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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세르비아인들은 발칸반도에 정착한 후 세르비아 왕국을 건설했으며, 이 나라는 세르비아 제국으로 발전하여 14세기에 전성기를 이루었다. 16세기에 세르비아 땅은 오스만 제국에 정복당하였으며, 합스부르크의 침략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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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비아 역사는 슬라브족이 세르비아를 포함한 발칸반도에 이주하여,
부족국가를 수립한 6세기에 시작됩니다.
세르비아 지역은 원래 일루리아 민족의 땅이었으나,
6~7세기에 슬라브족의 남슬라브계에 속하는
세르비아인이 이주하여 발칸반도의 주요 세력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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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비아/역사 – 나무위키
19세기부터 세르비아의 민족운동이 격렬해지면서 1817년 세르비아 공으로서 형식적인 오스만 제국의 속국으로자치권을 인정받았고, 1878년 ‘제6차 러시아- …
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7/2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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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비아 왕국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세르비아 왕국(세르비아어: Краљевина Србија / Kraljevina Srbija 크랄레비나 스르비야)은 … 역사편집. 19세기 초기부터 남슬라브인에 속하는 세르비아인의 독립 운동이 …
Source: ko.wikipedia.org
Date Published: 4/2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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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비아에 대한 역사적 오해와 진실 – 아틀라스뉴스
이렇게 알려진 이유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발발한 전쟁이 1990년대 연방국가던 구 유고슬라비아가 세르비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
Source: www.atlasnews.co.kr
Date Published: 7/16/2022
View: 7570
세르비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세르비아 공화국의 정치, 경제적 중심지이자 수도인 베오그라드(Beograd, … 세르비아 공화국의 민족 구성은 매우 다양하게 구성되어져 있다. … 역사 및 현황.
Source: encykorea.aks.ac.kr
Date Published: 3/25/2021
View: 7263
세르비아 역사두샨 바타고비치 외 | 선인- 교보문고
발칸반도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으며, 항상 그 지역의 중심 세력이었던 세르비아 역사서. 세르비아 역사가 시작된 시점에서 부터 티토가 사망할 때까지의 역사를 체계적 …
Source: www.kyobobook.co.kr
Date Published: 10/23/2022
View: 7801
세르비아 역사(1) 상세보기 – 대한민국 재외공관
세르비아 역사(1). 작성자: 주세르비아대사관; 작성일: 2016-02-20. 1. 목록. 이전 글 제22회 OSCE회의 개최 다음 글 세르비아 역사(1). loading …
Source: overseas.mofa.go.kr
Date Published: 5/2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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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비아 역사 – YES24
세르비아 역사. 두샨 바타고비치 등저 / 정근재 역 | 선인 | 2001년 09월 30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정가: 25,000원. 중고판매가: 25,000원.
Source: www.yes24.com
Date Published: 9/12/2022
View: 5564
[기고] 세르비아에 대한 역사적 오해와 진실
특히 코소보 사태에서 세르비아와 전쟁을 별였던 북대서양 조약 … 이 코소보 전투는 세르비아인들에게 세르비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에 …
Source: dream.kotra.or.kr
Date Published: 2/27/2021
View: 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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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세르비아 역사
- Author: 5분상식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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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21. 9.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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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세르비아 공화국(세르비아어: Република Србија / Republika Srbija 레푸블리카 스르비야 , 영어: Republic of Serbia), 약칭 세르비아(세르비아어: Србија / Srbija 스르비야 , 문화어: 쓰르비아)는 동남유럽 중앙의 발칸반도 중앙 판노니아 평원에 자리 잡고 있는 내륙국이다. 세르비아의 수도인 베오그라드는 오랜 역사를 지녔으며, 발칸반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다.
개요 [ 편집 ]
세르비아인들은 발칸반도에 정착한 후 세르비아 왕국을 건설했으며, 이 나라는 세르비아 제국으로 발전하여 14세기에 전성기를 이루었다. 16세기에 세르비아 땅은 오스만 제국에 정복당하였으며, 합스부르크의 침략을 받기도 했다. 19세기 초에 세르비아 혁명이 일어나면서 발칸반도 최초로 입헌 군주 체제를 세웠으며, 뒤이어 영토를 늘리고 이 지역에서 신분제와 농노제 그리고 노예제를 폐지하는 데 앞장 섰다.[1][2]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면서 1918년에 보이보디나 주가 세르비아에 귀속되었다. 세르비아는 몬테네그로, 크로아티아 및 슬로베니아를 비롯해 여타 남 슬라브 민족들과 함께 유고슬라비아로 통합하여 존속하다가 1991년에 유고슬라비아 연방 해체된 이후 몬테네그로와 함께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연방을 구성하였다. 2006년 6월 5일, 두 나라도 분리되었다. 2008년 2월에 알바니아인이 다수를 이루는 남부 지역의 코소보가 독립을 선언했다. 세르비아는 코소보를 유엔 코소보 임시행정부(UNMIK)이 통치하는 자치주로 보고 그 독립을 인정하고 있지 않지만, 러시아, 스페인, 그리스 등을 제외한 많은 나라들이 코소보를 독립국으로 인정하고 있다.
세르비아는 유엔, 유럽 평의회, 흑해 경제 협력 기구, 중앙유럽 자유 무역 협정 회원국이다. 국제 통화 기금에서는 세르비아를 신흥 개발도상국으로 분류하며, 세계 은행에서는 이 나라의 소득 수준을 중상류로 본다.[3] 세르비아는 인간 개발 지수가 높은 수준이며,[4] 프리덤 하우스에서는 2008년에 세르비아를 발칸 국가 가운데 몇 안 되는 ‘자유 국가’로 등재했다.[5] 이 나라는 유럽 연합 가입을 신청한 상태이며, 국제적으로 중립국이다.[6][7]
역사 [ 편집 ]
6세기에 발칸반도를 침공한 남슬라브족은 여러 개의 작은 왕국을 수립했지만 오래 가지 못하고 소멸되고 만다. 780년경부터 830년 사이에는 비셰슬라브(Višeslav), 라도슬라브(Radoslav), 프로시고이(Prosigoj)가 차례대로 세르비아를 지배했는데 유럽에서 경쟁 관계에 있던 불가리아 제1제국, 비잔티움 제국, 프랑크 왕국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노력했다.
830년경에는 비잔티움 제국의 지원을 받은 블라스티미르(Vlastimir) 공작이 발칸반도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불가리아 제1제국을 물리쳤다. 이를 계기로 세르비아에는 블라스티미로비치(Vlastimirović) 왕조의 지배를 받은 중세 세르비아 공국이 수립되었다. 850년에는 무티미르(Mutimir) 공작이 동방 정교회를 세르비아의 국교로 정하면서 기독교 세례를 받게 된다. 중세 세르비아 공국은 마케도니아, 보스니아 등으로 세력을 확장했지만 969년 비잔티움 제국에 합병되면서 소멸되고 만다.
1091년에는 현재의 노비파자르에 세워진 도시인 스타리라스를 수도로 하는 세르비아 대공국이 수립되었다. 1166년에는 스테판 네마냐가 세르비아의 대공으로 즉위한 뒤부터 세르비아의 여러 부족을 통일했다. 스테판 네마냐는 비잔티움 제국과의 투쟁에서 승리한 이후에 독립된 세르비아의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네마냐 왕조 시대를 열었다.
1217년에는 스테판 네마니치가 세르비아의 국왕 칭호를 받으면서 세르비아 대공국은 중세 세르비아 왕국으로 격상되었다. 1219년에는 스테판 네마니치의 동생인 성 사바에 의해 세르비아 정교회가 설립되었다. 이를 계기로 세르비아 정교회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주교에서 분리된 교회로 인정받았다.
14세기 중엽에는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이 발칸반도의 거의 대부분을 석권하는 등 세력을 떨쳤으나 1389년 코소보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에게 패하고,[8] 오스만 제국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결국 당시 이들의 중심지였던 보스니아는 동서양의 상반되는 세력에 오랫동안 굴복당해야 했다.[8]
1817년에는 세르비아 공국이 수립되었다. 세르비아 공국은 1830년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완전한 자치권을 획득했으며 세르비아 공작의 세습도 인정받았다. 공국 수립 당시의 영토는 오스만 제국의 베오그라드 파샤 관구가 있던 곳에 불과했지만 1831년부터 1833년까지 공국의 영토가 동쪽, 남쪽, 서쪽으로 확장되었다.
1867년 4월 18일에 오스만 제국이 세르비아 공국에서 군대를 철수하면서 세르비아 공국은 사실상 독립했다. 1878년 7월 13일에 체결된 베를린 조약을 통해 오스만 제국이 세르비아 공국의 독립을 법적으로 승인하면서 세르비아 공국은 국제적인 승인을 받았다. 1882년을 기해 세르비아 왕국으로 개편되었다.
세르비아 왕국은 민족적으로는 슬라브족에 속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간섭에서 자유롭지 못하였으므로 범슬라브주의와 범게르만주의가 교착되는 등 국내 정세가 복잡하였다. 알렉산다르 1세가 1903년에 흑수단에 의해 암살된 뒤, 다음 왕인 페타르 1세는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노력하였으나,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세력확장 정책과 유럽 열강들의 이해 대립이 발칸을 화약고와 같은 상태로 몰아넣었다.
1908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병합되고, 1914년에는 흑수단에 소속되어 있었던 세르비아의 대학생인 가브릴로 프린치프에 의해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암살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를 사라예보 사건이라 한다.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세르비아에 전쟁을 선포,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였다.
1914년 6월 28일 세르비아 출신의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였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을 암살한 사라예보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이 일어난 지 한 달 뒤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에 선전 포고를 하면서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게 된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집요한 침략에 세르비아는 잘 막아냈지만, 1916년 2월부터 한동안 점령당했다. 1918년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빼앗긴 땅을 수복하고 보이보디나 주를 편입하였으며, 1920년에는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통합되었다.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제2차 세계 대전이 진행 중이던 1941년 3월 25일에는 추축국 진영에 가담했지만 같은 해 3월 27일에 일어난 친(親)영국파 세력의 쿠데타로 인해 탈퇴하고 만다. 추축국 진영에 있던 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은 이에 대한 보복 조치로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하게 된다. 유고슬라비아는 소련의 지원과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의 활동을 통해 1943년부터 1945년 사이에 영토를 수복했다. 이를 계기로 요시프 브로즈 티토는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을 수립하게 된다.
1980년 티토가 사망한 이후에 유고슬라비아에서는 민족주의 여론이 형성되었으며, ‘대 세르비아주의’, ‘대 크로아티아주의’ 등 극단적인 민족주의 정치 세력이 등장했다. 유고 연방 내에 민족주의가 대두함에 따라 1991년부터 1992년까지 사이에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 공화국,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차례로 유고슬라비아에서 분리 독립을 선언하였으며, 유고슬라비아 전쟁이 발발한다. 세르비아 군인들은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보스니아 전쟁, 코소보 전쟁에서 민족 청소 등 반인륜적 전쟁 범죄를 자행했는데, 세르비아 뿐만 아니라 각 민족간 전쟁범죄 및 인종청소가 자행됨에 따라 많은 세르비아계 역시 피해를 입었고, 난민 신세로 전락했다. 이어 북대서양 조약 기구와 미국의 군사 개입을 감행했다.
2003년 2월에는 신 유고 연방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로 개명하였으며, 2006년 5월 몬테네그로가 분리 독립 투표에서 독립을 가결시킴으로써 같은 해 6월 5일에 ‘세르비아 몬테네그로’가 해체되어 세르비아 공화국과 몬테네그로 공화국으로 분리되었다. 2008년 2월 17일, 코소보가 세르비아에서 분리 독립을 선언하였다.
지리 [ 편집 ]
세르비아는 남동부 유럽 발칸반도의 판노니아 평원에 자리잡고 있으며, 다뉴브강이 북쪽 지방을 흘러간다. 세르비아는 북쪽으로 헝가리, 동쪽으로 루마니아와 불가리아, 서쪽으로 크로아티아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 몬테네그로, 남쪽으로 마케도니아 공화국과 국경을 접하며, 남쪽의 코소보와 분쟁 중에 있다.
동쪽 국경에는 카르파티아산맥이 있고, 벨리카 모리카라고 하는 500km 길이의 강이 흐른다. 남동부 지방에는 발칸 산맥이 로도프 산맥과 맞닿아 있고, 그리스와 마주한다. 세르비아 영토의 4분의 1 이상은 숲으로 되어 있다.
행정 구역 [ 편집 ]
이 부분의 본문은 이 부분의 본문은 세르비아의 행정 구역 입니다.
세르비아는 29개 구(세르비아어: Округ, okrug)와 1개 특별시(베오그라드 시)로 구성되어 있다.
세르비아는 헝가리인이 많이 사는 보이보디나 자치주와 알바니아인이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코소보 자치주를 포함했었다. 그러나, 코소보는 코소보 전쟁 이후 유엔의 관할 아래 있어 사실상 세르비아의 주권이 미치지 못했고, 미국과 영국 등 서방국가들의 지원 하에 2008년 2월 17일 독립을 선언해 세르비아의 통치 지역에서 분리 독립되었다.
정치 [ 편집 ]
의원내각제 국가인 세르비아는 대통령보다 총리의 실권이 크고, 대통령은 상징적인 역할에 머물고 있으나 부치치 총리가 대통령이 되면 대통령의 권한이 지금보다 훨씬 강화될 것으로 관측된다. 유고 내전의 여파로 얼마 전까지 극우 국가주의 정당인 세르비아 급진당이 집권했었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우익 정당인 세르비아 진보당이 집권하게 되었다.
세르비아의 주요 정당들은 이렇다.
주민 [ 편집 ]
이 부분의 본문은 이 부분의 본문은 세르비아의 인구 입니다.
2017년 기준, 세르비아 인구는 702.2만명이다. 남슬라브족의 일파인 세르비아인이 인구의 83%로 다수를 점하고 있다. 두 번째로 많은 헝가리인(3.9%)은 보이보디나를 중심으로 많이 거주하고 있고, 보스니아인(1.8%), 롬족(1.4%), 그 밖에 다른 민족인 알바니아인, 크로아티아인, 불가리아인 등이 거주한다.
언어 [ 편집 ]
세르비아어가 공용어이다. 키릴 문자와 로마자 모두 사용되나, 키릴 문자의 사용이 보다 보편적이다. 크로아티아어나 보스니아어와는 유고슬라비아 시절에는 방언적 차이에 불과했으나, 현재 정치적인 대립을 배경으로 급속히 분화하는 중이다.
2006년 10월 28일과 29일에 실시한 국민투표로 확정한 헌법 10조 1항에 “세르비아 공화국에서는 세르비아어와 키릴문자가 공식적으로 사용된다.”라고 규정했다. 보이보디나 자치주에서는 헝가리계 주민 상당수가 모어(母語)로 헝가리어를 쓰며, 그 밖에 소수 민족 언어도 일부 사용된다.
세르비아는 2006년 9월 부쿠레슈티에서 열린 프랑코포니 정상회담에 따라 참관국 자격을 획득하였으나, 프랑스어의 사용은 일부 제한적이다.
종교 [ 편집 ]
종교 인구의 85%는 세르비아 정교회(주로 세르비아인)로서 다수를 점하고 있으며, 가톨릭(주로 헝가리인과 크로아티아인)이 5.5%, 무슬림(주로 보스니아인과 알바니아인)이 3.2%, 개신교가 1.1%이다.
경제 [ 편집 ]
공산주의 붕괴에 따라 1992년 계획경제에서 시장경제로 전환하여 경제 발전을 시작했으나, 유고슬라비아 전쟁과 그로 인한 UN의 경제제재로 어려움을 겪었다. 2003년에는 국유 재산의 완전 사유화와 외자유치를 추진했지만, 2004년에는 외국인 투자가 절반 수준으로 떨어지고 무역적자가 커져 그를 메워줄 경제와 산업이 필요하다. 광공업이 발달했지만, 헝가리나 폴란드에 비해 경제 발전이 한참 뒤떨어져 있다.
문화 [ 편집 ]
국경일 [ 편집 ]
대외 관계 [ 편집 ]
이 부분의 본문은 이 부분의 본문은 세르비아의 대외 관계 입니다.
각주 [ 편집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세르비아 왕국(세르비아어: Краљевина Србија / Kraljevina Srbija 크랄레비나 스르비야 )은 세르비아와 마케도니아 공화국에 있었던 옛 나라이다. 1882년부터 1918년까지 존재하였고, 나중에 유고슬라비아 왕국이 되었다.
역사 [ 편집 ]
19세기 초기부터 남슬라브인에 속하는 세르비아인의 독립 운동이 활발하였다. 세르비아인은 오스만 제국의 쇠퇴와 민족주의의 대두에 자극을 받아 대세르비아주의를 내걸고 끊임없이 독립 운동을 하였다.
1867년에는 투르크군을 철수시키고 밀란 오브레노비치 4세(밀란 1세)를 세르비아 공작(公爵)으로 추대하였다. 1875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반란 때 투르크와 재차 싸워 패하였으나, 범슬라브주의와 결탁하고 러시아-투르크 전쟁 때에 러시아 제국과 협력하여 투르크와 싸웠으므로 1878년 산스테파노 조약, 베를린 회의에서 마침내 독립이 승인되었다.
이 나라는 민족적으로는 슬라브족에 속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간섭에서 자유롭지 못하였으므로 범슬라브주의와 범게르만주의가 교착되는 등 국내 정세가 복잡하였다. 알렉산다르 1세가 1903년에 암살당한 뒤, 다음 왕인 페타르 1세(재위 1903-1918)는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노력하였으나,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세력 확장 정책과 유럽 열강들의 이해 대립이 발칸을 화약고와 같은 상태로 몰아넣었다.
1908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병합되고, 1914년에는 세르비아의 대학생인 가브릴로 프린치프에 의해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를 사라예보 사건이라 한다.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세르비아에 전쟁을 선포,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였다.
세르비아는 초기에 오스트리아군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방어하였으나, 1915년에 불가리아가 참전한 것을 계기로 계속 패배, 나중에 전 국토가 동맹군에게 점령당한다. 이후 레지스탕스 조직이 세워져 오스트리아군과 불가리아군을 집요하게 괴롭혔으며, 잃어버린 국토를 되찾았다. 전후 세르비아가 중심이 되어 1920년에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 왕국’이 성립되고, 1929년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개명했다.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1941년 추축국이 침공하기 이전까지 존재하였다.
세르비아에 대한 역사적 오해와 진실
내전에서 생긴 이미지…EU 가입 앞두고 새로운 인식 필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동유럽 국가인 세르비아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역사적 사실들 많다. 조상연 ㈜ 케어프리 대표가 코트라에 세르비아에 대한 올바른 시각과 인식을 가지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도록 몇가지를 정리했다.
① 세르비아는 아직도 위험한 국가인가?
몇 해 전까지만 해도 한국 인터넷에 세르비아에 대해 가장 많이 볼 수 있었던 표현이 ‘발칸의 화약고’ 였다.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혹은 벌어질 가능성이 많은 아주 위험한 국가라는 표현이다. 이렇게 알려진 이유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발발한 전쟁이 1990년대 연방국가던 구 유고슬라비아가 세르비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코비나, 북마케도니아, 코소보로 분열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내전들 뿐이고 그 중심에 세르비아가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인상적으로 기억되는 것은 1995년 보스니아 내전 당시 세르비아인으로 구성된 민병대가 스레브레니차 지역에서 무슬림과 다른 민족 8,000여명 이상을 학살한 사건과 1999년에 있었던 코소보 사태이다. 코소보 사태에서 세르비아와 전쟁을 별였던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와 서방의 언론들은 세르비아를 인류의 적으로 몰아갔으며, 당시의 기억이 현재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어 세르비아를 유럽 내에서 가장 위험하고 문제 국가로 인식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하지만 지금의 세르비아는 비교적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있고 치안이 좋은 안전한 국가다. 2000년대 초반부터 세르비아는 EU 가입을 희망해 있으며, 2025년 EU 가입을 1순위 국정 과제로 여기고 EU와 가입 협상을 벌이고 있다. 정부는 경제 발전을 위해 적극적인 인센티브 제공으로 외국인 투자유치에 노력하고 있으며, 이미 유럽의 주요국가(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 금융기관들과 기업들이 진출해 있다.
우리나라 기업들도 진출해 있는 곳이다. 한국에 대한 이미지도 단기간 경제성장을 이룩한 하이테크 글로벌 기업을 가진 국가로 상당히 좋은 편이다. 코소보와의 분쟁이 아직도 뜨거운 감자로 남아 있기는 하다. 하지만 과거와는 달리 물리적인 충돌보다는 무역분쟁 등과 같이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방법으로 서로 견제를 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세르비아인들도 전으로 인해 충분히 고통을 경험했기 때문에 더 이상의 물리적인 충돌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② 코소보는 원래부터 무슬림의 땅이었나?
코소보 사태가 극한으로 치닫게 된 배경을 알기 위해서는 세르비아인의 역사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슬라브족인 세르비아인이 발칸 지역으로 들어오기 이전에 코소보는 로마의 주요 영토였다. 현재 발칸으로 슬라브인들이 이동을 한 것은 6세기 이후이며, 9~10세기 슬라브족의 한 부류인 불가리아가 제국을 건설했고, 이후 12세기 들어 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지역에서 세르비아계가 왕국을 건설했다. 14세기 중반에는 세르비아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을 건설하며 주변을 위협하는 세력으로 성장을 했다.
그러나 오스만 트루크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고 팽창 정책을 펼치면서 세르비아 왕국에 위험이 찾아 왔다. 1389년 6월28일 세르비아 연합군(라자르왕, 1329~1389)의 1만2,000과 오스만 제국의 술탄(술탄 무라드1세, 1326~1389)의 2만7,000의 군대가 코소보 벌판에서 전쟁을 치렀다. 헝가리 제국과 세르비아연합군이 오스만 제국군과의 코소보 전투의 결과는 세르비아연합군의 전멸이었다. 그러나 전쟁의 승리를 만끽하기 위해 전장을 순찰하던 무라드 1세가 세르비아 전사자 속에 숨어 있던 세르비아 군인 밀로쉬 오빌리치에게 암살되면서 전쟁은 무승부가 되었다.
이 코소보 전투는 세르비아인들에게 세르비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에 하나로 자리잡고 있다. 군대가 전멸했지만 적장이 숨졌기 때문에 세르비아인들은 이 전쟁에서 패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 전쟁을 계기로 사실상 오스만 제국의 지배가 시작이 되었으나 세르비아 민족은 1459년 스메데레보 지역이 최종 함락될 때까지 저항을 한다. 이렇듯 세르비아인들에게 코소보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이 시작된 곳으로 단순히 영토만을 의미하는 곳이 아니다.
또한, 코소보 지역은 세르비아 민족의 정신적 지주인 세르비아 정교회의 첫 번째 교구가 개설된 장소이며, 가장 오래된 수도원과 성당들이 있는 곳이다. 즉, 코소보는 세르비아 인들에게 외침에 대한 항전의 성지이자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이 지니는 의미와 같은 민족 종교의 근원지로 인식하는 곳이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기 시작하면서 세르비아인들은 현재 세르비아 북부인 보이보디나 지역과 크로아티아, 헝가리 등지로 이주를 하게 되고 코소보 지역은 오스만 제국의 장려로 무슬림계 알바니아인들이 이주하기 시작했다. 결국 20세기 후반에는 거주인의 90% 이상이 알바니아계 무슬림이 되면서 코소보 사태가 발생하고 지금까지 분쟁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세르비아 위치 /위키피디아
② 같은 슬라브족 국가인 유고슬라비아는 왜 갈라졌나
발칸에 주로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슬라브족이다. 사실 구 유고의 6개 공화국은 1918년 이전까지 한번도 통일 국가를 형성한 적이 없다. 또 같은 슬라브족이지만 살고 있던 지역이나 과거 왕국의 명칭으로부터 서로 다른 민족, 즉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 등)의 개념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들 사이에는 슬라브족이라는 동질감이나 역사적 유대감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크게 볼 때 남쪽에 사는 슬라브족들이고 언어적으로 유사해서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지만 카톨릭, 정교, 이슬람 등 여러 종교가 혼재해 있고 지역마다 상황에 따라 오스만제국과 합스부르크의 지배를 받아 왔기 때문에 동질감이 부족했다.
1918년 1차 세계대전 이후에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이(일명 베오그라드 왕국, 1929년 유고슬라비아 왕국) 처음 형성되고, 2차 대전 이후 보스니아,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까지 포함된 유고슬라비아(남쪽의 슬라브 국가라는 뜻)가 만들어 졌다. 하지만 내부에서 문제가 발생해 분리가 된다 하더라도 이상할 이유가 없을 정도로 동질성이 부족한 구성이었다.
2차 세계 대전 종전되면서 티토(Josip Broz Tito, 1892~1980)가 이끄는 파르티잔 군대(게릴라군)는 승전국의 대우를 받게 되고 이 결과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슬로베니아,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의 6개 공화국으로 이루어진 유고슬라비아를 건설해 발칸의 슬라브 국가로 인정을 받았다. 이후 티토 대통령은 과거 2차 세계 대전 중 발생한 인종 청소 갈등 등을 경찰력으로 누르고, 6개 공화국을 균형있게 발전시켜 과거의 갈등을 봉합하면서 사회주의 독재국가를 운영하였으며 제3 세계의 리더 중 한 국가로 자리잡게 된다.
그러나 1980년 티토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유고슬라비아는 연방정부를 장악하기 위한 각 공화국 정치인들의 각축장이 되었고, 코소보에서는 알바니아계 무슬림세력들의 자치권 강화 요청과 이에 대한 억압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코소보 내에서 세르비안 경찰력에 의해 탄압받던 알바니아 무슬림세력들의 세르비아인들에 대한 공격이 잦아지면서 문제가 심각해 졌다.
이때 등장한 정치인이 슬로보단 밀로쉐비치(1941~2006)다. 1989년(코소보 전투 500주년)에 코소보 벌판에서 밀로쉐비치는 민족주의에 불을 지피는 연설을 하게 되고, 이러한 세르비아 민족주의는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및 타연방의 정치인들에게 각자의 민족주의를 불러 일으키는 촉매제 역할을 하게 되었다. 1991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독립, 1992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독립, 북마케도니아 독립, 2006년 몬테네그로 독립, 2008년 코소보 독립 선포로 이어지는 일련의 해체 및 갈등 과정을 겪게 된 것이다.
③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의 악연
세르비아는 발칸지역의 문제아처럼 취급되어 왔고 계속된 유고내전으로 인해 발칸의 가해자로 묘사되고 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일방적인 가해자라고는 볼 수는 없다. 특히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의 갈등과 악연은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관점의 해석이 가능하다.
발칸지역의 문제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 하에서 내재되기 시작했습니다. 현 세르비아의 수도인 베오그라드를 기점으로 북쪽지역은 헝가리 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지배가 반복이 되었고, 세르비아 민족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독립을 위한 봉기를 했다. 이로 인해 오스만 제국의 탄압을 받게 된다.
그러나 끊임없이 세력 확장을 위해 서유럽을 위협하던 오스만 제국도 1683년 9월 비엔나 침공에 실패하고 1697년 센타(Zenta, Senta)에서 패배한 뒤, 1699년 합스부르크와 평화 조약을 체결 통해 헝가리와 아드리아해의 여러 지역(현 크로아티아 해안 지대)을 합스부르크에 할양하면서 발칸에서의 영향력이 확연히 줄어들게 된다.
오스만 제국의 힘의 약화는 현 보스니아와 몬테네그로 북부지역의 힘의 공백을 불러일으켰고 이를 막기 위해 합스부르크왕조는 계속해서 오스만 제국에 저항하던 세르비아인들에게 영토와 세금 혜택은 물론 병역, 종교의 자유(세르비아 정교회)를 보장하면서 세르비아인들의 이주를 장려하게 된다.
세르비아의 민초들은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해 현재는 관광지로 유명한 크로아티아의 카를로바츠, 플리트비체, 자다르, 스플리트 등지와 보스니아 모스타르 등지로 이주를 하여 정착하게 된다. 역사의 비극은 이때부터 싹트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성공적으로 정착한 세르비아인들은 종교적으로 다른 크로아티아(로마 카톨릭)인들 속에서 삶을 영위하다가 세계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혹독한 고통을 당하게 된다. 이탈리아 무솔리니 정권의 지원과 나치의 묵인 아래 급조된 크로아티아인으로 구성된 우스타샤 괴뢰 정권이 들어서게 되고 이들이 독일 나치의 이민족 박해 정책을 이행하며 유대인, 집시 및 세르비아인들에 대한 추방과 학살을 자행하면서 세르비아인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아픔을 준다. 크로아티아의 우스타샤 괴뢰 정권은 1945년 5월 독일의 패망이 있을 때까지 70만 명이 넘는 세르비아인들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④ 분리 과정의 분열
이렇게 2차 세계대전 중 벌어진 악연이 구유고 해체 시기에 크로아티아의 독립 과정에서 다시 발생한다. 크로아티아는 1991년 6월 25일 독립선언하고 1992년 1월 UN이 국가로 인정하면서 유고슬라비아와 관계를 단절한다.
이에 크로아티아에 살던 세르비아 인들은 2차대전 동안 세르비아인들이 겪은 공포를 상기하며 자신들의 보호하고자 크로아티아 내에서 독립을 선언하고(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 당시 세르비아인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크로아티아 내 유고슬라비아 연방군이 크로아티아인들과 전쟁을 벌이게 된다.
결국 크로아티아가 서방의 도움으로 전쟁에서 승리하며 독립을 하게 되었지만 이 과정에서 크로아티아는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입게 되었으며, 양측에서 군인과 민간인 포함 총 2만명 이상이 사망하거나 집을 잃은 난민이 되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독립을 했으나 크로아티아인들에게는 이 전쟁이 아직도 큰 상처로 남아 있으며 크로아티아 극우주의자들은 여전히 세르비아인들에 대한 큰 적개심을 드러내고 있다.
⑤ 시각의 전환
우리는 서방 언론의 시각으로 보도된 발칸 지역의 전쟁을 통해 세르비아를 발칸의 문제아로 인식하고 있지만, 어쩌면 보는 시각에 따라 세르비아와 세르비아인들에 대한 평가는 달라질 수 있다. 세르비아의 근-현대사를 지켜보면서 아래와 같은 질문들이 떠올랐는데, 한반도에도 유의미하게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1. 한민족이라는 동질성이 거의 없는 슬라브족이 하나의 국가로 강제 통합된 상황에서 이후 전개된 분열의 과정을 우리는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할까?
2. 2차 세계대전 동안에 벌어진 학살에 대한 단죄가 없었던 상황에서 1990년대 민족주의를 악용한 정치인들을 선택한 세르비아인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3. 민족의 근원지라고 믿는 코소보를 다른 세력에 넘겨줘야 한다는 국제 세력의 압력에 저항하는 것을 과연 잘못된 행동으로 봐야 할 것인가?
역사적으로 분쟁이 내재된 지역에 살면서 민족이 처한 상황에 대응 할 수 밖에 없는 세르비아인들도 어쩌면 역사의 비극 속에 살아가는 피해자가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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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비아 공화국의 정치, 경제적 중심지이자 수도인 베오그라드(Beograd, Belgrade)는 5∼6세기 처음 이 지역으로 이주해 내려온 슬라브족들이 ‘하얀 도시’라 부르면서 유래하였으며, 세르비아 정부에서 밝힌 베오그라드의 인구는 717만 6794명(2015년 현재)이다.
세르비아 공화국은 헝가리인들이 다수 거주하는 북부의 보이보디나(Vojvodina)와 알바니아인들이 90% 비율을 지닌 남부의 코소보(Kosovo)라는 두 개의 자치주를 지니고 있는데, 자치주 중 세르비아의 북부에 위치해 헝가리와 접하고 있는 보이보디나 자치주의 주도는 노비사드(Novi Sad)이며, 세르비아 남부에 위치한 코소보 자치주의 주도는 쁘리쉬티나(Priština)이다.
2008년 2월 코소보내 알바니아 정부는 일방적으로 세르비아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였고, 2009년 11월 현재 미국과 EU 내 상당 국가 그리고 우리나라를 비롯한 68개국이 코소보의 독립을 인정해 주고 있지만, UN에선 아직 독립 국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세르비아 공화국은 「헌법」에 따라 공화국 영토 내에 거주하는 모든 국민들에게 민주적 권리를 부여하는 민주 국가를 표방하고 있다. 2006년 10월 국민투표로 확정된 「헌법」 제10조 제1항에 따라 공화국의 공식 언어는 세르비아어이며, 공식문자로는 키릴(Cyril)문자가 선택되었지만, 라틴문자도 주로 사용하고 있다.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과 세르비아 정교에서 상징적으로 쓰고 있는 국기는 세르비아 공화국 국기 바탕위에 ‘4 C’가 쓰여져 있는데, 이것은 중세 세르비아 왕국 수립 초기 로마 교회로부터 세르비아 왕국이 가톨릭으로 전환할 것을 강요받는 와중에 세르비아 독립 정교회를 수립하였던 성 사바(Saint Sava)가 세르비아인들에게 정교를 중심으로 단결할 것을 요청한 문구인 “오직 단결만이 세르비아인을 구원할 수 있다(Only Unity Saves the Serbs (세르비아어로는 Samo Sloga Srbina Spasava))”라는 문장 중 문자의 첫 글자인 4개의 ‘S’ 를 따서 만든 상징물이다(세르비아에서 주로 쓰이는 키릴 문자로 ‘C’는 라틴문자로는 ‘S’를 상징하고 있다). 이러한 국기는 세르비아가 위기를 맞이할 때 마다 세르비아 민족의 단결을 위해 흔히 사용되어져 왔으며, 현재 세르비아 군대의 휘장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세르비아 공화국의 민족 구성은 매우 다양하게 구성되어져 있다. 세르비아 인구의 대다수는 세르비아인이며, 이외에도 37개의 다른 소수 민족들이 공화국에 거주하고 있다. 세르비아 공화국 헌법상 세르비아 국내에 거주하는 모든 민족은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지니며, 완전한 민족 평등권을 누리는 것으로 되어 있다. 또한 세르비아 공화국의 「헌법」은 국제 기준에 부합한 소수민족의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 더불어 1219년 성 성 사바사바에 의해 독립 정교회로서 자치권을 획득한 이래, 세르비아의 주 종교는 세르비아 독립 정교이다. 이 외에 세르비아 공화국내에는 이슬람교, 로마 가톨릭교, 개신교, 유대교 등 다른 종교들과 같은 여타의 종교 단체들도 자유로운 종교 활동을 하고 있다.
세르비아 역사 – 교보문고
유럽을 이야기할 때면 우리는 선진화된 문명과 뛰어난 경제 등을 이야기한다. 우리에게 있어서 모든 것은 미국, 유럽 중심이다. 세계사를 배워도 우리가 속한 아시아의 역사보다는 유럽과 미국의 역사가 중시된다. 그 안에서 우리는 주체라는 개념을 잃어버리곤 한다.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객관적인 것인지를 알지 못하고, 세상이 강요하는 것이 진실이라고 착각하면서 살게 된다.세르비아. 이름은 많이 들어봤지만, 아직도 그러한 나라가 있는지,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 등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었다. 대신 우리는 코소보 사태 등을 이야기하며, 그들의 민족성이 그렇다고, 뒤떨어진 경제상황이 지금의 현실을 만들었다는 식의 체념을 하게 된다. 무책임한 발언 속에서 우리는 그들이 지니고 있는 전쟁 이외의 것들에 대해서는 놓치고 있는 듯 하다. 마치 그들은 세상에 존재하던 그 순간부터 전쟁을 위해, 난민이 되기 위한 목적으로 살아온 것 마냥…아주 오래된 지구본을 꺼내 들고 유럽 발칸 반도 즈음에서 유고슬라비아라는 국가명을 발견한다. 베오그라드. 이유 모르게 그 이름이 친숙하게 내게 다가온다. 이제는 세르비아-몬테네그로 였던가로 새로이 태어난.. 그들의 역사에 대해서는 그다지 알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저 세계대전의 화약고였던 곳으로,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만을 떠올릴 뿐이다.어떻게 보면 그들의 역사는 우리의 그것과도 흡사해 보였다. 마치 우리가 지난 날 중국의 문화를 우월한 것으로 여기며 섬겼던 것 마냥, 그들은 비잔틴 문명을 숭배했다. 그들이 기독교 문화권에 속한다는 그 사실 자체가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기독교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 세계의 전유물로 여겨졌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프로테스탄티즘을 내세우며 그들의 경제적 성장이 마치 신앙의 힘으로 인해 이루어진, 신이 예비하신 것인 듯 세뇌받아왔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세르비아는 분명 기독교 문화권이었으며, 수도원 내의 황제와 황제비를 그린 그림 등은 비잔틴 제국의 그것과도 흡사해 보였다. 터키의 영향력이 강대해지면서 이슬람 문명으로부터의 침범이 잦아드는 그 순간에도 그들의 기독교 문명을 고수하려고 했던 점, 세르비아인으로서의 긍지를 유지하려고 했던 점 등은 그들을 이슬람 문명권으로 받아들여왔던 나의 잘못을 일깨워 주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그들은 그들의 강국으로서의 성장을 위하여 비잔틴으로부터의 독립, 더 나아가 비잔틴 제국의 우위에 서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세르비아의 문화는 유럽의 그것과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듯 하다. 세르비아 제국의 쇠퇴와 더불어 지방 영주들이 득세하는 모습은 유럽 중세의 봉건제 사회를 연상시켰다. 프랑스 혁명의 자유주의와 유럽사회에 유행처럼 번져나갔던 민족주의의 물결 역시도 세르비아에서는 조금더 강력한 형태로 표출되었으며, 그들의 지리적 위치로 인해 야기된 수많은 국가들의 간섭으로부터 끊임없이 자유로워지기 위한 반란, 저항이 자행되었다.어쩌면 세르비아는 불행한 역사가 이루어지리라는 사실을 예상할 수 밖에 없는 지역에 위치했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을 듯 하다. 기독교 문명의 마지막 보루로서, 세르비아 인들은 이슬람 문명과의 충돌에 익숙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끊임없이 타국으로부터의 간섭을 받으면서, 그들은 그렇게 살았다. 헝가리, 터키,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의 끊임없는 간섭 속에서 그들의 왕은 살아남기 위해 특정 국가의 가신이 되어야만 했다. 계속되는 전쟁 역시도 그들의 지리상 위치가 빚어낸 결과이지 않은가 생각된다.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실패와 내전, 하지만 그들은 세르비아-몬테네그로 라는 이름의 새로운 국가를 형성하였으며, 과거 몬테네그로인들이 그들은 세르비아인이 아님을 주장했던 역사로 미루어 볼 때 이 체제는 언젠가 또 다시 변화할 듯 하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역동의 대륙, 발칸반도. 두꺼운 책 한권만으로는 그들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전혀 모르던 곳에 대한 막연한 호기심의 해결은 또 다른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세르비아인들의 복잡한 역사는 오늘도 나에게 손짓을 하고 있는 듯 하다. 닫기
세르비아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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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 KOTRA 해외시장뉴스
– 내전으로 얻은 이미지, 발칸의 화약고 –
– EU 가입을 앞둔 세르비아에 대한 팩트 체크 –
조상연 ㈜ 케어프리 대표
역사상 유례없는 코로나19 바이러스의 확산으로 세르비아 정부도 4, 5월 국민들의 이동제한 정책을 실행하였고 이곳에서 생활하는 한국인들 역시 제한된 생활을 하게 되면서 SNS나 YouTube를 보다 많이 이용하게 되었습니다. 일부 유튜버들의 세르비아와 관련된 소개를 접하면서 사실과는 조금 다른 내용이 언급되거나 세르비아인들의 입장에서는 억울하게 생각할 수 있는 내용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세르비아에 대해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역사적 사실들 몇 가지를 짚어 봄으로써 우리 국민들이 세르비아와 발칸지역에 대한 올바른 시각과 인식을 가지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Q. 세르비아는 아직도 위험한 국가인가? A. 비교적 치안이 좋은 안전한 지역입니다.
사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네이버 등에 세르비아를 입력하면 가장 많이 볼 수 있었던 표현이 ‘발칸의 화약고’ 였습니다.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혹은 벌어질 가능성이 많은 아주 위험한 국가라는 표현입니다. 이런 불명예스러운 별칭으로 알려진 이유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발발한 전쟁이 1990년대 연방 국가였던 구 유고슬라비아가 세르비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코비나, 북마케도니아, 코소보로 분열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내전들 뿐이고 그 중심에는 연방의 종주국이라고 볼 수 있는 세르비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우리에게 인상적으로 기억되는 것들은 1995년 보스니아 내전 당시 세르비아인으로 구성된 민병대가 스레브레니차 지역에서 무슬림과 다른 민족 8,000여명 이상을 학살한 사건과 1999년에 있었던 코소보 사태 입니다. 특히 코소보 사태에서 세르비아와 전쟁을 별였던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와 서방의 언론들은 세르비아를 인류의 적으로 몰아갔으며, 당시의 기억이 현재까지 그대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보니 세르비아를 유럽 내에서 가장 위험하고 문제 국가로 인식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의 세르비아는 비교적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있고 치안이 좋은 안전한 국가입니다. 이미 2000년대 초반부터 세르비아는 EU 가입을 희망해 있으며, 2025년 EU 가입을 1 순위 국정 과제로 여기고 EU와 가입 협상을 벌이고 있습니다. 정부는 경제 발전을 위해 적극적인 인센티브 제공으로 외국인 투자유치에 노력하고 있으며, 이미 유럽의 주요국가(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 금융기관들과 기업들이 진출해 있으며, 우리나라 기업들도 진출해 있는 곳입니다. 한국에 대한 이미지도 단기간 경제성장을 이룩한 하이테크 글로벌 기업을 가진 국가로 상당히 좋은 편입니다. 비록 아직도 러시아, 중국과 정치적·경제적으로 가깝게 지내고 있고, 코소보와의 분쟁이 아직도 뜨거운 감자로 남아 있기는 하지만 과거와는 달리 물리적인 충돌 보다는 무역분쟁 등과 같이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방법으로 서로 견제를 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세르비아 인들 역시 이미 내전으로 인해 충분히 고통을 경험했기 때문에 더 이상의 물리적인 충돌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Q. 코소보는 원래부터 무슬림의 땅이었나? A. 코소보 지역은 세르비아 민족의 근원지 입니다
코소보 사태가 극한으로 치닫게 된 배경을 알기 위해서는 세르비아인의 역사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슬라브족인 세르비아인이 발칸 지역으로 들어오기 이전에 코소보는 로마의 주요 영토였습니다. 현 발칸으로 슬라브인들이 이동을 한 것은 6세기 이후이며, 9~10세기 슬라브족의 한 부류인 불가리아가 제국을 건설하였고, 이후 12세기 들어 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지역에서 세르비아계가 왕국을 건설하였으며, 14세기 중반에는 세르비아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을 건설하며 주변을 위협하는 세력으로 성장을 합니다.
그러나 강력한 군사력으로 번성하던 오스만 트루크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고 팽창 정책을 펼치면서 세르비아 왕국에 위험이 찾아 옵니다. 1389년 6월28일 세르비아 연합군(라자르왕, 1329~1389)의 1만2,000과 오스만 제국의 술탄(술탄 무라드1세, 1326~1389)의 2만7,000의 군대가 코소보 벌판에서 전쟁을 치룹니다. 헝가리 제국과 세르비아연합군이 아직 그 힘의 크기를 알 수 없었던 오스만 제국군과의 코소보 전투의 결과는 세르비아연합군의 전멸! 그러나 전쟁의 승리를 만끽하기 위해 전장을 순찰하던 무라드 1세가 세르비아 전사자 속에 숨어 있던 세르비아 군인 밀로쉬 오빌리치에게 암살되면서 전쟁 자체는 무승부가 되어 버립니다. 소위 전투에서는 패배하였으나 전쟁에서는 무승부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 코소보 전투는 세르비아인들에게 세르비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에 하나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군대가 전멸했지만 적장이 숨졌기 때문에 세르비아인들은 이 전쟁에서 패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전쟁을 계기로 사실상 오스만 제국의 지배가 시작이 되었으나 세르비아 민족은 1459년 스메데레보 지역이 최종 함락될 때까지 저항을 하게 됩니다. 이렇듯 세르비아인들에게 코소보는 오랜 기간 지배를 받았던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이 시작된 곳으로 단순히 영토만을 의미하는 곳이 아닙니다.
또한, 코소보 지역은 세르비아 민족의 정신적 지주인 세르비아 정교회의 첫 번째 교구가 개설된 장소이며, 가장 오래된 수도원과 성당들이 있는 곳입니다. 즉, 코소보는 세르비아 인들에게 외침에 대한 항전의 성지이자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이 지니는 의미와 같은 민족 종교의 근원지로 인식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기 시작하면서 세르비아인들은 현재 세르비아 북부인 보이보디나 지역과 크로아티아, 헝가리 등지로 이주를 하게 되고 코소보 지역은 오스만 제국의 장려로 무슬림계 알바니아인들이 이주하기 시작하였으며, 결국 20세기 후반에는 거주인의 90% 이상이 알바니아계 무슬림이 되면서 코소보 사태가 발생하고 지금까지 분쟁이 지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코소보에 위치한 세르비아 정교 수도원, Uroshevac
자료: Wikimedia commons
Q. 같은 슬라브족 국가인 유고슬라비아는 왜 갈라졌는가? A. 슬라브족이지만 민족으로의 동질성은 부족
발칸에 주로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슬라브족입니다(구 유고의 6개 공화국과 불가리아 포함). 사실 구 유고의 6개 공화국은 1918년 이전까지 한번도 통일 국가를 형성한 적이 없습니다. 또한 우리 눈에는 같은 슬라브족이지만 살고 있던 지역이나 과거 왕국의 명칭으로부터 서로 다른 민족(ex.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 등)의 개념이 형성되어 있었으며, 이들 사이에는 슬라브족이라는 동질감이나 역사적 유대감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크게 볼 때 남쪽에 사는 슬라브족들이고 언어적으로 유사해서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지만 카톨릭, 정교, 이슬람 등 여러 종교가 혼재해 있고 지역마다 상황에 따라 오스만제국과 합스부르크의 지배를 받아 왔기 때문에 동질감이 부족한 것입니다. 1918년 1차 세계대전 이후에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이(일명 베오그라드 왕국, 1929년 유고슬라비아 왕국) 처음 형성되고, 2차 대전 이후 보스니아,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까지 포함된 유고슬라비아(남쪽의 슬라브 국가라는 뜻)가 만들어진 것이니 내부에서 문제가 발생하여 분리가 된다 하더라도 이상할 이유가 없을 정도로 동질성이 부족한 구성이었던 것입니다.
2차 세계 대전 종전되면서 티토(Josip Broz Tito, 1892~1980)가 이끄는 파르티잔 군대(게릴라군)는 승전국의 대우를 받게 되고 이 결과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슬로베니아,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의 6개 공화국으로 이루어진 유고슬라비아를 건설하며, 발칸의 슬라브 국가로 인정을 받습니다. 이후 티토 대통령은 과거 2차 세계 대전 중 발생한 인종 청소 갈등 등을 경찰력으로 누르고, 6개 공화국을 균형있게 발전시켜 과거의 갈등을 봉합하면서 사회주의 독재국가를 운영하였으며 제3 세계의 리더 중 한 국가로 자리잡게 됩니다.
그러나 1980년 티토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유고슬라비아는 연방정부를 장악하기 위한 각 공화국 정치인들의 각축장이 되었고, 코소보에서는 알바니아계 무슬림세력들의 자치권 강화 요청과 이에 대한 억압이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코소보 내에서 세르비안 경찰력에 의해 탄압받던 알바니아 무슬림세력들의 세르비아인들에 대한 공격이 잦아 지면서 문제가 심각해 지고, 이때 등장한 정치인이 슬로보단 밀로쉐비치(1941~2006)입니다. 1989년(코소보 전투 500주년)에 코소보 벌판에서 밀로쉐비치는 민족주의에 불을 지피는 공화국 대통령 당선 축하 연설을 하게 되고, 이러한 세르비아 민족주의는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및 타연방의 정치인들에게 자신들의 민족주의를 불러 일으키는 촉매제 역할을 하게 되면서 1991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독립, 1992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독립, 북마케도니아 독립, 2006년 몬테네그로 독립, 2008년 코소보 독립 선포로 이어지는 일련의 해체 및 갈등 과정을 겪게 된 것입니다.
Q.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의 악연? A. 역사적으로 보면, 양쪽 다 피해자이자 가해자
앞서 이야기한 대로 세르비아는 발칸지역의 문제아처럼 취급되어 왔고 계속된 유고내전으로 인해 발칸의 가해자로 묘사되고 있지만 좀 더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일방적인 가해자라고는 볼 수는 없습니다. 특히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의 갈등과 악연은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관점의 해석이 가능합니다.
발칸지역의 문제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 하에서 내재되기 시작했습니다. 현 세르비아의 수도인 베오그라드를 기점으로 북쪽지역은 헝가리 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지배가 반복이 되었고, 세르비아 민족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독립을 위한 봉기를 하였으며, 이로 인해 오스만 제국의 탄압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세력 확장을 위해 서유럽을 위협하던 오스만 제국도 1683년 9월 비엔나 침공에 실패하고 1697년 센타(Zenta, Senta세르비아 북부 지역 도시)에서 패배한 뒤, 1699년 합스부르크와 평화 조약을 체결 통해 헝가리와 아드리아해의 여러 지역(현 크로아티아 해안 지대)을 합스부르크에 할양하면서 발칸에서의 영향력이 확연히 줄어들게 됩니다. 이러한 오스만 제국의 힘의 약화는 현 보스니아와 몬테네그로 북부지역의 힘의 공백을 불러일으켰고 이를 막기 위해 합스부르크왕조는 계속해서 오스만 제국에 저항하던 세르비아인들에게 영토와 세금 혜택은 물론 병역, 종교의 자유(세르비아 정교회)를 보장하면서 세르비아인들의 이주를 장려하게 됩니다.
세르비아의 민초들은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해 현재는 관광지로 유명한 크로아티아의 카를로바츠, 플리트비체, 자다르, 스플리트 등지와 보스니아 모스타르 등지로 이주를 하여 정착하게 됩니다. 역사의 비극은 이때부터 싹트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공적으로 정착한 세르비아인들은 종교적으로 다른 크로아티아(로마 카톨릭)인들 속에서 삶을 영위하다가 세계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혹독한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이탈리아 무솔리니 정권의 지원과 나치의 묵인 아래 급조된 크로아티아인으로 구성된 우스타샤 괴뢰 정권이 들어서게 되고 이들이 독일 나치의 이민족 박해 정책을 이행하며 유대인, 집시 및 세르비아인들에 대한 추방과 학살을 자행하면서 세르비아인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아픔을 줍니다. 크로아티아의 우스타샤 괴뢰 정권은 1945년 5월 독일의 패망이 있을 때까지 70만 명이 넘는 세르비아인들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릅니다.
2차 세계대전 중 나치의 세르비아인 학살 기록
자료: vreme.com
이렇게 2차 세계대전 중 벌어진 악연이 구유고 해체 시기에 크로아티아의 독립 과정에서 다시 발생하게 됩니다. 크로아티아는 1991년 6월 25일 독립선언하고 1992년 1월 UN이 국가로 인정하면서 유고슬라비아와 관계를 단절합니다. 이에 크로아티아에 살던 세르비아 인들은 2차대전 동안 세르비아인들이 겪은 공포를 상기하며 자신들의 보호하고자 크로아티아 내에서 독립을 선언하고(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 당시 세르비아인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크로아티아 내 유고슬라비아 연방군이 크로아티아인들과 전쟁을 벌이게 됩니다. 결국 크로아티아가 서방의 도움으로 전쟁에서 승리하며 독립을 하게 되었지만 이 과정에서 크로아티아는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입게 되었으며, 양측에서 군인과 민간인 포함 총 2만명 이상이 사망하거나 집을 잃은 난민이 되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독립을 하였으나 크로아티아인들에게는 이 전쟁이 아직도 큰 상처로 남아 있으며 크로아티아 극우주의자들은 여전히 세르비아인들에 대한 큰 적개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마치면서
우리는 주로 서방 언론의 시각으로 보도된 발칸 지역의 전쟁을 통해 세르비아를 발칸의 문제아로 인식하고 있지만, 어쩌면 보는 시각에 따라 세르비아와 세르비아인들에 대한 평가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세르비아의 근-현대사를 지켜보면서 아래와 같은 질문들이 떠올랐는데, 한반도에도 유의미하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다.
1. 한민족이라는 동질성이 거의 없는 슬라브족이 하나의 국가로 강제 통합된 상황에서 이후 전개된 분열의 과정을 우리는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할까?
2. 2차 세계대전 동안에 벌어진 학살에 대한 단죄가 없었던 상황에서 1990년대 민족주의를 악용한 정치인들을 선택한 세르비아인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3. 민족의 근원지라고 믿는 코소보를 다른 세력에 넘겨줘야 한다는 국제 세력의 압력에 저항하는 것을 과연 잘못된 행동으로 봐야 할 것인가?
역사적으로 분쟁이 내재된 지역에 살면서 민족이 처한 상황에 대응 할 수 밖에 없는 세르비아인들도 어쩌면 역사의 비극 속에 살아가는 피해자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 해당 원고는 외부 전문가가 작성한 정보로, KOTRA 공식의견이 아님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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