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 일체 하나님 | [김진혁 교수의 신학이야기 4강] 삼위일체 하나님! 아는데 설명할 방법이 없네…. 77 개의 자세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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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에서 성부(聖父), 성자(聖子), 성령(聖靈)은 삼위(3 Persons, 세 위격, 세 신격, 세 분, 三位)로 존재하지만, 본질(essence)은 한 분 하느님이라는 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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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크리스천들이 알지만 확실하게 설명은 못하는 바로 그것!
삼위일체 하나님, 삼위일체는 신비다.
신앙을 바로 세우는 맛있는 신학이야기. 김진혁 교수의 신학 강의를 추천합니다 🙂

김진혁 교수:
연세대학교 신학학사 (BA)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조직신학 석사 (ThM)
하버드대학교 Divinity School 목회학 석사 (MDiv)
옥스퍼드대학교 신학부 철학 박사 학위 (DPh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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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 하나님이란? – Manna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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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혁 교수의 신학이야기 4강] 삼위일체 하나님! 아는데 설명할 방법이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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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삼위 일체 하나님

  • Author: CBSJ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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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9. 7.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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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삼위일체(三位一體, 고대 그리스어: Τριάδος 트리아도스[*] , 라틴어: Trinitas 트리니타스[*] )란 그리스도교에서 성경적으로 또한 신학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교리이다. 하나님은 본질에서 한 분이시며 위격(位格, 고대 그리스어: ὑπόστασις 휘포스타시스[*] )에서는 세 분으로 존재하신다는 것이다.[1] 삼위일체에 대해서 동방교회는 본질에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세 위격으로 되는 신비를 지지했고, 서방교회는 세 위격으로 존재하는 하나님이 동일본질로 한 분 하나님이 되는 신비를 지지하며 신학적 관점의 차이를 보였다.[2]

기원 [ 편집 ]

삼위일체 방패(Scutum Fidei). 아버지(Pater)와 아들(Filius)과 성령(Spiritus Sanctus)은 동일한 인격이 아니나(non est) 한 하느님(하나님)이다.

삼위일체에 대한 성경적 근거는 이미 구약성경에서 자주 나타났고, 신약성경에서는 여러 곳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라는 문구가 증거되었다.[3] 그러나 신학적으로 정립이 되지는 않았다. 기독교회에서 삼위일체론의 초기 기원은 그리스도론(기독론)의 확장에서 시작되었다. 막 태동되었던 기독교에게 70년 유대 전쟁에서 다른 유파가 사라지고 유일하게 남은 바리사이파 유대교와 인성을 강조하는 에비온주의, 신성의 영적 요소만을 강조하는 영지주의의 등장으로 기독교 뿌리를 흔든 자극이 되었고, 육체를 가지신 제2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논리적인 설명인 신학이론이 필요했다. 이 즈음에 형성된 신약성경을 바탕으로 그리스도론과 그 그리스도론의 존재 이유에 대한 설명인 삼위일체가 등장하였다. 삼위일체는 점차 발전하여 이 세상을 설명하는 세계관과 신학적 지침으로서 기독교에 중요한 교리가 되었다.[4]

기독교 [ 편집 ]

기독교에서 성부(聖父), 성자(聖子), 성령(聖靈)은 삼위(3 Persons, 세 위격, 세 신격, 세 분, 三位)로 존재하지만, 본질(essence)은 한 분 하느님이라는 교리이다.[5] 삼위일체라는 표현은 교회에서 구약이라고 부르고 있는 타나크는 다양한 방식으로 간접적인 삼위일체가 나타나며, 신약성경 2고린 13:13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께서 이루어주시는 친교를 여러분 모두가 누리시기를 빕니다.”라는 표현에서 삼위일체가 분명하게 제시되고 있다. 삼위일체라는 용어는 후대 교회에서 사용하였다. 또 신구파를 막론한 대다수의 기독교는 삼위에 대한 개념이 요한 복음서 등에서 간접적으로 암시함(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라는 표현이 자주 나옴)을 주장하며 옹호하고 있다. 삼위일체라는 말은 성서에 나오지 않는다. 기원후 200년경 라틴 신학자인 테르툴리아누스가 신을 설명하기 위해 트리니타스(trinitas)라는 말을 만들어낸 게 그 시초다. 그리스도교 찬송가는 주로 삼위일체를 세 행으로 꾸며 성부, 성자, 성령에 각각 한 행씩 배당한다. 구약성서에는 삼위일체의 ‘예고편’이 있다. 아브라함 족장을 방문한 ‘사람 셋’은 ‘주’라고도 지칭되는데, 그리스도교도들은 이것을 가리켜 삼위일체가 아브라함을 방문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성자가 예수라는 세속의 형태로 태어나기 훨씬 전이다. 동방정교회의 화가들은 아브라함과 이 ‘구약성서의 삼위일체’를 여러 차례 그림으로 표현했다.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는 다윗의 시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다음으로는 시편 110:1의 말씀을 번역본대로 비교한 것이다.

공동번역 야훼께서 내 주께 선언하셨다. “내 오른편에 앉아 있어라.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판으로 삼을 때

개역한글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개역개정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새번역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너의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어라” 하셨습니다.

다윗은 시편에서 야훼 하느님(성부)께서 다윗의 또 다른 주(主)님과 대화하는 모습을 서술하고 있다.

에배소서 1:20 하느님께서는 그 능력을 떨치시어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려내시고 하늘 나라에 불러 올리셔서 당신의 오른편에 앉히시고 (공동번역)

사도행전 7:56 그래서 그는 “아, 하늘이 열려 있고 하느님 오른편에 사람의 아들이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하고 외쳤다. (공동번역)

마태복음 14:62 예수께서는 “그렇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이 전능하신 분의 오른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공동번역)

마태복음 12:36 다윗이 성령의 감화를 받아 스스로, ‘주 하느님께서 내 주님께 이르신 말씀,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굴복시킬 때까지 너는 내 오른편에 앉아 있어라.’ 하지 않았더냐? (공동번역)

로마서 8:34 누가 감히 그들을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께서 단죄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서 돌아가셨을 뿐만 아니라 다시 살아나셔서 하느님 오른편에 앉아 우리를 위하여 대신 간구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공동번역)

신약과 비교해 해석해 보았을 때 주(主)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으로 결론지을 수 있다.

또한 결정적인 삼위일체 교리의 핵심 구절은 요한의 첫째 편지 5장 1-8절 말씀이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 자녀를 사랑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또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계명은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누구나 다 세상을 이겨냅니다. 그리고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믿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하느님의 아들이 인간으로 오셔서 물로 세례를 받으시고 수난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신 예수이십니다. 그분은 물로 세례를 받으신 것뿐만 아니라 세례로 받으시고 수난의 피도 흘리셨습니다. 증언자가 셋 있습니다. 곧 성령과 물과 피인데 이 셋은 서로 일치합니다.”

요한은 요한1서에서 “하느님이 자신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보냈다는 것을 믿는 것”이 계명을 지키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고, 또한 그것을 증거하는 분이 성령이라고 시사하고 있으며, 그 셋은 하나라고 명확히 함으로 삼위일체론을 뒷받침하는 구절을 기록해 놓았다.

기독교의 경전 중에서 요한의 복음서에서도 그리스도의 선재와 성령의 오심을 설명하여 삼위의 개념을 다루고 있다. 사상적 개념으로는 기독교 초기의 환경이었던 유대교, 다신론, 영지주의 등의 배경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아들로 보내졌고, 아들이 이 땅에 존재했으며,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부활한 후에도 함께하시는 주, 즉 기독교가 고백하는 주에 대한 새로운 설명이 요청되었다. 특히 영지주의의 유출설과 마르키온주의의 이원론은 그리스도론을 뒤흔드는 사건이었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신학적 개념이 필요했다.[6] 이 새로운 개념은 흔히 325년 니케아 공의회와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호모우시우스라는 예수와 성부가 동일 본질이라는 관념을 더욱 발전시키고 논리적으로 체계화 시켜 삼위일체로서 확정했다. 니케아 공의회 이전부터 교부들 사이에서 받아들여지던 호모우시우스의 “동질적이고 하나의 실체로 된 아들과 아버지”라는 관념에 도전하여 삼위일체를 부인한 아리우스는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 의하여 파문되었다.

공의회의 결정 이전에 1세기 사도 교부인 로마의 클레멘스의 삼위 언급 즉 “하느님의 사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심, 성령으로”[7]라고 고백하는 문헌과 성육신 이전 예수 그리스도의 선재를 받아들이는 기록이 있다. 사도 교부인 안티오키아의 이그나티우스도 이미 존재했던 세례의 문구와 요한복음서를 활용하여 삼위 개념을 언급했다.[8] 2세기를 맞으며 기독교 변증가들은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설명하는 틀을 신학적으로 마련하고자 애썼다. 로고스 개념을 활용하여 유스티아누스에서 타티아누스, 안디오키아의 테오필루스로 이어지며 발전하였다. 2세기의 신학자 이레니우스의 경세적 삼위일체론의 등장과 이후 초대 기독교 전승을 기록한 사도전승에서 이미 삼위일체 개념을 따라 서품되는 감독자의 기도문이 있으며[9], 그 후 3세기 신학자 히폴리투스와 테르툴리아누스의 삼위일체론을 바탕으로 4세기 공의회의 결정이 이루어졌다.

일부 종교 학자들은 4세기 즈음에 확정된 삼위일체설은 기독교의 개념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고 있고, 또 이는 하느님의 본성에 대한 초기 기독교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도 있으며[10], 기독교 선교 이전 플라톤이 주장하던 성 삼위일체의 개념에서 가져온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11] 다른 학자는 삼위일체라는 개념이 기독교의 삼위일체설은 고대 이집트, 힌두교를 비롯한 고대 신앙의 영향을 받아 혼입된 교리라고 주장하기도 한다.[12][13][14][15]

현재는 대다수의 기독교 종파들이 삼위일체를 중심적인 교리로 이해하고 있다. 요한의 복음서 14장에서 설명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공생애를 통하여 자신이 곧 하느님이라는 사실과, 자신이 성부의 독생자로서 성부와 영원한 관계에 있다는 것과, 성령도 하느님으로서 하느님의 일을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으며, 하느님은 ‘절대단독주체 (Absolute Singleness)’가 아니며 성부, 성자, 성령 삼위가 하나이며 이를 통하여 예수는 삼위일체의 그 자체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삼위일체가 모든 기독교 종파의 주요 교리로 사용되지는 않는다. 니케아 신경과 보편교회의 세계공의회 전통을 거부하는 회복주의 계열의 일부 교파에서는 비성경적 논리에 불과하다며 삼위일체설을 부인하기도 한다.

찬성 견해 [ 편집 ]

삼위일체 찬성 교파와 교단은 대부분 그리스도교의 신학적 전통을 계승하고, 구약성경, 신약성경만을 경전으로 인정하고, 보편교회 시대의 신학적 기준을 사도적 지침이라 여기고 수용하는 교단들이다. 동방정교회와 천주교회, 개신교회 교단들인 루터교회, 개혁교회, 성공회교회, 침례교회, 장로교회, 감리교회, 성결교회, 오순절교회 등이다.

삼위일체의 요소는 성부, 성자, 성령인데 마태오 복음 11장 27절과 마르코 복음 10장 22절에서 예수는 ‘아버지’로부터 모든 것을 받았다고 하는 데서 비롯된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저에게 맡겨주셨습니다. 아버지밖에는 아들을 아는 이가 없고 아들과 또 그가 아버지를 계시하려고 택한 사람들밖에는 아버지를 아는 이가 없습니다.” — 마태오의 복음서 11장 27절 (공동번역)

또한 28장 19절에서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가르쳤고, 요한 복음서 14장은 이를 더욱 구체화하여 서술하고 있다. 코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8장 6절에는 대구법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곧 창조주와 동일함을 시사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아버지가 되시는 하느님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그분은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며 우리는 그분을 위해서 있습니다. 또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계실 뿐이고 그분을 통해서 만물이 존재하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살아갑니다. —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8장 6절 (공동번역)

반대 견해 [ 편집 ]

삼위일체 반대 교단들은 대부분 19세기 이후에 등장한 교파로, 현재 주류 그리스도교의 신학적 전통을 배교라 여기고, 초대교회에서 보편교회 시기를 지나며 현재 교회가 배교로 단절되었으며, 삼위일체 역시 단절의 이론이므로 이를 거부하는 것이 단절을 잇는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니케아 신경과 보편교회의 세계공의회 교리를 거부하는 회복주의 성향들로 여호와의 증인, 예수그리스도후기성도, 유니테리언 등이다.[16]

구약성경 신명기 6장 4절에서 나오는 “너,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의 하느님(하나님)은 야훼시다. 야훼 한 분뿐이시다.”라는 구절과 신약성경 마태오의 복음서 4장 10절에서 “사탄아, 물러가라! 성서에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하나님)을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하시지 않았느냐?”라는 구절 등 성서의 여러 면을 살펴보면 삼위일체와 관계되지 않는 듯한 내용도 담겨져 있다. 여호와의 증인이나 유니테리언, 그리스도아델피안 등의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종파는 이 점 또한 지적하며 만약 예수 그리스도가 삼위일체의 일부분이었다면 “오직 그분에게만”이라고 하지 않고 “우리에게”라고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신 가톨릭 백과사전'(New Catholic Encyclopedia, 1967년판) 제14권 299면에 수록된 내용을 살펴보면, 로마 가톨릭교회도 삼위일체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인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삼위일체 교의는 4세기 후반에 가서야 고안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 수 있다. 어떤 면으로 볼 때 그것은 사실이다. (중략) ‘세 위 속의 한 하느님’이란 교리는 4세기 말 이전에는 완전히 확립되지 않았으며, 온전히 그리스도인 생활과 신앙 고백의 일부가 되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영문, 1970년판) 제6권 386면에는 보편교회에서 삼위일체 교리가 채택된 제1차 니케아 공의회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니케아 공의회는 325년 5월 20일에 열렸다. 콘스탄티누스는 직접 회의를 주재하면서 토의를 적극적으로 주도하였으며, (중략) 공의회가 발의한 신경에 그리스도와 하느님의 관계를 ‘아버지와 하나의 실체’라고 표현한 결정적인 문구를 포함시킬 것을 직접 제안하였다. (중략) 주교들은 황제에게 위압감을 느껴 단지 두 명만 제외하고 신경에 서명하였는데, 그들 중 다수는 자신들의 견해와 매우 달리 행동한 것이다.”

이슬람교에서는 유일신 사상을 가지며, 이 삼위일체 교리에 대하여 혐오하는 반응이 그들의 경전 코란에 나와 있다.(수라 4:171, 5:73) 이러한 유일신 사상이 전투적이며 호전적인 이슬람을 나타내기 위한 기본적인 뼈대로 보기도 한다.[17]

다양한 해석 [ 편집 ]

삼신론: ‘세 인격의 세 하느님’이라는 이론이다.

양태론(modalism): 하느님이 시대에 따라 성부·성자·성령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한 인격의 한 하느님’이라는 이론이다. 간단히 말해서 구약의 시대에는 성부로, 신약의 시대에는 성자로, 신약 이후에는 성령으로 활동한다는 주장이 양태론적 이론의 일례이다.

종속론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온전히 하나인 주체이나, 성자와 성령은 성부에게 종속되어 있다는 이론이다.

양자론 : 양자론은 하느님이 예수를 양자로 삼았기 때문에,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주장이다.

기독교 전통 [ 편집 ]

삼위일체가 포함된 신조 [ 편집 ]

같이 보기 [ 편집 ]

각주 [ 편집 ]

삼위일체 하나님이란?

기독교의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십니다. 삼위일체란 유일하신 하나님(본질)이 3인격(위격)으로 존재하시고 사역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삼위일체는 기독교에 매우 중요한 교리이기 때문에 이 삼위일체를 부인하면 이단이 됩니다. 그럼에도 정통 기독교신자들도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 말은 자주 들어서 알고 있지만 실제 그것이 무슨 뜻인지 잘 모릅니다. 삼위일체라는 용어는 신학적으로 정립이 된 용어이지, 성경에 직접 나타난 용어는 아닙니다. 삼위일체는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된 진리일 뿐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가장 잘 계시하여준 성경 중에 하나가 바로 요한복음입니다. 사도요한은 유대인입니다. 그래서 그는 구약의 하나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바로 그가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예수님의 사역과 말씀 가운데서 바로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보혜사 성령님, 그리스도의 영이 오셨는데 그분도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요한에게는 유일하신 하나님이 3위격으로 존재하시고 사역하신다는 사실이 굉장한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스 논쟁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 논쟁은 2위이신 예수님이 1위인 아버지 하나님과 동등하냐 아니면 아버지보다 작으냐의 논쟁입니다. 동등하다면 예수님은 100% 하나님이시고, 작다면 예수님은 100% 하나님이 아닌 것입니다. 아리우스파는 예수님은 아버지 보다 작은 분이고 종속되어있다고 믿었습니다. 지금의 여호와의 증인이 이것을 따르고 있습니다. 아타나시우스파는 예수님은 아버지와 100%동등하다고 믿었습니다. 이 논쟁에서 아타나시우스파가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아리우스파는 요한복음14:28 “아버지는 나보다 크다”라는 말씀을 인용합니다. 결국 그리스도는 아버지에게 종속되어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삼위일체 하나님을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가에 대한 시도를 많이 합니다. 예컨대, 얼음이 녹으면 물이 되고, 물이 수증기가 되지 않습니까? 얼음, 물, 수증기는 같지 않습니까? 태양이 있고, 빛이 있고, 열이 있지 않습니까? 태양, 빛, 열은 결국 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분들은 삼위일체 하나님도 이렇게 이해 할 수 있는 듯이 말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셋이 하나가 되는가에 대한 이런 숫자 놀음은 우리 신앙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점 더 고상하게 말하는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소위 삼신론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아버지, 예수님, 성령이 모두 하나님이기 때문에 결국 삼신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틀린 말입니다. 하나님은 유일하십니다. 하나님은 한분뿐이십니다. 또 이런 주장도 있습니다. 시대마다 다른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하나님이 세 가지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며 역사한다고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구약시대에, 예수님이 신약시대에, 성령님은 교회시대에 존재하시면서 역사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을 경륜적 삼위일체론이라고 합니다. 이것도 이단입니다.

삼위일체를 어떻게 이성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능할까를 시도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삼위일체 신론은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가 불가능한 신비입니다. 삼위일체 신론은 우리에게 계시 된 만큼만 이해를 하셔야 합니다. 신비는 남겨두어야 합니다. 삼위일체 신론을 어떻게 이성으로 이해해야 할 것인가 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삼위일체 신론이 나타내는 진리가 무엇일까?를 알고, 그 진리에 감사와 감격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하나님은 인간이시면 안 됩니다. 초월자이셔야 합니다. 초월자이셔야 우리를 구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려면 초월자이시지만 우주와 역사 가운데 내주하셔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는 우리의 영혼 안에 내주 하셔야 합니다. 초월하시면서,인류의 역사 가운데 내주하시고, 인간의 영혼 안에 내주하시는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존재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 우리를 사랑하셔서 구원하실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 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감격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의 지혜에 감탄해야 합니다.

삼위일체 신론은 세 인격이 어떻게 한 하나님으로 존재할 수 있는 가를 우리의 이성을 통해 이해하라고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닙니다. 삼위일체 신론은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려면, 초월자이시지만 역사 가운데 내주하셔야 하고, 더 나아가서는 우리의 영혼 안에 내주 하셔야 함을 우리로 하여금 경험하도록 주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이해 안 되면 그대로 두세요. 그 대신 하나만 명심하십시오. 우리를 구원할 구원자는 초월하시면서, 내재할 수 있는 신이어야 합니다. 그분이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6).

For God so loved the world that he gave his one and only Son, that whoever believes in him shall not perish but have eternal life. (John 3:16 NIV)

[하나님 나라와 영성⑨]삼위일체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현요한)

삼위일체론은 무슨 철학적 사변에서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삼위일체론의 뿌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의 계시이며, 그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깊은 경험과 신앙과 예배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그저 비인격적인 절대자나 우주의 원리가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이요,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 세 위격은 서로 아무 상관 없이 존재하는 고립된 인격들이 아니라, 피차 불가분리의 필연적인 관계 안에 있으면서 사랑으로 일체를 이루고 있는 인격들입니다.(본문 중)

현요한(장로회신학대학교 명예교수, 조직신학)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을 단순한 유일신이라고 믿지 않고,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삼위일체 교리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논리적이지 않고, 너무 난해하며 추상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교리가 신앙에 도움이 되는지 의심하기도 합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일종의 형이상학적이고 철학적인 내용이지, 성경이 말하는 내용은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아직도 삼위일체 교리 같은 고리타분한 이야기가 필요한지 질문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실 삼위일체 교리는 그리스 철학이나 형이상학적 사변에서 나온 것은 아닙니다. 그 교리에 대한 교회의 진술이 철학적 용어를 사용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헬라 철학과는 거리가 멉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성경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신앙과 예배의 전통에서 나온 것입니다. 삼위일체라는 말은 세 위격(位格, person)이 한 본체(本體, substance)를 이룬다는 말을 축약한 것인데, 성경에 ‘삼위일체’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이해할 수밖에 없는 계시적 사건들이 일어났으며, 성경은 그것을 증언합니다.

신약성경의 신앙은 철저히 하나님이 한 하나님이시라는 구약성경의 신앙을 계승하고 있습니다(엡 4:5-6). 또한 동시에 신약성경의 신앙은 성자의 신성, 성령의 신성을 인정합니다(요 1:1-3; 20:28; 4:20; 고전 3:16, 19 등). 그러면 성부 성자 성령 모두 신성을 지닌 존재라는 말인데, 그래도 하나님은 한 분이라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이름만 다르지 실제로는 동일한 존재일까요? 그러나 성경은 명백히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구별되는 분이심을 증언합니다.1) 그리하여 신약성경은 성부, 성자, 성령을 동등하게 나란히 언급합니다(마 28:19, 고후 13:13).2) 이러한 양식은 초기 교회의 예전(liturgy)의 일부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고대 교회에서 삼위일체론의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공의회는 니케아 공의회(First Council of Nicea, A.D. 325)와 콘스탄티노플 공의회(First Council of Constantinople, A.D. 381)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회의들은 그 무렵에 등장했던 여러 가지 이단 설들이 본래 교회의 신앙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올바른 신앙(교의, 敎義)을 공식적인 신조로 공표한 것입니다. 그와 함께, 고대 교회에서 삼위일체론을 학문적으로 정립하고 기초를 놓은 위대한 신학자들이 있었는데, 동방교회에서는 카파도키아의 세 교부들이 중요하고, 서방교회에서는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가(Augustine, d. 430) 중요합니다.3) 카파도키아의 교부들은 성부는 물론, 성자와 성령을 포함하는 세 위격들 모두의 신성을 인정하면서, 그 구별되는 세 위격이 한 하나님이심을 해명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신성을 가진 구별되는 세 개별 실체가 하나님의 한 본질을 공유하며(mia ousia, treis hypostaseis), 또한 서로가 서로 안에 온전히 내주하신다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일체성을 설명하였습니다.4) 서방교회 삼위일체론은 주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전통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우선적으로 강조하고, 그 한 하나님 안에 서로 구별되면서 동등한 세 위격의 복수적 관계가 존재함을 설명하려고 하였습니다(una substantia, tres personae). 그가 삼위일체를 해석하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본질적으로 사랑이시라면, 하나님 안에 적어도 ‘사랑하는 이’와 ‘사랑받는 이’와 ‘사랑 그 자체’가 반드시 존재해야 할 것인데, 그는 이를 성부, 성자, 성령에 대응시켰던 것입니다.5)

그런데 17세기 과학혁명과 18세기 계몽주의 운동 이후 사람들은 형이상학적이며 추상적인 것보다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에 관심을 두게 되었고, 한동안 삼위일체론은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칼 바르트(Karl Barth) 같은 신학자는 다시 종교개혁적인 말씀의 신학, 계시의 신학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며 삼위일체론을 다시 중요한 신학적 주제로 발전시켰습니다. 이후 오늘날까지 많은 신학자들이 삼위일체론에 관심을 가지고 그에 대한 해석과 생각들을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이를 삼위일체론의 르네상스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러한 현상 이면에는 삼위일체론이 단순히 형이상학적인 사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삶의 실천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판단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해방신학자나 여성신학자들도 이러한 흐름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 내용들을 모두 자세하게 살펴볼 수는 없지만, 그 흐름 안에는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인격적인 사랑의 공동체, 혹은 사랑의 교제(코이노니아)를 발견하고, 그것은 원형으로 삼아 우리의 삶에서 그러한 삼위일체 하나님을 본받아 서로 평등하고 자유로운 민주적 공동체를 이루어 가고자 하는 의도가 들어 있습니다. 각 신학자들의 삼위일체론의 세부적인 내용은 다르지만, 서방교회 전통을 따르면서 한 분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랑의 교제 관계를 보든, 동방교회 전통을 따르면서 세 개별 위격들 간의 사랑의 공동체적 교제를 보든, 큰 흐름은 유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6)

그런데 성경은 그동안 우리가 계속 이야기해 온 ‘하나님 나라’가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나라’임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아버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마 13:43; 26:29; 눅 22:29; 고전 15:24).7) 또한, 하나님의 나라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입니다(요 18:36; 엡 5:5; 골 1:13; 벧후 1:11).8) 또한,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의 나라이기도 합니다.9) 이는 하나님의 나라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나라요, 이 세상에 실현되는 하나님의 나라는 그 삼위일체 하나님을 반영하는 나라가 되어야 함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그 삼위일체 하나님은 바로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다”라는 말은 삼위일체론의 내용적인 심층 문법(depth grammar)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10)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파하신 복음의 이야기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사이의 놀라운 사랑의 이야기이며, 그 속에서 우리가 함께 참여하게 되는 하나님의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죄인들과 병자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을 용서하고, 인정하고, 치유하고, 가르치고, 변화시켜 생명을 주신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자기를 비우고 내어 주어 사람이 되시고, 종의 모습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고난당하며 섬기는 사랑입니다(빌 2:5-11).

삼위일체론은 무슨 철학적 사변에서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삼위일체론의 뿌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의 계시이며, 그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깊은 경험과 신앙과 예배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그저 비인격적인 절대자나 우주의 원리가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이요(마 16:16),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 세 위격은 서로 아무 상관 없이 존재하는 고립된 인격들이 아니라, 피차 불가분리의 필연적인 관계 안에 있으면서 사랑으로 일체를 이루고 있는 인격들입니다. 그 인격들은 서로 구분된 타자이면서 동시에 서로 사랑하며 공동체를 이루는 인격들입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으로 구원하시는 분임과 함께,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우리 각 개인을 살릴 뿐 아니라, 공동체적이며 공적인 영역에서 이 세상을 살리는 기초가 됩니다. 하나님 나라를 사는 영성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고, 그 사랑을 받아 누리며, 이 땅에서 그 사랑의 공동체를 본받아 사는 영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코로나19 대유행의 시대에 이 땅에 사는 우리는 그러한 영성으로 살고 있습니까?

1) 성부와 성자의 구별: 요한복음 1:1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하였다. 여기서 성자를 가리키는 ‘말씀’은 하나님이시면서 하나님과 ‘함께’ 계신다고 하였으니 하나님과 말씀이신 성자는 구별된다. 또한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셨을 때(막 15:34), 버리시는 이와 버림받는 이는 구별될 수밖에 없다. 성부와 성령의 구별: 성령이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고 할 때(롬 8:26-27), 기도하는 이와 기도를 들으시는 이는 구별될 수밖에 없다. 성부께서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신다고 할 때(요 14:26), 보내시는 이와 보냄을 받는 이는 구별될 수밖에 없다. 성자와 성령의 구별: 성자께서 성령을 보내신다고 할 때(요 16:7), 보내시는 이와 보냄을 받는 이가 구별될 수밖에 없다.

2)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마 28:19);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3).

3) 고대와 중세 기독교 세계는 주로 지중해 연안에 퍼져 있었다. 그중에서 헬라어를 사용하는 동쪽 지역의 교회를 동방교회라고 하고, 라틴어를 사용하는 서쪽 지역의 교회를 서방교회라고 부른다. 카파도키아의 세 교부들이란 바실리오스(Basil the Great, 330-379),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오스(Gregory of Nazianzus, 329-389), 닛사의 그레고리오스(Gregory of Nyssa, c.335-c.395)를 가리킨다.

4) 나중에 다마스쿠스의 요한(John of Damascus, c. 675-749)은 카파도키아의 교부들의 해석을 기초로 동방교회 삼위일체론을 정립하였다. 그는 세 위격들의 상호내주, 혹은 상호침투를 의미하는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라는 용어를 확정 지었다.

5) 아우구스티누스는 또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의 정신(영혼)을 분석하여, 정신은 하나인데 정신과 정신의 자기 자신에 대한 지식과 정신의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으로 설명하기도 하고, 영혼은 하나인데 그 안에 기억과 지식과 의지가 있다는 식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6) 이러한 방향성은 동방정교회의 요한 지지울라스(John Zizioulas)를 비롯, 프로테스탄트의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 미로슬라브 볼프(Miroslav Volf), 로마 천주교회의 캐서린 모우리 라쿠냐(Katherine Mowry LaCugna) 등과 함께, 해방신학자인 레오나르도 보프(Leonardo Boff) 같은 이도 포함한다.

7) 하나님의 나라를 마 13:43은 “의인들의 아버지의 나라,” 마 26:29은 “내 아버지의 나라”라고 표현하며, 눅 22:29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일을 말씀하시며, 고전 15:24에서는 “…나라를 아버지께 바칠 때…”라고 말씀하신다.

8) 요 18:36에서 예수님은 그 나라를 가리켜 “내 나라”라고 말씀하시며, 엡 5:5은 그 나라를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 골 1:13은 “그 사랑의 아들의 나라”, 벧후 1:11은 “우리 구주 곧 그리스도 예수의 영원한 나라”라고 부른다.

9) 성경에 하나님의 나라를 성령의 나라라고 표현한 문자적 표현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나라를 이 땅에 실효적으로 실현하는 이는 성령이심을 분명히 보여준다. 마 12:28은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라고 하였고, 롬 14:17은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다”라고 하였다.

10) 다니엘 밀리오리, 『기독교조직신학개론』(개정3판)(새물결플러스,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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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이단 중에 여호와의 증인이 있다. 이들은 정통 기독교인들을 넘어뜨리기 위해 삼위일체에 대해 질문 하기를 즐기는데, 이들은 기독교가 믿는 삼위일체가 비합리적이고 비성서적이라고 주장한다. “왜 당신들은 성경에도 없는 삼위일체를 믿습니까? 이 교리는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사탄이 준 것입니다” 이렇게 주장한다.

사실 여호와의 증인의 지적대로 삼위일체(Trinitas)라는 단어는 성경에 없다. 그러나 이 특정 단어가 없다고 해서 성경에 그 개념도 없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가 삼위일체를 믿는 것은 비록 성경에 그 단어는 없지만 성경이 그 개념을 가르치기 때문이고, 우리가 이 단어를 사용할 때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의 관계를 더욱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사실 정통교회가 삼위일체라는 단어를 사용한 이유는 여호와의 증인 같이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부인하는 이단들 때문인 것이다. 만일 성자와 성령을 하나님으로 고백하지 않는 이단들이 아니었다면 정통교회도 굳이 성경에도 없는 삼위일체라는 단어를 만들어 사용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여호와의 증인이 삼위일체를 거부하는 주요 근거는 두 가지이다. 우선 그들은 이 개념이 논리적이지 못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기독교는 유일신을 믿는데 삼위일체는 이 원칙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어떻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셋인데 하나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오직 여호와만을 하나님으로 섬겨야 유일신론자가 되는 것이지, 어떻게 성부 하나님과 더불어 예수와 성령도 하나님으로 섬기면서 유일신론을 유지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따라서 삼위일체를 믿는 것은 곧 삼신론을 믿는 것이거나 우상숭배를 하는 것이라는 논리이다. 또 정통기독교가 주장하는대로 만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진짜 하나라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하나님께 기도할 때 자기가 그렇게 간절하게 자기 자신에게 기도했다는 말인데, 이게 논리적으로 모순이라는 것이다. 사실 이 둘이 서로 다른 존재이기 때문에 예수가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한 것이 아닌가? 그래서 삼위일체는 말이 안 되는 모순이라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여호와의 증인이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근거는 이 개념이 성서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들이 상투적으로 사용하는 성구가 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한 1:1) 일단 여기에 언급된 “말씀”이 우리의 일상적인 언어나 음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의미한다는 것에서는 정통기독교와 여호와의 증인이 이해를 같이 한다. 그런데 이 둘 사이에 입장이 갈라는 것이 1절에 두 번 나오는 “하나님”이란 단어에서이다. 여호와의 증인은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에 나오는 하나님을 “하나님/전능자”(The God)로 이해하지만, 곧 이어 나오는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의 하나님은 “신/대능자”(a god)로 이해한다. 어째서 같은 하나님이란 단어를 이렇게 다르게 이해하는 것일까? 헬라어 원문에 보면 이 첫 번째 하나님에는 정관사가 붙어 있고 두 번째 하나님에는 정관사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부 하나님은 The God/진짜 하나님이고 성자 하나님은 a god/유사 하나님이란 것이다.

이게 사실일까? 첫 번째에는 정관사가 있고 두 번째에는 정관사가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이 정관사의 유무가 진짜 하나님과 가짜 하나님을 구분하는 증거가 된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요한복음 1:1절 이후에 나오는 6,12,13,18절의 경우를 보면, 성부 하나님을 지칭하면서도 정관사가 없는 “하나님”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반면에 그들이 “신/대능자”라고 부르는 예수님이 “하나님”으로 기록된 성경구절들 중에 정관사가 붙은 경우들도 많이 발견되고 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20:28절에서 도마가 예수님을 가리켜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ὁ θεός)”라고 했을 때 이 “하나님”이란 단어에 정관사가 붙어 있다. 디도서 2:13절에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란 구절이 있는데, 여기에도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부를 때 정관사(The)가 붙어 있다.(그밖에 히 1:8절, 요일 5:20절, 롬 9:5절을 보라.) 따라서 정관사의 유무를 가지고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것은 설득력이 전혀 없다.

우리는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셋으로 구별되지만 서로 분리되지 않는 하나의 상태”라는 의미로 이해한다. 성경을 찾아보면 실제로 이 셋이 서로 구별되는 것으로 설명된 구절들도 나오고 서로 분리되지 않는 하나의 상태로 설명된 구절들도 나온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로 와서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영생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왜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고 대답하셨다.(마가 10:17-18) 또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성부 하나님을 “내 아버지여” 라고 부르면서 기도하셨다.(마태 26:39) 이로 보건대 성자 예수님과 성부 하나님은 서로 구분된다. 또한 예수님은 성령을 가리켜 “다른 보혜사”라고 부르시면서 자신과 성령을 구분하셨다.(요한 14:16)

반면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상태로 표현된 구절들도 많이 있다. 요한복음 10:30절에 보면 예수님이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말씀하실 때 유대인들이 돌을 들어 예수님을 치려 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유대인들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자칭 하나님이라” 주장하기 때문인 것이다. 또 요한복음 20:28절에 보면, 도마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내용이 나온다.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분명히 도마의 말을 교정해주셨을 것이다.(요일 5:20, 롬 9:5를 참조) 또한 성령은 예수의 영(갈라디아 4:6)이요 아버지의 영(고전 3:16)으로 설명되어 있고, 사도행전 5:3-4절에서는 성령을 속인 것이 곧 성부 하나님을 속인 것이 된다고 하면서 성령과 성부를 동의어로 취급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명령하시고(마태 28:19), 바울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축복을 한다. 만일 성자와 성령이 성부와 같은 하나님이 아니라면 그 이름들로 세례를 베풀거나 축도하는 것은 신성모독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성경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가르치고 있다.

삼위일체의 개념이 보통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오게 하기 위해 역사적으로 여러 가지 시도가 있어왔다. 대표적인 예를 들면 이렇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관계를 태양의 세 가지 속성에 비유해서 설명하는 방법이 있었다. 태양은 동시에 빛을 비추고 열을 발산하고 붉은 색의 모습을 띤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속성 중 하나가 사라지면 어떻게 되는가? 그것 하나만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체가 다 없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태양의 빛과 열과 붉은 색이 셋이지만 결국 하나인 것처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한 하나님이라는 설명이다. 또는 삼위의 관계를 상황/시기에 따라 다른 역할을 한다는 관점에서 설명하는 방법이 있었다. 하나님은 구약시대에는 성부로 (특히 창조와 관련하여), 신약시대에는 성자로 (특히 구속과 관련하여), 그 후에는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영원히 내주하시는 주님으로) 나타나셨지만 그 셋은 동일본질이라는 설명이다. 한 하나님이 시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는 설명이다. 이에 대한 현대판 설명은, 나는 집에서는 아버지이고 교회에서는 목사이고 학교에서는 선생이지만, 그렇다고 내가 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고 여전히 하나라는 설명이다.

이렇게 설명하는 방법을 양태론(modalism)으로 부르는데, 한 하나님이 필요에 따라 세 가지 양태(mode)로 나타난다는 이론이다. 이 설명의 강점은 삼위가 하나라는 것을 잘 설명해준다. 반면에 약점은 셋 사이의 구분이 거의 없어진다는 것이다. 사실 이 설명으로는 셋 사이에 이름만의 구별이 있을 뿐이지 실제적인 구별은 없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 이론의 불합리성을 지적하였다. 만일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그런 식으로 설명될 수 있다면, 그러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서 돌아가셨을 때 그때 성부도 돌아가셨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시기 전에는 누가 이 우주를 운행하고 계셨단 말인가? 논리가 서지 않는다. 그래서 정통교회는 이런 양태론적 설명이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제대로 설명하기에 부적합하다는 판정을 내린 것이다.

양태론이 유일신 하나님을 설명하려다가 너무 지나쳐 삼위의 실제적 구분을 무시하는 오류를 범했는데, 이 이론에서 정반대 극단으로 가서 아예 삼위의 분리를 주장하는 이론이 있었다. 일명 양자론(Adoptionism)이라 하는 이단이다. 이 이론에 의하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서로 다른 차원의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성자 예수님은 원래는 우리와 똑 같은 피조물인 인간인데, 너무나 완벽하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것을 좋게 보아서 세례 받으실 때 그를 당신의 특별 양자로 입적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처음부터 하나님이 아니라 세례 받으신 후부터 하나님이 되었기 때문에 성부 하나님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라는 것이다. 물론 이 이론은 너무나 터무니 없기 때문에 손쉽게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삼위일체는 양태론도 아니고 양자론도 아니다.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한 하나님의 본질을 유지하면서 그 인격과 사역에 있어서 분명하게 구별이 된다고 믿고 있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바이다. 이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우리는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일 뿐이다. 어떻게 하나님이 셋이면서 하나인가를 완벽하게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단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논리의 허점을 지닌 불완전한 비유를 들어서까지 설명을 시도하는 것인데 양태론적 설명이 이에 속한다. 어쨌든 우리가 가장 안전하게 이 문제에 대해 결론 내릴 수 있는 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 이상을 생각하지 말고 그 이상을 가르치지 말자는 것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요약하면 이렇다. 1) 성경은 한 하나님만을 섬기라고 가르치고 있다. 2)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인격과 사역에 있어서 서로 구분된다. 3) 이 세 인격이 모두 하나님으로 불리고 서로 하나인 것으로 즉 분리되지 않는 것으로 설명된다. 이 신비를 설명하기 위해 도입된 개념이 바로 삼위일체라는 개념이다. 우리가 성경이 가르치는 정도만 받아들이면 구원받는데 지장이 없다. 완벽하게 논리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이에서 지나는 설명을 시도할 경우 이단으로 빠질 위험이 다분히 있는 것이다.

[기독자료] 삼위일체에 대해 쉽게 이해하고 싶어요..

1. 삼위 일체(trinity)에 대해서

신학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연구하는 분야를 “신론”이라고 합니다. 신론에서는 하나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주제들을 연구합니다.

1) 하나님의 본질: 신지식, 하나님의 존재증명,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에 대한 지식

2)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이름들과 그 의미

3)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만이 가지신 속성과 인간과 함께 공유하는 속성들

4) 삼위일체

5) 하나님의 사역

1) 작정

2) 예정

3) 창조

4) 섭리

위를 보면 네 번째 항목에 “삼위일체”라는 주제가 포함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라는 말은 기독교의 신론에서만 사용되고 있는 독특한 용어입니다.

물론 삼위일체라는 말은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이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기독교인들이 이 말을 사용하게 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2. 신적 본질과 영광을 가진 세 인격: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

성경을 연구하다 보면 성경에서 신적인 본질과 영광을 소유하신 인격이 셋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세 인격은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에서 이 세 인격은 순서나 사역에서 서로 구별되면서, 모두 신적인 칭호와 영광과 속성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신적인 영광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자와 성령께서 신적인 영광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익숙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래에 있는 성경 구절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성자와 성령님께서도 신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2-1.성자의 신성에 대한 증거

가) 성자의 신성에 대한 증거(요1:1,20:28, 롬9:5, 빌2:6, 딛2:13, 요일5:20)

나) 성자에게 신적 명칭을 돌림(사9:6,40:3, 렘23:5,6, 딤전3:16, 욜2:32, 비교 행 2:21)

다) 성자에게 신적 속성을 돌림

* 영원성(사 9:6, 요 1:1-2, 계 1:8, 22:13)

* 편재성(마 18:20, 28:20, 요 3:13)

* 전지성(요 2:24-25, 21:17, 계 2:23)

* 전능성(사 9:6, 빌 3:21, 계 1:8)

* 불변성(히 1:10-12, 13:8)

* 성부에게 속한 모든 속성(골 2:9)

라) 성자께서 신적인 사역을 행하심

* 창조(요 1:3,10, 골 1:16, 히 1:2,10)

* 섭리(눅 10:22, 요 3:35, 17:2, 엡 1:22, 골 1:17, 히 1:3)

* 사죄(마 9:2-7, 막 2:7-10, 골 3:13)

* 부활과 심판(마 25:31-32, 요 5:19-29, 행 10:42, 17:31, 빌 3:21)

* 만물의 마지막 붕괴과 갱신(히 1:10-12, 빌 3:21, 계 21:5)

마) 성자께 신적 영광을 돌림(요 5:22-23, 14:1, 고전 15:19, 고후 13;13, 히 1:6, 마 28:19 등)-이 구절들을 읽어보면 성경에서 성자께 성부와 동등한 신적 영광을 돌리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2-2. 성령의 신성에 대한 증거들

가) 성령을 하나님과 동일시 함

* (행 5:3-4): 성령을 속인 것=하나님을 속인 것

* (고전 3:16): 성도-하나님의 성전=성령이 안에 거하심

* (딤후 3:16): 하나님의 감동-성령의 감동

나) 성령을 예수님과 동일시 함

* (행 16:6-7): 예수의 영=성령

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속성을 소유하심

* 편재성(시 139-7-10)

* 전지성(사 40:13-14-롬 11:34, 고전 2:10-11)

* 전능성(고전 12:11, 롬 15:19)

* 영원성(히 9:14)

라) 성령께서 신적 사역을 수행하심

* 창조 사역에 참여(창 1:2, 욥 26:13, 33;34)

* 하나님의 섭리 사역(시 104:30)

* 중생 사역(요 3:5-6, 딛 3:5)

* 죽은 자를 부활 시킴(롬 8:11)

마) 신적인 영광과 존귀가 성령께 돌려짐

*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마 28:19)

* 3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도함(고후 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3. 한 분이신 하나님

성경은 성부, 성자, 성령에 대해 모두 하나님으로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3분의 하나님이 계신다고 말하고 있을까요?(3신론)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한 분의 하나님만이 존재하신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유일신론).

우리는 앞에서 신적 본질과 영광을 가진 인격이 셋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성경은 이 세상에 하나님은 오직 한 분만이 계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1) “3분의 구별되는 인격을 가지신 2) 한 분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터툴리안이라는 사람은 “한 실체-세 인격(Una substantia-tres persona)이신 하나님”이란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이 말에서 “3위일체”란 말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에 대해서 분명히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그 이유는 세상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모델을 찾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한 실체-세 인격을 가지신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신관은 기독교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신관이며, 다른 종교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신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 삼위 하나님의 관계

성경에서 3위 하나님은 언제나 성부-성자-성령의 순으로 기술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3위 사이의 질서와 논리적 순서를 밝힌 것이지, 어느 한 위가 다른 위에 대해 지위와 능력과 기원이 종속되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1) 존재론적 순서

3위 하나님은 존재론적인 면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부는 다른 위로부터 발생하지 않으셨고, 성자는 성부로부터 영원히 발생(generation)하셨으며,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영원히 방출(procession)하셨다.”

2) 경륜적 순서

3위 하나님은 경륜적인 면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습니다.

“만물이 “성부로부터”(out of) 나오고, “성자로 말미암고”(through), “성령 안에”(in)있다(요 1:3,14).”

3) 구원 사역적 순서

3위 하나님은 인간의 구속 사역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습니다.

“성부는 구속을 계획하셨고(요 17:6), 성자는 죽음을 통해 구속을 성취하셨으며(롬 5:8), 성령은 구원의 효과를 각 개인에게 적용하신다(고후 3:18).”

5. 삼위일체 문제는 세상에 똑같은 모델이 없기 때문에 예를 들어 설명하는 일이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피조물인 우리가 하나님의 본질을 모두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아마도 이 문제는 우리가 천국에서 하나님을 뵙게될 때에 완전히 해결될 수 잇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계시해주신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을 연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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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이신 하나님

서론:

오늘은 영적 삶의 기초와 그리스도와 함께 걷는 것에 대해 나누고자 합니다.

왜 이런 기초들을 강조하고 점검하는게 중요할까요?

성경에서는 믿는 자들을 “영적인(신령한) 집(베전2:5)”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3:9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 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건물이 그런듯 기초는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약하고 잘못된 기초 위에 견고한 건물을 지을 수 없습니다. 기초가 튼튼해야 건물도 견고하고 더 높이 지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초가 약하면 건물도 부실해서 무너질 수 있으며 위로 높이 세울 수도 없습니다.

영적인 삶도 동일합니다. 기초가 올바르고 견고해야지만 우리의 내적인 영적 건물도 계속 성장하고 높은 단계로 나아갈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영적 삶이 좋고 튼튼한 기초들 위에 세워져 있으면 우리는 생명과 빛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해 주고 그들의 영적 길에 이정표와 방향표지를 제공해 줄 수 있는 “생명을 지닌 자들(bearers of life)”이 될것입니다.

예레미아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처녀 이스라엘아 너의 이정표를 세우며 너의 푯말을 만들고 큰 길 곧 네가 전에 가던 길을 마음에 두라 돌아오라 네 성읍들로 돌아오라 (예31:21)”.

여기서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그분의 나라)에게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 “어째서 길에서 비틀 거리느냐? 길을 찾을 수도 푯말을 볼 수 없느냐?”

따라서 우리의 영적 삶이 좋고 튼튼한 기초위에 세워진다면 우리 자신들이 우리가 섬기는사람들을 향한 길의 푯말이 됩니다.

우리가 강조하고 싶은 기초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하나님, 우리 자신, 그리고 적 (마귀)에 대한 올바른 시각을 갖는 것을 포함하는 진지한 나눔을 통해 필수적인 영적 기초들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오늘은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시각에 대해 중점을 두겠습니다.

왜 하나님에 대해 올바른 시각을 가지는 것이 중요할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Image)으로 창초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형상으로 변화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시각이 불완전하고 혼란스럽거나 손상된 것이라면 이것은 우리의 영적 성장과 그분의 형상으로의 변화에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내 생각에 있는 그분의 이미지가 제한적이라면 이것도 또한 우리의 변화를 제한하게 될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올바르고 부요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의 변화는 진실되고 풍요로울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시각은 참되고 진실된 변화로 이어집니다.

이 올바른 시각의 기초적인 측면들 중 하나는 바로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 성부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님.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삼위일체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시각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 할 것입니다. 그런 후에 삼위일체 각각의 인격에 대해 더 자세히 나누고자합니다.

삼위일체

인간 존재의 본질적이고 깊은 필요는 오직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온전히 발견함으로만 충족되어지고 채워질 수 있기 때문에 이 진리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삼위일체의 각 위격은 인간의 본질적인 필요를 채우시고 만족시키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필요들을 세 가지 주요 필요들 또는 영역들으로 요약 할 수 있습니다.

소속감의 필요

사람들과 자신, 사람과 창조물 사이의 깊은 화평의 필요

삶에서 특정한 역할이나 메시지를 발견하고 이를 수행 할 수 있게 하는 필요

이런 필요의 요소들의 부재는 우리 삶에서 다양한 반영되고 나타납니다.

어떻게 이것이 우리 삶에 반영되는지 나누겠습니다.

화평이 없으면 죄책감을 갖게되고 이것은 열등감으로 이어집니다.

이런 경우, 그 사람은 종종 보상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의 진정한 열등한 자아를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기 때문에 다른 성격을 가장 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과 함께있을 때, 그는 자신의 진정한 자아가 아닌 방식으로 말하고 행동합니다. 집에 돌아 왔을 때 그는 그 자신이 아니였음을 깨닫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진정한 내면을 다른 이들에게 공개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달리 어떻게 할 수도 없습니다.

때로는 자기 자신이 심지어 왜 그런 방식으로 행동하는지 모를 수도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오랜 시간 동안의 죄책감을 가진 결과로서 이 죄책감은 특정 영역에서는 열등감을 가지거나 또 다른 영역에서는 우월감을, 또는 자기 거절감을 가지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보여주기 위한 가짜 성격을 형성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죄책감과 깊은 평화의 부족으로 인해 자신의 진정한 성격은 그 사람 안에서 숨겨진 채 신음하고 고통가운데 있는 반면에 말입니다.

진정한 깊은 평화는 한 사람의 양심이 진정한 용서를 경험할 때에만 올 수 있습니다. 인간은 의롭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용서는 인간 안에 존재하는 깊은 필요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올바르게 살지 못하기 때문에 죄책감을 느낍니다.

소속감의 부재는 거부당하는 감정을 가지게하고, 원하지도 사랑받지도 않는다는 깊은 느낌을 가지게 합니다.

부모님이나 형제 자매로부터 자신이 받아들여지고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받지 못하는 가족에서 성장하면, 그는 소속의 결여감을 가지고 자라게 됩니다.

가족들이 수용과 사랑을 제공하려 할 때조차도, 그것은 때때로 자신의 깊은 필요를 채워주지 않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이로 인해 그 사람은 거절감이나 거부감, 또는 사랑받지 못함, 무가치함, 무시당함의 감정때문에 고통받습니다. 이것은 분노, 불안, 스트레스 및 폭력적인 행동과 같은 다양한 행동을 유발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옷이나, 가구, 소유물, 또는 말투 및 행동 등을 통해 자신의 외적인 모습으로 부족한 자신의 필요와 욕구를 보완하려고 노력할 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위해 매력적인 옷을 입거나 아무도 가지고 있지 않은 매우 특이한 자동차를 사는 것등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어떤 이들은 심지어 심한 말이나 행동으로 자신의 존재를 표현하고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끌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행동을 통해서 그 사람은 어린 시절에 겪은, 수용받지 못한 것, 관심 받지 못한 아픔에 대해 반응하고 있는 것이고 성장한 후에 그것을 보상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론 건강하지 않은 행동들이며, 그에 따른 결과가 있습니다.

왜 인간 존재에게는 이런 필요들이 있을까요?

이런 인간의 각각의 필요들은 본질적으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생각에 기초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가족에 속하도록 가족의 일원이 되도록 만드셨습니다.

가족의 일원이 되도록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의롭고 거룩하게 살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누구신지 반영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의롭고 거룩하십니다. 그러므로 인간도 의로워야 합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벧전 1 : 16)”

창조하셨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누구신지 반영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의롭고 거룩하십니다. 그러므로 인간도 의로워야 합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벧전 1 : 16)”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고 선포하는 목적을 위해 특정한 미션을 가지고 수행하도록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이런 필요들 중 하나라도 빠지면, 그 사람은 길을 잃은 것처럼 느끼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그런 상황을 보완하려고 하지만 오히려 악순환의 고리에 들어가기 때문에 더 고통스러워집니다.

해결책은 무엇일까요?

궁극적인 해결책은 인간의 모든 본질적인 필요를 충족시켜 주시는 삼위 일체로 당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

성부 아버지는 소속하고 싶은 사람의 깊은 필요를 채우십니다.

성자 예수님은 화평과 용서에 대한 사람의 필요를 채우십니다.

성령님은 각자 자신의 삶에 사명과 역할을 계시하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이 역할을 단계적으로 수행하도록 도와주십니다.

실제적인 관점에서 이것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성부 아버지는 소속하고 싶은 사람의 깊은 필요를 채우십니다.

자신의 자녀를 보살피고 자녀의 피난처, 보호자가 되시는 분이 아버지입니다. 아버지는 자녀의 연약함을 포용하고 자녀를 기뻐하십니다.

우리는 내면 깊은 곳에서는 이런 필요를 채울 수 있는 사람이 원합니다.

이러한 욕구가 충족된다면 우리는 수용됨을 느끼고 상실감을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 성부 아버지께서는 이 필요를 채우십니다!

그분의 신성한 팔이 우리를 감싸고 피난처가 되시고 보호하시며 소속된 느낌을 줍니다. 아버지는 우리 안에서 기뻐하십니다. 아버지 안에서 우리는 사랑받고 수용받고 원함받는 느낌을 받습니다. 우리는 진정한 따뜻함과 보호하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는 사물이 아니라 사람이라고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의 아버지됨과 어머니됨을 반영하는 진정한 희생과 관용의 아버지됨과와 어머니됨이 있는 가정에서 어떤 사람이 성장하게 되면, 그 사람은 매일 아침마다 깊은 위로를 주는 특별한 따뜻함의 온기를 느끼며 일어납니다. 그는 사랑받고 있고 보호와 돌봄을 받고 있으며 소속되어있다고 느낄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의 아비지됨과 어머니됨:

하나님은 아버지이시자 어미니이십니다. 하나님은 각각의 자녀가 인격이신 하나님 아버지의 진정한 성품을 반영하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가지도록 의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와 어머니로 강조한 두개의 말씀 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하지 아니할지라도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옛날부터 주의 이름을 우리의 구속자라 하셨거늘 (사63:16)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 (사66:13)

아이가 성정하면서 영적 통찰력을 가지기 시작할때 자신의 부모는 만족감과 따뜻함, 부드러움과 보호함을 주는 진정한 아버지됨과 어머니됨의 하나님 아버지를 반영하고 보여주는 것임을 이해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아버지의 신성한 손은 매일 아침마다 우리는 필요한 자이며, 받아들여지고, 깊이 사랑받는 삼위일체에 속한 하나님 집의 일원임을 말씀하실 것입니다.

자녀는 부모로 부터 자신이 사랑받고 필요한 존재이며 가족의 일원이라는 말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성장하면서 이러한 필요는 더 큰 영원한 것을 반영하는 것임을 깨달으면서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그 필요는 제한적인 땅의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외적으로는 벗어질 장막인 육체를 가지고 있지만, 내적으로는 영원한 영을 가지고 있습니다. 외부적으로는 우리는 사랑과 다정함을 원하지만 내면적으로는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과 부드러움으로만 채워질 수 있습니다.

우리 중 어떤 사람들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생각에 따른 자신의 책임을 이해하지 못하는 부모들 밑에서 자랐을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만족되지 못한 필요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필요들이 치유되고 다루어지지 않는 한, 우리가 아무리 그것을 능숙하게 숨기려하거나 극복하려고 해도 우리의 성격, 우리의 관계 및 우리의 미래에 영향을 미치고 반영되는 우리의 내면의 신음은 계속 될 것입니다.

우리가 창조된 목적을 따르는 충만한 삶을 살기를 원하며 주님의 신성한 뜻에 따라 우리의 온전한 역할과 책임을 수행하고자 한다면 우리의 숨겨진 내면의 필요들이 충족되고 치유 되는 것은 중요합니다.

플라스틱 용기에 찌그러진 부분이 있으면 모양과 크기가 바뀌어 버려서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와 비슷하게 나의 그릇의 크기와 모양이 변형된 상태라면 하나님께서는 나의 온전한 역할을 나에게 보여주시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나의 온전한 역할은 내 그릇의 온전한 크기와 모양을 통해서만 수행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그릇의 일부분이 찌그러져 있거나 망가진 상태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하라고 요구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동시에 자신의 가능성이 풀어지지 않은 채, 잠재력과 가능성의 부분이 눌려져 있기 때문에 나는 고통가운데 있게 됩니다.

이러한 영역과 왜곡이 치유되고 채워질 때, 그 사람은 충만한 평화와 위로를 경험하고, 자신의 역할을 발견해서 수행하게 됩니다.

이 역할은 이 땅의 교향곡과 같습니다.

‘교향곡 (symphony)’ 이라는 단어의 중요성에 대해서 조금더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는 찬양곡 또는 교향곡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에베소서 2 장 10 절에서 우리는 다음의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엡2:10) ”

헬라 원어에서 이것은 “우리는 시 또는 찬송으로 창조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그들이 이 땅에서 노래 또는 찬송이 되기를 원하신다고 자주 말씀하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스바냐 3:19, 20).

모든 노래는 가사와 곡으로 구성되어 있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를 시로 창조하셨습니다. 그 시에 아름다움을 주기 위해 곡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이 곡을 작곡할까요?

바로 성령님께서 영원한 곡이 되십니다. 성령님은 모든 시를 위해 특정한 곡을 작곡하십니다. 그분은 우리 각자의 곡을 알고 계십니다. 따라서 성령님과의 교제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분께서 내 안에 무엇이 있는지 보여주시고 내 영에 인쇄된 교향곡이 있음을 보여 주십니다. 또한 이 교향곡은 가사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사와 함께 곡도 있음도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 이 땅 위에서 나를 노래와 찬송으로 만들 수 있도록 그분께 기회를 드리도록 나에게 부탁하십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삶을 주도하실 때,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또한 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교향곡이 연주되기 시작합니다.

내 주변의 사람들도 그 교향곡, 영 안에 있는 시의 노래를 듣게 될것입니다. 그것은 지상의 빛이며 우리 각자에게서 빛나는 영원한 위로가 될 것입니다. 우리 각자는 서로 다른 교향곡입니다. 이 교향곡들은 끝이 없습니다.

우리의 내면이 회복되고 고쳐지며 깊은 내적 필요들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통해 치유 받을 때까지, 우리는 불려지지 않는 시로, 연주 되지 않는 교향곡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시가 발견되어지고 곡이 주어지면,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그리고 우리 주변의 세상을 위한, 불려지는 시, 연주되는 진정한 교향곡이 될 것입니다.

성자 예수님은 화평과 용서에 대한 사람의 필요를 채우십니다.

성자 예수님은 당신의 구속을 통해 화평과 용서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엡2:15)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골1:20)

십자가 위에서의 성자 예수님의 구속 역사는 성령님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지고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하며 우리의 죄책감을 씻으시고 나의 숨겨진 죄를 치유하십니다.

이런 숨겨진 죄들은 어느 시점에서는 그냥 죄일 뿐이 였지만 나중에는 죄책감의 구덩이가 됩니다.

이것은 갈등, 열등감, 보상받으려는 시도들 및 다양한 종류의 심리적 어려움과 갈등의 형태로 표현됩니다. 죄책감이 이 모든 갈등의 원인입니다.

우리는 바르게 살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내면의 깊은 곳에서 그렇게 살기를 원하는 욕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주 실패하고 실수와 죄로 가득차 있음을 느낌니다. 이것은 우리를 좌절시키고 죄책감과 절망의 장막으로 가득 채웁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반영됩니다. 또한 자신이 나쁜 사람이며, 패배자이고, 승리 할 수 ​​없다고 느끼기 때문에 자기 거부감으로 고통 받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용서와 그분의 사랑, 그리고 그분의 구속은 죄책감을 치유하고 우리의 연약함과 절망을 능력과 소망으로 바꿉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디모데후서 1 : 7)

성령님은 앞서 나눈 모든 일들에서 우리를 도와 주시고 가능하게 하십니다.

성령님은 전능하십니다. 성령님은 부드러우십니다. 성령님은 영원한 노래이십니다.

성령님은 정결케 하는 생명수이십니다.

성령님은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거류하는 동안 우리를 위로하시고, 우리와 동행하시는 동반자이십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원수, 고소자 앞에서 우리를 지키시는 “보혜사 (파라클레토스)”이십니다.

그분을 통해 우리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과 교제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 아버지의 아버지됨과 어머니됨을 우리에게 전해주십니다. 따라서 우리의 필요들이 치유됩니다. 그분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따스함을 우리에게 전달하시고 그분의 따스함으로 우리를 감싸주십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신성한 계획, 즉 아버지가 우리 각자에게 주신 역할을 전달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와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화목의 역할이 우리에게 주어졌고 그것을 알아가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성령님께서는 그 역할과 메시지를 볼 수 있도록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십니다.

나의 역할을 알게 되면 성령님께서는 내가 그 역할을 이행할 수있게 하십니다. 그분은 나의 능력이십니다. 그분은 나와 함께 걸으시고 나를 통해 그 메시지를 성취하십니다. 그분은 나와 매일 동행하십니다.

그분은 내 안에 계시며 나와 함께 걷고, 그분의 달콤하고 위로의 동반자관계를 허락해 주십니다.

그분은 사도행전에서 “dynamos (헬라어로, 힘, 능력의 의미)”라고 표현되신 것과 같이

신성한 에너지이십니다.

내가 식었다고 느낄 때 그리고 좌절감을 느낄 때 에너지를 불어넣어 주십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수 없다고 느낄 때 그분은 사랑의 발전기가 되십니다.

내 안에 깊숙이 있는 죽음이 드러나 나를 위압할 때, 그분은 생명의 발전기가 되십니다.

그분은 내가 불가능하다고 느낄 때, 불구가 되었다고 느낄 때, 나의 능력을 넘어서서 감당할 수 없다고 느낄 때, 능력의 발전기가 되십니다.

성령님은 내가 필요한 모든 것을 지속적으로 생성해 주십니다. 구속의 우물은 이미 나에게 이런 것들을 주었고, 성령님은 그것들을 내게 전달해주십니다.

우리가 많은 경우 삼위일체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분은 깨어지고 파괴된 인간됨에 대한 최종적인 그리고 깊고 궁극적인 해답이십니다.

인간 영혼의 궁극적인 회복과, 만족 ​​및 교정은 삼위일체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삼위 일체를 거부한 세상, 또는 삼위일체로 실족한 세상, 그래서 삼위일체를 잃어버러 무너진 세상을 향해,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선포하고 자랑해야 합니다. 인간이 어디에 있건 무엇을 믿건 간에 그 내면의 깊은 곳은 지속적으로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부르고 필요로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에베소서 1:3 – 14말씀으로 결론을 맺길 원합니다.

사도 바울은 신성한 아이콘(성화)을 보면서, 때로는 성부 아버지를, 때로는 성자 예수님을, 그리고 때로는 성령님을 바라 보았습니다:

“3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여기서는 성부를 지칭하고 있습니다]

6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그분이 여기서 사랑하시는 자는 예수님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도 사랑하시는 자로, 즉 당신의 자녀로 바라보십니다. 내가 이것을 받아들일 때, 이것은 나를 치유하며 내 안에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7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여기서는 죄 사함을 주시는 성자 예수님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8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9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0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11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12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3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14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여기서는 내 안에서 일하시며 영원한 생명을 맛보게 하시는 성령님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

6 절 :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이 구절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말씀입니다).

12 절 :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이신 예수님을 향한 말씀입니다).

14 절 :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성령님을 향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삼위일체 대한 계시입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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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말하는 삼위일체의 하나님

성경에서 말하는 삼위일체의 하나님

손봉호 교수가 말하는 삼위일체

삼위일체는 보통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한 하나님이요 세 인격체인데 그 세 인격은 성부, 성자, 성령으로 나타나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는 분명히 한 하나님이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마태복음 28장에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라고 하여 분명히 하나님을 세 인격체로 말하고 있다. 삼위일체라는 표현이 성경에는 전혀 없지만 삼위일체 교리가 말하고 있는 내용들을 성경은 다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을 어떻게 설명하느냐 하는 것이 아주 어렵다. 삼위일체를 논리적으로 해석하고 설명해서 그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면 그 해석은 이미 잘못된 것이다. 이것이 삼위일체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이다. 인간의 지혜로 ‘이것이 삼위일체구나’하고 깨닫게 되면 그것은 벌써 잘못 이해한 것이다. 그만큼 삼위일체 문제는 어려운 것이다. 설교 시간에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태양을 보자. 태양은 한 태양이지만 빛도 있고 열도 있고 또 살균 작용도 하지 않느냐. 삼위일체가 그와 같다.’ 그러면 ‘아, 그렇구나’하고 이해가 간다. 그러면 벌써 잘못된 것이다. 삼위일체를 그렇게 해석해서는 안 된다.

사실 우리는 삼위일체 교리를 잘 모른다. 다만 성경은 한 하나님을 이야기하고 또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가르치기 때문에 그대로 믿을 수밖에 없다. 나는 삼위일체에 관하여 질문을 받으면 제일 먼저 ‘나는 모릅니다’라고 대답한다. 이것은 내가 마음대로 만들어낸 방법이 아니라 배운 것이다. 내가 화란에서 철학을 공부할 때 철학을 가르치는 교수 중에 신학박사와 철학박사를 다 가지고 있는 분이 계셨는데 그 분이 항상 자랑으로 생각하는 것이 자기는 삼위일체를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는 경건한 목사님이요, 학생들에게 신앙적으로나 학문적으로 존경 받는 분이셨지만 삼위일체에 대해서는 항상 ‘신비’라고 말하였다. (손봉호 교수, 옥한흠 목사 편집 ‘현대교회와 성령운동’ p.11-12)

이상의 주장은 올바른 것과 그릇된 것이 섞여 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하느냐 하는 것이 아주 어렵다. 삼위일체를 논리적으로 해석하고 설명해서 그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면 그 해석은 이미 잘못된 것이다. 이것이 삼위일체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이다. 인간의 지혜로 ‘이것이 삼위일체구나’하고 깨닫게 되면 그것은 벌써 잘못 이해한 것이다. 그만큼 삼위일체 문제는 어려운 것이다”라는 주장은 맞는 것 같지만 전혀 그릇된 주장이다. 이 주장에 의하면 성경에 나타난 삼위일체 교리 이외의 성경의 기록은 논리적으로 해석하고 설명할 수 있다는 말인데 이는 전혀 그릇된 것이다. 창세기 1장에 나오는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시었다는 기록을 인간의 논리를 가지고 해석하고 설명할 수는 절대로 없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탄생하기 전에 하늘나라에 이미 존재하고 계셨다가 동정녀에게서 탄생하시어 이 세상에 오시었다는 사실을 인간의 논리를 가지고 해석하고 설명할 수는 절대로 없다.

5병 2어로 남자만 오천 명을 먹이시었다는 성경의 기록은 인간의 논리를 가지고 해석한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또한 죽어서 무덤 속에서 썩어서 냄새 나던 나사로가 예수님의 일어나라는 한 마디의 말씀으로 살아났다는 기록을 인간의 논리를 가지고 해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창세기로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무수히 기록된 신비한 사건들을 인간의 논리를 가지고 설명한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삼위일체를 논리적으로 해석하고 설명해서 그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면 그 해석은 이미 잘못된 것이다”라는 주장은 성경에 기록된 기적과 신비의 사건은 인간적인 논리와 해석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주장과 같은 주장인데 이는 전혀 그릇된 것이다. 또한 손봉호 교수가 화란에서 유학할 때 그를 가르쳤던 신학교 교수가 말하는 “나는 삼위일체를 모른다”라는 말을 겸손하고 고상한 주장인 것처럼 이야기 하는데 이는 겸손한 것도 고상한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신학교 교수라는 분이 성경에 나오는 “삼위일체를 모른다”라는 말은 성경을 잘못 연구한 데서 온 것으로 그릇된 주장이기 때문이다. 신학교 교수는 성경에 나오는 삼위일체의 교리를 오직 성경에 나타난 기록을 통하여 확신을 가지고 반드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조용기 목사가 말하는 삼위일체

삼위일체 하나님. 삼위일체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본질상 한분이시지만, 이 한분 하나님 안에는 성부, 성자, 성령이라 불리는 3위가 존재합니다. 이와 같이 3위로 말미암아 한분 하나님이 존재하는 것을 가리켜 삼위일체라고 합니다. 삼위는 인격에 있어서는 완전히 독립된 존재이지만 서로의 일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경우에 있어서 일체이신 한분 하나님이시다. (조용기 목사, ‘새신자 교육교재’ p.17)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부 하나님과 동등한 분으로서 하나님의 뜻에 절대 순종하여 사역하셨습니다. (조용기 목사, ‘창세기 강해’ p.30)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를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교파에서는 삼위삼체를 주장하는 곳도 있습니다. 아버지, 아들, 성령은 각기 개체로 세분 하나님이 서로 의논을 해서 우주를 다스린다는 주장입니다. 또한 일위삼체론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인데 예수님이 아버지가 되었다가 성령이 되었다가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렇듯이 신론에서 일치가 되지 않으면 대화가 될 수가 없습니다. 가장 시급한 문제는 신론이 우선 일치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제6회 전국교역자초청 특별세미나, 조용기 목사 강의 제목: ‘교회일치운동에 대한 나의 견해’ p.28)

조용기 목사를 비롯하여 한국 신학계와 교계에서 3위라는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위’(位, person)라는 말은 사람에게 사용하는 존칭어이다. 예를 들어 청첩장을 만들어 보낼 때 “OOO제위(諸位)께”라고 하는데 이는 “OOO분께”라는 뜻을 한문으로 표기한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하여 ‘위’(位)라는 말은 ‘분’이란 뜻이다. 따라서 ‘삼위'(三位)란 말은 바로 ‘세분’(three persons)이라는 뜻이다. 조용기 목사의 “하나님은 본질상 한분이시다”라는 말은 그릇된 것으로 바른 주장은 “하나님은 본질상 한분이시면서 세분이시고 세분이시면서 한분이시다”라고 말해야 한다. 또한 “한분 하나님 안에 성부, 성자, 성령이라 불리는 3위가 존재합니다”라는 것은 “한분 하나님 안에 세분이 존재합니다”는 말이 되어 전혀 그릇된 것이다. 한분 하나님 안에 세분이 존재하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한분으로 존재하시면서 세분이시고, 세분으로 존재하시면서 한분이시다”라고 말해야 바른 표현이다.

조용기 목사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부 하나님과 동등한 분으로서 하나님의 뜻에 절대 순종하여 사역하셨습니다”라는 주장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두분이 별도로 존재하시며 그 사역이 다르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바로 성부, 성자, 성령이라 불리는 3위 즉 세분이 별도로 존재하신다는 주장으로 올바른 주장이다.

조용기 목사의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를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교파에서는 삼위삼체를 주장하는 곳도 있습니다”라는 주장에서 조용기 목사는 삼위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삼위란 말은 영어로 ‘three persons’이며 이는 세분이시며 세분이 개체로 존재하신다는 말이다. 따라서 ‘삼위’(三位)란 말은 바로 ‘삼체’(三體)란 말이다. ‘삼위일체(三位一體)란 말은 삼위삼체(三位三體)이며 동시에 삼체일체(三體一體)’라는 말이다. 따라서 ‘삼위일체’(三位一體)의 정확한 표현은 ‘삼위삼체(三位三體), 삼체일체(三體一體), 일체삼체(一體三體)’로 표현해야 바른 표현이 된다. 영어로 ‘three persons but one person, and one person but three persons’이라고 표현해야 바른 삼위일체의 설명이 된다.

조용기 목사의 위의 글 중에 ‘일위삼체론’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한분이 세분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이 표현은 삼위일체의 다른 표현으로 맞는 표현이다. 즉 ‘삼위일체’(三位一體)라는 말은 바로 ‘일위삼체(一位三體)’와 전혀 같은 말이다. 왜냐하면 ‘삼위’(三位)란 말은 ‘삼체’(三體)라는 말이며 ‘일체’(一體)란 말은 ‘일위’(一位)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조용기 목사의 위의 글에 “어떤 이는 하나님은 예수님인데 예수님이 아버지가 되었다가 성령이 되었다가 한다고 주장합니다”는 말이 나오는데 어떤 이의 주장은 전혀 그릇된 주장이다. 바른 주장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은 별도의 두분으로 존재하시면서 한편으로 두분이 아니라 한분으로 존재하신다”고 말해야 한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음으로 이렇게 표현해야 한다. 구약과 신약성경에 수많은 신비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러한 신비한 기록 중의 하나가 바로 이상에서 논의한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 교리이다.

김홍도 목사가 말하는 삼위일체

어머니에게는 아들, 아내에게는 남편, 아들에게는 아버지이듯이 이것이 삼위일체이다. 물은 액체-물, 고체-얼음, 기체-수증기로 존재하듯이 하나님이 세분이 아니라 한 분으로 계시는 것이 삼위일체이다. (김홍도 목사 서울 금란교회, LA 근처에 위치한 세계비젼교회 김재연 목사 시무, 2007년 5월 18일 부흥회 설교 중에서 발췌)

김홍도 목사의 “어머니에게는 아들, 아내에게는 남편, 아들에게는 아버지이듯이 이것이 삼위일체이다”는 주장은 전혀 그릇된 것이다. 예를 들어 홍길동은 그의 어머니에게는 아들, 그의 아내에게는 남편, 그의 아들에게는 아버지이다. 이때의 홍길동은 오직 한분 곧 오직 한 사람일 뿐이지 3명의 홍길동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삼위일체의 하나님의 경우에는 성부, 성자, 성령의 3분의 하나님이 개별적으로 따로 따로 존재하시면서, 세분이 아니시고 한분 하나님으로 존재하신다는 뜻이다. 삼위일체에 근거하여 홍길동을 설명한다고 하면 3명의 홍길동이 존재하면서 동시에 1명의 홍길동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인간 세상에서 이러한 예는 일체 없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이 세상에 존재하는 실례를 들어 설명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이 세상의 어떤 용어를 빌려 설명한다고 하더라도 성경 밖에서의 삼위일체의 설명은 전혀 불가능하다. 그러나 오직 성경 안으로 들어와 성경의 기록을 통해서만이 설명이 가능하다.

김홍도 목사의 “물은 액체-물, 고체-얼음, 기체-수증기로 존재하듯이 하나님이 세분이 아니라 한분으로 계시는 것이 삼위일체이다”의 주장은 그릇된 것이다. 그의 설명 중에서 “물은 액체-물, 고체-얼음, 기체-수증기로 존재한다”는 말은 맞는 주장이지만 이러한 예를 들어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설명하는 것은 전혀 그릇된 것이다. “물은 액체-물, 고체- 얼음, 기체-수증기로 존재한다”는 말은 물은 세 가지의 형태로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물의 경우와 같이 하나님은 세가지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액체의 상태의 물이 변하여 기체의 상태의 수증기로 변화되듯이 성부 하나님이 변하여 성자 예수님이 되시는 것이 아니다. 즉 아버지가 아들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은 각각 별개의 개체로 존재한다. 따라서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물에 비유하여 설명하는 것은 전혀 그릇된 설명이다. 또한 김홍도 목사의 “하나님이 세분이 아니라 한분으로 계시는 것이 삼위일체이다”라는 주장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그릇된 것이다. 바른 주장은 “하나님은 세분이 아니라 한분으로 계시며, 한분이 아니라 세분으로 계시는 것이 삼위일체이다”이어야 한다. 즉 “하나님은 세분으로 계시면서 한편으로 한분으로 계시는 것이 삼위일체이다”이어야 한다. 이 설명은 성경 밖의 세상의 상식으로서는 어불성설이지만 성경 안에서는 이렇게 설명되어 진다.

하나님은 복수로 존재하심을 증거하는 구절

창 1:5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KJV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 and the earth.

창 1: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KJV God said,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fter our likeness.”

창 11:6-7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NIV The LORD said, “If as one people speaking the same language they have begun to do this, then nothing they plan to do will be impossible for them. Come, let us go down and confuse their language so they will not understand each other.”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Septuagint)은 창세기 1:1의 복수형 명사 ‘Elohim’을 헬라어 단수형 명사인 ‘theos’로, 영어성경에서는 단수형 명사 ‘God’로, 한글성경에서도 역시 단수형 명사인 ‘하나님’으로 번역하였다. 창 1:26에는 ‘God said,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fter our likeness’로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단수형 명사인 ‘God’가 ‘us, our’라고 하여 복수형으로 사용되고 있다. 창 11:6-7에도 단수형 명사인 ‘God’가 복수형인 ‘us’로 사용되고 있다. 히브리어 원문에는 이와 같이 하나님이 복수형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헬라어번역 성경, 영어번역 성경, 한글번역 성경에서는 복수형을 단수형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혼란을 일으키는 번역이다. 창 1:5, 창 1:26의 바른 번역은 ‘In the beginning Gods created the heaven and the earth. Gods said,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fter our likeness’이어야 논리적으로 말이 된다. 이렇게 번역하지 않고 영어성경대로 ‘God said,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fter our likeness’로 번역하므로 논리적으로 모순된 번역이 된 것이다. 즉 “한분 하나님께서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라고 말씀하시었다”면 앞 뒤의 말이 일치하지 않고 모순된 것이다. 따라서 영어로 표현할 경우 ‘Gods said,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fter our likeness’이어야 모순이 생기지 않게 된다.

요 17: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요 17:21-22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 17:11의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라는 말은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신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성자 예수님과 성부 하나님이 두분으로 따로 따로 존재하시며, 또한 “우리”(we)와 같이 라고 하여 예수님과 하나님을 “우리”(we)라고 하여 하나님은 복수로 존재하심을 밝히고 있다. 또한 요 17:21-22에서도 요 17:11에서와 같이 “우리”(us, we)라고 표현하여 단수로 된 한분의 하나님이 아니라 복수의 하나님으로 존재하심을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 세분이 각기 따로 따로 존재하심을 증거하는 구절

눅 3:21-22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 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하시니라.

여기에 “사랑하는 아들은 예수님이며, 예수님의 아버지는 하나님이시며, 성령님이 비둘기 형체로 강림하심”으로 하나님 아버지, 아들 예수님, 성령님의 세분이 각기 따로 따로 복수의 하나님으로 존재하심을 기록하고 있다. 눅 3:21-22은 삼위의 하나님, 즉 세분의 하나님, 삼체의 하나님(three persons)으로 세분이 별개의 개체로 따로 따로 즉 복수의 하나님으로 존재하심을 증거하는 기록이다. 눅 3:21-22을 통해서는 “세분 하나님이 한분이시다. 즉 하나님은 삼위일체이시다”라는 주장은 절대로 할 수 없다. 그 이유는 눅 3:21-22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 27:46-50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거기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가로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그 중에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융을 가지고 신 포도주를 머금게 하여 갈대에 꿰어 마시우거늘 그 남은 사람들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저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어떤 이단들은 이상의 기록을 통하여 예수님은 하나님이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죽었다고 주장하는데 얼핏 보면 맞는 것 같지만, 이는 성경에 기록된 삼위일체를 모르는 그릇된 주장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기도하시기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하시었다. 여기에 예수님이 자기 자신에게 기도했다면 말이 안 된다. 여기의 “나의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을 가르친다. 여기의 기록에 성령님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따라서 마 27:46-50의 기록을 통해서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말할 수 없고, 다만 십자가 상에 분명히 성자 예수님이 계시고, 성부 하나님이 별도로 존재하심을 밝혀낼 수 있다. 여기의 기록을 통하여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이 한분 하나님으로 즉, 단수의 하나님으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고, 두분이 각기 다른 개체로, 즉 복수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혀낼 수 있다.

롬 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여기에 ‘예수님 곧 성자 예수님,’ ‘예수님을 살리신 이의 영 곧 성령님,’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 곧 성부 하나님’이 기록되어 있다. 십자가 상에서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예수님은 죽은 예수님을 살리신 하나님과 성령님은 절대로 하나일 수가 없고 각기 다른 세분으로, 즉 복수로 존재하신다. 따라서 여기에서 세분의 하나님이 한분이라는 삼위일체의 적용은 불가능하며, 대신에 삼위(three persons), 즉 세분이 따로 따로 복수의 하나님으로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다.

벧전 3:18-19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에서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었다는 말은 예수님의 육신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시었다는 뜻이다.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다”는 말은 예수님의 죽은 영(영혼)이 살리심을 받았다는 뜻이 아니라 죽으신 예수님이 영 곧 성령님을 통하여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는 뜻이다. 이상의 기록에 예수님과 성령님이라는 두분이 따로 따로 복수로 존재하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요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여기의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는 기록은 “예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하나님 아버지께서 성령님을 보내 주사” 이다. 여기에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의 세분이 따로 따로 복수의 하나님으로 존재하심을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은 삼위(three persons)의 하나님 곧 세분이 따로 따로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지만 ‘일체의 하나님’ 곧 한분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말하는 구절이 아니다. 눅 3:21- 22, 마 27:46-50, 롬 8:11, 벧전 3:18-19, 요 14:16의 기록을 통하여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성령 하나님은 한분의 하나님이 아니라, 따로 따로 삼위(three persons)로, 세분의 하나님으로, 복수의 하나님으로 존재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밝혀 낼 수 있다.

세분 하나님이 한분 하나님으로 존재하심을 증거하는 구절

사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이상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the Son of God),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Mighty God), 영존하는 아버지이시다(the Father)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바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시며 동시에 하나님 아버지이시란 뜻이다. 즉 [성부 하나님 = 성자 예수님]이라는 공식으로 복수의 하나님이 아니라 단수의 한분의 하나님으로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성부 하나님 = 성자 예수님]라는 해석에 대하여 말이 안 된다고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지만 사 9:6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으니 이 기록을 사실대로 믿어야 한다.

요 4:24 하나님은 영이시다(God is spirit-NIV, God is a Spirit-KJV).

고후 3:17 주는 영이시다(The Lord is the Spirit).

요 20:28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다(Thomas said to him, ‘My Lord and my God!’).

요 4:24의 영어성경의 번역은 오역이다. 바른 번역은 반드시 ‘God is the Spirit’이어야 한다. 요 4:24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의미한다. 요 4:24과 고후 3:17의 기록에 의하면 하나님은 성령님이시며 예수님(주님)도 성령님이시다(God is the Spirit. The Lord is the Spirit). 따라서 요 4:24, 고후 3:17, 요 20:28의 기록을 통하여 [성부 하나님 = 성자 하나님 = 성령 하나님]이라는 공식을 밝혀낼 수 있다. 이상의 성경기록을 통하여 ‘세분의 하나님이 바로 한분의 하나님이라는 삼위일체의 교리’를 정립할 수 있다. 즉 세분의 복수의 하나님이 단수의 한분의 하나님으로 존재하고 계신다. 이 말은 곧 ‘삼위일체’라는 말이다.

요 14:7-11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 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요 12:45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When he looks at me, he sees the one who sent me).

이상의 기록에 예수님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하시어 ‘예수님이 자신이 곧 하나님 아버지이시다”라는 말씀으로 [성자 예수님 = 하나님 아버지 = 성부 하나님]이라는 공식을 말씀하신 것이다. 즉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는 두분으로 따로 따로 복수로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단수의 한분으로 존재하신다는 것을 말씀하신 기록이다.

요 14: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Believe me when I say that I am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s in me).

요 10: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I and my Father are one).

요 14:11에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 안에 계시고,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님 안에 계신다”는 말씀은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가 두분이 아니라 한분이라는 말씀이다. 따라서 요 10:30에서 예수님께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I and my Father are one)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나 곧 예수님과 아버지 곧 하나님 아버지라는 말씀은 분명히 두분으로 존재하시지만 한분으로 존재하신다”는 말씀이다. ‘I and my Father are one’라는 말씀은 ‘Two Persons are one Person’이라는 말씀이다.

요일 5:7-8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

NIV For there are three that testify: the Spirit, the water and the blood; and the three are in agreement.

KJV For there are three that bear record in heaven, the Father, the Word, and the Holy Ghost: and these three are one.

KJV에는 ‘the Father, the Word, and the Holy Ghost’로 되어 있고, NIV와 한글 성경에는 ‘성령과 물과 피’(the Spirit, the water and the blood)로 되어 있는데 이렇게 다른 이유는 어느 사본을 택했느냐에 따라 다른 것이다. KJV의 ‘the Father, the Word, and the Holy Ghost’에서 ‘the Word’는 요한복음 1:1-14에 나오는 말씀(the Word)으로 이는 바로 예수님을 의미한다. ‘아버지, 예수님, 성령님’은 이상에서 살펴본대로 삼위 곧 세분(three persons)으로 따로 따로 복수로 존재하시는데, 요일 5:7-8에서는 이 복수의 세분이 단수의 한분 곧 일체(one person)라고 기록하고 있다. ‘These three are one’이라는 말씀은 ‘아버지, 예수님, 성령님’의 세분이 하나 곧 한분이라는 뜻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these three Persons are one Person’라는 뜻이다. 이를 다시 영어로 표현하면 ‘There are three Persons, but these three Persons are one Person’이라는 뜻으로 ‘One Person is three Persons’이어야 바른 설명이다. 더 바른 표현은 ‘Three Persons but one Person. One Person but three Persons’이어야 한다. 이상에서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은 곧 하나님 아버지이다’는 뜻으로 [예수님 = 하나님 아버지]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요 14:7-11, 12:45, 14:11, 10:30, 요일 5:7-8을 통하여 삼위 곧 세분의 하나님께서 따로 따로 복수로 존재하시면서 동시에 한분 하나님으로 곧 일체로 존재하신다는 삼위일체의 기본교리를 밝혀낼 수 있다. 이러한 삼위일체의 교리의 설명은 성경 밖에서는 전혀 불가능하고 오직 성경 안에서만이 가능한 것이다.

삼위일체를 설명하는 여러 가지 주장들 가운데 “삼위일체란 태양에 비유하여 빛과 열과 파장이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집에서는 아버지, 교회에서는 목사, 회사에서는 사장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나무와 나무의 진액과 열매의 관계이다”라는 주장이 있는데 이들의 해설은 전혀 그릇된 것이다. “삼위일체란 태양에 비유하여 빛과 열과 파장이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라는 말은 태양의 성질을 설명하는 것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비유의 설명이 결코 될 수 없다. “집에서는 아버지, 교회에서는 목사, 회사에서는 사장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라는 설명은 한 아버지의 호칭에 관한 것일 뿐 삼위일체 하나님에 관한 설명이 결코 될 수 없다. “나무와 나무의 진액과 열매의 관계이다”라는 설명은 한 나무에 대한 설명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비유의 설명이 결코 될 수 없다.

위에서 본 눅 3:21-22, 마 27:46-50, 벧전 3:18-19에 의하면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이라는 세분이 따로 따로 별도로 복수로 존재하신다고 기록하였고, 요 4:24, 고후 3:17, 요 20:28에 의하면 하나님은 세분이 아니라 한분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을 ‘삼위일체’라고 표현하고 있다. 영어로는 ‘Three Persons but one Person, One Person but three Persons’으로 표현해야 한다. 이를 다시 설명하면 “세분이 계시는데 이는 한분이시며, 한분이 계시는데 이는 세분이시다”는 뜻이다. 따라서 삼위일체의 바른 표현은 [삼체일체 = 일체삼체]이어야 한다. 이상의 삼위일체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성경 밖에서 사용하는 세상적인 말로서의 설명은 절대로 불가능하며 이는 어불성설이다. 그러나 오직 성경 안으로 들어오면 전혀 정상적인 말이다. 성경 밖의 인간 세상에서 ‘동정녀 탄생’이라는 말은 존재할 수 없으나 성경 안에서는 전혀 정상적 사실이다. 세상 밖에서는 신비한 사건이지만 성경 안에서는 신비한 사건이 아니라 전혀 실제적인 진리이다. 죽어서 무덤 속에 장사 지낸 나사로를 예수님이 살리신 사건도 인간 세상에서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나아만의 문둥병이 요단강에 들어가 일곱 번 잠겼다가 나오니 치유되었고, 그 문둥병이 엘리사의 말 한마디에 게하시에게 순간적으로 들어가 문둥이가 되어버렸다. 이러한 신비한 일들이 성경에 수없이 기록되어 있다. 성경 밖에 있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말도 안 되는 말을 기록한 성경을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진리의 책으로 믿는다. 신비한 기적을 행하시는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을 믿는 종교가 기독교이다. 기독교는 불신의 세계에서는 말도 안 되는 삼위일체(삼체일체, 일체삼체)를 믿는 종교이다. 타 종교에도 신비한 일이 있으나 이는 마귀의 역사에 의한 것이라고 성경은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성경 안에서의 수많은 신비한 사건은 오직 성령님에 의한 역사이다. 다 같이 신비한 것이지만 무속 세계에서의 신비는 악령인 마귀에 의한 것이며 기독교 세계에서의 신비는 성령님에 의한 것으로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혹자는 기독교 내에서 신비주의를 강조하는 것을 이단이라고 물아 붙이는데 이러한 처사는 신구약의 성경을 전혀 잘못 이해한 데서 온 것으로 전혀 그릇된 비 성경적인 주장이며 마귀의 주장이다. 성경 밖의 세상 사람들의 측면에서 기독교의 삼위일체의 교리는 어불성설이지만 성경 안에서는 기독교의 기본적이며 보편적인 진리이다.

예배, 공동체, 삼위일체 하나님

하지만 나의 강의는,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식은 하나님의 존재, 즉 은총의 삼위일체 하나님을 반영해야만 한다는 확신 위에 서 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해 우리를 위해 행하셨고 지금도 행하고 계신 바를 반영해야 한다는 신념에 기초한다.

—「서문」중에서

만물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또한 그분을 위하여 창조되었다. 만물의 머리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자신의 몸으로 만드시고, 영적 제사를 드리는 왕 같은 제사장이 되도록 우리를 부르신다. 그분은 성부와 자신의 연합에서뿐만 아니라, 위대한 제사장 활동과 중보 사역에서도 성령으로 우리가 자신과 같아지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셨다. 이는 지상에서 드리는 우리의 기도가 하늘에서 그분이 드리는 기도의 메아리가 되게 하기 위함이다. 우리의 예배가 무엇이든, 그것은 그리스도의 예배에 대한 우리의 예전적 아멘(liturgical amen)일 뿐이다.

—「서론 예배에서 에수 그리스도의 위치」중에서

이때 은총의 복음이란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인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성자의 선물과 성령의 선물 안에서 우리에게 주심을 의미한다. 교제의 삶에 들어가도록 우리를 창조하셨던 하나님이 신적 참생명과 교제에 참여하도록 우리를 들어 올리신다. 이것이 거룩한 교제(Holy Communion), 즉 성찬(Eucharist)의 신학적 정수다.

—「1장 예배―유니테리언인가 삼위일체적인가」중에서

예배를 오늘날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문제라는 2차원적인 것으로 축소하는 일은, 인간이 절대자에 대한 반응을 스스로 만들어 가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내버려 두셨음을 암시한다. 이는 하나님이 이미 우리를 위해서 자신이 받으실 만한 유일한 응답을 주셨음을 간과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복종과 수난에서 인류 전체를 위한 제물이 이미 바쳐졌음을 무시한다.

—「1장 예배―유니테리언인가 삼위일체적인가」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는 그리스도와 성부의 인격적 연합을 모두가 나누어 가지도록 하는 절대적인 특별함이 있다. 즉, 모두가 그리스도와 인격적으로 연합하도록 그리스도의 인격은 모든 사람 하나하나와 깊숙이 연관된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그리고 여럿’은 여럿을 위한 하나, 여럿을 대신하는 하나, 여럿을 자신 안에 인격적으로 대표하는 하나다.…플라톤주의의 ‘하나 그리고 여럿’이 비인격적이고 개별자에 무관심하다면, 성경적 ‘하나 그리고 여럿’은 철두철미하게 인격적이다.

—「2장 유일한 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배의 중보자」중에서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의 말씀은 심판과 정죄의 말씀임과 동시에, 십자가의 말씀이기도 하다. 그러나 성부의 사랑의 말씀인 은총과 용서의 말씀을 우리가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 편에서는 유죄 선언에 겸손히 복종해야 한다는 사실도 의미한다. 우리의 죄를 위해 그리스도가 죽으셨다. 이것이 은총에 관한 종교개혁적 견해, 즉 ‘복음적 회개’를 이해하는 핵심이다. 그러나 누가 이 사랑에 대하여 완벽한 반응, 완벽한 참회의 행위, 유죄 판결에 완벽한 복종을 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인간성 안에서, 우리의 이름으로, 우리를 위해, 성부께 완벽히 복종하시고자 우리를 대신하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총의 놀라움이다!

—「2장 유일한 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예배의 중보자」중에서

이것은 창조와 구원에서 하나님의 목적이 실현되는 일로서 예배를 보는 삼위일체적 방법이다. 즉, 예배란 하나님과 교제하고 서로 교제하는 삶으로 우리를 끌어들이는 일이다. 우리는 교제 안에서 우리의 참존재를 찾을 때보다 더 진정한 인간일 수 없고 더 진정한 인격일 수도 없다. 이러한 방식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은 공동체를 창조하시는 일을 하고 계신다.

—「3장 세례와 성찬 ― 교제의 길」중에서

유아 세례는 아이가 믿음을 갖기 훨씬 이전에 일어나는 예식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가 우리가 태어나기 1,900년 전 우리 모두를 위해 하신 일을 인정하며, 믿음 안에서 우리가 아이를 위해 무언가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그분의 신실하심 안에서 그분의 때에 어린아이가 인격적 신앙을 가지도록 하시리라는 믿음으로 기도한다. 세례의 효력은 예식이나 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실함에 있다.…우리의 근거는 독자적 텍스트나 선례가 아니라 복음 그 자체에 있다. 그리스도는 남자와 여자, 성인과 유아를 위해 죽으셨고, 우리는 이것을 세례와 성찬에서 믿음으로 인정한다. 만약 그리스도가 모두를 위해 죽으셨다면, 왜 차별 없이 모두가 세례받으면 안 되는가?

—「3장 세례와 성찬 ― 교제의 길」중에서

우리의 우선적 관심은 그 콘퍼런스에 대해 논의하거나, 페미니스트에게 문제를 제기하는 데 있지 않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오늘날 예배를 향해 가는 두 가지의 다른 길이 있다는 사실이다.

첫째는 지금껏 설명한 예수 그리스도에 집중하는 방법이다. 교제의 생명을 위해 우리를 창조하신 은총의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를 구속하셨다.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알려지시고 사랑받으시고자 자기 자신을 선물로 주셨고, 우리를 위해 언약으로 맺어진 예배의 형식을 제공하셨다. 우리가 강조했듯 신약성경은 예배를 성자와 성부 사이의 교제에 우리가 성령을 통해 참여하게 하는 선물로 이해한다. 여기에서 성령은 우리를 자기 자신에 대한 나르시시스트적 집착에서 들어 올리신다. 이는 우리의 참된 인간성과 존엄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타자에 중심을 두는 삶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서로 간의 교제 안에서, 모두의 인간성을 향한 사랑의 관심 속에서 발견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두 번째 종류의 예배는 자아에 중심을 둔다. 이런 예배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형상으로 창조된 신과 자아, 우리 자신의 성을 함께 찬양한다.

—「4장 젠더, 섹슈얼리티 그리고 삼위일체」중에서

하지만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아버지”라고 명명하셨다. 이름은 은유 이상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고자 스스로에게 이름을 부여하심으로써 인간의 언어를 취하신다.…하나님과 인간을 각각 가리키고자 아버지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두 경우에서 이 단어가 같은 의미인 양 무차별적으로 쓰인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만약 그랬다면 분명하게 하나님 안에 젠더가 있다는 말이 되어 버린다. ‘아버지’라는 인간의 단어가 하나님에게 사용될 때, 창조자 하나님을 나타내고자 그 단어의 의미 변환이 반드시 일어난다. 창조자 하나님은 모든 지상의 아비에게 이름을 주신(엡 3:15) 단 한 분 진정한 아버지시다. 존재 질서에서 창조자가 피조물에 선행하듯, 하나님의 부성은 우리의 부성에 선행한다.

—「부록: 하나님에 관한 인간 언어에 대하여」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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