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44 편 | [하루 한 장] 시편44편_일러 주매 들었나이다 답을 믿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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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3. 14 [하루 한 장]“일러 주매 들었나이다” (시44편)
설교자 : 홍융희 목사 (분홍목사)
부산 성민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http://sungminch.com
시편 44편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어떻게 지키셨고
또 지키시고 계시며
앞으로 지키실 것인가에 대한
신앙의 고백과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출애굽 사건을 통해
그의 백성을 건져주셨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셔서
그곳 백성들을 쫓으시고
자기 백성을 마치 포도나무처럼
심으시고 번성하게 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조상들이 대대로 일러 주매
후손들이 듣고 기억하고
그 하나님을 대대로 붙잡아
오늘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으로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신앙전승에는 ‘사파르’, 즉
‘일러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의 일을
되풀이해 말하고 자세히 말하고
선언하고 공표하고 밝히 말하여
잊지 않도록 새겨주는 것이
신앙의 중요한 기초입니다
들어야 믿음이 생기고
들은 것을 붙잡고 기도하고
들은 대로 될 줄로 믿고
도전하고 싸워갈 수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얼굴을 비추사
구원을 명령하실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나아갑시다
승리주시는 주 찬양!
시편 44편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어떻게 지키셨고
또 지키시고 계시며
앞으로 지키실 것인가에 대한
신앙의 고백과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출애굽 사건을 통해
그의 백성을 건져주셨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셔서
그곳 백성들을 쫓으시고
자기 백성을 마치 포도나무처럼
심으시고 번성하게 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조상들이 대대로 일러 주매
후손들이 듣고 기억하고
그 하나님을 대대로 붙잡아
오늘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으로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신앙전승에는 ‘사파르’, 즉
‘일러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의 일을
되풀이해 말하고 자세히 말하고
선언하고 공표하고 밝히 말하여
잊지 않도록 새겨주는 것이
신앙의 중요한 기초입니다
들어야 믿음이 생기고
들은 것을 붙잡고 기도하고
들은 대로 될 줄로 믿고
도전하고 싸워갈 수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얼굴을 비추사
구원을 명령하실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나아갑시다
승리주시는 주 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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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44

〔고라 자손의마스길,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1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 조상들의 날 곧 옛날에 행하신 일을 그들이 우리에게 일러 주매 우리가 우리 귀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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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한 장] 시편44편_일러 주매 들었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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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시편 44 편

  • Author: 홍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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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8. 3. 13.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4CUrW9tePcI

시편 44

〔고라 자손의 1)마스길,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1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 조상들의 날 곧 옛날에 행하신 일을 그들이 우리에게 일러 주매 우리가 우리 귀로 들었나이다

2 주께서 주의 손으로 뭇 백성을 내쫓으시고 우리 조상들을 이 땅에 뿌리 박게 하시며 주께서 다른 민족들은 고달프게 하시고 우리 조상들은 번성하게 하셨나이다

3 그들이 자기 칼로 땅을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그들의 팔이 그들을 구원함도 아니라 오직 주의 오른손과 주의 팔과 주의 얼굴의 빛으로 하셨으니 주께서 그들을 기뻐하신 까닭이니이다

4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왕이시니 2)야곱에게 구원을 베푸소서

5 우리가 주를 의지하여 우리 대적을 누르고 우리를 치러 일어나는 자를 주의 이름으로 밟으리이다

6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 칼이 나를 구원하지 못하리이다

7 오직 주께서 우리를 우리 원수들에게서 구원하시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로 수치를 당하게 하셨나이다

8 우리가 종일 하나님을 자랑하였나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에 영원히 감사하리이다 (셀라)

9 그러나 이제는 주께서 우리를 버려 욕을 당하게 하시고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

10 주께서 우리를 대적들에게서 돌아서게 하시니 우리를 미워하는 자가 자기를 위하여 탈취하였나이다

11 주께서 우리를 잡아먹힐 양처럼 그들에게 넘겨 주시고 여러 민족 중에 우리를 흩으셨나이다

12 주께서 주의 백성을 헐값으로 파심이여 그들을 판 값으로 이익을 얻지 못하셨나이다

13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웃에게 욕을 당하게 하시니 그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조소하고 조롱하나이다

14 주께서 우리를 뭇 백성 중에 이야기거리가 되게 하시며 민족 중에서 머리 흔듦을 당하게 하셨나이다

15 나의 능욕이 종일 내 앞에 있으며 수치가 내 얼굴을 덮었으니

16 나를 비방하고 욕하는 소리 때문이요 나의 원수와 나의 복수자 때문이니이다

17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임하였으나 우리가 주를 잊지 아니하며 주의 언약을 어기지 아니하였나이다

18 우리의 마음은 위축되지 아니하고 우리 걸음도 주의 길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나

19 주께서 우리를 승냥이의 처소에 밀어 넣으시고 우리를 사망의 그늘로 덮으셨나이다

20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잊어버렸거나 우리 손을 이방 신에게 향하여 폈더면

21 하나님이 이를 알아내지 아니하셨으리이까 무릇 주는 마음의 비밀을 아시나이다

22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23 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일어나시고 우리를 영원히 버리지 마소서

24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가리시고 우리의 고난과 압제를 잊으시나이까

25 우리 영혼은 진토 속에 파묻히고 우리 몸은 땅에 붙었나이다

26 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 주의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소서

YouVersion

44

1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 열조의 날 곧 옛날에 행하신 일을 저희가 우리에게 이르매 우리 귀로 들었나이다 2 주께서 주의 손으로 열방을 쫓으시고 열조를 심으시며 주께서 민족들은 괴롭게 하시고 열조는 번성케 하셨나이다 3 저희가 자기 칼로 땅을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저희 팔이 저희를 구원함도 아니라 오직 주의 오른손과 팔과 얼굴의 빛으로 하셨으니 주께서 저희를 기뻐하신 연고니이다 4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왕이시니 야곱에게 구원을 베푸소서 5 우리가 주를 의지하여 우리 대적을 누르고 우리를 치려 일어나는 자를 주의 이름으로 밟으리이다 6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 칼도 나를 구원치 못하리이다 7 오직 주께서 우리를 우리 대적에게서 구원하시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로 수치를 당케 하셨나이다 8 우리가 종일 하나님으로 자랑하였나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영영히 감사하리이다(셀라) 9 그러나 이제는 주께서 우리를 버려 욕을 당케 하시고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

10 주께서 우리를 대적에게서 돌아서게 하시니 우리를 미워하는 자가 자기를 위하여 탈취하였나이다 11 주께서 우리로 먹힐 양 같게 하시고 열방 중에 흩으셨나이다 12 주께서 주의 백성을 무료로 파심이여 저희 값으로 이익을 얻지 못하셨나이다 13 주께서 우리로 이웃에게 욕을 당케 하시니 둘러 있는 자가 조소하고 조롱하나이다 14 주께서 우리로 열방 중에 말거리가 되게 하시며 민족 중에서 머리 흔듦을 당케 하셨나이다 15 나의 능욕이 종일 내 앞에 있으며 수치가 내 얼굴을 덮었으니 16 나를 비방하고 후욕하는 소리를 인함이요 나의 원수와 보수자의 연고니이다 17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임하였으나 우리가 주를 잊지 아니하며 주의 언약을 어기지 아니하였나이다

2018/06/13(수) “시편 44:1-26” / 작성: 정한조

본문 시편 44:1-26

찬송가 312장 ‘너 하나님께 이끌리어’

회상을 통한 구원의 확신(1-8절)

오늘의 본문의 표제어에는 라고 되어 있습니다. ‘마스길’은 ‘교훈’이라는 의미입니다. 고라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하나님의 사람인 모세의 지도력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허락하신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누리려고 하다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고라의 삶은, 지난주일 설교로 말씀드리면, 믿음 없고 패역한 사람의 길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시편은 그것을 아는 그의 후손이 혹 삶의 위기 상황을 만날지라도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해야함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기 위해서 이 시편을 지어서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전체의 노래가 되었습니다.

오늘 시편은 이스라엘이 외적의 침입을 당해, 국가적으로 위기를 맞았을 때에 고라 자손이 하나님께 올린 호소의 기도입니다. 이 시편의 배경을 설명하는 표제어가 붙어 있지 않기에 어떤 위기인지에 대해서는 몇몇의 견해들이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히스기야왕 때에 산헤립이 유다를 침략한 사건(왕하 18:13-19:37)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고 여겨집니다. 그 때에 온 유다가 초토화 되고, 예루살렘마저 함락될 위기에 있었습니다.

그런 때에 시인은 과거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행하셨는지를 돌아보았습니다. 1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 조상들의 날 곧 옛날에 행하신 일을 그들이 우리에게 일러 주매 우리가 우리 귀로 들었나이다

오늘 본문 1절은 “하나님이여!”로 시작됩니다. 국가가 아무리 어려운 위기에 처했을지라도 그것을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옛날에 행하신 일’은 곧 이스라엘 자손들의 출애굽부터 가나안 땅에 정착하기까지의 일을 의미합니다. 그 일을 ‘그들’이 우리에게 일러 주어서 우리가 귀로 들었다고 합니다. ‘그들’의 문자적인 의미는 ‘아버지들’입니다. 출애굽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를 가정에서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의무였습니다. 그것을 자녀들이 듣고 배워서 또 자기들의 자녀들에게 가르쳤던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에도 동일합니다. 부모들은 “부모인 우리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 우리 자녀들이 잘 배우겠지?”라고 생각을 많이 합니다. 하지만 잘 배우지 않을 가능성 더 많습니다. 식탁에서 일상에서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 행하신 일들을 자녀들과 나누어야 배웁니다. 그래서 우리 자녀들이 ‘신앙의 다음 세대’가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불신앙의 다른 세대’가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조상 이스라엘 자손들을 어떻게 인도하셨는지를 2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주께서 주의 손으로 뭇 백성을 내쫓으시고 우리 조상들을 이 땅에 뿌리 박게 하시며 주께서 다른 민족들은 고달프게 하시고 우리 조상들은 번성하게 하셨나이다

하나님께서 조상들을 인도하셔서 가나안 땅에 살게 된 것을 농부가 유실수(有實樹)를 심는 것으로 비유를 하고 있습니다. 농부가 과수원을 꾸려가기를 원할 때에 그저 사과나무나 감나무, 배나무를 땅에 심는다고 해서 저절로 과수원이 만들이지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과수원을 만들 땅을 정리해야 합니다. 잡목이나 잡초가 우거져 있으면 전부 뽑아내어야 합니다. 그리고 돌도 치워야 하고, 땅이 굳어 있으면 부드럽게 해야 합니다. 그 후에 유실수를 심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돌보며 거름을 주어야 하고, 잡초가 나면 뽑아야 마침내 열매를 맺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가나안 땅에 제대로 심기 위해서 수고를 하셨습니다. 그 곳에 있는 잡목과 잡초와 같은 사람들을 내어 쫓으시고, 호시탐탐 침략의 기회를 노리는 사람들을 고달프게(꺾어서 버리다) 하심으로 조상들을 번성하게 하여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조상들이 가나안 땅에 심겨진 것이 자신들이 실력이 아니었기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3절입니다.

그들이 자기 칼로 땅을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그들의 팔이 그들을 구원함도 아니라 오직 주의 오른손과 주의 팔과 주의 얼굴의 빛으로 하셨으니 주께서 그들을 기뻐하신 까닭이니이다

‘자기 칼’, ‘그들의 팔’은 인간(조상들)의 능력을 의미한다면, ‘주의 오른손’, ‘주의 팔’, ‘주의 얼굴의 빛’은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역사(役事)를 뜻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가나안 땅을 차지할 때에 그곳이 무주공산(無主空山)이 아니었습니다. 그 땅을 각 지파별로 나누고, 각 지파마다 그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서 싸웠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땅을 차지하게 해 주셨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뻐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래 전에 신학대학원에 입학 했을 때에, 저와 함께 입학한 사람들의 공통적인 고백이 “하나님께서 저를 불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합격하게 해 주셨습니다.”이었습니다. 단 한사람도 “하나님께 도와주시지 않으셨는데, 제가 공부해서 입학했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공부를 전혀 하지 않고, 시험을 보았는데 합격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각자가 열심히 공부를 했음에도, “하나님께서 해 주셨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고백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은혜를 베푸셨고, 그들은 자기들의 칼이나 활이 아니라 주님을 의지하여, 주님의 이름으로 적들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을 후손들이 알기에 고라 자손인 시인은 하나님을 자랑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고 고백합니다.

도움 없는 현실 토로(9-16절)

하지만 과거에 그렇게 조상들과 함께 해주시고, 조상들을 기뻐하시고, 조상들을 위해 역사하신 하나님께서 지금은 그렇게 하시지 않음을 탄식하고 있습니다. 9-14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주께서’ 우리를 버려 욕을 당하게 하시고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우리를 대적들에게서 돌아서게 하시니 우리를 미워하는 자가 자기를 위하여 탈취하였나이다 ‘주께서’ 우리를 잡아먹힐 양처럼 그들에게 넘겨주시고 여러 민족 중에 우리를 흩으셨나이다 ‘주께서’ 주의 백성을 헐값으로 파심이여 그들을 판 값으로 이익을 얻지 못하셨나이다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웃에게 욕을 당하게 하시니 그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조소하고 조롱하나이다 ‘주께서’ 우리를 뭇 백성 중에 이야기 거리가 되게 하시며 민족 중에서 머리 흔듦을 당하게 하셨나이다

과거에는 조상들을 버리지 않으셨는데 이제 자신들은 버리셔서 군대와 출전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적들에게 밀려나고, 약탈까지 당했습니다. 그렇게 되다보니 자신들은 이리 떼에게 잡아먹히는 양과 같이 되었고, 조금이라도 덜 피해를 당하기 위해서 이 나라 저 나라로 피난을 갔다고 합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헐값으로 판 것처럼 되어서 자신들은 이웃에게 욕을 먹고, 조롱과 웃음거리가 되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 사람들에 입에 오르내리는 험담거리가 되어서 너무 창피해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소망이 있는 것은 시인은 이 모든 상황을 하나님과 관련하여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9-14절까지 6절에 반복되는 단어가 ‘주께서’입니다. 주님께서 가만히 내버려 두셔서 이런 일을 겪는 것이지, 만약 주님께서 개입하시고 역사하시면 모든 것이 뒤바뀔 것임을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래의 회복 갈구(17-26절)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장 현실이 바뀐 것은 아니었습니다. 시인은 힘든 상황을 또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20-23절입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잊어버렸거나 우리 손을 이방 신에게 향하여 폈더면 하나님이 이를 알아내지 아니하셨으리이까 무릇 주는 마음의 비밀을 아시나이다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일어나시고 우리를 영원히 버리지 마소서

시인은 사람들이 잡아먹히는 양과 같이 죽임을 당하고 있다고 하소연합니다. 양은 자기 스스로를 보호하는 자구책(自救策)이 없는 짐승입니다. 양은 가젤이나 얼룩말과 같이 다리가 4개가 있지만 그것들처럼 빨리 달리지 못합니다. 들소와 같이 뿔이 있기는 하지만 그 뿔이 앞이나 옆으로 나지 않고 뒤로 말려있어서 자기를 보호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게다가 다른 맹수들처럼 날카로운 발톱이나 이빨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잊어버린 것도 아니고, 이방 신에게 우상숭배를 한 것도 아닌데, 백성들은 도살당하는 양처럼 계속 죽임을 당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주무시고 계시는지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많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런 때에는 좌절과 절망으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포기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시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17-18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임하였으나 우리가 주를 잊지 아니하며 주의 언약을 어기지 아니하였나이다 우리의 마음은 위축되지 아니하고 우리 걸음도 주의 길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나

외적에게 온 나라가 유린을 당하면, 하나님을 원망하며 “하나님! 도대체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라며 소리를 지를 것 같은데, 주님의 언약을 깨뜨리지도 않고, 마음을 다른 곳으로 돌린 적도 없고, 주의 길에서 벗어난 적도 없다고 합니다.

우리 교회 한 성도님이 별세하셔서, 지난 월요일(11일) 밤에 조문을 갔었습니다. 가는 길에 라디오 기독교방송을 틀었는데 오래 전에 많이 불렀던 복음성가가 흘러나왔습니다.

나 주의 믿음 갖고 홀로 걸어도 나 주의 믿음 갖고 노래 부르네

폭풍구름 몰아치고 하늘 덮어도 나 주의 믿음 갖고 실망치 않네

주는 내 친구 진실한 친구 세상 끝까지 주 의지 하리

폭풍구름 몰아치고 하늘 덮어도 나 주의 믿음 갖고 실망치 않네

“과거 신앙의 선배들의 믿음이 나보다 훨씬 좋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거 그 어려울 때에 신앙을 지켰던 분들이 움직이지 않는 큰 바위와 같고, 거목과 같이 느껴졌습니다. 시인도 온 나라에 폭풍 구름이 몰아쳐 하늘을 덮어도 믿음을 갖고 실망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고라 자손인 시인은 과거에 조상들을 출애굽에서 가나안 땅까지 인도해 주셨다면, 지금도 그렇게 역사해 주셔야, 후손들이 또 지금의 역사를 돌아보고 동일하게 하나님을 찬양할 것인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지 않으신다고 하소연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신앙을 버릴 정도로 흔들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그 때가 히스기야왕 때에 산헤립의 침략으로 인한 국가적인 위기였다면, 그 결과 어떻게 되었는지를 말입니다. 밤에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서 산헤립의 군대를 쳤습니다. 그날에 죽은 산헤립의 군인들의 숫자가 18만 5000명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시계는 어김없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돌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과 신앙에도 과거에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심이 분명한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여길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분명히 응답해 주셔야 하고, 손을 내밀어 주셔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실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시간표와 우리의 시간표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우리의 가정에, 일터(학교)에, 삶의 자리에 심어주셨습니다. 혹 하나님의 시간표와 나의 시간표가 달라, 우리가 가는 길에 폭풍 구름이 몰려오는 것 같다할지라도 실망하지 맙시다. 그런 때에 믿음이 없고 패역하게 살지 않고, 믿음을 따라 살며 순종하게 될 때에, 우리의 삶을 통하여 마침내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믿음과 순종을 따라 사시는 한 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고라 자손인 시인은 현재의 상황이 참 처절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의 손길이 아주 급함에도 하나님은 모른 채 하고 계시는 것처럼 여겨져 고통스러워했습니다. 하지만 시인은 하나님께 과거 조상들에게 행하신 역사, 출애굽에서 가나안 땅까지 인도해주셨음을 기억하며 하나님을 잊어버리거나 말씀을 어기거나 주의 길에서 탈선하지 않겠다고 고백했습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은 저희들은 압니다. 산헤립의 침략과 같은 국가적인 재난에서 하나님께서 결국 행하셨는지를 기억합니다.

혹 우리들의 인생길에도 시인과 비슷하게 느낄 때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과거에 분명하게 역사해 주셨는데, 지금은 외면하고 계신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서 돌아보면 하나님께서 한 번도 역사하지 않으신 때가 없음을 압니다. 비록 지금 하나님께서 동행하심이 생각되지 않을지라도, 그것은 단지 우리의 생각일 뿐이지 늘 함께 하고 계심을 믿음으로 수용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오늘도 하나님께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우리를 심어주신 삶의 자리에 폭풍 구름이 있다고 할지라도 믿음 없음의 삶이 아니라 믿음 있음의 삶을 살게 하시고, 패역의 삶이 아니라 순종의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고라 자손인 시인은 과거에 하나님께서 조상들을 애굽에서 가나안까지 인도하셨음을 고백했습니다. 당신의 지난 삶 가운데 하나님께 역사해 주셨다고 인정할 밖에 없는 또렷한 사건은 무엇입니까?

2. 시인은 국가적이 위기를 당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개입하고 계시지 않고 있다고 하소연을 했습니다. 당신의 삶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꼭 필요한 일임에도, 하나님께서 손을 내미시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일은 무엇입니까?

3. 지나온 당신의 신앙의 역사 가운데, 폭풍 구름이 몰려오는 상황에서도 말씀의 길, 순종의 길에서 어긋나지 않았던 때는 언제였습니까?

4. 오늘도 하나님께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심어 주신 삶의 자리임에도 폭풍 구름이 있고, 주님의 도움의 손길이 보이지 않을 때, 믿음이 있고, 순종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작성 : 정한조)

4월 13일 시편 44편 1-26절

[시편 44편 1-26절]

1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 조상들의 날 곧 옛날에 행하신 일을 그들이 우리에게 일러 주매 우리가 우리 귀로 들었나이다

2 주께서 주의 손으로 뭇 백성을 내쫓으시고 우리 조상들을 이 땅에 뿌리 박게 하시며 주께서 다른 민족들은 고달프게 하시고 우리 조상들은 번성하게 하셨나이다

3 그들이 자기 칼로 땅을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그들의 팔이 그들을 구원함도 아니라 오직 주의 오른손과 주의 팔과 주의 얼굴의 빛으로 하셨으니 주께서 그들을 기뻐하신 까닭이니이다

4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왕이시니 야곱에게 구원을 베푸소서

5 우리가 주를 의지하여 우리 대적을 누르고 우리를 치러 일어나는 자를 주의 이름으로 밟으리이다

6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 칼이 나를 구원하지 못하리이다

7 오직 주께서 우리를 우리 원수들에게서 구원하시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로 수치를 당하게 하셨나이다

8 우리가 종일 하나님을 자랑하였나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에 영원히 감사하리이다 (셀라)

9 그러나 이제는 주께서 우리를 버려 욕을 당하게 하시고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

10 주께서 우리를 대적들에게서 돌아서게 하시니 우리를 미워하는 자가 자기를 위하여 탈취하였나이다

11 주께서 우리를 잡아먹힐 양처럼 그들에게 넘겨 주시고 여러 민족 중에 우리를 흩으셨나이다

12 주께서 주의 백성을 헐값으로 파심이여 그들을 판 값으로 이익을 얻지 못하셨나이다

13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웃에게 욕을 당하게 하시니 그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조소하고 조롱하나이다

14 주께서 우리를 뭇 백성 중에 이야기 거리가 되게 하시며 민족 중에서 머리 흔듦을 당하게 하셨나이다

15 나의 능욕이 종일 내 앞에 있으며 수치가 내 얼굴을 덮었으니

16 나를 비방하고 욕하는 소리 때문이요 나의 원수와 나의 복수자 때문이니이다

17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임하였으나 우리가 주를 잊지 아니하며 주의 언약을 어기지 아니하였나이다

18 우리의 마음은 위축되지 아니하고 우리 걸음도 주의 길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나

19 주께서 우리를 승냥이의 처소에 밀어 넣으시고 우리를 사망의 그늘로 덮으셨나이다

20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잊어버렸거나 우리 손을 이방 신에게 향하여 폈더면

21 하나님이 이를 알아내지 아니하셨으리이까 무릇 주는 마음의 비밀을 아시나이다

22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23 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일어나시고 우리를 영원히 버리지 마소서

24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가리시고 우리의 고난과 압제를 잊으시나이까

25 우리 영혼은 진토 속에 파묻히고 우리 몸은 땅에 붙었나이다

26 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 주의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소서

시편 44편은 우리 조상들에게 이러저러하게 은혜를 베푸시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는 왜 이처럼 행하시는지 탄식하며 호소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8절까지 앞부분은 조상들로부터 전해 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의 역사와 그 하나님을 향한 신앙고백을 담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부분은 6절과 같이 인생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주를 의지한다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시편 44편은 이 신앙이 배신당했다는 강한 항의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긴 민족이 버림받고(9절), 적의 손에 넘겨지고(11절), 심지어는 헐값에 팔렸다(12절)며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지금 적들로부터 당하고 있는 이 모욕과 비방과 수치도 하나님께서 당하게 하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시편의 시인은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셨는지를 묻는 대신, 그저 하나님께서 그 인자하심으로 다시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간청합니다. 자신들이 왜 그처럼 큰 고통을 당하게 되었는지를 납득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17-21절은 이 사람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굳건히 지켰으며, 주를 버리거나 우상숭배에 빠지지 않았음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 시인이 왜 이렇게 원망에 휩싸이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자신들은 크게 죄가 없는 것 같은데, 고난이 너무 컸던 것입니다. 자신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수고하며 애써왔는데, 그에 대한 보상이 자신들의 조상들이 받았던 것과는 완전히 반대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우리 인생에서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상황이고, 누군가는 지금 그와 같은 상황을 겪고 있을 수 있으므로, 우리는 이 시편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지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듣게 됩니다.

“인생은 불완전하며, 사람은 자기가 당하는 일의 의미를 알 수 없다.”

“원망은 그 상황을 이겨내는 한 방편이 될 수는 있으나 정답을 제공해주지 않으며,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상황(고난과 그 안의 원망)을 다 보고 계시지만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큰 계획과 섭리를 베푸신다.”

때로 우리는 주변 사람들이 당한 고난에 대해 생각 없이 하나님의 대변자를 자처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다 뜻이 있으셔서…” 라고 말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속 편한 답변은 원망을 부풀릴 뿐입니다. 욥과 친구들의 대화를 기억해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신실한 신앙인도 몇 마디 말로 위로가 가능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원망하지는 않습니다. 잘 믿던 사람이 갑자기 하나님께 자신의 고통을 호소하며 억울함을 항의하고 있다면, 그 사람이 그만큼 어려운 상황에 부닥쳐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너무 감당하기 어려워서 오늘 시편 44편처럼 계속 원망만 쏟아져나오는 상황이라면,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역시 원망이나마 하나님을 바라며 기도하는 것뿐입니다. 만일 우리가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간구할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의 연약하고 부족한 모습을 나무라시기보다 조용한 위로와 더 큰 미래의 소망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사오나, 주님의 도움을 구합니다.”

시편 44편에서 표면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내내 원망뿐인 것 같지만, 사실은 이런 간절한 기도가 담겨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려울수록, 괴로울수록 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앞에서 고상한 척, 강한 척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믿음 대신 원망이 먼저 일어나더라도 그 앞에 엎드릴 수 있다면 그 엎드림이 우리에게 위로와 소망의 문이 될 줄로 믿습니다.

시편 44편 본문 및 주석 정리, 치욕 속에서 구원을 소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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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44편, 개역개정성경 본문 및 주석

시편 44편 개요

시편 44편은 공동체의 비탄시이며, 민족적으로 암울한 시기에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도와 주시길 간구하는 시입니다. 이 시편은 또한 구약성경 시대에서, 출애굽 당시 하나님께서 행하신 위대한 일들에 대한 예행연습과도 같은 상황을 제시합니다(시 105편). 이 시편 은 고라의 수혼들에게 헌정이 되었는데, 이들은 민수기 16장에 언급된 대로 반란을 일으켰던 제사장의 후혼들입니다.

시편 44편 구조

1-3절, 과거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셨던 것과 같은 상황을 간구

4-8절, 위대한 왕이신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신뢰에 대한 진술

9-12절, 백성들의 비탄

13-22절, 백성들의 결백에 대한 항의

23-26절, 백성들의 간청

현재의 치욕의 상황 속에서 구원을 소망하다

1 [고라 자손의 마스길(교훈),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 조상들의 날 곧 옛날에 행하신 일을 그들이 우리에게 일러 주매 우리가 우리 귀로 들었나이다

2 주께서 주의 손으로 뭇 백성을 내쫓으시고 우리 조상들을 이 땅에 뿌리 박게 하시며 주께서 다른 민족들은 고달프게 하시고 우리 조상들은 번성하게 하셨나이다

3 그들이 자기 칼로 땅을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그들의 팔이 그들을 구원함도 아니라 오직 주의 오른손과 주의 팔과 주의 얼굴의 빛으로 하셨으니 주께서 그들을 기뻐하신 까닭이니이다

1-3절, 우리 귀로 들었나이다 : 하나님께서 과거에 이스라엘 자손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신 놀라운 사건은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의 근본이었습니다(17:7, 118:16, 출 15:6). 이스라엘 자손들은 각 세대에 걸쳐서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위하여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자손들에게 전해야만 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자손들에게 들려 준 이야기들은 단지 역사적 사실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한 그들의 신앙 고백이기도 하였습니다(신 8장).

주의 오른손 : 이 표현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백하는 구원의 표어입니다.

그들을 기뻐하신 까닭 :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하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4:3, 롬 11장).

4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왕이시니 야곱에게 구원을 베푸소서

5 우리가 주를 의지하여 우리 대적을 누르고 우리를 치러 일어나는 자를 주의 이름으로 밟으리이다

4-5절, 나의 왕 : 이스라엘 공동체의 한숨 속에서, 시인 혼자서 하나님이 자신의 왕이라고 고백하는 1인칭을 썼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입니다. 아마도 이 표현은, 이스라엘의 왕이 영광의 왕이신 하나님께 하는 말일 것입니다. 국가의 왕으로서, 온 백성들을 인도하여 하나님께서 주실 새로운 은혜를 간구하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 이스라엘의 왕은 오직 하나님의 영과 도우심으로 승리할 수 있음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6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 칼이 나를 구원하지 못하리이다

7 오직 주께서 우리를 우리 원수들에게서 구원하시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로 수치를 당하게 하셨나이다

8 우리가 종일 하나님을 자랑하였나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에 영원히 감사하리이다 (셀라)

9 그러나 이제는 주께서 우리를 버려 욕을 당하게 하시고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

10 주께서 우리를 대적들에게서 돌아서게 하시니 우리를 미워하는 자가 자기를 위하여 탈취하였나이다

11 주께서 우리를 잡아먹힐 양처럼 그들에게 넘겨 주시고 여러 민족 중에 우리를 흩으셨나이다

12 주께서 주의 백성을 헐값으로 파심이여 그들을 판 값으로 이익을 얻지 못하셨나이다

9-12 : “우리를 버려”라는 이 단어는 이 시편에서 비탄의 부분이 시작되고 있음을 알려 줍니다. 이스라엘 군대가 단순히 전사들이 모인 강력한 군대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군대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군대였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승리는 하나님의 승리이며, 그들의 패배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내하도록 내버리셨기 때문에 찾아 온 것이었습니다.

헐값으로 파심 : 백성들이 고통을 경험하고 있을 때, 마치 하나님께서 그들을 팔아버리시고 넘겨 주신 것과 같은 아픔을 이스라엘은 느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결국 고난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셨고 이스라엘 백성을 파셨다가 다시 사셨습니다(26절 참조).

13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웃에게 욕을 당하게 하시니 그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조소하고 조롱하나이다

14 주께서 우리를 뭇 백성 중에 이야기 거리가 되게 하시며 민족 중에서 머리 흔듦을 당하게 하셨나이다

15 나의 능욕이 종일 내 앞에 있으며 수치가 내 얼굴을 덮었으니

16 나를 비방하고 욕하는 소리 때문이요 나의 원수와 나의 복수자 때문이니이다

17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임하였으나 우리가 주를 잊지 아니하며 주의 언약을 어기지 아니하였나이다

18 우리의 마음은 위축되지 아니하고 우리 걸음도 주의 길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나

19 주께서 우리를 승냥이의 처소에 밀어 넣으시고 우리를 사망의 그늘로 덮으셨나이다

20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잊어버렸거나 우리 손을 이방 신에게 향하여 폈더면

17-20절, 우리가 잊지 아니하며 :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배척하거나 잊지 않았다고 항변하고 있습니다. 이 고백의 의미는, 그들이 만일 하나님을 배척하였다면 당연히 고난을 받아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 손을 이방 신에게 향하여 폈더면 : 이 말은 기도의 자세를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에게 기도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한 분 뿐이신 하나님께만 헌신하였다라고 항변하고 있습니다.

21 하나님이 이를 알아내지 아니하셨으리이까 무릇 주는 마음의 비밀을 아시나이다

22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22절, 양 같이 : 이 단어는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버림을 받는 것을 예언하는 단어입니다(사 53:7, 롬 8:36 참조).

23 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일어나시고 우리를 영원히 버리지 마소서

24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가리시고 우리의 고난과 압제를 잊으시나이까

25 우리 영혼은 진토 속에 파묻히고 우리 몸은 땅에 붙었나이다

26 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 주의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소서

23-26절 :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결코 주무시지 않으십니다(121:3-4, 사 40:28).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 깨소서 “라고 외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즉시 권능을 행해 주실 것을 간구하는 기도의 표현입니다. 이들의 간절한 외침은 결국 주님께서 자신들을 용서해 주시고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는 믿음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소서 : 12절에서,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파셨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하나님께서 파신 자신들을 구원해 주시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팔렸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다시 되찾아지게 될 것입니다.

NKJV STUDY BI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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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하나님, 오늘의 나(시편44:1~26)

제목: 어제의 하나님, 오늘의 나

본문: 시편 44편

설교자: 최종혁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 그 하나님은 살아서 역사하신다. 전능하시고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 이 땅의 어떤 것도 하나님의 주권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선하시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을 믿고 산다.

우리는 어떻게 이것을 믿고 살까? 궁극적으로는 성령님의 사역을 통해 우리는 믿음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성령님은 두 가지를 통해 그 믿음의 기초를 놓으신다. 객관적인 기초와 주관적인 기초다. 객관적인 기초는 바로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드러내신 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그런 분이시란 것을 객관적으로 알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그렇다고 믿을 수 있다.

주관적인 기초는 우리의 경험이다. 경험은 다시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다른 사람의 경험과 내 경험이다. 성경의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간증)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정말 선하신 주권자라는 것을 알 수 있고 믿을 수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 가장 가깝게 그리고 가장 힘있게 와닿는 것은 바로 나의 경험이다. 내가 그런 하나님을 경험하면 우리의 믿음은 더욱 큰 확신으로 이어진다.

이런 기초 위에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 그리고 이 기초는 우리가 성경을 알면 알수록, 삶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면 할수록 더욱 견고해진다. 그 말은 우리의 믿음이 더욱 큰 확신으로 자라간다는 말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이 기대하는 삶이다. 성경의 하나님을 믿고 경험하며 믿음이 자라가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삶은 기대대로 되지만은 않는다. 그럴 때 우리는 당황한다. 어찌할 바를 모르기도 한다. 내가 믿는 하나님과 이 상황을 어떻게 함께 이해할 수 있는지 모르겠을 때가 있다. 우리의 기대와는 다른 상황이 펼쳐질 때 그렇고, 그런 상황이 길게 이어질 때 그렇다.

시편 44편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그런 당혹스러움을 볼 수 있다. 이 시편이 역사적으로 어느 시점을 말하고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상황은 분명하다. 그들은 전쟁에서의 패배를 경험하고 있는데 그 패배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들이 배운 하나님과 이 상황을 도저히 함께 이해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우리에게도 그런 상황들이 있고 그럴 때 우리는 다양하게 반응한다. 변하지 않는 믿음을 보이기도 하지만 분노하기도 하고 깊은 슬픔에 잠기기도 한다. 포기하고 좌절하기도 한다. 이 시편에서 보여지는 반응은 ‘당황’에 가장 가까운 것 같다. 그래서 이 시편은 그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길게 기록한 후 하나님께 묻는다. 23-24절.

우리에게도 이런 상황이 있을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 말씀을 통해 살펴보자.

I. 과거의 사실(1-3절)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 조상들의 날 곧 옛날에 행하신 일을 그들이 우리에게 일러 주매 우리가 우리 귀로 들었나이다”(1절)

우리 조상들의 날, 옛날, 그리고 귀로 들었다는 표현들은 이들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직접 경험한 세대는 아님을 분명히 한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전해들은 세대의 사람들이다.

어른들은 젊은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경험한 것을 이야기해주기를 좋아한다. 사실 나이를 떠나 특별한 경험을 한 사람들은 그 경험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고 싶어한다. 특히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계속해서 자녀들에게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말해줄 것을 명하셨다. 유월절을 제정하시면서 하나님은 그 의식을 통해 자녀들에게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을 거대한 제국인 애굽으로부터 구원하셨는지를 전해주라고 명하셨다. 초막절은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을 인도하고 보호하셨는지를 계속해서 기억하게 하는 절기였다. 모세의 마지막 설교인 신명기의 핵심도 하나님께서 어떻게 너희를 사랑하셨고 보호하셨는지를 기억하고 그 하나님만 섬기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모세는 이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있도록 글로 기록해 두었다.

이 시편을 기록한 때는 그 때로부터는 많은 시간이 지났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은 하나님께서 하신 놀라운 일들을 들었다. 그 일들은 잊을 수 없는 일들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특히 한가지 역사를 주목한다.

“주께서 주의 손으로 뭇 백성을 내쫓으시고 우리 조상들을 이 땅에 뿌리 박게 하시며 주께서 다른 민족들은 고달프게 하시고 우리 조상들은 번성하게 하셨나이다”(2절)

이것은 분명 여호수아의 지도 아래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그 땅에 정착한 역사에 대한 표현이다. 단순히 그런 영광스런 역사만 다시 생각해보는 것은 아니다. 이 시편의 기자는 그 역사의 주체가 누구였는지를 강조한다. 우리가 그 땅의 백성을 쫓아내어 정착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주께서 주의 손으로 그 모든 일을 이루셨다고 말한다. 이것은 3절에서 대조를 통해 더욱 분명하게 강조된다.

“그들이 자기 칼로 땅을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그들의 팔이 그들을 구원함도 아니라 오직 주의 오른손과 주의 팔과 주의 얼굴의 빛으로 하셨으니 주께서 그들을 기뻐하신 까닭이니이다”(3절)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이스라엘 민족은 전쟁을 했다. 그들의 팔로 칼을 들고 싸우고 땅을 차지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들이 땅을 차지할 수 있었던 근원적 힘은 다른 곳에 있었다. 바로 하나님이시다. 그들이 가나안 사람들보다 더 강하고 지혜로워서 그 땅을 차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 땅을 주셨기 때문에 그들은 땅을 차지하고 그 땅에서 번성할 수 있었다.

신명기에서 모세는 이것을 계속해서 강조하였다.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보다 더 크고 강하거나 혹은 더 의롭고 거룩해서 그 땅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가장 작고 목이 곧은 백성이었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으셨다면 가나안 땅은 그들이 처음부터 넘볼 수 있는 땅이 아니었다.

가나안 땅을 정복할 때 있었던 처음 두 전쟁이 이것을 증명한다. 여리고 성을 정복한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해서 우리는 그냥 그러려니하고 읽을 수 있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 상황을 그려보면 우리 입장에서 볼 때 말도 안되는 전쟁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여리고와의 전쟁을 앞두고 여리고 앞인 길갈에 진를 치고는 단체로 할례를 행했다(수 5장). 적군을 눈 앞에 두고 군사들을 전쟁 불능의 상태로 만든 것이다. 여리고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면 단번에 몰살 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할례를 행했다. 하나님께서 명하셨기 때문이다. 그들이 지금 언약의 백성으로서 이 전쟁을 수행해야 하는데 언약의 표인 할례를 받지 않고서 그렇게 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싸우기 위한 최선의 컨디션을 유지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었다. 왜냐면 그 하나님께서 그 땅을 그들에게 주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이 여리고 성벽을 무너뜨리는 전략도 이해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실제로 하루하루 성을 빙글빙글 돌았던 이스라엘 사람들과 그것을 보고 있었을 여리고 사람들을 생각해 보라. 얼마나 이상한 상황인가? 여리고는 큰 전쟁이 일어날 것을 대비하고 있었다. 성문을 굳게 닫고 아무도 출입하지 않았다. 애굽이라는 대국조차 붙잡지 못한 이스라엘 민족이 여리고 건너편에 있던 왕들을 무너뜨리고 이제 자신들을 무너뜨리기 위해 오고 있는 상황이었다. 엄청난 무기, 병력, 말들이 들이 닥칠 것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와서 한 일은 성벽 주위를 한바퀴 도는 것 뿐이었다. 첫날은 그러려니 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매일 그렇게 하는 것을 보며 여리고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직접 성벽을 돌기만 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게 무슨 전쟁인가 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어떻게 저 견고한 성을 함락시킬 수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을 때, 여리고 성은 무너졌고 그 성을 차지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다.

이어진 아이성의 함락은 전혀 반대의 경우를 보여준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을 때 작은 아이성을 함락시킬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 가운데 있던 죄를 제거하고 다시 말씀에 순종했을때, 아이성도 얻을 수 있었다. 이 두 사건은 정복 전쟁의 초기에 이들의 전쟁이 어떤 양상으로 진행될지를 보여주었다. 이후의 전쟁에서 이들은 계속해서 성벽을 돌지 않았다. 그들의 칼과 팔로 싸움을 싸웠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것이 그들에게 승리를 가져다 준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승리를 주셨다.

그들의 칼로 땅을 차지한 것도 아니고 그들의 팔로 스스로를 구원한 것도 아니었다. 하나님이 하셨다. 주의 오른손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을, 주의 팔은 하나님의 능력을, 주의 얼굴의 빛은 하나님의 은혜를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여서 은혜를 베푸셨고 그분의 능력으로 그들이 승리하였다.

하나님은 왜 그들에게 그렇게 하셨을까?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다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기뻐하셨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성경에서 때로 이 표현은 대상의 어떤 무언가가 기쁨을 주었다는 의미도 되지만 여기서는 아니다. 여기서는 그저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주권적인 선택을 의미한다.

신 7:7-8 [7]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8]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또는 너희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삼상 12:22 여호와께서는 너희를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것을 기뻐하셨으므로 여호와께서는 그의 크신 이름을 위해서라도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요

말 1:2-3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3]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폐하게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이리들에게 넘겼느니라

성경을 아무리 봐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신 이유를 이스라엘 자체에게서 찾을 수는 없다. 유대인들이 머리가 좋아서도 아니고 그들이 더 하나님께 순종한 겸손한 사람들이어서도 아니다. 단순히 하나님께서 그들 사랑하기를 선택하셨다. 하나님의 주권에 따라 그렇게 하셨다. 무엇도 이 주권적인 선택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에 따라 하나님은 그들에게 언약을 베푸셨고 언약에 성실한 사랑을 베푸셨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과거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전쟁의 승패는 군사력이나 지략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어떤 땅에서 내쫓으실 수도 있고 누군가를 어떤 땅에 뿌리 박게 하실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편에 서는 것이 중요하다. 나를 의지하거나 다른 사람, 다른 무엇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자들이 승리한다. 이것이 그들의 조상들의 경험을 통해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사실이고 이 사실은 현재의 기대로 이어진다.

II. 현재의 기대(4-8절)

현재의 기대는 당연히 하나님께서 함께하셔서 승리할 것이라는 기대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왕이시니 야곱에게 구원을 베푸소서”(4절)

먼저 시편의 기자는 하나님을 “나의 왕”으로 부른다. 단순히 과거 조상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오늘 나의 왕으로 말하는 것이다. 과거에만 주권적으로 일하셨던 하나님이 아니라 지금도 왕으로 일하시는 분이심을 인정하고 그분께 구원의 은혜를 구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의 구원은 5절에서 보는 것처럼 전쟁에서의 승리를 의미한다.

“우리가 주를 의지하여 우리 대적을 누르고 우리를 치러 일어나는 자를 주의 이름으로 밟으리이다”(5절)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푸시면 하나님을 의지하여 대적을 누르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들을 정복할 것을 기대한다. 그들 조상의 경험을 통해 배운 것처럼 이들도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할 것이다.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 칼이 나를 구원하지 못하리이다”(6절)

지금 이렇게 담대하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이들이 조상들을 통해 들은 것이 있어서 그렇고 또 하나는 이들 자신의 경험때문이다.

“오직 주께서 우리를 우리 원수들에게서 구원하시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로 수치를 당하게 하셨나이다”(7절)

이들도 구원하고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했다. 하나님을 믿고 신뢰할 수 있는 충분한 기초를 가지고 있던 것이다. 기록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알았고 조상들을 통해 전해진 간증을 통해 하나님을 믿었다. 그리고 자기 자신들의 경험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이들이 하나님을 의지할 기초는 탄탄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주신 승리에 대한 이들의 반응도 보라.

“우리가 종일 하나님을 자랑하였나이다”(8절)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자신들이 한 일인 것처럼 교만해지지 않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을 자랑했다. 그래서 지금 이들이 기대하고 있는 것도 그것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푸시면 하나님을 자랑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에 영원히 감사하리이다”

계속해서 하나님께 감사하길 원한다. 하나님을 종일 자랑하고 영원히 감사하기 원한다는 말은 과거의 하나님이 오늘도 동일하게 승리하게 하시고 또한 앞으로 영원히 그렇게 하시기를 기대하며 그 하나님을 경험한 자로서 하나님을 예배하기를 원한다는 말이다. 참 건강한 기대다. 이 기대에 무엇하나 잘못된 것은 없다.

그런데 현재의 사실은 그 기대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이제는”

아주 강한 대조의 표현이다. 그 기대와 현재 마주치는 사실은 너무나 다르다.

III. 현재의 사실(9-22절)

전쟁에서 패배했다(10-12)

당연히 승리를 기대했는데 패배가 찾아왔다. 대적이 승리했고 우리는 노략당했다. 죽임을 당했고 포로로 잡혀갔다. 마치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헐값에 팔아버리는 장사꾼같았다. 아무런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아무런 관심도 없는 물건을 파는 사람처럼 자기 백성을 전쟁에서 패하게 놔두신 것이다.

수치를 당했다(13-16)

그로인해 이스라엘은 수치를 당했다. 하나님으로 인해 자랑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사람들의 이야기 거리가 되었다.

시편 기자는 이 모든 일의 원인을 9절에서 말한다.

“그러나 이제는 주께서 우리를 버려 욕을 당하게 하시고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9절)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실 때 그들의 조상들이 땅을 차지했고 자신들도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을 수 있었는데 지금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는 것이 문제였다. 그럼, 질문은 왜 과거에 함께 하셨던 하나님께서 지금은 함께 하시지 않느냐는 것이다.

혹시 하나님이 함께 하기는 하시는데 과거처럼 전능하지 않으신 것은 아닐까? 그렇지는 않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는 분이시라고 성경은 분명하게 말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존재나 속성이 변하지 않고 언약에 있어서도 뜻을 돌이키지 않으신다.

그렇다면 다른 쉬운 대답은 죄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죄 가운데 있고 회개하지 않고 있었다면 지금의 상황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욥의 친구들도 욥에게 와서 했던 말이 그것이었다. 그런데 욥도 그랬던 여기의 상황도 그렇지는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님께 신실했다(17-22)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임하였으나 우리가 주를 잊지 아니하며 주의 언약을 어기지 아니하였나이다”(17절)

“우리의 마음은 위축되지 아니하고 우리 걸음도 주의 길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나”(18절)

언약에 따라 성실하게 행했다.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지 않았다. 하나님에게서 마음을 돌이키지 않았고 따라서 그들의 삶도 하나님의 길을 떠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 넣으셨다(19절).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답답한 마음이 20절과 21절에 기록되어 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잊어버렸거나 우리 손을 이방 신에게 향하여 폈더면”(20절)

“하나님이 이를 알아내지 아니하셨으리이까 무릇 주는 마음의 비밀을 아시나이다”(21절)

우리가 혹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하고 다른 신이라도 의지하려고 했던 것이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다 아시고 이미 드러내시지 않으셨겠냐는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 않으셨으니 우리의 무고함도 확실하다는 논리다.

그렇다면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왜 하나님은 지금 나에게 승리를 주지 않으실까?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22절)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다.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이런 상황을 허락하셨다는 것이다. 그 목적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욥에게 하나님께서 결국 그 상황을 설명해주지 않으셨던것처럼 이들도 하나님께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이런 상황을 허락하셨는지 알 수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지금 이 상황이 주를 위한 상황이고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는 결론이다. 시편 44편에서 “주께서”라는 말이 얼마나 많이 나오는지 보라.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면 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도 하나님의 손 아래 있고 하나님께서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계시다고 믿을 수 있다.

이런 확신 속에서 이 시편의 기자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고통을 언급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한다. – 23-26절

당연히 하나님이 주무시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것도 안다. 잊지 않으셨고 관심을 끊지도 않으셨다. 이 모든 일이 주님의 특별한 목적이 있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여전히 하나님에게서 마음을 돌리지 않을 것이고 하나님을 신뢰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고난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지는 않는다. 여전히 이 고난은 당황스럽고 이해하기 힘들다. 견디기도 힘들다. 그래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호소한다. 하나님의 헤세드로 구원하여주시기를 구한다. 결국 이 모든 것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도전

어제의 하나님은 오늘의 나에게 의미가 있는가? 어제의 하나님이 그저 어제라는 전설 속에만 계신 분이라면 오늘의 나하고 별 상관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제의 하나님이 오늘도 살아계시고 동일하시다면 우리는 이 시편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은 기대를 가질 수 있다. 또한 그 기대와 다른 상황 속에서도 참고 견디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이런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섭리 속에서 여러 고난이 있을 것을 말하며 시편 44편 22절의 말씀을 인용했다. 그런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한걸음 더 나아가 바울은 이렇게 결론지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7).

어제의 하나님은 오늘의 나에게 이런 확신을 주신다. 말씀을 통해, 다른 성도의 간증을 통해, 그리고 나의 경험을 통해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확신은 자란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기대대로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 감사할 수 있고 그렇지 않을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계속해서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결국 우리는 넉넉히 이길 것이다.

스펄젼의 시편 44편 강해

스펄젼의 시편 44편 강해

[개 요]

주제

이 시편에는 “고라 자손의 마스길, 영장으로 한 노래”라는 머리말이 붙어 있다. 이 머리말은 42편의 머리말과 유사하다. 이 점이 저자의 동일성을 입증하는 증거가 되지는 않지만, 그럴 가능성을 상당히 높여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충분히 다윗의 저작으로 간주될 수 있는 시편들을 굳이 다른 저자의 작품으로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나는 이 신성한 노래를 위대한 시편 작가인 다윗 이외의 다른 어느 작가의 작품으로 돌리기를 꺼려한다. 한편, 이 시편이 그의 생애 중 어느 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지에 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으므로, 우리는 이를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환난에 직면한 이스라엘의 어느 애국자가, 믿음과 슬픔이 교차하는 가운데 조국의 옛적 영광과 현재의 비통한 모습을 비교하면서 노래하고 있다. 기독교회와 관련하여 생각하자면, 이 노래는 교회가 특히 심각한 핍박 상태에 있을 때 가장 잘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에 나오는 구절들은, 피드먼트(Piedmont) 산악 지대 사이에서 발생한 개신교도들에게 가해진 대학살과 관련한 밀턴(Milton)의 유명한 시가를 상기시켜 준다.

이 노래는 은총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고라 자손들의 음성으로 부르기에 적합하였고, 그들에게나 다른 모든 이들에게 주는 교훈으로 가득하다. 그래서 마스길이라는 머리말이 붙었다.

구성

이 시는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1-3절 이스라엘을 위해 베푸신 여호와의 강력한 사역들을 회고하며,

4-8절 그것들을 기억하며 여호와에 대한 믿음을 표현하는 내용이다.

9-16절 불평이 나타나며,

17-22절 하나님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고 있다.

23-26절 여호와의 개입을 호소하는 내용이다.

[강 해]

1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 열조의 날 곧 옛날에 행하신 일을 저희가 우리에게 이르매 우리 귀로 들었나이다

2주께서 주의 손으로 열방을 쫓으시고 열조를 심으시며 주께서 민족들은 괴롭게 하시고 열조는 번성케 하셨나이다

3저희가 자기 칼로 땅을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저희 팔이 저희를 구원함도 아니라 오직 주의 오른손과 팔과 얼굴의 빛으로 하셨으니 주께서 저희를 기뻐하신 연고니이다

1절. “하나님이여······우리 귀로 들었나이다.” 주의 강하신 행위들은 우리 대화의 흔한 주제가 되었나이다. 우리는 책을 통해 주의 유명한 행사들을 읽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그것들을 듣습니다. 경건한 이스라엘인들을 통해 그 민족의 전기가 매우 상세하고도 정확하게 구전으로 보존되었다. 이러한 보존 양식 및 전달의 역사에는 나름대로의 문제점들이 있겠지만, 그것을 전해 듣는 자들의 마음속에 다른 무엇보다 더 생생한 감명을 준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귀로 듣는 것은 눈으로 읽는 것보다 더 생생한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이 사실에 주목해야 하며, 우리 주님의 복음을 만방에 외칠 기회를 잡아야 한다. 왜냐하면 목소리로 외치는 것이 가장 효력 있는 의사소통 방법이기 때문이다. “우리 귀로 들었나이다”라는 표현은, 청종하는 마음의 기쁨, 간절한 관심, 그리고 영혼을 뒤흔드는, 마치 소설 같은 이야기에 대한 생생한 감동 등을 암시할 수 있다. 귀가 있지만 듣지 못하는 자들이 너무나 많다.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자들은 복이 있다.

“우리 열조의 날 곧 옛날에 행하신 일.” 선조들은 자신이 직접 목격한 일들을 후세에 전하여 전승으로 이어지게 했다. 선조로부터 후손에게 전해진 역사의 초점이 하나님의 사역이었음에 주목하라. 그것은 역사의 핵심이다. 따라서 여호와의 사역에 문외한인 사람은 그 누구도 역사를 올바로 기록할 수 없다. 변화무쌍한 사건들 위에 찍힌 여호와의 발자취를 살피는 것은, 전쟁과 역병과 기근의 회오리바람을 타고 계시는 그분을 포착하는 것은,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 백성을 위한 그분의 변함없으신 배려를 파악하는 것은 흥겨운 일이다. 역사를 통해 하나님을 발견하도록 배운 자들은 자기 선조들로부터 귀한 가르침을 받아왔다. 신앙인 부모 밑에서 자라는 자녀가 그토록 거룩한 방법에 대해 무지해서는 안 된다. 이스라엘처럼 자기 나라의 역사를 통해 소중한 가르침을 받은 민족은, 시련의 때에 하나님께 도움을 호소하기 위한 근거를 항상 제시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결코 변함이 없으신 분이 장래에도 분명 은총을 베푸실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지난 경험에 입각한 전승들은 현재적인 도움을 위해 강력한 호소력을 발휘한다.

“우리 열조······저희가 우리에게 이르매.” 그들에게는 열조보다 더 나은 자료 제공자들이 있을 수 없었다. 선생들도 있었겠지만, 경건한 아버지들은 자기 자녀들에게 최선의 교사 노릇을 하였고, 그들은 그 신성한 의무에 태만할 수가 없었다. 신학 교수들의 자녀들 중에 자기 아버지로부터 들은 바를 하나님 앞에서 담대히 선언할 수 있는 자들이 극히 드물다는 사실은 두려워해야 할 일이다. 만일 아버지가 자기 자식들에게 신앙적으로 벙어리가 된다면, 그 자녀들의 마음이 죄에 사로잡혀 있다고 해서 놀랄 필요가 있겠는가? 자주 독립국의 백성들이 난롯가에 모여서 “용맹스러웠던 옛적의” 자기 조상들에 대한 무용담을 말하는 것을 즐기듯이, 구약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은 여호와 하나님의 놀라운 행사들을 회고함으로써 식탁에 둘러앉은 가족을 즐겁게 해주었다. 신앙적인 대화를 굳이 지루하게 나눌 필요는 없다. 본문의 경우에서는, 이야기하는 자의 견해보다는 사실 그 자체를 다루었다면, 그것이 지루해질 리가 없었을 것이다.

2절. “주께서 주의 손으로 열방을 쫓으시고.” 가나안 족속들이 약속의 땅에서 쫓겨난 사실이 여기서 상기되고 있다. 수효가 많고, 호전적이며, 몸집이 거대하고 용감하며, 또한 굳건한 체제와 강한 요새를 갖추었던 민족이 그들보다 훨신 연약한 이스라엘 민족에 의해 쫓겨난 것은, 여호와께서 그들에 대항하여 싸우셨기 때문이다. 성경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는 바에 의하면, 하나님이 역병(이로 말미암아 땅이 그곳에 거하는 자들을 삼켰다)과 말벌을 보내사 가나안인들을 치게 하셨으며, 다른 방편들을 통해 그들을 의기소침하게 만드셨다. 그러므로 여호수아가 쉽게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우상 숭배하는 민족에 대해 미리 앞서 역사하심으로 인한 결과였다.

“열조를 심으시며.” 예전에 이방 민족의 차지였던 곳에 이스라엘 민족이 심기웠다.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이 쫓겨난 자리에 에브라임 지파와 유다 지파가 자리를 잡았다. 위대한 이적을 행하시는 분이 바산의 참나무 뿌리를 찢으시고 그 대신에 거기다 자신의 택하신 바 “아름다운 포도원”을 심으셨다(사 27:2).

“주께서 민족들은 괴롭게 하시고.” 정죄받은 민족들은 징벌과 역병으로 고통을 당했고, 불과 칼로써 죽음을 당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의 대적들은 모두 추방당하여 멀리 쫓겨났다.

“열조는 번성케 하셨나이다.” 대적들을 환난으로 몰아넣으신 분이 자기 백성에게는 미소를 지으셨다. 그는 불경건한 민족들에게 보복하셨지만, 택함받은 지파들을 위해서는 긍휼을 베푸셨다. 공의와 긍휼이 나란히 위치한 모습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진노의 밤에 긍휼의 별이 빛을 비춘다! 하나님의 위대하신 사랑 곁에 그분의 위대하신 의분이 함께 짝을 이루고 있다는 것은 엄숙한 사실이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긍휼의 무게는 허다한 아모리 족속과 헷 족속을 멸하셨던 그 무서운 보복과 서로 균형을 이룬다. 하늘이 높은 만큼 지옥은 깊고, 도벳의 화염은 천상의 영광스러운 광채만큼이나 영원하다. 우리는 곤경의 때에 시들어가는 믿음을 회복하기 위해, 긍휼과 공의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크신 권능을 기억해야 한다.

3절. “저희가 자기 칼로 땅을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자기 백성을 인도하신 여호와만이 높임을 받으셔야 한다. 그는 구별하시는 은총을 통해 가나안과 이스라엘을 따로 구분하셨고, 따라서 그분의 권능으로써 택함받은 백성을 세우신 반면에 대적들은 멸하셨다. 각 지파들은 자신에게 할당된 땅을 차지하기 위해 싸웠지만, 그들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여호와의 도우심 덕분이었다. 이스라엘의 전사들은 기민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의 용기는 하나님의 신비하신 개입에 비하면 부수적인 것에 불과했다. 그 신비하신 개입으로 말미암아 여리고성이 무너졌고 이방 민족들의 마음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의기소침해졌다. 무장한 모든 병사들의 노력도 간과되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지원이 없었다면 그 모든 노력도 아무 소용이 없었을 것이므로, 모든 영광은 여호와께 돌려져야 한다. 이스라엘의 광야 여정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관한 멋진 비유로 간주될 수 있다. 사람들은 기도나 회개 등이 없이는 구원받을 수가 없다. 그러나 이것들 중 그 무엇도 그 자체로써 사람을 구원하지는 못한다. 이스라엘 군대가 없었다면 가나안은 정복되지 않았겠지만, 가나안이 그들에 의해 정복된 것이 아니라는 말도 사실이다. 정복자는 여호와셨고, 이스라엘 백성은 단지 그분의 도구로 사용되었을 뿐이다.

“저희 팔이 저희를 구원함도 아니라.” 그들은 기념할 만한 승리의 원인을 스스로에게 돌릴 수 없었다. 해와 달을 지으사 그들을 위해 존속하게 하신 분만이 그들의 찬양을 받기에 합당했다. 그들의 무기와 그들 자신에 대해 공히 부정적인 어투로 언급되었는데, 이는 사람들이 자신의 성공을 이차적인 원인 탓으로 돌리기 쉽다는 점을 우리에게 상기시키기 위함인 듯하다.

“오직 주의 오른손과 팔과 얼굴의 빛으로 하셨으니.” 하나님의 손이 그들을 위해 싸웠고, 하나님의 팔이 그 어떤 인간의 힘보다 강력하게 그들을 붙들었으며, 또한 하나님의 미소가 그들에게 불굴의 용기를 북돋워주었다. 그와 같이 삼중의 도움을 지닌 자는 땅과 사망과 지옥이 함께 일어나 대적한다 할지라도 승리할 수밖에 없다. 아낙 자손들의 거구나 쇠로 만든 그들의 전차들도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일어나셨을 때에는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했다.

“주께서 저희를 기뻐하신 연고니이다.” 은총의 모든 강물이 흘러나오는 원천이 여기에 제시된다. 자신의 백성을 향하신 여호와의 기쁨, 그분의 각별한 사랑, 그분의 특별한 관심-이것이 바로 은혜로우신 섭리의 바퀴를 움직이게 하는 주요 동인이다. 이스라엘은 택함받은 민족이었으므로, 그들에게는 승리가 주어졌고 그들의 원수들은 쫓겨났다. 신자들은 택함받은 백성이므로, 영적 축복과 승리를 누린다. 신자들 자신에게는 성공을 보장해 줄 만한 것이 전혀 없으며, 오직 여호와의 은총으로써만 그렇게 할 수 있다.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최종적인 영광에 대한 우리의 소망은 우리 자신 속에 있는 그 무엇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주권적이고도 거저 베푸시는 은총에 달려 있다.

4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왕이시니 야곱에게 구원을 베푸소서

5우리가 주를 의지하여 우리 대적을 누르고 우리를 치려 일어나는 자를 주의 이름으로 밟으리이다

6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 칼도 나를 구원치 못하리이다

7오직 주께서 우리 대적에게서 구원하시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로 수치를 당케 하셨나이다

8우리가 종일 하나님으로 자랑하였나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영영히 감사하리이다(셀라).

4절.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왕이시니.” 주의 권능과 은혜를 잘 아는 까닭에 내 마음은 주를 군주로 모시는 것을 기뻐하나이다. 강한 자들 중에 누가 주만큼 탁월하겠나이까? 그런즉 내가 누구에게 경의를 표하거나 도움을 요청해야 하겠나이까? 옛적 내 선조들의 하나님이신 주께서 내 영혼의 군주요 영주이십니다.

“야곱에게 구원을 베푸소서.” 백성이 그들의 왕 이외에 누구를 바라보겠는가? 직권을 이용하여 백성을 위해 싸우는 자가 바로 왕이다. 우리의 왕께서는 우리의 대적들을 그 얼마나 쉽게 물리치시는가! 오 여호와, 왕 중 왕이시여, 주께서는 주의 백성을 너무도 쉽게 구원하실 수가 있나이다. 주의 말씀 한마디로도 가능하오니 명령만 내리소서. 그리하면 핍박당하는 주의 백성이 풀려날 것입니다. 야곱의 긴 생애는 온통 시련과 구원의 체험으로 가득했으며, 그의 후손들은 여기서 그의 이름으로 불리우고 있다. 이는 마치 그들의 경험이 그 위대한 선조인 야곱의 그것과 유사하다는 점을 나타내기 위함인 것 같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축복을 얻고자 하는 자는 야곱의 슬픔에도 참예해야 한다. 본절에는 개인적인 선언과 중보 기도가 함께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에 대한 개인적인 관심을 가장 확실하게 표명하는 자들이 기도를 가장 잘 할 수 있으며, 여호와를 자신의 하나님으로 가장 철저하게 확신하는 자들이 시련에 처한 다른 신자들을 위해 맨 먼저 간구할 수 있다.

5절. “우리가 주를 의지하여 우리 대적을 누르고.” 전투 거리가 매우 가까워져서, 활도 아무런 소용이 없고 칼도 쓸모 없게 되었다. 이제 단검을 빼어 들고 서로 노려보며 주먹을 휘두르고 밀고 당기면서 씨름하는 상황이었다. 야곱의 후손은 야곱의 씨름을 재연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믿음은 어떤 결과를 야기했겠는가? 대적과 마주하여 계속 믿음을 붙들 수 있었을까? 그렇다. 분명코 믿음은 승리를 보장해 준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도우시는 한, 믿음은 막판에 힘을 발휘하여 대적들을 모조리 넘어뜨리기 때문이다.

“우리를 치려 일어나는 자를 주의 이름으로 밟으리이다.” 병기를 대신하여 여호와의 이름이 효력을 발휘하여, 그것을 사용하는 자들로 하여금 담대하게 대적들을 밟아 뭉갤 수 있게 해주었다. 하나님과의 연합과 교제를 통해 성도는 놀라운 일들을 행한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신다면, 누가 우리를 대적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신자들의 모든 승리가 “주를 의지함과”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는 데에 주목하기 바란다. 우리 자신의 힘을 믿고 전투에 나서다가 가장 수치스러운 패배를 당하지 않도록, 이 사실을 결코 잊지 말자. 하지만, 불신이라고 하는 위험한 죄에 빠지지 말자. 왜냐하면 여호와께서는 우리 중 가장 연약한 자에게도 긴급한 상황에 대처할 능력을 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오늘은 우리가 양처럼 겁 많고 방어할 수 없는 상태라고 하더라도,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권능으로 우리를 황소처럼 강하게 만드실 수 있으며, 우리로 하여금 외뿔 들소처럼 돌진하게 하실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를 대적하여 일어난 자들은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철저한 파멸을 당하고 말 것이다. 마치 걸음마를 하다가 넘어지는 아기들처럼 자기 자신으로서는 제대로 서 있을 수조차 없는 자들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대적들을 물리치며 그 발로 대적들의 목을 밟는다. 그리스도인은 마귀의 계교에 담대히 맞서 싸워 그를 물리쳐야 한다.

6절.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 칼도 나를 구원치 못하리이다.”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주의 인도하에 이방 세력을 밀어내고서 그 땅을 차지했지만, 그것은 그들이 무기를 잘 쓰거나 그들의 무용이 탁월해서가 아니라 오직 주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가능한 일이었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그토록 자랑하는 외부적인 도움을 의뢰하려는 마음을 영원히 몰아낼 것이며, 오직 자신을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복종시키겠나이다. 활은 사울왕에 의해 처음 도입된 이래로 이스라엘 초기 역사에 있어 매우 무서운 무기로 간주되었지만, 여기서는 칼과 더불어 한 켠으로 밀쳐지고 있다. 이는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여지를 남기기 위해서이다. 일인칭으로 표현된 본절은, 자신의 의와 힘을 포기하고 오직 주 예수님만 바라보는 모든 신자들의 신앙 고백으로서 합당하다. 이와 같은 자기 포기를 견지하게 해주는 은총을 사모하라. 왜냐하면, 우리의 교만한 본성은 피조물의 허위적이며 우쭐거리는 힘을 신뢰하기가 너무도 쉽기 때문이다. 육신의 팔이여, 내가 어찌 너를 신뢰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내가 사람을 의지하는 자들에게 임하는 저주를 나 자신에게 임하게 하겠는가?

7절. “오직 주께서 우리를 우리 대적에게서 구원하시고.” 하나님이여, 지난날을 돌이켜 보면 우리의 구원은 모두 주의 덕분입니다. 주는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으셨나이다. 주께서는 우리를 모든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셨나이다.

“우리를 미워하는 자로 수치를 당케 하셨나이다.” 주의 구원의 손등으로 그들을 때리사 그들로 하여금 수치스러워 얼굴을 가리게 하셨나이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보잘것없는 존재로 여겼지만, 주께서는 그들을 파멸케 하사 그들로 하여금 그토록 보잘것없다고 생각한 자들에 의해 멸망당하는 수치를 당케 하셨다. 자기 백성을 축복하시고 대적들을 쳐부수시는 하나님의 이중 사역은 어느 시대에나 변함이 없다.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갈 때 바로의 군대는 수장당한다. 이스라엘 지파들이 즐거워할 때 아말렉은 격파당한다. 야곱의 자손들이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쉬는 동안 이교도들은 자신의 거주지로부터 쫓겨난다.

8절. “우리가 종일 하나님으로 자랑하였나이다.” 하나님의 강하신 사역을 회고해 보면, 우리는 그분으로 자랑할 이유들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그 얼마나 복된 자랑인가! 이러한 자랑은 유일하게 거부감을 주지 않는 것이다. 여호와 앞에 쌓지 아니한 다른 모든 만나는 벌레먹고 악취가 나며, 여호와 안에서 이처럼 영광을 얻는 일 이외의 다른 모든 자랑은 역겹다. 여호와 안에서 하는 자랑은 칭찬할 만하며 즐거운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영영히 감사하리이다.” 찬양은 영속적이어야 한다. 설령 여호와께서 새로운 사랑을 베푸시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자기 백성을 위해 이미 행하신 일들로 인해 그분은 찬양을 받으심이 마땅하다. 우리를 택하시고, 우리를 아들로 삼고자 예정하시며, 피의 값을 지불하고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또한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우리를 부요케 하신 그 영원한 사랑을 기억할 때, 우리는 그분께 늘 찬양을 드릴 수밖에 없다.

“셀라.” 가장 높은 어조로부터 가장 낮은 어조로 이제 막 전환되는 곳에서, 내용의 흐름을 적절하게 잠시 중단시키고 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미리암의 탬버린 소리를 듣지 않고 라헬의 울음 소리를 듣게 된다.

9그러나 이제는 주께서 우리를 버려 욕을 당케 하시고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

10주께서 우리를 대적에게서 돌아서게 하시니 우리를 미워하는 자가 자기를 위하여 탈취하였나이다

11주께서 우리로 먹힐 양 같게 하시고 열방 중에 흩으셨나이다

12주께서 주의 백성을 무료로 파심이여 저희 값으로 이익을 얻지 못하셨나이다

13주께서 우리로 이웃에게 욕을 당케 하시니 둘러 있는 자가 조소하고 조롱하나이다

14주께서 우리로 열방 중에 말거리가 되게 하시며 민족 중에서 머리 흔듦을 당케 하셨나이다

15나의 능욕이 종일 내 앞에 있으며 수치가 내 얼굴을 덮었으니

16나를 비방하고 후욕하는 소리를 인함이요 나의 원수와 보수자의 연고니이다

9절. “그러나 이제는 주께서 우리를 버려 욕을 당케 하시고.” 여기서 애국 시인은 자기 민족의 지난날의 영광과 현재의 서글프고 낙망어린 상황을 대조하기 시작한다. 그는 현재의 비참한 상황을 어떤 인간적인 동맹의 상실이나 전쟁의 상처 탓으로 돌리지 않고, 전적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떠나신 때문이라고 본다. 그가 보기에는, 여호와께서 자기 민족에 대해 넌더리가 나사 그들을 혐오하여 저버리신 듯했다. 이는 마치 사람들이 불결한 옷을 보기 싫어 치워버리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불쾌감을 보이기 위해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이방 세력에게 조롱당하게 하셨다. 그는 이방 세력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큰 군대를 물리치게 함으로써 그들을 치욕스럽게 하신 것이다. 여호와의 성령의 권능이 어느 교회를 떠날 때, 그 교회는 실로 심한 수치와 슬픔을 당하기 마련이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최종적으로 그리고 전적으로 버려두지는 않으실 것이다. 하지만 많은 교회들이 죄로 말미암아 실패와 수치를 당해 왔으며, 따라서 모든 교회들은 동일한 곤경에 처해지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궁핍과 곤경이 한 민족을 수치스럽게 만들지는 않지만, 여호와의 부재는 교회로부터 모든 고귀한 것들을 앗아간다.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 만일 여호와께서 지휘하지 않으신다면, 크고 강한 부대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나님의 팔이 계시되지 않는다면, 가장 열성적인 일꾼들의 합심된 노력도 헛되다. 우리는 목회, 주일 학교, 선교 사역, 심방, 그리고 가두 전도 등이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 진행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할 것이다. 만일 우리의 위대하신 조력자께서 우리와 함께 나아가지 않으신다면, 실패는 불가피하다.

10절. “주께서 우리를 대적에게서 돌아서게 하시니.” 여호와께서 자신을 떠나셨다고 하는 굴욕적인 자각은 사람들을 소심하게 만든다. 여호와께서 진두에 서주시지 않는 싸움은 도망으로써 막을 내린다.

“우리를 미워하는 자가 자기를 위하여 탈취하였나이다.” 패배와 도주 후에는 약탈이 시작된다. 패배당하고 만 가련한 민족은 정복당한 데 따른 무서운 대가를 지불했다. 정복당한 땅은 약탈과 살인으로 황폐화되었으며, 침입자들은 싣고 갈 수 있는 값진 것들을 모조리 빼앗았다. 영적 체험을 통해 우리는 대적들에 의해 어떤 것들을 강탈당하게 되는지를 알고 있다. 의심과 두려움은 우리에게서 위로를 앗아가며, 무서운 예감은 우리로 하여금 소망을 잃게 만든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내버려두시는 데에는 지혜로운 목적이 있다. 버림받은 영혼에게 있어서는, 그 기간이 아무리 짧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으로부터 떠나는 것만큼 더 서글픈 재앙이란 있을 수 없다.

11절. “주께서 우리로 먹힐 양 같게 하시고.” 마치 음식으로 사용되기 위해 도살당하는 양처럼, 그 백성은 종종 무더기로 살육당했다. 희생 제물을 잡는 엄숙함 가운데서가 아니라 도살장의 잔인한 분위기 속에서 그들은 죽음을 당했다. 하나님은 마치 도살자에게 양을 넘기듯이 그들을 넘겨주신 듯하였으며, 삯군이 양떼를 이리들에게 넘겨주듯이 그들을 포기하신 듯했다. 본문의 불평은 쓰라린 감명을 준다.

“열방 중에 흩으셨나이다.”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갔고, 하나님의 성전에서 드리는 공적 예배를 떠나 우상 숭배자들 가운데 포로민으로서 파리해졌다. 이 모든 일은 여호와의 허락하심에 따른 것이며, 심지어는 그분의 명령으로 인한 것이었다. 우리는 자신의 슬픔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12절. “주께서 주의 백성을 무료로 파심이여.” 사람들이 상품을 누구에게나 팔듯이,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과 싸우고자 하는 어떤 민족에게나 그들을 넘겨주신 듯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모든 곤경으로부터 좋은 결과를 전혀 감지할 수 없었다. 시편 기자가 알 수 있는 한, 그 백성의 슬픔으로부터 여호와의 이름이 영광을 얻는 일은 전혀 없었다. 그들은 노예에게 붙이는 보통 값도 받지 못할 정도로 무가치한 존재로서 대적들에게 넘겨졌으며,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고난당하는 것으로 만족해 하실 뿐 그들의 몸값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셨다. 이 구절에서 표현된 재앙은 마치 식초에 쓸개즙을 섞은 것과 같이 쓰디쓴 것이다.

“저희 값으로 이익을 얻지 못하셨나이다.” 만일 여호와께서 이 모든 불행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다면, 시편 기자는 그것을 묵묵히 참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그 반대였다. 이스라엘 민족의 재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이름은 이방 세력에 의해 경멸당했다. 이방 세력은 이스라엘의 파멸을 여호와의 패배로 간주했다. 신자가 자신의 환난으로 인해 여호와의 위대하신 이름이 영광을 얻을 것임을 알 수 있을 때 그 환난의 무게는 가벼워진다. 하지만 헛되이 고통당하는 듯할 때 우리는 더 큰 곤경을 느낀다. 왜냐하면, 공공연하게 그분께 영광이 돌아가지 않는 때에도 그분이 자신의 비밀스러운 목적을 이루고 계시며, 정해진 때가 이르면 위대한 결과가 나타남으로써 사실상 여호와께 영광이 돌려진다면, 우리는 그 사실로 인해 위로를 받고 안심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허무하게 고난당하지 않으며, 아무런 결과도 없는 슬픔을 겪는 것이 아니다.

13절. “주께서 우리로 이웃에게 욕을 당케 하시니.” 항상 경멸이란 억압받는 자의 컵 속에 든 너무나 쓰디쓴 물질과 같다. 승리자의 비웃음과 조롱이 패배당한 자에게는 창과 칼만큼이나 고통스럽다. 하나님이 각별히 택하신 그분의 민족으로 하여금 인근 민족들에게 조롱을 당케 하신다는 것은 사실 신비였다.

“둘러 있는 자가 조소하고 조롱하나이다.” 짓밟힌 민족은 일상적인 농담거리로 전락했다. 압제자는 그 잔인한 혀로, “이스라엘처럼 비천하다”는 식으로 말한다. 그러한 조롱이 너무도 흔한 일이 됨으로써, 인근 민족들은 동일하게 압제를 당하면서도 정복자들의 말을 빌어 함께 조롱했다. 강한 자와 약한 자, 손윗사람과 동갑내기와 손아랫사람 등 모두에게 조롱거리가 되는 것은 참기 어려운 일이다. 경멸의 이빨은 뼈를 물어뜯는다. 시편 기자는 대적의 잔인성을 여러 가지 말로 표현하여 여호와의 긍휼을 얻고자 한다. 또한 그는 자기 백성의 모든 슬픔의 원인을 여호와의 의로우신 분노에서 찾는다. 그는 택함받은 백성의 시련을 묘사하기 위해 최상의 논거를 사용하였다. 이것은 다른 어떤 논리보다 하나님의 마음에 더 쉽게 와닿는 것이었다. 그분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자. 위에 계신 우리의 위대한 변호자께서는 이 강력한 간구를 이용하는 법을 아시며, 만일 우리가 이러한 때에 진리를 위해 비난을 참으면, 그는 그 논거를 영원한 보좌 앞에 올리실 것이다. 하나님이 친히 택하신 자들을 위해 보복하지 않으시겠는가? 아버지는 자기 자녀가 경멸당하는 것을 오래 참지 않을 것이다. 그분은 잠시 동안은 참을 수 있지만, 사랑하는 마음에서 재빨리 분노를 발할 것이며, 그리하여 핍박자와 모욕하는 자에게 호된 책망을 가할 것이다

14절. “주께서 우리로 열방 중에 말거리가 되게 하시며 민족 중에서 머리 흔듦을 당케 하셨나이다.” 여기서는 비탄조의 애가가 반복된다. 그들은 너무도 낮아진 나머지 아무도 그들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열방에 의해 공개적으로 혐오스럽고 비천한 존재로 취급당했다. 다른 사람들을 욕하는 자들은 그 욕됨을 강조하기 위해 이스라엘이라는 국명을 끌어들일 정도였다. 그리고 우연히 길에서 야곱의 자손과 마주치면, 그들은 음란한 몸짓으로 그를 놀렸다. 모든 우매자들의 화살은 으레 이스라엘을 표적으로 삼았다. 과거에 의인의 운명은 그러했고, 오늘날에도 어느 정도는 그러하며, 장래에도 의인은 가장 비참하게 취급당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은 의인의 고귀성을 알지 못하며, 진정 탁월한 것이 무엇인지를 보는 안목도 없다. 세상은 주님께 십자가를 지웠고, 그분의 제자들 역시 세상으로부터 합당한 면류관을 얻으리라고 기대할 수가 없다.

15절. “나의 능욕이 종일 내 앞에 있으며.” 시편 기자는 자기 민족의 대표자로 나서고 있으며, 자기 영혼의 끊임없는 낙심 상태를 토로한다. 그는 자신이 속한 교회 혹은 민족의 슬픔에 동참하고 있다. 그 마음이 선할수록 그 동정심 또한 크다.

“수치가 내 얼굴을 덮었으니.”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붉어진 그의 얼굴은 마치 심홍색 외투와도 같았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버림받는 것이 당연한 듯한 느낌을 받았고, 하늘로부터의 도우심이 사라짐으로 말미암아 자신과 자기 백성이 비천해졌다고 느꼈다. 한 민족의 죄와 수치를 절감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그 나라에 존재한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나님은, 그분께 징벌당한 자들을 긍휼히 여기실 것이며, 그 증거로서 귀한 사역자들과 자비심 많은 사람들을 보내신다. 그들은 백성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긴다.

16절. “나를 비방하고 후욕하는 소리를 인함이요.” 대적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조롱하는 단계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을 모독하기까지 했던 것 같다. 그들은 핍박과 아울러 신성모독의 죄악까지 범하였던 것이다.

“나의 원수와 보수자의 연고니이다.” 그 원수는 자기 선조들의 패배를 보복하는 것을 자랑하였다. 그들은 현재 무너진 상태인 이스라엘을 모욕함으로써 옛적 이스라엘의 승리에 대해 보복하였다. 그 당시 이스라엘 민족은 서글픈 곤경에 처해 있었지만, 그것이 절망적인 상황은 결코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 모든 재난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신 여호와께서 그들을 거기서 쉽게 벗어나게 하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자신의 팔을 의지하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만 바라보는 한, 그 어떤 대적도 이스라엘을 짓밟을 수가 없었다. 이스라엘은 일어서야만 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편이셨기 때문이다.

17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임하였으나 우리가 주를 잊지 아니하며 주의 언약을 어기지 아니하였나이다

18우리 마음이 퇴축지 아니하고 우리 걸음도 주의 길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나

19주께서 우리를 시랑의 처소에서 심히 상해하시고 우리를 사망의 그늘로 덮으셨나이다

20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잊어버렸거나 우리 손을 이방 신에게 향하여 폈더면

21하나님이 이를 더듬어 내지 아니하셨으리이까 대저 주는 마음의 비밀을 아시나이다

22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17절.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임하였으나 우리가 주를 잊지 아니하며.” 여기서 시편 기자는, 이스라엘이 여호와에 대한 충성을 버리지 아니하였다고 주장한다. 커다란 슬픔 가운데서도 여전히 순종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매달릴 수 있을 때,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다. 참된 충정은 비참한 대우도 견딜 수 있다. 무엇을 소유하기 위해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은 핍박이 일어나면 그분을 떠날 것이다. 하지만 신실한 신자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는 가장 심한 곤경에 처할지라도 하나님을 잊지 않을 것이다.

“주의 언약을 어기지 아니하였나이다.” 어떤 우상도 세우지 않았고, 정해진 예배를 포기하지도 않았다. 하나님은 여전히 온 민족의 경배 대상이셨다. 따라서 시편 기자는 여호와의 개입을 더욱 열렬하게 간구한다. 본절과 다음 절은 순교자의 고백을 연상시킨다. 사실상 이 시편 전체는 순교자의 불평이라고 지칭될 수도 있다. 성도들은 죄 때문이 아니라 의 때문에 시련을 당하며, 거짓 때문이 아니라 진실 때문에, 그리고 여호와를 배반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을 열심히 좇는 까닭에 고초를 겪는다. 그러한 시련은 매우 끔찍스러울 수 있지만, 너무도 영예로운 것이다. 그리스도를 위해 시련당하기에 합당하게 여김을 받는 자들에게는 여호와의 위로가 임하여 그들을 붙드실 것이다.

18절. “우리 마음이 퇴축지 아니하고 우리 걸음도 주의 길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나.” 마음과 생활이 일치되었으며, 이 둘 모두가 여호와의 길을 따랐다. 시련에 처한 경건한 자들은 마음으로나 행실로 범죄하지 않았다. 그들이 절대적으로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의도적인 범죄에 빠지지는 않았다. 마음으로나 행실로나 이스라엘 민족이 정직하다는 점을 하나님 앞에 입증할 수 있는 선지자인 시인이 그 나라 안에 있었다는 것은 그 민족에게는 축복의 표시였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더 많았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지파들은 너무도 쉽게 다른 신들을 섬기고 구원의 반석이신 여호와를 저버리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19절. “주께서 우리를 시랑의 처소에서 심히 상해하시고.” 비록 파탄지경에 이르러, 황량한 폐허에나 출몰하는 재칼, 올빼미, 뱀 따위와 더불어 지내야 하는 상황으로까지 몰렸지만 이스라엘은 신실함을 견지했다. 여호와의 징벌을 받아 기쁨을 상실할 정도인 경우라 할지라도 끝까지 그분께 진실한 모습을 여호와는 기뻐하신다. 하나님으로부터 이탈되는 것보다는 하나님에 의해 부숴뜨림을 당하는 것이 더 낫다. 기만자들과 함께 있기보다는 시랑들과 함께 있는 것이 더 낫다.

“우리를 사망의 그늘로 덮으셨나이다.” 이는 매우 강렬한 표현이다. 이스라엘은 절망과 사망의 짙은 어둠 속에 완전히 봉해진 상태인 것처럼, 마치 절망의 관 속에 봉해 넣어진 상태인 것처럼 묘사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사모하며 구원을 호소한다. 그것은 참으로 영광스러운 호소이다. 거짓된 믿음보다는 차라리 죽음이 더 낫다. 하나님께 진실한 자들은, 그분도 그들에게 결코 거짓되지 않으심을 발견할 것이다.

20절. 이제 하나님의 전지성에 호소하고 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이스라엘이 다른 신을 섬기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한 증인으로서 모시고자 한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잊어버렸거나.” 하나님의 이름을 망각하는 것은 배교의 첫 단계이다. 사람들은 먼저 진실을 잊어버리고, 그 다음에 거짓을 숭배한다.

“우리 손을 이방 신에게 향하여 폈더면.” 손을 펴는 것은 숭배나 간구를 나타내는 상징적인 동작이었다. 그들은 그 어떤 이교 우상들에게도 손을 펴지 않았다.

21절. “하나님이 이를 더듬어 내지 아니하셨으리이까.” 그러한 우상숭배를 그분께 숨길 수 있겠는가? 설령 그것을 마음속에다 감추고 생활 가운데 드러내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분이 거룩하신 의분으로써 그 패역함을 간파하지 않으셨겠는가?

“대저 주는 마음의 비밀을 아시나이다.” 그는 마음의 생각을 읽으시며, 따라서 사람의 은밀한 생각을 그분께 숨길 수 없다. 비밀스러운 마음뿐만 아니라, 가장 비밀스러운 것이라 할 수 있는 마음속의 비밀까지도 하나님은 마치 책을 읽듯이 환히 파악하신다. 시편 기자의 논리인즉, 여호와께서 그 백성의 신실성을 알고 계시며 따라서 죄 때문에 그들을 징벌하심도 아님을 알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분명 그들에게 임한 곤경은 다른 어떤 원인에서 비롯되었다.

22절. “주를 위하여.” 우리의 범죄 때문이 아니라 주께 순종한 까닭에. 이러한 탄원자들에게 시련이 닥친 것은, 그들이 하나님께 충성했기 때문이다.

“종일······죽임을 당케 되며.” 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기까지 핍박은 결코 그치지 않았으며, 그들은 쉴 틈이 없었고 피할 문도 찾지 못했다. 그 모든 시련은 하나님을 위해서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언약의 하나님이자 왕이신 그분을 저버리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우리가 죽음을 당하는 것은 당연시되었으며, 우리를 죽이는 자들은 양을 도살하듯이 아무런 거리낌도 받지 않고, 그것을 손쉽게 여겼다. 본절과 다음 절에서 우리는 순교자의 부르짖음을 들을 수 있다. 피드먼트와 스미스필드로부터, 성 바돌로매 성당의 대학살 현장과 클레이버하우스의 위그노 박해 현장으로부터, 제단 아래의 영혼들이 엄숙하게 보복을 부르짖고 있는 동안 본문의 탄원이 하늘로 올라간다. 교회의 이러한 탄원은 오래가지 않을 것이고, 교회에게 수치를 가한 자들에게 보응이 임할 것이며, 교회의 승리가 도래할 것이다.

23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일어나시고 우리를 영영히 버리지 마소서

24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고 우리 고난과 압제를 잊으시나이까

25우리 영혼은 진토에 구푸리고 우리 몸은 땅에 붙었나이다

26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우리를 구속하소서

23절. “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하나님은 주무시지 않지만, 시편 기자는 다른 어떤 이론으로도 하나님의 잠잠하심을 설명할 길이 없다는 듯이 이런 식으로 표현한다. 그는 위대하신 재판관이 압제를 종식시키고 거룩한 민족에게 평화를 베푸시기를 갈망하며, 따라서 그는 “깨소서”라고 부르짖는다. 어찌하여 압제자의 통치와 의에 대한 핍박이 허용되는지를 그는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라고 여쭙는다.

“일어나시고.” 이는 주께서 일어나시기만 하면 그들에게 구원이 임할 것이라는 뜻을 내포한다.

“우리를 영영히 버리지 마소서.” 주께서 우리를 너무도 오래도록 저버리셨나이다. 주의 부재로 말미암은 무서운 결과가 우리를 파멸시키고 있나이다. 우리의 재난을 멈추시고, 주의 진노를 가라앉히소서. 핍박 시기에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는가?”라고 부르짖기 쉽다. 성도들이 거만한 대적들의 핍박을 어떻게 견뎠는지를 생각하면서, 우리는 위대한 순교자들의 부르짖음에 참여하며 낙원의 노래를 부른다.

오 여호와여,

살육당하는 주의 성도를 위해 보복하소서,

그들의 뼈가 알프스 산맥에 싸늘하게 흩어졌나이다.

우리의 선조들이 통나무와 돌을 섬길 때에도,

그들은 주의 진리를 소중히 간직하였나이다.

잊지 마소서.

주의 책에는 그들의 신음 소리가 적혀 있나이다.

그들은 바로 주의 양들입니다.

24절.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고 우리 고난과 압제를 잊으시나이까.” 우리를 다루시는 여호와의 처사가 불가사의할 때, 우리는 성마른 태도로써가 아니라 간절하게 문의하는 자세로 여호와께 여쭐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의 처지를 논리정연하게 토로하며 존엄하신 왕 앞에서 선처를 탄원드리도록 허락받았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주께서는 주의 자녀들에게 임한 고통을 망각하시나이까? 이 질문은 대답하기보다는 아뢰기가 훨씬 더 쉬운 것이다. 사실, 핍박의 와중에 우리에게 왜 그토록 심한 고난이 닥쳐야 하는지를 알아내기란 어려운 일이다.

25절. “우리 영혼은 진토에 구푸리고.” 우리 마음은 가능한 한 낮아지되, 사람들의 발바닥 밑에 깔린 먼지처럼 낮아지고. 마음이 침잠할 때, 그 사람은 전반적으로 가라앉기 마련이다. 마음의 슬픔은 슬픔의 핵심이다.

“우리 몸은 땅에 붙었나이다.” 그러한 사람은 땅에 납작 엎드린다. 즉, 그는 몸을 굽힐 뿐만 아니라 땅에 바짝 엎드려 거기에 밀착된다. 사실, 자신의 마음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스스로 낙담에 잠겨 폐쇄되어 의기소침해지는 것은 비참한 일이다. 하나님의 성도도 그처럼 비참해질 수 있다. 그들은 먼지 속에 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욥과 나사로처럼 거름더미 위에 처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의 날은 도래하며, 그들의 상황은 변화될 것이다. 또한 그들은 쓰라린 겨울 후에 화려한 여름을 맞을 것이다.

26절. “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 짤막하지만 포괄적인 기도로서, 모든 기도자들이 염두에 두어야 할, 핵심적이며 명료하고 또한 간절한 내용이다.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우리를 구속하소서.” 여기에 최종적인 탄원이 나온다. 구속이 주의 은총으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확신하고서, 시편 기자는 주의 인자하심에 탄원하고 있는 것이다. 시련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잊지 않는 신실한 신자들 역시 이렇게 탄원할 수 있다. 주의 은총은 그 무엇보다 더 귀하고 안전한 간구 사항이라 할 수 있다.

만일 내가 위기에 몰린 순교자라면,

내 구주의 이름에 호소할 것이다.

그분을 위하여 용서를 구하고,

다른 어떤 요구도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이 시편은 마감되지만, 하늘에서는 이러한 탄원의 힘이 사라지지 않으며 시련에 처한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구원이 임하게 한다.

[주해와 설명들]

시 44편 전체. 이 시편을 개괄적으로 살펴보면, 여기 나오는 화자들이 이스라엘 민족에 속한 자들임에 대해 의심의 여지가 없는 듯하다. 하지만 대체로 주해가들은 그런 식으로 이해하는 데 있어 많은 난점을 발견해 왔다. 심지어는 그런 식의 견해 자체를 배격하기까지 한다. 그 이유인즉,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에 있어 이 시편의 작시 배경이 될, 그리고 이 시편의 문체를 입증해 줄 어떤 시대를 확정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이를 바벨론 포로 시기로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첫째, 11절과 14절에서 화자들이 “열방 중에 흩어졌고” 또한 “열방 중에 말거리가 되었던” 것으로 언급되지만, 당시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갔던 곳은 바벨론이라고 하는 한 나라로 국한되기 때문이다. 둘째, 17-21절은 그들이 참되신 하나님에 대한 예배를 신실하게 드렸노라고 하는 확신을 보여주며, 또한 그들에게 닥친 시련이 그들 스스로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할 증인으로서 하나님의 이름을 거명하고 있지만, 바벨론 포로 생활은 이스라엘의 배교에 대한 징벌이었으며, 특히 우상 숭배라고 하는 심각한 죄악에 대한 징벌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와 마카비의 시대에 관한 언급으로 해석하는 데 대해서도 동일한 반박이 가능하다. 더욱이, 성경 정경화의 역사를 고려하건대, 시편의 연대를 그렇게나 후대로 잡는 것은 도저히 무리이다. 이를 다윗 당시로 보기는 더욱 힘들다. 왜냐하면, 비록 당시의 신앙이 순수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스라엘의 분산이나 “주께서 우리를 버려 욕을 당케 하시고······주께서 우리로 먹힐 양 같게 하시고”라는 비탄을 토로할 만한 재난이 닥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편은, 매우 순수한 상태에서 시련을 당했던 초대 기독교회에 관한 예언적인 내용으로 이해되는 것이 합당할 것 같다. -윌리엄 드 버그(William de Burgh)

시 44편 전체. 암브로스(S. Ambrose)가 고찰한 바에 의하면, 앞의 시편들에서는 그리스도의 수난, 부활, 승천, 그리고 성령의 강림 등에 관한 예언이 나오는 반면에, 여기서는 그러한 사건들을 통해 유익을 얻을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이 영적 싸움을 전개하고 또한 시련을 겪을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함을 가르친다고 한다. 하나님의 은총에 인간의 의지가 협력되어야 한다. -크리스토퍼 워즈워스(Christopher Wordsworth).

1절. “주께서······행하신 일.” 홍해를 건너게 하신 일부터 십팔 만 오천에 달하는 앗수르 군사들을 물리치게 하신 일까지, 그분이 행하신 구원 사역들은 부지기수였는데도, 왜 “주께서 행하신 일”이라고 단수로 표현했을까? 그 이유인즉, 이 모든 일들은 여호와께서 손을 펼치사 사탄을 정복하고 죽음을 멸하며 모든 신자들에게 천국 문을 열어주신 그 위대한 일의 전형들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암브로스.

1절. “주께서······행하신 일.” 다른 이방 민족들은 자기 선조들의 영웅적 행위들을 노래하지만, 이스라엘의 노래는 하나님의 위대한 사역들을 기념하는 것이다. -톨룩(F. A. G. Tholuck).

1절. “저희가 우리에게 이르매.” 바실(Basil)은 이렇게 말했다:”너희 아버지들이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랑하도록 유도하는, 그리고 위험에 처할 때마다 그분을 의지하는 믿음을 갖도록 유도하는 일들을 너희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일에 태만하지 말라.” 이스라엘의 선조들은 자신의 입을, 말하자면 여호와의 막강한 행사들에 관한 내용을 읽게끔 해줄 수 있는 책으로 삼았다. 그들의 말을 들은 자녀들은 여호와를 찬양하며 그분께로 마음을 모을 수 있었다. -존 메이어(John Mayer).

1절. “우리 귀로 들었나이다.” 최대한의 관심과 애착을 갖고서, 우리가 듣고 그것에 유의했나이다. 여기 사용된 표현은 쓸데없는 중복이 아니라 강조를 위한 것이다. -존 트랩(John Trapp).

1절. 효율적인 학습을 위해 필요한 세 가지 요건들:(1) 배우는 자의 의향과 관심-”우리 귀로 들었나이다.” (2) 가르치는 자의 권위-”저희가 우리에게 이르매.” (3) 교사와 가르침을 받는 자 간의 사랑-”우리 열조.” -추기경 휴고(Hugo, Neal’s Commentary).

1, 2, 4, 8절. 자녀는 그 부모의 상속자이다. 아버지가 죽기 전에 자신의 보화를 땅 속에 묻어버림으로써 그 자녀로 하여금 그것을 손에 넣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총들은 그분의 보화들 중 너무도 귀한 부분이며 그 자녀들에게 베푸시는 유산들 중 너무도 소중한 부분이다. 그것들은 그들의 믿음을 북돋워주고, 그들로 찬양케 하며, 또한 그들에게 순종하는 마음을 고무시킨다. “주께서 우리 열조의 날 곧 옛날에 행하신 일을 저희가 우리에게 이르매······주께서 주의 손으로 열방을 쫓으시고”(1, 2절). 그들은 여기에 자신의 확신의 기초를 둔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왕이시니 야곱에게 구원을 베푸소서”(4절). 또한 그것들은 그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우리가 종일 하나님으로 자랑하였나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영영히 감사하리이다.” 사실, 자녀가 자기 부모의 상속자이듯이, 또한 그들에게는 부모의 빚을 갚을 책임이 있다. 임종에 처한 성도가 갚지 못한 큰 빚이란 바로 하나님의 은총이며, 따라서 그는 자기 자식에게 그 빚을 넘겨주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하늘에서나 땅에서나 늘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 -윌리엄 거놀.

2절.

주께서 주의 손으로 열방을 쫓으시고

열조를 심으시며

주께서 민족들은 괴롭게 하시고

열조는 번성케 하셨나이다

본절에서는 대조법이 두 차례 사용되었다. 먼저, 한 부류의 나무는 뽑아내고 다른 나무를 심는 장면이 대조되었다. 이는 곧 가나안 족속들이 팔레스타인에서 뽑히고 그 대신에 이스라엘이 심기운 것을 가리킨다(시 80:8과 비교). 두번째로는, 같은 뿌리에서 났으되 나쁜 가지들은 잘라내고 그 대신 다른 가지들을 번성케 하는 장면이 대조되었다. 이것 역시 팔레스타인 땅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벤야민 바이스(Benjamin Weiss).

3절. “저희가 자기 칼로 땅을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인간 측에서 행한 모든 일들이 무기력한 것으로 판명날 때, 여호와의 권능은 더욱 두드러진다. 하나님은 자신이 기뻐하시는 일을 이루시기 위해 사람을 도구로 사용하신다. 따라서 그분과 단절된 인간은 아무것도 이루어낼 수 없다. -데이비드 딕슨(David Dickson).

3절. “주께서 저희를 기뻐하신 연고니이다.” 거저 주시는 은혜는 그들의 모든 지복의 원천이다.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신 것은 오직 사랑하고자 하신 때문이다(신 7:7). 그분은 그들을 사랑의 대상으로 택하셨고, 그 선택에 따라 그들을 사랑하셨다. -존 트랩.

3절.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값없이 거저 베푸시는 놀라운 사랑이었다. 그분은 그들이 얻으려고 애쓰지 않은 땅과 그들이 건설하지 아니한 도시들과 또한 그들이 심지 아니한 포도원들과 올리브 밭들을 그들에게 주셨다(수 24:13). 어떤 경우에는 칼이나 활이 사용되지 않고 그 대신 말벌들이 정복의 도구로 사용되었다(수 24:12). 아담의 타락 이래로 인간에게 주어진 모든 좋은 것들은 참으로 과분한 은총 덕분이다. -윌리엄 플러머.

3절 하반절. 시편 기자는 아브라함이 특별한 인격적인 장점을 지녔기 때문에 혹은 그의 후손들이 어떤 미덕을 갖추었기 때문에 그토록 풍성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모든 축복을 하나님의 기뻐하심 탓으로 돌린다······또한 시편 기자는 여기서 전체 인류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일반 은총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택함받은 자와 세상의 나머지 사람들간에 존재하는 차이점에 대해 논한다. 여기서는 이러한 차이점이 단지 하나님의 기뻐하심에 따른 것으로 언급된다. -존 칼빈(John Calvin).

4절. “나의 왕.” 분명, 시편 기자는 자기 자신에 대한 개인적인 적용을 통해, 하나님과 그 백성간의 언약 안에서 자신의 개인적 입장을 토로하고 있다. -스튜어트 퍼론.

4절.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왕이시니 야곱에게 구원을 베푸소서.” 설령 곤경에 처한 그대에게 도움이 될 사람이나 수단이 이 세상에 전혀 없다고 하더라도 그대는 당황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보좌에 앉으신 분이 홀로 도우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분은 아무런 수단이나 도구에 의지하지 않고서도 그대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실 수 있다. 그 곤경이 아무리 크고 힘들다고 하더라도, 또한 그것이 아무리 이길 수 없는 듯이 보일지라도, 그분의 말씀 한마디로 충분히 그것을 해결할 수 있다. 위대하신 왕의 말씀 속에 그러한 권능이 있다. 그대의 구원을 위해, 그리고 그 백성의 구원을 위해 더 이상의 그 무엇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단지 보좌에 앉으신 분의 명령만 내려지면 된다. 설령 이 세상에서 복음이, 그리스도의 메시지가, 그리고 우리 영혼과 우리 후손의 영혼의 주요 관심사가 모두 마른 뼈처럼 황량하고 절망적인 상황에 직면해 있다고 하더라도, 그분은 말씀으로써 이 모두를 되살리실 수 있다. 우리의 왕으로서 보좌에 앉아 계시는 그분은 마치 마른 뼈와 같은 상황에 생명을 불어넣으실 수 있다. 그분이 보좌를 지키고 계시는 한, 설령 가시적인 모든 힘과 도움이 실패할지라도, 그분의 권능을 불신하여 낙심에 빠지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데이비드 클락슨(David Clarkson).

5절. “우리가 주를 의지하여 우리 대적을 누르고.” 문자적으로, ‘우리가 그들을 뿔로 받아 공중에 날릴 것이다’는 뜻이다. 이는 황소가 자신에게 덤벼드는 개를 뿔로 받는 장면에서 취한 은유이다. -아담 클라크(Adam Clarke).

6절.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 칼도 나를 구원치 못하리이다.” “활”과 “칼”은 온갖 종류의 전투 무기들을 통칭하는 표현이다. 또한 본절에서 시편 기자는 나머지 모든 사람을 대표하는 자로서 “구원”을 언급한다. 이는 모든 신자들이 한몸이라는 사실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토머스 윌콕스(Thomas Wilcocks).

6절.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나는 나 자신의 칼이나 활을 의지하지 않고 위대한 전사이신 하나님의 칼을 의지할 것이며, 위대한 궁수이신 하나님의 활을 의지할 것이다. 그분의 화살들은, 다음 시편에서 묘사된 바와 같이(시 45:3-5), 대적들의 심장을 예리하게 관통한다. 시 45편은 그 내적인 의미를 통해서뿐만 아니라 이러한 이미지를 통해 시 44편과 연결된다. -크리스토퍼 워즈워스.

6절. 우리가 자기 자신을 덜 신뢰할수록 혹은 하나님 이외의 그 무엇을 덜 신뢰할수록, 하나님에 대한 우리 신앙의 신실성에 대한 증거는 더 많아진다. -데이비드 딕슨.

6, 7절. 이 두 절은 3절과 정확히 부합되는 내용이다. 3절에서는 과거를 언급하면서 구원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덕분으로 돌렸듯이, 여기서는 미래를 언급하면서 그렇게 하고 있다. -헹스텐버그(E. W. Hengstenberg).

11절. “먹힐 양 같게.” 이는 그들이 매우 혹독한 핍박과 살육을 당할 지경에 처해 있었음을 강력히 암시한다. 이 세상의 짐승들 중 식용으로 사용되기 위해 그토록 엄청난 수효가 끊임없이 도살되는 것으로서는 양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다. 그처럼 계속된 살육은 22절에서도 언급되는데, 이는 히브리인들에게 지속적으로 가해졌던 억압을 묘사하기 위함이다. -Kitto’s Pictorial Bible.

11절. “먹힐 양 같게.” 새끼를 낳게 하거나 털을 얻기 위해서 계속 기르는 양과는 달리. -아서 잭슨(Arther Jackson).

12절. “주께서 주의 백성을 무료로 파심이여 저희 값으로 이익을 얻지 못하셨나이다.” 그 의미인즉 이러하다:주께서 그분의 백성을 그들의 대적에게 넘겨주시되, 그 대적들로 하여금 아무런 어려움도 겪지 않고 어떤 대가를 치루지 않아도 되게끔 하셨다. 주는 당신의 백성을 멸시하고 미워하사 단지 그들을 제거하기만을 바라셨다. -헹스텐버그.

12절. “주께서 주의 백성을 무료로 파심이여.” 티투스(Titus)에 의한 예루살렘 함락을 언급하면서, 유세비우스는 이렇게 말한다:”많은 것들이 싼 가격에 팔렸다. 팔 것은 많되, 살 것은 적었다.”

12절. “저희 값으로 이익을 얻지 못하셨나이다.” 그 일이 주의 영광을 드높이지 못했나이다. 왜냐하면 주의 대적들이 주의 백성보다 주를 더 많이, 그리고 더 잘 섬기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매튜 풀(Matthew Poole).

12절 하반절. 문자적 의미는 이러하다:(판매자는 구매자에게 으레 그렇게 하지만, 주께서는) ‘그들의 값을 올리지 못하셨다.’ -다니엘 크레스웰(Daniel Cresswell).

14절. “주께서 우리로 열방 중에 말거리가 되게 하시며.” “말거리”에 해당하는 원어 “마샬”(lvm)은 ‘비교’, ‘유사’라는 뜻을 지닌다(신 28:37 참조). 이스라엘의 참경이 너무 심했던 까닭에, 사람들은 비참한 사람을 가리켜 상징적으로 이스라엘인이라 부를 정도였다. 이는 마치, 거짓말쟁이를 가리켜 크레타 섬 사람이라 부르고, 비참한 노예를 가리켜 사르디니아 사람이라고 부른 것과 같다. 원래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복받은 민족”으로서, 그들을 통해 만민이 복을 받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다. -헹스텐버그.

15절. “나의 능욕이 종일 내 앞에 있으며.” 가시적인 교회가 서글픈 재난에 직면할 때, 진실한 교회 구성원들은 그 근심과 슬픔과 능욕에 동참한다. -데이비드 딕슨.

17절. 유세비우스는, 동방의 폭군 막시미누스(Maximinus)에 의해 그리스도인들에게 가해진 잔혹한 핍박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말한다:”그는 온갖 부류의 사람들을 굴복시켰지만 그리스도인들만큼은 예외였다. 그들은 죽음을 아랑곳하지 않았고 그의 폭압을 경멸했다. 그들은 불에 타거나, 목이 잘리거나, 십자가에 못박히거나, 야수들의 밥이 되거나, 바다 속에 빠트려지거나, 신체 일부가 불에 지져지고 불구가 되거나, 눈을 뽑히거나, 혹은 온몸을 난도질당해도 견뎌내었다. 그리고 기근과 투옥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간단히 말해서, 그들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을 그만두고 우상 숭배에 빠지기보다는 차라리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온갖 종류의 고통을 감수하는 쪽을 택했다. 여자들도 하나님의 말씀의 권능을 통해 남자 못지않은 용기를 발휘했으며, 어떤 여자들은 남자들과 더불어 모진 고문을 견디기도 했다.” -The Ecclesiastical History of Eusebius Pamphilus.

17절. “우리가 주를 잊지 아니하며 주의 언약을 어기지 아니하였나이다.” 비록 우리가 다른 많은 죄악들에 대해 스스로를 변명할 수 없으며 그 죄악들로 인해 주의 징벌을 받긴 했지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온갖 유혹과 위협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주의 은혜로 말미암아 배교와 우상 숭배로부터 스스로를 지켰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부디 주께서 이 사실을 은혜롭게 고려해 주시기를, 그리고 우리에게 견딜 수 없는 시험을 허락하지 마시기를 바라나이다. -매튜 풀.

17절. 만일 여러분들 누군가가 이 폭풍우 가운데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한다면, 여러분이 그분과 어떤 언약을 맺었는지를 그리고 여러분이 그분과의 약속을 어떻게 어떤 조건으로 마감했는지를 점검해 보십시오. 내가 생각하기에 이 시대에는 바람둥이 같은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들은 서둘러 결혼하지만, 어떻게 가정을 잘 꾸려나갈 것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이내 거지 신세로 전락하고 맙니다. 이 시대에 자칭 신앙인으로 고백하는 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신앙을 내세우지만, 신앙 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끝까지 따르지 않으며, 폭풍이 불면 곧장 그분을 떠나고 그분의 취지를 부인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마지막 날에 자칫하면 여러분의 영혼이 파멸에 직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하나님과의 언약을 유지하는 올바른 길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신자가 서로 만날 때에만 가능합니다. 우리 주님이 신자에게 당신의 율례와 규례와 명령을 주시며, 그것들로부터 한 발자국도 떠나지 말도록 당부하십니다. 설령 자신의 몸이 천 갈래로 찢긴다 할지라도 그것들로부터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언약에 신실한 자는 주님의 당부를 아멘으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알렉산더 피던(Alexander Peden)의 설교, 1682.

17-19절. 고대의 신실한 성도들은 사람들의 핍박이나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도 낙심하지 않았다. 신자들은 달과 닮은 점이 있다. 달은 일단 모습을 드러내면 개들이 짖는다고 해도 그 빛을 거두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핍박을 멈추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가 신앙 고백을 중단해야 하겠는가? -윌리엄 세커(William Secker).

17-19절. 교회는 큰 시련들을 겪어왔으며, 그때마다 본문의 내용을 하나님을 향한 신실함과 그분으로부터 얻는 은총의 힘을 입증하는 논거로 삼았다.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임하였으나.” “이 모든 일”이란 갖가지 재난들과 곤경들을 가리킨다.

“우리가 주를 잊지 아니하며 주의 언약을 어기지 아니하였나이다 우리 마음이 퇴축지 아니하고 우리 걸음도 주의 길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나.” 이 곤경들은 우리로 하여금 주의 길을 이탈하게 만들 정도로 강한 유혹으로 다가왔지만,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토대 위에 굳건히 서서 줄곧 주의 언약 가운데 있었나이다.

“주께서 우리를 시랑의 처소에서 심히 상해하시고 우리를 사망의 그늘로 덮으셨나이다.” 많은 성도들이 십자가에 직면하여 영적 진보를 이루는가 하면, 불신으로 말미암아 혹은 (히브리서 기자가 말한 바와 같이)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그들에게 권면하신 말씀”(히 12:5)을 망각함으로 말미암아, 그것에 직면하여 오히려 낙심하거나 영적으로 퇴보하는 성도들도 있다. -조셉 캐릴(Joseph Caryl).

18절. “우리 마음이 퇴축지 아니하고.” 이 무신론적인 세상의 방탕한 재사(才士)들은 진지한 경건을 우스꽝스럽게 여기고 희롱해 왔다. 하지만, 신실한 신앙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징책이나 사람들의 핍박에 의연히 대처하게 하심으로써 신앙적 진리에 대한 부인할 수 없는 증거들을 세상에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지혜와 선하심을 보라. 성도들의 믿음과 인내가 바로 여기에 있다. 불 속의 금과 같이 빛나는 그들의 용기, 온유함, 그리고 자기 부인 등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의 목전에는 신앙적 진리에 대한 분명한 증거들이 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지옥으로 던져 영원한 불 속에서 고통당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곤경의 불 속에 던져 넣으사 그들을 경멸하는 자들로 하여금 보다 손쉽게 깨달음을 얻게 하신다. 신앙의 대적자들이 시련에 처한 성도들의 일관성과 신실성에 의해 감명을 받아 그 신앙을 받아들이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 하나님은 현세대의 무신론적 세력들로 하여금 당신의 백성에게 시련을 가하도록 허용하시되, 그들이 감당할 수 있는 정도 이상을 허용하시지는 않는다. -존 플라벨(John Flavel).

18절. “우리 마음.” 히브리어 “레바브”(bbl) 혹은 헬라어 “카르디아”(kardiva)는, 구약과 신약 모두에서 “마음”으로 번역되며, 지각, 마음, 의지, 애정, 양심, 영혼 전체 등을 의미한다.

“우리 마음이 퇴축지 아니하고.” 비록 우리가 겨울의 폭풍에 직면해 있지만, 우리의 지각과 마음은 무성했던 여름 날과 동일하다. 비록 현재에는 우리가 곤경을 당하고 까불리고 부러지며 또한 핍박을 당할지라도, “우리 마음이 퇴축지 아니하고,” 우리 마음과 의지와 애정과 양심과 또한 우리의 전체 영혼은 예전과 동일하다. -토머스 브룩스.

19절. “주께서 우리를 용들의 처소에서 심히 상해하시고.” (KJV 직역.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용들’을 ‘시랑’으로 번역하였다-역자 주.) 그 독성과 잔혹성에 있어 용들에 비견되는 사람들의 처소는 로마, 로마 지배권, 이교도권과 로마 교황령, 그리고 크고 붉은 용인 사탄의 자리와 그로부터 권세를 받은 자들이요 그의 후예들인 짐승들의 자리 등이다. 그런 곳에서 성도들과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심한 곤경과 핍박을 받아왔지만, 그리스도의 이름을 굳게 부여잡고 자신의 믿음을 배반하지 않았다(계 2:13; 12:3 참조). 광야는 커다란 독사들이 서식하는 곳이며, 교황 시대에는 기독교회가 광야에 자리한 것으로 지칭되었다. 그곳에서 교회는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동안 보호 및 양육을 받는다(계 12:6, 14).

“우리를 사망의 그늘로 덮으셨나이다.” 앞 구절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대적하는 자들의 잔혹성을 암시하거니와, 이 구절은 교회에게 닥치는 음울한 곤경들과 비참한 상황을 암시한다. 어떤 면에서 이는 로마 가톨릭의 권세가 절정으로 치달을 때의 그 캄캄한 어둠 상태를 시사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그때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 어둠으로 뒤덮였고, 어디에도 복음의 빛은 거의 비취지 않는 듯했다. -존 길(John Gill).

19절. “시랑.” “시랑”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타님”(!ynt)은, 큰 물고기, 바다 괴물, 뱀, 용, 혹은 악어 등을 의미한다. 또한 그것은 재칼, 여우, 또는 늑대를 뜻할 수도 있다. 데 베테(De Wette)는 여기서 그것을 “재칼”로 번역한다. 이 단어를 어떻게 해석하든간에, 본문이 나타내는 본질적인 개념은 동일하다. “시랑의 처소”란 그런 괴물들이 발견되는 장소 혹은 그들의 서식처를 가리킨다. 말하자면, 황량한 장소, 사막, 오래된 폐허, 거주민을 찾기 힘든 성읍 등을 의미한다. -알버트 반스(Albert Barnes).

20절. “우리 손을 이방 신에게 향하여 폈더면.” 헌신의 대상이나 거룩한 곳을 향하여 ‘손을 펴는 것’은 고대에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이교도들도 취했던 동작이었다. 또한 동양에서는 오늘날에도 그러한 동작을 흔히 엿볼 수 있다. 동양인들 가운데 이러한 기도 자세가 계속 유지되었다는 사실은, 이슬람교도들의 종교와 그들의 습관적인 동작을 설명하고 있는 피츠(Pitts)의 글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이슬람교의 성인에게 바치는 선물로 밀랍 양초와 기름 병을 바다에 던졌던 알제리인들에 대해 말하면서, 피츠는 이렇게 말한다. “이 일을 행하고 난 후에, 그들은 함께 손을 잡고 그 성인에게 축복을 간구하며 형통한 항해를 기원한다.” 같은 페이지에서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대체로 그 성인들의 무덤 위로는 작고 아담한 방이 설치되었는데, 그것은 사원이나 교회와 흡사한 모양이다. 신도들은 이곳들을 늘 깨끗이 하며 돌보았다.” 그 뒷페이지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하지만 손을 들지도 않고 짤막한 기도만을 하고서 그곳들을 슬그머니 지나치는 자들도 많았다.” 또한 그의 설명에 의하면, 메카에 있는 성전을 순례차 방문했던 자들은 그곳을 떠나면서, “그곳을 향해 손을 들고서 진지한 간구를 올렸다”고 한다. -하머(Tomas Harmer, Observations).

21절. “하나님이 이를 더듬어 내지 아니하셨으리이까.” 주어진 은총에 대한 사람들의 신실성을 시험하기 위해 갖가지 시련들이 임할 수 있다. 그렇다면, 위선이란 그 얼마나 공허한 것인가! 사람들이 그러한 위선을 숨기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그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 우리는 흔히, 살인 사건은 밝혀지기 마련이라고 말한다. 또한 우리는 위선은 밝혀지기 마련이라고 확신 있게 말한다. 리브가가 자기 아들 야곱을 변장시켜 에서로 행세하게 함으로써 축복을 가로채게 하려는 계교를 꾸몄을 때, 야곱은 그 일에 반대하면서 이렇게 말한다:”아버지께서 나를 만지실진대 내가 아버지께 속이는 자로 뵈일지라 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을까 하나이다”(창 27:12). 그 말의 뜻인즉 이와 같다:’만일 아버지께서 그 속임수를 간파하시면 어쩌겠습니까? 그럴 경우에 내가 어떻게 아버지의 얼굴을 볼 수 있겠습니까? 내가 어찌 저주를 피하겠나이까?’ 모든 정직한 영혼들은 이런 식으로 위선의 길을 두려워한다. 만일 내가 시치미를 떼고 그럴 듯하게 가장한다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나의 거짓을 찾아내실 것이다. 그러한 위선자를 숨길 수 있는 흑암이나 사망의 그림자란 존재하지 않는다. 위선을 숨기기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고 해도, 그것은 마침내 드러날 것이다······만일 사람들의 행사가 선하지 않다면, 그들은 자신의 그릇된 행실을 오래도록 숨길 수 없다. 금도금한 놋이 잠시 동안은 감쪽같이 손에서 손으로 전해질 수 있지만, 시금석은 그 금속의 근본 바탕을 밝혀낼 것이다. 설령 시금석으로 밝혀낼 수 없다 해도, 불로 녹이면 그 실체가 드러날 것이다. -존 플라벨.

21절. 경건한 사람은 감히 은밀한 죄를 짓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이 은밀한 중에 보심을 알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의 간사한 꾀에 의해 기만당하지 않으시듯이, 우리가 아무리 은밀하게 행동해도 그분의 눈을 피하지는 못한다. -토머스 왓슨(Thomas Watson).

21절. 신앙에 대한 핍박의 시기에, 핍박자들의 공포와 유혹을 무력화시키고 하나님의 뜻을 굳건히 따르게 만드는 것은, 오직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사랑을 마음속에 확고히 간직하는 일뿐이다. 이 시편에서는, 성도들이 확고한 신앙을 견지해야 하는 이유를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에 하나님이 그들의 죄를 찾아내실 것이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대저 주는 마음의 비밀을 아시나이다.” -데이비드 딕슨.

22절.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레오나드 쇼에너(Leonard Schoener)는 여러 글들을 남겼지만, 그 중에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고난당하는 모든 자들을 위로하기 위한 다음과 같은 권고를 담은 내용도 있다.

“오 영원하신 하나님, 우리에게 귀를 기울여 주시기를 기도하옵나이다. 만군의 여호와여, 우리의 불평 소리를 들으소서. 이는 큰 곤경과 핍박이 엄습했기 때문입니다. 주의 유업 속으로 교만이 침투했고,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칭하는 많은 사람들이 연합하여 멸망의 가증한 것을 끌어들였나이다. 그들은 기독교회를 멸하여 황폐화시키나이다. 그들은 기독교회를 발 아래 짓밟았고, 멸망의 가증한 것을 하나님으로 섬기나이다. 그들은 주의 거룩한 성을 혼란으로 몰아넣으며, 주의 거룩한 제단을 넘어뜨리고, 또한 주의 제단에 손을 얹는 신실한 종들을 살해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소수의 무리만 남았고, 그들이 주의 온 땅을 경멸과 비난으로 가득 차게 만들었나이다. 우리는 마치 목자 없는 양들처럼 흩어지나이다. 우리는 집과 가정을 버려야만 하는 상황에 처했습니다. 우리는 바위 틈에 거하는 까마귀들과 같은 처지입니다. 우리는 동굴과 험한 바위를 방으로 삼나이다. 그들은 공중을 나는 새들처럼 우리를 살피나이다. 우리는 숲 속에서 방황하고, 그들은 개들을 풀어 우리를 쫓나이다. 그들은 우리를 사로잡아 마치 양들을 포박하여 끌고 가듯 하나이다. 그들은 우리를 선동적인 사람들 내지는 이교도들로 몰아붙입니다. 우리는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들과 같은 처지입니다. 많은 이들이 억압을 당하고, 감금됨으로 말미암아 그 몸이 쇠해졌나이다. 아무 잘못도 없이 시련을 당하다가 죽은 이들도 있나이다. 이 땅에서 당하는 성도의 인내가 여기 있나이다. 우리는 이곳에서 시련을 통해 시험을 받아야 합니다.

그들은 신실한 자들을 나무에 매달거나, 교살하거나, 난도질하거나, 혹은 은밀하게나 공개적으로 물에 빠트려 죽이기도 합니다. 남자들뿐만 아니라 여자들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이실 뿐만 아니라 진리이시기도 하다는 사실을 증거해 왔습니다. 세상은 아직도 격노하며 잠잠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미친 듯이 요동하나이다. 그들은 방화와 살인을 멈추지 않나이다. 그들로 말미암아 우리에게는 세상이 너무도 협소한 곳이 되었나이다. 오 여호와여, 주께서 얼마나 오랫동안 잠잠하시겠나이까? 주께서 주의 성도의 피를 언제까지 보응하지 않으려 하시나이까? 그 피로 하여금 주의 보좌 앞에 올려지게 하소서. 주의 거룩한 자들의 피가 주의 눈에 그 얼마나 귀하게 보이겠나이까! 하지만 이 땅에는 위로도 안식도 혹은 평강도 없나이다. 그러나 주께 소망을 두는 자는 결코 당황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 여호와여, 우리를 주로부터 분리시킬 수 있을 정도로 큰 슬픔이란 존재하지 않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끊임없이 주께 호소하나이다. 주께서는 거저 주시는 바 주의 은혜를 따라 우리의 위안을 위해 그분을 우리에게 보내셨나이다. 그는 참된 길, 곧 영생의 길을 예비하셨고, 우리에게 그것을 알리셨나이다. 지금부터 영원까지 영원한 영광과 승리를, 영예와 찬양을 주께 돌림이 마땅하오며, 주의 의는 영원토록 남아 있을 것입니다. 온 백성이 의로운 재판관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주의 거룩하신 이름에 영광을 돌림이 마땅하나이다. 그리스도는 온 세상을 심판하러 오시나이다. 아멘.” -A Martyrology of the Churches of Christ, commonly called Baptists(언더힐이 편집함, 1850).

22절.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하나님이 우리 죄를 인하여 우리를 징벌하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바로잡기를 원하시며 또한 좋은 의도(이를테면, “주를 위하여”)에서 우리에게 환난을 허락하신다는 사실은 참으로 귀한 은총이 아닐 수 없다. -데이비드 딕슨.

22절. “주를 위하여.” 사도 바울은 이 구절을 로마서 8:36에서 인용하였다. 그가 70인역으로부터 인용한 것임에 분명한 이 내용은 하나님의 교회가 어떤 시대에나 핍박에 직면해 왔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하지만 시편 기자의 어조와 사도 바울의 어조간에는 현저한 차이가 드러난다. 전자는 하나님의 징책을 이해할 수 없다는 투이며, 하나님의 무거운 손이 아무 까닭도 없이 그 백성 위에 얹혔노라고 불평하고 있다. 반면에, 후자는 핍박 가운데서도 즐거워하며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7)고 담대히 선언할 수 있다. -스튜어트 퍼론.

22절. “죽임을.” 여기 사용된 단어는 “카탈”(lfq)로부터 유래된 것이 아니라 ‘교살하다’는 뜻인 “하라그”(grh)로부터 유래된 것이다. 랑게 성경 주해(Lange’s Bibelwerk)에서 이러한 번역이 채택되었다.

23절. “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시편 121:4에는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만일 하나님이 주무시지 않는 분이라면, 교회가 “깨소서”라는 간청을 그분께 그토록 자주 드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만일 그분이 잠에서 깨어 계셔야 한다면, 어째서 시편 기자는 그분이 결코 주무시지 않는다고 말하는가? 이는 모순이 아닌가?

해답:곤경에 처한 교회가 그 시련의 열기 속에서 부르짖는 것과 진리의 성령께서 성도들을 위해 위로의 말씀을 주시는 것은 서로 별개의 문제이다. 가장 탁월한 성도들과 순교자들이 폭풍의 기간 동안 하나님께 나아가 호소하는 것은 통상적인 일이다. 이는 마치 베드로가 갈릴리 바다를 건너던 중에 배 고물에서 주무시는 그리스도께 그렇게 했던 것과 같다. 그는 마치 주님이 그들의 고뇌를 전혀 알지 못하시기라도 하듯이 끈질기게 간청을 드렸다. 요나를 태운 배가 바다에서 사나운 폭풍우를 만나 침몰의 위기에 직면했을 때, 선원들이 요나에게 “자는 자여 어찜이뇨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고 부르짖은 경우도 이와 유사하다. 일어나소서! 기도 중에 있는 성도들은, 마치 하나님이 침상 곁에 계신 듯이 그분과 친숙한 위치에 있다.

영혼의 간절한 열망:이스라엘의 집을 지키시되 결코 졸지 않으시는 파수꾼이신 주여, 파멸에 처한 우리를 돌아보지 않으시나이까? 깨소서, 깨소서! 주의 강하신 팔을 펼치시고 띠를 띠소서! 나는 주께서 일어나 계시는 줄을 알고 있나이다. 하지만 주께서 나를 도우사 일으켜 세워주시지 않는다면 내가 어떻게 하겠나이까? 나는 주께서 인생처럼 주무시지 않음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께서 스스로를 드러내시지 않는다면 내 영혼에게 유익한 것이 무엇이겠나이까? 잠들어 있는 자는 바로 저입니다! 주께서 주무시는 듯이 보이는 것은 나를 깨우시기 위함입니다. 또한 그것은, 주께서 내게 당부하셨듯이 나로 하여금 한 시간이나마 주와 더불어 깨어 있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내가 깨어 있기만 한다면, 나는 주께서 나를 영원토록 돌보고 계심을 이내 깨달을 것입니다. -윌리엄 스트리트(William Streat, The Dividing of the Hoof, 1654).

23절. “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우리는 믿음이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당신의 백성에게 직면된 상황을 고려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하는 유혹에 노출되어 있다. 또한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성령은 이러한 시련기에 적절한 간구를 알려주시며,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옹호하기 위해 일어나시리라는 담대한 기대감을 피력할 수 있다. -윌슨(W. Wilson).

25절. “우리 영혼은 진토에 구푸리고 우리 몸은 땅에 붙었나이다.” 우리의 몸과 영혼은 타격을 받아 넘어지고, 말하자면 땅에 납작 엎드러졌다. 그래서 우리 혼자 힘으로는 일어설 수가 없다. -헹스텐버그.

25절. “우리 영혼은 진토에 구푸리고.” 그들에게 닥친 곤경의 깊이 혹은 그들의 슬픔과 굴욕의 크기를 표현해 주는 은유적인 내용이다. (1) 그들에게 닥친 곤경의 깊이. 이는 전투에서 패배하거나 치명적인 부상을 당하여 먼지더미 속에 쓰러진 사람의 경우를, 혹은 죽어서 땅 속에 묻힌 사람의 경우를 암시하는 내용으로 표현되었다. 이 내용은 “주께서 또 나를 사망의 진토에 두셨나이다”(시 22:15)라는 구절과 그 맥을 같이한다. 또한 우리가 확신하기에, 이 표현은 죽었거나 거의 죽음에 이른 자의 극한적인 낙망과 위험 상황을 시사한다. (2) 그들의 슬픔과 굴욕의 크기. 이는 땅에 납작 엎드린 모습을 암시하는 내용으로 표현되었다. 이것은 여호와 앞에서 스스로 겸비한 태도를 나타내거나 큰 재난을 당했을 때의 모습을 나타내는 자세이다. 헤롯 아그립바가 죽었을 때, 사람들은 베옷을 입고 울면서 땅에 엎드렸다고 한다. -토머스 맨턴(Thomas Manton).

[설교힌트]

1절. 교회사의 고무적인 전통들.

1절. 부모의 의무와 자녀의 특권.

1절. 가족간의 대화를 위한 가장 유익한 주제.

1절. 모범적인 옛 시대의 진정한 영광.

2절. 성도들에 대한, 그리고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대조적인 처사.

3절. 거저 주시는 은혜를 기림. (1) 인간의 힘을 무력화시키심과 관련하여. (2) 하나님의 권능을 드러내심과 관련하여. (3) 그 비밀스러운 자원과 관련하여. “주께서 저희를 기뻐하신 연고니이다.”

3절. (1) 피조물은 낮아짐. (2) 여호와께서 높임을 받으심. (3) 특별히 구별하시는 은총이 계시됨.

3절 하반절. 모든 은총의 영원한 원천.

4절. (1) 하나님의 왕권을 인정함. (2) 왕의 개입을 호소함. (3) “야곱”이라는 표현 속에서 하나님의 언약이 암시됨. 혹은 충성스러운 백성이 왕의 후손을 위해 왕께 도움을 구함.

4절. 개인적인 충성, 그리고 중재를 간청함.

4절. “나의 왕.” 이 표현 속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1) 나의 통치자. (2) 나의 영예. (3) 나의 인도자. (4) 나의 수호자.

4절. 야곱에게 임한 구원들은 파란만장했던 그의 생애를 통해 예시되었다.

5절. 우리가 어떤 방법으로, 어떤 힘으로, 또한 어떤 정신으로 우리 대적들을 물리칠 것인가?

6절. 외적 대상들을 의지하는 일을 단념함. “내 활”은 목표물을 비껴갈 수 있으며, 부러질 수도 있고, 또한 빼앗길 수도 있다. “내 칼”은 부러지거나 무뎌질 수 있으며, 내 손이 그것을 놓칠 수도 있다. 우리는 자신의 역량과 경험과 재치와 부귀 등을 신뢰할 수가 없다.

6절. 자기 포기, 이것은 성도와 죄인의 의무이다.

7절. 완수된 구원. 누구에 의해? “오직 주께서.” 언제? “······하셨나이다.” 누구를 위해? “우리.” 어떤 범위에서? “우리 대적에게서.”

7절. 구원이 완수되었고, 지옥이 타파되었고, 또한 그리스도께서 높임을 받으셨다.

8절. 찬양, 그 지속성. 찬양을 영구적으로 지속하는 방법. 찬양이 지속됨으로 인한 영향. 우리가 찬양 가운데 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들.

9절. 교회의 타락을 애통해 하는 애가.

9절.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내버리시는 의도.

9절 하반절. 우리 교회들에게 닥치는 역경들 중 가장 심각한 것.

12절. 핍박의 결과에 대한 인간적인 평가와 하나님의 평가.

12절. 이 불평에 대한 대답. (1) 하나님의 백성은 박탈을 당해도 결과적으로는 아무것도 잃지 않는다. (2) 악인들은 자신의 승리를 통해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3) 하나님은 그 백성이나 악인들을 다루심에 있어 자신의 영광에는 아무런 손상도 입지 않으신다. -조지 로저스(George Rogers).

13절. 잔인한 조롱이라고 하는 시련. 그 아래에서 행하는 우리의 행실, 그 안에서 얻는 위로, 그리고 그것을 통해 쓰게 되는 면류관.

14절. 경건치 못한 격언들과 추잡스러운 말장난.

15절. 회개자의 고백.

17절. 시련, 진리, 그리고 경건한 자의 승리.

17절. 자신의 성실성을 확고히 견지하는 신실한 영혼.

17절. 하나님과의 언약에 대해 거짓 되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18절 상반절. 우리 마음이 변절되지 않았음을 확신할 수 있을 때.

18절. (1) 신앙에 있어 마음이 차지하는 위치-가장 우선적임. (2) 신앙에 있어 외적, 윤리적 삶이 차지하는 위치-마음에 뒤이어 수반됨. (3) 이 둘이 일치될 필요성. (4) 이 둘 모두가 하나님에 대한 신실성을 바탕으로 해야 함.

18절. 하나님은 정직한 자의 걸음을 기뻐하심. -토머스 브룩스.

18절. “주의 길.” 하나님의 길은 이러하다:(1) 의로운 길. (2) 복된 길. (3) 영혼을 소생시키는 길. (4) 초월적인 길- 다른 모든 길을 초월하는 길. (5) 영혼을 강건케 하는 길. (6) 때로는, 곤경과 혼란과 핍박에도 직면하게 하는 길. -토머스 브룩스.

21절. 그분이 그렇게 하실 수 없을까? 그분이 그렇게 하시지 않을까?

22절. (1) 시련 중에도 결백함-“양.” (2) 수치 중에도 영예로움-“주를 위하여.” -조지 로저스.

23절. 슬픈 상황에 처한 교회의 부르짖음. 낙심한 영혼의 불평.

24절. 하나님이 위로를 거두시는 이유.

25절. 심각한 곤핍 상태, 그리고 위대한 기도와 호소.

26절. 확신에 찬 영혼을 위해, 시련이나 핍박 아래에 놓인 성도들을 위해, 그리고 억압과 타락에 직면한 교회를 위해 적절한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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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9일] 시편 44편

본문: 시편 44편

찬양: 하나님이시여,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시편 44편은 분류상 애가입니다.특별히 이 시편은 개인적 차원의 애가가 아닌, 공동체차원의 슬픈 노래, 기도입니다.

1-8절 하나님께서 과거에 그들에게 주신 승리를 회상하며 기쁨과 감사를 고백합니다.

9절.. “그러나 이제는” 전쟁에서 패하고 비참해진 상황, 기도해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지 못하는 상황속에 시편기자는 탄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3절 이하에서는 그러한 절망속에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들의 기도를 더이상 듣지 않으시는 것 같은 그렇나 절망과 비참함 속에서도 상황속에서도 여전히 그는 하나님께 기듣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이전에는 그들에게 승리를 주셨던 하나님이, 이제는 더이상 돌아보시지 않으시고, 기도에 응답하시지도 않으시며, 자신들의 비참한 패배를 그저 바라보시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이런 이해할 수없는 상황속에서도 그는 어떻게 계속 기도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있었는가?

오늘 이 시편을 묵상하며 우리가 던지고자 하는 질문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는 메세지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가 시편기자가 마주하고 있었던 그러한 어려운 현실에 직면하고 있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의 연약함과 죄악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고통에 마주하고 있지만, 그럴지언정, 이 고통의 시간을 허락하신 하나님임을 우리가 기억한다면, 우리는 과연 이 어려운 시기에 무엇을 해야할까… 오늘 시편을 통해 말씀해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우리가 함께 듣기를 원합니다.

먼저 1-8절을 먼저 보면,1-8절까지는 과거에 시인과 그의 나라에 주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절망가운데, 옛날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자신의 경험이 아니라, 옛적 조상들, 아버지들로부터 들었던 영광스런 하나님의 승리의 이야기입니다.

애굽에 400년간 종살이로 있던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켜, 가나안땅으로 들이시는 이야기.. 시편기자는 그 일을 이렇게 말합니다. “그 일은 주께서 주의 손으로 행하신 일이다!!” 자기 백성을 도우시고 승리케 하셨던 이유는 자신들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주께서 그들을 기뻐하신 까닭” 즉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그는 알았던 것입니다.

그의 찬양은, 옛적 이스라엘이 가나안땅에 들어온 때에 하신 일로부터, 이제는 가까운 과거, 이 찬송을 부르는 시인이 경험한 일들로 나아갑니다. 4-6절은 그래서 주어가 “그들”에서 “우리”로 바뀌어집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조상들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의 삶 또한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었음을 그는 고백합니다.

그가 경험한 하나님을 그는 “종일 자랑하였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동하여 매일 하나님만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이런 마음을 우리 모두도 경험해본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어디에서든 누구에게든 하나님을 자랑하고 싶었던 그 은혜의 경험들 말입니다… 그 감격과 설렘과 감동이 그에게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9절에 이르면 완전히 다른 분위기로 바뀌어집니다.

9절 “그러나 이제는”

왜냐하면 그들에게 그 큰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서 더이상 하나님께서 그들의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않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종일 하나님을 자랑했던 그가, 그래서 이제는 10-15절, 능욕과 수치가 종일 그 앞에 있게 되었습니다.

17-21절에서 그는 말합니다. “왜 이런 고난이 그들에게 주어졌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이런 고난을 초래할 만한일을 저지르지 않았다..” 마치 욥의 고백과 같지 않습니까?

그리고 나서 그의 고백 22절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어디서 본 이 말씀 같지 않나요? 사도바울이 로마서에서 이 구절을 인용했던 그 말씀입니다. 그는 로마서에서 이 시편 44편 22절을, 믿음을 지키며 고난을 당하는 초대교회 성도들을 위해 씁니다. 왜 이 구절을 썼는가? 바울은 시편 44편에서 그들이 당했던 고난이, 그리고 그 초대교회 교인들이 마주했던 고난이 바로 “주를 위한 고난” 이었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주를 위하여..”

이 말에는 소유에 개념이 있습니다. 주를 위하여 구별된 자들, 주를 위하여 구별되어 성전의 양들이 제물로 바쳐진 것처럼.. 성도란, 바로 구별된 자, 주를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구별된 자들입니다.

이유없이 계속되는 어려움과 고난속에서 있을때, 무엇보다 그러한 상황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지만 하나님은 응답해주시지 않고, 우리를 돌아보시지 않는 것 같을때… 우리의 마음은 녹아져 내립니다. 과연 우리는 더이상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리에겐 소망이 과연 소망이 있을까?…

시인은 이런 절망의 순간에.. 무엇을 선택합니까? 23-26절. 하나님이 더이상 그들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 것 같은, 그 절망의 한복판 속에서도.. 그는 기도하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그의 선택은 여전히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이 절망속에서도 기도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이었을까요? 오늘 우리가 아무리 절망의 상황가운데 있을지라도, 우리가 기도해야함을, 기도할 수 있는 그 근거와, 여전히 기도속에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힘은 무엇일까요?

26절.. “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 주의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소서”

그가 소망을 가지고 기도하기를 멈추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근거, 그 힘은, 바로 주의인자하심입니다.

인자하심, 이 히브리어 단어는 바로 우리가 잘 아는 그 단어이지요. 헤세드, 바로 언약의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모든 절망의 순간에, 오늘날 특별히, 우리 공동체가 마주한 절망의 현실가운데, 언제쯤 헤어나올 수 있을까? 아니 헤어나올수는 있을까? 하는 여러움과 절망의 순간에 붙들 수 있는, 아니 여전히 붙들고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인자하심입니다.

그래서 그는 고백합니다.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났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그에겐 생명보다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그 생명보다 나은 그 헤세드, 하나님의 변치않는 사랑에 근거하여 그는 기도를 포기 하지 않았고, 하나님께 자기들의 도움이 되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는 인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는 헤세드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시편을 묵상하면서 로마의 성도들에게 이 말을 썼을 것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5-39).”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에서 매일 도살할 양처럼 여김을 받을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헤세드를 기억함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절망 속에서도 말이지요. 왜냐하면 우리가 주를 위하여 도살 당할 양처럼 죽임을 당하기 전에, 그 언약에 신실하신 주께서 친히 우리를 위하여 도살 당한 희생양이 되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신실하신 헤세드의 사랑, 그 인자하심을 기억하며, 오늘 우리의 상황이 아무리 절망적이라 할지라도, 그분을 향해 기도하기를 멈추지 않는 우리 모두가 되길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함께 기도하길 원합니다.

1. 기억하라! 가나안땅에서 베부르게 될때에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해야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잊어버린 그 은혜, 우리로 다시한번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 그 손길임을 다시한번 깨닫고, 기억하게 하여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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