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풍 백화점 생존자 | [삼풍백화점 생존자를 만나다] 온몸에 파편.. 20살 알바생, 26년만의 근황 27023 투표 이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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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6월 29일,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습니다.
부실공사 등이 원인이었던 이 사고로 약 1000여 명 이상의 종업원과 고객들이 사망하거나 부상 당했습니다.
현재 작가 ‘산만언니’로 활동 중인 한 생존자를 만났습니다.
사고 당시 지하 1층 식품부에서 일하고 있었던 그는 아팠던 스무살의 기억들을 다시 꺼내놓았습니다.
다시는 같은 사고가 발생하지 않았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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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 나무위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최후의 생존자 3인 – 유지환, 최명석, 박승현. 최명석(남, 1975년생, 사고 당시 21세, 사고 발생 11일 만에 구조) 상당히 운이 좋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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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9/2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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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풍백화점 붕괴사고 ‘최후 생존자 3인'(최명석, 유지환, 박승현 …

1995년 6월29일 오후 6시쯤, 국내 최대를 자랑하던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다. 단 20초 만에 양쪽 벽만 남긴 채 A동 5층 건물이 완전히 붕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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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naver.com

Date Published: 7/1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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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사망자는 502명, 부상자는 937명이며 6명은 실종되었다. 피해액은 약 2700여 억 원으로 추정된다. 생존자 중 최명석(崔明錫, 1975~)은 1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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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o.wikipedia.org

Date Published: 7/2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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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풍백화점 참사, 1~5층 생존자 없었던 이유…’꼬꼬무2′ – 뉴시스

사고 11일째, 붕괴 13일째 생존자 지환이를 구조해냈다. 지환 씨는 “딱 그 순간에 드는 생각은 발견됐다였다. 살았다가 아니라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생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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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obile.newsis.com

Date Published: 7/2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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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풍 붕괴 현장에서 나오기까지 26년…생존자 곁 ‘슬픔의 연대’

[토요판] 기획 삼풍과 생존자들1995년 6월29일 삼풍백화점 참사생존자 ‘산만언니’에게 출판 제안 세월호 유가족에게 손내밀었던 저자기억의 고통 겪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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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hani.co.kr

Date Published: 4/1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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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삼풍 생존자입니다 – YES24

세상은 생존자가 침묵하는 딱 그만큼 불행해진다”개인의 기록이 모여 연대라는 사회적 기록으로 나아가다1995년 6월 29일,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라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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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yes24.com

Date Published: 9/1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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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풍백화점 참사 5주년… `최후의 생존자` 박승현씨 – 부산일보

지난 95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당시 지켜보는 이들의 가슴을 졸이게 하며 17일만에 극적으로 구조된 “최후의 생존자” 박승현(24)씨는 삼풍참사 5주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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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usan.com

Date Published: 8/1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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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풍참사 20년> ③ 생존자 최명석씨 “평범한 행복 누리고파”

1995년 6월 폐허로 변한 삼풍백화점 현장에서 열하루 만에 기적적으로 생환한 최명석(40)씨는 20년이라는 세월이 참사의 기억을 희미하게 만들었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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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yna.co.kr

Date Published: 1/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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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풍백화점 생존자를 만나다] 온몸에 파편.. 20살 알바생, 26년만의 근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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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삼풍 백화점 생존자

  • Author: 안전한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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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1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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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삼풍백화점 붕괴사고(三豐百貨店 崩壞 事故, 영어: Sampoong Department Store Collapse)는 1995년 6월 29일 오후 5시 57분경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동에 있던 삼풍백화점이 붕괴한 사고로, 건물이 무너지면서 1,445명의 종업원과 고객들이 다치거나 사망했으며, 인근 삼풍아파트, 서울고등법원, 우면로 등으로 건물의 파편과 잔해, 먼지가 날아들어 주변을 지나던 행인 중에 부상자가 속출했고 수많은 재산상, 인명상 손해를 끼쳤다. 그 후 119구조대, 경찰, 서울특별시, 대한민국 국군, 정부, 국회까지 나서 범국민적인 구호 및 사후처리가 이어졌다.[1][2]

사망자는 502명, 부상자는 937명이며 6명은 실종되었다. 피해액은 약 2700여 억 원으로 추정된다. 생존자 중 최명석(崔明錫[3], 1975~)은 11일[4], 유지환(柳智丸[5], 1977~)은 13일[6], 박승현(朴勝賢[3], 1976~)은 17일[7] 동안 갇혀 있다가 구조되었다. 삼풍백화점이 있던 자리에는 현재 주상복합 아파트인 아크로비스타가 2001년 착공되어 2004년 완공되었다.

붕괴 원인 [ 편집 ]

부지 용도 [ 편집 ]

이 부분은 붕괴와는 관련이 없지만 건설과정에서 비리가 매우 심각했음을 보여준다. 1989년, 삼풍아파트가 완공된 후, 삼풍건설은 그 앞에 남은 어마어마한 넓이의 땅에 상가나 다른 건물을 짓고자 공사를 시작했지만, 무허가 공사를 이유로 제재를 받아 중단했다. 이유는 그 땅은 백화점 따위를 지을 수 없는 아파트용 부지였기 때문이다. 결국 삼풍그룹은 서초구청 공무원들에게 뇌물을 준 뒤 불법적으로 용도를 변경하였다.

내부 구조 임의 변경 [ 편집 ]

1987년 설계 당시 삼풍백화점은 ‘삼풍랜드’라는 명칭으로 서초동 삼풍아파트 대단지의 종합상가로 설계되어 있었다. 계획 당시의 건물은 지하 4층에서 지상 4층이었다. 그러나 거의 다 지어졌을 무렵, 당시 삼풍건설산업(주)의 회장 이준(李鐏, 1922~2003)은 당시 시공사인 우성건설에게 백화점으로 변경해 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백화점으로 바꾸게 될 경우, 건물의 구조가 상당히 바뀌기 때문에, 건물 붕괴를 우려한 우성건설 측이 이를 거부하자, 이준 회장은 계약을 파기하고 당시 삼풍건설산업에 변경을 지시했다. 그러나 법률상 건물의 사용용도에 의해 구조를 변경할 시 반드시 구조 전문가의 검토를 받아야 하는데 삼풍백화점 설계당시에는 이를 무시하여 설계, 공사가 강행되었다.

또한 삼풍백화점은 준공검사도 무시하고 가사용 승인만으로 개점하였다. 이후 9개월이 지나서야 겨우 준공승인을 받았으며, 1994년 10월에는 기초부분인 지하1층에 구조변경 공사를 했고, 1994년 11월에는 위법건축물로 판정을 받았다.

부실시공 [ 편집 ]

어떻게 바뀌었는가? [ 편집 ]

삼풍백화점은 애초에 무량판 공법(플랫 슬래브 구조)의 건물로 설계해서 완공한 백화점 건물이었고 초기의 건물은 문제가 없었지만, 용도가 바뀐 뒤 모든 것이 바뀌고 말았다. 일단 삼풍은 넓은 매장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상가건물의 벽을 없앴다. 본래 벽과 기둥이 같이 있었기 때문에 이 둘이 하중을 같이 버텨 줬지만, 그 벽이 사라지는 바람에, 기둥에만 무게가 분산되는 일이 일어났다. 그리고 에스컬레이터를 만들기 위해 각층에 구멍을 뚫었는데, 이 때 사라진 구멍 만큼 콘크리트가 사라지면서, 옆에 있는 기둥이 버텨야 하는 무게는 더 커졌다.

또한 이 기둥조차도 줄였다.[8] 애초 구조계산서에는 건물 4층과 5층의 20개 기둥 가운데 8개는 지름이 800mm로 그 안에 고장력 철근 16개를 설치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이 8개의 기둥이 설계 과정을 거치면서 지름은 600mm로 가늘어지고 철근 숫자도 8개로 줄였다. 이런 식으로 기둥이 줄어들면서 철근도 줄어들 수밖에 없었고, 더욱이 에스컬레이터에 방화벽을 설치하기 위해 기둥의 4분의 1을 아예 잘라버렸다.[9][10]

철근 [ 편집 ]

바닥과 기둥을 연결하고, 기둥이 옥상을 뚫고 나오는 일이 없기 위해서는 L자형 철근을 사용해야 했는데, 삼풍은 비용부담이 크다는 이유로 —자형 철근을 사용한 것이다. 그 결과 바닥과 기둥을 연결할 수 없게 되었고, 이 때문에 기둥이 바닥을 뚫고 나오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건물이 붕괴될 때 아무런 제동장치 없이 순식간에 무너진 것도 이 때문이었다.

무리한 건축 [ 편집 ]

식당가 [ 편집 ]

또한 본래 4층까지만 설계를 했던 삼풍백화점은 우성건설과의 계약 파기 이후 무리하게 5층으로 확장공사를 시행했다. 정부기관의 허가없이 불법행위를 저질렀다. 이 과정에서 바닥과 기둥이 추가로 생겼으며, 이에 따라 기둥이 버텨야 할 무게는 더 커졌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 한술 더 떠 5층의 용도까지 바꾼 것이다. 처음에 5층을 만들었을 때는 키즈랜드로 계획했지만 백화점 용도에 맞지 않다는 이유로 식당가로 불법 변경하였다. 그 결과 5층 바닥에 배수로가 설치되고 콘크리트도 추가되면서 건물에 무리가 갔다.

더욱이 그 식당가도 한식당이라 바닥에 온돌을 깔기로 하였는데, 온돌의 효과를 주기 위해서 엄청난 양의 콘크리트가 추가된 것이다. 거기에 한술 더 떠서, 5층에는 설계에 없던 벽돌벽과 무거운 돌정원, 대형 냉장고 등 무거운 사업제품을 설치했다. 이러한 불법 용도 변경으로 인해 하중이 3~4배 이상 증가하였다. 더군다나 4층에서는 매장 확장을 이유로 기둥을 없애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런 있어서는 안되는 일들이 건물 붕괴의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식당가의 무게는 1톤 트럭이 1200대 이상이 있었던거나 마찬가지일 정도로 무거웠다 10초만에 아홉 층이 무너졌다.

냉각탑 [ 편집 ]

본래 옥상의 슬라브는 6cm 두께로 계획되어 있었으나, 방수 처리를 하면서 9cm를 더 두껍게 했다. 또한 문제가 되었던 냉각탑 3개도 본래 지하에 설치하고자 했지만 지하공간 확보를 이유로 옥상에 설치했는데 구조 계산도 하지 않은 채 설치했으며 결국 평방 미터 당 610 kg/m2의 하중이 추가되었다. 그래서 해당 냉각탑 건물 전체에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개장 초기부터 건물 전체가 미세한 진동이 울렸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안전 무시 [ 편집 ]

본래 삼풍백화점의 에어컨 냉각탑을 북관 동쪽 삼풍아파트 7동 방향에 설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삼풍백화점은 삼풍아파트와 불과 30m도 떨어져 있지 않았으며, 이로 인한 소음으로 삼풍아파트와 삼호가든에서 주민들의 불만이 제기되었다.

그러자 경영진들은 1993년 8월, 냉각탑을 북관 서쪽 우면로(牛面路) 방향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그 이동 방법이 문제였다. 당시 삼풍백화점은 남, 북관 옥상에 삼각형 모양의 채광창을 옥상 가운데에 설치했는데, 원래 크레인으로 들어서 옮기는 게 당연하지만, 아파트 주민들의 민원 제기와 비용 절감이라는 이유로 냉각탑을 옮길 때 크레인을 사용하지 않고, 굴림대에 싣고 반대쪽으로 ㄷ자 모양으로 밀고 가는 최악의 실수를 일으켰다. 그 결과 건물 전체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고, 넓직한 매장공간 확보를 이유로 기둥을 없애고, 무단 증축하는 등 잘못된 시공으로 약해진 건물은 결국 이 과정에서 바닥이 깨졌고, 옥상 바닥이 버틸 수 있는 한계는 이미 초과한 상태였다.

물론 붕괴가 어느 한 순간부터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개장 초기에도 미세한 진동이 울리고, 물이 이유도 없이 새는 등의 징조가 계속 나타났지만,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그러나 냉각탑을 잘못 옮김으로써, 본격적인 붕괴는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

붕괴 조짐 [ 편집 ]

건물 붕괴는 사실상 예견됐었다. 붕괴 전부터 건물 전반에서 위험한 조짐이 발견되었기 때문이었다. 삼풍백화점이 건축되던 80년대 후반엔, 분당과 일산 등 1기 신도시 건설에 따른 자재난 파동이 있었다. 중국산 저질 시멘트 사용을 비롯해서, 콘크리트 배합, 철근 배합을 제대로 하지 않은 부실 시공의 징후는 건물이 붕괴되면서 성냥개비처럼 맥없이 꺾이고만 콘크리트 기둥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1993년에는 삼풍백화점 옆의 레포츠 센터 2층에 있었던 금융동(당시의 한미, 조흥은행 등)을 1층으로 옮기고 내부공사 후 삼풍문고라는 이름의 서점으로 1994년 1월 5일부터 영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 어마어마한 서적들 때문에 레포츠센터와 중앙홀 지역에서도 균열이 1995년 사고 때까지 1년 동안 셀 수도 없이 늘었다. 결국, 삼풍백화점 총관리부는 1995년 3월 2일 서점을 철수했다. 하지만 이미 생긴 균열은 점점 늘어났고, 중앙홀과 B관(스포츠센터)의 건물에 균열과 뼈대 구부러짐 현상이 일어나자 백화점 건물 전체가 서서히 기울어지기 시작했으며 붕괴일인 6월 29일경에 최고정점에 이르렀다.

1995년 4월에는 5층 북관 식당가 천장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5월부터는 이 균열에서 모래가 떨어지기 시작했고, 5층 바닥은 서서히 내려앉기 시작했다. 건축 전문가 일각에선, 부실 시공과 함께 구조물의 역학 관계를 정확히 고려한 설계 상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지만, 매장 면적을 넓히기 위해 기둥을 적게 세웠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사건 당일 오전에 목격자들의 증언을 살펴보면, 당시 붕괴 원인으로 인한 사태의 심각성을 짐작할 수 있다.[11][12][13][14][15][16][17][18][19][20][21][22]

붕괴 [ 편집 ]

진동 [ 편집 ]

이한상 삼풍백화점 대표이사를 비롯한 경영진들이 이에 대한 ‘대책’이라도 짜려고 했던 때는 사고 당일인 6월 29일이었다. 그들은 이날 5층에 있었던 일을 보고 비상임을 느끼게 되었다.

사고 당일 오전 9시 때 삼풍백화점 5층 식당 <춘원> 주인 김서정에게 긴급 전화가 걸려오게 되는데, 그 내용은 ‘춘원 전주비빔밥 전문집에 바닥이 돌출부분이 2m가 생겼고 천장이 조금 내려왔다. 빨리 와서 보라’는 소리였고, 그는 곧바로 현장으로 출동했다. 그가 직접 보니, 5층 기둥이 20cm가량 금이 가 있고 천장이 뒤틀려 내려앉아 있는 것이었다. <춘원>과 맞붙은 우동집 <현지>에서는 천장에서 물이 쏟아져나왔고 냉면집 <미전>의 천장도 가라앉고 있었다. 오전 10시에 출근한 A동(북관) 4층 상품의류부 직원(당시 31세)도 건물 4-5층에서 들려오는 ‘뚝뚝, 드르륵’소리와 함께 약 3분간 무거운 진동을 느꼈다고 전해진다.

이한상 사장은 오전 11시쯤 이영길 시설이사 및 건축과 이완수 차장과 함께 5층 현장을 직접 눈으로 확인했다. 1시간쯤 뒤 우동집과 냉면집의 천장에서 물이 쏟아지고 바닥이 내려앉기 시작하게 되었고, 결국 5층의 식당가 영업이 전면 중지되고 출입이 통제되었다. 삼풍백화점 측은 낮 12시 무렵 건물 설계 감리 회사인 우원건축에 연락하는 한편, 옥상의 에어컨 가동과 5층 입주업소에 대한 가스공급을 중지시켰다. 에어컨의 전원을 차단한 상태였고, 당일은 유난히 찜통더위가 기승을 부렸었다. 그래서 당일 쇼핑을 온 쇼핑객들은 백화점에 들어서면서 숨이 콱 막히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그 날 옥상에 펀칭현상이 일어났었다.

대책회의 [ 편집 ]

오후 3시, 우원건축에서 임형재 소장과 이학수 구조기술자가 삼풍백화점에 도착했다. 한 시간 뒤인 4시에는(붕괴 약 2시간 전) 임원회의실(당시 삼풍백화점 남관 3층)에서 이준 회장 주재로 2차로 긴급대책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임 소장은 칠판에 건물 구조도를 그려가며 “점검 결과 건물의 안전에 중대한 이상이 발견됐으니 빨리 긴급보수를 해야 한다”라고 말했고, “백화점 영업을 중지하고 고객들을 대피시키라.”라고 경영진들에게 권하였다. 그러나 여기서마저도 매장 폐쇄 여부가 관건이었고, 이를 가지고 토론을 했다. 이 회의에서 이학수 구조기술사가 “신공법으로 보수하면 위기를 넘길 수 있다, 진행되던 침하는 현재 멈췄다.”라고 경영진에 보고했고, 이준 회장도 사고 직후 검찰에서 “기술자들이 지지대를 받치고 보수를 하면 더 이상의 위험은 없다고 했고, 영업 중지를 건의한 중역들도 없었다”라고 진술했다. 결국, 붕괴되기 불과 2시간 전, 이 회장은 “큰 위험은 없으니 영업을 계속하면서 보수공사를 하자”는 최종 결정을 내렸다. 이처럼 징조는 있었으나 영업을 강행했다. 회의 이후 1시간이 넘게 구체적인 보수 계획에 대한 논의가 되는 한편, 임 소장은 설계 도면을 찾으러 서초동에 있던 사무실로 돌아갔다. 이후 삼풍 측은 중앙홀 2층의 행사전을 모두 스포츠센터 1층으로 옮기고 2층은 통행을 금지했다.

오후 5시 40분쯤 임원실 회의장으로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이영철 시설부장의 전화였다. “현재 붕괴가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는 보고였고, 이 회장 등 경영진들은 회의를 중단하고 일제히 건물 밖으로 긴급하게 대피했다고 흔히 알려졌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이 회장 등 경영진들은 백화점이 무너질 때에도 계속 보수 계획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었다. 붕괴의 시점에서도 이들은 건물보수에 필요한 자재와 인력을 수급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붕괴를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방증이다. 그러나 임원진들의 회의장은 무너진 A동이 아닌 B동에 있었기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럼에도 당시 정부와 언론 모두 경영진들이 붕괴 사실을 알고 미리 빠져 나갔다고 이야기하며 삼풍백화점 경영진에 대한 비난을 가중시켰다. KBS아카이브 프로젝트 <시대유감, 삼풍>은 이에 대해 2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건에 관해 제대로 된 취재가 이뤄지지 않은 나머지 이러한 보도 행태 계속 이어지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 후에, 중앙홀의 침하현상은 좀 멈춘다 싶었지만, 붕괴 16분 전인 5시 41분 백화점 침하에 가속도가 붙기 시작하면서 동시에 중앙홀도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중앙 홀과 백화점 2층에 있다가 이상함을 느낀 직원 및 손님들은 일부 대피하였으나, 나머지 고객은 모른 채 쇼핑 중이었다. 상태가 심각해지자 삼풍 측은 중앙홀 1층의 통행과 영업을 중지하고 2층도 영업을 중지했으나, 이윤을 위해 백화점 1, 2층은 영업을 강행했다. 당시 삼풍 측은 침하를 막기 위해 백화점 4각 구간에 뼈대를 세워서 가까스로 침하현상은 막았으나 1층이 침하현상이 멎자 5층의 천장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고 결국 1, 5층과 지하 1층에 막대한 균열이 생겼다.

매몰과 붕괴 [ 편집 ]

그들이 대피하는 동안 백화점 매장에서는 1천여 명이 훨씬 넘는 고객과 종업원들이 아무것도 모른 채 쇼핑과 영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5시 50분부터는 경영진들에 의해서가 아닌, 삼풍백화점 직원들의 고함이 5층에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모두 긴급히 대피하라”는 소리였고, 건물이 우르릉 하면서 우는 소리도 들렸다. 몇몇 고객들은 영문도 모른 채 대피를 한 경우도 존재했으나, 지하에 있던 사람들 중 상당수는 듣지 못했다.

결국, 오후 5시 57분, 5층 바닥의 가장 약한 기둥 2개가 무너지며, 그 기둥이 옥상까지 끌어당기면서 건물 붕괴는 시작되었다. 곧바로 삼풍백화점의 가장 얇았던 5층 바닥과 천장이 동시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때 백화점 5층의 잔해와 콘크리트가 무너져내리며 아래층을 차례대로 무너뜨리기 시작했고, 약 20초만에 건물은 지상5층에서부터 지하 4층까지 완전하게 매몰되었으며, 안에 있던 1,500여 명의 사람들은 잔해 속에 묻히게 되었다.

순식간에 건물 주변이 뿌연 먼지와 회오리바람으로 가득 찼고, 백화점 앞 우면로와 서울고등법원 청사에는 건물파편들이 날아왔다. 붕괴 직후 태풍 같은 바람이 10여 초간 휘몰아쳤다. 이후 먼지 바람들이 가까운 타 지역으로까지 날아갔다. 사고 직후 남아 있는 건물 잔해 사이에선 손수건을 흔들며 구조를 요청하는 사람들도 보였고, 살려달라는 간곡한 비명과 신음과 애원소리, 주변에는 백화점 진열상품들이 나뒹굴었고 피투성이가 된 채 잔해를 헤치고 나오는 사람들이 속속 목격됐다. 붕괴 후 매우 혼란해서 흩어진 백화점의 물건을 훔치는 사람들도 목격됐다.

삼풍건설산업 회장의 발언 [ 편집 ]

MBC 뉴스데스크에서는 삼풍백화점의 붕괴 후 전 삼풍건설산업 회장 이준이 서초경찰서에서 조사를 받는 기사를 보도했는데, 여기서 조사를 받는 이준이 떳떳하게 기자를 보고 “이보쇼, 기자 양반! 백화점이 무너졌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손님들에게도 피해가 가는 것이지만 우리 회사의 재산도 망가지는 거야!”라는 발언을 하여 국민들의 분노를 샀다.[23] 하지만 당시의 뉴스취재 원본을 살펴보면 이준 회장은 이 말 이후에 “그런데 내가 어떻게 붕괴 사실을 알고도 모른 척 할 수 있었겠냐”는 취지의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이는 뉴스보도에서 편집되었다. 시청자들의 분노를 삼풍백화점 측에 집중시키려는 다분히 의도적인 편집이었다.

최종 판결 [ 편집 ]

1996년 8월 23일 대법원에서 삼풍백화점 붕괴참사 관련 피고인들에 대한 판결이 확정되었다. 전 삼풍건설산업 회장 이준에게는 업무상과실치사상죄를 적용하여 징역 7년 6개월이 선고되었다.

삼풍백화점 측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설계변경 등을 승인해 준 서울 전 서초구청장 이충우, 황철민에게는 뇌물수수죄를 적용하여 각각 징역 10개월에 추징금 3백만 원과 징역 10개월에 추징금 2백만 원이 확정되었다.

정상기 전 서울시 상정계장, 김수익 우성건설 형틀반장, 김재근 전 서초구청 주택과장 등 피고인 10명도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과 추징금 3백만 원에서 선고유예 및 추징금 1백만 원의 원심형량이 확정되었다.

2심에서 징역 7년형을 받은 이한상(1953~) 전 삼풍백화점 대표이사 사장 등 12명은 상고를 포기하여 실형이 선고되었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와 관련하여, 업무상과실치사·업무상과실치상·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업무상횡령)·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뇌물)·뇌물수수·뇌물공여·부정처사후수뢰·수뢰후부정처사·허위공문서작성·허위작성공문서행사의 혐의로 기소된 피고인은 총 25명이다.

출소 후 이준 전 삼풍건설 회장은 서울 신당동 자택에서 살다가 지병이 악화되어 2003년 10월 4일 81세로 별세했다.

이한상 전 삼풍백화점 사장은 출소 후 삼풍백화점 동쪽에 위치한 삼풍아파트의 자택에서 살다가 2004년 몽골로 건너가 몽골 선교사가 되었고 울란바토르 북쪽의 헝거르라는 마을에서 사역하고 있다고 한다.[24]

사회적 영향 [ 편집 ]

붕괴 사고 이후 대한민국의 경제 호황 시기였던 1980년대와 1990년대 초에 지어진 건물들에 대한 공포와 회의적 시각이 확산되었다. 이로 인해 대한민국 정부는 전국의 모든 건물들에 대한 안전 평가를 실시했고 그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전체 고층 건물의 1/7(14.3%)은 개축이 필요한 상태였다.

전체 건물의 80%은 크게 수리할 부분이 있었다.

전체 건물의 2%만이 안전한 상태였다.

생존자 중 최명석은 11일, 유지환은 13일, 박승현은 17일(377시간) 동안 갇혀 있다가 구조되었다.

또한 1995년 7월 26일에 방영된 MBC 경찰청 사람들에서는 이번 사고와 관련되어 비리에 연루된 관련자 일체를 공개 수배하기도 하였으며, 국회의원 안상수는 이 사건에 대한 방송으로 국민적 관심을 받아 정계로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방송 중계 [ 편집 ]

일부 방송사에서 정규방송을 중단하여, KBS[25], MBC, SBS 등의 케이블 TV가 개국했지만, YTN 속보나 특보 체제를 편성하였다.

피해와 보상 [ 편집 ]

인명피해 [ 편집 ]

사망자 : 502명 (남 106명, 여 396명, 사망확인 472명, 사망인정 30명) (이은영 양 포함)

실종 : 6명

부상 : 937명

생존자 명단 [ 편집 ]

권은정

고진광

최명석

유지환

박승현

재산피해 [ 편집 ]

부동산

양식 : R/C조 5/4층 73,877m 2 전체 붕괴

전체 붕괴 건물 : 900억원 (추정)

시설물 : 500억원 (추정)

동산

상품 : 300억원 (추정)

양도세 : 1,000억원 (추정)

총 피해액 : 2,700억원 [추정]

피해보상액 [ 편집 ]

인적 피해보상비 : 2,971억원(추정)

물적 피해보상비 : 820억 8천 5백만원 (추정)

주변 아파트 피해 등 보상비 : 1억 4천 5백만원

같이 보기 [ 편집 ]

관련 작품 [ 편집 ]

소설 [ 편집 ]

영화 [ 편집 ]

가을로(Traces of Love, 2006년)

드라마 [ 편집 ]

만화 [ 편집 ]

야후(1998년) 작가 : 윤태호

다큐멘터리 [ 편집 ]

음악 [ 편집 ]

The Return of N.EX.T Part 2 – The World 곡명 : 세계의 문

소방 활동 사진 [ 편집 ]

각주 [ 편집 ]

삼풍백화점 참사, 1~5층 생존자 없었던 이유…’꼬꼬무2′

[서울=뉴시스]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사진 =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2’ 캡처) 2021.06.11.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성유민 인턴 기자 = SBS TV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2’가 1995년 6월29일 끔찍했던 그날을 조명했다.

10일 방송된 ‘핑크빛 욕망의 몰락 :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 편에서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를 다시 들여다봤다. 당시 내부에는 손님과 직원이 1500명 정도 있었다. 지상 5층 지하 4층의 총 9개 층의 건물이 무너지는데 걸린 시간은 단 10초였다.

사상 최악의 사고로 헬리콥터, 굴삭기 등 중장비와 구급차 100여 대, 소방대원 등이 모여들었다. 2차 붕괴의 위험 때문에 사람들은 콘크리트 더미를 일일이 수작업으로 치우기 시작했다. 붕괴 16시간 만에 지하 1층에 있던 5명이 구조됐다.

하루하루 시간은 흐르고 중장비 투입이 결정됐다. 사고 11일째, 붕괴 13일째 생존자 지환이를 구조해냈다. 지환 씨는 “딱 그 순간에 드는 생각은 발견됐다였다. 살았다가 아니라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생각이었다”고 밝혔다. 붕괴 사고 17일 만에 생존자 박 양을 구조했다. 이는 국내 매몰 사고 사상 최장시간 생존 기록이었다.

사망자 502명, 매몰됐다 구조 된 인원이 40명. 특히 구조된 사람들은 모두 지하에 있던 사람들이었고 1층부터 5층 지상층에서는 단 한명의 생존자도 없었다. 방송은 그 이유로 사진 한 장을 공개했다. 샌드위치처럼 겹겹이 쌓여있는 삼풍백화점의 무너진 모습은 다른 붕괴 사고에서는 볼 수 없는 형태였다.

삼풍백화점은 수시로 도면을 변경했고, 기둥의 굵기와 철근 숫자를 줄이고 천장과 기둥을 연결하는 지판의 두께를 줄이는 등 줄일 수 있는 것은 다 줄였다. 또한 원래 롤러스케이트장으로 설계했던 5층은 식당가로 교체했다.

이에 건물 전체에 균열이 시작됐다. 붕괴 당일 시설보수 직원들은 경영진에게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렸다. 붕괴 5시간 전, 사람이 아닌 귀금속과 고가의 상품들의 대피를 지시했다. 붕괴 4시간 전, 이준 회장까지 도착해 임원 회의를 진행했지만 이들은 영업을 마친 후 보수 공사에 들어갈 것을 결정했다.

생존자 산만 씨는 “참사는 사람을 가려서 오지 않는다. 오늘 아침 손 흔들고 나간 내 아이가 당할 수 있는 일이고 내 배우자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라며 “저도 제가 겪을 거라고 생각도 못했었다”라고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닌 모두의 이야기라고 강조했다.

문세윤은 “상식적으로 살면 되는데 상식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더 큰 피해자들이 생기는 것 같다”라며 “기본을 지키는 세상이 되길”이라고 바랐다.

시청률 조사회사 닐슨코리아에 따르면, 이날 방송 시청률은 전국 기준 5.8%를 기록했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삼풍 붕괴 현장에서 나오기까지 26년…생존자 곁 ‘슬픔의 연대’

[토요판] 기획

삼풍과 생존자들

1995년 6월29일 삼풍백화점 참사

생존자 ‘산만언니’에게 출판 제안

세월호 유가족에게 손내밀었던 저자

기억의 고통 겪는 과정 보며 후회도

든든한 담당편집자 못 되고 휴직계

사랑하는 이와 반려묘가 세상 떠나

“하고픈 대로 하라”며 손내민 저자

2015년 6월28일 오전,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20주년을 하루 앞두고 서울 서초구 양재동 시민의 숲 안에 있는 삼풍백화점 참사 위령탑 앞에서 한 유가족이 가족의 이름을 매만지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email protected]

2018년 4월, ‘세월호가 지겹다는 당신에게 삼풍 생존자가 말한다’라는 제목의 글로 사회관계망서비스(SNS)가 도배되었다. 우연히 그날 그 자리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당한 사고가 2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괴물처럼 따라다닌다는 삼풍 참사 생존자의 자기 고백이었다. 산만언니 작가가 글로써 자신의 불행을 공개한 이유는, 20여년 전 본인이 겪은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는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연대의 손을 내밀기 위해서였다. 참사는 이름과 얼굴만 바뀔 뿐 계속 반복되고 있으니까. 그는 더는 같은 고통이 생기지 않으리라는 생각에 글을 썼다고 밝혔다. 그의 진심은 절절했고, 불행을 겪는 타인에게 내미는 손은 따뜻했다. 이 글을 책으로 읽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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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 생존자에게 책을 제안하다

그해 내가 근무하던 출판사는 ‘상업출판사’라는 타이틀을 공공연하게 표방하는 곳이었다. 기획회의 시간에 내 삼풍 기획안을 받아 본 상사는 “사회과학 책은 안 팔려”라는 이유로 기획을 보류시켰다. 그래, 그럴 수 있지. 회사는 이윤이 중요하고, 회사원으로서 나는 팔리는 책을 만들어야 하니까. 게다가 나도 힘든데 남의 불행을 열거한 책까지 누가 사 보고 싶어 하겠는가. 그럼에도 입안이 썼다. 이윤만 추구하다가 연이어 참사를 만들어내는 한국 사회를 비판하는 책을 ‘이윤이 남지 않는다’라는 이유로 보류해야만 했기 때문에.

2019년, 개인적인 이유로 회사를 옮겼다. 그때 가장 먼저 떠오른 기획 아이템 가운데 하나가 산만언니 작가의 삼풍 관련 글이었다. 지난 회사보다 기획에 대한 입지가 조금 더 넓어진 덕분에 작가에게 ‘함께 책을 내자’고 제안할 수 있었다. 처음 제안 메일을 보냈던 날을 기억한다. 그의 글을 접한 지 1년이나 지났으니 분명 눈 밝은 편집자와 이미 계약되어 있으리라 예상했다. ‘혹시 모르니 시도나 해보자’는 생각으로 1년 전 작성했던 기획안을 보강해 나름 정성을 들여 쓴 출간 제안 편지와 함께 보냈고, 대차게 거절당했다.

강경한 답장에는 ‘이런 일로 세상에 이름을 남기고 싶지 않다’고, ‘이미 몇 군데 책 출간 제안을 받았으나 전부 거절했다’고 적혀 있었다. 역시, 괜찮은 글이 아직까지 출간되지 않은 데에는 다 이유가 있구나. 아쉽지만 이해했다. 그의 글을 책으로 내고 싶은 마음은 업자로서의 내 욕심이다. 그분에게는 ‘불행을 전시해서 남들에게 보여달라’는 제안이 얼마나 잔인하겠나. 거절이 당연한 반응이었다. 거절당한 아쉬움보다 동료 시민으로서의 미안함이 더 컸기에 그 의견을 존중하고 싶었다.

편집자로서는 포기했으나 독자로서 아쉬움이 남았다. 그에게 답신을 보냈다. 당신은 겪은 사람이니까, 당신의 목소리에는 의미가 있다고. 최대한 당사자의 목소리가 세상에 많이 나와야 비당사자와 당사자 사이의 간극을 줄일 수 있다고. 나와 함께하지 않아도 상관없으니 꼭 좋은 편집자를 만나 책으로 내주시기를 바란다고 적었다. 사실 마지막 인사라고 생각하고 보낸 편지였고 지금 생각하면 주제넘은 참견이었는데, 그 메시지가 작가님에게는 하트 시그널처럼 느껴졌나 보다. 갑자기 태세를 전환한 이메일이 도착했다.

“이지은 편집자님과 책, 하고 싶어요.”

돌고 돌아 책 작업을 시작했으나 출간까지 순탄치 않았다. 산만언니 작가는 삼풍 사고 날의 “덥고 습하던 날씨, 사고 직후의 먼지 내음과 피비린내, 매캐한 연기까지”(, 235쪽) 하나씩 다시 떠올라 글을 이어나가기가 힘들었다고 고백한다. “대단히 고통스러웠다. 매일같이 시공간을 초월해 1995년 6월29일의 서초동으로 되돌아가는 기분이었다.”(같은 책, 57쪽) 작가는 그날의 붕괴를 재경험하는 바람에 애써 가꾸어온 일상이 또 무너졌고, 그 일로 마음의 병까지 깊어져 20여년 근무한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그 모습을 보니 후회스러웠다.

‘아, 이럴까 봐 책 제안을 거절하셨구나.’ 나는 그에게 계약금 100만원에 인세 10퍼센트를 쥐여주기로 약속한 대가로 무엇을 빼앗은 것일까. “한평생 소망했다. 이런 일을 겪지 않은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사는 일상을, 남들이 지루해 마지않는 생, 매일 아침 눈을 떠 따박따박 회사에 가고, 그저 그런저런 잡다한 일들을 하고 돌아와 씻고 눕는 그 단순한 일상을 나는 무척이나 사랑한다. 한데 대체 무슨 연유로 또다시 지난날의 상처를 헤집어 불행에 대해 말하고 다니느라 내 일상을 파괴하는가”(같은 책, 113, 114쪽)라고 중얼거리던 분에게 어쩌자고 책을 내자고 제안했을까. 다시 떠올려도 낯이 뜨겁다.

1995년 6월29일 무너진 삼풍백화점을 이튿날 찍은 것이다. 양쪽 벽 사이 지하 한가운데 시멘트 기둥 조각과 휘어진 철근 등이 뒤엉켜 있다. 곽윤섭 선임기자 [email protected]

복직 뒤 원고 보니 색다른 점 ‘눈길’

무너진 건물서 빠져나오는 데 26년

힘든 시기 주변인의 크고 작은 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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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 기간 편집자의 곁에 선 저자

그렇게까지 당신을 힘들게 했으면 책이라도 잘 만들어야 하는데, 나는 담당 편집자로서도 그리 듬직하지 못했다. 기껏 애써서 쓴 원고를 출판사에 넘긴 작가에게 ‘휴직한다’고 선언하고 말았다. 물론 나름의 사정은 있었다. 10년을 동거하던 반려 고양이와 백년해로하자 약속한 반려인이 같은 해에 암에 걸리더니 동시에 세상을 떠났다. 두 존재가 삶을 정리하는 과정을 돕기 위해 휴직을 감행했고, 언제 복직할지 기약할 수 없었다. 어쩌면 오래 자리를 비우게 될 것 같다고, 미안하다는 내 휴직 인사에 산만언니 작가는 “기다릴게요. 어차피 지은 편집자님 아니었으면 안 냈을 책이에요”라는 말로 부채감을 조금은 덜어주었다.

그때 우리를 떠올리면 커다란 크라프트지 쇼핑백에 담긴 츄르(고양이 간식) 수십봉지가 생각난다. 그가 건네준, 츄르가 맛별로 들어 있는 크라프트지 쇼핑백은 두 손으로 껴안아도 품에 다 들어오지 않을 만큼 거대했다. 산만언니 작가는 아마 ‘어떻게 하면 이 친구에게 도움이 될까’ 고민하다가 ‘고양이에게 츄르가 최고라더라’는 풍문만 듣고는 일단 장바구니에 가득 담아 오신 것 같았다. 다만 양 조절에 실패하는 바람에 그날 선물해준 츄르는 우리 집 고양이가 한평생 먹어온 간식 양보다 더 많았다. 그 덕에 우리 고양이는 마지막 날까지 츄르를 실컷 먹고 떠났다.

휴직 중인 편집자가 뭐가 그리 예쁘다고, 그는 수시로 연락해 나를 챙겼다. 그때마다 ‘말씀만이라도 감사하다’는 사회적 예의를 챙기는 대신에 그에게 한껏 기대는 길을 택했다. 평소 같으면 자존심이 목숨만큼 중요한 내 성향에 절대 타인에게 의지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불행에 빠져 살던 시기인데다가 집 안팎의 이런저런 일로 마음이 요동치던 때라서 무조건적인 내 편이 필요했던 것 같다. 내 눈물과 하소연이 귀찮았을 법도 한데, 그는 묵묵히 들어주고 적절한 조언을 건네주었다. 언젠가 반려인의 생전 글을 함부로 도용한 잡지사 때문에 힘들어할 때는 “나랑 같이 그 회사 사무실에 쳐들어가자, 나 잘 따진다”며 한껏 목소리를 높여주기도 했다.

“힘내”, “기운 내”, “산 사람은 살아야 해”, “네가 남편 몫까지 살아야지” 같은 공허한 말들이 내 주변을 맴돌 때, 산만언니 작가만은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라고 담담하게 말해주었다. 불행을 먼저 겪어본 짬밥에서 나오는 여유. 그 말에 ‘역시 제대로 불행해져본 사람만이 제대로 위로할 줄 안다’는 진리를 깨달았다. 그 말을 믿고 정말 하고 싶은 대로 했다. 싸워야 하면 싸우고, 울어야 하면 울었다. 덕분에 후회도 원망도 남기지 않고 그 어둡고 긴 터널을 비교적 순탄하게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 같다.

불행이란 이름의 붕괴 겪은 이들에게

손을 내밀 줄 아는 사람의 ‘생존기’

동시대에 사는 우리는 운명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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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수의 연결이 결합한 선의의 기록

복직하고 원고를 다시 읽었다. 힘든 일을 겪기 전에는 작가의 삶 곳곳에 박혀 있는 크고 작은 불행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사고 당시의 고통스러운 상황과 친아버지의 자살, 친오빠의 학대, 자신의 우울증과 세번의 자살기도, 직장 내 괴롭힘과 퇴사까지. 그가 겪은 불행들이 너무나 선명해서, 어쩌면 조금은 연민이 일었던 것도 같다. 그러나 복직 후 다시 들여다본 작가의 글은 그때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가장 힘든 시기에 주변인들의 크고 작은 선의가 한 사람을 살렸고, 그들의 손길에 의지해 불행의 늪에서 밝은 빛 쪽으로 조금씩 걸어 나온 순간들이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예컨대 그가 좌절의 나날로 벽을 치며 울 때마다 그 절절함을 귀신같이 알아채고는 뜨끈한 묵은지김치찌개와 가자미튀김, 포기김치까지 살뜰하게 해 먹인 수녀님, 아픈 엄마 수술비가 모자라 ‘그냥 죽어야겠다’고 결심한 작가에게 “네 인생 여기서 끝난 거 아니다”라며 적금을 깨 선뜻 돈을 빌려준 회사 동료, 10년 넘게 병을 돌보아주며 물질적·정신적으로 도움을 준 정신과 의사 선생까지, 작가의 불행 사이사이에는 ‘대가 없는 타인의 호의’들이 숨어 있었다. 그제야 그가 내게 보내준 무조건적인 선의들이 어디서 온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그는 당신이 받아왔던 커다란 호의들 가운데 일부를 떼어내 나에게 전해준 것이었다. “내가 인정하기 싫은 생의 몇 안 되는 진리 가운데 하나인데, 상처를 주는 것도 사람이고, 그 상처를 치유하는 것도 사람이다. 물론 둘은 다른 사람일 확률이 높지만”(같은 책, 178쪽)이라고 말하면서. 조건 없는 호의 덕에 살아난 나는 이제 책에서 이야기하는 “동시대에 사는 우리 모두는 운명공동체다”(같은 책, 232쪽)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다.

는 1995년 6월29일 삼풍 붕괴 사고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하고 있지만, 사고 당일에 겪은 이야기는 책의 일부에만 등장한다. 이 책은 건물 붕괴 현장에서 빠져나오기까지 26년이 걸린 한 사람의 고백이다. “사람들은 장례식장이 참사 유가족의 하이라이트라고 생각하지만, 그날의 오열은 훗날 끝없이 이어질 통곡의 예고편에 불과하다.”(같은 책, 210쪽) 그는 삼풍이라는 참사 현장에 1995년 6월29일 하루가 아닌 26년 동안 갇혀 있었다. 그리고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이들의 호의가 하나둘 모여 26년 동안 그를 조금씩 일상으로 끌어올려주었다. 그렇게 살아남은 산만언니 작가는 삼풍과 다를 바 없는, 이름만 다른 참사를 겪은 세월호 유가족이나, 원가족에게 버림받은 보육원 아이들, 일상에서 불행이라는 이름의 붕괴를 겪은 나와 같은 이들에게 손을 내밀 줄 아는 사람으로 성장했다. 그러니 이 책은 사회가 무너뜨린 한 사람의 좌절기이자, 공동체가 일으켜 세워준 한 사람의 생존기다.

산만언니 작가가 자신에게 주어진 붕괴를 감내하는 동안 수많은 이들이 그를 받쳐주기 위해 노력했고, 덕분에 그는 살아남았다. 나 또한 내 안에 든든하게 자리 잡고 있던 커다란 돌기둥 두개가 속절없이 무너졌을 때 곁에서 나를 지키려 노력해준 산만언니 작가의 선의와 글 덕분에 살아남았다. 그렇게 우리는 두해 남짓한 시간 동안 서로의 붕괴와 생존을 오롯이 지켜보았다. 그러니 상사의 기획 반려부터 저자의 출간 제안 거절, 편집자의 휴직까지 수많은 곡절이 있었으나 이 책은 결국 내가 작업할 운명이 아니었을까.

산만언니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제가 얼마나 불행했나보다는 어떻게 살려고 노력했는지에 집중해주셨으면 해요. 얼마나 많은 날 부표 하나 없는 망망대해에 떠서 저 멀리 희미한 등대 불빛 한 줄기에 희망을 걸고 헤엄쳤는지, 그 부분을 눈여겨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도 이 책을 읽어줄 동료 시민들에게 같은 당부를 전하고 싶다. 에 녹아 있는 한 사람의 생존뿐 아니라, 나를 포함한 다수의 연결이 결합해 만들어낸 선의의 기록을 눈여겨봐달라고.

이지은 푸른숲 편집부 과장, 출판노동자

저는 삼풍 생존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불행에 대해 말하고 기록하는 일 역시 쉽지 않다. 가끔은 ‘나를 괴롭히며 쓰는 글이 타인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의문까지 든다. 하지만 내게는 이 글을 통해 세상에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그 모든 일들을 겪어왔지만, 그럼에도 내가 살아온 세상은 따뜻했다고. 눈물 나게 불행한 시절도 있었지만, 가슴 벅차게 감사한 순간들도 많았다고. 그러니 당신들도 살아 있으라고. 무슨 일이 있어도 그냥 살아만 있으라고. 그러다 보면 가끔 호사스러운 날들도 경험하게 될 거라고. 이 말을 하고 싶어 쓰는 것이다. 다른 것은 없다.

—「제1장_생존의 기억」중에서

요즘은 글을 더 잘 쓰고 싶어 자꾸만 욕심이 난다. 내가 겪은 사고 이후의 고통을 생생하게 잘 적어 놓으면, 이를 모르고 살던 수많은 사람이 참사가 주는 비탄이 어떤 것인지 공감할 테고 그러면 건물이 되었든 배가 되었든 그 일을 하는 엔지니어들은 설계도면을 한 번이라도 더 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레 시행사와 시공사도 안전 규정을 준수하고, 감리기관은 꼼꼼하게 관리 감독할 것이며, 해당 공무원은 인허가 기준을 확실히 세우고, 국가기관은 재난 대처방안에 대해 더욱더 많은 연구를 해 대응방안을 낼 테고, 사법부는 선례로 남을 피의자들의 판결을 지금보다 더 신중한 자세로 내릴 테니까. 그렇다면 정말 앞으로 세상이 조금이라도 안전해질 테니까. 잘하면 이를 통해 시민사회는 돈이 된다 해도 나쁜 일은 하지 말아야 하는 게 사람이고, 이 세상에 작업자의 목숨보다 비싼 기계는 없다는 것과, 사랑하는 이의 목숨은 돈 얼마에 결코 등가교환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테니까.

—「제1장_생존의 기억」중에서

지금 앓고 있는 불안과 우울이 전부 ‘삼풍 사고’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일이 내게 이토록 영향을 미친 것은, 당시에 내가 그 사고를 통해 원 없이 망가질 수 있는 필요충분조건들을 전부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스무 살이라는 나이, 부상 정도, 사고 당시까지의 개인적인 경험, 유전적 성향이나 기질, 가치관까지. 이 모든 것들이 전부 맞아떨어졌기에 일어난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덕분에 이제 나는 그 일에 더는 억울하지 않다. 하지만 누군가 내게 만약 그 일이 아니었다고 해도 이만큼 오래 아팠을 것 같으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라고 단호하게 대답해줄 수 있다. 그렇다. 그런 일을 겪는다고 해서 누구나 나처럼 아프지는 않을 것이다. 허나 분명히 말할 수 있다. 1995년 6월 29일 이후로 내 세계관은 완벽하게 뒤바뀌었다고, 그런 이유에서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악인이라 해도 나처럼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고, 이런 슬픈 역사는 두 번 다시 우리 사회에서 되풀이되지 말아야 한다고.

—「제2장. 고통이 가져다준 선물들」중에서

나는 차가워 봐서 따뜻한 것을 알고, 어두워 봐서 밝을 수 있으며, 너무도 절절하게 외로워 봐서 가족이 어떤 의미인지 안다. 또 불행해 봐서, 자다 일어나 벽을 치고 흐느낄 정도로 불행해 봐서, 행복이 무엇인지도 안다. 전에는 행복에 대해 대단히 착각하고 살았다. 내가 겪은 불행들이 너무도 선명해서, 행복도 불행처럼 어느 날 갑자기 창문을 깨고 안방으로 들이닥치는 것인 줄 알았다. 한데 아니었다. 행복은 요란하지 않게 삶에 스며들었다. 그러니까 행복은 생각만큼 대단한 게 아니었다. 그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죽거나 다치지 않은 상태, 다시 말해 여태 살아오면서 슬프지 않았던 모든 날이 전부 행복한 날들이었다.

—「제2장. 고통이 가져다준 선물들」중에서

나한테 그런 일이 왜 일어났는지에 대한 해답은 찾지 못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자연스럽게 알게 된 것은 있다. 그런 불행은 나뿐 아니라 세상 누구도 겪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그리고 박완서 작가의 《한말씀만 하소서》에 나온 한 대목처럼, 나 역시 그런 일을 겪지 말아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사실까지도. 종교에 의지하니 예전처럼 앞으로의 운명이나 미래가 궁금하지 않다. 눈이 앞에 달린 인간은 아무리 노력하고 산다고 해도 뒤에서 던지는 돌을 피할 길이 없다. 그러니 우리는 옆 사람한테 대신 좀 봐달라고 부탁하며 살아야 한다. 인간은 아무리 잘났어도 혼자서는 살 수 없다. 그러니 인간은 공동체 안에서 유기적으로 서로 협력해야 한다.

—「제3장_익숙한 비극 사이에서 건져 올린, 인간이라는 희망」중에서

얼마 전 우연히 한 학생이 인터뷰를 요청해왔다. 학생의 질문이 인상적이었다. “사람들이 왜 그럴까요? 왜 아이들을 잃은 부모에게 그렇게 못되게 굴까요?” 나는 말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일으킬지 잘 모른다고. 모르면 그럴 수 있다고. 나도 그러했고, 당신도 그렇고, 우리 모두 그럴 수 있다고. 반대로 알면 그럴 수 없다고. 그러니까 알아야 한다고. 그 말을 하며 나는 속으로 또 한 번 다짐했다. ‘아, 계속 말해야겠다. 이게 어떤 슬픔이고 고통인지 사람들이 알 때까지 내가 자꾸자꾸 말하고 다녀야겠다.’

—「상처가 상처를 끌어안을 때」중에서

삼풍백화점 참사 5주년… `최후의 생존자` 박승현씨

‘결코 잊혀져선 안될거예요’

“생존자끼리 가끔 연락”

“크게 아프지는 않지만 아직도 삼풍사고의 후유증으로 한달에 한번씩은 병원을 찾습니다.”

지난 95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당시 지켜보는 이들의 가슴을 졸이게 하며 17일만에 극적으로 구조된 “최후의 생존자” 박승현(24)씨는 삼풍참사 5주년을 하루 앞둔 28일 당시 끔찍했던 악몽의 순간을 떠올리며 이같이 말했다.

박씨는 그러나 “내과쪽으로 진료를 받고 있다”고만 밝히고 후유증에 대한 구체적인 얘기는 꺼렸다.

현재 근로복지공단 서울지역본부에 근무하는 박씨는 “지난 96년 “산재 근로자를 위한 사랑의 음악회”에 초청된 것이 인연이 돼 이 회사에 입사하게 됐다”며 “남들처럼 평범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박씨는 “5년의 세월속에 삼풍참사가 사람들에게 많이 잊혀졌을 것”이라며 “하지만 지난해 19명의 어린 생명을 앗아간 씨랜드 화재참사 등 매년 대형사고가 되풀이되는 현실을 지켜볼 때 삼풍참사는 결코 잊혀져서는 안될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고 힘줘 말했다.

박씨는 “삼풍희생자 위령탑 명단에 새겨진 아는 언니들의 이름을 볼 때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난다”며 “하지만 이번 5주기 추모식 때는 결코 울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고당시 삼풍백화점 판매원으로 일했던 박씨는 당시 자신보다 앞서 각각 11일,13일 만에 구조된 최명석(25),유지환(23)씨와도 계속 소식을 주고 받는다고 한다.

그는 “요즘은 서로 바쁜 사회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전화로 안부를 묻곤 한다”고 말했다.

최씨는 지난 1월 해병대를 제대한 뒤 LG건설에 입사,용인 수지아파트 건설현장에서 설비를 담당하고 있으며 호주로 유학을 떠났던 유씨는 지난해 말부터 인재관리회사인 맨파워 코리아에 근무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삼풍참사 20년> ③ 생존자 최명석씨 “평범한 행복 누리고파”

세상의 관심은 이제 부담…”딸과 즐거운 추억 만들며 살고 싶어”

(서울=연합뉴스) 김동규 기자 = “20년 동안 세상의 관심을 받으며 때론 부담스럽기도 했습니다. 평범한 일상을 누리며 사는 게 소박하지만 행복한 삶이더라고요.”

1995년 6월 폐허로 변한 삼풍백화점 현장에서 열하루 만에 기적적으로 생환한 최명석(40)씨는 20년이라는 세월이 참사의 기억을 희미하게 만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긴 세월도 그 기억을 완전히 지우진 못했다.

20년 전 최씨는 삼풍백화점에서 아르바이트하다 사고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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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1학년을 마치고 군에 가기 전에 용돈 벌이를 위해 나섰던 그 선택이 최씨를 악몽으로 이끌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강남 제일의 백화점이 속절없이 무너지고 사망자 수습이 계속되던 나날, 참사 열하루 만에 스무살 청년이 비교적 건강한 모습으로 살아 돌아왔다는 소식에 말 그대로 온 국민이 기뻐하고 환호했다.

230시간 만에 구조된 뒤 최씨는 “어머니 아버지 괜찮아요. 걱정 마세요”라며 가족들을 안심시켜 감동을 줬고, “콜라가 마시고 싶다”고 말했다고 알려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

최씨는 당시 인터뷰에서 소방수와 빗물을 받아 마시며 악조건 속에서도 버틸 수 있었다고 생존 비결을 밝혔다.

이는 연일 실낱같은 기대를 안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던 다른 실종자 가족들에게 “아직 내 자식, 내 형제가 살아있을 수도 있다”는 희망을 안겼다.

최씨의 ‘기적’이 신호탄이라도 된 듯 사고 13일째 유지환(당시 18세·여)씨가 추가로 구조되며 희망을 이어갔고, 박승현(당시 19세·여)씨는 사고 17일 만에 기적적으로 생환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최후의 생존자’로 불리는 셋은 이후 서로 안부를 주고받는 친구가 됐다.

최씨는 건강한 상태로 곧 일상에 복귀했지만, 건망증이 심해지는 등 후유증을 겪었다.

사고 전 밝은 성격의 그였지만 사선을 넘나들던 충격 때문인지 대학에 복학하고 나서도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방황했다.

“그땐 인생이 참 별것 없다고 느껴졌어요. 죽음이 항상 곁에 있다고 생각해선지, 사람도 동물이나 식물처럼 그냥 생존을 위해 살다 2세를 낳고 뒷바라지하다가 사라지는 존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인생이 마냥 허무하게 느껴졌어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답을 찾지 못해 방황을 계속하다 선택한 것이 해병대 입대였다.

병역특례 혜택을 주겠다는 제의도 있었지만, 이를 거부하고 자원입대했다. 몸이 힘들면 잡념을 없앨 수 있을 것이란 생각에서였다.

고된 훈련과 힘든 군 생활로 몸은 피곤했지만 후유증은 쉽게 아물지 않았다.

이런 무기력함을 끊는 전환점은 바로 취직과 결혼이었다.

군 복무를 마친 2000년 그는 곧바로 GS건설(당시 LG건설)에 입사했다. 대학에서 건축설비를 전공한 그는 건설현장에 투입돼 열정적으로 일했다.

큰 사고 경험이 있어서인지 안전과 관련된 일에는 신경이 곤두섰다.

“현장에서 항상 혹시나 안전을 위협하는 부분이 없나 둘러보게 되더라고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콘크리트를 만들 때 시멘트와 물의 비율이 정확히 맞는지를 꼼꼼히 살피고, 제 소관이 아니더라도 ‘이건 아니다’ 싶으면 곧바로 달려가서 작업을 중지시키고 화도 냈어요.”

현재 재건축·재개발 관련 업무를 맡은 그는 20년 전과 비교하면 우리 사회에서 안전과 관련한 제도가 많이 강화됐다는 걸 느낄 수 있다고 했다.

“법도 국민의 안전의식도 점차 성숙해가는 것 같아 다행이지만, 큰 사고가 나는 걸 볼 때면 ‘기본이 중요한데 이를 지키지 않아 또 많은 사람이 희생되는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는 2005년 결혼하고, 다음해 딸을 얻었을 때를 가장 행복한 순간으로 꼽았다.

올해 열 살인 딸은 아빠를 따라 낚시도 다니고 볼링장도 함께 가는 ‘착한 딸’이라고 소개하면서 “하루하루 바쁜 일상에 많이 놀아주지 못해 아쉽다”며 여느 아빠처럼 미안해했다.

사고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계속되는 세상의 관심이 고맙기도 하지만 이제는 부담스럽다.

“삼풍 참사일이 다가오거나 씨랜드 화재, 대구지하철 참사, 최근엔 세월호 참사까지 대형 사고 소식이 들리면 하루 이틀 뒤 어김없이 신문·방송사에서 찾아왔어요. 그땐 울컥하는 마음에 이런저런 말도 많이 했는데, 이제는 솔직히 딱히 더 하고 싶은 말이 없습니다. 그냥 평범한 사람처럼 살고 싶어요.”

20년 전의 기억을 이젠 일상으로 덮고 살고 싶다는 최씨는 “그동안 나름대로 열심히 숨 쉴 틈 없이 앞만 보고 달려온 것 같다”며 “앞으로는 묻어뒀던 꿈도 다시 찾고, 사랑하는 딸과 즐거운 추억도 많이 만들며 개인적인 삶에 집중하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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