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대기근 | 강제 노역부터 홀로도모르(우크라이나 대기근)까지! 현실판 ‘나폴레옹’ 스탈린의 폭정 | 요즘책방 : 책 읽어드립니다 The Page-Turners Ep.28 상위 15개 베스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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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 때 350만 굶어죽었다, 우크라이나는 그 악몽 잊지않는다

얼어붙은 감자 캐는 어린이들 – 1930년대 초반 극심한 기근으로 우크라이나에서 약 350만명이 굶어 죽는 비극이 벌어졌다. 소련이 집단 농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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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osun.com

Date Published: 6/2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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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뒤 역사] 우크라이나가 품은 원한의 뿌리 홀로도모르

우크라이나로선 러시아에 씻지 못할 원한을 품을 만한 결정적인 이유가 있다. 90년 전 우크라이나인 수백만 명이 대기근 속에 죽어간 ‘홀로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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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yna.co.kr

Date Published: 8/2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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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소련 대기근

일각에서 이오시프 스탈린 정부의 집단살해로도 여기는 우크라이나 대기근과 카자흐 대기근도 그 일부다. 우크라이나에서만 330만-390만 명, 카자흐스탄에서만 200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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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artsandculture.google.com

Date Published: 11/1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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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우크라이나 대기근

  • Author: tvN STORY 티비엔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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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0. 4. 13.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ydub_GL9mLo

[뉴스 뒤 역사] 우크라이나가 품은 원한의 뿌리 홀로도모르

1932·1933년 수백만명 아사…”스탈린 정권의 의도적 민족말살” 인구 격감한 돈바스 러시아인 집단이주, 우크라 내전 불씨 돼

[※편집자 주 : ‘뉴스 뒤 역사’는 주요 국제뉴스의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사건, 장소, 인물, 예술작품 등을 찾아 소개하는 부정기 연재물입니다.]

(파리=연합뉴스) 추왕훈 특파원 = 강대한 군사력을 지닌 러시아의 위협에 굴복하지 않고 일전불사의 결의를 다지는 우크라이나인들의 용기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당연히 부당한 침략에 맞서 조국을 지켜야 한다는 대의가 바탕이 됐겠지만, 러시아에 대한 원초적 거부감이 이를 확대 강화했을 수 있다. 우크라이나로선 러시아에 씻지 못할 원한을 품을 만한 결정적인 이유가 있다. 90년 전 우크라이나인 수백만 명이 대기근 속에 죽어간 ‘홀로도모르'(Holodomor)가 바로 그것이다.

홀로도모르 희생자 추모 행사 [EPA 자료사진·재판매 및 DB 금지]

우크라이나어로 ‘기아에 의한 죽음’ 또는 ‘기아에 의한 살인’이라는 뜻의 홀로도모르는 1932년과 1933년 당시 소련의 일부였던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난 대량 아사를 가리키는 고유명사다. 오늘날 많은 우크라이나인은 당시 아사자뿐만 아니라 기근과 함께 닥친 전염병의 희생자, 태어날 때부터 영양이 부실해 결국 삶을 이어가지 못한 영유아 등 홀로도모르가 직간접 원인이 돼 사망한 사람이 최대 2천만 명에 이른다고 주장한다. 학자들이 추정하는 사망자 수는 200만명에서 700만명까지 다양하다. 통계가 부실했던 시절에 일어난 일인데다 이 사건을 ‘반공산주의 선동’이라면서 한사코 부인한 소련의 통치가 60년 가까이 계속되는 동안 많은 자료가 사라지거나 왜곡됐기 때문에 아마도 정확한 피해 규모는 영원히 밝혀지기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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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주재 러시아 대사관 앞에서 열린 홀로도모르 연례 추모행사 [EPA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당시 살아남은 우크라이나인들이 후대에 전승한 목격담과 소수의 외국인이 기록으로 남긴 비참한 이야기들은 믿기 어려울 정도다. 한국에서도 번역 출간된 미국 예일대 역사학과 교수 티머시 스나이더의 책 ‘피에 젖은 땅’에는 굶주림을 견디지 못한 부모가 자식을 잡아먹은 이야기가 적나라하게 묘사돼 있다. 너무 끔찍해 인용은 생략한다. 우크라이나 국립과학원 산하 우크라이나 역사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홀로도모르 당시 식인행위로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이 2천500명을 넘었다고 한다. 이것만으로도 왜 이 사건이 10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 우크라이나 민족의 트라우마로 남게 됐는지를 잘 이해할 수 있다.

홀로도모르 당시 우크라이나 하르키우 지역의 거리 [홀로도모르 박물관 홈페이지 캡처·재판매 및 DB 금지]

우크라이나인들이 이 일로 깊은 원한을 품게 된 것은 굶주림으로 인한 죽음 그 자체보다는 그것이 우크라이나 민족을 말살하려는 소련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의 악마적 기획의 결과라는 인식 때문이다. 우크라이나는 세계적인 곡창지대이고 홀로도모르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농장 집단화의 부작용으로 생산력이 훼손돼 가던 터에 흉작까지 덮쳤다고 하더라도 수확된 곡물이 제대로 분배됐다면 대량 아사는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소련은 수많은 우크라이나인이 굶어 죽는 와중에도 개별 농가와 집단농장을 뒤져 징발한 곡물을 외국에 수출했다. 종자까지 모두 빼앗긴 농민들이 이듬해 파종하지 못해 홀로도모르의 두 번째 해인 1933년의 기근은 더욱 심해졌다. 소련 당국은 ‘국내 여권’을 도입해 굶주림을 못 견딘 우크라이나인들이 살길을 찾아 고향을 떠나는 것까지 막았다. 이중, 삼중의 억압에 항의하는 주민들에게는 악명높은 소련 비밀경찰의 체포, 고문, 처형이 뒤따랐다. 홀로도모르를 연구하는 현대의 역사학자들 가운데 다수는 이 사건의 처음부터 끝까지는 아닐지라도 상당 부분이 막 싹 트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를 억누르려는 스탈린의 의도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대체로 인정한다.

홀로도모르 희생자를 추모하는 촛불 [EPA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홀로도모르의 참상을 겪은 우크라이나인 가운데 다수는 몇 년 후 나치 독일군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해 오자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나치군이 격퇴된 후 이들은 소련의 가혹한 탄압을 피할 수 없었다. 소련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많은 우크라이나인이 나치에 협력한 사실을 들어 홀로도모르를 ‘나치 부역자들의 날조’라고 선전했다. 소련의 해체와 우크라이나 독립 이후 홀로도모르의 진상을 규명하자는 목소리가 커졌고 이를 ‘민족말살'(Genocide) 범죄로 규정하자는 우크라이나의 호소에 미국과 캐나다, 호주를 비롯한 일부 국가가 호응했다.

우크라이나가 소련으로부터 독립하고 23년이 흐른 2014년,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계 주민 비중이 가장 높은 도네츠크와 루간스크 등 동부 2개주가 분리 독립의 기치를 내걸고 내전의 불을 댕겼다. 우크라이나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러시아인들이 이 지역의 독립을 주장하는 것은 홀로도모르의 상처를 새삼 후벼파는 행위다. 홀로도모르가 없었더라면 합쳐서 돈바스로 불리는 이곳에 러시아인이 몰려들어 올 일도 없었다. 일할 만한 사람 대부분이 죽고 버려진 땅에 스탈린이 러시아인을 적극적으로 이주시켰기 때문이다.

불 뿜는 러시아 다연발 로켓 러시아·벨라루스 합동 군사훈련에서 러시아군의 다연발 로켓발사기가 로켓을 발사하고 있다 [러시아 국방부 제공·AP 연합뉴스 자료사진·재판매 및 DB금지]

홀로도모르를 국제사회에 알리는 노력을 주도했던 빅토르 유셴코 전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2007년 홀로도모르 75주년을 맞아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에 기고한 글에서 “당시의 러시아인들 역시 스탈린 압제의 희생자였다”면서 “이 시대의 러시아인들에게 책임을 전가할 생각은 전혀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의 희망은 이 범죄가 사실 그대로 알려지도록 하는 것뿐”이라고 썼다. 고개가 끄덕여지는 말이다. 그러나 인간사는 분별과 이성보다 원초적인 감정에 지배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돈바스가 우크라이나의 목에 들이댄 칼이 된 지금 애써 묻어두려 했던 90년 전의 원한이 되살아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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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000만 명 굶어 죽은 우크라이나 대기근 80주년

1000만 명가량이 굶어 죽은 것으로 추산되는 1932~33년 우크라이나 대기근(홀로도모르) 80주년을 맞아 23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의 홀로도모르 희생자 추모상 앞에서 시민들이 헌화한 뒤 묵념하고 있다. 홀로도모르는 우크라이나어 ‘홀로드(기아)’와 ‘모르(떼죽음)’의 합성어다. 우크라이나는 당시 볼셰비키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를 뿌리 뽑으려고 대기근 상황을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반면, 러시아는 스탈린의 집단농장을 위한 곡물 압수 조치로 카자흐스탄·벨라루스 등에서도 발생한 비극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키예프 로이터=뉴스1]

[안치용의 시네마 크리티크] 우크라이나 대기근과 스탈린, 그리고 기자

영화평(영화리뷰) <미스터 존스(Mr. Jones)>

아일랜드 대기근(영어: Great Famine, 아일랜드어: An Gorta Mór, An Drochshaol)은 1845년에서 1852년까지 아일랜드에서 일어난 집단기근과 역병, 대규모 해외이주 사건을 일컫는다. 대기근 시기에 백만 명이 죽고, 백만 명이 해외로 탈출하여 아일랜드 인구의 대략 4분의1이 감소했다.

1845년 갑자기 감자역병이 아일랜드 전역에 발생하며 감자를 주식으로 하는 아일랜드인이 죽어가기 시작했다. 감자역병이 대참사의 원인이긴 했으나, 먹을 곡식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아일랜드의 영국인 지주는 아일랜드인을 소작인으로 부리면서 많은 밀과 옥수수 등을 수확했으나 전량 영국으로 가져갔다. 당시 아일랜드는 영국의 지배를 받았다. 감자역병으로 감자가 수확되지 않아 아일랜드인이 재앙에 직면한 상황에서도 영국인 지주나 영국은 아일랜드에서 거둔 곡식을 아일랜드에서 풀지 않았다. 따라서 당시 아일랜드인은 하느님의 도움으로 기적적으로 살아남거나, 굶어 죽거나, 국외탈출의 세 가지 선택을 할 수 있었다.

‘유럽의 빵 바구니’에서 발생한 대기근

비슷한 유형의 대기근이 약 1세기 뒤에 세계의 곡창이자 ‘유럽의 빵 바구니’로 불리는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났다. 영화 <미스터 존스(Mr. Jones)>는 이 우크라이나 대기근을 소재로 한 극영화이다. 아일랜드 대기근은 비교적 소상히 알려졌고, 영화나 소설의 직간접 소재로 많이 활용된 반면 우크라이나 대기근은 잘 알려지지 않았고 여전히 실체에 관한 논란이 존재한다.

영화는 ‘가레스 존스’(1905~1935)라는 영국 저널리스트의 우크라이나 대기근 취재 전후를 다룬다. 우크라이나 대기근은 ‘홀로도모르(Holodomor)’로도 표현되는데, ‘기아’라는 뜻의 ‘홀로도(Holodo)’와 ‘죽음’이란 뜻의 모르(mor)가 합쳐진 우크라이나 말이다. 1932~33년 옛 소련의 자치공화국인 우크라이나에서 대기근으로 약 350만 명이 아사한 사건을 지칭한다. 사망자 규모는 관점에 따라 이 숫자의 2~3배까지로 늘어난다. 아일랜드 대기근과 마찬가지로 ‘홀로도모르’ 시기에 우크라이나 인구의 4분1 가량이 감소했다는 분석도 있다.

영화는 ‘홀로도모르’를 최초로 보도한 존스(제임스 노턴)의 취재기를 통해 ‘홀로도모르’를 조명한다. 우크라이나에서 수백만 명이 굶주림으로 죽어 나가는 와중에 스탈린이 그곳에서 생산된 곡식을 모두 수출해 산업화에 쏟아부었다는, 즉 의도적으로 우크라이나인의 아사(餓死)를 유발했다는 사실상 학살이라는 견해에 동조하는 듯하다. 이러한 반(反)스탈린적 분석은 1991년 소련에서 독립한 우크라이나의 공식적 입장이기도 하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1932~33년의 대기근을 재조사하여 당시 ‘대학살’과 가레스 존스의 기사가 모두 사실이었음을 공표했고 2008년에는 가레스 존스에게 사후 훈장을 수여했다. 키예프에 있는 타라스 셰브첸코 국립 대학 저널리즘 연구소는 2019년 ‘가레스 존스 메달’을 제정하여 ‘홀로도모르’ 연구에 기여한 기자, 학자, 출판사 등에 수여하고 있다.

그렇다면 ‘홀로도모르’는 아일랜드 대기근처럼 인간의 악의에 의한 의도한 학살, 혹은 최소한 방조한 학살이란 설명은 진실일까. 아일랜드에서 많은 영국인 지주와 영국 정부의 악의가 2백만명의 아일랜드인을 고토에서 죽이거나 몰아내었다면 약 100년의 시차를 두고 우크라이나에선 독재자 한 사람의 악의가 그보다 많은 우크라이나인을 굶겨 죽였다는 주장은 진실일까. 이 사건에 스탈린과 소련 공산주의 관료의 악의 혹은 의도가 어느 정도 개입했는지는, 더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홀로도모르’는 사실이지만, 그것이 악의나 의도에 의한 것이었는지, 또는 무능과 부패에 의한 것이었는지는 여전히 확인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한다. 존스의 우크라이나 취재는 분명 진실을 추구한 기자정신의 발로였지만, 그의 취재는 르뽀라는 한계를 갖는다. 따라서 현상을 포착해 기록으로 남길 수 있었고, 죽음을 무릅쓰며 용기를 발휘한 행위는 저널리스트의 귀감이 되어야 하겠지만, 그가 현상을 적시하였을 뿐 현상의 원인을 취재하는 데 성공한 것이 아니라는 점은, 그의 기자정신에 비추어 명확히 부언되어야 한다.

고통에 공감하기

‘홀로도모르’가 소비에트 정부의 정책 실패와 무능에 의한 것이었는지, 스탈린이란 독재자의 상상을 불허할 악의에 의한 것이었는지는, 저널리즘 나아가 아카데미즘에서 중요하게 논의되어야 할 사항이긴 하지만 ‘홀로도모르’란 역사 자체로 보면 무익한 논의일 수 있다. 사람들을 먹여 살릴 곡식이 있었지만 어쨌든 정말 많은 사람이 죽었다. 아일랜드와 달리 우크라이나엔, 혹은 소련 전체로는 그러한 수요를 감당할 곡식이 없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영화에서 그렸듯 굶주림에 시달리다 사람까지 잡아먹은 참담한 상황이 빚어진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비록 많은 이가 대서양을 건너지 못하고 수장됐지만 아사 지역을 탈출할 기회라도 부여된 아일랜드와 달리 1932~33년의 우크라이나는 봉쇄됐다. 따라서 하느님의 도움으로 기적적으로 살아남거나, 굶어 죽거나, 국외탈출의 세 가지 선택이 가능했던 아일랜드인과 달리 우크라이나인은 하느님의 도움으로(혹은 스탈린의 도움으로?) 기적적으로 살아남거나, 굶어 죽거나 하는 두 가지 선택만이 가능했다.

당시 모스크바의 외국 기자들은 소련 정부에 협조하고 그들이 제공하는 혜택을 누리면서 기사를 계속해서 쓰거나, 존스처럼 죽음을 감수하며 사실을 전달하고 모스크바에서 쫓겨나는 두 가지 선택을 앞에 두었다. 존스는 운이 좋았던 사례이고, 존스의 동료 기자처럼 존스의 길을 선택했다가 총에 맞아 죽는 제3의 선택이 있긴 했다. 존스가 자신의 30살 생일을 하루 앞둔 1935년 8월 12일에 내몽골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으니 사실 모스크바의 기자들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두 개밖에 없었다고 해야겠다. 쓰고 죽거나, 침묵하며 살거나.

아그네츠카 홀란드 감독은 “자신의 이상, 젊음, 용기만으로 잔혹한 현실에 맞서 연속적인 지옥의 순환에 들어가는 존스의 모든 메커니즘을 간단하고 솔직하게 설명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홀란드 감독은 “가짜 뉴스, 대안적 현실, 언론의 부패, 정부의 비겁함, 사람들의 무관심에 관한 이 이야기가 사실은 시대를 초월한 오늘날의 이야기”라며 “여전히 부패한 자들과 그들을 따르는 추종자들, 그리고 이기주의자들이 가득한 반면 오웰과 존스 같은 사람이 부족한 현실을 지적하기 위해 이 이야기를 현재에 다시 꺼냈다”고 제작동기를 밝혔다.

영화에선 존스가 뉴욕타임스 모스크바 지국장 월터 듀란티(피터 사스가드), 조지 오웰(조셉 묠)과 각각 대화하는 장면이 나온다. 조지 오웰과 만남이 실화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두 대화에서 존스의 상대가 공통적으로 얘기한 단어는 ‘맥락’이었다. 당시 사회주의에 우호적이었던 지식인들이 품은 사고의 틀과 관련된다. 거대한 시대정신이 진행하게 되면 어쩌면 약간의 퇴행과 부작용이 있겠지만 그 퇴행과 부작용의 안타까움에도 불구하고 시대정신의 전진을 성원해야 한다는 취지로 ‘맥락주의’ 사고를 요약할 수 있겠다. 현재 한국 정치에서도 ‘맥락주의’는 상당한 힘을 얻고 있다. 참고로 조지 오웰은 나중에 소설 <동물농장>을 발표하며 ‘맥락주의’에서 이탈한다. 혹은 조지 오웰이 ‘맥락주의’에서 이탈했다기보다 소련이 맥락을 잃어버렸다고 말해야 할까.

시대정신의 전진을 응원하고 수용할 때 어느 수준의 일시적 퇴행까지 용납할 수 있는 것일까. 복잡한 논의이지만, ‘홀로도모르’가 ‘맥락주의’의 일시적 퇴행에 속하는 간단한 사건이 아님은 확실하다. 영화 <미스터 존스>를 스탈린의 만행에 초점을 맞춰서 보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역사에서 목격된 거대한 비극적 사건과 그 맥락을 이해하려고 노력한 당시 소수 지식인의 무력했지만 의미 있는 분투에도 주목하면 좋겠다.

더 본질적인 핵심은 영화에서 흑백으로 보여준 ‘홀로도모르’이다. 부당하게 주어진 다중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과 그 고통의 이유를 찾는 인간적 노력에 주목하는 것, 두 가지를 유의하며 감상할 것을 제안한다. 홀란드 감독이 언급한 대로 가레즈 존스와 조지 오웰에 더 유의하는 것이 나쁘지 않은 감상법이긴 하지만, 그들의 출발점 또한 ‘공감’과 ‘인간’에서 찾아진다.

글·안치용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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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대기근 참사 ‘홀로도모르’

[러시아.CIS 이슈 따라잡기 – 35] 매년 11월 넷째 토요일은 우크라이나가 스탈린 시절 대기근 참사로 숨져간 조상들의 넋을 기리는 가장 큰 국가기념일이다. 우크라이나인들은 나치의 유대인 학살인 ‘홀로코스트’에 맞먹는 1932~1933년 대기근 참사를 ‘홀로도모르’라고 부른다.홀로도모르(Holodomor)는 스탈린이 ‘쿨라크(Kulak)’라고 부르는 부농(富農) 계층을 해체하고 농산물을 수출해 공업을 일으킬 기반을 마련하고자 1920년대 말부터 농업 집단화를 밀어붙이는 과정에서 수많은 우크라이나인들이 굶어 죽은 사건이다. 1932~1933년에 걸쳐 최대 1000만명에 이르는 우크라이나인들이 아사(餓死)했는데 이는 당시 우크라이나 전체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한다. 무엇보다 홀로도모르는 우크라이나인들이 러시아에 대해 갖고 있는 뿌리 깊은 적대 감정의 근원을 이루는 것이다. 유럽 내 최고로 비옥한 토지(흑토)를 가진 우크라이나에서 국민 전체의 생존이 위협당할 만한 기근 참사가 발생했다는 것은 어쩌면 역사의 아이러니다.홀로도모르가 발생한 배경은 강제적인 농업 집단화에 대해 우크라이나 지주들의 반발이 컸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집권 후 산업화를 강하게 독려하면서 이를 위한 재원을 농업에서 마련할 수밖에 없었다. 첨단 기계설비를 유럽에서 들여와 산업을 근대화하려면 쿨라크가 장악하고 있는 농산물 수확을 통제할 수 있어야 했다. 특히 ‘프롤레타리아를 위한, 프롤레타리아에 의한’ 정권을 표방하는 공산당으로서는 돈 많은 쿨라크는 혁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척결해야 할 대상이었다. 소련 공산당은 대다수 빈농을 혁명 대오로 이끌어내기 위해 쿨라크가 보유한 재산을 빼앗아 국영 집단농장을 통해 생산량을 공동 배분하는 형태로 사회주의 혁명의 이상을 실현할 필요도 있었다.문제는 우크라이나였다. 소련 농산물의 30% 이상을 생산했던 우크라이나는 개별적으로 농지를 소유하는 경향이 강했다. 쿨라크 수와 비중도 가장 높았다. 소련 당국이 농민들에게 토지를 내놓고 집단농장 건설에 동참할 것을 강요하자 이들의 저항은 거셌다. 우크라이나 농민들은 수확한 농산물을 불태우고 가축을 도살하기도 했다. 어차피 집단농장의 소유가 될 것이라면 물건을 순순히 내놓지 않겠다는 저항의 표시였다.하지만 이 같은 반발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우크라이나 농민들이 태업을 하면서 곡물 생산량은 크게 줄었지만 스탈린은 오히려 예년보다 더 많은 곡물 징발을 요구했다. 우크라이나에 할당된 농산물 송출 쿼터는 턱없이 늘어나 우크라이나인들이 굶지 않고서는 도저히 채울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소련 당국은 우크라이나 농민들이 이듬해 봄 파종을 위해 남겨둔 곡물 종자까지도 빼앗아갔다.무자비한 곡물 징발에 아사자가 속출했다. 배고픔에 지친 우크라이나인들은 들판에 떨어져 있는 알곡들을 주워 먹었고, 길거리 쓰레기통을 뒤져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소련 비밀경찰은 알곡 몇 알을 주워 씹는 것도 용납하지 않았고, 곡물을 모으다 적발되면 인민의 재산을 훔쳤다는 이유로 그들에게 총을 쏘았다.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아사자가 증가하고 있다는 소식에도 모스크바 당국은 우크라이나에 식료품을 일절 공급하지 않았다. 당시 소련의 전략적 곡물 비축분은 300만t으로, 이는 우크라이나의 굶주린 농민들을 긴급히 구호하는 데 쓰일 수 있었지만 소련 정부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오히려 외부에서 우크라이나로 들어가는 식품 수송 루트를 모두 차단했다. 우크라이나인들은 식량을 구하러 밖으로 나가는 것조차 금지되었다. 우크라이나에서 1932~1933년에 걸쳐 직접적인 아사나 이후 합병증으로 숨진 사람은 600만~800만명, 최대 1000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소련 당국이 우크라이나인들을 굶어죽도록 방치한 이유는 단순히 농업 집단화에 대한 반대 때문만은 아니었다. 스탈린의 심중에는 걸핏하면 소련 공산당 지시에 맞서려는 우크라이나인들의 씨를 말리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홀로도모르를 국가에 의해 특정 민족을 의도적으로 없애려는 ‘제노사이드(집단학살)’로 보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2004년 말 ‘오렌지혁명’으로 집권한 우크라이나 신정부는 반(反)러시아 기치를 내걸며 홀로도모르에 대한 진상 규명에 나섰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2006년 9월 유엔 총회에서 우크라이나 대기근 참사를 유엔이 제노사이드로 규정해달라고 호소했다. 인류사에 이처럼 불행한 역사가 또다시 반복되지 말아야 한다는 이유였다.그러나 홀로도모르는 학계에선 제노사이드로 거론되고 있지만 유엔이나 국제사법재판소(ICJ) 같은 권위 있는 국제기구를 통해서는 아직 공식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김병호 국제부 기자][ⓒ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1930년대 소련 대기근 — Google Arts & Culture

1930년대 소련 대기근은 1932년에서 1933년까지 소련의 곡물생산지역을 덮쳐 수백만 명을 아사시킨 대기근이다. 일각에서 이오시프 스탈린 정부의 집단살해로도 여기는 우크라이나 대기근과 카자흐 대기근도 그 일부다. 우크라이나에서만 330만-390만 명, 카자흐스탄에서만 20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된다.

정확한 사망자 수는 기록의 미비로 인해 알 수 없으나, 우크라이나인이 많이 사는 쿠반 지역을 포함시킬 경우 사망자 수가 급격히 치솟는 경향이 있다. 2007년 데이비드 마플스가 추산한 수치에서는 우크라이나에서만 750만 명이 죽었고 그 중 우크라이나인은 400만 명이라고 추산했다. 2010년 키예프 항소심재판소에서 발견한 바에 따르면 이 기근으로 인한 인구 손해는 직접 굶어 죽은 사람 390만 명에 출산율 감소로 인한 610만 명까지 합쳐서 1000만 명에 이른다.

기근의 주요 원인으로는 제1차 5개년 계획의 농업 집산화정책을 강제한 것, 농업 노동력이 감소한 것, 그리고 여러 차례의 가뭄 등이 꼽힌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이것이 우크라이나인과 카자흐인이라는 민족에 대한 인종청소를 위한 의도적 행위였다고 보는 반면, 이에 반대하는 의견도 적지 않다. 카자흐스탄 지역에서는 러시아 내전기에 있었던 튀르케스탄 대기근의 영향까지 더해져서 소련 체제가 세워지고 15년 만에 인구의 절반 이상이 죽었고, 카자흐스탄에서 카자흐인이 정작 소수민족이 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 사태를 소련 밖에 처음 알린 사람은 가레스 존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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