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찌무라 간조 | 우찌무라 간조의 생애 | 일본의 양심을 깨운 시대의 선구자 | 신앙의 위인전 97 개의 정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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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기독교 사상가 우찌무라 간조(1861-1930)는 일본인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찾고자 한 사상가입니다.
미국 농학자 클라크가 세운 삿포로 농과대학을 다니던 중 친구를 통해 복음을 듣게 되고 기도 모임에 참여하며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대학 졸업 후 1882년 친구와 함께 삿포로 독립교회를 설립한다. 미국 애머스트 대학과 하드포드 신학교를 졸업했으나 성직자가 되진 않았습니다.
일본으로 돌아와 도쿄 제일고등중학교 교사가 되었다. 그러나 1891년 교육 칙어 봉독식 때 천황에 예를 표하지 않아 일천황을 숭배하는 존황파의 미움을 받아 직장, 아내와 자식을 잃게 됩니다.
1900년 월간 성서연구를 간행해 선교에 몰두합니다. 그는 철저한 십자가 신앙을 강조하면서 참된 신앙은 성경에 근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의 꿈은 성경대로 사는 것과 위대한 평민을 키우는 것이었습니다. 수십년간 청년들 가르쳤던 6평짜리 다다미방에서 야나이하라 다다오 같은 3명의 도쿄대 총장, 오호히라 일본 수상 등 지도급 인사들이 배출됨으로 1차대전 후 일본의 근대화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김진홍 목사(두레수도원)는 우리가 지금 왜 우찌무라 간조를 알아야 하는가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지금의 한국 교회는 세인들의 비난과 조소 속에서 휘청대고 있습니다. 병든 세상을 치유하여 새롭게 하며 바른 미래로 이끌어 가야 할 교회가 오히려 세상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이런 때에 우리의 이웃 나라 일본에서 바른 교회를 일구고,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을 세워 나가기 위해 고민하며 살았던 우찌무라 간조의 삶과 사상을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은 큰 의미를 갖습니다.\”
예수님을 닮은 사람, 우찌무라 간조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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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치무라 간조 – 나무위키

우치무라 간조는 기독교 신앙의 유일한 근거는 성서뿐, 교회와 그 관습은 기독교를 담아내는 껍데기라고 하였다. 구안록에서는 죄인인 사람은 스스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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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12/2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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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찌무라 간조(Kanzo Uchimura) | 작가 & 작품 – 교보문고

우찌무라 간조 (內村鑑三, Kanzo Uchimura). 25 관심작가 등록. 외국작가 > 종교인/종교작가 > 기독교인; 출생지 : 일본; 출생 : 1861년; 사망 : 1930년. 작가소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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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kyobobook.co.kr

Date Published: 1/2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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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이크뉴스] 일본 사상가 우찌무라 간조의 불벼락 예언과 그 …

일본의 기독교 사상가 가운데 우찌무라간조(內村鑑三. 1861-1930년)라는 인물이 있다. 그의 한국인 제자 가운데 무교회 신앙자였던 김교신, 함석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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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reaknews.com

Date Published: 11/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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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찌무라 간조를 읽어야 하는 이유 < 문화 < 기사본문

서재의 우찌무라 간조 (홍성사 제공)최근 황석영의 소설 을 읽었다. 개신교 목사인 류요섭이라는 인물이 한국 전쟁 전후 시기의 피비린내 나는 과거로 ‘시간 여행’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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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newsnjoy.or.kr

Date Published: 3/2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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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찌무라 간조” 이야기 – 네이버 블로그

♧윌리암 클라크 선교사와 우찌무라 간조 선생♧ 1876년 미국 선교사 “윌리암 클라크” 는 일본 삿보로 농과 대학교로 부터 일본의 학생들에게 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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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4/2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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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기독교 사상가, 우치무라 간조 (内村鑑三, 1861 ~ 1930)

우치무라 간조 / 우찌무라 간조 (内村鑑三, 1861년 3월 26일 – 1930년 3월 28일)는 일본의 개신교 사상가이다. 서구적인 기독교가 아닌, 일본인들에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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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chedulife.com.au

Date Published: 2/3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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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우찌무라 간조의 삶과 신앙 – 다음블로그

우찌무라 간조(1861∼1930)는 삿뽀로농업대학시절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고 그것을 계기로 1882년 삿뽀로독립교회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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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5/1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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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찌무라 간조의 생애 | 일본의 양심을 깨운 시대의 선구자 | 신앙의 위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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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우찌무라 간조

  • Author: 성결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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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0. 9.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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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우치무라 간조

우치무라 간조(일본어: 内村鑑三, 1861년 3월 26일 – 1930년 3월 28일)는 일본의 개신교 사상가이다. 서구적인 기독교가 아닌, 일본인들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가르침 즉, 일본적인 기독교를 찾고자 한 사상가로 평가받는다.

생애 [ 편집 ]

다카사키 번사 우치무라 요시유키의 장남으로 에도 고이시가와(小石川)에서 태어났다. 미국 농학자인 윌리엄 스미스 클라크가 세운 삿포로농학교를 다니던 중 친구의 전도로 기독교인이 되었다. 대학생 시절 그는 친구들과 기도 모임을 구성하여 신앙생활했는데, 모임은 성직자와 평신도의 구분이 없는 민주적인 공동체였다. 이러한 새로운 신앙경험은 우치무라의 기독교 사상에 영향을 주었다.

대학교를 졸업한 1882년 우치무라와 친구들은 삿포로 독립교회를 통해 서구의 교회가 아닌 일본적 교회를 설립하고자 했다. 교회는 5명의 위원들에 의해 공동으로 운영되었는데, 일상적인 교회의 일은 그들이 함께 처리했고 그 외의 것은 언제나 투표로 처리했다. 또 교회의 회원은 의무적으로 교회를 위해서 일해야만 했다.

1884년 미국 애머스트 칼리지 3학년으로 편입하여 명예상을 받고 졸업한 뒤 하트포드 신학교에 진학하였으나 4개월만에 학업을 포기했다. 자신이 신학을 포기한 이유에 대해 “나는 더 이상 신학공부를 할 수 없게 되었다. 지난 3년 간의 극심한 정신적 긴장으로 신경이 불안정해지고 매우 심각한 만성 불면증에 시달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휴식이나 진정제, 기도도 효과가 없었고,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고향 땅으로 돌아가는 것밖에 없었다”라고 말했다.[1] 결국 1888년 일본으로 귀국하였고, 도쿄에 있는 제일고등중학교 교원으로 취직하였다.

하지만, 1891년 일본 천황의 절대권력의 상징인 《교육칙어》(敎育勅語)봉독식 때 예를 갖춰 인사를 하지 않았다는 ‘불경사건’으로 일본 천황을 숭배하는 존황파(尊皇派)들에게 미움을 받아, 보복 테러의 표적이 되어 아내와 자식 그리고 직장을 잃었다. 우치무라는 교원으로 활동하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나는 왜 기독교인이 되었는가?》(How I Became a Christian), 《구안록》등을 저술했다.

또한 《만조보》지의 기자와 월간지 《성서지》 연구의 간행인으로도 일하는 등 바쁘게 활동했다. 1921년에는 도쿄의 한복판에서 일요일마다 로마서를 강의하여 수많은 청중들이 크게 감동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연표 [ 편집 ]

1861년 다카사키 하급 무사 우치무라 요시유키의 아들로 에도에서 출생

1877년 도쿄외국어학교에서 삿포로 농업대학에 관비생으로 입학, 기독교로 개종(17세)

1881년 삿포로 농업대학 졸업(21세). 훗카이도 개척사 어용 관직을 임명받음. 도내의 어업을 조사•연구하는 일에 종사. 친구들과 삿포로 그리스도교회를 건립하여 전도 활동에 힘씀.

1883년 훗카이도 개척사 어용 관직 사직. 아사다 다케라와 결혼하였으나 6개월 만에 이혼.

1884년 미국 유학길에 오름(24세). 펜실베니아 주립 아동백치원의 간호인으로 근무. 뉴잉글랜드의 애머스트 대학에서 수학. 하트포드 신학교 입학. 4개월 간 신학 공부

1888년 일본으로 귀국(28세). 니가타 현의 호쿠에쓰 가칸 학교에서 교장직을 맡음. 선교에 대한 그의 원칙과 서양 선교사들 사이의 불화로 교장직 사직. 제일고등중학교의 강사로 부임.

1889년 요코하마 가즈코와 결혼.

1891년 제일고등중학교 불경사건(천황의 초상 옆에 걸어 놓은, 천황이 서명한 새로운 ‘교육칙어’ 사본 앞에 머리를 숙여 경의를 표하기를 거부한 사건)으로 교사직을 박탈당함. 아내와 사별.

1893년 <구안록> 출간

1894년 <전도의 정신> 출간. <지리 연구> 출간. 출간

1895년 출간

1897년 <번영을 위한 최상의 유물> 출간. ‘요로즈 쵸오호우’ 영문란 주필 역임(37세)

1898년 ‘요로즈 쵸오호우'(만조보) 주필 사임. 평론지 ‘도쿄 도쿠리츠잣시'(동경독립잡지) 발행

1900년 ‘도쿄 도쿠리츠잣시’ 폐간. 월간지 ‘세이죠노겡쿠'(성서지연구)를 창간, 30년간 문필 전도에 전력(40세)

1903년 고우도쿠 슈우스이 등과 반전론 제창. ‘요로즈 쵸소호우’지의 객원직을 사임. 오직 성서 연구와 복음 전도에 힘씀.

1930년 도쿄에서 별세(70세)

신학 [ 편집 ]

한국교회에서 우치무라 간조의 신학은 무교회주의라고 해서 불온시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는 무교회주의를 잘못 이해한 것으로, 무교회주의는 기존교회에 대한 반발이 아니라 성서의 권위를 존중한 복음주의이다. 교회가 아닌 성서가 기독교 신앙의 원천이라는 오직성서(Sola Scriptura)이다. 그는 성서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는다고 고백하였으며, “나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말미암아 얻은 구원에 대한 감사일뿐이다. 그러니 나의 신앙은 낡았고 구식이다”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강조하였다.[2] 그가 무교회주의를 주장한 이유도 기독교 신앙의 근거는 가시적인 교회 즉, 예배당이 아닌 성서뿐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우치무라 간조는 “기독교 신앙의 유일한 근거는 성서뿐, 교회와 그 관습은 기독교를 담아내는 껍데기”라고 하였다. 구안록에서는 죄인인 사람은 스스로 평안을 구할 수 없으나, 예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셨기 때문에 평안을 얻는다고 했다.

한국 교회에의 영향 [ 편집 ]

그에게 영향을 받은 제자로는 한국의 무교회주의 개신교 운동가인 김교신, 함석헌, 송두용, 최태용 등이 있다.

참고자료 [ 편집 ]

나는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할 수 있는가. <참길로 간 사람들①> 우찌무라 간조의 삶과 신앙, 김진아 기자, 인터넷 기독교 신문 에큐메니안[1] 기사

저서 [ 편집 ]

How I Became a Christian 『余は如何にして基督信徒となりし乎』나는 어떻게 크리스챤이 되었는가(1986년)

『余は如何にして基督信徒となりし乎』나는 어떻게 크리스챤이 되었는가(1986년) Representative Men of Japan 『代表的日本人』(1908年) 우치무라 간조의 인물 일본사(조양욱 역, 아침바다, 2003년) 대표적 일본인 (기파랑, 2011년)

『代表的日本人』(1908年) 우치무라 간조의 인물 일본사(조양욱 역, 아침바다, 2003년) 『基督信徒のなぐさめ』 – 1893年の内村鑑三の処女作。「無教会」という言葉が初めて使われた作品である。岩波文庫(1976年、ISBN 4-00-331191-4)。

『求安録』(1893年) 구안록 (포이에마, 2016년) 김유곤 옮김, 크리스챤서적, 2006년

ロマ書の研究 (1957) 우찌무라 간조의 로마서 연구 (김유곤 역, 크리스챤서적, 2002년)

一日一生 일일일생(안진희 역, 홍성사, 2004년)

『内村鑑三所感集』소감 – 복음 그 진리와의 대화 (김유곤 역, 크리스챤서적, 2011년)

우찌무라 간조 회심기 : 내 영혼의 항해 일지(양혜원 역 | 홍성사 | 2001년)

사랑의 샘가에서 (범우사 | 2013년)

내촌감삼 : 우찌무라 간조 성서주해 (바이블넷 | 2013년)

참고서적

우치무라 간조, 신 뒤에 숨지 않은 기독교인 / 양현혜 저 |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 2017년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 간조 / 스즈키노리히사 | 소화 | 1995년

우치무라 간조의 삶과 사상 / 미우라 히로시 저 / 오수미 역 | 예영커뮤니케이션 | 2000년

우찌무라 간조에게 배운다 / 이사카와후지오 저 / 김충손 역 | 은혜미디어 | 1996년

각주 [ 편집 ]

우찌무라 간조(Kanzo Uchimura)

작가소개

1861년 에도에서 다카사키 한시의 아들로 태어났다. 동경외국어학교(1874)를 거쳐 삿포로 농업 대학(1877)에 입학, 거기서 처음 기독교를 접했고 세례까지 받았다. 졸업 후 잠시 농상무성 관리로 있다가 미국 유학을 떠나 애머스트(Amherst) 대학에서 기독교 역사, 히브리어, 헬라어, 서양사 등을 공부했으며 졸업 후 하트포드 신학교에서 신학 공부를 했다. 1888년 소명을 품고 귀국한 그는 니가타 현의 호쿠에쓰 가칸 학교에서 교편 생활을 시작했다. 1891년 제일고등중학교에서 가르치던 중 천황의 ‘교육 칙어’를 불경시했다는 이유로 교직을 떠나야 했으며, 이 때부터 본격적인 저술 활동에 들어가 주옥 같은 저작들을 쏟아 냈다

지금, 우찌무라 간조를 읽어야 하는 이유

▲ 기독교를 통해 일본의 정신이 더 성숙해지고

조국애가 승화되리라는 확신을 갖고, 성경 연구

운동을 펼치며 조국 일본의 청년들을 기독교정신

으로 길러 내고 조국을 섬기도록 가르친 그의

신앙 운동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홍성사 제공)

“우찌무라 간조” 이야기

문학·책

“Welcome to Joe’s Sweet Home!” ^ – ^ – ^ – ^ – ^ – ^ – ^ – ^ 창조주께서 허락하신 삶은 한순간도 경홀히 할 수 없는 큰 은혜입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나 의 쓸 것을 남과 나누며 이루는 하나님나라 ! 그 영토(靈土)를 넓히는 일 에 일조할 수 있다면 무 얼 더 바라겠나이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 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육 간에 늘 강건하십시오.

[스크랩] 우찌무라 간조의 삶과 신앙

우찌무라 간조의 삶과 신앙

“나는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할 수 있는가.”

우찌무라 간조의 삶과 신앙

우찌무라 간조의 생애

우찌무라 간조(1861∼1930)는 삿뽀로농업대학시절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고 그것을 계기로 1882년 삿뽀로독립교회를 세웠다. 이 시절 함께 신앙생활을 하던 와다세오시마 사또 등을 중심으로 서구 기독교로부터 독립된 교회활동으로 그는 일본적 기독교를 추구한 사상의 기틀을 보여주었다. 이후 1884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필라델피아에 있는 사회 단체에서 활동하면서 실천적 활동의 중요성을 배우고 다시 애머스트 대학에서 수학, 그의 신앙관 확립에 전성기를 맞는다. 이 때는 우찌무라에게 있어 신앙적으로 가장 큰 기쁨을 맞은 시기이자, 서구 기독교에 대한 큰 회의와 반성을 하게 된 때이기도 하다. 그 곳에서 공부를 마친 우찌무라는 다시 하드포드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을 공부하지만, 그는 성직이라는 특권에 대한 깊은 회의로 성직자가 되지 아니하고 중도에 신학을 포기하고 다시 귀국한다.

1888년 일본으로 귀국한 우찌무라는 그가 미국에서 보고 배웠던 신앙의 훈련을 심어주기 위해 니가다에 있는 기타고시시학관에서 후진을 양성하는 데 힘쓰지만, 곧 사임하고 도쿄에 있는 제일고등학교 교원으로 부임했다. 그러나 1891년 불행한 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불경사건’이었다. 1890년에 발표되었던 천황의 절대권력의 상징인 <교육칙어> 봉독식때 정성들여 예를 다하지 않았다는 불경한 자로 몰려 교원과 학생, 넓게는 일반 여론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그는 이 일로 학교를 사직해야 했음은 물론이고 이 때부터 기독교가 천황제 중심주의와 자주 충돌하고 탄압을 받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직장과 아내를 잃은 우찌무라는 각 지역을 전전하면서 교직에 종사하는 한편 문필가로서 활동하였다. 이 때 <구안록>을 저술했으며, 영문으로 <나는 왜 기독교인이 되었는가>라는 책을 저술하기도 했다. 또 <만조보>지의 기자가 되었으며 더불어 월간지 <성서지연구>를 간행하였다. 그는 이후 독립적인 전도자로서 활동을 하기도 했는데, 1921년에는 도쿄의 한복판에서 일요일마다 로마서를 강의하여 수많은 청중들이 크게 감동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당시 한국에도 그의 사상적 영향을 받은 이들이 있었는데 김교신, 함석헌, 최태용 등이다.

“나는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중대한 의미를 부여한다. 삶 속에서 수없이 하나님을 부르짖어도, 신과의 ‘참 만남’이 상실된 부름은 공허한 외침일 뿐이다.

나의 하나님을 찾는 것. 그것은 단편적인 신앙을 벗어나 깊이 있는 신앙으로 가는 길에 없어서는 안 될 통과의례다. 기독교 역사를 돌아보면, 그런 고민의 과정을 거쳤던 많은 인물들이 있기 때문이다. 우찌무라 간조(1861∼1930)도 그런 인물 중의 하나다.

‘나의 하나님’, ‘나의 기독교’를 고민했던 사람. 나아가 ‘일본의 하나님’, ‘일본의 기독교’를 고민했던 그는 서구의 식민지적 기독교의 한계를 극복하고 일본인에게 참 복음이 되는 기독교를 찾고자 애썼다.

그는 서구 일변도로 주입되는 기독교가 아니라 일본인들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진리를 찾고자 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가 서구의 것만이 아니며, 이교도로 통칭되는 다양한 민족들에게도 동일하게 현현하는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독립적인 일본적 기독교를 고민했던 우찌무라 간조와 기독교의 만남은 반강제적인 서구 기독교에 의해서였다.

기독교와의 새로운 만남

“예쁜 여자들이 노래를 부르는” 외국인 구역에 가서 구경을 하자는 친구의 제안으로 처음 기독교 예배에 참석했었던 어린 우찌무라는 5년 후 삿뽀로농업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당시 삿뽀로농업대학은 미국 메사추세츠주립 농과대학의 학장인 클라크 박사에 의해 기독교 복음이 전파된 상태였다. 클라크 박사는 학생들에게 성경을 나눠주고 복음을 전하는 데 열심이었다. 그의 이런 노력은 헛되지 않았고 당시 학교의 1기생이었던 15명의 학생 전원이 예수를 믿겠다고 서약을 했다.

우찌무라는 당시 2기생으로 학교에 입학한 상태였는데 1기 선배들은 2기 후배들을 강제적으로 개종시키려 했다. 기독교 예배의 새로움과 서구인들의 따뜻함을 긍정적으로 생각했던 그였지만, 강압적으로 기독교를 요구하는 힘 앞에서 그는 강력하게 저항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루 4번 이상 사방의 신들에게 절하고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이름 모를 수많은 수호신들에게 기도하던 그에게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요구하는 많은 엄한 규율들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정신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었기에 강렬히 저항했지만, 결국 여론의 힘에 밀려 우찌무라는 일본의 예수를 믿겠다는 서약을 하고 말았다.

강제적인 과정을 통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이미 내밀한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는 이제 많은 신들을 위한 수십 가지의 예배형식을 갖출 필요가 없었다. 단지 하나님 한 분을 위한 예배만이 필요했을 뿐이며 점차 그의 말씀이 마음을 채워가기 시작했다. 그에게도 새로운 빛이 비추기 시작한 것이었다.

자립, 자주, 성서 – 우리의 교회를 세우라!

그렇게 받아들인 신앙은 학교의 동료들과 함께 모임을 이루면서 점차 깊어졌다. 그들은 함께 모여 많은 신학, 신앙서적들을 읽으며 토론하거나 신실한 기도 모임을 갖곤 했다. 그 작은 교회는 그들에게 매우 특별했는데 전적으로 민주적이어서 모든 학생들의 교회 직분이 동일했다. 그들은 그것이 철저하게 성경적이며 사도적인 관점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모든 이들이 목사요, 신부요, 선생이자 신도였다. 그것은 우찌무라의 신앙관 형성에서 매우 주목할 만한 부분인데, 훗날 일본적 기독교를 치열하게 고민했던 우찌무라의 사상 형성의 기본이 되었기 때문이다. 기독교를 만나고 함께 신앙을 나누던 초창기부터 이미 서구의 교회 형태가 아닌 평등한 신앙공동체를 만들었던 것이다.

학교를 졸업한 이듬해인 1882년 우찌무라를 비롯한 동료들은 교회를 세울 것을 결심했다. 삿뽀로독립교회였다. 그들은 서구의 교회가 아닌 일본적 교회를 설립하고자 했고, 서구의 원조를 받는 것을 부끄러워했다. 그래서 외국의 원조 없이 순수하게 일본인만의 힘으로 교회를 만들려 애썼다. 교회의 모토는 자립, 자주, 성서였다. 구조도 그들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교회는 5명의 위원들에 의해 공동으로 운영되었는데, 일상적인 교회의 일은 그들이 함께 처리했고 그 외의 것은 언제나 투표로 처리했다. 또 교회의 회원은 의무적으로 교회를 위한 일을 해야만 했다. 빈둥거려서는 안 됐고 특별히 할 줄 아는 게 없다면 난로에 넣을 나무라도 잘라야 했다. 그들이 이처럼 다른 교회들과는 ‘차별적인’ 교회공동체를 추구했던 것은 훗날 그의 글에서 밝히고 있듯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 교회의 구성원들은 자기들만의 독특한 체계와 원리들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는 그러한 독특성을 신성하게 여기고 유지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었다.”

신의 진리는 누구에게나 실현된다

우찌무라에게 큰 영향을 준 사건이 삿뽀로독립교회의 결성과 활동이었다면, 큰 영향을 준 사람은 뉴잉글랜드의 애머스트 대학 총장 실리 교수와의 만남이었다. 삿뽀로독립교회를 떠난 그는 많은 서적을 통해 만났던 실리 교수를 찾아가 공부를 시작했다. 그와의 인격적인 만남, 그리고 서구의 기독교를 직접 체험하게 되면서 여태껏 참된 기독교가 아닌 ‘식민적이고 우월적인’ 기독교를 만나왔음을 절감하게 된다.

“‘길들여진 코뿔소(회심한 이교도)’는 살아 있는 예다. 칠판에 그려진 예가 아니라, 최고의 현장에서 가져 온 최고의 표본이다. … 회심한 코뿔소로서 나는 선교의 서커스 사람들에게 이 문제에 대해서 좀 더 신중할 것을 권한다. 그들은 길들여진 코뿔소를 응석받이로 만들며 ‘길들여지지 않은 코뿔소(회심하지 않은 이교도)들이 길들여진 코뿔소를 모방하게 만든다. 그런 방식을 통해서 당신들의 일에 관심을 갖기를 바란다면 사람들에게 기독교 선교에 대한 잘못된 개념을 심어주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의 회고처럼 당시 서구 기독교는 다분히 식민주의적 선교 방식으로 기독교를 전하고 있었다. 설령 그것이 전부라 말할 수는 없어도 적어도 주류가 그러했다고는 말할 수 있으리라. 또한 기독교 국가의 우월주의는 인종, 지역, 자본주의와 맞물려 때로 제3세계들에게 폭력적이었음을 우찌무라는 직시했던 것이었다. 그는 그런 형태는 ‘참 기독교’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서구의 방식과 표현으로 획일화된 하나님은 분명히 일본인들이 만날 수 있는 하나님은 아니었다. 따라서 우찌무라에게 있어 참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바로 가장 일본다운 모습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었으며,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의 이런 생각은 훗날 그가 표방하게 되는 무교회주의와도 직결된 사고였다. 대개 무교회주의를 ‘교회 체제를 거부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실상 그가 그리고 있는 무교회주의는 교회의 제도나 형식보다 성서 속에 살아 있는 복음과 만나는 것이 가장 일차적이라는 각성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따라서 그가 말했던 무교회주의는 교회제도의 해체를 추구한 것이 아니라, 제도적 교회, 죽은 제도, 교리, 교권에 대항하는 비판정신에서 연유된 것이었\. 이런 사고의 저변에는 서구 기독교가 가진 교리, 형식, 직제에 관한 깊은 회의와도 연관되어 있을 것이라 유추된다. 그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사랑과 신앙에 의해 맺어진 모임이 곧 교회라는 것을 강하게 주장했다. 여기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무교회는 진보하여 유(有)교회가 되어지는 것이다. … 교회는 생명의 체구로서 균형을 갖추며 계속 무너지고 계속 세워지는 것이다. 무교회주의는 한편으론 결정체로 굳어버린 교회를 파괴하고 다른 한편으론 살아 있는 교회를 건설하기도 한다.”

우찌무라 간조. 그는 전생애를 통해 일본적 기독교를 위해 고민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 진리가 눈이 파란 서구인들에게만 해당한 것이 아니라, 피부가 검은 흑인들에게도, 또 키가 작고 노란 일본인들에게도, 나아가 모든 인류에게 타당한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각 민족의 특성에 맞게 실현되는 기독교가 ‘참 기독교’이며, 그것이 곧 신이 원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더불어 형식과 제도, 교리에 얽매이지 않고 성서, 나, 하나님이 끊임없이 대화할 때 기독교의 참 진리가 실현된다고 강조했다. 서구 일변도의 기독교가 중심이었던 1백여 년 전의 그 때 인류의 보편이 되시는 신의 폭넓음을 깨달은 우찌무라 간조의 통찰력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나님은 2천 년 동안 노력해서 얻은 우리의 민족적 특성이 미국과 유럽의 사상으로 완전히 대체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기독교의 아름다움은 기독교가 하나님이 각 민족에게 주신 모든 독특한 특성을 거룩하게 만들어 준다는 데 있다. 일본도 동일한 하나님의 민족이라니 이 얼마나 복되고 격려가 되는 말씀인가!”

우찌무라 간조 목사님의 신앙고백 1

도전, 실패, 그리고 좌절

어떤 일본 목사님의 신앙 고백을 간추려서 편집하였다. 이 글의 원래 저자인 우찌무라 간조 목사님은 진실한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고 곧바른 기별을 전하는 목사로서 희생적인 생애를 살다가 간 일본 기독교계의 대표적 인물이다. 기독교의 불모지인 일본에서, 저자는 전쟁의 참화로부터 일본을 일으켜 세우는데 공헌을 한 20명의 일본인 중에 한 명으로 선정될 정도로 일본 국민 전체에 정신적 감화를 끼친 정직한 그리스도인이었다. 그의 무덤에 세워진 비석에는 “일본은 하나님의 것이다”라는 글이 새겨짐으로서 지금도 그의 설교는 소리 없이 계속되고 있다.

다음에 소개하는 그의 간추린 신앙 고백을 통하여 그 속에 비추어져 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과 영적 위치를 확인해 보도록 하자. 오늘날 왜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하지 않는가? 왜 세상이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을 비웃게 되었는가? 왜 교회가 타협과 세속의 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영적 고뇌로부터 해방되어 승리와 평안의 길을 걸을 수 있는가? 여기에 답이 있다. 이번 기사는 진리를 더듬어 찾고자 하는 정직한 그리스도인들에게 통찰력 있는 답변을 제시해 줄 것이다.

깨어진 나의 첫 결심

내가 처음으로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을 접했을 때, 나는 그 도덕의 고결함과 위엄에 탄복하였다. 성경은 나의 불결함과 불완전함을 깊이 깨닫게 만든 유일한 책이었다. 내 말과 내 행실, 그리고 나의 사상을 성경에 비추어 보았을 때,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더럽기 이를 데 없었다. 내 생활은 은근한 기만과 거짓과 위선으로 온통 얼룩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 삶을 살았다. 나는 다른 사람의 실수를 보면서 좋아하였고, 다른 사람을 넘어뜨려서까지라도 성공하기를 원했다. 나의 목적은 언제나 아름답고 보기 좋은 것으로 위장되어 있었지만, 진정한 목적은 내 자신의 이기심과 명예를 채우는 것이었다. 겉으로는 도덕군자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매우 공격적인 야심가였던 것이다. 내 생애의 목적은 비루하였고, 사상은 더러웠다.

그러나 기독교인이 된 이후로부터, 나는 나의 모든 사상과 행실을 완전히 개혁하기로 결심하였다. “나는 이제부터 내 말과 행실을 완전히 뜯어 고치겠다. 다시는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 남을 비평하거나 중상하지 않겠다. 정욕을 억제하겠다. 게으름을 피우지 않겠다. 원수를 사랑으로 갚겠다. 스스로 높아지고자 하는 정신을 버리고 겸손하겠다. 술, 담배, 극장 구경도 중단하겠다. 나는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겠다.” 그야말로 전격적인 개혁을 선언하였다. “굳게 결심한 이 마음, 다시는 흔들리지 않으리!” 라는 결심과 함께 내 자신이 새롭게 거듭났다고 굳게 믿었다.

한동안 내 결심은 잘 실행되었다. 나의 개심은 정말 대단한 것이라고 다른 사람도 말했고, 내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였다. 나의 아침 기도는 뜨거웠고, 길었다. 나의 회심이 너무나 전격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어떤 친구들은 나의 그러한 변화를 싫어했다. 어제까지의 떠버리가 이제는 침묵가가 되었고, 나의 이야기 속에는 회개의 눈물과 성경절의 인용이 있었다. 나는 마치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듯한 생활을 살았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개혁이 유익한 것이긴 했지만, 인위적으로 조작된 성결은 오래가지 못했다. 나는 진정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경험을 이해하지 못한 채 기독교인으로서의 겉모양만을 흉내내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언행과 생각은 다시 옛 상태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나의 부자연스러운 생활은 내 주변 가족들과 친구들을 어색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내 자신 마저 부자유스럽고 고통럽게 만들었다. “약간의 방종이 신앙에 무슨 해를 가져오겠는가? 지나친 침묵은 오히려 우울증을 가져올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머리를 들기 시작했다. 얼마가지 않아서 나는 완전히 옛날의 상태로 돌아가고 말았다. 내가 기독교인이라는 유일한 표시는 매 주일마다 냉랭한 마음으로 예배에 참석하는 것과 아침 저녁으로 머리를 숙여서 무의미한 기도를 드리는 것으로서 근근히 명맥을 유지하였다.

친구들을 만나서 이야기 할 때, 이 목사와 저 신도의 결점 그리고 다른 사람의 흉을 화제거리로 삼으면서 즐기는 나의 옛 습관이 살아나기 시작하였다. 야고보가 말한대로 “한 혀로 주되신 아버지를 찬양하기도 하고, 같은 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들을 저주하기도 ” 하였다(약 3:10). 야고보가 기록한 그러한 말씀을 읽을 때마다 내 양심은 끌로 쪼이는 듯한 아픔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만일 내가 나의 말많은 습관을 억제하지 못한다면, 내가 믿는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이 내게 무슨 유익이 된단 말인가? 물론, 나는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라는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야고보는 “그렇게 믿는 것이 좋다. 그러나 마귀도 그렇게 믿고 떨고 있”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내 자신은 성경이 말하는 명백한 가르침과 교훈에 따라 살지도 않으면서, 세상 사람들을 향해서는 죄를 회개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라고 말하는 것이야말로 철면피가 극에 달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 나는 위선자이다. 참된 변화의 삶을 살고 있지 못한 내가 무슨 면목으로 남에게 기독교회의 신앙을 권하겠는가?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은 내 영혼에 해결할 수 없는 고통과 고뇌를 가져다 주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마음의 평안을 약속하고 있는데,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이후 내 영혼은 깊은 좌절과 고뇌의 미로를 헤메게 되었다. 어떻게 된 일인가? 그 때부터 나는 영혼의 평안을 찾기 위해서 수십년 동안 방황하였다.

율법의 정죄로부터 시작된 고뇌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은 나의 마음과 생애를 정죄하기 시작하였다. 그 정죄의 크기와 깊이가 너무나 컸기 때문에 “차라리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짐승이었으면” 이라는 생각이 떠오를 정도였다. 성경은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모두 살인자다 너희가 아는대로 살인자는 누구나 그 안에 영원한 생명이 없”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러나 내 마음 속에는 원한과 용서하지 못하는 정신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처음에는 이 말씀이 너무나 지나친 말씀이라고 생각되었지만, 그 말씀 역시 진리였다. 가인은 그의 동생 아벨을 미워하던 끝에 결국에는 아우를 죽이는 첫번째 살인자가 되었다. 증오는 결과적으로 살인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류의 역사를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죄인을 형벌하실 때에는 죄의 결과로 하지 않으시고 그러한 결과를 가져오게 만든 의지를 심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실 때에는 그 의지의 실행 여부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 의지 자체를 보신다. 증오심이 언제나 살인이라는 행위로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그 사람의 교육, 환경, 체면 등에 의해서 조절되기 때문이다. 만일 국가의 법과 사회의 제재가 없고, 살인자는 저생에서 지옥불에 떨어진다고 가르치는 종교가 없다면, 사람은 자기가 미워하는 사람을 결국에는 죽이고 말 것이다. 그래서 존 번연은 사형장에 끌려가는 죄수를 가리키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였다면 저 죄수는 존 번연이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마음 속에 증오심이 뿌리를 내릴 때마다 이미 살인은 시작된 것이다. 그러므로 증오와 원한을 품고 있는 나에게 하나님께서 살인죄의 선고를 내리시기로 어떻게 변명할 수 있겠는가?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명 역시 나를 붙잡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 나오는 도둑질은 절도나 강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무릇 하늘이 베풀지 않은 것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내게 베푸신 학식과 재능의 결과로 얻는 것이 아니라, 아첨과 뇌물로서 높은 지위를 얻는다면, 그것은 그 직위와 봉급을 도둑질한 것이 된다.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하지도 않으셨는데, 내 스스로 목사가 되어 성직의 권위와 존엄성을 사용한다면, 나는 엘리의 아들과 마찬가지로 성직에 따르는 명예를 도둑질한 것이다. 아, 인류가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을 때,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명에 의해서 정죄당하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나는 위선자고, 살인자며, 도둑질한 자였다. 성경이라는 빛으로 나를 살펴볼 때마다 도무지 피할 수 없는 절망감에 휩싸이게 되었다. 하나님의 진리를 알지 못하였을 때에는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그다지 큰 고통이 없었는데, 죄와 죄의 결과를 안 후로는 죄를 범할 때마다 말할 수 없는 고통과 고뇌가 나를 압도하였다. 그런데 매우 놀랄만한 사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칭하는 자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죄에 대한 고민과 고뇌가 무엇인지도 모른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죄에 대해서 깊은 절망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영혼을 치료하기 위해서 “교회”라는 간판을 걸고 환자들을 불러들이는 돌팔이 목사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어둠 속에서 멸망의 골짜기로 걸어가고 있다. 그러한 목사들에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계명을 지키고, 죄에 대해서 승리할 수 있을까요?” 라고 물으면, 그들은 한결같이 “연약한 인간은 원래 죄를 범한 다음, 그것을 후회하고 또한 그 결과를 두려워 한답니다. 그런 다음, 죄를 범한 자신에 대해서 절망감을 느끼게 되죠. 그러면서도 똑 같은 죄를 반복해서 범하는 삶을 사는 것이 일반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이랍니다. 비록 그러한 삶을 산다고 할지라도 교회 활동에 열심히 참석하고 잘 믿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느니 안심하고 교회에만 열심히 나오십시요” 라고 답변한다. 그러나 정말 그러한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말인가? 정말 그러한 삶이 성경이 말하는 “이기는 자”의 경험이란 말인가? 율법을 범한 죄로 인하여 받게 되는 양심의 고통 속에서 어떻게 성경이 약속하는 평안과 화평을 얻을 수 있단 말인가? 결코 그럴 수 없다. 성경은 모든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영혼의 평안을 약속하고 있다. 아무리 고통스럽다고 할지라도 나는 반드시 이 문제에 대한 진리를 찾아낼 것이다! 왜냐하면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서 겪게 되는 고통이 미신과 오류 속에서 양심을 기만하는 것보다 훨씬 낫기 때문이다.

[출처] [본문스크랩] 우케무라 간조의 신앙고백1 – 도전 실패 그리고 좌절 (씨알 아카데미) |작성자 최정윤

우찌무라 간조 목사님의 신앙고백 2.

교회 안에서의 실망과 외로움

교회 안에서의 외로움

오늘날, 진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신자의 고통과 눈물은, 성경을 옆구리에 끼고 기도회, 부흥회에 참석하는 것으로써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모든 의무를 완수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전혀 이해되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자신의 죄에 대하여 깊은 고통과 슬픔을 느끼는 그리스도인은 교회 안에서 조차 외로움과 설움을 맛보게 된다. 내가 너그러운 생각을 가지고 그들을 대하면, 그들은 사기로서 나를 맞아 준다. 그들이 내게 속옷을 구할 때에 내가 겉옷까지 벗어 주면, 그들은 오히려 신발과 모자까지 달라고 한다. 나의 정직을 이용하여 그들은 나를 그들의 편리한 도구로 만들려고 한다. 가끔씩 내가 교회를 위하여 곧바른 말을 하면, 그들은 나를 사랑이 없는 율법주의자로 몰아부쳤다. 아, 교회 안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한단 말인가? 교회는 나에게 죄를 강요하고 있다.

죄를 죄로 느끼지 않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나는 매우 외로운 세월을 보내야만 하였다. 그들의 설교나 신앙 태도는 나에게는 이렇게 들렸다. “죄에서 구원받으려는 자는 그리스도 교회로 오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방패 삼아서 대담무쌍하게 죄를 범하고자 하는 자들도 교회로 오라!” 오늘날, 교회는 신자들에게 십자가를 통하여 죄를 용서 받을 수 있는 길을 소개하고 있지만, 율법에 대해서 올바로 알려주지 않음으로써 교인들을 대담한 무법자로 양육시켜 가고 있다. 또한 어떻게 하면 죄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가를 안내해 주지 않음으로써 교인들을 지옥불에 대하여 두려워 떠는 신경쇠약 환자로 만들고 있다.

교회 안에서 얻지 못한 대답

나는 내 죄가 부끄러워서 하나님을 피하려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내 손을 놓지 않으셨다. 나는 하나님의 겨누는 표적이 된 듯하였고, 그의 화살에 맞아서 비틀거렸으며 그의 손이 나를 누르셨다. 내가 동으로 가도 그가 계셨고, 서로 가도 그분을 만나게 되었다. 나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요 용서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었다. 죄로 인한 가책으로 인하여 나는 완전히 삶의 즐거움을 잃고 말았다. 식욕을 잃고 밤잠을 이루지 못했으며 일할 기력조차 없었다. 하루는 유명한 목사님을 찾아가 내 영혼의 고통을 말하면서 도움을 구했으나 “나는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없다”는 대답을 줄 뿐이었다. 천로역정의 저자인 존 번연 역시 죄의 문제로 고민하고 있을 때, 하루는 감당할 길이 없어서 목사를 찾아가 마음을 털어 놓았던 적이 있었는데, 그 목사가 말하기를 “아마도 당신은 악마의 종이 되었나 봅니다”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죄의 문제를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을 성경과 자신의 경험을 통하여 설명하지 못하는 목사야말로 자신이 왜 목사가 되었는지를 모르는 성직자라고 말할 수 있다. 죄의 문제에 대한 명백한 답변을 가지고 있지 못한 어떠한 신앙이나 종교도 모두 거짓이다.

우찌무라 간조 목사님의 신앙고백 3.

망죄술로 사용된 봉사와 희생

봉사와 희생의 위험성

나는 희생적인 봉사를 통하여 영혼의 고통을 잊기로 결심하였다. 오늘날에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선과 봉사를 통하여 죄로 인한 양심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한다. 심지어는 교회에 바치는 헌금을 통하여 죄책감에서 벗어나려는 그리스도인들의 숫자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나 역시 한때 자선과 봉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의 참된 경험을 얻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빈민 구호 병원에 보조 간호원으로 들어가서, 그들의 발을 씻기고 배설물을 닦아주며, 환자들로부터 온갖 욕설을 들으면서도 즐거운 마음으로 인내의 수련을 받고자 하였다. 그러나 자선과 봉사는 사랑의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라는 진리를 깨닫고 나서부터 이 문제에 있어서 매우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자선과 봉사 사업에 종사하면 결국에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관념은 사실처럼 보이지만, 진리는 아니다. 자선과 봉사의 행위가 자비로운 마음을 배양시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결코 우리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사랑의 수준을 넘어설 수 없다. 자신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사랑 이상의 봉사와 자선을 억지로 이끌어 낼 경우, 자선은 위선이 되고, 봉사는 교만으로 발전하게 된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교회를 위하여 수많은 자선과 봉사를 베푼 사람이 결국에는 교만한 목사와 장로의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선과 봉사가 나를 교만하게 만든다면, 나의 선행은 나의 원수이다. 이러한 경우에 자선과 봉사의 양이 많으면 많을수록 교만과 위선의 깊이는 깊어진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선과 봉사라는 높은 곳에서 떨어진다면, 그는 거의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영적 상처를 받게 될 것이다.

조심하라! 고아원을 세워서 하나님과 사람에게 봉사하려고 하는 자여! 세상이 그대의 자선심을 인정하고 교회가 그대의 신앙적 헌신을 칭찬할 때, 그대는 바로 지옥의 벼랑길 위에 서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눈에 보이는 사업이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보다 더 높게 평가되는 오늘날, 그대의 이름이 높이 들리면 들릴수록 조심하라! 위대한 자선 사업가 하워드는 임종시에 단 두마디의 유언을 남겼다. 하나는 그의 미친 아들이 회복되기를 바라는 것과 자기를 위해 비석을 세우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대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을수록 안전하다. 자신의 죄를 해결하지 않은 채 자선 사업가가 되기를 원하는 자가 있는가? 조심하라! 세상에 이름을 날리고 싶어하는 정치가와 연예인들이 자선 사업에 많은 돈을 투자하는 모습을 보라! 그와 마찬가지로, 거듭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도 자선과 봉사를 인기의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 설교를 잘 하지 못하는 야심적인 목사도 자선가가 되면, 세상의 주목을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자선 사업에 종사하는 사람을 여러 사람들 앞에서 칭찬하지 말라! “너는 남을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그 구제를 은밀히 하라. 그리하면 은밀히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네게 갚아 주실 것이니라.” 마태복음 6:4.

마지막 시도, 목사의 길

자선 사업에서 마음의 평화를 찾지 못한 나는 마침내 극단적인 수단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이 같은 결과가 생길까봐 오래 전부터 두려워하였으며, 이러한 결정을 내리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이제 이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듯 하였다. 그래서 드디어 나는 목회 사업에 투신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세상에 위선적이고 파렴치한 사람들이 많지만, 목사보다 더한 사람이 있을까? 내가 기독교에 처음 발을 들여 놓았을 때부터, 나는 “결코 목사는 되지 않을 것이야” 라고 결심하였다. 그래서 하나님께 “내게 아무리 천한 직업을 주시더라도 제발 목사는 되지 않게 해주십시요”라고 기도하였다. 물론, 내가 어떤 직업을 가지더라도 복음의 전파를 위해서 최선을 다할 것이었다. 그러나 내 스스로 목사직을 택하여 Rev.(경건한 목사) 라는 명칭을 내 이름 앞에 얹는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소름 끼치는 일이었다. 비록 내가 마차꾼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목사는 되지 않겠다고 여러번 다짐하였지만, 결국 나는 그 길을 걸을 수 밖에 없었다.

“밭에 곡식이 익어 추수할 때가 되었다. 추수할 것이 많은데 추수할 사람이 너무나 적다. 그러므로 당신은 목사가 되어야 한다.” 나에게 여러 사람이 이러한 말로서 신학 공부를 권했었다. 그러나 나는 목사를 나의 직업으로 택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이 생각하는 목사는 내가 생각하는 목사와 달랐다. 나는 바울과 같은 목사가 되고 싶었다. 나는 루터와 같은 목사가 되기를 갈망하였다. 나는 리빙스턴과 같은 목사가 되기를 소원하였다. 나에게 그러한 목사가 되라고 권했으면, 나는 높으신 부르심으로부터 빠져나갈 길을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있어서, 제대로 성경을 배우지 못했고, 충분한 경험이 없으며, 자신의 죄와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해방되는 경험을 알지도 못하고, 성경이 말하는 거듭남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신학대학을 졸업했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목사가 되어서 설교 단상에 올라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목사직에 대해서 환멸을 느껴왔다. 로마제국의 핍박으로 인하여 그리스도 교회의 깃발이 피로 물들었을 때에는 매우 적은 소수의 선택된 사람들만이 목사가 되고자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목사직이 안락한 생활이 보장되는 직장으로 전락되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최소한의 생존경쟁으로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을 해결하고자 한다면, 목사가 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나님과의 기나긴 씨름 끝에 결국 나는 “결코 목사가 되지 않겠다”는 사욕을 버리기로 결심하였다. 이 마지막 제물을 바치고 목사로서 최대의 고난을 받는다면, 하나님께서 나의 영혼에 평안을 주실 것이다 라고 믿었다. 내 영혼의 평안을 위해서라면, 목사가 되어도 좋다고 생각하였다. 나는 신학교에서 기도와 단식으로 인생 최대의 행복을 얻고자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의 신학교는 중세기 때의 수도원과는 전혀 달랐다. 신학교에 들어가서 내가 처음 느낀 것은 너무나 편하다는 것이었다. 내가 빈민 구호 병원에서 수련하던 때와 비교하면 너무나 편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신학교에서의 실망

신학교에서 배운 어떤 학문들은 나의 사상에 있어서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특히 헬라어와 히브리어의 연구를 통해서 나는 모세와 바울을 직접 대면하는듯한 감격을 맛보았다. 신학이라는 학문을 여기서 제한하였더라면 좋았을텐데, 유감스럽게도 진지한 성경 연구는 일부에 지나지 않았고, 오히려 영혼을 구하는 기술을 가르치는 웅변학, 설교학, 목회학, 변증학과 같은 것들을 공부하는데 많은 시간을 바쳐야만 하였다. 나는 모세와 바울이 배웠던 신학을 배우고 싶었지만, 신학교는 나에게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 신학교 역시 나의 영혼에 평화를 가져다 주지 못했다. 신학교의 아침 기도회, 쉴새없는 찬미소리도 내 마음 속에 있는 죄의 사슬을 벗겨주지 못했다. 성경 연구, 기도, 찬미와 같은 것들이 학문의 대상이 되고, 의무로서 나에게 부담을 주었을 때, 그러한 것들이 더 이상 거룩한 힘으로 내게 다가오지 못했다. 더우기 종교 비판학과 같은 강의 시간에는 두려운 마음 없이는 입 밖에 낼 수 없는 거룩한 이름을 마치 오래된 돌멩이나 나무조각의 이름처럼 불러댔다. 신학교에서 내가 경험했던 위험은 바로 신성모독의 죄였다.

신성모독에 대한 형벌은 마음이 죄의 죄됨을 느낄 수 없는 상태로 전락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거룩한 성경 말씀이 죄인의 심령을 치료하고 죄의 사슬을 끊어주는 능력으로 다가오는 대신에 하나의 학문과 학설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나는 죄의 고통으로부터 구원을 얻으려고 신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나 신학교에 있는 어떤 교수들은 죄를 계속해서 범하고 있는 상태에서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신학을 나에게 강요하였다. 나는 신학교에서 영원한 멸망으로 떨어지는 문을 발견하곤 깊은 좌절에 빠지고 말았다.

신학의 중심은 마음에 있어야 한다. 전도는 정신이지 기술이 아니다. 목사의 설교는 배우의 연극이 아니다. 사람의 영혼을 다루는 정신적 사업을 위해서 기술적 훈련을 받는 자들은 자칫 잘못하면 목사라는 직업을 가진 연극 배우가 될 수 있다. 자기가 느끼지 않는 것을 느끼는 것처럼 말하고, 자기가 확신하지 않는 것을 확신하는 것처럼 말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연극 배우의 필수 연기가 아닌가?

하늘의 부르심을 받지 않은 사람도, 특별한 하늘의 계시와 영감이 없이도, 그리스도에 대한 순결한 사랑을 맛보지 못한 사람도 신학생이 될 수 있다. 그러한 신학생들에게 하나님의 복음 사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는 것이 현대 신학교가 가지고 있는 맹점이다. 설교는 제조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말씀과 바울의 글은 문법적으로 분석하고 해부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바울이 되어야 비로서 바울의 사상과 경험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억지로 바울의 사상을 꾸며보려고 노력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목사의 양성은 신학교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훌륭한 종교가 중에는 신학교 출신이 많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는 길리얏의 야인이었으며, 그의 사업과 정신을 물려주려고 선택한 후계자 역시 소를 모는 사밧의 아들 엘리사였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사 세상을 구하려고 계획하셨을 때에도, 당신의 아들을 히렐이나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배우게 하지 않으시고 나사렛 벽촌에 두셔서 천연계를 통하여 아들을 친히 가르치셨다. 19세기 최대의 전도자인 무디 역시 세탁소의 일꾼이었다. 훌륭한 목사는 결코 신학교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신학교가 만들어낸 목사야말로 그리스도 교회의 가장 위험한 원수이다.

그렇다! 신학교는 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장소가 아니다. 오히려 신학교는 마귀가 하나님의 교회를 어지럽히기 위해서 공격하기 좋은 최대의 공격 목표이다. 신학교가 마귀의 공격 목표가 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말하고 설교하는 것과, 그들의 품성과 사상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 마귀는 그리스도의 거짓 대리자들을 통하여 잘못된 사상과 교리를 하나님의 교회 속으로 밀어넣음으로써 교회를 세속화시키고 있다.

신학자와 목사가 만들어 놓은 거짓 평안

죄의 죗됨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은혜의 은혜됨을 알 수가 없다. 자기 죄의 무서움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은혜에 대한 절실한 필요를 느끼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말은 하지만 그 마음 속에 절실한 감사와 고마움을 느끼지 못한다. 오늘날 그리스도 교회에 들어온 가장 큰 위험은 죄를 어쩔 수 없는 인생의 부산물로서 가르치는 것이다. 타조가 사냥꾼한테 쫓기다가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어지면, 그 머리를 모래 속에 박고 그것으로서 온 몸을 숨겼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오늘날, 많은 신학자들과 목사들은 죄에 대해서 그렇게 가르친다. 그들은 죄를 도저히 승리할 수 없는 것으로 부각시킴으로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그러한 사람들은 대개 하나님의 율법은 너무나 거룩해서 도저히 순종할 수 없다는 식의 설교를 한다. 그러나 죄를 범한 교인들은 심한 양심의 가책과 심판의 두려움을 목사와 신학자에게 호소하게 된다. 그래서 그들이 생각해낸 것이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죄에 대해서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요. 십계명은 십자가에서 폐지되었습니다. 잘 믿기만 하십시요. 그러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한번 구원을 받으면 영원히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당신은 이미 받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없습니다.” 라는 신학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신학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죄를 범하고도 그것을 심각한 죄로 생각하지 않게 되며, 따라서 양심의 가책도 받지 않게 된다. 그리하여 죄인으로서 열렬히 구해야 할 십자가의 보혈과 은혜를 마음 속 깊이 구하지 않게 된다. 죄를 범한 죄인은 죄책감에 눌리게 되고, 죄인은 그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사랑과 구원의 하나님께 나오도록 계획하신 것이 하나님의 구속의 섭리인데, 신학자들은 죄 가운데서도 평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신학을 고안해 냄으로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할 죄인들의 마음에 거짓 평안을 넣어주었다. 죄를 범한 사람은 마땅히 죄책감을 느껴야 한다. 오직 죄를 회개하였거나 죄를 범하지 않는 사람만이 죄책감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이다. 죄를 생각하지 않거나, 인위적으로 율법을 폐지시킨다고 해서 죄가 없어지거나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시도는 죄를 죗되게 하지 않음으로써, 은혜를 은혜되지 않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변화와 해방의 기쁨

내가 깨달은 오해

죄에서 벗어나는 길

죄란 무엇인가? 노하는 것, 도둑질 하는 것 등이 죄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왜 노하고 도둑질하는가? 어찌하여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는 것일까? 악이란 음행, 더러움, 방탕, 우상숭배, 마술, 원수맺기 … 질투, 술주정을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육체의 죗된 행위는 마음에 깃든 병이 겉으로 드러난 증세이지, 병 자체는 아닌 것인가?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육체의 죗된 행위 하나 하나와 싸우는 일을 중단하기로 결정하였다. 왜냐하면 그러한 노력을 통해서는 결코 죄에 대해서 승리하거나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만일 겉으로 드러난 죗된 행위 자체가 악의 본질이 아니라면, 선한 행위 자체도 선이 아닐 것이다. 이름을 날리기 위한 자선, 더 좋은 것을 얻어내기 위한 기부금은 자선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을 전하는 것도 반드시 선은 아니다. 야심적인 목사, 세속적인 신앙인처럼 더러운 것은 세상에 다시 없다. 선은 정신이지 행위가 아니다. 왜냐하면 선한 행위는 선이 겉으로 드러난 결과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비록 내 모든 소유를 나누어 주고,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준다고 해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도 없다”고 증언하였던 것이다(고전 13:3).

한번은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께 와서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라고 물었다. 이 질문에 대한 그리스도의 대답에는 기독교 신앙의 진수를 담고 있다. “네가 어찌 선한 일에 대해서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니 곧 하나님이시다.” 무엇이 선이냐는 질문에 대해서 그리스도는 “선은 하나님이다”라고 답변하셨다. 효 도 선이고, 인 도 선이다. 그러나 효와 인은 선의 결과일 뿐이며, 선 자체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을 알면 의인이 될 수 있다. 선을 배우면 하나님께 가까워진다. 선을 구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서 선을 행할 수 없다. 종교와 도덕적 행위와 신앙은 서로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이다. 한쪽을 버리고서는 다른 쪽을 이해할 수 없다. 선이 하나님이라면, 악은 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을 떠나는 것을 말한다. 도둑질, 살인, 간음은 하나님을 떠난 결과이지 죄의 근본 원인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의 율법을 의도적으로 범하는 죄를 짓는 것은 내가 마음 속에서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고 내가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 결코 죄를 범할 수 없으며 죗된 생각이 나를 주장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께 온전히 돌아갈 수만 있다면 나는 의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죄에서 벗어나는 길, 영혼의 평안을 찾는 길, 그것은 오직 이 길 뿐이다!

아는 것과 믿는 것의 차이

신앙이란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다. 신앙이란 납득할 수 없는 일을 믿는 것이 아니다. 신앙이란 양심과 성경에 근거해서 의로운 선택을 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 교회에서 말하는 신앙이란, 지적인 동의가 아니라, 마음과 심령의 전적인 동의를 말한다. 그런데 마음과 심령의 하는 일은 의지와 양심의 선택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신앙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려면, 양심이 도덕적으로 올바른 선택을 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진리를 아는 것과 진리를 믿는 것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사슴은 사슴이요 말은 말인지를 알지만, 정치가들이 정권에 아부할 때에는 사슴을 말이라고 하지 않는가? 둘에 둘을 더하면 넷이 된다는 진리를 정확히 아는 장사꾼도 2원짜리 물건 두개를 5원에 팔고 있지 않은가? 아무리 부도덕하고 부절제한 목사라도 성경에 기록된 진리대로 순종하는 사람만이 최후의 승리자가 될 수 있다는 설교를 하지만, 과연 몇명의 목사들이 자신이 설교하는 진리를 믿으면서 그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가? 그러므로 나는 다음과 같은 그리스도의 계시적 말씀에 머리를 수그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볼 수 있겠는가?” 누가복음 18:8. 사도 바울은 별다른 사람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믿고 있는 진리대로 살다가 일생을 마친 사람에 불과하다. 마틴 루터나 요한 웨슬리가 오늘날까지 존경을 받는 이유도 그들이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과는 달리 자신이 인정하는 진리대로 살다가 죽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에 나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믿는 바대로 그대로 산다면, 이미 복음 사업은 끝마쳐졌을 것이고 우리 모두는 지금 하늘에 가있을 것이다.

나의 오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왕과 신하의 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자애로운 어머니와 갓태어난 아기의 관계와 같은 것이다. 아기는 어머니께로부터 만가지를 받지만, 아기는 어머니께 하나도 드리지 못한다. 하나님께 대하여 가지고 있는 우리의 신뢰 자체도 하나님의 사랑과 보살핌을 깨달았기 때문에 생긴 선물이다. 우리가 우리의 재산과 몸과 영혼을 하나님께 바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되돌려 드리는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주시는 자요, 인간은 항상 받는 자이다. 우리에게는 사랑이 없지만, 하나님은 그분 자체가 사랑이시며 사랑의 원천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기 원하는 사람은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봄으로써, 그분의 사랑이 자신의 마음 속에 새겨지도록 허용해야만 한다.

그렇다! 나는 하나님을 믿었다. 그분의 선하심을 알았다. 그리고 의롭고 선한 삶을 살고자 하는 결심도 하였고, 어느 정도 그분의 사랑도 알았다. 그러나 나의 모든 것을 바쳐서 그분을 신뢰할 정도로 그분의 사랑을 알지 못했다. 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자식이 부모를 버리고 배반하는 탕자가 되거나, 비록 부모 밑에 있을지라도 의무감에서 어쩔 수 없이 순종을 하면서 마음 속에 불만이 가득한 자식으로 자라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충분히 알지 못하는 그리스도인 역시 일상 생활의 모든 국면에서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게 된다. 나는 내 영혼이 구원을 받기 전에 성인의 거룩한 행위를 흉내내려고 했다. 나의 선행을 통하여 하나님의 관심과 호의를 얻어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의 선한 행위와 의로서 하나님의 친구가 되고, 나중에는 나의 구원에 대해서 그분과 대등한 계약을 맺으려고 계획했었다. 나는 지음을 받은 자면서도 지은 자의 흉내를 냈던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아기이면서 우주의 창조 사업에 동참했던 그의 파트너나 된 것처럼 행동하였다.

아, 나는 얼마나 미련했던가! 영원한 사랑의 하나님이 은혜와 사랑을 주려고 호소하시면서 나를 찾아오셨건만, 나는 오히려 “왜 나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까? 왜 나를 사랑해 주지 않습니까?” 라고 하나님께 대들었던 것이다. 지나간 생애 동안에 하나님께서 나의 선한 행위에 대해서 감사하다는 말을 하실 때까지 기다렸던 적이 얼마나 많던가? 그분의 무한하신 사랑에 대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그분의 손에 나를 온전히 맡기는 것이다. 나의 잘못은 마음 문을 활짝 열고 그분의 사랑을 충분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었다. 나는 언제나 “나 같은 죄인이 어떻게 무한한 사랑을 받을 수 있겠는가? 먼저 내 자신을 깨끗하게 하고 난 후에 하나님께 나아가야지” 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어떻게 내 스스로 나를 깨끗케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 이외에 누가 나를 죄로부터 깨끗케 할 수 있단 말인가? 어머니의 손을 놓음으로 흙탕에 빠지게 된 어린아기가 스스로 자신을 깨끗하게 씻을 때까지 어머니께 올 수 없단 말인가? 사랑의 어머니는 오히려 아이가 머뭇거리면서 더디 온 것을 책망하고 곧 새옷으로 갈아 입힐 것이다. 하물며 사랑의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대하시겠는가?

의심

세상에 태어나서 속아온 사람일수록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못한다. 이 죄악의 세상에서는 믿음이라는 신성한 특성을 키울 수 있는 여건이 잘 주어지지 않는듯하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믿으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인도하겠다” 라고 말씀하시지만, 사람들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소서. 그러면 믿겠나이다” 라고 요구한다. 인류는 하늘 아버지를 찾고 있다. 하늘에 걸려 있는 별들과 들에 핀 백합화가 모두 창조주의 사랑을 나타내고 있지만, 사람들은 태풍과 지진과 독초를 보면서 의심함으로써,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께 돌아가는 신앙을 배우지 못하고 있다. 인류의 6천년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가 꿰뚫고 있음을 증거하지만, 사람들은 수천번의 전쟁과 노예 매매와 인종 학대와 종교 전쟁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인류의 고통을 외면하고 계시다는 의심의 미로를 헤멘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그리스도인들 마저 자신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증거를 얻기 위해서 자꾸 눈에 보이는 특별한 기적과 은사를 요구하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성경에 기록해 놓으신 용서에 대한 증거의 말씀을 부인하는 것이 된다.

[출처] [본문스크랩] 우찌무라 간조 목사님의 신앙고백 5. 내가 깨달은 오해 (씨알 아카데미) |작성자 최정윤

변화와 해방의 기쁨

십자가를 통한 변화의 길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사도행전 4:12. 오직 그리스도만이 구원하시는 힘을 가지고 계시다. 모세의 율법을 몸에 두르고 엄격하고도 청렴한 바리새파인 다소 출신의 바울도 그 마음의 고뇌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자신의 재능과 학식을 분토로 여기고 나사렛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참회하며 용서함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었다.

독일에 한 청년이 있었다. 성령께서 그의 마음을 번뇌케 하여 그는 불안한 나머지 단식과 절제를 통하여 선을 쌓기 위해서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러나 어쩌랴, 그가 외모를 꾸미면 꾸밀수록 악한 생각이 끊임없이 마음에서 솟아나왔다. 그 때에 스승인 슈타우비츠의 한마디가 그에게 영감을 가져왔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나님은 루터의 죄를 용서하셨고 온 우주는 버림받았던 자식을 건져 올렸다. 그 후로 루터는 믿음과 성결을 강조하는 강력한 종교 개혁자가 되었지만, 오늘날 그의 후예들은 루터가 말한 믿음을 “죄를 겁없이 범할 수 있는 보험카드”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그래서 믿기만 하면 어떠한 생애를 살던지 간에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설교를 하게 된 것이다.

영국의 베드포드에 한 대장장이가 있었다. 그는 순박하고 단순한 심령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마음 속에 역사하는 사단의 세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무진 애를 썼다. 회개하는 눈물이 그의 눈에서 그칠 날이 없었으며, 용서를 비는 기도 소리가 듣는 자로 하여금 그를 동정하게 할 정도였다. 그는 도덕적 양심을 가지지 않은 동물의 처지를 부러워 하곤 하였다. 악마들이 그에게 몰려와서 그의 죄가 용서받지 못했으므로 지옥불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속삭이곤 하였다. 그런데 이 무거운 짐을 진 여행객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도 모르게 무거운 짐이 벗겨지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아, 이제 내 눈에는 그리스도를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없게 되었다. 나는 드디어 하나님의 아들과 하나가 되는 경험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그분의 의, 공로, 승리가 모두 내 것이 되었다.” 바로 이것이 천로역정의 저자인 존 번연의 간증이다.

나 역시 죄가 가져온 온갖 고뇌와 고통 속에서 방황하다가 모든 기력을 탈진하고 나서야 아버지의 자비만을 바라보면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범한 죄에 대해서 변명하지 않고, 내가 행한 의와 선한 행위를 내세우지도 않았다. 다만 태초 이전부터 예비해 두신 하나님의 어린양이 이루어 놓은 속죄만을 바라보았다. “하나님이시여,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시고 나의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용서해 주십시요. 저는 이제 당신께 드릴 선행이 하나도 없습니다. 저의 의로움을 주장할 수 있는 선행이라곤 하나도 없습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것은 피곤에 지친 몸과 정신, 그리고 깨어진 마음 뿐입니다.” 이러한 기도와 함께 하나님의 은혜가 내 영혼 깊숙히 스며 들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기도에 대하여 “너의 제물은 받아들여졌다. 너는 낡은 옷을 벗고 내가 너를 위하여 준비해둔 의의 옷을 입어라” 라고 말씀해 주셨다. 이제 나의 기도에는 내 소원을 요구하는 주장이 없어졌다. 다만 그리스도의 뜻대로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간청만이 있을 뿐이며,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찬송이 넘칠 뿐이다.

이제 유일한 나의 의무는 단지 하나님의 명령을 기다리는 것이다. 나의 기대는 노력과 희생에 대한 보수에서,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신뢰에 대한 약속된 보상으로 달라졌다. 나는 지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막대한 청구를 할 수 있게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나의 노력과 봉사에 대해서 최선의 선물로 축복해 주셨다. 먹고 입는 것에 대한 근심은 사라져 버렸고, 나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도 무가치한 것으로 여겨졌다. 오직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라는 말씀에 대한 느긋한 신뢰가 생겼다(롬 8:32).

더 이상 나는 의무로서 선을 행하지 않게 되었다. 전도든지 자선이든지 간에 즐거움과 만족한 마음을 가지고 행할 수 있게 되었다. 나의 말과 생활에는 순결한 유머와 여유가 넘치게 되었고, 이전보다 훨씬 더 깊고 의미있는 희생과 봉사를 하나님과 사람들을 위해서 바칠 수 있게 되었다. 희생, 절제, 극기와 같은 것들이 더 이상 하기 힘든 의무로 여겨지지 않게 되었고, 나를 구원하신 구세주를 위해서 바칠 수 있는 다시 없는 특권으로 생각되었다. 하나님께로부터 최고의 선물인 의를 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썩어 없어질 인생들로부터 명예와 부를 얻고자 애쓸 필요가 없었다. 이제 나도 영국의 크롬웰처럼 “주여, 비록 내가 처참하고 비천한 죄인일지라도 은혜로서 당신과 계약 가운데 있습니다.” 라고 기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베푸신 구원에 참여하게 된 이후부터 선에 대한 의무는 즐거움으로 바뀌게 되었고, 죄를 짓는 것은 더할 수 없는 고통이 되었다.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선을 행하게 되었고, 악을 미워하기 때문에 악을 행하지 않게 되었다. 율법은 더 이상 내게 무거운 짐이 되지 않았으며, 다음과 같은 사도 요한의 말이 이해되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요일 5:3.

구세주의 사업은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 진다. 첫째는 인류에게 완전한 생애를 가르치는 것이고, 둘째는 인류의 죄를 당신 자신이 직접 짊어지심으로써 제거하시는 일이다. 전자는 최종 목적이고, 후자는 전자로 인도하는 필요 수단이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죄인을 인도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죄를 속죄해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죄인이 하나님께로부터 진실로 용서받은 경험을 하지 못하면, 그 죄인은 결코 죄를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현대 기독교회는 속죄의 교리를 죄에 대한 값싼 용서에 국한시킴으로써, 신자들로 하여금 구세주의 모본을 쫓아서 따라가는 성화의 경험을 빼앗아 버렸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내 죄를 속하셨으니 이제 나는 애써 선행을 하지 않아도 되며, 죄를 범해도 구원에는 지장이 없다”고 믿는 사람은 아직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살리요” 롬 6:1. 내 경우에 있어서 처음에는 모세의 율법이 부각되었고, 그 후에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다가왔다. 어떤 의미에서 율법의 엄한 밧줄로 자신을 얽어 맨 적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이해할 수 없다. 오늘날 교회에는 속죄의 교리를 가지고 자신의 죄와 부도덕함을 가리우려고 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 하나님의 아들의 피로 이루어진 은혜가 눈 먼 자들에 의해서 희롱당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깊은 염려와 슬픔에 잠기게 된다. 그리스도의 속죄는 의를 사모하는 자들의 휴식처이지, 악인의 은신처가 아니다. 구약의 엄격한 십계명을 가르치지 않고, 신약의 은혜만을 부드럽게 설교하는 목사야말로 하나님의 어린양들을 소리없이 죽이는 늑대이다.

나는 하나님을 향하여 언제나 이러한 불만을 토로했다. “아, 하나님이시여 내가 당신을 찾고 있었는데 당신은 어찌하여 문을 열어 주시지 않았습니까? 내가 길 가에서 방황하고 있는 모습이 당신께는 가련하게 보이지 않으셨습니까? 내가 진리를 보지 못함으로 고통에 고통을 더하고 있을 때, 당신은 팔짱을 끼고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계셨습니까?” 그러나 이제 은혜로운 한 음성이 내게 이렇게 대답해주셨다. “나의 은혜와 인내가 네게 족하단다. 네가 괴로워하는 것을 보면서 나도 함께 괴로워 했단다. 내가 너를 구하지 않았던 이유는 너를 구원하기 위함이었다. 너에게 반생 동안의 방황과 번민을 허락했던 이유는 너로 하여금 자신을 의존하는 정신에서 벗어나서 온전히 나를 의지하도록 하기 위해서 였다. 너를 괴롭힌 것은 네 자신이었다. 이제부터는 나만을 의지해라. 지혜는 네가 아니라 나에게 있다는 사실을 있지 말아라. 나는 네 죄를 속하여 선에서 선으로 이끌어 너로 하여금 나를 위하여 세상을 구원하는 힘이 되게 하고자 한단다.” 이제 나는 온 정성과 마음을 다하여 이렇게 응답할 수 있게 되었다. “아버지여 그러하옵나이다. 모든 것이 그렇게 된 것은 거룩한 뜻에 합당하옵니다.” 마11:26

이제 나는 자신의 부족과 연약함을 깊이 인식한 채 자선 사업에 종사할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용서가 당신의 완전하신 심판과 공의에 어긋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나는 모든 정성과 힘을 다하여 그분을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다. 나를 깊은 멸망의 수렁에서 건져주신 그분의 은혜를 어떻게 저버릴 수 있는가? 전에는 그분의 율법에 압도 되었지만, 이제는 그분의 엄청난 은혜에 압도되었다. 하늘은 내가 가지기 원하는 모든 것을 나에게 주었다.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니 인생은 한번 살아볼 만하지 않은가!

나는 평안과 구원의 길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길을 안 것이 반드시 그 길을 걷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나는 단지 깨달았을 뿐이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평안과 행복한 마음을 가지고 그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질문과 대답

문: 무엇이 유이며, 무엇이 무입니까?

답: 하나님이다. 세상이다.

문: 누가 사람이며, 누가 짐승보다 못한 존재입니까?

답: 신자이다. 거짓 신자이다.

문: 무엇이 가장 추하며, 무엇이 가장 아름답습니까?

답: 신자의 뒷걸음질이다. 죄인의 회개이다.

우찌무라 간조의 선교 이해

<이후천 / 협성대 선교신학교수>

1. 서론

한국에서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 1861-1930)는 흔히 무교회(無敎會)주의자, 비전론(非戰論)을 주장했던 평화주의자 그리고 김교신, 함석헌 등에 영향을 준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간조의 삶과 신앙도 현실정치의 한복판에서 진보적으로 치열한 정치적 삶을 살았으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의외로 간조의 글들에서 우리는 또 다른 신앙유형의 맥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한국의 부흥회에서 강조되는 주장들과 거의 유사한 논리로 무장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간조로부터 타계적이고, 십자가의 피를 강조하는 한국부흥 운동이나 전도운동과의 내용적 일치점을 발견하게 된다. 특히 전도를 영혼구원의 문제로 인식하는 그의 체험과 방법에서 그것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런데 바로 여기 말하자면 그의 이러한 전도이해 속에는 단지 그것만이 아닌 현재 한국 교회가 진정으로 성찰해야 할 중요한 선교적 차원이 함축되어 있다. 그것은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 양면성을 지니고 있는데, 예컨대 하나님 나라 건설의 에큐메니칼적 차원의 확보 필요성이 요구된다는 것이 전자에 해당한다면, 에반젤리칼적 차원의 진정성이 후자와 연관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한 에큐메니칼적 차원의 확보 필요성이 제기된다는 말은 간조에게 있어서 지나친 교파주의에 대한 악폐의 강조와 대사회적인 선교적 접근이 부족하다는 것을 뜻한다. 다음으로 에반젤리칼적 차원의 진정성이 간조가 이해하는 전도의 긍정적인 면이라는 것은 우리가 간조의 언표 속에서 복음의 때묻지 않은 순수성을 회복시켜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점들은 한국 교회가 지금까지 실행해 온 지나친 물량주의와 팽창성장만을 전도로 이해하는 개체교회 중심적인 선교 내지는 전도방법에 기막힌 대안을 제공하는 실마리가 아닐까? 간조가 말하는 전도의 본래적 정신은 회복하되, 그의 한계인 선교 방법적 지평의 확대를 통해서 한국교회는 전 세계에 보다 포괄적인 선교모델을 제공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점에서 본다면 간조의 전도이해는 한국교회가 지니고 있는 선교이해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으며, 바로 그 점 때문에 동의와 동시에 비판의 모형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발견할 수 있겠는가?

이것을 위해 본 글은 간조의 생애와 회심 사건을 간략하게 살펴보고, 그가 이해하는 전도의 정신을 중심으로 목적과 방법을 탐구한다. 그래서 이것을 통해 우리는 한국교회 전도의 원형으로서 간조의 전도이해를 암묵적으로 받아들인다.

2. 간조의 생애와 회심

거의 대부분의 다른 아시아인들처럼 간조도 일본의 비그리스도교적 전통과 문화가 지배하는 가정에서 태어났다. 간조는 메이지 유신(1868-1912)이 시작되기 7년 전인 1861년 3월 28일 에도(江戶)에서 아버지 우찌무라 요시유키와 어머니 우찌무라 야소(1904)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의무와 야망을 중시하는 친가의 분위기와, 양심적이고 금욕적인 외가의 가풍에서 자랐다.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다카사키 파의 하급 무사(사무라이)계급에 속하였으므로 그도 본래는 “싸울 운명”과 “충성”이 숙명이었다. 그런데 간조의 아버지는 시도 잘 쓸 정도로 유학에 조예가 깊었기 때문에 그는 어릴 때 유교교육을 받았다. 간조의 어머니는 거친 삶 속에서도 정직과 절제를 최고의 가치로 살아 온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자세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그녀는 고된 인생을 불평하지 않고, 말없이 남편과 4남 1녀의 자녀들을 위해 헌신하였다.

장남 간조의 교육은 아버지의 영향으로 “대학” 및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에서 시작되었지만, 신분상승을 기대했던 아버지의 소원대로 영어를 배우기 시작하여, 1873년 12세에 이르러서는 서양식 사립학교인 도쿄의 아리마 사학교 영문과에 입학한다. 13세에 간조는 도쿄의 외국어학교에 편입하였다. 간조가 편입한 해, 이 학교는 영어학만을 분리하여 도쿄 영어학교로 독립하였다. 간조는 이 학교 재학 중 질병으로 1년간 휴학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는 이 학교에서 처음으로 구약성서의 이야기에 접한다. 그는 영어 독본을 통해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를 알게 된다. 이 당시 그는 친구의 권유로 외인 거류지 교회에 출석하였지만 단지 그리스도교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켜주는 정도였다.

간조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게 된 계기는 16세 되는 해인 1877년 신설 삿포로 농업학교의 2기 관비생으로 입학하고 나서이다. 본래 간조가 다닌 도쿄 영어학교는 그 해 4월 도쿄대학 예비문으로 개칭되어 졸업하면 도쿄대학이 보장되어 있었다. 그러나 가난한 간조로서는 장학금과 기숙사가 필요하였다. 삿포로 농업학교는 간조의 그러한 경제적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었다. 그런데 간조가 입학한 이 농학교는 미국 매사추세츠 농과대학 학장이었으며 선교사적 열망으로 가득찬 윌리암 클라크(W.S. Clark: 1826-1886)가 교무주임(an assistant director)으로 1년간 초빙되어 체류하는 가운데 1기생 15명 전원을 그리스도인으로 개종시킨 상태였다. 클라크는 이미 귀국하였지만 바로 이들 남은 1기생들의 상급생으로서의 권위와 “새로운 종교에 대한 열정과 선교의 정신”은 2기생들의 그리스도교 개종을 강제적으로 행사하게 하는 압력으로 작용하였다. 간조는 이러한 학교의 분위기에 처음에는 다신교적 미신에 사로잡힌 자기정체성의 위기를 느끼고 강력히 저항하였지만, 마침내 그해 12월 1일 친구들의 잇단 서명의 동참과 “학교의 여론”에 굴복하여, 자신의 뜻이나 양심과 달리 강제로 “‘예수 종교’의 문에 들어서는” 행위로서 클라크가 남긴 “예수님을 믿는 자들의 서약”에 서명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비록 간조가 자신의 그리스도교 개종이 강제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지만, 간조에게 있어서 이 사건은 오히려 자신이 기도했던 8백만 이상이나 되는 많은 신들로부터 벗어나 하나의 신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만든 “구원의 손길”임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이와 같은 강제적인 세례에 따른 그의 심리적 불안이나 갈등을 충분히 이해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사건은 간조에게 결과적으로 제신들로부터 해방시킨 사건으로 기억된다. 따라서 이것은 그가 그리스도교에 입문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마음 속 깊은 평화와 기쁨”을 동반하는 회심을 동반한 개종은 아직 아닌 것으로 보인다. 회심을 향한 한층 진일보한 상황은 그가 1878년 6월 2일 미국에서 온 감리교 선교사 미리암 콜버트 해리스(M.C. Harris)의 세례를 받으면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신 그분의 이름을 받아들이느냐는” 질문에 “단호하게 ‘아멘'”이라고 대답할 때로 보여진다. 그는 이 날을 결코 잊을 수 없는 날로 고백하고 있다. 그는 이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강제적인 서명을 오히려 만족스러워 하였고, 모든 신들에게 더 이상 기도를 하지 않게 된 사실에 대해서도 기쁨을 갖게 되었다. 또한 그는 스스로를 그리스도교인이라 고백하면서,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에 감동하여 요나단이라는 그리스도교적 이름을 택하기도 한다.

세례 이후 간조는 동기 6명과 함께 작은 예배공동체를 꾸리게 되는데, 이것이 후에 저 유명한 삿포로 밴드로 발전된다. 1880년 7월 상급생의 졸업을 계기로 간조는 동급생들과 함께 교회건축을 계획하지만 감리교와 성공회 교파 소속의 문제로 재정후원의 어려움을 겪게 되면서 교회 분파주의의 폐해를 목격하기도 한다. 어쨌든 간조는 1881년 7월 졸업 후에도 동기들과 함께 빌린 돈으로 어느 교회에도 소속되지 않는 독립교회를 세워 예배와 전도활동에 주력하여 부흥시킨다. 이 시기 그의 열심으로 자신의 가족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는데 성공한다. 또한 그는 관비생들의 규정에 따라 삿포로에 머물며 수산업을 전공하였으므로 어업관계 공무원으로 일하는 한편으로, YMCA를 결성하여 부회장직을 맡기도 한다. 1884년 3월 28일 간조는 교회에서 개방적이고, 지적인 여성 아사다 다케를 만나 모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하였지만, 6개월만에 분명하지 않은 이유로 이혼한다. 이 이혼으로 간조는 교회로부터 비난받는다. 이 일 이후 간조는 가진 재산을 모두 팔아 도미하게 된다.

간조의 진정한 회심은 그의 미국 유학기간에 일어난다. 간조는 1884년 11월 24일 처음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고, 얼마 안 있어 필라델피아로 옮긴다. 그곳에서 간조는 1885년 약 반년 간 정신박약아 양호원의 간호인으로 근무한다. 그 해 9월 그는 1821년에 설립된 매사추세츠의 애머스트 대학(Amherst College)에 비정규생으로 3학년에 편입한다. 이 대학에서 간조는 비로소 신앙의 스승인 제 5대 총장 줄리우스 호울리 실레(J.H. Seelye)를 만나 회심을 하게 된다. 실레의 따뜻함에 감동된 간조는 그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게 되는데, 특히 죄의 문제로 고민하던 그에게 실레의 다음과 같은 권면이 회심을 일으킨다.

우찌무라, 너는 네 자신의 마음속만 보니까 안되는 거야. 너는 네 밖을 보아야 해. 왜 자기 성찰을 그만두고 십자가에 달려서 네 죄를 용서해 주신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는가. 너는 어린 아이가 나무를 화분에 심어 놓고 그 나무의 성장을 확인하려고 매일 그 놈을 뿌리채 뽑아 보는 것과 같은 짓을 하고 있어. 왜 신과 햇볕에 맡기고 안심하고 너의 성장을 기다리지 않는가.

이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죄로부터 구원의 문제는 인간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의한다는 것이다. 죄로 더렵혀진 인간구원의 문제로 심각하게 고뇌하던 간조에게 실레 총장의 이 말은 참된 복음의 소식이었다. 그는 죄의 문제에서 해방되었다. 간조는 이 회심의 기쁨과 감격을 1886년 3월 8일과 5월 26일의 일기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에 의한 속죄신앙은 간조의 사상과 전도의 정신을 이해하는 중요한 기반이다.

내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날이다. 오늘처럼 그리스도의 속죄능력이 내게 분명히 드러난 적이 없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사건에서, 지금까지 나를 괴롭히던 모든 어려움에 대한 해결책을 찾았다. 그리스도께서 내 모든 빚을 해결하셨기 때문에, 나는 타락 이전에 태초의 사람이 가졌던 순결과 순진함으로 돌아갈 수 있다. 이제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예수님을 믿는 것이 나의 의무이다.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은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주실 것이다. 하나님은 나를 당신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실 것이며, 결국에는 천국으로 나를 인도하실 것이다; 이 세상에는 악보다도 선이 훨씬 더 많다는 생각에 감명을 받았다. 새, 꽃, 태양, 공기, 이 얼마나 아름답고, 밝고, 향기로운가! 그런데 인간은 날마다 악에게 불평하고 있다. 단 한 가지만 갖추면 이 세상은 천국인데도 말이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종교다.

비정규학생 간조는 1887년 7월 이학사 학위를 받음으로 애머스트 대학을 정식으로 졸업한다. 이후 그는 코네티컷주 하트포드 신학교(Hartford Seminary)에서 신학을 공부하지만 만족하지 못하였고, 4개월만에 건강상의 이유로 중단하여, 1888년 5월 일본선교에 대한 비전을 간직한 채 귀국한다. 귀국 후 간조는 니가타 현의 교장직을 맡았지만 동양이나 일본 현자들의 가르침도 중요하며, 외국전도회 선교사의 원조를 받아야 하는가의 문제에 대한 그의 부정적 입장과 선교사들의 주장이 대립하여 4개월만에 사직한다. 1889년 7월 31일에는 가정적인 여성 요코하마 가즈코와 재혼한다. 간조는 1889년 9월 2일부터 도쿄의 제일고등중학교(오늘날 도쿄대학교 교양학부)에서 교편을 잡았는데, 여기서 영어, 지리, 역사를 가르쳤다. 그는 1891년 1월 9일 천황이 서명한 교육칙어를 봉독하는 이 학교 행사에서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의무를 다하기 위해 머리를 조금 밖에 숙이지 않아 소위 “불경사건(不敬事件)”의 주인공이 되었다. 이 사건으로 또 다시 그는 2월 3일자로 면직되었고, 같은 해 4월 19일에는 그의 아내마저도 별세한다. 이때 이후로 간조는 “성서의 연구”와 같은 잡지를 출판하며, 본격적인 저술활동을 시작하여 두개의 J, 말하자면 Japan과 Jesus를 통합하려는 시도, 비전론(非戰論), 무교회주의에 대한 견해, 화석화된 기성교회와 신학에 회의하여 성서연구 중심의 그리스도교 복음 전도운동 등을 펼치며 강연과 그의 주옥같은 글들을 출판한다. 면직 이후 거의 40년간 저널리스트로서 그리고 자유로운 독립 전도자로서 그의 열정적이며, 치열했던 삶을 뒤로하고 간조는 1930년 3월 28일 아침 70세를 일기로 세상을 마친다.

3. 간조의 전도 이해

간조의 전도이해에 있어서 근본적인 것은 순수한 전도의 정신을 실현하는데 있다. 간조는 1894년 2월 “전도의 정신”을 출판하였는데, 그 책에서 그는 전도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 유형별로 여섯 가지를 제시한 후, 그 가운데 어떤 것이 가장 순수한 전도의 정신인지를 논하고 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이상적 전도자의 품성과 자질의 문제를 제시한다. 그 여섯 가지는 다음과 같다: 1) 의식(衣食)을 위한 전도; 2) 명예를 위한 전도; 3) 교회를 위한 전도; 4) 나라를 위한 전도; 5) 하나님을 위한 전도; 6) 사람을 위한 전도. 간조는 여기서 앞의 네 가지는 사람들의 자기 자신을 위한 전도라고 본다. 그렇지만 간조는 이 가운데 다섯 번째 하나님을 위한 전도야말로, 그리고 동시에 이것이 사람을 위한 전도일 때 – 특히 물질적으로 뿐만 아니라, 마음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인간파괴와 하나님만이라는 추상성이 극복되고, 인간의 영혼을 구하게 되는 진정한 전도의 정신이 살아나며, 순수한 종교적 사업이 된다고 주장한다.

나를 오해하지 말라. 나는 사람을 앞세우고 하나님을 뒤로 미루는 전도를 변호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사람을 섬김으로써 하나님을 섬기는 전도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왜 이욕을 위해서 전도하려는가. 나는 그것을 당장에 포기할 것을 권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너 자신에게 극히 불리하기 때문이다(세상이 너로 말미암아 유익을 얻지 못할 것은 뻔하다). 너는 전도계에서 명예를 얻으려는가. 그만두라 그것은 치열한 싸움터 속에서 얻으라. 또는 의회의 단에서 얻으라(군사나 정치도 전혀 공명만으로 할 것은 아니지만). 네 전도는 네가 속한 교회를 위해서냐. 걱정하지 말라. 네 종교는 곤고와 실망을 네게 가득 안겨줄 것이요, 기쁨과 성공은 없을 것이다. 나라를 위한 전도, 물러가서 정치가가 되라. 네 천직은 거기 있다. 하나님을 위한 전도, 네 하나님을 네 동포에게서 찾을 때까지 기다려라. 네가 하나님을 위한다 하면서 오히려 하나님을 거역할까 두렵다. 그에게 육정적인 쾌락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 네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대로 그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 그에게 하나님의 영이 거하거든 하나님께 바칠 것을 그에게 주라 […] 이 전도에 환희와 정열이 있다. 이 전도에 박해와 다툼이 있을 수 없다. 이것이 내가 진정 전도의 정신이라 말하는 것이다.

이 글에서 우리는 간조가 하나님 사랑과 인간 사랑을 동시에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간조는 하나님만을 위한 전도가 극단적으로 흐를 때 사람에 대한 “관용과 자비와 유화”가 결핍되고, 또한 하나님 없는 사람만을 위한 전도는 자신의 공명과 세상을 부정의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파악한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는 하나님 없는 인간 사랑에서 비롯된 전도는 맹목이고, 인간 없는 하나님을 위한 전도는 공허해진다. 그리고 이때 구원의 지평은 단지 영혼에만 제한되어 있지 않고, 국가, 인류, 세계, 우주가 그 시야에 들어온다. 이처럼 우리는 간조에게서 이미 통전적 구원(Integrales Heil)의 단초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전도의 정신이 구체적으로 전도의 목적과 연결될 때는 다소 추상화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간조가 하나님 나라를 현세적이기보다는 타계적으로 이해한다는 점이다. 그는 전도의 목적이 다가올 천국시민 양성에 있다는 것에 대해 확신한다. 이때 간조는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지 않고, 그가 직접적으로 표현하듯이 내세에서 이루어지는 “천국”논리에 입각해 있다. 소위 “예수 천당, 불신 지옥”과 같은 전도 구호는 아니더라도, 그의 하나님 나라는 죽음 이후 저 너머에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간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의 목적은 하나님 나라 건설에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에 실현될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는 가까웠다’고 말씀하셨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너희에게 임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시진 않았다 […] 그는 그의 나라의 건설을 미래에 기대하셨다. 그것도 이 세상의 미래가 아니다. 이 세상이 끝난 후에 올 내세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대하신 것이다 […] 앞으로 올 세계에 나타날 그의 나라의 시민을 모으고 그들을 연마하고 그들을 완성시키는 일, 그 사업이 예수의 전도의 목적이었다 […] 한마디로 말하자면 사도들은 그들에게 맡겨진 천국의 시민 양성을 그들의 활동의 주안으로 삼은 것이다.

여기서 전도의 목적을 하나님 나라 건설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올바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예수 전도의 목적과 사도들에게 맡겨진 사명이 저 세상의 “천국”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 개념의 폭을 축소시키는 결과를 갖게 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이해가 이 세상의 역사를 완전히 떠난 상태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미 불트만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이해에 있어서 논증한 바 있다. 불트만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현재에 침입해 있다는 것이다: “신의 나라가 이미 현재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나라가 그 시초에 있음을 말해준다”.

하지만 전도의 목적으로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러한 간조의 타계적 이해는 전도를 교세확장이나, 사회개혁 또는 국가구제, 세례, 성찬식으로 이해하지 않도록 한다. 왜냐하면 간조에 의하면 내세에 이루어지는 천국에 비하여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교회의 모든 사역과 활동은 수적 팽창을 염두에 둔 거짓되고 공허한 몸짓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회봉사로서의 전도에 종사하는 오늘날의 교회의 전도에 볼 만한 것이 없는 것도 당연한 노릇이다. 그들이 천국의 백성을 만들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그들은 이 세상의 성인이나 군자도 만들지 못한다. 그들의 사회사업이라는 것은 회칠한 무덤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그는 “옳은 전도”와 “나쁜 전도”를 구별하면서 나쁜 전도를 “교세확장을 위한 전도”로 손꼽고 있다. 이에 대한 근거로서 그는 마태복음 23장 15절과 고린도전서 1장 15절을 언급한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이에 비해서 옳은 전도란 “천국의 건설을 위한 전도”, “영혼을 구하기 위한 전도”, “자비와 사랑으로 비롯하여 자기 자신을 죽이고 종사하는 전도”이다. 간조에 의하면 여기서 옳은 전도와 나쁜 전도는 각각 그리스도의 전도와 교회의 전도에 해당되어 나뉜다. 이런 관점에서 간조는 미국 선교사들의 교회중심적인 선교모델을 강력히 비난한다. 미국 선교사들의 교회확장적인 전도는 성과를 중시함으로서 “신앙이나 도덕을 타락”시키는 “좋지 않은 태도, 천한 태도, 부끄러운 태도”라는 것이다. 따라서 간조는 자기의 제자를 만들거나 , 당파성을 갖는 것은 세상적 차원에서의 전도이해라고 본다. 더 나아가 교회를 위한 전도는 개종주의(Proselytism)와 연결되어 있고, “사랑과 평화를 세상에 가져오는 전도가 아니”라고까지 비판한다. 대신에 그리스도교 전도가 어떠해야 하는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독교의 전도란 나의 주장을 세상에 펴고, 나의 덕으로 사람을 감화시켜서, 나의 당이나 나의 제자를 만드는 일이 아니다. 기독교의 전도란 나의 죄를 세상에 고백하고, 내가 받은 은혜를 사람들에게 증명하고, 나의 구주를 세상에 소개하여 그분의 수종자나 그분의 제자를 만드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간조에 의하면, 전도자란 “자선사업가도 아니고, 사회개혁가도 아니며, 교회설립자도 아니다”. 다른 곳에서 그는 “사회사업은 사도들의 본업이 아니라 부업이었다”고 주장한다. 또 다른 곳에서도 간조는 전도를 자선사업과 연계시키지 않음으로써 전도는 곧 구령사업에 국한하는 것임을 명확히 한다: “전도는 자선사업이 아니다. 전도는 영혼을 구하는 것이지 육체를 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가 사회개혁에 힘쓰는 것은 그리스도교를 일본에서 침체시키는 원인으로 진단한다.

심지어 그는 선교사들의 출신 성분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선교사라고 하면 자못 존귀한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의 신분을 캐보면 대개는 목사가 될 소양이 없는 사람들이다. 혹은 상점의 점원 노릇을 했거나, 공장의 직공 노릇을 했거나, 농장에서 땅이나 파던 사람들이다”. 물론 그는 신분이 사람의 가치를 결정짓는 아니라고 부연하여 설명하지만 일본 사람들을 선교하는 목사이기 위해서는 적어도 그에 해당하는 품격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전도 방법의 무용론을 주장한다. 전도는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영혼 구원 자체가 문제이기 때문이다. 복음 전파 운동을 해야 하지만 복음 자체가 운동이기 때문에 인간적인 방법의 모색이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입장이다. 그리고 이때 전도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지 않고 순수한 복음을 증언해야 한다고 밝힌다. 그래서 전도자가 지녀야 할 성품으로 간조는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체험, 정직, 건전한 상식을 든다. 이 밖에도 전도자는 하나님에 관하여는 성서에 해박한 지식을 얻기 위해 원어로 연구할 수 있어야 하며, 사람을 알기 위해 역사와 사회학을 그리고, 만유의 이치를 깨닫기 위해 과학을 공부할 필요가 있다고 논한다. 그러나 제일 중요한 것은 전도자가 성서를 나누어주고 그 내용을 외우게 하는 것이 영성을 발전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전도방법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도는 방법이 아니다. 생명의 빵을 공급하는 일이다. 주어야 할 빵은 없으면서 줄 방법만 제 아무리 교묘하게 꾸민다고 그것으로 사람이 구원을 받지는 못한다. 나에게 빵이 있는가, 그것이 문제다. 줄 수 있는 생명의 빵이 있다면, 나누어 주는 방법이 아무리 졸렬하더라도 나는 전도에 있어서 이미 반 이상 성공한 것이다.

또 다른 곳에서 간조는 전도방법을 논하는 것은 하나의 “선교 소동”에 불과하다고 일축한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서 전도는 방법이 아니라, 진리체험의 문제이며, “영혼은 그 깊은 곳에서 서로 상통”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예컨대 미국사람들의 전도방법은 모금을 해야 하고, 선교지의 현지인 고위 관리와 사교를 하여 그 세력을 이용해서 교세를 확장해야 하는 방법을 택하는데, 이러한 전도 방법은 비성서적일 뿐더러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접근 통로를 막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이런 방식에 대해 간조가 회의하는 이유는 지나치게 금전 의존적이며, 정치적이고, 기계적이며, 책략적이라는 점 때문이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간조가 부흥회를 개최해서 사람들을 불러모아 회심을 촉구하고, 세례를 베풀며 교회설립을 하는 전도방법 등을 무조건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의 전도 방법에 대한 무게중심은 아무래도 이심전심을 중시하는 불교의 선종(禪宗)적인 태도를 가진다. 간조는 개인의 구원이 시작되면 이미 그것으로써 그 지역이 그리고 인류가 구원을 받는 것으로 간주한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간조의 “농민 구제책으로서 기독교 선교”를 논하는 글 속에서 일본 농업의 지주와 소작인 제도의 문제점을 논하면서 법개정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것을 볼 때, 그리고 그러한 것을 통한 농민 구제안을 그리스도교 전도의 방법으로 삼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서 그가 사회개혁 제도의 개혁에도 깊은 관심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도지역 선정의 문제와 관련하여 간조는 도시보다는 농촌에서의 전도가 보다 중요하다는 입장을 피력한다. 아마도 이것은 그가 수산업을 전공한 것에 기인하지 않나 생각된다. 그래서 우리는 그에게서 학생보다는 농민전도에 애착을 표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그는 가급적 남들이 가려고 하지 않는 지역 전도를 강조함으로서 전도지 재배치 문제와 전도 자원의 효율성 문제를 제기하기도 한다. 이것은 서구 선교사들이 한 지역에 여러 교회출신의 선교사들을 집중시킴으로써 빚어졌던 전도의 비효율성을 간파한데서 오는 견해일 수 있다. 이 연장선상에서 간조는 이미 복음을 접한 혹은 교회를 다니고 있는 사람에게 전도할 필요가 없다고 지적한다. 대신에 그는 무신론자나 타종교인들 그리고 정신적 방랑자들이 전도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밝힌다.

전도 주체와 관련하여 간조는 평신도들의 전도사역 참여를 지지한다. 그에 의하면 전도사역을 명예를 얻거나, 생계 수단으로 선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전도의 효과가 부실해진다고 한다. 간조는 전도를 하기 위해서 반드시 전문적인 전도자가 될 필요는 없으며, 자신의 일상적인 직업을 통해서 얼마든지 전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에 의하면 “교회가 행한 최대의 과오는 전도자란 계급을 만든 사실이다”. 이런 맥락에서 간조는 일본 전도에 있어서 필요한 것은 “독립 전도”로서 이것은 외국 선교사의 자금을 빌리지 않는 방식으로 진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상을 통해서 볼 때, 간조의 전도이해는 전통적인 교회중심적 전도개념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보면 그는 반교파주의적 전도이해를 하고 있다. 이것은 그의 생애에서 잠깐 살펴보았듯이 교파주의의 악폐에 대한 그의 체험에서 비롯된다. 이것은 후에 그의 무교회주의로 나타난다. 그에게 있어서 무교회의 무란 교회를 무시하거나, 없애버린다는 의미에서의 무가 아니다. 그에게 있어서 무교회는 본래적인 교회를 회복하자는 것으로서 교회를 갖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 하나님을 만나는 유(有)교회이다. 그리고 마치 집이 없는 사람들을 위한 숙소에 해당한다. 천국에는 어떤 조직적인 교회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세례도 성찬도 없을 뿐만 아니라, 어떤 직분도 없다. 이 공동체의 중심에는 성서가 있고, 오직 믿음만이 필요하다. 말하자면 오히려 간조에게 있어서 강단을 빼앗긴 요한 웨슬리의 사역과도 같이 세계전도에 대한 비전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물론 간조는 복음과 서구화를 동일시하거나 식민지적 선교에 대해서는 반대한다.

크리스천은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세계를 자신의 활동 지역으로 삼아야 한다 […] 크리스천의 의무 또는 책임 및 특권은 세계 전도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전 세계와 더불어 구원을 받은 것이다. 그의 구주는 모든 민족의 구주이다. 그는 자기 혼자 구원을 받으려고 원하더라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 그는 자신의 구원을 완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의 가족 및 국가가 구원받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는 또 주님과 함께 전 세계의 복음화, 모든 민족의 구원을 원하고 그러기 위해서 힘쓰지 않으면 안 된다[…] 감리교 파의 창시자 존 웨슬리의 표어는 다음과 같은 성구였다고 한다. 즉 나의 활동 구역은 전 세계이다(The field is the World)라고. 우리는 크리스천이 되어 육대주를 하나님의 은사로 받았다고 보아 조금도 틀림이 없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간조의 전도이해는 순수한 전도의 정신을 회복하자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진정한 전도의 정신은 하나님 나라 건설을 타계적으로 이해하는 것과 깊이 연관되어 있고, 따라서 철저히 비교회적인 색채를 띠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점에서 그의 무교회론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그의 교회론으로서 무교회론과 전도이해의 연관성을 규명하는 일은 이 글의 범위를 넘어선다.

4. 결론

지금까지 우리는 간조의 전도이해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단지 그것만이 아닌 현재 한국 교회가 진정으로 성찰해야 할 중요한 선교적 도전이 함축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간조는 외국 선교사들이 자신이 속한 교파를 확장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교회를 설립하는 것을 결코 좋게 보지 않았다. 또한 그는 전도를 위한 방편으로 그 어떤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하여 애쓰지도 않았다. 전도에는 방법이 불필요하며, 특히 교회확장을 위한 전도는 더욱 회피해야 할 교회의 모습이었다. 게다가 그에 의하면 이상적인 전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과학지식과 교양은 물론이고, 정직 등 건강한 성품이 요구된다는 것도 주장한다. 더 나아가 간조는 영혼구원을 위한 전도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개인적인 구속의 체험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이럴 때 피안의 천국 백성을 모을 수 있다고 한다. 여기에는 세상을 섬기기 위한 교회의 디아코니아가 결여되어 있다는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특히,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전도의 순수한 정신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간조는 하나님과 사람을 위한 전도야말로 가장 순수한 형태의 전도라는 것도 밝혀준다. 교회를 위한 전도는 교회를 몰락시키지만, 하나님과 사람을 위한 전도일 때, 교회가 산다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간조의 전도이해를 통해 순수한 전도의 정신이 회복되어야 한다는 점을 깊이 성찰한다.

베르카일은 선교사역의 순수한 동기와 불순한 동기를 구분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선교의 순수한 동기에는 1) 순종의 동기; 2) 사랑, 자비 그리고 동정의 동기; 3) 영광의 동기; 4) 종말론적 동기; 5) 긴급함; 6) 개인적 동기가 있다. 그리고 불순한 동기로는 1) 제국주의적 동기; 2) 문화적 동기; 3) 상업적 동기; 4) 교회 식민주의를 말한다. 존 영(John M.L. Young)도 그의 저서 {선교의 동기와 목적}(The motive and Aim of Missions)에서 선교의 동기는 “하나님의 사랑”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 그 일의 목적이 되어야만 한다”고 밝힌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만이 우리가 선교 일을 하는데 있어 약동하는 사랑을 우리에게 공급해주며, 우리가 순종을 잘하여 질투를 참으며 진정한 신앙심을 갖게 해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영에게 있어서 선교의 동기와 목적이 “하나님의 사랑”이라면, 베르카일에 있어서 그것은 선교의 순수한 동기와 관련하여 이해할 수 있다.

간조의 입장은 위 두 사람의 맥락과 닿아 있으며, 교회팽창 중심적인 전도를 통해서 성장해 온 한국교회에 커다란 교훈이다. 왜냐하면 최근 한국교회의 선교적 상황은 간조가 말하는 전도의 정신이 분명히 요구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선교적 상황이란 교회와 전도에 대한 비판이 급증하는 현상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교회의 역할과 전도의 방법에 대한 문제가 교회 안팎에서 제기되고 있는 형편이다. 이로써 한국 교회가 당면한 선교의 위기는 단순히 교회 선교프로그램이나, 그 외의 선교적 자원들, 즉 교회가 현재까지 이룩한 성과로서 인적, 물적 토대를 충분하게 동원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교회와 전도에 대한 올바른 이해의 부족에서 오는 경향이 크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간조의 무교회론과 그의 전도이해에 동조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현재의 교회와 전도에 대한 새롭고, 본질적인 시각의 등장이 요구된다. 이 새로움과 근본성은 반드시 현재에서만 찾아지는 것은 아니다. 간조의 전도이해는 적어도 여기에 대한 하나의 단초를 제공한다.

어쨌든 이런 점에서 간조의 전도이해에 대한 연구는 한국 교회선교에 대한 새로운 전망과 지평을 제공한다. 왜냐하면 간조의 전도이해는 기존 교회를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으며, 교회전도에 대한 재고를 요청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의 전도이해 상당부분이 교회론을 함축하고 있는데, 바로 이 점에서 우리는 오늘날 한국교회가 당면한 전도와 교회의 모습을 반성할 수 있다. 그렇지만 당연히 그의 전도이해와 무교회론과의 연관성 관계를 파악하는 일은 앞으로 남겨진 과제이다.

우찌무라 간조 회심기

책 속으로

어느 일요일 아침 학교 친구 한 명이 내게 물어 왔다. “나와 함께 외국인 구역에 가지 않겠니? 예쁜 여자들이 노래를 부르고, 키 크고 몸집이 좋은 긴 수염을 한 남자가 환상적으로 팔을 흔들고 몸을 비틀면서 높은 곳에서 소리치고 울부짖는 것을 구경할 수 있지. 입장료는 완전 공짜야.”

이것이 바로 그 당시 내게는 생소하기만 했던 외국어로 진행되는 기독교의 예배에 대한 친구의 묘사다. 나는 친구를 따라갔고, 그 곳이 비교적 마음에 들었다. 이런 나의 행동이 가져 올 무서운 결과는 알지 못한 채, 일요일마다 그 곳을 찾았다. 내게 처음으로 영어를 가르쳐 준 어느 나이 든 영국 부인은 내가 교회에 다니는 것을 무척 기뻐했다. 가엽게도 내가 ‘그 마을로 가는 일요일 소풍’이라고 불렀던 그 행위의 유일한 목적이 진리의 추구가 아니라 관광이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채 말이다.

받아들이라고 요구하지 않는 한, 기독교는 내게 즐거운 것이었다. 그 음악, 그 이야기, 그리고 기독교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내게 보여 준 친절은 나를 매우 기쁘게 했다. 그러나 5년 후, 기독교를 받아들이라는 공식적인 제안과 함께, 지켜야 할 엄한 규칙들과 많은 희생이 제시되었을 때, 나의 모든 본성은 그것에 굴복하기를 거부했다. 일 주일 중 하루는 종교적인 목적을 위해 반드시 따로 떼어놓어야 하며, 그 날은 다른 공부나 즐거운 일들을 해서는 안된다는 규정은 거의 불가능한 희생이었다.

새로운 믿음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것은 육신만이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나는 조국을 그 무엇보다 공경하고, 오직 내 조국의 신들만을 예배하도록 배웠다.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조국의 신이 아닌 다른 신들에게 나의 충성을 맹세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외국에 기원(起源)을 두고 있는 믿음을 받아들이게 되면 나는 조국의 반역자가 될 것이며, 조국 신앙의 배교자가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무와 애국심 위에 세워진 나의 모든 고귀한 야망들이 하나의 제안 때문에 한순간에 무너질 참이었다. — pp.31~32

기독교는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는 추상적인 교리가 아니라, 우리가 생명의 연합으로 결합되어야 하는 살아 있는 신적인 인격이다. 기독교는 죄로 인해 하나남과 분리된 자연이 하나남과 재결합하는 것이며, 그 과정은 교훈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은사와 능력을 부여받은 새로운 생명을 나눠줌으로 이루어진다. — p.281

9월 19일

신학은 작은 자가 이해하기엔 너무 큰 주제다. 작은 지성의 소유자들은 그토록 거대한 주제를 다룰 능력이 자기 안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자기 수준에 맞게 나름의 신학을 만들고, 자신보다 신학을 더 잘 이해하는 사람들에게는 저주를 퍼붓는다. 오 내 영혼아, 그대의 초라함에 맞도록 신학을 축소시키지 말고, 신학의 위대함에 맞도록 그대 자신을 확장시켜라 — p. 255

3일 1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을 주실 때는 실질적인 것을 주신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따른 단순한 공론이나, 상상력의 산물인 단순한 환상이 아니라, 세상의 바람에도 끄떡없는 참된 실체를 주신다.

3월 8일

내 인생에서 매우 중요하 날이다. 오늘처럼 그리스도의 속죄 능력이 내게 분명히 드러난 적이 없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사건에서, 지금까지 나를 괴롭혔던 모든 어려움에 대한 해결책을 찾았다. 그리스도께서 내 모든 빚을 해결하셨기 때문에, 나는 타락 이전에 태초의 사람이 가졌던 순결과 순진함으로 돌아갈 수 있다. 이제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예수님을 믿는 것이 나의 의무이다.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은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주실 것이다. 하나님은 나를 당신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실 것이며, 결국에는 천국으로 나를 인도하실 것이다.

독자들 중에는 ‘철학적인’ 성햐의소유자들은 위의 글을, 경멸은 아닐지라도 일종의 연민을 가지고 읽을 수도 있겠다. 당신들은 이 세상에 새로운 과학이 출현함으로써 루터, 크롬웰, 그리고 버니언(John Bunyan : 1628~1688 영국의 종교 작가)의 종교는 이제 하나의 ‘전통’으로 사라졌다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죽은 구세주가 사람에게 생명을 준다고 믿는 것은 ‘이성에 반하는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나도 당신들과 더 이상 입씨름을 하지 않겠다. 어쩌면 당신들은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선 책임 있는 영혼’ 같은 문제로 고민한 적이 단 한번도 없는지 모르겠다. 당신들의 야망은 ‘인생’이라고 불리는 이 짧은 존재의 시간 너머로는 뻗치지 않을 것이며, 당신들의 전능하신 심판자는 ‘사회’라고 불리는 인습적인 성격의 것이어서, 그 사회가 ‘그만하면 됐다’고 인정해 주는 것으로 필요한 모든 안정을 누릴 것이다. 그렇다. 십자가에 달리신 구세주는 영원을 소망하는 사람들, 그리고 자신의 가장 깊은 곳까지 심판하는 우주적이며 영적인 존재를 인식하는 사람들에게만 필요한 것이다.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루터와 크롬웰과 버니언의 종교가 ‘전통’이 아니라, 진실 중의 ‘진실’이다. (…)

5월 26일

이 세상에는 악보다 선이 훨씬 더 많다는 생각에 감명을 받았다. 새, 꽃, 태양, 공기, 이 얼마나 아름답고, 밝고, 향기로운가! 그런데 인간은 날마다 악에게 불평하고 있다. 단 한 가지만 갖추면 이 세상은 천국인데도 말이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종교다. 정말로 나는 낙관적인 사람이 되어 가고 있다. 이 일기는 몸을 데울 난로 하나 없이 뉴잉글랜드의 혹독한 겨울을 막 지내고 난 후에, 그리고 학비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쓴 것이다.(…) — pp 223~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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