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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복음 1 – YES24
: 하나님과의 친밀함 · 1. 신앙의 본질 · 2. 거짓 신앙체계 1 · 3. 거짓 신앙체계 2 · 4. 영적 분별력 · 5. 하나님을 아는 것 · 6.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 7.
Source: www.yes24.com
Date Published: 3/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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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주간 특집-그리스도 십자가의 복음 – 기독신문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의 고난이 끝이 아니라 지상사역의 목표이자 면류관이라고 생각했다. 초대교회가 어떻게 이런 신앙 이해에 도달했는가? 고난 주간을 맞아 예수의 …
Source: www.kidok.com
Date Published: 6/24/2021
View: 3077
십자가의복음(증보판) – 포도나무교회
십자가의복음(증보판). 제목, 본문, 설교자, 내용 … 54, 십자가의 사랑. 제53강. 여주봉목사. 2012-04-29 … 52, 십자가에 의한 ‘의’. 제51강. 여주봉목사.
Source: www.nwtv.kr
Date Published: 1/24/2021
View: 3426
십자가 복음이란 무엇인가? – 네이버 블로그
우리의 옛 사람(죄의 몸, 아담)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을 믿는 것이 십자가 복음이다. “내가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장사되고 예수와 함께 …
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12/18/2022
View: 8060
6부, 감추어진 십자가 복음의 비밀 – 진리횃불
맥박이 빨라지고 가슴이 두근거리게 되며, 죄책감이 마음을 사로잡아 괴로움을 느끼게 되고, 수치심으로 얼굴이 빨개지며 식은 땀이 몸을 적시기도 합니다 …
Source: changesoul.com
Date Published: 9/2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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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십자가 의 복음
- Author: 채널ANSer[앤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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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21. 9. 19.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m6s8P5tExRc
십자가의 복음 1
저자는 미 캘리포니아 침례대학을 졸업하고, 미 싸우스웨스턴 침례신학대학원을 졸업했으며, 미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수학했다. 침례신학대학 강사, 수도침례신학대학 강사를 역임했고, 하늘빛교회 담임목사로 섬기다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현재 포도나무교회를 담임하고 있으며, 새물결선교회 회장으로 섬기고 있다. 그의 저서로는『성령이 역사하시는 교회』『다가오는 하나님의 군대』『새부대의 교회를 위한 다섯 기둥』『십자가의 …
저자는 미 캘리포니아 침례대학을 졸업하고, 미 싸우스웨스턴 침례신학대학원을 졸업했으며, 미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수학했다. 침례신학대학 강사, 수도침례신학대학 강사를 역임했고, 하늘빛교회 담임목사로 섬기다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현재 포도나무교회를 담임하고 있으며, 새물결선교회 회장으로 섬기고 있다. 그의 저서로는『성령이 역사하시는 교회』『다가오는 하나님의 군대』『새부대의 교회를 위한 다섯 기둥』『십자가의 복음』『성령사역의 회복』『영적 분별력』『예배 회복』외 다수가 있으며, 역서로는『영적 전쟁』『치유의 권세』 등이 있다.
고난주간 특집-그리스도 십자가의 복음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의 고난이 끝이 아니라 지상사역의 목표이자 면류관이라고 생각했다. 초대교회가 어떻게 이런 신앙 이해에 도달했는가? 고난 주간을 맞아 예수의 고난과 죽음이 예수 자신 뿐만 아니라 초대교회를 통해 어떻게 이해되었는지 살펴본다.
예수께서 왜 십자가 처형을 받으셨는가?
예수의 고난은 단일 사건이 아니라 일련의 수난과정을 내포하지만 그 극치는 아무래도 십자가 사건에서 찾는 것이 자연스럽다. 마태가 지적한대로 예수는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마 26:21)였다. 무슨 이유로? 이 질문에 쉽게 대답할 수도 있다. 유대와 같은 로마 식민지에서 이런 종류의 처형은 지역 로마 총독의 명령으로만 수행될 수 있었다. 더욱이 십자가 형은 치안을 교란시키는 반란자들에게 내려지는 것이 상례였기에 예수께서도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서 반란자의 죄목으로 처형당했을 것으로 추론할 수도 있다. 누가복음의 한 구절도 이 가능성을 뒷받침해 준다. 무리가 『고소하여 가로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눅23:2-5). 빌라도는 이런 비난을 받고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마27:11 막15:2 눅23:3 요18:33)고 물었다. 궁극적으로 예수는 두 다른 반란자들과 더불어 처형되었고 십자가 형틀에 붙인 비문도 이러한 국가반란죄와 연관되어 있었다. 따라서 형식적으로 예수는 치안교란죄로 처형당한 것이 된다. 하지만 심문을 받을 때 예수께서는 자신이 국가 반란을 주도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분명히 하셨다(마26:55 막14:48 눅22:52). 더욱이 예수의 추종자들도 국가 반란에 가담한 죄에 연루되어 함께 처형되지도 않았다. 빌라도도 예수에게 (치안교란죄와 같은) 『죄가 없다』고 시인하였다(눅23:4).
예수의 직접적인 죽음의 원인을 「성전청결 사건」에서 찾는 사람들도 있다(마21:12-13 막11:15-17 눅19:45-46). 사실 예수의 행동은 성전을 개혁하고자 하는 개혁운동이라기보다는 성전파괴를 예고하는 행동이며 유대 종교체제의 무효화를 선언하는 도전적 행위였다. 성전청결이라는 공개적 행위가 있자마자 그를 죽이려는 결정적인 음모가 꾸며지기 시작하였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그러한 선포는 다윗왕국 건설에 대한 백성들의 대중적 소망을 자극하기에 충분하였기 때문에, 성전을 대항하는 예수의 공개적 행동은 로마 사람들에게 정치적 위협으로 간주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단순히 이런 식의 해석은 예수의 수난과정에서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역할과 그들의 선동에 부화뇌동했던 유대 군중의 역할을 무시한 것이다. 예수와 종교지도자들 간의 갈등은 이미 오래 전부터 시작된 것이고 마가복음에 따르면 그를 죽이고자 하는 음모는 예수의 사역 초반부부터 시작된 것을 알 수 있다(막3:6). 따라서 예수의 공개적인 성전청결 행위는 이러한 갈등과정을 절정에 끌어올린 촉매제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치안교란죄로 일단 예수를 빌라도 총독에게 넘겼으나 죽일 죄를 찾는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따라서 산헤드린이 예수의 문제로 비공식 모임을 가져 그를 죽일 음모를 꾸몄으나 로마 당국의 비판이 두려워서 치안교란죄 뿐만 아니라 이에 덧붙여 성전 모독죄란 종교적 죄목 하나를 더 추가하여 빌라도 총독에게 다시 넘긴 것으로 보인다(요11:48). 하지만 복음서 보도에 따르면 성전 모독죄에 대해서도 증인들의 주장이 서로 엇갈리고 또한 증인들까지 매수한 흔적이 역력하다. 복음서 기자들은 그들의 주장을 거짓 증언이라 못박고 있다(막14:55-59).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 총독과 유대 종교지도자들 간의 정치적 이해득실이 맞아떨어진 부분이 존재한다. 예수를 추종하는 수많은 군중들의 무리가 없었더라면 예수는 로마 당국이나 종교지도자들에게 위협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보편적 통치의 도래를 선포하는 예수의 왕국 설교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대망했던 유대 군중들의 소망을 자극하여 수많은 군중들의 추종을 만들어냈고 이것은 로마 당국자들 뿐만 아니라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잠정적인 엄청난 위협이 되었을 것이다. 물론 예수의 왕국 설교는 군사적이고 정치적인 의미는 없었지만 현체제를 고수하려는 기득권자들 모두에게 정치적인 위협이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유월절 동안 예루살렘에 도착한 예수의 공개적 설교와 행동으로 인해 고조된 이 위협은 결국 그의 체포와 처형을 야기하고 말았다. 결국 예수께서는 현 질서를 고수하려는 당시 종교, 정치 기득권자들의 이해에 따라 희생이 되셨다고 할 수 있다.
십자가 고난에 대한 예수의 이해
예수는 당대의 사회, 정치, 종교적 구조의 관점에서 무죄한 희생양으로 돌아가신 것은 분명하지만, 초대교회는 그것을 우연한 사건으로 이해한 것이 아니다. 죽이기는 사람들이 죽였지만 사실은 인류 구속을 위해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는 데 「넘기우신」 사건이라 할 수 있다(롬8:3). 예수의 죽음은 그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의가 계시된 사건이다(롬5:6-8 고전1:18-2:5). 초대교회가 이러한 인식에 도달하게 된 뿌리와 기원은 물론 예수 자신이다. 하지만 로마제국 당시 지녔던 십자가 처형의 잔인성과 치욕적 성격 때문에 초대교회는 외부로부터 자연히 조롱과 공격을 받게 되었다. 심지어 기독교회 내부에서조차 십자가의 의미에 대한 혼란과 당혹감이 존재했던 것이 분명하다. 신명기(21:22-23)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이다』고 말했다. 기독교 이전 시기에 이미 십자가에 못박힌 자가 하나님께 저주받은 인물로 간주되었음을 보여주는 얼마간의 중간사 시대의 문헌적 증거가 존재한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를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사람으로 생각하였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십자가에 달려 저주를 받은 예수를 메시야와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하는 기독교 메시지 자체를 모순된 주장으로 인식하였을 것이다. 초대교회의 설교 가운데 자주 신명기 21장23절이 암시된다(행5:30 10:39 13:29 갈3:13 벧전2: 24). 이것은 유대인들이 처음부터 신명기의 이 구절에 근거해서 예수를 메시야로 선포하는 기독교 메시지에 반대하고 기독교인들을 핍박하였음을 역으로 시사해 준다. 기독교인들이 신명기 구절을 주도적으로 예수의 죽음에 적용하였다기 보다는 유대인들이 기독교회를 공격하는 근거 구절로 활용하였을 가능성이 많다. 사실 바울도 십자가의 복음이 헬라 세계 속에서 「거리낌」과 「거침돌」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고전1:23 갈5:11). 십자가는 당대 헬라 세계 속에서 부끄러움과 굴욕의 상징이었고, 심지어 기독교 복음 전파자들 가운데도 십자가의 복음을 부끄러워하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롬1:16 딤후1:8).
이렇게 부끄러움과 거리낌의 대상이었던 십자가가 어떻게 초대교회에서 인류를 위한 구원 사건으로 이해될 수 있었을까? 뿌리를 찾다보면 우리는 그러한 이해의 근원을 예수 자신에게서 발견하게 된다. 복음서들은 예수께서 사역 중반부터 자신의 고난과 부활을 여러차례 예고하셨다고 기록한다(막8:31 9:31 10:33,34). 자신의 죽음의 의미에 대해 밝힌 곳은 많지는 않지만 가장 대표적인 복음서 구절은 마가복음 10장45절과 마태복음 20정28절이다. 이 구절은 이사야 53장의 「고난당하는 여호와의 종」 사상을 배경으로 한 것이 분명하다. 이 구절은 예수의 죽음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내어준 대속적 죽음으로 말한다(딤전2:5-6). 성찬식 말씀에서도 제자들에게 주어진 떡을 가리켜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으로 말씀하셨고 그의 죽음의 피를 상징하는 잔도 제자들을 위해 붓는 새 언약 의식으로 설명하셨다(눅22:19-20 막14:25). 최후의 만찬은 출애굽 구원 사건을 기념하는 유월절 식사를 배경으로 하는데 후자는 예수의 죽음을 기념하는 최후만찬의 신학적 의미를 풀어주는 열쇠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최후만찬은 장차 도래할 구원시대의 잔치를 예표하는 의미도 지녔다. 특별히 유월절 예루살렘에 도착하셔서 행하신 성전청결 사건은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새롭게 형성될 부활공동체, 즉 신약교회의 형성을 예시하는 예표적 사건이었다. 손으로 지은 현 예루살렘 성전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무너질 때 예수께서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손으로 짓지 아니한 새로운 성전』 곧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실 것이다(막14:58 요2:19). 예수는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고 결국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되었지만 이제 새 언약 시대에 새롭게 지어질 새 언약 공동체, 즉 신약의 교회는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어 믿는 자들이 서로 엮어져서 연결될 새 성전, 새로운 하나님의 처소가 될 것이다(막12:10). 결국 예수는 자신의 죽음을 새로운 하나님 백성을 창조한 교회론적 사건으로, 인류 구속을 위한 대속적, 희생적 죽음으로 이해했음을 알 수 있다.
예수의 죽음에 대한 초대교회의 이해들
십자가 고난과 죽음에 대한 예수 자신의 이해는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의 근거가 되었으며 사도들의 신학의 근간이 되었다(고전15:1-5). 특히 바울은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훨씬 더 풍부하고 다양하게 해석한다. 예수의 죽음은 하나님 백성의 속죄를 이룬 유월절 양의 희생제사였으며(고전5:7), 그들을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고(갈3:13), 아들의 명분을 부여해 준 구원론적 사건이었다(갈4:5). 그것은 이 악한 세대에서 건지시기 위해 그들의 죄를 위해 자신의 몸을 내어준 사건이었다(갈1:4).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의 죽음은 신자가 믿을 때 그의 십자가의 죽음에 참여하는 실존적인 사건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신자들은 세례받을 때 그와 함께 장사지낸 바 되었으며(롬6:4)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갈2:20). 특별히 신자를 주어로 삼아 「십자가에 못박다」는 능동태 동사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갈 5:24). 십자가 사건은 예수의 구속적 죽음에만 해당되는 것이 통례인데, 바울은 이 통례를 깨고 기독교인들 자신이 믿을 때 자신 속의 죄성 즉 「육(肉, 싸륵스)」을 못박았다고 선언한다. 십자가 사건은 여기서 기독교인의 윤리적 삶의 기초와 출발점이 된다. 그것은 옛 사람과 그 죽은 행실들을 처리한 사건이며, 이 구원론적 사건에 기초해서 신자는 여전히 자신의 육과 정욕을 「죽여야(put to death)」 한다(롬8:13). 여기에 이미 완성된 것(already)과 아직 완성되지 못한 것(not yet) 사이에 독특한 긴장 관계가 존재한다. 이미 완성된 측면만을 강조하게 되면 죄 문제는 이미 다 끝난 것이 되고 구원도 이미 완성된 것처럼 되며, 따라서 날마다 죄와 싸우고 회개할 필요도 없어지게 된다. 한국교회 내에 이런 잘못된 신학사상이 엄연히 존재한다. 반면에 아직 완성되지 못한 미래의 측면만을 강조하게 되면 기독교인의 삶과 윤리의 안정성을 위태롭게 만들 가능성이 있고 또다른 행위구원론의 위험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 신약 저자들은 「이미(already)」와 「아직 아니(not yet)」, 이 두 측면들을 모두 균형있게 붙들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십자가에 못박혀야 할 대상은 옛 사람, 정욕 또는 육체 뿐만 아니다. 신자는 율법에 대해서 죽었다(갈2:19). 율법에 대한 죽음은 곧 하나님을 향하여 살 수 있는 길로 설명된다(19절). 율법이 주인처럼 군림하던 때가 끝나고 그리스도의 주권적 통치 아래서 사는 때가 도래하였다(20절). 더욱이 신자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을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혔다』(갈6:14). 이 말의 의미는 다음 15절에서 부연 설명된다. 옛 세상의 질서는 할례와 무할례, 즉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하는 가치관에 묶여 있었다. 십자가 사건은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 노예냐 주인이냐, 남자냐 여자냐 하는 옛 세상의 구분 방식들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옛 가치체계에 종말을 고한 사건인 것이다(갈3:28). 그것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가로막힌 담을 허물고 그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한 새 인류로 만든 교회론적인 사건이었다(엡2:11-18).’EN’이제 십자가는 서로 다른 문화적, 사회적, 인종적, 성적 배경의 차이점들을 지닌 수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로 창조하였다(엡2:15). 이런 의미에서 십자가는 교회의 존립 근거이며 통일성의 기반이다. 그렇다면 십자가 복음은 단지 구원론적 의의만을 지닌 것이 아니라 사회적 계층과 인종적 차이, 신분적 차별을 뛰어넘어 모든 신자를 평등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사회변혁적 의의도 지닌다고 하겠다. 복음주의 교회가 이 후자의 의미를 소홀히하는 것은 약점 가운데 하나이다. 복음은 사회 변화의 지향성을 지녀야 한다.
바울은 선교 과정에서 당하는 고난들을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부르기도 한다(고후1:5). 그리스도의 고난은 단번에 끝난 사건이지만, 바울과 같은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당하는 고난 역시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불리운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일차적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바울의 함축된 의미는 그보다 폭넓다. 그는 복음 선교사로서 당하는 고난들을 설명하면서 『항상 예수의 죽인 것을 몸에 질머지고』 다닌다고까지 말한다(고후4:10). 물론 바울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처럼 구속적인 의미를 지닌다기보다 선교적인 의미를 지닌다. 예수께서 고난의 죽음을 당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부활의 생명에 동참할 수 있었던 것처럼, 선교사들 역시 그들의 고난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살리고 생명을 준다. 때문에 선교적인 의미에서 선교사들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의 연장선상에 놓인 것이다. 공관복음에서처럼 참된 예수의 제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하는 것처럼(막8:34), 하나님의 뜻대로 받는 고난은 제자들의 사역의 일부이며 교회의 참된 종들인 것을 확증해 주는 징표이다(고후11:23). 고난은 또한 부활에 참여하기 위해 거쳐야 할 과정으로 간주되기도 한다(빌3:10).
결론적으로 예수의 고난과 그의 십자가 죽음은 초대교회에서 다양하게 이해되고 해석되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대속적인 죽음이며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괄한 범세계적인 믿음의 공동체를 창조한 교회론적인 사건이다. 그것은 복음 선교를 통해 여전히 참여되어야 할 실재이며 매일의 삶 속에서 좇아야 한 본보기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십자가 복음은 교회의 통일성의 기초일 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회 계층의 차별을 무너뜨리고 그들을 그리스도 안의 한 형제자매로 변화시키는 사회변혁적 성격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유대인과 이방인, 노예와 주인, 남자와 여자 등 고대사회에서 뛰어넘을 수 없었던 신분적 차별들을 무너뜨리고 그들 모두를 평등한 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변화시킨 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다. 그것은 또한 제자된 사람들이 본받아야 할 자기부정과 섬김의 정신이기 하다. 이 십자가 복음의 정신을 특별히 한국교회는 실천해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이한수 교수(총신대학원 신약학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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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복음이란 무엇인가?
십자가 복음이란 무엇인가?
십자가 복음이란 무엇인가?
십자가 복음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쉬운 말씀이요. 가장 기본적인 말씀이다.
그런데 사탄이 지금까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도록 우리의 눈을 가리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모세의 수건이 아직도 벗겨지지 않아서 유대인들이 말씀을 읽으면서도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이 간절히 기다리는 메시야인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
그런데 예수님의 무엇을 믿어야하는지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죄를 회개하고 예수 믿으면 우리의 죄가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믿는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을 얻는다고 한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한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한다.
과연 이것이 진정한 복음인가를 숙고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에 교인수가 100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기독교 역사 120년 만에 1000만 명이 넘는다고 자랑을 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교인 수는 늘어나는데 교인들의 삶은 변화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속사람은 변화되지 않고 외형은 점점 화려해진다는 것이다.
지도자들은 성장 중독증에 걸려서 교회가 커지고 교인수만 많으면 목회에 성공한 것으로 알고
성도들의 영혼의 탄식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총체적으로 문제점을 안고 있다는 것을 누구도 부인 하지 않는다.
그래서 깨어있는 목사님들은 한국교회의 병폐를 고쳐보자고 여러 가지 방법을 내놓지만
큰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정녕 교인들을 변화시킬 방법이 없단 말인가?
정녕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흠이 없는 거룩하고 영광스런 교회를 세울 수 없단 말인가?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가는 거룩한 성도가 양산되는 방법이 없단 말인가?
있다!!. 방법이 딱 하나 있다.
바로 ‘십자가 복음’이다
이 말씀을 깨닫게 되면 속사람이 놀랍게 변화된다. 할렐루야!
그러면 ‘십자가 복음’이 무엇인가?
바로 로마서 6장 말씀이 십자가 복음에 대한 말씀이다.
특히 로마서 6장 6절은 십자가 복음의 핵심 말씀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 하려함이니”(롬6:6)
우리의 옛 사람(죄의 몸, 아담)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을 믿는 것이 십자가 복음이다.
“내가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장사되고 예수와 함께 부활했다”는 것을
믿는 것이 십자가 복음이다.
이 말씀을 믿으면 실제로 나의 옛사람(아담) 죽는다.
나의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장사되고 예수와 함께 부활 할 때,
나도 예수님과 함께 부활해서 ‘새 사람’이 되는 것이다.
‘새 사람이 되었다’라는 것은 고린도 후서 5장 17절 말씀인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는 말씀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새롭게 재창조 되었다’라는 것이다.
옛 사람이 새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본질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물리적인 변화가 아니라 화학적인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었다는 것이다.
염소가 죽어 양으로 완전히 새롭게 태어났다는 것이다.
염소인 옛사람에게 양가죽을 입혔다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대부분이 이렇게 예수님을 믿는다. 그래서 죄를 반복적으로 짓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옛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염소가 아예 죽어버리고 양으로 완전히 새롭게 태어났다는 것이다.
이것이 참 복음이다.
양으로 태어났으니 염소의 속성을 아무리 내려고 해도 안 된다는 것이다.
본성적으로 양의 성품이 나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양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십자가 복음이다.
십자가 복음인 로마서 6장 6절의 말씀을 믿는 순간
2000년 전의 십자가 사건이 지금 내 사건이 되는 것이다.
2000년 전의 십자가 사건이 지금 현재 나의 사건으로 체험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믿을 때”에 나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믿지 않으면 실제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믿어야” 실제가 되는 것이다.
말씀은 믿어야한다. 믿으면 그대로 이루어진다.
내가 만약 암이 걸렸어도 암이 말씀대로 낫는다고 믿으면 실제로 낫는다. 믿지 않으면 낫지 않는다.
이처럼 말씀은 믿을 때에만 실제가 되는 것이다. 그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수님도 병자들을 만났을 때에 꼭 물어본 것이 있었다.
‘믿음’을 물어보았다. 이유는 예수님도 말씀으로 치유하셨다. 말씀을 믿을 때만 역사하셨다.
다른 모든 것도 마찬가지다. 천국도 믿음으로 가는 것이다.
십자가 복음도 마찬가지이다.
십자가 복음도 믿음으로 되는 것이다.
내가 십자가 복음을 믿으면 실제로 나의 옛사람, 죄의 사람이 죽는다.
내 죄가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믿는 순간 내 죄가 십자가에서 실제로 죽는다.
히브리서 11장 1절 말씀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했다.
믿음은 내가 소원하는 것, 내가 소망하는 것들이 실제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믿는 대로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십자가 복음을 믿으면 그대로 내 죄가 십자가에서 죽는다.
여기에는 이유가 없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말씀대로 되는 것이다.
그래서 로마서 6장 1절과 2절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해서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사도 바울은 우리가 죄에 대해서 죽었다고 당당하게 말을 하고 있다.
헬라어로 ‘죽은’은 현재가 아니고 ‘과거’이다. 이미 죄에 대해서 죽었다는 것이다.
죄에 대해서 완전히 죽었다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내 죄가 죽었기 때문에 나하고 죄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죄에 대해서 죽었기 때문에 다시는 죄 가운데 살 수가 없다는 것이다.
어디서 죽었느냐? 바로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죽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이 로마서6장 3~5절이다.
로마서 6장 3~5절을 요약하면 “내가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장사되고
예수와 함께 부활해서 새사람이 되었다”라는 것이다.
이것이 십자가 복음이다.
이 말씀을 믿으면 실제로 내 죄가 십자가에서 죽는다.
죄인이 죽고 의인이 되는 것이다.
죄인이 죽고 거룩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롬6:22)
십자가에서 죄로부터 해방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다는 것이다.
죄에 대해서 죽었기 때문에 의인이 되는 순간부터 거룩함의 열매를 맺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열매를 맺었으니’에서 ‘맺었으니’는 현재 능동태이다. ‘맺을 것이다’가 아니다.
예수와 함께 죽은 사람은 예수와 함께 부활해서 거룩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거룩함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다.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10:10)
얼마나 놀라운 말씀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다고 선언을 했다.
현재완료 수동태이다. 거룩함을 이미 십자가에서 얻은 순간부터 지금도 거룩해져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 복음을 믿는 순간 거룩해졌고 지금도 거룩하다는 것이다.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히10:14)
더욱더 놀라운 것은 한 번의 제사로 영원이 온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죽음으로 영원히 완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말씀도 ‘현재완료 능동태’이다.
십자가 복음을 믿는 순간 완전하게 되었는데 지금도 계속 완전하다는 것이다.
십자가 복음이 믿어지면 이런 말씀들이 다 이해가 된다.
또한 십자가 복음의 핵심인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이 믿어지면 주님이 내안에 오셔서 사시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나의 자아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것이다.
내가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에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영으로 오신 그리스도가 사신다는 것이다.
이 말씀을 믿으면 그대로 이루어진다. 할렐루야!
이것이 십자가 복음이다. 이것이 완전한 복음이다.
그런데 오늘날 대부분이 예수님을 이렇게 믿는다.
십자가 밑에서 무릎을 꿇고 “예수님! 내 죄를 용서해주세요!
예수님의 피로 내 죄를 용서해주세요!
내 죄를 용서해주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이렇게 고백을 하고 예수님의 피로 용서함을 받고 구원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예수님을 믿으니까 죄가 실제로 죽지 않고 반복해서 죄를 짓게 된다.
죄 덩어리인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고 예수님을 믿으니까
예수님을 믿어도 계속해서 죄를 짓는 것이다.
이 복음은 ‘불완전한 복음’이요 ‘반쪽짜리 복음’이다.
이렇게 믿어서는 죄는 용서함을 받을 수 있지만 죄가 끊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오늘날 반쪽짜리 복음을 믿기 때문에 갈수록 죄를 짓는 것이다.
삶에 변화가 없는 것이다. 죄를 반복해서 짓는 것이다.
계속해서 미워하고, 혈기내고, 시기질투하고, 비방하고, 판단하고,
용서하지 않고, 원망불평하고, 고집부리고, 음란 하고, 욕심내고,
자존심을 조금만 건드려도 못견뎌하고, 조금만 책망을 해도 시험 들고 등등의 것들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것이다.
십자가 밑에 와서 무릎을 꿇고 내 죄 용서해 주세요! 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지고 계신 십자가로 ‘나도’ 올라가야 한다.
나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하는 것이다.
십자가만 바라보지 말고 ‘십자가 위에’ 올라가야한다.
십자가 밑에만 있지 말고 십자가에 올라가서 예수님과 함께 못박혀야한다.
이것이 십자가의 참된 의미이다.
십자가 밑에서 무릎을 꿇고 예수님! 내 죄 용서해주세요! 하는 사람에게
주님은 이렇게 말씀을 하신다. “얘야! 십자가 밑에서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지 말고
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자!”라고 말씀을 하신다.
죄가 죽는 유일한 곳은 십자가 밖에 없다. 천상천하 어디에도 죄가 죽는 곳은 없다.
오직 십자가에서만 내 죄가 죽는다.
십자가 밑에서가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만 죄가 죽는다. 이것을 깨닫기 바란다.
십자가 위에 올라가서 예수님과 함께 죽어야 내 죄가 죽는다.
단순히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죽는 것이 아니다. 용서는 받을 수 있지만 내 죄는 죽지 않는다.
십자가 밑에서는 아무리 해도 죄가 죽지 않는다.
십자가 위에서만 죽는다. 십자가에서 나도 함께 죽어야만 한다.
“십자가 밑에서 죄의 용서함을 받는 것”과 “십자가에 올라가서 예수와 함께 죽는 것”의
차이점을 염소와 양을 모델로 설명하겠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의 상태를 ‘염소’라고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롭게 된 상태를 ‘양’이라고 하자.
십자가 밑에 죄인인 ‘염소’가 와서 무릎을 꿇고 죄를 용서해달라고 한다. 보혈로 내 죄를 씻겨달라고 한다.
그렇게 해서 죄의 용서함을 받고 죄인인 염소에게 양의 가죽이 씌워진다.
이것이 십자가 밑에서 죄의 용서함을 받는 것과 같다.
이런 상태로 신앙생활을 하면은 겉은 양인데 속은 염소이다.
그러니 속에서는 염소의 속성이 그대로 나간다. 염소의 성품이 나간다.
내가 아무리 죄를 안 지으려고 해도 속은 염소이기 때문에 염소의 속성이 나갈 수밖에 없다.
아무리 예수님을 믿어도 속은 염소이기 때문에 염소의 속성인 죄가 나가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뿔로 받지 않으려고 해도 내 속에 염소가 있기 때문에 건드리면 뿔로 받는다.
아무리 혈기를 안내려고 해도 십자가에서 혈기가 죽지 않았기 때문에 참다가 참다가 혈기를 낸다.
혈기를 참는다고, 누른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누르다가 폭발하면 더 무서운 폭발이 일어난다.
이와 반면에 죄인인 ‘염소’가 십자가 위에서 못 박혀 매달려 죽는다.
그러면 죄인인 염소는 예수님과 함께 죽을 수밖에 없다.
죄인인 염소는 예수와 함께 죽었기 때문에 예수님과 함께 장사된다.
장사를 지낸다는 것은 확실히 죽었다는 것이다. 군대용어로 확인사살이다.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장사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부활 할 때 나도 함께 부활을 한다.
예수님과 부활 할 때 나는 양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부활 할 때 염소로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양으로 부활을 한다. 의인 ‘양’으로 태어난다.
겉도 양이요 속도 양이다.
옛 사람인 염소는 십자가에서 죽고 새 사람인 양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염소의 속성이 나오지 않고
양의 속성이 나온다. 양의 성품만 나온다.
염소의 속성을 내려고 해도 안된다. 양에게는 염소의 속성이 없기 때문이다.
부활한 성도는 양의 속성만 나간다.
바로 이것이 “십자가 밑에서의 구원”과 “십자가 위에서의 구원”의 차이이다.
오늘날 교인들이 양의 가죽을 쓴 염소와 같다.
그러니 계속해서 죄를 반복적으로 짓고 있는 것이다.
더욱더 안타까운 것은 회개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
회개를 외치는 강단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너무나 슬픈 현실이다.
오늘날 기도를 하지 않기 때문에 회개할 줄도 모른다.
그래서 주님은 오늘도 교회를 보고 피눈물 흘리고 계시는 것이다.
염소가 십자가에서 죽어야한다 그리고 양으로 다시 태어나야한다.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장사되고 예수와 함께 부활해서
새 사람이 되어서 거룩하게 살아야한다.
십자가 복음만이 거룩한 삶을 살 수가 있다.
십자가 복음은 나도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장사되고
예수와 함께 부활 한 것을 믿는 것이다.
부활해서 새 사람이 된 것을 믿는 것이다.
출처: 하늘 큰 소망교회/불불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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