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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선덕여왕 남편! 그의 정체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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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 : 남편은 누구인가요? – 네이버 블로그

그런데, 삼국유사 왕력보 선덕여왕조에 선덕여왕의 남편을 “음(飮)갈문왕”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때 음(飮)자의 우리말로 “마실 음”입니다. “飮葛文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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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2/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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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 – 나무위키:대문

남편은 삼국유사에서는 음갈문왕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화랑세기에는 여기에 추가적으로 김용춘, 을제 3명의 남자가 선덕여왕의 남편이라고 써 있다. 다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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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4/2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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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선덕여왕(善德女王, ? ~ 647년 2월 17일(음력 1월 8일), 재위: 632년 ~ 647년)은 신라의 제27대 왕이며 한국사 최초의 여왕이다.자비 (불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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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4/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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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 동시에 세 남자와 결혼하다 – 방랑자

신라 천년의 미소. 오늘은 친언니의 남편뿐 아니라 애인까지 빼앗은 선덕여왕의 기막힌 사연을 알아보겠습니다. 신라 26대 진평왕(579∼632년)은 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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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5/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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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내리’ 남자 셋 들이고도 임신 못한 선덕여왕 | 중앙일보

일러스트=강일구“신이 듣기에 옛날에 여와씨(女?氏)가 있었으나, 그는 진짜 천자가 아니라 (남편인) 복희(伏羲)가 구주(九州)를 다스리는 일을 도왔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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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2/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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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김유신과 연인사이?… 선덕여왕의 세가지 미스터리

선덕여왕의 세가지 미스터리. 1 성공한 군주였나 – 재위 15년동안 패전 거듭 상대등 반란 등 내치도 불안 2 남편 있었나 – 삼국유사엔 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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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2/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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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 미상 ~ 647 – 우리역사넷

선덕여왕은 신라 제27대 왕으로,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여왕이다. … 선덕여왕의 남편에 대해서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음갈문왕(飮葛文王)이 배필이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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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2/1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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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선덕여왕 남편! 그의 정체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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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6.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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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 : 남편은 누구인가요?

http://blog.naver.com/won_2063/110071166593 사람플러스 내맘

천하제패 꿈꾼 첫 女帝 선덕여왕 “여자도 왕위 계승”…난세에 빛난 발상의 전환

약소국 신라의 삼국통일 기초 세워

신라에만 여왕이 있었던 이유는 골품제 때문이라는 것이 정설이었다. 김부식은 ‘삼국사기’ 선덕왕조에서 “진평왕이 승하했는데 아들이 없자 나라 사람들이 (진평왕의 딸인) 덕만(德曼:선덕여왕)을 왕으로 세웠다”라고 썼고, 일연 역시 ‘삼국유사’ 왕력편에서 “성골의 남자가 없기 때문에 여왕이 즉위했다”고 쓴 이래 이 설명이 정설이 되어왔다. 한 마디로 선덕여왕은 성골의 핏줄 때문에 임금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필사본 ‘화랑세기’는 선덕여왕이 단지 성골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 자신의 능력으로 국왕이 되었음을 전해준다. 또한 ‘삼국사기’와는 달리 진평왕의 장녀가 아니라 차녀라고 적고 있다. ‘화랑세기’에 따르면 선덕여왕에게는 천명(天明)이라는 언니가 있었다. 천명공주가 사랑 때문에 왕위를 포기한 것을 선덕이 적절히 이용해 임금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천명의 사랑의 대상은 신라 25대 진지왕의 차남 용춘(龍春)이었는데, 그에게는 형 용수(龍樹)가 있었다. 용수는 진지왕의 장남이었으나 진지왕이 폐위되는 바람에 그 또한 왕위 계승에서 탈락하고 24대 진흥왕의 장남 동륜 태자의 아들이 즉위했으니 그가 바로 26대 진평왕이다. 태상태후는 진지왕의 왕비였던 지도에게 다시 진평왕을 모시라고 명령했다. 이로써 진평왕은 왕후 마야부인 외에 숙모까지 부인으로 거느리게 되었다.

친어머니 지도태후와 함께 궁중에서 자란 용수와 용춘은 어린 시절 진평왕을 아버지로 알고 자랐다. 천명공주와 선덕공주도 같이 왕궁에서 자랐으므로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 진지왕의 아들인 용수·용춘은 진평왕의 딸인 천명·선덕의 숙부였으나 신라사회는 친족간의 사랑이 금기가 되는 사회가 아니라 장려되는 사회였으므로 친족이란 사실은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용춘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지 못해 고민하던 천명공주는 어머니 마야왕후에게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남자 중에는 용숙(龍叔)같은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속사랑을 고백한 것이다. 용춘이 용수의 동생이기에 ‘젊은 숙(叔)’자를 써서 그렇게 표현한 것인데, 마야왕후가 ‘용숙’을 ‘용수’로 잘못 알아듣는 바람에 서로의 운명이 꼬여갔다.

마야부인에게서 이 말을 들은 진평왕은 용수를 사위로 삼고 왕위까지 물려주려 했다. 용수와 천명공주의 결합은 선왕의 혈통과 자기 혈통의 완전한 결합이기도 했으므로 아들이 없던 진평왕으로서는 최선의 선택이기도 했다. 천명은 기회를 엿보아 용춘에게 ‘첩이 본래 그리워 한 사람은 당신’이라고 고백했으나 용춘은 ‘가정의 법도는 장자(長者)가 귀한 법인데, 신이 어찌 형과 같겠습니까?’라며 구애를 거절했다.

천명공주는 이에 좌절하거나 용춘을 원망하지 않고 배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해 용춘의 직위를 높이기 위해 노력했다. 용춘은 13세 풍월주(風月主:대표 화랑)가 되어 골품에 구애받지 않는 인재발탁으로 큰 업적을 이룩했다. 그러자 진평왕은 용춘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로 결심하고 천명공주에게 왕위를 양보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선덕공주가 여기에 반발하고 나섰다. 그녀는 남자만이 왕위를 이어야 한다는 시대의 상식에 도전했다. 그녀는 용춘에게 왕위를 양보하기는커녕 용춘이 자신의 사신(私臣:개인적으로 거느리는 신하. 여기에서는 남편의 뜻도 있음)이 되야 한다고 주장했다.

용춘에게 왕위를 양보하는 대신 그를 사신으로 쓰겠다는 선덕의 당돌한 말은 진평왕을 감탄시켰다. 천명공주 같으면 상상도 못할 발상이었다. 진평은 선덕이 남자로 태어나지 못한 것을 한탄했겠지만 이 정도 배포라면 여왕노릇을 못할 것이 없겠다 싶었다. 그래서 진평왕은 선덕의 요청을 받아들여 용춘에게 선덕을 받들라고 명령했다. 이는 선덕의 사신이자 남편이 되는 것을 뜻했다. 용춘은 사양했으나 임금의 명령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화랑세기’는 선덕공주가 “점점 자라자 용봉(龍鳳)의 자태와 태양의 위용”을 갖게 되었다고 적고 있는데 그녀가 왕의 상징인 ‘용봉’과 ‘태양’처럼 된 것은 이런 발상의 전환과 노력의 결과였다. 여왕은 세 명의 남편을 둘 수 있게 하는 ‘삼서지제(三▩之制)’를 제도화해 용춘 외에도 흠반(欽飯)과 을제(乙祭)까지 남편으로 삼았다.

천명은 양보함으로써 왕위와 용춘을 모두 놓쳤으나 선덕은 상식에 도전한 결과 왕위와 용춘을 모두 차지하고, 두 남자까지 더 둘 수 있었다. 선덕여왕은 이런 배포만큼이나 총명했다. ‘삼국유사’에는 선덕여왕이 세 가지 일의 기미를 미리 알아냈다는 내용의 ‘지기삼사(知幾三事)’가 실려 있는데, 첫 번째는 선덕여왕이 당 태종이 보낸 모란꽃 그림에 나비가 없는 것을 보고 모란꽃엔 향기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겨울철에 개구리떼가 영묘사(靈廟寺) 옥문지(玉門池)라는 연못 부근에서 사나흘을 계속해서 울자, 서쪽 변방 여근곡(女根谷)에 백제군이 숨어 있음을 알아차리고 격퇴시켰다는 것이다. 신하들이 어떻게 백제 군사가 숨어 있었는지 알았냐고 묻자 “개구리의 성난 모양은 병사의 형상이고 옥문은 여자의 음부이다. 여자는 음이고 그 빛은 흰데 흰빛은 서쪽을 뜻하므로 군사가 서쪽에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남근(男根)이 여근(女根)에 들어가면 죽는 법이므로 잡기가 쉽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고 답한다. 이에 신하들은 “왕의 성스럽고 슬기로움에 탄복했다.” 세 번째는 자신의 죽을 날을 정확히 예언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라 최초의 여왕 선덕은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당 태종은 선덕여왕을 노골적으로 조롱했다. 643년 선덕여왕이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백제연합군의 공격에 맞서기 위한 군사지원을 요청하자 태종은 “그대 나라는 부인을 임금으로 삼아서 이웃 나라의 업신여김을 받으니 이는 임금을 잃고 적을 받아들이는 격”이라고 비판하면서, “자신의 종친 한 사람을 보내 임금으로 삼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때 신라 사신은 묵묵부답이었다고 ‘삼국사기’는 적고 있다.

그러나 선덕여왕은 내정간섭에 대한 불쾌감을 꾹 참고 이듬해 정월 사신과 방물(方物)을 보내 태종을 달랬다. 당 태종의 이런 여왕 비하 발언은 신라의 진골 남성들을 부추겨 나중에 비담(毗曇)의 난이 발생하는 원인이 된다. 이외에도 선덕은 재위 11년(642년) 백제 의자왕의 공격을 받아 서쪽 변경 40여 성을 빼앗기는 등 내우외환을 겪었다. 그녀는 이에 맞서 김유신(金庾信)을 압량주(押梁州:지금의 경산) 군주(軍主)에 임명해 백제의 공격에 맞서는 한편 김춘추(金春秋)를 고구려, 왜, 당에 파견해 군사지원을 요청했다.

그녀는 당에서 귀국한 자장법사(慈藏法師)의 건의에 따라 황룡사(黃龍寺) 9층탑을 축조한 이유는 탑을 세우면 ‘이웃 나라들(고구려·백제)은 항복할 것이며, 아홉 이민족이 와서 조공(朝貢)할 것’이란 말 때문이었다. 이 통일염원탑의 제1층은 일본(日本), 제2층은 중화(中華)…제6층은 말갈(靺鞨), 제7층은 거란(契丹), 제8층은 여진(女眞), 제9층은 예맥(濊貊)을 진압시킨다는 뜻이니 천하를 제패하려는 선덕여왕의 웅대한 포부가 담긴 탑이었다. 김부식(金富軾)은 ‘삼국사기’ 선덕왕조에서 ‘신라는 여자를 세워 왕위에 있게 하였으니 진실로 난세(亂世)의 일이며, 이러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라고 평했으나 삼국 중에 가장 약소국이었던 신라는 객관적으로 선덕여왕 때 삼국통일의 기초를 세웠다. 그녀는 성공한 여왕이었다.

————————————————– ●선덕의 언니 天明공주 사랑 때문에 왕위 포기, 결국엔 ‘그 사랑’ 쟁취 ————————————————- 용수가 죽으면서 형사취수(兄死取嫂)의 유풍에 따라 천명공주와 아들을 용춘에게 맡겼다. 천명은 비로소 꿈에 그리던 사랑을 얻을 수 있었다. 이는 용수가 사랑하는 부인과 우애 깊은 동생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기도 했다. 사랑 때문에 왕위를 포기한 천명은 용수가 죽음에 따라 비로소 그 사랑을 쟁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화랑세기’는 “(용춘)공이 자식이 없다는 이유로 (선덕에게서) 스스로 물러날 것을 청하였다”고 적고 있는데 이는 용춘이 선덕에게 애정이 없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사랑에 관한 한 승리자는 천명공주였다. 또한 선덕여왕은 자기 뒤를 이을 자식을 낳지 못했다. 용춘이 다른 여자에게서 다섯 아들을 낳은 것으로 보아 문제는 선덕에게 있었다.

선덕여왕의 남편이 누군가에 대해서는 사서에 정확히 나와 있지 않습니다 . 지역사가들의 추측으로는 조계룡과 김인평이라는 인물이 있는데 창녕조씨 족보에는 조계룡이 경주김씨 족보에는 김인평이 덕만공주의 남편으로 나와 있습니다 . 그런데 사서에 나와 있는 인평이란 이름이 아니고 연호로 보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사서에 나와 있는 음갈문왕이란 신라말로 “마실갈문왕”입니다. 그런데 마실은 창녕조씨 “조는 마실의 이두식표현입니다. 정리를 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이하 인용) 조계룡의 성씨인 조(曺)는 신라시대 말로 “마실”입니다. 한자 성씨로 조를 쓴 것이 됩니다. 그런데, 삼국유사 왕력보 선덕여왕조에 선덕여왕의 남편을 “음(飮)갈문왕”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때 음(飮)자의 우리말로 “마실 음”입니다. “飮葛文王”을 읽게 되면 “마실갈문왕”으로 읽게 됩니다. 즉 飮과 曺는 “마실”로 소리나는 한자로 이두식으로 표기한 것이 됩니다. 그리하여 飮갈문왕은 마실갈문왕으로서 조계룡의 曺갈문왕이 되는 것입니다. 진평왕이 조계룡을 서기631년 2월에 사성을 한 것은 곧 갈문왕으로 봉한 것이 됩니다 . 누구를 위하여 왜? 선덕여왕이 왕위에 오르는 데 조치를 한 것이 됩니다. 조계룡은 본래 비사벌가야의 왕손으로서 진평왕이 계룡(繼龍)이라 사성하여 용의 아들 즉 왕의 아들로 인정하였습니다. 처음 진평왕이 젊었을 때 앞으로 왕자가 없을 것이라 생각지 못하고 덕만공주를 약20여세가 될 때 혼인을 시킨 것이 됩니다. 이때가 서기600년이전이 됩니다. 계산상으로 덕만공주는 장녀일 경우 서기580년경에 출생한 것이 됩니다. 차녀라 하더라도 서기585년이전에 출생한 것이 됩니다. 그래서 김유신 보다는 최소한 10세~15세가 많습니다. 김유신은 서기595년생이며, 김춘추는 서기603년생입니다. 김춘추의 어머니가 되는 천명공주는 김춘추보다 약20여세가 많다고 보면 천명공주는 서기583년경생이 됩니다. 그래서 덕만공주는 서기600년 이전에 이미 혼인한 것이 됩니다. 이후에 진평왕이 아들을 얻지 못하고 마야부인이 돌아가시고 승만부인을 왕비로 삼았는데, 아들을 두었으나 일찍 죽었습니다. 이를 계산상으로 서기620년경에 마야부인이 약55세 이상일 때 돌아가시고 승만부인이 아들을 낳았는데 요절하였으므로 약10세에 죽었다라 하면 서기629년에 죽은 것이 되며, 이때 승만부인이 김용춘과 김용수를 싫어하였다 하는 바, 이에 김용춘이 자발적으로 고구려와 전쟁하러 갔다가 공을 세워 각간이 되었다 합니다. 이리하여 진평왕에게 아들이 없어 약45세가 되는 서기610년경부터 덕만공주가 왕위수업을 받기 시작하였다고 보면 됩니다. 덕만공주는 김춘추를 측근에 두었고 김유신의 여동생과 혼인하도록 하여 김유신을 측근으로 두게 되었습니다. 그후 왕자가 태어났으나 일찍 죽으므로 장녀이며 성골인 덕만공주가 서기630년부터 왕위를 잇기 위하여 본격적으로 준비를 한 것이 됩니다. 그리하여 그 남편이 되는 조계룡을 서기631년 2월에 갈문왕으로 봉하고 5월에는 칠숙의 반란모의를 적발하여 처형한 것이 됩니다. 서기632년 1월에 진평왕이 붕하니 덕만공주가 남편 조계룡과 김유신과 김춘추의 보좌로 여왕에 무난히 즉위하게 된 것입니다. 家 系 기록에 의하면 여왕은 신라의 규례에 따라 세명의 남편을 두었다. 생전에 후사를 얻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아버지 : 진평왕

어머니 : 마야부인 김씨

언니 : 천명공주

동생 : 선화공주

조카 : 태종 무열왕 (천명공주와 김용춘의 아들), 진덕여왕 (국반갈문왕과 월명부인( [1] )의 딸)

남편( 삼국유사 의 기록) 음갈문왕 (飮葛文王) : 삼국유사에 기록된 선덕여왕의 남편이다. 삼국유사외 다른 기록에는 기술이 없다.

남편( 화랑세기 의 기록) 김용춘 (金龍春) : 진지왕 의 장남( 화랑세기 에서는 차남)으로 여왕의 당숙이 된다. 여왕의 여동생 천명공주 와 결혼하여 제부가 되기도 한다. 흠반 (欽飯) : 여왕의 친척이다. 여왕의 숙부인 백반, 국반과 같은 항렬인 것으로 보아 선덕여왕의 숙부뻘로 추정된다. 을제 (乙祭) : 신라 의 대신이다.

선덕여왕 재위632년~647년 : 진평왕의 장녀이며 휘는 덕만 이다

26대왕.진평왕 (재위579년~632년) : 진흥왕의 장손 으로 휘는 백정, 진평 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얼굴이 기이하고 몸이 장대하였으며 의지가 깊고 식견이 명철 하였다.

작은아버지인 진지왕이 화백회의에 의하여 폐위되자 즉위하였다.

579년, 이찬 노리부 를 상대등에, 580년 지증왕의 증손인 이찬 후직 을 병부령에 임명하여 군사권을 장악 하였다.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왕권을 강화 하였고 관제를 정비하는 데 힘을 썼다.

581년, 관리 인사를 담당하는 위화부를 설치 하였다.

583년, 선박을 관리하는 선부서를 설치 하였다.

또한 원광, 담육 등 승려를 중국에 보내 불교를 진흥 시키고 왕실을 튼튼히 하는 데 힘썼다.

584년, 연호를 건복 으로 개원하였다.

여러 차례에 걸친 고구려의 침공에 대항하고 수 나라에게 공물을 바치며 수교 하였다.

618년, 수나라가 망하자 이후 당 나라와 수교 하며 고구려의 침공을 꾀했다.

재위 54년만에 죽자 당나라 태종 은 조서를 보내어 진평왕에게 좌광록대부 를 추증하였다.

선덕여왕 설화

1. 어느날 여왕에게 당나라 태종이 진홍, 자색, 백색의 모란이 그려진 그림과 그 씨앗 3되를 보내왔다.

여왕은 그림을 보고 “이 꽃에는 반드시 향기가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씨앗을 뜰에 심게 했는데 꽃이 피어서 질 때까지 향기가 나지 않아 여왕의 예언이 들어 맞았다.

2. 636년, 궁성 서쪽 옥문지에 개구리가 모여들어 삼사일을 계속 울어대자 사람들이 이상히여겨 여왕에게 물었다.

그러자 여왕은 급히 각간 알천과 필탄에게 정병 2000명을 데리고 서쪽교외로 나가 여근곡을 찾아가면 적병이 매복해 있을 것이라며 쳐부술 것을 명했다. 각간이 군사를 이끌고 가보니 여근곡이란 골짜기가 있고 그곳에 500명의 백제군이 숨어 있었다. 이들을 모두 죽이고 남산에 숨어있던 백제 장군 우소와 백제의 후원군까지 모조리 죽였다.

당시 신하들이 어떻게 모란꽃과 개구리의 일을 알았는지 묻자 여왕은 “꽃을 그렸는데 나비가 없으므로 향기가 없다는 것을 알았으니 이는 당나라 왕이 나에게 짝이 없는 것을 희롱한 것이다. 또 개구리가 성난 모양을 하는 것은 군사의 형상이요, 옥문이란 여자의 음경인데 여자는 음이며 그 빛이 희니 서쪽을 상징한다. 그래서 적군이 서쪽에 있음을 알았고 남근이 여근 속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으므로 쉽게 잡을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했다.

3. 선덕여왕은 평소에 자신을 도리천에 장사하라고 일렀는데 신하들이 도리천이 어딘지 몰라 물으니 낭산의 남쪽이라고 했다. 여왕이 세상을 떠나자 신하들은 낭산의 남쪽 양지쪽에 장례했다. 그 후 10년 뒤에 문무왕이 선덕여왕의 무덤 아래에 사천왕사를 세웠다. 불경에 사천왕천 위에 도리천이 있다고 했으니 선덕여왕은 자신의 무덤 아래에 사천왕사라는 절이 창건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여왕제에 대해 불만을 품은 자가 많았음으로 논란을 종식시키기 위해 여왕이 비범한 인물임을 강조)

지귀 설화

선덕여왕을 흠모하는 백성들이 많았는데 지귀는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선덕여왕의 아름다움을 사모하여 너무나 고민한 나머지 몸이 점점 여위어 갔다.

어느 날 여왕이 절에 불공을 드리러 갔다가 지귀의 이야기를 듣고 지귀를 불렀다.

여왕이 절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는 동안 지귀는 탑 아래에서 지쳐 잠이 들었는데 기도를 마치고 나오던 여왕은 지귀의 잠자는 모습을 보고 자신의 금팔찌를 뽑아서 지귀의 가슴에 놓고 갔다.

잠에서 깬 지귀는 여왕의 금팔찌를 발견하고 더욱 더 사모의 정이 불타올라 화귀로 변하였다.

지귀가 화귀가 되어 온 세상을 떠돌아 다니자 사람들은 두려워하게 되었다.

이에 선덕여왕이 백성들에게 주문을 지어 주어 대문에 붙이게 하니, 그뒤 백성들은 화재를 당하지 않게 되었다.

27대왕.선덕여왕(재위632년~647년) : 진평왕의 장녀이며 휘는 덕만 이다 .

진평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화백회의에서 그녀를 새 왕으로 추대하여 성조황고 라는 호를 올렸다.

선덕여왕은 백성을 사랑하였으며 민생 안정에 주력 하여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는 구휼정책을 활발히 추진 하였다.

또한 분황사, 영묘사 등 절을 많이 건립하고 불경을 연구 시켜 불교의 일대 부흥을 가져왔다.

특히 웅대한 호국의 의지가 담긴 80m의 황룡사 9층석탑 은 이웃의 9적을 물리쳐서 복속시키기 위해 나라 이름을 새겨넣은 것이며, 첨성대를 건립하여 농사에 도움이 되게 하였고 자장법사 를 당에 보내어 불법을 수입하였다.

632년, 관원들을 전국 곳곳에 파견하여 백성들을 진휼하게 하였다.

633년, 조세를 면제해주는 등 일련의 시책으로 혼란스러웠던 민심을 수습하였다.

634년, 연호를 인평 이라 고치고 불교를 장려 하였다.

635년,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주국낙랑군공신라왕 에 책봉되었다.

고구려,백제 가 침공해오자 이를 막는 한편 당 과 동맹 을 맺어 외교적 방어선을 구축하는 공격적인 외교술을 펼쳤다.

638년, 고구려가 칠중성을 공격해 오자 이를 격퇴하였다.

642년, 백제의 의자왕 에게 미후성 등 40여 성을 빼앗겼다.

이어 백제가 고구려와 모의하여 당항성을 빼앗아 나당의 통로를 끊어버리자 이 사실을 당나라에 호소하였다.

백제에게 대야성이 함락되자 김춘추 를 고구려에 보내어 구원을 청하였으나 실패하였다.

644년, 김유신 으로 하여금 백제에게 빼앗긴 성을 회복하게 하였다.

645년, 당 태종 이 고구려에 원정하자 원군을 보냈으나 다시 백제에게 서변 7성을 빼앗겼다.

647년, 상대등 비담 이 여왕이 정치를 잘못한다는 구실로 반란을 일으키자 김춘추,김유신에게 진압하게 하였다.

한때 선덕여왕이 독신자라는 설이 확산되었으나 기록에 의하면 신라의 규례에 따라 3명의 남편을 뒀다. 그러나 후사를 얻는데 실패하였다.

28대왕.진덕여왕 (재위647년~654년) : 휘는 승만 이다.

자태가 풍만하고 아름다웠으며 키는 7척이었고 팔이 무척 길어 쭉 뻗으면 무릎까지 닿았다 고 전해지는데 이러한 신체적 특징은 부처의 모습을 갖춘 보살에 비유되었을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647년, 사촌언니인 선덕여왕이 서거하자 왕위를 계승하여 즉위하였으며 연호를 태화 라 하였다.

왕권 강화를 통한 정치적 개혁을 실시함과 동시에 국내 안정을 꾀하여 비교적 안정된 위치에서 정무를 집행하였다.

같은해 백제 가 신라를 침공하자 김유신 을 출전시켜 백제군에 대적하도록 하였다. 백제의 지속적인 공략에 밀려 고전을 면치 못하던 신라는 고구려까지 신라 공격에 가세하자 진퇴양난의 신세가 되었다.

648년, 김춘추 를 당 나라에 보내 백제 정벌의 원군을 요청하였는데 당나라 역시 고구려 정벌을 위해 신라의 협조가 필요했기때문에 이를 환영하였다. 여왕과 당 태종 은 서로간에 친교를 돈독히 한 다음 나당연합을 체결 하였다.

649년, 당나라를 본떠 복제를 개편 하였다.

650년, 법민 을 당나라에 파견하여 여왕이 지은 태평송 을 바치고 같은해 당나라 연호인 영휘를 쓰기 시작하였다.

652년, 김춘추의 둘째아들 인문 을 당나라에 보내어 친교를 더욱 돈독하게 하였다.

한편 국내적으로는 명장 김유신으로 하여금 국력을 튼튼히 하여 삼국통일의 기틀을 다져나갔다.

여왕이 죽은 뒤 당 고종 은 비단 300필과 함께 사신을 파견하여 개부의동삼사 를 추증했다.

●중대●

29대왕.태종 무열왕 (재위654년~661년) : 진지왕의 손자 로 휘는 춘추 ,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 과는 이종사촌이다.

무열왕이 활동하던 시기는 삼국간에 치열한 싸움 이 벌어지던 때로 그는 웅변에 능하고 외교적 수완이 뛰어났으므로 일본,당나라에 다녀왔고 특히 당나라에 여러번 왕래하면서 외교적성과를 거두고 군사원조까지 약속받았다.

(삼국유사中 – 김춘추가 당나라에 갔을때 당 태종은 그를 보고 신성한 사람이라고 했다.

일본서기中 – 그는 미남이고 말솜씨가 좋아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642년, 백제 의 침입으로 대야성이 함락되고 사위인 성주 품석 과 딸이 죽음을 당하자 고구려와 힘을 합하고자 연개소문 을 만났으나 오히려 국경 영토문제로 감금 당했다가 고구려 대신의 도움을 받아 겨우 탈출하였다.

647년, 비담 이 반란을 일으키자 김유신 과 함께 이를 진압하였고 선덕여왕이 죽자 진덕여왕을 왕으로 내세웠다.

654년, 진덕여왕이 죽자 김유신, 알천 등의 추대를 받아 즉위함으로써 신라 최초의 진골 출신 왕 이 되었다.

즉위 후 율령을 새로 정비 , 60여 조를 제정하여 왕권을 강화 하였으며, 당 나라와 계속 친교를 맺어 개부의동삼사신라왕 에 책봉되었다. 또한 9서당 이라는 9개 군단를 설치하여 군사조직을 강화 하는 등 국가체제를 확립시켰다.

655년, 고구려 가 백제, 말갈 과 연합하여 북쪽 지방의 33개의 성을 공격하자 당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659년, 백제가 자주 국경 지역을 침범하자 당나라에 군사를 요청하여 본격적인 백제 정벌에 나섰다.

660년, 김유신이 당나라군과 함께 백제의 계백 장군이 이끄는 5천명의 결사대를 황산벌에서 물리치고, 의자왕의 항복을 받아내어 백제를 멸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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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

善德女王 지위 신라의 제27대 국왕 재위 632년 ~ 647년 전임 진평왕 후임 진덕여왕 이름 휘 덕만(德曼) 이칭 덕만공주(德曼公主) 연호 건복(建福) : 632년 ~ 633년 인평(仁平) : 634년 ~ 647년 시호 선덕(善德) 신상정보 출생일 미상 사망일 647년 2월 17일 (음력) 국적 신라 부친 진평왕 모친 마야부인 자녀 없음

선덕여왕(善德女王, ? ~ 647년 2월 17일(음력 1월 8일), 재위: 632년 ~ 647년)은 신라의 제27대 왕이며 한국사 최초의 여왕이다.자비 (불교)

개요 [ 편집 ]

성은 김(金), 휘는 덕만(德曼)이다. 진평왕과 마야부인 김씨(摩耶夫人 金氏)의 딸이며, 진평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재위 중인 632년부터 633년까지 건복(建福)의 연호를 사용하였고, 634년 인평(仁平)으로 개원하였다.

생애 [ 편집 ]

출생도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삼국사기》에는 진평왕의 맏이로, 《삼국유사》에는 형제자매 서열에 관한 기록이 없이 진평왕의 딸로만 기록되었다.

진평왕이 아들 없이 죽자, 화백회의에서 진평왕의 왕녀인 덕만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여, “성스러운 조상의 혈통을 이어받은 여황제”라는 뜻을 가진 성조황고(聖祖皇姑)라는 존호를 올렸다. 《삼국유사》 왕력(王曆) 편은 “김씨 성골의 남자가 다하였으므로 여왕이 왕으로 선 것이다” 라고 밝히고 있다.[1]

즉위한 해인 건복 49년(632년)에 을제(乙祭) 또는 을찬(乙粲)으로 하여금 국정을 총괄케 하고, 각지에 관리를 파견하여 홀아비, 홀어미, 고아, 독거노인 등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을 돕게 하였으며, 당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건복 50년(633년) 정월에는 스스로 신궁에 제사를 올리고 여러 주·군의 조세를 1년간 감해 주었다. 또한 8월에 백제가 서쪽 변경을 침공했다.

즉위 3년째인 건복 51년(634년)부터 인평(仁平)이라는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하였으며, 이 해에 분황사(芬皇寺)가 완공되었다.

인평 2년(635년) 겨울에는 이찬 수품(水品)과 용수(龍樹)를 시켜 각지의 민심을 위로하게 하였다. 또한 당으로부터 주국 낙랑군공 신라왕(柱國樂浪郡公新羅王)에 봉해졌다.

인평 3년(636년) 정월에는 수품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3월에 병이 나자 이를 기양하기 위해 황룡사(皇龍寺)에서 큰 법회를 열었다. 같은 해, 자장법사가 불법을 배우기 위해 당으로 들어갔다. 5월에 백제 장군 우소가 여근곡에 쳐들어오자 알천, 필탄 두 장군을 보내 이를 무찔렀다.

인평 5년(638년) 10월에는 고구려가 칠중성을 공격해 왔고, 다시 대장군 알천을 파견해 이를 격퇴하고 불안한 민심을 달랬다.

인평 6년(639년), 북부 국경을 방비하기 위해 하슬라(荷瑟羅)를 북소경(北小京)으로 삼고 사찬 진주(眞珠)를 보내 지키게 하였다.

인평 7년(640년)에는 귀족 자제들을 유학생으로서 당의 국자감에 입학하게 하였다.

인평 9년(642년) 정월에 다시 당에 조공하였다. 7월에 백제의 의자왕이 이끄는 군사들이 신라의 서쪽 40여 개 성을 함락시키고, 여기에 지 당과의 외교 거점이었던 당항성을 공격해오자 당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청하였다. 11월에 백제가 대야성을 함락시켰고, 김춘추의 사위인 이찬 품석(品釋) 등을 죽였다. 정세가 불리해지자 왕은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내어 동맹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보장왕은 신라가 차지한 죽령 이북의 땅을 반환할 것을 선제 조건으로 요구하였지만 김춘추가 거절하였기에 그를 감금하였다. 협상이 결렬되자 왕이 김유신을 보내 한강 북부까지 진격하니 보장왕은 김춘추를 풀어주었다.

인평 10년(643년) 정월에도 당에 토산품을 바쳤다. 9월에 당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청하였으나 당 태종은 이를 거절하였고, 인평 11년(644년) 정월에 신라는 다시 당에 조공을 바쳤다. 이에 당 태종이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공격을 멈추라고 종용하였다. 이에 연개소문은 “일전에 고구려와 수나라가 전쟁을 벌일 때 그 틈을 타서 신라가 빼앗아간 우리의 영토 500리를 돌려주기 전에는 싸움을 멈출 수 없다”며 거절하였다. 9월에 왕은 김유신을 대장군으로 삼고 백제를 공격하여 일곱 성을 빼앗았다.

인평 12년(645년) 정월에도 당에 조공을 바쳤다. 백제와의 전쟁은 계속되었다. 자장법사의 건의로 3월에 황룡사탑을 세웠다. 5월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략하자 군사 3만을 파견하여 이를 도왔다. 그러나 그 사이에 백제에게 일곱 성을 빼앗겼다. 11월에는 비담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재위 마지막 해인 647년 정월, 상대등 비담이 염종(廉宗)과 함께 “여자 군주는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女主不能善理)”라는 기치를 내걸고 반란을 일으켰다. 왕은 월성에 진을 치고 김유신을 파견하여 비담을 상대하게 하였다.

반란 와중인 1월 8일에 승하하였다. 시호를 ‘선덕(善德)’이라 하였고, 일전에 예언한 것처럼 낭산(狼山)의 남쪽에 장사지냈다.

사찰 및 첨성대 건립 [ 편집 ]

선덕여왕은 재위 초반 민생의 안정에 주력하여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도록 하는 구휼정책을 활발히 추진하였으며, 동아시아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천문대인 첨성대를 건립하여 농사에 도움이 되게 하였다. 또한 재위 기간에 분황사(芬皇寺)와 영묘사(靈妙寺) 등의 사찰을 건립하였다.

특히 선덕여왕은 웅대한 호국의 의지가 담긴 거대한 황룡사 9층 목탑을 세웠다. 황룡사 9층 목탑은 높이 80m의 거대한 탑으로 이를 모두 9층으로 한 뜻은 이웃의 9적을 물리쳐서 복속시키기 위해 나라 이름을 새겨넣은 것이다.[2]

왕이 미리 안 세 가지 일 [ 편집 ]

《삼국유사》에는 “선덕왕이 미리 안 세가지 일(善德王知幾三事)”이 수록되어 있다.[3]

즉위년인 632년, 당 태종은 빨강, 자주, 하얀색의 모란 그림과 그 씨앗을 선물로 보냈다. 왕은 이를 보고 “이 꽃은 향기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씨앗을 심어보니 과연 그랬다. 훗날 신하들이 이 일을 물어보니 왕은 “꽃 그림에 나비가 없었다. 이는 배우자 없는 나를 희롱한 것이다.”라고 답했다. 일연은 이 고사를 소개한 뒤, 당 태종이 신라에 세 여왕(선덕, 진덕, 진성)이 있을 것으로 짐작한 점도 함께 칭찬하고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이 일이 진평왕 말년에 벌어진 일로 묘사되어 있다.

여근곡의 백제 군사 [ 편집 ]

왕은 즉위 4년인 635년, 영묘사(靈廟寺)를 세운 적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겨울날, 영묘사 옥문지(玉門池)에 개구리가 사나흘 동안 운 일이 있었다. 이에 왕은 각간 알천(閼川), 필탄(弼呑)에게 병사 2천을 주어 서라벌 서쪽 부산(富山) 아래 여근곡(女根谷)을 습격하게 하였다. 여근곡에는 백제 장수 우소(亏召)가 매복해 있었는데, 알천과 필탄은 이를 쳐서 모두 죽였다.

훗날 신하들이 이 일을 물어보니 왕은 “개구리가 심히 우는 모습은 병사의 모습이요, 옥문이란 여자의 음부를 가리킨다. 여자는 음이고, 그 빛은 백색인데, 이는 서쪽을 뜻한다. 또한 남근이 여근에 들어가면 죽는 법이니 그래서 쉽게 잡을 수 있었다.”라고 답하였다.

삼국사기에서는 옥문지에서 개구리가 운 때를 즉위 5년인 636년 5월로 기록하고 있다.

왕의 승하 그리고 도리천 [ 편집 ]

어느날 왕이 신하들을 불러 “내가 죽으면 도리천(忉利天)에 장사지내도록 하라. 이는 낭산(狼山) 남쪽에 있다.” 라고 하였다. 이후 왕이 죽은 뒤 신하들은 왕을 낭산 남쪽에 장사지냈다. 이후 679년 문무왕 대에 이르러 선덕왕의 무덤 아래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세웠다. 이는 불경에 “사천왕천(四天王天) 위에 도리천이 있다”라는 내용이 실현된 것이었다.

기타 일화 [ 편집 ]

《삼국유사》 탑상 편에 따르면, 자장법사가 왕에게 황룡사 9층 목탑 건설을 진언한 때는 643년이었다. (삼국사기는 645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에 왕은 김용춘을 시켜 백제에서 기술자 2백 명을 맞아들여 탑을 지었다. 탑의 기둥을 세울 때, 백제 장인 아비지는 백제 멸망의 꿈을 꾸어 일을 멈추었다. 그때 노승 한 명, 장사 한 명이 나타나 기둥을 세우고 사라졌다. 이에 아비지는 마음을 고쳐먹고 탑을 완성했다.

《삼국유사》 신주 편에 따르면, 하루는 왕이 병이 깊어 홍륜사의 법척법사를 불러 치료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이에 밀본법사를 불러 침실 밖에서 경을 읽게 하였다. 경을 다 읽고 밀본은 막대기를 들어 침실 안으로 던졌다. 이에 늙은 여우 한 마리와 법척이 찔려 뜰 아래로 쓰러졌다. 이에 왕의 병이 당장 나았다.

평가 [ 편집 ]

당대의 신라인들은 선덕여왕의 품성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총명하고 민첩하였다. ” — 《삼국사기》 권제5 신라본기 제5 선덕왕(善德王)

또한 당대의 신라인들은 삼국통일의 위업이 선덕왕대에 비롯되었다고 인식하고 있었다.[4]

“ 탑을 세웠다 … 과연 삼한을 통합하였고, 군신이 안락함은 지금까지 그것에 힘입음이다. ” — 황룡사 9층 목탑 찰주본기

그러나 전근대의 역사가들은 선덕여왕을 비판하였는데, 이유는 그들이 유학자였던 점에서 기인한다.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여성은 본질적으로 남성보다 열등하며 따라서 여왕을 세우는 것은 세상의 질서를 깨뜨리는 것이라고 보았다.[5] 조선 후기의 실학자 안정복도 《동사강목》에서 여성의 즉위를 유교적 위계질서를 거스르는 것으로 간주했으며, 이에 더해 억불적 관점에서 선덕여왕의 사찰 건설을 비판하였다.

현대의 학자들은 선덕여왕의 선대인 진평왕 때부터 후대인 진덕여왕 대까지를 신라의 전환기로 평가한다. 진흥왕 대의 강력한 군사력과 대외적 유리함이 끝나고, 고구려와 백제가 연합하여 강국이었던 신라를 공격하면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덕여왕은 이의 대책으로 당과의 친선을 도모하고 불교를 진흥하여 백성을 단합함으로써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재위 기간 동안 귀족 자제들을 당나라 국학에 입학시키고 황룡사에 9층 목탑을 세우는 등 다양한 문화적 업적을 쌓았고 대당외교(對唐外交)를 한층 긴밀히 하였으며 군사적으로는 김춘추와 김유신을 중용하여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았다고 평가받는다.[6]

연호 [ 편집 ]

재위 중에 연호로 건복(建福)과 인평(仁平)을 사용하였다. 634년 봄 정월 인평으로 개원하였다.[7]

건복 (建福) 49년 50년 인평 (仁平) 원년 2년 3년 4년 5년 6년 7년 8년 9년 10년 11년 12년 13년 14년 632년 633년 634년 635년 636년 637년 638년 639년 640년 641년 642년 643년 644년 645년 646년 647년 임진 계사 갑오 을미 병신 정유 무술 기해 경자 기축 임인 계묘 갑진 을사 병오 정미

가계 [ 편집 ]

선덕여왕이 등장한 작품 [ 편집 ]

《벽루천》(2011년, 배역: 윤소이, 이주연)

게임 : 시드마이어의 문명6

같이 보기 [ 편집 ]

각주 [ 편집 ]

외부 링크 [ 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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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 동시에 세 남자와 결혼하다

신라 천년의 미소

오늘은 친언니의 남편뿐 아니라 애인까지 빼앗은 선덕여왕의 기막힌 사연을 알아보겠습니다.

신라 26대 진평왕(579∼632년)은 아들이 없고 두 딸만 있었습니다. 맏딸인 천명은 오촌 당숙인 용춘을 마음속으로 흠모했습니다. 그래서 나이가 차자 어머니 마야왕후에게 속셈을 털어놓았습니다.

“어머니,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용숙(龍叔)만 한 남자가 없습니다.”

황후는 천명이 말하는 용숙이 동생인 용춘이 아니라 형인 용수라고 생각하고 사위로 점찍었습니다.

용수와 용춘은 진평왕과 사촌 간이었습니다. 그러니 천명에는 오촌 당숙이 됩니다.

왕후의 귀띔을 들은 왕은 공주를 용수와 혼인시켜 사위로 삼았습니다. 잘못알고 시집을 보낸 것입니다.

부모님에게 대들지는 못했지만, 공주는 내심 불만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용춘에게 가서 자기의 마음을 은밀하게 털어놓았습니다. “제가 본래 그리워한 사람은 용춘 숙부 그대입니다.”

용춘은 무척 놀랐지만 점잖은 사람이라 조용하게 대답했습니다. “집안의 법도는 맏아들이 귀한 것인데 신을 어찌 감히 형님과 견주겠습니까?” 하지만 천명은 용춘을 단념할 수가 없었습니다.

날이 갈수록 천명의 용춘에 대한 사랑은 깊어갔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남편 용수가 공주의 마음을 눈치채고 여러 가지 꾀를 써서 용춘과 동침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용춘은 힘써 그 자리를 피했습니다.

나중에는 마야 황후까지 전후 사정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밤에 궁중에서 연회를 베풀고는 용춘을 불러 공주와 함께 묵도록 했습니다. 용수 또한 병을 칭하고 그 자리를 피했습니다. 하지만 용춘은 술은 같이 먹었지만 잠자리는 피했습니다.

천명의 동생 선덕공주가 점점 자랐는데, 자태와 위용이 왕위를 이을만했습니다. 그래서 진평왕은 용춘에 관심을 두고 천명에 그 지위를 양보하도록 했습니다. 천명은 효심으로 순종하고 출궁(出宮)했습니다. 이후 천명의 신분은 진골로 떨어졌습니다.

당시에는 성골(聖骨)만이 왕위계승권을 가졌는데, 진평왕에게는 아들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천명과 선덕이 성골로서 왕위계승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천명에 그 지위를 포기하라고 진평왕이 종용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서 천명 대신 선덕이 왕위 계승할 준비를 하였습니다. 여왕이 되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은 자손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선덕은 왕에게 말했습니다. “용춘이 능히 저를 보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해서 용춘은 선덕과 혼인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아뿔싸! 일 년이 지나도 선덕이 잉태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한시가 급한 왕이 천명의 남편인 용수에게 선덕을 모시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인 용춘을 양보했건만 이제는 남편까지 동생에게 빌려줄 형편이 된 천명은 기가 막혔습니다. 그래도 어떡합니까? 왕의 명령인데,…… 하지만 용수 역시 일 년이 다 지나도록 소득이 없었습니다.

세월이 흘렀습니다. 용수와 진평왕이 죽고 632년 선덕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용수가 죽은 후 용춘은 형의 아들 춘추와 처인 천명을 자신의 아내와 아들로 삼았습니다.

선덕여왕

후사를 이을 왕자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자, 이에 선덕은 용춘을 다시 지아비로 맞기로 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천명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습니다만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성골 남자가 씨가 말랐기 때문입니다.

아들을 얻기 위하여 궁여지책으로 용춘과 다시 결합했으나 여전히 태기는 없었습니다. 이에 조정의 중신들이 모여 선덕여왕의 문제를 의논했습니다. 그런 다음 여왕에게 아뢨습니다.

“용춘을 지아비로 삼았으나 잉태가 되지 않으니 삼서지제(三婿之制)에 따라 세 명의 남편을 두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삼서지제는 여왕이 아들을 낳을 수 있도록 세 명의 남편을 두는 제도입니다. 신라에서 널리 통용되지는 않았고 사례는 선덕여왕 한 번만 보입니다.

숙부를 남편으로 둔다는 것이 요즈음의 시각으론 천륜을 저버린 행위로 보이지만, 신라 시대 사람들은 근친혼이 곧 혈통을 보존하기 위한 최선책이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삼국통일의 영웅 김유신도 나중에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딸, 즉 자신의 조카와 결혼합니다.

김유신 장군과 태종무열왕 김춘추

선덕여왕은 중신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숙부인 김용춘 말고도 김흠반과 김을제를 남편으로 맞아들입니다. 이렇게 했어도 여왕은 태기를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용춘이 물러나려는 뜻을 보이자, 여왕이 허락합니다.

용춘은 물러나서 다시 천명을 처로 삼고 형의 소생인 춘추를[훗날의 태종무열왕] 아들로 삼습니다. 용춘은 천명과 평화로운 노년을 보내다가 647년 일흔의 나이에 세상을 떠납니다.

선덕여왕 능

선덕여왕이 죽자 647년 진덕여왕이 왕위에 오릅니다. 진덕여왕이 7년 만에 죽자 김춘추가 654년 왕위에 오릅니다. 우리가 아는 태종무열왕이 바로 천명공주의 아들입니다. 바야흐로 통일의 시대가 다가오는 것이죠.

[선덕여왕의 업적을 조금 살펴보겠습니다]

황룡사 구층 목탑이 있군요

자장(慈藏)의 권유에 따라 선덕여왕은 호국 의지를 담아 황룡사 9층 탑을 축조했습니다. 높이 80미터의 거대한 이 목탑은 이웃의 아홉 적을 상징하는 9층으로 제작되었습니다.

황룡사 구층 목탑

1층은 일본(日本), 2층은 중화(中華), 3층은 오월(吳越), 4층은 탁라(托羅 제주도), 5층은 응유(鷹遊, 백제), 6층은 말갈(靺鞨), 7층은 거란(丹國), 8층은 여적(女狄), 9층은 예맥(穢貊 고구려)을 억누르는 것을 상징합니다.

국보 31호 첨성대도 있습니다. 선덕여왕 재세 시에 건설한 천문관측시설입니다.

첨성대

그러나 다른 시각도 있습니다. 기도하는 용도도 쓰였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선덕여왕이 자손을 얻기 위해 지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수명과 장수 등을 관장하는 신인 북두칠성을 믿는 신앙이 칠성 신앙이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한 추리입니다.

분황사가 있습니다

분황사(芬皇寺)는 황룡사지와 잇닿아 있으면서 국보 제30호로 지정된 모전 석탑으로도 유명합니다. 선덕여왕 3년(634년)에 지어진 절로서, 원효대사가 거주하면서 화엄경소를 쓴 장소이기도 합니다.

분황사

분황사의 모전석탑은 현재 남아있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걸작품으로,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 올린 모전석탑(模塼石塔)입니다. 원래 9층이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지금은 3층만 남아있습니다.

분황사 모전석탑

통도사를 창건하셨군요. 선덕여왕은 15년(646)에 자장율사를 앞세워 통도사를 세웁니다. 스님께서 당에서 부처님의 두골(佛頭骨), 치아(佛齒)등 사리(佛舍利) 100 립과 부처님이 입으시던 비라금점가사(緋羅金點袈裟) 한 벌을 가져왔습니다.

양산 통도사 전경

사리를 3분하여 일부분은 황룡사탑(皇龍寺塔)에 두고 일부분은 태화사탑(太和寺塔)에, 일부분은 가사(袈裟)와 함께 통도사 계단에 두었습니다.

통도사 금강계단

이 계단이 금강계단입니다. 본래 금강계단이 축조되기 이전 통도사는 큰 못이었습니다. 스님이 못을 메워 금강계단을 설치하고 통도사를 창건하셨습니다.

그래서 통도사에는 불상이 없습니다.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있으니까요.

* 참고 문헌 *

김부식 지음, 이재호 옮김, <삼국사기>(솔출판사, 2006)

일연 지음, 이재호 옮김, <삼국유사>(솔출판사, 2008)

김대문 저, 이종욱 역주해, <화랑세기>(소나무, 2009)

김대문·각훈 지음, 여성구 옮김, <화랑세기/해동고승전>(지만지, 2008)

박은몽 지음, <신라를 뒤흔든 12가지 연애 스캔들>(랜덤하우스, 2009)

* 일부 자료와 사진 출처

경주국립박물관

정동극장 경주브랜드 공연 <미소2-신국의 땅, 신라>

구체적인 페이지 등은 명기하지 않았습니다.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씨내리’ 남자 셋 들이고도 임신 못한 선덕여왕

“신이 듣기에 옛날에 여와씨(女?氏)가 있었으나, 그는 진짜 천자가 아니라 (남편인) 복희(伏羲)가 구주(九州)를 다스리는 일을 도왔을 뿐입니다. 여치(呂治)와 무조(武?) 같은 이는 어리고 약한 임금을 만났기에 조정에 임해 천자의 명령을 빌린 데 지나지 않아, 사서에서는 공공연히 임금이라 일컫지는 못하고 다만 고황후(高皇后) 여씨(呂氏)라든가 즉천황후(則天皇后) 무씨(武氏)라고만 적었습니다. 하늘로 말한다면 양(陽)은 강하고 음(陰)은 부드러우며, 사람으로 말한다면 남자는 존귀하고 여자는 비천한 법이니, 어찌 늙은 할망구(??)가 규방을 나와 국가의 정사를 처리하게 할 수 있습니까? (그럼에도) 신라는 여자를 추대하여 왕위에 앉히니 이는 실로 난세(亂世)에나 있을 법한 일이라, 그러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 하겠습니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암탉이 새벽에 먼저 울면 집안이 망한다(牝鷄之晨)’고 하고, 『주역(周易)』에는 ‘암퇘지가 두리번두리번 거린다’고 했으니, 어찌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한국사 최초의 여주(女主)인 신라 제27대 선덕여왕(善德女王)이 재위 16년째인 647년 봄 정월 8일에 죽은 사실을 『삼국사기』가 적으면서 그 편찬 총책임자인 김부식이 덧붙인 역사평론인 사론(史論) 전문이다. 아주 혹독한 평가다. 한데 같은 『삼국사기』 선덕왕본기에는 원래 이름이 덕만(德曼)인 그가 아버지 진평(眞平)을 이어 즉위한 사실을 전하면서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총명하고 민첩하니 왕이 죽고 아들이 없자 나라 사람들이 덕만을 왕으로 세우고 성조황고(聖祖皇姑)라는 칭호를 올렸다”고 해서 이율배반의 평가를 한다. 성조황고는 그 의미가 확연하지는 않지만, 요컨대 성스러운 덕성을 지닌 후덕한 어머니 혹은 할머니 같은 존재 정도를 의미한다.여자가 군주 자리에 있을 수 없다는 불만은 당시 신라 내부에서도 팽배했던 듯하다. 국제사회에서 빈축을 사기도 했던 모양이다. 당 태종 이세민은 선덕이 여자라 해서, 당 황실에서 배필을 골라줄 테니 정치는 그 남자한테 맡기라 빈정대기도 했다. 선덕이 죽음을 앞두자 왕위 계승권이 없는 이들이 왕좌 탈취를 노리고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으니, 이해 봄 정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상대등(上大等) 직위에 있던 비담(毗曇)이 염종(廉宗)과 함께 일으킨 내란이 그것이다. 비담이 내세운 논리가 “여왕은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女主不能善理)”였다. 아마도 비담은 선덕이 곧 죽을 것이 확실한 와중에 그 후임을 같은 여자인 진덕(眞德)으로 확정하자 다시 여자가 임금이 돼선 안 된다는 논리를 내세워 권좌를 탈취하고자 했던 듯하다.비담 “여왕은 나라 못 다스려” 난 일으켜하지만 혹평과는 달리 선덕은 매우 똑똑한 여자였던 듯하다. 즉위 당시 나이가 얼마인지 알 수는 없지만, 중년을 넘어선 것만은 확실하다. 김부식 사론에선 그를 ‘늙은 할망구(??)’라 했고, 그가 즉위하자 신라사람들이 ‘성조황고(聖祖皇姑)’라 불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할 때 선덕은 노련하면서도 덕을 갖춘 정치인이었을 것이다.『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선덕의 총명함을 말해주는 일화가 나란히 등재돼 있다. 특히 『삼국유사』 기이(紀異)편에 수록된 이야기는 아예 제목부터가 ‘선덕왕 지기삼사(善德王知幾三事)’, 다시 말해 선덕왕이 미리 알아낸 세 가지 일이다. 두 가지는 부산(富山) 아래 여근곡(女根谷)이라는 곳으로 백제군이 몰래 침습한 걸 알아내 그들을 몰살하고, 자신이 죽을 날을 미리 알았다는 것이다. 선덕왕이 예지력이 뛰어났음을 보여주는 일화라 하겠다. 나머지 하나가 모란 사건이다. 먼저 『삼국사기』 선덕왕본기 첫 대목에 수록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앞선 왕(진평왕-인용자) 때 당나라에서 가져온 모란꽃 그림과 그 꽃씨를 덕만에게 보이니, 덕만이 말하기를 ‘이 꽃이 비록 지극히 요염하기는 하지만 틀림없이 향기가 없을 것입니다’고 했다. 왕이 웃으며 말하기를 ‘네가 그것을 어찌 아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꽃을 그렸으나 나비가 없는 까닭에 그것을 알았습니다. 무릇 여자에게 국색(國色)이 있으면 남자들이 따르고, 꽃에 향기가 있으면 벌과 나비가 따르게 마련입니다. 이 꽃은 무척 아름다운데도 그림에 벌과 나비가 없으니 이는 향기가 없는 꽃임에 틀림없습니다’고 했다. 그것을 심었더니 과연 말한 바와 같았으니 미리 알아보는 식견이 이와 같았다.”이는 선덕이 진평왕의 공주이던 시절의 일화로 보인다. 『삼국유사』의 ‘선덕왕 지기삼사’엔 이렇게 적혀있다.“당 태종이 모란을 세 가지 색깔, 즉 붉은색·자주색·흰색으로 그림을 그리고 그 씨앗 석 되를 보내왔다. (선덕)왕이 꽃 그림을 보고 말하기를 ‘이 꽃은 틀림없이 향기가 없을 것이오’라고 했다. 이에 명하여 뜰에다 (그 씨를) 심게 했다가 그것이 피고 지기를 기다렸더니 과연 그 말과 같았다. (중략) 이로써 대왕이 신령스럽고 신령함을 알게 되었다. 당시에 뭇 신하가 왕께 아뢰기를 ‘어떻게 (모란) 꽃과 개구리 두 사건이 그렇게 될 것을 아셨습니까?’ 라고 하니, 왕이 말하기를 ‘꽃을 그렸으되 나비가 없으니 거기에 향기가 없음을 알았소. 이는 곧 당나라 황제가 과인에게 배필이 없음을 놀린 것이오.’ (중략) 이에 뭇 신하가 모두 그의 성스러운 지혜에 감복했다. (모란) 꽃 세 가지 색을 보낸 것은 아마도 신라에 세 여왕이 있을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선덕·진덕(眞德)·진성(眞聖)이 그들이니 당나라 황제도 미래를 아는 명석함이 있었다.”『삼국사기』와 비교해 몇 가지 미세한 차이점을 지적하면, 우선 이 사건이 발생한 때가 선덕이 왕으로 있던 시절이다. 또 『삼국유사』 쪽 기술이 훨씬 생생하며 문학적이다. 이런 차이는 참조한 원전이 각기 달랐을 가능성도 있지만 같은 원전을 참조하면서 이를 전재하는 과정에서 현재와 같은 차이가 빚어졌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그렇다면 과연 이 사건이 역사성을 반영한 것일까. 필자는 이 일이 선덕여왕 혹은 선덕공주 시대에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판단한다. 그 근거는 이야기의 소재로 등장하는 모란 때문이다. 공주 시절이건, 여왕 시절이건 이 시대에는 모란이 등장할 수 없었다. 모란은 이보다 대략 100년 뒤에나 등장하기 때문이다. 당 태종이 모란 그림과 모란 씨를 보내왔다고 하는데, 이세민 시대에 중국에 모란은 없었다는 역사성의 차이를 어찌 증명할 것인가.중국사에서 볼 때 당 제국의 수도를 중심으로 모란이 재배되기 시작한 것은 진평왕, 혹은 선덕여왕 시대보다 무려 100년이나 뒤인 서기 750년 무렵 이후다. 아무리 일러도 730년 이전이 될 수 없다는 얘기다. 중국의 관련 기록을 모조리 검토하면 모란은 중국 대륙 북부 사막 지역에서 이 무렵에 들어왔으며, 더구나 그런 모란이 광적인 열풍을 일으킨 것은 800년 이후, 백거이가 이 시대 최고의 시인으로 떠오른 무렵이다. 실제 중국 청나라 때 당나라 시인 2200여 명이 남긴 시 4만8900여 수를 묶은 방대한 시집 『전당시(全唐詩)』를 훑어봐도 당 현종 개원 연간(713~741) 이전에는 모란을 소재로 하는 시가 단 한 편도 등장하지 않는다. 모란이 그 무렵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각종 기록을 봐도 이 꽃은 개원 연간에 장안에 비로소 들어왔다고 한다. 그러니 진평왕 시대에 당나라에서 신라에 모란씨나 모란 그림을 선물로 보낼 수는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화랑세기』에 여왕 둘러싼 ‘삼서지제’ 소개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무엇을 모티브로 한 것일까. 이 점을 해명하기 위해선 이 이야기가 선덕왕(혹은 선덕공주)을 감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꽃이 피었는데 향기가 없고, 그래서 나비가 날아들지 않는다거나 열매를 맺지 않았다는 것은 남자가 없거나, 남자가 있어도 자식, 특히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은유에 다름 아니다. 각기 다른 세 가지 색깔의 모란씨를 심었지만 향기가 없다는 것은 혹시 선덕왕에게 세 명의 남자가 있었지만 누구에게서도 자식을 두지 못했다는 뜻이 아닐까.의문의 실마리는 남당(南堂) 박창화(朴昌和·1889~1962)라는 사람이 필사본 형태로 남긴 『화랑세기(花郞世紀)』에서 찾을 수 있다. 『화랑세기』는 우두머리 화랑을 역임한 역대 풍월주 32명에 대한 전기물이다. 13세 풍월주 용춘공(龍春公) 열전을 보면 다음 왕위를 이을 아들을 생산하지 못한 선덕여왕을 둘러싸고 벌어진 ‘삼서지제(三?之制)’라는 제도가 다음과 같이 흥미롭게 소개되고 있다.“(선덕) 공주가 즉위하자 (용춘) 공을 지아비로 삼았지만 공은 자식이 없다는 이유로 스스로 물러나고자 했다. 이에 뭇 신하가 삼서(三?)의 제도를 의논하여 흠반공(欽飯公)과 을제공(乙祭公)으로 하여금 왕을 보좌토록 했다. (용춘) 공은 본디 (아버지인) 금륜(金輪)이 색(色)에 빠져 폐위된 일을 슬퍼하여 성품이 색을 좋아하지 않아 왕에게 아첨할 생각이 없었기에 물러날 뜻이 더욱 굳어졌다. 선덕은 이에 정사를 을제에게 맡기고 공에게 물러나 살도록 했다. (물러난) 공은 천명공주(天明公主)를 처로 삼고는 태종(太宗·김춘추)을 아들로 삼았다.”선덕왕은 아들을 두고자 용춘·흠반·을제 세 명의 남자를 잠자리로 불러들였으나, 모두 임신에 실패했다. ‘삼서지제’는 여자가 적통 아들을 두기 위해 남자를 세 명까지 불러들이는 제도였던 것이다. 이들은 정식 남편이 아니라 씨내리 남자들이었던 셈이다. 그러니 이 실제 사건을 토대로 해서 나중에 모란 이야기로 둔갑했다는 추론이 가능해진다.김태식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email protected]

선덕여왕 [善德女王] 우리 역사의 첫 여왕

선덕여왕은 신라 제27대 왕으로,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여왕이다. 여왕이라는 이유로 국내 정치세력의 저항과 주변국의 압박을 받았다. 그러나 김유신金庾信)과 김춘추(金春秋) 등의 지지세력을 활용해 위기를 극복하고, 사상적으로는 불교의 힘을 이용함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세웠다.

선덕여왕은 역사서에 선덕왕(善德王)이라 기록되어 있다. 성은 김(金)이고, 이름은 덕만(德曼) 혹은 만(萬)이다. 선덕(善德)은 죽은 후에 추증한 시호(諡號)이다. 제26대 진평왕(眞平王)의 맏딸로, 어머니는 복승갈문왕(福勝葛文王)의 딸인 마야부인(摩耶夫人) 김씨(金氏)이다. 그리고 동생으로는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을 낳은 천명공주(天明公主)가 있었다. 서동설화(薯童說話)에서는 선화공주(善花公主)가 진평왕의 셋째 딸이라 하여, 선덕여왕의 동생으로 나온다. 선덕여왕의 남편에 대해서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음갈문왕(飮葛文王)이 배필이라고 하였으나,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혼인을 하지 않은 것으로 나와 차이를 보인다. 자식은 없었다고 한다. 632년 정월, 진평왕이 죽자, 선덕여왕은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신라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이 왕위에 올랐던 이유는 무엇일까? 『삼국사기』에는 진평왕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국인(國人)들이 덕만을 왕으로 세우고 성조황고(聖祖皇姑)라는 칭호를 올렸다고 한다. 그러나 신라 중고기의 왕위가 반드시 왕의 아들로 계승된 것은 아니어서, 여왕 탄생의 이유로는 불충분하다. 같은 사안에 대해서 『삼국유사』는 ‘성골(聖骨) 남자가 다하여 여왕을 세웠다’고 다른 이유를 전하고 있다. 당시 진평왕의 가계를 살펴보면, 진평왕의 동생인 백반(伯飯)과 국반(國飯)은 이미 사망한 뒤였고, 이들에게도 자식은 국반의 딸인 승만(勝曼, 진덕여왕) 밖에 없었다. 진평왕의 가계에 성골 신분을 가진 남자가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때문에 차선책으로 성골 신분으로서 여성인 덕만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성골이라는 신분은 선덕여왕 즉위의 가장 큰 이유가 되었다. 하지만 여성이라는 점은 왕위계승의 반대 이유가 되기도 했다. 진평왕이 죽기 직전인 631년(진평왕 53), 이찬 칠숙(伊湌 柒宿)과 아찬 석품(阿飡 石品)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되었다. 이 난은 여성인 선덕여왕이 후계자로 내정된 것에 대한 반발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선덕여왕은 성골 신분을 강조하고, ‘성고황조’라는 존호를 통해 자신의 신성성을 내보이며 왕위계승의 정당성을 확보했던 것이다. 선덕여왕은 632년 즉위하여 647년까지 16년간 신라를 다스렸다. 선덕여왕은 생전에 자신이 죽을 날짜를 정확히 이야기하며, 낭산(狼山) 남쪽의 도리천(忉利天) 가운데에 장사지내라고 하였다. 선덕여왕이 자신이 예언한 그 날짜에 죽자, 신하들은 낭산 아래 양지바른 곳에 장사를 지냈다. 그런데 후에 문무왕(文武王)이 선덕여왕릉의 아래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창건했다. 불교에서 도리천은 사천왕천의 위에 있다고 하므로, 선덕여왕의 예언이 그대로 맞았던 것이다. 현재 선덕여왕릉은 경주시 배반동에 위치하고 있다. 선덕여왕이 죽자, 사촌동생인 승만이 왕위에 올라 진덕여왕이 되었다.

선덕여왕이 여성으로서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은 김유신과 김춘추로 대표되는 신흥 귀족들의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칠숙의 난에서 볼 수 있듯이 구귀족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이에 즉위 초에는 귀족들과 어느 정도 타협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일환으로 선덕여왕이 취한 첫 번째 조치가 바로 대신 을제(乙祭)에게 국정을 총괄하도록 한 것이었다. 선덕여왕은 즉위 초반 백성들에 대한 위문과 진휼정책을 많이 실시했다. 관리를 보내 어려운 사람들을 구휼하고, 조세를 감면해주거나 지방을 순회 위문하는 형태였다. 그리고 분황사(芬皇寺)와 영묘사(靈妙寺)를 창건하고, 백좌강회(百座講會)를 열어 인왕경(仁王經)을 강론하는 등 불교행사도 빈번했다. 인왕경은 왕권을 사상적으로 뒷받침하는 불교의 경전이다. 결국 이같은 조치들은 민생안정과 종교적 신성성을 강조함으로써, 왕위계승의 불안감을 불식시키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노력들이라 할 수 있다. 이와 함께 634년(선덕여왕 3) 봄에는 연호를 인평(仁平)으로 바꾸고, 이듬해에는 당으로부터 신라왕으로 책봉을 받았다. 이로써 선덕여왕의 치세는 대외적으로도 공인받게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선덕여왕은 점차 정국 운영의 주도권을 장악해 나간다. 636년(선덕여왕 5)에는 선덕여왕이 궁궐 서남쪽 옥문곡(玉門谷)에 백제 군사가 숨어있는 것을 미리 알아채고, 알천(閼川) 등을 보내 물리친 일이 있었다. 여기에서도 알천의 군사적 능력이 아니라, 적군의 매복을 눈치 챈 선덕여왕의 비상한 능력이 강조되고 있다. 그리고 하슬라주(何瑟羅州)에 북소경(北小京)을 설치하여 지방행정을 정비하고자 했으며, 당에 자제(子弟)를 파견해 국자감(國子監)에 입학시켜줄 것을 청하기도 했다. 국자감은 유학을 가르치는 국가기관이므로, 결국은 유교의 충효사상을 통해 왕과 국가에 대한 충성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선덕여왕의 정치는 642년(선덕여왕 11) 대야성(大耶城) 전투의 패배를 계기로 큰 변화를 맞게 된다. 신라는 백제 의자왕(義慈王)에게 대야성을 비롯한 서쪽의 40여 성을 빼앗김으로써 위기감이 조성되었다. 이에 선덕여왕은 고구려와 당에 사신을 보내 군사를 요청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오히려 당 태종(太宗)에게 “신라는 여자를 임금으로 삼고 있어 이웃나라의 업신여김을 받는다”는 비판을 받음으로써 선덕여왕의 권위는 더욱 흔들리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647년(선덕여왕 16) 정월, 상대등 비담(上大等 毗曇)과 염종(廉宗)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의 명분은 “여왕이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반란군과 왕군은 각각 명활성(明活城)과 월성(月城)에 주둔한 채 10여 일을 대치했다. 그때 큰 별이 월성에 떨어져 군사의 사기가 꺾였으나, 김유신이 허수아비에 불을 붙이고 연에 실어 올려보내는 계책으로 전세가 역전되었다. 이로써 비담의 난은 진압되었지만, 이 와중에 선덕여왕이 죽고 만다. 비담의 난으로 선덕여왕의 통치에 반대하던 귀족세력들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반면 선덕여왕을 측근에서 보좌하던 김춘추나 비담의 난을 진압한 김유신의 세력은 더욱 강성해지게 되었다.

신라는 진흥왕(眞興王)의 영토 확장 이후, 이를 되찾으려는 백제와 고구려의 지속적인 공격에 시달려 왔다. 이것은 선덕여왕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중에서도 백제는 7차례에 걸쳐 단독 혹은 고구려와 연합해 신라를 공격했다. 백제의 공격은 633년(선덕여왕 2) 서쪽 변경을 침입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그 이후 백제에서 의자왕이 즉위하자, 신라에 대한 공격은 더욱 거세졌다. 특히 642년 7~8월에 걸친 전쟁은 신라의 정치와 외교에 결정적인 변곡점이 된 사건이었다. 이 전쟁에서 신라는 대야성을 비롯한 서쪽 40여 성을 빼앗겼다. 그리고 김춘추의 딸인 고타소(古陁炤)와 사위인 대야성주 김품석(金品釋), 죽죽(竹竹) 등이 전사했다. 또한 이 시기에 백제와 고구려가 당항성(黨項城)을 빼앗아 신라와 당의 교통로를 끊고자 하는 일도 일어났다. 이로써 신라는 가야 지역의 지배권을 빼앗기고, 고립될 위기에 처했다. 그리고 김춘추는 백제에 강한 원한을 품게 되었다. 이 원한을 갚기 위해 김춘추는 직접 고구려로 가 군사를 청했다. 그러나 보장왕(寶藏王)은 죽령(竹嶺) 서북쪽의 땅을 반환해줄 것을 요구하며 청병을 들어주지 않고, 오히려 김춘추를 억류한다. 이에 김유신이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로 들어가니 그제서야 김춘추를 풀어주었다. 고구려 청병외교에 실패한 신라는 이듬해인 643년(선덕여왕 12) 9월, 당에도 사신을 보내 군사를 요청했지만 역시 실패했다. 백제의 계속된 공격을 막기 위해 김춘추가 외교적으로 노력을 했다면, 군사적으로는 김유신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신라는 김유신을 대장군을 삼아 백제의 7성을 빼앗는 등 백제에 대한 반격에 나섰다. 김김유신은 645년(선덕여왕14)에도 연달아 백제의 공격을 막아내며 선전하고 있었다. 같은 해 5월, 당 태종(太宗)이 고구려 정벌에 나서자, 신라는 군사 3만을 보내 이를 도왔다. 하지만 그 틈을 타 백제에게 서쪽의 7성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처럼 선덕여왕 대의 신라는 백제와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지만, 전체적으로는 열세를 보이고 있었다. 고구려 역시 신라에는 적대적인 상황이어서, 신라는 고립을 피하기 위해 당과의 외교에 주력했다. 즉위 초부터 거의 매년 사신을 보내 여왕임에도 불구하고 ‘신라왕’으로 책봉을 받는데 성공했다. 또한 당에 유학생들을 보내 국학(國學)에 입학시켜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선덕여왕의 청병 외교는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같은 노력은 이후 김춘추가 당에 가서 당의 군사적 지원을 이끌어내는 바탕이 되었다.

신라 왕실은 법흥왕(法興王)의 불교 공인 이후, 불교를 정치에 적극 활용했다. 이러한 신라 불교의 특징을 ‘호국불교(護國佛敎)’ 혹은 ‘국가불교(國家佛敎)’라고 부른다. 이러한 경향은 선덕여왕 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선덕여왕은 불교를 적극적으로 진흥하고, 동시에 왕권 강화를 위해 활용했다. 선덕여왕의 즉위 이후 분황사와 영묘사가 완성되었다. 그리고 왕이 병이 들자 황룡사(皇龍寺)에서 백고좌회를 열어 인왕경을 강론하기도 했다. 황룡사는 신라 제일의 사찰로, 당시 호국불교의 중심 도량이었다. 그리고 『인왕경』은 불교를 통해 나라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철학적 내용을 담고 있는 경전으로, 우리나라 호국불교의 근본 경전이다. 황룡사에서 『인왕경』을 강론했다는 것만으로도 ‘불교신앙으로 국가를 보호한다’는 호국불교의 특징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선덕여왕의 불교정책은 자장(慈藏)의 활동을 통해서 더욱 잘 드러난다. 자장은 636년(선덕여왕 5)에 불법을 배우기 위해 당에 들어갔다가, 643년(선덕여왕 12) 선덕여왕의 요청으로 귀국했다. 선덕여왕은 자장을 분황사에 머무르게 하면서 대국통(大國統)에 임명했다. 선덕여왕과 왕실의 후원을 배경으로, 자장은 계율을 강조하며 승단조직을 정비했다. 이로써 신라 불교는 체계를 확립하고,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자장의 가장 큰 역할은 황룡사 9층목탑의 건립에서 확인된다. 자장이 당에서 유학하고 있을 때 한 신인(神人)을 만났다. 그가 사방에서 외침을 당하는 신라의 상황을 걱정하자, 신인은 신라는 여자가 왕으로 있어 주변국의 침략이 잦다면서, 신라에 돌아가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우면 이웃나라가 항복하고 9한(韓)이 와서 조공할 것이라고 하였다. 신라에 돌아와 자장은 선덕여왕에게 이를 아뢰었고, 선덕여왕이 이것을 받아들임으로써 황룡사 9층목탑의 건립이 추진되었다. 탑의 건립에는 아비지(阿非知)라는 백제 장인이 동원되었다. 찰주(刹柱, 탑 꼭대기의 장식물을 지탱하는 쇠로 된 버팀대)를 세우는 날, 아비지는 백제가 멸망하는 꿈을 꾸고, 일손을 멈추었다. 그러자 대지가 진동하며 어둠 속에서 노승과 장사 한 사람이 나와 기둥을 세우고는 사라졌다고 한다. 645년(선덕여왕 14) 3월, 드디어 황룡사 9층목탑이 낙성되었다. 그리고 자장은 황룡사의 2대 주지로 취임했다. 신라는 거대한 목탑을 황룡사라는 호국사찰에 건립함으로써, 주변의 여러 나라가 신라에 항복해 오기를 기도했다. 또한 여왕이 가진 통치력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마음도 담겨 있었다. 그렇다면 황룡사 9층목탑은 선덕여왕의 권위를 높이고, 불교의 힘으로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려는 바람이 담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선덕여왕은 자장을 적극 후원함으로써 불교를 정치적으로 활용했고, 자장 역시 정치를 이용해 신라에서 불교의 영향력을 확대시켰다. 이러한 자장의 노력에 대해서 그를 ‘호국불교의 구현자’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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