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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 서문교회

시편 116편 15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성도는 하나님께 사랑을 입은 자를 말한다. 그 성도의 죽음은 믿음의 마지막 관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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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9/1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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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죽는 것(죽음)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신다.(시 116:15-19)

성경에서는 몇 가지 죽음을 말하는데 첫째는 영적인 죽음입니다. 영적인 죽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말합니다. 신앙을 버리면 하나님과 분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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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5/1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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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16:12-19 여호와께서 성도의 죽음을 귀히 보시는도다

찬양과 헌신 그리고 서원에 대한 약속 이행을 다짐하는 것을 봅니다. 시편 116편의 전반부는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신 하나님께 향한 사랑을 고백하며 평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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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1/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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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죽음 – 네이버 블로그

성도의 죽음 · 1) 성경은 육체적 죽음(눅12:4), 영적 죽음(엡2:1), 영원적 죽음(계21:8)을 말하고 있다. · 2)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므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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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6/2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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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죽음 – 브런치

그러기에 세기의 성자 슈바이처는 생명에의 경외심을 역설하게 된 것입니다. ○○○ 성도님은 만 2년 전에 부인 집사님과 함께 우리 교회에서 신앙생활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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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시116:15)

그리고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 것’은 무엇인가? (본론). 1장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 것. 1. 영생과 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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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시편 116편 15절 한 성도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당신의 마음을 나타내시고 교회안에 허락하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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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죽음이 귀중한 이유 – 기독뉴스

슬픔을 당한 권사님 가정에 이번에는 기쁨을 주셨습니다. 둘째 아들로부터 손녀가 태어났습니다. 귀중한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또 우리 교회 권사님 한 분이 현재 투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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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0. 1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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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 큐티 나눔터

시편 116편 15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성도는 하나님께 사랑을 입은 자를 말한다.

그 성도의 죽음은 믿음의 마지막 관문이다.

이로써 이 땅에서의 시련이 끝나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영생에 들어가는 첫 단계가 성도의 죽음이다.

더 이상 사탄의 마수가 작용하지 않는 곳으로 안전하게 옮겨진 성도는

예수님의 얼굴을 볼 수 있으며 앞서간 형제들을 대하며 위로를 받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도의 죽는 것을 귀중히 보시는 이유는

구속의 완성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하시기까지 하시면서 구속을 이루셨고

이는 에덴동산에서 사람이 범죄한 곳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이처럼 원대한 계획이 완성되는 순간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바라신 귀중한 시간일 것이다.

어제는 곤지암에 도자기 가마를 가지고 있었던 지인의 장례식장에 갔었다.

집 앞의 개천에서 갑자기 내린 폭우에 휩쓸려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그 부인은 남편을 찾기 위하여 손이 망가지도록 흙더미를 파헤쳤다.

그러나 시신은 멀리 떨어진 강가에서 발견되었다.

식장에는 중의 목탁소리와 염불이 이어졌고,

손님들은 술을 마시며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지인은 평소에 속가 제자로서 불심이 깊었다.

그러나 마음이 아픈 것은 영혼이 없는 자의 죽음이라는 것이다.

그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귀중히 보시지 않는다.

비록 많은 군중 앞에서 사자에게 처참히 찢겨 죽을지라도

성도의 죽음을 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이다.

나의 죽음이 어떤 상황이 될지 알 수 없으나 하나님께서 귀중하게 보실 것이다.

다만 그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길 기도할 뿐이다.

성도의 죽는 것(죽음)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신다.(시 116:15-19)

죽음은 참 슬픈 것이지만 성경에서는 죽음을 꼭 슬픔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본문에서는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오히려 귀중히 보신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죽음을 귀중하게 보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귀중하게 보시지 않는 죽음도 있습니다. 믿는 사람이 술집에 가서 술을 마시는데 술집에 불이 나서 죽은 경우도 있습니다. 믿는 사람이 믿음으로 살지 않고 육신이 원하는 대로만 살고 죄악만 쌓으니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기에 이 땅에 있는 것보다는 빨리 데리고 가시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여 죽었다면 이런 죽음은 여호와께서 귀중히 여기시는 죽음은 아닙니다.

그럼 어떤 죽음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여기시겠습니까? 믿음으로 살다가 죽는 성도의 죽음을 귀중히 보십니다. 우리 교회는 최근 들어 사랑하는 교우 두 사람을 먼저 보냈습니다. 우리는 지난 1년 동안 그분들이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려고 했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런 죽음은 하나님께서 귀중히 보셨을 것입니다. 주와 및 복음을 위하여 헌신하다가 죽는 성도의 죽음도 귀중히 보실 것입니다. 행7장에 보면 스데반이 복음을 증거 하다가 핍박자들에게 돌에 맞아 죽는데 그 때 하늘에서는 주님께서 스데반을 격려하기 위하여 보좌에서 일어서셨습니다. 주와 및 복음을 위하여 살다가 죽는 것을 하나님께서 귀중히 보시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몇 가지 죽음을 말하는데 첫째는 영적인 죽음입니다. 영적인 죽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말합니다. 신앙을 버리면 하나님과 분리되며 결국은 영원한 지옥에 떨어지게 됩니다. 이 죽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받아드리지 않은 사람들에게만 적용됩니다. 둘째는 육체의 죽음입니다. 육체의 죽음은 몸과 영이 분리되는 현상을 말하는 것으로서 영이 몸에서 떠나므로 몸의 기능이 정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죽음은 누구도 예외 없이 다 당하게 됩니다. 셋째는 육신의 죽음입니다. 육신의 죽음은 육체는 살아있는 상태에서 경험하는 신앙적인 자기 포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육신이 원하는 것을 포기하고 영이 원하는 것을 선택할 때 육신은 죽는 것입니다. 육신이 원하는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선택할 때 육신이 죽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 15:31에서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사도 바울이 믿음 안에 있다가 다시 믿음 밖으로 나가는 어리석은 일 즉 영적인 죽음을 날마다 반복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또 그의 육체가 날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육체의 죽음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 무슨 뜻이겠습니까? 육신의 죽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자기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하며 영 중심의 삶을 산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자기를 죽이는 것이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취할 행동 방식이라고 가르쳐줍니다. 막8:34에 보면 예수님께서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오늘 설교는 두 부분을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는 본문 중심으로 육신이 죽어지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살펴봅니다. 둘째는 성경 전체를 통해서 어떻게 육신이 죽어지는지 살펴봅니다.

1.육신이 죽어지면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1)주의 종으로서의 삶을 살게 된다.

16절에 보면 시편기자는 자신이 주의 종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종은 무슨 일을 하든지 주인이 원하는 대로 해야 합니다.

기수가 말 위에 올라탔는데 기수가 원하는 대로 가는 말이 있고 자기가 원하는대로기수를끌고 가는 말이 있습니다. 만약 말이 기수를 끌고 간다면 그 말은 매를 많이 맞아야 합니다. 그리고 기수에게 순종할 때 까지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우리 자신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움직이는가 아니면 내가 주님을 움직이려고 하는가를 살펴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종으로 사는 것을 답답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도 생각이 있고 나도 자유의지가 있는데 그렇게 구속당하며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은 힘든 일이지만 가장 지혜로운 일입니다. 장기를 둘 때 고수가 훈수 두는 대로 장기 알을 놓기만 해도 상대를 이길 수 있습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지시하시는 대로 주의 종이 되어 사십시오. 하수가 고수의 뜻을 이해 할 수 없지만 시키는 대로만 하면 다른 결과를 보게 되는 것처럼 인생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해가 안 되니 답답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주님이 인도하는 대로 순종하십시오. 그것이 가장 지혜롭게 인생을 사는 방법입니다.

2) 결박이 풀어진다.

16절에 보면 “주께서 나의 결박을 푸셨나이다”라고 말합니다.

결박을 당했다는 것은 어떤 부분이 묶여서 활동이 제한 당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재정이 결박당한 사람은 가난하거나 아니면 돈은 있으나 쓸 수 없게 되거나 손이 수고한 대로 거두지 못합니다. 건강이 결박당한 사람은 육체의 질병으로 고통당합니다. 대인관계에 결박당한 사람은 사람들 때문에 늘 고통당하든지 아니면 엎드려져도 도울 자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결박은 원어의 의미를 보면 징계로 인한 결박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고 육신이 원하는 대로만 사니 하나님께서 징계하셔서 결박을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녀들에게 용돈을 주는데 용돈을 엉뚱한 곳에만 사용하는 자녀가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필요하다면 용돈을 주지 않는 징계도 내릴 것입니다. 이런 경우 이 아이는 용돈 부분에 있어서 결박을 당했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징계의 이유는 사랑 때문입니다. 잠3:11, 12을 보면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고 징계의 이유를 밝힙니다.

그럼 언제 징계가 끝날까요? 내가 죽어질 때 징계가 끝납니다. 본문에서 성도가 죽어지면 주께서 그 성도의 결박을 풀어주신다는 말씀합니다. 재정의 결박이 있는 사람은 재정 분야에서 육신이 죽어져야 합니다. 대인관계의 결박이 있는 사람은 대인관계의 결박이 풀어져야 합니다. 내가 어떤 부분에 있어서 육신을 죽이면 하나님은 그 부분에 있어서 징계로 인한 결박을 풀어주신다는 말입니다.

3) 진정한 예배자가 된다.

17절에서 시편 기자가 “주께 감사제를 드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는 말은 예배가 회복된다는 말입니다. 육신이 죽어진 사람은 진정한 예배자가 됩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린다는 말은 내가 제물이 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구약시대에 제단에 올라가는 제물은 산채로 드리지 않았습니다. 칼로 찔러 피를 흘리고 완전히 죽여서 드렸습니다. 신약시대에 제사를 대신하여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육신을 죽여야 참 예배자가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예배를 위하여 몇 가지 권면을 드립니다.

첫째, 성령으로 드리는 예배자가 되십시오. 요4:24에 보면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신령이라는 성령으로 하는 것을 말합니다.

둘째, 진리로 드리는 예배자가 되십시오. 아무리 좋아 보이는 일도 아무리 대단해 보이는 일도 진리를 벗어나면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면 기적도 거짓이요 능력도 거짓입니다.

셋째, 시간으로 드리는 예배자가 되십시오. 모든 것이 주인의 것입니다. 시간도 주인의 것입니다. 내 맘 대로 시간을 사용하는 사람은 육신이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종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공식적인 예배에 좀 더 시간을 드리십시오. 하나님은 시간의 예배를 원하십니다.

넷째, 몸으로 드리는 예배자가 되십시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을 위하여 몸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생활이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자기의 몸으로 하나님의 듯을 이루어드리는 예배자를 주님은 찾으십니다.

다섯째, 물질로 드리는 예배자가 되십시오.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습니다. 구약시대에 제사를 드릴 때는 반드시 제물을 드렸습니다. 물질은 형편에 따라서 드렸습니다. 송아지로 가능한 사람은 송아지로 드렸고 염소가 적당한 사람은 염소로 드렸습니다. 염소도 부담스러운 사람은 비둘기를 드리기도 했습니다. 제물의 양은 형편에 따라 드렸으나 반드시 제물을 드리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4) 말씀대로 살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말씀대로 사는 것이 쉽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과 내가 원하는 것이 일치 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내 뜻이 일치 되지 않는 이유는 내가 살아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 생각이 살아있습니다. 내 고집이 살아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시키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내가 일치하려면 내가 죽어져야 합니다. 내가 죽어지면 내 뜻은 없어지고 하나님의 뜻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2.육신은 어떻게 죽어집니까?

하나님은 성도가 육신을 죽이고 영중심의 삶을 사는 것을 기뻐하시고 육신을 죽이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더 큰 은혜와 축복으로 역사하십시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의 육신을 죽이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육신을 죽일 수 있을까요? 성경이 말하는 몇 가지 해답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 나는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확신할 때 죽어집니다.

이 진리는 우리의 머리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나는 살아있는데 죽었다고 믿어야 한다는 것이 지성인들로서는 용납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의 사람들은 자신의 머리보다성경 말씀이 옳으며 진리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머리로 이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갈2:20에 보면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진리는 믿음의 원리가 적용됩니다. 믿으면 천국, 믿지 못하면 지옥입니다. 믿으면 기도가 응답되고 믿지 않으면 기도의 응답은 없습니다. 믿으면 축복을 받지만 믿지 않으면 축복도 없습니다. 내가 죽어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2000년 전에 갈보리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었습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 사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이 사실을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육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지배를 사는 사람도 많지 않은 것입니다. 이제 갈2:20 말씀을 그대로 믿으십시오. 내게 일어나는 현상이 어떠하든지 성경대로 나는 죽었다고 믿으시고 그 믿음대로 육신이죽어지는 일들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2)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의지적인 굴복을 할 때 죽어집니다. 내가 원하는 것과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다를 때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선택하려면 내가 원하는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이 포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를 쳐서 복종 시킨다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이 말은 다른 표현으로 인내와 절제입니다. 인내는 하기 싫은 것을 하는 것이며 절제는 하고 싶은 것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절제와 관련하여 국민일보에 실린 예화를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미국을 지탱하는 ‘파워 엘리트’그룹은 몇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들은 모두 가정에서 여왕처럼 강력한 권한을 가진 엄격한 어머니로부터 ‘절제’와 ‘도덕적인 삶’을 교육받는다. 미국을 지탱하는엘리트를와스프(WASP. White Anglo-Saxon Protestant)라고 부른다. 와스프는 백인이며 앵글로색슨족이며 개신교인이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 중 와스프가 아닌 사람은 케네디대통령이 유일하다. 그는 가톨릭 신자였다. 부시 전대통령과 부인 바바라여사도 대표적인 와스프그룹이다. 한번은 부시의 동생 조나단이 야구경기를 마치고 집에 들어오며 어머니를 불렀다. “어머니,제가 홈런을 쳤어요” 그러자 어머니 도로시가 엄하게 꾸짖었다. “네 자랑은 하지 마라. 중요한 것은 네 팀이 어떻게 됐느냐는 것이다. 개인보다는 전체를 생각하는 사람이 진정한 지도자가 될 수 있단다”지도자는 개인보다 전체를 생각한다. 지도자의 권위는 절제와 희생의 삶에서 나온다.”

저는 위의 글을 읽으면서 과연 우리 성도들은 미국을 움직이는 파워엘리트 그룹인 와스프처럼 영적인 훈련을 받고 있는가를 생각해 봤습니다. 그들이 여왕처럼 강력한 권한을 가진 어머니들로부터 절제와 도덕적인 삶을 교육 받았던 것처럼 나는 그렇게 목회하고 있는가를 돌아봤습니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무엇을 선택하느냐가 인생의 열매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선택에 실패를 합니다. 실패하는 이유는 무엇을 선택할 줄 몰라서 실패하는 경우보다는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를 알지만 육신이 원하는 것을 쳐서 복종시키지 못하여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3) 주님에게 완전히 정복당하면 죽어집니다.

주님에게 정복당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살아서 육신의 일을 행합니다. 그 결과 육신의 열매를 맺습니다. 주님에게 정복당하면 영의 일을 하게 되고 영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럼 주님에게 완전히 정복당하는 방법 어떤 방법이 있습니까?

첫째, 주님의 다루심으로 육신이 초죽음이 되면 주님에게 정복당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정복하셔서 우리를 통해서 성령의 열매, 사역의 열매, 영혼의 열매, 기도 응답의 열매를 맺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서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다루시는 것입니다. 환경을 적당하게 안배하셔서 우리를 죽이십니다. 그리고 그 죽음을 통해서 우리를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은 축복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 방법은 아픔이 있기에 힘든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이 신으로 충만하면 주님에게 정복당하고 육체는 죽어집니다. 성령님은 지배력이 있습니다. 성령님이 우리 가운데 오시면 우리를 지배하십니다. 오순절 날 성령께서 마가에 다락방에 모인 120명에게 임하시자 그들의 언어가 지배당했습니다.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 죽였던 핍박자 사울에게 성령께서 임하시자 그가 지배를 당하게 되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성령님이 지배하시면 우리는 죽어지고 그분의 뜻이 우리 가운데서 이루어집니다. 마치 조종사가 비행기를 조종하듯 성령님은 우리를 지배하셔서 우리의 죽음으로 열매를 맺습니다

(마경훈 목사)

큐티로 여는 성경(하)

여호와께서 성도의 죽음을 귀히 보시는도다

시편 116:12-19

요즘 며칠 비다운 비가 내려서 농작물 가뭄에 해소가 되었습니다.

또 다시 메마른 가뭄이 이어질까봐 미리 파두었던 웅덩이의 물을

여러 통에 가득 담아 가뭄을 대비하고

또 이렇게 하고도 양이 차지 않아서

재활용품으로 내놓은 페트병들을 모아 병마다 물을 채워 두었습니다.

농작물들은 자신을 돌보아주는 주인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큰다는데

그간 타들어가는 농작물에 제대로 물을 주지 못했던 미안한 마음이

이렇게까지 다음 가뭄을 대비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중부지방을 오르내리면서 많은 비를 뿌려준 한냉전선이 오늘을 지나

북한 쪽으로 올라간다고 하는데 그곳에서도 고마운 역할을 해주어

굶주린 북한 주민들이 기근으로 고통당하지 않기를 기원 드립니다.

[오늘의 시편 전후 배경 요약]

오늘의 시편 116편 후반부를 묵상하면서 작자 미상인

이 시인의 가슴에 하나님께 향한 고양된 감정이 부풀어 올라서

찬양과 헌신 그리고 서원에 대한 약속 이행을 다짐하는 것을 봅니다.

시편 116편의 전반부는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신 하나님께 향한

사랑을 고백하며 평생 기도의 다짐으로 시작하였는데[116:1]

오늘 읽게 되는 시편 116편 후반부는 내가 받은 이 큰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 할꼬 외치는 행복한 고민으로 시작합니다.[116:12]

무엇이 이 시인으로 하여금 이렇게까지 자기감정을 표현하게 하는지

그리고 그가 당면했던 고난은 무엇이었으며 그가 체험한 하나님과

그 기도의 응답은 무엇인지 궁금해지는데

앞선 문맥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그는 자신의 목숨을 포기해야 할 만큼 밑바닥으로 떨어져서 [116:8]

주변 사람들까지도 이제 저 사람은 끝난 인생이라고 했을 만큼

심각한 상황에 까지 내몰렸으나

하나님께서는 뭇 사람들의 말이 거짓말로 판명 나게 하셨고[116:11]

그는 다시 소생되고, 회복 되었으며

다시 기회를 얻은 것에 대해서 이렇게 까지 감사하고 감격하며

자신이 고통 중에 있을 때 드렸던 서원의 이행을 다짐하는 것을 봅니다.

————- ———— ———– ————

그런데 오늘의 시편을 음미해보면서 전후 문맥에 전혀 어울리지 않게

중간에 불쑥 끼어 들은 것처럼 보이는 한 구절이 왠지 마음에 걸립니다.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 도다.[116:15](개역한글)

아마 그는 마지막 호흡의 한 톱을 몰아쉬고

죽음 저편의 세계로까지 들어갔다가 나온 것 같으며

또한 한 사람의 호흡이 끊어지고 죽음을 맞았을 때

이생에서 경험하지 못하는 내생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경험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고백하게 된 것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성도가 죄악의 풍파와 유혹이 많은 이 세상에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며 성화의 투쟁을 마치고

그의 영혼이 육체를 벗어나게 될 때

그가 믿음으로 살아낸 인생을 매우 귀중한 가치로 여기시며

두 팔 벌려 그 영혼을 받으신다는 말씀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나사로가 죽었을 때

그는 세상에서 별 볼일 없고 무가치한 자였으나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가난과 질고를 견디며

하나님께 향한 믿음을 지킨 그가 너무 귀하여

천사들에게 받들려 천국으로 입성하게 하신 것이라든가,[눅16:22]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어갈 때

주님께서 보좌 우편에 서서 그의 영혼을 두 팔로 받으신 것과[행7:56]

모세가 죽었을 때 마귀가 그 시체를 취하고자 하자

하나님께서 천사장 미카엘을 보내셔서 지키게 하신 것을 보면[유1:9]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살다 한 평생을 마감하는 성도의 죽음에 대해

얼마나 관심이 지대하신지 엿보게 되는데

아마 시편 116편의 저자도 이러한 자리까지 갔다가

다시 이생으로 돌아오게 되고 생명을 연장 받은 것을 엿보게 됩니다.

그가 다시 생명을 연장 받아 그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이생으로 돌아왔으니 그는 다시 얻은 이 기회로 인하여

얼마나 하나님 앞에 진지한 인생이 되었을 것인지

오늘의 시편 속에 충만히 녹아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시편의 말씀들은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직접 계시로써가 아니라

시인이 경험하는 하나님을 드러내는 간접 계시라는 것을 감안할 때

따라서 오늘의 시편은 우리[내]가

이 시인이 경험했던 것 같은 극한 상황까지는 가지않았더라도

이 시인이 경험한 것들을 나의 간접 경험으로 삼고

이 시인의 고백과 삶의 자세를

나의 자세로 삼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교훈으로 받아드리게 합니다.

오늘 내가 살아있는 이 하루와 이 현실은

내 앞에 죽어간 사람들이 그토록 살고 싶어 했던

바로 그 하루이며 현실이라는 것을 감안 할 때

이 시편 116편에 녹아있는 시인의 고백과 사상처럼

오늘도 나의 수명을 연장하여 주신 내 생명의 주인이신 주님 앞에

오늘이 마치 내 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주님 앞에 진지하게 살아드려야 할 것을 마음 깊이 다짐하게 됩니다.

주님!

이 세상에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며

성화의 투쟁을 이어가다가

언젠가 주님께서 나를 부르셔서

내가 이 육체의 장막을 벗어나게 될 때

성도의 죽음을 귀히 보시는 주님 앞에

세상의 모든 수고를 끝내고

영광스럽게 안기는 은혜를 입혀 주옵소서.

오늘 나에게 허락한 이 하루를

그냥 보내지 않게 하시고

이미 주신 영생의 선물로써

주님과 연결된 새 생명이며

생명의 삶으로 살다가

주님께서 나를 부르시는 날

할렐루야 영광의 주님께 이르게 하옵소서.

성도의 죽음

성도의 죽음에 대한 의미

1) 성도의 죽음은 출생하는 날보다 나은 죽음이다. (전7:1-4)

2) 성도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 죽음이다. (시116:12-16)

3) 성도의 죽음은 주안에서 죽는 죽음으로 복된 죽음이다. (계14:13)

4) 성도의 죽음은 수고를 그치고 편히 쉬는 죽음이다. (계14:13)

5) 성도의 죽음은 의인의 죽음으로 소망이 있는 죽음이다. (벧전1:3-4)

6) 성도의 죽음은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살기 위한 죽음이다.(요11:25-26)

7) 성도의 죽음은 주로 말미암아 승리하는 죽음이다. (고전15:54-58)

8) 성도의 죽음은 새몸으로 덧입기 위한 죽음이다. (고후5:1-4)

9) 성도의 죽음은 주님이 깨우실 때까지 자는 죽음이다. (살전4:13-18)

10) 성도의 죽음은 저희 행한 모든 일이 따르는 죽음이다. (계14:13)

*죽음의 종류

1.육체적 죽음 인간의 생리적 죽음에 대하여 성경은 그저 ‘죽음’이라고 할 뿐 분명한 정의는 없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육체에서 영혼이 떠나가는 현상을 가리킨다고 말 할 수 있다(전12:7;마27:50;행7:59). 이러한 육체적 죽음은 죄에서 기인한 것이며, 모든 사람이 한 번씩은 겪게 되는 필연적인 과정이다(롬6:23);히9:27). 주께서 재림하시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이 육체적 죽음을 피할 수 없다. ​ 2.영적 죽음 육체적 죽음이 육신과 영혼의 분리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었던 것처럼 영적인 죽음도 이와 마찬가지로 분리 곧 인간이 하나님과 분리됨을 의미한다. 그리고 죄가 이러한 분리를 낳는 중요한 요인으로 등장하는 것도 육체적인 죽음과 동일하다(사59:2). 3.영원한 죽음 이 죽음은 영적인 죽음과 육적인 죽음의 최후 단계를 의미한다. 이것은 타락한 인간의 최후 결과요 마지막 열매이다. 그리스도의 재림 때 죄인들이 최후의 심판을 받아 생명과 기쁨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에게 떨어져 영원한 고통과 슬픔을 겪게 되는 상태를 가리킨다(계20:13-15). 성경에서는 이를 ‘둘째 사망’이라고 표현했다(계20:6,14;21:8) *죽음에 대한 성도의 자세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음으로 그의 부활에 동참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영생을 획득하게 되었다(고전15:54-57). 또한 성도는 인간 위에 군림하며 왕노릇하던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이에 따라 주를 믿는 성도들은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운 상태에 있는 것이다(요5:24;계20:6). 따라서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성도의 죽음은 예수님이 만들어 놓은 그 길을 따라 그의 피를 힘입어 담대하게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이다(히 10:19). 성도의 육적인 죽음은 개인적인 종말로서의 특별한 의미를 어떤 이는 말하기를 우리가 죽는 것은 죄의 결과가 아니고 죽음은 ‘인간의 자연스런 현상이다’고 한다. 죄가 아니라도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나 창세기 3장과 롬 5장에서 분명히 우리는 죄로 인해 죽게 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성경 속에서는 영적인 죽음이 먼저 왔고, 육적인 죽음이 오고, 그 이후에 영원한 죽음이 온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42문은 성도의 죽음은 영생에 들어가는 관문이라고 했다. 죽음은 신자에게 죄 짓는 삶의 종료를 뜻한다. 성화의 완성, 영화의 단계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우리가 간절히 사모하는 것은 이 죄의 몸을 벗어버리는 것 아닌가? 바울 사도도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했다. 현재 우리들의 삶에서는 우리는 죄의 세력에서부터 부분적으로는 자유 할 수 있다. 그러나 부패성으로부터의 완전한 자유는 마지막 날에 가능하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죽음은 본격적 축복의 삶에 대한 시작이다. 서론이 막을 내리고 이제 본론이 시작된다. 영광스런 새 출발이다. 영광의 관문이다. 왜냐하면 예수의 죽음은 인간의 최대의 불행을 최대의 축복으로 바꾸는 것이다. John Owen: the death of death (예수의 죽음은 죽음을 죽이는 죽음이다). 예수의 죽으심은 죄의 쏘는 것, 사망의 독기를 제거해 버림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축복의 세계로 인도하는 역할을 하셨다. C. Spurgeon은 ‘죽음은 상실이 아니라, 모든 상실을 상실함이다.’라고 했다. 아이들이 태어나면 고난의 시작이지만, 죽음은 고난의 끝이다. 우리는 이런 것을 생각할 때 담대해지고 감사할 수 있다. 우리들이 받는 고난은 우리들이 장차 누릴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 어떤 교인들 중에는 질병에 걸려서 기도했는데 결국 죽었을 때 실족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사실 죽음이 완전한 치유다. 질병이 나아도 또 질병에 걸린다. 그러나 죽음은 완전한 치유다.

성경이 말하는 죽음

1) 성경은 육체적 죽음(눅12:4), 영적 죽음(엡2:1), 영원적 죽음(계21:8)을 말하고 있다.

① 육체적(肉體的) 죽음은 영혼(靈魂)과 신체(身體)의 분리에 의한 육체 생명의 종결(終結)이다.

② 영적(靈的) 죽음은 하나님의 영과 인간의 영과의 연교(連交:연결하여 교통함)의 단절이다.

③ 영원(永遠)한 죽음은 최후심판(最後審判)으로 받게 될 영벌(永罰)을 가리킨다.

2)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므로 아무도 죽음을 피하지 못한다(히9:27).

사망은 존재의 끝남이 아니라 존재양식(存在樣式)이 달라지는 것일 뿐이다.

3) 죽음은 누구나 다 체험하는 것이지만, 자연 현상적(現狀的) 종말(終末)이 아닌 죄로 인한 형벌이다.(창2:17, 창3:19, 롬5:12,17, 롬6:23, 고전15:21, 약1:15)

죽음은

① 하나님의 진노의 표현이요(시90:7,11,),

② 심판이요(롬1:32),

③ 정죄요(롬5:16),

④ 저주이다(갈3:13).

4)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격(人格)에게 사망은 자연스러운 것일 수 없다. 육체적 죽음은 범죄로 인한 영적 사망의 결과이다.

성경이 말하는 성도들의 죽음의 의의

1)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로 말미암아 사죄, 칭의, 하나님과의 화친과 영원한 생명을 받았다.(요3:36, 요6:40, 롬5:17-21, 롬8:23, 고전15:26,51-57, 계20:14, 계21:3-4) 그러므로 신자의 죽음은 불신자의 죽음과 다르다.

① 불신자들의 죽음은 죄로 인한 심판이지만

② 신자들의 죄로 인한 형벌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담당하신 고로 형벌에서 벗어났다. 그리스도인들은 정죄와 사망에서 사죄, 칭의, 새 생명으로 옮겨진 자들이다(롬8:1-2, 고전15:55, 요5:24).

2) 성도가 당하는 고난(苦難)과 죽음은 형벌 적인 것이 아니라, 신자의 성화를 위하여 제정하신 징계의 절정(絶頂)이다(히12:6, 시116:15).

① 죽음이 가까이 왔다는 생각은 교만을 겸손으로 바꾸게 하고 육신의 소욕을 억제하여 성령의 소욕을 좇아 행함으로 영적 성장, 성화와 신행을 촉진시켜 준다. 그러므로 죽음은 성도의 성화를 위해 비상한 유익을 주는 것이다.

② 사죄, 칭의, 새 생명 받은 성도의 육체적 죽음은 그의 믿음의 시련과 영혼의 성화를 도와 천국에 들어가게 하는 준비로 남아 있는 것이요. 죄의 형벌이나 존재의 멸절이 아니다.

3) 성도의 지상생애(地上生涯)의 완성은 죽음으로 이룬다.

① 그리스도의 대속 공로의 완성도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루셨다.(요19:30)

② 사도 바울도 순교로 그의 사도적 직무를 완수하였다.(딤후4:7).

③ 이 세상 삶의 완성은 년 수(年數)를 표준하여 측량할 수 없다. 젊어서 충성하다가 죽은 사람들이 고령을 누린 자들 보다 더 많이 성취한 예도 종종 있음을 보게 된다.

4)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통해 그의 영혼이 이 세상에서 광명한 천당으로 옮겨지게 된다. 신자가 죽을 때에 그 영혼이 완전히 거룩하게 되어 즉시 영광 중에 들어가고 그 몸은 여전히 그리스도께 연합하여 부활할 때까지 무덤에 쉬느니라(소요리 문답 37)

5) 성도는 죽음을 통해 장막생활을 청산하고 영주처(永住處)인 천성(天城)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옮겨짐은 매우 신비하고 장엄한 일이다.

6) 사람이 입고 있던 때묻고 낡은 옷을 벗고 깨끗한 새 옷으로 갈아입은 것처럼 신자의 죽음은 의와 영생의 몸으로 바꾸어 입기 위해 죄와 사망의 몸을 벗는 것이다. 죽음을 통해 신령한 몸을 입을 수 있도록 이 육의 몸을 벗은 것이다.(고전15:42-44, 빌3:21)

성도의 죽음

남편을 떠나보내고 몇 주 뒤, 목사님이 교회 주보 칼럼에 성도의 죽음이란 제목으로 글을 올리셨다.

잘 기억하고 간직해야 할 기록이라 여기에 남긴다.

<성도의 죽음>

건강하고 바른 가정이라면 한 아이의 출생을 모두가 기뻐합니다. 하지만 정작 태어난 아이는 울면서 태어납니다. 반면 사람이 죽을 때는 그와 좋은 관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슬퍼합니다. 하지만 정작 이 세상을 떠나간 당사자가 내세를 보장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세상을 떠난 죽음 그 순간이야말로 영원과 연결되는 시간이자 영원한 집으로 들어가는 은혜와 축복의 통로가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한 인간의 태어남과 죽음을 사람이 주관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스스로의 의지로 태어난 사람도 없거니와 출생의 모든 환경 또한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 생명이 있게 하시는 그분에 의해 수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인간입니다. 죽음도 때와 방법은 전적으로 인간에게 있지 않고 절대자인 그분에게 있습니다. 그러기에 세기의 성자 슈바이처는 생명에의 경외심을 역설하게 된 것입니다.

○○○ 성도님은 만 2년 전에 부인 집사님과 함께 우리 교회에서 신앙생활의 첫 발을 내디디셨습니다. 당시 공모제 교장에 응모해놓고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오셨습니다. 그리고 두 달 만에 교장에 취임하셨습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교장실에서 감사예배를 드렸습니다. 신앙의 초보였지만 장로 권사이신 처가 부모님의 기도와 아내의 영향으로 이미 그 마음 밭이 옥토로 바뀌어 있었던 터였습니다.

2년 신앙생활을 해 오시는 동안 주일예배는 거의 빠짐없이 지키셨습니다. 삶의 자세가 바르고 성실하고 최선을 다하는 삶이었듯이 신앙생활도 그렇게 실천해오셨습니다. 설교를 들으면서 깨달음을 메모하고, 주보에 실린 목양 칼럼에서 좋은 글귀를 학교에서 훈화하실 때 인용하시기도 하고, 교회가 전개하는 천국 방언 캠페인을 학교에서 적용하기도 하는 등 적극적인 생활 크리스천으로 살아오셨습니다.

신앙생활 2년에 벌써 성경을 1독 하시고 지난 3월에는 확신반을 수료하셨습니다. 바로 이어 부활절에 세례를 받으시고 전 교우들 앞에서 세례 간증까지 하셨습니다.

그런 ○○○성도님께서 지난 7월 20일 몸에 이상을 느껴 진료받으신 결과 간암 말기 진단을 받으셨습니다. 그날이 23일, 그러니까 ○○○ 성도님이 신앙생활을 시작 한지 2년째이자 만 52세의 생일 아침이었습니다. 사망선고를 받은 그 아침에 병원 심방을 했을 때 성도님은 “하나님이 오늘 저를 다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라고 의연하고 담담하게 말씀하시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였습니다. 그로부터 꼭 1주일 만인 30일 새벽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으셨습니다.

매일 심방을 할 때마다 몸이 급격히 안 좋아지는 고통 중에도 기도할 때마다 “아멘”으로 응답하시고 제 손을 꽉 잡으시면서 고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난 수요예배를 마치고 병원에 들렀을 때는 매우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통증 때문에 몸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꾹 참아내셨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찬송 부르면 소리 없이 입으로는 따라 하시고 기도하면 “아멘”으로 응답하셨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지 세 시간 후 새벽 1시에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마지막인 것 같다고 해서 다시 달려갔습니다. 천국 소망에 대한 말씀을 읽어드리고 조용히 찬송을 부르고 기도했습니다. 힘겹게 숨을 쉴 뿐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한참의 시간이 흘러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잠시 눈이라도 붙이려고 집으로 돌아오려고 한 번 더 찬송을 불렀습니다. 임종 때에 불러보지 않았는데 갑자기 부르고 싶어 져서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찬송을 부르고 임종기도를 드렸습니다. “○○○선생님, 천국에서 만납시다.” 인사하고 저는 자리를 뜨고 제 아내가 “안 선생님, 존경합니다. 끝까지 예수님 이름 부르세요. 천국에서 만납시다.”라고 말하자 움직이지 않던 입이 움직였습니다. 소리는 안 들리지만 입 모양으로 봐서 “천국에서 만나요. 고맙습니다.”라는 말이 틀림없었습니다. 그 말이 마쳐지면서 숨을 멈추셨습니다. 고요히 잠자는 것처럼 주님의 품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병원이나 하나님에 대하여 불평이나 섭섭함을 한 번이라도 할 법한 상황이었지만 성도님은 다 감사로 받아들였습니다. 연명을 위한 장치를 거부하셨습니다. 마지막까지 목사의 손을 잡고자 했고 결국 기도와 작별인사로 이 세상을 마감하셨습니다. 이제 청년기에 접어든 남매와 사랑하는 아내를 두고 가지만 죽음 앞에 서는 성도님의 의연한 자세가 남은 가족들과 교우들에게 큰 도전과 위로가 되었습니다. 남겨진 남매에게 확고한 신앙적 유산을 남긴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사람이 죽을 때에야 그 사람의 신앙의 진위를, 믿음의 정도를 가늠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분은 진정 하나님이 인정하신 성도였습니다.

“주님을 성실하게 따르는 성도의 죽음은 주님께 귀중하다.”(시 116:15, 표준 새번역)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시116:15)

■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시116:15)

선지자선교회

본문: (시116:15)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서론)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하셨다.

그러면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 것’은 무엇인가?

(본론)

1장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 것

1. 영생과 생명

(요일5:10-11)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에게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하나님이 주신 영생과 하나님의 아들 안에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의 자기 안에 있는 증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보혜사 성령의 임하심’과 ‘주의 성령의 임하심’이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무엇인가?

그리고 ‘보혜사 성령의 임하심’과 ‘주의 성령의 임하심’은 무엇인가?

1)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

(엡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하셨다. 즉 우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가(엡2:1)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다. 이것은 우리에게 죄 사함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면 ‘피 곧 대속’은 무엇이며, ‘죄 사함 곧 구속’은 무엇인가?

① 피 곧 대속

❶ 대형벌의 대속

예수님의 육체가 죽으시는 대형벌(代刑罰: 골1:22)의 대속을 하셨다.

❷ 대복종의 대속

예수님께서 죽기까지 복종하시는 대복종(代服從: 빌2:8)의 대속을 하셨다.

❸ 대화평의 대속

예수님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아버지 하나님 안에 거하시는 대화평(代和平:골1:19-20)의 대속을 하셨다.

② 죄 사함 곧 구속

❶ 사죄의 구속

육신의 연약한 자(롬5:6)를 하나님의 영(롬8:9)이 거하시는 생령(창2:7) 곧 산 영(고전15:45)의 사람으로 구속하셨다.

❷ 칭의의 구속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는 죄인 된 자(롬5:8)를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롬5:19)로 구속하셨다.

❸ 화목의 구속

육신의 생각으로 하나님과 원수 된 자(롬5:10)를 영의 생각(롬8:6)으로 하나님과 화평하고 또 하나님과 화목 하는 자(고후5:18)로 구속하셨다.

2) 보혜사 성령의 임하심과 주의 성령의 임하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엡1:7, 엡1:13) 보혜사 성령과 주의 성령이 임하신다.

① 보혜사 성령의 임하심

❶ 영원토록 함께 계시는 보혜사

(요14:16-17)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보혜사 성령이 임하셔서 영원토록 함께 계신다.

❷ 모든 것을 가르치시는 보혜사

(요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보혜사 성령이 임하셔서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주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신다.

❸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시는 보혜사

(요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보혜사 성령이 임하셔서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신다.

–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보혜사 성령의 임하심이 곧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의 자기 안에 있는 증거로써 하나님이 주신 영생이다.

② 주의 성령의 임하심

(눅4: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주의 성령이 임하셔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기름을 부으시고(제사장 직책과 선지자 직책과 왕 직책을 세우시고)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신다.

❶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육신의 연약한 자<롬5:6, 롬6:19>를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롬8:9> 생기 있는 자가 되게 하시는 것이다.

❷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는 죄인 된 자<롬5:8, 롬11:30>를 하나님께 순종하는<롬1:5) 의인이 되게 하시는 것이다. ❸ 눌린 자를 자유케 육신의 생각으로 하나님과 원수 된 자<롬5:10, 롬8:7>를 영의 생각<롬8:6>으로 하나님과 화목 하는 자가 되게 하시는 것이다.

–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주의 성령의 임하심이 곧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의 자기 안에 있는 증거로써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이다.

2. 몸의 부활

1)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롬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하셨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임하시는 보혜사 성령과 주의 성령의 지극히 큰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엡1:19-20).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임하시는 보혜사 성령과 주의 성령의 지극히 큰 능력이 우리 죽을 몸도 살리신다. 그러므로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 것이다.

2)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고전15:42-44)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하셨다. 그러므로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 것이다.

2장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 것

1. 그 낳은 자의 귀중히 여기는 자

(아6:9) 나의 비둘기 , 나의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로구나 그는 그 어미의 외딸이요 그 낳은 자의 귀중히 여기는 자로구나 여자들이 그를 보고 복된 자라 하고 왕후와 비빈들도 그를 칭찬하는구나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로구나 그는 그 어미의 외딸이요 그 낳은 자의 귀중히 여기는 자로구나’ 하셨다. 그러므로 그는 그 어미의 외딸이요 그 낳은 자의 귀중히 여기는 자라 하신 것은 곧 주님께서 성도에 대한 심정을 말씀한 것이다. 이것이 곧 성도를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 것이다.

그러면 ‘그 낳은 자의 귀중히 여기는 자’는 무엇인가?

2.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

(롬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며. 이것이 그 낳은 자의 귀중히 여기는 자이며,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로써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보혜사 성령이 임하셔서 영원토록 함께 계시고(요14:16),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요14:26),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증거 하시는(요15:26) 것이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주의 성령이 임하셔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기름을 부으시고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시는(눅4:18) 것이다.

(결론)

문1: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 것’은 무엇인가?

답: ❶하나님의 아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하나님이 주신 영생이 있기에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 것이다. ❷하나님의 아들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기에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 것이다.

문2: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 것’은 무엇인가?

답: ❶그 낳은 자의 귀중히 여기는 자라(아6:9) 하신 것은 곧 주님께서 성도에 대한 심정을 말씀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를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 것이다. ❷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롬8:14)이다. 그러므로 성도를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 것이다.

– 2021. 07. 21∥김반석목사∥선지자문서선교회∥http://www.seonjija.net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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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윤긍환 (221.♡.161.187) 작성일 : 2004-09-09 12:28:00 조회수 : 1981 권면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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