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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수훈은 무엇인가요?

산상수훈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헌신되고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며, 위선 없이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며 지혜와 분별이 가득한 삶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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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gotquestions.org

Date Published: 2/2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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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수훈(마태복음 5-7장) 정리와 간단한 설명

산상수훈(마태복음 5-7장) 정리와 간단한 설명. 할렐루야!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 아버지, 무더운 여름에도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성경을 읽고 정리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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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cafe.daum.net

Date Published: 2/2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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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수훈 개론 – 네이버 블로그

산상수훈(The Sermon on the Mount, 山上垂訓)은 마태복음 5-7장에 걸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말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전(全) 교훈의 요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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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8/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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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수훈의 구조와 요점

주후 27년 즈음의 시대적 배경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첫째, 유대인들은 율법을 표면적으로만 이해하고 그러한 표면적, 문자적 이해를 바탕으로 율법을 6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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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comfortye.tistory.com

Date Published: 10/2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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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수훈(The Sermon on the Mount)

산상수훈은 예수님의 가장 긴 설교이며, 그분의 계명으로 가득 찼다. 제자 삼는 사역자라면 예수님이 설교 중 … D.) 불순종에 대한 마지막 경고와 요약(7:2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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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davidservant.com

Date Published: 9/2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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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수훈 (Sermon on the Mount) – 좁은문 – Good4Joy

산상수훈은 복음서에서 기록한 설교 중 가장 긴 것으로 “팔복”, “주기도문” 등의 유명한 가르침을 포함한 예수님의 아니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설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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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good4joy.org

Date Published: 12/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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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수훈 – 예수의 윤리 교육!?

정리 : 서로 사랑하라. 성경속사랑. 이 산상수훈은 예수님의 가르침 중 가장 긴 내용을 담고 있지만 요약하면 율법의 완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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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truthlee.tistory.com

Date Published: 9/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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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일, 마 5:1-7:29, 산상수훈 < 성경통독 ... - 크리스찬저널

마태가 정리한 이 복음서에 있는 다섯 개 혹은 여덟 개의 윤리적인 교훈들은 모세 오경이라는 율법서와 비교할 만한 것이라는 데 학자들은 동의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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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kcjlogos.org

Date Published: 3/2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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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산상수훈

성경의 산상수훈(山上垂訓)과 김교신의 팔복(八福) 해설 · 과거 거의 2000 년간 서양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책은 신약과 구약으로 이루어진 성경(聖經; bible)이다. · 단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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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hs.inha.ac.kr

Date Published: 12/1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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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수훈 요약
산상수훈 요약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산상 수훈 요약

  • Author: ES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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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0. 12. 30.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ZlkXdLUcgFU

산상수훈은 무엇인가요?

질문

산상수훈은 무엇인가요?

답변

산상수훈은 마태복음 5-7장에 나와 있는 예수님께서 하신 설교입니다. 마태복음 5:1-2로 인해 산상수훈이라고 알려졌습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산상수훈은 예수님께서 하신 설교 중 가장 유명한 것일 뿐만 아니라, 아마도 어느 누구의 설교보다도 유명한 설교일 것입니다.산상수훈은 몇 가지 각기 다른 주제들을 다룹니다. 이 글의 목적은 모든 주제들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말해 산상수훈이 말씀하고 있는 것에 대한 간략한 요약입니다. 산상수훈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헌신되고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며, 위선 없이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며 지혜와 분별이 가득한 삶을 사는 방법.5:3-12 – 팔복5:13-16 – 빛과 소금5:17-20 –율법의 완성 예수님5:21-26 – 분노와 살인5:27-30 – 정욕과 간음5:31-32 – 이혼과 재혼5:33-37 – 맹세5:38-42 – 눈에는 눈5:43-48 – 원수 사랑6:1-4 – 궁핍한 자 구제6:5-15 – 기도하는 방법6:16-18 – 금식하는 방법6:19-24 – 하늘에 쌓아 둔 보물6:25-34 – 염려하지 말라7:1-6 – 위선적으로 판단하지 말라7:7-12 –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7:13-14 – 좁은 문7:15-23 – 거짓 선지자들7:24-27 – 지혜로운 건축자마태복음 7:28-29은 산상수훈을 다음과 같은 주장으로 마무리합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우리 모두 예수님의 가르침에 계속되는 놀라움을 느끼고, 산상수훈 안에 가르치신 원칙들을 따라 살길 소망합니다!

산상수훈(마태복음 5-7장) 정리와 간단한 설명

산상보훈: 팔복- 제자들, 병든 자들, 같이 온 자들

1-10 팔복: 산에 올라가 가르치심. 가난. 애통. 온유. 의. 자비. 청결. 화평. 의

천국, 위로, 땅, 배부름, 긍휼, 하나님 봄, 하나님 아들, 천국

11-12 예수님으로 인해 모욕을 받고 박해를 받을 때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상이 큼이라

13-16 소금과 빛: 13 소금 14-16 빛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추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17-20 율법에 대한 교훈: 율법을 완성하려 오심/ 천국에서 큰 자/ 천국 입성에 대해

21-26 형제에 대한 교훈/ 형제를 욕하지 마라/ 형제와 사화 하라

21-24 노함/ 라가/ 미련한 자, 형제와 화해 25-26 고소인과의 화해

27-30 간음 : 음욕을 품는 자는 간음 자/ 오른 눈 오른손 범죄 시

31-32 이혼 : 음행의 이유 없이 이혼 금지/ 이혼 증서/ 간음하게 되는 자

33-37 맹세 금지: 예, 아니오 하라

38-42 보복 금지: 오른쪽 빰, 왼쪽 빰, 겉옷 속옷, 오리 십 리, 구하는 자 꾸고자

하는 자에게 주라

43-48 원수를 사랑하라: 박해하는 자 위해 기도하라 하나님의 아이들이 되리라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1. 팔복(1-12절)의 설명

8복에 대해서는 마음이 가난한 자에 대해서 이미 설명을 드렸지만 저는 성령을 받은 자로서 성령의 충만을 늘 갈급해 하고 성령의 충만을 기다리는 자로 설명을 했고 이런 사람은 처음부터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지며, 본인의 노력도 꼭 필요하다고 오천만의 로마서 사복음서 정리 코너의 산상수훈을 배우며에서 설명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도 역시 그 코너에서 말씀을 드렸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의는 하나님의 의이며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목마른 것도 역시 성령을 받고서 가장 하나님의 의를 잘 이룰 수 있는 복음을 전파하는 자가 이에 해당함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율법에 계시된 의이기도 하지만 또 복음에 나타난 의 즉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의 심판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십자가에 매달리심, 그리고 죽으심으로 해결하심으로 자신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셨고, 이를 통해서 믿는 자에게 미치는 의가 있는데 이 모든 의의 추구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모습이며 이렇게 하나님의 의로우심으로부터 나타난 칭의로 인해서 의롭게 된 성도의 세상에서 정의로운 삶이 너무나 필요함을 또 말씀을 드렸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했는데 마음이 청결하기 위한 가장 정확하고 완전한 방법은 우리의 죄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와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를 믿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의 세례를 받는 것을 통해서 자신의 모든 죄를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는 길이 마음이 청결하게 되는 유일하고 가장 올바른 길이 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용서받은 죄인의 죄에 대한 투쟁과 죄를 지으면 이에 대한 온전한 회개가 마음을 청결하게 만드는 줄로 믿는데 이런 사람이 받는 복이 하나님을 뵈옵는 복이라고 했으니 거룩하신 하나님을 죄인이 죄를 가지고서 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 시대에 제사장이 성막에 들어갈 때 자신의 몸을 깨끗하게 하고 죄가 있을 때 먼저 짐승의 피 흘림의 제사를 통해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정결케 하고 하나님께 나아갔는데 그렇지 못할 때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최초의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이 미국의 대학에서 자신이 우주에서 아무리 보아도 하나님의 모습은 뵐 수가 없다고 강의하자 한 학생이 이 말씀을 인용해서 반박했다는 내용은 모두가 잘 알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볼 수가 있으면 믿지 하는데 자신이 죽는 일도 모르는 것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죄인인 인간과 거룩하신 하나님과 화평의 복음을 전하는 자입니다. 이런 자는 하나님의 아들로 일컬음을 받게 된다고 했습니다. 불의한 인간과 거룩하신 하나님과 화목케 되는 길을 예수님께서 열어놓으셨는데 전하는 사람이 없으면 이를 알 수도 없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화평의 복음의 신을 신자라고 했고 전하는 발걸음이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인간관계에서도 어디에 가서든지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사람을 대하지 말고 그 사람이 모든 사람과 화평케 되도록 사랑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상 팔복에 대한 설명을 마치고 5장의 아래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할 것입니다.

11-12절의 말씀은 예수를 믿는 어떤 사람도 경험하게 되는 일입니다. 세상 사람과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그 사람을 주관하는 영이 다릅니다. 특별히 믿는 사람이 믿는 사람이 없는 집단에 들어가면 거의 왕 따를 당하는 수준의 핍박이 있고 모욕이 있고 그리고 미움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다 같이 집단이 되어서 괴롭힘을 당할 수가 있는데 교묘하게 괴롭힙니다. 이럴 때 화를 내고 같이 악으로 대하지 말고 도리어 기뻐하라고 하십니다. 참으로 현실에서 쉽지가 않지만 주님의 명령으로 기뻐해야 합니다. 그래서 어디를 가든 믿음의 백성이 하나가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백성이 믿지 않는 자들과 도리어 하나가 되어서 선하게 착하게 살고자 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같이 괴롭힌다면 이는 믿는 자의 도리를 완전히 저버린 죄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제가 목사가 되고도 약 8년을 세상에서 다양한 직장을 가지고 생활을 하는데 참으로 좋은 분들도 많이 만나서 도움도 많이 받고 위로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직위를 이용해서 그리고 앞에 보이는 작은 이익을 더 우선시해서 신자의 도리를 저버리는 사람도 너무나 많이 보았습니다. 특히 타 교인에 대한 부분과 천주교에 대한 부분에 있어서 너무나 잘못 배워서 하나가 되지 못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넓히지도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도 못하는 교인들이 너무나 많음을 목회를 하시는 목사님들께서 분명하게 아셔야 할 것입니다.

어디에나 예수님은 믿는 자와 함께 하시고 예수님은 나 혼자의 예수님도 내 교회만의 예수님도 아니고 모든 세상의 믿는 자의 주가 되심을 반드시 믿으셔야 합니다. 세상에서 출세하고 세상의 조직에 충성하고자 형제를 저버린 모든 자는 예수님께서 미워하시는 일을 하는 것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17장 예수님의 간절한 기도를 보시기 바랍니다.

2. 율법에 대한 말씀

17-20은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도 아니고 베드로의 말씀도 아닌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사도바울의 서신서를 잘못 이해하면 율법을 우리는 참으로 배우지도 실천하지도 않고서 세상의 법을 달달달 외우고 세상의 법을 지키는 일에는 목숨을 거나 주님의 명령을 실천하는 데에는 진작 그 명령이 무엇인지 명령의 내용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지키지도 않습니다. 이 율법에 대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이길 어떤 서신서의 내용도 전혀 없음을 믿으시고 이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셔야 합니다.

어떻게 율법을 완성합니까? 이미 예수님께 잘못하고 있다고 혼이 난 바리새인과 같이 율법을 달달달 외어서 실천을 해야 합니까? 이도 너무나 필요합니다. 율법을 우선 잘 배우는 것은 너무나 필요한 일입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성도가 세상에서 살아갈 때 구체적으로 생기는 일들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된다고 규정을 해 놓은 것입니다. 반드시 지켜야 할 내용은 절대로 지켜야 합니다. 예를 들면 땅에 대한 내용은 국법에서 사유를 허락하고 소유를 자본주의 원리에 따라서 끝도 없이 가져도 벌을 주지 않는다고 할 때(지금 우리나라와 같은 상황) 율법에서 하나님께서 토지에 대한 규정을 모르면 이렇게 사는 것이 죄가 되지 않을 것으로 크게 착각을 할 수가 있는데 율법은 땅의 소유에 대해서 엄격하게 제한을 하고 땅은 모두가 하나님의 것이라고 명령을 하시며 함부로 사고팔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와 같이 집을 여러 채 소유하고 땅을 많이 가지는 자는 반드시 저주를 받아서 그 집에 폐가가 될 것이고 땅에서 소산이 현저히 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율법을 잘 배워서 구체적인 상황에서 지켜야 합니다. 율법은 사랑을 구체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하느냐 정해 놓은 것입니다.

구약의 말씀이고 이스라엘에게만 주신 말씀이 아니라고 예수님께서 틀림없이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율법 613조문을 요약한 말씀이 10계명인데 반드시 지켜야 할 하나님의 백성의 큰 계명입니다. 사랑을 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을 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이 모든 계명을 지키게 됩니다. 자신의 혈육의 형제와 같이 자신의 자녀와 같이 믿음의 형제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면 모든 계명을 지키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 율법의 내용에 대해서 잘 배우고 반드시 때에 따라서 상황에 따라서 잘 지켜야 합니다. 성경 속에 유교의 사람에 대한 질서 못지않은 질서가 있습니다. 그리고 율법의 규정은 죄의 용서에 대해서 사형에 해당하는 죄는 짐승의 제사로도 사할 수가 없었고 반드시 죄를 지은 사람을 죽어야 했습니다. 간음에 관한 죄도 그러한 죄였는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용서를 해 주셨습니다(간음한 여인) 이렇게 율법이 불가한 내용도 예수님을 통해서 완전케 되었습니다. 그리고 율법은 그 조문을 다 지킨다고 의롭게 되기가 참으로 어렵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모든 죄를 용서받은 새로운 창조물이 된 신자가 성령을 받아서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게 되면 이를 통해서 율법의 완성이 또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율법을 모르면 절대로 사랑을 실천할 수가 없습니다. 율법은 지금도 성도의 가장 중요하고 가장 잘 알아야 하고 가장 잘 지켜야 하는 법입니다. 절대로 예수님으로부터 용서받은 인간의 서신서를 통해서 이런 예수님의 말씀을 무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들 서신서는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이 되었기에 절대로 예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감동은 있을 수가 없고 단지 서신서의 본 의미를 해석을 통해서 왜곡시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3. 간음과 이혼에 대한 말씀

간음에 대해선 더욱 엄격하게 말씀하십니다. 이 부분은 현대 특히 서양에서 너무나 잘 지키지 않는 부분이 있고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간통죄가 있었는데 지금은 서로 합의가 되면 간통이 성립이 되지 않고 있는데 절대로 성경에서는 그렇게 말씀하지 않고 있으니 성경의 말씀에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이혼에 대해서도 같은 내용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올바르고 세상의 법은 신자에게 절대로 올바르지 않은 부분이 있습니다.

4. 원수사랑에 대해서

이제 성도가 왜 원수도 사랑을 해야 합니까? 우리 모두는 죄인이었고 그리고 용서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죄를 용서받기 전에는 모두가 예수님의 원수들이었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볼 때 반드시 죄로 인해서 죽어야 할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도모지 들지 않고 불의로 진노의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하고 불화로 모든 저주를 받아야 할 자들이 저를 포함해서 모든 성도들입니다. 이런 하나님과 원수들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시 의롭게 되어 이 세상을 살 기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우리는 당연히 이제는 우리에게 원수가 되는 사람들, 우리에게 불의하게 대하는 사람들, 우리를 괴롭히고 속이고 죽이려는 우리의 원수를 이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듯 우리도 이들을 용서하고 축복하고 사랑해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나를 위한 십자가의 사랑을 묵상하며 죽이고 싶은 원수라도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이러한 원수였다는 인식이 없이 그리고 예수님의 나를 위한 십자가의 수난을 묵상함 없이 원수를 사랑하긴 어렵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를 지은 자를 용서를 해야만 우리의 죄도 또 용서받는 길이 열리고 용서를 받아야 기도도 상달이 되기에 우리는 반드시 이 말씀을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전도하면 정말로 끝까지 참아야 되고 참으로 참기가 어려운 일들도 있음을 경험하실 것입니다. 그래도 축복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고 완전한 사람이 되라는 명령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도 주신 명령이고 우리에게 또 주시는데 이도 반드시 율법을 알고 실천을 해야 합니다.

산상수훈 개론

산상수훈 개론

산상수훈

산상수훈(The Sermon on the Mount, 山上垂訓)은 마태복음 5-7장에 걸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말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전(全) 교훈의 요약」, 「천국의 대헌장Magna Charta」, 「그리스도교의 대헌장」, 「황금률The golden rule of morality」, 「성경 중의 성경」, 「천국시민헌장」, 「천국의 가신(嘉信; 아름다운 편지)」, 「천국의 복음」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산상수훈은 주후 4세기 초 성(聖) 어거스틴 이후부터 산에서 설교하신 말씀이라는 뜻에서 산상설교(山上說敎), 가르쳐서 본받게 한다는 뜻에서 산상교훈(山上敎訓), 계속하여 가르쳐 후세에 전한다는 뜻에서 산상수훈(山上垂訓), 보배와 같은 말씀이라는 뜻에서 산상보훈(山上寶訓) 등의 명칭으로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후대의 사람들이 마태복음 5-7장에 대해서 산상수훈, 산상설교, 산상교훈, 산상보훈 등의 이름을 부여한 것입니다. 이 가운데 산상수훈이라는 말이 현재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전해진 가르침의 핵심

산상수훈은 설교와 담화(談話) 등의 형식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전해진 것입니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3년의 공생애를 통해 전하신 수많은 설교와 제자들과 대화하시며 가르치신 어록 등의 자료들을 꼼꼼하게 수집하고 편집해서 한 편의 설교집으로 정리, 마태복음 5∼7장에 가장 완전한 형태로 수록했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누가복음 등 공관복음을 보면, 마태가 산상수훈에 집약해서 기록한 내용이 복음서의 여러 곳에서 반복되어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 산상수훈이 산 위에서 단 한 번 일회적으로 제자들에게 선포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에 깊이 새겨질 수 있도록 여러 번 반복적으로 강조되어 가르쳐졌던 내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산상수훈은 예수님께서 전해주신 모든 가르침들이 집약되어 있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산상수훈은 기독교 신앙과 윤리의 규범적 기초이며, 대헌장과 같은 천국의 가장 기본적인 골격이 되는 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나라의 백성이 진정으로 그 나라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법을 지켜야 하는 것처럼,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면, 하나님 나라의 법을 준수하며 살아가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 법의 통치를 받는 자만이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법을 지키지 않는 자들은 처벌을 받거나, 그 나라를 떠나야 합니다. 산상수훈은 하나님 나라의 법을 가장 온전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산상수훈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이요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살아가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산상수훈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산상수훈의 구성

산상수훈은 크게 서론(마5:1-2), 팔복(5:3-12), 빛과 소금의 비유(5:13-16), 6가지 반제와 율법의 완성(5:17-48), 세 가지 경건의 훈련(마6:1-18), 그리스도인의 생활윤리(마6:19-7:27), 실천의 중요성(마7:15-27), 결론(마7:28-29)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보면, 팔복, 빛과 소금의 비유, 6가지 반제Antithese(율법과 새 법), 그리스도교 기도의 모범인 주기도문The Lord’s prayer, 세 가지 경건 훈련(기도, 금식, 구제)의 올바른 지침, 황금률,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가치관, 말씀을 실천하는 삶 등의 중요한 가르침들이 산상수훈에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산상수훈을 공부하며 그리스도의 제자가 가져야 할 올바른 삶의 지침과 인생관, 가치관을 배울 수 있습니다. 산상수훈은 천국 백성이 가져야 할 올바른 마음과 삶에 대해서 정확한 표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산상수훈의 모든 내용은 단순한 가르침이 아니라 천국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먼저 삶으로 실천하심으로 온전히 이루신 세계를 말씀으로 풀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 가르침을 삶으로 실천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것이 진정한 천국의 법이라는 것을 삶을 통해서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6가지 반제

마태는 특히 산상수훈에서 6가지 반제(성내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이혼하지 말라, 맹세하지 말라, 보복하지 말라, 원수를 사랑하라)를 통해 예수님을 모세를 능가하는 율법 선생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모세를 가장 위대한 민족의 지도자로 생각했던 당시 유대인들에게 나사렛 출신의 목수에 불과했던 예수를 모세보다 더 크고 위대한 인물로, 더 나아가 그들이 오랜 시간동안 기다려왔던 그리스도로 선포한 것은 매우 도전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6가지 반제를 통해서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탁월한 해석은 물론, 그것을 기초로 한 차원 더 깊게 열려진 천국의 새 법을 볼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예수님이 모세의 율법을 완성한 율법 선생이요 진정한 그리스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마태는 6가지 반제 중에서 원수 사랑을 중요하게 언급하며, 이것이 율법의 완성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써 원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을 통해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해진다]”(마4:58)고 했습니다. 마태는 하나님을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시는 분으로 그렸습니다(마5:45). 그는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임하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자비를 알리기를 원했고, 그것을 그리스도인들이 닮아야 함을 강조한 것입니다. 기존의 율법이 죄에 대한 벌을 가르쳤다면, 예수님께서는 새 법을 통해서 죄에 대한 용서라는 새로운 차원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이것은 산상수훈을 포함한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이 됩니다. 이 원수 사랑을 통해서 위대한 복음의 시대가 열려진 것입니다.

행함의 중요성

또한 마태는 산상수훈 후반부에서 행함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7:24-27)고 기록하며 산상수훈을 마치고 있습니다. 마태는 「지혜로운 건축자와 어리석은 건축자 비유」를 통해 행함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산상수훈을 결론지었습니다.

그리고 산상수훈 전체 내용 가운데 무려 6분의 1(92절 중 15절) 가량을 통해서 행함의 중요성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산상수훈은 매우 소중한 가르침이지만, 이것이 삶의 실천으로 옮겨지지 않고 단순히 지적 유희를 제공하는 수준에 그치고 만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마태는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깨닫고, 마음으로 공감하는 수준이 아니라, 그것을 실제로 행할 때 진정으로 천국의 백성이 될 수 있고 말씀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행함으로, 실천과 적용으로 이어지지 않는 가르침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배울 뿐 아니라 그것을 삶에서 실천하는 지혜로운 자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산상설교와 평지설교

누가복음 6장 20절에서 49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전해주신 말씀이 산상수훈과 약간은 다르지만 거의 비슷한 내용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전하기 전에 예수님께서 먼저 열두 제자를 뽑으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누가복음 6장 12-1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셔서 밤이 되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신 후에 열두 제자를 뽑으셨습니다. 그리고 이후에 점점 많은 제자들이 주님께 나아오자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도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은 제자들에게 전해진 말씀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는 이 말씀을 전하실 때의 정황에 대해서 “예수께서 저희와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눅6:17)라고 했습니다. 마태가 「산」에서 전했다고 하는 말씀을, 누가는 「평지」에서 전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의 기록은 산상설교, 누가의 기록은 평지설교라고 합니다. 앞에서 산상수훈에서 가르친 말씀을 예수님께서 동일하게 여러 곳에서도 전했다고 언급했지만, ‘산’과 ‘평지’는 복음서의 저자인 마태와 누가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모세가 산에서 선포한 새 법

그렇다면 마태는 왜 예수님께서 산에서 말씀을 전한 것으로 기록했을까요? 이 안에는 매우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마태는 구약 시대의 상징적인 인물인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아서 [산]에서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전함으로 율법으로 다스려지는 [구약 시대]를 열었던 것처럼(참고 출19, 20장), 새로운 모세인 [예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새 법]을 받아서 [산]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전함으로 새 법으로 다스려지는 [신약의 새 시대]를 여신 것으로 그려놓은 것입니다.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가르침으로 인해 신약의 새 시대가 열려지는 감격을 너무나 장엄하고 아름답게 그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모세로 오신 예수님을 증거하고 싶었습니다. 이 감격에 대해서 우리가 깊이 묵상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산상수훈을 통해서 그 천국의 [새 법]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배울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새로운 모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전해주신 천국의 새 법을 깊이 알고, 이를 토대로 새로운 의의 역사를 열어가는 새 시대의 주역이 되는 놀라운 축복이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산상수훈(The Sermon on the Mount)

제자를 삼고, 그들을 그리스도 모든 계명에 순종하게끔 가르치려는 소망 때문에 제자 삼는 사역자는 예수님의 산상수훈에 매우 깊은 관심을 둘 것이다. 산상수훈은 예수님의 가장 긴 설교이며, 그분의 계명으로 가득 찼다. 제자 삼는 사역자라면 예수님이 설교 중 명령하신 모든 것을 자신이 순종할 뿐 아니라 제자들에게 가르치기를 원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 기록된 그 설교에 대해 내가 이해하고 있는 것을 나눌 것이다. 나는 사역자들이 그들의 제자들에게 산상수훈을 강해식으로 가르치기를 권장한다. 바라건대, 내가 쓴 것들이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아래의 것은 산상수훈의 윤곽인데, 우리에게 전반적인 개관을 보여주고 주제를 강조하고 있다.

I.) 예수님이 그분의 청중을 모으시다(5:1-2)

II.) 서론(5:3-20)

A.) 복이 있는 사람들의 성격특성과 축복(5:3-12)

B.) 계속해서 소금과 빛이 되라는 훈계(5:13-16)

C.)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과 율법의 관계(5:17-20)

III) 설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보다 더 의롭게 살라(5:21-7:12)

A.)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달리, 서로 사랑하라(5:21-26)

B.)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달리, 성적으로 순결하라(5:27-32)

C.)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달리, 정직하라(5:33-37)

D.)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같이, 원수를 갚지 말라(5:38-42)

E.)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같이, 네 원수를 미워하지 말라(5:43-48)

F.)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달리, 올바른 동기로 선을 행하라(6:1-18)

1.) 올바른 동기로 구제하라(6:2-4)

2.) 올바른 동기로 기도하라(6:5-6)

3.) 기도와 용서에 대한 교훈(6:7-15)

a.) 기도에 관한 지침(6:7-13)

b.) 용서의 필요성(6:8-15)

4.) 올바른 동기로 금식하라(6:16-18)

G.)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처럼, 재물을 섬기지 말라(6:19-34)

H.) 형제의 작은 결함을 비판하지 말라(7:1-5)

I.) 감상할줄 모르는 자들과 진리를 담론하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7:6)

J.) 기도에 대한 격려(7:7-11)

IV) 결론: 설교의 요약

A.) 요약 문(7:12)

B.) 순종에 대한 훈계(7:13-14)

C.) 거짓 선지자와 거짓 신자를 알아내는 방법(7:15-23)

D.) 불순종에 대한 마지막 경고와 요약(7:24-27)

예수님이 그분의 청중을 모으시다(Jesus Gathers His Audience)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가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마 5:1-2).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무리”에서 빠져나와 산에 올라가심으로 그분의 청중들의 크기를 줄인 것 같다. 우리는 “제자가 나아왔다”는 것을 읽게 되는데, 그것은 마치도 그분의 말씀을 듣기에 굶주린 사람들만이 그분을 따라 헉헉거리며 산을 오르기를 원했음을 보여준다. 분명한 것은 사람들이 꽤 많았다는 것이다; 7장 28절을 보면 그들을 “무리”라고 표현했다.

그 뒤 예수님은 그분의 제자들에게 설교하기 시작하셨는데, 처음부터 우리는 그분의 가장 중요한 주제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었다. 그분은 그들에게 어떤 특징을 소유하면 복이 있는 사람인지를 알려주셨다. 왜냐하면, 그런 특징은 천국을 약속받은 사람한테만 나타나기 때문이다. 오직 거룩한 자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것이라는 것이 곧 그분 설교의 전반적인 주제가 될 것이다. 사람들은 5:3-12의 말씀을 팔복이라 하는 데 모두 이 주제를 드러낸다.

예수님은 복이 있는 사람들의 부동한 특성들을 열거하시면서, 그들에게 많은 구체적인 축복들을 약속하셨다. 무심한 독자들은 종종 각 그리스도인은 팔복중의 한 가지, 오직 한 가지만 소유할 수 있다고 가정하지만, 세심한 독자들은 예수님이 서로 다른 축복을 받게 될 부동한 종류의 그리스도인들을 열거하신 것이 아니라, 모든 진정한 신자들이 다 하나의 포괄적인 미래의 축복인 천국을 상속받게 된다는 것을 뜻하심을 인식한다. 그분의 말씀에 대한 다른 방법의 해석은 있을 수 없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3-12).

축복과 성격특성(The Blessings and Character Traits)

먼저, 약속받은 모든 축복을생각해 보자. 예수님은 복이 있는 사람은 (1) 천국을 상속받을 것이고, (2) 위로를 받을 것이고, (3)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고, (4) 배부를 것이고, (5)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고, (6) 하나님을 볼 것이고, (7)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며, (8) 천국을 상속받을 것이다(첫 번째 약속을 반복함).

예수님은 우리가 심령이 가난한 자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들만이 천국을 상속받는다고 생각하기를 원하셨을까?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고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지만, 둘 다 하나님이 나라는 상속받지 못할까? 화평케 하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긍휼히 여기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지 못할까? 이것들은 분명히 잘못된 결론일 것이다. 따라서 오직 약속받은 많은 축복은 하나의 큰 축복인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는 것 안의 다양한 축복이라고 결론짓는 것만이 안전하다.

이번에는 예수님이 묘사한 서로 다른 특성들을 생각해 보자. (1) 심령이 가난하고, (2) 애통하고, (3) 온유하고, (4) 의에 주리고 목마르고, (5) 긍휼히 여기고, (6) 마음이 청결하고, (7) 화평하며, (8) 박해를 받았다.

예수님은 우리가 한 사람이 마음은 청결하지만, 무자비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를 원하실까? 한 사람이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지만, 의에 주리고 목마르지 않을 수 있을까? 다시 말하지만, 그럴 수 없다. 복이 있는 사람들의 성격특성들은 모든 복이 있는 사람들에 의해 어느 정도 다양하게 공유되고 있다.

분명히, 팔복은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르는 자들의 성격특성을 묘사한다. 그런 성격특성을 제자들에게 열거하는 것을 통하여, 예수님은 그들에게 그들은 구원받은, 언젠가는 천국에서 기쁨을 누릴, 복이 있는 사람들임을 확인시켜 주셨다. 현재, 그들은 받고 있는 고통 때문에 스스로 축복받았다고 느끼지 못할 수 있고, 그들을 지켜보는 세상 사람은 그들에게 복이 없다고 여길 수도 있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그들은 복이 있다.

예수님의 묘사에 부합되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이 아니며 천국을 상속받지 못할 것이다. 모든 제자 삼는 목사들은 그들이 목회하고 있는 무리 내의 사람들로 하여금 이 점을 알게 할 의무를 느껴야 한다.

복이 있는 사람들의 성격특성(The Character Traits of the Blessed)

복이 있는 사람의 8가지 성격특성은 해석에 따라 어느 정도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어떤 도덕적 미덕을 드러내는가? 나는 예수님이 구원받는 사람이 소유해야 할 첫 번째 필요한 특성을 설명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 그는 반드시 자신의 영적 빈곤을 인식해야 한다. 사람은 구원받기 전에 반드시 구주에 대한 그의 필요를 가장 먼저 볼 수 있어야 하며, 예수님의 청중들 사이에는 바로 그런 자신의 불쌍함을 인식한 사람들이 있었다.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한 이스라엘의 교만한 자들에 비해 그들은 얼마나 복된 가!

첫 번째 특성은 모든 구원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고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제외한다. 진정으로 복이 있는 사람은 자기에게는 하나님께 드릴만 한 것이 아무것도 없고 자기의 의는 다 “더러운 옷”(사 64:6)과 같음을 깨달은 사람이다.

예수님은 누구도 순전히 자신의 노력으로만 복이 있는 사람들의 특성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기를 원하지 않으셨다. 아니, 만일 사람들이 이런 특성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복이 있는 사람이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축복하셨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온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이 있는 사람은 단지 천국의 축복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어서 뿐 아니라,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 속에 이룩하신 일 때문이다. 매번 내 삶 속에 있는 복이 있는 사람들의 특성을 볼 때마다, 그것은 나로 하여금 내가 이룬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그분의 은혜로 내안에서 이루신 일을 생각나게 한다.

애통하는 자(The Mournful)

만일 첫 번째 특성이 제일 먼저 나열된 이유가 그것이 천국에 갈 수 있는 제일 필요한 특성이라면, 아마도 두 번째 특성도 의미 있게 나열된 것 같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마5:4). 예수님께서 진심의 회개와 양심의 가책을 묘사하고 계셨을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특별히 성경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룬다고 명확히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고후 7:10을 보라). 예수님께서 어느 한 번 말씀하신 슬픔에 잠긴 세리가 바로 이런 종류의 복이 있는 사람의 예이다. 그는 성전에서 겸손하게 머리를 숙이고, 가슴을 치며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며 울부짖었다.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며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한다고 하나님께 자랑하스럽게 기도하던 인근의 바리새인과는 달리, 그 세리는 자신의 죄를 용서받고 그곳을 떠났다. 그 이야기에서 세리는 복이 있는 사람이었으나 바리새인은 아니었다(눅 18:9-14을 보라). 나는 예수님의 청중들가운데 성령님의 질책을 받고 애통하는 자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들은 곧 성령님의 위로를 받게 될 것이다!

만일 예수님께서 그분께 나아오는 회개 한 사람들이 처음 느끼게 되는 애통을 말씀하시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분은 진정한 신자들이 세상 사람들이 그들을 사랑하는 하나님에 대한 반역을 지속적으로 대면하면서 느끼는 슬픔을 설명했을 것이다. 바울은 그것을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롬 9:2)고 표현하였다.

온유한 자(The Gentle)

세 번째 특성인, 온유함은 성경에서 또한, 성령의 열매 중 하나로 열거되었다(갈 5:22-23을 보라). 온유함은 자체생성 된 속성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성령님이 내주하시는 사람은 온유하게 변화 받도록 축복받았다. 그들은 언젠가는 이 땅을 기업으로 받게 되는데, 그것은 오직 의인만이 하나님이 지으신 새 땅에 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거칠고, 폭력적인 자칭 그리스도인들은 조심해야 한다. 그들은 복이 있는 사람 중 속하지 않는다.

의에 주린 자(Hungering for Righteousness)

네 번째 특성인, 의에 주리고 목 마른 것은 모든 진실로 거듭난 사람들이 소유한 하나님이 주신 내적 갈망이다. 의에 주린 자는 이 세상과 자신한테 남아 있는 모든 불의를 슬퍼한다. 그는 악을 미워하고(시 97:10; 119:128,163) 의를 사랑한다.

우리가 성경 속에서 정의란 단어를 읽을 때마다, 자주 즉각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전가한 법적인 입장”으로 번역하지만, 그것은 정확한 해석이 아니다. 많은 경우에, 그것은 “하나님의 기준으로 의롭게 살아가려는 소질”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여기에서 분명히 그러한 의도로 말씀하셨는데,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이 이미 소유하고 있는 것에 굶주려 있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성령님에 의해 거듭난 사람은 의롭게 살 수 있기를 갈망하며, 그들은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배부를” 확신이 있는데(마 5:6), 그것은 그들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이루실 것이기 때문이다(빌1:6).

여기서 예수님은 “의가 있는 곳인”(벧후 3:13) 새 땅의 시간을 예견하셨다. 그때가 되면 죄가 없을 것이다. 모든 사람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지금 의에 주리고 목말라 있는 우리는 배부를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진심으로 된 기도는 모두 응답받을 것이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이다”(마 6:10).

긍휼히 여기는 자(The Merciful)

다섯 번째 특성인 긍휼도 모든 거듭난 사람들이 그들안에 살아계시는 자비의 하나님에 의해 자연스럽게 소유하고 있는 미덕이다. 긍휼을 소유하지 않은 자들은 하나님께 축복받지 못했고, 그분의 은혜를 받지 못했음을 드러낸다. 사도 야고보도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약 2:13)라고 말했다. 만일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긍휼이 없는 심판을 받는다면, 당신은 그가 가야 할 곳이 천국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지옥이라고 생각하는가?[1] 답은 분명하다.

어느 한 번, 예수님은 주인에게 큰 긍휼을 받은 하인이 그의 동료 하인한테는 긍휼을 베풀지 않은 이야기를 말씀하셨다. 주인은 이 사실을 알게 된 후,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겼다”(마 18:34). 모든 이전에 탕감받은 빚은 다시 계산되었다. 그 후 예수님은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처럼 하시리라”(마18:35)고 그분의 제자들을 경고하셨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에게 용서를 구하는 그리스도 안의 형제나 자매를 용서하기를 거부한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전에 용서받은 죄를 다시금 계산하실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영원히 갚을 수 없는 빚을 갚을 때까지 고문당할 것이다. 나에게 그것은 천국을 말하는 것 같지 않다. 다시 말하지만, 긍휼을 베풀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없다. 그들은 복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The Pure in Heart)

천국을 약속받은 사람들의 여섯 번째 특성은 마음의 청결함이다. 많은 자칭 그리스도인들과는 달리,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따르는 자들은 단지 겉으로만 거룩하지 않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의 마음은 청결해졌다. 그들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것은 자신의 묵상과 동기에 영향을 미친다. 예수님은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을 약속하셨다.

나는 다시 한 번 이런 질문을 하고 싶다. 우리는 마음이 청결하지 않음으로 인해 하나님을 볼 수 없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은 나를 보지 못하고도 천국에 올 수 있다”라고 말씀하실까? 아니, 분명히 모든 진정으로 천국을 약속받은 사람이라면 청결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화평하게 하는 자(Peacemakers)

화평하게 하는 자는 다음과 같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예수님은 다시 한 번 모든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따르는 자들을 가리키는데, 그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다(갈 3:26),

성령님에 의해 거듭난 사람은 최소한 다음 세 가지 방면에서 화평하게 하는 자들이다.

첫째로, 전에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던 그들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롬 5:10을 보라).

둘째로, 그들은 될수록 다른 사람들과 화평하게 지낸다. 그들에게는 분쟁과 싸움이 적다. 바울은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이라고 썼다(갈 5:19-21을 보라). 진정한 신자들은 싸움을 피하고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십 리를 더 걸을 수도 있다. 그들은 자기들의 형제는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나님과 화목하다고 주장하지 않는다(마 5:23-24; 요일 4:20을 보라).

셋째로, 복음을 전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따르는 자들은 다른 사람이 하나님과 그리고 그들의 동료와 화목할 수 있게 도와준다. 아마도 산상수훈의 이 말씀 때문에 야고보가 이렇게 썼을 수 있다.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약 3:18).

박해를 받은 자(The Persecuted)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의를 위하여 박해 받은 자들을 축복하셨다. 물론, 그분은 단지 그리스도의 의로움이 그들에게 전가 된 것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닌, 의롭게 사는 사람들을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불신자들의 박해를 받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할 것이다.

예수님은 어떤 종류의 박해를 말씀하셨을까? 고문? 순교? 아니, 그분은 특별히 그분의 연고로 모욕당하는 것을 말씀하셨다. 이것은 다시 한 번 한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불신자와 확연히 다를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불신자들이 그들을 향해 악한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소위 그리스도인이 불신자와 하나도 구별되지 않음으로 하여 한 명의 불신자도 그들을 대적하여 말하지 않을까? 그들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처럼 하였느니라”(눅 6:26)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당신에 대해 좋게 말하고 있다는 것은 당신이 가짜 신자임을 나타낸다. 이 세상은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한다(요 15:18-21; 갈 4:29; 딤후 3:12; 요일 3:13-14).

소금과 빛(Salt and Light)

일단 예수님께서 그분의 순종하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확실히 천국을 상속받을, 변화 받고 축복받은 사람들에 속한다고 보증하셨다면, 그것은 곧 그들에 대한 경고이다. 영적 염소들에게 그들은 영원히 그들이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구원을 상실하지 않을 것이라고 지속적으로 보증하는 수많은 현대적인 설교자들과 달리,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이 실제로 복이 있는 사람들의 범주에서 자신을 제거할 수도 있다는 것을 경고할 수 있을 만큼 그분의 제자들을 충분히 사랑하신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3-16).

예수님은 그분의 제자가 소금이 되거나 빛이 되라고 훈계하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비유적으로) 그들은 이미 소금이 되었다고 말씀하셨으며, 그들이 맛을 잃지 말라고 훈계하셨다. 그분은(비유적으로) 그들은 이미 빛이 되었다고 말씀하셨으며, 그들의 빛을 숨기지 말고, 계속하여 비추라고 훈계하셨다. 예수님의 말씀은 자칭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이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할 필요에 대해 했던 수많은 설교와 다르다. 만일 한 사람이 이미 소금과 빛이 되어 있지 않다면, 그들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니다. 그들은 복이 있는 사람들에 속하지 않는다. 그들은 천국에 갈 수 없다.

예수님의 시대에, 소금은 고기의 방부제로 주로 사용되었다. 그리스도의 순종하는 제자로서, 우리는 이 죄로 가득한 세상을 완전히 썩어가고 부패해지는 데로부터 보존해 준다. 하지만, 우리의 행함이 이 세상과 같아진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아무 쓸데없어”(13절)질 것이다. 예수님은 복이 있는 자들에게 맛을 잃지 말고 자신의 유일한 특성을 보존하기를 경고하셨다. 그들은 반드시 주위의 세상과 구별되어야 하며, “맛을 잃지 말아야” 하는 데 그렇지 않으면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히게 된다.” 이것은 진정한 신자들이 뒤로 후퇴하지 말라는 신약 성경의 여러 분명한 경고 중의 하나이다. 만일 소금이 진짜라면, 짠맛을 낼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따르는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답게 행동해야 하는 데, 그렇지 않으면 심지어 이전에 그리스도인이었던 사람도 지금은 그리스도인이 아닐 수 있다.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따르는 자는 또한, 세상의 빛이다. 빛은 항상 빛난다. 만일 빛을 낼 수가 없다면 빛이 아니다. 이 비유에서, 빛은 우리의 착한 행실을 상징한다(마 5:16). 예수님은 착한 행실이 없는 사람들이 착한 행실을 억지로 짜내라는 뜻이 아니라, 착한 행실이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착한 행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숨기지 말라는 뜻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그들의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릴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께서 그들안에서 행하셨기에 그들이 착한 행실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하심과 우리의 그분과의 동역이 아름다운 균형을 이루는 것을 보게 된다, 누구든지 거룩하여지기 원하는 사람에게는 이 두 가지가 모두 필요하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과 율법의 관계(The Law’s Relationship to Christ’s Followers)

이제 우리는 새로운 단락을 보도록 하겠는데, 이것은 아주 중요한 부분이며, 그리스도의 대부분의 나머지 설교말씀에 대한 서론이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17-20).

만일 예수님께서 자신이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는 그분의 청중들을 경고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적어도 그분의 청중 중 일부가 확실히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었음을 결론 내릴 수 있다. 그들이 왜 이러한 가정을 했는지를 우리는 추측할 수밖에 없다. 아마도 그것은 일부 사람들을 미혹하여 예수님이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게 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엄격한 질책일 것이다.

어쨌든지, 예수님은 그분의 제자가 이러한 가정의 오류를 인식하기를 명확하게 원하셨다. 그분께서 전체 구약 성경을 묵시하셨기에, 그분은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모든 것을 절대로 폐할 수가 없다. 그와 반대로, 그분은 말씀하신 바와 같이, 율법과 선지자를 완전하게 하실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떻게 율법과 선지자를 완전하게 하실까? 일부는 예수님께서 단지 메시아의 예언에 대한 성취만 말씀하셨다고 생각한다. 비록 예수님께서 확실히 모든 메시아의 예언을 성취하셨지만(또는 하실 것이지만), 그분께서 뜻하신 바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문맥을 보면, 그분께서는 분명히 모든 율법과 선지서에 의해 쓰인 “일점 일획”(18절)과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19절)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루실 것을 말씀하셨다.

기타 사람은 예수님께서 그분의 순종적인 삶과 희생적인 죽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셨다고 추측한다(롬 8:4을 보라). 그러나 문맥을 살펴보면, 그것이 예수님께서 뜻하신 바가 아님을 알 수 있다. 18절에서 예수님은 율법을 완전하게 하기 위한 참조점으로써 그분의 삶이나 죽음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씀하시지 않았다. 오히려, 바로 그다음 구절에서, 그분은 율법은 적어도 “천지가 없어지기 전까지는” 우리와 관련이 있으며, “다 이루어 질 것”이다고 말씀하셨는데 이 참조 점은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시점에 비해 훨씬 후의 일이다. 그 후 그분은 율법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는 심지어 그들의 천국에서의 위치에도 영향을 미친며(19절), 사람들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율법을 더 잘 지켜야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선언하셨다(20절).

물론, 메시아 예언, 유형, 율법의 그림자, 그리고 율법의 요구가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것을 성취하는 것 외에도, 예수님은 그분의 청중들이 율법의 계명을 지키고, 선지자의 말씀을 행할 수 있기를 바랐다.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은 율법에 대한 하나님의 진정한 그리고 원래의 의도를 드러냄으로써 율법을 완전하게 하고, 율법을 완전하게 긍정하고 해석하며, 율법에 대한 청중의 부족한 이해를 완전하게 하실 수 있다.[2] 17절에서 완전하게 한다는 헬라어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온전하다, 이루다, 충만하다, 다 하다로 번역되어 있다. 이런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해석하시고자 했던 것이었으며, 네 구절 뒤부터 실현하시기 시작한다.

예수님은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시기 위해 오셨으며, “충만할 때까지 완전하게 하셨다.” 내가 산상수훈의 이 부분을 가르칠 때, 종종 사람들에게 물이 절반 담긴 컵을 하나님께서 율법과 선지자에게 주신 계시의 예로 보여준다. 예수님은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다(이 말을 할 때, 나는 물이 절반 담긴 컵의 물을 쏟아 버릴 것처럼 행동한다). 오히려, 그분은 율법과 선지자를 완전하게 하려고 위해 오셨다(이때 나는 물 한 병을 가져다가 그 컵이 찰 때까지 물을 붇는다).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무엇을 뜻하셨는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율법을 지키는 것의 중요성(The Importance of Keeping the Law)

율법과 선지서에 기록된 계명을 지키는 것에 대하여, 예수님은 더는 강하게 말씀하실 수가 없었다. 그분은 그분의 제자가 계명을 지키기를 바라셨다. 그것들은 여전히 매우 중요했다. 사실, 사람들이 계명을 어떻게 대하는가가 천국에서의 그들의 상태를 결정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5:19).

그리고 20절을 보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새로운 생각이 아니라, “그러므로“란 접속사로 이전 구절과 연결된 결론적인 구절임을 알 수 있다. 계명을 지키는 것이 얼마만큼 중요할까? 한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율법을 더 잘 지켜야 한다. 다시 한 번 우리는 예수님은 오직 거룩한 자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는다는 그분의 주제를 견지하신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스도를 대적하지 않기 위해서는, 제자 삼는 사역자는 어떤 사람이라도 그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낫지 않다면 그의 구원을 보증하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은 어떤 종류의 의를 말씀하셨을까?(Of What Kind of Righteousness Was Jesus Speaking?)

예수님께서 우리의 의는 반드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나아야 한다고 말씀하실 때, 그분은 우리에게 선물로 주실 법적인 의를 말씀하셨을까? 아니, 예수님은 그것을 가리키지 않으셨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문맥으로 보았을 때 이 해석은 적합하지 않다. 이 말씀의 전후 구절(그리고 전체 산상수훈)을 보면, 예수님은 계명을 지키는 것, 즉 의롭게 사는 것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분의 말씀에 대한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은 바로 우리가 반드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의롭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자신의 제자들에게는 적용하지 않는 기준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요구하신다고 보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예수님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정죄하시면서 같은 죄를 지은 그분의 제자들은 정죄하시지 않는데 그 이유가 단순히 그들이 “구원받는 기도”를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가?[3]

우리의 문제는 율법주의자로 보여지지 않기 위해서 말씀의 명백한 의미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진짜 문제는 우리가 예수님이 우리에게 전가한 의와 우리의 행위상의 의가 상호 분리할 수 없는 관계가 있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도 요한은 그것을 이해했으며 이렇게 썼다.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다”(요일 3:7). 또한, 우리는 새롭게 태어난 사람과 의롭게 사는 사람의 상호관계를 몰랐지만, 요한은 알고 있었다.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요일 2:29).

예수님은 5장 20절의 말씀에 다음과 같이 추가하실 수 있었다, “만일 너희가 회개하고, 진정으로 거듭났다면, 산 믿음으로 내가 주는 의를 받게 되며, 네가 내주하시는 성령님과 동역하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보다 더 의롭게 살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보다 더 거룩해질까?(How to be Holier than the Scribes and Pharisees)

5장 20절의 말씀에 대한 응답으로 자연스럽게 다음과 같은 질문이 든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정확히 어느 정도로 의로운가? 그 대답은, 별로이다.

다른 한 번, 예수님은 그들이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마 23:27)고 말씀하셨다. 즉, 그들은 겉으로는 의로워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악하다. 그들은 율법을 문자적으로는 잘 지키지만, 영적인 의미를 무시하고, 종종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말씀을 왜곡하거나 심지어 하나님의 계명을 고치기까지 한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이 본질적인 결함은 실제로 예수님의 산상수훈 중 남은 부분의 주요 초점이 되었다. 우리는 그분께서 하나님의 잘 알려진 계명들을 많이 인용하셨고, 인용하신 후 문자적으로 순종하는 것과 영적으로 순종하는 것의 차이를 설명하셨음을 볼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분은 반복적으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거짓 가르침과 위선을 폭로하셨고, 그분의 제자들을 향한 진실한 기대를 밝히셨다.

예수님은 매번 예를 드시기 전마다 “너희가 들었으나”란 말씀을 하셨다. 그분은 구약성경을 가능하게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는, 단지 회당에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듣기만 했던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그것은 그분의 청중들이 모든 삶 속에서 거짓 가르침만 받아왔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말만 들어왔고, 그들의 거짓된 삶만 보아왔었기 때문이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달리, 서로를 사랑하라(Love Each Other, Unlike the Scribes and Pharisees)

예수님은 그분의 여섯 번째 계명을 시점으로, 그분의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기대를 가르치기 시작하셨는데 그와 동시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폭로하셨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1-22).

먼저, 예수님께서 한 사람을 지옥으로 이끌 수도 있는 것들에 대해 경고하신 점을 유의하라. 그것은 그분의 주제인데 바로 오직 거룩한 자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는다는 것이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여섯 번째 계명을 인용하며 살인을 반대하였는데, 살인은 한 사람으로 하여금 법정에서 심판을 받아야 함을 분명히 경고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분의 제자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인식하지 못한듯한 “작은” 위반도 법정에서 심판을 받아야 하며, 더욱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함을 알게 하고 싶으셨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것(두 번째 큰 계명)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가 형제에게 화를 낼 때에는 우리 자신이 벌써 하나님의 법정에서 정죄당했음을 알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그 형제에게 악한 말을 하여 분노를 말로 표현한다면, 우리의 죄는 더욱 심각해지며, 하나님의 최고 법정에서 봤을 때 자신은 이미 유죄 선언을 받았음을 인식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그보다 더하여, 재차 악한 말로 형제에게 증오를 뿜어 낸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이미 지옥에 던져질만큼 충분히 죄를 지은 것이다.[4] 그것은 심각한 일이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는 우리와 형제와의 관계에 의해 보아낼 수 있다. 만일 우리가 형제를 미워하면, 그것은 우리가 영생을 소유하지 못했음을 드러낸다. 요한은 이렇게 썼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요일 3:15).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 4:20).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예수님이 명하신 대로,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자와 화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마 18:15-17을 보라).

예수님은 계속하여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 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

이것은 우리가 형제와의 관계가 좋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관계도 좋지 않다는 말씀이다. 바리새인들은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킨다”(마 23:23-24)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사소한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중요한 것은 사소하게 생각한다. 그들은 십일조와 예물을 드리는 것의 중요성은 강조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서로 사랑하라는, 두 번째 큰 계명의 중요성은 무시한다. 예수님의 두 번째로 중요한 계명은 지키지 않으면서, 예물을 드리는 것으로 하나님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은 얼마나 위선적인가! 예수님은 바로 이런 것을 경고하고 계셨다.

예수님은 계속하여 하나님 심판의 엄중성을 말씀하셨다.

너는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마 5:25-26).

하나님의 법정에서 벗어나, 될 수 있는 한, 우리의 형제들과 평화롭게 사는 것이 가장 좋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우리에게 화를 냈을 때, 우리가 “법정으로 가는 길” 곧 하나님의 앞에 설 때까지, 삶 속에서 그들과 화해하기를 고집스럽게 거부한다면, 우리는 분명히 후회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마태복음 18:23-35에서 나오는 용서하기를 거부하는 종의 모습과 매우 유사하다. 용서받았지만, 용서하기를 거부한 그 종은 빚을 다시 갚도록 되었으며, 그는 “빚을 다 갚을 때까지” 옥졸들에게 넘겨졌다(마 18:34). 여기서 예수님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 무서운 영원한 결과를 맞이할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달리, 성적으로 순결하라(Be Sexually Pure, Unlike the Scribes and Pharisees)

일곱째 계명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율법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지만, 영적인 의미를 무시하는지에 대한 예수님의 두 번째 예의 주제이다. 예수님은 그분의 제자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보다 성적으로 더 순결하기를 바라셨다.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마 5:27-30).

다시 한 번, 예수님께서는 오직 거룩한 자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는다는 주제를 유지하고 계심을 유의하라. 그분은 지옥과 그곳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할 일에 대해 경고하셨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일곱 번째 계명을 무시할 수 없으므로, 겉으로는 자신의 아내에게 충실한 척한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여성과 사랑을 나누는 상상을 한다. 그들은 시장에서 여자들을 보면 옷을 벗은 모습을 상상한다. 그들은 마음속으로 간음했으며, 따라서 일곱째 계명의 영적인 의미를 어겼다. 오늘날 교회 안의 상황은 얼마나 다를까?

물론, 하나님은 사람들이 성적으로 완전히 순결하기를 바라신다. 분명한 것은, 만일 이웃의 아내와 성관계를 맺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면, 그녀와 성관계를 맺는 것을 상상하는 것도 잘못된 것이다. 예수님은 이미 모세의 율법에 의해 요구된 것에 더 엄격한 법을 추가하지 않으셨다. 열 번째 계명은 명확하게 정욕에 대한 금지를 포함하고 있다.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출 20:17).

예수님의 청중 중에 정죄받은 사람이 있었는가? 아마 있었을 수 있다. 그들은 무엇을 했야 했는가? 예수님의 지시를 따라 그들은 즉시 회개해야 한다. 정욕에 빠진 사람은 무슨 일이 있든지, 어떤 대가를 치르든지, 음행을 멈춰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옥에 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합리적인 사람은 예수님께서 문자 그대로 음욕을 품은 사람들의 눈을 뽑아 내버리거나 손을 찍어 내버리라는 뜻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한 사람이 음욕을 품어 한눈을 뽑힌다 해도 그는 애꾸눈인 호색자일 뿐이다! 예수님은 극적이고 엄숙하게 일곱 번째 계명의 영적인 의미를 순종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계셨다. 영생은 그것에 달려 있다.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서, 제자 삼는 사역자도 그의 제자들에게 그들로 하여금 실족하게 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모두 찍어 내버리라고 훈계하여야 할 것이다. 만일 그것이 케이블 TV라면, 케이블 연결을 끊어야 하고, 그것이 일반TV라면, 텔레비전을 제거해야 한다. 만일 그것이 구독하고 있는 잡지라면, 구독을 취소해야 한다. 만일 그것이 인터넷이라면, 인터넷 접속을 끊어야 한다. 만일 그것이 열려 있는 창문이라면, 닫아야 한다. 그런 일은 지옥에서 영원히 보내야 할 가치가 없으며, 제자 삼는 사역자는 그의 양 떼를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그들에게 진실을 말하고 경고할 것이다.

간음의 또 다른 방식(Another Way to Commit Adultery)

예수님의 다음 예는 우리가 금방 고려했던 내용과 많이 관련되어 있는데, 아마도 그 이유 때문에 다음 순서에 언급했을 수 있다. 그것은 새로운 주제보다 오히려 앞의 주제에 대한 진일보 심화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 주제는 “바리새인들의 또 다른 방식의 간음”이다.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 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마 5:31-32).

다음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왜곡하여 자기들의 죄로 물든 삶의 방식에 부응시킨 예이다.

예수님 시절의 바리새인을 상상해보자. 길 건너편에 그가 음욕을 품은 매력적인 여자가 살고 있다. 그는 매일 그녀를 볼 적마다 그녀와 새롱거린다. 그녀는 그에게 매력을 느끼기 시작한 것 같고, 그녀를 향한 그의 정욕은 날로 불타오른다. 그는 그녀의 벗은 모습을 보고 싶어하고, 정기적으로 그녀에 대한 성적환상을 한다. 오, 그가 그녀를 소유할 수만 있다면!

그러나 문제가 있다. 그는 결혼했고, 그의 종교는 간음을 금지한다. 그는 일곱 번째 계명을 어기고 싶지 않다(비록 그가 매번 음욕을 품을 적마다 이미 계명을 어겼지만). 그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한 가지 해결책이 있다! 만일 그가 현재의 배우자와 이혼한다면, 그는 자신의 마음속의 연인과 결혼할 수 있다! 그러나 이혼을 하는 것이 합법적일까? 동료 바리새인은 그에게 “합법적이다“고 말해준다. 그것에 대한 성경 말씀도 있다! 신명기 24:1을 보면 아내와 이혼할 때 이혼증서를 주는 것에 대한 말씀이 있다. 이혼은 특정 상황에서 반드시 합법적으로 해야 한다! 그러나 그 상황은 무엇인가? 그 바리새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세히 읽어본다.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신 24:1).

아! 그는 아내에게서 그에게 수치가 되는 것을 발견하기만 하면, 아내와 이혼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발견했다! 그녀는 길 건너편의 여자만큼 매력이 없다는 것이다!(이것은 억지스러운 예가 아니다. 예수님 시절 이혼에 대해 가장 인기 있는 가르침을 주었던 랍비 힐레에 따르면, 한 남자는 자기의 아내보다 더 매력적인 여자를 발견하면 합법적으로 아내와 이혼할 수 있었는데, 왜냐하면, 다른 매력적인 여자가 현재 아내로 하여금 그의 눈에 “수치스럽게” 보이게 하였기 때문이다. 랍비 힐레는 또한, 만일 아내가 그의 음식에 소금을 너무 많이 넣거나, 그에게 아들을 낳아주지 못하면, 그가 아내와 이혼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러므로 이 음욕을 품은 바리새인은 아내에게 필요한 증서를 주고 합법적으로 이혼할 수 있으며 환상 속의 여인과 빨리 결혼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한치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아도 되는데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율법을 지켰기 때문이다.

부동한 관점(A Different View)

물론, 하나님은 사물을 부동한 관점으로 보실 수 있다. 그분은 결코 신명기 24:1-4에 언급된 “수치되는”일이 실제로 무엇이며, 심지어 그것이 이혼을 위한 정당한 이유인지 여부를 규정하신 적이 없다. 사실, 그 단락은 이혼이 합법적인지에 대한 말씀이 아니다. 그 단락에는 두 번 이혼하거나 한 번 이혼한 과부가 그녀의 첫 남편과 재혼하는 것에 대한 금지가 포함되어 있다. 이 단락의 말씀만 보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수치되는”일은 이혼을 합법화한다고 결론짓는 것은 강제적으로 의미를 주입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의 마음속에서, 내가 금방 묘사한 가상의 사람은 간부와 차별이 없다. 그는 일곱 번째 계명을 어기었다. 사실, 그는 일반적인 간부보다 더 간악하다. 왜냐하면, 그는 “이중간음”을 범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된 일인가? 먼저, 그는 자신한테 간음죄를 지었다. 예수님은 나중에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는 간음함이라”(마 19:9)고 말씀하셨다.

둘째로, 그의 이혼당한 아내는 생존하기 위해 반드시 다른 남편을 찾아야 하는 데, 이것이 하나님께는 바리새인이 그의 아내가 다른 남자와 섹스를 하게끔 강요한 것으로 보이신다. 따라서, 그는 그녀가 “간음”[5]하게 한 죄를 지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마5:32, 강조 추가)라고 말씀하셨다.

만일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라”(마 5:32)는 예수님의 말씀이 하나님께서 바리새인이 그의 전 부인의 새 남편이 범한 “간음”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면,[6]예수님은 그 음탕한 바리새인을 “삼중 간음”으로 고소하실 것이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어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마 19:3)라고 질문하는 것으로 보아, 예수님 시절에 이것이 뜨거운 논쟁거리였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의 질문은 그들의 속내를 드러낸다. 분명한 것은, 적어도 그들 중 일부는 합법적으로 이혼할 수 있는 이유가 있다고 믿었다.

나는 그리스도인들이 이혼에 대한 이 말씀을 잘못 해석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무거운 족쇄를 채우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에 대해 반드시 더 말해야겠다. 예수님은 여기에서 아직 거듭나기 전에 이혼한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훌륭한 짝을 찾아 결혼하는 것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것은 간음에 해당되 않는다. 만일 그것이 예수님의 뜻이었다면, 죄인들의 모든 죄에 대한 용서가 더는 제공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복음을 변경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지금부터 우리는 이렇게 설교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을 위해 죽으셨다. 만일 당신이 회개하고 그분을 믿는다면, 당신은 당신이 지은 모든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이혼 했다면, 당신은 재혼하지 말아야 하는 데 그렇지 않으면 간음하며 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성경은 간음한 사람은 지옥에 갈 것이라고 말씀한다. 또한, 만일 당신이 이혼한 후 재혼했다면, 당신은 그리스도께 나아오기 전에, 한 번 더 죄를 범하고 현재 배우자와 이혼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계속하여 간음하며 살게 되고 간음한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다.”[7]이것이 복음이란 말인가?[8]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달리, 정직하라(Be Honest, Unlike the Scribes and Pharisees)

예수님의 세 번째 예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불의한 행위 및 성경 말씀에 대한 오용은 진실을 말하라는 하나님의 계명과 관련된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거짓말을 할 수 있는 매우 독창적인 방법을 개발했다. 우리는 마태복음 23:16-22에서 보다시피 그들은 성전으로, 제단으로, 하늘로 맹세하면 자신의 맹세를 지켜야 할 의무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이 성전의 금이나, 제단 위의 예물이나 하늘 위의 하나님으로 맹세하면, 그들은 자신의 맹세를 지킬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은 어린아이들같이 손가락을 끼고 뒷짐을 지면, 진실을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예수님은 그분의 제자가 진실을 말하기를 원하신다.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마 33:37).

맹세에 관한 하나님의 원래 계명을 보면, 다른 무엇으로 맹세하라는 언급이 없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이 항상 진실을 말하기를 원하셨기에, 따라서 맹세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맹세는 서약이나 약속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맹세하는 것은 아무 잘못이 없다. 사실, 하나님께 순종하겠다는 맹세는 아주 좋다. 구원은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맹세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다른 무엇으로 맹세할 수밖에 없을 때, 그것은 그들이 거짓말한다는 간접적인 시인이다. 항상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맹세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교회는 거짓말쟁이로 가득하며, 사역자들은 종종 거짓과 기만의 선두 주자들이다.

제자 삼는 사역자는 정직한 모범을 보이고, 그의 제자들에게 항상 진실을 말하라고 가르친다. 그는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질 것이라는 요한의 경고를 알고 있다(계 21:8을 보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같이, 원수를 갚지 말라(Don’t Take Revenge, as do the Scribes and Pharisees)

예수님의 불만목록 중의 다음 항목은 구약 성경의 매우 잘 알려진 구절에 대한 바리새인의 남용이다. 우리는 이미 이 구절을 성경적 해석에 관한 장에서 살펴보았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 5:38-42).

모세의 율법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줬다고 유죄판결을 받았으면, 그는 그 피해에 상응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선언했다. 만일 그가 다른 사람의 이를 부숴버렸다면, 공정성과 정의에 의해, 그의 이도 부서져야 할 것이다. 이 계명은 법정에서 주요 범죄에 대한 정의를 확보하기 위해 주어졌다. 하나님은 율법에 따라 법정과 재판관의 제도를 만드셔서 범죄를 억제하고, 정의를 확보하고, 원수를 갚는 것을 막으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재판관은 공정해야 한다고 명령하셨다. 그들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라는 계명을 따르지만, 그 문구와 계명은 항상 법정에서 정의에 관한 구절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다시 한 번 계명을 왜곡하여 개인적인 원수를 갚는 것을 거룩한 의무로 만들어 버렸다. 분명한 것은, 그들은 관용이라곤 전혀 없이, 작은 침해에 대해서도 원수를 갚으려 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에게 항상 더 많은 걸 기대하신다. 원수를 갚는 것은 그분이 명시적으로 금지하신 것이다(신 32:35을 보라). 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은 자신의 원수에게 자비를 보여줘야 한다고 가르친다(출 23:4-5; 잠 25:21-22을 보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악인을 상대할 때에는 한 뺨을 때리면 다른 뺨을 돌려대고,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라고 가르치시면서 이 점을 확인하셨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잘못하였을 때, 하나님은 우리가 선으로 악을 갚고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이용하고, 원하는 대로 우리의 삶을 파괴하도록 허용하기를 기대하실까? 우리가 불신자들을 법정에 고소하고 우리에게 저지른 불법 행위에 대한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 잘못된 것일까? 아니, 예수님은 법정에서 큰 범죄에 대한 정당한 정의를 취득하는 것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사소한 침해에 대한 개인적인 복수를 말씀하셨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등을 찌른 사람에게 목을 졸라매도록 우리의 목을 내어주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분은 누군가가 우리에게 자동차를 요구하면, 그 사람에게 집까지 주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예수님은 단순히 우리에게 우리가 매일 겪게 되는 사소한 침해와 이기적인 사람들을 대면하면서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해 높은 수준의 관용과 자비를 보여줘야 함을 말씀하셨다. 그분은 우리가 이기적인 사람들의 기대 이상으로 친절하기를 원하신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 기준과는 거리가 멀다.

왜 수많은 자칭 그리스도인이 이렇게 쉽게 침해를 받는가? 왜 그들은 뺨을 맞는 것보다는 열 배나 더 작은 침해에 대해서도 이렇게 쉽게 화를 내는가? 이들은 과연 구원받았을까? 제자 삼는 사역자는 다른 뺨을 돌려대는 모범을 보여주며, 그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도록 가르친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같이, 네 원수를 미워하지 말라(Don’t Hate Your Enemies, as do the Scribes and Pharisees)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들의 증오의 마음을 수용하기 위해 고쳐버린 하나님이 주신 계명을 나열하셨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3-48).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레 19:18)라고 말씀하셨지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편리하게 이웃은 자기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이고 다른 사람은 다 원수라고 보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웃만 사랑하라고 하셨기에 우리가 우리의 원수를 미워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예수님에 따르면, 그것은 전혀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나중에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가 응당 모든 사람을 이웃으로 생각해야 함을 가르치셨다.[9]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원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을 사랑하기를 원하신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분의 자녀를 위한 기준이며, 그분 자신이 살아가는 삶의 기준이다. 그분은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신다. 우리는 응당 그분을 본받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 친절을 보여줘야 한다. 우리가 그같이 할 때, 그것은 우리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아들”(마 5:45)임을 보여준다. 정통적인 거듭난 사람은 그들의 아버지처럼 행동한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우리의 원수들을 향해 보여주기를 원하시는 사랑은 감정이거나, 그들의 불의에 대한 승인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에게 대항하는 이들에 대해 따뜻한 감정을 배양하라고 요구하시지 않는다. 그분은 우리가 우리의 적들이 정말 멋진 사람들이라고 거짓말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하지만, 그분은 우리가 그들을 향해 자비를 베풀고, 적어도 그들에게 문안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등 자원적인 행동을 하기를 기대하셨다.

예수님께서 다시 한 번 오직 거룩한 자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한다는 그분의 주제를 강조하셨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만일 그들이 단지 그들을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그들이 모든 유대인의 보기에 지옥으로 갈 것 같은 두 부류의 사람인 이교도 이방인과 세리보다 나을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단지 그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사람은 지옥에 갈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달리, 올바른 동기로 선을 행하라(Do Good for the Right Motives, Unlike the Scribes and Pharisees)

예수님은 그분을 따르는 자들이 거룩하기를 기대하셨을 뿐 아니라 그들이 올바른 동기로 거룩해지기를 기대하셨다. 한 사람이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해도 만일 그의 순종이 잘못된 동기에서 비롯되면 여전히 그분을 매우 불쾌하게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질책하셨는데, 그것은 그들이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하였기 때문이다(마 23:5을 보라). 그분은 그분의 제자들은 다르기를 기대하신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1-4).

예수님은 그분을 따르는 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할 것을 기대하셨다.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 그것을 명령하셨고(출 23:11; 레 19:10; 23:22; 25:35; 신 15:7-11),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나팔을 불며 표면적인 구제를 하였는데, 가난한 자들을 모아 공개적인 배급을 받게 하였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자칭 그리스도인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는지 모른다. 그들은 구제해본 적이 없기에 그 동기를 점검해볼 필요조차 없다. 만일 이기심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구제를 광고하게 했다면, 자칭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가난한 사람들의 곤경을 무시하게 한 것은 무엇일까? 이런 점에서, 그들의 의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를 능가했는가?

바울이 고린도전서 3:10-15에서 되풀이한 것처럼, 우리는 잘못된 동기로 선행을 할 수도 있다. 만일 우리의 동기가 순수하지 않다면, 우리의 선행은 상을 받지 못할 것이다. 바울은 불순한 동기로 복음을 전파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밝혔다(빌1:15-17을 보라). 예수님께서 지시하신 것처럼, 우리가 구제하는 동기가 순전한지를 확인하는 좋은 방법은 구제할 때에 될수록 은밀하게 하여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이다. 제자 삼는 사역자는 그의 제자들에게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라고(그들이 할 수 있다면) 가르치며, 그도 자신이 가르치는 대로 조용하게 실천한다.

올바른 동기로 기도하고 금식하라(Prayer and Fasting for the Right Reasons)

예수님은 또한, 그분을 따르는 자들이 기도하고 금식하기를 기대하시고, 그들이 그것을 하는 이유가 사람에게 보이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기 위함이기를 바라신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지옥에 가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다를 바가 없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기도하고 금식하는 유일한 이유는 매우 일시적인 보상인 사람들의 칭찬을 받기 위함이다. 예수님은 그분을 따르는 자들에게 이렇게 권고하셨다.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5-6, 16-18).

얼마나 많은 자칭 그리스도인들이 기도 생활을 하지 않고, 금식해본 적이 없는지 모른다.[10]이런 점에서, 그들의 의가 이 모든 것을 행하는(잘못된 이유임에도 불구하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기도와 용서의 주제로 돌아오다(A Digression Regarding Prayer and Forgiveness)

기도의 주제를 말씀하시는 동안, 예수님은 본제를 조금 벗어나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방법에 관하여 더욱 구체적인 지침을 주셨다. 예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 그분께서 자신에 대해 계시한 것을 우리가 부정함으로 그분의 아버지를 모욕하지 않기를 원하셨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께 간구하기 전에 이미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그분은 모든 것을 아신다), 우리가 기도할 때 무의미한 반복을 할 이유가 없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 6:7-8).

진실로, 우리의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를 드러낸다. 그분이 말씀 속에서 자신을 계시함으로 그분을 아는 사람은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고 그분께 영광을 돌린다. 그들의 가장 큰 소원은 거룩하여져서 온전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모범적인 기도에서 반영되는데 우리는 그 기도를 주님의 기도라고 부른다. 그것은 우리의 우선순위와 헌신에 대한 그분의 기대를 드러낸다.[11]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마 6:9-11).

그리스도의 제자가 가져야 할 최고의 관심사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고, 존경받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은 그들 자신이 거룩해 짐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위선적이다. 따라서 이 기도는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하나님께 복종하기를 원하는 우리의 소원을 반영한다.

모범기도의 두 번째 간구도 비슷하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나라에 대한 생각은 그 나라를 지배하는 한 왕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 제자는 그의 삶을 주관하시고, 온 땅을 지배하시는 그의 왕을 볼 수 있기를 소망한다. 아, 모든 사람이 순종의 믿음으로 왕이신 예수님께 무릎을 꿇고 경배드려야 할 것이다!

세 번째 간구는 첫 번째와 두 번째 간구의 되풀이이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다시 한 번, 우리가 자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고 어떻게 이러한 기도를 진심으로 할 수 있겠는가? 진정한 제자는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완전하게 이루어지기를 갈망한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며,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고, 그분의 나라가 임하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일용 할 양식”을 얻는 것보다 더 중요해야 한다. 이 네 번째 간구가 네 번째에 배치된 것은 그럴만 한 이유가 있다. 이 간구는 우리가 가져야 할 정확한 우선순위를 반영하며 탐욕에 대한 언급은 한마디도 찾아볼 수 없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재물이 아닌 하나님을 섬긴다. 그들은 초점을 이 땅에 보물을 쌓아두는 것에 두지 않는다.

그리고 이 네 번째 간구는 모범기도는 우리가 매일 하루를 시작할 때마다 해야함을 보여주는 듯 하다.

모범기도는 계속하다(The Model Prayer Continues)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종래로 죄를 짓지 않을까? 그들도 분명히 때로는 죄를 지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그들의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도록 가르쳤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2-15).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들의 불순종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고, 그들이 죄를 지으면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얼룩을 제거하려 하고, 고맙게도 은혜로우신 하늘 아버지께서 기꺼이 용서해 주신다. 그러나 그들은 반드시 용서를 구해야 하는 데 그것은 곧 주님의 기도의 다섯 번째 간구이다.

그러나 그들이 용서받는 것은 그들이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용서를 조건으로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많이 용서받았기에 그들도 그들에게 용서를 구하는 모든 사람을 용서해줄 의무가 있다(그리고 용서를 구하지 않는 사람도 사랑하고 그들과 화해하기를 힘써야 한다). 만일 그들이 용서하기를 거부하면 하나님은 그들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여섯 번째이자 마지막인 간구도 분명히 진정한 제자가 거룩해지려는 소원을 반영하였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그러므로 진정한 제자는 거룩함을 추구하기에 하나님께 그가 유혹될 수 있거나 실족할 수 있는 상황에 놓이지 않게 해달라고 간구한다. 또한, 그는 하나님께서 그가 빠질 수 있는 모든 악에서 구원해 달라고 간구한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악하고 유혹으로 가득한 이 세상으로 나아가기 전에 하루를 시작하면서 할 수 있는 좋은 기도이다. 그리고 우리는 당연히 그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이 기도를 응답해 주실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왜 이 기도의 여섯 가지 간구가 적절한지를 이해한다. 그 이유는 기도의 마지막 줄에 공개되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마 6:13). 하나님은 그분의 나라를 통치하시는 위대하신 왕이며 우리는 그분의 종이다. 그분은 전능하시며 아무도 그분의 뜻을 거역할 수 없다. 모든 영광은 영원히 그분께 있다. 그분은 우리의 순종을 받을만한 분이시다.

주님의 기도의 지배적인 주제는 무엇일까? 거룩함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고, 그분의 통치가 이 땅 위에 세워짐으로 하여 그분의 뜻이 모든 곳에 완전하게 이루어지기를 소망한다. 이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자신의 일용할 양식보다 더 중요하다. 그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원하며, 그들이 실패했을 때, 그들은 그분께 용서를 구한다. 용서받은 사람으로서, 그들은 다른 사람도 용서해준다. 그들은 완벽하게 거룩해지기를 원한다. 그들은 유혹을 피하기를 소원하는 데, 그것은 유혹은 그들이 죄를 지을 가능성을 커지게 하기 때문이다. 제자 삼는 사역자는 그분의 제자들에게 이런 것들을 가르치고 있다.

제자와 그의 물질적 소유(The Disciple and His Material Possessions)

산상수훈의 다음 주제는 물질의 축적을 삶의 주요동력으로 삼는 자칭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매우 큰 불쾌감을 줄 수 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19-24).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위하여 땅에 보물을 쌓아 두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그렇다면 “보물”은 무엇을 의미할까? 문자 그대로 보물은 보물 상자에 넣어서 어딘가에 보관되며 실제로 어떤 곳에도 사용되지 않는다. 예수님은 그것들은 좀벌레와 동록과 도둑을 끌어온다고 말씀하셨다.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은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좀벌레는 우리가 자주 입는 옷이 아닌 옷장의 맨 끝 부분을 해한다. 동록도 우리가 거의 사용하지 않는 것들을 해한다. 많은 선진국에서, 도둑들은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이 필요로 하지 않는 예술품, 보석, 비싼 장치, 그리고 저당 잡힐 수 있는 물건과 같은 것들을 훔친다.

진정한 제자들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린다”(눅 14:33을 보라). 그들은 단순히 하나님의 재물을 관리할 청지기이기 때문에 재물을 지출하는 모든 결정은 영적인 결정이다. 우리가 우리의 재물을 어떻게 관리하는가를 보면 누가 우리의 삶을 주관하는지를 보아낼 수 있다. 우리가 “보물”을 쌓아두며, 재물을 저축하고 필수적이지 않은 물건들을 구매하고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주관하고 계시지 않음을 드러내는데, 만일 그분이 주관하셨다면,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에게 위임하신 재물로 더 나은 일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더 나은 일이란 무엇인가?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늘에 보물을 쌓아 두라고 명령하셨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그분은 누가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눅 12:33).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고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우리는 하늘에 보물을 쌓아둔다. 예수님은 우리가 가치를 잃고 쓸모없어지기 마련인 것들을 영원히 가치가 떨어지지 않을 것들에 투자하라고 말씀하신다. 제자 삼는 사역자가 하는 일이 바로 그런 것들이며, 그분 역시 제자들에게 똑같이 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나쁜 눈(The Bad Eye)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고, 나쁜 눈을 가진 사람은 온 몸이 어두울 것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무슨 의미일까? 그분의 말씀은 꼭 돈과 물질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은 전 후 구절에서 모두 그 부분에 대해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6장 23절에서 “나쁘면”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마태복음 20장 15절에서 “악하게(부러워하는)”로 번역되었다. 거기서 우리는 한 주인이 한 품꾼에게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또는 내가 후하니까 네 눈이 부러워하느냐)”고 말하는 것을 읽을 수 있다. 분명히 눈은 문자 그대로 부러워 할 수 없다. 따라서 “부러워 하는(또는 나쁜) 눈”이란 표현은 탐욕스러운 사람을 가리킨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마태복음 6:22-23에서 의미하신 바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성한 눈을 가진 사람이란 진리의 빛이 그에게 들어오게 하는, 순수한 마음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를 섬기며, 땅이 아닌 그의 마음이 있는 하늘에 보물을 쌓아둔다. 나쁜 눈을 가진 사람은 진리의 빛이 그에게 들어오지 못하도록 마음을 닫았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가 이미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어둠으로 가득하며 거짓말을 믿는다. 그는 자기의 마음이 있는 땅에 보물을 쌓아두며, 그의 삶의 목적은 자기만족이라고 믿는다. 돈이 그의 신이다. 그는 천국을 상속받지 못한다.

돈을 자신의 신으로 모신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그것은 당신의 마음에 오직 하나님만이 계셔야할 자리에 돈이 자리잡고 있는 것을 말한다. 돈이 당신의 삶을 주도하고 있는 것이다. 돈은 당신의 에너지, 생각과 시간을 소모한다. 돈만이 당신의 기쁨의 주요 원천이다. 당신은 돈을 사랑한다.[12] 그 이유 때문에 바울은 탐하는 자와 우상 숭배자를 동일시하였고, 탐하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한다고 하였다(엡 5:5; 골 3:5-6을 보라).

하나님과 재물은 모두가 우리 삶의 주인이 되고 싶어하며,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 다시 한 번, 우리는 예수님께서 “오직 거룩한 자만이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는다”라는 그분의 주제를 유지하고 계심을 볼 수 있다. 그분은 어둠으로 가득한 사람은, 돈을 신으로 삼고, 땅에 마음을 두고 땅위에 보물을 쌓아두고 있으며, 생명으로 통하는 좁은길로 가지 않음을 분명하게 지적하셨다.

탐욕스러운 가난한 자(The Covetous Poor)

사치품을 탐내는 것만이 사람들을 물질에 빠지게 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일은 기본 필수품일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은 계속하여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 6:25-34).

이 책의 많은 독자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람들과 많이 다를 것이다. 당신이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위해 마지막으로 염려해본 것은 언제인가?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확실히 우리 모두에게 적용된다. 만일 우리가 생활 필수품을 추구하는 데에 신경쓰고 있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면, 필수품이 아닌 것을 추구하는 데에 신경을 쓰는 것은 얼마나 더 잘못된 것일까? 예수님은 그분의 제자가 두 가지 일을 추구하는 데에 집중하기를 바라셨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이다. 자칭 그리스도인이 십일조(구약의 계명임)는 낼 수 없지만, 많은 필요하지 않은 물질적인 것들을 살수 있다면, 그는 과연 그리스도의 기준인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계명대로 살았는가? 답은 분명하다.

흠잡는 사람이 되지 말라 (Don’t be a Fault-Finder)

예수님께서 그분을 따르는 자들에게 주신 다음 계명은 비판과 흠 잡는 죄에 관한 것이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 7:1-5).

비록 예수님은 이 구절에서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가리키지는 않으셨지만, 그들은 확실히 그런 죄를 짓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들은 예수님의 흠을 잡으려 하였다!

다른 사람을 비판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이 경고는 무엇을 의미할까?

먼저, 그분의 뜻이 아닌 것을 생각해 보자. 그분은 우리가 사람들의 행동을 관찰함으로써 그들의 성격에 대한 기본적인 판단을 하고 분별하지 말아야함을 의미하시지는 않았다. 그것은 아주 분명하다. 바로 이 말씀을 하신 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의 진주를 돼지앞에 던지지 말고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라고 지시하셨다(7:6을 보라). 그분은 분명히 특정 부류의 사람들을 돼지와 개에 비유하심으로써 그들이 받은 “진주”와 같은 거룩한 것들의 가치를 인식하지 못함을 말씀하셨다. 그들은 분명히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 계명을 지키려 한다면 반드시 사람들이 돼지나 개인지를 판단해야 한다.

또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양의 옷을 입은 이리”와 같은 거짓 교사(7:15을 보라)는 그들이 맺은 열매로써 판단할 수 있다고 알려주셨다. 분명히,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람들의 생활방식을 관찰하고 판단을 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바울은 고린도 신자들에게 이렇게 썼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고전 5:11).

이 가르침에 순종하기 위해서 우리는 사람들의 생활방식을 검토하고 우리의 관찰을 근거로 그들에 대한 판단을 내려야 한다.

사도 요한은 또한, 우리에게 누가 하나님께 속한 자이고 누가 악마에게 속한 자인지를 쉽게 분별할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사람들의 생활방식을 보면 누가 구원받고 누가 구원받지 못했는지가 분명하다(요일 3:10을 보라).

이 모든 것으로 보아, 한 사람이 하나님께 속한 자인지 아니면 악마에게 속한 자인지를 판단하기 위해 그 사람의 행동을 살펴보고 분별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경고하신 비판하는 죄가 아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무엇을 의미하셨을까?

우리는 예수님께서 형제의 작은 결함, 얼룩을 찾는 것에 대해 말씀하고 계심을 확인할 수 있다(예수님은 이 단락에서 형제란 단어를 세 번 사용하셨는다는 점을 유의하라). 예수님은 우리가 사람들의 명백한 결함을 관찰함으로 그들이 불신자라고 판단하는 것에 대해 경고하시지 않았다(왜나하면 그분은 그 부분에 대해 바로 이 설교에서 우리에게 곧 지시할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을 대하는 방법에 관한 가르침이다. 그들은 서로의 흠을 잡으려 해서는 안되는데, 특별히 자신의 큰 결함은 보지 못할 때 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경우, 그들은 위선적이 된다. 예수님께서 한 번은 위선적인 재판관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

사도 야고보의 서신서는 산상수훈과 아주 유사한데, 그는 이렇게 썼다.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약 5:9). 아마도 이것 또한, 우리가 신자끼리 서로 흠을 잡고, 그것에 대해 서로 원망하는 것에 대한 예수님의 경고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이것은 교회 속에 가장 널리 퍼져있는 죄 중 하나이며, 이런 죄를 지은 사람은 판단을 받는 위험한 위치에 놓여지게 된다. 우리가 다른 동료 신자들을 비판하며, 그의 잘못을 다른 사람들에게 지적한다면, 우리는 황금률을 위반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도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없을 때 우리의 나쁜말을 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동료 신자의 잘못을 지적할 수 있는데, 오직 우리가 위선이 없고, 우리가 대면하는 사람과 같은 죄(또는 더 심한 죄)를 짓지 않았을 경우에만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불신자와 이렇게 하는 것은 완전히 시간 낭비이다. 예수님의 다음 말씀은 그것을 말해주는 듯하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마 7:6).

마찬가지로, 잠언을 보면, “거만한 자를 책망하지 말라 그가 너를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지혜 있는 자를 책망하라 그가 너를 사랑하리라”(잠 9:8)고 한다. 예수님은 딴 때에 제자들에게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라고 말씀하셨다. 제자가 일단 이런 사람들이 진리를 알아보지 못하는 “개”들임을 분별했다면,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도 아직 복음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그분의 종들이 이런 사람들에게 자신의 시간을 낭비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는다.

기도에 대한 격려(Encouragement to Pray)

마지막으로 우리는 예수님의 설교 본문의 마지막 부분에 와 있는데 그것은 기도를 격려하는 약속으로 시작한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 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 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7-11).

“아!” 어떤 독자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산상수훈 중 이 부분의 말씀은 거룩함과 관계가 없다.”

그것은 우리가 기도중에 무엇을 구하고, 두드리고, 찾는지에 달려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로서 우리는 예수님의 설교에서 명령하신 모든 것을 순종하기를 원하며, 그 갈망은 우리의 기도에도 확실히 반영된다. 사실 예수님께서 전에 이 설교에서 하신 모범기도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과 거룩함에 대한 열망의 표현이었다.

또한, 누가복음을 보면, 이처럼 기도를 격려하는 약속은 다음과 같이 마무리 된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13). 예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약속 하실 때 고급스러운 것을 생각하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마음속으로 성령이야말로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셨는데, 왜냐하면,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거룩해 지게 하며 복음을 전파하는 것을 도와 다른 사람들을 거룩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룩한 사람은 천국에 간다.

다른 “좋은 것”은 하나님의 뜻안에 있는 모든 것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은 분명히 그분의 뜻과 그분의 나라에 가장 깊은 관심을 가지셨으며,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더 쓰임받기 위해 하는 기도는 항상 응답 받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맺음말(A Summarizing Statement)

이제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 시점까지 하신 모든 말씀을 요약하는 구절에 도착한다. 많은 주석가들은 이 구절을 놓치지만,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란 단어로 시작하는 이 구절은 분명히 맺음말이다. 따라서 그것은 이전의 가르침과 연결되는데, 그렇다면 이러한 질문이 들 것이다.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을 얼마만큼 요약하고 있는가? 한 번 읽어보고 생각해 보자.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

이 구절은 단지 그 전의 기도에 관한 몇 구절의 말씀에 대한 요약이 아닌데, 그렇지 않으면 이치에 맞지 않다.

예수님께서 설교 초기에 그분이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잘못 생각하는 것에 대해 경고하셨음을 기억하라(마 5:17을 보라). 그 시점부터 지금 도착한 이 구절에 이르기까지 그분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구약 성경의 계명들을 긍정하고 해석하셨다. 따라서, 그분은 지금 자신의 모든 명령을 요약하고 계시며, 이 모든 것은 율법과 선지자로부터 유래되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7:12).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란 문구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17부터 7:12까지 하신 모든 말씀을 연결시켜 준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설교를 마무리 짓기 시작하면서 다시 한 번 오직 거룩한 자만이 천국을 상속받는다는 그분의 주제를 되풀이 하셨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3-14).

분명히 찾는 자가 적으며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과 협착한 길은 구원의 상징이다. 대부분 사람들이 찾는 멸망으로 인도하는 큰 문과 넓은 길은 지옥의 상징이다. 만일 예수님이 이 말씀 전에 한 모든 말씀이 모종의 의미를 지니고, 이 설교가 논리적으로 전개되었고, 예수님이 이성적으로 의사전달을 했다면, 좁은 길에 대한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은 바로 그것은 예수님을 따르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길을 의미할 것이다. 넓은 길은 정 반대일 것이다. 얼마나 많은 자칭 그리스도인이 이 설교에서 묘사한 좁은 길에 서 있을까? 제자 삼는 사역자는 당연히 좁은 길에 서 있으며, 그는 자기의 제자들도 같은 길을 갈 수 있도록 이끌어 가고 있다.

이 설교가 자칭 그리스도인들을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은 구원과 멸망에 관해 많은 말씀을 하셨지만,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 관해서는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았다는 점이다. 하지만, 믿음과 행동은 분리할 수 없음을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설교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 예수님께 순종하는 사람은 자신의 행동을 통하여 믿음을 보여준다. 그분께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의 구원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의 징표일 뿐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 일어나는 변화도 그분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 우리의 거룩함인즉 그분의 거룩함이다.

거짓 종교 지도자를 분별하는 방법(How to Recognize False Religious Leaders)

예수님은 그분의 결론 발언을 계속하시면서, 그분의 제자들에게 거짓 선지자들이 분별없는 자들을 넓은 길로 인도하여 멸망에 이르게 함을 경고하셨다. 그들은 진정으로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이 아니다. 비록 그런 것처럼 위장하지만 말이다. 모든 거짓 교사들과 지도자들은 이 부류에 속한다. 어떻게 그들을 알아낼 수 있을까?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처럼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15-23).

분명히 예수님은 거짓 교사가 매우 기만적임을 지적하셨다. 그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진실해 보인다. 그들은 예수님을 그들의 주님으로 부르고, 선자자 노릇을 하며, 귀신을 쫓아 내며, 권능을 행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양의 옷을 입은 탐욕스러운 이리들이다. 그들은 진정한 양이 아니다. 그들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들의 진정한 신분은 그들의 “열매”로 알 수 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열매는 무엇인가? 분명히, 그것은 권능의 열매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에 대한 순종의 열매이다. 진정한 양들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할 것이다. 가짜는 “불법을 행한다”(7:3). 그렇다면, 우리의 책임은 그들의 삶을 예수님이 가르치고 명령하신 것에 비교해 보는 것이다.

거짓 교사들은 오늘날 교회 속에 편만해 있으며, 우리는 그로 말미암아 놀랄 필요가 없는데 왜냐하면, 예수님과 바울은 우리가 말세가 다가옴에 따라 이런 사람들이 나타날 것을 예견해야 함을 미리 경고하셨다(마 24:11; 딤후 4:3-4을 보라). 우리 시대의 가장 널리 알려진 거짓 선지자는 천국은 거룩하지 않은 사람을 기다린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수백만 명이 영원한 지옥살이를 하는 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존 웨슬리는 그들에 대해 이렇게 썼다

이것은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 하나님의 대사가 마귀의 대리인이 되고- 가르치는 일에 헌신한 사람들이 천국으로 가는 길이 아닌 지옥으로 가는 길을 가르치고 있다…만약 누군가 나에게 “왜, 누가 이런 일을 했는가?”고 묻는다면, 나는 수만 명의 현명하고 존경받는 사람들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들은 교파를 불문하고 교만한 자, 빈들거리는 자, 정욕에 빠진 자, 세상을 사랑하는 자, 쾌락을 추구하는 자, 불의하거나 박정한 자, 안일하고, 부주의하고, 악의 없고, 쓸모없는 존재, 그리고 의로움 때문에 비난을 받은 적이 없는 사람들을 부추겨 그들로 하여금 자기들이 천국으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거짓 선지자들이다. 이들은 하나님을 배신하고 또한, 사람을 배신한다… 이들은 지속적으로 사람들을 어두움의 세계로 끌어간다; 그리고 이들을 따라간 자들은 불쌍한 영혼마저 파멸된다. “지옥이 땅 밑에서 올라와 이들을 삼켜 버렸으면 좋겠다!”[13]

흥미롭게도, 웨슬리는 특별히 예수님이 마태복음 7:15-23에서 경고하신 거짓 교사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많은 거짓 교사가 가르치는 것과는 달리,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자는 지옥에 던져진다고 명백하게 말씀하셨음을 확인할 수 있다(7:19을 보라). 또한, 이 말씀은 교사와 선지자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 예수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고 말씀하셨다. 선지자뿐 아니라 모든 사람도 마찬가지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주제이다–오직 거룩한 자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한다. 예수님께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지옥에 갈 수밖에 없다.

또한, 예수님은 사람의 내면과 외면을 연결시키고 있음을 유의하라. “좋은” 나무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외적으로 드러나는 아름다운 열매의 원천은 사람의 본성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분은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는 사람들의 본성을 변화시켰다.[14]

마지막 경고 및 요약(A Final Warning and Summary)

예수님은 마지막에 하나의 경고 및 요약의 예로 그분의 설교를 결론 지었다. 당신이 예상한 것처럼, 그것은 오직 거룩한 자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한다는 그분의 주제에 대한 예증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 7:24-27).

예수님의 마지막 예는 일부 사람들이 생각하는 “성공적인 인생”에 대한 공식이 아니다. 문맥을 보면 그분은 어떻게 하면 어려운 시기에 그분의 약속을 믿음으로써 물질적인 번영을 이룰 것인가에 대한 조언을 주신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신 산상수훈의 모든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그분의 말씀대로 행한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며 무너지지 아니할 것이며;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그분께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며 엄청난 고통을 겪게 되며,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게 된다(살후1:9).

질문에 대한 답변(Answer to an Question)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그분의 희생과 죽음, 그리고 부활 이전에 살았던 그분의 추종자들에게만 적용될 가능성은 없을까? 그들은 율법아래 있음으로 임시적으로 구원 받았다가, 예수님이 그들의 죄를 위해 죽은 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므로 이 설교의 주제를 폐하여도 되지 않을까?

이런 이론은 잘못된 것이다. 아무도 자신의 행위로써 구원받은 사람은 없다. 구약 시대에도, 그 이전에도 항상 믿음으로 구원받았다. 바울은 로마서 4장에서 아브라함(구약 전)과 다윗(구약시대)은 모두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이지 행위로써 의롭게 된 것이 아님을 주장하였다.

또한, 예수님의 청중들 중 아무도 행위로써 구원받을 수 없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모두 죄를 범하였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롬 3:23).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그들을 구원할 수 있으며,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교회에는 너무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계명을 단지 우리가 죄인임을 인식하게 하는 것만으로 여김으로써 우리가 행위로써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지금 우리가 “복음을 들었으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기에 우리는 그분의 대부분의 계명을 무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계명을 다시 꺼내서 사람이 얼마나 죄악스러운지를 보여주며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해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전 세계로 나아가서 제자를 삼고 일단 그들이 죄책감을 느끼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되면, 내 계명은 그들의 삶에서의 목적을 다 하였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오히려, 그분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 강조 추가). 제자 삼는 사역자는 바로 그 일을 행한다.

[1]흥미롭게도, 야고보서의 그 다음 구절은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약 2:14)이다.

[2]비록 예수님이 의식법을 이루신 것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이 성령님을 통하여 예수님의 부활후 사도들에게 주어질 것이지만, 사람들이 “율법의 도덕적 측면”과 “율법의 의식적 측면”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맞는 말일 것이다. 우리는 지금 신약에서 왜 동물을 희생시킬 필요가 없는지 알고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 양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모든 음식물은 깨끗하다고 선언 하셨기에 구약의 음식법을 따를 필요가 없다(막 7:19을 보라). 우리는 지상의 대제사장의 중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의 대제상장은 예수님이기 때문이다. 의식법과는 달리, 도덕법의 어떠한 부분도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전후에 예수님에 의해 변경된 것은 없다. 오히려 예수님은 도덕법을 자세히 설명하시고 또 긍정하셨다. 그분이 부활하신 후에 사도들도 성령님의 감동으로 그렇게 행하였다. 모세의 율법의 도덕적 측면은 모두 그리스도의 새 언약의 율법에 포함되어 있다. 또한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유대인들에게 말씀하고 계셨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마태복음 5:17-20에 기록된 그분의 말씀은 신약 성경에서 발견된 그분의 지속적인 계시에 따라 해석해야 한다.

[3]또한, 만일 예수님이 우리가 그분을 믿음으로 인해 선물로 전가 받게 되는 율법적인 의를 말씀하셨다면, 그분은 왜 그것에 대해 암시조차 하시지 않았을까? 그분은 왜 교육받지 못한 청중들이 쉽게 오해할 수 있는 말씀을 하셨을까? 그들은 그분께서 전가한 의에 대해 말씀하실 줄을 짐작조차 못할 것이다.

[4]이것은 우리와 그리스도안에 있는 형제 자매들과의 관계에 적용된다. 예수님은 성경이 보편적으로 말씀하듯이(잠 1:7; 13:20을 보라) 일부 종교 지도자들이 어리석다고 말씀하셨다(마 23:17을 보라).

[5]물론, 하나님은 그녀가 재혼 할 때 그녀가 간음을 범했다고 보지 않으셨다. 그녀는 단지 남편의 죄로 인한 피해자였다. 분명한 것은, 그녀가 재혼하지 않는 한, 예수님의 말씀은 의미가 없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가 간음을 범했다고 보는 것은 의미가 없다.

[6]다시 한 번, 하나님은 그녀의 새로운 남편이 간음을 범했다고 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는 선한 일을 하고 있으며 이혼 당한 여자와 재혼하고 그녀의 생활을 돌봐주고 있다. 그러나 만일 한 남자가 한 여자가 자기와 결혼하게 하기 위해서 그녀를 남편과 이혼하도록 부추긴다면, 그는 간음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아마도 그런 죄를 염두에 두셨을 것이다.

[7]물론, 다른 상황도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구원받지 못한 남편에게서 이혼 당한 그리스도인 여자가 그리스도인 남자와 결혼하는 것은 간음을 범한 것이 아니다.

[8]이혼과 재혼에 관한 장에서, 나는 이 문제를 좀 더 철저하게 다룰 것이다.

[9]어떤 율법교사가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님께 “내 이웃이 누구이니까?”라고 물었다. 당신은 그가 이미 정답을 아는 줄로 생각했음을 보아낼 수 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미움 받는 종족인 한 사마리아인이 강도를 만난 유대인에게 자신이 이웃임을 증명한 이야기를 통하여 그에게 답하셨다(눅 10:25-37을 보라).

[10]이 책의 뒷부분에서, 나는 금식의 주제에 관해 전체 장을 통하여 다루었다.

[11]불행하게도, 일부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은 이 기도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그 이유는 이 기도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논리를 적용하면, 우리는 사도행전과 서신서에 기록 된 사도들의 많은 기도가 “그리스도인의 기도”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수 밖에 없다.

[12]다른 경우에도, 예수님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에 관해 같은 말씀을 하셨으며 누가는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었다”(눅 16:14)고 썼다. 때문에 다시 한 번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바리새인들의 행함과 가르침에 대하여 분명하게 폭로하셨다.

[13] The Works of John Wesley (Baker: Grand Rapids, 1996), by John Wesley, reprinted from the 1872 edition issued by the Wesleyan Methodist Book Room, London, pp. 441, 416.

[14]나는 이 기회에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죄를 위해 변명할 때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표현인 “우리는 그들의 마음을 모른다”는 말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말과는 상반되게, 예수님은 여기에서 외적으로 들어나는 것이 내면을 보여준다고 말씀하셨다. 다른 곳에서, 그분은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한다”(마 12:34)고 말씀하셨다. 한 사람이 미워하는 말을 할 때, 그것은 그의 마음이 미움으로 가득 차 있음을 나타낸다. 예수님은 또한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라”(막 7:21-22)고 우리에게 말씀하셨다.한 사람이 간음을 범했을 때 우리는 그가 마음속으로도 간음을 범했음을 분명히 안다.

산상수훈 (Sermon on the Mount)

Good4Joy

산상수훈

산상수훈은 마태복음 (Matthew) 5장부터 7장까지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설교로 마태복음이 기록한 5개의 설교 (Five Discourses) 중 첫 번째 입니다. 산상수훈은 복음서에서 기록한 설교 중 가장 긴 것으로 “팔복”, “주기도문” 등의 유명한 가르침을 포함한 예수님의 아니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설교입니다.

개요와 구조

산상수훈은 우리의 실질적인 왕으로서 예수님의 취임사로 비교할 수 있으며 그 취임사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어떻고 그 백성이 어때야 하는지 가르치고 있습니다.

개요

주제: 천국(축복, 기쁨, 행복)과 천국 백성의 윤리

시간: 공생애 시작; 갈릴리 사역; AD 30년경 (4:12-25)

장소: 갈릴리 (이스라엘 북쪽, 갈릴리 호수 서쪽) 지역의 한 산 (5:1); 전승에 의하면 가버나움 (Capernaum)과 디베랴 (Tiberius) 사이의 한 언덕

청중: 제자 (5:1, 7:28), 천국 백성이 될 사람

산상수훈은 한 번의 가르침이 아니고 여러 번 하신 가르침의 모음이라는 의견도 있음

마태복음의 산상수훈 중 34개 절이 누가복음 6장에 있고 이를 평상수훈(Sermon on the Plain)이라 부름

가르침의 기준

산상수훈을 통해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도덕과 윤리의 기준이 높습니다.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 가르침이 실제적이지 않다고 일축하거나 미래 천국에서 모두 이루어지는 것이라 주장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오늘을 살아가는 제자(크리스천)에게 기준을 주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예를 들어, 크리스천이 천국에서 박해받을 일(5:10)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힘으로는 이 가르침의 기준에 이를 수 없음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에 있어 우리의 어떤 것도 내세울 수 없음을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롬 3:19-20)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갈 3:23-24)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산상수훈은 선행을 통하여 구원을 얻는 방법을 제안한 것이 아니라, 죄인임을 깨달은 이(심령이 가난한 자)가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회개하고 진정한 믿음이 순종의 열매를 맺는 것이라 믿습니다.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설교 구조

산상수훈은 3 포인트 설교의 전형을 보여주는 예입니다.

3 포인트 (도입, 본문, 결론/적용):

천국 백성 (5:3-16): 팔복 (Beatitudes) 즉 천국 백성의 축복과 역할 (빛과 소금) 천국 율법 (5:17-7:6): 예수님의 율법 완성, 예수님의 윤리 가르침과 유대의 율법주의 전통의 대조 천국 들어가기 (7:7-27):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좁은 문, 분별/열매, 반석 위의 집

설교는 반석과 모래 위에 지은 집의 비유로 가르침에 순종하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가르치며 마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말씀에 순종하느냐 불순종하느냐에 따라 그들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실 심판자라 말씀하시며 산상수훈의 결론을 내리셨고 청중은 그의 가르침의 권위에 놀라며 산상수훈은 마치고 있습니다 (7:28-29).

산상수훈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마귀에게 시험을 당하신 후에 첫 사역을 갈릴리 지역에서 하셨는데, 마태복음 4-14장이 그 사역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산상수훈(5-7장)은 갈릴리 사역 중 일부이고 산상수훈이라 부르는 이유는 그 시작 때문입니다.

(마 5:1-2)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여기서 “ 입을 열어 ”하는데, 예수님이 입을 여시는 것 자체가 축복이요 그분의 말씀이 곧 진리요 생명입니다. 그리고 그 시작은 “복있는 자는” 하십니다. 행복, 기쁨, 천국의 복음 즉 기쁜 소식입니다.

그리고 설교의 끝은 (7: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로 맺고 있습니다.

천국 백성

천국 백성은 어떻고 이 땅에서 그들의 목적을 소개하며 설교를 시작하십니다.

팔복 (The Beatitudes 5:3-12)

천국 백성의 축복의 선언으로, 여기서 복(Blessed)은 처한 상황에 좌우되는 세상적 행복(happy)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복은 하나님 나라에서 구원받은 백성이 누리는 완전한 행복(wellbeing)이고 특별한 영적 기쁨입니다.

주요 구절: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같은 가르침: 눅 6:20-23

빛과 소금 (5:13-16)

예수님께서 구약의 예언(사 42:6)을 이루시며 “이방의 빛”이 됨을 이루셨습니다.

(사 42:6)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보며 (눅 2:30-32)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역할을 계속 이어서 수행할 것을 기대하십니다.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같은 가르침: 막 9:50; 눅 14:34-35

참고 말씀:

(요 8: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빌 2:15)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천국의 율법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자비가 아닌 자신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 하나님의 율법의 기준을 낮추거나 변질 시켰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율법을 다시 정리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율법을 수정이나 없애려는 것이 아닌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곡하고 잘 못 행하고 있는 것을 바로 잡는 것입니다. 그 목적을 17-20에서 예수님과 율법/율법의 완성으로 개관 설명하시고 5장 마지막까지 하나씩 설명해 주십니다.

예수님과 율법/율법의 완성 (5:17-20)

예수님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알리심으로 그것을 완전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에 내재한 깊은 원리를 가르치시며 그 율법을 단순한 지식, 외형, 혹은 종교 행위로서가 아닌 온전한 순종(하나님을 온 맘으로 사랑)을 강조하십니다.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마 22:37…39)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주신 율법은 두 가지로 구분하여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직접 돌판에 새겨 주신 십계명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오심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율법입니다. 그러나 십계명 외의 생활 율법들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오심으로 폐하게 되는 것도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제사 율법은 단번에 영원한 속죄양이 되어주심으로 우리가 다시는 양을 잡아 하나님께 대속 물로 드릴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히10장 참고)

또한 유대인들은 당시 많은 규례를 스스로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벗어나 그들 스스로 의인임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즉 마음에서는 멀고 행위만을 함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생각했고,

(마 15:3)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

예수님은 이러한 잘못된 율법 적용에 대해서 재정리해 주십니다. 즉 노하지 말라 (살인), 간음하지 말라, 맹세, 용서와 사랑으로 이어지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십계명을 비롯한 구약의 주요 가르침 비교할 수 있습니다.

노하지 말라 (5:21-26)

“살인하지 말지니라”(출 20:13)의 구약의 가르침과 비교하여, 살인이라는 행위적인 것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내면적이고 원론적인 부분을 지적하시며, 화내는 것은 마음으로 살인하는 것과 같다 가르치십니다.

(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같은 가르침: 눅 12:57-59

제자 요한의 관련 가르침:

(요일 2:9)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요일 3: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간음하지 말라 (5:27-32)

“간음하지 말지니라”(출 20:14)의 구약의 가르침과 비교하며, “살인”(“노하지 말라”)에 대한 가르침과 마찬가지로 마음의 중요성 지적하십니다. 성적 타락 주의에 대해 예수님께서 여러 번 강조하셨고 제자들도 서신서를 통해 같은 내용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심지어는 영적 리더들의, 간음의 죄와 유혹의 위험성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자신의 성적 타락에 대한 죄에 대해 극단적으로 대응해야 합니다.

(28-2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같은 가르침: 마 19:9; 막 10:11-12; 눅 16:18

참고 말씀:

(욥31:1) 내가 내 눈과 약속하였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

(잠6:25) 네 마음에 그의 아름다움을 탐하지 말며 그 눈꺼풀에 홀리지 말라

“눈을 빼고” “손을 찍어 내버리는 (cut it off and throw it away)” 표현을 쓰시며 극단적인 대응을 요구하십니다. 그런데, 예를 들면, 맹인도 상상하며 간음의 죄를 지을 수 있으니, 예수님은 우리에게 불구가 되라 가르치시는 것이 아니고 죄에 대해 매우 심각하게 대해야 한다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같은 표현: 마 18:8-9; 막 9:43-48

맹세하지 말라 (5:33-37)

구약은 신성을 모독한 이 외의 맹세/서원(oaths)은 허락하고 있습니다. (레19:12, 신23:21, 삿 11:30) 하나님도 하십니다. (창 26:3; 시 132:11) 그리고 신약의 예도 있습니다. (행 18:18, 계 10:6)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결혼 서약, 법적 계약 등 약속을 해야 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맹세를 많이 했을 뿐만 아니라 등급을 정해놓고 했었습니다. (참고: 마23:16-22) 깊이 생각지 않고 무심코 난발하는 것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특히 즉흥적인 “하나님 이름이로”, “내 목숨을 걸고” …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또한 맹세는 마치 믿음이 강한 것을 자랑하는 과시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알 수 없으며 우리가 미래를 주관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전히 맹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실은 말할 수 있고 진실만을 말해야 합니다.

(5:37)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제자 야고보의 같은 가르침: 약 5:12

보복하지 말라 (5:38-42)

보복하려는 것은 우리 인간의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하나님께서 의와 약한 이를 보호하기 위하여 주신 자비의 율법을 유대인들은 보복하는 “권리”로 악용했습니다.

(출 21:24)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모든 문제를 보복이나 폭력으로 풀려하지 말고 평화하기를 명령하십니다.

평화를 위하여 가능한 참고 주님께 걱정을 맡겨라. 크리스천은 분쟁과 분란을 피해야 합니다.

(5:39)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참고 말씀:

(롬 12: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원수를 사랑하라 (5:43-48)

당시 유대인들은 이웃을 이스라엘 즉 같은 민족과 같은 종교의 범위에 두고 그 테두리 안에서 사랑의 율법을 지키려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편이나 자기가 좋아하는 이들뿐 아니라 원수를 포함하여 모두를 사랑하라 명령하십니다. 특히 모든 이의 영혼을 사랑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5:44)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세상 사람과 다르지 않고 (우리의) 원수까지 사랑한다면 그것이 하나님을 닮아 가는 것일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러므로”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같은 가르침: 눅 6:27-36

참고 말씀:

(벧전 1: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레 11:44; 19:2; 20:7

구제, 기도/주기도문, 금식 (6:1-18)

구제, 기도, 금식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종교 행위였습니다. 3가지 모두에서 예수님은 외식(남들에게 보이려는)을 삼가라 지적하십니다. 모두 비밀스럽게 즉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마음으로 하라고 가르치십니다.

(6: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3가지는 (2) “구제할 때에”, (5) “기도할 때에”, (16) “금식할 때에”로 말씀하시는데 여기서 “때에”의 영어 해석은 “when you …” 입니다. “if”가 아닌 “when”으로 3가지를 할 때 이렇게 하라 가르치시니 예수님은 제자들이 구제, 기도, 금식하는 것을 전제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주기도문으로 알려진 (6:9-12)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기도는 하나님 찬양, 하나님 나라의 완성, 죄 용서, 그리고 필요를 구합니다.

같은 가르침 (기도): 눅 11:2-4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걱정하지 말라 (6:19-34)

사람들의 눈 때문에 외식하거나 자기 자신을 위한 이기주의가 아닌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분을 위해 살아가라 가르치십니다. 전능하시고 좋으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것이 있어야 할 줄을 다 아시기 때문에 염려하지 말라 가르치십니다.

(33)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참고: 마태복음 6:19-34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비판 말라 (7:1-6)

스스로 의인이라 생각하거나 혹은 남보다 내가 낫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자신의 죄는 보지 못하고 남의 죄를 지적하지 말라 가르치십니다. 자기가 먼저 큰 죄인인 것을 알고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그의 진정한 복을 위해)으로 조심스럽게 다른 이의 잘못을 시정해 주어야 합니다.

분별하지 말라거나 형제의 잘못을 간과하라는 가르침은 아닙니다. 바른 분별이 필요하고 내가 하나님의 거룩함을 추구하는 것처럼 형제의 거룩 추구에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천국 들어가기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7:7-12)

하나님은 찾는 자를 만나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11)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같은 가르침: 눅 11:9-13

“좋은 것” 을 같은 가르침이 있는 누가복음에는 “성령” 이라 쓰고 있습니다. (눅 11:13)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좁은 문 (7:13-14)

(13-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예수님이 많은 사람이 찾지 않는 좁은 문이십니다. 예수님만을 믿음으로 우리는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같은 가르침: 눅 13:24

참고 말씀:

(요 10: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열매로 분별/행하는 자

거짓 선지자는 열매로 분별할 수 있습니다. 바른 믿음을 가진 이는 말씀을 듣고 행하므로 좋은 열매를 맺고 그들이 천국에 들어갑니다.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같은 가르침: 눅 6:43-44, 47-49; 13:25-27

관련 자료

평상수훈 (Sermon on the Plain)

누가복음 6:17-49에 기록하고 있는 평상수훈은 복과 화 (Blessings and Woes), 원수 사랑, 비판하지 말라, 열매/듣고 행하는 자 산상수훈의 일부의 같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평상수훈이라 부르는 이유는, (눅 6:17)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

왜 같은 내용을 마태는 산에서 누가는 평지에서 했다고 기록했을까 라는 질문에, 어떤 이는 예수님께서 비슷한 설교를 여러 번 하셨다라고 해석하고 있는데 대중적인 해석은 높은 산도 아니었고 산에도 평평한 지역이 있을 수 있기에 같은 설교라고 설명합니다.

참고로 누가는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 내용을 4:14-9:9에 담고 있습니다.

참고한 자료

예수의 윤리 교육!?

반석 위에 집을 짓기 전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예수님의 산상설교

여러분 안녕하세요~ 나그네입니다!

이번에는 예수님의 소중한 가르침이 담긴 산상수훈을 소개하려 합니다. 이 설교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설교이자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명언과 금언이 담겨 있습니다.

비그리스도인께서는 이해하기 어렵더라도 단지 자기 계발의 목적으로라도 산상 수훈을 읽어보세요. 지키기 어려운 부분이 있어도 분명 자신의 삶을 성찰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이 글에서는,

산상 수훈이란

잘 알려진 명언들

을 소개하겠습니다.

산상수훈 (Sermon On The Mount)

산상수훈은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 제자들과 군중들에게 말씀하신 가르침을 말합니다. 산상설교라고도 합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마 5:1-2)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모두에서 이 설교를 다루고 있어 이 둘을 평행 본문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마태 쪽은 산상, 누가는 평지에서 설교한 것으로 기록하였습니다. 이 두 저자가 같은 곳에 있었지만 산과 평지로 다르게 느꼈듯이 관점과 작성방식이 조금 달라 산상수훈과 평지 설교로 구분합니다. 여기서는 산상수훈의 내용을 위주로 다룹니다.

산상수훈의 대표적인 내용

그럼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전부 소개해 드리고 싶지만 설교 내용이 너무 많아서 산상수훈 중에서 특히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소개하겠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오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 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마 5:13-16)

먼저 소금은 인간에게 꼭 필요한 물질입니다. 음식을 짜게 하는데 쓸 뿐만 아니라 방부제나 정화의 용도로도 사용됩니다.

지금이야 소금을 쉽게 구할 수 있지만, 예수님 당시에는 상당히 귀한 자원이었습니다. 또한 품질 또한 떨어져서 불순물이 많이 섞인 경우는 짠맛을 잃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 땅의 소금인 그리스도인들도 죄에 오염되면 그 기능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의 소금이니 항상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서 그 맑음을 잃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으로부터 소망의 빛을 받은 세상의 빛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행위를 사람들이 보고 존경심을 가져 예수님의 향기를 느끼도록 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한 것이 돼야 합니다.

알기 쉽게 말하자면, 여러분이 편의점에 가서 친절한 점원의 아주 훌륭한 서비스를 받게 되면,

“와 정말 멋진 가게구나. 또 와야지”

라는 식으로 편의점에 대한 평가가 올라가겠지요?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의 말과 행동을 보고, 그가 믿는 하나님을 평가하는 것입니다.

“책임이 막중하구나!”

음탕한 마음으로 여인을 바라본다면… 아웃!!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마 5:28)

이건 조금 무서운 부분입니다.

모세의 십계명에는 ※간음해서는 안된다고 적혀있습니다만, 예수님은 음탕한 마음으로 여자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간음죄를 범한 것이라는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에… 보기만 했는데요?”

이 부분을 읽으면서 모든 남자들은 부들부들 떨겠지요? 법으로 정해진다면 모든 남성들은 범죄자가 될 테니까요.

예수님이 너무 엄격하다고 생각하시겠지만, 하나님은 티끌만 한 죄도 허용하지 않습니다. 이 말씀으로 인간은 모두 죄인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또한, 죄는 인간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이 직접 이 땅에 오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간음 – 혼인한 배우자 이외의 사람과 성관계를 맺는 것

오른쪽 뺨을 맞으면 왼쪽 뺨도 내주어라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마 5:39)

지키려는 사람은 많이 없어도, 성경에서 가장 잘 알려진 문구라고 생각됩니다. 이 말씀은 원수에 대한 사랑에 대해 설명하시려고 예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을 사랑하는 건 쉬운 일입니다만, 원수를 사랑하는 건 참 힘든 일이지요. 나의 원수처럼 그를 적대하지 않고 사랑해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의 실천임을 말씀해주시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원수였던 우리를 위해 죽으셨듯이, 그리스도인은 원수도 천국에 가도록 사랑으로 도와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을 거부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요.

재물은 하늘에 쌓으라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 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재물의 축적은 곧 부(富, Wealth)를 의미합니다. 사회적 지위나, 능력, 실적까지도 재물의 양에 종속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이 땅의 재물만을 바라보고 의지하게 되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게 됩니다.

본문의 말씀은 거듭난 그리스도인에게 해당되는 말씀이지만, 시간이 흘러 죽게 되면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다는 사실은 모두에게 적용됩니다.

일례로 최근에 별세한 삼성그룹의 총수도 많은 재물이 있었지만 10원도 가져가지 못했습니다. 영원히 사는 천국이 있다는 걸 알았다면, 이 땅에서 잠깐 부자로 살기보다는, 천국에 재물을 쌓아두는 게 현명한 일이겠지요.

덧붙여서, 재물을 하늘에 쌓으라는 말씀은 헌금을 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늘의 재물은 하나님을 위한 마음을 통해서 쌓습니다. 전도를 위한 모든 일 즉 선행, 봉사, 순종 등이 포함됩니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니라 (마 6:34)

이 구절도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는 것. 힘든 날 아주 격려가 되는, 개인적으로도 많은 위로를 받는 말씀입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마 7:1-2)

움찔하시는 분도 있을 것 같습니다.

비판하지 말라. 즉 다른 사람을 심판하거나 판단해서 비난하는 것을 그만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판단했거나 헤아렸던 것에 따라 심판받게 될 것입니다.

이 땅에 사는 같은 사람으로서도, 같은 은혜를 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도, 모든 사람은 남을 판단할 자격이 없습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얻을 것이라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마 7:7)

말씀으로만 보면 매우 간단하고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진심으로 기도하고 구하면 응답해주시는 분이시니까요. 그러나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진심으로 구하지 않고 있는 건 아닐까요? 가장 먼저 구해야 할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입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선물을 먼저 구하세요!

단순하지만 매우 심오한 말씀이라고 생각됩니다.

산상수훈에서 유래된 말

산상수훈에는 격언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사용되고 있는 말의 유래가 된 것도 있습니다. 값어치를 모르는 자에게는 아무리 값진 것을 주어도 의미가 없다는 뜻의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라는 말은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마 7:6)

이 절에서 유래가 되었고, 취직이나 수험생들의 높은 경쟁을 의미하기도 하는 좁은 문은 다음 말씀에서 유래가 되었습니다. 진주와 좁은 문은 영적인 것을 비유한 것인데 육적인 것으로 바꾸어 이해되는 것이 인상적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마 7:13)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가르침에 반한 마하트마 간디

인도 독립의 아버지로 불리는 마하트마 간디. 다들 잘 아시지요? 이 유명한 힌두교도인 간디도 산상수훈의 가르침에 대해 극찬하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간디의 주요 사상이 비폭력 저항주의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설교에 많은 감명을 받았을 듯합니다.

간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나라와 내가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가르침에 따라 합의를 한다면 우리 두나라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의 문제 또한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그는 성경은 자신의 인생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고도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성경을 도덕책 정도로 생각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안타깝게도 진정으로 예수님을 만나지는 못했군요.

정리 : 서로 사랑하라

이 산상수훈은 예수님의 가르침 중 가장 긴 내용을 담고 있지만 요약하면 율법의 완성은 사랑이라는 말씀입니다. 꼭 성경을 읽어보시고 그 속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그럼 또 만나요~Bye

제88일, 마 5:1-7:29, 산상수훈

마태가 정리한 이 복음서에 있는 다섯 개 혹은 여덟 개의 윤리적인 교훈들은 모세 오경이라는 율법서와 비교할 만한 것이라는 데 학자들은 동의합니다. 즉 예수께서 산에서 교훈들을 선포한 것을 마치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하나님의 율법을 백성들에게 말한 것과 같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참고, 5:17). 그러므로 산상수훈은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의 새 율법이요, 새 기준으로, 이는 구약시대의 율법이며 십계명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1-4계명), 옆으로는 이웃을 사랑하라는(5-10계명) 것이며, 또한 천국인의 삶으로 진정한 복이란 이 세상에서 하늘의 것, 보이지 않는 천국을 소유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참고로,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에 두 가지 큰 설교를 하셨는데 하나는 산상수훈(마 5:1-7:29) 이고 다른 하나는 마 24-25장의 감람산 강설입니다).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의 개요(윤리적인 다섯 그룹 혹은 여덟 그룹의 교훈), 눅 17:1-10 참고

5:1-12, 천국 시민의 특징과 그들이 누리는 복

5:13-16, 천국 시민의 참 모습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됨

5:17-20, 율법의 완성자

5:21-48, 하나님 나라의 의를 가르치심

6:1-7:29, 천국 시민의 기본 생활 양식(구제, 기도, 금식, 재물관, 믿음의 확신, 이웃에 대한 태도)

(1) 6:1-8, 의의 방법

(2) 6:19-34, 물질과 염려에 관한 교훈

(3) 7:1-12, 삶의 원리

(4) 7:13-27, 생명의 길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통해 우리에게 행하라고 가르치신 바를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산상수훈을 한 개의 설교(담화)로 이해해야 하며 그 주제의 순서를 중요하게 보아야 합니다. 산상수훈의 주제의 전개는 예수께서 설명하신 천국 생활의 순서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아가페적인 사랑의 삶을 향한 점진적 성장의 단계입니다. 첫째, 복의 진정한 출처를 아는 것, 둘째, 분노와 강박적 정욕을 버리는 것, 셋째, 내 뜻을 이루려고 남을 비판하지 않는 것 등의 성장 단계로서 우리를 미워하고 아프게 하는 자들을 사랑하고 돕는 일이 자연스러운 성장의 열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산상수훈의 목표는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구체적으로 밝힘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이 땅의 삶에 대하여 현실성 있는 희망을 품게 하는 데 있으며, 예수께서는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너희에게 임하였다”고 사람들을 그 나라로 초청하고 있는 것입니다(달라스 윌라드, 『하나님의 모략』190-199쪽 참고).

첫째 그룹, 마 5:1-12, 천국 시민의 특징과 그들이 누리는 복

마 5:1-12, 팔복, 참고, 시 69:33-36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당)하였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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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복 (마 5:1-12)

처음 4가지 – 사람에게는 의가 없음

1)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심령이 가난하다는 말은 영적으로 갈급한 상태로,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을 간절히 기다리며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긴 상태를 말합니다.

2)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자기에게 구원 받을 만한 의의가 없음을 깨닫고, 하나님께 회개하며 엎드려 비는 마음으로 죄를 회개하고 자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제사는 죄인들의 상한 심령(시 51:17)임을 말합니다.

3)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온유한 자는 자신의 의를 주장하지 않고 주님의 사랑을 가득 품고 있는 자로 하늘나라의 땅을 기업으로 받습니다.

4)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의를 따라 살기 때문에 당하는 모든 경우의 부족과 필요를 말하며 이는 자신이 받은 축복을 이웃에게 나누어 주므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양식으로 배가 부릅니다.

* 싹난 지팡이, 특별히, 이 온유라는 말이 성경에서 사람에게 쓰일 때는 하나님에 의해 다스려지고 훈련되어, 우리들의 생각이나 행동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다스려지고, 우리들의 죄성이 다스려지고, 불 같은 성격이 다스려졌을 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복종하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합니다(베드로의 예). 이렇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면 온유한 사람이지만 불순종하면 거만한 사람이요, 온유하지 못한 사람입니다(나 자신의 예). 마음이 온유한 자는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깁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나중 4가지 – 복 받은 자의 책임

5)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진 것으로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교회 내에서도 다른 성도의 잘못을 발견할 때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그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중보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율법을 따라 사는 성도는 자기의 의의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고치려 하며 교회를 파탄으로 몰아넣습니다.

6)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음의 청결은 곧 행위의 거룩함으로 연결됩니다(시 24:4-5, 렘 4:14, 딤전 1:5)

7)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화평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을 때 생기는 하나님 나라의 행복과 평안을 말하며 교회를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최고의 이름을 받게 될 것입니다.

8)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순교자),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 당하였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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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6:20-26, 누가복음의 평지설교(산상수훈)

20.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21.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22.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23.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24.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25.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 싹난 지팡이, 산상수훈이 선포된 장소가 마태와 마가가 다른 이유, 산상수훈이 (신약의 십계명 같은 기본법으로 강조되어) 예수님의 사역 안에서 여러 군데에서 선포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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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지설교’(마태복음에 있는 산상수훈과 비교하여) 눅 6:17-19, 참고

복을 선포하심 : 심령이 1) 가난한 자, 2) 주린 자, 3) 우는 자, 4) 인자로 인하여 핍박 받는 자

화를 선포하심 : 심령이 1) 부요한 자, 2) 배부른 자, 3) 지금 웃는 자, 4) 칭찬받는 자

예수께서 내려 오셔서 평지에 서시니(눅 6:17)에서 연결되는 귀절로 예수님은 네 가지 복과 네 가지 화에 대한 말씀으로, 청중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된 자리로 돌아갈 것을 촉구하며, 이런 삶을 살고 있는 제자들을 위로하십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 나라의 원칙을 잘 지키는 사람들의 참 제자 됨을 보여줍니다(눅 6: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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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그룹, 마 5:13-16, 천국 시민의 참 모습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이다

마 5:13-16, 믿는 자의 삶(소금과 등경),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눅 11:33-36, 믿는 자의 삶(등경)

33.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움 속에나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34.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35.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36. 네 온 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의 빛이 너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 하시니라.

* 싹난 지팡이, 이는 믿는 사람들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지적해 주는 말씀입니다. 소금과 빛의 예를 들어, 믿는 사람들은 소금의 역할처럼 맛을 내고 세상을 썩지 않게 하며 또한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비추는 사람이 되어 세상을 밝히고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 외에 구제도 포함합니다(참고, 믿는 사람들은 복의 근원이 되어야 합니다. 창 12:2).

셋째 그룹, 마 5:17-20, 율법의 완성자

마 5:17-20, 율법과 복음, 참고 눅 16:16-17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 싹난 지팡이, 예수께서는 하나님이 보내신 약속의 결정체이시며, 예언의 성취자이시며, 율법의 완성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구약의 율법을 새로 해석하여 주시는 산상수훈으로 더 깊고 넓은 율법의 의미를 제시합니다.

넷째 그룹, 마 5:21-48, 하나님 나라의 의를 가르치심(진정 선한 사람이 되기 위한 하나님의 의)

마 5:21-26, 살인하지 말라

21.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출 20:13) 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바보)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25.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26.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눅 12:57-59, 화해하기를 힘쓰라

57.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아니하느냐 58. 네가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그가 너를 재판장에게 끌어가고 재판장이 너를 옥졸에게 넘겨주어 옥졸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59. 네게 이르노니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갚지 아니하고서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 싹난 지팡이, 살인은 악의 순서상 으뜸가는 분노(노하지 말라, 출 20:13, 신 5:17)입니다. 구약의 제6 계명은 사람의 몸을 죽이는 것을 살인이라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화를 내는 것도 영을 죽이는 것이므로 살인이라고 말씀하시며, 형제를 바보라고 하며 무시하는 행위도 영이 상처를 받으므로 살인하는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전에 불화한 형제와 화목하고 너를 고발한 자와 화해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마 5:27-32, 간음하지 말라(눈의 간음, 참고, 막 9:47-49, 출 20:14, 신 5:18)

27.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출 20:14) 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29.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30.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31.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신 24:1,3) 3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마 19:1-2 참고).

* 싹난 지팡이, 구약의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에 대한 신약적 해석으로 눈의 간음과 이혼한 여자와 결혼하는 것도 간음이라고 확대 해석합니다.

마 5:33-37, 맹세하지 말라

33. 또 옛 사람에게 말한바 헛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레 19:12, 민 30:2, 신 23:21) 3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35.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시 48:2) 36.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37.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 싹난 지팡이, 거짓 맹세는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보통 맹세할 때에 어떤 기준을 두고 맹세하는데 이것은 옳지 않은 것이며, 단지 옳다, 그르다로 의사를 표시하고 자신의 의견을 강조하기 위하여 맹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 5:38-42, 보복하지 말라 – 용서(참고, 눅 6:29-30, 눅 17:3-4)

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출 21:24, 레 24:20, 신 19:21) 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40.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마 5:43-48, 원수를 사랑하라

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레 19:18)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눅 6:27-36, 원수를 사랑하라

27.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28.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29.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30.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며 31.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32.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33.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34.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그만큼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꾸어 주느니라 35.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36.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 싹난 지팡이, 하나님께서는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원수가 된 우리들을 예수님의 보혈의 대가로 회복시켜 주셨으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도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복수하는 일은 하나님께 맡기고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해자를 볼 때 그도 하나의 인간임을 생각하고, 나에게도 똑같이 있는 그의 안타까운 한계를 인정하며,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그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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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의 신약적 해석(예수님의 새로운 교훈을 통한 율법의 확대 해석, 율법과 복음의 차이)

구약의 율법은 간음하지 말라고 하여 지키게 하였는데,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에 음심을 품는 것도(마 5:28절) 그리고 연관되는 행동까지도 간음으로 규정하고 있다. 또 구약에서는 사람을 상하게 한 자에게 같은 정도로 원수를 갚을 수 있게 율법으로 정하였는데 예수님은 오히려“원수를 사랑하라”(마 5:43-48, 눅 6:27-28),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라”,“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눅 6:29), “누가 오리를 가자거든 십리를 같이 가라” 등의 실천적인 말씀으로 율법의 참된 의미와 근본 정신을 강조하여 하나님 나라의 사랑에 대하여 설명하십니다. 결론적으로 마 5:17-18에서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온전하게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설명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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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그룹, 마 6:1-7:29, 천국 시민의 기본 생활 양식(구제, 기도, 금식, 재물관, 믿음의 확신, 이웃에 대한 태도)

마 6:1-18 말씀은 종교적 위선에 대한 경고의 말씀으로 성도들의 실제적인 신앙 생활에서 범하기 쉬운 잘못을 지적하고 올바른 믿음의 자세와 방법인 구제, 기도, 금식을 제시합니다

마 6:1-4, 구제

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2.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3.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4.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 싹난 지팡이, 원수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마 6:5-15, 기도(주기도문)

5.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7.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8.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14.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15.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 싹난 지팡이, 기도한다는 것은 단순히 속마음을 털어놓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기도는 가득 차 있는 마음 혹은 텅 빈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찾으며 그분과 대화하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자기 스스로는 기도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기도에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시편 이해』 15쪽, 디트리히 본 회퍼 지음, 최진경 옮김). 주기도문의 주요 사상은 성도를 통한 하나님의 영광이며, 하나님 나라가 중심 주제입니다. 사도 마태는 주기도문을 위치적으로 산상수훈의 가운데에 배치함으로 그 중요성을 강조하였습니다.

눅 11:1-4, 주기도문

1.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옵시며 3.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4.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하라.

* 싹난 지팡이, 하나님 아버지,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에 의하여 하나님은 흔히 이스라엘의 아버지로 생각되었으며(신 3:6, 사 63:16, 64:8, 말 2:10), 이스라엘 전체가 신실하지 못할 때에는 신실한 개인들에게로 하나님의 부성은 제한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특히 아바 아버지라는 표현으로 가장 가깝고 친근하신 하나님으로 표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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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윤 교수의 주기도문 강해 요약

주기도문은 마태판(마 6:9-13)과 누가판(눅 11:2-4)이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주기도문은 산상수훈의 중심 부분인 6:1-8의 종교 행위에 대한 가르침의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으며 그만큼 기도의 중요성이 강조된 것입니다. 누가복음의 주기도문은 예수님의 제자 중의 한 명이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하여 예수님께서 예수 공동체에게 가르쳐 준 것이라고 그 목적과 경위를 설명하고 있으며, 그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각 공동체에 따라 예배에 필요한 기도문들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마태판의 주기도문은 예배를 위하여 누가판을 보완한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참고, 싹난 지팡이 신약, 11쪽, 마태와 누가에서만 나타나는 Q자료에서 온 것일수도 있습니다).

주기도문을 이해하기 위하여 두 가지 영역으로 나누면, 첫째는 주기도문의 내용에 대한 간추린 해설이며 둘째는 주기도문의 성격입니다.

1. 주기도문에 대한 간추린 해설(하나님과의 관계)

1) 주기도문은 하늘에 계시는 초월자에 대한 경외심과 더불어 그분이 나의 아빠 되시는 친근함을 보여 줍니다. 초월자에 대한 경외심은 나중에 송영으로 다시 한 번 확인됩니다. 하나님은 초월자요 전능자요 무한한 자이시기 때문에 나를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고, 나의 문제를 아시고 나의 문제를 들어 주시는 분이며, 나를 온전히 살게 하시는 분이므로 그분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나의 아빠 되심은 그분이 나를 보호하시는 분일 뿐만 아니라 내가 그분의 상속자임을 나타내는 것이며, 그분의 능력을 끌어다 씀으로써 창조의 풍부함을 이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에‘아빠’로만 되어 있는 것이 원래 본문인데 초대 교회 안에서 예배용으로 사용되면서‘하늘에 계신’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것입니다.

당신 청원

2) 주기도문의 가장 중심된 청원은 당신 청원의 하나인‘당신의 나라가 임하게 하소서’ 입니다. 이는 하나님 백성이 드리는 기도로서 이 세상에 하늘나라가 이루어지기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의 청원은 내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겠다는 서약을 함께 담고 있으며, 이처럼 주기도문의 모든 청원은 단순한 청원이 아니고 서원과 서약을 겸하고 있습니다.

3) 당신 청원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는 엄밀한 의미에서 신앙 고백으로 볼 수 있으며 자신이 바라는 소망을 표현한 것입니다.

4) 당신 청원‘뜻이 땅에서 이루어지이다’

누가판에는 마태판의 세번째‘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라는 당신 청원이 없습니다. 이 셋째 당신 청원은 당신의 나라가 임하는, 하나님 나라 도래의 당신 청원을 부연한 것으로, 이 세 개의 당신 청원은 세 개의 우리 청원과 구성상의 대구를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 청원

5) 우리 청원의 첫째‘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아담적 실존 방법(스스로 우리 삶을 살아야 하는)을 지양하고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해 주심에 의지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 안에 있겠다는 서원입니다.

잠 30:9.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딤전 6:7-10,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6) 우리 청원의 둘째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회복된 자의 서원으로, 죄 용서함을 받은 자로서 이웃의 죄를 용서하여 주겠다는 의지가 포함된 기도입니다.

7) 우리 청원의 셋째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향하여 가는 자로서 사탄의 유혹에 계속 노출되는데 그 사탄에게 굴복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버리지 않겠다는 서약입니다.

송영

8) 송영은 세 개의 당신 청원을 나라(나라이 임하옵시며), 권세(뜻이 이루어지이다), 영광(이름이 거룩히)으로 부연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기도 후에 송영으로 기도를 보증하는 것이 관행이었습니다. 이 주기도문이 교회 기도로 공식화된 것은 이방 선교 이후이며 이방인들이 기도의 관습을 잘 모르므로 안디옥 교회에서부터 송영이 주기도문에 문자화된 것입니다.

2. 주기도문의 성격

1) 주기도문은 예수님이 시작한 ‘하나님 나라의 운동’으로 말미암아 불러 모아낸 하나님 나라의 백성에게 주어진 이상과 소망을 나타낸 것으로 하나님 나라의 정체성을 잘 보여 주는 것입니다.

2) 주기도문의 탁월함은 청원(서원)과 서약을 동시에 내포하는 간구로서 이 주기도문은 진짜 기도입니다. 중언부언하며 자기의 소욕만 만족시키면 그만이라는 세상 사람들의 기도와 대조가 되며 또 바리새인의 외식적인 기도와도 대조가 됩니다. 우리의 기도도 가끔 하나님에 대한 설교 혹은 이웃에 대한 설교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오로지 하나님께만 의지함이며 의지하게 해달라는 간구이며 동시에 청원인데, 청원을 드리는 자로서의 인간적인 부분은 적극적으로 내가 하겠다고 하나님께 순종을 서약하는 것입니다.

3) 주기도문의 짧고 간결함은 기도할 때 중언부언하지 말라는 마태복음 6장 7절의 요구에 잘 맞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통치 아래 살게 되는 온전한 삶을 위한 기도이므로 하나님께 구체적으로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4) 기도의 주체는 내가 아니고 우리라는 것입니다. 바울 서신에는 항상 우리 하나님이라고 쓰여 있으며 어쩌다 한 번(빌 1:3,4:19, 갈 2:20)이라고 씁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항상 이웃과의 관계를 생각하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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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6:16-18, 금식

16.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17.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18.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 6:19-24, 하나님과 재물

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銅綠)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저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21.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22.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23.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눅 16:13, 보물을 쌓아 둘 곳

13.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 싹난 지팡이, 청지기 직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선한 사업을 위하여 소망을 하늘에 두고, 영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맡기신 재물을 사용하기를 원하십니다. 특별히 레위기 25:14에는 이웃에게서 부당 이익을 취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모아진 재물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중요하지만 그 재물을 어떻게 모으느냐도 중요합니다. 이웃에게 피해를 입혀가며 경제 활동을 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백성의 일이 아닙니다.

마 6:25-34, 근심하지 말라(믿음의 확신)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눅 12:22-34, 염려하지 말라

22.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23.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24.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25.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 26. 그런즉 가장 작은 일도 하지 못하면서 어찌 다른 일들을 염려하느냐 27.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아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큼 훌륭하지 못하였느니라 28,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29.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30.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31.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2.(믿음이)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33.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34.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 싹난 지팡이, 아담의 범죄함으로 인하여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주신 에덴 동산의 완전함과 풍요를 잃어버리고 불완전함과 결핍 속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아담적 실존 방법(풍요)을 추구하는 것을 지양하고 하나님의 하나님 노릇해 주심에 의지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통치 안에 있겠다는 서원입니다.

마 7:1-6, 비판하지 말라(이웃에 대한 태도)

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3.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눅 6:37-42, 비판하지 말라(형제의 눈 속의 티)

37.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39.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맹인이 맹인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40.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하게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 41.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2.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 싹난 지팡이, 약 4:11-12, 판단하지 말라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을 준행해야 하는 사람(피조물)이 아니고 재판관(창조자)입니다.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으로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십니다. 도대체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고 정죄합니까.

마 7:7-12, 믿음의 기도

7.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9.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10.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 싹난 지팡이, 7:12의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는 결론을 나타낼 때 주로 쓰는 말입니다. 이곳의 그러므로,라는 단어의 쓰임은 생경한 느낌을 줍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화목을 위하여 형제를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이 단어로 ‘남을 대접하는 것’이 산상수훈의 결론으로 성도가 반석 위에 지은 집(열매를 맺는 것)임을 주지시키며 그 당시의 성경인 율법서와 선지서로 이 구절을 해석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백성들에게 주신 기독교의 핵심 윤리이자 천국 시민의 지고한 행동 규범으로 소위 황금률이라고 불리웁니다.

눅 11:9-13, 믿음의 기도

9.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10.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11. 너희 중에 아버지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12.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 싹난 지팡이, 믿음의 기도는 우선 두 가지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우선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 때에,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시는 약속의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게 됩니다. 그 다음은 우리가 누구인가를 알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됨을 깨닫고 하나님의 모든 것을 향유하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가 응답된 후에는 계속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하고 은혜 속에서 살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마 7:13-14, 좁은 문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라.

눅 13:22-30, 좁은 문

22. 예수께서 각 성 각 마을으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 23.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그들에게 이르시되 2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25.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26.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27. 저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하리라(참고, 시 6:8) 28.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29.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 30.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

* 싹난 지팡이, 눅 13:22의 말씀을 공생애 두번째 예루살렘 방문으로 보고, 산상수훈을 제1차 갈릴리 사역 안에 포함시키기도 하며 혹은 공생애 사역 이 년 중간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재차 방문했던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합니다. 본서는 후자를 따라 산상수훈을 2차 예루살렘 방문(유월절) 이후로 배치하였습니다.

마 7:15-20, 거짓 선지자(참고, 마 12:33-37)

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16.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20.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눅 6:43-45, 그 나무의 그 열매

43.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44.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45.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마 7:21-29, 반석 위에 지은 집(산상수훈의 결론)- 열매를 맺는 생활(요 15:1-17, 눅 13:6-9)로 연결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참고, 눅 13:25-30, 시 6:8) 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27.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29.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눅 6:46-49, 반석 위에 지은 집

46.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47.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48.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 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치되 잘 지었기 때문에 능히 요동하지 못하게 하였거니와 49.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주추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치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 하시니라.

* 싹난 지팡이, 율법의 완성자로 오신 예수께서는(마 5:17) 신약시대의 새 율법으로 산상수훈을 제시하십니다. 하지만 산상수훈은 모세 율법의 완성편으로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키기도 힘들었는데 신약 시대의 사람들이 예수님의 새 계명을 지키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이는 중생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님의 임재를 통해 예수님의 사랑을 자신의 내면에서 느끼고 실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마 7:7-29은 천국 시민의 실천적 규범을 제시하고 있으며 산상수훈(마 5-7장)의 결론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기 부인’을 통하여 예수님을 닮아가고‘말씀을 듣고 행하는 법’을 배워 반석 위에 집을 지어가는 것(성화의 과정)입니다.이는 열매 맺는 생활로 나타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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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삶의 다섯 단계(달라스 윌라드의 『하나님의 모략』 484-487쪽 요약)

1.예수를 “인자” 곧 우리를 구원하실 예정된 분으로 믿고 의지합니다(요 3:15, 롬 10:9, 고전 12:3). 이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나의 실체이며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입니다(히 11:1)

2. 예수의 인격에 대한 이 믿음은 그분의 제자가 되고 싶은 열망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분의 말씀 안에 산다는 것이며 그분의 가르침을 실천한다는 뜻입니다(요 8:31). 그럴 때 우리의 전 존재는 전진적으로 영생의 영광스러운 세계로 들어가게 되며 참으로 자유하게 됩니다(요 8:36).

3. 우리가 예수의 말씀 안에 거하게 되면 자연히 순종으로 이어집니다. 순종은 사랑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을 사랑하는 자는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고 말씀하시며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요 14:15, 21).

4. 순종과 순종에 필요한 삶은 마음과 영혼 전체의 내적 변화로 이어집니다. 내적 변화는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며(갈 5:22) 진정한 사랑이 우리의 중심이 됩니다(벧후 1:2-11).

5. 천국의 일을 행하는 능력이 생깁니다(요 14:12). 위대한 능력이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 되려면 반드시 순종하여 내적으로 변화된 위대한 성품이 요구됩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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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산상수훈

성경의 산상수훈(山上垂訓)과 김교신의 팔복(八福) 해설

과거 거의 2000 년간 서양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책은 신약과 구약으로 이루어진 성경(聖經; bible)이다.

다음에 성경 신약의 마태복음 5 장에서 7 장 첫 부분까지를 옮긴다. 이 부분은 산상수훈(山上垂訓; 산 위에서의 가르침)이라고 부르는 예수님의 가르침으로만 이루어진 유명한 부분이다. 힌두교도인 간디가 이 부분을 좋아하여 일생동안 삶의 규칙으로 삼았다(확인은 못하였으나)는 이야기도 있다.

종교와 이념을 떠나서 평온한 마음으로 읽어보기 바란다. 가능한 한 주석을 달지 않았다. 마음으로 느끼기 바라기 때문이다.

단지 과거에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라 어려운 한자어가 많아 영어 번역을 같이 첨부하였다. 이 영어는 현대적이면서도 아름다운 번역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산상수훈

[마 5: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Now when he saw the crowds, he went up on a mountainside and sat down. His disciples came to him,

[마 5:2]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and he began to teach them, saying:

[마 5:3] 심령(心靈)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 이 저희 것임이요

” Blessed are the poor in spirit,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

[임성삼의 생각; 첫 번째 복이면서 가장 귀중한 복이다.

겸손하며, 자만하지 않는 사람, 스스로를 과시하지 않는 사람이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중국어 성경과 프랑스어 성경에 이 구절이 다음과 같이 번역되어 있다.

虛心的人 有福了, 因爲天國是他們的 허심적인 유복료, 인위천국시타문적(중국어 성경)

“마음이 비어 있는 사람”이 좋은 번역이라고 느껴진다.

Heureux les pauvres en esprit, car le royaume des cieux est a eux!(프랑스어 성경)]

프랑스어 성경은 영어 성경과 단어대 단어로 동일하다. 독일어 성경도 거의 완전히 같은 내용이다.] [마 5:4] 애통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 를 받을 것임이요

Blessed are those who mourn, for they will be comforted.

[임성삼의 생각; 두 번째 복이다. 예수님께서 온 세상의 슬픈 사람들을 위로하고 계시다.] [마 5:5] 온유 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 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Blessed are the meek, for they will inherit the earth.

[임성삼의 생각; 세 번째의 복이다. 온화하고 부드러운 사람들이 이 땅의 주인일 것임을 확인하신 말씀이다.] [마 5:6] 의(義) 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Blessed are those who hunger and thirst for righteousness , for they will be filled.

[임성삼의 생각; 네 번째 복이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의(義)에 갈구(渴求; 몹시 애타게 구함)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그들이 만족하게 될 날이 온다는 선포이시다. 아직 오래 살지는 않았으나 의(義)가 실현되는 것을 많이 보았다.] [마 5:7] 긍휼히 여기는 자 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 을 받을 것임이요

Blessed are the merciful, for they will be shown mercy.

[임성삼의 생각; 다섯 번째 복이다. 선을 베푸는 사람이 그대로 보답을 받는다는 것은 동양과 서양의 보편적인 생각이다. 그리고 그만큼 실제적인 사례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마 5:8] 마음이 청결한 자 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 임이요

Blessed are the pure in heart, for they will see God.

[임성삼의 생각; 여섯 번째 복이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복이다.] [마 5:9] 화평케 하는 자 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 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Blessed are the peacemakers, for they will be called sons of God.

[임성삼의 생각; 일곱 번째 복이다. 신(神)의 아들은 사람들을 화평하게 하는 사람이라고 선언하셨다.] [마 5:10] 의(義)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 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 임이라

Blessed are those who are persecuted because of righteousness ,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임성삼의 생각; 여덟 번째 복이다. 의(義)를 위하여 핍박 받은 사람과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하늘의 왕국을 자기의 것으로 할 수 있다.] [임성삼의 주(註); 이 여덟 가지 복 중 다섯 가지에 대한 “김교신”의 해설을 뒤에 붙인다.] [마 5: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Blessed are you when people insult you, persecute you and falsely say all kinds of evil against you because of me.

[마 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Rejoice and be glad, because great is your reward in heaven, for in the same way they persecuted the prophets who were before you.

[임성삼의 생각; 기독교도들이 핍박을 받을 때,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그 상황을 넘은 사례는 역사상 적어도 수 백 번이 넘는다.] [마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You are the salt of the earth. But if the salt loses its saltiness, how can it be made salty again? It is no longer good for anything, except to be thrown out and trampled by men.

[임성삼의 생각; 본질을 잃지 말라는 준엄한 말씀이시다. 또한 세상을 썩지 않게 하며, 스스로도 결코 변하지 말라는 말씀이기도 하다.] [마 5:14] 너희는 세상의 빛 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 A city on a hill cannot be hidden.

[마 5: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Neither do people light a lamp and put it under a bowl. Instead they put it on its stand, and it gives light to everyone in the house.

[마 5:16 ]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In the same way, let your light shine before men, that they may see your good deeds and praise your Father in heaven.

[임성삼의 생각; 착한 행실을 하는 것은 세상의 빛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으로 인하여 많은 기독교도들은 착한 행실을 할 의무가 있다.] [마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Do not think that I have come to abolish the Law or the Prophets; I have not come to abolish them but to fulfill them.

[마 5: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I tell you the truth, until heaven and earth disappear, not the smallest letter, not the least stroke of a pen, will by any means disappear from the Law until everything is accomplished.

[마 5: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Anyone who breaks one of the least of these commandments and teaches others to do the same will be called least in the kingdom of heaven, but whoever practices and teaches these commands will be called great in the kingdom of heaven.

[임성삼의 생각; 예수님은 개혁자이셨으나, 과거의 모든 규범을 완전히 인정하셨다.] [마 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義)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For I tell you that unless your righteousness surpasses that of the Pharisees and the teachers of the law, you will certainly not enter the kingdom of heaven.

[임성삼의 생각; 여기의 서기관, 바리새인은 당시 율법을 신조로 살던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보다 더 철저해야 한다는 뜻으로 생각한다.] [마 5:21]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You have heard that it was said to the people long ago, ‘Do not murder, and anyone who murders will be subject to judgment.’

[마 5: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But I tell you that anyone who is angry with his brother will be subject to judgment. Again, anyone who says to his brother, ‘Raca,’ is answerable to the Sanhedrin. But anyone who says, ‘You fool!’ will be in danger of the fire of hell.

[임성삼의 생각; 법률의 단계를 뛰어 넘는 매우 준엄한 개념이다.

“라가”는 유태인의 욕이다.] [마 5: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줄 생각나거든

“Therefore, if you are offering your gift at the altar and there remember that your brother has something against you,

[마 5: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leave your gift there in front of the altar. First go and be reconciled to your brother; then come and offer your gift.

[임성삼의 생각; 유태인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은 하나님께 예물을 바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형제와의 화목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셨다.] [마 5:25]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 (私和; 송사(訟事)를 화해함) 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Settle matters quickly with your adversary who is taking you to court. Do it while you are still with him on the way, or he may hand you over to the judge, and the judge may hand you over to the officer, and you may be thrown into prison.

[마 5:26]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I tell you the truth, you will not get out until you have paid the last penny.

[임성삼의 생각; 이 가르침을 거의 2천 년 동안 받은 서양의 그 많은 변호사 숫자를 보면, 그들이 이 말씀을 잘 받아들인 것 같지는 않다. 간디도 자서전에서 말했다. 예수님을 닮은 서양 사람들을 보지 못하였다고.] [마 5:27]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You have heard that it was said, ‘Do not commit adultery.’

[마 5: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But I tell you that anyone who looks at a woman lustfully has already committed adultery with her in his heart.

[마 5:29]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If your right eye causes you to sin, gouge it out and throw it away. It is better for you to lose one part of your body than for your whole body to be thrown into hell.

[마 5:30]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And if your right hand causes you to sin, cut it off and throw it away. It is better for you to lose one part of your body than for your whole body to go into hell.

[임성삼의 생각; 매우 준엄한 말씀이어서 성직자들도 여러가지로 해석하고 있다.] [마 5:31]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It has been said, ‘Anyone who divorces his wife must give her a certificate of divorce.’

[마 5:3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But I tell you that anyone who divorces his wife, except for marital unfaithfulness, causes her to become an adulteress, and anyone who marries the divorced woman commits adultery.

[마 5:33]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Again, you have heard that it was said to the people long ago, ‘Do not break your oath, but keep the oaths you have made to the Lord.’

[마 5:3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But I tell you, Do not swear at all: either by heaven, for it is God’s throne;

[마 5:35]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or by the earth, for it is his footstool; or by Jerusalem, for it is the city of the Great King.

[마 5:36]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And do not swear by your head, for you cannot make even one hair white or black.

[마 5:37]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Simply let your ‘Yes’ be ‘Yes,’ and your ‘No,’ ‘No’; anything beyond this comes from the evil one .

[임성삼의 생각; 중요한 가르침이시다. 진리는 복잡하지 않다.

세상을 살면서 옳은 것은 옳다, 그른 것은 그르다고 하면 충분하다.

다음의 공자의 말을 생각해보자.

子曰 由아 誨女知之乎인저 知之爲知之오 不知爲不知이 是知也 니라 (논어 위정편 爲政十七)

유(자로)야, 내 너에게 안다는 것을 가르쳐 주겠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곧 아는 것이다.] [마 5: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You have heard that it was said, ‘Eye for eye, and tooth for tooth .’

[임성삼의 생각; 기원전 천 수백 년 전 모세가 전(傳)한 중요한 기준이다.] [마 5: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But I tell you, Do not resist an evil person.

If someone strikes you on the right cheek, turn to him the other also.

[마 5:40]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And if someone wants to sue you and take your tunic, let him have your cloak as well.

[마 5: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If someone forces you to go one mile, go with him two miles.

[마 5:42 ]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말라

Give to the one who asks you, and do not turn away from the one who wants to borrow from you.

[임성삼의 생각; “오른 뺨을 맞으면, 왼 뺨도 내밀어라”는 말씀이 나온 곳이다.] [마 5: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You have heard that it was said, ‘Love your neighbor and hate your enemy.’

[마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But I tell you: Love your enemies and pray for those who persecute you,

[마 5: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that you may be sons of your Father in heaven. He causes his sun to rise on the evil and the good, and sends rain on the righteous and the unrighteous.

[임성삼의 생각;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이 이 곳에서 시작되었다.] [마 5: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If you love those who love you, what reward will you get? Are not even the tax collectors doing that?

[마 5: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And if you greet only your brothers, what are you doing more than others? Do not even pagans do that?

[마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Be perfect , therefore, as your heavenly Father is perfect .

[임성삼의 생각; “완전해져라. Be perfect!” 이 말씀 속에 모든 내용이 있다.

“원수를 사랑하고”, “오른 뺨을 맞거든, 왼 뺨을 돌려대”면 완전해진다.

대학(大學)의 다음의 구절이 “Be perfect!”와 일맥 상통한다.

君子 無所不用其極 군자 무소불용기극

군자는 최선을 다하지 않는 일이 없다 ] [마 6: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義)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Be careful not to do your ‘acts of righteousness’ before men, to be seen by them. If you do, you will have no reward from your Father in heaven.

[마 6:2]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外飾; 겉을 꾸밈)하는 자 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So when you give to the needy, do not announce it with trumpets , as the hypocrites (위선자; 가장(하기), 착한 체하는 사람) do in the synagogues and on the streets, to be honored by men. I tell you the truth, they have received their reward in full.

[마 6:3]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But when you give to the needy, do not let your left hand know what your right hand is doing,

[마 6:4]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so that your giving may be in secret. Then your Father, who sees what is done in secret, will reward you.

[임성삼의 생각;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의 출전이다.] [마 6:5] 또 너희가 기도할 때 에 외식(外飾)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And when you pray, do not be like the hypocrites, for they love to pray standing in the synagogues and on the street corners to be seen by men. I tell you the truth, they have received their reward in full.

[마 6: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But when you pray, go into your room, close the door and pray to your Father, who is unseen. Then your Father, who sees what is done in secret, will reward you.

[마 6:7]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줄 생각하느니라

And when you pray, do not keep on babbling like pagans, for they think they will be heard because of their many words.

[마 6:8]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Do not be like them, for your Father knows what you need before you ask him.

[마 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임성삼; 아래 부분은 기독교에서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라는 뜻으로 “주기도문 主祈禱文”이라고 부른다. 신(神)께 인간이 기원하는 모범적인 내용(prototype; 수리학[水理學]에서 사용되는 protytype의 용법과는 다르다)이라고 알려져 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This, then, is how you should pray: “‘Our Father in heaven, hallowed be your name ,

[마 6:10]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your kingdom come, your will be done on earth as it is in heaven.

[마 6:11]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日用)할 양식을 주옵시고

Give us today our daily bread .

[마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Forgive us our debts, as we also have forgiven our debtors .

[마 6: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And lead us not into temptation, but deliver us from the evil one .’

[임성삼의 생각; 주기도문 끝. 우리가 신께 구해야 하는 것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를 생각해보자.

신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그날 먹을 음식을 바라고

우리가 잘 못한 일에 대한 용서를 구하고

내가 나쁜 일을 행하지 않도록 구해 주시기를 기원하는 것.

더 이상 무엇을 바랄 것인가….] [마 6:14]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For if you forgive men when they sin against you, your heavenly Father will also forgive you.

[마 6:15]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But if you do not forgive men their sins, your Father will not forgive your sins.

[마 6:16] 금식(禁食)할 때에 너희는 외식(外飾)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When you fast, do not look somber as the hypocrites do, for they disfigure their faces to show men they are fasting. I tell you the truth, they have received their reward in full.

[마 6:17]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But when you fast, put oil on your head and wash your face,

[마 6:18]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so that it will not be obvious to men that you are fasting, but only to your Father, who is unseen; and your Father, who sees what is done in secret, will reward you.

[임성삼의 생각; 겉으로 꾸미는 것을 매우 싫어하셨다.] [마 6: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Do not store up for yourselves treasures on earth, where moth and rust destroy, and where thieves break in and steal.

[마 6: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But store up for yourselves treasures in heaven, where moth and rust do not destroy, and where thieves do not break in and steal.

[마 6:21]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For where your treasure is, there your heart will be also.

[마 6:22]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The eye is the lamp of the body. If your eyes are good, your whole body will be full of light.

[마 6:23]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 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But if your eyes are bad, your whole body will be full of darkness. If then the light within you is darkness, how great is that darkness!

[임성삼의 생각; 우리는 우리 정신의 빛을 밝게 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 [임성삼; 아래 부분은 물질을 삶의 목적으로 여기는 사람에 대한 말씀이다.] [마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No one can serve two masters. Either he will hate the one and love the other, or he will be devoted to the one and despise the other. You cannot serve both God and Money.

[마 6: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Therefore I tell you, do not worry about your life, what you will eat or drink; or about your body, what you will wear. Is not life more important than food, and the body more important than clothes?

[마 6: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Look at the birds of the air; they do not sow or reap or store away in barns, and yet your heavenly Father feeds them. Are you not much more valuable than they?

[마 6: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Who of you by worrying can add a single hour to his life ?

Qui de vous, par ses inquietudes, peut ajouter une coudee a la duree de sa vie ?[불어 성경] [임성삼의 생각; 우리말 성경과 다른 나라 성경이 차이가 나는 흔하지 않은 구절이다.

영어 성경은 “염려함으로 그의 생명을 단 한 시간이라도 연장할 수 있느냐?”이고,

불어 성경은 “염려함으로 그의 삶의 기간을 une coudee(팔꿈치에서 손가락 끝까지의 길이, 약 50 cm)라도 더할 수가 있느냐?”이다.

원래의 언어로 하면 양쪽으로 모두 해석이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마 6: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 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And why do you worry about clothes? See how the lilies of the field grow. They do not labor or spin.

[마 6: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Yet I tell you that not even Solomon in all his splendor was dressed like one of these.

[마 6: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If that is how God clothes the grass of the field, which is here today and tomorrow is thrown into the fire, will he not much more clothe you, O you of little faith?

[마 6: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So do not worry, saying, ‘What shall we eat?’ or ‘What shall we drink?’ or ‘What shall we wear?’

[마 6: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For the pagans run after all these things, and your heavenly Father knows that you need them.

[마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But seek first his kingdom and his righteousness, and all these things will be given to you as well.

[임성삼의 생각; 하나님의 의(義)를 찾기 위해 물질적인 일에 마음을 쓰지 말라는 말씀이시다. 중요한 것과 부수적인 것의 차이를 명확하게 말씀하셨다.] [마 6: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Therefore do not worry about tomorrow, for tomorrow will worry about itself. Each day has enough trouble of its own.

[임성삼의 말; 나의 일생에 이 말씀이 매우 도움이 되었다. 살면서 큰 일을 만나 방황하게 되었을 때,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라는 말씀을 위안으로 삼고 그 날 할 일을 묵묵히 하느라고 노력하였다.

내가 힘든 때 선친께서는 일본의 덕천가강의 “인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는 것이다”라는 말씀을 해 주셨다.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자면, 매 순간이 괴로우며 매 순간 무거운 짐을 내리고 싶다. 그러나 덕천가강은 70 세가 넘도록 무거운 짐을 지고 멀리까지 나아갔다. 그 결과 일본의 250 년 평화를 확립하였다.

바로 눈 앞에 있는 오늘의 일을 서두루지 않고 성실하게 하는 것이, 내일의 일을 걱정하고 있는 것보다 나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분명하다.] [마 7: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Do not judge, or you too will be judged.

[마 7:2]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For in the same way you judge others, you will be judged, and with the measure you use, it will be measured to you.

[임성삼의 생각; 이런 자세가 필요한 것 같다. 논어에 다음의 이야기가 있다.

子曰 不在其位 不謨其政 부재기위 불모기정 (논어 태백편 泰伯十四)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그 지위에 있지 않으면서 함부로 정치를 계획하면 안된다] [마 7:3] 어찌하여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Why do you look at the speck of sawdust in your brother’s eye and pay no attention to the plank in your own eye?

[마 7:4] 보라 네 눈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How can you say to your brother, ‘Let me take the speck out of your eye,’ when all the time there is a plank in your own eye?

[마 7:5] 외식(外飾)하는 자여 먼저 네 눈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보고 형제의 눈속에서 티를 빼리라

You hypocrite, first take the plank out of your own eye, and then you will see clearly to remove the speck from your brother’s eye.

[임성삼의 생각; 스스로의 허물을 모르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격렬한 꾸짖음이다. “먼저 네 눈속의 들보를 빼어라”

노자(老子)가 공자를 만났을 때 심하게 꾸짖은 것도 이런 개념에서였다고 생각된다.] [마 7: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Do not give dogs what is sacred; do not throw your pearls to pigs. If you do, they may trample them under their feet, and then turn and tear you to pieces.

[임성삼의 생각; 아직 이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간혹 이 구절이 떠오르는 상황이 있다.] [마 7:7]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Ask and it will be given to you; seek and you will find; knock and the door will be opened to you .

[마 7:8]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For everyone who asks receives; he who seeks finds; and to him who knocks, the door will be opened.

[마 7:9]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Which of you, if his son asks for bread, will give him a stone?

[마 7:10]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Or if he asks for a fish, will give him a snake?

[마 7: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If you, then, though you are evil, know how to give good gifts to your children, how much more will your Father in heaven give good gifts to those who ask him!

[임성삼의 생각; 큰 약속이시다.] [마 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So in everything, do to others what you would have them do to you, for this sums up the Law and the Prophets.

[임성삼의 생각; 대단히 중요한 행동 지침이다. 공자도 거의 동일한 말을 여러번 하였다.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행하지 말라[己所不欲 勿施於人 기소불욕 물시어인](논어 안연편 顔淵二)

子貢이 問曰 有一言 而可以終身行之者乎잇가 子曰 其恕乎인저 己所不欲을 勿施於人이니라 (논어 위령공편 衛靈公二三)

자공이 물었다. 단 한마디말로 종신토록 행할수 있는 말이 있습니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그것은 바로 서(恕; 용서할 서, 밝게 알다)일 것이다. 자기가 그렇게 되고 싶지 않은 일을 다른 사람에게 베풀지 않는다는 것이다.

올 해에 많은 책을 소개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살아가는데는 위의 예수님 말씀 이상의 규범이나 책이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마 7: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Enter through the narrow gate. For wide is the gate and broad is the road that leads to destruction, and many enter through it.

[마 7: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But small is the gate and narrow the road that leads to life, and only a few find it.

[임성삼의 생각; 거의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는 의롭다고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러나 예수께서 원하신 길을 가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이 말씀을 하시던 때도 그렇고, 지금도 상황은 마찬가지인 것 같다.

진실된 길을 가기 위해서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생각하고 살아가는 방향과는 다른 길을 택해야 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고 생각한다.

위의 두 구절은 앙드레 지드의 소설 “좁은 문”의 제목이 나온 곳이다.]

“김교신 신앙저작집 제 4 권”의 팔복(八福) 해설

(전체 양이 너무 많아 앞에서 5 가지 복에 대한 해설까지만 옮긴다.)

백과사전 브리태니커에는 김교신에 대한 설명이 상당히 길다. 그러므로 한메 디지털 세계 대백과에 있는 내용을 옮긴다.

(브리태니커에서 김교신에 대한 개요적인 설명은 다음과 같다. “일제강점의 민족적 수난기에 종교적 구제와 사회적 구제의 더 높은 차원에서의 결합을 보여주는 실천적 차원의 구제신앙을 추구하였다.”)

김교신 金敎臣 1901∼1945 한메 디지털 세계대백과 종교인·교육자. 함흥 출생. 일본의 종교사상가 우치무라 칸조[內村鑑三〕의 문하에 들어가 7년간 배운 후에 도쿄〔東京〕 고등사범학교 지리박물학과를 졸업했다. 도쿄에서 노방(路傍; 길가) 설교를 듣고 결심, 1920년 성결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귀국 후 함흥영생고보·양정고보 교사로 박물학을 가르쳤다. 남강 이승훈(李昇薰; 1864∼1930)과 교유했고, 함석헌(咸錫憲; 1901∼1989) ·송두용(宋斗用)·정상훈(鄭相薰)·유석동(柳錫東)·양인성(楊仁性) 등과 함께 잡지 《성서조선(聖書朝鮮)》을 창간, 그 주필이 되었다. 저서 《산상수훈연구(山上垂訓硏究, 1933)》를 발간했고, 이어 함석헌과 공저로 일문(日文)으로 된 《우치무라 칸조와 조선(1940)》을 간행했다. 경기중학 교사가 되었으나 불온분자라 하여 6개월 만에 물러났으며, 개성의 송도고보(松都高普) 교사로 부임하여 민족주의 교육을 실천하였다. 《성서조선》 158호 권두언에서 항일민족사상을 풍유적(諷喩的)으로 표현한 《조와(弔蛙)》가 검열에 걸려, 함석헌 등과 함께 투옥된 <성서조선사건>에 연루되었다. 노평구(盧平久) 편찬의 《김교신 저작집》이 있다.▣] [이 책의 서문; 산상수훈에 대해 잘 정리된 간략한 이야기이다.]

기독교를 알려면 성서 본문을 읽는 것이 기독교에 관한 아무런 유명한 문헌을 뒤지기보다 제일 빠른 길이다. 특히 신약성서에는 간결한 중에 기독교 전편의 진리가 구현되어 있으므로 방대한 경서를 자랑하는 타종교에 비하여 신자 혹은 연구자의 편익(便益)이 불소(不少)하다.

……

예수는 교훈을 중요시하셨다. 예수의 전도생활에 기적이 없음이 아니었으나, 기적은 부득이한 경우에 한한 것이었고, 주요 목적은 하늘나라의 도(道)를 전함에 있었다.

마가의 전한 바에 의하면, “요한이 잡힌 후에 예수가 갈릴리에 이르러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였다.”(1장 14 절)하였고, 악귀(惡鬼)를 축출하고 열병을 즉석에서 고쳤다는 등 소문을 듣고 갈릴리 사방에서 찾아온 군중을 대하였을 때 예수는 오히려 헛된 군중을 피하여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로 가자. 거기서도 도를 전파하리니 내가 오기는 이를 위함이로다 “(마가 1.31)하여 그 사명(使命)을 명쾌히 지적하였다.

오천 명에게 떡 먹인 기적을 행한 후에, 예수는 군중을 피하여 혼자 산으로 물러가셨고, 가버나움까지 따라온 무리를 대하여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이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을 양식을 위하여 할지어다 “(요한 6.15, 26.27)라고 하여 우리들로 하여금 군중의 욕구하는 바와 예수가 주시려는 바와는 천양(天壤; 하늘과 땅)의 차가 있음을 알게 하였다.

이 영생의 양식은 흔히 교훈의 형식으로 우리에게 전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냉정한 정신으로써 예수의 교훈 중의 어느 하나라도 충실히 연구함으로써 기독교 전체를 대관(大觀)할 수도 있고 또 그가 전하려고 하여 마지 않으신 영생의 양식을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

산상수훈(山上垂訓) 은 누가에는 30 절로 되어 간결하고, 마태에는 1백 7 절로 되어 좀더 충족하다.

양으로 보아도, 예수의 교훈 중 가장 길고 완비한 것이며, 특히 그 내용으로 보아 이는 교훈 중으로 보아도, 예수의 교훈 중 가장 길고 완비한 것이며, 특히 그 내용으로 보아 이는 교훈 중에서도 모범될 만한 것이다 .

…이 설교에서는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로서의 예수가 유감없이 자기 인격을 약동케 하여 독자로 하여금 인간 예수에게 더욱 친근한 감을 갖게 한다.

산상수훈의 명칭은 영어의 The Sermon on the Mount, 독일어의 Die Bergpredigt 등의 한역(漢譯)으로 된 것인 듯하나 이것은 모세의 율법보다 더 완전한 율법이 아닌 것은 물론 훈계나 설교도 아니다. 이를 천국의 가신(嘉信; 아름다운 편지) 혹은 “천국의 복음”이라 하는 것이 그 “사랑의 선언”인 내용을 전함에 부합한 명칭이 될 것이다 .

이 가신(嘉信)을 전파한 장소는 산이라 하였으나, 시나이산(山)과 같은 높고 험한 산이 아니었고, 갈릴리 해변의 한 작은 언덕이었었다. 산에 정관사가 붙어서 새 oros라 하였으니, 예수께서 자주 기도하시던 장소인 것을 알 수 있다. 이 작은 언덕에는 작은 새가 나무 사이와 숲 사이에서 노래하고, 백합화가 각하(脚下; 발 아래)에 만발하여 천국의 음신(音信)을 전파하기에 적합한 만춘(滿春)의 아름다운 경치였던 것도 산상수훈 중에서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다음으로 주의할 것은 “복스럽도다, 마음이 가난한 자(者)는”하여 발단(發端)의 초(初) 일성(一聲)으로부터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나 칸트의 물(物)과 심(心)의 전환보다도 더 위대하게, 더 근본적으로 인생가치의 척도(尺度)를 전도한 이 혁명적 교훈 의 배후에는 간밤의 기도가 있었던 사실이다(누가 6.12). 이것이 예수의 교훈에 항상 권위가 있고, 생명이 있어, 학자의 설교와는 다른 바 있었던 까닭이다. 개벽 이래의 최대설교에 접할 때에 우리도 마땅히 기도로써 응수(膺受)할 것이다. 은밀한 골방의 기도(6.6) 사적 기도로서의 성령의 교통만이 이 천래(天來)의 복음을 해득하는 데 최대 주석책이요, 또 유일의 열쇠 되는 것을 명심하면서 본문에 들어갈 것이다. …….

[임성삼의 이야기; 이상이 서문이다.]

김교신의 팔복(八福) 해설

1. 심령(心靈)이 가난한 자(者)

마태복음 5 장 1 – 3 절(참조 누가 6.20)

1. 예수께서 무리들을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오거늘

2.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3. 마음이 가난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요,

… 산상수훈을 새로운 율법으로 해석하여

불신자(不信者)에게는 과도히 준엄한 것이나, 제자들에게는 감당할 만한 것인 것처럼 설명하려 함은 단지 기독교 신도의 편견에 불과한 것이다 . 산상수훈이 불신자에게 감당할 수 없는 고엄(高嚴; 높고 엄함)한 것일진대, 또한 신도들에게도 같게 견딜 수 없는 무거운 율법이 되고야 말 것이다

기독교도가 이교도에 대하여, 교회신자가 비교회신자에 대하여, 선교사배(輩)가 피선교민족에 대하여 본질적으로 도덕상 차이가 있는 것처럼 우월감을 가지는 것 은 마치 전년(前年)에 일인(日人) 의학박사 구보 아무게가 조선인의 두골을 재어 갖고 미개인종이라고 증명하려 하다가, 불행히 그 학설이 확립되기 전에 자기 자신이 정신병실에 수용을 당하여 요절(夭折)하였던 것 처럼 다 허망한 생각이다. …

[임성삼의 주(註); 독일 히틀러의 통치 시절, 독일에서도 여러 학자가 유태인, 슬라브인이나 흑인이 열등 민족이라는 학설을 증명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 결과 오히려 독일 민족이 열등하다는 것이 밝혀진 경우가 많아 이에 대한 연구는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다고 한다.]

군중의 착석함을 기다려 예수는 입을 열어 가르치시기 시작하였다. 누가복음 6 장 20 절에는 “예수 눈을 들어 제자를 보시고” 시작하셨다고 했다. 평화로운 언덕 위에서 바늘이 떨어짐을 오히려 감각할 만한 정숙한 청중 위의 침묵의 공기가 깨뜨려졌을 때 “눈이 다시 보지 못하였고 귀가 아직 듣지 못하였던” 천지개벽 이래 초유(初有)의 새로운 음파가 산록(山麓)을 잔잔히 흘러 내리게 된 것이었다 .

개구(開口)의 처음 일성(一聲)은 축복의 8 회 연발이었다 . 이것은 축사(祝辭), 지복(至福), 혹은 복언(福言 The Beatitudes)이라 하여 산상수훈 전체의 특질을 명확히 하는 것이므로 마태복음 5 장 제 3 – 10 절을 아래와 같이 원문의 순서대로 직역하여 해독(解讀)을 도울까 한다.

3. 복스럽도다, 가난한 자들은, 심령(心靈)에.

까닭이다, 저희 것인, 천국(天國)은 .

4. 복스럽도다, 애통하는 자들은.

까닭이다, 저희가 위로함을 받을.

5. 복스럽도다, 온유한 자들은.

까닭이다, 저들이 땅을 차지할.

6. 복스럽도다, 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의(義)에.

까닭이다, 저들이 배부름을 받을.

7. 복스럽도다, 자비한 자들은.

까닭이다, 저들이 자비함을 받을.

8. 복스럽도다, 결백한 자들은, 심정(心情)에.

까닭이다, 저들이 하나님을 볼 것인.

9. 복스럽도다, 화목케 하는 자들은.

까닭이다, 저희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10. 복스럽도다, 핍박을 받는 자들은, 의(義)를 위하여.

까닭이다, 저희 것인, 천국(天國)은.

이처럼 산상수훈은 축복으로써 시작되었다 . “복스럽도다”라는 말이 초두(初頭)에 8 회나 반복, 고조되었음에 주의할 것이다.

이 복스럽다는 원어 makarios 는 영역(英譯)에 blessed로 되었으니, 흔히 행복이라고 번역하는 happy와는 그 의미하는 바에 작지 않은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에 합당한 역어(譯語)를 발견하기 어려우나, 지금 blessedness를 ” 축복 “이라 하고 happiness를 “행복”이라고 번역하면, 축복은 행복보다 더 높은 것이다.

행복은 외계(外界)로서 오는 바 경우의 영향을 받는 것이고, 축복은 환경이 지배할 수 없는 영혼 속에서 용출(湧出)하는 내적 환희(歡喜)의 샘을 의미하는 것이다 . 축복은 하나님과의 정당한 관계로써 사람된 자의 진정한 도(道)를 걷는 데서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위 세간에서 불행한 자로 일컫는 자 중에도 축복받은 자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행복”이 단지 인간적인 행복을 의미한다면, “축복”은 하나님 편에서 본 바 즉 천국적인 행복을 의미한다.

그러면 하나님 편에서 보시는 바 “축복 받은 자”. 진정한 의미의 행복자는 과연 누구인가? 여하한 의미로써든지 부자가 행복자라 함은 개벽이래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변할 수 없는 떳떳한 도리 (道理)였다.

그런데 예수는 선언하였다.

너희 빈자(貧者)가 복이 있도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요(누가 6.20)

빈자라 함은 성(聖) 누가 가 전한 바와 같이 단순한 물질적인 빈자로 해석할 수 도 있다. 즉 토지, 금은(金銀)을 소유함이 없고 가옥(家屋), 의류(衣類)에 유족(有足)치 못한 자가 행운자(幸運者)이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 한다.

빈자(貧者)의 고통은 빈자라야 안다. 이 일구(一句)가 궁중에 기거(起居)하는 법왕의 훈유(訓諭)가 아니고, 구유에서 나고 목공(木工)의 집에서 자란 나사렛 예수의 말씀인 것에 중량이 있는 것이다.

가난한 그것이 곧 천국을 획득하는 필연적인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빈자로 난 것이 부자로 난 것보다 일반적으로 유익한 결과 를 낳는 것은 널리 역사상에서도 볼 수 있는 사실이다. 특히 천국(天國)에 들어감에는 부자보다 빈자가 유리함이 많다. 예수께 와서 영생(永生)의 도를 묻던 청년은 그 소유, 재산이 많음으로 인하여 “얼굴이 변하고 근심하며” 물러갔다(마가 10.17 – 22).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동(同) 25 절)는 것은 예수의 말씀이었다.

가난한 것은 방해됨이 없을뿐더러 오히려 천국을 향하는 자극이 되는 것이니, 빈(貧)은 소원할 만한 처지요, 복스러운 은혜의 자리임을 알 것이다 .

이미 빈자가 축복받을 자일진대, 빈자 중에도 그 정도의 심한 자가 더 복스러울 것은 명확한 일이다. 빈자 중 가장 심한 빈자는 물질적으로 가난한 외에 정신적으로 가난한 자 이다. 물자(物資)에 빈핍(貧乏)한 자라도 소위 청빈을 즐기는 경우에 달하면 오히려 부자의 심리(心理)를 가지게 된다. 그러므로 성(聖) 마태는 주도면밀하게 ” 심령(心靈)이 가난한 자 “라 하였다.

심령(心靈, pneuma, spirit)이 가난하다 함은 공자 의 이른바

德之不脩 덕지불수, 學之不講 학지불강, 聞義不能徙 문의 불능도, 不善不能改 불선 불개야, 是吾憂也 시오우야.

[임성삼의 주(註); 이 시절만 해도 위의 글을 한자로만 적어 놓아도 읽는 사람들은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이 뜻은 아래와 같다.

덕을 닦지도 못하고, 배운 것을 가르치지도 못하였으며, 옳은 것을 듣고 따르지도 못하였고, 착하지 못한 것을 능히 고치지도 못한 것. 이것들이 나의 근심이다. 논어 제 7 편 술이]

라 하여 학식(學識)으로나 제반 덕행(德行)으로나 내심(內心)에 수긍(首肯)할 아무 것도 인식할 바가 없는 자를 이름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최대 빈자(貧者)의 하나는 사도(使徒) 바울임을 알 수 있다. 그는 고백하여 말하기를

대개 내 속 곧 육체 속에 선한 것이 하나도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내가 아노니 , 선행하기를 원하는 마음은 내게 있으나, 그대로 이루는 것은 없는지라. …… 오호라, 나는 괴로운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死亡)의 몸에서 나를 구원하랴.

고(로마서 7.18 – 24).

仰不愧於天 俯不恥於人 앙불괴어천 불치어인

[임성삼의 주(註); 자주 인용되는 글이다. 단지 부끄러울 “치”자를 부끄러워할 “작(여기서는 지원되지 않는 한자)”으로 적는 경우가 많다.

위를 보아 하늘에 부끄러움이 없고, 아래를 보아 사람에게 부끄러움이 없다 , 맹자의 진심장구 상편에 나오는 글.]

하는 동양적 군자(君子), 교리의 정통을 자랑하는 기독교 신도, 독특한 체험을 고집하여 신앙적 교만에 스스로 머무는 고등신자 등등은 몸은 비록 유형적으로 적빈(赤貧)에 처하였을지라도, 무형적 거부(巨富)를 장악하고 있는 자들이다 . 부자인 점은 유형, 무형이 모두 일반이다.

심령상의 가난한 사람을 알기 위하여는 예수의 비유 중 제일 적확(的確)한 것이 있다.

두 사람이 성전에 올라가 기도할 새, 하나는 바리새 교인이요, 하나는 세리(稅吏)라.

바리새 교인이 서서 스스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내가 감사하옵기는 나는 다른 사람과 같이 토색하고, 불의하고, 음란하지 아니하고 또한 이 세리(稅吏)와도 같지 아니함이니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 못하고, 다만 가슴을 쳐 가로되 “하나님이여, 이 죄인(罪人)을 불쌍히 보소서. 나는 죄인(罪人)이로소이다”하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은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얻어 집에 돌아갔느니라.

대개 자기를 높이는 자는 반드시 낮아질 것이요,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

하시더라(누가 18.9 – 14). “심령이 가난한 자”란 것을 이보다 더 명백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이러한 빈자(貧者)가 복스럽다는 것이다 .

아래의 부분에 원어(原語)의 순서가 “저의 것인, 천국(天國)은 …”이라고 된 데 주의하여야 한다. “누가 천국의 시민이 될까?”하는 문제는 당시 유대인에게는 중요문제였다. 누가 천국을 소유할까? 학자(學者), 도인(道人), 성현(聖賢), 군자(君子)가 아니요, 오히려 세리(稅吏), 창기(娼妓)일지라도 그 심령에 가난한 자가 소유할 것이라 한다 .

또한 “천국은 저의 것이다”는[의] 동사 estin은 3인칭 단수 현재형이니, 천국은 미래의 완성을 기다릴 것이 없이 지금 당장 겸비(謙卑; 겸손하고 비처함)한 자(者)의 개인적인 소유가 된다고 한다 . 위대한 선언이 아닌가?

[임성삼의 주(註); 앞에도 있으나 다시 몇 나라의 말로 번역한 이 구절을 적는다.

심령(心靈)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Blessed are the poor in spirit,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虛心的人 有福了, 因爲天國是他們的 허심적인 유복료, 인위천국시타문적(중국어 성경)

마음이 비어 있는 사람

Heureux les pauvres en esprit, car le royaume des cieux est a eux! (프랑스어 성경)]

2. 애통(哀痛)의 축복

마태복음 5 장 4 절(참조; 누가 6.21)

복스럽도다, 애통하는 자들은. 까닭이다, 저희가 위로함을 받을 것인 .

누가 복음에는 “너희 이제 우는 자가 복이 있도다. 너희가 웃을 것이요. …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6. 21, 25)하였는데 여기 애통이라 함은 아주 심각하고 절통(切痛; 몹시 원통함)한 비탄을 말하는 것이다.

축복의 제 1 “심령이 가난한 자 복스럽다”는 일구(一句)에서, 그 인간가치의 척도가 전도됨이 심함에 놀랐던 자는 다시 제 2의 축복에 접하여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희락과 환소(歡笑)를 원함은 인간 세상의 통칙이다. 그런데 예수는 “애통하는 자, 통곡하는 자가 축복받은 자”라 선언하셨다. 그 생각의 차, 가치표준의 차가 심한 것이 마치 하늘과 땅, 동과 서가 상극함보다 더하도다.

뿐만 아니라, 예수 자신도 이런 비애의 사람이었다. 허다한 예수의 성상(聖像) 중에서 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作)이 독특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음은 예수의 이 중요한 성격을 전하는 까닭이라 한다. 가난의 곤궁을 체험한 자로서 가난의 축복을 말하고, 환난의 골짜기를 통과한 자가 비애의 행복을 선언하시는 것이다. 산상수훈의 일언(一言)일구(一句)가 모두 예수 자신의 인격과 체험을 통과한 것이어서, 교훈이 즉 그 자서전이라는 견해는 이 제 2의 축복에서도 명백히 나타났고, 또 우리로 하여금 교훈에 더욱 친근케 하고, 생생한 말씀을 눈 앞에 보게 한다.

비애와 통곡! 이것은 만인이 다 꺼리는 것이요, 온 세상이 피하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환소와 희락을 오히려 화 있다 하여 피하라 하셨고, 사도 야고보도 같게 말하였다.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바꾸며,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꾸라.

고(야고보 4.9). 애통은 진실한 것이요, 희락은 부허(浮虛)한 것이다 . 환소는 일시에 지나갈 것이요, 비애는 인생에 오래 머무를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는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바꾸며,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꾸라”하였다. 그러나 비애와 통곡이 다 가(可)한 것이 아니다.

대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은 회개를 이루어 구원을 얻게 하는 것이요 후회할 것이 없거니와 , 세상 근심은 죽는 것을 이루느니라 .

는(고린도 후서 7.10) 바울의 말과 같이 근심에도 두 가지가 있다.

정욕과 육을 본위로 하는 세상 근심과 걱정은 사람의 골수(骨髓)를 마르게 하며, 생혈(生血)을 고결(固結)케 하는 결과를 가져 온다 . 이런 종류의 근심은 하루 하면 그만큼 검은 머리가 희게 될 것이요, 이틀을 계속한다면 그만큼 생명을 단축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 즉 영(靈)을 본위로 한 비애, 자기의 학식부족, 덕성결핍, 외적 내적으로, 유형 무형으로 참말 심령에까지 빈자인 것을 통감하는 때의 비탄(悲嘆) , 동포와 인류의 구원에 관한 근심 , “창조함을 받은 우주만물이 썩어짐의 종됨을 장차 벗어나, 하나님의 뭇 자녀의 영광을 얻어 자유에 이를 것”(로마 8.21, 22)을 모두 애통해하는 우주적 비애, 이러한 애통은 전혀 고귀한 애통(noble sorrow) 이다. 이 애통은 있을수록, 심각할수록 심령을 고결케 하고 생명을 소생케 하여 구원을 얻게 하는 데까지 이르는 것이다.

(천로역정을 쓴) 번연이 눈물 많은 생애를 보냈고, 루터에게 비탄이 깊었고, 예레미야가 눈물을 먹고 자라서 눈물을 뿌리면서 예언하였었다. 누가 이 고귀한 비통의 골짜기를 통과하지 않고 진정한 “선지자”의 이름에 해당한 자 있었으며, “위대”라고 할 만한 생활을 한 자가 있었던가? 우리는 모른다. 취생몽사(醉生夢死)하는 하루살이와 같은 생활보다 애통에 각성한 자가 행복스러운 자라 함은 문자 그대로 진리이다 .

[임성삼의 주(註); 이 분의 말씀에 틀린 점이 없으나 나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나는 예수님께서 실제로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해 주셨다고 생각한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는 이처럼 애통하는 자에 대하여 “위로함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이 “위로함을 받는다”는 뜻은 보통 인간사회에서 말하는 위로나 혹은 위안과는 무척 차이가 있는 것이다. 가령 창세기 37 장에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팔고서, 그 저고리에 피를 묻혀 부친 야곱에게 갖다 주고, 요셉이 죽었음을 전하였을 때 “모든 아들들과 딸들이 야곱을 위로하려 하였으나, 저는 위로 받기를 거절하고 말하기를 ‘나는 통곡하며 무덤으로 내 아들 있는 데까지 갈 터이다’하였다”(35 절). 이 같이 라헬도 그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를 받지 아니하였었다(마태 2.18). 입술로 하는 위로, 외적으로 하는 인간적인 위로는 도저히 진정한 위로를 주지 못하는 것이다 .

예수가 선언하신 위로는 이 애통의 근원을 제거하는 위로 였다. 그러므로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는 다른 것이라”하였다(요한 14.27). 이 위로는 현재에 있어서도 어느 정도까지 받을 수 있으나, 특히 고귀한 애통으로 말미암아 천국에 들어갈 준비가 충분히 된 자에 대하여 내세의 충족을 약속한 것이다. 그러므로 제 1 축복이 현재 동사임에 반하여, 이 제 2 축복의 약속은 미래 동사로 되어 있다 . “이제 고난 받는 것과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을 비교하면 족히 비교할 수 없느니라”(로마 8.15)는 바울의 말은 이것을 가르침이요, 요한 묵시록에

내가 신천지(新天地)를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지고 바다도 또한 다시 있지 않더라. 내가 또 보매 거룩한 성, ….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이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 저희의 하나님이 되고, 눈물을 눈에서 다 씻기시매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과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일이 다 지나감이라 .

고 하였음은(21. 1 – 4) 그 구체적인 시현(示現)이다.

기독교도에게 애통이 없지 않다. 도리어 심각한 비탄과 뜨거운 눈물이 많다 . 의인에게 환난이 많고, 애자(愛子)에게 매가 잦은 법이다. 그러나 “눈물을 눈에서 다 씻기시는” 날을 기다리며, 우리는 “복스럽도다, 애통하는 자는 위로함을 받을 것임이라”는 그리스도 예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 행복스러운 처지를 발견하여야 할 것이다.

3. 온유한 자

마태복음 5 장 5 절

복스럽도다, 온유한 자들은. 까닭이다, 저들이 땅을 차지할 것인 .

…… 자연과학자는 말한다. 약육강식(弱肉强食)과 우승열패(優勝劣敗)는 천연(天然)의 법칙이라고. 또 정신과학자는 이에 응하여 힘은 정의다, 승즉관군, 패즉적이라고. 이를 갈고 발톱을 기르는 맹수나 완력, 금력, 지력(知力)을 측적하는 개인이나 육군, 해군, 공군을 확장하는 국가나 그 목적은 다 일반이다. 어떻게 하든지 타(他)를 배격하거나 위압하거나 회유하여 자기가 강자의 행복을 차지하려는 심사(心事)는 [새로 태어난] 뻐꾸기와 같은 것이다. 포악한 자가 강성하고 유순한 자가 쇠퇴하는 것은 밤낮으로 목도(目睹)하는 사실이다. 하늘이 높고 땅이 낮은 것처럼 변할 수 없는 철칙(鐵則)이다.

그런데 예수는 선언하신다. 강폭한 자가 아니요, 온유한 자가 복스럽다고 .

온유의 원문 praus는 온화, 유순(柔順), 겸손, 온량(溫良), 참음 등을 의미한다 . 성질이 관대하여 훼손(毁損), 경멸을 당할지라도 쉽게 격노하지 않고, 초급(樵汲), 역기(逆氣)함이 없고 오히려 악을 행하는 자에 대하여

出乎爾者 反乎爾哉 출호이자 반호이재

[임주(任註); 너에게서 나온 것은 너에게로 돌려보낸다]로 눈으로 눈을 갚고 이로써 이를 갚는다기 보다 차라리 피해 수욕(受辱)한 대로 참기에 능한 자 특히 하늘에 반역치 않는 것, 하나님이 내리신 모든 곤고(困苦), 환난을 달게 받는 성질을 이름이다. 이런 성질을 가진 자가 복스럽고 장차 땅을 차지할 것이라고. 사실과 멀기 심하다. 그러나 예수는 행복의 표준을 이처럼 전도시킨 것이다.

온유한 자는 현세에 처하여 열패자(劣敗者)가 안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고래(古來)로 진정한 기독신자는 이 열패자의 지위에 자처하였다.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오물(汚物)과 만물의 때와 같으니라”(고린도 전서 4.13)는 것이 초대 신자의 처지였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 자신이 이대로 온유한 성격이었다.

“저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휼도 없었느나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발악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자기를 부탁하셨다.”(베드로 전서 2.22 이하). 또한 이사야의 예언한 바……

이에 “온유”라 함은 단지 “유약(柔弱)”이라든가 “문약(文弱)”이라는 것과는 매우 다른 것이다 .

한신이 불량배의 다리 밑으로 기어나갈 때에 저는 유약한 비겁자인 까닭이 아니었다. 오히려 저에게 영웅적 기개(氣槪)가 있었으므로 그처럼 온유할 수 있었다.

”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나으며,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쳐서 빼앗기보다 나으니라 “(잠언 16.32)

는 것은 알렉산더 대왕의 고백을 기다리지 않고라도 사실이다. 사람과 사회에 대한 온유한 자의 그 온유의 깊은 곳에는 “공의로 심판하는 자에게 부탁하는” 신뢰가 있다. 예수의 경우가 그것이었고(마가 15 장), 욥의 순종이 또한 이에서 발원한 것이었다. ……

맹호와 사자는 종적을 끊게 된 때에 유순한 소와 양은 오히려 온 땅에 차게 하시는 이 가 또한 이 천지와 그 안의 만물을 온유한 자에게 차지시킬 것을 약속하셨다.(창세기 1.26, 로마서 8.32). 일세의 영웅아 나폴레옹은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한가로운 세월을 보내게 된 때에 나사렛 예수의 약한 생애와 구주의 천지를 석권하던 자기 신세의 말로를 비교하여 장탄식(長歎息)을 마지 못하였다 한다. 과연 예수는 온유한 자의 모범이었고 또한 땅을 차지하여 완전히 만왕의 왕이 된 자다. 우리도 저와 같이 온유하여 학대에 견디면 또 저와 같이 될 것이다.(로마서 8.17)

[임성삼의 생각; 실제로 온유한 사람이 땅을 차지한 예는 많이 있다.

또한 지금 온 지구상에서 강한 육식동물은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거의 멸종된 것이 사실이다.]

4. 의(義)에 주리고 목마른 자

마태복음 5 장 6 절

복스럽도다, 기갈한 자들은, 의에.

까닭이다, 저들이 배부름을 받을 것인 .

정의를 동경하는 마음은 인류의 가장 절실하고 순진한 심정의 발로이다. 멀리 신화시대로부터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사실(史實)을 상고(詳考)하면서 듣는 자, 읽는 자가 혹은 눈물겨워하고 혹은 한숨지어 비탄을 나누는 것이라든가, 동화나 전설 중에 나오는 형된 자를 미워하고 아우된 자를 동정하는 심사(心事)는 그 어느 편에 친소(親疎)나 정실(情實)이 있어서 된 것이 아니고 다만 정의감의 충동이 발로된 것뿐이다.

제갈공명의 출사표에 함루(含淚)하고 조자룡의 무운을 기구하는 자 위왕의 적군뿐이 아니요, 선죽교에 눈물 씻고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獨也靑靑)”한 봉래산의 제일봉(第一峰)을 쳐다보고서 만장의 기염(氣焰)을 토하는 자가 필왈 이조 오백 년의 불우(不遇)의 신하들 뿐이 아니다.

정의다, 정의다! 부당한 대우를 배격하고 당연한 도리가 통용되기를 희구(希求)하는 마음 , 이는 어린이의 소원이요, 또한 어른의 욕망이다. 문화인의 창도(唱導; 앞장 서서 부르짖음)하는 바요, 또한 야만인의 사모하는 것이다. 아니 우주만물이 모두 완전한 정의의 현실을 대망하면서 신음하고 있는 것이다(로마 8:21, 22).

정의(正義)는 우주의 법칙이요, 인류의 공도(公道)인 것 같다. 그러므로 아무런 폭군이라도 정의의 명분을 빌지 않고는 단기(單騎) 일병(一兵)도 움직일 수 없었던 것이다. ‘바로’ 왕의 이스라엘 추격에서, 카이젤의 선전포고와 미국의 남북전쟁에 이르기까지 그 어느 것이고 정의를 표방하지 않고 개전한 것은 없었다. 우주가 불의를 용납 안함을 이미 알고 있는 까닭이다. 이와 같이 정의는 우주의 원형리정(元亨利貞)이요, 제왕 후백(侯伯)으로부터 서민, 초부(樵夫)까지 공통으로 원하는 바라 하면 하필 그리스도는 이처럼 평범한 것으로써 제 4 축복을 선언하셨는가?

정의(正義)는 만인, 만국이 다 요구하는 것이나 동시에 만인, 만국이 다 회피, 배격하는 것이다 . 모순의 대(大)와 역설이 심함이 이보다 클 것이 없다. 그러나 사실이다. 사회가 인정하는 “어떤 정도까지”의 정의(正義)는 통용된다. 신축(伸縮) 변태(變態)가 자유자재한 정의는 세상이 환영한다 . 각 계급의 정의가 있고 각 종파의 정의가 있고, 국민으로서의 정의가 있고, 민족으로서의 정의가 있고, 유년시대에 강요한느 정의가 있고, 장자(長者)된 후의 정의란 것이 따로 있어 각기 그 국한된 범위에 배회하면서 과(過)하지도 않고 불급(不及)함도 없고, 열(熱)하지도 않고 냉(冷)하지도 않고, 극악의 인(人)도 아니어서 다소의 선(善)과 의(義)도 행하는 자가 세상이 인정하는 소위 중용(中庸)의 인(人)이요, 정의의 인(人)이다.

이에서 일보(一步)라도 초월하면 의를 행하는 것이 도리어 가증한 것이 되고 위험한 것이 된다 . 그러므로 초등교육에서 정직하라고 가르침은 가(可)하나 현대의 성인을 향하여 정직하라 함은 마치 자살하라고 권함이나 마찬가지다. 유년시대에 정직한 것은 오히려 기특하다마는 성인이 정직한 것처럼 현세의 폐물인 것은 다시 없다.

금주(禁酒) 단연(斷煙)은 유년시대로부터 미덕으로 장려하고 근일에 이르러는 교회나 구세군의 설교뿐 아니라 신문, 잡지까지도 통계상 수자를 열거하여 그 실행을 종용(慫慂)하건만 여전히 금주단연은 입신출세(立身出世)하려는 자에게 다른 아무런 덕성의 결함보다도 더 큰 장해를 주어 마지않는다. 타(他; 그대)는 추지(推知; 미루어 생각하여 앎)할 것이다.

의(義)는 행할 것이라 한다. 그러나 의를 행하면 견딜 수 없다 한다. 의를 행하는 곳에 증오(憎惡)가 생기고 핍박이 따른다. 이것이 세상의 실상(實相)이다. 역시 공중(空中)의 권세 잡은 자가 지배하는 곳이다. 이 세상에서 사회가 칭찬하는 의인 됨으로써 만족치 않고 모든 인습과 제한을 초월하여 진실로 정의를 추궁하여 갈(渴)한 자가 물을 찾고, 주린 자가 식물(食物)을 찾는 것처럼 급박한 필요에 응하고자 돌진하는 순정(純情)과 지성(至誠)으로써 의를 행할 때에 훼손(毁損)과 압제(壓制)는 준비하였던 것처럼 주위를 포위한다. 악마와 세상의 자식들은 교묘한 술책과 감당할 수 없는 악독으로써 의를 행하는 자를 차질(蹉跌)케 하고 선을 조성케 하려는 것까지도 방해한다.

이러므로 그리스도는 특히 의에 기갈(飢渴)한 자를 축복하신 것이다. 타산지석(他山之石)과 같은 입장에서 의를 찬양치 않는 이는 세상에 일인(一人)도 없다 . 인생을 출발하는 청년기에는 매일 삼시(三時)의 식사를 욕구하는 정도로써 의에 준거(準據)하려는 자는 차라리 많다. 그러나 이런 정도로써 의를 행하려든 자는 세상이 의를 행함에 부적(不適)한 장소임을 발견할 때에 대다수는 세속에 항복하여 원활(圓滑)하게 타협하여 버리고 소수의 비교적 강한 자라야 소위 “탈속(脫俗)”하여 산중이나 광야에서 독선기신(獨善其身)하는 정도이다.

이런 것은 의(義)에 대하여 주리고 갈(渴)한 것이 아니다. 기(飢)와 갈(渴)이라 함도 경험이 없이는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다. 저 하일(夏日)에 갈증이 심할 때는 우마(牛馬)의 발자국에 고인 물과 논의 물이라도 오예(汚穢)를 생각할 여지 없이 달게 마실 수 있고, 고산 위의 잔설(殘雪)과 사막에서 낙타의 위액(胃液)을 분배할 때며, 여러 날 단식한 후에 일시반(一匙飯; 숟가락 시)과 채소 한 잎을 얻었을 때의 경험, 체면도 없고 친우의 정의도 불고(不顧)하고서 일편(一片) 일적(一適)까지라도 섭취(攝取)하고야 말려는 그 기갈(飢渴)로써, 의를 행하여 백절불굴(百折不屈)하고 악과 싸우며, 만난(萬亂)을 배(排)하고라도 정의를 세워 완성하려고 애쓰며, 모든 조소와 압제와 훼손(毁損) 중에서도 정의를 단념하지 않는 자 이런 자를 향하여 그리스도는 특히 장려하시고 축복하셨다.

정의를 사모하는 마음이 그 극에 달하면 즉 종교가 되는 것이다 . 참으로 의에 갈급(渴急)한 자는 양심의 만족만으로써 족하지 못하다. 도덕상 정의가 극치에 달하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바른 관계에까지 미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완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완전하라 “(마태 5: 48)고 지시하셨고 또 시인은 노래하기를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주를 찾으려고 갈급함이

사슴이 시냇물을 찾으려 갈급함과 같도다.

내 마음이 하나님 사모하기를 목마름 같이 하니

곧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라.

내가 어느 때에 하나님 앞에 이르러 뵈오리이까.

하여(시 42 편) 인간의 의의 관념이 그 극도에 달하였음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의에 달하려는 노력과 하나님의 완전에 일치하려는 욕구는 인류의 최대, 최고의 분투였다 . 의를 행함에 배고파하고 갈(渴)하여 그 분투가 이까지 이르면 사람은 더욱 차질(蹉跌)하기 쉽고 실망에 떨어지게 된다. 루터는 에르플트 수도원에서 수양할 때 이 고투(苦鬪)에 견디지 못하여 종종 질식, 절도(絶倒)하였다고 한다. 기타 번연, 어거스틴, 크롬웰이 이 고투를 짊어지는 사람이었고 ……

오호라, 나는 괴로운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구원하랴.

는(로마 7:24) 비명(悲鳴)을 절규한 사도 바울은 하루 삼시(三時)의 끼니를 요구하는 정도의 필요로 반냉반열(半冷半熱)의 태도로써 의를 구한 것이 아니었다. 먹으면 좋고 안 먹어도 견딜 만한 처지가 아니었다. 저야말로 심히 기갈한 자처럼 수화(水火)도 가리지 않고 예절도 돌볼 겨를이 없이 급박한 요구에 지배되어 기(飢)를 포(飽; 물릴 포)하고 갈(渴)을 의(醫)하려고 돌격한 것이었다.

“자유를 달라,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달라!”는 넋이다. 조문도이석사가의(朝聞道而夕死可矣;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 공자)라 하며, “주의 들에서 하루의 삶은 세상의 천년보다 낫다”한다. 의롭지 못할진대 차라리 살 수 없다는 심사다. 이 바울의 진지한 태도를 일컬어 의에 기갈하였다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도덕상 정의에 권태치 않을뿐더러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의에 달하려 하여 기갈한 자를 향하여 주 그리스도 예수는 “복스럽도다 ….. 저들이 배부름을 얻을 것이다”라고 선언하셨다. 과연 천래(天來)의 가신(嘉信)이 아닌가. 정의(正義)가 행해지지 못하는 현세(現世)와 육(肉)의 권세가 오히려 강한 인생에 있어서 정의가 이길 것이요, 의에 배부를 것이라 한다. 어떻게 하여 배부름을 얻는 것인가? 신앙에 의하여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다. 불의의 세상과 정욕의 육신에 있어서 의는 완전히 행하여지지 못한다. 그러나 단테가 연옥(煉獄)편에서 말한 바와 같이

보라! 인간의 온갖 수단도 쓸 데 없고

노도 없고, 돛도 단 것이 없을지라도

천사의 날개(신앙)만이

이처럼 머나 먼 길을 도달케 하도다.

즉, 의에 포만(飽滿)케 됨은 첫째 신앙으로써 의롭다고 일컬음을 받는 것(로마 5:19, 갈라디아 5:5), 나의 죄를 십자가 위에 처분한 의의 완전한 현현(顯現)인 자를 쳐다보면서 자기를 그 안에 두는 때에(로마 3:22, 고린도 전서 1:30) 우리는 의롭지 못한 중에 처하면서도 의에 포만함을 얻게 된다.

5. 자비한 자

마태복음 5 장 7 절

복스럽도다, 자비한 자들은. 까닭이다, 저들이 자비함을 받을 것인 .

자비(慈悲)라 함은 성경의 다른 데서 “불쌍히 여긴다”든가, 혹은 “긍휼”이라고 번역한 말 eleos, eleo로서 그 용례를 찾아 보면 대개 하나님이 백성을 불쌍히 여기신다든가, 그리스도가 죄인을 긍휼히 보신다는 등에 사용 되어 단지 지인(知人), 친척에 대한 동정, 인정이라기보다 매우 고급의 감정을 표시하는 데에 사용 되었다.

그러므로 선한 사마리아 사람같이(누가 10:37) 전에 친면(親面)이 없었던 과객(過客)에 불과할뿐더러 인습(因習)상 적대시(敵對視)되는 처지의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그 당한 참경(慘景)을 목도하고서는 측은(惻隱)지심에 견디지 못하여 자기의 이해도 생각할 겨를이 없이 간호하여 주었을 때, 실로 그런 때에 이 자비란 자가 사용되었다. 기타 비슷한 예를 들면 마태 9 장 27 절, 마가 5 장 19 절에 “불쌍히 여기소서” 한 것과 로마 9 장 15, 16, 18 절, 갈라디아 6 장 16 절, 디모데 전서 1 장 2 절 등에 “긍휼히”라고 번역한 것이 모두 같은 글자다.

[임성삼의 이야기; 이 분은 정신적으로 힘이 넘치신 분이다. 요즈음 같은 시기에 이런 힘있는 해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위의 부분을 옮겨보았다. 나머지 세 복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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