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즈베키스탄 고려인 | 고려인의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어 마치 70-80년대 한국을 보는듯한 우즈베키스탄 마을┃알고E즘┃ 86 개의 정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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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와 순대가 외국 시장 안에도 있다? 아이들이 동네에서 하는 놀이는 사방치기와 수건돌리기? 한국을 보는 듯한 이 곳은 바로 우즈베키스탄의 동쪽 끝, 키르기스스탄 국경지대와 가까운 안디잔!
#우즈베키스탄 #고려인
📺방송정보
📌프로그램명:글로벌 아빠 찾아 삼만리 –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자매 1부 – 킹콩 아빠와 애교 공주들
📌방송일자: 2017년 11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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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고려인(高麗人, 러시아어: Корё-сарам)은 구소련 붕괴 이후 독립 국가 연합의 국가들에 거주하는 한민족을 이르는 말이다. 이들의 국가에는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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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o.wikipedia.org

Date Published: 2/1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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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 – 나무위키

박루슬란 감독이 우즈베키스탄 출신의 고려인 4세이다. 본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영화를 제작했다고 한다. 한국 기준으로 2012년 10월 11일 개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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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10/3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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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따냐…한반도·연해주·카자흐·우즈벡 유랑한 ‘고려인 …

자신이 나고 자란 우즈베키스탄을 떠나 한국에서 10년째 살고 있는 고려인이다. 고려인은 중앙아시아·러시아 등 구소련 지역의 동포를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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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khan.co.kr

Date Published: 11/1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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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기고] 우즈베키스탄 고려인의 한식 – 월드코리안뉴스

러시아로 부모님의 날(Родительский День)인 한식(寒食)은 우즈베키스탄 고려인 동포들에게 가장 중요한 세시풍속 의례일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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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worldkorean.net

Date Published: 11/2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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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즈베키스탄 고려인들의 민속문학 연구 – 전승양상과 의미를 …

우즈베키스탄으로 한정한 것은 중앙아시아의 독립국가 중에 고려인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고, 집단적 거주지역인 칼호즈가 있어 조사가 용이하고 광범위한 전승이 가능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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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krm.or.kr

Date Published: 8/3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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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의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어 마치 70-80년대 한국을 보는듯한 우즈베키스탄 마을┃알고e즘┃
고려인의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어 마치 70-80년대 한국을 보는듯한 우즈베키스탄 마을┃알고e즘┃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우즈베키스탄 고려인

  • Author: EBSCulture (EBS 교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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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2. 7. 19.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QmTt7wSqpHE

24년째 국적 없는 고려인 3세 “그림자처럼 산다”

편집자주 출생신고도 사망신고도 할 수 없는 이들이 있다. 분명 존재하지만 없는 사람으로 취급받는 이들, 무국적자다. 전 세계 무국적자는 300만 명, 그중 3분의 1은 아이들로 추산된다. 국가에 소속되지 못해 학교에 갈 수도 일자리를 구할 수도 없는 이들의 삶은 깜깜한 절망 그 자체다. 무국적 문제는 보편 인권에 바탕해야 할 인간사회의 심각한 허점이자 명백한 인재(人災)다. 이제는 바로잡아야 할 때다.

우즈베키스탄에서도 한인들은 모여 살았다. 다른 나라에서는 주로 상업지구에서 ‘코리아타운’을 볼 수 있다면, 우즈베키스탄에서는 들녘 한가운데에 ‘고려인 집성촌’이 있다. 수도 타슈켄트에서 차로 40여 분, 치르치크강 동쪽의 더스트릭 마을. 1937년 강제이주한 고려인들이 황무지를 개간해 만들었다는 이곳은 지난해 ‘황만금 마을’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구소련(CCCP) 시절 치르치크 집단농장 책임자로 마을을 소련 최고의 모범농장으로 일궈 사회노동영웅 칭호와 레닌 훈장을 받은 고려인 1세 황만금(1919~1997)을 국가적 위인으로 기리려는 현지 고려인 단체의 노력 덕분이다. 하지만 마을의 모습은 1991년 소련 해체 이전, 그 영화롭던 한때에 멈춘 듯했다. 잘 정돈된 광활한 논밭과 소련 시절 지어진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농가주택은 그 시절 마을의 자랑거리였지만 지금은 쇠락의 징표와 다름없어 보였다.

“그림자처럼 산다” 국적 없이 24년째

이달 8일(현지시간) 황만금 마을에서 만난 고려인 3세 장 비탈리(50·가명)씨의 삶도 마을과 함께 과거에 갇혀 있다. 장씨는 있지만 없는, 존재 자체가 불법인 무국적자다. 장씨의 부모는 모두 우즈베키스탄 국적자였지만 장씨 본인은 그 나라 국적을 받지 못했다. 1971년 투르크메니스탄에서 태어났지만 투르크메니스탄 국적도 없다.

장씨는 “소련 해체 후 지금까지 직업도 집도 없이 그림자처럼 살고 있다”며 짐더미 속에서 빨간색 수첩을 꺼내 보였다. 구소련 정부가 강제이주 한인에게 발급한 여권이었다. 앞표지에 ‘CCCP’란 글자가 박힌 여권에는 ‘1971년생’ ‘카레이스키(고려인)’ 등 장씨의 신상정보가 손글씨로 빼곡히 적혀 있었다. 1988년 발급받은 이 여권으로 그는 병역 의무도 마쳤다.

장씨의 실재를 증명해줄 유일한 서류였던 여권은 그러나 효력을 다한 지 오래다. 사라진 나라의 여권으로는 이제 마을 밖을 나가는 것도 쉽지 않다. 대처로 나가려면 치르치크강을 건너야 하지만 검문소를 통과할 수 없다. 장씨는 “스탈린이 고려인들을 강제이주시킨 뒤 마을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검문소를 세워 통제했다”며 “나는 지금도 스탈린 시대를 살고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빈곤과 함께 대물림되는 무국적 신분

장씨는 다섯 살이던 1975년 이혼한 어머니를 따라 출생지인 투르크메니스탄에서 타지키스탄 집단농장으로 옮겨 가 살았다. 소련 붕괴 이후 타지키스탄에서 터진 내전이 길어지면서 1997년 가까스로 우즈베키스탄으로 피란왔지만, 그를 기다린 건 지금까지 장장 24년째 이어지고 있는 무국적자의 삶이었다.

당연히 우즈베키스탄 국적일 거라 믿었던 장씨는 역사적 격변 속에 잃어버린 신분을 여태 되찾지 못했다. 자신이 무국적자라는 사실을 처음 안 1997년 국적을 취득하려 했지만 거주지 등록 제도에 발목이 잡혔다. “우즈베키스탄이 독립한 1991년 이후 거주지 등록을 하지 않은 기간을 따져 3개월마다 20달러씩 지불해야 한다”는 담당 경찰의 요구를 들어줄 형편이 못됐다. 지금은 내야 할 벌금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최근엔 출생증명서 제출 조건도 생겼다. 이를 위해 투르크메니스탄에 다녀오려면 경비 80달러가 추가로 든다.

한국 정부가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을 위해 중앙아시아 국가와의 외교에 공을 들이면서 고려인 무국적자 문제는 해결의 전기를 맞았다. 우즈베키스탄 정부가 2019년 문재인 대통령의 국빈 방문을 계기로 무국적 고려인에게 국적 취득을 허용한 것. 우크라이나로 이주했다가 소련 붕괴 후 우즈베키스탄으로 돌아온 뒤 줄곧 무국적자 신세였던 김 기나지(61)씨 등 600여 명의 고려인이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장씨는 이 기회조차 붙잡을 수 없었다. 우즈베키스탄의 경우 아프가니스탄 등과 국경이 닿아 있어 무국적자 자신이 테러리스트가 아님을 스스로 입증해야 한다. 하지만 무국적자로 지낸 기간에 거주지 등록을 하지 못해 그간의 이동 경로를 증명할 수 없다. 거주지 등록을 하려면 벌금도 내야 한다. 장씨는 자신에게 부과될 벌금이 우즈베키스탄 정부가 정한 벌금 기본값(BRV) 약 20달러에 거주지 비등록 기간 20여 년을 분기별로 곱한 금액으로 알고 있다.

신분 증명을 할 수 없어 그림자 노동을 해야 하는 장씨에겐 감당하기 힘든 돈이다. 한국 정부가 벌금을 대신 내줄 거란 기대는 애초 없었다. 인테리어 기술이 있는 장씨는 “같은 마을 고려인들로부터 가끔 일감을 받아 버는 일당(3달러)으로 생활하는데, 그마저도 최근 한 달간은 일이 없었다”며 “돈을 모아야 거주지 등록을 하고 국적을 얻을 수 있는데, 국적이 없으니 돈도 벌 수 없는 굴레에 빠졌다”고 토로했다.

장씨는 무국적자 신분을 자녀들에게 대물림해야 하는 현실이 더 가슴 아프다. 거주지 등록을 못한 탓에 장씨 자녀들도 사실상 무국적 상태를 앞두고 있다. 장씨는 “아이들이 만 16세가 되면 국적을 받아야 하는데 그 전에 벌금을 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현지 한국대사관에 따르면, 2019년 우즈베키스탄 정부는 고려인 집성촌을 직접 방문해 무국적자 실태를 파악했다. 당시 집계된 고려인 무국적자 수는 총 843명이었다. 한국 정부는 공식 집계를 한 적이 없기에, 현재로서는 이 정보가 고려인 무국적자 규모와 관련된 유일한 통계다. 그러나 현지 한인들은 현실과 동떨어진 수치라고 평가한다. 한 관계자는 “중앙아시아 일대 고려인의 무국적자 비율은 10%에 달한다”며 “사망자 등을 감안해 보수적으로 따져도 우즈베키스탄 내 고려인 가운데 1만여 명은 무국적일 것”이라고 말했다. 학계에서는 중앙아시아 고려인 무국적자가 5만여 명으로 추산되고, 그중 많은 인원이 우즈베키스탄에 살고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어머니 나라 찾았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경제적 형편이 낫다고 해도 무국적자의 삶은 크게 다를 게 없다.

구한말 러시아 연해주에 터를 잡았다가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한 외증조부모로부터 4대를 내려왔건만, 우즈베키스탄 고려인 알렌산 카쟈란(30)씨는 국적이 없어 프로축구 선수 생활을 마감해야 했다. 고려인 어머니와 아르메니아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카쟈란씨는 아르메니아에서 출생해 7세 때 우즈베키스탄으로 이주한 뒤 줄곧 이곳에서 살았다. 어머니가 우즈베키스탄 출신이라 자신도 당연히 이 나라 국민이라고 생각했지만, 국적이 부여되는 16세가 됐을 때 그에겐 영주권만 주어졌다. 10년 거주 조건을 채우지 못했다는 이유였다.

1년만 기다리면 10년 거주 기한이 채워져 국적이 나올 거라 믿었지만 아니었다. 네 차례 신청 끝에 지난달 국적을 받을 때까지, 14년간 국가는 카쟈란씨의 거듭된 요청에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자신이 무국적자여야 하는 정확한 이유도 알 수 없었다. 담당 경찰은 “대통령 사인이 아직 떨어지지 않았다”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2019년 고려인에 대한 국적 부여가 허용됐을 때도 카쟈란씨는 아버지가 아르메니아인이라는 이유로 대상에서 제외됐다.

영주권이 있으니 그마저도 없는 무국적 고려인보다 형편은 나았지만, 하는 일마다 제약이 따르긴 매한가지였다. 가까스로 우즈베키스탄 프로축구 리그 선수가 됐지만 신분은 번번이 걸림돌이 됐다. 구단들은 내국인 지위가 없어 외국인 급여를 줘야 하는 카쟈란의 영입을 꺼렸다. 해외 원정경기라도 있으면 더 난감했다. 우즈베키스탄 정부가 무국적자에게 발급하는 여행문서인 ‘회색 여권’을 인정하는 나라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입국 때마다 팀 동료들을 먼저 보낸 뒤 환승게이트에 남아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번잡한 서류 절차를 거쳐야만 했다.

고려인 아내를 만나 세 살, 한 살짜리 두 아이를 둔 카쟈란씨는 축구선수 생활을 접고 영업사원으로 새 삶을 시작했다. 하지만 본인 명의의 집을 살 수도, 마음대로 거주지를 옮길 수도 없었다. 휴대폰은 다른 사람 명의를 빌려서 개통했다. 더구나 외국인으로 간주돼 살고 있는 아파트에 대한 세금은 내국인보다 2배가량 더 내야 했다. “무국적자는 차량 번호판 색깔도 다릅니다. 더 많은 의무를 지고 살면서도 스스로 ‘이방인’이라고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카쟈란씨는 2018년 증조부모의 나라를 찾기도 했다. 고려인 지원단체 주최로 고려인 무국적자 문제를 다루는 콘퍼런스에 초청을 받아서다. 그는 “(콘퍼런스가 열린) 경기 안산시 공무원들도 참석한 자리였고, 사연을 얘기해 달라기에 말했더니 다들 ‘그렇구나’ 고개만 끄덕였다”며 “나를 불쌍하다고만 할 뿐 달라지는 건 없었다”고 당시를 돌아봤다. 카쟈란씨는 “지난달 경찰에 한국 언론이 무국적자인 나를 취재한다는 사실을 알렸더니 느닷없이 국적이 나왔다”며 한국 사회의 관심을 촉구했다.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정부광고 수수료를 지원받아 제작되었습니다.

타슈켄트(우즈베키스탄)= 이정원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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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고려인(高麗人, 러시아어: Корё-сарам)은 구소련 붕괴 이후 독립 국가 연합의 국가들에 거주하는 한민족을 이르는 말이다. 이들의 국가에는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키르기스스탄, 우크라이나, 몰도바 등이 포함된다. 약 50만 명의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거주하였으며, 남부 러시아의 볼고그라드 부근, 캅카스, 남부 우크라이나에도 많은 고려인들의 공동체들이 존재한다. 이들의 정체성은 1860년대 초 무렵부터 러시아 제국령 프리모르스키주로 대거 이주한 재로한인(在露韓人)으로부터 유래한다.

호칭 [ 편집 ]

본래 고려인은 자신들을 이주 한민족으로 인식하였다. 고려인이라는 명칭이 생긴 것은 서울 올림픽 직전인 1988년 6월에 전소련고려인협회(Всесою́зной ассоциа́ции сове́тских коре́йцев (ВАСК))가 결성되면서부터이다. 고려인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적이나 대한민국 국적을 보유하지 않은 소련인(Сове́тский наро́д)이었다. 또한 자신들의 언어와 문화도 한 세기 이상 지나면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는 크게 이질적인 러시아 친화적인 특성을 많이 띠고 있었기에 ‘조선(朝鮮)’이나 ‘한국(韓國)’이 아닌 ‘고려(高麗)’라는 중립적인 표현을 채택한 것이다. 따라서 고려인이라는 호칭은 한반도의 분열이 낳은 특수한 역사의 산물이며, 한반도의 역사적 왕조인 고려와의 직접적인 관련성은 없다.

흔히 이들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알려진 ‘카레이스키’는 러시아어로 ‘한민족의’, ‘한민족적인’을 의미하는 형용사 ‘코레이스키(Коре́йский)’에서 유래한 표현이다. 전통적으로 러시아어권에서 한민족을 가리키는 표현은 ‘코레이치(Коре́йцы)’이며, 현재는 한국어 ‘고려사람’에서 유래한 ‘코료사람(Корё-сара́м)’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역사 [ 편집 ]

극동 러시아와 시베리아 이주 [ 편집 ]

1800년대의 조선은 국정이 혼란하여 소수의 양반들이 절대다수의 토지를 독점하게 되었다. 조선족과 고려인은 출신이 다른데 조선족들은 가난한 농민들이였고 조선족들은 먹을 것을 찾아 가난을 피해서 청나라 동북지방, 즉 만주로 이주하였고 고려인들은 거의 대부분이 1890년 이후에 일제의 압력을 피해 연해주로 이주한 독립운동가와 상업을 종사하던 사람들이다. 고려인들은 조선족들과 다르게 고려에 자본이 존재하여 부유한 편이였고 연해주에 이주해서도 농장을 가질 수 있었으며 만주사변 이후에는 일본인들의 지원을 받고 연해주로 이주하게 된 사람들도 존재한다. 1900년도에는 그 수가 급증하여 1890년에는 고려인이 프리모르스키 지방(연해주)의 전체 인구의 20%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완성되기 이전에 극동 러시아의 고려인은 러시아인보다 많았으며, 러시아 지방 관리는 고려인들에게 귀화를 종용하였다. 1897년의 러시아 제국의 인구 조사에 의하면, 러시아 전체에서 고려말을 하는 사람들이 26,005명(남자 16,225, 여자 9,780)이었고[2], 1902년에는 32,000명을 넘었다. 여러 도시에 고려인 마을과 고려인 농장이 있었다.

1900년대 초에는 러시아와 조선 모두 일본과 대립하였다. 하지만, 1907년 러일 전쟁이 종료되면서 러시아는 가난한 소작농들인 조선족들은 내버려두고 독립운동가와 농장이라는 자본을 소지한 고려인들이 일본군의 스파이 행동을 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고려인들은 일제를 도우는 척하면서도 독립군들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또한 1919년,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에 모여 3·1 운동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고려인 마을은 군대의 보충을 비롯한 민족주의자들의 근거지가 되었다.[3][4]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이주한 조선인들은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등 러시아 문화에 상당히 적응을 한다.[5] 무엇보다도 그들의 땅에서 수탈 없이 일할 수 있다는 것이 이주의 가장 큰 이유였다.

강제 이주 [ 편집 ]

이 부분의 본문은 이 부분의 본문은 고려인의 강제 이주 입니다.

1937년에서 1939년 사이, 스탈린고려인들이 일본군의 스파이 행동을 하는 것을 두려워 하였다. 그래서 고려인 지도자 500명을 체포하고 그중 40-50명을 숙청 처형하였고 연해주에 살던 172,000명의 고려인들을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당시 극동지역 위원장 리우시코프는 1937년 8월 하바롭스크에 머물면서 스탈린의 지령을 받아 강제이주정책 추진했는데, 접경에 살고 있는 한인들은 간첩의 소지가 있으니 일본인과 접할 수 없게 하는 정책이 필요하다며 강제이주 정책을 건의했다고 한다. 여러 공동체의 지도자들은 추방 및 유배되었고, 이주 도중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글라스노스트 이전까지는 이주에 대해 발언하는 것조차 금지되었다.

이주민들은 협력하여 관개 시설을 설치하였고, 벼농사를 시작하였다. 3년이 채 지나지 않아 그들은 그들의 삶의 방식을 회복하였다. 하지만, 수십 년간 한국어가 금지되었기 때문에, 그 다음 세대는 한국어를 거의 잘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구소련 붕괴 이후 [ 편집 ]

소련의 붕괴 이후에도 거의 대부분의 고려인은 구 소련 지역에 동화되어 그대로 살아가고 있다. 연구에 따르면, 2002년에 약 470,000명의 고려인이 독립국가연합에 거주하며, 그중 198,000명이 우즈베키스탄에, 125,000명이 러시아, 105,000명이 카자흐스탄, 19,000명이 키르기즈스탄, 12,000명이 우크라이나, 6,000명이 타지키스탄, 3,000명이 투르크메니스탄, 5,000명이 기타 지역에 살고 있다.[1]

러시아 [ 편집 ]

2002년의 인구 조사에서는 148,556명의 고려인이 러시아에 거주하며, 남자가 75,835명, 여자가 72,721명이었다. 그중 1/4 정도는 시베리아와 극동 러시아에 거주한다. 그곳의 고려인들은 그 이주 경로가 다양하여, 1937년 선대의 강제 이주로부터 돌아온 독립국가연합 국적의 33,000명 외에, 약 4,000~12,000명의 북조선 이민자도 이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한민국이나 중국 소수 민족 출신의 고려인 또한 정착, 투자하며, 국경 무역에 참여하고 있다.

사할린 [ 편집 ]

사할린은 한때 일본 열도 본토로 취급받는 제5의 섬이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하면서 소련에 넘겨진 땅이다. 이 곳의 조선인들은 일본 땅으로 일하러 갔다가 전쟁이 끝나고 땅 주인이 소련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버려진 것이다. 사할린 섬에 있는 조선인들은 중일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제국 전시체제 당시 강제징용 당해 탄광으로 끌려가 강제노역당한 사람들이었다. 그 때문에 중앙아시아의 고려인과 사할린 한인의 정체성은 다르다. 사할린의 한인은 재일 한국인과 유사하나 그들과도 냉전 시대의 분단 때문에 독자적인 정체성으로 남았다.

유럽 및 기타 지역 [ 편집 ]

우크라이나의 2001년 인구 조사에서 12,711명이 스스로 고려인으로 인식하였는데, 이는 1989년의 8,669명보다 증가한 것이다. 가장 인구가 집중되어 있는 곳은 하르키우, 키이우, 오데사, 미콜라이우, 체르카시, 리비우, 루한스크, 도네츠크, 드니프로, 자포리자, 크림반도 등이다.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규모가 큰 한인 사회는 하르키우에 위치하는데, 약 150명의 한인 가정이 거주한다. 최초의 한국어 학교가 1996년 이들의 관리하에 개교하였다.

한편 2014년 크림반도가 러시아로 편입됨에 따라 이 지역에 살던 약 3000명의 고려인이 러시아 국적을 취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앙아시아 [ 편집 ]

중앙 아시아의 고려인은 거의 대부분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에 거주한다. 카자흐스탄의 고려인 문화는 이전의 수도였던 알마티(Almaty)를 중심으로 하는데, 이곳에서는 유일하게 한국어 신문(고려 신문)과 한국어 극장이 운영된다. 카자흐스탄의 인구 조사에서는 1939년 96,500명의 고려인이 기록되었고, 1959년에는 74,000명, 1970년에는 81,600명, 1989년에는 100,700명, 1999년에는 99,700명이었다. 우즈베키스탄의 고려인들은 농촌 지역에 넓게 흩어져 있다.

무국적 고려인 [ 편집 ]

구소련 붕괴 이후 일부 고려인들은 무국적자가 되었다. 구소련의 구성 공화국들이 독립 이후에 소련 국적을 인정하지 않아 국적을 다시 신청해야 하는데, 이를 몰랐거나, 서류를 분실하거나, 거주자로 등록하지 않았거나, 경제적인 여유가 없는 등으로 신청하지 못한 것이다. 이들은 교육을 비롯한 기본적인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으며,[6][7][8] 이러한 불이익은 그 자손들에게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9] 구소련 지역에는 현재 전체 고려인의 10%에 해당하는 약 5만의 무국적 고려인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우크라이나에서는 최근 한국 대사관의 신분 증명이 있다면 자국 내 무국적 고려인의 국적 회복을 지원해 줄 수 있음을 언급하였다.[10][11]

한국으로의 회귀 [ 편집 ]

현대에 들어 대한민국은 고려인을 비롯한 한국계 외국인의 귀국을 독려 및 지원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약 1만 명의 우즈베키스탄 고려인들이 대한민국으로 귀화하는 등 한국으로의 회귀가 이루어지고 있다.

대한민국의 고려인 거주 지역 [ 편집 ]

안산시 땟골마을 – 약 7000명의 고려인이 거주하는 국내 최대 고려인 거주지. 위치는 안산시 단원구 선부2동.

광주광역시 고려인마을 – 약 3000명의 고려인이 거주 중. 위치는 광주광역시 광산구 산정공원로 50번길 29. 9월 6일부터는 고려인들의 사연을 들려주는 ‘고려FM’이라는 라디오 방송을 송출 중에 있다.

문화 [ 편집 ]

고려인의 정체성을 쉽게 특정하기는 어렵다. 개개인마다의 차이가 있기 때문. 외관상으론 한국인과 흡사하지만 사고방식은 일반적인 러시아인에 가깝고 현재 대부분의 고려인 4세, 5세 등은 한민족이라는 정체성만 가지고 있을 뿐, 그 이상으로는 생각하지 않는 편이며, 혈통이 유사한 조선족과 약간 유사한 생각을 하는 고려인들이 거의 대부분이기도 하다. 현대 젊은층의 경우는 러시아에 완전히 동화되었기 때문에 모국어가 러시아어고 한국어를 전혀 구사하지 못하지만, 자신의 민족이 고려인이라는 자각은 하고 있다. 사실 우즈베키스탄이나 카자흐스탄의 경우 여권에 민족명을 표기하므로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현재, 중앙아시아 지역의 고려인들 대부분은 카자흐어, 우즈베크어 등 독립 후 새로 지정된 현지 공용어를 능숙하게 구사하지는 못한다. 스스로를 러시아인에 가깝다고 생각하여 현지어를 배우기 위해 별로 노력하지도 않는다.

또한 소련 해체 후 지역 민족주의가 대두하면서 심한 차별을 받게 된 고려인 중에는 연해주로 돌아가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연해주를 자신이나 부모의 ‘고향’으로 여기는 노인들, 다른곳에서 희망을 찾아보려는 젊은 고려인들 가운데 이런 경향이 있다고 하는데 이들의 정착을 지원하는 한국 사회단체의 지원상황이 다큐형식으로 한국TV에서 방송된 적 있다.

고려인 젊은이들은 한국을 ‘할아버지의 나라’ 정도로 여기고 있다고 한다. 한국어는 커녕 고려말도 거의 제대로 하기 어려워 하는 젊은이들이 부지기수. 그래도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인지는 하고 있다. 한국으로 일하러, 혹은 유학으로 오는 케이스도 있으며, 예를 들어서 일본에서의 일본계 브라질인이 겪는 차별과는 달리, 대한민국 정부는 조선족, 고려인에 대한 차별을 거의 하지는 않는다.

고려인들은 언어적인 측면 등 러시아 문화에 동화된 부분도 많지만 마르코프차를 비롯해 한국 요리의 식습관을 지켜나가고 있다. 우즈베키스탄 이나 카자흐스탄의 좀 큰 시장에 가면 고려인 반찬 가게도 있으며 국시 같은 이름의 요리도 찾아볼 수 있다. 단 고려인들의 한국 요리는 백여 년 전 옛날 식에 가깝기 때문에 대한민국(남한)의 요리와 상당히 다르다. 따라서 고려인들의 한국 요리는 북한의 요리에 가깝고 식재료도 중앙아시아의 상이한 식재료들로 만든 것이라 대한민국의 한식과는 매우 다르다.

중앙 아시아로의 이주 후, 고려인들은 주변의 사람들과는 다른 양식의 삶을 살았다. 그들은 관개 시설을 만들고 지역 일대의 쌀 재배 농가가 되었다. 주변의 유목민과는 거의 교류하지 않았으며, 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고려인들은 곧 한국의 전통 의상을 입지 않게 되었지만, 중앙 아시아인들의 옷보다는 서구의 복식을 채택하였다.

사용 언어 [ 편집 ]

1세대는 육진 방언을 기초로 러시아어의 영향을 받아들인 고려말(중앙아시아 한국어)을 사용한다. 다만 이들 거의 대부분은 거주 지역의 언어 역시 구사할 줄 안다. 한편 2세대 이후는 일반적으로 한국어는 겨우 알아듣거나 아예 하지 못하고 러시아어 등 거주 지역의 언어만 이해한다. 현대에는 거의 대부분 러시아어나 우크라이나어를 비롯하여 여러 중앙아시아 언어를 구사하며, 일반적으로 능숙한 한국어는 구사하지 못한다. 러시아 동남부 지역 프리모르스키 크라이 지역은 중국과 인접하여, 외국어로 중국어 사용이 약간 가능한 인구가 있다.

인물 [ 편집 ]

방송 [ 편집 ]

2015년 2월 14일부터 2015년 2월 16일까지 방송된 MBC 카레이스키 150년 만의 귀향에서 고려인의 후손들이 150주년이었던 2014년에 남북 화합과 통일을 염원하며 유라시아 자동차 횡단을 하는 장면을 방송하였다.

2016년 8월 15일부터 2016년 8월 16일까지 광복절 특집으로 방송 된 EBS 광복절 특집 다큐멘터리 ‘청춘, 사라진 100년 그들의 목소리’에서 세계 1차 대전 때 독일 포로수용소에 감금돼 음성실험을 하고 사라진 고려인 포로 6명의 이야기를 다뤘다.

2016년 9월 8일 KBS1TV에서 추석기획으로 방송 된 한국인의 밥상에서는 국시와 가지고추된장찜, 감자만두 등 우리의 정신을 이어나가며 다양한 문화를 조화롭게 받아들인 카자흐스탄의 고려인 밥상을 방송하였다.

같이 보기 [ 편집 ]

참조 [ 편집 ]

[커버스토리]내 이름은 따냐…한반도·연해주·카자흐·우즈벡 유랑한 ‘고려인’입니다

고려인 정 따냐씨의 가족은 5대에 걸쳐 러시아와 중앙아시아를 유랑해왔다. 지금은 남편, 두 자녀와 함께 10년째 한국에서 살고 있다. 지난 19일 경기 안산시에 있는 따냐씨 집에서 그의 가족사를 들었다. 왼쪽부터 따냐씨, 딸 이미연씨, 남편 이 비아체슬라브씨. 권도현 기자

할머니는 때때로 마당 아궁이에 큰 가마솥을 올리고 옥수수를 삶았다. 그럴 때면 손자, 손녀들은 마당에 모여 신나게 옥수수를 먹었다.

“할머니의 눈에서 ‘사랑’이 보였어요. 손자, 손녀들 배불리 먹이려고 늘 노력하셨던 거, 그게 생각나요.” 우즈베키스탄 수도 타슈켄트 외곽의 시골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을 들려달라는 부탁에 ‘할머니’와 ‘옥수수’ 얘기를 꺼냈다. 그의 이름은 정 따냐(텐 따찌아나·42). 자신이 나고 자란 우즈베키스탄을 떠나 한국에서 10년째 살고 있는 고려인이다. 고려인은 중앙아시아·러시아 등 구소련 지역의 동포를 일컫는다.

따냐씨는 할머니와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 할머니는 ‘조선어’만 할 수 있었고, 따냐씨는 러시아어를 썼다. 할머니의 눈에서 사랑을 읽은 기억만 남아 있을 뿐이다.

2010년 한국에 왔을 때 그의 눈엔 유독 할머니들이 띄었다. “우리 할머니와 똑같은 모습”이 신기하고 따뜻했다. 버스 안에서 어느 할머니와 손자가 정답게 얘기하는 모습은 더욱 특별하게 다가왔다. “나는 할머니와 저렇게 대화할 수 없었는데, 너무 부러웠어요.”

따냐씨 가족은 5대에 걸쳐 한반도→러시아 연해주→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한반도(한국)로 이어지는 유랑을 했다. 그의 증조할아버지·증조할머니는 한반도 이북 땅에서 태어나 러시아 연해주에서 살았다. 할아버지·할머니는 연해주 한인마을에서 태어나 카자흐스탄에서 자녀(따냐씨 아버지 5남매)를 낳고 우즈베키스탄으로 이주했다. 따냐씨의 딸과 아들은 우즈베키스탄에서 태어났지만 지금은 한국에 뿌리내리려 애쓰고 있다. 이제 따냐씨는 자신의 손자·손녀가 이곳 한국에서 태어나길 바란다.

다수의 한국인들에게 고려인의 존재는 기억해야 할 ‘역사’ 정도로 여겨지지만 이들은 이미 함께 살고 있는 ‘이웃’이다. 출입국관리 당국에 따르면 한국 땅에 있는 고려인은 약 7만명. 이들이 데려온 자녀까지 포함하면 한국의 고려인 규모는 약 8만명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고려인들은 대개 따냐씨처럼 우즈베키스탄이나 카자흐스탄에서 왔다. 한국어를 하지 못해 주로 중소규모 공장에서 저임금 노동으로 생계를 잇고 있으며 경기 안산, 인천, 광주 등지에서 느슨한 형태의 공동체를 꾸리고 있다.

올해는 3·1운동이 일어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100년이 되는 해다. 식민통치에 항거한 순국선열을 기리는 행사가 곳곳에서 이어졌다. 이 시기를 건너온 한민족의 거대한 흐름 속에 근현대사의 거친 물결에 파도처럼 부서졌다가 다시 일어섰던 ‘고려인’이 있다.

이들은 지배층의 착취, 제국주의와 전체주의의 폭력, 끝없는 이주 속에서도 끝내 삶을 포기하지 않았고 자녀를 열렬히 키웠다. 1세기가 넘는 시간을 돌아 다시 한반도 땅으로 ‘귀환’한 따냐씨 가족의 이야기에는 한민족의 또 다른 역사가 담겨 있다.

◆우즈벡서도 한국서도 ‘이방인’…아이들은 차별없는 ‘한국인’으로 살길

소련 붕괴 후 우즈벡인들이 말했다…“너희 땅으로 가라”

그때 처음으로 진지하게 ‘우리땅은 어디인가’ 생각해봐

한국 온 10년 동안 공장 전전…반말은 예사, 욕설도 들어

지금 직장 와서 처음 들은 “OO씨”, 인간대접 받는 느낌

정 따냐(42·사진)·이 비아체슬라브(43)씨 부부는 2010년, 딸과 아들은 2012년 한국에 왔다. 두 자녀를 각각 중학교, 초등학교에 보낸 첫해에 큰 고비가 찾아왔다. 아들인 이 안드레이군(19)은 그래도 고려인 아이들이 있는 안산의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하지만 딸 이미연씨(20)는 외국 국적 학생이 단 한 명도 없는 중학교에 입학했다. 미연씨는 “첫 1년 동안 내내 학교에선 그냥 앉아 있기만 했고, 밤마다 울었다”고 했다. 눈물을 뚝뚝 흘리는 딸을 보며 아버지는 “그냥 우즈베키스탄으로 돌아가자”고 했지만 따냐씨는 아침마다 딸을 다독여 등교시켰다. “우리에겐 목표가 있다. 그 목표에 집중해야 한다.” 엄마의 굳센 의지 때문에라도 학교에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미연씨는 교과서의 한글 낱말을 모두 러시아어로 번역해 가필한 다음 이해될 때까지 읽고, 수업을 들었다.

한국말에 능통한 중국 동포를 생각하면 러시아어만 쓰는 고려인들이 얼핏 이해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언어가 전승되지 않은 배경엔 고려인들만의 슬픈 역사가 있다.

■ 말과 글을 잃은 이유

따냐씨의 증조부모 세대는 한반도 최초의 ‘이민세대’이자 ‘개척세대’였다. 19세기 말 함경도 농민들은 지방관료와 지주의 착취에서 벗어나기 위해 러시아 연해주로 건너갔고 그곳의 황무지를 일궈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연해주로의 이민이 얼마나 대규모였는지, 1900년대 초 연해주의 고려인 인구는 3만명에 달했다(김호준 <유라시아 고려인 150년>). 따냐씨의 할아버지·할머니인 정 사예프, 박 니나는 이 무렵 연해주의 한인자치마을에서 태어났다(각각 1913년, 1914년 출생). 그들이 태어난 한인마을은 러시아에 있었지만 언어와 풍습은 조선과 다름없었다. 두 사람은 러시아 연해주가 항일운동의 근거지 역할을 하던 시기(1920년대)에 결혼했고 아이 셋을 낳았다.

고려인들이 말과 글을 지켜갈 의지를 잃게 만드는 비극은 1937년 일어났다. 그해 소련의 스탈린은 연해주에 살던 18만명의 고려인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시켰다. 고려인들은 시베리아 열차 화물칸에 실려 연해주로부터 약 6000㎞ 떨어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의 허허벌판에 버려졌다. 열차에선 사망자가 속출했다. 정 사예프·박 니나 부부의 품 안에서 아이 셋이 모두 숨을 거뒀다. 박 니나의 여섯 남매 중에서도 네 사람이 죽었다. 열차가 정차할 때마다 고려인들은 통곡을 하며 철길 옆에 시신을 묻었다.

정 사예프와 박 니나 부부가 내린 곳은 카자흐스탄의 황무지였다. 고려인들은 ‘이주지’에 닿은 후에도 토굴에서 연명했다. 이 과정에서도 친지와 지인들이 죽어나갔다. 두 부부가 서로의 곁을 지키며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기적 같은 일”(따냐씨)이었다. 고려인들은 날이 밝으면 죽은 이들을 땅에 묻고 갈대밭과 늪을 논밭으로 일궜다.

정 사예프와 박 니나 부부는 카자흐스탄에서 19년간 살며 다시 아들 둘, 딸 셋을 낳았다. 그중 둘째가 따냐씨의 아버지 정 표도르다. 이 가족은 이후 기후가 조금 더 따뜻한 우즈베키스탄으로 옮겨 살았고, 정 표도르는 박 클라브치아를 만나 가정을 꾸렸다. 이들은 우즈베키스탄에서도 농장 일을 했다. 따냐씨의 어린 시절 풍경에 등장하는 커다란 옥수수 농장이 이곳이다.

따냐씨는 어린 시절 할머니와 어머니가 ‘말’을 놓고 자주 다툰 것을 기억한다. 연해주에서 태어난 할머니는 ‘조선말’을 고집했다. 하지만 그들의 자녀세대는 달랐다. 따냐씨의 어머니는 ‘어차피 소련에서 살 텐데 조선말을 알고 있어봐야 뭐하느냐’고 대꾸했다. 소련은 학교에서 조선어 사용을 금지했고, 한민족의 노래를 부르는 것마저 막았다. 고려인의 문학작품도 검열해 강제이주를 연상케 하는 표현을 모두 삭제했다. 강제이주 10여년 후 태어난 따냐씨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학교에서 러시아어로 공부했다. 조선말을 알아듣기는 했지만 러시아어로 대답했고 따냐씨를 비롯한 자녀들에게도 굳이 조선말을 가르치지 않았다.

따냐씨의 아들이 한국 초등학교에 들어간 첫해 ‘매트리스를 치우라’는 선생님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가 선생님에게 호되게 맞은 일이 있었다. 아들 안드레이군은 허벅지에 시퍼렇게 멍이 들었는데도 일에 지쳐 있는 엄마를 생각해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따냐씨는 뒤늦게 학교의 다른 선생님으로부터 이 사실을 전해 들었다. 그는 아버지가 어린 시절 학교에서 러시아말을 잘 못한다고 맞은 적이 있었다는 얘기가 떠올랐다.

고려인 후손들은 말과 글은 이어받지 못했지만 전통만은 지켰다. 가을에는 늘 생고추를 갈아 김장을 했고 환갑 같은 잔치가 있을 때에는 친척이 모여 사흘 동안 음식을 준비했다. 한복도 입었다. 아이들 돌잔치에는 쌀, 펜, 실 등을 놓고 돌잡이도 했다. 평소 식습관은 고려인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따냐씨의 경우에는 아침에는 치즈를 곁들여 빵을 먹었고 점심·저녁에는 밥을 먹었다.

부모님 칠순잔치 때 한복 입고 ‘덩실’ 정 따냐(텐 따찌아나·왼쪽)씨 가족이 2017년 우즈베키스탄에서 열린 부모님의 칠순잔치 때 한복을 입고 춤을 추고 있다. 정 따냐씨 제공

■ 소련 해체 후의 혼란

따냐씨의 꿈은 선생님이었다. 교사는 고등교육을 마친 고려인들이 가장 많이 진출하는 직업군이었다. 그는 자신의 바람대로 1년간 교사로 일했다. 하지만 국내외 정치상황이 또 한번 따냐씨 가족을 덮쳤다. 1991년 말 소련이 붕괴했다. 그리고 그의 가족이 살던 곳은 ‘소련’에서 우즈벡 민족의 나라 ‘우즈베키스탄’이 됐다. 새 정부가 들어섰고 공용어가 러시아어에서 우즈벡어로 바뀌었다. “학교 교장선생님 같은 (중요한) 자리는” 모두 우즈벡인에게 돌아갔다. 심각한 인플레이션이 찾아왔고 동네 식료품 가게엔 소금, 비누 같은 물건조차 없었다.

월급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교사를 그만두고 시장에서 지인들과 함께 고려인들을 상대로 반찬가게를 했다. 지금도 고려인 밀집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당근김치’를 수북하게 쌓아놓고 팔았다.

소련 붕괴 이후 따냐씨는 우즈벡 사람들로부터 ‘너희 땅으로 가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그때 처음으로 진지하게 ‘우리 땅은 어디인가’를 생각해보게 됐다. 따냐씨 또래의 차 이고르씨(41) 가족이 겪은 일은, 소련 붕괴 직후 중앙아시아의 사회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고르씨의 아버지는 타타르족 지인과 함께 제빵공장을 운영했다. 그런데 소련 붕괴 후 “깡패”들이 아버지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공장을 넘기지 않으면 반드시 네 아들의 피를 보겠다.’ 이런 협박 전화가 수시로 걸려왔다. 실제로 이고르씨는 미행을 당했다. 결국 아버지는 타타르족 동업자와 함께 일을 관뒀고, 공장은 우즈벡인들 손에 들어갔다. 이 일로 그의 아버지는 뇌졸중을 얻어 1999년 사망했다. 이고르씨는 혼잣말하듯 말했다. “절대로 잊지 않을 겁니다. 영원히 내 기억 속에 남아 있어요.”

따냐씨 동네에서도 ‘비(非)우즈벡인’들이 떠나기 시작했다. “러시아 민족은 러시아로 가고, 유대인들은 이스라엘로 가고, 독일 민족도 독일로 가고…. 마을 사람들이 떠나는 걸 매일매일 지켜보던 때가 있었죠.” 이런 혼란 속에서도 따냐씨는 무역회사에 다니는 고려인 남편 이 비아체슬라브씨를 만나 결혼했다. “가진 것이 사랑밖에 없던 시절”이라, 1999년에 태어난 딸 이름을 러시아어로 ‘사랑’이라 지었다(러시아어 ‘사랑’은 한국어로는 발음하기 어려워 한국 이주 뒤 딸 이름을 미연으로 고쳤다. ‘미연’은 ‘아름다운 연꽃’이란 뜻으로 따냐씨가 직접 지었다). 이듬해 아들 안드레이를 얻었다.

정체성 혼란을 겪은 따냐씨와 다르게, 그의 아버지 정 표도르씨는 우즈베키스탄을 자신의 나라로 여겼다. 아버지는 평소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을 좋아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을 자주 했다. 정 표도르씨는 딸이 한국에 10년째 살고 있는데도 한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는 달랐다. 따냐씨 부부가 딸·아들을 두고 2년간 한국에 먼저 들어와 일하는 동안 어머니는 손녀와 손자를 돌봐주었다. 어머니는 한국에 와보고 싶어 했지만 심장질환으로 고생하다 지난해 세상을 떠났다.

따냐씨 가족의 ‘산증인’인 할머니는 1960년대에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고 2014년 100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할머니는 사고로 첫아들을 잃었지만 나머지 4남매를 있는 힘껏 키웠다. 표도르씨는 종합기술 전문학교를 나왔고, 따냐씨의 삼촌 블라디미르는 화가였다. 고모 안토니나와 소피야는 각각 교사와 회계사로 일했다. 따냐씨의 자녀에 대한 헌신은 할머니를 닮은 듯했고, “살고 있는 곳을 고향으로 여기고 사랑하겠다”는 신념은 아버지로부터 이어받은 듯했다.

교사 그만두고 시장에서 반찬 팔던 시절 소련이 해체된 후 정 따냐씨(오른쪽)는 교사를 그만두고 우즈베키스탄 시장에서 지인들과 함께 고려인식 반찬을 만들어 팔았다. 고려인들이 즐겨 먹는 ‘당근김치’가 수북이 쌓여 있다. 정 따냐씨 제공

■ 우여곡절 끝 ‘우리 땅’ 찾아왔지만…

‘우리 땅’을 찾아왔지만, 고려인들은 한국에 와서도 이방인이었다. 10년 동안 경기 지역 공장을 전전해온 따냐씨는 그간 겪은 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한국 사람은 세 명이 하는 일을 우리(자신과 같은 동포와 외국인 노동자)에게는 한 명에게 시키고, 젊은 남자 관리자들은 나이가 많은 여자한테도 그냥 반말을 해요. ‘너 바보야?’라는 막말이나 욕설도 해요.” 2년 동안 한 공장에서 일하고도 퇴직금 한 푼 못 받은 적도 있었다.

때로는 ‘화풀이성’ 해고도 당했다. “ ‘불량’이 계속 나오니까 관리자가 와서 ‘왜 이렇게 하느냐’고 화를 내요. 제가 한국어를 조금 할 줄 아니까, ‘우리는 시킨 대로 하고 있었어요’라고 답했는데 저보고 ‘지금 당장 집에 가라’고…. 말대답하는 게 기분 나쁘다는 거죠.”

그래도 따냐씨 가족은 큰 사고는 입지 않았다. 남편 비아체슬라브씨가 일하던 곳에서는 한 고려인이 낡은 프레스 기계에 팔이 절단되는 사고를 당했다. 그 고려인은 합의금으로 2000만원을 받고 우즈베키스탄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건설현장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이 끔찍한 사고를 당하는 것을 목격한 남편은 요즘도 가끔 우즈베키스탄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의중을 드러낸다.

■ 후손만은 한국에서 정착했으면

따냐씨는 두 달 전부터 한국인 직원들이 다수인 자동차 부품공장에서 일하고 있다. 서로 ‘○○씨’라 부르며 존대한다. “처음으로 사람 대접받는 느낌이에요. 그전까지는 사람 아니고… 바닥에 있는 느낌(이었다).” 그가 한국인들과 섞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인간 대접’이었다. 그래서 따냐씨는 자녀들만은 반드시 한국인으로 인정받기를 바란다. 딸 미연씨는 경기도의 한 ‘공유오피스’에서 관리직으로 일하고 있다. 이 업체의 블로그를 딸이 관리하고 있는데, 따냐씨는 매일같이 그 블로그에 들어가 딸이 올린 게시물을 확인하고 기뻐한다.

“사실은 저도 제 인생이 아쉬워요. 꿈도 못 이뤘고…. 이제 저의 새로운 꿈은 아이들이 여기서 자신의 ‘세계’를 만들도록 하는 거예요. 나중에는 제 손자·손녀들이 이런 말도 하는 거죠. ‘할머니, 할아버지는 한국에 외국인처럼 와서 고생을 많이 했지만 덕분에 우리는 한국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고.”

한국에 온 후 10년 동안 밤잠을 아껴가며 공부했지만 아직 따냐씨의 한국어는 능숙한 편이 아니다. 지난 19일 저녁, 경기 안산시의 따냐씨 집에서 인터뷰를 하는 동안 딸, 아들이 돌아가며 통역을 맡았다. 그의 남편은 아예 한국말을 익히지 못했다. 지금은 네 가족이 러시아어로 대화할 수 있지만, 시간이 흘러 자녀가 결혼하고 손자·손녀가 태어나면 또 다른 소통 단절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조선 말엽부터 시작된 유랑의 역사, 제국주의와 냉전 그리고 전체주의에 휩쓸리며 큰 희생을 감내했던 고려인들. 다시 한반도로 돌아온 고려인 동포들이 이주민으로서의 불안감과 단절감을 내려놓고 마음 편히 일상을 누릴 날은 언제쯤 올까.

구소련 지역 거주 동포들 왜 고려인이라고 부를까

구소련 지역에 거주하는 동포를 ‘고려인’이라고 일컫는다. 이들은 19세기 말부터 러시아 연해주로 진출한 조선인의 후손이다. 그런데 왜 ‘고려 사람’ 혹은 ‘고려인’이라고 부르게 됐을까.

<유라시아 고려인 150년>(김호준 저)에 따르면 러시아의 탐험가가 1860년에 연해주를 찾았을 당시부터 이미 조선인들은 자신을 ‘고려사람’으로 칭했다고 한다. 고려인 통사를 엮어낸 김호준 작가는 이 책에서 “조선 사람들이 연해주가 고구려 땅이었음을 과시하기 위해 스스로 고려사람이라고 불렀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이후 한반도에서 남과 북이 각각의 정부를 수립한 것도 ‘고려인’이라는 중립적 표현을 쓰게 된 데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한국을 비롯해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에 흩어져 사는 고려인은 50만명으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 연해주는 독립운동가들의 근거지였다. 시민단체 ‘고려인너머’는 한국 사회가 이들을 잊지 않도록 고려인 독립운동 기념비 건립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해외기고] 우즈베키스탄 고려인의 한식

4월 5일 가족들과 함께 타슈켄트 외곽, 양기율시에 있는 공동묘지를 찾았다.

러시아로 부모님의 날(Родительский День)인 한식(寒食)은 우즈베키스탄 고려인 동포들에게 가장 중요한 세시풍속 의례일 중 하나다. 해마다 양력으로 4월 5일이 되면 우즈베키스탄 고려인 동포들은 다른 일 제쳐놓고 먼저 선친들의 묘소를 찾는다.

고려인 동포와 결혼한 필자도 해마다 타슈켄트에서 약 50분 떨어진 양기율시에 있는 공동묘지를 찾아 돌아가신 처 작은아버지의 명복을 빈다.

1937년 강제이주 이후 정착 80여 년이란 비교적 짧은 이곳 고려인 역사 탓에, 고려인 동포들이 찾아뵙는 묘소는 주로 선친 혹은 조부모 묘소다.

고려인이 묘소를 찾는 날은 한식과 장례 후 삼 년째까지의 기일 그리고 추석 이렇게 일 년 중 세 번 정도이나, 추석이 주로 3년 탈상까지의 기간 찾는 날이라면 한식은 반드시 성묘하는 날로 여긴다.

구소련 시기부터 고려인이 소속된 직장, 기관은 이날 고려인에게 개인 휴가를 줬다. 이러한 관습(?)은 약하게나마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묘역은 주로 공동묘역형태로 교외에 있다. 고려인 전용 묘역도 있으나 많은 경우 타민족 묘소와 함께 조성된 민족 공동묘역으로 조성되고 이 경우 대부분 민족별로 구획이 나뉘어 조성되어 있다.

묘소는 머리를 북에 두고 봉분을 짓지 않는 매립형 기단을 조성한 뒤 묘비를 그 뒤쪽에 세우는 형태로 조성한다. 묘소 머리의 북향은 러시아민족의 남향, 우즈벡민족의 서남(메카)향과 비교된다. 묘비는 대부분 고인의 이름과 초상, 생몰 일자를 음각한 대리석 형태로 만든다.

묘소에 도착하면 묘소 주변 정리와 청소, 상차림, 배주, 삼배 순으로 성묘를 진행한다. 상차림은 밥과 반찬, 육류와 과일, 간식 등 평소 고인이 좋아하던 음식들을 차린다. 이에 따라 집안마다 상차림 음식이 조금씩 다를 수는 있으나 밥과 닭은 반드시 포함된다. 절은 이배반절인 우리의 배례와 조금 다르게 삼배를 한다.

이렇게 성묘 절차를 모두 마치면 대부분 집안 어른의 집에 모여 음식을 나누며 고인이 된 어른들에 대한 회고의 시간을 갖는데 장례일, 기일과 마찬가지로 술잔을 부딪치지 않는다.

정병오 우즈베스트투어 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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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즈베키스탄 고려인들의 민속문학 연구

본 연구는 소련 연방의 한 공화국이었다가 1991년 민족적 자치국가로 독립한 우즈베키스탄에 거주하는 고려인들의 민속문학에 관한 전승양상과 의미를 고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때 민속문학(특히 구비설화)을 중심으로 전승과정을 고찰하여 환경과 여건, 민족의식 …

본 연구는 소련 연방의 한 공화국이었다가 1991년 민족적 자치국가로 독립한 우즈베키스탄에 거주하는 고려인들의 민속문학에 관한 전승양상과 의미를 고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때 민속문학(특히 구비설화)을 중심으로 전승과정을 고찰하여 환경과 여건, 민족의식에 따라 변화되는 민속문학의 전승양상과 의미의 고찰을 통해 한민족의 정체성을 밝힐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우즈베키스탄으로 한정한 것은 중앙아시아의 독립국가 중에 고려인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고, 집단적 거주지역인 칼호즈가 있어 조사가 용이하고 광범위한 전승이 가능할 것이다..

중앙아시아의 고려인들은 강제 이주 이전부터 거주한 사람들도 있지만, 현재 50여만 명의 대부분이 원동에 거주하다가 1937년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한 사람들이다.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은 2008년 현재 71년이 되는데, 고유의 민족․음식 문화를 보존하고 있다는 긍정적인 측면과 민족어인 고려말이 생활현장에서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부정적인 측면이 공존하는 중에서 살아가고 있다.

사실 중앙아시아 고려인은 해외에 거주하는 네 번째 규모의 한민족 집단을 형성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민속문학 자료가 거의 없어, 이들의 활동 지역을 중심으로 현장조사와 연구가 필요하다. 즉 고려인들이 한반도에서 원동으로, 다시 중앙아시아로 이주한 역사적 배경과 강제 이주된 뒤에 어떻게 민족 문화를 보존하고 민족 정체성을 유지하였으며, 지역 사회 발전에 어떤 역할을 하였는지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본 연구는 그 자체가 독창적이며 소외된 이주민족 민속문학에 대한 검토라 하겠다. 현재 우즈베키스탄 고려인들의 민속문학의 전승양상과 의미에 대한 연구는 전혀 없다. 아마도 해외에 거주하는 동포들 사이에 전승하는 민속문학에 대한 연구는 중국 동북3성에 거주하는 조선족을 대상으로 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다고 하겠다. 오늘날 우즈베키스탄 고려인들을 대상으로 현지조사로 발굴한 자료를 통해 지역적 전승양상을 살펴보고, 이들의 의미를 통하여 고려인들의 민족적 정체성을 탐색한다는 것은 주제 자체가 독창적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오늘날 세계화 속에서 지역적 한민족 문화의 발굴과 개발은 특히 자원 부국으로 성장하는 중앙아시아 국가의 소외된 한민족 문화 발굴이란 측면에서 시대적으로 적절한 주제라 하겠다.

본 연구는 폭넓은 현지조사를 통한 우즈베키스탄 고려인의 민속문학(특히 구비설화)의 전승양상과 의미의 고찰을 통해 민족적 정체성을 찾아내는 종합적이고도* 본격적으로 시도하는 최초의 연구이다. 이 연구는 우즈베키스탄 고려인들의 민속문학의 지역적 전승양상이란 측면과 설화의 의미를 통해 70년간 한국과 왕래가 거의 단절된 고려인들의 민족적 정체성을 파악하는 측면으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현지조사에 의하여 민속문학 자료를 채록하는 방법에 의해서, 둘째는 수집된 민속문학 자료의 분석을 통하여 민족의식과 연관성을 검토하는 것이다.

[단독]떠도는 고려인 후예들 “90일마다 우즈벡 추방 슬퍼요”

“어린 딸을 데리고 90일마다 한국과 우즈베키스탄을 오가는 삶이 너무도 힘듭니다. 제발 할아버지 나라인 대한민국에서 맘 놓고 오래 살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고려인들, 체류 불안·고용 사기 피해 속출

한국에 부모 없는 4세들도 여전히 ‘떠돌이’

4000명 모여사는 ‘광주 고려인마을’ 가보니 “한국말 서툴러”…일자리·생활여건 취약

“4세들, 정부의 한시적 비자연장 미봉책”

전문가들, “특별법 통과로 권리 찾아줘야”

지난 10일 오후 광주광역시 광산구 월곡동 고려인마을에서 만난 김례나(22·여·가명)씨는 연신 눈물을 쏟아냈다. 2년 전 3살짜리 딸과 함께 한국에 들어온 후 우즈베키스탄으로 출국과 재입국을 반복하면서 겪었던 고통들이 떠올라서다.

고려인 4세인 김씨는 2015년 10월 단기방문비자(C3-8)로 입국한 후 3개월에 한 번씩 우즈베키스탄과 한국을 오가는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다. 고려인 4세의 경우 장기체류 비자를 받지 못해 만20세가 되면 90일마다 자신이 태어난 러시아나 우즈베키스탄 등으로 출국했다가 다시 입국해야 한다.

현행 ‘재외동포법’에는 고려인의 경우 3세까지는 ‘재외동포’로 인정받지만 4세부터는 ‘외국인’으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김씨는 “딸을 어린이집에 맡긴 채 닥치는 대로 일을 하는 데도 비행기 티켓을 살 돈조차 벌기가 힘들다”고 말했다.

올해로 고려인들이 러시아로 강제 이주된 지 80년이 됐지만 한국에 들어온 고려인들은 여전히 취약한 삶을 살고 있다. 문재인 정부 들어 고려인 4세에 대한 체류여건이 다소 완화됐지만 서툰 언어와 열악한 취업환경 때문에 경제적인 어려움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높다.

고려인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러시아 연해주 일대로 이주한 한인들을 말한다. 일제강점기인 1937년에는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면서 극심한 차별대우와 궁핍한 삶을 살았다.

조부나 증조부의 고향을 찾아 국내에 들어온 고려인들은 국내 도시 곳곳에서 모여 사는 경우가 많다. 낯선 한국에서 일자리를 구하거나 아이들을 교육시키기 위해서는 고려인 공동체의 지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중 광주광역시에 있는 고려인마을은 국내 대표적인 ‘고려인 커뮤니티’로 꼽힌다. 현재 한국에 있는 고려인 4만여 명 중 4000여 명이 광산구 월곡·산정·우산동 일대에 거주하고 있다. 경기도 안산(1만여 명)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고려인들이 사는 집결지다. 일자리를 찾기 위해 모여든 안산 등 수도권과는 달리 광주는 실제 거주를 위해 가족과 함께 정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고려인들이 광주에 둥지를 튼 것은 2000년대 초반부터다. 주로 도농복합 지역인 광산구 외곽의 농촌이나 인근 하남공단에서 일자리를 구하다 보니 집값이 싼 광산구 외곽지대에 모여 살게 됐다. 월곡동과 우산동 원룸촌이 ‘고려인마을’로 불리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이곳은 ‘고려인마을 종합지원센터’를 중심으로 지역아동센터와 어린이집, 청소년문화센터, 상담소, 쉼터 등이 고려인들의 한국 생활을 돕고 있다. 중앙아시아에서 태어난 뒤 중도입국한 자녀들을 위한 다문화학교인 ‘새날학교’와 자원봉사, 협동조합, 미디어센터 등도 활성화 돼 있다.

하지만 고려인들은 다양한 커뮤니티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한국생활에 대한 어려움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 고려인 4세의 경우 만20세가 되면 3개월에 한 번씩 우즈베키스탄이나 카자흐스탄 등으로 출국했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는 일을 반복한 게 대표적이다.

이에 문재인 정부는 오는 2019년 6월까지 한시적으로 고려인 4세들이 국내에 체류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올해 8월 김알렉산드라(56·여)씨의 편지를 받은 청와대 측이 4세들에게 방문동거비자(F1) 자격을 부여함으로써 부모와 헤어지는 아픔을 덜어준 것이다. 고려인 3세인 김씨는 지난 8월 ‘문재인 대통령께 드리는 호소문’을 통해 ‘2016년 한국에 들어온 후 2년이 안 되는 동안 6번이나 러시아로 출국했다 돌아온 딸의 이상한 여행을 멈춰달라’고 호소했다.

하지만 정부의 이번 조치 역시 사각지대가 많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법무부의 시행령에는 ‘부모가 한국에 거주 중인 고려인 4세대’로 규정되면서 부모가 한국에 없는 고려인들은 여전히 법적인 보호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딸과 함께 한국으로 들어온 고려인 4세 김례나씨 역시 기존처럼 출국과 입국을 반복해야 하는 처지다.

고려인들이 한국말에 서툰 것도 한국생활에서 겪는 가장 큰 애로점 중 하나다. 대부분의 고려인이 의사소통을 제대로 못 해 근무여건이 열악한 공장이나 농촌 지역에서 시간제 근로 형식으로 일하고 있다. 광주 고려인마을의 경우 성인 3500여 명 가운데 51%(1780여 명)가 제조업체에서 일하며, 45%(1600여 명)가 일용직이다.

다문화학교인 광주 새날학교 이천영(57) 교장은 “독립운동가 후손들인 고려인들이 떳떳하게 한국에 정착할 수 있도록 언어·문화 교육에 힘을 쏟고 있다”며 “국회에 계류 중인 ‘고려인동포 합법적 체류자격 취득 및 정착 지원을 위한 특별법 개정안’이 반드시 통과돼 그들이 잃어버린 권리를 찾아줘야 한다”고 말했다.

고려인 4세대들을 겨냥한 비자 연장이나 취업알선을 미끼로 한 각종 사기와 임금 체불사건도 속출하고 있다.

지난 8월에는 “자녀들의 영주권을 취득해주겠다”고 속여 리모(44·여)씨 등 고려인 3명에게 1430만원을 가로챈 혐의(사기)로 김모(44)씨가 구속되기도 했다. 신조야(62·여) 광주 고려인마을 대표는 “광주에서 함께 모여 살기를 희망하는 고려인이 꾸준히 늘어나고 있는데도 여전히 비자나 일자리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힘든 생활을 하는 동포들이 많다”고 말했다.

고려인들에 대한 의료 지원을 강화해달라는 목소리도 높다. 고려인들의 경우 국내 체류기간이 90일이 넘어야만 건강보험 가입 자격이 주어지기 때문에 입국 후 3개월 내에 병이 날 경우 병원비를 낼 엄두를 내지 못한다.

지난 9월에는 광주에서 일하던 고려인 동포 3세 손에브게니(36)씨가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귀국길에 올랐다가 버스 안에서 숨지기도 했다. 손씨는 지난 8월에 입국해 냉장고 조립업체에서 일하던 중 다리가 심하게 붓는 증세에 겪었지만 국내에 들어온지 40일밖에 되지 않아 의료보험 혜택을 받지 못했다. 결국 통증을 견디지 못한 손씨는 우즈베키스탄에서 치료를 받기 위해 귀국길에 올랐다가 변을 당했다.

재외동포연구원 원장인 임채완(66) 전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재외동포법상 고려인 4~5세대들은 같은 동포인데도 ‘외국인’ 취급을 받고 있다”며 “다양한 언어 교육을 통해 고려인들에게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하고 장기체류가 가능한 재외동포비자(F4)나 영주권을 주는 방법도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광주 고려인마을은 광주 지역의 고려인 중 80%(3200여 명)가 우즈베키스탄 출신이어서 양국 정부의 관심이 높은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는 지난 7일 우즈베키스탄의 아크타무 카이토프 고용노동부장관이 방문한 데 이어 오는 21일에는 샤프카트 미르지요예프 우즈베키스탄 대통령의 방문이 예정돼 있다.

박용수(60) 고려인 강제 이주 8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장은 “우즈베키스탄 정부가 조만간 광주 지역에 영사관을 설치할 예정”이라며 “한국에서 어렵게 생활하는 고려인들을 돕기 위해서라도 비자 문제나 한국어 교육 사업에 우리 정부와 각 지자체도 적극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광주광역시=최경호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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