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수 대교 붕괴 | 94년 10월 21일 성수대교 붕괴, 우연이 아닌 예고된 사고였다|크랩 인기 답변 업데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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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개의 한강 다리가 오늘날처럼 안전해질 수 있었던 이면에는 26년 전 발생한 성수대교 참사가 있습니다. 1994년 10월 21일 강북에서 강남을 잇는 성수대교가 무너졌고 다리를 건너던 차량 다섯 대가 다리와 함께 한강으로 추락해 32명이 사망했습니다. 준공 15년밖에 안 된 다리가 무너졌다는 사실은 전 국민을 경악케 했는데요. 사실 이 참사는 우연이 아니라 예고된 사고였습니다. 시공사인 동아건설과 서울시가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고 관리를 철저히 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사고였는데요. 그날의 참사, 크랩에서 영상으로 준비했습니다
구성, 편집 이지혜
도움 이근혁 인턴
#크랩 #성수대교 #붕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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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대교 붕괴 사고 – 나무위키:대문

1994년 10월 21일 오전 7시 38분 성수대교의 제10·11번 교각 사이 상부 트러스 48m가 붕괴되었다. 사고 부분을 달리던 기아 베스타 승합차 1대와 기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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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11/2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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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대교 붕괴 사고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성수대교 붕괴 사고(聖水大橋崩壞事故)는 1994년 10월 21일 서울특별시의 한강에 위치한 성수대교의 상부 트러스가 무너져내려 일어난 사고다. 이 사고로 17명이 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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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o.wikipedia.org

Date Published: 6/1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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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대교붕괴사건(聖水大橋崩壞事件)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성수대교붕괴사건은 공권력을 이용하여 사익을 위해 추구하여 왔던 한국 사회 부정부패가 그 사건의 배경이다. 건설사의 부실공사와 감리담당 공무원의 부실감사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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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encykorea.aks.ac.kr

Date Published: 12/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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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대교 붕괴 사고 – 리브레 위키

오전 7시 38분, 성수대교 5번과 6번 교각사이에 걸쳐진 상부 트러스 50m 가량이 갑자기 무너져 내렸다. 사고 부근을 달리던 승용차 2대와 승합차 1대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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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librewiki.net

Date Published: 10/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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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포착] 가을 아침, 믿을 수 없었던 ‘성수대교 붕괴참사’

이 사고로 성수대교를 통해 한강을 건너 학교나 직장으로 향하던 32명이 안타깝게 목숨을 잃었고, 17명이 다쳤다. 시내버스의 경우 뒷바퀴가 다리의 붕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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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yna.co.kr

Date Published: 9/2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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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대교 붕괴 사고

성수대교 붕괴 사고(聖水大橋崩壞事故)는 1994년 10월 21일 서울특별시의 한강에 위치한 성수대교의 상부 트러스가 무너져내려 일어난 사고다. 이 사고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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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duhoctrungquoc.vn

Date Published: 4/2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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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괴의 역사] ③ 무너진 ‘성수대교(1994년)ㆍ라오스댐(2018년 …

1994년 10월 21일, 대한민국 수도 서울을 가로지르는 한강 다리가 순식간에 ‘뚝’ 끊어졌다. 학생들이 버스를 타고 등교하고, 직장인들이 출근하는 오전 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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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opinionnews.co.kr

Date Published: 11/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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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괴사고 재현되나…” 40년 된 성산대교 충격적인 근황 공개됐다

한 누리꾼은 1994년 발생했던 성수대교 붕괴 사건을 떠올리며, “국민의 안전을 위해 보강 공사가 더욱 철저하게 진행되어야 한다”라고 목소리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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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ground.kr

Date Published: 6/1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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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일] 전조를 무시한 대가가 부른 참사, 1994년 오늘 성수대교 …

성수대교 붕괴는 사망자 수로만 볼 때, 인명피해 규모가 매우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다. 비행기 추락이나 건물 붕괴, 대규모 교통사고 등 국내외에서 종종 발생하는 재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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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hopebridge.or.kr

Date Published: 12/2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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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 성장기 대한민국을 강타한 살풍경, “다리가 무너졌다니까요”

성수대교 붕괴 사고는 위험 사회가 도래했으나, 사회적 위험에 대한 인식 수준은 낮았던 1990년대 중반 고도성장기의 끝자락의 살풍경을 고스란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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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ahopsi.com

Date Published: 4/1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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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년 10월 21일 성수대교 붕괴, 우연이 아닌 예고된 사고였다|크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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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성수 대교 붕괴

  • Author: 크랩 KLA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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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0. 10. 18.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fUXDeNKonEE

성수대교 붕괴 사고

성수대교 붕괴 사고 성수대교 붕괴 사고 현장 날짜 1994년 10월 21일 시간 아침 7시 38분 (KST)[1] 위치 서울특별시 성동구 옥수동 원인 부실공사 최초 보고자 서울성동소방서 참여자 동아건설, 서울특별시청 사망자 32명 부상자 17명

성수대교 붕괴 사고(聖水大橋崩壞事故)는 1994년 10월 21일 서울특별시의 한강에 위치한 성수대교의 상부 트러스가 무너져내려 일어난 사고다. 이 사고로 17명이 다치고 32명이 사망하여 총 49명의 사상자를 냈다.

사고 내용 [ 편집 ]

1994년 10월 21일 오전 7시 38분경에 제10·11번 교각 사이 상부 트러스 약 50m가 붕괴해 무너지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사고부분을 달리던 승합차 1대와 승용차 2대는 현수 트러스와 함께 한강으로 추락했고, 붕괴되는 지점에 걸쳐 있던 승용차 2대는 물속으로 빠졌다. 지나가던 한성운수 소속 16번 시내버스는 통과 도중 앞바퀴가 붕괴 지점에 걸쳐있다가 차체가 뒤집혀 추락한 후, 떨어진 상판에 박혀 찌그러지는 바람에 등굣길의 학생들을 비롯한 승객들이 졸지에 참변을 당하였다. 버스 추락으로 사망한 사람은 29명이다.[2][3][4]

사고 차량 중 승합차엔, 제49주년 경찰의 날을 맞아 우수 중대로 선정되어 표창을 받기 위해 본대로 가던 의경들이 타고 있었는데, 이들은 사고 발생후 전원 무사하여 헌신적으로 요구조자들을 구조했다.[5][6]

붕괴 원인 [ 편집 ]

점검 부실 및 내부 결함 문제 [ 편집 ]

성수대교는 건설될 당시, 트러스식 다리로 건설되었다. 하지만 트러스식 공법은 이음새가 잘못되면 무너지기 쉬운 공법이었다. 뿐만 아니라 안정 시공인 이음새 핀 등의 세부 요소들을 주기적으로 점검해야 하는데, 이러한 안전점검 조치를 소홀히 하였다.[7]

또한, 성수대교 사고원인은 교량 상판을 떠받치는 트러스의 연결이음새의 용접 불량과 유지관리 소홀이 주원인이다. 건설 당시 다리 밑 부분을 이루고 있는 트러스가 제대로 연결되지 않았으며, 연결 부분도 심하게 녹슬었을 뿐만 아니라 다리 위에 가해지는 압력을 분산시키는 이음새에도 결함이 있었다. 공사 도중 볼트 삽입 과정에도 문제가 있었으며, 특히 볼트를 무리하게 삽입함으로 인해 구멍의 모양이 변형되어 볼트의 강도가 약해졌다.[8][9][10][11]

과적차량의 통과 [ 편집 ]

붕괴 전의 성수대교 설계 하중은 DB-18(총중량 32.1t)이었지만, 이를 초과하는 과적 차량들이 자주 통과하였다. 이로써 성수대교는 40t이 넘는 차량들의 압력을 받았기에 붕괴는 예견되어 있었다.[12] 특히, 붕괴되기 일년 전인 1993년 서울 동부간선도로(성수대교~의정부 구간)가 개통되면서 교통량은 더욱 폭증했으나, 서울시에서는 이렇다 할 대책을 내놓지 않았다.[13]

피해 사항 [ 편집 ]

32명(남 16명, 여 16명)이 숨지고, 17명이 부상을 입어 총 49명의 사상자를 낸 사고였다. 이 사고는 해외에도 크게 보도되어 건설업계에 큰 타격을 입혔을 뿐만 아니라 국가 이미지도 크게 훼손되었다. 사망자 중에 무학여자고등학교 학생 8명과 무학여자중학교 학생 1명, 서울교육대학교 대학생 1명, 필리핀인 아델 아이다 등으로 이 중 외국인 1명이 포함되어 있었다.[14]

사상자 현황 사망자 부상자 국적 인원 인원 대한민국 31 17 필리핀 1 – 합계 32 17

사고 이후 [ 편집 ]

서울특별시 대책본부 설치 [ 편집 ]

사고 발생 직후 서울특별시는 대책본부를 설치한 후 서울특별시장을 본부장으로 8개반을 편성 후 활동을 시작하였다.[15][16]

구조 활동 [ 편집 ]

경찰에 의해 교통이 통제되고, 소방대와 119구조대는 구급차를 출동해 사상자를 구조하였다. 해난구조대는 잠수요원을 출동해 시신을 인양하고, 15개의 병원에 사망자를 안치, 6개의 병원에 부상자를 후송하였다.[17]

교통 정리 [ 편집 ]

성수대교 붕괴 이후 교통량 분산을 검토한 후 우회도로 안내판을 설치하여 영동대교, 동호대교로 교통량을 분산하고, 교통신호 주기를 조정하였고, 성수대교를 통과하던 시내버스 노선도 변경되었다.

서울특별시장의 경질 [ 편집 ]

사고 당일 오후 7시에 사고의 책임을 물어 이원종 서울특별시장이 경질되었고, 우명규 시장을 거쳐 11월 3일 최병렬이 시장으로 부임했다.

재건설 [ 편집 ]

붕괴 이후 토목학계는 무너지지 않은 부분을 그대로 수리해서 사용할 수 있다는 의견을 냈으나, 시민들의 정서를 감안해 새로 건설하는 방향으로 결정되어 1995년 4월 26일부터 현대건설이 새로 건설하기 시작해, 1997년 7월 3일에 직선 차선만 완성되었으며 이후 확장공사가 예정되어 있기 때문에 램프를 건설하지 못하였다.확장공사는 1998년 12월 31일 폭과 길이 확장공사 진입램프 신설을 하고 2004년 9월 최종 완성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성수대교 붕괴 사고 여파로 인해 같은 트러스식 공법으로 시공된 당산철교도 안전 점검 후폭풍이 일게 되어 1997년 1월 1일부터 철거 및 재건설에 들어갔고, 1999년 11월 22일에 다시 개통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관련 작품 [ 편집 ]

노래 [ 편집 ]

〈세계의 문 _ Part 1 – 유년의 끝 _ Part 2 – 우리가 만든 세상을 보라〉 (1995년 9월)

1. 가수 : N.E.X.T

2. 앨범 : 《3집 The Return of N.EX.T Part 2: World》

영화 [ 편집 ]

감독 : 김희정

텔레비전 드라마 [ 편집 ]

극중 나진아(하연수 분)는 이 사건으로 아버지(강남길 분)를 잃어 밤을 무서워하는 역으로 출연한다.

제5회에서 한영대교라는 이름으로 성수대교 붕괴 사건이 연상되는 신이 등장한다.

같이 보기 [ 편집 ]

사진 [ 편집 ]

성수대교붕괴사건(聖水大橋崩壞事件)

1977년 4월 착공하여, 1979년 10월에 준공된 성수대교가 1994년 10월 붕괴하였다. 이 붕괴사건으로 인하여 건설 분야에 만연되어 있던 부실공사와 부실감리, 안전 검사 미흡이 집중적으로 폭로되었다. 사고 책임을 물어 그 당시 서울 시장이었던 이원종 시장이 사임하였다. 이후 우명규 시장을 거쳐 최병렬 시장이 취임하면서 부실공사 대책이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성수대교의 무너지지 않은 부분을 보완해서 사용할 수도 있다는 토목학계(土木學界)의 의견도 있었지만 다리를 완전히 새로이 건설하기로 결정하였다.

성수대교 붕괴 사고

성수대교 붕괴 사고 사건 정보 날짜 1994년 10월 21일 오전 7시 40분 장소 서울특별시 강남구와 성동구 사이 성수대교 구간 인명피해 사망 : 32명, 부상 : 17명 재산피해 승용차, 버스 등 차량 다수 및 교량 상부 트러스

대한민국의 흑역사, 안전불감증의 참혹한 결과물

성수대교 붕괴 사고는 1994년 10월 21일 오전 출근 및 등교 시간대인 7시 40분경, 서울특별시 강남구 압구정동과 성동구 성수동을 잇는 성수대교의 상판 트러스 일부가 갑자기 무너져 내리며 해당 구간을 지나던 승용차와 버스 등 차량 다수가 한강에 빠지거나 무너진 다리 상판에 추락하며 대형 인명피해를 야기한 참사이다.

1 사고 과정 [ 편집 ]

오전 7시 38분, 성수대교 5번과 6번 교각사이에 걸쳐진 상부 트러스 50m 가량이 갑자기 무너져 내렸다. 사고 부근을 달리던 승용차 2대와 승합차 1대는 그대로 무너져 내린 상부 트러스와 함께 한강으로추락하였고, 붕괴지점에 겨우 걸쳐진 승용차 2대는 한강 물속으로 추락하였다. 특히 많은 인명피해를 발생시킨 한성운수 소속 16번 버스는 뒷바퀴 부근이 붕괴지점에 걸쳐졌다가 차체가 뒤집히면서[1] 무너진 상판에 추락하였다.

2 사고 원인 [ 편집 ]

성수대교는 트러스 공법으로 시공된 다리이다. 트러스 공법은 교각을 세우고 교각 사이에 트러스나 빔등 철제 받침대를 제작한 후 그 위에 교량 상판을 시공하는 방식이며, 당시 성수대교는 미려한 외관을 중점적으로 고려하였으며, 상부 트러스의 색상을 화사한 색감의 밝은 파란색을 적용하였다. 하지만 이런 수려한 외관의 트러스교는 이음새 부분의 세심한 관리가 필요한 구조적 특징이 있으며, 특히 이음새를 연결하는 이음새 핀 등 세부적인 요소에 대한 안전관리가 소흘했음이 드러났다. 또한 시공시 트러스가 제대로 연결되지 않았고, 연결부위도 부식되었으며, 상부를 통과하는 차량들에서 가해지는 압력을 분산시키는 이음새도 결함이 발견되는 등, 총체적인 부실공사가 밝혀졌다. 심지어 이음새를 이어주는 볼트를 규격에 맞지 않는 부품을 억지로 우겨넣은 것도 발견되었고, 어찌하 허술하게 볼트를 연결했는지 손으로 볼트를 돌려서 빼낼 수 있을 정도였다.

성수대교의 설계하중은 32.4톤 수준인 DB-18을 적용하였으나, 정작 성수대교를 통과하는 차량들에 대한 체계적인 중량제한을 감독하지 않아서 실제로는 설계하중을 뛰어넘는 40톤 이상의 대형 차량들도 아무런 제한없이 다리를 이용하여 교량 자체의 안전성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1993년, 동부간선도로가 개통하며 강남과 강북을 이어주는 성수대교의 교통량이 크게 늘어나면서 다리에 가해지는 하중이 크게 증가한 것으로 밝혀졌다.

3 피해 [ 편집 ]

총 32명의 사망자들중 24명이 거꾸로 뒤집혀 추락한 시내버스의 승객들이며, 특히 무학여자고등학교 8명, 무학여자중학교 1명 등 등교길에 오르던 많은 학생들이 변을 당했다. 다리 상판과 함께 추락한 승합차에는 49주년 경찰의 날을 맞아 우수중대로 선정되어 표창을 위해 이동중이던 의경들이 타고 있었는데, 천만다행으로 사망자나 중상자 없이 대체로 무사하여 사고후 무너진 상판위로 추락한 차량들을 돌면서 인명구조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성수대교의 5,6번 교각 사이 상부 트러스가 50미터 가량 무너졌으므로 성수대교는 다리로서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붕괴후 119 구조대 등 가용가능한 인력과 장비가 투입되어 구조작업에 나섰다. 119 구조대는 사고 직후 20여분간 한강에 잠수사를 투입하여 3구의 시신을 인양하였고, 거꾸로 뒤집힌 버스 아래 깔렸던 6구의 시신과 버스 안을 수색하여 추가로 시신을 수습하였다. 현장에서 수습된 시신은 24구였지만 중상자들 가운데 병원으로 후송 도중 8명이 사망하면서 총 32명이 희생된 참사였다.

4 처벌 [ 편집 ]

시공사인 동아건설은 부실시공의 책임이 인정되었고, 시공 감리, 교량의 안전관리 책임이 있는 서울특별시 공무원 등 8명이 사법부의 심판을 받았다. 이 사건에 있어서 사법부는 가해자들이 각자 맡은 범행의 부분이 합쳐져서 범행이 완성되는 것으로 모두가 공범이라는 논리로 관련자들을 엄중히 심판하였으며, 기존 판례를 뒤집는 재판계에 한 획을 그은 사건이었으며, 법조계에서는 관련자들을 모두 공법으로 취금하여 엄격한 처벌을 하려는 사법부의 의지가 나타난 사례로 취급한다.

“ 이 사건 성수대교와 같은 교량이 그 수명을 유지하기 위하여는 건설업자의 완벽한 시공, 감독공무원들의 철저한 제작시공상의 감독 및 유지·관리를 담당하고 있는 공무원들의 철저한 유지·관리라는 조건이 합치되어야 하는 것이므로, 위 각 단계에서의 과실 그것만으로 붕괴원인이 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합쳐지면 교량이 붕괴될 수 있다는 점은 쉽게 예상할 수 있고, 따라서 위 각 단계에 관여한 자는 전혀 과실이 없다거나 과실이 있다고 하여도 교량붕괴의 원인이 되지 않았다는 등의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붕괴에 대한 공동책임을 면할 수 없다고 봄이 상당하다 할 것이다.

이 사건의 경우, 피고인들에게는 트러스 제작상, 시공 및 감독의 과실이 인정되고, 감독공무원들의 감독상의 과실이 합쳐져서 이 사건 사고의 한 원인이 되었으며, 한편 피고인들은 이 사건 성수대교를 안전하게 건축되도록 한다는 공동의 목표와 의사연락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므로, 피고인들 사이에는 이 사건 업무상 과실치사상 등 죄에 대하여 형법 제30조 소정의 공동정범의 관계가 성립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 — 판례 97도 1740 내용중 일부

당시 이 판결을 두고 기소된 이들의 행동이 고의성을 가지고 구체적 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모두를 공범으로 취급하는 것 자체를 두고 법조계의 논란이 있었다. 사실 죄형법주의를 따지자면 기소된 이들 모두는 고의성이 인정되지 않아 무죄가 성립될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재판부는 당시 국민적인 분노를 유발한 해당 사건에 대해 법리적 적용보다 법 자체가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는 점을 고려하여 기존의 통념을 깬 판결을 하였다.

법적 처벌과 별개로, 사고 당일 오후 7시에는 도의적 책임을 물어 이원종 서울시장이 경질[2]되었으며 개원중이던 국회 일정이 잠시 중단되었고, 10월 24일에는 김영삼 대통령이 직접 대국민 사과를 하였다.

5 사고 이후 [ 편집 ]

멀쩡하던 다리가 무너져 내렸으니 당장 교통 불편이 일어났다. 사고 당일 퇴근시간이 다가오자 서울시는 우회도로 안내표지판을 설치하여 성수대교의 교통량을 인근 동호대교와 영동대교로 분산하였으며, 신호주기를 변경하는 등 시민들의 교통 불편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무너진 성수대교의 복구를 놓고 이런저런 의견이 나왔는데, 공사기간중 통행을 위해 성수대교 인근에 부교를 설치하자는 의견이 제시되었으나 관련 부처인 국방부는 부교를 놓아봐야 왕복 2차선 규모라서 실질적인 효과는 미미할 것으로 파악하였으며, 부교를 1개월 이상 유지하기도 힘들다는 점[3]을 피력하여 이 안건은 반려되었다. 복구 방식을 놓고도 이런저런 말들이 오갔는데, 일단 급한데로 무너진 구간을 수리하여 차량통행을 재개하려면 최소 3개월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시되었으나, 이미 부실공사로 멀쩡한 다리가 무너진 마당에 3개월만에 복구한다는 것에 여론이 매우 악화되었고 결국 성수대교에 대한 정밀진단 결과 전체적인 부실시공이 밝혀지며 전면 재시공이라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성수대교 붕괴 이후 한강 교량에 대한 대대적인 안전점검이 이뤄졌는데, 그 결과 서울 지하철 2호선이 지나는 당산철교의 부실시공이 밝혀지고, 안정성에 심각한 문제가 언론에 보도되기에 이르렀다. 결국 서울시는 성수대교와 마찬가지로 당산철교에 대한 전면 재시공을 결정하였으며, 재시공 기간동안 순환선이던 2호선은 당산역과 합정역을 임시 시/종착역으로 지정하면서 순환선 기능이 중지되었다.

6 성수대교 재시공 [ 편집 ]

성수대교의 시공사였던 동아건설의 회장은 자신들이 책임을 지고 다리를 재시공하여 국가에 헌납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기도 했지만, 최종적으로 현대건설이 시공사로 선정되어 1995년 4월 26일부터 재시공에 들어갔으며 약 3년여의 공사기간을 거쳐 1997년 7월 3일 완공되었다. 시공전 왕복 4차선 규모에 32.4톤의 설계하중을 강화하여 재시공 이후에는 왕복 8차선 규모에 설계하중 역시 40톤 규모로 적용하여 보다 편리하고 튼튼한 다리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시공업체 선정후 감리단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그간 건축업계의 관례를 깨고 해외업체인 High Point Rendel이 선정되어 주목을 받았다. 그 이면에는 그간 시공사와 감리사가 속된말로 누이좋고 매부좋은 사이로 철저한 시공 관리를 하지않는 문제점이 불거져 나왔기에 해외업체를 선정하게 되었으며, 이는 국가적인 망신으로 치부되었다.

7 여담 [ 편집 ]

이 사고로 무학여고와 무학여중 학생들이 참변을 당해 큰 충격을 받은 교육계에서는 아예 서울지역 인문계 고등학교 배정시 한강을 건너게 하지 않는다 라는 조항을 만들어 10년 가까이 유지하기도 했다.

라는 조항을 만들어 10년 가까이 유지하기도 했다. 사고로 희생된 이들을 기리기 위한 위령비가 성수대교 북단에 건립되었다. 문제는 서울시의 관리소흘로 위령비에 접근하는 것 자체가 목숨을 건 위험한 일이 되버렸다는 것. 위령비의 위치도 제대로 안내되지 않으며, 주차공간도 차로와 인접하여 위험하고 위령비가 세워진 곳에 접근하려면 차들이 쌩쌩 달리는 도로를 건너야 하는데 주변에는 아무런 보행자 안내표지나 건널목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사고 공화국으로 불리던 문민정부의 커다란 흑역사중 하나이다.

8 각주

[순간포착] 가을 아침, 믿을 수 없었던 ‘성수대교 붕괴참사’

1994년 10월 21일 성수대교 붕괴 현장을 하늘에서 내려다본 모습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임동근 기자 =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서울에 있는 한강 다리 중 하나가 무너져내렸다. 현대식 교량인 한강의 다리가 붕괴한 전례 없는 일이었다. 바로 1994년 10월 21일 발생한 ‘성수대교 붕괴사건’이다.

사건은 시민들이 한창 출근과 등교에 분주하던 금요일 오전 7시 40분께 발생했다. 강북 성수동과 강남 압구정동을 연결하는 성수대교의 10번과 11번 교각 사이 상판 48m 구간이 갑자기 붕괴하더니 20여m 아래 한강 위로 내려앉았다.

다리 위를 지나던 16번 시내버스와 승합차 1대, 승용차 4대 등 차량 6대는 붕괴한 상판과 함께 추락했다. 무너진 상판에는 시내버스가 거꾸로 뒤집힌 채 구겨져 있었고, 차량 3대가 반듯이 얹혀 있었다. 생존자들은 손을 흔들며 구조를 요청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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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고로 성수대교를 통해 한강을 건너 학교나 직장으로 향하던 32명이 안타깝게 목숨을 잃었고, 17명이 다쳤다. 시내버스의 경우 뒷바퀴가 다리의 붕괴지점에 걸쳐있다가 다리 상판에 뒤집힌 채 떨어지며 운전기사 및 승객 26명 가운데 24명이 사망했다. 전체 사망자 가운데는 강남 집에서 강북 학교로 등교하던 무학여고 여고생 8명도 포함돼 있었다.

붕괴한 성수대교는 서울의 한강을 가로지르는 11번째 다리로 너비 19.4m, 길이 1천160m, 왕복 4차선으로 1979년 완공됐다.

이 사고는 인재(人災)인 것으로 밝혀졌다. 기술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디자인과 속도를 중시한 새 공법을 미숙하게 적용했고 관리 감독은 소홀했다.

법원은 대교 건설과 관리 등에 관여한 시공업체 관계자와 공무원을 업무상과실치사 등의 공범으로 처벌했다.

성수대교는 1997년 7월 상판, 트러스, 교각 등을 모두 교체하는 복구공사로 재개통됐다. 서울시는 같은 해 대교 북단 나들목 인근에 사고 희생자의 넋을 위로하는 위령탑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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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대교 붕괴 사고: 1994년 서울특별시 성수대교가 끊어져 무너진 참사

사고 내용

1994년 10월 21일 오전 7시 38분경에 제10·11번 교각 사이 상부 트러스 약 50m가 붕괴해 무너지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사고부분을 달리던 승합차 1대와 승용차 2대는 현수 트러스와 함께 한강으로 추락했고, 붕괴되는 지점에 걸쳐 있던 승용차 2대는 물속으로 빠졌다. 지나가던 한성운수 소속 16번 시내버스는 통과 도중 앞바퀴가 붕괴 지점에 걸쳐있다가 차체가 뒤집혀 추락한 후, 떨어진 상판에 박혀 찌그러지는 바람에 등굣길의 학생들을 비롯한 승객들이 졸지에 참변을 당하였다. 버스 추락으로 사망한 사람은 29명이다.[2][3][4] 사고 차량 중 승합차엔, 제49주년 경찰의 날을 맞아 우수 중대로 선정되어 표창을 받기 위해 본대로 가던 의경들이 타고 있었는데, 이들은 사고 발생후 전원 무사하여 헌신적으로 요구조자들을 구조했다.[5][6]

붕괴 원인

점검 부실 및 내부 결함 문제 성수대교는 건설될 당시, 트러스식 다리로 건설되었다. 하지만 트러스식 공법은 이음새가 잘못되면 무너지기 쉬운 공법이었다. 뿐만 아니라 안정 시공인 이음새 핀 등의 세부 요소들을 주기적으로 점검해야 하는데, 이러한 안전점검 조치를 소홀히 하였다.[7] 또한, 성수대교 사고원인은 교량 상판을 떠받치는 트러스의 연결이음새의 용접 불량과 유지관리 소홀이 주원인이다.건설 당시 다리 밑 부분을 이루고 있는 트러스가 제대로 연결되지 않았으며, 연결 부분도 심하게 녹슬었을 뿐만 아니라 다리 위에 가해지는 압력을 분산시키는 이음새에도 결함이 있었다. 공사 도중 볼트 삽입 과정에도 문제가 있었으며, 특히 볼트를 무리하게 삽입함으로 인해 구멍의 모양이 변형되어 볼트의 강도가 약해졌다.[8][9][10][11] 과적차량의 통과 붕괴 전의 성수대교 설계 하중은 DB-18(총중량 32.1t)이었지만, 이를 초과하는 과적 차량들이 자주 통과하였다. 이로써 성수대교는 40t이 넘는 차량들의 압력을 받았기에 붕괴는 예견되어 있었다.[12] 특히, 붕괴되기 일년 전인 1993년 서울 동부간선도로(성수대교~의정부 구간)가 개통되면서 교통량은 더욱 폭증했으나, 서울시에서는 이렇다 할 대책을 내놓지 않았다.[13]

피해 사항

32명(남 16명, 여 16명)이 숨지고, 17명이 부상을 입어 총 49명의 사상자를 낸 사고였다. 이 사고는 해외에도 크게 보도되어 건설업계에 큰 타격을 입혔을 뿐만 아니라 국가 이미지도 크게 훼손되었다. 사망자 중에 무학여자고등학교 학생 8명과 무학여자중학교 학생 1명, 서울교육대학교 대학생 1명, 필리핀인 아델 아이다 등으로 이 중 외국인 1명이 포함되어 있었다.[14] 사상자 현황 사망자 부상자 국적 인원 인원 대한민국 31 17 필리핀 1 – 합계 32 17

사고 이후

서울특별시 대책본부 설치 사고 발생 직후 서울특별시는 대책본부를 설치한 후 서울특별시장을 본부장으로 8개반을 편성 후 활동을 시작하였다.[15][16] 구조 활동 경찰에 의해 교통이 통제되고, 소방대와 119구조대는 구급차를 출동해 사상자를 구조하였다. 해난구조대는 잠수요원을 출동해 시신을 인양하고, 15개의 병원에 사망자를 안치, 6개의 병원에 부상자를 후송하였다.[17] 교통 정리 성수대교 붕괴 이후 교통량 분산을 검토한 후 우회도로 안내판을 설치하여 영동대교, 동호대교로 교통량을 분산하고, 교통신호 주기를 조정하였고, 성수대교를 통과하던 시내버스 노선도 변경되었다. 서울특별시장의 경질 사고 당일 오후 7시에 사고의 책임을 물어 이원종 서울특별시장이 경질되었고, 우명규 시장을 거쳐 11월 3일 최병렬이 시장으로 부임했다. 재건설 붕괴 이후 토목학계는 무너지지 않은 부분을 그대로 수리해서 사용할 수 있다는 의견을 냈으나, 시민들의 정서를 감안해 새로 건설하는 방향으로 결정되어 1995년 4월 26일부터 현대건설이 새로 건설하기 시작해, 1997년 7월 3일에 직선 차선만 완성되었으며 이후 확장공사가 예정되어 있기 때문에 램프를 건설하지 못하였다.확장공사는 1998년 12월 31일 폭과 길이 확장공사 진입램프 신설을 하고 2004년 9월 최종 완성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성수대교 붕괴 사고 여파로 인해 같은 트러스식 공법으로 시공된 당산철교도 안전 점검 후폭풍이 일게 되어 1997년 1월 1일부터 철거 및 재건설에 들어갔고, 1999년 11월 22일에 다시 개통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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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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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괴의 역사] ③ 무너진 ‘성수대교(1994년)ㆍ라오스댐(2018년)’…공통점은 ‘주먹구구 관리’

1994년 한강 성수대교 상판 48m 붕괴돼 32명 사망

SK건설이 시공한 라오스 댐 붕괴…사망 71명·이재민 7000여명

대한민국이 산업화하면서 건축 기술도 함께 발전했다. 고층 건물은 물론이고 수십킬로미터에 달하는 대교도 짓는다. 아파트는 필수재가 됐고, 백화점·마트에선 생필품을 구매한다. 마포대교·성수대교는 서울 강남북을 잇는다. 이처럼 우리 생활에 필수적인 건축물이 붕괴돼 생사의 기로에 서게도 한다. 국내외 붕괴사고를 살펴봤다. [편집자주] [오피니언뉴스=유태영 기자] 다리와 댐이 붕괴해 수십명이 사망한 대형 참사가 국내외에서 발생했다. 다리와 댐은 사회간접자본(SOC)으로서 무엇보다도 안전성이 우선이다. 하지만 한강 다리가 무너져 평소처럼 등교 버스에 올라탔던 학생이 영문도 모른채 죽어갔다. 라오스에선 선진국에서 첨단 기술로 튼튼하게 공사한다고 생각했던 댐이 무너져 수십명을 사망케 하고 하루 아침에 삶의 터전이 물에 잠겼다.

성수대교가 ‘뚝’ 끊겼다…32명 사망

1994년 10월 21일, 대한민국 수도 서울을 가로지르는 한강 다리가 순식간에 ‘뚝’ 끊어졌다. 학생들이 버스를 타고 등교하고, 직장인들이 출근하는 오전 7시 38분에 ‘성수대교’ 상판 48m가 붕괴돼 한강 수면위로 떨어졌다. 이 사고로 32명이 숨졌고, 17명이 다쳤다.

1994년 10월 21일 오전 7시40분 무너진 성수대교 모습. 사진=연합뉴스

성수동과 압구정동을 잇는 성수대교는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처럼 예견된 사고였다. 사고 발생 당일 생벽부터 성수대교 상판 이음매에 균열이 있다는 신고가 여럿 서울시에 접수됐지만 방치한 결과 대형참사가 발생했다.

성수대교 붕괴사고의 책임은 시공사인 동아건설과 보수 및 관리기관인 서울시의 책임이 각각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성수대교는 건설당시 ‘트러스식’ 공법으로 다리를 건설했다. 이 공법은 이음새가 딱 들어맞지 않으면 무너질 위험이 높은 공법이었다. 완공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이음새를 유지관리 해야 했지만 하지 않았다.

1979년에 건설된 성수대교는 사고시점에 이미 완공된지 15년이 넘어 유지보수가 지속적으로 필요했다. 당시 MBC 보도에 따르면 사고현장 수중촬영 결과 단단히 잠겨있어야 할 볼트가 손으로 돌려도 될 정도로 헐거웠다고 보도됐다.

서울시는 교량 보수 및 관리에 미흡했다. 성수대교는 설계 당시 하루 통행량 8만대를 견딜 수 있게 만들었지만, 실제 하루 통행량은 설계 예측량의 2배가 넘는 16만대 이상 이었다. 더욱이 사고 발생 전년도인 1993년에 동부간선도로의 강북구 구간(성수~상계) 구간이 개통하면서 교통량은 더욱 늘었다.

1994년 10월 21일 성수대교 붕괴 사고 현장. 사진=연합뉴스

통행량 폭증 + 과적차량 단속 미비 = 피로균열 누적

통행량이 폭증하는데도 불구하고 과적차량 통행 단속에도 소홀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 대당 최대 18톤 하중을 견디게 설계됐지만 성수대교 북단에 있는 삼표산업 레미콘 공장에 드나드는 레미콘 트럭은 한 대당 최대 25톤에 달하는 과적차량이었다. 통행량 폭증과 과적차량 단속 미비로 피로균열이 생길수 밖에 없는 조건이 완성된 것이다.

사고 발생 당시 이원종 서울특별시장은 사고 직후 바로 경질됐다. 성수대교를 시공한 동아건설에 대한 처벌은 사고 발생 8년후인 2002년에 내려졌다. 대법원은 서울시가 동아건설을 상대로 낸 구상금 및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피고(동아건설)는 원고(서울시)에게 191억여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서울시는 성수대교 붕괴사고 희생자 배상금 및 위로금, 다리 재시공비 등으로 860억여원을 이미 지출한 상태였다.

다리 중간이 끊긴 성수대교는 1995년 4월 26일부터 현대건설이 새로 짓기 시작해 1997년 7월 완공돼 차량통행이 재개됐다. 마포대교·양화대교 등도 성수대교 붕괴사고 이후 재시공하거나 전면보수에 들어가 대형참사의 재발을 막았다.

붕괴된 보조댐 아래 인근 마을이 물에 잠긴 모습. 사진=연합뉴스

라오스댐 붕괴…사망 71명·이재민 7000명 발생

SK건설이 라오스에 짓고 있던 댐이 붕괴돼 수십명이 사망하고, 이재민이 수천명에 달하는 사고도 일어났다. 2018년 7월 23일 라오스에서 발생한 ‘세피안-세남노이 댐 붕괴 사고’다.

이 댐은 당시 SK건설(지분 26%)이 시공을 맡았고, 한국서부발전(지분 25%)은 발전소 운영을 담당했다. 태국 RATCH(지분 25%)와 라오스 국영기업 LHSE(지분 24%)은 전기판매를맡았다. 합작법인 ‘PNPC’가 건설중인 ‘세피안-세남노이(Xe Pian-Xe Namnoy)’ 보조댐이 무너져 5억톤 가량의 물이 하류로 쏟아졌다.

이 댐은 2019년 2월 준공을 목표로 공사중이었다. 발전용량은 410㎿(메가와트)로 총 사업비는 10억달러(약 1조1200억원)다. 공사비는 7억1000만달러(약 8000억원) 규모다.

이 사고로 인해 하류지역 13개 마을이 잠겼고, 1300가구가 피해를 입었다. 이재민 7000여 명을 포함해 1만1000여명이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됐다. 라오스 정부가 공식 확인한 사망자는 71명, 실종자는 131명이었다.

댐 붕괴로 라오스 인근 국가에도 피해가 발생했다. 댐 붕괴로 인한 홍수가 캄보디아 동북부 17개 마을을 덮치면서 북부 스퉁트렝 주(州)의 세콩강 인근 거주민 2만5000여명이 급류를 피해 집을 비우고 대피소로 향하는 등 인접국가로까지 피해가 확산됐다.

이 사고에 대해 SK건설과 한국서부발전은 서로 엇갈린 해명을 했다. 당시 SK건설 측은 “폭우로 강물이 범람하면서 보조댐이 넘친 것”이라고 사고 원인을 설명했다. 서부발전 측은 “사고 발생 3일전부터 댐 중앙에 침하가 확인됐고 날이갈수록 더욱 침하범위가 넓어지며 붕괴했다”며 상반되게 설명했다.

댐 붕괴에 대한 피해 보상안이 나오기까진 2년이 소요됐다. 지난 2020년 7월 라오스 정부는 댐 프로젝트 사업자 ‘PNPC’가 보상·복구비로 약 1094억원을 지급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중 약 629억원은 희생자와 재산 피해 보상에 쓰이고, 약 467억원은 인프라 복구 비용이다.

“붕괴사고 재현되나…” 40년 된 성산대교 충격적인 근황 공개됐다

서울 성산대교 바닥판 균열 발견

보강공사 후 1년 만에 문제 발생

최근 보강공사를 마친 서울 성산대교의 바닥판에 균열이 발생해 안전 문제가 다시 제기되고 있다.

지난 3월 22일 서울시 측에서는 정밀안전진단을 실시한 결과 성산대교에서 올림픽대로로 연결되는 남단 접속교 바닥 3 곳에서 균열을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올해로 건설된 지 40년이 지난 성산대교는 노후화 문제로 인해 2025년 완공을 목표로 43톤 이상의 대형 화물차도 다닐 수 있게 하는 보강 공사를 진행 중이다. 하지만 최근 보강공사가 이미 마무리된 구간에서도 여러 개의 균열이 발생하면서 논란이 된 것이다.

실제로 지난해 3월 보강 공사를 끝낸 성산대교 남단에는 상판 콘크리트 곳곳에 쩍 갈라진 균열을 확인할 수 있다.

균열이 간 바닥판은 ‘프리캐스트 콘크리트’로 시공되었는데, 이는 현장에서 콘크리트를 까는 것이 아니라 공장에서 사전에 만들어둔 콘크리트를 타설 하는 공법이다.

서울시 내부 문건에 의하면 균열의 원인은 바닥판의 재료가 잘못 측정되었거나, 시멘트의 온도가 부적절했거나, 운반·설치 과정에서 부주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서울시는 현재까지 모니터링을 실시한 결과 “더 이상의 균열 진행은 없다”라며 “정밀안전진단과 전문가 기술심의 결과 교량 구조 안전성은 이상 없는 것으로 판명됐다”라고 추가 설명했다.

하지만 누리꾼들은 보강공사가 끝난 지 1년밖에 안된 곳에서 벌써부터 균열이 발생한 것에 대해 “안전하다”라는 말을 믿기 어렵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한 누리꾼은 1994년 발생했던 성수대교 붕괴 사건을 떠올리며, “국민의 안전을 위해 보강 공사가 더욱 철저하게 진행되어야 한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희망브리지 전국재해구호협회

[그때·오늘·그일] 전조를 무시한 대가가 부른 참사, 1994년 오늘 성수대교 붕괴! ‘하인리히의 법칙(Heinrich’s Law)’이라는 이론이 있다. 큰 사고는 우연히 갑작스럽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반드시 경미한 사고들이 반복되는 과정이 존재한다는 것으로, 오랜 기간 다양한 사례를 통해 사실로 입증됐다. 큰 재해는 항상 사소한 것들을 무시하고 방치할 때 발생한다. 그리고 충분히 막을 수 있었음에도 막지 못한 결과는 언제나 참혹한 법이다. 지금으로부터 25년 전 오늘, 대한민국 한강 다리 하나와 국민들의 억장이 함께 무너졌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현장(사진: 대한민국 소방)

믿을 수 없는 참사가 가져온 충격 1994년 10월 21일 금요일 0시를 넘긴 시각, 성수대교를 지나던 운전자들은 다리 상판 이음새에 가로 2m 세로 1.3m 크기의 대형 철판이 깔려 있는 것을 목격했다. 이음새 중간에 심하게 벌어진 틈새를 덮기 위해 서울시가 임시방편으로 취해 놓은 조치였다.

이음새 틈새는 시간이 갈수록 벌어졌다. 그날 오전 6시 경에 성수대교를 통과하던 한 운전자는 다리 위 노면에서 큰 충격을 느껴 신고 전화를 했지만 서울시는 교량 통제 등의 긴급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결국 오전 7시 48분 경 성수대교의 제 10·11번 교각 사이 상판 50여m가 내려앉는 붕괴참사가 발생했다. 사고 지점을 통과 중이던 승합차 1대와 승용차 4대는 48m 길이의 이음새와 함께 한강으로 추락했다. 성수대교 남단에서 북단으로 달리던 시내버스 한 대 역시 붕괴 지점을 발견하고 급정거를 시도했지만 멈추지 못하고 한강에 빠지고 말았다.

총 6대의 차량과 49명의 탑승자가 추락했고, 이 중 32명이 사망했다. 특히 시내버스의 경우 기사 1명과 승객 30명 중 단 2명만이 살아남았다. 사고 발생 시각이 오전 출근 및 등교 시간이었던 탓에 희생자 대부분은 직장인과 학생들이었다.

붕괴된 성수대교 절단면 앞에 서 있는 사람들.(사진: 대한민국 소방)

성수대교 붕괴는 사망자 수로만 볼 때, 인명피해 규모가 매우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다. 비행기 추락이나 건물 붕괴, 대규모 교통사고 등 국내외에서 종종 발생하는 재난들은 훨씬 많은 사망자를 낳기도 한다. 하지만 성수대교 붕괴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수도 중심에 있는 멀쩡한 한강 다리가 한순간에 무너져 내린 사례는 그야말로 전대미문의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누가, 무엇을, 어떻게, 왜 무시했나? “그렇게 걱정들 했는데도 기어이 오늘 벌어진 성수대교 붕괴 참사는 예고된 인재(人災)였습니다. 안전에 대한 우리의 무사 안일한 자세를 보다 통렬히 자성하기 위해 동강 난 다리 앞에서 뉴스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1994년 10월 21일 MBC 뉴스데스크, 엄기영 앵커 오프닝)

당시 언론에서는 사고가 나기 1년 전부터 한강 교량의 보수 및 관리가 매우 부실해 붕괴사고가 우려된다는 보도를 연이어 내보냈다. 이는 전반적으로 교량 보수가 시급하다는 전문가들의 진단 때문이었는데, 서울시는 이를 계속해서 외면하고 위험성을 방치했다.

물론 참사의 직접적인 원인은 시공사인 동아건설의 부실공사였다. 다리 이음새를 용접하는 시공이 엉망이었고, 붕괴 직전까지 유지·보수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당시 성수대교 인근에서 수중 촬영을 실시한 결과 이음새의 볼트가 손으로 뺄 수 있을 정도로 허술했고, 볼트 구멍도 제멋대로 뚫려 있었던 것이 드러났다.

당시 건설사 측은 서울시가 늘어난 교통량을 감안하지 않고 차량을 통제하지 않아 사고를 유발했다고 주장했다. 최초 설계 단계에서는 하루 통행량을 8만대 정도로 설계했지만, 실제 하루 통행량은 2배가 넘는 16만대 이상이었다. 왕복 4차로에 불과한 탓에 교통 체증은 상습적이었다. 특히 붕괴 1년 전 1993년 동부간선도로 성수-상계 구간이 개통되면서 성수대교 교통량이 폭증했는데도, 당시 서울시는 하중 제한만 조정한 채 방치했다.

90년대 성수대교는 하루 종일 이런 상태였다.

성수대교는 육군 전차가 다닐 수 있는 18톤 하중으로 설계됐지만, 그 이상의 무게를 가진 차량도 쉽사리 다리를 오갔다. 철저한 단속이 이루어지지 않아서다. 당시 성수대교 북단에는 당시 삼표레미콘 공장이 있었는데, 최대 적재중량 25톤의 레미콘 트럭들이 성수대교를 수시로 오갔던 것으로 확인됐다.

이 같은 사실들이 언론보도 등을 통해 알려지면서 시민들의 분노와 불안감은 극에 달했다. 이영덕 국무총리가 참사의 책임을 지고 사퇴했으며, 이원종 서울시장은 전격 경질됐다. 서울시는 성급하게 ‘3개월 내 완벽 보수 후 재개통’을 약속했다가 성난 민심의 뭇매를 맞기도 했다.

정부는 성수대교의 보수 대신 재건설을 결정하는 한편, 한강에 있는 모든 다리를 전수 조사했다. 그 결과 지하철 2호선 합정역과 당산역을 잇는 당산철교의 안전성에 큰 문제가 있는 것으로 확인돼 운행을 중단하고 전면 재시공에 들어갔다. 당산철교는 성수대교가 무너지기 전부터 위험성이 계속해서 지적돼 지하철 기관사들이 철저하게 서행으로 통과하는 곳이었다. 이어 심각한 노후화가 드러난 양화대교와 광진교, 상판에 구멍이 뚫린 한남대교 역시 새롭게 시공했다.

구조 작업이 진행 중인 성수대교(사진: 대한민국 소방)

현재 한강에는 31개의 다리가 놓여 있고, 하루 교통량은 300만 대가 넘는다. 자가용과 버스, 지하철을 타고 한강을 건너 학교와 회사를 오가는 이들이 오늘도 수백만 명에 달한다. 한순간의 방심은 이내 사고가 되고, 이는 곧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이 된다는 걸 우린 25년 전 오늘 똑똑히 확인했다. 오늘날의 안전은 사고를 통한 반면교사가 아니라 철저한 사전 점검과 관리를 통해 지켜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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