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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5장 주석 강해 – Pensées
아담의 죄는 모든 사람의 죄다. 아담의 강력한 영향력을 말한다. 왕 노릇. 통치하다. 지배하다. 사망이 지배하다. 모두가 죽었다. 오실 …
Source: 392766.tistory.com
Date Published: 1/2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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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5장 주석 – 로마서 – 예사랑 성경 연구회 – Daum 카페
자체도 죄인을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에는 결코 견줄 수 없음을 함축하고 있다. … 무나도 무가치하고 자격이 없는 인간의 본질적 양상을 드러내고 …
Source: m.cafe.daum.net
Date Published: 7/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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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5장 강해 – 반석위에기쁨
로마서 5장 강해 · 1. 우리는 모두 심판과 징벌의 대상입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아담의 행한 불순종 때문에 모든 사람이 죄인의 대우를 받는다고 밝혔 …
Source: jorc9114.tistory.com
Date Published: 7/11/2022
View: 5579
헬라어 로마서 5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 인생여행
디카이오덴테스 운 에크 피스테오스 에이레넨 에코멘 프로스 톤 데온 디아 투 퀴리우 헤몬 예수 크리스투 개역개정,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
Source: tripol.tistory.com
Date Published: 5/22/2021
View: 2775
로마서5장주석. 롬5:1-11 의로운 자의 삶
로마서5:1-11 -. 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Source: shmission.com
Date Published: 1/22/2021
View: 5571
[로마서 5장 강해 설교말씀] 칭의(稱義)의 결과(롬 5:1-21)
로마서 5장에서는 칭의의 결과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원죄에 있을 때에는 전혀 살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Source: cdk153.tistory.com
Date Published: 2/22/2021
View: 826
로마서 강해 – 옛신앙
1장부터 11장까지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이치에 대해 증거했는데, 1, 2장은 구원의 필요성으로서 사람의 죄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3-5장은 …
Source: www.oldfaith.net
Date Published: 12/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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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5장
(알림: 이 문서는 칼빈의 로마서 주석과 함께 한 로마서 공부의 짤막한 기록입니다.) 그리스도의 의로움의 완전성. 1절: 태초의 타락 이래로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
Source: once4all.org
Date Published: 5/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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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로마서 5 장 강해
- Author: 선한목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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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19. 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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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5장 주석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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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5장 주석 강해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의 삶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의롭게 되었다면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가 되었기 때문에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할 것을 당부한다. 그리스도인의 현재는 미래가 침투한 것이다.
로마서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의롭다 함을 받았다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고 제안한다. ‘얻었다’는 디카이오덴테스(Δικαιωθέντες)를 부정 과거 시제로 사용함으로 이미 의롭게 되었고, 지금도 여전히 의로움을 강조한다. 앞으로 의로운 것이다. 새 관점 주의자인 제임스 던은 이 부분을 다른 시제들을 압도하는 것을 봐서는 안된다고 하지만 잘못된 생각이다.(WBC 로마서 상) 의로움을 통해 ‘하나님과 화평’ 하게 된다. 화평은 구약의 샬롬을 번역한 것이다.
로마서 5: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두 번째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할 수 있다. 서있다(ἑστήκαμεν)는 과거완료형으로 이미 우리가 은혜 안에 있음을 말한다. 거듭난 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볼뿐 아니라 보고 즐거워한다. 시편 1:2처럼 의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 한다.
로마서 5: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
환난 중에 즐거워한다 ‘καυχώμεθα ἐν ταῖς θλίψεσιν’는 환난 안에 있지만으로 해석된다. 즐거워한다 ‘καυχάομαι’는 우리가 아는 즐거움보다 ‘자랑스럽다’ ‘영광스럽다’의 의미가 더 강하다. 롬 2:17, 2:23, 고전 1:29에서 사용되었다.
환난은 인내를 필요로 한다. 참아야 하는 이유는 즐겁기(영광스럽기) 때문이다.
로마서 5:4 인내는 연단을 ,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인내는 반복이며, 반복된 인내는 연단으로 이어진다. 인내는 다시 소망으로 확증된다.
인내 도키메 δοκιμήν는 입증된 질적인 면의 의미이며, 품성, 검증된 품성, 또는 검증이 끝난 의미이다.
‘앎이로다’는 경험으로 알게 된 지식을 말한다. 지금까지 우리가 경험해서 봐서 안다. 우리는 결국 소망을 이룰 것이라는 수사적 기법이다.
로마서 5: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소망-엘피스는 부끄럽지 않다. 부끄러움은 종말에 일어날 하나님 앞에서의 부끄러움을 말한다. 즉 심판을 받지 않게 한다.
‘부끄럽다’καταισχύνει 는 현재형으로 지금 이미 부끄럽지 않다이다. 왜냐하면(ὅτι)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졌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에. 실현된 종말론
로마서 5: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왜 이미 이루어졌는가를 설명한다. 근거는 예수님의 구속 사역 때문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이미 취했다. 그 안에 들어갔다.
ἔτι γὰρ Χριστὸς ὄντων ἡμῶν ἀσθενῶν ἔτι κατὰ καιρὸν ὑπὲρ ἀσεβῶν ἀπέθανεν.
어순이 다르다. 그리스도께서 죽었다. 우리가 연약할 때 순이다.
연약할 때는 인간의 타락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함, 의를 이루지 못함을 포괄한다.
때에(κατὰ καιρὸν)는 적절한 시기, 알맞은 순간, 종말론적 순간 등을 말하며,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는 순간을 말한다. 즉 크로노스가 아닌 카리로스다.
로마서 5: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7절은 누군가를 위하여 죽지 않는다를 말한다. 순교는 개인이 아니라 종교와 나라와 명예를 위해서 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 개인을 위해 죽으셨다. 여기서 의인과 선인을 비교하가 분석하면 안 된다. 의인과 선인은 모두 예수님의 죽음과 비교되어야 한다. 누가 타인을 위해서 죽는가. 없다. 이런 뜻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서로를 위해 죽는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듯이.
요한복음 15: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로마서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이 구절도 도치되었다. 아래의 순서와 같다.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συνίστησιν δὲ τὴν ἑαυτοῦ ἀγάπην εἰς ἡμᾶς ὁ Θεὸς ὅτι ἔτι ἁμαρτωλῶν ὄντων ἡμῶν Χριστὸς ὑπὲρ ἡμῶν ἀπέθανεν.
바울은 먼저 강조하고, 그 이유를 설명하는 방식으로 이어간다. 먼저 기록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고 있다.
συνίστησιν 확증했다. 영어 Demonstrates로 번역. I place together, commend, prove, exhibit; instrans: I stand with; I am composed of, cohere. 등의 의미를 갖는다. 논증하여 증명하다는 의미가 강하다.
함께 서다(σύν+ἵστημι)는 뜻이다. 함께 서다는 여러 가지 증거들을 통해 증명해 내다는 의미를 갖는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이것이 내가 너희를 사랑한 증거다’라고 외치고 계신다.
로마서 5: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의롭다 함을 받았다. δικαιωθέντες는 부정 과거로, 이미 종결된 사건이다. 이전에 이미 우리는 의롭게 되었다. 미완료가 아니 과거완료형을 통해 법정적 선언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의 피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속이다.
그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 난다.
로마서 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우리가 원수 되엇을 때 화목하게 되었다. / 그의 아들을 통해 / …
εἰ γὰρ ἐχθροὶ ὄντες κατηλλάγημεν τῷ Θεῷ διὰ τοῦ θανάτου τοῦ Υἱοῦ αὐτοῦ, πολλῷ μᾶλλον καταλλαγέντες σωθησόμεθα ἐν τῇ ζωῇ αὐτοῦ·
카탈랏소 καταλλάσσω 화목하다. 수동태형으로 화목하게 되었다.
로마서 5:11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즐거워 한다. καυχώμενοι 현재형으로 지금 즐거워 하고 있다.
그리스도로 말미아암.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사라지지 않는한 기쁨도 사라지지 않는다. 신자와 그리스도는 연합되어 있다.
아담과 그리스도
로마서 5: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그러므로는 1-11절까지를 요약을 의미. 한 사람은 아담이다. 신학적으로 중요하다. 그러니 아담의 죄가 모든 인류에게 들어온 것이다. 원죄는 성경적 원리다. 개혁자들의 개발된 교리가 아니다. 한사람은 곧 모든 사람이 죄를 짓게 된다. 죄는 사망이다. 한 사람 죄는 모든 사람의 죄로,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죽는다.
로마서 5:13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죄와 율법의 관계. 율법은 모세로부터. 하지만 죄는 그 전에도 있었다. 창세기 4장에서 최초의 최가 발현된다. 가인이 아벨을 살인. 살인은 3장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 일어난다.
여기다 알ㄹ로게오. 상업 용어로 ‘타인에게 부과하다’ ‘대신 지불하게 하다’ 등의 의미다. 즉 율법이 있기 전에 죄에 대해 무감각했음을 말한다. 그때도 죄가 지배했고, 죄의 삯인 사망이 일어나고 있었다.
로마서 5: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아담의 죄는 모든 사람의 죄다. 아담의 강력한 영향력을 말한다.
왕 노릇. 통치하다. 지배하다. 사망이 지배하다. 모두가 죽었다.
오실 자는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도 모든 자에게 생명을 주신다.는 것을 말하려 함.
로마서 5:15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은사 카리스, 선물 도레아(δωρεά).. 은사도 선물도 동일하게 카리스지만. 바울은 이곳에서 카리스와 도레사를 구분하여 사용함. 도레사(δωρεά)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주는 예의를 차리는 선물을 말한다. 선물로 바울 신학을 다룬 책은 존 바클레이 <바울과 선물>(새물결플러스)이 있다.
요 4:10, 행 10:45, 롬 5:15, 고후 9:15, 엡 3:7, 4:7, 히 6:4 등에서 사용됨
같지 않다. 종류가 다르다. 아담이 죽음을 줬다면 예수님은 생명을 주신다.
Ἀλλ’ οὐχ ὡς τὸ παράπτωμα, οὕτως καὶ τὸ χάρισμα· εἰ γὰρ τῷ τοῦ ἑνὸς παραπτώματι οἱ πολλοὶ ἀπέθανον, πολλῷ μᾶλλον ἡ χάρις τοῦ Θεοῦ καὶ ἡ δωρεὰ ἐν χάριτι τῇ τοῦ ἑνὸς ἀνθρώπου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εἰς τοὺς πολλοὺς ἐπερίσσευσεν.
로마서 5:16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15절 그 은사- 같지 않다. 그 범죄
16절 이 선물- 같지 않다. 그 사람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정죄에 이름
많은 범죄로 의롭다하심을 받음.
로마서 5: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아담 사망이 왕 노릇 하게 됨
예수 신자들이 왕 노릇 하게됨 (생명 안에서)
종에서 아들로의 전환
로마서 5: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의 범죄 많은 사람 정죄
한 의로운 행위 많은 사람 의로다 함 받아 생명에 이름
로마서 5:19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죄는 불순종이다.
생명은 순종으로 얻어진다. 순종과 불순종은 계명에 대한 것이다.
로마서 5:20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율법이 옴으로 죄를 명확히 드러낸다.
‘들어온’ 과거 완료. 옛날이 이미 들어왔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 – 은혜가 더 필요하다는 뜻이다. ‘더’는 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의 죄의 깊이를 말한다.
넘치다 ὑπερεπερίσσευσεν는 최상급으로. 과거형이다. 이미 넘쳤다.
로마서 5: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은혜(χάρις)도
그리스도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른다.
왕노릇 하다(βασιλεύσῃ) 부정 과거. 옛날에 왕노릇했다. 죄의 왕노릇은 직설법, 은혜의 왕노릇은 가정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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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5장 주석
로마서 제 5장
=====5:1
그러므로 – 이는 1장에서부터 4장, 특히 3:21부터 4:25까지의 내용에 대한 결론이
요 그 적용이 새롭게 전개되기 시작함을 시사한다. 4장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은 믿음
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고 또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구속된 자에게도 그 칭의의 혜택
이 전가됨을 말하였다. 이제 5장에 들어가면서 ‘그러므로'( , 운)라고 말하는 것
은 이신 칭의에 대한 결론뿐만 아니라 그 적용이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됨을 의미하는
것이니, 이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주어지는 칭의의 열매들을 언급
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 여기서 우리는 칭의의 결과에 대한 바
울의 진술에 대하여 살펴보기에 앞서 ‘믿음’ 자체에 대한 성격 규정이 필요하다. ‘믿
음’에 대한 견해에 따라서 본서의 나머지 부분이 어떻게 해석되는지가 판가름나기 때
문이다. 일반적으로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에 따른 선물이므로 칭의의 조건이 될 수 없
고 다만 율법과 대치되는 개념으로만 생각되는 경향이 있다(Deissmann, Michaelis).
이는 믿음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며 인간의 행위가 될 수 없다는 입장에서 취해
진 주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믿음이 순종과 동일시되며(히 3:18, 19), 본절에
서처럼 ‘믿음으로'( , 에크 피스테오스)라는 말이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 디카이오덴테스)이라는 동사의 조건이 되는 구
절에 대해서는 충분한 설명이 될 수 없다(3:22, 30;갈 2:16;3:14;빌 3:9). 이와 관련
하여 불트만(R. Bultmann)은 “공적에 대한 철저한 포기로서, 하나님에 의해 정해진 구
원의 길에 공손하게 굴복하는 것으로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것으
로서 ‘믿음'( , 피스티스)은 옛 ‘자아’ 대신 새로운 ‘자아’가 형성되는 순
종의 자유로운 행위”라고 역설하였다(Theologie des Neuen Testaments). 여기서 불트
만은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기보다는 인간의 결단에 의해서 즉 ‘아래서 위로’ 행
하는 행위임을 설파하였다. 이러한 불트만의 주장에는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보
수주의의 견해(Machen)를 부정하면서 ‘믿음’이라는 단어가 바울에게서 애매하게 사용
된 것을 수정해 보려고 하는 시도가 엿보인다. 그렇지만 ‘믿음’ 자체가 우리의 의지로
가능한 것인가 ? 불가능한 것을 바라고 믿는 그 ‘믿음’이 우리의 의지로 가능하다면,
합리적인 인간은 무엇을 근거로 불가능한 것을 믿는 신앙을 소유하게 되었는가 ? 불트
만은 이에 대한 구체적인 대답을 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믿음’에 대해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순종’이 ‘믿음’과 동일시되는 것은 ‘믿음’이라는 심적(心的)
요소가 외부적으로 하나님 앞에 ‘순종’이라는 것으로 구체화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
고 믿음은 심적 요소로서 이 역시 하나님의 은사(恩賜)가 아니고는 믿음을 지니는 것
이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에 응답할 수 있게끔 인간의 심
성으로 하여금 ‘믿음’을 향하도록 하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이 없이는 인간은 ‘믿
음’을 갖을 수가 없다. 따라서 ‘믿음’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며 그것이 언어로 표현될
때 칭의의 조건으로 보일 때가 있으며, 더욱 구체적으로는 ‘순종’으로서 나타나기도
한다. 한편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카이오덴테스'(
)는 동사 ‘디카이오오'( , ‘의롭다 하다’)의 단순 과거 수동태
분사형이다. 이는 본 서신을 쓰고 있는 바울과 당시 본 서신의 수신인인 로마 교회 성
도들이 이미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은 상태임을 암시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 예수 그리
스도는 죄인된 인간과 의로우신 하나님 간에 평화의 관계를 맺게 해주는 주체이시다.
여기서 바울이 ‘화평'( , 에이레네)이란 용어를 사용한 것은 죄인된 인간
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었으나(1:18;2:5)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진노의 문제가
해결 되었음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 그리고 또한 이 용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
간이 칭의를 얻게 된 결과를 설명하기 위하여 채택되었다. 그런데 혹자는 본절의 ‘화
평’이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화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 흐르는 평안
상태를 가리킨다고 본다(Shedd). 그러나 본절의 문맥을 고려할 때 그리고 기타 바울
서신에 나타난 ‘화평’이란 단어의 사용을 감안할 때 그와 같은 주장은 지지를 얻지 못
한다. 즉 본절의 ‘화평’ 앞에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
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라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대한 언급이 나오므로,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대한 언급이 나오므로, 하나님과 원수된 관계에서 벗어나 하나님
과 사랑하는 호의적 관계로 진전되었다는 맥락에서 화평이 이해되어야 한다. 또한 골
1:20에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셨다는 사실이 강조되었고 엡 2:14
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는 믿는 자의 화평이 되신다는 사실이 강조되고 있으므로, ‘화
평’이란 단어는 진노 아래 있던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평케 되었다는 견
지에서 이해될 수 있다. 결국 ‘화평’은 인간 내부의 인격적 변화를 말하기보다는 하나
님과 원수된 인간이 회복의 관계로 진전된 점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나님께 의롭다 하
심을 받은 성도는 하나님과의 우호적 관계라는 사실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샘물처럼
끊임없이 흐르는 하나님의 평화를 내적으로 누리게 된다.
=====5:2
그로 말미암아 – 바울은 인간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음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에 대해 다시 반복하여 말하고 있다. 이는 베드로가 이스라엘의 관원과 장로와 서
기관들 앞에서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행 4;12)라고 하면서 구원을
얻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뿐이라고 역설한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닌
다.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 초기의 동방 사본들과 서
방 사본들에는 ‘믿음으로’라는 문구가 없으며 현대의 일부 영역본에도 이 말이 생략되
어 있다(NEB, RV, RSV). 그러나 이 말이 나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본절의 문맥상 그
의미가 함축되어 있으므로 이는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한편 엡 2:18에서 바울은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
라”고 선언했는데, 이것은 본절과 내용상 같은 의미이다. 성도가 ‘믿음으로 서 있게’
되는 것은 오직 성령의 사역에 의한 것이며 ‘은혜에 들어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후사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본절에서 암시된 바와 같이 하
나님께서 예비하시고 약속하신 그 은혜 속으로 우리가 스스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들어감을 얻는’ 것이다. 여기서 ‘들어감’으로 번역된 헬라어 ‘프로사고겐'(
)은 ‘접근'(access), ‘인도’, ‘채용’ 등으로 번역될 수 있으나 여기서는
‘인도’의 의미로 봄이 가장 적절하다. ‘프로사고겐’은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나 신
앞에 인도되거나 소개되는 특권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F.F. Bruce). 성도
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를 구원주로 믿고 그의 자녀가 되었으며 그분에 의
해 존귀하심과 영광중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인도함을 받고 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는 1:23 주석
을 참조하라. 본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우코메다 에프 엘피디 테스 돝세스'(
)는 직역하면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 가운데 우리가 자랑하느니라’가 된다. 여기서는 개역 성경의 ‘즐거워하느니라’에
해당하는 동사 ‘카우코메다'( )가 다음과 같이 해석될 수 있다. (1)
일반적으로는 ‘자랑하다’란 의미를 지니지만 이는 유대인이 율법을 자랑하는 것과 유
사한 어감이 풍기기에 오히려 ‘즐거워하다'(rejoice, KJV, NIV, RSV)로 해석하는 학자
들이 많다(Hendriksen, Black). 그리고 혹자는 ‘영광스러워하다’, ‘영광을 돌리다’라
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Lenski). 그렇지만 본절에서는 ‘자랑하다’든지 ‘영광스러
워하다’든지 또는 ‘즐거워하다’든지 어느 번역을 취하든 의미상 별 차이가 없다. 바울
이 지금 진술하고자 하는 바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소망 가운데 있는 성도의 내적인
변화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머레이(Murray)는 ‘최고로 기뻐하고 자랑하는 것을 가리
킨다’고 주장한다. (2) ‘카우코메다’가 1절의 ‘소유하다’, ‘취하다’를 의미하는 ‘에코
멘'( 혹은 )의 해석과 같이 청유형(請誘形)으로 ‘즐거워하
자’로도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3절과 본절의 문자 구조를 비교해 볼 때 청유형보다
는 평서문의 문장이 더 자연스럽고 3절과도 조화가 잘 된다(3절 주석 참조). 그러면
성도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하며 즐거워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 첫째로, 하나님 아
버지의 영광은 곧 성도들의 영광이 된다고 그리스도께서 논증하셨기 때문이며(요
14:3;17:24) 둘째로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며 성도들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구원 계획이 완성될 것이기 때문이다(히 2:10;벧전 5:4).
=====5:3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 ‘환난’으로 번역된 헬라어 ‘들마세신'(
)은 동사 ‘들리보'( )의 여성 명사형이다. 원래 ‘들리보’는 포도
즙 틀에서 포도즙을 짜내듯이 피와 땀과 눈물과 고통을 ‘짜낸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즐거워하나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우코메다'( )는 동사 ‘카우
카오마이'( )의 1인칭 복수 현재형으로 ‘기뻐 날뛰다’, ‘의기양양해
하다’, 또는 ‘자랑하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바울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가
게 된 즐거움이 복음으로 인해 받게 되는 핍박과 환난보다 훨씬 큼을 강조하고 있다.
성도가, 괴로움과 슬픔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환난을 극복하며 오히려 즐거움 가
운데 힘차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세상의 즐거움과 고통은 잠깐 피었다 사라지는 안개
처럼 가변적(可變的)이요 일시적인 반면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하는 즐거움과 기쁨은
불변하며 영원하기 때문이다(고후 4:18). 더더욱 성도는 주님께서 약속하신 바, 영원
한 세계에 대한 소망이 지대하고 극명하기 때문에(요 14:1-3) 현재의 모든 고난을 즐
거움 가운데 상쇄(相殺)시킬 수 있다.
환난은 인내를 – 복음을 따르는 자들에게는 필연적으로 환난이 닥쳐오며 인내가 요
구된다(마 13:20-22). ‘인내’로 번역된 헬라어 ‘휘포모네'( )는 동사
‘휘포메노'( )에서 유래한 여성 명사이다. ‘휘포메노’에는 ‘최후까지 남
는다’, ‘참는다’, ‘계속하다’, ‘기다린다’는 의미가 있다. 성도들이 이 땅에서 그리스
도를 위해서 살 때 극심한 핍박과 고난이 임하나 이 모든 환난에서 성령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참고 견디며 끝까지 살아 남을 수 있게 된다. 여기서 성도의 인내는 성령의
사역의 결과로 주어지는 수동적 의미만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성도의 성품과
인격에서 우러나오는 자발적인 의미까지 함축한다(W. Hendriksen).
=====5:4
인내는 연단을 – ‘연단'(鍊鍛)에 해당하는 헬라어 ‘도키메'( )는 ‘증명
하다’, ‘시련을 주다’, ‘시험하다’, ‘분별하다’, ‘택하다’ 등의 의미를 가진 동사 ‘도
키마조'( )에서 유래한 여성 명사로서 ‘연단’ 외에 ‘인격’, ‘증거’,
‘문서’, ‘자격’등의 의미를 지니며, 일반적으로 ‘엄격한 시험 또는 혹독한 시련을 통
과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마치 용광로에서 금이 여러번 단련됨으로써 정금과 순금
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성도는 여러 가지 시험과 환난을 참고 견딤으로써 그 자신이 정
화된다. 여기에는 성령의 사역이 함께하며 이 믿음의 시련을 통과한 성도는 금보다 더
귀한 신앙인으로 증명된다(벧전 1:7). 혹자는 ‘도키메’를 ‘체험’으로 번역한다
(Calvin). 즉 그는 본절의 ‘도키메’를 ‘하나님의 확실한 보호하심에 대한 체험’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도의 삶에 있어서 환난을 당하고 그 가운데서 인내하는 이 모든
과정들이 체험이므로 본절에서는 이와 같은 포괄적인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 바울은 신앙에서 소망의 문제로 접근했다. 신
약성경에서 성도의 소망은 일반적으로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을 의미하지만 보다 구체
적으로는 ‘부활의 소망’을 의미한다(행 28:20). 바울은 죽은 자가 다시 사는 일이 없
으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을 것이며, 또한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 성도의 신앙도 헛되다고 가르쳤다(고전 15:12-16). 이 말은 그
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임을 보여 주고 있다. 한편 본절의 ‘이
루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테르가제타이'( )는 ‘만들어내
다’, ‘행하다’, ‘준비하다’, ‘정복하다’, ‘성취하다’ 등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본절에서는 어떤 사건에서 어떤 결과를 ‘산출해 낸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성도는
불 시험과 같은 연단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을 받으며 이러한 사실을 인식함
으로써 부활에 대한 소망이 구체화되고, 그 소망만을 붙잡게 된다. 또한 본절의 ‘앎이
로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도테스'( )는 ‘오이다'( )의 주격
남성 복수 분사이며, ‘오이다’는 ‘에이도'( )의 제 2 완료 분사이다. ‘에이도’
는 ‘기노스코'( )가 주로 육적(肉的)인 앎을 의미하는데 반해 영적 체
험을 통해 얻어지는 지식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그리고 ‘에이도테스’는 분사 형태이
므로 체험을 통해 획득한 영적 지식이 부단히 계속됨을 의미한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
의 영광을 바라는 소망이 물리적 지식이 아니라 부단한 영적 지식을 통해 성도의 삶
속에 확고하게 자리잡게 됨을 시사하고 있다.
=====5:5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 바울은 연단을 통해 이루어진 소망이 부끄럽게
하지 않는 근거를 설명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무엇보다 먼저 성도 가운데 계시며 역사
하시는 성령 때문이다. 성령께서는 성도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보증해 주시는(인쳐 주
시는) 분이시기에 전신앙(全信仰)의 과정에 함께 계시고 보증하신 그 약속이 이루어지
게 하신다. 한편 ‘성령으로 말미암아’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디아 프뉴마토스'(
)이다. 이처럼 헬라어 전치사 ‘디아'( ) 다음에 목적격인
‘프뉴마'( )가 오지 않고 소유격인 ‘프뉴마토스'( )가
온 것은 성령이 원인이나 결과가 아니라 하나의 수단 내지 방법이 됨을 암시한다. 본
절 외에도 신약 성경 전체에서 ‘디아’ 다음에 ‘프뉴마’가 온 경우는 단 한번도 없다.
다만 ‘엔 토 프뉴마티'( )처럼 여격이 와서 방법을 나타
낼 뿐이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성령을 받았다고 해서 자랑할 것이 되지 못함을 의
미한다. 왜냐하면 현재 자신이 성령으로 충만하다 하더라도 이것으로 장래의 구원까지
보장받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성령은 구원에 이르는 방법이요 수단이므로 중요한
것은 성령 그 자체보다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가까이 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이
시다. 예수가 아니면 하나님께로 갈 수 없는 것이다(요 14:6).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 성령께서 성도와 함께 계시는 결정
적인 근거는 바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때문이다. 따라서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계심
은 하나님의 사랑이 성도를 향해 물붓듯이 부어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바울은 8:39에서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
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고 선포할 수 있었다. 본절의 ‘부
은 바 됨이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여케퀴타이'( )는 3인칭 단수 완
료 수동태 직설법으로 ‘쏟아 부은 바 되었다’는 의미이다(has been poured, RSV). 여
기서 하나님의 사랑이 액체처럼 쏟아 부어졌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
은 충분히 넘치게 부어졌을 뿐만 아니라 모이는 물처럼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성도들
에게 베풀어졌다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언급하면서 그 사랑의 표현
이 가장 절정에 이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5: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 바울은 8절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라고 언
급함으로써 본절의 의미를 보충하며 더욱 명확하게 해주고 있다. 바울이 엡 2:3에서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
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라고 진술하고 있듯이,
‘연약할 때에’는 믿음이 약한 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시점
을 가리킨다. 이는 ‘연약할 때에’로 번역된 헬라어 ‘아스데논'( )의 의
미를 살려볼 때 분명해진다. ‘아스데논’은 ‘아스데네스'( )의 제 2격 복
수로서 ‘도움을 받을 수 없다’, ‘소망이 없다’는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의 자연인은 그 자신이 스스로 구원의 길을 찾을 수 있는 힘이나 소망이 전
혀 없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특히 바울이 ‘우리가 아직 연약하다’는 사실을 말한 것은
우리가 전혀 구원의 소망이나 그 길을 찾을 하등의 힘이 없었음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구체화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代贖)의 은혜를 받을만한 자격과
가치가 전혀 없었음을 강조하고자 함이었다.
기약대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타 카이론'( )은 ‘정해
진 시기에’ 또한 ‘적절한 때에’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 표현은 하나님의 경륜(經綸)이
세상 가운데에서 시행될 정확한 시점이 있음을 보여 준다(요 2;4;4:23). 하나님의 구
원 계획은 일찍이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예언된 바이거니와(사 7:14;53:2) 하나님
께서 일을 행하실 때에는 막연한 시기에 하는 것이 아니라 만세전(萬歲前)에 예정하신
계획에 따라 행하신다. 본절의 ‘기약대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때가
‘적절한 시기’ 즉 ‘인류에게 가장 소망이 없던 때’였음을 의미하는 바, 사건이 이루어
진 때의 중요성을 강조함과 더불어 배후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계획의 중요
성을 강조한다. 구약성경에 예언된 그리스도께서 기약대로 이 땅에 오셨듯이, 재림도
기약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마 24:42-44). 실로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로서 당신의 영
원하신 계획대로 인류와 유주의 역사를 다스리시며 성도들에게 약속하신 바를 반드시
성취하시는 분이시다(민 23:19).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 경건치 않은 자는 8절의 ‘죄인’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
었다(sinners, LB). 곧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이 죄인이며 또한 경건치 않은 자이다.
한편 ‘…를 위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페르'( )는 그 외에도 ‘…대신
에’, ‘…에 관하여’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불경건한 자들
의 입장에서 이루어진 대속적인 사건이었음을 나타낸다.
=====5: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혹 있거니와 – 본절에서는 의인(a
righteous man)과 선인(a good man)이 대조되어 있다. 혹자는 이 둘을 구분하여 ‘선한
사람은 의로운 사람보다 더 위대하다는 특징을 지닌다’고 진술한다(Lenski). 물론 문
자적으로나 그 의미상 두 용어는 엄격하게 구분된다. 의인이 정의의 차원에 서 있는
사람이라면 선인은 사랑과 덕을 베푸는 사람이라는 어감을 지니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Lightfoot, Murray). 그러나 바울이 히브리인들이 시문학에서 즐겨 사용하는 평
행 대구법(parallelism)을 이용하고 있으므로 본절은 평행된 두 구절이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나아가 서로의 의미를 보충해 주는 문장 구조를 지니고 있다. 다시 말
해 본절은 의롭고 선한 사람을 위해 극히 드물기는 하지만 가끔 죽는 사람이 존재한다
는 의미를 지닌다(Murray). 이와 같은 본절의 핵심은 인간 세상에서 위대한 사람을 위
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사람이 가끔 출현할 수 있다는데 있지 ‘의인’과 ‘선인’을 구
별하는데 있지 않다. 더 나아가 본절은 의롭거나 선한 사람을 위해 죽는 희생적 행위
자체도 죄인을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에는 결코 견줄 수 없음을 함축하고 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절대적 사랑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인간 세상의 보편적이고 통속
적인 사랑을 소개하는 형식의 비교법을 사용하고 있는 본절은 8절의 내용의 서론격이
다. 본절이 8절 내용에 대해 서론격이라함은 의인이나 선인을 위해 죽는 자는 혹시 있
을 수 있으나, 죄인을 위해 죽는 자는 결코 있을 수 없다는 점에 있다. 결국 본절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절대적 우위성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에는 너
무나도 무가치하고 자격이 없는 인간의 본질적 양상을 드러내고 있다.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 본절에 이르러 바울은 요점에 봉착하고 있다. 그
리스도의 죽으심은 ‘죄인들'( , 하마르톨론)을 위한 것이었다. 여기
서 ‘죄인’은 도덕적으로 의롭거나 선하지 않은 사람일 뿐만 아니라 아담과 하와의 범
죄로 시작된 인간의 전적 타락성과 부패성으로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J. Calvin). 이러한 의미는 9절에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이라는 대조적 표현이 나옴을 볼 때 분명하다. 사도 바울의 이러한 대조적 표현은 희
생된 생명의 무한한 가치와 그분으로 말미암아 은혜를 입은 사람의 무가치성의 대조를
극명하게 해준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 이에 대한 바울의 표현은 다양하게 나타
난다.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렸으니'(갈 1:4),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
하여 가난하게 되심'(고후 8:9),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엡 5:2), 그리고 ‘우
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딛 2:14)등으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으심에
대하여 풍부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한편 ‘…을 위하여'( , 휘페르)라는
표현이 6-8절에서 모두 네 번 나온다. 그는 본절에서 이 전치사 대신 그리스도의 죽으
심에 있어 대속적 측면을 강조하는 전치사 ‘안티'( , ‘때문에’)를 사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이 단어를 사용하지 않은 까닭은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
함과 더불어 그밖의 다른 것도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희생이
주는 대속적 특징 이외에 그리스도 안에 내재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따라 남을 위하여
행동한다는 의미를 강조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휘페르’라는 단어의 사용
은 매우 적절하다.
하나님께서…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 바울은 하나님과 그의 아들 그리스
도와의 밀접한 관계,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과 세상과의 화목(고후 5:19) 그리고
영적으로 죽은자를 사랑으로 이끄시는 그리스도(요 15:12, 13) 등에 관하여 많은 기록
을 남기고 있다. 그 중에서 바울이 두드러지게 나타낸 것은 특히 하나님의 사랑에 대
해서이다. 그는 이것을 강조하여 ‘하나님 자신의 사랑’이라고 지적하였다. 여기서 ‘자
기 자신의 사랑’이라고 말함은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적이고 영원하며 참됨을 의미한
다. 인간의 사랑은 자기 자신의 사랑이 아니라 모범을 따르는 사랑이요 배운 사랑이
다. 궁극적으로 인간의 사랑은 그 근원이 인간에게 있지 않고 그 사랑을 주신 하나님
께 있는 것이다.(요일 4:10, 19).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랑을 확고하고 구체적으로
인간에게 드러내셨으니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죄인들을 위하여 십
자게에서 죽게 하셨다. 한편 본절의 ‘확증하셨느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슈니스테
신'( )은 ‘추천하다’, ‘드러내다’란 의미이다. 그래서 영역 성경
을 ‘나타내 보여 주다'(demonstrate)로 번역하거나(NASB, NIV), 혹은 단순히 ‘보여 주
다'(show)로 번역하기도 했다(RSV). 무엇보다 본절에서 주목되는 것은 바울이 동사의
시제로 현재성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헬라어의 현재 시제는 현재에 발생하는 단
순한 사건을 기술하는 것 뿐 아니라 현재 진행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슈니스
테신’을 보다 정확히 번역하자면 ‘나타내 보여주고 계시느니라'(is demonstrating)로
된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은 과거의 단 일회적 사건으로 끝이 났으나 하
나님의 사랑은 바울이 본 서신을 쓰는 당시뿐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에도 끊임
없이 부어지고 있음을 나타내 준다.
=====5:9
본절은 6절과 8절 내용의 연속이나 좀더 자세하고 진일보한 면을 갖는다. 즉 6절에
서는 ‘우리가 연약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고 하
셨고 8절에서는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셧다’고 하
였다. 이제 본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해
주신 내용을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면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운'( )은 주로 ‘그런즉’ 또는 ‘그러므로’라
고 개역 성경에 번역되었다(1절;4:9, 10, 16, 22). 본절에서는 앞절의 설명과 연결짓
기 위해 유도된 접속사의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다음에 이어지는 구절이 이유를 나
타내는 분사 구문이기 때문이다. 또한 ‘운’은 앞에서 말한 바에서 한층 논리가 진전됨
을 암시한다.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 4:25에서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칭의에 대한 설명이 있었으나 본절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대속(代贖)에 대한 설명이
다. 즉 4:25은 부활을 통해 ‘생명을 주는 영’이 되신 그리스도가 칭의의 근원이라는
진술이며, 본절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으심이 칭의의 근거라는 진술이다. 이러한 사
실은 ‘그 피를 인하여’라는 표현에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 문구는 헬라어로 ‘엔 토 하
이마티 아우투'( )이며 이를 문자적으로 해석하
면 ‘그의 피 안에서’이다. 여기서 바울이나 전치사 ‘디아'( )를 사용하지 않고
‘엔'( )을 사용한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디아’는 ‘….을 통하여'(throught)
라는 방법, 수단의 의미를 지니나 ‘엔’은 ‘어떤 사물이나 사람의 상태, 조건’을 나타
내는 포괄적 의미를 갖는다. 특히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 엔
크리스토), ‘주 안에서'( , 엔퀴리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 엔 크리스토 예수)등의 독특한 표현을 사용할 때 ‘디아’를 썼다. 본절에서 ‘디아’의
사용은, 그리스도의 보혈에는 대속적 능력이 있어 죄인들을 의롭게 하는 근원이 될 뿐
만 아니라 한번 의롭다 함을 얻은 자들을 계속 다스리시고 역사하시는 권세와 능력이
있음을 함축한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었으며 이후
에도 그리스도의 피의 권세와 능력의 작용을 받아 계속하여 성화의 삶을 살게 되는 것
이다. 한편 본절의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은 1절의 ‘믿음으로 의롭
다 하심을 얻었은즉’이라는 표현과 비교가 된다. 두 구절은 상호 모순되는 것이 아니
라 서로 다른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즉 1절에서는 의롭다 하심을 얻음에 있어 인간
편의 책임과 의무로서의 믿음이 강조되었고 본절에서는 의인(義認)의 근거로서의 하나
님의 대속적 피흘림이 강조된 것이다.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인
한 진노하심에서의 구원이 칭의를 위한 연결 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 무엇보다 여기서
의 ‘칭의’는 재판관에 의해 무죄 선고를 받아 벌을 면하게 되는 법정적인 차원의 ‘의’
라고 단정지을 수 있다. 따라서 본절에서는 그리스도가 죄인된 인간과 진노하시는 하
나님 사이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 뜨리는 ‘화목 제물'(propitiation)이 되셨다는
의미가 강하게 부각되고 있다. 한편 ‘더욱’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폴로 말론'(
)으로서 비교법 강조의 의미를 지닌다. 즉 본절에서 ‘폴로 말론’
은 단순히 ‘더욱’이란 의미가 아니라 ‘훨씬 더’, ‘더욱더’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 말
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피흘림이 칭의보다 더 확실하고 분명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
고 있다는 뜻이다.
=====5:10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 이 표현은 ‘우리가 연약할 때에'(6절), 또는 ‘우리가 죄
인 되었을 때'(8절)란 의미보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있을 때에 형성되는 하나님과의
단절된 관계를 보다 명확하고 적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심을 이루
는 단어 ‘원수'( , 에크드로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즉 ‘하
나님을 향해 적개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는 능동적 의미를 갖는다는 견해
(Lightfoot)와 ‘하나님이 원수로 여기는 사람’이라는 수동적 의미를 갖는다는 견해가
있다(Murray, Harrison). 두 가지 견해는 서로 상충되는 것이 아니며 모두 일면 타당
성을 갖는다고 본다. 그러나 어느 한쪽만을 주장한다면 다른 일면을 소홀히 하는 자가
당착(自家 撞着)에 빠지게 된다. 다시 말해서 ‘원수’를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범죄성
의 측면에서만 이해한다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놓쳐버리게 되며, 또한 ‘원
수’를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와 진노하심에서만 이해한다면 죄에 대한 인간
의 책임을 간과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양자의 견해를 모두 포괄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원수하였을 때에’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크드로이 온테스'(
)의 ‘온테스’가 능동이나 수동의 의미가 아니라 현재 분사로서 다만
어떤 상태나 조건을 나타낼 따름이라는 점에서도 분명해진다.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 하나님과 죄인
된 인간이 화목(和睦)될 수 있었던 근거는 물론 ‘칭의’이다. ‘칭의’가 없이는 하나님
과 인간의 화목은 있을 수 없다. 공의로우시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죄의 상태에 머무
르는 자에게는 진노의 채찍을 내리시나, 의롭다 칭함을 받은 자에게는 하나님과 화목
한 관계에 들어갈 수 있도록 은혜를 내리신다. 바울이 이처럼 화목을 강조하는 것은
‘화목’ 자체가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바울이 고후 5:18
에서 언급하기를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화목케하는 직책’을 주셨다고 할 때에, 이 직
책이란 물론 죄악된 세상과 하나님을 화목케 하는 제사장적 직분(벧전 2:9)이지만 좀
더 포괄적인 의미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선전하는 직책’이다.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 상반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화목에 대하여 진술한 반면, 본 구절에서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화목에 대하여 진술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의 죽음보다 그리스도의 부활
이 죄인된 인간의 구원과 화목에 있어 더욱 확실한 보증이 됨을 역설하고 있다. 그 이
유는 (1) 그의 부활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를 따르는 무리에게 부활을 확증시켜
주셨으며, (2) 그의 부활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 , 조에)이 그를 믿는
성도들에게 공급되므로 성도는 그 생명으로써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고 하나님의 후
사가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바울은 고전 15장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보
다 부활을 더욱 강조하게 된 것이다. 한편 본절의 ‘화목된’과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각각 ‘카탈라겐테스'( )와 ‘소데소
메다'( )이며 이 둘은 모두 1인칭 복수 수동태이다. 이는 하나님
과 죄인된 인간과의 화목을 이루는 주체가 하나님이시며 또한 구원을 이루시는 분도
하나님이심을 드러낸다. 칭의와 화목 그리고 구원은 인간의 공로나 업적과는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과 부활로 말미암은 것이다(3:25-28).
=====5:11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 ‘화목을 얻게 하신’이란 표
현은 지금까지 바울 자신이 설명했던 ‘칭의’, ‘진노하심에서의 구원’, 그리고 ‘구원’
을 포함하는 의미로 해석해도 별 무리가 없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모든 과정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 여기서의 ‘즐거워하다'(
, 카우코메노이)란 말은 2, 3절에서 언급된 동사인 ‘카우코메다'(
)의 분사형에 대한 해석이다. 본절에서도 이 동사는 ‘자랑하면서 즐거워하다’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exalt, MB). 그러면 본절에서 의미하는 ‘즐거움’은 구체적으로
어떤 즐거움인가 ? 이에 대해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구속(救贖)의 은혜
를 입은 자들의 즐거움이다.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자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지심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었으며
영생을 소유하게 되었으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당연하다. 둘째로, 영원한 소망
을 바라는 즐거움이다. 바울은 2절에서 이 즐거움을 언급했으며 본서의 다른 구절과
고린도후서에서도 수차례 언급하고 있다. 8:18에서는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고 하였고 8:24에서는 “우리가 소망으
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라고 하였
으며, 고후 5;1에서는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
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라고 하였다. 셋째는, 참된
즐거움이다. 현재 이 세상에서 우리가 누리는 즐거움은 일시적이요 가변적이며 또한
거짓되고 기만적이나 그 근원과 이유를 하나님께 둔 즐거움은 영원한 즐거움이요 보증
이 있는 즐거움이기에 참되다. 이에 대해 칼빈(Calvin)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만물의
근원이요 축복 그 자체이시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함으로써
아무것도 부족할 것이 없는 행복을 누리게 된다’라고 하였다.
=====5:12
이러므로 – 이는 헬라어 ‘디아 투토'( )의 번역으로 어떤 학자
는 이 접속사가 6-11절과 12-21절 내용을 하나로 연결해 주고 있다고 보지만
(Lenski), 본절에서 이 접속사의 사용은 매우 부자연스럽다. 왜냐하면 지금까지의 진
술과 본절부터 진술될 내용은 직접적으로 어떤 상관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
리는 ‘디아 투토’를 별 의미 없이 다른 주제로 전환하기 위해 사용된 단순 접속사로
이해해야 한다. 이는 히브리식 문장 전개 방법임을 이미 2:1의 주석에서 설명한 바 있
다.
한 사람으로…들어오고 – 바울은 그리스도로 인해 새시대(new aeon)가 시작됨을
설명하기 위해 먼저 옛 창조의 시작에 대한 설명을 시작한다.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
는 사실은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가 오염되었음을 가리킴과 동시에 ‘죄의 세력’이 세상
을 지배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고 하셨던
명령을 염두에 두었음이 분명하다. 죄와 사망은 불가피한 연관성을 갖고 있다. 여기서
‘사망’은 (1) 육체적인 죽음, (2)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엡 2:1;5:14;골 2:13;딤전
5:6;계 3:1), (3) 지옥의 형벌로 영원한 죽음을 의미한다(계 21:8). 본절에서는 두번
째와 세번째 사망의 개념이 함께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렇지만 6:23은 마
지막 영생과 사망이 대조되어 있으므로 세번째 사망의 개념이 더욱 타당하다. 자세한
것은 6:23 주석을 참조하라.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 바울은 한 사람에 의해 세상에 들어온
죄가 보편성을 지님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그 죄의 보편성에 대해 증명을 시도하지
않은 것은 이미 1:18-3:19에서 이미 설명을 했기 때문이다.
이르렀느니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엘덴'( )은 일반적으로 ‘통
과하다’, ‘퍼져가다’를 의미한다. 그래서 몇몇 영역 성경은 문자적으로 ‘퍼져가다’
(spread to)로 번역하기도 한다(RSV, NASB). 그렇지만 또 어떤 영역 성경은 개역 성경
과 같이 ‘이르렀다'(came to)로 번역하기도 한다(NIV). 어떤 번역을 취하든지 본절의
의미를 손상시키지는 않는다.
=====5:13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 본절은 삽입구로서 반론(反論)을 염두에
두고 기록한 내용으로 보인다. 그 반론이란 ‘모세 율법이 있기 전까지 과연 죄가 존재
했던가’라는 물음이다. 이에 대해 바울은 답변하기를 하나님께서 비록 기록된 율법으
로 죄를 심판하지 않으셨으나 인류는 모태에 있을 때부터 저주 아래 있었다고 한다.
즉 율법이 공포되지 않았을 때의 범죄자들 또한 결코 죄의 형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모세 율법이 주어지기 전까지의 기간 동안 죄의 결과로 생
기는 사망이 인류를 지배했다는 점에서 증명된다(14절). 또한 이 같은 사실은 모세 율
법이 적용되기 이전의 시대에 아우를 죽인 가인이 하나님께 형벌을 받은 사실(창
4:9-15), 죄악이 관영했던 노아 당시의 사람들이 홍수로 심판을 받은 사실(창 6:1-7),
바벧탑 사건(창 11:1-9), 음란한 소돔과 고모라 성의 멸망(창 19:23-29)등 구약성경에
기록된 구체적인 여러 실례들을 통해서도 입증된다. 결론적으로 죄는 아담으로부터 모
세까지(14절) 기간에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구절에는 죄
의 (1) 역사성(歷史性)과 (2) 보편성(普遍性)이 시사되어 있다.
율법이 없을 때에는…아니하느니라 – 모세 율법 전에도 각 나라마다 비록 원시적
이긴 하지만, 사회를 통치해 나가는 불문률(不文律)과 법률 및 도덕적 관습이 있었으
며 사람들은 그것들의 지배를 받아왔었다(Ur-Nammu Code, Eshnunna Code, Lipit-Ishta
Code, Hammurabi Code, Hittite Code). 그러므로 율법 이전에도 ‘죄에 대한 정죄’가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왜 본절과 같은 진술을 하였는가
? 바울은 단순히 법에 저촉되는 ‘죄’에 대하여 진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보다 보편
적인 의미에서의 죄, 곧 하나님과 분리되고 하나님을 반역하는 삶 그 자체를 죄로 규
정하고 있다. 율법이 있기 전에 사람들은 죄를 윤리적인 것으로만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었으며, 따라서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과 분리되고 하나님을 반역하던 삶이 죄라는
사실을 몰랐으므로 그러한 것을 죄로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 율법이 주어지
기 전에는 하나님 앞에서의 죄 의식이 결여 되었다는 것이다. 역으로 모세 율법이 공
포되었을 때 인류는 진정한 의미에서 죄를 죄로 인식하게 되었다.
=====5:14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 아담과 범죄는 (1) 하나님께 대한 불
순종이며, (2) 하나님과 같이 되어 보려고 하는 교만이었다. 그리고 모세 이전 사람들
이 이와 동일한 범죄를 짓지 않았을지라도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동일한 죄인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담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거역하는 본성을 이어 받았기 때문이
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호세아 선지자는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호 6:7)라는 표현
을 사용하여 인간의 범죄가 단순히 자범죄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파생된 근본
적인 죄임을 선포하고 있다.
사망이 왕노릇 하였나니 – 본 구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바실류센호 다나토스’
( )는 ‘사망이 왕권을 잡았다’로 번역된다
이 말은 세상이 죄악으로 충만했다는 의미이며, 보다 적극적으로는 죄악의 세력이 꺾
을 수 없을 만큼 강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말에 대조 되는 것으로 바울은 ‘은혜
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21절)라고 표현했다.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 이렇게 아담을 그리스도의 표상(表象)이라고 일컫는
것은 이상하게 생각될 수 있다. 두 사람은 신분이나 인류에게 미친 영향면에서 판이하
게 다르기 대문이다. 그러면 아담이 그리스도의 표상이 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
(1) 아담이 옛 시대의 시조인 것처럼 그리스도는 새 시대의 시조이다. (2) 아담의 범
죄가 모든 사람에게 미치듯이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義)도 모든 사람에게 미친다(고전
15:22;고후 5:14, 15). 즉 아담이 범죄의 시조라면 그리스도는 의의 시조이시다. 이
두 가지 의미에서 아담은 예수 그리스도의 ‘전형'( 튀포스)이 될 수 있
다 (type, RSV)
=====5:15
그러나( , 알라) – 이는 앞에서 말한 내용과 반대되는 뜻의 내용이 전개될
것임을 암시한다. 앞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와 아담의 유사점을 말하였으나 본절에서
는 그리스도와 아담의 차이점을 말하고자 한다.
이 은사 – 이는 언급된 사실과 관계있는 것이 아니라 본절에 언급된 ‘은혜’와 관계
된다.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 ‘그 범죄’라 함은 ‘아담의 범죄’와 ‘아담의 범죄외의
다른 범죄’, 즉 ‘모든 범죄’를 지칭할 수 있다. 그러나 본절 하반절은 아담의 범죄와
그리스도의 은혜를 비교하고 있으므로 대표적으로 ‘아담의 범죄’라고 해석하는 편이
타당하다. 그리고 헬라어 본문에서 ‘범죄'( , 파랖토마)가 단수형
이라는 사실도 이 견해를 지지한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의 은사'( ,
카리스마)와 아담에서 비롯된 ‘인간의 보편적인 범죄’를 대조시키면서 ‘하나님의 은
혜’를 부각시키는 논리를 전개시키고 있다.
한 사람의…죽었은즉 – 12절에서 바울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
와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고 했으나, 본절에서는 ‘모든 사람’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두 용어 사이에는 의미상 아무런 차이가 없다.
대표 단수를 사용하든지 단순히 복수를 사용하든지 헬라어 문법에서는 ‘모든’을 의미
할 수 있다. 물론 영어 문법에서는 ‘모든’을 의미할 수 있다. 물론 영어 문법도 이와
같다. 인간의 부분적 타락을 주장하기 위해 이러한 사실을 무시해 버리려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으나, 이것은 바울이 앞에서 ‘모든’이라는 총칭 형용사를 사용한 것과 비교
할 때 전혀 근거가 없다.
더욱 – 이 단어는 9절에서와 같이 단순한 비교가 아니라 비교급 강조의 의미를 갖
는다(much more, KJV). 아담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사망에 처하게 되었으나 그리스도
의 은혜로 죄와 사망의 권세는 무너지고 더 나아가 모든 사람은 소망과 기쁨 가운데
넘치는 삶을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Lenski).
하나님의 은혜 –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
암은 선물’과 동일하다. 하나님의 은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말미암아서만 모든 사
람에게 미치기 때문이다.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 앞에서 이미 바울은 ‘한 사람의 범죄’를 언급했으
나 지금은 ‘한 사람의 은혜’에 대해 진술하고 있다. 범죄가 한 사람 아담으로부터 시
작되었듯이 은혜도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로써 상반절의 ‘이 은
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명확해진다.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 여기서 ‘많은 사람’은 앞에 언급된 ‘많은 사
람’과 대조를 이룬다. 그리고 ‘넘쳤으리라’는 동사는 14절의 ‘왕노릇하였나니’라는 동
사와 대조를 이루고 있다. 한편 ‘넘쳤으리라’로 번역된 헬라어 ‘에페릿슈센'(
)은 ‘물이 그릇에서 넘쳤다’, ‘강물이 둑에서 넘쳤다’는 뜻으로 그
리스도의 은혜가 인류를 구원하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로 넘치며 모든 믿는 자에게 구
별없이 풍성하게 부여된다는 문맥상의 의미를 갖는다. 또한 동사 ‘에페리스슈센’은 목
적어로서 ‘에이스 투스 폴루스'( , ‘많은 사람에
게’), 즉 4격을 취한다. 헬라어에 있어 4격은 3격과 같이 단순 목적의 의미를 지닐 뿐
아니라 ‘…을 꿰둠고’, ‘…을 관통하여’라는 의미도 내포한다. 즉 그리스도의 은혜
가 개인의 전인격을 철저히 변화시키며 죄악을 씻고 거듭나게 한다는 것이다.
=====5:16
본절에서 바울은 범죄와 은혜의 기원(起原)과 그 위력(威力)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
한다. 즉 범죄는 한 사람에서부터 시작되었으나 은혜는 사망이 왕노릇하는 데서, 또는
범죄가 만연되어 있는 데서 비롯되었다. 이것은 ‘은혜’의 기원과 위력이 ‘범죄’보다
훨씬 더 크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이 선물( , 도레마) – 이는 15절에서 언급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을 가리킨다. 15절에서 ‘은사'( , 카리스마)가
‘범죄'( , 파랖토마)와 비교되었고 본절에서는 ‘은사’가 ‘심판’
( , 크리마)과 비교되었다. 은사는 값없이 주는 용서이며 심판은 엄격한 공
의로서 모두 하나님이 주체이시다. 만일 하나님께서 공의로 심판하신다면 우리는 모두
버림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죄를 용서
하셨고 값없이 우리를 의롭다 하셨다. 본절은 바로 이 칭의의 선물이 심판의 효능보다
우월함을 선언하고 있다.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 ‘의롭다 하심'( , 디카이오마), 곧 칭
의(稱義)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피 흘려 죽게 하심으
로 죄인들을 사면해 주시고 의로운 자들이라 칭하신 것으로서 이는 하나님께서 죄인들
에게 주신 선물이요 은사이다. 또한 18절의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
라’를 보면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은 구원을 얻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의롭다 하심이
없이는 구원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은 아담의 범죄로 인해
죄와 사망의 세력 아래 놓인 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말미암아 죄사함
을 받고 하나님과 원수된 상태에서 회복되어 구원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5:17
사망이…왕노릇하였은즉 – 본절은 12, 14절의 말씀을 요약 반복하고 있다. 즉 아
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죄가 선하게 창조된 세상에 들어와 온 세상을 오염시켰고 그 가
운데서 통치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이로써 본래 하나님을 최고의 통치자로 삼고, 그의
대리자로 인간, 그리고 인간의 지배를 받는 만물 순의 질서 체계가 죄의 지배력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대신에 죄(사단)가 최고 통치자로 군림하게 되어 하나님의 존재가 완
전히 무시되어 버림과 동시에 인간도 아무 주체 의식 없이 죄의 종노릇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질서 내지 통치권의 변화는 예수께서 광야에서 시험받으시는 장면에도 잘
묘사되어 있다(마 4:8, 9). 마귀는 천하 만국을 자기의 것인양 자랑하면서 예수로 하
여금 자기에게 경배할 것을 요구하였다. 여기서 ‘경배하라’는 사단의 요구는 최고의
통치자로서 마땅히 받아야만 하는 예배행위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사단에
게 세상의 지배권을 행사할 권리를 부여하셨는가 ? 결코 그렇지 않다. 마 28:18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예수 자신이 친히 하나님으로부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셨음을 가르쳤다. 만일 그러한 권세가 없다면 예수는 세상의 구주 또는 주인
(Lord)이 될 수 없다. 다만 사단은 자신이 그러한 권세를 가지고 있는 것인 양 속이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실제로 사단이 죄로 세상을 오염시켰다는 의미에서는 그 역시 세
상의 지배자로서 자처할 수도 있을 것이다.
더욱 – 본장에서 바울이 즐겨 사용했다. 자세한 것은 9절 주석을 참조하라.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 여기서 ‘은혜’와 ‘의의 선물’은 별개의
개념이 아니라 동일한 의미에 대한 서로 다른 표현으로서 저자가 주장하려는 논지의
의미를 분명히 밝혀 주는 구실을 한다.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왕노릇하리로다 – 상반절과 비교할 때 대조와 구분이 완
전해지려면 본 구절은 ‘생명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왕노릇하리로다’라고
구성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본절에서는 ‘왕노릇하다’의 주어가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다. 이것은 분명히 바울의 의도적인 변형이지만 틀린 말은 아니
다. 바울은 분명히 성도가 ‘하나님의 후사(後嗣)’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성도
가 ‘하나님의 후사’라는 것은 단순히 ‘유업을 잇는 자'(갈 3:29)만을 의미하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갖는 영광된 신분을 강조하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실제로 계 22:5
에서는 성도가 영원 무궁토록 ‘왕 노릇할’것이 언급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는
성도의 신분을 ‘왕 같은 제사장'(벧전 2:9)이라고 했다. 그리고 ‘왕노릇’이란 말은
‘죄의 종’되었던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위치가 정반대로 바뀌게 됨을
보여주고 있다(21절).
=====5:18
바울은 다시 12절부터 지금까지 진술했던 것을 요약하여 말하고 있다(Murray). 그
러면서 그는 죄인된 인간이 생명에 이르게 된 과정을 설명한다. 즉 (1) 한사람(아담)
의 범죄로 -> (2)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으며 -> (3) 예수그리스도의 의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 (4)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 (5) 생명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
과정에 바울이 그동안 진술했던 ‘믿음’과 ‘화목’을 삽입해 보면, ‘믿음’은 (3)과 (4)
사이에 그리고 ‘화목’은 (4)와 (5) 사이에 삽입될 수 있다.
그런즉( , 아라 운) – 12절에서부터 17절까지의 내용을 요약하는 결
론이 시작됨을 나타낸다. 죄와 율법에 관한 13, 14절 내용과 구원의 은혜와 범죄에 대
한 심판을 대조시킨 15-17절 내용으로 중단되었던 아담과 그리스도 간의 비교가 12절
에 이어 다시 본절에서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12절에 천명된 결론이 본절
에서 다시 언급되고 있다.
한 범죄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 헤노스 파랖토마토스'(
)는 두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즉 한글 개역 성경과 같이 ‘한 범죄’
로 해석하거나 영역 성경이나(the offence of one, KJV;one man’s trespass, RSV) 독
일어 성경처럼(eines Sunde, Luther Bible) ‘한 사람의 범죄’로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
다. 어느 경우를 취하든지 전후 문맥상의 의미에 있어서 별다른 차이를 초래하지 않으
나 후자의 해석이 지배적이다. 헬라어사본들 중의 가장 유력한 사본들 중 하나인 알렙
사본( )을 위시하여 고대 라틴어 사본들은 본문의 ‘헤노스’ 다음에 ‘안드로포스’
( , ‘사람’)을 첨가하고 있으며 많은 역본들이 이를 따르고 있다. 그
리고 15-17절에 ‘한 사람’이란 표현이 일관되게 반복 사용되고 있는 점으로 보아서도
‘한 사람’이 원문에 충실한 듯하다. 아무튼 본 문구는 ‘한 사람 아담의 범죄’를 가리
키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정조에 이른 것같이 – ‘많은 사람’으로 번역된 헬라어 ‘판타스 안드로
푸스'( )는 ‘모든 사람'(all men, KJV, RSV)을 의미
한다. 아담 한 사람의 범죄는 세상에 사망의 권세를 가져왔고 전인류는 이 사망의 권
세에 눌려 종노릇을 하게 되었다.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본문(
, 디 헤노스 디카이오마토스)은 ‘한 사람의 의로운 행동으로 말미암
아’라는 뜻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우신 행동을 가리킨다. 그런데 많은 학자
들은 여기서 ‘의로운 행동’ 즉 ‘디카이오마토스'( )를 ‘칭의의
행동’으로 해석한다(Meyer, Gedet). 그러나 ‘디카이오마토스’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없다고 여기시는 행위’, 곧 ‘하나님의 칭의 행위’란 뜻을 지닌 ‘디카이오시스’
( )와 구별되므로 ‘의로운 행동'(one man’s act of righteousness,
RSV)으로 해석됨이 무방하다(Murray, Holsten 등).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운 행동이란
예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행하신 모든 행동, 즉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행하신 모
든 행동, 즉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행하신 사역들을 총칭한다. 물론 이 구원사역은
십자가 사건에서 최절정을 이룬다.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고 구원을 얻는 근거는 바
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생명에 이르렀느니라 – 이 헬라어 본문 ‘에이스 판타스 안드로푸스
에이스 디카이오신 조에스'(
)를 번역하면 ‘모든 사람에게 생명의 칭의가 이르렀다’이
다(KJV, Modern Language Bible). 헬라어 본문은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
다’는 것을 말함이 아니라 ‘생명의 칭의'(justification of life)곧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 자체가 이미 ‘생명’에 이른 것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한편 ‘모든 사람이
생명의 칭의에 이르렀다’함은 만인 구원론(Universalism)을 뜻함이 아니다. 성경은 분
명히 그리스도를 믿고 구주로 섬기는 자들에게 구원이 임함을 밝히고 있다(요
3:16;14:6).
=====5:19
본절은 앞절 내용의 단순한 반복이 아니다. 앞절에서 바울은 일반적으로 범죄와 의
를 대조시켰으나 본절에서는 그 범죄와 의의 본질적 성격을 설명하고 있다. 즉 하나님
께 대한 아담의 범죄는 그 자신의 자발적인 불순종에 그 뿌리가 있으며 그리스도의 의
는 하나님께 대한 그분의 자발적이고 절대적인 복종에 근거한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 아담의 범죄, 곧 원죄(原罪)를 말한다. 아담이 범
죄한 내용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것이다. 에덴 동산의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아담이 거스린 것은(창 3:1-6) 순간적이요 단순하게 보일지 모르나
이는 창조주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고자 마음 먹었던 교만한 행위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불순종의 행위였다.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같이 – 12절에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다’고 선포했으나
15절에서는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진술했으며, 18절에서는
다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르렀다’고 선언했다. 한편 ‘죄인된 것같이’에서 ‘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테스타데산'( )은 단순 과거 수동형으로
‘제정되었다’, ‘설립되었다’는 의미이다. 이는 KJV와 RSV가 번역한 것처럼 단순히 ‘만
들어진 바 되었다'(were made)는 의미가 아니라 ‘법적 판결을 받았다'(were
constituted)는 의미이다(NIV).
한 사람의…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 ‘순종’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바울
은 죄인된 것을 불순종에 대한 인간의 책임과 연관짓고 있다. ‘순종’이라는 용어에는
인간의 책임 문제가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히 3:18, 19;4:2, 6). 무엇보다 ‘순종’이라
는 단어는 ‘아담의 불순종’과 ‘그리스도의 순종'(사 53:12;요 6:38, 39;10:17,
18;17:4, 5;빌 2:7, 8;히 5:8, 9), 특히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순종’에 대한 대조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Murray). 그리고 성도의 순종은 그리스도의 순종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데(히 5:8, 9),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순종하는 자’에게 죽기까지 순종하셨던 그
리스도가 성취하신 결과를 아무 대가 없이 은혜로 주시기 때문이다. 한편 ‘의인이 되
리라’에서 ‘되리라’로 번역된 헬라어 ‘카타스타데손타이'(
)는 미래 수동형으로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제정(制定)될 것이다’라는 의미이다.
혹자는 이 단어가 미래 시제임을 생각하여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성도들이 받을 영광을
언급하고 있다고 말한다(Meyer). 그러나 이보다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의롭다
고 인정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과거와 현재및 장래를 포함하는 모든 시대에
지속적으로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이 무난하리라고 본다(Murray, Sanday).
=====5:20
헬라어 성경 본문에는 본절 초두에 ‘데'( )가 언급되고 있으나 한글 개역 성경
은 이 접속사를 번역하지 않았다. KJV는 이를 ‘더욱이'(Moreover)로, Modern Language
Bible은 ‘그러나'(But)로 번역하고 있다. 아무튼 ‘데’는 본절에서 새로운 개념, 곧
‘율법’에 관해 이야기를 하려고 유도된 것이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 본 구절은 인간에게 모세 율법이 부여되었음을 말하나 이는
모세를 통해 주어진 율법이 최초로 사람들에게 주어진 법이 아니라 그 이전에 법이 선
재(先在)함을 나타낸다. 이는 ‘가입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레이셀덴'(
)이 단지 ‘들어왔다’라기 보다는 ‘곁에 들어오다'(came in beside,
Green), ‘미끄러져 들어오다'(slipped in, Modern Language Bible)를 뜻하기 때문이
다. 실제로 모세이전 아브라함이나 야곱 등과 같은 족장들은 그들에게 부여된 하나님
의 명령에 따라서 믿음의 길을 걸었고 모세 시대에는 성문화된 율법이 부여된 것이다.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 이 말은 율법이 세상에 들어옴으로써 사람으로 하여
금 더욱 죄를 짓도록 동기를 유발시켰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
께서 죄를 증가시켰다는 말이 된다. 헨드릭슨(Hendriksen)은 본 구절을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즉 “이것은 하나님께서 죄를 증가하게 만들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완전하신 사랑의 요구에 비추어 보아(마 22:37-40;막 12:29-31;눅 10:27) 인
간으로 하여금 죄의식에 예민해지게 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과 목적이었음을 의미한
다. 율법은 모든 죄의 가증함과 그 결과가 드러나도록 한다”(3:20;7:7, 13;갈 3:19).
또한 혹자는 “범죄를 더하게 하는 것은 율법의 우선적인 목적이 아니라 부차적인 목적
이다”라고 설명한다(Black). 이러한 주장에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동의한다. 바울의 의
도는 무엇보다 율법이 옴으로써 그 전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않았던 것을 확실히 죄로
인식하게 되었다(13절)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는 것이었다. 혹자는 딤전 1:9-11을 본절
과 연관지어 율법이 죄를 억제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한다(Herrison). 그러나
분명히 성도들이 인식해야 할 사실은 율법 자체가 죄를 억제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실제로 딤전 1:9-11에서는 이러한 암시가 전혀 없다. 오히려
딤전 1:9-11은 율법의 정죄 기능, 즉 사람이 자신의 행위가 옳은가 그렇지 않은가를
율법을 통해서 정죄받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 이 말은 율법이 주어짐으로써 범죄의 사실
이 더욱더 드러나 인간이 깊은 정죄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되면 될수록 인간을 향해 쏟
으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더욱 풍성하게 드러난다는 의미이다. 바꾸어 생각하면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 곳에서는 죄사함도 없으므로 용서에 대한 은혜를 깨닫는 일도
없다. 다만 죄가 죄로서 정죄되는 곳에서는 그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가 더욱 풍성하게 드러난다. 이러한 사실은 ‘죄가 더한 곳에’의 ‘더한’에 해당하는 헬
라어 ‘에플레오나센'( )이 ‘넘치다’라는 의미를 지니며, 반면 ‘은
혜가 더욱 넘쳤나니’의 ‘더욱 넘쳤나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페레페릿슈센'(
)이 최상급의 최상급, 즉 강조 최상급으로 ‘넘침보다도 더욱
넘쳤다’는 의미를 지닌다는 점에서 분명해진다(Murray). 다시 말해 은혜의 세력은 죄
의 세력을 휠씬 능가할 뿐만 아니라 완전히 말살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 상처입고 병
들어 죽어가는 자를 완전히 소생케 한다.
=====5:21
본절에는 바울이 그동안 논의해 왔던 중요한 개념들이(죄, 사망, 왕노릇, 은혜,
의, 예수 그리스도, 영생) 종합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그래서 혹자는 본절을 ‘너무도
아름다운 끝 맺음’이라고 극찬하였고(Hendriksen) 송영과 같은 가치를 지녔다고 말하
기도 했다(Denney).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한 것같이 – ‘사망 안에서’란 표현은 ‘생명 안에서'(17절
하반절)란 표현과는 정반대의 개념으로서 죄가 역사하는 한계를 의미한다. 죄의 결과
로 사망이 세상에 들어왔다(12, 14절; 6:23). 따라서 죄는 ‘사망 선고를 받은 자들’
곧 ‘사망의 세력 아래에 있는 자들’에 한해서 왕노릇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칭의(稱義)
의 은혜를 받은 자들에게는 결코 죄가 왕 노릇할 수 없다(Lloyd Jones). 바울은 6장에
서 이것을 ‘죄의 종’과 ‘의의 종’의 개념으로 대조시켜 설명하고 있다.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 앞 구절과 완전한 대조를 이루기 위해서
본 구절의 ‘왕노릇하여’ 앞에 ‘생명 안에서’라는 말을 삽입시켜 이해하면 된다. 이와
같은 대조를 통해서 우리는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 즉 ‘사망 안에서 종 노릇하는
사람’과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는 사람'(17절)이 구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한 분명한 구분은 예수의말씀 중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
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라는 선
포 가운데 가장 잘 나타나 있다.
로마서 5장 강해
로마서 5장 강해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화평 (롬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1절).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것은 의롭다 하심의 결과입니다. 여기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는 뜻은 ‘의롭게 간주되다’ 혹은 ‘의롭게 여겨지다’입니다. 결코 우리 스스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의롭게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며 거룩하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순전히 하나님 편에서 의롭게 여겨주신 것이요 의롭다고 간주해 주신 것입니다. 주의 목적에서 의로운 인생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의 범죄함을 인하여 내어줌이 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바라보고 그를 믿는 믿음이 하나님의 의를 우리에게 임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죄의 용서함을 받았으므로 이제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1. 이것은 복종으로 인한 화평입니다.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피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고후10:5)
죄인은 하나님과 적대관계에 있습니다.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하와의 선악과 범죄는 권위에 대한 보공을 거부한 데서 생겨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말라’고 했으나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권위를 인정하지 아니하고 불복종함으로써 인간에게 범죄가 들어온 것입니다. 그리고 이 죄로 인하여 인간에게 죽음과 온갖 고통이 왔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하나님과 그 아들 그리스도에게 입 맞추기를 거절하고 복종하지를 않습니다. 이 세상에 분열과 분쟁과 다툼이 끊어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평화를 누리기 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하나님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땅에 세우신 모든 권위자들에게도 순복해야 합니다. 이 권위에 대한 순복이 거부될 때 평화는 깨어지고 갈등이 첨예화되는 것입니다. 참된 권위에 대한 복종이 없는 곳에 평화는 없습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이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에 절대적으로 복종함으로써만 가능한 것입니다.
2. 이것은 화해로 인한 화평입니다.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돌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엡2:15)
아담의 범죄로 하나님과 원수된 인간은 실낙원하여 멸망의 길로 나아갔습니다. 때로는 그 낙원을 찾아 하나님께 가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가로막힌 담을 헐 수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거룩하신 하나님께 죄인인 인간이 가까이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엡2:14,15)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난미과 인간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졌습니다. 인간이 그 전에는 하나님께 대한 원수로 살았으나 이제는 하나님을 주로 모신 것입니다. 그래서 참 평화를 얻게 되었습니다. 전에 하나님과 원수되었을 때에는 우리의 마음과 육체에 참 화평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미워하는 마음, 원수된 마음은 사람에게 엄청난 갈등과 내적 고통을 안겨다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의 중재로 하나님과 화해함으로써 인간은 참 평화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3. 이것은 확신으로 인한 화평입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일지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우리의 화평은 휴전상태와 같은 일시적이고 언제 깨어질지 모르는 화평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므로 다시는 그의 사랑에서 끊어질 수 없는 은총을 누리며 안식할 수 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인은 미래에 대한 확실한 소망에 살기 때문에 결코 불확실성의 사회에 사는 불신자들과는 그 상태가 전연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한치도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러한 기대는 우리의 마음에 충분한 영적 활기를 불어넣고 용기를 북돋아 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소망이 실현될 시기가 가까울수록 그리스도인은 기쁨과 행복을 더욱 소중히 간직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값없이 주시는 사랑 (롬 5:2)
본문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은혜를 얻었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하고 그로 인해 즐거워한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본문을 통하여 가장 적절하고 충분한 은혜, 곧 불경건하고 서로 사랑할 줄 모르고 사랑할 만한 가치조차 없는 자들을 향해 값없이 주시는 사랑의 은혜에 참여하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벧전5:12) 이제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사랑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참사랑은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부터 존재하였습니다.
참사랑은 인간에 의해 존재하기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 속에 내제되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인간의 공동체가 만들어 낸 것도 아닙니다. 참사랑은 처음부터 인간과는 상관없이 존재하였습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서로 사랑하라'(눅10:27)는 계명을 주심과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자신을 십자가에 던지신 사랑의 실천으로 비로소 참사랑이 존재하기 시작한 것도 아닙니다. 이 참사랑은 그리스도의 사역 이전에도 존재하였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를 보내도록 한 것은 하나님의 참 사랑이었습니다. 곧 하나님의 세상을 향한 참사랑이 독생자 예수까지 보내게 하신 것입니다. (요3:16)
2. 참사랑은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비로소 우리에게 이르렀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참사랑이 그리스도의 오심 이전에도 존재하였지만 그럼에도 그리스도가 오시기 이전까지는 아직 참 사랑이 우리에게 이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극단적으로 말해서 그리스도의 오시기 이전까지 율법의 정죄 아래 있던 인류에게 참사랑의 마땅한 열매인 죄의 사유와 구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인류에게 사유가 이루어졌습니다. 구원이 성취되었습니다. 인간은 아무런 공로없이 그리스도를 의지함으로써 구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랑의 계명을 주심과 참된 사랑의 실천으로 사랑을 우리에게 느낄 수 있도록 했으며, 우리를 참사랑에 초대하신 것입니다. 결국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이전부터 존재하였던 창조주 하나님의 참사랑을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하여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인해 우리는 참 사랑 안에 서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곧 값없이 주시는 은혜요 참사랑입니다.
3. 참사랑은 영속적인 삶의 원천입니다.
하나님의 인간창조와 함께 시작된 참 사랑의 역사는 지금도 우리 안에서 계속되고 있으며, 우리는 그 참사랑 안에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 값없이 주시는 참사랑은 영속적인 화평과 보호로 나타납니다. 또 이 참 사랑 안에는 우리의 필요를 채우고도 남을 만큼 모든 것이 들어 있습니다. 이렇게 값없이 주신 참 사랑의 창고에서 신앙없는 죄인들은 자신들의 필요를 채울만한 가치있는 것들을 찾지 못합니다. 아니 이런 값없이 주신 사랑의 창고가 존재하는지조차 모릅니다.그러면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참사랑을 소유하고 또 그 사랑 안에 거하는 우리는 이 사랑의 창고에서 어떠한 삶의 원천을 찾아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사랑의실천입니다. 곧 값없이 받은 사랑을 나누어 주는 것은 자신이 받은 은혜를 함께 나눔으로 그 가치를 배가시키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참 사랑은 영속적인 원천이기 때문에 아무리 나누어도 줄어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욱 풍성한 사랑의 열매가 맺어질 것입니다.
4. 참사랑은 기쁨과 소망을 줍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화해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풍성한 사랑이 자리잡고 있으면 그 곳에는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기쁨은 우리에게 견고하게 보장된 기쁨으로 과거와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참사랑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지식에서 뿐만이 아니라, 이후에 그 사랑이 우리를 위해 행할 바가 무엇인지를 아는 지식에서도 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미래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는 소망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또한 기뻐합니다. 사도 바울도 이러한 참사랑을 확신하고 로마의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모든 기쁨과 평강이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되기를 원한다고 기도하였습니다. (롬15:13) 우리가 하나님의 참 사랑 안에서 화평을 누리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의 화평이기 때문이며(엡2:14), 우리가 참 사랑의 은혜 가운데 언제나 삶의 보장을 받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참사랑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는 소망 가운데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은 역시 전능하신 그리스도 자신이 바로 우리의 소망이시기 때문입니다.(딤전1:1)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사랑을 깨우쳐 주셨을 뿐만 아니라 참사랑 그 자체입니다.
고난과 영광 (롬 5:3)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완전한 행복을 찾아 헤매지만 절대적인 행복을 얻는 인간은 없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과 불행의 혼돈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죄에서 해방되어 구속받은 성도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땅에서 고난을 당함은 세상 사람들이 절망 속에서 당하는 고난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의 고난은 소망이 없으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고난을 통해 다가오는 찬란한 미래의 영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본문에서 우리가 환난중에서도 즐거워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3절) 그럼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땅에서 겪는 고난의 의미는 무엇이며 고난의 결과는 어떠한 것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 성도의 환난
많은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한 구속이 이 세상에서의 성도들의 모든 환란을 종식시키고 오직 행복만을 줄 것이라고 곧잘 오해합니다. 특히 전통적인 무교와 불교의 기복신앙에 영향을 받아 온 한국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의 구원이 인간의 육체적 질병이나 사회적 억압, 물질적 가난과 같은 고난에서 자신들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리라고 기대하면서 헌금의 목적과 기도의 내용들이 이러한 것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구원이 세상의 고난에서의 구원이 아님을 증거합니다. 바울은 회심후에 자신의 육체적 질병을 위해 세번이나 기도했음에도 하나님은 바울의 병을 고쳐주지 않으셨으며(고후12:7-9) 복음 전파중에는 유대인들에게 사심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이나 맞았고, 베드로는 로마에 거꾸로 십자가에 매달려 순교하였습니다. 이와같이 구속받은 성도에게도 세상의 고난은 언제나 다가오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이 주시는 세상적인 축복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참믿음이란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께 대한 헌신과 사랑이 변치 않음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롬8:35)에서도 믿음이 변치 않을 것이라고 하였으며, 다니엘의 세 친구는 하나님이 풀무불에서 자신들을 구하지 않으실지라도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겠노라고(단3:18) 선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환난을 당할 때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믿음을 저버려서는 안되며, 오히려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헌신을 깊게 하여 자신의 믿음을 단련하므로 세상이 감당치 못할(히11:38)정금같은 믿음을 소유해야 합니다.
2. 환난의 보상
바울 사도는 본문에서 환란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즐거워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환난을 통해 하나님의 큰 축복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주시는 환난의 보상은 어떠한 것인지 살펴보겠습니다.
1) 현세의 축복
영원한 소망이 없는 인간은 고난당할 때 좌절하고 세상에 대한 믿음과 바른 가치관을 포기하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창조적인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기에 결코 실망하거나 절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죄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다가 겪은 환난은 우리를 정금보다 귀한 믿음을 갖게 하여 하나님의 보다 적극적이고 깊은 사랑을 얻게 합니다. 또한 세상의 죄와 연합하여 행복을 얻으려는 어리석은 인간들은 오히려 끝없는 갈등과 번민 속에서 절망을 맞이하나 의를 위하여 고난받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비록 육신은 괴로우나 그 마음은 예수께서 주시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참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요14:27)
2) 내세의 축복
그러나 정금보다 귀한 믿음과 영혼의 평안함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의 시작이며 그림자일 뿐, 고난을 당하는 성도들이 내세에 받을 영광은 현재의 고난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롬8:18) 것입니다. 첫째로, 고난을 받는 자에게는 영생이 주어집니다.(고후1:6-11) 주님은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는 자는 그릿도와 더불어 영생에 참여할 것입니다. 둘째로 영광의 면류관을 얻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달려감은 영광의 면류관이 예비되었기 때문이라고(딤후4:8)고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악을 버리고 선한 싸움을 위해 고난받은 성도들을 위해 영광의 면류관을 준비하셨다가 그날에 그를 영화롭게 하실 것입니다. 세째로, 모든 즐거움에 참여하게 됩니다. 비록 이 땅에서는 악의 세력과의 싸움으로 고통받고 고난을 당하였으나 고난 중에서 믿음을 지킨 자들은 하나님께서 아들을 위해 준비하신 모든 즐거움에 동참하게 되며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서서 모든 눈물을 씻기시고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는'(계21:4) 영원한 즐거움으로 갚으실 것입니다.
환난에 대한 성도의 자세 (롬 5:4)
바울은 5장을 시작하면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고 했습니다. 3-5절은 이 즐거움의 크기를 보충 형식을 빌어 강조 설명하는 내용인데 그 내용에 따르면 어떤 환난도 이 즐거움을 앗아가지 못합니다. 칭의의 즐거움은 환란까지도 능히 극복케 합니다. 역으로 말하면 칭의의 즐거움이 환난과 역경에 의해 사그러드는 자가 있다면 그는 참된 신앙인이 아닌 것입니다.
1. 환난에 담대해야 합니다.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행14:22) 그것은 환난의 감정이나 신비한 체험에서 비롯된 뿌리없는 믿음과 참된 믿음을 구분해 주기 때문입니다. 감정에 따라 신앙생활하는 사람은 환난에 견딜 수가 없습니다. 일찌기 예수께서는 씨뿌리는 비유를 통하여 환난에 견디지 못할 감정적 신앙을 경고해 주셨습니다. 거기서 보면 돌밭에 뿌리운 씨앗은 빠르게 싹이 나지만 뿌리가 없기 때문에 끝까지 견디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감정적 신앙을 가진 사람은 신실한 신앙을 가진 듯 하다가도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집니다. (마13:21) 환난은 역경과 압박과 곤경을 의미합니다.(신4:30) 그것은 어느 형태로든 모든 사람의 삶 가운데 존재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성도에게도 환난이 필연적임을 전제로 하신 말씀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세상의 환난에 담대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다시 사셨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는 우리는 환난을 당해서도 담대해야 합니다. 엘리야는 850명의 거짓 선지자의 위협 가운데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대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응답하셨고 엘리야는 승리했습니다.(왕상18:20-40) 우리는 환난을 당하지만 세상을 이기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심으로 담대해야 합니다.
2. 환난을 즐거워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고통을 견디어내는 자가 아닙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는 자입니다. 이것이 환난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바른 태도이며 모습입니다. 우리는 환난을 도리어 즐거워하고 영광스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마5:10-12) 예수께서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다'(마5:10)고 하셨습니다. 또한 환난과 핍박에 대해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마5:12)고 하셨습니다. 누가는 이러한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사도들이 주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을 즐거워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행5:41) 우리가 받는 환난은 잠시 뿐입니다. 그 환난은 극히 경한 것으로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이루게 해주는 귀중한 수단입니다. (고후4:17) 우리가 환난을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3. 인내해야 합니다.
환난은 거짓 믿음의 소유자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끌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를 더 멀리하여 떠나게 합니다. 왜냐하면 거짓 믿음의 소유자들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고난당하는 것을 용납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한 환난과 고통을 참고 인내할 줄 모릅니다. 그러나 참 그리스도인의 경우는 다릅니다. 그들은 환난을 당하여 온갖 고통을 감수하며 참고 인내합니다. 그들은 아무리 모진 환난이라도 그것을 하나님께서 자신의 믿음의 상태를 테스트 하시는 것으로 알고 하나님께 옳다 인정하심을 받을 때까지 인내합니다. 그래서 신실한 성도의 믿음의 능력은 적지 않은 경우에 인내로 나타납니다.
4.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징계는 다 받는 것이어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히12:3-8)고 담대히 말했습니다. 환난은 이와같이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나타내 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우리의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시험합니다. 형통할 때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참다운 사랑이 아닙니다. 참된 그리스도에 ㅔ대한 사랑은 환난을 통하여 더욱 빛나고 영광스럽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깨닫게 될 때 환난에서 인내를 이루게 되며 성도가 환난에서 인내하게 될 때, 하나님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이 참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환난당할 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은 매우 중요하며 담대함과 인내함과 즐거워함에 우선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 (롬 5:5)
사도바울이 로마서를 쓰게 된 일차적인 목적은 이신칭의의 결과에 의한 구원의 확실성을 보여주는 데 있습니다. 바울은 의롭다 하심을 입은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① 하나님과의 평화 ② 은혜 안에 거함 ③ 영광의 소망으로 구분하였습니다. 특히 바울은 본문에서 세번째 내용인 성령에 의해 환난 중에서도 소망을 바라보게 하는 확신을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렇게 성도와 함께 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살펴보겠습니다.
1.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성령
바울은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였습니다. (롬8:9) 다시 말하면 성령을 받지 않고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성령께서 참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내재하고 계시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겔36:27) 우리는 성령을 단순한 하나님의 감화 정도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성령은 이미 우리 안에 주어진 바 되었으며, 주님께서도 성령이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 안에 거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요14:17)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성도의 몸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성령의 전으로 묘사하였습니다. (고전6:19,20) 성도의 몸은 성령께서 거하시는 장막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그의 일을 이루어 가십니다. (사61:1) 이러한 성령의 내주는 영원한 구원의 보증인 동시에 새로운 삶의 전개를 의미합니다. (히10:15)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떨어질 수가 없습니다. 성도의 최종적인 구원의 완성은 하나님의 사역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결코 구원은 인간의 행위나 율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엡2:5,8) 성도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이루시는 것입니다.
2. 성도를 감화하는 성령
성령은 성도가 하나님을 향하여 가지는 믿음과 복종 배후에 계십니다. (히9:14) 성령은 거룩한 열심을 창조하시며 성도의 마음을 인도하시고 지시하십니다. (살후2:13) 또한 참된 경건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길을 제시하고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성도 안에서 역사하신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성도와 함께 계시며 영원한 구원의 보장이 되어 주시는 동시에 성도의 연약함을 도우심을 뜻합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친히 하나님께 간구하십니다.(롬8:26) 이상과 같이 성령께서는 성도 안에 내주하시는 동시에 성도 안에서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3. 성도의 성장을 이끄시는 성령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2:12)라고 했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성령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그러한 성령의 역사가 어리석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세상 사람들은 모르는 성령을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에게 주셔서, 그 마음을 조명하시고 성도의 어두운 마음 눈을 밝히시는 동시에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 있는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과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하십니다. (고전2:10-16) 성령은 성도에게 참과 거짓을 구분하게 하시며 구원의 확실성에 대한 보증을 하심으로 성도의 성장을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때문에 성도는 오직 성령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을 기뻐하고 그로 인해 성장할 수 있습니다.
4. 성도를 깨끗게 하는 성령
택함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정화시켜 죄를 제거하는 것은 성령의 또 하나의 독특한 사역입니다. (요3:3,5) 이렇게 성도를 깨끗케 하는 성령은 성도가 하나님 심판대에 설 때에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서게 될 것을 보증하는 표가 됩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라고 고백한 것은 그 안에서 역사하시고 그를 성결케 한 성령의 사역이 아니고는 도저히 고백할 수 없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성령이 아니고는 예수를 주라 시인할 수 없다’고 선언하기 때문입니다. (고전12:3)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난미의 영을 받지 아니하므로 하나님의 일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부끄럽게 보입니다. 반면에 성령을 받은 자는 예수를 주로 시인할 뿐만 아니라 그 안에 기쁨이 있습니다. 평화가 있습니다. 또한 성령의 열매가 있습니다. 이것이 성도가 성령에 의해 영원히 거룩하게 성화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이렇게 성령의 열매를 맺으면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성령께서 주관하시는 삶입니다. ((갈5:22-23).
경건치 못한 자를 위한 사랑 (롬 5:6)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창세 전부터 지금까지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손수 슭을 빚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인간 존재를 탄생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최상의 것으로 이루어진 피조 세계를 삶의 터전으로 주셨습니다. 인간의 죄악으로 더럽혀지기 이전 처음의 세상 에덴동산은 실로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범죄는 낙원에서의 복된 삶에 종말을 가져왔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자유의지로 반역의 길을 선택했으며 그 결과는 죽음의 절망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죽음에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죄를 사함받고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길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끊임없는 범죄의 가능성 속에 살고 있는 연약한 인간들을 위해 세상에 오시고 죽음을 당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해 증거합니다. 이 사랑으로 말미암아 경건치 못한 자들이 구원의 은혜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경건치 못한 자를 위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
1) 경건치 못한 인간
본문에서 바울은 특별히 경건치 못한 자들을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합니다. 경건함은 하나님께 속한 자의 표징입니다. 성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경건은 행위를 삼가고 조심한다는 사전적인 의미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경배와 신앙고백의 태돌ㄹ 가리키는 말인 것입니다. 유세비우스는 경건에 대해 정의하기를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을 쳐다보면서 그분과 함께 보조를 맞추며 생활하는 삶’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범죄 행위는 스스로 하나님의 곁을 떠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자력으로 악을 극복하고 하나님을 향한 경건의 삶을 살 수 있는 존재가 못됩니다. 정욕을 따라 세상의 순간적인 즐거움을 좇고 또 다른 범죄를 양산하는 것이 죄인들의 연약한 속성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 없이는 경건한 삶을 불가능합니다. (벧후1:3) 강한 권능의 손으로 건져주지 않는다면 인간은 연약함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멸망에 이르는 불경건의 죄를 반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2) 그리스도의 사랑
예수님은 처음부터 경건치 못한 자들 가운데 오셨습니다. 형식적인 경건의 모양 조차 갖추지 못한 사람들, 감히 하나님 앞에 나서지 못하는 죄인들의 무리 속에 오셨습니다.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께 패역하고 떠났지만 하나님은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경건치 못한 자들을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하나님의 깊고 넓으신 사랑의 실체입니다. 그리스도는 연약한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적인 삶 속에서 완전한 경건을 실행하셨습니다. 단 한순간의 흔들림도 없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하나님만을 향해 사신 그리스도의 생애는 인간들을 깨우치는 신앙의 본보기입니다. 인간의 완악함은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는 패역을 저질렀지만 주님의 죽음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새로운 연결고리가 되었습니다. 이로써 연약한 인간이 하나님의 경건한 백성으로 살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순전한 사랑으로 죄를 씻기시고 구속의 언약을 이뤄주셨습니다.
2. 구원받은 자의 삶
1) 신실한 신앙고백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속죄함을 얻은 인생들에게는 새로운 삶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제는 죄의 어둠에 갇힌 자가 아니라 생명의 빛에 속한 자로 새 삶의 의미를 부여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자의 삶에는 죄에서 건져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진실한 감사와 신앙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갈 것을 다짐하는 결단이기도 합니다. 진실한 신앙고백은 온전한 신앙생활의 출발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나아가는 경건한 삶의 토대입니다.
2) 경건한 생활을 위한 노력
경건함은 구원받은 자와 구원받지 못한 자의 삶을 구분짓는 근거가 됩니다. 성경은 이방인으로 성령의 세례를 받고 구원을 확증한 고넬료의 경건생활에 대해 증거합니다. 그는 가족과 함께 하나님을 경외하며 이웃을 구제하고 항상 기도의 삶을 살았습니다. (행10:2) 이러한 고넬료의 생활은 경건해야 하는 신앙인들의 삶에 귀감이 됩니다. 하나님 앞에 경건한 자로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신앙생활의 기본입니다. 주님은 이러한 사람들에게 능력을 주시고 경건한 자로 인정받게 하십니다.
모든 인간들이 연약하여 죄의 사슬에 매여 있을 때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시고 경건치 못한 자들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따라서 그 피로 죄씻음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신앙고백을 바탕으로 하여 경건한 생활을 실천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야말로 경건치 못한 자를 위해 죽으신 주님의 사랑에 합당한 삶인 것입니다.
참 죽음 (롬 5:7)
죽음은 삶의 결론이며 완성입니다. 죽음은 한 사람의 전체적인 삶의 모습을 결정합니다. 악한 일과 죄를 짓다가 죽으면 악인으로 규정되고, 의나 선을 위해 살다가 죽으면 그는 의인, 혹은 선인으로 규정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 된 자의 죽음은 어떠해야 합니까? 그것은 당연히 그리스도를 본받는 죽음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곧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의미합니다. 이제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이 무엇인지를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은 적극적인 삶입니다. 뜻 없이 무릎 꿇고 피동적으로 움직임으로써 가능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발 벗고 나설 때에만 가능한 삶입니다. 이같은 삶을 위해서는 우선 과감하게 자기를 버려야 합니다. 인간은 불행히도 태어날 때부터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버리지 않는다는 것은 곧 죄를 버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자기들이 배운 장로의 유전이나 율법을 아는 지식, 즉 자기의 생각이나 이념을 버릴 수 없었기에 끊임없이 예수께 도전했고 결국은 예수를 죽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를 붙드는 대신 예수를 버렸습니다. 육적인 자아를 살리는 대신 예수를 죽인 것입니다. 이처럼 아집과 완악함에 사로잡힌 자는 자기를 위하여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과 권면을 버립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순종하려면 먼저 자기를 버려야 합니다. 그리스도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될 수 있으면 그 십자가의 고난을 피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철저히 부인함으로, 즉 그의 거룩함과 완전함을 버리고 인간의 죄 된 모습으로 고난의 십자가를 지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여 그 결과 인류를 구원하셨던 것입니다.
2. 의인을 위한 삶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사람이 선한 자를 좇으며 그를 위해 한평생을 살려고 합니다. 또 권세 있는 자나 능력있는 자를 사모하며 그들의 삶을 본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잃어버린 자를 위하여, 죄인을 위하여, 가난하고 병든 자를 위하여 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그리스도 자신이 그러한 삶을 사셨습니다. 그는 당시 유대인들이 미워했던 창기를 영접했고 세리와 더불어 먹고 즐겼으며 이방인과 함께 하셨습니다. 모든 사람들로부터 접근이 허락되지 않은 문둥병자를 가까이하여 그를 고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건강한 자나 의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병든 자와 죄인을 위하여 세상에 오셨음을 세상에 널리 선포하셨습니다. 그의 죽음도 죄인을 위한 죽음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증거하기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라고 했습니다.즉 그리스도는 세상의 모든 죄악과 죄인을 위하여 하나님께 드릴 속죄 양이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 죽음을 원하는 자, 즉 그리스도를 본받기 원하는 자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처럼 죄인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오늘날의 죄인은 누구입니까? 그것은 도덕적으로 율법적으로 바르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아직도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사탄의 권세 아래서 방탕한 삶을 사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생명이 없는 것들을 열심히 추구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그들의 삶을 변화시켜 의의 길로 들어설 수 있도록 살아야 합니다.
3. 고난의 길을 피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는 대적자들에게 뺨을 맡기셨고 수욕과 침뱉음을 당하셨습니다. 이러한 모딘 고통과 수욕을 피하려고 당신의 얼굴을 가리지 않으셨습니다.(사50:6) 그리스도께서는 자기가 당할 고난을 담대히 맞아들이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잡히고 세상의 관원들과 이방인에게 넘겨져 조롱과 핍박과 능욕당할 것을 뻔히 아시면서도(눅9:22) 예수살렘에 들어가셨던 것입니다. 그같은 고난의 결과는 믿는 자에게 위로를 넘치게 하셨으며(고후1:5)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아 모든 사람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셨습니다.(벧전3:18)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 자기를 끝까지 순종하시고 죄인들을 위해 일하셨으며 고난을 끝까지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이 바탕이 되어 하나님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참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그 죽음은 죄인의 생명을 구원하는 죽음이었고 부활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죽음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늘보좌에 올라 하나님의 영광을 얻는 죽음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참 죽음을 원하는 자는 이러한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 의를 위해 적극적으로 고난 받아야 합니다. 즉 자기를 온전히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야 하며 이로 인해 오는 모든 세상의 고난을 극복해야 합니다. 그러할 때에 세상에는 복음의 빛이 널리 퍼져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될 것이며 좀 더 소망있고 사랑이 넘치는 세상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발현 (롬 5:8)
6절에서 본문8절에 이르기까지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우리에게 발현되었는지를 보여 줍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로마서 전체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강조한 나머지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이 약화될 것을 염려한 바울은 본문에서 하나님의 사랑에 그의 논증의 초점을 맞춥니다. 본문에서의 그의 주장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의 사랑의 발현의 극치입니다. 이제 이러한 본문에서 주장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발현에 대해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구속을 창세전부터 계획하셨습니다.
우리는 우선 6절의 ‘기약대로’라는 말씀을 주의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은 ‘정해진 때’ 혹은 ‘약속된 때’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는 어느날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예비되고 계획된 것이란 말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사랑의 차이를 우리는 여기서 발견합니다. 인간은 아무리 굳은 사랑의 맹세를 해도 상황과 여건에 따라 쉽게 변합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 같은 이는 예수님을 버리지 않겠노라고 굳게 맹세한지 채 24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세번이나 저주까지 해가면서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마26:33)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당신을 거역하고 죄를 범했지만 여전히 사랑이 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때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계획을 밝히셨습니다. (창3:15) 그럼에도 인간은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죄를 범했지만 인간 구속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도 조금도 변화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의 끝없는 배반의 역사를 뚫고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셨으며 그를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인류를 죄에서 구속하셨습니다.
2. 연약할 때 구속하셨습니다.
6절의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의 또 다른 면을 보여줍니다. 이 말씀은 인간이 연약한 자로 판명난 때라는 말입니다. 즉 긴긴 역사를 통해 인간이 자력으로는 의를 행할 수 없음이 명백히 드러났을 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이미 율법도 주시고 수많은 예언자를 보내셨지만 유대인을 비롯한 온 인류의 종교적, 도덕적 형편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을 때였습니다. 세상은 타락할 대로 타락해 있었고 의인은 단 한 사람도 찾아볼 수 없었던 때였습니다. (롬3:10) 임박한 심판의 때라고 할 만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하나님은 세상을 심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인류를 구속하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을 확증하셨으며 복음에 이의를 제기하는 모든 입을 다물게 하셨습니다.
3. 원수를 사랑하셨습니다.
본문의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라는 말씀이나 10절의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라는 말씀은 표현만 다를 뿐이지 의미는 같은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죄를 지음으로써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죄는 단순히 인간에게만 짓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느 순간에든지 하나님의 면전에 있습니다. 따라서 종교적 죄를 짓든 도덕적 죄를 짓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를 짓는다는 것은 하나님께 도전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과 원수관계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결국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 죄를 지었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원수를 원수로 갚지 않으시고 오히려 사랑과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는 원수를 사랑했습니다. 그는 원수들의 멸망을 기뻐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그것이 안타까워 자지 아들을 내어주시면서까지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사랑의 본 모습입니다.
4. 아들을 내어주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하나님 사랑의 방법, 또는 사랑의 발현 모습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심원한 사랑의 계획과 인내를 가지셨을 뿐만 아니라 최종적으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주시기까지 인간을 사랑하셨습니다. 원수는 미워하고 아들은 사랑하며, 원수를 희생해서 아들을 유익하게 하는 것이 인간의 보편적인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정반대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그는 원수된 인간들을 구속하기 위해서 사랑하는 독생자를 죽음의 자리에 내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죄책을 예수께 지워(사53:6) 당신의 진노를 받는 십자가 위에 들리셨습니다. (갈3:13) 그리고 그 위에 모든 인류에게 내리셔야 할 진노를 다 쏟으셨습니다. 한마디로 예수께서는 인류를 위한 희생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극에 달한 발현입니다. 당신의 아픔과 상처를 안으로 감수하시며 하나님은 인류를 사랑하셨던 것입니다.
무너진 율법 (롬 5:9)
흔히 구약을 율법시대라 부르고 신약을 복음시대라 합니다. 그러한 시대의 분수령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구약과 신약의 분수령이 되셨고 율법의 시대를 폐하시고 전혀 새로운 복음의 시대를 여셨습니다. 일찌기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당신의 뜻을 알도록 율법을 주셨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계명입니다. 인간은 이것을 지켜야 하며 이것을 지킴으로 의롭다하심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이 율법을 통하여 인간은 완전해질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연약한고로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인간의 비극이 있습니다. 완전해지고 싶은 인간이지만 그렇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복음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이 복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러한 내용들에 대해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율법에 불완전한 인간
하나님께서는 자연계를 통한 일반계시를 주셨으나 인간이 범죄 함으로 이 계시를 바로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성문화된 율법을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문화된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과 계시를 알며 순종하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율법은 온전히 지켜야만 의롭게 되는 칭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노력으로는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가 없습니다. 간혹 한두 가지의 율법을 지킬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의롭다함을 얻기 위해서는 그것으로 부족합니다. 율법으로 의를 얻기 위해서는 율법을 온전하게 하나도 빠짐없이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죄 앞에서 연약한 존재입니다. 선을 행하고자 하는 원함은 있을지라도 그 원함과는 전혀 다르게 행동합니다. 때문에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고 탄식했던 것입니다. 율법은 생명으로 가는 길을 제시하나 생명 길을 걷게 하는 능력은 없습니다. 율법 외에 또 다른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그는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셨으며 그를 믿는 모든 자를 의롭게 하셨습니다.
2. 단번에 드려진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제사장으로서 인간들을 대신하여 하나님 앞에 제물로 자기를 드리시고 희생 피를 뿌리셨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그리스도를 가리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1:29)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가리켜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해서 흘리는 바 나의 피'(마26:28)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자신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케 하셨습니다.(히9:12)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자신이 선포한 법을 자신이 지키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법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범죄한 인간을 위하여 대속적 생명의 희생이 요구되었는데 그리스도께서 이 요구에 순종하시고 법이 요구하는 모든 것에 적극적으로 순종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전생애는 의로운 생애였으며 하나님의 뜻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생애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인간이 하나님과 교통하는 길이 열렸으며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3. 율법의 완성자 그리스도
인간의 노력으로 도저히 지킬 수 없는 율법을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단번에 제물로 드리심으로 율법을 완성하는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켰다 할 수 있습니다. 공의란 하나님의 정의, 하나님의 의로우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죄는 하나님의 정의에 역행하는 행동을 말합니다. 그 죄는 마땅히 처벌되어야 하며, 마땅히 벌할 것을 벌하지 않는 것도 죄입니다. 즉 죄를 묵인하는 것은 무법과 불법입니다. 곧 하나님의 정의는 그 모든 것을 온전히 성취해야 만족하는 성질의 것입니다. 범죄하는 영혼은 반드시 죽습니다.(겔18:4)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공의 때문에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죄인을 위하여 대속의 제물로 자신을 드린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신을 제물로 드림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케 하시고 율법의 요구를 성취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느니라'(롬10:4)고 했습니다. 따라서 율법의 완성을 성취한 그를 믿는 우리는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킨 자들입니다. 그의 의를 힘입어 의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율법이 아닌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의롭다하심을 얻은 것입니다.
구속의 확신 (롬 5:10)
본문에서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라는 말의 뜻은 우리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죄인이었을 때라는 뜻입니다. 인간은 연약하기 때문에 죄인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죄인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원수가 된 것입니다. 6절의 ‘연약할 때’란 우리의 마음에 죄성이 남아 있어 언제나 범죄할 수 있는 상태를 뜻하는 것이므로 인간은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이 없었다면 그의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수 없었을 것이요, 따라서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인으로 그대로 남아 있어 하나님의 원수에서 변함이 없었을 것입니다. 사실 범죄하여 하나님을 떠나가는 인간에 대해 깊은 원한을 느끼는 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인간의 범죄에 대한 이러한 깊은 원한에도 나타나나 것입니다. 죄로 인하여 생겨난 원한은 그 죄의 대가를 치루기 전에는 풀릴 수 없고 화목도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 당신의 공의를 만족시키시고 죄인의 죄를 제거하셨습니다. 신인간에 화목은 이렇게 해서 이루어졌습니다.
1.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였습니다.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골1:21,22) 인간은 스스로의 죄악된 행실로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진정한 아버지시요 만물의 생명과 식물을 주시는 창조주를 배반하였습니다. 그의 권위에 대한 복종을 거부하고 자행자지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조금도 헤아리지 아니하고 스스로 살아가는 줄로 생각하고 때로는 자고하여 하나님께 도전하는 말을 함부로 하고, 또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형상을 썩어질 금수와 인간의 모습으로 바꾸기도 하였으며, 나무와 돌로 조각한 신상을 섬김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너는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출20:3)고 선언하셨으나 처음부터 우상숭배에 빠져 악을 행해온 인간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우상을 만들고 음란하듯 그것들을 섬겼습니다. 하나님은 조금도 변함없이 그대로 계셨는데, 인간은 불순종하여 죄를 지었으며 하나님께 용서를 빌지 않고 끝까지 등을 돌렸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처음부터 살인자요 거짓말장이의 아비인 마귀에게 속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원수된 관계의 결과를 초래한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스스로 자원하여 들어갔습니다.
2.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8절) 진실한 사랑은 반드시 외적인 행위로 나타납니다. 말하자면 사랑은 내면의 심리상태에서 우러나는 것이지만 그 표현은 행동으로 표출된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사랑도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하여 가장 구체적이고 적극적으로 입증되었습니다. 물론 그 이전부터도 하나님은 역사를 통하여 여러 모양인 인간에게 사랑을 나타내시고 때로는 진노의 심판으로 사랑의 격정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날 마지막에 그 아들도 우리에게’ 주시사 지극한 사랑을 표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순전히 그의 사랑으로 인하여 진노 아래 놓인 우리를 구원코자 그 아들을 화목제물로 삼으시고 ‘우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신'(골1:22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여전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고'(빌3:18)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으셔서 온 인류가 구원 얻기를 간절히 소망하십니다.
3.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화목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5:18) 이제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의 원수가 아닙니다. ‘우리가 그 피로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9절)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사랑을 받으십니다. 이로 인하여 화평, 친목, 상호간의 사랑이 이룩되었으며 화목한 삶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는 우리의 구원이 그리스도 안에서 확증된 것입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요일3:1) 우리의 과거는 하나님과 원수였으나 이제는 그의 아들이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백성으로 선포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이제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을 누릴 자격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가 모든 생활에서 그에 대한 사랑을 반영하여야 합니다. 현재의 구원받은 상태를 끝까지 확신하고, 미래를 기대하면서 즐거워해야 합니다.
화목을 이루신 그리스도 (롬 5:11)
하나님께서 처음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 세상에는 미움과 다툼이 없고 평화로움만이 있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은 서로 친밀한 관계였고 역시 인간과 동물, 사이에도 화목과 평화가 유지되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세상의 평화는 깨어지고 미움과 다툼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가 단절되었고, 아담과 하와는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고자 하였으며, 뱀과 여자도 서로 다투게 되었습니다. (창3장) 인류의 다툼은 이때부터 시작되어 인류의 역사는 투쟁의 역사가 되었으며 인간을 끝없는 불행으로 몰고 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하신 만물이 처음의 화목한 상태로 회복되길 원하셨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ㅅㅂ자가는 곧 화해의 십자가이며 사랑의 십자가입니다. 누구든지 십자가를 믿는 자는 모든 불행의 원인인 다툼에서 벗어나 진정한 평화를 누릴 것입니다.(요14:27) 그리스도를 통해 주시는 화목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1. 화해의 재물이신 그리스도
하나님은 선에 대해서는 축복으로, 악에 대하여는 진노의 심판으로 갚으십니다. 범죄한 인간에 대하여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반드시 심판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 그 심판을 견딜 자는 세상에 아무도 없으며 따라서 인간은 영원히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였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인간들이 다 죽는 것은 또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에 위배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으로 오시고 십자가에 죽으실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죄에 대해 인간의 대표로서 자신을 죽게 하여 죄의 심판을 담당하시고 인간을 의롭게 하셔서 구원의 길을 여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롬5:15-19) 즉 그리스도는 구약시대의 희생 제물같이 자신을 직접 제물로 드리셔서 인간의 죄와 세상의 불화를 해결하시고 창조 때의 화목으로 회복하기 위한 구원의 완성을 이루신 것입니다. 이제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사람은 십자가의 화목에 참여할 것이며 십자가를 통해서 주시는 참된 평안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2. 그리스도가 이루신 화목
1) 하나님과 인간의 화목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선하십니다. 하나님은 악을 미워하시고 악과 함께 계실 수 없으십니다. 따라서 범죄한 인간은 결코 하나님과 같이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에덴에서 쫓으시고 화염검으로 동산을 두르신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창3:24) 결국 인간의 범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단절시킨 것입니다. 그런데 피조물인 인간의 생명의 근원은 창조주에게 있으므로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은 자연히 죽을 운명에 처하였습니다. 이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심판의 희생을 치루심으로 죄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단절된 관계를 회복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역은 새로운 생명을 주는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화목을 얻은 인간은 항상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을 생명의 구원자로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과 화목한 자는 다시는 죄와 화목해서는 안 됩니다. (롬6:6) 나아가서 구원 받은 자는 더욱더 율법의 요구에 충실하며 악을 미워하고 선을 행하기에 열심을 내어야 합니다.
2) 인간과 인간 사이의 화목
범죄한 아담과 하와는 타락의 원인을 서로에게 전가시켰습니다.(창3:12) 이러한 행동은 바로 전까지 하와를 향해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2:23)고 하던 사랑의 마음이 파괴되고 서로 불신하며 미워하는 마음까지 들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자식은 서로 죽이는 행위를 범하게 되고 인간의 역사는 서로를 죽이고 죽는 투쟁의 역사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미움과 다툼을 제거하고 서로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게 하여 단절된 인간과 인간 사이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새로운 계명으로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눅10:27)고 가르치셨고 또 그것을 몸소 행하심으로 본을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는 이웃에 끊임없는 사랑을 베풀어 사랑을 이루라시는 화목의 교훈을 실천해 나가야 합니다.(요일4:12)
3) 인간과 자연 사이의 화목
인간을 위해 아름다운 과실과 채소를 맺던 땅은 범죄 후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되었고, (창3:18) 인간은 짐승을 식물로 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간과 짐승은 서로 싸우며 생존을 위해 서로를 위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세상을 화목하게 하심으로 구속의 그 날에는 ‘이리가 양과 함께 거하고…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어도…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는'(사11:6-9) 참으로 화목하고 평화로운 세상이 올 것입니다. 신자들은 바로 이러한 날이 오기까지 이 세상에 살면서 화목과 평화를 실천해 나가야 합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죄 (1) (롬 5:12)
한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들이 의롭다 하심을 얻고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화평과 구원의 은혜에 들어감을 강조하는 앞부분과 이 구절은 대조되어 더욱더 그리스도의 사랑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죄로 인하여 그의 모든 후예들이 죄악 가운데서 허덕이고 있는 것을, 그리스도 한 사람이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며 즐거워하는 자들이 되게 하였던 것입니다. 아무튼 구원의 은혜를 바로 알기 위해서도 우리는 자신의 죄악의 실상을 분명히 파악해야 합니다. 그 죄악의 실상을 상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아담은 세상에 죄를 가져왔습니다.
1) 죄의 기원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후에 이 아름다운 우주에 죄가 도입된 것은 아담에 의해서 입니다. 세상의 모든 만물을 아담을 위해 온전히 아름답게 지어졌고 이 세상에 사는 아담도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며 지혜가 충족한 상태로 모든 피조물과 함께 평화롭게 살았습니다. (겔28:11-19;사14:12-15;계12:3,4) 그러나 사탄에 의해 꾀임에 빠진 아담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음으로 불순종의 죄를 범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2) 죄의 의미
죄의 의미는 원래 ‘과녁을 빗나가다’ 혹은 ‘금지된 선을 넘다’는 뜻으로써 아담이 하나님께서 명하신 금지된 나무의 실과를 먹어 불순종한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과녁을 맞추지 못한 인간의 태도나 행위를 가리킵니다. 또한 죄는 선을 행할 수 없는 인간의 무능과 잘못을 범하기 쉬운 인간의 죄 된 경향 모두를 포함합니다. 결국 아담을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과녁을 맞추지 못함으로써 죄인이 되었고 그 이후로 타락한 본성에 의해 선에 대한 무능, 죄의 경향성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의 후예인 우리들은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죄인이 되었습니다. 즉 우리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인이기도 하지만 역으로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2. 아담의 죄는 세상에 사망을 가져왔습니다.
1) 그에 대한 즉각적인 심판
아담의 죄의 결과는 일차적으로 땅과 아담 자신에게 저주로 나타났는데 아담은 저주를 받아 엉겅퀴와 가시덤불을 내는 땅에서 종신토록 땀을 흘리며 수고해야 먹고 살 수 있었습니다. 또한 그의 아내 하와는 해산의 고통을 심하게 겪어야 자식을 얻을 수 있도록 하였고 그 남편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창3:16-19) 그리고 결국에는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죽음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2) 여자의 후손에게 심판과 저주가 전가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자에게 저주하실 때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과 원수가 되어 사탄의 후손으로부터 발꿈치가 상하게 될 것을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사탄의 세력이 여자의 후손 곧 그리스도를 괴롭힐 것을 예표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범죄 했을 때 이미 구속까지 섭리해 놓으셨음을 의미하는 것인데 아무튼 이로 인해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큰 고통을 치르셔야 했습니다. 그는 인류의 죄를 담당하시고 그 대가를 온 몸으로 치르셔야 했던 것입니다. 아담의 죄, 그리고 그 안에서 오늘날 우리가 범하는 죄는 이처럼 막중한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3) 모든 인간에 대한 영원한 심판을 초래했습니다.
아담의 죄로 인해 그에게 속한 인간 모두는 죽음이라는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첫째 육체적인 죽음을 포함합니다. 흙으로 만들어진 인간은 죄의 결과로 본래의 것인 흙으로 돌아가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 육체적인 죽음이라는 심판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창3:19) 시편기자는 하나님의 저주로 제한된 연수를 살아가는 자신의 인생에 슬픔과 고통뿐이 없음을 안타까와하고 있습니다.(시90:10) 둘째로, 영적 죽음에 대한 심판입니다. 모든 인간은 육체적인 죽음 뿐 아니라 하나님께 멀어져서 더 이상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없는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곁을 떠나게 되었듯이 그의 후손도 그들의 불법 때문에 하나님의 곁에서 멀리 떨어져 둘째 사망의 경지에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마7:23)
아담은 하나님으로부터 지음받은 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분명한 방법을 제시받았습니다. 그것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따먹지 않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 안에서 풍요롭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말씀을 어겼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에 빗나가는 행동을 하였습니다. 그것이 곧 죄이며 그 죄로 인해 그 자신 뿐 아니라 인류가 사망의 권세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한 사람의 말미암은 죄(2) (롬 5:12)
바울은 본문에서 아담의 범죄로 세상에 들어온 죄에 관하여 논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들을 에덴동산에 두시며 그들과 언약을 맺어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 행하면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범죄 하였고 하나님의 언약을 파기하고야 말았습니다. 결국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영원히 추방되어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에 그 진노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아담의 피를 받은 후손도 죄인임을 말하면서 또한 그 죄로 말미암아 사망에 이르게 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즉 아담이 지은 죄가 전 인류에게 미친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그러한 죄의 영향과 성향을 살펴보겠습니다.
1. 죄는 세상에 침입하여 왔습니다.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고 하는 것은 죄가 없는 상태의 세상에 죄가 침입했다는 의미입니다. 한 사람의 범죄로 죄가 세상에 침입한 이후로 세상이 죄로부터 자유로웠던 기간은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완전하고 아름답게 창조하시고 그것을 낙원이라 부르셨습니다. 또한 그곳에 자신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들어 살게 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했습니다. (창1:1-31) 그때는 그곳에 죄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죄가 침입하였고 인간은 타락하고 만 것입니다. 이렇게 죄가 세상에 들어옴으로써 범죄를 유발하는 반역과 불순종으로 이끌었으며 우리의 영을 계속 오염되게 하였던 것입니다.
2. 세상에 들어온 죄는 활동성이 있습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죄를 의인화 하여 설명합니다. 즉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죄가 왕노릇한다’고 말합니다. 죄에는 이와같이 활동성이 있습니다. 죄는 마귀의 인격을 통해서 세상에 들어왔습니다.(창3:1-4) 죄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들어와서는 인간으로 하나님을 멀리하게 만들었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분리시켰습니다. (시52:3) 그 결과 인간은 죄의 종이 되었습니다. (요8:34) 이러한 죄의 활동의 결과는 여러가지로 나타납니다. (요일5:17) 그것은 불순종, 불법, 불의, 시기, 분열 등으로 나타납니다. (요일5:17) 죄는 하나님께 반역하는 행위이며 혐오하는 마음을 갖게 합니다. 이러한 상태의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이 통치하는 대신에 죄가 인간의 전인격을 지배합니다. 이는 아담의 타락한 피로 말미암아 우리의 습관이나 실제 행동들이 죄에 의해 완전히 조종되고, 인간은 그것에 복종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합니다. 즉 죄는 인간의 전부분에 역사하는 활동성을 가진 것입니다.
3.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습니다.
죄의 결과로 찾아온 것은 사망입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육체적인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결코 그것이 육체적인 사망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죄는 필연적으로 영적인 죽음까지 초래합니다.(요9:41) 죄는 죽음이란 재앙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하나님은 에덴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고 아담에게 경고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아담은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사망의 쏘는 것은 죄라고 말하였습니다. (고전15:56) 죄가 아니라면 아담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아담의 창조가 완전하고 죄와는 무관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담의 불순종의 한 행동이 그를 사망으로 몰아넣고야 말았으며 그가 취한 흙으로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창3:19)
4.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습니다.
죄의 유전성은 모든 인류의 각 개인에게 사망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롬3:23) 단 한명의 예외도 있을 수 없습니다. 죄가 유전되므로 그에 따르는 죽음의 형벌 또한 유전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죽기 위해 태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그와 같은 결과가 한 사람의 불순종에 의해 그 죄를 받은 모든 후손에게 미친 것입니다. 아담 한 사람의 불순종의 직접적인 결과로 죄가 인간의 생명과 인류의 역사 가운데로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담의 죄가 전 인류에게 전가된 것입니다. 그 결과 인간에게는 아무런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참된 빛이 들어왔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죄를 속하는 거룩한 어린 양의 보혈이 우리 가운데 보내시고 죄를 담당케 하셨습니다. 죄는 더 이상 우리를 주장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가 죄를 덮어버림으로 더 이상 우리에게서 죄가 발견되지 않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기쁨의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율법의 의의 (롬 5:13)
바울은 본장 12-21절에서 죄가 세상에 어떻게 들어왔으며 그 죄가 어떻게 세상을 지배해 왔는지를 설명합니다. 또한 그 죄를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해서 정복하시고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셨는지도 설명합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본문은 율법의 가입의 의의에 대한 설명 부분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본문에 나오는 죄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이 주어진 의의는 이것만으로 만족될 수는 없습니다. 그 율법의 의의에 대하여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죄를 드러냅니다.
율법의 의의 중 첫째는 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죄는 아담의 타락으로 인한 범죄 이후로부터 모세의 율법이 주어지기까지도 여전히 존재하였으며, 그 죄의 결과로 주어진 형벌은 세상을 지배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이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사람들이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고 자행하였습니다. 물론 그것이 모든 사람들이 죄 자체에 대한 의식조차 없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다만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의 심각성과 중대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그 가운데 죄와 더불어 살면서 죄를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러한 인간의 범법함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율법을 주시고 인간으로 죄를 깨닫도록 하셨습니다. 그 율법이 인간을 하나님 앞에 조인으로 고발하여 인간의 죄 된 모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율법은 하나님의 의를 공고히 세우고 증거하여 인간의 어떠한 노력과 행위로써도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킬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2.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몽학선생의 역할을 담당합니다.
그러나 율법의 의의를 인간의 죄를 드러내는 것으로 한정해서 말할 수는 없습니다. 율법은 죄를 깨달아 죄인임을 스스로 인식한 인간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몽학선생의 역할을 담당합니다. (갈3:24) 이것이 율법의 두번째 의의입니다. 옛 그리스의 귀족들은 6세에서 16세까지의 어린 자녀들의 생활을 보호하고 감독하기 위하여 그의 집에 거하는 신뢰할 수 있는 노예를 택하고 그 직무를 수행하도록 했는데 이 직무를 맡은 자를 몽학선생이라고 했습니다. 이 직분을 받은 자는 아이가 성년이 될 때까지 가정교사와 후견인으로서 시중을 들었습니다. 몽학선생은 자연히 아이들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몽학선생의 훈육기간은 잠시였으며 이 기간이 완전히 끝나고 나면 그는 노예의 신분으로 다시 돌아가야 했습니다. 즉 아이가 성년이 되면 그 아이는 몽학선생의 감독에서 벗어나 아버지의 한 아들로서의 특권을 누리면서 마음껏 자유를 누리고 가정생활을 하였습니다. 바울은 율법을 바로 그리이스의 이 몽학선생 제도를 그의 논증을 도입하여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볼 때 율법은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무력한 인간의 후견인으로 생활을 감독하고 보호하여 죄악을 행하고자 하는 인간의 마음을 억제시킵니다. 때문에 율법은 인간에게 귀찮고 까다로운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후견인으로서 율법의 임무는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멈춥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년이 된 성도는 더 이상 후견인의 지도와 감독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는 참 자유를 얻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의 이 율법의 역할과 기능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쨌든 율법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한 셈이며 죄인의 구원에 큰 역할을 한 셈입니다.
3. 구원받은 자의 삶의 지표가 됩니다.
율법에서 찾아볼 수 있는 세번째 의의는 그것이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의 삶의 지표가 된다는 것입니다. (롬3:27) 율법은 앞서 살핀 바와 같이 그것 자체로서는 생명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은 오직 죄인을 위하여 대신 죽으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율법의 존재가 필요치 않은 것은 아닙니다. 율법은 여전히 필요합니다. 그것은 율법이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며 선악을 구별하는 기준이 되며 인간의 삶에 있어서 선한 삶을 살기 원하는 자들의 방향을 결정하는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즉 살아있는 믿음은 마치 살아있는 나무가 열매를 맺듯이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약2:18) 과일나무의 뿌리의 튼튼함이 그 열매를 통하여 입증되듯이 믿음도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 발전하고 성장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화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하나님 백성으로 선언된 우리를 거룩하게 변화시킴으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구속과 영화의 계획을 성취합니다.
왕 노릇하는 사망 (롬 5:14)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이 영생을 얻을 수 있음을 역설하고자 하는 바울은 먼저 모든 인생이 결코 피할 수 없는 죽음의 권세 아래에 놓여 있다는 사실과 그 원인은 인류가 계약의 대표자인 아담 안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 죄악 때문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러한 내용을 함축하고 있는 본문을 통해 죄와 사망의 관계, 그리고 죄를 죄 되게 하는 율법과 계약의 대표자이신 아담과의 관계에 대하여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사망의 근원으로서의 죄
1) 인간은 모두가 죄인입니다.
바울의 인간관은 모두가 죄인이라는 데 그 주안점이 있습니다. 죄와 그의 열매인 사망이 아담을 통해 맹위를 떨치는 세력으로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12절) 이 죄는 하나님에 대한 반역 또는 항거, 하나님 앞에서의 불순종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자입니다. 하나님은 옛날에 흑암에서 빛을 내도록 명령하신 자이며, 인간을 창조하신 자입니다. (창1:3) 그러므로 인간의 악, 곧 죄는 창조자로서 생명의 근원인, ‘생명에 이르게 하는 계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대한 반항입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은 자신의 피조성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죄인은 유 신의 생각을 좇는 자이며,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게 하는 것이므로 이 육신의 생각대로 사는 자는 반드시 죽습니다. (롬8:7,13) 이것이 죄가 가져온 결과입니다.
2) 사망의 근원은 아담의 범죄입니다.
모세의 율법이 있기도 전에, 즉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한 것은 그들에게 모세의 율법과 그로 인한 범죄가 아닌 , 보다 궁극적인 범죄가 있음을 말하는데 그것이 바로 ‘아담의 원죄’입니다. 하나님과 생명을 걸고 계약한 인간의 대표자 아담과 함께 우리 모두는 계약의 동참자가 되었고, 아담의 범죄와 함께 우리는 역시 계약의 파기자가 되어 결국 모든 인생은 앞으로 태어날 자들까지도 생명을 상실한 자가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인류는 왕노릇하는 사망의 권세 아래에 놓이게 되었고, 스스로를 구원할 수밖에 없는 무능력 속에서 자신들을 구원할 메시야를 대망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모든 것보다도 최우선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는 바로 우리의 생명을 상실케 한 ‘아담의 죄’,’원죄’인 것입니다.
2. 죄인 위에 왕 노릇하는 사망
사도바울은 본문에서 조의 열매인 사망을 절대적이요 보편적이며, 지속적인 권세를 지닌 막강한 군주로 묘사합니다.
1) 사망의 권세는 절대적입니다.
범죄하는 인생에게 있어서 사망은 필연적입니다. 그것은 예외나 유보가 없습니다. 아무도 그것을 피할 수 없으며 그 권세를 뿌리칠 수도 없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죽음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는 인생은 언젠가 하나님이 정하신 그때, 자신의 죄악의 열매인 죽음이 넘을 수 없는 벽 앞에 반드시 서게 될 것입니다.
2) 사망의 권세는 보편적입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임합니다. 부자도, 부자의 문 앞에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고 생명을 연명하는 거지 나사로도 모두 죽음 앞에서는 평등했습니다. 죽음을 권세자라고 해서 봐주지 않으며, 평생을 비참하게 산 자라고 해서 동정하지도 않습니다. 알렉산더에게도 나폴레옹에게도, 로마의 시이저와 폭군 네로에게도, 그리고 유명한 소설가와 시골의 가난한 촌부에게도, 늙은이에게도 어린아이에게도 죽음을 차별을 두지 않고 임합니다.
3) 사망의 권세는 지속적입니다.
사망의 권세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만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옛날 아담으로부터 성군 다윗의 시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죽음의 권세는 조금도 약해지지 않고 계속되었으며, 주께서 완전히 그 권세를 물리치는 그때까지 계속해서 역사할 것입니다. 그 권세는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라는 바울 사도의 증거대로(고전15:26) 이 세상의 그 어떤 권력이나 권위, 지배자 보다도 오래도록 남아 죄인 된 인간을 지배할 것입니다 .
3. 사망의 권세에서 벗어나는 길
인간이 사망의 길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길입니다. 성경은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고 말합니다.(행4:12) 즉 인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역을 통해서만 죽음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위해 대신 죽으시고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심으로 사망에서 벗어나는 길을 마련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를 의지함으로 참된 자유를 누려야겠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요10:7)
인간의 범죄와 하나님의 은혜(1) (롬 5:15)
바울은 로마서에서 그의 특유한 논조를 구사합니다. 특히 본문의 구절은 더욱 그러한데 그것은 대조적인 용어를 사용하여 결론을 도출해 내는 것입니다. 아담과 그리스도, 순종과 불순종, 할례와 무할례, 인간의 범죄와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 등이 바로 그와 같은 대조적 표현입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한 사람의 범죄가 전 인류를 사망에 이르게 함같이 한 사람의 완전한 순종이 많은 사람으로 의롭게 한다는 장면을 묘사함으로써 상황의 대전환을 가져오고 있습니다.
1. 대립적인 두개의 주권
1) 죄의 주권
한 사람의 범죄로 죄가 세상에 들어왔으며 모든 사람이 사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롬5:12) 죄는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몇 가지의 결과를 초래하는데 그 첫째는 사망입니다.(롬6:23) 그것은 영육 간에 미치는 죽음을 의미합니다.(창3:19) 한 사람 아담의 불순종이 초래한 결과는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아담은 한 개인으로 범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인류의 대표자였으며, 그로 인하여 그가 지은 죄는 모든 인류에게 전가된 것입니다. 둘째는 불화입니다. 우리는 인류의 전 역사에 나타난 사건을 통하여 이 단어의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죄의 결과로 인간은 하나님과 멀어졌습니다. 아담은 범죄한 후 하나님을 피하여 숨었으며(창3:10) 그 후손은 역사상에 계속적인 범죄를 자행해 왔음을 성경은 증거합니다. 또한 인간과 인간이 불화하여 아담은 하와에게 그 책임을 전가하려 했습니다. (창3:12) 그리고 인간의 범죄는 자연과의 불화도 가져왔습니다. 자연을 지배하며 다스릴 특권을 받았던 인간이 자연의 위협을 받게 된 것입니다. 셋째는 인간의 무능력입니다. 인간은 종종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죄로 인해 초래된 죽음은 인간의 힘으로 결코 극복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2) 은혜의 주권
죄가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은혜가 주장하는 곳에는 인간에게 소망과 희망을 가져다줍니다. 그 자세한 내용을 살펴보면 첫째는 인간에게 생명을 줍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누릴 수 있는 생명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상한 심령을 가지고 그에게 나와 회개하고 자복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생명의 약속을 실현하십니다.(롬4:20) 둘째는 평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인생의 순례과정에서도 보호하시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히4:3) 셋째는 능력을 가져다줍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빌4:13)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2. 아담의 불순종과 그리스도의 순종
바울은 로마서에서 특히 두개의 단어를 자주 사용합니다. 그것은 ‘아담’과 ‘그리스도’입니다. 아담은 죄를 상징하고 그리스도는 은혜를 상징합니다. 아담은 죄악에 미혹당하여 타락의 길을 열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경고를 소홀히 여겼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는 공의가 담겨져 있으며, 절대적인 책임이 요구됨에도 불구하고 아담은 그러한 주님의 명령에 소홀히 했던 것입니다. 그의 그러한 행동이 얼마만한 영향을 미치게 될지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행동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발적이면서도 순종적인 희생을 하셨던 것입니다. (마26:39) 또한 율법에 대한 가장 완전한 순종으로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롬10:4) 그는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시고 영화롭게 하셨던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함을 보장받을 수 있습니다. 아담의 불순종이 많은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었다면 그리스도는 순종으로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의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3. 흘러넘치는 하나님의 은혜
그리스도로 인하여 인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수리적으로 측량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요한은 그리스도를 가리켜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고 했습니다.(요1:16) 하나님은 은혜는 영원토록 계속해서 흘러넘치는 은혜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지극히 풍성함’이라고 했습니다. (엡2:9)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함을 받은 자들이 누리는 축복인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는 헤아릴 수도, 측량할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속죄는 제한이 없습니다. 그를 믿고 의지하며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무한정으로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인간의 범죄와 하나님의 은혜(2) (롬 5:15)
바울은 그리스도의 구원을 설명하면서 구속사적 관점에서 두 사람을 제시합니다. 그 두 사람은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인류는 두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사 속에서 커다란 변화의 전환점을 가져오는 계기를 마련하였습니다. 그것은 ‘범죄와 의’이며, ‘사망과 생명’입니다. 한 사람 아담으로 인하여 인류는 하나님과 멀어지는 계기가 되었고, 한 사람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류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게기를 찾았습니다. 바울은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를 대비하여 설명함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선포합니다. 이제 이러한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1. 아담의 범죄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여기서 ‘한사람’이란 것은 ‘아담’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1) 아담의 범죄는 교만과 이기주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만들어 놓으시고 먹지 말라는 명령을 하심으로 자신에게 순종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만약 불순종할 때에는 죽음이 닥칠 것이라는 사실을 경고하심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 중심주의로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뱀이 와서 유혹할 때 선악과를 먹으면 선악을 알게 된다고 말합니다.(창3:5) 그 유혹에 넘어감으로서 인간은 스스로 선악을 구별할 줄 알게 되기를 원하였습니다. 그것은 인간 스스로가 유익한 것과 해로운 것을 결정하겠다는, 하나님을 떠난 독립적인 선언이었습니다. 또한 뱀이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고 하는 유혹에(창3:5) 넘어감으로 인간의 중심인 하나님을 몰아내고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려고 하는 교만에서 출발한 것이었습니다.
2)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김으로 나타난 결과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파괴로써 사망이 이르른 것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를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롬5:12)라고 설명하였습니다. 결국 아담은 모든 인간의 대표로 행동하였고 그러므로 아담이 죄를 범하였을 때 그 죄의 결과로 모든 인간은 스스로가 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함으로 범죄하고 그 결과로 모든 사람에게 사망이 이르게 되었습니다. 성경에서는 이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2:3)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 ‘이와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5:12)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바울도 다음과 같이 선포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6:23)
2. 하나님의 선물
‘그러나 이 은사는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여기서 ‘은사’는 원어에서 인간 사이에서 교환되는 일반적인 선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가장 높고 귀한 선물을 가리키는 말로 최고의 은혜를 의미합니다.
1) 이 선물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온 것입니다.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독생자를 주시기 위해서 구원을 이야기하셨고 그래도 불순종한 인간을 위해 가장 귀하신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신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행위의 결과로 의롭다고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비록 행위는 경건치 않다 할지라도 믿기만 하면 의롭다고 인정해 주신다는 확고한 사실입니다. ‘일하는 자엑;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4:4,5) 이 두 가지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최고의 선물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2) 이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온 것입니다.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예수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신 분이었습니다.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벧전 2:22) 그런 분이 십자가에 달려 정죄 받으셨습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벧전2:24) 이러한 순종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요17:4).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5:19) 이러한 그리스도의 순종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의롭다 하심이 이르렀고 생명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두번째 아담으로 오신 그리스도 (롬 5:16)
중국의 철학자 공자는 성선설을 주장하여 인간의 본성은 본래 선한 것이므로 교육을 통해 선한 본성을 고양시켜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담이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죄가 이 세상에 들어와서(17절) 모든 인간은 죄인이 되었으므로 이 세상에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롬3:10)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죄인인 인간의 보상은 오직 사망밖에 없습니다. (롬6:23)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은혜를 베푸셨으니 곧 그리스도 예수를 화해의 제물로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인 인간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의 소망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사도는 본문을 통해 죄의 근원인 아담과 은혜의 근원인 그리스도를 비교하여 아담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 그러면 두번째 아담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어떻게 구원의 은혜를 얻을 수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죄의 근원인 아담
1) 인간의 대표자 아담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만물을 다스리도록 창조하셨습니다.(창1:28) 그래서 인간을 기계와 같이 만드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창1:27) 만드시고 하나님의 지, 정, 의를 가지게 하셔서 인간의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섬기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자발적인 섬김을 허용하시기 위하여 선악과를 만드시고 그 과실을 따먹지 말도록 아담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행위 언약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담과 언약을 맺으신 것은 아담 개인과의 사건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아담의 이름이 상징하듯이 모든 인간과 맺은 언약이며 아담은 그 대표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하고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의 죄는 아담 개인의 죄가 아니라 아담의 후손인 전 인류의 죄인 것입니다.
2) 아담을 통해서 들어온 죄
언약의 파기로 인해 아담에게 내려진 죽음이란 형벌은 육신의 죽음만이 아니라 하나님과 교제의 단절이란 영적인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떠난 인간은 당연히 세상 권세자인 죄의 종노릇(17절)을 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배반한 인간의 원죄와 그로 인한 인간의 부패와 타락한 마음은 죄가 왕노릇을 하게 됨에 따라 더욱 더 부패해져서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죄인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아담의 죄를 통해 들어온 마귀의 지배 아래에 놓여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졌습니다.
2. 은혜의 근원인 그리스도
1) 인간의 대표인 그리스도
비록 인간은 하나님을 배반하였으나 사랑의 하나님은 그래도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이심과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죄로 인해 죽게 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는 인간의 죄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죄의 대가를 지불하는 것은 죄인인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없는 희생의 제물로 독생자 예수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인간의 몸으로 보내신 것은 죄가 없는 희생 제물임과 동시에 구원받을 인간의 대표성을 지니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은 구약시대에 죄를 씻기 위해 대신 죽은 어린 양의 희생제물(레4:32)과 같은 성격을 가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1:29)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이 죽게 되었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새로운 아담으로 오셔서 자신의 몸을 희생제물로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히7:27) 인간의 모든 죄를 하나님 앞에 깨끗케 하시고 인간에게 구원의 길을 열으신 것입니다.
2) 그리스도를 통해 들어온 죄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속죄의 제물로 드려 인류를 구원하시기 이전에 죄의 문제에 대한 완전한 해결을 없었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사역은 구원의 완성이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는 아담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들어온 죄의 권세를 물리치시고 정복하심으로 인간이 더 이상 죄의 종 노릇을 하지 않도록 (롬6:6)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망의 원인인 죄에서 떠난 인간은 하나님께 의롭다 인정하심을 받고 구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대속이 모든 자에게 효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전제조건으로 죄를 씻는 희생의 피를 요구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죄는 인간이 아닌 그리스도께서 흘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의 피가 아닌 그리스도의 피를 들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들고 나아가는 방법이란 바로 그리스도의 피가 구속의 피임을 믿는 믿음인 것입니다. (롬3:25)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구주로 영접하는 자는 후에 그리스도와 같이 영광의 왕 노릇을 할 것입니다.(딤후2:12)
영원한 죽음과 영원한 생명 (롬 5:17)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맞게 됩니다. 다소 오래 살고 일찍 죽는 차이는 있을지 모르나 어떠한 형태로든 죽음을 맞이하는 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중국의 진시황은 이러한 죽음을 피해보고자 온갖 방법을 다 써 보았지만 죽음은 역시 황제도 넘어설 수 없는 커다란 운명이었습니다. 이렇듯 죽음은 우리에게 가장 무서운 것 중의 하나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죽음이 끝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죽음이 이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허무 그 자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무기력하게 죽음의 사신을 두려움으로 기다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육체적 죽음보다 더 무거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망의 권세 아래 갇히게 되는 영원한 죽음입니다. 1. 영원한 죽음
1) 죽음의 원인인 인간의 타락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후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종신토록 고생을 하며 살다가 결국은 죽어서 한줌의 흙으로 돌아가도록 운명지어졌습니다. 이때부터 인간은 영원한 죽음, 곧 영적 사명 외에도 하나의 사건에 불과한 육체적 죽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2) 죽음의 기독교적 이해
많은 불신자들은 육체적 죽음이 이 세상, 그리고 자신의 삶의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육체적 죽음의 의미는 매우 다릅니다. 세상의 죽음은 결코 모든 것의 종말이 아니요, 영원한 생명 안에서 지나쳐 가는 하나의 작은 사건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하물며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고뇌, 곤궁, 질병, 비참, 고민, 재난, 고통, 번민이라고 불리우는 것들은 말할 바도 아닙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 모든 인간에게 있어 가장 큰 절망은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떠나 사망의 권세 아래 놓인 인간의 운명인 것입니다. 그것은 육체적 질벙이 아닌 영적 죽음이며 궁극적인 죽음입니다.
3) 영원한 죽음
19세기의 천재 철학자인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의 진정한 죽음을 ‘절망’이라는 병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여기에서의 절망이란 그야말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원한 죽음을 맞이할 수 밖에 없는 절대적 위기에 처해있는 인간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인간이 영원한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즉 그리스도의 죽음의 대속을 통해 직면한 영원한 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2. 의인과 확실한 구원
1) 의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역사는 인간의 의로움이나 정당함을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우심을 통해서 이루어진 선물입니다. 이것을 의롭다 칭함(칭의) 혹은 의롭다 인정함이라 부릅니다. 곧 우리의 노력이 아닌 예수님의 인정으로 구속받는 것입니다.
2) 대속의 은총
바울은 분명히 인간이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님을 자세히 설명하였습니다. (롬4:1-25) 여기에서 우리는 대속의 은총을 발견하게 됩니다. 대속은 마치 한 알의 밀알이 썩어 죽음으로써 많은 열매를 맺는 것과 같이 자신의 죽음으로 타인을 살리는 오묘한 희생입니다. 이는 놀라운 은총이 아닐 수 없고 기적 중에서도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이 없다고도 하고, 대속의 믿음이 우매하다고도 합니다. 그러한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이 없다고도 하고, 대속의 믿음이 우매하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은총을 입은 우리에게 있어서는 이것이야말로 인간을 아담에게서 비롯된 영원한 죽음으로부터 살려내는 유일한 길이요 힘입니다.
3. 참 생명 안에서 왕 된 우리
1) 참 생명을 소유한 기쁨
생소한 로마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의 복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사도 바울은 열심으로 자신의 신앙을 간증하였습니다. 그가 그러한 중에서도 느꼈던 가장 주된 기쁨은 역시 생명의 왕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삶의 환희였습니다. 오랜 동안의 선교 여행을 통해 여러번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기고 굶주림과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사도 바울은 자신의 그러한 삶 때문에 기뻐하고 심지어는 로마에서의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고 순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2) 영원한 생명의 힘
위와 같은 사도 바울의 강인한 의지는 그야말로 인간의 갖은 고통과 번민과 질병, 급기야는 육체적 죽음까지도 재앙이 아닌 하나님의 은총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영원한 생명 안에서 나오는 힘입니다. 그러하기에 사도 바울은 인내는 연단을 주고 연단은 소망을 주는 것으로 생각했으며, 그 소망은 성령이 주는 자랑스러운 선물로 생각하였던 것입니다.(롬5:4,5)
그리스도인의 확신(1) (롬 5:18)
바울은 본문과 다음 구절에서 5장의 전체적인 내용을 요약하면서 결론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범죄한 인간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해하고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율법의 정죄함을 받아 사망에 이를 수 밖에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의의 한 행동, 곧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사망에서 의와 구원의 길로 우리를 인도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믿음을 굳게 해야 합니다. 이제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구원의 확신에 대하여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우리는 모두 심판과 징벌의 대상입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아담의 행한 불순종 때문에 모든 사람이 죄인의 대우를 받는다고 밝혔습니다. 즉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시고 아담을 인류의 대표로 지명하셨습니다.(창1:28) 하나님은 아담이 전체의 대표가 될 것과, 그의 행동의 열매를 전인류가 누려야 함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아담과 함께 그 안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역시 죄의 책임을 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지위란 재판상으로 죄인의 신분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죄인 된 것은 우리의 개인적인 행동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아담의 불순종에 의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창3:15) 본문에서 바울이 강조하고자 하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인류 전체가 죄인으로 규정되었으며 죄인의 범주에 들게 된 것입니다. 죄의 본성을 지닌 인간은 그 마음속에서 온갖 악을 생각해 내고 또한 악한 일만 행하며 심판을 피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자신이 죄인이며, 심판의 대상임을 깨닫고 회개하고 자복하는 심령으로 그리스도께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께서 순종으로 의를 이루셨습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우리가 죄인이었다는 것이 확실한 만큼이나 우리가 의인되었음을 역설합니다. 이는 둘째 아담되신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한 것입니다.(히5:9)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로부터 오며, 그 안에 있습니다.(요10:9) 나의 죄인됨이 전적으로 아담에게서 온 것처럼 나의 의와 구원도 전적으로 그리스도에 의한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 순종 보다 더 영광스러운 일은 없습니다. 첫째로 그가 제정하신 율법 아래로 자신을 굴복시키고 낮고 천한 인간의 자리에 오시어 육신을 입으신 것입니다. (요1:14) 둘째로 희생에의 능동적인 순종을 하셨습니다. 그는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같았습니다. (사53:7) 주님은 자발적이면서도 완벽하게 순종하셨습니다. 바울은 우리의 죄 된 신분이 변화를 가져온 것이 바로 주님의 이와같은 순종의 결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어 새로운 생명을 받게 됩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명제를 우리는 확신해야 합니다. 이것이 로마서 전체의 대주제입니다.
3. 사망의 영역에서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칭의는 사죄뿐만 아니라 우리가 죄의 종 노릇에서 완전히 벗어났음을 의미합니다.(사50:8) 우리는 생명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하늘의 소망을 두고 사는 자들입니다.(고후1:7) 이미 그러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과거적인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하여금 우리를 대신하여 죄의 대속제물로 삼으셨습니다.(고전5:21) 우리는 그의 죽으심에 함께 장사지낸 바 되었으므로 더 이상 죄가 우리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죄는 오직 우리가 사는 날 동안만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동과는 무관하게 죄인 된 것처럼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의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신분이 바뀐 것입니다. 사망의 영역에서 벗어났습니다. 더 이상 사망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며 이제는 은혜가 우리에게서 왕노릇합니다.(요1:16) 이 진리를 확신해야 합니다.
4. 하나님이 끝까지 보호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받은 우리를 끝까지 지켜 주십니다.(시34:7) 우리는 더 이상 죄에 대하여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도 우리를 멸망시킬 수 없습니다. (요17:12) 하나님은 성도를 구속하시기만 하시고 내버려 두시는 분이 결코 아닙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보호하시며 안전하게 하십니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들은 끊을 자가 없으며(고후13:5) 성령께서 그 길을 인도하십니다.(고후1:21,22) 이러한 삶의 실제적인 인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속하신 은혜를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확신(2) (롬 5:18)
아담과 그리스도는 인류의 타락과 구원을 대표합니다. 즉 아담은 모든 인류의 대표자였으나 그가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모든 사람이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심판아래 놓여 고통당하고 멸망당하는 인간들을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 아담으로 인해 타락한 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또 한사람 아담을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통하여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주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독생자 그리스도 예수십니다. 그러면 그러한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죄인에게 어떻게 구원이 임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그리스도의 의와 행동
1) 순종하셨습니다.
아담이 범한 죄의 핵심은 불순종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금하신 열매를 따먹음으로 그의 말씀에 불순종하였고 그 결과 모든 인생에게 사망이 임하게 되었습니다.(고전15:21) 이처럼 불순종은 사람을 사망에 이르게 할 정도로 하나님께서 매우 싫어하시며 죄악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제사보다 순종이 낫다고 하셨던 것입니다.(삼상15:21)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이와같이 하나님께서 참으로 원하시는 순종의 모범이 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자발적으로 자신을 순종하셨습니다. 거리낌이나 억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것이 아니라 기꺼이 영광의 보좌를 버리고 죽기까지 온전한 순종을 하셨던 것입니다.
2) 희생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온전한 순종은 곧 그리스도의 희생을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순종하는 믿음으로 자기의 가장 소중했던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드렸듯이(창22:3-18) 그리스도도 하나님께 온전한 순종을 하기 위해 십자가에 자신의 몸을 희생하셨던 것입니다. 그 희생은 흠없고 온전한 어린양의 범죄한 인생을 위해 스스로 죄인이 되시고 고난과 죽음을 자처한 희생이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는 아담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인간의 원죄를 극복하기 위하여, 또 온전한 순종의 모범이 되시기 위하여 자기를 철저히 부인하고 고난과 죽음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심으로 자신을 희생하셨던 것입니다. 그 결과 어둠과 죽음의 권세에 놓여 인간에게 희망과 기쁨이 가득한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의 의의 결과
1) 모든 사람이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희생하심은 구원의 복음을 믿는 자로 누구든지 구원을 얻게 하시려는 사랑 때문이었습니다.(요3:16) 즉 이 구원은 부자나 힘있는 자들만 위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가난하고 억눌린 자만을 위한 복음도 아니며 의인만을 위해서, 선한 자만을 위한 복음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구원은 세상의 모든 사람을 위해서 열려져 있으며, 모든 사람을 위해서 열려 있져 있으며,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주어진 것입니다. 구원의 은총은 오직 모든 사람에게 열려진 구원의 가능성을 깨닫고,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며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에게만 허락된 것입니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모든 사람에게 만연된 죄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며 그분의 뒤를 따르는 자에게는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구원의 길이 열려져 있음을 뜻합니다.
2)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었습니다.
‘의롭다 하심’은 인간의 행위나 노력이나 능력에 의해 주어진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것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총입니다. 그런데 이 은총에는 커다란 능력이 있어서 더러운 것도 깨끗하게 하며, 죄를 성결하게도 합니다. 즉 인간 속에 내재해 있는 더러운 죄악을 깨끗하게 하며, 죄를 성결하게도 합니다. 그러므로 살감이 의롭게 되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는 것이며, 이 은총은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십자가의 희생의 피값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3)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아담이 불순종의 죄를 지은 결과 모든 인생은 사망의 권세 아래 놓여 생명에 이르지 못하고 죽을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12절) 이는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롬6:23) 그래서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사망 아래 놓인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하여 커다란 은총을 예비하셨습니다. 그것은 곧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의 어린 양으로 삼아 완전한 재물로 삼음으로 그것을 통하여 영생을 얻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부활의 능력을 주심으로 모든 사망의 권세를 무찌르고 영원한 생명의 첫 열매가 되게 하심으로 그를 믿는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의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희생과 순종이 갖는 큰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순종치 않은 자와 순종한 자(1) (롬 5:19)
바울은 본문에서 순종치 않은 자와 순종한 자를 대비적으로 묘사하여 표현했습니다. 순종치 않는 자는 아담을 가리키고 순종한 사람은 예수를 가리킵니다. 본문은 앞에 나오는 18절의 내용을 반복해서 그 근거를 규정짓고 보충설명을 해주는 말씀인데, 여기서는 법적 관계를 떠나 순종에 관한 면에서 첫 사람 아담과 둘째 아담 그리스도를 대조적으로 율법과 복음의 상관성을 깨우쳐 줍니다. 이렇게 볼 때 바울은 창세기 3장을 염두에 두고 본문을 기록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순종(복종)을 척도로 두 사람을 비교하는 논리는 빌 2:8을, 또는 히5:8,9를 따랐습니다. 어쨌든 순종할 것이냐 불순종할 것이냐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있는 모든 인간에게 던져진 양자택일의 문제입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가 결단을 내리고 살아야 할 문제입니다.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순종치 않은 자
‘한 사람이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아담은 자신의 불순종이 이렇듯 모든 인류에게 죄의 굴레를 씌우게 할 줄을 몰랐을 것입니다. 한 순간의 실수가 영원히 돌이킬 수가 없는 죄악으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 현상은 지금도 우리에게서 또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나 한 사람이 잘못한들 무슨 그리 큰 문제가 있을까? 나 한 사람이 빠지는 데 흔적이 날까? 이러한 생각이 연쇄적인 반응을 일으켜 작은 실수가 큰 죄악을 일으키는 불행의 씨앗이 되기도 합니다. 주님이 비유로 든 탕자의 경우에도, 탕자는 자기 한 사람이 편하고 자유롭게 살겠다고 아버지 말씀을 불순종하고 객지로 나갔으나, 그의 그러한 행동이 온 집안의 화목을 깨고 식구들에게 불행을 야기시킨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눅15) 나 하나쯤이야 하는 생각이 이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화를 자초하는 근원이 됩니다. 그러므로 나 나 한 사람이 책임과 의무를 다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라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은 물론 알지 못하는 미지의 사람과 장차 올 후세 사람들에게까지도 엄청난 재앙을 뿌리고 갈 수 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도 버리지 않으시며 사랑하시고 예수께서는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거친 산과 들을 헤매십니다. 한 사람의, 하나의 목숨이 소중하고 그 책임이 크심을 깨우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아간 한 사람의 작은 탐심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수많은 백성들이 전장에서 죽음을 당하게 된 사례도 있습니다.(수17:19) 그같은 일은 역사에 무수히 나오는 현상입니다. 그런데도 왜 같은 실수가 반복되고 예기된 불행을 미연에 방지하지 못할까요? 성경에서, 아담에게서 바른 교훈을 가슴깊이 받아들이지 않은 결과입니다.
2. 순종하는 자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곧 예수의 순종이 많은 인류에게 의인으로 인정받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담이 불순종하여 지은 죄악이 세상을 죄악으로 가득 차게 하였으나 예수님은 순종하심으로 그 죄를 덮어버리시고 (가리우시고), 우리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칭호를 받게 하신 것입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삼상15:22)라고 사울왕을 꾸짖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순종을 좋아하십니다. 이 사실을 아는 독생자 예수께서는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고 하나님의 의를 성취하셨습니다. 한 사람의 순종에 따른 헌신과 희생이 많은 사람을 살린 사실은 역사상 많이 있으나 예수님의 순종은 전인류의 생명을 사망에서 건진 유일무이한 순종입니다.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우리도 말씀에 순종해야 하겠습니다.
3. 순종의 성경적 의의
모든 인간들이 걸어가는 인생길은 구원과 멸망의 두 길 중 하나입니다. 우리 인간의 생활은 마치 뿌리없는 풀처럼, 파도와 함께 일어나는 물거품과도 같은 것으로 영원하지를 못합니다. 그 끝에는 구원과 멸망이 있으며 이 사실은 해가 동쪽에서 떠오르듯이 확실하고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이 두 범주에서 제외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한 사람의 순종을 따라 삶으로써 영생을 얻을 것이냐 한 사람이 불종한 것을 따라 영멸을 할 것이냐 하는 결단이 우리 신앙의 요체가 됩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것, 그것은 우리를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살리는 길입니다. 어버이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식에게, 스승의 가르침을 순종하는 제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교회에게 축복이 임하리라는 믿음은 당연하다고 성경은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항상 복종하며 두렵고 떨림으로 너의 구원을 이루라'(빌2:12) 바울의 이 권고는 이 시간 우리를 향해서 들려주는 말씀입니다.
순종치 않은 자와 순종한 자(2) (롬 5:19)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성도는 죄와 전혀 무관한 존재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한다해서 행위가 완전한 의인이 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여전히 죄를 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죄의 권세 아래 있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아래 있으며 죄의 결과인 사망에 이르지 않습니다. 바울은 이처럼 성도의 죄와 사망과의 무관성을 증명하고 확증하기 위해 본문은 물론 본장 전체를 할애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특히 그 무관성을 역설하기 위해 아담의 불순종과 그리스도의 순종을 대비시키고 있는데 그 의미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아담의 불순종
1) 죄의 근원은 불순종입니다.
아담의 타락은 그것을 명백히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아담은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써 타락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의 불순종은 그로 하여금 되돌아올 수 없는 타락의 길을 걷게 했습니다. 인간 세계 속에 현존하고 있는 수많은 죄악은 이 불순종 이후에 생겨났습니다. 즉 아담의 불순종은 인류의 범죄의 시작을 알린 것입니다. 아담의 불순종은 죄로 하여금 맘대로 세상에 침입하도록 무방비 상태로 만들었습니다. 죄는 아담의 불순종을 통하여 이 세상에 들어왔고 왕으로 군림하였습니다. 아담의 불순종은 만악의 씨앗이 되어 이후 그들의 후손을 통해 많은 죄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살인, 탐욕, 간음, 우상숭배 등 모든 죄악은 아담의 불순종이 근원이 되어 이 세상에 보편화된 죄악은 아담의 불순종이 근원이 되어 이 세상에 보편화된 죄악의 열매들입니다. 그리고 이 불순종은 오늘날에도 보편적 죄악의 근원으로 모든 인간들에게 존재합니다. 특히 이 불순종은 불신앙을 포함함으로써 더욱 무서운 죄를 격발시킵니다.
2) 아담의 불순종은 죄를 이 세상에 끌어들이는 결과만을 초래한 것이 아니라 단번에 모든 인류를 죄인으로 만들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주안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첫 언약을 체결하실 때 그는 전인류의 대표자였습니다. 그는 우리를 대표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언약을 받았고 당시 우리는 그의 안에 있었습니다. 이 원리에 의해 그의 불순종은 그 개인의 불순종이 아니라 전인류를 대표한 불순종이었습니다. 우리는 그의 안에서 하나님께 불순종하였고 자연히 죄인으로 규정되었습니다. 이는 바울의 독특한 진술이지만 주관에 치우친, 오류가 섞인 진술이 아닙니다. 그는 성경을 바로 이해했으며 정확한 성경이해가 그로 이러한 진술을 하게 한 것입니다. 어쨌거나 아담의 불순종은 인간 모두를 불순종의 아들들로 만들었습니다.
2. 그리스도의 순종
1) 순종의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철저히 하나님께 순종하셨습니다. 그의 순종에 대해서는 복음서와 서신서들이 확실히 증거해 줍니다. 그는 먼저 율법이 규정하는 모든 것들을 준수하셨습니다. 그는 난지 8일만에 할례를 받으셨으며(눅2:21) 십이세 되던 해에는 절기의 전례를 좇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눅2:42) 죄가 없으시면서도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고 (마3:13-15 율법이 정한절기를 지키셨습니다. 이를 가리켜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갈4:4)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율법 아래 나셨습니다. 그는 율법의 지배를 받으셨고 그것에 온전히 순종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그의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는가를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그렇게 완벽하게 하나님 앞에 순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자세는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가 자기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사셨음을 배워야 합니다.(마26:42)
2)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표해서 순종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순종의 보다 더 깊은 의미는 그의 순종이 우리를 대표한 순종이라는 점입니다. 그는 율법에 흠없이 순종하셨습니다. 그는 완벽하셨습니다. 그에게도 우리에게와 마찬가지로 많은 죄의 유혹이 있었지만 능히 그것을 물리치셨고 율법에 철저히 순복하심으로 온전히 의를 이루셨습니다. (눅4:1-13) 그러나 이는 단순히 그의 능력의 광대함을 드러내시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의 신성을 드러내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그는 우리의 대표자이셨기 때문에 그는 의를 ㄹ온전히 이루신 것입니다. 그는 철저한 복종을 통해서 의를 이루셨고 이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키셨습니다. 우리의 죄책을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며 자신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키셨습니다. 그럼 로 우리는 아담 안에서 죄인 됨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의인이 된 것입니다. 아담의 불순종이 우리를 죄인되게 함과 같이 그리스도의 순종이 우리를 의인되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순종의 의미입니다.
율법의 완성자이신 그리스도(1) (롬 5:20,21)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준수함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행위 구원론을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의 율법뿐만 아니라 율법을 여러 경우에 적용하고 해석한 그들은 미쉬나와 구전 전승들까지도 철저하게 신봉하며 남에게 가르쳤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철저한 율법주의에 빠져서 하나님의 은혜를 잃어버리고 자신들의 율법적 선행을 자랑하는 교만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유대인들의 행위 구원론을 거부하며 오직 구원은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에 대한 믿음에 있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앞에서 율법은 그들의 의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의 허물과 죄를 고백하는 것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의 의를 자랑할 수 있는 인생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자만이 구원의 은혜를 맛볼 수 있습니다.
1. 율법의 기능
1) 죄를 드러내는 율법
바울 사도는 20절에서 하나님이 주신 율법은 인간으로 하여금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율법 때문에 죄를 많이 짓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율법으로 인해 인간의 범죄가 많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주신 율법은 선하고 온전한 것이기에, 율법이 없을 때에는 타락한 인간이 죄를 범해도 깨닫지 못했으나 율법이 주어졌을 때에는 그 율법으로 말미암아 인생들의 죄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롬3:20) 그러므로 율법은 죄를 사해주는 구원의 길이 아니라 모든 세상으로 드러난 그들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는 것입니다. (롬3:19)
2) 회개케 하는 율법
그러나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목적은 단지 인간의 죄를 드러내어 진노 아래 두고 심판하시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 앞에 정한 사망의 형벌밖에 기다릴 것이 없음을 깨달아(롬4:15) 오직 인간을 구원하실 분은 하나님 밖에 없음을 고백하고 인간의 힘에 의한 구원의 획득을 포기하도록 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길을 기대하도록 만드는 것입ㅁ니다. 그러므로 율법으로 인한 회개는 인간에게 구원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이기에 바울 사도는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20절)라고 선언했던 것입니다.
2. 율법의 완성자인 그리스도
율법이 비록 인간의 죄를 드러나게 하며 인간의 구원을 얻는 방법이 잘못 되었다고 할지라도 율법을 지키는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롬2:13) 하나님의 말씀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죄로 인해 타락한 인간이 율법의 요구를 지키지 못함으로 구원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공의의 하나님은 구원의 조건으로 반드시 율법의 온전한 실천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 율법의 요구는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영혼과 마음까지도 합치된 완전한 순종이므로(마5:21-32)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대신해서 구원의 요구 조건인 율법을 완성시킬 분을 보내셨는데 그분이 곧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율법의 형식 뿐 아니라 사랑과 진실을 요구하는 내용까지도 온전히 이루시고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칭의를 획득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스스로를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모든 인간은 율법의 완성자이신 그리스도께 나아가 그를 의지하고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인정받아 구원을 얻어야 합니다.
3. 그리스도의 은혜
1) 죄에서 해방됨
타락하여 선을 행치 못하는 인간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인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영원히 죄의 종노릇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21절)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대신해서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심으로 죄는 더 이상 인간을 주장하지 못하게 되어 인간은 죄의 종노릇에서 해방된 것입니다.(롬6:6) 따라서 이제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죄에서 떠나 의롭다 인정함을 받은 자가 된 것입니다.
2) 영생을 얻음
또한 인간은 죄에서 해방될 뿐만 아니라 율법이 규정한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었던 죄인이었으나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완성하시므로 죄의 대가인 사망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은혜에 동참하게 되고 그 대가로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영생에 동참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와 사망이 다시는 우리를 주장하지 못하며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과 자유함을 얻게 된 것입니다.
율법의 완성자이신 그리스도(2) (롬 5:20,21)
본문은 죄와 은혜의 상관관계에 관한 말씀입니다. 죄는 인류에게 사망을 가져왔습니다. 모든 인류는 아담 안에서 불가항력적으로 죄를 범했고 죄는 인류에게 사망을 가져왔습니다. 이것은 인류에게 하나의 법칙으로 굳어졌습니다. 인간은 원하지 않지만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어쩔 수 없이 이 법칙에 지배를 받습니다. 사도바울은 본문에서 이것을 표현하여 이르기를 ‘죄의 왕 노릇’이라고 표현합니다. 모든 사람은 죄의 왕 노릇 아래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죄를 범하여 그 결과로 사망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죄의 지배를 뚫고 이 세상에 들어온 ‘은혜’입니다. 이 은혜는 의가 이 세상을 지배했듯이 ‘왕권’을 가지고 이 세상을 지배합니다. 그러나 그 권세는 죄의 지배보다 절대적으로 우월합니다. 이제 이러한 바울의 논증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죄의 왕노릇
1) 죄의 지배 아래 태어나는 인간
먼저 우리는 우리의 출신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 선악간의 백지상태로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죄인 된 존재로 태어납니다. 우리는 죄가 지배하는 나라에서 태어나며 본질상 하나님과 원수 관계를 맺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51:4)라고 했으며 바울은 우리가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고 (엡2:3) 했습니다. 우리의 출신 성분은 이미 태어나기 전에 결정되었습니다.
2) 죄의 지배 아래서 살아가는 인간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은 죄가 지배하는 나라입니다. 우리는 죄의 통치를 받으며 죄가 요구하는 것을 만족시키며 살아갑니다. 어느 누구든지 죄의 통치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그 요구를 거부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에 와서 철학자들과 사회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바울의 논증을 거부합니다. 그들은 죄란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실수와 그릇된 결단, 혹은 제반 사회적 모순의 결과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합니다. 예수께서는 죄의 존재와 그 권능을 인정하여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8:34)라고 했습니다. 곧 모든 인간은 죄를 지음으로써 죄의 종이 되고 죄의 종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다는 것입니다.
3) 죽음을 향해 살아가는 인간
죄의 지배 아래 태어나고 죄의 지배 아래 살아가는 인간은 곧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입니다. 본문은 이를 명백히 밝혀 줍니다.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을 후원해 줍니다. 죄의 통치 아래 있는 자들을 사망의 지배 아래 둡니다. 먼저 인간을 영적 사망으로 인도합니다. 전혀 하나님의 말씀에 무감각한 자로 만듭니다. 그들의 눈을 어둡게 해 하나님의 거룩하신 계시를 보아도 알지를 못하게 합니다.(마13:13) 둘째로 인간의 육체를 사망으로 인도합니다. 인간을 한시적인 존재로 만들고 그것을 자각하게 해 스스로 절망하도록 만듭니다. 실로 죄의 왕 노릇 아래 있는 인간의 비참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2. 은혜의 왕노릇
1) 흘러넘치는 은혜
바울의 논증에 의하면 죄란 매우 심각한 것입니다. 인간의 사망과 고통의 모든 근원은 죄입니다. 죄는 인간을 지배하고 인간을 파멸로 몰고 갑니다. 이러한 죄의 심각성을 밝힌 후에 그는 이제 그가 본래부터 말하고 싶었던 논증으로 나아갑니다. 그것은 죄의 대칭되는 은혜에 관한 논증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속하시기 위해 은혜를 내리셨는데 그것이 그리스도입니다. 이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통해 이 은혜는 범죄와 같지 않습니다.(15절) 즉 죄의 권능과 통치와 상쇄될 만큼만의 권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단숨에 덮어버릴 만큼만의 권능은 죄의 권능보다 우월합니다. 이것을, 이러한 은혜의 성격을 설명하기 위하여 바울은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라는 표현을 쓴 것입니다.
2) 왕으로써 지배하는 은혜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은혜는 죄의 권능을 일시적으로 덮어버리는 단회적인 성격의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은혜를 하나의 인격으로 묘사합니다. 은혜는 하나의 거대한 권능을 가진 인격자입니다. 그는 죄보다 절대적으로 우월한 권능을 가지고 이 땅에 들어왔습니다. 아담의 범죄를 통해 죄가 이 땅에 침입해 왔지만 그 자리에 은혜가 재침입해 온 것입니다. 그리고 죄가 이 땅에 왕노릇했듯이 이제는 은혜가 왕노릇합니다. 은혜가 우리의 지배자가 된 것입니다. 이 은혜는 강력한 지배자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지배하에 있는 백성들은 절대로 잃어버리거나 빼앗기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은혜의 지배 아래 한 번 들어간 자들은 사망과는 무관한 자가 됩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11:25,26).
헬라어 로마서 5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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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카이오덴테스 운 에크 피스테오스 에이레넨 에코멘 프로스 톤 데온 디아 투 퀴리우 헤몬 예수 크리스투
개역개정,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새번역,1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누립시다’
우리말성경,1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는 인정을 받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고 있습니다.
가톨릭성경,1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립니다.
영어NIV,1 Therefore, since we have been justified through faith, we have peace with God through our Lord Jesus Christ,
영어NASB,1 Therefore having been justified by faith, we have peace with God through our Lord Jesus Christ,
영어MSG,1 By entering through faith into what God has always wanted to do for us–set us right with him, make us fit for him–we have it all together with God because of our Master Jesus.
영어NRSV,1 Therefore, since we are justified by faith, we have peace with God through our Lord Jesus Christ,
헬라어신약Stephanos,1 δικαιωθεντες ουν εκ πιστεως ειρηνην εχομεν προς τον θεον δια του κυριου ημων ιησου χριστου
라틴어Vulgate,1 iustificati igitur ex fide pacem habeamus ad Deum per Dominum nostrum Iesum Christum
히브리어Modern,1 לכן אחרי נצדקנו באמונה שלום לנו עם האלהים באדנינו ישוע המשיח׃
성 경: [롬5:1]
주제1: [칭의(稱義)의 결과]
주제2: [칭의(稱義)의 결과]
그러므로 – 이는 1장에서부터 4장, 특히 3:21부터 4:25까지의 내용에 대한 결론이요 그 적용이 새롭게 전개되기 시작함을 시사한다. 4장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고 또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구속된 자에게도 그 칭의의 혜택이 전가됨을 말하였다. 이제 5장에 들어가면서 ‘그러므로'(*, 운)라고 말하는 것은 이신 칭의에 대한 결론뿐만 아니라 그 적용이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됨을 의미하는 것이니, 이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주어지는 칭의의 열매들을 언급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 여기서 우리는 칭의의 결과에 대한 바울의 진술에 대하여 살펴보기에 앞서 ‘믿음’ 자체에 대한 성격 규정이 필요하다. ‘믿음’에 대한 견해에 따라서 본서의 나머지 부분이 어떻게 해석되는지가 판가름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에 따른 선물이므로 칭의의 조건이 될 수 없고 다만 율법과 대치되는 개념으로만 생각되는 경향이 있다(Deissmann, Michaelis). 이는 믿음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며 인간의 행위가 될 수 없다는 입장에서 취해진 주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믿음이 순종과 동일시되며(히 3:18, 19), 본절에서처럼 ‘믿음으로'(*, 에크 피스테오스)라는 말이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디카이오덴테스)이라는 동사의 조건이 되는 구절에 대해서는 충분한 설명이 될 수 없다(3:22, 30;갈 2:16;3:14;빌 3:9). 이와 관련하여 불트만(R. Bultmann)은 “공적에 대한 철저한 포기로서, 하나님에 의해 정해진 구원의 길에 공손하게 굴복하는 것으로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것으로서 ‘믿음'(*, 피스티스)은 옛 ‘자아’ 대신 새로운 ‘자아’가 형성되는 순종의 자유로운 행위”라고 역설하였다(Theologie des Neuen Testaments). 여기서 불트만은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기보다는 인간의 결단에 의해서 즉 ‘아래서 위로’ 행하는 행위임을 설파하였다. 이러한 불트만의 주장에는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보수주의의 견해(Machen)를 부정하면서 ‘믿음’이라는 단어가 바울에게서 애매하게 사용된 것을 수정해 보려고 하는 시도가 엿보인다. 그렇지만 ‘믿음’ 자체가 우리의 의지로 가능한 것인가 ? 불가능한 것을 바라고 믿는 그 ‘믿음’이 우리의 의지로 가능하다면, 합리적인 인간은 무엇을 근거로 불가능한 것을 믿는 신앙을 소유하게 되었는가 ? 불트만은 이에 대한 구체적인 대답을 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믿음’에 대해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순종’이 ‘믿음’과 동일시되는 것은 ‘믿음’이라는 심적(心的) 요소가 외부적으로 하나님 앞에 ‘순종’이라는 것으로 구체화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믿음은 심적 요소로서 이 역시 하나님의 은사(恩賜)가 아니고는 믿음을 지니는 것이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에 응답할 수 있게끔 인간의 심성으로 하여금 ‘믿음’을 향하도록 하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이 없이는 인간은 ‘믿음’을 갖을 수가 없다. 따라서 ‘믿음’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며 그것이 언어로 표현될 때 칭의의 조건으로 보일 때가 있으며, 더욱 구체적으로는 ‘순종’으로서 나타나기도 한다. 한편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카이오덴테스'(*)는 동사 ‘디카이오오'(*, ‘의롭다 하다’)의 단순 과거 수동태 분사형이다. 이는 본 서신을 쓰고 있는 바울과 당시 본 서신의 수신인인 로마 교회 성도들이 이미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은 상태임을 암시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된 인간과 의로우신 하나님 간에 평화의 관계를 맺게 해주는 주체이시다. 여기서 바울이 ‘화평'(*, 에이레네)이란 용어를 사용한 것은 죄인된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었으나(1:18;2:5)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진노의 문제가 해결 되었음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 그리고 또한 이 용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이 칭의를 얻게 된 결과를 설명하기 위하여 채택되었다. 그런데 혹자는 본절의 ‘화평’이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화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 흐르는 평안 상태를 가리킨다고 본다(Shedd). 그러나 본절의 문맥을 고려할 때 그리고 기타 바울 서신에 나타난 ‘화평’이란 단어의 사용을 감안할 때 그와 같은 주장은 지지를 얻지 못한다. 즉 본절의 ‘화평’ 앞에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라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대한 언급이 나오므로,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대한 언급이 나오므로, 하나님과 원수된 관계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사랑하는 호의적 관계로 진전되었다는 맥락에서 화평이 이해되어야 한다. 또한 골 1:20에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셨다는 사실이 강조되었고 엡 2:14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는 믿는 자의 화평이 되신다는 사실이 강조되고 있으므로, ‘화평’이란 단어는 진노 아래 있던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평케 되었다는 견지에서 이해될 수 있다. 결국 ‘화평’은 인간 내부의 인격적 변화를 말하기보다는 하나님과 원수된 인간이 회복의 관계로 진전된 점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은 성도는 하나님과의 우호적 관계라는 사실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샘물처럼 끊임없이 흐르는 하나님의 평화를 내적으로 누리게 된다.
디 후 카이 텐 프로사고겐 에스케카멘 테 피스테이 에이스 텐 카린 타우텐 엔 헤 헤스테카멘 카이 카우코메다 엪 엘피디 테스 돜세스 투 데우
개역개정,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새번역,2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금 서 있는 이 은혜의 자리에 [믿음으로] 나아오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될 소망을 품고 ㉡자랑을 합니다. / ㉡또는 ‘자랑합시다’
우리말성경,2 또한 우리는 그분으로 인해 우리가 서 있는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며 기뻐합니다.
가톨릭성경,2 믿음 덕분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서 있는 이 은총 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영어NIV,2 through whom we have gained access by faith into this grace in which we now stand. And we rejoice in the hope of the glory of God.
영어NASB,2 through whom also we have obtained our introduction by faith into this grace in which we stand; and we exult in hope of the glory of God.
영어MSG,2 And that’s not all: We throw open our doors to God and discover at the same moment that he has already thrown open his door to us. We find ourselves standing where we always hoped we might stand–out in the wide open spaces of God’s grace and glory, standing tall and shouting our praise.
영어NRSV,2 through whom we have obtained access to this grace in which we stand; and we boast in our hope of sharing the glory of God.
헬라어신약Stephanos,2 δι ου και την προσαγωγην εσχηκαμεν τη πιστει εις την χαριν ταυτην εν η εστηκαμεν και καυχωμεθα επ ελπιδι της δοξης του θεου
라틴어Vulgate,2 per quem et accessum habemus fide in gratiam istam in qua stamus et gloriamur in spe gloriae filiorum Dei
히브리어Modern,2 אשר בידו מצאנו באמונה מבוא אל החסד הזה אשר אנחנו עמדים בו ונתהלל בתקות כבוד האלהים׃
성 경: [롬5:2]
주제1: [칭의(稱義)의 결과]
주제2: [칭의(稱義)의 결과]
그로 말미암아 – 바울은 인간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음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에 대해 다시 반복하여 말하고 있다. 이는 베드로가 이스라엘의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 앞에서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행 4;12)라고 하면서 구원을 얻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뿐이라고 역설한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 초기의 동방 사본들과 서방 사본들에는 ‘믿음으로’라는 문구가 없으며 현대의 일부 영역본에도 이 말이 생략되어 있다(NEB, RV, RSV). 그러나 이 말이 나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본절의 문맥상 그 의미가 함축되어 있으므로 이는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한편 엡 2:18에서 바울은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선언했는데, 이것은 본절과 내용상 같은 의미이다. 성도가 ‘믿음으로 서 있게’되는 것은 오직 성령의 사역에 의한 것이며 ‘은혜에 들어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후사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본절에서 암시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예비하시고 약속하신 그 은혜 속으로 우리가 스스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들어감을 얻는’ 것이다. 여기서 ‘들어감’으로 번역된 헬라어 ‘프로사고겐'(*)은 ‘접근'(access), ‘인도’, ‘채용’ 등으로 번역될 수 있으나 여기서는 ‘인도’의 의미로 봄이 가장 적절하다. ‘프로사고겐’은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나 신앞에 인도되거나 소개되는 특권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F.F. Bruce). 성도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를 구원주로 믿고 그의 자녀가 되었으며 그분에 의해 존귀하심과 영광중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인도함을 받고 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는 1:23 주석을 참조하라. 본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우코메다 에프 엘피디 테스 돝세스'(*)는 직역하면 ‘하나님의 영광의소망 가운데 우리가 자랑하느니라’가 된다. 여기서는 개역 성경의 ‘즐거워하느니라’에 해당하는 동사 ‘카우코메다'(*)가 다음과 같이 해석될 수 있다. (1) 일반적으로는 ‘자랑하다’란 의미를 지니지만 이는 유대인이 율법을 자랑하는 것과 유사한 어감이 풍기기에 오히려 ‘즐거워하다'(rejoice, KJV, NIV, RSV)로 해석하는 학자들이 많다(Hendriksen, Black). 그리고 혹자는 ‘영광스러워하다’, ‘영광을 돌리다’라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Lenski). 그렇지만 본절에서는 ‘자랑하다’든지 ‘영광스러워하다’든지 또는 ‘즐거워하다’든지 어느 번역을 취하든 의미상 별 차이가 없다. 바울이 지금 진술하고자 하는 바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소망 가운데 있는 성도의 내적인 변화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머레이(Murray)는 ‘최고로 기뻐하고 자랑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2) ‘카우코메다’가 1절의 ‘소유하다’, ‘취하다’를 의미하는 ‘에코멘'( 혹은 )의 해석과 같이 청유형(請誘形)으로 ‘즐거워하자’로도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3절과 본절의 문자 구조를 비교해 볼 때 청유형보다는 평서문의 문장이 더 자연스럽고 3절과도 조화가 잘 된다(3절 주석 참조). 그러면 성도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하며 즐거워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 첫째로,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은 곧 성도들의 영광이 된다고 그리스도께서 논증하셨기 때문이며(요 14:3; 17:24) 둘째로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며 성도들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구원 계획이 완성될 것이기 때문이다(히 2:10;벧전 5:4).
우 모논 데 알라 카이 카우코메다 엔 타이스 들맆세신 에이도테스 호티 헤 들맆시스 휘포모넨 카테르가제타이
개역개정,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새번역,3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을 ㉣자랑합니다. 우리가 알기로, 환난은 인내력을 낳고, / ㉢또는 ‘환난 가운데서도 자랑을 합니다’ ㉣또는 ‘자랑합시다’
우리말성경,3 뿐만 아니라 우리는 또한 환난 가운데서도 기뻐합니다. 이는 환난은 인내를,
가톨릭성경,3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영어NIV,3 Not only so, but we also rejoice in our sufferings, because we know that suffering produces perseverance;
영어NASB,3 And not only this, but we also exult in our tribulations, knowing that tribulation brings about perseverance;
영어MSG,3 There’s more to come: We continue to shout our praise even when we’re hemmed in with troubles, because we know how troubles can develop passionate patience in us,
영어NRSV,3 And not only that, but we also boast in our sufferings, knowing that suffering produces endurance,
헬라어신약Stephanos,3 ου μονον δε αλλα και καυχωμεθα εν ταις θλιψεσιν ειδοτες οτι η θλιψις υπομονην κατεργαζεται
라틴어Vulgate,3 non solum autem sed et gloriamur in tribulationibus scientes quod tribulatio patientiam operatur
히브리어Modern,3 ולא זאת בלבד כי אף נתהלל בצרות יען אשר ידענו כי הצרה מביאה לידי סבלנות׃
성 경: [롬5:3]
주제1: [칭의(稱義)의 결과]
주제2: [칭의(稱義)의 결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 ‘환난’으로 번역된 헬라어 ‘들마세신'(*)은 동사 ‘들리보'(*)의 여성 명사형이다. 원래 ‘들리보’는 포도즙 틀에서 포도즙을 짜내듯이 피와 땀과 눈물과 고통을 ‘짜낸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즐거워하나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우코메다'(*)는 동사 ‘카우카오마이'(*)의 1인칭 복수 현재형으로 ‘기뻐 날뛰다’, ‘의기양양해 하다’, 또는 ‘자랑하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바울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가게 된 즐거움이 복음으로 인해 받게 되는 핍박과 환난보다 훨씬 큼을 강조하고 있다. 성도가, 괴로움과 슬픔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환난을 극복하며 오히려 즐거움 가운데 힘차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세상의 즐거움과 고통은 잠깐 피었다 사라지는 안개처럼 가변적(可變的)이요 일시적인 반면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하는 즐거움과 기쁨은 불변하며 영원하기 때문이다(고후 4:18). 더더욱 성도는 주님께서 약속하신 바, 영원한 세계에 대한 소망이 지대하고 극명하기 때문에(요 14:1-3) 현재의 모든 고난을 즐거움 가운데 상쇄(相殺)시킬 수 있다.
환난은 인내를 – 복음을 따르는 자들에게는 필연적으로 환난이 닥쳐오며 인내가 요구된다(마 13:20-22). ‘인내’로 번역된 헬라어 ‘휘포모네'(*)는 동사 ‘휘포메노'(*)에서 유래한 여성 명사이다. ‘휘포메노’에는 ‘최후까지 남는다’, ‘참는다’, ‘계속하다’, ‘기다린다’는 의미가 있다. 성도들이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 때 극심한 핍박과 고난이 임하나 이 모든 환난에서 성령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참고 견디며 끝까지 살아 남을 수 있게 된다. 여기서 성도의 인내는 성령의 사역의 결과로 주어지는 수동적 의미만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성도의 성품과 인격에서 우러나오는 자발적인 의미까지 함축한다(W. Hendriksen).
헤 데 휘포모네 도키멘 헤 데 도키메 엘피다
개역개정,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새번역,4 인내력은 단련된 인격을 낳고, 단련된 인격은 희망을 낳는 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말성경,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을 알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성경,4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영어NIV,4 perseverance, character; and character, hope.
영어NASB,4 and perseverance, proven character; and proven character, hope;
영어MSG,4 and how that patience in turn forges the tempered steel of virtue, keeping us alert for whatever God will do next.
영어NRSV,4 and endurance produces character, and character produces hope,
헬라어신약Stephanos,4 η δε υπομονη δοκιμην η δε δοκιμη ελπιδα
라틴어Vulgate,4 patientia autem probationem probatio vero spem
히브리어Modern,4 והסבלנות לידי עמידה בנסיון והעמידה בנסיון לידי תקוה׃
성 경: [롬5:4]
주제1: [칭의(稱義)의 결과]
주제2: [칭의(稱義)의 결과]
인내는 연단을 – ‘연단'(鍊鍛)에 해당하는 헬라어 ‘도키메'(*)는 ‘증명하다’, ‘시련을 주다’, ‘시험하다’, ‘분별하다’, ‘택하다’ 등의 의미를 가진 동사 ‘도키마조'(*)에서 유래한 여성 명사로서 ‘연단’ 외에 ‘인격’, ‘증거’, ‘문서’, ‘자격’등의 의미를 지니며, 일반적으로 ‘엄격한 시험 또는 혹독한 시련을 통과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마치 용광로에서 금이 여러번 단련됨으로써 정금과 순금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성도는 여러 가지 시험과 환난을 참고 견딤으로써 그 자신이 정화된다. 여기에는 성령의 사역이 함께하며 이 믿음의 시련을 통과한 성도는 금보다 더 귀한 신앙인으로 증명된다(벧전 1:7). 혹자는 ‘도키메’를 ‘체험’으로 번역한다(Calvin). 즉 그는 본절의 ‘도키메’를 ‘하나님의 확실한 보호하심에 대한 체험’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도의 삶에 있어서 환난을 당하고 그 가운데서 인내하는 이 모든 과정들이 체험이므로 본절에서는 이와 같은 포괄적인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 바울은 신앙에서 소망의 문제로 접근했다. 신약성경에서 성도의 소망은 일반적으로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을 의미하지만 보다 구체적으로는 ‘부활의 소망’을 의미한다(행 28:20). 바울은 죽은 자가 다시 사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을 것이며, 또한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 성도의 신앙도 헛되다고 가르쳤다(고전 15:12-16). 이 말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임을 보여 주고 있다. 한편 본절의 ‘이루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테르가제타이'(*)는 ‘만들어내다’, ‘행하다’, ‘준비하다’, ‘정복하다’, ‘성취하다’ 등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본절에서는 어떤 사건에서 어떤 결과를 ‘산출해 낸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성도는 불 시험과 같은 연단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을 받으며 이러한 사실을 인식함으로써 부활에 대한 소망이 구체화되고, 그 소망만을 붙잡게 된다. 또한 본절의 ‘앎이로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도테스'(*)는 ‘오이다'(*)의 주격 남성 복수 분사이며, ‘오이다’는 ‘에이도'(*)의 제 2 완료 분사이다. ‘에이도’는 ‘기노스코'(*)가 주로 육적(肉的)인 앎을 의미하는데 반해 영적 체험을 통해 얻어지는 지식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그리고 ‘에이도테스’는 분사 형태이므로 체험을 통해 획득한 영적 지식이 부단히 계속됨을 의미한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는 소망이 물리적 지식이 아니라 부단한 영적 지식을 통해 성도의 삶 속에 확고하게 자리잡게 됨을 시사하고 있다.
헤 데 엘피스 우 카타이스퀴네이 호티 헤 아가페 투 데우 엨케퀴타이 엔 타이스 카르디아이스 헤몬 디아 프뉴마토스 하기우 투 도덴토스 헤민
개역개정,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새번역,5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하여 그의 사랑을 우리 마음 속에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말성경,5 이 소망은 우리를 낙심시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인해 그분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성경,5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영어NIV,5 And hope does not disappoint us, because God has poured out his love into our hearts by the Holy Spirit, whom he has given us.
영어NASB,5 and hope does not disappoint, because the love of God has been poured out within our hearts through the Holy Spirit who was given to us.
영어MSG,5 In alert expectancy such as this, we’re never left feeling shortchanged. Quite the contrary–we can’t round up enough containers to hold everything God generously pours into our lives through the Holy Spirit!
영어NRSV,5 and hope does not disappoint us, because God’s love has been poured into our hearts through the Holy Spirit that has been given to us.
헬라어신약Stephanos,5 η δε ελπις ου καταισχυνει οτι η αγαπη του θεου εκκεχυται εν ταις καρδιαις ημων δια πνευματος αγιου του δοθεντος ημιν
라틴어Vulgate,5 spes autem non confundit quia caritas Dei diffusa est in cordibus nostris per Spiritum Sanctum qui datus est nobis
히브리어Modern,5 והתקוה היא לא תביש כי הוצק בלבבנו אהבת אל על ידי רוח הקדש הנתן לנו׃
성 경: [롬5:5]
주제1: [칭의(稱義)의 결과]
주제2: [칭의(稱義)의 결과]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 바울은 연단을 통해 이루어진 소망이 부끄럽게 하지 않는 근거를 설명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무엇보다 먼저 성도 가운데 계시며 역사하시는 성령 때문이다. 성령께서는 성도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보증해 주시는(인쳐 주시는) 분이시기에 전신앙(全信仰)의 과정에 함께 계시고 보증하신 그 약속이 이루어지게 하신다. 한편 ‘성령으로 말미암아’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디아 프뉴마토스'(*)이다. 이처럼 헬라어 전치사 ‘디아'(*) 다음에 목적격인 ‘프뉴마'(*)가 오지 않고 소유격인 ‘프뉴마토스'(*)가 온 것은 성령이 원인이나 결과가 아니라 하나의 수단 내지 방법이 됨을 암시한다. 본절 외에도 신약 성경 전체에서 ‘디아’ 다음에 ‘프뉴마’가 온 경우는 단 한번도 없다. 다만 ‘엔 토 프뉴마티'(*)처럼 여격이 와서 방법을 나타낼 뿐이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성령을 받았다고 해서 자랑할 것이 되지 못함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현재 자신이 성령으로 충만하다 하더라도 이것으로 장래의 구원까지 보장받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성령은 구원에 이르는 방법이요 수단이므로 중요한 것은 성령 그 자체보다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가까이 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가 아니면 하나님께로 갈 수 없는 것이다(요 14:6).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 성령께서 성도와 함께 계시는 결정적인 근거는 바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때문이다. 따라서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계심은 하나님의 사랑이 성도를 향해 물붓듯이 부어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바울은 8:39에서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고 선포할 수 있었다. 본절의 ‘부은 바 됨이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여케퀴타이'(*)는 3인칭 단수 완료 수동태 직설법으로 ‘쏟아 부은 바 되었다’는 의미이다(has been poured, RSV). 여기서 하나님의 사랑이 액체처럼 쏟아 부어졌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충분히 넘치게 부어졌을 뿐만 아니라 모이는 물처럼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성도들에게 베풀어졌다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언급하면서 그 사랑의 표현이 가장 절정에 이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에티 가르 크리스토스 온톤 헤몬 아스데논 에티 카타 카이론 휘페르 아세본 아페다넨
개역개정,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새번역,6 우리가 아직 약할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제 때에, 경건하지 않은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우리말성경,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 그리스도께서는 작정된 시기에 경건하지 않은 사람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가톨릭성경,6 우리가 아직 나약하던 시절, 그리스도께서는 정해진 때에 불경한 자들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영어NIV,6 You see, at just the right time, when we were still powerless, Christ died for the ungodly.
영어NASB,6 For while we were still helpless, at the right time Christ died for the ungodly.
영어MSG,6 Christ arrives right on time to make this happen. He didn’t, and doesn’t, wait for us to get ready. He presented himself for this sacrificial death when we were far too weak and rebellious to do anything to get ourselves ready. And even if we hadn’t been so weak, we wouldn’t have known what to do anyway.
영어NRSV,6 For while we were still weak, at the right time Christ died for the ungodly.
헬라어신약Stephanos,6 ετι γαρ χριστος οντων ημων ασθενων κατα καιρον υπερ ασεβων απεθανεν
라틴어Vulgate,6 ut quid enim Christus cum adhuc infirmi essemus secundum tempus pro impiis mortuus est
히브리어Modern,6 כי המשיח בעודנו חלשים מת בעתו בעד הרעשים׃
성 경: [롬5:6]
주제1: [칭의(稱義)의 결과]
주제2: [칭의(稱義)의 결과]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 바울은 8절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라고 언급함으로써 본절의 의미를 보충하며 더욱 명확하게 해주고 있다. 바울이 엡 2:3에서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라고 진술하고 있듯이, ‘연약할 때에’는 믿음이 약한 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시점을 가리킨다. 이는 ‘연약할 때에’로 번역된 헬라어 ‘아스데논'(*)의 의미를 살려볼 때 분명해진다. ‘아스데논’은 ‘아스데네스'(*)의 제 2격 복수로서 ‘도움을 받을 수 없다’, ‘소망이 없다’는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의 자연인은 그 자신이 스스로 구원의 길을 찾을 수 있는 힘이나 소망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특히 바울이 ‘우리가 아직 연약하다’는 사실을 말한 것은 우리가 전혀 구원의 소망이나 그 길을 찾을 하등의 힘이 없었음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구체화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代贖)의 은혜를 받을만한 자격과 가치가 전혀 없었음을 강조하고자 함이었다.
기약대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타 카이론'(*)은 ‘정해진 시기에’ 또한 ‘적절한 때에’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 표현은 하나님의 경륜(經綸)이 세상 가운데에서 시행될 정확한 시점이 있음을 보여 준다(요 2;4;4:23).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일찍이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예언된 바이거니와(사 7:14;53:2) 하나님께서 일을 행하실 때에는 막연한 시기에 하는 것이 아니라 만세전(萬歲前)에 예정하신 계획에 따라 행하신다. 본절의 ‘기약대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때가 ‘적절한 시기’ 즉 ‘인류에게 가장 소망이 없던 때’였음을 의미하는 바, 사건이 이루어진 때의 중요성을 강조함과 더불어 배후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계획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구약성경에 예언된 그리스도께서 기약대로 이 땅에 오셨듯이, 재림도 기약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마 24:42-44). 실로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로서 당신의 영원하신 계획대로 인류와 유주의 역사를 다스리시며 성도들에게 약속하신 바를 반드시 성취하시는 분이시다(민 23:19).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 경건치 않은 자는 8절의 ‘죄인’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sinners, LB). 곧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이 죄인이며 또한 경건치 않은 자이다. 한편 ‘…를 위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페르'(*)는 그 외에도 ‘…대신에’, ‘…에 관하여’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불경건한 자들의 입장에서 이루어진 대속적인 사건이었음을 나타낸다.
몰리스 가르 휘페르 디카이우 티스 아포다네이타이 휘페르 가르 투 아가두 타카 티스 카이 톨마 아포다네인
개역개정,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새번역,7 의인을 위해서라도 죽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더욱이 선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감히 죽을 사람은 드뭅니다.
우리말성경,7 의인을 위해 죽는 사람은 거의 없고 선한 사람을 위해 과감히 죽는 사람은 간혹 있기는 합니다.
가톨릭성경,7 의로운 이를 위해서라도 죽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혹시 착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누가 죽겠다고 나설지도 모릅니다.
영어NIV,7 Very rarely will anyone die for a righteous man, though for a good man someone might possibly dare to die.
영어NASB,7 For one will hardly die for a righteous man; though perhaps for the good man someone would dare even to die.
영어MSG,7 We can understand someone dying for a person worth dying for, and we can understand how someone good and noble could inspire us to selfless sacrifice.
영어NRSV,7 Indeed, rarely will anyone die for a righteous person–though perhaps for a good person someone might actually dare to die.
헬라어신약Stephanos,7 μολις γαρ υπερ δικαιου τις αποθανειται υπερ γαρ του αγαθου ταχα τις και τολμα αποθανειν
라틴어Vulgate,7 vix enim pro iusto quis moritur nam pro bono forsitan quis et audeat mori
히브리어Modern,7 הן בעד הצדיק יקשה לאיש למות אכן למות בעד הטוב אולי ישאהו לבו׃
성 경: [롬5:7]
주제1: [칭의(稱義)의 결과]
주제2: [칭의(稱義)의 결과]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혹 있거니와 – 본절에서는 의인(a righteous man)과 선인(a good man)이 대조되어 있다. 혹자는 이 둘을 구분하여 ‘선한 사람은 의로운 사람보다 더 위대하다는 특징을 지닌다’고 진술한다(Lenski). 물론 문자적으로나 그 의미상 두 용어는 엄격하게 구분된다. 의인이 정의의 차원에 서 있는 사람이라면 선인은 사랑과 덕을 베푸는 사람이라는 어감을 지니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Lightfoot, Murray). 그러나 바울이 히브리인들이 시문학에서 즐겨 사용하는 평행 대구법(parallelism)을 이용하고 있으므로 본절은 평행된 두 구절이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나아가 서로의 의미를 보충해 주는 문장 구조를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해 본절은 의롭고 선한 사람을 위해 극히 드물기는 하지만 가끔 죽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의미를 지닌다(Murray). 이와 같은 본절의 핵심은 인간 세상에서 위대한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사람이 가끔 출현할 수 있다는데 있지 ‘의인’과 ‘선인’을 구별하는데 있지 않다. 더 나아가 본절은 의롭거나 선한 사람을 위해 죽는 희생적 행위 자체도 죄인을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에는 결코 견줄 수 없음을 함축하고 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절대적 사랑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인간 세상의 보편적이고 통속적인 사랑을 소개하는 형식의 비교법을 사용하고 있는 본절은 8절의 내용의 서론격이다. 본절이 8절 내용에 대해 서론격이라함은 의인이나 선인을 위해 죽는 자는 혹시 있을 수 있으나, 죄인을 위해 죽는 자는 결코 있을 수 없다는 점에 있다. 결국 본절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절대적 우위성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에는 너무나도 무가치하고 자격이 없는 인간의 본질적 양상을 드러내고 있다.
쉬니스테신 데 텐 헤아우투 아가펜 에이스 헤마스 호 데오스 호티 에티 하마르톨론 온톤 헤몬 크리스토스 휘페르 헤몬 아페다넨
개역개정,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새번역,8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실증하셨습니다.
우리말성경,8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그분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가톨릭성경,8 그런데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영어NIV,8 But God demonstrates his own love for us in this: While we were still sinners, Christ died for us.
영어NASB,8 But God demonstrates His own love toward us, in that while we were yet sinners, Christ died for us.
영어MSG,8 But God put his love on the line for us by offering his Son in sacrificial death while we were of no use whatever to him.
영어NRSV,8 But God proves his love for us in that while we still were sinners Christ died for us.
헬라어신약Stephanos,8 συνιστησιν δε την εαυτου αγαπην εις ημας ο θεος οτι ετι αμαρτωλων οντων ημων χριστος υπερ ημων απεθανεν
라틴어Vulgate,8 commendat autem suam caritatem Deus in nos quoniam cum adhuc peccatores essemus
히브리어Modern,8 אבל בזאת הודיע האלהים את אהבתו אלינו כי המשיח מת בעדנו בהיותנו עוד חטאים׃
성 경: [롬5:8]
주제1: [칭의(稱義)의 결과]
주제2: [칭의(稱義)의 결과]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 본절에 이르러 바울은 요점에 봉착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죄인들'(*, 하마르톨론)을 위한 것이었다. 여기서 ‘죄인’은 도덕적으로 의롭거나 선하지 않은 사람일 뿐만 아니라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시작된 인간의 전적 타락성과 부패성으로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J. Calvin). 이러한 의미는 9절에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이라는 대조적 표현이 나옴을 볼 때 분명하다. 사도 바울의 이러한 대조적 표현은 희생된 생명의 무한한 가치와 그분으로 말미암아 은혜를 입은 사람의 무가치성의 대조를 극명하게 해준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 이에 대한 바울의 표현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렸으니'(갈 1:4),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고후 8:9),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엡 5:2), 그리고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딛 2:14)등으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으심에 대하여 풍부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한편 ‘…을 위하여'(*, 휘페르)라는 표현이 6-8절에서 모두 네 번 나온다. 그는 본절에서 이 전치사 대신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있어 대속적 측면을 강조하는 전치사 ‘안티'(*, ‘때문에’)를 사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이 단어를 사용하지 않은 까닭은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함과 더불어 그밖의 다른 것도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희생이 주는 대속적 특징 이외에 그리스도 안에 내재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따라 남을 위하여 행동한다는 의미를 강조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휘페르’라는 단어의 사용은 매우 적절하다.
하나님께서…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 바울은 하나님과 그의 아들 그리스도와의 밀접한 관계,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과 세상과의 화목(고후 5:19) 그리고 영적으로 죽은자를 사랑으로 이끄시는 그리스도(요 15:12, 13) 등에 관하여 많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 중에서 바울이 두드러지게 나타낸 것은 특히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이다. 그는 이것을 강조하여 ‘하나님 자신의 사랑’이라고 지적하였다. 여기서 ‘자기 자신의 사랑’이라고 말함은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적이고 영원하며 참됨을 의미한다. 인간의 사랑은 자기 자신의 사랑이 아니라 모범을 따르는 사랑이요 배운 사랑이다. 궁극적으로 인간의 사랑은 그 근원이 인간에게 있지 않고 그 사랑을 주신 하나님께 있는 것이다.(요일 4:10, 19).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랑을 확고하고 구체적으로 인간에게 드러내셨으니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다. 한편 본절의 ‘확증하셨느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슈니스테신'(*)은 ‘추천하다’, ‘드러내다’란 의미이다. 그래서 영역 성경을 ‘나타내 보여 주다'(demonstrate)로 번역하거나(NASB, NIV), 혹은 단순히 ‘보여 주다'(show)로 번역하기도 했다(RSV). 무엇보다 본절에서 주목되는 것은 바울이 동사의 시제로 현재성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헬라어의 현재 시제는 현재에 발생하는 단순한 사건을 기술하는 것 뿐 아니라 현재 진행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슈니스테신’을 보다 정확히 번역하자면 ‘나타내 보여주고 계시느니라'(is demonstrating)로 된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은 과거의 단 일회적 사건으로 끝이 났으나 하나님의 사랑은 바울이 본 서신을 쓰는 당시뿐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에도 끊임없이 부어지고 있음을 나타내 준다.
폴로 운 말론 디카이오덴테스 뉜 엔 토 하이마티 아우투 소데소메다 디 아우투 아포 테스 오르게스
개역개정,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새번역,9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게 되었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은 더욱 확실합니다. / ㉤그, ‘하나님의’가 없음
우리말성경,9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써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에서 확실히 구원받을 것입니다.
가톨릭성경,9 그러므로 이제 그분의 피로 의롭게 된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영어NIV,9 Since we have now been justified by his blood, how much more shall we be saved from God’s wrath through him!
영어NASB,9 Much more then, having now been justified by His blood, we shall be saved from the wrath of God through Him.
영어MSG,9 Now that we are set right with God by means of this sacrificial death, the consummate blood sacrifice, there is no longer a question of being at odds with God in any way.
영어NRSV,9 Much more surely then, now that we have been justified by his blood, will we be saved through him from the wrath of God.
헬라어신약Stephanos,9 πολλω ουν μαλλον δικαιωθεντες νυν εν τω αιματι αυτου σωθησομεθα δι αυτου απο της οργης
라틴어Vulgate,9 Christus pro nobis mortuus est multo igitur magis iustificati nunc in sanguine ipsius salvi erimus ab ira per ipsum
히브리어Modern,9 ועתה אשר נצדקנו בדמו מה מאד נושע בו מן הקצף׃
성 경: [롬5:9]
주제1: [칭의(稱義)의 결과]
주제2: [칭의(稱義)의 결과]
본절은 6절과 8절 내용의 연속이나 좀더 자세하고 진일보한 면을 갖는다. 즉 6절에서는 ‘우리가 연약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고 하셨고 8절에서는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셧다’고 하였다. 이제 본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해 주신 내용을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면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운'(*)은 주로 ‘그런즉’ 또는 ‘그러므로’라고 개역 성경에 번역되었다(1절;4:9, 10, 16, 22). 본절에서는 앞절의 설명과 연결짓기 위해 유도된 접속사의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다음에 이어지는 구절이 이유를 나타내는 분사 구문이기 때문이다. 또한 ‘운’은 앞에서 말한 바에서 한층 논리가 진전됨을 암시한다.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 4:25에서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칭의에 대한 설명이 있었으나 본절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대속(代贖)에 대한 설명이다. 즉 4:25은 부활을 통해 ‘생명을 주는 영’이 되신 그리스도가 칭의의 근원이라는 진술이며, 본절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으심이 칭의의 근거라는 진술이다. 이러한 사실은 ‘그 피를 인하여’라는 표현에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 문구는 헬라어로 ‘엔 토 하이마티 아우투'(*)이며 이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그의 피 안에서’이다. 여기서 바울이나 전치사 ‘디아'(*)를 사용하지 않고 ‘엔'(*)을 사용한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디아’는 ‘….을 통하여'(throught)라는 방법, 수단의 의미를 지니나 ‘엔’은 ‘어떤 사물이나 사람의 상태, 조건’을 나타내는 포괄적 의미를 갖는다. 특히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엔 크리스토), ‘주 안에서'(*, 엔퀴리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엔 크리스토 예수)등의 독특한 표현을 사용할 때 ‘디아’를 썼다. 본절에서 ‘디아’의 사용은, 그리스도의 보혈에는 대속적 능력이 있어 죄인들을 의롭게 하는 근원이 될 뿐만 아니라 한번 의롭다 함을 얻은 자들을 계속 다스리시고 역사하시는 권세와 능력이 있음을 함축한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었으며 이후에도 그리스도의 피의 권세와 능력의 작용을 받아 계속하여 성화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한편 본절의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은 1절의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이라는 표현과 비교가 된다. 두 구절은 상호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즉 1절에서는 의롭다 하심을 얻음에 있어 인간 편의 책임과 의무로서의 믿음이 강조되었고 본절에서는 의인(義認)의 근거로서의 하나님의 대속적 피흘림이 강조된 것이다.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인한 진노하심에서의 구원이 칭의를 위한 연결 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 무엇보다 여기서의 ‘칭의’는 재판관에 의해 무죄 선고를 받아 벌을 면하게 되는 법정적인 차원의 ‘의’라고 단정지을 수 있다. 따라서 본절에서는 그리스도가 죄인된 인간과 진노하시는 하나님 사이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 뜨리는 ‘화목 제물'(propitiation)이 되셨다는 의미가 강하게 부각되고 있다. 한편 ‘더욱’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폴로 말론'(*)으로서 비교법 강조의 의미를 지닌다. 즉 본절에서 ‘폴로 말론’은 단순히 ‘더욱’이란 의미가 아니라 ‘훨씬 더’, ‘더욱더’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피흘림이 칭의보다 더 확실하고 분명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고 있다는 뜻이다.
에이 가르 에크드로이 온테스 카텔라게멘 토 데오 디아 투 다나투 휘우 아우투 폴로 말론 카탈라겐테스 소데소메다 엔 테 조에 아우투
개역개정,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새번역,10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일 때에도 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한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은 더욱더 확실한 일입니다.
우리말성경,10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됐을 때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심으로 인해 그분과 화목하게 됐으니 화목하게 된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인해 확실히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가톨릭성경,10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을 때에 그분 아드님의 죽음으로 그분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 그 아드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영어NIV,10 For if, when we were God’s enemies, we were reconciled to him through the death of his Son, how much more, having been reconciled, shall we be saved through his life!
영어NASB,10 For if while we were enemies, we were reconciled to God through the death of His Son, much more, having been reconciled, we shall be saved by His life.
영어MSG,10 If, when we were at our worst, we were put on friendly terms with God by the sacrificial death of his Son, now that we’re at our best, just think of how our lives will expand and deepen by means of his resurrection life!
영어NRSV,10 For if while we were enemies, we were reconciled to God through the death of his Son, much more surely, having been reconciled, will we be saved by his life.
헬라어신약Stephanos,10 ει γαρ εχθροι οντες κατηλλαγημεν τω θεω δια του θανατου του υιου αυτου πολλω μαλλον καταλλαγεντες σωθησομεθα εν τη ζωη αυτου
라틴어Vulgate,10 si enim cum inimici essemus reconciliati sumus Deo per mortem Filii eius multo magis reconciliati salvi erimus in vita ipsius
히브리어Modern,10 כי אם נרצינו לאלהים במות בנו בהיותנו איבים אף כי נושע עתה בחייו אחרי אשר נרצינו׃
성 경: [롬5:10]
주제1: [칭의(稱義)의 결과]
주제2: [칭의(稱義)의 결과]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 이 표현은 ‘우리가 연약할 때에'(6절), 또는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8절)란 의미보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있을 때에 형성되는 하나님과의 단절된 관계를 보다 명확하고 적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심을 이루는 단어 ‘원수'(*, 에크드로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즉 ‘하나님을 향해 적개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는 능동적 의미를 갖는다는 견해(Lightfoot)와 ‘하나님이 원수로 여기는 사람’이라는 수동적 의미를 갖는다는 견해가 있다(Murray, Harrison). 두 가지 견해는 서로 상충되는 것이 아니며 모두 일면 타당성을 갖는다고 본다. 그러나 어느 한쪽만을 주장한다면 다른 일면을 소홀히 하는 자가 당착(自家 撞着)에 빠지게 된다. 다시 말해서 ‘원수’를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범죄성의 측면에서만 이해한다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놓쳐버리게 되며, 또한 ‘원수’를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와 진노하심에서만 이해한다면 죄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간과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양자의 견해를 모두 포괄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원수하였을 때에’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크드로이 온테스'(*)의 ‘온테스’가 능동이나 수동의 의미가 아니라 현재 분사로서 다만 어떤 상태나 조건을 나타낼 따름이라는 점에서도 분명해진다.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 하나님과 죄인된 인간이 화목(和睦)될 수 있었던 근거는 물론 ‘칭의’이다. ‘칭의’가 없이는 하나님과 인간의 화목은 있을 수 없다. 공의로우시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죄의 상태에 머무르는 자에게는 진노의 채찍을 내리시나, 의롭다 칭함을 받은 자에게는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에 들어갈 수 있도록 은혜를 내리신다. 바울이 이처럼 화목을 강조하는 것은 ‘화목’ 자체가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바울이 고후 5:18에서 언급하기를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화목케하는 직책’을 주셨다고 할 때에, 이 직책이란 물론 죄악된 세상과 하나님을 화목케 하는 제사장적 직분(벧전 2:9)이지만 좀더 포괄적인 의미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선전하는 직책’이다.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 상반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화목에 대하여 진술한 반면, 본 구절에서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화목에 대하여 진술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의 죽음보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죄인된 인간의 구원과 화목에 있어 더욱 확실한 보증이 됨을 역설하고 있다. 그 이유는 (1) 그의 부활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를 따르는 무리에게 부활을 확증시켜 주셨으며, (2) 그의 부활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 조에)이 그를 믿는 성도들에게 공급되므로 성도는 그 생명으로써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고 하나님의 후사가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바울은 고전 15장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보다 부활을 더욱 강조하게 된 것이다. 한편 본절의 ‘화목된’과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각각 ‘카탈라겐테스'(*)와 ‘소데소메다'(*)이며 이 둘은 모두 1인칭 복수 수동태이다. 이는 하나님과 죄인된 인간과의 화목을 이루는 주체가 하나님이시며 또한 구원을 이루시는 분도 하나님이심을 드러낸다. 칭의와 화목 그리고 구원은 인간의 공로나 업적과는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과 부활로 말미암은 것이다(3:25-28).
우 모논 데 알라 카이 카우코메노이 엔 토 데오 디아 투 퀴리우 헤몬 예수 크리스투 디 후 뉜 텐 카탈라겐 엘라보멘
개역개정,11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새번역,11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자랑합니다. 우리는 지금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해를 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말성경,11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는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 안에서 기뻐합니다.
가톨릭성경,11 그뿐 아니라 우리는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자랑합니다. 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제 화해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영어NIV,11 Not only is this so, but we also rejoice in God through our Lord Jesus Christ, through whom we have now received reconciliation.
영어NASB,11 And not only this, but we also exult in God through our Lord Jesus Christ, through whom we have now received the reconciliation.
영어MSG,11 Now that we have actually received this amazing friendship with God, we are no longer content to simply say it in plodding prose. We sing and shout our praises to God through Jesus, the Messiah!
영어NRSV,11 But more than that, we even boast in God through our Lord Jesus Christ, through whom we have now received reconciliation.
헬라어신약Stephanos,11 ου μονον δε αλλα και καυχωμενοι εν τω θεω δια του κυριου ημων ιησου χριστου δι ου νυν την καταλλαγην ελαβομεν
라틴어Vulgate,11 non solum autem sed et gloriamur in Deo per Dominum nostrum Iesum Christum per quem nunc reconciliationem accepimus
히브리어Modern,11 ולא זאת בלבד כי גם מתהללים אנחנו באלהים על יד אדנינו ישוע המשיח אשר בו עתה קבלנו את הרצוי׃
성 경: [롬5:11]
주제1: [칭의(稱義)의 결과]
주제2: [칭의(稱義)의 결과]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 ‘화목을 얻게 하신’이란 표현은 지금까지 바울 자신이 설명했던 ‘칭의’, ‘진노하심에서의 구원’, 그리고 ‘구원’을 포함하는 의미로 해석해도 별 무리가 없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모든 과정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 여기서의 ‘즐거워하다'(*, 카우코메노이)란 말은 2, 3절에서 언급된 동사인 ‘카우코메다'(*)의 분사형에 대한 해석이다. 본절에서도 이 동사는 ‘자랑하면서 즐거워하다’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exalt, MB). 그러면 본절에서 의미하는 ‘즐거움’은 구체적으로 어떤 즐거움인가 ? 이에 대해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구속(救贖)의 은혜를 입은 자들의 즐거움이다.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자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지심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었으며 영생을 소유하게 되었으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당연하다. 둘째로, 영원한 소망을 바라는 즐거움이다. 바울은 2절에서 이 즐거움을 언급했으며 본서의 다른 구절과 고린도후서에서도 수차례 언급하고 있다. 8:18에서는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고 하였고 8:24에서는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라고 하였으며, 고후 5:1에서는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라고 하였다. 셋째는, 참된 즐거움이다. 현재 이 세상에서 우리가 누리는 즐거움은 일시적이요 가변적이며 또한 거짓되고 기만적이나 그 근원과 이유를 하나님께 둔 즐거움은 영원한 즐거움이요 보증이 있는 즐거움이기에 참되다. 이에 대해 칼빈(Calvin)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만물의 근원이요 축복 그 자체이시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함으로써 아무것도 부족할 것이 없는 행복을 누리게 된다’라고 하였다.
디아 투토 호스페르 디 헤노스 안드로푸 헤 하마르티아 에이스 톤 코스몬 에이셀덴 카이 디아 테스 하마르티아스 호 다나토스 카이 후토스 에이스 판타스 안드로푸스 호 다나토스 디엘덴 에프 호 판테스 헤마르톤
개역개정,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새번역,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또 그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들어온 것과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게 되었습니다.
우리말성경,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인해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또 죄로 인해 죽음이 들어온 것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습니다.
가톨릭성경,12 그러므로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왔듯이, 또한 이렇게 모두 죄를 지었으므로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미치게 되었습니다.
영어NIV,12 Therefore, just as sin entered the world through one man, and death through sin, and in this way death came to all men, because all sinned–
영어NASB,12 Therefore, just as through one man sin entered into the world, and death through sin, and so death spread to all men, because all sinned–
영어MSG,12 You know the story of how Adam landed us in the dilemma we’re in–first sin, then death, and no one exempt from either sin or death.
영어NRSV,12 Therefore, just as sin came into the world through one man, and death came through sin, and so death spread to all because all have sinned–
헬라어신약Stephanos,12 δια τουτο ωσπερ δι ενος ανθρωπου η αμαρτια εις τον κοσμον εισηλθεν και δια της αμαρτιας ο θανατος και ουτως εις παντας ανθρωπους ο θανατος διηλθεν εφ ω παντες ημαρτον
라틴어Vulgate,12 propterea sicut per unum hominem in hunc mundum peccatum intravit et per peccatum mors et ita in omnes homines mors pertransiit in quo omnes peccaverunt
히브리어Modern,12 לכן כאשר על ידי אדם אחד בא החטא לעולם והמות בעקב החטא וכן עבר המות על כל בני אדם מפני אשר כלם חטאו׃
성 경: [롬5:12]
주제1: [칭의(稱義)의 결과]
주제2: [아담과 그리스도]
이러므로 – 이는 헬라어 ‘디아 투토'(*)의 번역으로 어떤 학자는 이 접속사가 6-11절과 12-21절 내용을 하나로 연결해 주고 있다고 보지만 (Lenski), 본절에서 이 접속사의 사용은 매우 부자연스럽다. 왜냐하면 지금까지의 진술과 본절부터 진술될 내용은 직접적으로 어떤 상관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디아 투토’를 별 의미 없이 다른 주제로 전환하기 위해 사용된 단순 접속사로 이해해야 한다. 이는 히브리식 문장 전개 방법임을 이미 2:1의 주석에서 설명한 바 있다.
한 사람으로…들어오고 – 바울은 그리스도로 인해 새시대(new aeon)가 시작됨을 설명하기 위해 먼저 옛 창조의 시작에 대한 설명을 시작한다.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가 오염되었음을 가리킴과 동시에 ‘죄의 세력’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고 하셨던 명령을 염두에 두었음이 분명하다. 죄와 사망은 불가피한 연관성을 갖고 있다. 여기서 ‘사망’은 (1) 육체적인 죽음, (2)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엡 2:1;5:14;골 2:13;딤전 5:6;계 3:1), (3) 지옥의 형벌로 영원한 죽음을 의미한다(계 21:8). 본절에서는 두번째와 세번째 사망의 개념이 함께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렇지만 6:23은 마지막 영생과 사망이 대조되어 있으므로 세번째 사망의 개념이 더욱 타당하다. 자세한 것은 6:23 주석을 참조하라.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 바울은 한 사람에 의해 세상에 들어온 죄가 보편성을 지님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그 죄의 보편성에 대해 증명을 시도하지 않은 것은 이미 1:18-3:19에서 이미 설명을 했기 때문이다.
이르렀느니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엘덴'(*)은 일반적으로 ‘통과하다’, ‘퍼져가다’를 의미한다. 그래서 몇몇 영역 성경은 문자적으로 ‘퍼져가다'(spread to)로 번역하기도 한다(RSV, NASB). 그렇지만 또 어떤 영역 성경은 개역 성경과 같이 ‘이르렀다'(came to)로 번역하기도 한다(NIV). 어떤 번역을 취하든지 본절의 의미를 손상시키지는 않는다.
아크리 가르 노무 하마르티아 엔 엔 코스모 하마르티아 데 우크 엘로게이타이 메 온토스 노무
개역개정,13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새번역,13 율법이 있기 전에도 죄가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가 죄로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우리말성경,13 율법이 있기 전에도 죄가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는 죄가 죄로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가톨릭성경,13 사실 율법이 있기 전에도 세상에 죄가 있었지만, 율법이 없어서 죄가 죄로 헤아려지지 않았습니다.
영어NIV,13 for before the law was given, sin was in the world. But sin is not taken into account when there is no law.
영어NASB,13 for until the Law sin was in the world; but sin is not imputed when there is no law.
영어MSG,13 That sin disturbed relations with God in everything and everyone, but the extent of the disturbance was not clear until God spelled it out in detail to Moses. So death, this huge abyss separating us from God, dominated the landscape from Adam to Moses.
영어NRSV,13 sin was indeed in the world before the law, but sin is not reckoned when there is no law.
헬라어신약Stephanos,13 αχρι γαρ νομου αμαρτια ην εν κοσμω αμαρτια δε ουκ ελλογειται μη οντος νομου
라틴어Vulgate,13 usque ad legem enim peccatum erat in mundo peccatum autem non inputatur cum lex non est
히브리어Modern,13 כי עד זמן התורה היה החטא בעולם אך לא יחשב חטא באין תורה׃
성 경: [롬5:13]
주제1: [칭의(稱義)의 결과]
주제2: [아담과 그리스도]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 본절은 삽입구로서 반론(反論)을 염두에 두고 기록한 내용으로 보인다. 그 반론이란 ‘모세 율법이 있기 전까지 과연 죄가 존재했던가’라는 물음이다. 이에 대해 바울은 답변하기를 하나님께서 비록 기록된 율법으로 죄를 심판하지 않으셨으나 인류는 모태에 있을 때부터 저주 아래 있었다고 한다. 즉 율법이 공포되지 않았을 때의 범죄자들 또한 결코 죄의 형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모세 율법이 주어지기 전까지의 기간 동안 죄의 결과로 생기는 사망이 인류를 지배했다는 점에서 증명된다(14절). 또한 이 같은 사실은 모세 율법이 적용되기 이전의 시대에 아우를 죽인 가인이 하나님께 형벌을 받은 사실(창 4:9-15), 죄악이 관영했던 노아 당시의 사람들이 홍수로 심판을 받은 사실(창 6:1-7), 바벧탑 사건(창 11:1-9), 음란한 소돔과 고모라 성의 멸망(창 19:23-29)등 구약성경에 기록된 구체적인 여러 실례들을 통해서도 입증된다. 결론적으로 죄는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14절) 기간에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구절에는 죄의 (1) 역사성(歷史性)과 (2) 보편성(普遍性)이 시사되어 있다.
율법이 없을 때에는…아니하느니라 – 모세 율법 전에도 각 나라마다 비록 원시적이긴 하지만, 사회를 통치해 나가는 불문률(不文律)과 법률 및 도덕적 관습이 있었으며 사람들은 그것들의 지배를 받아왔었다(Ur-Nammu Code, Eshnunna Code, Lipit-Ishta Code, Hammurabi Code, Hittite Code). 그러므로 율법 이전에도 ‘죄에 대한 정죄’가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왜 본절과 같은 진술을 하였는가 ? 바울은 단순히 법에 저촉되는 ‘죄’에 대하여 진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보다 보편적인 의미에서의 죄, 곧 하나님과 분리되고 하나님을 반역하는 삶 그 자체를 죄로 규정하고 있다. 율법이 있기 전에 사람들은 죄를 윤리적인 것으로만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었으며, 따라서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과 분리되고 하나님을 반역하던 삶이 죄라는 사실을 몰랐으므로 그러한 것을 죄로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는 하나님 앞에서의 죄의식이 결여 되었다는 것이다. 역으로 모세 율법이 공포되었을 때 인류는 진정한 의미에서 죄를 죄로 인식하게 되었다.
알라 에바실류센 호 다나토스 아포 아담 메크리 모위세오스 카이 에피 투스 메 하마르테산타스 에피 토 호모이오마티 테스 파라바세오스 아담 호스 에스틴 튀포스 투 멜론토스
개역개정,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새번역,14 그러나 아담 시대로부터 모세 시대에 이르기까지는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죽음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아담은 장차 오실 분의 모형이었습니다.
우리말성경,14 그러나 아담 시대부터 모세 시대에 이르기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않은 사람들에게까지 죽음이 왕 노릇 했습니다. 아담은 오실 분의 모형입니다.
가톨릭성경,14 그러나 아담부터 모세까지는, 아담의 범죄와 같은 방식으로 죄를 짓지 않은 자들까지도 죽음이 지배하였습니다. 아담은 장차 오실 분의 예형입니다.
영어NIV,14 Nevertheless, death reigned from the time of Adam to the time of Moses, even over those who did not sin by breaking a command, as did Adam, who was a pattern of the one to come.
영어NASB,14 Nevertheless death reigned from Adam until Moses, even over those who had not sinned in the likeness of the offense of Adam, who is a type of Him who was to come.
영어MSG,14 Even those who didn’t sin precisely as Adam did by disobeying a specific command of God still had to experience this termination of life, this separation from God. But Adam, who got us into this, also points ahead to the One who will get us out of it.
영어NRSV,14 Yet death exercised dominion from Adam to Moses, even over those whose sins were not like the transgression of Adam, who is a type of the one who was to come.
헬라어신약Stephanos,14 αλλ εβασιλευσεν ο θανατος απο αδαμ μεχρι μωσεως και επι τους μη αμαρτησαντας επι τω ομοιωματι της παραβασεως αδαμ ος εστιν τυπος του μελλοντος
라틴어Vulgate,14 sed regnavit mors ab Adam usque ad Mosen etiam in eos qui non peccaverunt in similitudinem praevaricationis Adae qui est forma futuri
히브리어Modern,14 אולם המות מלך מאדם עד משה גם על אלה אשר לא חטאו בדמיון עברת אדם הראשון אשר הוא דמות העתיד לבוא׃
성 경: [롬5:14]
주제1: [칭의(稱義)의 결과]
주제2: [아담과 그리스도]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 아담과 범죄는 (1)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며, (2) 하나님과 같이 되어 보려고 하는 교만이었다. 그리고 모세 이전 사람들이 이와 동일한 범죄를 짓지 않았을지라도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동일한 죄인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담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거역하는 본성을 이어 받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호세아 선지자는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호 6:7)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인간의 범죄가 단순히 자범죄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파생된 근본적인 죄임을 선포하고 있다.
사망이 왕노릇 하였나니 – 본 구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바실류센호 다나토스’ (*)는 ‘사망이 왕권을 잡았다’로 번역된다 이 말은 세상이 죄악으로 충만했다는 의미이며, 보다 적극적으로는 죄악의 세력이 꺾을 수 없을 만큼 강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말에 대조되는 것으로 바울은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21절)라고 표현했다.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 이렇게 아담을 그리스도의 표상(表象)이라고 일컫는 것은 이상하게 생각될 수 있다. 두 사람은 신분이나 인류에게 미친 영향면에서 판이하게 다르기 대문이다. 그러면 아담이 그리스도의 표상이 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 (1) 아담이 옛 시대의 시조인 것처럼 그리스도는 새 시대의 시조이다. (2) 아담의 범죄가 모든 사람에게 미치듯이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義)도 모든 사람에게 미친다(고전 15:22;고후 5:14, 15). 즉 아담이 범죄의 시조라면 그리스도는 의의 시조이시다. 이 두 가지 의미에서 아담은 예수 그리스도의 ‘전형'(*, 튀포스)이 될 수 있다(type, RSV)
알 우크 호스 토 파랖토마 후토스 카이 토 카리스마 에이 가르 토 투 헤노스 파랖토마티 호이 폴로이 아페다논 폴로 말론 헤 카리스 투 데우 카이 헤 도레아 엔 카리티 테 투 헤노스 안드로푸 예수 크리스투 에이스 투스 폴루스 에페리쓔센
개역개정,15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새번역,15 그러나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실 때에 생긴 일은, 아담 한 사람이 범죄 했을 때에 생긴 일과 같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으나,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더욱더 넘쳐나게 되었습니다.
우리말성경,15 그러나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주시는 은사는 아담의 범죄와 같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죽었으나 하나님과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해 주어지는 선물은 더욱 많은 사람에게 넘쳤습니다.
가톨릭성경,15 그렇지만 은사의 경우는 범죄의 경우와 다릅니다. 사실 그 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하느님의 은총과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은혜로운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충만히 내렸습니다.
영어NIV,15 But the gift is not like the trespass. For if the many died by the trespass of the one man, how much more did God’s grace and the gift that came by the grace of the one man, Jesus Christ, overflow to the many!
영어NASB,15 But the free gift is not like the transgression. For if by the transgression of the one the many died, much more did the grace of God and the gift by the grace of the one Man, Jesus Christ, abound to the many.
영어MSG,15 Yet the rescuing gift is not exactly parallel to the death-dealing sin. If one man’s sin put crowds of people at the dead-end abyss of separation from God, just think what God’s gift poured through one man, Jesus Christ, will do!
영어NRSV,15 But the free gift is not like the trespass. For if the many died through the one man’s trespass, much more surely have the grace of God and the free gift in the grace of the one man, Jesus Christ, abounded for the many.
헬라어신약Stephanos,15 αλλ ουχ ως το παραπτωμα ουτως και το χαρισμα ει γαρ τω του ενος παραπτωματι οι πολλοι απεθανον πολλω μαλλον η χαρις του θεου και η δωρεα εν χαριτι τη του ενος ανθρωπου ιησου χριστου εις τους πολλους επερισσευσεν
라틴어Vulgate,15 sed non sicut delictum ita et donum si enim unius delicto multi mortui sunt multo magis gratia Dei et donum in gratiam unius hominis Iesu Christi in plures abundavit
히브리어Modern,15 אך לא כדבר הפשע דבר המתנה כי אם בפשע האחד מתו הרבים אף כי חסד אלהים ומתנתו עדפו ערוף לרבים בחסד האדם האחד ישוע המשיח׃
성 경: [롬5:15]
주제1: [칭의(稱義)의 결과]
주제2: [아담과 그리스도]
그러나(*, 알라) – 이는 앞에서 말한 내용과 반대되는 뜻의 내용이 전개될 것임을 암시한다. 앞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와 아담의 유사점을 말하였으나 본절에서는 그리스도와 아담의 차이점을 말하고자 한다.
이 은사 – 이는 언급된 사실과 관계있는 것이 아니라 본절에 언급된 ‘은혜’와 관계된다.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 ‘그 범죄’라 함은 ‘아담의 범죄’와 ‘아담의 범죄외의 다른 범죄’, 즉 ‘모든 범죄’를 지칭할 수 있다. 그러나 본절 하반절은 아담의 범죄와 그리스도의 은혜를 비교하고 있으므로 대표적으로 ‘아담의 범죄’라고 해석하는 편이 타당하다. 그리고 헬라어 본문에서 ‘범죄'(*, 파랖토마)가 단수형이라는 사실도 이 견해를 지지한다.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의 은사'(*, 카리스마)와 아담에서 비롯된 ‘인간의 보편적인 범죄’를 대조시키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부각시키는 논리를 전개시키고 있다.
한 사람의…죽었은즉 – 12절에서 바울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와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고 했으나, 본절에서는 ‘모든 사람’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두 용어 사이에는 의미상 아무런 차이가 없다. 대표 단수를 사용하든지 단순히 복수를 사용하든지 헬라어 문법에서는 ‘모든’을 의미할 수 있다. 물론 영어 문법에서는 ‘모든’을 의미할 수 있다. 물론 영어 문법도 이와 같다. 인간의 부분적 타락을 주장하기 위해 이러한 사실을 무시해 버리려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으나, 이것은 바울이 앞에서 ‘모든’이라는 총칭 형용사를 사용한 것과 비교할 때 전혀 근거가 없다. 더욱 – 이 단어는 9절에서와 같이 단순한 비교가 아니라 비교급 강조의 의미를 갖는다(much more, KJV). 아담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사망에 처하게 되었으나 그리스도의 은혜로 죄와 사망의 권세는 무너지고 더 나아가 모든 사람은 소망과 기쁨 가운데 넘치는 삶을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Lenski).
하나님의 은혜 –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선물’과 동일하다. 하나님의 은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말미암아서만 모든 사람에게 미치기 때문이다.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 앞에서 이미 바울은 ‘한 사람의 범죄’를 언급했으나 지금은 ‘한 사람의 은혜’에 대해 진술하고 있다. 범죄가 한 사람 아담으로부터 시작되었듯이 은혜도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로써 상반절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명확해진다.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 여기서 ‘많은 사람’은 앞에 언급된 ‘많은 사람’과 대조를 이룬다. 그리고 ‘넘쳤으리라’는 동사는 14절의 ‘왕노릇하였나니’라는 동사와 대조를 이루고 있다. 한편 ‘넘쳤으리라’로 번역된 헬라어 ‘에페릿슈센'(*)은 ‘물이 그릇에서 넘쳤다’, ‘강물이 둑에서 넘쳤다’는 뜻으로 그리스도의 은혜가 인류를 구원하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로 넘치며 모든 믿는 자에게 구별없이 풍성하게 부여된다는 문맥상의 의미를 갖는다. 또한 동사 ‘에페리스슈센’은 목적어로서 ‘에이스 투스 폴루스'(*, ‘많은 사람에게’), 즉 4격을 취한다. 헬라어에 있어 4격은 3격과 같이 단순 목적의 의미를 지닐 뿐 아니라 ‘…을 꿰둠고’, ‘…을 관통하여’라는 의미도 내포한다. 즉 그리스도의 은혜가 개인의 전인격을 철저히 변화시키며 죄악을 씻고 거듭나게 한다는 것이다.
카이 우크 호스 디 헤노스 하마르테산토스 토 도레마 토 멘 가르 크리마 엨스 헤노스 에이스 카타크리마 토 데 카리스마 에크 폴론 파랖토마톤 에이스 디카이오마
개역개정,16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새번역,16 또한,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은 한 사람의 범죄의 결과와 같지 않습니다. 한 범죄에서는 심판이 뒤따라와서 유죄 판결이 내려졌습니다마는, 많은 범죄에서는 은혜가 뒤따라와서 무죄 선언이 내려졌습니다.
우리말성경,16 또한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인해 생긴 결과와 같지 않습니다. 심판은 한 사람으로 인해 정죄에 이르렀으나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주시는 은사는 많은 범죄로 인해 의롭다 하심에 이르게 됩니다.
가톨릭성경,16 그리고 이 선물의 경우도 그 한 사람이 죄를 지은 경우와는 다릅니다. 한 번의 범죄 뒤에 이루어진 심판은 유죄 판결을 가져 왔지만, 많은 범죄 뒤에 이루어진 은사는 무죄 선언을 가져왔습니다.
영어NIV,16 Again, the gift of God is not like the result of the one man’s sin: The judgment followed one sin and brought condemnation, but the gift followed many trespasses and brought justification.
영어NASB,16 And the gift is not like that which came through the one who sinned; for on the one hand the judgment arose from one transgression resulting in condemnation, but on the other hand the free gift arose from many transgressions resulting in justification.
영어MSG,16 There’s no comparison between that death-dealing sin and this generous, life-giving gift. The verdict on that one sin was the death sentence; the verdict on the many sins that followed was this wonderful life sentence.
영어NRSV,16 And the free gift is not like the effect of the one man’s sin. For the judgment following one trespass brought condemnation, but the free gift following many trespasses brings justification.
헬라어신약Stephanos,16 και ουχ ως δι ενος αμαρτησαντος το δωρημα το μεν γαρ κριμα εξ ενος εις κατακριμα το δε χαρισμα εκ πολλων παραπτωματων εις δικαιωμα
라틴어Vulgate,16 et non sicut per unum peccantem ita et donum nam iudicium ex uno in condemnationem gratia autem ex multis delictis in iustificationem
히브리어Modern,16 ולא כמו על ידי חטא אחד כן המתנה כי המשפט יצא מאחד לחיב אבל מתנת החסד היא לזכות מפשעים רבים׃
성 경: [롬5:16]
주제1: [칭의(稱義)의 결과]
주제2: [아담과 그리스도]
본절에서 바울은 범죄와 은혜의 기원(起原)과 그 위력(威力)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 한다. 즉 범죄는 한 사람에서부터 시작되었으나 은혜는 사망이 왕노릇하는 데서, 또는 범죄가 만연되어 있는 데서 비롯되었다. 이것은 ‘은혜’의 기원과 위력이 ‘범죄’보다 훨씬 더 크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도식으로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이 선물(*, 도레마) – 이는 15절에서 언급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을 가리킨다. 15절에서 ‘은사'(*, 카리스마)가 ‘범죄'(*, 파랖토마)와 비교되었고 본절에서는 ‘은사’가 ‘심판’ (*, 크리마)과 비교되었다. 은사는 값없이 주는 용서이며 심판은 엄격한 공의로서 모두 하나님이 주체이시다. 만일 하나님께서 공의로 심판하신다면 우리는 모두 버림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고 값없이 우리를 의롭다 하셨다. 본절은 바로 이 칭의의 선물이 심판의 효능보다 우월함을 선언하고 있다.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 ‘의롭다 하심'(*, 디카이오마), 곧 칭의(稱義)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피 흘려 죽게 하심으로 죄인들을 사면해 주시고 의로운 자들이라 칭하신 것으로서 이는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주신 선물이요 은사이다. 또한 18절의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를 보면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은 구원을 얻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의롭다 하심이 없이는 구원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은 아담의 범죄로 인해 죄와 사망의 세력 아래 놓인 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과 원수된 상태에서 회복되어 구원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에이 가르 토 투 헤노스 파랖토마티 호 다나토스 에바실류센 디아 투 헤노스 폴로 말론 호이 텐 페리쎄이안 텐 카리토스 카이 테스 도레아스 텐 디카이오쉬네스 람바논테스 엔 조에 바실류수신 디아 투 헤노스 예수 크리스투
개역개정,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새번역,17 아담 한 사람의 범죄 때문에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왕노릇 하게 되었다면, 넘치는 은혜와 의의 선물을 받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더 확실합니다.
우리말성경,17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해, 죽음이 바로 그 한 사람을 통해서 왕 노릇 했다면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도록 받는 사람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할 것입니다.
가톨릭성경,17 사실 그 한 사람의 범죄로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지만, 은총과 의로움의 선물을 충만히 받은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하여 생명을 누리며 지배할 것입니다.
영어NIV,17 For if, by the trespass of the one man, death reigned through that one man, how much more will those who receive God’s abundant provision of grace and of the gift of righteousness reign in life through the one man, Jesus Christ.
영어NASB,17 For if by the transgression of the one, death reigned through the one, much more those who receive the abundance of grace and of the gift of righteousness will reign in life through the One, Jesus Christ.
영어MSG,17 If death got the upper hand through one man’s wrongdoing, can you imagine the breathtaking recovery life makes, sovereign life, in those who grasp with both hands this wildly extravagant life-gift, this grand setting-everything-right, that the one man Jesus Christ provides?
영어NRSV,17 If, because of the one man’s trespass, death exercised dominion through that one, much more surely will those who receive the abundance of grace and the free gift of righteousness exercise dominion in life through the one man, Jesus Christ.
헬라어신약Stephanos,17 ει γαρ τω του ενος παραπτωματι ο θανατος εβασιλευσεν δια του ενος πολλω μαλλον οι την περισσειαν της χαριτος και της δωρεας της δικαιοσυνης λαμβανοντες εν ζωη βασιλευσουσιν δια του ενος ιησου χριστου
라틴어Vulgate,17 si enim in unius delicto mors regnavit per unum multo magis abundantiam gratiae et donationis et iustitiae accipientes in vita regnabunt per unum Iesum Christum
히브리어Modern,17 כי אם בפשע האחד מלך המות על ידי האחד אף כי מקבלי עדף החסד ומתנת הצדקה ימלכו בחיים על ידי האחד ישוע המשיח׃
성 경: [롬5:17]
주제1: [칭의(稱義)의 결과]
주제2: [아담과 그리스도]
사망이…왕노릇하였은즉 – 본절은 12, 14절의 말씀을 요약 반복하고 있다. 즉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죄가 선하게 창조된 세상에 들어와 온 세상을 오염시켰고 그 가운데서 통치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이로써 본래 하나님을 최고의 통치자로 삼고, 그의 대리자로 인간, 그리고 인간의 지배를 받는 만물 순의 질서 체계가 죄의 지배력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대신에 죄(사단)가 최고 통치자로 군림하게 되어 하나님의 존재가 완전히 무시되어 버림과 동시에 인간도 아무 주체 의식 없이 죄의 종노릇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질서 내지 통치권의 변화는 예수께서 광야에서 시험받으시는 장면에도 잘 묘사되어 있다(마 4:8, 9). 마귀는 천하 만국을 자기의 것인양 자랑하면서 예수로 하여금 자기에게 경배할 것을 요구하였다. 여기서 ‘경배하라’는 사단의 요구는 최고의 통치자로서 마땅히 받아야만 하는 예배행위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세상의 지배권을 행사할 권리를 부여하셨는가 ? 결코 그렇지 않다. 마 28:18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예수 자신이 친히 하나님으로부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셨음을 가르쳤다. 만일 그러한 권세가 없다면 예수는 세상의 구주 또는 주인(Lord)이 될 수 없다. 다만 사단은 자신이 그러한 권세를 가지고 있는 것인 양 속이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실제로 사단이 죄로 세상을 오염시켰다는 의미에서는 그 역시 세상의 지배자로서 자처할 수도 있을 것이다.
더욱 – 본장에서 바울이 즐겨 사용했다. 자세한 것은 9절 주석을 참조하라.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 여기서 ‘은혜’와 ‘의의 선물’은 별개의 개념이 아니라 동일한 의미에 대한 서로 다른 표현으로서 저자가 주장하려는 논지의 의미를 분명히 밝혀 주는 구실을 한다.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왕노릇하리로다 – 상반절과 비교할 때 대조와 구분이 완전해지려면 본 구절은 ‘생명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왕노릇하리로다’라고 구성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본절에서는 ‘왕노릇하다’의 주어가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다. 이것은 분명히 바울의 의도적인 변형이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바울은 분명히 성도가 ‘하나님의 후사(後嗣)’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성도가 ‘하나님의 후사’라는 것은 단순히 ‘유업을 잇는 자'(갈 3:29)만을 의미하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갖는 영광된 신분을 강조하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실제로 계 22:5에서는 성도가 영원 무궁토록 ‘왕 노릇할’것이 언급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는 성도의 신분을 ‘왕 같은 제사장'(벧전 2:9)이라고 했다. 그리고 ‘왕노릇’이란 말은 ‘죄의 종’되었던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위치가 정반대로 바뀌게 됨을 보여주고 있다(21절).
아라 운 호스 디 헤노스 파랖토마토스 에이스 판타스 안드로푸스 에이스 카타크리마 후토스 카이 디 헤노스 디카이오마토스 에이스 판타스 안드로푸스 에이스 디카이오신 조에스
개역개정,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새번역,18 그러니 한 사람의 범죄 행위 때문에 모든 사람이 유죄판결을 받았는데, 이제는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 때문에 모든 사람이 의롭다는 인정을 받아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말성경,18 그러므로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해 모든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처럼 한 분의 의로운 행동으로 인해 모든 사람이 의롭다는 인정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습니다.
가톨릭성경,18 그러므로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았듯이,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어 생명을 받습니다.
영어NIV,18 Consequently, just as the result of one trespass was condemnation for all men, so also the result of one act of righteousness was justification that brings life for all men.
영어NASB,18 So then as through one transgression there resulted condemnation to all men, even so through one act of righteousness there resulted justification of life to all men.
영어MSG,18 Here it is in a nutshell: Just as one person did it wrong and got us in all this trouble with sin and death, another person did it right and got us out of it. But more than just getting us out of trouble, he got us into life!
영어NRSV,18 Therefore just as one man’s trespass led to condemnation for all, so one man’s act of righteousness leads to justification and life for all.
헬라어신약Stephanos,18 αρα ουν ως δι ενος παραπτωματος εις παντας ανθρωπους εις κατακριμα ουτως και δι ενος δικαιωματος εις παντας ανθρωπους εις δικαιωσιν ζωης
라틴어Vulgate,18 igitur sicut per unius delictum in omnes homines in condemnationem sic et per unius iustitiam in omnes homines in iustificationem vitae
히브리어Modern,18 לכן כאשר בפשע אחד נאשמו כל בני אדם ככה גם על ידי זכות אחת יזכו כל בני אדם לחיים׃
성 경: [롬5:18]
주제1: [칭의(稱義)의 결과]
주제2: [아담과 그리스도]
바울은 다시 12절부터 지금까지 진술했던 것을 요약하여 말하고 있다(Murray). 그러면서 그는 죄인된 인간이 생명에 이르게 된 과정을 설명한다. 즉 (1) 한사람(아담)의 범죄로 -> (2)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으며 -> (3) 예수그리스도의 의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 (4)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 (5) 생명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 과정에 바울이 그동안 진술했던 ‘믿음’과 ‘화목’을 삽입해 보면, ‘믿음’은 (3)과 (4) 사이에 그리고 ‘화목’은 (4)와 (5) 사이에 삽입될 수 있다.
그런즉(*, 아라 운) – 12절에서부터 17절까지의 내용을 요약하는 결론이 시작됨을 나타낸다. 죄와 율법에 관한 13, 14절 내용과 구원의 은혜와 범죄에 대한 심판을 대조시킨 15-17절 내용으로 중단되었던 아담과 그리스도 간의 비교가 12절에 이어 다시 본절에서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12절에 천명된 결론이 본절에서 다시 언급되고 있다.
한 범죄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 헤노스 파랖토마토스'(*)는 두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즉 한글 개역 성경과 같이 ‘한 범죄’로 해석하거나 영역 성경이나(the offence of one, KJV;one man’s trespass, RSV) 독일어 성경처럼(eines Sunde, Luther Bible) ‘한 사람의 범죄’로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다. 어느 경우를 취하든지 전후 문맥상의 의미에 있어서 별다른 차이를 초래하지 않으나 후자의 해석이 지배적이다. 헬라어 사본들 중의 가장 유력한 사본들 중 하나인 알렙 사본(*)을 위시하여 고대 라틴어 사본들은 본문의 ‘헤노스’ 다음에 ‘안드로포스’ (*, ‘사람’)을 첨가하고 있으며 많은 역본들이 이를 따르고 있다. 그리고 15-17절에 ‘한 사람’이란 표현이 일관되게 반복 사용되고 있는 점으로 보아서도 ‘한 사람’이 원문에 충실한 듯하다. 아무튼 본 문구는 ‘한 사람 아담의 범죄’를 가리키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정조에 이른 것같이 – ‘많은 사람’으로 번역된 헬라어 ‘판타스 안드로푸스'(*)는 ‘모든 사람'(all men, KJV, RSV)을 의미한다. 아담 한 사람의 범죄는 세상에 사망의 권세를 가져왔고 전인류는 이 사망의 권세에 눌려 종노릇을 하게 되었다.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본문(*, 디 헤노스 디카이오마토스)은 ‘한 사람의 의로운 행동으로 말미암아’라는 뜻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우신 행동을 가리킨다. 그런데 많은 학자들은 여기서 ‘의로운 행동’ 즉 ‘디카이오마토스'(*)를 ‘칭의의 행동’으로 해석한다(Meyer, Gedet). 그러나 ‘디카이오마토스’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없다고 여기시는 행위’, 곧 ‘하나님의 칭의 행위’란 뜻을 지닌 ‘디카이오시스'(*)와 구별되므로 ‘의로운 행동'(one man’s act of righteousness, RSV)으로 해석됨이 무방하다(Murray, Holsten 등).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운 행동이란 예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행하신 모든 행동, 즉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행하신 모든 행동, 즉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행하신 사역들을 총칭한다. 물론 이 구원사역은 십자가 사건에서 최절정을 이룬다.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고 구원을 얻는 근거는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생명에 이르렀느니라 – 이 헬라어 본문 ‘에이스 판타스 안드로푸스 에이스 디카이오신 조에스'(*)를 번역하면 ‘모든 사람에게 생명의 칭의가 이르렀다’이다(KJV, Modern Language Bible). 헬라어 본문은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다’는 것을 말함이 아니라 ‘생명의 칭의'(justification of life)곧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 자체가 이미 ‘생명’에 이른 것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한편 ‘모든 사람이 생명의 칭의에 이르렀다’함은 만인 구원론(Universalism)을 뜻함이 아니다. 성경은 분명히 그리스도를 믿고 구주로 섬기는 자들에게 구원이 임함을 밝히고 있다(요 3:16;14:6).
호스페르 가르 디아 테스 파라코에스 투 헤노스 안드로푸 하마르톨로이 카테스타데산 호이 폴로이 후토스 카이 디아 테스 휘파코에스 투 헤노스 디카이오이 카타스타데손타이 호이 폴로이
개역개정,19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새번역,19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죄인으로 판정을 받았는데, 이제는 한 사람이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인으로 판정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말성경,19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처럼 한 분의 순종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될 것입니다.
가톨릭성경,19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이가 죄인이 되었듯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이가 의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영어NIV,19 For just as through the disobedience of the one man the many were made sinners, so also through the obedience of the one man the many will be made righteous.
영어NASB,19 For as through the one man’s disobedience the many were made sinners, even so through the obedience of the One the many will be made righteous.
영어MSG,19 One man said no to God and put many people in the wrong; one man said yes to God and put many in the right.
영어NRSV,19 For just as by the one man’s disobedience the many were made sinners, so by the one man’s obedience the many will be made righteous.
헬라어신약Stephanos,19 ωσπερ γαρ δια της παρακοης του ενος ανθρωπου αμαρτωλοι κατεσταθησαν οι πολλοι ουτως και δια της υπακοης του ενος δικαιοι κατασταθησονται οι πολλοι
라틴어Vulgate,19 sicut enim per inoboedientiam unius hominis peccatores constituti sunt multi ita et per unius oboeditionem iusti constituentur multi
히브리어Modern,19 כי כאשר במרי האדם האחד היו הרבים לחטאים ככה גם על ידי משמעת האחד יהיו הרבים לצדיקים׃
성 경: [롬5:19]
주제1: [칭의(稱義)의 결과]
주제2: [아담과 그리스도]
본절은 앞절 내용의 단순한 반복이 아니다. 앞절에서 바울은 일반적으로 범죄와 의를 대조시켰으나 본절에서는 그 범죄와 의의 본질적 성격을 설명하고 있다. 즉 하나님께 대한 아담의 범죄는 그 자신의 자발적인 불순종에 그 뿌리가 있으며 그리스도의 의는 하나님께 대한 그분의 자발적이고 절대적인 복종에 근거한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 아담의 범죄, 곧 원죄(原罪)를 말한다. 아담이 범죄한 내용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것이다. 에덴 동산의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아담이 거스린 것은(창 3:1-6) 순간적이요 단순하게 보일지 모르나 이는 창조주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고자 마음 먹었던 교만한 행위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불순종의 행위였다.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같이 – 12절에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다’고 선포했으나 15절에서는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진술했으며, 18절에서는 다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르렀다’고 선언했다. 한편 ‘죄인된 것같이’에서 ‘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테스타데산'(*)은 단순 과거 수동형으로 ‘제정되었다’, ‘설립되었다’는 의미이다. 이는 KJV와 RSV가 번역한 것처럼 단순히 ‘만들어진 바 되었다'(were made)는 의미가 아니라 ‘법적 판결을 받았다'(were constituted)는 의미이다(NIV).
한 사람의…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 ‘순종’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바울은 죄인된 것을 불순종에 대한 인간의 책임과 연관짓고 있다. ‘순종’이라는 용어에는 인간의 책임 문제가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히 3:18, 19;4:2, 6). 무엇보다 ‘순종’이라는 단어는 ‘아담의 불순종’과 ‘그리스도의 순종'(사 53:12;요 6:38, 39;10:17, 18;17:4, 5;빌 2:7, 8;히 5:8, 9), 특히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순종’에 대한 대조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Murray). 그리고 성도의 순종은 그리스도의 순종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데(히 5:8, 9),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순종하는 자’에게 죽기까지 순종하셨던 그리스도가 성취하신 결과를 아무 대가 없이 은혜로 주시기 때문이다. 한편 ‘의인이 되리라’에서 ‘되리라’로 번역된 헬라어 ‘카타스타데손타이'(*)는 미래 수동형으로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제정(制定)될 것이다’라는 의미이다. 혹자는 이 단어가 미래 시제임을 생각하여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성도들이 받을 영광을 언급하고 있다고 말한다(Meyer). 그러나 이보다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과거와 현재및 장래를 포함하는 모든 시대에 지속적으로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이 무난하리라고 본다(Murray, Sanday).
노모스 데 파레이셀덴 히나 플레오나세 토 파랖토마 후 데 에플레오나센 헤 하마르티아 휘페레페리쓔센 헤 카리스
개역개정,20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새번역,20 율법은 범죄를 증가시키려고 끼여 들어온 것입니다. 그러나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게 되었습니다.
우리말성경,20 율법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고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습니다.
가톨릭성경,20 율법이 들어와 범죄가 많아지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
영어NIV,20 The law was added so that the trespass might increase. But where sin increased, grace increased all the more,
영어NASB,20 And the Law came in that the transgression might increase; but where sin increased, grace abounded all the more,
영어MSG,20 All that passing laws against sin did was produce more lawbreakers. But sin didn’t, and doesn’t, have a chance in competition with the aggressive forgiveness we call grace. When it’s sin versus grace, grace wins hands down.
영어NRSV,20 But law came in, with the result that the trespass multiplied; but where sin increased, grace abounded all the more,
헬라어신약Stephanos,20 νομος δε παρεισηλθεν ινα πλεοναση το παραπτωμα ου δε επλεονασεν η αμαρτια υπερεπερισσευσεν η χαρις
라틴어Vulgate,20 lex autem subintravit ut abundaret delictum ubi autem abundavit delictum superabundavit gratia
히브리어Modern,20 אבל התורה נכנסה למען ירבה הפשע ובאשר רבה החטא עדף ממנו החסד׃
성 경: [롬5:20]
주제1: [칭의(稱義)의 결과]
주제2: [아담과 그리스도]
헬라어 성경 본문에는 본절 초두에 ‘데'(*)가 언급되고 있으나 한글 개역 성경은 이 접속사를 번역하지 않았다. KJV는 이를 ‘더욱이'(Moreover)로, Modern Language Bible은 ‘그러나'(But)로 번역하고 있다. 아무튼 ‘데’는 본절에서 새로운 개념, 곧 ‘율법’에 관해 이야기를 하려고 유도된 것이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 본 구절은 인간에게 모세 율법이 부여되었음을 말하나 이는 모세를 통해 주어진 율법이 최초로 사람들에게 주어진 법이 아니라 그 이전에 법이 선재(先在)함을 나타낸다. 이는 ‘가입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레이셀덴'(*)이 단지 ‘들어왔다’라기 보다는 ‘곁에 들어오다'(came in beside, Green), ‘미끄러져 들어오다'(slipped in, Modern Language Bible)를 뜻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모세이전 아브라함이나 야곱 등과 같은 족장들은 그들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믿음의 길을 걸었고 모세 시대에는 성문화된 율법이 부여된 것이다.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 이 말은 율법이 세상에 들어옴으로써 사람으로 하여금 더욱 죄를 짓도록 동기를 유발시켰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죄를 증가시켰다는 말이 된다. 헨드릭슨(Hendriksen)은 본 구절을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즉 “이것은 하나님께서 죄를 증가하게 만들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완전하신 사랑의 요구에 비추어 보아(마 22:37-40;막 12:29-31;눅 10:27) 인간으로 하여금 죄의식에 예민해지게 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과 목적이었음을 의미한다. 율법은 모든 죄의 가증함과 그 결과가 드러나도록 한다”(3:20;7:7, 13;갈 3:19). 또한 혹자는 “범죄를 더하게 하는 것은 율법의 우선적인 목적이 아니라 부차적인 목적이다”라고 설명한다(Black). 이러한 주장에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동의한다. 바울의 의도는 무엇보다 율법이 옴으로써 그 전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않았던 것을 확실히 죄로 인식하게 되었다(13절)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는 것이었다. 혹자는 딤전 1:9-11을 본절과 연관지어 율법이 죄를 억제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한다(Herrison). 그러나 분명히 성도들이 인식해야 할 사실은 율법 자체가 죄를 억제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실제로 딤전 1:9-11에서는 이러한 암시가 전혀 없다. 오히려 딤전 1:9-11은 율법의 정죄 기능, 즉 사람이 자신의 행위가 옳은가 그렇지 않은가를 율법을 통해서 정죄받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 이 말은 율법이 주어짐으로써 범죄의 사실이 더욱더 드러나 인간이 깊은 정죄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되면 될수록 인간을 향해 쏟으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더욱 풍성하게 드러난다는 의미이다. 바꾸어 생각하면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 곳에서는 죄사함도 없으므로 용서에 대한 은혜를 깨닫는 일도 없다. 다만 죄가 죄로서 정죄되는 곳에서는 그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더욱 풍성하게 드러난다. 이러한 사실은 ‘죄가 더한 곳에’의 ‘더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플레오나센'(*)이 ‘넘치다’라는 의미를 지니며, 반면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의 ‘더욱 넘쳤나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페레페릿슈센'(*)이 최상급의 최상급, 즉 강조 최상급으로 ‘넘침보다도 더욱 넘쳤다’는 의미를 지닌다는 점에서 분명해진다(Murray). 다시 말해 은혜의 세력은 죄의 세력을 휠씬 능가할 뿐만 아니라 완전히 말살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 상처입고 병들어 죽어가는 자를 완전히 소생케 한다.
히나 호스페르 에바실류센 헤 하마르티아 엔 토 다나토 후토스 카이 헤 카리스 바실류세 디아 디카이오쉬네스 에이스 조엔 아이오니온 디아 예수 크리스투 투 퀴리우 헤몬
개역개정,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새번역,21 그것은, 죄가 죽음으로 사람을 지배한 것과 같이, 은혜가 의를 통하여 사람을 지배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는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말성경,21 이것은 죄가 죽음 안에서 왕 노릇 한 것처럼 은혜도 의로 인해 왕 노릇 해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인해 영생에 이르게 하려는 것입니다.
가톨릭성경,21 이는 죄가 죽음으로 지배한 것처럼, 은총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는 의로움으로 지배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영어NIV,21 so that, just as sin reigned in death, so also grace might reign through righteousness to bring eternal life through Jesus Christ our Lord.
영어NASB,21 that, as sin reigned in death, even so grace might reign through righteousness to eternal life through Jesus Christ our Lord.
영어MSG,21 All sin can do is threaten us with death, and that’s the end of it. Grace, because God is putting everything together again through the Messiah, invites us into life–a life that goes on and on and on, world without end.
영어NRSV,21 so that, just as sin exercised dominion in death, so grace might also exercise dominion through justification leading to eternal life through Jesus Christ our Lord.
헬라어신약Stephanos,21 ινα ωσπερ εβασιλευσεν η αμαρτια εν τω θανατω ουτως και η χαρις βασιλευση δια δικαιοσυνης εις ζωην αιωνιον δια ιησου χριστου του κυριου ημων
라틴어Vulgate,21 ut sicut regnavit peccatum in morte ita et gratia regnet per iustitiam in vitam aeternam per Iesum Christum Dominum nostrum
히브리어Modern,21 למען כאשר מלך החטא במות ככה ימלך גם החסד על ידי הצדקה לחיי עולם בישוע המשיח אדנינו׃
성 경: [롬5:21]
주제1: [칭의(稱義)의 결과]
주제2: [아담과 그리스도]
본절에는 바울이 그동안 논의해 왔던 중요한 개념들이(죄, 사망, 왕노릇, 은혜, 의, 예수 그리스도, 영생) 종합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그래서 혹자는 본절을 ‘너무도 아름다운 끝 맺음’이라고 극찬하였고(Hendriksen) 송영과 같은 가치를 지녔다고 말하기도 했다(Denney).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한 것같이 – ‘사망 안에서’란 표현은 ‘생명 안에서'(17절 하반절)란 표현과는 정반대의 개념으로서 죄가 역사하는 한계를 의미한다. 죄의 결과로 사망이 세상에 들어왔다(12, 14절; 6:23). 따라서 죄는 ‘사망 선고를 받은 자들’ 곧 ‘사망의 세력 아래에 있는 자들’에 한해서 왕노릇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칭의(稱義)의 은혜를 받은 자들에게는 결코 죄가 왕 노릇할 수 없다(Lloyd Jones). 바울은 6장에서 이것을 ‘죄의 종’과 ‘의의 종’의 개념으로 대조시켜 설명하고 있다.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 앞 구절과 완전한 대조를 이루기 위해서 본 구절의 ‘왕노릇하여’ 앞에 ‘생명 안에서’라는 말을 삽입시켜 이해하면 된다. 이와 같은 대조를 통해서 우리는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 즉 ‘사망 안에서 종 노릇하는 사람’과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는 사람'(17절)이 구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한 분명한 구분은 예수의말씀 중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라는 선포 가운데 가장 잘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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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5장 강해 설교말씀] 칭의(稱義)의 결과(롬 5: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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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5장에서는 칭의의 결과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원죄에 있을 때에는 전혀 살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살아난 자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특권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양자의 영을 받았고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칭의(稱義)의 결과(롬 5:1-21)
1-11절, 하나님과의 화목, 즐거움, 구원의 확신
[1절]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디카이오덴테스 과거분사)이라는 원어는 칭의(稱義)가 점진적이거나 반복적이지 않고 단회적임을 보인다. ‘누리자’라는 말(에코멘)은 어떤 사본들과 역본들에 ‘누리느니라’(에코멘)고 되어 있다.
칭의의 결과 중 하나는 하나님과의 화목이다. 사람들은 죄 가운데 있었을 때 하나님과 불화(不和)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죄를 미워하고 죄에 대해 노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되었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선언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이다. 이제 우리는 담대히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으며,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는 큰 특권이며 복이다. 그것은 에녹과 노아와 욥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과 친밀히 교제하는 것이다(창 5:21-24; 6:9; 욥 29:4).
[2절]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우리가 서 있는 이 은혜’는 칭의(稱義)의 은혜를 가리킬 것이다.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모든 사람은 이제 칭의의 은혜 안에 서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 은혜 안에 흔들리지 않고 굳게 서 있어야 하며, 결코 이 은혜를 떠나지 않아야 한다. 칭의의 은혜가 곧 구원이요 생명이기 때문이다. 예수님 믿고 구원얻는 것은 그를 통하여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음이 없다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칭의의 결과 중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러한 즐거움은 장차 올 영광스런 천국, 곧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확신과 견고한 소망에서 나온다. 죄인들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지만(롬 3:23),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얻은 성도는 이 영광을 바라보며 소망 중에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다. 천국의 영광은 성도의 기쁨과 즐거움의 이유인 것이다.
[3-4절]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鍊鍛)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는 평안할 때만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고,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 그것은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기 때문이다. ‘연단’이라는 원어(도키메)는 ‘연단의 경험’ ‘연단된 인격’이라는 뜻이다. 환난이 성도의 신앙 인격을 단련하여 그의 소망을 확실하게 만들기 때문에, 성도는 환난 중에도 기뻐할 수 있다. 환난은 온전한 인격을 위해 유익하다.
[5절]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성도의 소망은 헛되지 않다. 그것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헛된 꿈이나 망상이 아니다. 성도의 소망이 확실한 까닭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되었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우리 속에 오심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진 것과 같다. 우리 안에 오셔서 영원히 거하시는 성령께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확증이시다.
[6-8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이는]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그](善人)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확증하셨음이니라].우리가 불경건과 죄 가운데서 연약하였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을 믿고 성령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진 것이며 그 사랑을 체험한 것이다.
우리가 연약하고 경건치 않았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사실은 얼마나 큰 사랑인가! ‘그 선인(善人)’(투 아가두)은 앞에 말한 ‘의인’을 가리킨다고 본다. 죄인들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의 확증이었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일서 4:9-10,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9-11절]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는 장차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으로부터 확실히 구원을 얻을 것이다. 이 구원의 확신은 성도의 기쁨의 근거가 된다. 성도가 장래의 구원을 확신하지 못한다면 결코 기뻐할 수 없을 것이며 고난 중에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 성도는 미래의 구원을 확신하므로 고난 중에도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에 근거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은 하나님과의 화목을 가져오고 그의 마지막 진노의 심판으로부터의 구원을 보증하는 것이다.
바울은 또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고 말한다. 칭의의 결과는 참으로 놀랍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는 하나님과의 화목을 누릴 뿐 아니라, 또한 미래의 구원의 확실한 보증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 이것이 성도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동행하는 삶이요 천국을 소망하며 항상 기뻐하는 삶인 것이다.
본문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결과에 대해 증거한다. 첫째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은 하나님과 화목을 누린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고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다.
둘째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 우리가 천국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은혜 때문이며 환난 중에도 낙심치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셋째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달려 죽으심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해야 한다.
넷째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은 장차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받을 것도 확신한다.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은 현재 하나님과 담대히 교제하게 할 뿐 아니라, 마지막 심판대에서의 구원도 확신케 한다.
12-21절, 영원한 생명
[12절]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그 안에서 혹은 그것에 근거하여](에프 호)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이러므로’라는 말은 21절 전체에 연결되어서 “이러므로 한 사람 아담으로 죄와 사망이 들어왔으나,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의와 영생이 왔다”는 뜻이라고 본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다. 그 한 사람이 아담이다. 이것은 창세기 3장에 기록된 인간의 타락의 사건을 가리킨다. 인류의 죄와 사망은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아담의 첫 범죄는 온 인류의 범죄이었다. ‘그 안에서’라는 말은 한 사람 아담 안에서 혹은 그의 범죄에 근거해서라는 뜻 같다. 인류의 대표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인류는 죄인이 되었고 그 죄의 결과로 죽게 되었다.
[13-14절]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본문은 문맥상 삽입적 성격을 가진다. 인간의 사망의 원인은 죄이다. 율법이 없었던 모세 이전에도 사람들은 다 죽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다 죄인이었기 때문이다. 죄인은 누구나 다 죽는다.
[15-16절]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왜냐하면]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죽었으나]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넘쳤음이니라].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定罪)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한 사람 아담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으나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많은 사람이 살았고, 또 한 사람 아담의 범죄로 모든 인류가 죄와 정죄(定罪) 아래 있었으나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들의 많은 범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의롭다 하심에 이르게 하였다.
[17절]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하리로다.한 사람 아담의 범죄로 사망이 인류를 지배했으나,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의의 선물로 말미암아 생명이 많은 사람을 지배할 것이다. 이것이 칭의의 결과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의의 선물을 풍성히 받아 영생을 얻었다. 예수께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또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 11:26)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영생을 소유하고 있다.
[18절]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그런즉’이라는 말은 본절이 이 단락의 요점임을 보인다. ‘한 범죄’는 ‘한 사람의 범죄’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고 ‘의의 한 행동’도 ‘한 사람의 의’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다.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라는 말은 직역하면 ‘생명의 의롭다 하심에’인데, 그것은 의롭다 하심의 결과가 생명임을 보인다. 의와 생명은 함께 간다. 죄는 사망이요 의는 생명이다. 그러므로 칭의는 생명의 칭의이다. 즉 칭의의 결과는 영생, 다시 죽지 않는 영원한 생명인 것이다.
15절부터 18절까지 반복되는 말씀은 한 사람 아담의 죄가 어떻게 온 인류에게 전가(轉嫁)되었는지를 증거한다. 아담의 죄는 온 인류의 죄이었다. 이것이 원죄(原罪)이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난다. 이 원죄는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사실,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 또 모든 사람이 정죄되었다는 사실에서 확증된다.
이와 비슷한 원리로, 그러나 정반대의 내용으로, 이 본문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의(義)가 어떻게 믿는 모든 사람에게 값없이, 은혜로 풍성히 넘치도록 전가(轉嫁)되었는지를 증거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는 ‘많은 사람을 대신한 속죄’이었다. 예수께서는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자기 목숨을 주셨고(마 20:28), 그의 피는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해 흘리신’ 피이었다(마 26:28).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원한 생명을 풍성히 누리게 된 것이다.
[19절]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죄는 불순종이다. 죄악된 세계의 특징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에 대한 불순종이다. 순종은 의요 불순종은 죄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순종과 의를 요구하신다. 노아는 순종하는 의인이며 아브라함도, 모세도, 여호수아도, 갈렙도 그러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최고의 모범이시다. 그는 창조주로서 피조물인 인간 부모에게 순종하셨고 율법을 주신 자로서 친히 율법을 준행하셨을 뿐만 아니라, 마침내 죽기까지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셨다.
그의 순종의 죽음은 우리를 위한 의가 되셨다. 예수께서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고통과 수치와 저주의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사함으로 이 의 안에 거해야 하며, 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을 본받아야 한다. 우리는 원망하고 불평하며 거역하는 자가 되지 말고 잠잠히 믿고 순종하되 죽기까지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 하나님께서 참 하나님이시며 우리가 가진 진리가 진리일진대, 우리는 하나님과 성경 교훈에 절대 순종해야 한다.
[20-21절]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우리가 율법을 몰랐을 때는 죄가 적었으나 율법을 알게 되므로 우리는 우리의 많은 죄들과 우리 본성의 전적 부패성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죄가 많은 곳에 하나님의 은혜는 더욱 크고 넘쳤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우리의 죄의 심각성과 하나님의 죄사함의 은혜의 크심에 대한 우리의 깨달음의 정도에 비례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죄사함을 많이 받은 자는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된다(눅 7:47). 이제 우리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많은 죄의 사함을 얻었고 하나님의 완전한 의를 얻었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우리의 죄들은 크고 심각하였으나 하나님의 죄사함의 은혜는 크고 놀라왔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의롭다 하신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본문은 첫 사람 아담의 죄의 전가(轉嫁)와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의(義)의 전가에 대해 증거하며, 또 우리가 받은 의롭다 하심의 결과로서 영원한 생명을 증거한다.
첫째로, 온 인류의 대표자이며 시조(始祖)인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온 인류는 다 죄인이 되었고 죽게 되었고 정죄함을 받게 되었다. 그것은 언약의 원리에 근거한 것이라고 본다. 이것이 원죄(原罪)이다.
둘째로, 우리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의 의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이것은 우리의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에 근거하였다.
셋째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결과는 영원한 생명이다. 죄의 결과는 죽음이었으나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에 근거하여 그를 믿는 자들에게 주신 영생이다. 죄는 죽음이요 의는 생명이다.
[민수기 히브리어 원어 성경강해] 레위 지파 직분과 계수 명령(민 3:5-13)반응형
로마서 강해
로마서 강해 김효성 목사 2021년 7월 1일 수정 자료 내려받기 머리말 주 예수 그리스도(마 5:18; 요 10:35)와 사도 바울(갈 3:6; 딤후 3:16)의 증거대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라는 고백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기본적이고 중요하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진술된 대로(1:8), 우리는 성경의 원본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오류가 없이 기록되었고 그 본문이 “그의 독특한 배려와 섭리로 모든 시대에 순수하게 보존되었다”고 믿는다. 이것은 교회의 전통적 견해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약성경의 헬라어 비잔틴 다수 사본들의 본문이 순수하게 보존된 성경 원본의 본문에 가장 가까운 본문으로 여전히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본다. 성경은 성도 개인의 신앙생활뿐 아니라, 교회의 모든 활동들에도 유일한 규범이다. 오늘날처럼 다양한 풍조와 운동이 많은 영적 혼란의 시대에,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묵상하기를 원하며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뜻을 알기를 원한다. 성경을 가지고 설교할지라도 그것을 바르게 해석하고 적용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올 것이다(암 8:11).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오고 있다. 많은 설교와 성경강해가 있지만, 순수한 기독교 신앙 지식과 입장은 더 흐려지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요구되는 성경 해석과 강해는 복잡하고 화려한 말잔치보다 성경 본문의 바른 뜻을 간단 명료하게 해석하고 잘 적용하는 것일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성경책 한 권으로 충분하다. 성경주석이나 강해는 성경 본문의 바른 이해를 위한 작은 참고서에 불과하다. 성도는 각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성경을 읽어야 하고, 성경주석과 강해는 오직 참고로만 사용해야 할 것이다. 제목 차례 로마서 서론 1장: 사람의 죄 2장: 하나님의 심판 3장: 칭의(稱義)의 방법 4장: 아브라함의 예 5장: 칭의(稱義)의 결과 6장: 성화(聖化)의 이유 7장: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8장: 성령의 인도하심 9장: 은혜로 택하심 10장: 신앙고백 11장: 하나님의 구원 계획 12장: 그리스도인의 생활 13장: 사회적 의무, 이웃 사랑, 빛의 생활 14장: 서로 덕을 세우라 15장: 사도 바울의 전도 사역 16장: 인사 서론 로마서는 사도 바울이 제3차 전도여행 중 하나님의 감동으로, 아마 고린도에서 기록한 편지로서(롬 15:19, 23-26; 16:1; 행 19:21) 바울의 13권 혹은 14권의 서신들 중에서, 아니 신약성경 27권 중에서 구원의 복음을 가장 논리적으로 밝히 증거한 매우 중요한 책이다. 본서의 저자 는 사도 바울이다(1절). 1세기 말부터 2세기 초, 로마의 클레멘트, 익나시우스, 순교자 저스틴, 폴리갑 등은 본서를 많이 인용하였고 교회역사상 본서의 바울 저작성을 부정하는 학자들은 거의 없었다. 본서의 저자는 본서 끝부분에서 자신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마게도냐와 아가야의 북서쪽 해안]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널리 전하였고 이제는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고 있다고 말했다. 이것은 사도행전에 기록된 바울의 행적과 일치한다(행 19:21; 20:22; 24:17 등). 본 서신을 받은 로마교회 의 기원에 대해 몇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로, 천주교회는 사도 베드로가 로마교회를 세웠고 25년간 그 교회의 감독으로 있었다고 주장한다.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고린도의 디오니시우스는 베드로와 바울이 로마에서 함께 교회를 설립하였다고 말하였다. 1) 이레니우스도 말하기를, 로마교회가 베드로와 바울, 두 영광스러운 사도에 의해 세워졌다고 하였다. 2) 터툴리안은 베드로와 바울이 로마에서 순교 당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오늘날 일반적으로 베드로가 로마를 방문했으며 또 후에 그곳에서 순교 당했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그가 로마교회를 세웠다거나 25년간 그곳에서 사역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는다. 만일 바울이 로마를 방문하기 전에 베드로가 그곳에서 교회를 세웠고 그곳에서 사역하고 있었다면 바울은 필경 그에게도 문안했을 것이고, 또 남의 터 위에 교회를 세우지 않겠다는 신념으로 사역했던(롬 15:20) 그가 그 교회를 방문하려고 계획을 세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둘째로,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와서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던 자들이 로마에 돌아가 교회를 세웠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셋째로, 아시아와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사도 바울이나 기타 다른 제자들에 의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신자들이 로마로 올라가 살면서 교회를 세웠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두 번째와 세 번째의 견해는 다 가능하다고 본다. 본 서신의 저작 장소 와 연대 에 관하여, 본 서신에 의하면 바울은 로마교회를 방문하려는 소원을 갖고 있었고(1:10), 또 그들에게 복음을 전함으로 그들을 견고케 하고 열매를 맺게 하기를 원하였다(1:11, 13). 그는 본 서신을 기록할 당시 예루살렘의 어려운 성도들을 위해 모은 헌금을 가지고 그리로 가고 있었다(15:25-27). 또 그가 ‘식주인[집주인] 가이오’를 언급한 것을 보면, 그는 고린도에 머물고 있었다고 보인다(고전 1:14). 그러므로 본 서신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서 주후 56년경에 썼을 것이다. 로마서의 특징적 주제 는 구원 이다. 1장부터 11장까지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이치에 대해 증거했는데, 1, 2장은 구원의 필요성으로서 사람의 죄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3-5장은 의롭다 하심(칭의, 稱義)에 대해, 6-8장은 거룩하여짐(성화, 聖化)에 대해, 또 9-11장은 구원받을 자들에 대한 예정에 대해 증거했다. 그리고 12장부터 16장까지는 구원 얻은 자들의 삶에 대하여 교훈하였다. 구원 얻은 자들은 거룩하고 정직하고 선하고 진실한 삶을 살아야 한다.
1장: 사람의 죄 1-7절, 복음 안에서 문안함 [1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사도 바울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소개했다. 종은 주인에게 복종하는 신분이다. 그는 주인이 명령하는 대로 순종해야 한다. 바울은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몰랐고 그를 믿는 자들을 핍박했지만,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님으로, 또 자신을 그의 종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야 한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다시 사신 구주와 주님이시다. 우리는 사람이나 돈이나 쾌락의 종이 되지 말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 그에게 즐거이, 온전히 복종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바울은 또 자신을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라고 말하였다. 누가복음 6:13,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사도(使徒)는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들과 바울에게만 적용되는 명칭이다. 열두 제자 중 가룟 유다가 배신했으므로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제자들은 가룟 유다 대신 맛디아를 뽑았다(행 1:26). 사도행전에서 예외적으로 바울의 동역자 바나바가 바울과 함께 ‘사도들’이라고 두 번 불리었다(행 14:4, 14 원문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택함을 입었다고 말했다. 사도들은 하나님의 복음을 해설하고 선포하는 일을 맡은 자들이었다. 그들은 구약의 선지자들처럼 하나님의 성령의 특별한 감동을 받은 자들이었고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의 전달자들이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의 기초를 놓은 자들이었다(엡 2:20). 그러므로 신약교회와 성도들은 하나님의 복음을 잘 파악하기 위해 사도들에게로, 즉 그들의 글들인 신약성경으로 나아가야 한다. 혼란한 시대에는 더욱 성경만이 하나님의 뜻과 진리를 확인하는 길이다. 종교개혁시대에 많은 학자들과 교회지도자들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복음이 가리워져 있었다. 사람들은 어떤 교훈과 노선이 바른 것인지 알기 어려웠다. 그러나 루터는 비록 한 사람의 천주교 신부이었지만 성경의 확실한 지식과 확신으로 종교개혁의 횃불을 들 수 있었다. 다른 개혁자들도 그러하였다. 오늘날 배교와 타협과 혼돈의 시대에도 참된 교회들과 종들은 오직 성경으로 가야 한다. [2절]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하나님의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내용으로 구약성경에 미리 약속되어 있었다. 구약성경은 오래 전부터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약속하였었다. 창세기 3:15에 예언된 ‘여인의 후손’이나 창세기 12장에 언급된 ‘아브라함의 씨’나 창세기 49:10에 예언된 ‘ 실로 ’[안식의 사람]나 이사야 9:6의 신적 아기의 탄생이나 미가 5:2의 그의 근본이 태초인 자 등이 그것이다. 기독교 복음은 구약성경에 근거하고 있다. 구약성경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과 예표의 말씀들로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다(요 5:39; 눅 24:27, 44). [3절]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씨, 자손]에서 나셨고. 복음의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 사람이시요 참 하나님이시다. 그는 참된 인성(人性)과 참된 신성(神性)을 소유하고 계신 분이시다. 본절의 ‘육신’이라는 원어( 사르크스 )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가리킨다고 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윗의 자손으로 참 사람으로 탄생하셨다. 그의 몸만 다윗의 자손으로 나신 것이 아니고, 그의 영도 그러하셨다. 즉 그는 몸과 영혼을 가진 참 사람이셨다. 이것은 구약성경의 예언들의 성취이었다. 예레미야 23:5,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에스겔 34:23, “내가 한 목자를 그들의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호세아 3:5, “그 후에 저희가 돌아와서 그 하나님 여호와와 그 왕 다윗을 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예언들의 성취이시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라”(마 1:1)는 말로 시작된다. [4절] 성결의 영( 프뉴마 하기오쉬네스 )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성결의 영’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 속에 계신 거룩한 신성(神性)의 영을 가리킨다고 본다. 예수께서는 인성(人性)으로는 다윗의 자손이요 신성(神性)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의 증거는 그가 행하신 기적들과 그의 부활하심이다. 그의 죽음과 부활은 복음의 기본적 사실들이다. 고린도전서 15:1-4,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 . . .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모든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행하신 기적들과 그의 죽음과 그의 부활을 반드시 확인하고 믿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부활하심으로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 ‘인정하다’는 원어( 호리조 )는 ‘확정하다, 선언하다’는 뜻이다. 영어성경들은 ‘선언되셨다’라고 번역하였다 (KJV, NASB, NIV) . 그는 본래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부활하심으로써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확실히 인정되고 확정되고 선언되신 것이다. 이 분이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바울은 복음의 내용을 설명하면서 이와 같이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인성과 참된 신성을 증거하였다.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의 중심 인물이시며 복음 자체이시다. 그는 죄인들의 대속물로 하나님께서 세상에 보내신 구주이시다. 그는 슬픔과 불행, 절망과 허무, 죽음의 그늘진 세상에서 우리를 건지시기 위해 오신 구주이시다. 그 안에 구원과 영생, 기쁨과 소망이 있다. [5-6절]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의 은혜를 받았다. 또 은혜는 사도의 직분에도 관계된다. 우리는 직분에 있어서도 무자격한 자들이다. 사도직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는 것이었다. ‘믿어 순종케’라는 원어( 에이스 휘파코엔 피스테오스 )는 ‘믿음의 순종을 위해’라는 뜻이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할 뿐만 아니라, 믿음 자체가 순종 곧 마음의 순종이다(롬 6:17). 마음으로 순종한 자는 물론 행위로도 순종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가지고 곳곳에 다니며 사람들로 하여금 믿음의 순종을 하게 하였다. 이 편지를 받는 로마 교인들도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하는 무리 중에 들었다. 그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었다. ‘부르심’은 성령께서 죄인들을 회개시켜 예수님을 믿게 하시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들, 그의 양들, 그리스도께서 피 흘려 사신 자들만 그의 부르심을 입고 그들은 그의 특별한 소유가 된다. 그들이 그리스도인들이다. [7절]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편지하노니](고전, 고후, 갈 외에는 작은 글씨로 첨가됨)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고전, 고후, 갈 외에는 ‘있을지어다’라고 번역함).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은 자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이며 성도(聖徒, 거룩한 자)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다. 그들은 만세 전에 하나님의 긍휼로 택함을 입은 자들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죄사함을 받아 거룩해진 무리들이다. 바울은 그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안이 있기를 기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고 성화를 이루어간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우리의 구원도, 우리의 성화도 불가능할 것이다. ‘평안’은 매우 포괄적인 개념이다. 그것은 마음의 평안과 몸의 건강과 물질적 안정과 환경적 평안을 다 포함하는 개념이다. 그것은 우리가 받은 구원의 결과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복음을 바로 알아야 한다. 복음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하나님의 복음이며 복음의 전달자는 사도들이며 복음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구약성경에 약속된 메시아,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신 자이시다. 그는 죄인의 구주로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대속사역을 이루셨다. 이 배교의 시대에 우리는 그의 사도들의 글인 신약성경을 통해 복음을 바로 알아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 죄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예수님 믿고 죄사함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특별한 소유가 되고 그를 순종하는 자가 되는 것은 가장 존귀한 구원의 복이다. 우리는 이 놀라운 구원의 복을 깨닫고 늘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안을 더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믿음의 견고함과 거룩하여짐과 온전해짐, 즉 우리가 죄와 마귀와 싸워 이기기 위해 필요하다. 또 우리는 이 세상 사는 동안, 평안의 나라 천국에 들어가기까지 마음의 평안과 몸의 건강과 물질적 안정과 환경적 평안이 필요하다. 8-17절, 로마에 복음 전하기를 원함 [8-10절] 첫째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을 인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내 영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어떠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바울은 먼저 로마의 교인들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었기 때문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라는 말은 우리의 구원이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음을 나타낸다. 오늘날 우리의 감사의 이유도 육적인 것보다 영적인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세상적, 물질적 형통과 번창보다 먼저 우리 자신과 주위의 형제들이 구원 얻은 사실과 그들의 믿음과 믿음의 성장과 믿음의 소문이 주위에 퍼져나감을 감사해야 한다. 바울은 하나님을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섬긴다고 표현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의 복음으로 구원받았고 그 복음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다. 바울은 또 ‘내 영으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표현한다. 우리의 인격은 우리의 영에 있다. 영은 인격의 주체이며 몸은 영의 도구이다. 기독교는 단지 몸의 종교가 아니고 영의 종교이다. 우리의 중생한 영의 새 성향은 우리의 마음과 몸을 늘 주장해야 한다. 바울은 그의 감사와 쉬지 않는 기도 생활에 대해 하나님께서 증인이 되신다고 말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진실한 마음과 진실한 사역을 증거한다. 우리도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항상 진실하게 말하고 행하며 또 감사하고 기도해야 한다. 바울은 로마 교인들을 위해 항상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뜻 안에서’ 그들에게로 갈 좋은 길 얻기를 원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믿는 믿음이다. 하나님의 허락 없이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라면 이것 혹은 저것을 하겠다는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약 4:15). [11-12절] [이는]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원함이니 그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서로의 안에 있는](원문)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바울이 로마로 갈 좋은 길 얻기를 기도한 이유는 그들 보기를 심히 원했기 때문이며, 그가 그들 보기를 원했던 것은 그들에게 어떤 신령한 은사를 나눠주어 그들을 견고케 하기 위함이었다. ‘신령한 은사’는 방언이나 병 고침 같은 은사라기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킨다고 본다. 사도들의 사역은 일차적으로 말씀 사역이었다. 그 말씀 사역을 통하여 성도들의 신앙과 소망은 어린아이의 시기를 벗어나 소년기, 청년기, 장년기로 자라며 견고케 된다(골 1:28-29). 오늘날 목사들의 사역의 목표와 임무는 바로 성경의 바른 강해이다. 바울은 또 서로의 견고한 믿음을 인해 서로 위로를 얻기를 원했다. 이것은 사실일 뿐만 아니라, 또한 그의 겸손한 태도를 보인다. 사도는 성도들에게 무엇을 주려고만 하지 않고 그들로부터 위로를 받으려 한다고 겸손히 말했다. 성도의 교제란 하나님께서 동일하게 은혜로 주신, 서로 안에 있는 믿음을 인하여 피차 위로와 힘을 얻는 것이다(살전 5:14). 이것이 영적 교제이며 교제의 유익이다. 우리의 교제는 단지 먹고 마시는 데 그치지 말고, 이렇게 같은 믿음의 확인을 통해 위로와 격려를 주고 받는 교제가 되어야 한다. [13절]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약간의](원문)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바울은 그가 로마로 가기를 원한 또 하나의 목적을 그들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들 가운데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함이라고 표현한다. 문맥에 비추어 볼 때, 그것은 영혼 구원의 열매를 가리킨다고 본다. 그는 거창하게 많은 사람의 구원을 목표로 삼지 않고 ‘약간의’ 열매 즉 몇 사람의 구원을 목표로 삼았다. 우리는 한 영혼의 구원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 또 바울이 본문에서 말한 열매는 로마의 성도들의 인격의 온전해짐과 선행을 포함한다고 본다. 구원 얻은 성도들은 인격이 온전해짐과 선행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갈 5:22-23). [14-15절]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바울은 자신이 모든 사람들에게 빚을 졌다고 말했다. 여기의 ‘빚’은 전도의 빚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영혼들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깨닫고 또 우리가 받은 구원의 은혜를 깨달았다면, 우리는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세상 모든 사람에게 전해야 할 의무가 있다. 우리는 배운 자에게나 못 배운 자에게나, 부자에게나 가난한 자에게나, 우리나라 사람에게나 다른 나라들의 사람에게나 차별 없이 복음을 전해야 한다. 택함 받은 자들만 회개하고 믿고 구원받을 것이지만, 우리의 전도 대상에는 어떤 제한이 있을 수 없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죄를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으라고 전해야 한다. [16-17절] [이는] 내가 [그리스도의](전통사본)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아니함이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이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義)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함이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복음을 널리 전하기를 원했다. 그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이유는 복음이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었다. 원문에는 ‘능력’이라는 말이 강조되어 있다. 많은 사람이 이 복음을 통해 구원을 받았다. 오늘날도 이 복음은 죄인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오늘날도 죄인들은 다른 수단으로가 아니고 이 복음으로 구원을 얻을 것이다(고전 1:21-24).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이 좋아하든지 싫어하든지 이 복음을 널리 전해야 한다. 또 복음이 구원의 능력이 되는 까닭은 믿음으로 얻는 하나님의 의(義)가 복음에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의는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과 법을 다 행했을 때 얻을 수 있는 바이었고(신 6:25), 죄는 하나님의 명령과 법을 어긴 상태이었다. 이 세상의 근본적 문제는 죄 문제 곧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어겨 범죄함으로 죄 가운데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 문제의 해결은 모든 사람과 세상의 근본 문제의 해결이다. 사람의 가장 큰 복은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사람의 가장 중요한, 근본적 문제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과 법을 행함으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은 경험과 성경을 통해 명백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의(義)를 복음에 나타내셨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으셔서 우리의 모든 죄의 책임과 형벌을 담당하심으로 이루신 의(義)이다(단 9:24; 롬 10:4; 고전 1:30). 이제 하나님께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이 의(義)를 주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복음이며,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구원이다. ‘믿음으로 믿음에’라는 말씀은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라는 뜻이라고 본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받는다. 이것이 복음이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되는 이치이다. 어떤 큰 죄인이라도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와 그를 구주와 주로 영접하고 믿으면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받는다. 이것이 하나님의 복음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代贖)을 깨닫고 그를 영접하고 믿는 것, 곧 속죄신앙은 죄인이 구원 얻는 신앙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바울은 로마로 가서 그 교인들을 견고케 하기를 원했다(11절). 우리의 믿음과 인격은 성경말씀으로 견고해져야 한다. 믿음은 말씀에서 나오며(롬 10:17) 말씀은 영의 양식과 같고(마 4:4) 일정한 음식보다 귀히 여겨야 한다(욥 23:12). 그것은 우리의 신앙 지식을 확실케 하며(눅 1:4) 우리에게 확신을 준다(딤후 3:14).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히 거하게 해야 한다(골 3:16). 우리는 신구약성경을 통해 우리의 믿음과 인격이 견고해져야 한다. 둘째로, 바울은 로마로 가서 서로의 믿음을 인해 위로 얻기를 원했다(12절). 우리는 서로를 위로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 자는 서로 위로하는 자가 된다(고후 1:3-4). 성령께서는 위로자로 우리 속에 계신다(요 14:16). 로마서 15:4,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성도들의 교제는 서로의 참된 믿음 때문에 서로에게 위로가 된다. 셋째로,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16절). 우리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구원 얻은 자들은 다 복음에 빚진 자이다. 바울은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고 말했다.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은 것은 그것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있고 죄인들은 그 복음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이다. “우리의 의는 이것뿐 예수님의 피밖에 없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함으로 한 명의 영혼이라고 구원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와 교회의 첫 번째 사명이다. 18-27절, 우상숭배와 정욕의 죄 로마서 1-2장은 구원의 필요성에 대해 설명한다. 사람들에게 구원이 필요한 것은 그들의 많은 죄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 때문이다. [18-19절] [이는]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나타남이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본문은 사람들에게 구원이 필요한 까닭은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해 하늘로 좇아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의 많은 죄에 대해 하나님의 진노가 있을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구원이 필요한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많은 죄 때문에 구원이 필요하다. 바울은 사람을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사람은 불의를 행하면서 진리를 가로막는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진리에 대한 관심과 흥미를 잃게 되고 마음이 어두워지고 진리를 왜곡시키고 진리를 대항한다. 사람의 죄는 불경건과 불의로 요약된다. 모든 죄는 불의이며 그 중에 하나님에 대한 죄가 불경건이다. 불의는 불경건을 포함한다.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이 의(義)요, 그것을 지키지 못한 것이나 어긴 것이 죄이다. 죄들 중 불경건은 근원적 죄이다. 다른 모든 죄는 불경건에서 나온다. 사람은 하나님을 무시하므로 여러 가지 죄를 짓는다. 사람들의 불경건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이기 때문이다. 본문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어느 정도 모든 사람 속에 있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그들에게 보이셨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자신을 어느 정도 알려주셨다. 그것이 사람의 종교성, 하나님 의식, 양심, 이성 등이다. [20절] [이는]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神性)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됨이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오묘막측한 천지만물의 존재는 전지전능한 창조자 하나님의 존재를 증거한다. 작은 건물 하나도 지은 자가 있는데, 천지만물이 우연히 생겼다는 것은 가장 불합리한 말이다. 천지만물은 창조주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신성(神性)을 알게 해준다. 자연만물은 사람이 세상에 창조주 하나님이 계신 줄 몰랐다고 핑계할 수 없게 만든다. [21절]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거나 감사치 않고 도리어 우상숭배에 떨어졌기 때문에 진노하신다. ‘하나님을 알되’라는 말씀은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을 알고 있음을 보인다. 무신론자도 전쟁 때에는 하나님을 찾는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선조들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이 없었으나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고 그들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겨왔다.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어느 정도 의식하며 살지만, 그 하나님을 참으로 영화롭게 하지 않고 또 그에게 감사하지도 않는다. 그들의 마음은 심히 어두워져 있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는 지식을 가지지 못한 것이 사람의 근본적인 무지(無知)이며 어리석음이다. [22-23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새들과 짐승들]와 버러지 형상[기는 것들]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사람들은 자신을 지혜롭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에 살면서 그를 알지 못하고 있다. 세상의 시작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세상의 진행과 목적에 대한 지식도 있을 수 없다. 역사상 천재적 사상가들의 결론은 보통 사람들의 결론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그러므로 성경은 모든 사람을 다 무지하고 어리석다고 말한다. 사람의 무지의 대표적 증거가 우상숭배이다. 우상숭배는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 세계를 혼동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원자존자이시며 그의 영광은 썩어지거나 없어지지 않는 영광이며, 이 세상의 것들은 다 썩어지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우상숭배에 빠져 있다. 우상숭배는 불경건과 무지의 증거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불경건에 대해 진노하시는 것은 정당한 일이다. [24절]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그러므로’라는 말은 불경건이 모든 정욕의 죄의 원인임을 보인다. 하나님은 인류의 도덕의 근원이시고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은 부도덕의 뿌리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도덕성의 회복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때에만 가능하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만 악을 떠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불경건한 자들을 정욕의 죄 가운데 버려두셨다. 그는 죄인들을 회개시키시고 구원하실 능력도 있고 그들을 버려두실 권한도 있다. 왜 자신들을 구원치 않으시냐고 항의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이 스스로 하나님을 떠났고, 지금도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있고 자연만물 속에 명백히 나타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감사치 않고 오히려 우상숭배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불경건한 마음을 마음의 정욕과 더러움에 버려두셨다. 정욕의 죄는 불경건에서 나온다. 그것은 불경건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한 징벌이다. 죄는 죄를 더한다. 불경건한 사회는 음란한 사회가 된다. 그것은 확실히 하나님의 징벌이다. [25절]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하나님의 진리’는 하나님에 관한 바른 말을 가리키고, ‘거짓 것’은 하나님에 관한 거짓된 말을 가리킨다. 사람들은 참 하나님을 우상으로 바꾸었고, 하나님에 대한 바른 말을 헛된 우상의 말로 바꾸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피조물들을 조물주 대신 혹은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우상 앞에 절하지만, 우상은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조상들에게 제사를 드리지만, 죽은 조상들은 후손들에게 복과 화를 주지 못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 대신에 돈을 사랑하며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 그러나 돈이 신이며 사람이 신인가? 돈이 얼마나 헛되고 사람이 얼마나 연약한지는 재벌의 자살이나 병원 중환자실이나 장례식장에서 알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은 돈의 종이 되어 돈을 위해 살며 자신만 사랑하며 의지하다가 허무하게 죽어간다. 사람은 이런 헛된 것들을 극복해야 한다. 영원히 찬송 받으실 자는 하나님뿐이시다. 그는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그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 섬기며 그에게 찬송과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한다. [26-27절]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 파데 아티미아스 )[저열한 욕망]에 내어 버려 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듯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 아스케모쉬넨 )[상스러운 행위들]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사람들의 죄들 가운데 두드러진 죄는 저열한 욕망의 죄 즉 음란의 죄이다. 바울은 여성들의 죄에 대해 말한다. 여성들은 자신들을 순리대로 쓰지 않고 역리로 쓴다. 여성들이 자신들을 순리대로 쓴다는 말은 성년이 되어 결혼하여 정상적 결혼생활을 하는 것을 말하며, 역리로 쓴다는 것은 정상적 결혼생활을 이탈하여 행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특히 여성들의 간음, 음행, 매춘, 동성애 등을 가리켰다고 본다. 바울은 남성들의 죄에 대해서도 말한다. 그들도 하나님께서 주신 부부관계로 만족하지 않고 심지어 남성이 남성으로 더불어 상스러운 행위들을 하였다. 이것은 동성애를 가리킨 것이라고 보인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결혼의 질서를 파괴하는 악한 행위이다. 그러나 사람의 감정과 욕구는 이렇게 심히 변질되고 부패되었다. 동성애의 죄악은 옛날 소돔성과 고모라성 사람들의 죄악이었다(창 19장). 또 옛날 가나안 족속들에게 이런 죄악이 있었다(레 18장). 또 고대 헬라 사람들과 로마 사람들 가운데도 이런 죄악이 보편적이었다. 키케로(Cicero)는, “[동성애의] 행위는 헬라인들 가운데는 보편적이었고, 그들의 시인들과 위인들, 심지어 지식인들과 철학자들도 그런 일을 행했고 그것을 자랑했다. . . . 그것은 어떤 특정한 도시들만의 풍습이 아니라 그리스 전체의 풍습이었다”라고 말했다( 투스쿨란 토론집 4:33; 반즈 노트 , p. 554). 하나님께서는 이런 동성애에 대해 ‘상당한 보응’을 내리셨다. 소돔성과 고모라 성은 유황불비로 잿더미가 되었고 가나안 족속들은 이스라엘 백성에 의해 멸망당했다. 고대 헬라와 로마도 다 멸망하였다. 오늘날 에이즈 (AIDS) 질 병의 세계적 유행은 동성애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보인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하나님의 진노가 모든 불경건과 불의에 대해 하늘로 좇아 나타난다. 하나님의 진노는 마지막 심판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길은 경건과 도덕성의 완전한 회복인데, 그것은 불가능하고 오직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경건해야 한다. 우리는 우상숭배치 말아야 한다. 돈이나 사람이나 자기 자신이나 과학이 우상이 되지 않게 해야 한다. 우리는 영원자존하신 하나님, 살아계신 참 하나님, 창조자, 섭리자, 심판자 하나님을 바로 알고 그에게 합당한 감사와 영광과 경배를 올려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거룩해야 한다. 우리는 모든 불의를 버리고 도덕성을 회복해야 한다. 우리와 우리 자녀들은 이 음란한 세대에서 특히 음란, 간음, 매춘, 동성애의 악을 다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늘 깨끗이 씻음 받고 우리의 몸과 마음을 항상 거룩하게 지키도록 힘써야 한다. 28-32절, 여러 가지 죄악들 [28절] 또한 저희가 마음( 에피그노세이 )[지식]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 아도키몬 눈 )[부패된 생각](NASB, NIV)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사람들은 세상의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가지기를 싫어한다. 하나님의 지식이 모든 지식의 근본이지만 그들은 그 지식을 거절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그 부패된 생각에 내버려두셨다. 사람들의 생각은 하나님의 보시기에 부패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버려두셔서 합당치 못한 일들을 행하게 하셨다.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거절하는 자는 결국 여러 가지 죄악들에 떨어진다. 불경건은 모든 죄악들의 뿌리이다. [29절] 곧 모든 불의, [음행](전통본문), 3) 추악( 포네리아 )[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詐欺)[속임],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불경건의 결과, 사람들에게는 모든 불의가 가득하다. ‘모든 불의’는 뒤에 열거된 여러 죄악들을 포함한다. ‘불의’(不義)는 모든 죄악들의 대표적 명칭이다. 의(義)는 하나님의 계명에 일치하는 행위요, 불의(不義)는 그의 계명에 어긋나는 행위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계명에 순종하는 의로운 삶을 살기를 원하시고 모든 불의를 정죄하신다. 사람들은 또 음행이 가득하다. 사람의 죄악들 중에 우상숭배 다음으로 두드러진 죄악은 음행이다. 세상은 악하고 음란한 세상이다(마 12:39). 하나님께서는 결혼 제도를 주셨고 사람에게 성적 순결과 깨끗하고 단정한 삶을 명하시며 음행을 미워하시고 정죄하신다. 사람들은 또 악이 가득하고 탐욕이 가득하다. 악은 다른 사람에게 정신적, 물질적 해를 끼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선하게 살라고 명하시지만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악을 행한다. 또 탐욕은 세상의 것을 더 많이 가지려는 마음이다. 그것은 실상 하나님 대신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며 일종의 우상숭배이다(골 3:5). 탐욕은 사람으로 다른 죄들을 짓게 하는 원인이 되며 거기서 각양의 죄들이 나온다. 성도가 하나님과 영원한 천국을 참으로 믿고 소망하고 사모한다면 허무한 세상의 것들에 대한 탐심을 버려야 한다. 사람들은 또 ‘악의’(惡意)가 가득하다. 악한 마음에서 악한 행위들이 나온다. 사람은 마음과 생각을 지켜야 하며 악한 마음을 버리고 선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사람들은 또 ‘시기, 살인, 분쟁’이 가득하다. 시기는 남이 나보다 잘되는 것을 싫어하는 마음이다. 그것은 미워하는 마음으로 발전하고 미워하는 마음은 살인하는 데까지 이르기도 한다. 미워하는 것은 살인하는 것과 같다(요일 3:15). 또 사람은 욕심 때문에 살인하기도 한다. 또 사람들은 분쟁한다. 시기와 미움, 사랑 없음, 자기 중심적임, 상대방을 무시함, 오해함 등이 분쟁을 만든다. 사람들은 또한 ‘속임과 악독’이 가득하다. 사람들은 자기의 유익을 위해 남을 속이고 남을 해친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명은 사람이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성도는 자기의 이익보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고 거기에 순복해야 하고, 또 하나님의 뜻 안에서 진실해야 하고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사람들은 또 ‘수군수군한다.’ 이것은 은밀히 남의 말 하기를 좋아하는 행동을 가리킨다. 남에게 할 말이 있으면 당사자에게 직접 해야 하며 뒤에서 그에 관해 수군거리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각자 자기 일에 충실해야 하고 다른 사람의 일에 참견하지 말고 또 그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하지 말아야 한다. [30절]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거만한]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비방한다’는 말은 남의 명예에 해가 되는 말을 하는 것을 가리킨다. 비방은 교만과 시기와 미움 등에서 나온다. 사랑은 이웃의 모든 허물을 덮지만(잠 10:12), 미움은 이웃에 대한 비난으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인간 관계에 금이 가고 가정이나 단체나 교회나 사회가 파괴된다. 사랑은 건설하는 덕이요, 미움과 비난은 파괴하는 악이다.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라는 원어( 데오스튀게이스 )는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들’이라는 뜻일지도 모르지만 (BDAG) 인간 관계의 죄를 말하는 문맥상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들’이라는 뜻 같다 (Thayer) . 모든 악이 다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악이지만 특히 남을 거짓되이 비방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매우 가증한 악이다. 또 사람들은 ‘거만한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이다. 거만함과 교만함과 자랑함, 이 세 단어들은 뜻이 서로 가깝다. 교만은 마귀의 죄악이고(딤전 3:6) 죄인들의 특성이 되었다. 피조물이 창조주 하나님을 대항하고 자신을 주인과 왕으로 여기는 것이 교만이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주인과 왕이시므로, 교만은 어리석고 무지한 일이요 매우 근본적 죄악이다. 거기서 남을 멸시함과 자랑이 나온다. 사람들은 또 악을 도모하며 계획한다. 이것은 실수의 악이 아니고 의도된 악, 계획된 악이다. 고의적인 악행은 실수로 범하는 악행보다 더 악하다. 부지 중에 범한 죄와 고의적인 죄는 벌이 크게 다르다. 사람들은 또 부모를 거역한다.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되지 않은 자녀들은 부모를 거역한다. 이것이 부패된 인간 본성이다. 아이들은 엄한 교훈과 징계와 훈련을 통하지 않고는 잘 길들여지지 않고 통제되지 않는다. 그래서 성경은 어릴 때부터 교훈과 징계의 매로 아이들을 교육하라고 말한다(잠 23:13-14). 사람의 부패된 인간성은 사랑의 매를 통해 비로소 조금 제어되고 고쳐질 수 있다(잠 13:24; 22:15). [31절] 우매한 자( 아쉬네투스 )요 배약(背約)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원통함을 풀지 않는 자요](전통본문) 4) 무자비한 자라. 사람들은 우매하여 참된 지혜와 지식, 총명과 이해력이 없다. 그들은 많은 지식을 추구하여 얻지만, 참으로 알아야 할 지식, 곧 인생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며 지금 왜 여기 살고 있고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에 대한 지식이 없다. 이것이야말로 우매한 인생의 모습이다. ‘배약(背約)하는 자’는 약속을 어기는 자, 불신실한 자를 가리킨다. 사람이 약속을 어기는 데는 부득이한 환경적 요인도 있겠지만, 많은 경우는 자신의 불신실함 때문이다. 사람들은 쉽게 약속하고 그 약속을 쉽게 저버린다. 특히 사람의 불신실함은 시간이나 돈에 대한 약속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신실한 인격은 약속을 반드시 지키려 한다. ‘무정한 자’는 인정이 없는 자를 가리킨다. 사람들은 어떤 환경에서는 인정이 있어 보이지만, 다른 많은 경우 무정함을 드러낸다. 사람들은 자기 유익을 위해 부모님을 저버리며 아내를 학대한다. 힘센 자는 약한 자를 학대하고 그의 것을 빼앗고 강대국은 약소국을 침입한다. 또 사람들은 원통한 일이 있을 때 그것을 마음에 오래 간직하고 잘 풀지 않고 또 보복하려 한다. 사람은 서로 화해하기 어렵고 마음을 달래기 어려운 존재이다. 이런 부족 때문에 때때로 인간 관계가 허물어진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에게 악을 행한 자와도, 그가 사과하면, 언제나 즉시 화해해야 한다. 우리는 남을 용서하기를 힘써야 한다. 마지막으로, 사람들은 무자비하다. 자비와 긍휼은 하나님의 성품이다. 그러나 타락한 사람들은 이기적(利己的)이게 변하였고 자기 이익을 위해 남을 해치고 남의 것을 교묘하게 빼앗는다. 또 그들은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다면 결코 할 수 없을 악을 행하며 또 거칠고 폭력적이고 사악한 자들이 되었다. [32절]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쉰유도쿠시 )[칭찬하느니라, 기뻐하느니라]. 사람들은 이런 죄악들을 행하는 자가 죽어야 마땅하다는 하나님의 율법과 공의를 알고 있다. 이런 공의는 그들의 사회법들에 어느 정도 나타나 있고 그들의 양심의 법에도 기록되어 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벌은 사망이다. 그것은 변할 수 없는 하나님의 법칙이다. 죄인들은 영적으로, 육적으로 죽고 영원히 죽을 것이다. 그것은 단지 그들의 몸의 죽음 정도가 아니고 그들의 몸과 영혼이 받을 영원한 지옥 형벌을 포함한다(계 21:8).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기들만 이런 죄악들을 행할 뿐 아니라 이런 것들을 행하는 자를 옳다고 칭찬하고 기뻐한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더 가증한 뻔뻔함과 완악함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사람들은 심히 죄악되다.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가지기를 싫어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죄들에 떨어진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그렇게 내어 버려두셨다(24, 26, 28절). 사람들은 모든 불의, 음행, 악, 탐욕, 악의가 가득하고, 시기, 살인, 분쟁, 속임, 악독이 가득하고, 수군수군하고 비방하고 하나님 앞에 가증하고, 거만하고 교만하고 자랑하고, 악을 계획하고 부모를 거역하고, 지혜와 총명이 없고 약속을 어기고 무정하고 원통함을 풀지 않고 무자비하며 게다가 악행하는 자들을 옳다고 칭찬하고 기뻐하는 뻔뻔함까지 있다. 이런 모든 죄악들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사람들에게 임한다. 둘째로, 우리는 이런 모든 죄악들을 미워하고 버리고 그것들로부터 떠나야 한다. 우리는 모든 죄악들을 깨끗이 씻음 받아야 한다. 사람의 죄들은 어떻게 씻음 받을 수 있는가? 사람의 죄는 오직 하나님의 아들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만 깨끗이 씻음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신의 모든 죄를 인정하고 미워하고 버리기를 결심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받아야 하고 이제는 모든 죄를 멀리하고 정직하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 2장: 하나님의 심판 [1-3절]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사람은 자기도 악하면서 남의 악함을 판단하기 잘한다. 그러나 그에게 바른 판단력이 어느 정도 있다는 것이 그를 옳은 자로 만들지는 못한다. 남의 잘못을 잘 지적하고 판단한다고 해서 그가 의로운 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의 판단의 행위가 그를 정죄하는 셈이 된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같은 악을 행하기 때문이다. 그의 양심은 자기도 정죄받아야 할 자임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행위를 판단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악인이든지, 그를 판단하는 자든지, 혹은 그를 심문하고 벌을 주는 재판관이든지 하나님의 공의롭고 두려운 심판을 피할 수 없다. [4-5절]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남의 죄를 판단하면서 자신은 회개치 않고 하나님의 심판을 무시하는 자는 하나님의 더 큰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는 다른 죄인보다 더 악한 자이다. 장차 하나님의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날이 올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가상적 이야기가 아니고 장차 온 세상에 임할 한 사건이다.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인이요 온 세상을 심판하실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이 사실들이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필요성을 증거한다. [6-8절]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엑스 에리데이아스 )[혹은 ‘이기적 야망으로’(NASB)]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 그의 심판은 공의롭다. 그는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 영생으로 보응하신다. 선을 행하는 데는 인내가 필요하다. 한두 번 선을 행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겠지만, 계속 선을 행하는 것은 인내가 필요하다.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은 참으로 가치 있고 영광스러운 부활과 천국과 영생을 가리킨다. 참고 선을 행함으로써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는 복된 몸으로 부활하여 천국에 들어가고 영생에 이를 것이다. 구원받을 자들은 참고 선을 행하며 부활과 천국과 영생을 사모하다가 영생에 이를 것이다. 그러나 악인들 속에는 다투며 당을 짓는 이기적 야망이 있다. 그들은 사람의 존귀함을 알지 못하고 세상의 헛된 것만을 더 가지려 한다. 그래서 그들은 진리에 복종치 않고 당을 지어 진리와 다투며 불의를 좇고 온갖 악을 행한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에 대해 공의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노와 분으로 보응하실 것이다. [9-10절]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 스테노코리아 )[곤경, 심한 고생]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평안]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혼에 환난과 심한 고통이 있을 것이다. 육신에도 그러하지만, 그의 영혼에 더욱 그러하며, 악인은 죽은 후에도 그 영혼이 지옥에서 고통 중에 있게 될 것이다(눅 16:23-25). 악에 대한 이러한 보응은 유대인들에게나 이방인들에게나 동일하다. 그러나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안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행복도 의인의 심신(心身) 곧 육신과 영혼에 다 적용되며, 또 유대인들에게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다 적용된다. [11절]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 하나님의 심판은 공평하며 세계적이다. 그것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다 임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의 역사와 전통과 특권 때문에 그들을 편벽되이 취급하지 않으실 것이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학력이나 직업, 재산이나 가문, 사회적 신분 등 외적 조건을 보고 편벽되이 그를 판단치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롭게, 공평하게, 공정하게 심판을 시행하시는 하나님이시다. [12-13절]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하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편벽되이 취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율법 없이 망하고 율법이 있는데도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을 것이다. 율법을 가진 유대인들이나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이나 다 그들이 행한 대로 공의롭고 공평하게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율법을 가진 유대인들은 이방인들보다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대 앞에서 더 나은 조건을 가진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가지고 있었느냐, 율법을 알았느냐가 문제가 아니고 율법을 지켰느냐가 문제이다. 왜냐하면 신명기 6:25에 보면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지킨 자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14-15절]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이방인들은 그들에게 율법이 없었다고 해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에서 면제될 수 없다. 왜냐하면 율법 없는 이방인들도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하며 그 양심으로 옳고 그름을 증거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 안에 있는 양심, 즉 도덕적 분별력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 속에 기록해 두신 율법이다. 그래서 사람은 양심대로 행해야 한다. [16절]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사도 바울은 복음의 내용 속에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의 진리가 있음을 증거한다. 심판은 두려운 진리이지만, 기독교의 근본 교리이며(히 6:1-2) 복음의 기본적 내용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라는 말씀은 예수께서 심판주이심을 보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심판주이시다(요 5:22; 행 17:31). 그 날에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실 것이다. 그 심판은 공의롭고 철저할 것이다. 여기에 모든 사람의 구원의 필요성이 있다. [17-24절]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형식]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神社)[신전] 물건을 도적질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 중에 한 지도적인 인물을 가상적으로 들어 유대인들의 잘못을 지적한다. 그 유대인은 율법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자랑한다. 그는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긴다. 그는 율법 지식과 진리의 형식을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고 있다. 사도 바울은 남을 가르치는 유대인이 도적질하거나 간음하여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하나님과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은 악을 행하는 그 유대인 때문에 그의 하나님을 욕하고 있다. 이 말씀은 오늘날 형식적인 교인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우리가 교인이라는 이름, 더욱이 직분자의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 어떤 악을 행하면,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욕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도다운 인격과 삶이 없이 교인이라는 이름이나 교회의 직분을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 교인이라는 이름보다, 또 목사, 장로, 권사, 집사의 직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의롭고 선한 인격과 삶임을 알고 기도하고 힘써야 한다. [25-29절] 네가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한즉 네 할례가 무할례가 되었느니라.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제도( 디카이오마 )[의(KJV), 요구(NASB, NIV)]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의문(儀文)( 그람마 )[율법 조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판단치 아니하겠느냐?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성령으로 말미암고](NASB, NIV) 의문(儀文)[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할례를 받은 것은 율법을 행할 때 가치가 있지, 율법을 범할 때는 아무 가치가 없다. 그것은 무할례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러므로 할례자가 율법을 어기면 그가 할례를 받았다는 것이 무슨 의미와 가치가 있는가? 무할례자인 이방인이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율법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유대인들을 판단하지 않겠는가? 할례의 의미와 가치는 율법을 행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성경은 마음의 할례에 대해 가르친다(신 10:16; 렘 4:4). 그것은 마음의 모든 더러움과 완고함을 베어 내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심령의 거룩한 변화인 중생(重生)을 가리킨다. 진정한 기독교는 마음과 내면성의 종교이며 변화된 심령의 종교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모든 죄악된 마음 상태로부터 새로워지고 깨끗해지는 마음의 변화이다. 참된 경건은 사람의 마음이 새로워져서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믿고 순종하는 것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장차 온 세상에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아들에게 맡기셨고(요 5:22) 아들 예수께서는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 위해 다시 오실 것이다(행 17:31; 딤후 4:1; 사도신경). 요한계시록 22:10,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공의로 철저하게 심판하실 것이다. 그 날은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날”이다(5절). 사람은 자기의 행한 대로 심판을 받을 것이다.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는 영생에 이르고 불의를 좇는 자는 진노에 이를 것이다(6-8절). 주께서는 사람들의 은밀한 것들도 다 심판하실 것이다(16절). 요한계시록 20:13,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종교적 외식을 미워하신다. 성도라는 이름이나 교회의 직분자라는 이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도다운 인격과 삶이다. 참된 경건은 사람의 마음이 새로워져서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믿고 그의 계명을 순종하여 정직하고 선하고 진실하게 사는 것이다. 우리는 옛날 유대인들처럼 결코 형식적 교회 생활에 머무르지 말아야 한다. 마태복음 23장에 보면, 주께서는 외식자들에게 화를 선언하셨고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고 말씀하셨다. 죄인들은 죄를 회개하고 구주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계명들을 순종해야 한다. 3장: 칭의(稱義)의 방법 1-18절, 모든 사람이 죄인임 [1-2절]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의 특권들 중 첫째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사실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유대인들을 통해 온 세계의 모든 족속에게 전달되었다. 모세와 선지자들과, 예수님과 사도들은 유대인들 즉 이스라엘 사람들이었다. 성경 저자들은 주로 유대인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진리들을 계시하셨고 그것들을 기록하고 보관하며 전달하게 하셨다. 그것은 유대인들의 특권이었다. 시편 147:19-20, “저가 그 말씀을 야곱에게 보이시며 그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보이시는도다. 아무 나라에게도 이같이 행치 아니하셨나니 저희는 그 규례를 알지 못하였도다.” [3-4절]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신실하심]을 폐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 어떤 유대인들이 믿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 보관의 특권에 차질이 생긴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하심은 그들의 불신앙과 불순종 때문에 폐해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다 거짓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참되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들과 심판에서 의로우시다. [5-6절]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 사람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낸다고 하여서 그 불의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 불의에 대하여 진노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결코 불의하실 수 없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그가 불의하시다면, 어떻게 심판자가 되실 수 있겠는가? 의롭지 못한 심판자는 참된 심판자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아무리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일지라도, 또 그들의 죄와 부도덕함이 하나님의 의를 드러낸다 할지라도, 그들이 범죄하는 한 그들은 마땅히 정죄(定罪)받아야 한다. [7-8절] 그러나[왜냐하면 5) 어떤 이들이 말하기를]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으면 어찌 나도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않겠느냐 함이라.]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저희가 정죄(定罪)받는 것이 옳으니라. 본문은 5, 6절을 보충 설명한다. 사람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게 드러났을지라도 그의 거짓말이 어떤 선한 역할을 한 것이 아니며 선으로 간주될 수도 없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선을 이루기 위해 악을 행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무슨 일이든지 목표가 선하고 옳아야 할 뿐만 아니라, 방법도 선하고 옳아야 한다. 이 말씀은 전도를 위해 자유주의 교회들과 천주교회들과 협력하는 어떤 복음주의 전도자들의 오류를 잘 증거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할 때, 바른 목표를 가져야 하고 바른 방법도 사용해야 한다. 바른 목표를 위해 올바르지 않은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 [9절]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사도 바울은 이미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죄인임을 증거하였다. 그는 1장에서는 주로 이방인의 죄를, 2장에서는 주로 유대인의 죄를 증거했다고 보인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특권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이방인들과 다를 바가 없는 죄인들이다.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이나 모두 다 구별 없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들이다. [10-12절]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세상에 의인은 한 사람도 없다. ‘하나님과 사람’(神人)이신 예수님만 예외이실 뿐이다. 사람들 중에서 그는 유일하게 죄가 없으시다(히 4:15; 벧전 2:22; 요일 3:5). 그 외에 하나님의 계명에 완전히 일치하게 산 자, 참으로 의로운 자는 하나도 없다. 의인 노아나 욥이나 다니엘도(창 6:9; 욥 1:1; 겔 14:14) 완전한 의인은 아니었다. 또 깨닫는 자도 없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누구이시며 사람이 어디서 와서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며 또 장차 어디로 갈 것인지 깨닫지 못한다. 또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 모든 사람은 인생의 정로(正路)를 알지 못함으로 이리저리 치우쳤고 헛되고 무가치하게 살고 있다. 사람들이 쌓은 선한 업적이라는 것도 실상 무의미하고 무가치하다. 영원히 가치 있고 선한 일을 행하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 [13-15절]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사람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같이 구역질나는 나쁜 냄새를 낸다.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나오는 것들은 더럽고 악취나는 것들뿐이다. 또 사람들의 혀는 속이는 혀이다. 사람들은 거짓말에 숙련되어 있다. 또 그 입술에는 남을 죽이는 독이 있고 그들의 말들은 남을 저주하는 악독으로 가득하다. 또 그들의 발들은 남을 죽이기에 빠르다. 참으로 사람은 전적으로 부패되었고 무능력해졌다. [16-18절] 파멸과 고생[불행]이 그 길에 있어 평강[평안]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죄인인 사람들의 길에는 파멸과 불행이 있고 그들은 평안의 길을 알지 못한다. 또 그들의 눈앞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 죄인들의 죄악된 삶의 근본 원인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불경건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악에서 떠나게 된다(잠 16:6).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는 자들에게는 악을 버리고 떠남도 없고 참된 의(義)와 선(善)도 없다. 그런 자들에게 파멸과 불행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 없는 세상의 현실이며 우리가 구원 얻기 전 상태였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들과 성경을 주셨다. 우리는 유대인들을 통해 주신 성경과 하나님의 말씀들을 감사히 받고 읽고 다 믿고 다 실천해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참되시고 진실하시고 신실하시다. 디모데후서 2:13, “우리는 미쁨[신실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신실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우리는 참되신 하나님의 말씀을 다 믿고 우리의 삶의 목표와 그 방법도 바르고 참되게 가져야 한다. 셋째로,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며 심령이 심히 부패되어 선을 행하기에 무능력하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서도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하셨고(렘 17:9) 또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는 절망적인 말씀을 하셨다(렘 13:23). 인류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구별 없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들이다. 넷째로, 죄인들의 길에는 파멸과 불행이 있고 그들의 심령에는 평안이 없다. “파멸과 불행이 그 길에 있어 평안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이사야 48:22,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죄는 죽음과 불행과 지옥 형벌을 가져왔다. 사람이 천국에서 영생과 참된 평안과 기쁨을 누리려면 죄사함과 의(義)의 구원이 필요하다. 19-31절, 칭의(稱義)의 방법 [19-20절]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사람은 율법을 통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한다. 율법의 역할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죄악됨을 깨닫게 하여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는 데 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 앞에서 죄인으로 판정되므로 하나님 앞에서 항변할 말이 없다. 율법을 다 지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사람은 세상에 한 사람도 없다. [21절] 이제는 율법 외에( 코리스 노무 )[율법과 별개로] 하나님의 한 의(義)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기독교 복음은 율법과 별개로 나타난 하나님의 한 의에 대한 소식이다. 사람은 죄인이며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으므로 구원이 필요했다. ‘이제는’이라는 말은 구약시대와 대조하여 신약시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구약시대에 증거된,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義)는 행위의 의, 즉 모든 율법을 항상 행함으로 얻을 수 있는 의이었다. 그러나 사람은 율법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었다. 이제 하나님께서 율법과 별개로 주시는 한 의가 복음 안에 나타났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으로 말미암은 의이다. 이 의(義)는 율법과 선지자들, 즉 구약성경에 이미 증거된 바이었다. 구약성경은 ‘행하라’는 도덕법을 강조하지만, 제사들, 유월절 어린양, 성막 제도 등을 통하여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도 증거하였다. 그 은혜는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증거될 것이었다. 구약성경은 또 메시아의 속죄사역으로 인한 의(義)를 직접 예언하기도 하였다. 이사야 53:11,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다니엘 9:24,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70이레[주간]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永贖)되며[영원히 속(贖)하여지며] 영원한 의(義)가 드러나며 이상(異像)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 [22절]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믿는 모든 자에게 그리고 모든 자 위에](전통본문) 6)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이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의이다. 율법을 행함으로 얻는 의(義)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의(義)이다. 신약시대의 의(義)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누구나 차별 없이 받을 수 있는 의(義)이다. 그러므로 신약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구원을 위해 필수적으로 중요하다. [23-24절] [이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되었음이니라]. 본문은 모든 믿는 사람들이 차별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까닭을 말한다. 그 까닭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으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죄인이 단지 그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었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얻는 의(義)는 행위로 얻는 의(義)와 대조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요 값없이 거저 얻는 의이다. 이런 의가 가능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위해 구속(救贖)을 이루셨기 때문이었다. ‘구속’(救贖)이란 값을 주고 산다는 뜻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죗값, 즉 죄의 책임 곧 죄책(罪責)과 형벌을 짊어지시고 우리를 건져내셨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누구나 그의 십자가의 보배로운 피로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이다. [25-26절]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그의 피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 힐라스테리온 )[유화제물(宥和祭物)]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이 말씀은 앞절의 말씀을 좀더 설명한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그의 속죄사역을 믿는 것이고 그의 피를 믿는 것이다. 피가 생명이므로 피흘림이 죄를 속(贖)한다(레 17:11). 유화제물(宥和祭物)은 하나님의 진노를 가라앉히는 제물을 말한다. 그것은 우리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크신 진노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신 죽음으로 누그러지셨다는 의미이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속죄의 한 의미이다.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지은 죄들을 용서하심으로라는 뜻이다. 물론, 사람이 예수님 믿고 난 후에 짓는 죄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로 씻음을 받는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무조건 의롭다고 간주하신다면 그런 판단 자체가 불의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죄인들의 죄의 형벌을 대신 담당하신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에 근거하여 예수님 믿는 자들을 의롭다고 하셨으므로, 그것은 의로운 판단이시요 의로운 행위이신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사역으로 인한 의롭다 하심 곧 칭의(稱義)의 원리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증거할 뿐만 아니라, 또한 예수님 믿는 자들이 받는 의(義)의 정당함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모든 죄를 예수 그리스도께 전가(轉嫁)시키셨으므로 그들을 의롭다고 정당하게 선포하실 수 있다는 말씀이다. 그러나 성도들이 받은 이 의롭다 하심은 성도가 실제로 의인으로 변화되었다는 뜻이 아니고, 단지 법적으로 의인으로 간주된다는 뜻이다. 그것은 법적인 의미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늘 법정에서 성도들에게 죄가 없다는 무죄(無罪) 판결을 내리심과 같다. 물론,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는 또한 새 생명을 받기 때문에 실제적으로도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산다. 그러나 성도는 비록 법적으로는 완전한 의인이지만 실제적으로는 아직 불완전하고 부족이 있다. [27절]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행위의 법으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성도의 의가 자신의 행위에 근거하지 않고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신 속죄사역에 근거하기 때문에, 성도는 자랑할 것이 없다. 율법과 별개로 나타난 의, 복음 안에 나타난 의, 즉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의는 받는 사람 편에서 아무것도 자랑할 수 없는 의이다. 왜냐하면 이 의는 사람들의 행위의 법으로 얻는 것이 아니고, 단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의를 믿음으로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28절]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행위와 관계가 없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로기조마이 )[간주하노라(NASB, NIV), 판단하노라, 결론을 내리노라(KJV)]. 본절에서 사도 바울은 사람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복음의 기본적 진리를 다시 결론적으로 단언하였다. [29-31절]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에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유대인들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또한 이방인들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구원 진리는 할례 받은 유대인들에게나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에게나 똑같이 적용된다. 이 구원 진리는 어느 시대나 어느 민족에게나 동일하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효력 있는 진리이다. 오늘날도 죄인들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얻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신약의 복음이 구약의 율법을 폐지시키는 것은 아니다. 구약과 신약은 서로 충돌치 않는다. 율법과 복음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구약과 신약은 그림자와 실체요 예언과 성취이다. 율법은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여 복음으로 이끄는 인도자 역할을 한다. 사실, 복음에 제시된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의 죽음은 율법의 저주를 받으신 죽음이었고(갈 3:13) 율법의 의를 이루신 것이었다(롬 10:4).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을 폐지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율법을 굳게 세우는 것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세상에는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자가 아무도 없다. 율법은 단지 사람의 죄를 깨닫게 할 뿐이다. 사람은 율법으로 죄를 깨달으나 율법을 지켜 구원받지는 못한다.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소위 율법주의는 진리가 아니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위한 구속(救贖)의 죽음을 죽으셨고 또 유화(宥和)제물이 되셨다. 24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 25절, “화목제물[유화제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의 죄로 인해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받으신 것이다. 그는 우리의 죗값을 지불하셨고 우리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셨다. 셋째로, 사람은 율법을 행함으로써가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에 근거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주어진다. 이것이 죄인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구원이다. 4장: 아브라함의 예 [1-3절]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진리는 구약성경도 증거한 바이었다.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을 그 증거로 들었다. 창세기 15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셔서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4-5절]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이라는 말은 행위를 가리킨다. 일하는 자가 받는 삯은 은혜가 아니고 당연히 받아야 하는 보수이다. 의롭다 하심이 사람의 의로운 행위에 근거하였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닐 것이지만, 의로운 행위가 없었을지라도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의로 간주되었으므로,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와 같이, 믿음과 행위는 서로 구별되고 대조된다. 믿음은 행위와 다른 무엇이다. 그것은 말 그대로 그저 믿는 것이다. 이것은 성도에게 의로운 행위가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다. 아브라함은 경건하고 의로운 삶을 살았다. 참 믿음은 경건하고 정직한 행위로 나타난다. 그러나 사람의 행위는 불완전하므로 사람이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사람은 행위로가 아니고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죄인 구원의 방법이다. [6-8절] 일한 것이 없이( 코리스 에르곤 )[행위들과 별개로]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사도 바울은 행위들과 별개로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해 증거한 다윗의 시를 인용했다. 그가 인용한 말씀은 시편 32:1-2이다. 그것은 사람이 죄가 없어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 아니고 죄가 있지만 죄사함을 받기 때문에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을 보인다. 이와 같이, 의롭다 하심은 사람의 의로운 행위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인 것이다. [9-10절]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니라. 아브라함이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은 할례 받기 전인가 후인가? 그가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건은 창세기 15장에 나오고(15:16), 창세기 16장은 그가 하갈을 취하여 이스마엘을 낳은 때가 86세라고 증거하며, 창세기 17장은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때가 99세라고 증거한다(17:24).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때는 그가 할례를 받기 13년 이전이었다고 보인다. [11-13절]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저희도] 7)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 뿐 아니라[할례 받을 뿐 아니라 또한](원문)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에게(도)니라.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後嗣)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아브라함의 할례는 그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받은 의를 확증하는 표이었다. 아브라함이 할례자의 조상이라고 할 때, 그 할례자는 단지 육신의 할례를 받은 자들을 가리키지 않고, 육신의 할례를 받았을 뿐 아니라 또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진 유대인들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아브라함이 열국의 아버지가 되고 그 후손이 온 세계에 충만하리라는 약속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적용되고 그들을 다 포함하는 뜻이 있다. [14-16절]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後嗣)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카타 카린 )[은혜에 의거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율법은 죄인에게 죄를 깨닫게 하고 그로 하여금 진노하신 하나님 앞에 서게 한다. 그러므로 율법만으로라면 아무도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없었다. 여기서 율법과 은혜, 행위와 믿음은 다시 대조된다. 율법을 행하는 것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물론, 믿는 자는 율법에 순종하며 정직하게 말하고 행동할 것이다. 그러나 믿음 그 자체는 율법 순종의 행위와는 구별된다. [17-18절]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 믿음의 성격을 증거한다.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은 죽은 자들을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자이시다. 그는 무(無)로부터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믿음은 바로 그 하나님 곧 창조자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고 믿었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라는 말은 ‘소망을 거슬러 소망 중에’라는 역설적 표현이다. 아브라함은 육신적으로 소망이 없었으나 하나님께 대한 소망을 붙들었다. 이것은 다른 말로, 자신에 대한 부정과 하나님께 대한 긍정을 뜻한다. 자기에게 무엇이 있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을 섬기다가 자기에게 아무것도 없는 것이 드러날 때에 낙심하고 좌절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그것은 그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고 단지 자기 자신을 신뢰한 것일 뿐이다. [19-22절]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이미]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생각하지 않고](전통사본) 8)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아브라함은 나이가 많아 백세가 되어 자기 몸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았을 때에도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다. 그는 결코 자신의 상태만 바라보지 않았고 하나님의 능력과 약속을 믿었다. 그것이 참된 믿음이다. 믿음은 우리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전능하신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의지하는 것이다. 믿음은 우리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이라고 인정하는 것이며, 자신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며 의탁하는 것이다. [23-25절]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때문에]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때문에] 살아나셨느니라. 우리의 구원도 같은 원리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범죄 때문에 십자가에 내어줌이 되셨고 우리의 의롭다 하심 때문에 다시 살아나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아브라함의 믿음과 같은 믿음을 가진 자들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적인 죽음과 삼일 만에 부활하심을 믿는 자는 참 하나님을 믿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내용을 믿는 것이다. 이 믿음은 사람의 무엇을 의지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단지 전능하신 하나님, 부활의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이런 믿음을 가진 자들이 아브라함처럼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는 것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아브라함은 자신의 의로운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고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다윗도 행위로는 부족과 실수가 없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용서하심으로 용납함을 받았다. 이와 같이, 죄인들은 자신의 의롭고 선한 행위들로가 아니고 오직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둘째로, 아브라함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그가 할례의 규례와 율법을 받은 것은 그가 받은 의를 확증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진리는 할례자에게나 무할례자에게나 똑같이 적용된다.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할 뿐이다. 유대인들도, 이방인들도 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셋째로,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하나님을 바라고 믿었다.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은 것이다.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자이시다. 믿음은 우리 자신을 부정하고 하나님을 긍정하는 것이며, 우리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이것이 죄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는 믿음이다. 이 믿음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다. 신약 성도들이 주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으나 삼일 만에 부활하셨음을 믿을 때, 그들은 이런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진 것과 같다. 5장: 칭의(稱義)의 결과 1-11절, 칭의(稱義)의 결과 [1절]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누리느니라].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디카이오덴테스 , 과거분사)이라는 원어는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이 점진적이거나 반복적이지 않고 단회적임을 보인다. ‘누리자’라는 말( 에코멘 ) 9) 은 전통사본들의 다수에는 ‘누리느니라’( 에코멘 ) 10) 고 되어 있다. 칭의의 결과 중 하나는 하나님과의 화목이다. 사람들은 죄 가운데 있었을 때 하나님과 불화(不和)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죄를 미워하시고 죄에 대해 노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되었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이다. 이제 우리는 담대히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으며, 성경말씀의 묵상과 기도로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는 큰 특권이며 복이다. 그것은 에녹과 노아와 욥처럼 하나님과 친밀히 교제하며 그와 동행하는 것이다(창 5:21-24; 6:9; 욥 29:4). [2절]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믿음으로]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우리가 서 있는 이 은혜’는 칭의를 받은 은혜를 가리킨다고 본다. 예수님 믿고 구원 얻은 모든 사람은 이제 칭의를 받은 은혜 안에 서 있다. 모든 성도는 이 은혜 안에 흔들리지 않고 굳게 서 있어야 하며, 결코 이 은혜를 떠나지 않아야 한다. 칭의 받은 은혜가 곧 구원이요 생명이기 때문이다. 예수님 믿고 구원 얻는 것은 그를 통하여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음이 없다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칭의의 결과 중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런 즐거움은 장차 올 영광스런 천국, 곧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확신과 견고한 소망에서 나온다. 죄인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지만(롬 3:23),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영광 곧 부활과 천국의 영광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 얻은 성도는 이 영광을 바라보며 소망 중에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다. 부활과 천국의 영광은 성도의 기쁨과 즐거움의 이유인 것이다. [3-4절]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鍊鍛)( 도키메 )[연단된 인격]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는 평안할 때만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고,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 그것은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된 인격을, 연단된 인격은 소망을 이루기 때문이다. 환난이 성도의 신앙 인격을 단련하여 몸의 부활과 천국과 영생에 대한 그의 소망을 확실하게 만들기 때문에, 성도는 환난 중에도 오히려 기뻐할 수 있다. [5절]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성도의 소망은 헛되지 않다. 그것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헛된 꿈이나 망상이 아니다. 성도의 소망이 확실한 까닭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되었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우리 속에 오심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진 것과 같다. 우리 안에 오셔서 영원히 거하시는 성령께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표이시며 확증이시다. [6-8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이는]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善人)( 투 아가두 )[그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확증하셨음이니라]. 우리가 불경건과 죄 가운데서 연약하였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을 믿고 성령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진 것이며 그 사랑을 체험한 것이다.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은 얼마나 큰 사랑인가! ‘그 선인’은 앞에 말한 ‘의인’을 가리킨다고 본다. 죄인들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의 확증이었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일서 4:9-10,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9-11절]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는 장차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으로부터 확실히 구원을 얻을 것이다. 이 구원의 확신은 성도의 기쁨의 근거가 된다. 성도가 장래의 구원을 확신하지 못한다면 결코 기뻐할 수 없을 것이며 고난 중에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 성도는 미래의 구원을 확신하므로 고난 중에도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에 근거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은 하나님과의 화목을 가져오고 그의 마지막 진노의 심판으로부터의 구원을 보증하는 것이다. 성도는 천국을 확신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또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고 말한다. 칭의의 결과는 참으로 놀랍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는 하나님과의 화목을 누릴 뿐 아니라, 또한 미래의 구원의 확실한 보증과 확신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동행하며 살고 천국을 확신하고 소망하며 항상 기뻐하며 산다.
본문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결과에 대해 증거한다. 첫째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은 하나님과 화목을 누린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고 성경말씀 묵상과 기도로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다. 둘째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 우리가 천국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은혜 때문이며 환난 중에 낙심치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셋째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은 장차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받을 것도 확신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이었고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받은 것은 그 사랑이 우리 속에 부어진 것이다. 의롭다 하심을 얻은 우리는 이제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마지막 진노로부터의 구원도 확신하게 되었다. 12-21절, 영원한 생명 [12절]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에프 호 )[이는](Thayer, NASB)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이르렀음이니라]. 창세기 3장의 증거대로,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왔다. 아담의 첫 범죄는 아담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고 온 인류의 범죄이었다. 인류의 대표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인류는 죄인이 되었고 그 죄의 결과로 모두가 죽게 되었다. [13-14절]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사람의 죽음의 원인은 죄이다. 율법이 없었던 모세 이전에도 사람들은 다 죽었는데, 그것은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었기 때문이다. [15-16절]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왜냐하면]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죽었을지라도]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넘쳤음이니라].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定罪)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dikaivwma)에 이름이니라. 한 사람 아담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으나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많은 사람이 살았고, 한 사람 아담의 범죄로 모든 인류가 죄와 정죄(定罪) 아래 있었으나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들의 많은 범죄에도 불구하고 그들로 하여금 의롭다 하심에 이르게 하였다. [17절]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하리로다. 한 사람 아담의 범죄로 죽음이 인류를 지배했으나,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의의 선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다. 이것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결과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의의 선물을 풍성히 받아 영생을 얻었다.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주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생을 소유하고 있다. [18절]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디 헤노스 디카이오마토스 )[한 의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그런즉’이라는 말은 본절이 이 단락의 요점임을 보인다.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라는 말은 의롭다 하심의 결과가 생명임을 보인다. 의와 생명은 함께 간다. 죄는 사망이요 의는 생명이다. 그러므로 칭의의 결과는 영생, 다시 죽지 않는 영원한 생명인 것이다. 15절부터 18절까지 반복되는 말씀은 한 사람 아담의 죄가 어떻게 온 인류에게 전가(轉嫁)되었는지를 증거한다. 아담의 죄는 온 인류의 죄이었다. 이것이 원죄(原罪)이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난다. 이 원죄는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사실,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 또 모든 사람이 정죄되었다는 사실에서 확증된다. 이와 비슷한 원리로, 그러나 정반대의 내용으로, 본문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의(義)가 어떻게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값없이, 은혜로 풍성히 넘치도록 전가(轉嫁)되었는지를 증거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는 ‘많은 사람을 대신한 속죄’이었다. 예수께서는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자기 목숨을 주셨고(마 20:28), 그의 피는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해 흘리신’ 피이었다(마 26:28).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그를 믿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원한 생명을 풍성히 누리게 된 것이다. [19절]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죄는 불순종이다. 죄악된 세계의 특징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에 대한 불순종이다. 순종은 의요 불순종은 죄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순종과 의를 요구하신다. 노아는 순종하는 의인이며 아브라함도, 모세도, 여호수아도 그러했다. 사람이신 예수께서는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최고의 모범이시다. 그는 창조주로서 피조물인 인간 부모에게 순종하셨고 율법을 주신 자로서 친히 율법을 준행하셨을 뿐만 아니라, 마침내 십자가에 죽기까지 아버지께 순종하셨다. 빌립보서 2:5-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의 순종의 죽음은 우리를 위한 의가 되었다. 예수께서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고통과 수치와 저주의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사함으로 이 의 안에 거해야 하며, 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을 본받아야 한다. 우리는 원망하고 불평하며 거역하는 자가 되지 말고 잠잠히 믿고 순종하되 죽기까지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 하나님께서 참 하나님이시며 우리가 가진 진리가 진리일진대,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교훈에 절대 순종해야 한다. [20-21절]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율법을 몰랐을 때는 죄가 적었으나 율법을 알게 되므로 우리는 우리의 많은 죄들과 우리 본성의 전적 부패성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죄가 많은 곳에 하나님의 은혜는 더욱 풍성했고 넘쳤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우리 죄의 심각성과 하나님의 죄사함의 은혜의 크심에 대한 우리의 깨달음의 정도에 비례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큰 죄사함을 받은 자는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된다(눅 7:47). 이제 우리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많은 죄사함을 얻었고 하나님의 완전한 의를 얻었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우리의 죄들은 크고 많고 심각했으나 하나님의 죄사함의 은혜는 컸고 풍성했고 놀라웠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의롭다 하신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한 사람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인류는 다 죄인 되었고 정죄(定罪) 되었고 죽게 되었다. 아담은 한 개인일 뿐만 아니라, 온 인류의 시조(始祖)이며 언약의 대표자이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처음에 주셨던 명령 곧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명령은 인류를 대표하여 받은 명령 곧 행위언약이었다. 그 언약에서의 실패는 그 개인의 실패일 뿐 아니라, 인류 전체의 실패이었다. 그것이 원죄(原罪)라는 것이다. 둘째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신자들은 다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이것은 우리의 의롭고 선한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에 근거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으로 우리의 의를 이루셨다. 셋째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결과는 영원한 생명이다. 죄는 죽음이요 의는 생명이다. 죄의 결과는 죽음이었으나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에 근거하여 그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이 영생에 이르는 것이다. 죄의 값은 죽음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영생이다(롬 6:23). 6장: 성화(聖化)의 이유 [1-3절]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메 게노이토 )(강한 부정어).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에이스 )[안으로]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에이스 )[안으로]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지만(5:20) 하나님의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할 수는 없다. 그 이유는 성도가 이미 죄에 대해 죽었기 때문이다. 죄에 대해 죽은 자는 계속 죄 가운데 살 수 없다. 성도가 거룩해야 할 이유는 첫째로 세례의 원리로 설명된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을 때 그의 죽으심에 참여하였다. 세례는 일차적으로 죄씻음을 표시하고 확증하지만, 그것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표시하고 확증한다. 죄는 하나님과의 분리를 가져오고, 죄씻음은 하나님과의 영적 연합을 가져온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고 그를 믿는 우리는 그와 연합하여 그의 죽음에 참여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해 죽은 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씻음을 받고 그와 연합된 성도가 계속 죄 가운데 거하면서 죄를 짓는다면 그것은 구원의 이치에 반대되는 일이 되는 것이다. [4-5절]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장사된 것은, 그가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으로 부활하심과 같이 우리도 새 생명 가운데 살게 하려 함이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은 또한 그와 함께 사는 것이며, 그의 부활의 생명이 그와 연합된 이들 속에 활동하여 새 생명으로 살게 하는 것이다. 이치가 그러하다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가 죄 가운데, 즉 영적 죽음 가운데서 산다는 것은 모순이 아닐 수 없다. 구원 얻은 자들은 새 생명을 받았고 의로운 생활을 하도록 구원 얻은 것이고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6-7절]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옛 사람’은 죄로 인해 죽었던 옛 자아, 곧 구원 얻기 전의 자신을 가리킨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을 때 옛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새 피조물이 되었다(고후 5:17). 옛 사람이 죽은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게 하려 함이다. ‘죄의 몸’은 ‘옛 사람’과 같은 뜻으로 죄성을 가진 몸을 가리킨다. 이제 죄성을 가진 몸인 옛 사람은 죽었고, 의롭다 하심을 얻은 새 사람이 살았다. 우리의 구원은 죄 안 짓게 하는 구원이다. 그것은 죄에 대하여 죽는 구원이며 의를 향해 사는 구원이다. 그러므로 구원 얻었다고 하면서 죄 가운데 산다면 그것은 구원의 목적과 방향에 반대로 가는 것이다. [8-11절]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전통본문) 11)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만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연합되어 그와 함께 죽은 자가 되었다면, 우리는 또 그와 함께 살 것이다. 그것은 거룩한 생활로 나타난다. 비록 구원 얻은 성도의 생활이 완전치 못할지라도, 거룩함은 구원의 당연한 과정이다. 예수께서 부활하셨고 영원히 사시고 다시 죽지 않으시듯이, 예수님 믿는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으로 살고 범죄치 않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에 대해 단번에 속죄의 죽음을 죽으셨다. 그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와 그 결과인 죽음은 영원히 제거되었다. 죄와 사망은 설 곳이 없어졌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역은 완전하고 영원하다. 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을 향해 살아나신 것이다. 이제 죄와 사망은 끝났고 하나님을 위해 사는 생활만 그에게 있다. 성도의 거룩한 생활 곧 성화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의 연합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고 하나님을 향하여 사신 것처럼 우리도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을 향하여 산 자임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12-13절]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몸의 욕심들로 말미암아 죄에 순종치 말고] 12)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도구]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도구]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는 몸의 욕심들을 통해 활동한다(약 1:15). 몸은 의의 도구가 될 수도 있고 죄의 도구가 될 수도 있다. 성도는 죄에 대해 죽은 자이므로 죄가 몸을 주장치 못하도록 욕심들을 통제해야 하고 죄에 순종치 말아야 한다. 구원 얻은 성도는 자기 몸을 거룩하게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13절의 “너희 지체”라는 말에 ‘지체’는 몸의 부분들, 즉 눈과 귀와 입, 손과 발 등을 가리킨다. 성도는 이제 몸의 모든 부분을 불의의 도구로 죄에게 내어주지 말고, 의의 도구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전에는 우리가 하나님 없이 살며 더럽고 악한 것을 보고 듣고 말하며 만지고 그런 곳으로 갔을지라도,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우리 몸을 거룩하게 드리고 의롭고 선한 것만 보고 듣고 말하고 행해야 한다. [14절] [이는]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못할 것임이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성도들이 자기 몸을 죄에게 주지 않고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이유는 죄가 그들을 주관치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 죄가 그들을 주관치 못하는 이유는 그가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우리 죄를 대신해 죽으심으로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셨기 때문에 율법이 요구하는 법적 책임과 형벌이 제거되었고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을 말한다. 의롭다 하심 곧 칭의(稱義)는 법적인 구원이다. 성도는 이미 법적으로 완전한 의를 얻었다. [15절]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메 게노이토 ). 바울은 6:1-2에서도 성도가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계속 머물 수 있는가라고 질문한 후 ‘그럴 수 없다’고 분명하고 강하게 대답했었다. 그는 여기서도 의롭다 하심을 받은 성도들이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고 해서 죄를 지어도 되는가라고 질문한 후 ‘그럴 수 없다’고 한번 더 분명하고 강하게 대답한다. 그는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들이 죄짓는 생활을 할 수 없음을 다시 강조한 것이다! 성화는 성도의 당연한 길이다. 성도는 죄 가운데 거해서는 안 된다. 사도 요한도 요한일서에서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죄를 계속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하나님께로서 나지] 아니하니라”고 말하였다(요일 3:9-10). [16-17절]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성도가 거룩해야 할 이유는 둘째로 순종의 원리로 설명된다. 사람은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의 종이 된다. 죄에게 순종하면 죄의 종이 되어 죄 안에 살다가 사망에 이르게 될 것이고, 하나님께 순종하면 하나님의 종이 되고 의 안에 살다가 영생에 이르게 될 것이다. 바울은 성도가 구원 얻었던 처음 순간을 언급한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순간이다. 우리는 본래 죄에게 순종하고 죄만 짓고 살았던 죄의 종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을 들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소식이었고 그를 믿는 자에게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을 주신다는 내용이었다. 우리는 그 말씀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구원을 얻었다. ‘마음으로’라는 원어( 에크 카르디아스 )는 ‘마음으로부터, 마음에서 우러나와’라는 뜻이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마음에서 우러나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영접하고 그에게 순종하는 것이다. 그것이 믿음이다. 우리는 마음으로 순종한 결과 죄에게서 해방되고 의에게 종이 되었고,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에 근거하여 우리의 모든 죄는 씻음 받고 우리는 단번에 의롭다고 여기심을 받았다. 우리는 죄에게서 자유케 되고 의에게 종이 되었다. [19-22절]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너희가 그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육신이 연약하다는 것은 우리 속에 죄성이 남아 있음을 가리킨다. 성도가 거룩하게 살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이지만, 그에게 죄성이 남아 있으므로 거룩함에 이르라는 권면이 필요하다. 성도는 성화(聖化)가 당연한 목표라는 권면과 격려가 필요한 것이다. 성도가 죄의 종이었을 때는 죄만 지었기 때문에 의에 대해 자유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때에 맺은 열매라는 것은 더러운 죄들이었으므로 부끄러운 것들뿐이었고 그 결국은 사망이었다. 진실로, 모든 죄들은 비록 범죄할 당시에는 혹시 즐거워보일지라도 지나고 보면 부끄러운 것들이다. 의는 칭찬받을 만하지만, 죄는 수치와 후회를 남길 뿐이다. 이제 성도는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으로 인해 죄에게서 해방되었다. 죄의 종이 죄에게서 해방되어 자유인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자유는 하나님께 종이 되는 자유이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께 종이 되는 것은 결코 무거운 짐이 아니다(마 11:30). 거룩함의 열매는 구원 얻은 성도에게 당연한 열매이다.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이다. 중생(重生)과 칭의(稱義)는 반드시 성화(聖化)를 동반한다. 법적인 구원에 실제적 구원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구원이 아닐 것이다. 출생한 아기가 성장하는 것은 정상적인 일이듯이, 중생한 성도가 지식이 더하고 거룩해지는 것은 정상적인 일이다. 그러나 이 정상적인 성화는 성도의 순종을 통해 이루어진다. 성도는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의 열매를 맺다가 영생에 이른다. 하나님께 종이 되는 것과 거룩의 열매를 맺는 것은 영생과 한 줄 위에 있고 그 줄은 끊어질 수 없다. 구원 얻은 성도는 하나님께 순종하며 거룩한 생활을 하는 과정을 통해 영생에 이르는 것이다. 이 정상적 과정이 없다면, 그는 구원 얻지 못한 자일 것이다. [23절] [이는]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恩賜)[은혜의 선물]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영생임이니라]. 성도가 영생을 확실히 얻을 것이라는 이유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죄에 대한 대가(代價) 즉 죄의 보응과 형벌이 죽음이지만 택자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이기 때문이다. 이 짧은 말씀은 복음 진리의 요약과도 같다.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본장은 구원 얻은 성도가 거룩해져야 할 이유, 즉 성화(聖化)의 이유를 증거한다. 첫째로, 구원 얻은 성도가 거룩해져야 할 이유는 세례의 원리로 설명된다. 즉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 받았을 때 그와 연합되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이름으로 세례 받은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와 함께 살았다. 그것은 죄의 몸인 옛 사람이 죽었고 새 사람이 새 생명 안에서 산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우리의 죄성 때문에 거룩한 생활을 할 수 없다고 생각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서 죄에 대해 죽었고 하나님을 향해 산 자가 되었음을 인정하고 죄와 결별하고 산 자처럼 의롭고 거룩한 생활을 해야 하는 것이다. 둘째로, 구원 얻은 성도가 거룩해져야 할 이유는 순종의 원리로 설명된다. 즉 그가 죄에게서 해방되어 하나님께 종이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속에는 아직도 우리로 범죄케 할 수 있는 죄성(罪性), 곧 죄악된 성질과 성향이 남아 있다. 그러나 구원은 죄에게서 해방되어 하나님께 종이 되는 것이다. 성화는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과 방향이고 성도의 정상적이고 당연한 일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거룩함이다. 그러므로 예수님 믿고 구원 얻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 즉 구약의 도덕법과 신약의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의 교훈들에 순종함으로써 거룩한 생활을 해야 하고 성화(聖化)를 이루어야 한다. 7장: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1-3절]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淫婦)[음란한 여자]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부[음란한 여자]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바울은 결혼의 비유를 들어 성도가 율법으로부터 자유케 되었음을 증거한다. 남편 있는 여인은 그 남편이 살아 있을 동안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지만, 남편이 죽은 후에는 다른 남자와 결혼할지라도 음란한 여자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한 쪽이 죽었으므로 그와의 부부의 관계가 끝났기 때문이다. [4절]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율법의 저주를 당하시고 율법의 의(義)를 이루셨기 때문에, 예수님 믿는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한 것과 같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율법의 요구를 다 만족시키셨기 때문에, 우리는 율법의 저주와 형벌에서 자유함을 얻었다. 우리가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한 목적은, 부활하신 주와 연합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위해 선한 인격과 생활의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함이다. [5절]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육신에 있을 때’라는 말은 구원 얻기 전의 상태를 가리키고,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라는 말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깨달아지는 죄의 정욕이라는 뜻이라고 본다. 우리가 구원 얻기 전에는 죄성이 우리를 지배하였고 죄의 정욕들이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몸의 기관들에 역사해 우리로 사망에 이르는 행동을 하게 했다. 간혹 양심의 가책이 있었을지라도 그것은 무시되고 변명으로 무마되었다. [6절]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성령](NASB, NIV)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儀文)[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얽매였던 것’이라는 말은 율법의 규례들을 가리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는 죄와 사망으로부터 뿐만 아니라, 또한 율법으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되었다. 우리는 율법에 대해 죽임을 당했고 율법으로부터 자유케 되었다. 바울은 6:14에서도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다고 말하였다. 또 그는 갈라디아서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해 강조하면서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었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으나,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다고 말하였고(3:23, 25), 또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말했다(5:1). 바울은 그 책에서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에 대해 분명하게 말했다. 그러나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는 죄와 방종에 떨어지게 하는 자유가 아니다. 그 자유는 율법의 공포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위해 살고 의와 거룩을 행하게 하기 위한 자유이다. 의롭고 거룩한 삶, 이것이 구원의 방향이다. 구원은 죄로부터 건져내어 의롭고 거룩하게 살게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구원이라고 할 수 없다. 그래서 앞에 6:15에서도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고 말하였다. 또 그는 갈라디아서 5:13에서도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고 말하였다. ‘영의 새로운 것으로’라는 말에서 ‘영’이라는 말은 성령을 가리키며 (NASB, NIV) , ‘의문’(儀文)이라는 말은 ‘글자’라는 뜻으로 율법의 조문을 가리킨다고 본다(고후 3:6도 비슷함). 우리가 율법에 대해 죽었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옛날처럼 율법 조문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긴다.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는 성도에게 성화를 위한 큰 힘이 된다. 때때로 성도에게 죄와 연약이 있으나 그가 낙심하지 않고 더욱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가고 의와 거룩의 길로 나아가는 데에 이 자유가 큰 힘이 되는 것이다. [7절]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이제까지 말한 내용이 율법을 정죄(定罪)하는 인상을 줄지 모르기 때문에, 바울은 ‘율법이 죄인가?’라고 묻고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그러면 율법의 역할은 무엇인가? 율법은 죄를 알게 하고 죄를 깨닫게 하는 역할을 한다. 율법이 없었다면 사람은 죄를 죄로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 자체는 죄가 아니다. [8-11절]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율법은 그 자체가 죄가 아니지만, 죄가 율법으로 기회를 타서 우리 속에 각양 탐심을 이루었다. 법이 없으면 죄가 죄로 인식되지 못하기 때문에 죄가 없는 것 같고 죄가 죽은 것 같다. 그러나 율법을 통해 우리의 죄악된 성질과 행위들이 드러난다. 전에 율법이 없을 때는 죄에 대한 지식이 없으므로 나 자신의 존재가 살아 있는 것 같았으나, 율법이 이를 때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죄로 인하여 죽은 자라는 것이 드러났다. 율법은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는 약속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가 율법을 완전히 행할 수 있다면 율법을 통하여 영생에 이를 수 있을 것이나, 우리는 율법을 다 행할 수 없고 율법을 통해 우리 자신이 심히 죄악됨을 깨달을 뿐이다. 영생에 이르게 할 율법이 실제로는 우리를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다. 죄는 율법으로 기회를 타서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였고 죽게 하였다. [12-13절]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되게 하려 함이니라. 율법 자체는 죄악되지 않다. 율법은 실상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다. 14절에서 바울은 율법을 신령하다고까지 말한다. 그는 디모데전서 1:8에서도 “사람이 율법을 법 있게 쓰면 율법은 선한 것인 줄 우리는 아노라”고 말했다. 율법은 바른 정신으로 사용하면 구원 얻은 성도들에게 선하고 유익하다. 그러므로 선한 것이 우리에게 사망이 되었을 수 없다. 단지,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그 선한 율법으로 우리를 죽게 한 것이다. 이로써 죄가 심히 죄악됨을 드러낸 것뿐이다. [14-15절]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율법으로부터 자유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내면 속에는 선악간의 싸움이 있다. 바울은 ‘나는’ ‘나의’ ‘내가’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내면적 싸움을 표현한다. 그것은 모든 성도들 속에 있는 선악간의 싸움이다. 성도에게는 육신의 연약성 곧 죄성(罪性)이 남아 있다. 이 죄성 때문에 우리는 율법이 요구하는 의를 행치 못한다. 율법은 영적이지만, 나는 영적이지 못하고 육신적이다. 나는 육신에 속해 죄 아래 팔려 있고 때때로 원하는 것을 행치 않고 미워하는 것을 행하고 있다. [16-17절]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가 율법 행하기를 원한다는 것 자체가 율법의 선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제는’이라는 말은 6절이나 8:1에도 쓰였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롭다 하심을 받은 후를 가리킨다.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라는 말은 구원 얻은 성도에게 있어서 범죄의 주체는 참된 자아가 아님을 증거한다. 구원 얻은 성도의 참된 자아는 ‘속사람’(22절) 혹은 ‘새 사람’(엡 4:24)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구원 얻은 성도의 참된 자아는 의와 생명 안에서 살려 하지만, 성도 속에는 죄성이 남아 있어 율법을 거슬러 죄를 짓게 한다. 성도가 죄를 짓는 것은 참된 자아의 행위가 아니고 자신 속에 남아 있는 죄성의 행위이다. 그렇다고 해서, 성도가 범죄의 책임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선악간의 모든 행위는 바로 우리 자신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18-20절]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육신’이라는 원어( 사르크스 )는 ‘몸’( 소마 )이라는 말과 동의어로 사용되며, 성도의 남은 죄성은 육신 즉 몸에 있다고 보인다. ‘원함이 내게 있다’는 말은 구원 얻은 성도의 참된 자아는 의와 선을 원함을 나타낸다. 이것은 새 사람의 소원이요 중생한 영혼의 변화된 성향이다. 구원 얻은 사람만 이러한 소원을 가진다. 구원 얻기 전에는 이런 소원이 없었고 단지 때때로 양심의 가책 정도가 있었을 뿐이다. 그렇지만, 구원 얻은 후에도 원함은 있으나 선을 행하는 능력이 없다. 이것이 성도에게 남아 있는 죄성과 연약성인 것이다. 선을 원하는 것은 참된 자아요, 선을 원치 않고 악을 행하는 것은 내 속에 거하는 죄성이다. 그것이 우리 몸에 남은 옛 사람의 성질인 것이다. [21-23절]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 누스 )[생각]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성도는 자신 속에 두 가지 모순된 성향이 있음을 깨닫는다. 하나는 참된 자아의 소원으로서 선을 행하려 하는 성향이요, 다른 하나는 우리 몸 속에 남아 있는 죄성으로 악을 행하려는 성향이다. ‘속사람’은 의롭다 하심을 얻은 후의 참된 자아를 가리킨다. 중생한 참 자아는 ‘마음’( 누스 ) 곧 생각(mind)으로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고 그 법을 지키려 한다. 그러나 우리 속에는 다른 한 성향이 있어 우리를 죄의 법 아래로 사로잡아 온다. 성도 속에는 이 대립된 두 가지 성향이 있어 항상 내면적으로 싸우는 것이다. [24-25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 누스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바울의 탄식은 성도들의 탄식과 신음이다. 마음의 성향과 육신의 성향의 싸움으로 성도는 피곤해진다. 성도는 당연히 이 죄와 사망의 몸으로부터의 구원을 갈망하게 된다. 그러나 바울은 또한 하나님께 감사한다. 성도의 거룩한 생활과 성화는 이러한 싸움과 탄식 속에서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는 죄에 대해 점점 죽고 의에 대해 점점 산다. 하나님의 구원은 효력이 있고 승리적이다. 비록 구원 얻은 성도들이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섬기고 육신으로 죄의 법을 섬기지만, 성도들이 탄식과 신음 중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얻은 의롭다 하심 때문이다. 성도는 이미 하나님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인(義人)으로 인정받았다. 성도는 때때로 죄에 넘어짐에도 불구하고, 법적인 의를 이미 얻었고 최종적 구원과 영생도 보장되어 있다(롬 8:30; 빌 1:6). 이 최종적 구원은 영육의 완전한 구원이다.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으로 말미암아 율법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었다. 이것은 우리가 율법의 저주와 형벌로부터 자유함을 얻었다는 뜻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므로 우리의 모든 죄책과 형벌을 담당하셨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 조문에 따라 행하지 않고 율법의 공포에서 벗어나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담대히 의와 거룩을 행한다. 둘째로, 그러나 우리의 육신에는 아직 죄성이 남아 있다. 구원 얻은 성도에게는 이 남은 죄성으로 말미암는 내면적 싸움이 항상 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17에서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했다. 우리는 때때로 바울처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절) 하고 신음하며 탄식한다. 그러나 성도는 탄식과 신음 속에서 점점 거룩해져간다. 그것이 성화의 과정이다. 그 뿐만 아니라, 성도는 이미 얻은 의롭다 하심과 영생과 하나님의 자녀 됨과 천국 기업의 보장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과 자유 속에서 의와 선과 사랑을 힘써 행해야 한다. 8장: 성령의 인도하심 로마서 8장은 구원 얻은 성도들의 거룩한 생활 곧 성화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이루어짐을 증거한다. 우리의 성화는 성령의 은혜이다.
1-14절, 성령을 따라 삶 [1-2절]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 [곧 육신을 좇지 않고 성령을 좇아 행하는 자들](전통사본) 13) 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나를](전통본문) 14) 해방하였음이라. ‘이제’는 구원 얻은 후를 가리키며, ‘육신’은 사람의 죄성을 가진 몸을 가리킨다고 본다. 구원 얻은 성도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거하는 자들이요 육신 즉 몸의 죄성을 따라 행하지 않고 성령을 따라 행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형식적으로 ‘주여, 주여’ 하는 자가 아니고 진실히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경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이다. 그런 자들에게는 비록 부족과 연약은 있지만 결코 정죄함이 없다. 그 이유는 그들이 복음 안에서 자유함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은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주시는 영생을 가리킨 것 같다. ‘죄와 사망의 법’은 율법을 가리킬 것이다. 율법은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 하고 우리로 사망에 이르게 한다. 그러나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복음으로 우리에게 의를 주시고 죄와 사망의 율법으로부터 자유케 하셨고 영원한 생명을 은혜로 주셨으므로 성도들에게는 정죄함이 없는 것이다. [3-4절]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성령]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 디카이오마) [의(KJV), 요구(NASB, NIV)]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람은 본성의 죄성과 연약성 때문에 ‘어찌 할 수 없는’ 죄인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와 연약 때문에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으로 이 세상에 보내셨고 그에게 우리의 죄를 담당시키셨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이며 하나님의 복음의 중심적 내용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얻은 자들은 이제 육신의 죄성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사는 자들이 되었다. ‘육신을 좇지 않고 성령을 좇아 행하는 우리’라는 표현은 구원 얻은 자들을 묘사한다. 이들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진다. 율법의 요구는 모든 율법을 항상 지킴으로 얻는 의, 곧 완전한 의(義)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형벌을 받으심으로 이 의를 이루셨고, 하나님께서는 예수께서 이루신 이 의를 예수님 믿는 자들에게 은혜로 주셨다. [5-8절]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성령](KJV, NASB, NIV)을 좇는 자는 영[성령](KJV, NASB, NIV)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성령]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본절의 육신과 영은 단지 사람의 육체와 영을 가리키지 않고 몸의 죄성과 성령을 가리킨다. 구원 얻은 자들에게는 단지 몸과 영의 대립이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중생한 사람의 영이라도 영육이 결합되어 있는 동안에는 몸의 죄성의 영향을 받아 영의 기능들인 생각과 감정과 의지에 있어서 연약과 부족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구원 얻은 성도의 내면적 싸움은 육신의 죄성과 성령의 대립이다. 사람은 몸의 죄성을 따라 살면 그 결과는 죽음이지만, 성령을 따라 몸의 죄악된 욕심을 죽이며 산다면 그 결과는 의와 생명과 평안인 것이다. 그러므로 육신의 생각 즉 몸의 죄성을 따른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않을 뿐 아니라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사람은 심히 죄악되며 무능력해졌다. 그러므로 본성 그대로의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성화는 본성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성령의 도우심으로만 된다. [9절]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성령 안에](KJV, NASB)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성도의 구원은 하나님의 영의 사역이다. 성령께서는 구원 얻은 자 속에 오셔서 거하신다. 이것은 구약성경에 예언된 복이며 신약 성도에게 주신 특권이다. 이렇게 성령께서 그 속에 거하시는 성도는 더 이상 육신 즉 죄성을 가진 몸에 불과한 자가 아니고 성령 안에 있는 자이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영께서 계시지 않는 자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영’과 성령은 동일시된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영이실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시다. 여기에 삼위일체의 신비가 다시 증거된다. 참 성도는 이미 성령을 받은 자이며 성령을 받지 못한 자는 성도가 될 수 없다. 오순절파는 이 점에 대해 바른 생각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본다. [10-11절]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성령께서는] 의를 인하여 산 것( 조에 )[생명](원문, KJV)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하늘에 계시지만 신성(神性)으로 그의 영 곧 성령을 통하여 우리 속에 계신다. 우리의 몸은 죄로 인해 죽은 것과 같고 또 어느 날 죽게 될 것이지만, 우리 속에 계신 성령께서는 생명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자이시다. 성령께서 우리 속에 생명을 시작하시고 유지시키시는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의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성령은 의를 인하여 생명이시니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부활의 하나님이시다. 그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시키셨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성도들 속에 계시다면 성도들은 장차 그 영으로 인해 부활할 것이다. 성도의 부활은 확실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빈 무덤을 남기고 부활하셨듯이, 예수님 믿고 구원 얻은 모든 성도들도 마지막 날 빈 무덤을 남기고 부활할 것이다. 성도들 속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그 일을 보증하신다. 성도들은 반드시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할 것이다. [12-14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성령](KJV, NASB, NIV)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구원 얻은 우리는 죄성을 가진 몸에 빚이 있어 몸의 욕구대로 살아야 할 자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은혜의 하나님께 빚을 진 자들이다. 하나님께서는 값없이 주신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우리의 죄를 씻으셨고 우리를 의롭다고 여기셨고 새 생명을 주셨다. 지옥 갈 죄인을 천국 가게 하신 구원의 은혜는 우리가 그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는 큰 빚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큰 빚은 진 자이다. 성도는 죄성을 가진 몸의 욕구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 이 말씀은 가상적 경고이다. 이 말씀은 중생한 성도가 죄 가운데 살다가 지옥 갈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는 말씀이 사람이 율법을 행할 능력이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듯이,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는다는 말씀은 하나의 경고이지 구원 얻은 성도들이 구원을 잃을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의 뜻은 택한 자를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 구원하시는 것이다(요 6:39). 하나님께서 예정하시고 부르신 모든 사람은 영광에 이를 것이다(롬 8:30). 그러나 성도가 계속 죄를 짓는다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성령으로 몸의 죄악된 행위들을 죽여야 한다. 그것이 성화이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성화를 위해 우리 속에 거주하신다. 우리의 성화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죄성을 극복하는 과정이다. 14절의 ‘하나님의 영’이라는 말은 13절의 ‘영’이라는 말이 성령을 가리킴을 보인다. 성도는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이다. 성도의 거룩한 생활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화를 위해 항상 성령의 인도하심을 사모하며 의지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얻은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그들 속에 남아 있는 몸의 죄성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행하는 자들이다.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 안에 영원히 거하시며 그들을 감동하시고 지도하시고 거룩한 생활을 하게 도우신다. 성화는 성령의 은혜이다. 둘째로, 이렇게 구원 얻은 성도들은 결코 정죄함이 없다 (1절). 참으로 중생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몸의 죄성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의와 선을 행하기를 힘쓸 것이며, 비록 그들에게 실수와 부족이 없지 않을지라도, 결코 정죄함이 없을 것이다. 셋째로, 성화(聖化)는 성도가 성령의 도우심으로 몸의 죄성을 죽임으로써 조금씩 이루어진다. 성화는 단지 사람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은혜이다. 갈라디아서 5:16,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물론, 우리도 힘써야 한다. 15-39절, 양자(養子) 됨과 영화(榮化) [15-17절]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養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 아람어 )[아버지]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우리를 인도하시는 성령께서는 ‘양자(養子)의 영’ 곧 우리를 양자로 삼으시는 영이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친자(親子)이시고 예수님 믿는 우리들은 하나님의 양자(養子)들이다.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에 근거하여 우리를 양자로 삼으셨고 우리 속에 하나님을 ‘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마음을 일으키셨다. 우리의 영의 이런 진심의 고백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된 증거이다. 또 자녀들이 부모의 기업을 상속받듯이,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기업 곧 천국을 상속받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천국의 상속자로 묘사되었고 우리도 그와 함께 천국을 상속받을 자로 묘사되었다. 영광의 천국은 성도들을 위해 예비되었다. 마태복음 25:34, “그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통해 영광에 들어가셨듯이, 우리도 고난을 회피하지 말아야 한다. 예수께서 많은 고난을 받으셨듯이 우리도 세상에서 많은 고난을 받을 것이며,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영광을 받으셨듯이 우리도 고난 받은 후에 영광을 받을 것이다. 성도들의 현재의 고난은 장차 받을 영광에 이르는 과정이다. [18-21절]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장차 성도들에게 나타날 영광은 천국의 영광이며 부활과 영생의 영광이다. 요한계시록 21:10-11,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 고린도전서 15:42-43, “죽은 자들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빌립보서 3:20-21,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성도들이 장차 누릴 천국과 영생의 영광은 그들이 현재 당하는 고난과 비교할 수 없이 크고 아름답고 영원할 것이다. 피조 세계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날이 오기를 고대한다. ‘피조물들’은 동식물의 세계를 가리키며, ‘하나님의 아들들’은 영광스런 부활체를 입은 성도들, 곧 영화(榮化)된 성도들을 가리킬 것이다. 지금은 동물들도 식물들도 그 영광의 날을 기다리며 허무한 데 굴복하고 썩어짐에 종노릇하고 있지만, 그 날이 오면 모든 피조물도 하나님의 자녀들처럼 영광의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다. 그 날에는 피조물들에게도 죽음이나 질병이나 썩는 것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22-25절]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養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救贖)을 기다리느니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는 성령의 역사로 거듭난 자들을 가리킨다. 모든 피조물과 거듭난 성도들은 함께 탄식하며 성도들의 몸의 구속(救贖) 즉 영광스런 부활의 몸을 기다리며 사모한다. 우리는 다 죄와 죽음과 불행이 영원히 사라질 그 날을 사모한다. 중생(重生)과 칭의(稱義)로 시작된 구원은 성화(聖化)로 진행되며 마침내 영화(榮化)로 완성될 것이다.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은 다 거듭하고 의롭다 하심을 얻고 거룩해지고 영광에 이를 것이다. 우리의 법적인 구원 곧 칭의(稱義)와 양자(養子)는 영화(榮化)의 단계에서야 죄로부터의 완전한 구원, 즉 실제로 죄와 죄성이 전혀 없는 구원이 될 것이다. 지금은 죄와의 싸움, 죄성과의 싸움이 있지만, 그때에는 그런 싸움이 더 이상 없을 것이다. 그 영화의 단계는 아직 미래에 있다. 우리는 그것을 소망한다. 성도는 법적으로 이미 구원을 받았으나 장차 완전한 구원을 누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영광의 구원을 참음으로 기다려야 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결코 실패하지 않는 완전한 구원이며 그 영광은 확실하기 때문에, 우리는 고난 중에서도 낙심치 말고 그 영화의 단계를 참고 기다려야 한다. [26-27절]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성령께서는 성도의 연약함을 도우신다.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할 때 하나님께 무엇을, 어떻게 기도할지 알지 못하지만, 이때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서 탄식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 이것은 성령의 도우심이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실패치 않고, 우리의 영적인 생활은 쇠잔해지지 않는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며,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생각을 아시며,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그 기도를 잘 들으실 것이다. [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우리가 알거니와’라는 말은 이 진리가 확실함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회개시키시고 믿게 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성도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모든 것’은 성도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가리킨다. 그것 안에는 낙심할 만한 일도 있고 실패한 일도 있고, 심지어 실수하고 범죄한 일도 있을 것이나, 그것들조차도 선을 이루는 데 사용된다. ‘선’은 일차적으로 성화(聖化)를 가리킨다. 성도의 일생은 영적 훈련과 성장의 과정, 즉 성화의 과정이다. [29절]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미리 아신 자들’이라는 말은 구별하여 사랑하신 자들이라는 뜻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회개와 믿음을 미리 아셨기 때문에 우리를 택하셨다는 뜻이라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선택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주권적 행위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선택이 아닐 것이다. 주께서는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자들 곧 선택된 자들만 그에게 나아와 그를 믿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요 6:37, 44, 65).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신 자들을 예정하셨다. 그의 예정의 목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목표이다. 사람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나 범죄함으로 그것을 상실하였고 이제 구원으로 그것을 회복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은 죄 없는 거룩한 형상이다. 또 본문은 예수께서 많은 형제들 중에 맏아들이 되셨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감히 예수님의 동생들이라고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30절]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과거시제). 사람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된다.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은 장차 영화롭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영화롭게 하실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영화롭게 하셨다’는 과거시제가 사용되었다. 이것은 확실한 미래의 사건을 나타내는 표현법이다. 성도들을 영화롭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미리 작정하신 바이며 지금 섭리하시는 바이다. 영광은 하나님의 구원의 목표이다. 이 일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고 이제 그를 믿는 자들이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또 이 구원의 완성을 위해 성령께서 그들 안에 오셔서 도우시는 것이다. [31-32절]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이 일’은 구원의 일, 특히 영화를 가리킨다. 세상에서도 최고 권력자가 어떤 이를 위하면 그를 대적할 자가 없을 것이다. 우주의 최고 권력자이시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위하시는 자를 대적할 자가 누구이겠는가? 사람의 최대의 대적자는 사탄인데 심지어 사탄도 욥기 1장에 증거한 대로 하나님의 허락하신 범위 안에서만 활동할 수 있다. 사탄도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성도들을 대적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신 증거는 그의 아들을 우리를 위해 죽게 하신 일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이었다(요 3:16; 롬 5:8).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선물인 아들을 주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하다면, 그 외의 것을 무엇이든지 주시지 않겠는가? [33-34절]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의롭다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하나님이시도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본문은 칭의가 과거의 사건이지만, 그 효력이 지금도 있음을 증거한다.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들을 송사하거나 정죄할 자는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죄 때문에 죽으셨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속죄를 확증하셨고 승천하셔서 지금 하나님 오른편에서 그들을 위해 간구하시기 때문이다. 그의 간구하심은 그가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완전한 속죄와 의(義)를 계속 적용하시는 행위이다. [35-37절]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赤身)[헐벗음]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성도들의 구원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너무 크고 확실하기 때문에 아무도 그 사랑의 줄을 끊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 사랑에 근거한 성도들의 구원은 영원한 보장을 가진다. 성도들의 생활은 고난의 생활이지만, 성도들은 어떤 고난의 현실에서도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않을 수 있다. 왜냐하면 환난이나 곤고나 괴롭힘이나 기근이나 헐벗음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그 어떤 것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의 현실이 어렵고 힘들지라도,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승리할 수 있다. 성도들의 구원과 승리는 완전하고 확실하다. 성도들은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긴다. 하나님의 구원은 실패치 않고 끝까지 보존되고 성도들은 성화(聖化)를 이루고 마침내 영광에 이를 것이다. [38-39절]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여기에 성도들의 넉넉한 승리를 단언한 이유가 있다. 그들은 영광의 구원에 이를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우리를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미 하나님의 선택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와 성령의 인치심에서 확증된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미 성도들에게 부어졌고 그 사랑에서 끊을 자는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구원의 완성인 영화는 확실하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어떤 고난의 현실에서도 낙심치 않고 담대히 행할 수 있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주 예수님 믿고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양자(養子)가 되었다. 15-16절,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養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둘째로, 성도들이 얻은 구원은 장차 영광에 이르는 구원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천국을 기업으로 받는 구원이다. 예수께서 고난을 통해 영광을 얻으셨듯이, 예수님 믿는 성도들은 비록 이 세상 사는 동안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하지만 장차 영광의 부활의 몸을 얻고 영광의 천국에서 복된 영생을 누릴 것이다. 그것은 모든 피조물들도 고대하는 바이다. 그 영광은 현재 우리가 당하는 고난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소망 중에 그 영광을 참고 기다려야 한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실 구원의 완성 곧 영화(榮化)는 확실하다. 우리 안에 오신 성령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모든 일들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며 성화를 이룬다.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자는 아무도 없다. 예수님 믿고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에게는 영화(榮化)가 확실히 보장된다. 성도들은 넉넉히 이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소망과 확신을 가지고 성령을 따라 거룩한 생활을 힘써야 한다. 9장: 은혜로 택하심 로마서 9장부터 11장까지에서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 문제를 다루면서 하나님의 예정에 대해 증거했다. 9장은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선택에 근거하였고 이 선택이 사람의 행위에 근거하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적 긍휼과 은혜에 근거하였음을 증거했다. [1-3절]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사도 바울은 동족 이스라엘의 구원을 간절히 사모하였다. 사람이 한 부모에게서 난 형제자매들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친척들이나 같은 민족에 대해 더 친근함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특히 먼저 구원 얻은 자들이 구원 얻지 못한 가족들과 친척들과 동족들의 구원에 대해 매우 큰 안타까움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4-5절]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養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온갖 특권을 누린 특별한 민족이었다. 그들은 다른 민족들과 달리 하나님의 자녀로 불리었고 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영광의 표들과 언약들과 율법과, 성막과 성전 예배 즉 제사 제도와, 약속들이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육신적으로는 그들에게서 나셨다. 그러나 그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많은 은혜를 입었던 민족이지만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의 보내신 메시아를 죽였고 또 예수님 믿는 자들을 미워하고 핍박하고 죽이고 있었다. [6-9절] 또한[그러나](NASB)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라. 명년 이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선택의 진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다 그의 자손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으로 선택된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그의 자손으로 여기심을 받았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아브라함의 여종 하갈에게서 난 이스마엘과 그 자손들이나,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죽은 후 아브라함의 후처 그두라에게서 난 여섯 명의 아들들과 그 자손들은(창 25:1-6) 아브라함의 언약의 복을 받은 자손으로 간주되지 않았고 오직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자손들만 언약의 자손들로 간주되었다. [10-13절]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하나님의 선택의 진리는 또한 이삭의 아내 리브가가 쌍둥이 아들, 에서와 야곱을 낳았을 때 더 분명하게 드러났다. 그들이 아직 나지도 않았고 선과 악을 행하지도 않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했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 됨이 육신의 혈통이나 그들의 선한 행위에 근거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의 선택으로 되는 것을 증거한다. 사람의 행위의 의는 더러운 누더기 옷과 같다(사 64:6). 사람의 구원은 그의 선행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 즉 그의 은혜의 선택에 있다(딤후 1:9). [14-16절]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출 33:19)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하나님께서 주권자이시므로 구원하실 자를 임의로 선택하신다는 사실은 결코 부당하거나 불의한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은 그가 모세에게 하신 말씀에서도 확증된다. 구원은 사람의 소원이나 노력으로가 아니고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 [17-18절]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출 9:16)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도 하시고 강퍅케도 하신다. 구원은 사람의 손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손에 있다. 구원의 능력이 하나님께 있다. 구원은 사람들 속에서 나오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 하나님께서는 구원하고자 하시는 자들을 구원하신다. [19-24절]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말대답]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토기장이가 진흙 덩어리로 귀한 그릇이나 천한 그릇을 만들 권한이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구원에 대해 결정할 권한이 있으시다. 실상, 악인의 멸망은 그 자신의 죄와 직접 관계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들을 멸망시키시는 것이 아니다. 악인들은 스스로 악을 행했고,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악인들을 오래 참으시고 관용하셨다. 또 구원 얻는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로 얻은 것뿐이다. 사람의 죄악된 본성으로 말한다면, 우리나 저들이나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긍휼로 우리에게 회개와 믿음, 죄사함과 의를 주셨다. [25-29절]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호 2:23).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호 1:10) 함과 같으니라.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사 10:22)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이는 그가 그 일을 이루시고 의로 그것을 속히 이루실 것임이라. 이는 주께서 땅 위에서 속히 이루실 것임이니라](전통본문) 15) 하셨느니라.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시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사 1:9)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과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오직 택하신 자들을 구원하실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긍휼로 남은 자들이 있었듯이,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은혜로 남은 자들이 있으며 오직 그들만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들이다. [30-33절]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의의](전통본문) 16)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율법의](전통본문) 18)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실패의 원인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가 아니고 율법의 행위로써 하나님의 의를 이루려 했기 때문이었다. 사람은 행위로써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 행위로는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며 멸망할 자들이다. 사람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음으로써만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시온에 예수 그리스도를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으로 두셨다. 이사야의 예언대로, 율법 행위를 의지하는 자는 그 돌에 걸려 넘어질 것이나, 그를 믿고 의지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사도 바울은 비록 그가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그의 형제와 골육 친척의 구원을 원하였다. 3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우리는 주 예수님 믿지 않고 지옥 갈 우리의 가족들과 친척들과 동족들을 향해 간절함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그들을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해야 한다. 둘째로, 사람의 구원은 원하는 자로 말미암지 않고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지도 않고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 (16절). 하나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신다(18절). 죄인들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며 하나님의 주권적 긍휼의 선택으로 말미암는다. 만세 전에 하나님께서 은혜로 택하신 자들은 다 예수님 믿고 구원 얻을 것이다. 셋째로, 이스라엘 백성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 얻음을 거절하고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 했다가 실패하였다. 30-32절,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의의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율법의 행위에 의지함이라.” 죄인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10장: 신앙고백 [1절]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에 관심을 두었다. 그들은 당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고 하나님의 복음을 거절하고 있었다. 바울은 그들의 구원을 마음에 소원하며 하나님께 간구하였다. [2-3절]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의에 대한 바른 지식이 없었으나 종교적 열심은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의(義)가 참으로 보잘것없음을 알지 못하고 단지 종교적 행위의 열심으로 의(義)를 이룰 줄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의 지식 없는 열심은 종교적 형식주의나 위선에 떨어지기 쉬울 뿐 참된 의를 이루지 못하였다. 두 종류의 의(義)가 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의요 다른 하나는 사람이 자기의 행위로 이루는 의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실패의 이유는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의 의를 세우려 했기 때문이었다. 사람의 행위의 의는 심히 불완전하다. 이사야 64:6, “대저 우리는 다 부정(不淨)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오늘날도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를 모르고 자기의 행위의 의를 이루려 하고 그것을 의지하려 할 때 실패할 수밖에 없다. [4절]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의를 이루셨다. 그는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셨다’(요 19:30)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그의 대속 사역을 가리키며 그 내용은 율법의 요구를 이룬 완전한 의이다. 예수께서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해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 고린도전서 1:30,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救贖)함이 되셨으니.” 의가 없었던 죄인들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었다. [5-8절]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 누가 음부[무덤]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는 율법을 다 행함으로 이루는 의이다. 신명기 6:23, “우리가 그 명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신명기 5:33,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삶을 얻고 복을 얻어서 너희의 얻은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그러나 사람은 율법을 행함으로 의를 이루지 못한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의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한 바 되셨다가 삼일 만에 부활하시고 의를 이루셨다. 로마서 3:21-24,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로마서 4: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약 성도들에게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셨다. [9-13절]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마음으로 믿어져](원문)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입으로 고백되어](원문) 구원에 이르느니라.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구원을 얻는 믿음의 기본적인 내용은, 예수께서 주님이신 것과 그가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자는 그의 기적들, 속죄, 재림 등을 믿을 수 있다. 사람이 마음으로 주를 믿고 입으로 고백할 때 의롭다 하심과 구원을 얻는다. 구원에 있어서 신앙고백은 필수적이다. 사람의 믿음과 신앙고백은 그리스도인의 자발적 행위이지만,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이루어지는 것이다(요 6:37, 44). 또 구원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다.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11절),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12절),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13절)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을 위해 참된 믿음과 신앙고백이 중요하다. [14-17절]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하나님의](전통사본) 18)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선택된 자들은 자동적으로 구원 얻는 것이 아니고 전도를 통하여 믿음으로 얻는다. 믿음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고 전도의 말씀을 통해 생기며 전도는 하나님께서 전도자를 파송하심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는 택자들을 전도라는 수단을 통해 구원하신다. 전도와 믿음은 하나님의 예정을 이루는 정상적이고 필수적인 방법이다. 그러므로 전도는 교회의 최대의 사명이다. 고린도전서 1: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교회는 전도자를 부르고 훈련시키고 세우고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곳에는 어디든지 파송해야 한다. 전도자의 발걸음은 귀하고 아름답다. 또 교회는 파송된 전도자를 기도와 물질로 후원해야 한다. 전도의 필요성은 말씀의 필요성이다. 전도는 말씀 전파이다. 믿음은 복음의 말씀의 바른 지식을 통해 생기기 때문이다. [18-21절]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그렇지 아니하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뇨? 먼저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 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하였고 또한 이사야가 매우 담대하여 이르되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하였고 이스라엘을 대하여 가라사대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셨느니라. 바울은 신명기와 이사야서를 인용하였다. 신명기 32:21,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자로 나의 질투를 일으키며 그들의 허무한 것으로 나의 진노를 격발하였으니 나도 백성이 되지 아니한 자로 그들의 시기가 나게 하며 우준한 민족으로 그들의 분노를 격발하리로다.” 이사야 65:1,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게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하나님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먼저 전파되었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돌아오기를 오랫동안 기다리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그 말씀에 순종치 않고 그 말씀을 거슬러 행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고 그 죄를 뉘우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던 이방인들을 불러 옛 백성 이스라엘로 하여금 시기 나게 하실 것이다.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의 의를 이루셨다. 유대인들은 행위의 의를 고집하다가 실패했으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을 믿음으로 의를 얻었다. 이것은 구약성경에 예언된 바이었다. 예레미야 23:5,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다니엘 9:24,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우리는 믿음으로 의를 얻었고 이제 그 의 안에서 의를 행해야 한다. 둘째로, 사람은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마음으로 그의 죽음과 부활을 믿으면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얻는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그 가족들과 함께 구원을 얻는다(행 16:31). 에베소서 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셋째로, 사람은 전도자의 전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는다. 보냄을 받아야 전할 수 있고 전하는 자가 있어야 복음을 들을 수 있고 복음을 들어야 복음을 믿을 수 있고 믿어야 구원 얻을 수 있다(14, 15절). 17절,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마가복음 16:15-16,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힘써 전도해야 한다. 11장: 하나님의 구원 계획 [1-6절]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저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송사하되 주여, 저희가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7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 [그러나 만일 행위에서 난 것이면 더 이상 은혜가 아니니 그렇지 않으면 행위가 더 이상 행위가 아니리라](KJV, NKJV). 19)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셨다. 그들 중에 남은 자들이 있다는 사실이 그 증거다. 예수님의 처음 제자들은 유대인들이었고 바울 자신도 그러했다. 옛날에 선지자 엘리야의 시대는 배교의 시대이었다. 엘리야는 하나님께 자기 혼자만 남았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7,000명을 남겨두셨다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오늘날도 교회들이 배교한 시대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남은 종들과 교회들과 성도들이 있을 것이다. [7-12절] 그런즉 어떠하뇨?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졌느니라.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날까지 저희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신 29:4; 사 29:10). 또 다윗이 가로되 저희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옵시고 저희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저희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하였느니라(시 69:22-23).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 나게 함이니라. 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이리요. 이스라엘 백성 중 소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얻었으나, 남은 대다수는 완악하여져서 그를 거절하고 그를 믿지 않고 있었다. 이런 현상은 성경에 예언된 바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의 실패는 이방인들의 구원이 되었고 이스라엘 백성이 시기 나게 되었다.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들의 풍성한 구원이 되었다면, 장차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온 세상이 얼마나 더 충만한 구원의 복을 누리는 일이 되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실패까지도 사용하셔서 선을 이루신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의 회복을 암시했다. [13-16절]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이는 곧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케 하여 저희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저희를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서 이방인들을 구원함으로 자기 골육 이스라엘 사람들로 시기케 하여 그들 중 얼마라도 구원하기를 소원했다.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은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과 같을 것이다. 제사하는 곡식 가루의 처음 한 줌이 거룩하면 그 전체가 거룩하며, 나무의 뿌리가 거룩하면 그 가지들도 거룩하다. 이 비유는 이스라엘의 조상들과 그 후손들의 관계에 적용될 수 있고 구약교회와 신약교회의 관계에도 적용될 수 있다. 신약교회의 이방인 신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약교회인 이스라엘 백성의 거룩함에 참여하였다. [17-18절] 또한 가지 얼마가 꺾여졌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 자긍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참감람나무 같은 이스라엘 백성의 불신앙 때문에 가지들 중 다수가 꺾이었고 그 대신 돌감람나무 같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고 그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들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방인 신자들은 원나무 같은 유대인들을 향해 자랑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 [19-24절]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이운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仁慈)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仁慈)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저희도 믿지 아니하는 데 거하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얻으리니 이는 저희를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스려[거슬러]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은즉 원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얻으랴. 이방인 신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원가지들인 이스라엘 사람들도 아끼지 않고 꺾어버리셨다면 접붙임 받은 가지들인 이방인 신자들도 꺾어버리실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엄위하심을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하는 자는 하나님의 인자(仁慈) 안에 거하지만, 불신앙과 죄 가운데 행하는 자는 하나님의 엄위하신 처분이 있을 것이다. 또 이스라엘 백성은 지금 불신앙 때문에 버림을 받았지만, 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다. 구원하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다. 돌감람나무의 가지들도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거든 하물며 원가지들은 얼마나 더 잘 접붙임을 받겠는가? [25-26a절]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사도 바울이 말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비밀은 이방인들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되지만 마침내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온 이스라엘의 구원’은 이스라엘 백성의 민족적, 국가적 대회심을 가리키는 것 같다. 이스라엘 민족 전체는 아닐지라도, 이스라엘 백성의 선택된 충만한 수의 사람들이 회개하며 예수님을 믿게 될 것을 암시한다. 만일 그렇지 않고 그 말이 단순히 이방인들과 이스라엘 백성의 선택된 총수를 의미한다면 구태여 ‘비밀’이라고 표현할 것이 없을 것이다. 또한 이방인들의 충만한 수와 이스라엘 백성의 ‘더러’가 대조되고, 또 이스라엘 백성의 ‘더러’와 ‘온’ 이스라엘이 대조되는 것을 생각할 때도 ‘온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백성의 민족적, 국가적 회개를 암시한다고 본다. [26b-29절]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내가 저희 죄를 없이 할 때에 저희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사 59:20-21). 복음으로 하면 저희가 너희를 인하여 원수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을 인하여 사랑을 입은 자라.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민족적 회복은 이사야서에 예언된 바이기도 하다. 이스라엘 백성이 현재 복음을 거절함으로써 하나님의 원수가 되어 있지만, 하나님의 선택하심으로 말한다면 그들은 이제까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들로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입었었다. 이런 하나님의 선택의 사랑은 폐해진 것이 아니라고 보인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회복시키실 날이 올 수 있고 올 것이다. [30-32절] 너희가 전에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에 순종치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치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저희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긍휼로 말미암는다. 이방인들은 전에는 불순종하였으나 이스라엘 백성의 불순종으로 이제 하나님의 긍휼을 입었고, 이와 비슷하게 유대인들은 지금 불순종하고 있으나 훗날에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긍휼이 임할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이나 이스라엘 백성을 불순종 가운데 버려두심은 그들 모두에게 긍휼을 베푸시기 위함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33-36절]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 에이스 아우톤 )[주를 위함]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사도 바울은 성령의 감동으로 구원의 복음 진리를 다 해설한 후에 이제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깊고 부요하심과 그의 판단과 행하심의 깊고 측량할 수 없음을 고백한다. 피조물인 인생이 어찌 창조자를 다 이해하며 다 설명할 수 있겠는가? 실상 억만 분지 일도 못할 것이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서 계시하여 주신 만큼 하나님과 그의 구원의 일에 대하여 알며 이해하며 전하며 설명할 뿐이다. 하나님의 계시하신 그 내용은 오늘날 신구약 66권의 성경책에 기록되어 있다. 사도 바울은 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주를 위함]이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의 진리를 보인다. 세상의 모든 일은 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오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으며 마침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다. 그것은 세상의 일반적인 모든 일들에 있어서도 그러하고 특히 사람들의 구원의 일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일들을 계획하시고 처리하시며 특히 사람들의 구원의 일에 있어서 그러하시다. 이것은 웅대한 세계적, 우주적 진리이다.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 은혜로 택하신 자들을 남겨두셨다. 그는 엘리야 때에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7천명을 남겨두셨다. 이스라엘 백성의 실패의 역사도 결국 하나님께서 택하신 이방인들의 구원이 되었다. 오늘날 배교의 시대에도 하나님께서 은혜로 택하신 자들이 있음이 확실하다. 교회들은 배교와 타협과 혼란 속에 있지만, 이런 교계의 풍조에 물들지 않고 순수한 옛신앙을 소유하고 옛길을 붙든 자들이 세계 곳곳에 남아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믿고 기대하며 또 우리 자신이 그런 자들이 되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모든 인류를 향하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깨달아야 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고 구원의 복음을 거절함으로써 복음은 이방 세계로 전파되었고 많은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었다. 돌감람나무의 가지들 같은 이방인들이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비밀한 구원의 계획이 증거되었다. 이방인들의 충만한 수가 들어올 때까지 이스라엘 백성의 더러는 완악할 것이나, 마침내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을 것이다(25-26절). 그것은 이스라엘의 민족적 회심을 암시하며, 여기에 온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있다. 셋째로,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에서 비롯된다. 30-32절, “너희가 전에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치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치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저희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36절,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우리가 구원 얻은 것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의 작정과 섭리로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만 믿고 의지하고 그 긍휼 안에서 의와 선을 행해야 한다. 12장: 그리스도인의 생활 1-2절, 헌신(獻身) [1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로기켄 )[합당한] 예배니라. 사도 바울은 구원 얻은 자의 생활에 대해 교훈하면서 첫째로 헌신에 대해 말한다. 헌신(獻身)은 하나님께 우리의 몸을 드리는 것을 말한다. 몸은 우리의 모든 것을 포함한다. 그것은 우리의 손과 발, 우리의 재능과 목소리와 힘, 우리의 시간과 돈, 심지어 우리의 생명까지 포함한다. 이런 것들은 다 우리의 몸과 같이 움직인다. 몸이 없으면 이런 것들도 없다. 몸을 드리는 것은 이 모든 것을 드리는 것이다. 헌신의 이유는 무엇인가?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복음은 하나님의 크신 자비와 사랑의 소식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자비와 사랑으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 우리의 모든 죄와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을 얻었다. 로마서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은혜의 선물]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몸을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크신 자비와 사랑과 은혜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6:19-20,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린도후서 5:14-15,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사도 바울은 헌신을 ‘산 제사’라고 표현하였다. 그것은 구약시대의 제사와 대조되는 말이다. 구약시대에는 짐승을 죽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자신을 십자가에 대속 제물로 주신 오늘날에는 우리가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필요할 뿐이다. 구약시대의 번제는 일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상징했으나, 또한 성도들의 온전한 헌신도 상징했다고 본다. 우리는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야 한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헌신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삶이어야 한다. 거룩한 삶이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죄를 짓지 않는 삶이다. 이런 헌신 곧 거룩한 삶을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드리는 ‘합당한 예배’라고 불렀다. 어떤 형식의 예배보다도, 하나님 앞에서의 헌신과 거룩한 삶 자체가 하나님께 드리는 가장 합당한 예배라는 뜻이다. [2절]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 누스 nou'”)[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사도 바울은 헌신자가 행해야 할 바를 몇 가지 교훈한다. 첫째로, 우리는 이 세상을 본받지 말아야 한다. 이 세상은 언제나 불경건하고 악하고 음란한 세상이다. 마태복음 12:3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마가복음 8:38,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이며 또한 세상으로부터의 구원이다. 세상은 악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오순절에 모였던 경건한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고 말했다(행 2:40). 세상 사람들의 삶의 목적과 가치관과 사고방식은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와 너무 거리가 멀다. 그러므로 성도가 하나님께 헌신하려면 이 세상을 본받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세상을 본받는다면, 우리는 결코 경건하고 거룩하고 선하게 살 수 없고 하나님께 헌신할 수 없다. 둘째로, 우리는 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야 한다. 구원은 경건하고 거룩하고 선한 방향으로의 생각의 변화이다. 그것이 중생이다. 또 ‘변화를 받으라’는 원어( 메타모르푸스데 )는 현재 명령형으로 우리의 생각의 변화가 한번에 끝나는 것이 아니고 계속 반복해서 일어나야 함을 보인다. 성도의 영적 성장 곧 성화는 생각의 성숙함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생각이 날마다 새로워져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방향으로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 에베소서 4:22-23도, “너희는 유혹의[속이는]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너희의 생각의 영으로] 새롭게 되어[계속 새롭게 되어]”라고 말한다. ‘새롭게 되어’라는 원어(현재부정사)도 계속성을 나타낸다. 우리의 구원은 생각의 변화에서 시작되고 그 생각의 변화는 한번으로 끝나지 않고 성숙해지는 것이다. 성화(聖化)는 깨달음의 성숙 과정이다. 사람의 연약성은 잘 변하지 않지만, 성도의 생각과 깨달음에는 변화가 있다. 생각의 성숙은 평생 진행될 것이다. 구원 얻기 전 우리의 생각은 이 세상 중심적이고 불경건하고 부도덕하고 정욕적이었으나, 구원 얻은 우리는 이제 우리의 생각이 새로워져서 성경에 교훈된 대로 하나님과 천국과 영생을 생각하고 경건하고 도덕적인 것만 생각하는 자들이 되었고 또 그러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라고 표현하였다. 하나님의 뜻은 그 내용이 선하며 그것을 믿고 행한 결과도 선하다. 미가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仁慈)[자비]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또 주권적 섭리자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뻐하시는 일들을 행하신다. 시편 115:3,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빈번히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뜻과 달라 우리가 이해할 수 없다. 이사야 55:8-9,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을 분별해야 하고 비록 그 뜻을 다 이해하지 못할 때에도 그 뜻에 순종해야 한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알아야 한다. 사도행전 20:27에 보면, 사도 바울은 가는 곳마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모든 뜻을 거리낌 없이 다 전하였다고 증거하였다. 하나님의 뜻은 성경에 밝히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다. 디모데후서 3:15-17,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에게 구원과 온전함을 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부분적으로 아는 것으로 만족치 말고 성경 전체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뜻을 알고 그 뜻에 순종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도의 생활에서 성경 읽기와 성경 연구는 필수적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하여 신구약 66권을 열심히 읽고 듣고 연구해야 한다. 또 우리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에 순종해야 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 헌신함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에 순종하는 것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께 헌신(獻身)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손과 발을, 우리의 재능과 목소리와 힘을, 우리의 시간과 돈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드리며, 우리의 목숨까지도 하나님의 일을 위해 바쳐야 한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자기 몸을 십자가에 내어주셨듯이 우리는 우리 몸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자비와 사랑에 보답하여 헌신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희생하셨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신을 희생하셨다. 그는 핏값으로 우리를 사셨다(행 20:28; 고전 6:20). 그의 죽음은 우리의 의가 되었고 그를 믿는 우리는 죄와 죽음과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을 얻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에 보답하여 하나님께 헌신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생각을 날마다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해야 한다. 우리는 이 악하고 음란한 세상을 본받지 말아야 한다. 특히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을 본받지 말아야 한다. 또 우리는 계속 생각의 변화, 생각의 성숙함을 가져야 한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해야 하고 그 뜻에 순종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성경 곧 신구약 66권의 책에 계시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말씀을 귀히 여기며 주야로 읽고 듣고 묵상하고 연구하며 그 모든 말씀을 다 믿고 그 모든 말씀을 다 소망하고 그 모든 말씀을 힘써 행해야 한다. 헌신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3-13절, 그리스도인의 생활 [3-5절]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소프로네인 )[바르게, 건전하게] 생각하라.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우리는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바르고 건전하게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다. 몸에 여러 지체가 있듯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 여러 직분이 있다. 각 지체는 자기 위치를 잘 지켜야 한다. 눈은 눈의 역할을, 입은 입의 역할을, 손이나 발은 손이나 발의 역할을 잘할 때 몸은 평안할 것이다. 이와 같이, 교회도 각 사람이 자기 위치를 지키며 충성할 때 평안할 것이다. 고린도전서 12:14-27, “몸은 한 지체뿐 아니요 여럿이니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뇨?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뇨?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 이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고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요구할 것이 없으니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하사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6-8절]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勸慰)하는 자면 권위(勸慰)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 하플로테스 )[단순함(KJV), 너그러움(NASB, NIV)]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은사는 각각 다르며 각 사람은 자기 직분에 충실해야 한다. 예언하는 자는 믿음의 분수대로 해야 한다. 오늘날에 설교자는 성경을 연구하고 묵상하여 거기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충실히 전해야 한다. 섬기는 자는 섬기는 일로 해야 한다. 교회 직분자들은 섬기는 자들이다. 가르치는 자는 가르치는 일에, 권위(勸慰)하는 즉 권면하고 위로하는 자는 권위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구제하는 자는 단순함과 너그러움으로 해야 한다.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해야 하고,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해야 한다. [9-10절]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선한 것을 붙들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우리는 서로 사랑하며 악을 미워하고 선한 일에 힘써야 한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다. 요한복음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고린도전서 13:6,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거짓된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우리는 거짓 없는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또 우리는 선하게 살아야 한다. 악은 남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며 선은 남에게 유익을 끼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선하게 사는 것이다. 아모스 5:15,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미가 6:8,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仁慈) [자비]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우리는 서로 사랑하며 우애하고 사이좋게 지내야 하고 서로 좋은 친구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상대방에게 약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우리를 위해 피 흘려 대속하셨기 때문에 서로 사랑해야 한다. 또 우리는 서로를 먼저 존경해야 하고 또 서로에게 복종해야 한다. 에베소서 5:2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11절]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또 우리는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아야 하고 또 열심을 품고 주를 섬겨야 한다. 우리는 부지런하게 살아야 한다. 잠언 6:6,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데살로니가후서 3:10-12,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규모 없이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만 만드는 자들이 있다 하니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종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 에베소서 5:16, “세월을 아끼라[시간을 최선용하라]. 때가 악하니라.” 직장 다니는 자나 사업하는 자는 자기의 일에, 학생들은 학교 공부에, 주부들은 음식 만드는 일이나 집안 살림의 일에 충실해야 한다. 우리는 특히 열심을 품고 주를 섬겨야 한다. 우리는 썩는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썩지 않는 양식을 위해 일해야 한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일이다(요 6:27-29). 우리는 성경 읽고 기도하는 일에 힘써야 하며, 또 지교회에 속하여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모임들에 빠지지 않고 잘 참석하고 전도와 봉사의 일들에도 참여하고 힘써야 한다. 히브리서 10:24-25,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사도행전 2:46,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12절]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우리는 소망 중에 즐거워해야 한다. 성도들의 소망은 주 예수님의 재림과 죽은 자들의 부활과 천국과 영생이다. 이것들은 성도의 기쁨과 즐거움의 이유이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소망하고 그 소망이 확실하기 때문에 기뻐할 수 있다. 또 우리는 환난 중에 참아야 한다. 우리는 세상에서 질병들, 경제적 곤란, 자연적 재난, 핍박 등 여러 가지 환난들을 당한다. 그러나 우리는 환난 중에 참아야 한다. 왜냐하면 주권자 하나님께서 그 환난을 주셨고, 하나님께서 그 환난 중에서도 우리를 지키실 것이 확실하고, 또 하나님께서 그 환난을 통해 우리의 인격을 단련시키시고 우리에게 영적 유익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도에 항상 힘써야 한다. 우리는 평안할 때 하나님께 찬송하지만, 환난 날에 기도해야 한다. 야고보서 5:13-16,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기도는 성도가 하나님과 교제하는 방법이며 하나님의 능력을 공급받는 길이다. 우리가 기도에 항상 힘쓰면 어떤 어려운 일이 와도 낙심치 않고 승리의 삶을 살 수 있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다. [13절] 성도의 쓸 것을 공급하며[성도의 필요한 것들을 함께 나누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우리는 성도의 필요한 것을 함께 나누며 손님 대접하기를 힘써야 한다. 구제는 하나님의 뜻이다. 신명기 15:7-10,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강퍅히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 요구하는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 . . 너는 반드시 그에게 구제할 것이요, 구제할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범사와 네 손으로 하는 바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우리는 어려운 교우나 이웃, 또 손님에 대해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고 후하게 대접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교회의 장로들의 자격 요건에 대해 가르치면서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을 들었다(딤전 3:2).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의 분량을 따라 바르고 건전하게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지체임을 기억하고 결코 자기 위치를 벗어난 생각을 하지 말고 자기 위치에 맞게, 겸손하게, 바르고 건전한 생각을 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 이것은 주께서 주신 새 계명이기도 하다. 사랑은 거짓이 없어야 하고 선한 행위로 나타나야 한다. 우리는 서로 우애하고 서로를 먼저 존경하고 또 피차 복종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부지런하게 살고 게으르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특히 열심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우리는 세상 일에도 게으르지 말아야 하고 각자 자기의 일에 충실해야 하지만, 특히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날마다 성경 읽고 기도하고 계명 순종하기를 힘써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아야 한다. 우리는 주 예수님의 재림과 복된 부활과 천국과 영생을 확신하고 소망하고 즐거워하며 또 이 세상에서 당하는 여러 가지 환난들을 참아야 한다. 다섯째로, 우리는 선행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우리는 가난한 성도들을 돌아보며 구제하기를 좋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다(딛 2:14). 14-21절, 선으로 악을 이기라 [14절]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성도는 자기를 핍박하고 심히 괴롭히는 자들에 대해서도 사랑으로 대하고 그들을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주 예수께서 친히 가르치신 내용이다. 마태복음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로마서 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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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의로움의 완전성
1절: 태초의 타락 이래로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을 얻게 된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 때문이다. 그의 공로는 완벽하게 하나님께서 받으셨으므로 두려움 없이 화평을 누리자.
2절: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영광을 우리의 것으로 주장할 수 있다. 미래의 소망이 있는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일을 위해 바쁠 수 밖에 없다.
4절: 인내는 연단—곧, 성숙한 인격을 만들어 낸다. 그렇게 장성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약속이 헛것이 아니라 실질적 능력이 있음을 알게 되고 우리의 소망이 굳어지는 것이다. 그 소망은 곧 2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에 참예하는 소망이다. (야고보서 1장 4절 참조)
5절: 그 소망은 결코 헛되지 않고 우리 현세의 삶에서도 확인이 되는 바이다. 그러므로 시련이 올찌라도 우리의 소망이 더 굳건해지고 연단의 열매를 얻는다. 그러므로 악한 자가 우리의 기쁨을 앗아가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없다. 환난 조차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는 계기가 된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깨닫고 느끼도록 성신께서 일하신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고 (2절 참조) 우리가 무얼 잘해서 얻어낸 사랑이 아니다.
And certain it is, that no other thing is taught by Paul than that the true fountain of all love is, when the faithful are convinced that they are loved by God, and that they are not slightly touched with this conviction, but have their souls thoroughly imbued with it. Calvin, Commentary on Romans Calvin, Commentary on Romans
6-8절: 성신님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된 것은 특히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의미를 깨달음을 통해서였다.
9절: 더 나아가,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사랑이 끊이지 않을 것임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기 때문에, 그의 살으심으로 더더욱 진노에서 벗어날 것이다.
[F]or it would not have been enough for salvation to have been once procured for us, were not Christ to render it safe and secure to the end. And this is what the Apostle now maintains; so that we ought not to fear, that Christ will cut off the current of his favor while we are in the middle of our course: for inasmuch as he has reconciled us to the Father, our condition is such, that he purposes more efficaciously to put forth and daily to increase his favor towards us. Calvin, Commentary on Romans Calvin, Commentary on Romans12절: 우리가 아담 안에서 죄를 지었다는 것은 특별히 계명을 어겼다는 의미 보다는 부패하고 악한 심성을 지녔다는 뜻이며,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상태 가운데로 들어갔다는 뜻이다.
But to sin in this case, is to become corrupt and vicious; for the natural depravity which we bring, from our mother’s womb, though it brings not forth immediately its own fruits, is yet sin before God, and deserves his vengeance: and this is that sin which they call original. For as Adam at his creation had received for us as well as for himself the gifts of God’s favor, so by falling away from the Lord, he in himself corrupted, vitiated, depraved, and ruined our nature; for having been divested of God’s likeness, he could not have generated seed but what was like himself. Hence we have all sinned; for we are all imbued with natural corruption, and so are become sinful and wicked. Calvin, Commentary on Romans Calvin, Commentary on Romans
12절 다음은 18절로 이어서 읽는 것이 유익하다. 13-17절은 잠시 부연 설명에 해당한다.
13절: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다”는 것은, 율법을 모른다고 정죄를 피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율법 없이는 자기가 죄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다시 말 해, “율법이 없을 때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다”.
14절: 그러나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지라도, 심지어 갓난 아기일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죄가 있기 때문에 죽음을 면치 못한다.
15절: “많은”은 “전부”와 같다. 아담 안의 많은, 그리고 전부는, 아담 안에서 죽었으나; 그리스도 안의 많은, 그리고 전부는, 다시 말해 신자들은, 살았다.
16절: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세례 받기 전의 죄 뿐만 아니라 앞으로 지을 ‘많은 범죄’까지도 덮는 은사이다. 죄에 대한 심판(공의)의 결과는 정죄이지만, 많은 죄에 대한 은사(은혜)의 결과는 의로움이다.
17절: 그리스도가 아담 보다 위대하다. 왜냐면 그리스도의 의가 아담의 죄를 무력화하기 때문이다. 물론 아담의 죄와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이 모든 면에서 대응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아담 안에서의 죽음은 아담의 죄가 우리에게 전가(imputation)됨가 더불어 그 안에서 우리의 실질적 타락에 기인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의 생명은 오직 그리스도의 의를 아버지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에게 전가하심으로서 얻을 뿐, 우리에게 있는 그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의는 “은혜”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사도는 이미 밝혔다. 또, 아담의 죄는 온 인류에게 죽음을 가져왔지만, 그리스도의 의는 신자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얻는다. 그리고 신자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통해 나면서부터 그리스도를 접하게 되지만, 불신자의 자녀들은 그것을 기대할 수 없다.
19절: 그리스도의 순중은 우리에게 전가할 의를 마련하기 위함이었음을 배운다. 또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하심을 얻기 위한 순종은 완벽하고 완전한 순종이어야 함을 배운다. 그러므로 죄인이 자기의 부족한 순종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되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자기 방식 대로 예배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가증스럽게 여기시는지 배운다.
20절: 범죄를 더하게 하기 위함이 율법의 유일한 목적은 아니다. 하지만 죄인으로 하여금 자기 죄의 심히 죄됨을 알게 하고 구원자가 필요함을 알게 하는 것은 중요한 목적 중 하나이다. (이부분을 굳이 죄의 욕구를 일으킨다고 해석할 필요는 없다.)
21절: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 “하였다”는 과거형을 씀으로써, 사도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 죄가 더 이상 왕노릇할 수 없음을 밝히고 있다. 단순히 “의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왕노릇한다”고 할 수 있으나 거기에 “은혜”라는 말을 더함으로써 사도는 다시 한 번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서 인정 받을 그 무엇이 있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자비에 인한 것임을 각인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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