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3 편의 배경 | 달콤한 Qt 서정오목사의 시편산책 10: 더 원할 것 없습니다 (시편23편) 빠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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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보다 더 달달~한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아침 묵상,〈달콤한 QT〉
서정오 목사의 시편 산책 그 10 번째, 더 원할 것 없습니다
▶말씀: 시편23편
\”나의 목자 되신 하나님이 계시는데 아직도 부족히고 더 바랄 것이 있나요?
오늘 하루 시편23편을 깊이 되새기며 행복의 비결은 무엇인지 묵상해보세요\”
▶말씀인도: 서정오 목사
▶방송 월~금 오전 6:30/ 유튜브 오전 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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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고백과 같이(시23:1-6) – 네이버 블로그

시편 23편의 배경은 다윗 왕 노년에 자기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좇아오는 아들을 피해 도망치며 불렀던 시가 시편 23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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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1/1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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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란노

시편 23편을 묵상하며 목가적인 감상과 함께 “여호와는 내게 목자시니 내게 … 일반적으로 시편 23편은 여느 다른 시들과 마찬가지로 어떠한 배경을 근거로 하여 작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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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duranno.com

Date Published: 8/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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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23편>

시편 23편은 집을 떠나 유리(流離)하는 다윗의 상황을 담고 있습니다. … 시편 23편에는 자세하게 소개하지 않지만 구약의 배경을 찾아보려고 노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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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aladin.co.kr

Date Published: 4/2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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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스펄젼의 시편 23편 강해 – 다음블로그

스펄젼의 시편 23편 강해 [개 요] 주제 이 시에는 “다윗의 시”라는 말 외에는 다른 머리말이 없다. 사실 이 시는 특별한 상황에서 기록한 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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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3/1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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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를 배경으로 읽는 시편 23편 이해(1) – 크리스천투데이

여섯 절로 되어 있는 시편 23편은 시편 중에서 가장 많이 애송되는 시이다. 이 시편의 언어들은 일상생활 속에서 늘 사용되는 단순한 것들이지만 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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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ristiantoday.co.kr

Date Published: 3/2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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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23편에 대한 오해

시편 23편에 대한 오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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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hyjesusonly.com

Date Published: 6/1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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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23편 & 성경주석

시편 23편 & 성경주석 ·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 2.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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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ible-story.tistory.com

Date Published: 1/1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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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시편 23편 4절에 보면,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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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sooyoungro.org

Date Published: 8/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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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17 – 오후예배 설교문(시편23편) – 숭실교회

목자이신 하나님! 본문말씀: 시편 23:1-6 오늘 시편23편은 전 세계 기독교인이 가장 좋아하는 성경말씀입니다. 우리나라의 성도들도 마찬가지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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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sspch.net

Date Published: 5/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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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시편 23 편의 배경

  • Author: CBSJ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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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9. 8.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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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고백과 같이(시23:1-6)

성경/시23:1-6 제목/다윗의 고백과 같이

● 목자 되시는 하나님

시편 23편은 시편 1편과 더불어 많이 알려진 시편입니다. 기독교 백화점에 가면 시편 23편을 쓴 액자들을 보면 목가적인 풍경 속에 예수님께서 어린양을 안고 있는 모습이 대부분입니다. 그 만큼 평안함과 포근함을 느낌을 주는 것이 시편 23편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성구이기도 합니다. 시편 23편은 저자는 다윗입니다. 다윗이 언제 시편 23편의 시를 썼을까? 우리가 머릿속으로 그려보는 평안하고 포근한 배경이 아닙니다. 시편 23편의 배경은 다윗 왕 노년에 자기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좇아오는 아들을 피해 도망치며 불렀던 시가 시편 23편입니다. 그러니까 시편 23편의 배경은 처절하고, 수치스럽고, 절망적이고, 가슴이 찢어지듯 아픈 상처 속에서 드려진 찬양입니다.

시편 23편에서 다윗의 고백의 핵심은 본문 1절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다윗은 아들 압살롬에게 수치스러운 도망 속에서도 하나님을 목자로 고백합니다. 우리나라는 농경사회이고 양을 많이 키우지 않기 때문에 목자의 개념이 잘 잡히지 않지만, 주로 유목과 목축을 하던 유대인들에게 목자의 개념은 보호자요, 책임자요, 인도자요, 공급자입니다.

그래서 다윗 왕은 목자 되신 여호와께서 어떻게 보호하고 인도하고 공급하고 책임지는가를 2절부터 보여 주고 있습니다. 2절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고, 3절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의의 길로 인도하시며, 4절 어디를 가든 주께서 함께 주시고, 지팡이와 막대기로 보호해 주십니다. 그리고 5절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차려 주십니다.

▶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이런 것 아니겠습니까? 다윗과 같이 아들에게 쫓기는 수치스러운 처지는 아니라 할지라도, 다윗이 처한 위기처럼, 다윗이 당한 어려움처럼, 우리의 삶이 위기이며, 어려움에 있지 않습니까? 답답한 현실 속에서, 내일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불안하고, 초조하고, 깊은 잠을 자며 깨고 싶지 않은 심정은 아니십니까? 살아가고 있는 현실에 대해 ‘하나님 좀 어떻게 좀 해 보세요!’라는 하나님에 대한 간절함과 원망의 마음은 아니십니까? 다윗도 아마도 그러한 심정이었을 겁니다. 사랑하는 아들의 칼날을 피해 도망치는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바라보면, 어쩌면 죽고 싶은 심정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고백합니다. 다윗이 이렇게 고백 한 후에 다윗이 한 행동은 무엇입니까? 다윗이 노력한 것이 무엇입니까? 준비한 것이 무엇입니까? 압살롬을 공격하기 위해 자기의 군사들을 재정비 합니까? 왕의 자리를 되찾기 위해 도움의 세력을 끌어들입니까? 아닙니다. 다윗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그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고 고백하며 찬양하며 기도하며 기다렸습니다. 결국 압살롬을 앞세워 다윗을 쫓아낸 세력들을 자중지란(自中之亂)하여 무너지고, 압살롬은 도망치다 나무에 걸리고, 다윗의 장군 요압의 창에 죽임을 당합니다(삼하18:14).

● 다윗의 고백과 같은 삶

다윗은 자신이 푸른 초장을 찾아 눕고, 쉴만한 물가에서 쉬기 위해 무언가 애쓰고 수고하지 않았습니다. 영혼의 소생과 의의 길을 위하여 몸부림치지 않았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빠져 나오려고 지팡이와 막대기를 붙들고 휘두르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그 상황을 빠져 나오기 위해 스스로 무언가 하려고 발버둥치지 없습니다.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고백하며, 찬양하며, 기도하며, 기다리며 목자 되신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갔을 뿐입니다.

그러자 목자 되신 하나님이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로 인도해 주시고,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의의 길로 인도하시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함께 해주시고, 지팡이와 막대기로 보호하시며, 결국 원수 앞에서 상을 차려 주시고, 머리에 기름을 발라 주십니다. 그런 하나님이심을 아는 다윗이 시편 23편 마지막 절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이러한 시편 23편의 고백과 같은 다윗의 삶을 우리도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도 어려움 속에서도, 절망 속에서도, 수치스러운 속에서도, 답답함 속에서 다윗과 같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고백하고, 찬양하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리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다윗의 이러한 신앙의 고백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다윗이 이러한 고백할 할 수 있었던 배경을 그의 삶 속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첫째로, 다윗은 삶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시편 150편중 약 절반 정도인 73편이 다윗의 부른 찬양입니다. 다윗은 늘 하나님께 찬양하는 삶의 모습을 보입니다. 그의 찬양이 얼마나 영감이 있던지 사무엘상 16장을 보면 사울 왕이 하나님이 부리시는 악령이 괴로움을 당할 때에 다윗이 수금을 연주하므로 악령이 사울에게서 떠나갑니다.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이를 때에 다윗이 수금을 들고 와서 손으로 탄즉 사울이 상쾌하여 낫고 악령이 그에게서 떠나더라.”(삼상16:23) 찬양은 어려움을 당했을 때 위로와 힘을 주는 능력이 있습니다.

찬송가 413장 “내 평생에 가는 길”의 작사가는 스패포드라는 교수인데, 1873년에 미국 시카고에서 일어난 대화재 사건 때 모든 재산을 잃어버립니다. 그 충격에 가족들은 좌절하고 낙심해 있는데, 의사의 권유로 가족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스패포드 교수는 사건 수습의 일로 가족들을 먼저 보냈는데, 아내와 네 자녀가 탄 여객선이 영국의 화물선과 충돌하여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들을 모두 잃게 됩니다.

장례를 마치고 죽은 가족들을 추모하며 사고 지역을 지날 때 그는 눈물을 흘리며 이 찬송시를 적게 됩니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고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그렇게 찬양하는 자가 다윗과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둘째로, 다윗은 언제나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치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칭송과 사랑을 받자 사울 왕은 질투하여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사울을 칼을 피해 도망치는 다윗에게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찾아옵니다.

사무엘상 24장을 보면 엔게디 황무지에서 다윗을 추격하던 사울 왕이 굴에 들어가 용변을 봅니다. 그 굴에는 다윗과 그를 따르는 자들이 숨어 있었습니다. 다윗을 따르는 자들이 말하기를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삼상24:4) 하고 사울 왕을 죽이려고 하지만, 다윗은 사울 왕의 겉옷자락만 칼로 가만히 벱니다. 그러나 그 일로 인하여 괴로워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삼상24:6) 그리고 사울 왕을 죽이지 못하게 합니다.

그런 비슷한 일이 또 한 번 나옵니다. 사무엘하 26장에서 십 황무지에서 다윗을 죽이려고 좇아오던 사울 왕이 진영 가운데서 창을 머리 곁에 꽂아 둔 채 잠을 잡니다. 다윗을 따르던 아비새가 말하기를 ‘하나님이 오늘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넘기셨나이다. 청하오니 내가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내가 그를 두 번 찌를 것이 없으리이다.’(삼하26:8) 그런 아비새에게 다윗은 말합니다. ‘9.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10.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은 죽을 날이 이르거나 또는 전장에 나가서 망하리라.’(삼하26:9-10) 그리고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갑니다.

다윗은 시기하고 질투하여 억울한 누명을 씌우고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사울 왕을 두 번씩이나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사울 왕이 하나님께 기름을 부음을 받은 왕이기에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죽이지 않았음을 알게 하기 위하여 사울 왕의 옷자락과 창과 물병만을 가지고 갑니다. 그것은 다윗의 삶이 늘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서 사는 코람데오와 같은 삶을 살았기 때문에 압살롬에게 좇기는 수치스럽고,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고백하며 찬양하며 기도하며 기다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다윗은 예배 중심의 삶을 살았습니다.

아무리 신앙이 좋다고 할지라도 예배 중심의 신앙이 아니면 모래위에 세운 성과 같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삶을 얼마나 사모했는지,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이후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법궤가 우여곡절 끝에 다윗 성으로 들어 올 때에 왕의 신분도 잊고 다윗 성으로 들어오는 법궤 앞에서 옷이 흘러내리는 줄도 모르고 기뻐 뛰며, 춤추며 앞서서 갑니다. 그것을 본 다윗의 아내이자 사울 왕의 딸인 미갈이 다윗을 업신(삼하6:16)여기며 이렇게 말합니다.

새번역 성경으로 읽어 보겠습니다. ‘오늘 이스라엘의 임금님이, 건달패들이 맨살을 드러내고 춤을 추듯이, 신하들의 아내가 보는 앞에서 몸을 드러내며 춤을 추셨으니, 임금님의 체통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삼하6:20) 그러자 다윗이 말합니다. ‘21. 그렇소. 내가 주님 앞에서 그렇게 춤을 추었소. 주님께서는, 그대의 아버지와 그의 온 집안이 있는데도, 그들을 마다하시고, 나를 뽑으셔서,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도록, 통치자로 세워 주셨소. 그러니 나는 주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소. 나는 언제나 주님 앞에서 기뻐하며 뛸 것이오. 22. 내가 스스로를 보아도 천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주님을 찬양하는 일 때문이라면, 이보다 더 낮아지고 싶소. 그래도 그대가 말한 그 여자들은 나를 더욱더 존경할 것이오.’(삼하6:21-22)

그런 다윗이 성전 건축하기를 평생의 소원으로 가지고 성전 건축을 하려 하였지만 하나님은 다윗이 전쟁으로 많은 피를 흘렸기에 거절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대로 아들 솔로몬이 성전 건축 할 때에 더 멋있는 성전건축을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서 준비합니다.

역대상22:1-5 “1. 다윗이 이르되 이는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이요 이는 이스라엘의 번제단이라 하였더라. 2. 다윗이 명령하여 이스라엘 땅에 거류하는 이방 사람을 모으고 석수를 시켜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할 돌을 다듬게 하고, 3. 다윗이 또 문짝 못과 거멀못에 쓸 철을 많이 준비하고 또 무게를 달 수 없을 만큼 심히 많은 놋을 준비하고, 4. 또 백향목을 무수히 준비하였으니 이는 시돈 사람과 두로 사람이 백향목을 다윗에게로 많이 수운하여 왔음이라. 5. 다윗이 이르되 내 아들 솔로몬은 어리고 미숙하고 여호와를 위하여 건축할 성전은 극히 웅장하여 만국에 명성과 영광이 있게 하여야 할지라 그러므로 내가 이제 그것을 위하여 준비하리라 하고 다윗이 죽기 전에 많이 준비하였더라.”

역대상22:14-16 “14.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의 성전을 위하여 금 십만 달란트와 은 백만 달란트와 놋과 철을 그 무게를 달 수 없을 만큼 심히 많이 준비하였고 또 재목과 돌을 준비하였으나 너는 더할 것이며, 15. 또 장인이 네게 많이 있나니 곧 석수와 목수와 온갖 일에 익숙한 모든 사람이니라. 16. 금과 은과 놋과 철이 무수하니 너는 일어나 일하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실지로다 하니라.”

이러한 예배에 대한 간절함 때문에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고백하며, 찬양하며, 기도하며, 기다릴 수 있었습니다.

▶ 이러한 다윗의 찬양하는 삶, 하나님을 늘 인정하는 삶, 예배중심의 삶을 통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고백하는 신앙을 소유한 것처럼, 우리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늘 인정하는 코람데오의 삶, 예배 중심을 삶을 통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고백하는 신앙을 소유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스펄전 목사는 시편 23편을 일컬어 ‘시편의 진주’라고 일컬었다고 한다.1 수많은 성도들 뿐 만 아니라 성경을 그리 많이 접하지 않은 이들에게도 이 시편은 참으로 사랑을 받고 있다. 시편 23편은 병든 자와 고난당하는 이들에게 위로를 주는 시편으로 많이 읽혀지고 묵상되어졌다. 시편 23편은 굳이 주석을 하지 않아도 어렵게 느껴지는 시편은 아니며, 더욱이 많은 이들이 암송하고 있을 정도로 고도의 은유법이 사용된 시이다. 그러나 설교자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시편 23편을 주제로 설교를 할 때에는 설교자만의 독특한 메시지를 이 시편에 담아 선포하기란 쉽지 않으며, 또한 그 내용의 풍부함은 오히려 부담감마저 줄 수 있는 본문이 될 수 있다. 시편 23편을 묵상하며 목가적인 감상과 함께 “여호와는 내게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2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1~2절)는 구절에서 끝없이 푸르게 펼쳐져 있는 곳을 연상하며 한가로이 햇볕을 쬐고 있는 양떼들을 상상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시편 23편은 여느 다른 시들과 마찬가지로 어떠한 배경을 근거로 하여 작시되었는가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정황은 없다. 시편 23편은 고도의 비유적 표현을 가진 ‘사상’(寫像, imagery)으로 되어 있다. 이는 최소한의 언어를 가지고 자신이 표현하려고 하는 목적을 최대한으로 이루고 있다는 말이다. 마치 화가가 색에 의존하여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려고 하듯이 시편의 신앙인은 사상(寫像, Imagery)에 최대한 호소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상상을 적극적으로 유도하고 있다.

아름다운 전원시로 알려져 있으며,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자의 평화롭고도 조용한 즐거움을 묘사하고 있는 마치 한 폭의 그림을 연상시켜 주고 있는 듯한 이 시를 우리는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누구든지 한 번 쯤은 고민하였으리라 생각한다. 시편 23편을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대로 단순히 목가적인 측면과 함께 나타나는 서정적인 시의 관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또한 시편 23편에 언급되어 있는 지리적인 도움을 십분 활용하여 이해하여 이 시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얻고자 한다. 우선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하셨는데 과연 이 표현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하는 질의를 던짐으로써 이 시를 감상하도록 하자.

여호와는 나의 목자

이집트의 시내산을 거쳐 타박 국경을 거쳐 이스라엘을 입국하면 제일 먼저 도착하는 도시가 이스라엘 최남단에 있는 에일랏이라고 하는 곳이다. 이곳은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세계적인 관광 명소로 유명하다. 아카바만을 사이에 두고 요르단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데, 석양이 질 무렵 태양에 반사되어 에서 볼 수 있듯이 진한 적색으로 물 들어가는 요르단 영토는 이 지역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장관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지역에서 조금 더 북쪽으로 올라가면 광활한 광야가 펼쳐지는데, 얼마 후에 성경에서 언급하는 유대 산지에 이를 수 있다. 광야 생활에 지친 이스라엘 민족은 12종족을 대표하는 12정탐꾼을 이곳으로 보내기도 하였으며, 이스라엘 정탐꾼들은 이 지역에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대로 풍성한 포도 열매를 보기도 하였다(민 14:1~4). 또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고원 지대에 올라가는 싸움에 임하여 대패했던 지역이기도 하다(신 1:41~46). 유대 산지는 그 자체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상상하고 있는 비옥한 땅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상상을 초월할 만큼 많은 돌이 있다.

유다 지역은 크게 두 지역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마치 등뼈 역할을 하듯이 남쪽과 북쪽으로 쭉 뻗어 있는 유다 고원 지대가 있다. 서쪽에 위치해 있는 지중해에서부터 동쪽으로 이동할 때에 쉐펠라가 있고, 유다 고원지대 그리고 유다 광야 지대가 이어진다. 쉐펠라는 에서 볼 수 있듯이 이스라엘에서는 보기 드물 정도로 매우 비옥하다. 히브리어로 ‘낮은 땅’이라고 하는 의미인데, 유다 산지와 블레셋 평야 사이에 위치한 구릉 지대를 가리킬 때 쓰이고 있다. 이는 유다 고원지대에서 서쪽을 보며 이름이 지어졌다. 이 지역의 특성은 매우 비옥한 땅으로서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아얄론 골짜기, 소렉 골짜기, 엘라 골짜기, 구브른 골짜기, 라기스 골짜기, 아도라임 골짜기 등을 포함하고 있다.

반면에 동쪽으로 진행하며 고원 지대를 넘어서면 에서 보는 바와 같이 매우 척박한 광야 지대가 이어지는데, 이 광야 지대를 일컬어 유다 광야라고 한다. 즉 고원 지대를 중심으로 해서 동쪽과 서쪽이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 주는데, 비가 내리는 형태가 전혀 다르다. 구름이 지중해에서부터 동쪽으로 이동할 때, 이 구름은 유다 고원 지대 위로 올라가게 되며 높은 곳에서 응고 되어 조금 더 찬 기후를 형성한다. 그리고 그 습한 기운을 가지고 있는 구름 기운은 산 위 가장 높은 곳에 다다랐다가 다시 요르단 계곡을 향해서 내려와서 요르단을 넘어 솟아 있는 모압 산지를 향해 이동하기 때문에 이 지역은 강수량이 적은 이스라엘의 기후를 감안한다고 하여도 특히 강수량이 적은 지역이다. 따라서 여러 세기를 걸쳐 거친 기후로 말미암아 경작할 수 있는 땅은 유다의 서쪽 경사 지역인 반면, 사막 지역은 동쪽의 경사 지역에서부터 시작한다. 즉 등뼈 역할을 하고 있는 고원지대에 위치해 있는 헤브론克5冗므爪예루살렘 도시를 중심으로 해서 동쪽 지역과 서쪽 지역의 강수량의 차이로 인해 서쪽 지역은 평야가 펼쳐져 있는 반면에, 동쪽 지역은 광야가 펼쳐져 있는 것이다. 유대 산지와 함께 이어지는 유대 광야는 신약에서 예수님꼐서 금식 기도를 하신 장소로 잘 알려져 있다. 사실 유대 광야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것 보다 훨씬 더 작은 지역이다. 남북의 길이는 남쪽의 사막 지역에 있는 브엘세바라고 하는 도시에서부터 예루살렘까지 이르는데, 약 80 km 정도이다. 유대 광야의 동서 길이는 예루살렘에서부터 동편에 위치한 사해까지 약 28km 정도이다.

이 지역의 특성은 에서 보듯이 이스라엘의 남쪽 지역과 함께 매우 척박하다. 서쪽 지역의 비옥한 땅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형태이다. 흔히들 생각하기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해서 많은 환상을 가지고 그 땅을 바라보는 경우가 혹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이스라엘의 광야를 보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대한 묘사에 대해서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물론 비가 간혹 내리는 겨울철에는 광야가 푸르게 변하여 마치 잔디를 깔아 놓은 듯하다. 그러나 만약 영국에 펼쳐져 있는 푸르고 푸른 잔디를 한번 쯤 본 사람이라면, 이스라엘의 겨울철의 초장은 그리 실감 있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알려진 이 약속의 땅은 광야를 포함하여 이스라엘의 모든 세대에 걸쳐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시험(test)의 장소였다. 그들이 광야를 통과하는 동안 빵과 물이 부족하여 생존의 위협을 받는 순간에도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진실로 의지하느냐에 관한 문제를 배우는 기간이었다. 광야에서 보이는 것이라고는 모래와 타는 듯한 태양, 사막의 들짐승들만이 존재할 뿐이다. 타는 듯이 내리쬐는 태양과 목마름, 사막에서의 살을 에이는 듯한 추위와 배고픔 그리고 들짐승들에 대한 공포 등 상상하기 조차 힘든 어려움이 산적해 있는 곳이다. 이처럼 사막에서의 삶이 불가능하였으나, 오직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실 때에 이러한 여행은 가능하였다. 배가 고파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하였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통하여 그들을 먹이셨다. 또한 목이 말라 고통 하고 있을 때에 반석에서 나오는 물로 그들을 살리셨다. 홍해가 갈라지는 체험을 하고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기는 하지만 다시 하나님의 존재마저 의심하고야 마는 이 백성들을 뜨거운 태양에서 보호 하시려고 거대한 구름 기둥을 준비하사 그들을 보호 하셨던 여호와 하나님, 사막의 밤에 생기는 차가운 기운을 막기 위하여 불 기둥을 준비하셨던 하나님. 사막에서의 엄청난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하시는 하나님, 그들과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 그 어느 신보다도 뛰어난 만왕의 왕이라고 하는 신앙이 그들 안에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순간들이었다. 비록 육신적으로 눈에 보이는 젖과 꿀을 직접적으로 볼 수는 없었다고 하여도 인류의 정신사에 있어서 큰 획을 그을 수 있는 영적인 젖과 꿀을 얻을 수 있는 가장 값진 순간들이었다. 젖과 꿀은 고사하고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는 듯한 이 땅에서 그들은 진정 영적인 젖과 꿀을 맛보았던 것이다. 2,000년간 나라 없는 백성으로 지냈어도 이 백성을 오늘날까지 존속시켰던 기초를 우리는 바로 여기에서 찾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광야에서의 경험은 훗날 다윗의 시편 23편에서 나타나는 신앙 고백의 근간이 되었다.

이 고원 지대에 위치해 있는 도시로서는 예루살렘과 헤브론이라고 하는 도시가 있다. 다윗이 처음으로 헤브론에 수도를 정한 것도 이러한 전략적, 지리적인 위치를 차지고 있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고원 지대에 위치해 있는 것이 전략적으로 얼마나 중요한가를 간파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또한 기후적인 면에 있어서 이 지역을 중심으로 비가 내리는 형태에 따라 서쪽과 동쪽 지역이 확연히 다르다. 따라서 이 유대 광야 지역 안에 속해 있는 도시들 가운데 우리의 관심을 끄는 도시가 베들레헴이다. 여호수아는 땅을 분배하기 전 이스라엘을 위하여 약속된 통치자가 유다 족속에서 나올 것을 예견하였다(창 49:10). 결국 다윗은 유대 광야 안에 있는 베들레헴이라고 하는 도시에서 태어났는데 예루살렘에서 약 11km 떨어진 남쪽에 위치한다. 다윗은 자신의 첫 번째 왕좌를 그가 태어난 베들레헴에서 남쪽으로 16km 정도 떨어진 헤브론에서부터 시작하였다. 이러한 지정학적인 위치에서 볼 때에 다윗은 사해 넘어 있는 모압산을, 그리고 반대편 서쪽으로는 지중해를 관망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젊은 다윗 왕은 모압산에서 아마도 훗날 그 백성을 향해 적대 행위를 하게 될 군사들이 훈련 하고 있는 장면을 보았으리라는 상상도 가능하다.

즉 이 지역에 거주하게 될 때에 양떼를 치는 목자가 어느 쪽을 택하였겠는가라고 묻는 다면 당연히 동쪽 보다는 서쪽을 선호하였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다윗과 같은 목동 일을 하였던 사람은 이러한 기후의 특성을 잘 알고 있었으며, 서쪽으로 양떼를 몰고 이동한다면 그들은 동쪽과는 전혀 다른 지역을 체험할 수가 있었다는 사실과 동쪽으로 향한다면 또한 서쪽과는 전혀 다른 메마른 지역이기에 양떼를 치기에는 서쪽과 비교하여 볼 때에 상대적으로 회피할 수 밖에 없는 지역이었다. 이러한 유대 고원 지대에서 목동의 직업을 가졌던 다윗은 ‘좋은 목자’의 교훈을 배울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경험은 훗날 그가 통치자로서의 모습을 세워나가는데 큰 교훈이 되었다.

고대 근동 지역에서 ‘목자’라는 칭호는 본래 백성을 다스리는 지도자들을 일컫는 용어였다. 이 칭호는 구체적으로 왕에게 적용되는 용어였다(렘 23:4; 겔 34:2을 참조). 더 나아가서 이 용어는 구약에서 하나님을 향해서 쓰이기도 하였다. “…요셉을 양떼 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시 80:1; 창 49:24; 겔 34:11ff 참조) 즉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하는 고백 속에는 단순히 감상적인 차원을 넘어선다고 할 수 있다. 목회적인 배경이 담겨져 있을 뿐만 아니라 신학적이며 또한 정치적인 배경도 우리는 감안해야 할 것이다. 마치 유대 고원 지대를 중심으로 죽음과 삶이 갈라지고 있는 상황에서 목동 생활에 뼈가 굳어져 있는 다윗이 어느 길을 택하느냐에 따라 그의 목동 시절 양의 생명이 달려 있었던 것과 같이 이제 다윗은 그가 어떠한 결정을 내리느냐에 따라 그의 추종자들과 함께 삶과 죽음의 길이 교차 하였던 중대한 사안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모습을 연상하고 있는 다윗에게 있어서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라고 하는 감상적인 고백의 차원에서 벗어나 여호와 그분 만이 곧 나의 생명이라고 하는 애끓는 고백이 ‘나의 목자’라고 하는 고백 안에 담겨져 있었다. 그 분만이 죽음의 길이 아닌 생명의 길로 인도하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신다는 고백이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머무르지 않고 그는 한 단계 더 나아가 여호와에 대한 고백을 담아 나아 간다.

여호와는 나의 인도자 (3절)

3절에서 시편 신앙인의 목자상에 대한 고백은 그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는 분에서 벗어나 비록 이해 할 수 없는 고난에도 그는 감사할 수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그의 인생을 안내하시는 분으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편에서 우선 양이라고 하는 동물의 속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 양이라고 하는 동물은 지구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동물이라고 한다. 양은 소나 말과 혹은 다른 짐승과는 달리 방향 감각이 거의 없다. 쉽게 멀리 가서 방황 할 때가 많이 있다. 그런데 다른 짐승들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반드시 자기 집을 찾아 돌아오지만 양이라고 하는 동물은 조금만 집에서 멀리 떨어지면 집을 찾지 못하는 속성이 있다. 반면에 양은 둥글게 우리를 만들고 그 속에 몰아넣고 목자가 문에 누워 있으면 절대 밖으로 나오는 법이 없다. 아침에 목자가 일어나 나오면 양들이 따라 나오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양은 충분한 물과 꼴로 인도할 수 있는 좋은 목자를 필요로 한다.

둘째, 양은 습성의 동물이다. 우선, 광야 가운데 나 있는 줄을 볼 때에 이러한 사실은 금방 드러난다. 그 넓은 광야에 줄이 그어져 있는데, 이 줄은 양의 성격을 잘 대변해준다. 수십 마리나 되는 양을 놓고 목자가 앞서서 가면 양이 뒤따라가는데 그 양들은 멋대로 진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앞에 있는 양을 따라 가기 때문에 그곳은 줄이 생기게 되는데 이러한 이유로 그 드넓은 광야에는 줄이 마치 오목판처럼 그어져 있다. 더 나아가 양은 오직 목자가 인도해 준 곳에서 발견되는 풀만을 뜯는다. 스스로 다른 곳으로 이동할 줄도 모르고 자신이 인도함을 받은 그 목초지의 풀이 초토화 되기까지 풀을 뜯는다. 그래서 모두 뜯어 먹어서 풀이 없으면 그들은 굶주리게 될 수 도 있는 습성이 있다. 따라서 목자는 이 양들을 이끌고 다른 목초지로 이동을 해야만 한다. 따라서 좋은 목자는 이들이 먹고 있는 목초지에 꼴과 물을 잘 살펴서 목초지에서 목초지로 이동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셋째, 양은 모여 있지 않고, 사방에 흩어져 풀을 뜯는 습성이 있다. 양들은 좋은 풀이 있을 때에 다른 양과 절대 싸우는 법이 없다. 좋은 풀이 있다고 해서 서로 차지하겠다고 싸우지 않는다. 풀은 어떤 곳은 좀 많이 나기도 하고 또 어떤 곳은 좋은 풀이 있어도 여러 군데에 퍼져서 풀을 뜯는 습성이 있다.

따라서 양들이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광야가 아닌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는 목자가 존재함으로 가능한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의 목자가 되심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었다. 이는 1절에서 3절의 주어가 분명하게 나타내 주고 있다는 사실과도 일맥상통 한다. ‘그가’ 나를 누이시며(ynIx-eyBir?’), ‘그가’ 나를 인도하시는 도다(ynIleh}b’y]), ‘그가’ 나를 인도하시는 도다(ynIjen]y’). 양의 주인은 목자이듯이 우리 인생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인생의 길에 진정한 주인인 하나님이 목자가 되어 주신다는 사실로 인하여 다윗은 감사할 수 있었다. 때로는 고난 가운데 처한다고 하여도 그는 목자가 되시는 여호와께서 계심으로 만족할 수가 있었다. ‘그의 이름을 위하여’라고 하는 구절에 잘 나타나 있듯이 지금까지 시편 신앙인의 삶 가운데 자신의 뜻과 목적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어가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호와는 나의 보호자

시편 신앙인의 목자상에 대한 고백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4절에서 비록 그가 광야 가운데 있는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이는 푸른 초장과 대비되는 말이다. 양들은 목초지를 따라 유대 광야에서 쉐펠라 즉 동쪽에서 서쪽을 왕래할 수 밖에 없다. 이 때에 유다 광야에는 참으로 험난한 골짜기들이 많이 있는데 이 구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골짜기는 히브리어로 가예(ay>G:)라고 하는데 이 용어는 우리로 하여금 유다 광야에 있는 깊고 좁은 ‘나할 프라트’라고 하는 곳을 떠 올리게 한다. 아랍어로는 와디 켈트라고 한다. 이 곳은 에서 보는 바와 같이 매우 좁은 길일 뿐 아니라 깊은 골짜기로 되어 있는 위험천만한 지역이다. 자칫 잘못하여 발을 헛디디기라도 하면 천길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져 목숨을 잃을 수 밖에 없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위태로운 골짜기이다.

이 뿐 만이 아니라 골짜기에는 맹수들이 거처로 삼고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바람이 갑자기 불어와 골짜기에서 양들을 아래로 떨어뜨릴 뿐 만 아니라 때로는 갑자기 쏟아지는 비로 인해서 양의 생명을 위협하기도 한다. 태양이 골짜기 아래에까지 비춰지지 않기 때문에 골짜기는 죽음의 골짜기라고 일컬어 질만큼 양떼에게 있어서는 참으로 위험한 여행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4절에서 언급하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가운데에서도 그가 ‘내 잔이 넘친다’고 고백할 수 있었던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여호와께서 그의 보호자가 되시기 때문이다. 이 구절에서 특히 목자가 위험한 가운데 있는 양떼를 보호한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용어가 있다.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는 구절이다. ‘막대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마쉬에나(hn;[ev]m’)라고 하는데 이는 솨안(?v)에서 유래하였다. 그 의미는 목자가 피곤할 때 의지하기도 하며 양 떼를 인도하는 방향 제시용 지팡이를 가리킨다. 그리고 ‘지팡이’(fb,ve)의 일차적인 의미는 ‘강타하다’라고 하는 의미를 가졌는데, 이는 양 떼에게 달려드는 맹수들에게 사용되던 곤봉과 같은 것으로써 보호형으로 쓰여졌다.

결국 지팡이와 막대기는 음침한 골짜기에서 위안을 줌과 동시에 든든한 힘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1절에서 3절까지는 ‘그가’라고 하는 3인칭 단수를 쓰고 있는 반면, 4절에서는 이보다 더 친근감을 가질 수 있는 2인칭 대명사로 바뀌어져 나온다. 즉 “…내가 두려워 하지 않을 것은 당신이(hT;a’) 나와 함께 하심이라. 당신의 지팡이(?]vi)와 당신의 막대기(?,n][;v]mi)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여호와께서 인간과 함께 하신다는 신뢰는 마태에 의하면 예수와 세상과의 관계에서 보다 더 확실해 진다. 마태에 의하면 예수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였고, 이는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의미였다(마 1:23).

이는 복음서의 골격을 이루고 있다. 마태복음의 끝에도 또한 예수께서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시면서 역시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고 마무리를 지었다. 즉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가운데에서도 다윗이 두려워하지 않을 이유가 있었다면 여호와께서 그의 목자가 되시기 때문이었다.

여호와는 나의 공급자 (5절)

고대 근동에서는 손님을 극진히 대접하는 관례가 있을 뿐 아니라 주인은 객을 보호할 의무를 가지고 있었다. 자신을 죽이려고 쫓아오는 이들을 피하여 사람의 장막에 들어가게 되면 생명을 보존 할 수가 있었다. 급한 나머지 장막에 들어갈 시간이 되지 않을 경우, 그 사람이 살고 있는 장막을 잡기만 하여도 그 주인은 객을 보호해주어야 했다. 이는 창세기 19장에서 롯이 천사들을 보호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천사들을 내 놓으라고 하는 소돔 백성들의 요구에 대해서 자신의 친딸을 내 놓아서라도 천사들을 보호하고자 하였던 롯의 이해하지 못할 행위도 이러한 관습에서 비롯되었다고 하겠다.

이 때에 원수들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이러한 관계를 다윗은 상상하였던 것이다. 그가 비록 원수에게서 쫓기고 있다 할지라도 그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구절은 단순히 보호하시는 의미에 한정되지 않는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에게 놀라운 공급자의 모습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근동 지방에는 지친 나그네에게 기름과 포도주를 대접하고 원기를 소생시켜 주는 관습이 있다. 고대의 목자들은 감람유와 황 그리고 향료등을 잘 혼합하여 양을 곤충으로부터 보호하고, 양의 피부에 생기는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썼다. 감람 열매와 포도가 자라는데 있어서 시간이 걸리고 또한 기름과 포도주를 숙성시키는데에도 시간이 필요하므로 내전이나 혹은 다른 나라와의 전쟁이 있을 때에는 이러한 것들을 준비할 만한 작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음은 당연한 것이다.

그래서 기름과 포도주는 건조한 근동 지역에서는 매우 값있는 품목으로 분류되었다. 온도가 상당히 높고 건조하기 때문에, 피부와 목이 상하기 십상이다. 이때에 기름은 얼굴과 몸의 피부를 부드럽게 하는 역할을 하며, 포도주는 목을 깨끗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손님을 맞이하는 경우 기름과 포도주를 대접함으로써 그들은 새 힘을 얻고 여행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기름과 포도주는 성경에서 기쁨과 번영을 상징하였다. 그래서 시편 104편 15절은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와 사람의 얼굴을 윤택케 하는 기름과 사람의 마음을 힘있게 하는 양식을 주셨도다”라고 하고 있다.

시편 23편에서 사용되는 용어가 직접적으로 인용되어 있지는 않다 하여도 시편 23편은 복음서의 핵심인 구속 사건에 대한 예수님의 목자상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생각해 깊이 묵상할 수 있는 시편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께서 나는 ‘선한 목자’(요 10:11)라고 하였을 때에 단순히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지식을 가지고 청중에게 익숙한 비유를 쓰기 위하여 ‘선한 목자’라는 표현을 쓴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구약에서 여호와가 나의 목자되심에 대한 개념은 신약에서는 예수께서 자신을 일컬을 때에 하신 말씀이었으며, 더 나아가서는 이 개념은 초대 교회의 개념으로 확장된다(벧전 2:25과 5:4 참조). 이러한 사실은 구약을 읽는 이로 하여금 ?물론 비판 입장에 서 있는 이들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지만 ?구속의 복음의 관점에서 시편 23편을 읽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출애굽기 사건의 메아리가 시편에 나타나고 있는 애굽으로부터의 여호와의 구속 사건에 대한 메아리로 울려나고 있으며, 이는 신약에서는 자신의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고 하는 선한 목자상에 대한 예수의 메아리로 바뀌어져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주(註)

1) J. J. Stewart Perowne, Commentary on the Psalms, 2 vols. in 1 (Grand Rapids: Kregel, 1989), 1:245. (초판 1878-1879)

2) 70인역은 ‘신선한 물’이라고 읽고 있다.

스펄젼의 시편 23편 강해

[개 요]

주제

이 시에는 “다윗의 시”라는 말 외에는 다른 머리말이 없다. 사실 이 시는 특별한 상황에서 기록한 시가 아니기에 특별한 머리말이 필요 없으며, 어떤 상황에서나 있는 그대로 성도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시라고 볼 수 있다. 이 시는 다윗이 영감을 받아 지은 아름다운 시로서 어떤 음악으로도 이 시에 담겨 있는 아름다움을 다 표현할 수 없다. 전쟁의 나팔 소리를 울렸던 자가 평화의 노래를 부르고, 목자로서 재난을 당해 슬피 울던 자가 양 떼의 평안함을 인하여 즐거움으로 노래한다. 독자들은 이 시를 읽으면서 넓게 드리워진 나무 그늘 아래 앉아서 주위의 풍성한 양 떼를 바라보며 기쁜 마음으로 노래하는 목동 다윗의 모습을 그려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윗이 노년기에 이 시를 기록했다면 그는 자신이 어린 시절에 다녔던 시냇가를 회상하며 조용히 묵상하는 가운데 기록했을 것이다. 이 시는 시편 중의 진주와도 같은 시이다. 그 부드럽고 순수한 빛은 보는 사람들의 눈을 기쁘게 한다. 이 시에는 경건함과 시적 아름다움이 함께 나타나 있고, 그 감미로움과 영성을 따를 만한 다른 시가 없다.

성경에서 이 시가 시 22편 다음에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을 주의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시 22편은 십자가의 시이다. 시 22편에는 푸른 초장도, 잔잔한 시냇가도 없다. 우리는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부르짖음을 읽은 후에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는 고백을 대하게 된다. 우리는 목자장 되신 그분이 당하신 피 흘리는 고통과 그분을 공격하는 칼을 본 후에야 선한 목자께서 우리를 돌보신다는 사실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것인가를 알게 된다.

이 시를 새에 비유한다면 종달새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종달새는 노래하면서 날아오르고, 날아오르면서 노래하며, 마침내 저 멀리 날아가 눈에 보이지 않을 때에도 그 노래 소리는 끊이지 않는다. 이 시의 마지막 말을 주의해서 살펴보라:”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이 시는 하늘의 노래이다. 구름 아래 이 땅에서 부르기보다는 하늘의 영원한 집에서 하늘의 곡조로 불러야 할 노래이다. 아! 우리가 이 시를 읽으면서 이 시의 영적 세계에 들어간다면, 하늘 나라에서 누릴 삶을 이 땅에서 체험하게 될 것이다.

[강 해]

1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3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1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무한하신 여호와께서 그분의 백성에게 목자가 되시다니! 하나님은 얼마나 겸손하신 분이시며, 이것은 또한 얼마나 감격스런 일인가!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그분의 위대한 사랑과 돌보심을 나타내기 위해 자신을 목자로 비유하신 것은 진정 우리의 감사와 찬양을 받으실 일이다. 다윗은 양을 지키는 자였으며, 그래서 양이 무엇을 필요로 하고 또 목자가 하는 일은 무엇인지도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약하고 아무 저항도 할 수 없으며 어리석은 피조물인 양으로 비유하고, 하나님을 공급하시고 보존하시며 인도하시는 분으로 비유했다. 아직 중생하지 않은 자, 하나님께 돌아서지 않은 자는 어느 누구도 자신을 여호와의 양으로 비유할 수 없고, 오직 늑대나 염소로 비유할 수 있을 뿐이다. 양이란 주인의 소유물이며, 야생 동물이 아니다. 주인은 때로 양을 대량으로 키우며, 종종 비싼 값으로 사기도 한다. 다윗이 깨달았던 것처럼 우리도 여호와께 속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구절에는 다윗이 여호와께 속했다는 것에 대한 확신이 나타나 있다. 여기에는 “만일”이라는 조건이나 “바란다”라는 소망도 없다.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자신의 상태를 단순히 서술할 뿐이다. 우리는 하늘의 아버지께 의존하는 마음을 배양해야 하겠다.

이 구절에서 “나의”라는 짧은 단어는 참으로 아름다운 말이다. 다윗은 “여호와는 이 세상의 목자시며, 그분의 수많은 양들을 인도하신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단순히 말했다. 그분이 다른 사람에게 목자가 아니라 할지라도, 나에게는 목자이시다. 그분은 나를 돌보시고, 나를 지키시며, 나를 보존하신다. “나의 목자시니”라는 말의 시제는 현재이다. 각 성도는 어떤 상황에 처했든지, 지금 현재 여호와의 돌보심 아래 있는 것이다.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다윗은 앞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했는데, 여기에 함축된 뜻이 이 구절에 나타나 있다. 다윗은 간단하고 긍정적인 표현으로 말한다:”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가 아니라면 내게 무엇인가 부족한 것이 있겠지만,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가 되시면 그분은 나의 필요를 채워 주실 수 있으시며, 또한 그분은 그렇게 하기를 기뻐하신다. 그분의 마음은 사랑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나는 이 세상의 일시적인 것으로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그분은 공중의 새도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도 자라게 하시지 않는가? 그렇다면 어찌 그분의 자녀들을 굶주리도록 버리시겠는가? 나는 또한 영적으로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그분의 은혜가 내게 족할 것을 안다. 내가 그분을 의지하노라면, 그분은 내게 “네 사는 날을 따라서 능력이 있으리로다”( 신 33:25 )라고 하실 것이다.

때로는 내가 원하는 것을 모두 소유하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에도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나보다 더 부유하고 더 지혜로운 자들이 부족함을 느낀다 할지라도, 나는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34:10). 다윗은 “내가 부족함이 없다”라고 하지 않고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했다. 세상에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해도, 기근이 이 땅을 황폐하게 하고, 재앙이 이 도시를 멸한다고 해도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가 늙어 몸이 약해진다 해도, 죽음이 내 앞에 닥친다고 해도 나는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나는 모든 것을 소유했기에 풍족하다. 은행에 돈을 많이 쌓아 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일용할 양식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악인은 항상 부족하나 의인은 결코 부족한 법이 없다. 죄인은 결코 만족하지 못하나,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만족함을 누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히 받는다.

2절.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두 가지 특성이 있다. 성도들의 삶은 묵상하는 삶이며, 또한 활동하는 삶이다. 이것이 두 가지 특성이다. 첫째, 성도들은 묵상하는 삶을 산다:”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푸른 초장”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이것은 진리의 성경 말씀을 가리킨다. 이 말씀은 항상 새롭고 신선하며 영양이 풍부하기에 이 말씀을 가까이하는 자는 늘 만족함을 누린다. 풀이 무성하게 자란 푸른 초장에 누우면 풀을 뜯다가 자갈이나 흙을 씹을 염려가 없어진다. 성경에는 감미로운 복음의 교리가 풍성하게 들어 있다. 부드러운 풀이 양에게 영양분을 공급하듯이, 말씀은 영혼의 양식이 된다. 우리가 성경에서 약속의 말씀을 발견하고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면, 우리는 초장에 누운 양과 같이 풍족함을 누리게 된다.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건초와 평안을, 안식과 새롭게 됨을, 평안과 만족을 발견한다. “그가 나를······누이시며”라는 표현을 주의해서 보라. 여호와,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여호와, 바로 그분께서 우리로 말씀의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그 말씀의 양식을 먹게 하신다. 말씀 안에 있는 약속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삼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는 마땅히 감사해야 한다. 그러나 어떤 영혼들은 세상에 연연하다가 세상을 따라 살아가기도 한다. 그들은 말씀이 복된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그러나 이 복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려 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푸른 초장”을 알고 있지만, 이 초장에 누우려 하지는 않는다. 수년 동안 “믿음의 확신”을 누리는 성도들은 은혜로우신 하나님께 크게 감사를 드려야 한다.

둘째,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의 은혜로 활동하는 삶이다. 우리는 생각할 뿐만 아니라 또한 행동한다. 우리는 먹기 위해서 누울 뿐만 아니라, 또한 온전함을 향해 행동하는 순례자들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했다. “쉴 만한 물가”란 무엇을 뜻하는가? 이것은 성령의 영향력과 은혜를 말한다. 그분의 영은 마치 물처럼 여러 가지 모양으로 우리를 도우신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고, 새롭게 하시며, 풍성하게 하시고, 소중히 여기신다. 이것들은 “쉴 만한 물가”와 같다. 성령께서는 평화를 사랑하시며, 어떤 허식의 나팔 소리로 떠들어 대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분이 우리 영혼에 오실 때에는 이웃 사람들에게 떠들어 대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이웃 사람들은 그분이 나와 함께하시는 것을 알지 못한다. 우리 마음에 성령을 홍수처럼 부어 주신다 해도, 우리의 바로 옆에 앉아 있는 자들도 이것을 전혀 알지 못한다.

내 마음 고요한 곳에서

하늘과 내 하나님을 만나네.

조용한 물은 깊이 흐른다. 속이 비어 있는 북보다 더 시끄러운 것은 없다. 하나님은 고요한 중에 성도들의 영혼을 만나신다. 하나님의 영은 택하신 양, 즉 성도들을 싸움과 다툼의 높은 파고가 있는 곳으로 인도하시지 않고, 거룩한 사랑의 평화로운 시냇가로 인도하신다. 그분은 독수리가 아니라 비둘기와 같으시고, 몰아치는 돌풍이 아니라 조용히 내리는 이슬과 같은 분이시다. 우리 주님은 이처럼 “쉴 만한 물가”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우리는 스스로 그곳으로 갈 수 없다. 우리는 그분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그가 나를······인도하시는도다”라고 했다. 그분은 우리를 그곳으로 몰아가지 않으신다. 모세는 율법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몰아갔으나, 예수께서는 자신의 본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사랑으로 이끄신다.

3절.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우리의 영혼이 슬픔을 당하면 그분은 우리를 새롭게 하신다. 우리의 영혼이 죄를 지으면 그분은 거룩하게 하시고, 약할 때면 강하게 하신다. 이는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이다. 그분이 하시지 않는다면, 세상에 살고 있는 그분의 종이라도 성도들을 위해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분의 말씀이 자동적으로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여호와, 그분이 내 영혼을 소생시키신다. 우리들 중에 은혜를 받지 못한 자가 있는가? 우리의 영성이 지극히 낮아졌다고 느끼는 자들은 없는가? 밀물과 썰물을 주장하시는 분은 우리의 영성이 썰물처럼 낮아졌을 때 다시 밀물처럼 회복시켜 주신다. 그렇다면 그분이 축복해 주실 것을 기도하라. “내 영혼의 목자시여, 나를 소생시키소서.”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그리스도인들은 순종하기를 기뻐한다. 그러나 이 순종은 주님의 본을 따르는 것이며, 사랑으로 행하는 순종이다. 그분이 우리를 몰아가시는 것이 아니라 앞서가시며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어떤 계명은 순종하고 다른 계명은 무시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말씀 안에 있는 모든 명령에 순종한다. 성경은 “의의 길들”로 인도하신다고 했다. (KJV에는 히브리 원어를 따라 “의의 길들”이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이렇게 “길들”이라고 복수형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에 유의하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명하시든지, 우리는 그분의 사랑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그대로 행할 것이다. 어떤 성도들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 그 축복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생각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것은 가장 감미로운 축복이요 선물이다. 우리는 죄에서 구원받기를 소망하고, 또 거룩한 길로 인도함을 받는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거저 주시는 은혜이다: “자기 이름을 위하여.” 우리가 거룩한 백성이 되고, 좁은 의의 길을 걷는 것은 위대한 목자이신 그분께 영광이 되는 일이다. 우리가 이렇게 인도함을 받는다면, 하늘에 계신 목자의 돌보심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께 감사와 경배를 드려야 한다.

4절.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이 구절은 사람이 임종을 맞이할 때 많이 암송하는 구절이며, 어두운 골짜기를 밝게 비춰 주는 구절이다. 이 구절에 들어 있는 단어들은 모두 풍성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내가······다닐지라도.” 다닌다는 말은 잘 아는 길을 걷는 것을 말하며, 어느 곳으로 가는지를 알고 있으며, 그 길을 따라 걷기로 결심한 것이며, 안전함을 느끼고, 그리하여 온전한 평안을 누리는 것을 말한다. 죽음을 앞둔 성도들도 당황하지 않는다. 놀라서 뛰어가거나, 더 이상 가지 못하고 멈추어 서는 것도 아니다.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그는 지금까지 걷던 걸음으로 계속 걸어간다.

“골짜기로.” 계곡 안에서 이리저리 걷는 것이 아니라, 계곡을 가로질러 걷는다. (KJV에는 “in the valley”가 아니라 “through the valley”라고 번역되었다. 이것은 “골짜기를 가로질러”라는 뜻이다-역자 주.) 우리는 사망의 어둡고 검은 터널을 지나서 밝은 영생으로 나온다. 우리는 죽은 것이 아니라, 영광 가운데 깨어나기 위해 잠시 잠을 자는 것이다. 죽음이란 그곳에 머물러 거하는 집이 아니라, 그곳을 거쳐서 나오는 현관과 같고, 목적지가 아니라 목적지를 향한 통로와 같다.

“골짜기.” 산에 폭풍이 몰아칠 때에도 골짜기는 조용하다. 이처럼 성도들의 마지막 날들은 그들의 인생 중에서 가장 평화로운 날들이다. 민둥산과 같은 산이라도 골짜기에는 풍성한 곡물이 있는 법이다. 이처럼 성도들은 살아서 누렸던 즐거움보다 죽음을 당해서 더 많은 즐거움과 지식을 얻게 된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이 골짜기는 “사망의 골짜기”가 아니라 “사망의 그림자가 있는 골짜기”이다. (KJV에는 “사망의 그림자가 있는 골짜기”라고 번역되었다-역자 주.) 사망의 본질은 사라졌고, 오직 그 그림자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림자가 있다는 것은 또한 어디엔가 빛이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사실이다. 우리의 순례 여행길에는 항상 죽음이 따른다. 그리고 하늘의 빛은 우리가 가는 길을 비추는 것이다. 죽음 저편에 빛이 있다는 것을 즐거워하자. 그림자를 두려워하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림자는 우리가 가는 길을 잠시라도 멈추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개의 그림자는 물지 못한다. 칼의 그림자도 죽이지 못한다. 죽음의 그림자도 우리를 멸망에 이르게 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망의 그림자를 두려워하지 말자.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시편 기자는 아무런 해도 없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예수께서 이 모든 악을 멀리 치워 버리셨다는 강한 확신 속에서 이 말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마치 모든 악이 영원히 사라지고 없는 것처럼 두려워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고통스러워하는 것들 중에는 다만 우리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들이 많이 있다. 우리가 실제로 존재하는 해만을 당한다면, 현재 우리가 당하는 고난과 슬픔의 십 분지 일에 불과할 것이다. 우리는 한 번 죽는 죽음을 수천 번씩 느낀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이런 두려움에서 구원을 받았다. 그는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며, 악한 사탄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사탄은 이미 정복당한 원수이며, 앞으로 파멸을 당할 원수이다. 다윗은 이렇게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로서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고 했다.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즐거움이다. 바다 한가운데 있는 어린아이는 갑판에 있는 다른 승객들과는 달리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이는 엄마의 품안에서 잠들어 있다. 아이는 엄마와 함께 있다면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 이것은 성도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께서 그와 함께하신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당신은 나와 함께하십니다. 당신을 소유함으로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진 것입니다. 당신이 나와 함께하시므로 나는 완전한 위로와 절대적인 안전을 확보한 것입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 당신은 이것으로 당신의 양 떼를 다스리십니다. 이것들은 당신의 주권, 그리고 당신의 은혜로운 보살핌의 상징입니다.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나는 당신이 지금도 다스리고 계심을 믿습니다. 당신의 지팡이가 내 영혼을 보호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죽지 않을 것이라는 소망을 품고서 위로를 받는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까지 죽지 않고 살 자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도들이 이렇게 죽지 않는 것을 소망하며 살아갈 만한 특별한 가치나 이유가 있겠는가? 지혜로운 자라면 죽음을 맛보지 않는 것과 죽음을 당하는 것 사이에서 한 가지를 선택하라면 죽음을 선택할 것이다. 죽음을 당하지 않고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살전 4:17)하는 자는 사실 무엇을 얻는다기보다는 잃는 것이다. 죽음을 맞이하지 못한 성도들은 죽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나누는 교제를 상실한 것이다. 또한 바울도 살아 남은 자들이 자는 자들보다 더 특혜를 받는 것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이야기했다. 바울은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 1:21)고 했고,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빌 1:23)라고 했다. 시 23편은 낡은 시가 아니다. 이 시가 다윗의 시대에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던 것처럼, 또한 오늘날 성도들에게도 감미로운 시이다.

5절.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선한 사람에게도 원수는 있다. 원수가 하나도 없다는 것은 주님을 닮은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에게 원수가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친구가 될 수 없다.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며, 하나님과 벗이 되면 세상과 원수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에서 하나님의 사람은 원수의 목전에서도 평정을 잃지 않는 것을 주의해 보라. 그가 원수의 목전에서도 평안과 담대함을 유지한 것이 신선하게 느껴진다. “주께서······내게 상을 베푸시고.” 군인이 원수들과 전쟁을 할 때에는 식사를 급히 하고 전쟁터로 나간다. 그런데 여기서는 어떠한가? 주께서 상을 베푸시는데, 마치 하인이 평화스러운 때에 상을 펴서 식탁보를 정리하고 여러 가지 장식을 하고 잔치를 준비하는 것처럼 한다. 여기에는 어떤 혼란도, 소동도 없으며 서두르지도 않는다. 원수들이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지만, 마치 아무 일도 없는 평화로운 시기인양 하나님은 식탁을 준비하시고, 그리스도인들은 거기 앉아 식사를 즐긴다. 아! 이처럼 지극히 어려운 시기에도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백성들에게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을 주신다!

온 세상이 대적한다고 해도

성도들은 온전한 평강을 누리네.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우리는 날마다 우리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기름 부음을 받는 축복을 누리기 원한다. 성도들은 모두 제사장이다. 그러나 기름 부음이 없다면 제사장으로서의 의무를 다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성령님께 나아가 기름 부음을 받아야 한다. 기름 부음을 받지 않은 제사장은 그 자격을 상실한다. 또한 제사장은 하늘에서 새로운 은혜를 날마다 받지 않는다면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없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그는 잔 가득히 충분히 담았을 뿐만 아니라 넘치도록 받았다. 가난한 사람이라도 가진 것으로 만족하고, 넘치도록 만족을 누릴 수 있다. 가난한 농부는 한 조각 빵과 냉수를 마시면서도 “이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또한 주님이 저와 함께 계시지 않습니까?”라고 말하며 감사할 수 있다. 그의 잔이 넘친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부유한 사람이라도, 그가 만족하지 못한다면 그의 잔이 넘칠 수 없다. 만족하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한 사람의 잔은 금이 가고 그 틈을 통해 잔이 새는 것이다. 만족한 자는 무엇이나 그를 즐겁게 한다. 이 만족을 찾은 자는 행복한 자이다. 이것은 왕국보다 더 낫고, 이것을 가진 자만이 행복을 누린다.

6절.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나를 따른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우리는 이 사실에서 큰 위로와 격려를 받는다. 그러므로 “정녕”이라는 단어로 이 사실을 확증한 것이다.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은 “오직 선하심과 인자하심만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우리가 사는 동안 다른 것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이 우리와 함께할 것이기 때문이다. (히브리 원어에 “아크”<^a>라는 단어가 “선하심과 인자하심” 앞에 나타나는데 이는 “분명히”, “정녕”이라는 뜻으로 무엇을 확증하는 데 사용되기도 하고, “만이”라는 뜻으로 “다른 것을 제외하고 오직 이것만”을 제한적으로 가리키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 이 두 가지 뜻이 함께 어우러져 사용되기도 한다-역자 주.)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이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항상 우리를 붙들어 준다. 왕자가 외국에 나갈 때 수행원 없이 떠날 수 없듯이, 성도의 삶도 이와 같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항상 그를 따른다:”나의 평생에.” 우리가 사는 동안 때로는 어두운 날을 만나고, 때로는 밝은 날을 만나며, 때로는 배고픈 날을, 때로는 잔칫날을, 때로는 지루한 겨울을, 때로는 밝은 여름을 만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날에도 하나님의 선하심은 우리의 필요를 채우고, 그분의 인자하심은 우리의 죄악을 지워 버린다.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요 8:35). 내가 이 땅에 거하는 동안, 나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집에 거할 것이다. 이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은 그분이 내게 주신 집이다. 내가 천국에 가도 역시 그분과 함께 거할 것이다. 이 땅이나 천국이나 모두 하나님의 집인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하사 당신이 이 아름다운 시를 읽으면서 평화를 누리기를 바란다.

[주해와 설명들]

시 23편 전체. 다윗이 지은 많은 시 중에서 시 23편이야말로 가장 감미로운 시라고 할 수 있다. 새가 공중을 날면서 아름다운 소리로 노래하듯, 이 짧은 시는 이 세상을 노래로 가득 차게 한다. 이 노랫소리는 고난을 사라지게 하고, 슬픔에 잠긴 자들을 위로하며 안식을 준다. 이 시는 감옥에 갇힌 자를 위로하고, 의심을 사라지게 했다. 낙망한 군인들에게는 용기를, 병든 자에게는 새 힘을, 뼈아픈 슬픔을 이기지 못하는 과부와 고독한 고아들에게는 위로를 주었다. 죽어 가는 군인들은 이 시를 들으며 평안히 눈을 감았고, 음침한 병원은 이 시로 빛을 받았으며, 옥에 갇힌 자들은 이 시를 읽고 자유함을 누렸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노예 된 자들은 이 시를 읽으면서 주인이 누리지 못한 자유를 누렸고,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자들은 이 시를 읽으면서 위로를 받았다. 이 시는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를 줄 것이다. 당신의 자녀들과 나의 자녀들, 그리고 자녀들의 자녀들을 향해, 그리고 모든 시대의 사람들에게 노래하며 위로를 줄 것이다. 이 세상의 종말이 이르기까지, 그리고 마지막 성도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까지 이 시는 그 날개를 접지 아니할 것이다. 그러고서 하나님의 가슴으로 날아가 하늘의 모든 소리들과 함께 합하여 영원히 아름답고 기쁜 노래로 노래할 것이다. -헨리 워드 비처(Henry Ward Beecher, Life Thoughts).

시 23편 전체. 이 시는 “다윗의 목가시”라고 불린다. 다윗이 작사하고 노래를 부른 이 시는 참으로 귀한 시이다. 어떤 유대인들은 다윗이 헤렛 수풀에 숨었을 때에 지은 시라고 한다(참조. 삼상 22:5). 그러나 이 시는 그가 원수를 모두 정복한 후, 그 땅에 평화를 정착시키고서, 노년기에 이르러 한 발은 이 땅에 두고 다른 한 발은 천국에 들여놓았을 때에 지었을 것이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식사를 할 때 이 시를 암송한다. -존 트랩.

시 23편 전체. 어거스틴은 꿈 속에서 천국에 있었는데 시 119편이 생명나무가 되어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시 23편은 이 생명나무 주위에서 피어 나는 가장 아름다운 꽃과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시 119편은 모든 별들 중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태양과 비교되었다. 시 23편은 여러 별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별로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존 스토턴(The Songs of Christ’s Flock, 1860).

시 23편 전체. 어떤 경건한 사람들은 이 시가 묘사하고 있는 충만한 삶을 보면서, 우리가 항상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슬퍼한다. 그러나 다윗도 오래 살았지만, 시 23편과 같은 시는 오직 한 편밖에 쓰지 않았다. 우리는 이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가 쓴 어떤 시들은 역시 이 시처럼 생생한 믿음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시 23편은 처음부터 끝까지 개개인이 갖는 확신, 즐거움, 승리 등으로 가득찬 시로서 독특하고 유일한 시이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도 어두움의 시간이 있고, 또한 즐거움의 시간도 있다. -윌리엄 플러머.

1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어떤 사람들은 “내 땅이 나를 지키나니 나는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 사업이 나를 도우리니 나는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말할 것이다. 군인은 자신의 무기를 의지하고, 농부는 노동력과 기술을 의지하며, 예술가는 자신의 능력을, 상인은 사업을, 학자는 자신의 책을 의지할 수 있다. 그들은 “이것들이 나를 지키리니 나는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말하고 노래하자:”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진정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자들은 여호와 외의 다른 것들을 경멸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보다 다른 무엇을 더 사랑하는 자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고백할 수 없다. -존 헐(John Hull, B.D., Lectures on Lamentations, 1617).

1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 구절은 미래형으로 기록되었으나,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다”라고 현재형으로 번역할 수도 있다. -맥더프(J. R. Macduff, D.D., The Shepherd and His Flock, 1866).

1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우리는 이 비유에서 많은 교훈을 받을 수 있다. 다윗은 그가 말하는 대로 한때는 목동이었다:”그 종 다윗을 택하시되 양의 우리에서 취하시며 젖 양을 지키는 중에서 저희를 이끄사”(시 78:70, 71). 그 자신이 목동이었던 다윗은 이제 여호와를 목자라고 부른다. 그는 양 떼를 지키고, 사자와 곰 또는 다른 위험한 것들로부터 양들을 보호하고, 초장으로 인도하며 물가에 데려가 물을 먹였다. 다윗은 여호와께서 이와 같은 일, 그리고 이보다 더 크고 위대한 일을 하신다고 말하는 것이다. 바울도 이렇게 말했다:”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딤전 1:13). 우리는 이처럼 여호와의 돌보심을 야곱의 생애에서도 볼 수 있다:”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창 32:10). 이런 고백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명백하다. 첫째, 누구나 여호와께서 베푸시는 참된 은혜를 받을 수 있다. 은혜는 그 은혜를 받을 자를 구별하지 않는다. 은혜는 베푸는 자가 행하는 것이며, 받는 자가 행하는 것이 아니다. 둘째,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들은 모든 것을 영적인 일을 위해 사용한다. -사무엘 스미스(Samuel Smith, Chiefe Shepheard, 1625).

1절. “목자.” 여호와께서 목자가 되신다는 말은 진정 감미로운 말이다. 이 말을 듣고서 그리스도의 품에 안긴 경험이 없는 사람들, 그분의 양이 아닌 사람들도 목자의 선함을 생각하고 그분께 오게 되기를 바란다. 사탄은 우리에게 매혹적으로 다가오지만 결국에는 우리로 죄에 빠지게 할 것이며, 만약 당신이 그를 따른다면 당신은 그가 참으로 악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는 당신으로 죄를 짓지 못하게 하고, 가시로 죄의 길을 막아 버리므로 엄하게 보인다. 그러나 당신이 죄를 짓지 않고 그분의 양 떼 속으로 들어오면 참으로 선하신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양 떼 주위에 죄를 짓지 못하도록 가시 울타리가 쳐 있는 것을 보고서 그 안으로 들어가기를 꺼린다. 그러나 당신은 양의 우리를 싫어하지 말고 그 안으로 들어가라. 그리스도는 그분의 양이 방황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그분의 양들이 방황을 하면 그분은 양들을 안으로 데려오시며, 때로는 양 떼를 지키는 개(성도들이 당하는 고난)도 함께 데려오신다.

그분이 우리에게 고난을 주신다고 해서 그분을 악한 분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분은 선하신 분이다. 사탄은 당신에게 미소를 짓고, 당신이 죄를 지을 때는 당신에게 친절해 보인다. 그러나 그가 결국에는 당신에게 악하게 대할 것임을 명심하라. 마침내 우는 사자처럼 당신을 삼키고, 또한 괴롭게 하며 학대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오라. 그분을 당신의 영혼의 목자로 삼으라. 그리스도께서 당신으로 죄를 짓지 못하도록 막으시는 것은 그분이 선하시기 때문이다. 또한 선하신 그분은, 당신이 죄를 지었을 때에는 당신을 죄로부터 구원하신다. 아! 예수께서 그분의 양 떼, 특히 죄를 지은 자에게 선하시다는 것을 알고서 죄인들이 그분의 양 떼가 있는 우리 속으로 들어간다면! -존 듀랜트(John Durant, 1652).

1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여호와는 나를 먹이는 목자시다. 목자는 양 떼를 먹이고, 인도하고, 다스리고, 보호한다. -헨리 에인즈워스.

1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여호와를 목자로 비유하는 이유가 몇 가지 있다. 첫째, 선한 목자는 자신의 양을 안다. 목자는 양털에 표시를 하고, 양이 길을 잃으면 그 양을 찾으러 밖으로 나가서 양을 찾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이런 일을 행한다고 말씀하셨다:”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요 10:27). 하늘의 별을 헤아리고 그것들의 이름을 부르시며, 우리의 머리털 수까지 다 헤아려 아시는 그분은 그분의 자녀들을 특별히 보살피신다. 양 떼의 필요를 채우시고, 모든 위험에서 양을 보호하신다. 둘째, 선한 목자는 양을 치는 기술이 있어서, 양 떼를 풍성한 초장으로 인도한다.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양 떼로 척박한 땅에서 허기지게 내버려두지 않으신다······셋째, 선한 목자는 양이 곁길로 가는 습성이 있다는 것을 알고서 부지런히 양 떼를 지킨다. 양이 곁길로 가면 언제든지 그 양을 다시 데려온다.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가련한 양 떼들이 곁길로 갈 때에 자비를 베푸사 다시 데려오신다······넷째, 선한 목자는 자신의 기술을 활용하여 양을 먹일 의지를 품는다.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양 떼가 필요로 하는 것을 공급하기를 진정 원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에게 “내 양을 치라”고 세 번이나 간절히 부탁하셨다. 다섯째, 선한 목자는 그의 양 떼를 돌본다······여호와께서는 그분의 양 떼를 안전하게 지키신다. 다윗도 이 시편에서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고백했다. 또한 여호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내가 이 잡힐 양 떼를 먹이니 참으로 가련한 양이라 내가 이에 막대기 둘을 취하여 하나는 은총이라 하며 하나는 연락이라 하고 양 떼를 먹일쌔”(슥 11:7). 여섯째, 목자는 그의 양이 약하거나 너무 어리면, 그 양의 안전과 회복을 위해 품에 안고 다닌다. 여호와께서는 우리를 이렇게 대하신다:”그는 목자같이 양 무리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사 40:11). 마지막으로, 선한 목자는 길 잃은 양이 집으로 돌아오면 즐거워한다. 이처럼 여호와께서는 죄인이 회개하는 것을 즐거워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7). -사무엘 스미스.

1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나는 목자와 양을 주의해서 살펴보았다. 어떤 양들은 목자 가까이에 있어서 목자가 어디로 가든지 주저하지 않고 따르며, 다른 양들은 이쪽 저쪽으로 흩어지거나 멀리 뒤에 처지기도 하였다. 그리고 목자는 자주 뒤를 돌아보면서 날카롭고 엄한 목소리로 고함을 지르거나 그들을 꾸짖고, 때로는 돌을 던지기도 했다. 목자가 양을 불구로 만드는 것도 보았다. 모든 목자가 선한 목자는 아니다. 나는 양 떼로 덮여 있던 그 언덕을 지날 때마다 선한 목자라는 이 주제를 생각하곤 했다. 우리 구세주는 선한 목자시다. 그분이 앞서가면 양들은 그분을 따른다(요 10:4). 이것은 문자 그대로 사실이다. 그들은 잘 훈련되고 길들여 있어서 지극히 온순하게 목자를 따른다. 목자들은 각자의 양 떼들을 우리에서 끌어내어 그들을 앞서가며 어디든지 원하는 대로 인도하는 것이다. 초장을 향하는 길에는 여러 양 떼들이 함께 있어서 양들은 각기 자신의 양 떼에 속해 자신의 목자를 따라간다. 그러므로 양 떼들은 목자를 항상 따라야 하며, 곁에 있는 옥수수밭을 향해서는 안 된다. 어떤 양이든지 곁길로 가면 반드시 문제에 빠지게 되어 있다. 목자는 종종 큰 소리로 자신의 존재를 알려 준다.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고, 그 소리를 따라간다. 그러나 낯선 사람이 부르면 그들은 걸음을 멈추고, 머리를 높이 세워 긴장한다. 그 사람이 계속해서 부르면 양들은 도망을 간다. 그들은 이 낯선 사람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재미있으라고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단순한 사실 그대로를 말한 것이다. 나는 이 실험을 계속해서 해 보았다.

목자들이 앞서가는 것은 길을 가르쳐 주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가는 길이 안전하고 풍요로운가를 보기 위한 것이다. 사나운 맹수가 공격이라도 하면 그들을 막아서기 위해 목자는 무장을 하고 앞으로 간다. 그래서 그들은 무척 용감하다. 다윗이 그랬던 것처럼, 바로 이 산에서 목자들은 야수들과 싸운 경험이 수없이 많다(삼상 17:34-36). 지금도 사자들은 없지만 늑대는 수없이 많다. 그리고 표범이나 다른 야수들이 어슬렁거리며 다니기도 한다. 그것들은 종종 목자가 있을 때에도 공격하므로, 목자는 항상 싸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이 야수들과 용감하게 싸운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또한 도둑이나 강도가 나타날 때에도 충성스러운 목자들은 목숨을 걸고 싸우며 양 떼를 지킨다. 이렇게 싸우다가 실제로 목숨을 잃은 이야기도 들었다. 지난 봄, 한 목자는 도망가지 않고 세 명의 강도들과 싸우다가 칼에 맞았다. 그래서 그가 지키던 양 떼들 가운데서 죽어 갔다. 어떤 양들은 항상 목자 가까이 따르며, 목자의 사랑을 받는다. 그런 양들에게는 이름이 있다. 목자가 그 이름을 부르면 즐거이 응답한다. 친절한 목자는 이들이 먹을 수 있도록 맛있는 풀을 주곤 한다. 그런 양들은 늘 만족하고 행복하다. 이들은 길을 잃을 염려도 없고, 야수나 도둑이 가까이할 것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대부분의 양들은 그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행하고, 이기적으로 행동한다. 그들은 여기 저기 마음대로 뛰어다니고, 맛있는 것을 찾아 돌아다닌다. 어쩌다 한 번씩 다른 양 떼가 어디 있나 보기 위해 머리를 들곤 하며, 목자의 야단을 듣기 일쑤다. 어떤 양들은 목자의 인도에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의 밭에 뛰어들거나, 심한 경우에는 나무 위에도 오르다가 떨어져 다리를 부러뜨리기도 한다. 이런 양 떼들로 인해서 목자는 끊임없이 어려운 문제들을 수습해야 한다. -톰슨(W. M. Thomson, D.D., The Land and the Book).

1절. “목자.” 우리가 그 언덕에 앉아 있을 때, 갑자기 그 산에 생기가 도는 것을 느꼈다. 목자들이 양 떼들을 몰고서 성문을 빠져나와 이곳으로 오고 있었다. 우리는 목자들과 양 떼들을 흥미롭게 쳐다보고 있었다. 수천 마리의 양과 염소들이 떼를 지어 몰려왔다. 목자들은 양 떼들이 모두 나오기까지 그곳에 서 있었다. 그러자 목자들이 각자 흩어지고 자기 갈 곳으로 향했다. 그들은 자기 갈 곳으로 향하면서 각자 특유의 높은 소리를 지르며 나아갔다. 양들은 그 소리를 듣고서 자기의 목자들을 찾아 떠나갔다. 처음에는 양 떼가 이곳 저곳으로 혼란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자기 목자들을 향해 방향을 잡기 시작했다. 양들은 각각 자신의 목자를 따라 길게 일렬로 늘어서 이동했다. 이런 광경은 내게 새로운 것이 아니었지만, 언제 보아도 이 광경은 흥미롭다. 이 광경은 우리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생생하게 증언해 준다:”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어놓은 후에 앞서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고로 따라 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요 10:3-5). 목자들의 삶을 생각하면 평화롭고 조용한 삶을 연상하게 되지만, 실제로 목자의 삶에서 이런 모습은 전혀 보기 힘들다. 그들의 삶은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을 연상시킨다. 어깨에는 장총을 메고, 허리에는 단도와 권총을 차고 있으며, 손에는 싸울 때에 쓰는 도끼를 들었다. 목자들은 이런 것들을 가지고 다녔다. 그들은 날카로운 눈매에 험악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며, 언제든지 전투를 벌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포터(J. L. Porter, A.M., The Giant Cities of Bashan, 1867).

1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우리는 ‘빈곤’과 ‘결핍’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결핍’이란 무엇인가 없는 것을 말한다. ‘빈곤’이란 꼭 필요한 것이 없는 것을 말한다. 사람이 걸어야 하는데 지팡이가 없다면 이것은 ‘결핍’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걸어야 할 사람이 다리가 없다면 이는 ‘빈곤’이다. 선한 사람에게도 여러 가지 좋은 것들이 ‘결핍’될 수는 있지만, 필수적으로 있어야 할 것들이 없는 ‘빈곤’ 상태에 이르지는 않는다. 내게 좋은 외투가 없다면, 이것은 빈곤이 아니라 결핍이다. 외투가 없어도 내가 걸어다니는 데는 지장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동안 주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받은 대로 그 길을 조심스럽고 명랑하게 걸어갈 수가 있다면, 내게 화려한 장식품이 없어도 나는 부족함이 없다. 내게 있는 작은 것으로도 만족하고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우리는 타락하여 항상 세상의 것들을 추구하고,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것 이상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야고보는 사람들이 구하여도 받지 못하는 이유를 말하면서, 이는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약 4:3)이라고 했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들에게 부족함이 없도록 하겠다고 하셨다. 그러나 그분은 그들의 타락한 정욕을 만족시키려고 모든 것을 공급하시지는 않는다. 당신의 무지와 불만, 그리고 교만과 감사하지 않는 마음은 당신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고 황무지에 살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께서 하갈의 눈을 여시듯 당신의 눈을 여신다면, 당신은 샘과 시내와 자비와 축복을 충만히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사치스럽지는 않지만 풍족하고, 부유하지는 않지만 적합하고, 당신에게 가장 적합한 만큼 채워 주신다는 것을 알라. 당신도 다윗과 함께 이렇게 고백할 것이다:”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오바댜 세지윅.

1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선한 목자를 의지하고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고 믿는 것과 세상의 재물을 신뢰하며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고 믿는 것은 서로 반대되는 생각이다. 선한 목자를 의지하여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은, 세상 사람들에게 불가능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매우 어려울 것이고, 세상 재물을 신뢰하여 부족함이 없게 사는 것은 자연스럽고 쉬운 일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물질적인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하나님의 약속에 의존하는 자는, 쌓인 재물을 의지하는 자보다 비교할 수도 없이 훨씬 더 확실한 보장을 확보한 것이다. 이 세상의 재물이 우리의 필요를 언제나 채워 준다는 절대적인 보장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는 가장 현명하고 생각이 깊은 사람들이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약속이 가장 확실한 보증이 된다는 것을 누가 감히 부인하겠는가? -존 스티븐슨.

1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리스도의 양 떼는 초장을 바꿀 수는 있어도, 초장이 없는 경우는 결코 없다.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마 6:25). 그분께서 우리에게 위대한 것을 허락하셨는데도, 우리는 지극히 작은 것으로 그분을 불신하겠는가? 우리에게 하늘의 축복을 주신 그분은 또한 이 세상의 것으로도 복을 주실 것이다. 위대한 농부와 같은 그분은 결코 물건을 쓸데 없이 쌓아 두지 않으신다. -윌리엄 세커(William Secker).

1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당신이 아프다는 소식, 그리고 여호와께서 당신을 붙드시고 회복시키신다는 소식을 듣고서 이 편지를 통해 하나님께 찬송을 올립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할 때에 당신의 잔이 넘치도록 하신 하나님, 그분의 도우심에 대해 듣고서 내 믿음도 키우고 싶습니다.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고백은 우리 메시아의 양들이 “메-” 하고 고백하는 소리가 아닙니까? 여호와께서 우리의 목자가 되신다면, 우리는 결코 부족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 목자는 모든 것을 채워 주시는 분이시니까요! 그분만으로 우리는 풍족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 짧은 구절에는 충만한 평화가 담겨 있으며, 이것은 그분의 양 떼만이 아는 사실입니다. 이 시의 다른 부분은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말을 부연해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 시에서 우리는 안식, 새롭게 함, 회복시키는 자비, 인도, 죽음 가운데서도 얻는 평안, 승리, 넘치는 축복, 미래에 대한 확신, 삶과 죽음 가운데서도 누리는 영원한 안식, 영적 그리고 육적 번영 등을 발견하게 됩니다. 시 23편을 읽고서 우리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외쳐야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다면, 어떻게 부족함을 느낄 수 있습니까? 우리는 그분의 모든 부를 누릴 권리가 있습니다. 그분의 부와 영광이 우리의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금하시지 않습니다. 영원한 생명도 우리의 것입니다. 우리 목자장께서는 그분의 양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알고 계십니다. 그분이 손수 체험하셨으니까요. 그분은 “도살할 양”처럼 여김을 당하셨습니다. 그분은 “내가 내 양을 알고”(요 10:14)라고 하셨습니다. 그분은 양을 알기 위해서 스스로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치셨고, 그래서 양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스스로 체험하여 양들의 연약함을 동정하고 체휼하시는 것입니다. 그분의 양들은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어떤 고난도 아픔도 궁핍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어떤 경우에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기 때문입니다.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저를 바라리라 하도다”(애 3:24). -데오도시아 하워드, 파워스코트(Theodosia A. Howard, Mrs. Viscountess Powerscourt, Letters, 1861, 로버트 댈리 편집).

1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한 가난한 성도가 나이 들어서 무척 빈궁함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불평하지 않았다. 어느 날 한 친절한 이웃이 길에서 그를 만나자, “참 살기 어렵지요?”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처럼 나이든 노인이 어떻게 생활을 꾸려 나가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언제 보아도 쾌활하군요!” “천만에요! 우리는 빈궁한 것이 아닙니다. 내게는 부자 아버지가 있어요. 그분이 날 빈궁한 채 살라고 내버려두지는 않으신답니다.” “뭐라구요? 아직도 아버님께서 살아 계시단 말씀이신가요? 아버님은 연세가 정말 많으시겠군요!” “아! 내 아버지는 죽지 않으신답니다. 그분은 항상 나를 보살펴 주시지요!”

이 나이든 성도는 하나님이 날마다 공급해 주시는 연금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의 빈궁함과 그가 얼마나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지는 모든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필요한 것은 결코 부족한 적이 없었노라고 단언했다. 그가 최악의 빈궁한 처지에 놓일 때면, 바로 그때가 하나님의 구원이 일어나는 때였다. 나이 들어 그가 손으로 일을 하지 못하게 되자, 여호와께서는 자비의 손을 그에게 내밀어 주셨다. 아침을 겨우 먹고 난 후, 다음 먹을 점심을 구할 길이 막연할 때도 종종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다윗처럼 목자 되시는 여호와를 의지하고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고백할 수 있었다. 하나님을 신뢰한 그대로 여호와께서는 전혀 예기치 않는 방법으로 그의 필요를 채워 주셨다. -존 스티븐슨.

1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요한복음 10장을 보면 그리스도의 양에 대한 여섯 가지 특성을 발견할 수 있다. (1) 그들은 그들의 목자를 안다. (2) 그들은 목자의 소리를 안다. (3) 그들은 목자가 그들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듣는다. (4) 그들은 목자를 사랑한다. (5) 그들은 목자를 신뢰한다. (6) 그들은 목자를 따른다. -로저스(Mrs. Rogers, The Shepherd King, 1856).

1-4절. 강가에는 목자들이 양을 인도하고 있었다. 목자가 앞서가고 양은 목자의 뒤를 따르는 모습을 보면서 선한 목자 되신 우리 주님을 생각했다. 목자는 양 떼가 강을 건너도록 인도하고 있었다. 목자를 따르는 양들은 모두 같은 모습으로 따르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양들은 아무런 주저함도 없이 용감히 강을 건넜다. 이 양들은 목자의 발자취를 가까이서 따르며, 목자의 사랑을 받는 양들이다. 이 양들은 푸른 초장이나 잔잔한 물가를 거닐 때에도, 산에서 풀을 뜯어야 할 때에도, 그리고 정오의 뜨거운 태양을 피해 큰 바위 아래서 쉴 때에도 늘 목자 곁에 그를 따른다. 어떤 양들은 물에 들어가면서도 의혹과 두려움 가운데 들어간다. 그들은 강 저 아래로 떠내려가기도 한다. 그러나 양들은 한 마리 한 마리 모두 헤엄쳐서 강을 건넌다. 그런데 작고 어린 양들은 어떠한가? 그들은 강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 그들이 강에 뛰어드는 모습을 보면 가련하기 짝이 없다. 양 떼를 지키는 개들이 이 어린 양들을 쫓아 강으로 밀어넣는 것이다. 어린 양들은 “메애-” 하고 소리를 지르며 공포 가운데 물로 뛰어든다. 이 연약한 양들은 멀리 흘러 떠내려간다. 그러면 목자들은 강으로 뛰어들어가 두려워 떠는 양들을 안고 강을 건넌다. 모두 안전하게 건넌 후에는 양들이 기뻐하는 것이 역력하다. 나이 든 양들은 목자 주위에 모여들고, 어린 양들은 즐거워 뛰어다니며 목자에게 감사를 표시한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요셉을 양 떼처럼 인도하시는 큰 목자 되신 그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는가? 또한 그분의 양 떼인 우리 모두가 죽음을 맞이하여 건너야 할 강을 생각하지 않겠는가? 그분이 우리 앞서가시므로 그분을 가까이하는 양들은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목자께서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사 43:2)라는 말씀을 기억한다. 그분께 눈을 고정시키는 자들은 강을 보지 못하고, 그 강물이 차겁다는 것이나 높은 물결이 일어나는 것도 느끼지 못한다. -톰슨.

2절.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그분에게는 “푸른 초장”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곳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그분에게 “푸른 초장”이 있다는 것은 그분의 능력을 말하고, 그곳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것은 그분의 선하심을 의미한다. 그분은 다 시들고 말라 버린 초장이나 먹기에 맛이 없는 그런 초장으로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분이 나를 인도하시는 “초장”은 보기에도 좋고 먹기에도 좋은 “푸른” 초장이다. 초장의 풀이 푸른색이 아니라면 식욕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푸른색을 띠고 있는 풀은 식욕을 돋구고 먹기에도 좋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심은 색깔이 푸르다는 것에만 나타난 것이 아니다. 푸르다는 것은 단지 색깔에 불과하고, 이 색깔은 외모에 불과하다. 푸른 색깔을 띠었어도 나뭇잎이나 깃발이나 골풀 같은 것은 아무 소용도 없다. 그러나 “푸른 초장”이기 때문에 내게 유익이 되는 것이다. 푸른 초장은 보기에도 좋고 먹기에도 좋으며, 먹은 후에는 소화시키기에도 좋다. 푸른 초장의 풀에는 수액이 많아서, 이것을 먹으면 별로 물을 마시고 싶은 생각이 들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양들은 물을 마셔야 한다. 선한 목자는 양에게 필요한 물을 공급한다. 목자는 양을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한다. 이 물가는 물결이 높이 치고 겁이 많은 양들을 위협하는 그런 물이 아니다. 비록 조금씩 마시더라도 아무런 두려움 없이 마실 수 있는 고요하고 잔잔한 물이다. 여호와께서 나를 이렇게 대하신다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여호와께서 나를 푸른 초장으로, 그리고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신다. 그러나 우리가 배를 채우고 마른 목을 축이기도 전에 다른 곳으로 우리를 몰고 가신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보기는 하되 먹지는 못한다면 우리는 비참해 지지 않겠는가? 그러나 선하신 여호와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양 떼를 푸른 초장에 누이신다. 양들은 모두 배불리 먹고 그 풀밭에 누워 쉬는 것이다. -리처드 베이커(Sir Richard Baker).

2절. “인도하시는도다.” 우리는 부드럽고 친절하게 인도함을 받아야 하며, 끌려가거나 쫓겨가서는 안 된다. 양처럼 연약한 우리는 외형적인 폭력으로 몰려가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감동을 통해 인도함을 받아야 한다······에서는 야곱의 가축을 사냥하듯이 몰아 속히 이동을 하고자 했다. 그러나 야곱은 가축의 필요에 민감한 목자였기에, 천천히 이동을 하겠다고 에서에게 말했다:”내 주도 아시거니와 자식들은 유약하고 내게 있는 양 떼와 소가 새끼를 데렸은즉 하루만 과히 몰면 모든 떼가 죽으리니”(창 33:13). -랜슬롯 앤드루즈.

2절. “인도하시는도다.” 목자는 양 떼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여 풀을 뜯게 하며, 일반적으로 양 떼에게 풀을 뜯어다가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특별한 상황에 처했을 때는 먹을 것을 갖다 주어야 하는 경우도 있다. 늦은 가을이 되어 초장이 마르거나 겨울에 눈이 덮이게 되면, 목자들은 삼림이 있는 지역으로 양 떼를 몰고 가서 하루 종일 푸른 잎이 있는 나뭇가지를 꺾어 양 떼를 먹인다. 삼림을 가꾸는 목적도 이처럼 양 떼를 먹이기 위해서이다. -톰슨.

2절.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이 구절은 약한 양 떼를 보살피며 부드럽고 친절하게 인도하는 것을 표현한다. -에인즈워스.

2절. “푸른 초장······쉴 만한 물가.” 여호와께서 인도하시는 초장에는 풍성한 꼴이 있으며, 결코 황폐하게 되지 않는다. 그분이 인도하시는 시냇물도 깊고 넓어서 결코 마르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신 이래 양 떼들은 이 목장에서 꼴을 먹었으나, 이 초장에는 언제나 꼴이 풍성하다. 양 떼들은 아담 이후로 이 물가에서 물을 마셨지만 지금도 이 시내는 마르지 않는다. 양 떼가 모두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이 초장에는 꼴이 풍성하고 시내는 마르지 않을 것이다. -랠프 로빈슨(Ralph Robinson, 1656).

2절. “푸른 초장······쉴 만한 물가.” 카불의 아르반 산 정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꽃들이 만개하고, 여기 저기에 검은 텐트들과 수없이 많은 양과 낙타들이 떼를 지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나는 아르반에 거하는 동안 대평원의 색깔이 계속해서 변하는 것을 보았다. 한때는 황금빛 꽃이 군락을 이루며 피었다가, 이내 새로운 꽃이 피고, 다시 하룻밤 사이에 주홍빛 꽃이 피었다가 갑자기 짙은 남빛을 띠는 꽃이 피곤 한다. 초장의 푸른 빛깔도 그 색도를 달리하며 변화를 거듭한다. 그 동안 베두인족으로부터 카불의 아름다움과 비옥함에 대해 소문으로 들어왔지만, 이처럼 직접 눈으로 보고서는 그 아름다움에 경탄했다. 아랍 사람들은 일년 동안 그 초장에서 세 종류의 풀이 자란다고 자랑했다. 또한 물가에는 나무들이 자라고, 길게 펼쳐진 잔디밭은 이곳 저곳 이동하는 유목민들에게는 천국과도 같았다. 주위의 지역은 모두 메마르고 생기가 없지만, 이곳에서는 사람들이 시원한 그늘을 즐기고, 야생 동물들도 신선하고 깨끗한 꼴을 먹을 수 있다. -오스틴 레어드(Austin H. Layard, 1853).

2절. “쉴 만한 물가.” 큰 강은 큰 소리를 내며 양들로 겁이 나게 한다. 또한 양들이 이런 큰 강에서 물을 마시다가 잘못하면 빠른 급류에 휩싸여 떠내려갈 수도 있다. 그러나 “쉴 만한 물가”는 이처럼 큰 강과 대조적이다. -매튜 풀.

2절. “쉴 만한 물가.” 히브리 표현을 직역하면 “안식의 물들”이다. 양들은 이런 물가에서 물을 마시기를 좋아한다. 여기에는 아무런 위험도 없고, 공기도 상쾌하기 때문이다. 복음의 교리는 실로의 물처럼(사 8:8) 평온하게 흐르고, 또 맛도 좋다. -존 트랩.

3절.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이 구절을 음미하면 몇 가지 함축된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첫째, 성도들은 교회의 양 떼 속에 있으면서도 곁길로 가거나 실족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왜 “소생시키시고”라는 표현이 이곳에 나왔겠는가? 둘째, 선한 목자는 양을 구원하기 위해 신속히 행하신다. 그분은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그 결과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 마지막으로, 이 일을 하시는 것은 “자기 이름을 위하여” 하신다. -토머스 데일(Thomas Dale).

3절.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우리를 위험과 파멸에서 구원하신 바로 그 손이, 우리를 실족하거나 탈선하지 않도록 지키신다. 하나님의 책망과 그분의 온유함은 함께 작용한다. “그들이 그 길을 굽게 하며 자기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렸음이로다”(렘 3:21)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또한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내가 너희의 배역함을 고치리라”(렘 3:22)고 하신다. 우리는 이 부르심을 듣고서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다:”보소서 우리가 주께 왔사오니 주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이심이니이다”(렘 3:22). -손턴(J. Thornton, Shepherd of Israel, 1826).

3절.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그분은 나를 죄와 무지에서 돌이키실 뿐만 아니라 내가 잘못된 것을 의지하지 않도록 인도하신다.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의의 길에는 항상 거룩함의 나무가 있고, 그 가는 길에는 위로의 샘이 있으며, 그 마지막 도달하는 곳에는 영원한 안식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길을 왜 꼭 “의의 길”이라고 해야 하는가에 대해 의문을 품을 것이다. 왜 ‘의무의 길’이나 ‘우리의 순종의 길’이라고 해서는 안 되는가? 거룩함이나 의로움은 우리 스스로의 능력에 의지한 순종으로 이루어질 수 없고, 우리 자신이 의무를 다 수행한다고 해도 얻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의 이러한 능력과 노력에 의한 행동은 “푸른 초장”이 될 수 없고, 오직 메마른 황무지에 불과한 것이다. 이것들은 “쉴 만한 물가”가 아니라 거칠고 위험한 급류와 같다. 이런 것들은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 때에 위로나 평강을 주지 못한다. 이제 영광을 얻으신 그리스도, 그분의 순종에 의지하여 이런 축복을 받게 된다. -제임스 허비.

3절.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히브리 표현으로 이 구절은 영혼을 돌이킨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영혼을 돌이키시되 (1) 잘못된 것이나 방황에서, (2) 떠나기 전에 원래 있던 곳으로 돌이키신다. 그분은 나를 소생시키시고 위로하신다. -매튜 풀.

3절. “의의 길.” 아! 여호와여! 이 의의 길을 걷는 사람들이 너무 없어서 이제는 그 길이 지워져 버린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이제는 그 길이 어디 있다는 것을 찾아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 길을 찾을 수 있다고 해도 너무나 좁아서 특별한 도움이 없다면 그 길에서 쓰러지거나 곁길로 나가게 되기 십상이다. 천사들도, 그리고 훌륭한 사람들도 이 “의의 길”을 그들의 힘으로 걸어갈 수 없었다. 인도해 주는 손길을 따르지 않았기에 이 의의 길에서 멀어지고 마침내 멸망을 당하고 만 것이다. 내 영혼의 선한 목자 되신 여호와여, 당신이 기뻐하시는 대로 은혜로 나를 의의 길로 인도하시고, 이 길에서 실족하지 않도록 붙들어 주소서. 당신이 나를 의의 길로 인도하시고, 이후에 지켜 주시지 않으시면 이 길이 죄의 길이 되고 말 것입니다. -리처드 베이커.

3절. “의의 길.” 사막이나 광야에는 포장된 길이 없다. 때로는 여섯, 또는 여덟 개 정도의 길이 평행선으로 나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들은 모두 같은 목적지를 향한 길이 분명하다. 이런 길을 보면 나는 시 23편에 나타나 있는 길을 생각하게 된다.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이 길들은 모두 한 곳을 목표로 삼고 달린다. -존 개즈비.

3절. “자기 이름을 위하여.” 그분은 “선한 목자”라는 이름을 가지셨다. 그분은 자신의 양을 위해 해야 할 일을 다하신다. 양들이 나쁜 양이라고 해도 그것 때문에 목자가 악한 목자가 될 수는 없다. 여호와는 변함없이 선한 목자가 되신다. 그리고 “자기 이름”을 위해 양이 나쁜 짓을 하는 경우에도 선을 베푸신다. 이것으로 그분이 어떤 이익을 얻는 것은 아니지만, 그분은 영광을 거두신다. 그리고 ‘그분의 이름’이 높임을 받을 것이다. -리처드 베이커.

4절.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니면서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진실된 모든 성도들에게 주어진 축복이다! 죽음이란 진실된 성도들에게는 죽음이 아니며,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이며, 이 세상에서 우리가 당하는 고통과 염려와 슬픔과 비극과 비참함으로부터의 구원이며, 안식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영원한 기쁨의 시작이다. 이것은 하늘의 기쁨을 맛보는 것이며, 이 기쁨은 어떤 말로도 다 표현할 수 없고, 이 세상에서는 누구도 보거나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다······모든 성도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성경은 이 육체적 죽음을 잠깐 잠을 자는 것으로 표현했다. 죽음을 통해서 사람들은 잠시 동안 감각을 잃어버리지만 깰 때에는 죽음을 당했던 시절보다 훨씬 새롭게 되어 다시 살 것이다!······이처럼 육체의 죽음은 삶으로 들어가는 문이며, 우리가 올바로 생각한다면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편안한 것이며, 우리에게 재앙이 아니라 그것을 고치고 치료하는 것이며, 원수가 아니라 친구이며, 잔혹한 군주가 아니라 온유한 인도자이며, 멸망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그리고 슬픔과 고통이 아니라 즐거움과 쾌락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영원히 누릴 것이다. -사망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짤막한 설교, 1547.

4절.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내가 에스겔이 보았던 해골 떼를 보아야 한다고 하더라도, 공포의 왕이 거리를 뽐내며 다니면서 내 주위에서 수천 수만을 사람을 죽인다 해도, 나는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내 친구들과 친척, 그리고 가족을 향해 활을 쏘고 내 사랑하는 자들과 친구들을 어두움에 떨어뜨리고 내게서 멀리 떠나가게 한다고 해도, 나는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나를 겨누고 화살을 쏜다고 해도, 화살의 독이 내 영혼을 삼킨다고 해도, 그 화살을 맞고 내가 중상을 입어 병들고 쇠약해진다고 해도, 죽음의 징후가 나를 사로잡아 내가 분해되는 과정에 있다고 해도, 나는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내 육체는 떨 것이다. 그러나 내 육체의 약함을 아시는 그분이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내가 고통스럽게 싸우는 것을 용서하실 것이다. 내가 죽음의 고통을 두려워할지언정, 죽음의 해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망의 쏘는 독이 제거된 지 오래이다. 사망이 쏘는 화살은 끝이 마모되어 버렸고, 그래서 내 육체만 쏠 뿐이지 그보다 더 깊이 파헤치고 들어가지는 못한다. 사망이 내 영혼을 죽이지 못한다. 사망의 화살을 보고서 난 미소를 지을 수 있다. 나를 파멸의 구덩이로 몰아넣고자 하는 자가 미친 듯이 날뛰며 내 육체를 공격한다고 해도, 내 육체에서 영혼이 거하지 못하도록 하고자 쉬임없이 공격한다고 해도, 나는 아무런 동요도 하지 않을 것이다. -사무엘 래빙턴(Samuel Lavington).

4절.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휴 스토웰(Hugh Stowell) 목사님은 죽어 가면서 그의 가족에게 “하늘에 대한 내 말을 들어보라”고 했다:”나는 이제 너희들의 얼굴을 오래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제 하늘에 가면, 영광의 보좌 주변에서 우리가 함께 만나자!” 이 말을 듣고서 그의 딸이 감격하여 이렇게 외쳤다:”그곳에 가는 동안 어떤 위험도 없다고 생각하세요?” 목사님은 아주 평안한 모습으로 아름답게 대답했다:”딸아, 위험이라니! 그런 말은 하지 말아라. 무슨 일이 있어도 성도들에게 위험이란 없단다! 만사형통이야! 하나님은 사랑이시란다. 만사형통이야! 영원한 평화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영원한 안식을 누린단다!” -존 스티븐슨.

4절.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이런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이처럼 어둡고 음침한 곳에서도 너와 함께 다니며 네 영혼을 지키는 친구는 도대체 누구란 말이냐? 이렇게 묻는다면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셨고, 그가 이처럼 위험한 길을 걸으면서도 하나님의 지팡이를 의지했기에 쓰러지지 않았다고 대답할 것이다. 나는 세상 사람들에게 여호와 하나님과 같은 유쾌하고 쾌활한 친구를 구할 수 있다면 구해 보라고 도전하고 싶다. 우리가 슬픔에 처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은 세상 사람들이 어두운 얼굴로 있으면 그들이 즐겁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이 겉으로는 미소를 짓지만 그들의 영혼이 저주받은 영혼일 때 그들은 진정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치 잠언에 나와 있는 사람과 같다:”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고 즐거움의 끝에도 근심이 있느니라”(잠 14:13). 마음이 슬플 때에 노래하고 웃고 즐거워한다면, 하나님의 영은 이것을 미친 짓이라고 한다:”내가 웃음을 논하여 이르기를 미친 것이라 하였고 희락을 논하여 이르기를 저가 무엇을 하는가 하였노라”(전 2:2).

그러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죽을 만큼 낙담이 되는 환경에서도, 하나님을 친구로 삼은 자들은 명랑하게 지낼 수 있다! 세상에서 아무리 용감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죽음을 바라보면서, 영원의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을 즐거운 마음으로 볼 수 있겠는가? 누가 장작을 한 아름 안고서 불길로 들어가겠는가? 그러나 성도들은 이것도 할 수 있고, 이보다 더한 것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성도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영원한 공의를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지옥의 소리도 즐겁고 감사한 마음으로 들을 수 있다. 마지막 심판의 날도 기쁨과 안식으로 바라볼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은 아무리 즐거운 친구와 함께 있다고 해도 이렇게 될 수는 없다. 세상 사람들아, 하프와 비올라를 가지고 즐겁게 노래를 불러 보라. 너희들이 원하는 모든 악기를 총동원하여 음악회를 열고 즐겁게 지내 보라. 그렇다고 마지막 심판의 날을 기쁨으로 바라보고, 지옥의 소리를 즐겁게 들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가능하겠는가? 오늘 밤, 죄인들이 하나님 앞에 나타나서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 보라. 기분이 어떤가? 용기가 없다고? 즐겁고 유쾌한 친구를 불러 보라. 그들과 함께 지내며 즐거운 마음을 가져 보라. 술잔을 기울이고, 매춘부를 불러 보라. 낙담하지 말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경고를 아직도 조롱할 수 있겠는가? 지금까지 얼큰하게 취하고 유쾌하게 지내던 자가 왜 이렇게도 풀이 죽었는가! 정말 갑작스런 변화가 일어났구나! 함께 즐겁게 놀던 친구들은 어디로 갔는가? 모두 도망가 버렸는가? 쾌락의 도구로 삼았던 여자들은 어디로 갔는가? 모두 너희를 버리고 떠나갔단 말인가? 왜 이렇게 버림을 당해야 하는가? 이제 누더기를 걸친 구차한 자가 되어 웃고 있는가? 뭐라고? 이제 평안이 없다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내일 아침 하나님 앞에 나타나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너희 마음속에 근심이 있는 것 같구나. 그렇다면 지금까지 누리던 그 즐거움과 쾌락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 결국이 겨우 이것이란 말인가?

너희 앞에는 진정으로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자들이 있지 않는가? 너희는 영원에 대한 것은 생각하기도 싫어했지만, 그들은 영원에 대한 생각을 품고 있다. 왜 그들의 모습은 너희와 이렇게 대조적인지 아는가? 그들은 여호와께서 그들의 친구가 되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들의 친구 되신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어둡고 더러운 길을 가야 할 때에도 그들과 함께하신다.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되어 함께 거하는 것은 얼마나 유쾌하고 즐거운 일인가! 이것은 하나님을 친구로 삼는 것이다. 하나님과 친구가 된 영혼은 진정 축복을 받은 영혼이다.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시 144:15). -제임스 제인웨이.

4절.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어둡다는 것은 나쁜 것이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가장 나쁜 것이다. 다윗이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이라고 말한 것은 가장 좋은 믿음으로 가장 나쁜 환경을 지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가장 험악한 상황에서도 해를 당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이다······또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있다는 것은 사망의 권세 아래 있으며, 언제든지 사망에 붙잡힐 수 있는 상황에 있다는 것을 말한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라는 말은 ‘내가 죽음에 가까이 있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내가 언제든지 죽음에 잡힐 것처럼 보인다고 해도, 내가 극한 위험에 처하여 죽음을 피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고 해도’라는 뜻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조셉 캐릴.

4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골짜기란 낮은 지역이다. 그 양 옆에는 산이 있다. 원수들이 산에 매복하여 있다가 여행하는 사람들을 향해 화살을 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이 골짜기를 지나가야 한다. 그래도 시편 기자는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했다. 사탄이 불화살을 쏜다고 해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셨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흔히 이 은유가 사람의 죽음을 말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원래 의미는 죽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원수들에게 둘러싸인 골짜기와 같은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다윗은 원수들이 매복해 있는 골짜기에서도 하나님의 보호를 받았고, 하나님은 그를 위해 상을 펴시고 잔치를 베풀어 주셨다(5절). 베두인족은 오늘날까지도 언덕에 올라 있다가 골짜기를 따라 지나가는 여행객들을 괴롭힌다. -존 개즈비.

4절.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옛부터 내려오는 속담에 무슨 큰 일을 행한 것을 두고서 “사자의 수염을 뽑았다”라는 표현을 쓴다. 죽은 사자의 경우는 어린 소년이라도 뽑을 수 있다. 소년들이 길에서 죽은 곰이나 사자나 늑대를 보게 되면, 그들은 털을 잡아뜯고 원하는 대로 그것을 가지고 논다. 몸을 밟고 올라서기도 하고, 살았을 때에는 생각지도 못할 일들을 죽은 시체를 가지고서는 마음대로 하는 것이다. 죽었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날뛰는 사자, 게걸스레 탐식하는 늑대, 이런 맹수들도 죽은 후에는 아무런 힘이 없다. 죽음도 이런 맹수와 같다. 죽음은 사람을 먹어 치우는 맹수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 사망에게 사망 선고를 내리셨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사망 위에서 뛰어놀 수 있다. 초대 교회의 순교자들은 즐거이 불에, 칼에, 그리고 배고픈 야수에게 자신의 육체를 주며, 죽음을 놀리고 조롱했다. 승리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을 믿음으로 소유했기 때문이다(참고. 고전 15장). -마틴 데이(Martin Day, 1660).

4절.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당신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는 말이 얼마나 힘이 있고, 감미로우며, 우리에게 보증이 되는 말인지 알고 있는가- 엄숙한 죽음의 순간이 다가올 때, 영원으로 들어가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할 때, 하나님을 향해 “당신의 사랑이 나와 함께하는 동안 사망이 내게 해를 끼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사망아 네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꿀벌은 누군가를 일단 쏘고 나면 다시는 해를 끼칠 수 없다고 한다. 사망은 그리스도의 육체에 침을 쏘았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더 이상 해를 끼칠 수 없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그 승리는 곧 성도들의 승리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네가 광야 길을 걸을 때 의지했던 그 팔, 네가 약하여 의지했던 그 팔로 내가 너를 붙들고 너와 함께하리라”고 하신다. 이 말을 듣고서 성도들은 “이 팔을 의지하고 나는 평안하나이다. 내 사랑하는 당신을 의지하고 안식하나이다. 당신은 내가 곤란에 처했을 때, 내가 두려움에 떨 때에 나를 도우시고 붙드셨나이다. 당신은 나를 깊은 곳에서 붙잡으시고 구원하셨기에 이 팔이 사랑의 팔인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라고 응답할 것이다. 성도들이 생명의 빛과 함께하는 동안에는 어두움이 있을 수 없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는 이런 성도들을 “안위”한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이것을 시험해 보라. 이렇게 하는 것은 성도들에게 주어진 특권이다. 그분은 당신의 연약함을 아시고 당신을 붙들어 주고자 하신다. 당신이 연약할 때 그분을 의지하면 힘을 얻을 것이다. 당신이 온전히 약해질 때 그분의 힘이 당신 안에서 온전히 나타난다. 전능하신 분의 사랑이 함께하는 동안에는 그분의 양들은 결코 멸망할 수 없다. 그리스도는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8)고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히 이렇게 말할 수 있다:”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파워스코트.

4절. “주의 지팡이.” 지팡이는 세 가지로 유용하게 쓰인다. (1) 양의 수를 헤아리는 데 쓰인다. 이런 의미에서 양들은 막대기 아래를 통과한다:”소나 양의 십분 일은 막대기 아래로 통과하는 것의 열째마다 여호와의 거룩한 것이 되리니”(레 27:32). 목자는 막대기 아래로 지나는 양의 수를 헤아린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을 “그 산업의 지파”(렘 10:16)라고 했다. (시편에서 “지팡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쉐벳”(fbv)인데 이는 “지팡이”, “막대기”, “종족”, “지파”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인용된 “막대기”와 “지파”는 모두 “쉐벳”(fbv)이 사용된 경우를 예로 든 것이다-역자 주.) 이런 의미에서 “주의 지팡이······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는 말을 이해해야 한다. 이 지팡이가 나를 붙드는 것이다. 시편 기자는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과도 같다:”내가 악한 사람들로 인하여 위험에 처했다 할지라도 이것이 나의 안위가 되었나이다. 당신은 나를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당신은 나로 멸망을 당하지 않게 하십니다. 당신은 나를 기억하시고, 붙드시며, 보존하시나이다. 당신의 특별한 보살핌이 나를 지키시나이다.” (2) 양이 뒤에 처져서 목자를 따라올 때, 목자는 지팡이를 들고서 양들이 따라오는 속도를 빠르게 한다. 이런 의미에서 다윗은 여호와의 지팡이가 그를 안위한다고 했다. 하나님의 백성이 게으르고, 냉랭해지고, 뜨거움이 없어지면 하나님은 어떤 방법으로든지 그들의 삶을 바꾸어서 더 적극적이고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도록 한다. 그리하여 성도들의 마음에 많은 기쁨과 위로가 샘솟게 한다. (3) 때로 양들은 게으름을 피우고, 아무 생각 없이 양 떼로부터 흩어져 혼자서 풀을 뜯기도 하며, 다른 초장에 가서 방황하기도 한다. 양들은 이처럼 혼자서 방황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목자들은 지팡이로 이런 양을 때려서 양 떼 속으로 몰고 오는데 이는 그 양을 보존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다윗은 여호와의 막대기가 그를 안위한다고 말했다.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양들을 이처럼 홀로 버려두지 않으시고, 그들의 잘못을 고쳐 주시며 방황하지 않도록 안위하신다. 양이 이처럼 홀로 방황하면 위험과 고난이 항상 따라오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양 떼를 섭리 가운데 보존하신다. -오바댜 세지윅.

4절.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 목자는 양을 칠 때에 꼭 지팡이나 혹은 막대기를 들고 다닌다. 그 한쪽 끝은 휘거나 갈고리처럼 구부러져 있다. 이 지팡이로 목자는 양 떼를 다스리고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기도 하며, 원수들에게서 보호하기도 한다. 양 떼가 순종하지 않으면 이 지팡이로 징계하여 고치기도 하고, 길을 잃어 헤맬 때면 인도하는 데 쓰기도 한다. 이 지팡이는 목자들이 소지해야 할 필수품인 것이다. -톰슨.

4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시편 기자는 불확실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할 것이다. 이러한 믿음이 바로 이 구절에 나타나 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여기에는 시편 기자의 신뢰가 가장 온전히 나타나 있다. 우리는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무서워한다. 보일 때에는 위험한 것이라도 우리를 두렵게 하지 않는데도, 어두움 속에서는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나도 우리는 두려워한다. 보이지 않는 것은 신비스럽고 불확실하며, 불길한 예감이나 우울감은 아닐지라도 우리의 마음을 염려로 가득 채운다. 여기서 시편 기자는 가장 불확실한 형태, 그리고 가장 두려운 것을 들어서 말하면서, 이런 가운데서도 그는 하나님을 신뢰할 것이라고 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보다 인간의 체험의 한계를 더 넘어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러나 시편 기자는 이런 환경에서도,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상황에서도 단호히 하나님을 의지할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종종 보이지 않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다. 주님의 제자들은 변화산에서 구름이 덮이는 것을 보고서도 두려워했다. 우리는 현재 당하는 어려움이나 질병보다도 미래에 보이지 않는 불확실성 때문에 더욱 믿음의 시련을 받는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알고 있는 고난은 쉽게 견디고 그분을 의지한다. 그런데 왜 보이지 않는 것,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처럼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는 것일까? 불확실한 상황에서 우리는 왜 하나님의 자녀처럼 굳건한 믿음을 행사하지 못하는 것일까! 어린이들은 실제적으로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마 6:34)는 말씀을 따라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 성인들은 이 점에서 어린이보다 지혜롭지 못하다. 우리는 불확실한 것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상상을 하며, 하나님을 단순히 의지하는 삶을 잊어버리고 만다. -필립 베넷 파워(Philip Bennett Power).

4, 5절.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당신은 이 세상에서 모든 곤란한 일을 주장하십니다. 당신이 나와 함께하시므로 나는 아무리 위험하고 어려운 일을 당해도 승리할 것을 의심치 않습니다. 내가 곁길로 갈 때는 당신의 지팡이로 책망하시고, 내가 기진해 쓰러질 때면 당신의 막대기로 나를 붙드시나이다. 선하신 여호와여, 나는 바로 이 두 가지를 가장 필요로 하고 있나이다. 내가 잘못할 때에는 나를 부르시고, 내가 힘이 없을 때에는 당신의 진리로 붙드시나이다.

지극히 높으신 분의 지팡이와 힘이 나를 지키신다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인가? 우리가 곁길로 갈 때에 하나님의 경계와 징계를 받는다는 것은 얼마나 자비롭고 유익한 일인가? 그분은 사랑하시는 자를 책망하시고, 그분의 백성에 속한 자들을 징계하신다. 또한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그분은 우리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여 말씀의 꼴을 먹이시고, 마침내 우리로 영생을 얻게 하신다. 우리가 이 육신의 장막을 벗고서 하늘 나라에 가게 되면 그 나라의 아름다움과 부요함을 알게 되고, 그분의 영원한 잔치에 참예하게 될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그분을 사랑하는 자들을 기름으로 부으시고, 그들의 마음에 성령으로 기쁨을 주셔서 어떤 원수나 곤란한 일을 당하여도 슬퍼하지 않게 하실 것이다.

옛말에 “어떤 일이든 이미 얻은 것을 잘 유지하고 다스리는 것은 그것을 처음 얻을 때보다 더 쉬운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다윗도 이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양 떼들의 의로움이 아니라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덕과 공의가 지배하는 곳,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진리의 초장으로 인도함을 받고, 전능하신 분의 호의를 받아 그분의 양으로 헤아림을 받았다면, 이후에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살피시고 은혜를 베푸사 진리의 초장에 거하게 하신다. 여호와의 양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혼자서 다닐 수 없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어야 모든 위험을 지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여호와께서 함께하심으로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했다. -존 후퍼(John Hooper, 순교자, 1495-1555).

4절.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다윗은 푸른 초장에 있을 때,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을 때, 그의 이름이 높아지고 평화를 누리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뜻하시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비극의 골짜기를 다니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이 시를 기록했을 것이다. 이때에도 하나님 안에서 닻을 내리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면 가장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진정한 지혜이다. 날씨가 좋을 때에 폭풍을 대비하고, 건강할 때에 병들 것을 생각하며, 부유하고 평화롭고 고요할 때에 가장 최악의 상태를 생각하고, 여름에는 다가오는 겨울을 생각하며 준비하는 것이 참된 지혜이다.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수없이 많은 고난을 당할 수도 있다. 하나님을 믿는 자도 예외가 아니다. 죄인들은 책망을 받고 교훈을 받아야 한다는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방주를 만들 때는 물에 띄우기 위한 것이고, 배를 만들 때는 바다를 항해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이 배를 타는 선원이 어느 곳에 닻을 내려야 하는지를 안다면 참으로 행복한 자이다. 인생의 바다를 항해하는 동안 폭풍을 만나고 이때에 진정 의지할 자가 누구이며, 안전한 피난처가 무엇인지를 아는 자는 진정 축복을 받은 자이다. 다윗은 그가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고 했다. 이 시는 시편 기자가 늘 이렇게 살았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다가오는 고난의 시기에 그가 행할 의무가 무엇이고, 어떻게 노력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한없이 선하시다는 것, 그리고 지팡이와 막대기로 인도하시고 안위하신다는 것을 증거했다. 이것을 근거로 시편 기자는 그가 두려워하지 않으리라고 서원을 드렸다. 베드로는 그의 연약함으로 두려워하여 주님을 부인하고 말았다. 그러나 후에 그가 회개했고, 주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베드로에게 형제를 굳게 하라고 부탁하셨다. 하나님은 마음을 굳게 다짐한 자, 그분을 따르는 자를 좋아하시기 때문이다. 이처럼 다윗도 자신의 삶을 돌이켜보면서 자신이 때때로 잘못한 것을 생각하고 새롭게 결심하는 것이다. 좋을 때만 하나님을 섬기는 자, 어려움이 닥치면 두려워하거나 신실하지 못한 마음으로 물러서는 자가 되지 않을 것을 다짐한다. 불확실한 안개를 두려워하는 자, 멀리서 일어나는 폭풍의 검은 구름을 두려워하는 자, 고난의 날이 지나가기까지 얼굴을 숨기고 있는 자, 곁에 서서 팔짱을 끼고서 구경만 하는 자, 하나님을 섬기기로 용감하게 뛰어들지 않는 자, 이들은 모두 책망을 받아야 한다. -존 프라임(John Prime, 1588).

4절. “사망.” 죄의 세력 아래 있는 자들의 죽음은 범죄자의 죽음과도 같다. 범죄자가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게 되면, 그는 법정에서 끌려나가 온 몸을 결박당하고, 팔은 뒤로 돌려서 묶이게 된다. 그러면 이 사형수는 슬픔과 두려움으로 죽음을 당하기 전에 죽는다. 그러나 의인의 죽음은 이와 같지 않다. 그의 종말은 평안하고, 마치 정직한 자가 침실에 들어가 잠을 자는 것과 같다. 그의 하인은 존경심으로 그의 옷을 벗기고 침대에 눕힌다. 양심의 거리낌이 없기에 그의 마음에는 평안이 있다. 죽음으로 그는 소망에게 이별을 고하게 되는데, 천국에서는 이런 소망도 필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 평화, 기쁨, 하나님께서 주신 이런 은혜들은 죽음 이후 천국에 들어갈 때에도 우리와 함께한다. -윌리엄 스트러더(William Struther).

4절.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여호와께서는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에 그분을 부르기를 바라시며, 우리가 부르면 구원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다윗은 어떠한 고난을 당한다고 해도 두려움을 버리고 여호와를 의지하겠다고 약속했다. 그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난다고 해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그는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는 약속을 붙잡았다. 이 약속은 모든 성도들에게 주어진 약속이다. 하나님의 “막대기”를 우리가 의지한다면, 그 막대기가 너무 약해서 부러지지 않을까? 그분은 이 약속을 하신 후 마음이 변하신 것은 아닐까?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할 때에 지금까지 하신 것과는 달리 우리에게 지팡이와 막대기를 내미시고, 손을 내밀어 우리를 붙들어 주실까? 의심할 여지도 없이 우리가 극한 상황에 처했을 때에도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즉시 우리를 도우실 것이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1). -토머스 타임(Thomas Tymme).

4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주의 지팡이와 막대기.” 그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사랑을 인하여 그분을 찬양하며 이렇게 말했다:”난 이제 눈을 감고 편히 죽을 수 있습니다. 나는 흙으로 돌아가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품에 안기고 싶습니다. 내가 죽는다고 슬피 울지 마십시오.” 이어서 마귀가 그를 얼마나 괴롭게 하고 유혹했는지 돌이켜보면서, 자신이 잘못했을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책망하신 것이 진정 하나님의 선하심의 표현이었다고 말했다. -제임스 제인웨이의 회상.

4절.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봄베이에서 선교사로 일하던 허비(Hervey) 부인이 죽어 가고 있을 때, 그녀의 친구가 “당신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동안 구세주께서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했다. 이 말을 듣고서 그녀는 “어둡다고요? 어두움이 하나도 없는데요. 모두가 빛이에요”라고 했다. 그녀는 병들어 있는 동안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보고서 이렇게 말했다:”그분은 참으로 거룩하신 분입니다. 그분의 다른 속성보다도 이 거룩함이 가장 소중하게 보입니다.” 그녀는 또한 그리스도의 영광과 위엄을 보고서 그 광경을 표현했다:”그분에게 속한 다른 모든 영광이 사라지고 그분만이 홀로 남는다면, 그래도 그 영광이 우주에 충만할 것입니다!”

4, 5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고난받을 각오를 기꺼이 하는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의 삶을 진정으로 누릴 수 있는 자들이다······죽음과 영원을 묵상하고 마음의 준비를 한 성도들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생명을 더욱 감미롭게 누리는 것이다. 이 세상의 삶에 종말을 고한다는 것이 그에게는 그렇게 슬픈 일이 아니다. 이것은 더 감미로운 삶을 살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차 잔치에서 배불리 먹고 그 잔치가 끝나지 않으면 2차 잔치가 시작될 수 없다. 2차 잔치에서는 1차 때보다 더욱 맛있는 음식이 많이 나오지만, 1차가 끝나지 않으면 시작될 수 없는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풍성한 잔치에 대해 이야기하면서(5절), 또한 죽음에 대해서도 말했다(4절). 만일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신다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고백했다.

또 베드로는 어떠했는가? 그도 역시 인생을 진정으로 즐겁게 누리며 살지 않았는가? 그는 감옥(바람직하지 못한 곳)에 있을 때에도 두 병사 사이에서 쇠사슬에 묶인 채(편안하지 못한 자세로) 단잠을 잤다. 이 밤이 지나면 헤롯은 그를 죽일 수도 있었다. 어떤 사람도 이런 시간에는 단잠을 잘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깊은 잠을 잤기에, 천사가 그를 구하기 위해 왔을 때는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서 깨워야만 했다(행 12:6, 7). 헤롯도 그 밤에 그토록 깊이 잠을 자지는 못했을 것이다. 베드로는 무엇 때문에 이토록 편안히 잠을 잘 수 있었는가? 그는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죽음을 당한다면 다음 세상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될 터인데, 무엇 때문에 죽음을 당한다는 생각으로 이 세상에서의 안식을 깨뜨릴 수 있겠는가? -윌리엄 거놀.

4, 6절.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시편 기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 깊은 신뢰를 표현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닌다고 생각했다. “사망”이란 가장 악한 것이고, 모든 악한 것을 다 모아 놓은 것과도 같다. 그러므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가장 어둡고 두려운 곳을 표현한 것이다. 다윗은 자신이 이런 상태에 빠져들 경우를 생각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 빠지면 모든 종류의 악이 그를 뒤덮고, 그는 슬픔에 차서 견딜 수 없게 될 것이다. 이런 상황은 짧은 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당한 기간 동안 지속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골짜기로 “다닐지라도”라고 했다. 그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상황이 지속되는 것이다. 그가 이런 상황에 떨어진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는 이런 상황에서도, 나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아무런 소망이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고귀한 결심이다. 만일 이 결심을 하게 된 근거가 확실한 것이라면, 이것은 진정 영적인 용기이고 거룩한 결심이다. 그러나 아! 여호와께서 이런 상황에서 당신을 버리신다면, 당신을 원수들에게 넘겨 버리고 유혹과 위협에서 구해 주지 않으신다면, 그리고 당신은 그분에게서 영원히 떨어진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영원히 사망에게 삼킨 바가 될 것이다. 물이 당신의 영혼을 덮치고, 당신은 영원히 사망의 그늘에 누워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이와는 정반대되는 확신을 품고 있다:”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존 오웬(John Owen).

5절.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종을 축복하기 위해서 악인에게 의존하지 않으신다. 악인들은 하나님과 협력할 수 없고, 또 하나님 그분이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주권자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악인이 없어도 그분에게 속한 모든 사람들을 축복하실 수 있다. 악인들은 하나님의 뜻에 저항하고, 또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에게 축복하는 것을 저지하려고 하지만, 하나님의 뜻과 그 기뻐하시는 대로 행하시는 것을 막을 능력이 없다. 한 방울의 물로 불을 끌 수는 없다. 물은 불과 반대되는 성질을 가졌지만, 한 방울의 물은 불을 끌 능력이 없는 것이다. 악한 사람들의 악의와 계략은 너무 약해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뜻과 축복을 대항할 수 없다. 악한 사람들은 사람에 불과하고,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 사람이 하나님을 대적할 수 없다. 여호와는 그분을 대적하는 자들을 제하시고, 이 땅을 다스리시며, 그분의 뜻을 이루실 것이다. 그분이 축복하는 자가 축복을 받고, 그분이 저주하는 사람이 저주를 받는다. 피조물에 불과한 악인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랴! 하나님의 백성들은 잔혹한 원수들에게 둘러싸여 있어도 하나님의 돌보심과 사랑을 받고 살아간다. -오바댜 세지윅의 글을 요약한 것.

5절.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 원수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후대하시는 것을 보고서 질시하고 불평은 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을 저지할 수는 없다. -매튜 풀.

5절.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동양에서는 사람들이 집을 방문하게 되면 향기로운 기름을 머리에 바르고, 아주 좋은 포도주를 한 잔 대접한다. 포도주를 대접할 때는 잔이 넘치도록 채워 준다. 기름을 바르는 것은 사랑과 존경을 나타내고, 포도주를 넘치게 대접하는 것은 손님이 그 집에 머무는 동안 무엇이든 풍족하게 누릴 것을 말하는 것이다. 시편 기자는 이런 것을 이 시에서 언급했을 것이다. -사무엘 버더.

5절.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머리에 기름을 바르면 기분을 상쾌하게 하고 피로를 풀어 준다. 기름에는 세 가지 기능이 있다. 기름은 만지기에 부드럽고, 보기에 윤기가 나며, 냄새가 향기롭다. 기름은 이렇게 우리의 감각을 만족하게 한다. 그러므로 기름을 바르는 자에게는 기쁨이 있다. 이 점에 대해 솔로몬은 즐겁게 살 것을 권고하며 이렇게 말했다:”네 머리에 향 기름을 그치지 않게 할지니라”(전 9:8). 이것은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은 것을 상징한다. 성령의 기름 부음만이 사람의 영혼을 진정 기쁘고 즐겁게 할 수 있다. 이 기름을 “즐거움의 기름”(시 45:7)이라고 했으며, “성령의 기쁨”(살전 1:6)이라고 했다. -나다나엘 하디.

5절.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특별한 손님이 왔을 때, 머리에 향기로운 기름을 바르는 것은 큰 존경을 표현하는 것이다. 복음서에서 어느 여인은 구세주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서 “매우 귀한 향유”를 주님의 머리에 부었다(마 26:7). 한 영국 부인이 아라비아 배의 내부를 구경하고, 물건을 좀 사고자 배에 승선하여 선실에 앉았다. 그러자 아라비아 소녀가 그녀에게 와서 향기로운 기름을 머리에 부었다. -조셉 로버츠.

5절.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동양에서는 손님을 환대할 때, 반드시 머리에 기름을 바른다. 목욕을 하면 몸이 상쾌해지듯이, 이렇게 하면 몸의 피로가 풀리고 상쾌해진다. 그러나 이 시편에서는 영적 기름과 영적 즐거움으로 이해해야 한다. -바르트.

5절.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당신은 내게 생활 필수품만 공급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사치스러운 것도 내게 주시나이다. -A Plain Explanation of Difficult Passages in the Psalms, 1831.

5절.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시신에 바르는 애굽 사람들의 연고는 시체가 부패하는 것을 방지하고, 무덤 속에서도 오래 보존되도록 한다. 그러나 오, 여호와여! 당신께서 은혜로 우리의 영혼에 부어 주시는 보배롭고 향기로운 기름은 우리 영혼을 깨끗하게 하고, 아름답게 단장하고, 힘을 주고, 영생의 씨앗을 심고, 이 세상에서 타락하지 않게 할 뿐만 아니라 당신의 품에 안겨 영원한 축복을 얻기까지 우리를 보존하나이다. -장 밥티스트 마시용(Jean Baptiste Massillon, 1663-1742).

5절. “내 잔이 넘치나이다.” 그분은 충분하게 주실 뿐만 아니라 남아서 넘치도록 주신다. 이 행복을 가진 자는 잔을 똑바로 들고서 넘치는 것은 가난한 형제들의 빈 잔에 흐르도록 해야 한다. -존 트랩.

5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여호와께서 당신의 잔이 넘치도록 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입술로 그 맛을 보도록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높은 산에서 내리는 비는 가장 낮은 골짜기로 흘러내려야 한다. 사람들은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눅 6:38)라는 말씀을 잘 믿지 않는다. -윌리엄 세커.

5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라틴어로 쓰인 불가타 역본에는 이 구절을 “나의 취하게 하는 잔, 이것은 얼마나 훌륭한 것인지!”라고 되어 있다. 순교자들은 이 잔을 마시고서 취했다. 그리하여 고난을 당하러 잡혀갈 때, 그들은 슬피 우는 아내, 자녀들, 친척들, 친구들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들은 감사하면서 이렇게 말했다:”내가 구원의 잔을 들리라!” -어거스틴.

6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여호와의 집을 향해 어쩌다 한 번씩 기도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의 집에서 영원히 거하겠다고 했다. 그는 항상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간구하는 것이다. 마치 수탉이 울고서 잊어버리고, 또 울다가 잊어버리는 것처럼, 기도하고 곧 잊어버리고, 또 기도하고 곧 잊어버리는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되지 못한다. 이런 사람들은 서둘러 기도를 끝내고 다시는 생각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기도를 마치 소가 “음매-” 하고 울고, 돼지가 “꿀꿀”거리는 것 이상으로 생각지 않으신다. -윌리엄 페너(William Fenner, The Sacrifice of the Faithful, 1600-1640).

6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이것은 우리가 미래에 이렇게 되기를 소망하는 것이며, 인생의 여러 과정을 거치면서 배운 가장 큰 교훈이다. 우리가 살면서 슬픔과 기쁨을 겪고, 순례자의 길을 걷다가 또 휴식을 취하고, 잠시 동안 평안을 누리다가 또 다투고, 이런 모든 일을 경험하면서 언젠가 이 모든 것들을 판단하는 최후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이날을 준비해야 한다. 우리는 광야 인생길을 걸으면서 여호와께서 베풀어 주시는 상을 받는다. 마치 위대한 왕의 아들이 외국에서 아버지의 나라로 돌아오면서 이곳 저곳에서 환영을 받고 잔치를 벌이는 것과도 같다. 그러다가 여행이 끝나면 마침내 아버지의 궁으로 돌아가 여행 중에 더러워진 옷을 벗어버리고 새 옷을 입고서, 아버지와 함께 앉아 잔치에 참여하는 것이다. -알렉산더 매클라렌(Alexander Maclaren, 1863).

6절.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다윗은 여호와의 집에 거하기로 굳건히 결심했다. 그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여러 번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체험하고서 이렇게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는 이런 결심을 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베푸신 여러 가지 은혜를 헤아려 보았다. 그분은 푸른 초장에서 그를 먹이셨고, 하나님의 말씀의 물을 먹이셨다. 여호와는 그를 의의 길로 인도하시고, 그를 새롭게 하셨다. 또한 위험한 지경에 처해서는 힘을 주셨고, 죽음의 위험을 당해서도 그를 지키셨다. 그에게 원수들이 많이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많은 축복을 내려주셨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이 많은 자비로움을 체험했기에,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혜를 베푸실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윌리엄 퍼킨스(William Perkins).

[설교힌트]

1절. 목자와 양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라. 목자는 다스리고, 인도하고, 먹이고, 보호한다. 그러면 양들은 목자를 따르고, 순종하고, 사랑하고, 신뢰한다. 우리가 진정 여호와의 양인지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라. 양과 함께 먹는 염소의 운명을 말하라.

1절 하반절. 이제부터 영원까지 부족함이 없는 사람.

2절 상반절. 성도들의 휴식. (1) 하나님께로서 온다-“그가 나를.” (2) 깊은 휴식이다-“누이시며.” (3) 하나님의 풍성한 공급을 받는다-“푸른 초장에.” (4) 우리가 끊임없이 찬양할 내용이다.

2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들.

2절. 성경-날마다 새롭고 풍성한 위로와 교훈을 주는 말씀.

2절 하반절. 지도자, 길, 우리가 얻는 위로, 길에 있는 여행객.

3절. 은혜로운 회복, 거룩한 인도, 하나님의 동기.

4절. 성령께서 하시는 일.

4절. 하나님의 임재는 사망 가운데서 얻게 될 유일한 힘.

4절. 사망 중의 생명과 어두움 중의 빛.

4절 중반절. 선한 사람이 얻은 평안함.

4절 하반절.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증거-겸손한 자에게 베푸시는 안위.

5절. 잔치에 참여하는 군인,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 만족함을 얻은 손님.

5절 하반절. 성령의 계속적인 기름 부음, 그 방법과 효능.

5절. 풍성한 잔치, 이것과 관련된 우리의 의무.

6절 상반절.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축복.

6절. 집으로 가는 길과 우리가 도달할 집. 하늘의 집과 그곳에서 살 사람들.

출처 : 예수 코리아

글쓴이 : 예수코리아 원글보기 : 예수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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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23편에 대한 오해

시편 23편에 대한 오해

“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시23:1,6)

본 시편 23편을 주제로 한 설교와 글이 많기로는 성경의 모든 구절 중에서도 상위 열 손가락 안에는 충분히 들 것입니다. 신자가 전체로 암송할 수 있는 구절로 치면 아마 으뜸일 것입니다. 새로운 주석과 설교가 더 이상 필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만큼 모든 신자에게, 심지어 불신자에게마저 큰 위로가 되는 시편입니다. 단순히 읽기만 해도 마음에 평강이 스며들 정도로 은혜가 넘칩니다. 성경 말씀 그 자체로도 큰 능력을 발휘한다는 말은 바로 이 시편을 두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무엇이든 과(過)하면 반드시 어디엔가 부족한 면이 나타나는 법입니다. 본 시편도 위로와 은혜가 너무 넘치다보니 신자들이 그 풍성한 여유로움에만 파묻혀버리는 것 같습니다. 신자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나도 하나님이 보호 인도하실 뿐 아니라 넘치도록 채워주신다고 단순히 이해하고 치운다는 것입니다.

원칙적으로 틀린 이해는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신자를 분명히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십니다. 원수의 목전에서도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시어 내 잔을 넘치게 해주십니다. 신자의 평생을 두고 주님의 인자하심과 선하심이 따르지 않은 때와 장소는 정녕 없습니다. 그러나 본 시편 기자가 정작 말하려고 하는바 초점이 그런 은혜의 풍성함에만 있지 아니합니다.

독자는 무슨 글을 읽든 반드시 시작과 끝에 주목해야 합니다. 글의 시작은 화자가 전하고자 하는 주제에 대한 발제(發題)이며 끝은 결론(結論)입니다. 이 둘을 무시해 버리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 시편을 머리와 꼬리가 잘려나간 몸통만 들고서 이것이 생선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본 시편의 시작인 1절과 마지막 6절을, 그 중에서도 각 구절의 후반부에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우선 1절부터 다시 봅시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정확하게 어떤 뜻입니까? 아니 신자들이 주로 어떻게 이해합니까? 거의 대부분이 “여호와는 나에게 언제 어디서나 부족함이 없는 은혜로 채워주신다.”일 것입니다. 그럼 다시 본문과 세밀히 비교해 보십시오. 어떤 차이를 발견할 수 있습니까?

이 기자는 자기에게 부족함이 없는 이유는 여호와 그분이 나의 목자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또 그분만으로 부족함이 없기에 그 분 외의 다른 목자는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한 분만으로 만족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채워주시는 은혜에 부족함이 없다고 흔히 이해하고 있는 바와는 사실상 다른 뜻입니다. 결과적으로 같은 내용을 단지 표현만 다르게 한 것도 아닙니다.

채워주시는 은혜에 부족함이 없으려면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나도 은혜가 넘쳐야 합니다. 쉽게 말해 현실적 고난이 닥쳐서 은혜가 부족하거나 사라지는 것 같은 일이 없어야 합니다. 반면에 그분만으로 부족함이 없으려면 어떤 문제와 질병과 환난이 닥쳐도 하나님이 계시기에 얼마든지 믿음으로 이겨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전자의 경우 은혜는 현실에서 좋은 일이, 특별히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놀라온 축복들과 동의어가 됩니다. 반면에 후자는 하나님 그분이 바로 은혜이기에 그분이 이끄는 일이라면 기쁘든 슬프든 모두 은혜로 다가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본 시편에서 묘사하고 있는 기자가 처해있는 상황도 은혜가 넘치는 기쁜 일이 아니라 고달프고 슬픈 일들뿐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닌다고 합니다. 또 “내 원수의 목전에서”라고 말합니다. 둘 다 절대 절명 위기의 순간입니다. 단순히 힘든 일 정도가 아닙니다. 생명이 경각에 달린 환난입니다. 바로 그런 때에 오직 여호와만이 구원의 목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라는 표현도 잘 따져보아야 합니다. “쉴 만한”이라는 것은 그 전에 도무지 쉴 수 없었다는 뜻입니다. 환난이 겹쳐서 힘들고 지쳐있는 신자를 하나님이 물가로 인도하셨다는 것입니다.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도 하나님이 그를 눕게 만들어 준 것입니다. 여호와가 주시는 은혜가 부족함이 없으려면 “항상 푸른 초장에 거하게 하시며”라고 말해야 합니다. 매사에 안락하게 지내고 있다면 구태여 “쉴 만한”이라고 표현할 이유도 필요도 없습니다.

또 이 기자가 너무나 고달픈 가운데 있었으니까 하나님이 그의 “영혼을 소생시킨” 것입니다. 소생(蘇生)이라는 말은 그 전에는 죽어 있었거나, 죽음과 방불한 상태였다는 것이 전제가 됩니다. 원수가 바로 눈앞에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죽이려 들었기에 도무지 그에 맞설 힘이 자기에겐 없었고 그래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까지 밀어 넣어졌던 것입니다. 사방이 다 막힌 그런 구렁텅이에 떨어져 절망에 빠졌었는데 여호와의 간섭과 섭리로 구출 받고 나니 그 영혼도 새 힘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시편에는 우리의 예상, 기대, 이해, 믿음과는 달리 신자가 된 후에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나도 넘치는 축복과 풍성한 은혜 가운데에서 지내고 있다는 의미는 전혀 없습니다. 신자의 삶 전체가 물이 전혀 부족하지 않는 푸른 초장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이 시편은 그래서 축복을 많이 받은 자나, 현재보다 더 풍성해질 것을 기대하는 신자가 부를 노래가 아닙니다. 절망을 넘어 죽음의 문턱에까지 이르렀던 자가 하나님의 건져주심으로 겨우 숨을 쉴 수 있는 여유를 회복했기에 자기 속에서 저절로 터져 나오는 진정한 감사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쉴 만한”의 의미를 다시 정확히 되새겨 보십시오. “이제야 비로소 쉬게” 된 것입니다. 전혀 문제가 없이 유복하며 풍성한 상태였기에 항상 원기가 넘쳤던 것이 아닙니다. 초장에 누인다고 했지 초장 위에 집이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주님이 기진맥진한 신자를 거기까지 데려온 것입니다. 자기가 누울 힘도 없을 정도로 지쳐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잠간의 휴식일 뿐입니다.

주님만이 나의 목자이기에 그 분 외에는 전혀 필요 없다는 것도 아주 심각한 의미를 내포합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잃더라도 그분만으로 만족한다는 뜻입니다. 욥처럼 소유물, 건강, 가족은 물론 주변 사람들도 다 떠나고 정말로 이 세상에 혈혈단신 오직 맨 몸으로 홀로 남겨진 것 같아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주위에 도와줄 사람이라곤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가족과 배우자도 아무 힘과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가장 가까운 측근마저 자기를 비방 멸시하거나 배반하고 떠났습니다. 그야말로 이 땅에서 자기가 다시 회복될 수 있다는 예상, 기대, 꿈이라고는 단 한 치도 남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시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심지어 하나님마저 인자하고 푸근한 분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언제나 모든 것을 채워주시기는커녕 사망의 골짜기로 떨어지게 된 것도 이 땅의 인간 원수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 그분 때문인 것 같습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환난이 언제 끝날지 모르고 도리어 더 큰 환난이 겹치기만 합니다. 그래서 현 상황은 물론 그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도 도무지 이해되지 않고 의심과 원망과 불신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그럼에도 그런 의심과 원망과 불신은 잠시뿐이고 그분에 대한 궁극적인 신뢰와 헌신에는 아무 변화가 없다는 것이 이 기자가 말하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의 뜻입니다.

오늘날의 신자는 어떻게 이 시편 기자 같은 확신을 갖고 절망에서 영혼이 소생될 수 있습니까? 본 시편을 주문처럼 낭랑하게 암송할 수 있기 때문입니까? 제자훈련과 기도모임에 열심히 참석하여 내 믿음을 최고조로 올렸기 때문이니까? 아닙니다.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세상의 모든 인간에게서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조차 예수님을 배반하거나 부인하며 다 떠났습니다. 당신께서 이 세상에 가진 것이라곤 단 하나도 남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생명마저도 버려야 했습니다. 심지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절규할 만큼 하나님 아버지로부터도 버림받았습니다. 이 땅에 단 혼자만 남겨졌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간 것이 아니라 완전히 그 골짜기에 떨어져 죽었습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로 인한 모든 형벌을 당신께서 대신 다 짊어지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더러 어떤 절대 절명의 순간에 빠져 있어도 당신의 십자가만 붙들라는 것입니다. 그럼 당신 생명까지 우리를 위해 대신 내어주신 주님이 항상 나와 함께 하시고 당신의 이름을 위해서 반드시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신자는 바로 그 절대적이고 영원한 진리와 은혜 가운데 이미 들어와 있는 자입니다. 바꿔 말해 비록 현실에서 도무지 이해되지 않고 하나님마저 나를 버린 것 같은 환난이 닥쳐도 이 시편을 기쁨으로 즐거이 부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당장의 고통 때문에 비탄의 한숨과 단장의 슬픔이 함께 터져 나올지라도 말입니다.

이 시편의 마지막 결론이 무엇입니까?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주님이 그 어떤 상황에서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나 원수가 내 목전에서 나를 죽이려 할 때도, 나와 함께 하시고 결국에는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전혀 의심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따른다고 합니다. 신자 쪽에선 주님에 대해 어떤 의심과 원망과 불신도 개입하지 않는 온전한 믿음과 헌신의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 쪽에서 보면 세상의 어떤 것도 신자를 향한 당신의 인자에 추호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진리 아닙니까? 그래서 자기도 영원히 주님을 떠나지 않겠다는 헌신과 실천이 필연적으로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편은 감사 찬양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엄숙하고도 진지한 결단과 헌신으로 마칩니다. 감사가 넘칠수록 주님을 향한 실제적인 헌신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감사는 입술로만 하는 빈껍데기 감사일뿐입니다. 아무리 감사 헌금을 많이 드렸어도 그렇습니다. 삶에서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것만이 온전하고도 진정한 감사의 표식입니다.

본 시편은 또 주님만 계시면 충분하다고 시작합니다. 마지막은 그래서 평생 동안 주님 곁에 있겠다고 말합니다. 그 중간의 믿음의 여정에는, 쉽게 말해 인생의 여정은 광야같이 온갖 고난이 겹친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과거 수많은 어려움에서 건짐을 받은 체험이 있기에 이런 고백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 시편은 항상 푸근하고 따듯한 안락과 풍요가 넘치기에 감사 찬양하는 내용이 아닙니다. 도리어 세상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너무나 쓰라린 상황 속에서 주님이 먼저 손을 내밀어 건져 주심을 맛보고 있기에 평생 동안 주님만으로 만족하겠다는 어찌 보면 피맺힌 결단과 헌신의 절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는 첫 구절을 고백하지 않는 신자는 없습니다. 이어지는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도 대부분의 신자가 고백하지만 그 정확한 의미를 아는 자는 드문 것 같습니다. 풍요할 때에 이 시편을 암송하는 것은 신자라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비탄과 절망의 한숨과 울음밖에 새어나오지 않는 상황 속에서 심령 깊숙한 곳에서부터 온전한 체험적 고백으로, 그것도 자신만의 고유의 의미를 담은 표현으로 터져 나와야 비로소 이 시편을 올바르게 이해한 것입니다.

12/11/2014

시편 23편 & 성경주석

<시편 23편 서론>

다윗의 시.

일반적으로 “목자의 시”로 알려져 있는 시 23편은 아마도 시편의 모든 시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지고 또한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시일 것이다. 이 시는 아이들에게는 즐거움이 되는 동시에 노인들에게는 위안이 된다. 이 시는 시편의 진주, 나이팅게일 시, 목자의 목자에 관한 목자의 노래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려 왔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시가 순교자들의 찬미라고 말했다. 시편의 다른 어떤 시보다도 이 시에 관해서 더 많은 책들과 기사들이 쓰였고 또한 이 시의 주제와 관련해 더 많은 시와 찬미들이 지어졌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시는 모든 시대, 모든 사람을 위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 시는 그저 단순한 목자의 시가 아니다. 여기에는 그의 양떼들을 인도하여 “쉴 만한 물가”에 있는 “푸른 초장”에서 쉬면서 풀을 먹도록 하고 또한 광야의 위험에서 그것들을 지켜 주는 애정 어린 목자의 모습뿐 아니라 자기의 손님을 위해 풍성한 식사와 지극 정성의 보호를 베푸는 은혜로운 주인의 모습도 묘사되어 있다. 이 시는 일생 동안 그의 자녀들을 사랑으로 이끌어 주고 그의 삶이 다하는 날까지 그들을 자기의 손님으로 후대해 주는 여호와께 대한 절대적 확신의 신앙 고백으로 끝난다. 이 시는 세 연으로 나뉘어 있다. 처음 두 연(1~3절과 4절)에는 애정 깊은 인도와 보호에 대한 개념이 나타나 있고, 셋째 연(5~6절)에는 주인이 제공하는 후한 대접에 관한 개념이 드러나 있다. 시 23편에서는 민족주의적 색채가 없다. 이 시는 그 호소에 있어서 보편적이다. 유대의 거친 언덕들에서 목자로 지낸 경험과 또한 후에 수도에 있는 동방 왕궁의 부유한 왕으로서의 경험은, 다윗으로 거룩한 서정시들 중 가장 아름다운 이 시를 짓기에 적합한 인물이 되게 하였음이 분명하다.

<시편 23편 개역한글>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시편 23편 성경주석>

23:1 나의 목자.

여호와를 목자로, 그의 백성을 양떼로 나타내는 비유는 성경에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상징적 표현이 가장 먼저 발견되는 곳은 창 48:15이다. 이 절에 나오는 “나를 기르신 하나님”은 문자적으로는 “나의 목자”이다(참조 창 49:24). 또한 시편(78:52; 80:1; 119:176)과 선지서들(사 40:11; 겔 34장; )과 신약(눅 15:3~7; 요 10:1~18; 21:15~17; 히 13:20; 벧전 2:25; 5:4)에서도 이 비유적 표현을 찾아볼 수 있다. 이 비유의 아름다움과 의미를 이해하고 감상하기 위해서는 유대 광야의 험한 자연 환경과 목자와 양떼 사이의 친밀한 생활, 그중에서도 특히 그들만이 외따로 떨어져 함께 보내는 긴 고독의 시간 동안에 피차간에 형성되는 서로에 대한 강한 애정에 관하여 알아야만 한다.

23:1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 신뢰를 나타내는 말. 이 구절이 이 시의 핵심이다.

23:2 푸른 초장.

문자적으로 “싱싱한 새 풀의 목장.”

23:2 쉴 만한 물.

(「제임스왕역」에는 “still waters”[잔잔한 물]로 되어 있음-역자 주). 문자적으로 “휴식처의 물.” 이는 곧 강이나 시내, 우물, 호수 주변처럼 물이 있는 휴식처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이 얼마나 아름다운 묘사인가!(참조 부조와 선지자, 413).선한 목자가 그의 양들을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는 것은 광활한 대로에서의 힘든 활동들을 위해 그들을 더 잘 준비시키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매일의 삶에서 힘든 싸움을 더 잘 싸우도록 하기 위해 그들에게 원기를 회복할 시간을 부여한다.

23:3 영혼.

히브리어 네페쉬(nepes∨). 참조 시 3:2; 16:10 주석.

23:3 소생시키시고.

히브리어 슈브(s∨ub). 참조 시 19:7 주석.

23:3 자기 이름을 위하여.

하나님의 인도는 그가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그의 품성의 계시이다(참조 출 33:19; 시 31:3 주석).

23:3 의의 길.

유대의 거친 지형에 익숙한 사람들은 그들이 깊은 와디(wadi, 아라비아, 시리아 등에 있는 우기 이외에는 물이 없는 강-역자 주)들이 가로지르는 고지대를 횡단할 때 바른길을 찾지 못하면 시간 낭비뿐 아니라 큰 어려움에 봉착하기가 매우 쉽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허락하기만 하면, 비록 당시에는 그 길이 쉽지 않은 길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언제나 우리를 바른길로 인도하신다.

23:4 사망의 음침한.

히브리어 찰마웨트(s.almawet). 첼(s.el), “그림자”와 마웨트(mawet), “죽음”에서 유래한 단어. 이 단어들은 둘 다 구약에서 매우 흔하게 쓰이고 있는 것이다. 첼은 49회에 걸쳐 쓰였는데 그중 45회가 “그림자”로 번역되었으며, 마웨트는 157회 중에 128회가 “죽음”으로 번역되었다. 현대의 학자들 중에는 찰마웨트를 “검게 되다”라는 의미의 악갓어 어근 찰라무(s.ala-mu)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아 “흑암”으로 번역하는 사람들도 있다. 「70인역」은 이 단어의 어원에 대한 전통적 견해를 지지한다. 우가릿어(참조 68, 69쪽)에서는 찰마웨트에 대한 그 어떤 설명도 찾아볼 수 없다. 현존하는 우가릿 문헌들 중에서 이 단어가 발견되는 것은 불명료한 구절 가운데 나오는 단 한 번의 경우뿐이다. 번연(Bunyan)은 “사망의 음침함”이라는 구절을 자신의 위대한 풍유적 작품 천로역정(Pilgrim’s Progress)의 독자들에게 특별히 귀중한 구절이 되게 했다.

23:4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이것으로 충분하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임재를 깨닫는 것 외에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다. “오직 당신, 오직 당신, 당신 외에는 세상에서 바랄 것이 없나이다.”

23:4 지팡이.

히브리어 셰베트(s∨ebet.). 목자의 지팡이나 막대기(레 27:32), 교사의 채찍(삼하 7:14; 잠 13:24), 통치자의 홀(창 49:10; 사 14:5) 등을 나타내는 데 사용됨. 이 지팡이는 때때로 무기로도 사용되었는데(삼하 23:21), 시 23:4에서는 바로 이 같은 기능을 염두에 두고 이 단어를 쓴 듯하다. 지팡이는 떼를 지어서 목초지로 몰려드는 굶주린 짐승들을 격퇴하는 무기로 사용되었다.

23:4 막대기.

히브리어 미쉬에네트(mis∨‘enet), “막대기”, “의지가 되는 것.” 병자들과 노인들이 의지하는 지팡이가 그 한 예이다(출 21:19; 슥 8:4).

23:4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마치 “나를 안위하는 것은 그것들이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이 문장에서 “그것들”(참조 「제임스왕역」)이 강조되고 있다. 지팡이와 막대기는 목자의 임재에 대한 상징으로 어떤 순간에라도 목자가 구조를 위해 준비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목자는 휴식, 원기회복, 자양물, 회복, 친교, 안내, 두려움에서의 구원, 위안, 안전, 원수들에 대한 승리 등을 제공한다. 그리스도인이 이 이상 더 요구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럼에도 시인은 계속 여호와의 선하심에 대한 이러한 증거들을 강조하고 또한 다른 비유를 사용해서 그것들에 친절한 주인의 선한 모습을 추가한다.

23:5 내 원수의.

하나님이 주인이기 때문에 해를 가하고자 하는 원수들의 음모는 무산될 수밖에 없다.

23:5 상을 베푸시고.

다윗은 지금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연회장에 있는 손으로 소개한다. 여호와는 목자 이상의 일을 한다. 그는 그의 손들을 위해 자신의 식탁에 음식을 풍성히 차려내는 왕이다.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에 관한 비유(마 22:1~14)와 비교하라. “상을 베풀다”라는 구절은 식사 준비를 나타내는 관용적 표현이다(참조 잠 9:2).

23:5 내 잔이 넘치나이다.

참조 엡 3:20. 다윗은 여기서 전적으로, 또는 적어도 우선적으로는 여호와의 기쁨의 잔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자비를 무조건적으로 흘러넘치도록 부어 준다. 이 비유는 부차적으로 물질적 번영의 복을 의미할 수도 있다. 다윗은 그 같은 복을 누려 왔다. 그는 또한 고통스런 경험을 통해서 번영이 영적 생애에 위험하다는 사실도 배웠다. “가장 운반하기 어려운 잔은 빈 잔이 아니고 위에까지 가득 찬 잔이다”(치료봉사, 212). 그것보다도 더 어려운 것은, 만일 실제로 그런 잔이 있다면, 흘러 “넘치는 잔”을 운반하는 것이다.

23:6 인자하심.

물질적, 영적 복들이 다윗의 온 생애를 통하여 그를 따르는 것처럼 의인화되었다. 그는 이 말을 통하여 자신의 인생의 현실적 부침(浮沈)의 전반에 걸쳐서 인도하신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를 나타내며 또한 즐거운 마음으로 이 같은 인도가 미래에도 계속될 것임을 예상한다.

23:6 여호와의 집.

시인은 자신이 계속 하나님의 집에 손님으로 머물 것임을 확인하고 있다(참조 시 15:1; 27:4; 65:4; 84:4).

23:6 영원히.

문자적으로 “날들의 길이까지.” 이는 곧 그가 살아 있는 동안을 의미한다. 그러나 믿음을 지닌 하나님의 자녀는 이생에서의 하나님과의 교제를 넘어 장차 올 세상에서의 영원한 교제를 바라본다. 이 시는 다함없는 기쁨의 분위기 속에서 끝난다.

출처 :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성경주석」제6권

2020.05.17 – 오후예배 설교문(시편23편)

2020.05.17 – 오후예배 설교문(시편23편)

목자이신 하나님!

본문말씀: 시편 23:1-6

오늘 시편23편은 전 세계 기독교인이 가장 좋아하는 성경말씀입니다. 우리나라의 성도들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얼마나 좋아들 하시는지, 제가 언젠가 한 번은 인터넷에서 검색하다가 시편 23편의 전국 사투리 버전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전체 말씀은 재미로 찾아들 보시고요. 이 설교문에는 적어 드리겠습니다. “여호와가 내 목자 아이가? 내사마 답답할 끼 없데이!” 충청도 버전, “여호와는 염생이 같은 지를 키우시고 멕이시는 분이시니 지가 부족한 것이 없네유.” 전라도 버전, “아따 여호와가 시방 나의 목자신디 나가 부족함이 있겄냐?” 강원도 버전, “여보서요. 여호와는요. 우리 목자래요. 내가요 부족한기 한 개도 음잖소.” 제주도 버전, “여호와가 우리 몰태우린디 나가 을큰험이 이시쿠 가게.” (무슨 방언같아서 저도 알아들 수가 없네요.) 마지막으로 북한 버전, “여호와는 나의 목자 되시니끼니, 내레 부족한거이 조금도 없시오. 기럼.” 웃자고 한 번씩 적어 드렸는데요. 그만큼 우리나라 성도님들이 시편 23편을 좋아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입니다.

시편 23편은 제게도 큰 의미가 있는 말씀입니다. 결혼을 하고 전임전도사 사역을 하면서, 사모와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서울에 혼자 있는데, 가끔씩 외로움이 크게 밀려옵니다. 그때에 사모와 제가 똑같은 테이프를 하나 사서 서로 듣던 것이 있었는데요. 시편 23편을 가사로 서로 다른 곡조를 붙인 찬양테이프였습니다. 밤에 혼자 있으면 외로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테이프를 틀어놓고, 기도하곤 하였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다보면, 저절로 눈물이 흐로고는 했었습니다. 그때 들었던 시편 23편 찬양들이 많은 위로가 되었던 것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그래서 우리 숭실교회에 와서 심방을 할 때에 시편 23편을 여러 차례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때마다 제가 무슨 말씀을 나누었냐면요? 1절에서 4절 말씀에 나타나는 세 가지 동사를 함께 나누었어요. 1절에서 4절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가 되신다고 하시잖아요. 그 목자 되신 우리 하나님이 양 되는 우리를 어떻게 해주시는가? 3가지 동사에 잘 나타나 있어요. “인도하신다.” “함께 하신다.” “안위하신다(위로하신다. 지켜주신다.).”

그런데 설교문을 준비하면서, 시편 23편을 조금 더 전문적으로 연구해 보았습니다. 구약학자들이 쓴 글을 좀 찾아보았는데요. 아주 중요한 것을 배웠어요. (1) 우리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시편 23편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모습을 목자로만 압니다. 그런데 23편에는 하나님이 목자이시기도 하시고, 또 하나 집주인으로 드러나십니다. 6절에 보면 “여호와의 집”이라는 말씀이 등장하잖아요. (2) 그래서 시편 23편에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두 가지로 표현하고 있어요. 첫째는 목자와 양이고요. 둘째는 집주인과 손님(혹은 백성)입니다. (3) 그래서 시편 23편은 2개의 연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연은 1절엣 4절까지로 하나님을 목자로 그리고 있고요. 둘째 연은 5절과 6절, 하나님을 집주인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4) 1연과 2연에서 나타나시는 목자로서의 하나님과 집주인으로서 하나님은 자신의 양과 손님에게 두 가지의 일을 해주십니다. 첫째는 공급하시는 일이고요. 둘째는 보호하시는 일입니다. 제가 하나 더 추가하고 싶은 게 있는데요. 1절에서 4절은 그 장소가 세상 한 가운데서 일어나는 일이고요. 5절에서 6절은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이고요. 그래서 종말에는 저 천국, 하나님 나라에서 일어날 천국잔치와 영생의 일을 이야기하고 있어요. 이렇게 구분하여 놓고, 1-4절과 5-6절을 함께 나누며 말씀을 생각하겠습니다.

첫째, 1절에서 4절에서는 목자 되신 하나님께서 힘겨운 세상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그러니까 양이 되는 저와 여러분을 위해 일하시는 분으로 나타납니다. 어떻게 일하시냐면요? 첫째는 양이 되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여 주십니다. 1절과 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양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풀과 물입니다. 양은 스스로 그것을 찾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눈이 잘 보이지를 않고요. 다리는 짧고 몸이 커서 한 번 넘어지면 일어서기도 쉽지 않고요. 그 위에 다른 양이 쌓이잖아요.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반드시 목자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목자를 돕는 개같은 동물이 필요합니다. 그 목자가 어리석은 양을 푸른 풀밭으로 인도하고요.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는 거에요. 그래서 마음껏 먹고 마실 수가 있어요. 그래서 양은 목자 없이는 절대로 살아갈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이 강하고 능력이 많은 것 같아도, 연약하기가 그지 없습니다. 병원에 심방을 가잖아요. 그것을 금방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교회에도 몇분의 환우분들이 계시잖아요. 그분들을 심방하면 이구동성으로 하시는 말씀이 “자신이 너무도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다는 겁니다.” 요즘 코로나 19를 통해서 경험하는 것이 인간의 역약함입니다. 과학과 의학이 그토록 발전했는데도, 코로나 19를 완전히 제압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간접적인 죽음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그코록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가 필요하냐면요? 우리의 목자 되시는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채우시고 공급해주셔야 우리는 살아갈 수가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어떤 존재냐면요?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요즘 코로나 19로 인해서 우리나라 경제가 어려워요. IMF때보다 더 어렵다고 말씀합니다. 우리 성도님들도 경제가 너무 어렵다고 걱정을 많이 하십니다. 그러나 저는 확신해요. 우리의 목자 되신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고 공급해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이 어려운 때에 우리는 더 목자 되신 하나님께 매달려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고백하면서 더 간절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목자 되신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필요를 채우시고 공급하실 줄로 믿습니다.

둘째, 세상 한 가운데서 양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해주시냐면요? 보호해주십니다. 3절과 4절을 보십시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조금 전에 말씀드렸지요? 양이 참 어리석고 약한 존재에요. 그러다 보니까 위험에 늘 노출되는 존재에요. 특히나 밤이 되잖아요. 그러면 사방에서 위험한 동물들이 양을 노리고 있어요. 늑대도 있고요. 사자도 있어요. 그런 동물이 나타나면, 목자가 어떻게 하냐면요?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라고 하잖아요? 두 개다 양을 보호하는 도구입니다. 특히 지팡이 끝에는 날카로운 것이 달려 있어요. 그것을 무기로 삼아서 양을 노리는 늑대, 사자랑 싸우는 거에요. 막대기는 양이 이상한 곳으로 달려가지 않도록 몰아가는 작은 막대기에요. 그러니까 목동의 손에는 양을 보호하기 위해 싸우고 인도하는 도구가 들려 있는 겁니다. 이렇게 양이 항상 위험에 노출되어 있으니까, 목동은 양 곁을 떠날 수가 없어요. 아마도 TV같은 데서 보셨을 겁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종종 돌로 쌓은 작은 원형 성곽과 같은 곳이 있어요. 그게 뭐냐면요? 밤에 양을 그곳에 몰아넣는 거에요. 그리고 목동은 그 앞에 불을 피우고 밤새 지킵니다. 이처럼 낮에도 밤에도 목동은 양 곁을 떠나지를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그런 분이에요. 제가 여러 차례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시는 가장 큰 축복이 “함께 해주시는 임마누엘”의 축복이에요. 그렇게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육신의 옷을 입고 이 땅에 오셨어요. 그분이 우리 예수님이시고요. 그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약속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합니다. 또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셔서, 우리와 함께 하도록 해주셨습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므로, 우리를 보호해주십니다. 지켜주십니다. 그러니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요즘 정말로 힘이 드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수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자리에서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보호해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제 5절과 6절을 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집주인이 되십니다. 이미 말씀드렸듯이, 집은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 집주인이 되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교회의 주인이 되신다는 겁니다. 교회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역사하십니다. 어떻게 역사하시냐면요? 첫째, 공급하여 주십니다. 5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머리에 기름을 붓는 것은 중동에서 집주인이 손님을 귀한 사람으로 인정해준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요. 또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람으로 인정한 사람을 기름을 부어서 알려주십니다. 그러니까 5절은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람으로 선택하신 사람을 불러서 잔치상을 차려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도 원수의 목전 앞에서 그러십니다. 이 장소가 어디이겠습니까? 바로 교회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기름 부으셔서 선택하셨어요. 그리고 그 사람들은 자신의 성도로, 교회로 삼아주셨어요. 그래서 그들에게 잔치상을 베풀어주십니다. 그 잔치상에 무엇이 있는가? 말씀이 있어요. 찬양이 있어요. 기도응답의 축복이 있어요. 우리 숭실교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공급해 주시는 이런 그 잔치상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 교회가, 우리 교회에서 함께 드리는 예배의 자리가, 너무도 복된 자리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천국에 가면 이 찬치상이 우리를 매일같이 기다리고 있어요. 오늘도 그 기쁨의 자리를 소망하시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집주인 되신 하나님께서 손님되는 우리를 위해 또 무엇을 하시냐면요? 우리를 보호해주십니다. 6절을 보십시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사실 6절은 다윗의 소망을 표현하는 말씀입니다. 집주인 되시는 하나님과 영원히 살고 싶다는 거에요. 하나님의 집인 성소, 교회를 자신의 영원한 거처로 삼고 싶다는 거에요. 저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토록 살고 싶다는 거에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면 영원한 천국이 있고, 하나님의 품에 안기게 되면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항상 있으므로, 세상에서 누릴 수 없는 평안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러한 복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특히나 우리 교회에 나올 때마다 이 자리에 하나님이 계시고, 그 하나님이 오늘도 저와 여러분을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지켜주시고 보호하신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한 단어만 함께 나누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실 시편 23편은 신뢰시에요. 다윗이 하나님을 100% 신뢰하고 믿고 있다는 믿음의 표현이에요. 그 한 마디가 요약되어 있는 말씀이 있어요. 바로 “반드시”라는 단어입니다. 히브리어로 “아크”라는 말인데요. 본래 “견고하게 세우다.”라는 동사에서 유래한 말이고, 그 의미가 “확실히, 의심할 여지없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지금 하나님 앞에 “확실한, 의심이 없는” 믿음을 고백하고 있는 거에요. “하나님.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목자이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주인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나를 보호하십니다. 나의 필요한 것을 공급하여 주십니다. 그것을 확실히 믿습니다.” 이 믿음이 저와 여러분에게도 고백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제목:

-목자 되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신뢰할 수 있게 하옵소서!

-힘겨운 세상에서 살아가는 성도님들 한 분, 한 분을 기억하여 주옵소서!

키워드에 대한 정보 시편 23 편의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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