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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incompetech.com/music/royalty-free/index.html?isrc=USUAN1100303
아티스트: http://incompetec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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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 대전 – 나무위키:대문
제1차 세계 대전은 사라예보 사건으로 인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 왕국에 전쟁을 선포하여 1914년 7월 28일부터 1918년 11월 11일까지 전 세계적으로 전개된 …
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4/2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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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 대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제1차 세계 대전(第一次世界大戰, 영어: World War I, WW1)은 1914년 7월 28일부터 1918년 11월 11일까지 일어난 유럽을 중심으로 한 세계 대전이다.
Source: ko.wikipedia.org
Date Published: 11/2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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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국 (제1차 세계 대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제1차 세계 대전의 연합국은 프랑스와 러시아 제국, 영국이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이탈리아 왕국의 삼국 동맹에 대항하기 위해 맺은 삼국 협상을 효시 …
Source: ko.wikipedia.org
Date Published: 1/1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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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 | 홀로코스트 백과사전
제1차 세계대전은 20세기 최초의 대규모 국제 분쟁으로 기록된다.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왕가 후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그의 부인 소피 배공비가 …
Source: encyclopedia.ushmm.org
Date Published: 10/2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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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 조약 및 배상 | 홀로코스트 백과사전
비참했던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승전 연합국은 패전국들에게 일련의 가혹한 조약들을 체결하도록 강요했다. 이러한 조약들은 동맹국(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에 …
Source: encyclopedia.ushmm.org
Date Published: 3/2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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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세계대전 전야인가? 1차대전 분석 세계적 학자의 대답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한 현재 상황은 1차 세계대전 전야와 비슷한가? 우크라이나 전쟁 뒤 또 다른 세계대전이 터지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 …
Source: www.hani.co.kr
Date Published: 4/1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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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과 1918년 인플루엔자 – 네이버 프리미엄콘텐츠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가 사라예보를 방문하자 세르비아인들의 분위기는 좋을 수 없었다. 결국 황태자 부부는 세르비아 비밀 결사대 …
Source: contents.premium.naver.com
Date Published: 11/1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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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택의 글로벌 줌업]”1차대전 종전 100년…인류는 전쟁의 …
1914년 7월 28일 시작해 1918년 11월 11일까지 4년 4개월간 진행된 1차대전은 인류가 겪은 가장 큰 참극의 하나로 기록된다. 피해는 상상을 초월했다.
Source: www.joongang.co.kr
Date Published: 10/2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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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개월간 쏟아진 포탄 6000만발… 병사 70만명이 참호서 죽어갔다
1918년 11월 11일, 휴전 조약이 발효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전례 없이 처참했던 4년 동안의 전쟁은 큰 상처를 남겼다. 세계는 대전(大戰) …
Source: www.chosun.com
Date Published: 10/2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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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세계 1 차 대전
- Author: 궁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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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20. 8.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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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 대전
제1차 세계 대전(第一次世界大戰, 영어: World War I, WW1)은 1914년 7월 28일부터 1918년 11월 11일까지 일어난 유럽을 중심으로 한 세계 대전이다. 1914년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며 시작되었고, 1918년 독일의 항복으로 끝이 났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단순히 세계 대전(World War) 또는 대전쟁(Great War)이라고 불렸다.[5][6][7] 미국에서는 처음에 유럽 전쟁)라고 불렸다.[8] 제1차 세계 대전으로 병사 900만명 이상이 사망했다. 기술 및 산업의 고도화와 전술적 교착 상태로 인해 사상자 비율이 악화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은 사망자가 많았던 전쟁 중 하나이며, 참전국의 수많은 혁명 등을 포함하여 주요한 정치적 변화가 일어났다.[9]
이 전쟁은 전 세계의 경제를 두 편으로 나누는 거대한 강대국들 동맹끼리의 충돌이다.[10] 한쪽 편은 대영제국, 프랑스, 러시아 제국의 삼국 협상을 기반으로 한 협상국이며, 다른 한편은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있는 동맹국이다. 이탈리아 왕국은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함께 삼국 동맹에 가입되어 있었지만 동맹국에 참여하지 않았고 나중에는 협상국으로 참가하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침공했다.[11] 이러한 동맹은 재조직되었고 더 많은 국가가 전쟁에 참여하도록 압력을 가하면서 확장되었다. 이탈리아 왕국, 일본 제국, 미국이 연합국에 가입했으며 오스만 제국, 불가리아 왕국이 동맹국에 가담했다. 궁극적으로 유럽인 6천만 명을 포함한 군인 7천만 명이 전쟁에 가담하면서 역사적으로 가장 큰 전쟁 중 하나에 동원되었다.[12][13]
이 전쟁의 근본적인 원인은 신제국주의때문이었지만, 직접적인 원인은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왕위 후계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세르비아 국민주의자 가브릴로 프린치프에게 암살당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 왕국에게 최후 통첩을 내리면서 7월 위기가 시작되었고,[14][15] 지난 수십년에 걸쳐 형성된 국제적 동맹끼리 서로 연결되었다. 수주 이내에 강대국끼리 전쟁이 시작했고 이 분쟁은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7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를 침공하면서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16][17] 러시아가 총동원령을 내리면서 독일군은 중립국인 룩셈부르크와 벨기에를 침공하면서 프랑스로 진격했고, 이로 인해 영국이 독일에게 선전포고했다. 파리 앞에서 독일군이 진격을 멈춘 이후, 서부 전선은 1917년까지 참호전과 같은 소모전 양상으로 굳어지게 된다. 한편, 동부 전선에서는 러시아군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로 진격하는데는 성공했지만 동프로이센 침공은 독일군의 반격으로 실패하게 된다. 1914년 11월에는 오스만 제국이 참전하면서 전역이 코카서스, 메소포타미아, 시나이반도 등으로 확대되게 된다. 이탈리아와 불가리아는 1915년 참전했고, 루마니아 왕국은 1916년 참전했으며, 미국은 1917년 참전했다.
러시아 정부가 1917년 3월 붕괴된 이후 동부 전선이 해소되었으며 이후 10월 혁명으로 인해 동맹국이 러시아 영토를 획득했다. 1918년 11월 4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휴전에 합의했다. 1918년 서부 전선에서 독일군의 춘계 공세 이후, 연합군은 일련의 공세를 방어하고 이후 진격하여 독일군 참호들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독일 11월 혁명 이후, 독일이 1918년 11월 11일 휴전에 합의하면서 연합국이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었다.
전쟁이 끝나면서,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러시아 제국, 오스만 제국 등 4개 주요 제국이 해체되게 되었다. 앞의 2개 제국은 승계국가가 탄생했지만 많은 영토를 잃었으며 후자의 2개 제국은 완전히 해체하게 되었다. 유럽 및 서남아시아 지도는 새로운 독립 국가가 생기면서 새롭게 그려지게 되었다. 또한, 이러한 끔찍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국제 연맹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목표는 유럽의 민족주의 부활과 독일에서 파시즘의 장악으로 인해 상황이 악화되며 실패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하게 되었다.
명칭 [ 편집 ]
1914년 10월 캐나다 잡지 맥클린스에서는 “어떤 전쟁은 스스로 이름을 붙인다. 그것이 대전(Great War)이다”라고 말했다.[18] 1914년 말 뉴욕에서 발행한 전쟁의 기원 및 초기 역사에 관한 책의 제목은 “세계 대전”(World War)라는 이름으로 붙여졌다.[19] 전간기 기간 동안, 영미권에서는 이 전쟁을 세계 대전(World war) 또는 대전(Great war)라고 불렀다.
“제1차 세계 대전”이라는 용어는 1914년 9월 독일 철학자 에른스트 헤켈이 “‘유럽 전쟁’의 두려움에 관한 과정이나 성격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단어의 전체적 의미에서 이것은 ‘제1차 세계 대전’이라고 불릴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시작되었다.[20] 또한, 제1차 세계 대전이라는 말은 장교이자 저널리스트인 찰스 아 코르트 레핑턴(Charles à Court Repington)이 지은 1920년대 역사책 제목이기도 했다.[21]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된 이후, “제1차 세계 대전”이라는 말이 보편화되었으며 캐나다와 영국에서는 ‘First World War’이라는 용어를, 미국에서는 ‘World War I’이라는 용어로 사용한다.
배경 [ 편집 ]
이 부분의 본문은 이 부분의 본문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원인 입니다.
정치 및 군사적 동맹 [ 편집 ]
19세기 유럽 강대국들은 유럽 전역에서 힘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으며 그 결과 1900년에는 복잡한 정치, 군사적 동맹 네트워크를 형성하게 되었다.[11] 이 동맹은 1815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의 신성 동맹으로부터 시작했다. 1873년 10월에는 독일 총리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러시아 사이 삼제 동맹(Dreikaiserbund)을 체결했다. 이 동맹은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러시아 간에 발칸반도에 대한 정책에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에 1879년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삼제 동맹에 탈퇴하여 독오 동맹을 따로 만들었다. 한편, 오스만 제국의 발칸반도에 대한 영향력이 지속적으로 약화되면서 발칸반도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은 반대로 증가하게 되었다.[11] 이 독오 동맹은 1882년 이탈리아 왕국이 가입하면서 삼국 동맹으로 변화했다.[22]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의 군사 동맹 지도. 협상국 은 초록색으로 나타냈으며, 동맹국 은 갈색으로 나타냈다.
비스마르크는 프랑스와 러시아 두 나라간의 양면전선 전쟁을 피하기 위해 독일과 러시아간의 동맹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빌헬름 2세가 독일의 황제 지위에 오르면서 비스마르크는 퇴위를 강요당했고 비스마르크가 세운 동맹 시스템은 점차 해체되었다. 예를 들어, 빌헬름 2세는 1890년 러시아와의 재보장 조약 갱신을 거부했다. 4년 후인 1894년, 3제 동맹을 막기 위하여 러불 동맹이 공식적으로 체결되었다. 1904년, 영국은 프랑스와 함께 영불 협상(Entente Cordiale)을 맺었으며 1907년에는 영국이 영러 협상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공식적으로 영국-프랑스-러시아 동맹으로 이루어지진 않았지만, 프랑스나 러시아가 분쟁을 겪을 경우 영국이 참가하게 된다는 항목이 있었으며, 이러한 양자 연동 협정을 삼국 협상으로 알려졌다.[11]
군비 경쟁 [ 편집 ]
1871년 보불전쟁에서 독일이 승리하여 독일이 통일한 이후, 산업 및 경제력이 급상승하게 되었다. 1890년대 중반부터 빌헬름 2세는 중요한 경제 자원을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가 지휘하는 독일 제국해군에 투자하여 영국 해군과 해군 군비 경쟁을 하게 되었다.[23] 그 결과, 각 국가들은 주력함을 더욱 많이 건조하기 위해 노력했다. 1906년 HMS 드레드노트의 건조 이후 대영제국은 독일 제국과의 경쟁에서 중요한 위치를 선점하게 되었다.[23] 영국과 독일 사이의 군비 경쟁은 모든 유럽 주요국이 유럽 전역의 분쟁에 필요한 장비와 무기를 생산하는 데 산업 기반을 기울이면서 유럽 전역으로 경쟁이 확장되었다.[24] 1908년부터 1913년까지 유럽 국가의 군비 지출은 50% 상승했다.[25]
발칸 반도의 분쟁 [ 편집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과거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던 1878년 이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점령한 이후 1908년부터 1909년까지 보스니아 위기가 도래하게 되었다. 이 점령으로 세르비아 왕국 및 그 국가의 후원자인 범슬라브주의 동방 정교회의 러시아 제국을 화나게 했다.[26] 이 지역에서 러시아의 행보는 이미 “유럽의 화약고”로 널리 알려진 발칸반도의 균형을 붕괴시켜 평화 협정을 불안정하게 만들었다.[26] 1912년부터 1913년까지 발칸 동맹과 오스만 제국 사이의 전쟁인 제1차 발칸 전쟁이 발발했다. 이 전쟁 결과 체결된 런던 조약에서 알바니아는 독립했으며, 불가리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그리스는 영토를 확대하면서 오스만 제국의 영토가 감소했다. 1913년 6월 16일, 불가리아가 세르비아 및 그리스를 침공하면서 발발한 33일간의 제2차 발칸 전쟁에서는 불가리아가 패배하여 세르비아와 그리스에게 마케도니아 대부분을, 루마니아에게 남도브루자를 빼앗기게 되었으며 발칸반도를 불안정하게 만들었다.[27]
서막 [ 편집 ] [28][29] 사건 당시 방관자였던 페르디난드 베흐를 찍은 사진이라고 주장한다. 이 사진은 일반적으로 가브릴로 프린치프 가 체포당하는 사진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일부는사건 당시 방관자였던 페르디난드 베흐를 찍은 사진이라고 주장한다.
사라예보 사건 [ 편집 ]
이 부분의 본문은 이 부분의 본문은 사라예보 사건 입니다.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수도인 사라예보를 방문했다. 세르비아의 흑수단이 지원하는 청년 보스니아 민족주의 단체의 암살단 6명 쳬베코 포포비치(Cvjetko Popović), 가브릴로 프린치프(Gavrilo Princip), 무함마드 메메드바시치(Muhamed Mehmedbašić), 네델코 차브리노비치(Nedeljko Čabrinović), 트리프코 그라베츠(Trifko Grabež), 바소 쿠브릴로비치(Vaso Čubrilović)는 대공의 차량 행렬이 지나가는 거리에 서 있었다. 차브리노비치가 차에 수류탄을 던졌지만 차를 놓쳤다. 근처의 군중 몇몇이 부상을 입었고,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차는 계속 움직일 수 있었다. 다른 암살단은 차가 빠르게 지나쳐 암살할 수 없었다. 약 한시간 후, 페르디난트 대공이 사라예보 병원을 방문하고 돌아올 때 길을 잘못 들려 우연히 프린치프가 서는 곳을 지나가게 되었다. 프린치프는 권총을 발사해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그의 아내 호엔베르크 여공작 조피를 암살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내에서 사람들의 반응은 차가울 정도로 무관심한 수준이었다. 역사학자 즈비네크 제만(Zbyněk Zeman)은 나중에 “이 사건은 거의 어떠한 인상도 주지 못했다. 일요일과 월요일(6월 28일~29일)에 빈의 군중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음악을 듣고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라고 전했다.[30][31]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폭력 사태의 확대 [ 편집 ]
그러나 사라예보 내에서는 오스트리아 정부가[32][33] 세르비아 주민들에 대한 폭력을 하도록 부추겼고, 그 결과 사라예보의 크로아티아인과 보스니아인이 세르비아인 두명을 죽이고 세르비아인 소유의 건물을 불태우는 사라예보 반세르비아 폭동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포그롬의 특성을 갖추었다. 작가 이보 안드리치는 “사라예보에서 증오의 열풍이 불었다”라면서 이런 폭력 사건에 대해 말했다.[34] 세르비아 민족에 대한 폭력 행위는 사라예보에서 뿐 아니라 현대의 크로아티아 및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영토에 위치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대도시에서도 일어났다.[35]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정부는 유명한 세르비아인 5,500명을 수감하고 송환했으며, 그 중 700명에서 2,200명이 감옥에서 사망했다고 통계내렸다. 세르비아인 460명은 사형 선고가 내려졌고,[36][37][38] 이슬람교가 지배적이었던 지역에서는 슈츠크롭스(Schutzkorps)라는 민병대 집단이 형성되어 세르비아인들에 대한 핍박을 시작했다.[39]
7월 위기 [ 편집 ]
이 부분의 본문은 이 부분의 본문은 7월 위기 입니다.
사라예보 암살 사건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러시아 제국, 독일 제국, 프랑스 제국, 대영제국 간 1달 간의 외교 기동으로 이끌어졌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의 관리(특히 검은 손 조직의 임원들)들이 이 사건과 관련되었다고 판단하고 보스니아 내에서 세르비아의 영향을 줄이기 위해[40] 세르비아에게 의도적으로 전쟁을 자극할 10가지 요구 사항으로 구성된 7월 최후통첩을 보냈다.[41] 세르비아가 10가지 요구사항 중 8가지만 수락하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1914년 7월 28일 전쟁을 선포했다. 군사역사가인 헤우 스트라첸은 “세르비아의 초기 모호한 응답에 관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행동에 차이를 주었을 것인지 아닌지는 의심해야 한다. 프란츠 페르디난드 대공은 그리 인기있는 성격은 아니였으며 제국은 그의 죽음에 그렇게 애도를 표하지는 않았다”라고 말했다.[42]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발칸 반도의 영향력을 넓히는 것이 내키지 않았던 세르비아 왕국의 오랜 지원국인 러시아 제국은 7월 29일 부분 동원령을 명령했다.[22] 7월 30일 러시아 제국이 총동원령을 내리자, 같은 날 독일 제국은 동원령을 발동했다.[43] 독일은 베를린의 대사를 통해 러시아에게 12시간 내에 동원령을 해제하지 않으면 전쟁 상황이 올 것이라는 최후 통첩을 보냈다.[43] 러시아는 동원령을 해제하는 것에 협상하자는 응답을 보냈다. 그러나, 독일 제국은 협상을 거부하고 1914년 8월 1일 러시아에게 선전포고했다.[43]
독일의 전쟁계획인 슐리펜 계획은 러시아가 동부에서 진군하기 전에 프랑스 지역을 빠르고 대규모로 침공해서 서부를 미리 제압한다는 전략이었다. 따라서, 러시아의 동원령 선포와 동시에 독일 제국은 프랑스에게 중립을 유지하라는 요구를 보냈다. 프랑스 내각은 즉시 군사 동원령을 내리라는 군의 압박에 저항하여 사건을 막기 위해 프랑스 국경에서 10 km 밖으로 군대를 철수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독일 제국은 8월 2일 룩셈부르크를 침공했으며, 8월 3일에는 독일 제국이 프랑스에게 선전포고했다.[43] 8월 4일, 벨기에가 자국의 영토를 통해 프랑스를 침공하려는 것에 대해 거부하자 독일 제국은 벨기에게도 선전포고했다.[43][44][45] 영국은 벨기에의 중립 상태를 유지하라는 최후통첩을 독일 제국이 무시하자, 1914년 8월 4일 독일 제국에게 선전포고했다.[46]
전쟁의 진행 과정 [ 편집 ]
개전 [ 편집 ]
동맹국 사이의 혼란 [ 편집 ]
동맹국의 전략은 잘못된 의사 소통으로 혼란을 빚었다. 독일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세르비아 침공에 도움을 주기로 약속했지만,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해석에 따라 달랐다. 이전의 군사 전개 훈련 계획은 1914년 초 개정되었지만, 개정 이후의 훈련 계획은 진행된 적이 없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휘관들은 독일이 러시아와 전투하면서 북부 전선을 지원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47] 그러나, 독일은 프랑스를 침공하는 동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러시아군의 대부분을 막을 것이라 구상하고 계획을 세웠다. 이러한 혼란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육군이 세르비아 전선과 러시아 전선으로 병력이 나뉘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1914년 9월 9일 셉템베르프로그라암(Septemberprogramm)에서는 독일의 총리 테오발트 폰 베트만-홀베크가 독일의 전쟁 목적 및 승리할 경우 연합국에게 요구할 사항 등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는 계획을 내놓았다. 그러나, 이 문서는 공식적으로 채택되지 않았다.
세르비아 전역 [ 편집 ]
오스트리아가 침공하면서 8월 12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과 세르비아군 간에 체르 전투와 콜루바라 전투가 발발했다. 이후 2주일 동안 오스트리아군의 공격은 대량의 인명 손실로 그치면서 전쟁 기간 동안 첫 번째 연합군의 주요 승리로 기록되었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신속한 승리에 대한 희망이 없어지고 말았다. 그 결과, 오스트리아는 러시아 전선에 대한 방어를 약화시키고 대신 세르비아 전선에 상당한 병력을 유지시켰다.[48] 1914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세르비아 침공 실패는 지난 20세기동안 우월한 적을 상대로 승리한 전쟁 중 하나로 꼽힌다.[49]
이 전역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가장 어린 군인이 참전한 전역이다. 츠부스니카에 태어난 몸칠로 가브리치는 1914년 8월 오스트리아-헝가리군에게 그의 부모, 할머니, 형제 7명이 죽은 이후 8살에 세르비아 육군 제6 포병 사단에 입대했다.[50][51][52] 10살때 그는 상병으로 승진했으며,[51][52] 11살에는 하사 대리 병장이 되었다.[52]
벨기에와 프랑스의 독일군 [ 편집 ]
서부전선의 영국군 야전병원.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독일군(제7 야전군의 서부군)은 개정된 슐리펜 계획에 따라 진군하기 시작했다. 이 독일군은 중립국인 벨기에를 통해 프랑스 국경으로 진군, 독일 국경에서 프랑스군을 둘러싸 남쪽으로 포위하는 작전에 투입되었다.[14] 프랑스는 “독일과 러시아 사이에 전쟁이 발발할 경우, 우리는 완전히 자유로운 행동을 할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독일은 한 전선에서는 프랑스를 공격하는 동시에 다른 전선에서는 러시아를 공격할 것이라고 다짐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나리오를 충족시키기 위해, 슐리펜 계획은 1870~1871년의 보불전쟁과 같이 최대한 빨리 프랑스로부터의 항복을 얻어내기 위한 계획으로 짜여졌다. 또한, 프랑스에서 빠른 승리를 위해 라인 강의 서부가 국경과 맞닿아 있는 알자스로렌의 험한 지형을 통해 공격하는 대신 영국 해협으로 진군하여 영국의 지원을 저지한 이후 파리를 공격한다는 작전으로 이루어졌다. 이후 대부분의 군대를 러시아로 보냈다. 러시아는 동맹국에게 위협을 줄 수 있는 동원령을 완료하는데 오랜 기간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1914년, 전선으로 가는 길에 있는 화차 에 있는 독일 군인. 전쟁 초기에는 양 측이 매우 짧은 전쟁으로 끝날 것이라고 예측했다.
기존의 모든 독일의 전쟁 계획은 독일군이 벨기에를 통해 행군하는 것이었다. 독일은 프랑스를 침공할 때 벨기에를 통한 자유로운 행군을 원했다(원래는 네덜란드도 포함되어 있었으나,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이를 거부했다). 중립국인 벨기에는 이를 거부했고, 따라서 독일은 벨기에를 침공하고자 했다. 프랑스 또한 벨기에를 통해 프랑스군을 이동시키고 싶었지만, 벨기에는 자국 영토에서 전쟁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으로 독일의 제안 뿐 아니라 프랑스의 제안 또한 거절했다. 결국, 독일의 벨기에 침공 이후 벨기에는 프랑스군과 함께 전투하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에는 벨기에군 대부분이 지원에 대한 모든 희망을 잃고 안트베르펜으로 후퇴하여 항복했다.
이 계획은 독일의 우측이 프랑스군을 우회하기 위해 진군해야 했고(프랑스군의 대부분은 프랑스-독일 국경에 몰려 있었다) 이후 파리까지 남쪽으로 진군해야 했다. 8월 11일부터 24일까지 국경 전투에서 독일군은 승리를 거뒀다. 9월 12일, 프랑스군은 영국 원정군의 도움을 받아 9월 5일부터 12일까지 이루어진 1차 마른 전투에서 독일군이 파리 동부로 진격하는 것을 방어했고 다시 독일군을 전선에서 50 km 후퇴시켰다. 이 전투는 서부 전선에서 기동전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14] 프랑스군의 알자스 남부 공세는 8월 20일 뮐루즈 전투로 시작했지만 제한적인 성공만 거두었다.
동부전선에서는 독일 장교들이 예상한 것과는 달리 매우 일찍 2개 군으로 프랑스 침공을 시작했다. 프랑스 침공에 동원되기로 예정되었던 제8 야전군을 철도를 통해 재빨리 오스트프로이센 지역으로 이동시켰다.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이끄는 이 군은 8월 17일부터 9월 2일까지 이어진 일련의 타넨베르크 전투에서 러시아군을 격파했다. 러시아의 침공을 좌절시켰지만, 지치지 않은 독일군을 동부로 이동시킨 결과 1차 마른 전투에서 연합국이 전술적 승리를 이끌었다. 동맹국은 프랑스에서 빠른 승리를 거두는 데 실패하고 2개 전선에서 전쟁을 시작해야 했다. 독일군은 프랑스 내의 방어하기 좋은 지역에서 전투를 했고, 영구히 잃어버린 것보다 더 많은 23만명의 프랑스군 및 영국군을 무력화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신 문제 및 납득하기 어려운 명령 결정은 독일군이 전쟁 초기 승리하는데 어려움을 주었다.[53]
아시아와 태평양 지역 [ 편집 ]
뉴질랜드는 1914년 8월 30일 독일령 사모아를 점령했다. 9월 11일, 오스트레일리아 해군 및 군사파견군(AN&MEF)이 독일령 뉴기니의 뉴포메른섬(나중에 뉴브리튼섬이 됨)에 상륙했다. 10월 28일, 페낭 해전에서 독일 순양함 SMS 엠덴이 러시아 순양함 젬추크를 침몰시켰다. 일본군은 독일의 미크로네시아 식민지를 장악하고 칭다오 전투를 통해 중국 산둥 반도에 위치한 칭다오를 점령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정부가 칭다오에 있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순양함 SMS 카이저린 엘리자베스의 철수를 거부하자, 일본은 독일 뿐 아니라 오스트리아-헝가리에게도 전쟁을 선포했다. 1914년 11월 이 함선은 칭다오 방어전에 참여했으며 나중에는 침몰했다.[54] 몇 달 이내에, 연합군은 태평양의 독일령 지역을 장악했다. 오직 독일령 뉴기지 지역에서만 고립된 상선 기습 및 방어 태세만 있었다.[55][56]
아프리카 전구 [ 편집 ]
전쟁의 첫 번째 충돌로는 아프리카에서 영국, 독일, 프랑스 사이 식민지 세력의 충돌이었다. 8월 6일~7일에 프랑스와 영국군은 토골란드 및 독일령 카메룬 지역을 침공했다. 8월 10일, 독일령 남서아프리카의 독일군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전쟁의 나머지 기간 동안 산발적이고 치열한 전투가 이어졌다. 대령 파울 폰 레토우보르베크(Paul von Lettow-Vorbeck)가 이끄는 독일령 동아프리카 식민지군은 제1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유격전을 이끌었고 유럽에서 휴전이 이루어진 지 2주가 지나서야 항복하였다.[57]
인도의 연합국 지원 [ 편집 ]
영국 정부가 인도에서 반란이 일어날 것이라는 두려움과는 달리, 인도에서는 영국에 대한 충성과 전례없는 호의가 나타나게 되었다.[58][59] 인도 국민 회의 및 기타 단체의 인도 정치 지도자들은 열심히 영국의 전쟁 노력을 지원했으며, 영국에 대한 전쟁 지원이 인도 자치 운동을 이끌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영국령 인도 제국군은 전쟁 초기에는 영국군보다는 열세였다. 인도 중앙 정부 및 인도 토후국이 많은 음식, 돈, 탄약 보급을 보내주는 동안 130만명 가량의 인도군 및 노동자가 유럽, 아프리카, 중동 등지에서 자원군으로 활동했다. 총 14만명이 유럽의 서부 전선으로 보내졌고, 70만명이 중동 전선으로 보내졌다.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인도인 47,746명이 사망했고 65,126명이 부상을 입었다.[60] 전쟁 자체로의 고통 뿐 아니라, 전쟁 이후에도 영국 정부가 인도 자치에 관해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자 인도 자치 운동은 마하트마 간디가 주도하는 인도 독립 운동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된다.
서부 전선 [ 편집 ]
참호전의 시작 [ 편집 ]
제1차 세계 대전 이전 군사 전술은 기술의 발전 속도를 따라잡는데 실패하면서 구식이 돼버렸다. 이러한 기술적 진보는 강한 방어적 전략으로 이끄는 원인이 되었으며, 구식의 전술로는 더 이상 대부분의 전쟁에서 돌파가 힘들어지게 되었다. 철조망은 밀집보병의 진군에 심각한 방해물이 되었으며, 포병은 기관총과 결합하여 개방지를 횡단하는 데 매우 어렵게 만들어 1870년대보다 더욱 치명적으로 발전했다.[61] 양측 지휘관은 많은 사상자 없이 참호전 전략을 발전시키는 데 실패했다. 그러나, 이 때 기술 진보로 인해 화학 무기 및 전차가 발명되는 등 새로운 공격 무기를 개발하게 만들었다.[62]
1914년 9월 5일부터 12일까지 일어난 1차 마른 전투 이후 협상국 및 독일군은 서로 측면을 포위하기 위해 북부에서 기동전을 시도했다. 이러한 일련의 기동전을 바다로의 경주라고 부른다. 이러한 측면 포위 시도가 모두 실패하면서, 영국 및 프랑스는 곧 독일 제국이 벨기에 해안부터 로렌 지역까지 단단하게 구축한 방어선을 구축한 것을 보게 되었다.[14] 독일은 점령 지역을 방어하면서 영국 및 프랑스군에 대한 공격을 모색하고 있었다. 따라서, 독일군의 참호는 프랑스 및 영국군의 참호보다 더욱 많이 건설되었다. 영국-프랑스군의 참호는 독일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기 전까지 머무르는 “임시적인” 방어선에만 끝나 있었다.[63]
양측은 과학 기술의 진보를 이용하여 교착 상태를 깨려 시도했다. 1915년 4월 22일 제2차 이프르 전투에서는 독일군이 서부 전선에서 처음으로 (만국 평화 회의의 헤이그 협정을 위반하는) 염소 가스를 이용했다. 곧 양측에서 여러 종류의 가스 사용이 일반화되었고, 결정적으로 증명되진 않았지만 전투를 겪은 군인들은 독가스 전쟁이 가장 두렵고 기억에 남는 공포가 되었다.[64][65] 1916년 9월 15일에는 전체적으로는 솜 전투의 일부인 플레르-쿠르슬레 전투에서 영국군이 처음으로 전차를 이용했고, 부분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전쟁이 진행되면서 전차의 효과는 커졌다. 독일군은 자신들이 디자인한 매우 적은 수의 전차를 사용했으며, 대부분은 연합국으로부터 노획한 전차를 전리품으로 이용했다.
1916년, 베르됭의 프랑스 87연대.
참호전의 지속 [ 편집 ]
양측 모두 2년 동안 서로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줄 수 있는 공격을 하지 못했다. 1915~1917년 동안, 대영제국 및 프랑스는 전략, 전술적 방향의 측면의 선택 때문에 독일보다 더 많은 사상자로 고통받았다. 독일은 오직 하나의 주요 공세만 시도했지만 연합군은 독일의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한 여러 시도를 하였다.
1916년 2월 독일은 프랑스의 베르됭에서 프랑스 진지를 공격하면서 베르됭 전투가 시작되었다. 1916년 12월 프랑스의 반격으로 공세 시작 지점 이전까지 독일군을 퇴각시키기 전까지 전투는 독일군이 많은 이익을 보았다. 프랑스군의 사상자는 엄청났지만, 독일군의 사상자 또한 이에 못지 않게 높아서 양 측 교전국의 사상자는 70만명[66]에서 97만 5천명[67] 가까이 된다. 베르됭은 프랑스의 의지 및 희생의 상징이 되었다.[68]
1916년 7월부터 11월까지 영국-프랑스군은 솜 전투를 통해 독일군을 공격했다. 이 공격이 시작한 7월 1일 당시 영국 육군은 역사상 가장 큰 사상자가 발생해, 첫날 전투에만 19,240명이 사망하는 등 총 사상자가 75,470명이나 되었다. 솜 공세 전체 기간 동안 영국군의 사상자는 약 42만명이었다. 프랑스군 또한 대략 20만명의 사상자가 나왔으며, 독일군은 50만명의 사상자가 나왔다.[69]
1916년 전체 기간 동안 베르됭에서의 오래된 공격은[70] 솜 전투의 심각한 사상자와 합쳐져 프랑스군이 지쳐 붕괴 위기까지 달했다. 1917년 4월 5일 니벨 공세가 연합국의 실패로 끝난 이후 영국 및 프랑스군의 헛된 정면 공격 시도는 프랑스 병사(poilu)의 프랑스군 반란으로 이어졌다.[71] 동시에 일어난 영국의 아라스 전투는 제한된 범위에서 이루어져 궁극적으로 전략적 가치는 떨어졌지만 더 많은 성공을 거두었다.[72][73] 아라스 공세의 일부분으로 캐나다 군단이 비미 리지를 점령했고, 이는 해당 국가에게 매우 중요하게 되었다. 캐나다의 국가정체성이 전투로 탄생되었다는 생각은 이후 캐나다의 군사 및 일반 사학계에서 널리 퍼지게 되는 의견이 되었다.[74][75]
1917년 7월부터 11월까지 이루어진 파스샹달 전투는 이 기간 벌어진 영국의 마지막 대규모 공세(프랑스의 지원)가 되었다. 이 공세는 10월 전장이 진흙탕으로 되기 전까지 연합국 사이의 약속으로 진행되었다. 사상자에 대해서는 많은 의견이 존재하지만 거의 20만명에서 40만명 사이로 추측한다.
서부 전선의 참호전은 몇 년 동안 많은 지역의 점령이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고, 그 결과 이 전선은 종종 정적이고 변하지 않는 전선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 영국, 프랑스, 독일은 끊임없는 전술의 발전으로 인해 새로운 전장으로 나타났다.
해전 [ 편집 ]
이 부분의 본문은 이 부분의 본문은 제1차 세계 대전의 해전 입니다.
전쟁이 시작했을 당시, 독일 제국의 순양함은 전 세계에 흩어져 있었으며 그들 중 일부는 연합국 상선을 공격하기도 했다. 영국 해군은 비록 연합국 선박을 보호하는 데는 무능력했지만 당황하지 않고 체계적으로 그들을 패배시켰다. 예를 들어, 칭다오에 주둔한 독일의 동아시아 함대의 일부였던 경순양함 SMS 엠덴은 15척의 상선을 포획하거나 침몰시켰으며, 러시아 순양함 및 프랑스 구축함도 침몰시켰다. 그러나, 장갑순양함 SMS 샤른호르스트, SMS 그나이제나우, 경순양함 SMS 뉘른베르크, SMS 라이프치히, 수송함 2척으로 이루어진 독일 동아시아 함대는 선박을 습격하라는 명령을 받지 못했고 대신 영국 군함을 만났을 때 독일 영토로 항해했다. 독일 함대 및 SMS 드레스덴은 코로넬 해전에서 장갑순양함 2척을 침몰시켰지만, 1914년 12월 포클랜드 해전에서 탈출한 SMS 드레스덴 및 약간의 보조함을 제외한 모두가 파괴되었고, 탈출한 선박들도 마스아티에라 해전에서 대부분이 파괴되거나 포획되었다.[76]
전쟁 발발 이후, 영국은 독일의 봉쇄를 시작했다. 이 전략은 지난 2세기 동안 여러 국제법에 의해 성문화 된 원칙을 어기는 것이었지만 여러 중요한 군사적, 민간적 자원 공급 차단에 효과가 있었음이 밝혀진다.[77] 영국은 중립국 선박에 피해를 입히는 것을 막기 위해 공해에서 바다로 들어오는 모든 함선의 이동을 막았다.[78] 이후 이 전술을 제한적으로 따라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도 유사한 효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기대했다.[79]
1916년 유틀란트 해전(독일어로 Skagerrakschlacht)은 제1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가장 거대했던 해전이었으며, 전쟁 중 유일한 전함 간의 전투였다. 이 해전은 1916년 5월 31일부터 6월 1일까지 북해의 윌란 반도 부근에서 일어났다. 독일의 대양함대는 라인하드 세어가 지휘했고, 영국의 대함대는 제독 존 젤리코가 지휘했다. 독일 함대가 해전에 돌입하기 시작하자 자기 함대보다 더 큰 영국 대함대를 피해 탈출하면서 영국 함대에게 많은 피해를 주었다. 그러나, 전략적으로는 영국이 여전히 제해권을 가지고 있었고, 독일 수상함대의 대부분은 전쟁 기간 내내 항구에만 있어야 했다.[80]
1918년 독일과의 휴전 당시 런던의 타워 브릿지 근처에 전시된 U-155
독일의 유보트는 북아메리카와 영국 사이의 보급선을 차단하려 시도했다.[81] 잠수함전의 성격은 공격이 자주 경고없이 왔으며 상선의 승무원들은 생존률이 희박했다.[81][82] 미국은 이에 대해 항의를 시작했고, 독일은 교전 규칙을 바꿨다. 1915년 여객선 RMS 루시타니아가 침몰한 이후, 독일은 여객선이 지나다니는 해로에서 공격하지 않겠다고 했으며, 영국은 “안전 장소”(구명보트와는 다른 표준)에 승무원을 배치하고 경고를 보내는 프라이즈 규칙 보호를 넘어서서 상선을 무장시켰다.[83] 마침내, 1917년 초 독일이 무제한 잠수함 작전 규칙을 도입하면서 미국이 선전포고했다.[81][84] 독일은 미국이 해외에서 많은 군대를 수송하기 전에 연합국 해로에 대한 공격을 시도했지만, 장거리 유보트를 5척만 유지시킬수 있어서 실제 효과는 미미했다.[81]
1917년에는 상선들이 구축함들과 같은 호송선단을 보호를 받아 유보트의 피해가 줄어들었다. 이러한 호송선단 전술은 유보트가 표적을 쉽게 찾지 못하게 하여 피해가 크게 줄어들었다. 이후 하이드로폰과 폭뢰가 도입되면서 구축함이 수중에 있는 잠수함을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호송선단은 상선이 호송선단이 모일 때까지 기다려야 해서 보급 전송이 느려지는 부작용을 가져왔다. 이러한 지연을 막기 위해 새로운 화물들을 구축하는 광범위한 프로그램이 만들어졌다. 군인 수송선은 잠수함에게 너무 빨랐기 때문에 호송선단의 지원을 받지 않았다.[85] 유보트는 199척을 이용해 5,000척 이상의 연합군 함선을 침몰시켰다.[86] 또한, 제1차 세계 대전은 항공모함이 처음으로 나온 시기로 HMS 푸리어스가 1918년 7월 톤데른 기습에서 소프위드 카멜을 발진시켜 체펠린 비행선 격납고를 성공적으로 공격했다. 또한, 대잠 순찰기로 소형 순찰선을 띄우기도 했다.[87]
남부 전구 [ 편집 ]
발칸반도의 전쟁 [ 편집 ] [88] 1917년, 포로로 잡은 세르비아 군인을 처형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군인. 전쟁 기간 동안 세르비아 왕국 은 85만명이 사망하면서 전쟁 전에 비해 4분의 1의 인구가 감소했다.
러시아와 직면한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세르비아를 공격한 군대의 3분의 1만 러시아 전선으로 보낼 수 있었다. 큰 손실을 입은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 왕국의 수도인 베오그라드를 점령했다. 그러나, 콜루바라 전투에서 세르비아군의 반격이 성공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는 1914년 말까지 원래 전선으로 후퇴해야 했다. 1915년의 첫 10개월 동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대부분의 군사를 이탈리아 전선으로 보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외교관은 불가리아를 설득하여 세르비아를 공격하도록 유도했다.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지방의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사는 세르비아 뿐 아니라 이탈리아와 러시아 전선 등지로도 향해졌다. 몬테네그로는 세르비아와 동맹을 맺었다.[89]
세르비아는 불가리아군이 60만명의 군대를 동원해 지원하면서 한 달 내에 정복했다. 세르비아군은 2개 전선에서 패배에 직면하면서 전쟁 초기에 침공했던 알바니아 공국 북부로 후퇴했다. 이후, 세르비아군은 코소보 전투에서 패배했다. 몬테네그로는 1916년 1월 6~7일에 있었던 모이코바츠 전투에서 아드리아 해안에서 후퇴하던 세르비아군을 보호하는 데 성공했지만, 결과적으로 몬테네그로도 오스트리아-헝가리에게 점령당했다. 살아남은 세르비아 병사들은 배를 통해 그리스로 철수했다.[90] 정복 이후,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불가리아 왕국이 나눠 점령했다.
1915년 말, 프랑스와 영국군이 테살로니키에 상륙하면서 그리스 정부에게 동맹국에게 전쟁을 선포하라고 압박하였다. 그러나, 친독일 성향의 콘스탄티노스 1세 국왕은 연합국 원정군이 상륙하고 친연합국인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 이런 요구를 거부했다.[91] 그리스 국왕과 연합국 사이의 마찰은 국론 분열이 축적되어 왕당파와 테살로니키의 베니젤로스 임시 정부 간 분열로 이어졌다. 아테네에서 연합국파와 왕당파 간의 긴 협상과 노엠브리아나(Noemvriana)라고 부르는 무장 투쟁 끝에 왕이 폐위되었으며 그의 둘째 아들 알렉산드로스가 새로운 국왕이 되었다. 이후 그리스는 공식적으로 연합국 편에 참전했다.
비행기의 폭격을 피해 참호에 들어간 불가리아 군인.
처음에는 마케도니아 전선이 정적이었다. 프랑스군 및 영국군은 1916년 11월 19일 모나스티르 공세에서 큰 손실을 겪고 비톨라 주변의 마케도니아 영토 일부를 점령했으며, 전선의 안정을 가져왔다.
세르비아 및 프랑스군은 1918년 9월 독일 및 오스트리아-헝가리군 대부분이 후퇴한 이후에야 전진할 수 있었다. 불가리아군은 전쟁에서 도브로 폴 전투에 큰 패배를 겪었다. 결국, 불가리아는 2주 후인 1918년 9월 29일 항복했다.[92] 독일 최고 사령부는 전선을 유지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지만, 이 군대는 전선을 유지하기에 너무 약했다.[93]
마케도니아 전선 자체가 붕괴되면서 연합군은 부다페스트 및 빈으로 향하는 도로를 확보했다. 힌덴부르크와 루덴드로프는 확실히 전략 및 작전상 균형이 확실히 무너졌다고 결론내리고 불가리아의 붕괴 이후 하루만에 즉각적인 평화를 요구했다.[94]
오스만 제국 [ 편집 ]
오스만 제국은 1914년 8월 비밀 조약인 오스만-독일 동맹을 맺은 이후 동맹국에 합류했다.[95] 오스만 제국의 참전은 러시아의 코카서스 영토 위협과 수에즈 운하를 통한 영국-인도 간 연결을 끊을 수 있는 위협을 가지고 있었다.
아나톨리아 자체에 살고 있던 오스만 터키인은 그리스인, 아시리아인, 아르메니아인 등의 민족을 그리스인 집단 학살, 아르메니아인 집단 학살, 아시리아인 집단 학살 등 대량학살하며 러시아 및 영국 측에서 참전하는 영향을 주었다.[96]
이에 대해, 영국과 프랑스는 오스만 제국을 침공하여 갈리폴리 전역(1915년)과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개전했다. 갈리폴리에서는 오스만 제국이 영국군, 프랑스군,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군단을 성공적으로 격퇴했다. 대조적으로,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쿠트 공방전(1915~1916년)에서 패배한 이후 영국군이 1917년 3월 바그다드를 점령했다. 오스만 제국은 쿠르드족 및 투르크맨족과 연합하여 전투한 데 반해 영국군은 아랍인 및 아시리아인과 연합하여 전투했다.
또한, 서쪽으로는 오스만 제국이 수에즈 운하에 대한 공격을 1915년, 1916년 두차례 했으나 점령하지 못했다. 8월에는 독일 제국-오스만 제국 연합군이 로마니 전투에서 ANZAC 산악 사단과 52 (로우랜드) 보병 사단에게 패배했다. 이 승리에 이어, 영국 육군과 이집트 원정군은 시나이반도를 횡단하여 12월에 마그드하바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을 후퇴시키고 1917년 1월 라파 전투에 승리하면서 이집트 시나이와 오스만령 팔레스타인 경계까지 진격했다.
1917년 바스라의 메소포타미아 파견군의 교전 목록이 적힌 크리스마스 카드.
러시아군은 코카서스에서 일방적인 전투를 치렀다. 오스만 군대의 최고 사령관인 엔베르 파샤는 러시아가 정복했던 중앙아시아 지역을 다시 점령하고자 하는 야심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지휘관으로써는 별로였다.[97] 그는 1914년 12월 10만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코카서스에서 러시아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겨울에 러시아군에 대한 정면공격을 하자고 주장했지만, 사리카미스 전투에서 86%의 병력을 잃고 오스만군이 패배했다.[98]
1914년 12월, 독일의 지원을 받은 오스만 제국군은 영국군과 러시아군 간의 연결을 끊고 카스피 해의 유층지대를 점령하기 위해 페르시아(현 이란)을 침공했다.[99] 페르시아는 표면상 중립국이었지만 실제로는 영국군과 러시아군의 영향 하에 있었다. 오스만군과 독일군은 쿠르드족 및 아제르바이잔인의 대규모 지원을 받았을 뿐 아니라 카슈카이인, 탕기스탄인, 루르인, 캄세흐인의 지원을 받았으며, 프랑스군 및 영국군은 그리스인과 아시리아인과 아르메니아인의 지원을 받았다. 페르시아 전역은 1918년까지 지속되어 오스만 제국 및 동맹국의 패배로 끝났지만, 1917년 아르메니아와 아시리아인을 이끌며 오스만 제국에 대해 가장 강하게 공세를 하던 러시아가 휴전하면서 보급선이 끊기고, 무기 및 양에서 열세가 되면서 북부 메소포타미아의 영국군이 후퇴해야 했다.[100]
1915년부터 1916년까지 러시아군의 지휘관이었던 니콜라이 유데니치는 남부 코카서스에서 대부분의 터키군을 몰아내면서 승리자로 자리잡았다.[98] 1917년, 대공 니콜라우스 니콜레비치는 코카서스 전선의 지휘관이 되었다. 니콜라우스는 정복한 지역에서 러시아-조지아 철도를 계획하여 1917년에 공세할 새로운 보급품을 얻으려고 했다. 그러나, 1917년 3월(러시아 혁명 이정 율리우스력으로는 1917년 2월) 러시아 2월 혁명을 통해 황제가 퇴위하자 러시아 코카서스 군은 붕괴하기 시작했다.
영국 외무부가 아랍인을 선동하면서 일어난 아랍 반란은 1916년 영국의 지원을 받은 메카의 후세인 빈 알리를 중심으로 일어난 메카 전투서부터 시작했으며, 다마스쿠스에서 오스만군이 항복하면서 끝났다. 메디나의 오스만군의 지휘관인 파흐리 파샤는 메디나 공방전에서 약 2년 반동안 저항했다.[101]
이탈리아령 리비아와 영국령 이집트 국경의 세누시족은 터키의 선동에 힘입어 무장하여 연합군과 소규모 게릴라전을 벌였다. 영국은 세누시 전역에서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12,000명이나 투입해야 했다. 이 반란은 1916년 중순 완전히 끝나게 되었다.[102]
오스만 제국이 고전을 면치 못하자, 독일 제국은 독일 아시아 군단을 파병하였다.
오스만 전선에서 연합국의 총 사상자는 65만명이다. 오스만군의 총 사상자는 75만명(325,000명 사망, 425,000명 부상)이다.[103]
이탈리아의 참전 [ 편집 ]
트롤 지방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육군.
1916년 8월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이탈리아 사이 일어난 도베르도 전투 를 묘사한 그림.
이탈리아는 삼국 동맹의 일환으로 1882년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가 가지고 있던 트렌티노, 오스트리아 연해 지대, 피우메 (현 리예카), 달마티아 지역을 확보하고 싶었다. 이탈리아는 1902년 프랑스와 비밀 조약을 맺어 삼국 동맹을 무효화시켰다.[104] 전쟁이 발발하자 이탈리아는 삼국 동맹은 방어적 조약이고 오스트리아-헝가리는 공격자라는 이유로 참전을 거부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정부는 프랑스령 튀니지를 대가로 이탈리아의 중립을 이루기로 했다. 이에 대해, 연합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가 패배할 경우 남부 티롤, 오스트리아 연해 지대, 달마티아 연안 지대를 주는 조건으로 참전하게 했다. 연합국하고의 이 협상은 1915년 런던 조약으로 공식화되었다. 또한, 1915년 4월 연합국의 터키 침공에 자극받아 이탈리아는 삼국 협상에 가입하고 5월 23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게 선전포고했다. 다섯달 후, 이탈리아는 독일에게도 선전포고했다.
이탈리아의 참전은 국무총리 안토니오 사란드라, 외무부 장관 시드니 소니노,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비밀리에 추진했다.
1915년 2월 16일, 오스트리아와의 동시 협상에도 불구하고, 런던의 특사가 이탈리아가 협상국에 참여할 경우 좋은 거래를 해 주겠다는 제안을 했다. … 최종 선택에는 러시아군이 3월 카르파티아 산맥에서 승리했다는 뉴스의 도움을 얻었다. 사란드라는 협상국의 승리가 눈앞에서 보이기 시작한다고 생각했고, 그는 신속하게 합의를 하기 위해 몇 가지 요구 사항을 철회하라고 특사에게 지시했지만 이익 공유에 관해 너무 늦게 도착한다고 불안해했다. … 런던 조약은 4월 26일에 채결되었으며 이탈리아는 1개월 내에 전투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 5월 4일이 돼서야 사란드라는 삼국동맹을 폐기한다고 서명했다.[105]
군사적으로 이탈리아는 우월했다. 그러나, 이러한 이점은 전투가 일어나는 지형이 험하고 전략 및 전술의 부적절한 사용으로 인해 사라져버렸다. 정면 공격의 철저한 지지자였던 육군 원수 루이지 카도르나는 슬로베니아 고원으로 침입해 류블랴나를 점령하고 빈을 위협할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카도르나의 계획은 견고한 율리안알프스 산맥와 크라스의 험난한 지형, 참호전과 같은 기술적인 변화를 따라잡지 못한 계획이었으며 그 결과 엄청난 인명을 희생하고 교착 상태로 멈춰 버렸다.
트렌티노 전선에서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수비하기 유리한 산악 지형을 이용했다. 개전 초 전략적인 후퇴 이후 전선은 큰 변화가 없었으며 오스트리아의 카이저쉬젠(Kaiserschützen)과 스텐드쉬젠(Standschützen)이 이탈리아의 알피니의 여름에 걸친 백병전을 막아냈다. 1916년 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아시아고 알토피아노에서 베로나와 파두아를 향해 공세를 시작했으나(트렌티노 공세), 별 소득이 없었다.
1915년 초, 이탈리아는 트리에스테 북동부의 소카 강(이손초 강)을 따라 11번의 공세를 진행했다. 11번의 공세는 모두 고지대에 위치했던 오스트리아-헝가리가 격퇴했다. 1916년 여름 도베르도 전투에서 이탈리아군이 승리하여 고리치아를 점령했다. 이 작은 승리 이후에는 이탈리아군이 고리치아 동부의 바니시스 플라티우와 카르스트 플라티우를 중심으로 공세를 진행했지만 1년 가까이 전선에 변화가 없었다. 1917년 가을에는 동부 전선이 동맹국에게 유리한 상황으로 진행되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독일군의 스톰트루퍼(Stormtrooper)와 알펜크롭스 엘리트원을 포함한 다수의 병력을 증원받았다.
동맹국은 1917년 10월 26일 독일 제국을 주도로 한 분쇄 작전을 시작했다. 코바리드 지역에서 일어난 카포레토 전투에서 독일군이 승리했다. 이탈리아군은 100 km 넘게 후퇴했으며, 피아베 강 전투에서야 전선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군이 카포레토 전투에서 대규모의 손실을 입었기 때문에 이탈리아 정부는 소위 18세 이상의 모든 남성을 소집하는 “99 소년들”(Ragazzi del ’99)을 진행했다. 1918년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피아베 강 전투에서 패배를 겪었으며, 결정적으로 그해 10월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에서 패배했다. 11월 1일, 이탈리아 해군은 새로운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주으로 전력을 넘기는 것을 막기 위해 풀라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의 대부분을 파괴했다. 11월 3일, 이탈리아군은 바다를 건너 트리에스테를 점령했다. 같은 날에 빌라 지우티 휴전을 체결했다. 1918년 11월 중반, 이탈리아군은 오스트리아 연해 지대 전체를 장악하고 런던 조약에서 이탈리아에게 보장된 달마티아 전체를 점령했다.[106] 1918년 11월 전쟁이 끝날 무렵,[107] 제독 엔리코 밀로는 자신 스스로를 이탈리아령 달마티아의 총독으로 선포했다.[107]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1918년 11월 항복했다.[108][109]
루마니아의 참전 [ 편집 ]
이 부분의 본문은 이 부분의 본문은 제1차 세계 대전과 루마니아 입니다.
루마니아는 1882년부터 동맹국과 동맹을 맺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시작되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에게 선전포고를 했기 때문에 루마니아가 참전할 의무가 없다고 말하면서 중립국을 선언했다. 협상국이 루마니아가 동맹국에게 선전포고하는 대가로 트란실바니아와 바나트와 같이 루마니아인이 많이 사는 큰 영토를 보장해주자, 1916년 8월 27일 루마니아 정부는 협상국에 가입하여 트란실바니아를 공격하여 러시아의 제한된 지원을 받고 참전했다. 루마니아의 공세는 초기에는 성공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을 밀어냈지만 이후 동맹국의 반격으로 인해 다시 루마니아-러시아 국경으로 후퇴해야 했다.[110] 동맹국이 부쿠레슈티 전투에 승리하면서 1916년 12월 6일에 루마니아의 수도가 함락되었다. 1917년에는 몰도바 지역에서 전투가 계속되면서 동맹국은 지루한 교착 상태로 빠지게 되었다.[111][112] 1917년 말 10월 혁명으로 인해 러시아가 항복하자, 루마니아는 1917년 12월 9일 동맹국과 휴전해야 했다.
1918년 1월, 루마니아군은 러시아군이 포기한 베사라비아 지역을 점령했다. 비록 루마니아와 볼셰비키 러시아 정부 사이 1918년 3월 5일~9일에 2달 이내 베사라비아에서 철수한다는 조약을 맺었지만, 1918년 3월 27일 루마니아 통합 지역 의회가 루마니아로 합병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면서 베사라비아를 자국 영토로 병합했다. 1918년 5월 7일에는 부쿠레슈티 조약을 맺으면서 동맹국과 평화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에서 루마니아는 동맹국과 종전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에게 영토 할양이 이루어지고 카르파티아 산맥에 대한 통행권이 주어졌으며, 독일에게 석유 채굴권이 부여되었다. 그 대신 동맹국은 루마니아가 베사라비아를 장악하는 것을 인정했다. 이 조약은 1918년 10월 알렉산드루 마르힐로만 정부가 무효화하면서 1918년 11월 10일 명목상 전쟁이 재개되었다. 다음 날, 부쿠레슈티 조약은 콩피에뉴에서 휴전이 이루어지면서 무효화되었다.[113][114] 루마니아는 현대 국경을 기준으로 1914년에서 1918년동안 군인과 민간인을 포함하여 748,000명이 사망했다.[115]
동부 전선 [ 편집 ]
초기 전투 [ 편집 ]
1917년, 독일군의 공격을 기다리는 참호의 러시아군.
서부전선이 교착상태로 빠진 반면, 동부유럽의 전쟁은 계속되었다. 러시아군의 초기 계획은 오스트리아의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과 독일의 동프로이센을 동시에 침공하는 계획이었다. 비록, 갈리치아를 향한 러시아군의 초기 공세는 성공적이었으나 동프로이센을 향한 공세는 1914년 8~9월에 일어난 타넨베르크 전투와 마수리아 호 전투에서 파울 폰 힌덴부르크와 에리히 루덴도르프의 분전으로 저지되었다.[116][117] 러시아의 덜 발달된 산업 기반과 비효율적인 군사 명령 체계가 이후 벌어진 사건들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15년 봄에는 러시아군이 갈라치아 지역에서 후퇴했으며, 5월에는 동맹국이 폴란드 남부 지역에 돌파구를 만들었다.[118] 8월 5일에는 동맹국이 러시아군을 후퇴시키며 바르샤바를 점령했다.
러시아 혁명 [ 편집 ]
이 부분의 본문은 이 부분의 본문은 러시아 혁명 입니다.
1916년 6월 러시아군이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 동부를 향한 브루실로프 공세가 성공했지만,[119] 러시아 정부의 전쟁에 관한 불만이 증가하고 있었다. 공세의 성공은 승리를 위해 지원해야 하는 다른 장군이 군사를 내주기 꺼려한 탓에 약화되었다. 연합군과 러시아군은 8월 27일 루마니아가 연합국으로 참전 할 때 일시적으로 소생했다. 독일군이 트란실바니아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을 지원하는 동안, 남쪽에서 독일-불가리아군이 공격하면서 12월 6일에는 부쿠레슈티가 동맹국에게 함락되었다. 한편, 러시아의 차르 니콜라이 2세가 전쟁을 계속 끌면서 러시아 내 불안 상황이 고조되었다. 알렉산드라 황후의 무능한 통치는 시위를 앞당기도록 했고, 1916년 말에는 황후가 좋아하는 그리고리 라스푸틴이 살해당했다.
1917년 3월, 페트로그라드에서 시위가 일어나 니콜라이 2세가 퇴위하고 러시아 임시 정부가 뒤를 이었으나, 이 정부의 힘은 약했고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사회주의자와 연대하여 겨우 유지했다. 이러한 상황은 전선과 후방 모두에서 혼란을 가중시켰다. 육군은 점점 비효율적으로 변해갔다.[118]
임시 정부에 대한 불만과 취약함으로 블라디미르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당의 인기가 높아졌고, 이들은 전쟁을 그만둘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자 1917년 11월에는 볼셰비키의 무장 봉기가 성공하여 볼셰비키가 정권을 장악했고, 12월에는 독일과 휴전 협상을 맺었다. 처음에 볼셰비키는 독일의 요구를 거절했으나, 독일군이 무저항으로 우크라이나 전역을 장악하자 1918년 3월 8일 러시아와 동맹국 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이 맺어지게 된다. 이 조약에서는 핀란드, 발트 3국, 폴란드와 우크라이나의 대부분을 동맹국에게 할양하는 등 광대한 영토가 넘겨졌다.[120] 러시아 지역에서 독일군이 명백하게 승리했지만, 이전 러시아 지역에 주둔하기 위해 필요한 독일군의 인력이 너무 많아 이후 일어난 춘계 공세가 실패하고 식량과 물자 보급도 상당히 뒤처지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이 맺어지면서 협상국은 해체되었다. 이후 연합국은 독일이 러시아의 자원으로 팽창하는 것을 저지하고 러시아 내전에서 백군을 지원하기 위해 러시아로의 소규모 침공을 단행했다.[121] 연합군은 러시아 북부 개입의 일환으로 아르한겔스크와 블라디보스토크에 상륙했다.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 편집 ]
1918년 블라디보스토크의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이 부분의 본문은 이 부분의 본문은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입니다.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은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을 위해 연합국에 동참하여 전쟁에 참여한 군단이다. 러시아 내의 군단은 1917년 만들어졌으며, 1917년 12월에는 프랑스(미국인 자원군 포함), 1918년 4월에는 이탈리아에서도 만들어졌다.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은 1917년 7월 현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일어난 즈보로프 전투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을 이겼다. 이 승리 이후 체코슬로바키아 자원군 수가 늘어나면서 체코슬로바키아의 주 군사가 되었다. 바흐마흐 전투에서는 독일 제국군에게 승리하면서 휴전 협정을 맺도록 강요했다.
러시아 지역에서는 볼셰비키에 대한 러시아 내전이 발발하면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은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장악하고 시베리아의 모든 주요 도시를 점거했다. 이 군단이 예카테린부르크 근처까지 나타나면서 1918년 7월 볼셰비키는 로마노프 왕가의 처형을 단행하게 된다. 이 군단은 이 사건이 일어난 지 7일도 되지 않아 도시를 장악한다.
러시아의 유럽 지역 항구가 안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군단은 블라디보스토크로의 긴 우회로를 통해 대피했다. 1920년 9월 미국 선박 헤프론을 통해 마지막으로 군단이 떠나게 되었다.
동맹국의 평화 협상 제안 시작 [ 편집 ]
1916년 12월, 베르됭 전투가 10달 지나고 루마니아로 공세를 성공적으로 끝내자 독일은 연합군과의 평화 협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곧, 미국의 대통령인 우드로 윌슨이 조정자로 개입을 시작하면서 양측의 조건을 듣기 시작했다.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전쟁내각은 독일의 제안은 연합군 사이를 분열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초기의 분노와 숙고 이후, 윌슨에게는 별도의 노력으로 미국이 “잠수함 작전”으로 인해 독일과 전쟁하기 직전이라는 신호를 들었다. 연합군은 윌슨의 제안에 대해 논의하는 동안, 독일은 “서로의 직접적인 견해 교환”에 대해서 거부했다. 독일의 응답을 보고 연합군 정부는 1917년 1월 14일 자유롭게 명확한 요구를 제시했다. 그들은 피해를 보상받고, 점령 지역에서 독일군이 물려나며, 프랑스, 러시아, 루마니아, 기타 참전국에 대한 배상을 요구했다. 이 요구에는 이탈리아인, 슬라브인, 루마니아인, 체코슬로바키아인에 대한 해방 및 “자유롭고 통일된 폴란드”를 건설하라는 요구도 했다. 안보에 대해서는 연합군은 평화를 유지할 제제방법으로 미래의 전쟁을 제한하거나 예방할 방법을 모색했다.[122] 독일이 어떠한 특정 제안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협상은 실패하고 협상국은 독일의 제안을 거부했다. 윌슨에게 협상국은 동맹국이 점령한 모든 연합군 영토에서 나오며 손해 배상금을 물 때까지 평화 협상을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123]
미국의 참전 [ 편집 ]
미국은 전쟁 중 영국과 독일 간에서 중립적 입장을 표명하고 있었다.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계속적으로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공격에 대해서 방관하지 않겠다.”라는 의사를 표명했고, 독일은 이에 대해 이러한 공격을 중단할 것임을 몇 차례 약정했다.
그러나 1917년 1월 16일, 독일 외무 장관 아서 치머만이 멕시코 주재 독일 제국 대사 펠릭스 폰 에카르트에게 보냈던 암호 전문 치머만 전보에서 “멕시코가 미국을 공격할 경우, 멕시코가 1848년에 미국에 빼앗긴 모든 영토를 되찾을 수 있도록 해주겠다.”라는 내용 때문에 미국은 참전 쪽으로 기울어졌다. 얼마 후 독일이 유보트를 이용해 영국 배를 공격했는데, 그 배에 탔던 많은 미국인들이 죽었다. 따라서 윌슨 대통령은 의회에 독일에 선전 포고할 것을 1917년 4월 6일에 제의했다. 이는 미국 영토에 대한 독일의 공격에 한한다는 내용으로 하원 결의안 373:50, 상원 82:6으로 승인되었다. 12월 6일에는 오스트리아에도 선전 포고를 하여, 그 범위가 이탈리아 전선까지 확대되었다.
종전 [ 편집 ]
1917년, 미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한 이래, 연합국은 반격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결국, 동맹국의 군대가 차례대로 투항했다. 불가리아가, 그 다음 오스만 제국, 오스트리아 순으로 항복했다. 오스트리아가 항복한 같은 날, 독일의 킬(Kiel) 군항에서는 해군 수병에 의한 폭동이 일어났다. 파급 효과는 엄청났는데, 곧바로 독일 각지에서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여 군경과 실랑이를 벌였다. 결국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제위를 포기하고 네덜란드로 망명했다. 독일은 군주제를 포기하고 공화정으로 전환하였으며, 1918년 11월 11일 연합국과 휴전을 맺었다. 이렇게 해서 약 9백만이 전사한 이 전쟁은 끝이 났다.
결과 [ 편집 ]
동맹국이 연합국에게 전쟁에 지면서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 오스만 제국은 세브르 조약, 오스트리아는 생제르맹 조약, 헝가리는 트리아농 조약, 불가리아는 뇌이 조약을 맺으면서 오스만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해체되고, 많은 영토와 인구를 잃었다. 이로 인해 발칸 반도와 중동 지방에서 많은 독립국들이 생겨났다.
독일의 경우 해외 식민지를 모두 포기하였고, 본토 손실은 알자스와 로렌을 프랑스에 넘겨주고 폴란드 지역을 독립시킬 정도의 적잖은 영토를 잃었다. 또한 장기간 전쟁수행으로 인하여 인플레이션이 일어났고, 실직자가 속출하였다. 더욱이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한 과다한 배상금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원인이 되었다.
전쟁 이후의 세계 [ 편집 ]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지에서는 민주주의가 발전했다. 일본은 오세아니아의 군도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말미암아 반성보다 지독한 가난과 배상금에 대한 것에 시달렸으며 오스만 튀르크도 세브르 조약을 맺음으로써 영토가 크게 줄어들었다(1922년 해체, 1923년 터키 공화국 수립).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도 각각 생제르맹 조약, 트리아농 조약을 맺음으로써 영토가 크게 줄어들었다. 불가리아는 뇌이 조약으로 남도브루자를 루마니아에 떼어주었다.
이탈리아는 승전국이었으나 연합국에게 영토를 보장받기는커녕 냉대를 받았다. 결국 1922년에 베니토 무솔리니에 의한 파시스트 정권이 수립된다. 이탈리아와 마찬가지로 중국은 연합국임에도 불구하고 산둥 반도에 대한 이권을 돌려받지 못하였다.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중앙유럽의 많은 국가는 독립하였으며, 독립을 조건으로 영국을 도왔던 인도는 그 약속이 무산되자 지속적인 투쟁 운동을 시작했다.
한편,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은 민족 자결주의를 제창하였으며, 전쟁의 방지와 세계의 평화를 위해 국제 연맹을 설립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로써 국제 연맹이 설립되었으나, 정작 미국은 의회의 반대로 가입에 실패하였다. 결국 다시 고립의 길을 걸었다.
연표 [ 편집 ]
이 부분의 본문은 이 부분의 본문은 제1차 세계 대전 연표 입니다.
1차 대전의 결과와 의의, 그리고 그 영향 [ 편집 ]
참호 건너기에 실패한 탱크
동맹국과 러시아의 전후 결과 [ 편집 ]
독일 제국 [ 편집 ]
바이마르 공화국 탄생
막대한 배상금 지불
독일의 일부 영토였던 폴란드 땅이 독립하게 됨
알자스-로렌: 프랑스에 병합
아프리카 식민지
– 르완다, 부룬디(벨기에 위임 통치령)
– 탄자니아(영국 위임통치령)
– 카메룬, 토고: 영국과 프랑스의 분할
– 산둥반도는 일본에 조차
– 독일 제국의 태평양 식민지는 미국과 일본이 분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편집 ]
폴란드(신생국), 이탈리아에 일부 영토 할양.
유고슬라비아 왕국: 크로아티아, 체코슬로바키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슬로베니아가 연합 왕국으로 독립한 후 유고슬라비아 왕국 건설
헝가리는 오스트리아에서 독립한 왕국이 됨, 루마니아에 일부 영토 할양.
오스트리아 자체는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으로 탄생
러시아 제국 [ 편집 ]
발트 3국 및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폴란드, 핀란드 독립
루마니아에 일부 영토 할양
오스만 제국 [ 편집 ]
사상자 [ 편집 ]
이 부분의 본문은 이 부분의 본문은 제1차 세계 대전 사상자 입니다.
독일, 러시아, 프랑스 순으로 희생자를 많이 냈다. 반대로 일본은 희생자를 가장 적게 냈다.
기술 [ 편집 ]
이 전쟁으로 인해 과학 기술이 발전했다. 그러나 독가스와 같은 인류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무기들도 개발되어 나왔다. 최초의 독가스는 독일군이 사용하였으며, 연합군도 같은 무기로 대응했다. 독가스에 대한 유일한 대응책은 양측 모두 방독면 외에는 없었다. 독가스가 사용된 것은 마른 전투 이래 기관총, 철조망, 참호선으로 고착화된 전선을 뚫기 위해서였다. 탱크도 참호선을 뚫기 위해 개발되었으며, 대포도 점점 대구경화되었다. 장거리 사격 능력을 보완하기 위해 열차포(독일의 크루프 열차가 유명하다)도 등장하였다.
기술의 개선은 전방에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대표적인 사례로 생리대를 들 수 있다. 제1차 세계 대전은 여성의 사회 진출을 가속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는데, 이러한 여성을 위해 생리대가 개발되었다.
명언 [ 편집 ]
“ 만일 불타는 꿈속에서
그가 실려가는 마차 뒤를 따라 걸을 수 있다면
……
독가스 찬 폐 속에서 쿨렁쿨렁 쏟아져 나오는 피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
친구여 영광의 이야기를 졸라대는 아이들에게
그렇게 진심으로 거짓말을 하지는 못할 테지
그 오래된 거짓말 말일세
“조국을 위해 몸바치는 것은 고귀한 영예라고.” ” [131] — 윌프레드 오언, 《고귀한 영예》, 인류이야기 현대편 1에서 재인용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벌어진 전쟁의 참상은 많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독일의 화가 오토 딕스(독일어: Otto Dix, 1891년 ~ 1969년)는 참호전의 참상을 그린 〈전쟁〉(1929년 작)에서 참호 속에 흩어진 사지와 흙더미에 거꾸로 박힌 시체, 피범벅이 된 진흙탕을 묘사하였다. 하필이면 왜 저렇게 끔찍하게 묘사하였느냐는 사람들의 질문에 딕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바로 저랬다. 나는 보았다.”[132]
한편 영국의 시인 윌프레드 오언(영어: Wilfred Owen, 1893년-1918년)은 전쟁의 참상을 고발한 반전시 《고귀한 영예》를 발표하였다.
모병 포스터 [ 편집 ]
미국 [ 편집 ]
미국의 가장 유명한 모병 포스터 “샘 아저씨는 네가 육군에 지원하기를 원한다.” ( 1917년 작)
미국의 역대 신병 모집 포스터 중 가장 유명한 것으로, 미국을 상징하는 캐릭터인 엉클 샘이 그려진 포스터가 있다. 아래 글귀에는 “샘 아저씨는 네가 육군에 지원하기를 원한다.”라고 쓰여져 있다. 미국 해군에서도 육군 못지않게 모병 포스터를 많이 발행했다.
영국 [ 편집 ]
영국의 모병 포스터 “누가 빠졌습니까? 당신입니까?”
영국도 미국 못지않게 신병모집 포스터를 만들었다. 영국은 독일보다 인구가 부족하여 미성년자들까지 징집한 적이 있었다(주로 공부할 의지가 없는 남학생들이 해당되었다). 실제로 유틀란트 해전(1916년 덴마크 근처의 유틀란트 만에서 영국 해군과 독일 해군 사이에서 벌어졌던 전투)에 참전한 어떤 수병의 나이는 만15세였다고 한다.
BE READY? JOIN NOW! : 준비가 되었습니까? 지금 참여하십시오!
TAKE UP THE SWORD OF JUSTICE : 정의의 칼을 잡으십시오.
WHO’S ABSENT? IS IT YOU? : 누가 빠졌습니까? 당신입니까?
THERE’S ROOM FOR YOU ENLIST TO-DAY : 당신이 오늘 지원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WOMEN OF BRITAIN SAY – “GO!” : 영국의 여성들은 말합니다. “가세요!”
DADDY, WHAT DID YOU DO IN THE GREAT WAR? : 아버지, 아버지는 1차 대전 때 무엇을 하셨나요?
미디어 [ 편집 ]
연합군이 독일의 방어선을 향해 폭격하는 모습 프랑스와 영국의 제1차 세계 대전 시대 전차
해리 폰 틸저와 피어레스 4중주단이 연주. 1918년 3월 컬럼비아 레코드의 빈센트 브라이언이 녹음. “The Makin’s of the U.S.A.”해리 폰 틸저와 피어레스 4중주단이 연주. 1918년 3월 컬럼비아 레코드의 빈센트 브라이언이 녹음.
아서 필즈와 피어레스 4중주단이 연주. 1918년 5월 에디슨 레코드의 제임스 A. 브레넌이 녹음. “We’re All Going Calling on the Kaiser”아서 필즈와 피어레스 4중주단이 연주. 1918년 5월 에디슨 레코드의 제임스 A. 브레넌이 녹음.
같이 보기 [ 편집 ]
각주 [ 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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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 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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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링크 [ 편집 ]
제1차 세계대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
제1차 세계대전은 20세기 최초의 대규모 국제 분쟁으로 기록된다.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왕가 후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그의 부인 소피 배공비가 암살되면서 1914년 8월에 시작되어 이후 4년간 여러 국가로 확전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연합국 및 동맹국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연합국인 영국, 프랑스, 세르비아, 러시아 제국(후에 이탈리아, 그리스, 포르투갈, 루마니아, 그리고 미국이 가세함)과 동맹국인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후에 오스만투르크와 불가리아가 가세함)가 서로 대항하여 전쟁 하였다.
교착 상태
특히 서부 전선의 전투와 참호전에서 큰 희생으로 인해 교착 상태에 빠지자 신속하게 결정적인 승리를 올리겠다는 양측의 초기 열정은 희미해져 갔다. 서부 전선의 참호 및 요새는 대략적으로 북해에서 스위스 국경까지 최장 475마일까지 확대되었으며, 미국과 서유럽의 병사들이 가장 맣이 참전 하였다. 광범위한 동부 전선은 대규모 참호전이 불가능했지만 전투 규모는 서부 전선과 마찬가지였다. 북부 이탈리아, 발칸 및 오스만투르크에서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해전뿐만 아니라, 처음으로 공중전도 벌어졌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미국
1917년 4월, 독일이 무제한 잠수함을 이용한 전쟁을 선언하자 고립주의를 표명하던 미국이 참전함에 따라 전쟁에 결정적인 변수가 발생했다. 존 J. 퍼싱(John J. Pershing) 장군의 지휘 아래 미원정군(AEF)의 새로운 병력과 군수물자가 공급되고 독일 항구에 대한 대대적 봉쇄가 강화되면서 전쟁의 균형이 연합국에 유리한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러시아 혁명
초기에는 이렇게 연합국에 유리한 상황은 동부지역에서 펼쳐진 사건들로 인해서 힘의 균형이 상쇄 되었다. 연합국의 주축이었던 러시아는 1917년 초부터 혼란에 빠져 있었다. 그 해 2월, 제정 러시아 정부가 전쟁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함으로 인해 대중 폭동인 2월 혁명이 일어났다. 이 혁명으로 황제 니콜라스 2세가 물러나고 진보주의 및 사회주의 당의 임시 정부에게 권력이 넘어감으로써, 궁극적으로는 혁명적 사회주의 당원인 알렉산더 케렌스키의 통치 아래에 있게 되었다. 이렇게 다원적 민주주의를 짧게 경험하는 것은 혼란을 가중시켰는데, 그해 여름동안 참전으로 인한 지속적인 악화와 심각해진 경제난은 러시아 노동자, 군인 및 선원들로 하여금 폭동을 일으키도록 하였다 (“The July Days”).
1917년 10월 24-25일, 블라드미르 레닌의 지휘 아래에 있던 볼세비키(좌익 사회주의자) 군대는 주요 정부 건물들을 장악하고 겨울궁전을 급습한 다음, 러시아의 수도 페트로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신정부 청사를 장악했다. 역사상 최초로 성공한 마르크스주의자 쿠테타인 “사회주의 10월 대혁명”은 비효율적인 임시 정부를 없애고 레닌의 통치 하에 있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을 세웠다. 새로운 소비에트 공화국의 급진적인 사회, 정치, 경제 및 농업 개혁은 전후 수년간 서방 민주주의 정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들은 유럽 전역에서의 공산주의 확산을 너무 두려워한 나머지 1920년대와 1930년대에는 우익 정권(아돌프 히틀러의 나치 독일 정부 포함)과 타협하거나 유화 정책을 쓰는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이 유럽에 끼친 즉각적인 영향은 러시아 영토 내에서 오랜 기간동안 끔찍한 내전들이 지속되었다는 것과(1917-1922) 새로운 볼세비키 세력이 독일 카이저 제국과 별도의 평화 조약을 체결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었다. 독일의 요구 사항 때문에 협상이 결렬되자, 독일군은 동부 전선에서 대대적인 공세를 펼쳤고, 이에 의해서 1918년 3월 6일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연합군 진격, 동맹국 항복
독일군이 1918년 늦겨울에 볼세비키 러시아를 철수하게 만들고 여름에 파리의 문턱으로 진군하는 성과를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연합군은 오스트레일리아에 있는 마른강에서 독일군에 대한 반격을 시도했다. 연합군은 1918년 여름과 가을에 걸쳐 서부 전선에서 독일군을 꾸준히 밀어냈다(“백일 공세”).
9월과 10월에 각각 불가리아와 오스만 제국이 항복하는 것을 시작으로 동맹국이 항복하기 시작했다. 11월 3일, 오스트리아-헝가리 군대는 이탈리아 파투아에서 휴전협정에 서명했다. 독일에서는 킬에서 발생한 선원 폭동이 독일 해안 도시와 하노버, 프랑크푸르트 및 뮌헨 등지의 주요 지자체 도시에서 발생한 광범위한 폭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노동자 및 군인 의회는 소비에트 모델을 기반으로 소위 “독일 혁명”의 불을 당겼다; 바바리아에서는 독립 사회 민주주의자(USPD) 쿠르트 아이스너의 “공화국 위원회”(Räterrepublik)가 설립되었다. 프레드리히 에베르트가 수장으로 있는 강력한 독일 사회 민주주의당(SPD)은 새로 설립된 위원회를 불안정한 요소로 보고, 이것 대신에 의회 개혁 및 평화를 위해 독일 대중 의견의 필요성을 옹호했다.
휴전
1918년 11월 9일, 독일군 사령관에 의해 버림 받고 정치적인 불안감이 만연한 가운데 황제(카이저) 윌리엄 2세는 독일 왕좌에서 내려왔다. 같은 날, SPD 대표인 필리프 샤이데만은 독일을 공화국으로 선포했고 임시 정부를 프레드리히 에베르트가 이끌었다. 이틀후, 카톨릭 중앙당(Zentrum) 대표 마티아스 에르츠베르거가 이끄는 독일 대표단은 연합국 사령관인 프랑스 육군 원수 페르디낭 포슈의 지휘 아래에 있는 승전 연합국의 대표단과 콩피에뉴 숲의 열차에서 만나서 휴전 조항에 동의했다.
1918년 11월 11일(11/11) 오전 11시, 서부 전선의 전투가 중단 되었다. 그당시 사람들이 “대전”이라고 말하던 전쟁은 끝이 났지만, 국제적,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양상 전반에 가져온 파장은 향후 수십 년간 계속 남아 있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피해
제1차 세계대전은 근대 역사에서 가장 파멸적인 전쟁 중 하나가 되었다. 전쟁 결과로 천만 명에 달하는 군인들이 죽었으며, 이는 이전 1백년간 벌어진 모든 전쟁의 군대 사망자 수를 훨씬 초과하는 수치였다. 정확한 사망자 통계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대략적으로 2,100만명의 군인이 전투에서 부상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모든 참전국에 발생한 엄청난 피해는 일부는 기관총 및 독가스전과 같은 새로운 무기에 기인했으며 점점 기계화되는 전쟁의 성격에 맞도록 전술을 구사하지 못한 군수뇌부에도 책임이 있었다. 특히 서부 전선에서의 소모전 정책은 수십만 병사의 생명을 앗아갔다. 1916년 7월 1일은 하루 만에 가장 심각한 인명 피해가 발생한 날로써, 프랑스의 솜므(Somme)에서만도 영국군 5만 7,000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독일과 러시아에서의 군 사망자수는 최고치였다: 각각 사망자 수가 1,773,700명과 1,700,000명으로 추산된다. 프랑스는 동원 병력의 16퍼센트를 잃었는데, 배치된 병력 역사상 가장 높은 사망률이었다.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민간인의 사망자수를 주의해서 집계한 공식적인 기관은 없지만, 학자들은 전쟁의 직접 및 간접적 결과로 1,300만명의 일반인들이 죽었다고 주장한다. 전쟁 말기에는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인플루엔자 전염병인 “스페인 독감”의 발병으로 많은 군인과 민간인이 사망하였다. 전쟁의 결과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유럽과 소아시아에 있는 자신의 고향에서 쫓겨나서 난민들이 되었다. 재산 및 산업 손실도 치명적이었는데, 특히 전투가 치열했던 프랑스와 벨기에의 손실이 가장 컸다.
제1차 세계대전: 조약 및 배상
비참했던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승전 연합국은 패전국들에게 일련의 가혹한 조약들을 체결하도록 강요했다. 이러한 조약들은 동맹국(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오스만투르크와 불가리아)의 상당 부분의 영토를 빼앗고 거액의 배상금을 지불 하도록 만들었다.
이 전에는 유럽의 지도가 근본적으로 변경된 적은 거의 없었다. 전쟁의 직접적인 영향으로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러시아 및 오스만 제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1919년 9월 10일의 생제르맹앙레 조약을 통해 합스부르크에서 떨어져 나온 대부분 독일어 언어권으로 구성된 오스트리아 공화국이 건국되었다. 오스트리아 제국은 왕실 소유지를 양도해서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그리고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및 세르비아 왕국(1929년에 유고슬라비아로 변경)과 같은 승계국을 새로 건국했다. 또한, 남부 티롤, 트리에스테, 트렌티노 및 이스트리아를 이탈리아로 양도했고, 부코비나를 루마니아로 양도했다. 조약의 중요 내용은 새롭게 형성된 오스트리아가 독립성을 타협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제약은 “게르만주의자”가 오랜 시간 바라던 목표이자 오스트리아 출신의 아돌프 히틀러와 그의 국가 사회주의(나치)당의 숙원 목표인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통합을 효과적으로 방지했다.
이중 제국의 다른 부분인 헝가리도 독립국가가 되었다. 트리아농 조약(1920년 11월)의 조항에 따라 헝가리는 트란실바니아를 루마니아로, 슬로바키아 및 트란스칼패티아 루스를 새로 형성된 체코슬로바키아로, 그리고 기타 헝가리 왕실 소유지를 향후 유고슬라비아로 양도했다. 오스만 제국은 1920년 8월 10일 세브르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연합국과의 적대감을 종식시켰지만, 이후 곧 바로 터키 독립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 결과 건국된 새로운 터키 공화국은 1923년 기존 조약을 대체하는 로잔 조약에 서명함으로써 기존 오스만 제국을 효과적으로 분할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10개월 정도 앞둔 1918년 1월, 미국 대통령 우드로우 윌슨은 소위 “14개 조항”이라고 하는 전쟁 목표를 작성하였다. 이러한 조항 중 8개는 구체적으로 연합국의 승리와 관련된 영토적 및 정치적 합의를 다루고 있는데, 유럽에서 민족적 인구에 대한 국가 자결권의 개념을 포함한다. 나머지 조항은 향후에 전쟁을 예방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마지막 조항은 국제 연맹이 국가간 분쟁을 더욱 적극적으로 중재하도록 제시했다. 윌슨은 이러한 제안이 정당하고 지속적인 평화, “종전을 위한 전쟁”을 끝내기 위한 “승리가 없는 평화”를 가져올 것을 희망했다.
독일 지도부가 휴전 협정에 서명했을 때, 그들은 14개 조항이 미래의 평화 조약을 위한 기반이 될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미국, 영국, 프랑스 및 이탈리아의 정부 간부들이이러한 조약 조항을 논의하기 위해 파리에서 만났을 때, “4대 강국”의 유럽 대표단은 다른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독일을 분쟁의 주요 선동자로 보고 있던 유럽 연합국은 궁극적으로 패전국 독일에 대해 특히 엄격한 조약상 의무를 부여했다.
1919년 5월 7일 독일 정부 관리들에게 제시된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의 영토를 벨기에(유펜-말메디), 체코슬로바키아(훌친 지구), 그리고 폴란드(포즈나니, 서부 프로이센, 그리고 상부 실레지아)로 제한하도록 강요했다. 프랑코-프로이센 전쟁 후에 1871년에 합병된 알사스와 로렌 지방은 프랑스로 반환되었다. 독일의 모든 해외 식민지는 국제 연맹 위임 통지령이 되었으며, 독일 민족 인구가 많은 도시인 단치히는 자유 도시가 되었다. 조약에서는 라인란트에서 무장 해제와 주둔을 요구했으며, 자를란트를 프랑스령에 두도록 하는 특별한 상태도 요구했다. 국민투표로 네덜란드-독일 접경지인 북부 슐레스비히 지역과 상부 실레지아 일부의 운명은 결정하도록 제안했다.
패전국 독일에 제의된 조약 중 아마도 가장 굴욕적인 부분은 “전쟁에 관한 유죄조항”으로 알려진 제231조로써, 이것은 독일이 제1차 세계대전 발발에 대한 전적인 책임을 받아들이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독일이 모든 물적 손실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판단하여, 특히 프랑스의 수상 조르주 클레망소는 독일은 천문학적인 배상금을 지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독일이 이러한 천문학적인 부채를 지불할 능력이 없을 것임을 인식한 클레망소와 프랑스는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빠른 복구와 프랑스에 대한 새로운 전쟁 가능성에 대해 크게 두려워했다. 따라서, 프랑스는 독일이 경제적 우월성을 다시 회복하고 재무장하는 노력을 제한하기 위한 전후 조약 시스템을 추구하였다.
독일군은 10만명으로 제한되었으며, 징병제는 금지되었다. 조약은 독일 해군의 선박을 10만톤 미만으로 제한했으며, 잠수함 선단의 취득이나 유지는 금지되었다. 또한, 공군을 유지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독일은 침략 전쟁을 벌인 것에 대해 카이저 및 기타 수뇌부를 전범 재판에 회부하도록 요구 받았다. 이렇게 열린 라이프치히 재판에는 카이저 또는 기타 중요 국가 수뇌부가 피고로 출석하지 않은 상태에서 대부분 무죄 판결이 내려졌는데, 이것은 독일에서 조차 수치스러운 일로 여겨졌다.
새로 출범한 독일 민주 정부는 베르사유 조약을 “강압된 평화”(강권)라는 시각으로 바라봤다. “4대 강국”의 다른 나라보다 훨씬 더 많은 물질적 피해를 입은 프랑스가 가혹한 조항을 고집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평화 조약은 제1차 세계대전을 발발시킨 국제적인 분쟁을 궁극적으로 해결해 주지는 못했다. 오히려 유럽 국가간 협력을 저해하고 처음 전쟁을 유발한 근본적인 문제가 더욱 돌출되도록 하는 결과를 낳았다. 전쟁의 끔찍한 희생과 많은 인명 손실은 패전국만이 짊어져야 할 엄청난 부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탈리아의 경우처럼 전쟁의 댓가가 국가가 지불한 생명과 군수품 희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승전국들 에게도 큰 부담이 되었다.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및 불가리아와 같은 패전국들의 국민에게 있어서 평화 조약이란 불공평한 처벌로 보였다.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처럼 민주주의이거나, 헝가리처럼 독재주의이거나, 불가리아처럼 과도 정부이거나 상관없이, 이들 정부는 군사적 및 재정적 합의 조항을 금새 위반하기 시작했다. 평화 조약에서 부담이 큰 조항을 개정하고 거부하려는 노력은 이들 정부의 외교 정책에서 핵심적인 요소가 되었으며 국제 정치에서 불안정한 요소로 작용했다. 예를 들어, 전쟁에 관한 유죄조항, 배상금 지불 의무, 그리고 독일 군대에 대한 제한 등은 독일인 대부분의 입장에서 특히 과중하다고 생각되는 것이었다. 베르사유 조약의 개정은 1920년대 초와 1930년대 초에 히틀러의 나치당을 비롯한 독일의 급진 우익당이 주류 유권자의 신뢰를 얻을 수 있도록 도운 발판이 된것들 중 하나이다.
재무장, 독일 영토(특히 동부) 회복, 라인 지방의 재무장, 그리고 이러한 치욕적인 패배와 평화 이후에 유럽과 전세계 강대국 중에서 명성 회복 등의 공약은 초국가주의자들의 감성을 부축였고 일반 유권자들이 나치 이데올로기의 더욱 급진적인 사상을 간과하도록 만들었다.
지금은 세계대전 전야인가? 1차대전 분석 세계적 학자의 대답
‘몽유병환자’ 저자 클라크 교수 인터뷰
“1914년과 우크라 상황 유사점 없다”
러에 신중한 태도 보이는 숄츠 독일 총리 옹호
1차대전의 원인을 분석한 <몽유병 환자>의 저자 크리스토퍼 클라크 케임브리지대 교수. 영국학술원 누리집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한 현재 상황은 1차 세계대전 전야와 비슷한가?
우크라이나 전쟁 뒤 또 다른 세계대전이 터지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이 나온다. 열강들이 외교보다는 힘을 과시하는 대치를 이어가다가 터진 1차대전의 상황이 거론된다.
1차대전 원인을 분석한 책 의 저자 크리스토퍼 클라크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1차대전과 비교하지 말라며 주전론의 위험성도 경고했다고 영국 이 27일 전했다.
그가 쓴 는 2013년 출간 뒤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됐으며, 특히 1차대전 패전국인 독일에서 35만부 이상이 팔렸다. 앙겔라 메르켈 전 독일 총리는 각료들에게 이 책을 권한 적이 있다. 고 헬무트 슈미트 전 독일 총리는 2014년 독일 잡지 에 러시아의 크림반도 강제병합 사태로 촉발된 우크라이나 위기를 1차대전 전야와 비교하는 ‘미국 몽유병 환자’라는 생전 마지막 기고를 했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도 최근 비보도 전제를 언론에 이 책을 인용하며 무책임한 정치인들이 호전적 언사로 분쟁으로 몰고 간다고 비판했다고 은 전했다. 숄츠 총리는 자신은 1차대전 당시 독일 황제인 “카이저 빌헬름이 절대 되지 않겠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
하지만, 클라크 교수는 1차대전 발발의 배후에 있는 동력과 우크라이나 전쟁 상황과는 닮은 것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사람들은 앞으로 나가기를, 머리를 난간 위로 내밀기를, 격화의 위기를 감수하기를 원치 않는다”라며 “1914년과 현재 우크라이나 상황 사이에 유사점은 없다”고 평가했다. 그는 “1차대전은 믿을 수 없이 복잡하고, 여러 군데에 걸친 방식으로 시작됐다”며 “반면 2014년과 올해 우크라이나 침공의 경우, 이는 단지 한 열강에 의한 평화의 침해 사례다”고 지적했다. 그는 현재 “유럽은 두 짝으로 이뤄진 동맹 시스템으로 나뉘지 않았다”며 “유럽에서 적어도 러시아는 지금 고립됐다”고 말했다.
클라크 교수는 또 현재의 지정학적 상황과 2차대전 전야 사이의 비교도 일축했다. 서방에서는 현재 독일이 러시아에 유화적인 태도를 보인다고 비난하는 여론이 있다. 이는 2차대전 전에 영국 등이 아돌프 히틀러에게 유화정책을 펴서 2차대전이 발발했다는 주장과 연결된다.
클라크 교수는 2차대전 직전인 “1938년 같은 것이 보이지 않고, 푸틴은 히틀러가 아니다”고 말했다. 그는 “히틀러는 심각한 인종주의 철학이 있었고, 히틀러의 철학에서 독일인은 유럽 대륙 전역으로 팽창할 수 있는 생물학적 집단이었다”며 “더 좋은 비유는 19세기 때의 기회주의적인 러시아의 포식이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을 희생물로 삼았다”며 “세계는 전반적으로 더욱더 19세기처럼 다극화되고 예측불가능해지고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서방 각국이 독일의 어중간한 입장에 대한 불만을 품는 것도 새로운 현상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그는 1853년 크림 전쟁으로 치닫는 와중에서 당시 프로이센에 서유럽 열강들과 더 강력한 동맹을 촉구한 영국의 사설 등을 거론하면서 “머리를 긁고 있는 독일을 참지 못하는 것이 새로운 일은 아니다”고 말했다.
그는 프랑스 및 영국과의 동맹을 주장하는 지식인과 “독일 혹은 프로이센은 러시아가 좋아하지 않는 것은 어떤 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믿는” 지식인 사이의 몇 세기에 걸친 분열이 독일에 있다는 점이 자주 간과되고 있다고도 말했다. 클라크 교수는 “외부로부터 위협이 있으면, 대부분의 정치 시스템은 그에 맞서는 결집으로 대응할 것이다”면서도 “그러나 이 문제를 놓고는 독일에서는 그렇지 않고, 러시아 문제는 이 나라를 나누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러시아에 대해 신중한 태도를 보이는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를 옹호했다. 그는 “숄츠는 엉터리 물건 판매원이 아니다”며 “독일 총리가 독일의 힘을 과시할 기회를 찾기보다는 분쟁으로 끌려가기를 꺼리는 모습으로 보여주는 것이 훨씬 올바르다고 나는 생각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클라크 교수는 독일 정부는 역사의 중요한 시기에서 유럽의 신뢰를 잃을 위기라고 강조했다. 그는 “나는 숄츠를 이해하고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을 늘리겠다는 정책도 이해한다”면서도 “그렇다면, 이는 긴 게임이고 큰 채찍을 휘두르기보다는 조용하게 말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그는 “조율된 행동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클라크 교수는 “우크라이나에서 푸틴이 하고 싶은대로 내버려 두는 위험은 지대하고 예측할 수 없다. 푸틴이 한 말이 명확히 보여준다”며 “푸틴은 (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을 신청한) 핀란드에 대해 (이에 따른) 장기적인 결과를 언급했는데, 푸틴은 무언가를 말하고는 이를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다”고 지적했다. 푸틴이 집권 이후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동진 확대,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시도, 핀란드의 나토 가입 신청에 대해 경고한 것이 결코 허풍이 아니라는 것이다.
클라크 교수는 에서 1차대전의 원인은 독일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외교보다는 힘의 과시와 대결로 상황을 악화시킨 서방 열강 모두에게 있다는 주장을 폈다. 당시 서방 열강들이 몽유병 환자처럼 전쟁으로 다가갔다는 것이다. 이는 독일이 2차대전뿐만 아니라 1차대전에도 전적으로 책임이 있다는 기존 학설에 대한 도전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영국의 역사학자 존 뢸은 클라크 교수의 책이 독일을 다시 잘못된 길로 인도할 수 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클라크 교수는 그런 반론은 자신의 책을 잘못 읽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몽유병은 상황을 절벽으로 모는 위험한 행동을 하지 말자는 암호다”며 “전쟁을 도발했다는 주장들은 완전히 요점에서 어긋난 것으로 드러났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 어떠한 몽유병 위험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지금 모든 사람은 각성했는데, 이는 푸틴이 우리 모두를 깨웠기 때문이다”고 지적했다.
정의길 선임기자 [email protected]
제1차 세계대전과 1918년 인플루엔자
1918년 11월 11일에 독일이 항복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기 때문에 미국이 전쟁에 참여한 기간은 6개월에 지나지 않았다. 이 기간에 미국이 유럽으로 파병한 병력은 약 50만 명이었다. 참전을 위해 미국 전역에서 대규모의 병력 소집 및 이동이 있었는데, 1918년 캔자스주에 있는 펀스턴 병영에서 치명적인 전염병이 발생했다. 처음에는 많은 병사에게서 38도 이상의 고열과 통증, 무기력 등의 증상이 나타났다. 계절성 독감과 비슷한 증상이었다. 일반적으로 계절성 독감은 이틀이나 사흘 정도 앓다가 회복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처음에 이 전염병은 ‘삼일열(三日熱)’이라고 불렸다. 계절성 독감은 병영이나 훈련소에서 늘 발생하는 질병이어서 관심을 가지는 의사는 거의 없었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건강한 병사와 보급품을 서부전선으로 보내는 것이 가장 중요했던 연방 정부도 관심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1918년 봄에 처음 발생한 인플루엔자는 유럽으로 파견된 병력과 함께 이동하면서 한 달 이내에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서부전선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도 인플루엔자에 걸렸다. 당시 유럽에서 유일하게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지 않은 국가는 스페인이었는데, 스페인 언론은 인플루엔자에 관해 빈번하게 보도했다. 이후 많은 사람이 이 전염병을 ‘스페인 독감’이라 불렀지만, 사실 인플루엔자는 스페인에서 시작된 것도 아니고 스페인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 것도 아니다. 따라서 최근 일부 역사학자는 이 전염병을 스페인 독감 대신 ‘1918년 인플루엔자’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플루엔자는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에서도 급속하게 퍼졌다. 하지만 여름이 되자 갑자기 사라졌고, 이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918년 가을에 인플루엔자가 다시 발생했다. 이번에도 병영에서 가장 먼저 시작되었다. 사실 군부대는 인플루엔자를 비롯한 전염병이 발생하고 퍼지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였다. 수많은 사람이 모여 함께 훈련을 받으면서 생활하기 때문이다. 당시 서부전선에서는 끊임없이 병력을 요청했으므로 연방 정부의 가장 큰 관심사는 전염병이 아니라 파병이었다. 매사추세츠주에 있는 데븐스 병영은 ‘1918년 인플루엔자’로 가장 큰 피해가 발생한 곳이다. 당시 제76사단과 제12사단이 훈련을 받고 있었는데, 다른 어느 병영보다 신병이 많이 모였다.
1918년 9월 2일, 30여 명의 병사가 병영 내 병원을 찾았다. 2주 후에 병원을 찾은 병사는 무려 40배 가까이 증가한 약 1,100명이었다. 의무감은 ‘1918년 인플루엔자’의 발생 원인을 밝히기 위해 당시 미국에서 가장 뛰어난 의사인 윌리엄 웰치를 비롯해 의사 여러 명을 데븐스 병영으로 파견했다. 이들이 도착했을 때 환자 수는 2,000명 이상이었고, 하루에 90명 이상이 사망했다. 하지만 전염병의 원인을 밝히지는 못했다.
데븐스 병영의 가장 큰 문제점은 병력 과잉이었다. 수용 가능한 규모는 3만 5,000명 정도였지만, 1918년 한 해 동안 데븐스 병영으로 파견된 신병은 5만 명 이상이었다. 의사들은 병력 규모를 줄이라고 제안했으나, 유럽에서는 계속해서 더 많은 병력을 요청했다. 원래 전쟁부에서는 1918년 10월 한 달 동안에만 14만 명의 신병을 모집할 계획이었다. 결국 신병 모집은 취소되었지만, 병사들의 이동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당시 미국 전역에서 모집된 병력은 미국 내에서는 기차로, 유럽의 전쟁터로는 수송선으로 이동했다. 기차와 수송선은 모두 ‘1918년 인플루엔자’가 광범위하게 확산하는 데 중요한 매개체였다. 1918년 9월, 루이지애나주에서 328대대가 기차로 출발했다. 출발할 때 기차에는 12명의 환자가 있었다. 사흘 뒤 버지니아주에 도착했을 때 환자는 120명 이상으로 증가했다. 제한된 공간에서 ‘1918년 인플루엔자’가 급속하게 퍼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쟁의 승리를 강조하는 연방 정부는 별다른 조처를 취하지 않았다.
‘1918년 인플루엔자’는 유럽으로 파견된 군대에서 더욱 심각했다. 당시 대통령인 우드로 윌슨은 전쟁 승리를 위해 잘 훈련된 병력을 유럽에 파병했다. 이 미국해외파견군(AEF)은 뉴욕이나 샌프란시스코 항구에서 수송선을 타고 대서양을 건너 유럽으로 이동했다. 당시 가장 많은 병력을 수송한 선박은 리바이어던호였다. 리바이어던은 <<구약성경>> <욥기> 41장에 등장하는 강력한 힘을 가진 괴물이다. 수많은 병력을 수송하는 거대한 선박에 걸맞은 이름이었다.
수송선을 타고 대서양을 건너 유럽으로 이동하는 중에도 ‘1918년 인플루엔자’는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다. 탑승자 전원을 일주일 이상 격리하도록 했지만 이와 같은 조치는 거의 지켜지지 않았다. 병력과 보급품이 지연되었기 때문이다. 한때 리바이어던호는 1만 2,000명의 병사를 한꺼번에 수송하기도 했는데, 연방 정부가 취한 조치는 정원을 10퍼센트 정도 감소시키는 것뿐이었다. 가장 끔찍한 재앙은 1918년 10월에 발생했다. 유럽행 항해 도중 리바이어던호에서는 4,000명 이상의 인플루엔자 환자가 발생했고, 그중 200명 이상이 사망했다. 항해 중이어서 외부의 도움을 받는 것도 불가능했다. 의사나 간호사도 충분하지 않았고 의약품마저 부족했다. 처음에는 계절성 독감과 비슷한 증상이었지만, ‘1918년 인플루엔자’의 주된 증상은 점차 묽은 피나 거품이 섞인 체액이 흐르는 것이었다. 환자들을 격리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유럽에서는 프랑스 남서쪽에 있는 보르도에서 처음 ‘1918년 인플루엔자’가 발생했다. 이 지역은 미국해외파견군이 도착하는 여러 항구 가운데 하나였다. ‘1918년 인플루엔자’의 발생 기원에 관해 여러 학자가 서로 다른 의견을 제시하고 있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는 미국에서 처음 발생한 뒤 병력 이동과 더불어 유럽으로 확산되었다고 믿고 있다. 1918년 가을에는 매달 25만 명 이상의 해외 파견군이 유럽으로 이동했다. 이 가운데 대부분은 프랑스-영국 연합군이 독일군과 전투를 벌인 서부전선으로 파병되었다. 결국 서부전선에서도 ‘1918년 인플루엔자’가 급속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전염병의 원인을 밝히지 못해 별다른 치료나 조처를 할 수 없었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곳에서 환자의 격리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1918년 인플루엔자’는 서부전선 전체로 퍼졌다. 당시 환자 수는 약 7,000명 정도였다. 뫼즈-아르곤전투에서 연합군은 최후 공세를 펼쳤는데, 이때 전투 사상자는 약 90명이었다. 반면, ‘1918년 인플루엔자’ 사망자는 450명 정도로 다섯 배 이상 많았다.
[채인택의 글로벌 줌업]”1차대전 종전 100년…인류는 전쟁의 비극에서 배운 게 없다”
11월 11일은 제1차 세계대전 종전 100주년 기념일이다. 1918년 종전 당시 연합군을 주도했던 영국은 전쟁의 참극을 두고두고 기억하며 재발을 방지하라는 의미에서 11이 세 차례 겹치는 11월 11일 11시에 종전 시점으로 정했다.
[1차대전의 기억 여행] 시리즈 1회100년 전 1918년 1차대전 종전
기억 쉽게 11월 11일 11시로
현재도 영연방국가 현충일로
인류 어리석음이 비극 부른
교훈 새겨 비극 막는 날 돼야
영국 작가 스미스, 돌직구 트윗
“인류는 대전에서 배운 게 없다”
지적대로 아직도 곳곳 분쟁
아직도 전쟁 유혹에 쉽게 빠져
시리아 내전, 예멘 내전 개입 등
국제사회, 외교적 해결에 무능
북핵도 이제야 협상 노력 시작
분쟁과 살상 반복에서 벗어나야
전승국인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프랑스에서 열리는 100주년 추념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파리 행 비행기에 올랐다. 영국의 테리사 메이 총리를 비롯한 과거 연합군의 지도자들도 파리로 몰리고 있다. 100주년을 맞아 유럽 여러 나라에선 사흘간의 추모 행사에 들어갔다.
처참한 살육의 1차대전
1914년 7월 28일 시작해 1918년 11월 11일까지 4년 4개월간 진행된 1차대전은 인류가 겪은 가장 큰 참극의 하나로 기록된다. 피해는 상상을 초월했다. 군인만 약 972만(질병, 사고 포함) 명이 숨졌다. 민간인은 직접 사망자 약 95만, 전쟁으로 인한 전염병·굶주림 등으로 인한 간접사망자 약 590만을 포함해 모두 657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대량학살이나 다름없는 엄청난 피해 규모다.
연합국에선 러시아가 군인과 민간인을 포함해 약 375만 명이 숨졌고 프랑스(약 170만), 대영제국(영국과 식민지를 포함해 약 122만), 이탈리아(122만)가 각각 100만 명 이상의 사망자를 냈다. 세르비아는 전 인구의 16%인 70만 명이 목숨을 잃는 대재앙을 당했다.
동맹군 측에선 터키가 인구의 13.7%에 해당하는 약 29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독일(약 247만), 오스트리아 헝가리(약 156만), 불가리아(약 19만) 등도 희생이 컸다. 산업혁명으로 고도의 기술 문명과 경제 발전, 국제화를 이룬 인류가 문명의 이기를 인간을 살상하는 데 동원한 비극이다. 장거리 야포, 비행기, 잠수함, 지뢰, 독가스 같은 과학기술 산물이 인류를 살상하는 데 대량 동원된 최초의 전쟁이 1차대전이었다.
“1차대전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인류”
그래서 전쟁이 끝난 11월 11일은 영연방 국가 등 여러 지역에서 전몰자들을 추모하는 날로 삼고 있다. 다시는 비극적인 전쟁을 벌이지 말자고 다짐하는 날의 의미도 있다.
그런데 영국 일간지 인디펜던트 인터넷판은 지난 6일 작가이자 사회운동가인 해리 레슬리 스미스(95)의 트윗을 게재했다. “포피(1차대전 전몰자 추념용 조화)를 2018년 현충일을 위해 달지 말고 인류가 (1차대전이 종전된) 1918년 이래 아무것도 배운 게 없음을 부끄럽게 여기기 위해 달자”는 내용이었다. 트윗은 스미스 자신을 “대공황 생존자. 제2차 세계대전 영국 공군 참전용사, 복지국가를 위한 활동가, (여러 책의) 작가”라고 소개하고 있다.
스미스의 지적대로 인류는 현재 1차대전 못지않은 대량 살상극을 멈추지 않고 있다.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인류의 수치 시리아 내전 사우디 예멘 내전 개입
대표적인 것이 2011년 3월부터 계속되고 있는 시리아 내전과 2015년 4월 시작된 사우디아라비아 주도의 예멘 내전 개입이다. 피해 규모부터 어마어마하다.
BBC방송은 영국에서 활동하는 인권단체인 ‘시리아 인권 관측기구’의 자료를 인용해 올해 8월까지 시리아 내전으로 11만613명의 민간인을 포함해 모두 36만4371명이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장기 행방불명으로 사망으로 추정되는 15만6900명은 제외한 수치다. 이 단체는 여기에 더해 보고나 관측되지 않은 10만 명 정도의 사망자가 더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7년 8개월에 걸친 내전으로 이렇게 많은 사람이 총격·포격·폭격 등으로 ‘도살’되고 있음에도 국제사회는 아무런 해결 방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현재 러시아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의 정부군은 전국의 62.2%를 장악해 사실상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다. 미국이 간접 지원하는 소수민족 쿠르드족 등이 27.3%를, 사우디아라비아가 실질적으로 지원하는 반군이 9.7%를 각각 차지하고 있다. 극단주의 테러단체인 이슬람국가(IS)가 1% 미만의 작은 지역에서 버티는 중이다. 2011년 내전의 발단이 된 알아사드 정권 퇴진도, 민주화도, 심지어 평화도 요원한 상황이다. 종전 100주년을 맞는 올해까지 인류는 1차대전의 참극에서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결코 과장된 이야기가 아님을 보여준다.
“굶기기를 전술의 하나로 활용”
사우디아라비아는 2015년 4월부터 국경을 맞댄 예멘의 내전에 개입하고 있다. 이슬람 수니파인 예멘의 압둘라 만수르 하디 대통령이 이란의 지원을 받는 시아파 후티 반군에 밀리자 수니파 종주국인 사우디는 아랍에미리트(UAE)·이집트·쿠웨이트 등과 함께 연합군을 조직해 내전에 뛰어들었다.
문제는 내전 개입이 분쟁으로 끝나지 않고 인도주의적 재앙으로 번지고 있다는 점이다. 영국 일간지 인디펜던트는 지난 10월 15일 예멘 내전에서 폭격과 전투 등으로 민간인을 포함해 1만 명 정도가 숨지고 수백만 명이 집을 잃었으며 840만~1300만 명이 아사 위기에 처했다고 보도했다. 유엔은 예멘이 지난 100년 이래 인류가 처한 최악의 기근을 겪고 있다고 개탄했다. 1차대전이 끝나고 100년이 된 지금 다시 그 시절의 대량살상과 기아 참극이 재현되고 있는 세이다. 인디펜던트는 사우디가 예멘을 봉쇄하면서 기아 위협을 전술의 하나로 활용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미국 일간지 시카고 트리뷴은 이미 2017년 11월 사우디의 예멘 봉쇄로 식량과 의약품을 포함한 물자 공급이 막혀 2017년 한해만 5만 명의 어린이가 기아와 질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고 모니터링 그룹을 인용해 보도했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도 같은 시기 유엔 소식통을 인용해 사우디가 봉쇄를 풀지 않으면 수천 명이 추가로 숨질 것으로 우려했다. 미국의 후버 연구소는 2015년 12월 사우디가 하루 2억 달러의 전비를 지출하고 있다고 추산했다.
세계 곳곳에서 여전히 살상극
이뿐이 아니라 리비아와 아프가니스탄에서도 내전이나 무장 충돌로 인명이 희생되고 있다. 중동뿐 아니라 우크라이나 동부에선 우크라이나 정부군과 러시아가 지원하는 분리주의자 사이에 ‘돈바스 전쟁’이 한창이다. 미국도, 유럽연합(EU)도 이 살상극을 멈추지 못하고 있다. 남중국해에선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이 한창이다. 양국은 대규모 무역분쟁도 벌이고 있다. 감정의 골은 날로 깊어만 간다. 1차대전 종전 100년을 맞는 올해 인류는 여전히 분쟁 중이다.
무력사용 위협에 쉽게 빠지는 국제사회
이런 불안하고 위태로운 상황은 1차대전이 발발하던 당시와 큰 차이가 없다. 세 가지 점에서 그렇다. 첫째가 무력사용 유혹에 쉽게 빠지는 국제사회다. 지루하고 힘든 외교적 대화와 설득, 타협과 양보의 과정을 거치는 대신 우세한 무력을 사용해 상대를 간단히 제압하고 싶은 유혹이다. 1차대전 발발 과정을 살펴보면 이런 특성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대전의 도화선은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위 계승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사라예보에서 암살된 사건이다. 오스만튀르크 영토이던 보스니아를 1908년 오스트리아가 병합하자 세르비아인과 보스니아 인구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던 세르비아계 주민은 이를 세르비아에 합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생각을 세르비아 민족주의라고 불렀다. 암살범인 19세의 세르비아계 보스니아 청년 가브릴로 프린치프도 그런 생각을 했다. 현재 이탈리아, 헝가리, 터키를 비롯한 세계 각국에선 민족주의와 과격한 포퓰리즘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1차대전을 촉발한 당시와 갈수록 닮아가고 있다.
효과적인 외교가 없다
둘째는 효과적인 외교의 부재다. 사라예보 암살보다 사건 해결을 둘러싼 외교의 실패가 대전의 더욱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보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 암살 1주일 뒤 오스트리아는 동맹국인 독일에 ‘세르비아를 공격할 경우 그들의 동맹국인 러시아가 나설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우리를 지원해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동맹인 독일은 지원을 약속했다. 오스트리아는 힘든 외교보다 손쉽게 보인 무력을 택한 것이다. 그 결과는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공중분해였다. 독일 제국은 호엔촐레른 왕조가 물러나고 영토 일부를 잃는 데 그쳤지만 다민족 국가였던 오스트리아는 갈기갈기 찢어졌다. 그 영토는 현재 10개국으로 나뉘어 있다.
그 뒤 한 달 가까운 기간 동안 유럽 각국은 전쟁을 막기 위해 외교 노력을 벌였으나 지지부진했다. 심지어 영국과 독일, 러시아 왕실은 혈연관계였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러시아를 믿은 세르비아는 자존심을 앞세웠다. 독일을 믿었던 오스트리아는 7월 28일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했다. 범슬라브주의를 내세워 슬라브 종주국을 자처하던 러시아는 남슬라브족인 세르비아를 돕겠다며 즉시 병력 동원령을 내렸다. 사흘 뒤 독일은 러시아에 동원 중지를 요청했으나 ‘병력 동원은 오로지 오스트리아를 대상으로 한 것’이라는 답을 보냈다. 다음날인 8월 1일 독일은 동맹을 위해 러시아에 선전포고했다. 이틀 뒤엔 3일 러시아와 동맹국인 프랑스에 선전포고하고 그 중간에 있는 중립국 벨기에를 침공했다. 그러자 영국은 벨기에의 중립을 훼손했다며 4일 독일에 선전포고했다. 이틀 뒤 고민하던 오스트리아가 러시아에 선전포고하면서 전쟁의 불길은 걷잡을 수 없게 됐다. 무력사용의 유혹에 빠져 외교보다 힘에 의존한 것은 유럽의 모든 강대국이 마찬가지였다. 이는 끔찍한 비극으로 이어졌다. 외교 실패는 수천만 명의 인명 살상으로 이어졌다.
당시와 비교하면 지금도 효과적인 외교적 해결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시리아 내전도, 사우디의 예멘 내전 개입도, 돈바스 전쟁도 외교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북한의 핵 도발도 외교를 통한 해결 시도를 시작만 한 상태가 아닌가.
셋째는 동맹의 한계다. 군사공동체인 동맹만으론 결코 안전과 평화를 보장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오히려 동맹 때문에 연쇄 참전으로 이어진 것이 1차대전의 특징이었다. 특히 외교 노력을 수반하지 못한 동맹은 더욱 효율이 떨어진다는 교훈을 준다. 북미와 서유럽의 다자 동맹인 나토(북대서양 조약기구)는 물론 심지어 한미동맹도 무조건 맹신할 순 없는 상황이다. 무조건적인 동맹 의존도, 공허한 이념이나 이상 추구도, 한쪽 편들기도, 민족주의 맹신도 모두 극복의 대상이다. 우리의 실력을 기르고, 우리 국민의 국익을 위한 외교를 펼칠 필요가 있다. 1차대전 종전 100년을 맞아 냉정하게 살펴보는 동아시아와 한반도 상황이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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