시기 않기 때문에 예언을 받거나 보는 사람이 자기의 신학 프레임으로 듣고 해석하고 적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또한, 요즈음에는 숫자로 예언하거나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들이 많이 등장하여 예언 사역의 물을 흐리고 있다. 숫자로 성경을 해석하거나 예언하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유대인 신비주의인 카발리즘의 영향으로, 성경이 말하는 숫자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여 성경을 해석하거나 예언하고 있다.

휴거날짜 예측은 성경의 안식년(7년)과 희년(50년)에 유대인 달력으로 나팔절(휴거일)과 초막절(지상 재림일)을 계산하여 예측하는 것인데, 여태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예측했지만 당연히 한번도 맞은 적이 없다. 그런데도 아직도 이런 해석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성경 해석의 연장 선상에서 예언하는 사람들도 많다.

예를 들어, 2017년에 대해 예언할 때, 17=10+7인데 10과 7은 완전수이므로 2017년은 ‘돌파의 해’, ‘특별한 은혜의 해’라고 예언한 사람들이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2017년은 이스라엘이 독립한 1948년부터 70년이 되는 해,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을 탈환한 지 50년이 되는 해이므로 이스라엘에 ‘전쟁’이나 ‘특별한 사건’이 생긴다면서 모여서 기도하자고 촉구하는 사람도 있다.

셋째, 소속 단체가 같으면 같은 예언을 하기 쉽다.

1990년대 초에 휴거 소동으로 한국을 시끄럽게 했던 다미회의 휴거날짜 예언 대표적이다. 수많은 학생이나 어른들이 동일한 예언을 하여 정통 교회의 목회자나 성도들도 많이 동조했지만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어떤 기름부음이 한 단체를 지배하는 대표적 사례이므로 각별히 유의해야 한다.

더군다나 휴거날짜(예수님의 공중재림 날짜)는 성경에 분명히 ‘아무도 모르고 하나님만 아신다’(마 24:36)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성경의 분명한 내용과 위배되는 예언은 당연히 틀린 것인데 사람들은 혹시나 하고 잘못 기대하고 믿기 때문에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메시아닉 쥬 운동(예수 믿는 유대인들의 운동)과 신종 유대주의인 ‘히브리 뿌리운동’에 심취된 자들 중에서, 성경은 ‘그 해를 모른다’고 했지만, ‘그 달’과 ‘그 날’은 히브리 달력의 계산을 통해 알 수 있다고 억지를 부리는 사람들이 있으므로 각별히 유의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교회 시대의 예언은 성령의 조명 수준이다.

100% 무오류한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이지만 성경의 해석이나 오늘날의 예언은 ‘성령의 조명’ 수준이므로(고전 2:13-14) 틀릴 가능성이 많다.

하나님이 주시는 예언은 틀리지 않지만 해석이나 적용 과정에서 틀리는 경우가 있고, 숫자나 절기를 통한 예언처럼 처음부터 틀리는 경우가 있고, 예언자의 신학 프레임이나 개인적 취향 및 소원이나 영적 수준에 따라 틀리게 듣거나 보는 경우도 있다.

필자도 초창기에 너무나 분명하게 들었는데 틀린 경우가 있어서, 내가 과연 예언을 믿어야 하고 예언 사역을 해야 하나라는 고민에 빠진 적이 있다. 왜 그런 경우가 생기느냐고 하나님께 물었더니 하나님은 “네 마음판이 깨끗하면 내(하나님) 음성을 듣고 네 마음판이 더러우면 네 음성을 듣는다”고 하셨다.

그래서 중요한 음성을 들을 때는, 나름대로 철저하게 치유하고 회개한 후에 듣거나 보려고 노력한다. 그래도 틀릴 가능성이 있으므로 몇 명의 동역자에게 반드시 내용을 ‘확인’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100% 다 맞는 것도 아니다.

예언이 좀 틀린다고 해서 무익한가?

예언의 기능은 위로하고 안위하고, 책망하고 훈계하고, 중요한 결정이나 미래에 될 일에 대한 지식을 주는 것이다. 이중에서 위로하고 안위하고, 책망하고 훈계하는 것은 즉석에서 본인을 통해 ‘확인’이 가능하지만, 중요한 결정이나 미래에 될 일에 대한 예언은 시간이 지나봐야 알 수 있기 때문에 상당한 위험 부담이 있고 틀릴 가능성이 농후하다.

미국의 ‘캔서스 예언자들’의 경우를 보더라도 맞은 확률이 30%도 채 안 된다고 한다. 그러면 비판자들은 ‘그런 예언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반문한다. 비판자들은 모든 예언이 완벽하게 맞아야 한다고 가정하기 때문에 이런 비판을 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에서 100% 완벽한 것이 어디 있나?

문자로 분명하게 기록된 성경 말씀에 대한 해석도 천차만별이라 수많은 교단이 있고, 한 교단 내에서도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로 해석하고, 그중에서 틀린 것-대표적인 것이 기적중지론이다- 이 많은데 왜 그런 것에 대해서는 별 비판이 없는가?

어떤 유명한 의사가 임종 전에 제자들에게 고백했다.

“평생 동안 환자를 보면서 25%(15%라는 설도 있다) 정도의 오진을 했었다”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이 깜짝 놀랐고 나중에 소문을 들은 일반인들도 깜짝 놀랐다. 제자들은 자기들의 오진율은 스승의 두 배 정도 되는데 스승은 그것 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랐고, 일반인들은 당대 최고 의사의 오진율이 그 정도로 높다는 사실에 놀랐다. 일반적으로 병원에서는 중병일수록 오진율이 높다고 한다. 예언도 마찬가지다. 위로와 책망의 예언은 잘 맞지만 중요한 결정이나 미래에 대한 예언은 잘 맞지 않으므로 각별한 분별이 필요하다.

2008년 미국의 리만 브라더스의 파산으로 촉발된 금융위기는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영국 최고의 경제학자들에게 질문했다.

“왜, 아무도 위기를 예견하지 못했나?”

“위기를 예견했습니다만 언제 얼마나 심각하게 나타날지 몰랐습니다.”

‘경기 예측은 유명한 경제학자들 보다 동네 이발사가 더 잘한다’는 말이 있다. 그렇다고 경제학자들의 경기 예측이 필요 없다고 하는가?

미래의 불확실성으로 인해 사람들은 어떤 방법으로든 미래의 일을 미리 알려고 노력한다.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은 당연히 철학관이나 점쟁이를 찾아간다. 기독교 신자들 중에서도 30%가 정기적으로 점쟁이를 찾는다고 한다.

안정된 직장에서 봉급을 받는 사람들-신학자들도 포함-은 상대적으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약하다. 그러나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한 순간 한 순간이 중요한 결정의 순간이므로 혼자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에는 여간 불안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예언 사역자들을 많이 찾는다.

가정 주부도 마찬가지다.

자녀의 교육과 진로, 결혼과 출산, 남편의 사업이나 직장 등의 문제를 관장하고 돌보기 때문에 한 순간 한 순간이 중요한 결정의 순간이라 혼자 결정하기가 힘들어서, 목회자의 조언을 구하지만 상담자가 예언의 은사가 없는 경우 보편적이고 상투적인 조언이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오히려 평신도 예언 사역자를 찾는 경우가 많다.

사업가든 가정주부든 많은 사람이 미래의 불확실성이나 호기심 때문에 예언 사역자를 찾는다. 하나님이 예언의 은사를 교회에 주셨기 때문에 그것은 지극히 성경적이다. 그런 걸 부인하는 사람이 오히려 비경적이다. 성경에서 은사 중에 구체적을 구하라고 명령한 것은 신기하게도 예언의 은사이다.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전 14:1).

다른 신령한 것들-기적행하는 은사들-은 ‘간절히 사모하라’고 했지만 예언에 대해서는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권면한다. 그런데 ‘왜 예언을 하려고 노력하지 않는가?’ 노력하고 구해 보라. 생각 보다 쉽게 받아진다. 요즈음은 어린 아이는 물론 조금만 사모하고 훈련하면 누구나 금방 쉽게 받는다.

그러나 중요한 결정이나 미래의 방향 설정에 관한 예언은 틀릴 가능성이 있으므로, 예언 사역자는 지나친 약속을 자제하고 내담자는 지나친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이런 안전 장치를 갖고 예언을 대하면, 의사의 오진율이 높아서 실패한 치유도 있지만 여전히 의사의 치유가 필요하고 경제학자의 경기 예측이 틀리지만 여전히 사업가나 투자자에게 그들의 예측이 중요하듯, 예언도 여러 가지로 유익한 점이 많다.

의사도 중요한 수술을 할 때는 실수의 가능성에 대한 면책에 대해 환자의 동의서를 받듯, 필자도 중요한 예언을 할 때는 반드시 내담자에게 위험성을 고지하면서 주요한 결정은 결국 본인의 인생 경험과 지혜를 통해 할 것을 권면한다. 예언 사역자의 예언은 자문에 불과한 것이지 강제 사항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나고 보면, 틀린 경우도 있지만 맞은 경우도 있고, 필자 자신의 인생에서도 틀린 경우도 있지만 맞은 경우가 더 많고 여러 면에서 예언의 은사가 유익하여 이런 은사를 주신 하나님께 너무나 감사한다.

결론적으로, 성경의 권위에 종속되는 사적 계시인 예언의 은사는 오늘날에도 지속된다. 예언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이자 강력한 영적 무기이다. 잘 사용하면 하나님 나라 확장에 크게 기여하지만 잘못 사용하면 혼란을 가중시키므로 조심해서 사용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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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Endnotes)

1. Wayne Grudem, The Gift of Prophecy In the New Testament & Today (Crossway Books, 1988: rev. 2000).

2. John F. MacArthur, Jr., Charismatic Chaos (Zondervan Publishing, 1992);『은사 I & II』.

3. Richard Gaffin, Jr, Perspective on Pentecost . (Presbyterian & Reformed Publishing, 1979);『오순절의 전망』.

4. Jack Deere, Surprised by the Voice of God ; 『놀라운 하나님의 음성』.

5. 이신론(deism)이란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후 운행은 자연법칙에 맡겼다면서 창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지 않는 주장이다. 그러므로 성경 이신론자란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모든 말씀을 하신 후 더 이상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시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말한다―필자 주.

6. Jack Deere, Surprised by the Voice of God , 251-69.

7. Vern Poythress, Miracles Class 강의 (Philadelphia, PA: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 1990, 1991).

8. D. A. Carson, Exegetical Fallacies (Grand Rapids, MI: Baker Book House, 1984), 46.

9. Grudem, The Gift of Prophecy , 17

10. David Pytches, Spiritual Gifts in the Local Church (Bethany House, 1985), 79.

11. C. Peter Wagner, Your Spiritual Gifts Can Help Your Church Grow (Regal Books, 1979), 228.

12. Robert Clinton, Spiritual Gifts (Horizon House), 52.

13. R. Laird Harris, Gleason L Archer, Jr., Bruce K. Waltke, Theological Wordbook of the Old Testament (Moody Press, 1980, 92), 544

14. C. Peter Wagner, Prayer Shield (Regal Books, 1992);『방패기도』, 168-169 ; Cindy Jacobs, Possessing the Gates of the Enemy (Chosen Books, 1991, 1994);『대적의 문을 취하라』, 145-55를 보라. 또한 책 전체가 이런 주제를 다룬 것으로는 Jim W. Goll, Kneeling on the Promises (Chosen Books, 1999) 및 Barbara Wentroble, Prophetic Intercession (Renew, 1999)을 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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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은사(15) 예언의 은사란 무엇이며 7가지 장점은 무엇인가?(고전14:1~5)_2020-07-07(화)

아침묵상입니다.

제목: 성령의 은사(15) 예언의 은사란 무엇이며 7가지 장점은 무엇인가?(고전14:1~5)_2020-07-07(화)

https://youtu.be/-Y80OsnL_Qg [혹은 https://tv.naver.com/v/14654477 ]

1. 성령의 은사 중에서 “예언의 은사”란 어떤 은사인가요?

성령의 9가지 특별은사들(고전12:8~10) 중에서 “예언의 은사”는 초자연적인 신령하고도 영적인 특별 은사로서, 성령의 감동하심과 역사로 인해 일반적으로는 결코 알 수 없는 현재의 상태나 미래의 일을 미리 내다보고 미리 말할 수 있는 은사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예언의 은사는 미리 말하는 은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크게 볼 때 성령의 은사에는 크게 3종류(말의 은사와 행동의 은사와 앎의 은사)가 있는데, 그중에서 예언의 은사는 방언과 방언통역의 은사와 더불어서 말의 은사에 속합니다.

2. 예언은 주로 어떤 내용을 말하는 은사인가요?

예언의 은사는 주로 내용에 따라 2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하나는 장차 오실 메시야에 관해 미리 말하는 방면이 있고, 또 하나는 하나님께서 내리실 진노와 멸망을 미리 내다보고 회개를 촉구하는 방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상에 따라서 예언은, 하나는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말하는 예언이 있고, 또 하나는 개인에 관하여 말하는 예언이 있습니다. 먼저, 내용에 따라 예언을 분류해보면, 대부분은 회개를 촉구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을 촉구하는 예언이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예언 중에 군데군데마다, 아직 오시지는 않으셨지만 장차 오실 메시야가 누구시며, 어떤 사역을 하실 것인지를 예언하는 내용들이 있습니다. 사실 예수께서는 구약시대에 350가지 이상의 예언을 따라 그대로 오셔서 그 모든 것들을 다 성취하셨기에 우리도 그분을 메시야로 믿고 따르고 있습니다. 한편 메시야에 관한 예언은 메시야의 혈통, 잉태, 출생, 공생애, 죽음, 부활, 승천, 재림에 관한 예언 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언을 대상에 따라 분류해 보면, 국가와 민족을 위한 예언이 대부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인 예언도 종종 있으니, 나단선지자가 다윗을 찾아가 개인적으로 그를 책망한 것은 대표적인 개인 예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예언은 오늘날에도 존재하고 있을까요?

어떤 사람은 예언은 성경의 기록이 종료됨과 동시에 사라졌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물론 그들은 그때 예언의 은사만 사라진 것이 아니라 방언, 방언통역, 병고침(치유) 등의 성령의 9가지 특별은사가 다 사라졌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성경을 기록할 때까지만 일하시고 그 후로는 일을 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이 성경에 위배됩니다. 성령께서는 2천년전이나 지금이 똑같이 하실 말씀을 갖고 있으며 지금도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성경의 기록은 오실 메시야에 관한 예언, 그리고 족장들이나 이스라엘 민족에 관한 예언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신약성경은 오신 메시야와 그것을 믿고 따랐던 자들의 신앙고백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선지자들의 예언이 기록으로 성경에 남겨져 있다 할지라도, 성령께서는 지금도 여전히 개인과 국가민족에 관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예언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메시야에 관한 예언만 더이상 하지 않을 뿐 지금도 계속해서 활동하고 있는 은사입니다. 한편, 누군가가 오신 메시야가 누구시며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설교하고 있고, 회개를 촉구하고 있다면 그는 지금도 선지자적인 사역을 하고 있는 목회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4. 오늘날에도 예언의 은사가 존재한다는 근거는 무엇인가요?

오늘날에도 여전이 예언의 은사가 존재한다는 것은 성경의 기록을 통해서 확인해 볼 수 있으며, 현재 그 은사를 가지고 사역하고 있는 분들의 말을 통해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후자는 지금도 가짜가 많고 거짓도 섞여 많아서 항상 분별이 필요하고 조심해야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전자는 이미 기록된 말씀 안에 들어있는 내용들이기에, 예언의 존재유무를 검증하는 용도로도 얼마든지 쓰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에는 오순절 성령강림이후에도 계속해서 예언의 은사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증거하고 있을까요? 첫째, 오순절 성령강림 후 베드로의 설교를 살펴보면, 말세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을 부어줄 것인데 그러면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행2:17). 둘째, 예수께서도 주님의 재림시까지 예언은 계속될 것을 말씀하셨는데, 특히 말세가 될 수록 거짓예언들이 많이 있으니, 거짓선지자들의 미혹에 더욱 주의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마7:22,24:24). 셋째, 사도행전의 기록을 살펴보면, 여전히 선지자들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예루살렘교회의 일곱집사의 하나였던 전도자 빌립에게 있는 딸들, 네 명은 처녀로서 예언하는 자였습니다(행21:8~9). 그리고 유대에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있어서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그가 붙잡아 이방인에게 넘길 자가 있다는 것을 미리 내다보았습니다. 그는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의 손과 발을 묶은 후,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 띠 임자를 찾고 있다고 미리 말해주었기 때문입니다. 넷째, 특히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에 교회 가운데 실재하고 있는 예언의 은사에 대해서 보다 더 많은 정보를 우리에게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다섯째, 사도요한도 A.D.95~96년경 예언의 영을 받아 장차 되어질 일을 미리 내다보고 예언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5. 예언의 은사의 7가지 장점은 무엇인가요?

방언의 은사가 개인을 건강하게 건축해주는 장점을 가지고 있는 것과는 달리 예언의 은사는 교회를 건강하게 건축하게 해 준다고 바울은 말했습니다(고전14:2~4). 그러므로 예언의 은사가 교회에서 제대로 실행되기만 한다면, 예언의 은사는 적어도 7가지의 장점이 있습니다. 첫째, 교회를 건강하게 건축합니다(고전14:4). 둘째, 사람들을 예언으로 권면할 수 있습니다(4절). 셋째, 사람을 위로합니다. 왜냐하면 현재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으나 하나님께서는 장차 그를 귀하게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미리 내다보고 예언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넷째, 사람들의 죄를 책망을 합니다(24절). 다섯째, 여러 사람들에게 판단을 받게 합니다. 예언은 한 분이신 성령께서 행하시는 일이기에, 여러 사람들을 통해서도 함께 검증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여섯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됩니다. 죄를 정확히 지적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일곱째, 그것으로 영적인 것들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31절,19절). 고로 제대로 된 예언의 은사라고 한다면, 교회는 매우 큰 유익을 보게 될 것입니다.

2020년 07월 07일(화)

정병진목사

예언의 은사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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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2:6/ 그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에 따라 우리가 받은 선물이 각각 다릅니다. 우리는 이것을 분수에 맞게 사용해야 합니다. 만일 그 선물이 예언이라면 믿음의 정도에 맞게 하십시오.

“예언의 은사는 믿음의 분수대로(정도에 맞게)” 해야 한다고 바울사도는 권면합니다. 예언은 교회 안에서 ‘사도’의 은사 다음의 위치를 가진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교회 안에 이런 지체들을 세우셨는데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예언자이며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기적을 행하는 사람, 다음은 병 고치는 사람, 남을 돕는 사람, 다스리는 사람, 방언을 하는 사람들입니다.”(고린도전서 12:28)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은사와 직분은 깊은 관련성이 있으며, 하나님께서 직분을 주실 때 그 직분을 감당할 은사도 함께 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예언’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예언은 미래를 예언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아래 참조).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의 지식으로 알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의 신비와 비밀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위로, 명령, 교훈, 요구, 권면, 판단 등을 포함합니다(고전 14:3, 31). 또 하나님의 말씀에는 하나님의 계획, 경륜, 섭리가 예언의 형태로 계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의 계획을 성경이라는 기록된 로고스를 통해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중 일부는 하나님의 때가 될 때까지 비밀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때가차면'(갈라디아서 4:4) 하나님은 그것을 밝히 드러나실 것입니다. 구약의 많은 비밀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통해 드러나고 완성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친히 세우신 사도들과 예언의 은사(직분)을 맡은 자들에게 먼저 가르쳐 주시고 우리에게도 신약성경을 통해 전달해 주셨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에게 아낌없이 전하라는 사명을 받은 교회의 일꾼입니다. 이 말씀은 오랜 세대 동안 숨겨졌던 비밀인데 지금 하나님의 성도들에게 알려졌습니다”(골로새서 1:25-26).

그러나 여전히 비밀에 속한 성경의 구절들이 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은 때가차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억지로 풀려는 자들과 그것을 풀었다고 주장하는 단체나 개인은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 스스로 멸망을 불러들이고 다른 사람들도 멸망으로 끌어들이려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대언하는 자는 자신의 믿음 분수대로 해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그것을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풀어서 설명했습니다: “우리에게는 보다 확실한 예언의 말씀이 있습니다. 날이 새어 샛별이 여러분의 마음에 떠오를 때까지 여러분은 어두움을 밝혀 주는 등불과 같은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성경의 예언을 자기 멋대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예언은 결코 사람의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받아 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베드로후서 1:19-21)”.

그러면서 베드로는 억지로 풀려는 자들에 대한 한 가지 예를 들어줍니다: “바울의 모든 편지에서도 그는 이와 같은 말을 했는데 그 가운데는 알기 어려운 말이 더러 있습니다. 무식하고 믿음이 약한 사람들이 다른 성경처럼 그것도 억지로 해석하여 스스로 멸망을 불러들이고 있습니다(베드로후서 3:16)”.

“믿음의 분수대로”에서 “분수대로”라는 단어는 “걸맞게” 혹은 “부합되게”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곧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유다서 1:3)입니다. 그러므로 거기에 부합되는 예언을 한다는 것은 자기 개인의 사견을 섞지 않고 교회에 주신 역사적인 신앙과 잘 부합되는지 살피는 것입니다.

이 예언의 은사는 오늘날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목사나 성경교사와 관련이 있는 은사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것은 장래일을 말하는 예언이나 미래를 점치는 것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주지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교회의 지체들은 더욱 기도하고 조심스럽게 말씀을 연구하고 해석하여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어떤 은사이든 교회를 세우고 성도들을 온전케 하기 위해 주신 것임을 기억하고 성령께서 우리를 주장하시도록 자신을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써야 합니다.(디모데후서 2:15)”.

•참고: 예언’은 ‘미리 예(豫)’가 아닌 ‘맡길 예(預)’를 사용했습니다. 예언자라는 말의 히브리어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서 전한다’ 혹은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해명한다’는 의미로 성경에서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신구약 성경이 완성된 우리 시점에서는 후자의 의미, 곧 성경의 말씀을 연구하고 해명한다는 것이 더 의미가 있습니다.

성경은 장래일을 점치거나 귀신이나 영적인 존재를 의지하여 미래를 예단하고 통제하려는 것도 하나님은 엄격히 금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또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다 마쳤다. 나는 처음(알파)과 마지막(오메가)이며 시작과 끝이다. 내가 목마른 사람에게 생명의 샘물을 값없이 주겠다(요한계시록 21:6). 미래의 복과 은혜가 목마른 사람들은 알파와 오메가 되시는 그리스도에게 나아가야 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미신이나 부적처럼 이용하는 것도 우상숭배와 같은 죄가 될 수 있습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엘리 제사장 때에 법궤를 가지고 블레셋 과의 전투에 나갔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영매나 무당을 찾아다님으로 자신을 더럽히지 말아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이다.

레위기 19:31

-“영매나 무당은 남자이건 여자이건 반드시 돌로 쳐죽여라. 이런 사람은 죽어도 마땅하다.”

레위기 20:27

•} 기도:

나의 하나님, 성경 말씀을 주셔서 진리를 알고 깨닫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고 믿게 하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연구하고 해석할 수 있는 역량을 주시기 먼저는 말씀에 대한 바른 자세와 믿음을 주시옵소서. 주신 말씀을 전할 때는 개인적인 생각이나 사사로운 해석을 더하지 않고 성경전체의 문맥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겸손히 전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겸손만큼 사람을 마귀의 손아귀에서 멀리 벗어나게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 Nothing sets a person so much out of the devil’s reach as humility.- Jonathan Edwar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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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ST

예언의 은사를 어떻게 사모해야 하는가?

[질문]

고린도 전서 13장과 14장에서 말하는 예언은 어떤 의미로 이해해야 하고 또 기도할 때 어떻게 사모해야하는지요?

[답변]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고전14:1-5, 개역개정)

예언의 은사란?

성경이 말하는 예언은 쉽게 생각하듯이 장래 일을 미리 알아맞히듯이 말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헬라 원어인 ‘프로페테이아’는 성령의 영감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를 깨달아 다른 이에게 경고 권면한다는 뜻입니다.

먼저 아셔야 할 것은 하나님의 뜻은 인간 스스로는 깨달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쪽에서 먼저 펼쳐 보여주어야만 합니다. 여러 번 비유했지만 어린아이는 힘이 모자라 아빠가 움켜쥔 손바닥 안에 무엇이 있는지 열어서 알 재간이 없기에 아빠가 손바닥을 펼쳐서 보여주어야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도 이런 관계인데 하나님 쪽에서 먼저 열어 보이는 것을 계시라고 하며, 그러려면 인간에게 반드시 성령의 영감이 작용해야만 합니다. 따라서 인간 스스로 깨우치는 인본주의적 가르침은 결코 성경이 말하는 예언이 될 수 없습니다.

예언의 뜻을 구체적으로 풀이한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고전13:2) “예언하는 능”을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아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비밀과 지식은 당연히 하나님 쪽에서 주도적으로 행하는 계시로만 알 수 있는 그분의 비밀과 지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비밀 가운데는 장래 일에 대한 경고도 일부 포함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초대교회에 특별히 신약성경이 완성되기 전에는 간혹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도 성령의 영감으로 장래 일에 대해 경고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육하원칙에 따라서 구체적으로 시기와 방식까지 다 알 수 있는 미래 예측은 없었습니다. 주로 하나님의 뜻에 대한 원칙만 밝히는 차원이었습니다. 단적으로 말해 구약선지자들의 예언은 “너희가 하나님을 거역하고 우상을 따라간 죄를 회개하라. 그렇지 않으면 이방대적의 침공이란 방식으로 하나님의 심판과 징계를 면치 못할 것이다”라는 일관된 내용이었습니다.

신약시대의 예언도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컨대 요한사도가 책으로 남겨 놓은 요한계시록만 해도 “언제 어디 누구 어떻게 왜 무엇이”가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앞으로 일어날 사건과 상황을 전체적으로 심지어 비밀스럽게 묘사했을 뿐입니다.

다시 정리하지만 예언은 하나님의 뜻을 성령의 영감으로 깨달아 성도들에게 가르치는 은사입니다. 그런데 세상만사를 다스리고 인류역사를 이끄는 하나님의 원칙은 이미 성경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분의 비밀과 지식은 신구약성경에 계시되어 있습니다. 신약시대의 예언은 그래서 구약성경을 풀어서 가르치는 은사였고, 신약성경까지 완성된 이후에는 신구약성경을 풀어서 가르치는 은사인 셈입니다.

바꿔 말해 더 이상 장래 일을 알아맞히는 식의 예언은 필요 없고 또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일어나지도 않는다는 뜻입니다. 특별한 경우를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꼭 필요한 때에 꼭 미리 알려주어야 할 사건을 꼭 필요한 사람에게만 계시할 수 있는 가능성까지 부인하지 않는다는 뜻일 뿐입니다.

바울 사도가 예언을 성령의 은사 중에서 가장 크고 귀한 것으로 꼽고 또 성도들더러 그 은사를 사모하라고 권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만약 장래 일을 알아맞히는 식의 예언이라면 신자들 모두, 조금 극단적으로 말해서 무당의 신 내림 방식으로, 하나님 계획을 미리 알아낼 수 있는 능력을 받으라는 권고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게 아니라 성경에 이미 계시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정확히 해석하여 올바르게 가르치는 은사야말로 모든 성도가 반드시 사모해야 할 가장 귀한 은사이지 않습니까?

예언의 은사를 어떻게 사모해야 하는가?

성도가 예언의 은사를 사모하여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그 해답도 나왔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자신의 깨우침이어선 안 됩니다. 성령의 영감을 얻는 기도부터 해야 합니다. 자기가 갖고 있는 사상, 철학, 선입관, 편견, 오만, 고집, 체험, 심지어 목회자들에게서 이전에 듣고 배운 선지식마저 먼저 깨끗이 지우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런 중립의 백지상태에서 하나님 정말로 이 성경구절을 통해서 제게 무엇을 깨닫게 해주려는지 성령님을 통해 알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인간은 교만과 아집과 죄로 찌들어 있기에 아무리 믿음이 좋은 신자라도 자기 생각과 하나님의 계시를 혼동할 가능성은 상존합니다. 그 때에 하나님의 계시인지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몇 가지 있습니다.

우선 성경에서 일관되게 말하는 기독교 정통교리와 상충하는지부터 점검해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성도는 교리부터 배워야만 합니다. 모든 종교인들이 자기 종교의 경전부터 열심히 배워서 따르는데 유독 기독교인들은 그런 열성이 부족하니 참으로 큰일입니다. 타종교는 인간 양심과 성찰로 충분히 알 수 있는 인본주의적 가르침인 반면에 기독교는 하나님의 절대적 계시임에도 그러지 않으니 더 큰 잘못입니다.

또 서두에 인용한 본문은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라고 말합니다. 성경에서 깨달은 내용이 성도들을 권면 위로하고 교회의 덕을 세우는 내용이어야 하고 또 그렇게만 적용하여서 성령의 열매까지 맺혀야 합니다. 자기 덕만 세우는 것은 예언의 은사가 의도하는 바가 분명 아니라고 말합니다.

성령의 영감을 받아 성령의 열매가 열리려면 성도들을 위로 권면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긴 해도 인본주의적 내용과 방식으로 그쳐선 안 된다는 뜻입니다. 예컨대 성도들끼리 자기를 낮추고 남을 높이며 서로 사랑하자고 권하는 것은 아주 선한 일이고 자주 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꼭 성령의 영감을 받지 않아도 타종교인과 불신자까지 포함해서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예언의 은사를 통해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것이 아닐 가능성이 훨씬 높습니다.

하나님의 비밀과 지식은 성령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신령한 일입니다. 신령한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성경은 분명히 밝혀 놓았습니다.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1-3)

바울 사도는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우상에게 끌려가지만, 성령이 역사하면 예수를 주라 시인 영접하게 된다고 하며 그것을 신령한 일이라고 선언합니다. 예언의 은사를 통해 성도들을 권면위로하며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일 또한 명료해졌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특별히 십자가 구원의 은혜로 성도들을 권면 위로하고 교회의 모든 행사에 오직 예수님의 이름만 높아지는 내용과 결과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각자 겸손해지고 남을 높이고 서로 사랑하는 일도 자기의 의로움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사랑을 받아서 함께 나누는 방식으로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예수 십자가 복음으로 죄에 찌든 인간을 성령의 거듭남으로 깨끗케 하여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그 자녀들 각자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며, 그런 자녀들이 주님의 사랑으로 서로 섬기는 공동체를 형성 확대하며, 아직도 예수를 모르는 미혹된 영혼들을 복음과 공동체로 초대하고, 신자는 현실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행하여서 필요하면 자기 모든 것 생명까지 바쳐서라도 이 땅을 거룩하게 변화시키라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언의 은사란 성경을 예수 십자가 복음에만 비추어서 해석하여 가르치는 은사입니다. 그 은사를 사모하는 기도도 예수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구원의 비밀과 경륜을 정확히 깨닫고, 자신의 욕심이나 의나 자랑은 일절 개입되지 않게 순전하게 성도들에게 가르쳐서 서로 위로 권면하며, 그 복음 안에서 죄와 흑암의 세력에 함께 승리하게 해달라고 간구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4/21/2016

“예언과 방언의 은사에 대한 견해“

본지에 기고되는 논문이나 나의주장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는 순수한 기고자의 주장임을 알려드립니다. -코닷-

1. 은사에 관한 견해

2. 예언에 대한 견해

1) 예언의 종류

2) 예언의 은사란 어떤 것인가?

3) 기도원이나 선배들이 준 예언을 그대로 믿어야 하는가?

3. 방언에 대한 견해

1) 방언의 종류

2) 일반 성도나 현대교회에선 방언이 필요한가?

4. 결론

1. 은사에 관한 견해

▲ 이병삼 목사(충신교회원로)

신약성경에 ‘은사’에 대한 헬라 원어는 3가지가 있다.

1) 도리스(δύαις 약1:17), 2) 도레아(δωρεά 고후9:15, 히6:4), 3)카리스마(χάριςμα 롬1:11, 5, 15)이다. 이 세 단어의 원뜻은 모두 ‘선물’(gift)이라는 뜻이다.

이들은 신약성경에서는 특히 인간의 공로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있는 자들에게 주어진 각종 재능과 사명, 직무 등을 총괄적으로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다.

고전12장을 통해 성령의 은사에 대한 가장 중요한 것들을 뽑아본다.

1) 모든 은사의 본질적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게 하는 것이다(12:3). 고전에는 성령의 은사를 9가지로 말하고, 롬12장과 엡4장에서는 12가지로 말하여 성경에 성령의 은사는 도합21가지로 기록이 나온다. 이 21가지 은사의 본질적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실현시키기 위한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것이다(요6:40)

2) 모든 은사는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차이가 있을 수 없다(12:4).

은사는 여러 가지이나 성령은 한 성령에게서 한 목적을 위해 주신 것이니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하다고 말 할 수 없다. 어떤 은사는 굉장히 위대해 보이고, 어떤 은사는 좀 시시해 보이는 경향이 있다. 하등의 차이가 없으나 교만과 죄악 때문에 그렇게 보는 것이다.

3) 각각 맡은 직임은 신앙의 척도도 아니고, 고저도 없다(12:5).

직임과 직위를 계급처럼 보아서는 안 된다. 어떤 직임과 직위는 봉사와 섬기기 위한 것들이다. 섬기고 봉사하는 것이 신앙의 척도와 고저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직임과 직위든 감사하므로 순종할 뿐이지 명예와 신앙의 척도가 아닌 것이다.

4) 은사는 신앙의 목적이 아니라 신덕을 위한 수단인 것이다(12:7).

성령의 은사는 성도들의 신앙의 유익을 위해서 주신 선물이다. 만약 은사가 신앙의 목표라면 성경의 수많은 인물들이 어떤 은사를 가졌느냐가 초점이 있는 것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해 말씀에 순종하며 신앙대로 사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다.

5) 은사는 보이는 은사보다, 보이지 않는 은사를 더 귀중히 여겨야 한다(12:8-10).

성령의 9은사는 드러나 보이는 은사이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은사가 있으니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은사이다. 아무리 보이는 은사가 제아무리 풍성해도 눈에 보이지 않는 은사인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고, 아무 유익이 없는 것이다.

6) 은사란 인간 자신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12:11).

성령님이 자신의 뜻에 따라 각 사람에게 임으로 주신다. 그래서 선물인 것이다. 그러나 그 선물을 받았다고 그 사람의 전유물도 아니고 소유물도 아닌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은사를 소유할려고 애쓴다. 은사를 사모하는 것 자체는 잘못은 아니다. 내 뜻대로 쓰라고 주신 선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위해 봉사와 섬기라고 주신 선물이다.

7) 성령님이 나에게 준 은사란 무엇일까요(12:11).

모든 성도에게는 21가지 중에서도 여러 개를, 또 보이지 않는 은사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은사 중 에서도 어던 분은 더 많은 봉사와 섬김을 위해 많이 준 자도 있고, 어떤 분에게는 예정하신 뜻대로 적게 주시고 한 가지나 몇 가지에 집중하도록 하신다.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 받게 함과 교회 덕을 위함과 이웃과 사회를 위함이다.

우리 같은 죄인들에게는 이런 선물 받을 자격이 없는데도 과분할 정도로 보이는 은사, 보이지 않는 은사로 귀중한 선물로 안겨 주심에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다. 그간 알게 모르게 이 모든 은사를 나를 위해 내 뜻대로 사용된 점이 있다면 회개하고, 이제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와 이웃과 사회를 위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최선을 다해 충성, 봉사, 섬김, 베품으로 주님만을 기쁘시게 하시길 바랍니다.

2. 예언에 대한 견해

1) 예언의 종류

예언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예언(預言)과 예언(豫言)입니다.

한문 성경도 구분이 안 돼 있고, 한글 성경에는 둘 다 ‘예언’이라고 기록 되어 혼선이 온 것이다.

① 예언(預言)은(헬,프로페테우오 προφητευω 와 영,prophecy) ‘하나님의 계시나 뜻을 사람들에게 전한다’는 뜻이다. 구약의 예언자는 豫言者가 아니라 預言者이다. 구약의 예언자를 ‘나비,א׳בכ 이고,헬라어로 프로페테스 προφητης라고 한다.

② 예언(豫言)은(영,predict(prediction이라는 단어로) ‘미래에 있을 일을 미리 말한다’는 뜻이다.

구약성경 선지서들에는 예언이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거기 예언은 모두가 prophecy를 의미 합니다(預言). 그래서 선지자들의 預言 가운데는 豫言이 포한되어 있는 경우도 많이 있기도 합니다.그러나 그 선지자의 豫言이 아니라 하나님의 豫言을 한 것입니다. 신약 성경의 고전12장과 14장에서는 계속해서 예언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영어 성경을 자세히 보면 prediction(豫言)이 아니고, prophecy(預言)으로 정확하게 구분하여 있습니다. 우리 성경에서 또 다른 예로는 ‘사랑’이란 단어입니다. 우리 성경은 모두 사랑입니다. 헬라어나 영어 선경은 완전 구분되 있다.

사랑 ① 스톨케 στοργή : 가족적, 동족적인 사랑 ② 휠리아 φιλία : 친구나 우애적 사랑 ③ 에로스ἕρος : 이성적, 정적 사랑 ④ 아가페 άγάπη : 하나님께 속한 거룩한 사랑, 이렇게 구분된 단어를 우리 성경은 한 단어로만 사용하니 큰 혼동이 오는 것이다.

2) 예언의 은사란 어떤 것인가?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예언의 은사는 預言을 뜻하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현대에서는 預言은 끝났다는 점과 豫言은 존재치 않는 것이다. 預言은 계시의 종말로 성경 66권 전부에 기록해 두었으니 더 이상 預言은 없으며, 豫言은 하나님과 성령님, 예수님만 할 수 있는 것이지 만약 사람이 이 豫言은 은사를 받았다는 자들이 있는데 그렇다면 100% 한 번도 틀림이 없이 완벽하게 이루어지는 豫言을 계속하고 있다면 그분이 곧 하나님이시다. 세상 지식적인 人間의 예언은 20~30%나, 어쩌다 맞는 것은 예언의 은사 받은 것이 아니고, 세상 지식적인 은사 받은 것이나 악령이나, 마귀의 은사 받은 것이나 아니면 또 혹 누구나 아는 이야기를 예언이라고 하든지, 통계학으로 어림잡아 하는 것이 맞는 수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성령님이 주신 예언의 은사가 아닌 것이다. 고전에서 나오는 예언의 은사, 사도시대에 국한된 예언이었다.

4C말까지는 정경이 완성되지 못해서 하나님이 일시 豫言의 은사를 주신 것 같으나 이미 預言된 말씀이 더 많다. A.D.397년 정경 완성으로 預言도 豫言도 종결된 것이다. 이제 더 이상의 預言이 필요치 않는 시대인 것이다.

3) 기도원이나 선배들이 준 예언을 그대로 믿어야 하는가?

계시 종결로 預言도 豫言도 더 이상 하나님이 주시지 않는 시대인데도 기도원에 기도하려 가면 자칭 預言者들이 여러 가지로 예언해 준다. ‘당신은 신학 공부해서 목사가 되라’, ‘당신은 목사 사모가 되라’, ‘당신은 장로가 될 수 있는 꿈을 어젯밤 주셨으니 명심하라’. 이런 예언 받은 자가 혹 있거들랑 빨리 잊으세요. 다 점쟁이들이 점 꽤 대로 속이는 말이요, 무당들이 무당 굿하는 것과 같은 종류이다. 이런 것이 계속 예언되는데 다 맞고 틀림이 없다면 하나님이 또 다른 성경을 쓰시고 계신 것이니, 66권 이외 계속 출간되어야 한다. 성령님이 우리 기도 시간에 음성으로 잠 속에서, 꿈으로 다시 우리에게 예언해 주시지 않으시니 거기에 속지 말고 성경에 맞는 말씀만 하나님의 預言이지 성경에 맞지 않는 豫言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3. 방언에 대한 견해

1) 방언의 종류: 성경에 기록된 방언은 세 가지로 기록이 나온다.

① 다른 나라 말인 방언이 있다: 성령의 감동으로 배우지도 않은 다른 나라 말을 성령의 능력으로 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오순절 성령 강림 때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배우지도 않은 다른 나라 말로 전도한 것이다. 오순절에 모인 15개국 성도들께 그들 나라 말로 전해지는 말씀에 큰 은혜를 받게 된다. 예수님 제자들은 갈릴리 어부 출신이 대다수 였고, 외국어를 배울 기회가 없다. 성령님의 능력으로 만이 가능한 것이다.

②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이 있다: 고전14:2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않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성령님이 필요에 의해(장본인께 확신 주기 위함, 듣는 이가 신기하게 느끼게 하기 위함), 혹 사람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방언은 통역이 없으면 교회에서는 하지 말라고 명하십니다(고전14:28). 통역이 없이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교회 안에서 하게 되면 말하는 자도 야만이 되고,듣는 자들도 야만이 되고 만다. 혹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이 나에게 주어졌다면 믿음의 확신을 얻는 다음부터는 새 방언을 하던지 이미 預言된 말씀 정경으로 깊이 들어거야 신앙의 성장이 올바로 된다.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에만 머물러 있으면 영분별을 못하므로 마귀 유혹에 넘어가기 쉬워 교만과 자만에 빠져 신앙에 저해가 되고, 신앙의 열매가 없게 되고 마는 것이다.

③ 새 방언이 있다(막16:17): 새 방언이란 것은 성경 말씀을 새롭게 깨달아 자기 나라 말로 전하기도, 가르치기도 하는 것이다. 신령한 세계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새롭게 깨달은 것은 처음 듣는 말이요, 그 내용이 새로운 말이다. 그래서 새 방언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다. 성경 말씀은 하나님 말씀이라 유한된 인간은 평생 깊은 은혜의 세계, 신령한 세계로 들어가서 새로운 진리를 깨닫고, 연구하고 해도, 너무도 깊고 오묘해서 다 캐내어 알 수 없고, 완벽한 진리라고 확언할 수 없다. 그러나 성경은 완벽하고 조금도 부족 된 면이 없다.

2) 일반 성도나 현대 교회에선 방언이 필요한가?

행2장의 방언은 외국, 타국 방언이었고, 그 목적이 오직 복음 전하기 위해서 성령님이 일시 주신 것이지 제자들 일평생 이 은사가 계속된 것은 아니다. 오늘날 현대 교회에서 행해지는방언은 듣는 사람이 알아 들을 수 없으며, 심지어 방언을 말하는 본인도 그 뜻을 전연 모르고 그냥 하는 것이다. 이런 방언이 무슨 목적으로 현대에 꼭 필요하다고 보는가? 이젠 필요치 않다고 본다. 현대 방언은 통역이 없으면 교회에 유익이 없다고 한 것을 보아 통역이 가능한 방언은 預言의 말씀이었다고 학자들은 보고 있다.(특히 칼빈은 강하게 주장했다)

고린도전후서는 A.D.52-57년 경에 기록되었고, 요한계시록 A.D.100년경에 기록되었다. 신약성경이 정경으로 채택되기에는 또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 A.D.363년 라오디게아회의 때 목록 수집하기 시작하여 34년간 숙고 끝에 A.D.397년 칼타고회의 때 정경으로 27권이 확정되었다. 사도시대 이후 300년간 통역된 방언은 預言의 말씀으로 정경으로 채택되었다는 것이 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이다. 정경이 완성된 후에는 계시가 종결된 것 같이 豫言도 종결되었고, 預言도 방언도 종결되어야 마땅하다는 견해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성도나 현대 교회에선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은 자제하는 것이 성경적이다.

4. 결론

고린도교회는 성령의 은사는 충만한 교회였으나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한 교회였다. 그래서 분열,분당이 생겼으며(1:10-4:21), 부도덕해서 음행 죄가 교회 안에까지 침투했으며(5장 전체, 6:12-20),서로 싸워 세상 법정까지 고소했을 뿐 아니라(6:1-8), 주님의 성찬을 욕되게까지 하였다(11:17-34).뿐만 아니라 저들은 부활도 바로 이해하지도, 믿지도 않했으며(15장 전체), 이런 점에서 서로 자기만 내세우는 개인주의로 자기가 받은 은사를 자랑하고 뽐내는 통로였다. 그래서 방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그것을 드러내기 위해 공적예배 시간에 소란을 피우므로 예배의 질서가 흐려지고, 혼란한 고린도교회를 바로 세우기 위해 고리도전서를 쓰게 됐다. 그래서 바울은 방언 보다는 預言을 힘쓰라고 한 것은 그 預言의 은사가 당시 고린도교회에 유용성 때문에 더 크게 부각시킨 것이다. 여기서 預言의 은사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그 해석이요, 그 설교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방언이 통역이 되는 경우에는 듣는이까지 덕이 되고 유익이 있으므로 預言과 다를 바가 없게 된다.

고전14장에 들어가서 전체의 흐름은 방언 자제 쪽에 무게를 두고 기록했다.

①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도록 하라(1절)

② 방언은 하나님께 하는 것이라 알아 듣는 자가 없고(2절)

③ 방언은 자기 덕을, 예언은 교회 덕을 세우나니(4절)

④ 방언은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예언하는 것만 못하다(5절)

⑤ 방언은 성도들에게 유익이 없다(6절, 계시, 지식, 예언에 비해서)

⑥ 방언은 뜻을 분별할 수 없음으로 알아들을 수 없다(7절)

⑦ 전쟁을 예비 할 수 없다(8절, 나팔)

⑧ 허공에다 말하는 것과 같다(9절)

⑨ 방언은 말하는 자나 듣는 자가 다 야만이 된다(10-11절)

⑩ 방언은 통역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12-13절)

⑪ 방언으로 기도하면 자기 영은 기도하나 마음에는 열매가 없다(14절)

⑫ 방언으로 축복이나 감사할 때, 무식한 자는 ‘아멘’할 수가 없다(16-17절)

⑬ 성경 깨닫고, 다섯 마디 말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하는 것보다 낫다(19절)

⑭ 방언이 복음의 세계를 접하지 못한 자들을 위해 주신 표적이나 지금 세계는 이 복음을 못 듣고, 못 본자 없는 시대이니 자제함이 좋고(21-22절)

⑮ 온 교회가 다 방언하면 무식한 자나, 불신자들이 볼 때 미쳤다고 한다(23절)

⑯ 다 預言하면 그들이 와서 책망, 판단을 받고, 숨은 일이 들어나므로 하나님게 경배하고,복음이 전파된다(24-25절)

바울은 누구보다 방언을 잘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이 더 중요하므로 바울도 자제하고 삼가게 되었다. 성령 은사 중의 하나인 방언의 은사는 성령님이 꼭 필요한 자에게 개인적인 영적 깊은 세계의 은혜 생활하도록 주신 것이다. 그러나 교회나 공적 예배나 공동체에서는 유익이 없으므로 자제하고 삼가는 것이 성령의 뜻을 위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더 나타낸 다고 바울은 지금까지 우리에게 설교하고 계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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