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반도체 역사 | 삼성, 그리고 반도체 신화 | “64K D램 반도체 신화를 열다” (Kbs 130720 방송) 4892 좋은 평가 이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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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반도체의 역사는 197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0년대 미국과 일본은 각자가 개발한 반도체 칩들을 생산하며 세계 전자업계를 주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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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극장
64K D램 반도체 신화를 열다 (2013.07.20 방송)
* 64K D램, 한국 반도체 신화의 서막을 열다
현재 세계 메모리반도체 분야의 정상은 명실상부한 한국이다.
그 기적의 출발은 1983년, 64K D램의 개발이었다. 이미 선발주자들에 비해 20년 가까이 늦었던 출발. 자본도, 기술도, 판로도 없던 한국이 어떻게 64K D램 개발에 성공했을까?
* 특명 1983, 반도체를 만들어라!
1980년대 초, 반도체 사업은 인구 1억 명 이상, GNP 1만 달러 이상이 돼야 시도할 있었던 첨단산업이었다. 당시 인구 4천만에 GNP 2천 달러를 겨우 넘었던 한국에게 반도체는 언감생심의 벽이었다.
하지만 세계의 산업이 ‘중후장대’에서 ‘경박단소’로 옮겨가는 것을 간파한 삼성의 이병철 회장은 83년 2월, 반도체 사업 진출을 세상에 알렸다. 두 차례의 오일쇼크에서 첨단산업만이 살 길이라는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국내외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국산 메모리 반도체 64K D램은 개발 6개월 만에 세상에 나오게 된다. 반도체 선진국들도 꼬박 6년이 걸렸던 64K D램을, 아무런 기술도 없었던 한국이 만들어 낸 것이다.
* 무에서 유를 창조하다! – 64K D램 개발 도전기
당시 반제품을 조립, 가공하는 수준의 기술을 갖고 있던 한국. 64K D램 개발의 급선무는 기술 확보였다. 이를 위해 삼성은 기술이전 협약을 맺고 미국과 일본의 반도체 업체로 연수를 떠났다. 하지만 산업스파이 취급을 받으며 서러움을 안은 채 쓸쓸히 귀국해야 했던 개발 팀. 결국 자력개발을 목표로 기술 황무지에 씨를 뿌리기 시작했다. 눈썰미로 담아온 조각 정보를 바탕으로 연구실에서 쪽잠을 자며 실험과 실패를 반복했던 개발 팀. 가족의 희생을 뒤로 하고, 그대로 주저앉고 싶은 마음도 억누르며 오로지 칩 하나만 바라보던 그들에게 마침내 완벽하게 작동하는 64K D램이 만들어졌다. 6개월 만에 이뤄낸 기적이었다.
* 기적을 시공하다! 기흥공장 건설, 그 6개월의 기록
반도체 산업에서 개발만큼 중요한 것이 빠른 양산이다. 경쟁사보다 생산에서 뒤처지면 시장에서 도태되어 천문학적인 손실을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64K D램 개발과 함께 생산 공장 건설도 시작됐다.
반도체 공장 건설 평균 기간은 1년 6개월. 하지만 건설팀에게 주어진 기간은 단 6개월뿐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공사기간도 건설업계에서 금기시 되는 겨울이었다. 완공은 불가능하게만 보였다. 그러나 이후, 6개월간의 강행군이 이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설비기계 운반을 위해 4km 자갈길을 한 나절 만에 평평하게 만드는 괴력을 발휘하며 6개월 만에 공장이 완공됐다. 할 수 있다는 의지가 만들어낸 기적이었다.
* 추격자에서 선도자로 – 한국 반도체, 세계 정상에 서다
64K D램 개발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지만 세계 시장 진입은 녹록치 않았다. 64K D램은 일본의 덤핑작전에 따른 가격 급락으로 엄청난 적자를 안겨줬다. 92년에는 미국 업체의 반덤핑 제소로 인해 또 한 차례의 위기를 견뎌야 했다. 그러나 이러한 위기상황 속에서도 한국은 반도체 산업을 포기하지 않았다. 64K D램의 시장진입 실패 이후 바로 256K D램을 개발해 88년 첫 흑자를 냈고, 이후 16M D램, 64M D램 개발을 통해 선진국을 넘어선 기술력을 선보였다. 그리고 93년, 메모리반도체 분야에서 세계 시장점유율 1위를 차지한 데 이어, 94년에는 256M D램을 세계 최초로 개발하면서 기술력까지도 명실상부한 세계 1위로 거듭났다. 반도체 산업에 뛰어든 지 꼭 10년 만의 일이었다.
세계 반도체 역사를 바꾼 획기적인 사건이자, 한국 반도체 신화를 연 64K D램 개발. 기적을 현실로 만들었던 우리의 열정과 노력을 돌아보고자 한다.
#이병철 #이건희 #반도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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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in] ‘K반도체’ 리더 삼성전자의 반도체 역사와 현재 – 천지일보

… 반도체의 리더라고 할 수 있는 삼성전자의 반도체 역사와 현재를 정리해봤다. ◇삼성 반도체 사업의 역사 삼성전자는 반도체를 설계부터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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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2/2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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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으로 만나는 대한민국 > 과학·기술 > 반도체 기술

IT 강국 대한민국을 이끌다. 반도체 기술 · 새로운 용어 ‘규석기시대’ · 반도체 산업역사 = 삼성전자의 40년의 역사 · 메모리반도체 점유율 1위를 넘어 비메모리반도체 산업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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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theme.archives.go.kr

Date Published: 8/2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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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 나무위키

1968년 삼성그룹 회장 이병철이 <중앙일보> 칼럼을 통해 전자산업 진출을 선언했고[21] 이에 따라 1969년 삼성전자공업을 설립했으며 1969년 12월 삼성전자-산요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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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7/2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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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40년 성공비화 – 오늘의 삼성을 만든 5大 핵심 원동력

지식사회에서는 창조적 천재들이 역사를 발전시키고 세계를 이끌어간다. … 삼성반도체 사업의 투자의 결단을 내린 故 이병철 회장과 사업의 토대를 다진 이건희 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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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8/2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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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그리고 반도체 신화 | “64K D램 반도체 신화를 열다” (KBS 130720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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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삼성 반도체 역사

  • Author: KBS 다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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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0. 10. 27.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SB7A0fEowNg

[이슈in] ‘K반도체’ 리더 삼성전자의 반도체 역사와 현재

삼성전자 미국 오스틴 파운드리 공장의 모습. (제공: 삼성전자)

반도체는 전기를 전하는 성질이 도체(導體)와 부도체(不導體)의 중간 정도인 물질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반도체는 메모리 반도체와 시스템 반도체(비메모리 반도체) 둘로 크게 나뉜다. 또한 시스템 반도체는 팹리스(설계 전문)와 파운드리(위탁제조 전문)로 나뉜다. 지난 2019년 기준 시스템 반도체 시장 규모는 3067억 달러로 메모리 반도체(1116억 달러) 분야의 약 3배에 달했다. 시스템 반도체의 경우 컴퓨터, 스마트폰, 각종 웨어러블 기기부터 냉장고, 드론, 자동차까지 안 들어가는 곳이 없는 만큼 메모리 반도체 시장보다 규모가 훨씬 크다.

국내 반도체산업의 명암 <4> 삼성, 메모리 반도체 강자 2030년 비메모리 1위 목표 기존 계획보다 투자액 확대 美 내 파운드리 투자 지연 TSMC·인텔 이길 수 있을까

[천지일보=손지아 기자] 반도체 산업은 우리나라 수출의 20%를 차지하면서 9년째 수출 1위를 유지 중이다. 마지막 이야기인 4번째 반도체 기획에서는 우리나라 반도체의 ‘리더’라고 할 수 있는 삼성전자의 반도체 역사와 현재를 정리해봤다.

◆삼성 반도체 사업의 역사

삼성전자는 반도체를 설계부터 제작까지 다 하는 종합반도체기업(IDM: Integrated Device Manufacturer)이다. 메모리 반도체, 시스템 반도체를 모두 생산하고 있다. 삼성의 반도체 사업은 고(故) 이병철 전(前) 삼성전자 회장이 반도체 사업에 관심을 두고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시작됐다.

삼성은 지난 1980년 삼성반도체를 합병한 후 반도체 개발에 적극 나서며 같은 해 한국전자통신을 인수했고 1983년 미국 뉴저지주에 현지 TV 공장을 차린 뒤 1984년 사명을 삼성전자㈜로 변경했다.

1986년부터 ‘휴먼테크’라는 기업 PR 카피를 내세우며 같은 해 세계 최소형/최경량 4㎜ VTR을 개발했고 1987년 경기도 용인군 기흥읍에 삼성종합기술원을 열었다. 1988년에는 미국 마이크로 파이브 사를 인수하며 삼성반도체통신을 합병했다. 1989년 부문별 대표이사제 개편 후 광주전자를 설립하고 정보통신부문에서 컴퓨터 사업을 별도 부문으로 독립시켰다.

삼성전자가 최신 DDR5 D램 모듈의 성능을 극대화하고 전력 사용을 최소화하는 전력관리반도체(PMIC) 3종을 공개하며 시스템반도체 라인업을 본격 확대한다고 18일 밝혔다. (제공: 삼성전자) ⓒ천지일보 2021.5.18

1991년 휴대폰 개발 후 1992년 세계 최초로 64㎆ D램을 개발했고 국내 최초로 양키본드를 발행하고 전사 통합경영 체제로 조직을 개편했다. 1994년에 256㎆ D램, 1996년에 1㎇ D램도 최초로 개발했다. 1997년 30인치 TFT-LCD를, 1998년 128㎆ SD램 / 128㎆ 플래시 메모리를, 1999년에 MP3 휴대전화 및 3D TFT-LCD 모니터를 세계 최초로 각각 개발해냈으며 인텔로부터 1억불 투자를 받았다.

2010년대에 들어서는 반도체 시장 점유율 1위 사업자인 인텔과의 격차를 줄이기 시작했다. 인텔은 반도체 시장에서 세계 CPU 공급량의 2/3를, SSD 공급량의 1/3을 차지하는 기업이었다.

삼성전자의 반도체 매출과 영업이익은 2013년부터 2015년 3분기까지 급격하게 증가했다. 매출액이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13년 16.4%, 2014년 19.3%, 2015년 3분기 23.3%로 올랐고 영업이익 비중은 같은 기간 18.7%→35.1%→49.3%로 증가했다. 특히 2015년 3분기 실적에서는 직전 분기 영업이익보다 5.80%, 전년 동기 대비 79.80%나 급증한 어닝 서프라이즈를 보여줬다. 그만큼 반도체 사업의 영업이익도 커졌다는 얘기다.

2017년 1분기부터 점점 반도체 호황의 효과를 보며 역대 1분기 최초로 10조원에 육박하는 영업이익을 기록하기 시작하다 3분기엔 반도체 하나로 영업이익 10조원을 달성했다. 삼성전자의 전체 매출은 62조원, 영업이익은 14조 5000억원으로 3분기 전 세계 IT기업 중 영업이익 1위를 기록했고 결국 인텔을 매출과 영업이익에서 추월해 반도체 1위 사업자로 부상했다.

반도체.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현재 삼성 반도체의 위상은

삼성전자는 메모리 반도체 강자다. 삼성전자는 메모리 반도체에서 지난 30년간 세계 1위를 지켜왔다. 특히 RAM(램)과 낸드 플래시 메모리의 경우에는 장기간에 걸쳐 왕좌를 지키고 있는 메모리 반도체 업계 1위 업체다. 실제 램 분야 업계 2위인 SK하이닉스와 낸드 플래시 메모리 분야 업계 2위인 도시바와도 큰 차이가 있다.

SSD도 수직계열화를 통한 비용 절감 및 품질향상, 엄청난 AS와 품질보증, 즉각적인 펌웨어 업데이트를 통해 속도, 수명, 안정성, 고객지원 넷 다 동 세대에서 1위를 놓치지 않는 제품을 지속적으로 발매해 오랫동안 점유율 1위를 유지하고 있다. DDR 메모리의 경우 적절한 성능과 가격, 오버 수율로 유명하다.

반면 메모리 반도체와 비교해 시스템 반도체 경쟁력은 약하다. 한국이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시스템 반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3~4%대에 그치고 있다.

이에 우리나라는 계속해서 시스템 반도체 경쟁력을 높여나갈 방침이다. 정부는 2019년 4월 삼성전자 화성사업장에서 ‘시스템 반도체 비전 선포식’을 열고 시스템 반도체 육성을 통해 종합 반도체 강국으로 거듭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오는 2030년까지 비메모리 반도체 부문에서도 세계 1위를 차지하겠다고 발언한 바 있다.

삼성전자 반도체 생산현장에서 직원들이 시스템을 점검하고 있다. (제공: 삼성전자) ⓒ천지일보 2019.7.2

최근 반도체 공급 부족 사태 등으로 파운드리 사업의 중요성이 부각되자 국내 파운드리 사업의 관심도도 높아지고 있다. 파운드리 서비싱은 의뢰사가 설계·개발한 칩을 삼성전자에서 하청을 받아 생산해주는 것이다. 삼성전자는 2005년부터 파운드리 사업에 손을 대오기 시작했고 2017년 5월 비메모리 사업부에서 파운드리 사업부를 분리하며 사업 규모를 본격적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이후 삼성전자는 회사 자체의 엄청난 체급과 높은 비메모리 공정 수준으로 빠르게 사업 주도권을 키우고 있다.

세계 파운드리 시장은 대만의 TSMC와 삼성전자가 70% 이상을 점유하고 있다. TSMC는 이 중 50% 이상의 독보적인 점유율을 기록하고 있고 삼성전자는 이 분야 2위지만 격차가 커 쉽지 않은 경쟁을 벌이고 있다.

TSMC는 독주체제를 굳히기 위해 향후 3년간 대만·미국·일본 등에 1000억 달러(약 113조원)를 투자한다. 매년 37조 6000억원을 시설 투자에 투입하겠다는 것이다. 삼성전자는 올해 5월 133조원을 투자하려던 계획에 38조원을 증액해 총 171조원을 해당 분야에 투자하기로 했다.

전체 투자 규모는 TSMC를 앞섰지만 파운드리 부문에 투자하는 규모는 작기 때문에 격차를 줄이기는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TSMC는 매년 30조원 이상 투자에 나서고 있는데 삼성전자의 파운드리 투자는 연 10조원 안팎 수준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현재 TSMC는 미국 애리조나에 이어 일본과 유럽에도 신규 공장 건설을 검토하고 있다. 인텔은 200억 달러(23조원)를 투자해 미국에 신규 파운드리 공장을 짓기로 한 데 이어 300억 달러(34조원)를 들여 세계 3위 파운드리 회사인 ‘글로벌파운드리’ 인수에 나섰다. 반면 1위와의 격차가 큰 상태로 삼성전자의 미국 내 파운드리 공장 투자는 지체되고 있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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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으로 만나는 대한민국 > 과학·기술 > 반도체 기술

현대 문명을 가리켜 ‘반도체시대’ 혹은 반도체의 원료인 규소의 이름을 따서 ‘규석기시대‘라고 한다. ‘반도체’란 물질의 사용으로 예전에 상상할 수 없던 편안한 삶을 누리는 현재를 일컫는 말로, 실제로 우리 주변 전자제품의 대부분에는 반도체가 들어있다. 우리가 날마다 사용하는 컴퓨터, 스마트폰, 카메라, 자동차, 냉장고, 세탁기 같은 전자제품부터 USB메모리, SD카드 등의 저장매체, 심지어 전자여권까지 생활 곳곳에 광범위하게 반도체가 사용되고 있다.

반도체(半導體, semiconductor)란 전기가 통하는 도체와 전기가 통하지 않는 부도체의 중간단계 물질로, 대표적인 반도체 물질에는 규소 즉, 실리콘(Si)과 게르마늄(Ge)이 있다. 반도체를 만드는 순수한 규소 결정의 경우에는 전기가 통하지 않는 절연체이지만 여기에 열, 빛, 자장, 전압, 전류 등 약간의 불순물을 넣어 주면 상황에 따라 도체나 절연체가 될 수 있는 반도체가 되는 것이다.

2015년 6월 24일 미래창조과학부에서 광복 70년을 맞이해 광복 이후 국가 경제발전을 견인해 온 과학기술의 역할을 조명하기 위해 ‘대표성과 70선’을 선정해 공개했는데, 1980년대 성과에 ‘디램(DRAM) 메모리 반도체’ 개발이 포함되었다. 오늘날 대한민국을 IT 강국으로 만드는 데 반도체가 큰 기여를 했음을 인정한 것이다.

최근 과학자와 공학자들은 투명하면서도 휘어지는 반도체를 개발 중에 있다. 옷이나 시계처럼 착용이 가능한 ‘웨어러블 컴퓨터’(wearable computer)를 만들기 위해서이다. 평면 세계에서 곡면 세계로 진입하는 웨어러블 컴퓨터가 상용화되는 그때는 시커먼 돌덩이인 규소가 만들어낸 ‘규석기시대’를 넘어선 또 다른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이다.

전자공업 육성과 조완희 박사 초청(1967)

전자공업진흥법 공포안(1969)

반도체가 산업사회에서 본격적으로 각광받기 시작한 것은 1950년 이후부터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965년 처음으로 반도체소자가 생산되었다. 미국의 고미그룹이 국내에 합작투자회사를 설립하여 트랜지스터를 조립, 생산한 것이 시초였다. 그 후, 모토롤라(Motorola) 등 여러 외국 업체가 국내의 저렴한 인건비와 유능한 기능 인력을 이용해 반도체를 단순조립하기 위해 계속 들어왔는데, 이것이 우리의 반도체산업을 신장시키는 밑거름이 되었다.

1974년 삼성반도체통신주식회사의 전신인 한국반도체주식회사가 설립되어 국내 기업에 의하여 처음으로 손목시계용 IC칩과 트랜지스터칩 등을 개발, 생산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국내 반도체산업은 큰 전환기를 맞게 되었다. 1970년대 후반에는 우리나라의 전자손목시계가 세계시장에서 수위를 차지하면서 국내에서도 반도체산업의 주축을 이루는 실리콘 중심의 IC산업발전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삼성전자는 1970년대 초반 세계 오일 파동으로 경영난을 겪자 부가가치가 높은 첨단 하이테크산업에 진출해야 한다는 확신을 가졌다. 이병철 당시 삼성전자 회장은 전자 부문을 살릴 수 있는 길은 핵심 부품인 ‘반도체 자급’이라고 판단, 1974년 12월 주변의 만류에도 사재를 털어 파산 직전에 몰린 한국반도체를 인수했다. 이미 반도체산업이 성장궤도에 오른 미국과 일본보다 27년이나 늦은 출발이었다. 삼성전자는 한국반도체를 반도체사업부로 흡수했지만, 자체 기술이 없어 난항을 겪으며 자본금만 날리는 그룹의 미운 오리새끼가 되었다. 1982년 반도체와 컴퓨터 사업팀을 조직하고, 본격적인 시장조사에 들어갔지만, 반응은 냉담했다. ‘3년 안에 실패할 것이다.’, ‘TV도 제대로 못 만드는데 최첨단산업으로 가는 것은 위험하다.’ 등 재계의 반대 여론과 업계의 냉소가 뒤따랐다.

일반적으로 반도체사업은 인구 1억 이상, GNP 1만 달러 이상, 국내 소비 50% 이상이 되어야 가능한 사업으로 알려져 있는데, 당시 우리는 이 가운데 하나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실정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삼성은 반도체가 나라의 미래를 바꿀 수 있는 산업이라 확신했고, 대량생산이 가능한 메모리제품 64K D램 기술 개발에 착수하였다. D램은 당시 세계적으로 수요가 가장 많고 표준화된 제품이었지만 경쟁사도 많았고, 반제품을 들여다 가공하고 조립하는 당시 우리의 기술 수준에서는 무모한 도전이었다. 그러나 이병철 회장은 ‘D램을 하지 않는 것은 싸워보기도 전에 항복하는 것’이라는 강력한 의지를 내보이며 개발을 강행했다.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첨단기술의 현장-삼성반도체 64KD램 개발에 성공(1983)

1983년 12월 1일 개발에 착수한 지 6개월 만에 309개 공정을 자력으로 개발하고 웨이퍼를 생산라인에 투입하며 국내 최초로 64K D램 개발에 성공했다. 우리도 반도체를 생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준 64K D램은 2013년 문화재청이 산업 역사로서 그 가치를 인정해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삼성은 1992년에는 ‘64M D램’을 세계 최초로 개발하며 메모리 강국인 일본을 추월했고, 1994년에는 256M D램, 1996년에는 1GB D램 등 연달아 세계 최초 모델을 내놓으며 차세대 반도체시장을 주도했다. 1990년대 중반부터는 비메모리 분야인 시스템 반도체를 신 성장 동력으로 삼았다. 반도체 산업은 일자리 창출과 국가 이미지 제고의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고부가 산업으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삼성전자가 1976년 시계용 칩을 생산했을 당시 첫해 매출은 400만 달러 초반이었지만, 2012년에는 300억 달러를 훌쩍 넘겼다. 30여 년 만에 매출이 7천 배가량 늘어난 것이다. 시장조사업체 IC인사이츠 조사에 따르면, 2012년 세계 반도체시장에서 미국의 인텔이 491억1400만 달러로 1위, 삼성전자가 322억5100만 달러의 매출을 기록하며 일본을 제치고 2위에 올랐다. 또한 삼성전자는 1993년부터 2014년까지 21년 동안 전 세계 메모리반도체시장 점유율 1위를 확고부동하게 유지해오고 있다. SK하이닉스도 전 세계 메모리반도체시장 점유율 20%로 2위를 차지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차지한 전 세계 메모리반도체시장 점유율은 무려 70%로, 사실상 전세계 메모리반도체시장을 독주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 미국은 만약 우리나라가 전 세계에 메모리반도체의 수출을 전면 중단한다면, 전세계 국가들의 재앙이 될 수도 있다고 언급할 정도이다.

우리나라의 반도체산업은 이처럼 양적으로는 발전했으나 진정한 반도체 강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상대적으로 부가가치가 높은 비메모리 반도체 생산 점유율을 높여야 한다. 세계 반도체 시장규모를 보면 비메모리 반도체가 70%, 메모리 반도체가 30%를 차지하는데 우리는 이 중 메모리 분야의 점유율이 50-60%, 비메모리 분야에선 5% 정도를 차지할 뿐이다. 비메모리 반도체의 경우 위성통신, 이동체 통신 같은 정보통신 단말기기 등 쓰임새도 워낙 다양하고, 핵심기술만 있으면 경쟁자가 쉽게 따라올 수도 없기 때문에 앞으로는 이 분야의 개발·생산에 주력할 과제가 놓여있다.

(집필자 : 남애리)

삼성전자 40년 성공비화 – 오늘의 삼성을 만든 5大 핵심 원동력

눈앞의 기름진 음식만 즐기다 뚱뚱해진 고양이는 쥐를 잡지 못한다. 현실에 만족하지 말고 꾸준히 연구·개발해야 한다. 디지털 사회에서 꼭 필요한 것은 바로 아날로그 감성이다. 세상은 인간에 의해 움직이기 때문이다. 지식사회에서는 창조적 천재들이 역사를 발전시키고 세계를 이끌어간다. 삼성전자가 존재하는 이유다.

⊙ 2010년 매출액 154조6300억원·영업이익 17조3000억원 달성한 세계 최대 IT기업

⊙ 1969년 종업원 수 36명으로 시작, 2010년 말 현재 국내외 인력 19만여 명

⊙ 한국 경제에 차지하는 비율은 10%대. 無形 파급효과는 그 이상

우리 사회에서 삼성전자는 어떤 존재일까. 국내 최고 IT기업, 글로벌 전자회사, 최고 인재들이 모여 있는 고연봉(高年俸) 업체, 일 많이 시키는 곳…. 수식어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삼성전자에 대한 평가는 시각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그러나 단일 기업으로서 대한민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무시할 수 없다. 각종 지표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154조6300억원의 매출액을 달성했다. 영업이익은 17조3000억원, 순이익은 16조1500억원. 매출액 기준으로 세계 최대의 IT기업이다. 수치로 볼 때 삼성전자의 영업이익은 국내 전체 기업이 낸 총 이익의 10% 이상을 차지한다. 국내 수출액의 10%도 삼성전자 몫이다. 직원 수는 국내외 모두 합쳐 19만여 명.

삼성전자는 한국을 넘어선 글로벌 기업이다. 삼성전자 매출액의 83.3%가 수출에서 이뤄졌다(2009년). 제품 생산은 34개국에서, 판매는 49개국에서 이뤄지고 있다. 연구소를 비롯한 해외 거점은 200여 곳이다.

삼성전자의 주당 가격은 100만원 선. 2011년 2월 7일 현재, 시가총액 158조400억원을 기록했다. 국내 주식시장의 전체 시가총액 대비 13.65%를 차지했다.

삼성전자는 시가총액을 기준으로 세계 상위 1000개 기업 중 최상위권에 속한다. 일본의 노무라증권 금융공학연구센터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2010년 12월 31일 삼성전자는 2009년 말보다 12계단 뛰어오른 37위(1222억 달러)를 차지했다. 이 수치는 일본 최고 기업인 도요타자동차(32위·1368억 달러)와 비슷한 수준이다.

삼성전자가 국내외 경제에 미치는 파급효과는 객관적인 지표 그 이상을 차지한다. 대한민국 경제의 상징인 셈이다.

“창조와 혁신으로 새로운 10년을 맞이하자”

삼성전자는 1969년 매출 3700만원, 종업원 수 36명으로 시작했다. 출발은 미약했지만 지금은 창대(昌大)하다.

1975년 세계 3번째, 국내 최초의 순간 수상 방식 TV인 이코노TV를 선보였고, 1983년 첨단반도체 사업에 진출해 64K D램 개발에 성공했다. 1992년에는 64메가 D램을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1994년에는 LCD 크기 표준을 주도했다. CDMA 이동통신시스템과 양문형 냉장고, 1기가 낸드플래시메모리, TFT-LCD 장착 컬러 휴대폰 등으로 첨단기술의 장을 열었다.

삼성전자는 “변하지 않으면 고사(枯死)한다”는 인식을 기반으로 변신을 거듭해 왔다. 이건희(李健熙) 회장은 2011년도 신년사에서 “창조와 혁신, 동반성장으로 새로운 10년을 맞이하자”며 이렇게 말했다.

“지금부터 10년은 100년으로 나아가는 도전의 시기가 될 것입니다. 지금 삼성을 대표하는 대부분의 사업·제품은 10년 안에 사라지고 그 자리에 새로운 사업 제품이 자리 잡아야 합니다. 삼성 브랜드 가치를 높이고 인류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일이라면 누구와도 손을 잡을 수 있어야 하고, 모자라는 부분은 기꺼이 협력하는 결단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글로벌 인재를 키우고 유망 기술을 찾아내야 합니다. 창의력과 스피드가 살아 넘치고 부단히 혁신을 추구하는 기업문화도 구축해야 합니다.”

삼성전자의 40년 성공비결은 미래를 내다보는 오너의 안목(眼目), 인재(人材) 중심의 경영전략, 끊임없는 위기의식과 자기성찰, 거듭된 혁신, 현지화 전략으로 요약된다.

삼성전자는 최근 《삼성전자 40년사》를 발간했다. 《도전과 창조의 역사》, 《도전과 창조의 유산》 2권으로 구성된 사사(社史)는 2010년 4월 제작을 완료했으나 여러 사정으로 배포가 미뤄졌다.

김정현 사사편찬팀장은 “회사 창립 40주년이었던 2009년 11월에 발간하려다 2010년 4월에서야 마무리됐는데 배포는 그 이후에 이뤄졌다”며 “최근에 대학과 국공립도서관에만 배포했을 뿐 언론에는 적극적으로 공개하지 않았다”고 했다.

《삼성전자 40년사》에는 반도체, 애니콜 신화, 보르도TV, 와이브로 등 세계 최고 제품들의 탄생비화가 담겨 있다. 디자인, 특허, 상생 등 삼성전자의 경쟁력이자 성공의 원동력도 들어 있다. 그 비화(秘話)를 소개한다. 제2, 제3의 삼성전자를 기대해서다.

挑戰, 길을 나서다

선진 한국을 향한 출발, 64K D램 개발

삼성반도체 사업의 투자의 결단을 내린 故 이병철 회장과 사업의 토대를 다진 이건희 회장. 1983년 2월 8일. 물끄러미 호텔 창 밖을 내다보던 이병철(李秉喆) 회장의 깊게 팬 주름에는 고단함이 묻어났다. 진눈깨비가 흩날리는 도쿄의 밤 풍경은 그의 머릿속만큼이나 어수선했다.

“진출할 것인가 이대로 주저앉을 것인가.”

매년 일본에서 새해를 맞이하며 삼성그룹의 진로를 모색해 온 이병철 회장은 기업의 운명을 바꾼 이른바 ‘2·8 동경구상’에 몰입해 있었다.

이튿날 아침, 그는 홍진기(洪璡基) 당시 《중앙일보》 회장에게 전화를 걸어 “반도체, 해야겠습니다. 가급적 빠른 시일 내에 이 사실을 공표해 주세요”라고 전했다. 당시 국내 재계는 반도체 사업에 부정적이었다. 일본의 최고 기업들조차 힘겨워하는 반도체를 우리 실력으로 만들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런 현실 속에서 반도체 사업의 진출 선언은 한마디로 도전 그 자체였다.

이병철 회장은 반도체 사업을 ‘사업보국(事業報國)’의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산업이라 확신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삼성은 언제나 새 사업을 준비할 때 그 기준이 명확했다. 국가적 필요성이 무엇이냐, 국민의 이해가 어떻게 되느냐, 또 세계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그것이다. 현 단계에서 국가적 과제는 ‘산업의 쌀’이며 21세기를 개척할 산업혁신의 핵심인 반도체를 개발하는 것이다.”

이병철 선대 회장. 삼성전자는 오래전부터 반도체 회사를 갖고 있었다. 1974년 12월, 한국반도체 지분 50%를 50만 달러에 인수한 상태였다. 나머지 50%의 지분은 미국 소규모 벤처기업인 ICII 소유였다.

당시 한국반도체 인수 작업을 주도한 사람은 바로 이건희 동양방송 이사였다. 그 무렵 미국과 일본에서는 컴퓨터와 반도체가 화두였다. 이건희 이사는 그 흐름을 주목했고 삼성전자 임직원들을 만날 때마다 이런 말을 자주 했다.

“IBM을 분석하세요. IBM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연구해야 합니다. IBM의 움직임을 잘 봐야 합니다. 반도체 시장의 판세를 거머쥐고 있는 IBM을 읽으면 사업의 맥을 짚어나갈 수 있습니다.”

반도체라는 씨앗은 결코 남에게 빼앗길 수 없는 종자(種子)였다. 이건희 이사의 이 같은 결정은 결과적으로 ‘반도체 신화’의 씨앗이 됐다.

그러나 반도체 회사 인수 당시 기술수준은 그야말로 형편없었다. 가장 큰 약점은 자체 설계능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삼성반도체는 그룹의 미운 오리로 낙인 찍혀 있었다. 심지어 삼성반도체로 발령이 나면 회사를 퇴직하겠다는 직원들도 많았다. 모든 것이 악순환이었다.

이건희 회장. 보다 못한 이병철 회장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그는 삼성반도체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경험부족’을 들었다. 이병철 회장은 미국과 일본을 방문하면서 반도체 전문가들을 수도 없이 만났다.

손자(孫子)는 “패할 수 없는 싸움, 필승이 보장된 싸움만 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명장(名將)”이라고 했다. 이병철 회장이 그랬다. 자신이 확인하고 또 확인한 것을 직원들에게 철저히 검토시킨 후 계획을 수립하도록 했다.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 때 사업을 시작했다.

1983년 3월 15일, 이병철 회장은 언론을 통해 반도체 사업 진출을 공식 발표했다. 삼성전자는 기흥부지를 확보하고 언론 홍보를 통해 범국가적 지원 체제를 유도했다.

이병철 회장은 삼성전자의 첫 번째 메모리 제품으로 ‘D램’을 택했다. 규모의 생산력에 승부를 걸기로 한 것이다.

이재용 사장. 이 회장은 곧바로 삼성석유화학에 근무하던 성평건 소장을 기흥반도체 초대 공장장으로 임명했다. 이 회장은 성 소장에게 “6개월 만에 공장 건설을 완료하라”고 지시했다.

6개월은 불가능한 공사기간이었다. 하지만 반도체 사업은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당시 64K D램은 세계 시장에서 없어서 못 팔 때였다. 이 회장은 호황이 끝나기 전에 시장에 진입해야 성공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병철 회장의 경영수완이 발휘된 것은 이때였다. 그는 어느 날 공장 건설 현장을 불쑥 방문해 수수께끼 같은 질문을 던졌다.

“장비를 운반해 오던 배가 만약 태평양 한가운데에서 침몰했을 때 자네들은 어떻게 할 텐가?”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이 회장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럴 때 바로 회의가 필요한 거다. 대체할 만한 장비가 다른 곳에 있는지, 없으면 어떻게 만들 것인지를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의논해야 한다. 급할 때일수록 회의가 유용한 법이다.”

그해 12월 1일, 삼성이 중대 발표를 한다는 소식에 기자들이 회견 장소에 속속 도착했다.

“설마 64K D램? 아니겠지? 6개월밖에 안됐잖아.”

잠시 후 강진구 사장이 준비해 온 보도자료를 읽기 시작했다.

“64K D램을 개발했습니다. 6개월 만에 생산·조립·검사까지 모든 공정을 완전히 개발했습니다. 미국·일본에 비해 10년 이상 뒤졌던 한국의 반도체 기술 수준을 4년으로 좁혔습니다.”

삼성의 64K D램 개발 성공은 한국의 기술력을 세계에 과시한 기적 같은 소식이었다. 오랜 기간에 걸쳐 사업 기반을 확보한 미국과 일본 업체 입장에서 보면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여기에는 미국 현지법인 이상준 박사와 이종길 박사, 이승규 부장 그리고 국내의 연구진 등 20명으로 구성된 64K D램 프로젝트 팀의 숨은 노력이 결정적이었다.

64K D램 개발은 우리도 반도체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안겨준 첫 번째 대(大)사건이었다. 이병철 회장의 염원이었던 사업보국의 꿈을 실현할 반도체 신화의 웅장한 서막이었다.

세계 무대에 처음으로 ‘삼성’을 알린 삼성産 전자레인지

삼성전자는 기흥공장 착공 6개월 만에 반도체 1라인을 완공했다. 2~3년이 걸린다는 업계 상식을 완전히 뛰어넘는 성과였다. 사진은 1980년대 중반 기흥사업장. 1977년 봄, 이건희 당시 부회장은 삼성전자 가전사업부를 이끌어갈 차세대 먹을거리로 ‘전자레인지’를 택했다. 당시 삼성전자 가전사업부는 세탁기와 선풍기, 전기밥솥, 믹서 등을 생산·수출하고 있었지만 마땅한 주력상품이 없어 고전을 면하지 못했다.

이건희 부회장의 특명을 받은 박경팔 사업부장은 일본 가전업체 마쓰시타(松下)의 나카가와 사업부장을 만나 조언을 구했다. 그러나 나카가와 사업부장의 반응은 절망적이었다.

“전자레인지는 1초에 무려 24억5000만 번이나 전기장의 방향이 바뀌는 마이크로 웨이브(초단파)를 이용해 식품을 가열하는 첨단제품입니다. 초단파는 매우 다루기 어려운 기술이에요. 지금 당신 회사의 기술 수준으로 제품을 만들었다가는 자칫 대형 사고가 발생할 수 있어요.”

일본 측의 적극적인 만류에도 불구하고 삼성전자는 사업을 밀어붙였다.

먼저 마쓰시타의 전자레인지를 들여와 부품 분석에 들어갔다. 뚜껑을 열어보니 국내에서 조달할 수 있는 부품은 20%에도 못 미쳤다. 가장 큰 문제는 핵심부품인 마그네트론. 돈을 주고도 구입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 마그네트론을 생산하는 업체는 도시바와 마쓰시타였다. 박경팔 부장은 마쓰시타에 구입 의사를 타진하고자 수십 차례 미팅을 요청했다. 마쓰시타 측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미팅을 요청한 지 6개월 만에 첫 실무면담이 이뤄졌다. 예상대로 마쓰시타 측은 ‘판매 불가(不可)’ 입장이었다. 그러나 박 부장의 끈질긴 협조요청에 마침내 마쓰시타 측이 손을 들었다. 박 부장은 상대에게 이렇게 말했다.

“마그네트론을 제외하고 우리는 전자레인지 개발을 모두 마쳤습니다. 도시바가 아니라 마쓰시타 마그네트론 사양에 맞춰 개발했기 때문에 가격 불문하고 마쓰시타의 부품을 구입하겠습니다.”

사실 당시 삼성전자 전자레인지 사업은 사업성 여부를 검토하는 초기단계였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지 마그네트론을 확보해야 한다는 일념에 박경팔 사업부장은 초강수를 뒀던 것이다. 10여 분의 정적이 흐른 후 나카가와 마쓰시타 사업부장이 입을 열었다.

“만약 삼성전자가 전자레인지를 개발하게 된다면 어느 나라에 판매할 계획입니까?”

“미국입니다.”

당시 마쓰시타는 미국 전자레인지 시장을 독점하고 있었다. 그 시장을 뚫겠다는 박 부장의 말에 나카가와 부장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각서를 쓰세요. 마쓰시타가 판매하는 곳에서는 삼성전자의 물건을 팔지 않겠다는 각서요. 그러면 박 부장의 회사에 마그네트론을 판매하겠소.”

박 부장은 또다시 강수를 뒀다.

“저는 마그네트론을 구입하러 온 것이지 거짓말을 하러 온 게 아닙니다. 마쓰시타의 거래선도 모르는 상황에서 덮어놓고 약속부터 할 순 없습니다. 만약 나카가와 부장님이 지금 저의 입장이라면 이 각서를 쓰시겠습니까?”

박 부장의 항의에 나카가와 부장은 미소로 답변했다.

“박 부장이 각서를 썼다면, 저는 삼성전자와 거래를 하지 않을 생각이었습니다. 진실한 마음을 보여준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이제부터 삼성전자는 마쓰시타의 파트너입니다.”

나카가와 사업부장은 당시 ‘경영의 신’이라 불렸던 마쓰시타의 창업자 마쓰시타 고노스케(松下幸之助)로부터 경영을 배운 일본의 정통 기업인이었다. 고노스케 회장은 ‘성장은 솔직함에서 나온다’고 믿었고, 직원을 채용할 때 ‘스나오(素直, 순수·솔직)’정신을 제일 우선으로 뒀다. 그를 스승으로 섬긴 나카가와 사업부장도 마찬가지였다.

전자레인지의 핵심부품인 마그네트론을 확보한 삼성전자 가전사업부는 사업에 박차를 가했다. 개발에 착수한 지 1년 만인 1979년 가을, 국내 최초의 전자레인지 ‘RE-705D’가 세상에 첫선을 보였다. 그러나 당시 12·12사태로 전자레인지 개발 소식은 주목을 받지 못했다.

1년 후 전자레인지 사업팀은 미국 시장을 뚫기로 했다. 미국의 대규모 소매업체 제이씨 페니(J.C. Penney)가 관심을 보였다. 페니 측은 “149달러짜리 5만 대를 구입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인건비를 제외한 자재 값만 169달러였다. 팔면 팔수록 손해였다. 삼성 측은 페니 측을 설득해 169달러에 5만 대를 팔았다. 1981년 10만 대 수출을 달성한 후 이듬해 80만 대 수출 계약을 체결했다.

미국시장을 빼앗기기 시작한 마쓰시타는 삼성전자에 마그네트론 부품을 팔지 않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이때 삼성전자에 힘이 되어준 사람은 다름 아닌 나카가와 사업부장이었다. 그는 고노스케 회장에게 이렇게 직보했다.

“삼성전자가 우리를 배신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배신한 것은 우리 내부의 ‘자만’입니다. 삼성전자는 우리보다 두 배나 더 비싼 가격으로 마그네트론을 구입해 저렴한 전자레인지를 만들어냈습니다. 저들의 성공을 탓할 게 아니라 나태했던 우리가 반성해야 합니다.”

고노스케 회장은 후발 회사에 거래선을 빼앗긴 책임을 물어 나카가와 사업부장을 교체한 후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그때 고노스케 회장은 이런 말을 남겼다.

“오늘의 굴욕은 뼈아프지만 후배가 선배보다 월등한 것은 축하할 일이다.”

이 말은 지금도 삼성전자 내에서 회자되고 있다.

1983년 삼성전자 전자레인지 사업부는 100만 대를 생산했고 1999년에는 세계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했다. 2004년에는 최단기간 누적생산 1억 대를 돌파하며 전 세계 전자레인지 최강자로 부상(浮上)했다. 전자레인지는 세계 시장에 삼성전자라는 이름을 알리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삼성전자의 전자레인지 성공 신화는 ‘하버드 비즈니스스쿨’의 케이스 스터디 사례로 활용되며 조리기기 사업의 바이블로 전해지고 있다.

神話 역사를 새로 쓰다, 애니콜

1981년 J.C. Penney 공급을 시작으로 미국시장 진출에 물꼬를 튼 삼성전자 전자레인지는 이듬해부터 급속도로 성장했다. 1985년 일본에서 부품을 들여와 조립·판매했던 카폰모델은 삼성전자 무선(無線)사업에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모토롤라는 국내외 휴대전화 시장을 독점해 갔다.

휴대전화 개발팀은 경쟁제품의 외관, 기능, 통화품질의 장단점을 분석한 후 삼성 휴대폰과 꼼꼼히 비교했다. 개발팀원들은 휴대폰을 던지고 밟고 부수고 떨어뜨리는 작업을 수백·수천 번 해댔다. 고가(高價)인 휴대폰의 견고성이 문제였던 것이다. 삼성 휴대폰은 하중 100㎏도 제대로 견디지 못하고 과자처럼 바삭 소리를 내며 부서지곤 했다.

개발팀은 밤이고 낮이고 튼튼한 휴대폰 개발에 빠져 있었다. 어느 날 기술설계 담당직원이 아이디어를 냈다.

“휴대폰 아래 위 사이에 기둥을 10개 넣었습니다. 만약 200㎏ 힘으로 누른다고 해도 각각 기둥이 20㎏씩만 버텨주면 괜찮을 것 같아 실험을 해봤습니다. 끄떡없었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자동차가 지나가도 문제가 없는 휴대폰이 세상에 나왔다.

SH-770이 출시되던 1995년 여름, 찌는 듯한 더위 속에서 개발팀 직원들은 전국 대리점을 돌며 “삼성 휴대폰은 한라산 정상(頂上)에서도 터진다”는 사실을 알렸다. 난공불락으로 보이던 경쟁사와의 통화품질·견고성·디자인 경쟁에서 한번 붙어볼 만했던 것이다.

며칠 후 삼성전자 대회의실에서 특별회의가 열렸다. 안건은 SH-770 론칭에 대한 마케팅 전략이었다.

“기지국이 많으면 전국이 산악지형이라 해도 큰 문제가 안 되지만 그 수가 제한된 현재 상황에서는 휴대폰 성능을 높이는 것이 최선입니다. 그래서 이번 제품은 산악지형에서도 통화가 원활하도록 전파강도를 대폭 높였습니다. 크기와 무게를 줄이고 디자인도 개선했습니다. 경쟁사 제품과 비교해 일부 조건에서는 더 우월한데 이런 점을 고려해 마케팅 방향을 잡아주십시오.”

특별회의 참석자들은 열띤 토론을 벌였다. 마침내 그 유명한 ‘애니콜’ 브랜드가 탄생했다. 그동안 ‘삼성 휴대폰’으로 불리던 것이 ‘애니콜’로 변경된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전화가 터진다는 의미였다. ‘한국지형에 강하다 애니콜!’이라는 광고 카피도 만들어졌다.

그런데 얼마 후 경쟁사가 삼성전자를 과장광고로 제소했다. 광고심의위원회에 불려나간 천경준 당시 개발실장은 애니콜이 ‘한국지형에 강하다’는 문구의 근거를 입이 닳도록 설명했다. 소비자들이 휴대폰이라는 말만 들어도 미국산(産)을 먼저 떠올리던 때에 삼성전자가 미국산을 능가하는 제품을 내놓았다는 데 대해 심의위원들도 반신반의했다. 천 실장은 심의위원들에게 “산악지형이 많은 우리나라에서는 전파 장애를 해소하기 위해 성능이 좋은 안테나를 개발하는 것이 관건이었다”며 안테나 성능을 기술적으로 설명했다. 마침내 나정웅 한국과학기술원 교수가 애니콜의 안테나 성능을 인정하면서 논란은 일단락됐다.

애니콜은 1994년 첫 출시 후 이듬해 경쟁사의 10년 아성을 깨뜨리고 시장주도권을 장악했다. 1996년 국내 시장점유율 50% 이상을 차지한 애니콜은 세계 시장에서 새로운 ‘신화’를 써갔다.

變化, 등불을 켜다

트렌드의 중심에 녹아들다

삼성전자는 ‘한국지형에 강하다’는 콘셉트를 내세워 외국산 제품이 장악하고 있던 국내 휴대폰 시장에서 1위로 올라섰다. 세계에서 가장 큰 시장인 미국. 크든 작든 세계 어느 기업도 간과할 수 없는 곳이 미국시장이었다. 미국은 다른 모든 곳의 트렌드를 움직이는 힘이 있었다. 삼성이 미국에서 1등을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하지만 누구나 마음먹은 만큼 쉽게 성과를 얻을 수 없는 곳이 또한 미국이었다. 삼성 역시 고전에 고전을 거듭하며 진출 초기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2003년, 북미총괄 자리에 오동진 사장이 발령났다. 그는 직전 2년간 싱가포르에서 동남아총괄 부사장으로 있으면서 상당한 성과를 달성해 잠시 숨을 고르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와중에 갑자기 인사이동이 있었던 것이다.

“북미총괄이라….”

액션플랜을 수립한 오 사장은 그때부터 특유의 추진력을 발휘하며 일을 벌여 나갔다.

오 사장은 미국 전자제품 소매업체 베스트바이(Bestbuy)를 첫 번째 공략 대상으로 삼았다.

그는 노트북을 직접 들고 베스트바이 창업자인 딕 슐츠 회장을 찾아갔다. 브리핑에 앞서 슐츠 회장이 말문을 먼저 열었다.

“삼성이라면 비록 소규모이긴 하지만 지금도 저희 매장에 납품하고 있는 걸로 압니다.”

“맞습니다. 오늘 어렵게 회장님을 만나뵙자고 한 건 저희 삼성제품을 베스트바이 모든 매장에 본격적으로 들여놓고 싶어서입니다.”

슐츠 회장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처럼 무턱대고 자사(自社) 제품을 모든 매장에 들여놓고 싶다고 말하는 거래업체는 처음이었던 것이다.

“음…. 저희 매장은 납품하고 싶다고 납품할 수 있는 매장이 아닙니다. 그런 일이라면 굳이 저를 만날 필요가 있을까요?”

오동진 사장은 물러서지 않았다.

“바쁘시겠지만 제가 준비해 온 자료를 먼저 봐주십시오. 저희 삼성이 앞으로 베스트바이와 함께한다면 미국 내 1위 기업이 될 것입니다. 베스트바이 또한 유통사로서, 삼성의 파트너로서 함께 성장할 수 있을 겁니다.”

오 사장은 슐츠 회장에게 삼성의 ‘비전’을 강하게 심어줬고 마침내 베스트바이 전 매장에 ‘삼성전자 제품 공급’이라는 약속을 받아냈다.

다음 목표는 ‘시어즈’라는 유통사였다.

북미총괄 TV마케팅팀에 있던 이윤 과장은 32인치 HDTV를 시어즈에 공급하고자 했다. 하지만 시어즈 측은 “삼성과는 볼 일이 없다”며 약속 자체를 하지 않았다. 이윤 과장이 몇 번을 찾아갔지만 결과는 매번 똑같았다.

시어즈 담당자의 동선(動線)을 파악한 이윤 과장 일행은 50㎏이 넘는 무거운 32인치 브라운관 HDTV를 들고 시어즈 본사로 무작정 찾아갔다. 커다란 물건을 들고 정문을 들어오는 이들을 경비원이 제지했다. 이윤 과장 일행이 안쓰러웠는지 경비원은 출입을 허락했고 시어즈 담당자를 만날 수 있었다. 이윤 과장은 품질과 가격, AS 면에서 타사(他社)에 비해 경쟁력이 있다고 설명한 후 간신히 가계약을 체결했다.

매장에 불꽃이 붙었다. 삼성제품의 저렴한 가격, 손색없는 품질은 고객의 입에서 입으로 소문나기 시작했다. 그동안의 판매실적이 무색할 정도로 제품이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미국 유통사들의 인식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 시점도 이때였다.

전자제품 시장이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바뀌면서 삼성전자 제품은 품질 면에서 월등한 성능을 보여줬다. 실용적인 제품이 속속 출시되면서 미국시장은 삼성전자 품 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미국시장의 가전제품 1위 자리는 오랫동안 S사의 것이었다. 삼성이 처음 미국시장에 진출했을 때 S사는 30%를 넘는 브랜드 위상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 무렵 삼성은 1%에 불과했다. 오동진 사장은 “미국시장에서 오래가는 강한 기업이 되기 위해서는 소비자들이 어릴 때부터 사용하는 물건을 만들어야 한다”며 “그때가 돼야 영원한 1등이 될 수 있다”고 했다.

미국시장에서 초기 삼성전자의 모습은 우리 손으로 만든 제품을 좀 더 많이 파는 것에 치중했다. 현지인의 생각이나 문화는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삼성 제품은 미국 소비자들에게 “어린 시절 삼성과 함께했어요”라는 인식을 주며 시장을 장악해 나가고 있다.

디지털기술의 성공은 아날로그적 感性에 좌우

세계 유수 업체들이 각축을 벌이는 TV시장에서 삼성 브랜드를 알리고 수익을 내기 시작한 모델은 대형 프로젝션TV였다. 그중 2004년 출시한 ‘L7’은 원통에 벽걸이TV를 걸어놓은 듯한 디자인으로 사각형 디자인 일색인 프로젝션TV 시장에 신선한 충격을 줬다.

삼성전자 TV는 디자인으로 세계 시장에서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바야흐로 세계 TV시장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CRT시대를 지나 PDP, LCD 기술을 만나면서 디지털TV로 바뀌고 있었다.

물론 어려움이 없지 않았다. 디자인이 새로운 흐름으로 물길을 돌렸지만, 후속 모델의 디자인에 대한 부담은 더욱 커져 갔다. 평범해서도 안 되고, 너무 튀어도 소비자에게 외면받기 십상이었다.

기술이 아무리 진보해도 TV디자인은 프레임에 머물렀다. 변용에는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결국 소비자의 감성을 건드려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디지털기술에서 꼭 필요한 것이 바로 아날로그 감성이었던 것이다.

새로운 디자인을 모색하던 어느 날 한 디자이너의 눈에 와인글라스가 들어왔다. 동료가 마시다 남은 와인이 글라스 바닥에 깔려 있었다. 음악이 흐르고, 시간이 흘렀다.

“저 와인글라스, 자줏빛 몽롱한 환상을 담는 레테의 강.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달려오는 로렐라이 처녀….”

우연은 의도하지 않은 현실로 다가왔다. 그날 밤 TV디자인팀은 새로운 스케치에 매달렸다. 와인글라스를 닮은 TV디자인이 수백 장 그려졌다.

이름은 ‘보르도TV’로 정해졌다. 디자인팀과 기술개발팀은 시제품을 만들어 최지성 당시 사장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최 사장은 개발팀을 무척 나무랐다. 시제품의 두께(110㎜)가 당초 디자인팀이 제시한 두께(80㎜)보다 두꺼웠기 때문이었다. 삼성전자 역사 이래 기술개발의 기둥으로 대우를 받았던 엔지니어들은 디자인을 따라잡지 못했다는 이유로 자존심이 상해 있었다.

디자인을 따라잡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한 달 후 개발팀은 당초 시안대로 80㎜에 맞췄다. 실제 두께는 1㎜ 얇은 79㎜. 자존심이 강한 자는 자존심이 강한 사람을 이해하는 것처럼 디자인팀은 개발팀의 자존심이 1㎜에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경외감을 표시했다.

보르도TV는 삼성전자 엔지니어들의 새로운 흐름을 읽는 계기가 됐다. 기술과 디자인은 함께 간다는 사실을…. 어쩌면 기술이 디자인을 계속적으로 따라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제품 경쟁력을 강화하는 요소로 디자인의 위력은 ‘보르도TV’에서 증명됐다. 보르도는 삼성전자의 대표 TV제품으로 세계 시장을 누볐다. 이를 발판으로 삼성전자는 세계 TV시장에서 선두가 됐다. 보르도TV는 TV시장의 판도를 바꾼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革新, 초일류로 가다

시장은 없다, 만들어갈 뿐이다

2005년 출시된 보르도TV. 삼성전자를 세계 1위로 올려놓는 데 현격한 공을 세웠다. 2001년 8월, 도쿄(東京) 오쿠라호텔에 윤종용(尹鍾龍) 부회장, 이윤우(李潤雨) 반도체총괄사장, 이학수(李鶴洙) 구조조정본부장, 황창규(黃昌圭) 메모리사업부장이 속속 모여들었다. 이병철 선대회장이 반도체 사업 진출을 결심했던 그 호텔이었다.

“시장할 텐데 음식점으로 갑시다.”

이들을 기다리고 있던 이건희 회장은 ‘자쿠로’라는 호텔 인근 음식점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 회장이 삼성전자 핵심수뇌부를 긴급 호출한 까닭은 일본 T사가 극비리에 제안한 ‘합작개발’을 받아들일 것인지, 아니면 독자노선을 갈 것인지를 결정하기 위해서였다.

낸드플래시(전원이 없어도 데이터를 계속 저장할 수 있는 메모리의 일종) 원천기술 특허를 보유하고 있고 세계시장 점유율 46%를 차지하고 있던 T사의 제안은 2위 업체였던 삼성전자(메모리 세계시장 점유율 26%)로서는 매력적이었다. 이건희 회장은 노심초사하며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수뇌부들은 이건희 회장에게 이렇게 건의했다.

“낸드플래시는 삼성전자가 수종(樹種)사업으로 키워온 프로젝트입니다. 독자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우리가 기술적으로 부족한 게 사실이지만 곧 따라잡을 수 있습니다.”

이른바 ‘자쿠로 회동’이라 불리는 이날 모임은 삼성전자의 새로운 수종사업으로 떠오른 플래시메모리 사업의 방향을 정하는 중요한 미팅이었다. 이날 회동은 ‘D램 신화’에 이은 ‘플래시메모리 신화’의 시작이었다.

이후 삼성전자는 1년 만에 도시바를 추월했고, 3년 후에는 세계시장 점유율 58%라는 경이적인 수치를 기록했다.

이 같은 성과를 올릴 수 있었던 것은 ‘자쿠로 회동’ 때 힘을 발휘한 경영진의 놀라운 결단력 때문이었다. 그룹 핵심 인사들의 선견력이 없었다면 플래시메모리 사업은 일본의 그늘에 눌려 있었을 것이다.

플래시메모리의 신화는 삼성이 자체 양성한 해외박사 1호인 임형규 수석에서 비롯됐다. 그는 1984년 7월 플래시메모리의 원조(元祖)격인 16K EEP를 개발했다. 이후 시장성 있는 기술에 눈을 돌린 임형규 수석은 마스크롬(메모리 반도체의 일종)에 주목했다.

임 수석이 기술의 사업성을 항상 염두에 둔 것은 선대 회장인 이병철 회장의 평소 지론 때문이었다. 이병철 회장은 이런 말을 자주 했다.

“기술적으로만 완벽한 제품이 아니라 사업성이 있는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 연구원이라고 해서 연구실에 틀어박혀 연구만 했다가는 시대에 뒤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제 연구원들도 사업을 알아야 살아남는 세상이다.”

삼성전자는 세계 최초로 1기가 플래시메모리 개발에 성공했다. 하지만 환호는 오래가지 못했다. 내다 팔 시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2003년 10월 9일, 이건희 회장 주도로 열린 ‘반도체 특별 전략회의’는 반도체 사업의 세대교체를 공식적으로 결정한 회의였다. 이때부터 삼성전자는 본격적으로 모바일형 복합 메모리칩 개발에 들어갔다. “삼성전자 없이 모바일 혁명은 불가능하다”는 자신감을 갖고 사업을 추진해 나간 것이다.

2006년 12월 11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개막한 세계적 반도체학회인 ‘IEDM(국제전자소자학회)’에서 반도체 총괄을 맡고 있던 황창규 사장은 “D램과 S램을 하나로 합친 512메가 원디램 개발에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이후 삼성전자는 플렉스-원낸드 메모리를 개발했고 모바일 시장을 장악해 나가기 시작했다.

플렉스-원낸드 개발소식을 접한 세계적인 IT기업 관계자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삼성전자를 방문했다. 삼성전자 측은 이들에게 비빔밥을 대접하며 이렇게 말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이라면 흔히 김치와 불고기를 꼽지만 비빔밥도 그에 못지않습니다. 다양한 재료를 선택적으로 넣을 수 있는 비빔밥은 한국 문화가 반영된 고객친화적 음식입니다. 소문난 비빔밥 집은 끊임없이 새로운 재료를 섞어 가며 더욱 맛있는 비빔밥을 창조해 냅니다. 식생활이 다른 외국인을 고려해 그들 문화의 비빔밥도 만들 수 있어요. 삼성전자가 퓨전반도체 시장을 선도할 수 있는 배경도 이와 같습니다.”

플래시메모리는 디지털카메라가 필름 대신 플래시 카드를 사용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성장했다. MP3와 모바일기기가 대중화되면서 플래시메모리 시장은 더욱 커졌다.

최근 들어 삼성전자는 꿈의 저장장치라 불리는 SSD(하드디스크드라이브에 비해 빠른 속도와 소형화가 가능한 저장장치) 개발에도 힘을 쏟고 있다. SSD 수요처가 기존 PC에서 디지털기기로 다양화될 것이란 판단에서다.

삼성전자는 시장의 창조자이자 개척자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개발을 하고 있다. 눈앞의 기름진 음식만 즐기다 뚱뚱해진 고양이는 쥐를 잡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전통과 역사의 유럽에서 ‘名品’으로 인정받다

낸드플래시는 USB메모리, 디지털카메라, MP3플레이어, 고용량 휴대폰, SSD 등으로 상품화되면서 지속적으로 신시장을 개척했다. 1988년 당시 삼성전자 프랑스법인은 ‘KED’라는 프랑스 수입회사와 합작법인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물론 ‘삼성’이라는 브랜드를 아는 사람도 드물었다. 그러나 20년 후인 2007년 6월, 프랑스법인은 휴대폰과 LCD TV 등 5개 부문에서 프랑스 현지시장 1위를 차지했다. 기업순위도 150대 기업에 진입했다. 이제 ‘SAMSUNG’은 아무에게나 미소를 보내던 값싼 브랜드가 아니라 명품(名品) 대우를 받는 최고의 브랜드로 프랑스를 정복한 것이다.

유럽의 전자 유통시장은 무혈(無血)의 전쟁터와 다름없다. 대형 유통매장들이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유럽에서는 제품이 어느 위치에, 어떤 모습으로 얼마나 많이 진열되느냐에 따라 매출이 좌우된다.

프랑스법인의 성공은 대형 유통업체와 관계를 돈독히 하고 판매조직을 효율적으로 운영한 결과였다.

유럽 최대의 전자 유통업체인 ‘다티(Darty)’의 매장 로열석에는 언제나 삼성전자 제품이 진열돼 있다. 매장 직원들이 제일 먼저 고객에게 추천하는 제품 역시 삼성전자 제품이다. 이 같은 결과는 20년 동안 끊임없는 노력으로 신뢰를 쌓아왔기 때문에 가능했다.

물론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티의 판매이사 블라디미르 라임즈는 삼성전자와 첫 거래를 시작할 당시 매우 당혹스러웠다고 한다. 최고경영자의 지시로 삼성전자 제품을 들여놓긴 했지만 그 같은 지시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삼성 TV는 AS센터의 골칫거리였습니다. 판매량보다 AS가 더 많았죠. 도대체 무슨 이유에서 삼성과 계속 거래를 해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당시 현장 직원들의 이 같은 불만에 대해 최고경영자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삼성 제품을 계속 취급하라고 지시 내린 이유는 삼성 사람들의 열정 때문이다. 삼성 제품이 지금은 부족한 것이 사실이지만 품질의 문제라기보다는 유럽시장, 특히 프랑스 시장에 적응하지 못해서 발생하는 문제들이고 점차 개선되고 있다. 나는 삼성 제품보다 삼성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먼저 신뢰가 생겼다. 삼성은 크게 성공할 브랜드라는 확신이 섰다.”

삼성전자 프랑스법인은 현지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요리를 마케팅에 접목해 ‘삼성’이라는 이름을 최고의 브랜드로 만들었다. 삼성 제품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라임즈 이사는 불과 1년 만에 놀라운 경험을 했다. 삼성 제품이 현지화하면서 판매량이 급등하기 시작한 것이다. 라임즈 이사의 삼성에 대한 인식이 바뀐 것은 2000년 한국을 방문해 최지성 당시 부사장을 만나고 나서였다. 최 부사장은 라임즈 이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삼성전자는 기술을 넘어 디자인에서도 최고가 될 것입니다. 여성들도 전자제품을 친근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삼성의 전략은 특히 유럽에서 사랑받을 수 있는 제품으로 거듭날 겁니다. 우리 삼성을 믿고 유럽에서 함께 넘버원이 되도록 합시다. 라임즈 이사는 고객이 아니라 우리의 소중한 파트너입니다.”

삼성전자의 제품이 차지한 곳은 다티의 진열대와 고객의 거실만이 아니었다. 2005년 12월,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버킹엄궁에 삼성전자 LCD TV를 들여놨다. 영국 여왕도 인정한 명품이 된 것이다. 2008년 5월에는 프랑스 대통령 관저 엘리제궁에도 삼성전자 TV가 입성했다. 프랑스처럼 치즈 종류가 370여 가지에 달하는 자존심 강한 나라를 정복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創造, 백년기업을 향하다

특허라는 양날의 칼

“결론부터 말하겠습니다. 삼성전자는 64K와 256K D램의 로열티로 8500만 달러를 우리에게 지급하시오.”

1985년 어느 날, TI(Texas Instruments)에서 왔다고 자신을 소개한 한 미국인이 삼성전자를 찾아왔다. 그는 자기 회사가 보유한 반도체 D램 특허권을 삼성 측이 침해했다고 주장했다. 그가 제시한 금액은 당시 삼성전자 한 해 영업이익의 85%가 넘는 액수였다.

1년 뒤 삼성전자가 이 혹독한 조건을 수락하게 되리라는 것을 그때는 아무도 몰랐다.

1986년 TI는 미국 댈러스 지방법원과 워싱턴 소재 미국 국제무역위원회에 소송을 제기했다. TI는 일본의 7개 회사와 삼성전자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그 무렵 일본 기업들은 TI의 특허가 기본특허임을 간파하고 8개월을 버티다가 TI의 요구를 전격 수용했다. 삼성전자만 끝까지 버텼다.

마침내 미국 국제무역위원회는 삼성전자의 D램 미국수출을 금지했다. 사업을 중단할 수 없는 삼성전자는 그로부터 6개월을 더 버티다가 TI의 요구를 100% 받아들였다. 8500만 달러를 고스란히 지불한 것이다. 특허의 위력을 배운 수업료치고는 너무나 비싼 대가를 치렀다.

1987년 경영권을 승계받은 이건희 회장은 취임 이후 자율경영·인간존중과 함께 ‘기술 중시’를 21세기 초일류 기업을 향한 비전으로 내세웠다. 이 회장은 “남보다 앞선 기술 없이는 미래에 먹고살 길이 없다는 사실을 모두가 예의주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건희 회장의 특명에 따라 삼성전자는 연구개발 인프라를 대폭 확충하고 미래사업을 위한 씨앗 심기에 주력했다. 삼성의 브레인 ‘종합기술원’이 세워진 것도 이 무렵이었다. 이 회장은 연구개발의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비유했다.

“연구개발은 보험과 같습니다. 이를 제대로 하지 않는 것은 농부가 배고프다고 뿌릴 종자를 먹어버리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삼성전자는 1987년 ‘비싸디 비싼 수업료’를 지불한 후 특허의 중요성에 눈을 뜨고 독자기술 확보에 전력을 다했다. 그 결과 10년 동안 상당수의 특허를 확보했다. 1998년 미국 특허등록 건수는 1306건에 달했다.

삼성전자는 2000년 들어 ‘특허 내실화’에 주력했다. 특허로 돈을 벌어들인 것이다. 삼성전자는 MPEG(동영상 파일 압축 기술) 관련 특허로 한 해 동안 2500만 달러의 로열티 수입을 올렸다. 2009년 현재, 세계 1400개 업체가 삼성의 MPEG 기술을 사용하고 있다. 10년간 1조원에 달하는 로열티 수입을 기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특허의 중요성을 깨달은 삼성전자는 2007년 12월 이상한 특허 소송에 휘말렸다. LCD 패널과 LCD TV시장에서 삼성전자와 양강(兩强) 체제를 구축하고 있던 일본의 S사가 도쿄지방법원에 삼성전자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S사는 “삼성전자가 자신의 회사 특허 5건을 무단으로 사용하고 있다”며 “LCD TV와 LCD 모니터의 일본 판매를 금지해 달라”고 요청했다.

나름 ‘체력’을 키워온 삼성전자는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S사가 소송을 제기한 지 한 달 뒤 맞소송을 제기했다. 삼성전자는 “S사가 LCD 모듈 관련 4건의 삼성전자 특허를 침해하고 있다”고 역공을 취했다.

결과는 삼성전자의 승리였다. 도쿄지방법원은 “S사가 생산하고 판매하는 LCD TV 제품이 삼성전자의 특허를 침해했다”며 삼성 손을 들어준 것이다. 국내기업이 일본 현지에서 일본 기업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최초의 사건이었다.

삼성전자의 역공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미국 국제무역위원회는 S사가 삼성전자의 특허 2건을 침해했다고 판단했다. 이를 근거로 미국 법원은 삼성전자의 요구를 수용해 S사가 생산한 LCD TV와 휴대전화의 판매금지 처분을 내렸다. 지난 20여 년간 모진 풍파(風波)를 이겨내고 독자기술을 확보한 결과였다.

2008년 12월, 삼성전자는 미국에서 출원·등록 특허 7404건을 기록하면서 만년 1등이었던 IBM을 제치고 미국 내(內) 1위 자리에 올랐다. 특허경영 역사에 방점을 찍는 순간이었다. 유럽에서도 3위(1475건)를 차지하며 비유럽 국가의 회사로서는 유일하게 ‘톱10’에 입성했다. 특허제도는 천재(天才)의 불꽃에 이익이라는 기름을 붓는 제도였다.

두뇌 전쟁 시대를 위하여

1991년 시작된 ‘삼성전자 소프트웨어 멤버십’은 삼성전자뿐만 아니라 우리나라가 세계적인 IT강국으로 발전하는 데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컴퓨터 천재들, 특히 소프트웨어 인재를 뽑아 오세요.”

컴퓨터 부문 인사팀에 비상이 걸렸다. 1991년 러시아를 방문 중이던 이건희 회장이 직접 국제전화로 지시를 내린 것이다. 1987년 반도체 사업에서 첫 흑자를 낸 후 기뻐할 겨를도 없이 사업구상에 전념했던 이건희 회장은 컴퓨터 사업에 관심이 컸다.

인사팀 김성재 이사는 곧바로 회의를 소집했다.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거듭했지만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인사팀의 안테나에 유니코사(UNICOSA·전국대학컴퓨터서클연합)가 포착됐다. 유니코사는 고려대 등 7대 대학 컴퓨터 동아리가 조직한 연합회였다. 유니코사 회장을 지낸 송길섭 사원이 아이디어를 냈다.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자유분방한 대학생들. 그들을 위해 ‘삼성전자 소프트웨어 멤버십’이라는 새로운 울타리가 만들어졌다. 삼성의 멤버십 프로그램은 컴퓨터를 다룬다는 대학생들 사이에 금방 입소문이 났다. 소위 ‘모범생 인재’를 선호하는 삼성전자가 학점이나 학교를 보지 않고 컴퓨터 재능만을 보고 회원을 뽑는 것 자체가 뉴스거리였다.

제1기 멤버십 프로그램에 참가한 대학생 회원들의 실력은 그야말로 대단했다. 대졸 신입사원에 비해 실력이 2~3년 앞서 있었던 것이다.

멤버십 프로그램이 끝날 무렵 삼성전자는 대학 졸업을 앞둔 회원 중 10여 명을 채용하기로 했다. 문제는 학점과 삼성직무검사(SSAT)의 결과였다. 멤버십 회원들의 학점이 대부분 ‘선동열 방어율’과 비슷한 수준이었던 것이다.

인사팀의 노력으로 멤버십 회원들은 학점과 상관없이 면접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면접 결과를 발표하기 직전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겼다. 컴퓨터 실력과 면접 결과가 정반대로 나타난 것이었다. 컴퓨터 고수(高手)들 사이에는 흔히 말하는 ‘계보’가 존재했다. 실력에 따라 증손자, 손자,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라고 서로를 부르곤 했다. 그런데 면접 결과는 증조할아버지가 떨어지고 증손자가 합격하는 꼴이었다.

천재급 인력을 모아놓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중에서도 더 뛰어난 인재를 발굴하는 것이 삼성전자가 해야 할 일이었다. 안승준 당시 인사팀 부장은 면접관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상황을 설명했다. 마침내 삼성전자 최초로 면접 결과를 뒤집는 ‘혁명’이 벌어졌다.

지식사회에서는 창조적 천재들이 역사를 발전시키고 세계를 이끌어간다. 바둑 1급짜리 10명이 머리를 싸매고 달려들어도 바둑 1단 1명을 이기기 힘든 것과 같은 원리다. 최고의 인재를 발굴하는 삼성전자의 전통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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