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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경동 목사의 기초신앙읽기 9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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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

[눅 9: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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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6/2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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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다 (누가복음 9:62) – SELB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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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4/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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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년]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면 (눅 9:57~62) – 기멀전

손에 쟁기를 잡았다는 말은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맡았다는 뜻이고, 뒤를 돌아다보는 것은 세상 일을 걱정하고 염려한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손에 쟁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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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1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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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4/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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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터교회 – 2022. 7. 24 주일설교 손에 쟁기를 잡고, 누가복음 9 …

2022. 7. 24 주일설교 손에 쟁기를 잡고, 누가복음 9:57~62 57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58 예수께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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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2/2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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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9:62 KRV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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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7/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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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손에 쟁기를 잡고

  • Author: 부흥TV 장경동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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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8. 31.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UDKRxc0Q2jA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제자도에 대한 교훈

성 경: [눅 9:57-62]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59)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60)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61)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눅 9:57]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 여기서 ‘어떤 사람이’는 불특정 인물을 지칭하는 헬라어 부정 대명사 ‘티스’의 번역이다.

누가는 이렇게 불특정 인물로 묘사하고 있으나

마태복음의 평행본문에서 이 사람은 서기관이었다.

(마 8:19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아뢰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학식, 재력, 권력에 있어서 유대사회의 최고 상위계층에 있는 서기관이 예수를 따르겠다고 나선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또한 ‘어디로 가시든지’라는 말은 그가 단지 예수께 대한 신앙을 갖겠다는 뜻이 아니라 열 두 제자들처럼 예수를 수행하며 섬기는 제자가 되겠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 사람이 예수의 어떤 점을 보고 그를 따르려 하는지,

그리고 어떤 모습의 제자상을 가지고 그의 제자가 되려고 지원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계속 이어지는 예수의 답변으로 볼 때

(58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아마 이 지원자는 예수님의 권능에 매력을 느꼈을 것이고

(마 8:16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그렇게 능력 많으신 분을 수행하는 제자들의 자랑스러워 하는 모습에 부러움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영광에 동반되는 아픔,

능력 이전에 가난함의 의미를 알고 지원했어야 했고

무엇보다 예수의 제자가 되려는 결심은 자기 부인(自己否認)의 의미를

알고 난 후에 했어야 했다.

[눅 9: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 암시성이 깊은 예수님의 대답은 이 지원자의 의도를 예리하게 간파하고 있으며

그런 생각으로 제자가 되려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는 사실을 뜻한다.

예수를 따르는 것은 권력이나 부, 명예 따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도리어 여우나 새와 같은 짐승들에게도 허락된

최소한의 삶의 터전조차 보장받지 못한다.

예수를 따르는 일은

의. 식. 주 문제가 안정적으로 확보되고 거기에 덧붙여

입신양명(立身揚名)을 지향하는 출세주의가 아니라

때로는 사람들에게 배척을 당하며

안정된 삶의 거처도 없이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며

자기를 희생시켜 다른 사람을 살리는 일이다.

(23절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허영심에 사로잡혀 예수의 제자가 되려했던 이 서기관은 아마도 예수의 말씀을 듣고 그의 제자가 되기를 포기했을 것이다.

[눅 9:59]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죽은 이에 대한 예우를 갖춘 장례식은 가정적, 종교적, 사회적 영역에서 매우 중요한 의무 가운데 하나였다.

장례의 의무는 율법을 공부하는 일,

성전 예배, 유월절 제사, 할례 시행 등 보다도 우선권을 가졌으며,

보통 죽은 시체를 만지지 말아야 하는 사제들도

그들의 친척이 죽은 경우에는 시체를 만질 수 있었다.

(레 21:1-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 말하여 이르라 그의 백성 중에서 죽은 자를 만짐으로 말미암아 스스로를 더럽히지 말려니와

2) 그의 살붙이인 그의 어머니나 그의 아버지나 그의 아들이나 그의 딸이나 그의 형제나

3) 출가하지 아니한 처녀인 그의 자매로 말미암아서는 몸을 더럽힐 수 있느니라).

그 만큼 장례를 치루는 일은 중요한 일이었다.

그밖에 연고자(緣故者) 없이 죽은 사람을 묻어주는 일은

이생과 내생에 하나님의 보상이 약속된 사랑의 행위로 여겨졌다.

유대사회의 장례 풍토가 이런 만큼

아버지의 장례를 치루는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따라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룬 후 따르겠다는 이 사람의 명분은

누구도 반대할 수 없는 적절한 것이었다.

[눅 9:60]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 이말은 그 내용의 급진성 때문에 해석하여 적용하기가 매우 난해하여 여러가지의 견해가 제기되었던 본문이다.

(1)아람어를 잘못 번역한 것이다(Black).

(2)본문의 표현은 역설적인 것으로 장례지내는 일은 반드시 치러지고야 말리라는 의미이다(Manson, Sayings of Jesus, p.73).

(3)이 표현은 비유대인 계열에서 나온 말이다.

이러한 해석들은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힘들다.

그렇다고 하여 이 말을 보편적인 행위 규범으로 해석하여 주의 일을 위하여

가정에 대한 의무를 저버려도 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서도 안 될 것이다.

본문의 의미는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로 하여금 육체적으로 죽은 사람들을 장사지내게 하라”는

뜻으로 세상 일은 세상 사람들에게 맡기고

오직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의 일에 전심전력하라는 의미로 받아 들여야 한다.

즉 성도들이 예수를 좇음에 있어서 결정적인 우선순위를

세상 일과 하나님의 일 중 어디에 둘 것인가에 대한 자세의 문제로서

그것은 뼈를 깎는 아픔을 동반하는 결단을 요청한다는 것이다.

▶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 이 문구는 누가만의 것으로 콘첼만(Conzelmann) 같은 학자는 본문에서 회개의 긴박성으로부터 전도의 긴박성으로의 전이를 보기도 한다.

아무튼 이 말씀은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의무는 예수를 따르는 일이요,

그러한 예수 제자의 길의 핵심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데 있음을 말해준다.

[눅 9:61]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 이 장면은 엘리사가 엘리야를 좇기 전에 가족과 마지막 입맞춤을 하게 해달라고 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왕상 19:20 그가 소를 버리고 엘리야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청하건대 나를 내 부모와 입맞추게 하소서 그리한 후에 내가 당신을 따르리이다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돌아가라 내가 네게 어떻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그러나 뒤이은 예수님의 대답을 통해 유추하건대,

(62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이 사람의 마음은 가족에 대한 염려로 가득차 있었으며

작별 인사 중 가족의 만류가 간절해질 경우에는

가정에 발목이 묶일 가능성이 많았을 것이다.

[눅 9: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 – 농경문화의 산물인 이 격언적 표현은 B.C. 80년의 헤시오드(Hesiod; 그리스의 교훈시인)에 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전통적으로 전해 내려오는 격언적 문구를

적절하게 사용하여 자신이 가르치고자 하는 교훈의 소재로 삼으시는

탁월한 능력을 지녔던 것이다.

손에 쟁기를 들고 밭을 가는 자의 유일한 목적은 곧은 고랑을 내는 일이며,

그 사람이 자기가 하는 일 외에 다른 일에 신경을 써서 뒤를 돌아본다면

고랑은 곧게 될 수가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를 좇는 자의 유일하고도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일이다.

‘따르는 자’는 이 목적의식을 잠시도 망각해서는 안된다.

여기서 ‘합당치’에 해당하는 헬라어’유데토스’는

‘잘 놓여 있는’, ‘적합한’, ‘순응하는’의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를 전파함에 있어서 우선 순위에 대한

철저한 의식을 가지고 궁극적인 목적에 모든 관심을 집중시키는 사람이

‘적합한’자라는 사실을 가리킨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다 (누가복음 9:62)

It’s not that it’s impossible to read some writers without a Biblical background, but that you would miss a whole dimension to their work.

Prof. Steven Goldsmith, University of California at Berkeley

from 2006 Bible Literary Project

[송년]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면 (눅 9:57~62)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면 (눅 9:57~62)

2009년을 마무리하는 52번째 주일입니다. 연말이 되면 사회 각 분야에서 지난 1년간 일어난 가장 좋은 일, 가장 나쁜 일 10가지를 선정하며 지나 온 날들을 회고합니다. 2009년의 마지막 주간은 21세기를 여는 첫 10년을 마감하는 기간이기도 합니다.

21세기의 첫 해 2001년 9월11일, 미국 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에 대한 테러 사건을 시작으로 지난 10년은 테러와 테러에 대응하는 양 세력 간의 힘겨루기로 전 세계가 몸살을 앓았던 우울한 날들이었습니다. 더 정확한 사실이 밝혀지면 알겠지만 영국 UCL에서 공부했다고 하는 나이지리아 출신 청년이 성탄절날 암스텔담에서 미국 디트로이트 공항으로 향하던 여객기를 폭파시키려다 실패한 사건이 발생하여 2000년대 첫 10년의 마지막을 끔찍한 테러 소식으로 마무리할 뻔 하였습니다.

서남아시아에 발생한 거대한 쓰나미와 중국의 대지진, 미국의 허리케인 등 정신없이 몰아친 자연재해는 현대 문명세계의 자존심을 여지 없이 짓밟아버렸습니다. 전세계를 강타한 경제 불황은 물질 풍요를 누리며 잘 나가던 선진 서방 나라들조차 고개를 떨구고 깊은 한숨을 쉬게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정치, 경제, 국제관계와 자연 환경에 이르기까지 어느 한 곳 편안한 분야가 없고 어느 하루 조용한 날 없이 참으로 숨가쁘게 달려온 지난 10년 세월입니다.

우리나라 기독교계에서도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사건을 꼽는다면 아프칸에 피랍되었던 자원봉사단 사건입니다.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 100주년이 되는 2007년을 앞두고 많은 교회와 단체들이 ‘부흥 2007년’ 을 외치며 100년 전 평양에서 일어난 신앙대부흥을 재연하려고 대규모 집회들을 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해 여름에 아프칸에 피랍된 자원봉사팀 일로 전 세계의 관심이 쏠렸고 공격적 선교정책을 펼치는 한국기독교를 향한 비판으로 개신교에 대한 반감이 팽배했던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진정한 신앙부흥은 사람들을 많이 동원하여 체육관이나 광장에서 모이는 인위적인 대형집회와 행사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겸비한 각 개인의 심령들을 통해 시작되며 하나님이 움직이셔야 된다는 값진 교훈을 얻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1년 혹은 10년 세월을 하나로 묶어 매듭을 짓고 또 새로운 1년과 10년을 향해 조심스럽게 출발하려고 합니다. 생각할 줄 아는 능력을 가진 인류만이 과거를 되돌아보며 반성하고 뉘우치며 더 나은 삶을 위해 다짐하고 다시 일어서는 특권을 부여받았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즈음에 우리가 걸어온 지난 날을 되돌아보며 잘못된 것은 다시 반복하지 않도록 고쳐나가고 좋은 점은 서로 격려하여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하는 기회를 가져야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걸어온 발자취를 되돌아 보는 일은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한 긍정적인 자세입니다.

오늘 아침에 읽은 성경말씀에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 하였습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밭을 가는 농부가 뒤를 돌아 보면 제대로 밭을 갈아엎을 수 없습니다. 이때 뒤를 돌아본다는 말은 한눈을 판다는 말로 바꿀 수 있습니다. 혹은 과거에 미련을 두고 현재에 불성실하여 내일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예수께서 비유로 하신 이 말씀은 뒤돌아보는 일에 대하여 또 다른 관점에서 주시는 교훈입니다.

예수님이 열 두 제자를 선택하여 곁에 두고 일하셨는데 열 두 제자 외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따르겠다고 나섰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을 보면

첫째는, 스스로 따라 나서는 사람입니다(57절).

둘째는, 예수께서 ‘나를 좇으라’ 하고 부른 사람입니다(59절).

셋째도 예수께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61절).

그런데 세 종류의 사람 모두 예수님의 제자로 쓰임 받기에 적합한 사람들이 아닌 듯 합니다.

첫번째 사람이 ‘주께서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라가겠습니다’ 했지만 예수께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는데 나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십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그 사람으로부터 좋다 나쁘다 아무런 대꾸가 없이 생략되었습니다. 묵묵부답으로 슬그머니 떨어져 나가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닙니다. 이 사람은 예수께서 부르신 것도 아닌데 자청하여 선생님의 뒤를 따르겠다고 나섰습니다. 예수께서 하시는 일과 겉으로 보이는 영광스런 모습만 보고 그 길을 따르려 하는 사람에게 주님은 네가 따르겠다고 하는 나의 길은 그렇게 쉽고 편하지 않다. 편히 쉴 곳도 없는 거칠고 험한 길이라고 말씀하시자 그만 아무런 말 없이 슬그머니 뒤로 빠지는 사람입니다.

예수의 제자가 되면 좋은 집이 생기고 편안한 삶이 보장될 것이라 기대하여 따른다면 처음부터 잘 못 생각한 것임을 보여주십니다. 일시적으로 감동을 받고 즉흥적으로 헌신을 각오하였지만 ‘내가 받는 고난과 죽음도 함께 받을 수 있겠느냐’는 물음에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는 즉흥적 신앙인의 모습을 이 사람으로부터 찾아보게 됩니다.

두번 째 사람은 제자의 길을 자원한 첫째 사람과는 달리 예수께서 나를 따르라고 불러내신 사람입니다. 이 사람 정도면 할 수 있겠다 여겨 부르셨는데 ‘먼저 아버지 장사지내고 돌아와 따르겠다’고 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죽은 자는 죽은 자들로 장사하게 두고 너는 가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십니다. 그런가 하면 세번째 사람은 가족들에게 먼저 작별 인사를 하고 와서 따르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주님은 이 사람에게 ‘손에 쟁기를 잡은 자가 뒤돌아보면 하나님 나라에 적합한 사람 아니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의 중심이 되는 구절입니다.

‘먼저 가서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해주십시오’ 말한 이 사람의 말에 무슨 잘못됨이 있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죽은 사람들이 죽은 사람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라’는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죽은 사람들이 죽은 사람을 장사하라니요? 이때 죽은 사람이란 육신의 죽음이 아니라 영혼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살았으나 죽은 자들 곧 예수의 생명이 없는 죽은 자들이 자기 죽은 자들을 장사지내도록 하고 너는 지금부터 내가 너에게 주는 하나님 나라의 생명을 전파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사람의 부친이 그날 돌아가신 것도 아닙니다. 연세 많으신 부친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곁에 모시다가 돌아가시면 그때 따르겠다는 말로 이해합니다. 주님은 지금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네가 필요하다고 하시는데 이 사람은 먼저 세상의 일부터 해결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 나라에 헌신하겠다는 대답입니다.

또 다른 면에서 해석하면, 예수님 시대 이스라엘의 장례 풍습은 시신을 굴무덤에 안장하는 몇일간의 장례식으로 끝이 아니라 장례식을 치른 후 1년이 지나 유골을 거두어 유골함으로 옮기는 기간 전체를 장례기간으로 삼는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 사람이 먼저 부친을 장사지내고 오게 허락해 달라는 말은 지금 즉시 따르라는 주님의 부르심에 1년이라는 기간을 두고 정중히 거절하는 핑계에 불과하였습니다. 결국 이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처음부터 제자의 길을 따를 마음 준비가 안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세번째 사람은 주님을 따를 마음이 있는 듯 보입니다. 이 사람 말이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과 작별하도록 허락해주세요’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사람에게마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적합하지 않다’ 하고 냉정하게 대답하십니다. 최소한 가족들과 작별인사는 하고 와야 하지 않을까요? 기본적인 인간의 정마저 매몰차게 끊고 따라야 제자다운 것이라는 말일까요? 도대체 예수님은 부모자식과 가족간의 기본적인 도리마저 무시하고 집을 나와 예수를 따라야만 한다고 하시는 것일까요? 혹시 여러분 마음에 그러니까 기독교가 개독교라는 비판을 듣는거라는 공감이 막 생기려고 합니까? 예수께서 어찌 그런 당연한 인간의 도리를 무시하고 사람들을 광적인 추종자들로 만드시려는가 의혹이 생깁니까? 이건 요즘 한국 사회를 어지럽히는 신천지집단이 하는 짓과 비슷해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런 가르침은 제자도의 우선순위가 무엇임을 분명히 알게 하시려는 강조법입니다.

세번째 사람은 내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말하지만 이 사람 역시 가족을 핑계삼아 지금은 헌신할 수 없다는 의도에서 나온 대답이었습니다. 집에 돌아가 가족들에게 제자의 길을 가겠노라 작별인사를 하고 오겠다는 마음에는 누군가 자기를 강력하게 붙잡고 가지말라고 설득하면 주저앉을 수도 있다는 계산이 깔려있습니다. 손에 쟁기를 잡았다는 말은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맡았다는 뜻이고, 뒤를 돌아다보는 것은 세상 일을 걱정하고 염려한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손에 쟁기를 쥐어주고 지금부터 밭을 갈라고 하시는데 이 사람은 가족을 구실삼아 뒤를 돌아보고 있으니 ‘쟁기를 손에 잡고 뒤돌아보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다음에 내가 하고 싶을 그때에 헌신하겠다는 대답은 지금 부르시는 주님의 부르심에 적당한 응답이 아닙니다.

한 손에 쟁기를 쥐고 또 한 손에는 막대를 들고 소를 몰며 밭을 가는 농부는 오직 앞에 있는 목표물을 보고 전진해야 밭이랑을 똑바로 일구게 됩니다. 얼마나 많이 일했는가 확인하고 싶어 뒤를 돌아다 보는 순간 쟁기가 돌뿌리에 걸려 부러질 수도 있습니다. 주인이 뒤를 돌아보는 순간 밭가는 소는 엉뚱한 방향으로 가 밭이랑이 비뚤어집니다. 노련한 농부, 전문가 농부는 그런 일을 하지 않습니다. 쟁기를 손에 잡고 뒤를 돌아다 보는 농부는 진정한 농부의 정신이 없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 시민이 되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한 번 목표로 정한 그 길을 갈 때 뒤돌아보거나 한 눈을 팔지 않습니다.

쟁기를 손에 잡고 뒤를 돌아보면 안된다는 말씀은 한 해를 마무리하는 즈음에 더 나은 내일을 위해 과거를 회고하고 정리하는 의미에서 뒤를 돌아보는 것을 금하는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겠다는 사람이 세상 재미와 옛 것에 마음을 빼앗기는 일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미련과 아쉬움에 발목을 붙잡혀 세상과 하나님 나라 사이에 두 발을 담그고 어정쩡한 태도로 신앙생활하는 것은 제자로서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제자는 몇 주 혹은 몇 달간 제자훈련반에 등록하여 제자훈련 코스를 수료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구절 많이 암송하고 교회 안 빠지고 잘 나오며 봉사생활 앞장서 잘 하면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훈련 프로그램 수료증을 받았어도 전과 다름 없이 가정에서 불성실하고 직장과 학교에서 이중인격자로 낙인 찍히고 이웃과의 관계에서 제 잘난 맛에 사는 고집불통 예수쟁이라는 소리를 듣고 산다면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닙니다. 자칭 제자일 뿐입니다. 제자는 그리스도를 따라 그분의 삶을 나의 삶으로 받아 불편하고 힘들고 손해가 될지라도 일평생 끝까지 따라가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영광스런 자격입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돌아보면 안된다는 말씀은 어쩌면 세속 직업을 포기하고 신학교에 들어가 목회자로 훈련받고 목사가 될 사람들이나 선교사들에게 주시는 비유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일차적으로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무리는 아닙니다. 그러나 꼭 목회자와 선교사들에게만 해당하는 말씀일까요? 누구든지 예수를 구주로 믿고 그리스도인으로 따르기로 결심한 사람은 삶의 우선순위를 바르게 정하라고 하시는 말씀으로 이해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됨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됨과 그 의미가 다르지 않습니다. 전에는 세상의 즐거움과 재미가 우선이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를 본 받는 삶을 우선순위로 두게 되었습니다.

지금 각자의 손에 쟁기가 들려있습니다. 하나님 나라 밭에서 일하는 농부로서 내가 할 일은 맡겨진 사명을 완수하기까지 오직 앞을 바라보며 거칠고 험한 밭을 부드럽게 일구어 그 밭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일입니다. ‘내가 주를 따르기는 하겠지만 그러나 먼저’ 하며 다른 일에 마음을 빼앗기는 농부는 되지 말기 바랍니다. 한 손에 전에 즐기던 세상의 일도 꼭 붙잡고 다른 손에 하나님 나라의 영광도 함께 얻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주의 부르심을 최선으로 두지 않고 세상과 하나님 나라 사이에 두 발 담그고 머뭇거리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세 부류의 사람에 속합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이 하늘로부터 내린 유황불에 불타 무너질 때 롯과 아내와 두 딸들은 천사의 손에 이끌려 황급히 성을 빠져나왔습니다. 그 성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불타 죽게된 그들을 불쌍히 여겨 건져주신 하나님은 목숨을 건짐 받은 그들에게 한 가지 중요한 조건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앞만 보고 달리며 절대로 뒤를 돌아다 보거나 들에 머물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목숨을 보존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아무 것도 챙기지 못하고 맨몸으로 도망쳐나오게 된 롯의 아내는 성읍에 두고 온 모든 것들이 생각나 그만 뒤를 돌아다보고 말았습니다. 절대로 뒤돌아보면 안된다는 말씀이 있었지만 두고 온 집과 재물과 피땀 흘려 모아놓은 삶의 터전이 아깝고 아쉬워 잠간 뒤를 돌아보는 순간 소금기둥으로 변하였습니다. 결국 롯의 아내는 과거의 것은 물론 목숨까지 모든 것을 영원히 잃고 만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세상 마지막 날이 롯의 때와 같으리라 하셨습니다. 롯의 때에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집을 짓다가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멸망한 것처럼 세상 마지막 날이 갑자기 임하리니 세상 사는 재미에 흠뻑 빠져 그 날이 옴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가 허둥대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지붕에 있는 자는 세간살이 가지러 집으로 내려가지 말고 밭에 있는 사람도 이와 같이 뒤로 돌아오지 말라, 롯의 처를 생각하라’(눅17:32) 하셨습니다.

롯의 처는 목숨이 달린 긴박한 순간에 세상 것들에 마음을 빼앗겨 영원을 잃어버린 불명예스런 사람의 모델입니다. 주님은 롯의 처를 예로 들어 영원한 생명을 그 무엇으로 바꿀 수 있을건가 생각해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조건은 세상의 재물이나 업적이나 나의 이익을 위한 인간관계 같은 것이 우선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생명을 소유함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가 되는 조건은 부르심에 즉각 응답하고 따르는 순종의 삶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라 불편함과 고난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결단이고 그리스도를 가장 우선으로 둘 수 있는 각오입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적합하다는 역설입니다. 부담스러우십니까?

지난 해를 돌이켜 생각해봅시다. 나는 앞을 향해 목표를 바라보고 달려왔는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오직 목표를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로 정하고 힘껏 달려왔는가? 갈팡질팡 우왕좌왕 뒤를 돌아보고 한참 되돌아갔다가 우여곡절 끝에 다시 방향을 잡고 있는 중인가? 아니 처음 결심을 포기하고 들판에 머물렀거나 뒤를 돌아보며 두고 온 세상 것들이 아쉽고 아까워 눈물 흘리고 있는가? 어떻게 해서든 낡은 세계의 한 부분을 움켜쥐고 있으려 하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이루어주시려는 더 영광스런 새로운 것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금년 한 해 동안 나는 어떤 사람으로 살아왔는가? 제자인가? 지나가는 예수님을 멀리서 바라만 보는 행인인가? 눅9:51에 예수께서는 이 땅에서의 사명을 마치고 아버지께로 가실 때가 가까워졌음을 아시고 최후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 땅에 오신 사명을 이루셨습니다.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그 길을 머뭇거리거나 지연시키고 한 눈을 팔지 않으시며 앞을 향해 나아가는 굳은 각오가 엿보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바로 그런 자세로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을 이루어 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는 주님의 부르심에 즉각 순종하여 주께서 앞서가신 길을 따릅니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 먼저 앞서 계신 주님을 바라보고 따르면 됩니다. 2009년의 남은 시간은 물론 새해에도 주님께 부름받은 영광스런 제자의 삶을 힘쓰시기 바랍니다.

Top 11 손에 쟁기를 잡고 The 150 Correct Answer

장경동 목사의 부흥특강 –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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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제자도에 대한 교훈 성 경: [눅 9:57-62]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59)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60)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61)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눅 9:57]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 여기서 ‘어떤 사람이’는 불특정 인물을 지칭하는 헬라어 부정 대명사 ‘티스’의 번역이다. 누가는 이렇게 불특정 인물로 묘사하고 있으나 마태복음의 평행본문에서 이 사람은 서기관이었다. (마 8:19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아뢰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학식, 재력, 권력에 있어서 유대사회의 최고 상위계층에 있는 서기관이 예수를 따르겠다고 나선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또한 ‘어디로 가시든지’라는 말은 그가 단지 예수께 대한 신앙을 갖겠다는 뜻이 아니라 열 두 제자들처럼 예수를 수행하며 섬기는 제자가 되겠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 사람이 예수의 어떤 점을 보고 그를 따르려 하는지, 그리고 어떤 모습의 제자상을 가지고 그의 제자가 되려고 지원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계속 이어지는 예수의 답변으로 볼 때 (58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아마 이 지원자는 예수님의 권능에 매력을 느꼈을 것이고 (마 8:16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그렇게 능력 많으신 분을 수행하는 제자들의 자랑스러워 하는 모습에 부러움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영광에 동반되는 아픔, 능력 이전에 가난함의 의미를 알고 지원했어야 했고 무엇보다 예수의 제자가 되려는 결심은 자기 부인(自己否認)의 의미를 알고 난 후에 했어야 했다. [눅 9: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 암시성이 깊은 예수님의 대답은 이 지원자의 의도를 예리하게 간파하고 있으며 그런 생각으로 제자가 되려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는 사실을 뜻한다. 예수를 따르는 것은 권력이나 부, 명예 따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도리어 여우나 새와 같은 짐승들에게도 허락된 최소한의 삶의 터전조차 보장받지 못한다. 예수를 따르는 일은 의. 식. 주 문제가 안정적으로 확보되고 거기에 덧붙여 입신양명(立身揚名)을 지향하는 출세주의가 아니라 때로는 사람들에게 배척을 당하며 안정된 삶의 거처도 없이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며 자기를 희생시켜 다른 사람을 살리는 일이다. (23절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허영심에 사로잡혀 예수의 제자가 되려했던 이 서기관은 아마도 예수의 말씀을 듣고 그의 제자가 되기를 포기했을 것이다. [눅 9:59]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죽은 이에 대한 예우를 갖춘 장례식은 가정적, 종교적, 사회적 영역에서 매우 중요한 의무 가운데 하나였다. 장례의 의무는 율법을 공부하는 일, 성전 예배, 유월절 제사, 할례 시행 등 보다도 우선권을 가졌으며, 보통 죽은 시체를 만지지 말아야 하는 사제들도 그들의 친척이 죽은 경우에는 시체를 만질 수 있었다. (레 21:1-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 말하여 이르라 그의 백성 중에서 죽은 자를 만짐으로 말미암아 스스로를 더럽히지 말려니와 2) 그의 살붙이인 그의 어머니나 그의 아버지나 그의 아들이나 그의 딸이나 그의 형제나 3) 출가하지 아니한 처녀인 그의 자매로 말미암아서는 몸을 더럽힐 수 있느니라). 그 만큼 장례를 치루는 일은 중요한 일이었다. 그밖에 연고자(緣故者) 없이 죽은 사람을 묻어주는 일은 이생과 내생에 하나님의 보상이 약속된 사랑의 행위로 여겨졌다. 유대사회의 장례 풍토가 이런 만큼 아버지의 장례를 치루는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따라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룬 후 따르겠다는 이 사람의 명분은 누구도 반대할 수 없는 적절한 것이었다. [눅 9:60]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 이말은 그 내용의 급진성 때문에 해석하여 적용하기가 매우 난해하여 여러가지의 견해가 제기되었던 본문이다. (1)아람어를 잘못 번역한 것이다(Black). (2)본문의 표현은 역설적인 것으로 장례지내는 일은 반드시 치러지고야 말리라는 의미이다(Manson, Sayings of Jesus, p.73). (3)이 표현은 비유대인 계열에서 나온 말이다. 이러한 해석들은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힘들다. 그렇다고 하여 이 말을 보편적인 행위 규범으로 해석하여 주의 일을 위하여 가정에 대한 의무를 저버려도 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서도 안 될 것이다. 본문의 의미는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로 하여금 육체적으로 죽은 사람들을 장사지내게 하라”는 뜻으로 세상 일은 세상 사람들에게 맡기고 오직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의 일에 전심전력하라는 의미로 받아 들여야 한다. 즉 성도들이 예수를 좇음에 있어서 결정적인 우선순위를 세상 일과 하나님의 일 중 어디에 둘 것인가에 대한 자세의 문제로서 그것은 뼈를 깎는 아픔을 동반하는 결단을 요청한다는 것이다. ▶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 이 문구는 누가만의 것으로 콘첼만(Conzelmann) 같은 학자는 본문에서 회개의 긴박성으로부터 전도의 긴박성으로의 전이를 보기도 한다. 아무튼 이 말씀은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의무는 예수를 따르는 일이요, 그러한 예수 제자의 길의 핵심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데 있음을 말해준다. [눅 9:61]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 이 장면은 엘리사가 엘리야를 좇기 전에 가족과 마지막 입맞춤을 하게 해달라고 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왕상 19:20 그가 소를 버리고 엘리야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청하건대 나를 내 부모와 입맞추게 하소서 그리한 후에 내가 당신을 따르리이다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돌아가라 내가 네게 어떻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그러나 뒤이은 예수님의 대답을 통해 유추하건대, (62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이 사람의 마음은 가족에 대한 염려로 가득차 있었으며 작별 인사 중 가족의 만류가 간절해질 경우에는 가정에 발목이 묶일 가능성이 많았을 것이다. [눅 9: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 – 농경문화의 산물인 이 격언적 표현은 B.C. 80년의 헤시오드(Hesiod; 그리스의 교훈시인)에 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전통적으로 전해 내려오는 격언적 문구를 적절하게 사용하여 자신이 가르치고자 하는 교훈의 소재로 삼으시는 탁월한 능력을 지녔던 것이다. 손에 쟁기를 들고 밭을 가는 자의 유일한 목적은 곧은 고랑을 내는 일이며, 그 사람이 자기가 하는 일 외에 다른 일에 신경을 써서 뒤를 돌아본다면 고랑은 곧게 될 수가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를 좇는 자의 유일하고도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일이다. ‘따르는 자’는 이 목적의식을 잠시도 망각해서는 안된다. 여기서 ‘합당치’에 해당하는 헬라어’유데토스’는 ‘잘 놓여 있는’, ‘적합한’, ‘순응하는’의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를 전파함에 있어서 우선 순위에 대한 철저한 의식을 가지고 궁극적인 목적에 모든 관심을 집중시키는 사람이 ‘적합한’자라는 사실을 가리킨다.

[송년]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면 (눅 9:57~62)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면 (눅 9:57~62) 2009년을 마무리하는 52번째 주일입니다. 연말이 되면 사회 각 분야에서 지난 1년간 일어난 가장 좋은 일, 가장 나쁜 일 10가지를 선정하며 지나 온 날들을 회고합니다. 2009년의 마지막 주간은 21세기를 여는 첫 10년을 마감하는 기간이기도 합니다. 21세기의 첫 해 2001년 9월11일, 미국 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에 대한 테러 사건을 시작으로 지난 10년은 테러와 테러에 대응하는 양 세력 간의 힘겨루기로 전 세계가 몸살을 앓았던 우울한 날들이었습니다. 더 정확한 사실이 밝혀지면 알겠지만 영국 UCL에서 공부했다고 하는 나이지리아 출신 청년이 성탄절날 암스텔담에서 미국 디트로이트 공항으로 향하던 여객기를 폭파시키려다 실패한 사건이 발생하여 2000년대 첫 10년의 마지막을 끔찍한 테러 소식으로 마무리할 뻔 하였습니다. 서남아시아에 발생한 거대한 쓰나미와 중국의 대지진, 미국의 허리케인 등 정신없이 몰아친 자연재해는 현대 문명세계의 자존심을 여지 없이 짓밟아버렸습니다. 전세계를 강타한 경제 불황은 물질 풍요를 누리며 잘 나가던 선진 서방 나라들조차 고개를 떨구고 깊은 한숨을 쉬게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정치, 경제, 국제관계와 자연 환경에 이르기까지 어느 한 곳 편안한 분야가 없고 어느 하루 조용한 날 없이 참으로 숨가쁘게 달려온 지난 10년 세월입니다. 우리나라 기독교계에서도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사건을 꼽는다면 아프칸에 피랍되었던 자원봉사단 사건입니다.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 100주년이 되는 2007년을 앞두고 많은 교회와 단체들이 ‘부흥 2007년’ 을 외치며 100년 전 평양에서 일어난 신앙대부흥을 재연하려고 대규모 집회들을 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해 여름에 아프칸에 피랍된 자원봉사팀 일로 전 세계의 관심이 쏠렸고 공격적 선교정책을 펼치는 한국기독교를 향한 비판으로 개신교에 대한 반감이 팽배했던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진정한 신앙부흥은 사람들을 많이 동원하여 체육관이나 광장에서 모이는 인위적인 대형집회와 행사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겸비한 각 개인의 심령들을 통해 시작되며 하나님이 움직이셔야 된다는 값진 교훈을 얻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1년 혹은 10년 세월을 하나로 묶어 매듭을 짓고 또 새로운 1년과 10년을 향해 조심스럽게 출발하려고 합니다. 생각할 줄 아는 능력을 가진 인류만이 과거를 되돌아보며 반성하고 뉘우치며 더 나은 삶을 위해 다짐하고 다시 일어서는 특권을 부여받았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즈음에 우리가 걸어온 지난 날을 되돌아보며 잘못된 것은 다시 반복하지 않도록 고쳐나가고 좋은 점은 서로 격려하여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하는 기회를 가져야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걸어온 발자취를 되돌아 보는 일은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한 긍정적인 자세입니다. 오늘 아침에 읽은 성경말씀에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 하였습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밭을 가는 농부가 뒤를 돌아 보면 제대로 밭을 갈아엎을 수 없습니다. 이때 뒤를 돌아본다는 말은 한눈을 판다는 말로 바꿀 수 있습니다. 혹은 과거에 미련을 두고 현재에 불성실하여 내일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예수께서 비유로 하신 이 말씀은 뒤돌아보는 일에 대하여 또 다른 관점에서 주시는 교훈입니다. 예수님이 열 두 제자를 선택하여 곁에 두고 일하셨는데 열 두 제자 외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따르겠다고 나섰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을 보면 첫째는, 스스로 따라 나서는 사람입니다(57절). 둘째는, 예수께서 ‘나를 좇으라’ 하고 부른 사람입니다(59절). 셋째도 예수께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61절). 그런데 세 종류의 사람 모두 예수님의 제자로 쓰임 받기에 적합한 사람들이 아닌 듯 합니다. 첫번째 사람이 ‘주께서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라가겠습니다’ 했지만 예수께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는데 나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십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그 사람으로부터 좋다 나쁘다 아무런 대꾸가 없이 생략되었습니다. 묵묵부답으로 슬그머니 떨어져 나가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닙니다. 이 사람은 예수께서 부르신 것도 아닌데 자청하여 선생님의 뒤를 따르겠다고 나섰습니다. 예수께서 하시는 일과 겉으로 보이는 영광스런 모습만 보고 그 길을 따르려 하는 사람에게 주님은 네가 따르겠다고 하는 나의 길은 그렇게 쉽고 편하지 않다. 편히 쉴 곳도 없는 거칠고 험한 길이라고 말씀하시자 그만 아무런 말 없이 슬그머니 뒤로 빠지는 사람입니다. 예수의 제자가 되면 좋은 집이 생기고 편안한 삶이 보장될 것이라 기대하여 따른다면 처음부터 잘 못 생각한 것임을 보여주십니다. 일시적으로 감동을 받고 즉흥적으로 헌신을 각오하였지만 ‘내가 받는 고난과 죽음도 함께 받을 수 있겠느냐’는 물음에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는 즉흥적 신앙인의 모습을 이 사람으로부터 찾아보게 됩니다. 두번 째 사람은 제자의 길을 자원한 첫째 사람과는 달리 예수께서 나를 따르라고 불러내신 사람입니다. 이 사람 정도면 할 수 있겠다 여겨 부르셨는데 ‘먼저 아버지 장사지내고 돌아와 따르겠다’고 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죽은 자는 죽은 자들로 장사하게 두고 너는 가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십니다. 그런가 하면 세번째 사람은 가족들에게 먼저 작별 인사를 하고 와서 따르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주님은 이 사람에게 ‘손에 쟁기를 잡은 자가 뒤돌아보면 하나님 나라에 적합한 사람 아니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의 중심이 되는 구절입니다. ‘먼저 가서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해주십시오’ 말한 이 사람의 말에 무슨 잘못됨이 있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죽은 사람들이 죽은 사람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라’는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죽은 사람들이 죽은 사람을 장사하라니요? 이때 죽은 사람이란 육신의 죽음이 아니라 영혼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살았으나 죽은 자들 곧 예수의 생명이 없는 죽은 자들이 자기 죽은 자들을 장사지내도록 하고 너는 지금부터 내가 너에게 주는 하나님 나라의 생명을 전파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사람의 부친이 그날 돌아가신 것도 아닙니다. 연세 많으신 부친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곁에 모시다가 돌아가시면 그때 따르겠다는 말로 이해합니다. 주님은 지금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네가 필요하다고 하시는데 이 사람은 먼저 세상의 일부터 해결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 나라에 헌신하겠다는 대답입니다. 또 다른 면에서 해석하면, 예수님 시대 이스라엘의 장례 풍습은 시신을 굴무덤에 안장하는 몇일간의 장례식으로 끝이 아니라 장례식을 치른 후 1년이 지나 유골을 거두어 유골함으로 옮기는 기간 전체를 장례기간으로 삼는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 사람이 먼저 부친을 장사지내고 오게 허락해 달라는 말은 지금 즉시 따르라는 주님의 부르심에 1년이라는 기간을 두고 정중히 거절하는 핑계에 불과하였습니다. 결국 이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처음부터 제자의 길을 따를 마음 준비가 안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세번째 사람은 주님을 따를 마음이 있는 듯 보입니다. 이 사람 말이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과 작별하도록 허락해주세요’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사람에게마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적합하지 않다’ 하고 냉정하게 대답하십니다. 최소한 가족들과 작별인사는 하고 와야 하지 않을까요? 기본적인 인간의 정마저 매몰차게 끊고 따라야 제자다운 것이라는 말일까요? 도대체 예수님은 부모자식과 가족간의 기본적인 도리마저 무시하고 집을 나와 예수를 따라야만 한다고 하시는 것일까요? 혹시 여러분 마음에 그러니까 기독교가 개독교라는 비판을 듣는거라는 공감이 막 생기려고 합니까? 예수께서 어찌 그런 당연한 인간의 도리를 무시하고 사람들을 광적인 추종자들로 만드시려는가 의혹이 생깁니까? 이건 요즘 한국 사회를 어지럽히는 신천지집단이 하는 짓과 비슷해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런 가르침은 제자도의 우선순위가 무엇임을 분명히 알게 하시려는 강조법입니다. 세번째 사람은 내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말하지만 이 사람 역시 가족을 핑계삼아 지금은 헌신할 수 없다는 의도에서 나온 대답이었습니다. 집에 돌아가 가족들에게 제자의 길을 가겠노라 작별인사를 하고 오겠다는 마음에는 누군가 자기를 강력하게 붙잡고 가지말라고 설득하면 주저앉을 수도 있다는 계산이 깔려있습니다. 손에 쟁기를 잡았다는 말은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맡았다는 뜻이고, 뒤를 돌아다보는 것은 세상 일을 걱정하고 염려한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손에 쟁기를 쥐어주고 지금부터 밭을 갈라고 하시는데 이 사람은 가족을 구실삼아 뒤를 돌아보고 있으니 ‘쟁기를 손에 잡고 뒤돌아보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다음에 내가 하고 싶을 그때에 헌신하겠다는 대답은 지금 부르시는 주님의 부르심에 적당한 응답이 아닙니다. 한 손에 쟁기를 쥐고 또 한 손에는 막대를 들고 소를 몰며 밭을 가는 농부는 오직 앞에 있는 목표물을 보고 전진해야 밭이랑을 똑바로 일구게 됩니다. 얼마나 많이 일했는가 확인하고 싶어 뒤를 돌아다 보는 순간 쟁기가 돌뿌리에 걸려 부러질 수도 있습니다. 주인이 뒤를 돌아보는 순간 밭가는 소는 엉뚱한 방향으로 가 밭이랑이 비뚤어집니다. 노련한 농부, 전문가 농부는 그런 일을 하지 않습니다. 쟁기를 손에 잡고 뒤를 돌아다 보는 농부는 진정한 농부의 정신이 없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 시민이 되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한 번 목표로 정한 그 길을 갈 때 뒤돌아보거나 한 눈을 팔지 않습니다. 쟁기를 손에 잡고 뒤를 돌아보면 안된다는 말씀은 한 해를 마무리하는 즈음에 더 나은 내일을 위해 과거를 회고하고 정리하는 의미에서 뒤를 돌아보는 것을 금하는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겠다는 사람이 세상 재미와 옛 것에 마음을 빼앗기는 일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미련과 아쉬움에 발목을 붙잡혀 세상과 하나님 나라 사이에 두 발을 담그고 어정쩡한 태도로 신앙생활하는 것은 제자로서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제자는 몇 주 혹은 몇 달간 제자훈련반에 등록하여 제자훈련 코스를 수료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구절 많이 암송하고 교회 안 빠지고 잘 나오며 봉사생활 앞장서 잘 하면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훈련 프로그램 수료증을 받았어도 전과 다름 없이 가정에서 불성실하고 직장과 학교에서 이중인격자로 낙인 찍히고 이웃과의 관계에서 제 잘난 맛에 사는 고집불통 예수쟁이라는 소리를 듣고 산다면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닙니다. 자칭 제자일 뿐입니다. 제자는 그리스도를 따라 그분의 삶을 나의 삶으로 받아 불편하고 힘들고 손해가 될지라도 일평생 끝까지 따라가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영광스런 자격입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돌아보면 안된다는 말씀은 어쩌면 세속 직업을 포기하고 신학교에 들어가 목회자로 훈련받고 목사가 될 사람들이나 선교사들에게 주시는 비유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일차적으로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무리는 아닙니다. 그러나 꼭 목회자와 선교사들에게만 해당하는 말씀일까요? 누구든지 예수를 구주로 믿고 그리스도인으로 따르기로 결심한 사람은 삶의 우선순위를 바르게 정하라고 하시는 말씀으로 이해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됨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됨과 그 의미가 다르지 않습니다. 전에는 세상의 즐거움과 재미가 우선이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를 본 받는 삶을 우선순위로 두게 되었습니다. 지금 각자의 손에 쟁기가 들려있습니다. 하나님 나라 밭에서 일하는 농부로서 내가 할 일은 맡겨진 사명을 완수하기까지 오직 앞을 바라보며 거칠고 험한 밭을 부드럽게 일구어 그 밭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일입니다. ‘내가 주를 따르기는 하겠지만 그러나 먼저’ 하며 다른 일에 마음을 빼앗기는 농부는 되지 말기 바랍니다. 한 손에 전에 즐기던 세상의 일도 꼭 붙잡고 다른 손에 하나님 나라의 영광도 함께 얻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주의 부르심을 최선으로 두지 않고 세상과 하나님 나라 사이에 두 발 담그고 머뭇거리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세 부류의 사람에 속합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이 하늘로부터 내린 유황불에 불타 무너질 때 롯과 아내와 두 딸들은 천사의 손에 이끌려 황급히 성을 빠져나왔습니다. 그 성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불타 죽게된 그들을 불쌍히 여겨 건져주신 하나님은 목숨을 건짐 받은 그들에게 한 가지 중요한 조건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앞만 보고 달리며 절대로 뒤를 돌아다 보거나 들에 머물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목숨을 보존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아무 것도 챙기지 못하고 맨몸으로 도망쳐나오게 된 롯의 아내는 성읍에 두고 온 모든 것들이 생각나 그만 뒤를 돌아다보고 말았습니다. 절대로 뒤돌아보면 안된다는 말씀이 있었지만 두고 온 집과 재물과 피땀 흘려 모아놓은 삶의 터전이 아깝고 아쉬워 잠간 뒤를 돌아보는 순간 소금기둥으로 변하였습니다. 결국 롯의 아내는 과거의 것은 물론 목숨까지 모든 것을 영원히 잃고 만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세상 마지막 날이 롯의 때와 같으리라 하셨습니다. 롯의 때에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집을 짓다가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멸망한 것처럼 세상 마지막 날이 갑자기 임하리니 세상 사는 재미에 흠뻑 빠져 그 날이 옴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가 허둥대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지붕에 있는 자는 세간살이 가지러 집으로 내려가지 말고 밭에 있는 사람도 이와 같이 뒤로 돌아오지 말라, 롯의 처를 생각하라’(눅17:32) 하셨습니다. 롯의 처는 목숨이 달린 긴박한 순간에 세상 것들에 마음을 빼앗겨 영원을 잃어버린 불명예스런 사람의 모델입니다. 주님은 롯의 처를 예로 들어 영원한 생명을 그 무엇으로 바꿀 수 있을건가 생각해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조건은 세상의 재물이나 업적이나 나의 이익을 위한 인간관계 같은 것이 우선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생명을 소유함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가 되는 조건은 부르심에 즉각 응답하고 따르는 순종의 삶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라 불편함과 고난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결단이고 그리스도를 가장 우선으로 둘 수 있는 각오입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적합하다는 역설입니다. 부담스러우십니까? 지난 해를 돌이켜 생각해봅시다. 나는 앞을 향해 목표를 바라보고 달려왔는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오직 목표를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로 정하고 힘껏 달려왔는가? 갈팡질팡 우왕좌왕 뒤를 돌아보고 한참 되돌아갔다가 우여곡절 끝에 다시 방향을 잡고 있는 중인가? 아니 처음 결심을 포기하고 들판에 머물렀거나 뒤를 돌아보며 두고 온 세상 것들이 아쉽고 아까워 눈물 흘리고 있는가? 어떻게 해서든 낡은 세계의 한 부분을 움켜쥐고 있으려 하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이루어주시려는 더 영광스런 새로운 것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금년 한 해 동안 나는 어떤 사람으로 살아왔는가? 제자인가? 지나가는 예수님을 멀리서 바라만 보는 행인인가? 눅9:51에 예수께서는 이 땅에서의 사명을 마치고 아버지께로 가실 때가 가까워졌음을 아시고 최후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 땅에 오신 사명을 이루셨습니다.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그 길을 머뭇거리거나 지연시키고 한 눈을 팔지 않으시며 앞을 향해 나아가는 굳은 각오가 엿보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바로 그런 자세로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을 이루어 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는 주님의 부르심에 즉각 순종하여 주께서 앞서가신 길을 따릅니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 먼저 앞서 계신 주님을 바라보고 따르면 됩니다. 2009년의 남은 시간은 물론 새해에도 주님께 부름받은 영광스런 제자의 삶을 힘쓰시기 바랍니다.

청 교 도 의 길

본문: 눅 9:57-62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손에 쟁기를 잡고 하는 일은 묵은 땅을 갈아 엎고 씨를 뿌리는 것이다. 목적과 헌신이 분명한 것이다. 쟁기를 손에 잡고 뒤를 돌아본다는 것은 땅을 갈지도 못하고 씨를 뿌리지도 못하는 것이다. 쟁기를 잡은 목적은 온데 간데 없어지고 마음은 다른 데로만 가는 것을 말한다. ‘마음은 콩밭에 가있다“는 속담이 있다. 몸은 주인 밭에 있지만 마음은 온통 자기 논두렁에 심어 놓은 콩밭에 가있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 설렁설렁 일을 하는 둥 마는 둥한다는 것이다. 뒤를 돌아본다는 것은 삶의 방향과 목적이 후퇴하고 물러선다는 뜻도 된다. 쟁기를 잡고서도 수시로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그 일을 그만 둘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뒤를 돌아보다가는 뒤로 후퇴하게 되고, 후퇴는 결국 파멸로 끝이 나고 말 것이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주님은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눅9:62) 우리가 손에 잡은 쟁기는 오직 믿음이요, 오직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 의인은 오직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산다. 떡으로만 살지 않고 말씀으로 산다. 그런데 어디 뒤를 돌아보며 뒤로 물러가는가?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10:38)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본 사람의 대표적인 예는 롯의 처이다. “롯의 처를 기억하라”(눅17:32)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으므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창19:26) 쟁기를 손에 잡고 뒤를 돌아본 사람의 또 한 사람의 예는 데마이다. 세상에 대한 사랑과 미련 때문에 쟁기를 손에 잡고 뒤를 돌아보다가 아예 뒤로 가버렸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딤후4:10) 베드로 사도는 쟁기를 손에 잡고 뒤를 돌아본 사람들의 결국에 대해 말씀한다. “만일 그들이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벧후2:20-22) 예수님의 일곱 귀신 비유도 쟁기를 손에 잡고 뒤를 돌아본 사람에 대한 말씀일 것이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마12:43-45) 예수님의 씨뿌리는 비유에서,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었지만,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손에 쟁기를 잡고 세상 염려와 재물과 향락을 뒤돌아보다가 결실을 못한다는 것이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오늘 본문은 말씀해 주고 있다. 1.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감정과 욕망으로 주를 따르는 자이다 .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눅9:57-58) 이 ‘어떤 사람’을 마태복음에서는 서기관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은 당시 많은 기적(오병이어의 기적, 불치병의 치료)을 행하셨기에, 권력과 부와 명예를 얻을 것으로 기대하고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말은 쉽지만, 주를 따른다는 것이 정말 무엇인지 안다면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주님은 십자가를 향해 가고 계셨다. 그는 아마도 이 땅에서의 부귀 영화를 기대하고서 따르겠다고 한 것 같다. 예수님의 대답을 보면, 그의 감정적인 동기와 목적을 꿰뚫고 있다. 순간적인 열정에 따라 경솔한 맹세를 하고 있음을 보신 것이다. 예수 믿으면 복 받고 자식 잘 되고 사업 잘 되고 천국까지 간다고 하니까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심지어 예수님이 택한 12제자들도, 누가 크냐? 누가 영광의 예수님 좌우에 앉느냐? 하고 분쟁을 하기도 했다. 가롯 유다는 아마도 로마를 정복하는 구세주로 기대했다가 실망하고 배신한 경우로 본다. 그런 사람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대답은 이러하다. 여우도 굴이 있다. 거처가 있다. 공중의 새도 집이 있다. 거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하신다. 주님을 따르는 길이 어떤 것인지를 모르고 감정적인 고백을 하는 그를 깨우쳐 주는 말씀이다. 주님을 따르는 길이 고난의 길이라는 것을 비유적으로 말해 주고 있다. 여우나 새도 있는 최소한의 삶의 터전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길임을 시사해 주고 있다. 예수를 따르며 권력이나 부, 명예를 탐하는 사람들의 세속적인 욕망을 깨뜨리는 말씀이다. 예수 믿고 팔자 고칠려고 하는 사람들, 가진 것에 더 가질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말씀이다. 믿기만 하면 구하기만 하면 다 이루어진다는 긍정복음 형통복음들을 산산히 부수는 말씀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 행하리이다’ 했지만 행하지 않아서 망하고 말았다. “백성이 일제히 응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출19:8) 베드로도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요13:37) 했지만 세 번 부인하고 말았다. 돌밭에 떨어진 말씀은 처음엔 기뻐하다가 핍박이 오면 금새 부인하고 마는 경우이다. 그러한 사람에게 예수님의 대답은 이러하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떡으로만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 이것을 깨우치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주리게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신다(신8장). 불뱀과 전갈이 있는 그 광대한 광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게도 하신다. 내 없는 것, 부족한 것을 채우고, 있는 것은 더 많이 갖게 하기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아니다. 그 끝없는 탐욕과 야망의 충족은 바알과 아세라들이 약속하는 것들이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말씀, 진리를 살게 하시기 위해, 주님은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부와 권력, 명예에 목말라하는 것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요,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것이다.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부끄러운 것이고, 그 마침은 멸망이라고 하신다(빌3:19). 팥죽 한 그릇을 얻기 위해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팔았다. 그러나 모세는 애굽의 보화와 낙을 얻기 위해 믿음을 팔지 않았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11:24-26)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앞으로 받을 영광과 기업을 안다면,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기 위해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로 여길 줄 알면 쟁기를 손에 잡고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주님을 따르는 것이 군사와 같다는 것을 알면 생활에 얽매여 뒤돌아 보지 않을 것이다. 두 마음을 품으면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고 하셨다. 재물과 하나님은 겸하여 섬길 수 없는 것이다. 2.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세상 일 ( 예법 ) 이 먼저인 자이다 .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눅9:59-60) 유대인들은 장례를 율법의 제사처럼 중요하게 여겼다. ‘먼저’는 ‘돌아서다’, ‘포기하다’의 뜻이 있다. 부친의 장례로 인해 예수를 따를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세상에서의 일과 관계가 예수를 따르는 일보다 우선되고 앞선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예수를 따르려면, 세상과 일과의 관계에서 결단이 필요하다. 세상은 이러한 결단에 대해 분노하고 견디기 힘들게 할 것이다. 그러나 그 고난의 가시밭길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예수를 따를 수가 없다. 이러한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이러하다.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라.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 죽은 육체들을 장사하게 하라는 뜻이다. 장례와 세상 법도가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고, 우선 순위를 어디에 둘 것인지를 말씀하신다. 세상의 일과 법도보다, 예수의 일을 우선으로 여길 수 있는 자만 주를 따를 수 있다. 우선 순위의 문제는 우리 주님과 온 성경이 강조하는 말씀이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믿음생활은 우선 순위를 바꿔가는 것이다. 세상에서 예수께로, 떡(재물)에서 말씀으로, 우선 순위를 바꿔가는 것이다. 사람의 일에서, 예수의 일로 우선 순위를 바꿔가는 것이다. “그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디모데는) —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빌2:21).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것이 믿는 자들의 최우선 순위이다.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기 위해 믿음을 지키고 달려갈 길을 다 달려 갔다. 푯대를 향하여 부름의 상을 향하여 달려 갔다. 주께 받은 사명을 마치기 위해 자기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였다.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고난의 가시밭길 끝에 영광의 구름이 피어오른다. 불뱀과 전갈이 있는 광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해서 가나안 기업이 열린다. 참된 안식과 축복과 영원한 영광이 있다. 3.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혈연이 우선인 자이다 .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눅9:61) 육신의 혈연에 얽매인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못한다. ‘먼저’가 내 가족이다. 우선 순위가 가족이다. ‘작별’은 단순한 작별 인사만을 뜻하지 않고 가족에 대한 ‘집착’을 나타내고 있다. 모든 것을 가족과 논의 후에 결정하겠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예수를 좇고자 하는 열망이 한 쪽에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이상으로 집착하고 마음이 쏠려 있고 우선인 것은 혈연이고 가족이다. 가족과 혈연 때문에 사람 때문에 우선 순위를 바꿀 수가 없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주님이 주시는 대답은 이러하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집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보다 우선 순위인 것이 하나님의 나라이다.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눅18:29-30) 버린다는 것은 우선 순위를 버리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그들을 버렸는데 현세에 오히려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는 것이다. 부모 자녀를 얻기 위해 하나님의 나라를 버린 사람은 오히려 그것을 잃고 영생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끼고 돈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애끼다가 뭐 되고, 화가 되기도 한다. 가장 귀한 것도 버리지 않고서는, 우선 순위를 바꾸지 않고서는, 현세에 여러 배의 축복도 받지 못하고, 영생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10:37-39) 모세도 레위 지파를 축복할 때 이렇게 말했다. “그는 그의 부모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내가 그들을 보지 못하였다 하며 그의 형제들을 인정하지 아니하며 그의 자녀를 알지 아니한 것은 주의 말씀을 준행하고 주의 언약을 지킴으로 말미암음이로다”(신33:9)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사는 길이 믿음의 길이다.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길이 믿음의 길이다. 주님을 따르려면, 세상의 법도와 예절보다 하나님의 일을 우선시해야 한다. 부모 형제 자녀보다 우선인 것이 하나님의 나라이다. 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살고, 소망하고 전파하는 것이 천국 믿음이요 천국 생활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미 시작 되었고 침노하는 자들만이 얻을 수 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이 하나님의 나라는 완성되고 영원히 영원히 함께 살게 될 것이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먼저 구하고 해야 할 일을, 나중에 구하고 해야 할 일과 뒤바꾸지 말아야 한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주님을 따르려면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말아야 한다. 생활에 얽매이고 염려와 근심이 가득 차서는, 손에 쟁기를 잡고 뒤돌아 볼 수 밖에 없다.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아야 한다. 우리는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고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한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고 파멸과 멸망에 빠지고 만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고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찌르고 만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말자.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게 하나님의 사람답게 의와 경건과 믿음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고 영생을 취하자. 위에서 부르는 부름의 상을 향하여 손에 쟁기를 잡고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일에 전심전력을 다하자.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PBA 글쓴이 : 강대식 원글보기 : 강대식 메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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