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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2장 강해 – Pensées
로마서 2장 강해 로마서 2장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모든 인류를 고발합니다. 1-11절 하나님의 공평한 심판 12-16절 율법과 심판 17-29절 유대인 …
Source: 392766.tistory.com
Date Published: 5/1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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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2장 주석 – 로마서 – 예사랑 성경 연구회 – Daum 카페
(2) 너도 똑같이 그 행동을 한다. (3) ‘그러므로’ 너는 너의 행동을 정죄하는 것이고, 너도 핑계치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유대인들은
Source: m.cafe.daum.net
Date Published: 6/1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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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강해 2장 – 조정민, 유기성, 박한수, 유진소 목사
성령하나님이 임하신다. 그래서 삶이 바뀐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잘 믿는지 안믿는지는 열심으로 평가하면 안된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대단히 …
Source: blog.naver.com
Date Published: 12/2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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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주석 로마서 2장 1-10절 | 갓포스팅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마땅히 두려워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그 심판에 대해서 우리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주지 않으면 결코 그것을 두려워 …
Source: gp.godpeople.com
Date Published: 10/2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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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강해 – 옛신앙
로마서의 특징적 주제는 구원이다. 1장부터 11장까지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이치에 대해 증거했는데, 1, 2장은 구원의 필요성으로서 사람의 죄 …
Source: www.oldfaith.net
Date Published: 5/2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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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2장 강해 – 성경의 세계
로마서 2장 강해 로마서 2장은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고 말합니다. 율법을 행하든, 행하지 않든, 율법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모든 …
Source: bible66.tistory.com
Date Published: 1/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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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라어 로마서 2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 인생여행
즉 어떤 사람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지 않은 상태에서 많은 선을 베풀었을지라도 그의 선행이 아무 쓸모없는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이 하나님과 관련을 맺었 …
Source: tripol.tistory.com
Date Published: 3/1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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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판단과 하나님의 판단 I (로마서 2장 1-16절)
로마서는 본론의 시작을 하나님 없는 자들의 영적 상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열어갑니다. (롬1:24-32)을 보면 하나님 앞에 이방인들의 죄와 허물, 심령의 부패가 …
Source: mission-hamburg.de
Date Published: 5/2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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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로마서 2 장 강해
- Author: 선한목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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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19. 3.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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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2장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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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2장 강해
로마서 2장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모든 인류를 고발합니다.
1-11절 하나님의 공평한 심판 12-16절 율법과 심판 17-29절 유대인과 율법
1-11절 하나님의 공평한 심판
2: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그러므로'(디아)는 앞선 이야기의 결론이지만 헬라어 문법상 완벽하게 연결된 것은 아니며 연장의 개념도 포함합니다. 앞선 이야기, 즉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보다 우상을 숭배하는 죄에 빠져 있다는 1장의 내용에 대해 추가 설명하려는 것입니다. ‘사람아’는 마치 대화의 상대를 앞에 두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편지이기에 상상의 대상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수사학적 기법을 자주 사용합니다.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결국 판단하는 자의 오류를 폭로합니다. 자신도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할 대상이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율법을 어기면서 율법을 안다며 다른 이방인들을 비판하는 유대인들을 전제합니다.
2:2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3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하나님의 심판
유대인들의 착각을 폭로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진리대로’ 진행됩니다. 기록된 말씀대로 어긋나지 않고 진행됩니다.
심판을 피할 줄로
어리석은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을 가지고 있으면 오지 않는다고,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돌봐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착각에 빠져 있는 판단의 오류를 바울을 지적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피할 수 없습니다. 모든 죄인에게 임합니다.
2:4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하나님의 인자하심
하나님의 인자는 문맥상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내포하며 또한 인내의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종종 인자와 친절이 함께 사용됩니다. 하나님은 언약 안에서 인자하시며, 친절하십니다. 하지만 죄를 지을 때도 하나님은 인자하십니다. 이럴 때의 인자는 한시적인 것으로 하나님의 심판이 이르기 전까지입니다. 그런데 죄인들은 하나님의 인내를 용서로 착각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인내의 시간을 방종하며 죄를 짓는 데 사용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기다린 이유를 회개시키기 위함입니다.
2:5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고집과 마음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은 계속된 악과 죄를 말합니다. 고집은 일관성이며, 회개하지 않는 마음 역시 일관성입니다. 한 번 죄를 짓고 잘못된 생각에 빠져 계속하여 죄를 짓는 것입니다. 이러한 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합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즉 행동과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결국 ‘진노의 날’이 임할 것이며, 하나님의 심판이 나타날 것입니다.
쌓는도다
하나님의 진노를 인애와 정비례합니다. 하나님의 인내가 길어지면 그만큼 다가올 심판의 강도도 올라갑니다. 하나님은 심판하실 때 임할 진노로 심판하실 때 그들을 참아온 시간에 비례하여 심판하실 것입니다.
2:6-8 6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8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하나님은 아무런 까닭 없이 심판하지 않습니다. 행한 대로 심판합니다. 역으로 악을 행하지 않는다면 심판하지 않을 것입니다. ‘행한 대로’는 명백한 결과를 말합니다. 추측하시거나 예측하시지 않고 행한 그대로를 심판하십니다.
영생으로 하시고
하나님은 선을 행하는 자는 영생을 선물로 주시지만 악을 행하는 자는 진노와 분노로 갚으십니다. 7-8절은 6절의 해석입니다. 선행은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것으로 말합니다. 마치 행위로 구원 사는 것처럼 말하지만, 실제로 구원과 행위는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행한 대로 상급과 저주를 받습니다. 7절에서는 영생을 상급으로 8절은 진노와 분노를 받습니다.
당을 지어
당을 짓다는 에레데이아는 희귀한 헬라어로 신약 이전의 문서에서는 발견되지 않습니다. 뜻은 ‘당파적인’ 또는 ‘편당 하여’라는 뜻을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힘을 규합하는 것입니다. 마치 시편 2편 1-3절을 생각나게 합니다.
시 2: 1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2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3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
‘당을 짓는다’는 표현의 에리데이아스의 기본어인 에리스는
2:9-11 9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10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 11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
악을 행하는 자
8절의 ‘당을 지어’는 9절의 ‘악을 행하는 자’로 연결됩니다. 그들은 환난과 곤고가 있을 것이라 말합니다. 당을 짓는 이유가 바로 악을 행하기 위함입니다. ‘당을 짓는’의 어원인 에리스는 투쟁 논쟁이란 단어에서 유래했으며, 이기적 욕망을 위해 자신의 편을 모으는 것을 말합니다.(WBC 로마서1) 그들에게는 ‘환난과 곤고’가 있을 것입니다. 11절의 ‘하나님’이 이 문장을 이끕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바울의 확고한 선언입니다.
먼저는
하나님의 심판은 먼저 유대인에게 임한 것이고, 그 다음은 헬라 인입니다. 헬라인은 이방인은 대표하는 민족으로 다른 모든 민족을 포괄하는 단어입니다.
환난과 곤고-영광과 존귀와 평강
이 대립적 구문은 악을 행하는 자(9절)와 선을 행하는 자(10절)로 구분됩니다. 계명에 순종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들의 종말에 대한 것이며, 하나님의 심판을 명백히 하는 선언입니다. 7절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이 10절에서 ‘영광과 존귀와 평강’로 약간 수정됩니다. ‘썩지 아니함’이 빠지고 ‘평강’으로 교체됩니다.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함
유대인과 헬라인은 대변하는 존재들입니다. 유대인은 하나님의 백성을, 헬라인은 이방인을 대변합니다. 하지만 둘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을 때는 동일하게 심판을 받게 됩니다. 유대인이 먼저 등장한다는 것을 염두에 둡시다. 유대인들은 특권을 가진 존재들이며, 심판도 그들에게 먼저 일어날 것입니다.
롬 3:1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2 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유대인들은 분명 특권을 가졌지만 결국 그들의 특권으로 인해 먼저 심판을 받을 것이며, 더욱 강하게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은 외모가 아닌 중심을 보십니다.
사무엘상 16: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12-16절 율법과 심판
2:12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동일한 결론을 말합니다. 율법이 범죄한 자는 율법 없이도 망하며, 율법을 가지고 있으나 율법을 어기는 자는 율법대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모든 인류를 죄인입니다. 율법은 소유하였다 하여 율법이 지키지 않습니다. 율법은 순종해야 한다. 12절의 목적은 결국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드러내는 동시에 율법은 지키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고 오히려 독이 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롬 2:13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율법은 듣기 위한 것이 아니라 순종 즉 실천하기 위함입니다. 히브리 사상은 들음이 곧 행함이지만 헬라 사상은 구분되어 있습니다. 귀를 막는 것은 듣지 않음, 곧 불순종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지금은 헬라적 사상으로 말합니다. 왜냐하면 청중이 헬라 사상을 가진 로마인들이기 때문입니다. 들음 곧 지식이 의인을 만들지 못합니다. 오직 행하는 자가 의롭다 함을 받게 됩니다. 이 부분은 바울의 주요 교리인 이신칭의와 어긋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하지만 바울은 행함과 의를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초대교회는 행함이 곧 의로 보았으며 바울 또한 이것을 다르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2:14-16 (14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15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16 곧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율법 없는 이방인
바울은 율법을 설명해 나갑니다. 하지만 이 부분은 후대에 첨가된 것으로 보입니다. 율법과 본성으로 동일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는 점은 놀랍습니다. 하지만 결국 율법도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준 것이기에 양심의 법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로마서 안에서 양심이 율법의 역할과 같음을 주장합니다. 이러한 바울의 주장은 율법을 가지고 있고, 안다고 착각하는 유대인들의 자만과 어리석음을 비꼬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쌀을 창고에 가지고 있어도 밥을 해 먹지 않으면 굶어 죽는 것과 같습니다. 율법은 지킬 때 의미가 있어집니다.
마음에 새긴 율법
14절의 본성과 15절의 양심은 동일한 선상에서 다룹니다. 비록 율법이 없다 해도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본성에 새긴 양심이 율법의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양심은 하나님의 계명과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지만 맥락상 같은 것입니다. 바울은 양심을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로 확장시킵니다. 이러한 해석은 16절에서 ‘은밀한 것을 심판’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양심을 통해 사람들이 알 수 있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바울은 심판을 예수 그리스도의 몫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대리자로 하나님을 대신하고 대변합니다. 십자가에서 힘 없이 죽어간 그리스도는 후에 다시 재림하실 때 심판자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17-29절 율법을 소유가 구원을 보장하지 않는다.
[2:17-20] 17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18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19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20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율법을 의지하는 네가
17절을 율법을 의지하는 유대인들의 어리석음을 비판합니다. 그들은 율법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자랑합니다. 하지만 율법을 순종하지 않습니다. 사실은 율법을 싫어합니다. 그럼에도 율법을 소유한 것으로 자랑합니다.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라는 말은 유대인인 것을 스스로 자랑하는 유대인들을 비꼬는 말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소유했으니 지키지 않음으로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킵니다. 이제 그들의 자만과 어리석음을 18-19절에서 폭로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유대인의 첫 번째 어리석음은 그들이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생각을 알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그것으로 자신들의 특권의식을 자랑합니다. 하지만 앎과 실천은 엄연히 다르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지극히 선한 것’은 율법을 존귀하게 여기는 유대인들의 성향을 말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으며, 또한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음으로, 자신들이 안다고 생각한 율법이 그들을 심판할 것입니다.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진리는 빛이고, 지혜와 지식 역시 빛입니다. 굳이 소크라테스의 예화를 빌리지 않아도 진리는 어둠을 비추는 빛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맹인들이며, 하나님의 율법을 가진 자신들이 맹인들을 인도하는 자라 착각했습니다. 분명 계명은 빛입니다.
시편 119:130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
시편 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하지만 이들은 소유할 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소유가 곧 영생이란 착각을 했던 것입니다.
2: 21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 22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느냐 23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않느냐
21-23절은 유대인 자랑을 뒤엎는 바울의 폭로가 담겨 있습니다. 먼저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자신을 가르치지 않는 유대인들을 고발합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이방인들에게 가르칩니다. 하지만 자신들은 지키지 않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이중성을 폭로합니다. 진정한 가르침은 말이 아니라 행함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서 이방인들에게 율법을 지키라고 말합니다. 이방인들에게 도둑질하지 말라하면서 자신들은 합니다. 간음하지 말라 하면서 그들은 간음합니다. 바울은 여기서 더 나갑니다. 우상을 가증히 여기면서 하나님의 전에서 도둑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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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2장 주석
로마서 제 2장
=====2:1
그러므로 – 전후 문맥으로 보아 이 접속사가 어떤 부분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는지
분명하지 않다. 혹자는 이 접속사가 앞에서 설명된 이방인들의 부도덕한 행위와 관련
이 있다고 주장한다(Hendriksen). 또한 어떤 학자는 본절 전체를 1:20과 같이 삼단 논
법식으로 재구성하여 다음과 같은 사상적 전개로 이해하고자 했다(J. Murray). (1) 다
른 사람의 행동을 너는 판단한다. (2) 너도 똑같이 그 행동을 한다. (3) ‘그러므로’
너는 너의 행동을 정죄하는 것이고, 너도 핑계치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유대인들은
종종 어떤 문장을 다른 주제로 전환하고자 할 때 별 의미 없이 접속사를 사용하여 주
의를 환기시키는 문법 구조를 사용한다(삼하 8:1;10:1;13:1;히 4:14). 바울도 이와 같
이 이방인의 죄악상을 폭로하는 주제로 전환하는 시점에서 별 의미없이 이 접속사를
사용하였다.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 ‘판단하는’의 헬라어 ‘크리논'( )은 하나님의
‘판단'( , 크리마)과는 구분되는 것으로서 ‘의심한다'(눅 24:38), ‘헤아린
다'(마 7:2), ‘구별하다'(마 13:30)라는 뜻으로 사용되며 본절에서는 인간이 그 이웃
에 대하여 편견을 가졌다는 의미로 쓰여졌다(요 8:15;약 4:12). 한편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을 지시하는지의 문제는 의견이 분분하다. (1) 혹자는
이 부류의 사람을 스스로 남을 규탄하고 지도하며 판단하는 입장에 있다고 생각하는
‘많은 선생'(약 3:1)이라고 주장한다(Matthew Henry). (2) 또 혹자는 ‘판단하는 사람
아’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스 호 크리논'( ) 가운데 ‘파스’
( , ‘모든’)를 강조하여 ‘남을 판단하는 모든 사람’이란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
를 포함하며 판단하는 일을 습관적으로 반복하는 자들이라고 한다(J. Barmby). 그러나
본장 전체의 흐름으로 보아 본절의 이 말은 율법을 받고 자랑하면서 율법에 따라 살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을 칭하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할 것 같다. 물론 유대
인이라는 구체적 표현이 나타나지는 않지만 당시 유대인들의 삶이 이웃을 판단하는 교
만한 삶이었음은 사실이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가장 적합한 대상이라는 견해를 마치
이방인은 이 부류에서 제외된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은 또 다른 오해를 발생하게 할
것이다.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 바르트(Barth)는 하나님께 핑계할 수 없는 부류에 하나님
을 모르는 사람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사람도 포함시킨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비록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더라도 유한한 인간이며 시간에 속한 존재이기 때문이라
고 한다. 즉 인간은 제한되고 연약한 존재로 항상 죄악 가운데 그 영향권 아래 살아가
므로 누구든지 하나님께 핑계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바르트의 주장대로라면
핑계치 못할 자의 범주에 바울 자신도 포함되므로 바울 역시 또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있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따라서 본 절은 신앙에서 떠난 유대인들을 향한 바울의 책
망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Luther, Calving, Hendriksen). 유대인이 하나님
의 율법을 받아 이방인보다 더욱 밝은 계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
역하며 살았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께 핑계할 수 없는 것이다.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은 판단력이
무능해졌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의를 이룰 능력도 무력해졌다. 그렇기에 남을 판단하
는 자는 자신이 자신을 정죄하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정죄함이니’로 번역된 헬라어
‘카타크리네이스'( )는 ‘카타'( , ‘…에 반대하여’)와
‘크리노'( , ‘구별하다, 판단하다’)가 합쳐진 ‘카타크리노'(
)의 현재 직설법 2인칭 단수 동사로서 ‘세아우톤'( , ‘너 자신을’)
과 함께 쓰여 스스로를 죄있다고 판단하는 것을 의미한다. 혹자에 의하면 이 ‘정죄’는
남을 저주했을 때 분만 아니라 용서했을 때도 받게 되는데 그것은 자기 자신이 판단의
기준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Lenski).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 이 표현은 유대인들이 범하는 잘못이 이중
적인 성격을 띠고 있음을 보여준다(Calvin). 즉 그들은 이방인과 똑같은 잘못을 범하
고 있으면서도 뻔뻔스럽게 다른 사람의 잘못을 신랄하게 정죄하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
다. 이것을 좀더 간략하게 나타내자면 ‘어두움과 위선'(Murray)이 될 수 있겠다. 이와
같은 바울의 논리는 예수의 가르침에 근거한다(마 7:1-5;툭 6:41, 42).
=====2:2
하나님의 판단 – 여기서의 ‘판단'( , 크리마)은 공의의 하나님께서 내리
시는 심판 또는 정죄를 의미한다(약 3:1). 사람이 스스로 하는 판단은 항상 한계가 있
고 상대적이지만 하나님의 판단은 절대적인 표준이므로 모든 범죄자에 대해 심판과 정
죄를 내리심이 당연하다. 이러한 하나님의 판단(심판)은 종말에 궁극적으로 이루어지
는데, 어느 누구도 그의 심판에서 제외되거나 특권을 부여받지 못한다. 왜냐하면 하나
님은 진리이시므로 그의 절대적인 공의 성취하시기 때문이다(Murray).
진리대로 – 이 말에는 심판의 순결성과 외모를 취하지 않으시고 인간의 내면을 감
찰하시어 판단하시는(삼상 16:7) 하나님의 절대적인 공의(Calvin, Harrison, Barmby)
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우리가 아노라 – 본절에서 부울이 사용한 1인칭 복수 ‘우리’와 1:5에서의 ‘우리’는
그 지시하는 바가 각기 다르다. 즉 본절에서는 수신자와 바울 자신을 같은 공동체로
여기고 ‘우리’라고 하고 있고, 1:5에서는 복음을 전하는 바울 일행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에, 거기서는 송신자들을 의미하고 있다.
=====2:3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행하는 사람아 – 바르트(Barth)는 본절을 매우 실존주의
적으로 해석한다. 즉 그는 판단하는 일이 어떤 체계나 사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하
며, 그러한 체계나 사상에서 나오는 선행은 인간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에
게 있어서 체계적인 사상은 복음의 생동력을 잃게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이성을 통해 체계적인 사상을 통합하고자 했던 헤겔(Hegel)에 정면 도전한 키에르 케
고르(Kierkegaard)의 실존주의적 신앙 노선에 서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체계적인
사상을 고집하면 복음의 생명력을 상실하게 되는 것은 교회사를 통해서 입증될 수 있
다. 그러나 기독교는 논리와 사상의 체계에만 집착해서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극
단적으로 사상의 체계를 부정해서도 안 된다. 전자의 경우는 기독교를 논리의 체계 속
에 질식(窒息)시키게 하며, 후자는 신비 주의에로 흐르게 하기 때문이다. 오직 기독교
는 복음의 진리를 왜곡시키지 않는 범위에서 체계를 지님과 동시에 복음의 생명력을
지녀야 참 종교로서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 예수의 가르침 중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재물 바치는 것을 빙자하여 자기 부모를 부양하고 공궤
(供饋)할 책임을 회피했다(막 7:11). 이러한 그들의 행위는 종교라는 허울 아래 ‘하니
님’을 이용하여 자신의 명예나 이익을 추구하고 자신의 잘못을 합리화한 행위인 것이
다. 이 같은 이들은 겉모습과 말을 그럴 듯 하지만 속마음은 이미 부패해서 회칠한 무
덤(23:27, 28)과도 같이 양면성을 갖고 있었다. 이와 같은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의
공의로운 심판을 결코 피할 수 없다(고후 5:10). 설령 그 사람이 유대인 중에 유대인
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정죄적 선언을 피할 수 없다. ‘피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크프세'( )는 ‘사라지다’ 또는 ‘도망가 안전한 곳을 찾다'(행
19:6)라는 뜻이 있고, ‘에크퓨고'( )의 미래중간태이다. 죄인이 여호와
의 낯을 피하여 숨을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시 139:8;벧전 3:12).
=====2:4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멸시하느뇨 – ‘인도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게이'( )는 현재 직설법 3인칭 동사로서, 하나님의 지속적
이고 적극적인 행동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 이방의 우상숭배와 부도덕, 그리고 남을
판단하는 어떤 자들의 교만을 지켜보심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방향을 전환하여 마음과
태도를 바꾸기를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속성, 곧 ‘인자하심’ 때문이다. 본절에
서 ‘인자하심’은 거듭 사용되어 중요한 사상임을 보여 준다. 본 구절의 ‘인자하심’
( , 크레스토테토스)은 하반절의 ‘인자하심'( , 크
레스톤)과 의미상 별차이는 없지만 특히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미하며(11:22), 보다 포
괄적이고 근본적인 뜻을 갖는다. 이는 또한 부모가 자녀를 대하는 것과 같은 성품을
시사한다(마 7:9-11). 그러나 유대인들을 포함한 모든 죄인들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이용하여 오히려 자기의 의를 자랑할 뿐더러 그의 오래 참으심을 자신들의 안전을 보
장하는 수단으로 생각했다. 더 나아가 인생들은 악한 일을 행함에도 속히 징벌을 행하
시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너그러움을 이용하여 악을 행하기에 담대하였다(전 8:11).
본절에서 이와 같은 죄인의 태도는 ‘하나님을 멸시하는'( ,
카타프로네이스) 것이라고 지적된다. 유대인의 교만과 이방인의 부도덕은 같은 죄악으
로서 하나님을 깔보거나 업신여기는 방자한 행동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풍성함을
멸시하는 죄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죄인들 가운데 나타나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켰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며 동시에 복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이 복음이 바로 죄인들에게 주어졌다(1:16).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하나
님의 택한 백성이기에 죄를 범할지라도 그 죄에 따라 공의의 심판을 받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든지, 아니면 자기들이 죄를 범해도 하나님께서 즉각적으로 심판을 내리시지 않
기에 자기들의 행위가 하나님의 뜻에 별로 어긋나지 않는 것으로 착각했을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잘못에 대해 하나님께서 심판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을 무시해 버렸다. 이것은 곧 하나
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해서도 소홀히 여겼다는 말이 된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완악한
심령에 대하여 바울은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5절)이라고 표현했다. 한편 본
절의 ‘용납하심'( , 아노케)은 잠시 쉬는 것을 의미하며 ‘자제’
(self-restrain)의 개념을 지닌다. 본절에서는 ‘너그러움’을 뜻하며 구체적으로 ‘징벌
의 지연’을 뜻한다. 또한 ‘길이 참으심'( , 마크로뒤미아)은 ‘어
떤 충격에도 곧바로 반응하지 않음’을 뜻한다. 이 두 단어는 ‘인자하심'(
, 크레스톤)과 합해져서 심판을 연기하여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벧후 3:15) 하나
님의 성품을 시사한다(Harrison).
■■=====2:5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 – 인간이 갖고 있는 완고함이나 회개치 않는 마음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상반된 대조를 보인다. ‘회개치 아니한’의 헬라어 ‘아메타노에
톤'( )은 하나님의 권고적인 회개를 뜻하는 ‘메타노이안'(
)과 부정접두사 ‘아'( )의 합성어이다. 이는 하나님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개조되거나 변화되지 않는 마음을 뜻하며, 동시에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거부하는 반항
적인 의미를 내포한다. 이러한 반항은 빛에 대한 거부로서 온순하고 순종적인 마음을
잊어 버린 완고한 행동이다. 또한 ‘고집’에 해당되는 헬라어 ‘스클레로테타'(
)는 ‘완악’, ‘완고’ 또는 ‘잔인’을 뜻하는 ‘스클레로테스'(
)의 목적격으로서 영적으로 경화(硬化)되거나 딱딱하게 굳어버린 상태를 의
미한다. 이들 두 단어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경고와 함께 자주 사용되었으며(신
9:27) 본절에서는 서로 연결되어 서로의 의미를 보다 선명하게 밝혀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죄인은 자기의 고집과 회개치 아니하는 마음으로 인하여 스스로 하나님의 진노
를 쌓고 있는 것이다.
그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 ‘진노의 날’을 A.D. 70년 예루살렘이 로마의
티투스(Titus) 장군에 의해 포위되어 함락되던 것과 반드시 연관지을 필요는 없다. 1
절에서 본절까지의 내용이 하나님을 거역한 유대 민족 전체에 대한 것으로 생각될 수
도 있으나, 6절부터는 개인의 행위에 따른 심판이 분명하게 언급되고 있다. 따라서 본
절은 민족적인 심판에 대한 언급이라기보다는 개인의 행위에 대하여 보응하는 마지막
심판으로 이해해야 한다(Luther, Calvin, Hendriksen, Harrison). 한편 ‘그 날'(
, 헤 헤메라)은 종말론적인 용어로서 ‘주의 날'(
, 헤 헤메라 퀴리우). 곧 심판의 날을 가리킨다(고전 3:13;살전 5:4). 16절에 언
급 된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은 구체적으로 마지막 심판 날을 가리
키므로 본절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2:6
그 행한대로 – 심판의 기준이 되는 ‘행함’은 단순히 겉으로 드러난 행위만을 가리
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생각하는 바까지도 포함한다(시 139:1-4). 본절에서의 ‘행
함’은 특히 인간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었으며 또한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의미한
다고 볼 수 있다. 즉 어떤 사람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지 않은 상태에서 많은 선을 베
풀었을지라도 그의 선행이 아무 쓸모없는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이 하나님과 관련을 맺
었으나 그 믿음에 따른 행위가 없으면 그는 구원을 얻을지라도 상급은 없다. 그러므로
본절은 인간이 하나님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서부터 시작하여 모든 행위에 그 보응을
받게 된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보응하시되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도세이'( )는 ‘아포디도
미'( ) 의 미래 직설법으로 좋거나 나쁜 의미의 모든 보상을 뜻한
다. 따라서 본 구절에 의하면 믿는 자에게는 선한 상급이 주어지겠지만, 불신자는 그
형■편에 따라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고후 5:10). 그리고 그러한 심판은 누구도 예외가
있을 수 없는 공정한 것이다.
=====2:7
참고 선을 행하여 – 본문을 보면 바울이 6절에서 언급했던 ‘행위’가 단순히 율법적
인 차원의 것만을 의미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참고 선을 행한다’는 것은 성도가 영
광의 면류관을 향해 끊임없이 달음박질 해나가는 것(빌 3:12-14)으로 이해되는데 이는
이신 칭의의 가르침과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마 24:13;골 1:23;히 3:14;계 2:10).
성경에서 말하는 ‘선’은 율법이 요구하는 것 이상이며 오직 하나님을 믿는 성도만 그
믿음에 따라 하나님과 이웃에게 ‘선’을 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예수의 선한 사
마리아인의 비유와(눅 10:25-37), 포도나무 비유(요 15;1-14)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성도의 선행이란 예수를 떠나서는 있을 수 없으며 오직 그와 연합된 가운데서 비롯될
수 있다. 즉 그리스도와 연합한 삶이 성령을 따라 사는 것이며(갈 5:16-18;6:8), 그렇
게 될 때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 가운데 선이 나온다(갈 5:22, 23). 그리고 이 열매는
낙심하지 않고 참고 인내하며 행할 때 거두게 된다(갈 6:9).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 – 이것들의 본질은 영생이며, 그것들이 나타나는 장소
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즉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생을 누리며 사는 성도에게 주
어지는 특권을 이 세 가지로 표현했다. 따라서 여기서 언급된 ‘영광’은 하나님의 속성
과 관련되어 나타나는 ‘영광’과는 다른 것으로서(1:23 주석 참조) 성도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게 될 때에 나타나게 될 변화를 가리킨다(J.
Murray). 그리고 성도가 얻게 될 그 ‘영광’은 ‘존귀한 것’이며 결코 ‘썩지 아니하는
것’이다.
영생으로 하시고 – 영생( , 조엔 아이오니온)은 항상 궁극
적인 구원으로 표현되었다. 유대교도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을 준다는 것을 가르쳤으나
그들은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고 율법을 행함으로 생명얻기를 원했다.
그러나 율법을 행하면서 썩어질 육체의 증표(證標)를 구하는 자들에게는 영생이 허락
되지 않았다(8:6). 영생은 언제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만 찾을 수 있으며(6:23) 또한
그를 믿는 자들에게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요 1:12;3:15). 한편 본절에서 영
생은 6절에 기록된 ‘하나님의 보응’의 목적격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8절의 ‘노와 분’이
라는 말과 대조를 이룬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게는 심판이라는 개념보다 생명이
라는 개념이 더 중요하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부터 승리하시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후 그를 따르는 모든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과 영생을 소망하며 다시 오
실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는 삶을 보장받고 있기 때문이다.
=====2:8
당을 지어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토이스 여스 에리데이아스'(
)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구절이다. 왜냐하면 ‘에리데이아'( )
가 ‘보수(報酬)에 얽매인 고용인’이라는 뜻을 가진 헬라어 ‘에리도스'( )
에서 파생되었다면, 본절은 ‘이기적인 욕망이나 야망을 가진 자들에게’라고 번역될 수
있고, ‘다툼’이나 ‘논쟁’의 의미를 가진 헬라어 ‘에리스'( )에서 나왔다면,
‘논쟁하는 자들에게’로 번역될 수 있기 때문이다. 빌 1:16에서의 ‘에리데이아'(
)는 분명히 ‘에리스'( )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빌
2:3에서는 ‘다툼’이라는 의미보다는 오히려 ‘이기적인 욕망’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
다. 그외 갈 5:20이나 약 3:14 등에서는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내포하는 의미로 사용
되었다. 그리고 본절은 단순히 ‘당을 지어’로 번역되면 바울이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
가 분명히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것은 두 가지 의미를 모두 합쳐서 ‘이기적인 욕
망을 따라 논쟁에 가담하는 자들’로 이해하는 편이 좋다. 즉 진리에 대한 명확한 이해
가 없어 어떤 분쟁이 일어나면 항상 쉽게 발뺌할 수 있거나 이익이 되는 편에서는 자
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은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 민중들 사이에서
나타나던 공통된 특징이었다.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 – 진리와 의는 상호 보충적인 관계로 쓰여진
(엡 4;24) 반면 진리와 불의는 상반적인 관계로 쓰여졌다(1:18;고전 13:6;살후 2:12).
진리로 자기들의 생활을 다스리지 않고(1:21) 강퍅하게 회개치 않는 마음으로 자기의
의를 좇는 자는 결국 불의에 순종하는 자로 나타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진리와
불의의 두 주인을 섬길 수 없기 때문이다. 진리에 대한 불순종은 불의에 순종하는 것
이며 또한 붕의에 순종하는 것은 궁극적인 영원한 의를 포기하는 행위이기에 그들에게
주어질 것이라고는 하나님의 분노 외에 아무것도 없다. 그들에게 주어지는 분노는 불
신앙에 따른 적극적인 불순종에 대하여 발생하는 것이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하시려는 궁극적인 구원을 거부하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보응은 더욱 가증될 것
이다. 바울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라고 같은 말을 반복한 것도 그
들에게 임할 진노의 강도를 보다 명백하게 나타내고자 한 것이라고 할수 있다.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 ‘노’에 해당하는 헬라어 ‘뒤모스'( )는 보통 ‘분
노’로 번역되지만 ‘진노'( , 오르게)와 특별한 구별 없이 사용될 수 있다. 바
울이 유사한 의미를 가진 두 단어를 같이 사용한 것은 일종의 중복어법으로 하나님께
서 불순종하는 자들에 대하여 무시무시한 진노로 보응하시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
다.
=====2:9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 ‘각 사람의 영'(
, 파산 프쉬켄 안드로푸)이라는 표현은 사람의 영혼과 육체 중 ‘영혼’만을 의
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바울은 ‘영’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쉬케'( )를 ‘사
람’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하기 때문이다(13:1;행 2:41, 43). 또한 전후 문맥상 ‘사
람’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 고데(Godet)의 견해에 따르면 9절과 10절의 구
성은 7절과 8절의 대조적 구성을 거꾸로 재배열 시킨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볼 때
‘각 사람’이라는 말과 ‘각 사람의 영’이라는 말은 동일한 의미로서 ‘모든 사람’을 의
미한다. 따라서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이라는 표현 역시 악의 계획을 추진하는
사람들에게 임할 보응의 보편성(6절)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악을 행하
는 각 사람은 선을 행하는 각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 행한대로 하나님의 판단을 받게
된다.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 8절에 언급된 ‘노와 분’이 심판자이신 하나님 편에 속한
것이라면 본절의 ‘환난과 곤고’는 하나님이 발하신 ‘노와 분’으로 인하여 약한 자에게
내려지는 결과이다. 그리고 이 두 단어는 선을 행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상급인 ‘영광
과 존귀와 평강’과 반대되는 것이기도 하다. 혹자는 ‘환난’은 외적인 것으로 ‘곤고’는
내적인 것으로 설명한다(Hendriksen).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 본 구절은 다음 10절에서도 반복된다.
구원이나 은혜와 마찬가지로 심판과 형벌에 있어서도 유대인이 우선적이다. 언약과 약
속에 따른 복이 유대인들에게 먼저 주어졌듯이 그 복을 거절한 데에 대한 형벌도 유대
인들에게 우선적으로 적용된다. 왜냐하면 우선적인 특권을 부여한 자에게 거기에 상응
하는 책임을 묻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이기 때문이다(시 50:3-6;눅 12:47, 48;벧전
4:17). 한편 본절에 언급된 ‘헬라인’은 모든 이방인을 대표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
당하다.
=====2:10
영광과 존귀와 평강 – 7절에서도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이 나왔으나 본절에
서는 ‘썩지 아니함’ 대신 ‘평강’이 언급되었다 혹자는 이것을 ‘하나님과의 화목'(5:1)
으로 이해하기도 하며(Black, Murray), 또다른 학자는 보다 넓은 의미로 해석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의 모든 축복 속에서 새롭게 변화된 영혼과 육체로 영원히 즐거워하며 충
만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구원’이라고 설명한다(Hendriksen). 어떤 의미이든 바울은
악한 자에게 형벌로 내리시는 ‘환난과 곤고'(9절)에 대조를 이루는 용어로서 ‘평강’이
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그 결과가 상반되는 것을 보여준다
=====2:11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 – 본절은 앞 부분(1-10절)과 그
다음에 이어지는 부분(12-29절)을 이어주는 다리의 역할을 하는데, 문자적으로 ‘하나
님께서는 어떠한 불공평도 없으시다’, 또는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편애도 없으시다’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심판은 편파적(偏頗的)인 것이 될 수 없다. 이 사실은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라는 (5절) 구절이 이미 증명한 바 있다. 하나님의 판단 기준은 특권
이나 지위가 아니라 사람이 행한 일들의 성격이 어떠한 것이냐의 문제이다. ‘사람을
외모로 취한다'( , 프로소폴렘프시아)는 개념을 히브리적
사고에서 온 것으로서 재판관의 편견이나 편애를 지시하는 의미로 쓰여졌다(삼상
16:7;대하 19:7;욥 34:19). 하나님은 편견이나 편애가 없어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외형상 유대인에게 우선권을 부여한 사실과 모순을 이루는 것처럼 보
일 수도 있다. 그러나 유대인 역시 그의 행한대로 판단받으며, 오히려 그들에게 있어
서는 우선권이 부여된만큼 악행에 대하여 더 큰 환난과 곤고를 당해야 한다. 유대인이
기 때문에 편견과 편애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또한 특권을 주장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라도 그분의 선하신 뜻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다(마 20:15). 오직 공의로우신 그분만이 판단받는 자들의 다양한 입장을 고려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로 있다.
=====2:12
본절에서 바울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요지는 율법을 받지 못한 이방인이든지 율법을
받은 유대인이든지 누구나 자신들의 죄로 인해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순복했느냐 하지 않
았느냐 하는 문제이다.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 ‘율법 없이'( , 아노모스)라는 말은 부사로서
신약성경에서는 여기서만 사용되었다. ‘율법 없이'( , 아노모스)의 명사형
‘아노미아'( )나 형용사형 ‘아노모스'( )는 대개 ‘불법’이나
‘범법’을 의미한다. 그러나 본절의 경우에는 ‘율법을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를 말한
다(고전 9:21). 즉 ‘아노모스’는 14절의 ‘타 메노몬 에콘타'(
, ‘율법을 갖지 아니한’)와 같은 의미로 해석되어야 하는 바, 계약을 맺
어 율법의 기준에 따라 살기로 약속한 일이 없는 자들, 곧 씌어진 율법을 받지 않은
이방인들로 이해되어야 한다(행 2:23).
율법 없이 망하고…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 바울은 율법 없이 범죄
한 자들은 ‘망한다'( , 아폴룬타이)라고 서술하고 율법 아래서 범
죄한 자들은 ‘심판을 받으리라'( , 크리데손타이)고 서술한다.
이 두 단어는 모두 수동태로서 하나님의 능동적인 보응이 있을 것을 시사한다. 율법을
받지 아니한 이방인들은 우주 만물과 양심에 나타내신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지 않음으
로 인하여 파멸된 것이며(1:20), 율법을 받은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잘 알게 되었
음에도 불구하고 순종하지 않았으므로 율법의 기준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특
별히 유대인들이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게 된다는 주장은 매우 중요한 사상이
다. 바울은 율법을 자랑거리로 여기지 아니하고 죄인들을 정죄하거나 규제하는 수단에
불과한 것으로 정의하였다. 그러나 율법은 심판의 기준이 되는 것이고, 율법 자체가
멸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율법 아래서 범죄한 자들은 이 율법을 기준으로 심판받아
멸망에 이르게 될 것이다(J. Murray)
=====2:13
율법을 – 12절에서와 마찬가지로 ‘율법'( , 노모스)은 관사가 없이 사용
되었다. 공인 본문(Textus Receptus, Majority Text)에는 정관사 ‘투'( )가 ‘노
무'( , ‘율법의’)앞에 있는데, 대부분의 고대 사본( , A. B)에는 이 관사가
생략되어 있다. 그런데 ‘노모스'( , ‘율법’)에 관사가 붙고 안 붙고에 따라
약간의 의미상 차이가 있다. (1) ‘노모스’ 앞에 정관사 ‘호'( )가 붙으면, 거의 대부
분 모세 율법을 의미한다. (2) ‘노모스’ 앞에 관사가 붙어 있지 않으면 대부분의 경우
모세의 율법이나 율법의 특정한 조문(條文)을 의미하기 보다는 보다 포괄적인 의미로
서 추상적인 법 개념을 의미한다. 즉 인간의 양심 속에 주어진 법이나, 자연적 계시
속에 나타난 법이나 어떤 순종을 요구하는 일반적인 개념의 법을 가리킨다. (3) 특수
한 경우로서 관사가 생략되어 있으나 모세 율법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하는 경
우이다. 이는 헬라어 문법상 이미 알려진 어떤 확실한 개념을 보다 선명하게 나타내거
나 그 단어의 본래적 개념을 강조하고나 할 때 관사를 생략하는 용법으로서 율법의 특
수한 의미를 강조하고자 하는 의도로 쓰인 경우가 있다. 만약 본절을 관사없는 사본을
따라 해석한다 하더라도 ‘율법’은 12절의 ‘율법’과 같은 것으로서 모세의 율법을 뜻하
는 특수한 경우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J. Murray).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 유대인들은 율법을 받았을 뿐 아니라 익히 배우고 들어
서 잘 알게 되었다. 이것은 그들의 자랑거리다. 그렇지만 이 지식은 그들을 심판에서
제외시킬 수 있는 힘이 될 수 없다. 율법을 들었으면 행해야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율
법이 의의 법칙일지라도 그것을 행하는 사람만이 그것으로 인해 살리라고 가르친다(레
18:5;신 4:1). 그러나 본절은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원리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아
니라 모든 사람이 범죄할 수밖에 없는 죄인(3:23)이라는 사실을 부각시키기 위해 이
논리를 전개하고 있을 뿐이다.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 본서에서 ‘의롭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카이오데손타
이'( )가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단지 자신
들이 율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의롭게 되리라고 생각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문제가 달랐다(J. Murray). 글자 그대로 보면 ‘의롭게 된다’는 것이 율법을 행하는 자
에게 해당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보다 근본적인 기준과 목적은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
속에서 찾을 수 있다. 바울은 행함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하
나님 편에서 보시는 판단에 의하여 칭의가 결정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2:14
이방인이 본성으로 –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본성(nature)을 따라 부분적으로 행할
수 있을지 모르나 완전히 행할 수는 없으므로 이방인 역시 죄인일 수밖에 없다. 간혹
이방인도 율법의 행위를 수행하면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논리를 펴는 자들이 있으니
이들은 바울이 전개하는 논리의 흐름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 자들이다. 비록 본절이나
앞절(13절)에서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을 만족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표
현하였지만 계속되는 바울의 논리는 어느 누구도 율법의 요구대로 완전히 순종할 수
없기에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3:9, 19). 무엇보
다도 본절은 율법을 받았다고 자랑하는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받은 것 자체가 아무런
의미도 없음을 보여 주고 있으며, 이방인들도 양심의 법칙을 따라 율법이 요구하는 바
행위를 할 때가 있음을 가르침으로써 유대인들이 저지르는 어리석음을 경고하고 있다.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 인간은 그 본성에 심어진 양심과
생각 때문에 스스로 하나님의 율법에 직면하게 된다(J. Murray). 즉 인간들의 본성 속
에 존재하는 도덕적 성향은 하나님의 일반적 계시에 의하여 생긴 것으로서 명령하거나
금지하는 양심의 소리를 수반한다(Murray). 이방인들은 유대인의 율법과 동일하지는
않지만, 그들은 본래적인 양심의 법을 따라 일반 계시의 도움을 받아서 하나님의 계시
를 유비적(類比的)으로 받는다. 그러나 그들의 율법은 궁극적인 구원을 보장하지 않는
다. 이방인이 갖는 양심의 법은 간혹 모세 율법과 비슷한 법과 규례를 가질 수 있으
나, 율법의 궁극적인 의미에는 전혀 도달할 수 없다.
=====2:15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 ‘양심’에 해당하는 헬라어 ‘쉬네이데시스'(
)는 문자적으로 ‘함께 안다’라는 의미로서 본절에서는 ‘함께 증거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쉼마르튀루세스'( )와 함께 쓰여 사람의 마
음속에서 연대적으로 증거하므로 율법처럼 증인으로서 그 역할을 감당한다는 뜻으로
쓰여졌다. 양심은 인간이 마음속에서 자신의 행동을 살피면서 때로는 자신을 정죄하기
도 하며, 율법과 일치한 행동에 대하여는 스스로 선한 증거로 인정하기도 하는 인간의
‘바른 인식의 주체’인 것이다(고전 8:7-12). 칼빈(Calvin)은 양심을 정의하면서 ‘합리
적인 행위에 대하여서는 변호하며 악한 행실에 대하여서는 고발하고 유죄 선고를 내리
기도 하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이러한 양심은 타락한 인간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도덕적 성품을 보여준다(고호 4:2). 그러나 양심에 화인 맞은 자들은 계속해서 죄 가
운데 자신을 방치하여 스스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는 거짓 속에서 멸망으로 나아
간다(갈 6:3;딤전 4:2;딛 1:15).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 이것은 인간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여러가지 생각이 갈등
상태에 놓여 있음을 보여 준다. 즉 사람이 어떤 잘못을 범했을 때 그 행위가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 한쪽에서는 그것을 합리화시키려는 생각이 일어난다. 이러한 갈
등이 반복되는 상태가 모든 사람의 내부에 존재한다. 이것이 곧 인간의 양심에 새겨져
있는 율법적인 요소인 것이다.
율법의 행위 – 율법에 따르는 행위로 해석되기 보다는 율법적인 요소가 인간의 양
심 가운데 활동하며 그것이 행위로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이 어떤 행위를 통해
양심의 갈등을 느낀 후에 이전보다 나은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 ‘율법의 행위’라고 할
수 있다.
=====2:16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 본 구절은 문자적으로 ‘내 복음을 따라'(
, 카타 토 유앙겔리온 무)로 번역될 수 있다. 이 말은 바울 자신
이 전파한 복음을 근거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이야기한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바
울은 ‘내 복음’이란 표현을 취했는데, 이것은 협소한 의미로 사용되어 ‘이신 칭의’의
교리에 대한 것이 아니라 바울이 전파한 모든 내용을 가리킨다. 초대 교육 교부들은
이것을 ‘누가복음’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으나(Origen, Jerome)여기서는
바울의 전파 내용 중 종말론적인 설교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타당하다. 왜
냐하면 바울이 본절에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바울은
‘내 복음’이란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복음’의 출처가 자기 자신인 것처럼 나타내고 있
다. 그러나 이는 바울의 사도적 권위와 깊이 연관되는 표현으로 바울 자신이 예수께로
부터 사도로 세우심을 받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다는 인식을 드러내 주며 자기가
그 복음을 위해 택정함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바울은 이
러한 부르심에 대해 전인격적으로 반응한다는 뜻에서 복음을 자신의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 이 용어가 원문에서는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라
는 구절 뒤에 따라 나오지만, 굳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진 복음과 연결지을
핑요는 없다(Calvin). 오히려 본 구절은 하나님의 심판이 하나님의 단독 사역이 아니
라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음을 나타내고자(요 5:27;행 17:31)하
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복음이 성취되어 인간들에게 주어졌듯
이 그 복음으로 인한 심판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실행되는 것이 정당한 절차일 것
이다. 예수께서도 심판날 왕권을 가지고 오실 것을 말슴하셨다(마 16:28).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 심판날에는 감추인 것이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드러나게 된다(고전 4:5). 예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외식을 신랄하게 비판하신
것도 어떤면에서는 마지막 날에 있을 심판에 대한 본보기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 앞
에서는 선하게 행동하고 선한 말을 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중심을 보시기에
외식하는 자들의 마음과 생각을 심판날에 남김없이 드러내실 것이다(마 12:36, 37).
그날이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헤메라'( )는 문장 맨 앞에
위치하여 강조적으로 사용되었다. 바티칸 사본(B;codex Vaticanus)에서는 정관사 ‘헤’
( )가 표기되어 있는데 문법상으로는 맞는 듯하다. 그러나 이처럼 정관사를 생략하는
것은 바울의 서술 방법 중 하나이다(12절). 더욱이 5절에서 ‘그날’에 대해 언급하면서
정관사를 사용했기 때문에 굳이 이를 사용하지 않아도 의미가 통하고 본절에서는 내용
자체가 마지막 심판 날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으므로 생략한 것 같다.
=====2:17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으나 본절 첫머리에 ‘이데'( , ‘보라’), 혹은
‘에이 데'( , ‘그러나 만약’)가 있다. 흠정역(KJV)이 번역한 공인 본문
(Textus Receptus)은 전자를 취하지만, 대부분의 사본들과 비교적 오래된 사본들( ,
A, B, D, K, )은 후자를 취하였다. ‘에이 데’는 직설법과 함께 사용되어 실제로 발
생될 수 있는 상태를 가정하는 조건절을 갖는다. 따라서 본절의 ‘에이'( , ‘만약’)
는 20절까지 조건문으로 취한다.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 ‘칭하는’의 헬라어 ‘에포노마제'( )
는 ‘이름을 붙이다’ 또는 ‘칭함을 받다’라는 뜻을 가진 ‘에포노마조'(
)의 현재 조건문으로 그 의미는 ‘유대인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이다.
여기서 ‘유대인'( , 유다이오스)은 ‘히브리인'( , 헤브
라이오스)이나 ‘이스라엘인'( , 이스라엘리터스)이라는 용어와 구
별된다. 히브리인이라는 호칭은 언어 군(群)의 개념을 강조하고 있고, 이스라엘인이라
는 호칭은 구속사적인 개념을 강조하는데, 유대인이라는 호칭은 헬라인이나 이방인들
과 상대되는 개념으로서 모세 율법을 중심으로 형성된 종교 공동체로서의 특성을 반영
한다.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 유대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부여받은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 특권을 자랑할 뿐 아니라 그 특권을 받지 못한 이
방인들을 경멸하기도 했다. 이러한 우월감이 하나님께 감사하며 순종함으로 나타났으
면 하나님께 칭찬을 받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나, 그들은 특권만을 중요하게 여기며 그
에 따르는 책임을 무시했다. 그들은 제사장 나라에 걸맞는 거룩한 백성으로서의(출
19:6) 특권을 유지하려면 ‘언약을 지켜야 할'(출 19:5) 책임이 있음을 무시했다. 그들
은 율법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자랑한다고 내세웠으나 실상은 율법의 요구에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하면서 그들이 부여받은 특권만을 자랑스럽게 여겼던
것이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모습은 세례 요한의 책망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마 3:9).
=====2:18
본절에서는 유대인들이 율법을 통해서 얻게 된 유익이 언급되어 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길은 하나님께서
친히 계시해 주셔야만 가능하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해
서 여러 모양으로 계시하셨기에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 달리 하나님의 뜻을 아는 백성
이 되었다. ‘하나님의 뜻’은 구체적으로 ‘구원 계시’를 가리키지만 좀더 폭넓게 하나
님의 섭리까지도 포괄할 수 있는 용어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구원 계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를 통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계시된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생활
이 요청된다.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 본 구절에 대해서는 해석자들마다 약간씩 견해가
다르다. 예를 들어 틴델(Tyndale)은 ‘선악에 대한 경험을 가지는 것’으로 해석하며,
모펫(Moffat)은 ‘종교에 있어서 생동력있는 것에 대한 의식을 가지는 것’으로 해석하
기도 한다. 또한 영역 성경중에서 이 구절을 ‘도덕적인 구분에 대한 지식을 가지는
것’으로 번역하기도 한다(NEB). 이러한 해석상의 어려움을 피하기 위해 칼빈(Calvin)
은 선한 것을 받아들이는 것과 선악을 구별하는 것을 동시에 인정한다. 이러한 해석은
메튜 헨리(Mattew Henry)같은 주석가도 동의한다. 그렇지만 본문이 뜻하는 바는 칼빈
의 첫번째 견해에 더 접근해 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본절은 유대인들이 단순히
선악간에 판단한다기 보다는 율법의 선한 교훈을 인정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통해 선한 것을 인정한다는 사실은 그 선을 옳은 원리로 받아들였
다는 의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믿음으로 율법에 따르는 선한 삶을 살
지 않은 어리석음을 저질렀다. 이러한 어리석음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
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한'(1:21) 이방인들의 어리석음과 동일하다.
=====2:19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 본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본문을
부산 구문의 형식으로, 직역하면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양을 가지고서’가 된
다. 이에 대해 칼빈(Calvin)은 이유를 나타내는 분사 구문으로 이해하여 ‘지식과 진리
의 모양을 가지고 있으므로’라고 해석했다. 그리고 영역 성경 중에서도 이 구절을 이
유를 나타내는 접속사(because)를 사용하여 번역했다(NIV). 이러한 해석은 본문의 흐
름상 적합하다고 본다. 한편 ‘지식’과 ‘진리’는 특별한 의미상의 구별 없이 중복어법
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한다(Black). 그리고 ‘규모’에 해당하는 헬라어 ‘모르
포시스'( )는 ‘모양’이나 ‘외모’를 뜻하지만 외적인 모양만을 가
리키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참된 표현’을 의미하기도 한다(Barmby). 그래서 혹자는
‘모르포시스’를 ‘본질'( , 휘포스타시스)과 같은 의미로 해석하기도
했다(Black). 간혹 학자들 중에는 ‘모르포시스’를 유대인들의 ‘외식’과 같이 ‘과장된
외형'(Calvin)이나 ‘경건이 없는 겉 모양'(Matthew Henry)으로 이해하기도 하나 이러
한 해석은 본문의 성격상 적합하지 않다. 본문에서는 유대인이 율법을 통해 가진 지식
이나 진리가 거짓되다든지 알맹이가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유대인들이 율법을 통한
참된 지식의 본질을 소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Murray, Barmby) 그 지식을 좇지 않
고 자기 임의대로 행하는 것을 책망하는데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 – 성경에서 소경과 어두움에 있
는 자는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눈이 먼 상태에 있다는
것은 어둠 가운데서 헤매이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사 42:19;56:10;마 6:23;요
1:5;고후 4:4;요일 2:11). 여기서도 바울은 역시 중복어법을 사용하여 자신이 전하고
자 하는 메시지의 내용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어두움에 있는 자들의 빛’이라는 표현
은 이방인을 향한 유대인들의 사명을 시사한다. 유대인들은 토라를 자기의 등불이라고
생각한 것처럼 토라를 소유한 자신들이 이방인들에게 등불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
지고 있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사명마저도 자신들의 특권을 자랑하는 도구로 삼
고 말았다. 오늘날 성도들도 ‘주의 말씀은 내발에 등’이라고(시 169:105) 고백하면서
빛된 삶을 살지 못한다면 유대인들처럼 말씀을 가졌다는 것만으로 자랑하려 하는 잘못
을 범하는 것이다.
=====2:20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아이의 선생 – 영적으로 ‘이리석은 자’와 ‘어린아이’는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어린아이’가 영적인 의미에서 상징하는 바가 ‘연약한 존
재'(고전 14:20;엡 4:14) 또는 ‘어리석은 존재'(잠 22:15)로 나타난 점으로 미루어 보
아 본 구절도 앞절과 마찬가지로 중복어법에 의한 강조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다. 한편
‘훈도’란 용어는 헬라어 ‘파이듀테스'( )로 보통 ‘선생’으로 번역되
는 헬라어 ‘디다스칼로스'( )와 동일한 의미를 지니지만, 좁은 의
미에서 ‘파이듀테스’는 잘못을 범할 때 채찍질도 가하는 ‘엄한 선생’을 가리킨다.
스스로 믿으니 –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결정적인 잘못은 특권을 부여받은 자들이라
는 자기 만족에 빠져 있었다는 사실이다. 부울은 갈라디아서에서도 유사한 표현을 사
용하고 있는데(갈 6:3, 4) 본절과 같이 행함 없는 자랑을 위선이라고 폭로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갖지 못한 특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 특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 특권으로 말미암아 더 큰 행악에 빠지게 된 것이다. 그들은 자기
의 신념을 신뢰하였을 뿐만 아니라 부패한 인간의 도덕적 무능력에 지나친 기대를 가
짐으로 인하여 아무것도 아닌 초라한 가운데서 자신을 속이는 잘못을 범하였다. 또한
율법주의자들은 그 이웃들에게 자신도 질 수 없는 무거운 짐들을 지우는 반율법적인
잘못을 범하였으며 더 나아가 그들의 신념은 자신을 속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만
홀히 여기는 결과를 초래함으로 인하여 스스로 하나님의 징계를 초래하고 말았다.
=====2:21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 이 질문은 유대인들
의 형식적인 삶에 대하여 다음에 계속되는 네 가지 질문을 유도하기 위한 대표적인 의
문문이다. 그리고 이 질문은 유대 랍비들의 문헌에서 자주 발견되고 있다
(Hendriksen). 유대교 지도자들은 자신들만이 율법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
며 진리를 알고 있다고 자부했고(요 9:34), 이 점은 주님께서도 인정해 주신 바 있다
(ak 23:3). 그들에게 있어서 문제는 자기들이 가르치는 바를 자신들은 지키지 않으면
서 의로운 체 하는 그들의 외식이었다(마 23:23-28). 이러한 의미에서 유대교 지도자
들은 여호와 신앙을 형식적인 종교로 전락시킨 책임을 면할 수 없다. 그들은 입술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행동으로는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처럼 나타내 보이지만, 실상
그들의 심령은 전혀 하나님과 무관하며 단순히 형식적이고 외면적인 종교 지도자에 불
과했다.
=====2:22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 ‘간음’에 해당하는 헬라어 ‘모이큐오'(
)는 히브리적 표현에서 ‘영적 간음’이나 ‘우상 숭배’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기
도 하였으나(계 2:22) 본절에서는 우상 숭배를 따로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영적
간음’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바울은 의도적이며 구체적인
사실을 선명하게 표현하면서 그들 가운데서 실제로 행해지고 있는 온갖 음행과 간통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율법주의자들은 가장 엄격한 율법을 종교의 원리로 삼고 있었
지만, 그들의 도덕적 기준은 여전히 부패한 인간 본성의 심연에 머물러 있었다.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하느냐 – 앞에서 언급된 ‘도적질’과
‘간음’이란 용어를 비추어 볼 때 바울은 십계명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유
대인은 십계명에 따라 우상을 가증스럽게 여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이나 우상을 위해 만들어진 것을 탐내어 도적질했다. 신사(神社) 물건을
도적질 한 것이 악행인가에 대해서 성경이 명백히 가르치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따지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본절에서 바울은 그러한 행위가 죄인지 죄가 아닌
지에 대해서 논하고자 이 질문을 내놓은 것이 아니라 가증스러이 여기는 우상 제물을
탐낸, 우상 숭배 이상의 죄악을 폭로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신명기에서는 이 문제
를 암시적으로보여주면서 그 행위가 죄가 된다고 교훈하고 있다. 즉 신명기는 우상들
에 입힌 은이나 금을 탐내어 취하지 말라는 말씀과 함께 그 금지의 이유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일로 인해 올무에 빠질 것이 염려되기 때문인 것을 들고 있다(신 7:25).
=====2:23
학자들 사이에는 본절을 의문문으로 해석하느냐 평서문으로 해석하느냐에 대한 의
견이 분분하다. 평서문을 주장하는 학자들(Cranfield)은 24절에서 헬라어 원문상 24절
에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가르'( )가 사용되고 있으므로 본절은 그 접속사를
유도할 만한 이유를 묻는 의문문이 되든지 아니면 그 이유를 유도해 내는 평서문이 되
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본절은 이유를 묻는 의문문의 성격을 띠지 않았으므로
이유를 유도해 내거나 확정을 나타내는 평서문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게 생각할 근거는 본문 가운데서 발견할 수 없다. 오히려 24절의 접속사 ‘가르’
( )는 21절에서 23절까지에 언급된 다섯 가지 질문을 하게 된 근거를 설명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본절은 내용상 앞에서 언급된 네 가지 질문의 형식과 잘 부
합될 뿐 아니라 특히 21절에 언급된 첫번째 질문을 보다 구체화시켜 대비적으로 표현
한 것이다. 그러면서 그 나머지 세 가지 질문을 요약한 질문도 된다. 따라서 본절은
의문문으로 해석하는 편이 본문 이해에 더욱 도움이 된다.
율법을 범함으로 – 이말은 유대인들이 범한 잘못들(22, 23절)이 곧 율법을 범한 행
위임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21절에서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는 질문의
내용이 율법을 범하고 있는 사실에 대한 것임도 본절에 잘 나타나고 있다.
=====2:24
기록된 바와 같이 – 이 표현은 본절이 사 52:5의 인용구임을 시사해 준다. 이렇게
함으로써 바울은 이사야 선지자의 권위를 내세우는 동시에 자신의 논리를 더욱 확고히
정당화시킬 수 있게 되었다. 비록 바울이 이사야 선지자의 직접적인 선포를 간접적인
내용으로 변형시켰으나 내용상으로는 동일한 의미를 유지하고 있다.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 당시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을 마치 하나님과 동일한 인격을 소유한 거룩한 백성인 양 취급했다. 그것은
실제로 그들의 삶이 고상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들의 지나친 자랑에 이방인들이 속
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방인들이 바울이 고발한 것과 같은 유대인의 범죄함을 발견
한다면 유대인들은 스스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도구가 되고 말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
한다고 말하는 자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하는 자들임을 바울은 분명하게 밝
히고 있다(J. Murray).
=====2:25
네가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나 – 바울은 유대인들의 가장 큰 자랑거리인 율
법과 함께 또 다른 자랑거리인 할례의 문제로 주의를 환기시키면서 자신이 의도한 복
음의 본질에 한 걸음 더 접근하고 있다. 유대인을 이방인과 구별시키는 유일한 기준은
율법이지만 표식은 할례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지금까지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들
어 논리를 전개해 왔지만, 이제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의 자랑거리요 표식인 할례
문제를 거론함으로써 더욱더 유대인들이 변명할 수 없도록 만들고 있다. 여기서 ‘율법
을 행한다’는 것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을 좇는 것으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하나님의 편에 서 있을 때 유대인들의 할례가 그진가를 발휘할 수 있는 것
이지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형식적인 할례 의식에 그치며 이는 그들을 아브라함의 자
손으로 계속 유지시킬 수 있는 신적인 힘을 상실케 하고 만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바
리새인과 사두개인에게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하나님이
능히 이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마 3:9)고 경고했던 것이다.
네 할 례가 무할례가 되었느니라 – 유대인들은 할례 자체가 의의 조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조건, 구원의 조건이 되는 것으로 오해했다. 실제로 유대교의 전승에 따
르면 ‘게헨나(지옥) 문 옆에 앉았을지라도 할례받은 사람은 아무도 지옥에 떨어지지
않도록 아브라함이 책임을 져 준다’는 내용의 교훈이 있다(Harrison). 이와 같이 유대
인들 사이에서는 할 례가 다른 어떤 의식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바울이 형식적인 유대인들의 할례는 무할례와 같다고 선포한 것은 혁명적인 선언
이었다. 이러한 바울의 선포로 인해 유대인의 자랑은 쓸모없는 것으로 변하게 되며 형
식적인 신앙에서 실제적인 신앙으로의 결단이 요구되고 있다.
로마서 강해 2장 – 조정민, 유기성, 박한수, 유진소 목사
성서QT 로마서 강해 2장 – 조정민, 유기성, 박한수, 유진소 목사 TourLove77 ・ URL 복사 본문 기타 기능 공유하기 신고하기 참고로 아래 프스팅은 목사님들의 설교 말씀을 간추려 정리한 워딩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에 붙들린 사람이다. 복음의 능력, 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의지, 그런 것들을 너무나 절절히 깨달았기 때문에 그 자신이 온전히 변화된 삶을 살기 시작한 사람이다. 그는 복음의 능력에 붙들린 사람이다. 그런데 이 복음이 누구에게 필요한 것인가다. 물론 복음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게 필요하다. 불신자에게, 교회 안다니는 사람에게 물론 필요하다. 그러면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어떠한가? 남을 판단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인가? 남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인가? 오늘 사도 바울은 1절에서 그야말로 법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 무법한 사람들, 불법에 치우친 사람들, 그야말로 막 사는 사람들에 대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쌓고, 심판이 임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러면 그들을 비판하는 사람, 그들을 판단하는 사람, 사사건건 그들과 자신을 비교하는 사람, 그래서 내가 마치 도덕적 우위에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을 한 번 다시 보자는 그 얘기다. 바울이 이런 얘기를 로마에 있는 교회에 하는 까닭은, 교회가 자칫하면 사실은 그런 판단하는 자의 입장에 서기 때문이다. 우리는 죄와 간음, 살인, 사기, 도둑, 뭐 이런 것들에 집중하게 되지만, 우리가 죄의 뿌리로 들어가면 판단하는 것, 선과 악을 판단하는 것, 내 기준에서 판단하는 것, 그거야 말로 죄 중에 죄악이요, 모든 죄의 뿌리가 되는 죄인데, 우리가 그런 죄의 뿌리에 닿아있으면서도 그 자신의 죄를 들여다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기 때문에 한 번 보자는 것이다. 오늘날 대표적인 사람들이 종교인들이고, 법조인, 언론인, 정치인들이다. 남을 판단하는 사람, 사사건건 시비하는 사람, 옭고 그름을 날마다 문제 삼는 사람, 그런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인가, 사실 그 부분에 관해서 아주 냉철하고 통찰력있는 사도 바울의 지적이다. 남을 판단하는 사람, 비판하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2장 1절을 보자 [로마서] 2장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원칙 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2.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네가 판단하고 있지만 사실은 네 판단의 기준으로 너는 네 자신을 옭아매고 있구나. 너도 그런 일 하지 않느냐는 그런 얘기다. 도덕적으로 비난을 일삼는 사람들을 보면 놀랍게도 어느 날 그가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 만천하에 드러내게 된다. 바울 자신이 얼마나 남을 비판했으면, 얼마나 남의 신앙을 정죄했으면, 얼마나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증오감을 품었으면, 그렇게 스데반을 돌로 쳐죽일 때 현장에서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앉아 있었을까? 비을 그 자신이 그런 삶을 살았기에, 남을 판단하는 사람들아, 남을 정죄하는 사람들아, 너는 그 판단과 정죄의 기준으로 너는 동일한 일을 하고 있지 않느냐는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이다. 누군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판단하는 사람들 목에는 반드시 녹음기를 걸어놔야 한다고. 비판하는 사람들 목애는 반드시 녹음기를 걸어놓아 가지고 MP3 파일을 만들어서 다시 들려줘야 된다. 그게 너가 남을 향해서 비판하고 비난하는 것이지만, 그 소리는 녹음해서 꼭 네가 들어야 할 소리다 그런 이야기다. 어쩌면 오늘날 목사들에게도 동일한 이야기를 할 것이다. 너 지금 설교하는 그 설교 녹음해서 너부터 들어야 된다고. 크리스천들이 지금 너희들이 뭐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 모든 말씀을 우리가 먼저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남보다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기도하는지 말씀에서 살펴보자. 누가복음 18장 9~14절~14절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 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 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 세리는 유대인들이 다 결멸하고 꼴도 보기 싫어하는 자들, 반역자들, 매국노 취급하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문제는 바리새인들의 기도의 기본 태도가 어떠한가 이다. ‘나는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십일조 내고, 불의를 범한 적이 없습니다. 나는 저 세리처럼 창녀처럼 살지 않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기도를 드리는데 세리는 와서 고개도 못들고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드리자 하나님께서는 세리를 더 의롭다고 하셨다. 주님께서 이런 말씀하시기 전에 산상수훈에서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는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마 7:1~2 ) 란 말씀을 하셨다. 이어서 주님께서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제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어라’ (마 7:3~5) 고 말씀하셨다. 지금 세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든 고민은 이런 것이다. 불의가 만연하고 있다. 그럼 이 불의를 보고 침묵해야 되는가? 이 불법적이고 폭력적인 세상을 바라보고 우리는 그냥 잠잠히 기도만 하고, 골방에 앉아서 그냥 주여 주여 부르짖기만 하면 되는가? 그래서 기도만 하는 복음주의자들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다. 불의를 보고 침묵하는 종교는 필요없다고. 교황이 직접 그런 얘기를 했다. 맞는 얘기다. 우리는 어떻게 살라는 것인가? 우리는 어떻게 해야하나? 침묵해야 하는지, 불의를 보고 우리도 날카롭게 비판해야 하는지, 우리는 사실 현실적으로 이런 문제 속에서 늘 갈등을 겪고 있다. 사도 바울은 이 점에 대해서 분명한 답을 주고 있지 않다. 전체적인 맥락에서 우리가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 복음을 얘기하기 위해서 이런 주제를 들고 나온 것이다. 그러면 복음은 도덕주의자들한테는 필요가 없는지, 비판적인 도덕론자들은 구원 안받아도 되는지, 남을 비판하면 본인은 의로워지는 것인지, 비판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의로운지, 이런 난제를 우리에게 던지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지만은 하려거든 먼저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빼내고, 그래야 네 눈이 밝아져서 정말로 옳은 기준을 가지고 남의 티를 빼지 않겠느냐는 이야기를 하시는 거다. 그래서 우리가 불의를 보고 먼저 점검해야 될 것은 뭔가? 우리 자신을 점검해야 되는 것이다. 신앙이란 항상 내게 초점을 맞누는 일이다. 세상은 항상 남을 손가락질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손가락질 하나를 할 때 남을 향한 한 손가락 보다는 나를 향한 이 세 손가락을 유심히 보라는 것이다. 남의 죄는 손바닥만하겠지만 내 죄는 그야말로 보자기만할 수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늘 내면 삶에, 나의 내면에 초점을 맞춰야 된다는 것이다. 내 속을 깨끗하게 하고 나면 남의 허물을 비판한 사람이라도 그 허물을 가려주는 사람이 된다. 그 허물을 대신하는 사람이 된다. 그 허물을 치워주는 사람이 된다. [로마서] 2장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원칙 3.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4.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네가 자꾸 비판하고 판단하면 하나님께서 너를 그렇게 오랬동안 견디고 참아주고 용납한 것을 멸시하는 거냐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을 경멸하는 사람, 하나님을 무시하는 사람,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의 전유물이 남을 비판하고 욕하고 미워하는 일이다. 사도 바울은 5절 이하에서 경고한다 [로마서] 2장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원칙 5.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6.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그래서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대로 보응하신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그대로 보응하신다는 내용은 시편 62편 12절 ‘주여 인자함은 주께 속하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대로 갚으심이니이다’ 주님이 인자하시기 때문에 오래 참고 기다리신다. 그러나 각 사람이 행한대로 반드시 갚아 주신다는 거다. 보응하신다는 거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 잠언 24장 12절 ‘네가 말하기를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하였노라 할지라도 마음을 저울질 하시는 이가 어찌 통찰하지 못하시겠으며 네 영혼을 지키시는 이가 어찌 알지 못하시겠느냐 그가 각 사람의 행위대로 보응하시리라’ 하나님은 비판하는 우리 입술을 보고 있지 않고, 비판하는 우리 안의 내면을 불꽃갗이 보고 계신다. 너 왜 비판하는데, 너 왜 그 사람에게 화를 내는데, 너 무엇때문에 그 사람 욕하는데, 우리 중심을 그렇게 보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중심에 따라서 갚아주신다고 말씀하신다. [로마서] 2장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원칙 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8.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 세상은 결코 비판으로 깨끗해 지지 않는다. 세상은 결코 비난하는 자들 때문에 개혁되지 않는다. 누군가 그 허물을 보고 내가 가려주는 사람, 내가 덮어주는 사람, 내가 빗자루를 들지 않으면 이 세상이 깨끗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 세상은 몽둥이 든 사람들이 세상 천지다. 그래서 오늘 그 몽둥이를 든 비판적인 도덕론자들을 향해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너 진짜 큰 일 났구나, 구원받아야 되겠다.’ 그 사람에게 시급한 것은 구원이라는 것이다. 그 사람에게도 가장 절실한 것이 복음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 복음에 빚진 자 되어서 우리가 몽둥이 들고 설치는 사람들의 대열에 합류할 것이 아니라, 그냥 조용히 빗자루 들고 내가 남이 어질러 놓은 것, 남이 더렵혀 놓은 것 그냥 치우는 자가 되기를 바란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어떤 마음의 중심과 동기를 가지고 이런 행위들을 하고 있는지, 낱낱이 그 중심과 동기를 다 알고 계신다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실 때 그 동기를 다 아시기 때문에, 그 동기와 그 동기에서 비롯된 행위들에 보응하는 심판을 하신다고 한다. 우리는 날마다 구원과 심판의 갈림길에서 우리의 행위들로 그 모든 것을 축적하고 있는 셈이다.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요, 마지막에는 심판이 있으리라고 말씀했던 것처럼, 우리는 날마다 그 마지막을 향해서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정말 까마득히 잊어버리거나 애써 그걸 잊으려고, 망각하려고 애쓰지 않는다면, 우리가 깨어 있다면, 우리가 날마다 어떤 길을 걷고 있는지 왜 모르겠는가? 우리가 날마다 걷고 있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영생의 걸음이 될 것인지, 사망의 걸음이 될 것인지, 그걸 날마다 분별하면서 가야한다. 정신없이 달려가다 보니까 이게 아니네 식으로, 이렇게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그냥 떠내려 가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날마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급하고 중요한 것 같아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미 무엇이 중요한 지, 뭐가 더 급한 것인 지, 무엇이 더 먼저 해야할 일인 지를 다 우리에게 알려 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이 중요하다고 규정하는 것들을 따라가서는 안된다. 세상 사람들이 급하다, 이게 급하다, 이게 다급하다라고 말하는 기준을 받아들여서 거길 정신 없이 따라가서는 안된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먼저 할 일, 먼저 하라고 다 가르쳐 주셨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그 모든 것을 더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먼저 남을 비판하기 전에, 먼저 남의 눈에 티를 빼내기 전에, 먼저 너는 네 눈의 들보를 살피고 그 들보를 빼내야 밝히 이 모든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해주셨다. 우리는 예배드리는 게 너무 중요하고, 교회 다니는 게 너무 중요하고, 내 믿음을 지키는 게 너무 중요할 지 모르겠지만 하나님께서는 먼저 가서 너는 형제와 화해하고 오라고 하신다. 형제와의 화해는 나중에 해도 되고 먼저 예배를 잘 드려야 된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아니 이게 먼저가 아니라 네가 네 가까이 있는 형제들과 이웃들과 화평케 지내고 화목한 후 그렇게 오는 것이 먼저라고 하신다. 그러니 네가 예물을 가지고 예배지로 나오는 것보다, 그게(화해가) 먼저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서는 다 그 우선 순위를, 분명한 삶의 중요도를 말씀해 주셨다는 것이다. 그런 것들이 사실은 율법이 우리에게 그 모든 것을 가르쳐 주셨시만, 지금 사도 바울은 율법 있는 자들과 율법 없는 자들에게 동일한 기준이 하나님께서 적용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율법을 아는 사람들은 율법이 기준이 될 것이고, 율법이 없는 사람들, 율법을 모르는 사람들, 하나님 말씀을 모르는 사람들, 교회 안다니는 사람들, 그 사람들에게도 하나님께서는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실 것인데, 그 것이 우리가 익히 아는 양심이라는 것이다. [로마서] 2장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원칙 9.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10.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 11.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 주님께서는 우리가 선한 일을 행하는 자와 악한 일을 행하는 자가 어디로 각자 걸어가고 있는 지를 미리 다 말씀해 주셨다. 사도 바울이 무슨 색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요한복음 5장 29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우리는 죽음이 끝이 아니다. 누구나 죽겠지만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게 우리는 다 알고 가는 길이다. 사탄은 늘 이렇게 속삭인다. ‘야 뭐 별 거 있어 죽은 뒤에 뭐가 있어, 죽으면 끝이지, 그러니 마음대로 살아. 기회는 한 번인데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려므나’ 이런 속삭임을 듣기야 하겠지만,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길을 날마다 걷느냐에 따라서 ‘생명의 부활의 길’을 갈 것이냐, 죽음의 심판의 길’로 갈 것이냐고 선택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악을 행함으로써 심판의 부활로 나가는 사람들은 환난과 곤고가 일을 것인데 먼저는 유대인이고 다음은 헬라인에게라고 말씀하신다. 왜 유대인이 중요한가? 메시아가 그 계보에서 태어났다. 그들에게 먼저 율법이 맡겨졌다. 먼저 말씀이 주어졌다. 그래서 말씀을 안다는 것은 엄청난 특권이자 엄청난 책임이다. 모르면 차라리 좋았을텐데 말씀을 들었기 때문에 무거운 책임과 함께 특권을 함께 받은 것이다. 살다보면 이 두 가지가 함께 붙어다니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는 한 면만 이야기하면 안된다. 구원만 이야기하면 안된다. 구원은 심판과 동전의 앞뒷면이다. 심판도 구원의 일부이고, 심판도 복음의 한 일부라는 것을 잊어버리게 되면, 구원받았기 때문에 심판과는 상관없이 살 거라는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한 번 구원받으면 따놓은 당상인데 이제 뭐 어떻게 살던 심판과는 상관 없지 뭐’. ‘아니다’. 우리는 날마다 ‘영생의 길’로 걸어가지 않으면 안되고, 본인이 딴 길로 가고 있으면서도 구원의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보응에 관한 이야기를 했었고, 각 사람이 자기가 행한대로 보응받는 것이 구원의 조건은 아니지만, 그러나 각 사람의 행함은 구원을 이루고 구원을 증거하는 것으로 하나님은 그것을 기준으로 삼는 잣대임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가 선행을 해서 구원받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구원을 위해 제대로 지키고 있냐 않냐, 구원의 길로 가고 있냐 않냐 이건 우리의 행위로 드러난다. 그래서 그 행위로 보응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 앞에 설 수 있겠지만, 주님 앞에 서서 상급이 있는 사람도 있고, 상급이 없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어느 목사님이 본인은 잘 사는 줄 알았는데 사모님이 밤에 화들짝 놀라 깨더니 ‘여보 큰 일 났어. 주님을 만났는데 당신이 주님 앞에서 아무런 상급이 없데, 왜? 여기서 다 받았다네.’ 우리가 여기서 상급을 다 찾아 먹으면 나중에 받을 게 없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은밀히 교제하고 계산하는 게 있어야 한다. 사람한테 다 알아주면 사람이 다 알아줬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중계산서를 발급하지 않는다. 참고로 조정민 목사님의 말씀 중 ‘구원의 길로 가고 있냐 않냐 이건 우리의 행위로 드러난다’에서 이 ‘행위’에 대해 덧붙이자면 바울 서신, 특히 로마서의 중점은 ‘믿음’으로 인한 ‘구원’에 가 있다. 그러나 야고보서의 중점은 ‘성화’에 있다. 즉 야고보서는 구원받은 자로서 어떻게 거룩하게 살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야고보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며 ‘행위’를 강조하고 있고, 그 행위는 구원을 받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 ‘구원 받은 자로써의 행위’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로마서는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야고보서는 ‘구원을 받은 자로서 어떻게 거룩하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조첨이 맞춰져 있다. 즉 야고보서는 ‘구원받은 우리가 구원받은 자로서 참다운 신앙의 사람이 되어야 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므로 야고보서 2장 26절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는 말씀을 행위구원이라고 치부하고 배척하는 것은 잘못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야고보서는 참 신앙을 추구하는 하나님의 뜻이 그대로 잘 담겨 있는 서신임을 바로 알고서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그런 헛되고 죄악스러운 잘못된 구원관에서 속히 벗어나야 할 것이다. 왜 신앙은 자꾸 은밀한 부분을 말하는가? 신앙은 우리 마음 속에 있는 것들을 이야기한다. 왜 사람들에게 드러내려고 하지 말라고 하는가? 왜 오른 손이 한 일을 왼 손 모르게 하라고 말하는가? 왜 하나님과의 그런 비밀스러운 관계를 원하시는가? 우리가 자꾸 사람들을 의식하고, 사람들에게 평가받고, 사람들한테 인정받기만을 갈망한다면, 그래서 사람들이 알아주고 인정하고 평가해주고 칭찬해주고 그렇게 끝나버린다면 하나님께서 대체 할 게 뭐 있겠는가? 세상 사람들은 보이는 게 전부지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게 전부이다. 보이는 건 잠깐이다.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을 거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외모보다 우리의 중심, 우리의 겉보다는 우리의 속, 안을 보신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간다, 신앙이 점점 성숙해져 간다는 것은 점점 우리의 속안을 들여다본다는 뜻이다. 점점 사람들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점점 나를 들여다 보는 것이 신앙의 길이다. 사람들의 죄에 민감한 것보다도 훨씬 내 안에 있는 죄에 민감해지기 때문에 문제의 발단이 나한테 있다는 것까지 이르게 된다. 그래서 한 때 카톨릭에서 부르짖었던 ‘내 탓이오’란 구호가 모든 문제가 나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깨닫게 되는, 여기까지 이르는 것이 우리가 신앙에 눈 뜨는 과정이다. 성숙이란 문제를 파악해 문제의 원인을 밖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나한테서 찾는 것이다. [로마서] 2장 유대인과 율법 12.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13.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나 죄인이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 이렇게 표현한 것이지만, 율법 없이 범죄한 자가 있고, 율법을 있으면서도 범죄한 자가 있다고 말슴하시는 것이다. 말씀을 모르고 죄짓고 사는 사람하고, 말씀을 알고 죄짓는 사람이 있다면 누가 더 나쁜가? 하나님 앞에서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함을 받는다. 목사가 말씀을 전하면서 그 말씀하고 상관 없이 산다면 그 목사는 의로운가? 우리가 말씀을 듣고서, 들은 말씀과 상관없이 산다면 우리는 무슨 의롭다함을 얻겠는가? 그 율법을 듣고 안듣고가 중요하지만, 그 율법대로 사느냐 않느냐, 율법을 행하느냐 안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그래서 우리가 말씀을 아는 것, 읽는 것, 암송하는 것, 묵상하는 것 등은 다 좋지만, 그 말씀이 내 삶의 일부가 되지 않으면, 그렇게 삶을 살아내지 않으면 그 때문에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율법을 모르는 사람들은 어떻게 율법대로 살아가며, 하나님을 모르는데 하나님의 기준에 어떻게 합당하게 살아갈 수 있으며, 그 사람들은 왜 심판을 받아야 하는가? [로마서] 2장 유대인과 율법 14.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15.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이방인이 가진 본성, 이 본성이란 무엇인가? 율법 없는 이방인들이 율법의 일을 행하게 하는 수단과 방법이라는 것이다. 말씀을 모르는 사람들이 마치 말씀을 아는 사람처럼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그 수단과 방법의 본성을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거다. 이 본성은 곧 ‘양심’과 같은 말이다. 그래서 어느 인류 문화권의 어느 곳에서나 사람을 죽이는 것은 죄라고 말하는 것이다. 물론 식인종이 있지만, 식인종도 먹을만큼 이상 잡으면 죄라고 한다. 왜 우리에게 죄의식이나 죄책감이 있는 것일까? 그게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본성이라는 것이다. 본성이라는 게 있기 때문에, 율법을 모른다고 하더라도, 성경이 없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율법은 없지만 성경은 비록 주어지지 않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알고 분별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본성을 주셨기 때문에 그것이 그 사람에게는 심판과 구원의 방도가 된다는 것이다. 종교심, 종교성을 하나님께서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종교심이 병들어 버리면 우리의 양심보다 더 못한 것으로 되고 만다. 주님께서 오셔서 바리새인들과 율법을 아는 사람들을 그렇게 나무라신 것도 이 때문이다. 그 율법이 선한 양심의 기능도 못하고, 어쩌면 더욱 더 자기를 드러내는 수단으로 삼고, 또한 남다른 구제를 하고 남다른 금식을 하고 남다른 기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예수님의 야단을 많이 맞은 까닭은 그게(율법이) 양심만도 못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는 것을 주님께서 깨우쳐 주신 것이다. 너희들의 종교심은, 너희들의 종교성은 참된 영성의 걸림돌이다. 이것이 예수님이 그 땅에 오신 이유이고, 유대인들을 나무라신 이유이고, 특별히 대제사장이나 종교인들, 종교전문가들을 그토록 혹독하게 가차 없이 비난한 이유였다. 어쩌면 그 종교성 때문에 양심이 더 무더진 사람들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런 결론을 맺는다. [로마서] 2장 유대인과 율법 16. 곧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보응을 모르는 사람들은, 율법을 모르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도 모르고, 성경도 없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나님을 알만한 양심, 그 마음판에 ‘양심’이라는 것을 둠으로써 생각을 제어할 수 있고, 욕망과 탐욕으로부터 콘트롤할 수 있는 그런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 섭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게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주님이 오신 것이다. 그것이 제대로 작동하면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사도 바울은 ‘나의 복음’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이지 그의 복음이 아니다. ‘구원의 복음’이다. 그렇게 사도 바울처럼 나의 복음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그런 나의 복음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논거를 가차없이 펼칠 수 있는 것이다. 내 양심을 넘어서는 것, 그 양심이라는 것들이 나중에 보면 한낱 쓰레기같다는 것도 알게 된다. 하나님의 기준, 투명한 기준, 햇볕 안에 끌고 나갔더니 그것도 다 덕지덕지 땜질한 것임을 우리가 알지만, 그랬을 때 우리는 그 인간의 양심조차도 얼마나 병 들었고, 얼마나 추악해 졌는지 우리가 깨닫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의인은 없으되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그런 고백에 까지 이르게 되지만, 그러나 어쨋든 우리는 이 복음과 같지 않으면, 나의 구원에 대한 복음, 그 복음에 대한 열정과 확신이 없으면 우리는 다른 일반인들과 다를 바 없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한다. 베드로전서 3장 15~17절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의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함이라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리라’ 양심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고난 받는다. 복음 가지고 사는 사람들도 고난 받는다. 그러나 우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 복음으로 살아야 한다. 복음으로 사는 일과 선한 양심으로 사는 일은 둘이 아니다. 그리고 선을 행함으로써 고난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한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실상 모습을 낱낱이 고발하듯 그 죄성을 열거하듯 우리에게 보여준다. 도대체 하나님을 거부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어떠하냐를 일목요언하게 보여준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사람들을 비판하는 그런 비판적인 도덕주의자들은 어떻냐는 것이다. 나는 법 없이도 산다, 나처럼만 살아봐라,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실상 어떻냐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실상을 낱낱이 드러내 보여주는 사람들은 바로 종교인들이다. 종교전문가들이다. 유대인들이다. 이 세상에 유대인처럼 종교적인 사람들은 없다. 어쩌면 그렇게 4000년동안 변함없이 살 수 있는가? 얼마나 놀라운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그런데 뭐가 문제인가? 세상에 어느 나라 민족이 그렇게 4000년간 동일한 복장으로, 동일한 토라를 가지고, 동일한 믿음을 지켜나갈 수 있는가? 그런데 그 종교심, 그 종교성, 그 놀라운 자세가 어떤 것이냐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2장 17절 이하에서 펼쳐 보여준다. 이는 유대인의 죄가 아니다, 유대인들의 잘못이 아니다. 유대인들에 대해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에서 너희들이 ‘자칭 유대인이라고 하는 너희들은 사탄의 회’다라고 말한다. 어떻게 유대인에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성경을 통해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사탄이 세상을 지배하는 수단은 두 가지라는 걸 알게 된다. 크게는 정치요, 또 다른 하나는 종교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가장 종교적인 백성들 틈에서 그 종교성이 가진 해악을 낱낱이 드러내 보여주셨다. 그래서 가장 종교적인 사람들을, 가장 비종교적인 사람들과 빗대어서 누가 더 의롭냐?를 말씀해 주신 것이다. 그 분은 사마리아인에 대한 비유를 통해서 ‘누가 네 이웃이냐’를 우리에게 질문하셨고, 세리와 바리새인의 기도를 들어서 ‘누가 더 의로운 기도를 하느냐’고 우리에게 질문하셨다. 그런 예수님과 그런 예수 믿는 자들을 얼마나 핍박했던 사울이었나? 청년 사울은 얼마나 독기를 품고 그들을 적대하였는가? 그는 단 한 순간도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그는 메시아는 커녕 예수야말로 십자가에 못박히는 게 마땅하다, 하나님을 참칭해도 저렇게 참칭할 수 없다, 크리스천들이라도 하나님을 모독해도 저렇게 모독할 수 없다, 그런 불꽃같은 믿음을 가졌던 청년 사울이었다. 그랬던 그가 예수님을 만나보니, 예수님을 알고보니, 예수님을 따르다보니 그는 다시 유대인들에 대해 하나님의 메세지를 전해야 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목숨 걸고 믿는 사람들한테 메세지를 전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한다. 사도 바울이 로마의 몇 안되는 새 신자들, 초신자들한테 바른 믿음을 위해서 쓴 글이지만, 이 편지가 예루살렘 성전에 배달되어서 대제사장이 읽었다면 어떠했을까? 그는 당장에 죽은 목숨이다. 17절부터 유대인의 좋은 점, 유대인이 왜 구원도 먼저 받고, 왜 하나님께서 유대인에게 주신 그 특권이 어떤 것인지를 일러주고 있다. [로마서] 2장 유대인과 율법 17.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18.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19.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20.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유대인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인가? 율법을 의지하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을 정말 자랑하는 사람들이다. 율법의 교훈을 받아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지극히 선한 것, 무엇이 하나님에게 합당한 것인지를 아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눈 먼 자들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 되는 자들이다. 그래서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의 교사이고 어린 아이의 선생인데, 문제는 이렇게 스스로 믿고 있지만 이렇게 믿는 대로 살고 있는가이다. 즉 너희들은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그렇게 살고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새로 발견한 것인가? 구약의 하나님은 예수님과 다르신가? 아니 구약의 하나님도 동일했다. 그런데 그들은 유대교의 전통과 유대교의 가르침과 랍비의 전승들에 의해 눈이 가려진 것이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얼마나 ‘이방을 품으라’고 말씀하셨는가? 어떻게 구약에 요나서가 들어가 있는가? 어떻게 유대인만 부르셨고 유대인만 구원하겠다고 결정하셨는가? 먼저는 유대인이요, 즉 먼저 유대인을 원한 까닭은 그 구원의 진리와 그 구원의 복음과 구원의 메세지가 이방에, 열방에 전해지도록 하기 위한 것이지, 그들만의 전유물로 준 게 아니다. 문제는 유대교가 하나님을 그들의 전유물로 여긴 것이고, 그 자신들만 소유한 것처럼 살았던 것이 문제였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사야 26장 18절 ‘우리가 잉태하고 산고를 당하였을지라도 바람을 낳은 것 같아서 땅에 구원을 베풀지 못하였 고 세계의 거민을 출산하지 못하였 나이다’ 하나님이 구약의 백성들을 부른 까닭은 잉태하고 산고를 겪어서 ‘세계 거민을 출산하라’고 부른 것이다. 크리스천을 부른 이유가 열방을 품고, 열방을 출산하라는 것이다. 우리끼리 잘 먹고 잘 살고 천국에서 만나자고 부른 것이 아니다. 에스겔 선지자께서도 동일한 말씀을 하셨다. 얼마나 주님께서는 그렇게 살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분노하고 계시는지 에스겔 5장 14~15절에 나타나 있다. ‘내가 이르되 또 너를 황무하게 하고 너를 둘러싸고 있는 이방인들 중에서 모든 지나가는 자의 목전에 모욕거리가 되게 하리니 내 노와 분과 중한 책망으로 네게 벌을 내린즉 너를 둘러싸고 있는 이방인들에게 네가 수치와 조롱거리 가 되고 두려움과 경고가 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 세계 거민을 출산하지 못하고 너희들끼리 똘똘 뭉쳐서 너희들만의 천국을 만들어 살면 너희가 이방의 수치거리가 되고 조롱거리가 되게 하겠다는 말씀이다. 아니 그렇게 똘똘 뭉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만 했어도 다행이지만,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서도 말씀대로 살지 못했다. 에스겔16장 51~52절 ‘사마리아는 네 죄의 절반도 범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네가 그들보다 가증한 일을 심히 행하였으므로 네 모든 가증한 행위로 네 형과 아우를 의롭게 하였느니라 네가 네 형과 아우를 유리하게 판단하였은즉 너도 네 수치를 담당할지니라 네가 그들보다 더욱 가중한 죄를 범하므로 그들이 너보다 의롭게 되었나니 네가 네 형과 아우를 의롭게 하였은즉 너는 놀라며 네 수치를 담당할지니라’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사람 취급도 하지 않고 개 취급을 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사마리아인들이 너희가 저지른 죄의 절반도 범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11장 24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유대인들을 향하여 하신 말씀이다. 너희들 사는 것 보니까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가 차라리 이스라엘이나 예루살렘보다 견디기가 낫다는 것이다. 가장 종교적으로 살아가는 백성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우리가 듣지 않으면 우리도 동일하게 살아가게 될 것이다. 우리가 불신자들을 품지 않으면, 우리가 그들을 주님께로 인도하지 않으면, 우리가 세상 속에서 길을 잃어버리면, 우리가 복음을 먼저 알고 부름을 먼저 받았기 때문에 책임은 두 배 네 배가 된다. 복음을 맡은 것은 큰 축복이지만, 어마어마한 책임이 뒤따른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점점 주님의 뜻을 알아가면 구약의 하나님이나 예수님이나 성령님이나 삼위일체 하나님은 영원히 변함이 없으시다. 그 분이 우리를 부른 까닭은 딱 하나다. 세계 거민을 잉태하고 출산하라는 것이다. [로마서] 2장 유대인과 율법 21.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 22.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느냐 23.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24.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너희들이 그렇게 자랑하는데 문제는 그렇게 스스로 믿고서, 너희들이 맹인들의 길을 인도하고,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 되고, 율법에 있는 진리와 지식을 알고, 뭐 어리석은 자의 교사가 되고, 어린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고 있는데,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 자신은 왜 가르치지 않느냐?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 때문에 모독받지 않는다. 어떻게 불신자들 때문에 하나님 이름이 모욕을 받는가? 다 믿는 사람들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당한다는 말씀이다. 이 시대가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예수님의 복음이 전해지지 않고, 교회 때문에 천국에 나와야할 사람들이 나오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안다. 우리가 교회되지 않으면 대책이 없다. 우리가 진실로 주님의 사람이 되어서 그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그들을 부르고, 그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것 말고는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다.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다. 우리 개인적으로도 인생의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지만 이 시대 자체가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다. [로마서] 2장 유대인과 율법 25. 네가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하면 네 할례는 무할례가 되느니라 26.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규례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27.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율법 조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겠느냐 율법을 행하면, 말씀대로 살면 말씀은 유익하다는 것이다. 말씀만큼 유익한 것이 어디 있는가? 말씀 때문에 주님이 오셨고,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인데 그 말씀처럼 살면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자유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우리는 묶여 사는 삶이 아니라, 더 이상 묶이지 않은 삶을 그 말씀의 능력으로 살아내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고 그냥 고작 성경 한 권 끼고 산다면 그게 뭐가 유익한가? 유대인들은 모두 할례를 받았다. 난지 8일만에 모두 할례를 받는다. 할례도 유익하다. 하지만 할례받은 자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자로서 살지 못하면 할례가 무슨 소용이냐는 것이다. 그러나 할례 받지 않았더라도, 몸에 할례를 받지 않았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수만 있다면 그 사람들이 무할례자일지라도 그 사람들이 진정한 할례자들이다. 바울은 그 표현을 바꿔서 표면적 유대인과 이면적 유대인이라는 말로 다시 이중적인 표현을 쓰고 있다. 우리가 겉으로만 세례교인이고 목사고 장로이고 집사이면 뭐하는가? 그 삶이 말씀과 동떨어진 삶이라면 무슨 소용있겠는가?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라도 그런 재앙은 없다. 차라리 목사나 교인이 안되었으면 좋았을 것을. 그런 일들이 유대인 때난 우리 때나 동일하게 일어나고 있다 .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율법 조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정죄하지 않겠느냐? 오늘날 동일하게 불신자들이 왜 기독교를 향해서 욕을 하고, 왜 교회에 대해서 욕을 하고, 왜 크리스천들에 대해서 비난을 하느냐는 것이다. 그들 가운데서는 율법도 모르고, 성경도 모르고, 교회도 안다니고, 기도도 잘 안할지 몰라도, 하나님이 주신 양심을 따라서, 더 어떻게 보면 하나님을 잘 아는 사람처럼 살기 때문에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작자들아, 제발 좀 그렇게 살지 말아라, 그 얘기를 지금 계속 하고 있는 것이다. [로마서] 2장 유대인과 율법 28.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29.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표면적 유대인, 이면적 유대인이란 말도 마찬가지로, 할례자, 무할례자와 마찬가지로 할례를 안 받았더라도 할례 받은 사람처럼 사는 사람들은 할례를 받고도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처럼 사는 사람들을 반드시 비난하고 정죄할 수밖에 없듯이, 우리도 또한 교회도 안 나가고, 그리스도인이라고 스스로 칭하지도 않고, 세례도 안 받았고, 하물며 성경도 제대로 안 읽었을지라도 인간의 도리를 다하고, 성숙한 인격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미숙한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너희들은 도대체 무엇을 믿고 사니, 너희들이 믿는 예수님은 대체 어떤 분이시니 그렇게 말하지 않겠느냐? 그러면 누가 진정 그리스도인이냐? 무슨 재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냐, 아니면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냐? 교회를 나가든 안 나가든 어떤 사람들을 보면 그에게서 그리스도가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만약에 이면적 유대인으로 남았던 유대인들처럼, 무할례자처럼 살았던 할례자처럼 그렇게 우리가 비기독교인들처럼 사는 기독교인들이라고 한다면, 이 시대 여전히 우리때문에 복음이 전해지지 않고, 우리때문에 하나님이 가려지고, 우리 때문에 예수님이 욕을 얻어먹는 이런 사태가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만약에 우리가 정말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면, 복음을 알면, 유대인을 비난하려고 하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사도 바울의 진심은 너희들에게도 복음이 필요하구나, 교회 다니는 너희들에게도 복음이 필요하구나, 평생 교회를 다녀도 예수님을 잘 모르는 너희들도 구원받아야 겠구나, 그런 복음에 대한 열정 때문에 사도 바울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자신이 복음이 필요 없다고 살았던 사람인데 가장 복음이 필요한 사람이 나 자신이었구나 이걸 사도 바울이 깨달았기 때문에, 초대교회가 선 그 로마교인들을 향해서 자칫하면 이들이 율법으로 돌아갈 소지가 대단히 많으니까 은혜로 시작했지만, 율법으로 돌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아주 많았기에, 그래서 그들에게도 동일하게 ‘선 줄로 알면 넘어질까 조심’하고, 너희들이 자랑하는, 그 유대인들이 그렇게 하나님을 멀리 떠나게 되었던 것처럼, 기껏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고도 점점 그리스도와 거리가 멀어지는 삶을 살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바울의 애절한 심정이 담겨있다. 세상에 어떤 신이 인간인 우리를 위해 죽는가?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분(예수 그리스도)를 알기만 하면, 그 분이 그렇게 죽으심으로 구원받은 것을 알기만 하면, 그런 그 분이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있다는 것을 알기만 하면, 우리가 어떻게 그 분의 이름을 욕되게 할 수 있겠냐고 통탄하고 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면 어떻게 하나님을 욕되게 할 수 있나? 예수님을 알면 어떻게 도대체 그렇게 살 수 있냐? 이런 피를 토하듯한 절규가 이 말씀 안에 담겨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정말 제대로 안다면 우리는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고, 그 분을 욕되게 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불신자들을 향해서 그리스도를 드러내지 못한다면, 그리스도가 우리를 통해 전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세상에 이미 물든 것이다. 세상이 우리 안에 물밀듯이 밀려와서 이미 우리는 세상 사람으로 살고 있는 것이지, 우리가 말했던 것처럼 하나도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오늘 나는 어떻게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는지 돌아보고 기도의 자리에 앉자. 로마서 1장 18절부터는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부인하고 마음대로 세상 죄를 짓고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인지 그들에게 심판이 있을 것에 대해 사도 바울이 말씀하셨다. 그건 두려운 일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들에게 그보다도 더 큰 죄가 있다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들에게 세상 사람들보다 더 큰 죄가 있으면 뭐가 있을까? 바로 남을 심판하는, 판단하고 정죄하는 죄에 대한 것이다. 로마서 1장 18절~32절까지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믿지도 않고 자기 마음대로 그저 불경건과 불의를 행하는 이들을 조목조목 그 죄를 열거하면서 이들은 사형에 합당하고 하나님이 반드시 죽이고 멸할 것이라 는 하셨을 때, 두 손들고 아멘! 당연히 그렇습니다! 아멘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이 누구냐 하면 유대인들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계명을 직접 받았고 그들은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에 자부심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선민의식이 강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과 자기들과는 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사도 바울의 말에 100% 동의하며, 말씀 잘 하셨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저 불의한 이방인들은 다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자들이라고 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 유대인들에게 찬물을 끼얹는 선언을 오늘 하는 것이다. [로마서] 2장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원칙 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2.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1절 말씀을 보면 ‘남을 심판하는 자여!’ 오늘 이 말씀은 우리의 마음에 반드시 새겨두어야 할 말씀이다. 이 말씀이 우리의 마음 속에서 계속 들려줘야 된다. 남을 심판하는 자여! 이 말씀을 잊어버리면 남 심판하는 자리에 서게 된다. ‘너 남을 심판하는 자여!’ 그 때 정신 바싹 차리고 ‘아 내가 판단하고 또 정죄하고 있구나’ 바로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다. 이건 너무너무 중요한 말씀이다. 우리가 소위 믿음이 좋다는 사람들 중에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 이것이 죄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죄인지를 듣기는 했었지만 마음에 새겨지지 않으니까 계속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일을 반복한다. 하나님 믿지 않고 허랑방탕하게 온갖 죄를 다 저지르며 사는 사람하고 은근히 마음에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소위 믿음이 좋다고 하는 사람하고 누가 더 죄인같은가? 아직도 ‘그래도 방탕한 사람이 더 죄인이지’ 하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남을 심판하는 마음을 가진 자는 해결받지 못한다. 인터넷 글 중에 ‘진짜 무서운 사람’이라는 글이 있다. ‘새벽기도 한 번도 빠지지 않은 집시님의 눈길이 무섭다. 십일조 정확하게 꼬박꼬박하는 신자의 눈길이 무섭다. 40일 금식기도 다녀온 권사님 눈길이 무섭다. 크고 건강한 교회에 다니는 성도가 무섭다.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신학자가 무섭다. 성도수가 제법 되는 목사들이 무섭다’. 왜 무서운 것인가? 그들 마음 속에는 은근히 남을 판단하는 게 있다. 나는 잘 하는데, 나는 이만큼 열심인데, 그러면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마음이 있는 데, 이것이 무섭다는 것이다. 바리새인들 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을 철저하게 지켰다. 하나님이 주신 것 외에도 율법 규정 등을 자기들이 부가적으로 만들어 가지고, 심지어 음식을 하는 데 들어가는 양념까지도 십일조를 바치도록 할만큼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며 살려고 했던 사람이 바리새인들이다. 하지만 그들의 그 경견과 열심은 광기가 되어 버렸다. 어느 정도였냐면 죄짓는 사람은 돌로 쳐서 죽일 정도 였다. 신앙 열심이 잘못 빠지면 이렇게 된다.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것이,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는 것이 사람을 돌로 쳐죽이는 수준까지 간다. 이게 왜 그런가 하면, 판단하고 정죄하는 죄가 얼마나 큰 지를 명심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선민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이방인들은 지옥의 불쏘시개라고 생각했다. 사도 바울이 말한다 1절 하반부에 ‘그대는 남을 심판하는 일로 결국 자기를 정죄하는 셈이다. 남을 심판하는 그대도 똑같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엄청 충격을 받았다. ‘아니 우리가 심판하는 대로 우리도 그대로 하고 있다고?’ 인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3절에서 또 이야기한다. [로마서] 2장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원칙 3.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을 심판하면서 스스로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여… 정말 그렇다고 수긍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 세상에 저 방탕한 사람, 하나님 믿지 않는 온갖 죄를 저지르는 사람들과 나하고 같다고? 나도 그 사람들처럼 그런 죄를 짓고 있다고? 인정 안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지옥갈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다. 벌레만도 못한 자다. 말할 수 없는 죄인이다. 다 교리이지, 실제로 마음에는 난 괜찮은 사람이야’ 이런 생각을 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세상에 나보다 악질인 사람들이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본인은 예수님을 만난 게 아니다,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하고 있다. 자기가 얼마만한 죄인인지를. 남을 심판하지 말라는 말씀은 죄를 덮어버리라는 말이 아니다. 이를 악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련히 죄를 짓고, 잘못을 해놓고, 우리 서로 비난하지 말자, 남 판단하지 말자, 우리 모두 예수 믿는 사람들인데 남 판단하고 비난하고 그러지 말자,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자, 죄를 지은 사람이 이런 식으로 뻔뻔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완전히 악용하는 사례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우리가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게 하시려고 구원하신 것이다. 우리 가운데 죄가 있으면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 하나님은 해결하라고 하신다. 그러나 죄를 지은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나는 의인인데 너는 죄인이야. 이런 태도는 오히려 큰 죄를 짓는 것이다. 죄 지은 사람보다 더 큰 죄이다. 심판하는 죄, 판단하는 죄이다. 마태복음 5장 22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여기서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살인죄와 똑같은 죄를 적용한다는 것이다. 마음으로 형제를 비판하고 노하면 실제로 형제를 죽인 것과 같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25장 28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실제로 간음한 거나 마음으로 음욕을 품은 거나 하나님 보시기에 같다는 것이다. 남의 죄에 대해서 나는 의로운 데 너는 죄인이야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우리가 남을 비판하면 꼼작없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스스로 심판을 받는 것이다. 누가복음 6장 37절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아니할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아니할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우리가 어떤 사라을 비판하면 반드시 나에게도 그 죄가 있기 때문에 꼼짝없이 나는 그 비판으로 인하여 심판을 받게 된다. 그런데 내가 남을 용서하면, 내게도 그런 죄가 있는데 하나님이 그 용서로 인하여 내 죄를 용서하여 주신다. 돌아오는 게 더 크다. 내가 비판하면 더 큰 비판이 돌아오고 용서하면 더 큰 용서가 돌아온다. 누가복음 6장 38절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이 말씀 명심하여야 한다. 프란시스 세프라는 신학자는 이 말씀을 실제로 표현 및 적용하기를 보이지 않는 녹음기가 있다고 이렇게 설명을 했다. 우리는 모두 보이지 않는 녹음기를 달고 다닌다. 그래서 우리가 하는 말이 그대로 녹음이 된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가서, 심판대에서 틀어진다. 그 때 한 말 그대로 다 들리고, 그 말대로 심판을 받는다. 너가 그랬잖아 잘못된 것이라고. 너가 그랬잖아 그게 죄라고.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사람에 대해여 용서하는 말을 하고 그 사람을 긍휼이 여기면 이건 엄청난 축복이다. 하나님 앞에 갔을 때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돌려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선민으로 택하신 것은 유대인들이 잘 나서 그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 지를 보여주시려고 하신 거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작은 민족을 하나님이 선민으로 택하신 것이다. 유대민족을 선민으로 택하신 걸 보니까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시구나, 하나님은 용납하지 않을 민족이 없으시구나, 저 유대인을 택하신 걸 보니까 하나님은 우리도 받아주시겠구나, 그렇게 쓰시려고 유대인을 택하신 것이다. 신명기 7장 7절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그랬는데 유대인들은 자기가 선민이라는 것을 끊임없이 자랑하고 이방인들은 지옥의 불쏘시개라고 그렇게 멸시하고 정죄하고 심판했으니 하나님께서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서기를 기다리시고 계신다. 유대인들이 지금도 저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이 돌이키기만을 오래도록 기다리고 계신 것이다. 그런데 그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업신여기는 것 같기에 사도 바울은 4절에서 [로마서] 2장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원칙 4.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여기서 우리는 죄를 지은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 지를 알 수 있다. 우리 가운데 죄를 짓는 사람이 나오면 먼저 우리도 똑같은 죄인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하고, 그 사람만 죄인이고 나는 의인이라는 태도를 가지면, 이건 더 무서운 죄를 짓게 되므로, 나도 똑같은 죄인이다, 당신은 실제로 죄를 지었고, 나는 가능성만 가지고 있는 나나 당신이나 똑같은 죄인이지만 이 죄는 해결해야 된다. 이런 마음으로 죄를 접근해 들어가야 하고, 또 그 사람이 스스로 회개하기를 기다려줘야 한다. 정죄하고 심판하지 말고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려야 하며, 또한 풍성하신 인자하심과 너그러우심으로 오래 참으신 하나님처럼 해야 한다. 대만 제자훈련시 ‘교회는 문제가 많은 목사님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공개적인 답변이 불편하시면 강요하지는 않겠습니다’라는 질문이 올라왔다. 답변을 드렸다. ‘그가 아버지나 형이나 동생이라면 어떻게 할건지 생각해 보십시오.’ 이 말은 가족이라면 죄를 덮어 버리라는 뜻이 아니다. 죄는 해결해야 되고 고쳐야 한다. 그런데 이중적인 태도를 가지면 안된다는 것이다. 만약에 그 분이 아버지나 형이나 동생이라면 소문내겠는가? 아무 말 안하고 그 분 찾아가서 이거를 이렇게 하시면 안됩니다, 이거 고쳐져야 합니다고, 말을 해도 얼마나 부드럽게, 얼마나 진심으로 스스로 돌이키기를 바라면서, 그리고 얼마나 오래 기다려주면서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내 가족이 아니면 그냥 말만하고 이럴 수가 있느냐, 저럴 수가 있느냐, 어쩌면 그렇게 엄격하고 단호하게 문제를 처리하려고 하느냐, 어떻게 기준이 그렇게 둘이냐는 것이다. 똑같은 문제를 처리하되 어떻게 기준이 둘인가? 내 가족에게 하는 방법이 다르고, 가족 아닌 사람에게 하는 방법이 다를 수가 있는가? 이게 죄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문제 많은 목사님, 나는 그 목사님에게 어떤 교인인지를 한번 생각해 보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문제를 풀어가는 방법을 가르쳐주실 것이다. 로마서 1장과 로마서 2장은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5장에서 말씀하신 탕자의 비유에 그대로 있다. 탕자의 비유에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허랑방탕하게 다 써버린 둘째 아들 이야기가 나온다. 둘째 아들이 회개하고 돌아왔을 때 그 둘째 아들 동생을 받아준 아버지에 대해서 불평하고 불만이 컸던 큰 아들 이야기도 나온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 큰 아들이나 둘째 아들이나 다 탕자이다. 그리고 이 큰 아들이 더 큰 죄인이라는 것이다. 로마서 1장 18절에서 32절의 이야기는 탕자 이야기이다. 오늘 로마서 2장 1절에서 11절까지 나오는 이야기는 큰 아들 이야기다. 우리는 대부분 큰 아들에 속한다. 이미 예수를 믿고 주일 예배를 드리는 자를 어찌 탕자라 할 수 있는가? 반듯하고 삶이 경건한 예수를 믿는 자들은 큰 아들과 같아져 가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방탕한 사람을 보면 갑자기 마음에서 판단이 일어나고 정직함이 일어난다. 방탕한 사람이 우리 가까이 오면 어떤 느낌이 드는가? 큰 아들 같아지지 않는가? 어떻게 저런 사람이 다 있어? 난 저런 사람하고 얽히기 싦어. [로마서] 2장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원칙 5.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5절 말씀에 그대는 완고하여 회개할 마음이 없으니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이 나타날 진노의 날에 자기가 받을 진노를 스스로 쌓아 올리고 있는 것이다. 완고하여 회개할 마음이 없는 이 사람이 누군가 하면 죄인이 아니라, 심판과 판단하는 사람, 정죄하는 사람이다. 죄를 지은 사람은 처음에는 자기가 그런 짓 하지 않았다고 발뺌하고 어떻든 변명을 한다. 그러다가 죄가 밝혀지면 확 꺽어진다. 그리고 부들부들 떨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두려워하면서 잘못했다고 용서를 빈다. 그렇게 그 사람은 오히려 회개할 기회가 있지만, 그런데 그런 죄인을 정죄하고 심판하는 사람은 좀처럼 회개를 안한다. 왜냐하면 자기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하나님 앞에 가서야 그동안 자기가 말했던 것, 행동했던 것, 마음에 품었던 것 다 드러내고 난 다음에서야 그는 그때서야 내가 나를 정죄하며 살았던 것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의 심판의 자리에 들어가면 꼼짝없다. 비판 잘 하는 사람에게 당신은 왜 그렇게 부정적이고 비판적인지를 질문하면, 내 성품이 내 성격이 솔직하고 철저하기 때문이라고 대부분 그렇게 변명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자기 죄를 몰라서 그렇다. 특히 남의 죄를 비판하고 정죄하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모르니까 그렇게 하는 거지 사람 성격이 솔직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프랜시스가 제자들과 함께 40일 금식할 때, 39일째 되던 날 어느 제자가 그 허기를 이기지 못해서 스프 한 스푼을 떠서 먹었다. 그러자 다른 제자들이 모두 그 스프를 떠 먹은 제자를 노려보았다. 금식을 깨뜨렸기 때문에. 그때 프랜시스가 스푼을 들고 가서 자신도 그 스푸를 떠먹었다. 제자들이 경악했다. 아니 선생님 아직 금식이 끝나지 않았는데 이렇게 드시면 어떻게 됩니까? 그러자 프랜시스는 우리가 금식하는 것은 정말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살자고 우리가 금식하는 것인데, 우리가 굶으면서 이렇게 서로 미워할 바에야 차라리 먹고 서로 사랑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기준을 분명히 해야 한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잘 하고 열심히 내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더라도 결국 내 마음 속에 끊임없이 비판하고, 정죄하고, 판단하고 있다면, 나는 완전히 잘못 가고 있는 것이다. 더욱 무서운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내가 예수님을 진짜 제대로 믿었고 바로 믿었다면, 나는 용서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 가고 있어야 한다. 믿음은 사랑으로 열매 맺어져야 그게 진짜이다. [로마서] 2장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원칙 6.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6절 말씀은 좀 충격적이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대로 갚아 주실 것이다. 심판은 그 사람이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서 심판이 진행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로마서에 대해 잘못 오해하고 있는 것 중에 하나가 로마서는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 는 복음을 증거한 책이라고 알고 있다. 분명히 로마서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는 놀라운 복음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러나 심판은 분명히 행한대로 받는다 고 7절에서 10절까지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다 . [로마서] 2장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원칙 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8.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9.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10.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 11.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다. 그것은 아멘이다. 그러나 그 믿음은 반드시 합당한 행함이 따라오게 되어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믿음으로 구원하시는 것은 어떤 죄를 짓고 살아도 예수를 믿으니까 구원해 주시겠다는 뜻으로 주신 게 아니다. 믿으니까 이제는 구원받을 자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이제는 하나님 앞에 설 때 구원받은 자의 삶을 하나님 앞에 드러낼 수 있게 만들어 주신다는 것이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 행함이 꼭 필요하다는 그런 뜻도 아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다. 그러나 정말 믿는 사람은 사랑의 열매가 맺어지게 되어 있다. 사과나무에 사과 열매가 맺어지니까 사과나무인 줄 아는 거다. 그런데 사과열매 때문에 사과나무가 사는 건 아니다. 사과나무가 사는 것은 뿌리가 살아 있으니까 사는 것이다. 이 뿌리가 믿음이다. 그런데 사과나무인 줄 알았는데 열매가 돌복숭아가 맺어있다면 이것은 사과나무가 아니다. 그런 경우에는 나무에 문제가 생긴 거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절대로 오해하면 안된다. 사람이 성숙한 과정에서 판단과 행동의 기준이 변한다. 어릴 때의 기준은 무조건 좋고 싫은 것이다. 분별의 기준이 없으므로 그냥 좋으면 좋은 거고 싫으면 무조건 안한다. 조금 나이 들면 이제 유익한 게 무언지 알게 된다. 뭐가 내게 유익하고 손해인지 계산을 하게 되고, 조금 더 들면 내 편이나 아니냐가 중요한 기준이 되다. 더 성숙하면 옳으냐 그르냐가 기준이 된다. 이 정도쯤 가면 대단히 성숙한 사람이다. 옳으냐 그르냐를 가지고 문제를 보는 것은 성숙한 사람이다. 그러나 예수를 믿으면 여기서 하나 더 간다. 하나님의 뜻이냐 아니냐. 옳으냐 그르냐의 기준을 넘어서는 일은 굉장히 어렵다. 옳으냐 그르냐는 문제 때문에 관계가 모두 깨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부부 싸움 왜 하며 사는가? 이 역시 누가 옳으냐 그르냐를 가지고 싸우는 것이다. 왜 하나님의 천국같은 교회가 깨지고 싸우는가? 옳으냐 그르냐 가지고 싸우는 거다. 옳으냐 그르냐는 우리를 살리지 못한다. 하나 더 가야한다. 하나님의 뜻이냐 아니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옳으냐 그르냐가 아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그래서 우리를 위해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거다. 손양원 목사님이 두 아들 죽인 원수를 양자를 삼았다. 이 또한 옳으냐 그르냐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예수님이 나 위해 죽으시고, 그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니 내가 예수님 바라보고 살면 우리 안에 일어나는 변화가 용서하고 용서하고, 사랑하고 사랑하고, 예수님 바라보는 믿음이 없는 사람은 정죄하고 판단하고, 정죄하고 판단하고, 이건 흉내낼 수 없다. 서로 꾸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진짜 구주로 영접했는지 아닌지는 용서와 사랑을 하는지, 아니면 정죄하고 심판하는지를 보면 금방 드러난다. 어느 분에게 문제가 있어서 좋은 의도로 그 점을 지적해 고쳐주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를 더 시험에 들게 하고 낙심케 할 수 있다. 우리는 마음에 정말 단단히 새겨야 한다. 남을 심판하고 정죄하는 것은 우리 의지나 결단으로 극복이 안된다. 주 예수님을 바라보는 눈이 뜨이지 않으면 해결이 안된다. 주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기적이 일어난다. 남 판단하고 정죄하는 내가 용서하고 사랑하는 사람으로 바꿔진다. 이건 기적이고 진짜 거듭난 것이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믿음의 눈이 열리지 않으면, 신앙생활 오래 할수록 판단이 더 많아 진다. 남에 대한 정죄가 더 커진다. 완전 율법주의에 빠져든다. 그래서 분위기가 무서운 분위기가 된다. 우리 마음을 분명히 해야 한다. 방탕한 자를 볼 때, 그를 심판하는 자를 볼 때 누가 더 죄가 크냐? 심판하는 자의 죄가 더 크다. 이건 명심해야 한다. 방탕한 사람보다 그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사람의 죄가 더 크다. 이건 절대 잊으면 안된다. 이걸 잊지 않으면 가정에 기적이 일어난다. 가족관계에 기적이 일어난다. 직장생활에 완전히 기적이 일어난다. 하나님 모르고 방탕하게 사는 사람, 정말 큰 일이다,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을 보면서 정죄하고 판단하는 사람은 더 큰 일이다. 그는 이미 은혜를 받은 사람인데 그럼에도 그런 사람을 정죄하고 판단하고 있으니 그 죄가 더 커 이를 어찌해야 하는가. 예수님을 정말 제대로 믿었다면 용서가 나오고 사랑이 나와야 진짜다. 주님, 저도 모르는 사이에 판단하고 정죄를 했던 것이 있으면, 주여 깨닫게 하소서. 그리고 정말 고백하고 회개하고 오늘 해결받게 하소서. 주 예수를 바라보는 눈을 뜸으로 용서와 사랑이 계속 흘러나오게 하옵소서. 03’20” 우리는 늘 우리의 신앙상태를 돌아보며 살아야 한다. 우리가 영적인 상태를 하나님 앞에서 진단받을 때 마치 몸의 암같이 가장 두려운 진단이 내려지는 것이 있다면, 율법주의에 빠졌다는 진단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살면서 우리 자신도 모르게 율법주의 신앙에 빠져버리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한국교회가 지금 가장 힘들어하는 문제가 바로 이 문제이기도 하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 중에서도 율법주의 신앙에 스스로 뻐져있는 분들이 꽤 있을 것이다. 오늘 말씀을 듣고 굉장히 화를 낼 분이 있을 텐데, 이는 자기 자신의 문제를 터치하고 있기 때문일 것 같다. 율법주의를 간단히 말하면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를 힘써서 구원을 받고자 하는 믿음이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면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를 믿으며 복음을 받은 것은 그것과 무엇이 다른가? 십자가 복음에 대한 은혜를 받은 사람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기만 하면 누구든지 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고, 성령 하나님이 그 사람 마음에 임하시게 되며, 그래서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율접적인 신앙’이나 ‘복음의 신앙’이나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이 둘엔 굉장한 차이가 있다. ‘율법적인 신앙’은, ‘율법주의적인 신앙’은 ‘열심’과 ‘충성’을 강조한다. 죽을 때까지 열심과 충성, 열심과 충성, 그래도 도무지 만족이 없고 해결함이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음적인 신앙은 ‘감사’와 ‘사랑’이 초점이다. 이미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셨고, 성령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오셔서 우리를 도와주시기 때문에 감사할 것밖에 없다. 그냥 사랑하면 된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지게 된다. 이것은 굉장한 차이다. 우리는 율법주의적인 신앙에 빠져있는지, 복음적인 은혜의 사랑에 서있는지 그 중 어느 쪽인가? 로마서 1장부터 3장까지는 사도 바울이 유대인들을 향하여 아주 중용한 메세지를 던지고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을 정말 믿지 않으면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말씀에 제일 반발하는 사람들이 유대인들이다. 예수를 믿지 않으면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고, 유대인들도 예외가 아니라고 하니, 유대인들로서는 분노하는 일이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왜 유대인들도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고 말하는 건가? 하나님의 율법을 가지고 있지만, 율법주의에 빠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율법주의에 빠진다는 것은 굉장히 두려운 일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율법주의에 벗어나는 것이다. 그럼에도 안타깝게도 예수를 믿고도 율법주의에 빠져있는 성도들이 많다. [로마서] 2장 유대인과 율법 17.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18.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19.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20.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17절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이 ‘그대가 유대사람’이라고 자처한다는 표현을 썼는데, 이는 상당히 선동적인 표현이다. 뉘앙스를 살려서 말하자면 ‘당신이 그 잘난 유대인이라고? 그러면 한 번 따져보자!’란 뜻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똑같은 표현으로 도전받을 수 있다.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냐? 당신이 예수를 믿는 사람이냐? 그럼 그 믿음 한 번 따져보자?’ 이런 식으로 불신자들이 우리에게 시비조로 도전해올 수 있는 비슷한 뉘앙스다. 유대인인 사도 바울이 유대인에 대해서 한 번 따져보자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17절부터 20절까지 보면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알고 있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으며, 그래서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다고 하는 것에 대해 7가지를 사도 바울은 열거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그런 사람들이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21절에서 유대인들에게 아주 도전적인 말을 한다. [로마서] 2장 유대인과 율법 21.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 22.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느냐 23.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24.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그런 여러분이 남을 가르치면서도 왜 여러분 자신을 가르치지 못하느냐?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질문을 하고 있다. ‘하나님의 율법을 안다고? 하나님의 율법을 가졌다고? 그렇다면 당신들은 잘 알면서 왜 당신들은 도적질하지 말라면서 도적질을 하고, 간음하지 말라면서 간음하고, 우상숭배하지 말라고 하면서 신전의 물건을 훔치는 등 왜 당신들 스스로 율법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한 마디로 말하면 당신들은 위선자들이다. 몰라서 지키지 못하는 저 불신자들보다 더 나쁜 사람들이다. 다 알면서도 당신들은 율법을 어기고 있다.’ 유대인들은 우상숭배를 큰 죄로 여긴다. 그래서 형상에 절대로 절을 안하기에 자기들은 절대로 우상숭배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들의 마음을 지적한다. 우상숭배자들의 마음이 뭐냐, 우상숭배하는 자들의 마음의 동기는, 우상숭배로부터 돈을 많이 버는 복과 권력을 얻고 싶은 복을 받고 싶고, 남을 지배하고, 쾌락을 누리며, 자기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다 하고 싶은 그런 욕심이 우상숭배자들이 가지고 있는 마음의 동기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새긴 우상에게 절은 하지 않지만, 그 마음 속에 있는 욕심은 우상숭배자와 똑같다는 것이다. 우상숭배자들이나 유대인들이나 권력욕, 재물욕, 명예욕, 남 지배하고자 하는 욕심, 쾌락을 사랑하는 것 등이 똑같다고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지적하고 있다. 알면서도 자기가 그런 죄를 짓는 것, 남 보고 하지말라면서 자기는 은근히 그런 죄를 짓는 것, 이런 경우가 율법주의다. 이 율법주의적인 신앙은 아주 보편적인 믿음이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교인을 가지고 있는 종교이다. 이름은 여러 종교들을 꼽을 수 있지만 다 율법적인 종교이다. 우리가 흔히 종교가 문제다, 전쟁은 다 종교때문에 일어난 거다. 나는 종교라는 말만 들어도 진저리가 나, 이런 식으로 종교에 대해서 말하는 경우는 전부 율법주의적인 종교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 기독교는 그런 뜻에서 보면 종교가 아니다. 우리는 다른 종교와 전혀 다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기독교인들이 또 기독교가 제대로 자기 믿음을 지키지 못하게 되니까 율법주의적인 종교가 되버린 것이다. 유대인들이 율법주의에 빠진 가장 특별한 증상 중의 하나가 할례받은 것을 자랑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할례받은 것을 하나님의 백성이 된 증거라 생각한다. 그리고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들을 개 취급을 한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이 개 취급을 하는 무할례자들이 할례받은 유대인들보다도 하나님의 율법을 더 잘 지킬 수 있다는 말씀을 하고 있다. 유대인들로서는 기절초풍할 일이다. [로마서] 2장 유대인과 율법 25. 네가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하면 네 할례는 무할례가 되느니라 26.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규례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27.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율법 조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겠느냐 유대인들은 이 말 자체에 벌써 화가 나있다. 율법을 다 지키면서 할례를 받았다면 할례가 유익하지만, 만약에 할례를 받았는데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면 그 할례는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이 율법의 규정을 지키면 그 사람이 할례를 받은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는 이 말은 유대인들로서는 상상도 안되고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여기고 있다.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들이 할례받은 자기네 유대인들보다 하나님의 율법을 더 잘 지킬 수 있다는 것은 유대인들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였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럴 수 있다고 말씀하는 것이다. 할례받은 사실 그 자체를 그렇게 자랑하고 또 할례받지 못한 사람을 그렇게 폄하하고 비판하고 개 취급할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할례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하나님으 백성으로 삼아주셨다는 증거이다. 그러므로 감사할 일일 뿐이다. 하나님 저희 같은 자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할 내용일 뿐, 할례받은 걸 가지고 막 자랑하며, 할례받지 못했다고 개 취급하는 것은 하나님을 오히려 진노하게 만드는 것뿐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들도 이와 같은 함정에 빠지고 있다. 이 할례받은 것과 우리가 세례받은 것은 영적인 뿌리가 같은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세례받을 것을 굉장히 큰 자부심으로 여긴다. 나는 세례받았다, 세례교인이다 라는 말은 나를 함부로 보지 말라는 거다. 세례받은 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내가 무슨 큰 권세를 얻은 것처럼 자랑하면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만 할 뿐이다. 세례는 그런 뜻으로 준 게 아니다. 감사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것이니 다른 사람을 사랑하라고 주신 것이다. 고린도전서 1장 29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자랑하시는 것을 정말 싫어하신다. 율법주의자들의 특징이 자기도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면서 은근히 자기를 이런 것 저런 것에 대해 자랑하는 것이다. 사람은 타락한 이후 율법을 온전히 지켜서 의로워질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율법주의자들은 율법을 다 지켜서 의로워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니 생각해 보면 그들이 얼마나 힘들 것인가? 율법주의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신앙생활이 힘들다. 정말 힘들다.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거다. 안되는 것을 해보려고 하는 거니까. 그리고 율법주의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좌절을 계속 겪는다. 그래서 안된다 못한다, 마음에 늘 그런 생각 이있다. 그리고 위선적이게 된다. 실제로는 그렇게 못하면서 겉으로는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처럼 그렇게 자꾸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그러면서 자기 스스로 두려움도 많다. 왜? 자기 실상이 드러나면 자기도 똑같이 비판을 받기 때문에. 그들의 얼굴은 어둡다. 열심히 하고 충성도 하지만 얼굴은 어둡다. 이는 율법주의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특징이다. 22’05” 교인들의 얼굴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다. 율법주의적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의 얼굴은 권위적이고 딱딱하고 굳어있게 마련이다. 믿음이 좋다는 사람일수록, 직분이 높은 사람일수록 더 그렇다. 기쁨이 있고 감사가 있고 사랑이 넘치면 얼굴이 권위적이고 딱딱할 수가 없다. 은혜가 있는 사람은 결코 그럴 수 없다. 율법주의의 정반대가 십자가의 복음으로 은혜생활을 하는 것이다. 은혜생활을 하는 사람의 특징이 ‘감사’와 ‘사랑’이다. 성령 하나님이 마음에 오셨기 때문에, 마음이 뒤집어지는 것이다. 마음이 완전히 바꿔버린다. 그 특징이 감사와 사랑으로 이것을 마음이 할례를 받았다고 하는 것이다. [로마서] 2장 유대인과 율법 28.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29.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19절에 성령으로 마음에 받는 할례가 참 할례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마음이 할례를 받는다. 그 말은 성령 하나님이 내 마음에 임하시고, 나는 항상 성령 하나님을 의식하고 살게 된다는 것이다. 내 마음에 가장 귀한 분이 오셨다. 그 열매가 기쁨이고 감사이고 사랑이다. 또 부드러운 마음이라고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예언하셨다. 에스겔서 36장 26~27절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율법주의 신앙에 빠졌는지, 은혜생활을 하는지 스스로 분별할 수 있는 기준이 있는데, 그것은 성령 하나님이 마음에 임하신 것을 느끼고 있느냐이며, 성령 하나님이 지금 마음에 계신 것을 느끼고 있다면 마음이 부드러워진다. 기쁨과 감사와 사랑이 있다면 은혜생활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딱딱하고 굳어있고 남에 대한 비판이 있고 두려움이 있고 염려가 있다면 자신도 모르게 지금 율법주의에 빠져 있는 것이다. 25’22” 성령 하나님이 자신의 마음에 오셨다면 주변 사람들이 다 알게 되어있다. 감사와 기쁨과 사랑의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마음이 변한 것은 사람이 알게 되어 있다. 자신도 알지만 주변 사람들도 안다. 할례는 아브라함 때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인 유대인들 모두 할례를 받았다. 이것은 무엇을 상징하느냐 하면 이제부터 너는 완전히 내 것이라고 하나님이 인치신 거다. 너는 이제 세상과는 완전히 작별한 거다. 세상에 대해서는 너는 죽은 거다. 이제 너는 내 것이다. 그런 증거로 하나님이 할례를 시작하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할례를 하면 이제부터 나는 하나님의 것이다 라는 증거이다. 그런 믿음으로 살라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육체의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지만, 마음에 그런 할례가 임한다. 그게 바로 성령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시는 것이다. 성령하나님이 내 마음에 오시면 마음에 할례가 일어난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너는 이제 세상에 대해서는 죽은 자야. 너는 이제 내 것이다. 내가 너의 마음에 주님으로 왕으로 임했다. 그런 뜻이다. 골로새서 2장 11절 에 분명히 말씀하셨다. ‘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마음의 할례가 일어나게 된다. 성령하나님이 임하신다. 그래서 삶이 바뀐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잘 믿는지 안믿는지는 열심으로 평가하면 안된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지만, 열심만 가지고서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왜냐하면 율법주의자들도 대단히 열심히 하고, 충성스러우며, 거기에 목숨을 걸었으니까. 유대인들은 할례받는 정도가 아니다. 그들은 월삭도 지키고, 각종 절기도 지키고, 각종 대회 성회 등 그들이 지키는 것이 엄청 많다. 그들이 열심히 그들의 절기를 지키고,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는 율법을 온전히 지킬 자신이 없으니까, 그런 것을 가지고서 자기들의 마음에 위안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열심히 하고 있어, 그러면서도 마음이 계속 불안하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도 그렇게 믿는 사람들이 많다. 쓸데없는 것을 자랑하는 거다. 예수 믿으면서 마음에 심령이 온전히 거듭나지 못한 상태에서 겉으로만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을 자꾸 덧입히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분들이 주로 자기가 다니는 교회 자랑, 담임목사 자랑, 예배당이 얼마나 큰 가를 자랑, 교인수 자랑, 그리고 정통교단 자랑, 교회에 역사가 많이 일어나고 은사가 넘친다는 등의 자랑을 늘어놓는다. 율법주의에 빠지면 그런 쓸데없는 자랑거리만 잔뜩 가지고 있다. 진짜 자랑하고 정말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사람들이 나를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사람들이 나를 보면 하나님이 믿고 싶어진다, 이런 건 진짜 자랑할만 하다. 유대인들의 문제는 그렇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그렇게 율법을 지키려고 하고 그렇게 애를 쓰면서도 세상 사람들이, 유대인 아닌 세계 각국의 많은 사람들이 유대인이 믿는 하나님이 좋은 줄 모른다는 것이다. 24절 말씀 [로마서] 2장 유대인과 율법 24.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그것은 성경에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들 가운데 모독을 당한다라고 기록된 말씀과 같다. 이게 율법주의의 심각한 문제이다. 그렇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데도 영광이 안 나타나 사람들이 보기에 좋아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한국교회가 빠져 있는 함정이 바로 이 문제이다. 한국갤럽의 한국 종교실태 조사 결과 가장 종교생활에 열심을 내는 종교로 기독교가 타 종교에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높았다. 종교에 대한 호감도에서는 꼴찌다. 이것이 바로 전형적인 율법주의적인 종교다. 유대인들을 말할 게 없다. 이제 율법에서 해방되어 십자가의 복음으로 은혜생활을 한다는 우리 예수 믿는 자들이 유대교와 다름없이 똑같이 가고 있다. 본래 기독교는 이렇지 않았다. 사도행전 2장부터 4장까지 읽어보면 성령이 임하시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보고 주변 사람들이 다 칭찬하고 예수 믿고 싶어서 사람들이 몰려 들어왔다. 박혜란 목사님이 쓰신 ‘목사의 딸’에서 아버지는 많은 분들이 존경하고 훌륭하고 한국이 자랑하는 그런 신학자이고 목사님이신데, 딸이 본 아버지는 달랐다는 것이다. 딸이 본 아버지는 유교적이고 가부장적인 권위주의이자 철저한 율법주의에 아내를 매정하게 대하고 자녀들에게 아버지의 사랑을 주지 않고 가정을 돌보는 일은 세속적인 일이라 생각하고 성경주석 작업만 평생 하시고, 그리고 나가서 교회 일만 하시면서 자녀들에게 말할 수 없는 상처를 주었다. 이 박혜란 목사님이 그 아버지의 영향으로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하나님이 자기를 창조하신 것은 믿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무서운 하나님, 언제나 벌 주시는 하나님이었고, 항상 하나님 앞에 죄지은 것이 없을까 노심초사하고 두려워 떨며 살았다고 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그렇지만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장점을 보기보다는 항상 잘못된 것, 단점만 보면서 늘 비판적인 마음을 가지고 그렇게 살았던 것은 바로 아버지때문에 받은 영향이었다고 한다. 자녀들이 너무나 아버지에게 상처가 많아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못했다. 아버님이 연세가 많아서 돌아가실 때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아버지와 화해를 해야 되겠다 생각하고서 형제를 대신해서 아버지에게 장문의 편지를 썼다. ‘아버님, 아버님의 믿음에는 요런 문제가 좀 있어 보입니다. 아버님 이건 잘못하신 것 같습니다, 아버님 때문에 우리 형제들이 여러가지 마음의 상처를 많이 받고 제대로 신앙생활을 못했습니다. 부탁컨데 마지막으로 아버지가 잘못한 건 잘못했다고 해주십시오. 용서한다 사랑한다 그런 말 한디만이라도 해주십시오.’ 그렇게 장문의 편지를 써보냈다. 그 편지를 받아든 그 목사님이 미국에 계신 이 따님에게 바로 달려왔다. 그리고 한 마디 하고 가셨다. ‘회개하라’ 성경구절을 인용했다. 출애굽기21장 17절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 박혜란 목사님이 이 책을 쓰신 이유는 한국교회가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 율법주의적 전통에서 이제는 좀 벗어나길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지금 한국교회가 존경하고 우러러보는 많은 목사님과 장로님들 중에 이 목사님과 비슷한 삶을 사는 이들이 많다. 열심히 믿으면 믿을수록 사람들이, 교회분위기가 더 무서워지는 이런 현상, 교인들끼리 서로 끊임없이 서로 비판하고 비난하고, 그리고 조금이라도 잘 나면 자랑하고 과시하고 내세우려고 하고, 이건 정말 해결해야될 문제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이렇게 하려고 십자가에 죽으시 분이 아니다. 우리는 예수 믿을 때 마음에 할례받은 사람들이다. 할례받은 사람은 성령하나님이 오신다. 성령하나님이 내 마음에 와 계신 것이 느껴지면 사랑하게 된다. 성령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다. 우리가 진짜 예수 잘 믿었는지 안믿었는지는 사랑으로 소문난지 보고 확인하는 거다. 절대 열심으로 확인하는 게 아니다. 내가 얼마나 주일을 잘 지키며, 내가 얼마나 십일조를 잘 했는지, 내가 얼마나 전도를 많이 했는지, 내가 얼마나 성경공부를 많이 했는지, 그것으로는 아직까지 모른다. 내가 사랑으로 소문났는지 이걸 봐야 된다. 주변의 가족들과 친척들에게, 직장 동료들에게, 함께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는 소그룹 교우들에게, 이웃들에게 사랑으로 소문났는지 확인해봐야 한다. 34’34” 존 비비어 목사 – 존에게 가서 그가 변화될 것을 믿는다고 고백하라. 그리고 그 동안의 잘못을 모두 용서한다고 분명히 말해라. 48’06” 아부다비 – 가시 돋친 버드나무, 그리 믿음이 좋은데 가시가 많은 교인 2장 1절 말씀이 ‘그러므로’로 시작한다. 도대체 위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러므로’라고 했는가? 1장 전체, 아니면 1장 내용의 일부를 받게 된다. 1장에 무슨 내용이 있었냐면은 중반부 넘어가면서 ‘이방인의 죄’에 대하여 언급을 했다. 그런데 이방인의 죄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죄악들이었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깨뜨려 역행하고 순리에 어긋나 사용하는 ‘동성애’로 인하여 이미 그들이 벌을 받았고, 정신을 못차리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니까 온갖 죄를 다 짓는데, 하나님께써 그들을 내버려 두셨다 는 내용이었다. [로마서] 2장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원칙 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유대인들이 이를 보고, 즉 유대인들이 이방인의 어떤 부도덕한 죄들, 그리고 하나님 말씀에 어긋난 짓을 하는 것을 보고 판단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도 그럴 수 있는데, 그렇게 판단하는 자들에 대하여 경고하는 것은 ‘내로남불’하지 말아라, 함부로 이방인에 대하여 비난하지 말아라, 유대이으로 태어났다는 그 하나만으로 하나님이 너희를 절대로 옳다고 인정하시지 않는다. 율법을 안다고 해서 너희들이 그 율법을 지키고 있다고 착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로마서] 2장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원칙 3.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절대 그렇지 않다. 지금 이 말씀을 유대인에 대한 말씀으로만 들으면 안된다. 오늘의 우리에 대한 말씀으로 들어야 한다. 우리는 영적유대인의 관점에서 이 말씀들과 구약과 신약의 말씀을 살펴봐야 된다. 우리 안에 그런 교만과 아집, 독선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택했어’ 유대인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평생을 산다. 그들은 이방인들을 향하여 지옥을 위해 준비된 불쏘시개라고 했다. 그리고 이방인이 존재하는 이유는 지옥을 채우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얼마나 교만하고 악한 생각인가. 우리도 자칫하면 거기까지는 아니지만 우리도 모른체 어떤 생각을 할 수 있냐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하고 교만해 질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경계하는 것은 우리를 살피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모든 자에게 행한대로 갚아 주신다. [로마서] 2장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원칙 6.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이게 하나님의 절대적인 원칙이다. 하나님은 행한대로 갚아 주신다. 그렇다면 누구를 심판하시느냐? 행한대로 갚는다는 말은 벌도 주고 상도 준다는 것이다. 달란트 비유시 주인이 왔을 때 상을 받는 사람이 있었고 심판을 받는 사람이 있었다. 이게 행한대로 받는 거다.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열심히 행했다. 뭔가를 남겼고 노력을 했고 땀을 흘렸다. 그리고 결과물이 있어 주인에게 칭찬과 상을 받았다.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일해야 할 때 일 하지 않았고 주인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오해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결과로 심판을 받은 것이다. 행한 대로 갚아 주신다는 말씀을 우리는 아주 무섭게 들어야 한다. 심판이 있고 상급이 있다, 어떤 사람이 심판을 받는가? [로마서] 2장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원칙 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8.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심판 받는 사람과 상급 받는 사람의 기준이 있다. 이 말씀을 잘 봐야 한다. 하나님께서 미리 가르쳐 주신 것이다. 초대교회의 구성원은 이방인 중에 예수 믿는 사람이 있었다. 헬라인 중에 예수 믿는 사람이 있었을 것이고, 유대인으로서 예수 믿는 사람이 있었다. 로마서 16장 마지막 부분엔 그들의 이름들을 다 거론하면서 바울이 인사를 할 적에 그들 대부분이 유대인들이었다. 그래서 로마서는 유대인으로서 예수 믿는 사람에게 보낸 편지다. 그래서 이 8~9절 말씀은 쉽지 않은 것이다. 아무리 예수를 믿어도 자기가 유대인이라고 하는 긍지까지 버리는 사람이 많지 않다. 이게 쉽지 않다. 이 땅에 예수 믿고 성령 받고 불 받았다고 펄펄 뛰는 사람도 지역을 따지고 학력을 따지는 세상인데 옛날에 오죽했겠는가. 그런데 바울은 파격적으로 주님 안에서 이렇게 말한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필요 없다. 하나님 앞에 당을 짓는다든지 진리를 따르지 아니한다든지 불의를 따른 자에게, 그리고 악을 행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이 땅에서도 심판이 있고 하나님 앞에 섰을 때도 반드시 심판이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당 짓지 말자. 교회들마다 당을 지어 난리법석을 떤다. 자기가 지을려고 해서 지은 게 아니지만, 인간은 이렇게 끼리문화, 텃새문화가 있기 때문에 꼭 자기 마음에 맞는 사람들하고 속삭거리는 것이 있다. 교회마다 이것을 사탄이 잡고 흔들어 댄다. 목사파 장로파, 신참파 고참파, 호남파 경남파가 있고, 이 짓거리를 하고 돌아다닌다. 악한 짓거리다. 역사가 쌓이고 전통이 쌓여 갈수록 이 당짓는 문화들이 교회나 정치나 학교 등에서 동문이 어디냐 끌어주고 밀어주고 이런 짓을 함으로써 국가 발전을 저해하고 믿음 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한다. 이게 한국교회를 망치고 있다. 반대로 상받는 사람도 있다. 참고 선을 행하며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는 자는 하나님이 보고 계시다가 상을 주신다. [로마서] 2장 유대인과 율법 12.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13.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가인이 아벨을 때려 죽였다. 최초의 살인이 동생을 때려 죽인 사건이니까 인간이 얼마나 악한지 알 수 있다. 살인은 십계명 중 6번째 범죄이다. 그런데 가인은 율법 전에 죄를 저질렀다. 율법은 지금부터 4000년 전 모세 때 온 거다. 대략 잡아 아담은 6000년 전 사람이다. 율법을 모세를 통하여 주시기 전인 약 2000년 전에 가인이 범죄한 것이다. 즉 율법이 있기 전에 가인이 살인죄를 저질렀다. 그러면 율법 없이 범죄했으면 범죄가 아닌가, 죄이다. 율법이 오기 전에도 율법을 범한 건 죄다. 율법 이후에도 범죄한 것도 죄다. 그래서 자기 안에 ‘양심’의 법이 그걸 알고 가인이 아벨의 시체를 훔쳐 왜 흙으로 덮었겠는가. 범죄한 걸 알았기 때문이다. 이게 ‘양심의 법’이다. 율법을 알든 모르든 범죄한 자나, 율법을 모르고 율법을 범하든, 율법을 알고 율법을 범하든 모든 자에게 동일한 심판이 임한다. 즉 유대인들은 율법을 알고도 죄를 지었고, 이방인들은 율법을 모르고도 죄를 짓는다. 그리고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율법을 범했고 이 때문에 동일하게 심판을 받는다. 이를 거꾸로 말해보면 어떤 이는 율법을 모르고도 율법을 지키고, 율법을 알고서 율법을 지켰다면 둘 다 칭찬을 받을 것이다. 여기서 소돔과 고모라가 범죄 전 동성애 체제였다. 그러면 성경에 율법이 오기 전인 아브라함 때니까 동성애를 저질렀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것은 모르고 죄를 지었으니까 이해해주시고 참고로 하셨냐, 그렇지 않다. 이런 사례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우리가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이라고 칭할 수 있는, 율법이 꼭 하나님 말씀의 전부라고 표현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규정되어진 율법, 그 율법 안에 ‘도덕’과 ‘윤리’가 들어간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살인을 한다는 것’은 ‘율법과 상관 없이 인간이 해서는 안되는 일’이라는 것이다. 동성애, 짐승과 행하는 수관행위, 근친상간 등의 이런 행위 등은 율법에 명시했지만, 레위기법 기록 전이라도 인간의 ‘양심의 법’으로서는 ‘해서는 안되는 행위’라는 말이다. 지금 이 땅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지탄을 받고 윤리적으로 욕을 먹는다면, 만약에 우리가 욕을 먹는 행위가 율법에 명시되어 있지 않은 내용도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율법에 없으니까 나는 천국간다는 그런 소리는 해서는 안된다. 보편타당한 윤리와 도덕이라고 하는 것은 말씀 안에 다 있어야 하는 것이다. 말씀을 초월한 비도덕적 윤리적 행위는 있을 수 없다. 말씀에 설령 그 내용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할지라도 열매, 즉 그것은 윤리와 도덕의 열매아다. 그 열매가 깨끗하지 못하고 아름답지 못한 것은 이미 말씀에 거칠은 죄를 지은 것과 같다. 도덕과 윤리를 초월하는 단 한 번의 경우가 있다. 그것은 생명을 위한 것이다. 기생 라합이 거짓말을 한다. 성경말씀에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이미 기생 라합은 율법이후의 시대 사람으로 이방인이다. 기생 라합은 이방 여인이므로 율법 까지는 몰랐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됐든 말씀의 기준으로 보면 기생 라합은 거짓말을 했다. 어떤 거짓말을 했는가면 정탐꾼을 숨겨주고 모른다고 했다. 그런데 거짓말의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가족은 구원을 받았다. 기생 라합은 살기 위해서 거짓말을 했다. 단순히 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그렇게 했다. 뭐냐, 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는 하나님, 이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이들을 절대 거슬러서는 우리가 이길 수 없다. 그걸 알고서 일찌감치 믿음으로 손을 들었다. 그리고 기생 라합은 자기와 자기 친족들의 구원을 조건으로 내걸었고, 그리고 나서 거짓말을 했다. 이걸 믿음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므로 거짓말 하지 말라는 것은 분명히 율법에 명시되어 있지만 생명을 위해서는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날마다 반복된다면, 이건 하나님을 이용하는 죄가 된다. 이것은 복음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위하여, 생명을 취하기 위하여,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계심으로 인하여, 요한일서에 그런 말씀이 있는데, 우리 안에 기름 부음이 있으니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을 이유는 없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의 양심을 주장하시고, 우리의 생각과 판단을 주장하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거하게 하실 것이니까 그건 염려할 필요가 없다. 그렇게 본다. 오늘의 결론,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율법을 아는 자나 모르는 자나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고, 우리가 항상 경청하여 깨어 있을 것이 뭐냐하면 남의 허물을 함부로 판단하고 정죄하기 전에 내가 말씀 앞에 바로 서있는 하나님의 사람인가 이것을 항상 감찰하면서 주님 앞에 섰을 때 심파이 아닌 상급을 받는 예수님의 사람이 될 수 있기 위하여 우리의 남은 여생 사는 동안에 치열하게 말씀을 붙잡고 씨름해 나가는 저와 여러분이 꼭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거의 말씀 위주로 논리정연하고 바르게 풀어 주시는 유진소 목사님의 로마서 강해입니다. 7강 : 로마서 2장 1~5절 – Seven Deadly Sins : 교만, 시기, 분노, 나태, 탐욕, 식탐, 색욕 8강 : 로마서 2장 6~11절 – 하나님과 사람에게 함께 있는 성품(공유적 속성) : 인자, 성실, 의로움, 판단 – 중심(믿음, 죄된 동기) 9강 : 로마서 2장 12~29절 – 신앙이 종교가 되지 않기 위한 마음의 할례(행동으로, 솔직하게, 지혜롭게) 온유와 겸손으로 서로 섬기고 긍휼히 여기며 사랑하는 함께 나누고 배려하며 더불어 사는 정의와 공의, 진리가 물같이 흐르는 그런 세상이 속히 오기만을! #로마서 #로마서강해 #로마서2장 #베이직교회 #조정민 #선한목자교회 #유기성 #제자광성교회 #박한수 #호산나교회 #유진소 #남을심판하는자여 #마음에할례를받으라 #비판하면의로운가 #나의구주나의복음 #남을판단하는사람아 #하나님은중심을보신다 #할례는마음에할지니 인쇄
칼빈주석 로마서 2장 1-10절
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2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롬 2:1,2
1 그러므로 … 사람아, …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이 책망의 말씀은 외적인 거룩함을 과시함으로써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 위선자들을 겨냥한 것이다. 그들은 마치 자기들이 하나님을 온전히 만족시키기라도 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들을 받으셨다고 생각하기까지 한다.
바울은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지 못하다는 증거로서 더 가증스러운 부도덕한 행위들을 보여주고 나서, 이제부터는 스스로를 믿음이 두터운 자라고 여기는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공격한다. 그들은 그가 제시한 첫 번째 죄악의 범주에 속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사도 바울의 추론은 너무도 명백하고 단순해서, 그가 어떤 식으로 자기의 논증을 펴나갔는지 의아해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는 그들을 ‘핑계하지 못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그들 스스로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알고 있었으면서도 율법을 어겼기 때문이다.
그는 마치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 같다. “네가 다른 이들의 그런 부도덕한 행위에 동의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리고 실제로 그런 사람들을 공공연하게 대적하며 꾸짖는 듯한 인상을 준다 할지라도, 네가 진정으로 스스로를 살핀다면 네게 그런 죄악들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너는 스스로의 행위에 대해 어떤 항변도 할 수가 없다.”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크리네인’(krinein, 판단하다)과 ‘카타크리네인’(katakrinein, 정죄하다)이라는 두 헬라어 동사를 사용함으로써 멋진 언어 유희를 펼친 것 외에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울이 그들을 정죄하는 데 사용한 과장법이다.
그는 마치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 같다. “너는 두 배로 정죄를 받아 마땅하다. 왜냐하면 네가 정죄하고 비난하는 다른 사람의 그 부도덕한 행위를 바로 네가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 사이에 잘 알려진 이런 말이 있다. “다른 이들에게 삶의 규범을 지켜야 한다고 요구하는 사람들은 자기들 스스로가 결백하고 합리적이며 온갖 덕을 행한다고 주장하는데, 만일 이들이 다른 사람들에게서 고치려고 하는 그 동일한 잘못을 행할 경우, 그들은 용서 받을 만한 자격이 조금도 없다.”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이 구문은 직역한 것으로 그 의미는 다음과 같다. “네가 판단을 할지라도 너는 같은 일을 행하고 있다.” 바울은 그들의 마음 상태가 바르지 않기 때문에 이런 일을 행한다고 진술한다.
죄는 엄밀히 말해서 마음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런 면에서 스스로를 정죄하고 있는 셈이다. 즉, 도적질한 자와 간음한 자, 중상하는 자를 비난할 때 그들은 단순히 사람들에 대해서 판단을 내린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과 분리할 수 없는 그 부도덕함에 대해서 판단을 했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여기서 바울이 의도한 바는 위선자들에게 충격을 줌으로써 그들의 자기 만족감을 버리게 하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세상의 박수갈채를 받을지라도 혹은 스스로를 무죄하게 여긴다 할지라도, 그들이 진정으로 뭔가를 얻었다고 착각하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다.
하늘에서는 아주 다른 심판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서 그는 그들 내면의 부정함을 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이 부정함은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인간의 증언으로 입증하거나 유죄 판결을 내릴 수가 없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심판에 호소하는 것이다. 그분의 심판 앞에서는 어둠 자체를 숨길 수가 없다. 또한 죄인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들에 대한 소송은 그분의 심판에 따라 결정되어야만 한다.
이 심판의 ‘진리’는 두 가지로 드러날 것이다. 첫째, 하나님께서 누구에게서 죄를 찾아내셨든 간에 그 사람의 지위고하地位高下를 막론하고 죄를 벌하실 것이다. 둘째, 그분은 외적인 모습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시며, 참으로 신실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행위가 아니라면 그 어떤 행위에도 만족하지 않으신다.
이 사실을 통해 우리는, 사람이 거짓된 경건의 가면을 쓴다 하더라도 그분은 자신의 심판을 통해 은밀한 사악함을 벌하실 것임을 알 수 있다. ‘진리대로’라는 어구는 히브리 어법을 따른 것이다.
히브리어에서 ‘진리’는 종종 마음의 내적 온전함을 의미하며, 그러하기에 쉽게 감지할 수 있는 거짓뿐만 아니라 외견상 선한 행위로 보이는 것과도 반대되기 때문이다. 위선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거짓된 의義뿐만 아니라 그들의 은밀한 감정에도 주의를 기울이실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때만 정신을 차리게 된다.
3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4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5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6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8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9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10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 롬 2:3-10
3 사람아, 네가 … 생각하느냐 죄가 입증되기 전까지는 맹렬한 비난을 삼가는 것이 수사학修辭學의 법칙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여기서 자기가 고발하고자 하는 바를 입증하기 전에 심한 혹평을 한 것은 분별 없는 행동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이들이 혹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은 그런 경우가 아니다. 그들이 죄가 있다는 사실에 대한 그의 증거는 충분히 결정적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사람들 앞에 그들을 고발한 것이 아니라 양심의 심판으로 그들의 유죄를 증명했기 때문이다. 바울은 자기가 의도한 바를 입증했다고 생각했음이 분명하다.
즉, 그들이 스스로를 살피고 하나님의 면밀한 심판을 따르게 될 때, 자기들의 불의함을 부인否認할 수 없을 것이다. 바울에게는 그들의 거짓된 고결함을 그토록 혹독하고 신랄하게 비난할 절박한 필요가 있었다.
왜냐하면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허울뿐인 그들의 자신감을 흔들어놓지 않는 한, 놀라울 정도로 스스로를 철석같이 신뢰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위선을 극복하는 최선의 방법은 그 마취 효과에서 깨어나게 해서 그 위선을 하나님의 심판의 빛 앞으로 끌고 가는 것임을 기억하자.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바울은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논증을 펴고 있다. 만일 우리의 죄가 인간의 판결을 받아야 한다면, 그 죄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 아닌가? 그분은 모든 심판자들 중에 유일하게 참된 심판자이시다. 인간이 신적인 본능에 이끌려서 악한 행위를 정죄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의 판단은 단지 하나님의 심판을 미약하고 희미하게 닮았을 뿐이다. 다른 이들이 그들의 판단을 피하는 것은 허용하지 않으면서 자기들 스스로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지극히 어리석은 자들이다. 바울은 ‘사람아’라는 말을 반복하는데, 이는 사람을 하나님과 비교하기 위한 것이다.
4 그의 인자하심과 …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내가 볼 때 이 구절에는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딜레마가 존재하는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바울은 이의異意가 제기될 만한 내용을 예상하고 있는 것 같다. 위선자들은 자기들의 선한 행위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얻기라도 한 것처럼 스스로의 형통함에 대해 우쭐해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멸하는 그들의 마음은 더 완고해진다. 이런 이유 때문에 사도 바울은 그들의 교만함을 미리 조처하는 것이다. 그는 반대 논증을 폄으로써, 그들이 외적으로 형통하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호의를 베푸신다고 생각할 만한 이유는 전혀 없음을 입증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유익이 될 만한 전혀 다른 계획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즉, 그분은 죄인들을 자신에게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충분하지 않은 상황에서 형통함을 신뢰하는 것은, 그분의 측량할 수 없는 인자하심을 경멸하고 조롱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즉, 현세現世에서 하나님께서 목숨을 보전해주신 자들에게는 더 과중한 형벌이 부과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른 사악함에 더하여, 아버지로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초청을 거절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모든 호의가 아버지로서의 그분의 인자하심을 드러내는 여러 증거가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분은 마음에 다른 목적을 가지고 계실 때가 종종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친절을 베푸시면서 자기들을 관대하게 지원해주신다고 해서, 자기들이 그분께 사랑스러운 존재라도 되는 것처럼 경건하지 않은 자들이 스스로의 형통함을 자축自祝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주님께서는 그분의 선하심을 통하여, 스스로의 안녕安寧을 간절히 원한다면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분은 바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시는 동시에 우리가 그분의 자비하심을 더 담대하게 바랄 수 있도록 우리에게 확신을 더해주시기도 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풍성함을 이런 목적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남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풍성함을 늘 동일한 견지에서 봐서는 안 된다. 주님께서 자신의 종들을 호의적으로 대하시고 그들에게 세상적인 복을 주실 때, 그분은 이런 종류의 표지를 통해 그들에게 자신의 선한 뜻을 알리시는 것이며, 동시에 그들로 하여금 오직 그분 안에서만 모든 선한 것들을 구하도록 훈련시키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분의 법을 어기는 자들을 동일한 은혜로 대하실 때, 그분은 자신의 인자하심을 통하여 그들의 완고함을 누그러뜨리려 하신다. 그렇다고 해서 그분이 그들을 기뻐하신다고 선언하시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분은 그들에게 회개를 요구하신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내적內的으로 만지지 않으신다면 귀머거리들에게 간청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면서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이런 반론에 대해 우리는, 이 경우에 비난을 받아야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사악한 본성이라고 대답해야 한다.
나는 ‘요구하여’calleth라는 말보다는 ‘인도하여’leadeth라는 번역이 더 마음에 든다. 왜냐하면 후자가 더 함축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인도하여’라는 말을 무리하게 몰아댄다는 의미보다 오히려 손을 잡아 이끈다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5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우리가 주님의 권고하심에 대해서 고집을 피울 때 회개하지 않는 마음이 생긴다. 그리고 회개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들은 공공연하게 주님의 심기心氣를 건드린다.
주목할 만한 이 구절을 통해, 우리는 앞에서 내가 이미 언급한 사실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즉, 경건하지 않은 사람들은 이 땅에 사는 동안 날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더욱 가혹한 심판을 스스로에게 쌓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지속적으로 향유하는 하나님의 선물들 또한 그들의 정죄를 가중시킬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 모든 선물들에 대해서 설명을 요구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가 되면 그들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아 더 심해진 자기들의 극한 사악함에 대해 비난 받아 마땅함을 알게 될 것이다. 적어도 그들은 그분의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아 고침 받았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옳지 못하게 남용함으로써 이런 식으로 재앙을 쌓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자.
진노의 날 직역하자면 ‘그 날에’(into the day)라고 할 수 있다[헬라어로는 ‘에이스 헤메란’(eis hemeran)이며 ‘그 날을 위하여’(for the day)라는 의미이다]. 경건하지 않은 자들은 지금 그들 주변에 하나님의 진노를 쌓고 있다. 그 날에 그 진노가 그들 머리 위로 거침없이 쏟아질 것이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파멸을 자기들에게 쌓고 있으며, 그 날이 되면 하나님의 창고에 쌓여 있던 그 파멸이 쏟아져나올 것이다. 마지막 심판의 날은 신자들에게는 구원의 날이 될 것이다. 그러나 경건하지 않은 자들에게 이 날에 대해 언급할 때, 그것은 ‘진노의 날’이라고 불린다.
주님의 오심을 언급하는 다른 모든 경우들을 볼 때, 이런 식으로 경건하지 않은 자들에게는 항상 두렵고 무시무시한 날로, 그러나 경건한 자들에게는 기쁘고 즐거운 날로 묘사된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주님의 가까이 오심에 대해서 언급할 때마다 경건한 자들에게는 크게 기뻐하라고 명한다. 그러나 버림 당한 자들을 향해서는 공포와 두려움을 선포할 뿐이다.
스바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폐와 패망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습 1:15). 요엘서 2장 2절에서도 이와 비슷한 상황을 설명한다.
그리고 아모스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화 있을진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냐 그 날은 어둠이요 빛이 아니라”(암 5:18). ‘나타나는’이라는 단어를 덧붙임으로써 바울은 이 ‘진노의 날’이 어떠할 것인지 넌지시 비춘다.
즉, 그때가 되면 주님께서 자신의 심판을 분명하게 보이실 것이다. 물론 주님께서는 날마다 이 심판에 대한 암시를 주시지만, 책들이 개봉되고 양과 염소가 나뉘고 알곡에서 가라지를 제거하는 그 날이 되기까지 그분은 그 심판을 분명하고 충분하게 드러내는 것을 연기하고 보류하신다.
6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바울은 거룩한 척하는 눈먼 위선자들을 다루어야 했다. 그들은 겉보기에 그럴듯한 몇 가지 공허한 행위들로 포장하기만 하면 자기들 마음의 사악함이 감쪽같이 감추어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가치 있게 여기실 의로운 행위의 참된 특성을 지적한다. 혹시 그들이 말이나 단순한 행위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에 충분하다고 확신을 가질 경우를 대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문장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난해하지는 않다. 주님께서는 정당한 보응을 통해 버림 당한 자들의 사악함을 벌하심으로써,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하는 것을 그들에게 돌려주실 것이다.
그분은 또한 자신이 이전에 영화롭게 하기로 정하신 자들을 성결케 하심으로써 그들의 선한 행위를 높여주실 것이다. 그러나 그분이 그들의 공로를 인정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시는 것은 아니다.
또 현재의 구절에서 선행에 대한 보답이 공로에 기인한 것임을 입증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 구절은 선한 행위가 어떤 보상을 받게 될지 선언하지만, 그 행위의 가치 혹은 그것에 합당한 값어치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일에 보상이 주어진다고 해서, 그 일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은 것으로 여기는 것은 어리석다.
7 참고 선을 행하여 라틴어 역에는 ‘perseverantia’(꾸준함, 영어의 ‘perseverance’)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으나, ‘patientia’(인내, 영어의 ‘patience’)라고 읽는 것이 훨씬 더 그 의미를 잘 표현해준다. 꾸준함은 지치지 않고 지속적으로 선을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성도들에게는 인내 또한 요구되는데, 인내로 말미암아 그들은 여러 가지 다양한 시험을 만나더라도 견고함을 잃지 않는 것이다. 사탄은 성도들이 주님께 쉽게 나아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수많은 장애물들을 통해 그들을 방해하고, 그들을 올바른 길에서 돌아서게 하고자 애쓴다. 신자들이 계속해서 선한 일을 행함으로써 ‘영광과 존귀를 구한다’고 말할 때, 바울은 그들이 하나님 외에 다른 어떤 것을 갈망한다거나 더 위대하고 가치 있는 것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는 의미로 이야기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을 구하게 될 때는 반드시 그분 나라의 복락福樂을 동시에 구하고자 한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다. 이 구절에서는 그것을 알기 쉽게 다른 말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선을 행하고자 애씀으로써 썩지 아니함을 얻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영생永生을 주실 것이라는 의미이다.
8 당을 지어 …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이 구절은 약간 애매하다. 우선 본문의 전체적인 의미가 끊어진다. 논증의 맥이 이어지려면 비교 대상이 되는 두 번째 항목은 첫 번째 항목의 문장 구조와 일치해서 다음과 같은 식으로 되어야 한다.
“주님께서는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을 주실 것이지만, 다투기를 좋아하고 불순종하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사망을 주실 것이다.” 그런 다음에 이런 결론이 내려져야 한다. “전자前者를 위해서는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이 보장된 반면, 후자後者를 위해서는 진노와 고통이 준비되어 있다.”
이 구절이 애매한 또 다른 이유는 ‘진노, 분노, 환난, 곤고’라는 단어들이 문맥상 서로 다른 두 개의 절에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구절의 의미가 혼란스러워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리고 사도들의 글을 읽을 때 이런 점이 발견되더라도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멋진 수사법은 다른 저자들에게서 배울 일이다. 세련되거나 고상한 맛이 부족하고 충분히 문학적인 표현 양식을 갖추지 못한 이 글에서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바로 영적인 지혜이다.
여기에 언급된 ‘당 짓는 것’은 반항적이고 고집스러운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지금 바울은 아무 개념 없이 가증스러운 자기 탐닉에 빠짐으로써 하나님을 비웃고 경멸하는 위선자들과 논쟁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리’라는 말은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의미할 뿐이다. 그분의 뜻만이 진리의 빛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멍에를 짊어지기보다는 항상 죄악에 굴복하는 쪽을 택하는 것은 모든 불신자들의 공통적인 특징이다.
그리고 아무리 겉으로 순종하는 척하더라도,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하여 야유를 보내며 완강하게 대적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누가 봐도 악인惡人임이 분명한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의 진리를 조롱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위선자들은 그 진리를 대적하여 거짓된 예배 형태를 만들어 내는 데 조금의 주저함도 보이지 않는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더 나아가서, 그런 불순종하는 자들이 ‘불의不義를 따른다’고 덧붙인다. 주님의 법에 굴복하기를 거부하는 자들에게, 그들을 죄의 노예 상태로 굴러떨어지지 않도록 해줄 중간 지대 같은 것은 없다.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죄의 노예가 되는 것은 난폭하고 부도덕한 자들이 받아야 할 마땅한 보상이다.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이 단어의 본질절인 의미를 살리려면 이렇게 번역할 수밖에 없다. 키케로(Cicero, 기원전 106~43. 로마 시대의 정치가, 웅변가, 문학가, 철학자)가 그의 저서 《투스쿨란의 대화》Tusc. 4권에서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처럼, 헬라어로 ‘쑤모스’thumos라는 말은 라틴어에서 ‘excandescentia’(분노, 영어의 indignation)라고 부르는 것으로, 갑작스러운 분노의 폭발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구절의 나머지 단어들에 대해서는 에라스무스의 번역을 따랐다. 그러나 여기 언급된 네 단어 중에서 마지막 두 단어(환난과 곤고)는 앞의 두 단어(진노와 분노)의 결과임을 주목하라. 하나님의 노여움과 언짢음을 경험하는 자들은 즉시 부끄러움을 당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참 신자들이 받게 되는 복과 버림 받은 자들이 당하는 파멸에 대해서 한두 마디로 간략하게 기술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두려움을 좀더 효과적으로 느끼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를 얻고자 하는 그들의 열망을 북돋우기 위해서, 그는 이 두 가지 주제를 자세하게 진술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마땅히 두려워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그 심판에 대해서 우리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주지 않으면 결코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또한 여러 가지 자극을 받음으로써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내세에 대한 갈망으로 가슴이 사무치는 일도 없다.
9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여기서 ‘유대인’은 단순히 헬라인과 대조되고 있음이 거의 확실하다. 나중에 바울은 지금 여기서 헬라인이라고 칭하는 자들을 이방인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경우에 유대인들은 순서상 헬라인보다 우선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그들이 다른 사람들에 우선해서 율법의 약속과 경고를 둘 다 받았기 때문이다. 바울은 마치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 같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의 보편적인 법칙이다. 그분의 심판은 유대인에게서 시작해서 온 세상을 아우르게 될 것이다.”
. 칼빈주석 로마서 2장 11-16절 ▷
로마서 강해
로마서 강해 김효성 목사 2021년 7월 1일 수정 자료 내려받기 머리말 주 예수 그리스도(마 5:18; 요 10:35)와 사도 바울(갈 3:6; 딤후 3:16)의 증거대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라는 고백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기본적이고 중요하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진술된 대로(1:8), 우리는 성경의 원본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오류가 없이 기록되었고 그 본문이 “그의 독특한 배려와 섭리로 모든 시대에 순수하게 보존되었다”고 믿는다. 이것은 교회의 전통적 견해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약성경의 헬라어 비잔틴 다수 사본들의 본문이 순수하게 보존된 성경 원본의 본문에 가장 가까운 본문으로 여전히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본다. 성경은 성도 개인의 신앙생활뿐 아니라, 교회의 모든 활동들에도 유일한 규범이다. 오늘날처럼 다양한 풍조와 운동이 많은 영적 혼란의 시대에,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묵상하기를 원하며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뜻을 알기를 원한다. 성경을 가지고 설교할지라도 그것을 바르게 해석하고 적용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올 것이다(암 8:11).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의 기근이 오고 있다. 많은 설교와 성경강해가 있지만, 순수한 기독교 신앙 지식과 입장은 더 흐려지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요구되는 성경 해석과 강해는 복잡하고 화려한 말잔치보다 성경 본문의 바른 뜻을 간단 명료하게 해석하고 잘 적용하는 것일 것이다. 사실상, 우리는 성경책 한 권으로 충분하다. 성경주석이나 강해는 성경 본문의 바른 이해를 위한 작은 참고서에 불과하다. 성도는 각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성경을 읽어야 하고, 성경주석과 강해는 오직 참고로만 사용해야 할 것이다. 제목 차례 로마서 서론 1장: 사람의 죄 2장: 하나님의 심판 3장: 칭의(稱義)의 방법 4장: 아브라함의 예 5장: 칭의(稱義)의 결과 6장: 성화(聖化)의 이유 7장: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8장: 성령의 인도하심 9장: 은혜로 택하심 10장: 신앙고백 11장: 하나님의 구원 계획 12장: 그리스도인의 생활 13장: 사회적 의무, 이웃 사랑, 빛의 생활 14장: 서로 덕을 세우라 15장: 사도 바울의 전도 사역 16장: 인사 서론 로마서는 사도 바울이 제3차 전도여행 중 하나님의 감동으로, 아마 고린도에서 기록한 편지로서(롬 15:19, 23-26; 16:1; 행 19:21) 바울의 13권 혹은 14권의 서신들 중에서, 아니 신약성경 27권 중에서 구원의 복음을 가장 논리적으로 밝히 증거한 매우 중요한 책이다. 본서의 저자 는 사도 바울이다(1절). 1세기 말부터 2세기 초, 로마의 클레멘트, 익나시우스, 순교자 저스틴, 폴리갑 등은 본서를 많이 인용하였고 교회역사상 본서의 바울 저작성을 부정하는 학자들은 거의 없었다. 본서의 저자는 본서 끝부분에서 자신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마게도냐와 아가야의 북서쪽 해안]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널리 전하였고 이제는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고 있다고 말했다. 이것은 사도행전에 기록된 바울의 행적과 일치한다(행 19:21; 20:22; 24:17 등). 본 서신을 받은 로마교회 의 기원에 대해 몇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로, 천주교회는 사도 베드로가 로마교회를 세웠고 25년간 그 교회의 감독으로 있었다고 주장한다.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고린도의 디오니시우스는 베드로와 바울이 로마에서 함께 교회를 설립하였다고 말하였다. 1) 이레니우스도 말하기를, 로마교회가 베드로와 바울, 두 영광스러운 사도에 의해 세워졌다고 하였다. 2) 터툴리안은 베드로와 바울이 로마에서 순교 당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오늘날 일반적으로 베드로가 로마를 방문했으며 또 후에 그곳에서 순교 당했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그가 로마교회를 세웠다거나 25년간 그곳에서 사역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는다. 만일 바울이 로마를 방문하기 전에 베드로가 그곳에서 교회를 세웠고 그곳에서 사역하고 있었다면 바울은 필경 그에게도 문안했을 것이고, 또 남의 터 위에 교회를 세우지 않겠다는 신념으로 사역했던(롬 15:20) 그가 그 교회를 방문하려고 계획을 세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둘째로,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와서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던 자들이 로마에 돌아가 교회를 세웠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셋째로, 아시아와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사도 바울이나 기타 다른 제자들에 의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신자들이 로마로 올라가 살면서 교회를 세웠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두 번째와 세 번째의 견해는 다 가능하다고 본다. 본 서신의 저작 장소 와 연대 에 관하여, 본 서신에 의하면 바울은 로마교회를 방문하려는 소원을 갖고 있었고(1:10), 또 그들에게 복음을 전함으로 그들을 견고케 하고 열매를 맺게 하기를 원하였다(1:11, 13). 그는 본 서신을 기록할 당시 예루살렘의 어려운 성도들을 위해 모은 헌금을 가지고 그리로 가고 있었다(15:25-27). 또 그가 ‘식주인[집주인] 가이오’를 언급한 것을 보면, 그는 고린도에 머물고 있었다고 보인다(고전 1:14). 그러므로 본 서신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서 주후 56년경에 썼을 것이다. 로마서의 특징적 주제 는 구원 이다. 1장부터 11장까지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이치에 대해 증거했는데, 1, 2장은 구원의 필요성으로서 사람의 죄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3-5장은 의롭다 하심(칭의, 稱義)에 대해, 6-8장은 거룩하여짐(성화, 聖化)에 대해, 또 9-11장은 구원받을 자들에 대한 예정에 대해 증거했다. 그리고 12장부터 16장까지는 구원 얻은 자들의 삶에 대하여 교훈하였다. 구원 얻은 자들은 거룩하고 정직하고 선하고 진실한 삶을 살아야 한다.
1장: 사람의 죄 1-7절, 복음 안에서 문안함 [1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사도 바울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소개했다. 종은 주인에게 복종하는 신분이다. 그는 주인이 명령하는 대로 순종해야 한다. 바울은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몰랐고 그를 믿는 자들을 핍박했지만,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님으로, 또 자신을 그의 종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야 한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다시 사신 구주와 주님이시다. 우리는 사람이나 돈이나 쾌락의 종이 되지 말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 그에게 즐거이, 온전히 복종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바울은 또 자신을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라고 말하였다. 누가복음 6:13,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사도(使徒)는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들과 바울에게만 적용되는 명칭이다. 열두 제자 중 가룟 유다가 배신했으므로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제자들은 가룟 유다 대신 맛디아를 뽑았다(행 1:26). 사도행전에서 예외적으로 바울의 동역자 바나바가 바울과 함께 ‘사도들’이라고 두 번 불리었다(행 14:4, 14 원문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택함을 입었다고 말했다. 사도들은 하나님의 복음을 해설하고 선포하는 일을 맡은 자들이었다. 그들은 구약의 선지자들처럼 하나님의 성령의 특별한 감동을 받은 자들이었고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의 전달자들이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의 기초를 놓은 자들이었다(엡 2:20). 그러므로 신약교회와 성도들은 하나님의 복음을 잘 파악하기 위해 사도들에게로, 즉 그들의 글들인 신약성경으로 나아가야 한다. 혼란한 시대에는 더욱 성경만이 하나님의 뜻과 진리를 확인하는 길이다. 종교개혁시대에 많은 학자들과 교회지도자들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복음이 가리워져 있었다. 사람들은 어떤 교훈과 노선이 바른 것인지 알기 어려웠다. 그러나 루터는 비록 한 사람의 천주교 신부이었지만 성경의 확실한 지식과 확신으로 종교개혁의 횃불을 들 수 있었다. 다른 개혁자들도 그러하였다. 오늘날 배교와 타협과 혼돈의 시대에도 참된 교회들과 종들은 오직 성경으로 가야 한다. [2절]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하나님의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내용으로 구약성경에 미리 약속되어 있었다. 구약성경은 오래 전부터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약속하였었다. 창세기 3:15에 예언된 ‘여인의 후손’이나 창세기 12장에 언급된 ‘아브라함의 씨’나 창세기 49:10에 예언된 ‘ 실로 ’[안식의 사람]나 이사야 9:6의 신적 아기의 탄생이나 미가 5:2의 그의 근본이 태초인 자 등이 그것이다. 기독교 복음은 구약성경에 근거하고 있다. 구약성경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과 예표의 말씀들로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다(요 5:39; 눅 24:27, 44). [3절]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씨, 자손]에서 나셨고. 복음의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 사람이시요 참 하나님이시다. 그는 참된 인성(人性)과 참된 신성(神性)을 소유하고 계신 분이시다. 본절의 ‘육신’이라는 원어( 사르크스 )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가리킨다고 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윗의 자손으로 참 사람으로 탄생하셨다. 그의 몸만 다윗의 자손으로 나신 것이 아니고, 그의 영도 그러하셨다. 즉 그는 몸과 영혼을 가진 참 사람이셨다. 이것은 구약성경의 예언들의 성취이었다. 예레미야 23:5,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에스겔 34:23, “내가 한 목자를 그들의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호세아 3:5, “그 후에 저희가 돌아와서 그 하나님 여호와와 그 왕 다윗을 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예언들의 성취이시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라”(마 1:1)는 말로 시작된다. [4절] 성결의 영( 프뉴마 하기오쉬네스 )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성결의 영’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 속에 계신 거룩한 신성(神性)의 영을 가리킨다고 본다. 예수께서는 인성(人性)으로는 다윗의 자손이요 신성(神性)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의 증거는 그가 행하신 기적들과 그의 부활하심이다. 그의 죽음과 부활은 복음의 기본적 사실들이다. 고린도전서 15:1-4,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 . . .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모든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행하신 기적들과 그의 죽음과 그의 부활을 반드시 확인하고 믿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부활하심으로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 ‘인정하다’는 원어( 호리조 )는 ‘확정하다, 선언하다’는 뜻이다. 영어성경들은 ‘선언되셨다’라고 번역하였다 (KJV, NASB, NIV) . 그는 본래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부활하심으로써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확실히 인정되고 확정되고 선언되신 것이다. 이 분이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바울은 복음의 내용을 설명하면서 이와 같이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인성과 참된 신성을 증거하였다.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의 중심 인물이시며 복음 자체이시다. 그는 죄인들의 대속물로 하나님께서 세상에 보내신 구주이시다. 그는 슬픔과 불행, 절망과 허무, 죽음의 그늘진 세상에서 우리를 건지시기 위해 오신 구주이시다. 그 안에 구원과 영생, 기쁨과 소망이 있다. [5-6절]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의 은혜를 받았다. 또 은혜는 사도의 직분에도 관계된다. 우리는 직분에 있어서도 무자격한 자들이다. 사도직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는 것이었다. ‘믿어 순종케’라는 원어( 에이스 휘파코엔 피스테오스 )는 ‘믿음의 순종을 위해’라는 뜻이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할 뿐만 아니라, 믿음 자체가 순종 곧 마음의 순종이다(롬 6:17). 마음으로 순종한 자는 물론 행위로도 순종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가지고 곳곳에 다니며 사람들로 하여금 믿음의 순종을 하게 하였다. 이 편지를 받는 로마 교인들도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하는 무리 중에 들었다. 그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었다. ‘부르심’은 성령께서 죄인들을 회개시켜 예수님을 믿게 하시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들, 그의 양들, 그리스도께서 피 흘려 사신 자들만 그의 부르심을 입고 그들은 그의 특별한 소유가 된다. 그들이 그리스도인들이다. [7절]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편지하노니](고전, 고후, 갈 외에는 작은 글씨로 첨가됨)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고전, 고후, 갈 외에는 ‘있을지어다’라고 번역함).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은 자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이며 성도(聖徒, 거룩한 자)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다. 그들은 만세 전에 하나님의 긍휼로 택함을 입은 자들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죄사함을 받아 거룩해진 무리들이다. 바울은 그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안이 있기를 기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고 성화를 이루어간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우리의 구원도, 우리의 성화도 불가능할 것이다. ‘평안’은 매우 포괄적인 개념이다. 그것은 마음의 평안과 몸의 건강과 물질적 안정과 환경적 평안을 다 포함하는 개념이다. 그것은 우리가 받은 구원의 결과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복음을 바로 알아야 한다. 복음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하나님의 복음이며 복음의 전달자는 사도들이며 복음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구약성경에 약속된 메시아,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신 자이시다. 그는 죄인의 구주로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대속사역을 이루셨다. 이 배교의 시대에 우리는 그의 사도들의 글인 신약성경을 통해 복음을 바로 알아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 죄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예수님 믿고 죄사함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특별한 소유가 되고 그를 순종하는 자가 되는 것은 가장 존귀한 구원의 복이다. 우리는 이 놀라운 구원의 복을 깨닫고 늘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안을 더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믿음의 견고함과 거룩하여짐과 온전해짐, 즉 우리가 죄와 마귀와 싸워 이기기 위해 필요하다. 또 우리는 이 세상 사는 동안, 평안의 나라 천국에 들어가기까지 마음의 평안과 몸의 건강과 물질적 안정과 환경적 평안이 필요하다. 8-17절, 로마에 복음 전하기를 원함 [8-10절] 첫째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을 인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내 영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어떠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바울은 먼저 로마의 교인들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었기 때문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라는 말은 우리의 구원이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음을 나타낸다. 오늘날 우리의 감사의 이유도 육적인 것보다 영적인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세상적, 물질적 형통과 번창보다 먼저 우리 자신과 주위의 형제들이 구원 얻은 사실과 그들의 믿음과 믿음의 성장과 믿음의 소문이 주위에 퍼져나감을 감사해야 한다. 바울은 하나님을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섬긴다고 표현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의 복음으로 구원받았고 그 복음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다. 바울은 또 ‘내 영으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표현한다. 우리의 인격은 우리의 영에 있다. 영은 인격의 주체이며 몸은 영의 도구이다. 기독교는 단지 몸의 종교가 아니고 영의 종교이다. 우리의 중생한 영의 새 성향은 우리의 마음과 몸을 늘 주장해야 한다. 바울은 그의 감사와 쉬지 않는 기도 생활에 대해 하나님께서 증인이 되신다고 말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진실한 마음과 진실한 사역을 증거한다. 우리도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항상 진실하게 말하고 행하며 또 감사하고 기도해야 한다. 바울은 로마 교인들을 위해 항상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뜻 안에서’ 그들에게로 갈 좋은 길 얻기를 원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믿는 믿음이다. 하나님의 허락 없이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라면 이것 혹은 저것을 하겠다는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약 4:15). [11-12절] [이는]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원함이니 그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서로의 안에 있는](원문)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바울이 로마로 갈 좋은 길 얻기를 기도한 이유는 그들 보기를 심히 원했기 때문이며, 그가 그들 보기를 원했던 것은 그들에게 어떤 신령한 은사를 나눠주어 그들을 견고케 하기 위함이었다. ‘신령한 은사’는 방언이나 병 고침 같은 은사라기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킨다고 본다. 사도들의 사역은 일차적으로 말씀 사역이었다. 그 말씀 사역을 통하여 성도들의 신앙과 소망은 어린아이의 시기를 벗어나 소년기, 청년기, 장년기로 자라며 견고케 된다(골 1:28-29). 오늘날 목사들의 사역의 목표와 임무는 바로 성경의 바른 강해이다. 바울은 또 서로의 견고한 믿음을 인해 서로 위로를 얻기를 원했다. 이것은 사실일 뿐만 아니라, 또한 그의 겸손한 태도를 보인다. 사도는 성도들에게 무엇을 주려고만 하지 않고 그들로부터 위로를 받으려 한다고 겸손히 말했다. 성도의 교제란 하나님께서 동일하게 은혜로 주신, 서로 안에 있는 믿음을 인하여 피차 위로와 힘을 얻는 것이다(살전 5:14). 이것이 영적 교제이며 교제의 유익이다. 우리의 교제는 단지 먹고 마시는 데 그치지 말고, 이렇게 같은 믿음의 확인을 통해 위로와 격려를 주고 받는 교제가 되어야 한다. [13절]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약간의](원문)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바울은 그가 로마로 가기를 원한 또 하나의 목적을 그들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들 가운데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함이라고 표현한다. 문맥에 비추어 볼 때, 그것은 영혼 구원의 열매를 가리킨다고 본다. 그는 거창하게 많은 사람의 구원을 목표로 삼지 않고 ‘약간의’ 열매 즉 몇 사람의 구원을 목표로 삼았다. 우리는 한 영혼의 구원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 또 바울이 본문에서 말한 열매는 로마의 성도들의 인격의 온전해짐과 선행을 포함한다고 본다. 구원 얻은 성도들은 인격이 온전해짐과 선행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갈 5:22-23). [14-15절]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바울은 자신이 모든 사람들에게 빚을 졌다고 말했다. 여기의 ‘빚’은 전도의 빚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영혼들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깨닫고 또 우리가 받은 구원의 은혜를 깨달았다면, 우리는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세상 모든 사람에게 전해야 할 의무가 있다. 우리는 배운 자에게나 못 배운 자에게나, 부자에게나 가난한 자에게나, 우리나라 사람에게나 다른 나라들의 사람에게나 차별 없이 복음을 전해야 한다. 택함 받은 자들만 회개하고 믿고 구원받을 것이지만, 우리의 전도 대상에는 어떤 제한이 있을 수 없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죄를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으라고 전해야 한다. [16-17절] [이는] 내가 [그리스도의](전통사본)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아니함이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이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義)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함이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복음을 널리 전하기를 원했다. 그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이유는 복음이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었다. 원문에는 ‘능력’이라는 말이 강조되어 있다. 많은 사람이 이 복음을 통해 구원을 받았다. 오늘날도 이 복음은 죄인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오늘날도 죄인들은 다른 수단으로가 아니고 이 복음으로 구원을 얻을 것이다(고전 1:21-24).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이 좋아하든지 싫어하든지 이 복음을 널리 전해야 한다. 또 복음이 구원의 능력이 되는 까닭은 믿음으로 얻는 하나님의 의(義)가 복음에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의는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과 법을 다 행했을 때 얻을 수 있는 바이었고(신 6:25), 죄는 하나님의 명령과 법을 어긴 상태이었다. 이 세상의 근본적 문제는 죄 문제 곧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어겨 범죄함으로 죄 가운데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 문제의 해결은 모든 사람과 세상의 근본 문제의 해결이다. 사람의 가장 큰 복은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사람의 가장 중요한, 근본적 문제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과 법을 행함으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은 경험과 성경을 통해 명백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의(義)를 복음에 나타내셨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으셔서 우리의 모든 죄의 책임과 형벌을 담당하심으로 이루신 의(義)이다(단 9:24; 롬 10:4; 고전 1:30). 이제 하나님께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이 의(義)를 주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복음이며,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구원이다. ‘믿음으로 믿음에’라는 말씀은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라는 뜻이라고 본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받는다. 이것이 복음이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되는 이치이다. 어떤 큰 죄인이라도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와 그를 구주와 주로 영접하고 믿으면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받는다. 이것이 하나님의 복음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代贖)을 깨닫고 그를 영접하고 믿는 것, 곧 속죄신앙은 죄인이 구원 얻는 신앙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바울은 로마로 가서 그 교인들을 견고케 하기를 원했다(11절). 우리의 믿음과 인격은 성경말씀으로 견고해져야 한다. 믿음은 말씀에서 나오며(롬 10:17) 말씀은 영의 양식과 같고(마 4:4) 일정한 음식보다 귀히 여겨야 한다(욥 23:12). 그것은 우리의 신앙 지식을 확실케 하며(눅 1:4) 우리에게 확신을 준다(딤후 3:14).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히 거하게 해야 한다(골 3:16). 우리는 신구약성경을 통해 우리의 믿음과 인격이 견고해져야 한다. 둘째로, 바울은 로마로 가서 서로의 믿음을 인해 위로 얻기를 원했다(12절). 우리는 서로를 위로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 자는 서로 위로하는 자가 된다(고후 1:3-4). 성령께서는 위로자로 우리 속에 계신다(요 14:16). 로마서 15:4,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성도들의 교제는 서로의 참된 믿음 때문에 서로에게 위로가 된다. 셋째로,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16절). 우리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구원 얻은 자들은 다 복음에 빚진 자이다. 바울은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고 말했다.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은 것은 그것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있고 죄인들은 그 복음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이다. “우리의 의는 이것뿐 예수님의 피밖에 없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함으로 한 명의 영혼이라고 구원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와 교회의 첫 번째 사명이다. 18-27절, 우상숭배와 정욕의 죄 로마서 1-2장은 구원의 필요성에 대해 설명한다. 사람들에게 구원이 필요한 것은 그들의 많은 죄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 때문이다. [18-19절] [이는]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나타남이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본문은 사람들에게 구원이 필요한 까닭은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해 하늘로 좇아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의 많은 죄에 대해 하나님의 진노가 있을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구원이 필요한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많은 죄 때문에 구원이 필요하다. 바울은 사람을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사람은 불의를 행하면서 진리를 가로막는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진리에 대한 관심과 흥미를 잃게 되고 마음이 어두워지고 진리를 왜곡시키고 진리를 대항한다. 사람의 죄는 불경건과 불의로 요약된다. 모든 죄는 불의이며 그 중에 하나님에 대한 죄가 불경건이다. 불의는 불경건을 포함한다.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이 의(義)요, 그것을 지키지 못한 것이나 어긴 것이 죄이다. 죄들 중 불경건은 근원적 죄이다. 다른 모든 죄는 불경건에서 나온다. 사람은 하나님을 무시하므로 여러 가지 죄를 짓는다. 사람들의 불경건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이기 때문이다. 본문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어느 정도 모든 사람 속에 있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그들에게 보이셨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자신을 어느 정도 알려주셨다. 그것이 사람의 종교성, 하나님 의식, 양심, 이성 등이다. [20절] [이는]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神性)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됨이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오묘막측한 천지만물의 존재는 전지전능한 창조자 하나님의 존재를 증거한다. 작은 건물 하나도 지은 자가 있는데, 천지만물이 우연히 생겼다는 것은 가장 불합리한 말이다. 천지만물은 창조주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신성(神性)을 알게 해준다. 자연만물은 사람이 세상에 창조주 하나님이 계신 줄 몰랐다고 핑계할 수 없게 만든다. [21절]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거나 감사치 않고 도리어 우상숭배에 떨어졌기 때문에 진노하신다. ‘하나님을 알되’라는 말씀은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을 알고 있음을 보인다. 무신론자도 전쟁 때에는 하나님을 찾는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선조들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이 없었으나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고 그들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겨왔다.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어느 정도 의식하며 살지만, 그 하나님을 참으로 영화롭게 하지 않고 또 그에게 감사하지도 않는다. 그들의 마음은 심히 어두워져 있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다는 지식을 가지지 못한 것이 사람의 근본적인 무지(無知)이며 어리석음이다. [22-23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새들과 짐승들]와 버러지 형상[기는 것들]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사람들은 자신을 지혜롭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에 살면서 그를 알지 못하고 있다. 세상의 시작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세상의 진행과 목적에 대한 지식도 있을 수 없다. 역사상 천재적 사상가들의 결론은 보통 사람들의 결론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그러므로 성경은 모든 사람을 다 무지하고 어리석다고 말한다. 사람의 무지의 대표적 증거가 우상숭배이다. 우상숭배는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 세계를 혼동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원자존자이시며 그의 영광은 썩어지거나 없어지지 않는 영광이며, 이 세상의 것들은 다 썩어지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우상숭배에 빠져 있다. 우상숭배는 불경건과 무지의 증거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불경건에 대해 진노하시는 것은 정당한 일이다. [24절]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그러므로’라는 말은 불경건이 모든 정욕의 죄의 원인임을 보인다. 하나님은 인류의 도덕의 근원이시고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은 부도덕의 뿌리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도덕성의 회복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때에만 가능하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만 악을 떠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불경건한 자들을 정욕의 죄 가운데 버려두셨다. 그는 죄인들을 회개시키시고 구원하실 능력도 있고 그들을 버려두실 권한도 있다. 왜 자신들을 구원치 않으시냐고 항의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이 스스로 하나님을 떠났고, 지금도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있고 자연만물 속에 명백히 나타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감사치 않고 오히려 우상숭배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불경건한 마음을 마음의 정욕과 더러움에 버려두셨다. 정욕의 죄는 불경건에서 나온다. 그것은 불경건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한 징벌이다. 죄는 죄를 더한다. 불경건한 사회는 음란한 사회가 된다. 그것은 확실히 하나님의 징벌이다. [25절]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하나님의 진리’는 하나님에 관한 바른 말을 가리키고, ‘거짓 것’은 하나님에 관한 거짓된 말을 가리킨다. 사람들은 참 하나님을 우상으로 바꾸었고, 하나님에 대한 바른 말을 헛된 우상의 말로 바꾸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피조물들을 조물주 대신 혹은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우상 앞에 절하지만, 우상은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조상들에게 제사를 드리지만, 죽은 조상들은 후손들에게 복과 화를 주지 못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 대신에 돈을 사랑하며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 그러나 돈이 신이며 사람이 신인가? 돈이 얼마나 헛되고 사람이 얼마나 연약한지는 재벌의 자살이나 병원 중환자실이나 장례식장에서 알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은 돈의 종이 되어 돈을 위해 살며 자신만 사랑하며 의지하다가 허무하게 죽어간다. 사람은 이런 헛된 것들을 극복해야 한다. 영원히 찬송 받으실 자는 하나님뿐이시다. 그는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그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 섬기며 그에게 찬송과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한다. [26-27절]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 파데 아티미아스 )[저열한 욕망]에 내어 버려 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듯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 아스케모쉬넨 )[상스러운 행위들]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사람들의 죄들 가운데 두드러진 죄는 저열한 욕망의 죄 즉 음란의 죄이다. 바울은 여성들의 죄에 대해 말한다. 여성들은 자신들을 순리대로 쓰지 않고 역리로 쓴다. 여성들이 자신들을 순리대로 쓴다는 말은 성년이 되어 결혼하여 정상적 결혼생활을 하는 것을 말하며, 역리로 쓴다는 것은 정상적 결혼생활을 이탈하여 행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특히 여성들의 간음, 음행, 매춘, 동성애 등을 가리켰다고 본다. 바울은 남성들의 죄에 대해서도 말한다. 그들도 하나님께서 주신 부부관계로 만족하지 않고 심지어 남성이 남성으로 더불어 상스러운 행위들을 하였다. 이것은 동성애를 가리킨 것이라고 보인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결혼의 질서를 파괴하는 악한 행위이다. 그러나 사람의 감정과 욕구는 이렇게 심히 변질되고 부패되었다. 동성애의 죄악은 옛날 소돔성과 고모라성 사람들의 죄악이었다(창 19장). 또 옛날 가나안 족속들에게 이런 죄악이 있었다(레 18장). 또 고대 헬라 사람들과 로마 사람들 가운데도 이런 죄악이 보편적이었다. 키케로(Cicero)는, “[동성애의] 행위는 헬라인들 가운데는 보편적이었고, 그들의 시인들과 위인들, 심지어 지식인들과 철학자들도 그런 일을 행했고 그것을 자랑했다. . . . 그것은 어떤 특정한 도시들만의 풍습이 아니라 그리스 전체의 풍습이었다”라고 말했다( 투스쿨란 토론집 4:33; 반즈 노트 , p. 554). 하나님께서는 이런 동성애에 대해 ‘상당한 보응’을 내리셨다. 소돔성과 고모라 성은 유황불비로 잿더미가 되었고 가나안 족속들은 이스라엘 백성에 의해 멸망당했다. 고대 헬라와 로마도 다 멸망하였다. 오늘날 에이즈 (AIDS) 질 병의 세계적 유행은 동성애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보인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하나님의 진노가 모든 불경건과 불의에 대해 하늘로 좇아 나타난다. 하나님의 진노는 마지막 심판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길은 경건과 도덕성의 완전한 회복인데, 그것은 불가능하고 오직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경건해야 한다. 우리는 우상숭배치 말아야 한다. 돈이나 사람이나 자기 자신이나 과학이 우상이 되지 않게 해야 한다. 우리는 영원자존하신 하나님, 살아계신 참 하나님, 창조자, 섭리자, 심판자 하나님을 바로 알고 그에게 합당한 감사와 영광과 경배를 올려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거룩해야 한다. 우리는 모든 불의를 버리고 도덕성을 회복해야 한다. 우리와 우리 자녀들은 이 음란한 세대에서 특히 음란, 간음, 매춘, 동성애의 악을 다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늘 깨끗이 씻음 받고 우리의 몸과 마음을 항상 거룩하게 지키도록 힘써야 한다. 28-32절, 여러 가지 죄악들 [28절] 또한 저희가 마음( 에피그노세이 )[지식]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 아도키몬 눈 )[부패된 생각](NASB, NIV)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사람들은 세상의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가지기를 싫어한다. 하나님의 지식이 모든 지식의 근본이지만 그들은 그 지식을 거절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그 부패된 생각에 내버려두셨다. 사람들의 생각은 하나님의 보시기에 부패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버려두셔서 합당치 못한 일들을 행하게 하셨다.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거절하는 자는 결국 여러 가지 죄악들에 떨어진다. 불경건은 모든 죄악들의 뿌리이다. [29절] 곧 모든 불의, [음행](전통본문), 3) 추악( 포네리아 )[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詐欺)[속임],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불경건의 결과, 사람들에게는 모든 불의가 가득하다. ‘모든 불의’는 뒤에 열거된 여러 죄악들을 포함한다. ‘불의’(不義)는 모든 죄악들의 대표적 명칭이다. 의(義)는 하나님의 계명에 일치하는 행위요, 불의(不義)는 그의 계명에 어긋나는 행위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계명에 순종하는 의로운 삶을 살기를 원하시고 모든 불의를 정죄하신다. 사람들은 또 음행이 가득하다. 사람의 죄악들 중에 우상숭배 다음으로 두드러진 죄악은 음행이다. 세상은 악하고 음란한 세상이다(마 12:39). 하나님께서는 결혼 제도를 주셨고 사람에게 성적 순결과 깨끗하고 단정한 삶을 명하시며 음행을 미워하시고 정죄하신다. 사람들은 또 악이 가득하고 탐욕이 가득하다. 악은 다른 사람에게 정신적, 물질적 해를 끼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선하게 살라고 명하시지만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악을 행한다. 또 탐욕은 세상의 것을 더 많이 가지려는 마음이다. 그것은 실상 하나님 대신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며 일종의 우상숭배이다(골 3:5). 탐욕은 사람으로 다른 죄들을 짓게 하는 원인이 되며 거기서 각양의 죄들이 나온다. 성도가 하나님과 영원한 천국을 참으로 믿고 소망하고 사모한다면 허무한 세상의 것들에 대한 탐심을 버려야 한다. 사람들은 또 ‘악의’(惡意)가 가득하다. 악한 마음에서 악한 행위들이 나온다. 사람은 마음과 생각을 지켜야 하며 악한 마음을 버리고 선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사람들은 또 ‘시기, 살인, 분쟁’이 가득하다. 시기는 남이 나보다 잘되는 것을 싫어하는 마음이다. 그것은 미워하는 마음으로 발전하고 미워하는 마음은 살인하는 데까지 이르기도 한다. 미워하는 것은 살인하는 것과 같다(요일 3:15). 또 사람은 욕심 때문에 살인하기도 한다. 또 사람들은 분쟁한다. 시기와 미움, 사랑 없음, 자기 중심적임, 상대방을 무시함, 오해함 등이 분쟁을 만든다. 사람들은 또한 ‘속임과 악독’이 가득하다. 사람들은 자기의 유익을 위해 남을 속이고 남을 해친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명은 사람이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성도는 자기의 이익보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고 거기에 순복해야 하고, 또 하나님의 뜻 안에서 진실해야 하고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사람들은 또 ‘수군수군한다.’ 이것은 은밀히 남의 말 하기를 좋아하는 행동을 가리킨다. 남에게 할 말이 있으면 당사자에게 직접 해야 하며 뒤에서 그에 관해 수군거리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각자 자기 일에 충실해야 하고 다른 사람의 일에 참견하지 말고 또 그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하지 말아야 한다. [30절]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거만한]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비방한다’는 말은 남의 명예에 해가 되는 말을 하는 것을 가리킨다. 비방은 교만과 시기와 미움 등에서 나온다. 사랑은 이웃의 모든 허물을 덮지만(잠 10:12), 미움은 이웃에 대한 비난으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인간 관계에 금이 가고 가정이나 단체나 교회나 사회가 파괴된다. 사랑은 건설하는 덕이요, 미움과 비난은 파괴하는 악이다.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라는 원어( 데오스튀게이스 )는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들’이라는 뜻일지도 모르지만 (BDAG) 인간 관계의 죄를 말하는 문맥상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들’이라는 뜻 같다 (Thayer) . 모든 악이 다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악이지만 특히 남을 거짓되이 비방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매우 가증한 악이다. 또 사람들은 ‘거만한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이다. 거만함과 교만함과 자랑함, 이 세 단어들은 뜻이 서로 가깝다. 교만은 마귀의 죄악이고(딤전 3:6) 죄인들의 특성이 되었다. 피조물이 창조주 하나님을 대항하고 자신을 주인과 왕으로 여기는 것이 교만이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주인과 왕이시므로, 교만은 어리석고 무지한 일이요 매우 근본적 죄악이다. 거기서 남을 멸시함과 자랑이 나온다. 사람들은 또 악을 도모하며 계획한다. 이것은 실수의 악이 아니고 의도된 악, 계획된 악이다. 고의적인 악행은 실수로 범하는 악행보다 더 악하다. 부지 중에 범한 죄와 고의적인 죄는 벌이 크게 다르다. 사람들은 또 부모를 거역한다.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되지 않은 자녀들은 부모를 거역한다. 이것이 부패된 인간 본성이다. 아이들은 엄한 교훈과 징계와 훈련을 통하지 않고는 잘 길들여지지 않고 통제되지 않는다. 그래서 성경은 어릴 때부터 교훈과 징계의 매로 아이들을 교육하라고 말한다(잠 23:13-14). 사람의 부패된 인간성은 사랑의 매를 통해 비로소 조금 제어되고 고쳐질 수 있다(잠 13:24; 22:15). [31절] 우매한 자( 아쉬네투스 )요 배약(背約)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원통함을 풀지 않는 자요](전통본문) 4) 무자비한 자라. 사람들은 우매하여 참된 지혜와 지식, 총명과 이해력이 없다. 그들은 많은 지식을 추구하여 얻지만, 참으로 알아야 할 지식, 곧 인생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며 지금 왜 여기 살고 있고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에 대한 지식이 없다. 이것이야말로 우매한 인생의 모습이다. ‘배약(背約)하는 자’는 약속을 어기는 자, 불신실한 자를 가리킨다. 사람이 약속을 어기는 데는 부득이한 환경적 요인도 있겠지만, 많은 경우는 자신의 불신실함 때문이다. 사람들은 쉽게 약속하고 그 약속을 쉽게 저버린다. 특히 사람의 불신실함은 시간이나 돈에 대한 약속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신실한 인격은 약속을 반드시 지키려 한다. ‘무정한 자’는 인정이 없는 자를 가리킨다. 사람들은 어떤 환경에서는 인정이 있어 보이지만, 다른 많은 경우 무정함을 드러낸다. 사람들은 자기 유익을 위해 부모님을 저버리며 아내를 학대한다. 힘센 자는 약한 자를 학대하고 그의 것을 빼앗고 강대국은 약소국을 침입한다. 또 사람들은 원통한 일이 있을 때 그것을 마음에 오래 간직하고 잘 풀지 않고 또 보복하려 한다. 사람은 서로 화해하기 어렵고 마음을 달래기 어려운 존재이다. 이런 부족 때문에 때때로 인간 관계가 허물어진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에게 악을 행한 자와도, 그가 사과하면, 언제나 즉시 화해해야 한다. 우리는 남을 용서하기를 힘써야 한다. 마지막으로, 사람들은 무자비하다. 자비와 긍휼은 하나님의 성품이다. 그러나 타락한 사람들은 이기적(利己的)이게 변하였고 자기 이익을 위해 남을 해치고 남의 것을 교묘하게 빼앗는다. 또 그들은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다면 결코 할 수 없을 악을 행하며 또 거칠고 폭력적이고 사악한 자들이 되었다. [32절]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쉰유도쿠시 )[칭찬하느니라, 기뻐하느니라]. 사람들은 이런 죄악들을 행하는 자가 죽어야 마땅하다는 하나님의 율법과 공의를 알고 있다. 이런 공의는 그들의 사회법들에 어느 정도 나타나 있고 그들의 양심의 법에도 기록되어 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벌은 사망이다. 그것은 변할 수 없는 하나님의 법칙이다. 죄인들은 영적으로, 육적으로 죽고 영원히 죽을 것이다. 그것은 단지 그들의 몸의 죽음 정도가 아니고 그들의 몸과 영혼이 받을 영원한 지옥 형벌을 포함한다(계 21:8).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기들만 이런 죄악들을 행할 뿐 아니라 이런 것들을 행하는 자를 옳다고 칭찬하고 기뻐한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더 가증한 뻔뻔함과 완악함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사람들은 심히 죄악되다.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가지기를 싫어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죄들에 떨어진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그렇게 내어 버려두셨다(24, 26, 28절). 사람들은 모든 불의, 음행, 악, 탐욕, 악의가 가득하고, 시기, 살인, 분쟁, 속임, 악독이 가득하고, 수군수군하고 비방하고 하나님 앞에 가증하고, 거만하고 교만하고 자랑하고, 악을 계획하고 부모를 거역하고, 지혜와 총명이 없고 약속을 어기고 무정하고 원통함을 풀지 않고 무자비하며 게다가 악행하는 자들을 옳다고 칭찬하고 기뻐하는 뻔뻔함까지 있다. 이런 모든 죄악들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사람들에게 임한다. 둘째로, 우리는 이런 모든 죄악들을 미워하고 버리고 그것들로부터 떠나야 한다. 우리는 모든 죄악들을 깨끗이 씻음 받아야 한다. 사람의 죄들은 어떻게 씻음 받을 수 있는가? 사람의 죄는 오직 하나님의 아들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만 깨끗이 씻음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신의 모든 죄를 인정하고 미워하고 버리기를 결심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받아야 하고 이제는 모든 죄를 멀리하고 정직하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 2장: 하나님의 심판 [1-3절]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사람은 자기도 악하면서 남의 악함을 판단하기 잘한다. 그러나 그에게 바른 판단력이 어느 정도 있다는 것이 그를 옳은 자로 만들지는 못한다. 남의 잘못을 잘 지적하고 판단한다고 해서 그가 의로운 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의 판단의 행위가 그를 정죄하는 셈이 된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같은 악을 행하기 때문이다. 그의 양심은 자기도 정죄받아야 할 자임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행위를 판단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악인이든지, 그를 판단하는 자든지, 혹은 그를 심문하고 벌을 주는 재판관이든지 하나님의 공의롭고 두려운 심판을 피할 수 없다. [4-5절]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남의 죄를 판단하면서 자신은 회개치 않고 하나님의 심판을 무시하는 자는 하나님의 더 큰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는 다른 죄인보다 더 악한 자이다. 장차 하나님의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날이 올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가상적 이야기가 아니고 장차 온 세상에 임할 한 사건이다.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인이요 온 세상을 심판하실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이 사실들이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필요성을 증거한다. [6-8절]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엑스 에리데이아스 )[혹은 ‘이기적 야망으로’(NASB)]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 그의 심판은 공의롭다. 그는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 영생으로 보응하신다. 선을 행하는 데는 인내가 필요하다. 한두 번 선을 행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겠지만, 계속 선을 행하는 것은 인내가 필요하다.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은 참으로 가치 있고 영광스러운 부활과 천국과 영생을 가리킨다. 참고 선을 행함으로써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는 복된 몸으로 부활하여 천국에 들어가고 영생에 이를 것이다. 구원받을 자들은 참고 선을 행하며 부활과 천국과 영생을 사모하다가 영생에 이를 것이다. 그러나 악인들 속에는 다투며 당을 짓는 이기적 야망이 있다. 그들은 사람의 존귀함을 알지 못하고 세상의 헛된 것만을 더 가지려 한다. 그래서 그들은 진리에 복종치 않고 당을 지어 진리와 다투며 불의를 좇고 온갖 악을 행한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에 대해 공의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노와 분으로 보응하실 것이다. [9-10절]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 스테노코리아 )[곤경, 심한 고생]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평안]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혼에 환난과 심한 고통이 있을 것이다. 육신에도 그러하지만, 그의 영혼에 더욱 그러하며, 악인은 죽은 후에도 그 영혼이 지옥에서 고통 중에 있게 될 것이다(눅 16:23-25). 악에 대한 이러한 보응은 유대인들에게나 이방인들에게나 동일하다. 그러나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안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행복도 의인의 심신(心身) 곧 육신과 영혼에 다 적용되며, 또 유대인들에게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다 적용된다. [11절]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 하나님의 심판은 공평하며 세계적이다. 그것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다 임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의 역사와 전통과 특권 때문에 그들을 편벽되이 취급하지 않으실 것이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학력이나 직업, 재산이나 가문, 사회적 신분 등 외적 조건을 보고 편벽되이 그를 판단치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롭게, 공평하게, 공정하게 심판을 시행하시는 하나님이시다. [12-13절]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하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편벽되이 취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율법 없이 망하고 율법이 있는데도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을 것이다. 율법을 가진 유대인들이나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이나 다 그들이 행한 대로 공의롭고 공평하게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율법을 가진 유대인들은 이방인들보다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대 앞에서 더 나은 조건을 가진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가지고 있었느냐, 율법을 알았느냐가 문제가 아니고 율법을 지켰느냐가 문제이다. 왜냐하면 신명기 6:25에 보면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지킨 자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14-15절]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이방인들은 그들에게 율법이 없었다고 해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에서 면제될 수 없다. 왜냐하면 율법 없는 이방인들도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하며 그 양심으로 옳고 그름을 증거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 안에 있는 양심, 즉 도덕적 분별력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 속에 기록해 두신 율법이다. 그래서 사람은 양심대로 행해야 한다. [16절]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사도 바울은 복음의 내용 속에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의 진리가 있음을 증거한다. 심판은 두려운 진리이지만, 기독교의 근본 교리이며(히 6:1-2) 복음의 기본적 내용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라는 말씀은 예수께서 심판주이심을 보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심판주이시다(요 5:22; 행 17:31). 그 날에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실 것이다. 그 심판은 공의롭고 철저할 것이다. 여기에 모든 사람의 구원의 필요성이 있다. [17-24절]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형식]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神社)[신전] 물건을 도적질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 중에 한 지도적인 인물을 가상적으로 들어 유대인들의 잘못을 지적한다. 그 유대인은 율법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자랑한다. 그는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긴다. 그는 율법 지식과 진리의 형식을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고 있다. 사도 바울은 남을 가르치는 유대인이 도적질하거나 간음하여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하나님과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은 악을 행하는 그 유대인 때문에 그의 하나님을 욕하고 있다. 이 말씀은 오늘날 형식적인 교인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우리가 교인이라는 이름, 더욱이 직분자의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 어떤 악을 행하면,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욕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도다운 인격과 삶이 없이 교인이라는 이름이나 교회의 직분을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 교인이라는 이름보다, 또 목사, 장로, 권사, 집사의 직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의롭고 선한 인격과 삶임을 알고 기도하고 힘써야 한다. [25-29절] 네가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한즉 네 할례가 무할례가 되었느니라.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제도( 디카이오마 )[의(KJV), 요구(NASB, NIV)]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의문(儀文)( 그람마 )[율법 조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판단치 아니하겠느냐?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성령으로 말미암고](NASB, NIV) 의문(儀文)[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할례를 받은 것은 율법을 행할 때 가치가 있지, 율법을 범할 때는 아무 가치가 없다. 그것은 무할례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러므로 할례자가 율법을 어기면 그가 할례를 받았다는 것이 무슨 의미와 가치가 있는가? 무할례자인 이방인이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율법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유대인들을 판단하지 않겠는가? 할례의 의미와 가치는 율법을 행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성경은 마음의 할례에 대해 가르친다(신 10:16; 렘 4:4). 그것은 마음의 모든 더러움과 완고함을 베어 내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심령의 거룩한 변화인 중생(重生)을 가리킨다. 진정한 기독교는 마음과 내면성의 종교이며 변화된 심령의 종교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모든 죄악된 마음 상태로부터 새로워지고 깨끗해지는 마음의 변화이다. 참된 경건은 사람의 마음이 새로워져서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믿고 순종하는 것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장차 온 세상에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아들에게 맡기셨고(요 5:22) 아들 예수께서는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 위해 다시 오실 것이다(행 17:31; 딤후 4:1; 사도신경). 요한계시록 22:10,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공의로 철저하게 심판하실 것이다. 그 날은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날”이다(5절). 사람은 자기의 행한 대로 심판을 받을 것이다.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는 영생에 이르고 불의를 좇는 자는 진노에 이를 것이다(6-8절). 주께서는 사람들의 은밀한 것들도 다 심판하실 것이다(16절). 요한계시록 20:13,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종교적 외식을 미워하신다. 성도라는 이름이나 교회의 직분자라는 이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도다운 인격과 삶이다. 참된 경건은 사람의 마음이 새로워져서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믿고 그의 계명을 순종하여 정직하고 선하고 진실하게 사는 것이다. 우리는 옛날 유대인들처럼 결코 형식적 교회 생활에 머무르지 말아야 한다. 마태복음 23장에 보면, 주께서는 외식자들에게 화를 선언하셨고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고 말씀하셨다. 죄인들은 죄를 회개하고 구주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계명들을 순종해야 한다. 3장: 칭의(稱義)의 방법 1-18절, 모든 사람이 죄인임 [1-2절]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의 특권들 중 첫째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사실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유대인들을 통해 온 세계의 모든 족속에게 전달되었다. 모세와 선지자들과, 예수님과 사도들은 유대인들 즉 이스라엘 사람들이었다. 성경 저자들은 주로 유대인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진리들을 계시하셨고 그것들을 기록하고 보관하며 전달하게 하셨다. 그것은 유대인들의 특권이었다. 시편 147:19-20, “저가 그 말씀을 야곱에게 보이시며 그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보이시는도다. 아무 나라에게도 이같이 행치 아니하셨나니 저희는 그 규례를 알지 못하였도다.” [3-4절]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신실하심]을 폐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 어떤 유대인들이 믿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 보관의 특권에 차질이 생긴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하심은 그들의 불신앙과 불순종 때문에 폐해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다 거짓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참되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들과 심판에서 의로우시다. [5-6절]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 사람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낸다고 하여서 그 불의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 불의에 대하여 진노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결코 불의하실 수 없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그가 불의하시다면, 어떻게 심판자가 되실 수 있겠는가? 의롭지 못한 심판자는 참된 심판자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아무리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일지라도, 또 그들의 죄와 부도덕함이 하나님의 의를 드러낸다 할지라도, 그들이 범죄하는 한 그들은 마땅히 정죄(定罪)받아야 한다. [7-8절] 그러나[왜냐하면 5) 어떤 이들이 말하기를]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으면 어찌 나도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않겠느냐 함이라.]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저희가 정죄(定罪)받는 것이 옳으니라. 본문은 5, 6절을 보충 설명한다. 사람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게 드러났을지라도 그의 거짓말이 어떤 선한 역할을 한 것이 아니며 선으로 간주될 수도 없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선을 이루기 위해 악을 행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무슨 일이든지 목표가 선하고 옳아야 할 뿐만 아니라, 방법도 선하고 옳아야 한다. 이 말씀은 전도를 위해 자유주의 교회들과 천주교회들과 협력하는 어떤 복음주의 전도자들의 오류를 잘 증거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할 때, 바른 목표를 가져야 하고 바른 방법도 사용해야 한다. 바른 목표를 위해 올바르지 않은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 [9절]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사도 바울은 이미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죄인임을 증거하였다. 그는 1장에서는 주로 이방인의 죄를, 2장에서는 주로 유대인의 죄를 증거했다고 보인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특권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이방인들과 다를 바가 없는 죄인들이다.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이나 모두 다 구별 없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들이다. [10-12절]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세상에 의인은 한 사람도 없다. ‘하나님과 사람’(神人)이신 예수님만 예외이실 뿐이다. 사람들 중에서 그는 유일하게 죄가 없으시다(히 4:15; 벧전 2:22; 요일 3:5). 그 외에 하나님의 계명에 완전히 일치하게 산 자, 참으로 의로운 자는 하나도 없다. 의인 노아나 욥이나 다니엘도(창 6:9; 욥 1:1; 겔 14:14) 완전한 의인은 아니었다. 또 깨닫는 자도 없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누구이시며 사람이 어디서 와서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며 또 장차 어디로 갈 것인지 깨닫지 못한다. 또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 모든 사람은 인생의 정로(正路)를 알지 못함으로 이리저리 치우쳤고 헛되고 무가치하게 살고 있다. 사람들이 쌓은 선한 업적이라는 것도 실상 무의미하고 무가치하다. 영원히 가치 있고 선한 일을 행하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 [13-15절]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사람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같이 구역질나는 나쁜 냄새를 낸다.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나오는 것들은 더럽고 악취나는 것들뿐이다. 또 사람들의 혀는 속이는 혀이다. 사람들은 거짓말에 숙련되어 있다. 또 그 입술에는 남을 죽이는 독이 있고 그들의 말들은 남을 저주하는 악독으로 가득하다. 또 그들의 발들은 남을 죽이기에 빠르다. 참으로 사람은 전적으로 부패되었고 무능력해졌다. [16-18절] 파멸과 고생[불행]이 그 길에 있어 평강[평안]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죄인인 사람들의 길에는 파멸과 불행이 있고 그들은 평안의 길을 알지 못한다. 또 그들의 눈앞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 죄인들의 죄악된 삶의 근본 원인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불경건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악에서 떠나게 된다(잠 16:6).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는 자들에게는 악을 버리고 떠남도 없고 참된 의(義)와 선(善)도 없다. 그런 자들에게 파멸과 불행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 없는 세상의 현실이며 우리가 구원 얻기 전 상태였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들과 성경을 주셨다. 우리는 유대인들을 통해 주신 성경과 하나님의 말씀들을 감사히 받고 읽고 다 믿고 다 실천해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참되시고 진실하시고 신실하시다. 디모데후서 2:13, “우리는 미쁨[신실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신실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우리는 참되신 하나님의 말씀을 다 믿고 우리의 삶의 목표와 그 방법도 바르고 참되게 가져야 한다. 셋째로,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며 심령이 심히 부패되어 선을 행하기에 무능력하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서도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하셨고(렘 17:9) 또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는 절망적인 말씀을 하셨다(렘 13:23). 인류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구별 없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들이다. 넷째로, 죄인들의 길에는 파멸과 불행이 있고 그들의 심령에는 평안이 없다. “파멸과 불행이 그 길에 있어 평안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이사야 48:22,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죄는 죽음과 불행과 지옥 형벌을 가져왔다. 사람이 천국에서 영생과 참된 평안과 기쁨을 누리려면 죄사함과 의(義)의 구원이 필요하다. 19-31절, 칭의(稱義)의 방법 [19-20절]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사람은 율법을 통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한다. 율법의 역할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죄악됨을 깨닫게 하여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는 데 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 앞에서 죄인으로 판정되므로 하나님 앞에서 항변할 말이 없다. 율법을 다 지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사람은 세상에 한 사람도 없다. [21절] 이제는 율법 외에( 코리스 노무 )[율법과 별개로] 하나님의 한 의(義)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기독교 복음은 율법과 별개로 나타난 하나님의 한 의에 대한 소식이다. 사람은 죄인이며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으므로 구원이 필요했다. ‘이제는’이라는 말은 구약시대와 대조하여 신약시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구약시대에 증거된,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義)는 행위의 의, 즉 모든 율법을 항상 행함으로 얻을 수 있는 의이었다. 그러나 사람은 율법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었다. 이제 하나님께서 율법과 별개로 주시는 한 의가 복음 안에 나타났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으로 말미암은 의이다. 이 의(義)는 율법과 선지자들, 즉 구약성경에 이미 증거된 바이었다. 구약성경은 ‘행하라’는 도덕법을 강조하지만, 제사들, 유월절 어린양, 성막 제도 등을 통하여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도 증거하였다. 그 은혜는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증거될 것이었다. 구약성경은 또 메시아의 속죄사역으로 인한 의(義)를 직접 예언하기도 하였다. 이사야 53:11,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다니엘 9:24,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70이레[주간]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永贖)되며[영원히 속(贖)하여지며] 영원한 의(義)가 드러나며 이상(異像)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 [22절]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믿는 모든 자에게 그리고 모든 자 위에](전통본문) 6)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이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의이다. 율법을 행함으로 얻는 의(義)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의(義)이다. 신약시대의 의(義)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누구나 차별 없이 받을 수 있는 의(義)이다. 그러므로 신약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구원을 위해 필수적으로 중요하다. [23-24절] [이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되었음이니라]. 본문은 모든 믿는 사람들이 차별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까닭을 말한다. 그 까닭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으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죄인이 단지 그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었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얻는 의(義)는 행위로 얻는 의(義)와 대조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요 값없이 거저 얻는 의이다. 이런 의가 가능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위해 구속(救贖)을 이루셨기 때문이었다. ‘구속’(救贖)이란 값을 주고 산다는 뜻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죗값, 즉 죄의 책임 곧 죄책(罪責)과 형벌을 짊어지시고 우리를 건져내셨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누구나 그의 십자가의 보배로운 피로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이다. [25-26절]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그의 피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 힐라스테리온 )[유화제물(宥和祭物)]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이 말씀은 앞절의 말씀을 좀더 설명한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그의 속죄사역을 믿는 것이고 그의 피를 믿는 것이다. 피가 생명이므로 피흘림이 죄를 속(贖)한다(레 17:11). 유화제물(宥和祭物)은 하나님의 진노를 가라앉히는 제물을 말한다. 그것은 우리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크신 진노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신 죽음으로 누그러지셨다는 의미이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속죄의 한 의미이다.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지은 죄들을 용서하심으로라는 뜻이다. 물론, 사람이 예수님 믿고 난 후에 짓는 죄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로 씻음을 받는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무조건 의롭다고 간주하신다면 그런 판단 자체가 불의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죄인들의 죄의 형벌을 대신 담당하신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에 근거하여 예수님 믿는 자들을 의롭다고 하셨으므로, 그것은 의로운 판단이시요 의로운 행위이신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사역으로 인한 의롭다 하심 곧 칭의(稱義)의 원리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증거할 뿐만 아니라, 또한 예수님 믿는 자들이 받는 의(義)의 정당함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모든 죄를 예수 그리스도께 전가(轉嫁)시키셨으므로 그들을 의롭다고 정당하게 선포하실 수 있다는 말씀이다. 그러나 성도들이 받은 이 의롭다 하심은 성도가 실제로 의인으로 변화되었다는 뜻이 아니고, 단지 법적으로 의인으로 간주된다는 뜻이다. 그것은 법적인 의미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늘 법정에서 성도들에게 죄가 없다는 무죄(無罪) 판결을 내리심과 같다. 물론,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는 또한 새 생명을 받기 때문에 실제적으로도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산다. 그러나 성도는 비록 법적으로는 완전한 의인이지만 실제적으로는 아직 불완전하고 부족이 있다. [27절]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행위의 법으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성도의 의가 자신의 행위에 근거하지 않고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신 속죄사역에 근거하기 때문에, 성도는 자랑할 것이 없다. 율법과 별개로 나타난 의, 복음 안에 나타난 의, 즉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의는 받는 사람 편에서 아무것도 자랑할 수 없는 의이다. 왜냐하면 이 의는 사람들의 행위의 법으로 얻는 것이 아니고, 단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의를 믿음으로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28절]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행위와 관계가 없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로기조마이 )[간주하노라(NASB, NIV), 판단하노라, 결론을 내리노라(KJV)]. 본절에서 사도 바울은 사람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복음의 기본적 진리를 다시 결론적으로 단언하였다. [29-31절]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에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유대인들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또한 이방인들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구원 진리는 할례 받은 유대인들에게나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에게나 똑같이 적용된다. 이 구원 진리는 어느 시대나 어느 민족에게나 동일하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효력 있는 진리이다. 오늘날도 죄인들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얻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신약의 복음이 구약의 율법을 폐지시키는 것은 아니다. 구약과 신약은 서로 충돌치 않는다. 율법과 복음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구약과 신약은 그림자와 실체요 예언과 성취이다. 율법은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여 복음으로 이끄는 인도자 역할을 한다. 사실, 복음에 제시된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의 죽음은 율법의 저주를 받으신 죽음이었고(갈 3:13) 율법의 의를 이루신 것이었다(롬 10:4).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을 폐지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율법을 굳게 세우는 것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세상에는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자가 아무도 없다. 율법은 단지 사람의 죄를 깨닫게 할 뿐이다. 사람은 율법으로 죄를 깨달으나 율법을 지켜 구원받지는 못한다.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소위 율법주의는 진리가 아니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위한 구속(救贖)의 죽음을 죽으셨고 또 유화(宥和)제물이 되셨다. 24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 25절, “화목제물[유화제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의 죄로 인해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받으신 것이다. 그는 우리의 죗값을 지불하셨고 우리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셨다. 셋째로, 사람은 율법을 행함으로써가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에 근거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주어진다. 이것이 죄인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구원이다. 4장: 아브라함의 예 [1-3절]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진리는 구약성경도 증거한 바이었다.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을 그 증거로 들었다. 창세기 15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셔서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4-5절]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이라는 말은 행위를 가리킨다. 일하는 자가 받는 삯은 은혜가 아니고 당연히 받아야 하는 보수이다. 의롭다 하심이 사람의 의로운 행위에 근거하였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닐 것이지만, 의로운 행위가 없었을지라도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의로 간주되었으므로,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와 같이, 믿음과 행위는 서로 구별되고 대조된다. 믿음은 행위와 다른 무엇이다. 그것은 말 그대로 그저 믿는 것이다. 이것은 성도에게 의로운 행위가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다. 아브라함은 경건하고 의로운 삶을 살았다. 참 믿음은 경건하고 정직한 행위로 나타난다. 그러나 사람의 행위는 불완전하므로 사람이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사람은 행위로가 아니고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죄인 구원의 방법이다. [6-8절] 일한 것이 없이( 코리스 에르곤 )[행위들과 별개로]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사도 바울은 행위들과 별개로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해 증거한 다윗의 시를 인용했다. 그가 인용한 말씀은 시편 32:1-2이다. 그것은 사람이 죄가 없어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 아니고 죄가 있지만 죄사함을 받기 때문에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을 보인다. 이와 같이, 의롭다 하심은 사람의 의로운 행위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인 것이다. [9-10절]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니라. 아브라함이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은 할례 받기 전인가 후인가? 그가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건은 창세기 15장에 나오고(15:16), 창세기 16장은 그가 하갈을 취하여 이스마엘을 낳은 때가 86세라고 증거하며, 창세기 17장은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때가 99세라고 증거한다(17:24).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때는 그가 할례를 받기 13년 이전이었다고 보인다. [11-13절]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저희도] 7)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 뿐 아니라[할례 받을 뿐 아니라 또한](원문)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에게(도)니라.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後嗣)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아브라함의 할례는 그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받은 의를 확증하는 표이었다. 아브라함이 할례자의 조상이라고 할 때, 그 할례자는 단지 육신의 할례를 받은 자들을 가리키지 않고, 육신의 할례를 받았을 뿐 아니라 또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진 유대인들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아브라함이 열국의 아버지가 되고 그 후손이 온 세계에 충만하리라는 약속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적용되고 그들을 다 포함하는 뜻이 있다. [14-16절]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後嗣)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카타 카린 )[은혜에 의거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율법은 죄인에게 죄를 깨닫게 하고 그로 하여금 진노하신 하나님 앞에 서게 한다. 그러므로 율법만으로라면 아무도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없었다. 여기서 율법과 은혜, 행위와 믿음은 다시 대조된다. 율법을 행하는 것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물론, 믿는 자는 율법에 순종하며 정직하게 말하고 행동할 것이다. 그러나 믿음 그 자체는 율법 순종의 행위와는 구별된다. [17-18절]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 믿음의 성격을 증거한다.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은 죽은 자들을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자이시다. 그는 무(無)로부터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믿음은 바로 그 하나님 곧 창조자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고 믿었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라는 말은 ‘소망을 거슬러 소망 중에’라는 역설적 표현이다. 아브라함은 육신적으로 소망이 없었으나 하나님께 대한 소망을 붙들었다. 이것은 다른 말로, 자신에 대한 부정과 하나님께 대한 긍정을 뜻한다. 자기에게 무엇이 있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을 섬기다가 자기에게 아무것도 없는 것이 드러날 때에 낙심하고 좌절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그것은 그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고 단지 자기 자신을 신뢰한 것일 뿐이다. [19-22절]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이미]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생각하지 않고](전통사본) 8)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아브라함은 나이가 많아 백세가 되어 자기 몸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았을 때에도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다. 그는 결코 자신의 상태만 바라보지 않았고 하나님의 능력과 약속을 믿었다. 그것이 참된 믿음이다. 믿음은 우리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전능하신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의지하는 것이다. 믿음은 우리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이라고 인정하는 것이며, 자신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며 의탁하는 것이다. [23-25절]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때문에]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때문에] 살아나셨느니라. 우리의 구원도 같은 원리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범죄 때문에 십자가에 내어줌이 되셨고 우리의 의롭다 하심 때문에 다시 살아나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아브라함의 믿음과 같은 믿음을 가진 자들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적인 죽음과 삼일 만에 부활하심을 믿는 자는 참 하나님을 믿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내용을 믿는 것이다. 이 믿음은 사람의 무엇을 의지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단지 전능하신 하나님, 부활의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이런 믿음을 가진 자들이 아브라함처럼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는 것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아브라함은 자신의 의로운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고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다윗도 행위로는 부족과 실수가 없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용서하심으로 용납함을 받았다. 이와 같이, 죄인들은 자신의 의롭고 선한 행위들로가 아니고 오직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둘째로, 아브라함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그가 할례의 규례와 율법을 받은 것은 그가 받은 의를 확증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진리는 할례자에게나 무할례자에게나 똑같이 적용된다.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할 뿐이다. 유대인들도, 이방인들도 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셋째로,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하나님을 바라고 믿었다.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은 것이다.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자이시다. 믿음은 우리 자신을 부정하고 하나님을 긍정하는 것이며, 우리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이것이 죄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는 믿음이다. 이 믿음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다. 신약 성도들이 주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으나 삼일 만에 부활하셨음을 믿을 때, 그들은 이런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진 것과 같다. 5장: 칭의(稱義)의 결과 1-11절, 칭의(稱義)의 결과 [1절]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누리느니라].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디카이오덴테스 , 과거분사)이라는 원어는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이 점진적이거나 반복적이지 않고 단회적임을 보인다. ‘누리자’라는 말( 에코멘 ) 9) 은 전통사본들의 다수에는 ‘누리느니라’( 에코멘 ) 10) 고 되어 있다. 칭의의 결과 중 하나는 하나님과의 화목이다. 사람들은 죄 가운데 있었을 때 하나님과 불화(不和)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죄를 미워하시고 죄에 대해 노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되었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이다. 이제 우리는 담대히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으며, 성경말씀의 묵상과 기도로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는 큰 특권이며 복이다. 그것은 에녹과 노아와 욥처럼 하나님과 친밀히 교제하며 그와 동행하는 것이다(창 5:21-24; 6:9; 욥 29:4). [2절]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믿음으로]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우리가 서 있는 이 은혜’는 칭의를 받은 은혜를 가리킨다고 본다. 예수님 믿고 구원 얻은 모든 사람은 이제 칭의를 받은 은혜 안에 서 있다. 모든 성도는 이 은혜 안에 흔들리지 않고 굳게 서 있어야 하며, 결코 이 은혜를 떠나지 않아야 한다. 칭의 받은 은혜가 곧 구원이요 생명이기 때문이다. 예수님 믿고 구원 얻는 것은 그를 통하여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음이 없다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칭의의 결과 중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런 즐거움은 장차 올 영광스런 천국, 곧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확신과 견고한 소망에서 나온다. 죄인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지만(롬 3:23),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영광 곧 부활과 천국의 영광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 얻은 성도는 이 영광을 바라보며 소망 중에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다. 부활과 천국의 영광은 성도의 기쁨과 즐거움의 이유인 것이다. [3-4절]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鍊鍛)( 도키메 )[연단된 인격]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는 평안할 때만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고,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 그것은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된 인격을, 연단된 인격은 소망을 이루기 때문이다. 환난이 성도의 신앙 인격을 단련하여 몸의 부활과 천국과 영생에 대한 그의 소망을 확실하게 만들기 때문에, 성도는 환난 중에도 오히려 기뻐할 수 있다. [5절]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성도의 소망은 헛되지 않다. 그것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헛된 꿈이나 망상이 아니다. 성도의 소망이 확실한 까닭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되었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우리 속에 오심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진 것과 같다. 우리 안에 오셔서 영원히 거하시는 성령께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표이시며 확증이시다. [6-8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이는]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善人)( 투 아가두 )[그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확증하셨음이니라]. 우리가 불경건과 죄 가운데서 연약하였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을 믿고 성령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진 것이며 그 사랑을 체험한 것이다.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은 얼마나 큰 사랑인가! ‘그 선인’은 앞에 말한 ‘의인’을 가리킨다고 본다. 죄인들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의 확증이었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일서 4:9-10,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9-11절]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는 장차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으로부터 확실히 구원을 얻을 것이다. 이 구원의 확신은 성도의 기쁨의 근거가 된다. 성도가 장래의 구원을 확신하지 못한다면 결코 기뻐할 수 없을 것이며 고난 중에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 성도는 미래의 구원을 확신하므로 고난 중에도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에 근거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은 하나님과의 화목을 가져오고 그의 마지막 진노의 심판으로부터의 구원을 보증하는 것이다. 성도는 천국을 확신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또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고 말한다. 칭의의 결과는 참으로 놀랍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는 하나님과의 화목을 누릴 뿐 아니라, 또한 미래의 구원의 확실한 보증과 확신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동행하며 살고 천국을 확신하고 소망하며 항상 기뻐하며 산다.
본문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결과에 대해 증거한다. 첫째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은 하나님과 화목을 누린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고 성경말씀 묵상과 기도로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다. 둘째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 우리가 천국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은혜 때문이며 환난 중에 낙심치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셋째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은 장차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받을 것도 확신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이었고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받은 것은 그 사랑이 우리 속에 부어진 것이다. 의롭다 하심을 얻은 우리는 이제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마지막 진노로부터의 구원도 확신하게 되었다. 12-21절, 영원한 생명 [12절]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에프 호 )[이는](Thayer, NASB)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이르렀음이니라]. 창세기 3장의 증거대로,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왔다. 아담의 첫 범죄는 아담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고 온 인류의 범죄이었다. 인류의 대표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인류는 죄인이 되었고 그 죄의 결과로 모두가 죽게 되었다. [13-14절]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사람의 죽음의 원인은 죄이다. 율법이 없었던 모세 이전에도 사람들은 다 죽었는데, 그것은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었기 때문이다. [15-16절]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왜냐하면]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죽었을지라도]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넘쳤음이니라].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定罪)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dikaivwma)에 이름이니라. 한 사람 아담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으나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많은 사람이 살았고, 한 사람 아담의 범죄로 모든 인류가 죄와 정죄(定罪) 아래 있었으나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들의 많은 범죄에도 불구하고 그들로 하여금 의롭다 하심에 이르게 하였다. [17절]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하리로다. 한 사람 아담의 범죄로 죽음이 인류를 지배했으나,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의의 선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다. 이것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결과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의의 선물을 풍성히 받아 영생을 얻었다.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주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생을 소유하고 있다. [18절]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디 헤노스 디카이오마토스 )[한 의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그런즉’이라는 말은 본절이 이 단락의 요점임을 보인다.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라는 말은 의롭다 하심의 결과가 생명임을 보인다. 의와 생명은 함께 간다. 죄는 사망이요 의는 생명이다. 그러므로 칭의의 결과는 영생, 다시 죽지 않는 영원한 생명인 것이다. 15절부터 18절까지 반복되는 말씀은 한 사람 아담의 죄가 어떻게 온 인류에게 전가(轉嫁)되었는지를 증거한다. 아담의 죄는 온 인류의 죄이었다. 이것이 원죄(原罪)이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난다. 이 원죄는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사실,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 또 모든 사람이 정죄되었다는 사실에서 확증된다. 이와 비슷한 원리로, 그러나 정반대의 내용으로, 본문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의(義)가 어떻게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값없이, 은혜로 풍성히 넘치도록 전가(轉嫁)되었는지를 증거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는 ‘많은 사람을 대신한 속죄’이었다. 예수께서는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자기 목숨을 주셨고(마 20:28), 그의 피는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해 흘리신’ 피이었다(마 26:28).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그를 믿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원한 생명을 풍성히 누리게 된 것이다. [19절]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죄는 불순종이다. 죄악된 세계의 특징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에 대한 불순종이다. 순종은 의요 불순종은 죄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순종과 의를 요구하신다. 노아는 순종하는 의인이며 아브라함도, 모세도, 여호수아도 그러했다. 사람이신 예수께서는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최고의 모범이시다. 그는 창조주로서 피조물인 인간 부모에게 순종하셨고 율법을 주신 자로서 친히 율법을 준행하셨을 뿐만 아니라, 마침내 십자가에 죽기까지 아버지께 순종하셨다. 빌립보서 2:5-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의 순종의 죽음은 우리를 위한 의가 되었다. 예수께서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고통과 수치와 저주의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사함으로 이 의 안에 거해야 하며, 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을 본받아야 한다. 우리는 원망하고 불평하며 거역하는 자가 되지 말고 잠잠히 믿고 순종하되 죽기까지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 하나님께서 참 하나님이시며 우리가 가진 진리가 진리일진대,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교훈에 절대 순종해야 한다. [20-21절]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율법을 몰랐을 때는 죄가 적었으나 율법을 알게 되므로 우리는 우리의 많은 죄들과 우리 본성의 전적 부패성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죄가 많은 곳에 하나님의 은혜는 더욱 풍성했고 넘쳤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우리 죄의 심각성과 하나님의 죄사함의 은혜의 크심에 대한 우리의 깨달음의 정도에 비례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큰 죄사함을 받은 자는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된다(눅 7:47). 이제 우리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많은 죄사함을 얻었고 하나님의 완전한 의를 얻었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우리의 죄들은 크고 많고 심각했으나 하나님의 죄사함의 은혜는 컸고 풍성했고 놀라웠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의롭다 하신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한 사람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인류는 다 죄인 되었고 정죄(定罪) 되었고 죽게 되었다. 아담은 한 개인일 뿐만 아니라, 온 인류의 시조(始祖)이며 언약의 대표자이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처음에 주셨던 명령 곧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명령은 인류를 대표하여 받은 명령 곧 행위언약이었다. 그 언약에서의 실패는 그 개인의 실패일 뿐 아니라, 인류 전체의 실패이었다. 그것이 원죄(原罪)라는 것이다. 둘째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신자들은 다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이것은 우리의 의롭고 선한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에 근거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으로 우리의 의를 이루셨다. 셋째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결과는 영원한 생명이다. 죄는 죽음이요 의는 생명이다. 죄의 결과는 죽음이었으나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에 근거하여 그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이 영생에 이르는 것이다. 죄의 값은 죽음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영생이다(롬 6:23). 6장: 성화(聖化)의 이유 [1-3절]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메 게노이토 )(강한 부정어).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에이스 )[안으로]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에이스 )[안으로]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지만(5:20) 하나님의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할 수는 없다. 그 이유는 성도가 이미 죄에 대해 죽었기 때문이다. 죄에 대해 죽은 자는 계속 죄 가운데 살 수 없다. 성도가 거룩해야 할 이유는 첫째로 세례의 원리로 설명된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을 때 그의 죽으심에 참여하였다. 세례는 일차적으로 죄씻음을 표시하고 확증하지만, 그것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표시하고 확증한다. 죄는 하나님과의 분리를 가져오고, 죄씻음은 하나님과의 영적 연합을 가져온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고 그를 믿는 우리는 그와 연합하여 그의 죽음에 참여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해 죽은 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씻음을 받고 그와 연합된 성도가 계속 죄 가운데 거하면서 죄를 짓는다면 그것은 구원의 이치에 반대되는 일이 되는 것이다. [4-5절]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장사된 것은, 그가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으로 부활하심과 같이 우리도 새 생명 가운데 살게 하려 함이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은 또한 그와 함께 사는 것이며, 그의 부활의 생명이 그와 연합된 이들 속에 활동하여 새 생명으로 살게 하는 것이다. 이치가 그러하다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가 죄 가운데, 즉 영적 죽음 가운데서 산다는 것은 모순이 아닐 수 없다. 구원 얻은 자들은 새 생명을 받았고 의로운 생활을 하도록 구원 얻은 것이고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6-7절]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옛 사람’은 죄로 인해 죽었던 옛 자아, 곧 구원 얻기 전의 자신을 가리킨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을 때 옛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새 피조물이 되었다(고후 5:17). 옛 사람이 죽은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게 하려 함이다. ‘죄의 몸’은 ‘옛 사람’과 같은 뜻으로 죄성을 가진 몸을 가리킨다. 이제 죄성을 가진 몸인 옛 사람은 죽었고, 의롭다 하심을 얻은 새 사람이 살았다. 우리의 구원은 죄 안 짓게 하는 구원이다. 그것은 죄에 대하여 죽는 구원이며 의를 향해 사는 구원이다. 그러므로 구원 얻었다고 하면서 죄 가운데 산다면 그것은 구원의 목적과 방향에 반대로 가는 것이다. [8-11절]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전통본문) 11)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만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연합되어 그와 함께 죽은 자가 되었다면, 우리는 또 그와 함께 살 것이다. 그것은 거룩한 생활로 나타난다. 비록 구원 얻은 성도의 생활이 완전치 못할지라도, 거룩함은 구원의 당연한 과정이다. 예수께서 부활하셨고 영원히 사시고 다시 죽지 않으시듯이, 예수님 믿는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으로 살고 범죄치 않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에 대해 단번에 속죄의 죽음을 죽으셨다. 그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와 그 결과인 죽음은 영원히 제거되었다. 죄와 사망은 설 곳이 없어졌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역은 완전하고 영원하다. 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을 향해 살아나신 것이다. 이제 죄와 사망은 끝났고 하나님을 위해 사는 생활만 그에게 있다. 성도의 거룩한 생활 곧 성화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의 연합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고 하나님을 향하여 사신 것처럼 우리도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을 향하여 산 자임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12-13절]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몸의 욕심들로 말미암아 죄에 순종치 말고] 12)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도구]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도구]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는 몸의 욕심들을 통해 활동한다(약 1:15). 몸은 의의 도구가 될 수도 있고 죄의 도구가 될 수도 있다. 성도는 죄에 대해 죽은 자이므로 죄가 몸을 주장치 못하도록 욕심들을 통제해야 하고 죄에 순종치 말아야 한다. 구원 얻은 성도는 자기 몸을 거룩하게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13절의 “너희 지체”라는 말에 ‘지체’는 몸의 부분들, 즉 눈과 귀와 입, 손과 발 등을 가리킨다. 성도는 이제 몸의 모든 부분을 불의의 도구로 죄에게 내어주지 말고, 의의 도구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전에는 우리가 하나님 없이 살며 더럽고 악한 것을 보고 듣고 말하며 만지고 그런 곳으로 갔을지라도,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우리 몸을 거룩하게 드리고 의롭고 선한 것만 보고 듣고 말하고 행해야 한다. [14절] [이는]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못할 것임이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성도들이 자기 몸을 죄에게 주지 않고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이유는 죄가 그들을 주관치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 죄가 그들을 주관치 못하는 이유는 그가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우리 죄를 대신해 죽으심으로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셨기 때문에 율법이 요구하는 법적 책임과 형벌이 제거되었고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을 말한다. 의롭다 하심 곧 칭의(稱義)는 법적인 구원이다. 성도는 이미 법적으로 완전한 의를 얻었다. [15절]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메 게노이토 ). 바울은 6:1-2에서도 성도가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계속 머물 수 있는가라고 질문한 후 ‘그럴 수 없다’고 분명하고 강하게 대답했었다. 그는 여기서도 의롭다 하심을 받은 성도들이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고 해서 죄를 지어도 되는가라고 질문한 후 ‘그럴 수 없다’고 한번 더 분명하고 강하게 대답한다. 그는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들이 죄짓는 생활을 할 수 없음을 다시 강조한 것이다! 성화는 성도의 당연한 길이다. 성도는 죄 가운데 거해서는 안 된다. 사도 요한도 요한일서에서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죄를 계속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하나님께로서 나지] 아니하니라”고 말하였다(요일 3:9-10). [16-17절]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성도가 거룩해야 할 이유는 둘째로 순종의 원리로 설명된다. 사람은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의 종이 된다. 죄에게 순종하면 죄의 종이 되어 죄 안에 살다가 사망에 이르게 될 것이고, 하나님께 순종하면 하나님의 종이 되고 의 안에 살다가 영생에 이르게 될 것이다. 바울은 성도가 구원 얻었던 처음 순간을 언급한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순간이다. 우리는 본래 죄에게 순종하고 죄만 짓고 살았던 죄의 종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을 들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소식이었고 그를 믿는 자에게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을 주신다는 내용이었다. 우리는 그 말씀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구원을 얻었다. ‘마음으로’라는 원어( 에크 카르디아스 )는 ‘마음으로부터, 마음에서 우러나와’라는 뜻이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마음에서 우러나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영접하고 그에게 순종하는 것이다. 그것이 믿음이다. 우리는 마음으로 순종한 결과 죄에게서 해방되고 의에게 종이 되었고,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에 근거하여 우리의 모든 죄는 씻음 받고 우리는 단번에 의롭다고 여기심을 받았다. 우리는 죄에게서 자유케 되고 의에게 종이 되었다. [19-22절]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너희가 그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육신이 연약하다는 것은 우리 속에 죄성이 남아 있음을 가리킨다. 성도가 거룩하게 살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이지만, 그에게 죄성이 남아 있으므로 거룩함에 이르라는 권면이 필요하다. 성도는 성화(聖化)가 당연한 목표라는 권면과 격려가 필요한 것이다. 성도가 죄의 종이었을 때는 죄만 지었기 때문에 의에 대해 자유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때에 맺은 열매라는 것은 더러운 죄들이었으므로 부끄러운 것들뿐이었고 그 결국은 사망이었다. 진실로, 모든 죄들은 비록 범죄할 당시에는 혹시 즐거워보일지라도 지나고 보면 부끄러운 것들이다. 의는 칭찬받을 만하지만, 죄는 수치와 후회를 남길 뿐이다. 이제 성도는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으로 인해 죄에게서 해방되었다. 죄의 종이 죄에게서 해방되어 자유인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자유는 하나님께 종이 되는 자유이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께 종이 되는 것은 결코 무거운 짐이 아니다(마 11:30). 거룩함의 열매는 구원 얻은 성도에게 당연한 열매이다.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이다. 중생(重生)과 칭의(稱義)는 반드시 성화(聖化)를 동반한다. 법적인 구원에 실제적 구원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구원이 아닐 것이다. 출생한 아기가 성장하는 것은 정상적인 일이듯이, 중생한 성도가 지식이 더하고 거룩해지는 것은 정상적인 일이다. 그러나 이 정상적인 성화는 성도의 순종을 통해 이루어진다. 성도는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의 열매를 맺다가 영생에 이른다. 하나님께 종이 되는 것과 거룩의 열매를 맺는 것은 영생과 한 줄 위에 있고 그 줄은 끊어질 수 없다. 구원 얻은 성도는 하나님께 순종하며 거룩한 생활을 하는 과정을 통해 영생에 이르는 것이다. 이 정상적 과정이 없다면, 그는 구원 얻지 못한 자일 것이다. [23절] [이는]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恩賜)[은혜의 선물]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영생임이니라]. 성도가 영생을 확실히 얻을 것이라는 이유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죄에 대한 대가(代價) 즉 죄의 보응과 형벌이 죽음이지만 택자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이기 때문이다. 이 짧은 말씀은 복음 진리의 요약과도 같다.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본장은 구원 얻은 성도가 거룩해져야 할 이유, 즉 성화(聖化)의 이유를 증거한다. 첫째로, 구원 얻은 성도가 거룩해져야 할 이유는 세례의 원리로 설명된다. 즉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 받았을 때 그와 연합되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이름으로 세례 받은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와 함께 살았다. 그것은 죄의 몸인 옛 사람이 죽었고 새 사람이 새 생명 안에서 산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우리의 죄성 때문에 거룩한 생활을 할 수 없다고 생각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서 죄에 대해 죽었고 하나님을 향해 산 자가 되었음을 인정하고 죄와 결별하고 산 자처럼 의롭고 거룩한 생활을 해야 하는 것이다. 둘째로, 구원 얻은 성도가 거룩해져야 할 이유는 순종의 원리로 설명된다. 즉 그가 죄에게서 해방되어 하나님께 종이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속에는 아직도 우리로 범죄케 할 수 있는 죄성(罪性), 곧 죄악된 성질과 성향이 남아 있다. 그러나 구원은 죄에게서 해방되어 하나님께 종이 되는 것이다. 성화는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과 방향이고 성도의 정상적이고 당연한 일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거룩함이다. 그러므로 예수님 믿고 구원 얻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 즉 구약의 도덕법과 신약의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의 교훈들에 순종함으로써 거룩한 생활을 해야 하고 성화(聖化)를 이루어야 한다. 7장: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1-3절]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淫婦)[음란한 여자]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부[음란한 여자]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바울은 결혼의 비유를 들어 성도가 율법으로부터 자유케 되었음을 증거한다. 남편 있는 여인은 그 남편이 살아 있을 동안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지만, 남편이 죽은 후에는 다른 남자와 결혼할지라도 음란한 여자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한 쪽이 죽었으므로 그와의 부부의 관계가 끝났기 때문이다. [4절]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율법의 저주를 당하시고 율법의 의(義)를 이루셨기 때문에, 예수님 믿는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한 것과 같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율법의 요구를 다 만족시키셨기 때문에, 우리는 율법의 저주와 형벌에서 자유함을 얻었다. 우리가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한 목적은, 부활하신 주와 연합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위해 선한 인격과 생활의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함이다. [5절]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육신에 있을 때’라는 말은 구원 얻기 전의 상태를 가리키고,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라는 말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깨달아지는 죄의 정욕이라는 뜻이라고 본다. 우리가 구원 얻기 전에는 죄성이 우리를 지배하였고 죄의 정욕들이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몸의 기관들에 역사해 우리로 사망에 이르는 행동을 하게 했다. 간혹 양심의 가책이 있었을지라도 그것은 무시되고 변명으로 무마되었다. [6절]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성령](NASB, NIV)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儀文)[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얽매였던 것’이라는 말은 율법의 규례들을 가리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는 죄와 사망으로부터 뿐만 아니라, 또한 율법으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되었다. 우리는 율법에 대해 죽임을 당했고 율법으로부터 자유케 되었다. 바울은 6:14에서도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다고 말하였다. 또 그는 갈라디아서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해 강조하면서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었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으나,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다고 말하였고(3:23, 25), 또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말했다(5:1). 바울은 그 책에서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에 대해 분명하게 말했다. 그러나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는 죄와 방종에 떨어지게 하는 자유가 아니다. 그 자유는 율법의 공포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위해 살고 의와 거룩을 행하게 하기 위한 자유이다. 의롭고 거룩한 삶, 이것이 구원의 방향이다. 구원은 죄로부터 건져내어 의롭고 거룩하게 살게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구원이라고 할 수 없다. 그래서 앞에 6:15에서도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고 말하였다. 또 그는 갈라디아서 5:13에서도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고 말하였다. ‘영의 새로운 것으로’라는 말에서 ‘영’이라는 말은 성령을 가리키며 (NASB, NIV) , ‘의문’(儀文)이라는 말은 ‘글자’라는 뜻으로 율법의 조문을 가리킨다고 본다(고후 3:6도 비슷함). 우리가 율법에 대해 죽었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옛날처럼 율법 조문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긴다.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는 성도에게 성화를 위한 큰 힘이 된다. 때때로 성도에게 죄와 연약이 있으나 그가 낙심하지 않고 더욱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가고 의와 거룩의 길로 나아가는 데에 이 자유가 큰 힘이 되는 것이다. [7절]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이제까지 말한 내용이 율법을 정죄(定罪)하는 인상을 줄지 모르기 때문에, 바울은 ‘율법이 죄인가?’라고 묻고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그러면 율법의 역할은 무엇인가? 율법은 죄를 알게 하고 죄를 깨닫게 하는 역할을 한다. 율법이 없었다면 사람은 죄를 죄로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 자체는 죄가 아니다. [8-11절]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율법은 그 자체가 죄가 아니지만, 죄가 율법으로 기회를 타서 우리 속에 각양 탐심을 이루었다. 법이 없으면 죄가 죄로 인식되지 못하기 때문에 죄가 없는 것 같고 죄가 죽은 것 같다. 그러나 율법을 통해 우리의 죄악된 성질과 행위들이 드러난다. 전에 율법이 없을 때는 죄에 대한 지식이 없으므로 나 자신의 존재가 살아 있는 것 같았으나, 율법이 이를 때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죄로 인하여 죽은 자라는 것이 드러났다. 율법은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는 약속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가 율법을 완전히 행할 수 있다면 율법을 통하여 영생에 이를 수 있을 것이나, 우리는 율법을 다 행할 수 없고 율법을 통해 우리 자신이 심히 죄악됨을 깨달을 뿐이다. 영생에 이르게 할 율법이 실제로는 우리를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다. 죄는 율법으로 기회를 타서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였고 죽게 하였다. [12-13절]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되게 하려 함이니라. 율법 자체는 죄악되지 않다. 율법은 실상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다. 14절에서 바울은 율법을 신령하다고까지 말한다. 그는 디모데전서 1:8에서도 “사람이 율법을 법 있게 쓰면 율법은 선한 것인 줄 우리는 아노라”고 말했다. 율법은 바른 정신으로 사용하면 구원 얻은 성도들에게 선하고 유익하다. 그러므로 선한 것이 우리에게 사망이 되었을 수 없다. 단지,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그 선한 율법으로 우리를 죽게 한 것이다. 이로써 죄가 심히 죄악됨을 드러낸 것뿐이다. [14-15절]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율법으로부터 자유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내면 속에는 선악간의 싸움이 있다. 바울은 ‘나는’ ‘나의’ ‘내가’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내면적 싸움을 표현한다. 그것은 모든 성도들 속에 있는 선악간의 싸움이다. 성도에게는 육신의 연약성 곧 죄성(罪性)이 남아 있다. 이 죄성 때문에 우리는 율법이 요구하는 의를 행치 못한다. 율법은 영적이지만, 나는 영적이지 못하고 육신적이다. 나는 육신에 속해 죄 아래 팔려 있고 때때로 원하는 것을 행치 않고 미워하는 것을 행하고 있다. [16-17절]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가 율법 행하기를 원한다는 것 자체가 율법의 선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제는’이라는 말은 6절이나 8:1에도 쓰였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롭다 하심을 받은 후를 가리킨다.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라는 말은 구원 얻은 성도에게 있어서 범죄의 주체는 참된 자아가 아님을 증거한다. 구원 얻은 성도의 참된 자아는 ‘속사람’(22절) 혹은 ‘새 사람’(엡 4:24)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구원 얻은 성도의 참된 자아는 의와 생명 안에서 살려 하지만, 성도 속에는 죄성이 남아 있어 율법을 거슬러 죄를 짓게 한다. 성도가 죄를 짓는 것은 참된 자아의 행위가 아니고 자신 속에 남아 있는 죄성의 행위이다. 그렇다고 해서, 성도가 범죄의 책임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선악간의 모든 행위는 바로 우리 자신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18-20절]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육신’이라는 원어( 사르크스 )는 ‘몸’( 소마 )이라는 말과 동의어로 사용되며, 성도의 남은 죄성은 육신 즉 몸에 있다고 보인다. ‘원함이 내게 있다’는 말은 구원 얻은 성도의 참된 자아는 의와 선을 원함을 나타낸다. 이것은 새 사람의 소원이요 중생한 영혼의 변화된 성향이다. 구원 얻은 사람만 이러한 소원을 가진다. 구원 얻기 전에는 이런 소원이 없었고 단지 때때로 양심의 가책 정도가 있었을 뿐이다. 그렇지만, 구원 얻은 후에도 원함은 있으나 선을 행하는 능력이 없다. 이것이 성도에게 남아 있는 죄성과 연약성인 것이다. 선을 원하는 것은 참된 자아요, 선을 원치 않고 악을 행하는 것은 내 속에 거하는 죄성이다. 그것이 우리 몸에 남은 옛 사람의 성질인 것이다. [21-23절]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 누스 )[생각]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성도는 자신 속에 두 가지 모순된 성향이 있음을 깨닫는다. 하나는 참된 자아의 소원으로서 선을 행하려 하는 성향이요, 다른 하나는 우리 몸 속에 남아 있는 죄성으로 악을 행하려는 성향이다. ‘속사람’은 의롭다 하심을 얻은 후의 참된 자아를 가리킨다. 중생한 참 자아는 ‘마음’( 누스 ) 곧 생각(mind)으로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고 그 법을 지키려 한다. 그러나 우리 속에는 다른 한 성향이 있어 우리를 죄의 법 아래로 사로잡아 온다. 성도 속에는 이 대립된 두 가지 성향이 있어 항상 내면적으로 싸우는 것이다. [24-25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 누스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바울의 탄식은 성도들의 탄식과 신음이다. 마음의 성향과 육신의 성향의 싸움으로 성도는 피곤해진다. 성도는 당연히 이 죄와 사망의 몸으로부터의 구원을 갈망하게 된다. 그러나 바울은 또한 하나님께 감사한다. 성도의 거룩한 생활과 성화는 이러한 싸움과 탄식 속에서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는 죄에 대해 점점 죽고 의에 대해 점점 산다. 하나님의 구원은 효력이 있고 승리적이다. 비록 구원 얻은 성도들이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섬기고 육신으로 죄의 법을 섬기지만, 성도들이 탄식과 신음 중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얻은 의롭다 하심 때문이다. 성도는 이미 하나님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인(義人)으로 인정받았다. 성도는 때때로 죄에 넘어짐에도 불구하고, 법적인 의를 이미 얻었고 최종적 구원과 영생도 보장되어 있다(롬 8:30; 빌 1:6). 이 최종적 구원은 영육의 완전한 구원이다.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으로 말미암아 율법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었다. 이것은 우리가 율법의 저주와 형벌로부터 자유함을 얻었다는 뜻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므로 우리의 모든 죄책과 형벌을 담당하셨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 조문에 따라 행하지 않고 율법의 공포에서 벗어나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담대히 의와 거룩을 행한다. 둘째로, 그러나 우리의 육신에는 아직 죄성이 남아 있다. 구원 얻은 성도에게는 이 남은 죄성으로 말미암는 내면적 싸움이 항상 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17에서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했다. 우리는 때때로 바울처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절) 하고 신음하며 탄식한다. 그러나 성도는 탄식과 신음 속에서 점점 거룩해져간다. 그것이 성화의 과정이다. 그 뿐만 아니라, 성도는 이미 얻은 의롭다 하심과 영생과 하나님의 자녀 됨과 천국 기업의 보장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과 자유 속에서 의와 선과 사랑을 힘써 행해야 한다. 8장: 성령의 인도하심 로마서 8장은 구원 얻은 성도들의 거룩한 생활 곧 성화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이루어짐을 증거한다. 우리의 성화는 성령의 은혜이다.
1-14절, 성령을 따라 삶 [1-2절]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 [곧 육신을 좇지 않고 성령을 좇아 행하는 자들](전통사본) 13) 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나를](전통본문) 14) 해방하였음이라. ‘이제’는 구원 얻은 후를 가리키며, ‘육신’은 사람의 죄성을 가진 몸을 가리킨다고 본다. 구원 얻은 성도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거하는 자들이요 육신 즉 몸의 죄성을 따라 행하지 않고 성령을 따라 행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형식적으로 ‘주여, 주여’ 하는 자가 아니고 진실히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경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이다. 그런 자들에게는 비록 부족과 연약은 있지만 결코 정죄함이 없다. 그 이유는 그들이 복음 안에서 자유함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은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주시는 영생을 가리킨 것 같다. ‘죄와 사망의 법’은 율법을 가리킬 것이다. 율법은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 하고 우리로 사망에 이르게 한다. 그러나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복음으로 우리에게 의를 주시고 죄와 사망의 율법으로부터 자유케 하셨고 영원한 생명을 은혜로 주셨으므로 성도들에게는 정죄함이 없는 것이다. [3-4절]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성령]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 디카이오마) [의(KJV), 요구(NASB, NIV)]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람은 본성의 죄성과 연약성 때문에 ‘어찌 할 수 없는’ 죄인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와 연약 때문에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으로 이 세상에 보내셨고 그에게 우리의 죄를 담당시키셨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이며 하나님의 복음의 중심적 내용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얻은 자들은 이제 육신의 죄성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사는 자들이 되었다. ‘육신을 좇지 않고 성령을 좇아 행하는 우리’라는 표현은 구원 얻은 자들을 묘사한다. 이들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진다. 율법의 요구는 모든 율법을 항상 지킴으로 얻는 의, 곧 완전한 의(義)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형벌을 받으심으로 이 의를 이루셨고, 하나님께서는 예수께서 이루신 이 의를 예수님 믿는 자들에게 은혜로 주셨다. [5-8절]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성령](KJV, NASB, NIV)을 좇는 자는 영[성령](KJV, NASB, NIV)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성령]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본절의 육신과 영은 단지 사람의 육체와 영을 가리키지 않고 몸의 죄성과 성령을 가리킨다. 구원 얻은 자들에게는 단지 몸과 영의 대립이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중생한 사람의 영이라도 영육이 결합되어 있는 동안에는 몸의 죄성의 영향을 받아 영의 기능들인 생각과 감정과 의지에 있어서 연약과 부족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구원 얻은 성도의 내면적 싸움은 육신의 죄성과 성령의 대립이다. 사람은 몸의 죄성을 따라 살면 그 결과는 죽음이지만, 성령을 따라 몸의 죄악된 욕심을 죽이며 산다면 그 결과는 의와 생명과 평안인 것이다. 그러므로 육신의 생각 즉 몸의 죄성을 따른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않을 뿐 아니라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사람은 심히 죄악되며 무능력해졌다. 그러므로 본성 그대로의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성화는 본성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성령의 도우심으로만 된다. [9절]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성령 안에](KJV, NASB)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성도의 구원은 하나님의 영의 사역이다. 성령께서는 구원 얻은 자 속에 오셔서 거하신다. 이것은 구약성경에 예언된 복이며 신약 성도에게 주신 특권이다. 이렇게 성령께서 그 속에 거하시는 성도는 더 이상 육신 즉 죄성을 가진 몸에 불과한 자가 아니고 성령 안에 있는 자이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영께서 계시지 않는 자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영’과 성령은 동일시된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영이실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시다. 여기에 삼위일체의 신비가 다시 증거된다. 참 성도는 이미 성령을 받은 자이며 성령을 받지 못한 자는 성도가 될 수 없다. 오순절파는 이 점에 대해 바른 생각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본다. [10-11절]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성령께서는] 의를 인하여 산 것( 조에 )[생명](원문, KJV)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하늘에 계시지만 신성(神性)으로 그의 영 곧 성령을 통하여 우리 속에 계신다. 우리의 몸은 죄로 인해 죽은 것과 같고 또 어느 날 죽게 될 것이지만, 우리 속에 계신 성령께서는 생명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자이시다. 성령께서 우리 속에 생명을 시작하시고 유지시키시는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의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성령은 의를 인하여 생명이시니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부활의 하나님이시다. 그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시키셨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성도들 속에 계시다면 성도들은 장차 그 영으로 인해 부활할 것이다. 성도의 부활은 확실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빈 무덤을 남기고 부활하셨듯이, 예수님 믿고 구원 얻은 모든 성도들도 마지막 날 빈 무덤을 남기고 부활할 것이다. 성도들 속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그 일을 보증하신다. 성도들은 반드시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할 것이다. [12-14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성령](KJV, NASB, NIV)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구원 얻은 우리는 죄성을 가진 몸에 빚이 있어 몸의 욕구대로 살아야 할 자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은혜의 하나님께 빚을 진 자들이다. 하나님께서는 값없이 주신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우리의 죄를 씻으셨고 우리를 의롭다고 여기셨고 새 생명을 주셨다. 지옥 갈 죄인을 천국 가게 하신 구원의 은혜는 우리가 그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는 큰 빚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큰 빚은 진 자이다. 성도는 죄성을 가진 몸의 욕구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 이 말씀은 가상적 경고이다. 이 말씀은 중생한 성도가 죄 가운데 살다가 지옥 갈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는 말씀이 사람이 율법을 행할 능력이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듯이,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는다는 말씀은 하나의 경고이지 구원 얻은 성도들이 구원을 잃을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의 뜻은 택한 자를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 구원하시는 것이다(요 6:39). 하나님께서 예정하시고 부르신 모든 사람은 영광에 이를 것이다(롬 8:30). 그러나 성도가 계속 죄를 짓는다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성령으로 몸의 죄악된 행위들을 죽여야 한다. 그것이 성화이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성화를 위해 우리 속에 거주하신다. 우리의 성화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죄성을 극복하는 과정이다. 14절의 ‘하나님의 영’이라는 말은 13절의 ‘영’이라는 말이 성령을 가리킴을 보인다. 성도는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이다. 성도의 거룩한 생활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화를 위해 항상 성령의 인도하심을 사모하며 의지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얻은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그들 속에 남아 있는 몸의 죄성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행하는 자들이다.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 안에 영원히 거하시며 그들을 감동하시고 지도하시고 거룩한 생활을 하게 도우신다. 성화는 성령의 은혜이다. 둘째로, 이렇게 구원 얻은 성도들은 결코 정죄함이 없다 (1절). 참으로 중생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몸의 죄성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의와 선을 행하기를 힘쓸 것이며, 비록 그들에게 실수와 부족이 없지 않을지라도, 결코 정죄함이 없을 것이다. 셋째로, 성화(聖化)는 성도가 성령의 도우심으로 몸의 죄성을 죽임으로써 조금씩 이루어진다. 성화는 단지 사람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은혜이다. 갈라디아서 5:16,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물론, 우리도 힘써야 한다. 15-39절, 양자(養子) 됨과 영화(榮化) [15-17절]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養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 아람어 )[아버지]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우리를 인도하시는 성령께서는 ‘양자(養子)의 영’ 곧 우리를 양자로 삼으시는 영이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친자(親子)이시고 예수님 믿는 우리들은 하나님의 양자(養子)들이다.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에 근거하여 우리를 양자로 삼으셨고 우리 속에 하나님을 ‘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마음을 일으키셨다. 우리의 영의 이런 진심의 고백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된 증거이다. 또 자녀들이 부모의 기업을 상속받듯이,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기업 곧 천국을 상속받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천국의 상속자로 묘사되었고 우리도 그와 함께 천국을 상속받을 자로 묘사되었다. 영광의 천국은 성도들을 위해 예비되었다. 마태복음 25:34, “그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통해 영광에 들어가셨듯이, 우리도 고난을 회피하지 말아야 한다. 예수께서 많은 고난을 받으셨듯이 우리도 세상에서 많은 고난을 받을 것이며,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영광을 받으셨듯이 우리도 고난 받은 후에 영광을 받을 것이다. 성도들의 현재의 고난은 장차 받을 영광에 이르는 과정이다. [18-21절]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장차 성도들에게 나타날 영광은 천국의 영광이며 부활과 영생의 영광이다. 요한계시록 21:10-11,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 고린도전서 15:42-43, “죽은 자들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빌립보서 3:20-21,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성도들이 장차 누릴 천국과 영생의 영광은 그들이 현재 당하는 고난과 비교할 수 없이 크고 아름답고 영원할 것이다. 피조 세계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날이 오기를 고대한다. ‘피조물들’은 동식물의 세계를 가리키며, ‘하나님의 아들들’은 영광스런 부활체를 입은 성도들, 곧 영화(榮化)된 성도들을 가리킬 것이다. 지금은 동물들도 식물들도 그 영광의 날을 기다리며 허무한 데 굴복하고 썩어짐에 종노릇하고 있지만, 그 날이 오면 모든 피조물도 하나님의 자녀들처럼 영광의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다. 그 날에는 피조물들에게도 죽음이나 질병이나 썩는 것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22-25절]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養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救贖)을 기다리느니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는 성령의 역사로 거듭난 자들을 가리킨다. 모든 피조물과 거듭난 성도들은 함께 탄식하며 성도들의 몸의 구속(救贖) 즉 영광스런 부활의 몸을 기다리며 사모한다. 우리는 다 죄와 죽음과 불행이 영원히 사라질 그 날을 사모한다. 중생(重生)과 칭의(稱義)로 시작된 구원은 성화(聖化)로 진행되며 마침내 영화(榮化)로 완성될 것이다.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은 다 거듭하고 의롭다 하심을 얻고 거룩해지고 영광에 이를 것이다. 우리의 법적인 구원 곧 칭의(稱義)와 양자(養子)는 영화(榮化)의 단계에서야 죄로부터의 완전한 구원, 즉 실제로 죄와 죄성이 전혀 없는 구원이 될 것이다. 지금은 죄와의 싸움, 죄성과의 싸움이 있지만, 그때에는 그런 싸움이 더 이상 없을 것이다. 그 영화의 단계는 아직 미래에 있다. 우리는 그것을 소망한다. 성도는 법적으로 이미 구원을 받았으나 장차 완전한 구원을 누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영광의 구원을 참음으로 기다려야 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결코 실패하지 않는 완전한 구원이며 그 영광은 확실하기 때문에, 우리는 고난 중에서도 낙심치 말고 그 영화의 단계를 참고 기다려야 한다. [26-27절]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성령께서는 성도의 연약함을 도우신다.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할 때 하나님께 무엇을, 어떻게 기도할지 알지 못하지만, 이때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서 탄식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 이것은 성령의 도우심이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실패치 않고, 우리의 영적인 생활은 쇠잔해지지 않는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며,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생각을 아시며,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그 기도를 잘 들으실 것이다. [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우리가 알거니와’라는 말은 이 진리가 확실함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회개시키시고 믿게 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성도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모든 것’은 성도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가리킨다. 그것 안에는 낙심할 만한 일도 있고 실패한 일도 있고, 심지어 실수하고 범죄한 일도 있을 것이나, 그것들조차도 선을 이루는 데 사용된다. ‘선’은 일차적으로 성화(聖化)를 가리킨다. 성도의 일생은 영적 훈련과 성장의 과정, 즉 성화의 과정이다. [29절]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미리 아신 자들’이라는 말은 구별하여 사랑하신 자들이라는 뜻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회개와 믿음을 미리 아셨기 때문에 우리를 택하셨다는 뜻이라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선택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주권적 행위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선택이 아닐 것이다. 주께서는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자들 곧 선택된 자들만 그에게 나아와 그를 믿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요 6:37, 44, 65).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신 자들을 예정하셨다. 그의 예정의 목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목표이다. 사람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나 범죄함으로 그것을 상실하였고 이제 구원으로 그것을 회복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은 죄 없는 거룩한 형상이다. 또 본문은 예수께서 많은 형제들 중에 맏아들이 되셨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감히 예수님의 동생들이라고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30절]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과거시제). 사람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된다.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은 장차 영화롭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영화롭게 하실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영화롭게 하셨다’는 과거시제가 사용되었다. 이것은 확실한 미래의 사건을 나타내는 표현법이다. 성도들을 영화롭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미리 작정하신 바이며 지금 섭리하시는 바이다. 영광은 하나님의 구원의 목표이다. 이 일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고 이제 그를 믿는 자들이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또 이 구원의 완성을 위해 성령께서 그들 안에 오셔서 도우시는 것이다. [31-32절]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이 일’은 구원의 일, 특히 영화를 가리킨다. 세상에서도 최고 권력자가 어떤 이를 위하면 그를 대적할 자가 없을 것이다. 우주의 최고 권력자이시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위하시는 자를 대적할 자가 누구이겠는가? 사람의 최대의 대적자는 사탄인데 심지어 사탄도 욥기 1장에 증거한 대로 하나님의 허락하신 범위 안에서만 활동할 수 있다. 사탄도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성도들을 대적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신 증거는 그의 아들을 우리를 위해 죽게 하신 일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이었다(요 3:16; 롬 5:8).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선물인 아들을 주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하다면, 그 외의 것을 무엇이든지 주시지 않겠는가? [33-34절]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의롭다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하나님이시도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본문은 칭의가 과거의 사건이지만, 그 효력이 지금도 있음을 증거한다.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들을 송사하거나 정죄할 자는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죄 때문에 죽으셨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속죄를 확증하셨고 승천하셔서 지금 하나님 오른편에서 그들을 위해 간구하시기 때문이다. 그의 간구하심은 그가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완전한 속죄와 의(義)를 계속 적용하시는 행위이다. [35-37절]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赤身)[헐벗음]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성도들의 구원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너무 크고 확실하기 때문에 아무도 그 사랑의 줄을 끊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 사랑에 근거한 성도들의 구원은 영원한 보장을 가진다. 성도들의 생활은 고난의 생활이지만, 성도들은 어떤 고난의 현실에서도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않을 수 있다. 왜냐하면 환난이나 곤고나 괴롭힘이나 기근이나 헐벗음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그 어떤 것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의 현실이 어렵고 힘들지라도,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승리할 수 있다. 성도들의 구원과 승리는 완전하고 확실하다. 성도들은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긴다. 하나님의 구원은 실패치 않고 끝까지 보존되고 성도들은 성화(聖化)를 이루고 마침내 영광에 이를 것이다. [38-39절]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여기에 성도들의 넉넉한 승리를 단언한 이유가 있다. 그들은 영광의 구원에 이를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우리를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미 하나님의 선택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와 성령의 인치심에서 확증된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미 성도들에게 부어졌고 그 사랑에서 끊을 자는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구원의 완성인 영화는 확실하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어떤 고난의 현실에서도 낙심치 않고 담대히 행할 수 있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주 예수님 믿고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양자(養子)가 되었다. 15-16절,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養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둘째로, 성도들이 얻은 구원은 장차 영광에 이르는 구원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천국을 기업으로 받는 구원이다. 예수께서 고난을 통해 영광을 얻으셨듯이, 예수님 믿는 성도들은 비록 이 세상 사는 동안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하지만 장차 영광의 부활의 몸을 얻고 영광의 천국에서 복된 영생을 누릴 것이다. 그것은 모든 피조물들도 고대하는 바이다. 그 영광은 현재 우리가 당하는 고난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소망 중에 그 영광을 참고 기다려야 한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실 구원의 완성 곧 영화(榮化)는 확실하다. 우리 안에 오신 성령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모든 일들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며 성화를 이룬다.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자는 아무도 없다. 예수님 믿고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에게는 영화(榮化)가 확실히 보장된다. 성도들은 넉넉히 이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소망과 확신을 가지고 성령을 따라 거룩한 생활을 힘써야 한다. 9장: 은혜로 택하심 로마서 9장부터 11장까지에서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 문제를 다루면서 하나님의 예정에 대해 증거했다. 9장은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선택에 근거하였고 이 선택이 사람의 행위에 근거하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적 긍휼과 은혜에 근거하였음을 증거했다. [1-3절]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사도 바울은 동족 이스라엘의 구원을 간절히 사모하였다. 사람이 한 부모에게서 난 형제자매들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친척들이나 같은 민족에 대해 더 친근함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특히 먼저 구원 얻은 자들이 구원 얻지 못한 가족들과 친척들과 동족들의 구원에 대해 매우 큰 안타까움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4-5절]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養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온갖 특권을 누린 특별한 민족이었다. 그들은 다른 민족들과 달리 하나님의 자녀로 불리었고 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영광의 표들과 언약들과 율법과, 성막과 성전 예배 즉 제사 제도와, 약속들이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육신적으로는 그들에게서 나셨다. 그러나 그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많은 은혜를 입었던 민족이지만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의 보내신 메시아를 죽였고 또 예수님 믿는 자들을 미워하고 핍박하고 죽이고 있었다. [6-9절] 또한[그러나](NASB)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라. 명년 이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선택의 진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다 그의 자손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으로 선택된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그의 자손으로 여기심을 받았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아브라함의 여종 하갈에게서 난 이스마엘과 그 자손들이나,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죽은 후 아브라함의 후처 그두라에게서 난 여섯 명의 아들들과 그 자손들은(창 25:1-6) 아브라함의 언약의 복을 받은 자손으로 간주되지 않았고 오직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자손들만 언약의 자손들로 간주되었다. [10-13절]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하나님의 선택의 진리는 또한 이삭의 아내 리브가가 쌍둥이 아들, 에서와 야곱을 낳았을 때 더 분명하게 드러났다. 그들이 아직 나지도 않았고 선과 악을 행하지도 않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했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 됨이 육신의 혈통이나 그들의 선한 행위에 근거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의 선택으로 되는 것을 증거한다. 사람의 행위의 의는 더러운 누더기 옷과 같다(사 64:6). 사람의 구원은 그의 선행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 즉 그의 은혜의 선택에 있다(딤후 1:9). [14-16절]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출 33:19)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하나님께서 주권자이시므로 구원하실 자를 임의로 선택하신다는 사실은 결코 부당하거나 불의한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은 그가 모세에게 하신 말씀에서도 확증된다. 구원은 사람의 소원이나 노력으로가 아니고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 [17-18절]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출 9:16)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도 하시고 강퍅케도 하신다. 구원은 사람의 손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손에 있다. 구원의 능력이 하나님께 있다. 구원은 사람들 속에서 나오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 하나님께서는 구원하고자 하시는 자들을 구원하신다. [19-24절]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말대답]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토기장이가 진흙 덩어리로 귀한 그릇이나 천한 그릇을 만들 권한이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구원에 대해 결정할 권한이 있으시다. 실상, 악인의 멸망은 그 자신의 죄와 직접 관계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들을 멸망시키시는 것이 아니다. 악인들은 스스로 악을 행했고,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악인들을 오래 참으시고 관용하셨다. 또 구원 얻는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로 얻은 것뿐이다. 사람의 죄악된 본성으로 말한다면, 우리나 저들이나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긍휼로 우리에게 회개와 믿음, 죄사함과 의를 주셨다. [25-29절]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호 2:23).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호 1:10) 함과 같으니라.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사 10:22)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이는 그가 그 일을 이루시고 의로 그것을 속히 이루실 것임이라. 이는 주께서 땅 위에서 속히 이루실 것임이니라](전통본문) 15) 하셨느니라.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시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사 1:9)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과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오직 택하신 자들을 구원하실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긍휼로 남은 자들이 있었듯이,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은혜로 남은 자들이 있으며 오직 그들만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들이다. [30-33절]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의의](전통본문) 16)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율법의](전통본문) 18)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실패의 원인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가 아니고 율법의 행위로써 하나님의 의를 이루려 했기 때문이었다. 사람은 행위로써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 행위로는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며 멸망할 자들이다. 사람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음으로써만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시온에 예수 그리스도를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으로 두셨다. 이사야의 예언대로, 율법 행위를 의지하는 자는 그 돌에 걸려 넘어질 것이나, 그를 믿고 의지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사도 바울은 비록 그가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그의 형제와 골육 친척의 구원을 원하였다. 3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우리는 주 예수님 믿지 않고 지옥 갈 우리의 가족들과 친척들과 동족들을 향해 간절함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그들을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해야 한다. 둘째로, 사람의 구원은 원하는 자로 말미암지 않고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지도 않고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 (16절). 하나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신다(18절). 죄인들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며 하나님의 주권적 긍휼의 선택으로 말미암는다. 만세 전에 하나님께서 은혜로 택하신 자들은 다 예수님 믿고 구원 얻을 것이다. 셋째로, 이스라엘 백성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 얻음을 거절하고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 했다가 실패하였다. 30-32절,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의의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율법의 행위에 의지함이라.” 죄인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10장: 신앙고백 [1절]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에 관심을 두었다. 그들은 당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고 하나님의 복음을 거절하고 있었다. 바울은 그들의 구원을 마음에 소원하며 하나님께 간구하였다. [2-3절]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의에 대한 바른 지식이 없었으나 종교적 열심은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의(義)가 참으로 보잘것없음을 알지 못하고 단지 종교적 행위의 열심으로 의(義)를 이룰 줄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의 지식 없는 열심은 종교적 형식주의나 위선에 떨어지기 쉬울 뿐 참된 의를 이루지 못하였다. 두 종류의 의(義)가 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의요 다른 하나는 사람이 자기의 행위로 이루는 의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실패의 이유는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의 의를 세우려 했기 때문이었다. 사람의 행위의 의는 심히 불완전하다. 이사야 64:6, “대저 우리는 다 부정(不淨)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오늘날도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를 모르고 자기의 행위의 의를 이루려 하고 그것을 의지하려 할 때 실패할 수밖에 없다. [4절]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의를 이루셨다. 그는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셨다’(요 19:30)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그의 대속 사역을 가리키며 그 내용은 율법의 요구를 이룬 완전한 의이다. 예수께서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해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 고린도전서 1:30,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救贖)함이 되셨으니.” 의가 없었던 죄인들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었다. [5-8절]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 누가 음부[무덤]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는 율법을 다 행함으로 이루는 의이다. 신명기 6:23, “우리가 그 명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신명기 5:33,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삶을 얻고 복을 얻어서 너희의 얻은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그러나 사람은 율법을 행함으로 의를 이루지 못한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의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한 바 되셨다가 삼일 만에 부활하시고 의를 이루셨다. 로마서 3:21-24,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로마서 4: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약 성도들에게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셨다. [9-13절]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마음으로 믿어져](원문)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입으로 고백되어](원문) 구원에 이르느니라.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구원을 얻는 믿음의 기본적인 내용은, 예수께서 주님이신 것과 그가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자는 그의 기적들, 속죄, 재림 등을 믿을 수 있다. 사람이 마음으로 주를 믿고 입으로 고백할 때 의롭다 하심과 구원을 얻는다. 구원에 있어서 신앙고백은 필수적이다. 사람의 믿음과 신앙고백은 그리스도인의 자발적 행위이지만,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이루어지는 것이다(요 6:37, 44). 또 구원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다.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11절),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12절),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13절)는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을 위해 참된 믿음과 신앙고백이 중요하다. [14-17절]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하나님의](전통사본) 18)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선택된 자들은 자동적으로 구원 얻는 것이 아니고 전도를 통하여 믿음으로 얻는다. 믿음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고 전도의 말씀을 통해 생기며 전도는 하나님께서 전도자를 파송하심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는 택자들을 전도라는 수단을 통해 구원하신다. 전도와 믿음은 하나님의 예정을 이루는 정상적이고 필수적인 방법이다. 그러므로 전도는 교회의 최대의 사명이다. 고린도전서 1: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교회는 전도자를 부르고 훈련시키고 세우고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곳에는 어디든지 파송해야 한다. 전도자의 발걸음은 귀하고 아름답다. 또 교회는 파송된 전도자를 기도와 물질로 후원해야 한다. 전도의 필요성은 말씀의 필요성이다. 전도는 말씀 전파이다. 믿음은 복음의 말씀의 바른 지식을 통해 생기기 때문이다. [18-21절]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그렇지 아니하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뇨? 먼저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 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하였고 또한 이사야가 매우 담대하여 이르되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하였고 이스라엘을 대하여 가라사대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셨느니라. 바울은 신명기와 이사야서를 인용하였다. 신명기 32:21,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자로 나의 질투를 일으키며 그들의 허무한 것으로 나의 진노를 격발하였으니 나도 백성이 되지 아니한 자로 그들의 시기가 나게 하며 우준한 민족으로 그들의 분노를 격발하리로다.” 이사야 65:1,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게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하나님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먼저 전파되었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돌아오기를 오랫동안 기다리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그 말씀에 순종치 않고 그 말씀을 거슬러 행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고 그 죄를 뉘우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던 이방인들을 불러 옛 백성 이스라엘로 하여금 시기 나게 하실 것이다.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의 의를 이루셨다. 유대인들은 행위의 의를 고집하다가 실패했으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을 믿음으로 의를 얻었다. 이것은 구약성경에 예언된 바이었다. 예레미야 23:5,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다니엘 9:24,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우리는 믿음으로 의를 얻었고 이제 그 의 안에서 의를 행해야 한다. 둘째로, 사람은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마음으로 그의 죽음과 부활을 믿으면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얻는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그 가족들과 함께 구원을 얻는다(행 16:31). 에베소서 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셋째로, 사람은 전도자의 전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는다. 보냄을 받아야 전할 수 있고 전하는 자가 있어야 복음을 들을 수 있고 복음을 들어야 복음을 믿을 수 있고 믿어야 구원 얻을 수 있다(14, 15절). 17절,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마가복음 16:15-16,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힘써 전도해야 한다. 11장: 하나님의 구원 계획 [1-6절]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저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송사하되 주여, 저희가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7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 [그러나 만일 행위에서 난 것이면 더 이상 은혜가 아니니 그렇지 않으면 행위가 더 이상 행위가 아니리라](KJV, NKJV). 19)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셨다. 그들 중에 남은 자들이 있다는 사실이 그 증거다. 예수님의 처음 제자들은 유대인들이었고 바울 자신도 그러했다. 옛날에 선지자 엘리야의 시대는 배교의 시대이었다. 엘리야는 하나님께 자기 혼자만 남았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7,000명을 남겨두셨다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오늘날도 교회들이 배교한 시대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남은 종들과 교회들과 성도들이 있을 것이다. [7-12절] 그런즉 어떠하뇨?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졌느니라.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날까지 저희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신 29:4; 사 29:10). 또 다윗이 가로되 저희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옵시고 저희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저희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하였느니라(시 69:22-23).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 나게 함이니라. 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이리요. 이스라엘 백성 중 소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얻었으나, 남은 대다수는 완악하여져서 그를 거절하고 그를 믿지 않고 있었다. 이런 현상은 성경에 예언된 바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의 실패는 이방인들의 구원이 되었고 이스라엘 백성이 시기 나게 되었다.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들의 풍성한 구원이 되었다면, 장차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온 세상이 얼마나 더 충만한 구원의 복을 누리는 일이 되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실패까지도 사용하셔서 선을 이루신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의 회복을 암시했다. [13-16절]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이는 곧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케 하여 저희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저희를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서 이방인들을 구원함으로 자기 골육 이스라엘 사람들로 시기케 하여 그들 중 얼마라도 구원하기를 소원했다.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은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과 같을 것이다. 제사하는 곡식 가루의 처음 한 줌이 거룩하면 그 전체가 거룩하며, 나무의 뿌리가 거룩하면 그 가지들도 거룩하다. 이 비유는 이스라엘의 조상들과 그 후손들의 관계에 적용될 수 있고 구약교회와 신약교회의 관계에도 적용될 수 있다. 신약교회의 이방인 신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약교회인 이스라엘 백성의 거룩함에 참여하였다. [17-18절] 또한 가지 얼마가 꺾여졌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 자긍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참감람나무 같은 이스라엘 백성의 불신앙 때문에 가지들 중 다수가 꺾이었고 그 대신 돌감람나무 같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고 그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들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방인 신자들은 원나무 같은 유대인들을 향해 자랑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 [19-24절]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이운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仁慈)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仁慈)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저희도 믿지 아니하는 데 거하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얻으리니 이는 저희를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스려[거슬러]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은즉 원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얻으랴. 이방인 신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원가지들인 이스라엘 사람들도 아끼지 않고 꺾어버리셨다면 접붙임 받은 가지들인 이방인 신자들도 꺾어버리실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엄위하심을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하는 자는 하나님의 인자(仁慈) 안에 거하지만, 불신앙과 죄 가운데 행하는 자는 하나님의 엄위하신 처분이 있을 것이다. 또 이스라엘 백성은 지금 불신앙 때문에 버림을 받았지만, 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다. 구원하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다. 돌감람나무의 가지들도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거든 하물며 원가지들은 얼마나 더 잘 접붙임을 받겠는가? [25-26a절]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사도 바울이 말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비밀은 이방인들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되지만 마침내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온 이스라엘의 구원’은 이스라엘 백성의 민족적, 국가적 대회심을 가리키는 것 같다. 이스라엘 민족 전체는 아닐지라도, 이스라엘 백성의 선택된 충만한 수의 사람들이 회개하며 예수님을 믿게 될 것을 암시한다. 만일 그렇지 않고 그 말이 단순히 이방인들과 이스라엘 백성의 선택된 총수를 의미한다면 구태여 ‘비밀’이라고 표현할 것이 없을 것이다. 또한 이방인들의 충만한 수와 이스라엘 백성의 ‘더러’가 대조되고, 또 이스라엘 백성의 ‘더러’와 ‘온’ 이스라엘이 대조되는 것을 생각할 때도 ‘온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백성의 민족적, 국가적 회개를 암시한다고 본다. [26b-29절]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내가 저희 죄를 없이 할 때에 저희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사 59:20-21). 복음으로 하면 저희가 너희를 인하여 원수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을 인하여 사랑을 입은 자라.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민족적 회복은 이사야서에 예언된 바이기도 하다. 이스라엘 백성이 현재 복음을 거절함으로써 하나님의 원수가 되어 있지만, 하나님의 선택하심으로 말한다면 그들은 이제까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들로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입었었다. 이런 하나님의 선택의 사랑은 폐해진 것이 아니라고 보인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회복시키실 날이 올 수 있고 올 것이다. [30-32절] 너희가 전에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에 순종치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치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저희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긍휼로 말미암는다. 이방인들은 전에는 불순종하였으나 이스라엘 백성의 불순종으로 이제 하나님의 긍휼을 입었고, 이와 비슷하게 유대인들은 지금 불순종하고 있으나 훗날에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긍휼이 임할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이나 이스라엘 백성을 불순종 가운데 버려두심은 그들 모두에게 긍휼을 베푸시기 위함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33-36절]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 에이스 아우톤 )[주를 위함]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사도 바울은 성령의 감동으로 구원의 복음 진리를 다 해설한 후에 이제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깊고 부요하심과 그의 판단과 행하심의 깊고 측량할 수 없음을 고백한다. 피조물인 인생이 어찌 창조자를 다 이해하며 다 설명할 수 있겠는가? 실상 억만 분지 일도 못할 것이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서 계시하여 주신 만큼 하나님과 그의 구원의 일에 대하여 알며 이해하며 전하며 설명할 뿐이다. 하나님의 계시하신 그 내용은 오늘날 신구약 66권의 성경책에 기록되어 있다. 사도 바울은 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주를 위함]이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의 진리를 보인다. 세상의 모든 일은 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오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으며 마침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다. 그것은 세상의 일반적인 모든 일들에 있어서도 그러하고 특히 사람들의 구원의 일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일들을 계획하시고 처리하시며 특히 사람들의 구원의 일에 있어서 그러하시다. 이것은 웅대한 세계적, 우주적 진리이다.
본장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 은혜로 택하신 자들을 남겨두셨다. 그는 엘리야 때에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7천명을 남겨두셨다. 이스라엘 백성의 실패의 역사도 결국 하나님께서 택하신 이방인들의 구원이 되었다. 오늘날 배교의 시대에도 하나님께서 은혜로 택하신 자들이 있음이 확실하다. 교회들은 배교와 타협과 혼란 속에 있지만, 이런 교계의 풍조에 물들지 않고 순수한 옛신앙을 소유하고 옛길을 붙든 자들이 세계 곳곳에 남아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믿고 기대하며 또 우리 자신이 그런 자들이 되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모든 인류를 향하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깨달아야 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고 구원의 복음을 거절함으로써 복음은 이방 세계로 전파되었고 많은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었다. 돌감람나무의 가지들 같은 이방인들이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비밀한 구원의 계획이 증거되었다. 이방인들의 충만한 수가 들어올 때까지 이스라엘 백성의 더러는 완악할 것이나, 마침내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을 것이다(25-26절). 그것은 이스라엘의 민족적 회심을 암시하며, 여기에 온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있다. 셋째로,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에서 비롯된다. 30-32절, “너희가 전에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치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치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저희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36절,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우리가 구원 얻은 것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의 작정과 섭리로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만 믿고 의지하고 그 긍휼 안에서 의와 선을 행해야 한다. 12장: 그리스도인의 생활 1-2절, 헌신(獻身) [1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로기켄 )[합당한] 예배니라. 사도 바울은 구원 얻은 자의 생활에 대해 교훈하면서 첫째로 헌신에 대해 말한다. 헌신(獻身)은 하나님께 우리의 몸을 드리는 것을 말한다. 몸은 우리의 모든 것을 포함한다. 그것은 우리의 손과 발, 우리의 재능과 목소리와 힘, 우리의 시간과 돈, 심지어 우리의 생명까지 포함한다. 이런 것들은 다 우리의 몸과 같이 움직인다. 몸이 없으면 이런 것들도 없다. 몸을 드리는 것은 이 모든 것을 드리는 것이다. 헌신의 이유는 무엇인가?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복음은 하나님의 크신 자비와 사랑의 소식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자비와 사랑으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 우리의 모든 죄와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을 얻었다. 로마서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은혜의 선물]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몸을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크신 자비와 사랑과 은혜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6:19-20,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린도후서 5:14-15,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사도 바울은 헌신을 ‘산 제사’라고 표현하였다. 그것은 구약시대의 제사와 대조되는 말이다. 구약시대에는 짐승을 죽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자신을 십자가에 대속 제물로 주신 오늘날에는 우리가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필요할 뿐이다. 구약시대의 번제는 일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상징했으나, 또한 성도들의 온전한 헌신도 상징했다고 본다. 우리는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야 한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헌신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삶이어야 한다. 거룩한 삶이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죄를 짓지 않는 삶이다. 이런 헌신 곧 거룩한 삶을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드리는 ‘합당한 예배’라고 불렀다. 어떤 형식의 예배보다도, 하나님 앞에서의 헌신과 거룩한 삶 자체가 하나님께 드리는 가장 합당한 예배라는 뜻이다. [2절]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 누스 nou'”)[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사도 바울은 헌신자가 행해야 할 바를 몇 가지 교훈한다. 첫째로, 우리는 이 세상을 본받지 말아야 한다. 이 세상은 언제나 불경건하고 악하고 음란한 세상이다. 마태복음 12:3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마가복음 8:38,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이며 또한 세상으로부터의 구원이다. 세상은 악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오순절에 모였던 경건한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고 말했다(행 2:40). 세상 사람들의 삶의 목적과 가치관과 사고방식은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와 너무 거리가 멀다. 그러므로 성도가 하나님께 헌신하려면 이 세상을 본받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세상을 본받는다면, 우리는 결코 경건하고 거룩하고 선하게 살 수 없고 하나님께 헌신할 수 없다. 둘째로, 우리는 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야 한다. 구원은 경건하고 거룩하고 선한 방향으로의 생각의 변화이다. 그것이 중생이다. 또 ‘변화를 받으라’는 원어( 메타모르푸스데 )는 현재 명령형으로 우리의 생각의 변화가 한번에 끝나는 것이 아니고 계속 반복해서 일어나야 함을 보인다. 성도의 영적 성장 곧 성화는 생각의 성숙함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생각이 날마다 새로워져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방향으로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 에베소서 4:22-23도, “너희는 유혹의[속이는]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너희의 생각의 영으로] 새롭게 되어[계속 새롭게 되어]”라고 말한다. ‘새롭게 되어’라는 원어(현재부정사)도 계속성을 나타낸다. 우리의 구원은 생각의 변화에서 시작되고 그 생각의 변화는 한번으로 끝나지 않고 성숙해지는 것이다. 성화(聖化)는 깨달음의 성숙 과정이다. 사람의 연약성은 잘 변하지 않지만, 성도의 생각과 깨달음에는 변화가 있다. 생각의 성숙은 평생 진행될 것이다. 구원 얻기 전 우리의 생각은 이 세상 중심적이고 불경건하고 부도덕하고 정욕적이었으나, 구원 얻은 우리는 이제 우리의 생각이 새로워져서 성경에 교훈된 대로 하나님과 천국과 영생을 생각하고 경건하고 도덕적인 것만 생각하는 자들이 되었고 또 그러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라고 표현하였다. 하나님의 뜻은 그 내용이 선하며 그것을 믿고 행한 결과도 선하다. 미가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仁慈)[자비]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또 주권적 섭리자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뻐하시는 일들을 행하신다. 시편 115:3,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빈번히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뜻과 달라 우리가 이해할 수 없다. 이사야 55:8-9,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을 분별해야 하고 비록 그 뜻을 다 이해하지 못할 때에도 그 뜻에 순종해야 한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알아야 한다. 사도행전 20:27에 보면, 사도 바울은 가는 곳마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모든 뜻을 거리낌 없이 다 전하였다고 증거하였다. 하나님의 뜻은 성경에 밝히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다. 디모데후서 3:15-17,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에게 구원과 온전함을 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부분적으로 아는 것으로 만족치 말고 성경 전체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뜻을 알고 그 뜻에 순종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도의 생활에서 성경 읽기와 성경 연구는 필수적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하여 신구약 66권을 열심히 읽고 듣고 연구해야 한다. 또 우리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에 순종해야 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 헌신함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에 순종하는 것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께 헌신(獻身)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손과 발을, 우리의 재능과 목소리와 힘을, 우리의 시간과 돈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드리며, 우리의 목숨까지도 하나님의 일을 위해 바쳐야 한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자기 몸을 십자가에 내어주셨듯이 우리는 우리 몸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자비와 사랑에 보답하여 헌신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희생하셨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신을 희생하셨다. 그는 핏값으로 우리를 사셨다(행 20:28; 고전 6:20). 그의 죽음은 우리의 의가 되었고 그를 믿는 우리는 죄와 죽음과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을 얻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에 보답하여 하나님께 헌신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생각을 날마다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해야 한다. 우리는 이 악하고 음란한 세상을 본받지 말아야 한다. 특히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을 본받지 말아야 한다. 또 우리는 계속 생각의 변화, 생각의 성숙함을 가져야 한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해야 하고 그 뜻에 순종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성경 곧 신구약 66권의 책에 계시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말씀을 귀히 여기며 주야로 읽고 듣고 묵상하고 연구하며 그 모든 말씀을 다 믿고 그 모든 말씀을 다 소망하고 그 모든 말씀을 힘써 행해야 한다. 헌신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3-13절, 그리스도인의 생활 [3-5절]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소프로네인 )[바르게, 건전하게] 생각하라.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우리는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바르고 건전하게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다. 몸에 여러 지체가 있듯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 여러 직분이 있다. 각 지체는 자기 위치를 잘 지켜야 한다. 눈은 눈의 역할을, 입은 입의 역할을, 손이나 발은 손이나 발의 역할을 잘할 때 몸은 평안할 것이다. 이와 같이, 교회도 각 사람이 자기 위치를 지키며 충성할 때 평안할 것이다. 고린도전서 12:14-27, “몸은 한 지체뿐 아니요 여럿이니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뇨?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뇨?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 이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고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요구할 것이 없으니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하사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6-8절]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勸慰)하는 자면 권위(勸慰)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 하플로테스 )[단순함(KJV), 너그러움(NASB, NIV)]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은사는 각각 다르며 각 사람은 자기 직분에 충실해야 한다. 예언하는 자는 믿음의 분수대로 해야 한다. 오늘날에 설교자는 성경을 연구하고 묵상하여 거기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충실히 전해야 한다. 섬기는 자는 섬기는 일로 해야 한다. 교회 직분자들은 섬기는 자들이다. 가르치는 자는 가르치는 일에, 권위(勸慰)하는 즉 권면하고 위로하는 자는 권위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구제하는 자는 단순함과 너그러움으로 해야 한다.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해야 하고,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해야 한다. [9-10절]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선한 것을 붙들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우리는 서로 사랑하며 악을 미워하고 선한 일에 힘써야 한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다. 요한복음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고린도전서 13:6,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거짓된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우리는 거짓 없는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또 우리는 선하게 살아야 한다. 악은 남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며 선은 남에게 유익을 끼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선하게 사는 것이다. 아모스 5:15,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미가 6:8,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仁慈) [자비]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우리는 서로 사랑하며 우애하고 사이좋게 지내야 하고 서로 좋은 친구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상대방에게 약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우리를 위해 피 흘려 대속하셨기 때문에 서로 사랑해야 한다. 또 우리는 서로를 먼저 존경해야 하고 또 서로에게 복종해야 한다. 에베소서 5:2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11절]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또 우리는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아야 하고 또 열심을 품고 주를 섬겨야 한다. 우리는 부지런하게 살아야 한다. 잠언 6:6,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데살로니가후서 3:10-12,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규모 없이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만 만드는 자들이 있다 하니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종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 에베소서 5:16, “세월을 아끼라[시간을 최선용하라]. 때가 악하니라.” 직장 다니는 자나 사업하는 자는 자기의 일에, 학생들은 학교 공부에, 주부들은 음식 만드는 일이나 집안 살림의 일에 충실해야 한다. 우리는 특히 열심을 품고 주를 섬겨야 한다. 우리는 썩는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썩지 않는 양식을 위해 일해야 한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일이다(요 6:27-29). 우리는 성경 읽고 기도하는 일에 힘써야 하며, 또 지교회에 속하여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모임들에 빠지지 않고 잘 참석하고 전도와 봉사의 일들에도 참여하고 힘써야 한다. 히브리서 10:24-25,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사도행전 2:46,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12절]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우리는 소망 중에 즐거워해야 한다. 성도들의 소망은 주 예수님의 재림과 죽은 자들의 부활과 천국과 영생이다. 이것들은 성도의 기쁨과 즐거움의 이유이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소망하고 그 소망이 확실하기 때문에 기뻐할 수 있다. 또 우리는 환난 중에 참아야 한다. 우리는 세상에서 질병들, 경제적 곤란, 자연적 재난, 핍박 등 여러 가지 환난들을 당한다. 그러나 우리는 환난 중에 참아야 한다. 왜냐하면 주권자 하나님께서 그 환난을 주셨고, 하나님께서 그 환난 중에서도 우리를 지키실 것이 확실하고, 또 하나님께서 그 환난을 통해 우리의 인격을 단련시키시고 우리에게 영적 유익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도에 항상 힘써야 한다. 우리는 평안할 때 하나님께 찬송하지만, 환난 날에 기도해야 한다. 야고보서 5:13-16,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기도는 성도가 하나님과 교제하는 방법이며 하나님의 능력을 공급받는 길이다. 우리가 기도에 항상 힘쓰면 어떤 어려운 일이 와도 낙심치 않고 승리의 삶을 살 수 있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다. [13절] 성도의 쓸 것을 공급하며[성도의 필요한 것들을 함께 나누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우리는 성도의 필요한 것을 함께 나누며 손님 대접하기를 힘써야 한다. 구제는 하나님의 뜻이다. 신명기 15:7-10,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강퍅히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 요구하는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 . . 너는 반드시 그에게 구제할 것이요, 구제할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범사와 네 손으로 하는 바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우리는 어려운 교우나 이웃, 또 손님에 대해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고 후하게 대접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교회의 장로들의 자격 요건에 대해 가르치면서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을 들었다(딤전 3:2).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의 분량을 따라 바르고 건전하게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지체임을 기억하고 결코 자기 위치를 벗어난 생각을 하지 말고 자기 위치에 맞게, 겸손하게, 바르고 건전한 생각을 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 이것은 주께서 주신 새 계명이기도 하다. 사랑은 거짓이 없어야 하고 선한 행위로 나타나야 한다. 우리는 서로 우애하고 서로를 먼저 존경하고 또 피차 복종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부지런하게 살고 게으르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특히 열심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우리는 세상 일에도 게으르지 말아야 하고 각자 자기의 일에 충실해야 하지만, 특히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날마다 성경 읽고 기도하고 계명 순종하기를 힘써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아야 한다. 우리는 주 예수님의 재림과 복된 부활과 천국과 영생을 확신하고 소망하고 즐거워하며 또 이 세상에서 당하는 여러 가지 환난들을 참아야 한다. 다섯째로, 우리는 선행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우리는 가난한 성도들을 돌아보며 구제하기를 좋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다(딛 2:14). 14-21절, 선으로 악을 이기라 [14절]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성도는 자기를 핍박하고 심히 괴롭히는 자들에 대해서도 사랑으로 대하고 그들을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주 예수께서 친히 가르치신 내용이다. 마태복음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로마서 2장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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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2장 강해
로마서 2장은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고 말합니다. 율법을 행하든, 행하지 않든, 율법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모든 사람은 죄인입니다. 바울은 특별히 율법을 자랑하는 이들을 향하여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고 있으며, 율법을 자랑하면서도 순종하지 않는 그들의 거짓을 폭로합니다.
1-11절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사람들
12-16절 성문 율법과 본성의 율법
17-29절 율법이 있으나 지키지 않는 유대인
1-11절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사람들
바울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고 말합니다.
로마서 2: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1절에서 판단하는 주체는 유대인입니다. 1장과 2장 전반부를 보면 판단은 율법에 의한 판단이 분명해 보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판단이 어리석다 말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판단한 기준으로 사용하는 기준이 바로 자신을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판단하는 네가 같을 일을 행함이라’고 말함으로 결국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가 율법의 기준에 의하면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임을 밝힙니다.
로마서 2:2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바울은 한 더 잘못된 판단을 하는 이들에 대해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이른다고 말합니다.
로마서 2:3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인간의 어리석음은 잘못된 판단에서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지 않고, 자신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들을 행하고도 자신이 악을 행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합니다. 그들 스스로 ‘나는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나 있다’고 착각합니다.
로마서 2:4-5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로마서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하나님의 심판은 갑자기 임하지 않습니다. 임계점이 찰 때까지 하나님은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의 기다림은 시간을 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는 은혜의 시간입니다. 그들은 어리석게도 기회를 ‘그날에 임할 진노를 쌓’(5절)는 오류를 범합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지만 영원히 참지 않습니다.
로마서 2:6-8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하나님이 심판의 방법 또는 기준은 오직 행위에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믿음은 지식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삶의 전반적인 전인격적 삶과 연관됩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행한 대로 보응’(6절) 하심을 명백히 합니다. 선을 행하고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는 복음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이들에게 영생을 선물로 주십니다. 하지만 당을 지어 불의를 따르는 자들은 진노와 분노라 하십니다. 당을 짓는다는 표현이 한국어로도 굉장히 구어(舊語)에 속합니다. 문맥상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힘을 모으고 말을 만들어 거짓을 행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바울은 구약의 고라당을 염두에 두고 이런 표현을 사용했을 수도 있습니다.
로마서 2:9-11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
하나님의 심판은 혈육적인 것으로 판단하지 않고 오직 행위로 합니다. 바울은 악을 행한다면 먼저 유대인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것이고, 헬라인에게도 역시 동일하게 임할 것임을 경고합니다. 선을 행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상급 역시 먼저는 유대인에게 임하고 그다음은 헬라인에게 임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12-16절 성문 율법과 본성의 율법
로마서 2:12-13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하나님의 심판은 율법이 있으나 없으나 동일합니다. 율법이 범죄한 자들은 율법 없이 망하고, 율법이 있는 자들이 범죄 할 때는 그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라 율법을 행하는 자입니다. 의로움이란 행위로 결정되는 것이지 성경에 대한 지식이 아닙니다.
로마서 2:14-16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곧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적지 않은 논란이 있는 곳입니다. 바울은 비록 율법이 없는 이방이라고 할지라도 자신 안에 있는 내면의 법이 율법이 되어 고발하거나 변명하여 마음에 새긴 율법을 드러낸다고 말합니다. 성문화 된 율법이 없다 해도 내면이 율법이 있기 때문에 결국 내면의 율법이 성문화 된 율법과 다르지 않음을 말합니다.
17-29절 율법이 있으나 지키지 않는 유대인
이제 마지막으로 바울은 율법이 있다고 자랑하는 유대인들을 향해 그들의 거짓들을 폭로합니다.
로마서 2:17-20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먼저 유대인들이 자신들이 누구인지를 생각하는 부분은 그들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뜻을 알고 맹인의 길을 인도하고,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진리에 대해 안다고 생각하며,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아이의 선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율법을 의지한다는 말을 매우 역설적입니다. 율법에 대한 의지는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도무지 답이 없지만 자신들은 율법이 있다고 말합니다.
두 번째는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았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뜻을 안다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은 거짓은 아닙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계시이고, 하나님의 의지와 뜻을 드러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에게 진정한 계시를 하지 않았습니다. 참된 계시는 문자가 아니라 영을 통한 깨달음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2:21-24 21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 22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느냐 23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24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바울은 조금 격앙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율법을 자랑하면서도 지키지 않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왜 지키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결국 가르침을 받아야 할 사람은 이방인이 아니라 유대인 자신들입니다. 그들은 남은 가르치면서 자신은 가르치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도둑질하지 말라하고 도둑질했고, 간음하지 말라 말하면서도 간음을 행합니다. 우상을 가증히 여기면서 선진의 물건을 도둑질합니다. 율법을 자랑하면서 율법을 지키지 않습니다. 결국 그들은 율법을 소유했을 뿐 그 어떤 것도 행하지 않았습니다.
로마서 2:25-29 25 네가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하면 네 할례는 무할례가 되느니라 26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규례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27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율법 조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겠느냐 28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29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율법을 할례의 문제로 이어갑니다. 율법을 지키면 할례가 되지만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무할례가 된다는 것입니다. 율법보다 할례가 먼저입니다. 율법을 출애굽 이후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것이지만 할례는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있을 때부터 행한 것입니다. 할례를 행함으로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맺은 언약 안에 있음을 증표 합니다. 율법은 이미 언약 안에 있는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보다 할례가 앞섭니다.
헬라어 로마서 2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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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 아나폴로게토스 에이 오 안드로페 파스 호 크리논 엔 호 가르 크리네이스 톤 헤테론 세아우톤 카타크리네이스 타 가르 아우타 프라쎄이스 호 크리논
개역개정,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새번역,1 그러므로 남을 심판하는 사람이여, ㉠그대가 누구이든지, 죄가 없다고 변명할 수 없습니다. 그대는 남을 심판하는 일로 결국 자기를 정죄하는 셈입니다. 남을 심판하는 그대도 똑같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실제 인물이 아니라 가상의 논쟁 상대를 가리키는 말
우리말성경,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여, 그대는 변명할 수 없습니다. 그대는 남을 판단하는 그것으로 그대 스스로를 정죄하고 있습니다. 남을 판단하는 그대가 똑같은 일들을 행하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성경,1 그러므로 아, 남을 심판하는 사람이여, 그대가 누구든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남을 심판하면서 똑같은 짓을 저지르고 있으니, 남을 심판하는 바로 그것으로 자신을 단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어NIV,1 You, therefore, have no excuse, you who pass judgment on someone else, for at whatever point you judge the other, you are condemning yourself, because you who pass judgment do the same things.
영어NASB,1 Therefore you are without excuse, every man of you who passes judgment, for in that you judge another, you condemn yourself; for you who judge practice the same things.
영어MSG,1 Those people are on a dark spiral downward. But if you think that leaves you on the high ground where you can point your finger at others, think again. Every time you criticize someone, you condemn yourself. It takes one to know one. Judgmental criticism of others is a well-known way of escaping detection in your own crimes and misdemeanors.
영어NRSV,1 Therefore you have no excuse, whoever you are, when you judge others; for in passing judgment on another you condemn yourself, because you, the judge, are doing the very same things.
헬라어신약Stephanos,1 διο αναπολογητος ει ω ανθρωπε πας ο κρινων εν ω γαρ κρινεις τον ετερον σεαυτον κατακρινεις τα γαρ αυτα πρασσεις ο κρινων
라틴어Vulgate,1 propter quod inexcusabilis es o homo omnis qui iudicas in quo enim iudicas alterum te ipsum condemnas eadem enim agis qui iudicas
히브리어Modern,1 לכן אין לך התנצלות אתה בן אדם הדן תהיה מי שתהיה כי במה שתדין את חברך תחיב את נפשך באשר אתה הדן תעשה כמעשהו׃
성 경: [롬2:1]
주제1: [유대인에 대한 심판]
주제2: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
그러므로 – 전후 문맥으로 보아 이 접속사가 어떤 부분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는지 분명하지 않다. 혹자는 이 접속사가 앞에서 설명된 이방인들의 부도덕한 행위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Hendriksen). 또한 어떤 학자는 본절 전체를 1:20과 같이 삼단 논법식으로 재구성하여 다음과 같은 사상적 전개로 이해하고자 했다(J. Murray). (1) 다른 사람의 행동을 너는 판단한다. (2) 너도 똑같이 그 행동을 한다. (3) ‘그러므로’ 너는 너의 행동을 정죄하는 것이고, 너도 핑계치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유대인들은 종종 어떤 문장을 다른 주제로 전환하고자 할 때 별 의미 없이 접속사를 사용하여 주의를 환기시키는 문법 구조를 사용한다(삼하 8:1;10:1;13:1;히 4:14). 바울도 이와 같이 이방인의 죄악상을 폭로하는 주제로 전환하는 시점에서 별 의미없이 이 접속사를 사용하였다.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 ‘판단하는’의 헬라어 ‘크리논'(*)은 하나님의 ‘판단'(*, 크리마)과는 구분되는 것으로서 ‘의심한다'(눅 24:38), ‘헤아린다'(마 7:2), ‘구별하다'(마 13:30)라는 뜻으로 사용되며 본절에서는 인간이 그 이웃에 대하여 편견을 가졌다는 의미로 쓰여졌다(요 8:15;약 4:12). 한편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을 지시하는지의 문제는 의견이 분분하다. (1) 혹자는 이 부류의 사람을 스스로 남을 규탄하고 지도하며 판단하는 입장에 있다고 생각하는 ‘많은 선생'(약 3:1)이라고 주장한다(Matthew Henry). (2) 또 혹자는 ‘판단하는 사람아’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스 호 크리논'(*) 가운데 ‘파스’ (*, ‘모든’)를 강조하여 ‘남을 판단하는 모든 사람’이란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를 포함하며 판단하는 일을 습관적으로 반복하는 자들이라고 한다(J. Barmby). 그러나 본장 전체의 흐름으로 보아 본절의 이 말은 율법을 받고 자랑하면서 율법에 따라 살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을 칭하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할 것 같다. 물론 유대인이라는 구체적 표현이 나타나지는 않지만 당시 유대인들의 삶이 이웃을 판단하는 교만한 삶이었음은 사실이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가장 적합한 대상이라는 견해를 마치 이방인은 이 부류에서 제외된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은 또 다른 오해를 발생하게 할 것이다.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 바르트(Barth)는 하나님께 핑계할 수 없는 부류에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사람도 포함시킨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비록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더라도 유한한 인간이며 시간에 속한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인간은 제한되고 연약한 존재로 항상 죄악 가운데 그 영향권 아래 살아가므로 누구든지 하나님께 핑계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바르트의 주장대로라면 핑계치 못할 자의 범주에 바울 자신도 포함되므로 바울 역시 또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있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따라서 본 절은 신앙에서 떠난 유대인들을 향한 바울의 책망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Luther, Calving, Hendriksen). 유대인이 하나님의 율법을 받아 이방인보다 더욱 밝은 계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며 살았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께 핑계할 수 없는 것이다.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은 판단력이 무능해졌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의를 이룰 능력도 무력해졌다. 그렇기에 남을 판단하는 자는 자신이 자신을 정죄하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정죄함이니’로 번역된 헬라어 ‘카타크리네이스'(*)는 ‘카타'(*, ‘…에 반대하여’)와 ‘크리노'(*, ‘구별하다, 판단하다’)가 합쳐진 ‘카타크리노'(*)의 현재 직설법 2인칭 단수 동사로서 ‘세아우톤'(*, ‘너 자신을’)과 함께 쓰여 스스로를 죄있다고 판단하는 것을 의미한다. 혹자에 의하면 이 ‘정죄’는 남을 저주했을 때 분만 아니라 용서했을 때도 받게 되는데 그것은 자기 자신이 판단의 기준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Lenski).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 이 표현은 유대인들이 범하는 잘못이 이중적인 성격을 띠고 있음을 보여준다(Calvin). 즉 그들은 이방인과 똑같은 잘못을 범하고 있으면서도 뻔뻔스럽게 다른 사람의 잘못을 신랄하게 정죄하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좀더 간략하게 나타내자면 ‘어두움과 위선'(Murray)이 될 수 있겠다. 이와 같은 바울의 논리는 예수의 가르침에 근거한다(마 7:1-5;툭 6:41, 42).
오이다멘 데 호티 토 크리마 투 데우 에스틴 카타 알레데이안 에피 투스 타 토이아우타 프라쏜타스
개역개정,2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새번역,2 하나님의 심판이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공정하게 내린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우리말성경,2 우리는 그런 일을 행하는 사람에게 진리대로 하나님의 심판이 내린다는 것을 압니다.
가톨릭성경,2 우리는 그러한 짓을 저지르는 자들에게 내리는 하느님의 심판이 진리에 따른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영어NIV,2 Now we know that God’s judgment against those who do such things is based on truth.
영어NASB,2 And we know that the judgment of God rightly falls upon those who practice such things.
영어MSG,2 But God isn’t so easily diverted. He sees right through all such smoke screens and holds you to what you’ve done.
영어NRSV,2 You say, “We know that God’s judgment on those who do such things is in accordance with truth.”
헬라어신약Stephanos,2 οιδαμεν δε οτι το κριμα του θεου εστιν κατα αληθειαν επι τους τα τοιαυτα πρασσοντας
라틴어Vulgate,2 scimus enim quoniam iudicium Dei est secundum veritatem in eos qui talia agunt
히브리어Modern,2 וידענו כי משפט אלהים כפי האמת על עשי אלה׃
성 경: [롬2:2]
주제1: [유대인에 대한 심판]
주제2: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
하나님의 판단 – 여기서의 ‘판단'(*, 크리마)은 공의의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심판 또는 정죄를 의미한다(약 3:1). 사람이 스스로 하는 판단은 항상 한계가 있고 상대적이지만 하나님의 판단은 절대적인 표준이므로 모든 범죄자에 대해 심판과 정죄를 내리심이 당연하다. 이러한 하나님의 판단(심판)은 종말에 궁극적으로 이루어지는데, 어느 누구도 그의 심판에서 제외되거나 특권을 부여받지 못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진리이시므로 그의 절대적인 공의 성취하시기 때문이다(Murray).
진리대로 – 이 말에는 심판의 순결성과 외모를 취하지 않으시고 인간의 내면을 감찰하시어 판단하시는(삼상 16:7) 하나님의 절대적인 공의(Calvin, Harrison, Barmby)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우리가 아노라 – 본절에서 바울이 사용한 1인칭 복수 ‘우리’와 1:5에서의 ‘우리’는 그 지시하는 바가 각기 다르다. 즉 본절에서는 수신자와 바울 자신을 같은 공동체로 여기고 ‘우리’라고 하고 있고, 1:5에서는 복음을 전하는 바울 일행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에, 거기서는 송신자들을 의미하고 있다.
로기제 데 투토 오 안드로페 호 크리논 투스 타 토이아우타 프라쏜타스 카이 포이온 아우타 호티 쉬 에크픀세 토 크리마 투 데우
개역개정,3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새번역,3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을 심판하면서, 스스로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여, ㉣그대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을 줄로 생각합니까? / ㉣실제 인물이 아니라 가상의 논쟁 상대를 가리키는 말
우리말성경,3 그런 일을 행하는 사람을 판단하면서 똑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이여, 그대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을 줄로 생각합니까?
가톨릭성경,3 아, 그러한 짓을 저지르는 자들을 심판하면서도 스스로 같은 짓을 하는 사람이여, 그대는 하느님의 심판을 모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까?
영어NIV,3 So when you, a mere man, pass judgment on them and yet do the same things, do you think you will escape God’s judgment?
영어NASB,3 And do you suppose this, O man, when you pass judgment upon those who practice such things and do the same yourself, that you will escape the judgment of God?
영어MSG,3 You didn’t think, did you, that just by pointing your finger at others you would distract God from seeing all your misdoings and from coming down on you hard?
영어NRSV,3 Do you imagine, whoever you are, that when you judge those who do such things and yet do them yourself, you will escape the judgment of God?
헬라어신약Stephanos,3 λογιζη δε τουτο ω ανθρωπε ο κρινων τους τα τοιαυτα πρασσοντας και ποιων αυτα οτι συ εκφευξη το κριμα του θεου
라틴어Vulgate,3 existimas autem hoc o homo qui iudicas eos qui talia agunt et facis ea quia tu effugies iudicium Dei
히브리어Modern,3 ואתה בן אדם הדן את אשר פעלו כאלה ועשית כמעשיהם התחשב להמלט ממשפט האלהים׃
성 경: [롬2:3]
주제1: [유대인에 대한 심판]
주제2: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행하는 사람아 – 바르트(Barth)는 본절을 매우 실존주의적으로 해석한다. 즉 그는 판단하는 일이 어떤 체계나 사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하며, 그러한 체계나 사상에서 나오는 선행은 인간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에게 있어서 체계적인 사상은 복음의 생동력을 잃게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이성을 통해 체계적인 사상을 통합하고자 했던 헤겔(Hegel)에 정면 도전한 키에르 케고르(Kierkegaard)의 실존주의적 신앙 노선에 서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체계적인 사상을 고집하면 복음의 생명력을 상실하게 되는 것은 교회사를 통해서 입증될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는 논리와 사상의 체계에만 집착해서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극단적으로 사상의 체계를 부정해서도 안 된다. 전자의 경우는 기독교를 논리의 체계 속에 질식(窒息)시키게 하며, 후자는 신비 주의에로 흐르게 하기 때문이다. 오직 기독교는 복음의 진리를 왜곡시키지 않는 범위에서 체계를 지님과 동시에 복음의 생명력을 지녀야 참 종교로서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 예수의 가르침 중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재물 바치는 것을 빙자하여 자기 부모를 부양하고 공궤(供饋)할 책임을 회피했다(막 7:11). 이러한 그들의 행위는 종교라는 허울 아래 ‘하니님’을 이용하여 자신의 명예나 이익을 추구하고 자신의 잘못을 합리화한 행위인 것이다. 이 같은 이들은 겉모습과 말을 그럴 듯 하지만 속마음은 이미 부패해서 회칠한 무덤(23:27, 28)과도 같이 양면성을 갖고 있었다. 이와 같은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의 공의로운 심판을 결코 피할 수 없다(고후 5:10). 설령 그 사람이 유대인 중에 유대인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정죄적 선언을 피할 수 없다. ‘피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크프세'(*)는 ‘사라지다’ 또는 ‘도망가 안전한 곳을 찾다'(행 19:6)라는 뜻이 있고, ‘에크퓨고'(*)의 미래중간태이다. 죄인이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숨을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시 139:8;벧전 3:12).
에 투 플루투 테스 크레스토테토스 아우투 카이 테스 아노케스 카이 테스 마크로뒤미아스 카타프로네이스 아그노온 호티 토 크레스톤 투 데우 에이스 메타노이안 세 아게이
개역개정,4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새번역,4 아니면, 하나님께서 인자하심을 베푸셔서 ㉤그대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신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풍성하신 인자하심과 너그러우심과 오래 참으심을 업신여기는 것입니까? / ㉤실제 인물이 아니라 가상의 논쟁 상대를 가리키는 말
우리말성경,4 아니면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그대를 회개로 이끄시는 것을 알지 못하고 그분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오래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합니까?
가톨릭성경,4 아니면, 하느님의 그 큰 호의와 관용과 인내를 업신여기는 것입니까? 그분의 호의가 그대를 회개로 이끌려 한다는 것을 모릅니까?
영어NIV,4 Or do you show contempt for the riches of his kindness, tolerance and patience, not realizing that God’s kindness leads you toward repentance?
영어NASB,4 Or do you think lightly of the riches of His kindness and forbearance and patience, not knowing that the kindness of God leads you to repentance?
영어MSG,4 Or did you think that because he’s such a nice God, he’d let you off the hook? Better think this one through from the beginning. God is kind, but he’s not soft. In kindness he takes us firmly by the hand and leads us into a radical life-change.
영어NRSV,4 Or do you despise the riches of his kindness and forbearance and patience? Do you not realize that God’s kindness is meant to lead you to repentance?
헬라어신약Stephanos,4 η του πλουτου της χρηστοτητος αυτου και της ανοχης και της μακροθυμιας καταφρονεις αγνοων οτι το χρηστον του θεου εις μετανοιαν σε αγει
라틴어Vulgate,4 an divitias bonitatis eius et patientiae et longanimitatis contemnis ignorans quoniam benignitas Dei ad paenitentiam te adducit
히브리어Modern,4 או התבוז לעתרת טובו ולחמלתו ולארך רוחו ולא תתבונן כי טובת האלהים תדריך אתך לתשובה׃
성 경: [롬2:4]
주제1: [유대인에 대한 심판]
주제2: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멸시하느뇨 – ‘인도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게이'(*)는 현재 직설법 3인칭 동사로서, 하나님의 지속적이고 적극적인 행동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 이방의 우상숭배와 부도덕, 그리고 남을 판단하는 어떤 자들의 교만을 지켜보심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방향을 전환하여 마음과 태도를 바꾸기를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속성, 곧 ‘인자하심’ 때문이다. 본절에서 ‘인자하심’은 거듭 사용되어 중요한 사상임을 보여 준다. 본 구절의 ‘인자하심’ (*, 크레스토테토스)은 하반절의 ‘인자하심'(*, 크레스톤)과 의미상 별차이는 없지만 특히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미하며(11:22), 보다 포괄적이고 근본적인 뜻을 갖는다. 이는 또한 부모가 자녀를 대하는 것과 같은 성품을 시사한다(마 7:9-11). 그러나 유대인들을 포함한 모든 죄인들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이용하여 오히려 자기의 의를 자랑할 뿐더러 그의 오래 참으심을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수단으로 생각했다. 더 나아가 인생들은 악한 일을 행함에도 속히 징벌을 행하시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너그러움을 이용하여 악을 행하기에 담대하였다(전 8:11). 본절에서 이와 같은 죄인의 태도는 ‘하나님을 멸시하는'(*, 카타프로네이스) 것이라고 지적된다. 유대인의 교만과 이방인의 부도덕은 같은 죄악으로서 하나님을 깔보거나 업신여기는 방자한 행동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풍성함을 멸시하는 죄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죄인들 가운데 나타나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켰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며 동시에 복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이 복음이 바로 죄인들에게 주어졌다(1:16).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기에 죄를 범할지라도 그 죄에 따라 공의의 심판을 받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든지, 아니면 자기들이 죄를 범해도 하나님께서 즉각적으로 심판을 내리시지 않기에 자기들의 행위가 하나님의 뜻에 별로 어긋나지 않는 것으로 착각했을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잘못에 대해 하나님께서 심판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을 무시해 버렸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해서도 소홀히 여겼다는 말이 된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완악한 심령에 대하여 바울은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5절)이라고 표현했다. 한편 본절의 ‘용납하심'(*, 아노케)은 잠시 쉬는 것을 의미하며 ‘자제'(self-restrain)의 개념을 지닌다. 본절에서는 ‘너그러움’을 뜻하며 구체적으로 ‘징벌의 지연’을 뜻한다. 또한 ‘길이 참으심'(*, 마크로뒤미아)은 ‘어떤 충격에도 곧바로 반응하지 않음’을 뜻한다. 이 두 단어는 ‘인자하심'(*, 크레스톤)과 합해져서 심판을 연기하여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벧후 3:15) 하나님의 성품을 시사한다(Harrison).
카타 데 텐 스클레로테타 쉬 카이 아메타노에톤 카르디안 데사우리제이스 세아우토 오르겐 엔 헤메라 오르게스 카이 아포칼륖세오스 디카이오크리시아스 투 데우
개역개정,5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새번역,5 ㉥그대는 완고하여 회개할 마음이 없으니,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이 나타날 진노의 날에 자기가 받을 진노를 스스로 쌓아 올리고 있는 것입니다. / ㉥실제 인물이 아니라 가상의 논쟁 상대를 가리키는 말
우리말성경,5 그대의 고집과 회개하지 않는 마음 때문에 그대는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 나타날 그날에 그대에게 임할 진노를 쌓고 있습니다.
가톨릭성경,5 그대는 회개할 줄 모르는 완고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의로운 재판이 이루어지는 진노와 계시의 날에 그대에게 쏟아질 진노를 쌓고 있습니다.
영어NIV,5 But because of your stubbornness and your unrepentant heart, you are storing up wrath against yourself for the day of God’s wrath, when his righteous judgment will be revealed.
영어NASB,5 But because of your stubbornness and unrepentant heart you are storing up wrath for yourself in the day of wrath and revelation of the righteous judgment of God,
영어MSG,5 You’re not getting by with anything. Every refusal and avoidance of God adds fuel to the fire. The day is coming when it’s going to blaze hot and high, God’s fiery and righteous judgment.
영어NRSV,5 But by your hard and impenitent heart you are storing up wrath for yourself on the day of wrath, when God’s righteous judgment will be revealed.
헬라어신약Stephanos,5 κατα δε την σκληροτητα σου και αμετανοητον καρδιαν θησαυριζεις σεαυτω οργην εν ημερα οργης και αποκαλυψεως δικαιοκρισιας του θεου
라틴어Vulgate,5 secundum duritiam autem tuam et inpaenitens cor thesaurizas tibi iram in die irae et revelationis iusti iudicii Dei
히브리어Modern,5 ובקשי לבבך הממאן לשוב תצבר לך עברה אל יום עברת האלהים ועת הגלות צדקת משפטו׃
성 경: [롬2:5]
주제1: [유대인에 대한 심판]
주제2: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 – 인간이 갖고 있는 완고함이나 회개치 않는 마음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상반된 대조를 보인다. ‘회개치 아니한’의 헬라어 ‘아메타노에톤'(*)은 하나님의 권고적인 회개를 뜻하는 ‘메타노이안'(*)과 부정접두사 ‘아'(*)의 합성어이다. 이는 하나님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개조되거나 변화되지 않는 마음을 뜻하며, 동시에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거부하는 반항적인 의미를 내포한다. 이러한 반항은 빛에 대한 거부로서 온순하고 순종적인 마음을 잊어 버린 완고한 행동이다. 또한 ‘고집’에 해당되는 헬라어 ‘스클레로테타'(*)는 ‘완악’, ‘완고’ 또는 ‘잔인’을 뜻하는 ‘스클레로테스'(*)의 목적격으로서 영적으로 경화(硬化)되거나 딱딱하게 굳어버린 상태를 의미한다. 이들 두 단어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경고와 함께 자주 사용되었으며(신 9:27) 본절에서는 서로 연결되어 서로의 의미를 보다 선명하게 밝혀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죄인은 자기의 고집과 회개치 아니하는 마음으로 인하여 스스로 하나님의 진노를 쌓고 있는 것이다.
그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 ‘진노의 날’을 A.D. 70년 예루살렘이 로마의 티투스(Titus) 장군에 의해 포위되어 함락되던 것과 반드시 연관지을 필요는 없다. 1절에서 본절까지의 내용이 하나님을 거역한 유대 민족 전체에 대한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으나, 6절부터는 개인의 행위에 따른 심판이 분명하게 언급되고 있다. 따라서 본절은 민족적인 심판에 대한 언급이라기보다는 개인의 행위에 대하여 보응하는 마지막 심판으로 이해해야 한다(Luther, Calvin, Hendriksen, Harrison). 한편 ‘그 날'(*, 헤 헤메라)은 종말론적인 용어로서 ‘주의 날'(*, 헤 헤메라 퀴리우). 곧 심판의 날을 가리킨다(고전 3:13;살전 5:4). 16절에 언급 된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은 구체적으로 마지막 심판 날을 가리키므로 본절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호스 아포도세이 헤카스토 카타 타 에르가 아우투
개역개정,6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새번역,6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가 한 대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 ㉦시 62:12; 잠 24:12
우리말성경,6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의 행위에 따라 갚아 주실 것입니다. 시62:12;잠24:12
가톨릭성경,6 하느님께서는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실 것입니다.
영어NIV,6 God “will give to each person according to what he has done.”
영어NASB,6 who WILL RENDER TO EVERY MAN ACCORDING TO HIS DEEDS:
영어MSG,6 Make no mistake: In the end you get what’s coming to you–
영어NRSV,6 For he will repay according to each one’s deeds:
헬라어신약Stephanos,6 ος αποδωσει εκαστω κατα τα εργα αυτου
라틴어Vulgate,6 qui reddet unicuique secundum opera eius
히브리어Modern,6 אשר ישלם לאיש כמעשהו׃
성 경: [롬2:6]
주제1: [유대인에 대한 심판]
주제2: [행위에 따른 심판]
그 행한대로 – 심판의 기준이 되는 ‘행함’은 단순히 겉으로 드러난 행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생각하는 바까지도 포함한다(시 139:1-4). 본절에서의 ‘행함’은 특히 인간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었으며 또한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어떤 사람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지 않은 상태에서 많은 선을 베풀었을지라도 그의 선행이 아무 쓸모없는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이 하나님과 관련을 맺었으나 그 믿음에 따른 행위가 없으면 그는 구원을 얻을지라도 상급은 없다. 그러므로 본절은 인간이 하나님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서부터 시작하여 모든 행위에 그 보응을 받게 된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보응하시되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도세이'(*)는 ‘아포디도미'(*) 의 미래 직설법으로 좋거나 나쁜 의미의 모든 보상을 뜻한다. 따라서 본 구절에 의하면 믿는 자에게는 선한 상급이 주어지겠지만, 불신자는 그 형편에 따라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고후 5:10). 그리고 그러한 심판은 누구도 예외가 있을 수 없는 공정한 것이다.
토이스 멘 칻 휘포모넨 에르구 아가두 돜산 카이 티멘 카이 아프다르시안 제투신 조엔 아이오니온
개역개정,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새번역,7 참으면서 선한 일을 하여 영광과 존귀와 불멸의 것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우리말성경,7 참고 선을 행해 영광과 존귀와 불멸을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영생을 주시나
가톨릭성경,7 꾸준히 선행을 하면서 영광과 명예와 불멸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영어NIV,7 To those who by persistence in doing good seek glory, honor and immortality, he will give eternal life.
영어NASB,7 to those who by perseverance in doing good seek for glory and honor and immortality, eternal life;
영어MSG,7 Real Life for those who work on God’s side,
영어NRSV,7 to those who by patiently doing good seek for glory and honor and immortality, he will give eternal life;
헬라어신약Stephanos,7 τοις μεν καθ υπομονην εργου αγαθου δοξαν και τιμην και αφθαρσιαν ζητουσιν ζωην αιωνιον
라틴어Vulgate,7 his quidem qui secundum patientiam boni operis gloriam et honorem et incorruptionem quaerentibus vitam aeternam
히브리어Modern,7 למתמידים בעשות הטוב ומבקשים את הכבוד וההדר ואת אשר איננו עבד יתן את חיי העולמים׃
성 경: [롬2:7]
주제1: [유대인에 대한 심판]
주제2: [행위에 따른 심판]
참고 선을 행하여 – 본문을 보면 바울이 6절에서 언급했던 ‘행위’가 단순히 율법적인 차원의 것만을 의미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참고 선을 행한다’는 것은 성도가 영광의 면류관을 향해 끊임없이 달음박질 해나가는 것(빌 3:12-14)으로 이해되는데 이는 이신 칭의의 가르침과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마 24:13;골 1:23;히 3:14;계 2:10). 성경에서 말하는 ‘선’은 율법이 요구하는 것 이상이며 오직 하나님을 믿는 성도만 그 믿음에 따라 하나님과 이웃에게 ‘선’을 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예수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와(눅 10:25-37), 포도나무 비유(요 15;1-14)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성도의 선행이란 예수를 떠나서는 있을 수 없으며 오직 그와 연합된 가운데서 비롯될 수 있다. 즉 그리스도와 연합한 삶이 성령을 따라 사는 것이며(갈 5:16-18;6:8), 그렇게 될 때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 가운데 선이 나온다(갈 5:22, 23). 그리고 이 열매는 낙심하지 않고 참고 인내하며 행할 때 거두게 된다(갈 6:9).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 – 이것들의 본질은 영생이며, 그것들이 나타나는 장소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즉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생을 누리며 사는 성도에게 주어지는 특권을 이 세 가지로 표현했다. 따라서 여기서 언급된 ‘영광’은 하나님의 속성과 관련되어 나타나는 ‘영광’과는 다른 것으로서(1:23 주석 참조) 성도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게 될 때에 나타나게 될 변화를 가리킨다(J. Murray). 그리고 성도가 얻게 될 그 ‘영광’은 ‘존귀한 것’이며 결코 ‘썩지 아니하는 것’이다.
영생으로 하시고 – 영생(*, 조엔 아이오니온)은 항상 궁극적인 구원으로 표현되었다. 유대교도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을 준다는 것을 가르쳤으나 그들은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고 율법을 행함으로 생명얻기를 원했다. 그러나 율법을 행하면서 썩어질 육체의 증표(證標)를 구하는 자들에게는 영생이 허락되지 않았다(8:6). 영생은 언제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만 찾을 수 있으며(6:23) 또한 그를 믿는 자들에게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요 1:12;3:15). 한편 본절에서 영생은 6절에 기록된 ‘하나님의 보응’의 목적격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8절의 ‘노와 분’이라는 말과 대조를 이룬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게는 심판이라는 개념보다 생명이라는 개념이 더 중요하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부터 승리하시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후 그를 따르는 모든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과 영생을 소망하며 다시 오실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보는 삶을 보장받고 있기 때문이다.
토이스 데 엨스 에리데이아스 카이 아페이두시 테 알레데이아 페이도메노이스 데 테 아디키아 오르게 카이 뒤모스
개역개정,8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새번역,8 이기심에 사로잡혀서 진리를 거스르고 불의를 따르는 사람에게는 진노와 분노를 쏟으실 것입니다.
우리말성경,8 자기 이익만 추구하고 진리에 순종하지 않고 불의를 따르는 사람에게는 진노와 분노를 내리실 것입니다.
가톨릭성경,8 그러나 이기심에 사로잡혀 진리를 거스르고 불의를 따르는 자들에게는 진노와 격분이 쏟아집니다.
영어NIV,8 But for those who are self-seeking and who reject the truth and follow evil, there will be wrath and anger.
영어NASB,8 but to those who are selfishly ambitious and do not obey the truth, but obey unrighteousness, wrath and indignation.
영어MSG,8 but to those who insist on getting their own way and take the path of least resistance, Fire!
영어NRSV,8 while for those who are self-seeking and who obey not the truth but wickedness, there will be wrath and fury.
헬라어신약Stephanos,8 τοις δε εξ εριθειας και απειθουσιν μεν τη αληθεια πειθομενοις δε τη αδικια θυμος και οργη
라틴어Vulgate,8 his autem qui ex contentione et qui non adquiescunt veritati credunt autem iniquitati ira et indignatio
히브리어Modern,8 ועל בני המרי ואשר לא ישמעו לאמת כי אם לעולה שמעו חרון אף וחמה׃
성 경: [롬2:8]
주제1: [유대인에 대한 심판]
주제2: [행위에 따른 심판]
당을 지어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토이스 여스 에리데이아스'(*)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구절이다. 왜냐하면 ‘에리데이아'(*)가 ‘보수(報酬)에 얽매인 고용인’이라는 뜻을 가진 헬라어 ‘에리도스'(*)에서 파생되었다면, 본절은 ‘이기적인 욕망이나 야망을 가진 자들에게’라고 번역될 수 있고, ‘다툼’이나 ‘논쟁’의 의미를 가진 헬라어 ‘에리스'(*)에서 나왔다면, ‘논쟁하는 자들에게’로 번역될 수 있기 때문이다. 빌 1:16에서의 ‘에리데이아'(*)는 분명히 ‘에리스'(*)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빌 2:3에서는 ‘다툼’이라는 의미보다는 오히려 ‘이기적인 욕망’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외 갈 5:20이나 약 3:14 등에서는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내포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본절은 단순히 ‘당을 지어’로 번역되면 바울이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가 분명히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것은 두 가지 의미를 모두 합쳐서 ‘이기적인 욕망을 따라 논쟁에 가담하는 자들’로 이해하는 편이 좋다. 즉 진리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없어 어떤 분쟁이 일어나면 항상 쉽게 발뺌할 수 있거나 이익이 되는 편에서는 자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은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 민중들 사이에서 나타나던 공통된 특징이었다.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 – 진리와 의는 상호 보충적인 관계로 쓰여진(엡 4;24) 반면 진리와 불의는 상반적인 관계로 쓰여졌다(1:18;고전 13:6;살후 2:12). 진리로 자기들의 생활을 다스리지 않고(1:21) 강퍅하게 회개치 않는 마음으로 자기의 의를 좇는 자는 결국 불의에 순종하는 자로 나타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진리와 불의의 두 주인을 섬길 수 없기 때문이다. 진리에 대한 불순종은 불의에 순종하는 것이며 또한 붕의에 순종하는 것은 궁극적인 영원한 의를 포기하는 행위이기에 그들에게 주어질 것이라고는 하나님의 분노 외에 아무것도 없다. 그들에게 주어지는 분노는 불신앙에 따른 적극적인 불순종에 대하여 발생하는 것이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하시려는 궁극적인 구원을 거부하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보응은 더욱 가증될 것이다. 바울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라고 같은 말을 반복한 것도 그들에게 임할 진노의 강도를 보다 명백하게 나타내고자 한 것이라고 할수 있다.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 ‘노’에 해당하는 헬라어 ‘뒤모스'(*)는 보통 ‘분노’로 번역되지만 ‘진노'(*, 오르게)와 특별한 구별 없이 사용될 수 있다. 바울이 유사한 의미를 가진 두 단어를 같이 사용한 것은 일종의 중복어법으로 하나님께서 불순종하는 자들에 대하여 무시무시한 진노로 보응하시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들맆시스 카이 스테노코리아 에피 파산 프시켄 안드로푸 투 카테르가조메누 토 카콘 이우다이우 테 프로톤 카이 헬레노스
개역개정,9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새번역,9 악한 일을 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먼저 유대 사람을 비롯하여 그리스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환난과 고통을 주실 것이요,
우리말성경,9 악을 행하는 모든 사람의 영혼에 환난과 고통이 있을 것입니다. 먼저는 유대 사람에게 있을 것이며 다음으로는 그리스 사람에게 있을 것입니다.
가톨릭성경,9 먼저 유다인이 그리고 그리스인까지,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환난과 고통을 겪을 것입니다.
영어NIV,9 There will be trouble and distress for every human being who does evil: first for the Jew, then for the Gentile;
영어NASB,9 There will be tribulation and distress for every soul of man who does evil, of the Jew first and also of the Greek,
영어MSG,9 If you go against the grain, you get splinters, regardless of which neighborhood you’re from, what your parents taught you, what schools you attended.
영어NRSV,9 There will be anguish and distress for everyone who does evil, the Jew first and also the Greek,
헬라어신약Stephanos,9 θλιψις και στενοχωρια επι πασαν ψυχην ανθρωπου του κατεργαζομενου το κακον ιουδαιου τε πρωτον και ελληνος
라틴어Vulgate,9 tribulatio et angustia in omnem animam hominis operantis malum Iudaei primum et Graeci
히브리어Modern,9 צרה ומצוקה על כל נפש אדם עשה הרע על היהודי בראשונה וכן גם על היוני׃
성 경: [롬2:9]
주제1: [유대인에 대한 심판]
주제2: [행위에 따른 심판]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 ‘각 사람의 영'(*, 파산 프쉬켄 안드로푸)이라는 표현은 사람의 영혼과 육체 중 ‘영혼’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바울은 ‘영’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쉬케'(*)를 ‘사람’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하기 때문이다(13:1;행 2:41, 43). 또한 전후 문맥상 ‘사람’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 고데(Godet)의 견해에 따르면 9절과 10절의 구성은 7절과 8절의 대조적 구성을 거꾸로 재배열 시킨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볼 때 ‘각 사람’이라는 말과 ‘각 사람의 영’이라는 말은 동일한 의미로서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 따라서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이라는 표현 역시 악의 계획을 추진하는 사람들에게 임할 보응의 보편성(6절)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은 선을 행하는 각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 행한대로 하나님의 판단을 받게 된다.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 8절에 언급된 ‘노와 분’이 심판자이신 하나님 편에 속한 것이라면 본절의 ‘환난과 곤고’는 하나님이 발하신 ‘노와 분’으로 인하여 약한 자에게 내려지는 결과이다. 그리고 이 두 단어는 선을 행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상급인 ‘영광과 존귀와 평강’과 반대되는 것이기도 하다. 혹자는 ‘환난’은 외적인 것으로 ‘곤고’는 내적인 것으로 설명한다(Hendriksen).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 본 구절은 다음 10절에서도 반복된다. 구원이나 은혜와 마찬가지로 심판과 형벌에 있어서도 유대인이 우선적이다. 언약과 약속에 따른 복이 유대인들에게 먼저 주어졌듯이 그 복을 거절한 데에 대한 형벌도 유대인들에게 우선적으로 적용된다. 왜냐하면 우선적인 특권을 부여한 자에게 거기에 상응하는 책임을 묻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이기 때문이다(시 50:3-6;눅 12:47, 48;벧전 4:17). 한편 본절에 언급된 ‘헬라인’은 모든 이방인을 대표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돜사 데 카이 티메 카이 에이레네 판티 토 에르가조메노 토 아가돈 유다이오 테 프로톤 카이 헬레니
개역개정,10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
새번역,10 선한 일을 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먼저 유대 사람을 비롯하여 그리스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영광과 존귀와 평강을 내리실 것입니다.
우리말성경,10 그러나 선을 행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을 것입니다. 먼저는 유대 사람에게 있을 것이며 다음으로는 그리스 사람에게 있을 것입니다.
가톨릭성경,10 먼저 유다인에게 그리고 그리스인에게까지, 선을 행하는 모든 이에게는 영광과 명예와 평화가 내릴 것입니다.
영어NIV,10 but glory, honor and peace for everyone who does good: first for the Jew, then for the Gentile.
영어NASB,10 but glory and honor and peace to every man who does good, to the Jew first and also to the Greek.
영어MSG,10 But if you embrace the way God does things, there are wonderful payoffs, again without regard to where you are from or how you were brought up.
영어NRSV,10 but glory and honor and peace for everyone who does good, the Jew first and also the Greek.
헬라어신약Stephanos,10 δοξα δε και τιμη και ειρηνη παντι τω εργαζομενω το αγαθον ιουδαιω τε πρωτον και ελληνι
라틴어Vulgate,10 gloria autem et honor et pax omni operanti bonum Iudaeo primum et Graeco
히브리어Modern,10 וכבוד והדר ושלום לכל עשה הטוב ליהודי בראשונה וכן גם ליוני׃
성 경: [롬2:10]
주제1: [유대인에 대한 심판]
주제2: [행위에 따른 심판]
영광과 존귀와 평강 – 7절에서도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이 나왔으나 본절에서는 ‘썩지 아니함’ 대신 ‘평강’이 언급되었다 혹자는 이것을 ‘하나님과의 화목'(5:1)으로 이해하기도 하며(Black, Murray), 또다른 학자는 보다 넓은 의미로 해석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의 모든 축복 속에서 새롭게 변화된 영혼과 육체로 영원히 즐거워하며 충만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구원’이라고 설명한다(Hendriksen). 어떤 의미이든 바울은 악한 자에게 형벌로 내리시는 ‘환난과 곤고'(9절)에 대조를 이루는 용어로서 ‘평강’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그 결과가 상반되는 것을 보여준다
우 가르 에스틴 프로소폴렘프시아 파라 토 데오
개역개정,11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
새번역,11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함이 없이 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말성경,11 이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편애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성경,11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영어NIV,11 For God does not show favoritism.
영어NASB,11 For there is no partiality with God.
영어MSG,11 Being a Jew won’t give you an automatic stamp of approval. God pays no attention to what others say (or what you think) about you. He makes up his own mind.
영어NRSV,11 For God shows no partiality.
헬라어신약Stephanos,11 ου γαρ εστιν προσωποληψια παρα τω θεω
라틴어Vulgate,11 non est enim personarum acceptio apud Deum
히브리어Modern,11 כי אין משא פנים עם האלהים׃
성 경: [롬2:11]
주제1: [유대인에 대한 심판]
주제2: [행위에 따른 심판]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 – 본절은 앞 부분(1-10절)과 그 다음에 이어지는 부분(12-29절)을 이어주는 다리의 역할을 하는데, 문자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불공평도 없으시다’, 또는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편애도 없으시다’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심판은 편파적(偏頗的)인 것이 될 수 없다. 이 사실은 ‘하나님의의로우신 판단’이라는 (5절) 구절이 이미 증명한 바 있다. 하나님의 판단 기준은 특권이나 지위가 아니라 사람이 행한 일들의 성격이 어떠한 것이냐의 문제이다. ‘사람을 외모로 취한다'(*, 프로소폴렘프시아)는 개념을 히브리적 사고에서 온 것으로서 재판관의 편견이나 편애를 지시하는 의미로 쓰여졌다(삼상 16:7;대하 19:7;욥 34:19). 하나님은 편견이나 편애가 없어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외형상 유대인에게 우선권을 부여한 사실과 모순을 이루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유대인 역시 그의 행한대로 판단받으며, 오히려 그들에게 있어서는 우선권이 부여된만큼 악행에 대하여 더 큰 환난과 곤고를 당해야 한다. 유대인이기 때문에 편견과 편애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또한 특권을 주장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라도 그분의 선하신 뜻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다(마 20:15). 오직 공의로우신 그분만이 판단받는 자들의 다양한 입장을 고려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로 있다.
호소이 가르 아노모스 헤마르톤 아노모스 카이 아폴룬타이 카이 호소이 엔 노모 헤마르톤 디아 노무 크리데손타이
개역개정,12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새번역,12 율법을 모르고 범죄한 사람은 율법과 상관없이 망할 것이요, 율법을 알고 범죄한 사람은 율법을 따라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말성경,12 율법 없이 죄짓는 사람은 모두 율법 없이 멸망하고 율법 안에서 죄짓는 사람은 모두 율법대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가톨릭성경,12 율법을 모르고 죄지은 자들은 누구나 율법과 관계없이 멸망하고, 율법을 알고 죄지은 자들은 누구나 율법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영어NIV,12 All who sin apart from the law will also perish apart from the law, and all who sin under the law will be judged by the law.
영어NASB,12 For all who have sinned without the Law will also perish without the Law; and all who have sinned under the Law will be judged by the Law;
영어MSG,12 If you sin without knowing what you’re doing, God takes that into account. But if you sin knowing full well what you’re doing, that’s a different story entirely.
영어NRSV,12 All who have sinned apart from the law will also perish apart from the law, and all who have sinned under the law will be judged by the law.
헬라어신약Stephanos,12 οσοι γαρ ανομως ημαρτον ανομως και απολουνται και οσοι εν νομω ημαρτον δια νομου κριθησονται
라틴어Vulgate,12 quicumque enim sine lege peccaverunt sine lege et peribunt et quicumque in lege peccaverunt per legem iudicabuntur
히브리어Modern,12 כי כל אלה אשר חטאו בלי תורה גם בבלי תורה יאבדו ואשר חטאו בתורה גם על פי התורה ישפטו׃
성 경: [롬2:12]
주제1: [유대인에 대한 심판]
주제2: [행위에 따른 심판]
본절에서 바울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요지는 율법을 받지 못한 이방인이든지 율법을 받은 유대인이든지 누구나 자신들의 죄로 인해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순복했느냐 하지 않았느냐 하는 문제이다.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 ‘율법 없이'(*, 아노모스)라는 말은 부사로서 신약성경에서는 여기서만 사용되었다. ‘율법 없이'(*, 아노모스)의 명사형 ‘아노미아'(*)나 형용사형 ‘아노모스'(*)는 대개 ‘불법’이나 ‘범법’을 의미한다. 그러나 본절의 경우에는 ‘율법을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고전 9:21). 즉 ‘아노모스’는 14절의 ‘타 메노몬 에콘타'(*, ‘율법을 갖지 아니한’)와 같은 의미로 해석되어야 하는 바, 계약을 맺어 율법의 기준에 따라 살기로 약속한 일이 없는 자들, 곧 씌어진 율법을 받지 않은 이방인들로 이해되어야 한다(행 2:23).
율법 없이 망하고…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 바울은 율법 없이 범죄한 자들은 ‘망한다'(*, 아폴룬타이)라고 서술하고 율법 아래서 범죄한 자들은 ‘심판을 받으리라'(*, 크리데손타이)고 서술한다. 이 두 단어는 모두 수동태로서 하나님의 능동적인 보응이 있을 것을 시사한다. 율법을 받지 아니한 이방인들은 우주 만물과 양심에 나타내신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파멸된 것이며(1:20), 율법을 받은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잘 알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순종하지 않았으므로 율법의 기준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특별히 유대인들이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게 된다는 주장은 매우 중요한 사상이다. 바울은 율법을 자랑거리로 여기지 아니하고 죄인들을 정죄하거나 규제하는 수단에 불과한 것으로 정의하였다. 그러나 율법은 심판의 기준이 되는 것이고, 율법 자체가 멸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율법 아래서 범죄한 자들은 이 율법을 기준으로 심판받아 멸망에 이르게 될 것이다(J. Murray)
우 가르 호이 아크로아타이 노무 디카이오이 파라 토 데오 알 호이 포이에타이 노무 디카이오데손타이
개역개정,13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새번역,13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사람이 의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오직 율법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의롭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말성경,13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사람이 의인이 아니라 오직 율법을 행하는 사람이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것입니다.
가톨릭성경,13 율법을 듣는 이가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가 아니라, 율법을 실천하는 이라야 의롭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어NIV,13 For it is not those who hear the law who are righteous in God’s sight, but it is those who obey the law who will be declared righteous.
영어NASB,13 for not the hearers of the Law are just before God, but the doers of the Law will be justified.
영어MSG,13 Merely hearing God’s law is a waste of your time if you don’t do what he commands. Doing, not hearing, is what makes the difference with God.
영어NRSV,13 For it is not the hearers of the law who are righteous in God’s sight, but the doers of the law who will be justified.
헬라어신약Stephanos,13 ου γαρ οι ακροαται του νομου δικαιοι παρα τω θεω αλλ οι ποιηται του νομου δικαιωθησονται
라틴어Vulgate,13 non enim auditores legis iusti sunt apud Deum sed factores legis iustificabuntur
히브리어Modern,13 כי לא שמעי התורה צדיקים לפני האלהים כי אם עשי התורה הם יצדקו׃
성 경: [롬2:13]
주제1: [유대인에 대한 심판]
주제2: [행위에 따른 심판]
율법을 – 12절에서와 마찬가지로 ‘율법'(*, 노모스)은 관사가 없이 사용되었다. 공인 본문(Textus Receptus, Majority Text)에는 정관사 ‘투'(*)가 ‘노무'(*, ‘율법의’)앞에 있는데, 대부분의 고대 사본(*, A. B)에는 이 관사가 생략되어 있다. 그런데 ‘노모스'(*, ‘율법’)에 관사가 붙고 안 붙고에 따라 약간의 의미상 차이가 있다. (1) ‘노모스’ 앞에 정관사 ‘호'(*)가 붙으면, 거의 대부분 모세 율법을 의미한다. (2) ‘노모스’ 앞에 관사가 붙어 있지 않으면 대부분의 경우 모세의 율법이나 율법의 특정한 조문(條文)을 의미하기 보다는 보다 포괄적인 의미로서 추상적인 법 개념을 의미한다. 즉 인간의 양심 속에 주어진 법이나, 자연적 계시 속에 나타난 법이나 어떤 순종을 요구하는 일반적인 개념의 법을 가리킨다. (3) 특수한 경우로서 관사가 생략되어 있으나 모세 율법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하는 경우이다. 이는 헬라어 문법상 이미 알려진 어떤 확실한 개념을 보다 선명하게 나타내거나 그 단어의 본래적 개념을 강조하고나 할 때 관사를 생략하는 용법으로서 율법의 특수한 의미를 강조하고자 하는 의도로 쓰인 경우가 있다. 만약 본절을 관사없는 사본을 따라 해석한다 하더라도 ‘율법’은 12절의 ‘율법’과 같은 것으로서 모세의 율법을 뜻하는 특수한 경우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J. Murray).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 유대인들은 율법을 받았을 뿐 아니라 익히 배우고 들어서 잘 알게 되었다. 이것은 그들의 자랑거리다. 그렇지만 이 지식은 그들을 심판에서 제외시킬 수 있는 힘이 될 수 없다. 율법을 들었으면 행해야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율법이 의의 법칙일지라도 그것을 행하는 사람만이 그것으로 인해 살리라고 가르친다(레 18:5;신 4:1). 그러나 본절은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원리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범죄할 수밖에 없는 죄인(3:23)이라는 사실을 부각시키기 위해 이 논리를 전개하고 있을 뿐이다.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 본서에서 ‘의롭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카이오데손타이'(*)가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단지 자신들이 율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의롭게 되리라고 생각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문제가 달랐다(J. Murray). 글자 그대로 보면 ‘의롭게 된다’는 것이 율법을 행하는 자에게 해당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보다 근본적인 기준과 목적은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 속에서 찾을 수 있다. 바울은 행함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보시는 판단에 의하여 칭의가 결정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호탄 가르 에드네 타 메 노몬 에콘타 퓌세이 타 투 노무 포이오신 후토이 노몬 메 에콘테스 헤아우토이스 에이신 노모스
개역개정,14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새번역,14 율법을 가지지 않은 이방 사람이, 사람의 본성을 따라 율법이 명하는 바를 행하면, 그들은 율법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자기 자신이 자기에게 율법입니다.
우리말성경,14 율법이 없는 이방 사람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한다면 비록 그에게는 율법이 없을지라도 자기 자신이 자기에게 율법이 됩니다.
가톨릭성경,14 다른 민족들이 율법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도 본성에 따라 율법에서 요구하는 것을 실천하면, 율법을 가지고 있지 않은 그들이 자신들에게는 율법이 됩니다.
영어NIV,14 (Indeed, when Gentiles, who do not have the law, do by nature things required by the law, they are a law for themselves, even though they do not have the law,
영어NASB,14 For when Gentiles who do not have the Law do instinctively the things of the Law, these, not having the Law, are a law to themselves,
영어MSG,14 When outsiders who have never heard of God’s law follow it more or less by instinct, they confirm its truth by their obedience.
영어NRSV,14 When Gentiles, who do not possess the law, do instinctively what the law requires, these, though not having the law, are a law to themselves.
헬라어신약Stephanos,14 οταν γαρ εθνη τα μη νομον εχοντα φυσει τα του νομου ποιη ουτοι νομον μη εχοντες εαυτοις εισιν νομος
라틴어Vulgate,14 cum enim gentes quae legem non habent naturaliter quae legis sunt faciunt eiusmodi legem non habentes ipsi sibi sunt lex
히브리어Modern,14 כי הגוים אשר אין להם תורה בעשותם כדברי התורה מאליהם גם באין תורה הם תורה לנפשם׃
성 경: [롬2:14]
주제1: [유대인에 대한 심판]
주제2: [행위에 따른 심판]
이방인이 본성으로 –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본성(nature)을 따라 부분적으로 행할 수 있을지 모르나 완전히 행할 수는 없으므로 이방인 역시 죄인일 수밖에 없다. 간혹 이방인도 율법의 행위를 수행하면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논리를 펴는 자들이 있으니 이들은 바울이 전개하는 논리의 흐름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 자들이다. 비록 본절이나 앞절(13절)에서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을 만족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표현하였지만 계속되는 바울의 논리는 어느 누구도 율법의 요구대로 완전히 순종할 수 없기에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3:9, 19). 무엇보다도 본절은 율법을 받았다고 자랑하는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받은 것 자체가 아무런 의미도 없음을 보여 주고 있으며, 이방인들도 양심의 법칙을 따라 율법이 요구하는 바 행위를 할 때가 있음을 가르침으로써 유대인들이 저지르는 어리석음을 경고하고 있다.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 인간은 그 본성에 심어진 양심과 생각 때문에 스스로 하나님의 율법에 직면하게 된다(J. Murray). 즉 인간들의 본성 속에 존재하는 도덕적 성향은 하나님의 일반적 계시에 의하여 생긴 것으로서 명령하거나 금지하는 양심의 소리를 수반한다(Murray). 이방인들은 유대인의 율법과 동일하지는 않지만, 그들은 본래적인 양심의 법을 따라 일반 계시의 도움을 받아서 하나님의 계시를 유비적(類比的)으로 받는다. 그러나 그들의 율법은 궁극적인 구원을 보장하지 않는다. 이방인이 갖는 양심의 법은 간혹 모세 율법과 비슷한 법과 규례를 가질 수 있으나, 율법의 궁극적인 의미에는 전혀 도달할 수 없다.
호이티네스 엔데잌뉜타이 토 에르곤 투 노무 그랖톤 엔 타이스 카르디아이스 아우톤 쉼마르튀루세스 아우톤 테스 쉬네이데세오스 카이 메탘쉬 알렐론 톤 로기스몬 카테고룬톤 에 카이 아폴로구메논
개역개정,15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새번역,15 그런 사람은, 율법이 요구하는 일이 자기의 마음에 적혀 있음을 드러내 보입니다. 그들의 양심도 이 사실을 증언합니다. 그들의 생각들이 서로 고발하기도 하고, 변호하기도 합니다.
우리말성경,15 이런 사람은 율법의 요구가 자기 마음에 기록돼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들의 양심도 이것을 증거합니다. 그들의 생각이 서로 고발하기도 하고 변호하기도 합니다.
가톨릭성경,15 그들의 양심이 증언하고 그들의 엇갈리는 생각들이 서로 고발하기도 하고 변호하기도 하면서, 그들은 율법에서 요구하는 행위가 자기들의 마음에 쓰여 있음을 보여 줍니다.
영어NIV,15 since they show that the requirements of the law are written on their hearts, their consciences also bearing witness, and their thoughts now accusing, now even defending them.)
영어NASB,15 in that they show the work of the Law written in their hearts, their conscience bearing witness, and their thoughts alternately accusing or else defending them,
영어MSG,15 They show that God’s law is not something alien, imposed on us from without, but woven into the very fabric of our creation. There is something deep within them that echoes God’s yes and no, right and wrong.
영어NRSV,15 They show that what the law requires is written on their hearts, to which their own conscience also bears witness; and their conflicting thoughts will accuse or perhaps excuse them
헬라어신약Stephanos,15 οιτινες ενδεικνυνται το εργον του νομου γραπτον εν ταις καρδιαις αυτων συμμαρτυρουσης αυτων της συνειδησεως και μεταξυ αλληλων των λογισμων κατηγορουντων η και απολογουμενων
라틴어Vulgate,15 qui ostendunt opus legis scriptum in cordibus suis testimonium reddente illis conscientia ipsorum et inter se invicem cogitationum accusantium aut etiam defendentium
히브리어Modern,15 בהראותם מעשה התורה כתוב על לבם ודעתם מעידה בהם ומחשבותם בקרבם מחיבות זאת את זאת או גם מזכות׃
성 경: [롬2:15]
주제1: [유대인에 대한 심판]
주제2: [행위에 따른 심판]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 ‘양심’에 해당하는 헬라어 ‘쉬네이데시스'(*)는 문자적으로 ‘함께 안다’라는 의미로서 본절에서는 ‘함께 증거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쉼마르튀루세스'(*)와 함께 쓰여 사람의 마음속에서 연대적으로 증거하므로 율법처럼 증인으로서 그 역할을 감당한다는 뜻으로 쓰여졌다. 양심은 인간이 마음속에서 자신의 행동을 살피면서 때로는 자신을 정죄하기도 하며, 율법과 일치한 행동에 대하여는 스스로 선한 증거로 인정하기도 하는 인간의 ‘바른 인식의 주체’인 것이다(고전 8:7-12). 칼빈(Calvin)은 양심을 정의하면서 ‘합리적인 행위에 대하여서는 변호하며 악한 행실에 대하여서는 고발하고 유죄 선고를 내리기도 하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이러한 양심은 타락한 인간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도덕적 성품을 보여준다(고호 4:2). 그러나 양심에 화인 맞은 자들은 계속해서 죄 가운데 자신을 방치하여 스스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는 거짓 속에서 멸망으로 나아간다(갈 6:3;딤전 4:2;딛 1:15).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 이것은 인간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여러가지 생각이 갈등 상태에 놓여 있음을 보여 준다. 즉 사람이 어떤 잘못을 범했을 때 그 행위가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 한쪽에서는 그것을 합리화시키려는 생각이 일어난다. 이러한 갈등이 반복되는 상태가 모든 사람의 내부에 존재한다. 이것이 곧 인간의 양심에 새겨져 있는 율법적인 요소인 것이다.
율법의 행위 – 율법에 따르는 행위로 해석되기 보다는 율법적인 요소가 인간의 양심 가운데 활동하며 그것이 행위로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이 어떤 행위를 통해 양심의 갈등을 느낀 후에 이전보다 나은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 ‘율법의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엔 헤메라 호테 크리네이 호 데오스 타 크맆타 톤 안드로폰 카타 토 유앙겔리온 무 디아 크리스투 예수
개역개정,16 곧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새번역,16 이런 일은, ㉧내가 전하는 복음대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내세우셔서 사람들이 감추고 있는 비밀들을 심판하실 그 날에 드러날 것입니다. / ㉧그, ‘나의 복음’
우리말성경,16 이런 일은 내가 전한 복음대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실 그날에 일어날 것입니다.
가톨릭성경,16 이러한 사실은 내가 전하는 복음이 가르치는 대로,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하여 사람들의 숨은 행실들을 심판하시는 그 날에 드러날 것입니다.
영어NIV,16 This will take place on the day when God will judge men’s secrets through Jesus Christ, as my gospel declares.
영어NASB,16 on the day when, according to my gospel, God will judge the secrets of men through Christ Jesus.
영어MSG,16 Their response to God’s yes and no will become public knowledge on the day God makes his final decision about every man and woman. The Message from God that I proclaim through Jesus Christ takes into account all these differences.
영어NRSV,16 on the day when, according to my gospel, God, through Jesus Christ, will judge the secret thoughts of all.
헬라어신약Stephanos,16 εν ημερα οτε κρινει ο θεος τα κρυπτα των ανθρωπων κατα το ευαγγελιον μου δια ιησου χριστου
라틴어Vulgate,16 in die cum iudicabit Deus occulta hominum secundum evangelium meum per Iesum Christum
히브리어Modern,16 ביום אשר ישפט האלהים את כל תעלמות בני האדם ביד ישוע המשיח כפי בשורתי׃
성 경: [롬2:16]
주제1: [유대인에 대한 심판]
주제2: [행위에 따른 심판]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 본 구절은 문자적으로 ‘내 복음을 따라'(*, 카타 토 유앙겔리온 무)로 번역될 수 있다. 이 말은 바울 자신이 전파한 복음을 근거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이야기한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바울은 ‘내 복음’이란 표현을 취했는데, 이것은 협소한 의미로 사용되어 ‘이신 칭의’의 교리에 대한 것이 아니라 바울이 전파한 모든 내용을 가리킨다. 초대 교육 교부들은 이것을 ‘누가복음’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으나(Origen, Jerome)여기서는 바울의 전파 내용 중 종말론적인 설교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바울이 본절에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바울은 ‘내 복음’이란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복음’의 출처가 자기 자신인 것처럼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이는 바울의 사도적 권위와 깊이 연관되는 표현으로 바울 자신이 예수께로부터 사도로 세우심을 받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다는 인식을 드러내 주며 자기가 그 복음을 위해 택정함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부르심에 대해 전인격적으로 반응한다는 뜻에서 복음을 자신의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 이 용어가 원문에서는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라는 구절 뒤에 따라 나오지만, 굳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진 복음과 연결지을 핑요는 없다(Calvin). 오히려 본 구절은 하나님의 심판이 하나님의 단독 사역이 아니라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음을 나타내고자(요 5:27;행 17:31)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복음이 성취되어 인간들에게 주어졌듯이 그 복음으로 인한 심판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실행되는 것이 정당한 절차일 것이다. 예수께서도 심판날 왕권을 가지고 오실 것을 말슴하셨다(마 16:28).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 심판날에는 감추인 것이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드러나게 된다(고전 4:5). 예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외식을 신랄하게 비판하신 것도 어떤면에서는 마지막 날에 있을 심판에 대한 본보기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 앞에서는 선하게 행동하고 선한 말을 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중심을 보시기에외식하는 자들의 마음과 생각을 심판날에 남김없이 드러내실 것이다(마 12:36, 37).
그 날이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헤메라'(*)는 문장 맨 앞에 위치하여 강조적으로 사용되었다. 바티칸 사본(B;codex Vaticanus)에서는 정관사 ‘헤'(*)가 표기되어 있는데 문법상으로는 맞는 듯하다. 그러나 이처럼 정관사를 생략하는 것은 바울의 서술 방법 중 하나이다(12절). 더욱이 5절에서 ‘그날’에 대해 언급하면서 정관사를 사용했기 때문에 굳이 이를 사용하지 않아도 의미가 통하고 본절에서는 내용 자체가 마지막 심판 날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으므로 생략한 것 같다.
에이 데 쉬 유다이오스 에포노마제 카이 에파나파우에 노모 카이 카우카사이 엔 데오
개역개정,17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새번역,17 그런데, ㉨그대가 유대 사람이라고 자처한다고 합시다. 그래서 ㉨그대는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 ㉨실제 인물이 아니라 가상의 논쟁 상대를 가리키는 말
우리말성경,17 그대는 자칭 유대 사람이라 하고 율법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자랑하고
가톨릭성경,17 그런데 그대는 자신을 유다인이라고 부르면서 율법에 의지하고 하느님을 자랑하며,
영어NIV,17 Now you, if you call yourself a Jew; if you rely on the law and brag about your relationship to God;
영어NASB,17 But if you bear the name “Jew,” and rely upon the Law, and boast in God,
영어MSG,17 If you’re brought up Jewish, don’t assume that you can lean back in the arms of your religion and take it easy, feeling smug because you’re an insider to God’s revelation,
영어NRSV,17 But if you call yourself a Jew and rely on the law and boast of your relation to God
헬라어신약Stephanos,17 ιδε συ ιουδαιος επονομαζη και επαναπαυη τω νομω και καυχασαι εν θεω
라틴어Vulgate,17 si autem tu Iudaeus cognominaris et requiescis in lege et gloriaris in Deo
히브리어Modern,17 הן אתה נקרא בשם יהודי ונשענת על התורה והתהללת באלהים׃
성 경: [롬2:17]
주제1: [유대인에 대한 심판]
주제2: [형식적 율법주의]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으나 본절 첫머리에 ‘이데'(*, ‘보라’), 혹은 ‘에이 데'(*, ‘그러나 만약’)가 있다. 흠정역(KJV)이 번역한 공인 본문(Textus Receptus)은 전자를 취하지만, 대부분의 사본들과 비교적 오래된 사본들(*, A, B, D, K, )은 후자를 취하였다. ‘에이 데’는 직설법과 함께 사용되어 실제로 발생될 수 있는 상태를 가정하는 조건절을 갖는다. 따라서 본절의 ‘에이'(*, ‘만약’)는 20절까지 조건문으로 취한다.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 ‘칭하는’의 헬라어 ‘에포노마제'(*)는 ‘이름을 붙이다’ 또는 ‘칭함을 받다’라는 뜻을 가진 ‘에포노마조'(*)의 현재 조건문으로 그 의미는 ‘유대인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이다. 여기서 ‘유대인'(*, 유다이오스)은 ‘히브리인'(*, 헤브라이오스)이나 ‘이스라엘인'(*, 이스라엘리터스)이라는 용어와 구별된다. 히브리인이라는 호칭은 언어 군(群)의 개념을 강조하고 있고, 이스라엘인이라는 호칭은 구속사적인 개념을 강조하는데, 유대인이라는 호칭은 헬라인이나 이방인들과 상대되는 개념으로서 모세 율법을 중심으로 형성된 종교 공동체로서의 특성을 반영한다.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 유대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부여받은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 특권을 자랑할 뿐 아니라 그 특권을 받지 못한 이방인들을 경멸하기도 했다. 이러한 우월감이 하나님께 감사하며 순종함으로 나타났으면 하나님께 칭찬을 받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나, 그들은 특권만을 중요하게 여기며 그에 따르는 책임을 무시했다. 그들은 제사장 나라에 걸맞는 거룩한 백성으로서의(출 19:6) 특권을 유지하려면 ‘언약을 지켜야 할'(출 19:5) 책임이 있음을 무시했다. 그들은 율법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자랑한다고 내세웠으나 실상은 율법의 요구에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하면서 그들이 부여받은 특권만을 자랑스럽게 여겼던 것이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모습은 세례 요한의 책망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마 3:9).
카이 기노스케이스 토 델레마 카이 도키마제이스 타 디아페론타 카테쿠메노스 에크 투 노무
개역개정,18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새번역,18 율법의 가르침을 받아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가장 선한 일을 분간할 줄 알며,
우리말성경,18 율법의 가르침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할 줄 압니다.
가톨릭성경,18 율법을 배워 하느님의 뜻을 알고 무엇이 중요한지 판단할 줄 안다고 합니다.
영어NIV,18 if you know his will and approve of what is superior because you are instructed by the law;
영어NASB,18 and know His will, and approve the things that are essential, being instructed out of the Law,
영어MSG,18 a connoisseur of the best things of God, informed on the latest doctrines!
영어NRSV,18 and know his will and determine what is best because you are instructed in the law,
헬라어신약Stephanos,18 και γινωσκεις το θελημα και δοκιμαζεις τα διαφεροντα κατηχουμενος εκ του νομου
라틴어Vulgate,18 et nosti voluntatem et probas utiliora instructus per legem
히브리어Modern,18 וידעת הראוי ובהיותך מלמד בתורה תבין בין טוב לרע׃
성 경: [롬2:18]
주제1: [유대인에 대한 심판]
주제2: [형식적 율법주의]
본절에서는 유대인들이 율법을 통해서 얻게 된 유익이 언급되어 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길은 하나님께서 친히 계시해 주셔야만 가능하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해서 여러 모양으로 계시하셨기에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 달리 하나님의 뜻을 아는 백성이 되었다. ‘하나님의 뜻’은 구체적으로 ‘구원 계시’를 가리키지만 좀더 폭넓게 하나님의 섭리까지도 포괄할 수 있는 용어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구원 계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를 통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계시된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생활이 요청된다.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 본 구절에 대해서는 해석자들마다 약간씩 견해가 다르다. 예를 들어 틴델(Tyndale)은 ‘선악에 대한 경험을 가지는 것’으로 해석하며, 모펫(Moffat)은 ‘종교에 있어서 생동력있는 것에 대한 의식을 가지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또한 영역 성경중에서 이 구절을 ‘도덕적인 구분에 대한 지식을 가지는 것’으로 번역하기도 한다(NEB). 이러한 해석상의 어려움을 피하기 위해 칼빈(Calvin)은 선한 것을 받아들이는 것과 선악을 구별하는 것을 동시에 인정한다. 이러한 해석은 메튜 헨리(Mattew Henry)같은 주석가도 동의한다. 그렇지만 본문이 뜻하는 바는 칼빈의 첫번째 견해에 더 접근해 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본절은 유대인들이 단순히 선악간에 판단한다기 보다는 율법의 선한 교훈을 인정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통해 선한 것을 인정한다는 사실은 그 선을 옳은 원리로 받아들였다는 의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믿음으로 율법에 따르는 선한 삶을 살지 않은 어리석음을 저질렀다. 이러한 어리석음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한'(1:21) 이방인들의 어리석음과 동일하다.
페포이다스 테 세아우톤 호데곤 에이나이 튀플론 포스 톤 엔 스코테이
개역개정,19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새번역,19 눈먼 사람의 길잡이요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의 빛이라고 생각하며,
우리말성경,19 그리고 그대는 스스로 눈먼 사람의 안내자요,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의 빛이요.
가톨릭성경,19 또 자신이 눈먼 이들의 인도자고 어둠 속에 있는 이들의 빛이라고 확신하며,
영어NIV,19 if you are convinced that you are a guide for the blind, a light for those who are in the dark,
영어NASB,19 and are confident that you yourself are a guide to the blind, a light to those who are in darkness,
영어MSG,19 I have a special word of caution for you who are sure that you have it all together yourselves and, because you know God’s revealed Word inside and out,
영어NRSV,19 and if you are sure that you are a guide to the blind, a light to those who are in darkness,
헬라어신약Stephanos,19 πεποιθας τε σεαυτον οδηγον ειναι τυφλων φως των εν σκοτει
라틴어Vulgate,19 confidis te ipsum ducem esse caecorum lumen eorum qui in tenebris sunt
히브리어Modern,19 ובטחת בנפשך להיות מוליך העורים ואור להלכים בחשך׃
성 경: [롬2:19]
주제1: [유대인에 대한 심판]
주제2: [형식적 율법주의]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 본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본문을 부산 구문의 형식으로, 직역하면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양을 가지고서’가 된다. 이에 대해 칼빈(Calvin)은 이유를 나타내는 분사 구문으로 이해하여 ‘지식과 진리의 모양을 가지고 있으므로’라고 해석했다. 그리고 영역 성경 중에서도 이 구절을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because)를 사용하여 번역했다(NIV). 이러한 해석은 본문의 흐름상 적합하다고 본다. 한편 ‘지식’과 ‘진리’는 특별한 의미상의 구별 없이 중복어법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한다(Black). 그리고 ‘규모’에 해당하는 헬라어 ‘모르포시스'(*)는 ‘모양’이나 ‘외모’를 뜻하지만 외적인 모양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참된 표현’을 의미하기도 한다(Barmby). 그래서 혹자는 ‘모르포시스’를 ‘본질'(*, 휘포스타시스)과 같은 의미로 해석하기도 했다(Black). 간혹 학자들 중에는 ‘모르포시스’를 유대인들의 ‘외식’과 같이 ‘과장된 외형'(Calvin)이나 ‘경건이 없는 겉 모양'(Matthew Henry)으로 이해하기도 하나 이러한 해석은 본문의 성격상 적합하지 않다. 본문에서는 유대인이 율법을 통해 가진 지식이나 진리가 거짓되다든지 알맹이가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유대인들이 율법을 통한 참된 지식의 본질을 소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Murray, Barmby) 그 지식을 좇지 않고 자기 임의대로 행하는 것을 책망하는데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 – 성경에서 소경과 어두움에 있는 자는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눈이 먼 상태에 있다는 것은 어둠 가운데서 헤매이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사 42:19;56:10;마 6:23;요 1:5;고후 4:4;요일 2:11). 여기서도 바울은 역시 중복어법을 사용하여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내용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어두움에 있는 자들의 빛’이라는 표현은 이방인을 향한 유대인들의 사명을 시사한다. 유대인들은 토라를 자기의 등불이라고 생각한 것처럼 토라를 소유한 자신들이 이방인들에게 등불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사명마저도 자신들의 특권을 자랑하는 도구로 삼고 말았다. 오늘날 성도들도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라고(시 169:105) 고백하면서 빛된 삶을 살지 못한다면 유대인들처럼 말씀을 가졌다는 것만으로 자랑하려 하는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파이듀텐 아프로논 디다스칼론 네피온 에콘타 텐 모르포신 테스 그노세오스 카이 테스 알레데이아스 엔 토 노모
개역개정,20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새번역,20 지식과 진리가 율법에 구체화된 모습으로 들어 있다고 하면서, 스스로 어리석은 사람의 스승이요 어린 아이의 교사로 확신한다고 합시다.
우리말성경,20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아이의 선생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는 그대가 율법의 지식과 진리의 교훈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성경,20 율법에서 지식과 진리의 진수를 터득하였으므로 어리석은 자들의 교사이며 철없는 자들의 선생이라고 확신합니다.
영어NIV,20 an instructor of the foolish, a teacher of infants, because you have in the law the embodiment of knowledge and truth–
영어NASB,20 a corrector of the foolish, a teacher of the immature, having in the Law the embodiment of knowledge and of the truth,
영어MSG,20 feel qualified to guide others through their blind alleys and dark nights and confused emotions to God.
영어NRSV,20 a corrector of the foolish, a teacher of children, having in the law the embodiment of knowledge and truth,
헬라어신약Stephanos,20 παιδευτην αφρονων διδασκαλον νηπιων εχοντα την μορφωσιν της γνωσεως και της αληθειας εν τω νομω
라틴어Vulgate,20 eruditorem insipientium magistrum infantium habentem formam scientiae et veritatis in lege
히브리어Modern,20 מיסר לחסרי לב ומורה הפתאים ויש לך צורת המדע והאמת בתורה׃
성 경: [롬2:20]
주제1: [유대인에 대한 심판]
주제2: [형식적 율법주의]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아이의 선생 – 영적으로 ‘이리석은 자’와 ‘어린아이’는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어린아이’가 영적인 의미에서 상징하는 바가 ‘연약한 존재'(고전 14:20;엡 4:14) 또는 ‘어리석은 존재'(잠 22:15)로 나타난 점으로 미루어 보아 본 구절도 앞절과 마찬가지로 중복어법에 의한 강조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다. 한편 ‘훈도’란 용어는 헬라어 ‘파이듀테스'(*)로 보통 ‘선생’으로 번역되는 헬라어 ‘디다스칼로스'(*)와 동일한 의미를 지니지만, 좁은 의미에서 ‘파이듀테스’는 잘못을 범할 때 채찍질도 가하는 ‘엄한 선생’을 가리킨다.
스스로 믿으니 –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결정적인 잘못은 특권을 부여받은 자들이라는 자기 만족에 빠져 있었다는 사실이다. 부울은 갈라디아서에서도 유사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갈 6:3, 4) 본절과 같이 행함 없는 자랑을 위선이라고 폭로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갖지 못한 특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 특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 특권으로 말미암아 더 큰 행악에 빠지게 된 것이다. 그들은 자기의 신념을 신뢰하였을 뿐만 아니라 부패한 인간의 도덕적 무능력에 지나친 기대를 가짐으로 인하여 아무것도 아닌 초라한 가운데서 자신을 속이는 잘못을 범하였다. 또한 율법주의자들은 그 이웃들에게 자신도 질 수 없는 무거운 짐들을 지우는 반율법적인 잘못을 범하였으며 더 나아가 그들의 신념은 자신을 속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결과를 초래함으로 인하여 스스로 하나님의 징계를 초래하고 말았다.
호 운 디다스콘 헤테론 세아우톤 우 디다스케이스 호 케뤼쏜 메 클렢테인 클렢테이스
개역개정,21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
새번역,21 그렇다면 ㉪그대는 남은 가르치면서도, 왜 자기 자신은 가르치지 않습니까? 도둑질을 하지 말라고 설교하면서도, 왜 도둑질을 합니까? / ㉪실제 인물이 아니라 가상의 논쟁 상대를 가리키는 말
우리말성경,21 그렇다면 남을 가르치는 그대가 왜 자신은 가르치지 않습니까? 도둑질하지 말라고 선포하는 그대가 왜 도둑질합니까?
가톨릭성경,21 그렇다면 남은 가르치면서 왜 자신은 가르치지 않습니까? 도둑질을 하지 말라고 설교하면서 왜 그대는 도둑질을 합니까?
영어NIV,21 you, then, who teach others, do you not teach yourself? You who preach against stealing, do you steal?
영어NASB,21 you, therefore, who teach another, do you not teach yourself? You who preach that one should not steal, do you steal?
영어MSG,21 While you are guiding others, who is going to guide you? I’m quite serious. While preaching “Don’t steal!” are you going to rob people blind? Who would suspect you?
영어NRSV,21 you, then, that teach others, will you not teach yourself? While you preach against stealing, do you steal?
헬라어신약Stephanos,21 ο ουν διδασκων ετερον σεαυτον ου διδασκεις ο κηρυσσων μη κλεπτειν κλεπτεις
라틴어Vulgate,21 qui ergo alium doces te ipsum non doces qui praedicas non furandum furaris
히브리어Modern,21 ואתה אשר תורה אחרים את נפשך לא תורה אמרת לא תגנב והנך גנב׃
성 경: [롬2:21]
주제1: [유대인에 대한 심판]
주제2: [형식적 율법주의]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 이 질문은 유대인들의 형식적인 삶에 대하여 다음에 계속되는 네 가지 질문을 유도하기 위한 대표적인 의문문이다. 그리고 이 질문은 유대 랍비들의 문헌에서 자주 발견되고 있다(Hendriksen). 유대교 지도자들은 자신들만이 율법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진리를 알고 있다고 자부했고(요 9:34), 이 점은 주님께서도 인정해 주신 바 있다(마 23:3). 그들에게 있어서 문제는 자기들이 가르치는 바를 자신들은 지키지 않으면서 의로운 체 하는 그들의 외식이었다(마 23:23-28). 이러한 의미에서 유대교 지도자들은 여호와 신앙을 형식적인 종교로 전락시킨 책임을 면할 수 없다. 그들은 입술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행동으로는 하나님께 순복하는 것처럼 나타내 보이지만, 실상 그들의 심령은 전혀 하나님과 무관하며 단순히 형식적이고 외면적인 종교 지도자에 불과했다.
호 레곤 메 모이큐에인 모이큐에이스 호 브델뤼쏘메노스 타 에이돌라 히에로쉴레이스
개역개정,22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느냐
새번역,22 간음을 하지 말라고 하면서도, 왜 간음을 합니까? 우상을 미워하면서도, 왜 신전의 물건을 훔칩니까?
우리말성경,22 간음하지 말라고 하는 그대가 왜 간음합니까? 우상이라면 질색하는 그대가 왜 신전 물건을 훔칩니까?
가톨릭성경,22 간음을 하지 말라고 하면서 왜 그대는 간음을 합니까? 우상을 혐오한다고 하면서 왜 그대는 신전 물건을 훔칩니까?
영어NIV,22 You who say that people should not commit adultery, do you commit adultery? You who abhor idols, do you rob temples?
영어NASB,22 You who say that one should not commit adultery, do you commit adultery? You who abhor idols, do you rob temples?
영어MSG,22 The same with adultery. The same with idolatry.
영어NRSV,22 You that forbid adultery, do you commit adultery? You that abhor idols, do you rob temples?
헬라어신약Stephanos,22 ο λεγων μη μοιχευειν μοιχευεις ο βδελυσσομενος τα ειδωλα ιεροσυλεις
라틴어Vulgate,22 qui dicis non moechandum moecharis qui abominaris idola sacrilegium facis
히브리어Modern,22 אמרת לא תנאף ואתה נאף תשקץ את האלילים ואתה גזל את הקדש׃
성 경: [롬2:22]
주제1: [유대인에 대한 심판]
주제2: [형식적 율법주의]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 ‘간음’에 해당하는 헬라어 ‘모이큐오'(*)는 히브리적 표현에서 ‘영적 간음’이나 ‘우상 숭배’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나(계 2:22) 본절에서는 우상 숭배를 따로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영적 간음’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바울은 의도적이며 구체적인 사실을 선명하게 표현하면서 그들 가운데서 실제로 행해지고 있는 온갖 음행과 간통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율법주의자들은 가장 엄격한 율법을 종교의 원리로 삼고 있었지만, 그들의 도덕적 기준은 여전히 부패한 인간 본성의 심연에 머물러 있었다.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하느냐 – 앞에서 언급된 ‘도적질’과 ‘간음’이란 용어를 비추어 볼 때 바울은 십계명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유대인은 십계명에 따라 우상을 가증스럽게 여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이나 우상을 위해 만들어진 것을 탐내어 도적질했다. 신사(神社) 물건을 도적질 한 것이 악행인가에 대해서 성경이 명백히 가르치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따지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본절에서 바울은 그러한 행위가 죄인지 죄가 아닌지에 대해서 논하고자 이 질문을 내놓은 것이 아니라 가증스러이 여기는 우상 제물을 탐낸, 우상 숭배 이상의 죄악을 폭로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신명기에서는 이 문제를 암시적으로보여주면서 그 행위가 죄가 된다고 교훈하고 있다. 즉 신명기는 우상들에 입힌 은이나 금을 탐내어 취하지 말라는 말씀과 함께 그 금지의 이유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일로 인해 올무에 빠질 것이 염려되기 때문인 것을 들고 있다(신 7:25).
호스 엔 노모 카우카사이 디아 테스 파라바세오스 투 노무 톤 데온 아티마제이스
개역개정,23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새번역,23 율법을 자랑하면서도, 왜 율법을 어겨서 하나님을 욕되게 합니까?
우리말성경,23 율법을 자랑하는 그대가 왜 율법을 어기고 하나님을 욕되게 합니까?
가톨릭성경,23 율법을 자랑하면서 왜 그대는 율법을 어겨 하느님을 모욕합니까?
영어NIV,23 You who brag about the law, do you dishonor God by breaking the law?
영어NASB,23 You who boast in the Law, through your breaking the Law, do you dishonor God?
영어MSG,23 You can get by with almost anything if you front it with eloquent talk about God and his law.
영어NRSV,23 You that boast in the law, do you dishonor God by breaking the law?
헬라어신약Stephanos,23 ος εν νομω καυχασαι δια της παραβασεως του νομου τον θεον ατιμαζεις
라틴어Vulgate,23 qui in lege gloriaris per praevaricationem legis Deum inhonoras
히브리어Modern,23 תתהלל בתורה ותנבל את האלהים בעברך את התורה׃
성 경: [롬2:23]
주제1: [유대인에 대한 심판]
주제2: [형식적 율법주의]
학자들 사이에는 본절을 의문문으로 해석하느냐 평서문으로 해석하느냐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평서문을 주장하는 학자들(Cranfield)은 24절에서 헬라어 원문상 24절에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가르'(*)가 사용되고 있으므로 본절은 그 접속사를 유도할 만한 이유를 묻는 의문문이 되든지 아니면 그 이유를 유도해 내는 평서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본절은 이유를 묻는 의문문의 성격을 띠지 않았으므로 이유를 유도해 내거나 확정을 나타내는 평서문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게 생각할 근거는 본문 가운데서 발견할 수 없다. 오히려 24절의 접속사 ‘가르'(*)는 21절에서 23절까지에 언급된 다섯 가지 질문을 하게 된 근거를 설명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본절은 내용상 앞에서 언급된 네 가지 질문의 형식과 잘 부합될 뿐 아니라 특히 21절에 언급된 첫번째 질문을 보다 구체화시켜 대비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면서 그 나머지 세 가지 질문을 요약한 질문도 된다. 따라서 본절은 의문문으로 해석하는 편이 본문 이해에 더욱 도움이 된다.
율법을 범함으로 – 이말은 유대인들이 범한 잘못들(22, 23절)이 곧 율법을 범한 행위임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21절에서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는 질문의 내용이 율법을 범하고 있는 사실에 대한 것임도 본절에 잘 나타나고 있다.
토 가르 오노마 투 데우 디 휘마스 블라스페메이타이 엔 토이스 에드네신 카도스 게그랖타이
개역개정,24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새번역,24 성경에 기록한 바 ㉫”너희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 모독을 받는다” 한 것과 같습니다. / ㉫사 52:5(칠십인역); 겔 36:22
우리말성경,24 기록되기를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해 이방 사람들 사이에서 모욕을 당하는구나”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사52:5;겔36:22
가톨릭성경,24 과연 성경에, “하느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서 모독을 받는다.”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영어NIV,24 As it is written: “God’s name is blasphemed among the Gentiles because of you.”
영어NASB,24 For “THE NAME OF GOD IS BLASPHEMED AMONG THE GENTILES BECAUSE OF YOU,” just as it is written.
영어MSG,24 The line from Scripture, “It’s because of you Jews that the outsiders are down on God,” shows it’s an old problem that isn’t going to go away.
영어NRSV,24 For, as it is written, “The name of God is blasphemed among the Gentiles because of you.”
헬라어신약Stephanos,24 το γαρ ονομα του θεου δι υμας βλασφημειται εν τοις εθνεσιν καθως γεγραπται
라틴어Vulgate,24 nomen enim Dei per vos blasphematur inter gentes sicut scriptum est
히브리어Modern,24 כי שם האלהים בגללכם מחלל בגוים כאשר כתוב׃
성 경: [롬2:24]
주제1: [유대인에 대한 심판]
주제2: [형식적 율법주의]
기록된 바와 같이 – 이 표현은 본절이 사 52:5의 인용구임을 시사해 준다. 이렇게 함으로써 바울은 이사야 선지자의 권위를 내세우는 동시에 자신의 논리를 더욱 확고히 정당화시킬 수 있게 되었다. 비록 바울이 이사야 선지자의 직접적인 선포를 간접적인 내용으로 변형시켰으나 내용상으로는 동일한 의미를 유지하고 있다.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 당시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을 마치 하나님과 동일한 인격을 소유한 거룩한 백성인 양 취급했다. 그것은 실제로 그들의 삶이 고상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들의 지나친 자랑에 이방인들이 속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방인들이 바울이 고발한 것과 같은 유대인의 범죄함을 발견한다면 유대인들은 스스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도구가 되고 말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자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하는 자들임을 바울은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J. Murray).
페리토메 멘 가르 오펠레이 에안 노몬 프라쎄스 에안 데 파라바테스 노무 에스 헤 페리토메 수 아크로뷔스티아 게고넨
개역개정,25 네가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하면 네 할례는 무할례가 되느니라
새번역,25 율법을 지키면 할례를 받은 것이 유익하지만, 율법을 어기면 ㉬그대가 받은 할례는 할례를 받지 않은 것으로 되어 버립니다. / ㉬실제 인물이 아니라 가상의 논쟁 상대를 가리키는 말
우리말성경,25 그대가 율법을 행하면 할례는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대가 율법을 어기면 그대의 할례는 무할례와 같습니다.
가톨릭성경,25 그대가 율법을 실천하면 할례는 유익합니다. 그러나 그대가 율법을 어기면, 그대가 받은 할례는 할례가 아닌 것이 되고 맙니다.
영어NIV,25 Circumcision has value if you observe the law, but if you break the law, you have become as though you had not been circumcised.
영어NASB,25 For indeed circumcision is of value, if you practice the Law; but if you are a transgressor of the Law, your circumcision has become uncircumcision.
영어MSG,25 Circumcision, the surgical ritual that marks you as a Jew, is great if you live in accord with God’s law. But if you don’t, it’s worse than not being circumcised.
영어NRSV,25 Circumcision indeed is of value if you obey the law; but if you break the law, your circumcision has become uncircumcision.
헬라어신약Stephanos,25 περιτομη μεν γαρ ωφελει εαν νομον πρασσης εαν δε παραβατης νομου ης η περιτομη σου ακροβυστια γεγονεν
라틴어Vulgate,25 circumcisio quidem prodest si legem observes si autem praevaricator legis sis circumcisio tua praeputium facta est
히브리어Modern,25 הן המילה מועילה אם תשמר את התורה אבל אם עבר אתה את התורה אז מילתך היתה לך לערלה׃
성 경: [롬2:25]
주제1: [유대인에 대한 심판]
주제2: [형식적 율법주의]
네가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나 – 바울은 유대인들의 가장 큰 자랑거리인 율법과 함께 또 다른 자랑거리인 할례의 문제로 주의를 환기시키면서 자신이 의도한 복음의 본질에 한 걸음 더 접근하고 있다. 유대인을 이방인과 구별시키는 유일한 기준은 율법이지만 표식은 할례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지금까지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들어 논리를 전개해 왔지만, 이제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의 자랑거리요 표식인 할례 문제를 거론함으로써 더욱더 유대인들이 변명할 수 없도록 만들고 있다. 여기서 ‘율법을 행한다’는 것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을 좇는 것으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하나님의 편에 서 있을 때 유대인들의 할례가 그진가를 발휘할 수 있는 것이지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형식적인 할례 의식에 그치며 이는 그들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계속 유지시킬 수 있는 신적인 힘을 상실케 하고 만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에게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마 3:9)고 경고했던 것이다.
네 할례가 무할례가 되었느니라 – 유대인들은 할례 자체가 의의 조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조건, 구원의 조건이 되는 것으로 오해했다. 실제로 유대교의 전승에 따르면 ‘게헨나(지옥) 문 옆에 앉았을지라도 할례받은 사람은 아무도 지옥에 떨어지지 않도록 아브라함이 책임을 져 준다’는 내용의 교훈이 있다(Harrison). 이와 같이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할례가 다른 어떤 의식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형식적인 유대인들의 할례는 무할례와 같다고 선포한 것은 혁명적인 선언이었다. 이러한 바울의 선포로 인해 유대인의 자랑은 쓸모없는 것으로 변하게 되며 형식적인 신앙에서 실제적인 신앙으로의 결단이 요구되고 있다.
에안 운 헤 아크로뷔스티아 타 디카이오마타 투 노무 퓔라쎄 우크 헤 마크로뷔스티아 아우투 에이스 페리토멘 로기스데세타이
개역개정,26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규례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새번역,26 그러므로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이 율법의 규정을 지키면, 그 사람은 할례를 받지 않았더라도 할례를 받은 것으로 여겨질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말성경,26 할례받지 않은 사람이 율법의 요구를 지킨다면 그의 무할례가 할례로 여겨지지 않겠습니까?
가톨릭성경,26 그러니 할례 받지 않은 이들이 율법의 규정들을 지키면, 할례를 받지 않았지만 할례를 받은 것으로 여겨지지 않겠습니까?
영어NIV,26 If those who are not circumcised keep the law’s requirements, will they not be regarded as though they were circumcised?
영어NASB,26 If therefore the uncircumcised man keeps the requirements of the Law, will not his uncircumcision be regarded as circumcision?
영어MSG,26 The reverse is also true: The uncircumcised who keep God’s ways are as good as the circumcised–
영어NRSV,26 So, if those who are uncircumcised keep the requirements of the law, will not their uncircumcision be regarded as circumcision?
헬라어신약Stephanos,26 εαν ουν η ακροβυστια τα δικαιωματα του νομου φυλασση ουχι η ακροβυστια αυτου εις περιτομην λογισθησεται
라틴어Vulgate,26 si igitur praeputium iustitias legis custodiat nonne praeputium illius in circumcisionem reputabitur
히브리어Modern,26 לכן אם ישמר הערל את משפטי התורה הלא תחשב לו ערלתו למילה׃
카이 크리네이 헤 에크 퓌세오스 아크로뷔스티아 톤 노몬 텔루사 세 톤 디아 그람마토스 카이 페리토메스 파라바텐 노무
개역개정,27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율법 조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겠느냐
새번역,27 그리고 본래 할례를 받지 않았더라도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사람이, 율법의 조문을 가지고 있고 할례를 받았으면서도 율법을 범하는 사람인 ㉭그대를 정죄할 것입니다. / ㉭실제 인물이 아니라 가상의 논쟁 상대를 가리키는 말
우리말성경,27 본래 할례받지 않은 사람이 율법을 지키면 율법의 조문과 할례를 소유하고도 율법을 어기는 그대를 심판하지 않겠습니까?
가톨릭성경,27 그리하여 몸에 할례를 받지 않았으면서도 율법을 준수하는 이들이, 법전을 가지고 있고 할례를 받았으면서도 율법을 어기는 그대를 심판할 것입니다.
영어NIV,27 The one who is not circumcised physically and yet obeys the law will condemn you who, even though you have the written code and circumcision, are a lawbreaker.
영어NASB,27 And will not he who is physically uncircumcised, if he keeps the Law, will he not judge you who though having the letter of the Law and circumcision are a transgressor of the Law?
영어MSG,27 in fact, better. Better to keep God’s law uncircumcised than break it circumcised.
영어NRSV,27 Then those who are physically uncircumcised but keep the law will condemn you that have the written code and circumcision but break the law.
헬라어신약Stephanos,27 και κρινει η εκ φυσεως ακροβυστια τον νομον τελουσα σε τον δια γραμματος και περιτομης παραβατην νομου
라틴어Vulgate,27 et iudicabit quod ex natura est praeputium legem consummans te qui per litteram et circumcisionem praevaricator legis es
히브리어Modern,27 והערל מלדה המקים את התורה הלא הוא ידין אתך אשר יש לך הכתב והמילה ועברת את התורה׃
우 가르 호 엔 토 파네로 유다이오스 에스틴 우데 헤 엔 토 파네로 엔 사르키 페리토메
개역개정,28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새번역,28 겉모양으로 유대 사람이라고 해서 유대 사람이 아니요, 겉모양으로 살갗에 할례를 받았다고 해서 할례가 아닙니다.
우리말성경,28 겉으로 유대 사람이라고 해서 참 유대 사람이 아니고 몸에 받은 할례가 참 할례가 아닙니다.
가톨릭성경,28 겉모양을 갖추었다고 유다인이 아니고, 살갗에 겉모양으로 나타난다고 할례가 아닙니다.
영어NIV,28 A man is not a Jew if he is only one outwardly, nor is circumcision merely outward and physical.
영어NASB,28 For he is not a Jew who is one outwardly; neither is circumcision that which is outward in the flesh.
영어MSG,28 Don’t you see: It’s not the cut of a knife that makes a Jew.
영어NRSV,28 For a person is not a Jew who is one outwardly, nor is true circumcision something external and physical.
헬라어신약Stephanos,28 ου γαρ ο εν τω φανερω ιουδαιος εστιν ουδε η εν τω φανερω εν σαρκι περιτομη
라틴어Vulgate,28 non enim qui in manifesto Iudaeus est neque quae in manifesto in carne circumcisio
히브리어Modern,28 כי לא הנראה מחוץ הוא היהודי ולא הנראה מחוץ בבשר היא המילה׃
알 호 엔 토 크륖토 유다이오스 카이 페리토메 카르디아스 엔 프뉴마티 우 그람마티 후 호 에파이노스 우크 엨스 안드로폰 알 에크 투 데우
개역개정,29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새번역,29 오히려 속 사람으로 유대 사람인 이가 유대 사람이며, 율법의 조문을 따라서 받는 할례가 아니라 성령으로 마음에 받는 할례가 참 할례입니다. 이런 사람은,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칭찬을 받습니다.
우리말성경,29 오히려 속사람이 유대 사람이라야 참 유대 사람이며 문자화된 율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으로 마음에 받은 할례가 참 할례입니다. 그 칭찬은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옵니다.
가톨릭성경,29 오히려 속으로 유다인인 사람이 참유다인이고, 문자가 아니라 성령으로 마음에 받는 할례가 참할례입니다. 그렇게 하는 이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느님께 칭찬을 받습니다.
영어NIV,29 No, a man is a Jew if he is one inwardly; and circumcision is circumcision of the heart, by the Spirit, not by the written code. Such a man’s praise is not from men, but from God.
영어NASB,29 But he is a Jew who is one inwardly; and circumcision is that which is of the heart, by the Spirit, not by the letter; and his praise is not from men, but from God.
영어MSG,29 You become a Jew by who you are. It’s the mark of God on your heart, not of a knife on your skin, that makes a Jew. And recognition comes from God, not legalistic critics.
영어NRSV,29 Rather, a person is a Jew who is one inwardly, and real circumcision is a matter of the heart–it is spiritual and not literal. Such a person receives praise not from others but from God.
헬라어신약Stephanos,29 αλλ ο εν τω κρυπτω ιουδαιος και περιτομη καρδιας εν πνευματι ου γραμματι ου ο επαινος ουκ εξ ανθρωπων αλλ εκ του θεου
라틴어Vulgate,29 sed qui in abscondito Iudaeus et circumcisio cordis in spiritu non littera cuius laus non ex hominibus sed ex Deo est
히브리어Modern,29 כי אם אשר בפנים הוא יהודי ומילה היא אשר בלב כפי הרוח ולא כפי הכתב אשר לא מבני אדם תהלתו כי אם מאת האלהי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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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판단과 하나님의 판단 I (로마서 2장 1-16절)
제목: 사람의 판단과 하나님의 판단 I
본문 : 로마서 2장 1-16절
로마서는 본론의 시작을 하나님 없는 자들의 영적 상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열어갑니다. (롬1:24-32)을 보면 하나님 앞에 이방인들의 죄와 허물, 심령의 부패가 정말 가공할만한 수준입니다.
그리고 오늘 읽은 본문으로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를 가지고 연결됩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이 하나님 앞에 진노의 대상이 되는 것이 지극히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사도는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하고 말을 이어갑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롬1:16)과 (롬2:9-10)에서, 그리고 (롬2:17)이후의 문맥을 살펴볼 때 사도는 1차적으로 유대인들에게 그리고 그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도덕적이고 지적인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음을 알게 해줍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다른 판단을 하며, 오히려 하나님의 자리에 서서 판단을 하며 그릇된 길에 빠져들어 있다는 것을 사도바울은 알려주고 싶어합니다.
그러면 그들이 어떻게 어긋난 길에 접어들어 있는지, 우리에게는 그러한 면이 어떻게 은밀하게 내재되어 있는지 본문을 통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1. 같은 일을 행하면서도 남을 판단합니다
(롬2: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사도바울은 그 사람들의 본질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과거에 사울이었을 때의 바로 자신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으며 유대인 중의 유대인이었습니다.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빌3:6). 율법의 행위에 있어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인정을 당연히 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의 만남은 사울이 바울되게 하는 혁명적 변화를 그에게 가져다 주었습니다. 과거에 삶의 행위로는 완벽하다고 생각했는데, 주님께서 성령으로 그의 마음을 비추시자 그의 마음은 구차하고 누추한 원죄의 자아의 모습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산상수훈의 말씀을 기억하면 우리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금방 이해할 수 있겠지요? 주님은 우리의 영혼, 우리의 마음에 관심이 있습니다. 우리의 평생에 걸쳐 바로 그것에 눈을 떼지 않으시고 지켜보십니다.
이 진리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도는 이방인들을 정죄하는 모든 유대인들과 도덕군자 행세를 하는 이방인들에게 “당신들은 나의 말을 잘못 이해하고 있소“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당신들도 그들과 똑같이 같은 일을 행하고 있지 않소?”하고 반문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오직 성도만이 사도의 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계신 자들만이 마음의 부패의 가공함을 온전히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렘17:9).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인 우리에게 많은 고난과 삶의 고통과 아픔을 겪게 하시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의 내면이, 루터를 비롯해서 신앙의 선배들이 맛보고 기뻐하였던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진리”가 선사하는 은혜의 감격의 자리에 도달하게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부패한 마음을 가진 인생이 다른 이를 판단하고 있으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이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이 됩니다. “나는 저들과 달리 의롭습니다.” 그만큼 주님의 십자가를 의지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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