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세례 와 성령 충만 의 차이 | [성령 임재]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의 차이 그리고 성령충만 받는 법\” // 인바이블 말씀사역 / 크리스천 신앙 성장을 위한 채널 / 성경 속에 답이 있다 답을 믿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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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음악
출처 : Music Copyright ⓒ Christian BGM All Rights Reserved.
제목 : “주를 향한 나의 사랑을”
링크 : https://youtu.be/lD-O1aYjmgs
#인바이블_말씀사역 #크리스천_신앙_성장을_위한_채널
오래전에 성경공부를 할 때 한 분이 이런 질문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목사님, 오늘 제 아들이 설교를 듣고 와서, 성령세례는 무엇이고 성령충만이 무엇이냐고 물었는데 제대로 대답을 못했습니다. 솔직히 저도 잘 몰라서 그러는데 목사님, 성령세례는 무엇이고 성령충만은 무엇이며, 어떻게 다른가요?”라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성령세례라는 말과 성령충만이라는 말을 자주 듣고 씁니다. 그러나 많은 분들이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는 하지만 이것에 대해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역자들조차도 이런 경우를 종종 보곤 했습니다.
여러분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과 아는 것에 하나가 되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우리가 믿는 것과 아는 것에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자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성장하려면 반드시 성령충만이 동반되어야 해야 하는데, 이 성령충만이란 무엇이며,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래서 이번 시간에는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의 차이가 무엇이며, 또 우리가 어떻게 성령으로 충만할 수 있는지에 대해 함께 나누기 원합니다.
여러분 성경은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에 대해 이렇게 기록합니다.
(행 1:5, 개정)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엡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여러분 성경은 말합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또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말입니다. 그럼 여러분, 성경이 이렇게 말하는 성령세례는 무엇이며, 또 성령충만이란 무엇일까요?
이 시간에는 먼저 “성령세례”가 무엇인지에 대해 함께 나누기 원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성령세례가 무엇인지에 대해 마태복음에 기록된 한 사건을 통해 이것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우리가 잘 알다시피 예수님은 요단강가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십니다. 그런데 이때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물위로 올라오실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마 3: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여러분 성경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물위로 올라오셨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다고 합니까?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예수님에게 임하셨다고 합니다.
여러분, 성령세례가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물세례(침례)가 물로 받는 세례라면 성령세례는 성령으로 받는 세례를 말합니다. 물세례(침례)가 “죄씻음을 받고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면, 성령세례는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나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우리는 언제, 어떻게 이런 성령세례를 받게 될까요?
그것은 우리가 구원의 복음(엡 1:13)을 들을 때, 성령님이 이 믿음의 통로를 통해 임재하시게 되는데, 이때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날 때 성령세례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성령님이 임하셨던 것처럼 우리에게 성령님이 임하시는 것이 성령세례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성령으로부터 세례를 받으며 거듭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세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것이 성령세례라면 성령충만이란 무엇일까요?
성령세례는 성령님이 우리에게 임하실 때, 우리가 거듭날 때에 일어나게 됩니다. 그럼 성령충만이란 무엇이냐?
성령세례가 성령님이 우리 안에 임하실 때 일어나는 것이면 성령충만은 내 안에 임하신 성령님의 “채움의 정도 상태”를 표현한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성령님이 우리 안에 임하셨을 때, 충만하게 임하셨다면 이것이 성령충만이 되는 것입니다. 즉, 성령충만이란, 성령님이 우리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득 채운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세례가 성령님이 우리에게 임재하실 때 쓰는 말이라면, 성령충만은 우리에게 임하신 성령님의 채움의 상태를 표현한 말인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 누군가에게 성령님이 충만하게 임하셨다면, 이때 “성령충만을 받았다”는 말을 쓰게 되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성령의 부으심을 받았다”는 말을 쓰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것을 성경을 통해 찾아볼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사도행전 2장의 마다락방에 성령이 임한 사건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이때 성령님이 임하시게 되는데, 성령님이 어떻게 임하셨다고 합니까? 성령이 불처럼 임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거기 있던 사람들이 성령을 받았다고 하는데 어떻게 성경을 받았다고 합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행 2: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여러분 성경은 성령이 어떻게 임했다고 합니까?
불처럼 임하신 성령님에 의해(행 2:3) 모든 사람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고 합니다.
반면, 베드로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도 동일한 성령님이 임하셨는데, 이때는 성경이 성령님이 어떻게 임했다고 표현을 합니까?
(행 10:45, 개정)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여러분 우리가 이 두 말씀을 통해 볼 수 있는 차이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동일하게 성령님이 임하셨지만, 성령님이 임하실 때에 채워짐에 차이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마가다락방에서는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신 반면, 이방인들에게는 성령이 부어지는 것으로 그쳤다는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 왜 동일한 성령님이 임하셨는데, 이런 채워짐의 차이가 나는 걸까요?
여러분 이러한 차이는 그 사람의 신앙의 상태나 태도, 믿음, 깊이, 갈망과 같은 이유 때문에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마가다락방에 모였던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한 신앙과 믿음이 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더욱이 이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는 말씀을 받고(행 2:33), 갈망하고 기도하며 기다렸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에게는 성령님이 불처럼 임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에게는 성령님이 충만하게 임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반면 베드로가 만난 고넬료와 이방인들은 믿음은 있었지만, 마가다락방에 있던 사람들에 비해 신앙적인 깊이나 믿음, 갈망에 정도에 차이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이들에게 임하실 때는 충만하게 임하신 것이 아니라, 이들의 신앙의 상태에 따라 성령이 부어진 것입니다.
에스겔의 표현을 빌려 말하면, 이방인들에게 성령이 임하실 때 어떤 사람에게는 발목까지, 어떤 사람에게는 허리까지 임한 것입니다(겔 47:2-5). 그래서 이때 성경이 성령이 충만했다는 단어를 쓴 것이 아니라, 성령이 부어졌다고 말을 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성령충만에 대한 특징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또 우리가 알아야 할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에 대한 다른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성령세례가 “단회적인”체험이라면, 성령충만은 “다회적인” 체험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세례는 물세례처럼 원칙적으로 한번 경험하는 체험인 것에 반해, 성령충만은 “충만과 소진, 채워짐”이 반복되는 체험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것을 성경을 통해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제자들이 마가다락방에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지만, 사역이 진행된 후에 또 4장에서 성령충만을 다시 받지 않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이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령세례는 성령님이 임하실 때 일어나는 단회적인 체험이라면 성령충만은 소진과 채워짐이 반복되는 다회적인 체험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래서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해지도록, 성령충만을 유지하도록 애를 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에 대해서는 다음 편을 통해 자세히 나누기 원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성령 세례 와 성령 충만 의 차이 주제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참조하세요.

[신앙문답] 중생, 성령 세례, 성령 충만의 차이점은 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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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성령 세례 와 성령 충만 의 차이

  • Author: 인바이블 말씀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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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2. 4. 28.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kToTnxnzkt8

[신앙문답] 중생, 성령 세례, 성령 충만의 차이점은 뭔가요?

[질문]

안녕하세요.. 모태 신앙으로 교회를 20년 넘게 다닌 대학생입니다. 요즘 성경에 대해 약간 어려움이 있어 이렇게 글을 남깁니다. 친구 중 한 명이 ‘중생과 성령 세례 그리고 성령 충만의 차이점’이 무엇이냐고 물어왔습니다. 저 역시 명확하게 시원하게 잘 알지 못해 나중에 알려 준다고 했어요,,-,-;; 꼭 좀 가르쳐주세요,, 중생과 성령 세례 그리고 성령 충만의 차이점에 대해서 말이에요,,그럼 답변 기다리겠습니다. 주 안에서 늘 평안하세요~!

[문답]

1. 중생, 성령 세례, 성령 충만에 대해서는 사람들마다 약간 다르게 정의하고 있기 때문에 명확하게 정의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그 차이점만 간단하게 비교해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2. 중생 신약 성경에서 “중생”(regeneration)이란 말은 2번 사용되었습니다(마 19:28, 딛 3:5). 우리 말로 “중생”이라고 번역된 말은 헬라어 “팔린게네시아스”란 말을 번역한 말입니다. 이 말은 “팔린”(다시)이라는 말과 “게네시아스”(출생)란 말이 합쳐진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재출생”, 또는 “새로운 출생”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유대인 학자 니고데모를 보고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요 3:3). 여기에서 “거듭난다”는 말은 “재출생”, 또는 “위로부터의 출생”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거듭난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이 어떻게 모태에 들어갔다가 다시 태어날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이때에 “주님은 육신을 통해 난 것은 육신이고, 성령을 통해 난 것은 영이라”고 하셨습니다(요 3:4-6). 주님은 “물과 성령으로 다시 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주님의 말을 통해서 세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 사람은 육신의 출생 외에 성령을 통한 제2의 영적인 출생이 가능하다. 2) 성령을 통한 제 2의 출생을 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볼 수도 없으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도 없다. 3) 성령을 통한 제 2의 출생은 모든 신자들에게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이다.

우리가 어머니를 통해서 아기가 태어나는 것을 제 1의 출생이라고 한다면, 성령에 의해 천국 백성으로 다시 태어나는 영적인 출생을 “중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일은 구원과 동시에 일어나며, 성령께서 주관하시는 일로서, 모든 성도들에게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3. 성령 세례 구약 시대에는 특별한 사역자들에게만 성령이 주어졌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성령은 거룩한 일을 맡은 사람들에게 임하셨으며, 그들이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특별한 힘과 능력을 부여했습니다. 그러나 요엘 선지자는 말세가 되면 하나님께서 “모든 육체”에 성령을 부어주실 것이라고 예고한 바 있습니다(욜 2:28). 그리고 사도 베드로는 오순절에 성령이 임했을 때 이러한 요엘의 예언이 이루어졌다고 말했습니다(행 2:17). 사도 베드로는 “자기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기만 하면 누구든지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행 2:39). 그 후에 이방인인 고넬료의 가족 역시 주님을 믿을 때에 성령이 임했습니다. 주님께서 오신 신약 시대는 요엘의 예언과 같이 “누구든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수 있는 축복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성령의 세례”는 예수를 믿을 때에 “성령을 선물로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받는 물세례는 성령 세례를 받았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예수님은 믿는 자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셨습니다. 성령 세례는 다음과 같은 4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1) 구원과 성령 세례는 동시에 일어난다. 성령 세례는 몇몇 특별한 그리스도인만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받는 사람은 누구나 성령을 선물로 받습니다(행 2:38-39). 구원 받는일과 성령세례를 받는 일은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2)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다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여기에는 그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고전 12:13)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3) 성령 세례는 일생에 단 한 번만 받는다. 우리가 물 세례를 한 번 받는 것처럼, 성령 세례도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에 단 한 번만 받습니다. 성령 세례는 한 번 받은 후에는 반복될 수 없으며, 또한 상실되지도 않습니다. 성령 세례는 요엘이 말한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을 알리는 징표입니다(엡 4:5).

4) 성령 세례는 사람이 받으려고 노력해서 받는 것이 아니다. 성령 세례는 성령 세례를 받으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에, 그리고 중생하게 될 때에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구원과 중생, 그리고 성령 세례는 거의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의지와는 관계 없이 주님을 믿을 때에 저절로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4. 성령 세례와 성령 충만의 차이 1) 성령 세례는 예수를 믿을 때에 받게 되지만, 성령 충만은 예수를 믿은 후에 일생에 걸쳐서 받게됩니다.

2) 성령 세례는 예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받게 되지만, 성령 충만은 헌신된 사람들만이 받을 수 있습니다(행 6:3,5).

3) 성령 세례는 예수 믿을 때에 단 한 번만 받게 되지만, 성령 충만은 일생에 걸쳐서 계속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4) 성령 세례는 한 번 받으면 소실되는 일이 없지만, 성령 충만은 성령을 근심케 할 때에 소멸(성령의 감동을 불을 끄듯이 막음)될 수 있습니다.

5) 성령 세례는 믿을 때에 일어나지만, 성령 충만은 이미 믿은 성도들에게 죄를 이길수 있는 힘을 주고, 복음을 전할 능력을 주며, 삶 속에서 성령의 열매를 맺도록 만들어 줍니다.

6) 일부 사람들은 성령 충만하면 귀신을 쫓거나 방언을 하고, 또 능력을 행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성령 충만보다는 “성령이 주시는 은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고전 12장,14장). 성령 충만은 성령의 열매(사랑, 기쁨,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등)로 나타납니다.

7) 성령 충만은 죄를 이기게 하고 자원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만들어 줍니다. 사람들은 자기 힘으로 강력한 죄의 세력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성도들이 죄를 이길 수 있도록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성도들은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죄에 대해 승리하거나 자원해서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습니다. 신약 시대의 성도들의 승리의 비결은 성령 충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성도들에게 술 취하지 말고 “계속해서 성령 충만을 받으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출처:bilbenar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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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어떻게 다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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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둘 다 성령의 역사지만 다른 개념입니다. 이 둘의 차이를 아는 것은 결혼과 결혼생활을 아는 것과 같습니다. 결혼과 결혼생활의 차이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결혼을 해야 법적 부부가 됩니다. 그러나 부부가 되었다고 결혼생활이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부부가 서로 지속적으로 사랑하고 서로의 의무와 책임을 다할 때 행복한 결혼생활이 유지됩니다. 이제 이 둘의 상관관계가 성령세례와 성령충만과 같다는 의미를 이해하실 것입니다. 성령세례가 결혼과 같다면 성령충만은 결혼생활과 같은 것입니다.

먼저 성령세례가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1) 세례의 종류

성경은 세례가 세 가지가 있다고 증언합니다. 세례 하면 생각나는 사람은 세례자 요한입니다. 세례(침례)요한은 제사장 사가랴의 아들로서 예수님보다 6개월 일찍 태어나서 메시아의 길을 예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한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로 메시아의 오실 길을 예비하는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였습니다(사 40:3, 말 3:1). 그는 회개를 촉구하며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요단강에서 사람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 때, 자신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에게 참된 회개를 촉구하며 이렇게 불같이 외쳤습니다: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발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태복음 3:11-12)

세례요한은 ‘물세례’, ‘성령세례’와 ‘불세례’가 있다고 말하며 자신이 지금 주는 것은 물세례라고 말합니다. 그가 비록 어머니 태중에 있을 때부터 성령 충만하였지만(눅 1:15), 그도 성령세례를 받아야만 하는 죄인이었습니다. 아무튼 성령세례와 물세례는 그보다 능력이 많은 어떤 분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이가 없다”라고 말했습니다(눅 7:28). 그렇다면 세례요한보다 큰 자는 하나님 한 분밖에는 없습니다.

2) 성령세례와 불세례

물세례는 회개의 세례이고, 세례요한이 준 것처럼 인간이 주는 세례입니다. 그러나 성령과 불세례는 오직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참고로 예수님은 물로 세례를 주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준 것이라”(요 4:2)

•성령세례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행 1:5)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이 성령세례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연장선상에 놓인 구속사역의 프로세스 중 하나입니다. 즉, 성령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사역을 실제로 죄인들에게 적용하시는 사역으로서 우리의 구원과 영적 출생을 위한 것입니다(고전 13:12). 성령세례는 예수님의 생명(숨, 호흡)을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에게 불어넣는 재창조(우리 입장에서는 거듭남) 사역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요 20:22)

이 성령세례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하셨던 코에 생기를 불어넣는 장면과 같다 할 수 있습니다(창 2:7). 우리가 중생하는 순간 성령은 우리에게 인간의 영을 창조하시고 우리 몸에 내주합니다(고전 3:16, 6:19).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내주 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는 존재가 됩니다(롬 8:15).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불세례

성령세례가 구원과 영적 출생을 위한 필수 과정이라면, 불세례는 성령세례를 받지 못한 자들에게 임하는 심판을 의미합니다.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태복음 3:11-12). 쭉정이 즉,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한 모든 사람들은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지는 운명에 처하게 됩니다. 불은 정화와 소멸, 고통을 동반하는 재앙이나 심판을 의미합니다. 불로 세례를 받는 다는 것은 그 자체로 너무도 끔찍합니다. 꺼지지 않는 불은 지옥에서 타오르는 불입니다(계 19’20, 20:10, 21:8).

구원과 심판은 오직 하나님께서 그 권한을 위임받은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마 3:11-12, 행 1:5).

3) 성령세례와 자녀됨

우리가 믿는 순간 성령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시고 그 영원한 관계는 취소될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성경에서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그리스도 안에”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서술합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2).

이 관계는 영원한 관계입니다. 그 누구도 끊을 수 없습니다(로마서 8장, 요한복음 10:28). 제거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이 관계의 보증이시기 때문입니다.

3) 성령충만이란

우리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어도, 우리의 혼은 성령으로 충만할 때만 성령의 다스림 아래에 있게 됩니다. 일단 성령이 우리 몸에 내주하게 되면 성령은 결코 우리를 떠나지 않습니다(롬 8:9). 하지만 우리가 죄를 짓게 되면 성령의 충만을 잃고 성령의 다스림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이 때문에 성경은 우리에게 성령으로 충만하라고 명령하고 있지(엡 5:18) 결코 성령으로 내주하게 하라고 명령하지 않는 것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 5:18)

성령충만은 성령께서 우리를 온전히 지배하시고 다스리시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임계점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임계점(臨界點, Critical point)은 액체가 기체로 변하는 최대의 온도-압력 한계점을 의미합니다. 임계점이 이르기 전에는 액체가 기체가 되지 못합니다. 기체가 되었어도 임계점 이하로 떨어지면 액체로 변화합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롬 7:18-19)라고 말하며 괴로워했습니다.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

우리가 거듭났지만 우리 안에 죄성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성령충만하지 않으면 이 죄성이 우리를 다스리고 지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육체(죄성, 옛자아)의 지배아래 놓여 육체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임계점 아래로 떨어진 기체가 액체 상태로 변화된 것과 같습니다. 성령충만하던지 아니면 죄성의 지배아래 놓이든지(육신에 속한 상태) 둘 중 하나의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그 중간은 없습니다. 신앙 생활에서 회색지대는 결코 존재하지 않습니다.

•육신에 속한 상태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영적인 사람을 대하듯이 말할 수가 없어서 세속적인 사람,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를 대하듯 말합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젖을 먹이고 단단한 음식을 먹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그것을 소화시킬 능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직도 여러분은 세상 사람들처럼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시기와 다툼이 있는데 어찌 육적인 세상 사람들처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고린도전서 3:1-3)

육신의 속한 자의 특징을 ‘어두움 가운데 행하는 상태’라고 요한은 표현했습니다(요한일서 1:5-7).

•주도권 싸움

영적인 출생 때부터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과 우리 육체 안에 거하는 죄성은 서로 주도권 타툼을 하게 됩니다(로마서 7:18). 이 주도권 싸움에서 우리의 지배권을 결정하는 것이 바로 우리들 자신, 우리의 의지입니다. “너희가 어느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찌니라?”(왕상 18:21).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의지, 신앙)을 얻기 위해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가 대결은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성령과 죄성의 영적인 전투를 비유하는 이미지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죄성의 지배아래 놓이게 될 때 성령께서는 슬퍼하시고 근심하십니다(에베소서 4:30). 그 상태가 지속되게 되면 성령은 소멸됩니다(데살로니가전서 5:19). 성령께서 사라지거나 떠나신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령을 근심시키는 상태가 되면 우리는 성령께서 공급하시는 영적인 자원과 능력이 우리에게 흘러오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아의 능력으로 살게 되며 그 열매는 쓴뿌리에서 기인한 것이기에 쓸 수밖에 없습니다(히브리서 12: 15). 우리가 성령을 소멸시키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성령의 인도를 받지 못하게 되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게 되어 GPS가 고장나 방향을 잃고 표류하는 배와 같습니다.

성령의 내주하심이 성령충만의 절대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닙니다. 성령충만을 결정짓는 것은 성령님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입니다.

4) 성령충만과 성령의 열매

우리들이 성령께서 역사하실 수 있는 밭이 되면 성령께서는 우리를 통해 당신의 어떠함을 나타내십니다(고린도전서 12:7). 우리의 생각, 표정, 말과 행동을 통해 드러나게 됩니다. 이것이 성령의 열매입니다(길라디아 5:22-24).

•성령의 열매

성령충만이 지속되어 인격의 변화가 열매로 나타나는 것이 성령의 열매입니다.

오직 성령에 충만한 그리스도인만이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고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매일의 삶속에서 산제물(살아있는 제물)처럼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을 영적으로 성장한 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베드로후서 3:18).

“여러분은 우리 주님이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분을 아는 지식에서 점점 자라가십시오. 주님께 이제와 영원히 영광이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베드로후서 3:18)

•결정자

그럼 성령충만과 육의 충만의 임계점을 긋는 선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율법(하나님의 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난 것이 죄입니다. 그 죄는 우리를 영적인 어두움으로 덮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관계는 어그러지고 멀어집니다.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사 59:2).

•회복의 길

죄성은 지배아래에서 벗어나 임계점을 통과하여 성령충만으로 나아가는 길은 회개입니다(요한일서 1:9).

“우리가 우리 죄를 고백하면 신실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은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죄악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입니다”(요한일서 1:9). 회개를 통해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다시 회복되면 우리는 다시 성령의 충만한 상태가 되어 아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5) 그러므로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결혼과 결혼생활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결혼을 잘 했는데 결혼생활이 실패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교인들에게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렇게 호소합니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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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ST

Billy Graham의 주장: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서로 다른 것이다.”

     Billy Graham의 주장: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서로 다른 것이다.”

오늘날 전 세계의 신학계에서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의 관계를 성경에서 밝혀내지 못하여 성령론에 대하여 기독교 내에서 끝없는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신학계에서 아래와 같은 두 가지의 견해가 공존하고 있다. 이 두가지의 관계를 모르면 성령세례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따라서 반드시 알고 성령세례에 접근해야 한다. 장로교를 위시하여 비 오순절교단은 “물세례 받을 때 성령세례를 받는다. 물세례는 외적 상징이며 성령세례는 내적 실체이다. 성령세례는 중생 시에 모두 받는 것이다.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별개의 관계이다. 중생 시에 성령세례를 모두 받았으니(고전 12:13), 성령충만을 받아야 한다. 이 사실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한국 오순절교단을 대표하는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는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동의어의 관계라고 주장하면서, 한편으로 동의어의 관계가 아니라고 하여 횡설수설한 상태에 있다. 오순절교단은 “행 10장의 고넬료는 중생 시에 성령세례를 받았다. 오늘날에도 중생 시에 받는 경우도 있으나, 예수님의 120명의 제자들이나 사마리아 신자들처럼 중생 시에 받지 못하고 중생 후에 받기도 하는 것이니 못 받았다면 받아야 한다. 이 사실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양측에서 다 같이 공통적으로 “성령세례는 처음 한번 받는 것이며, 성령충만은 계속하여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양 교단에서 이상과 같이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의 관계에 대하여 완전히 서로 다른 주장을 하면서 성경에 근거한 해석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과 같이 성경에 근거했다면 이와 같이 서로 다른 주장을 하게끔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는 말인데 이 말은 그릇된 것이다. 그러나 성경을 바르게 번역하고 바르게 해석하면 상반되는 주장이란 절대로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성경은 무오류의 진리의 말씀이기 때문이다(잠 30:5-6). 두 교단 모두가 고전 12:13, 행 8:14-19, 10:47, 19:2, 요 7:39, 14:17, 20:22, 롬 8:15, 고전 2:12, 7:40, 갈 3:2 등의 그릇된 번역을 맞는 것으로 믿고 착각하여 잘못 연구하여 두 가지의 상반된 주장이 나오게 된 것이다.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의 관계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

매튜 헨리가 말하는 성령세례와 성령충만

행 1:4-5에서 그들이 곧 성령을 받으리라는 특별한 보장과 그 성령을 기다리라는 명령이 주어지고 있다. “너희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야 될 것이다”라고 말씀되고 있다. 즉 다음과 같은 뜻이다. “너희에게 성령이 어느 때보다 풍족하게 부어질 것이다”라고 한다. 그들은 전보다 더욱 풍성하고 힘있게 성령으로 충만하였다. 그들은 복음을 확장시키기 위하여 기적적인 능력을 입게 되었고 120명의 제자가 동시에 같은 성령에 충만하였다. (매튜 헨리, ‘성서주석 사도행전’ [상] p.32,33,68)

베이커 주석이 말하는 성령세례와 성령충만

유월절 다음에 오는 국가의 명절인 오순절 날은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는 약속에 놀랍게도 꼭 들어맞는다(베이커 성경주석 ‘사도행전’ [상] p.102). 오순절 날에 모든 제자들이 성령으로 충만하였다. 성령께서는 예전에는 없던 방법으로 그의 완전한 구원활동으로 그들에게 임했다(요 7:39). 승천하시기 전에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요 20:22). 그런데 지금까지는 성령께서 그의 충만한 은혜의 능력을 그들에게 나누어 주시지 않았다(베이커 성경주석 ‘사도행전’ [상] p.106). 에베소 교인들의 경우에 있어서는 오순절의 불세례가 물세례 의식의 반복을 불 필요하게 했을 것이다(베이커 성경주석 ‘사도행전’ [하] p.254).

여기에서 매튜 헨리는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의 관계에 대하여 일목요연하게 말하지 아니 했으나 두 가지를 동의어로 취급하고 있다고 추론할 수 있다. 베이커 성경주석은 행 1:5의 성령의 세례와 행 1:8의 성령의 권능과 행 2:4의 성령의 충만의 관계에 대하여 일체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베이커 성경주석은 여기에서 “오순절 날 성령의 세례를 받았다. 오순절 날 불세례를 받았다. 오순절 날 성령의 충만을 받았다”하여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을 같은 뜻으로 사용하고 있음을 추론할 수 있다.

Billy Graham이 말하는 성령세례와 성령충만

성령세례는 중생 시에 받는 것이므로 성경에서 이를 구하라고 말하지 않고 있다. 성경 어느 곳에도 성령세례를 받으라는 유사한 기술이나 명령은 없다. 그러나 성령충만을 받으라는 명령은 있다. (Billy Graham, ‘The Holy Spirit’ p.103,140)

Billy Graham의 주장: “성령세례는 오순절 날 한번 있었다.”

본인은 수년간의 성경공부를 통하여 회심(conversion)의 순간에 모든 믿는 자들의 생애에서 오직 한번 성령세례를 받는 것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이는 오순절 날에 시작되었는데 예수님을 구세주로 인정하는 모든 사람은 이 경험을 나누어 가지며 믿는 자들이 중생하는 순간에 성령세례를 받는다. 추가하여 성령충만을 받을 수 있다. 만약 성령충만을 받지 아니했다면 받을 필요가 있다. 나는 성령세례는 반복되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성경기록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고전 12:13에서 성령세례는 과거의 완성된 사건이었음을 보여준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믿는 모든 자들을 위한 것이었듯이 성령세례도 오순절 날 한번 있었던 것으로 믿는 자들이 나누어 갖는 것이다. 모든 기독교인들은 성령충만을 받아야 한다는 명령을 받았다. (Billy Graham, ‘The Holy Spirit’ p.67,114)

John R. W. Stott가 말하는 성령세례와 성령충만

오순절 날 일어난 사건은 예수님이 하늘로부터 성령을 부어주셨고 그리하여 예수님은 처음에 120명의 제자들에게 그리고 3,000명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었다. 이 성령세례의 결과 120명은 성령충만을 받았다(행 2:4). 그리하여 성령충만은 성령세례의 결과였다. 세례는 예수님이 행하신 것(하늘로부터 성령을 부으심)이었고, 충만은 제자들이 받은 것이었다. 신약성경에 성령세례를 받으라는 유사한 기술이나 명령은 없다. 그러나 성령충만을 받으라는 명령은 있다. (John R.W. Stott, ‘Baptism and Fullness’ 1964년 초판발행 p.48,50. 영국성공회 목사)

이상의 Billy Graham과 John Stott는 “성경 어느 곳에도 성령세례를 받으라는 유사한 기술이나 명령은 없으나 성령충만을 받으라는 명령은 있다”고 하여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서로 다르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한편 Billy Graham은 성령세례도 오순절 날 한번 있었던 것이라고 하였는데, 행 2:4에 실제로 오순절 날 성령충만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Billy Graham의 “오순절 날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말과 “오순절 날 성령충만을 받았다”라는 기록에 근거하면 그는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같은 뜻으로 취급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그러나 그는 한편으로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서로 다르다는 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에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의 관계에 대한 그의 주장은 분명히 모순 속에 있다.

Richard B. Gaffin이 말하는 성령세례와 성령충만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동일한 것이 아니다. 성령세례는 회심 때 단회적으로 일어나는 것이지만 성령충만은 신자의 생활 속에서 계속되는 과정 혹은 활동이다.(Richard B. Gaffin, ‘Perspectives on Pentecost’ p.32, 웨스트민스터신학교 교수)

John F. Walvoord가 말하는 성령세례와 성령충만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동일한 것이 아니다. D. H. Dolman은 세례와 충만은 동의어라고 했는데 이는 혼란을 일으키는 말이며 비 성경적인 가르침이다. (John F. Walvoord, ‘The Holy Spirit’ p.139,194. 달라스신학교 교수 및 학장)

J. Oswald Sanders가 말하는 성령세례와 성령충만

오순절 날에 제자들이 받은 권능은 성령충만의 결과였지 성령세례의 결과는 아니었다. 세례(baptized), 충만(filled), 받는다(received) 등의 단어를 서로 혼용해서 사용할 수 있으며, 그리고 실제적으로 동의어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성경과 어원학의 양면에서 지지를 받을 수 없는 터무니 없는 억측이다. (J. Oswald Sanders, ‘The Holy Spirit’ p.69. 뉴질랜드성서훈련원 원장)

W. A. Criswell이 말하는 성령세례와 성령충만

사도행전 2:4에 ‘그들이 성령충만을 받았다’고 했지 ‘그들이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하지 않았다. 성경 어디에도 그들이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말이 결코 없다. 오순절과 가이사라의 두 경우에 그들이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동시에 일어났기 때문에 성경교사들이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을 동일한 것으로 만들었는데 이는 비극적 실수이다. 세례(baptism)는 충만(filling)이 아니다. John Wesley, Charles Finney, Dwight L. Moody, R. A. Torrey를 위시한 몇몇은 성령충만을 받았는데 Torrey를 위시한 몇몇은 성령충만을 성령세례라고 잘못 말하고 있다. (W. A. Criswell, ‘The Baptism, Filling & Gifts of the Holy Spirit’ p.6 미국 달라스 제일침례교회 목사)

Rene Pache가 말하는 성령세례와 성령충만

성경에 믿는 자에게 성령세례를 구하라고 강조한 구절이 어느 곳에도 없다.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세례 받을 때 성령충만을 받았다. 성경 어느 곳에도 예수님께서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말이 없다. 사도행전 1:5에 의하면 120명은 오순절 날 성령세례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성령충만도 받았다. (Rene Pache, ‘The Person and Work of the Holy Spirit’ p.72,78. 불란서 파리신학교, 스위스 엠마오신학교 교장)

Anthony A. Hoekema가 말하는 성령세례와 성령충만

우리는 신약성경에서 믿는 자들에게 성령의 세례를 구하라는 구절을 발견할 수 없으며 어느 곳에서도 사도들이 이러한 세례를 구하라고 가르치는 것을 찾아볼 수 없다. 에베소서 5:18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명령하고 있다. (Anthony A. Hoekema, ‘What About Tongue-Speaking’ 번역서, p.139-140 미국 칼빈신학교 교수)

Robert G. Gromaki가 말하는 성령세례와 성령충만

현대방언운동가들은 성령세례를 성령의 충만과 혼동하였다. 성령세례는 비 경험적이지만 성령의 충만은 경험적이다. 성령세례를 받으라는 명령은 없지만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명령은 있다. (Robert G. Gromaki, ‘The Modern Tongues Movement’ 번역서, p.131,153)

J. E. Stiles가 말하는 성령세례와 성령충만

성령세례란 말이 오순절 이후 행 11:6에서 행 1:5의 예수님의 말을 인용한 것 외에 전혀 사용되지 않고 있다. 행 8:17에서 성령을 ‘receive’했다고 했지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말하지 않고 있다. 행 9:1-17에서 우리가 통상 듣는대로 성령세례를 받으라고 말하지 않고 성령충만을 받으라고 말하고 있다. 행 10:1-48에서 세례가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강림했다는 말이 없고 성령이 모든 사람에게 임했다고 하였다. (J. E. Stiles, ‘The Gift of the Holy Spirit’ p.33-34)

Merrill F. Unger가 말하는 성령세례와 성령충만

오순절 날의 권능의 경험은 성령세례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성령충만에 의한 것이었다(행 2:4).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동의어가 아니다. 세례와 충만이란 단어는 전적으로 구분된다. 성령세례는 구원의 중요한 부분이며 요소이다(고전 12:13). 성경에 성령세례는 받으라는 명령은 없으나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충만을 받으라는 명령을 받았다(엡 5:18). (Merrill F. Unger, ‘방언론’ p.21,59)

구약시대에는 오순절과 같은 성령세례의 사역이 없었다. 오순절의 성령세례는 최초의 역사적 사건이다. 성령의 세례의 사역은 새로운 세대의 총체적으로 독특한 사건이며 오순절 날 처음으로 이루어졌다. (Merrill F. Unger, ‘The Baptism & Gifts of the Holy Spirit’ p.65-66 미국 달라스신학교 학장)

C. Peter Wagner가 말하는 성령세례와 성령충만

Others, and I find myself part of this group, believe that Holy Spirit baptism ordinarily takes place as a part of conversion because Paul says, “For by one Spirit we were all baptized into one body”(1 Cor. 12:13). We prefer to call subsequent experience “fillings of the Holy Spirit.” (C. Peter Wagner, ‘Acts of the Holy Spirit’2000, p.464 미국 풀러신학교 교수)

Richard B. Gaffin, John F. Walvoord, J. Oswald Sanders, W. A. Criswell, Anthony A. Hoekema, J. E. Stiles, Merrill F. Unger, C. Peter Wagner는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성령 세례와 성령충만은 같은 뜻이 아니라 서로 다른 뜻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박형룡 목사가 말하는 성령세례와 성령충만

신약에서 물세례가 죄를 씻어 깨끗케 하는 정화의 의미를 가지느니 만큼 성령의 세례는 죄를 제거하는 정화하는 사역인 것이다. 사도행전 2,8,19장에 의하면 성령의 은사 혹 세례는 신자들의 최초적인 체험이다. 이 말씀들에 의해 세례의 개념을 살펴보면 물세례는 성령의 세례를 상징하는바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들어가는 최초 의식이며 모든 신자들에게 보편한 것이다. 고린도전서 12:13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다”는 말씀은 이 은사의 보편성을 명확히 제시한다. 성령의 세례가 몇 사람들이 즐기는 제2차적이요 또 따라오는 체험이 아니라 모든 신자들이 즐기는 최초적 보편적인 체험이다. 신자가 성령의 세례로 구원을 받고 영적 생활을 계속하는 도중에 반복하여 받는 성령의 비상한 은혜는 성령의 충만이다. 성령충만은 성령의 세례와 다르다. 오순절 날에 모인 120명의 성도들은 본래 성령으로 세례 받아 중생한 자들로서 이 날에 성령의 충만을 받았다. 이것을 성령의 세례라 한 것은 예외의 표현인 듯하다(행 1:5). 신약에 성령의 세례는 받으라는 호소와 명령은 없고 성령의 충만에 관해서는 모든 신자들이 이것을 받으라는 명령과 권면이 자주있다. (박형룡 목사, ‘교의신학 구원론’ p.51-57, 프린스톤신학교 졸업, 평양장로회신학교 교수, 부산고려신학교 교장, 서울 장로회신학교, 서울 장로회총회신학교 교수 및 교장 역임)

박아론 목사가 말하는 성령세례와 성령충만

오순절주의에서는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을 동일시한다. 성령세례의 별명을 불세례라 한다. 성령세례를 받음으로 기성신자, 교회들이 능력을 받아 능력있게 전도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다르다. 같다고 하면 오순절주의자다. 성령세례가 먼저 있고 그 다음이 성령충만이다. 웨스트민스터신학교는 전통보수의 전당이다. 미국에서의 개혁주의 신학의 최후의 보루이다. (1995년 8월 11일 웨스트민스터신학교 한인목회자 연장교육에서의 박아론 목사의 강의록에서 발췌, 강의 제목: ‘현대교회의 성령운동과 오순절성령운동, 보수신학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미주한인예수교장로회의 목사고시의 주제

진정한 은혜와 은사의 구분은 물론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을 구분하지 못하고 교회성장이라는 대의 명분아래 광분하고 있는 현대판 교회상(특히 한국과 미국 및 세계교회)을 근거 있는 자료로 비판 및 판단하고 논하라. (1987년 1월 LA한국일보. 미주 한인예수교장로회 총회 1986년 목사고시 공고문에서 발췌. 총회장 황보연준, 고시부장 황성수 목사)

김의환 목사가 말하는 성령세례와 성령충만

많은 신자들이 신령한 축복을 말할 때에 믿음으로 오는 중생 다음에 두 번째로 성령 축복을 받아야 하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믿음으로 얻은 칭의로 구원을 얻으나 두 번 째 축복인 성령세례를 받아야 더 큰 은혜를 입게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믿음으로 칭의를 얻어 구원 얻은 다음에 열심히 기도하고 헌신함으로 성령 받은 것처럼 비 복음적 신앙을 가르치는 자들이 있다. 이것은 분명히 다른 복음이다 (김의환 목사, ‘성경적 축복관’ p.62-63). 성령의 세례와 성령충만은 다르다. 성령의 세례는 구원과 관계가 있고 성령충만은 증거와 전도와 관계가 있다. (김의환 목사, 1993년 1월 20일 ‘개혁주의 성령론’ 강의안에서 발췌, 한국 장로교합동 총신대 총장 및 한국 칼빈신학교 총장 역임)

이윤근 목사가 말하는 성령세례와 성령충만

성령의 세례와 성령의 충만함과 능력 즉 권능은 별개의 문제이다. 성령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와 연합하고(고전 12:13, 마 16:16-17),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수를 전해야 하겠다. 그렇게 하라고 성령의 능력(권능)을 입혀 주는 것이다. (이윤근 목사, ‘개혁주의 성령론’ p.212)

홍정길 목사가 말하는 성령세례와 성령충만

오순절 다락방에서 성령님이 교회를 향해서 세례를 주셨다. 이 세례라는 말은 주께서,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거하신다는 말이다. 오순절 다락방에 성령님의 강림이 임하셨다. 성령 하나님이 강림하신 것, 전능하신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 거하시면서 우리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으로 강림하신 날을 성령강림절이라 하고 성령님께서 이때 임한 것을 세례라는 말로 표현했다. 그래서 너희가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하셨다. 에베소서 5:18에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명령했다. 성령의 세례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성령의 세례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 개인의 구주로 영접할 때 이미 받는다. 그것이 성경 전체가 말씀하고 있는 내용이다. 성령세례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있는 사건이고 성령충만은 우리 속에 성령께서 풍성히 거하시는 것을 말한다. 결론적으로 성령세례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이미 받았으며 그 다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이 구할 것은 성령의 충만함이다. 왕이신 예수님의 말씀이 그 사람의 삶을 지배하는 것이 성령충만이다. 성령의 완전한 지배를 뜻한다. 그러므로 성령충만은 우리가 성령을 얼마나 받느냐 소유하느냐가 아니라 성령님께서 나를 얼마나 지배하시느냐 소유하시느냐 하는 것이다. (홍정길 목사, 옥한흠 목사 편집, ‘현대교회와 성령운동’ p.114-115,118,120,124,133)

이상에서 박형룡 목사, 박아론 목사, 김의환 목사, 이윤근 목사, 홍정길 목사는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같은 뜻이 아니라 서로 다른 뜻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고 있다. 이상에서 홍정길 목사는 “너희가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하셨다. 오순절 다락방에서 성령님이 교회를 향해서 세례를 주셨다. 성령 하나님이 강림하신 날을 성령강림절이라 하고 성령님께서 이때 임한 것을 세례라는 말로 표현했다”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그 뜻이 완전히 다르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주장을 한마디 간략하게 요약한다면 “제자들은 오순절 날 성령세례를 받았는데, 이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별개의 것”이라는 것이다. 이는 사도행전 2:1-4의 기록을 제대로 읽어보지 않고 무책임하게 해석한 전혀 그릇된 주장이다. 사도행전 2:1-4의 기록에 의하면 성령님께서 불의 형체로 제자들에게 임하시었고, 제자들은 모두 성령충만을 받았다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그의 주장대로 오순절 날 제자들은 분명히 성령세례를 받았다. 그런데 사도행전 2:1-4에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기록은 없고 대신에 성령충만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바른 해석은 “오순절 날 제자들은 성령세례를 받았다. 오순절 날 제자들은 성령충만을 받았다”이어야 한다. 따라서 두 용어는 같은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홍정길 목사는 바로 이러한 두 용어의 관계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착각 속에서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별개의 관계라고 그릇 주장하게 된 것이다. 위에서 “성령세례는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거하신다는 말이다. 성령충만은 우리가 성령을 얼마나 받느냐 소유하느냐가 아니라 성령님께서 나를 얼마나 지배하시느냐 소유하시느냐 하는 것이다”라는 주장도 전혀 그릇된 것으로 성경에 근거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전적으로 자의적인 해석에 불과하다. 행 1:5,8, 2:1-4의 관계를 연구하면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의 뜻은 “성령(님)의 권능을 받는 것이다”라는 것으로 간결하고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음이 밝혀진다.

박형용 목사가 말하는 성령세례와 성령충만

세례 요한의 말처럼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획대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들을 위해 구속을 성취하셨다(롬 4:25). 그런데 십자가에서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구속을 성취하신 예수님이 40일 동안 부활체로 이 땅위에 계시면서 하신 말씀이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 1:5)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누가 읽더라도 사도행전의 맥락으로 볼 때 사도행전 2장의 사건인 오순절 사건을 가리키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행 2장의 오순절 사건이 성령세례 사건이었음을 인정하는데 어려움이 없는 것이다. 성경은 오순절 사건이 “성령세례 사건”이라고 증거하는 것이다. 이런 축제의 날에 역사적인 오순절 사건이 발생했다. 오순절 성령세례 사건은 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상황으로(행 2:2) 그리고 볼 수 있는 상황으로(행 2:3) 전개되었다. 그리고 거기에 모인 제자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여러 나라 말로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 (박형용 목사, ‘성령론연구’ 2007년 6월 15일 www.youngpark.net에서 발췌)

이상에서 박형용 목사는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두 사건의 관계를 일목요연하게 설명하지 않고 있다. 행 2:1-4에서 오순절 날에 제자들은 성령충만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박형용 목사는 오순절 사건은 성령세례의 사건이라고 말하며 제자들은 오순절 날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하였다. 따라서 여기에서 박형용 목사는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을 분명히 같은 의미로 취급하고 있음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또한 박형용 목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오순절 성령세례의 사건(행 1:5)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사건처럼 역사적으로 유일한 사건이지만 성령의 충만(행 2:4)은 성령세례 받은 사람이 계속적으로 받을 수 있는 것이다. 해리슨(Everett F. Harrison)은 “누가가 세례 대신에 충만이란 용어를 썼다. 충만과 세례는 완전한 동의어가 아니다”라고 했다. 성령세례는 단회적인 것으로 성도들이 예수 믿을 때 경험하는 것이요(고전 12:13), 성령충만은 예수 믿은 이후 성령의 요구에 순종하면서 사는 삶을 가리킨다(엡 5:18-6:9).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성령세례 사건 역시 구약에서 예언된 사건이다. 오순절 사건이 발생한 후 제자들이 성령충만을 받고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게 되었다. (박형용 목사, ‘사도행전 주해’ p.58,283,312.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신약학 교수 및 총장 역임, 한국 웨스트민스터대학원대학교 총장)

박형용 목사의 주장을 요약하면 “성령세례는 예수님을 믿을 때 받지만 성령충만은 예수 믿은 후에 받는 것으로 두 용어는 다른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박형용 목사는 그의 글에서 “오순절 성령세례의 사건”(행 1:5)이라는 말과 “성령의 충만”(행 2:4)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여기에 사도행전 1:5에 기록된 성령세례를 오순절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했고, 사도행전 2:4에 기록된 내용을 성경 그대로 성령의 충만(행 2:4)이라고 하였다. 사도행전 2:4에 나오는 성령충만은 분명히 오순절 사건이었다. 따라서 그의 주장대로 오순절은 성령세례의 사건이 일어난 날이며, 오순절은 성령충만의 사건이 일어난 날이었다. 따라서 오순절의 두 사건은 별개의 사건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한 사건을 두 가지로 다르게 표현한 것이기 때문에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같은 말, 즉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박형용 목사는 이러한 사실을 스스로 혼동하고 있다. 또한 박형용 목사는 해리슨 (Everett F. Harrison)이 말하는 “누가가 세례 대신에 충만이란 용어를 썼다. 충만과 세례는 완전한 동의어가 아니다” 라는 주장을 수용하고 있다. 여기에 나오는 “대신”이라는 말의 사용법을 이해하면 해리슨이 “충만과 세례는 완전한 동의어가 아니다”라는 주장이 그릇된 것임을 바로 알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은사”라는 말 대신에 “선물”이란 말을 썼다고 한다면 “은사”라는 말과 “선물”이란 말은 같은 뜻이며, “아버지”란 말 대신에 “부친”이라는 말을 썼다면 이 두 말은 같은 뜻이다. 분명히 누가는 사도행전 2:4에서 사도행전 1:5에 나오는 성령세례의 용어 대신에 성령충만이란 용어를 썼다. 따라서 사도행전의 기록자인 누가는 여기에서 세례와 충만은 완전한 동의어로 사용한 것이다. 동의어라는 말은 용어의 표현이나 어원은 다르지만 그 뜻이 같다는 말이다. 사도행전 1:5의 예수님의 약속의 말씀에 따라 “120명의 제자들은 오순절 날에 성령세례 곧 성령충만을 받았다”라고 해석해야 올 바른 해석이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성령세례(행 1:5)와 성령충만(행 2:4)을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아니하면 성령론은 모순 속에 빠져서 바른 성령론의 정립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현대신학계에서 성령론 정립에 실패한 여러 이유 중의 하나이다.

또한 박형용 목사는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성령세례 사건 역시 구약에서 예언된 사건이다. 오순절 사건이 발생한 후 제자들이 성령충만을 받고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게 되었다”(행 2:4)라고 주장하는데, 이를 한 마디로 “제자들은 오순절 날 성령세례를 받고 난 후에 성령충만을 받았다”는 것이다. 사도행전 2:1-4의 기록을 통하여 이렇게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일체 없다. 그가 이렇게 그릇된 주장을 하게 된 근본 원인은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을 정연하게 정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박형용 목사는 “제자들은 오순절 날에 성령세례를 받았다. 제자들은 오순절 날에 성령충만을 받았다”라고 하여 두 사건은 같은 뜻의 동의어로 그의 글을 통하여 스스로 증거하고 있음을 보이고 있는데, 결론적으로 그는 두 용어의 관계를 정확하게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

이종성 목사가 말하는 성령세례와 성령충만

사도행전 2장 1-4절에서 성령충만이 방언의 원인이라고 한다. 성령세례라는 말은 없다. 성령세례에 직접 언급한 구절은 마 3:11, 막 1:8, 눅 3:16, 행 1:5, 11:16, 고전 12:13로 어느 곳에서도 성령의 세례를 받은 후에 방언을 했다는 말은 없다. (이종성 목사, ‘성령론’ 1992, p.327-8 동경신학대학 졸, 미국 풀러, 루이빌,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 졸, 연대신과대학 교수, 장로회신학대 학장 역임)

이종성 목사는 이상에서 “사도행전 2:1-4에서 성령충만이 방언의 원인이라고 한다. 성령세례라는 말은 없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행 1:5에 기록된 성령세례는 몇 날이 못되어 오순절에 일어날 사건이며 행 2:1-4의 성령충만은 행 1:5의 성령세례가 성취되는 사건이다. 즉 오순절 날에 성령세례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말씀이 오순절 날 성령충만으로 성취된 것이다. 따라서 “120명의제자들은 오순절 날 성령세례를 받을 것이다. 120명의 제자들은 오순절 날 성령충만을 받았다”라는 기록은 동의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이종성 목사는 “사도행전 2:1-4절에서 성령충만이 방언의 원인이라고 한다. 성령세례라는 말은 없다”는 그릇된 주장을 하고 있다.

이인한 목사가 말하는 성령세례와 성령충만

사도행전 10장의 경우를 보면 고넬료의 가정은 중생과 동시에 성령의 세례를 받았다(이인한 목사, ‘성령의 불세례’ p.60). 고넬료의 가정의 경우에 성령충만과 아울러 중생의 경험을 동시에 경험한 가정임을 알 수 있다(이인한 목사, ‘신자와 성령’ p.23). 그 누구를 막론하고 사도행전 1:5의 성취가 행 2:4이라면 확실히 성령의 세례와 성령의 충만은 구별해야 하며 성령의 세례 받는 결과가 성령의 충만임을 시인해야 한다. 중생, 성령세례, 성령충만, 성령은사의 4가지 과정은 성령께서 하시는 순서적 역사이다. (이인한 목사, ‘오순절과 성령의 불세례’ p.39,58)

이인한 목사는 이상에서 “고넬료의 가정의 경우에 성령충만과 아울러 중생의 경험을 동시에 경험했다”고 하여 “고넬료는 중생 시에 성령충만을 받았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고넬료의 가정은 중생과 동시에 성령의 세례를 받았다”고 하였다. 따라서 이상에서 그는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을 동일한 사건으로 설명하고 있다. 또한 이인한 목사는 “사도행전1:5의 성취가 행 2:4이라면 확실히 성령의 세례와 성령의 충만은 구별해야 하며 성령의 세례 받는 결과가 성령의 충만임을 시인해야 한다”고 하여 성령의 세례와 성령의 충만은 동일한 사건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인한 목사의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에 관한 성령론은 모순 속에 있다. 이인한 목사의 “사도행전 1:5의 성취가 행 2:4이라면 확실히 성령의 세례와 성령의 충만은 구별해야 하며 성령의 세례 받는 결과가 성령의 충만임을 시인해야 한다”는 주장은 전혀 그릇된 것이다. 바른 주장은 “사도행전 1:5의 성취가 행 2:4이라면 확실히 성령의 세례와 성령의 충만은 구별해서는 안 되며, 성령의 세례 받는 결과가 성령의 충만이 아니라 성령세례가 곧 성령충만이다”이어야 한다.

정원태 목사가 말하는 성령세례와 성령충만

중생과 성령의 기본세례(고전 12:3,13)는 동일한 사건을 각각 다른 차원에서 보는 것이다. 전통적 개혁교회에서 중생한 자는 성령의 세례를 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성령의 기본세례를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그들의 잘못을 회개하고 전혀 기도에 힘씀으로 성령의 생활충만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엡 5:18). 그리고 오순절 날에 이르매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능력세례를 베푸셨고(행 2:1-3), 그 결과 그들은 성령의 능력충만을 받은 것이다(행 2:4). (정원태 목사의 번역서 ‘로이드 죤스 성령세례’ 역자 서문에서 발췌, 총신연구원 졸, 미국 훼이스학교 졸, 미국 콩고드신학교 졸, 총신 교수 역임)

정원태 목사는 이상에서 “성령의 기본세례, 성령으로 능력세례, 성령세례, 성령의 생활충만, 성령의 능력충만”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의 관계의 설명에 있어서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이러한 혼란된 용어를 사용하게 된 원인은 고전 12:13의 그릇된 번역을 바른 번역으로 믿고 착각했기 때문이며, 행 1:4-5, 행 1:8, 행 2:1-4의 관계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차영배 목사가 말하는 성령세례와 성령충만

성령의 세례는 곧 성령을 충만하게 받는 것을 의미한다. 행 1:5과 행 2:4를 비교하면 성령의 세례와 충만은 동일한 사역임을 알 수 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충만은 계속 되어야 하나 성령의 세례는 한번 일어난다는 점이 다르다. 120명은 다 성령의 세례를 받음과 동시에 충만함을 입었다는 엄연한 사실을 외면할 수 없다. 120명은 오순절의 성령충만과 더불어 성령세례를 동시에 받았다.

처음으로 성령의 충만을 받는 것을 성령의 세례라고 하기 때문에(행 1:5과 2:1-4) 성령충만을 받으라는 말씀은 아직도 충만함을 입은 적이 없는 사람에게는 성령의 세례를 받으라는 말씀과 동일한 것일 수 있다.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같은 사건이라고 할 수 밖에 달리 말할 수 없다. 같은 사건을 두고 성령의 세례라고 하기도 하고, 권능이 위에서 임한다 하기도 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다고 하기도 한다. 성경을 아무리 보아도 성령의 세례와 충만을 서로 분리시켜 엄연히 구별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 처음으로 성령이 충만히 임하여 큰 회개가 이루어질 때 이것을 성령세례라 하고 다음에 계속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는 것을 충만이라고 구별해야 한다. 성령세례는 단번에 일어나는 구원의 한 서정으로 다시 되풀이 되지 않지만 충만은 계속 죽을 때까지, 아니 장차 올 영원한 세계에서도 계속 있어야 할 은사이다. 그러나 성령의 세례와 충만은 연속적이다. (차영배 목사, ‘성령론’ 1989, p.160,165,180,181-2 장로교합동 총신대 학장 역임. 총신대 교수, 고신대 강사 역임)

차영배 목사는 그가 세운 주장과 모순되는 주장을 John Stott가 할 경우에 자가당착이라는 말로 그를 비판하였다(차영배 목사, ‘성령론’ p.175). 차영배 목사가 위에서 말하는 성령론은 자가당착의 모순으로 꽉 차있다. 차 목사는 “성령의 세례는 곧 성령을 충만하게 받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면서 “다만 차이가 있다면 충만은 계속되어야 하나 성령의 세례는 한번 일어난다는 점이 다르다”고 하였는데 이 주장은 모순이다. 그는 말하기를 “성령의 세례는 곧 성령을 충만하게 받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성령의 세례와 충만은 전혀 차이가 없다. 그런데 그는 “다만 차이가 있다면 충만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하여 모순된 주장을 하고 있다. 또한 그는 “120명은 다 성령의 세례를 받음과 동시에 충만함을 입었다는 엄연한 사실을 외면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는 또한 대단히 모순된 주장이다. 그는 “성령의 세례는 곧 성령을 충만하게 받는 것”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120명은 다 성령의 세례를 받음과 동시에 충만함을 입었다”는 말은 전혀 모순된 주장이다. 그의 “성령의 세례는 곧 성령을 충만하게 받는 것”이라는 주장을 120명에게 적용시키려고 한다면 “120명은 다 성령의 세례를 받음과 동시에 충만함을 입었다”라고 말해서는 절대로 안 되고 “120명은 다 성령의 세례 곧 충만함을 받았다”라고 말해야 한다. 또한 그의 “성령의 세례는 곧 성령을 충만하게 받는 것”이라는 주장을 120명에게 적용시키려고 한다면 “120명은 오순절의 성령충만과 더불어 성령세례를 동시에 받았다”고 말해서는 절대로 안 되고 “120명은 오순절의 성령충만 곧 성령세례를 받았다”라고 말해야 모순이 없게 된다.

위의 차영배 목사의 주장을 요약하면 (1)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같은 사건이다. (2) 처음으로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는 것은 성령세례이고 계속하여 임하는 것은 성령충만으로 구별해야 한다. (3) 성령세례는 다시 되풀이 되지 않아 연속적이 아니다. 그러나 성령충만은 되풀이 되며 연속적이다. (4) 그러나 성령의 세례와 충만은 연속적이다. 여기에서 차영배 목사는 “성령세례는 다시 되풀이 되지 않아 연속적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면서 동시에 “성령의 세례와 충만은 연속적이다”라고 하여 “성령의 세례는 연속적이다”고 전혀 모순된 주장을 하고 있다. 이상에서 보는 것과 같이 차영배 목사가 저술한 성령론은 자가당착의 모순으로 가득차 있다. 따라서 차영배 목사가 주장하는 한국의 장로교의 개혁주의 성령론은 존재하지 않는다. 앞뒤의 말이 전혀 일치하지 않고 횡설수설하며 방향이 없는 혼란의 상태에 있는 그의 성령론이 한국의 신학계와 교계를 오도하고 있으니 불행한 일이다. 한편 차영배 목사의 제자인 우희영 목사는 그의 저서 “성령의 사역”에서 전혀 그릇 연구된 차영배 목사의 “성령론”을 일체의 논평 없이 액면 그대로 인용하고 수용하여 차영배 목사와 똑같이 횡설수설한 책을 저술하여 한국 신학계와 교계를 오도하는데 앞장서고 있으니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서철원 목사가 말하는 성령세례와 성령충만

성령강림은 성령세례로 약속되었고(행 1:5), 아버지의 약속으로 지목되었는데(행 1:4), 성령충만으로 결과하였다. 성령세례의 약속이 성취되면 성령세례로 기술된 것이 아니고, 성령충만(행 2:4; 9:17; 13:52)으로 묘사되었다. 오순절에 성령이 120명의 제자들에게 강림하므로 주 예수의 성령 파송의 약속(요 15:26; 16:7)과, 성령 받으라는 명령(요 20:22)과 성령세례(행 1:5)가 성취되었다. 제자들의 성령 받음은 성령세례로 표기되지 않고 성령으로 충만케 되어짐이었다. 베드로는 그의 설교에서 성령세례를 약속하지 않고 예수 믿음으로 성령 받음을 약속하였다(행 2:38). 성령강림 후에는 더 이상 성령세례는 적용되지 안 했고 주 예수의 약속을 회상하여 한번 반복함 밖에 없다 (행 11:16). 성령강림 이후에는 성령세례가 더 이상 사용되지 안 했고 성령 받음과 성령의 충만, 성령의 내주, 성령을 마심으로 표현되었다. 인류 역사상 예수 그리스도만이 성령으로 세례 받은 최초의 사람이다. 그가 성령으로 세례 받아 그리스도로 임명되었고 하나님의 구원사에 새로운 시대를 도입하였다.(서철원 목사, ‘성령신학’ p.79,112,225)

이상의 서철원 목사의 주장에 의하면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의 관계의 설명은 아주 애매 하지만 그의 결론을 한 마디로 표현하여 이 두 사건은 다르다는 설명을 복잡하게 설명하고 있다. 한편 그는 “성령강림 이후에는 성령세례가 더 이상 사용되지 안 했고 성령 받음과 성령의 충만, 성령의 내주, 성령을 마심으로 표현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 말을 다시 정리하면 “성령세례라는 말이 성령 받음과 성령의 충만, 성령의 내주, 성령을 마심으로 표현되었다”는 설명이다. 이 설명에 의하면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같은 말이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서철원 목사는 “성령세례는 다르다.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같은 것이다”라고 하여 모순된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눅 4:1에 의하면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성령충만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기록은 성경에 일체 없다. 그런데 서철원 목사는 눅 4:1의 기록을 근거로 하여, 즉 예수님은 성령충만을 받았다는 기록에 근거하여 “인류 역사상 예수 그리스도만이 성령으로 세례 받은 최초의 사람이다”고 주장하여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을 같은 의미의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서철원 목사가 말하는 그의 성령론은 커다란 모순 속에 있다.

신성종 목사가 말하는 성령세례와 성령충만

행 8:17에 성령을 받은지라가 미완료 과거, 즉 반복을 뜻함으로 그것은 일회적 성격을 지닌 성령세례가 아니라 성령충만임을 알 수 있다. (신성종 목사, ‘신약신학’ p.136)

신성종 목사는 이상에서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다르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상의 주장은 행 8:17에 나오는 헬라어 동사 ‘lambano’의 그릇된 번역을 맞는 번역으로 착각한 데서 온 것이며, 행 1:5, 1:8, 2:1-4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그릇된 주장이다.

고신대가 말하는 성령세례와 성령충만

복음서에서는 성령세례에 대해서는 모두 미래의 약속으로 되어 있다. 사도행전 1:5에서도 여전히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그러나 몇 날이 못되어 이루어질 약속으로 되어 있다. 그러다가 오순절 날에 성령이 약 일백이십 성도에게 강림하였는데(행 2:1-3), 여기에 세례란 말은 사용되지 않았어도 사도행전 1:5과 관련하여 그들이 받은 것은 성령세례라고 부를 수 있다. 그들이 성령으로 세례 받은 결과로 곧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았다(행 2:4). (고려신대학원 교수회, ‘성령론연구보고서’ 1994, p.12-13,35)

이상에서 “행 2:1-3에 세례란 말은 사용되지 않았어도 사도행전 1:5과 관련하여 그들이 받은 것은 성령세례라고 부를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즉 행 2:1-3에 근거하여 120명의 제자들은 성령세례를 받았고, 행 2:4에 근거하여 그들은 성령충만을 받았다고 하여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같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한편으로 “그들은 성령으로 세례 받은 결과로 곧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천부당만부당한 그릇된 해석이다. 이러한 그릇된 해석이 나오게 된 이유는 행 1:5과 행 1:8의 관계와 그리고 행 2:1-4의 관계를 해석하지 못한데 있다. 행 1:5과 행 1:8의 사건이 행 2:1-4에서 성취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여 이상의 구절을 통하여 [성령세례(행 1:5) = 성령의 임재로 성령의 권능을 받는 것(행 1:8) = 성령의 임재로 성령충만을 받음(행 2:3-4)]의 공식이 정립된다.

따라서 “그들이 성령으로 세례 받은 결과로 곧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았다”는 주장은 천부당만부당 그릇된 주장이다. 바른 해석은 반드시 “오순절 날 그들은 성령세례를 받았다. 오순절 날 그들은 성령충만함을 받았다. 오순절 날 그들은 성령세례 곧 성령충만을 받았다”이어야 한다. 여기에 다른 말을 첨가한다면 그릇된 해석이 된다. 행 1:5, 행 1:8, 행 2:1-4의 관계를 바르게 번역하고 해석하지 못하면 성령론의 정립은 절대로 불가능하게 된다.

김명용 목사가 말하는 성령세례와 성령충만

성령세례라는 말은 성서에 나오지 않는다. 성서는 성령세례에 대해 말하지 아니하고 성령충만에 대해 말하고 있다(엡 5:18).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 성령세례라는 말은 성서적 정당성이 없는 표현이다. 오순절 교리에 있어서 성령세례는 장로교회의 정통적 성령론이 성령충만과 매우 근접해 있는 개념이다. (‘교회와 신학’ 장로회신학대학 논문집 제 xxII집, 1990, 장로회신학대학 출판부, 김명용 목사의 논문 ‘오순절운동의 성령론의 특징과 문제점’에서 발췌 p.194)

김명용 목사의 “성령세례라는 말은 성서에 나오지 않는다. 성서는 성령세례에 대해 말하지 아니하고 성령충만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주장은 천부당만부당한 그릇된 주장이다. 김명용 목사의 “성령세례라는 말은 성서에 나오지 않는다”는 주장은 마 3:11, 막 1:8, 눅 3:16, 요 1:33, 행 1:5, 행 11:16, 고전 12:13에 기록된 성령세례를 전혀 잘못 연구했기 때문에 그릇된 주장을 하게 된 것이다. 특히 행 1:5과 고전 12:13에 나오는 헬라어 전치사 ‘en’의 번역에 대하여 전혀 연구하지 아니하여 성령세례라는 말은 성서에 나오지 않는다는 그릇된 주장을 하게 된 것이다.

‘큰 글자 통독성경’에서 말하는 성령충만과 성령세례

오순절의 성령강림은 역사적 유일회적 사건이고, 성령세례는 개인적 회심 시의 유일회적 사건이며, 성령의 충만은 반복적 사건이다. (1994년판 ‘큰글자 통독성경’ 편찬대표 한철하 목사, 아세아연합신학대학 총장 역임)

이상의 주장은 전혀 그릇된 주장이다. “오순절의 성령강림은 역사적 유일회적 사건이다”는 주장은 구약과 신약의 성경을 한번도 제대로 읽어보지 못한 결과라는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또한 “성령세례는 개인적 회심 시의 유일회적 사건이다”는 주장은 고전 12:13의 그릇된 번역을 맞는 번역으로 착각한 데서 온 그릇된 것이다. 성경에 회심 시에 성령세례를 받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성경구절은 한 구절도 없다. 또한 “성령의 충만은 반복적 사건이다”라는 주장도 행 1:8, 행 2:3-4에 기록된 성령충만의 뜻을 잘못 연구했기 때문에 생긴 전혀 그릇된 주장이다.

하용조 목사가 말하는 성령세례와 성령충만

예수님께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하셨습니다. 성령세례가 예수님에게 임하였습니다. 그 때부터 예수님에게 능력과 기적이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오순절 날 성령을 받았습니다. 사도행전 1:5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게 되리라”고 했습니다. 이 사건은 10일 후에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2-4에 보면 제자들은 오순절 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성령이 충만히 임했다는 뜻은 그분이 나를 통치하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하용조 목사, ‘사도행전 강해’ 온누리교회 CGN TV Internet 방송 2007년 5월 26일)

하용조 목사는 이상에서 “예수님께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하셨습니다. 성령세례가 예수님에게 임하였습니다”라고 하여 예수님께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하여 성령세례를 받으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의 어느 곳에도 예수님께서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기록은 일체 없고 대신에 눅 3:21-22에 요단강에서 물세례 받으신 후에 성령님이 임하시었고, 눅 4:1에 성령충만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오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행 1:5의 성령세례와 행 2:4의 성령충만은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음으로 예수님이 성령충만을 받으셨다는 말이나 성령세례를 받으셨다는 말은 같은 말이다. 따라서 하용조 목사가 “예수님께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하여 성령세례를 받으셨다”고 하는 주장은 바른 주장이다. 한편으로 하용조 목사는 “제자들은 오순절 날 성령을 받았다. 오순절 날 성령세례를 받게 되리다. 오순절 날 성령충만을 받았다”라고 설명함으로서 그는 “성령 받음과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서로 같은 뜻의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4회에 걸친 그의 사도행전 1장과 2장의 강해설교에서 “이들 세 가지의 용어들은 같은 뜻이다. 또는 다른 뜻이다”라고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일체 언급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이들 세 가지의 용법에 대한 하용조 목사의 주장은 다만 추론할 수 있을 뿐이다.

하용조 목사는 그가 편찬한 ‘비전성경사전’(p.640)에서 “성령세례는 성도가 예수님을 믿을 때 받는 것으로 단회적인 것이라면 성령의 충만은 성도가 계속하여 누릴 수 있는 축복이다”고 하여 성령세례와 성령의 충만은 서로 다른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성경에 근거가 일체 없는 것으로 그릇된 주장이다. 행 1:5, 1:8, 2:3-4의 기록에 근거하여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동의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아니하면 성령론의 정립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조두만 목사가 말하는 성령세례와 성령충만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몇 날이 안 되어 성령을 받으리니(행 1:5). 요한의 물세례는 회개와 죽음을 의미한다.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다는 뜻은 성령을 물 붓듯이 풍성히 주실 것을 의미한다. 충만하게(행 2:4)는 “때가 찾다. 가득 넘치다”의 의미이다. “성령충만”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자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요, 그 영이 충만하지 않으면 성역자가 되지 못한다. 성령이 충만한 자(행 11:24)란 성령이 풍부히 주어져 있다는 것이다. (조두만 목사, 신수동 성결교회 목사, 예수교 대한성결교회 총회 의장, 경기도 안양소재 성결교신학교 대학원장 역임 ‘주해설교 사도행전’ p.19,27,61,105)

조두만 목사는 여기에서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의 관계에 대하여 일체 말하지 않고 있다. 한편 조두만 목사는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몇 날이 안 되어 성령을 받으리니”(행 1:5)라고 하였다. 그런데 행 1:5에는 “성령을 받으리니”란 말은 일체 나오지 아니한다. 따라서 조두만 목사는 행 1:5의 기록을 자의적으로 변개시켰다.

성기호 목사가 말하는 성령세례와 성령충만

성령세례를 성경에서는 성령의 충만(행 2:4), 성령이 그들 위에 임함(행 11:15), 성령을 받음(행 19:2),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움(눅 24:49)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사도들이 오순절 날 성령세례(행 1:5)를 받아 성령충만하였다.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회개하며 성령세례를 사모하는 중 성령충만을 간구해야 합니다(행 8:15). (성기호 목사, ‘이야기신학’ p.226-229. 경기도 안양성결대학교 총장 역임, 한국복음주의신학회 회장 역임)

성기호 목사는 이상에서 “성령세례를 성경에서는 성령의 충만(행 2:4), 성령이 그들 위에 임함(행 11:15), 성령을 받음(행 19:2),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움(눅 24:49)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라고 하여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같은 의미의 동의어라고 하였다. 한편으로 그는 “사도들이 오순절 날 성령세례(행 1:5)를 받아 성령충만하였다”라고 하여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서로 다른 뜻이 있는 것으로 주장하여 모순된 주장을 하고 있다.

또한 성기호 목사는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회개하며 성령세례를 사모하는 중 성령충만을 간구해야 합니다”라고 했는데, 이는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서로 다른 것이라는 주장이다. 성기호 목사는 행 8:15를 근거로 하여 “성령세례를 사모하는 중 성령충만을 간구해야 합니다”라고 하는데 이 구절을 통해서는 이러한 해석은 절대로 나올 수 없다. 행 8:15-17의 한글성경의 번역에 의하면 베드로와 요한은 “사마리아 신자들이 성령 받기를 위해 기도하였고, 그들에게 안수하여 성령을 받았다”고 하였다. 따라서 성기호 목사의 “행 8:15를 근거로 하여 성령세례를 사모하는 중 성령충만을 간구해야 합니다”라는 주장은 전혀 그릇된 것이다. 바른 주장은 “성령세례 곧 성령충만을 간구해야 합니다”이어야 한다.

레마 성경주석이 말하는 성령세례와 성령충만

성령세례를 받은 신자가 능력과 체험에 있어서 성령의 강력한 사역을 계속적으로 받는 상태를 일컬어 신약은 성령충만이라고 한다. 행 19:1-7에서 바울은 에베소교인들에게 성령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들이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이제 바울은 성령충만을 통하여 성도들에게 능력을 주었습니다. (레마 성경주석 ‘사도행전’ p.284, 484)

이상에서 “성령세례를 받은 신자가 능력과 체험에 있어서 성령의 강력한 사역을 계속적으로 받는 상태를 일컬어 신약은 성령충만이라고 한다”는 주장은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같은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라는 주장이다. 한편 “행 19:1-7에서 바울은 에베소교인들에게 성령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라는 말과 “이제 바울은 성령충만을 통하여 성도들에게 능력을 주었습니다”는 말은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레마 성경주석은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다른 것이라고 했다가 또한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같은 것”이라고 하여 앞뒤의 말이 일치하지 않고 서로 모순된 주장을 하고 있다. 행 1:5의 성령세례와 행 2:3-4의 성령충만의 관계를 정립하지 못하면 성령론의 정립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Lloyd Johns의 주장: “성령세례를 받는 것과 성령충만은 동시적이다.”

사람이 성령세례를 받는 것과 성령으로 충만된 것은 동시적이다. 그러나 에베소 5:18과 관련해서 성령충만할 수는 있지만 아직 그가 성령세례를 받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제자들은 오순절 날 성령의 세례와 충만을 받은 것이다. 성령충만을 성령의 인침과 세례로 잘못 혼동하는 것은 성경을 심히 곡해하는 것이다. (Lloyd Jones, ‘성령세례’ 번역서, p.106,112)

이상의 “사람이 성령세례를 받는 것과 성령으로 충만된 것은 동시적이다. 제자들은 오순절 날 성령의 세례와 충만을 받은 것이다”는 주장은 행 1:5, 1:8, 2:3-4의 기록을 전혀 잘못 연구한 데서 온 것으로 전혀 그릇된 주장이다. 오늘날 신학계에서 행 1:5, 1:8, 2:3-4의 기록을 해석하지 못하여 성령론 정립에 실패하고 있다. 행 1:5,8의 “몇 날이 못되어 성령세례를 받을 것이다.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을 것이다”는 말씀은 오순절 날 성취되어질 미래의 사건이다. 그런데 행 2:3-4에는 행 1:5,8이 성취되었다는 기록은 없고 대신에 “불이 임하여 성령충만을 받았다”고만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제자들은 오순절 날 성령세례를 받았다. 제자들은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여 성령의 권능을 받았다. 오순절 날 제자들은 성령충만을 받았다”라고 해석해야 한다. 따라서 이들은 표현하는 용어가 다를 뿐 뜻이 서로 같은 의미의 동의어이다. Lloyd Jones는 이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성령세례를 받는 것과 성령으로 충만된 것은 동시적이다”라는 그릇된 주장을 하게 된 것이다. “제자들은 오순절 날 성령의 세례와 충만을 받은 것이다”라는 주장은 그릇된 것이므로 반드시 “제자들은 오순절 날 성령의 세례 곧 성령의 권능충만을 받은 것이다”라고 해석해야 한다.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이란?:크리스찬리뷰 ㅣ The Christian Review

세례란 ‘물 속에 잠긴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구약에 세례란 말은 없지만 학자들은 세례가 구약시절에 물을 가지고 정결 예식을 행했던 데서 유래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신약성서에서 세례는 세례 요한과 함께 등장한다.

세례 (Baptism)

세례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을 의미한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롬 6:5)

세례에는 ‘물세례와 성령세례’가 있다. 물세례란 ‘내적인 은혜’의 ‘외적인 표현’이다. ‘내적인 은혜’란 ‘성령세례’를 말한다. 성령세례를 설명하려면 ‘침례'(baptism)란 용어가 이해하기 쉽다.

물 속으로 들어갈 때 육은 죽고, 나올 때는 영이 산다.(롬8:13) 겉 사람은 죽고, 속사람이 된다.(고후 4:16)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이 된다.(롬 6:6) 나는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것이다.(빌 1:21, 갈 2:20) 우리는 ‘성령세례’를 받을 때 구원 받았다고 한다.

성령세례 (Baptism by The Holy Spirit)

구원이란 우리를 억누르고 있는 죄로부터의 해방이다. 죄의 문제는 죄인인 인간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은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다. 그분이 바로 예수이다. 예수는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구원은 인간의 노력이 아닌,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다. 은혜란 ‘상'(award)이 아닌 ‘선물'(gift)이다. 상은 자격이 있어 받는 것이고, 선물은 자격이 없음에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구원은 상이 아닌 선물이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

우리가 가진 믿음조차도 ‘은혜로 인한 믿음’이라고 했다. 어떤 사람들은 믿으려고 노력해도 믿어 지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다른 사람은 특별한 노력 없이도 믿어지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이를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믿어지는 믿음’이라고 한다.

성령충만 (Full of The Holy Spirit)

성령세례가 구원과 관련된 ‘일회적인 사건'(event)이라면, 성령충만은 성결과 관련된 ‘지속적인 운동'(movement)이다. 성결이란 구원받은 자가 구원 받은 자답게 사는 것이다. 성결은 완성형이 아니라 진행형이고, 된 것이 아니라 되어 가는 것이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2-13)

여기서 구원이란 성령세례로 받은 ‘칭의'(justification)가 아닌, 성령충만을 통한 ‘성결'(holiness)이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엡 5:18) 충만은 차고 넘친다는 뜻이 아니라 ‘성령의 지배를 받는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Lord)로 고백했지만 자신이 주인되어 산다. ‘성령충만’이란 그리스도가 주인된 ‘성결한 삶’을 뜻한다. 성결이란 뜻의 히브리어 ‘카도쉬’ (kadosh)와 희랍어 ‘하기오스'(hagios)는 세상과 구별된 ‘거룩함’을 뜻한다. 성결은 ‘하나님의 본성’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성결해야 한다.

대제사장은 제사를 드릴 때 반드시 제복을 입어야 한다. 대제사장의 제복은 입는 것과 머리에 쓰는 것들을 합하여 일곱 가지가 있다. 속옷, 겉옷, 에봇, 흉배, 허리 띠, 금패, 성관이다. 특별이 성관에는 ‘여호와께 성결’이라고 새겨진 ‘금패’가 있다. 대제사장은 하나님 앞에서 절대적인 성결을 지켜야 한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흠 없는 ‘제물과 대제사장’이 되셔서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사를 올려 드린 것 같이.〠

김환기|크리스찬리뷰 영문편집위원, 호주구세군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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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세례와 성령충만

이번호부터 성령에 대한 실제적인 문제들을 함께 나눕니다. 이번호의 주제는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입니다.

성령세례와 물세례

청년시절에 “성령세례를 받았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았습니다. 당시 제 주변에는 방언을 하고,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분들로부터 성령세례를 받았느냐는 질문을 들으면, 무언가 성령의 강한 역사가 드러나고 있는지 묻는 것처럼 들렸고, 내게는 방언처럼 눈에 보이는 성령의 은사가 없었기에 스스로 부족한 신앙인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나중에 성령에 대해 공부하면서 성령의 역사에 대한 내 생각이 올바르지 못했음을 깨달았습니다.

흔히 “성령세례”를 물세례 다음에 경험하는 두 번째 세례처럼 생각하지만, 이것은 오해입니다. 세례는 오직 하나입니다. 물세례와 성령세례는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입니다. 물세례 가운데 성령세례가 함께 임합니다. 물세례는 죄 용서와 구원의 은혜가 결정적으로 임하는 예식이고, 물세례 중에 성령이 함께 임하는 성령세례를 경험하게 됩니다. 사도행전 2:38에는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을 함께 받는다고 말합니다. 세례 때 성령이 함께 임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구원과 칭의가 이루어지게 하시는 분이고,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를 주라고 고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고전 12:3)

김하중 장로는 『하나님의 대사』라는 책에서 자신의 세례 경험을 소개합니다. 이분은 베이징의 무역대표부에서 근무하던 중에 예수를 믿게 되었는데, 갑자기 귀국해야 할 사정이 생겼습니다. 교회에 다닌 지 몇 달 안 되었지만, 귀국 소식을 들은 베이징 교회의 목사님이 세례를 받고 가라고 말합니다. 목사님은 집으로 찾아와 세례를 베풉니다. 세례 때 목사님이 머리에 물을 부으며 손을 대는 순간, 눈물이 폭포처럼 쏟아지면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몸 속으로 확 쏟아져 들어오는 경험을 합니다. 그 순간 이분은 정신을 잃습니다. 이분은 그 순간 온몸으로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행전 2장이 말하는 세례의 순간입니다. 세례 때 성령께서 강하게 역사하시는 성령세례가 함께 임합니다.

성령세례와 성령충만

사도행전 8장에는 세례와 성령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 중에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는 받았지만,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행 8:16).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이 와서 이들에게 안수하니 성령을 받게 됩니다. 이 본문을 예로 들며 어떤 분들은 물세례와는 다른 성령세례가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본문을 자세히 보면, 성령의 임재를 강조하고는 있지만, 이것이 물세례를 넘어서는 또 다른 세례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이 본문이 말하려는 것은 사마리아의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역사를 통해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지만, 성령의 강한 역사를 느끼지 못한 게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들이 받았던 소위 성령세례는 성령이 충만하게 역사하는 것을 경험하기 시작한 순간을 말합니다. 일부 사람들이 성령충만을 경험하는 순간을 성령세례라는 단어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손기철 장로는 성령세례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지만 여전히 내 자신의 계획과 지혜로 살아갈 때, 성령님은 우리 존재의 한쪽 구석에서 눈물을 흘리고 계십니다. 그러나 의지적으로 나의 자아를 성령님께 전부 내드리고 그분께 순종할 때부터 성령님이 나를 소유하고 통제하기 시작하십니다. 이런 만남 혹은 경험을 ‘성령세례’라고 하며, 그 상태로 사는 것을 ‘성령충만’한 삶이라고 합니다.” 여기서도 성령세례를 “성령충만이 시작된 첫 번째 경험”으로 설명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 모두 성령세례가 필요합니다. 즉 성령이 충만하게 역사하는 은혜를 경험하는 순간이 필요합니다. 에베소서 5:18은 이렇게 말합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이 말씀이 전하려는 메시지는 영향력입니다. 성령충만함을 술취함에 비교하는 것은 술의 영향력 아래 있는 것처럼 성령의 영향력 아래 있는 것이 성령충만임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영향력 속에 있고, 성령이 이끌어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세례로 시작된 성령충만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성령충만은 어떻게 유지될 수 있을까요?

성령충만의 유지

성령충만함을 유지하기 위해 먼저 나 자신이 성령충만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성령충만한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 네 가지의 모습이 있습니다(엡 5:19-21). 첫째,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라는 말씀처럼 구원의 은혜를 고백합니다. 둘째,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라는 말씀대로 성령충만한 사람은 찬양이 끊이지 않습니다. 셋째, “범사에 감사하며”, 곧 감사가 성령충만의 표식입니다. 넷째,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는 말씀대로 주님을 섬기듯이 봉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성령충만함이 나타나는 삶입니다. 구원의 은혜를 고백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가 있고, 봉사가 있다면, 내가 성령충만 속에 거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성령충만을 더욱 깊게 하고, 유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충만을 어떻게 유지할 수 있을까요? 성령충만의 표식들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은혜를 고백하는 것이 시작입니다. 이승현 교수는 『성령』이라는 책에서, 성령이 말하게 하시는 방언 기도의 대부분은 바로 구원의 은혜를 노래하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고린도전서 14:2은 방언의 특징을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고 강조합니다. 바로 십자가의 비밀, 복음의 비밀입니다.

성령충만하게 역사하는 방법은 바로 이 구원의 은혜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선 하나님 찬양을 기뻐하십니다. 제가 아는 한 목사님은 성령의 은사를 가지고 계신 분인데, 교회에 가서 찬양하면 성령님이 자신 안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느낀다고 합니다. 성령충만을 유지하는 방법은 바로 에베소서 5:19-21의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구원의 은혜를 고백하고, 찬양하고, 감사하고, 봉사할 때, 성령충만은 유지되고 깊어집니다.

성령충만을 유지하는 또 다른 방법은 사도행전 8장의 마술사 시몬의 이야기에 등장합니다. 사마리아에서 사도들이 안수하여 성령이 임하자, 마술사 시몬은 사도들에게 그런 능력을 달라고 조릅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말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행 8:20). 성령충만은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돈으로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베드로는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행 8:22). 성령충만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성령이 함께하는 사람이 되려면 회개해야 합니다. 성령은 죄와 함께 있지 못하는 분입니다.

그리고“주께 기도하라”는 말씀대로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론 공부를 시작하면서, 성령에 대해 공부하는 목적은 성령충만하여 성령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소개한 회개, 구원의 고백, 찬양, 감사, 봉사, 기도를 통해 성령충만을 경험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 세례와 충만 Baptism and Fullness (2014.2.19.-24.)

서론

기본적인 접근 원리들

첫째,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공통된 소원과 의무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온전한 목적을 찾는 것이어야 한다.

둘째, 우리는 성경에서 이 하나님의 목적을 찾아야 한다.

셋째,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목적은 설명하는 부분보다 교훈하는 부분에서 우선적으로 찾아야 한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는 그 목적을 사도행전의 설화체 본문에서보다 주로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도들의 설교나 글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우리에게 약속된 것을 받아야 하며 우리에게 명령한 것을 순종해야 하는 한편, 성경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일어났다고 묘사된 것들이 반드시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일어나야 하는 것은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p15-16)

1. 성령의 약속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로 삼으시고 그 후에 성령을 주시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에게 ‘아들의 영’을 주셔서 우리를 자녀로 삼으시는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바울의 경우 양쪽을 다 말하고 있다. 그는 한편으로는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다”(갈 4:6)고 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다”(롬8:14-15)고 말한다. 우리가 이것을 어느 쪽에서 보든지 결과는 같다. 하나님의 영을 소유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나님의 자녀라면 누가나 하나님의 영을 소유하고 있다. (p20)

독특한 축복의 약속

메시아의 시대가 되면 하나님이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실 것이고, 그 부어 주심은 새롭고 독특하며, 또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p24)

성령의 ‘세례’는 성령의 약속 또는 선물과 동일한 것이며, 죄의 용서와 마찬가지로 구원의 복음에 필수적인 요소라는 것이 나에게는 분명한 사실로 보인다. 우리는 결코 ‘구원’을 – 마치 그것이 오직 죄, 죄책, 진노, 그리고 죽음으로부터 건져냄을 받는 것에서 그치는 것처럼 – 전적으로 소극적인 용어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구원이 이 모든 요소를 포함하고 있음을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하지만 구원에는 우리를 중생시키시고, 우리 안에 내주하시며, 우리를 자유케 하시고 변화시키시는 성령의 적극적인 축복 또한 포함된다. (p27)

보편적인 축복의 약속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이 마지막 구절은 매우 분명하고 인상적인 주장이다. 그것은 성령의 ‘선물’ 또는 ‘세례’의 약속은 주 우리 하나님이 부르시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해당된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약속의 범위는 그분의 부르심의 범위와 같다. 이 신성한 부르심을 받아들이는 자는 누구나 이 신성한 약속을 상속받는다. (p30)

세례라는 용어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할 때 성령을 받는다. (p41)

2. 성령의 충만

성령의 세례를 말할 때 그것은 단회적인 선물을 가리킨다. 그러나 성령의 충만을 말할 때 우리는 이 선물이 지속적이며 갈수록 더 많이 충당되어져야 하는 것임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p56)

‘세례’와 ‘충만’의 차이점

입문의 경험으로서 세례는 반복될 수도, 잃어버릴 수도 없는 것이지만, 충만은 반복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어떤 경우에든 유지 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p56)

첫째, “충만하다”거나 “채우심을 받았다”는 것은 모든 헌신된 그리스도인의 정상적인 특징이었음을 알 수 있다.(p57)

둘째, 이 표현은 어떤 특정한 사역이나 직책을 위해 하나님이 내려 주신 것을 가리킨다. (p57)

셋째, 때때로 성령의 충만은 일생 동안 지속되는 직분(예를 들면, 사도나 선지자처럼)을 위해서가 아니라 즉각적으로 감당해야 할 일이나 또는 어떤 위기 상황에 준비시키기 위해서 주어졌다. (p57-58)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다시 충만해졌는지를 묘사하는 구절들과 또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계속적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명령하는 이런 구절들이 있다는 사실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잃어버리는 것이 가능하며 또 애석하게도 그것이 흔한 일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p59)

계속적인 충당

우리가 계속해서 성령으로 충만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주 예수님께로 와야 한다고 첫 번째 본문은 강조한다. (p61-62)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성령을 소유하면서 (또는 성령이 내주하시는 자는 그 누구도), 그 성령을 자신에게만 제한할 수 없다. 성령은 그 계신 곳에서 흘러나가신다. 만일 흘러나가지 않는다면, 그분이 거기 계시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전도의 열망과 활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성령 충만에 대해서는 그 어떤 주장도 경계해야 한다. (p64)

성령 충만의 표지들

성령 충만은 개인적이고 신비적인 경험보다는 하나님과 동료 인간들과의 도덕적 관계에서 더욱 잘 드러난다.

첫째는 “화답하며”이다. … 충만의 첫 번째 표지는 교제이다. 그뿐 아니라 그것은 영적 교제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속적인 잡담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습은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는” 성령 충만의 두 번째 결과로 이어진다.

세 번째로 우리는 “범사에 감사해야 한다.”

성령 충만의 건전한 결과들이 이제 밝히 드러났다. 이러한 충만함이 드러나는 두 가지 주된 영역은 예배와 교제이다. 성령으로 충만하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찬양하고 아버지께 감사하며, 서로 화답하고 피차 복종할 것이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사람 양쪽과 다 바른 관계를 맺게 하신다. 우리는 초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 이러한 영적 특질과 활동 안에서 성령 충만의 우선적인 증거를 찾아야 한다. (p68-71)

놀라운 영적 경험을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모두 다 똑같이 도덕적인 의무들과 정직성, 순결, 비이기적인 태도 등에서 실패할 수 있다. 또한 나는 이 양쪽 그룹에서 똑같이, 그리스도를 닮은 아름다운 사람들을 알고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실패와 보잘것없는 성과는 그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증거가 아니라, 그들이 죄나 불신으로 인해 잃어버림으로써 고린도 교인들처럼 ‘비영적인’ 또는 ‘육에 속한’ 자들이 될 수밖에 없었던 성령의 충만을 회복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증거다. (p79)

권면

첫째, 아마도 비교적 ‘평범한’ 종류의 깊은 경험들은 많이 체험했으나, 성령의 특이한 경험들은 하지 못한 자들에게 말하고자 한다. 우리는 두려움이나 교만 또는 시기심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주장하는 어떤 경험들의 타당성을 쉽게 의심하거나 부인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가졌다고 주장하는 것을 우리가 가지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부인하는 것은 옳지 않다. 우리는 분명히 “범사에 헤아려야”하며 특별히 “영들을 시험해 보아야”한다 (살전 5:21; 요일 4:1) (p89)

둘째, 좀더 특별한 성령의 사역을 경험한 자들에게 권면하고자 한다. …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영적 은혜이지 영적 은사나 경험이 아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당신의 경험이 당신을 경배와 찬양으로 이끌도록 하라. 그러나 당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권면할 때는 경험에 근거하지 말고 성경에 근거해서 권면하기를 부탁한다. (p89-90)

셋째, 끊임없이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고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성령 안에서 행하도록 하자. (p90)

3. 성령의 열매

첫째, ‘사랑과 희락과 화평’은 우리가 하나님과 맺는 관계를 나타낸다.

둘째,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맺는 관계를 나타낸다.

셋째, ‘충성과 온유와 절제’는 우리가 자신과 매는 관계를 나타낸다.

사도가 ‘심는 것’으로 의미하고자 한 것은 우리의 생각과 습관, 생활 방식, 삶의 방향과 삶의 훈련 등으로 구성된 전체적인 삶의 패턴인 것 같다. 그것은 우리가 함께 어울리는 사람들, 친구들과 맺는 우정 관계, 읽는 책과 보는 영화나 텔레비전 프로그램, 또 우리가 여가 시간에 하는 활동 그리고 우리의 관심을 끌고 우리의 에너지를 소모시키며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이 모든 것에 대해, 즉 우리 삶의 전체적인 흐름과, 그보다는 작지만 매일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무수한 사항들에 관해, 우리는 결정을 내려야 한다. 이런 것들을 선택함으로써 우리는 언제나 계속 심고, 심고, 또 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을 어디에 심느냐에 따라 우리는 거두어들이게 된다. 바울은 서신서에서 여러 번 반복해서 이 주제로 돌아가는데, 여러 다양한 비유를 사용하여 이 주제를 설명한다. 어떤 곳에서는 옷으로 설명하고 (우리가 벗는 것과 입는 것), 어떤 곳에서는 운동 선수의 분투를 예로 들어 설명한다 (어떤 것은 피하고 어떤 것은 얻기 위해 쫓아가는 것). 또 어떤 곳에서는 삶과 죽음의 문제로 설명하고(우리의 죄악된 욕망과 정욕을 십자가에 못박아서라도 실제로 죽여야 하고, 그 대신 성령의 인도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살아야 하는 것), 어떤 곳에서는 빚을 갚아야 하는 일로 설명한다(우리는 육신이 아닌 성령에 밎진 자라는 것). 하지만 이 모든 비유들이 그리스도인의 자연적 성화와 관련하여 무엇보다 강조하는 것은, 우리가 제대로 된 수확을 거두기 원한다면 (적당한 조건이 갖추어져 있음을 전제할 때) 제대로 된 밭에 제대로 된 씨를 뿌려야 한다는 것이다. (p101)

첫째,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은 그 기원이 초자연적이기 떄문에, 우리는 겸손과 믿음이 모두 필요하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스스로는, ‘육체’의 토양에서 이러한 결실을 맺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겸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 안에 이 성령의 열매를 자라게 하실 수 있음을 믿는 믿음이 둘 다 필요하다.

둘째,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은 조건만 갖추어진다면 그 성장이 자연적인 것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그 조건을 만족시키기 위한 훈련이 필요하다.

셋째,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은 그 성숙의 과정이 점진적이기 때문에,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하다.

(p104-105)

4. 성령의 은사들

“성령의 은사들은 사람들이 특정하게 각자에게 맞는 봉사의 일을 하는 데 적합하도록 하나님이 그분의 은혜와 능력으로 부여하신 일정한 재능들이다.” (p109)

“얼마나 많은 다양한 은사들이 존재하는가?”라는 우리의 처음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신약 성경에 명기된 스무 가지의 은사가 있으며, 다양성을 사랑하시고 후히 주시는 분인 살아 계신 하나님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은사들을 주실 수 있다.” 바울은 이 주제를 소개하면서 여러 번 반복해서 말함으로써 이러한 사실을 강조한다. 성령은 한 분이시지만 은사는 여러 가지고, 직임도 여러 가지며, 역사도 여러 가지라고 그는 쓰고 있다. (고전 12:4-6)(p112)

영적 은사들은 우리 자신들(수혜자들)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돕고, 위로하고, 강건하게 하라고 주어진 것이다. (p140)

결론

요약.

성령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주어진다. 그러나 성령은 지속적으로 충만해져야 한다. 성령이 충만할 때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는다. 성령의 열매는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므로 겸손해야하고, 토대만 갖춰지면 자연적으로 성장하므로 훈련해야 하고, 천천히 자랄 때 인내해야 한다. 성령의 은사는 다양한데 모두 다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 주어진다.

2014.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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