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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世宗 | |
---|---|
이름 | |
휘 | 이도(李祹) |
군호 | 충녕대군(忠寧大君) |
시호 | 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 (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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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각은…] 한글날, 세종대왕 이름부터 제대로 알자 | 중앙일보
세종대왕이 왕자로 있을 때는 충녕군(忠寧君)이라 칭하였지만, 그의 본래 이름은 따로 있었다. 세종대왕이 출생했을 때 이름은 ‘祹(도)’다. 이는 흔하지 …
Source: www.joongang.co.kr
Date Published: 1/2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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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이름 뜻이 옷소매? 후대 눈엔 이상하겠지만…
여기서는 ‘옷의 변’ 글자를 대용으로 삼았다. 결국 세종 이름은 ‘裪(옷소매 도)’이다. 세종대왕의 본명이 ‘복 도’가 아니라 ‘옷소매 도’ …
Source: www.ohmynews.com
Date Published: 12/2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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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소매냐 복이냐” 세종대왕 이름 진실은? – 주간동아
조선 세종대왕의 이름이 ‘도’라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세간에서는 한자 표기를 두고 두 가지 설이 있다. ‘옷소매 도(裪)’ 자를 쓴 ‘이도( …
Source: weekly.donga.com
Date Published: 8/1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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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조선) – 나무위키
조선의 제4대 국왕. 묘호는 세종(世宗), 시호는 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 본명은 이도( 李裪 ), 자는 원정(元正), 아명은 막동(莫同, …
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8/17/2021
View: 7532
세종(世宗)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재위 1418∼1450.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이도(李祹), 자는 원정(元正). 태종의 셋째아들이며, 어머니 …
Source: encykorea.aks.ac.kr
Date Published: 8/1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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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이름 및 업적 총정리! – 네이버블로그
세종대왕 이름은 “이도”라고 합니다 이도 : 오얏나무 이(李) / 복 도(祹) 세종대왕은 태종 이방원의 셋째 아들이였으며,
Source: blog.naver.com
Date Published: 7/1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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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1397 ~ 1450 – 우리역사넷
이름은 도(祹)이고 자(字)는 원정(元正)이며, ‘세종(世宗)’은 묘호(廟號)이다. 세종은 태종[조선](太宗)과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閔氏)의 셋째 아들로, 1397년(태조 …
Source: contents.history.go.kr
Date Published: 1/15/2022
View: 9570
세종대왕 소개 – 서울광장
세종대왕의 개인 소개와 연혁을 알려드립니다. … 세종대왕은 지극한 애민정신과 민본사상에 기초하여 한글반포, 과학기술, … 이름, 이 도(李祹).
Source: plaza.seoul.go.kr
Date Published: 11/30/2021
View: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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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世宗, 1397년 5월 7일[1] ~ 1450년 3월 30일)은 조선의 제4대 국왕(재위 : 1418년 9월 9일 ~ 1450년 3월 30일)이다. 대부분 세종의 업적에 대한 존경의 의미를 담아 세종대왕(世宗大王)으로 불린다.
개요 [ 편집 ]
조선의 제4대 국왕으로 태종과 원경왕후의 아들이다. 형인 양녕대군이 폐세자가 되자 세자에 책봉되었으며 태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2]
세종은 과학 기술, 예술, 문화, 국방 등 많은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백성들에게 농사에 관한 책을 펴내었지만 글을 읽지 못해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효율적이고 과학적인 문자 체계인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하였다. 훈민정음은 언문으로 불리며 왕실과 민간에서 사용되다가 20세기 주시경에 의해 한글로 발전되어, 오늘날 대한민국의 공식 문자로서 널리 쓰이고 있다.
과학 기술에도 두루 관심을 기울여 혼천의, 앙부일구, 자격루, 측우기 등의 발명을 전폭적으로 지원했고, 신분을 뛰어넘어 장영실, 최해산 등의 학자들을 후원하였다.
국방에 있어서는 이종무를 파견하여 왜구를 토벌하고 대마도를 정벌하였으며, 이징옥, 최윤덕, 김종서 등을 북방으로 보내 평안도와 함길도에 출몰하는 여진족을 국경 밖으로 몰아내고 4군 6진을 개척하여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으로 국경을 확장하였고, 백성들을 옮겨 살게 하는 사민정책(徙民政策)을 실시하여 국토의 균형된 발전을 위해서도 노력하였다.
정치면에서는 황희와 맹사성, 윤회, 김종서 등을 등용하여 정무를 주관하였는데 이 통치 체제는 일종의 내각중심 정치제도인 의정부서사제의 효시가 되었다. 이 밖에도 법전과 문물을 정비하였고 전분 6등법과 연분 9등법 등의 공법(貢法)을 제정하여 조세 제도의 확립에도 업적을 남겼다.
생애 [ 편집 ]
왕자 시절 [ 편집 ]
탄생과 봉작 [ 편집 ]
1397년(태조 6년) 5월 7일[1](음력 4월 10일), 한성 준수방(서울 종로구 통인동)에서 태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로 당시 정안군이던 아버지 태종과 어머니 민씨(원경왕후)의 여섯번째 자녀이자,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날 당시 형 양녕대군 이제, 효령대군 이보와 정순공주, 경정공주, 경안공주 등 동복 친누나 세 명이 있었다. 아명은 막동(莫同)이고, 이름은 도(祹)이다.
1408년(태종 8년), 충녕군(忠寧君)에 봉해졌으며 같은해에 소헌왕후가 되는 심온의 딸 심씨와 혼인하였다. 어려서부터 독서와 공부를 좋아하였으며, 두 형과 함께 빈객으로 임명된 계성군 이래(李來)와 변계량에게 수학하였다. 이후 정몽주의 문하생인 권우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어려서부터 책을 한시도 손에 놓지 않아 눈병과 과로로 건강을 해치기도 하여, 부왕 태종은 책을 모두 감추게 하기도 했다.
1412년(태종 12년) 효령대군과 함께 대군으로 진봉되어 충녕대군(忠寧大君)이 되었다. 충녕대군은 형제간 우애가 깊은 인물이고, 부모에게 지극한 효자로 각인되었다. 특히 친동생인 성녕대군에게는 형제 중 직접 병간호를 할만큼 우애가 각별했으나 홍역을 앓던 성녕대군은 끝내 병을 털어내지 못한 채 사망하였다.
양녕대군과의 갈등 [ 편집 ]
실록에는 충녕대군과 양녕대군의 갈등을 암시하는 내용도 기록되어 있다. 세자인 양녕대군이 옷을 차려 입고 몸단장을 한 뒤 자신의 모습이 어떠한지 아랫사람에게 묻자, 충녕대군은 “먼저 마음을 바로 잡은 뒤에 용모를 닦으시기 바랍니다.” 라고 말하였다.[3]
상왕 정종이 베푼 연회가 끝난 후 세자가 매형인 이백강의 첩인 칠점생을 데리고 가려 하자 충녕대군은 이런 세자의 행동을 지적하였고, 세자는 결국 칠점생을 데려가지 못하였다.[4] 또한 세자가 조모인 신의왕후의 기일에 흥덕사에서 향을 피운 후 아랫사람들과 어울려 바둑을 두며 놀자, 충녕대군은 이런 세자의 행동을 지적하였고 세자는 불쾌해 하였다.[5]
양녕대군은 기생 어리(於里)를 사랑하여 여러차례 궁에 몰래 들였고, 이로 인해 태종에게 꾸지람을 들었다. 양녕대군은 충녕대군이 태종에게 어리에 대한 얘기를 했을 것이라며 원망하였다.[6] 양녕대군은 태종에게 혼나면서 공손하지 못한 말투와 행동을 보이며 말대꾸를 했는데 이때마다 충녕대군이 양녕대군을 타일렀다.[7]
세자 책봉과 즉위 [ 편집 ]
1418년(태종 18년) 6월 3일, 태종은 세자의 여러가지 비행에 고심하던 중 신료들의 폐세자 주청에 대한 상소가 연이어 올라오자, 세자의 행동이 지극히 무도하여 종사를 이어 받을 수 없다고 판단하여 세자를 폐위시키고 광주(廣州)로 추방하였다. 이어 충녕대군을 새로운 세자로 책봉하였다.[8][2]
같은 해 8월 10일, 태종은 세자에게 양위하였다. 세자는 양위를 거절하였으나 오랜 기간 반복된 태종의 양위를 받아들여 경복궁 근정전에서 즉위하였다.[9] 태종으로부터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으나 세종의 재위 초기에는 태종이 상왕으로서 군권과 인사권을 직접 행사하였고, 세종의 장인인 심온을 비롯한 외척세력을 숙청하였다.
이후 세종은 신분을 가리지 않고 유능한 인재를 많이 등용하여 깨끗하고 참신한 정치를 펼쳐 나갔다. 그러면서도 인사와 군사에 관한 일은 세종 자신이 직접 처리함으로써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이루었다. 아울러 국가의 행사를 오례에 따라 유교식으로 거행하였으며, 사대부에게도 주자가례의 시행을 장려하여 유교 윤리가 사회 윤리로 자리 잡게 만들었다. 또한 사대사고를 정비하고, 《삼강행실도》, 《효행록》 등을 간행하여 유교를 장려하였다.
치세 [ 편집 ]
대외 정책 [ 편집 ]
세종은 명나라와의 외교에서 금·은 세공을 말과 포(布)로 대신토록 하는 데에 합의를 이끌었고, 여진과의 관계에 있어서 최윤덕과 이천에게 압록강 상류 지역에 4군(四郡)을, 김종서와 이징옥에게 두만강 하류 지역에 6진(六鎭)을 설치하도록 하였다.
일본과의 외교에서 초기에는 삼포 개항 등의 회유책을 썼으나 상왕 태종의 명령 아래 무력으로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사령관 이종무의 실책으로 조선의 피해가 만만치 않아 실질적으론 군사적인 승리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대마도주가 조선에 항복하여 조공할 것을 약속하였기에 부정적인 것 또한 아니었다.
공녀와 금은 조공 중지 [ 편집 ]
조선은 기본적으로 명나라에 사대정책을 취하였으며 매년 조공하고 조공품 보다 후한 물품들을 받았으나, 공녀 등의 인적자원과 광물의 조공은 국가 재정의 큰 부담이 되었다.
태종과 세종대에 명나라에 처녀와 금은을 조공하였다. 처녀 조공은 처녀 진헌이라 불렀는데 태종대에는 진헌색이라는 기관을 설치했다. 세종 시대의 명나라에 조공으로 바처진 공녀는 74명으로 태종 때의 40명 보다 증가하였다. 태종 때에 이미 명나라에 청하여 조공의 중지를 요청하였으나 개선되지 않았다. 명나라로 차출되는 공녀들은 이송 전 입궁하여 왕비의 위로를 받았으며, 남겨진 가족은 후하게 대접받았다.[10] 태종 · 세종 대에 조선인 공녀 중 일부는 명나라 황제의 후궁이 되었는데, 황제의 사망 후 순장되었다.[11]
세종은 이복동생인 함녕군과 인순부윤 원민생등을 명에 보내어 작고 척박한 땅에서 금은이 나지 않음을 이유로 금은 조공을 면제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1430년(세종 12년)에 말과 명주, 인삼 등 다른 공물을 더 보내는 조건으로 처녀 조공과 금은 조공은 면제되었다.
대마도 정벌 [ 편집 ]
이 문단에 관해서는 이 문단에 관해서는 대마도 정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고려 말부터 지속된 왜구의 노략질 문제는 처음에는 회유책을 써서 평화적 해결을 모색했다. 하지만 무로마치 막부의 전국적 통제에도 왜구의 남해안 노략질은 줄어들지 않았다.
1419년(세종 1년), 왜구가 침입하자 그해 6월 19일, 이종무를 삼도 도절제사로 삼아 그로 하여금 삼도에 소속된 9명의 절제사들과 전함 227척, 군사 1만 7천 명을 이끌고 거제도의 마산포를 떠나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를 정벌케 하였다. 열흘 후 대마도의 도주가 항복을 하였다.[12] 이 때 이종무는 왜구에게 잡혀 갔던 조선 사람과 함께 붙잡혀 있던 명나라 사람도 구출하였다. 조선군은 대마도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군대를 철수시켰다.
이후 대마도주의 간청을 받아들여 1426년(세종 8년) 내이포, 부산포, 염포 등의 3포를 개항하고, 1443년(세종 25년) 계해약조를 체결하여 세견선 50척, 세사미두 200석으로 무역을 허락하였다.[13] 이러한 정책은 왜구를 너그럽게 포용함으로써 노략질을 근본적으로 방지하고자 함이었다. 실제로 이같은 정책으로 14세기부터 지속된 왜구의 침입은 삼포왜란이 발생하기까지 약 100여년 동안은 소강상태를 보였다.
4군 6진 개척 [ 편집 ]
“ 祖宗所守, 雖尺地寸土, 不可棄也
조종(祖宗)께서 지키시던 땅은 비록 척지 촌토(尺地寸土)라도 버릴 수 없다. ” — 《세종실록》 78권, 세종 19년(1437년) 8월 6일 (계해)
태종 이래 불안정한 압록강과 두만강 지역의 여진족을 무찌르기 위해 정벌 계획을 수립하였고 세종은 마침내 요동 정벌 이후 수그러들었던 북진정책을 추진하였다. 1432년(세종 14년), 두만강 하류의 석막을 공격하여 영북진(寧北鎭)을 설치하였다.[14]
1433년(세종 15년), 최윤덕으로 하여금 압록강과 개마고원 일대의 여진족을 소탕할 것을 명하였다. 최윤덕이 이끄는 부대는 파저강 전투(婆猪江)에서 여진족을 무찔렀고 세종은 이 일대에 여연(閭延) · 자성(慈城) · 무창(茂昌) · 우예(虞芮) 등 4개의 군(四郡)을 설치하였다.
김종서가 이끄는 부대는 함길도 지역을 내습하는 여진족을 소탕하여 두만강 이북으로 몰아내고 1437년(세종 19년) 이 일대에 온성(穩城) · 경원(慶源) · 경흥(慶興) · 부령(富寧) · 회령(會寧) · 종성(鍾城) 등의 여섯개의 진(六鎭)을 설치하여 북방 영토를 개척하였다.
이후 이 지역의 관리와 지배권을 강화하기 위해 삼남 지역의 주민을 이주시키고 토관제도 등을 실시하였다.
훈민정음 창제 [ 편집 ]
세종어제 훈민정음, 목판본 월인석보 제1권. (1459년)
훈민정음 창제에 관해서는 훈민정음 창제에 관해서는 훈민정음 한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420년(세종 2년), 중앙 집권 체제를 운영하기 위해 정책 연구 기관으로 궁중 안에 집현전을 설치하여 그들을 일반 관리 이상으로 우대하였다.
1443년(세종 25년), 세종은 백성들이 당시의 문자인 한자를 쉽게 배우지 못하며, 우리 말과 한자가 서로 통하지 않아 말하고자 하는 바를 표현하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겨 친히 28개의 글자를 창제하였다.[15] 글자의 모음은 음양의 원리를 기본으로 만들었으며 자음은 오행의 원리를 기본으로 만들었다.
“ 우리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한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끝내 제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를 가엾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니
사람마다 하여금 쉽게 익혀 날마다 씀에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다. ” — 《세종어제 훈민정음》
1446년(세종 28년) 9월 29일, 훈민정음을 반포하였고 예조판서 정인지가 서문을 작성하였다.[16]
계해년(1443년) 겨울에 우리 전하께서 정음(正音) 28자(字)를 처음으로 만들어 예의(例義)를 간략하게 들어 보이고 명칭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 하였다. 사물의 형상을 본떠서 글자를 만들되 고전을 모방하고, 소리로 일곱 가지 음(音)을 맞추었다. 삼극(三極)의 뜻과 이기(二氣)의 오묘함을 모두 포괄하여 28자만으로 전환이 무궁무진하였다. 간략하면서도 요령이 있고 정밀하면서도 막히는데가 없었다. 그런 까닭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반나절이면 이를 이해하고, 어리석은 사람일지라도 열흘이면 배울 수 있게 된다. 이 글자를 가지고 옛글을 해석하면 그 뜻을 알 수가 있으며, 송사(訟事)를 청단(聽斷)하면 그 실정을 알아낼 수가 있게 된다. 자운(字韻)은 청탁(淸濁)을 능히 분별할 수가 있고, 악가(樂歌)는 율려(律呂)가 능히 화합할 수가 있으므로 쓰고 싶은 말을 표현하지 못할 것이 없고, 어디를 가든지 통하지 못할 것이 없어서, 비록 바람소리와 학의 울음이든지, 닭의 울음소리나 개짖는 소리까지도 모두 표현해 쓸 수가 있게 되었다. — 《세종실록》 113권,
세종 28년(1446년) 9월 29일 (갑오)
재상 등용과 국정 분담 [ 편집 ]
세종은 문치주의 정책을 펼치면서 세 명의 정승에게 조정의 대소사를 맡아보게 하였으며, 이것은 의정부서사제 시행이었다.
황희에게는 주로 인사, 행정, 군사 권한을 맡겼고 맹사성에게는 교육과 제도 정비, 윤회에게는 상왕 태종과의 중개자 역할과 외교 활동을 맡겼고, 과거 시험은 맹사성과 윤회에게 분담하여 맡겼다. 나중에 김종서가 재상의 반열에 오를 때쯤에는 국방 업무는 김종서에게 맡겨서 보좌하게 하였다. 맹사성과 황희는 같은 입장을 취하면서도 서로 다른 성품을 가졌다.[17]
황희가 분명하고 강직했다면, 맹사성은 어질고 부드럽고 섬세했다. 또한 황희가 학자적 인물이었다면 맹사성은 예술가적 인물이었다.[17] 윤회 역시 예술가적인 특성을 갖고 있었다. 세종은 이들 재상들의 재질과 능력을 보고 적합한 임무를 분담하여 맡겼다. 황희는 주로 이조, 병조 등 과단성이 필요한 업무에 능했고, 맹사성은 예조, 공조 등 유연성이 필요한 업무에 능했으며 윤회는 외교와 집현전 쪽을 주로 맡아보았다. 세종은 부드러움이 필요한 부분은 맹사성에게 맡기고, 정확성이 요구되는 부분은 황희에게 맡겼다. 따라서 황희는 변방의 안정을 위해 육진을 개척하고 사군을 설치하는 데 관여, 지원하기도 했고, 외교와 문물 제도의 정비, 집현전을 중심으로 한 문물의 진흥 등을 지휘 감독하는 일을 맡기도 했다.[17]
이에 반해 맹사성은 음률에 정통해서 악공을 가르치거나, 시험 감독관이 되어 과거 응시자들의 문학적, 학문적 소양을 점검하는 일을 주로 맡았다.[17] 맹사성과 비슷한 윤회에게는 주로 외교 업무와 상왕 태종과의 매개자 역할, 외교 문서의 작성과 시험 감독관 등의 업무가 부여되었다. 세종은 이들의 능력을 알면서도 권력남용의 가능성을 우려하여 한 사람에게 대권을 모두 넘겨주지는 않았다. 이들 재상들은 맡은 분야와 업무를 서로 분장하거나 서로 공유하기도 했다. 맡은 역할과 성격을 떠나 이들은 모두 공정하고 공과 사를 명확하게 구분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의정부 서사제 실시 [ 편집 ]
세종은 맹사성, 황희, 권진, 김종서 등의 재상들에게 일정 부분의 권한을 위임하여 대신 정무를 주관하게 했다. 세종은 6조의 관료들이 병권과 인사권 외의 정무를 의정부 정승들의 의결을 거쳐 왕에게 전하게 하는 의정부 서사제를 실시한다. 그런데 세종이 의정부 서사제를 실시한 표면적 이유는 건강 때문이었다. 그러나 세종이 왕권의 상당 부분을 의정부로 옮기도록 결심한 배경은 영의정이 황희였기 때문이다. 황희는 오랫동안 관직에 있었으므로 처세술에 능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야사인 《연려실기술》에는 황희가 어떤 젊은 성균관 유생으로부터 “정승이 되어서 임금의 그릇됨을 잡지 못한단 말이냐”라고 면박을 당했는데 도리어 기뻐했다고 한다.[18] 이후 18년 동안 황희는 명재상으로서 세종을 잘 보필하였다.
세종대의 또 다른 정승은 맹사성으로 그는 청렴한 관료였지만 자신의 의견이나 개성을 쉽게 드러내지 않았다. 세종은 맹사성 역시 적극 신뢰하여 황희, 권진과 함께 그를 중용하였다. 또한 세종 후반기에는 황희 등이 천거한 김종서 등을 재상으로 중용하여 정사를 맡기기도 했다.
과학의 발전 [ 편집 ]
앙부일구 현재 남아있는 앙부일구는 모두 1654년 현재 남아있는 앙부일구는 모두 1654년 시헌력 이후에 제작된 것이다.
세종은 정인지, 정초, 이천, 장영실 등에게 명하여 천문 관기구인 간의(簡儀), 혼천의, 혼상(渾象), 천문 기구 겸 시계인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해시계인 앙부일구와 물시계인 자격루, 누호(漏壺) 등 백성들의 생활과 농업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는 과학 기구를 발명하게 하였다.[19] 궁중에 일종의 과학관이라 할 수 있는 흠경각(欽敬閣)을 세우고 과학 기구들을 설치했다.
흠경각(欽敬閣)이 완성되었다. 이는 대호군 장영실(蔣英實)이 건설한 것이나 그 규모와 제도의 묘함은 모두 임금의 결단에서 나온 것이며, 흠경각은 경복궁 침전 곁에 있었다. (중략) 지금 이 흠경각에는 하늘과 해의 돗수와 날빛과 누수 시각이며, 또는 사신(四神)·십이신(十二神)·고인(鼓人)·종인(鍾人)·사신(司辰)·옥녀(玉女) 등 여러 가지 기구를 차례대로 다 만들어서,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저절로 치고 저절로 운행하는 것이 마치 귀신이 시키는 듯하여 보는 사람마다 놀라고 이상하게 여겨서 그 연유를 측량하지 못하며, 위로는 하늘 돗수와 털끝만큼도 어긋남이 없으니 이를 만들은 계교가 참으로 기묘하다 하겠다. 또 누수의 남은 물을 이용하여 기울어지는 그릇을 만들어서 하늘 돗수의 차고 비는 이치를 보며, 산 사방에 빈풍도(豳風圖)를 벌려 놓아서 백성들의 농사하는 어려움을 볼 수 있게 하였으니, 이것은 또 앞 세대에는 없었던 아름다운 뜻이다. 임금께서 여기에 항상 접촉하고 생각을 깨우쳐서, 밤낮으로 근심하는 뜻을 곁들였으니, 어찌 다만 성탕(成湯)의 목욕반(沐浴盤)과 무왕의 호유명(戶牖銘)과 같을 뿐이리오. 그 하늘을 본받고 때를 좇음에 흠경하는 뜻이 지극하며 백성을 사랑하고 농사를 중하게 여기시니, 어질고 후한 덕이 마땅히 주나라와 같이 아름답게 되어 무궁토록 전해질 것이다. — 《세종실록》 80권,
세종 20년(1438년) 1월 7일 (임진)
천문과 역법 [ 편집 ]
고금의 천문도(天文圖)를 참작하여 새 천문도를 만들게 했으며, 이순지와 김담 등에 명해 중국의 수시력과 아라비아의 회회력등 주변국의 역법을 참고로 하여 역서(曆書)인 《칠정산(七政算)》 내편과 외편을 편찬하였는데, 서울을 기준으로 천체 운동을 정확하게 계산함으로써 독자적으로 역법을 계산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이순지는 천문, 역법 등에 관한 책인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을 편찬하였다.[20]
금속활자와 인쇄술 [ 편집 ]
태종 때 제작되었던 기존의 청동 활자인 계미자(癸未字)가 글자의 형태가 고르지 못하고 거칠다는 단점이 발견되자, 세종은 1420년에 경자자(庚子字), 1434년 갑인자(甲寅字), 1436년 병진자(丙辰字) 등을 주조함으로써 활판 인쇄술을 한 단계 발전시켰으며, 이 시기에 밀랍 대신에 식자판을 조립하는 방법으로 종전보다 인쇄 능률을 향상시켜 서적 편찬에 힘썼다.
도량형 통일 · 총통제작 [ 편집 ]
1431년(세종 13년)과 1446년(세종 25년)에는 아악의 음률을 정하는 기준으로 쓰던 구리관인 황종관(黃鐘管)을 표준기(標準器)로 지정하여, 그 길이를 자(尺)로 삼고 담기는 물을 무게의 단위로 삼도록 함으로써 조선의 도량형을 확립시켰다. 또한 천자총통(天字銃筒), 지자화포(地字銃筒)와 같은 신무기를 개발하는 것은 물론 총통의 제작 및 사용법에 관한 책인 《총통등록》(銃筒謄錄)을 편찬했다.
문물의 발전 [ 편집 ]
음악 정비 · 편경 제작 [ 편집 ]
세종은 관습도감(慣習都鑑)을 두어 박연으로 하여금 제례 때 사용하는 중국의 음악이었던 아악을 정리하여 향악과 조화롭게 결합시켰다. 또한 새로운 우막에 맞춰 새로이 편경과 편종 등의 새로운 악기를 만들었으며, 정간보를 통해 이 음악을 기록하게 하였다.[20]
편경은 쇠나 흙으로 만들어져 소리가 고르지 못하고 음을 제대로 조율할 수 없는 단점이 있었으나 1430년(세종 12년), 편경을 돌로 제작하여 고른 소리를 내게 하였다. 날씨나 온도가 변해도 형태가 바뀌지 않는 돌의 속성을 이용한 것이다.
서적 편찬 [ 편집 ]
세종 본인이 지은 《월인천강지곡》을 비롯하여 정인지, 권제(權踶)의 《용비어천가》, 정초와 변계문(卞季文)의 《농사직설》, 정인지와 김종서의 《고려사》, 설순(楔循)의 《삼강행실도》, 윤회(尹淮)와 신장(申檣)의 《팔도지리지》, 이석형(李石亨)의 《치평요람》, 수양대군의 《석보상절》, 김순의(金循義)와 최윤(崔潤) 등의 《의방유취》 등 각 분야의 서적이 편찬되었다.[20]
문물 정비 [ 편집 ]
농업과 양잠에 관한 서적의 간행하고 환곡법의 철저한 실시와 조선통보의 주조, 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를 설치하고 공정한 전세제도의 확립 등으로 경제 생활 향상에 전력했다.
법전 정비 [ 편집 ]
세종은 즉위초부터 법전 정비에 힘을 기울였다. 1422년(세종 4년), 《속육전》의 완전한 편찬을 목적으로 육전수찬색(六典修撰色)을 설치하고 법전의 수찬에 직접 참여하기도 하였다. 수찬색에서는 1426년(세종 8년) 음력 12월에 완성된 《속육전》 6책과 《등록 謄錄》 1책을 세종에게 바쳤고, 1433년(세종 15년)에는 《신찬경제속육전》(新撰經濟續六典) 6권과 《등록》 6권을 완성하였다. 이후에도 개수를 계속하여 1435년(세종 17년)에 이르러 《속육전》의 편찬 사업이 완결되었다.
형옥제도 확립 [ 편집 ]
그 밖에 형벌 제도를 정비하고 흠휼(欽恤) 정책도 시행하였다. 1439년(세종 21년), 양옥(凉獄), 온옥(溫獄), 남옥(男獄), 여옥(女獄)에 관한 구체적인 조옥도(造獄圖)를 각 도에 반포하였고, 1448년(세종 30년)에는 옥수(獄囚)들의 더위와 추위를 막아 주고, 위생을 유지하기 위한 법을 유시하기도 하였다.
세종은 형정에 신형(愼刑) 및 흠휼 정책을 썼으나 절도범은 어린아이와 노인을 제외한 이에게 자자(刺字), 단근형(斷筋刑)을 정하였고, 절도 3범은 교형(絞刑)에 처하는 등 사회 기강을 확립하기 위해 형벌을 강화하기도 하였다. 사형수는 금부삼복법(禁府三覆法)을 도입하였는데, 사형수의 사형에 대하여 의금부에서 반드시 3심을 거쳐 결정하도록 한 제도이다.
이외에도 죄수의 자식을 부양하는 것과 유배 중의 죄수가 늙은 부모를 만날 수 있도록 지시하였다.
공법 제정 [ 편집 ]
조선의 조세 제도는 토지와 노동력, 특산물을 국가에 바치는 조용조 제도였다. 세종은 이 가운데 조세 제도의 근간인 공법(貢法)을 제정함으로써 조선의 전세 제도 확립에도 업적을 남겼다.
종래의 세법이었던 답험손실법은 관리의 부정으로 인하여 농민에게 주는 폐해가 막심하였기 때문에 1430년(세종 12년)에 이 법을 전폐하고 1결당 10두를 징수한다는 시안을 내놓고 문무백관에서 촌민에 이르는 약 17만 2806명을 대상으로 여론을 조사하여 57%의 찬성을 얻어냈으나 이에 대한 반대와 문제점이 제기되자 결론을 얻지 못하였다.
1436년(세종 18년), 공법상정소(貢法詳定所)를 설치하여 집현전 학자들도 이 연구에 참여하게 하는 등 연구와 시험을 거듭하여 1444년(세종 26년) 공법을 확정하였다.[21] 이 공법의 내용은 토지를 비옥도에 따라 6등급으로 나누어 세금을 내는 전분육등법(田分六等法)과, 매년 농사의 풍흉을 상중하로 구분하여 최대 20두에서 최소 4두까지 거두어 들이는 연분구등법(年分九等法)이다. 이후 공법은 조선시대 세법의 기본이 되었다.
애민정책 [ 편집 ]
세종은 ‘임금의 직책은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고, 백성을 사랑하는 것’임을 강조하였다.[22][23][24]
“ 人君之職, 愛民爲重
임금의 직책은 백성을 사랑하는 것을 중하게 여기는 것이다. ” — 《세종실록》 76권, 세종 9년(1427년) 12월 20일 (계유)
1437년(세종 19년), 굶주리는 백성들이 발생하자 경기도와 강원도에서 각전과 각관에 바치는 반찬을 없앴다.[24]
임금이 승정원에 이르기를, “임금의 직책은 오로지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다. 지금 백성의 굶주려 죽는 것이 이와 같은데, 차마 여러 도에서 바치는 반찬을 받을 수 있는가? 전에 흉년으로 인하여 이미 하삼도에서 바치는 반찬을 없애고, 오직 경기 · 강원 두 도만 없애지 않았었는데, 지금 듣자니 경기에도 굶주려 죽는 자가 또한 많다니, 내가 몹시 부끄럽다. 두 도에서 바치는 반찬도 아울러 없애는 것이 어떠한가.” — 《세종실록》 76권,
세종 19년(1437년) 1월 22일 (임자)
관비(관청에 소속되어 있는 여자 종)가 출산할 경우, 1주일의 산후 휴가만 주어졌는데 출산 후 100일을 쉬도록 명을 내렸으며[25], 관비의 남편 또한 산후 1개월의 휴가를 주었다.[26] 이러한 명령에 대해 당시의 일부 관료들이 비판하였지만 세종은 이를 그대로 시행하였다. 또한 노비를 가혹하게 다루거나 살인을 저지르는 자에 대해서 법령에 따라 엄중히 처단할 것을 명하였다.
“ 노비는 비록 천민이라고는 하나, 하늘이 낸 백성 아님이 없으니,
신하된 자로서 하늘이 낳은 백성을 부리는 것만도 만족하다고 할 것인데,
그 어찌 제멋대로 형벌을 행하여 무고한 사람을 함부로 죽일 수 있단 말인가. 임금된 자의 덕(德)은 살리기를 좋아해야 할 뿐인데,
무고한 백성이 많이 죽는 것을 보고 앉아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금하지도 않고
그 주인을 치켜올리는 것이 옳다고 할 수 있겠는가.
나는 매우 옳지 않게 여긴다. ” — 《세종실록》 105권, 세종 26년(1444년) 윤7월 24일 (신축)
이 밖에도 나라의 노인들을 우대하였으며, 쌀과 의복을 내려 구휼하였고 때로는 양로연을 열어 노인들을 위로하였다. 승정원에서 양로연에 초대받은 노인 중 천민의 참석을 중지할 것을 요구하며 상소를 올렸으나, 세종은 이를 일갈하며 노인의 신분에 관계 없이 죄를 지은 자가 아니면 모두 참석하도록 지시하였다.
승정원에서 아뢰기를, “노인으로서 천한 자는 양로연(養老宴)에 나오지 말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양로(養老)하는 까닭은 그 늙은이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고, 그 높고 낮음을 헤아리는 것이 아니니, 비록 지천(至賤)한 사람이라도 모두 들어와서 참예하게 하고, 그 장죄(贓罪)를 범하여 죄를 입어 자자(刺字)한 자는 참예하지 못하게 하라.” 하였다. — 《세종실록》 57권,
세종 14년(1432년) 8월 17일 (계묘)
불교에 귀의 [ 편집 ]
유교 이념에 의해 건국된 조선은 전왕조인 고려가 불교의 폐단으로 인해 쇠퇴하였음을 경계하며 억불 정책을 실시하였으나, 천년 넘게 이어져 온 불교 신앙은 민간은 물론 왕실내에서도 하루 아침에 사라지지 못했다. 세종은 때에 따라 억불 정책을 펼치면서도 왕실 내의 불사를 직접 주관하였다.
재위 후반에 아들 광평대군과 평원대군이 잇따라 요절하면서, 세종과 소헌왕후는 비탄에 빠졌고, 곧 불교 사찰을 찾아다니며 이들의 명복을 비는 불사를 주관하기도 했다. 이어 소헌왕후 마저 승하하자 세종은 세자와 대군들을 이끌고 불교 사원을 찾아 소헌왕후의 명복을 빌었다.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불교의 폐단을 지적하며 불사를 중단할 것을 청하였다.[27][28]
이러한 숭불 정책에 유학자들의 반발이 거셌으나, 세종은 이에 개의치 않고 궁궐 내에 법당을 조성하고 불사 중창과 법회에 참석하였으며, 먼저 죽은 가족들의 넋을 위로하기도 하였다.
건강 악화 [ 편집 ]
어린 시절부터 몸이 약한 데다가, 학문에만 전념하는 모습을 보여 아버지 태종에게 걱정을 샀던 세종은 젊은 시절 무리하게 국정을 돌본 탓에 집권 후반에 들어서면서 건강이 몹시 악화되었다. 각종 질병에 자주 시달려서 병석에 누워 정무를 볼 수 없게 되었고, 이러한 질병으로 인해 여러 번 세자의 섭정을 하려고 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에 무산되었다.
세종은 학문을 좋아하고 육식을 즐겼기 때문에 젊은 시절 비만하여 몸집이 거대하였으나 노년에는 질병을 앓아 비쩍 말랐을 것으로 추측한다.[18] 이러한 이유로 1948년 그려진 국가표준영정이나 이당 김은호의 영정과는 다른 모습이라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일부에서는 세종이 사냥 외에 별다른 움직임이 적었기 때문에 종기(背浮腫)와 소갈증(消渴症, 당뇨병), 풍질(風疾)과 성병의 일종인 임질 등을 앓았다고 한다.
《세종실록》에는 세종이 시각 장애를 앓아 괴로워하는 기록이 있다. “내가 두 눈이 흐릿하고 아파서 봄부터 어두운 곳에서는 지팡이에 의지하지 않고는 걷기가 어려웠다.” 등의 내용으로 세종이 시각에 장애가 있었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29] 세종은 당뇨병을 치료하기 위해 식이요법으로 흰수탉(백웅계)을 자주 먹었다.[30] 이는 어의에 처방에 따른 것으로[31] 그 자세한 내용은 훗날 세조 6년 1460년에 전순의가 편찬한 당대 최고의 식이요법서 《식료찬요 食療撰要》에 당뇨병 치료법으로 소개되어있다.[32][33]
최후 [ 편집 ]
치세 말년에 이르러 병세가 악화되어 제대로 집무를 할 수 없게 되자 세자 향(문종)이 대리청정을 하였다. 집권 후반부에는 이런 각종 질병을 다스리기 위하여 자주 온천에 행차하였고 불교 사원을 방문하여 불교의 힘을 빌렸다. 1446년(세종 26년) 소헌왕후가 죽은 이후 건강은 더욱 악화되었다.
1450년(세종 32년) 2월 4일, 병세가 악화되어 영응대군의 집으로 이어하였고 2월 17일 승하하였다.[34]
묘호와 시호 [ 편집 ]
1450년(문종 즉위년) 2월 22일, 시호를 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으로, 묘호를 세종(世宗)으로 세종의 세(世)는 ‘번성’을 의미하며 나라를 안정시키고 태평성대의 기반을 마련하였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
3월 13일, 허후, 정인지 등이 세종의 묘호는 중흥 혹은 창업의 업적을 이룬 군주에게 올리는 것인데 선왕은 이에 어울리지 않으니 문종(文宗)으로 고칠 것을 청했으나 문종은 선왕이 북방의 공훈이 있다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다.[35]
5월 21일, 좌의정 황보인이 길복(吉服)을 입고 빈전에 나아가서 시호의 책보(冊寶)를 올렸는데, 그 시책(諡冊)은 다음과 같다.
그윽이 생각하건대, 천지(天地)의 큰 덕은 비록 다 형용하여 말할 수 없지만, 신자(臣子)의 지극한 정리(情理)로서는 다만 미덕을 나타내는 데에 간절하므로, 삼가 상헌(常憲)에 따라서 이에 휘칭(徽稱)을 올립니다. — 《문종실록》 1권,
문종 즉위년(1450년) 5월 21일 (갑자) 세종대왕 시책문 삼가 생각하건대, 황고 대왕(皇考大王)께서는 제성(齊聖) 광연(廣淵)하시고 총명 예지(睿智)하시어 처음부터 끝까지 학문을 바탕으로 정치하는 근원을 깊이 연구하고, 밤이나 낮이나 정성을 다하여 정치하는 방도를 넓혔습니다. 유학을 숭상하고 덕화(德化)를 일으켰으며, 농사를 권장하고 형옥(刑獄)을 가엾게 여기었습니다. 조(祖)를 높이고 종(宗)을 공경하는 정성을 다하고, 사대와 교린의 도리를 다하였습니다. 구족(九族)은 실로 인륜을 돈독히 하는 일에 한결 같았고, 조민(兆民)은 태평한 정치에 다 포용되었습니다. 예절이 갖추어지고 풍악이 조화되니, 문치(文治)는 해와 달처럼 빛나고, 가까운 곳이 편안하고 먼 곳이 엄숙하니 위무(威武)는 풍정(風霆)처럼 떨쳤습니다. 이웃 나라에서는 두려워하며 사랑하는 정성을 바치고, 중국에서는 칭찬하고 권애(眷愛)하는 은총을 베풀었습니다. 좋은 상서가 자주 응하고, 칭송의 소리가 번갈아 일어 났습니다. 과연 30년간 태평의 성대이요, 진실로 천 년 사이에 만나기 어려운 행운입니다. 바야흐로 아버지께 만세(萬歲)까지 계실 것을 믿었는데, 어찌 하늘이 하루 아침에 무너질 줄을 생각하였겠습니까? 부비(付卑)의 어려움을 길이 생각하니, 호곡(號哭) 벽용(擗踴) 하는 슬픔을 견딜 수 없습니다. 이에 추숭하는 전(奠)을 거행하여, 애모하는 마음을 조금 펴려고 합니다. 삼가 옥책을 받들어 ‘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란 존시(尊諡)와 ‘세종(世宗)’이란 묘호를 올립니다. 우러러 생각하건대, 선왕의 영령[懿靈]은 깊은 감찰(鑑察)을 내리셔서 빛나는 옥책을 받으시어 대대로 영구히 전하는 큰 명성[(鴻名]을 누리고, 큰 복록(純禧)을 거듭 주셔서 무궁한 보조(寶祚)를 말없이 도와주소서.
능묘 [ 편집 ]
능은 영릉(英陵)으로 소헌왕후와 한 봉분 안에 묻혀있는 합장릉이다. 경기도 여주시 세종대왕면에 위치하며 효종의 능과 함께 영녕릉(英寧陵)을 구성한다.
세종의 능은 원래 태종의 능인 헌릉 근처의 구룡산 부근이었으나 풍수지리에 좋지 않다는 이유로 1469년(예종 1년) 경기도 여주의 현재의 위치로 이장되었다.[36] 이때 초장지였던 구룡산의 비석과 석물은 그대로 방치하고 새롭게 조성되었다. 1981년 구룡산 기슭에서 농사짓던 한 농부에 의해 최초로 묻혔던 능의 상석과 석물, 석수, 장명등 등이 발견되었고, 초장지 1km 지점인 내곡동 산 13번지에서는 비석이 발견되었다. 초장지의 비석과 석물 등은 세종대왕기념관 경내로 옮겨졌다.
기타 [ 편집 ]
일화 [ 편집 ]
왕자 시절에 지나칠 정도로 독서만 하여 시력이 나빠지자, 이를 걱정한 태종이 젊은 환관을 시켜 “모든 책을 치우고 쉬게 하라”고 하자, 매우 상심하다가 우연히 병풍 틈에서 《구소수간(歐蘇手簡)》을 발견하고 기뻐하며 여러 번 읽었다. [37]
첫번째 며느리인 세자빈 김씨(휘빈 김씨)는 투기와 미신행위를 이유로 폐위하였고 [38] , 두번째 며느리인 세자빈 봉씨(순빈 봉씨)는 궁녀와의 동성애 행위가 적발되자 폐위하였다. [39]
, 두번째 며느리인 세자빈 봉씨(순빈 봉씨)는 궁녀와의 동성애 행위가 적발되자 폐위하였다. 적자 중에는 영응대군을, 서자 중에는 계양군을 가장 사랑하였다. [40] [41]
죽음을 앞두고 왕세자(문종)와 수양대군(세조)을 불러 사람들의 이간질에 휘말리지 말고 동생들을 아끼고 사랑하라고 당부하였다.[42]
경오년(1450년) 정월에 세종이 문종(文宗)과 세조(世祖)를 불러 유교(遺敎)를 전하니, “ 나라를 가진 자는 멸망을 은휘(隱諱)하지 않으며, 삶을 가진 자는 죽음을 은휘하지 않는다. 내 이제 너희 두 사람에게 말하거니와, 대저 신하들이란 임금이 죽는 그 날로 즉시 그 형제들의 허물을 공격하는 법이다. 내가 죽는 날에는 너희 형제의 허물을 말하는 자가 반드시 많을 것이니, 너희는 모름지기 내 말을 잊지 말고 항상 친애하는 마음을 간직한다면 사람들이 능히 이간질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부득이 하게, 비록 죄를 주더라도 재삼(再三) 생각하고 그 인정과 도리를 익히 헤아려서 속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을 느껴야 옳을 것이다. 내가 처음 즉위하였을 때, 효령대군(孝寧大君) 등을 공격하는 자가 많았는데, 내가 아니었다면 능히 보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 — 《세조실록》 1권, 총서
중첩된 혼인 관계 [ 편집 ]
아버지 태종이 외척을 숙청한 반면 세종은 이들과 이중 삼중의 인척 관계를 형성한다.
세종의 왕비인 소헌왕후 심씨의 작은아버지 심종은 세종의 고모부이기도 하다. 심종은 태조 이성계의 딸인 경선공주의 남편이며 세종의 장인 심온의 동생이다.
세종의 동서인 노물재의 어머니는 원경왕후의 여동생이며 민제의 딸이다. 따라서 세종의 이종 사촌 형제가 된다. 노물재는 심온의 셋째 딸에게 장가들어 세종의 이종사촌임과 동시에 동서가 되었으며, 노물재의 아들이 성종 때의 영의정 노사신이다.
세종의 처남인 심준은 세종의 외삼촌인 민무휼의 사위이므로, 처남인 동시에 외사촌 매제가 된다.
세종의 보양식 [ 편집 ]
세종은 정실 왕비인 소헌왕후 이외에도 10명의 후궁을 두었으며, 도합 11명의 처와 첩을 통하여 모두 18명의 아들과 7명의 딸을 얻었다.[43] 세종의 넘치는 스태미너의 원천은 그가 평소에 즐겨 먹었던 보양식에 있었다. 세종은 평소 흰 수탉 고환 요리를 즐겨먹었다.[44][45][46] 이 요리는 중국에서 옛날부터 강정식품으로 먹었으며, 조선시대에도 임산부가 수탉을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고 해서 손 귀한 집에서는 수탉을 찾았다. 세종의 수라상에는 항상 수탉의 고환을 벌꿀과 달걀 흰자를 섞어 살짝 데친 요리가 올라왔다고 한다.[47] 당대에는 닭 자체가 귀했고, 특히 흰 수탉은 더욱 귀했기 때문에 수탉 고환요리는 민가에 전해지지 않은채 비밀스럽게 전수되었다.
가족 관계 [ 편집 ]
세종이 등장하는 작품 [ 편집 ]
세종으로부터 유래된 것 [ 편집 ]
건축물 [ 편집 ]
세종대왕기념관 은 서울 동대문구에 위치한 세종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기념관이다.
은 서울 동대문구에 위치한 세종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기념관이다. 세종문화회관 은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에 위치한 종합문화예술 공간이다.
은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에 위치한 종합문화예술 공간이다. 세종과학기지 는 남극 킹조지섬에 위치한 대한민국의 과학 기지이다.
는 남극 킹조지섬에 위치한 대한민국의 과학 기지이다. 세종관 은 청와대 본관 앞쪽 왼쪽 건물의 이름이다.
은 청와대 본관 앞쪽 왼쪽 건물의 이름이다. 한국천문연구원 세종홀 은 대전 유성구에 위치한 천문우주과학 분야의 정부출연 연구기관으로 세종홀은 천문대 본관의 이름이다.
은 대전 유성구에 위치한 천문우주과학 분야의 정부출연 연구기관으로 세종홀은 천문대 본관의 이름이다. 세종대왕릉역은 경기도 여주시 세종대왕면에 위치한 경강선의 전철역이다.
지역명 · 도로명 [ 편집 ]
단체 · 상 [ 편집 ]
유네스코 세종대왕 문해상 은 유네스코에서 제정한 상으로, 문해율 증진을 위해 힘쓴 사람이나 단체에게 주는 상이다.
은 유네스코에서 제정한 상으로, 문해율 증진을 위해 힘쓴 사람이나 단체에게 주는 상이다. 세종대왕기념사업회 는 문화 단체로 세종대왕의 업적을 추모하며 민족문화창달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설립된 단체이다.
는 문화 단체로 세종대왕의 업적을 추모하며 민족문화창달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설립된 단체이다. 법무법인 세종 은 대한민국의 대형 로펌 회사이다.
은 대한민국의 대형 로펌 회사이다. 세종 솔로이스츠는 문화 단체로, 줄리어드 음대에 재직하고 있는 강효 교수의 책임 아래 운영되고 있는 앙상블 단체이다.
구축함 [ 편집 ]
세종대왕의 초상화가 그려진 만원권 지폐
화폐 도안 [ 편집 ]
기념일 [ 편집 ]
소행성 [ 편집 ]
7365 세종은 1996년 일본의 아마추어 천문가 와타나베 가즈오(渡辺和郎)가 발견한 소행성으로, 세종대왕의 천문학적 업적을 기려 명명하였다.
프로젝트 [ 편집 ]
21세기 세종계획은 문화관광부에서 1998년에 시작하여 2007년 국립국어원이 마무리한 중장기 국어 정보화 사업이다.
같이 보기 [ 편집 ]
참고 문헌 [ 편집 ]
《세종실록》
서정민, 2008. 《세종, 부패 사건에 휘말리다 (조말생 뇌물 사건의 재구성)》. 살림. (ISBN 978-89-522-0812-5).
외부 링크 [ 편집 ]
각주 [ 편집 ]
주해 [ 편집 ]
[내 생각은…] 한글날, 세종대왕 이름부터 제대로 알자
한글날을 맞아 다른 임금은 몰라도 세종대왕만은 그 이름을 국민이 올바로 알아야 할 것이다. 오랫동안 국사 교육을 소홀히 하다 보니, 세종대왕의 ‘세종(世宗)’이 이름인 줄 아는 젊은이들이 적지 않다. ‘세종’은 세종대왕 자신도 생존 시에는 전연 들어보지 못한 칭호다. 다시 말해서 ‘세종’은 돌아가신 뒤에 그 공적과 덕망을 살펴 후임 왕과 조정대신들이 정한 묘호(廟號·종묘에서 그 신주를 부르는 호칭)다.
세종대왕께서는 세상을 널리 평화롭게 덕망으로 다스렸기 때문에 ‘인간 세(世)’와 ‘마루 종(宗)’을 취하여 묘호를 정한 것이다. 묘호에서 조(祖)와 종(宗)의 구별은 조공종덕(祖功宗德), 즉 공이 있는 왕은 ‘조’를, 덕이 있는 왕은 ‘종’을 취함을 원칙으로 하였다.
세종대왕이 왕자로 있을 때는 충녕군(忠寧君)이라 칭하였지만, 그의 본래 이름은 따로 있었다. 세종대왕이 출생했을 때 이름은 ‘祹(도)’다. 이는 흔하지 않은 글자다. 왕자의 이름에 일반적으로 쓰이는 한자를 쓰면 백성들은 그 글자를 피해야 하므로 백성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하여 글자를 만들어 썼기 때문이다.
祹자는 福(복 복) 또는 祥(상서 상)에서 示(보일 시)를 취하고, 陶(질그릇 도)의 본글자로서 바로잡다의 뜻이 있는 匋(도)를 합쳐 ‘복’ 또는 ‘상서롭다’의 뜻으로 祹(복도)를 만들어 세종대왕의 휘자(이름)로 취하였다.
그러나 후대 문헌에서 祹를 ‘裪’자로 잘못 기록한 것도 적지 않다. 裪는 일반 자전에 올라 있는 한자로 ‘옷소매끝 도’이므로 왕자의 이름으로 취할 수 없는 뜻의 글자다. 더구나 세종대왕의 형제들의 이름을 보면 禔(제, 양녕대군), (보, 효녕대군), (종,성녕대군) 등 12형제가 모두 ‘示(시)’ 부수자로 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외자 이름일 때는 일반인들도 부수자를 같이 하는 것으로 항렬자를 삼는 것이다.
옛 문헌에도 잘못 기록된 것이 있음을 모르고 세종대왕의 이름을 裪가 맞다고 주장하는 것은 깊이 따져보지 않은 탓이다. 이런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조선 중기의 대학자인 이덕무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는 ‘李示旁匋, 我世宗諱(이시방도 아세종휘)’와 같이 세종의 휘는 ‘示’ 옆에 ‘匋’를 쓴다고 분명히 밝혀 놓았다.
이번 기회에 한글학회의 자문으로 만들어진 광화문광장의 ‘세종이야기’에 裪로 잘못 써 놓은 것을 祹로 정정하고, 선원보(璿源譜, 왕실 족보의 일종)를 비롯하여 각종사전에서도 裪를 祹로 고쳐야 한다. 전 국민이 세종대왕의 휘자를 올바로 알아 인류 사상 위대한 훈민정음을 창제한 거룩한 뜻에 보답해야 할 것이다.
진태하 인제대 석좌교수
세종대왕 이름 뜻이 옷소매? 후대 눈엔 이상하겠지만…
큰사진보기 ▲ 세종문화회관 지하에 설치되어 있는 의 일부. ⓒ 김슬옹 관련사진보기
큰사진보기 ▲ 세종실록에 나오는 세종 본명 출처(기사 제목 포함)와 실제 이미지 ⓒ 김슬옹 관련사진보기
큰사진보기 ▲ 에 나오는 태종의 열두 아들 이름 ⓒ 김슬옹 관련사진보기
가. 示(5획) = 礻(4획) 祹(복 도)=礻+匋
나. 衣(6획) = 衤(5획) 裪(옷소매 도)
최근 경인신문(11월 7일자)은 “세종대왕도 모르는 훈민정음, 광화문 광장의 세종대왕 동상에 오자가 웬 말”라는 제목으로 세종대왕 동상 앞 ‘세종대왕’의 훈민정음식 표기와 동상 지하에 있는 ‘세종 이야기’ 전시관의 세종대왕의 본명인 ‘도(裪)’자가 잘못된 표기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본명의 한자가 잘못되었다는 주장은 역사 기록을 제대로 살피지 않은 잘못된 지적이다.’세종대왕’ 동상에 새긴 묘호(廟號: 임금이 죽은 뒤에 생전의 공덕을 기리어 붙인 이름) “세종대왕”은 세종정신을 드러내면서도 현대인들과의 소통을 고려한 일종의 절충식 표기이므로 이는 따로 논의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세종대왕의 본명 도(裪)자의 한자 오류 문제에 대해서만 논의하기로 한다.기사는 사단법인 훈민정음기념사업회 박재성 이사장 제보를 바탕으로 작성한 기사인데, 세종대왕의 피휘(避諱, 존귀해서 피해야 할 이름)자를 “裪(옷소매 도)”로 표기한 것은 잘못된 표기이며, 큰 글씨 옆에 작은 글씨로 해설한 “祹(복 도)”자가 옳다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은 고 진태하 명지대 교수가 중앙일보(2010.10.8.)에서 10년 전에 주장한 바이기도 하다. ‘裪’는 ‘옷소매끝 도/옷소매 도’이므로 임금의 아들인 왕자의 이름으로는 취할 수 없는 뜻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잘못됐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옷소매 도(裪)’자가 바른 글자이고, ‘복 도(祹)’자는 틀린 글자이다.의 구체적인 기록을 찬찬히 확인해보면 금방 알 수 있는데, 이와 관련된 5건의 기록 모두 아래 이미지처럼 “옷소매(윗옷의 좌우에 있는 두 팔을 꿰는 부분)”를 뜻하는 ‘도(裪)’자로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종실록을 번역하는 분들이 이 글자를 ‘복 도(祹)’의 이체자 ‘礻+匋’로 판독하고 기록하여 ‘복 도’로 오해하게 된 것이다. 필자 또한 기존 판독문대로 써 왔으나 이제 수정하고자 한다.결정적으로, 세종의 본명 한자가 조선왕실 족보 기록인 에서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현재 참고하는 세종실록(태백산사고본)은 임진란으로 불에 타 후대에 다시 작성된 자료라는 점을 고려하면, 세종대왕의 본명 한자가 “옷소매 도(裪)”자인지 “복 도(祹)”자인지는 조선왕조의 족보인 이 책보다 더 정확한 것은 없다.은 세종대왕 시절에 편찬된 것이므로, 태종의 셋째 아드님인 세종의 이름은 ‘휘자(諱字)’ 즉 “높은 어른(임금 포함)의 이름자”가 되므로 표기되지 않았다. 태종은 원경왕후와의 사이에 4명의 왕자와, 후궁 사이에서 8명의 왕자 모두 열두 명을 두었는데 모두 ‘옷의 변[衣(6획) = 衤(5획)]’ 계열이다.왕실은 특정 한자를 왕족 이름으로 쓰게 되면, 일반 백성들이 그 한자를 쓰는 데 제한을 받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 점을 고려해 1음절 한자를 선택하였다. 한 글자이다 보니 돌림자 설정의 어려움 때문에 한자자전의 특정 부수를 돌림자(또는 항렬자)로 대신하였다. 여기서는 ‘옷의 변’ 글자를 대용으로 삼았다. 결국 세종 이름은 ‘裪(옷소매 도)’이다.세종대왕의 본명이 ‘복 도’가 아니라 ‘옷소매 도’라고 하여 세종대왕과 왕실의 권위가 내려가는 것은 아니다. 이 문제를 함께 검토해 준 정우영 동국대 명예교수는 “상용한자를 쓰지 않고 쓰임이 거의 없는 한자를 선택한 것은 백성들의 일상생활에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배려심, 또는 자기를 낮추는 겸양, 애민정신을 기본원칙으로 하여 작명용 한자를 선택한 결과”라고 강조했다.후대 사람들이 세종대왕의 본 이름을 ‘복 도’로 오해하게 된 것은 첫째, 세종대왕에 대한 존경하는 마음을 투사하여 좋은 뜻으로 해석하려는 선입견이 작용한 탓이다. 입신양명의 소망을 담아 작명하였을 것이라는 오늘날의 작명 관념으로 잘못 해석한 것이다.둘째는 복잡한 한자의 이체자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복 도’는 두 가지 계열이 있는데, 하나는 ‘示(보일시변 시) + 匋(질그릇 도)’ 계열이고, 또 하나는 ‘礻(보일시변 시) + 匋(질그릇 도)’ 계열이다. 곧 ‘示=礻’는 이체자이다.곧 ‘祹(복 도)’의 이체자인 ‘礻+匋’의 왼쪽 부수(礻)와 ‘裪(옷소매 도)’의 왼쪽 부수(衤)는 짧은 한 획의 차이로 인해 전문가들조차 혼동해서 쓸 정도이다. 그러다 보니 실제 ‘裪’를 ‘礻+匋’로 잘못 써서 이를 ‘복 도’로 잘못 해석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는 이 세상에 이름을 드날리려 했으리라는 보통 사람들이 갖는 ‘작명의 심리학’이 크게 작용하였을 것이라 생각한다.일부에서는 세종실록의 ‘裪(옷소매 도)’가 ‘복 도’의 ‘礻+匋’의 이체자라거나 잘못 표기한 것이라고 보는 분도 있다. 활자 제작의 어려움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와 이기범 경기대 서예학과 교수는 임금 이름을 오기하거나 속된 이체자로 나타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한다. 세종실록을 연구하는 원정재 모임의 권오향 교수도 후대의 관념을 과거 글자에 투사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세종실록이 ‘裪(옷소매 도)’로 기록했으면 글자 자형이든 뜻이든 있는 그대로 따라야 한다고 한결같이 말하고 있다.따라서 세종문화회관 지하에 설치되어 있는 는 ‘복 도(祹)’로 설명한 부분을 고쳐야 하며, 조선왕조실록 판독문과 번역문에서 세종의 이름을 ‘도(祹)’자로 표기한 부분은 모두 “(옷소매) 도(裪)”자로 고쳐야 한다.
“옷소매냐 복이냐” 세종대왕 이름 진실은?
서울 광화문광장 세종대왕 동상(위)과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에 나오는 세종대왕 이름. ‘옷소매 도(裪)’ 자를 쓴 ‘이도(李裪)’로 보인다. [동아DB]
피휘 위해 쓸 일 없는 한자로
진짜 발음은?
전근대 동아시아 사회에선 국왕이나 조상·성인의 이름, 국호·연호에 들어간 한자는 일반인 이름에 쓰지 못했는데, 이러한 풍습을 ‘피휘(避諱)’라고 한다. 좋은 뜻을 가진 한자 수(數)는 한정된 데다, 국왕 이름에 들어갔다는 이유로 그 한자를 쓰지 못하게 하면 아이 이름을 짓기가 어려워진다. 따라서 왕이 될 가능성이 높은 왕족 이름에는 여간해서는 쓸 일 없는 한자를 넣었다. 전통 사회에선 아명(兒名)과 성인 이후 쓸 이름(名)을 따로 지었다. 피휘는 왕이 될 세자나 왕이 된 이의 이름이 그 대상이었다.조선 세종대왕의 이름이 ‘도’라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세간에서는 한자 표기를 두고 두 가지 설이 있다. ‘옷소매 도(裪)’ 자를 쓴 ‘이도(李裪)’와, ‘복 복(福)’ 자와 뜻이 같은 ‘복 도(祹)’ 자를 쓴 ‘이도(李祹)’가 그것이다. 백과사전 등 여러 매체는 ‘복 도’ 자를 쓴 ‘이도’로 해놓았으나, 서울 광화문광장 세종대왕 동상에는 ‘옷소매 도’의 ‘이도’로 표기해놓았다. 학계 의견도 분분하다. 박재성 훈민정음기념사업회 이사장과 작고한 진태하 명지대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 등은 세종 이름을 놓고 논쟁한 학자로 유명하다.과연 진실은 무엇일까. 조선 임금 집안에도 족보가 있다. 숙종 7년(1681) 간행된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이다. 이 족보는 왕실 종친 이간(李侃)이 저술해 1679년 숙종에게 바친 ‘선원보략(璿源譜略)’을 근거로 만들어졌다. 조선왕조는 임금마다 실록을 편찬했는데, 여기에도 왕 이름이 기록돼 있다. 옷 의(衣) 변은 ‘衤’로 쓰고, 보일 시(示) 변은 ‘礻’로 쓰는데 두 변은 한 획 차이로 매우 비슷하다. 당시 자료들을 살펴보면 세종 이름은 옷 의 변(衤)인 ‘옷소매 도(裪)’ 자인 것으로 보인다.세종 이름의 한자 표기를 둘러싼 논란은 ‘보일 시 변(礻)’과 ‘옷 의 변(衤)’이 비슷할뿐더러, 옷소매 도 자가 거의 쓰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기인한 듯하다. ‘복 도’ 자는 ‘복 복’ 자에 가려 쓰이는 경우가 많지 않으나, 한컴오피스 등 한글 프로그램에 수록돼 있다. 반면 ‘옷소매 도’ 자는 그렇지 못하다. 대표자끼리 만남을 ‘영수(領袖)회담’이라고 하는데, 이 ‘수(袖)’ 자가 바로 ‘옷소매 수’다. 옷소매를 가리키는 한자가 몇 개 더 있기에, ‘옷소매 도’ 자는 쓰이는 경우가 거의 없다. 서양식 출판이 도입된 근대화 초기 ‘옷소매 도’ 활자가 없으니, 그 대신 ‘복 도’ 자를 쓴 것이 이런 혼란을 만들었을 것으로 짐작된다.조선 임금이 자기 이름을 공문서 등에 명기한 경우가 있을까. 1910년 대한제국은 일제에 합병됐는데, 당시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이 일제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와 이른바 ‘한일병합조약’을 조인하는 형태로 이뤄졌다. 조약을 조인하기 전 대한제국 황제 순종이 이완용에게 전권을 위임하는 문서가 만들어졌는데, 여기에 순종 이름이 쓰여 있다. 순종 이름은 ‘터 기(基)’ 자와 뜻이 같은 ‘기지 척(坧)’인데, 이 문서에 ‘坧’ 자가 적혀 있다. 해당 위임장은 조작됐다는 설이 우세하다.조선 임금은 워낙 드문 한자를 이름으로 썼기에 잘못 읽는 경우도 있다. 정조 이름은 ‘계산할 산(算)’의 옛 글자 ‘산(祘)’을 쓴 ‘이산(李祘)’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정조 재위 중인 1796년 나온 ‘규장전운(奎章全韻)’은 이 한자를 ‘성’으로 발음하도록 규정했다. 정조의 어명으로 출간한 책에서 흔히 쓰이지 않는 ‘祘’ 자 발음을 ‘성’으로 해놓은 이유는 정조가 자기 이름을 ‘성’으로 부르게 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말년의 정조는 ‘이산’이 아니라 ‘이성’으로 불리길 원했다는 연구도 제법 있다.실제 어떻게 발음했는지 애매한 임금 이름은 또 있다. 정조 아들 순조의 이름은 ‘옥 이름 공(玜)’ 자다. 그런데 순조 이름을 정한 내력을 밝힌 ‘정조실록(正祖實錄)’ 24년 1월 25일조 기사에는 ‘玜’의 뜻은 ‘아름다운 구슬’이고 ‘발음은 홍’이라고 돼 있다. 그렇다면 순조 이름은 ‘이공’이 아니라 ‘이홍’으로 발음해야 하지 않을까. 더 헷갈리는 것은 고종 이름이다. 대일항쟁기 이후 고종 이름에 쓰인 한자(㷩)가 ‘빛날 희(熙)’와 같다 보고, 고종 이름을 ‘이희’라고 불러왔다. 그런데 청나라 때 나온 ‘강희자전(康熙字典)’에 따르면 해당 한자는 ‘빛날 형’으로 돼 있다. 고종 이름은 이희가 아닌 ‘이형’이 옳은 독법일 개연성도 적잖다.올바른 역사 인식은 정명(正名)에서부터 시작돼야 한다. 역대 조선 임금의 이름을 옳게 부르는 방법을 면밀히 살펴야 할 이유다.
이 시기는 과학과 기술적인 측면에 있어서도 크게 발전을 보았다. 천문대와 천문관측기계 방면에서의 발전이 이러한 측면의 하나로 꼽힌다. 조선 초기 서운관에는 천문을 관측하기 위해 두 곳에 간의대(簡儀臺)를 설치한 바 있으나, 이것은 아주 미흡한 것이었다.
세종 14년부터 시작된 대규모의 천문의상(天文儀象)의 제작사업과 함께 경복궁의 경회루 북쪽에 높이 약 6.3m, 세로 약 9.1m, 가로 약 6.6m의 석축간의대가 세종 16년에 준공되었다. 그리고 이 간의대에는 혼천의(渾天儀)·혼상(渾象)·규표(圭表)와 방위(方位) 지정표(指定表)인 정방안(正方案) 등이 설치되었다.
세종 20년 3월부터 이 간의대에서 서운관의 관원들이 매일 밤 천문을 관측하였다. 이러한 간의대와 그 중요한 시설물들은 중국과 이슬람의 영향과 전통적인 요소들이 함께 들어 있었다. 혼천의는 천체관측기계로서 문헌상으로는 세종 15년 6월에 만들어진 것이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이다.
그리고 같은 해 8월에 또 하나가 만들어졌는데, 정초(鄭招)·정인지(鄭麟趾) 등에게 고전(古典)을 조사하게 하는 한편, 장영실(蔣英實) 등 기술자들에게 실제 제작을 담당하게 하였다.
이 혼천의는 천구의(天球儀)와 함께 물레바퀴를 동력으로 해 움직이는 시계장치와 연결되어 천체의 운행과 맞게 돌아가도록 되어서 일종의 천문시계의 성격도 가졌다. 또한, 시간을 측정하는 해시계와 물시계도 제작되었다. 해시계로는 앙부일구(仰釜日晷)·현주일구(懸珠日晷)·천평일구(天平日晷)·정남일구(定南日晷) 등이 있다.
그리고 물시계로는 자격루(自擊漏)와 옥루(玉漏)가 있다. 앙부일구는 우매한 백성들을 위해 혜정교(惠政橋)와 종묘 남쪽의 거리에 설치한 우리 나라 최초의 공중시계(公衆時計)였다. 또한, 현주일구와 천평일구는 휴대용 시계였으며, 정남일구는 매우 정밀한 해시계로 이것으로 관측하면 자연히 남쪽이 정해지면서 시각을 알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해시계는 갠 날과 낮에만 쓸 수 있는 것이므로, 공적인 표준시계로는 물시계가 더 유용했는데 자격루가 그것이다. 자동시보장치가 붙은 물시계인 자격루는 세종이 크게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장영실을 특별히 등용해 이의 제작에 전념하게 해 세종 16년에 완성하였다.
그것은 경복궁 남쪽의 보루각(報漏閣)에 설치되어 조선시대의 표준시계로 이용하였다. 세종 20년에는 장영실에 의해 또 다른 자동물시계이며 천상시계인 옥루가 완성되었다. 세종은 천문·역서(曆書)의 정리와 편찬에도 큰 관심을 가져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 등이 편찬되었다.
세종 15년에는 정인지·정초·정흠지(鄭欽之)·김담(金淡)·이순지(李純之) 등에게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을 편찬하게 했으며, 세종 24년에 완성되어 2년 만에 간행되었다. 『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도 이순지·김담에 의해 편찬되었는데, 이것은 당시 가장 완전한 이슬람 천문학서의 번역본이라 하겠다.
이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의 편찬으로 조선의 역법(曆法)은 완전히 정비되었다. 또한, 세종 27년에는 이순지에 의해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이 편찬되었다. 이 책은 세종대에 이룩한 천문·역법의 총정리 작업과 천문의상 제작의 이론적 근거를 찾기 위한 고문헌(古文獻) 조사사업의 결산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높은 수준의 중국 천문학사라고 평가할 수 있다.
측우기의 발명도 이 시기 과학기술의 발달에서 주목할 만한 업적이다. 농업국가인 조선시대에서 강우량의 과학적 측정은 매우 큰 뜻을 가진다고 하겠다. 측우기는 세종 23년 8월에 발명되어 새로운 강우량의 측정제도가 마련되었고, 그 미흡한 점은 이듬해 5월에 개량·완성되었다.
이 측우기를 발명해 강우량을 측정함으로써 농업기상학의 괄목할 만한 진전을 이룩한 것이다. 또, 조선시대의 도량형 제도도 세종대에 확정되었다. 즉, 세종 13년과 28년에 확정된 도량형제도가 그 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그대로 법제화되었다.
이 제도는 12율(律)의 기본음인 황종률(黃鐘律)을 낼 수 있는 황종관(黃鐘管)을 표준기(標準器)로 삼은 것으로서, 황종관의 길이는 자[尺]로 길이의 단위를 삼았고, 그 속에 담기는 물은 무게의 단위로 삼은 것이었다.
인쇄술에서도 세종대는 특기할 만한 발전을 이룩하였다. 1403년에 주조된 청동활자인 계미자(癸未字)의 결점을 보완하기 위해 세종 2년에 새로운 청동활자인 경자자(庚子字)를 만들었고, 세종 16년에는 더욱 정교한 갑인자(甲寅字)를 주조하였다.
세종은 계미자 인쇄기의 결점을 보완하기 위해 세종 2년에 새로운 청동활자인 경자자와 인쇄기를 만들게 해 활자의 주조와 인쇄기술상의 큰 발전을 가져 왔다. 세종 16년에는 경자자보다 더 아름다운 자체인 갑인자의 주조사업이 이천(李蕆)의 감독 아래 이루어져 20여 만 자의 크고 작은 활자가 주조되었다.
그 뒤 세종 18년에는 납활자인 병진자(丙辰字)가 주조됨에 따라 조선시대의 금속활자와 인쇄술은 일단 완성을 보게 되었다. 한편, 화약과 화기(火器)의 제조에 있어서도 기술적으로 크게 발전하였다. 세종대는 종래 중국기술의 모방에서 탈피하려는 독자적 경향이 나타나서 화포(火砲)의 개량과 발명이 계속되었다.
완구(碗口)가 개량되고, 소화포(小火砲)·철제탄환·화포전(火砲箭)·화초(火초) 등이 발명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세종에게서 아직 만족할 만한 수준에 도달한 것은 못되었다. 세종 26년에 화포주조소(火砲鑄造所)를 짓게 해 뛰어난 성능을 가진 새로운 규격의 화포를 만들어냈고, 이에 따라 이듬해는 화포의 전면 개주(改鑄)에 착수하였다.
세종 30년에 편찬·간행된 『총통등록(銃筒謄錄)』은 그 화포들의 주조법과 화약사용법, 그리고 규격을 그림으로 표시한 책이었다. 이 책의 간행은 조선시대의 화포제조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주목할 만한 업적으로 평가된다. 세종대에는 농사법의 개량을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중국의 농서인 『농상집요(農桑輯要)』·『사시찬요(四時纂要)』 등과 우리 나라 농서인 『본국경험방(本國經驗方)』 등의 농업서적을 통해 농업기술의 계몽과 권장을 했으며, 정초가 지은 『농사직설(農事直說)』을 편찬·반포하였다. 이 책의 반포는 조선시대 농업과 농업기술사에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의약발명에도 세종대는 특기할 만한 시대로서 『향약채집월령(鄕藥採集月令)』·『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의방유취(醫方類聚)』 등의 의약서적이 편찬되었다.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과 『의방유취(醫方類聚)』의 편찬은 15세기까지의 우리 나라와 중국 의약학의 발전을 결산한 것으로 조선과학사에서 빛나는 업적의 하나이다.
이 시대는 또 음악에 있어 우리 역사상 가장 빛나는 업적을 남긴 시기였고, 그것은 세종의 지휘와 참여로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유교정치에 있어서 중요시되는 것이 유교적 의례인데, 국가의 의례인 오례에는 그에 합당한 음악이 따르게 마련이다. 따라서, 유교적인 의례의 정리와 함께 음악의 정리는 불가피한 것이었다.
세종의 음악적 업적은 크게 아악(雅樂)의 부흥, 악기(樂器)의 제작, 향악(鄕樂)의 창작, 정간보(井間譜)의 창안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업적은 음악에 대한 깊은 관심과 조예를 가진 세종이 박연(朴堧)과 같은 음악의 전문가를 만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었다.
왕은 종래 미비하고 불완전한 아악을 바로잡기 위해 박연 등을 시켜 중국의 각종 고전을 참고해 아악기를 만들게 하고, 아악보를 새로 만들게 해, 조회아악(朝會雅樂)·회례아악(會禮雅樂) 및 제례아악(祭禮雅樂) 등을 제정하였다.
그 뒤 아악은 국가·궁중의례에 연주되었고, 본고장인 중국보다도 완벽한 상태로 부흥시킬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아악의 부흥은 그 악기의 국내 생산과 직결된 문제로서 종래 중국에서 수입했던 악기들을 국내에서 생산하였다. 특히, 가장 중요한 악기인 편경(編磬)과 편종(編鐘)도 대량으로 생산되었다. 세종은 또한 박연으로 하여금 율관(律管)을 제정하게 해 모든 악기의 음(音)을 조율(調律)하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세종은 친히 「정대업(定大業)」·「보태평(保太平)」·「발상(發祥)」·「봉래의(鳳來儀)」 등 대곡(大曲)을 작곡하였다. 현재 국립국악원에서 연주되는 여민락(與民樂)도 「봉래의(鳳來儀)」 일곱 곡 중 한 곡이며, 「정대업(定大業)」과 「보태평(保太平)」은 1964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왕은 또한 기보법(記譜法)을 창안했으니, 곧 정간보(井間譜)가 그것이다. 정간보에 음의 시가(時價)와 박자를 표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세종은 이 정간보를 사용해 향악인 「정대업(定大業)」·「보태평(保太平)」·「봉래의(鳳來儀)」·「봉황음(鳳凰吟)」·「만전춘(滿殿春)」 등을 기보하였다. 정간보는 세조대에 약간 개량된 것을 현재에도 국악에 사용하고 있다.
세종대왕 이름 및 업적 총정리!
생활정보 세종대왕 이름 및 업적 총정리! 슈퍼우먼 dorimom ・ URL 복사 본문 기타 기능 공유하기 신고하기 세종대왕의 업적은 어떤게 있을까? 세종대왕 이름은 “이도”라고 합니다
이도 : 오얏나무 이(李) / 복 도(祹)
세종대왕은 태종 이방원의 셋째 아들이였으며,
첫째 양녕대군, 둘째 효령대군, 셋째 충년대군(세종대왕)입니다
출생순서를 보면 셋째가 아닌 여섯째 아들이였는데요,
태종 이방원의 첫째 아들 양녕대군 위로 세명의 아들이 더 있었지만,
태종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기도 전에 어린 나이로 사망하여
대군으로 책봉을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때문에 이름, 생몰년도가 밝혀지지 않은 채
존재했다라는 기록만 남아있다고 해요
하여 세종대왕은 셋째 충년대군으로 책봉되었습니다
세종대왕 이도의 업적은 굉장히 많죠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훈민정음 창제”가 있어요
훈민정음을 만들기 전 세종대왕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서 한문 글자와는 서로 뜻이 통하지 아니하니,
백성들이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제뜻을 글로 쓰지 못하는 사람이 많구나
내가 이것을 가엾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노니,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쉬이 익혀서 날마다 쓰기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백성들을 굽어살피는 깨우친 임금 세종이라는 말이 맞네요!
세종대왕 이도의 업적
훈민정음 창제
해시계, 물시계, 측우기 발명
음악을 기록하는 악보를 창안, 기본율관 제정 등
혼천의
인쇄 기술 발전
천문학의 발전
석축간의대
뿐만 아니라 세종대왕 이도의 업적은 굉장히 많아요
농사하는 농민들을 위해 농사직설 책을 펴내며,
농사를 짓는 방법을 책으로 만들었습니다
또한 최윤덕에게 4군, 김종서에게 6진을 설치해서
지금의 한반도 모양을 갖추게 하도록 영토를 확장하였죠
당연 업적 중 훈민정음 창제가 훌륭한 것 같아요
글을 알아보지 못해 병에 대비를 하지 목하는 백성과,
사기를 당하는 백성을 위해 훈민정음을 창제하였으며,
훈민정음은 세계에 있는 문자중 창제한 사람과
창제된 연도를 아는 유일한 문자라고 해요
해서 더 특별한 업적이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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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世宗] 왕조의 문화적 기틀을 세우다
세종(世宗, 1397년~1450)은 조선의 제4대 국왕으로, 재위 기간은 1418~1450년이다. 이름은 도(祹)이고 자(字)는 원정(元正)이며, ‘세종(世宗)’은 묘호(廟號)이다. 세종은 태종[조선](太宗)과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閔氏)의 셋째 아들로, 1397년(태조 6) 4월 10일 한양 준수방(俊秀坊)의 태종 사저(私邸)에서 출생하였다. 1408년(태종 8) 2월 11일 충녕군(忠寧君)에 봉해졌고, 1412년(태종 12) 5월 3일에 다시 충녕대군(忠寧大君)으로 진봉(進封)되었다. 1418년(태종 18) 6월 3일 세자에 책봉되었으며, 같은 해 8월 10일 태종의 양위를 받아 경복궁 근정전(勤政殿)에서 즉위하였다. 충녕군 시절이던 1408년(태종 8) 2월 16일에 청송 심씨(靑松沈氏) 심온(沈溫)의 딸과 혼인했는데, 바로 소헌왕후(昭憲王后)이다. 처음에 태종은 1402년(태종 2) 4월 맏아들 제(禔)를 원자(元子)로 책봉했다가 2년 후인 1404년(태종 4) 세자로 책봉했는데, 그가 바로 양녕대군(讓寧大君)이다. 태종은 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가 막내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한 것이 적장자(嫡長子) 상속의 원칙에 위배된다는 점을 명분으로 내세워 왕자의 난(王子-亂)을 일으키고 정권을 장악했다. 따라서 태종은 자신의 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적장자를 자신의 후계자로 세워야 했고, 그래서 자신의 정비(正妃) 원경왕후에게서 낳은 맏아들 양녕을 세자로 책봉한 것이다. 하지만 세자 양녕은 학업에 소홀했으며 자기 자신을 절제하는 능력이 부족하여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키는 등 국왕으로서의 자질을 갖추지 못했다. 이에 태종은 부득이 맏아들 세자를 폐위하고 대신 일찍부터 학문에 독실했고 정치적인 능력도 갖추었던 셋째 아들 충녕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그리고 세자 책봉 2개월 만에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上王)으로 물러나 세종의 국정 운영을 배후에서 지원하였다. 단, 태종은 군사권만은 세종이 30세가 될 때까지 자신이 직접 관장할 것을 천명하였다. 세종은 1422년(세종 4)에 상왕 태종이 서거하면서 명실상부한 친정(親政)을 시작하였다. 세종은 재위 전반기에는 부왕 태종대의 제도를 계승하여 6조로부터 직접 업무를 보고받고 지시를 내리는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를 실시하다가. 1436년(세종 18)부터는 의정부에서 먼저 심의한 후에 국왕의 재가를 받는 의정부 서사제(議政府署事制)로 국정 운영 방식을 바꾸었다. 한편, 세종은 1421년(세종 3) 10월 맏아들 향(珦)을 세자로 책봉했으며, 1445년(세종 27)부터는 세자에게 서무(庶務)를 대리(代理)하도록 하고 자신은 각종 문화 사업에 전념하였다. 세종은 재위 32년 동안 중앙집권체제(中央集權體制)의 확립, 국가 재정의 충실, 영토의 확장, 민생의 안정, 문화의 발달 등을 이룩함으로써, 우리 역사에서 가장 훌륭한 국왕의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아래에서는 세종이 이룩한 여러 업적들을 개관해 보도록 하겠다.
집현전(集賢殿)은 세종대 정치·사회적 안정과 문화적 발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기관이었다. 집현전은 원래 중국에서 연원한 것으로, ‘집현전’이 처음 등장한 것은 당(唐)나라 때이며, 송(宋)나라에서도 당의 제도를 따라 집현전을 설치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시대에 집현전이 처음 설치되었으며, 조선 초기 정종대에도 설치된 바가 있었다. 하지만 당시의 집현전은 유명무실한 기구에 그쳤으며, 명실상부한 학술 기관으로서의 집현전이 등장한 것은 세종대에 이르러서였다. 세종은 조선의 문물·제도 정비를 완성하고 성리학(性理學)에 기반한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원만히 수행하기 위해서는 인재 양성과 학문 진흥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이를 위한 학술 기관으로 집현전을 설립하였다. 세종대에 집현전이 설치된 것은 1420년(세종 2) 3월이다. 설치 초기 집현전은 주로 경연(經筵)과 서연(書筵)에서 국왕·세자와 함께 유가(儒家) 경전(經傳)과 역사서를 읽고 토론하는 업무를 담당하다가, 1428년(세종 10)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학술 연구 사업을 수행하였다. 집현전에서의 학술 연구는 고제(古制) 연구와 서적 편찬 사업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고제 연구는 조선의 상황에 맞는 유교적 의례(儀禮)·제도를 확립하기 위해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대 제도를 연구하는 것으로, 예조와 의례상정소(儀禮詳定所), 집현전 등을 중심으로 연구가 추진되었다. 서적 편찬은 고제 연구 및 여타 학술 활동의 결과물들을 정리하여 책으로 편찬하는 사업이다. 집현전에서 편찬된 서적은 약 40종에 달하며, 연구 분야도 유학(儒學)이나 의례에만 국한되지 않고 정치·역사·문학·어학·군사·지리·의학·농업·천문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다. 세종은 젊고 유능한 학자들을 집현전 학사로 발탁했으며, 이들이 장기간 집현전에서 학문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여러 가지 특전을 주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사가독서(賜暇讀書)로, 집현전 관원들에게 일정 기간 휴가를 주어 정무(政務)에서 벗어나 재충전을 하면서 학문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이다. 사가독서는 1426년(세종 8) 12월에 처음 실시됐으며, 문헌 기록으로는 1426년(세종 8)을 포함하여 모두 세 차례의 사가독서 실시가 확인된다. 집현전은 1456년(세조 2) 사육신(死六臣) 사건을 계기로 설치된 지 37년 만에 혁파되었다. 이처럼 집현전은 존속 기간이 비교적 짧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기간 중에 관학(官學)의 중심 기관으로 역할하면서, 세종대의 학술·문화의 발전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또, 이 기간 중에 약 100명의 학사들이 집현전을 거쳐 갔는데, 이들은 집현전 혁파 이후 세조~성종대에도 계속 관료로 활동하면서 15세기 문물·제도 정비의 완성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훈민정음(訓民正音)의 창제는 세종이 남긴 문화유산 가운데 가장 빛나는 업적이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처음 창제한 것은 1443년(세종 25) 12월이었다. 이후 세종은 최항(崔恒)·박팽년(朴彭年)·신숙주(申叔舟)·이현로(李賢老)·이개(李塏)·강희안(姜希顔) 등에게 명하여 훈민정음으로 『운회(韻會)』를 번역하게 하였고 국정 운영에 관한 문서들을 훈민정음으로 작성하는 등의 여러 가지 시험 과정을 거쳤다. 이 과정에서 최만리(崔萬理)·김문(金汶) 등이 새 문자의 창제에 강하게 반대했지만, 세종은 이러한 반대를 물리치고 더욱 적극적으로 훈민정음의 반포를 주도해 나갔다. 그리고 1446년(세종 28) 9월 29일, 마침내 훈민정음의 완성을 공식 반포하였다. 훈민정음은 새로운 문자를 만든 목적과 각 문자의 의미 등을 상세히 설명한 해례(解例)를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다. 훈민정음 반포 이후 세종은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훈민정음으로 번역하거나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 훈민정음으로 해설을 달아 반포하는 등 훈민정음 보급을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였다. 또, 『동국정운(東國正韻)』·『홍무정운역해(洪武正韻譯解)』 등을 편찬하여 훈민정음으로 한자의 정확한 발음을 정리하는 작업도 추진하였다.
성리학의 사상적 기반 위에서 건립된 조선은 유교적 예악정치(禮樂政治)의 실현을 추구하였다. 여기에서 ‘예(禮)’는 사회적 질서를 의미하고 ‘악(樂)’은 조화를 의미한다. 즉,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사회적 지위에 맞는 분수와 질서를 지키면서 살지만 그 가운데 상하 간의 조화를 이루어 가는 것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예와 악의 정신이 구체적으로 발현되는 의례와 음악의 정비가 필요하다. 따라서 유교 정치의 실현을 추구했던 세종대에 국가 의례와 음악의 정비가 추진된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 의례의 정비는 새 나라 조선의 위상에 걸맞는 의례의 제도를 확정하는 것으로 태종대 의례상정소가 설치된 이후 본격화되었고 세종대 집현전이 설치되면서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조선시대의 국가 의례는 길례(吉禮 : 국가 제사), 가례(嘉禮 : 국가의 경사), 흉례(凶禮 : 왕실의 장례), 빈례(賓禮 : 사신 영접), 군례(軍禮 : 군사 관련 의례) 등 다섯 가지[오례(五禮)]로 나누어지는데, 태종~세종대에 추진된 오례 정비의 결과가 정리된 것이 바로 『세종실록(世宗實錄)』에 부록으로 수록되어 있는 「세종실록오례(世宗實錄五禮)」이다. 세종대에 정비된 오례의 내용은 이후 세조~성종대의 보완·정비 과정을 거쳐 1474년(성종 5)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간행·반포로 최종 귀결되었다. 세종대에는 예악 정치에서 또 하나의 축인 음악에 대한 정비도 이루어졌다. 세종의 음악적 업적은 크게 아악(雅樂) 정비, 악기(樂器) 제작, 향악(鄕樂) 창작, 정간보(井間譜) 창안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세종은 종래의 불완전한 아악을 정비하기 위해 박연(朴堧) 등으로 하여금 율관(律管)을 제정하고, 편경(編磬)·편종(編鐘) 등의 아악기를 새로 만들며, 조회(朝會)·회례(會禮) 및 국가 제례에서 사용할 아악을 제정하게 하였다. 또, 세종은 직접 「정대업(定大業)」·「보태평(保太平)」·「봉래의(鳳來儀)」 등의 음악을 작곡하여 국가 의례에서 연주하도록 했다. 한편, 세종은 음의 시가(時價)와 박자를 표시할 수 있는 기보법(記譜法)을 창안했는데, 그것이 바로 정간보(井間譜)이다. 한편, 조선은 성문법(成文法)에 근거하여 국가를 운영하는 법치(法治) 국가를 지향했다. 이에 따라 조선에서는 건국 초부터 법전(法典) 편찬이 추진되어, 1397년(태조 6)에 『경제육전(經濟六典)』이 편찬되었고, 1408년(태종 8)에는 『경제육전』 이후의 법령들을 모은 『속육전(續六典)』이 편찬되었다. 이와 같은 법전 편찬의 흐름은 세종대에도 계속되었는데, 먼저 1422년(세종 4)~1428년에 『속육전』 이후 시행된 조례(條例)들을 정리한 『신속육전등록(新續六典謄錄)』이 편찬되었다. 이어 1433년(세종 15)에는 『경제육전』 이후 편찬된 『속육전』 계열 법전들의 내용과 그 이후 시행된 조례들을 종합·정리한 『신찬경제속육전(新撰經濟續六典)』과 『육전등록(六典謄錄)』이 편찬되었다.
세종대에는 천문, 의학, 농업 등 과학 기술 분야에서도 큰 발전을 이루었던 시기였다. 먼저 천문 분야를 살펴보면, 세종은 1432년(세종 14)부터 장영실(蔣英實)·이천(李蕆) 등에게 혼천의(渾天儀)를 비롯한 각종 천문 관측 기계들을 제작하게 하여 1438년(세종 20)에 모두 완성하였다. 그리고 1434년(세종 16)에는 경복궁 안에 석축 간의대(簡儀臺)를 축조하고 이곳에 관측 기계들을 비치하여 매일 밤 천문을 관측하게 하였다. 1434년(세종 16)에는 물시계 자격루(自擊漏)가 만들어졌고, 이것을 보루각(報漏閣)에 설치하여 표준시계로 사용하였다. 또, 1441년(세종 23)에는 측우기(測雨器)가 발명되어 새로운 강우량 측정 제도가 마련되었다. 한편, 세종은 역서(曆書)의 정리와 편찬에도 관심을 가졌는데, 그 결과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1442년)과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1445) 등이 편찬되었다. 의학 분야에서 세종은 1431년(세종 13) 집현전 학사 유효통(兪孝通) 등에게 명하여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약재를 이용한 처방을 연구하게 하여, 2년 만에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을 편찬하였다. 또, 1445년(세종 27)에는 역시 집현전에 명하여 임상적 처방을 병증에 따라서 분류·집성한 『의방유취(醫方類聚)』를 편찬하였다. 농업 분야에서 세종은 삼남 지역에 관리를 파견하여 농사 경험이 풍부한 나이 많은 농부들로부터 농사짓는 방법들을 채집하게 하였다. 그리고 정초(鄭招) 등에게 명하여 삼남에서의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농사 방법들을 종합·정리하게 했는데, 그 결과물이 1429년(세종 11)에 편찬된 『농사직설(農事直說)』이다. 이밖에도 인쇄술 분야에서는 금속활자의 주조가 활발히 추진되어 경자자(庚子字, 1420년), 갑인자(甲寅字, 1434년), 병진자(丙辰字, 1436년) 등이 만들어졌다. 또, 군사 분야에서는 화약 무기 제조 기술이 크게 발전하여 각종 화포(火砲)의 개량과 발명이 계속되었고, 1448년(세종 30)에는 화포 제작 및 화약 사용법을 정리한 『총통등록(銃筒謄錄)』이 편찬되었다.
세종은 민생 안정을 위한 여러 가지 정책들을 추진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공법(貢法)의 시행이다. 공법 이전에는 관리가 매년 풍·흉작을 조사하여 세율을 정하는 답험손실법(踏驗損實法)을 적용했으나, 풍흉을 조사하는 답험관의 부정으로 폐해가 컸기 때문에 이를 개정한 것이다. 세종은 1436년(세종 18) 공법상정소(貢法詳定所)를 설치하였다. 공법은 토지를 비옥도에 따라 6등급, 풍흉 정도에 따라 9등급으로 나누고 기본 세율을 1/20로 하는 것을 기본 골자로 하였다. 이 과정에서 세종은 문무백관으로부터 촌민에 이르기까지 약 17만 명에게 여론조사를 실시하는 등 민생에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는 제도를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한편, 국토의 개척과 확장도 세종의 업적에서 빼놓을 수 없는데,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4군 6진 개척이다. 즉, 세종은 빈번한 침입과 약탈로 많은 문제를 야기하고 있던 여진족에 대한 정벌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그 결과 압록강 유역에는 여연군·자성군·무창군·우예군 등의 4군을 설치했고, 두만강 방면에는 김종서(金宗瑞)를 보내서 경성·회령·종성·경흥·온성·부령 등의 6진을 개척하였다. 그 결과 세종대에는 압록강과 두만강이 중국과의 국경으로 확정되고 그 이남 지역이 우리나라의 영토로 편입되는 대업이 이루어졌다.
이상과 같이 찬란한 업적을 남긴 세종이었지만, 세종 개인의 삶에는 많음 슬픔과 고통이 있었다. 먼저 즉위 초반 장인 심온이 처형되고 처가가 풍비박산되는 비극을 겪었다. 당시 영의정이던 심온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한 태종이 상왕의 군사권 행사에 이견을 보였던 강상인(姜尙仁) 등을 처벌하는 과정에서 그 배후로 심온을 지목하여 처형한 것이다. 태종은 세종의 왕권을 위협할 만한 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조처였지만, 세종에게는 처가를 잃는 아픔이었다. 세종은 사랑하는 자식과 아내를 먼저 잃는 아픔도 겪었다. 먼저 1424년(세종 6)에 맏딸 정소공주(貞昭公主)를 잃었으며, 1444년(세종 26) 12월에는 다섯째 아들 광평대군(廣平大君)이, 한 달 후인 1445년 1월에는 일곱 째 아들 평원대군(平原大君)이 연달아 서거하였다. 그리고 이듬해(1446년) 4월에는 왕비 소헌왕후마저 세상을 떠났다. 한편, 세종은 수많은 질병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세종실록』에는 세종의 질병에 관한 기사가 약 50여 건에 이르는데, 20대 후반부터 서거할 때까지 각종 질환에 시달렸던 것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세종의 질병은 그가 정치 체제를 의정부 서사제로 전환하고 세자에게 정무를 대리하도록 했던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세종은 이상과 같은 불우한 가정사와 질병의 고통 속에서도 자신에게 맡겨진 역사적 책무를 다하였다. 그 결과 앞서 검토한 바와 같은 찬란한 업적을 남김으로써 건국된 지 50여년 밖에 안 되었던 조선을 굳건한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1450년(세종 32) 2월 4일 세종은 영응대군(永膺大君)의 사저(私邸)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2월 17일에 영응대군 집의 동별궁(東別宮)에서 향년 54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다. 같은 해 6월 경기도 광주(廣州) 헌릉(獻陵) 서강(西岡)에 장사지냈다가, 1469년(예종 1) 3월에 여주(驪州) 서북성산(西北城山) 자좌(子坐) 자리(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로 이장했으며, 능호(陵號)는 ‘영릉(英陵)’이다. 시호(諡號)는 ‘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세종대왕 소개 < 광화문광장 < 서울특별시
세종이야기
세종대왕은 서기 1397년 5월 15일 한성부준수방 (지금의 서울 통인동 일대)에서 조선 3대 임금인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셋째아들로 태어나 22살이던 1418년 아버지인 태종의 양위를 받아 조선 4대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세종대왕은 지극한 애민정신과 민본사상에 기초하여 한글반포, 과학기술, 문화 예술, 군사, 외교, 농경, 천문의 발달 등 조선시대의 르네상스를 이룩하였다.
「세종이야기」는 위대한 성군 세종대왕의 업적을 기리고 이를 통해 대한민국의 역사적 자존감과 민족적 긍지를 알리는 소통의 공간으로 자리할 것이다.
세종의 빛으로 서로 사맛다.
세종대왕 신상 정보 구분 설명 이름 이 도(李祹) 자 원 정(元正) 칭호 세종대왕(世宗大王) 출생지 한양 준수방(현재의 서울특별시 통인동 경복궁 영추문 근처) 생년월일 1397년 4월 10일(음력) / 5월 15일(양력)(~1450년 2월 17일) 재위기간 1418년 8월 ~ 1450년 2월(31년 6개월) 가족관계 아버지 – 태종(太宗) 이방원
어머니 –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
왕비 –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
자녀 – 조선 제 5대왕 문종 외 18남 4녀 취미 공부, 독서 성격 이지적이며 실리주의적임. 때로는 과단성이 있어 결단력를 발휘 특이사항 높은 학구열, 빠르고도 영민한 판단력 특기 절대음감의 소유자
(편경의 소리를 듣고 음이 틀린 것을 한 번에 알아맞힐 수 있음) 신체사항 의젓하고 당당한 풍채, 지나친 독서로 인한 안질환 좋아하는 음식 고기, 앵두 좋아하는 운동 무예습득과 건강증진을 위한 격구와 강무 세부능력 과학, 음악, 서화 등 분야를 막론하고 두루 정통함
토론을 좋아하며 남의 말을 잘 경청함 관심사 오직 백성을 위해 필요하고 쓸모 있는 것 가치관 및
정치 이념 민본과의 소통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튼튼해야만 나라가 평안하게 된다.” 주요경력 조선 4대 임금(1418~1450)
백성을 위한 정치활동을 활발히 진행
훈민정음을 창제해 나랏글을 만듦
과학, 음악, 기술 발전 및 영토 확장에도 큰 공을 세움
세종대왕 연혁
세종대왕 연혁표 연도 업적 1400년 주자소 설치
계미자 제작 1411년 충녕군에서 충녕대군이 됨 1416년 조선 4대 임금으로 세종 즉위
대마도 정벌 1421년 집현전 궁중에 설치
경자자 제작 시작
새로 개조한 정밀한 저울을 반포
조선통보라는 화폐를 주조 1426년 편경 제작
농사직설 편찬
편종 제작 1431년 천체관측기구 혼천의 제작
물시계 자격루 제작
천문도 천상열차분야지도 석각본 제작
국악의 기초 확립
금속활자 갑인자 제작
해시계 앙부일구 제작 1436년 천체관측기구 일성정시의 제작
6진 개척 1441년 우량계 측우기 제작
하천수위측정기구 수표 제작
훈민정음 창제
역서 칠정산 편찬
용비어천가를 지음
천자포 등 화포 개량
유량악보 정간보 창안 1446년 훈민정음 반포
훈민정음 해례본 완성
석보상절 편찬, 월인천강지곡 편찬
동국정운 6권을 편찬
로켓 화기 신기전 제작
병기기술서인 총통등록 편찬 1450년 세종 승하
키워드에 대한 정보 세종대왕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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