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타가와 히로시게 | 에도시대 우키요에 | 문화부흥으로 인해 살기 좋아지면서 생긴 죠닌문화 그리고 목판화로 새겨진 서민들의 풍속화! 모든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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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먹듯 쉬운 미술! 미술식탁!
일본의 17~19세기 에도시대에 서민들의 일상을 담은 풍속화(목판화)
우키요에에 대해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0:14 우키요에란?
0:20 우키요에의 발달 배경
1:23 가츠시카 호쿠사이 ‘가나가와의 큰 파도’
1:46 서양과 영향을 주고 받은 우키요에
2:37 우타가와 히로시게 ‘대교에 내리는 소나기’
2:53 우키요에에 매력을 느낀 고흐
3:24 우키요에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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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 히로시게 = 우타가와 히로시게 – 그 어느날 오후

우타가와 히로시게(歌川重廣:1797~1858)는 탁월한 재능을 소유한 우키요에(浮世繪) 화가였다. 그는 에도(江戶)에서 세습적인 직업으로 불 끄는 소방관 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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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ongisau.tistory.com

Date Published: 2/1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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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타가와히로시게 (歌川重廣)의우키요에풍경화 나타난일본전통 …

우타가와히로시게(歌川重廣)의우키요에풍경화(浮世繪風景畵)에. 나타난일본전통교량의특징과표현기법. 문지영1). ① 작품명에 거론된 교량명의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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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yooshin.co.kr

Date Published: 10/1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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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타가와 히로시게

우타가와 히로시게는 에도 시대 말기의 우키요에 화가이다. 본명은 안도 시게우에몬으로, 안도 히로시게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었다. 간략히 보기자세히 알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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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artsandculture.google.com

Date Published: 6/2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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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타가와 히로시게(歌川重廣) 도카이도(東海道)의 53경치>를 …

홍대신문 모바일 사이트, 기사 상세페이지, 국립중앙박물관 3층 아시아관 중 일본실에서 전시되고 있는 우키요에(浮世絵) 작품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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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hiupress.hongik.ac.kr

Date Published: 11/2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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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키요에 – 나무위키:대문

안도 히로시게 / 우타카와 히로시게의 도카이도 53역참 중 16경 ‘간 … 또한 기타가와 우타마로 등의 작품을 비롯하여 많은 유명작품의 가짜가 에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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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4/2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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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시대 우키요에 | 문화부흥으로 인해 살기 좋아지면서 생긴 죠닌문화 그리고 목판화로 새겨진 서민들의 풍속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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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우타가와 히로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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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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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많이 온다-우타가와 히로시게

임창섭 미술평론가 시립미술관 학예연구관

장마철이다. 우타가와 히로시게의 ‘다리에 쏟아지는 소나기’만큼 소나기를 서정적으로 표현한 그림은 드물다. 어스름한 저녁, 쏴아아 다리에 쏟아지는 빗줄기, 이리저리 맘 급한 이들의 발걸음. 그 와중에 비를 피하기 위해 머리에 쓴 것들은 제각각이다.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다리에 있는 사람들 마음을 고스란히 읽히게 한다. 이 그림은 ‘우키요에’라는 일본 다색 목판화로 ‘명소 에도 100경’ 시리즈 중에 하나이다.

1800년대 일본 에도(지금의 동경)는 상업이 발달하면서 자본이 형성되자, 상인들 사이에 다양한 취미들이 생겨났다. 일본씨름 스모나 공연의 일종인 가부키 등이 엄청난 성황을 이루었다. 여기에 일본 미술문화에 독특한 장르인 다색 목판화도 발전에 발전을 더했다. 이것은 서로 친밀감 혹은 신뢰를 쌓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 달력이나 선물로 주고받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손으로 그린 그림보다는 저렴하면서 많은 이들에게 동시에 선물로 줄 수 있는 것이었는데, 자신만의 개성과 품위를 알리기 위해 돈을 아끼지 않고 인쇄하다보니 점점 세련돼졌다. 유명한 화가에게 작품을 의뢰하거나, 목판을 파는 조각사나 인쇄공을 고용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자 돈이 잘 벌리는 사업으로 퍼지면서 더욱 다양하고 유명한 화가의 그림으로 제작되면서 에도를 대표하는 문화가 됐다.

우타가와 히로시게作 ‘다리에 쏟아지는 소나기’ 명소 에도 100경 시리즈, 34×22.5cm, 1857.

우키요에의 기본적인 제작방법은 화가가 그린 그림을 조각공이 정교하게 목판으로 파고, 그것을 인쇄공이 종이에 찍는 것이다. 다만 색을 얼마나 분리해서 여러 판을 만드느냐에 따라 정교함이 차이난다. 하지만 작품 혹은 예술이기보다는 이익을 내야하는 상품이기에 추가제작을 하거나, 인기 있는 것들은 판을 줄여 찍거나 가지고 있는 색으로 바꾸어 대량으로 찍어내기도 했다. 또 남녀가 성교하는 장면이나 남녀의 성기를 과장한 그림(일명 춘화)을 찍어 책으로까지 만들어냈다. 그래서 한때 우키요에의 내용을 신고해서 검열을 받아야 하는 일까지 생겼다. 이처럼 인기가 넘쳐 생산량이 넘쳐나자 유럽에 수출되는 도자기를 포장하는 용지로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도자기를 포장한 종이에 인쇄된 그림이 예민한 시각을 가진 유럽 화가들에게 눈에 띈 것은 당연했다. 처음 발견한 이는 ‘마네’라고 하는데 섬세한 묘사와 단순한 색채 그리고 다양한 화면구도를 알아보고 주변의 인상파 친구들에게 알렸다. 그 중에서 고흐는 ‘비 내리는 다리’, ‘자화상’에 배경으로 사용하였고, 특히 ‘탕기영감의 초상화’ 배경에는 여러 장의 우키요에를 그대로 베껴 넣었다. 일본에서는 상품 혹은 포장지에 불과했던 것이 인상파 화가들에게는 그들의 예술세계를 창조하는데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이런 현상을 미술사학계에서는 ‘자포니즘'(Japonism)이라고 부르는데, 19세기 후반에 서양미술에 나타난 일본미술의 영향과 일본적인 취향을 즐기고 선호하는 현상을 말한다. 이것은 곧 우키요에부터 시작된 것이다.

‘우키요에’ 이름은 15세기 무렵 근심어린 세상이라는 뜻인 ‘우키요’라는 말에서 나왔다. 나라가 안정되고 평화시대가 되자 어느 덧 당장의 행복을 따르려는 세태로 변했다. 그러자 우키요는 즐기고 살자는 ‘우키우키’라는 말로 바뀌었는데, 이것이 에도시대 후반에 ‘새로운 유행’ 혹은 ‘당대풍(當代風)’이라는 뜻이 되었다. 여기에 그림이라는 뜻인 ‘에’를 붙여 우키요에는 새롭게 유행하는 그림 혹은 ‘당대(現代) 그림’이라는 의미로 해석하면 정확할 것이다.

목판화는 판화제작 특성상 원본은 사라지고 복제품만 남는다. 하지만 남아있는 수많은 우키요에는 하급품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그것은 판화라는 장르의 독창성을 인정하는 것이기도 하고, 그 자체가 독창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본을 원작가의 감독도 없이 베껴낸 것은 단지 복제일 뿐이다. 겉모습은 모방할 수 있지만, 작가의 예술의지는 모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복제는 ‘품(品)’의 ‘ㅍ’도 붙이기 어렵다.

우타가와 히로시게 ‘다리 위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

우타가와 히로시게 ‘다리 위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1857, 목판화)

일본이 개항하면서 도자기 등이 유럽으로 대량 건너왔다.

유럽 미술인들은 물건을 싼 종이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종이에 그려진 그림 때문이었다.

이런 그림을 ‘우키요에(浮世繪)’라고 한다. 대체로 16세기에 시작된 풍속화로 일상부터 풍경, 때로는 춘화까지 포함한다. 평면성과 과장성, 파격적인 구도가 특징이다.

18세기 후반 대표적인 작가는 가쓰시카 호쿠사이, 우타가와 히로시게다.

이 그림은 내 눈을 사로잡은 히로시게(1797-1858)의 ‘다리 위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1857)다.

‘아, 비를 저렇게 강한 선으로 표현할 수도 있구나’하는 첫 느낌이었다.

우키요에는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강한 감명을 주면서 ‘자포니즘’(Japonism)이라는 유향까지 만들었다.

마네와 모네, 드가, 고흐에게 준 영향은 지대했다.

18세기 동아시아 미술에서 조선의 회화는 청나라와 일본에 전혀 뒤지지 않었다. 정선부터 김홍도, 이인문, 신윤복으로 이어지는 회화는 변화의 시대에 어울리는 상승의 기운을 얻고 있었다.

하지만 세도정치와 쇄국의 결과로 실학은 멈췄고, 에너지는 소멸되고 말았다.

화원(畫員)의 그림이 쇠퇴하면서 이름도 없는 작가들의 그림인 민화가 성장했지만, 민화를 발전적으로 계승할 동력이 약했고, 널리 알릴 통로는 없다시피 했다.

유럽으로 건너간 그림이 우키요에가 아닌 민화였다면, 하는 상상을 해본다.

서툴러 보이지만, 민화에는 익살, 과장, 소박 등의 정서가 색채와 조화롭게 호흡을 맞추고 있다.

인상주의 화가들이 우키요에에 반했던 것은 구도와 색상의 배합이었지, 그림에 숨은 정서에 감응했던 건 아니다.

민화를 봤다면 그 상상력과 대담함을 찬탄했을지도 모른다.

안도 히로시게 = 우타가와 히로시게

19세기 우키요에 판화의 대가 중 한 사람인 우타가와 히로시게는 고흐가 사랑했던 화가로도 유명하다. 일본이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참가하면서 파리 사교계와 문화계에는 일본 열풍이 불어 닥쳤고, 유럽 서양 미술 전반에 그 영향을 떨쳤다. 이를 ‘자포니즘(Japonism)’이라고 하는데, 우키요에는 마네, 모네, 로트렉, 보나르, 고흐 등 수많은 화가들을 매료시켰다. 특히 고흐는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 〈탕기 영감의 초상〉, 〈아고스티나 세가토리의 초상〉 등의 배경에 우키요에를 그려 넣었을 뿐만 아니라 우타가와 히로시게를 좋아해 〈에도 명소 100경(名所江戶百景)〉을 유화로 모사할 정도로 심취해 있었다.

우타가와 히로시게는 일본의 풍경을 서정적이고 시적으로 그려 낸 화가이다. 그는 1797년 에도의 변두리인 아즈마지에서 하급 무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안도 도쿠타로로, 안도 히로시게라고도 불린다. 그는 13세 때 부모를 연이어 잃고 가장이 되었고, 아버지의 직업을 세습하여 에도 성의 소방일을 담당하는 무사로 일했다. 그러나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그는 15세 무렵 우타가와 도요히로(歌川豊廣)의 문하에 들어갔다. 실력을 인정받은 그는 이듬해 스승에게서 우타가와 히로시게라는 이름을 받았고, 22세 때인 1818년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한 장짜리 판화 작품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도요히로의 문하에서 약 17년간 가부키 배우와 미인을 소재로 한 판화를 제작하면서 여타 우키요에 화가와 비슷한 길을 걸었다. 그러나 화가로 활동하면서도 무사의 일은 계속했다. 그는 1823년 조부인 주에몬의 아들 나카지로에게 일을 물려주고 우키요에에 전념했다.

1828년 스승 도요히로가 세상을 떠났다. 이때 2대 도요히로의 자리를 물려받을 것을 권유받았지만 자신만의 작품을 그리고 싶었던 히로시게는 이를 정중히 거절했다. 2년 후 히로시게는 ‘이치유사이(一遊齋)’라는 호로 〈동도명소(東都名所)〉를 발표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풍경화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도카이도의 53경치〉 중 〈간바라〉

〈도카이도의 53경치〉 중 〈쇼노〉

〈도카이도의 53경치〉 중 〈니혼바시〉

그의 작품은 전통적인 일본 풍경화에 서구의 원근법과 빛의 변화를 표현하는 기술을 적용한 대담한 것이었다. 그는 교토, 나라, 에도 전역을 두루 여행하면서 현장에서 직접 관찰하고 사생한 바를 토대로 현실의 풍광을 그려 냈다. 특히 섬세한 필치와 차분하고 조화로운 색상으로 서정적이고 시적인 분위기를 묘사하는 데 뛰어났다.

히로시게의 대표작 〈도카이도의 53경치(東海道五十三次)〉는 1832년 가을, 왕실에 말을 진상하는 막부 관리로 선발되어 교토에 올라가면서 한 스케치를 바탕으로 그린 그림이다. 도카이도는 에도에서 교토에 이르는 도로인데, 이 길을 통해 에도와 교토 간에 물자와 사람이 이동했다. 히로시게는 여행에서 돌아온 즉시 작품을 시작했다. 이 연작은 에도의 니혼바시에서부터 교토의 가모가와 삼조대교까지 53개 역의 풍경을 그린 것으로, 계절과 날씨,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풍광을 섬세한 필치와 따뜻한 색감으로 표현한 걸작이다. 이 작품은 훗날 파리의 살롱을 중심으로 크게 유행하면서 인상파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

히로시게는 〈오미 8경〉, 〈오사카 명소 그림〉, 〈교토 명소 경치〉, 〈기소가도의 69역참〉 등 수많은 명소를 그렸으며, 이 중에는 이미 간행된 그림을 토대로 그린 것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대표작은 〈도카이도의 53경치〉와 같이 스스로 관찰한 바를 토대로 한 작품들이다. 그는 사물을 직접 보고 묘사한 것을 토대로 현실 세계를 옮겨야 진실한 그림이라고 생각하고, 직접 답사하여 눈으로 확인한 후 이를 자신의 내면 세계와 조화시켜 표현했다.

히로시게는 직접 관찰을 토대로 지형을 세세히 묘사하면서도 자신만의 독창적인 원근법을 사용하여 화면을 구성했다. 또 계절과 날씨, 시간의 흐름에 따른 광선 변화를 표현해 서정적인 분위기를 부여했다. 그는 일상적인 상황에서도 시적인 감수성을 발견해 내는 감성적인 인물이었는데, 그의 그림은 이런 특유의 감수성에 전통 일본화풍이 조화된 것으로 평가된다.

명소 에도 100경〉 중 〈대교에 내리는 소나기

〈명소 에도 100경〉 중 〈가메이도 매화가 있는 찻집〉

평생 일본의 전통적인 자연관을 담은 풍경화를 그린 히로시게는 ‘눈과 달과 꽃의 화가’로 불리기도 한다. 이는 말년에 발표한 〈설월화〉 3부작 〈기소지의 산천〉, 〈가나자와 8승지의 야경〉, 〈아와나루토 풍경〉 때문에 생긴 별칭인데, 이 연작은 일본의 자연을 가장 일본적인 감수성과 색채로 표현한 동시에 보편적인 감성에 호소하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히로시게는 말년에 〈명소 에도 100경〉을 비롯해 〈에도 근교 8경〉, 〈가나자와 8경〉 등 에도와 근교의 풍광을 그렸다. 특히 〈명소 에도 100경〉은 에도 토박이로서 자신이 가장 사랑하고 친밀하게 여겼던 에도의 100가지 풍경을 그리는 야심 찬 계획이었다. 그중 〈대교에 내리는 소나기(大はしあたけの夕立)〉와 〈가메이도의 매화가 있는 찻집(龜戶梅屋鋪)〉은 고흐가 우키요에에 매료된 계기가 되었다. 고흐는 히로시게의 이 그림들을 모사하기도 하고, 그림의 배경에 우키요에를 넣을 정도로 심취했다.

그러나 야심만만한 계획인 〈명소 에도 100경〉은 히로시게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완성되지 못했다. 원인은 당시 에도에 창궐한 콜레라였다고 한다. 임종 당시 히로시게는 “동로(東路)에 붓을 놓고 나그네의 하늘, 서방의 명소를 바라보네.”라는 와카를 남겼다. ‘에도의 집에 붓을 놓고 이제부터 서방정토로 명소를 구경하러 떠난다’라는 시구는 평생 자연을 관찰하고 그린 화폭 위의 시선답다고 할 만하다.

<우타가와 히로시게(歌川重廣) 도카이도(東海道)의 53경치>를 감상하고

도카이도의 53경치 中 “니혼바시”와 “가케가와”

국립중앙박물관 3층 아시아관 중 일본실에서 전시되고 있는 우키요에(浮世絵) 작품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우키요에는 일본과 아시아를 넘어 서양에서도 폭넓게 인식되었을 정도로 판화라는 장르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다. 무로마치 시대부터 제작되기 시작하여 에도 시대에 최고 전성기를 맞이하는 우키요에는 일본의 풍속적인 장면을 소재로 삼아 ‘덧없는 세상’을 표현한 그림이다. 우키요에가 처음 제작되기 시작했을 무렵, 일본에서는 이미 작가 미상의 미인도 병풍들이 성행하고 있었다. 이러한 흐름과 같이 하여 초기의 우키요에는 아름다운 여인들이나 가부키 배우들을 소재로 하고 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우키요에는 한계점에 다다르게 되는데, 가츠시카 호쿠사이(葛飾北斎)가 등장함으로써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물론 호쿠사이가 등장하기 이전에 하나의 삽화처럼 취급되던 우키요에를 작가의 이름을 건 작품으로 인식시킨 히시가와 모로노부(菱川師宣), ‘니시키에’(錦絵)라는 회화 같은 정교한 목판화 장르를 창시한 스즈키 하루노부(鈴木春信) 등 우키요에의 시작과 발전을 이끈 중요한 화가들도 존재하였다. 그러나 특정 인물이 주요 소재였던 우키요에에 이전에는 없던 ‘산수판화’라는 장르를 새로이 창시했다는 점에서 호쿠사이는 굉장히 중요하게 평가된다. 그의 대표작으로 ‘후지산 36경’을 꼽을 수 있다. 이는 과감한 구도와 서정성이 가미된 화면을 보여주며, 서양의 원근법을 우키요에의 대표적인 특성인 평면성과 결합하여 독특한 화면을 구현해낸다.

호쿠사이의 ‘산수판화’ 장르와 독특한 화면구성을 이어받은 화가가 우타가와 히로시게(歌川重廣)다. 그의 대표작으로 ‘도카이도의 53경치’를 꼽을 수 있다. 도카이도는 에도시대에 중앙에서 지방통치를 쉽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5개의 도로 중 하나였다. 이 도로 중간중간에는 53개의 역참이 있어 길을 떠난 이들이 쉬어가거나 말을 타기도 하고 유흥을 즐기기도 했다고 한다. 히로시게는 역참과 도시 곳곳에서 보이는 풍경들을 53개의 우키요에 작품으로 구현해냈다. 히로시게는 지형의 세부적인 특징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동시에, 자신만의 독특한 화면 구성법으로 이를 새로이 해석하였다. 호쿠사이와 마찬가지로 서양 원근법이 가미된 구도와 계절에 대한 암시를 드러내는 묘사를 활용함으로써 화면마다 색다른 미감을 표출해낸다. 53개의 화면들 중에는 강이나 냇가를 가로지르는 다리가 다수 등장한다. 이는 도카이도가 지나가는 지역들이 대부분 바다와 면해 있어 도보로는 강을 가로질러 가야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역적 특색에서 비롯된 건축적 구조물이 도카이도 시리즈에서 하나의 중요한 테마로 자리 잡게 된다. 그리고 이는 유럽의 인상주의 화가들을 매료시켜 유화 작품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소재로 활용된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산수를 하나의 시리즈로 제작한 호쿠사이와 히로시게의 우키요에는 구매력을 높이는 마케팅적 장치를 굉장히 잘 활용한 작품들이라 생각한다. 하급무사들이 주축이 되어 제작된 우키요에는 이전의 교토미술과는 완전히 새로운 양상을 띠고 있었다. 판화라는 특성상 대량생산이 가능하였고 이에 따라 비교적 저렴하게 작품들을 제작하고 즐길 수 있었다. 이와 함께 우키요에를 향유하는 계층도 이전과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그 폭이 넓어지고 다양해지게 되었다. 또한 도카이도와 같이 물자를 교류할 수 있는 길이 발달됨에 따라 수요 계층의 경제적 성장도 함께 이루어졌다. 우키요에의 산수판화는 이러한 여러 가지 상황을 매우 영리하게 잘 접목시킨 장르라고 생각한다. 마치 해외여행에서 각 도시의 관광명소가 담긴 여행엽서를 구매하듯이, 우키요에는 일반 대중들에게 특정 공간에 대한 환상과 여행 욕구를 증폭시켜주는 역할을 수행했을 것이다. 예술과 상품의 아슬아슬한 경계 지점을 잘 활용한 장르가 우키요에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남가영(예술4) 학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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