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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조 기베르티

로렌조 기베르티. Lorenzo Ghiberti ( 영국 : / ɡ ɪ ˈ b ɛər t i / , 미국 : / ɡ iː ˈ – / , 이탈리아어: [ loˈrɛntso ɡiˈbɛrti] ; 1378년 – 1455년 12월 1일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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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hmn.wiki

Date Published: 11/1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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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초 기베르티

로렌초 기베르티. 1378년 – 1455. 12. 1. Lorenzo Ghiberti, born Lorenzo di Bartolo, was a Florentine Italian artist of the Early Renaissance best known as th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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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artsandculture.google.com

Date Published: 1/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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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초 기베르티 – 요다위키

초년기. 기베르티는 1378년 플로렌스에서 20km 떨어진 펠라고에서 태어났다. 로렌조는 시오네 디 세르 부오나코르소 기베르티와 피오레 기베르티의 아들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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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yoda.wiki

Date Published: 10/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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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초 기베르티의 ‘천국의 문’

로렌초 기베르티 GHIBERTI의 금동 자화상 Self-Portrait, 1425-52, 금동장식, 피렌체 산 조반니 세례당 Battistero di San Giovanni, Florence

기베르티는 자신이 몰두한 작업 외에는 돈이나 무엇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었다 합니다. 작업의 완성도에 빠져 오로지 그것 한 가지만 파고들었다 합니다. 그가 자신의 자화상을 청동문에 즐겨 새겼듯이, 그는 자신의 미술에 대한 견해와 방법이 담긴 의미심장한 자화상 격인 회고록 <코멘타리오>를 1447년에 펴냈습니다. ‘코멘타리오 테르초 Commentario terzo’, 제3의 논평이라는 이 회고록에는 자신의 생애 작업 활동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 저술 페이지마다 그의 깊은 영성이 넘치는 종교성과 예술성과 신앙심이 충만하게 표현되어 있으며 지적인 성품까지 잘 녹아있는 고백록입니다. 이 책은 초기 르네상스 미술에 대해 귀중한 정보를 제공해줄 뿐 아니라, 미술가가 쓴 최초의 자서전이기도 합니다.

로렌초 기베르티

이탈리아의 초기 르네상스 미술가 (1378-1455)

Lorenzo Ghiberti ( , ,[1][2][3] Italian: [loˈrɛntso ɡiˈbɛrti]; 1378 – 1 December 1455), born Lorenzo di Bartolo, was a Florentine Italian artist of the Early Renaissance best known as the creator of the bronze doors of the Florence Baptistery, called by Michelangelo the Gates of Paradise. 금공예와 조각가로 훈련받은 그는 금속 조각품을 위한 중요한 작업장을 설립했다. 그의 《코멘타리》에는 예술에 관한 중요한 글과 더불어 어떤 예술가가 남긴 자서전 중 가장 일찍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초년기

기베르티는 1378년 플로렌스에서 20km 떨어진 펠라고에서 태어났다.[4] 로렌조는 시오네 디 세르 부오나코르소 기베르티와 피오레 기베르티의 아들이었다고 한다.[4] 그러나, 시오네가 기베르티의 실제 아버지인지에 대해서는 약간의 의구심이 있다. 그들의 결혼생활의 어느 시점에 피오레는 플로렌스로 가서 바르톨로 디 미켈레라는 이름으로 금장공과 함께 살았다.[4] 피오레와 바르톨로는 공동법률결혼을 유지했기 때문에 기베르티의 친아버지가 누구였는지는 알 수 없다. 시오네의 죽음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그가 세상을 떠난 피오레와 바르톨로가 1406년에 결혼한 이후로는 알려져 있다.[4]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르톨로는 로렌조가 알고 있는 유일한 아버지였고 그들은 친밀하고 애정 어린 관계를 맺고 있었다.[4] 바르톨로는 플로렌스의 영리하고 인기 있는 금장공이었고, 로렌조를 그의 직업으로 훈련시켰다. 로렌조가 디자인의 제1원리를 배운 것은 이 견습으로부터였다.[4]

로렌조는 여러 형태의 예술에 관심이 있었고 금공예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그는 골동품 메달을 모형화하는 것과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4] 로렌조는 플로렌스 출신의 이탈리아 화가인 게라르도 스타니나로부터 화가로 정식 훈련을 받았다.[4] 그 후 그는 안토니오 델 폴라이올로도 일했던 바르톨로 디 미켈레의 플로렌스 작업장에 출근했다.[5] 1400년에 부보닉 페스트가 플로렌스를 강타했을 때, 기베르티는 리미니로 이사했다.

리미니에서 그는 운 좋게도 페사로의 영주 카를로 말라테스타 궁전에서 일자리를 얻었고, 그곳에서 카를로 1세 말라테스타 성의 벽화 프레스코 완성을 도왔다.[4] 궁전에서 기베르티는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방이 주어졌고, 그는 이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곳이 그가 회화 예술에 대한 깊은 사랑을 얻은 곳이라고 생각된다.[4] 그러나 그가 도착한 직후 그는 그의 고향인 피렌체에 있는 친구들로부터 세례교 주지사들이 대회를 열고 청동작업에 숙련된 명장들을 보내고 있다는 소식을 받았다.[4] 그림에 대한 대단한 감상에도 불구하고, 기베르티는 말라테스타에게 휴가를 요청했다. 1401년 그는 피렌체 성당의 침례교에서 청동문 한 쌍을 만들기 위해 위원회를 위해 열리고 있는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피렌체로 돌아갔다.[4]

플로렌스 세례문

천국의 문

기베르티의 경력은 플로렌스 침례교(Battistero di San Giovanni)로 가는 청동 문짝에 대한 두 번의 연이은 커미션에 의해 지배되었다. 이들은 초기 르네상스의 주요 걸작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제막부터 유명하고 영향력이 있었다. 기베르티는 21세 때 브루넬레스치를 준우승으로 내세우며 청동문 1세트 1401에서 우승하면서 처음 유명해졌다. 원래 계획은 구약성서의 장면들을 묘사하는 문이었지만, 대신 신약성서의 장면들을 묘사하는 것으로 계획이 바뀌었다. 그러나 살아남은 시편은 이삭의 희생을 그린다.

그는 이 커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도나텔로, 마솔리노, 미첼로초, 파올로 우크첼로, 안토니오 폴라이우올로 등 많은 예술가들이 훈련하는 대규모 워크숍을 마련했다. 그의 첫 번째 28개 패널 세트가 완성되었을 때, 기베르티는 그의 첫 세트를 위해 원래 의도했던 대로 구약성서의 장면들과 함께 교회의 또 다른 출입구를 위한 두 번째 세트를 제작하도록 의뢰받았다. 28장면 대신 전혀 다른 스타일로 10장의 직사각형 장면을 연출했다. 이것들은 보다 자연주의적이며, 원근법과 더 큰 이상화를 가지고 있었다. 미켈란젤로의 “천국의 문”으로 불리는 이 두 번째 세트는 르네상스 휴머니즘 시대의 주요 기념물로 남아 있다.

‘천국의 문’에는 10개의 패널이 있었고, 각 패널에는 구약성서의 특정 이야기에서 나온 에피소드들이 묘사되어 있었다. 아래 목록은 각각의 이야기가 천국의 문 위에 놓여 있는 곳을 보여준다.

파라다이스 패널의 문(순서) 애덤앤이브 조셉 카인과 아벨 모세 노아 조슈아 아브라함 데이빗 아이작 & 제이콥 솔로몬.

게이트 오브 파라다이스 다중 설명 패널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 (패널)

창세기 초에 신은 우주(이미지 상단에 나타나 있음)를 창조했다. 그가 우주를 창조했을 때, 그는 “에덴의 정원”을 창조했다. 이곳이 그가 최초의 인간 아담과 이브를 창조한 곳이다. 아담과 이브는 금지된 나무에서 사과를 먹고 있다. 이브는 신의 타락한 천사 루시퍼에게 속았고, 뱀은 금단의 열매(왼쪽 가운데에 표시)를 먹으면 신과 같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속았다. 그의 가장 아름다운 천사인 루시퍼는 타락한 천사와 악마(왼쪽 아래)가 되었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 (패널)

가인과 아벨은 첫 번째 사람인 아담이 낳은 아들이다. 아벨은 카인보다 어렸다. 질투심에서 가인은 신이 (사진 맨 위에 나타나 있는) 자신의 희생보다 아벨의 희생을 더 선호하는 것에 격분했다. 아벨은 평화로운 것으로 알려졌으며 무리들과 평화롭게 앉아 있다(왼쪽 가운데에 있다). 가인은 아벨에게 그를 따르도록 꾀어 그를 죽인다(아래에 드러나 있다).

노아의 이야기 (패널)

하나님은 세상이 폭력으로 가득 찬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노아에게 홍수로 지구를 파괴할 것이며 방주를 건설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두 종류의 동물과 그의 가족(왼쪽, 오른쪽, 가운데에 표시)을 데리고 오라고 들었다. 술주정뱅이를 나타내는 통 옆에 모세가 누워 있다(왼쪽 아래 표시). 모세가 제물을 바치는 것이 있다(오른쪽 아래 표시).

아브라함의 이야기 (패널)

세 사람이 아브라함에게 왔다. 그는 그들에게 옷을 입히고, 먹이를 주고, 그들에게 술을 주었다. 그 세 사람은 천사였고 그들은 자신을 신의 사신이라고 밝혔다. 그들은 그에게 80세였던 그의 아내 사라가 아이를 낳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 번은 아이들로 하여금 아브라함에게 아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게 하였으나, 천사에게 들르라는 명령을 받았다.

아이작의 이야기 (패널)

이삭은 아브라함의 아들이다. 그는 천사가 아브라함을 멈추기 전에 희생될 예정이었다. 야곱은 이삭의 축복(오른쪽 그림)을 받고 있다. 레베카는 (옥상에 있는) 갈등을 겪게 될 두 아들을 하느님이 그녀에게 말해주는 것을 듣고 있다.

조셉의 이야기 (패널)

요셉의 아버지 이름은 야곱이고 그들은 가나안에 살았다. 요셉은 11형제 중 둘째로 어렸고 그의 아버지는 그것 때문에 그와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야곱은 요셉에게 그의 형제들이 부러워하는 특별한 옷을 주었다. 요셉은 그의 형제들에게 그들이 모두 자기를 죽이고 있는 곳과 그들이 그에게 절을 하는 곳이라고 말한 두 가지 꿈을 꾸었다. 그들은 격분하여 그를 죽일 계획이었으나, 그를 노예로 팔아 이집트의 소유로 삼았다(오른쪽 아래쪽에 있다. 요셉은 감옥에 갇혔고 사람들에게 꿈의 의미를 말했다. 파라오는 요셉의 꿈을 설명하기 위해 요셉을 찾았다. 파라오는 요셉에게 그의 도시가 식량 자원이 부족해지는 꿈을 말했다. Joseph은 다가오는 저 수확을 위해 매년 식량을 따로 떼어 놓을 것을 제안한다.

모세의 이야기 (패널)

모세는 나일강의 바구니에 생모에 의해 숨겨졌다. 바로의 딸은 모세를 발견하여 바구니에서 데려갔다(강과 백성과 함께 왼쪽에 있음). 모세는 이집트의 파라오의 자녀가 되었다. 그는 이스라엘 사람으로 태어났고 그의 민족은 이집트 사람들의 노예가 되었다. 10개의 재앙이 이집트를 강타했고 사람들은 겁에 질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끌고 이집트에서 나와 홍해를 건너게 하고(오른쪽에는 사람들이 기뻐하며) 모세는 시나이 산(맨 위에 있는)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는다.

조슈아 이야기 (패널)

모세는 죽었다. 여호수아는 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지도자가 되어 그들을 약속된 땅(아래에 있는 것)으로 인도해야 했다. 하나님의 백성, 요르단 강을 건너는 것(강줄기 한가운데서 목격) 여호수아는 여리고 성을 중심으로 일곱 번 십계명을 거느리고 다니다가 성벽이 무너졌다. 여호수아와 그의 군대가 그 성읍을 점령하였다(위쪽에 있다). 그들은 그 도시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데이비드 이야기 (패널)

사울은 이스라엘의 왕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이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할 선택된 왕이 아니라고 하셨다. 새 왕을 찾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언자 사무엘. 다윗은 다윗처럼 사울에게 끌려가서, 갑옷장이 되어 방패를 메게 하였다. 이스라엘과 이집트 사이에 전쟁이 있었다. 골리앗은 누군가가 그를 죽일 수 있다면 그의 군대 일은 그만두겠다고 약속했다. 다윗은 목동으로서 양을 보호하지 못하도록 야수를 죽이는 데 능숙했고, 돌로 골리앗을 때려서 자신의 칼(사진 맨 아래에 나타나 있음)으로 죽였다.

솔로몬 왕의 이야기 (패널)

솔로몬 왕은 이집트의 바로 왕과 동맹을 맺고 그의 딸과 결혼하였다(중간에서 공유됨). 솔로몬 신이시여, 어떤 소원이라도. 솔로몬은 하나님께 더 나은 지도자가 되라고 요청했고 하나님은 그에게 지혜로 보답하셨다. 사람들은 솔로몬을 선하고 현명한 왕으로 인정했다. 두 명의 매춘부가 왕에게 왔다. 그들은 둘 다 아기를 낳았다. 그 아기들 중 한 명이 죽었다. 죽은 아기의 엄마는 살아있는 아기가 그녀의 것이라고 주장했다. 두 여자 모두 살아있는 아기가 자기 것이라고 맹세했다. 솔로몬 왕은 아기를 나누어 가질 수 있도록 아기를 반으로 자르라고 명령했다. 어머니는 아기를 불쌍히 여겨 자비를 구했고, 다른 한 마리는 뻔뻔하게 제출했다. 솔로몬은 울부짖는 사람에게 상을 주었다. 그는 그녀가 진정으로 어머니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왼쪽 가운데, 그의 아내 뒤에 있는)

평판화(Plageclement)에서 북쪽 도어의 패널 중 하나

안드레아 피사노의 초창기 문

지오토의 권고에 따라 안드레아 피사노는 1329년 플로렌스 침례교에서 첫 번째 문을 디자인하는 커미션을 받았다. 남문(南門)은 원래 두오모를 마주보는 동쪽에 설치되었고, 1452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되었다. 이 프로토-르네상스 문들은 28개의 콰트레포일 판넬로 이루어져 있으며, 20개의 탑 판넬이 성 생전의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세례자 요한 8개의 하부 패널은 희망, 믿음, 자선, 겸손, 강인함, 절제, 정의, 신중함 등 8가지 덕목을 묘사하고 있다. 피사노는 그것들을 완성하는데 6년이 걸렸고, 1336년에 완성되었다. 1453년 기베르티와 그의 아들 비토리오가 피사노의 기존 패널에 도어 케이스를 추가하도록 위임받았다. 기베르티는 작품의 대부분을 비토리오와 그의 작업장의 다른 구성원들에게 맡기고 액자가 완성되기 8년 전인 1455년에 죽었다.[6] 문 위에 라틴어 글씨가 새겨져 있다: “안드레아스 우골리니 니니 드 피스 나 서기. MCCCXXX” (안드레아 피사노가 1330년에 나를 만들었다. 남문들은 2016년 9월 동안 복구가 진행 중이었다.

1401년 경기

1401년, 아르테 디 칼리말라 (보 수입업자 길드)는 결국 세례의 북쪽에 놓이게 될 문을 디자인하기 위한 경쟁을 발표했다. 이 문들의 원래 위치는 세례의 동쪽이었지만, 기베르티가 “천국의 문”으로 알려진 그의 두 번째 임무를 마친 후 세례의 북쪽 면으로 문이 옮겨졌다.[7]

이 새로운 문들은 피렌체가 1348년 흑사병과 같은 비교적 최근의 재앙으로부터 벗어나게 된 것을 축하하는 봉헌제물 역할을 할 것이다. 각 참가자에게는 놋쇠 네 개의 테이블이 주어졌고, 문패널의 크기와 모양에 해당하는 금속조각에 ‘이삭의 희생’을 덜어주어야 했다.[4] 각 작가에게는 패널 준비 기간이 1년씩 주어졌고, 최고의 평가를 받은 작가에게는 위촉장을 수여하는 것이었다.[4] 많은 예술가들이 이 위원회를 위해 경쟁하는 동안, 배심원단은 기베르티, 필리포 브루넬레스치, 시몬 다 콜레, 프란체스코 디 발 옴브리노, 니콜로 디 아레초, 자코포 델라 퀘르시아 다 시에나, 니콜로 람베르티 등 7명의 준결승 진출자들만을 선정했다.[4] 1402년 심판 당시 기베르티와 브루넬레스치만이 최종 후보자로 선정되었고, 심사위원들이 결정할 수 없을 때는 함께 작업하도록 배정되었다. 브루넬레스치의 자존심이 길을 가로막았고, 그는 건축학을 공부하기 위해 로마로 갔고, 이에 따라 당시 21세의 기베르티는 스스로 문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러나 기베르티의 자서전은 “한 번의 반대 목소리도 없이 승리했다”고 주장했다. 기베르티와 브루넬레스치의 ‘이삭의 희생’의 원작이 피렌체의 바르젤로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브루넬레스치와 기베르티가 만든 ‘이삭의 희생’의 차이점에는 패널 구성 방식과 패널의 전반적인 효율이 포함된다. 브루넬레스치의 판넬은 청동 틀 위에 놓인 작품상의 개별 조각들로 구성되었다. 브루넬레스치가 자신의 패널에 작품을 만드는 방식과는 대조적으로, 기베르티가 작품을 캐스팅한 것은 이삭을 제외한 모든 인물들이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어졌다.[8] 그 인물들의 조각들 자체가 안쪽에 모두 움푹 패여 있었다. 기베르티가 판넬을 만드는 방법 때문에 결국 더 강해지고, 청동을 덜 썼으며, 브루넬레스치의 판넬보다 무게가 덜 나갔다. 청동을 적게 사용함으로써 패널의 비용 효율도 높아졌다. 예술 자체의 측면을 포함하여, 이 차이점들은 대회의 위원회가 어떻게 승자를 결정하는지에 포함되었다.

경기 후

대회가 끝난 후, 기베르티의 아버지 바르톨로는 그의 문이 주조되기 전에 그의 문 디자인을 완벽하게 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4] 이 커미션은 즉각적이고 지속적인 인정을 받았다. 1403년 정식 계약은 이전에 훈련받은 것과 같은 워크숍인 바르톨로 디 미켈레의 작업장과 체결되어 하룻밤 사이에 피렌체에서 가장 권위 있는 작업장이 되었다.[4] 그로부터 4년 후인 1407년 로렌조는 법적으로 수수료를 넘겨받아 추가 수수료를 받는 것이 금지되었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성문을 만드는 데 할애했고, 일년에 2백 송이의 꽃집을 받았다.[4] 문을 주조하기 위해 로렌조는 아자 또는 타작 마룻바닥이라는 스튜디오에서 일했다. 스튜디오는 세인트 병원 근처에 위치해 있었다. 마리아 누오바, 오늘날에도 여전히 피렌체에서 활동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병원이다.[4] 아자에서는 기베르티가 문을 주조하려고 금속을 녹이기 위해 큰 용광로를 만들었지만, 그의 첫 모델은 실패작이었다. 이 실험이 끝난 후, 그는 다시 한번 곰팡이를 만들려고 시도했다. 두 번째 시도에서 그는 성공했고 결국 총 22,000파운드의 청동을 사용하게 되었다.[4] 이 시기에 이것은 큰 액수였다.

기베르티가 문을 완성하는데 21년이 걸렸다. 이 금박을 입힌 청동문은 28개의 판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신약성서의 그리스도의 삶을 묘사한 20개의 판넬이 있으며, 1424년 4월 19일 세례교 측면에 배치되었다.[4] Twenty panels showing the life of Christ from the New Testament are depicted: the Annunciation, Nativity, Adoration of the Magi, Dispute with the Doctors, Baptism of Christ, Temptation of Christ, Chasing the Merchants Away, Christ Walking on Water, Transfiguration, Resurrection of Lazarus, Christ’s Arrival in Jerusalem, Last Supper, Agony in the G 아덴, 잡혀가는 그리스도, 편평한 그리스도, 빌라도와 함께 재판받는 그리스도, 칼바리 여행, 십자가 죽음, 부활, 오순절.[9] 8개의 하단 패널은 4명의 전도사와 성 암브로즈, 성 제롬, 성 그레고리, 성 아우구스티누스 성당을 보여준다. 판넬은 문갑의 단풍틀과 판넬의 교차점에 있는 예언자들의 금박 흉상들과 시빌들로 둘러싸여 있다. 원래 피사노의 문 대신 동쪽에 설치되었던 이들은 나중에 북방으로 옮겨졌다. 그것들은 미술사학자 안토니오 파올루치가 “15세기 1/4분기 플로렌스 미술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10]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북문 위의 청동상은 바리새인과 사두새인에게 설교하는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그리고 있으며 프란체스코 루스티치가 조각하였다. 루스티치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의해 그의 디자인에 도움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는 그의 도구 선택을 도왔다.

도어가 완료된 후

이 문들이 완성된 후, 기베르티는 유명인사와 이 분야의 최고 아티스트로 널리 인정받았다. 그는 교황으로부터 몇몇을 포함한 많은 위원회를 받았다. 1425년 그는 플로렌스 침례교에서 두 번째 커미션을 받았는데, 이번에는 그와 그의 작업실(미첼로초와 베노초 고졸리 포함)이 27년 동안 자신들을 훌륭하게 해냈다. 이 문들의 디자인 대상은 당시 피렌체 공화국의 수상이었던 레오나르도 브루니 다레조에 의해 선택되었다.[11] 그들은 구약성서의 장면을 묘사한 10개의 판넬을 가지고 있으며, 차례로 동쪽에 설치되었다. 판넬은 큰 직사각형이며, 이전 문들처럼 더 이상 전통적인 고딕 콰트레프유에 내장되지 않았다. 기베르티는 그의 작품에 깊이를 주기 위해 최근에 발견된 원근법의 원리를 이용했다. 각각의 패널은 한 개 이상의 에피소드를 묘사한다. ‘요셉의 이야기’는 그의 형제들이 우물 속으로 캐스팅한 요셉, 상인들에게 팔린 요셉, 파라오에게 요셉을 인도하는 상인, 파라오의 꿈을 해석하는 요셉, 그에게 경의를 표하는 파라오, 제이콥은 그의 아들들을 이집트로 보내고 요셉은 그의 형제들을 알아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이야기를 그린다. 바사리의 <라이프>에 따르면, 이 패널이 가장 어렵고 또한 가장 아름다웠다고 한다. 이 수치들은 원근 공간(도나텔로가 발명하고 문자 그대로 “평평한 안도감”을 뜻하는 릴리예보 쉬키아토(Rillievo schiacciato)라고 불리는 기술)에서 매우 낮은 안도감으로 분포되어 있다. 기베르티는 절개된 선에서부터 패널 내에서 거의 독립적으로 서 있는 인물 조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조각 기법을 사용하여 공간감을 더욱 강조한다.

판넬은 잎과 과일로 화려하게 장식된 금박 틀에 포함되어 있으며, 많은 예언자와 24개의 흉상들이 있다. 두 개의 중앙 흉상은 화가와 그의 아버지 바르톨로메오 기베르티의 초상화다.

Annoration 패널은 옷과 날개, 그리고 트럼펫을 입은 천사가 Mary에게 나타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데, 이 장면은 문간을 떠나는 충격의 표현으로 보여졌다.[12] 예수 탄생 패널은 소, 당나귀, 요셉과 마리아, 천사, 그리고 목자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탄생을 묘사한다. 메리를 제외한 모든 인물들이 그녀에게 경의를 표하는 동안, 패널의 모든 인물들은 동굴 근처에 묘사되어 있다.[13] 마기패널의 예배는 세 마리의 마기가 요셉과 천사를 배경으로 그리스도와 마리아를 찬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14] Christ Anthe Doctors 패널에서 그리스도는 그와 토론하는 의사들에게 둘러싸인 왕좌와 같은 의자에 앉아 있는 아이로 묘사된다. 그리스도가 얼마나 똑똑하게 말했는지에 대해 충격을 받은 의사들의 이야기는 모든 의사들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치열한 토론을 벌이며 서로에게 말을 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15] 그리스도의 세례, 그리스도는 구경꾼, 비둘기, 그리고 그의 사촌인 세례자 요한에게 둘러싸여 강에서 세례를 받는 모습을 보여준다. 배경에는 나뭇잎과 바위, 흐르는 강물이 있는 강렬한 디테일을 가진 나무들이 있다.[16] 그리스도의 유혹 패널은 쓰러진 천사 사탄과 바위 위에 서 있는 동안 천사에게 둘러싸인 그리스도와 함께 보여진다. 사탄은 박쥐 같은 날개와 예복을 입은 인간으로 묘사된다.[17] ‘상인들을 쫓아가다’ 패널은 그리스도가 성전 안에서 주먹을 치켜든 채 상인 무리를 밀어내는 장면을 그린다. 배경의 절은 복잡한 무늬의 기둥과 아치로 그려져 있으며, 상인들이 물건을 들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18] 물 위를 걷는 그리스도는 베드로가 물에 빠진 동안 물 위에 서 있는 예수와 바다에 있는 제자들을 보여준다. 판넬에는 돛이 달린 배와 돛대의 개별 로프가 있고 배 자체도 예술적인 디자인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바다도 물결이 흐르고 예수님이 물 위에 서 계신 곳에는 그 위에 서 있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아래로 굽어진다.[19] 변형판에는 예수가 예언자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제자인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위에 서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세 제자에 대한 경외감은 그들이 땅에 엎드려 그리스도와 예언자들을 멀리하는 것으로 표현된다.[20] 라자루스의 양육 패널은 라자루스가 그의 무덤을 떠나 그리스도와 그의 자매, 그리고 제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을 보여준다. 라자루스의 자매들에 대한 경외감은 그들 중 한 명이 땅에 엎드려 무릎을 꿇은 채 라자루스를 움켜쥐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예루살렘 출입국 패널은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문을 배경으로 많은 군중의 환영을 받으며 나귀에 올라타는 모습을 보여준다. 군중 개개인은 각기 다른 헤어스타일과 옷으로 뚜렷한 얼굴을 하고 있다.[21] 최후의 만찬 패널은 그리스도의 신약성서에서 잘 알려진 장면을 12명의 제자들과 함께 보여준다. 배경은 기둥에 포도를 장식하고 배경에는 휘장을 두었으며, 그리스도는 식탁의 맨 앞에 있고 제자들은 일제히 앉아 있다.[22] ‘정원의 고통’ 패널에는 그리스도가 각도를 향해 기도하는 모습과 그의 뒤에서 자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정원의 형상은 매우 세밀한 덤불과 바위, 나무로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다.[23] 그리스도는 제자들이 군인과 맞서고 있는 동안 유다에 의해 체포되도록 표식되어 있다. 병사들은 각각 창, 도끼, 칼 같은 개인화된 갑옷과 무기를 가지고 있다.[24] 플레게일레이션 패널은 막대기를 들고 있는 로마 병사들에 의해 예수가 채찍질을 당하는 모습을 그린다.[25] 북문 십자가상패널은 십자가상 기슭에서 마리아와 요한과 함께 그리스도의 옆에 있는 천사들이 매달린 모습을 그린다. Mary는 십자가에서 멀리 내려다보는 그녀와 함께 상복을 입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26] 캐스팅의 전반적인 품질이 절묘하다고 여겨지지만, 알려진 착오가 있다. 예를 들어 북문(평판) 15번 패널(평판)에서는 앞줄의 두 번째 기둥의 주물을 팔 위에 겹쳐 놓았으므로 편평기 중 하나가 돌에 갇힌 채 손을 내밀고 나타난다.[27]

미켈란젤로는 이 문들을 “천국의 문”이라고 불렀다. Porte del Paradiso), 그리고 그것들은 여전히 변함없이 이 이름으로 언급되고 있다. 조르지오 바사리는 1세기 후에 “모든 면에서 불가능할 정도로 완벽하고, 지금까지 만들어진 가장 훌륭한 걸작”이라고 묘사했다. 기베르티 자신은 이 작품들이 “내가 만든 작품들 중 가장 특이한 작품”이라고 말했다.

성 요한 침례자 동상

더 세인트. 세례자상 존은 1412-1416년에 지어진 플로렌스의 오르산미셸의 틈새에 자리잡고 있다. 이 동상은 성당에 기초를 두고 있다. 세례자 요한

기베르티의 걸작은 양모 상인 길드였던 아르테 디 칼리말라 길드에 의뢰되었다. 그들은 피렌체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이 조각상은 그 시대의 기술적 진보였다. 기베르티는 청동으로 만들어진 이 8인치 4인치 조각상을 결합시킬 수 있는 놀라운 주조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기베르티의 동상은 칼과 휘장으로부터 우아한 곡선이 보이는 이탈리아의 고딕 양식의 영향을 받았다.

성 마태오 동상

이 동상은 은행가 길드라고 불리는 아르테 델 캄비오 길드의 자금 지원을 받았다. 이 동상은 1419년부터 1423년까지 지어졌다.

성 마태복상은 청동 8인치 10인치 높이에 이르렀다. 그것은 또한 플로렌스의 오르산미셸의 틈새에 위치해 있다.

길드는 그들의 동상이 성당보다 크거나 더 크기를 원한다고 명시했다. 세례자상 존.

만년, 가족, 죽음

1417년까지 로렌초 기베르티는 가치 있는 콤비 메이커인 바르톨로메오 디 루카의 16세 딸 마르실라와 결혼했다.[28] 그들은 함께 두 아들을 낳았다. 1417년 토마소 기베르티를 갖게 되었고, 1년 후 비토리오 기베르티를 갖게 되었다.[29] 기베르티는 그의 대부분의 현대 예술가들보다 더 부자였고, 그의 성공은 그에게 엄청난 재정적 보상을 가져다 주었다. 1427년의 세금 신고는 그가 플로렌스 외곽에 상당한 양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또한 상당한 액수의 돈을 국채에 투자하여 신용을 얻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의 부동산과 화폐 보유량은 계속 늘어났다.[29] 로렌초 기베르티는 75세까지 살았고, 열병에 걸려 플로렌스에서 죽었다.[4] 그는 1455년 12월 1일 산타 크로스에 묻혔다.[4] 비토리오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금장공과 청동 캐스터로 나섰지만 큰 명성을 얻은 적은 없었다.[4] 토마소는 로렌조의 조수들과 협력자로써 아버지의 사업에 합류했다.[28] 아버지가 사망한 후 1447년 이후의 어떤 문서에도 언급되지 않기 때문에 그가 사업을 계속했는지는 알 수 없다.[28] 후에 비토리오에게는 부오나코르소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들이 부오나코르소라는 부성 예술을 따랐다.[4] 그러나 부오낙코르소는 포와 포탄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등 할아버지의 작품에서 다른 스핀을 보였다. 그가 이러한 무기를 제조한 것은 그를 유명하게 만들었는데, 주로 사르자나 피사의 전쟁을 제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4]

세례교로 가는 두 번째 문의 패널인 요셉의 이야기

기타 작품

기베르티는 아르테 디 칼리말라 침례교 성 요한과 성 요한 중 한 명, 플로렌스의 오르산미셸의 엄선된 틈새를 위해 기념비적인 금박을 입힌 청동상을 집행하는 임무를 맡았다. 마태복음 아르테 디 캄비오 (은행조합) 마침내 그는 세인트루이스의 청동상을 제작하기도 했다. Stephen for the Arte deella Lana (울 제조사 길드)

그는 또한 고전 유물의 수집가였고 역사학자였다. 그는 인본주의 사상의 확산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그의 미완성된 코멘타리는 르네상스 예술에 대한 귀중한 정보원이며, 예술가의 첫 자서전으로 여겨지는 것을 담고 있다. 이 작품은 바사리의 바이테의 주요 출처였다.[30]

기베르티의 “코멘타리오”에는 가장 일찍 알려진 예술가의 자서전이 포함되어 있다. 그는 시마베 시대부터 자신의 작품에 이르기까지 예술의 발전에 대해 논한다. 피렌체 침례교에서 두 번째 청동 포탈을 묘사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이 작품에서 자연을 가능한 가깝게 모방하려고 노력했다. 비율과 관점 모두에서… 멀리서 바라본 사람의 눈에 비친 것처럼 그 건물들이 보인다.” 기베르티가 그의 예술을 묘사할 때 사용한 언어는 르네상스 예술가들이 그들의 예술작품을 위해 애쓰는 목적을 이해하는 데 있어 미술사학자들에게 매우 귀중한 것으로 증명되었다.

흔히 최초의 원근법의 거장으로 여겨졌던 파올로 우첼로는 몇 년 동안 기베르티의 작업장에서 일했는데, 이 때문에 우첼로의 원근법에 대한 혁신이 기베르티의 지시로 인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기 어렵게 되었다. 조각의 중앙점 원근법의 첫 사례 중 하나로 유명한 도나텔로는 기베르티의 작업실에서도 잠시 작업을 했다. 파올로가 도나텔로와 평생의 우정을 시작한 것도 이때쯤이었다. 1413년경, 기베르티의 동시대의 한 사람인 필리포 브루넬레스치는 오늘날 예술가들이 사용하는 기하학적 원근법을 거울에 다양한 플로렌스 건물의 윤곽을 그려 보여주었다. 건물의 윤곽이 계속되었을 때, 그는 모든 선들이 수평선에 모여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최근의 장학금은 그의 원근법에 관한 연구에서 기베르티가 11세기 초에 원근법의 광학적 기초를 쓴 아랍 다산술 알하센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준다. 그의 《광학서》는 14세기에 델리 양네이로 이탈리아어로 번역되었으며, [31]기베르티의 《코멘타리오 테르조》에 길게 인용되었다. 저자 A. 마크 스미스는 기베르티를 통해 알하젠의 ‘광학서’가 “르네상스 초기 이탈리아 그림에서 인위적인 시각의 발달에 중심이었을 것”이라고 제안한다.[32]

갤러리

기베르티의 1401년 대회 우승 작품

천국의 문, 침례교, 플로렌스, 상황 의 문은 재현되어 있다.

피렌체 천국의 문 에서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있는 패널의 각진 모습(위 참조)

피렌체 산타크로스 대성당에 있는 기베르티 무덤

참조

이삭의 희생 (기베르티와 브루넬레스키)

피렌체 여행 후 찍은 사진을 정리하며 하나씩 다시 공부하고 있다.

바르젤로 미술관에는 로렌초 기베르티(Lorenzo Ghiberti, 1378 – 1 December 1455)와 필리포 부르넬레스키 (Filippo Brunelleschi, 1377 – April 15, 1446)의 청동 부조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데, 모두 ‘이삭의 희생’이라는 작품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의 목을 베려고 할 때 천사가 내려와 말리는 장면을 묘사한 작품이다. 하인들이 졸고 있거나 딴데 정신이 팔려 있는 모습은 신의 기적을 보지 못하는 인류를 표현했다고 한다.

이 두 작품은 1401년 피렌체 세례당 정문 장식을 만들 조각가를 뽑기 위한 경합이었다. 기베르티가 선정되 유명한 ‘천국의 문’을 조각하게 된다. 같은 주제를 통해 누가 더 종교적 묘사에 어울릴 것인가를 결정했지 예술성을 평가한 것은 아니다.

이삭의 희생 (Lorenzo Ghiberti)

이삭의 희생 (필리포 브루넬레스키, Filippo Brunelleschi)

부르넬레스키는 조각을 포기하고 로마로 가서 고대 로마의 건축을 연구하고 (대표적으로 판테온) 이후 다시 피렌체로 돌아와 두오모의 돔을 설계하게 된다. 설계 공모전에서 선정된 부르넬레스키의 조수는 공교롭게도 기베르티였다. 둘의 갈등은 다시 반복되어, 부르넬레스키가 기베르티에게 1420년 공사 권한을 넘기고 빠졌다가 돔의 공사에 아는 바가 없던 기베르티의 포기로 1423년 다시 부르넬레스키가 돌아와 혼자 감독을 맡았다.

둘의 경쟁과 질시는 나오는 글마다 누가 더 치졸했는가는 조금씩 다른데, 어쩌면 이 두 위대한 르네상스 조각가(건축가)의 얘기도 흥미로운 문학 작품이나 영화 스토리가 될 것 같다 (아마 이미 있을지도 모르겠다).

[르네상스 회화와 조각 ③] 세기의 조각 라이벌 대결, 기베르티 VS 브루넬레스키

피렌체 산 조반니 세례당의 조각상을 차지하기 위한 양보할 수 없는 대결

세기에 남을 대결의 결과가 두 천재의 운명을 뒤바꾸다

[핸드메이커 김강호 기자] 이탈리아 피렌체의 두오모 광장에는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피렌체 대성당)’이 있다. 또한 그 옆에는 피렌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자 예배의 중심지였던 산 조반니 세례당이 있다. 피렌체 대성당 위에 얹혀 있는 빨간 벽돌 돔, 그리고 세례당 동쪽과 북쪽문의 조각 부조상은 오늘날에도 수많은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명소이다.

이 작품들은 바로 로렌초 기베르티(lorenzo ghiberti, 1378~1455)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 1377~1446)가 만든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 얽혀있는 재밌는 이야기가 있다. 둘은 원래 라이벌이었고, 세례당 문의 부조상을 만들기 위해 역사적인 대결을 펼쳤다는 것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천재적인 예술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베키오 궁전 벽화를 두고 세기의 대결을 펼친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좀 더 이른 시기에 이미 이들의 선배 격인 조각가들이 영혼을 담은 대결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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