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산 상륙작전 | 한국 해병대 Vs 북한군 7군단, 원산 상륙 작전 시나리오 제2부 결정적 행동, 2차 한국전쟁 , Second Korean War, 작계5029 Ep05 97 개의 정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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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상륙작전 – 나무위키

이 작전이 성공했다면 중공군이 개입하기 전 전쟁을 끝낼 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맥아더 원수는 인천을 점령한 후 바로 병력을 다시 배에 태워 원산 상륙작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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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6/1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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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cus 인사이드]인천상륙작전은 성공했지만…맥아더 고집에 …

경험을 중시한 맥아더가 미 10군단을 원산에 상륙할 부대로 낙점한 이상 미 1군단이 하루빨리 38선 부근까지 올라와 미 10군단과 자리를 바꿔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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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joongang.co.kr

Date Published: 3/2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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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웃음거리가 된 맥아더의 ‘원산상륙작전’ – 노컷뉴스

맥아더, 유엔군을 둘로 쪼개고 10군단을 원산에 상륙시키는 우를 범하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자 워커 미 8군사령관은 서울을 점령한 미 10군단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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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nocutnews.co.kr

Date Published: 5/2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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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기 유엔군의 원산 상륙작전과 철수작전을 통해 본 해상 …

한국전쟁기 유엔군의 원산 상륙작전과 철수작전을 통해 본 해상수송 Sea Transportation seen through the UN Forces’ Amphibious Landing and Evacuation Operation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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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kci.go.kr

Date Published: 7/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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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도발시 ‘작계 5015’로 반격 …원산·함흥 상륙해 인민군 퇴로 …

[민병권의 군사이야기], 상륙작전은 전세 바꾸는 게임체인저, 과거 인천·원산 성패 통해 교훈얻어, 미국의 ‘초수평선 상륙작전’ 도입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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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sedaily.com

Date Published: 3/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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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산 상륙 작전 – BEMIL 아카이브 – 유용원의 군사세계

원산상륙작전의 개념은 패주하는 인민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평양을 협공한다는 것이었다. 개성∼사리원∼평양 라인은 워커 장군의 8군에게 맡기고 알몬드 장군의 10군단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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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emil.chosun.com

Date Published: 2/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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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해병대 vs 북한군 7군단, 원산 상륙 작전 시나리오 제2부 결정적 행동, 2차 한국전쟁 , Second Korean War, 작계5029 ep05
한국 해병대 vs 북한군 7군단, 원산 상륙 작전 시나리오 제2부 결정적 행동, 2차 한국전쟁 , Second Korean War, 작계5029 ep05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원산 상륙작전

  • Author: R의 미래전략실
  • Views: 조회수 299,78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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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0. 10. 6.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WpU7fvdQ64w

[Focus 인사이드]인천상륙작전은 성공했지만…맥아더 고집에 헛고생

1950년 9월 15일 단행된 인천상륙작전의 결과는 실로 엄청났다. 순식간 전세를 역전시켰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모두의 반대를 물리치고 고집스럽게 작전을 주도한 맥아더의 명성은 이후 6·25전쟁사에 뚜렷이 각인됐다.

그런데 이때부터 이듬해 해임 전까지 그는 계속해서 실망스러운 모습만 보여주었다. 우선 인천항에서 40여㎞ 떨어진 서울을 탈환하는데 보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는 점은 생각해 볼 부분이 많다.

미 10군단의 모든 부대가 상륙하는데 열흘 정도가 필요했으나 가장 먼저 투입된 미 해병 제1사단의 전투력이 당시 경인 지역에 산재한 공산군보다 앞선 상태였다. 그런데도 진격은 더뎠고 맥아더도 특별히 채근하지 않았다.

이점은 낯선 곳에서 작전을 펼쳐야 하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더 큰 패착이 곧바로 이어졌다. 바로 무의미한 실패로 기록된 원산 상륙작전이다.

북진의 목적으로 다시 상륙을 선택한 것이 잘못이라 할 수 없지만 한참 앞으로 나가던 미 10군단을 인천으로 회군시켜 배에 태운 뒤 한반도를 한 바퀴 돌아 원산으로 보낸 것은 한마디로 패착이었다.

당시 전선의 상황을 살펴보면 미 10군단이 의정부 북부, 국군 2군단이 충주, 국군 1군단이 삼척까지 도달한 상태였지만 문제는 미 1군단이었다. 당시 미 8군의 선봉대였던 미 1군단은 경기도 안성까지만 북상한 상태였다.

그 때문에 굳이 원산 상륙을 강행한다면 미 8군 예하 중 부산에 가까이 위치했던 부대를 차출해 보내고 10군단은 그냥 평양을 향해 진격하는 것이 순리적이었다.

맥아더, 인천상륙 성공 뒤 원산상륙 노려

하지만 경험을 중시한 맥아더가 미 10군단을 원산에 상륙할 부대로 낙점한 이상 미 1군단이 하루빨리 38선 부근까지 올라와 미 10군단과 자리를 바꿔야 했다. 결국 미 1군단이 도착하지 않은 상태에서 미 10군단이 회군하자 북진은 순식간 탄력을 잃었다.

당시에 전쟁을 지휘하던 이들도 문제점을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가장 앞에 있던 부대를 선봉에 세운다는 건 극히 단순하지만 명쾌한 해법이었다.

워커 미 8군 사령관은 미 10군단이 그냥 평양으로, 국군 2군단이 미 10군단의 우측을 담당하여 한반도 중앙으로, 동부전선은 가장 앞에 서 있던 국군 1군단이 동해축선을 따라 올라가고 미 1군단은 서울을 거쳐 경원가도를 따라 원산으로 향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워커처럼 많은 이들이 상륙작전보다 육상으로의 진격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특히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켰던 해군의 반대가 컸는데, 당시 미 극동군 해군사령관 조이(Turner Joy) 제독의 주장을 살펴보면 모든 것이 설명될 수 있을 정도다.

“미 10군단이 해상으로 돌아 원산으로 이동하는 것보다 지상으로 이동하기가 더 쉽고 시간도 단축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해군에서는 누구도 이런 작전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사람이 없다. 차라리 상륙작전을 벌인다면 인천에서 쉽게 연계할 수 있고 평양이 가까운 서해안의 진남포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좋다”

워커, 원산은 시간과 비용 많이 들어 효과 없어

한마디로 원산상륙은 시간도 비용도 많이 들고 효과도 없을 것이라는 부정적인 의견이었다.

반면 일부지만 육군에서 상륙작전을 지지하는 이들도 있었다. 한마디로 한반도에서 마주한 지형에 질렸기 때문이었다. 한반도는 불과 미국의 플로리다만 한 크기지만 전장은 쉽지 않았다.

한국에 도착해 보니 거친 산악이 이어지고 지도에는 도로가 표시되어 있지만, 오솔길인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작전을 펼치기 어려웠다. 여름에 참전한 그들이 지금까지 경험한 유일한 평지인 논밭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독일군을 질리게 한 러시아의 진흙 장군과 맞먹었다.

유일한 교통로라 할 수 있는 철도는 곳곳이 파괴되어서 중장비 이동이 어려웠다. 그래서 미 10군단장 알몬드(Edward Almond)는 “원산까지 육로로 진격하는 것을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실행 전부터 많은 갑론을박이 있었지만, 인천상륙작전 당시처럼 맥아더의 의지를 꺾을 수 있는 이는 없었다. 그 결과 작전은 강행되었지만, 미 10군단을 실은 함정들은 원산항 인근에 설치된 기뢰에 막혔다.

일본에서 동원한 소해정까지 투입해 기뢰를 제거하는 동안 미 10군단은 영흥만과 울릉도 사이 해상을 왕복하며 시간을 보내야 했다. 결국 동해안을 따라 북상한 국군 1군단이 원산을 점령한 뒤 10월 14일에서야 상륙함으로써 작전은 실패로 막을 내렸다.

상륙작전 때문에 귀중한 전력을 보름 가까이 사용하지 못한 여파는 컸다. 북진이 실패로 끝난 이유는 많지만 이처럼 최고 지휘관의 고집과 이를 막을 수 없었던 시스템도 크게 한몫했다. 아쉬울 뿐이다.

남도현 군사칼럼니스트

한국전쟁기 유엔군의 원산 상륙작전과 철수작전을 통해 본 해상수송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시작되자 유엔은 결성 이후 처음으로 ‘집단안보체제’를 가동하여 참전을 결정했다. 유엔군은 병력과 물자를 군함과 선박에 탑재하여 세계 각지에서 동북아 해역으로 집결시켰다. 한반도 대부분이 북한군의 진영에 들어간 상황에서 전황을 바꿀 수 있는 모든 전략은 해군력이었다. 이글에서는 한국전쟁 동안 유엔군이 전개했던 해상수송과 해양통제 활동에 주목했다. 부산교두보를 확보한 이후, 한국전쟁에서는 큰 해전이 없었고, 일찍이 해상통제권을 확보하여 해군의 활동은 육상작전 지원과 해상수송으로 좁혀졌다. 그런데 유엔 해군은 휴전협정이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하는 1953년 7월 27일까지 폭격과 포격 등 해상봉쇄를 전개한 곳이 있었다. 바로 원산이었다. 원산은 일제시기 북한지역의 대표적인 도시였다. 일찍이 개항된 원산에 철도와 항만공사가 시작되어 성진, 청진, 흥남, 나남 등 북한 서쪽지역의 교통, 산업, 경제 중심지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글은 첫째 한국전쟁과 해군의 해상작전의 전개를 살펴보았다. 한반도 해역에서 북한군의 해군력이 일찍이 붕괴한 상황이므로 한반도 전역의 제해권은 유엔 해군이 장악했다. 유엔 해군은 상륙작전, 철수작전, 해군항공 폭격, 소해작전, 해상수송작전, 해상봉쇄작전을 반복하며 전개했다. 둘째 한반도 해역의 작전과 함선 이동을 검토했다. 한국전쟁에서 유엔군은 육상수송과 함께 상륙작전을 통한 지원을 적극 선택했다. 셋째 한국전쟁에서 원산의 지정학적 역할과 군사적 대응을 고찰했다. 한국전쟁에서 수송과 전투를 고려한 해상작전이 전개된 곳은 부산과 인천, 원산과 진남포였다. 군사전략적으로 원산과 진남포는 ‘한반도의 좁은 허리 부분’이었다.

When the Korean War began on June 25, 1950, the UN forces loaded troops and supplies onto warships and ships and gathered them from all over the world to the seas of Northeast Asia. With most of the Korean Peninsula entering the camp of the North Korean army, any strategy that could change the situation was naval power. This article focused on maritime transport and maritime control activities conducted by the UN forces during the Korean War. After securing the Busan bridgehead, there were no major naval battles in the Korean War, and by securing maritime control early, the naval activities were narrowed to land operation support and sea transport. However, there were places where the United Nations Navy implemented maritime blockades such as bombardment and artillery until the armistice agreement took effect. It was the origin. This article first looked at the development of the Korean War and naval operations at sea. As the naval power of the North Korean army collapsed early in the waters of the Korean Peninsula, the UN Navy took control of the entire Korean peninsula. The United Nations Navy repeatedly deployed amphibious operations, evacuation operations, naval air bombing, minesweeping operations, maritime transport operations, and maritime blockade operations. Second, the operation and movement of ships in the waters of the Korean Peninsula were reviewed. In the Korean War, the UN forces actively selected support through amphibious operations along with land transport. Third, the geopolitical role and military response of Wonsan in the Korean War were considered. In the Korean War, naval operations that considered transportation and battle were conducted in Busan and Incheon, and Wonsan and Jinnampo. Military-strategic, Wonsan and Jinnampo were ‘the narrow waist of the Korean Peninsula’.

北도발시 ‘작계 5015’로 반격 …원산·함흥 상륙해 인민군 퇴로 끊는다

viewer 1950년 9월 15일 개시된 인천상륙작전에 동원된 함정들이 해안으로 향하고 있다. 국가보훈처의 흑백사진 원본을 서울경제신문이 컬러 이미지로 변환했다.

viewer 한국전쟁 종군화가 허버트 한(Herbert C. Hahn)이 1950년 인천상륙작전 당시 인천 및 월미도에 대한 연합군의 포격을 묘사한 그림./이미지제공=미 해군 역사·문화유산 사령부

viewer 연합군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앞줄 왼쪽 두번째)이 1950년 9월 16일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켜 인천항 일대를 둘러보고 있다. 흑백원본 사진을 서울경제신문이 컬러이미지로 변환했다. (사진출처=미 해군 역사및 문화유산 사령부)

viewer 원산상륙작전 소해함 기뢰피격 장면. 미 해군으로부터 국군이 공여받은 소해함 ‘YMS-516’호가 1950년 10월 18일 원산상륙작전 도중 갈마반도 인근 해상에서 자기 감응 기뢰에 피격돼 물기동이 치솟고 있다. 서울경제가 원본 흑백사진을 리마스터한 뒤 컬러이미지로 변환했다. /사진제공=미 해군 역사·문화유산 사령부

viewer 미 해군 1사단의 상륙장갑차, 상륙주정 등이 1950년 10월 26일 북한 원산에 상륙하고 있다. 흑백원본 사진을 서울경제신문이 리마스터한 뒤 컬러이미지로 변환했다. /사진출처=미 해군 역사·문화유산 사령부

viewer 국군의 날인 지난 1일 경북 포항 영일만 해상에서 실시된 합동상륙작전에서 우리 군의 첨단 상륙장비들이 하늘과 바다를 새까맣게 채우고 있다. /포항=연합뉴스

viewer 문재인 대통령이 1일 경북 포항 영일만 해상에서 연합상륙작전의 기함 역할을 맡은 마라도함에 탑승해 국군의 날 기념식에 임하고 있다. /포항=연합뉴스

viewer 지난 1일 경북 포항 영일만 일원에서 열린 연합상륙 훈련에서 대형 수송함 마라도함(뒤쪽 배)의 앞을 천왕봉급 상륙함이 지나가고 있다. /포항=연합뉴스

viewer 해군이 운용 중인 대형수송함 1번함 ‘독도함’의 모습. /사진제공=국방부

viewer 미국이 개발한 수직이착륙형 스텔스전투기 F-35B가 지난 2011년 10월 3일 미 해군 강습상륙함 와스프호에서 처음 수직착륙을 하고 있다. 미 해군은 이 같은 첨단 항공기를 해상전력과 함께 투사해 적의 사정 거리 밖에서 상륙지점의 적 방어세력을 와해시킨 뒤 안전하게 상륙병력을 돌격시키는 전략을 운용해왔다. /사진제공=미 해군

viewer 국내 개발 ‘상륙돌격장갑차-II’ 랜더링 이미지. 기존 상장차보다 기동성과 방호력, 무장능력이 크게 향상될 예정이다. /사진제공=ADD

viewer KAI가 개발을 제안한 해병대용 상륙공격헬기 ‘마린온 무장형’이 해상에서 비행하는 상상도/사진제공=KAI

viewer 2014년 한미연합상륙훈련에서 한미 장병들이 상륙돌격장갑차의 엄호를 받으며 해안을 점거하고 있다. /사진출처=미 해병대

viewer 2015년 3월 30일 실시된 ‘쌍룡훈련’에서 상륙작전 등을 훈련한 한미 장병들이 화이팅을 외치고 있다. 문재인 정부 출범후엔 한미연합 차원의 대규모 실기동 훈련이 폐지돼 쌍룡훈련 때와 같이 실전적 연합대응력을 유지하기 힘들게 됐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사진제공=해병대

viewer 북한이 개발한 신형 극초음속 미사일이 ‘화성-8형’이 지난 9월 28일 자강도 룡림군 도양리에서 발사되고 있다.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viewer 2015년 5월 ‘쌍룡훈련’에서 한미연합상륙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참가한 미군 수직이착륙 항공기 ‘V-22오스프리’가 공중 기동을 하고 있다. 우리 해군 및 해병대도 보다 빠른 상륙작전을 위해 오스프리와 같은 수직이착륙기를 도입해야 한다는 지적이 군 안팎에서 나오고 있다. /사진제공=해병대

viewer 해병대가 2018년무렵까지도 운영했던 M48계열의 구형 전차 주행 장면/사진제공=국방부

viewer 소형전술챠량 K-151의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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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전에서 상륙작전은 전세을 단숨에 역전시킬 수 있는 게임체인저다. 1950년 한국전쟁 초기 성공한 3대 작전인 포항·통영·인천 상륙작전은 아군에 대반격의 기회를 만들어줬다. 그해 7월의 포항상륙작전을 통해 미군은 대규모 증원군을 집결시킬 수 있었다. 이로써 금강 방어선까지 뚫고 남하한 북한군을 저지하는 결정적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8월에는 우리 해병대가 국군 최초의 단독 상륙작전을 통영에서 감행해 현지 주요 항만 등을 봉쇄하려던 적군의 작전을 무산시켰다. 그리고 9월에는 연합군의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켜 서울을 탈환하고 북진에 나섰다.반면 상륙작전의 실패는 아군에 큰 시련을 안긴다. 맥아더 장군이 10월에 원산상륙작전을 무리하게 추진하려고 참모들의 반대를 물리치는 과정에서 연합군의 북진이 열흘 가량 늦어졌다 진통 끝에 10월 16일 출발한 상륙 주력군은 북한의 기뢰를 처리하느라 애를 먹었고 당초 예상보다 엿새 가량이나 늦은 10월 26일에서야 원산에 상륙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이미 12일 전에 원산일대를 점령한 지상군마저 발목이 잡혀 진군 속도를 늦추게 됐다. 허비된 시간으로 인해 연합군은 10월 19일 압록강을 넘어 남하한 중국 공산군을 조기에 저지할 적기를 놓쳤다. 그 결과 연합군은 ‘장진호 전투 패배 → 흥남철수 →1·4후퇴→38선 교착→정전협정’으로 이어지는일련의 과정을 밟게 됐고, 한반도 분단이 71년째 고착화된 것이다 . 오늘날 북한이 다시 전면적인 도발을 해온다면 우리 군은 반격의 상륙작전을 성공시킬 수 있을까. 한미연합작전 차원에선 순식간에 북한에 응징을 가할 수 있는 상륙 전력이 상비돼 있으며, 우리 군만으로도 자주적인 대규모 상륙전을 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역량이 빠르게 향상되고 있다.◆71년만에 포항상륙작전 데자뷔…”이번엔 우리 힘으로”우리 군의 현주소를 알 수 있는 장면이 지난 10월 1일 포항 영일만 도구해안 일대에서 펼쳐졌다. 해병대 1사단이 주관한 국군의 날 기념행사로 사단급 규모의 합동상륙 훈련이 펼쳐진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기함을 타고 참관한 이날 훈련에서 우리 군은 첨단 전력들을 과시했다.먼저 우리 군이 최근 전력화한 군 전용통신 위성 ‘아나시스-Ⅱ’가 원활한 합동작전을 위한 통신을 고속으로 연결했다. 언제든지 군 임무 수행이 가능하도록 24시간 안정적인 통신 서비스를 제공하는 위성인데 북한의 전파교란(재밍) 등에도 대응할 수 있는 기능을 갖췄다. 이어서 고고도 무인정찰기 ‘글로벌 호크’가 작전 상공을 정찰하며 전략 정보를 수집했다. 여기에 더해 육·해·공군의 특수부대 요원들이 적진에 침투해 세밀한 적의 동향을 보고하자 이를 바탕으로 스텔스 전투기 F-35를 비롯해 36대의 항공기로 구성된 편대가 적진의 저항세력을 타격해 방어를 무력화했다. 이어서 상륙병력들이 탑승한 국산 상륙기동헬기 마린온 등이 아파치 공격헬기의 엄호를 받으며 해안 침투했다. 해병대 특수수색대 요원들이 소형고무보트를 타고 은밀히 침투해 수중장애물을 제거하자 상륙돌격장갑차, 솔개급 공기부양정 등을 타고 강습요원, 장갑차 등이 빠르게 목표지역으로 돌격해 임무를 완수했다. 국군이 과거엔 장비와 인력, 경험부족으로 인해 자주적으로 수행하기 어려웠던 사단급의 대규모 상륙작전을 이제는 신속하게 수행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유사시 ‘작계5015’ 수행할 수 있나지난 9월 26일 국민의힘 대선 예비 후보 TV토론회에서 돌연 우리 군의 작전계획(작계)이 이슈화됐다. 우리 군의 ‘작계5015’를 놓고 일부 예비 후보 간 짧은 설전이 벌어진 것이다. 작계5015는 북한의 급변 사태, 국지 도발, 전면전 감행 등에 대응한 한미의 주요 방어·반격 작전 및 선제적 작전 방향을 담고 있다. 그중에는 반격 작전 차원에서 주요 지역에 대한 우리 해병대 등의 상륙작전도 포함돼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유사시 원산·함흥 등이 주요 작전 지역에 포함될 수도 있다. 북한의 도발시 아군의 빠른 상륙으로 적의 허리를 끊어 퇴로와 증원군을 차단하려는 것이다.우리 군은 한미 연합 상륙작전은 물론이고 자주적 합동 상륙작전도 성공시킬 수 있도록 역량을 향상하고 있다. 그런 흐름에서 1만 4,000톤급 대형 수송함(일종의 강습 상륙함) 2번함 ‘마라도함’이 올 6월 취역한 것은 큰 의미가 있다. 앞서 전력화된 1번함 독도함과 2번함 마라도함을 동시에 운용 시 한 번에 최대 1,000여 명에 육박하는 상륙 병력과 다량의 전투 장비를 수송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이는 미군이 상비하는 해병 원정 부대(약 2,200여 명 규모)에 버금가는 규모다.여기에 더해 기존의 천왕봉급 상륙함 4척과 고준봉급 상륙함 4척 등 여타 상륙 함정들까지 감안하면 연대급 이상 병력을 한 번에 상륙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해군이 추진 중인 계획대로 오는 2033년까지 3만 톤급 경항공모함을 건조해 전력화한다면 사단급 병력 이상을 일시에 적진에 쏟아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적 사정거리 밖에서 상륙 지점 초토화물론 북한의 방어 태세도 갈수록 진화하고 있다. 북한도 레이더를 비롯한 감시 인프라를 확충하고 있다. 주요 해안에는 기뢰, 지뢰, 철제 구조물 등 상륙 저지용 장애물과 공격용 화기들을 집중 배치한 것으로 전해진다.이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 군이 주목한 것이 미군의 ‘초수평선작전(OTH)’이다. 적의 탐지 범위나 공격 범위 밖의 수평선 너머에서 주로 미사일·함포·항공기를 동원한 원거리 공격으로 상륙 지점의 적군과 장애물들을 일소한 뒤 병력과 장비를 상륙시키는 방식이다. 이현무 한국국방연구원(KIDA) 전문위원에 따르면 초수평선 상륙작전은 적 해안으로부터 약 50해리(약 90㎞) 이상 떨어진 원거리 해상에서 공격을 가해 상륙 목표 지역을 초토화시킨뒤 병력을 목표 지점으로 돌격시키는 방식으로 전개된다.대한민국 해병대는 초수평선 상륙작전을 한국의 여건에 맞춰 ‘공지 기동 입체 고속 상륙작전’으로 재해석했다. 공지 기동이란 항공 전력과 지상군 전력의 긴밀한 협력으로 적을 빠르게 무너뜨려 전쟁의 주도권을 잡는다는 개념이다. 한 당국자는 “미군은 각 군종이 자체적으로 (폭격기 등) 항공력과 (인공위성 정보 등) 우주 자산을 동원할 수 있어 해병대나 해군이 일정 규모의 상륙작전을 독립적·입체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며 “우리 해병대도 올해 말까지 상륙 공격 헬기와 상륙 기동 헬기 등으로 구성된 항공단을 창설해 자주적인 항공 지원의 토대를 마련하고 (폭격기, 우주 감시 자산 등의 지원을 위해) 공군과도 긴밀히 협력할 것”이라고 설명했다.◆‘오마하 해변’의 참극은 없다일반인들이 상륙작전이라고 하면 떠올리는 장면은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 초반 약 30분간 펼쳐졌던 노르망디 상륙작전이다. 노르망디 오마하 해변으로 돌격했던 연합군 장병들은 속도가 느리고 엄폐 장갑도 부실한 상륙주정을 타가다가 적의 포격에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우리 해병대는 이 같은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해 상륙 돌격 장비의 무장·방호·기동력을 대거 높이고 있다.그런 차원에서 추진되는 상륙돌격장갑차-II사업은 1990년대 개발돼 노후화된 기존의 ‘한국형 상륙돌격장갑차(KAAV)’를 대체·증강할 신형을 개발·양산하는 프로젝트다. 2036년까지 단계적으로 상당량이 생산될 것으로 전망된다. 기존 상장차의 수상 속도 대비 거의 두배에 가까운 속도를 낼 것으로 추정된다. 구경 40㎜급 무인포탑으로 무장하고 방호력이 획기적으로 증강될 것으로 평가된다.상륙 공격 헬기는 기존의 국산 상륙 기동 헬기 ‘마린온’에 무장과 최신 항전 시스템 등을 장착하는 방식으로 2031년까지 개조·개발된다. 피탄시 생존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장갑이 강화되며 향후 유무인 복합 체계 구축 등을 통해 임무 수행 능력이 한층 향상될 예정이다. 상륙공격헬기가 개발돼 전력화하면 해병대가 자체적으로 공중 지원능력을 갖추게 돼 유사시 빠르고 안전하게 적진으로 돌입할 수 있다.◆시험대에 선 한미 연합작전 능력한미 연합 상륙작전 능력은 현 정부 들어서 시험대에 올랐다. 군의 한 관계자는 “아직 국군만으로는 대규모 합동 상륙전을 펼치는 데 한계가 있어 미군과의 연합작전 역량을 강화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그런데도 한미 연합 훈련 중 실기동훈련은 대대급 이하 규모로만 축소 운용되고 있어 대규모 연합 상륙작전의 실전적 경험를 함께 익히고 발전시키는 데 어려움이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쌍룡훈련’과 같은 대규모 한미 연합 상륙 훈련은 문재인 정부 들어 폐지된 상태다. 현 정부에선 대규모 실기동 훈련을 되살리기 어려운 만큼 차기 정부에서 복원할 수 있도록 대선주자들이 안보공약을 개발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실전적 교리·교범 확립도 시급하다. 불과 4~5년 전까지만 해도 해병대는 미국산 구형 UH-1H헬기를 주력 기동 헬기로 운용해왔다. 그마저도 수량이 많이 부족한 가운데 운용시간의 80~90%가량을 상륙작전 관련 훈련이 아닌 산불 진화 지원, 단순 인원 수송 등의 업무에 빼앗겼다. 그나마 국산 상륙 기동 헬기 마린온이 개발돼 점진적으로 전력화되고 있어서 다소 숨통이 트일 예정이지만 여전히 기타 임무 투입 시간이 적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이를 해소하려면 기동 헬기의 실전적 상륙 훈련 비중을 늘려 우리 군의 상황에 맞는 교리·교범을 발전시키고 체득시켜야 한다고 군사 전문가들은 지적한다.◆변화하는 전장 환경도 숙제미 해군을 견제하기 위한 중국의 반접근·지역거부(A2AD) 전략과 이를 추종한 북한의 무기 개발은 한미 연합 상륙작전의 최대 위협으로 떠오르고 있다. 중국은 다양한 사거리의 대함탄도미사일과 순항미사일을 개발해왔다. 특히 음속의 5배 이상으로 개발되는 극초음속 순항미사일은 기존의 함대 대공 방어 체계로는 요격하기가 극히 어려울 것으로 평가받는다. 북한도 최근 신형 장거리 순항미사일을 시험 발사한 데 이어 극초음속활공체(HGV)를 탑재한 탄도미사일 시험에도 나서고 있어 향후 지대함 미사일로 응용 개발될 우려가 있다.미군은 근래에 초수평선작전보다 진화한 개념인 ‘바다로부터의 작전적 기동(OMFTS)’ 개념을 발전시켜왔다. 그러나 이는 주변국과 동서로 좁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는 한국 군에는 적용하기 어렵다. 따라서 한국 여건에 맞는 대응이 필요하다. 유사시 북한 및 지원 세력이 한미 연합 상륙군을 탐지·추적하기 어렵도록 주요 상륙 함정들을 저피탐(스텔스) 형상으로 개량해야 한다. 적의 위성·항공 정찰 장비와 지상·해상 레이더를 선제적으로 교란·마비·파괴할 수 있는 역량도 확충할 필요가 있다. 또한 북한 주요 해역에 대거 깔려 있을 기뢰 등을 빠르게 해체할 수 있도록 소해함 등 인프라를 한층 확충해 한국전쟁 당시 ‘원산 상륙작전’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말아야 한다고 군 관계자들은 지적했다.상륙작전의 기본은 적의 측·후방을 기습 타격해 퇴로와 증원로를 차단하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종심까지 파고는 방향으로 상륙작전의 임무와 전략이 변화하는 게 선진국의 트랜드라고 군 관계자들은 전하고 있다. 따라서 상륙의 성공 못지 중요한 게 종심타격을 위한 빠른 기동력 확보와 후속 지원·증원군 확보다. 상륙에 성공하더라도 이후 진군 속도가 지체되면 적의 종심으로 파고들 길이 막히게 되고, 이런 상황에서 지원물자와 증원군이 적기에 도착하지 않으면 상륙군이 적진에 고립되기 때문이다.하지만 현재 우리 해병대의 도섭능력을 제한적이다. 과거보다 장비의 양적 질적 향상이 이뤄지긴 했으나 여전히 육군이나 해군이 쓰는 A급 물량보다 성능 낮거나 한 세대 이전의 구형을 보급 받고 있어서다. 전차, 장갑차, 전술차량 등이 대부분 그렇다. 전차의 경우 개발된지 반세기 가까이 지난 패튼 계열 탱크(M48 계열)를 근래에까지 사용하다가 지난 2018년에야 국산 구형 전차를 개량한 K-1E1탱크로 교체 받았다. 육군이 K2전차를 대거 보급 받고, 이어서 차기 전차개발까지 추진하면서 도태되는 K1전차 개량형을 해병대에 물려준 것이다. 한 예비역 영관급 장교는 “북한군의 전차가 대체로 노후화돼 해병대는 K1E1로도 충분히 돌파할 수 있다는 인식이 있었던 것 같은데 김정은 정권 이후 기존의 구형 ‘천마호’전차를 대체할 신형 전차(해외 호칭 ‘M2020 탱크’)를 개발해 전력화를 하고 있다”며 “신형 전차의 외형으로 보면 4세대 전체의 대표인 미국 에이브럼스 전차를 추종한 측면이 보여 만만히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닐 것”이라고 지적했다.장갑차도 해병대는 구형 국산 병력수송장갑차(APC)인 ‘K-200’을 운용 중이다. 반면 육군은 선진국의 동향을 반영해 기동성과 험지돌파능력, 방호력과 공격력, 내부공간 활용성 등이 확장된 보병전투차량(IFV)인 ‘K-21’로 전력을 구성하는 추세다. 그나마 소형 전술차량의 경우 속칭 ‘군토나’(K-131)에서 한국판 험비로 불리는 신형 K-151로 교체되고 있다. 방산업계의 한 관계자는 “K-151은 기존보다 도섭능력과 방호력이 크게 향상된 차량”이라며 “다만 해병대의 여타 차량들은 여전히 육군이 과거에 쓰던 구형 장비를 물려 받은 측면이 있어서 1m이상의 수심도 건널 수 있는 도섭능력에 미달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향후 이들 육상 기동장비들의 성능을 개선하고 물량을 확충하더라도 더 중요한 것은 작전을 결심하기 위한 군 통수권자를 비롯한 군 수뇌부의 결심이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하고 있다. 과거 연평도 포격사태 때처럼 수뇌부가 보복응징 수준을 놓고 우왕좌왕하다가 해병대 수준에서의 제한적인 응징에 그친 사례를 보면 북한이 보다 고강도 도발시 과연 전격적인 상륙전으로 보복응징하고, 종심까지 타격할 결심을 할 수 있을 지 불확실하다는 게 군 안팎의 평가다. 특히나 문재인 정부 들어서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고 비핵화를 이루기 위해 적극적인 대화에 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이로 인해 유사시 공세적인 대응태세를 수세적인 대응태세로 전환한 점이 문제가되고 있어 유사시 작계5015가 실효성 있게 결심돼기 어렵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따라서 차기 정부에 도전하는 각 대선주자들은 향후 안보공약과 정책을 수립할 때 대북 관여 전략과 공세적 대응태세간 균형을 맞춰 대북억제역량이 제대로발휘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당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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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산 상륙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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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의 3대 상륙작전으로는 인천·원산·흥남작전을 꼽는다. 인천상륙작전은 세계 상륙 전사에 길이 남을 명작으로 너무 유명하지만, 원산·흥남작전도 큰 의미가 있는 작전이었다.특히 원산작전은 우리 해군의 피해가 컸고 소해전(掃海戰)의 의미를 부각해 준 작전으로 오래 기억될 것이다.원산상륙작전은 1950년 9월 29일 서울 수복 기념식 직후 공식 논의가 시작됐다.환도식이 끝난 뒤 맥아더 장군은 조이 제독, 워커 장군, 알몬드 장군 등 휘하 지휘관들을 대동하고 서울시청을 방문한 자리에서 “또 다른 곳에 상륙작전을 실시해 전쟁을 종결시키겠다”고 선언했다.인천상륙작전이 끝난 지 며칠 되지 않았는데 또 상륙작전을 하겠다는 말에 의아해진 일부 참모들은 작전 지역이 38선 이북 원산이라는 점에 놀랐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은 일찍부터 이 작전을 계획하고 있었다.최초로 이 작전이 구상된 것은 도쿄 맥아더사령부였다. 이 제안을 받은 맥아더는 인천작전에 전념하는 동안에도 이를 머릿속에 담아 두고 있었다.그러다가 서울 탈환이 임박한 9월 26일 합동 특수작전기획단에 38선 이북지역 작전계획 수립을 명했다. 그는 미8군을 서쪽이나 동쪽 해안을 따라 북상시키면서 주공 임무를 수행케 하고, 그 반대편인 진남포나 원산에 상륙하겠다는 구상을 갖고 있었다. 다음날인 9월 27일 맥아더 장군은 작전참모로부터 원산 상륙작전(9 – 50작전) 계획을 보고받았다.이 계획은 첫째, 북한 정규군이 와해됐다는 것 둘째, 소련이나 중국이 참전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서울을 잃어 보급선이 끊긴 상황에서 유엔군의 총반격을 당해 패주하는 인민군의 목줄을 졸라 전쟁을 빨리 끝내려는 것이 맥아더의 구상이었다. 8군을 서쪽으로 진격시키고, 상륙군을 원산으로 올려보내 서쪽으로 이동시킴으로써 평양을 압박하려는 것이었다.그러나 인천과 마찬가지로 원산에 대한 이견이 나와 한동안 진통이 있었다. 상륙작전보다 육로를 통한 공격이 더 효과적이라는 의견이 제시됐고, 인천을 장악했으니 상륙작전을 하려면 동해안보다 서해안이 낫지 않겠느냐는 의견도 나왔다. 특히 해군 지휘부에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많았다.“10군단이 해상으로 돌아 원산으로 이동하는 것보다 지상으로 이동하는 것이 더 쉽고 시간도 단축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해군에서는 누구도 이런 작전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사람이 없었다.”원산상륙작전에 대한 조이 제독의 이 코멘트가 당시 미 해군의 생각을 대변하고 있다. 인천에서 남쪽으로 한참 내려가 남해안을 삥 돌아 동해로 북상하는 것이 비경제적이라는 의견이었다. 그러나 육군의 의견은 달랐다.“전술적 관점에서 바다를 통해 원산으로 이동하는 것이 경제적이다. 육상을 통한 이동은 언급할 가치가 없다. 불도저·대구경포·대형 트럭의 절반은 도로변에 남겨질 것이다.나는 북한 지역에서의 육상 이동은 어리석은 생각이라고 본다. 더욱이 38선 이북에서 동서 간의 통신은 매우 취약하다.”10군단장 알몬드 장군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말로 육상 이동을 반대했다. 지금처럼 도로가 잘 정비되지 않았던 그 시대에 크고 무거운 무기와 장비들을 좁은 육로로 이동시키기가 어렵다는 의견이었다.38선 이북을 작전지역으로 택하는 데도 정치적인 곡절이 있었다. 북한 침략군의 패색이 짙어지자 소련은 북한을 보호하기 위해 ‘칸막이’를 치려 했다. 유엔 무대에서 소련은 “만일 유엔군이 38선을 넘으면 유엔군은 침략자가 된다”고 역설했고 공산권 회원국들도 이 주장에 동조했다.이상하게도 인도의 평화 철학자 네루 수상의 지지를 받은 이 주장 때문에 유엔군은 일주일 가까이 38선 이북에 대한 군사행동에 발이 묶여 있었다. 궁지에 몰린 북한에 이 기간은 숨을 돌릴 귀중한 여유가 됐다.처음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논란이 있을 때 미 합동참모본부는 38선 이북 지역에 대한 지상작전에 동의했었다. 그러나 인천으로 가던 맥아더 장군에게 한 장의 긴급 전문이 전달됐다. 전문 내용은 트루먼 대통령이 38선 이북으로 적을 밀어붙이는 작전을 승인했지만 그것이 최종 결론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 작전을 수행하려면 최종적인 승인을 얻으라는 말이었다.그러나 대다수 유엔 회원국은 공산군의 침략으로 38선의 의미는 없어졌다고 보고 있었다. 그것은 한국의 평화와 안보를 위해 맥아더 장군이 38선을 넘어가 작전을 전개해도 무방하다는 뜻으로 해석됐다.“귀하의 군사적 목표는 북한군 파괴다. 이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38선 이북에서의 상륙·공수·지상작전을 포함한 모든 군사작전에 대한 권한을 귀하에게 부여한다. 단, 소련과 중공군이 북한에 진입하지 않았고 참전 통보도 없으며 우리 군사작전에 대항하는 위협이 없을 때에 한해 적용한다.”초조하게 본국의 회답을 기다리던 9월 27일 맥아더 장군에게 반가운 전보가 날아들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만주와 소련 국경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추가 지침이 날아든 것은 그로부터 이틀 뒤였다. 한국군 외에는 소·만 국경 가까운 곳에서 작전을 해서는 안 되며, 미 해군·공군도 중국과 소련 영토에서의 활동을 금한다는 지침도 함께 떨어졌다.이렇게 해 원산상륙작전은 겨우 추진력을 얻게 됐다. 원산상륙작전의 개념은 패주하는 인민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평양을 협공한다는 것이었다. 개성∼사리원∼평양 라인은 워커 장군의 8군에게 맡기고 알몬드 장군의 10군단을 원산에 상륙시켜 원산∼평양간 도로를 장악하고 워커 장군과 합류해 정주∼군우리∼영원∼함흥∼흥남 선까지 전진시킨다는 계획이다.맥아더 장군은 10군단의 원산 상륙일을 10월 20일로 잡았다. 그 계획을 달성하기 위해 해병대는 인천항에서 병력과 장비를 탑재시키고, 7사단은 부산항에서 탑재시키도록 조치했다. 인천항 한곳에서 하면 좋지만 인천의 항만시설이 부족해 부득이 두 곳으로 나눌 수밖에 없었다.알몬드 장군은 인천에서 지휘관 회의를 소집해 상륙작전 준비에 착수했다. 10월 3일까지 해병1사단과 미7사단이 미8군과 전선을 교대한다는 전제 아래 이동과 탑재 계획을 지시했다. 이 경우 원산까지의 이동 기간이 최소한 4일이 소요되지만 늦어도 10월 15일에는 원산상륙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다.인천상륙작전 때와 같은 지휘 체제를 복원하기 위해 해체됐던 제7합동기동부대(JTF7)가 부활됐다. 알몬드 장군에게 이양됐던 작전 지휘권도 다시 스트러블 제독에게 환원됐다. 원산상륙작전 참여부대 구성과 지휘관들은 인천상륙작전 때와 동일했으나 소해(掃海)작전 전대가 추가됐다. 한국전쟁 첫 소해작전을 위해서였다.38선을 넘어 북한 지역을 공격해도 좋다는 워싱턴의 ‘허락’을 받은 맥아더 장군은 원산 상륙작전 시행에 때를 맞춰 8군사령관 워커 중장에게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1. 본직은 명에 의해 10월 2일부로 규정돼 10월 19일부로 개정된 유엔군 공격 한계선 일체를 10월 24일 0시부로 철폐한다.2. 귀하는 귀하의 지휘 권한에 속하는 모든 부대에 명해 한국군과 함께 전력으로 한만 국경선으로 돌진케 하라.3. 본직은 이제 유엔군에 부과된 북조선군 격멸 임무가 달성될 때까지 귀하와 귀하의 지휘권 아래 있는 전 지휘관이 아무런 제한도 받지 않고 한만 국경선까지 진출할 수 있음을 보증하는 바이다.10월 23일자 일부인이 찍힌 이 전문은 10월 20일 원산작전 시작을 염두에 둔 것으로 압록강까지 진격시키려는 구상에서 나온 것이다. 한국군과 함께 전력을 다해 한만 국경까지 진격시키라는 이 명령은 한국인들에게 북진통일에 대한 기대를 한껏 부풀게 해 준 유명한 명령이 됐다.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같이 위태로웠던 것이 불과 한 달 전이었다. 부산 교두보를 지키기 위해 혼신의 힘을 쏟던 일이 옛날 얘기가 되고, 평양을 넘어 압록강 진격을 공언하게 됐으니 국민의 기쁨이 어떠했겠는가.미8군이 서부전선을, 미10군단이 동부전선을 담당한다는 방침에 따라 서부전선에 투입됐던 미 육군7사단과 미 해병1사단은 10월 2일부터 8군과의 교대를 시작했다.그 많은 병력과 장비를 일시에 이동시키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도로 사정도 나빴지만 도로가 피난민들로 길이 메워지다시피 해 더욱 복잡했다.유엔군이 38선 문제로 머뭇거리고 병력과 장비 이동 문제로 시간을 허비하고 있을 때, 한국군은 재빨리 움직였다. 이승만 대통령에게는 38선 문제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38선은 김일성이 먼저 침범한 선인데 인민군을 그 선 이북으로 쫓아내는 것으로 만족할 수는 없다는 것이 국민의 정서이기도 했다.포항전선에서 하루 15마일 속도로 북진을 계속한 한국군 제3사단은 10월 2일에는 양양 읍내에 사단 사령부를 설치할 수 있었다.한국군의 진격 속도가 그렇게 빨랐던 것은 북진통일에 대한 염원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 부대별로 북진속도 경쟁이 벌어져 갖가지 에피소드가 피어나기도 했다. 육군 22연대장 김응조 중령은 휘하 장병들에게 목표물을 첫발에 명중시키면 1계급 특진 약속을 내걸어 많은 성과를 거뒀다고 한다. 그런 혜택 때문에 북진 중 이등병에서 상사가 된 사병이 있었다 하니, 역시 메리트란 인간을 움직이는 동력인 모양이다.해군 동해전대의 적극적인 함포사격 지원과 측방 보급도 북진을 촉진시킨 요인이었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쫓기는 인민군이지만 그들과 수시로 교전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하루에 15마일씩 진격한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었을것이다. 38선 이북 지역에서는 적의 저항이 심했다. 10월 2일 양양에 입성한 3사단이 원산 점령에 8일이나 소요된 것을 보면 적이 일방적으로 패주만 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원산 남쪽 50km 지점인 통천 지역에서 거센 저항을 받았다.10월 10일 국군 3사단과 수도사단의 원산 점령은 맥아더 장군의 원산 상륙작전 계획의 수정을 초래한 쾌거가 됐다. 맥아더 장군은 이미 한국군에게 점령된 지역에 상륙작전을 감행할 이유가 없어졌으니 원산보다 더 북쪽인 흥남 상륙작전을 계획하도록 명령을 내렸다.한국군의 원산 점령으로 원산상륙작전은 육군의 무혈입성에 비유되는 행정 상륙작전이 됐다. 그러나 원산이 그렇게 쉽게 점령된 것은 아니었다. 적은 동해안에서 가장 중요한 항만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저항했다.북한 공식 전사에는 병력이 모자라 원산지역 당 조직과 당원, 그리고 근로자들까지 동원해 14일까지 방어전을 계속했다고 기록돼 있다. “산과 건물 등을 이용해 강인하게 싸웠다”는 표현에서 원산을 내주고 싶지 않았던 의지가 묻어난다.통천에서 적을 격멸한 3사단이 10월 9일 동해안을 따라 원산 동쪽에 진출했을 때 양구∼관양∼신고산∼원산 가도로 진격해 온 수도사단이 원산 남쪽에 당도했다. 동남쪽에서 원산을 협공하는 형국이 됐다.원산은 해안지역에 솟은 1500m 높이의 산자락에 불규칙하게 형성된 도시여서 인민군은 험준한 지세를 이용해 완강히 저항했다. 제24기계화 보병연대, 945해병연대, 원산경비대가 적의 주력이었다. 공식적으로는 10월 10일이 원산 점령일로 돼 있지만 실제로는 11일 저녁 무렵에야 점령이 끝났다. 10일 이른 아침부터 이틀 동안 치열한 시가전이 벌어졌다. 원산비행장이 확보된 것도 13일의 일이다.이렇게 원산이 점령됐지만 상륙군은 한동안 목적지에 오르지 못했다. 적이 원산 앞바다 영흥만에 빽빽하게 부설해 놓은 기뢰에 발목이 잡힌 것이다. 원산은 인천과 달리 물길이 좋고 밀물 썰물간 조고 차이도 없어 언제고 마음먹는 대로 작전이 가능한 곳으로 생각했다가 뜻밖의 복병을 만나 제해권을 유보당했다.인천상륙작전 당시부터 적이 중요 항만에 기뢰를 많이 부설하고 있다는 정보가 입수됐다. 실제로 서해상에서 활동하던 미 구축함이 기뢰에 접촉한 일이 있어 원산 앞바다인 영흥만에도 기뢰가 부설됐을 것으로 예상됐다. 그러나 그렇게 촘촘히 부설돼 있을 줄은 몰랐다. 훗날 확인된 일이지만 당시 북한은 소련으로부터 약 4000개의 기뢰를 도입, 3000개를 원산 흥남 앞바다에 부설했다.원산상륙작전 주력 부대인 미 해병1사단 병력과 장비 탑재는 10월 6일부터 인천항에서 시작돼 16일에야 원산을 향해 출항했다. 남해안을 돌아 835해리나 되는 항해 끝에 원산에 도착한 것이 10월 19일이었다. 다음 날부터 작전을 개시했으면 10월 20일 작전 개시 계획에 차질이 없었겠지만 기뢰라는 복병 앞에서는 막강 유엔군도 속수무책이었다.영흥만의 기뢰를 제거하는 소해작전이 끝날 때까지 할 일 없이 해상을 떠도는 ‘반복작전’을 할 수밖에 없었다. 반복작전이란 원산 앞바다에서 12시간 동안 울릉도를 향해 내려갔다가 다시 원산으로 올라가는 항해를 반복하는 것이었다. 파도가 거센 가을 바다를 일주일 동안 왔다 갔다 하는 해상생활에 지친 해병대원들은 화가 나서 요요(YO YO)작전이라고 불평을 터뜨렸다고 한다. 요요작전은 장병들에게만 불만이 아니었다.한국군이 원산을 함락한 날인 10월 10일 육군본부와 미8군 사령부는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물불을 가리지 않은 감투정신에 감동한 8군사령관 워커 장군은 “바다에 이 쾌거를 모르는 멍청한 군단 하나가 떠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대 병력도 아쉬운 마당에 군단 병력이 할 일 없이 바다를 떠돌아 전쟁 수행에 차질이 생긴 것을 비꼰 이 말은 워커 장군과 10군단장 알몬드 장군의 불편한 관계를 말해 주는 일화로 널리 알려졌다.워커 장군은 맥아더가 군단장인 알몬드를 군사령관인 자신의 휘하에 배속시켜 주지 않은 데 불만을 품고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맥아더 장군이 원산 대신 흥남 상륙을 검토하도록 지시한 것은 원산이 이미 한국군에게 점령돼 돌격상륙을 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엍다.3사단이 원산 턱밑에까지 진격한 10월 8일 맥아더 장군은 “만일 한국군이 목표일 전에 원산을 점령하면 미7사단은 원산 북쪽 이원(利原)으로 상륙시키고, 해병1사단은 그 북쪽인 흥남으로 상륙시키도록 검토하라”고 도일 제독에게 지시했다.이에 대해 도일 제독은 조심스럽게 이의를 제기했다. 이원은 기뢰도 적고 상륙 해안선도 양호해 돌격상륙이 가능하지만, 흥남은 앞바다에 기뢰가 많이 부설돼 소해에 많은 시일이 걸린다는 이유를 들었다. 이 의견에는 스트러블 제독도 동의했다. 흥남이 원산보다 기뢰제거에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는 것을 그도 알았다. 부족한 인원과 소해 장비로 두 해역에서 동시에 소해작전을 수행할 수 없다는 것도.스트러블과 도일 제독의 의견이 같다는 것을 확인한 조이 제독은 맥아더 장군에게 원래 계획대로 원산 상륙만 하자고 설득해 어렵게 승낙을 받아냈다.원산항으로 상륙 함정을 접안시키기 위한 영흥만 소해전은 10월 10일부터 착수됐다. 당시 태평양 해역에 있던 미 해군 소해부대는 제3기뢰전대였다. 제7합동기동부대에 배속돼 있던 이 부대는 스포포드 대령이 지휘하고 있었는데, 소해전대는 철제 함대소해함(AM) 4척과 목제 연안소해함(AMS) 6척뿐이었다.함대소해함이 4척이라고 하지만 1척만 정상 가동되고 있었고, 나머지 3척은 퇴역했다가 그중 2척만이 8월에 재취역한 상태였다. 스트러블 제독은 본국에 소해부대 증강을 요청해 구축함 1척, 소해구축함(DMS) 2척, 고속수송함(APD) 1척, 일본 소해정 8척을 배정받았다. 물론 한국 해군에서도 704함, 516함, 510함, 영등포(FS) 등 4척이 가세했다.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 해군은 500여 척의 소해함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 평화시대가 길어지자 소해전 예산이 즐어들고 기뢰전에 대한 관심도 사라져 소해부대는 겨우 명맥만 유지하는 정도였다. 원산상륙작전을 계기로 소해전의 중요성이 다시 인식된 것은 한국전쟁이 갖는 또 하나의 의미가 됐다.스포포드 대령은 10일 새벽 소해전대를 이끌고 영흥만에 도착했지만 막상 작전을 시작하려니 막막하기만 했다. 해도상에 나타난 원산의 지리와 수심 정도를 제외하고는 원산에 관한 정보가 아무것도 없었다. 원산 앞바다에 부설된 기뢰의 수와 종류·위치도 캄캄했고, 영흥만에 점점이 떠 있는 여러 섬의 적정과 포대 등에 관한 정보도 없었다.암중모색 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육안으로라도 기뢰를 탐색해 최단거리의 수로를 확보하는 방법뿐이었다. 미 순양함 워체스터함에서 발진한 헬리콥터가 소해함 앞을 날며 기뢰의 위치를 확인해 알려주면 기뢰의 선을 절단해 폭파시켰다.첫날 작전에서 폭파한 기뢰는 21개. 그런 속도로는 부지하세월이었다. 스포포드 대령은 다음날부터 항공 탐색의 폭을 넓히기 위해 초계기의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UDT(수중폭파반)를 활용, 탐색 활동을 강화했다. 폭파도 일일이 절단하는 방법에만 매달릴 수가 없어 폭격에 의한 폭파를 시도했다. 공중과 바다 속에서 기뢰의 위치를 파악해 보고하면 함재기가 날아가 폭격하는 방식이었다.10월 12일 항공모함 필리핀 시 함과 레이테 함에서 날아간 스카이레이더와 코르세어기들이 1000파운드짜리 폭탄 세 개씩을 싣고 날아가 목표 지점을 때렸다. 폭탄은 수압식 신관으로 조종돼 수심 20~25피트에서 터졌다.39대의 함재기가 벌떼처럼 날아가 바다 위에 폭탄을 쏟아부으면 바다 위에 수많은 물꽃이 피어오른다. 그것이 기뢰의 폭발로 인한 것인지 폭탄에 의해 생긴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많은 기뢰가 없어지는 것은 사실이었다.그러나 터진 것도 있고 안 터진 것도 있어 완전한 소해작전이 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소해함정들이 기뢰가 부설된 바다에서 전통적인 해저 계류기뢰 소해법을 병행했다. 이 작업은 매우 위험하지만 ‘완전한 청소’를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작전이 시작된 지 나흘째인 10월 13일 두 척의 미국 소해함이 기뢰에 접촉돼 침몰당했다. 플레지함은 정오가 조금 지나 임무를 마치고 외해로 나가려고 방향을 바꾸는 순간 바다에 떠다니던 기뢰에 선체가 닿아 폭발했다.그 큰 배가 순식간에 가라앉는 것만 보아도 기뢰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짐작할 수 있다. 포격을 당해 치명상을 입어도 침몰까지는 상당한 시간 여유가 있는 법인데, 기뢰는 부딪치면 그 자리에서 침몰이다.상공에서 초계 임무를 수행하던 중 이를 목격한 함재기의 연락을 받고 달려간 소해구축함 엔디코트가 즉시 단정을 내려 구조작전을 폈다. 배에서 탈출한 승조원은 구조됐으나 탈출 여유를 갖지 못한 사람들은 배와 함께 수장됐다.두 척의 소해함 침몰로 인한 피해는 사망·실종 13명, 부상 79명이었다. 이를 계기로 UDT가 본격적으로 투입됐다. 대원들이 물속으로 들어가 기뢰의 위치를 확인해 부표를 띄워 위험 지역 접근을 예방했다.한동안은 아무 일이 없었다. 그러다가 10월 18일 집중적인 피해가 발생했다. 바로 우리 해군의 피해였다. 영흥만 외해에 떠 있는 여도(麗島) 남쪽 해역을 탐색하던 한국 해군 516정과 일본 소해정 19호가 갑자기 천지를 진동시키는 굉음을 일으키며 폭발됐다. 손 써볼 새도 없이 침몰됐다. 그리고 LST영등포는 대파 되였다,이 보고를 받고 나는 한동안 머릿속이 텅 빈 것 같았다.배와 함께 수장된 해군 장병들의 고혼을 떠올리면서 지금 나는 잠시 붓을 놓고 명복을 빈다. 또 그 배들이 어떤 배인가. 해군 초창기 그런 배 한 척을 갖기 위해 전 장병이 모금운동을 벌였다는 눈물겨운 얘기를 들어온 나로서는 인명의 손실 못지않게 함정의 손실도 가슴아팠다.UDT가 확인한 결과 우리 배들을 침몰시킨 기뢰는 자기(磁氣)기뢰로 확인됐다. 육안으로는 식별되지 않는 기뢰였으니 운명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기뢰는 부설방법에 따라 계류(繫留)기뢰, 해저(海低)기뢰, 부유(浮遊)기뢰로 분류된다. 기뢰를 물에 띠워놓고 선으로 연결하여 바다밑바닥에 닻으로 고정시켜 놓은 것을 계류 기뢰라고 한다. 해저기뢰는 바다 밑바닥에 앉혀놓은 기뢰이며 부유기뢰는 바다위에 띠워놓아 조류 및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이동하는 기뢰다. 또 기뢰는 폭팔하는 방식에 다라 접촉(接觸)기뢰와 감응(感應)기뢰로 분류한다. 함정이 지나가다 부딛칠때 그 충격으로 폭팔하는 기뢰가 접촉기뢰다. 그리고 함정이 지나갔 때 발생하는 압력, 자장(磁場), 음향등의 제 요소에 감음하여 폭팔하는 기뢰를 감응(感應)기뢰라고 하며 자기기뢰, 압력기뢰, 음향기뢰등이 이에 속한다. 지금은 기뢰탐지 소나(mine hunting sonar)가 많이 향상되었찌만 6.25당시는 당하면 운명으로 돌릴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앉아서 당하기만 하면 전쟁에는 진다. 방법을 찾아야 한다. 자기기뢰처럼 보이지 않는 기뢰가 어디에 부설됐는지를 알아내려면 그것을 설치한 사람을 찾아내면 된다.UDT 대원들은 기뢰가 묻혀 있는 위치를 알아내기 위해 현지 주민들을 접촉하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만난 사람은 웅도 주민이었다. 기뢰를 부설하려면 현지 주민의 협조 없이는 안 될 것이라는 추정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웅도는 영흥만 입구에 있는 작은 섬이다. 소련의 기뢰 장교들은 1950년 7월부터 이 섬 주민들을 소집해 기뢰에 관한 교육부터 시켰다. 기뢰의 원리와 성능을 알아야 운반과 설치, 관리에 그들을 동원할 수 있지 않겠는가.웅도 주민들은 친절했다. 소련 기뢰 장교들이 인민군 해군장교 몇 명을 데리고 섬에 와서 주민들을 모아 기뢰 교육을 시킨 일부터, 운반과 부설에 동원됐던 사람들의 이름과 필요한 정보를 낱낱이 알려 주었다. 그 사람을 만나 보자고 하면 찾아서 데려와 주기도 했다.특히 원산역장과 기뢰창 근무 경력자들의 증언은 귀중했다. 그들은 어떤 모양의 기뢰가 언제 몇 개씩 들어 왔는지를 잘 기억하고 있었다. 영흥만에 부설된 기뢰의 종류와 수를 가늠할 수 있었다. 그들의 진술을 종합하면 기뢰 부설에 종사한 소련 장교는 약 30명이었고, 부설에 동원된 선박은 32척이었으며, 부설된 기뢰는 3000개, 부설이 끝난 것은 10월 4일이었다.소련 장교들은 바지선에 선로를 깔고 그 위에 기뢰를 얹혀 바다로 나갔다. 목적 해역에 도착하면 섬 주민들을 시켜 기뢰를 밀어 바다에 떨어뜨렸다. 그래서 정확한 위치가 파악됐다. 굵은 전선에 고압전류를 흐르게 해 바다 속을 훑으며 끌고 가면 자기기뢰가 펑펑 터졌다.소련 함정들이 주로 이용하던 뱃길 ‘러시아 수로’의 소해가 끝난 것은 소해작전 개시 2주일이 지난 10월 25일 오후였다. 이제 상륙이었다. 오래 바다를 떠돌던 군단병력이 드디어 뭍에 올라 북진을 계속하게 됐다.그러나 인천 때처럼 본격적인 작전을 할 필요는 없었다. 원산은 이미 우리 수중에 들어 와 있었기 때문에 비(非)돌격 상륙 명령이 떨어졌다. 적의 저항이 없는 ‘행정상륙’이었다.수송선 빅토리아호에서 오랜 선상생활을 보낸 한국 해병대 제3대대(대대장 김윤근)와 제5대대(대대장 김대식)는 27일 미 해병1사단에 배속돼 원산항 북쪽 해안인 갈마반도에 상륙했다.“이번만은 역사가 우리보다 앞서갔다.”상륙이 끝난 뒤 스미스 해병1사단장이 남긴 이 코멘트는 원산상륙작전의 성격을 말해 주는 유명한 코멘트가 됐다.3대대는 미 해병7연대, 5대대는 미 해병 1연대 배속이었다. 원산 고급중학교에서 숙영을 마치고 곧바로 미군 트럭 편으로 덕원으로 진격했다. 덕원은 원산 서북쪽 교외지방으로, 원산~평양도로와 원산~함흥도로가 분기되는 교통의 요지다.덕원 천주교회를 임시 숙소로 배정받은 장병들은 ‘신명을 바쳐 조국을 수호하겠다’는 선서를 했다. 장진호 방면에 집결한 적을 섬멸하기 위해 이동한다고 했다. 북으로 북으로 달려 도착한 첫 목적지는 함흥이었다. 그러나 얼마 후 트럭은 다시 남쪽으로 내달렸다. 미 해병1사단 작전 배속이 해제돼 다시 원산으로 돌아간 것이다.5대대 역시 북으로 이동하다가 배속 명령 해제로 10월 31일 원산으로 되돌아갔다. 뒤에 알게 된 일이지만 금강산 지역에 준동하는 인민군 패잔병들을 소탕하기 위해 한국 해병대를 후방으로 빼돌린 것이었다. 깊은 산속에 숨어든 인민군 패잔병 세력이 태백산맥을 타고 북상하다가 금강산 남쪽 건봉사 지역과 북쪽인 통천 일대 산악지역에 근거를 마련하고 인근 해안지역에 출몰하면서 양민들을 괴롭히고 있었던 것이다.기뢰라는 복병을 만나 원산상륙작전이 늦어진 사이 서부전선에서는 급속한 북진이 이루어졌다. 상륙군을 평원(평양~원산) 가도에 배치해 서쪽으로 진격시키려던 계획도 수정됐다.평양이 이미 점령됐던 것이다. 그러니 서쪽으로 이동시켜 미8군과 함께 평양을 협공하게 하려던 당초 계획이 바뀐 것이다. 그래서 상륙군의 진로가 북으로 변경됐다.임진강을 건넌 국군1사단과 7사단, 그리고 미 기병1사단 사이에는 먼저 평양을 점령하려는 로드 레이스가 벌어졌다. 서울탈환전 당시 서로 먼저 서울에 입성하기 위해 경쟁했던 것과 같은 현상이었다.평양 레이스의 승자는 백선엽 사단장이 이끄는 1사단이었다. 고랑포를 떠난 1사단은 하루 20km씩 진격해 10월 19일 170km 떨어진 평양에 입성했다. 영흥만에서 소해작전이 한창 진행되던 시기였다.21일에는 평양 비행장에서 적 수도인 평양 점령 축하 열병식이 열렸다. 미 제5기병연대 F중대 200여 명이 벌인 열병식에는 맥아더 장군, 워커 장군, 스트래트 메이어 미 극동 공군사령관이 참석했다.맥아더 장군은 축사를 마친 뒤 “지금부터 96일 전에 한국 땅에 상륙한 사람은 1보 앞으로 나오라”고 명령했다. 앞으로 나온 사람은 5명뿐이었다. 그중 3명은 얼굴이나 손에 피묻은 붕대를 감은 부상자였다. 200여 명의 중대원 가운데 초기에 투입된 사람이 5명뿐이었다는 사실은 한국전쟁 초기 유엔군의 인명 피해가 그만큼 컸다는 것을 말해 주는 자료가 됐다.30일에는 김일성광장에서 평양 시민 환영대회가 열렸다.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든 평양 시민들이 광장을 가득 메운 이 행사에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유명한 ‘압록강 수통물’이 배달됐다.평양 점령 닷새가 지난 10월 23일 한·만 국경까지 진격하라는 맥아더 장군의 명령이 떨어지자 이번에는 한국군 부대 사이에 압록강 레이스가 벌어졌다.제일 먼저 압록강 물을 대통령에게 보내려는 이 경쟁에서는 6사단 7연대 1중대가 승리의 영광을 차지했다.훗날 주월 공사를 지낸 이대용(예비역 준장) 대위가 지휘한 1중대 대원들은 평안북도 초산지역으로 진격해 압록강변에 이르렀다. 중대원들은 수통에 물을 담으며 통일이 다 된 것 같은 감회에 젖었다.“아, 이게 압록강 물이란 말인가.” 환영식장에서 압록강 물이 담긴 수통을 받아든 이대통령이 감격에 겨운 표정으로 수통을 들어올리며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원산상륙작전은 워커 장군으로부터 ‘멍청한 군대’라는 조롱을 받아가면서 강행한 작전이지만 나름대로 의미를 지닌 작전이었다. 11월 초 국방장관과 육군참모총장이 참석한 1군단 지휘관 회의에서 북진 속도를 높이는 문제가 나오자, 이종찬 장군은 “방한복도 없이 사단을 동태로 만들 작정이냐”고 불만을 토로했다. 송요찬 장군도 “방한모에 면장갑이라도 주지 않고 무슨 면목으로 진격을 호령할 수 있겠느냐”고 동조했다.1군단에 겨울 보급품이 지급된 것은 원산상륙작전 이후였다. 하루 1500톤이 소요되는 보급품은 육로로는 도저히 수송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해군은 원산 앞바다 소해가 끝난 뒤 흥남 앞바다 기뢰까지 제거해 흥남항을 보급기지로 삼았다.기뢰가 한미 양국 해군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는 것과 군단 병력을 일주일이나 바다 위에 묶어 두었다는 사실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원산작전 이후 미 해군참모총장 셔먼 제독은 “우리가 가고자 하는 시간에 가고 싶은 장소에 갈 수 없다면 우리는 제해권을 확보했다고 말할 수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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