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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6. 24 (수) [하루 한 장]“더불어 주목하여” (행3장)
부산 성민교회 새벽기도회
설교자 : 홍융희 목사 (분홍목사)
사도행전 3장은 오순절 사건 이후
듣는 귀와 말하는 혀가 회복된
하나님의 백성에게 성령께서
연이어 회복시켜주시는 두 가지
다른 감각을 깨워주시는 사건입니다
그것은 바로 시각과 촉각입니다
먼저 베드로와 요한은 기도하러
성전 미문을 향해 가다가
구걸하는 하반신장애인을 만나
마치 하나님 보듯 그를 주목합니다
이 시선의 변화가 촉발한 기적은
그 한 사람뿐 아니라 제자들과
모든 이들을 뒤바꿔 놓았습니다
또한 그들은 은과 금이 번쩍이는
미문 앞에서 자신들에게는
은과 금이 없으나 그보다 귀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있음을
선포하면서 그 이름 안으로
걸인의 삶을 초대하면서 그를
붙잡아 일으킵니다
그러자 온전히 회복됩니다
주여, 우리에게도 성령을 주사
굳어진 감각을 깨워주소서!
=======================================
* 부산 성민교회 : 부산시 사하구 승학로 201(괴정동). 전화 051-204-0691
http://sungminch.com/
성민교회 홈페이지에 오시면 더 많은 성민가족 이야기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홍융희 목사의 설교 모음 USB구입은 교회 사무실로 전화 문의 바랍니다.
*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고 성경말씀을 깨닫게 하시길 원하십니다.
[하루 한 장]과 여러 영상들을 통해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확인해 보세요.
http://www.youtube.com/c/홍융희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분홍목사 홍융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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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3장 주석 – Daum 카페
사도행전 제 3장 … (3) 해질 황혼 무렵에 또 한번의 기도 시간이 있었다. … 아울러 사도들이 예수의 승천직후 예루살렘에 거주하고 있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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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라어 사도행전 3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 인생여행
페트로스 데 카이 요안네스 아네바이논 에이스 토 히에론 에피 텐 호란 테스 프로슈케스 텐 에나텐 개역개정,1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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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8/1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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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튜 헨리 주석, 사도행전 0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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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1/1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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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뱅크 > 성경 주석 > 새롭게 되는 때(사도행전 3: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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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3장]주제집중이 잘된 설교_예수만 바라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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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3장, 성전 미문 앞에서 베드로는 사람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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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3장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 Pensées
그리고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선정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은 찬송'(8절)합니다. 2. 11-26절 베드로의 설교. 사도행전 초기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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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10(목) “사도행전 3:1-10” / 작성: 김광욱
또 다른 위임명령은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입니다. … 사도 베드로의 설교를 듣던 사람 3천 명은 마음이 찔려서 회개하고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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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 – 옛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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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홍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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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20. 6. 23.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8nQxJExcRfc
사도행전 3장 주석
사도행전 제 3장
=====3:1
제 구시 기도 시간에 – 3시를 가리킨다. 단 6 : 11 ; 9: 21에 의하면 경건한 유대
인들은 하루에 제 삼 시(오전 9시), 제 육시(12시), 그리고 본문에 나타난 제 구 시
(오후3시)를 정해놓고 세번의 기도를 하였다. 물론 이것은 구속력있는 율법 규례가 아
니라 나의 종교적 관습이었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하루 구분법에 의하면 제 구 시는
해가 기울기 시작하여 저녁시간이 되어가는 오후 예배 시간을 의미한다(출 29:39). 요
세푸스(Josephus)에 의하면 유대인들의 공식적 기도시간은 (1) 이른아침. (2)제 구
시, 즉 오후 예배 시간인 이 때공중 기도를 드리는 순서가 있어서 사람들이 많이 모였
다고 한다.(3) 해질 황혼 무렵에 또 한번의 기도 시간이 있었다. 오늘날도 기도시간을
정해놓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인간 나약함을 극복하기 위해 권장할 만한 방법이라
하겠다.
베드로와 요한 – (1) 함께 어업에 종사한 동업자 였다 (마 4 : 18, 21 ; 눅 5:
10). (2) 세례요한의 때부터 메시야를 고대하던 자들이었다(요 1: 37, 42) (3) 개심
후 함께 사도직을 받은 동료 였다( 1: 13 ; 마 10 : 2). (4) 특별히 예수께 인정받고
사랑을 입은자들이었다 (마 26 : 37 ; 눅 8 : 51 ; 9 : 28). (5)예수께서 수난 받으실
때에 행동을 같이하던 친밀한 친구였다(눅 22 : 8 ; 요 18 : 16). (6)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한 동역자 였다(8 : 14). 성질이 급하고 정열적인 베드로와 조용하고 차분
한 요한은 성격적으로 많은차이가 있었지만 이 두사람은 모든면에서 함께 행동하였다
(눅 22 : 8 ; 요 13 : 24,25 ; 18 : 16,17 ; 20 : 2). 따라서 이들은 12제자의 선봉장
(先鋒將)으로 가장 중심 역할을 했으며 지도자 (lwader)로 부각된 인물들이었다.
성전에 올라갈새 – ‘ 올라갈새’를 가리키는 헬라어 ‘아네바이논'(*
)은 미 완료 시제로서 ‘그들이 올라가고 있었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현재 진행중인
어떤 동작 및 과정을 아주 시각적으로 인상깊게 그리고 생생하게 묘사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무엇때문에 유대인의 관습을 따라 기도시간에 성전에 올라갔으까? 여기서 칼빈
(Calvin)은 말하기를 ‘ 유대인의 율법 의식을 따라 기도하기 위해 성전에 올라갔다기
보다는 그 시간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므로 복음을 전파하기에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
여서 올라갔다’는 표현은 단순히 성전의 위치가 지형상 높았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근
본적으로 종교상의 경건한 측면에서 비롯되어 나온 말이다(11 : 2 ; 18 : 22 ; 눅 18
: 10 ; 요 7 : 14). 아울러 사도들이 예수의 승천직후 예루살렘에 거주하고 있었다는
것은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욱 24 : 49)고 하신 예
수의 명령과 또 그들의 사명이 ‘예루살렘에서 부터 시작되리라'(1 : 8)는 말씀과도 일
치 되는것이다.
=====3:2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 – ‘카이 티스 아네르 콜로스 에크 코일리아스 메트로스 아
투'(* )
를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그리고 그의 어머니 태에서 부터 앉은뱅이였던 사람 하나’
가 된다. 이것은 그가 중간에 사고로 다친것이 아니고 태어날때 부터 40세(4 : 22)가
되는 지금까지 하체가 마비된 고통을 지닌것을 보여줌으로써 나을 희망이 전혀 없는
사람임을 시사한다.
사람들이 메고 오니 성전에 들어가는…구걸하기 위하여 – 그는 일하여 생계를유
지할 수 없으므로 동냥하여 살아가야 했다.더욱이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
이므로 매번 다른 사람에 의해 운반되어져야 하는 불쌍하고 비참한 걸인(乞人)이었나.
한편 운반하는 사람들이 그를 구태여 성전 문 앞에 둔 이유는무엇일까 ? 유대교에서
는 남을 구제하는 일이매우 큰 덕목으로 여겨졌다. 이 때문이 성전에 올라오는 사
람들은 그 거지들에게 동전을 던져줌으로써 하나님의 상을 얻고자 하였다. 그래서 이
것을 잘 아는 걸인들이 성전이나 전각 입구에앉아 구걸하는 일이 많았다. 따라서 걸인
들에게는 하나님께 예배하러 나아가는 사람들을 만날수 있는 성전 문앞이야말로 동냥
을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장소였고 또한 유대인들은 남을 구제하여 하나님의 상을 얻기
위해 성전 문에 걸인이 있는것을 싫어하지 않았던 것이다.
미문이라는 성전문에 – 미문(the Beautiful Gate) 이라는 이름은 외관상으로 장
엄함과 화려함을 지녔기 때문에 붙여진 듯하다. 그런데 이 미문이 예루살렘
성전의 어느 문을 가리키는지는 학자들간에 의견이분분하다. 이방인의 뜰로 들어가는
성전 동편의바깔 문인 슈산 문(Meyer, Alfird), 또는 이방인의 뜰에서 여인의 뜰로
통하는 니가노르 문(Knowling, Alexander) 의 양설이 주로 언급되나 후설이 보다 유력
하다. 기원 후 5세기 이래로 많은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 바깥 뜰 동쪽에 위치하
여 있고 또 예루살렘 멸망 이후에도 그대로남아 있던 동문 혹은슈산문(그 문이 수산
궁전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다)을 본문의 미문으로 동일시하여 왔었다. 그
러나 유머의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 와 미쉬나(Mishnah)의문서인 ‘미도트
‘(Middoth 1 : 3, 4 : 2. 3 : 성전규모와 그 건축 종사자들에 대한 기록)의 기록에의
하면 니카노르 문(Nicannor Gate)과 동일시하고있다. 이 문은 아름답고 값진 고린도산
황동으로 만들어진 웅장한 문으로서 가치상으로 볼 때 은으로 도금되고 금으로 장식된
것들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요세푸스는 말한다.
두는 자라 – ‘두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티둔'(* )은 미완료 과거
형으로서 매일매일 반복되어 앉혀지는 습관적인 동작을 가리킨다.
=====3:3
구걸하거늘 – 그는 여전히 자기의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서 평상시 방법대로 구걸
한다.그런데 ‘구걸하거늘’을 가리키는 헬라어 ‘에로타'(* )는 미완료시제
로서 구걸의 행위가 다 끝나지 않고 계속되는 가운데 손을 내밀고 무엇을 받으려
는 그때의 정황을 잘 묘사해 주는 누가의 표현법이다. 그리고 또한 이것은 간절하고도
정중하게 한 푼 도와줄 것을 요청하는 표현이다. 아무튼 그는 무엇을 구해야 진정한
삶을 얻게 되는지를 알 수 있는 믿음의 눈이 열려지지않은 가련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종들을 향해서도 물질적인 적선(積善)을 구하고있는 것이다.
=====3:4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 혹자는 베드로가 혼자서 말했음과 걸인이 한꺼번에
두 사람을 주목하지는 않았을 것임을 근거로 제시하면서 본문의 기적 행위가 베드로
한 사람에 의해서 되어졌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요한으로더불어’라는 표현은 후대
에 와서 첨가된 것이라고 주장한다(Hanechen). 그러나 이는 별 호소력이 없는 주장으
로 본문에 있는 그대로 요한은 베드로와 함께 행동을 취한 것이며 이 기적행함에도
똑같이 주님의 종으로서 성령의 능력따라 행한 것이다. 단지 여기서 베드로가 말한
것은 행동파적인 기질이 있어 그의 적극적인성격을 반영한다. 지난날 12제자와 함께
있을때도 베드로는 언제나 제자들의 대변자(代辯者)역할을 서슴없이 하였었다(마 16 :
13 -16). 따라서 여기서는 누가 앞에 나서서 직접적으로 활동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
니며, 주님께서 크신능력으로 당신의 종들을 통해 놀라운 이적을 베푸신 사실에 초점
이 있을진대, 요한 역시 베드로와 똑같이 이 기적의 사건에 참여한 것이다(J.
Calvin, Lenski). 동시에 행동파 베드로와 사색가 요한이 함께 보조를 맞추는 모습이
야말로 참으로 아름다운 동역의 모습이다.
주목하여 가로되 – 원문상으로는 ‘주목(注目)하여’의 헬라어 ‘아테니사스'(*
)란 말이 맨 처음에 나온다. 그리고 ‘데'(* ,그리고’) 이하는 걸인이
마흔살이 되는 지금까지 성전 문 앞에서 구걸하였어도 여태껏 경험하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일이 전개됨을 보여 준다. 또 ‘아테니사스’ 란 말은 바라보는 대상을 향한
집중된 응시를 의미하며1 : 10에서 승천하시는 예수를 ‘자세히 쳐다 보다’로 번역된
말과 같은 동사다(눅 4 : 20). 그렇다면 왜 주목하여 보았을까 ? (1)13 : 9에서와같이
사도가 집중적인 웅시의 동작을 취한 것은 이제 이적을 일으키기 전에 필요한 내적인
준비를 갖추기 위해서이다. (2)나면서부터 앉은뱅이가된 이 사람을 측은하고 불쌍한
마음으로 쳐다봄으로써 걸인으로 하여금 사도를 주시하게끔 하기위해서다. 즉 인격과
인격의 접촉을 갖기 위해서이다. (3)내재하시는 성령의 지도와 그 역사하심을 따라 행
동하던 사도들은 불쌍한 앉은뱅이의 구걸을 받자 자신들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특
별하신 감동에 의해서 그를 주목하는 행동을 취한 것이다(Calvin). 여기서(1) 의 견해
는 성경의 기적을 이적 설화로 취급하는 비판자들이 주로 내세우는 주장으로서 받아들
이기가 어렵고 (2)와(3)의 주장은 자연스럽다고 하겠다. 따라서 신비주의자들의 주장
처럼 본문의 ‘주목하여’라는말은 사람 마음의 깊은 내면을 들여다 본다거나,어떤 상황
의 내막을 발견하기 위하여 취하는 소위 투시 동작이 아님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Lenski).결국 주님이 그들을 감동시켰을 때에 그들은 이 동냥하는 걸인에게 눈을 고
정시킴으로 그 걸인이 베드로와 요한을 쳐다보게 유도한 것이다.
우리를 보라 – 이의 헬라어 ‘블려손 에이스 헤마스'(*
)는 병들거나 아픈 것이 없이 영원히 사는 천국 복음에 대해 전파하는사도들
에게 단지 한 푼의 돈을 동냥하는 걸인의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하여 단호하고 권위
있는 그러나 긍휼히 여기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명령하는 말이다. 따라서 이는 이제 앉
은뱅이가 돈 몇 푼을 구하는 상태에서 떠나 하나님의 은혜를소원(訴願)하도록 요구한
말이다. 즉 자신에게 신기하고도 이례적(異例的)인 하늘의 축복을 소망하도록 촉구한
것이다.
=====3:5
바라보거늘 – ‘에페이켄'(* )은 미완료 과거 능동태로서 단순히 쳐
다보는 것이아니라 그의 주의를 사도들에게 집중하는 것을 생동감있게 묘사한 말이다.
그리고 이 단어 앞에’눈을'(* ,투스 오프달무스)이란 단
어를 첨가하면 더욱 생동감있는 표현이 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걸인이 무슨 마음으
로 또는 왜 쳐다보았을까에 대해서는 다음과같은 견해가 있다. (1)자기에게 동냥을 주
려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빌어주기 위하여 바라보았다. 따라서 그 걸인은 자기
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모르고 단순히 쳐다본 것이다(Haenchen). (2)보통
몇 푼을 던져주고 가는 사람들과는 달리 유별나게 ‘우리를 보라’고까지말한 그들에게
이제 이 걸인은 ‘평상시보다도 더많은, 뭔가 대단한 것을 얻는가 보다’라고 생각하여
주의를 집중하여 쳐다본 것이다(Lenski).(3) 기적을 일으킬 만한, 즉 고침을 받을 만
한 믿음의 눈으로 쳐다보았다(E.M. Blaiklock). 그증거로 병고침받은 자들에게는 대개
믿음이 있었다는 점과(막 6: 34,36) 그가 고침을 받은 후 즉시 하나님을 찬미한 것
을(8절) 제시한다.따라서 베드로가 그의 믿음을 보았다는 것이다.그러나 당사자의 믿
음과 관계없이 주님의 일방적인 주권에 의해 병고침을 베풀어 준 사례들을 생각할 때
(요 9 : 1-12) 이 견해는 설득력이 약하다 하겠다. 따라서 걸인의 신앙 행위는 기적이
일어난 후에 생긴 것이라고 보나 렌스키의 견해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취할 수 있겠
다.
=====3:6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 앉은뱅이에게 보기드문 기대감을 잔뜩 불러 일으켜
놓고 베드로가 한 이 말은 은과 금을 구하던 걸인으로하여금 허탈감에 빠지게 했다는
견해도 있지만 곧 이어서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라고했기 때문에 낙담할 시
간적 여유가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오히려 그는 이제 베드로의 이선언을 통해서
돈 몇 푼이 아닌 자신의 처지에대한 근본적인 해결의 빛을 기대하는 희망의 신앙이
싹트기 시작하는 느낌을 받았다고 할 수있겠다. 따라서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
니”라고 곧바로 선언되는 베드로의 선포는 앉은뱅이로 하여금 어떤 신기한 기대감(期
待感)을갖게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은과 금은 내게 없다”베드로의 선언속에서 우리는
(1)물질의 소유에 초월해 사는 사도들의 청빈함을 엿볼 수 있으며 예수의 말씀대로
금이나 은이나 돈을 가지고다니지 않았다는 것과(마 10 : 9) (3)혹 물질이있었다고 하
더라도 ‘믿는 사람의 필요를 따라’교회 공동체에서 공동 관리하였다(2 : 44, 45)는추
측을 할 수 있겠다. 우리는 문자적으로 이 구절을 적용하며 사도들에게 물질이 전혀
없었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제 주님의 뜻따라 앉은뱅이에게 은이나 금과
는 비교가 안 되는하늘의 능력을 그에게 나타내려고 했기 때문에 복음 전파의 차원에
서 그렇게 선포한 것이다.한편 본 구절이 궁핍한 자들에 대한 물질적 구제를 금하는
것은 결코 아니며 또 교회의 역할이 물질적 도움보다는 영적 구원에 집중되어야 함을
가르치는 말씀도 아니다. 결과적으로 볼 때 본문의 앉은뱅이 또한 육신의 치유를 경
험한 사람이다(7절). 다만 본 사건은 사도들의 궁극적 관심사가 신체보다는 영적 치유
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은 사실이다.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이름으로 – 사도들이 소유한 최고의 보물은 나사렛 예
수 그리스도였다. 그들은 이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기 위하여 걸인이 구하던 은과
금,즉 세상의 보화들을 배설물로 여겨버린 자들이었다(빌 3 : 8). 여기서 ‘이름으로
‘라고 표현한 것을 먼저 주목해 보자. 히브리인들에게 있어 이름은 그 사람의 성격
및 본질 즉 그 사람의존재를 대표해 주는 것이었다(주제 강해 창 25:19-16 ‘이름 짓기
‘ 참조). 그러므로 여기서 이름이란 그 사람 인격(人格) 전체를 대표하는 말이다. 따
라서 베드로는 자신의 능력이나 신앙심 가지고 기적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믿는 예수의 능력과 은혜에 의존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는 셈이다. 다시 말해서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생명의 근원이 되신 예
수께서 크신 능력을 베푸셔서 병자를 낫게 하신다는 것을 선언하고있다. 이 사실은 12
절과 16 절에서 더 뚜렷이 증거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사렛’이라는 수식
어를 사용한 것에 대해 어떤 학자들은 사적 예수인 나사렛 예수와 부활하신 신앙의그
리스도를 분리한다(Martin Keil, Bultmann).그러나 역사적 예수와 부활하신 그리스도
는 전혀 별개의 인물이 될 수 없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 1
: 46)는 말이 암시해 주듯 당시 나사렛은 천한 지방으로 간주되었기에 주님께서 나사
렛에서 성장하셨다는 것은 언제나 유대인들의 경멸과 조롱의 내용이 되었다. 그러나
베드로는 나사렛 예수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의 구원자이신 대망의 메시야였으며 그분
께서 부활. 승천하셔서 지금 하늘과 땅의 모든권세를 가지고 이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기적베푸심을 역설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걸으라 – ‘페리파테이'(* )란 말은 시작과 계속의 개념을 가진
현재 명령형으로서 ‘걷기 시작하라. 그리고 지금부터 계속 걸으라’는 뜻이다. 이 명령
은 주님이 뜻을 선포하는 말씀이므로 놀라운 권능을 동반하는 권위있는 선언이다. 그
리고 앉은뱅이가 이 말을 믿었다는 문자적인 기록은 없지만 사도의 말에 항변(抗辯)
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그대로 순응한 것을 보아 그가 베드로의 권위있는 명령을 듣고
믿었음알수 있다. 따라서 사도의 이 명령과 함께 성령의크신 역사가 순간적으로 불쌍
한 걸인에게 임하게되었다. 다시 말해서 사도의 이 ‘걸으라 ‘는명령과 함께 성령이
얼어붙은 영혼을 혼들어 놓았던 것이다. 40년동안 말라 붙어 있던 하반신에 창조주의
생명의 기운이 불어 넣어짐으로써 치유의 은혜가 임하는 순간이었다.
=====3: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 ‘잡아 일으킨다’는 말은 신유(神癒)를 베푸는 자의 신
비한 능력을 치유받는 환자에게 전달해 주는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뜻을
따라 자신이 선포한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을 의심없이 믿고 확신하여 손수 불구자의
손을 잡고 일으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걸인의 편에서 보면 베드로의 명령에 대한
그의 믿음과 순종을 엿볼 수 있으며 이러한 그의 믿음을 더욱 복돋아 주기 위하여 오
른손을 잡아 일으킨 것이 된다(John Joseph H. Mayfield).
발과 발목이 – 앉은뱅이가 치유될 때의모습을 설명하기 위하여 누가가 사용하
고 있는 특수한 단어들은 한결같이 의학적 성격을 띤 용어들로서 그의 전직이 의사였
음을 여실히 드러낸다(Kowling). ‘발’의 헬라어 ‘바세이스'(* )는 ‘발바
닥’ 또는 ‘발꿈치’를 가리킨다. 그리고 ‘발목’의 헬라어 ‘스퓌드라'(* )는
‘ 복사뼈’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이 두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여기에만 나타난 의학적용
어이다(Henry Alford).
곧 힘을 얻고 – 이것은 앉은뱅이가 걷지 못한 근본 이유가 발과 발목에 힘이 없었
기 때문임을 말함과 동시에 이제 당장 발과 발목에 기이한 힘이 생겨 정상으로 돌아옴
을 뜻한다. 그리고 일순간에 앉은뱅이가 치유받것은 생명의 근원이 되신 주님의 능력
으로 말미암아 일반 법칙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이적이 일어난 것을 의미한다.
=====3:8
뛰어 서서 걸으며 – 본 구절에 대한 헬라어 ‘여살로메노스 에스테 카이 페리에파
테이'(* )를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그는 뛰어 일어나 똑바로 섰다. 그리고 계속해서 걸어 돌아다녔다’는 뜻이
다. 여기서 미완료 시제를 사용한것은 사도가 그에게 명령한 그대로 일어나 걷고뛰기
시작했으며 또한 계속해서 걸을 것임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이는(1)베드로의 말이 허
풍(虛風)을 떠는 빈 발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실재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고침받는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을 생생하게 입증하는것이며 따라서 나사렛 예수 그리
스도의 살아계심과 그 능력의 놀라움을 증거하는 것이다. 더나아가 이 기적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하였던바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사35 : 6)라는 메시
야의 시대가 실제로 도래하였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표적(sign)이 된 것이다. (3)40여
년 동안 불구의 앉은뱅이 신세로 침상을떠나지 못했던 그가 이제 고침을 받음으로 말
미암아 말로 다 할 수 없는 그 기쁨을 기운차게 표시한 것이다.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 앉은뱅이였던 그가 꿈만 같은 놀라운 기적의
은혜를 입어 걷게 되자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맨처음 들어간 곳은 성전이었다. 이
는 자신의치유가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임을 고백하는 행위이다.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 상상할 수 없는 은혜를 받은 자로서 너무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이다. 여기서 ‘뛰기도'(leaping up)의 헬라어 ‘할레스다이(*
) 뛰어 오르기도 하고 달리기도 하는 모습으로 마치 놀란 토끼처럼 껑충껑충
뛰어 다녔다는 뜻이다. 또는 오랫동안 새장 안에 갇힌 새가 풀려나 창공을 날아가듯
이, 혹은 개집에 매여 있던 개가 풀려나 사방을 자유롭게 뛰어다니듯이 신바람난 모습
을 묘사한 것이다.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시 100 : 4)라는 시인의 노래는 새롭게 얻은 몸으로 그야말로 기쁨이 충만하여 사도
의 뒤를 따라 성전에들어가는 이 사람에게서 가장 극적으로 나타나고있다.
하나님을 찬미하니 – 동전 몇 닢을 구걸하던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을 체험함
으로써 육신의 치료를 받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영혼의 구원까지 받게 되었으니 성
전에 가서 하나님을 찬미함은 너무나 당연한 모습이다. 이렇듯 찬송은 은혜를 입은
자가 마음에서부터 드리는 지극한 감사의 표현이고 입술의 제사임을 본다(히 13:15).
=====3:9
모든 백성이…보고 – 기적은 그 당사자에게만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니라 그를 둘
러싸고있는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다.앉은뱅이였던 자가 걷고 뛰는
모습은 주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해 온전한 치유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대한 획실한 증거가 되었다. 그 앉은뱅이 걸인은 수 년 동안의 구걸로 인해 이미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따라서 그의 신원(身元)이나 치유 사실의 여부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3:10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 – ‘기이히 여기며’의 헬라어는 ‘담보스'(*
)로 어떤 행위를 보고 감정적인 면에서 느끼게 되는 탄복이나 충격적인
놀라움 또는 거룩한 두려음등을 말한다. 그리고 ‘놀라니라’의 ‘에크스타시스'(*
)는 뜻하지 않은 사건을 접했을 때 정상적인 마음의 평정을 잃어버
리고 망연자실(茫然自失)해진 상태를 말한다(막 1 : 27 ;10 : 24, 32 ; 14 : 33 ; 16
: 5,6 ; 눅 4 : 36). 이처럼 사람들의 비상한 관심을 끌며 정신을 차릴 수없을 정도
로 심히 놀라게 하는 것은 기적의 결과로 나타나는 첫단계의 모습으로서 기적 자체가
갖는 영향력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와같은 놀라음의 반응이 그 이적을 일으
키신 분께 대한 믿음과 반드시 동일한 것은 아니다. 다시말해서, 그 이적이 시사하
는 바인 하나님의 권능과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서도 단지 그 이적에대한 놀라움과 두
려움을 표할 수도 있는 것이다.그러나 이적은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방편이다(출4
: 2-9 ; 요 11 : 40- 42 ;롬 15 : 18, 19)
=====3:11
나온 사람이… 붙잡으니 – ‘붙잡으니’의 헬라어 ‘크라툰토스'(*
)는 어깨에 매달렸다는 뜻이며 이는 (1)많은 사람들에게 베드로
와 요한을 통해서 이런 기적이 일어났음을 알리기 위한 것이고 (2)사도를 향한 애착과
고마움을 표시한 것이고(3)사도들이 자기를 그냥 떠나지 못하게 하기 위한 행동이다.
솔로몬의 행각이과…모이거늘 – 솔로몬 행각은 (1)성전 바깥 뜰 동편 끝에 있는
기다란 집채 곧 회랑(回廊)으로 교사들이 자유롭게 강론하던 곳이었다. (2)대중 집회
를 할 만한 장소로서 초대 교인들이 이곳에서 자주 집회를 가졌음을 알 수있다(5 :
12). (3)예수께서 이곳에서 설교하신일도 있었다(요 10 : 23). 아무튼 기적으로 인
하여 많은 군중이 사도들 주위에 몰려들었다는 것은 기적이,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그
자체에 목적이있지 않고 사도들로 하여금 기적을 베풀어 주신분에 대해 중거케 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음을 보게 한다. 왜냐하면 기적 때문에 크게 놀라서모인 군중들
은 이제 하나님 나라와 나사렛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하여 생생하게 듣게 되었기때
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바클레이(Barclay)는,’기적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모이게 하
기 위해서 종을 치는 것과 같은 역활을 하는데 의미가 있다’고 했다.
=====3:12
백성에게 말하되 – 걸인이 고침받게 된 기적은 (1)사람들을 놀라게 하여 (2) 그들
을 사도들 앞에 모이게 했고 (3)이제 사도들로 하여금 기적의 실체가 되시는 예수 그
리스도에 대해서 증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여기서 ‘말하되’를 가리키는 헬라
어 ‘아페크리나토'(* ))는 어떤 일에 대한 답변으로 경위(經緯)
를 설명할 때 쓰는 표현이다. 이는 기이한일을 보고서 그 일에 대한 설명을 바라는 사
람들에게 베드로가 설교할 기회를 얻게 되었음보여준다. 따라서 본절 이하는 2 : 14에
나타난 오순절 이후의 베드로의 설교에 이어 두번째 설교로서 본절은 그 서론에 해당
한다.
이스라엘사람들아 – 설교를 듣는 대상을 호칭하는 표현으로서 의미 심장하고 중대
한 선포를 할 때 베드로가 자주 쓰는 표현이며(1 :16; 2: 14, 22) 그들이 율법과 약속
을 받은 선민임을 상기시킨다.
왜 기이히 여기느냐…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기이히 여긴다’는 말에 대해서는
10 절 주석을,그리고 ‘주목하다’에 대한 자세한 해석은 4절주석을 각각 참조하라. 사
람들의 잘못된 관심을 책망하면서 설교의 서론으로 주의를 환기시키는질문이다. 즉
(1)사도 자신들의 어떤 특별한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고친 것이 아니라는 선언이
며 그러므로 자기들을 눈여겨 보지 말라는것이다.(2)과거에 하나님의 수많은 능력을
체험한 이스라엘 사람들로서 왜 이 일을 기이히여기느냐는 것이다. 이는 곧 그 이적의
동인(動因)이 하나님께 있음을 상기시키는 말이다.(3)결국 사람들의 관심과 주의를 오
직 하나님의 하시는 일과 예수 그리스도에게 돌리는 표현이다.자기들은 단지 예수 그
리스도의 심부름꾼인 도구들일뿐이라는 것이다. 이는 자기가 믿음이 좋고 대단한 영력
(靈力)이 있어서 이적적 권능을 행사하는 것처럼 은근히 자신을 강조하여 모든존경과
영광을 다 받으며 기적과 그로 인해 모든 군중들을 지극히 인간적으로 이용하는 종교
적영웅주의자들, 즉 거짓 선지자들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다. 이처럼 사람들의 관심
을 끌어 인기주의로 자기를 나타내는 일에는 흥미가 없는 사도들은 오직 어떻게 하면
사람들로 하여금 이 기적의 실체가 되시는 나사렝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며 또한 그
로 인해 자기들의 죄를 꼐닫게하여 이들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할 수 있을까에만 관
심을 집중하였다. 이것이 기적의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 절에서 사
도들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가를 구체적으로 목
도한다.
=====3:13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 이는 본래 출애굽기에서 최초로 사용된 표현
이며(출 3 : 16, 15 ; 4 : 5) 이 표현을 사용한 의도는25, 26절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즉 이 말은 유대사람들에게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는
자들이라는 실감을 가지게하는 표현이며 이 같은 표현은 신약성경에서도 많이 사용되
었다(마 22 : 32 ; 막 12 : 36). 더 나아가 자신들이 율법과 예언에서 멀리 떨어진
새로운 종교를 말하고 있는것 이 아니라 구약의 바탕 위에서 구약의 완성자이신 예수
에 관한 복음을 전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 여기서 ‘종’을 나타내는 헬라어는 하나님의
아들을 가리키는 ‘휘오스'(* )가 아니라 ‘파이스'(* )이다. 따라서 이
종의 의미는 일찍이 이사야가 예언했던 고난의 종을 말한다(사 42 : 1-9 ; 49 : 1-13
; 53 : 1-12).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영광스러운 모습이 아니라 구속자로 오셔
서 세상로부터 배척과 수욕을 당하시며 십자가에 죽기까지 고난을 당하셨음에도 불구
하고 한 마디의 항변도 없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서 즉 하나님의 종으로서
이 모든 일을 감당하는 예수의 낮아지신 신분과그 직무를 말한 것이다(2:7). 예수와
종을 직접 함께 언급한 곳은4 : 27,30 등이며, 고난받은 종에 관한 암시적언급은 8 :
32, 33 ; 막 10 : 45 ; 14 : 24 ; 벧전 2 : 22-24등에도 나온다. 그린데 이 종 예수
를우리 조상의하나님이 이제 영화롭게 하셨다는 것이다. 여기서 ‘영화롭게 했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에 대해 두 견해로 엇갈린다. (1) 예수에 의해 일어난 기적으로 말
미암아 예수께서 영화릅게 되셨다(Haencgen). (2) ‘에돝사센'(* )
은 부정 과거로서 온 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그가 종으로서 죽었지만 하나님이 3일 만
에 부활시키고 승천케 하셔서 이제 하나님 우편에 앉히기까기 그를 높이신 사실을 말
한다(F. F. Bruce, Lenski). 후자의 견해를 취하는 것이 바람직하겠다.왜냐하면 이로
써 베드로는 예수가 구약에서부터 예언된 메시야이며 하나님의 아들임을 구약성경
인용하여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도는 이어서 유대인들의 죄악을, 즉 그들이 이
예수를 어떻게 배척했는가를 담대하게 지적한다.
넘겨주고 – 이의 헬라어 ‘파레도카테’ (* )는 예수를 십자가
에 못박도록 로마인, 즉 이방 통치자 빌라도에게 넘겨주었던 것을 말한다(사 53
:12).
부인하였으니 – 이는 빌라도가 예수의 무죄함을 발견하고 놓아주고자 했으나 저희
가 바라바를 택하고 예수를 부인하여 오히려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던 사실에 대한
지적이다(눅 23:13-23). 사도는 그들의 죄를 깨우치기 위해 통렬하게 책망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 죄의 무서움과 심각성을 아는 자만이 하나님의 자비앞에 두손
들고 나올수 있기 때문이다.
=====3:14
거룩하고 의로운자 – 사도는 계속하여 예가 어떤 분이었던가를 증거하면서 동시
에 그들이 저지른 죄가 얼마나 흉악했던가를 대조용법을 통해서 신랄하게 지적한다.
여기서 ‘거룩한자'(* , 호 하기오)는 ‘하나님의아들’을 가리키는 용어
이다(막 1 : 24; 눅 1 :35; 요일 2 : 20).그리고 ‘의로운 자'(* , 호
디카이오스)란 모든 블의에서 완전히 떠나서 절대 공의로우신 분이라는 뜻이다(7 :
52 ; 22 : 14 ; 사 53 : 11 ; 렘 33 : 15 ; 요일 2: 1).따라서 ‘거룩하고 의로운 자’
란 구약에서말하는 메시야의 칭호이다.
살인한 사람(* , 안드라 포네아).이는 거룩하고 의로운 자와
대조적으로 묘사되어 그들의 사악한성격을 더욱 뚜렷이 부각시키고 있다. 이 사람은
바라바를 가리킨다. 그는, 유월절 사면(赦免)의 관례에 따라 총독 빌라도가 예수와 바
라바 둘 중하나를 석방해 주겠다고 유대인에게 제의했을 때 유대인들의 선택에 의해
풀려난 죄수였다(마 27 :15-16). 이 사람에 대해서(1)마27 : 16에는 유명한 죄수로,
(2) 막15 : 7에는 민란(民亂) 중에 살인하여 포박된 자들 중 하나로, (3)요18 : 40 에
는 강도로 각각 언급되어 있다.
=====3:15
생명의 주 – 본절은 베드로 설교의 절정으로서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을 강조하여
사람들의 관심을 예수께 집중시키고 있다. ‘생명의주’의 헬라어 ‘호 아르케고스 테스
조에스'(* )란 ‘생명을 주관하는자’, ‘생명의 근원
‘, ‘구원의 원천’ 등을 뜻하는말로서 살인자 바라바와 절대적으로 대조됨과 동시에
그들이 저지른 죄의 극악성을 계속하며강조한다(요 5 : 26 ; 10 : 28 ; 14 : 6).
죽였도다 – 살인자는 놓아주고 오혀려 생명의 주는 죽였으니 이 얼마나 통탄할 만
한 일인가 ! 특히 원문상으로는 ‘너희들이’라는 ‘휘메이스'(* )를 강조하
여(14절)그들의 죄를 정면으로 지적하고 공격하고 있다. 즉 ‘너희들이 예수를 죽인 죄
인들이요 살인자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부인할 수없는 역사적 사실이었다. 오순절 전
까지만 해도 두려워 숨어 지내던 비겁한 하도들의 이 담대한 증거를 보라!
하나님이…살리셨으니 – 유대인들은 ‘거룩하고 의로운자’를 죽였지만 하나님이
사흘만에 다시 살리셨으니 이는 (1)유대인들이 저지른 모든 불의와 그 행위에 대한 하
나님의 심판의 예고이며 (2) 예수가 거룩하고 의로운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하는 표
었다. 따라서 구약에서 부터 예언된 메시야임을 온 천하에 선포한것이다.(요 16: 20;
롬 1:4).(3)죄의 세력과 그로 인한 모든 결과들에 대한 승리, 즉 구속 사역의 완성을
의미하므로 예수께서 죄와 사망을 이기신 생명의 주이심을 입증하신것이다.(4)하나님
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만유의 주로 그리스도를 높이시고 영화롭게 하셨
다는 표이다(빌 2 : 5 – 11).
우리가 이일에 증인이로라 – 사도들의 담대한 증가와 무엇보다도 사도들 곁에 온
전한 사람으로 서 있는 고침받은 그 사람이 부인할수 없는 생생한 증인이 된것이다.
따라서 그 기적사건은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했다(부활)는 표가 될뿐만 아
니라 사도들이 지금 증거하는 그 내용이 참이라는 점을 입증하는 것이다. 여기서 ‘증
인’의 헬라어 ‘마르튀스'(* )는 사실에 근거하여 진술해야 함을 강조하는
법정적(法廷的)술어이다.
=====3:16
그 이름을 믿으므로…예수로 말미암아난 믿음이 – 이제까지 유대인들 앞에서 예
수를 증거한 사도는 이제 결론적으로 앉은뱅이가 고침받게 된 그 능력의 근원을 대구
법으로 표현된 삼중적 묘사로서 엄숙하게 되풀이해서 강조하고있다. 사도는 이 표현에
서 무엇을 전달하고 있는가? (1)자신들이 이 사람을 고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거듭 밝
히고 있다(12절).(2) 그 이름(* , 토 오노마)곧 저희들이 죽인 그 예수
께서 지금 무덤에 묻혀 있는 것이 아니고 다시 살아나셔서 이 사람을 낫게 했다는 선
언이다. 왜냐하면 이름이란 그 사람의 인격과 그 사람자신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따라
서 이는 하늘에 앉으셔서 지금도 살아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활동의 계속
성을 진술한 말이다.(3)예수께서 하늘에서 계속 역사하시되 성도들의믿음을 통하여
일을 하시는 것을 말한다. 즉 그의몸된 교회와 지체된 믿는 자를 통하여 친히 능력을
베푸시는 것을 아울러 강조한 것이다. 여기서 ‘믿으므로’는 헬라어 ‘에피'(* )
를 써서 믿음의 기초 위에서 역사함을 말했으며 ‘예수로말미암아 난 믿음이’에서의
믿음은 ‘디아'(* )를 써서 그 믿음이 예수를 통하여 얻어지는 믿음임을 말했다.
따라서 이는 믿음의 근원적 출처 또한 주님이라는 사실, 즉 믿는 자를 통한 그리스도
의 직접적인 행위를 강조하고 있다하겠다. 그러므로 그 이름을 믿으므로 예수로 말미
암아 난 믿음이 고침을 받게 했다는 것과,예수께서 낫게 하셨다는 말은 서로 상충되는
말이아닌 것이다. 한편 여기서 말한 믿음이 누구의믿음을 가리키느냐에 대해서는 다음
과 같은 견해가 있다. (1) 앉은뱅이의 믿음을말한다(Stanley D. Toussaint). (2)베드
로와 앉은뱅이의 믿음이다(Meyer, Lenski, Matthew Henry) (3) 베드로와 앉은뱅이의
믿음이다(Lighfoot, Cavin).이 중 한 견해만 배타적으로 선택하기란 쉽지 않다.왜냐하
면 이 치유 사건에는 먼저 두 사도의 믿음이 주도적으로 작용했으며, 이 앉은뱅이가
치유받은 후에 하나님을 찬양한 것으로 보아 그의믿음 또한 전혀 배제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3:17
형제들아 – 12절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아’라고 부르면서 그들의 죄를 날카롭고도
준엄하게 꾸짖던 사도는 이제 ‘형제들아’라고 부드러운 어조로 따뜻하게 부르면서 간
절한 권면의성격을 띤 호소를 함으로써 그의 설교의 새로운 국면을 시작하고 있다.
너희가 알지 못히여서 -죄에 대해 핑계댈 수 없도록 간담이 서늘할 정도로 무섭게
지적한 사도는 이제 상처를 싸매주는위로를 한다. 즉 청중으로 하여금 회개하여 하나
님의 은혜를 받는 자리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 그들의 죄의 정상(情狀)을 참작하는 말
을 하면서 격려한다. 저들이 조금도 용서받을 길이 없음을 알고 자기들의 죄에 대한
형벌의 두려움만 생각하여 짐짓 절망해 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일단 그들의 범죄
의 원인을 무지 때문이었다고 진단해 준 것이다(눅 23 : 34 ; 딤전 1 : 13 ; 벧전 1:
14).
너희 관원들도 – 13, 14절에서 일반 대중의 우매 무지(愚昧無知)한 죄를 낱낱이
지적한 사도는 이제 관원들, 지도자들의 죄를 지적한다.예수께 대한 지독한 시기심으
로 백성을 충돌질하고 선동한 이들의 죄는 훨씬 더 컸다(마 27 : 18).
=====3:18
그러나 하나님이…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 – 일반 대중과 관원들의 죄를 빠뜨리
지않고 추적한 사도는 단순히 죄를 폭로하고 들추어내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그러나’
(* ,데)라는 강조 접속사를 사용하여 이 모든 것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계획의 성
취라는 측면을 증거한다. 다시 말해서 구약성경에서 분명하게 예언된 바, 즉 그리스
도께서 십자가의 수난을 받아 친히 죽음으로써 하나님의 구속 경론이 이루어지리라는
그예언이 성취된 것이라고 말한다. 유대인들이 무지 속에서 저지른 일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게 했다. 그 계획이란 다름아니라 선지자들에 의해 예언된 바
메시야의 수난에 관한것이다(2 : 23 ; 17 : 3 ; 26 : 22, 23).구약성경에 메시야가 고
난 당하리라는 사실이 직접 언급된적은 없다. 다만 고난당하는 하나님의 종에 관한언
급이 나오며(사53장)또 메시야의 고난에 관한 예표론적 예언이 선지서와 시편에 등장
한다(시22, 69편 ; 렘 11 : 19 ; 단 9 : 26 ; 슥 13 :7).
=====3:19
회개하고 돌이켜 – 눅 13: 1-19 주제강해 ‘회개에 대하여’를 참조하라.
=====3:20
또 주께서 너희를 위히여…예수를 보내시리니 – 어떤 학자들은, 본절을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메시야가 되시기로 정해졌다는 의미로이해한다. 그러나 이는 본문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오히려 본절은, 재림하실 예수께서 이미 메시야로 오셔서 그 사역을
완수하신 바로 그분임음 가르친다. 말하자면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메시야 시대의 도래
는 예수를 메시야로 받아이느냐의 여부에 달려있었다는 것이다.
=====3:21
만유를 회복하실 때 – 하나님께서는 오래 전부터 선지자들의 입을빌어 하나님을
떠나 타락하고 부패하게 된 이 세상을 여인의 후손을 통해 회복하리라고 예언하셨다
(창 3 : 15). 여기서 회복이란 ‘아포카타스타세오스'(*
)로소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1)땅 에서 모든 죄
와 불의를 제거함(고전 15: 24 – 28).(2)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모든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어 그 지으신 본래의 목적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상
태에 이르게 함(엡 1 : 10).(3)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이 완성된 복스러운 상
태(계21 : 1)로 만듦. 이 회복은 그리스도의 속죄로 인하여 이미 시작되었으며 주께
서 재림하실 때에 온건히 완성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뿐만아니라 죄로 인하여
탄식하는 만물도 그리스도의 두번째 나타나심을 고대하는 것이다(롬 8 : 19 -21).
=====3:24
또한 사무엘 때부터…이 때를 가리켜 말하였느니라 – 베드로가 소개하는 아브라
함, 모세, 사무엘 등은 모두 이스라엘 백성이 참다운 지도자로 추앙(推仰)했던 조상
들이다. 따라서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첩경은 이 믿음의 조상들과 그리
스도와의 밀접한 관련성을 밝히는 것임을 베드로는 잘 알고 있다. 따라서 베드로는
모세와 사무엘 및 그 이후의 모든 선지자들에 대하여 언급하고 그들 모두가 예수 그리
스도를 증거하고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모세의 경우처럼 선지자 사무엘이 정확하게
예수에 대하여 적용될 수 있는 어떤 예언을 한 사실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러나 사
무엘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왕이 되게 하였고 그의 나라와 관련된 예언을 남겼다(삼
상 13 : 14 ; 15 : 28 ; 16 : 13 ; 28 : 17). 그리고 다윗 왕국에 관련된 그의예언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로 말미암아 궁극적 성취를 보게 되었다. 또한 삼하7 :
12-16에 기록되고 있는 다윗 자손에 관한 나단 선지자의 예언은 메시야와 연관성을 지
닌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또한 그 예언이 예수에 의해서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던 것으
로 여겨진다(13 : 22 , 23 , 34 ; 히 1 : 5)
=====3:25
너희는…언약의 자손이라 – ‘너희”에해당하는 ‘휘메이스'(* )가 강조적
용법으로 사용되었다. 하나님께서 그 조상들과 언약을 맺으셨는데 이제 바로 ‘너희’
가 그 약속의유업을 받을 자녀들로서 그 언약의 후계자, 상속자로 택함받았다는 사실
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아브라함에게…너의 씨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 아브라함과의 언약에서 하나님
은 그 후손들에게 축복을 약속하셨으며 또한 그 후손을 통해 지상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창 12: 3 ; 18 : 18 ; 22 : 18 ; 26 : 4 ; 갈 3 : 8).
베드로는 이 말씀을 인용하여 예수를 메시야로 위임한 것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주
신 약속을 동일시하고 있다(창 12 : 1-3). 따라서 여기서 ‘씨’의 헬라어 ‘스페르마
‘(* )는 갈 3 : 16에서 설명되었듯이, ‘여럿을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않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한 것으로 보아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즉 그들
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리스도가 아브라함의 씨로서 모든 족속에게 구원의
복된 소식을 주려고 왔다는 의미이다(롬10 : 15 ; 딤전 1 : 11).
=====3:26
너희게게 먼저 보내사 – 헬라어 성경에서는 “너희에게 먼저’라는 뜻의 ‘휘민 프
로톤'(* )이란 말이 문장 처음에 나와 강조되고 있다. 왜냐하
면 하나님의 구원 게획의순서가 첫째는 유대인이었고 그리고 그 유대인들을 통해서
이방인들을 구원하고자 했기 때문이다(롬 1 : 16)) 유대인들은 본문의 진술대로 하
나님의 특별하신 주권적 은혜에 의해서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언약의 자손이요, 씨
를 가진자손들이었기에 구원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따
라서 사도는 이 큰 축복과 특권을 상기시키는 것이다(롬 1 : 16 ; 2 : 10 ; 11 : 1).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 – 하나님께서 종을 먼저
보내신 그 이유와 목적이 무엇인가를 밝힌다.즉 19절의 반복으로 각인이 회개하여 악
함을 버리고 그리스도께 돌아올 것을 호소하는 것으로 사도의 간절한 설교는 끝을 맺
는다(겔 3 : 19 ; 18 : 27 ; 33 : 14 ; 욘3 : 10). 왜냐하면 베드로는 이 하나님의 은
혜를 받게 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그리스도를 증거했기 때문이다. 본장의 주석을 마감
하면서 한 가지 분명히 밝힐 것은 본장에서 강조하는 것은 앉은뱅이가 고침받는 기적
자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앉은뱅이의 치유 기적 자체만 강조하여 논한다면 우리는 나
무는 보고 정녕 숲은 못보는 근시안적인 안목을 가진 자가 되고 말것이다. 왜나하면
기적은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는 표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장에서는 그 기
적이 보여주는 하나님 나라와 그 나라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하나님의 전
(全)구속 경륜(求續經綸)을 설명하면서 증거한 베드로의 훌륭한 설교에 초점이 모아짐
이 마땅하다.
헬라어 사도행전 3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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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트로스 데 카이 요안네스 아네바이논 에이스 토 히에론 에피 텐 호란 테스 프로슈케스 텐 에나텐
개역개정,1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새번역,1 ㉠오후 세 시의 기도 시간이 되어서,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올라가는데, / ㉠그, ‘제 구 시’
우리말성경,1 어느 날 오후 3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가톨릭성경,1 베드로와 요한이 오후 세 시 기도 시간에 성전으로 올라가는데,
영어NIV,1 One day Peter and John were going up to the temple at the time of prayer–at three in the afternoon.
영어NASB,1 Now Peter and John were going up to the temple at the ninth hour, the hour of prayer.
영어MSG,1 One day at three o’clock in the afternoon, Peter and John were on their way into the Temple for prayer meeting.
영어NRSV,1 One day Peter and John were going up to the temple at the hour of prayer, at three o’clock in the afternoon.
헬라어신약Stephanos,1 επι το αυτο δε πετρος και ιωαννης ανεβαινον εις το ιερον επι την ωραν της προσευχης την εννατην
라틴어Vulgate,1 Petrus autem et Iohannes ascendebant in templum ad horam orationis nonam
히브리어Modern,1 ופטרוס ויוחנן עלים יחדו אל המקדש לעת התפלה בשעה התשיעית׃
성 경: [행3:1]
주제1: [예루살렘 교회의 활동]
주제2: [앉은뱅이 치유]
제 구시 기도 시간에 – 3시를 가리킨다. 단 6:11; 9: 21에 의하면 경건한 유대인들은 하루에 제 삼 시(오전 9시), 제 육시(12시), 그리고 본문에 나타난 제 구 시 (오후3시)를 정해놓고 세번의 기도를 하였다. 물론 이것은 구속력있는 율법 규례가 아니라 나의 종교적 관습이었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하루 구분법에 의하면 제 구 시는 해가 기울기 시작하여 저녁시간이 되어가는 오후 예배 시간을 의미한다(출 29:39). 요세푸스(Josephus)에 의하면 유대인들의 공식적 기도시간은 (1) 이른 아침. (2)제 구 시, 즉 오후 예배 시간인 이 때공중 기도를 드리는 순서가 있어서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고 한다. (3) 해질 황혼 무렵에 또 한번의 기도 시간이 있었다. 오늘날도 기도시간을 정해놓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인간 나약함을 극복하기 위해 권장할 만한 방법이라 하겠다.
베드로와 요한 – (1) 함께 어업에 종사한 동업자 였다 (마 4:18, 21; 눅 5: 10). (2) 세례요한의 때부터 메시야를 고대하던 자들이었다(요 1: 37, 42) (3) 개심 후 함께 사도직을 받은 동료 였다( 1: 13; 마 10:2). (4) 특별히 예수께 인정받고 사랑을 입은자들이었다 (마 26:37; 눅 8:51; 9:28). (5)예수께서 수난 받으실 때에 행동을 같이하던 친밀한 친구였다(눅 22:8; 요 18:16). (6)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한 동역자였다(8:14). 성질이 급하고 정열적인 베드로와 조용하고 차분한 요한은 성격적으로 많은 차이가 있었지만 이 두사람은 모든 면에서 함께 행동하였다(눅 22:8; 요 13:24,25; 18:16,17; 20:2). 따라서 이들은 12제자의 선봉장(先鋒將)으로 가장 중심 역할을 했으며 지도자 (lwader)로 부각된 인물들이었다.
성전에 올라갈새 – ‘ 올라갈새’를 가리키는 헬라어 ‘아네바이논'(*)은 미 완료 시제로서 ‘그들이 올라가고 있었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현재 진행중인 어떤 동작 및 과정을 아주 시각적으로 인상깊게 그리고 생생하게 묘사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무엇때문에 유대인의 관습을 따라 기도시간에 성전에 올라갔으까? 여기서 칼빈(Calvin)은 말하기를 ‘ 유대인의 율법 의식을 따라 기도하기 위해 성전에 올라갔다기 보다는 그 시간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므로 복음을 전파하기에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여서 올라갔다’는 표현은 단순히 성전의 위치가 지형상 높았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근본적으로 종교상의 경건한 측면에서 비롯되어 나온 말이다(11:2; 18:22; 눅 18:10; 요 7:14). 아울러 사도들이 예수의 승천직후 예루살렘에 거주하고 있었다는 것은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욱 24:49)고 하신 예수의 명령과 또 그들의 사명이 ‘예루살렘에서 부터 시작되리라'(1:8)는 말씀과도 일치 되는 것이다.
카이 티스 아네르 콜로스 에크 코일리아스 메트로스 아우투 휘파르콘 에바스타제토 혼 에티둔 칻 헤메란 프로스 텐 뒤란 투 히에루 텐 레고메넨 호라이안 투 아이테인 엘레에모쉬넨 파라 톤 에이스포류오메논 에이스 토 히에론
개역개정,2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새번역,2 나면서부터 못 걷는 사람을 사람들이 떠메고 왔다. 그들은 성전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게 하려고, 이 못 걷는 사람을 날마다 ‘아름다운 문’이라는 성전 문 곁에 앉혀 놓았다.
우리말성경,2 사람들이 태어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을 메고 오는데 그들은 그가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할 수 있도록 ‘아름다운 문’이라는 성전 문에 그를 날마다 앉혀 놓았습니다.
가톨릭성경,2 모태에서부터 불구자였던 사람 하나가 들려 왔다. 성전에 들어가는 이들에게 자선을 청수 있도록, 사람들이 그를 날마다 ‘ 아름다운 문’ 이라고 하는 성전 문 곁에 들어다 놓았던 것이다.
영어NIV,2 Now a man crippled from birth was being carried to the temple gate called Beautiful, where he was put every day to beg from those going into the temple courts.
영어NASB,2 And a certain man who had been lame from his mother’s womb was being carried along, whom they used to set down every day at the gate of the temple which is called Beautiful, in order to beg alms of those who were entering the temple.
영어MSG,2 At the same time there was a man crippled from birth being carried up. Every day he was set down at the Temple gate, the one named Beautiful, to beg from those going into the Temple.
영어NRSV,2 And a man lame from birth was being carried in. People would lay him daily at the gate of the temple called the Beautiful Gate so that he could ask for alms from those entering the temple.
헬라어신약Stephanos,2 και τις ανηρ χωλος εκ κοιλιας μητρος αυτου υπαρχων εβασταζετο ον ετιθουν καθ ημεραν προς την θυραν του ιερου την λεγομενην ωραιαν του αιτειν ελεημοσυνην παρα των εισπορευομενων εις το ιερον
라틴어Vulgate,2 et quidam vir qui erat claudus ex utero matris suae baiulabatur quem ponebant cotidie ad portam templi quae dicitur Speciosa ut peteret elemosynam ab introeuntibus in templum
히브리어Modern,2 ואיש אחד פסח מבטן אמו מובא שמה אשר יושיבהו יום יום שער המקדש הנקרא שער המהדר לשאל מתנות מאת באי המקדש׃
성 경: [행3:2]
주제1: [예루살렘 교회의 활동]
주제2: [앉은뱅이 치유]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 – ‘카이 티스 아네르 콜로스 에크 코일리아스 메트로스 아투'(*)를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그리고 그의 어머니 태에서 부터 앉은뱅이였던 사람 하나’ 가 된다. 이것은 그가 중간에 사고로 다친 것이 아니고 태어날때 부터 40세(4:22)가 되는 지금까지 하체가 마비된 고통을 지닌것을 보여줌으로써 나을 희망이 전혀 없는 사람임을 시사한다.
사람들이 메고 오니 성전에 들어가는… 구걸하기 위하여 – 그는 일하여 생계를 유지할 수 없으므로 동냥하여 살아가야 했다. 더욱이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이므로 매번 다른 사람에 의해 운반되어져야 하는 불쌍하고 비참한 걸인(乞人)이었다. 한편 운반하는 사람들이 그를 구태여 성전 문 앞에 둔 이유는 무엇일까 ? 유대교에서는 남을 구제하는 일이 매우 큰 덕목으로 여겨졌다. 이 때문이 성전에 올라오는 사람들은 그 거지들에게 동전을 던져줌으로써 하나님의 상을 얻고자 하였다. 그래서 이것을 잘 아는 걸인들이 성전이나 전각 입구에 앉아 구걸하는 일이 많았다. 따라서 걸인들에게는 하나님께 예배하러 나아가는 사람들을 만날수 있는 성전 문앞이야말로 동냥을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장소였고 또한 유대인들은 남을 구제하여 하나님의 상을 얻기 위해 성전 문에 걸인이 있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던 것이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 미문(the Beautiful Gate) 이라는 이름은 외관상으로 장엄함과 화려함을 지녔기 때문에 붙여진 듯하다. 그런데 이 미문이 예루살렘 성전의 어느 문을 가리키는지는 학자들간에 의견이분분하다. 이방인의 뜰로 들어가는 성전 동편의 바깔 문인 슈산 문(Meyer, Alfird), 또는 이방인의 뜰에서 여인의 뜰로 통하는 니가노르 문(Knowling, Alexander) 의 양설이 주로 언급되나 후설이 보다 유력하다. 기원 후 5세기 이래로 많은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 바깥 뜰 동쪽에 위치하여 있고 또 예루살렘 멸망 이후에도 그대로남아 있던 동문 혹은 슈산문(그 문이 수산 궁전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다)을 본문의 미문으로 동일시하여 왔었다. 그러나 유머의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와 미쉬나(Mishnah)의 문서인 ‘미도트'(Middoth 1:3, 4:2. 3:성전규모와 그 건축 종사자들에 대한 기록)의 기록에의하면 니카노르 문(Nicannor Gate)과 동일시하고있다. 이 문은 아름답고 값진 고린도산 황동으로 만들어진 웅장한 문으로서 가치상으로 볼 때 은으로 도금되고 금으로 장식된 것들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요세푸스는 말한다.
두는 자라 – ‘두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티둔'(*)은 미완료 과거형으로서 매일매일 반복되어 앉혀지는 습관적인 동작을 가리킨다.
호스 이돈 페트론 카이 요안넨 멜론타스 에이시에나이 에이스 토 히에론 에로타 엘레에모쉬넨 라베인
개역개정,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새번역,3 그는,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들어가려는 것을 보고, 구걸을 하였다.
우리말성경,3 그는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들어가려는 것을 보고 구걸했습니다.
가톨릭성경,3 그가 성전에 들어가려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고 자선을 청하였다.
영어NIV,3 When he saw Peter and John about to enter, he asked them for money.
영어NASB,3 And when he saw Peter and John about to go into the temple, he began asking to receive alms.
영어MSG,3 When he saw Peter and John about to enter the Temple, he asked for a handout.
영어NRSV,3 When he saw Peter and John about to go into the temple, he asked them for alms.
헬라어신약Stephanos,3 ος ιδων πετρον και ιωαννην μελλοντας εισιεναι εις το ιερον ηρωτα ελεημοσυνην λαβειν
라틴어Vulgate,3 is cum vidisset Petrum et Iohannem incipientes introire in templum rogabat ut elemosynam acciperet
히브리어Modern,3 ויהי כראותו את פטרוס ואת יוחנן באים אל המקדש ויבקש לקחת מאתם צדקה׃
성 경: [행3:3]
주제1: [예루살렘 교회의 활동]
주제2: [앉은뱅이 치유]
구걸하거늘 – 그는 여전히 자기의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서 평상시 방법대로 구걸한다. 그런데 ‘구걸하거늘’을 가리키는 헬라어 ‘에로타'(*)는 미완료시제로서 구걸의 행위가 다 끝나지 않고 계속되는 가운데 손을 내밀고 무엇을 받으려는 그때의 정황을 잘 묘사해 주는 누가의 표현법이다. 그리고 또한 이것은 간절하고도 정중하게 한 푼 도와줄 것을 요청하는 표현이다. 아무튼 그는 무엇을 구해야 진정한 삶을 얻게 되는지를 알 수 있는 믿음의 눈이 열려지지 않은 가련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종들을 향해서도 물질적인 적선(積善)을 구하고 있는 것이다.
아테니사스 데 페트로스 에이스 아우톤 쉰 토 요안네 에이펜 블렢손 에이스 헤마스
개역개정,4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새번역,4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그를 눈여겨 보고, 그에게 말하였다. “우리를 보시오!”
우리말성경,4 그러자 베드로가 요한과 함께 그를 주목하면서 “우리를 보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가톨릭성경,4 베드로는 요한과 함께 그를 유심히 바라보고 나서, “우리를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영어NIV,4 Peter looked straight at him, as did John. Then Peter said, “Look at us!”
영어NASB,4 And Peter, along with John, fixed his gaze upon him and said, “Look at us!”
영어MSG,4 Peter, with John at his side, looked him straight in the eye and said, “Look here.”
영어NRSV,4 Peter looked intently at him, as did John, and said, “Look at us.”
헬라어신약Stephanos,4 ατενισας δε πετρος εις αυτον συν τω ιωαννη ειπεν βλεψον εις ημας
라틴어Vulgate,4 intuens autem in eum Petrus cum Iohanne dixit respice in nos
히브리어Modern,4 ויסתכל בו פטרוס וגם יוחנן ויאמר אליו הביטה אלינו׃
성 경: [행3:4]
주제1: [예루살렘교회의 활동]
주제2: [앉은뱅이 치유]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 혹자는 베드로가 혼자서 말했음과 걸인이 한꺼번에 두 사람을 주목하지는 않았을 것임을 근거로 제시하면서 본문의 기적 행위가 베드로 한 사람에 의해서 되어졌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요한으로 더불어’라는 표현은 후대에 와서 첨가된 것이라고 주장한다(Hanechen). 그러나 이는 별 호소력이 없는 주장으로 본문에 있는 그대로 요한은 베드로와 함께 행동을 취한 것이며 이 기적행함에도 똑같이 주님의 종으로서 성령의 능력따라 행한 것이다. 단지 여기서 베드로가 말한 것은 행동파적인 기질이 있어 그의 적극적인 성격을 반영한다. 지난날 12제자와 함께 있을때도 베드로는 언제나 제자들의 대변자(代辯者)역할을 서슴없이 하였었다(마 16:13 -16). 따라서 여기서는 누가 앞에 나서서 직접적으로 활동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며, 주님께서 크신 능력으로 당신의 종들을 통해 놀라운 이적을 베푸신 사실에 초점이 있을진대, 요한 역시 베드로와 똑같이 이 기적의 사건에 참여한 것이다(J. Calvin, Lenski). 동시에 행동파 베드로와 사색가 요한이 함께 보조를 맞추는 모습이야말로 참으로 아름다운 동역의 모습이다.
주목하여 가로되 – 원문상으로는 ‘주목(注目)하여’의 헬라어 ‘아테니사스'(*)란 말이 맨 처음에 나온다. 그리고 ‘데'(*, 그리고’) 이하는 걸인이 마흔살이 되는 지금까지 성전 문 앞에서 구걸하였어도 여태껏 경험하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일이 전개됨을 보여 준다. 또 ‘아테니사스’ 란 말은 바라보는 대상을 향한 집중된 응시를 의미하며 1:10에서 승천하시는 예수를 ‘자세히 쳐다 보다’로 번역된 말과 같은 동사다(눅 4:20). 그렇다면 왜 주목하여 보았을까 ? (1)13:9에서와 같이 사도가 집중적인 응시의 동작을 취한 것은 이제 이적을 일으키기 전에 필요한 내적인 준비를 갖추기 위해서이다. (2)나면서부터 앉은뱅이가 된 이 사람을 측은하고 불쌍한 마음으로 쳐다봄으로써 걸인으로 하여금 사도를 주시하게끔 하기 위해서다. 즉 인격과 인격의 접촉을 갖기 위해서이다. (3)내재하시는 성령의 지도와 그 역사하심을 따라 행동하던 사도들은 불쌍한 앉은뱅이의 구걸을 받자 자신들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특별하신 감동에 의해서 그를 주목하는 행동을 취한 것이다(Calvin). 여기서 (1)의 견해는 성경의 기적을 이적 설화로 취급하는 비판자들이 주로 내세우는 주장으로서 받아들이기가 어렵고 (2)와(3)의 주장은 자연스럽다고 하겠다. 따라서 신비주의자들의 주장처럼 본문의 ‘주목하여’라는 말은 사람 마음의 깊은 내면을 들여다 본다거나, 어떤 상황의 내막을 발견하기 위하여 취하는 소위 투시 동작이 아님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Lenski). 결국 주님이 그들을 감동시켰을 때에 그들은 이 동냥하는 걸인에게 눈을 고정시킴으로 그 걸인이 베드로와 요한을 쳐다보게 유도한 것이다.
우리를 보라 – 이의 헬라어 ‘블려손 에이스 헤마스'(*)는 병들거나 아픈 것이 없이 영원히 사는 천국 복음에 대해 전파하는 사도들에게 단지 한 푼의 돈을 동냥하는 걸인의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하여 단호하고 권위있는 그러나 긍휼히 여기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명령하는 말이다. 따라서 이는 이제 앉은뱅이가 돈 몇 푼을 구하는 상태에서 떠나 하나님의 은혜를 소원(訴願)하도록 요구한 말이다. 즉 자신에게 신기하고도 이례적(異例的)인 하늘의 축복을 소망하도록 촉구한 것이다.
호 데 에페이켄 아우토이스 프로스도콘 티 파르 아우톤 라베인
개역개정,5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새번역,5 그 못 걷는 사람은 무엇을 얻으려니 하고, 두 사람을 빤히 쳐다보았다.
우리말성경,5 그는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고 그들을 쳐다보았습니다.
가톨릭성경,5 그가 무엇인가를 얻으리라고 기대하며 그들을 쳐다보는데,
영어NIV,5 So the man gave them his attention, expecting to get something from them.
영어NASB,5 And he began to give them his attention, expecting to receive something from them.
영어MSG,5 He looked up, expecting to get something from them.
영어NRSV,5 And he fixed his attention on them, expecting to receive something from them.
헬라어신약Stephanos,5 ο δε επειχεν αυτοις προσδοκων τι παρ αυτων λαβειν
라틴어Vulgate,5 at ille intendebat in eos sperans se aliquid accepturum ab eis
히브리어Modern,5 וישם פניו אליהם בקותו לקחת מאתם דבר׃
성 경: [행3:5]
주제1: [예루살렘 교회의 활동]
주제2: [앉은뱅이 치유]
바라보거늘 – ‘에페이켄'(*)은 미완료 과거 능동태로서 단순히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주의를 사도들에게 집중하는 것을 생동감있게 묘사한 말이다. 그리고 이 단어 앞에 ‘눈을'(*, 투스 오프달무스)이란 단어를 첨가하면 더욱 생동감있는 표현이 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걸인이 무슨 마음으로 또는 왜 쳐다보았을까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 (1)자기에게 동냥을 주려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빌어주기 위하여 바라보았다. 따라서 그 걸인은 자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모르고 단순히 쳐다본 것이다(Haenchen). (2)보통 몇 푼을 던져주고 가는 사람들과는 달리 유별나게 ‘우리를 보라’고까지 말한 그들에게 이제 이 걸인은 ‘평상시보다도 더많은, 뭔가 대단한 것을 얻는가 보다’라고 생각하여 주의를 집중하여 쳐다본 것이다(Lenski). (3) 기적을 일으킬 만한, 즉 고침을 받을 만한 믿음의 눈으로 쳐다보았다(E. M. Blaiklock). 그 증거로 병고침받은 자들에게는 대개 믿음이 있었다는 점과(막 6: 34,36) 그가 고침을 받은 후 즉시 하나님을 찬미한 것을(8절) 제시한다. 따라서 베드로가 그의 믿음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사자의 믿음과 관계없이 주님의 일방적인 주권에 의해 병고침을 베풀어 준 사례들을 생각할 때(요 9:1-12) 이 견해는 설득력이 약하다 하겠다. 따라서 걸인의 신앙 행위는 기적이 일어난 후에 생긴 것이라고 보나 렌스키의 견해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취할 수 있겠다.
에이펜 데 페트로스 아르귀리온 카이 크뤼시온 우크 휘파르케이 모이 호 데 에코 투토 소이 디도미 엔 토 오노마티 예수 크리스투 투 나조라이우 에게이레 카이 페리파테이
개역개정,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새번역,6 베드로가 말하기를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그대에게 주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 하고, / ㉡그, ‘나사렛 사람’
우리말성경,6 베드로가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라고 말하고
가톨릭성경,6 베드로가 말하였다.“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영어NIV,6 Then Peter said, “Silver or gold I do not have, but what I have I give you. In the name of Jesus Christ of Nazareth, walk.”
영어NASB,6 But Peter said, “I do not possess silver and gold, but what I do have I give to you: In the name of Jesus Christ the Nazarene– walk!”
영어MSG,6 Peter said, “I don’t have a nickel to my name, but what I do have, I give you: In the name of Jesus Christ of Nazareth, walk!”
영어NRSV,6 But Peter said, “I have no silver or gold, but what I have I give you; in the name of Jesus Christ of Nazareth, stand up and walk.”
헬라어신약Stephanos,6 ειπεν δε πετρος αργυριον και χρυσιον ουχ υπαρχει μοι ο δε εχω τουτο σοι διδωμι εν τω ονοματι ιησου χριστου του ναζωραιου εγειραι και περιπατει
라틴어Vulgate,6 Petrus autem dixit argentum et aurum non est mihi quod autem habeo hoc tibi do in nomine Iesu Christi Nazareni surge et ambula
히브리어Modern,6 ויאמר פטרוס כסף וזהב אין לי אבל את אשר בידי אתננו לך בשם ישוע המשיח הנצרי קום התהלך׃
성 경: [행3:6]
주제1: [예루살렘 교회의 활동]
주제2: [앉은뱅이 치유]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 앉은뱅이에게 보기드문 기대감을 잔뜩 불러 일으켜 놓고 베드로가 한 이 말은 은과 금을 구하던 걸인으로 하여금 허탈감에 빠지게 했다는 견해도 있지만 곧 이어서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라고했기 때문에 낙담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오히려 그는 이제 베드로의 이 선언을 통해서 돈 몇 푼이 아닌 자신의 처지에대한 근본적인 해결의 빛을 기대하는 희망의 신앙이 싹트기 시작하는 느낌을 받았다고 할 수있겠다. 따라서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라고 곧바로 선언되는 베드로의 선포는 앉은뱅이로 하여금 어떤 신기한 기대감(期待感)을 갖게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은과 금은 내게 없다”베드로의 선언속에서 우리는 (1)물질의 소유에 초월해 사는 사도들의 청빈함을 엿볼 수 있으며 예수의 말씀대로 금이나 은이나 돈을 가지고다니지 않았다는 것과(마 10:9) (3)혹 물질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믿는 사람의 필요를 따라’교회 공동체에서 공동 관리하였다(2:44, 45)는 추측을 할 수 있겠다. 우리는 문자적으로 이 구절을 적용하며 사도들에게 물질이 전혀 없었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제 주님의 뜻따라 앉은뱅이에게 은이나 금과는 비교가 안 되는하늘의 능력을 그에게 나타내려고 했기 때문에 복음 전파의 차원에서 그렇게 선포한 것이다. 한편 본 구절이 궁핍한 자들에 대한 물질적 구제를 금하는 것은 결코 아니며 또 교회의 역할이 물질적 도움보다는 영적 구원에 집중되어야 함을 가르치는 말씀도 아니다. 결과적으로 볼 때 본문의 앉은뱅이 또한 육신의 치유를 경험한 사람이다(7절). 다만 본 사건은 사도들의 궁극적 관심사가 신체보다는 영적 치유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은 사실이다.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이름으로 – 사도들이 소유한 최고의 보물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였다. 그들은 이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기 위하여 걸인이 구하던 은과 금,즉 세상의 보화들을 배설물로 여겨버린 자들이었다(빌 3:8). 여기서 ‘이름으로’라고 표현한 것을 먼저 주목해 보자. 히브리인들에게 있어 이름은 그 사람의 성격 및 본질 즉 그 사람의 존재를 대표해 주는 것이었다(주제 강해 창 25:19-16 ‘이름 짓기’ 참조). 그러므로 여기서 이름이란 그 사람 인격(人格) 전체를 대표하는 말이다. 따라서 베드로는 자신의 능력이나 신앙심 가지고 기적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믿는 예수의 능력과 은혜에 의존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는 셈이다. 다시 말해서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생명의 근원이 되신 예수께서 크신 능력을 베푸셔서 병자를 낫게 하신다는 것을 선언하고있다. 이 사실은 12절과 16 절에서 더 뚜렷이 증거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사렛’이라는 수식어를 사용한 것에 대해 어떤 학자들은 사적 예수인 나사렛 예수와 부활하신 신앙의 그리스도를 분리한다(Martin Keil, Bultmann). 그러나 역사적 예수와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전혀 별개의 인물이 될 수 없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 1:46)는 말이 암시해 주듯 당시 나사렛은 천한 지방으로 간주되었기에 주님께서 나사렛에서 성장하셨다는 것은 언제나 유대인들의 경멸과 조롱의 내용이 되었다. 그러나 베드로는 나사렛 예수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의 구원자이신 대망의 메시야였으며 그 분께서 부활. 승천하셔서 지금 하늘과 땅의 모든권세를 가지고 이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기적베푸심을 역설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걸으라 – ‘페리파테이'(*)란 말은 시작과 계속의 개념을 가진 현재 명령형으로서 ‘걷기 시작하라. 그리고 지금부터 계속 걸으라’는 뜻이다. 이 명령은 주님이 뜻을 선포하는 말씀이므로 놀라운 권능을 동반하는 권위있는 선언이다. 그리고 앉은뱅이가 이 말을 믿었다는 문자적인 기록은 없지만 사도의 말에 항변(抗辯) 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그대로 순응한 것을 보아 그가 베드로의 권위있는 명령을 듣고 믿었음알수 있다. 따라서 사도의 이 명령과 함께 성령의 크신 역사가 순간적으로 불쌍한 걸인에게 임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사도의 이 ‘걸으라’는 명령과 함께 성령이 얼어붙은 영혼을 혼들어 놓았던 것이다. 40년동안 말라 붙어 있던 하반신에 창조주의 생명의 기운이 불어 넣어짐으로써 치유의 은혜가 임하는 순간이었다.
카이 피아사스 아우톤 테스 뎈시아스 케이로스 에게이렌 아우톤 파라크레마 데 에스테레오데산 하이 바세이스 아우투 카이 타 스퓌드라
개역개정,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새번역,7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는 즉시 다리와 발목에 힘을 얻어서,
우리말성경,7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그의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어
가톨릭성경,7 그러면서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러자 그가 즉시 발과 발목이 튼튼해져서
영어NIV,7 Taking him by the right hand, he helped him up, and instantly the man’s feet and ankles became strong.
영어NASB,7 And seizing him by the right hand, he raised him up; and immediately his feet and his ankles were strengthened.
영어MSG,7 He grabbed him by the right hand and pulled him up. In an instant his feet and ankles became firm.
영어NRSV,7 And he took him by the right hand and raised him up; and immediately his feet and ankles were made strong.
헬라어신약Stephanos,7 και πιασας αυτον της δεξιας χειρος ηγειρεν παραχρημα δε εστερεωθησαν αυτου αι βασεις και τα σφυρα
라틴어Vulgate,7 et adprehensa ei manu dextera adlevavit eum et protinus consolidatae sunt bases eius et plantae
히브리어Modern,7 ויאחז ביד ימינו ויקם אותו ויתחזקו פתאם רגליו וקרסליו׃
성 경: [행3:7]
주제1: [예루살렘 교회의 활동]
주제2: [앉은뱅이 치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 ‘잡아 일으킨다’는 말은 신유(神癒)를 베푸는 자의 신비한 능력을 치유받는 환자에게 전달해 주는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따라 자신이 선포한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을 의심없이 믿고 확신하여 손수 불구자의 손을 잡고 일으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걸인의 편에서 보면 베드로의 명령에 대한 그의 믿음과 순종을 엿볼 수 있으며 이러한 그의 믿음을 더욱 복돋아 주기 위하여 오른손을 잡아 일으킨 것이 된다(John Joseph H. Mayfield).
발과 발목이 – 앉은뱅이가 치유될 때의모습을 설명하기 위하여 누가가 사용하고 있는 특수한 단어들은 한결같이 의학적 성격을 띤 용어들로서 그의 전직이 의사였음을 여실히 드러낸다(Kowling). ‘발’의 헬라어 ‘바세이스'(*)는 ‘발바닥’ 또는 ‘발꿈치’를 가리킨다. 그리고 ‘발목’의 헬라어 ‘스퓌드라'(*)는 ‘ 복사뼈’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이 두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여기에만 나타난 의학적 용어이다(Henry Alford).
곧 힘을 얻고 – 이것은 앉은뱅이가 걷지 못한 근본 이유가 발과 발목에 힘이 없었기 때문임을 말함과 동시에 이제 당장 발과 발목에 기이한 힘이 생겨 정상으로 돌아옴을 뜻한다. 그리고 일순간에 앉은뱅이가 치유받는 것은 생명의 근원이 되신 주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일반 법칙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이적이 일어난 것을 의미한다.
카이 엨살로메노스 에스테 카이 페리에파테이 카이 에이셀덴 쉰 아우토이스 에이스 토 히에론 페리파톤 카이 할로메노스 카이 아이논 톤 데온
개역개정,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새번역,8 벌떡 일어나서 걸었다. 그는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갔다.
우리말성경,8 뛰어 서서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면서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갔습니다.
가톨릭성경,8 벌떡 일어나 걸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껑충껑뛰기도 하고 하느님을 찬미하기도 하였다.
영어NIV,8 He jumped to his feet and began to walk. Then he went with them into the temple courts, walking and jumping, and praising God.
영어NASB,8 And with a leap, he stood upright and began to walk; and he entered the temple with them, walking and leaping and praising God.
영어MSG,8 He jumped to his feet and walked. The man went into the Temple with them, walking back and forth, dancing and praising God.
영어NRSV,8 Jumping up, he stood and began to walk, and he entered the temple with them, walking and leaping and praising God.
헬라어신약Stephanos,8 και εξαλλομενος εστη και περιεπατει και εισηλθεν συν αυτοις εις το ιερον περιπατων και αλλομενος και αινων τον θεον
라틴어Vulgate,8 et exiliens stetit et ambulabat et intravit cum illis in templum ambulans et exiliens et laudans Dominum
히브리어Modern,8 ויקפץ ויתהלך ויבא אתם אל המקדש מתהלך ומרקד ומשבח את האלהים׃
성 경: [행3:8]
주제1: [예루살렘 교회의 활동]
주제2: [앉은뱅이 치유]
뛰어 서서 걸으며 – 본 구절에 대한 헬라어 ‘여살로메노스 에스테 카이 페리에파테이'(*)를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그는 뛰어 일어나 똑바로 섰다. 그리고 계속해서 걸어 돌아다녔다’는 뜻이다. 여기서 미완료 시제를 사용한것은 사도가 그에게 명령한 그대로 일어나 걷고 뛰기 시작했으며 또한 계속해서 걸을 것임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이는 (1)베드로의 말이 허풍(虛風)을 떠는 빈 발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실재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고침받는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을 생생하게 입증하는 것이며 따라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계심과 그 능력의 놀라움을 증거하는 것이다. 더나아가 이 기적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하였던바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사35:6)라는 메시야의 시대가 실제로 도래하였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표적(sign)이 된 것이다. (3)40여년 동안 불구의 앉은뱅이 신세로 침상을 떠나지 못했던 그가 이제 고침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말로 다 할 수 없는 그 기쁨을 기운차게 표시한 것이다.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 앉은뱅이였던 그가 꿈만 같은 놀라운 기적의 은혜를 입어 걷게 되자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맨처음 들어간 곳은 성전이었다. 이는 자신의 치유가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임을 고백하는 행위이다.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 상상할 수 없는 은혜를 받은 자로서 너무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이다. 여기서 ‘뛰기도'(leaping up)의 헬라어 ‘할레스다이(*) 뛰어 오르기도 하고 달리기도 하는 모습으로 마치 놀란 토끼처럼 껑충껑충 뛰어 다녔다는 뜻이다. 또는 오랫동안 새장 안에 갇힌 새가 풀려나 창공을 날아가듯이, 혹은 개집에 매여 있던 개가 풀려나 사방을 자유롭게 뛰어다니듯이 신바람난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들어가서” (시 100:4)라는 시인의 노래는 새롭게 얻은 몸으로 그야말로 기쁨이 충만하여 사도의 뒤를 따라 성전에 들어가는 이 사람에게서 가장 극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하나님을 찬미하니 – 동전 몇 닢을 구걸하던 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을 체험함으로써 육신의 치료를 받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영혼의 구원까지 받게 되었으니 성전에 가서 하나님을 찬미함은 너무나 당연한 모습이다. 이렇듯 찬송은 은혜를 입은 자가 마음에서부터 드리는 지극한 감사의 표현이고 입술의 제사임을 본다(히 13:15).
카이 에이덴 파스 호 라오스 아우톤 페리파툰타 카이 아이눈타 톤 데온
개역개정,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새번역,9 사람들은 모두 그가 걸어다니는 것과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보고,
우리말성경,9 모든 백성이 그가 걸어 다니는 것과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가톨릭성경,9 온 백성은 그가 걷기도 하고 하느님을 찬미하기도 하는 것을 보고,
영어NIV,9 When all the people saw him walking and praising God,
영어NASB,9 And all the people saw him walking and praising God;
영어MSG,9 Everybody there saw him walking around and praising God.
영어NRSV,9 All the people saw him walking and praising God,
헬라어신약Stephanos,9 και ειδεν αυτον πας ο λαος περιπατουντα και αινουντα τον θεον
라틴어Vulgate,9 et vidit omnis populus eum ambulantem et laudantem Deum
히브리어Modern,9 ויראהו כל העם מתהלך ומשבח את האלהים׃
성 경: [행3:9]
주제1: [예루살렘 교회의 활동]
주제2: [앉은뱅이 치유]
모든 백성이… 보고 – 기적은 그 당사자에게만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니라 그를 둘러싸고 있는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앉은뱅이였던 자가 걷고 뛰는 모습은 주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해 온전한 치유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대한 획실한 증거가 되었다. 그 앉은뱅이 걸인은 수 년 동안의 구걸로 인해 이미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따라서 그의 신원(身元)이나 치유 사실의 여부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에페기노스콘 데 아우톤 호티 아우토스 엔 호 프로스 텐 엘레에모쉬넨 카데메노스 에피 테 호라이아 퓔레 투 히에루 카이 에플레스데산 담부스 카이 엨스타세오스 에피 토 쉼베베코티 아우토
개역개정,10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새번역,10 또 그가 아름다운 문 곁에 앉아 구걸하던 바로 그 사람임을 알고서, 그에게 일어난 일로 몹시 놀랐으며, 이상하게 여겼다.
우리말성경,10 그가 성전 ‘아름다운 문’에 앉아 구걸하던 바로 그 사람임을 알아보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해 몹시 놀라며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가톨릭성경,10 또 그가 성전의 ‘ 아름다운 문’ 곁에 앉아 자선을 청하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경탄하고 경악하였다.
영어NIV,10 they recognized him as the same man who used to sit begging at the temple gate called Beautiful, and they were filled with wonder and amazement at what had happened to him.
영어NASB,10 and they were taking note of him as being the one who used to sit at the Beautiful Gate of the temple to beg alms, and they were filled with wonder and amazement at what had happened to him.
영어MSG,10 They recognized him as the one who sat begging at the Temple’s Gate Beautiful and rubbed their eyes, astonished, scarcely believing what they were seeing.
영어NRSV,10 and they recognized him as the one who used to sit and ask for alms at the Beautiful Gate of the temple; and they were filled with wonder and amazement at what had happened to him.
헬라어신약Stephanos,10 επεγινωσκον τε αυτον οτι ουτος ην ο προς την ελεημοσυνην καθημενος επι τη ωραια πυλη του ιερου και επλησθησαν θαμβους και εκστασεως επι τω συμβεβηκοτι αυτω
라틴어Vulgate,10 cognoscebant autem illum quoniam ipse erat qui ad elemosynam sedebat ad Speciosam portam templi et impleti sunt stupore et extasi in eo quod contigerat illi
히브리어Modern,10 ויכירו אותו כי הוא אשר היה ישב לשאל צדקה בשער המקדש המהדר וימלאו שמה ושממון על הנעשה לו׃
성 경: [행3:10]
주제1: [예루살렘 교회의 활동]
주제2: [앉은뱅이 치유]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 – ‘기이히 여기며’의 헬라어는 ‘담보스'(*)로 어떤 행위를 보고 감정적인 면에서 느끼게 되는 탄복이나 충격적인 놀라움 또는 거룩한 두려움등을 말한다. 그리고 ‘놀라니라’의 ‘에크스타시스'(*)는 뜻하지 않은 사건을 접했을 때 정상적인 마음의 평정을 잃어버리고 망연자실(茫然自失)해진 상태를 말한다(막 1:27 ;10:24, 32; 14:33; 16:5,6; 눅 4:36). 이처럼 사람들의 비상한 관심을 끌며 정신을 차릴 수없을 정도로 심히 놀라게 하는 것은 기적의 결과로 나타나는 첫단계의 모습으로서 기적 자체가 갖는 영향력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와같은 놀라움의 반응이 그 이적을 일으키신 분께 대한 믿음과 반드시 동일한 것은 아니다. 다시말해서, 그 이적이 시사하는 바인 하나님의 권능과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서도 단지 그 이적에 대한 놀라움과 두려움을 표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적은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방편이다(출4:2-9; 요 11:40- 42 ;롬 15:18, 19)
크라툰토스 데 아우투 톤 페트론 카이 톤 요안넨 쉬네드라멘 파스 호 라오스 프로스 아우투스 에피 테 스토아 테 칼루메네 솔로몬토스 엨담보이
개역개정,11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불리우는 행각에 모이거늘
새번역,11 그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 곁에 머물러 있는데, 사람들이 모두 크게 놀라서, 솔로몬 행각이라고 하는 곳으로 달려와서, 그들에게로 모여들었다.
우리말성경,11 그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고 있을 때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 ‘솔로몬의 행각’이라 불리는 곳으로 달려와 그들에게 몰려들었습니다.
가톨릭성경,11 그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 곁을 떠나지 않고 있는데, 온 백성이 크게 경탄하며 ‘ 솔로몬 주랑’ 이라고 하는 곳에 있는 그들에게 달려갔다.
영어NIV,11 While the beggar held on to Peter and John, all the people were astonished and came running to them in the place called Solomon’s Colonnade.
영어NASB,11 And while he was clinging to Peter and John, all the people ran together to them at the so-called portico of Solomon, full of amazement.
영어MSG,11 The man threw his arms around Peter and John, ecstatic. All the people ran up to where they were at Solomon’s Porch to see it for themselves.
영어NRSV,11 While he clung to Peter and John, all the people ran together to them in the portico called Solomon’s Portico, utterly astonished.
헬라어신약Stephanos,11 κρατουντος δε του ιαθεντος χωλου τον πετρον και ιωαννην συνεδραμεν προς αυτους πας ο λαος επι τη στοα τη καλουμενη σολομωντος εκθαμβοι
라틴어Vulgate,11 cum teneret autem Petrum et Iohannem concurrit omnis populus ad eos ad porticum qui appellatur Salomonis stupentes
히브리어Modern,11 ויהי הוא מחזיק בפטרוס וביוחנן וירץ אליהם כל העם אל האולם הנקרא אולם של שלמה וישתוממו׃
성 경: [행3:11]
주제1: [예루살렘 교회의 활동]
주제2: [베드로의 답변]
나온 사람이… 붙잡으니 – ‘붙잡으니’의 헬라어 ‘크라툰토스'(*)는 어깨에 매달렸다는 뜻이며 이는 (1)많은 사람들에게 베드로와 요한을 통해서 이런 기적이 일어났음을 알리기 위한 것이고 (2)사도를 향한 애착과 고마움을 표시한 것이고 (3)사도들이 자기를 그냥 떠나지 못하게 하기 위한 행동이다.
솔로몬의 행각이라… 모이거늘 – 솔로몬 행각은 (1)성전 바깥 뜰 동편 끝에 있는 기다란 집채 곧 회랑(回廊)으로 교사들이 자유롭게 강론하던 곳이었다. (2)대중 집회를 할 만한 장소로서 초대 교인들이 이곳에서 자주 집회를 가졌음을 알 수있다(5:12). (3)예수께서 이곳에서 설교하신 일도 있었다(요 10:23). 아무튼 기적으로 인하여 많은 군중이 사도들 주위에 몰려들었다는 것은 기적이,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그 자체에 목적이있지 않고 사도들로 하여금 기적을 베풀어 주신 분에 대해 중거케 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음을 보게 한다. 왜냐하면 기적 때문에 크게 놀라서 모인 군중들은 이제 하나님 나라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하여 생생하게 듣게 되었기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바클레이(Barclay)는, ‘기적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모이게 하기 위해서 종을 치는 것과 같은 역활을 하는데 의미가 있다’고 했다.
이돈 데 호 페트로스 아페크리나토 프로스 톤 라온 안드레스 이스라엘리타이 티 다우마제테 에피 투토 에 헤민 티 아테니제테 호스 이디아 뒤나메이 에 유세베이아 페포이에코신 투 페리파테인 아우톤
개역개정,12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새번역,12 베드로가 그 사람들을 보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이스라엘 동포 여러분, 어찌하여 이 일을 이상하게 여깁니까? 또 어찌하여 여러분은, 우리가 우리의 능력이나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하기나 한 것처럼, 우리를 바라봅니까? / ㉢그, ‘이스라엘 남자들’
우리말성경,12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여, 왜 이 일을 이상하게 생각합니까? 또 우리 자신의 능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합니까?
가톨릭성경,12 베드로는 백성을 보고 말하였다. “이스라엘인 여러분, 왜 이 일을 이상히 여깁니까? 또 우리의 힘이나 신심으로 이 사람을 걷게 만들기나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유심히 바라봅니까?
영어NIV,12 When Peter saw this, he said to them: “Men of Israel, why does this surprise you? Why do you stare at us as if by our own power or godliness we had made this man walk?
영어NASB,12 But when Peter saw this, he replied to the people, “Men of Israel, why do you marvel at this, or why do you gaze at us, as if by our own power or piety we had made him walk?
영어MSG,12 When Peter saw he had a congregation, he addressed the people: “Oh, Israelites, why does this take you by such complete surprise, and why stare at us as if our power or piety made him walk?
영어NRSV,12 When Peter saw it, he addressed the people, “You Israelites, why do you wonder at this, or why do you stare at us, as though by our own power or piety we had made him walk?
헬라어신약Stephanos,12 ιδων δε πετρος απεκρινατο προς τον λαον ανδρες ισραηλιται τι θαυμαζετε επι τουτω η ημιν τι ατενιζετε ως ιδια δυναμει η ευσεβεια πεποιηκοσιν του περιπατειν αυτον
라틴어Vulgate,12 videns autem Petrus respondit ad populum viri israhelitae quid miramini in hoc aut nos quid intuemini quasi nostra virtute aut pietate fecerimus hunc ambulare
히브리어Modern,12 וירא פטרוס ויען ויאמר אל העם אנשי ישראל מה אתם תמהים על זאת ומה תסתכלו בנו כאלו אנחנו בכחנו ובחסידותנו שמנו את זה מתהלך׃
성 경: [행3:12]
주제1: [예루살렘 교회의 활동]
주제2: [앉은뱅이 치유]
백성에게 말하되 – 걸인이 고침받게 된 기적은 (1)사람들을 놀라게 하여 (2) 그들을 사도들 앞에 모이게 했고 (3)이제 사도들로 하여금 기적의 실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여기서 ‘말하되’를 가리키는 헬라어 ‘아페크리나토'(*))는 어떤 일에 대한 답변으로 경위(經緯)를 설명할 때 쓰는 표현이다. 이는 기이한 일을 보고서 그 일에 대한 설명을 바라는 사람들에게 베드로가 설교할 기회를 얻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본절 이하는 2:14에 나타난 오순절 이후의 베드로의 설교에 이어 두번째 설교로서 본절은 그 서론에 해당한다.
이스라엘사람들아 – 설교를 듣는 대상을 호칭하는 표현으로서 의미 심장하고 중대한 선포를 할 때 베드로가 자주 쓰는 표현이며(1 :16; 2: 14, 22) 그들이 율법과 약속을 받은 선민임을 상기시킨다.
왜 기이히 여기느냐…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기이히 여긴다’는 말에 대해서는 10절 주석을, 그리고 ‘주목하다’에 대한 자세한 해석은 4절 주석을 각각 참조하라. 사람들의 잘못된 관심을 책망하면서 설교의 서론으로 주의를 환기시키는 질문이다. 즉 (1)사도 자신들의 어떤 특별한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고친 것이 아니라는 선언이며 그러므로 자기들을 눈여겨 보지 말라는것이다. (2)과거에 하나님의 수많은 능력을 체험한 이스라엘 사람들로서 왜 이 일을 기이히 여기느냐는 것이다. 이는 곧 그 이적의 동인(動因)이 하나님께 있음을 상기시키는 말이다. (3)결국 사람들의 관심과 주의를 오직 하나님의 하시는 일과 예수 그리스도에게 돌리는 표현이다. 자기들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심부름꾼인 도구들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는 자기가 믿음이 좋고 대단한 영력(靈力)이 있어서 이적적 권능을 행사하는 것처럼 은근히 자신을 강조하여 모든 존경과 영광을 다 받으며 기적과 그로 인해 모든 군중들을 지극히 인간적으로 이용하는 종교적 영웅주의자들, 즉 거짓 선지자들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다. 이처럼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 인기주의로 자기를 나타내는 일에는 흥미가 없는 사도들은 오직 어떻게 하면 사람들로 하여금 이 기적의 실체가 되시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며 또한 그로 인해 자기들의 죄를 깨닫게하여 이들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할 수 있을까에만 관심을 집중하였다. 이것이 기적의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 절에서 사도들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가를 구체적으로 목도한다.
호 데오스 아브라암 카이 호 데오스 이사앜 카이 호 데오스 야콥 호 데오스 톤 파테론 헤몬 에돜사센 톤 파이다 아우투 예순 혼 휘메이스 멘 파레도카테 카이 에르네사스데 카타 프로소폰 필라투 크리난토스 에케이누 아폴뤼에인
개역개정,13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그를 넘겨 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의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거부하였으니
새번역,13 아브라함의 하나님과 이삭의 [하나님]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께서 자기의 ㉣종 예수를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일찍이 그를 넘겨주었고, 빌라도가 놓아주기로 작정하였을 때에도, 여러분은 빌라도 앞에서 그것을 거부하였습니다. / ㉣또는 ‘아이’
우리말성경,13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께서 그분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일찍이 그를 넘겨주었고 빌라도가 놓아주기로 판결했음에도 당신들은 빌라도 앞에서 그것을 부인했습니다.
가톨릭성경,13 여러분은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기고, 그분을 놓아주기로 결정한 빌라도 앞에서 그분을 배척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하느님과 이사악의 하느님과 야곱의 하느님, 곧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종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
영어NIV,13 The God of Abraham, Isaac and Jacob, the God of our fathers, has glorified his servant Jesus. You handed him over to be killed, and you disowned him before Pilate, though he had decided to let him go.
영어NASB,13 “The God of Abraham, Isaac, and Jacob, the God of our fathers, has glorified His servant Jesus, the one whom you delivered up, and disowned in the presence of Pilate, when he had decided to release Him.
영어MSG,13 The God of Abraham and Isaac and Jacob, the God of our ancestors, has glorified his Son Jesus. The very One that Pilate called innocent, you repudiated.
영어NRSV,13 The God of Abraham, the God of Isaac, and the God of Jacob, the God of our ancestors has glorified his servant Jesus, whom you handed over and rejected in the presence of Pilate, though he had decided to release him.
헬라어신약Stephanos,13 ο θεος αβρααμ και ισαακ και ιακωβ ο θεος των πατερων ημων εδοξασεν τον παιδα αυτου ιησουν ον υμεις παρεδωκατε και ηρνησασθε αυτον κατα προσωπον πιλατου κριναντος εκεινου απολυειν
라틴어Vulgate,13 Deus Abraham et Deus Isaac et Deus Iacob Deus patrum nostrorum glorificavit Filium suum Iesum quem vos quidem tradidistis et negastis ante faciem Pilati iudicante illo dimitti
히브리어Modern,13 אלהי אברהם אלהי יצחק ואלהי יעקב אלהי אבותינו הוא פאר את עבדו ישוע אשר אתם מסרתם אותו וכחשתם בו בפני פילטוס כשהיה דן לפטרו׃
성 경: [행3:13]
주제1: [예루살렘 교회의 활동]
주제2: [베드로의 답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 이는 본래 출애굽기에서 최초로 사용된 표현이며(출 3:16, 15; 4:5) 이 표현을 사용한 의도는25, 26절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즉 이 말은 유대사람들에게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는 자들이라는 실감을 가지게하는 표현이며 이 같은 표현은 신약성경에서도 많이 사용되었다(마 22:32; 막 12:36). 더 나아가 자신들이 율법과 예언에서 멀리 떨어진 새로운 종교를 말하고 있는것 이 아니라 구약의 바탕 위에서 구약의 완성자이신 예수에 관한 복음을 전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 여기서 ‘종’을 나타내는 헬라어는 하나님의 아들을 가리키는 ‘휘오스'(*)가 아니라 ‘파이스'(*)이다. 따라서 이 종의 의미는 일찍이 이사야가 예언했던 고난의 종을 말한다(사 42:1-9; 49:1-13; 53:1-12).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영광스러운 모습이 아니라 구속자로 오셔서 세상로부터 배척과 수욕을 당하시며 십자가에 죽기까지 고난을 당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한 마디의 항변도 없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서 즉 하나님의 종으로서 이 모든 일을 감당하는 예수의 낮아지신 신분과그 직무를 말한 것이다(2:7). 예수와 종을 직접 함께 언급한 곳은4:27,30 등이며, 고난받은 종에 관한 암시적 언급은 8:32, 33; 막 10:45; 14:24; 벧전 2:22-24등에도 나온다. 그린데 이 종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이제 영화롭게 하셨다는 것이다. 여기서 ‘영화롭게 했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에 대해 두 견해로 엇갈린다. (1) 예수에 의해 일어난 기적으로 말미암아 예수께서 영화릅게 되셨다(Haencgen). (2) ‘에돝사센'(*) 은 부정 과거로서 온 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그가 종으로서 죽었지만 하나님이 3일 만에 부활시키고 승천케 하셔서 이제 하나님 우편에 앉히기까기 그를 높이신 사실을 말한다(F. F. Bruce, Lenski). 후자의 견해를 취하는 것이 바람직하겠다. 왜냐하면 이로써 베드로는 예수가 구약에서부터 예언된 메시야이며 하나님의 아들임을 구약성경 인용하여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도는 이어서 유대인들의 죄악을, 즉 그들이 이 예수를 어떻게 배척했는가를 담대하게 지적한다.
넘겨주고 – 이의 헬라어 ‘파레도카테’ (*)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도록 로마인, 즉 이방 통치자 빌라도에게 넘겨주었던 것을 말한다(사 53 :12).
부인하였으니 – 이는 빌라도가 예수의 무죄함을 발견하고 놓아주고자 했으나 저희가 바라바를 택하고 예수를 부인하여 오히려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던 사실에 대한 지적이다(눅 23:13-23). 사도는 그들의 죄를 깨우치기 위해 통렬하게 책망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 죄의 무서움과 심각성을 아는 자만이 하나님의 자비 앞에 두손 들고 나올수 있기 때문이다.
휘메이스 데 톤 하기온 카이 디카이온 에르네사스데 카이 에테사스데 안드라 포네아 카리스데나이 휘민
개역개정,14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새번역,14 여러분은 그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을 거절하고, 살인자를 놓아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우리말성경,14 여러분은 거룩하고 의로운 분을 거절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달라고 요청해
가톨릭성경,14 여러분은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을 배척하고 살인자를 풀어 달라고 청한 것입니다.
영어NIV,14 You disowned the Holy and Righteous One and asked that a murderer be released to you.
영어NASB,14 “But you disowned the Holy and Righteous One, and asked for a murderer to be granted to you,
영어MSG,14 You repudiated the Holy One, the Just One, and asked for a murderer in his place.
영어NRSV,14 But you rejected the Holy and Righteous One and asked to have a murderer given to you,
헬라어신약Stephanos,14 υμεις δε τον αγιον και δικαιον ηρνησασθε και ητησασθε ανδρα φονεα χαρισθηναι υμιν
라틴어Vulgate,14 vos autem sanctum et iustum negastis et petistis virum homicidam donari vobis
히브리어Modern,14 אבל אתם כחשתם בקדוש ובצדיק ובקשתם כי יחן לכם איש רצח׃
성 경: [행3:14]
주제1: [예루살렘 교회의 활동]
주제2: [베드로의 답변]
거룩하고 의로운자 – 사도는 계속하여 예가 어떤 분이었던가를 증거하면서 동시에 그들이 저지른 죄가 얼마나 흉악했던가를 대조용법을 통해서 신랄하게 지적한다. 여기서 ‘거룩한자'(*, 호 하기오)는 ‘하나님의 아들’을 가리키는 용어이다(막 1:24; 눅 1 :35; 요일 2:20). 그리고 ‘의로운 자'(*, 호 디카이오스)란 모든 블의에서 완전히 떠나서 절대 공의로우신 분이라는 뜻이다(7:52; 22:14; 사 53:11; 렘 33:15; 요일 2: 1). 따라서 ‘거룩하고 의로운 자’란 구약에서 말하는 메시야의 칭호이다.
살인한 사람(*, 안드라 포네아). – 이는 거룩하고 의로운 자와 대조적으로 묘사되어 그들의 사악한 성격을 더욱 뚜렷이 부각시키고 있다. 이 사람은 바라바를 가리킨다. 그는, 유월절 사면(赦免)의 관례에 따라 총독 빌라도가 예수와 바라바 둘 중 하나를 석방해 주겠다고 유대인에게 제의했을 때 유대인들의 선택에 의해 풀려난 죄수였다(마 27 :15-16). 이 사람에 대해서(1)마27:16에는 유명한 죄수로, (2) 막15:7에는 민란(民亂) 중에 살인하여 포박된 자들 중 하나로, (3)요18:40에는 강도로 각각 언급되어 있다.
톤 데 아르케곤 테스 조에스 아펰테이나테 혼 호 데오스 에게이렌 에크 네크론 후 헤메이스 마르튀레스 에스멘
개역개정,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새번역,15 그래서 여러분은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주님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
우리말성경,15 생명의 근원 되시는 분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이 일에 대해 증인들입니다.
가톨릭성경,15 여러분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그분을 다시 일으키셨고, 우리는 그 증인입니다.
영어NIV,15 You killed the author of life, but God raised him from the dead. We are witnesses of this.
영어NASB,15 but put to death the Prince of life, the one whom God raised from the dead, a fact to which we are witnesses.
영어MSG,15 You no sooner killed the Author of Life than God raised him from the dead–and we’re the witnesses.
영어NRSV,15 and you killed the Author of life, whom God raised from the dead. To this we are witnesses.
헬라어신약Stephanos,15 τον δε αρχηγον της ζωης απεκτεινατε ον ο θεος ηγειρεν εκ νεκρων ου ημεις μαρτυρες εσμεν
라틴어Vulgate,15 auctorem vero vitae interfecistis quem Deus suscitavit a mortuis cuius nos testes sumus
히브리어Modern,15 ואת שר החיים הרגתם אשר האלהים הקימו מן המתים ואנחנו עדיו׃
성 경: [행3:15]
주제1: [예루살렘 교회의 활동]
주제2: [베드로의 답변]
생명의 주 – 본절은 베드로 설교의 절정으로서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을 강조하여 사람들의 관심을 예수께 집중시키고 있다. ‘생명의 주’의 헬라어 ‘호 아르케고스 테스 조에스'(*)란 ‘생명을 주관하는자’, ‘생명의 근원’, ‘구원의 원천’ 등을 뜻하는 말로서 살인자 바라바와 절대적으로 대조됨과 동시에 그들이 저지른 죄의 극악성을 계속하며 강조한다(요 5:26; 10:28; 14:6).
죽였도다 – 살인자는 놓아주고 오혀려 생명의 주는 죽였으니 이 얼마나 통탄할 만한 일인가 ! 특히 원문상으로는 ‘너희들이’라는 ‘휘메이스'(*)를 강조하여(14절) 그들의 죄를 정면으로 지적하고 공격하고 있다. 즉 ‘너희들이 예수를 죽인 죄인들이요 살인자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부인할 수없는 역사적 사실이었다. 오순절 전까지만 해도 두려워 숨어 지내던 비겁한 사도들의 이 담대한 증거를 보라!
하나님이… 살리셨으니 – 유대인들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죽였지만 하나님이 사흘만에 다시 살리셨으니 이는 (1)유대인들이 저지른 모든 불의와 그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예고이며 (2) 예수가 거룩하고 의로운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하는 표었다. 따라서 구약에서 부터 예언된 메시야임을 온 천하에 선포한것이다. (요 16: 20; 롬 1:4). (3)죄의 세력과 그로 인한 모든 결과들에 대한 승리, 즉 구속 사역의 완성을 의미하므로 예수께서 죄와 사망을 이기신 생명의 주이심을 입증하신 것이다. (4)하나님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만유의 주로 그리스도를 높이시고 영화롭게 하셨다는 표이다(빌 2:5 – 11).
우리가 이일에 증인이로라 – 사도들의 담대한 증거와 무엇보다도 사도들 곁에 온전한 사람으로 서 있는 고침받은 그 사람이 부인할수 없는 생생한 증인이 된것이다. 따라서 그 기적 사건은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했다(부활)는 표가 될뿐만 아니라 사도들이 지금 증거하는 그 내용이 참이라는 점을 입증하는 것이다. 여기서 ‘증인’의 헬라어 ‘마르튀스'(*)는 사실에 근거하여 진술해야 함을 강조하는 법정적(法廷的)술어이다.
카이 에피 테 피스테이 투 오노마토스 아우투 투톤 혼 데오레이테 카이 오이다테 에스테레오센 토 오노마 아우투 카이 헤 피스티스 헤 디 아우투 에도켄 아우토 텐 홀로클레리안 타우텐 아페난티 판톤 휘몬
개역개정,16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새번역,16 그런데 바로 이 예수의 이름이, 여러분이 지금 보고 있고 잘 알고 있는 이 사람을 낫게 하였으니, 이것은 그의 이름을 믿는 믿음을 힘입어서 된 것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은 그 믿음이 이 사람을 여러분 앞에서 이렇게 완전히 성하게 한 것입니다.
우리말성경,16 예수의 이름을 믿는 믿음으로 인해 그분의 이름이 여러분이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온전케 했으니, 예수로 인해 난 믿음이 여러분 앞에서 이같이 그를 완전히 낫게 했습니다.
가톨릭성경,16 이 예수님의 이름에 대한 믿음 때문에, 바로 그분의 이름이 여러분이 지금 보고 또 아는 이 사람을 튼튼하게 하였습니다. 그분에게서 오는 믿음이 여러분 모두 앞에서 이 사람을 완전히 낫게 해 주었습니다.
영어NIV,16 By faith in the name of Jesus, this man whom you see and know was made strong. It is Jesus’ name and the faith that comes through him that has given this complete healing to him, as you can all see.
영어NASB,16 “And on the basis of faith in His name, it is the name of Jesus which has strengthened this man whom you see and know; and the faith which comes through Him has given him this perfect health in the presence of you all.
영어MSG,16 Faith in Jesus’ name put this man, whose condition you know so well, on his feet–yes, faith and nothing but faith put this man healed and whole right before your eyes.
영어NRSV,16 And by faith in his name, his name itself has made this man strong, whom you see and know; and the faith that is through Jesus has given him this perfect health in the presence of all of you.
헬라어신약Stephanos,16 και επι τη πιστει του ονοματος αυτου τουτον ον θεωρειτε και οιδατε εστερεωσεν το ονομα αυτου και η πιστις η δι αυτου εδωκεν αυτω την ολοκληριαν ταυτην απεναντι παντων υμων
라틴어Vulgate,16 et in fide nominis eius hunc quem videtis et nostis confirmavit nomen eius et fides quae per eum est dedit integram sanitatem istam in conspectu omnium vestrum
히브리어Modern,16 ולמען אמונת שמו חזק שמו את האיש הזה אשר אתם ראים ומכירים אתו והאמונה אשר לנו על ידו היא העלתה לו את הארכה הזאת לעיני כלכם׃
성 경: [행3:16]
주제1: [예루살렘 교회의 활동]
주제2: [베드로의 답변]
그 이름을 믿으므로… 예수로 말미암아난 믿음이 – 이제까지 유대인들 앞에서 예수를 증거한 사도는 이제 결론적으로 앉은뱅이가 고침받게 된 그 능력의 근원을 대구법으로 표현된 삼중적 묘사로서 엄숙하게 되풀이해서 강조하고있다. 사도는 이 표현에서 무엇을 전달하고 있는가? (1)자신들이 이 사람을 고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거듭 밝히고 있다(12절). (2) 그 이름(*, 토 오노마)곧 저희들이 죽인 그 예수께서 지금 무덤에 묻혀 있는 것이 아니고 다시 살아나셔서 이 사람을 낫게 했다는 선언이다. 왜냐하면 이름이란 그 사람의 인격과 그 사람자신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하늘에 앉으셔서 지금도 살아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활동의 계속성을 진술한 말이다. (3)예수께서 하늘에서 계속 역사하시되 성도들의 믿음을 통하여 일을 하시는 것을 말한다. 즉 그의 몸된 교회와 지체된 믿는 자를 통하여 친히 능력을 베푸시는 것을 아울러 강조한 것이다. 여기서 ‘믿으므로’는 헬라어 ‘에피'(*)를 써서 믿음의 기초 위에서 역사함을 말했으며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에서의 믿음은 ‘디아'(*)를 써서 그 믿음이 예수를 통하여 얻어지는 믿음임을 말했다. 따라서 이는 믿음의 근원적 출처 또한 주님이라는 사실, 즉 믿는 자를 통한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행위를 강조하고 있다하겠다. 그러므로 그 이름을 믿으므로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고침을 받게 했다는 것과, 예수께서 낫게 하셨다는 말은 서로 상충되는 말이 아닌 것이다. 한편 여기서 말한 믿음이 누구의 믿음을 가리키느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 (1) 앉은뱅이의 믿음을 말한다(Stanley D. Toussaint). (2)베드로와 앉은뱅이의 믿음이다(Meyer, Lenski, Matthew Henry) (3) 베드로와 앉은뱅이의 믿음이다(Lighfoot, Cavin). 이 중 한 견해만 배타적으로 선택하기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이 치유 사건에는 먼저 두 사도의 믿음이 주도적으로 작용했으며, 이 앉은뱅이가 치유받은 후에 하나님을 찬양한 것으로 보아 그의 믿음 또한 전혀 배제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카이 뉜 아델포이 오이다 호티 카타 아그노이안 에프랔사테 호스페르 카이 호이 아르콘테스 휘몬
개역개정,17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리들도 그리한 줄 아노라
새번역,17 그런데 ㉤동포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의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무지해서 그렇게 행동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 ㉤그, ‘형제’
우리말성경,17 형제들이여, 이제 나는 여러분이 여러분의 지도자들처럼 무지해서 그렇게 행동했던 것을 압니다.
가톨릭성경,17 이제,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도 여러분의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무지한 탓으로 그렇게 하였음을 압니다.
영어NIV,17 “Now, brothers, I know that you acted in ignorance, as did your leaders.
영어NASB,17 “And now, brethren, I know that you acted in ignorance, just as your rulers did also.
영어MSG,17 “And now, friends, I know you had no idea what you were doing when you killed Jesus, and neither did your leaders.
영어NRSV,17 “And now, friends, I know that you acted in ignorance, as did also your rulers.
헬라어신약Stephanos,17 και νυν αδελφοι οιδα οτι κατα αγνοιαν επραξατε ωσπερ και οι αρχοντες υμων
라틴어Vulgate,17 et nunc fratres scio quia per ignorantiam fecistis sicut et principes vestri
히브리어Modern,17 ועתה אחי ידע אני כי בבלי דעת עשיתם גם אתם גם ראשיכם׃
성 경: [행3:17]
주제1: [예루살렘 교회의 활동]
주제2: [베드로의 둘째 설교]
형제들아 – 12절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아’라고 부르면서 그들의 죄를 날카롭고도 준엄하게 꾸짖던 사도는 이제 ‘형제들아’라고 부드러운 어조로 따뜻하게 부르면서 간절한 권면의 성격을 띤 호소를 함으로써 그의 설교의 새로운 국면을 시작하고 있다.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죄에 대해 핑계댈 수 없도록 간담이 서늘할 정도로 무섭게 지적한 사도는 이제 상처를 싸매주는 위로를 한다. 즉 청중으로 하여금 회개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자리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 그들의 죄의 정상(情狀)을 참작하는 말을 하면서 격려한다. 저들이 조금도 용서받을 길이 없음을 알고 자기들의 죄에 대한 형벌의 두려움만 생각하여 짐짓 절망해 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일단 그들의 범죄의 원인을 무지 때문이었다고 진단해 준 것이다(눅 23:34; 딤전 1:13; 벧전 1: 14).
너희 관원들도 – 13, 14절에서 일반 대중의 우매 무지(愚昧無知)한 죄를 낱낱이 지적한 사도는 이제 관원들, 지도자들의 죄를 지적한다. 예수께 대한 지독한 시기심으로 백성을 충돌질하고 선동한 이들의 죄는 훨씬 더 컸다(마 27:18).
호 데 데오스 하 프로카텡게일렌 디아 스토마토스 판톤 톤 프로페톤 파데인 톤 크리스톤 아우투 에플레로센 후토스
개역개정,18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자기의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
새번역,18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예언자의 입을 빌어서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아야만 한다고 미리 선포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습니다. / ㉥또는 ‘메시아’
우리말성경,18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예언자들의 입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고난받아야 할 것이라고 미리 선포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습니다.
가톨릭성경,18 하느님께서는 모든 예언자의 입을 통하여 당신의 메시아께서 고난을 겪으시리라고 예고하신 것을 그렇게 이루셨습니다.
영어NIV,18 But this is how God fulfilled what he had foretold through all the prophets, saying that his Christ would suffer.
영어NASB,18 “But the things which God announced beforehand by the mouth of all the prophets, that His Christ should suffer, He has thus fulfilled.
영어MSG,18 But God, who through the preaching of all the prophets had said all along that his Messiah would be killed, knew exactly what you were doing and used it to fulfill his plans.
영어NRSV,18 In this way God fulfilled what he had foretold through all the prophets, that his Messiah would suffer.
헬라어신약Stephanos,18 ο δε θεος α προκατηγγειλεν δια στοματος παντων των προφητων αυτου παθειν τον χριστον επληρωσεν ουτως
라틴어Vulgate,18 Deus autem quae praenuntiavit per os omnium prophetarum pati Christum suum implevit sic
히브리어Modern,18 והאלהים ככה מלא את אשר הגיד מקדם בפי כל נביאיו כי יענה המשיח׃
성 경: [행3:18]
주제1: [예루살렘 교회의 활동]
주제2: [베드로의 둘째 설교]
그러나 하나님이…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 – 일반 대중과 관원들의 죄를 빠뜨리지 않고 추적한 사도는 단순히 죄를 폭로하고 들추어내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그러나'(*, 데)라는 강조 접속사를 사용하여 이 모든 것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계획의 성취라는 측면을 증거한다. 다시 말해서 구약성경에서 분명하게 예언된 바, 즉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수난을 받아 친히 죽음으로써 하나님의 구속 경론이 이루어지리라는 그 예언이 성취된 것이라고 말한다. 유대인들이 무지 속에서 저지른 일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게 했다. 그 계획이란 다름아니라 선지자들에 의해 예언된 바메시야의 수난에 관한 것이다(2:23; 17:3; 26:22, 23). 구약성경에 메시야가 고난 당하리라는 사실이 직접 언급된 적은 없다. 다만 고난당하는 하나님의 종에 관한 언급이 나오며(사53장)또 메시야의 고난에 관한 예표론적 예언이 선지서와 시편에 등장한다(시22, 69편; 렘 11:19; 단 9:26; 슥 13 :7).
메타노에사테 운 카이 에피스트렢사테 에이스 토 엨살레이프데나이 휘몬 타스 하마르티아스
개역개정,19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새번역,19 그러므로 여러분은 회개하고 돌아와서, 죄 씻음을 받으십시오.
우리말성경,19 그러므로 여러분은 회개하고 돌아오십시오. 그래서 여러분의 죄 씻음을 받으십시오.
가톨릭성경,19 그러므로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와 여러분의 죄가 지워지게 하십시오.
영어NIV,19 Repent, then, and turn to God, so that your sins may be wiped out, that times of refreshing may come from the Lord,
영어NASB,19 “Repent therefore and return, that your sins may be wiped away, in order that times of refreshing may come from the presence of the Lord;
영어MSG,19 “Now it’s time to change your ways! Turn to face God so he can wipe away your sins, pour out showers of blessing to refresh you,
영어NRSV,19 Repent therefore, and turn to God so that your sins may be wiped out,
헬라어신약Stephanos,19 μετανοησατε ουν και επιστρεψατε εις το εξαλειφθηναι υμων τας αμαρτιας οπως αν ελθωσιν καιροι αναψυξεως απο προσωπου του κυριου
라틴어Vulgate,19 paenitemini igitur et convertimini ut deleantur vestra peccata
히브리어Modern,19 לכן הנחמו ושובו וימחו חטאיכם׃
성 경: [행3:19]
주제1: [예루살렘 교회의 활동]
주제2: [베드로의 둘째 설교]
회개하고 돌이켜 – 눅 13: 1-19 주제강해 ‘회개에 대하여’를 참조하라.
호포스 안 엘도신 카이로이 아나프슄세오스 아포 프로소푸 투 퀴리우 카이 아포스테일레 톤 프로케케이리스메논 휘민 크리스톤 예순
개역개정,20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새번역,20 그러면 주님께로부터 편히 쉴 때가 올 것이며, 주님께서는 여러분을 위해서 미리 정하신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보내실 것입니다. / ㉦또는 ‘메시아’
우리말성경,20 그러면 주 앞에서 새로워지는 때가 올 것이요, 주께서 여러분을 위해 미리 정하신 그리스도 예수를 다시 보내실 것입니다.
가톨릭성경,20 그러면 다시 생기를 찾을 때가 주님에게서 올 것이며, 주님께서는 여러분을 위하여 정하신 메시아 곧 예수님을 보내 주실 것입니다.
영어NIV,20 and that he may send the Christ, who has been appointed for you–even Jesus.
영어NASB,20 and that He may send Jesus, the Christ appointed for you,
영어MSG,20 and send you the Messiah he prepared for you, namely, Jesus.
영어NRSV,20 so that times of refreshing may come from the presence of the Lord, and that he may send the Messiah appointed for you, that is, Jesus,
헬라어신약Stephanos,20 και αποστειλη τον προκεκηρυγμενον υμιν ιησουν χριστον
라틴어Vulgate,20 ut cum venerint tempora refrigerii a conspectu Domini et miserit eum qui praedicatus est vobis Iesum Christum
히브리어Modern,20 למען אשר יבאו ימי רוחה מלפני יהוה וישלח את אשר בשרו לכם מקדם את ישוע המשיח׃
성 경: [행3:20]
주제1: [예루살렘 교회의 활동]
주제2: [베드로의 둘째 설교]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수를 보내시리니 – 어떤 학자들은, 본절을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메시야가 되시기로 정해졌다는 의미로 이해한다. 그러나 이는 본문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오히려 본절은, 재림하실 예수께서 이미 메시야로 오셔서 그 사역을 완수하신 바로 그분임음 가르친다. 말하자면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메시야 시대의 도래는 예수를 메시야로 받아이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었다는 것이다.
혼 데이 우라논 멘 뎈사스다이 아크리 크로논 아포카타스타세오스 판톤 혼 엘랄레센 호 데오스 디아 스토마토스 톤 하기온 앞 아이오노스 아우투 프로페톤
개역개정,21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새번역,21 이 예수는 영원 전부터, 하나님이 자기의 거룩한 예언자들의 입을 빌어서 말씀하신 대로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 마땅히 하늘에 계실 것입니다.
우리말성경,21 그러나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그분의 거룩한 예언자들의 입을 통해 말씀하신 대로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 예수는 마땅히 하늘에 계셔야 할 것입니다.
가톨릭성경,21 물론 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예로부터 당신의 거룩한 예언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대로, 만물이 복원될 때까지 하늘에 계셔야 합니다.
영어NIV,21 He must remain in heaven until the time comes for God to restore everything, as he promised long ago through his holy prophets.
영어NASB,21 whom heaven must receive until the period of restoration of all things about which God spoke by the mouth of His holy prophets from ancient time.
영어MSG,21 For the time being he must remain out of sight in heaven until everything is restored to order again just the way God, through the preaching of his holy prophets of old, said it would be.
영어NRSV,21 who must remain in heaven until the time of universal restoration that God announced long ago through his holy prophets.
헬라어신약Stephanos,21 ον δει ουρανον μεν δεξασθαι αχρι χρονων αποκαταστασεως παντων ων ελαλησεν ο θεος δια στοματος παντων αγιων αυτου προφητων απ αιωνος
라틴어Vulgate,21 quem oportet caelum quidem suscipere usque in tempora restitutionis omnium quae locutus est Deus per os sanctorum suorum a saeculo prophetarum
히브리어Modern,21 אשר צריך כי יקבלהו השמים עד ימי שוב כל הדברים לתקונם אשר דבר עליהם האלהים בפי נביאיו הקדושים מימי עולם׃
성 경: [행3:21]
주제1: [예루살렘 교회의 활동]
주제2: [베드로의 둘째 설교]
만유를 회복하실 때 – 하나님께서는 오래 전부터 선지자들의 입을 빌어 하나님을 떠나 타락하고 부패하게 된 이 세상을 여인의 후손을 통해 회복하리라고 예언하셨다(창 3:15). 여기서 회복이란 ‘아포카타스타세오스'(*)로소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1)땅에서 모든 죄와 불의를 제거함(고전 15: 24 – 28). (2)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모든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어 그 지으신 본래의 목적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상태에 이르게 함(엡 1:10). (3)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이 완성된 복스러운 상태(계21:1)로 만듦. 이 회복은 그리스도의 속죄로 인하여 이미 시작되었으며 주께서 재림하실 때에 온건히 완성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뿐만 아니라 죄로 인하여 탄식하는 만물도 그리스도의 두번째 나타나심을 고대하는 것이다(롬 8:19 -21).
모위세스 멘 에이펜 호티 프로페텐 휘민 아나스테세이 퀴리오스 호 데오스 휘몬 에크 톤 아델폰 휘몬 호스 에메 아우투 아쿠세스데 카타 판타 호사 안 랄레세 프로스 휘마스
개역개정,22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의 모든 말을 들을 것이라
새번역,22 모세는 말하기를 ㉧’주 하나님께서 나를 세우신 것 같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동족 가운데서 한 예언자를 세워 주실 것이다. 그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무엇이든지 다 들어라. / ㉧신 18:15; 19
우리말성경,22 모세는 말하기를 ‘주 하나님께서 너희를 위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예언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그가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들으라.
가톨릭성경,22 모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너희 동족 가운데에서 나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켜 주실 것이니, 너희는 그가 하는 말은 무엇이든지 다 들어야 한다.
영어NIV,22 For Moses said, ‘The Lord your God will raise up for you a prophet like me from among your own people; you must listen to everything he tells you.
영어NASB,22 “Moses said, ‘THE LORD GOD SHALL RAISE UP FOR YOU A PROPHET LIKE ME FROM YOUR BRETHREN; TO HIM YOU SHALL GIVE HEED in everything He says to you.
영어MSG,22 Moses, for instance, said, ‘Your God will raise up for you a prophet just like me from your family. Listen to every word he speaks to you.
영어NRSV,22 Moses said, ‘The Lord your God will raise up for you from your own people a prophet like me. You must listen to whatever he tells you.
헬라어신약Stephanos,22 μωσης μεν γαρ προς τους πατερας ειπεν οτι προφητην υμιν αναστησει κυριος ο θεος υμων εκ των αδελφων υμων ως εμε αυτου ακουσεσθε κατα παντα οσα αν λαληση προς υμας
라틴어Vulgate,22 Moses quidem dixit quia prophetam vobis suscitabit Dominus Deus vester de fratribus vestris tamquam me ipsum audietis iuxta omnia quaecumque locutus fuerit vobis
히브리어Modern,22 הן משה אמר אל אבותינו נביא יקים לכם יהוה אלהיכם מקרב אחיכם כמני אליו תשמעון ככל אשר ידבר אליכם׃
에스타이 데 파사 프쉬케 헤티스 에안 메 아쿠세 투 프로페투 에케이누 엨솔레드류데세타이 에크 투 라우
개역개정,23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 받으리라 하였고
새번역,23 누구든지 그 예언자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백성 가운데서 망하여 없어질 것이다’ 하였습니다.
우리말성경,23 누구든지 그 예언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사람은 백성 가운데서 멸망당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신18:15;신18:18-19
가톨릭성경,23 누구든지 그 예언자의 말을 듣지 않는 자는 백성에게서 잘려 나갈 것이다.’
영어NIV,23 Anyone who does not listen to him will be completely cut off from among his people.’
영어NASB,23 ‘And it shall be that every soul that does not heed that prophet shall be utterly destroyed from among the people.’
영어MSG,23 Every last living soul who refuses to listen to that prophet will be wiped out from the people.’
영어NRSV,23 And it will be that everyone who does not listen to that prophet will be utterly rooted out of the people.’
헬라어신약Stephanos,23 εσται δε πασα ψυχη ητις αν μη ακουση του προφητου εκεινου εξολοθρευθησεται εκ του λαου
라틴어Vulgate,23 erit autem omnis anima quae non audierit prophetam illum exterminabitur de plebe
히브리어Modern,23 והיה כל הנפש אשר לא תשמע אל הנביא ההוא ונכרתה מעמיה׃
카이 판테스 데 호이 프로페타이 아포 사무엘 카이 톤 카뎈세스 호소이 엘랄레산 카이 카텡게일란 타스 헤메라스 타우타스
개역개정,24 또한 사무엘 때부터 이어 말한 모든 선지자도 이 때를 가리켜 말하였느니라
새번역,24 그리고 사무엘을 비롯하여 그 뒤를 이어서 예언한 모든 예언자도, 다 이 날에 있을 일을 알려 주었습니다.
우리말성경,24 또 사무엘과 그 뒤를 이은 모든 예언자들도 이때를 가리켜 예언했습니다.
가톨릭성경,24 그리고 사무엘을 비롯하여 그 뒤를 이어 말씀을 전한 모든 예언자도 지금의 이때를 예고하였습니다.
영어NIV,24 “Indeed, all the prophets from Samuel on, as many as have spoken, have foretold these days.
영어NASB,24 “And likewise, all the prophets who have spoken, from Samuel and his successors onward, also announced these days.
영어MSG,24 “All the prophets from Samuel on down said the same thing, said most emphatically that these days would come.
영어NRSV,24 And all the prophets, as many as have spoken, from Samuel and those after him, also predicted these days.
헬라어신약Stephanos,24 και παντες δε οι προφηται απο σαμουηλ και των καθεξης οσοι ελαλησαν και προκατηγγειλαν τας ημερας ταυτας
라틴어Vulgate,24 et omnes prophetae a Samuhel et deinceps qui locuti sunt et adnuntiaverunt dies istos
히브리어Modern,24 וגם כל הנביאים משמואל ואשר נבאו אחריו כלם הגידו מראש את הימים האלה׃
성 경: [행3:24]
주제1: [예루살렘 교회의 활동]
주제2: [베드로의 둘째 설교]
또한 사무엘 때부터… 이 때를 가리켜 말하였느니라 – 베드로가 소개하는 아브라함, 모세, 사무엘 등은 모두 이스라엘 백성이 참다운 지도자로 추앙(推仰)했던 조상들이다. 따라서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첩경은 이 믿음의 조상들과 그리스도와의 밀접한 관련성을 밝히는 것임을 베드로는 잘 알고 있다. 따라서 베드로는 모세와 사무엘 및 그 이후의 모든 선지자들에 대하여 언급하고 그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모세의 경우처럼 선지자 사무엘이 정확하게 예수에 대하여 적용될 수 있는 어떤 예언을 한 사실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러나 사무엘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왕이 되게 하였고 그의 나라와 관련된 예언을 남겼다(삼상 13:14; 15:28; 16:13; 28:17). 그리고 다윗 왕국에 관련된 그의예언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로 말미암아 궁극적 성취를 보게 되었다. 또한 삼하7:12-16에 기록되고 있는 다윗 자손에 관한 나단 선지자의 예언은 메시야와 연관성을 지닌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또한 그 예언이 예수에 의해서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13:22, 23, 34; 히 1:5)
휘메이스 에스테 호이 휘오이 톤 프로페톤 카이 테스 디아데케스 헤스 디에데토 호 데오스 프로스 투스 파테라스 휘몬 레곤 프로스 아브라암 카이 엔 토 스페르마티 수 에뉼로게데손타이 파사이 하이 파트리아이 테스 게스
개역개정,25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너희 조상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라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셨으니
새번역,25 여러분은 예언자들의 자손이며,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조상들과 맺은 언약의 자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의 자손으로 말미암아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 ㉨창 22:18; 26:4
우리말성경,25 여러분은 예언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조상들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후손으로 인해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창22:18;창26:4
가톨릭성경,25 여러분은 그 예언자들의 자손이고, 또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너희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하시며 여러분의 조상들과 맺어 주신 계약의 자손입니다.
영어NIV,25 And you are heirs of the prophets and of the covenant God made with your fathers. He said to Abraham, ‘Through your offspring all peoples on earth will be blessed.’
영어NASB,25 “It is you who are the sons of the prophets, and of the covenant which God made with your fathers, saying to Abraham, ‘AND IN YOUR SEED ALL THE FAMILIES OF THE EARTH SHALL BE BLESSED.’
영어MSG,25 These prophets, along with the covenant God made with your ancestors, are your family tree. God’s covenant-word to Abraham provides the text: ‘By your offspring all the families of the earth will be blessed.’
영어NRSV,25 You are the descendants of the prophets and of the covenant that God gave to your ancestors, saying to Abraham, ‘And in your descendants all the families of the earth shall be blessed.’
헬라어신약Stephanos,25 υμεις εστε υιοι των προφητων και της διαθηκης ης διεθετο ο θεος προς τους πατερας ημων λεγων προς αβρααμ και τω σπερματι σου ενευλογηθησονται πασαι αι πατριαι της γης
라틴어Vulgate,25 vos estis filii prophetarum et testamenti quod disposuit Deus ad patres vestros dicens ad Abraham et in semine tuo benedicentur omnes familiae terrae
히브리어Modern,25 אתם בני הנביאים ובני הברית אשר כרת האלהים עם אבותינו באמרו אל אברהם ונברכו בזרעך כל משפחות האדמה׃
성 경: [행3:25]
주제1: [예루살렘 교회의 활동]
주제2: [베드로의 둘째 설교]
너희는… 언약의 자손이라 – ‘너희”에 해당하는 ‘휘메이스'(*)가 강조적 용법으로 사용되었다. 하나님께서 그 조상들과 언약을 맺으셨는데 이제 바로 ‘너희’가 그 약속의 유업을 받을 자녀들로서 그 언약의 후계자, 상속자로 택함받았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아브라함에게… 너의 씨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 아브라함과의 언약에서 하나님은 그 후손들에게 축복을 약속하셨으며 또한 그 후손을 통해 지상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창 12: 3; 18:18; 22:18; 26:4; 갈 3:8). 베드로는 이 말씀을 인용하여 예수를 메시야로 위임한 것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동일시하고 있다(창 12:1-3). 따라서 여기서 ‘씨’의 헬라어 ‘스페르마'(*)는 갈 3:16에서 설명되었듯이,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않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한 것으로 보아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즉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리스도가 아브라함의 씨로서 모든 족속에게 구원의 복된 소식을 주려고 왔다는 의미이다(롬10:15; 딤전 1:11).
휘민 프로톤 아나스테사스 호 데오스 톤 파이다 아우투 아페스테일렌 아우톤 율로군타 휘마스 엔 토 아포스트레페인 헤카스톤 아포 톤 포네리온 휘몬
개역개정,26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
새번역,26 하나님께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악에서 돌아서게 하셔서, 여러분에게 복을 내려 주시려고, 먼저 자기의 종을 일으켜 세우시고, 그를 여러분에게 보내셨습니다.”
우리말성경,26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악으로부터 각자 돌아서게 하셔서 여러분에게 복 주시려고 자기의 종을 세워 여러분에게 먼저 그를 보내셨습니다.”
가톨릭성경,26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종을 일으키시고 먼저 여러분에게 보내시어, 여러분 하나하나를 악에서 돌아서도록 하여 여러분에게 복을 내리게 하셨습니다.”
영어NIV,26 When God raised up his servant, he sent him first to you to bless you by turning each of you from your wicked ways.”
영어NASB,26 “For you first, God raised up His Servant, and sent Him to bless you by turning every one of you from your wicked ways.”
영어MSG,26 But you are first in line: God, having raised up his Son, sent him to bless you as you turn, one by one, from your evil ways.”
영어NRSV,26 When God raised up his servant, he sent him first to you, to bless you by turning each of you from your wicked ways.”
헬라어신약Stephanos,26 υμιν πρωτον ο θεος αναστησας τον παιδα αυτου ιησουν απεστειλεν αυτον ευλογουντα υμας εν τω αποστρεφειν εκαστον απο των πονηριων υμων
라틴어Vulgate,26 vobis primum Deus suscitans Filium suum misit eum benedicentem vobis ut convertat se unusquisque a nequitia sua
히브리어Modern,26 לכם בראשונה העמיד האלהים את עבדו ישוע וישלחהו לברך אתכם בשובכם כל איש מרע מעלליכם׃
성 경: [행3:26]
주제1: [예루살렘 교회의 활동]
주제2: [베드로의 둘째 설교]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 헬라어 성경에서는 “너희에게 먼저’라는 뜻의 ‘휘민 프로톤'(*)이란 말이 문장 처음에 나와 강조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순서가 첫째는 유대인이었고 그리고 그 유대인들을 통해서 이방인들을 구원하고자 했기 때문이다(롬 1:16)) 유대인들은 본문의 진술대로 하나님의 특별하신 주권적 은혜에 의해서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언약의 자손이요, 씨를 가진 자손들이었기에 구원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따라서 사도는 이 큰 축복과 특권을 상기시키는 것이다(롬 1:16; 2:10; 11:1).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 – 하나님께서 종을 먼저 보내신 그 이유와 목적이 무엇인가를 밝힌다. 즉 19절의 반복으로 각인이 회개하여 악함을 버리고 그리스도께 돌아올 것을 호소하는 것으로 사도의 간절한 설교는 끝을 맺는다(겔 3:19; 18:27; 33:14; 욘3:10). 왜냐하면 베드로는 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그리스도를 증거했기 때문이다. 본장의 주석을 마감하면서 한 가지 분명히 밝힐 것은 본장에서 강조하는 것은 앉은뱅이가 고침받는 기적 자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앉은뱅이의 치유 기적 자체만 강조하여 논한다면 우리는 나무는 보고 정녕 숲은 못보는 근시안적인 안목을 가진 자가 되고 말것이다. 왜나하면 기적은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는 표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장에서는 그 기적이 보여주는 하나님 나라와 그 나라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하나님의 전(全)구속 경륜(求續經綸)을 설명하면서 증거한 베드로의 훌륭한 설교에 초점이 모아짐이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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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튜 헨리 주석, 사도행전 03장
그들은 기적의 참됨을 알고 아주 만족해 했고 아무런 논박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았다”(10절). 그는 오랜 월 거기 앉아 있었으므로 모든 사람들이 그를 알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는 은총을 입을 사람으로 택함을 받았다. 그들은 바리새인들이 그리스도께서 고치신 장님에 대해 의심한 것처럼 그가 정말 그 사람일까 의심할 만큼 악하지는 않았다(요 9:9, 18). 그들은 지금 그가 “걸으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보았고(9절), 또한 그의 심중에 일어난 변화도 짐작하였다. 그는 전에 마음 놓고 구걸할 때처럼 힘껏 소리쳐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병이 완치되었다는 명백한 증거는 그가 병 고침에 대하여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성별될 때만이 자비는 완전히 성취된다.그들은 그것을 보고 놀랐다. 그들은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랐고”(1절), “크게 놀랐다”(11절). 그들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성령이 임재하시므로 사도들이 행한 기적에 대하여 적어도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은 그리스도 자신이 행하신 같은 종류의 기적에서 받은 이상의 충격을 받은 것처럼 보인다. 이 사실이야말로 기적은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임을 잘 보여 준다.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의 주변에 몰려들었다. “모든 사람이 솔로몬의 행각이라 칭하는 행각에 모였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능력을 가진 사람을 봄으로 그들의 호기심을 채우려 했고 또 다른 이들은 그들의 설교야말로 하나님에게서 온 것으로 하나님이 인정하신 설교라 인정하고 그들에게 설교를 들으려고 모였다. 무리들은 솔로몬이 성전 외곽의 행각을 세웠던 것이며 이방인들의 집회처인 솔로몬의 행각에 그들을 중심으로 모였다. 무리들은 또 헤롯이 제 이의 솔로몬이 되려는 야망을 가지고 솔로몬이 행각을 견고하게 세우고 자기의 이름으로 명명한 그 기초 위에 몇 개의 골방과 회랑을 세운 곳에 모였다. 여기서 무리들은 모여 이 놀라운 공경을 보려 하였다.
그는 일어나라는 명령에 복종하여 뛰어 일어났다. 그는 그의 발과 발목에 강련한 힘이 주어지는 것을 느꼈고, 그래 흔히 치료받고 점차 회복되어 가는 사람들이 그러는 것처럼 두려움과 떨리는 마음으로 슬며시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는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힘있고 경쾌하게 또 그의 힘이 아니라 다른 힘에 의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벌떡 일어났다. 갑자기 힘이 생겼으므로 그도 자신의 일에 깜짝 놀랐다. 오랫 동안 불구로 누웠던 사람이 기쁘게 자리를 거두고 떠난 것처럼 그도 이리저리 뛰었다.그는 서서 걸었다. 그는 어디 기대거나 떨거나 하지 않고 곧바로 서서 지팡이도 없이 걸었다. 그는 발을 굳게 디뎠고 확실하게 움직였다. 치료된 것이 나타났다. 더구나 완전한 치료였다.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경험한 사람들은 경험한 것을 증거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힘을 주시지 않았는가? 우리는 그의 앞에서 감사의 예배를 드리자. 신앙적인 대화를 나누며 그의 앞에서 바로 행하자. 단호히 그의 편에 서서 그에게 받은 힘을 가지고 기쁨으로 그와 동행하자.그는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았다”(11절). 그가 왜 그들을 붙잡았는지 물을 필요도 없다. 내가 믿기로는 그가 제 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는 너무나도 기뻐서 여지껏 만난 최대의 은인으로써 그들을 포옹하였고, 광포할 정도로 매달렸다.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하여 그에게 무슨 일을 하셨는가를 알리는 동안 그들을 잠시도 그냥 놔두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그들에게 그의 애정을 표했다. 그는 그들을 붙잡고 못가게 하였다. 어떤 이들은 그들이 그를 떠나면 다시 앉은뱅이가 될까보아 그들에게 매달렸다고 말한다. 여하튼 하나님에게 고침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고치실 때 도구로써 이용한 사람들을 사랑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그 후에도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음을 안다.그는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들에 대한 그의 강한 사랑이 그들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그가 그들을 성전 밖에 붙들어 둠으로 그리스도를 전하러 가지 못하게 할 수는 없었다. 우리가 의무 수행함에 있어서 우리 친구의 열정어린 친절에 의해 지장을 받아서는 안 된다. 그들이 그와 함께 머물지 않는다면 그는 그들을 따라 가기로 결심하였다. 또한 그는 거동할 수 없었고 또 구걸을 해야 했으므로 오랫 동안 들어갈 수 없었던 성전으로 그들이 들어갔기 때문에 더욱 다행한 일이었다. 그리스도가 고치신 혈기마른 자와 같이 그는 곧 성전에서 발견되었다(요 5:14). 그가 성전으로 들어간 것은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리기 위한 것뿐 아니라, 그의 이름으로 그가 병 고침을 받았던 예수에 대해 사도들로부터 자세히 듣고 싶어서였다. 그리스도의 능력을 경험한 사람들은 더욱 그리스도와 친숙하여지기를 간절히 바라야 한다.그는 거기서 “걷기도 하며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몸과 마음에 주신 힘은 그를 찬양하는데 쓰여져야 하며 우리는 그것으로 어떻게 그에게 영광을 돌릴지 연구해야 함을 기억하자. 그의 이름으로 고침을 받은 사람들은 그의 이름과 그가 주시는 힘으로 생활하여야 한다(슥 10:12). 그가 뛸 수 있게 되자 그는 곧 하나님 안에서 기뻐 뛰었고 그를 찬양하였다. 본문에서 성경이 응한 것을 볼 수 있다(사 35:6).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라”는 말씀이다. 이제 이 사람이 치유되어 새롭게 되자 그는 기쁨과 감사함으로 넘쳤다. 참으로 회개한 모든 사람은 하나님과 동행하고 그를 찬양해야 한다. 그러나 회개한 젊은이들은 더욱 뛰며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그는 기대로 부풀었다. 베드로는 많은 사람들이 구걸하는 사람들에게 하듯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시선을 고정하여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동정어린 눈길은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4절). 요한은 같은 행동을 취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한 분, 같은 성령에 의하여 인도함을 받았기 때문이었고 그러므로 이 기적을 행함에 같이 협력하였다. “우리를 보라”고 그들은 말하였다. 우리의 눈은 언제나 주님을 향해야 한다(우리의 마음의 눈이 말이다). 그리고 그 외적인 표시로 몸의 눈은 그가 은총의 종으로 여기는 분들에게 시선을 집중해야 한다. 이 사람에게 사도를 바라보라고 두 번 명령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벌써 “그들에게서 무언가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로 가득 찼고 그러기에 곧 “그들을 주시하였다”(5절). 우리가 말씀을 듣고 기도에 전념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 나올 때는 기대를 가지고 온 마음을 바쳐야 함을 기억하자. 우리는 하늘을 향하여 거기서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에 의하여 은총을 입기를 구해야만하며 그리고 기도에 대한 평화의 응답을 바라야 한다. “내가 당신에게 나의 기도를 드리고 당신을 바라나이다.”동냥을 얻으려는 기대는 좌절되었다. “은과 금이 내게 없으므로 은과 금을 당신에게 줄 수는 없소”라고 베드로는 말하였다. 그러나 그가 만약 적선할 수 있다면 그것은 동이나 은이나 금 같은 것은 아님을 시사하고 있다. 다음 사실을 기억하자.그리스도가 귀하게 여기며 친구로 여기는 사람에게 세상의 부도 풍성히 누린다는 것은 흔한 일은 아니다. 사도들은 가난하여 겨우 자기들이나 지낼 수 있었지 여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베드로와 요한의 수중에 많은 돈이 있었다 해도 교회의 가난한 사람들 생계 유지에 쓰여졌고 이 돈을 자기들 마음대로 처리하거나 헌납자의 의도를 떠나서 사용할 수도 없었다. 공적 신용은 엄격하고 성실하게 지켜야 한다.남을 돕고 싶어도 도울 능력이 없는 사람이 많은 반면 그럴 능력은 있으면서도 마음이 허락지 않아 못하는 사람들도 있는 법이다.그는 기대한 것 이상으로 받았다. 베드로는 그에게 줄 돈은 없었다.그러나 그는 돈 이상의 것을 가지고 있었다. 즉 그것은 하늘에서 유래된 능력으로 그의 질병을 고칠 수 있는 것이었다. 세상에서 가난한 사람들도 영적인 선물과 은사와 위로에는 매우 부유할 수도 있음을 기억하자. 확실히 영적 세계에서 우리는 은과 금에 비교될 수 없는 것을 차지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사서 얻는 것이 더욱 좋은 것이다(욥 28:12; 잠 3:14).그는 그에게 더 좋은 것을 주었다. 즉 그의 병을 고쳐 준 것이다. 아마 병을 고칠 수 있었다면 이를 위하여 많은 금과 은도 아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병 나음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 그는 삶을 위해 일할 수 있었고 따라서 더 이상 구걸할 필요가 없었다. 더구나 이제 그는 “필요한 사람들에게 줄 수 있게 되었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복된 것이다.” 기적적인 치료는 하나님 사랑의 표시이므로 수천 금은을 드리는 이상의 영예를 그에게 돌려야 한다. 베드로는 은과 금은 줄 것이 없었지만 아직도 “네게 줄 것이 내게 있다”고 그는 말하였음을 생각해 보자. 가난한 사람을 돕고 싶으나 자선할 만한 자금이 없는 사람이 있다. 비록 은과 금은 없다해도 손과 발이 성하고 오관을 지니고 있다면 이것으로 맹인과 절름발이와 병자를 도울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도움이 필요할 때 그들이 안 한다면 그들에게 은과 금이 생겨도 남에게 주지 못한다. “누구나 선물을 받으면 그것을 쓸 줄도 알아야 한다. 이제 어떻게 치료되었는가를 알아 보자.”그리스도께서 “말씀을 보내사 저희를 고치시다”라 하였다(시 107:20). 치유의 은사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리스도는 스스로 치료하셨으나 사도들은 그의 이름으로 치료하였다. 베드로는 앉은뱅이에게 “일어나 걸으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만약 그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재하지 않았다면 희롱으로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 다음과 같은 말이다. “내가 그리스도의 능력에 의지하여 말한다. 이제 그의 권능에 의하여 병이 완치될 것이니 그에게 찬양과 영광을 돌릴지어다”는 뜻이다. 그는 그리스도를 “나사렛 예수”라고 부른다. 이 명칭은 경멸을 나타내는 것이나 이를 사용한 이유는 세상에서 그에게 가한 명예 훼손은 지금 하늘에 계신 분의 영광을 더욱 돋보이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부르고 싶은 이름으로 부르라. 그를 경멸하는 뜻으로 나사렛 예수라 부르라. 그 이름으로 인하여 기적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되리라. 왜냐하면 그가 자기를 스스로 낮추셨기에 이제 그는 가장 높임을 받으셨기 때문이다.” 그는 앉은뱅이에게 “일어나 걸으라” 명한다. 그에게 능력이 있어서 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일어나 걸으려 한다면 자기의 무력을 알고 그를 일으킬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한다면 그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일어나 걸음으로 그 능력이 그에게 임한 것을 그는 입증하였다. 병 고침을 받은 그에게 남은 일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영적으로 무력한 우리들의 영혼도 치료함을 받자.베드로는 손을 뻗쳐 그를 도왔다(7절). 그는 그가 일어나 걸으라고 명한 바로 그 이름을 믿고 “어른 손을 받아 일으켰다.” 만일 명령된 대로 효과가 생긴다면 그의 일으켜 세운 행위가 그의 치료에 도움이 된 것이 아니고 다만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도움을 받았다는 것을 명백히 표시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우리에게 일어나 계명대로 행하라 명하실 때 우리가 믿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이고 말씀의 능력 아래 우리를 맡기면 하나님은 성령을 보내사 우리의 손을 받아 일으켜 세워 주신다. 만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 하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할 수 없는 것까지 할 수 없는 은혜를 약속하셨다. 그 약속에 의해 우리의 본성은 새로워지고 은총은 헛되지 않게 된다. “그의 발과 발목이 힘을 얻었다”고 했는데 이 말씀은 그가 일어나려 하지 않고 또 도움도 받지 않았다면 결코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는 그가 할 일을 했고 베드로도 그의 할 일을 했지만 모든 것을 이루신 분은 그리스도이다. 그에게 힘을 주신 분은 바로 그리스도였다. 먹이 나누어질 때 양이 늘고 포도주를 쏟을 때 물이 포도주로 변한 것같이 그가 발목에 힘을 주고 일어나려 할 때 그의 발에 힘이 주어졌던 것이다.
그는 사고로 다친 것이 아니라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다.” 그는 어머니의 태에서부터 앉은뱅이였다. 그는 나면서부터 중풍병으로 하체가 마비된 것같이 보여진다. 왜냐하면 “그의 발과 발목이 힘을 얻었다”는 치료 기사를 보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7절). 그 때나 지금이나 이런 가련한 경우는 늘 있다. 이들에게 우리는 사랑을 베풀고 연민을 가지고 대해야 한다. 이 말씀은 또한 우리가 나면서부터 영적으로 앉은뱅이인 것을 의식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능력이 임하지 않고서는” 나면서 앉은뱅이 된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일할 수도 걸을수도 없음을 알아야 겠다.그는 걸인이었다. 일하여 생계를 유지할 수 없으므로 그는 동냥하여 생계를 유지하였다. 영적인 걸인도 마찬가지다. 그는 친구들에 의해 “매일 성전문 앞”에 억지로 끌려오지만 성전을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동냥을 구걸할 뿐 자신을 위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가련한 구경군에 불과한 것이다. 성전에서는 모임이 있었다. 도움을 간청해야 될 만한 선한 사람들의 모임이었고 이렇게 모였을 때야말로 도움을 청할 적절한 때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거기에 누워 있었다. 아무 것도 없으면서도 일할 수 없는 사람이 구걸을 부끄러워해서는 안 된다. 만일 그가 성전에서 매일 적선을 받지 못하였다면 매일 거기에 누워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동시에 간청해야 함을 기억하자. 고넬료의 기도가 그랬다(10:4). 우리가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갈 때 우리가 바라던 것은 특수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주어진다. 성전문을 출입하는 영적인 걸인들의 대부분이 어떤 도움이 없다고 낙심하고 만다는 것은 대단히 가련한 일이다. 그들이 늘 무시되는 것은 아니다. 한 마리의 일벌을 굶기기보다는 여러 마리의 말벌을 굶기듯이 마찬가지로 열 명의 영적인 게으름뱅이에게 은사가 허락되기 보다 받을 만한 가치가 인정받은 사람에게만 주어진다. 그가 누워있는 성전 문의 이름이 기록되었는데 미문이라고 불렀다. 그 이유는 이 문이 외관상의 장엄함과 화려함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라이트푸트 박사(Dr. lightfoot)는 말하기를 이 문은 성전의 이방인의 지역에서 유대인의 지역으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한다. 그는 가정하기를 이 앉은뱅이는 이방인에게 구걸하는 것을 수치로 여겼으므로 유대인에게만 구걸하였을 것이라 한다. 그러나 휘트비 박사(Dr. Whitby)는 이 문이 성전의 첫째 입구로 보며 많은 돈을 들여 아름답게 꾸민 것은 그 곳이 엄위로우신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의 정면이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이 거기 누워 구걸한다고 이 문의 아름다움이 손상되는 것은 아니었다.그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적선해 줄 것을 구걸하였다93절). 이것이야말로 그가 그들에게 구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이었다. 이 사람들은 자애로운 사람들로 평판이나 있었고 또한 많은 것은 가지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그들이 가진 것으로 선행을 베풀었다. 성전에서 소경과 절뚝발이가 그리스도에게 나아와 고침을 받은 것이 불과 수주일 전이었다(마 21:14). 그런데 이 사람은 베드로와 요한이 그리스도의 사역자로 말씀을 전하고 그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였다는 것을 알았다면 왜 동냥하는 것 이상을 요구할 수 없었을까? 이해가 안 된다. 어쨌든 그는 그가 바라지도 않던 것을 얻게 되었다. 그는 적선을 원했지만 그는 병나음을 받았던 것이다.
“성전에서” 일어났다. 성전은 모두가 모이는 장소였기 때문에 “베드로와 요한도 함께 그곳에 올라갔다.” 특히 오순절 명절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이 사람들 가운데 복음의 그물은 쳐졌다. 이 그물에 많은 사람이 낚였을 것을 상상할 수가 있다. 성전으로 가서 예배를 드림은 좋은 일이요 함께 성전으로 올라가는 일은 큰 위안이 됨을 기억하자. “그들이 내게 같이 가자고 말하였을 때 내가 기뻐하였으니” 최상의 사회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회임을 기억하자.때는 “기도하는 시간”이었다. 즉 유대인들에게 일반적으로 알려지고 지켜지던 공중 예배 시간이었다. 시간과 장소는 모든 행위를 결정하는 두 필수적 요소이다. 그러므로 모든 시기와 장소는 덕을 세우기에 제일 적합한 것으로 모든 사람이 일치하여 결정되어야 한다. 공중 예배와 함께 또한 기도하는 처소와 시간이 있어야 한다. 제 9시 즉 오늘날 오후 세시는 유대인들에게 기도하는 시간 중 하나였다. 그 외에 아침 9시와 정오 12시도 기도하는 시간이었다. 시편 55편 17절, 다니엘 6장 10절을 참조하라. 모든 기독교인들은 각기 강제성을 띄지는 않지만 마음으로 작정한 기도의 시간을 갖는 것이 유익하다. “시기가 적절할 때 모든 것은 아름다운 결과를 낳는 법이다.”
베드로와 요한은 각기 제자들 가운데 형제가 있었다. 그들이 전도하러 나갈 때 형제들끼리 짝이 되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이 다른 사도들 간에도 형제간의 사이 이상으로 밀접히 맺어진 것같이 보인다. 때로 “우정이 혈연보다 더 두터울 수가 있다.” 형제 이상으로 더 사이가 좋은 친구도 있는 법이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리스도가 부활하시기 전보다 더욱 친근해진 것같이 보인다(요 20:2). (내가 가정하여 말해 보건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보인다. 즉 사랑의 제자였던 요한은 베드로가 뉘우치고 회개하자 또 그의 죄로 인하여 “더욱 슬피우는” 것을 보자 다른 어떤 사도들보다 더욱 정을 느껴 부드럽게 대한 것이리라. 또한 그의 영적인 나약성을 염려함으로 강건케 하기 위하여 더욱 베드로에게 친절을 베푼 것 같다. 그리스도가 가장 좋아하였던 제자가 베드로의 제일 친한 친구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가 회개함으로 베드로를 용납하셨다는 좋은 증거였다. 다윗이 범죄하고 기도하기를 “주를 경외하는 자로 내게 돌아오게 하소서”(시 119:76)라고 하였다.
Ⅰ. 이 기적을 행한 사람은 사도들 가운데 중심 인물이었던 베드로와 요한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생존해 계신 동안 한 사람은 제자들의 대변자적인 역할을 하였고 다른 한 사람은 주님이 제일 사랑하던 자였다. 지금도 그들은 같은 입장에 있었다. 수천 명이 회개하게 되자 교회는 여러 개의 모임으로 나뉘었고 아마 베드로와 요한은 누가가 가입해 있는 모임에 속한 것 같았다. 그러므로 누가도 그가 바울을 수행할 때 바울이 말하고 행한 것을 자세히 기록할 수 있었던 것처럼 베드로 요한과 함께 있으므로 그들이 말하고 행한 것을 자세히 기록할 수가 있었다. 여러 모임이 있으므로 이 모임들은 서로 다른 사도들이 행한 것을 본받을 수가 있었다.
3:12
앉은뱅이를 고친 후 베드로가 행한 설교(사도행전 3:12-26)
본문에는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고친 후 행한 설교가 있다. “베드로가 무리를 보았을 때” 무엇을 하였나 고찰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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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무리가 몰려드는 것을 보았을 때 그들의 모임 장소인 성전의 솔로몬의 행각에서 그들에게 재빨리 그리스도를 전파하였다. 그들로 와서 솔로몬의 지혜보다 더 큰 지혜를 듣게 하자. 여기 솔로몬보다 더 위대한 분에 대하여 증거되고 있으니 말이다.그는 사람들이 기적에 놀라 경탄에 가득찬 것을 보았을 때 이제 부드러워져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마음 밭에 복음의 씨앗을 뿌렸다.그는 무리들이 자신과 요한을 추앙하는 것을 보자, 즉시 나서서 그들이 품은 숭배심은 자신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만 돌려져야 한다고 하였다.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에서 그랬듯이 그는 즉시 이 문제를 처리하였다(14:14, 15). 설교 내용은 다음과 같다.
Ⅰ. 그는 겸손히 기적에 대한 명예를 그리스도에게 돌리고 그들은 다만 그리스도의 사역자요 그의 손에 들리워진 연장에 불과하다고 선언하였다. 그들이 전하는 가르침은 자신들의 창의에서 나온 것이거나 그들만의 소유가 아니라 그리스도에게서 전해 받은 것이었다. 그는 그들을 “이스라엘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그 뜻은 그들이 율법과 약속을 지녔을 뿐 아니라 복음과 약속의 성취를 받기도 하였으나 이제는 오직 현실적인 통치에만 관심을 쏟고 있음을 나타내는 말이었다. 두 가지를 그는 그들에게 질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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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어째서 기적 자체에 놀라느냐는 것이었다.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참으로 그것은 경이로운 일이었기에 그들이 보고 놀라는 것은 당연한지 모른다. 그러나 이미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무수히 행하신 것인데 그들이 그 때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아무 느낌도 없었던 것이다. 바로 얼마 전에 그리스도께서 “즉은 자들 가운데서 나사로를 일으키셨던 것이다.” 그런데 어찌 이 사건이 이상하게 보이는가? 라고 묻는다.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친숙한 것을 이상한 것으로 취급하고는 마치 자기들의 잘못은 없는 것처럼 생각함을 기억하자. 불과 며칠 전에 그리스도 자신이 죽음에서 부활하셨다. 왜 그들은 이 사실로 인해 놀라지 않는가? 왜 믿지 않는 것일까?어째서 그들은 다만 기적의 도구에 불과한 자기들을 그토록 찬양하는가 묻는다.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그들이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은 확실하였다. 이로 인하여 사도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들일 뿐 아니라 세상을 축복하고 인류를 유익하게 하며 병자와 영혼의 병자 즉 영적으로 앉은뱅이요 중풍병자인 자들을 고치고 상한 뼈를 고치고 그들에게 기쁨을 주기 위하여 보냄을 받았다는 것이 나타났다.그렇지만 그들은 “자신의 권능이나 경건으로” 이를 행할 수 없었다. 그것은 그들의 힘이나 또는 그들이 맞고 있는 의술이나 그들의 말의 힘으로 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그것을 행한 능력은 오로지 그리스도에게서 온 것이었다. 그것은 자신의 경건함에 의한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약하고 어리석은 자에 불과하였기에 그리스도께서 선택하셨다. 베드로는 죄인이었다. 유다에게 무슨 경건이 있었는가? 그렇지만 그는 그리스도도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였었다. 그들에게 무슨 경건함이 있었다 해도 그들이 그것을 가치있는 양 가장할 수는 없었다.무리들이 이 일을 그들의 권능과 경건에서 유래한 것으로 여기고 그렇게 바라본 것은 무리들의 과오였다. 하나님의 사랑으로써 사역자로 선택된 사람은 존경을 받을 수 있지만 우상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기억하자. 우리는 도구에 불과하고 하나님이 행하신 것을 우리가 한 것으로 여기게 되지 않도록 조심하자.베드로와 요한에게 훌륭한 것은 이 기적의 영광을 자신들에게 돌린 것이 아니라 조심스럽게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돌렸다는 것이다. 올바로 된 사람이라면 그들이 이 일을 대할 때 대단히 겸손하였음을 볼 수 있으리라. “우리가 아니라. 오1 주님 우리가 아니라 당신의 이름을 영광되게 하소서.” 모든 면류관은 주의 발 아래 드려야 한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이 나와 함께 하소서.”
Ⅱ. 그는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조상들에게 약속된 참 메시야라고 소개한다(13절). 그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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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그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이기 때문이다. 최근에 그들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했다 하여 불경자로 그리스도를 정죄하였지만 베드로는 그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로 하나님에게는 귀중한 아들이며 그는 우리에게 구세주이시라고 하였다.하나님은 그를 그의 교회의 왕과 제사장과 예언자로 세움으로 영화롭게 하셨다. 그는 예수를 부활과 승천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그의 삶과 죽음에서도 영화롭게 하셨다.그는 하나님을 “우리 조상의 하나님”으로 영광을 돌리고 경의를 가지고 조상의 이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 부른다(이들은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 위대한 사람들이었다). 하나님께서 그를 세상에 보내신 것은 그들의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 즉 “그들의 자손으로 말미암아 땅 위의 만민의 축복을 받으리라”는 말씀과 또 그들과 맺은 계약, “하나님께서 그들과 그들의 자손의 하나님이 되리라”는 말씀을 따라 보내신 것이었다. 사도들은 족장들을 그들의 조상이며 하나님을 그들로부터 혈통을 이어 받은 유대인의 족장들의 하나님이라 부른다. 이렇게 함으로 사도들은 그들이 유대 민족에게 악의가 없으며(유대인들이 그들을 질투어린 눈초리로 쳐다보므로) 오히려 관심을 가지고 귀하게 여기며 그 나라가 잘 되기를 바라는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내고자 한다. 더구나 그들이 가르치는 복음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뜻의 계시였다. 26장 7, 22절, 누가복음 1장 72, 73절을 보라.그는 전과 같이 그들을 명백하고도 단호하게 예수의 살인자로 규정한다.”너희가 저를 민족의 대표자격인 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넘겨 주었고 아무 것도 모르면서 그들에게 선동되어 마치 그가 많은 사람에게 잘못을 저지른 사람처럼 취급하였도다”라고 말한다.”그가 외적인 허세와 권능으로 오지 않았기 때문에 너희가 그를 부인하고 그를 넘겨 주었으며 그를 너희 왕으로 여기지도 아니하였고 메시야로 받들지도 않았도다. 너희가 로마 총독 빌라도 앞에서 그를 부인하고 너희 민족의 메시야 대망을 스스로 부인하여 총독으로 하여금 너희를 비웃게 하였느니라(Dr. Hammonddml 말처럼). 너희가 너희에 대한 그의 변명을 무시하고서 빌라도 앞에서 부인하였도다” (빌라도가 그를 내보내려 하였으나’ 사람들이 이를 반대하고 그를 제거하였던 것이다). “너희가 빌라도보다 악하도다. 만일 너희가 빌라도가 그의 뜻대로 심판하게 하였다면 그가 예수를 놓아 주었을 것이기 때문이라. 너희가 스스로 자신에 대해 증거자가 되었고 그를 박해한 악의를 품은 자들도 반박할 수 없었던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였도다”라고 반박한다. 주 예수는 무흠하신 것 이상으로 거룩하고 공의로우심으로 그를 죽인 자들의 죄는 더욱 무거운 것이다.”너희는 살인자가 놓이기를 원하고 그리스도는 처형하였도다. 마치 바라바가 주 예수보다 선대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었던 것처럼 더 큰 모욕을 가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은 것처럼 행하였도다”라고 말한다.”너희가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라 말한다. 다음과 같은 뜻이다. “너희가 생명의 파괴자인 살인자는 놓아 주고 생명의 주인이신 구주를 죽였도다. 그를 버렸을 뿐 아니라 너희의 은총을 저버린 것이다. 너희에게 생명을 주신 그의 생명을 저버리므로 너희는 못할 짓을 하였도다. 너희가 생명의 주를 정복하였다고 여기는 것은 어리석은 일인데 그것은 그는 그 안에 생명이 있으시고 그가 내주신 생명을 곧 회복하시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그는 전처럼 그의 부활을 입증한다(2:32). 다음 같이 이론을 전개한다. “너희가 다른 임금들에게서 지위와 영토를 빼앗을 수 있는 것처럼 생명의 주에게서도 그의 생명을 빼앗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으나 너희가 스스로 잘못됨을 알았도다. 곧 하나님께서 그를 살리신 것이라. 너희가 그를 죽이므로 하나님을 거스려 싸우고 실패하였도다. 하나님께서 그를 죽음에서 살리시고 그의 요구를 들으시사 그의 가르침을 굳게 하시고 그의 고통으로 인한 온갖 비난을 물리치셨으니 그의 부활의 사실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가 증인이라”고 말한다.그는 이 무기력한 사람의 치료를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것이라 한다(16절). 그가 자신을 나타내신 “그 이름을 믿음으로 그 이름이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다.” 그는 다시 반복하기를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고 말한다.그는 기적의 진실성에 관하여는 그들 자신이 증인이라고 호소한다. 기적이 임한 그 사람은 “너희가 보았고 잘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 이 병자가 전에 베드로와 요한을 안 일은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 사이에 어떤 묵계가 있으리라고 의심할 수는 없다.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는 그가 어릴 적부터 앉은뱅이인 것을 알도다. 이 기적은 너희 모두가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임하였으니 즉 성전 모퉁이에서가 아니라 성전 문 앞에서 이루어졌도다. 너희가 어떻게 이 일이 이루어졌는가를 보았으므로 무슨 속임수가 있으리라는 의심의 여지가 없으니 즉시 그 사실을 시험해 볼 자유가 있느니라. 치료는 완전한 것이었도다. 보라, 완전히 낫지 않았는가! 그가 전혀 앓던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걷고 뛰는 것은 너희가 보도다”라는 의미의 말이다.그는 그들에게 이 사건을 통해 임한 능력을 알려 준다.이 일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는 형식적으로 또는 장식을 위해 불리워진 것이 아니라 그의 이름의 전문가이며 교사인 우리에 의하여 또한 우리가 그로부터 받은 위임과 교훈에 의하여 그가 우리에게 주신 능력과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그리스도라는 이름에 의하여 이루어졌다고 한다. 어명(御命)이 비록 집행하는 사람은 보잘 것 없는 관리이지만 왕의 이름으로 수행되는 것처럼 이 일은 그리스도의 권위와 능력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말한다.그리스도의 능력은 “그의 이름을 믿으므로” 그를 신뢰하고 그를 의지하며 오로지 그만 믿고 바람으로 임하게 된다. 그런데 이 믿음까지도 di avuto/u – 즉 그를 통하여 즉 그의 역사하심의 결과이다. “그것은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선물이다.” 그가 우리에게 주신 믿음으로 그가 영광을 받으셨으니 이는 그가 곧 “우리의 믿음의 시작이자 완성자”이시기 때문이다. 라이트푸트 박사(Dr. Lightfoot)는 본문에서(16절) 믿음이 두 번 언급됨을 지적한다. 이 기적을 행한 것은 사도의 믿음이요 이 기적을 받은 것은 앉은뱅이의 믿음 때문이었던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나는 이 일이 주로 사도들의 믿음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믿음으로 이 기적이 임하게 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에게 능력을 받아 이 일을 했고 모든 영광을 그에게 돌렸던 것이다. 베드로는 이 기적을 설명하면서 그들이 세상에 가르친 복음의 진리 즉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능력과 은사의 초석이시며 능한 치유자이시며 구세주이심을 확신하였고 그에게 은혜를 입는 유일한 방법으로써 복음서에서 말하는 믿음의 의무를 권하였다. 이것은 또한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통한 우리의 구원의 복음의 신비를 우리에게 설명해 준다. 우리를 의롭게 하는 이름은 그의 영광스런 이름 우리의 “의로우신 주님이시다.” 그리고 우리는 특별히 그의 이름에 의하여 그 이름을 믿음으로, 바로 그 이름을 우리의 것으로 받아들임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베드로는 그들에게 못박히신 예수를 전하고, 이 신랑의 참된 친구로서 그는 그를 섬기고 받들기 위해 그의 모든 관심을 헌신하였던 것이다.
Ⅲ. 그는 비록 그들이 그리스도를 죽인 죄를 저질렀지만 그들이 자비하심을 얻도록 그들에게 소망을 준다. 그는 할 수 있는 대로 그들에게 확신을 주었고 반면 그들이 낙심하지 않도록 조심하였다. 그들의 죄는 컸으나 그는 그들의 죄를 경감시켜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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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범죄가 무지의 탓이라고 솔직히 비난함으로 그들의 죄를 가볍게 해 준다. 그는 그들이 “생명의 주를 죽였다”고 한 그의 말을 듣고 그들이 공포에 사로잡혀서 낙심해 버리거나 도망가려는 듯한 기색을 청중들의 안색에서 읽고 그들을 형제라 칭함으로 엄한 문책을 완화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또한 그가 그들을 형제라 부를 수 있었던 것은 자신도 이 죄악에 그들과 함께 공범자였기 때문이다. 그도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을 부인하였고 그를 알지 못한다고 맹세하였다. 그는 이렇게 하고 스스로 놀랐다. 그러므로 그는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너희에 대해서는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원들도 그리한 줄 내가 아노라”(17절). 이 말을 통해 우리는 베드로의 깊은 사랑을 발견하게 되며 우리가 바라던 것 이상의 최상의 것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베드로는 상처를 샅샅이 헤쳐논 후 그 치료에 대하여 생각함으로써 그들에게 그들의 의사이신 예수에 대하여 바른 인식을 갖게 해 준다. 이 보다 더 승리로운 방법이 있을까? 그가 이같이 그들을 변호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께서 그를 못박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셨고 그들이 행한 바를 알지 못함이라고 그들을 대신하여 간구하신 본을 따랐기 때문이다. 관헌들에 대하여는 기록되기를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 한다. 고린도 전서 2장 8절을 보라. 혹 관헌들과 백성들 중의 일부는 그들의 양심에서 비쳐오고 확신되는 바를 거스려 악의를 가지고 이 일을 저질렀으리라. 그러나 대부분은 대세에 따랐을 뿐이요 알지 못했기 때문에 저질렀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바울이 교회를 박해한 것은 “알지 못하고 불신으로” 하였던 것이다(딤전 1:13).그는 그들의 범죄 즉 “생명의 주”를 죽게 한 죄의 결과를 가볍게 해 준다. 이 일은 끔찍한 잘못하였으나 “성경의 응한 것”으로 예언된 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들이 꼭 범죄할 필요는 없었지만 그리스도의 고통은 그들에게 필요하였고 따라서 그가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마땅히 고통을 당해야 했던 것이며 너희는 알지 못하고 이 일을 행하였도다”라고 말한 것은 이런 의미에서였던 것이다. “너희가 성경을 이루었으나 알지 못하였도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너희의 손으로 그의 예언자들을 통하여 보여 주신바 그리스도가 고통을 당하시리란 것을 성취하셨느니라. 그를 너희에게 넘겨 준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었고 그러나 너희는 자신의 독선으로 이 계획을 전혀 알지 못하였도다. 너희가 그런 뜻을 지녔던 것이 아니요 너희 마음에도 그런 생각은 없었도다.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너희 자신의 정열을 합리화함을 이용하여 성서를 응하게 하셨던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밀한 뜻에 의해서 결정된 것이 아니라 그의 사업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그리스도가 고통을 당하시리란 예언자들의” 입과 글을 통하여 여러 세대 전서부터 선포하셨던 것이다. 그들을 통하여 이 사실을 나타내신 것은 바로 하나님이었고 그는 그의 말씀이 좋은 결과를 이루기를 바라신다. 그는 그가 나타내신 것을 이루셨고 그가 이루심으로 정확히 변함없이 나타내셨던 것이다.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박해하여 죽게 한 그들의 모든 죄는 변명의 여지가 없지만 그들에게 회개할 수 있는 길이 있고 그들의 회개를 통해 자비를 바랄 수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바로 이 회개에 의하여 하나님의 은혜로운 섭리는 이루어질 뿐만 아니라(이 말씀은 요셉이 그의 형제들이 그에게 용서할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다고 생각했을 때 그들을 격려한 말씀과 일치한다. “두려워 마소서.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시었소.” 창 50:15, 20) 특별한 뜻으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고통은 “죄사유”를 위하심이요, 그 자비의 출현에 근거하여 그는 그들에게 소망을 바라라고 격려하였던 것이다.
Ⅳ. 그는 그들에게 모두 기독교인으로 개종할 것을 권고하며 그렇게 하는 것이 그들에게 말할 수 없이 유익함을 확신시켜 준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영원히 굳게 서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그의 설교의 목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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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그는 그들이 무엇을 믿어야만 하는가를 가르친다.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약속된 후손으로 그에 대하여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기를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신(25절) 바로 그 씨임을 믿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으로(창 12:3) 이 약속은 오래지 않아 그에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제 이 약속은 자신이 바로 육체에 따라 “아브라함의 씨”였던 예수 안에서 결국 완성되었고 그를 통하여 이스라엘 자손뿐 아니라 “땅 위의 만민이”복을 받았으니 어떤 이는 그를 통해 약간의 도움을, 어떤 이는 전폭적인 구원을 이루었던 것이다.그들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가 예언자임은 믿어야 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형제 가운데서” 일으키시겠다고 약속하신 “모세와 같은 예언자”이다(22절). 이 말씀은 그 약속에 대하여 언급한다(신 18:18).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그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예언자이다. 그 안에서 모든 하나님의 계시는 집약되고 그를 통해 우리에게 넘겨진다. 그는 하늘이 선택한 “모세와 같은 예언자”이다. 그는 다른 예언자들보다 더 친밀하게 신의 뜻을 알고 하나님과 가깝게 말씀을 나누었다. 그는 모세와 같이 그의 백성의 멍에를 풀어주셨고 광야에서 그들을 안도하셨다. 그는 모세와 같이 왕자이며 율법 수여자이며 모세가 전형적이었던 것처럼 참 예약의 수립자이시다. 모세는 “종으로” 그리스도는 “아들로 성실하셨다.” 그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살인하였고 바로에게 맞섰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자기 것으로 삼으시고 그에게 사명을 맡기셨던 것이다. 모세가 온유와 인내의 전형적 인물이듯이 그리스도도 그러하였다. 모세가 주의 말씀에 의하여 죽었듯이 그리스도도 그러하였다.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으나”(신 34:10; 민 12:6, 7) 여기 모세보다 큰 분이 있으니 그가 곧 그리스도시다. 그는 하나님이 세우신 예언자이니 그 이유는 예수가 이 명예를 자기가 취할 것으로 생각지 않고 하나님에게 돌렸기 때문이다. 그는 이스라엘에 제일 높은 분으로 세움을 받았다. 그는 그들 가운데서만 그의 인격 속에 숨겨 있는 직책을 수행하셨다. 그들은 그들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은사를 처음으로 제공받았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 가운데 세움을 받으사 육체에 관하여는 그들에게서 그리스도는 나시었다.” 이것은 그들에게 큰 명예인 것으로 그를 받아들이는 것은 그들의 의무이며 위로가 되는 것이다. 흔히 생각하기를 그가 자기 백성에게 오셨으므로 그들이 그를 받아들일 것이라 한다. 실상 구약의 교회는 여러 세대를 걸쳐 끊임없이 계속된 선자자들과 선자자 학파를 통하여 축복을 받았다(본문에서는 “사무엘 때부터 옴으로 말한 모든 선지자.” 24절이라고 기록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사무엘 때부터 예언자 시대가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 종들은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그의 품에 품으셨던 그의 아들을 보내기까지 조롱을 당하였던 것이다.그들은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올 것이며(19절)” 그 때는 “모든 것이 회복되는 시기”임을 믿어야 한다(21절). 이 세상 뒤에는 장래의 나라, 즉 다른 생이 있을 것이다. 이 때는 주 앞으로부터 즉 그 날에 그의 영광이 나타나시므로 마지막 날에 그의 오심으로써 도래할 것이다. 주께서 나타나지 않으셨으므로 많은 죄인들의 안전의 원인이 되었고 성자들에 대한 불신의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나타나심이 임박하였으니 이 모든 죄는 잠잠케 될 것이다. “보라. 재판장이 문 앞에 섰으니” 그러면 주의 나타나심은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만물이 회복된다”(21절). “새 하늘과 새 땅이”나타날 것인데 이는 만물이 사라진 후에 나타날 것이며(계 21:1), 모든 피조물이 회복될 것이다. 이 피조물은 인간의 범죄로 인하여 지금은 탄식하며 슬퍼하는 것이다. 어떤 이는 이 말씀을 종말의 한 측면으로서 이해한다.
그러나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유사 이래 그의 모든 거룩한 예언자들의 입을 통해 말씀하신 만물의 마지막”을 뜻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아담의 7대 손 에녹이 예언하였고”(유다서14) 다른 예언자들이 예언한 일시적인 심판도 사도가 “영원한 심판”이라고 부른 그 심판의 전형적인 것이다. 이것이 신약에 이르러서는 전보다 더 명백하게 나타났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은 그것을 바랄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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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이와 함께 “유쾌하게 하는 날”이 임할 것이다. 이 날은 “염복에 무거운 짐을 진 자”들에게 시원한 그늘과 같이 주의 백성에게 위로가 될 것이다. 모든 기독교인은 현재의 괴로움과 수고가 끝난 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준비될 휴식”을 바란다. 이 소망을 바라고 그들은 오늘의 고통을 참으며 봉사를 계속한다. “주 앞으로부터 오는” 유쾌함은 주의 앞에서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그는 그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말해 준다.”회개해야 한다.” 그들은 실수로 저지른 일을 잘 생각해 보고 온전한 정신으로 돌아와 돌이켜 생각하고 새로이 주어진 확신에 복종하고 새롭게 시작해야만 한다.”개종해야” 한다. 주어진 사실에 숨김없이 마주 서서 과거에 그들이 걸었던 것과는 정반대로 발걸음을 돌이켜야 한다. 그들은 그들이 반항하였던 “주 하나님에게 돌아와야만” 한다. 우리가 죄를 회개하는 것으로 족하지 않다. 개종하고서 다시는 돌아서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유대교 신앙을 기독교 신앙으로 바꿀 뿐 아니라 육적이요 세상적이요 감각적인 세력의 지배에서 벗어나 거룩하고 천상적이고 신적인 원칙과 정열로 돌아와야만 한다.대 선지자이신 그리스도에게 순종해야 한다. “그가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나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그의 지시에 귀를 기울이라. 그의 가르침을 받으며 그의 다스림에 복종하라. 거룩한 믿음을 가지고 순종하라. 그러면 예언자들에게 들리어진 것같이 거룩한 사명이 부여되리라. 너희는 그를 들을지라. 절대적인 믿음과 복종만을 그에게 돌리도록 하라. 더욱 모든 일에 있어서 그를 들으라. 그의 법이 너의 모든 행위를 다스리게 하라. 그리고 그의 뜻이 결정되는 대로 따르라. 그가 말씀하실 때는 언제나 너희는 듣도록 하고 그가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나 혈과 육으로는 불쾌하더라도 환영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주여 말씀하소서. 당신의 종이 듣겠나이다”하는 태도이다. 본문에는 왜 우리가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행하고 복종해야 하는지 그 훌륭한 근거를 보여 주고 있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그의 부름에 귀를 막고 그의 멍에를 안 메려고 목을 곧게 하면 멸망받을 것이기 때문이다(23절).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와 그가 말하는 대로 행치 않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받으리라 하였다.” 전쟁과 기근으로 말미암아 도시가 멸망할 위기에 놓이는 것은 구약의 선지자들을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적이며 영원한 파멸인 영혼의 파멸은 대 예언자이신 그리스도를 경홀히 여기었기 때문에 받는 위협이다. 구세주의 말을 듣지 않는 자는 파멸자의 수중에 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그는 그들이 무엇을 구할 것인가를 말하고 있다.죄의 용서를 구해야 한다. 이것은 언제나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의 특권으로 말씀되고 있다(19절). “회개하고 돌이켜 죄없이 함을 받으라.”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이다.죄 사유는 한 줄기의 햇빛으로 구름이 사라지듯이(사 44:22) 빚을 탕감받을 때 줄을 그어 없애듯이 죄없이 함을 받으라는 말이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실 때 그는 더 이상 죄인을 나쁘게 여기시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치 없었던 것처럼 그것은 용서된다. 죄인을 거스려 쓰여진 모든 가혹한 처벌이(욥 13:26) 해면으로 씻어내듯이 깨끗이 없어진다. 이는 속박에 대한 사면이요 심판의 최소이다.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에게 돌아오지 않는 한 우리는 죄의 용서를 바랄 수는 없다. 그리스도께서 죄 사유의 대가로 죽으셨지만 이 죄 사유의 은혜를 받으려면 회개하고 돌이켜야 하는 것이다. 회개없이 사유함도 없다.회개하여 죄사함을 받고자 하는 희망은 우리를 회개하게 하는 강한 동기가 되어야 한다. “회개하라. 그러면 죄사함을 받을 것이요” 이 회개는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대한 이해와 죄 사유의 희망으로부터 넘쳐오는 복음적인 것이다.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느니라”는 말씀은 제일 중대한 선포이다.우리의 죄 사유가 위로의 결실을 맺을 때는 “유쾌하게 되는 날이 이를 때이다.” 만약 우리가 죄사유함을 받는다면 이것만으로 우리는 기뻐할 수 있다. 그러나 공개적으로 용서함을 받고 우리의 의롭다 하심이 천사와 사람들 앞에서 발표될 때 이 위로는 완성되는 것이다. 즉 로마서의 말씀대로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신다”(롬 8:30). “우리가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요일 3:2) 우리의 죄가 없어졌으나 그러나 “유쾌하게 하는 때가 오기까지는” 그 축복된 결과가 무엇인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싸움과 수고가 있는 동안에(안으로는 의심과 두려움이요 밖으로는 고통과 위험인데) 죄 사유를 만족하게 성취할 수는 없다. 다만 그 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유쾌한 때가 오기만을 기다릴 뿐이다.그리스도의 재림의 위로를 구해야 한다(20,21절).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라. 그러므로 너희는 다른 재림이나 다른 복음을 바라지 말고 이 복음을 완성하고 그를 바랄지어다. 너희는 모세가 너희에게 그와 같은 다른 사람을 기다리라고 명했다 해서 예수와 같은 다른 예언자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만물이 회복할 때까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두겠지만 만약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키면 너희가 결코 그를 놓치지 아니하리니 어떤 방법으로든지 그가 너희에게 보이시리라”고 말한다.그렇다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은 몸을 지니시고 임재하실 것을 바라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제자들의 시야에서 사라진 그를 받은 하늘이 종말까지 그를 보유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육체적인 임재는 이 축복된 자리에만 국한되며 종말에 만물이 성취될 것이며 따라서 성만찬에서 몸으로 그가 현실에 임하리라는 꿈을 꾸는 자는 그에게 모욕을 주는 것이요 스스로 속이는 것이다. 그가 시련을 받으실 때 영광받으신 구세주는 사람들 시야에 보이지 않았으리라는 것에 의견이 일치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인” 그에 대한 신앙으로 살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가 “이 세상에서 믿어져야” 하겠기 때문에 그는 영광 중에 올리우신 것이다. 하몬드 박사(Dr. Hammond)는 이렇게 해석한다. “하늘 뜻을 받아들이는 사람을 해석하여 하늘 나라의 영광과 권세를 받아들이는 자는 만물이 그 발 아래 복종할 때까지 왕노릇하시리라(고전 15:25; 시 75:2).그렇지만 그를 보내사 모든 사람이 회개하고 돌이키게 할 것이 약속되고 있다(20절).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리니 그는 너희에게 그의 부활을 전 후하여 제자들에 의해 전파되었으며 모든 사람들에게 모든 것이 되실 것이라”고 말한다.
첫째, 그의 영적인 임재를 구하라고 한다. “세상에 보냄을 받은 그는 바로 너희에게 보냄을 받은 것이 너희는 그가 오심으로 위로를 받으라. 그는 그의 계약이시며 병기가 되는 복음 가운데서 너희에게 나타나신 것이다”라고 말한다.
둘째, “그는 그리스도와 기독교에 원수이며 그리스도의 사역자들과 백성들을 그들에게서 넘겨 준 불신의 유대 민족과 예루살렘을 멸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실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복음을 믿으므로 평안을 주실 것인데 그것은 새롭게 할 때에 이루어질 것이요 그 때 너희도 참여하리라”고 말한다. 그런 다음에야 “교회가 안식을 누린다”고 하몬드 박사(Dr. Hammond)는 말하고 있다.
셋째, “종말에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보내는 것은 너희에게 축복이 될 것이다. 그 때에 너희는 너희의 구속이 가까이 옴을 알고 기쁨으로 머리를 들 것이라” 한다. 본문의 그리스도의 내림은 그 때를 뜻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 때까지 “하늘이 그를 받아 둘” 것이기 때문이다(21절).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계획이 서 있는 것같이 태초에 시작된 그의 예언도 마지막 날의 계약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이 마지막 날에 “그가 그의 종들인 예언자들에게 선포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신비가 이루어질 것이다”(계 10:7). 교회 안의 모든 제도는 종말에 만물의 회복을 예고해 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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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2)
[1] [2] [3]그는 그들이 만일 돌이키면 무슨 근거 위에 이 일들을 기다릴 것인가를 말해 준다. 즉 그들이 그를 부인하였고 죽으시게 하였지만 그들이 이스라엘 족속인 이유로 그에게 자비를 입기를 바랄 수 있을 것이라 한다.이스라엘 족속으로 그들은 구약의 은총을 독점하였다. 다른 어떤 민족보다 그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나라였고 하나님의 은총이 그들에게 수여되었으므로 메시야와 그의 나라에 관계가 있는 것이다. “너희는 예언자들의 자손이요 언약의 자손이니”란 말씀과 같다.그들이 자손이라 했다. 이 말은 그들이 학교의 학생처럼 예언자의 제자들이란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구약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사무엘서부터 그의 후예들에게 “예언의 영을 물려받도록” 훈련하는 의미에서 “예언자의 자손이란 뜻은 아니다.” 다만 그들 가운데서 예언자들이 일어나고 또 예언자로 세움을 받은 백성이란 뜻에서이다. “하나님께서 너희 자손들 가운데서 선지자를 일으키지 않았는가?” 하는 말은 이스라엘에 대해 상당히 우호적인 뜻으로 얘기되고 있다(암 2:11). 구약과 신약을 망라하여 모든 영감을 받은 저자들은 “아브라함 자손”중에서 나왔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맡김으로 그들의 명예요, 이익인 것이다(롬 3:2). 그들의 정치제도는 예언, 즉 거룩한 계시에 따라 조직되었고 이 계시에 의하여 여러 세대를 걸쳐 그들의 정치적 문제들은 해결을 보았던 것이다. 호세아 12장 13절을 보라. “여호와께서는 선지자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며 선지자로 저를 보호하셨도다.” 이제 예언이 끝난 마지막 때의 교회도 “예언자의 자손”이라 부르는 것은 합당하다. 그것은 그들이 알지는 못하였지만 매 안식일마다 “그들의 회당에서 읽혀지는 예언자의 외침을” 들었기 때문이다(13:27). 이런 이유 때문에 그들은 속히 그리스도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를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지닌 자격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그들의 예언자들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라고 예언되고 있기 때문이다(벧전 1:13). 그러므로 그들은 아무에게 무시를 당할 수도 없고 아무도 그들을 부인할 수도 없는 것이다(성서에 나타난대로). 예언자들과 그의 예언에 의해 축복을 받은 그들은 하나님의 은사를 헛되이 받지 않도록 관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특히 이 말씀을 교역자의 자녀들에게 적용시킬 수 있다. 그들이 만일 그들의 부친의 직책을 물려 받기를 원한다면 이를 하나님께 간구해야 할 것이며 “하나님의 종들의 후손이 지속될 것”을 바라야 한다.그들은 자손들이었다. 즉 가족에서 자녀들에게 유산이 상속되는 것처럼 그들은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들과 맺으신 계약의 상속자”이다. 하나님의 계약은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에게” 이루어졌고 그들은 바로 그 계약이 성립된 자손이요 그러기에 그들에게 “계약의 축복이 부과되는” 것이다. 즉 다음과 같은 말씀이다. “메시야의 약속이 너희에게 주어졌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너희에게 주어진 긍휼을 버리지 않고 고집스러운 불신으로 마음의 문을 닫지 않으면 너희에게 좋은 결과가 오리라 바랄 수 있도다.” 본문에서 이 약속은 계약의 첫째 조항으로 언급되고 있다.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너희 씨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니” 본문에서 “씨”는 주로 그리스도를 가르키고 있지만(갈 3:16), 또한 그의 몸인 교회와 아브라함의 영적인 자손인 모는 믿는 자로 포함된다. “땅 위의 모든 족속”이 그들 가운데 그리스도의 교회를 가지므로 축복을 받게 된다. 그리고 “육체에 따라 아브라함의 자손”인 그들도 이 특권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땅 위의 모든 족속인 그리스도 안에서 축복받는다면 그들보다 더 가까운 “육에 따른 친척은” 더 축복을 받는 것이다.이스라엘 족속으로 그들은 최초로 신약의 은사를 접하게 되었다. “그들이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언약의 자손”이므로 그들에게 구속자가 처음 보내졌고 이 사실은 그들에게 용기를 부여하는 것으로, 만약 회개하고 돌이키면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 그는 오실 것이다(20절).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리니 너희에게 먼저 그를 보내시리라”(26절). 너희에게만 그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너희 유대인들에게 먼저 보내셨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 예수를 세우시사 그를 임금과 구세주”로 지명하시고 권위를 부여하셨으며 이 사실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그를 “죽음에서 부활시키사 그들을 축복하시려고 그를 보내셨으니”이는 특히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불신에서 돌이키사 축복하시려는 부드러운 뜻에서 비롯된 것이라 한다. 그러므로 그는 너희가 축복받고 “불신에서 돌이켜” 희망을 지니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하고 있다.본문은 그리스도가 어떻게 그의 사명을 받게 되었는지를 말해 존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를 세우사 그를 보내셨도다”라 기록되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를 예언자로 세우셨고 하늘로부터 들린 음성으로 자기의 자녀임을 선언하셨고 그의 성령으로 그를 충만하게 하사 보내셨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그를 보내신 것은 진리에 대해 증언하게 하기 위함이요 잃은 영혼을 찾아 구원하기 위한 것이며 그의 적들을 정복하기 위하여 보내신 것이다. 어떤 이는 그를 “부활케 하신 일”이 그를 높이시려는 첫 번째 조처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부활의 목적은 그 사명을 새롭게 하시는 데 있는 것이다. 그를 부활케 하심으로 그가 우리는 떠난 것같이 보이지만 하나님은 그의 복음과 성령을 통하여 그를 우리에게 새롭게 보내신 것이라고 한다.그는 누구에게 보냄을 받았는가? “먼저 너희에게, 즉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예언자들의 자손이요, 언약의 자손인 너희에게 복음의 은총이 주어졌도다”라고 말한다. 예언자들이 그리하였던 것처럼 예수의 지상 공생에도 유대인에게 국한되었었다. 그는 “이스라엘 집의 잃은 양을 찾기 위하여 보냄을 받았고” 그러므로 제자들에게 다른 지방으로 가지 말라고 명하셨던 것이다. 부활 후에 그는 만국에 전파되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 처음 시작되었던 것이다”(눅 24:47). 또한 그들이 다른 민족들에게 보냄을 받았을 때에도 그들은 먼저 그들이 발견한 유대인들에게 전파하였다. 그들은 맏아들이므로 첫 번째의 특권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죽으시게 하여 멀리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그는 부활하시자 그들에게 먼저 가셨는데 이것은 그들이 그의 죽음으로 인한 은혜를 처음으로 누리게 작정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무슨 임무를 띠고 그는 보냄을 받았나. “그가 먼저 너희에게 보냄을 받은 것은 너희를 축복하기 위해서이다. 그는 마땅히 너희가 받아야 할 정죄를 하시고자 오신 것이 아니라 축복하는 것이 첫째 임무이다. 복음에 기록된 대로 너희에게 수여된 의롭다하심을 받아들인다면 그가 너희를 의롭다하실 것이라. 그러나 그가 너희를 축복하려 먼저 너희에게 오셨는데 너희가 그 축복을 거절하고 부인하면 그것은 오히려 너희에게 저주가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말 4:6). 다음 사실을 기억해 두자.
첫째,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사명은 우리를 축복하시기 위한 것임을 알아야겠다. 즉 “의인의 해가 떠올라 그의 날개 안에 품어 치료하리라”는 말씀과 같다. 그가 세상을 떠나신 후에도 그는 축복을 남겨 놓으셨다. 그가 제자들을 떠나실 때 “제자들에게 축복하시고 승천하셨던 것이다”(눅 24:51) 즉 그가 성령을 보내신 것은 가장 큰 축복이요 축복 중의 축복인 것이다(사 44:3).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심은 그리스도로 인해서요, 그를 통해서만이 우리는 축복을 바랄 수 있는 것이다.
둘째, 그리스도가 우리를 축복하시기 위하여 오신 그 큰 축복은 우리가 다른 모든 축복을 받게 하기 위하여 불신에서 우리를 떠나게 하시며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사(마 1:21) 죄에서 돌이키게 하고자 하시는 데 있다. 죄는 우리가 나면서부터 뗄래야 뗄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총의 섭리는 우리가 죄에서 돌이킬 뿐 아니라, 죄에 항거하며 죄를 버릴 뿐 아니라 미워하게 하시는 데 있다.
사도행전 3장 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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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3장
3장은 기적 사건과 기적에 대한 설명이 베드로의 설교이다. 설교는 앞의 기적의 의미를 설명하는 기능을 한다. 기적 자체가 믿음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기적은 설명이 필요하다.
3장 단락구분
성전 미문에서의 기적(1-10)
배경(1-3절)
치유(4-8절) 치유의 내용
백성들의 반응(9-10절)
베드로의 설교(11- 26)
배경(11절)
베드로의 설교[12-26]
(1) 정황설명 (12-18):
(2) 행동 촉구(19-26):
사도행전 3:1-10
3장 기적의 두 가지의 의미:
1) 사도들이 예수님의 사역을 계속해가는 자들이라는 것을 보여줌. 사도들이 천상에 계신 예수님의 대행자로 사역을 진행한다.
2) 앞으로 4장에 산헤드린 공의회와 유대 정부로부터 핍박을 받게 되는 계기를 보여줌. 핍박을 받는 이유를 보여준다.
이 단락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서 날 때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을 치유하는 기적을 기록하고 있다. 이 기사는 베드로와 요한으로 대표되는 1) 사도들이 예수님이 행하셨던 일들이 계속 이어감을 보여준다. 또한 2) 앞으로 사도들이 유대 정부로부터 위협을 받게 되는 계기가 된다.
누가는 초자연적 사건에 이어 항상 사건에 대해 설명하는 형식으로 사도행전을 전개해 간다.
-행 2장
-행 3장
-성령강림 사건 이후의 사도들이 행한 “최초 기적” 기록(행에 총 14회의 기적이 기록됨). 또한 주목할 점은 사도들이 행한 기적들 중 내용을 “가장 상세하게” 기록하는 단락이기도 하다.
여기 기적이야기가 보여주는 두 가지 특징
(1) 아픈 사람이 치유를 요구하기 전에 사도들이 먼저 주도권을 쥐고 기적을 일으켰다.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도권을 상징한다. 복음서에 보면 치유 사건에서 두 가지의 패턴이 있다. 믿음으로 다가갔을 때 치유하시는 경우와 요구하지도 않은 사람을 고치시는 경우.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도성을 보여준다. 하나님이 구원을 주도하심.
(2) 사 35:3-6
행 3:8절 “뛰어 서서 걸으며” 이사야서 35장의 표현을 사용하였다. 메시아 시대가 도래하면 다리를 절던 자들이 사슴처럼 뛸 것이다. 약속했던 메시야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약속했던 메시야 시대의 축복이 시작되었음을 보여줌.
여기 베드로와 요한의 치유 이야기는 누가복음 5:17-26(침상에 메여 온 중풍병자)에 나오는 예수의 치유 기적과 많은 점에서 유사하다.
a. 둘 다 침상에 메여온다. 행 3:2 “메고 오니” 침상에 메고 온다는 말, 행 3:6
b. “일어나라”
c. 죄 사함. 행 3:19 “죄 없이 함을 받으라”, 눅 5 “죄 사하는 권세”
누가는 이 치유 사건을 통해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사도들이 예수님의 일을 계속해 가는 사람들이라고 암시한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통해서 계속 진행되고 있음을 암시. 예수님의 천상 사역.
또한 행 14장의 바울의 사역과도 연관이 있다. 행 14:8- 루스드라에서 못 걷는 자를 일으킴.
베드로의 기적과 바울의 기적의 공통점.
a. 같은 종류의 환자: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자. 3:2 “나면서 못 걷게 된 이”, 14:8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되어
b. 두 경우 다 아픈 사람을 주목해 봄: 3:4 “주목하여”, 14:9 “주목하여”
c. 일어나다는 동사 3:6, 14:10
d. 사람들의 반응이 유사하다. 3:12, 사람들이 신적인 인물로 본다. 14:바울과 바나바를 신격화한다.
앞으로는 1) 예수님의 기적과 닮아있고, 2) 뒤로는 바울의 기적과 닮아있다.
1) 왜? 예수님이 하신 사역을 사도들이 계속 이어가고 있음.
2) 왜? 바울이 베드로와 같은 기적을 베풂으로 베드로와 같은 영적 권위가 있음을 보여주려는 의도.
이 사건은 또한 앞으로 유대 당국자들과의 갈등을 일으키는 사건을 기록하는 사도행전 4장을 미리 예고하는 역할을 한다.
배경(1-3절)
1절 시간과 장소
베드로와 요한은 ‘제 구시 기도시간(오후 3시)’에 성전에 올라간다.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매일 아침과 오후에 제물이 드려졌다. 아침 제물은 동이 튼 직후 즉 오전 9시에 드렸다(단 9:21, Judith 9:1, Josephus, Ant. 14.3.4 65), 그리고 오후 제물은 대략 오후 3-4시경(제 구시)에 드려졌다.
이 오후 기도시간은 고넬료가 환상을 본 시간이기도 하다(행 10:3,30). 유대인들은 하루 두 번 이 시간에 성전에 기도하기 위해서 모여들었다 (참고 눅 1:8-10, 21 이하). 두 사도도 이 시간에 성전에 올라간다. 이 기적의 사건은 2:43절과 2:46절의 부연설명의 의도가 있다.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2:43) 절의 말씀을 설명함.
2:46절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성전 미문 사건을 통해서 기도시간에 성전에 올라가서 모였음을 보여줌. 유대인들은 하루 두 번 제자를 드린다. 오전 9시와 오후 3-4시에 드린다.
사도들이 잡힌 이유는 부활을 증거함과 성전 소란 죄에 해당한다. 성전 제사 시간에 베드로의 설교로 사람들이 웅성거림에 따라 오후 제사에 문제가 있었을 것이다.
2절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언제 메고 왔을까? 아침부터일까? 오후 3시였을까?
*미문(the Beautiful Gate)
성전에는 여러 개의 문이 있다. 이 미문의 위치가 어디인지 분명치 않다. 후보지로 거론되는 것은 (1) 니카노르 문 (the Nicanor Gate)과 (2) 수산 문(the Shushan Gate)이다.
요세푸스는 고린도식으로 만들어진 니카노르 문(여인의 뜰 또는 이스라엘의 뜰 근처)이 동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성전의 다른 문들에 비해 규모가 큰 문이고, 또 여러 가지 장식이 잘 된 문이라고 언급한다. => 그러므로 아름다운 문을 여기로 볼 수 있다.
Fitzmyer: 상징적, 아름다운 일이 일어났기에..
성전 동쪽에 위치한 ‘수산(Shushan) 문’ 성전 외부에서 이방인의 뜰로 들어가는 문
(1) 수산 문은 성전 밖에서 이방인들의 뜰로 이어지는 문이다. 또한 (2) 베드로가 이 사건 직후에 사람들에게 설교하는 장소인 솔로몬 행각(3:11)과 가까운 위치에 있으며, 비둘기와 다른 제물들을 매매하는 시장과도 가까운 위치에 있다. 따라서 오고 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 구걸하기에는 안성맞춤인 장소였을 것이다. (3) 3절-성전(히에론) 성전 전 전체를 의미하는 단어 vs. 나오스(성소, 지성소) 즉, 성전 동쪽에 위치한 문이었을 것.
치유(4-8절)
3절-5절
*처절한 형편
이 사람은 성전 미문에 앉아 오가는 사람에게 오랜 기간 동안 구걸(40세)하고 있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도 이 사람이 그 문에 앉아 있었을 수도 있다. 성전에 드나드는 많은 사람들이 이 사람을 알고 있었을 것(예수님을 알았을 수도, 제자들을 알았을 수도 있다.)이며, 이 사람은 구걸하는 것으로 자기 삶을 연명하고 있었다. 이 사람은 사도들이 누구인지 관심을 가지고 쳐다보지도 않았다. 베드로와 요한을 지나가는 사람들 중 몇 사람으로만 여긴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이 이 사람에게 ‘우리를 보라’(4절)고 말한다. ‘우리를 보라’라는 두 사도의 명령에는 이 사람 속에서 믿음을 불러일으키려는 의도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이 사람이 기대하는 것은 ‘돈’밖에 없다.
6절 기대가 무너지지만 기대 이상의 것을 주신다. 돈을 구했지만 구원을 주신다. 내려놓게 하시면 그 이상의 것을 주신다.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리시지만 기대 이상의 것을 주신다.
‘금과 은’에 대한 언급은 사도들의 형편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초대교회는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 주었다(행 2:44-45).
-두 사도
“금과 은은 내게 없거니와”
초대교회의 상황
1) 초대교회와 사도들이 금과 은을 축척한 공동체가 아니었다.
2) 현 상황에서는 사도들이 재산을 마음대로 컨트롤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처음에는 상대의 필요에 따라 일대일로 서로 나눠줌(2:44-45). 시간이 지나면서 4장에 가면 사도들이 권위를 가지고 나눠주는 형태로 조직화된다.(4장,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숙어적 표현으로 누구의 통제 하에 둔다는 의미이다.)
중세 가톨릭 교회는 예수는 없지만 금과 은은 있다고 했다고 한다. 오늘날 우리의 상황은?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1. 예수 그분, 2. 예수의 능력)
(1) 두 사도는 이 사람을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치유한다. 사도행전에서 ‘이름’은 인물(person) 즉 그 사람을 나타내기도 하고(행 3:16), 능력(power)의 근원을 의미하기도 한다(행 4:10).
‘예수의 이름으로’라는 표현은 사도행전 3장과 4장에 계속해서 반복되어 쓰인다(3:6,16; 4:10,18,30).
(2) 예수의 이름이라는 표현은 사도행전에서의 제자들의 사역이 다름 아닌 예수의 천상 사역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지상의 대리자를 통해서 사역하심.
7절 <일으키니>
치유의 문맥에서 쓰인 7절의 ‘일으키니’라는 동사는 예수께서 누가복음 5장에서 중풍병자를 치유하신 사건에서 그에게 하신 ‘일어나라’는 명령을 연상시킨다. 발과 발목: 누가의 직업적 특징을 보여준다. 직업병. 당시 의사들이 자주 사용하던 단어이다. , 오른손,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통해서 같을 일을 하고 계심.
8절
치유받은 이 사람의 행동을 설명하고 있다. 누가가 여기에서 쓰고 있는 7개의 동사는 이 사람의 기쁨을 표현하는 말이다. 사도행전에서 기쁨은 반복해서 등장하는 특징이다(2:46; 4:21,24; 5:41; 8:39; 11:23; 12:14; 13:48, 52; 15:3; 16:25, 34; 19:17).
8절 뛰어, 서서, 걸으며,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찬송하니.=> 7개의 동사로 기쁨을 묘사한다.
사도행전의 중요한 신학: 기쁨의 신학.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흐르는 중요한 신학이다.
누가복음은 “큰 기쁨”이라는 단어로 인클루지오 구조이다. 눅 2:10 “큰 기쁨의 좋은 소식”녹 24:52 “큰 기쁨”
사도행전 복음이 들어가는 현상에 나타나는 반응. 예루살렘 교회에 복음이 들어갔을 때 2:46, 사마리아에 복음이 들어갔을 때 8:8, 이방 내시도 기뻐한다(8:39).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세상에 큰 기쁨을 주셨다. 복음이 들어가는 지역마다 “기쁨”이 일어난다. 정말 예수님을 만나서 기쁜가?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 기쁨이 없다는 것은 잘 확인해봐야 한다.
<‘뛰어 서서 걸으며’>라는 동사가 결합된 본문: 이 치유 사건과 사도행전 14장의 바울의 치유 기적.
본문에서 치유된 사람에 대해서 ‘뛰어 서서’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이사야 35:3-6(LXX)의 예언이 지금 성취되고 있음을 보여주려는 의도가 들어 있다.
*사 35:3-6
3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며
4 겁내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 주실 것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5 그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6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 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이 사람의 치유를 통해 이사야가 예언했던 종말에 시온 산에서 벌어질 하나님 백성의 회복이 지금 성취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종말에 메시아가 올 때 나타나는 구원의 혜택이 시작되었음을 나타낸다.
*8절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저는 자는 구약법에 의하면 성전에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레 21:17-20, 삼하 5:8) 난 생 처음 성전에 들어갔던 것 같다. 성전 앞에서 성전만 바라보던 사람이 성전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기쁨이 있었다.
8절의 두 가지 회복
1) 육체적 회복
2) 성전에 들어가는 영적 회복이 이루어졌다. 8절 “하나님을 찬송하니” 이 사람은 사도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고치셨다고 선포한다. 치유의 현상을 특별한 사역자의 능력으로 보는가? 하나님의 권능으로 보는가? 예언기도를 의존하는 현상들. 하나님을 붙잡는 것이 안라 사람을 의지하게 된다.
백성들의 반응(9-10절)
9-10절
이 두 구절은 치유 기적을 본 사람들의 반응을 기록하고 있다. ‘모든 백성’(9절)은 제 구시 기도시간에 성전을 방문하고 있던 모든 사람들을 가리키며, 따라서 대부분이 유대인들이었다. 베드로는 이들을 ‘이스라엘 사람들’이라고 부른다(3:12). 이 사람들의 반응은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고 설명되는데 이것은 기적에 대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반응이다.
누가는 기적에 대해 사람들을 반응을 빼지 않고 기록한다(눅 4:36; 5:26; 11:14; 18:43). 놀람과 두려움은 믿음과 동의어는 아니지만, 이것이 믿음을 일으킨다(참고 행 4:4).
놀람이, 기적이 믿음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기적은 놀래는 정도이고 베드로의 기적에 대한 의미 설명 후 믿음이 발생했다. 기적에는 설명이 필요하다.
베드로의 설교 (3:11 이하)
성전이 복음 전도의 중요한 장소였음을 보여준다. 기적은 항상 해석이 따라야 한다. 베드로가 고넬료 집에 가는 것은 환상 때문이 아니라 환상에 대한 해석 때문에 간다. 그 설명을 듣고 가는 것이다. 바울이 성령에 이끌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데 말리는 선지자들이 있다. 바울에게 말씀하신 동일한 성령께서 가라고 하시고 선지자를 통해 막으실까? 뒤의 사람들은 자신이 본 환상을 본인들 나름대로 해석한 것이다. 환상과 해석은 분리되어야 한다. 해석이 중요하다. 해석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게 하고 믿음을 일으킨다.
누가는 초자연적 사건과 이에 대한 해설을 함께 묶는다. 여기서도 베드로는 성전 미문에서 벌어졌던 치유 기적에 대해서 설교한다. 베드로와 요한은 자신들을 둘러싼 군중들을 향해 이들의 오해를 고쳐주면서 치유 기적이 자신들의 능력에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밝힌다.
오순절 성령강림의 사건에 대한 해설이 요엘의 예언으로 설명이 되는 반면, 여기 치유 사건은 신명기 18:15의 말씀으로 설명이 된다(행 3:22-26).
베드로의 설교[1] (12절-16절)
베드로는 몰려온 군중들에게 부정과 긍정의 말을 전한다. 먼저 부정하는 말의 내용은 기적을 일으킨 장본인이 자신들이 아닌 점을 밝힌다(12절). 이어 긍정의 말은 예수에 대해 소개와 관련이 있다. ‘그 이름’(16절) 즉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개가 11절을 제외한 12절~16절의 내용이다.
설교의 단락 구분
(1) 정황설명(12-18):
기적이 벌어지기 전에 기적을 가능하게 만들도록 한 이유에 대해 설명(12-15)
예수 그리스도 소개(16절)
백성들의 무지와 하나님의 계획 설명(17-18절)
(2) 행동 촉구
적용 부분
그러므로… 어구로 시작: 2개의 명령: “회개하라!, 돌이키라!”. 헬 원문에는 두 개의 명령이다.
베드로 설교의 특징
1) 언약의 하나님을 강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신 분이다.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고 이스라엘 백성은 언약 백성이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13)”=> 언약의 하나님. “연약의 자손이라(25절)” 시작과 끝에 언약이 등장한다.
유대인을 대상으로 하는 설교: 구약을 인용함. 행 3:22-23=> 신 18:15. 행 3:25=> 창세기 12장, 22장, 26장, 28장.
유대인들이 아는 구약에 호소, 언약을 언급: 즉 예수께서 바로 구약에서 약속하신 메시아다라는 것을 보여준다.
(1) 예수 그리스도가 약속의 성취라는 것을 보여준다.
(2) 그런데 너희들이 그 약속을 거부했다. (3) 회개 촉구/경고=> 메시아를 거부할 때 멸망을 받으리라.
2)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대조시킴.
13-15 하나님이 하신 일과 이스라엘이 한 일을 대조함.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이스라엘의 실패를 대조.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다. <=> 너희가 거부하였다.
3) 예수님을 소개하는 호칭이 강하게 많이 등장한다. 6개.
그의 종(13), 거룩하고 의로운 이(14), 생명의 주(15), 그리스도(18), 나 같은 선지자(22), 너의 씨(아브라함의 씨)(25)
*베드로의 설교는 기독론적인 설명과 종말론적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1) 기독론
하나님의 종(13절, 26절)
거룩하고 의로운 이(14절)
생명의 주 (15절)
그리스도(18절- 자기의 그리스도, 19절- 예정하신 그리스도)
모세와 같은 선지자(22절)
아브라함의 씨(자손) (25절)
(2) 종말론
두 단계의 종말을 설명함: 초림과 재림 (재림- 20절, 초림 -26절)
누가복음에서 미래의 종말(재림의 소망)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 분명함.
베드로 설교의 배경(11절)
11절은 베드로가 하는 설교의 배경을 제시한다. 11절은 바로 앞 10절의 내용을 대부분 그대로 반복한다. 새로운 요소는 설교의 장소가 ‘솔로몬 행각’이며 이곳으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는 내용이다. 예루살렘 성전의 이방인의 뜰 구역은 여러 주랑들(porticoes)로 둘러 싸여 있었다. 그중에 하나가 솔로몬 행각이었으며 이 행각은 성전 동쪽에 위치해 있었다.
이방인의 뜰과 그 주위 주랑들에서는 서기관들이 사람들을 모아놓고 가르치기도 하고 논쟁을 벌였으며(참고, 눅 2:46; 요 10:23), 상인들은 물건을 팔고, 환전해 주는 일을 하고 있었다(David Williams). 백성들은 두 사도들을 향해서 달려와 모여들었다.
베드로의 설교: 정황설명(12-18)
기적이 벌어지기 전에 기적을 가능하게 만들도록 한 이유에 대해 설명(12-15)
예수 그리스도 소개(16절)
백성들의 무지와 하나님의 계획 설명(17-18절)
12절
두 사도를 대표해서 베드로는 이 치유 기적에 대한 사람들의 잘못된 인식을 고치기 위해 부정하는 말을 먼저 한다.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는 사람을 ‘주목’하여 보았다(3:4). 이제 군중들이 두 사도를 ‘주목’하여 본다. 두 사도는 자신들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이 낫게 된 것이 아님을 밝힌다. 이 보도에서 논쟁은 기적이 정말 일어났는가에 대한 사실이 아니라 이 기적을 누가 일으켰는가에 대한 것이다. 특히 이방인들은 이런 초자연적인 일을 행한 사람들을 신과 같은 사람(divine men)으로 보는 경향이 그 당시에 있었다. 사도행전에는 이 치유 기사와 유사한 내용이 행 14:8-18에 등장한다.
베드로는 이 기적의 근원은 자신들의 힘과 경건이 아니라고 분명히 한다. 이방인들의 반응과 흡사하게, 예루살렘의 유대인들도 기적이 사람이 행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사도들은 자신들의 능력이 아니라 부정하여 사람들의 시선을 자신들에게서 하나님에게로 바꾸어 놓는다.
13절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언급하며 이 기적의 근원이 영화롭게 되신 예수이심을 밝힌다.
(1) 하나님의 종 종은 고난 받는 종의 역할을 하시는 메시아임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소개하고 나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1)‘그의 종’ 즉 하나님의 종이라고 소개한다. 구약에서는 모세가 하나님의 종이라고 불리고(수 1:7, 13; 9:24; 11:12;15; 12:6; 14:7; 18:7, 대상 6:49; 대하 24:9), 또한 이사야서의 종의 노래(사 52-53 LXX)에 등장하는 종에게 이 호칭이 사용된다.
누가 행전에서 이 호칭은 일반적인 의미로 하나님에 의해 파송되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을 가리킨다. 이 구절에서는 이사야 53장에 기록된 종과 같은 사람이라는 의미. 따라서, 메시아적 의미를 담고 있다. 사 53장의 종은 고난 받는 종이다.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는 구절은 거의 확실하게 이사야서 52:13(LXX)을 반영하고 있다. 베드로는 이 예언이 예수께 해당하고, 그의 부활과 승천을 통해 이 구약의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지적한다. 영화롭게 하심= 예수의 부활과 승천을 일컫는 말.
‘너희가 그를 넘겨주고’라는 구절은 누가복음에서 누가가 기록한 예수의 수난 예고(눅9:44; 18:32)와 수난 기사(20:20; 22:4,6,22,48)를 생각나게 한다. 본디오 빌라도는 AD 26-36년까지 유대를 다스리던 로마의 관리였다. ‘빌라도가 놓아주기로 결의한’ 내용은 누가복음 23:1-23에서 빌라도가 예수를 세 번이나 풀어주려고 했던 사건을 염두에 둔 말이다(눅23:4,16,22). 빌라도는 결국 사람들의 요구에 무죄한 예수를 넘겨주었다(눅23:24). 이런 사람들의 행동은 하나님의 행동과 날카로운 대조를 보인다. 즉, 사람들은 예수를 넘겨주었지만, 하나님은 그를 영화롭게 하셨다.
(2) 거룩하고, 의로운 이
거룩, 하나님께 붙이는 이름을 예수님께 붙이고 있다.
의로운 이 => 고난 받는 종의 다른 표현 사 53:11 메시아적 호칭.
14절
‘거룩한 자’라는 말은 하나님께 소속된 자라는 의미(레 11:44-45)이며, 눅 1:35에서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수태고지를 하면서 예수를 가리켜 사용한 표현이다. 예수에 대한 ‘거룩한 이’라는 호칭은 베드로가 시 16:10을 인용하는 행 2:27에서도 사용된다.
예수께 ‘거룩한 이’라고 부르는 것은 초대교회에서 일반화되고 있는 현상이었다(요 6:69, 요일 2:20, 계 3:7, 막 1:24, 눅 4:34). 누가의 이 호칭도 이사야 52-53장에서 근거하고 있다. 거룩한 이는 구약에 하나님의 호칭이기도 하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같은 분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레 11:44-45, 시 77:41 LXX). 예수의 승천이 예수님을 하나님과 같은 거룩한 분으로 보게 만든다.
‘의로운 이’라는 표현은 이사야가 하나님의 종을 부르는 호칭이다(사 53:11). 이 호칭은 행 7:52에서는 스데반이 사용하고 있고, 행 22:14에서는 아나니아가 사용하고 있다.
결국 이 표현은 하나님이 인정하신 자라는 의미. 유대교에서 의로운 이는 메시아적 호칭이다(1 Enoch 38:2; 46:3, PsSol 17:32).
(3) 생명의 주 1) 바라바와 대조(살인자와 예수님을 대조) 2) 생명을 주시는 분이다.
15절
생명의 주’는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의미이다. 이 말은 바로 앞 14절에서 언급된 바라바와 예수를 대조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사용된 말이다. 바라바는 살인한 자이다 그러나 예수는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다.
16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은 예수를 목적어로 보는 예수를 믿는 믿음을 의미하기보다는 예수를 통해서 생겨난 믿음을 가리킨다. 즉, 사도들이 예수의 이름을 선포했을 때(6절), 날 때부터 불구자였던 사람에게 믿음이 생겨난 것이다. “완전히 낫게” 구약에 나타난 제사에 쓰였던 표현 “완전히”
17절-18절
(1) 백성과 지도자들의 무지가 예수께서 죽으신 첫 번째 이유가 된다. (2) 두 번째로 예수께서 고난 받고 죽으신 이유는 선지자들을 통해 구약에서 예언하신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되기 위해서였다고 베드로는 밝힌다. 인간의 책임과 하나님의 계획(주권)이 균형 있게 설명되고 있다.
두 반응 ‘너희’ 백성들=> 회개함,
‘너희 관리들’=> 사도들을 체포함.
‘모든 선지서’가 다 그리스도의 고난 받으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는 부활 후에 눅 24:26-27에서 자신의 고난과 영광에 대한 이야기를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기록된 자신에 대한 예언을 자세하게 설명하셨다. 바울도 구약성경을 가지고 예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서 설명했다(행 17:2-3).
-행 17:1 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2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3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4 그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
(4) 고난 받는 메시아라는 사상은 유대교에서 존재하는 개념이 아니다.
구약에 고난 받은 의인(시 22, 시 69) 그리고 여기 13절에 암시된 이사야 53장 고난 받는 종의 사상이 초대교회가 염두에 두었고, 베드로가 18절에서 말하고 있는 구절들이다. 사도들에게도 공생애 기간 동안에는 고난 받는 메시아라는 사상이 없었다.
부활 사건을 통해서 고난 받는 메시아에 대해 알게 되었다. 고난 받는 종(사 53장). 고난 받는 의인(시 22, 시 69)에 대한 이해가 생겼다.
질문: 나사렛 사람. 유대인들의 메시아사상.
베드로의 설교(2): 행동 촉구(19-26)
구약을 통한 경고와 회개 촉구(22-26), 적용 부분
패턴: 약속하고 경고한다.
약속: 죄 없이 함, 새롭게 함
경고: 멸망받으리라. 끊어질 것이다.
19절-21절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회개는 방향 전환, 돌이키는 것은 죄로부터 돌아서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
백성들과 지도자들의 무지와 하나님의 계획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책임과 죄를 면제시켜주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회개해야 한다. 베드로는 이 구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야 할 일을 두 가지 동사를 사용해 설명하는데, ‘회개하다’와 ‘돌이키다’이다.
16절에서는 인간의 반응으로 믿음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 구절(19절)은 복음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회개와 돌이킴이라는 동사로 설명한다. 초대교회는 복음에 반응하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반응(믿음, 회개, 돌이킴)을 설명하는 다양한 표현들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또, 죄 없이함도 유사어-19절)
회개하다와 돌이키다 이 두 단어는 동의어가 아니다. 첫 번째 동사 회개하다는 죄로부터 돌아서다를 의미한다. 두 번째 동사 ‘돌이키다’는 하나님께로 돌아가다의 의미이다. 회개의 목적은 ‘죄 없이 함을 받는 것’이다.
회개의 결과
부정적 측면: “죄 없이 함을 받는다”
긍정적 측면: “새롭게 함” 회복이나 휴식을 가리키는 단어.
<죄 없이 함>
“없이하다”(blot out Acts 3:19 evxaleifqh/nai )라는 단어, 파피루스, 파피루스에 썼던 글을 물로 지우는 표현. 죄를 물로 씻듯이 지워버리겠다는 의미
회개의 결과에는 부정적인 의미에서 ‘죄를 없이함’이 주어진다. 그리고 긍정적인 측면의 결과는 ‘주께로부터 새롭게 하는 날’이 오는 것이다.
<새롭게 함>(Acts 3:20 avnayu, xewj)라고 쓰인 명사의 동사 형태(anapsuxo to refresh)는 물을 마시고 나서 생겨나는 회복이나 휴식의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삿 15:19, 삼하 16:14, 출 23:12, 삼상 16:23- 다윗의 음악 때문에 사울 왕이 쉼을 얻음).
*출 23:12 너는 엿새 동안에 네 일을 하고 일곱째 날에는 쉬라 네 소와 나귀가 쉴 것이며 네 여종의 자식과 나그네가 숨을 돌리리라
특히 이 명사 단어는 칠십 인경에서 1회 사용되는데, 출 8:15(LXX)
22-23절
베드로는 백성들의 회개를 촉구하기 위해서 신명기와 창세기의 말씀에 호소한다.
22절에서 신명기 18:15가 인용된다. 이 신명기 본문 사도행전 7:37에서 다시 사용된다. 베드로는 신명기 18:15-19의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간접적으로 말한다.
(5) 모세와 같은 선지자(메시아)가 미래에 있을 것이라고 모세가 예언했는데 이제 그 예언이 예수에게서 완성이 되었다. 신명기 인용은 두 가지 목적이 있다.
첫 번째는 예수께서 신명기의 예언을 성취하신 분이시라는 것이며, 둘째 목적은 경고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이다. ‘백성 중에서 멸망받으리라’는 레위기 23:29에서 나온 말이다.
베드로는 회개를 촉구하면서(19절) 동시에 메시아를 계속 거부할 경우의 결과(23절)에 대한 경고를 빼놓지 않고 하고 있다.
눅, 행의 기독론: 『선지자 기독론』 예수께서 그 선지자다. 엠마오의 두 제자(선지자), 모세와 같은 선지자.
(6) 아브라함의 자손: 베드로는 25절 하반절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인용한다. 이 구절은 창세기 22:18(LXX) (참고, 창 12:1-3 LXX, 그러나 문자상 창 22장에 더 가까움)에 기초하고 있다. 창세기 22:18은 바울이 갈라디아서 3:16에서도 인용하는 구절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베드로는 바울이 했던 것처럼 ‘너의 씨’가 단수인 점을 강조하면서 메시야적으로 이 본문을 해석하지 않는다. 그는 단순히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만을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눅 1:55, 73; 행 7:5-6, 16-17).
26절
<그 종을 세웠다>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웠다는 구절은 예수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셨다는 의미로 성육신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같은 동사인 “세우다”가 선지자들을 세우다는 의미로 이미 22절에서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설교하면서 이들이 하나님의 구원역사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있음을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라는 말로 설명한다. 유대인들의 구속사적 특권에 대해서는 복음서와 바울이 공통적으로 말하고 있는 내용이다(마 15:24; 롬 1:16; 2:10).
단수와 복수
“너희가 돌이킨다.” 공동체의 책임
“각각 버려라” 각 개인의 책임
3장 적용
적용은 쪼개 놓은 본문을 통합하는 것이다.
1.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대신 취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영광 받는 대상. 치유받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칭찬하지 않고 하나님을 찬양한다. 영광 받는 대상이 누구인가?
2.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은과 금인가? 예수 그리스도인가? 초대교회는 예수밖에 줄 것이 없었습니다. 예수 말고 상담학, 문화 할 동, 체육활동.. 예수님 한 분으로 충분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가? 한국교회는 자꾸 예수님 플러스알파를 찾는다.
3. 청중의 입장: 회개와 돌이킴, “약속과 경고” 둘 다를 듣고 있는가? 가끔 듣고 싶은 것만 들을 때가 있다. 지음 받은 존재가 하나님 앞에서 해야 할 일 1) 의지(권리, 우리의 권리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와 2) 순종(의무)
설교자는 약속만 선포해서도 안되고, 경고만 선포해서도 안된다. 균형 잡힌 설교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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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뱅크 > 성경 주석 > 새롭게 되는 때(사도행전 3:19-26)
3:19-21 『그러므로 너희는 회개하고 돌이키라. 그러면 주의 임재하심으로부터 새롭게 되는 때가 올 때 너희 죄들이 지워지리라. 또 하나님께서 전에 너희에게 전파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리라. 하늘은 실로 만물이 회복될 때까지 그 분을 마땅히 받아들여야 하니, 이는 하나님께서 세상이 시작된 이래로 이 일에 관하여 그의 모든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니라.』
이 구절은 다시 한 번 학자들을 당황케 한다. 왜냐하면 이 구절은 영적인 약속들(26절)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에게 하신 정치적 약속들과 재림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주의 임재하심으로부터 새롭게 되는 때가 올 때 너희 죄들이 지워지리라』(19절).
“때”(when, 19절)라는 단어는 99%의 성경에서 변개되었으며, 99%의 주석가들은 이 구절에 대해 올바른 해석을 하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초림과 혼동하고 있다(행 1:6,7 참조). 그러나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을 말하는 구절이 아니라 재림을 말하는 구절이다. 본문을 주의깊게 살펴보자. 베드로가 한 말은 예레미야(렘 50:20), 이사야(사 44:22), 아모스(암 9:14,15)가 했던 말과 똑같은 말인데, 바로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실 “때” 이스라엘의 죄들은 지워질 것이라는 말이다. 그것이 로마서 11:26-28과 히브리서 8:10의 내용이다. 본문은 “이스라엘의 죄들”이 지워질 것이라고 말한다. 『주의 임재하심으로부터 새롭게 되는 때가 올 때 너희 죄들이 지워지리라』(19절).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실수하는 것은 갈보리로 말미암아 죄인들이 용서받았다는 사실 밖에는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지워지는” 것은 죄인 개개인의 죄가 아니라 특정 민족의 죄이다(사 44:21,22).
Bible Believers / 69
여기서 “때”에 관한 학자들의 견해를 살펴 보기로 하자.
1. 빈센트(Vincent)에 따르면 “때”(when)는 틀렸으며 “-하기 위하여”(in order that)로 되어야 한다. “때”(times)도 틀렸으며 “시기”(seasons)로 되어야 한다. “새롭게 되는”은 “서늘한”(cooling)으로 되어야 한다. 빈센트는 왜 세 개의 장애물만을 쓰러뜨리는가? “돌이키라”를 “탈선하다”로, “죄들”은 “적응하는 데 실패”로, “지워지리라”는 “흡수되리라”로, “주”는 “바알”로 되어야 한다고는 왜 말하지 않는가?
2. A.T. 로버트슨(Robertson) 박사에 따르면 “때”(when)는 틀렸다. “-하기 위하여”(that so)로 되어야 한다. 그는 “회개가 새롭게 되는 때를 가져온다”고 말한다. 무천년주의, 죽은 정통주의 보수주의자는 20절(또는 21절)의 한 단어도 기록된 그대로 믿지 않는다. 그는 “새롭게 되는 때”를 “영적 부흥”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문맥상 “만물이 회복될 때”인 재림을 말하는 것이다. [A.T. 로버트슨 박사는 신학생들을 가르칠 만큼의 성경적 지각을 갖고 있지 못하다. 왜냐하면 그의 전공은 지상에서 가장 위대한 책을 수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3. 아담 클라크(Adam Clark)와 라잇풋(Lightfoot)에 따르면 “때”는 틀렸으며 “that”으로 되어야 한다. 이 두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파괴하는 비평가들 중에서 가장 파괴적인 두 사람이다(클라크, Ibid., p.707). 그들은 재림에 대한 구절들이 “은혜의 왕국의 통치”로 불려야 한다고 말한다!!
4. 로크만 재단과 밥 존스 대학(NASV)에 따르면 “때”는 틀렸으며 “-하기 위하여”(in order that)으로 되어야 한다. 이에 일치하는 번역본은 NEB, RSV, <공동 성서>(1973), 그리고 NCCC가 지원하는 다른 번역본들이다.
5. 래드 박사는 “때”(when)는 틀렸고 “that”으로 되어야 한다, “새롭게 되는 때”는 이미 여기에 있으며 그것을 “현재의 축복”이라고 말한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지금 지상에 계시지 않은데도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고후 5:1-10)!
6. “때”(when)는 틀렸다. 노울링(Knowling)에 따르면 “올 수 있도록”(that so there may come)으로 되어야 한다(Ibid., p.115). “새롭게 되는 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에 보내지신 것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으며(20절 참고) 그것은 “위로를 구하는 자에게 임하는 자애로우신 하나님의 임재”를 말한다.
7. “때”는 틀렸다. 더멜로우, RV(1881- 1884), ASV(1901), PDQ(666).
8. 제미에슨, 퍼셋, 브라운에 따르면 “때”는 틀렸다. 한 마디로, 성경만 틀렸고 그 어떤 것이라도 다 맞다는 것이 그들의 말이다.
어리석은 자의 등에 백 대의 채찍을 때린다 해도 그의 어리석음은 그에게서 떠나가지 않을 것이다(잠 17:10).
성경이 가르치는 참된 진리를 배우려다가 1880-1990년의 주요 주석가들에게 시간만 낭비한 것이다. 이스라엘의 죄들이 지워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이다. 이스라엘의 죄들은 『주의 임재하심으로부터 새롭게 되는 때가 올 때』까지는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구약 어디에도 회개와 개심만으로(본문의 “회개하고 돌이키라”는 말을 주목할 것) 이스라엘의 죄들이 지워진다고 말하는 곳은 없다. 이스라엘의 죄들은 “새 언약”(히 8:10)이 효력을 발생할 때 없어질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재림하시기 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호의를 베푸신다 할지라도 그것은 “죄들이 지워지는 것”과는 별개의 이야기다.
오리겐에서부터 디엠(Thieme)에 이르는 모든 성경 주석가들은 “죄들이 지워지는 것”을 골로새서 2:14에 있는 개인의 구원으로 잘못 이해했다. 그들 모두는 그것이 “회개”와 “개심”의 결과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스도를 영접한 20세기의 죄인은 골로새서 2:14을 사도행전 4:12에 비추어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시몬 베드로와 그의 청중은 그들이 디모데전서 4:1-5에 대해 몰랐던 것처럼 골로새서 2장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 상태였다.
분명히 말하지만 <킹제임스성경>에 있는 대로 “때”(when)가 올바른 번역이다. 빈센트의 <단어연구, Word Studies>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 누가복음 23:42의 “왕국”이란 단어는 “왕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영광”을 말한다는 사람이 어떤 주석을 할 수 있겠는가?
『…전에 너희에게 전파된 예수 그리스도』(20절). 베드로는 바로 전 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설교했다. “전에”라는 부사는, 그가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예언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교회시대의 끝에 전파될 메시지인 “전에 너희에게 전파된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기 때문이다(히 8:10의 “그 날들 이후에”와 행 15:16의 “이 일 후에”를 주목할 것).
『너희에게…』에서 “너희”는 일차적으로 이스라엘을 가리키며, 이것은 『하나님께서…너희를 복 주시려고…너희에게 보내어』(26절)와 연결된다. 그리고 이것을 누가복음 1:68-69와 비교해 보라. 이것은 또한 로마서 1:16과도 맞아 떨어진다. AV(1611) 본문은 언제나 (지상의 메시야가 통치하는 “정치적” 왕국으로서) 이스라엘의 천년왕국 회복에 대한 절대적인 진리를 확증해 준다. 이제 우리는 사도행전 1장과 천년왕국 사이의 빈 간격이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된 그리스도의 몸으로 채워졌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창세기에서 말라키에 걸쳐 이스라엘에게 언급된 것 중 바뀐 것은 단 하나도 없다(갈라디아서 3:29 및 주석 참조). 아브라함과 그의 씨에게 준 땅 즉 팔레스타인, 시리아, 시내 산은 “조건 없이” 주어진 것이다.
『하늘은 실로 만물이 회복될 때까지 그 분을 마땅히 받아들여야 하니, 이는 하나님께서 세상이 시작된 이래로 이 일에 관하여 그의 모든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니라』(21절). 21절을 충분히 설명하자면 적어도 3주는 걸릴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하늘에 계신다(골 3:1-3, 히 12:1,2). “회복될 때”는 구약에서 너무나 많이 언급되어 있기 때문에(창 15,22,49, 신 29,32, 유 5절, 삼하 22, 사 2,11,65,66 겔 27,40-48 등) 배교한 정통주의자들이 “때”(when)를 “위하여”(so that)로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이스라엘에게서 이 약속들을 훔쳐내어 그것들을 교회에 적용시키는 것뿐이다. 이사야 34:6, 미카 4:3, 예레미야 23:5, 스카랴 14:9, 이사야 35:1-10을 보라. 이 구절들은 죄인이 회개하고 위로받는 것 이상의 것들을 말하고 있다.
“때”(when)를 다른 것으로 바꾸는 대부분의 주석가들의 무분별은 21절의 “만물”(all things)이 영적인 것만을 언급한다고 믿는 데 기인한 것이다(골로새서 2-3장을 이 구절에 비춰서 읽음으로써 덫에 걸리게 되는 것이다).
어떤 근본주의자가 일단 사도행전 1:6에서 주춤하게 되면 사도행전 2:30에서는 휘청거리게 되며, 사도행전 2:30에서 휘청거린 다음에는 여지없이 사도행전 3:19에서 물 속으로 가라앉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올리브 산에 맨발로 내려오실 때까지 “새롭게 되는 때”나 “만물이 회복되는” 것은 없다(행 1:11, 슼 14:1-12 참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직 올리브 산에 내려오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회복”(21절)과 “새롭게 됨”(19절)이 지금 진행되고 있다고 주장하는 주석가들은 다윈의 진화론을 성경 예언에 적용시키는 국제적인 사회주의자이다.
『…모든 거룩한 선지자들…』(21절)에는 세상과 시대의 시작을 기록했던 모세가 포함되며, 그가 기록한 야곱, 이삭, 아브라함, 노아, 에녹, 아벨 등도 포함된다. 유다서 14절에서 에녹이 인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예언은 거기까지 거슬러 올라감을 알 수 있다. 에녹은 침례인 요한이 태어나기 2000년 전에 재림을 전파하고 있었다.
3:22-26 『모세도 실로 조상들에게 말하기를 ‘주 너희 하나님께서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한 선지자를 너희에게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가 무엇을 말하든지 그에게서 모든 말을 들으라.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그 백성 가운데서 멸망되리라.’고 했느니라. 뿐만 아니라 사무엘로부터 그 뒤를 이어 예언한 모든 선지자들도 한결같이 이 날들을 미리 말하였느니라. 너희는 그 선지자들의 자손이며 또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들과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라.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씨 안에서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으리라.’ 고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를 일으키사 너희를 복 주시려고 먼저 너희에게 보내어 각각 자기의 악한 행실로부터 돌아서게 하셨느니라.”고 하더라.』
『…나와 같은 한 선지자…』(22절). 이 유명한 구절은 신명기 18:15-18에서 발견된다. 이것은 요한복음 1:24-28에서 요단 강에서 왜 그와 같은 의문이 제기되었는지를 설명해 준다. 구약의 유대인들은 예레미야(마 16:14)와 엘리야(요 1:21)가 둘 다 모세와 같은 선지자였음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선지자”는 예수 그리스도였다(요 1:21). 모세가 신명기 18:15-18에서 “네게”(thee)라고 말했을 때 그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대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며, 여기에는 그 모세의 말이 다시 인용되고 있는 것이다(『주 너희 하나님께서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한 선지자를 너희에게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가 무엇을 말하든지 그에게서 모든 말을 들으라』 22절). 그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방인 성도의 거듭남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무엘로부터 그 뒤를 이어 예언한 모든 선지자들도 한결같이 이 날들을 미리 말하였느니라』(24절). “그 뒤를 이어” 예언한 사람들은 다윗부터 말라키까지다. 이 구절은 사도행전 2:17의 “마지막 날들”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모든 것이 재림(마태복음 1장과 사도행전 7장 사이에 성취될 약속들)을 위해 준비되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이 “왕국”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초림과 재림을 함께 두었다(벧전 1:11). 이것은 누가복음 4:18에서 그리스도께서 이사야 61:1,2를 다루시는 것으로 볼 때 명백해진다. “이스라엘을 위한 연기된 왕국”은 하나의 학설이 아니다. 그것은 학설이었던 적이 결코 없으며, 또 학설이 되지도 않을 것이다. 그것은 그것을 학설이라고 가르쳤던 모든 사람들의 눈앞에서 신문의 제 1면에 실릴만큼 확실하고 중요한, 예언된 진리이다. 베드로가 “이 날들”이라고 말했을 때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선행되는 날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 날들은 여기서 일어나고, 대환란 때(계 22:12) 다시 일어난다. 히브리서 1:2의 “마지막 날들”이 사도행전 1-7장이나 계시록 4-19장에 위치할 수 있는 것처럼, 사도행전 3:23,24의 “이 날들”은 교회시대의 시작이나 그 “끝”에 자리할 수 있다.
23절의 “사람”이 지난 1000년 간 있었던 이방인들을 말한다고 할 수는 없다. “사람”은 모세와 베드로의 메시지를 들은 사람들이다. “너희는 그 선지자들의 자손이며”(29절)라는 표현이 그것을 증명해 준다. 샤프, 로버트슨, 그밖의 배교한 정통주의자들이 얼마나 자주 갈라디아서 3:29을 이 본문에 비추어 이해하는지와 상관 없이, 베드로가 설교하고 있던 사람들은 선지자들의 물리적인 자손이다. 갈라디아서 3:26-29은 결코 물리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미혹당한 주석가들은 그 문맥에서 28절을 읽은 후에, 갈라디아서 3:29을 물리적인 것으로 설명한다.
이제 진리를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의 마음에서 모든 의심을 제거하기 위해, 말로만 전천년주의를 믿는다고 하는 번역가들을 제쳐 두고, <킹제임스성경>(1611)이 제시하는 진리를 살펴 보기로 하자.
거의 모든 관주성경들은 갈라디아서 3:8의 관주에 창세기 12:3을 제시했다. 그러나 그 구절은 창세기 12:3과 연결되지 않는다. 창세기 12:3에는 “족속들”(families)이라고 되어 있다. 갈라디아서 3:8의 참조 구절은 “민족들”로 되어 있는 창세기 22:18이다. 갈라디아서 3:8은 영적인 것을 언급하고 있으며, “그리스도”가 (이삭으로서) 발견되는 창세기 22:18과 연결되어야 한다. 창세기 12:1-3은 “땅”과 관계가 있다. 베드로는 여기서 “민족들”이 아니라 “족속들”(kindreds)에 대해 말하고 있다(25절). 그럼으로써 베드로는 그의 메시지를 문자적인 히브리인들에게 주어진 땅(창 12:1-3)과 연결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관주성경이 본문에서 제시하는 참조구절은 창세기 22:18이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가장 훌륭한 보수주의자들이 “최상의 필사본은 26절에 ‘예수’가 삭제되어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말한 “최상의 필사본”은 당연히 로마 카톨릭 교회의 예수회 성경(1582)과 일치한다. “예수”란 단어는 밥 존스, 스프링필드, 미주리 대학에서 그것을 삭제하기 300년 전에 이미 그 라틴어 성경에서 삭제되었다.
25절에서는 인칭대명사의 철자변이에 대해 40개 이상의 필사본을 인용했음에도 불구하고 1966년판 알란드 텍스트(미국 성서공회)에는 “예수”가 삭제된 필사본 증거가 하나도 제시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극도로 변개된 인쇄체 대문자 필사본들과 알렙, B, D에 의해 “예수”가 성경에서 빠졌다. 위에 나열한 “근본주의자들”은 그분을 본문 밖으로 내쫓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의 지위를 “종”으로 변개시켰다(13절 주석 참조). 그들은 성경 본문을 태워 버리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것에 할 수 있는 온갖 짓을 다 했다.
죽은 자들로부터 그리스도께서 일으켜지신 것은(26절, “그의 아들 예수를 일으키사”) 그리스도의 “아들되심”과 연관된다. 그가 종인 것과 관계된 것이 아니다. “종”이란 단어는 13절이나 26절에 맞지 않다.
출처 : 월간 성경대로믿는사람들 1996년 8월 (통권 53 호) page : 68
[사도행전3장]주제집중이 잘된 설교
사도행전 3장, 예수만 바라보자, 주제 집중이 잘된 설교
사도행전 3장 12절 말씀,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라는 구절을 통해 주제 집중이 잘된 설교가 있어 소개합니다. 이 설교를 읽고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 제목을 “예수만 바라보자”보다는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지금 당신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이러면 어떨까 생각도 드네요. 제목의 신선미를 살릴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아쉽게도 설교의 본문은 제게 있는데, 설교자는 누군지 나와 있질 않네요. 설교에 참조할 수 있도록 편집하여 소개합니다.
예수님만 바라보자 / 사도행전 3장 11절-16절
본문에 세 종류의 사람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로, 은과 금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은 돈을 바라보는 사람이었습니다. 성전 미문에 앉아서 성전에 출입하는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어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의 주머니를 바라보고, 돈을 바라보는 사람이 바로 성전 미문에 앉아 있었던 걸인이었습니다. 돈을 바라보면 돈을 의지하게 되고 돈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재물만 바라보면 망합니다. 그런 예가 성경에 참 많이 나와 있습니다. 먼저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는 따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를 따먹다가 하나님을 떠나 죽게 되었고, 에서는 물질을 사랑해서 팥죽 한 그릇을 받고 장자권을 팔아먹었습니다. 아간이라는 사람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명령을 어기고 외투 한벌과 은 이백세겔과 금 오십 세겔 중의 금덩이 하나를 감추어 두다가 결국 돌에 맞아 죽는 심판을 당하였습니다. 게하시는 은 한푼도 받지 말라고 당부한 엘리사 선지자의 말을 외면하고 나아만 장군에게 은 한 달란트와 옷 두 벌을 받았습니다만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문둥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갸룟 유다는 은 30이 탐나서 사랑하는 스승을 팔아먹고 스스로 목매달아 죽고 말았습니다.
바라봄의 법칙이 있습니다. 자신이 바라보는대로 그렇게 되어지는 것인데,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의해서 그와 같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돈을 바라보면 돈의 종이 되는 것이고, 음란한 생각을 갖고 여인을 바라보면 음란한 인간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높은 꿈을 가지고 예수님을 바라보면 예수님처럼 되어질 줄로 믿습니다.
둘째로, 사람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앉은뱅이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으키자 사람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바라보았습니다. 사람들은 “와! 굉장한 사람이다. 사십년 동안 앉은뱅이로 고통당하던 사람을 벌떡 일으키는 것을 보니 보통사람이 아니다. 정말 놀라운 권능과 경건을 소유한 사람이다.”라고 생각하여 베드로와 요한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사람을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그때 베드로와 요한은 이와 같은 능력이 우리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된 것임을 고백하면서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도 예수님만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의지하면 실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사야 2장 22절에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數)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시편 144편 4절에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람을 의지하면 허망함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 코에 호흡이 끊겨질 때에 허무감에 사로잡히고, 결국 낙심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시편 118편 8절과 9절에 ‘여호와께 피함이 사람을 신뢰함보다 나으며 여호와께 피함이 방백들을 신뢰함보다 낫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방백이란 권세가, 장관, 국회의원 같은 사람을 말합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혹시 장관 친척이나 국회의원 친척이 있습니까?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을 의지하고 있습니까? 머지 않아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권력가들을 의지하지 마시고 하나님만 신뢰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히브리서 12장 2절 말씀과 같이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만 바라보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새힘을 얻습니다.
유명한 오스트리아의 음악가 하이든(Haydn, 1732-1809)은 주님을 잘 믿는 독실한 크리스챤이었습니다. 그에게는 늘 열정적인 힘과 지칠 줄 모르는 용기가 있었습니다. 어느날 한 사람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당신은 지칠 줄 모르는 힘과 열정이 계속 솟아날 수 있습니까?” 그러자 하이든이 “예! 우리집에는 조그만 골방이 하나 있는데, 내가 지치고 피곤할 때는 언제나 그 골방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다오. 하나님께서는 한번도 나를 시망시키는 일이 없었다오”하는 고백을 했습니다.
또한, 주님을 바라보면 고침을 받습니다.
본문 16절에 ‘그 이름을 믿으므로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40년 동안 앉은뱅이로 고통당하던 사람을 예수님께서 고쳐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질병을 담당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시는 구세주가 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질병을 담당하신 신유의 주님도 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조용히 주님을 앙망하면 마음의 상처와 영혼의 병을 고침받을 수 있습니다. 믿음의 병, 육신의 질병도 깨끗하게 고침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누구를 바라보고 있습니까? 돈을 바라보다가는 시몬처럼 돈과 함께 멸망을 당할 것입니다. 사람을 바라보다가는 그 의지했던 사람의 호흡이 그 코에서 끊어질 때에 허무함을 느끼고 좌절하고 실망하게 되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의 주인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에는 구원받게 되어지고, 새로운 힘을 얻을 것입니다. 소망이 넘치게 되고 나음을 입게 되어질 줄로 믿습니다. (*)
by 코이네자료실
사도행전3장, 성전 미문 앞에서 베드로는 사람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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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3장, 성전 미문 앞에 사람이 있었다
그곳에 사람이 있었다
본문 : 사도행전 3장 1-9절
2014.2.9. 소토교회 주일낮예배 설교
1. 주목 받고 싶은 세상
이 세상은 온통 주목받을 사람들만 살아가고 있고, 또 그럴 자격이 있으며, 자신 또한 그렇게 주목받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목표 속에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누구든 그렇게 주목받는 성공한 사람이 되고 싶어합니다. 누군가가 내게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부터 모든 사람의 관심을 독차지하는 성공하는 인생을 살고 싶은 것이죠.
그런데 생각을 한 번 바꾸어보았습니다. 사고의 전환인 것이죠. 어차피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은 한정되어 있는데, 그런 사람되려고 박터지게 살 것이 아니라, 난 주목하는 사람이 되면 되지 않겠나? 내가 주목해주고, 내가 관심을 가져주었기에 저 사람이 산다. 내가 관심 가져주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 집사람이 한 번씩 그럽니다. 자기가 재밌게 보는 드라마가 있으면 그 드라마 성공한다고 합니다. 왜냐면 내가 봐주는 것은 재밌는 것이고, 그렇기에 성공한다는 것이죠. 내가 재미없다고 고개 돌리는 것은 다 망하더라는 자신감. 여러분, 주목하는 사람이 좋나요? 주목받는 사람이 좋나요?
오늘 그런 사람들이 말씀의 주인공으로 나옵니다. 먼저 성전의 미문에 앉아서 구걸을 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언제나 남에게 관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누가 나에게 돈을 한 푼 주지 않나? 그런 관점으로 사람을 보고 사는 거죠. 자신이 다른 이의 관심의 대상이 될 것이라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기를 유심히 바라보는 눈길을 느꼈습니다. 이 사람 도대체 내게 얼마를 줄려고 하는가? 아마 그랬을 것입니다. 좀 이상하기는 했을 겁니다. 왜냐면 대부분 자신이 붙잡아야 자기를 봐주는데, 이 사람은 그러기도 전에 자기를 보고 있거든요.
2. 주목하여 보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기도하러 갔습니다. 유대인들은 습관적으로 하루 세 번 기도합니다. 아침 해뜰 때, 오후 3시에 그리고 해질 때 기도합니다. 성전에서 하기도 하고, 자기가 있는 그 자리에서 엎드려서 기도합니다. 보통 기도문을 외거나, 성경말씀을 읽거나 자기의 소원을 반복적으로 말하면서 기도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성령을 받은 후 항상 오후 세시가 되면 성전에 기도하러 갔습니다. 성전에서 기도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전에 들어갈 때 항상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른 때는 그저 저런 불쌍한 사람이 있구나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오늘은 그 사람이 눈에 들어옵니다.
원문에 “주목”이란 말은 “아테니조” 인데, 그 의미는 “강한 시선으로 똑바로 응시하는 것”입니다. 즉, 주목한다는 것은 세심하게 관심을 가지는 태도입니다. 이 구걸을 하는 장애인은 베드로와 요한의 눈길이 상당히 부담스러웠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저 사람이 내게 뭘 주려나 보다 하고 기대감을 가지기도 했겠죠.
베드로와 요한은 왜 이 사람을 주목했을까? 혹 이런 생각을 해볼 수도 있습니다. 아하 요거 기회다. 오늘 여기서 이 사람을 벌떡 일어서게 한다면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우릴 주목할 것이고, 이 때 전도해보자. 그러면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을 것이다. 어떻습니까? 때때로 좀 그런 일들이 일어났으면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식이라면 이 장애인을 두 번 죽이는 일이 됩니다. 그저 전도하기 위한 소모품에 불과한 것이죠. 안타깝게도 우리 주위에 그런 일이 많이 일어나는 것을 봅니다. 사람이 사람이 아니라 필요에 따른 소모품이 되게 하는 것이죠.
베드로와 요한은 그 사람을 긍휼의 마음으로 주목하여 본 것입니다. 지금껏 아무도 제대로 주목해주지 못한 사람. 태어날 때부터 장애인으로 온갖 설움을 받고 살아왔고, 지금은 이렇게 구걸하며 살아가는 불쌍한 인생. 그런데 그 불쌍한 사람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살아야 할 하나님이 지은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 사람들을 만나시며 예수님이 하신 일은 바로 우리를 긍휼히 여기며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아름다운 사람들이 죄 때문에 저리 불행하게 사는데, 저들을 어떻게 회복시킬 수 있을까? 저 사람이 회개하고 회복되면 어떤 모습일까? 이런 기대감으로 우리 사람들을 만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 최고의 지도자들도 아주 불쌍한 천민들도, 사람 대접 못받는 죄인들, 나병환자, 장애인 가리지 않고 그들을 찾으시고 만나시며, 그들을 치료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기대를 가져야 합니다. “저 사람이 예수를 믿으면 어떻게 될까?” 저 사람이 예수 믿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하나님 은혜 가운데 살아간다면 어떻게 될까? 지금 베드로와 요한은 그런 마음으로 그 장애인을 본 것입니다. 이전에는 그저 그 자리에 구걸하는 걸인이 있었는데, 지금 베드로의 눈길이 머문 그곳에는 하나님이 회복시키고 구원할 사람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베드로의 눈길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때때로 우린 쓸데 없는 고민을 합니다. 이 사람이 예수 믿으면 어떻게 될까? 내가 어떻게 해줄 수 있을까? 괜시리 부담이 되고, 그 다음을 생각하다보면 차라리 안하는게 낫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선을 행할 것을 포기해버리지는 않았습니까? 여러분 그 다음은 고민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알아서 하십니다. 책임지십니다. 여러분이 지금 믿음을 갖고 생활하듯이 그 사람에게도 주님께서 그렇게 하시며 책임지실 것입니다.
3. 우리를 보라
이 말을 가슴에 간직해야 합니다. 아마 그리스도인들에게 제일 하기 힘든 일이 뭐냐고 물으면 전도하는 것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누구나 그것은 부담이 되는 일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낯선 사람에게 전도지 한 장 주는게 왜 그리 힘드는지,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전도할 때 가장 잘 못하는게 있습니다. 못하는게 아니라 잘못하는 것입니다. 바로 구원을 구걸하는 것입니다. 제발 구원받아주세요. 예수 믿는 일을 아주 싸구려로 만들어 버립니다.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되었나 모르겠습니다. 어떤 집사님이 이사 온 이웃에게 친절을 베풀었습니다. 처음에 고마워하다가 이 분이 교회 집사님인 것을 알고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마치 뭐 맡겨둔 것처럼 이것 저것 요구하기 시작하는거예요. 집사님이 하도 어이가 없어서 한 동안 찾아가질 않았더니 어느 날 엘리베이터 안에서 만났습니다. 반갑게 인사를 하더니 그 분이 집사님에게 하는 말이 요즘 왜 우리 집에 오지 않아요? 절 전도할려면 그래가지고 되겠어요? 하더랍니다. 교회에서 이벤트성 전도를 하도 하다보니까 사람들이 이제는 그걸 이용하는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복음을 그렇게 싸구려로 만들지 마십시오. 혹 여러분 손에 1억짜리 수표를 들고 있고, 이걸 누구에게 전해야 하는데 누구에게 줄까 고민하고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여러분이 지금 갖고 있는 복음, 우리가 전하는 예수님은 그저 그런 정도가 아닙니다.
4.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장애인은 베드로에게 한푼의 돈을 바랐지만 베드로는 그에게 내가 가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의 병을 고쳤습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는 놀라운 역사가 있습니다.
(빌 2:9)”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이 예수의 이름은 보통 이름과는 다른 놀라운 이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첫째, 예수 이름은 모든 무릎이 그 앞에 경배하기에 족한 귀한 이름입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모든 만물을 만드신 제 2위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예수 이름은 구원을 주는 이름입니다. 예수 이름 이외에는 죄악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이름이 없습니다. (행 4:12)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셋째, 놀라운 표적과 기사가 이루어지는 이름입니다. (행 4:30)”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넷째, 예수 이름은 기도 응답의 보증이 되는 이름입니다.
5. 꽃을 보는 눈길로 사람을 보라
어느 시인의 표현처럼 사람은 누구나 ‘꽃’이다. 누구나 활짝 펴서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이쁨 받고 싶고, 또 그렇게 창조되어진 존재입니다. 참된 기독교의 모습은 사람을 꽃으로 대접해 주는 사역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꽃을 보는 눈길로 사람을 보는 것입니다.
그는 밤마다 꿈을 꾸었을 것입니다. 멀쩡한 다리로 마음껏 걸어 다니면서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나 아침이면 비참한 자신의 실상과 만나게 됩니다. 또 다시 다른 사람들의 어깨에 의지한 채 이곳저곳으로 이동해야 하는 신세, 몇 푼 동전을 구걸하며 살아야 하는 자신의 가련한 몰골과 조우하게 됩니다. 그는 가난과 불구라는 족쇄에 걸려 서서히 꿈과 희망을 내동댕이치게 됩니다. ‘인생에 희망은 없다. 오직 냉엄한 현실만 있을 뿐’이라고 외치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걷고 뛰고 성전을 돌아다니며 찬양하였습니다.
“그는 걸었네 뛰었네 찬양했네 그는 걸었네 뛰었네 찬양했네 곧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by 코이네 소토교회 박동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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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3장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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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3장 강해
사도행전 3장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오순절 성경 강림은 놀랍고 기이하게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이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고, 상상도 못했던 방식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이토록 놀랍고 기이하게 일어납니다. 사람의 생각을 뛰어 넘고, 사람들의 이성을 초월하여 역사하십니다. 하지만 언제나 말씀하셨고, 약속하셨던 것들입니다. 다만 그 말씀에 마음에 두지 않음으로 이해할 수없고, 생각하지 않음으로 기이하게 보일뿐입니다. 3장에서는 교회가 대중 앞에서 소개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성전 미문에 앉아있던 앉은뱅이가 예수의 이름으로 치유합니다.
1-10절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라
11-26절 베드로의 설교
1. 1-10절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라
우리는 이제 놀라운 한 장면을 만나게 됩니다. 성령 충만의 사건은 새로운 교회의 출현을 알렸습니다. 이제 성령의 오심을 통해 성령의 다른 이름인 ‘예수의 영’이 교회를 주도하게 될 것임을 드러냅니다. 성령 충만을 통해 제자들은 그리스도에 속한 사람 즉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그들은 예수를 드러내고, 예수가 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그 첫 시작은 예수께서 하셨던 치유와 회복을 제자들이 하는 것입니다.
‘제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갑니다. 제 구시는 로마 시간으로 현재의 오후 3시를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루 세 번 제 삼시 제 육시, 제 구시에 기도했고, 많게는 다섯 번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베드로가 성전에 올라간 시간은 제 구시로 유대인들에게 정해진 기도시간입니다. 그 때 사람들이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사람을 메고 와서 성전 미문(美門)에 두었습니다. 참으로 아이러한 일입니다. ‘아름다운 문’이라는 뜻을 가진 미문에 성전에 들어가지 못하는 불구의 사람이 그 입구에서 구걸하고 있습니다.
그는 성전에 기도하러가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았고 구걸합니다.(3절) 베드로와 요한은 구걸하는 소리를 듣고 ‘우리를 보라’고 말합니다. 앉은뱅이는 무엇을 얻을까 싶어 베드로와 요한을 보았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그 사람에게 외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내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6절)
단순하고 명료했습니다. 베드로는 그 사람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그러자 곧 발과 발목이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걷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선정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은 찬송’(8절)합니다.
2. 11-26절 베드로의 설교
사도행전 초기는 베드로가 심각할 정도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도행전보다 복음서의 기록연대가 늦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복음서의 저작 연대를 알아내기는 힘듭니다. 그럼에도 사도행전이 누가복음 이후에 기록되었고, 요한복음 이전에 기록된 것은 분명합니다. 학자마다 의견이 분분하긴 하지만 사도행전은 AD 70-80년 즈음에 기록된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이 시기는 마태복음의 연대와 비슷하거나 빠른 시기입니다. 복음서는 비록 베드로가 부각되기는 하지만 확연히 부각되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요한복음의 경우는 베드로의 입지가 의외로 작습니다. 그렇다면 누가는 왜 사도행전초기에 베드로를 유난히 강조하는 걸까요? 그것은 사도행전이 복음서의 저술 목적보다 교회의 신학적의 주도권에 대한 이해를 주려는 의도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즉 사도행전은 초기에는 베드로가 주도적인 인물로 등장하지만 중간 이후 베드로는 사라지고 등장하지 않으며 일반 사도들이 나오다 13장 이후 사도 바울에게 복음의 주도권이 넘어가 버립니다. 누가는 베드로의 권위를 무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용’하련느 것으로 보입니다. 즉 초대교회 초기는 베드로가 강력한 권위를 가진 존재였다는 것이고, 이후 점점 다른 사도들과 바울에게 넘어가는 것을 보여주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분석해 봅시다.
1) 12-16절 예수의 이름이 낮게 했다
사건의 발달은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은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11절) 그로 사람들은 앉은뱅이였던 사람이 완전히 치유된 것으로 보고 놀라 사도들이 있던 솔로몬 행각으로 달려가 모입니다. 베드로는 이것을 보고 즉각적으로 반응합니다. 먼저는 이 사람을 낫게 한 것은 ‘우리의 개인의 권능과 경건’(12절)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그럼 어떻게 이 사람이 나았을까요? 베드로는 13-16절에서 이유를 설명합니다. 결론부터 말해 봅시다. 이 사람이 나은 이유는 ① ‘그 이름이’ 낫게 했습니다. ② 두 번째는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낫게 한 것입니다. 장애를 치유한 주최는 예수이기도 하고, 그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의아한 것은 실제로 예수의 이름으로 걷게 한 사람은 베드로입니다. 맥락적 의미에서 본다면 앉은뱅이의 믿음이 아니라 ‘베드로의 믿음’이라고 해야 옳습니다.
예수는 누구인가?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하나님 앞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으로 소개합니다. 이 표현을 통해 유대인들이 기대하고 소망하는 그 메시아임을 강조하려는 의도입니다. ‘영화롭게 하다’(13절)의 표현은 성육신과 고난, 그리고 부활과 승귀까지의 모든 것을 포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그리스도를 모든 사람들은 ‘증인’입니다. 증인이라는 표현은 1:8에서 강조한 ‘증인이 된다’는 표현의 확증입니다. 2장에서 기다렸던 성령이 임했고, 그로인해 제자들은 ‘증인’이 되었습니다. 이제 땅 끝까지 이르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예루살렘’에 있습니다.
너희가 죽였도다.
베드로는 예수의 죽음의 이유가 ‘그들’ 즉 유대인들에게 있음을 선포합니다. ‘너희’(13절)는 단순히 베드로의 설교를 듣는 있는 유대인들로 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스라엘 전체를 말하며, 더 나아가 예수님을 믿지 않는 후일의 이방인들까지 포함합니다. 베드로는 ‘너희가’ 예수를 죽였지만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15절)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의 죄로 인해 예수께서 죽으셔야만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2) 17-26절 구약에서 예언된 바로 그 메시야
17-26절까지는 구약에서 예언했던 그 메시아가 바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임을 증언합니다. 예수님은 구약에서 고난 받으실 것을 예언했습니다.(18절) ‘모든 선지자의 입’은 선지서와 시편뿐 아니라 구약 전체를 아우르는 표현으로 받아도 됩니다. 성경에서 미리 예언했지만 ‘너희들’이 그것을 알지 못해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러니 ‘회개하고 돌이켜 죄 없이 함을 받으라’(19절)는 것입니다. 마만약 그렇게 한다면 ‘새롭게 되는 날’(19절 하) 너희들에게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20절)실 것을 들려줍니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새롭다’는 표현입니다. 베드로는 ‘새롭다’는 표현을 21절에서 ‘만물을 회복하실 때’로 바꾸어 말합니다. 그 증거로 22절에서 모세의 말을 인용합니다. 신명기 18:15,18,19입니다.
신 18: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신 18:18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서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령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말하리라
신 18:19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전하는 내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내게 벌을 받을 것이요
결국 ‘그 선지자’는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 선지자의 말은 유대인들이 믿는 구약의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하나님의 권위입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첫번째 논증입니다.
두 번째 증거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 예수를 통해 성취되었다고 선언합니다. 다시 ‘사무엘 때부터 이어 말한 모든 선지자’(24절)도 예수를 증언합니다. 특히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었음을 설명합니다.
창 22: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고 그의 후손을 통해 ‘복’(26절)을 주시려는 것은 대속제물로 돌아가신 예수의 십자가 사건임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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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10(목) “사도행전 3:1-10” / 작성: 김광욱
[본문] 사도행전 3:1-10 [찬송가] 301장 ‘지금까지 지내온 것’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습니다(행1:3). 하나님 나라의 일에는 사도들에게 사명을 주신 것과 앞으로 일어날 성령님의 역사에 대한 예고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일을 위한 두 가지 위임명령을 하셨습니다. 하나는 마태복음 28장 18-20절의 말씀입니다. 그 핵심 내용은 모든 민족을 제자 삼는 것이고,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이고, 주님의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위임명령은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입니다.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성령님이 제자들에게 임하실 때에 권능을 받는다는 것과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땅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오순절에 제자들에게 성령님이 임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권능을 받아 신비로운 일을 행하였습니다. 그 일은 오순절에 제자들이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외국어를 세계 각국에서 모인 사람들에게 말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초자연적인 일이 있은 다음, 성령님에 의해 말씀의 권능이 사도 베드로에게 임하였습니다. 사도 베드로의 설교를 듣던 사람 3천 명은 마음이 찔려서 회개하고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후 초대 교회에서 기적과 표적이 많이 나타나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구제하고, 모이기에 힘쓰고, 성찬과 애찬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함으로 구원 받는 사람들의 수가 점점 늘어갔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교회에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는 통로가 되기 때문에 악한 세력의 공격을 받습니다. 초대 교회에서 성령님의 권능으로 기적과 표적과 말씀의 능력이 나타났지만, 외부의 박해와 내부의 갈등이 존재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인 사도행전 3장은 초대 교회에 성령님이 임하심으로 사도들이 권능을 받고 기적과 표적을 행하며 말씀의 열매를 맺으며 부흥하는 가운데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약 40세의 장애인이 걷게 되는 기적의 사건이 나옵니다. 이 기적은 초대 교회가 외부 공격을 받는 발단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성전에 올라갈새(1-3절)] [1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사도 베드로와 요한은 제 9시 오늘날 시간으로는 오후 3시에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올라갈새’는 원문에 미완료 시제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완료되지 않고 계속 진행되는 동작이나 습관적인 동작을 뜻합니다. 즉 사도들은 습관적으로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성전에 올라갔던 이유는 당시 사람들처럼 기도하러 올라갔습니다. 누가복음 18장의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에서도 두 사람이 성전에 올라가 기도했다고 나옵니다. 성전은 제사드리는 곳이지만 기도하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초대 교회 사도들처럼 시간을 정해서 습관적으로 기도 생활을 하는 것이 성도의 바른 신앙생활입니다.
[2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사도들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간 그 시간에 선천성 하반신 장애인이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성전의 출입문 중 하나인 미문 앞 입구로 나왔습니다. 그가 성전 문 입구로 나갔던 이유는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가 날마다 성전에 나가서 구걸했던 이유는 먹고 살아가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로 육체노동을 통해 벌이했던 고대 사회 특성상 걷지 못한 사람이 일자리를 구하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처럼 어려웠을 것입니다.
[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선천성 하반신 장애인이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에게 구걸하였는데 때마침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구걸을 하였습니다. 걷지 못하는 장애인은 그날 하루 돈 몇 푼이라도 동냥을 받아야지만 먹고 살아갈 수 있었기에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을 볼 때마다 간절히 구걸하였을 것입니다. 이때에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그 사람의 말소리를 들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4-6절)] [4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구걸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자 사도 베드로와 요한은 그 사람을 주목하였습니다. 구걸하는 사람은 양반다리의 자세로 허리를 세워 앉지 않고 몸을 엎드려 손을 벌려 동냥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가 ‘우리를 보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형식적인 적선을 위해 그 사람에게 보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진심으로 불쌍히 여기며 그 사람의 얼굴을 마주 보려고 했습니다.
[5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걷지 못하는 장애인은 적선해 줄 사람이 보라고 했으니 무엇을 얻을까 기대하며 사도 베드로와 요한을 바라보았습니다. 궁핍한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행동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도 베드로는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을 줄 수 없었습니다.
[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사도 베드로와 요한에게는 은과 금, 그리고 그를 도울 수 있는 돈이 없었습니다. 몇 푼의 돈이 있었을지라도 적은 돈을 그에게 적선하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을 주고 싶었습니다. 사도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물질이 아니라 예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성령님이 임하실 때 임할 권능을 이미 경험했던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의 능력이 걷지 못하는 사람에게 임하기를 원하며,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설령 은과 금이 있어서 걷지 못하는 사람에게 그것을 주었던들 그 사람이 그것으로 얼마나 오랫동안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겠습니까? 돈이 떨어지면 또다시 성전 문 앞으로 갔을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걷지 못하는 사람을 걷게 하여 건강한 몸으로 자발적 경제 활동을 하게 만들어, 그가 다시는 성전 앞에서 동냥하지 않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사도 베드로는 그것보다 더 값진 것을 그에게 주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 치유를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7-10절)]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사도 베드로가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사람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권능이 사도 베드로의 손을 통해 그 사람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사도 베드로의 손은 하나님의 손이 된 것입니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사람이 사도 베드로의 손을 잡고 일어났을 때 겨우 몸만 지탱한 것이 아니라 발과 발목이 힘을 얻어 걸을 수 있었고 발과 발목의 힘으로 뛰기까지 했습니다. 이사야 35장 6절의 예언이 성취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사35:6)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당시 장애인을 부정하게 여겼기에 성전 안으로 한 번도 들어가지 못했던 그가 성전으로 들어갔을 때 얼마나 감개무량하였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찬송하였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은 육신의 치유와 비교할 수 없는 영적 치유를 받았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손이 되어 세상에서 어려운 형편에 처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을 나누되 그것보다 훨씬 더 큰 하나님 구원의 은혜를 전해야 하겠습니다. 어떤 나눔 물품보다 더 값진 선물을 전달해 드리는 사람이 되십시다.
[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성전 미문 안팎에서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 한 사람이 걷고 뛰며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그들의 반응이 10절입니다.
[10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성전에 정기적으로 기도하러 다닌 사람은 성전 미문을 통과할 때면 변함없이 구걸하는 그 사람을 보았을 것입니다. 구걸하는 사람이 약 40세 정도였고 꽤 오래전부터 구걸을 해왔다면 성전출입을 자주 하는 사람들은 그 사람의 얼굴과 차림새를 모를 리가 없었습니다. 그가 뛰는 모습을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랐다고 합니다. 개역개정 성경에서 ‘놀라다’는 말이 두 번 나오지만 원문에서 서로 다른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첫째 ‘놀랍게’는 놀라움으로 인해 마비가 될 정도라는 표현입니다. 둘째 ‘놀라니라’의 원형은 ‘엑스타시스’입니다. 잘 알려진 단어, 영어 ‘엑스터시’의 어원이며 ‘황홀경’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이성을 잃을 정도로 놀랐다는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약 40년 동안 선천성 하반신 장애로 살았던 사람이 걷고 뛰고 하는 것을 목격한 사람들은 극도의 놀라움으로 몸이 마비되거나 정신을 잃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장애인이 치유되는 것보다 더 놀라운 ‘엑스터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이지 않겠습니까? 약 40년 동안 걷지 못한 사람이 육체의 치유와 비교할 수 없는 영혼의 치유를 받도록 하나님의 손이 임하셨습니다. 사도들이 하나님의 손이 될 것을 이미 예수님께서 예고하셨습니다. 성령님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육체적 영적 치유가 예루살렘에서 그치지 않고 땅끝까지 이어가도록 제자들을 인도하셨습니다.
성전 미문에서 초라한 모습으로 구걸했던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사람은 금은으로 장식된 높이 약 23미터나 되는 웅장한 성전 문과 대조적이었습니다. 아무리 금은으로 장식된 성전 문을 통해 성전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더라도 하나님의 원대로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으면 영적 상태는 초라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초라하고 영적으로 장애가 있는 사람이라도 예수님 안에서 영적 치유를 받게 되면 영적으로 찬란한 새사람이 됩니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육체적 정신적 문제 해결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가능함을 잊지 마십시다. 그리고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하나님의 손이 되었듯이 오늘 하루 우리 주변에 영적으로 죽어가는 영혼을 볼 때 그들이 주님을 영접하도록 하나님의 손이 되십시다.
[기도]하나님 아버지, 영적으로 초라하고 참 자유를 누리지 못했던 저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복과 구원을 베풀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의 손으로 밑바닥 인생에서 일어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잊지 않고, 그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게 하시옵소서.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손을 붙잡고 일으켜 세우는 하나님의 손이 되게 하시옵소서. 어려운 형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물질적 도움보다 더 값진 구원의 손이 임하도록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손이 되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위한 질문]1.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간 이유가 무엇입니까?
2. 성전 미문 앞에서 걷지 못하는 사람이 구걸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3. 사도 베드로가 구걸하는 사람에게 무엇을 주었습니까?
4. 내 주변에 손을 내밀어 잡아줄 사람이 누구인지 생각해 봅시다.
5. 그 사람에게 힘이신 하나님의 손이 되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작성: 김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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