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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영어: Franklin Delano Roosevelt, 1882년 1월 30일 ~ 1945년 4월 12일)는 미국의 32번째 대통령(재임 1933년 ~ 1945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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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즈벨트는 미국대통령선거 4선 대통령입니다.좋은 밤입니다. 친구들~ 노변정담, 즉 난롯가에서 나누는 정다운 이야기로 평가되는
루즈벨트의 라디오 연설로따듯한 소통의 리더십을 가지고 어려운 시대를 이끌었습니다.
국민의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나라를 만드는 것은 결코 정치인 혼자만이 아닌 국민과 함께 소통하고 함께 행동할 때
이뤄낼 수 있는 것임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의 투표권은 스스로 말고는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것임을 그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스스로 투표를 하지 않는 것이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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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선거이야기] 시리즈
1. 루즈벨트 : https://youtu.be/ng9OaAN0ewk
2. 안창호 : https://youtu.be/bnHEAw8MhBk
3. 플라톤 : https://youtu.be/Rn6I7l6bd6o
4. 단테 : https://youtu.be/sqG1WF3P7FA
5. 한나아렌트 : https://youtu.be/H2LaEMRqyf8
6. 토크빌 : https://youtu.be/Li2XoWfz4xY
7. 브란트 : https://youtu.be/hNUKDKd-Zw8
8. 링컨 : https://youtu.be/ZibIN8c-D_8
9. 존듀이 : https://youtu.be/Shj4U4Nm5CE
✔️한국선거방송 : http://www.etv.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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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클린 D. 루스벨트 – 나무위키:대문
미국의 제32대 대통령. 미국 역사상 대통령을 4번 지낸 유일한 인물로[6] 본명은 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 …
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11/1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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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미국 대통령 선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공화당의 대항마는 캔자스 주지사 알프레드 랜던이었으며, 정치적으로는 중도의 입장에 있었다. 일부 정치학자 중에는 접전을 예측한 사람도 있었지만, 선거 결과 루즈벨트 …
Source: ko.wikipedia.org
Date Published: 5/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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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아메리카] 유일한 4선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 (1)
[인물 아메리카] 유일한 4선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 (1) … 제2차 세계 …Source: www.voakorea.com
Date Published: 3/19/2022
View: 8359
소아마비를 극복하고 대통령이 된 프랭클린 루즈벨트
프랭클린 델러노어 루즈벨트, 미국의 32대 대통령으로 대공황과 2차대전 등 큼직한 위기 중에 미국이 유럽의 변방에서 세계 초강대국으로 나아가는 커다란 변화의 발판 …
Source: hosp.ajoumc.or.kr
Date Published: 7/28/2022
View: 7359
루스벨트 대통령
대통령이 된 플랭크린 루스벨트는 천천히. 연단 위로 올랐다. 하늘은 마치 당시 미국사회의 절. 망을 반영하듯 어두운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그는 성경에 손을 얹고 …
Source: www.koreascience.or.kr
Date Published: 4/1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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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즈벨트 대통령의 업적과 평가 학술논문 간행물 검색
본 연구는 루즈벨트 대통령에 대한 조명을 통해 그가 왜 미국 역사상 위대한 대통 령이었는지 그리고 루즈벨트 대통령이 다른 대통령과 차별되는 리더십은 무엇인지 …
Source: scholar.dkyobobook.co.kr
Date Published: 5/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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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지도력 형성 배경과 본질
Franklin D. Roosevelt’s Leadership – Franklin D. Roosevelt;Leadership of Presents;Principle-Centered Leadership;Rating the Presents.
Source: www.kci.go.kr
Date Published: 12/10/2021
View: 7290
6700조 베팅…바이든, ‘4년짜리 대통령’ 넘어 ‘루즈벨트’ 꿈꾸나
스스로 ‘과도기 후보’라고 밝힌데다 78세의 최고령 대통령으로 당선된 만큼 … “하품 나는 후보에서 FDR(프랭클린 루즈벨트)과 비교받는 대통령이 …
Source: www.joongang.co.kr
Date Published: 1/1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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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루즈 벨트 대통령
- Author: 중앙선거관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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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19. 10. 6.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ng9OaAN0ewk
프랭클린 D. 루스벨트
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영어: Franklin Delano Roosevelt, 1882년 1월 30일 ~ 1945년 4월 12일)는 미국의 32번째 대통령(재임 1933년 ~ 1945년)이다. 그는 임기 동안 대공황과 제2차 세계 대전을 모두 경험한, 20세기의 중심인물 중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루스벨트의 리더쉽은 뉴딜 정책을 통하여 미국이 대공황에서 벗어나도록 도왔으며, 제2차 세계 대전 때 연합군에 동참하여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 왕국, 그리고 일본 제국을 상대로 전쟁을 수행하여 승리로 이끌었다. 그렇지만 스탈린에 대한 미묘한 자세는 이후 역사가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세계 평화를 위한 국제 조직에 대한 그의 열망은 사후에 국제 연합의 결성으로써 결실을 맺게 되었다. 미국의 대통령 중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대통령직에 네 번이나 당선되어 12년간 백악관을 차지했던 장기 집권자이기도 하다. 또, 미국인들에게 역대 대통령 중에서 가장 존경하는 지도자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하면 상위에 위치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생애 [ 편집 ]
생애 초반 [ 편집 ]
출생과 가계 [ 편집 ]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1882년 1월 30일에 미국 뉴욕주 북부의 하이드파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제임스 루스벨트(1828 – 1900)는 델라웨어 앤드 허드슨 철도의 부사장이며 유복한 지주였다. 루스벨트 가는 1650년경에 네덜란드에서 뉴 암스테르담(오늘날의 뉴욕)으로 이주한 지주 클라에스 판 로센펠트(Claes van Rosenvelt)의 후손들이다. 클라에스 판 로센펠트의 아들 니콜러스 루스벨트는 두 아들을 두었는데, 그 중 첫째 요하네스 루스벨트는 오이스터베이, 둘째 야코부스 루스벨트는 하이드파크 루스벨트의 선조가 된다. 이에 따라 18세기에 루스벨트 가는 하이드파크 루스벨트가(19세기에는 민주당 지지자가 됨)와 오이스터베이 루스벨트 가(공화당 지지)로 나뉜다.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야코부스 루스벨트의 5대손이며, 오이스터베이의 공화당원인 제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요하네스 루스벨트의 5대손이다. 그러므로 두 사람은 같은 6대조 할아버지를 둔 12촌(fifth cousin) 형제관계에 있는 먼 친척이었다. 하이드파크와 오이스터베이의 루스벨트 가문들은 정치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친교를 계속 나누었다. 제임스 루스벨트는 오이스터베이의 일가 모임에서 아내를 만났으며, 또 프랭클린도 일가 모임에서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질녀 엘리너를 알게 되어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아버지 제임스는 본처 레베카 하워드에게서 이복 형인 제임스 루스벨트 주니어를 두었다. 그리고 제임스 주니어의 아들인 제임스 테드 루스벨트가 프랭클린보다 3년 연상이었다.
어린 시절 [ 편집 ]
프랭클린의 어머니 사라 델러노(1854 – 1941)는 프랑스계 위그노이며, 그녀의 조상은 1621년에 매사추세츠로 이주한 필리프 드 라 누아였다. 프랭클린은 사라가 낳은 유일한 아이이며, 제임스는 프랭클린이 태어났을 당시 54살로 고령이었기 때문에, 사라가 프랭클린의 유년기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훗날 프랭클린은 친구에게 자신이 살아 생전 가장 무서웠던 대상은 어머니였다고 고백하였다.
그 시대의 귀족적이고 부유한 집안의 자제답게 그 역시 어린 시절에 학교를 다니지 않고 가정교사의 교육을 통해 귀족식 교육을 받으며 귀공자로 성장했고, 거의 매년 가족과 함께 유럽 여행을 다니며 세계에 대한 견문을 넓혔다. 프랭클린은 부모와 가정교사 등에게 과보호를 받으며 자라 또래의 아이와 사귈 기회가 거의 없었다. 14살 때, 프랭클린은 사립명문 그라턴 기숙학교에 입학, 졸업했다.
청년기 및 결혼 [ 편집 ]
루스벨트는 명문 사립고 그로톤(Groton High School)을 졸업한 후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하였다. 대학 시절 그는 학업적으로 평범한 학생이었다. 훗날에 그는 “나는 대학 시절 경제학 과목들을 4년 내내 수강했으나 내가 배운 모든게 틀렸다는 걸 깨달았다”고 회고했다. 그는 학업과 운동에는 소질이 없었으나 활력과 리더십을 발휘하여 교내 신문 하버드 크림슨(The Harvard Crimson)의 편집장으로 활약했다. 1903년 역사학을 전공으로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는 다음 해에 컬럼비아 로스쿨에 입학하여 법률 공부를 시작했다. 1907년 뉴욕주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후 로스쿨을 중퇴하였다. (나중에 컬럼비아 로스쿨은 그에게 사후(posthumous) 법무박사(J.D.) 학위를 수여했다.) 변호사가 된 그는 1908년 당시 월가에서 유명했던 로펌 카터 레드야드 & 밀번(Carter Ledyard & Milburn)에 입사하여 기업(corporate) 업무를 주로 맡았다.
1905년 3월 17일, 어머니의 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당시 대통령으로 재임 중이던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조카 엘리너 루스벨트와 결혼하였다.
첫 선거전, 그리고 그 뒤의 큰 불행 [ 편집 ]
1910-1913년, 뉴욕 주의 상원의원이 된 후, 민주당 진보파의 지도자가 되었다. 1913-1920년, 윌슨 대통령 아래서 해군 차관을 거쳐 1920년 선거에서 그는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지만, 워런 하딩의 공화당에 패배했다. 그러나 선거 다음 해인 1921년, 캄포벨로의 여름 별장에서 찬물에 빠진 이후 소아마비 진단을 받고 걷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극심한 통증에 시달려왔다. 오늘날의 분석에 따르면 길랭-바레 증후군이 더 유력하다. 그러나 지체장애에 대한 대책이 없었던 우드로 윌슨 대통령과는 달리 지체장애를 받아들여 재활 치료를 받았다.
재임기간 [ 편집 ]
1933년 자신의 첫 취임식에서
그는 1928년 그는 뉴욕 주지사에 당선되었고, 주(州) 수력 회사의 설립, 양로 연금 연제도의 확립, 농민·실업 구제 등 혁신적인 여러 개혁을 실행하였다. 두 번에 걸친 임기 중 ‘최고의 지사’라는 칭송과 함께 뛰어난 임무 수행 능력을 증명받고 마침내 1932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낙관적인 경제론 때문에 최악의 지지율로 허덕이던 허버트 C. 후버를 누르고, 대공황으로 고통받던 국민들에게 국가주도 대공황 극복 계획, 이른바 ‘뉴딜’ 정책을 선언, 압도적인 득표 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뉴딜 정책과 재선 [ 편집 ]
사회보장제도로써 사회를 안정되도록 하다. [ 편집 ]
그는 취임 직후 뉴딜 정책이라고 불리는 복지정책을 시행하였다. 뉴딜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와 부흥뿐 아니라 사회개혁도 포함하는 것으로 사회안정을 위해 이미 유럽에서는 1882년 사회보장법을 제정하여(독일)시행한 복지제도들을 도입한 사회보장정책이었다.[1] 경제대공황으로 의식주에 어려움을 겪는 서민들을 정부가 돌보지 않는다면, 서민들의 불만이 혁명이나 폭동으로 폭발할 것이기 때문에, 아동수당을 지급하고 과부들을 돌보는 등 사회보장제도를 시행했다.[2]
실행을 위해서는 행정부의 권한이 필요한데, 의회는 대통령에게 많은 권한을 부여하여 그 정책 실행을 용이하도록 배려하였다. 노동자들이 민주노조를 만들어 자본가와의 교섭으로써 노동조건 및 사회적 지위향상을 이루어가는 권리(대한민국에서는 대한민국 헌법 33조에서 존중)인 단체 교섭권존중, 노동3권을 침해하는 부당노동행위 규정(피터 와그너 법 제정, 전국노동관계법. 한국에서는 노동조합및 노동관계조정법에 해당함.) 같은 노동자의 권리 향상과 테네시 계곡 개발공사(TVA) 등의 대규모 공공근로에 의한 실업자구제대책 및 사회 보장 충실 같은 정책을 실시하며 경제대공황 극복을 도모했지만, 좀처럼 성과가 오르지 않았다. 또 선린 외교 정책을 주장하여 라틴 아메리카 여러 나라와의 우호 관계를 증진하고, 경제원조로 서반구 여러 나라의 결합을 강화하였다. 유럽 전체주의의 침략에 대해서는 자유민주주의 국가 방위에 진력하고, 일본의 중국 침략에도 반대, 평화를 원했다.[3]
1935년 여름부터 경기가 상승되어 1936년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1937년 경기는 다시 악화되기 시작하여 후기 뉴딜로써 대처하였는데,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1941년의 제2차 세계 대전 참전에 의한 군수 증대 덕분에 미국의 경제는 회복하여 실업자도 격감했다. 뉴딜 정책의 효과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고, 과연 2차 세계대전이 없었다면 경제 침체를 완벽히 극복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선 많은 의견이 엇갈린다.(1941년 진주만 기습으로 참전하기 전까지, 미국 경제는 실업률이 15%를 상회하는 등, 체제 자체가 붕괴하는 대파국은 넘긴 상황이었지만 완벽히 경기가 회복됐다고는 절대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반 [ 편집 ]
1940년 선거에 출마해 웬델 윌키를 누르고 3선 되었다. 그는 그때 2번까지만 임기를 맡는다는 조지 워싱턴의 전통을 깼다. 1941년 처칠과 대서양 회담을 한 후, 대서양 헌장을 작성하고, 전쟁의 궁극 목표를 명시하였다. 그 해 12월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인하여 부득이 참전하고, 전력을 기울여 전쟁을 수행하였다. 또 다시 4년 후, 그는 4선에 성공했지만 루스벨트 사후 대통령 3선 출마금지법으로 조지 워싱턴의 전통이 계승, 강화되었다.
1945년 전쟁이 끝나기 직전, 죽을 때까지 전쟁의 승리와 전후 세계질서의 구상에 헌신하였다.
대전 중 [ 편집 ]
1941년의 진주만 기습 이후, 독립운동가 이승만 등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해줄 것을 요청하며, 합동 군사 훈련을 추진한다. 여기서 루즈벨트의 조선에 대한 인식을 집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그는 해관차관보로 재직했기 때문에 당연히 조선이라는 나라가 일본에 의해 식민지배를 받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여기에 루즈벨트의 정치적 정체성이 더해지며 조선에 루즈벨트의 시선은 부정적인 방향으로 이어진다. 이는 루즈벨트가 아내인 엘리너를 통해 시어도어에서 이어지는 루즈벨트 가문의 정치적 자산을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먼 친척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자신의 정치적 정체성을 시어도어와 밀접하게 공유하는 그의 입장에서는 조선이라는 나라가 불편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시어도어가 포츠머스 강화 회담에서 일본의 편을 들어주었기 때문에, 일본은 한층 수월하게 조선을 집어삼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조선에 대해서 상당히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는 추론은 적절하다고 볼 수 있겠다. 이러한 추론을 바탕으로 그가 실제로 조선에 대해 부정적 관점을 이어갔다는 주장이 있다.[출처 필요] 이후에도 이승만이 계속 국무성을 방문했지만 결국 만나지 못했던 것 또한 앞선 내용과의 어느정도 인과성을 갖는다고 볼 수 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루즈벨트 개인사에서 비롯된 그럴듯한 하나의 가설일 뿐이다. 루즈벨트의 위와같은 ‘코리아 패싱’은 당시 미국의 국제 전략에서 굳이 한국과 끈끈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추론이 더 타당할 것이다.
한편 1943년에서 1945년까지 전후 유럽 문제를 놓고 연합국이 몇 차례 회담을 열었는데, 여기서 부분적으로 소련이 북유럽 국가를 병합하여 지배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루스벨트는, 스탈린이 유럽 일부 지역을 지배할 수 있다고 경고하자 스탈린과 자신의 관계에 대한 이유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말로 대답하였는데 “나는 스탈린이 그런 사람이 아니리라고 생각하였다…… 나는 만약 내가 그에게 모든 것을 준다면, 나는 아마 그에게 아무것도 돌려달라고 청할 수 없을 것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따라 그는 아무것도 빼앗지 않고 나와 함께 세계의 자유민주주의와 평화를 위해 일할 것이다.”[4]
1943년 11월 28일, 미·영·소 3개국 정상회담(테헤란 회담)에서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한국인이 완전한 독립을 얻기 전에 약 40년 간의 수습 기간(apprenticeship)을 필요로 한다.”고 말했고, 스탈린은 이에 구두로 동의를 표하였다.[5]
전쟁을 속히 종결시켜야 된다는 판단에서 그는 소련에게도 도움을 청하였다. 미국 내부의 반공주의 인사들의 반대에도 그는 소련에 지원을 청하였다. 그러나 8월 10일 일본은 항복의사가 있음을 구두로 더글러스 맥아더편에 전해왔고, 그는 소련을 참전시킨 것을 후회한다.
사망 [ 편집 ]
63세이던 1945년 4월 12일 독일의 항복을 눈 앞에 둔 시점에서 애완견 팔라와 공원을 거닐다 뇌출혈로 사망했다. 부인 엘리너 루스벨트의 여비서 루시 머서(Lucy Mercer Rutherfurd)는 그의 결혼 생활을 끝나게 했지만, 그가 숨을 거둔 그곳에도 함께 했다. 딸 애너 루스벨트(Anna Roosevelt)는 백악관에서 모친을 대신하여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맡기도 했다.
그의 죽음 직후 한때 스탈린에 의한 독살설이 제기되었으나, 중화민국의 국부천대 사건과 한국 전쟁 등으로 음모설은 묻혔다.
평가 [ 편집 ]
1945년 5월 7일 독일이 연합군에 항복했다. 그의 지휘로 제2차 세계 대전은 미국과 연합국의 승리로 막을 내리지만, 전쟁 전후 그의 태도에 대한 비판도 많았다. 무엇보다 유럽에서 600만명의 유대인이 무참하게 학살되고 있는데도 외면하고 그냥 두고 보기만 했다는 점과 독일계나, 이탈리아계 등과는 달리 일본계 미국인들은 수용소에 격리수용한 인종차별정책으로 많은 비난을 받았다.[6] 국내 정치 경제 면에서 보수주의자들에게 대중 인기에 영합하는 길거리 정치로 자유민주주의를 왜곡하고 건전한 기업풍토에 손상을 주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민주당 지지자들은 루즈벨트의 재임 기간과 그 이후 민주당 주도기를 미국이 가장 평등했던 기간으로 기억한다.
정책과 사상 [ 편집 ]
제2차 세계 대전 [ 편집 ]
1941년 1월 6일, 그는 “네 가지 자유” 연설을 하였다.
1943년 3월 루스벨트와 국무장관 코델 헐이 워싱턴에서 영국 외상 앤서니 이든과 가진 회합 때 한국의 독립문제가 연합국 지도자들 사이에서 최초로 논의되었다. 이때 루스벨트는 “한반도를 일정 기간 동안 미국, 소련 및 중국 등 3국의 ‘신탁통치’아래 두었다가 독립시킨다.”는 의견을 처음으로 밝혔으며, 이든은 호의적 반응을 보였다.[7]
1943년 11월 22일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영국의 윈스턴 처칠, 중국의 장제스와 함께 3국 수뇌 회담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한국문제를 본격적으로 공식 논의하였다. 11월 27일 발표된 ‘카이로 선언’은 제3항에서 “한국인의 노예 상태에 유의, 한국을 해방하여 적당한 시기에 독립시킬 것”을 결의했다. 카이로 회담이 끝나자마자 루스벨트와 처칠은 이란의 수도 테헤란으로 장소를 옮겨 소련의 스탈린을 만났다. 1943년 11월 28일, 이번엔 중국의 장제스가 빠진 채 이루어진 미·영·소 3개국 정상회담에서 루스벨트는 “한국인이 완전한 독립을 얻기 전에 약 40년 간의 수습 기간(apprenticeship)을 필요로 한다.”고 말했고, 스탈린은 이에 구두로 동의를 표하였다(테헤란 회담).[8]
세계대전의 결과 [ 편집 ]
1945년 8월 15일, 루스벨트는 비록 그 전에 뇌출혈로 사망했지만, 그의 제2차 세계 대전 미국과 연합군의 지도로 전쟁이 끝나기 직전에 추축국에 속해 있던 일본이 핵무기 공격을 겪고 나서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그의 지휘 아래 제2차 세계 대전은 미국과 연합국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기타 [ 편집 ]
1933년, 미국 민주당 루스벨트 대통령은 회의 중 시카고 갱단에 고용된 살인청부업자 조지프 쟁거라의 저격을 받았으나 목숨을 건졌다. 대통령 때문에 위통이 생긴다는 이유라고 설명했던 쟁거라는 표적을 잘 볼 수 있는 의자 위에 올라가 총을 쐈으나 엉뚱하게도 대통령이 아닌, 대통령 옆에 있던 시카고 시장 앤턴 서맥을 죽였다. 그리고 쟁거라는 체포되어 전기 의자형을 선고받았다.[9]
같이 보기 [ 편집 ]
역대 선거 결과 [ 편집 ]
각주 [ 편집 ]
외부 링크 [ 편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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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미국 대통령 선거
1936년 미국 대통령 선거는 1936년 11월 3일에 치른 미국의 대통령선거이다. 세계 공황이 8년째에 접어드는 년도에 치러진 선거이다. 현직 대통령인 민주당의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의회와 법원을 통해 뉴딜 정책의 조항을 계속 추진하고 있었다. 당시 뉴딜 정책은 이미 상당수 법제화되어 사회 보장이나 실업 급여와 같은 정책이 대부분의 미국인에게 높은 인기를 얻고 있었다. 공화당의 대항마는 캔자스 주지사 알프레드 랜던이었으며, 정치적으로는 중도의 입장에 있었다. 일부 정치학자 중에는 접전을 예측한 사람도 있었지만, 선거 결과 루즈벨트는 선거인단 선거에서 불과 8표를 잃었을 뿐, 양당 체제가 1850년대에 시작된 이래 가장 큰 승리를 얻었다.
후보자 지명 [ 편집 ]
민주당 [ 편집 ]
루스벨트 대통령은 오직 한 사람의 대항마가 있었을 뿐이었다. 뉴욕주 출신의 반 뉴딜을 내건 변호사 헨리 S. 브레킨릿지가 4주 예비선거에서 루스벨트에 맞서 출마했다. 그러나 민주당원에게 루즈벨트의 인기는 강력했고, 브레킨릿지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 큰 차이로 패했다. 뉴저지주에서는 루스벨트가 후보자 명단에 실려 있지 않았고, 예비 선거에서 브레킨릿지에게 졌지만 서면 투표에서 19%를 획득했다. 루스벨트를 지지하는 대의원 후보자가 뉴저지주 뿐만 아니라 다른 주에서도 압도적이었다. 다른 예비 선거를 보면 브레킨릿지가 가장 많이 득표한 것은 메릴랜드주로 15%였다. 전체적으로 루스벨트가 경선 투표 수의 93%를 획득한데 반해 브레킨릿지는 2%에 불과했다.
민주당 전당 대회는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되었다. 대의원들은 만장일치로 현직 대통령인 루즈벨트 대통령이 후보로, 역시 현직 부통령 존 N. 가너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루즈벨트의 요청에 따라 남부에 거부권을 부여했던 3분의 2 규칙이 철폐되었다.
지명 투표 결과 (민주당, 1936년) 대통령 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 1100 존 N. 가너 1100
공화당 [ 편집 ]
많은 후보자가 공화당 지명을 원했지만, 랜던 주지사와 보라 상원 의원이 유력 후보로 생각되었다. 녹스, 워렌, 그린, 데이는 각각의 출신 주 예비 선거에서 승리하는 한편, 진보주의자이자 ‘반역자’로 유명한 70세의 보라는 위스콘신, 네브래스카, 펜실베이니아, 웨스트버지니아주와 오리건주 예비 선거에서 승리하는 한편 녹스의 일리노이, 그린의 사우스다코타에서도 상당한 힘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당의 유력자들은 대부분이 부유한 사업가이자 중도파 랜던을 밀어주어서 매사추세츠 주와 뉴저지주 예비 선거에서 승리했고 당원 집회나 주 당원 집회에서 우세했다. 녹스가 랜던의 부통령 후보가 되었고 데이, 그린 및 워렌은 그 대의원을 재량으로 한 것으로, 당대회에서의 투표는 다음과 같은 결과가 되었다.
알프레드 랜던 984
윌리엄 에드가 보라 19
기타 당 [ 편집 ]
이 선거에서는 루이지애나주 민주당 상원 의원으로 “부의 공유”(Share Our Wealth)를 내걸고 일세를 풍미했던 휴이 롱을 제3 후보자로 추천하는 움직임이 활발했지만 역사가이자, 전기 작가인 T. 해리 윌리엄스에 따르면 롱 자신에게 대선 출마 의사는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윌리엄스에 따르면) 롱은 라디오 방송에서 인기를 얻은 가톨릭 교회의 성직자이자 반유대주의적인 포퓰리스트인 찰스 코글린 신부와 손 잡고 신당 “부의 공유” 당에서 공천으로 다른 누군가를 출마시키려 했다. 신당 후보와 루즈벨트로 좌파의 표가 갈라지기 때문에 공화당의 대통령이 선출되더라도 ‘부의 공유’의 존재감을 어필할 수 있고, 롱 자신은 4년을 기다려 1940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부의 공유”당 후보로는 공화당 경선에 참여했던 보라 상원 의원이나 버튼 K. 훨러 상원 의원(민주당, 몬태나 주) 또한 농민노동당의 유력 정치인이었던 플로이드 B. 올슨 미네소타 주지사가 꼽히고 있었지만, 1935년 9월에 롱이 암살되자 보라와 훨러는 제3당 출마에 관심을 잃고 올슨 지사는 말기 위암 진단을 받아서 출마를 포기했다.
코글린 신부는 롱의 아래에서 활동하고 있던 백인지상주의자로 기독교 우파의 대변자인 제럴드 L. K. 스미스와 노령 연금 제도의 창설을 주장하고 의사인 프랜시스 타운센드와 손 잡고 결성한 신당 ‘연합당’ 후보로 윌리엄 렘케 하원 의원 (공화당, 노스다코타)를 옹립했다. 렘케는 다른 가능성이 있었던 후보자에 비해 카리스마도, 명성도 없었고, 경선에서도 제대로 싸우지 못해 겨우 2%를 달성하는데 그쳤으며 연합당은 이듬해 해산했다.
워싱턴 주에서는 파시스트 활동가로 실버 군단을 이끌었던 윌리엄 더들리 펠리가 후보자 명단에 올랐지만, 2,000 표 미만의 표를 획득하는데 그쳤다.
일반선거 [ 편집 ]
투표는 1936년 11월 3일에 이루어졌다. 이 선거는 ‘여론 조사’를 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것은 《리터러리 다이제스트》(The Literary Digest) 잡지가 독자와 잠재 독자 1000만 명에 조사표를 우송하여, 200만통을 회수한 설문지에 근거한 것이었다. 최근 5번의 선거에서 우승자를 정확히 예측했던 《리터러리 다이제스트》는 10월 31일 호에서 랜던이 선거인단표 370표를 획득해 승리하겠다고 선언했다. 이 오류의 원인은 잘못된 샘플링에 의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리터러리 다이제스트》의 독자는 공화당 지지자가 많았다.
같은 해 과학적인 조사를 시작한 광고 회사 임원 조지 갤럽이 5,000명의 무작위 추출에 근거한 조사로 루즈벨트의 당선을 예측했다. 갤럽의 정확한 예측은 언론인과 실제 정치인에게 여론 조사를 중요한 요소로 인식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루즈벨트는 48주 중 46주에서 압승을 거두며 하원의 민주당 세력도 더 늘어났다. 선거에서 루즈벨트의 60.8%라는 득표율은 1964년의 린든 존슨을 따르는 미국 역사상 두 번째로 높은 지지율이었다. 예외적으로 182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제임스 먼로가 사실상 반대파가 없는 선거로 선거인단 투표 98.5%를 얻은 적이 있었지만, 1850년대 양당 정치가 확립된 이래론 당시 최고 득표율이였다. 여담으로 당시 정치학자 중에는 세계 대공황에 책임이 있다고 많은 유권자가 인정한 공화당이 곧 사라질 것으로 예측한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공화당은 1938년 의회 선거에서 다수당은 되지 못했지만 의석을 늘리는데 성공했으며, 1952년 대통령 선거에선 다시 후보 당선을 이뤄낸다. 물론 루스벨트 집권기부터 20세기 후반까지 수십년간 상하원 선거에선 공화당이 열세를 면치 못하긴 했다.
선거인단 선거 결과 랜던은 메인과 버몬트 주에서만 승리를 거두었고, 민주당 의장 제임스 페어리는 이를 받아 “메인이 움직이면 나라가 움직인다”는 당시 전통적인 정치 격언을 “메인이 움직이면 버몬트가 움직인다”로 바꿔 부르기도 했다.
결과 [ 편집 ]
주별 결과 [ 편집 ]
프랭클린 루스벨트
민주당 알프레드 랜던
공화당 윌리엄 렘케
연합당 기타 주합계 주 선거인표 # % 선거인표 # % 선거인표 # % 선거인표 # % 선거인표 #
앨라배마주 11 238,136 86.4 11 35,358 12.8 – 551 0.2 – 1,639 0.6 – 275,244 AL 애리조나주 3 86,722 69.9 3 33,433 26.9 – 3,307 2.7 – 701 0.6 – 124,163 AZ 아칸소주 9 146,765 81.8 9 32,039 17.9 – 4 0.0 – 615 0.3 – 179,423 AR 캘리포니아주 22 1,766,836 67.0 22 836,431 31.7 – 후보자명단에 없음 35,615 1.4 – 2,638,882 CA 콜로라도주 6 295,021 60.4 6 181,267 37.1 – 9,962 2.0 – 2,434 0.5 – 488,684 CO 코네티컷주 8 382,129 55.3 8 278,685 40.4 – 21,805 3.2 – 8,104 1.2 – 690,723 CT 델라웨어주 3 69,702 54.6 3 57,236 44.9 – 442 0.4 – 223 0.2 – 127,603 DE 플로리다주 7 249,117 76.1 7 78,248 23.9 – 후보자명단에 없음 327,365 FL 조지아주 12 255,364 87.1 12 36,942 12.6 – 141 0.1 – 728 0.3 – 293,175 GA 아이다호 주 4 125,683 63.0 4 66,256 33.2 – 7,678 3.9 – 후보자명단에 없음 199,617 ID 일리노이주 29 2,282,999 57.7 29 1,570,393 39.7 – 89,439 2.3 – 13,691 0.4 – 3,956,522 IL 인디애나주 14 934,974 56.6 14 691,570 41.9 – 19,407 1.2 – 4,946 0.3 – 1,650,897 IN 아이오와주 11 621,756 54.4 11 487,977 42.7 – 29,687 2.6 – 3,313 0.3 – 1,142,733 IA 캔자스주 9 464,520 53.7 9 397,727 46.0 – 497 0.1 – 2,770 0.3 – 865,014 KS 캔터키주 11 541,944 58.5 11 369,702 39.9 – 12,501 1.4 – 2,056 0.2 – 926,203 KY 루이지애나주 10 292,894 88.8 10 36,791 11.2 – 후보자명단에 없음 93 0.0 – 329,778 LA 메인 주 5 126,333 41.5 – 168,823 55.5 5 7,581 2.5 – 1,503 0.5 – 304,240 ME 메릴랜드 주 8 389,612 62.4 8 231,435 37.0 – 후보자명단에 없음 3,849 0.6 – 624,896 MD 매사추세츠주 17 942,716 51.2 17 768,613 41.8 – 118,639 6.5 – 10,389 0.6 – 1,840,357 MA 미시간 주 19 1,016,794 56.3 19 699,733 38.8 – 75,795 4.2 – 12,776 0.7 – 1,805,098 MI 미네소타 주 11 698,811 61.8 11 350,461 31.0 – 74,296 6.6 – 6,407 0.6 – 1,129,975 MN 미시시피 주 9 157,318 97.1 9 4,443 2.7 – 후보자명단에 없음 329 0.2 – 162,090 MS 미주리 주 15 1,111,043 60.8 15 697,891 38.2 – 14,630 0.8 – 5,071 0.3 – 1,828,635 MO 몬태나 주 4 159,690 69.3 4 63,598 27.6 – 5,549 2.4 – 1,675 0.7 – 230,512 MT 네브래스카 주 7 347,445 57.1 7 247,731 40.7 – 12,847 2.1 – 후보자명단에 없음 608,023 NE 네바다 주 3 31,925 72.8 3 11,923 27.2 – 후보자명단에 없음 43,848 NV 뉴햄프셔주 4 108,460 49.7 4 104,642 48.0 – 4,819 2.2 – 193 0.1 – 218,114 NH 뉴저지 주 16 1,083,549 59.6 16 719,421 39.6 – 9,405 0.5 – 6,752 0.4 – 1,819,127 NJ 뉴멕시코 주 3 106,037 62.7 3 61,727 36.5 – 924 0.6 – 448 0.3 – 169,176 NM 뉴욕주 47 3,293,222 58.9 47 2,180,670 39.0 – 후보자명단에 없음 122,506 2.2 – 5,596,398 NY 노스다코타 주 13 616,141 73.4 13 223,283 26.6 – 2 0.0 – 38 0.0 – 839,464 NC 노스다코타주 4 163,148 59.6 4 72,751 26.6 – 36,708 13.4 – 1,109 0.4 – 273,716 ND 오하이오 주 26 1,747,140 58.0 26 1,127,855 37.4 – 132,212 4.4 – 5,382 0.2 – 3,012,589 OH 오클라호마 주 11 501,069 66.8 11 245,122 32.7 – 후보자명단에 없음 3,549 0.5 – 749,740 OK 오리건 주 5 266,733 64.4 5 122,706 29.6 – 21,831 5.3 – 2,751 0.7 – 414,021 OR 펜실베이니아 주 36 2,353,987 56.9 36 1,690,200 40.8 – 67,468 1.6 – 26,771 0.7 – 4,138,426 PA 로드아일랜드 주 4 165,238 53.1 4 125,031 40.2 – 19,569 6.3 – 1,340 0.4 – 311,178 RI 사우스캘롤라이나 주 8 113,791 98.6 8 1,646 1.4 – 후보자명단에 없음 115,437 SC 사우스다코타 주 4 160,137 54.0 4 125,977 42.5 – 10,338 3.5 – 후보자명단에 없음 296,472 SD 테네시 주 11 328,083 68.9 11 146,520 30.8 – 296 0.1 – 1,639 0.3 – 476,538 TN 텍사스주 23 734,485 87.1 23 103,874 12.3 – 3,281 0.4 – 1,842 0.2 – 843,482 TX 유타주 4 150,246 69.3 4 64,555 29.8 – 1,121 0.5 – 755 0.4 – 216,677 UT 버몬트 주 3 62,124 43.2 – 81,023 56.4 3 후보자명단에 없음 542 0.4 – 143,689 VT 버지니아 주 11 234,980 70.2 11 98,336 29.4 – 233 0.1 – 1,041 0.3 – 334,590 VA 워싱턴 주 8 459,579 66.4 8 206,892 29.9 – 17,463 2.5 – 8,404 1.2 – 692,338 WA 웨스트버지니아 8 502,582 60.6 8 325,358 39.2 – 후보자명단에 없음 2,005 0.2 – 829,945 WV 위스콘신주 12 802,984 63.8 12 380,828 30.3 – 60,297 4.8 – 14,451 1.1 – 1,258,560 WI 와이오밍 3 62,624 60.6 3 38,739 37.5 – 1,653 1.6 – 366 0.4 – 103,382 WY 총계: 531 27,752,648 60.8 523 16,681,862 36.5 8 892,378 2.0 – 320,811 0.7 – 45,647,699 필요수: 266
접전 주(투표율차 10%미만) [ 편집 ]
파란 색이 민주당이 승리한 곳을 보여준다.
뉴햄프셔주, 1.75% 캔자스주, 7.72%
참고 문헌 [ 편집 ]
Kristi Andersen, The Creation of a Democratic Majority: 1928-1936 (1979), statistical
(1979), statistical James McGregor Burns, Roosevelt: The Lion and the Fox (1956)
(1956) Fadely, James Philip. “Editors, Whistle Stops, and Elephants: the Presidential Campaign of 1936 in Indiana.” Indiana Magazine of History 1989 85(2): 101-137. Issn: 0019-6673
1989 85(2): 101-137. Issn: 0019-6673 William E. Leuchtenburg, “Election of 1936”, in Arthur M. Schlesinger, Jr., ed., A History of American Presidential Elections vol 3 (1971), analysis and primary documents
vol 3 (1971), analysis and primary documents Donald McCoy, Landon of Kansas (1968)
(1968) Arthur M. Schlesinger, Jr., The Politics of Upheaval (1960), online version
[인물 아메리카] 유일한 4선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 (1)
오늘의 미국이 있기까지 각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을 소개해드리는 ‘인물 아메리카’입니다. 유일한 4선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를 만나보시겠습니다.
미국의 32번째 대통령으로 대공황을 극복하고, 2차 세계 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 대통령, 약칭 FDR은 1882년 1월 30일에 뉴욕 주 북부의 하이드파크라는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철도회사의 부사장을 지낸 부유한 집안이었습니다.
제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와는 6대조 할아버지 때 갈려 나온 친척이었습니다. FDR은 어렸을 때는 집에서 가정 교사를 고용해 공부했고, 중등학교는 사립명문 그로턴 기숙학교, 대학은 하버드를 나왔습니다. 하버드 졸업 후 컬럼비아 로스쿨에 들어갔습니다. 재학 중이던 1907년 뉴욕 주 변호사 시험에 합격해 미국 금융업계의 중심지, 월스트리트에 있는 법률회사에서 일했습니다.
프랭클린은 23살 때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조카 엘리너와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결혼 생활은 평탄치 못했습니다. 프랭클린이 엘리너 여사의 비서인 루씨 머서 씨와 가까워지면서 생긴 일이라고 합니다.
FDR은 1910년 28살의 나이로 뉴욕 주 상원의원에 출마해 공화당의 아성이었던 지역에서 승리했습니다. 그 뒤 위드로우 윌슨 대통령 정부에서 해군성 차관보로 일했습니다.
1920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민주당 부통령 후보로 지명됐지만, 본선에서 공화당의 워런 하딩에 패배했습니다. 선거 다음 해인 1921년, FDR은 여름 별장에서 찬물에 빠졌다가 나온 뒤 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후 다시는 혼자서 걷지를 못하고 남은 일생 동안 계속 휠체어 신세를 졌습니다.
많은 사람은 다리의 마비로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정치적 꿈은 사라졌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잘못됐다는 것이 바로 나타났습니다. FDR은 불구의 몸인데도 1928년 뉴욕 주지사 선거에 출마해 당당히 승리합니다.
프랭클린 주지사는 수력 회사의 설립, 양로 연금 연제도의 확립, 농민·실업 구제 등 혁신적인 여러 개혁을 실행했습니다. 이어 2년 후 재임에도 성공합니다. 두 번에 걸친 임기 중 ‘최고의 지사’라는 칭송을 받았습니다.
FDR은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신세가 됐지만, 대중 앞에 나타날 때는 언제나 강건하고 친근한 모습이었고 농담도 잘했습니다. 1932년에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됐습니다. 당시 미국은 대공황의 시련을 겪고 있었습니다. 국민 네 명 중 한 명은 일자리를 잃었고, 농산물 가격 폭락으로 농민들은 극도의 곤경에 빠졌습니다. 산업생산은 공황 전보다 절반으로 줄어들었습니다.
잠 잘 데도 없는 사람이 200만 명이나 됐고, 32개 주에서 은행이 문을 닫아 수백만 명이 은행에 넣어둔 돈을 날려야 했습니다.
FDR은 시카고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 대선 후보 수락 연설에서 처음으로 경제에 대한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정책인 ‘뉴딜’(New Deal) 정책을 내세웠습니다. FDR은 공화당의 허버트 후버 대통령을 압도적으로 물리치고 1933년 3월 4일 제32대 대통령에 취임합니다.
루스벨트는 취임 연설에서 그 유명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이다’라고 역설했습니다. FDR은 국민에게 용기를 잃지 말고 함께 난관을 타개해 나가자고 호소했습니다.
아주대학교의료원 웹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 칼럼이 다루고 있는 사람들을 계속 보고 있노라면, 참 병이란 것은 아무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온다는 것을 느끼게 됨과 동시에 걸린 사람과 그 사람의 주변을 그 병이 변화시켜나가는 과정, 그리고 걸린 사람과 그 주변이 그 변화에 대응해 나가는 과정 또한 인상적이란 사실도 느끼게 된다.
그런 변화는 폐렴처럼 생명을 위협하는 병이지만 지나고 나면 흔적이 별로 없는 병보다는 천연두처럼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기는 것일수록 더 크고 길기 마련인데, 이런 점에서는 소아마비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병중의 하나이다.
프랭클린 델러노어 루즈벨트, 미국의 32대 대통령으로 대공황과 2차대전 등 큼직한 위기 중에 미국이 유럽의 변방에서 세계 초강대국으로 나아가는 커다란 변화의 발판을 마련한 것으로도 유명한 동시에 휠체어대통령으로 더 잘 알려진 사람이다. 물론 루즈벨트가 휠체어 신세를 지게된 것은 소아마비 때문이지만, 사실 루즈벨트는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 불우한 환경에서 무서운 병에 걸려 다리까지 마비되는 불행을 극복하고 미국의 대통령에까지 오른 그런 입지전적인 인물은 아니다.
오히려 모든 것을 다 갖춘 명문가의 외동아들로 태어나 최고의 교육을 받고, 활달한 성격에 스포츠맨쉽과 수려한 외모까지 갖추어 변호사로, 정치인으로 승승장구하던 사람이었다. 뉴욕 지사에서 상원의원이 되고 부통령 후보까지 되었다가 하딩에게 패해 잠시 정치를 떠나있던 39세 무렵 그는 소아마비에 걸렸는데 연장아나 성인이 걸릴 경우 마비가 더 흔하다는 통계에 걸맞게도 그 역시 하지가 마비되어 휠체어 신세를 지게 되었다.
매력적이고 활발하던 그에게는 참을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고 은퇴를 고려하게 되었는데, 그에게는 그때까지 남편의 불륜까지 참아내며 지내던 부인, 엘레노어 루즈벨트가 있었다. 그녀는 남편을 도와 대통령 후보에 입후보시키고 선거운동까지 같이하며 대통령에 당선시켰고, 루즈벨트 행정부 출범 이후에도 여러 정책과 사회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하지마비라는 충격적인 개인사를 극복해낸 루즈벨트의 의지나 능력이 폄하될 필요는 전혀 없다. 오히려, 손가락을 살짝 베어 며칠간만 못쓰게 되어도 오만 엄살을 떨며 불편을 호소하는 필자 같은 범인에겐, 죽을 때까지 격무에 시달리며 마비와 싸운 그의 정신력은 존경스럽기만 하다.
사실 그가 `소아마비라는 병을 이겨냈다` 라는 의미가 그 개인에게 국한되지 만은 않는 이유는, 가깝게는 그와 미국에 무척이나 큰 영향을미친 그의 부인이 그의 인생 전면에 나설 수 있는 기회가 된 것이 바로 이 병 때문이었고, 이 부부가 함께 만들어 나간 역사는 미국과 세계를 크게 바꾸어놓았기 때문이다.
근래에 소아마비 백신이 전세계적으로 사용되면서 이 병은 거의 보기 힘들어졌고, 우리나라에서는 1983년 이후에는 발생이 보고되지 않을 정도이며 나아가 2005년에는 천연두처럼 완전 박멸을 목표로 하고 있는 병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지금 너무도 당연하게 경구 소아마비백신을 복용하는 아이들의 부모나 그 이전세대에서는 학교마다 이 병을 앓은 친구들을 보는 것은 쉬운 일이었고 이제는 청장년이 된 그들이 우리 곁에 아직 많이 있으리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궁금한 것은 ”이 병이 사라져 가는 것처럼, 그 당시 그 친구들을 무슨 무서운 것 보듯이 대한 우리의 무지한 자세도 사라졌을까?” 하는 것인데, 과연 우리는 그들에게 네 상황을 극복하고 꿈을 이루라고 말하기에 부끄럽지 않은 사회를 만들었을까? 최소한 능력이 있다면 대통령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런 중요한 일을 할 수 있는 상황이기는 할까?
처음에도 말했듯이 병이란 누구에게나 공평한 법이기에, 유명인이 아닐지라도 누구나 한번쯤은 ”병을 극복하고 자신의 꿈을 이루기에는 힘겨운 우리사회”를 안타까워 했을 것이다.
[글] 김효정 레지던트 / 소아과
6700조 베팅…바이든, ‘4년짜리 대통령’ 넘어 ‘루즈벨트’ 꿈꾸나
조민근 국제팀장의 픽: 바이든의 야망
“선거운동 기간 바이든은 자신을 ‘과도기 후보’(transition candidate)라고 소개했다. 하지만 취임 이후에는 ‘변혁적 대통령’(transformational president)으로 자리매김하려 하고 있다.”
지난달 28일(현지시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첫 상ㆍ하 양원 연설 뒤 뉴욕타임스(NYT)가 내놓은 논평이다. 이날 그는 천문학적 인프라 투자와 복지의 확대, 그리고 부자 증세라는 정책 방향을 천명한다. 단순한 경기 부양이 아닌 미국 사회의 틀 자체를 바꾸겠다는 야망을 드러낸 것이다. 미 언론은 이를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이래 이어져 온 ‘작은 정부’에서 ‘큰 정부’로 회귀한다는 공식 선언으로 해석했다.
그리고 한달이 흐른 28일, 의회에 제안할 구체적인 예산안(2022 회계연도)도 윤곽을 드러냈다. 미 언론에 따르면 올 10월부터 적용될 이 예산안의 규모는 무려 6조 달러(약 6700조원). 지난해 트럼프 행정부가 요구했던 예산안에 비해 25% 늘어난 것으로 2차 대전 이후 최고 수준이다. 앞서 예고했듯 정부 지출이 늘어나는 핵심 분야는 인프라와 복지, 교육이다.
바이든이 취임할 때까지만 해도 이런 과감한 행보를 예상한 이는 드물었다. 상원의원과 부통령을 거치며 그는 민주당 주류 정치인으로 온건하고 타협적인 면모를 보였다. 스스로 ‘과도기 후보’라고 밝힌데다 78세의 최고령 대통령으로 당선된 만큼 재선에 도전하지 못할 것이란 관측도 지배적이었다.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실세’가 될 것이란 말이 나온 것도 그래서였다.
하지만 취임 이후 코로나19 백신 접종 속도전을 주도하고, 매머드급 경기부양안을 밀어붙여 통과시키는 모습에 그를 보는 시선도 달라졌다.“하품 나는 후보에서 FDR(프랭클린 루즈벨트)과 비교받는 대통령이 됐다”(영국 이코노미스트)는 평가가 대표적이다.
실제로 바이든의 코로나19 위기를 루즈벨트 시절의 대공황에 비유하며 일찌감치 ‘롤모델’로 언급해왔다. 백악관 집무실(오벌 오피스) 책상 앞에도 루즈벨트의 초상을 걸었고, 지난주 한미 정상회담에서도 문재인 대통령과 이 초상을 소재로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루즈벨트는 ‘뉴딜(New Deal)’로 미국의 경제 뿐 아니라 정치 지형까지 바꾸며 유일무이한 4선의 대통령으로 남았다. 민주당 지지자에 북부의 진보적 공화당원을 흡수하며 이른바 ‘뉴딜 연합’을 구축하면서다.
바이든 역시 ‘중산층 복원’을 내세우며 정치적 승부수를 던졌다. 하지만 앞길이 그리 순탄해 보이지만은 않는다. 천문학적 지출이 필연적으로 불러올 천문학적 재정적자, ‘핀셋 증세’에 공화당 의원들은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민주당은 민주당 대로 온건파와 진보파로 나뉘어 벌써부터 엇갈린 목소리를 낸다. 바이든의 ‘값비싼 제안’에 “이념적으로, 문화적으로 양극화한 정치 구도 속에서의 위험한 도박”(NYT)이란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조민근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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