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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의 난 – 나무위키

고려에서 1270년 5월 ~ 1273년 4월까지 삼별초들이 일으킨 반란. 여몽전쟁의 마무리 격으로 여겨진다. 2. 전개 과정[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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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9/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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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의 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삼별초의 항쟁(三別抄의 亂, 1270년 ~ 1273년)은 고려-몽골 전쟁이 끝나고서 삼별초가 원나라에 대항해 일으킨 항쟁이다. 삼별초의 대몽항쟁(-對蒙抗爭)이나 삼별초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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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o.wikipedia.org

Date Published: 9/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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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삼별초(三別抄)는 몽골 침략기에 그에 대항하던 고려의 무장 세력이며, 원래는 하나의 단일한 단체가 아니었다. 뒤에 삼별초의 난을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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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o.wikipedia.org

Date Published: 9/2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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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항쟁(三別抄抗爭)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삼별초는 야별초(夜別抄)의 좌별초(左別抄)·우별초(右別抄)와 신의군(神義軍)으로 … 『고려사』등 전통시대 역사서에서는 삼별초의 난, 혹은 삼별초반란이라고 규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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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encykorea.aks.ac.kr

Date Published: 11/1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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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국의 불꽃 삼별초 항쟁 어떻게 평가할까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

반대파들은 격렬하게 저항을 시작했고, 해산 명령에 불복한 삼별초를 중심으로 난(저항)을 일으켰다. 삼별초는 진도 정부 1년, 제주정부 2년, 도합 3년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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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hankyung.com

Date Published: 7/2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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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의 난

삼별초의 난은 고려-몽골 전쟁이 끝나고서 삼별초가 원나라에 대항해 일으킨 항쟁이다. 삼별초의 대몽항쟁이나 삼별초의 항쟁으로 불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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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artsandculture.google.com

Date Published: 3/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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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의 대몽항쟁 – 우리역사넷

삼별초의 대몽항쟁. 국문; 원문; 해설; 참고자료. 배중손(裴仲孫, ?~1271)은 원종 때 여러 관직을 거쳐 장군에 이르렀다. (원종) 11년에 수도를 개경(開京)으로 다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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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contents.history.go.kr

Date Published: 11/2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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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의 항몽유적 – 우리역사넷

최초의 별초는 무신 정권이 도둑을 막기 위해 만든 야별초였어요. 작은 규모로 시작된 야별초는 그 수가 늘면서 좌별초와 우별초로 나뉘었고, 몽골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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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contents.history.go.kr

Date Published: 9/1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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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항쟁비 내용 | 강화군 문화관광>강화둘러보기>명소

그는 12·3세기 고려의 중요한 정치적 사건이었던 묘청의 난과 무인 난, 삼별초의 봉기를 고려 역사에 흐르는 일련의 정신적 맥락에서 주목하였으며, 이러한 관점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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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ganghwa.go.kr

Date Published: 11/1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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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삼별초 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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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0. 1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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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삼별초의 항쟁(三別抄의 亂, 1270년 ~ 1273년)은 고려-몽골 전쟁이 끝나고서 삼별초가 원나라에 대항해 일으킨 항쟁이다. 삼별초의 대몽항쟁(-對蒙抗爭)이나 삼별초의 항쟁(-抗爭)으로 불리기도 했다.

배경 [ 편집 ]

원래 삼별초는 봉기하기 전에는 고려 조정의 휘하에 있었다. 또한 삼별초는 최씨무신정권의 사병 집단이었고 군부독재를 유지하는 역할을 했다. 몽골이 고려를 침략하자 최씨무인정권은 1232년에 강화도로 천도하고서 몽골의 침략에 맞섰다. 하지만 기반이 허약한 고려는 잦은 반란에 직면한다. 반란 중 일부는 평정되었지만, 북부 지역의 반란 무리는 몽골로 이탈하고 그 영토는 제국 몽골에 병합되었다. 또한 최씨무인정권이 붕괴당하고 고려 원종과 원종에 기생한 일단의 문신을 비롯한 신료들은 제국 몽골에 항복하였다. 그 후 무인 정권에게서 정치권력을 빼앗은 원종은 결국 1270년(원종 11년) 삼별초를 해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배중손이 이끄는 강화도의 삼별초는 제국 몽골에 예속된 고려 원종의 조정에 반기를 들고 봉기하였다.[1][2]

경과 [ 편집 ]

애초 고려 무인 정권의 사병 집단이면서 대몽 항쟁에서 선봉에 섰던 삼별초는 고려와 몽고 사이의 강화(講和)와 굴복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개경 환도가 발표되자 즉각 반기를 들었다. 삼별초 지유(指諭) 배중손과 야별초(夜別抄) 지유 노영희(盧永禧) 등은 항쟁을 결의하였다. 배중손을 지도자로 추대하고 강화도와 육지와의 교통을 끊었으며, 왕족인 승화후 왕온[3]을 왕으로 추대하여 관부(官府)를 설치하고 관리를 임명하여 반몽정권(反蒙政權)을 수립했다.[1]

그러나 이탈자가 속출하여 경계가 어렵게 되자 함선 일 천여 척을 징발하여 강화도의 재화와 백성을 모두 싣고 강화도를 떠나 서해안 요지를 공략하면서 남하하여 진도에 이르렀다. 그곳에 불변하고 오래가는 근거지를 두고 용장사를 행궁으로 삼았다. 그 뒤 용장사 주변에 산성을 쌓고 관아도 세웠으며, 제법 도읍지의 면모를 갖추고 삼별초는 활발하고 힘차게 움직였고 고려의 유일한 정통 조정이라고 주장했으며[2] 당시 진도와 그 인근 지역에는 과거 최씨 무신정권이 소유한 농장이 그때까지도 대규모로 존재했다. 그것과 동시에 경상도와 전라도 지방의 세곡이 수도로 운송되는 길목에 진도가 있었고 이것은 세곡으로 운반되는 식량과 자금을 자체 군량으로 사용할 수 있는 요충지였다.[1]

또한 남해안과 각 도서·나주·장흥에서 동으로는 부산·김해·마산 등까지, 북으로는 전주에까지 출병하여 진압군을 격파하고 위세를 떨쳤으며, 그해 음력 11월에 이르러 삼별초군은 제주도까지 점령하였는 등[1] 1271년 초까지 진압군과의 전투에서 여러 차례 승리하면서 개경 조정을 위협하였다.

그러나 1271년(김진관 12년) 음력 5월 진압군이 세 방향(좌군·중군·우군)에서 진도를 침략한다. 삼별초는 진도의 관문인 벽파진에서 중군을 막는 데 주력했지만, 삼별초가 중군을 방어하는 동안 좌군과 우군이 배후와 측면에서 기습하였다.[1] 진도 정권이 수립된 지 9개월 만에 진도는 함락당하였다. 혼란에 빠진 삼별초는 순식간 무너졌고 배중손은 진도 남도진성에서 전사하였다. 그러나 1271년 말, 삼별초의 김통정 장군이 지휘하는 잔여 세력은 탐라(제주도)로 거점을 옮겨 계속 항쟁하였다. 탐라에서의 삼별초는 처음 1년간 자체 조직 정비와 방어 시설의 구축에 주력하였고 이후 약 반년간 전라도 연안에서 군사 활동을 전개하여 그 세력이 충청도와 경기도 연안까지 확대되었으며, 개경 근처까지 군사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몽골제국과 진압군의 침략으로 1273년 원종 14년 음력 4월 탐라에서 결사 항전하던 삼별초도 무너지고 말았다.

결과 [ 편집 ]

고려 [ 편집 ]

삼별초의 항쟁은 고려 대몽항전의 최후를 장식한 것으로서 그 후 고려는 14세기 중반까지 원나라의 간섭에 시달렸다. 그러나 당시 고려 백성 중에서 삼별초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다.

원나라 [ 편집 ]

몽골은 탐라총관부를 설치하여 1273년부터 1290년까지 탐라를 직할하고 다루가치를 두어 다스렸으며, 1277년(충렬왕 3)에는 목마장을 설치하여 자신들의 마필 수요를 충당했다.

평가 [ 편집 ]

오늘날 삼별초의 항쟁은 외세 침략에 완강히 대항한 국가 영웅으로 추앙받는다. 다만 무인 사병 집단의 저항 정도로만 보는 일부 시각도 존재한다. 1978년 삼별초의 항쟁을 기리려는 기념물이 제주도에 세워졌다. 진도에 있는 용장산성 같은 유적지는 관광지로 유지된다.

읽을거리 [ 편집 ]

각주 [ 편집 ]

참고 자료 [ 편집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삼별초(三別抄)는 몽골 침략기에 그에 대항하던 고려의 무장 세력이며, 원래는 하나의 단일한 단체가 아니었다. 뒤에 삼별초의 난을 일으킨다. 다른 반란군과는 달리 원래는 비정규군이었다가 정규군으로 재편된 군대였다. 제주도에서 궤멸하였다는 것이 통설이나, 일부 세력이 류큐 왕국(오키나와 지역)으로 향하였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1]

유래 [ 편집 ]

별초(別抄)는 몽골 침입 이전부터 등장하는데, 기존의 정규 군사조직 이외의 새로이 편성된 군대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후 별초는 지역별 별초, 신분별 별초 등으로 변화하게 되는데, 이는 고려 전기의 군사 조직을 대체하는 새로운 군사 조직의 등장을 의미한다. 첫 등장은 무신정권 초반기에 발생한 조위총이 일으킨 반란 때부터이다. 대몽항쟁과 관련하여서는 야별초 등이 주로 언급되지만, 지역이나 신분별 별초군 또한 대몽항쟁기에 활동한 모습이 확인된다.

삼별초는 처음에 최우가 도둑을 막기 위해 설치한 야별초(夜別抄)에서 유래한다. 야별초는 1219년 최우가 권력 보호를 위해 조직한 사병이었는데, 뒤에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는 정규군으로 편성되었으며, 도방의 직할 부대의 성격을 띠게 된다. 그에 따라 야별초는 다시 좌별초, 우별초로 나뉘었으며, 몽골에 포로로 잡혀갔다 돌아오거나 탈출한 이들로 이루어진 신의군을 포함하여 삼별초라 불렀다.[2] 삼별초는 주로 경찰·군사 등의 공적(公的) 임무를 띠었으나 무인 정권기의 특성상, 실질적으로는 최씨 무신정권의 사병에 가까운 조직이었다. 한편으로 그 지휘관에는 도령(都領)·지휘(指揮)·교위(校尉) 등의 무반관료들이 임명되어, 어디까지나 국가의 통제를 받는 군조직이기도 하였다.

대몽항쟁의 배경 [ 편집 ]

이 부분의 본문은 이 부분의 본문은 삼별초의 난 입니다.

1231년부터 몽골 침략이 시작되자 최씨 일가와 지배자들은 강화도로 피난을 떠난다. 1258년 김준이 최충헌의 증손 최의를 살해함으로써, 최씨 일가 독재를 종식시켰다.[2] 그러나 그 뒤에도 지배자는 김준에서 임연, 그리고 다시 임연의 아들 임유무로 무신 지배는 승계되었다. 이 와중에 원종은 결국 몽골에 굴복했고, 대세는 이미 몽골에 굴복한 원종 쪽으로 기울었다. 1270년 음력 5월 원나라에서 귀국길에 오른 원종은 1270년 개경으로의 환도를 단행하였다. 이는 고려가 몽골에 의한 격하를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즉, 원 간섭기의 시작이었다. 그러자 임유무는 이에 저항한다. 그러자 원종은 삼별초를 회유하여 임유무를 암살하여 100년간 왕권보다 더 강력한 권세를 휘두르던 무인시대는 완전히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2]

대몽항쟁 [ 편집 ]

그러나 결국 1270년 개경 환도가 임박하자 삼별초는 몽골에 굴복한 왕에게 운명을 맡길 수 없었고, 내부에서 동요하기 시작했다. 결국 원종은 삼별초에게 해산령을 내리고 그들의 명단을 거둬오도록 지시하였다. 이 연명부가 몽골군의 수중에 넘어가면 삼별초는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삼별초 내에서 이에 대한 반감이 컸다. 마침내 1270년 음력 6월 초, 개경 환도를 앞둔 시점에서 삼별초의 지도자였던 배중손과 노영희 등 삼별초 지휘자들은 항전을 결정한다.[2]

삼별초는 왕족 승화후 왕온을 추대하여 왕으로 삼고, 강화도의 거의 모든 재산과 사람들을 태운 대 선단을 이끌고 진도로 이동했다. 이 과정에서 강화도의 대부분의 시설은 불태워졌다. 당시 진도와 그 인근 지역에는 과거 최씨 정권이 소유한 대규모의 농장이 그때까지도 존재하였다. 동시에 진도는 경상도와 전라도 지방의 세곡이 서울로 운송되는 길목에 속해 있었다. 이는 세곡으로 운반되는 식량과 자금을 자체 군량으로 쓰는 동시에 군사적인 요충지였다.[2]

진도에 도착한 삼별초는 ‘용장사’라는 절을 임시 궁궐로 삼았다. 그리고 용장사 주변에 산성을 쌓고 관아도 세웠으며, 이를 기반으로 진도는 제법 도읍지의 면모를 갖추었다. 진압군은 속수무책이었던 반면, 이들은 남해안 일대를 석권하고 해상력을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정부를 건설한다.[2] 그들은 또 고려의 정통 정부임을 자처하면서 일본에 사절을 교환하는 등의 외교활동도 하였다. 1270년 음력 11월 이르러 삼별초군은 제주도까지 점령하였다.[2]

결과 [ 편집 ]

1271년 음력 5월 몽골에 의해 진압군이 조직되어 좌군·중군·우군, 즉 세 방향으로 나눠서 진도를 공격해왔다. 삼별초는 진도의 관문이었던 벽파진에서 중군을 막는 데 주력하였다. 그러나 삼별초가 중군으로 들어오는 적을 막는 데 주력하는 동안, 그 틈을 타서 진압군의 좌군과 우군이 배후와 측면에서 기습 공격을 해왔고, 성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지휘자 배중손과 승화후 온은 살해되고 혼란에 빠진 삼별초는 흩어져 각기 피신하였다.

살아남은 삼별초 병사들은 김통정의 지휘 아래 혼란을 수습하고 제주도로 후퇴한다. 그 후 제주도에 상당한 규모의 외성을 건립하는 등 여몽 연합군에 항거하며 일진일퇴가 거듭되었다. 그러던 중 1273년 음력 4월, 진압군 1만여 명이 제주도에 상륙하고, 삼별초는 힘없이 무너졌다. 지휘자 김통정은 산 속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서 4년에 걸친 삼별초의 항전은 막을 내린다.[2]

일본과의 관계 [ 편집 ]

(원문) 一 以前狀【文永五年】揚蒙古之德 今度狀【文永八年】韋毳者無遠慮云云如何

一 文永五年狀書年號 今度不書年號事

一 以前狀歸蒙古之德成君臣之禮云云 今狀遷宅江華近四十年 被髮左袵聖賢所惡 仍又遷都珍嶋事

一 今度狀端不從成戰之思也 奧爲蒙所使云云 前後相違如何

一 漂風人護送事

一 屯金海府之兵 先二十許人送日本國事

一 我本朝統合三韓事

一 安寧社稷 待天時事

一 請胡騎數萬兵事

一 達兇疏 許垂寬宥事

一 奉贄事

一 貴朝遣使問訊事

(해석) 이전【분에이(文永) 5년(1268년, 원종 9년)】의 장(狀)에서는 몽골의 덕을 찬양했는데, 이번 서장【분에이 8년(1271년, 원종 11년)】의 서장에서는 ‘위취자(韋毳者, 짐승 가죽 걸친 놈)들은 멀리 내다보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한다. 어찌된 일인가?

분에이 5년의 서장에서는 몽골 연호를 썼는데 이번에는 쓰지 않은 일.

전의 서장에서는 ‘몽골의 덕에 귀부하여 군신의 예를 이루었다’ 하였는데, 이번에는 ‘강화로 천도한 지 40여 년’이나 되었다고 하고 ‘피발좌임(被髮左袵)은 성현이 꺼린 것’이라 하고 ‘또 진도(珍嶋)로 천도했다’는 일.

이번 서장 앞부분에서는 (몽골을) 따르지 않아 전쟁이 있게 된 까닭을 쓰고, 뒷부분에서는 ‘몽골이 고려를 부렸다’고 하니 전후가 서로 다르다. 어찌된 일인가?

‘풍랑으로 표류된 자들을 호송한다’고 한 일.

‘김해부의 병사 20여 명을 먼저 일본국으로 보낸다’고 한 일. [3]

‘우리 본조(고려)가 삼한을 통합했다’고 한 일.

‘사직을 안녕케 하면서 하늘의 때를 기다린다’고 한 일.

‘수만의 호기(胡騎)를 청한다’ [4] 는 일.

는 일. ‘흉악한 상소가 도착하더라도 너그러이 용서해 달라’ 한 일.

‘예물을 드린다’고 한 일.

‘귀조(일본)가 사신을 보내 방문하라’ 한 일.

「고려첩장불심조조」 『한국상대고문서자료집성』(이기백, 일지사, 1987),

일본의 도쿄대학 사료편찬소에 소장되어 있는 《고려첩장 불심조조》(高麗牒状不審条々)라는 제목의 문건은 당시 일본측이 고려로부터 받은 문건 가운데 앞서 고려로부터 전해진 국서와는 내용이 다른 점에 대해서 메모해 둔 것인데, 일본 가마쿠라 시대의 구게(公家) 요시다 쓰네나가(吉田経長, 1239~1309)의 일기인 《길속기》(吉續記)에는 분에이(文永) 8년(1271년) 9월 5일에 고려로부터 첩장이 전해졌다[5]고 하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진도가 함락된 이후의 시점에서 일본에 전달된 그 첩장의 내용은 앞서의 국서에서 몽골의 위엄과 덕을 찬양하고 있던 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실제 고려에서는 원종 8년인 분에이 4년(1267년) 쿠빌라이 칸의 요구에 따라 일본으로 하여금 몽골에 사신을 파견할 것을 권하는 국서를 보낸 적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 일본은 고려로부터 온 국서의 수령을 거부했고, 결국 고려 사신들은 다자이후에 머무르다 이듬해에 귀국하였다. 이때 보낸 문서의 내용이 일본 나라의 동대사(東大寺) 존승원(尊勝院) 소장 문서 중 「조복이조원적초」(調伏異朝怨敵抄)에 필사되어 전한다. 그 내용은 몽골 황제의 교화가 미치지 않는 나라가 없다는 것을 천하에 알리려 하니 통호하길 권유한다는 것이었다.

분에이 4년에 고려로부터 전해졌던 첩장과는 달리 분에이 8년(1271년) 일본측에 접수되었던 또 하나의 고려첩장의 원본은 전해지지 않지만, 대략적인 내용은 《고려첩장 불심조조》라는 문서를 통해 몽골의 덕을 찬양하던 이전의 고려의 국서와는 정반대로 위취(韋毳)니 피발좌임(被髮左袵)이니 하는 말로 몽골을 비난하며 또한 ‘진도’로 천도하였음을 알리고 일본에 병사를 청하는 내용이었던 것을 알 수 있으며, 분에이 8년(1271년) 9월 시점에서 이러한 내용의 국서를 일본에 보낼 세력은 당시 진도를 거점으로 항쟁하던 삼별초 세력임이 유력하다. 당시 삼별초는 진도 정부가 고려의 ‘정통’ 정부임을 강조하며 동시에 몽골 침략의 위기를 일본과 공동으로 타개해 나갈 것을 소망하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6][7] 이때 고려첩장을 가지고 일본으로 파견되었던 진도 삼별초의 사신은 진도 정부가 붕괴된 이후에도 한동안 외교적 활동을 전개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1271년 9월 19일에 일본에 왔던 원의 사신 조양필(趙良弼)과 관련한 기록에서 고려담라(高麗聃羅) 즉 ‘탐라’의 삼별초가 일본에 도착한 조양필의 사행을 방해하려 하였다는 기록이나[8] 도단공(徒單公) 리(履)가 찬하였다는 석각 사료 《찬황복현기》에서 마찬가지로 조양필의 공적을 찬양하는 가운데 “반적 탐라가 (조양필의) 길을 막았다.”는 기록에서 암시된다.

기타 정보 [ 편집 ]

역대 지휘자 [ 편집 ]

배중손 : (임기 : 1233년 ~ 1271년) 배중손은 전 신의군의 우두머리로 삼별초에서도 지휘자를 맡아 삼별초를 총지휘했다. 이후 새 나라를 세우기 위해 왕족인 온왕을 추대한다.

온왕 : (재위 : 1270년 ~ 1271년) 삼별초가 내세운 국왕으로, 배중손에게 추대 받아 왕위에 올랐다. 몽고에 저항하기 위해 강화도의 본산을 진도로 옮기면서 많은 노력을 했고, 진압군을 번번이 패퇴시키는 등 전적을 남겼으나 진도 전투로 장수 배중손이 전장에서 죽으면서 체포되어 결국 처형당했다.

김통정 : (임기 : 1271년 ~ 1273년) 진도 전투에서 살아 남은 군사들을 총지휘했다. 탐라로 이동하여, 성을 쌓는 끈질김에 여몽의 포기가 다가오고 삼별초의 승리가 코앞으로 다가왔으나 원나라의 일본 정벌 정책으로 인해 원 세조는 탐라를 차지하려 했다. 그리하여 1만 병력의 진압군이 쳐들어와 결국 삼별초의 항전은 막을 내린다.

고려 군대 계보 [ 편집 ]

좌별초 → 신의군┐

우별초 ────┴→ 삼별초

같이 보기 [ 편집 ]

각주 [ 편집 ]

삼별초항쟁(三別抄抗爭)

1232년(고종 19) 최씨정권이 정부를 이끌고 강화도로 천도한 뒤 대몽항전의 전 시기를 통해 삼별초는 가장 강력한 전투병력이었다. 당시의 군사력으로서는 2군6위(二軍六衛)의 조직이 형식상 남아 있었고, 또 최씨정권의 순수한 사병집단인 도방(都房)의 병력도 존재했으나, 전투병력으로서 가장 위력을 발휘한 것은 삼별초였다.

주 01)를 수비하는 방어의 책임 뿐만 아니라, 몽고군의 침입이 있을 때는 본토로 파견되어 몽고군과 싸워 큰 전과를 올렸다. 또한 강화도에서 정변이 있을 때마다 삼별초는 집정무신의 등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최의(崔竩)를 죽여 최씨정권을 타도한 김준(金俊)과 김준을 살해하여 마지막 집정무신이 된 임연(林衍)이 모두 삼별초의 협력을 얻어 정권을 잡는 데 성공하였다. 삼별초는 강도(江都) 를 수비하는 방어의 책임 뿐만 아니라, 몽고군의 침입이 있을 때는 본토로 파견되어 몽고군과 싸워 큰 전과를 올렸다. 또한 강화도에서 정변이 있을 때마다 삼별초는 집정무신의 등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최의(崔竩)를 죽여 최씨정권을 타도한 김준(金俊)과 김준을 살해하여 마지막 집정무신이 된 임연(林衍)이 모두 삼별초의 협력을 얻어 정권을 잡는 데 성공하였다.

삼별초는 권신의 정치권력과 깊이 유착되어 있어 사병적 성격이 농후하였다. 그러나 국가 재정에 의해 양성되고 국고에서 녹봉을 받는 등 권신의 사병과는 구별되었고 몽고와의 항전에 주요한 군사력을 제공하였다. 더욱이 삼별초 가운데 신의군은 전쟁 중에 적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돌아온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반몽적(反蒙的) 성격이 다른 어느 군대보다 강했다.

주 02)이 부왕을 대신해 몽고에 입조(入朝)함으로써 30년간 계속된 몽고와의 전쟁은 종식되고 화평이 수복되었다. 이때 최씨정권은 타도되어 일단 왕정이 복구된 외형적 형세였으나, 정부의 실권을 장악한 것은 여전히 무인들이었다. 이러한 무인의 권력은 1270년(원종 11)까지 존속되었으며, 10여 년간의 고려의 내부 정세는 매우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1259년 고려의 태자 전(倎) 이 부왕을 대신해 몽고에 입조(入朝)함으로써 30년간 계속된 몽고와의 전쟁은 종식되고 화평이 수복되었다. 이때 최씨정권은 타도되어 일단 왕정이 복구된 외형적 형세였으나, 정부의 실권을 장악한 것은 여전히 무인들이었다. 이러한 무인의 권력은 1270년(원종 11)까지 존속되었으며, 10여 년간의 고려의 내부 정세는 매우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실권을 잡은 무인들은 출륙환도를 거부하면서 경우에 따라서는 결전도 단행하겠다는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자 원종은 몽고에 접근하여 무인들의 세력을 억제하고 출륙환도를 단행함으로써 왕정복구(王政復舊)를 확립하려고 노력하였고, 몽고는 배후에서 고려 왕실을 조종해 반몽고세력을 배제하려고 획책하였다.

1270년임유무(林惟茂)가 살해되어 무인정권이 종식되자 원종은 몽고의 지시에 따라 출륙환도를 단행하였다. 삼별초의 입장에서 볼 때 세력 근거지이며 항전의 군사기지인 강화도를 철수해 개경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멸망을 자초하는 것이었다. 당시 개경은 몽고군에 호위된 국왕이 장악하고 있었고, 몽고 두련가(頭輦哥)·몽가독(蒙哥篤) 장군이 거느린 병력이 주둔해 있었다. 그러므로 환도는 삼별초의 해체를 의미하였다.

삼별초가 출륙환도의 방침에 불응하자 개경에 도착한 원종은 강화에 장군 김지저를 파견하여 삼별초를 혁파하고 삼별초의 명부(名簿)를 압수하였다. 지금까지 삼별초는 무인정권이라는 정치권력의 중심과 연결하여 몽고와의 항전에 참여해왔다. 그러나 이제 무인정권이 붕괴하고 그 정치권력이 변동하여 몽고와 완전히 결탁함으로써 그에 대항하여 싸워야 하는 입장으로 바뀌게 되었다.

특히 삼별초의 명부를 압수당한 상황에서 명부가 몽고군에 넘어가면 보복을 각오해야만 했다. 이에 장군 배중손(裵仲孫)이 야별초지유 노영희(盧永禧) 등을 설득하여 일단의 삼별초를 규합해서 원종을 폐하고, 왕족인 승화후 온(承化侯 溫)을 새 국왕으로 옹립해 1270년 6월 봉기하였다.

‘구국의 불꽃’ 삼별초 항쟁, 어떻게 평가할까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오랫동안 대륙과 중국이라는 강대국들과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는 지정학적 숙명을 가진 한민족. 우리는 승리·굴복·공존 등 세가지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만주를 잃고 한반도로 축소된 후에는 굴복과 공존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가 많았다. 고려는 등거리 외교와 활발한 무역을 바탕으로 분열된 중국과 공존해 왔다. 하지만 몽골의 등장으로 공존과 굴복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고, 정부는 강화로 천도했다. 고려의 천도, 항전인가 도피인가고려의 강화 천도 사건은 다시 평가해 볼 필요가 있다. 고려 정부의 정통성 문제, 우리가 외세를 대하는 방식 등을 통해 역사의 교훈을 얻기 위해서다. 고려와 몽골의 갈등은 1225년에 사신으로 온 저고여의 죽음으로 시작됐다. 1231년에 1차 침입이 있었다. 이후 몽골은 내정을 간섭하고, 압박을 가해 무신정권은 천도를 제의했다. 당시 화의론을 주장하는 반대론자와 찬성론자 간의 격론이 있었다. 대부분은 반대했으나 실권자인 최우의 힘으로 고종과 정부는 1232년 7월 6일에 강화로 천도했다. 출륙하는 1270년까지 38년 동안 몽골은 고려를 총 9차례 공격했다. 강화천도를 몽골의 고압적인 태도와 과중한 경제적 보상, 군사의 파병과 군비의 조달, 그리고 정치적인 간섭 때문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명분보다 더 중요한 실질적인 이유가 있었다.강화 천도의 실질적인 이유와 배경 첫째, 강화도는 수전능력이 약한 몽골의 공격을 방어하며 장기간 항전하는 데 유리하다. 조석간만의 차가 크고, 조류가 복잡해서 외부세력이 근접하기 힘든 지형이라는 주장이 있다. 실제로 몽골군은 배를 만들어 강도를 공격하려는 시도를 몇 번 했으나 효과적이지 못했다. (윤용혁, 《고려대몽항쟁사 연구》) 하지만 그 주장은 일부만 맞을 뿐이다. 강화수로는 폭이 매우 좁고, 밀물과 썰물을 이용할 수 있어 도강이 가능하다. 무엇보다도 몽골군은 절대 수전에 약하지 않다. 칭기즈칸의 태생과 활동, 죽음의 사연이 담긴 무대는 바이칼호 일대이고, 몽골인들의 고향은 훌룬호와 보이르호 일대이다. 몽골군은 서쪽으로 진군하면서 발하슈호·카스피해·흑해·볼가강 등을 건넜다. 더구나 그들은 최고의 기술자군을 거느린 다국적군대였다. 더욱이 유목민의 이동성(mobility)은 언제든 해양민의 이동성(mobility)으로 즉시 전환할 수 있다. 이 평범한 사실을 알아챈 서양인들은 디지털문명이 시작되는 21세기의 첫날 ‘타임(TIME)’지의 표지 모델로 칭기즈칸의 사진을 실은 것이다. 둘째, 강화도는 경제적인 타격을 덜 받으면서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고려의 국가 재정은 대부분 초기에 설치한 13개 조창을 활용한 시스템으로 충당됐다. 납부된 세곡들은 일부가 한강 수로망을 이용했고, 대부분은 서해연안 해로를 따라 개경까지 운반됐다. 따라서 개경의 입구인 강화도는 조세시스템을 유지하고, 물자를 공급받는데 큰 문제가 없었다. 강도정부의 경제적인 능력은 궁궐·내성·중성·외성 등의 방어체제는 물론이고, 팔만대장경의 제작이라는 어마어마한 국가사업을 벌인 데서도 증명된다.셋째, 강화도는 해양능력이 강한 고려에게는 외교에 유리했다. 강화도는 다양한 항로를 이용해서 동아시아의 어떤 지역과도 방해받지 않고 교류할 수 있었다. 특히 몽골의 적대국인 남송과 무역, 우호관계 등을 추진해서 몽골에게 외교적인 부담을 주고 군사력을 분산시키는 데 유리했다. 실제로 송나라의 상인들이 두 나라 사이를 오고가면서 정치적인 역할과 내정정탐을 했고, 그 사실을 안 몽골은 항의와 압박을 가했다. 넷째, 무신정권은 몽골 제국이 추진한 정복전쟁의 구도를 파악하고, 내부 혼란을 활용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몽골의 대고려전은 세계 패권 전략과 정복전쟁의 일부였으므로 공격 시기와 규모 등의 판단과 계획은 처한 상황과 전체 계획에 따라 유동적이었다. 그래서 40여 년 동안이나 약체의 고려를 전면적으로 공격하지 않았다. 무신정권은 이러한 몽골 제국의 정책과 군사전략의 특성을 간파하고, 현실적인 한계를 유효적절하게 활용했다. 이러한 추론은 몽골의 정복과정과 국제관계 상황을 보면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1206년에 등장한 칭기즈칸은 1207년에 서하를 공격한 후에 강국인 금나라를 1211년부터 공격했고, 1215년에는 수도인 연경(북경)을 함락하고, 이어 고려를 침입했다. 몽골은 1219년에는 중앙아시아 서쪽의 호라즘 왕국을 점령했고, 1221년에는 헝가리와 폴란드를 침공했다. 1227년에 칭기즈칸이 전사하자, 뒤를 이은 오고타이 대칸은 1229년에 금나라를 공격했다. 1231년(고종 18) 8월에는 사리타이(撒禮塔)가 고려를 침공했다가, 강화로 천도한 해에 용인전투에서 전사했다. 몽골은 1233년에 만주를 장악했고, 1234년 1월에는 금을 멸망시켰다. 이후 1235년부터 남송을 공략했다. 또 1236년에 유럽원정을 재개해 발트해까지 진격했고, 폴란드 왕국을 공격했다. 1237년부터는 러시아의 공국들을 공격해 1240년부터는 러시아 전토를 지배했다. 1241년 4월에는 헝가리군을 완파하고, 유럽 점령의 마지막 순간에 오고타이 칸의 죽음으로 회군했다. 그러나 1252년에는 아랍의 압바스 왕조를 멸망시키면서 이란 이라크 지역을 점령했다. 1258년에는 바그다드를 점령하고 다음 해에 ‘일한국(Il Khanate)’을 세웠다. 유라시아 세계를 뒤집어 놓은 이 거대한 대전투들은 모두 강도정부 시절에 발생했다. 거대한 전쟁 속에서 강력한 적들과 교전하는 몽골에 고려는 금나라와 송나라의 배후세력이라는 지정학적 가치가 있을 뿐, 군사전략상으로는 우선순위에서 밀려 있었다. 그러므로 몽골군대가 고려와 벌인 9번의 전투는 정부 없는 나라를 약탈하는 수준이지, 본격적인 전쟁은 아니었다. 더구나 몽골은 1259년에 몽케 대칸이 남송을 원정하는 도중에 죽자, 대칸 계승 전이라는 내분과 혼란에 빠졌다. 결국 동생인 쿠빌라이 칸이 뒤를 잇고, 1271년에 국호를 원으로 개칭했다. 그 과정에서 고려는 쿠빌라이의 편을 들어 외교적인 성공을 거뒀다고 본다. 그 결과 유리한 조건으로 1270년에 개경으로 돌아가고 항복, 쿠발라이의 부마국이 되었다. 쿠빌라이 칸은 정복사업이 큰 틀 속에서 완료, 국내 상황이 안정되자 송나라 점령에 주력했다. 강도 정부에 대한 또 다른 평가 무신정권이 몽골의 전략, 전술적인 약점을 간파하고, 강화도가 가진 다양한 이점을 고려해 장기간 항전한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정권 차원이 아닌 민족 백성의 관점에서 또 다른 평가가 필요하다. 그들은 정말 백성들과 나라를 위해 항전할 목적으로 강도로 천도한 것일까? 정부에서 버림받고 맨 무장 상태인 백성들이 9차에 걸쳐 공격받으면서 처절하게 유린당했을 때 강도정부는 보호 조치와 공동작전 등을 실시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충주에서 자발적으로 참여해 승리를 거둔 관노들을 죄인으로 몰기도 했었다. 군대를 양성하고, 함선을 건조하면서 해전 능력을 강화하는 전쟁준비를 게을리했고, 주변의 여러 나라와 외교관계를 맺어 생존을 모색하는 작업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내버린 백성들에게서 세금을 받아 궁궐을 세우고, 방어체제를 구축해 수성전에 전념했다. 백성들을 강화도로 소환해 저택과 별장, 거대한 사원을 세웠으며, 팔만대장경을 제작했다. 심지어는 불필요한 행사들을 하며 사치 생활을 누렸다. 그렇다면 강화천도는 나라와 백성을 위한 항전의 성격도 있지만, 무신정권과 귀족, 불교 세력을 위한 도피라는 비중이 더 컸음을 부인할 수 없다. 고려는 원나라의 반 지배상태로 들어가 자주를 상실했다. 친원파의 준동으로 영토가 분할됐고, 내분이 발생했다. 결국은 삼별초 진압과 일본공격에 동원돼 엄청난 국력과 인적, 물적인 손실을 입었다. 칭기즈칸과 몽골에 대한 또 다른 생각 칭기즈칸은 역사적으로 위대하고 몽골제국은 인류문화 발전에 공을 세운 나라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전쟁 수행방식, 반인륜적 행위 등이란 측면에서 비판할 필요가 있다. 특히 우리의 생존과 생활에 막대한 피해를 준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몽골의 선조인 선비족이 부여와 매우 가깝고 원(고)조선의 방계종족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를 정도 이상으로 숭배하고, 마치 몽골이 형제국처럼 대한 것으로 착각하는 우를 계속 범한다면, 식민지 백성들의 자기기만과 환상이라는 잔재를 탈각하지 못할 것이다. 고려, 군사력을 갖추고, 국제질서의 상황을 간파해가면서 유연성과 배짱을 겸한 무신정권의 외교전략은 현실감이 부족한 지금의 우리에게 교훈을 줄 수 있다. 윤명철 <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

이 사료는 몽골과 강화가 이루어진 후에도 몽골에 끝까지 저항하였던 삼별초(三別抄)와 관련된 것이다. 삼별초는 몽골 침략에 맞서 강화도⋅진도⋅제주도로 이동하며 항쟁하였던 민족적인 성격을 갖고 있으며 항쟁 과정에서 일반 백성들의 도움을 받기도 했는데, 이 사료는 그러한 모습을 잘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삼별초는 처음에 도적을 없애고 폭행을 금지시키는 등 치안 유지를 위해 최우(崔瑀, ?~1249)가 야별초(夜別抄)라는 이름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도적’에는 당시 조정에 항거하여 각지에서 일어난 백성들도 포함되었다. 즉 야별초가 정권의 유지 수단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후 지방에 야별초를 파견하면서 점차 그 수가 늘어나 좌별초와 우별초로 나뉘었다. 여기에 몽골과의 항전에서 포로로 잡혔다 탈출한 장정들로 신의군(神義軍)을 조직하여 더하면서 이를 삼별초라 부르게 되었다.

삼별초는 대표적인 항몽 부대이면서 최우의 사병적 성격도 강하였다. 삼별초 등의 끈질긴 저항에도 몽골의 침입을 막기 어렵자, 고려 조정은 원종(元宗, 재위 1260~1274) 때 몽골과 강화를 추진하였다. 이때 몽골은 강화도에서 나와 개경으로 돌아올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고, 원종은 이를 수락하고 환도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삼별초는 이에 불복하고 난을 일으켰다. 배중손(裴仲孫, ?~1271)과 야별초의 지유 노영희(盧永禧) 등은 정부와 몽골에 대항하면서 왕족인 승화후(承化侯) 온(溫)을 국왕으로 받들고 새 정부를 수립하였다. 이러한 삼별초의 항쟁은 무신 정권의 잔여 세력이 왕권 강화와 친정 체제 구축을 시도하는 원종에 대한 도전이었다.

삼별초군은 본거지를 남해의 요충지인 진도로 옮기고 항몽 투쟁과 반정부적 태도를 분명히 하였다. 그들은 봉기하면서 “몽골군이 크게 이르러 인민을 살육하고 있다.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돕고자 하거든 모두 구정(毬庭)에 모이라”고 외쳤다. 당시의 모습을 이승휴(李承休, 1224~1300)가 “군(群), 불령(不逞), 강량(强梁)의 무리가 까마귀 떼같이 화도(花都), 즉 강화도에 모여들었고, 이들이 남하하여 진도에 웅거하면서 여러 주현을 병탄하므로 사태가 난처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고 묘사한 것으로 보아, 유망 농민층이 대거 참여하였고 이들의 지지를 받으며 삼별초의 항쟁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강화도의 삼별초군은 1000여 척의 함선을 타고 진도로 이동하였다. 이후 전라도와 경상도 일원을 제압하고 거제도와 제주도까지 장악하는 한편 남방 주민들의 호응을 얻어 한때는 크게 세력을 떨치기도 하였다.

한편 삼별초가 봉기할 당시 이를 진압할 병력조차 제대로 없었던 개경 조정은 몽골에 원군을 요청하였다. 1270년(원종 11년) 11월 김방경(金方慶, 1212~1300) 등이 이끄는 여⋅몽 연합군이 진도로 진출하였다가 삼별초의 반격으로 대패하였다. 그러나 1271년(원종 12년) 5월 상당수 삼별초 병력이 남해안 일대에 나가 있는 사이에 개경의 정부군과 몽골군이 기습적으로 진도에 상륙하여 공격을 감행하였다. 공격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삼별초군이 제대로 저항하지도 못하는 사이 진도성은 함락되었고, 승화후 온과 배중손은 이때 전사하였다. 이후 진도를 잃은 삼별초의 남은 무리들은 다시 제주도로 본거지를 옮겨 김통정(金通精, ?~1273)을 중심으로 계속 항쟁하였다.

1272년(원종 13년)부터 삼별초가 다시 활동을 재개하자 1273년(원종 14년) 2월 여⋅몽 연합군 1만여 명이 제주의 삼별초군을 포위하고 공격하였다. 이에 삼별초군은 끝까지 저항하였으나, 김통정은 산속으로 도피하였다가 죽고 나머지도 모두 전사하거나 포로가 됨으로써 3년여에 걸친 항쟁은 종식되었다.

몽골과 끝까지 싸운 삼별초의 항몽유적

<용장산성(전남 진도군)>

진도군청

“조정이 몽골에 항복하고 개경으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개경으로 돌아가면 우리 삼별초는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치욕스런 항복을 하느니 함께 끝까지 싸워봅시다.”

삼별초는 고려 때 권력을 잡은 무신들이 이끌던 군대를 말해요. 고려가 몽골에 항복하자 삼별초는 이를 따를 수 없었어요. 그리고 삼별초를 따르는 백성과 군사들과 함께 진도로 근거지를 옮겨 몽골군과 계속 맞서 싸웠어요. 삼별초가 몽골에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싸운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들의 항전은 성공했을까요?

삼별초, 몽골에 맞서 싸우다

몽골이 고려를 침략해 왔어요. 강력한 몽골군에 맞서 고려 조정은 수도를 강화도로 옮겨가며 끝까지 맞서 싸웠어요. 오랜 기간 몽골과 맞서 싸우던 고려 조정은 백성들이 많은 피해를 입자 어쩔 수 없이 항복하였어요. 그리고 수도를 다시 개경으로 옮겼어요.

고려 조정이 몽골에 항복하자 삼별초가 반대하고 나섰어요. 삼별초는 처음에 무신들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사병 집단을 말해요. 무신들이 난을 일으켜 권력을 잡고 나라를 통치하면서 삼별초는 도둑을 잡는 경찰 역할과 외적과 맞서 싸우는 특수부대 역할을 했어요.

몽골과의 전쟁에서 가장 큰 역할을 했던 삼별초에게 개경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죽는 것과 같았어요. 특히 몽골군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돌아와 삼별초가 된 병사들은 누구보다 강하게 반발하였어요.

“강화도로 몽골군이 쳐들어왔다.”

“몽골군이 강화도의 백성과 삼별초를 모두 죽일 것이오.”

삼별초를 이끌던 배중손은 거짓 소문을 퍼트리고 정변을 일으켜 강화도를 점령하였어요. 그리고 1천여 척의 배를 모아 따르는 무리와 함께 진도로 향했어요. 한반도 남쪽 끝에 있던 진도는 제주도와 거제도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큰 섬이에요.

강화도와 마찬가지로 섬 주변의 물살이 빨라 방어에 유리했고, 경상도와 전라도 지역에 접근하기에 편리했어요. 진도에 도착한 배중손은 성을 쌓고 궁을 지어 새로운 고려를 만들려고 했어요. 임금도 새로 모셨어요.

삼별초가 몽골에 저항하며 진도에 자리를 잡자 많은 백성이 따랐어요. 몽골에 항복할 경우 무자비하게 살육될 것이라는 소문 때문이었죠. 백성들의 지지를 받은 삼별초는 남해안의 여러 지역을 차지하고 고려․몽골 연합군과 맞서 싸웠어요.

삼별초를 없애기 위해 고려·몽골 연합군은 오랜 시간 군사를 모으고, 수군을 키웠어요. 연합군에 맞서 삼별초는 목숨을 걸고 싸웠지만 결국 힘에 밀려 진도 용장산성을 빼앗기고 말았어요. 삼별초를 따르던 많은 백성도 이때 목숨을 잃거나 포로가 되었어요.

진도를 빼앗긴 삼별초는 어쩔 수 없이 남은 군사와 백성들을 모아 제주도를 향했어요. 삼별초는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더 안전한 곳이 필요했어요. 제주도는 삼별초가 진도에 자리 잡을 때 이미 군대를 보내 점령한 곳이었어요.

제주도에 도착한 삼별초는 항파두리성을 쌓고, 고려·몽골 연합군에 맞섰어요. 길이가 대략 15㎞이었던 항파두리성은 외성과 내성의 이중성으로 쌓았어요. 외성은 흙으로 성을 쌓았고, 내성은 사각형 모양으로 돌을 쌓아 만들었어요.

<항파두리성 복원 모습>

문화재청

삼별초는 항파두리성을 쌓으며 고려·몽골 연합군의 공격을 준비하였어요. 그러나 진도에서 대부분의 군사를 잃은 삼별초에게 많은 여유가 없었어요. 제주도에 발을 내린지 채 일 년이 지나지 않아 고려·몽골 연합군은 다시 공격해 왔어요. 힘이 다한 삼별초는 끝내 패하고 말았어요.

새로운 고려를 볼 수 있는 진도 용장산성

강강화도를 떠난 삼별초는 진도의 벽파진에 내렸어요. 벽파진은 예부터 육지와 연결된 나루터가 있던 곳이에요. 조선 시대에는 이순신 장군이 명량대첩을 준비하던 곳이었어요. 물살이 빠른 울돌목에서 벽파진은 배를 안전하게 정박시킬 수 있는 곳이었어요.

벽파진에 내린 삼별초는 산의 능선을 따라 만들어진 용장산성을 근거지로 삼았어요. 성을 다시 정비하고, 가장 깊숙한 곳에는 개경의 만월대와 비슷하게 단을 쌓아 궁궐을 지었어요. 그리고 강화도에서 새로 모신 임금을 중심으로 새로운 조정을 만들었어요.

<용장산성>

진도군청

삼별초는 몽골에 항복하지 않은 고려를 내세웠어요. 그 뜻을 따라 진도를 비롯해 전라도 해안 지역과 멀리는 경상도의 남해와 거제도의 백성들에게도 호응을 얻었어요. 삼별초는 남해안 지역을 장악하며 해상왕국으로서의 위세를 널리 떨쳤어요. 멀리 일본에 국서를 보내 자신들이 고려의 정통을 이었음을 알리기도 했어요.

고려 조정과 몽골은 자신들을 부정하는 삼별초를 가만히 둘 수 없었어요. 몇 차례의 공격에도 삼별초가 꺾이지 않자 고려․몽골 연합군은 100여 척의 함선과 많은 군사를 준비하여 용장산성의 삼별초를 공격하였어요. 연합군은 군대를 세 개로 나누어 용장산성을 포위하여 공격하였어요.

<용장산성에서 몽골에 항전한 삼별초>

수적으로 우세한 연합군의 기습 공격에 밀려 삼별초는 크게 패하고 말았어요. 삼별초가 새로이 세운 임금도 몽골군에 잡혀 목숨을 잃었고, 배중손도 도망을 가며 끝까지 싸우다 목숨을 잃었어요. 진도에 세워진 또 다른 고려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어요.

삼별초의 마지막 모습을 간직한 한라산

<항파두리성 내성터 발굴 모습(제주 제주시)>

1273년, 160척의 배에 약 1만 명의 고려·몽골 연합군이 제주도에 상륙하였어요. 함덕에서 연합군과 삼별초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어요. 항파두리성을 포위한 연합군은 화약 무기를 사용하기도 했어요. 연합군의 힘에 밀려 삼별초는 결국 패하고 말았어요.

항파두리성을 탈출한 70여 명의 삼별초는 붉은오름에 올라 끝까지 싸우다 모두 전사하였어요. 삼별초를 이끌던 김통정도 한라산에 들어가 끝내 자결하고 말았어요. 세계 최강의 몽골군에 맞서 3년 가까이 항전한 삼별초와 백성들의 의지가 한라산과 오름 곳곳에 담겨 있어요.

역사 속 작은 이야기: 별초는 특수부대?

고려 숙종 때 윤관은 별무반이란 특수부대를 만들어 여진족을 정벌하였어요. 기병인 신기군, 보병인 신보군, 스님들로 이루어진 항마군 등 각기 역할을 나눠 조직한 별무반은 여진을 정벌하고 동북 9성을 쌓았어요. 이후 여진 정벌의 필요성이 사라지자 별무반도 해체되었어요.

별무반은 특수 임무를 위해 임시로 만든 특수부대였어요. 여진 정벌 이후 별무반은 해체되었으나 유사한 성격의 부대가 무신 정권이 세워진 후 다시 만들었는데 그것이 ‘별초’였어요. 최초의 별초는 무신 정권이 도둑을 막기 위해 만든 야별초였어요. 작은 규모로 시작된 야별초는 그 수가 늘면서 좌별초와 우별초로 나뉘었고, 몽골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오거나 탈출한 이들로 이루어진 신의군이 만들어지면서 삼별초라 불렸어요.

삼별초는 무신 세력의 사병 역할도 하면서 조정으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았어요. 많은 지원 속에 삼별초는 고려 최강의 군대로 성장해 갔어요. 고려에서 가장 강한 군대였던 삼별초는 주로 개경에 있었지만, 일부는 지방에도 있었어요. 지방에서 근무하던 별초들은 몽골과의 항쟁에도 큰 역할을 했어요. 그 대표적인 예가 김경손 장군과 12명의 결사대 이야기예요.

몽골군이 압록강을 넘어 고려를 침략해 왔어요. 여러 성이 함락되었고 예전에 강감찬 장군이 거란군을 크게 물리쳤던 귀주성을 포위했어요. 귀주성은 북쪽에서 개경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아주 중요한 성이었어요. 몽골군의 공격에 김경손은 성문을 나가 기습할 것을 결심했어요.

“나라를 위해 몸을 잊고 죽어도 물러서지 않을 자 오른편에 서라.”

“장군. 죽여주십시오. 그냥 여기서 죽겠습니다.”

귀주성을 지키던 별초들은 몽골군의 힘에 모두 겁에 질려 창을 바다에 놓고 엎드려 빌었어요. 어쩔 수 없이 김경손은 이전부터 자신과 함께 싸워왔던 12명의 결사대만을 이끌고 성 밖으로 말을 달려 나갔어요.

김경손과 12명의 결사대가 처음 노린 것은 검은색 깃발을 든 몽골군이었어요. 결사대가 쏜 화살에 몽골군의 깃발이 하나둘 땅바닥으로 떨어졌어요. 그리고 허둥대는 몽골군을 향해 계속해서 화살을 날렸어요. 갑작스러운 공격에 정신없이 흩어지는 몽골군을 뒤로 한 채 김경손과 12명의 결사대는 무사히 귀주성으로 돌아왔어요.

전열을 전비한 몽골군은 다시 귀주성을 포위하고 공격해 왔어요. 그러나 김경손의 활약으로 성안의 별초들과 백성들은 사기가 올라 죽을 각오로 몽골군과 맞서 싸웠어요. 몽골군이 수레에 풀과 나무를 싣고 굴려 성을 공격했어요. 고려군은 끓는 쇳물을 쏟아 쌓여있는 풀과 나무를 태워 물리쳤어요. 20여 일 동안 여러 차례 공격을 막아내며 고려군은 귀주성을 지켜냈어요.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강했던 몽골에 항복하는 것을 거부하고 진도와 제주도까지 내려가며 끝까지 항전한 삼별초. 외세의 큰 힘 앞에서도 자신의 뜻을 꺾지 않았던 이들의 힘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요? 나라의 큰 위험 앞에 우리는 어떤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지 한번 생각해 보아요.

[집필자] 신범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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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기타

: 기타 소재지 : (23054) 인천 강화군 내가면 외포리

보문사를 가려면 외포리선착장에서 석모도행 배를 타야 합니다. 배를 타기 전에 선착장 오른편 얕은 산 아래에 삼별초 항쟁비가 서있습니다. 삼별초군들이 몽고와의 화친을 반대하여 진도로 떠난 곳이 바로 외포리 앞바다랍니다. 당시 배 천척이 이곳 외포리 앞바다에서 강화동쪽 초지진 앞까지 이어져 출항했다 합니다.

대몽항쟁과 삼별초

천도 이후 몽골과의 항전은 1259년까지 계속되었다. 천도 직전인 1231년까지를 포함하면 몽골의 고려 침입은 도합 6차(11회)에 걸쳐 이루어졌다. 몽골의 침입이 장기적으로 되풀이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강도를 거점으로 한 고려의 치열한 저항 때문이었다. 몽골군은 전라·경상지역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참담한 침략을 자행하였지만, 일반 백성들은 섬이나 산성으로 집단 피난하며 그에 저항하였다.

지방 각처에서의 항전은 강도정부로부터 파견된 지방관 혹은 방호별감의 지휘하에 이루어진 경우도 있었지만, 지방민의 자율적인 방어전이 일반적이었다. 가령 1236년 안성의 죽주산성에서 적의 포위 공격을 치열한 접전 끝에 물리쳤던 것은 강도에서 파견된 방호별감 송문주의 지휘에 의한 것이었다. 1253년 몽골군의 주력이 충주에 침입하였을 때, 당시 충주인들은 충주산성에 입보하여 방호별감 김윤후의 지휘로 몽골군의 포위 공격에 대항하였다. 이들은 70일간 대항한 끝에 몽골군을 물리치는 데 성공하였고, 이로 인해 몽골군은 더 이상의 남진을 단념하고 고려에서 철군하고 말았다. 당시 강도정부는 지방의 주요 거점 지역에 방호별감을 파견하여 현지 수령들과 협조하여 대처하도록 하였다. 한편 지방민의 자율적 항전 사례도 적지 않다. 1232년 몽골군 사령관인 살례탑을 사살한 것은 승려 김윤후가 지휘하던 용인의 처인부곡민이었으며, 1254년 경북 상주의 상주산성에서 몽골군 주력부대를 격파한 것은 승려 홍지가 지휘한 상주민이었다. 이 같은 지역주민들의 방어전 참여는 고려 대몽항쟁의 중요한 한 특징이었으며 이 때문에 살례탑을 사살한 1232년 처인성 승첩의 경우는 뒷날 임진왜란 때 이른바 의병운동의 선구적 사례로 부각되기도 하였다.

삼별초의 역사적 성격

고려정부에 있어서 삼별초의 봉기는 명백한 반역행위였다. 그리하여 이후 역사 기술에서 삼별초의 봉기는 ‘작란(作亂)’, 삼별초는 ‘역적(逆賊)’이나 ‘적당(賊黨)’ 등으로 표현되고 있다. 1941년 김상기는 삼별초에 대한 이 같은 관점을 극복하고 역사적 재평가를 시도하였다. 그는 12·3세기 고려의 중요한 정치적 사건이었던 묘청의 난과 무인 난, 삼별초의 봉기를 고려 역사에 흐르는 일련의 정신적 맥락에서 주목하였으며, 이러한 관점에서 삼별초의 봉기를 “묘청 일파로 말미암아 나타난 고려인의 자아적 정신”이 “임연·배중손 등의 배몽사상으로 출현”한 것으로 파악하였다.3) 즉, 삼별초의 봉기를 고려인의 전통적 민족의식에 의한 대외항전의 사건으로서 파악하면서 그 역사적 의의를 강조하였다. 이는 묘청의 난의 역사적 의의를 주목하였던 신채호 선생의 사론에 일정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삼별초의 봉기와 항전에 대한 이 같은 역사적 재평가는 대체로 지금까지 대세를 이루어왔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한편 북한에서는 반외세 투쟁이었다는 점 이외에, 그것이 인민에 의한 것임이 특별히 강조되었다. 일찍이 김석형은 고려 대몽항쟁사의 전개를 3단계로 나누어, 제1단계 지배계급과의 협력에 의한 인민항전, 제2단계 인민들만에 의한 침략군에 대한 항전, 제3단계 인민들의 반외세 반봉건정권 투쟁으로서 구분하면서, 삼별초항전을 제3단계의 투쟁으로 규정하였다.4) 그후 김재홍은 이를 더욱 구체화시켜서 삼별초항전을 ‘인민들의 애국적 투쟁’이라는 관점에서 반외세 반봉건정부 투쟁으로 높이 평가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이 북한에서 대몽항쟁사 서술의 기본관점으로 정착되었다. 또한 기전위(旗田巍)는 일본사의 입장에서 삼별초 항전을 평가하여 “삼별초의 저항이 없었다면 몽골은 예정계획에 따라 훨씬 일찍 일본을 습격했을 것”이라 하고, “삼별초의 난은 몽골의 일본원정을 늦추고 방위준비를 갖출 시간을 주었다”고 하여5) 그것이 갖는 국제적 의미를 지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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