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브란트 탕자 의 귀향 | 성현 목사의 이 시대의 영성작가들_2강 헨리나우웬의 탕자의 귀향(Cbs 아카데미숲) 빠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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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현 목사의 이 시대의 영성작가들_2강 헨리나우웬의 탕자의 귀향(CBS 아카데미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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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향 – 네이버 블로그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향 · 가로 1.8미터, 세로 2.4미터의 캔버스에 유화물감으로 그려진 작품이다(1669년경). · 육신의 시력은 어두워지는 반면, · 서른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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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1/1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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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한 점이 인생을 바꾸다 – 브런치

<탕자의 귀향>은 렘브란트가 나이 먹어 그린 대작으로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 이야기’를 다룬 것이다. 아버지의 유산을 들고 자유를 찾아 떠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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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runch.co.kr

Date Published: 4/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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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자의 귀향 – YES24

신약성경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귀향’ 비유를 고스란히 화폭에 옮긴 렘브란트의 그림에서 영감을 얻은 헨리 나우웬은 작은아들의 방탕한 삶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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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yes24.com

Date Published: 4/1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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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자의 귀향>, 아버지의 두 손이 다르게 생긴 이유는?

책 <탕자의 귀환(포이에마)>은 헨리 나우웬이 렘브란트의 작품 <탕자의 귀향>을 감상하고 그림을 통해 받은 은혜와 묵상을 담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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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ristiantoday.co.kr

Date Published: 4/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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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8) 렘브란트 ‘탕자의 귀환’

하르멘츠 반 레인 렘브란트, ‘탕자의 귀환’. 1662년쯤, 캔버스에 유채, 262×206㎝, 에르미타주 미술관, 상트페테르부르크. 탕자를 안아주는 아버지의 표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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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khan.co.kr

Date Published: 4/2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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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향’ 앞에서의 묵상 4 : 숨은 탕자 – 다음블로그

늦었지만,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향>의 그림 속 탕자의 형을 살펴본다. 나는 에르미타쥐 박물관의 렘브란트 방에 걸린 <탕자의 귀향>의 아버지와 탕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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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11/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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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자의 귀향 : 렘브란트의 성화와 함께 깨달은 말씀 – 갓피플몰

헨리 나우웬 | 글로리아 | 램브란트의 성화와 함께 깨달은 말씀. 영성에 관한 탁월한 저서들을 우리에게 선사한 헨리 나우웬, 그가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향(The Retur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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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all.godpeople.com

Date Published: 4/2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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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나우웬 저, ‘탕자의 귀향’을 읽고 – 가난한선비/과학자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이란 어쩌면 아들보다는 아버지의 모습에 가깝다는 생각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헨리 나우웬이 렘브란트의 작품 ‘탕자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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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rtmodel.tistory.com

Date Published: 1/30/2022

View: 5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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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렘브란트 탕자 의 귀향

  • Author: CBS 아카데미 숲
  • Views: 조회수 17,28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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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7. 1. 11.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ID9E3yz_BrI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향

서른살 무렵 , 렘브란트는 아내와 함께 있는 자신을 모델로 ‘매음굴의 탕자’를 그렸습니다.

내면의 갈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정경입니다.

주인공은 술에 잔뜩 취해 있습니다.

입은 반쯤 벌어졌고 눈은 음탕한 욕심으로 번들거립니다.

여인의 눈동자 역시 욕정으로 들떠 있습니다.

오른쪽 귀퉁이에서 아래로 늘어진 커튼마저 악명 높은 암스테르담 홍등가의 매음굴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로부터 30년 뒤 바로 그 화가가 감춰진 삶의 비밀을 꿰뚫어보는 눈으로

자기 초상을 그려냈다는 사실이 좀처럼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렘브란트의 주요 관심사 가운데 하나가 돈 이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많이 벌었지만 그만큼 손이 컸고 씀씀이가 헤펐습니다.

빚잔치를 하고 파산 과정을 밟는 길고도 지루한 소송을 벌이는 데 적잖은 에너지를

쏟아 부었습니다.

20대 말부터 30대 초반에 나온 자화상들은 평판에 연연하며,

아첨에 굶주리고, 옷깃에 풀을 먹인 전통 복장 대신 금줄을 늘어뜨린다든지,

이국적인 모자나 베레모, 헬멧, 터번 따위를 즐기는 등

사치스럽게 차려입기를 좋아하는 남성상을 보여줍니다.

물론 이처럼 공들인 차림새는

독특한 회화기법을 과시하고 적용하는 통상적인 방편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후원자들의 비위를 맞추는 데 만족할 수 없었던

작가의 오만한 됨됨이를 보여주는 특징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성공과 명성 부를 누리던 시기는 금세 지나가고

곧바로 슬픔과 불행, 재난의 시절이 닥쳤습니다.

렘브란트가 평생 겪은 불행을 간추려보면 누구라도 입이 딱 벌어지고 말 겁니다.

탕자에 견주어도 결코 밀리지 않을 만한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1635년 아들 룸바르투스가 숨졌고,

3년 뒤에는 장녀 코르넬리아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1640년 다시 둘째딸 코르넬리아를 잃었으며,

1642년에는 진심으로 사랑하고 사모했던 사스키아까지 앞세웠습니다.

렘브란트 곁에 남은 건 생후 9개월 된 어린 아들 티투스 뿐이었습니다.

아내가 눈을 감은 후에도 고난과 어려움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티투스의 유모 헤이르체 디르흐와 불행한 관계를 유지하다가 소송을 벌이기에 이르렀으며,

상대방을 정신병원에 감금하는 것으로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다음에는 헨드리키예 스토펠스라는 여성과 이전보다는 훨씬 안정된 교제를 시작했습니다.

두 사람은 남매를 두었는데 아들은 1652년에 죽고, 딸만 렘브란트 사후까지 생존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화가로서의 평판은 수직으로 추락했습니다.

재정 문제도 날로 심각해져 1656년에는 지급불능 선고를 받기에 이르렀고,

1657과1658년 사이에 열린 세 차례 경매를 통해 전 재산이 팔려나갔습니다.

암스테르담의 저택과 가구는 모두 남의 손으로 넘어갔습니다.

빚과 빚쟁이들한테서 완전히 자유로워진 건 아니었지만,

오십 줄에 들어서면서부터 렘브란트는 그럭저럭 평온을 되찾았습니다.

제이봄 로젠버르의 말마따나 렘브란트는 더이상 화려한 껍데기나 가식적인 표현에

현혹되지 않고 한결 예리해진 눈으로 인간과 자연을 꿰뚫어보기 시작했습니다.

1663년에 헨드리키예가 세상을 떠났고,

그 후로 5년 뒤에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 티투스의 결혼과 죽음을

연달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가난하고 외로운 노년을 보내던 렘브란트 자신도 눈을 감았습니다.

유족이라곤 딸 코르넬리아와 며느리 마그달레나 반로, 손녀 타티아뿐이었습니다.

그림 한 점이 인생을 바꾸다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향>이 헨리 나우웬의 삶 속으로 들어왔다. 그 그림은 그 사람의 삶을 바꾸었다. 나우웬은 평생 <탕자의 귀향>과 함께 살았고 <탕자의 귀향>을 썼다. 나우웬이 하버드의 교수직을 버리고 죽는 날까지 ‘라르쉬 공동체’에 들어가서 지적장애인들과 함께 살기로 결단하게 된 배경에 이 그림이 있었다.

<탕자의 귀향>은 렘브란트가 나이 먹어 그린 대작으로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 이야기’를 다룬 것이다. 아버지의 유산을 들고 자유를 찾아 떠난 작은 아들의 생활은 방탕하였다. 먼 나라에 가서 가진 것을 모두 허비해 버리고 급기야 돼지를 치는 신세가 되었다. 돼지 먹이로라도 목숨을 부지하려 하지만 그마저도 주는 사람이 없었다. 굶주려 죽을 지경에 이르자 자기가 떠나온 아버지 집에서 지내던 풍성한 시절이 생각났다. 아버지 집에서는 품군들도 풍족하게 먹지 않았던가. 이렇게 죽느니 아버지 집에서 품군이 되는 편이 좋았다. 그렇게 돌아온 탕자를 아버지는 측은히 여겨 안고 입맞추며 잔치를 벌였다. 말할 것도 없이 그림을 그린 렘브란트는 위대하다. 마찬가지로 한 점의 그림을 통해 삶과 신앙에 대한 깊은 통찰을 끌어낸 나우웬도 위대하다. 나도 화가로서 렘브란트가 되든지 감상자로서 나우웬이 되고 싶다.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그림을 그리든지, 한 점의 그림 앞에서 인생을 바꾸는 감상자가 되든지 해야 한다.

가로 1.8미터, 세로 2.4미터의 큰 화폭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장면은 두 사람이 포옹하고 있는 모습이다. 한 노인이 거렁뱅이같은 사내를 두 손으로 어루만지고 있다. 거의 눈이 먼 아버지는 집 나갔다 돌아온 아들을 말없이 안아주고 있다. 아들은 남루한 옷차림에 겉옷도 걸치지 않은 벌거숭이 같은 모습이다. 그의 머리카락은 아무렇게나 깎여져 있고, 다 닳은 샌들이 벗겨져 드러난 발바닥은 부르트고 굳은 살이 박혀 있다. 온갖 풍상을 겪다 돌아온 작은 아들을 감싸 안은 아버지의 손에 한없이 따사로운 빛이 비추고 있다.

왼편에는 껴안고 있는 두사람에게 차가운 시선을 던지고 있는 인물이 서있다. 이 집의 맏아들이다. 그리고 중간에 앉아서 가슴에 손을 얹고 안타까운 표정으로 두 사람의 포옹을 지켜보고 있는 인물과 하녀인듯한 여자가 보인다.

헨리 나우웬은 에르미타주 미술관에서 이 작품의 장엄한 아름다움에 숨이 막혀 온 종일 이 그림을 떠날 수 없었다. 이 그림을 통해 자신의 삶을 해석했다. 나우웬이 대학교수의 일을 접고 지적 장애인들과 함께 사는 것은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두 팔을 향해 다가가는” 과정이었다. 그것은 구경꾼에서 주인공이 되는 일이었고, 회개를 가르치는 자리가 아닌 회개하는 죄인의 자리에 서는 것이었으며, 소중한 존재로 사랑받는 인간이 되는 과정이었다. 아버지의 품, 그곳은 “그토록 들어가기 원하면서도 두려워서 차마 발을 들여놓지 못했던 자리”였다.

“그토록 간절히 열망하고, 소원하고, 갈구하던 것들을 모두 받을 수 있는 곳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악착같이 붙들고 싶은 모든 것들을 놓아버려야 하는 자리였습니다.”(33쪽)

<탕자>

이 그림 앞에서 렘브란트의 고통에 찬 삶을 먼저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아들과 두 딸의 죽음을 봐야 했고 진심으로 사랑했던 아내 사스키아까지 앞세웠다. 어린 아들 티투스의 유모와 맺은 관계는 그를 더욱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뒤 이어 만난 여성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도 죽었다. 그러는 동안 화가로서의 명성도 수직으로 추락했고 재정적으로 파산지경에 이르렀다. 이 그림을 그릴 당시 렘브란트는 젊은 날의 찬란한 성취와 명성의 뒤안길에서 고통스럽고 좌절된 삶을 살고 있었다. 그것은 돌아온 탕자의 모습 그 자체였다.

또한 이 탕자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즉 그리스도의 모습이기도 하다. 예수는 하늘 아버지의 아들로서 모든 것을 가지고 ‘먼 지방’ 낯선 나라에 가서 자신을 비우고 인간이 되셨다. 죄인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주고 결국 십자가의 죽음에 다다른 예수는 ‘의로운 탕자’였다. 그는 상한 몸으로 모든 인류를 하늘 아버지의 품으로 이끌어 갔다.

그림은 우리 모두가 탕자이며 돌아갈 집이 있고 아버지가 계시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인정과 칭찬을 받기위해 삶을 허비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은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는 그림 속 아들의 모습 그것이다. 우리는 모두 “인간 존재의 근원에서 멀어진” 탕자이다. 세상의 헛된 욕망을 채우기 위해 하늘 아버지가 주신 것들로 허랑방탕하는 ‘영적인 가출자’이다. 그림 속 탕자가 비루한 순간에도 끝내 팔아치우지 않았던 ‘단검’은 자신이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신분임을 끝까지 붙들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우리도 허리춤에 달린 ‘단도’를 움켜쥐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탕자는 전 재산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인간 존재의 근원으로 되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돼지처럼 대접해주길 바라는 자신을 자각했을 때 비로소 스스로 돼지가 아니라 인간, 그것도 아버지의 아들임을 깨달았습니다.”(93쪽)

<큰아들>

큰아들은 망나니 같은 동생을 위해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이는 아버지가 못내 못마땅했다. 그는 늘 아버지 집에서 가사를 돌보아 왔으나 아버지와의 마음의 간격은 크고 깊었다. 동생의 귀향을 보고도 분노와 시기와 원망으로 가득했던 그 역시 ‘탈선한’ 존재였다. 큰아들의 탈선은 동생의 경우보다 더 분별하기 어렵고 본질적이다. 큰아들은 집에 있으면서 집을 나간 자였다.

그가 귀향하기 위해서는 더 멀고 어려운 길을 가야할지 모른다. 그래서일까. 지팡이를 잡고 있는 그의 오른손에 어둠이 깃들어 있다. 그는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용서와 사랑이 없는 성도의 모습과 겹쳐진다. 이미 믿는다는 사람에게 믿음의 길이 더 멀리 있다는 무서운 진실을 큰아들을 통해 깨닫게 된다.

<아버지>

집을 나가는 아들을 너무도 사랑했기에 말리지 못하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 아들이 집에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무작정 기다리며 애태우는 아버지, 눈물로 나날을 견디며 고통에 찬 삶을 사신 아버지…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오자 사죄할 틈도 주지 않고 용서하고 말았다. 아들이 돌아온 것만으로도 감격한 나머지 가장 성대한 잔치를 벌였다. 이 아버지는 고통으로 일그러진 탕자들을 아무 말없이 껴안는 예수 그리스도와 다름 아니다.

이야기 속 아버지는 차라리 어머니의 성정을 지녔다. 자세히 보면 아들의 어깨에 얹은 아버지의 오른손은 여성의 손처럼 보인다. 그러고 보니 아들은 흡사 자궁 속 태아의 모습이다. <탕자의 귀향>은 어머니의 자궁으로 회기하는, 즉 ‘존재의 근원’으로 회기하는 이야기다.

<탕자의 귀향>에서 대다수 감상자들은 자신의 존재를 무릎 꿇은 아들에게 투사한다. 또한 자신이 큰아들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에 직면한다. 결국 그림은 감상자를 아버지의 자리로 밀어 넣는다. 나우웬은 “아버지는 결국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이고, 내 여정의 종착점이며, 마지막 안식처” (219쪽)라고 말한다. 저자는 그림 속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이웃을 향해 우리의 두 손을 펼쳐 용서와 사랑과 치유의 초청을 해야 한다고 권면한다. 우리는 모두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 아버지가 되기까지 우리의 영적 귀향은 끝나지 않는다.

탕자의 귀향

출판사 리뷰

렘브란트의 영감 넘치는 그림과 헨리 나우웬의 깊은 통찰력이 어우러져 빚어낸 또 하나의 작품

“헨리 나우웬 영성 모던 클래식” 시리즈는 우리에게 탁월한 영적 유산을 남기고 떠난 헨리 나우웬(1932-1996)의 대표적인 저서 컬렉션이다. 여기에는 지금까지 출간되지 않았던 유작도 일부 포함되는데, 대표적인 것이 이 책의 후속편이라 할 수 있는 Home Tonight(포이에마 근간)이다.

『탕자의 귀향』은 나우웬의 영적 삶의 궤적을 잘 보여주는 책이자 그의 대표작이다. 신약성경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를 고스란히 화폭에 옮긴 렘브란트의 그림에서 영감을 얻은 헨리 나우웬은 작은아들의 방탕한 삶과 귀환, 큰아들의 깊은 상실감과 분노, 아버지의 용서와 환대로 이어지는 일련의 움직임을 깊이 파고든다. 성경적, 역사적, 심리적 맥락에서 작품을 분석한 그의 글은 모든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영적인 귀향길에 있음을 보여주는 한편 아들의 자리에서 아버지의 위치로 나아갈 것을 도전한다. 결국 그리스도인의 삶은 남루한 옷차림으로 무릎을 꿇고 있는 작은아들에게서 구부정하게 서 있는 아버지에게로, ‘축복을 받는 자리’에서 ‘은총을 베푸는 자리’로 나아가는 과정임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집을 떠나 여전히 방황하고 있는 이들에게, 그리고 과감하게 귀향을 결심했지만 익숙한 길과 안전한 경로를 찾지 못해 어려워하는 ‘아직 길 위에 있는’ 크리스천들에게 이 책은 넘치는 영감과 안전한 지침을 선사한다.

이 책은 국내에 동일한 제목으로 출간된 바 있지만 번역의 오류를 잡고 편집을 새롭게 하여 다시 출간한 것이다.

우연한 만남, 운명적 동행

성직자이자 대학 교수였던 헨리 나우웬이 렘브란트의 그림 ‘탕자의 귀향’을 처음으로 접했던 때는 1983년이다. 당시 그는 중앙아메리카에서 자행되고 있는 폭력과 전쟁을 종식시키지 위해 크리스천 공동체들이 무엇이든 힘닿는 대로 행동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미국 전역을 누비는 고단한 순회강연을 마치고 막 돌아왔을 즈음이었다. 프랑스 트로즐리에 있는, 지적 장애를 가진 이들에게 따듯한 보금자리를 제공하는 라르쉬(L’Arche) 공동체에서 몇 달 머물고 있던 중이었다. 하루는 공동체 안에 있던 친구의 사무실을 방문했다가 방문에 붙여놓은 커다란 포스터를 발견하게 되는데, 이것이 첫 만남이었다.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뜨거운 친밀감, 붉은 망토의 온화한 톤, 소년의 겉옷에서 반사되는 황금빛, 그리고 양쪽을 한꺼번에 휘감고 있는 신비로운 광채에 빨려들어 가는 느낌이었습니다”(p.13).

‘길고 긴 영혼의 순례’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3년 후, 러시아를 방문할 기회를 갖게 되면서 원작과 마주할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서 얼마 후, 나우웬은 교수직을 사임하고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진로를 선택했다. 하버드 대학교 교수직을 포기하고 지체장애자들의 공동체에 들어간 것이다. 『탕자의 귀향』은 1992년에 출간되었다. 생활의 터전을 옮기고 10년 후인 1996년, ‘탕자의 귀향’에 대한 텔레비전 특집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에르미타주 미술관을 방문할 준비를 하는 도중 심장마비로 그가 그토록 바랐던 ‘아버지의 품’에 안겼다. 그는 렘브란트를 하나님이 붙여준 평생 ‘길벗’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림을 통해 배우는 영성

그림은 헨리 나우웬에게 있어 위로와 용기를 공급받는 중요한 원천 가운데 하나였는데, 특히 빈센트 반 고흐와 렘브란트의 영향이 컸다.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향’은 그의 가장 내밀한 마음의 갈망, 즉 영적인 본향에 돌아가고자 하는 소망을 드러내준 작품이었다. 그는 오래도록 ‘탕자의 귀향’을 묵상했고, 이 그림을 통해 자신의 삶을 바라봤다. 에르미타주 미술관에서, 실물보다 크게 그린 거대한 ‘탕자의 귀향’ 그림 앞에서 몇 시간이고 앉아 있었던 나우웬은 햇빛의 각도에 따라 그림이 시시각각으로 바뀌는 모습을 지켜보며 그림 속 등장인물들의 세세한 부분까지 음미했다. 이제 각각의 인물이 담고 있는 의미들을 렘브란트와 자신의 삶을 투영시켜 정밀하게 해석해나간다.

자식이 자기 유산을 챙겨 집을 나가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역사적인 맥락에서 짚어내고, 작은아들의 낡은 샌들과 새 신발, 반지가 갖는 의미를 부각시키는가 하면, 아버지와 아들을 감싸고 있는 빛 그리고 아버지와 맏아들 사이의 공간이 갖는 의미, 아버지와 큰아들의 닮은 외적 요소들이 암시하는 바를 하나씩 탐색한다. 그림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뿐만 아니라 주변인들에 대한 관찰력, 각 인물들의 내면 심리 묘사, 아버지의 두 손이 서로 다르다는 것 등을 감지해내는 그의 예민한 감각, 그리고 등장인물의 얼굴 표정, 자세, 옷의 색감, 공간에 대한 그의 해석은 독자들에게 ‘탕자의 귀향’에 내포된 새로운 의미의 세계를 열어준다. 나아가 모든 인간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거대한 영적 전투’를 보게 하고, 팔을 활짝 벌리고 기다리시는 그분께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진짜 귀향’으로 초대한다.

아들의 신분 회복에서 아버지의 직분으로 가는 여정

이 책은 그림에 등장하는 세 사람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이것은 헨리 나우웬이 경험한 영적 여정의 단계들이기도 했다. 아버지의 품을 그리워하며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둘째아들에서 책임감을 가지고 착실하게 집을 지키고 있었던 첫째아들로, 그래서 질투와 분노, 완고한 태도, 무엇보다 교묘한 독선에 사로잡혔던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그러나 끝내 그림에 등장하는 아버지, 슬픔과 용서, 너그러운 마음으로 상징되는 인정 넘치는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는 소명을 받아들이는 자리에까지 이른다.

대부분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궁극적인 부르심이라고 생각하지만, 헨리 나우웬은 이보다 ‘더 큰 부르심’을 듣게 한다. 용서하고, 화해하며, 치유하고, 잔칫상을 내미는 두 손이 바로 우리의 손이어야 한다는 소명이다. 돌아온 자식들을 환영하며 잔치를 여는 아버지는 죄에 대하여 깊이 슬퍼할 수 있을 때, 진정으로 용서할 수 있을 때, 너그러운 마음을 품게 될 때 가능한 것임을 설득력 있게 들려준다. 나우웬은 여기까지 도달하지 못할 때 우리의 영적 여정은 종착점에 도착하지 못한 것이며 진정한 안식처 또한 찾지 못한 것이라고 못 박는다.

[이주향의 그림으로 읽는 철학](8) 렘브란트 ‘탕자의 귀환’

아버지의 부재

인간이 타인의 마음을 꿰뚫어보지 못해 불행해지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인간이 불행에 빠지는 건 ‘나’의 마음속 움직임을 주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의 아우렐리우스의 말입니다. 불행은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데서 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 것일까요?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는 아버지의 부재(不在)입니다. 아버지가 없다는 것,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 아버지가 없다는 것, 그것이 우리를 울지도 못하게, 외롭지도 못하게 하는 거 아십니까?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환’을 보았을 때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여기선 울어도 되는구나, 외롭다고 하소연할 수 있구나, 하는 느낌! 무엇보다도 걷잡을 수 없이 허물어진 아들의 영혼을 만져주는 아버지가 피로에 지친 아들의 생 전체를 따뜻하게 덥히고 있습니다. 아들에 대한 기다림으로 아예 눈이 먼 것 같은 무표정한 아버지의 따뜻한 손, 그 손에 몸을 맡긴 채 이제 평온을 찾은 듯 무릎을 꿇고 앉은 탕자, 탕자의 헤진 옷과 감출 수 없는 더러운 발바닥이 고된 방황의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그것은 나의 모습이었습니다. 더러는 체면 때문에, 더러는 생에 대한 긴장을 늦출 수 없어 외면하고 억눌러 왔던 남루한 내 영혼입니다. 나아갈 수도, 주저앉을 수도 없는 우리들의 영혼인 거지요.

알려졌듯 탕자는 실패한 아들입니다. 아버지에게 받을 유산을 미리 받아가지고 나가 모두 탕진하고 빈털터리 거지로 돌아온 초라한 자 아닙니까? 그러고 보면 실패하지 않는 게 생의 목적은 아닌가 봅니다. 더구나 아버지 곁에서 못마땅한 질시의 눈으로 탕자를 바라보는, 성실하기만 한 형의 싸늘한 눈길을 보면 반듯하게만 살아온 선한 삶이 오히려 위태로울 수 있겠구나, 싶기도 합니다.

탕자를 안아주는 아버지의 표정을 보십시오. 무엇보다도 저 눈을 보십시오. 그리움이 켜켜이 쌓인 자의 눈입니다. 과거를 규명하려 드는 냉정하고 싸늘한 눈이 아니라 기진맥진한 아들의 아픔 속으로 그저 스며들고자 하는 자의 포근한 눈이지요? 저런 눈을 가진 아버지가 있어야 기진맥진한 인생이 쉴 곳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아버지가 있어야 있는 그대로의 ‘나’의 모습이 부끄럽지 않을 것입니다.

자식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는 아버지가 많습니다. 왜 그것도 못하느냐고? 자식의 미래가 걱정되는 아버지는 성급하고 공격적입니다. 자식이 맘에 걸리는 아버지는 이래라저래라 간섭하면서 자식이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마다 야단치는 것으로 사랑을 대신합니다. 아버지는 자신들의 인생에서 두려워했던 것을 자식들에게 금지하는 거지요. 그런데 그럴수록 아버지는 자식들에게서 자신이 금지했던 것을 볼 것입니다. 그런 아버지들은 폭력적입니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아이들은 기를 펴지 못합니다. 주눅이 든 아들이 아버지의 기대에 미치기 위해 노력할수록 스스로에게는 오히려 파괴적이지요. 아버지가 있어 행복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있어 두려운 아들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 아들들은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고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남을 믿지 못합니다.

아버지는 굴종을 요구하는 지배자여서는 안됩니다. 아버지는 자식들이 자기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자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아버지가 갖춰야 할 가장 큰 능력은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기다려주는 자입니다. 저 탕자의 아버지는 바로 긍정적인 아버지의 원형입니다.

다시 한 번 탕자의 등에 얹힌 따뜻한 아버지의 손을 보십시오. 진짜로 신의 손길 같지 않습니까? 탕자가 자기 안의 눈물을 모두 토해내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저런 손길을 알아야 실패에 좌절하지 않고 다시 자기를 추스를 수 있습니다. 저런 품에 안겨봐야 생을 압니다. 생이란 잘못하지 않고 낭비하지 않는 게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방황하지 않는 것이 좋은 게 아니라는 것을. 생의 의미는 자기 자신을 긍정하는 데서 올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긍정하게 되기까지 생에는 지름길이 없습니다.

누구나 한번쯤 탕아가 됩니다. 세상의 아버지는 둘입니다. 탕아를 기다리는 아버지와 탕아를 버리는 아버지. 당신은 아버지가 있어 행복하셨습니까? 당신은 행복한 아버지이십니까?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향’ 앞에서의 묵상 4 : 숨은 탕자

늦었지만,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향>의 그림 속 탕자의 형을 살펴본다. 나는 에르미타쥐 박물관의 렘브란트 방에 걸린 <탕자의 귀향>의 아버지와 탕자의 모습을 보면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감동의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그림의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려 탕자의 형의 모습을 보았다. 나는 이 아버지의 맏아들을 ‘숨어 있는 진짜 탕자’라 규정하고 싶다. 그 이유는 사실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진짜 탕자가 이 맏아들이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15장의 여러 비유를 하면서 주님은 이 비유를 들어야 할 대상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누가복음 15장 1절을 보면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라고 했다. 이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리며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먹는다”(눅 15:2)라고 했고, 이에 주님은 이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이 비유의 말씀을 하신 것이다.

렘브란트가 그린 <탕자의 귀향>을 보면, 아버지의 맏아들인 형은 지팡이를 두 손으로 꼭 쥐고 꼿꼿하게, 그리고 무표정하게 서있다. 형의 이러한 모습은 아버지를 배신하고 집을 나갔던 동생이 실패자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취한 모습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모습이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에게 집에서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김으로 아들의 신분이 회복되었음을 보여주셨다.

그리고는 종들에게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고 했다. 맏아들은 밖에서 일하다가 집에 가까이 왔을 때 들려오는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접한 후 한 종에게 들은 소식을 듣고 크게 분노한다. 그는 아버지가 불합리하고, 불공평한 편애를 베푼다고 생각한 나머지 잔치에 들어가기를 거부하였다. 렘브란트는 이런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사실 인간적으로만 생각해 보면, 맏아들의 노함과 그가 하는 말 중에 틀린 말이 있는가?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탕자를 받아들이고, 잔치를 베풀면서 살진 송아지를 잡았다는 말을 들은 맏아들은 얼마나 큰 배신감이 몰려왔겠는가? 맏아들의 말에 의하면 아버지를 그 오랜 세월 동안 섬기면서 “염소 새끼라도 주어 잔치를 즐기게 한 적이 없던” 아버지가 탕자를 위해 베푸는 그 아낌 없는 사랑이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맏아들은 드러난 탕자인 둘째 아들을 거부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은 이 탕자를 받아들이는 아버지를 거부하는 것이다! 사실 아버지의 말에 의하면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라는 말씀에서 아버지의 모든 것이 맏아들의 것이었다. 그런데, 그는 아버지에 대한 오해를 철저히 하고 있었다. 잃어버린 자가 돌아올 때 모든 것을 포기하는 눈먼 사랑을 가진 아버지를 맏아들은 거부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비유의 초점은 사실 맏아들이다. 그는 아버지의 마음을 거부하고 있는 숨겨진 탕자였던 것이다. 온갖 자신만의 생각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비판하며, 결국은 아버지의 결정마저 거부하는 실질적인 탕자가 이 맏아들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숨겨진 탕자의 모습은 ‘레미제라블’에 나오는 자베르 경관의 모습과 너무나 유사하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빵 한 조각을 훔친 것으로 인해 무려 19년의 세월 동안 감옥에서 보내도록 하고, 장발장의 인생을 철저히 파괴하는 것이 ‘정의’라고 말하는 판사와 자베르 경관, 그리고 감옥에서 나온 장발장을 받아주지 않고 철저한 선입견으로 그를 배제하는 모습이 오늘 우리 시대의 모습과 너무나 비슷하지 않는가?

렘브란트는 그렸다. 아버지의 빨간 망토를 맏아들 역시 걸치고 있는 모습에서 아버지가 가진 모든 것을 맏아들이 가졌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다면, 맏아들은 아버지처럼 한없는 용서와 사랑으로 드러난 탕자를 받아들여야 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점에서 실패했다.

오늘 이 땅을 본다. 여기 저기서 지팡이를 두 손으로 꼭 쥐고 꼿꼿하고, 무표정하게 서서 아래를 향해 정죄하고 비난하는 모습을 가진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성경이 보여주는 자비하신 아버지의 모습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무조건 옳고,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은 철저하게 비판하는 모습이 이 땅에 가득하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처럼 교회와 세상의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들의 입에서 온갖 비난과 저주의 말이 쏟아져 나온다. 도저히 그리스도인이면 말할 수 없는 더러운 오물들을 막 쏟아낸다.

탕자는 이런 사람이 진짜 탕자이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이 땅에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진짜 탕자인 줄을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자신의 몸에 걸쳐진 빨간 망토를 벗어서 그래도 아버지께 돌아온 드러난 탕자를 덮어주고, 아버지처럼 그를 받아들이는 것일 것이다. 이때 숨겨진 진짜 탕자는 진정한 주님 안에서 자유와 행복을 누리는 참 아들이 될 것이다!

헨리 나우웬 저, ‘탕자의 귀향’을 읽고

아버지가 되는 여정.

헨리 나우웬 저, ‘탕자의 귀향’을 읽고.

나이 마흔이 넘어 뒤늦게 헨리 나우웬을 만났습니다. 내게 다가온 그는 풍성하면서도 깊은 영성의 소유자였습니다. 그가 진솔하고 가감없이 드러내는 내면의 연약한 부분을 통하여 저는 하나님을 조금 더 알고 조금 더 거짓없이 신뢰할 수 있었습니다.

수려한 필체에 빨려들어가면서도 그의 글을 읽고나서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비단 그의 진솔함 때문만은 아니었을 겁니다. 물론 그의 진솔함에 예의를 갖춰 저 역시 진솔함으로 화답하면서 제 안의 난잡한 자기애와 쫓기는듯한 무질서한 삶을 다시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저 역시 쉼이 필요했던 것이었지요. 그러나 그 진솔함보다는, 돌아온 탕자인 작은 아들과, 비록 집은 나가지 않았지만 역시나 집으로 돌아와야 할 큰 아들을 넘어, 두 아들을 똑같이 사랑으로 대하며 언제나 기꺼이 기다리시는 아버지가 되고자 마침내 마음을 다잡는 그의 의지가 저를 숙연하게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덕분에 저 역시 위로받고 사랑받는 아들의 입장을 넘어 위로를 베풀고 사랑을 베푸는 아버지가 되고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이란 어쩌면 아들보다는 아버지의 모습에 가깝다는 생각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헨리 나우웬이 렘브란트의 작품 ‘탕자의 귀향’을 우연히 보게 되면서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대학 교수이자 영성가로서 고된 일정을 소화해내야 했던 시절, 그는 그 그림과의 첫 만남에서부터 마음을 빼앗기고 맙니다. 그리고 그만 그 작품 속의 탕자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말지요. 돌아온 탕자가 지난날 자신의 모습과 같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는 탕자처럼 아버지의 품에 안기고 싶었습니다. 그 동안 비록 풍성한 의미가 가득했던 일들을 해내왔지만, 터무니없이 분주한 일상을 살아내야 했고, 그러면서 내면적으론 은밀하게 갈급함이 조금씩 쌓여갔던 것입니다. 그는 그 너머에 존재하는 영혼의 안식을 얻고 싶었습니다.

어느 날, 동료 덕에 러시아를 방문하게 됩니다. 거기엔 약 3년 전 자신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던 그 렘브란트 작품의 원본이 전시되고 있는 예르미타시 미술관이 있었습니다. 그는 기대에 잔뜩 부풀어 올랐습니다.

이윽고 그 작품을 직접 몇 시간이고 계속해서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을 때, 그는 자신을 가득 채워왔던 내밀한 마음의 갈망을 충족시키게 됩니다. 책에서 그는 그곳에 간 것이 진정한 귀향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고 기록할 만큼 그림에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하버드 대학 교수 자리를 내놓고, 지적 장애인들에게 따뜻한 보금자리를 제공하는 공동체 ‘라르쉬’ (‘방주’라는 의미)의 토론토 지점, ‘데이브레이크’에서 어색하지만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나서도 그는 늘 그 그림과 함께 했습니다. 그 그림은 예수님이 전해주신 이야기를 렘브란트가 그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 그림 한 장으로부터 헨리 나우웬은 깊은 통찰을 이끌어냅니다. 그 통찰은 복음의 정수가 집약되어 있다고 말할 정도로 오랜 시간 그 그림과 함께 했던 그만의 깊고도 깊은 묵상으로 말미암은 것이겠지요. 덕분에 저와 같은 독자는 이 책을 마주함으로써 그가 파놓은 깊은 우물에서 손쉽게 지혜를 길어다 마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책의 소재가 되어준 렘브란트의 작품은 그의 삶의 여정이 마무리되는 시점에 그려졌다고 합니다. 갖은 굴곡을 거치며 살아낸 삶의 종착역에서 그가 붓으로 담아낸 그 그림은 무르익은 인생의 원숙함이 그대로 녹아있는 작품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수년에 걸쳐 이 그림과 함께 하며 렘브란트의 삶을 흡수했으며 그가 그린 그림 속의 주요 인물 하나하나를 차례대로 흡수합니다. 책의 구조는 이러한 순서를 따르고 있지요. 그의 영적인 여정의 순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 번째로는, 집을 나갔다 마침내 돌아온 작은 아들이 되는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아마도 저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쉽게 공감하리라 생각합니다. 회심하면서 경험할 수 있는, 즉 자기자신의 모습을 비로소 집을 멀리 떠난 죄인의 모습과 같은 위치에 놓는 깨달음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공유하는 것일 테니까요. 저 역시 렘브란트의 그림이나 예수님의 이야기에서 저 자신을 그 누구보다도 항상 작은 아들의 위치에 대입시키곤 했습니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어쩌면 그것이 가장 편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두가 자신의 회심기를 이야기할 때면 자신이 얼마나 타락했었는지 얼마나 악했었는지 얼마나 자기밖에 몰랐었던지를 언급하며 낮아진 자존감을 자랑스럽게 얘기하곤 하지요. 그러나 그 깊은 은혜와 사랑으로 아버지께 받아들여졌음을 감사하기만 하고 거기서 멈춘다면 그 삶은 결코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닐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구원 티켓을 얻은 것에 있지 않고 실제로 삶을 하나님나라로 살아내는데 방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헨리 나우웬은 큰 아들과 자신이 놀랍도록 흡사하다는 사실을 우연찮게 발견하게 됩니다. 허랑방탕한 생활을 해본 적도 없고, 전통을 지키며 집을 지키며 살았지만, 실제로는 마치 작은 아들인 것처럼 살았던 자신을 돌아보게 된 것입니다. 질투와 분노, 과민하고 완고한 태도, 그리고 무엇보다 교묘한 독선을 간직한 채 살아온, 삶의 한 꺼풀 아래에 고스란히 존재했던 큰 아들의 모습을 자신의 삶에서 비로소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작은 아들이 큰 아들로 발전할 가능성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에게나 존재합니다. 처음엔 은혜에 감격하며 경건한 삶을 살겠다는 다짐을 하지만, 많은 경우 그것이 지속되지 못하게 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됩니다. 감사와 은혜로 시작한 경건이 사적인 유익이나 안위만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버리기 일쑤이지요. 어느덧 작은 아들은 꼿꼿하게 서서 자신의 자리를 크게 확보하려고 애쓰는 큰 아들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작은 아들은 큰 아들의 산을 넘어야 하는 숙제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헨리 나우웬이 이른 곳은 바로 아버지가 되는 여정입니다. 마흔을 넘기도록 이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를 설교나 여타 글에서 수십 번은 접했을 겁니다. 그러나 저자와 마찬가지로 저 역시 아버지가 되라는 부르심을 인지하게 된 건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그가 묵상하고 써놓은 이 책을 읽다보니 무릎을 탁 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받아들여지길 바라거나 받는 입장을 넘어 주기를 늘 기쁘게 고대하며 준비되어있고 또 실제로 줄 수 있는 입장으로의 발전과정이 곧 그리스도인의 삶의 여정 (성화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과 다를 바 없다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깨닫고 감사하며 겸손한 마음을 갖는 것을 넘어 일상에서 하나님나라를 살아낸다는 것은 작은 아들과 큰 아들을 넘어 아버지가 되는 여정과 같습니다. 정의와 공의를 행하며 구체적인 삶을 살아내는 것은 받는 입장만 고수해선 불가능하겠지요. 기꺼이 주려는 마음은 곧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씀도 사랑받기만 하려는 태도로는 지킬 수 없습니다.

회심하여 낮아진 자존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시기를 거쳐 그것이 교만과 위선으로 빠지지 않도록 늘 깨어있으면서, 비록 많이 가지지 않았지만 서로 나누며 약한 자들을 도우며 정의롭고 공의롭게 살아가는 것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지향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두 아버지가 되는 영적인 여정 어딘가에 위치해있는 것이지요.

제 안엔 여전히 작은 아들과 큰 아들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무너진 자존감을 자랑으로 여기는 모순적인 겸양을 보여주길 아직도 종종 즐기며, 제 눈에 비쳐진 상대적으로 방탕한 이들을 향한 비판적인 시선을 감출 수 없을 때도 부지기수입니다. 이제 헨리 나우웬 덕분에 많은 것들이 정리되는 기분입니다. 방향이 조금 더 뚜렷해졌습니다. 아버지가 되어가는 길에 위치해있는 저 자신을 봅니다. 조금 더 성숙한 신앙인이, 믿음을 행동으로 번역하며 일상을 살아내는 그리스도인이 되길 다시 한 번 다짐합니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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