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역사 | 우크라이나의 역사 (누구나 20분만에 완독하는, 한 편 정리!) 빠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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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오스트리아 지배 하의 서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지배 하의 동부 우크라이나가 각각 독립을 선언하여, 이 두 형태가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1920년에 동서 통일을 선언했으나 외부 군대의 침략으로 신생독립국 우크라이나는 오래 가지 못하였고, 결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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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함께 우리의 일상으로 들어온 우크라이나! 우크라이나에 대한 관심은 높아졌지만, 정작 이 나라의 역사를 알지 못한다면, 현재의 사태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만큼 우크라이나 사태의 역사적 뿌리는 깊습니다. 우크라이나를 이해하기 위한 역사여행을 떠나보겠습니다.
#역사 다큐멘터리​#우크라이나 역사#젤렌스키#키이우​​​​#키예프​​​#리비우​​​#오데사​#마리우폴​#돈바스​#키예프 공국#키이우 공국#푸틴#러시아 침공#우크라이나 전쟁#유로마이단 혁명#오렌지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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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Historic Reckoning by Kyle Preston
Zaphenath Paneah by Quinten Coblent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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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역사 – 나무위키

우크라이나 역사는 키예프 공국에서 시작되어 현대의 우크라이나 독립(1991년), 그리고 오렌지혁명과 유로마이단까지 설명한다. 2. 고대[편집]. 고대 그리스인 역사가들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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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12/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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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우크라이나(우크라이나어: Україна)는 동유럽 국가다. 남쪽과 남동쪽으로는 흑해와 아조프해, … 역사. 독립. • 독립, 소비에트 연방으로부터 분리 독립 1991년 12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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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o.wikipedia.org

Date Published: 9/1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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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역사①…러시아의 영토인가 – 아틀라스뉴스

우크라이나는 1922년 결성된 소련(USSR)에 가입했고, 69년 후 1991년에 독립했다. 소련 시절의 우크라이나는 공화국이자, 유엔 회원국이었으나 지방정부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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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atlasnews.co.kr

Date Published: 6/16/2022

View: 286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질긴 악연 – 한겨레21

“자연으로부터 축복받은 땅, 역사로부터 저주받은 땅.” 우크라이나를 한마디로 일컫는 표현이다. ‘유럽의 곡창’으로 불릴 만큼 비옥한 토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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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h21.hani.co.kr

Date Published: 4/2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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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와 싸우며 강해진 나라…우크라이나의 역사를 주목하자

1차-2차 대전 사이 소련에 독립 투쟁 시도 – 제국역사라디 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폴란드독립소련맥락전쟁혁명우크라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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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hankookilbo.com

Date Published: 1/19/2021

View: 5119

[불타는 우크라이나]’한 국가 두 문화’ 1100년…열강들 충돌 때 …

이로 인해 최초의 국가가 성립되고 1991년 옛 소련의 품에서 벗어나기까지 1100년의 세월과 냉전 종식 후 30년 동안 우크라이나는 수난의 역사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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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joongang.co.kr

Date Published: 6/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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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우크라 사태 이해하려면, 우크라이나 역사를 보라… ‘유럽 …

유럽 최후의 대국, 우크라이나의 역사 구로카와 유지 지음·안선주 옮김|글항아리|296쪽|1만6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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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khan.co.kr

Date Published: 11/2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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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우크라이나 역사

  • Author: 인문학 프로파일The Humanities Profi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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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2. 4.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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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우크라이나의 역사는 우크라이나의 역사에 대해 설명한다.

역사학 [ 편집 ]

우크라이나의 역사는 소비에트 시절에는 크게 두 개의 역사학파가 주도하였다. 우크라이나, 벨라루스를 동슬라브족으로 묶고 동슬라브족을 러시아와 일치해 해석하려는 학파와 우크라이나의 존재 목표를 소비에트 통합으로 해석하려던 학파이다. 하지만 현대 우크라이나에서는 이 두 학파는 사라지고 우크라이나의 발전 과정을 러시아와 구별되어 생각하는 학파가 주를 이루게 되었다. 우크라이나는 우크라이나의 발전 과정을 러시아와 구별시켜 보기 위해 우크라이나의 사료편찬, 역사기술을 서구식 방법인 영토접근법(Territorial approach)으로 사용하여 우크라이나 영토에 존재했던 모든 사건과 그 지역을 거쳐 간 모든 종족, 민족을 우크라이나 역사에 포함시킨다. 이러한 영토접근법은 캐나다 토론토 대학 역사학부 마고시(Paul Magocsi)교수가 창조하여 주로 사용하던 방법으로서 현대 중국에서도 사용되고 있는 방법이며 국가의 민족주의화를 위한 역사적 접근 방법이다. 이러한 영토적 접근 방법은 우크라이나에 존재했던 키메르족, 트리필리안, 스키타이인, 사마르티안 등 루스인 이전의 우크라이나에 거주했던 종족들을 우크라이나 조상으로 포함시키게 된다.[1]

고대 [ 편집 ]

우크라이나 지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최소 기원전 5000년 경부터이며, 기원전 10세기부터는 각 민족들이 역사에 이름을 드러냈다. 기원전 10세기 경부터 스키타이인과 킴메르인이, 기원전 7세기 경에는 사르마트인이 각각 우크라이나에 진출했다. 게르만족의 대이동 시기에는 동고트족의 일부가 우크라이나에 들어왔지만, 7세기부터는 동유럽 평원에서 독자적인 힘을 구축하기 시작한다.

기본적으로는 슬라브 문화를 바탕으로 했다. 하지만 동, 서, 남의 많은 여러 슬라브 원주민들 중 동슬라브족은 고대부터 중앙아시아에서 온 투르크 민족들의 지배를 받고 튀르크 문화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동슬라브인들은 5세기부터 투르크 민족 국가인 사바르 카간국의 지배하에 있었고 그 후에는 아바르 카간국에 정복되어 나중에는 북게르만족 루스인의 초기 국가인 루스 카간국에 막대한 영향을 준 하자르 카간국에 정복되어 있었다. 하자르 카간국의 영향에 따라 동슬라브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생기기 시작하였고 8세기에서 9세기에 루스 카간국이라는 튀르크의 군주 칭호인 카간을 자칭하는 루스인의 첫 국가가 등장하였다. 그 전까지는 중앙아시아 튀르크족들이 카간을 자칭하였으나 그 지배 아래 동슬라브족들도 완전히 종속과 동화되어 동슬라브족의 정체성이 확립되었고 그 후 동슬라브족이 카간을 자칭하였다. 동슬라브족은 튀르크족의 지배를 받아들이고 그 휘하에서 활동하였다. 3세기부터 10세기까지 튀르크족의 동슬라브족 지배에 의한 투르크화의 영향력으로 동슬라브족 문화는 서유럽 문화와는 조금은 이질적인 존재로 취급됐었다.[2]

현재의 우크라이나 북부와 벨라루스 그리고 러시아에 해당하는 지역에서는 동슬라브족이 거주하고 있었다. 고대 동슬라브어를 사용하고, 삼림 지대에서 소박한 농경 생활을 보내고 있던 동슬라브족의 서쪽에는 발트어파에 속한 발트족, 동쪽이나 북쪽에는 핀우그리아어파에 속한 핀족들이 그들과 같은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남쪽의 흑해 북해안의 스텝은 유목화된 동슬라브족들이 거주했다. 이윽고 이 지역의 동슬라브족들은 튀르크인들의 지배로 투르크어족에 동화되었고, 돌궐의 대제국이 붕괴한 다음은 볼가 강의 하류에서 튀르크족의 정복에 의해 하자르 한국에 정복당하였다.

서유럽에서 프랑크 왕국 등 게르만족의 왕국이 형성되었을 무렵에, 북서쪽 스칸디나비아반도에서 노르만인들이 활동하기 시작했다. 해적·침략 행위 뿐만 아니라 발트 해·북해의 교역에 종사한 노르만인은 발달된 항해술로 강을 타고 흑해로 들어가서 남쪽의 경제적으로 번영한 동로마 제국과 교역에도 나섰고, 또 이슬람 제국의 교역도 활발히 행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두 개의 교역 루트를 통해 동슬라브족 사람들은 노르만인과 튀르크 하자르의 영향을 받아 국가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 부분의 본문은 이 부분의 본문은 루스 카간국 입니다.

753년에 라도가 호수 부근에 루스인 최초의 도시인 스타라야라도가가 형성된 이후 튀르크족과 동슬라브인들의 영향으로 루스인들의 정체성이 확립되기 시작하였고, 830년 경에는 튀르크의 군주 칭호인 카간을 루스인들의 군주의 칭호로 사용하면서 루스인의 첫 국가인 루스 카간국이 등장하였다. 루스인들은 이후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 러시아인의 원형이 되었으며, 이들이 세운 국가인 루스 카간국은 류리크 왕조와 키예프 루스의 전신이 되었다. 이후 루스 카간국의 마지막 카간이자 류리크 왕조의 시조인 류리크가 오늘날 노브고로드 방면으로 정착하였는데, 원초 연대기에 의하면 추드인, 동슬라브인, 메레인, 벱스인, 크리비치인들이 루스인들을 내쫓고 스스로 통치하려 하였으나 그 후 부족들이 서로 싸우기 시작하였기 때문에 질서를 잡기 위해 다시 루스인들을 불러들여 862년에 류리크가 노브고로드에 정착하게 되면서 류리크 왕조가 탄생하였다고 한다. 루스인들은 10세기까지 투르크족의 영향을 받았고 이에 따라 류리크 왕조의 시조인 류리크 또한 위대한 카간이자 왕으로 불렸지만, 류리크 왕조가 개창된 이후에는 피지배층인 동슬라브족에 서서히 동화되었으며, 카간이라는 호칭보다는 대공이라는 호칭이 자주 쓰이게 되었다.

중세 [ 편집 ]

이 부분의 본문은 이 부분의 본문은 키예프 루스 입니다.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러시아의 원형인 키예프 루스는 882년 노브고로드의 2대 공작인 올레그 베시가 키이우를 점령한 후 형성되었다. 현재 우크라이나 영토는 키예프 루스의 남부 지방이었다. 키예프 루스와 류리크 왕조는 스칸디나비아에서 온 루스인들이 세웠으며 이들은 동슬라브인들에게 흡수되었다. 키예프 루스는 9세기에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동방 정교회와 비잔틴 문화를 수용하였고 10세기와 11세기에는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 중 하나가 되어 후의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러시아 3국의 국가 정체성 형성의 바탕이 되었다. 키예프 루스는 13세기 류리크 왕조의 분할 상속으로 인한 내부 분열과 몽골의 침략으로 멸망하였다. 키예프 루스가 멸망한 이후 우크라이나 땅에는 갈리치아와 볼히니아 두 공국이 그 뒤를 이었다. 갈리치아와 볼히니아는 갈리치아-볼히니아 대공국으로 합쳐졌다 분열되고 결국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의해 정복되었다.

근대 [ 편집 ]

17세기 중반에는 우크라이나 중부에 카자크 수장국이 세워져 백년 이상 러시아 차르국의 압력을 견뎠으나 결국 폴란드와 러시아에 의해 분할되었다. 그 후 18세기 후반의 폴란드 분할을 통해 우크라이나의 중부와 동부는 러시아 제국에 합병되고 서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합병되었다.

현대 [ 편집 ]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오스트리아 지배 하의 서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지배 하의 동부 우크라이나가 각각 독립을 선언하여, 이 두 형태가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1920년에 동서 통일을 선언했으나 외부 군대의 침략으로 신생독립국 우크라이나는 오래 가지 못하였고, 결국 1922년에 서쪽은 폴란드, 동쪽은 소비에트 연방의 영토가 되었다. 소비에트 연방에 합병된 우크라이나는 1921년-1922년 간, 1932년-1933년 간 두 차례에 걸쳐 큰 기근을 겪었다. 특히 1930년대에 일어난 둘째 기근은 스탈린이 집단 농장 체제에 저항이 심했던 우크라이나에 대해 인위적으로 부른 기근으로 홀로도모르(Holodomor)라 불린다. 이로 인한 사망자 수는 적게는 8백만여 명에서 많게는 1천만여 명 이상으로 추산되고 있다.

1991년 우크라이나는 소련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였다.

2010년에 치러진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가 실시 되었을때,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율리아 티모셴코를 꺾고,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며, 2014년에 일어난 혁명, 내전 등이 일어나서 국가가 불안한 상황에 놓여 있으며, 2015년 현재, 페트로 포로셴코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2019년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제6대 우크라이나 대통령에 선출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각각 2014년, 2022년부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각주 [ 편집 ]

↑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2272459&cid=51278&categoryId=51278 ↑ украина што значи „гранична област“ или „крајина“{{웹 인용|url= старословенскиот поимшто значи „гранична област“ или „крајина“{{웹 인용|url= http://litopys.org.ua/rizne/nazva_eu.htm |title=З Енциклопедії Українознавства; Назва “Україна” |publisher=Litopys.org.ua |accessdate=October 31, 2011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우크라이나(우크라이나어: Україна)는 동유럽 국가다. 남쪽과 남동쪽으로는 흑해와 아조프해, 동쪽과 북동쪽으로는 러시아, 북쪽과 북서쪽으로는 벨라루스, 서쪽으로는 폴란드, 슬로바키아, 헝가리, 남서쪽으로는 루마니아, 몰도바와 접한다. 키이우가 수도이며 가장 큰 도시다. 동유럽 평원과 이어져 있으며 기후는 비교적 온화한 편이다. 법적 공용어는 우크라이나어이고, 인구 대부분은 우크라이나어를 사용하지만, 대부분 동부 인구(주로 동부 지역과 동남부 지역, 오데사 지역)는 러시아어 사용자이기도 하다. 주요 도시로는 키이우, 도네츠크, 드니프로, 하르키우, 르비우, 오데사, 자포리자가 있다. 2014년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합병함에 따라 행정력이 크림반도에 미치지 못하지만, 국제사회는 대체로 크림반도를 우크라이나의 일부라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중세 초 루스 카간국으로부터 키예프 루스로 이어진 우크라이나는 오랫동안 투르크족·몽골족 등 지배를 받았다. 19세기까지 대다수 우크라이나 영토가 러시아 제국에 통합되었고, 나머지 부분은 오스트리아-헝가리 통제 아래 있었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혁명 후 혼란과 끊임 없는 전쟁 속에서 여러 차례 독립을 시도하여 1917년에 민족국가를 건설했으나, 1922년에 소비에트 연방에 강제 합병되었다. 1923년 소비에트 연방 헌법 적용을 받으며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란 이름의 구성국으로 존재했다, 1991년 소련 해체와 함께 독립하였다.[1]

지하 자원이 풍부하여 도네츠 탄전의 석탄, 크리보이로그의 철광석, 카르파티아 유전과 천연가스, 그 밖에 망간, 우라늄, 식염, 칼리염, 석회석 등을 산출한다. 산업으로는 석탄·철광·선철 생산에서 중요성 있다. 풍부한 수력 전기를 이용하여 기계 제조 공업·화학 공업이 크게 발달했으며 유수 공업 지대를 이루고 있다. 석탄업, 철강업, 기계 제조업, 화학 공업 중심은 돈바스·드니프로 주이며, 드니프로 강 하구에서 키이우 사이 6개 수력 발전소가 단계상(段階狀)으로 건설되어 있다. 우크라이나 경지율은 약 70%에 이르고 있어, 겨울밀·옥수수·보리·사탕무·해바라기·포도의 재배, 가축 사양 등에서는 구소련 시절 매우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온난한 크림 반도 남단과 광천이 솟는 카르파트 지방은 중요한 관광·보양지다.[1] 러시아 작가 니콜라이 고골의 작품 〈타라스 부리바〉 배경으로도 알려졌다. 공용어는 우크라이나어를 쓰고, 우크라이나 국민 절대 다수가 믿는 종교는 우크라이나 정교회다.

자연 환경 [ 편집 ]

지리 [ 편집 ]

이 부분의 본문은 이 부분의 본문은 우크라이나의 지리 입니다.

우크라이나 지도

국토 면적 603,700km2에 576,700km2 (크림 공화국과 세바스토폴 제외시) 해안선 길이는 2,782km로, 우크라이나는 세계에서 44번째로 큰 국가(중앙아프리카 공화국보다는 작고, 마다가스카르보다는 크다.)이다. 또한, 유럽에서는 두 번째로 큰 나라이다[2]. 어떤 사람들은 유럽의 중심이 우크라이나 서쪽의 라키브 마을 인근이라고 한다. 하지만 여전히 유럽의 지리적 중심을 보는 관점에 대해 논쟁이 있다.

우크라이나는 비옥한 평원, 스텝, 고원이 있으며, 그들을 지나가는 강이 흑해로 흘러들어간다. 거의 남쪽 만으로 강이 빠져나가고 남동부 지방에는 다뉴브 삼각지가 루마니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대표적인 산은 카르파티아 산맥으로서 우크라이나 서부에 위치한다.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높은 산은 호베를라 산으로 높이는 2,061m이다. 크림 반도를 따라서 넓은 해안선이 펼쳐진다.

우크라이나에 분포하고 있는 초르노젬(흑토) 지대는 비옥한 토양으로 유명하다. 그 밖에 아스팔트, 무연탄, 철, 망가니즈, 크롬, 타이타늄, 납, 아연, 알루미늄, 수은, 니켈, 천연 가스, 석유 등 70여 가지의 종류에 달하는 천연 자원이 매장되어 있다.

기후 [ 편집 ]

대개 온화한 대륙성 기후를 보이는데 남쪽의 크림 반도 인근에서는 온난 습윤 기후가 나타나기도 한다. 비는 북서부 지방에 가장 많이 내리고 동부와 남동부 지역은 덜 오는 편이다. 겨울은 흑해 인근 지방이라면 따뜻하지만 내륙으로 들어갈수록 대체로 추워진다. 여름에는 전반적으로 따뜻하지만 남쪽 지방은 무덥다.

역사 [ 편집 ]

이 부분의 본문은 이 부분의 본문은 우크라이나의 역사 입니다.

기원 [ 편집 ]

우크라이나 역사는 중앙아시아에서부터 건너와 동유럽을 정복한 튀르크 민족들의 관계를 빼 놓을 수 없다. 3세기부터 시작한 중앙아시아 투르크 민족들의 유럽 침공과 동슬라브족 정복 그리고 이주는 5세기부터 10세기까지 사바르 카간국에 이어 아바르 카간국 그리고 하자르 카간국까지 이어진다. 동유럽 동슬라브 원주민들은 사바르 카간국에 정복당해 프랑크족들과 대립하기도 하였고 하자르 카간국의 우크라이나 초원 정복으로 인해 동슬라브 문화는 서유럽의 문화와는 조금 이질적인 특징을 가지게 되었다. 하자르 카간국의 영향에 따라 동슬라브족으로서의 정체성이 생기기 시작하였고 8세기에서 9세기에 루스 카간국이라는 고대 투르크어인 군주 칭호인 카간을 자칭하는 북게르만족 루스인의 첫 국가가 등장하였다. 그 전까지는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를 지배했던 중앙아시아 투르크 민족들이 카간을 자칭하였으나 그 지배 아래 동슬라브인들도 완전히 종속과 동화되어 동슬라브인의 정체성이 확립되었고 그 후 동슬라브인들이 카간을 자칭하였다.

키예프 루스는 10세기까지 중앙아시아 투르크 민족의 영향을 받았고 이에 따라 류리크 왕조의 시조인 류리크 또한 위대한 카간이자 왕으로 불렸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862년경 전까지는 확실히 카간이라 칭한 루스인들이 페르시아 사서와 동, 서 로마 기록에 남아 있다. 여기에 원초연대기의 기록에서는 루스인들의 카간으로 알려진 류리크가 동슬라브족 지역에 정착하면서 류리크 왕조와 키예프 루스가 나타나며 카간이라는 호칭보다는 크냐지 또는 벨리키 크냐지라는 호칭이 자주 쓰이게 된다.[3] 동슬라브인들은 튀르크계 카간국인 하자르 카간국의 지배하에 오랫동안 있었다. 루스인들의 첫 국가인 루스 카간국이 키예프 루스로 발전하였고 그 남쪽이 현재 우크라이나 영토이다. 이 중세 국가의 수도는 현 우크라이나의 수도인 키이우였다. 키예프 루스는 현재의 북게르만족 계통의 루스인들이 세웠다고 하나 동유럽 학자들은 이에 부정적이다. 루스인들은 강력한 류리크 왕조를 세웠다. 그리하여 10세기와 11세기에는 키예프 루스가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국가 중 하나가 되어 후의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러시아 3국의 국가 정체성 형성의 바탕이 되었다.

키예프 루스는 내부 분열과 몽골의 침략으로 멸망하였다. 우크라이나 땅에는 갈리치아(Galicia, Halych)와 볼히니아(Volhynia, Volodymyr-Volynskii) 두 공국이 그 뒤를 이었다. 갈리치아와 볼히니아는 갈리치아-볼히니아 왕국으로 합쳐졌다 분열되고 결국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의해 정복되었다.

근대 [ 편집 ]

17세기 중반에는 우크라이나 중부에 카자크 수장국이 세워져 백년 이상 러시아 차르국의 압력을 견뎠으나 결국 폴란드와 러시아에 의해 분할되었다. 그 후 18세기 후반의 폴란드 분할을 통해 우크라이나의 중부와 동부는 러시아 제국에 합병되고 서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합병되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오스트리아 지배 하의 서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지배 하의 동부 우크라이나가 각각 독립을 선언, 1920년에는 동서 통일을 선언했으나 외부 군대의 침략으로 신생 독립국 우크라이나는 오래 가지 못하였다. 결국 1922년에 서쪽은 폴란드, 동쪽은 소비에트 연방의 영토가 되었다. 소비에트 연방령 우크라이나는 1921년~1922년, 1932년~1933년 두 차례에 걸쳐 큰 기근을 겪었다. 둘째 기근은 스탈린이 집단 농장 체제에 저항이 심했던 우크라이나에 대해 인위적으로 부른 기근으로 홀로도모르라 불린다. 이로 인한 사망자 수는 적게는 8백만 명에서 많게는 1천만 명 이상으로 추산되고 있다.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소비에트 연방은 폴란드를 침공, 우크라이나 서부를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일부로 만들었다. 1941년에는 독일군과 추축군이 소비에트 연방의 적군을 쳐부수었다. 소비에트 연방이 ‘영웅 도시’라 칭한 키예프 전투에서는 66만 여명이 넘는 소비에트 연방군이 포로로 잡혔다. 처음에는 우크라이나인들이 독일군을 ‘해방군’으로 환영했다. 그러나 나치 독일은 곧 대량 학살을 시작하여 유대인들과 우크라이나인 민간인들을 죽이거나 강제 추방하였다. 마을 전체를 태워 없애기도 하여 우크라이나인들은 독일의 지배가 소비에트 연방의 지배처럼 포악하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전쟁 중과 독일 치하의 민간인 사망자 수는 50여만 명이 넘는 유대인들을 포함하여 7백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갈리치아 지방에서는 폴란드인들과 우크라이나인들끼리 서로 집단 학살을 저지르기도 한 끔찍한 시기였다. 독일과의 전투로 소련군은 약 1천 100만 명의 사망자를 냈는데 그 가운데 270만 명이 우크라이나계였다. 우크라이나 민족은 추축국을 상대로 전투를 벌인 첫 민족이 되었고(카르파티아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으로 인한 피해도 매우 컸다.

현대 [ 편집 ]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에 소비에트 연방령 우크라이나는 서쪽으로 확장되어 우크라이나인들이 사는 땅을 거의 대부분 포함하게 되었다. 1954년에는 우크라이나에 의해 러시아 본토와 단절되어 있던 크림 반도가 러시아에서 우크라이나령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니키타 흐루쇼프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우애를 과시하기 위해 페레야슬라프 조약(코자크 헤티만국이 러시아 차르국의 보호를 요청)의 300주년을 맞아 우크라이나에 크림 반도를 할양한 것이다. 이는 우크라이나 독립 후 양국 간의 분쟁 소지가 된다.

1991년 우크라이나는 모스크바에서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의 쿠데타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후의 혼란 속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이는 결국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를 촉진시켰다. 우크라이나는 독립국가연합의 창립 회원국이다.

현재 우크라이나의 국기는 스텝 지방의 금빛 밀밭 위 푸른 하늘의 모습을 상징한다고 한다. 청색과 황색은 우크라이나인들이 전통적으로 깃발에 많이 쓰던 색이다.

2005년 1월에 빅토르 유시첸코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며, 율리아 티모셴코는 2, 3차례나 총리로 선출되었다.

2010년 2월 7일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가 실시 되었을 때,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율리아 티모셴코를 꺾고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2012년 7월 4일에 우크라이나 의회에서 러시아어를 지역공용어로 인정하는 법을 통과하고 준 공용어로 인정하는 것을 둘러싸고 충돌이 일어났다.[4][5] 하지만 그 이전에는 러시아어를 공공기관에서 사용하는 것을 허용하는 법안으로 인해 충돌이 일어났다.[6][7] 그리고 2012년 8월 8일에 야누코비치가 동남부에서 러시아어를 공식언어로 하는 법안에 서명하면서 러시아어는 우크라이나 동남부의 공식언어가 되었다.[8] 우크라이나는 총선을 치른지 2주만인 2012년 11월 11일에 여당이 총선에서 승리했다.[9] 우크라이나는 2013년에 EU와의 협정이 무산되자 친EU시위가 발생되었고, 시위진압과정에서 부상자가 발생되었다.[10][11] 2013년 12월 8일에는 반정부 시위대에 의해 레닌상이 철거되었다.[12][13]

유로마이단 시위가 발생한 결과, 친러 대통령이었던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러시아로 도망하였다. 이로 인해서 친러 성향이 강했던 크림 반도의 크림 자치 공화국이 우크라이나로부터 독립선언과 함께 러시아로의 편입을 추진하였으며, 그 후 합병을 위한 주민 투표가 실시되었고 2014년 3월 18일 합병 조약이 체결되었다.

유럽 연합과 미국 등 서방 진영은 이 합병을 불법으로 간주하였으며, 러시아에 제재를 가하였다. 또한, 도네츠크와 루한스크 주는 우크라이나에서 독립을 선언하였으나, 국제 사회의 대부분의 국가들은 이 독립 결정을 승인하지 않고 있으며,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전쟁을 벌이고 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크림 반도의 러시아 합병을 인정하지 않으며, 돈바스 지역을 비롯한 동부 지방에 대해선 강력한 군사적 행동을 추구하고 있다. 현대에도, 미국과 유럽 연합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적 개입을 경계하고 있으며, 결국 2022년 2월 24일에 러시아의 선전포고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이 일어나고 말았다.

정치 [ 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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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는 입법, 사법, 행정 등 3권이 분리된 의회민주주의 국가이다. 대통령은 직접 선거를 통해 선출되며, 임기는 5년 중임제인데, 1번의 중임이 가능해 최대 임기는 10년이다. 대통령이 총리와 내각을 지명하는데, 의회의 승인을 받아야 하며 야당이 의회가 절대다수일 경우 총리가 대신 권력을 독점한다.

의회 [ 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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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의회는 단원제 최고회의(Verkhovna Rada)이며, 총 450석 중 225석은 전체 유권자의 4% 이상 지지를 얻은 정당에게 비례로 배정된다. 나머지 225석은 선거구에서 직접선거로 결정된다. 모든 의원들의 임기는 5년이다. 의회는 총리를 뽑고, 법률을 발의하고, 국제 협정을 비준하며 예산안을 승인한다. 2020년 6월 현재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정렬은 2019년 7월 21일 총선거의 결과 순).

국회(최고회의)구성

대통령 [ 편집 ]

우크라이나는 금융위기와 정국불안으로 2010년 1월 17일 대통령 선거가 치러져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승리했는데, 과반 득표가 나오지 않자, 같은 해 2월 7일 결선 투표를 통해,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승리를 확정하였다.[14] 율리아 티모셴코는 패배를 맞이하였다. 이로써, 오렌지 혁명의 과정은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2014년 대선에서 페트로 포로셴코가 승리하여 대통령이 취임했으며, 2019년 선거에서 전직 대통령인 페트로 포로셴코를 이기고 희극인, 배우 출신의 정치인 볼로디미르 젤렌스키가 정식 대통령이 되었다.[15]

행정 구역 [ 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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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는 24개 주와 1개 자치 공화국, 주와 같은 지위를 갖는 2개 특별시로 이루어져 있다. 이 가운데 크림 자치 공화국과 세바스토폴은 2014년 이후부터 러시아의 실질적인 지배 상태에 있다.

주 체르카시주 체르니히우주 체르니우치주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주 도네츠크주 이바노프란키우스크주 하르키우주 헤르손주 흐멜니츠키주 키로보흐라드주 키이우주 루한스크주 르비우주 미콜라이우주 오데사주 폴타바주 리우네주 수미주 테르노필주 빈니차주 볼린주 자카르파탸주 자포리자주 지토미르주

자치 공화국 크림 자치 공화국

특별시 키이우 (Kyiv) 세바스토폴

대외 관계 [ 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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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즈노예 로켓엔진 설계업체는 액체부분 세계 최고 로켓 엔진 설계 업체이다. 소련 시절 전략 로켓군의 지상 발사 전략 탄도탄은 모두 여기서 설계되었다. 2022년 러시아와 전쟁 중에 있다.

경제 [ 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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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의 경제 규모는 독립국가연합 국가 중 2위이다. 하지만, 정치와 사실상 마찬가지로 경제도 불안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우크라이나의 경제는 유럽 연합이나 러시아, 미국 등에 의존하고 있다. 밀의 총생산량은 22,323,600톤(2011년, 세계11위)[16]이다.

사회 [ 편집 ]

주민 [ 편집 ]

2001년 국세조사에 따르면 우크라이나의 민족 구성 비율은 우크라이나인이 77.8%, 러시아인이 17.3%이다. 약 12,000명의 고려인이 거주하며, 벨라루스인 역시 거주한다. 종교는 대부분 우크라이나 정교회를 믿는 기독교인이며 가톨릭교회이지만, 동방정교회 전례 즉, 예배방식을 따르는 동방 가톨릭 교회인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교회와 선교사들에 의해 들어온 개신교가 있다.

2001년 국제조사에 따른 모어분포를 보면 67.5%가 ‘법적’ 공용어인 키릴 문자를 사용하는 우크라이나어를, 29.6%가 ‘실제적’ 공식어인 러시아어를 쓴다. 루마니아어·폴란드어·헝가리어 등 소수민족어도 쓰인다. 러시아어는 하르키우와 도네츠크, 루한스크 등의 동부, 오데사 등의 남부, 크림 반도 전역에서 주로 쓰이며, 동부와 남부의 지역 공식어로도 지정되어 있다. 하지만 2014년 2월 23일에 최고 라다가 러시아어 등 소수민족어를 지역 공식어로 인정하는 법률을 다수결로 폐지하는 것을 결정하면서 지역공식어 지위를 박탈당했다.[17] 하지만, 2014년 5월 20일에 의회에서 다시 러시아어가 제2국어로 지정될 예정이다.[18] 르비우 등 서부는 우크라이나어만 쓰인다. 수도 키이우는 러시아어와 우크라이나어가 모두 쓰인다. 거의 대부분의 우크라이나인들이 우크라이나어와 러시아어를 모두 이해한다. 우크라이나어, 러시아어는 둘 다 동슬라브어군에 속하지만 우크라이나어는 폴란드어나 체코어 등 서슬라브어와도 가까운 면이 있으며, 벨라루스어와의 문법도 유사하다. 벨라루스어도 약간은 사용되며, 북부 지방에서 주로 사용된다.

한편, 우크라이나는 2006년부터 프랑코포니의 참관국이 되었다.

역사적 사건사고 [ 편집 ]

문화 [ 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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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문화는 우크라이나 내 절대적 우위를 점하고 있는 기독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혼인 생활 역시 전통에 따르는 경향이 있었으며, 서유럽에 비해 조부모가 아이들 양육에 있어 더 큰 역할을 담당했다. 우크라이나의 문화는 건축, 음악, 미술에서 반영되듯이 동/서 인접국들의 영향을 받았다. 소비에트 연방의 우크라이나 지배는 1932년 스탈린이 ‘문학과 미술 조직 재건’이라는 법령을 공표하면서, 소련 내 공산주의 리얼리즘을 표방하는 정책을 펼침으로서 우크라이나의 미술과 문학에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정책은 사실상 독창성을 무참히 짓밟는 것과 다름없었다. 1980년대 글라스노스트(개방) 정책이 일어나면서, 소련의 예술가들과 작가들은 그들의 표현의 자유를 되찾는데 성공하게 된다.

건축 양식 [ 편집 ]

키이우에 있는 성 미하일 황금 돔 수도원은 우크라이나 건축 양식의 예로 들 수 있다. ‘피산키’라고 불리는 부활절 달걀의 전설은 우크라이나에서 유래한다. 부활절 달걀은 일정한 패턴을 따라 왁스(또는 촛농)로 그림을 그리며, 염색을 함으로써 달걀에 산뜻한 색을 불어넣으며, 염색은 그 전 왁스칠한 부분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달걀이 완전히 염색된 후에는 왁스칠 한 흔적이 완전히 사라지고 색깔 패턴만 남게 되었다고 한다

이 전통은 수천 년 전부터 존재했으며, 이는 우크라이나의 기독교 수용보다도 선행한다. 2000년에는 카르파티야 산맥 근처에 있는 코로먀라는 도시에 우크라이나 7대 불가사의로서 현대 우크라이나의 상징으로 선별된 피산카 박물관이 세워졌다고 한다.

음식 [ 편집 ]

우크라이나 전통음식은 닭고기, 돼지고기, 쇠고기, 생선, 버섯요리 등이 있다. 또한 우크라이나인들은 다량의 감자, 곡물, 신선하거나 절인 야채도 많이 섭취한다. 유명한 전통음식으로는 바례니키(밀가루 경단에 버섯, 감자, 독일식 양배추 김치, 신 치즈 또는 체리를 넣고 끓인 음식), 보르쉬(사탕무와 양배추와 버섯 또는 고기를 넣고 끓인 빨간 수프), 그리고 홀룹찌(양배추에 쌀, 당근, 고기를 채워넣고 말은 음식) 등이 있다. 우크라이나의 명물로서 키이우 치킨도 있다. 우크라이나 인들은 끓인 과일, 주스, 우유, 우락유(우크라이나인들은 우락유로 코타치 치즈를 만든다.), 생수, 차와 커피, 맥주, 와인, 호릴카를 마신다.

국기 [ 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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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의 국기

우크라이나의 국기는 밀과 하늘을 상징하는 것으로 하늘색과 노란색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민 공화국 시절에는 문장이 들어간 국기를 사용하였고, 소비에트 연방의 지배를 받은 시절에는 낫과 망치가 들어간 국기를 사용하였다.

국장 [ 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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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의 국장

우크라이나의 국장은 일명 ‘트리주브’라고도 불리며, 우크라이나를 상징하는 문장이다. 이 문장은 키예프 루스 시절부터 쓰여 왔으며, 문장에 총을 든 남자가 들어가 있기도 하였고, 소비에트 연방의 지배를 받은 시절에는 낫과 망치가 들어간 문장을 사용하기도 했다.

각주 [ 편집 ]

외부 링크 [ 편집 ]

(영어) 우크라이나 – Curlie

우크라이나 [ 편집 ]

대한민국 [ 편집 ]

해외 [ 편집 ]

우크라이나 역사①…러시아의 영토인가

19세기 이후 민족주의 대두…”같은 민족이라고 한나라로 있어야 하나“

러시아어로 우크라이나는 변경(borderland)이라는 의미의 보통명사다. 러시아제국의 중심지인 페테르스부르크(레닌그라드)나 모스크바에서 보면 우크라이나 일대는 이민족과 대치하는 변경지역이었다.

이 보통명사가 나라 이름으로 처음 등장한 것은 1917년 2월 혁명 직후였다. 니콜라이 2세 황제가 퇴위하고 러시아 남부 지역의 민족주의자들이 중앙 라다(Central Rada)라는 의회를 소집해 국가 창설을 논의했다. 1917년 11월 중앙 라다는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Ukrainian People’s Republic)을 수립했는데, 이 나라가 우크라이나의 시초다. 중앙 라다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이자 역사학자인 미하일로 흐루셰프스키(Mykhailo Hrushevsky)에 의해 주도되었다.

곧이어 러시아에 10월 혁명이 일어나고 볼셰비키들은 1차 대전 교전국인 독일, 오스트리아와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브레스트 리토프스크 조약에 우크라이나는 독일 점령지에 포함되었다. 1차 대전과 혁명, 반혁명의 소용돌이에서 우크라이나라는 이름의 여러 국가들이 생성-소멸되었고, 볼셰비키가 주도하는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공화국이 최종 승리했다. 우크라이나는 1922년 결성된 소련(USSR)에 가입했고, 69년 후 1991년에 독립했다. 소련 시절의 우크라이나는 공화국이자, 유엔 회원국이었으나 지방정부에 불과했다.

우크라이나가 독립국으로 존재한 기간은 러시아 혁명기의 4년과 1991년 독립 이후 30여년에 불과하다. 이 객관적 사실은 블라디미르 푸틴을 비롯해 범러시아주의자들로 하여금 “우크라이나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나라”라고 주장하게 하는 근거가 된다.

우크라이나 위치 /위키피디아

우크라이나는 면적이 60만㎢으로, 대한민국의 6배, 한반도를 합친 면적의 3배나 되며, 인구는 4,000만명을 웃돈다. 과거 소련의 13개 공화국 가운데 러시아 다음으로 큰 공화국이었다. 언어는 우크라이나어, 종족은 우크라이나인으로 분류되지만, 광의로 러시아와 같은 슬라브족이며 러시아어족에 해당한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를 한 뿌리에서 나온 형제국이라고 강조하지만, 우크라이나인들은 1천여년의 역사과정을 거치면서 러시아인과 구분되는 차별화된 종족이라고 주장한다. 두 나라의 분쟁은 여기서 시작된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중세국가였던 키예프 공국에 같은 뿌리를 두고 있다. 키예프 공국이 몽골에 의해 멸망하고 슬라브족은 흩어졌다. 남부 슬라브족은 몽골, 폴란드-리투아니아,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를 받았고, 북부 슬라브족은 모스크바 공국에서 출발해 러시아 제국으로 다시 일어났다. 1천년 가까이 남과 북의 슬라브족은 다른 역사 과정을 거쳤고, 남부 슬라브족은 17세기 이후 러시아 제국에 통합되었다.

제정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슬라브족을 멸시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식량공급기지로 활용했으며, 농민반란을 가혹하게 진압했다. 1861년 농노해방령 이후에도 제정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높은 토지세와 이자를 부과하며 수탈했다. 우크라이나 농민들의 원성이 높아갔고, 지식인들은 우크라이나의 역사적, 문화적 차이에 주목하게 된다.

우크라이나 지식인들은 대러시아에서 독립하자는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러시아 정부는 이를 억압하고 우크라이나의 러시아화 정책을 밀어붙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크라이나 서부지역에서 민족 문화운동이 뿌리를 내려 갔다.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코스토마로프(1814~1870)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의 싹을 틔운 인물이다. 그는 키예프 대학 역사학 교수로 우크라이나 분리주의를 지원했다는 혐의로 시베리아 유형을 가기도 했다. 페테르스부르크 대학 교수로 복귀한 그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역사에 대해 방대한 저술을 남기면서, 남부 러시아인(우크라이나인)과 북부 러시아인(러시아인)은 서로 다른 민족이라고 주장했다.

미하일로 흐루셰프스키(1866~1934)는 우크라이나 민족을 만들어낸 역사학자다. 아버지 세르히 흐루셰프스키는 언어, 민요, 전통을 비롯해 우크라이나적인 모든 것에 깊은 애착을 가져 이를 아들에게 자주 들려주곤 했고, 아들 미하일로는 어린 시절부터 우크라이나의 민족감정을 키웠다. 미하일로는 키예프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하고, 대학 졸업후 10권으로 구성된 역사서 ‘우크라이나-루스의 역사’를 집필했다. 이외에 ‘우크라이나 문학의 역사’, ‘우크라이나인의 역사에 대한 개요’, ‘삽화로 보는 우크라이나의 역사’를 집필했다. 1917년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 의회인 중앙 라다의 의장을 역임했고, 볼셰비키에 의해 오스트리아 빈으로 망명했다가 1924년대에 우크라이나로 귀환했다.

푸틴 대통령도 흐루셰프스키를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를 조장한 인물로 지목한다. 푸틴은 대통령실 홈페이지에 올린 글 에서 “흐루셰프스키가 우크라이나 문화와 언어, 독자성을 강화하는 주요한 역할을 했다”면서, “이러한 활동이 러시아 국수주의에 대항하게 되었다”고 했다.

니콜라이 코스토마로프(왼쪽)와 미하일로 흐루셰프스키(오른쪽) /위키피디아

러시아는 자신을 대러시아, 우크라이나를 소러시아, 벨라루스를 백(白)러시아로 부르며, 세 나라가 러시아 민족의 3형제라고 부른다. 1939년 소련이 폴란드를 분할하며 얻은 영토를 우크라이나에 붙여주었으며, 1940년엔 루마니아의 베사라비아를 우크라이나에 합쳤다. 이런 것들이 형제국가였기에 가능했다고 푸틴은 주장한다.

푸틴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차르 체제 이전부터 한뿌리에서 뻗어나간 자연스런 관계”라며 독립된 국가로서 인정하길 거부했다. 그는 자신의 이름으로 올린 글에서 러시아, 우크라이나가 형제국가로 동슬라브족이라는 한 민족임을 장황하게 설명했다.

푸틴의 대러시아주의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와 충돌하고 있다. 이 충돌은 과거 서유럽의 제국주의와 별반 다르지 않다. 20세기초에 영국이 아일랜드의 독립운동을 억누르고, 프랑스가 알제리를 억압하던 구태를 새로운 세기에 러시아가 자행하고 있는 것이다.

푸틴은 러시아인에게는 우크라이나가 파시스트 군벌에 의해 장악되었다고 주장한다. 언론을 통제하기 때문에 러시아인들은 그렇게 믿고 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대통령 볼로디미르 젤렌스키는 유대인이고, 우크라이나는 다당제를 통해 민주적으로 선거를 치른다. 2019년 선거에서 젤렌스키는 압도적 표차로 승리했다. 푸틴은 러시아인들의 눈과 귀를 틀어막으면서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고 있는 것이다.

푸틴은 또 돈바스(Donbas) 지역에 러시아인의 봉기를 부추겨 우크라이나 내부를 흔들고 있다. 영국이 북아일랜드에 스코틀랜드 출신 신교도를 흔드는 것과 다르지 않다.

1991년 8월 24일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독립 선언을 환호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푸틴의 주장대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한뿌리임은 역사적으로 부인하기 어렵다. 분명한 것은 우크라이나인들이 러시아를 증오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크라이나인들은 같은 슬라브족이지만, 러시아와 따로 독립해 살겠다는 의지가 강하다.

우크라이나인들이 러시아를 극도로 혐오하게 된 계기는 1930년대 기근이다. 1930년대 후반 이오시프 스탈린의 집단농장화 정책과 대기근으로 우크라이나 농민 250만~350만명이 굶주림으로 아사하는 참사가 빚어졌다. 이때 소련 당국은 집단농장화를 반대했거나 민족주의 정책을 지지했던 우크라이나 관리들을 숙청하고, 농민 반발을 통제하기 위해 마을을 통째로 강제이주시키기도 했다. 이러한 반발로 우크라이나인들은 2차 대전중인 1941~44년에 나치 독일을 해방자로 맞아들이기도 했다. 스탈린은 이를 반역행위로 보았다.

1980년대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yov)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 이후 소비에트 연방의 장악력이 약화되자, 1991년 8월 24일 우크라이나 최고회의는 독립선언법을 채택하고 1991년 12월 1일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투표는 “우크라이나의 독립선언법을 지지하십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찬반을 묻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이 국민투표에서 전체 유권자의 84.18%인 3,189만명이 투표에 참가해 92.3%의 지지로 독립이 가결되었다.

우크라이나인들은 러시아와 같은 민족임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들은 러시아와 함께 하기 싫어한다.

<참고자료>

Opinion – Putin’s Obsession with Ukraine as a ‘Russian Land’

Article by Vladimir Putin ”On the Historical Unity of Russians and Ukrainians“

한정숙, : 역사서술로 우크라이나 민족을 만들어내다: 흐루셰프스키의 『우크라이나의 역사』와 우크라이나 정체성 :, 서울대학교 러시아연구소, 러시아연구 24권 2호(2014)

Wikipedia, Nikolai Ivanovich Kostomarov

Wikipedia, Mykhailo Hrushevs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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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와 싸우며 강해진 나라…우크라이나의 역사를 주목하자

키예프 루스로 뿌리 공유하지만 이후 분열

1차-2차 대전 사이 소련에 독립 투쟁 시도

푸틴 “소련에서 만들어진 나라” 주장하지만

러시아 개입이 외려 ‘우크라이나 정체성’ 강화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정확히는 볼셰비키, 소비에트 러시아에 의해 완전히 만들어진 것이다. 이 과정은 1917년 혁명 직후에 시작됐으며 레닌과 그 동료들이 러시아 자신의 역사적 영토를 분할하는 가장 엉성한 방식으로 진행됐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2월 21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란 국가의 개념을 허구라고 말했다. 그 기원 자체가 소련에 있다는 주장이다. 우크라이나 주권 자체에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다른 국가의 주권에 대한 침탈을 정당화하기 위한 논리지만, 이런 주장을 하게 된 역사적 맥락 자체는 있다. 현대적 의미에서 우크라이나란 국가는 볼셰비키 혁명과 함께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독립해 등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련이 성립하기 이전부터, 우크라이나라는 ‘민족국가’의 정체성은 엄연히 존재했다. 오히려 러시아 제국에 저항하고 소련과 싸우면서 역사를 이어갔다. 친서방과 친러시아의 대립 구도가 본격화한 2014년 이래, 러시아의 개입은 우크라이나를 쪼개기는커녕 오히려 우크라이나 국가주의를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소러시아’라는 별명

푸틴 대통령의 주장 자체에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중세로 거슬러 올라가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문화적 기원은 같다. 키예프 루스라는 이름의 거대한 연맹국가는 9세기부터 13세기까지 옛 동슬라브족을 대표하는 국가였다. 명칭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이 국가의 거점은 최초에는 모스크바보다도 북쪽에 있는 노브고로드였으나, 이후에는 현재의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였고, ‘루스’라는 이름은 오늘의 러시아가 이어받았다.

키예프 루스가 몽골군의 침입으로 무너진 후, 우크라이나 일대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이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지배를 받으며 모스크바 공국(이후 러시아 차르국, 러시아 제국)과는 다른 정체성을 만들게 됐다. 특히 우크라이나 지역은 카자크(코사크로도 불림)라는 기병대가 자치권을 얻어 치안을 유지했다.

우크라이나는 17세기에 주인을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 러시아로 바꾼다. 주요 카자크 지도자 중 하나인 보흐단 흐멜니츠키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반기를 들고 독립해 카자크 국가를 세운 뒤 러시아 차르국을 끌어들여 폴란드에 맞선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가 카자크의 자치권을 부정하고 간섭을 강화하면서 우크라이나는 결국 ‘소러시아’라는 이름으로 러시아 제국의 일부가 됐다. 이때 러시아로 넘어가지 않은 현대 우크라이나 서부 일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변방으로 남았다.

소련에 맞서 태동한 우크라이나

우크라이나가 근대적 ‘독립 국가’의 모습을 잠시나마 갖추게 된 것은, 1차 세계대전 도중 발생한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고 소련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는 과정에서였다. “소련이 우크라이나를 만들었다”는 푸틴 대통령의 주장과는 정반대로 우크라이나는 소련과 싸우면서 탄생한 셈이다.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제정 러시아가 붕괴되자 우크라이나의 제헌의회(라다)는 독립을 선언해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을 수립했다. 이때 우크라이나 의회에는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 유대인과 폴란드인 등 이민자 공동체가 모여 있었다. 제정이 무너진 자리에 수립된 러시아의 임시 정부는 이들에게 자치권을 인정했지만, 이 정부가 볼셰비키 혁명으로 다시 한 번 뒤집히면서 우크라이나는 볼셰비키 정권을 대상으로 독립 전쟁을 치른다.

소련은 우크라이나 내의 볼셰비키를 앞세웠고(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공화국), 남은 우크라이나는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 ‘동맹국’에 의지했다. 그러나 동맹국이 1차대전의 패전국이 되면서 우크라이나는 전후 처리에서 독립 보장을 받지 못하고 소련과 폴란드 등 주변국에 의해 분할됐다.

이후 폴란드와 소련이 영토를 놓고 전쟁을 벌이자 서부 우크라이나는 폴란드의 편에 서서 민족국가로서 독립을 노렸다. 하지만 폴란드가 평화 협정을 체결하면서 동부 우크라이나의 소비에트 공화국을 인정해 민족주의적 독립 시도는 결국 좌절됐다.

소련 내부로 편입됐지만 소비에트 우크라이나는 이 과정에서 독자적 정체성을 인정받게 됐다. 1920년대에는 소련의 소수민족 국가 정체성을 존중하는 ‘토착화’ 정책 덕택에 우크라이나어와 우크라이나 문화가 부흥했다. 이 정책은 이오시프 스탈린이 1930년대 후반부터 독재 정권을 굳히고 ‘러시아화’를 채택하면서 무너졌지만 이 시점에 이미 우크라이나는 더 이상 ‘소러시아’가 아니었다.

더구나 스탈린 소련은 우크라이나를 착취했다. 대표 곡창지대인 우크라이나에서 사람이 굶어죽는 사태가 벌어진 1932, 1933년 ‘홀로도모르(대기근)’는 스탈린 정권의 잘못된 농업 정책과 농민 수탈에서 비롯됐다는 게 정설이다.

이 때문에 2차 대전 당시에는 독-소 전쟁 도중 우크라이나로 진군해 온 나치 독일이 해방군으로까지 환영을 받은 적도 있다. 하지만 나치군이 우크라이나 농장과 산업 시설을 파괴하고, 우크라이나에 거주하던 유대인과 폴란드인,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을 무차별 학살하는 ‘인종 청소’를 저지르면서, 나치에 영합한 일부 극우 무장군단을 빼고는 우크라이나인은 독일에 동조하지 않게 됐다.

‘소련 내부 존속’ 원했던 우크라이나, ‘푸틴 러시아’는 거부

1991년 소련이 무너지면서 우크라이나는 연방 밖의 주권국가로 독립했다. 독립 우크라이나 자체는 결코 반(反) 소련, 혹은 반 러시아 성향으로 보기 힘들었다. 애초에 발트 3국, 아르메니아, 조지아 등과 달리 우크라이나는 소련 내 자치적 국가로 존속을 추구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소련이 보수주의자 쿠데타와 이에 맞선 보리스 옐친의 대두로 붕괴하면서 우크라이나도 자연스레 소련 내 다른 국가처럼 독립하게 됐다.

독립 이후로도 우크라이나는 친(親) 러시아와 친 서방 정권이 엇갈려 집권하면서 기본적으로 양측에서 중립적 입장을 유지해 왔다. 그러나 2004년 오렌지 혁명과 2013년 유로마이단 집회, 뒤이은 푸틴 러시아의 크리미아 병합과 돈바스 전쟁 등을 거치면서 ‘러시아에 저항하는 우크라이나’라는 국가주의 의식은 점점 더 커졌다.

우크라이나 싱크탱크 라줌코프센터가 2016년 발표한 의식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55.7%가 우크라이나인을 “민족적 정체성과 관계없이 우크라이나 시민 모두”라고 정의했다. 우크라이나계와 러시아계 모두가 우크라이나 국가를 구성하는 우크라이나인이라는 인식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는 2007년 조사 대비 16.9%포인트 늘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우크라이나의 주권 자체를 무시하는 푸틴 대통령의 주장은 대외는 물론 대내적으로도 우크라이나에 대한 개입을 정당화하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조슈아 터커 뉴욕대 교수는 “우크라이나가 주권 국가로서의 권리를 가질 자격이 없다는 주장을 만들려는 의도”라며 “군사 개입이 타국의 주권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하겠다는 신호”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지금에 이르기까지 우크라이나의 반응을 보면, 푸틴 대통령의 시도는 오히려 우크라이나의 독립성을 좌절시키는 게 아니라 오히려 강경하게 저항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인현우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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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우크라이나]‘한 국가 두 문화’ 1100년…열강들 충돌 때마다 전쟁 포연

SPECIAL REPORT

우크라이나는 서구 강국과 러시아 갈등의 역사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국가 중 하나다. 1·2차 세계대전 등 글로벌 세력 재편으로 이어지는 전쟁이 발발할 때도 주요 열강들이 결코 놓치지 않으려 했던 핵심 영토로 꼽혔다. 서유럽과 러시아의 중간 지대에 위치한 지정학적 특수성과 러시아와의 태생적 유사성 등 전략적 요충지로서의 군사적·경제적 중요성이 그 어느 지역보다 컸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최초의 국가가 성립되고 1991년 옛 소련의 품에서 벗어나기까지 1100년의 세월과 냉전 종식 후 30년 동안 우크라이나는 수난의 역사를 끊임없이 반복해야만 했다.

우크라이나는 유럽 대륙에서 러시아 다음으로 면적이 넓은 나라다. 882년 수도 키예프를 중심으로 건립된 키예프 루스 공국은 오늘날 러시아·우크라이나·벨라루스 일대에 거주했던 루스인들이 세운 최초의 우크라이나 국가였다. 이후 1240년 몽골의 침략을 피해 주민들이 동북부 지역으로 대거 이주한 곳이 지금의 모스크바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서로 자신이 키예프 루스 공국의 역사를 계승한 ‘정통 후계자’라고 주장하는 핵심 근거다.

1차 세계대전 땐 동족끼리 싸워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와 역사를 공유하고 있다면 유럽 국가들과는 식량과 천연자원 등을 매개로 오랜 기간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우크라이나는 곡물 경작에 최적의 조건을 갖춘 흑토 지대여서 밀·옥수수·보리 생산량이 주변국들보다 월등히 많다. 농업 환경이 열악한 유럽 국가들 사이에서 우크라이나가 ‘유럽의 빵바구니’로 불리는 이유다. 식량뿐 아니라 철광석·석탄·니켈·흑연 등 핵심 원자재 매장량도 세계적 규모를 자랑하며 주변국의 원자재 공급을 도맡아 왔다.

지정학적 위치도 남다르다. 우크라이나는 해양 세력과 대륙 세력이 만나는 요충지이자 러시아와 유럽이 서로 오가는 관문인 탓에 패권 세력 간 갈등과 충돌이 끊이지 않았다. 1700년대 발트해 주도권을 놓고 러시아와 스웨덴이 맞붙은 대북방 전쟁 때는 스웨덴 편에 섰는데 스웨덴이 결국 패하면서 동맹국인 우크라이나 주민들까지 강제 노동에 동원되는 등 전쟁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기도 했다.

18세기 말부터 1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약 120년 동안은 우크라이나 영토가 둘로 쪼개져 주변국들의 지배를 받았다. 영토의 약 80%는 러시아 제국에, 나머지 약 20%는 오스트리아 제국에 분할됐다. 이 무렵부터 러시아 제국 치하의 우크라이나는 점차 러시아의 일부로 전락한 반면 오스트리아 제국에 속한 우크라이나는 서유럽 영향권에 들면서 상대적으로 민족국가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두 개의 문화권으로 나뉘기 시작했다.

1853~56년 크림 전쟁은 우크라이나 땅에서 러시아 제국과 유럽 열강이 본격적으로 맞붙은 싸움이었다. 표면상으로는 크림반도 내 러시아의 흑해 함대 주둔을 둘러싼 러시아 제국과 오스만 튀르크 제국의 충돌이었지만 실제로는 러시아의 지중해 진출을 저지하려는 성격이 강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연합군 형태로 오스만 튀르크 제국을 지원 사격하면서 전쟁은 국제전으로 번졌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젊은 시절 이 전쟁에 참전한 경험을 바탕으로 훗날 『세바스토폴 이야기』를 펴내기도 했다.

무엇보다 1차 세계대전은 우크라이나에 뼈아픈 역사로 남아 있다. 동서 두 지역으로 나뉘어 동족끼리 싸워야 했기 때문이다.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제국이 연합국과 동맹국으로 갈라져 전쟁을 치르면서 우크라이나인들도 연합군에 350만 명, 동맹군에 25만 명이 각각 참전하게 됐다. 이후엔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까지 이어지면서 우크라이나는 소련·폴란드·루마니아·체코슬로바키아 등 4개국으로 분할됐다. 국가가 하나로 통합되기보다는 오히려 더욱 쪼개지게 된 것이다.

우크라이나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1991년 옛 소련 해체 후 더욱 짙어졌다. 70년간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치 독립을 꿈꿨지만 옛 소련이 물려준 5000여 개의 핵무기 탓에 주변국의 집중 감시를 받아야 했다. 결국 우크라이나는 1994년 강대국들의 안전 보장을 조건으로 핵을 모두 폐기하는 내용의 부다페스트 양해각서를 체결하며 핵무기의 짐을 벗을 수 있었다.

이처럼 우여곡절 끝에 외부적 갈등 요소는 털어냈지만 정작 더 크고 깊은 분쟁의 불씨는 우크라이나 내부에 자리 잡고 있었다. 유럽과 가깝게 지낸 서부 지역과 러시아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한 동부 지역이 오랜 기간 둘로 나뉘어 독립적인 생활권을 유지하다 보니 ‘한 국가 두 문화’ 체제가 고착화됐고, 이로 인해 대통령선거를 치를 때면 친서구파와 친러시아파의 극한 충돌이 반복되곤 했다.

2개 주 독립 선언으로 갈등 고조

2014년엔 친러 성향의 빅토르 야누코비치 전 대통령이 ‘유로마이단 혁명’으로 불리는 반정부 시위로 물러나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남부 크림반도를 전격 합병하는 강경책으로 대응하면서 또다시 격랑에 휩싸였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침략이 아니라 원래 러시아의 일부였던 땅을 돌려받은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국제사회의 거센 비난은 피할 수 없었다. 당시 국제사회는 크림반도 합병엔 유럽의 영향력이 러시아의 앞마당까지 확대되는 걸 용납할 수 없다는 푸틴 대통령의 강한 의지가 담겨 있다는 점에서 1990년대 두 차례에 걸친 체첸 전쟁과 2008년 남오세티야 전쟁의 연장선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더욱이 우크라이나 곳곳이 혼란에 휩싸인 틈에 도네츠크와 루간스크 등 러시아인들이 다수 거주하는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의 2개 주가 분리 독립을 선언하면서 내부 갈등은 극에 달했다. 당시 우크라이나 정부군과 반군과의 유혈 충돌로 1만 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후 2014년 9월 유럽안보협력기구(OSCE) 중재로 민스크 휴전 협정이 체결됐지만 이후에도 반군의 무장투쟁과 이에 맞선 정부군과의 교전은 끊임없이 지속됐다. 서구 진영과 러시아의 대리전 양상 속에 ‘잠재적 화약고’로 불리던 이 지역은 최근 또다시 포연에 휩싸이면서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러-우크라 사태 이해하려면, 우크라이나 역사를 보라… ‘유럽 최후의 대국, 우크라이나의 역사’

유럽 최후의 대국, 우크라이나의 역사

구로카와 유지 지음·안선주 옮김|글항아리|296쪽|1만6000원

우크라이나는 수세기 동안 러시아, 오스트리아, 폴란드 등 주변국들로부터 전략적·산업적 요충지로 여겨졌다. 최근에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가입을 두고 러시아와 충돌하고 있다. 우크라니아는 러시아 군대가 침공할 수 있다고 알려졌던 지난 16일을 ‘단결의 날’로 선포했다. 이날 수도 키예프의 올림피스키 경기장에서는 시민들이 200m 길이의 국기를 들고 행진하는 행사가 열렸다. AP연합뉴스

연일 우크라이나가 주요 뉴스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한국 언론이 우크라이나 뉴스를 이렇게까지 많이 보도한 것은 처음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가능성이 크다고 보도된 지난 16일 다행히 침공은 발생하지 않았지만, 고조된 위기는 아직 온전히 가라앉진 않았다. 우크라이나와 한국의 직접 교역량은 많지 않지만, 세계 각국이 긴밀하게 얽혀 있는 초연결 시대에 우크라이나에서 발생한 평화의 균열은 한국에도 직접적 영향을 줄 수 있다. 17일엔 우크라이나군이 자국 내 친러 반군이 있는 곳에 수류탄 공격을 감행했다는 러시아 언론의 보도가 나온 후 코스닥 지수가 급락하기도 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는 누리꾼들이 ‘현 우크라이나 사태 요약본’을 공유하며 다급하게 우크라이나 역사를 공부하고 있다.

마침 이 시기에 <유럽 최후의 대국, 우크라이나의 역사>라는 책이 나와 눈길을 끈다. 저자는 일본 외무성에 근무하며 주우크라이나 대사를 지냈으며 니혼대학 국제관계학부 교수를 역임한 구로카와 유지다. 구로카와는 1996년 우크라이나 대사로 임명되기 전에는 우크라이나에 대해 ‘유럽의 곡창지대’ 혹은 ‘농업국’이라는 단편적 이미지만 가지고 있었으며, 외무성에 근무하는 30년 동안 우크라이나에 대해 공부하려는 마음도 딱히 없었다고 털어놓는다. 하지만 실제 살아보니 “우크라이나는 곡창지대임에 틀림없었지만, 동시에 그것만으로는 단정 지을 수 없는 매우 복잡하면서도 깊이가 있는 대국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그는 자신이 우크라이나를 ‘발견’한 것처럼 독자들도 우크라이나를 발견했으면 하는 마음에 2002년 이 책을 썼다. 무려 기원전 8세기에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활동했던 스키타이족부터 소련 독립 이후의 2000년대 초반까지 방대한 역사를 다룬다. 중요한 국제관계와 내분의 양상을 모두 제시하는 것이 특징이다.

기원전 8~2세기 흑해 북쪽의 현 우크라이나 지역에는 스키타이인이 살았다. 역사학자 헤로도토스는 유목민족인 스키타이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그들은 도시도, 성과 요새도 짓지 않고 이동할 때는 포장을 둘러친 마차에 가재도구를 실어 소나 말에게 끌게 했다. 그들이 이러한 생활 방식을 취하게 된 것은 스키타이의 토지가 목초로 우거지고 여러 하천이 흐르는 평원이기 때문이다.” 헤로도토스의 기록은 ‘유럽의 곡창지대’라 불리는 우크라이나 영토가 이때부터 비옥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헤로도토스가 남긴 다른 기록들에 따르면 스키타이인은 능란한 기마술이 특징인 용맹한 전사였는데, 침공해 들어오는 페르시아인을 격퇴한 기록도 남아 있다.

우크라이나 역사는 키예프 루스 공국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키예프 루스 공국은 882년부터 1240년까지 오늘날 동유럽 지역에 해당하는 키예프(현재 우크라이나의 수도 이름이 됐다)를 중심으로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일대에 존재했던 루스인들의 국가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모두 자신들이 키예프 루스 공국의 역사를 계승한 ‘직계 후계자’라고 주장한다.

러시아의 논리는 이렇다. 키예프 루스 공국이 멸망한 후에 우크라이나 땅은 리투아니아-폴란드 연합왕국 영토가 됐고 나라 자체가 소멸해서 계승자가 없었으나, 키예프 루스 공국을 구성하던 모스크바 공국은 단절되지 않고 존속해 공국의 제도와 문화를 계승해 훗날 러시아 제국으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반면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의 논리는 이렇다. 15세기의 모스크바는 키예프 루스 공국의 지배 아래에 있던 비(非)슬라브 부족의 연합체일 뿐이며, 가혹한 전제 중앙집권 체제인 러시아·소련의 체제와 키예프 루스 공국의 체제는 전혀 다르므로 별개의 국가라는 것이다. 또한 우크라이나 역사가들은 1240년 키예프 함락 후에 한 세기 가까이 존속했던 ‘할리치나-볼린 공국’을 최초의 우크라이나 국가라고 평하며, 우크라이나 땅에도 키예프 루스 공국을 계승한 국가가 존재했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키예프 루스 공국의 정통 계승자 여부에 따라, 자기 나라가 1000년 전부터 이어온 영광의 역사를 가진 나라인지, 아니면 지금까지 러시아의 한 지방에 불과했던 단순한 신흥국인지를 가늠하는 국격에 관련된 중요한 문제”라고 설명한다.

14세기 중반 할리치나-볼린 공국이 멸망한 후 17세기 중반 코사크(준군사적 자치 공동체)가 우크라이나의 중심 세력이 되기까지 약 300년 동안 우크라이나 땅에는 우크라이나를 대표하는 정치 권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우크라이나 땅은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의 세 민족으로 분화돼 언어도 제각기 다르게 사용했다. 리투아니아-폴란드 연합왕국의 지배하에 놓였던 16세기 말에는 귀족의 힘이 강해지면서 자유로운 농민들 대부분이 영주의 농노가 되기도 했다. “서유럽에서는 농노가 사라지던 시대에 동유럽과 우크라이나에서는 농노가 출현한 셈”이다.

이후 수세기 동안 러시아, 오스트리아, 폴란드 등 수많은 국가가 우크라이나 땅을 탐냈다. 18세기 말 폴란드가 분할되고 튀르크족이 흑해 북안에서 물러난 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120여년간 우크라이나 영토의 80%는 러시아 제국, 20%는 오스트리아 제국에 의해 지배된다. 1차 대전이 터졌을 때 우크라이나만큼 여러 나라들에 치여 유린당한 땅도 없었다. 볼셰비키 적군, 폴란드군, 루마니아군, 프랑스군이 우크라이나 땅을 둘러싼 세력들이었다. 1919년과 1920년의 우크라이나는 여러 세력의 충돌로 무질서한 내란 상태에 빠져 있었다.

1차 대전으로 러시아에서는 제정이 무너지고 소련이 탄생했다. 민족 자결의 원칙에 따라 구 러시아 제국의 지배 아래 있던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등 여러 국가들이 독립을 이뤘다. 우크라이나인은 유럽의 어느 민족보다 긴 시간 독립을 위해 싸웠지만, 이 시기에 독립에 성공하지 못했다. 저자는 당시 러시아 볼셰비키의 조직력과 레닌의 전략적 능력, 러시아 차르 정부하에서 오랫동안 억압돼 있던 우크라이나의 민족주의와 낮은 인텔리 지도자의 비율 등을 원인으로 꼽는다. 1922년 소비에트연방이 정식으로 성립한 이후 70여년간 우크라이나는 연방의 한 부분이 됐다.

지연된 독립으로 우크라이나인들은 큰 시련을 겪는다. 저자는 “소련 초기 우크라이나 공산당은 상당히 자유롭게 자신들의 주장을 모스크바에 전달했고, 이를 관철시켰다. 하지만 스탈린의 권력 장악과 함께 우크라이나의 자치 영역은 좁아지고 결국 모스크바에 의해 완전히 통제돼 소련의 일개 행정 단위가 됐다”고 말한다. 스탈린은 공업화된 사회주의 국가를 만들기 위한 5개년 계획을 실행하며, 1928~1932년 농촌의 우크라이나인들을 대거 공장 지역으로 이주시켰다. 같은 시기 농민들을 토지에서 분리해 국영농장 중심으로 집단화를 시키는 ‘농업 집단화’를 추진했는데, 이로 인해 농업 생산량이 급격하게 떨어진다. 1932~1933년에는 ‘우크라이나 대기근’이 발생한다. 저자는 대기근은 인위적인 기근이며, 홀로코스트에 필적할 만한 제노사이드로 지적하는 학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전한다. 하지만 소련은 공식적으로 이 기근의 존재를 부인하며, 은폐하려 했다.

우크라이나 독립은 소련 붕괴의 결정적 계기가 된다. 1986년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폭발 사고 등으로 소련 체제에 대한 불신이 우크라이나에서 터져나오고, 우크라이나어 복권 움직임이 일어난다. 그로부터 3년 후인 1989년 ‘페레스트로이카를 위한 우크라이나 국민운동’(약칭 루흐·rukh)이라는 조직이 결성돼 30만명 가까운 시민의 지지를 받으며 독립운동을 이끈다. 1990년 3월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공화국의 의회인 최고회의(라다)의 선거가 이뤄지면서 소련이 지속될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같은 해 8월24일 우크라이나 최고회의가 독립선언을 채택하고, 그해 말 폴란드·헝가리·미국·캐나다 등이 독립을 승인하면서 소련이 사실상 해체된다.

최근 와서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에 가입하려는 우크라이나와 이를 저지하려는 러시아의 갈등이 부각됐다. 그러나 구로카와가 전하는 역사를 보면 오랜 세월 러시아로부터 독립된 국가로서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우크라이나인들의 모습이 분명히 보인다. 오랫동안 우크라이나는 러시아를 포함한 여러 강대국들의 전략적·산업적 요충지였기에 이 지역을 둘러싼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얽혀 있으며, 갈등 역시 끊이지 않는 것이다. 책의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우크라이나와 일본의 역사적 교류와 공통분모를 다루며, 앞으로 우크라이나와의 교류를 더 넓혀나가자고 제안한다. 한국의 시민들도 우크라이나에 대한 커진 관심을 기반으로 우크라이나의 역사를 더 깊이 이해할 기회를 가져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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