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콜리니코프 | Mbti로 보는 고전문학 – 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 – 5분 해설 #1편 상위 179개 베스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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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죄와 벌’에 대해서 이해하기 쉽게 설명드리는 영상입니다.
이번 영상에서는 본격적인 내용 진행에 앞서서 배경이 되는 사전지식을 설명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즐겁게 감상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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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 나무위키:대문

주인공인 로지온 라스콜리니코프(Родион Раскольников)[1]가 살인을 함으로써 형사소설과 유사성을 띠지만, 살인 행위 자체보다는 그 살인을 행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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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10/1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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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죄와 벌』에 나타난 ‘죄’와 ‘벌’의 의미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1860년대 잡계급 지식인 세대를 대표하는 전형이다. 그는 작가 자신의 동시대의 사회적·정신적 부조리에 고통 받고 반항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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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kci.go.kr

Date Published: 12/2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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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자유냐 정의냐(석영중교수)

라스콜리니코프라는 대학생이 있었는데 매우 가난해서 학비 때문에 휴학한 상태였다. 그에게는 어머니와 여동생이 있었는데 가난해서 여동생 두냐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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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3/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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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살인을 저지른 청년의 최후 – 오마이뉴스 모바일

이 청년의 이름은 로지온 로마노비치 라스콜리니코프, 줄여서 ‘로쟈’라 불리는 인물이다(아래 라스콜리니코프). <죄와 벌>은 이 청년을 둘러싼 다양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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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2/1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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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콜리니코프와 오늘, 초인의 치외법권적 권능 | Redian – 레디앙

라스콜리니코프와 오늘, 초인의 치외법권적 권능. [소설로 읽는 한국 사회] 『죄와 벌』. By 여미애. 2018년 11월 19일 04:32 오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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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redian.org

Date Published: 8/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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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경계 뛰어넘은 ‘자만의 죄’ 고발 – 한겨레

라스콜리니코프가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는 동기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심리적 억압 때문이다. 도스토예프스키 연구가인 모출스키의 주장처럼, 상트페테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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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hani.co.kr

Date Published: 12/2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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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TI로 보는 고전문학 - 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 - 5분 해설 #1편
MBTI로 보는 고전문학 – 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 – 5분 해설 #1편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라스콜리니코프

  • Author: 닥터코코DR CO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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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0. 10. 18.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KBd5TgvfyDU

라스콜리니코프는 정의로웠나?

석영중의 맵핑 도스토옙스키 <27> 상트페테르부르크: 죄와 벌, 그리고 정의

우선 『죄와 벌』의 내용을 살펴보자. 라스콜리니코프는 잘생기고 똑똑한 청년이다. 법대에 다니다가 학비가 없어 얼마 전에 휴학했다. 시골에서 여동생과 함께 연금으로 근근이 살아가는 어머니가 부쳐주는 쥐꼬리만한 용돈으로 간신히 끼니를 해결한다. 방세는 몇 달이나 밀려 있다.

그가 거주하는 슬럼 지역에는 조그마한 전당포가 있는데, 인색하기로 악명 높은 노파가 주인이다. 노파는 빈곤에 찌든 서민들이 가져오는 자질구레한 물건에 푼돈을 쥐여주며 과도한 이자를 매긴다. 원금 상환이 하루만 늦어도 저당물은 처분해버린다. 평생 이런 식으로 빈민의 고혈을 빨아먹으며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어찌나 인색한지 하인 쓰는 돈이 아까워서 지적 장애인인 여동생을 노예처럼 부려먹는다.

젊고 착하고 똑똑한 사람들은 돈이 없어 죽어가고 있는데 이렇게 늙고 사악한 인간이 그 많은 돈을 움켜쥐고 있다는 게 말이 되는가? 노파를 죽이고 돈을 빼앗아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면 어떨까? “어쩌면 수백, 수천 명의 사람들이 올바른 길로 갈 수도 있고 수십 가구가 극빈과 분열, 파멸, 타락, 성병 치료원에서 구원받을 수도 있어. 이 모든 일이 노파의 돈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단 말이야.” 딱 한 사람, 그것도 사악하기 그지없는 인간을 제거하고 수백, 수천 명을 살릴 수 있다면 그 살인은 인류를 위해 눈감아 주어도 되지 않을까. 당시 대학생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사고 실험이다.

“이 공중에 떠도는 이상하고 불온한 생각”은 라스콜리니코프의 머릿속에서 뛰쳐나와 살인의 실행으로 돌진한다. 너무나도 사랑하는 여동생 두냐가 겪은 수난 때문이다. 어머니가 보낸 편지에 의하면 두냐는 부잣집 가정교사로 들어갔는데 변태성욕자인 주인 남자가 스토커 수준으로 추근거리는 바람에 곤욕을 치렀다. 간신히 최악의 상황을 모면한 두냐는 중년 변호사 루진과 약혼한다. 야비하고 인색한 인간이라는 걸 알지만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다. 간신히 입에 풀칠이나 하는 늙은 어머니와 학업을 중단한 오빠를 위해서 그녀는 자신을 희생하기로 결심한다.

책에서 읽은 이론, 무더운 날씨, 영양 부족 여기에 활활 타오르는 분노가 더해지면서 라스콜리니코프는 폭발한다. 두냐의 변태 고용주와 야비한 약혼자에 대한 증오가 전당포 노파에게 투사된다. 그는 하숙집 부엌에서 장작 패는 도끼를 훔쳐 품에 넣고 전당포에 간다. 물건을 잡히러 온 척하며 안으로 들어가 도끼를 마구 휘둘러 노파를 살해한다. 하필이면 이때 노파의 여동생이 들어와 유혈이 낭자한 살인 현장을 목격한다. 지적 장애인이지만 목격자는 어디까지나 목격자다. 라스콜리니코프는 비명을 지를 생각조차 못하고 멍하니 서서 바라보는 백치 여인의 머리를 도끼로 내리친다.

이후 라스콜리니코프는 예상치 못 했던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노파를 향해 폭발했던 증오가 이상하게도 그 자신을 향해 되돌아온다. 후회와는 다른 기이한 자괴감, 그리고 전 인류로부터 단절되었다는 섬뜩한 느낌에 짓눌러 폐인처럼 된다. “끝없는 고독감과 음울한 소외감이 갑자기 뚜렷하게 그의 영혼 속으로 파고 들어왔다.” 불안의 하중을 견디다 못해 그는 우연히 알게 된 마음씨 착한 매춘부 소냐를 찾아가 모든 것을 털어 놓는다. 독실한 그리스도교인 소냐는 ‘종교적 차원에서’ 그에게 자백을 종용한다. 처음부터 라스콜리니코프가 범인이라는 심증을 굳히고 있던 예심판사 포르피리는 ‘법적 차원에서’자수를 권유한다. “자수하세요. 그게 당신에게 유리합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살인죄로 형을 선고받고 시베리아 유형지로 이송된다. 소냐는 시베리아까지 그를 따라간다. “언제까지나, 그 어느 곳에서나 절대로 당신을 버리지 않을 거에요.” 시베리아에서 그는 진심으로 죄를 뉘우치고 새로운 삶에 눈을 뜬다.

범죄와 사법제도에 대한 지대한 관심

1860년대 러시아 사회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강도·살인·사기·성폭력 등 강력 범죄의 증가다. 무엇보다도 수도의 팽창이 원인이었다. 페테르부르크 인구는 1850년부터 1890년대 말까지 약 반세기 동안 50만에서 126만으로 크게 증가했다. 농노 해방과 함께 도시로 밀려든 유휴인력 덕분에 뒷골목에는 악취 풍기는 선술집과 매음굴과 싸구려 셋집과 전당포가 빼곡하게 들어찼다. 뒷골목 문화의 팽창과 더불어 범죄도 폭증했다.

도스토옙스키는 당대 독자들에게 잘 알려진 범죄 사건이나 범죄 관련 글을 소설로 들여왔다. ‘죄와 벌’이라는 제목은 1863년 ‘시간’ 지에 실린 포포프의 칼럼 ‘죄와 벌, 형법의 역사에 관한 소고’에서 차용해 왔다. 라스콜리니코프의 살인 또한 실제 살인 사건을 토대로 한다. 1865년 1월 ‘목소리’ 지는 가게 점원 치스토프가 노파 두 명을 도끼로 살해하고 금품을 강탈한 사건을 보도했다.

도스토옙스키는 재판 기록도 꼼꼼하게 살폈다. “재판 기록은 그 어떤 소설보다도 더 흥미롭다. 예술이 다루고자 하지 않는 인간 영혼의 어두운 측면을 조망해주기 때문이다.”

1864년 공포된 사법개혁은 범죄에 대한 도스토옙스키의 관심에 부채질을 했다. 차르 알렉산드르 2세의 ‘대개혁’ 과제 중 하나인 사법개혁은 낙후된 러시아 법 제도를 뜯어고쳐 “정의와 자비가 지배하는 법정”을 조성하고 “모두가 인권을 향유하는 시민 사회”를 이룩하는 것이 목표였다. 사법권과 행정권의 완전한 분리, 재판 절차 공개, 구두주의, 대심주의가 개혁의 세부내용이었다.

도스토옙스키는 쌍수를 들어 개혁을 환영했고, 개혁 과정에 비상한 관심을 기울였다. 수시로 법정을 방문하고, 유명한 재판을 참관하고, 열심히 공판 속기록을 읽었다. 체포·투옥·심문·형 집행을 모두 거친 노련한 ‘전과자’로서, 그는 당대 그 어떤 소설가보다 자세하게 범죄와 사법제도를 소설에 반영시켰다. 라스콜리니코프가 법학도이고 여동생의 약혼자가 변호사라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정의 구현에 진정 필요한 것은 용서와 사랑

사법개혁의 추이에 주목하는 동안 도스토옙스키는 정의의 문제를 성찰했다. 가난한 사람들, 소외당한 사람들, “학대받고 모욕받은 사람들”에 대한 연민에 법과 정의의 차원이 더해졌다. 『죄와 벌』을 시작으로 쏟아져 나온 일련의 대작들에서 그가 제기하는 가장 근원적인 질문 중의 하나는 “정의란 무엇인가”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이 질문에 직접적인 답은 제시하지 않는다. 정의라는 단어조차 많이 언급하지 않는다. 그는 정의를 분석하고 논의하는 대신 다각도에서 정의를 ‘보여준다’. 상식적으로 정의는 의롭고 공정한 것을 의미한다. 공적인 영역에서 정의는 분배와 처벌을 수반한다. 공정하다는 것은 물질적인 나눔을 배제할 수 없으며, 의롭다는 것은 악에 대한 처벌을 간과할 수 없다. 이 모든 나눔과 처벌은 어느 정도 양적인 계산을 피할 수 없다. 라스콜리니코프의 살인은 단적인 예다. “한 마리의 벌레 같은 전당포 노파를 죽이고 돈을 빼앗아 빈곤에 처한 백 명, 천 명의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 그들을 구해줄 수 있다면 그 살인은 정당화될 수 있지 않을까.”

이 한 문장에 도스토옙스키는 분배와 처벌과 계산 모두를 담아냈다. “1대 100”(한 마리 대 백 명)의 계산에 입각해서 악당(벌레 같은 노파)을 처벌하고 재화를 분배한다(돈을 빼앗아 나누어 준다)는 셈법이다. 주인공의 살인에는 여러 가지 동기가 작동하지만 최소한 정의에 대한 갈증도 그 중 하나다. 그렇다면 라스콜리니코프의 살인은 정의로운 것인가? 정의를 구현했는가? 이제까지 내가 가르쳐온 학생들 중 정의가 구현되었다고 대답한 학생은 단 한 명도 없다.

도스토옙스키는 만에 하나 그런 독자가 나올까봐 그랬던지 이중 살인이라는 복선을 깔아놓는다. 사악한 노파를 처벌하러 간 라스콜리니코프는 노파뿐 아니라 노파의 여동생까지 죽이게 된다. 여동생은 짓밟힌 사람들을 대표한다. 한없이 착하고 가난하고 무기력하고 불쌍하다. 지적 장애를 타고 나 언니한테 부림을 당하며 심지어 동네 한량들한테 수시로 성폭행까지 당한다. 바로 그런 사람을 위해서 라스콜리니코프는 도끼를 집어든 것이지만, 살인 과정에서 그 사람까지 죽이고 말았다. “타격은 정확하게 두개골에 가해졌다. 도끼의 날은 금방 윗이마를 지나 거의 정수리까지 그녀의 머리를 쪼개버렸다.” 웬만한 호러 무비 뺨치게 잔인한 장면이다. 정의가 무엇인지 딱 부러지게 대답할 수 없는 독자라 할지라도 이것이 정의가 아니라는데 공감할 것이다.

이중 살인 덕분에 도스토옙스키의 메시지는 분명해진다. 처벌과 분배는 정의 실현의 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분노는 정의를 촉발시킬 수 있지만 정의 자체는 아니다. 도스토옙스키는 훗날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정의를 완성시키는 것은 용서와 화해와 사랑이라는 사상을 발전시킨다. 라스콜리니코프의 이론은 바로 그것, 용서와 사랑을 결여하기 때문에 정의가 될 수 없는 것이다.

프랑스 철학자 시몬 베유의 지적은 이 점에서 도스토옙스키의 사상을 계승한다. “정의에 헌신하는 사람들은 사랑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개인적으로 아무리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한다 해도 그렇게 해야 한다.” ●

고려대 노문과 교수.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자유, 도스토예프스키에게 배운다』등을 썼다.

도스토옙스키『죄와 벌』에 나타난 ‘죄’와 ‘벌’의 의미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1860년대 잡계급 지식인 세대를 대표하는 전형이다. 그는 작가 자신의 동시대의 사회적·정신적 부조리에 고통 받고 반항하는, ‘새로운’ 인간이자 시대의 표상으로 구상되었다. 극빈한 생활로 인해 그의 삶은 부정적 세계관과 무의미로 가득 차 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결코 단순한 허무주의적 공상가는 아니다. 그는 신을 부정하고 그 자리에 인간의 전능한 이성을 자리매김하는 깊은 철학적 특징을 보여주는 비범한 인물이다. 동시에 드높은 자긍심과 절대적 고독감, 슬픔을 느낄 수 있는 낭만적 인물이기도 하다. 라스콜리니코프의 범죄는 일반적인 범죄보다 훨씬 더 심오하다. 그는 단순히 한 인간을 살해한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범죄의 본질과 사회적 도덕을 규정해온 원칙을 살해한 것이다. 그의 사상은 인류를 비범인(非凡人)과 범인(凡人)이라는 두 가지 부류로 분류한다. 그리고 위대성이라는 모호한 기준 하에 전자에 의한 후자의 지배를 합리화한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자신이 벌인 살인이라는 ‘실험’의 합리성과 정당성을 주장하는 근거가 된다. “죄와 벌”이라는 작품 제목은 도스토옙스키 사상의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를 잘 드러내주고 있다. 여기서 ‘죄’라는 단어는 이미 ‘넘어서는 것’을 의미한다. 라스콜리니코프의 범죄의 본질은 바로 모든 경계와 규범, 그리고 도덕성을 넘어서는 것에 있다. 이로 인해 도스토옙스키 문학의 반(反)주인공의 중요한 모토인 “모든 것이 허용된다.” 이러한 ‘넘어서기’ 모티브는 『죄와 벌』의 거의 모든 등장인물들의 운명에서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이 모티브는 성격상 완전히 다른 특징을 갖는다. 어원적으로 ‘지시’, ‘충고’, ‘가르침’을 의미하는 ‘벌’ 역시 ‘죄’와 마찬가지로 복잡한 개념이다. 라스콜리니코프는 범죄를 저지른 후 무시무시한 도덕적 고통을 겪는다. 자신의 사상과 신념을 실행한 후 절대적 자유와 홀가분함을 느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간과한 것은 바로 자신에게 내재한 인간적 본성, 즉 양심의 가책이었던 것이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양심의 가책을 부정하며 전혀 뉘우침 없이 자신의 이론을 계속해서 신봉한다. 하지만 ‘경계를 넘어섬’이 귀착하는 곳은 평범한 살인자로서의 자신의 모습과 자신이 인류와 완전히 단절되었다는 극단적인 정신적 공허함일 뿐이다. 자각에 이르기 위해서는 고통스러운 분열을 거쳐야만 한다. 공식적인 진짜 형벌은 작품의 에필로그에서 시작된다. 이것이 라스콜리니코프에게는 완쾌이자 부활인 것이다. 구원은 외부로부터, 또 다른 자기인 타인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The protagonist of Crime and Punishment, Raskolinikov, epitomizes generations of Russian Intellectuals of the 1860s. He has been conceived as a ‘new’ man and a symbol of his time, as he endures and defies the social and mental absurdities of Dostoevsky’s contemporaries. His life of poverty has shaped his world view with nihilism and meaninglessness. However, Raskolinikov is not merely a nihilistic daydreamer. He is in fact an extraordinary character with a profound philosophical trait, who denies God to establish the omnipotent rationality of men instead. At the same time, he is a romantic character as he feels pride, absolute loneliness and sadness. Raskolinikov commits a crime deeper than common crimes. He did not merely murder a human being, but also the principle that defines the nature of crime and social morality. In his world view, mankind falls into two categories: the extraordinary man and the ordinary man. Raskolinikov rationalizes the former’s domination over the latter with the vague criterion of greatness and his theory serves to justify and legitimate the ‘experiment’ of the murder he has committed. The title ‘Crime and Punishment’ reveals one of the most important themes of Dostoevsky’s thoughts. Here, the word ‘crime’ already means ‘transgression’. The very nature of Raskolinikov’s crime lies in the transgression of all boundaries and norms, and morality. In that sense, “Everything is permitted” is to be understood as an important motto of Dostoevsky’s anti-hero. This central motif of ‘transgression’ can thus be found along the fate of almost all the characters of Crime and Punishment. However, it assumes different meanings for each of them. As for ‘punishment’, which means etymologically ‘instruction, advice, teaching’, it denotes a concept as complex as of ‘crime’. After perpetrating his crime, Raskolinikov is in the grip of a dreadful moral struggle. Thinking he could live in absolute freedom and solitude after putting into practice his thoughts and beliefs, he has overlooked the human nature intrinsic to himself, that is, the guilt of his conscience. Raskolinikov denies it and keeps advocating his theory with no sign of remorse. However, the ‘transgression’ only comes from his self-image as an ordinary murderer and his extreme hollowness that cuts him out of humanity. To reach self-consciousness he must go through several difficult phases. The real, official punishment begins in the epilogue, which means for Raskolinikov recovery and moral regeneration. His redemption comes from without, from another character who constitutes his alter ego.

2.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자유냐 정의냐(석영중교수)



죄와 벌(1867년 출간)

라스콜리니코프라는 대학생이 있었는데 매우 가난해서 학비 때문에 휴학한 상태였다.

그에게는 어머니와 여동생이 있었는데 가난해서 여동생 두냐는 선불을 받고 입주가정교사를 하게 된다.

그런데 그 집주인남자가 두냐에게 추파를 보내며 매우 추근대지만 선불을 받았기 때문에 그 집에서 나올 수가 없었다.

가까스로 문제가 해결되어 두냐는 그 집에서 나와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되는데 그 남편은 약간 나이가 많고 돈이 있는 남자였다.

아주 치사하고 비열한 인간인데 돈 때문에 결혼을 하려는 것이었다.

이와같은 사실을 어머니는 아들 라스콜리니코프에게 편지로 알려주는데 그는 아주 마음이 불편해한다.

게다가 그의 머릿속에는 이상한 생각이 하나 있는데 그가 사는 동네는 빈민굴이고 그곳에 전당포 노파고리대금업자가 있는데 사악하고 이만도 못한 노파를 죽이고 돈을 빼앗아서 백명의 선량한 학생들에게 쓰면 어떨까 그것은 인류를 위해서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있었다.

빈곤 그리고 정의감 가족의 재난 이런 것들이 합쳐져서 라스콜리니코프는 이상한 생각을 하다가 결국은 그 이념에 따라 살인을 저지르고 만다.

살인 후에 그는 고독과 부자유와 혐오감에 시달리고 있다가 우연히 술집에서 알게된 마르멜라도프라는 술주정뱅이의 딸인 매춘부 소냐와 알게 된다.

소냐에게 그는 자기 죄를 고백하고 예심판사인 폴피리가 살인범으로 라스콜리니코프를 지목하고 있던 차에 두 사람의 인도를 받아서 죄를 자백하고 시베리아로 유배를 가게 된다.

그리고 시베리아에서 진심으로 뉘우쳐 갱생하고 새사람이 된다는 내용이다.

죄와 벌을 정리하면 위와 같이 된다. 스토리는 그렇게 복잡하지 않지만 구성적으로 볼 때 짜임새가 있는 소설이다. 기본테마는 돈이다. 돈 때문에 두냐는 가정교사로 들어가고 돈 때문에 주인남자(스비드리가일로프)에게 고통을 받는다. 돈 때문에 소냐는 매춘부가 되고 돈 때문에 전당포 노파와 그의 여동생을 죽인다

그런데 죄와 벌뿐 아니라 도스토엡스키의 모든 소설의 3대요소는 돈과 살인과 치정이다. 대부분의 통속소설에는 이 세가지가 들어가야 재미가 있다. 그런데 왜 이런 세가지 요소를 가지고 소설을 썼을까 돈 때문이다(웃음) 도스토엡스키는 전업작가이기 때문에 돈을 벌어야 한다. 예를 들자면 톨스토이는 백작가문의 자제였고 영지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었다. 뚜르게네프도 마찬가지로 가문이 좋아서 영지에서 나오는 것으로 얼마든지 잘 살수 있었지만 글을 잘 써서 작가가 된 것이다. 다르다 도스토엡스키는 당장 글을 안쓰면 굶어죽는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원고와 생활은 긴밀한 관계이므로 팔리는 소설을 쓰기 위해 이 세가지 요소를 집어넣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팔리는 소설을 쓸려면 재미있게 써야 하고 멜로가 없으면 안팔리고 소설도 결국 상품일 수밖에 없다. 팔리는 소설을 쓸려면 소비자의 기호를 알아야 하는데 당시에는 인터넷이 없었고 신문밖에 없었으므로 도스토엡스키는 열렬한 광적 신문독자였다. 아무리 바뻐도 신문을 읽었고 사회면은 그의 영감의 원천이었다. 사회면에는 범죄사건이 나오는데 그는 범죄사건을 읽고 자기의 작품에 반영을 시켰다. 사실 죄와 벌도 그 당시 신문에 나온 살인사건에서 영감을 받아 쓴 것이다.

도스토엡스키는 자유를 끊임없이 탐구하면서 정의와 대립시킨다.

정의와 자유는 라스콜리니코프의 살인의 동기였던 것이다.

이것이 죄와 벌의 첫문장이다.

이 문장은 많은 작가들이 극찬한 소설의 완벽한 첫문장이라고 한다.

뭐가 이렇게 완벽한 첫문장일까?

여기에는 시간공간 인간 그리고 움직임이 있다.

걸어가고 옮겨가고 있는 것은 청년이 살인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방향이다.

이 움직임은 살인을 위해 미리 답사하러 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소설 전체로 보면 이 나아감은 청년이 자유를 향해 가는 첫걸음이었던 것이다.

작은 방 이것은 상당히 중요하다.

빈곤한 청년이 살고 있는 방은 아주 작은 방이기는 하지만 다른 면에서 보면 그의 왜곡된 심리를 가두고 있는 감옥이었던 것이다.

그는 이 감옥에서 나와서 걸음을 옮겨가고 있었는데 이 걸음을 옮겨가고 있다는 것은 다이너미즘이다.

정적인 것이 없고 범죄를 향해 걸어가고 있는 것같지만 이 때 자유를 향해 나아가는 첫걸음을 내딛고 있었던 것이다.

라스콜리니코프의 상황은 최악이다.

찌는듯한 여름 답답한 방에 있고 극빈상태에 있고 가난 때문에 가족이 해체될 상황이다.

그래서 살인이라는 것은 그에게 사적인 것과 이념적인 것 두 차원에서 자리잡게 된다.

돈의 부족은 주인공을 살인으로 몰고가는 1차적인 원인이다.

주인공은 살인을 통해 자유를 얻고자 한다.

돈의 부족 때문에 그는 자유가 없고 여동생도 모든 삶이 묶인다.

살인은 돈의 부족을 해결하여 자유를 획득하고자 하는 시작점이었다.

작은 방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은 돈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념의 차원에서도 돈의 부족은 살인의 동기가 된다.

1860년대 러시아의 수도 상태 페테르부르크는 도시화의 과정중에 있었다.

반세기만에 도시인구가 두배로 증가했다.

도시인구의 중가는 사회악과 빈민굴이 성립이 된다는 것이다.

왜냐면 빈부차가 너무 커서 그 당시 빈민굴에는 수많은 노숙자들과 행상인들 알코올 중독자들 그리고 매춘부 뚜쟁이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들은 뒷골목문화의 주역들이었다.

이 빈부의 차이는 두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했다.

이것을 본 라스콜리니코프의 눈에 들어온 돈의 부족은 모든 사회악의 근원이구나 하고 타개해야 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1860년대 러시아 신문에 난 사회문제는 몇가지가 있는데 도시빈민 알코올 중독 매춘 대기오염 이렇게 정리가 된다.

이것만 봐도 그 당시 도시빈민의 문제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알수가 있는 것이다.

사적인 차원과 이념차원에 있어서 살인의 동기와 목적을 체계적으로 살펴보자

이 두가지를 합해서 나타나는 첫 번째 살인의 동기는 초인사상이다.

니체도 초인을 이야기 했는데 니체는 죄와벌 이후의 사람이다.

니체의 초인사상에 영향을 받은 것은 결코 아니다.

이때의 초인사상은 나폴레옹3세에게 나온 사상인데 “인류는 초인과 범인으로 나뉘어진다 초인은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있고 모든 사람을 좌지우지할 수 있고 인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에게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고 해서 많은 논란을 가져왔다.

이 초인사상은 라스콜리니코프에게 있어서 심리적인 자유의 보장을 의미한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지금 이렇게 살고 있지만 초인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지않을까? 나는 초인아닌가? 그렇다면 나에게는 모든 것이 허용되지 않은가?

여기서 모든 것이라는 것은 매우 위험한 생각인데 여기에는 살인도 포함이 된다.

이 초인은 다른 말로 인신(人神)이라는 말로 바꿀 수 있다.

도스토엡스키는 인신이라는 말을 작품속에서 여러번 쓰고 있는데 인신이란 신이된 인간이란 뜻이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초인이며 모든 것이 허용되는 인간이며 인신인가 그것을 자기에게 묻고자 했고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의 살인에는 이념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이 얽혀져 있다.

살인사건은 심리적인 자유의 담보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이념도 섞여 있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은 공리주의 사상이다.

이 사상은 밴덤의 사상인데 인간의 도덕적인 목적은 행복이고 행복의 추구가 선의 대표적인 미덕이라고 봤다.

공리라는 것은 한 인간의 행복이고 인간은 사회의 구성원들이기 때문에 사회의 도덕적인 목적은 개인의 행복에 있다고 보는 것이 공리주의이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은 최근에 들어서 트롤리딜렘마로 표현이 되곤 한다.

이 트롤리 딜렘마( 鑛車問題 Trolley Problem )는 기차가 오고 있는데 한쪽에는 다섯사람이 있고 한 쪽에는 한 사람이 있다.

만약에 철도직원이 레버를 움직이지 않으면 다섯사람이 치어 죽게 되어 있고 레버를 움직이면 한 사람만 죽는데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나?

이것이 트롤리 딜렘마이다.

이것은 사실 순수한 사고실험이지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이 사고실험이 일리가 있는 것은 공리주의의 일정부분을 설명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트롤리딜렘마는 여러버젼이 있는데 심리나 윤리가 더해지면서 버전이 달라지기는 하지만 골자는 똑같은데 순수하게 산술적이라는 것이다.

공리주의에 따르면 직원은 레버를 움직여서 한명을 희생시키고 다섯사람을 살려야 한다.

라스콜리니코프가 노파를 죽인다는 것은 이 레버를 움직여서 한 사람을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정말 사악하고 이만도 못한 노파를 죽여서 그가 가진 돈을 가져다가 백명의 무고하고 선량한 사람을 구할 수 있다면 그것이 올바른 선택이라는 것이다.

과연 이것이 옳은 것인가?

라스콜리니코프는 이러한 산술에 입각한 살인을 저지르고 산술적인 이론에 의한 정의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이 산술적 정의는 어떠한 결과를 낳게 되는가?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유도 정의도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살인후의 라스콜리니코프의 심리

살인후에 그는 자유함을 얻고 싶었지만 자신에 대해 혐오감을 느낀다.

자신에 대한 혐오감 어머니에 대한 혐오감 동생에 대한 혐오감 주변 모든 사람들에 대한 혐오감을 느끼고 그리고 그 혐오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는데 이것은 죄의식과는 다른 것인데 그냥 혐오스럽기가 짝이 없는 것이다.

또 중요한 것은 부자유이다.

심리적은 자유를 위해서 나는 초인이다 모든 경계를 넘어서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입증하고 싶어서 살인을 저질렀지만 이상하게 부자유스러운 것이었다.

너무나 부자유해서 견딜수가 없었고 오히려 이 부자유가 빨리 끝났으면 하고 바랬다.‘

심지어 너무 부자유스러워서 빨리 잡혔으면 바라기까지 했는데 이것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상황인가?

거기다 더 심각한 심리적은 상황은 고독이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살인을 저지른 후에 모든 것으로부터 단절되었다는 느낌을 지울수 없었다.

마치 무언가가 내 안에서 도려내어진 것같다고 말한다.

내가 도려내어져서 세상으로부터 단절되어졌다는 그 느낌이 라스콜리니코프를 미치도록 힘들게 만들었다.

그는 살인을 저지름으로써 인간의 내면에 있는 어떤 것을 상실해버린 것이다.

이 내적 기반을 상실해버렸기 때문에 그는 세상과 소통할 수 없고 세상과 관계를 가질 수 없으므로 그는 단절되어버리는 것이다.

오늘 낮에 아는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과 이상하게 죄악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죄와 벌에서 죄는 무엇인지 알겠는데 그러면 벌은 무엇이냐 하고 질문을 했다.

시베리아로 유배가는 것이 벌이냐 그건 아닐 거다라고 말했다.

벌이라고 하는 것은 그가 시베리아로 유배가기전에 이미 주어지고 있는데 이 단절이라는 것 이 고독이라는 것이 그에게 내려진 벌이 되는 것이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시베리아로 가기 전까지 단 한 번도 기쁜 적이 없었는데 살인전에도 살인후에도 기쁜 적이 한번도 없었고 그 누구도 사랑한 적이 없었다.

도스토엡스키는 까라마조프형제들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

지옥이란 무엇인가? 지옥이란 어떤 공간이 아니다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니다.

지옥이란 사랑할 수 없는 상태다 이런 말을 했다.

라스콜리니코프한테 해당되는 것이 그것이다. 사랑할 수 상태 아무도 사랑할 수 없고 아무도 소통할 수 없고 아무런 기쁨도 없는 상태 이것이 그에게 내려진 벌인 것이다.

게다가 이 금품의 행방이 묘연하다.

라스콜리니코프는 돈 때문에 살인했고 돈을 훔쳤는데 모든 것에 혐오스럽고 모든 것이 싫어지고 이 금품을 보기만해도 싫고 그래서 이 금품을 가져다가 땅에다 파묻어버린다.

이 금품을 가지고서 백명을 구한다는 의도였는데 그런데 그런 의도조차도 아무의미가 없고 그냥 그 돈이 싫은 것이다.

그래서 그 훔친 금품을 파묻어 버린다.

그는 살인이후에 자유를 얻기는커녕 자유를 잃어버리고 꽁꽁 묶여버린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면 정의는 실현을 했는가 아니다 정의도 실현하지 못했다.

도스토엡스키는 산술적인 정의의 모순을 보여주기 위해서 라스콜리니코프의 이중살인을 보여준 것이다.

정의의 좌절

라스콜리니코프는 노파를 도끼로 살해하고 우연이 노파의 집에 들른 여동생을 도끼로 쳐죽인다.

여동생은 리자베타인데 백치이다.

러시아에서는 이런 백치를 가리켜서 바보성자라고 부른다.

정말 티없이 순수하고 맑고 어떤 때는 간질병자이기도 하고 어떤 때는 거지이기도 하고 그런데 백치끼가 있어서 바보성자 거룩한 바보라고 하는데

라스콜리니코프는 리자베따가 밖에 나간줄 알고 왔는데 이 사람이 갑자기 들어온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해 목격자인데 그는 아무 상관없는 백치까지 죽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라스콜리니코프의 살인은 이중살인이 되는 것이다.

라스콜리키코프의 이중살인은 공리주의식 정의에 대한 도스토엡스키의 대답이다.

바보성자(유로지비)는 겸손과 수난의 상징이다.

러시아 그리스도교에만 독보적으로 존재하는 것인데 이 사람들은 사회에 하층민이고 핍박받고 있고 특히 히 이 소설에서는 노파에게 핍박을 받고 있는 존재로 그려지고 있다.

죽도록 일만하고 언니에게 욕만 먹고 그리고 받는 것도 없이 그렇게 사는 사람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러니까 라스콜리니코프는 이렇게 노파를 죽여서 노파에게 고통을 당하는 리자베따같은 사람을 구제하려고 했던 것인데 노파와 함께 구제의 대상이 되는 사람도 죽여버리는 꼴이 된 것이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정의를 실현하려다가 정의의 대상까지 죽이게 된 것이다.

왜 하필이면 살인의 도구가 도끼였을까?

매우 끔찍하다.

라스콜리니코프의 살인을 끔찍하게 확대하기 위해 이 도끼를 사용했을 수도 있겠지만 도끼는 매우매우 중요한 살인의 도구이다.

러시아문화를 통털어서 가장 중요한 문화의 도구는 도끼이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살림이 우거져서 농부가 산에 가서 도끼로 나무를 해다가 오두막집을 지었다.

또 나무를 해서 성당도 지었고 나무로 성화상도 만들었다.

옛날 러시아 농가에 가서 문을 열고 들어가면 정면에 도끼가 있고 성상화가 걸려있다.

러시아문화사에 가장 알려진 책의 제목이 도끼와 성상이다.

그만큼 러시아에서는 도끼와 성상은 같이 간다.

그런데 라스콜리니코프는 그 중요한 도끼를 가지고 살인을 저지른 것이다.

도끼를 가지고 성상을 만들기는커녕 성상을 파괴해버린 것이다.

라스콜리니코프에 의미가 있다.

라스콜(raskol)은 17세기 러시아에서 일어났던 종교대분열을 가리킨다.

이때 러시아는 구교와 신교로 나뉘어지는데 구교신자들은 별것도 아닌 사소한 전례상의 문제를 가지고 구교를 고집한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를 분립화교도라고 불렀는데 라스콜이라고 하는 것은 분리를 의미한다.

이 분립화교도들은 그 사소한 전례들을 지키기 위해서 불가마도 불사한다 그래서 화형에 처해졌다.

그래서 이 라스콜리키코프라는 이름은 이념을 위해서 불가마라도 불사한다는 몰입도 나쁜 의미에서의 몰입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다른 의미에서 인류로부터 분리된 인물이다 하는 뜻이다.

도스토엡스키는 소설에서 주인공이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

그래서 다른 이름에도 다 의미가 있는데 가령 라스콜리니코프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쏘냐라는 이름에는 성스러운 지혜라는 의미가 들어있다.

그러면 자유도 잃어버리고 정의도 실현하는데 실패한 이 주인공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가.

이 주인공은 어떻게 자유를 찾아가는가

자유를 잃어버린 벌로 그냥 끝나는 것인가 아니다.

이 소설은 처음에 라스콜리니코프가 작은 방에서 나올때부터 자유를 향한 여정은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면 그 여정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 대목에서 라스콜리니코프가 회개하냐 잘못을 뉘우치냐 절대 아니다.

여기서도 라스콜리니코프가 소냐의 말을 따르는 것은 힘들기 때문에 부자유스러운 것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자기가 초인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서 화가 나기 때문이지 진심으로 뉘우심은 없었다.

자유를 향하여

소냐에게 고백함으로써 라스콜리니코프의 자유를 향한 발걸음은 속도를 내게 된다.

실제로 자유를 향한 라스콜리니코프의 여정은 감옥으로 가는 여정과 중첩이 된다.

현실에서는 감옥으로 가는 과정이지만 라스콜리니코프에게는 자유로 가는 여정인데 그게 단계적으로 이루어진다.

처음에는 고백을 해야 한다.

일단은 소냐에게 고백을 했다.

소냐는 그를 향하여 나쁜 사람 악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고 불쌍한 사람이라고 한다.

이 말은 이미 라스콜리니코프는 벌을 받고 있는 불쌍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소냐는 경찰서에 가서 자백하라고 하지 않고 거리로 나가서 광장에 나가서 무릎을 꿇고 사람을 죽였습니다라고 고백을 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경찰서에 가서 자백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다.,

사람들과 관계를 회복하라는 이야기이다.

대지에 무릎을 꿇으라는 것 사거리에 나가서 사람들에게 고백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도려내어졌던 부분을 회복을 하고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 다음이 넘어서기 넘어가기의 문제인데 죄는 러시아말로 Prestuplenie 프레스투플레니라고 하는데 그 뜻은 오버스텝인데 선을 넘어선다 즉 윤리나 도덕에서 절대로 넘어서는 안되는 선을 넘어선다는 뜻인데 라스콜리니코프는 선을 넘어섰다.

방에서 나와서 문지방을 넘어서서 그는 죄를 짓는 쪽으로 간다.

이제는 두 번째 넘어서기를 해야 하는데 죄와 죄가 아닌 것을 가르는 경계의 선을 넘어서야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공간적인 이동이 불가피하게 되는 것이다.

넘어서기 도스토엡스키는 이 넘어서기 오버스텝을 공간화로 보여주기 위해서 라스콜리니코프의 움직임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작은 방에서 거리로 나오고 거리에서 광장으로 가고 광장에서 시베리아로 가는 쪽으로 이어지게 된다.

라스콜리니코프의 방은 괭장히 작은데 관처럼 작은 방 새장처럼 작은방 감옥같이 작은방 이렇게 묘사하고 있는데 이 방에서 일단 나와야 한다.

이 방은 자아가 된다.

자아에서 나와서 거리로 나와야 되고 확트인 공간인 시베리아로 가야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구심원적으로 자아인 방에서 나오고 거리고 나오고 시베리아로 가야되는데 그러면 라스콜리니코프는 시베리아로 가서 넘어선 상태냐 그렇지 않다.

시베리아로 간 후에도 그는 하나도 뉘우치지 않는다.

자기가 초인이 아닌 것만 화가 나고 억울할 뿐이다.

라스콜리니코프가 시베리아로 갔을 때 소냐가 따라왔지만 다른 수인들하고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의 눈에 비친 수인들은 그저 혐오스럽고 증오스러울 뿐이다.

그는 아무도 섞이지도 않고 아무도 사랑하지도 않고 소냐도 귀챦아하고 달라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시베리아로 가서도 라스콜리니코프의 마음의 상태는 이런 상태로 표현이 된다.

감방안에 갇힌 라스콜리니코프는 어느날 문든 강이 있는데 그 강건너를 보면서 우연히 뜻하지 않게 가슴이 트임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때 강건너라는 것은 넘어서기에 대한 공간적인 표상이 된다.

그 부분을 한번 읽어보기로 하는데 이 부분이 에필로그이다.

비로소 이제 에필로그에 와서야 라스콜리니코프의 자유를 향한 여정이 어느정도 마무리가 된다.

그것은 강건너를 바라볼 때 일어난 것이다.

강가 그곳에는 자유가 있었다.

감옥안의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사람들 이제 다른 눈으로 보기시작하는 것이다,.

시간도 달라지고 공간도 달라지고 시간이 멈춰버린 것같다.

뻬]째르크에서는 그냥 지속적으로 시간이 움직이고 빡빡할 정도로 살고 있었지만 이제 시간도 달라지고 공간도 달라지고 가장 중요한 것은 여기에는 뭐가 편안한 것이 흐른다는 점이다.

노랫소리- 라스콜리니코프가 노래한 적이 한번도 없는데 얼마나 달라졌는지 모른다.

노랫소리를 들은 적도 없었다.

아무 것도 없었다 어떻게 그렇게 피폐한 삶을 살수 있을까 할 정도였다.

그러다가 강 건너라는 것을 보면서 그에게 변화가 일어나는데 갑자기 소냐에게 사랑을 느끼게 되고 감정을 느끼게 된다.

이제 비로소 사랑이라는 말이 나오고 사랑과 더불어 기쁨이 나오고 있다.

소설 전체를 걸쳐서 라스콜리니코프에게 넘치는 기쁨이 있었다.

이 때 이 환희라는 것은 돈으로도 살수 없고 그 어떤 것으로도 살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강건너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와도 같은 것 시간이 멈춰버린 것같은 공간에서의 기쁨같은 것이다.

그리고 라스콜리니코프의 마지막은 희망으로 시작된다,

이중살인을 저지른 청년의 최후

큰사진보기 ▲ 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 ⓒ 문예출판사 관련사진보기

한 남자가 있다. 그는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학부생의 신분으로 학술지에 자신의 논문을 투고할 정도의 지성인이다. 하지만 집을 떠나 수도(상트 페트르부르크)에서 생활하는 데에 경제적, 정신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 청년의 이름은 로지온 로마노비치 라스콜리니코프, 줄여서 ‘로쟈’라 불리는 인물이다(아래 라스콜리니코프).은 이 청년을 둘러싼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엮어낸 작품으로, 도스토예프스키의 4대 장편들 중 가장 먼저 쓰인 작품이자 세계인들에게 제일 널리 읽히고 있는 책이다. 줄거리는 복잡하지 않다.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가 지은 ‘죄’, 그리고 그로 인해 받게 되는 ‘벌’에 대한 이야기를 기술해 놓았다.하지만 표면적으로 주변에서 쉽게 보이는 범죄인 ‘살인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빌려, 작가인 도스토예프스키가 실제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인간과 사회를 둘러싼 ‘본질적인 물음’이다. 그가 살아가던 19세기 유럽은 영웅주의와 공리주의가 득세하며 새로운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는 선전이 휘몰아치던 시대였다.도스토예프스키는 이 흐름에 강한 위기감을 느꼈고, 이를 이라는 작품을 통해 그려내어 당대의 러시아 청년들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남기고자 했던 것이다.라스콜리니코프는 작품의 초입부에서 바로 도끼를 휘두르는 살인을 저지른다. 살인의 대상이 된 인물은 평소 그가 고물을 맡기고 돈을 꾸어가던 전당포 노파 알료냐 이바노브나이다. 그리고 우연찮게 사건을 목격하게 된 그녀의 동생 리자베타 역시 희생양이 된다. 이렇게 라스콜리니코프는 두 노파를 찰나의 순간에 죽이며 ‘이중살인’의 죄를 저지르게 된다.평범한 대학생이던 그는 왜 살인을 저지르게 되었을까. 처음 독자에게 제시되는 이유는 경제적인 것이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시골에서 상경한 가난한 대학생으로, 당장 하숙비를 낼 돈도 생활에 사용할 돈도 여의치 않은 상황이다. 그렇기에 부유한 수전노인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여 그녀의 재산을 갈취하려 했다.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며 등장하는 창녀 ‘소냐’와의 대화 속에서, 경제적 사유 이면의 보다 철학적인 범행 동기가 드러난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소냐에게 고백한다. 전당포 노파는 자신만 알고 다른 사람에게 베풀 줄 모르는, 사회에 해만 되는 존재였다고. 그렇기에 그런 ‘벌레’라면 자신이 죽여도 되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아니, 오히려 그런 ‘이’와 같은 존재를 죽임으로써 자신의 존재 이유를 증명할 수 있다고 말한다.라스콜리니코프가 법학부에 재학 중 한 잡지에 투고한 논문의 제목은 였다. 그는 여기서 영웅에 대한 담론을 펼친다. 나폴레옹과 무함마드는 수 만명이 넘는 사람들을 죽이고도 처벌받거나 괴로워하기는커녕 역사적 위인으로 추앙받는다.그것은 그들이 사회에 ‘필요없는’ 존재를 죽이고도 당당할 수 있는 선택받은 인간, 즉 비(非)범인이었기 때문이다. 범죄를 저지르고 괴로워 한다면 그는 한낱 평범한 인간이지만, 범죄를 자신의 성공을 위한 발판으로 여길 줄 안다면 그는 영웅이라는 것이 라스콜리니코프가 마음 속 깊게 품고 있던 사상이었다.결국 그가 두 여인을 도끼로 살해한 것은, 겉으로는 돈을 훔치기 위해서 였으나 보다 실질적으로는 과연 자신은 그러한 특별한 존재가 맞는지 ‘시험’해 보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범행동기는 마을 사람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하였다. 오로지 살인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한 검사 포르피리만이 우연찮게 라스콜리니코프의 를 구해 읽은 것을 계기로 그를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눈여겨 보기 시작한다.그런데 라스콜리니코프는 범행 이전의 마음가짐과 달리 살인 이후부터 스스로를 압박해오는 심리 상태를 견뎌내지 못한다. 죄책감과 심적 혼란이 뒤섞여 그를 압박해오자 그는 수차례 정신적 착란과 더불어 육체적 무기력증과 현기증까지 경험한다.이는 라스콜리니코프를 점차 궁지로 몰고가는 원인이 된다. 자신이 나폴레옹과 같은 영웅임을 인정받고자 범행을 저질렀으나, 비웃던 일반 사람들처럼 그 자신도 살인에서 공포와 혼란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는 처음에는 그를 혼란스럽게 하지만, 이후 점차 자신이 선택받은 존재가 아니었음에 대한 절망감을 느끼게 된다.결국 라스콜리니코프는 소냐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죄를 제대로 인식하게 되고, 땅에 키스하며 그 죄를 대로에서 크게 소리친다. 그리고 직접 포르피리에게 모든 것을 자백하고 시베리아에 유형을 떠나는 형벌을 받아들인다.은 이처럼 소수의 선택된 자의 역사적 특권과 의무를 강조하는 헤겔식 ‘영웅주의’와 이들이 주축이 되어 더 나은 미래사회,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필요성이 떨어지는 일부 사람들의 희생(죽음)은 당연하다고 믿는 사회주의적 ‘공리주의’라는 두 사상이 가지고 있는 피폐함을 확연히 드러낸 작품이었다.19세기는 프랑스 대혁명을 기점으로 해 위와 같은 사상이 널리 퍼지던 시대였고, 특히 젊은 러시아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급진주의와 서구주의가 유행하고 있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런 흐름이 겉으로는 멋지고 올바른 것처럼 보일지라도, 실제로 삶에 적용될 경우 큰 도덕적 붕괴와 사회 혼란을 야기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싶었다.혹자는 라스콜리니코프를 ‘인신(人神)’ 사상을 가진 이라고 규정한다. 신을 거부하고 인간을 신의 자리에 두고자 하는 사상을 의미한다. 당시 싹을 틔우고 있던 공산주의와 궤를 같이한다. 인간이 신처럼 공동체를 원하는 방향으로 개조해 나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도스토예프스키는 보수주의자이자 러시아 정교의 독실한 신자였다. 그렇기에 그는 당대 러시아를 다시 신의 품으로 이끌고 싶었다. 과도하게 인간 중심 사상을 주장하는 것은, 그리고 그를 바탕으로 유토피아를 만들고자 하는 것은 현실에 맞지 않는 것이라고 우려하였다.결국 시간이 흘러 오늘날 우리는 그의 우려가 적중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인간을 신의 영역에 올리려는 시도가 다양한 분야에서 지속되고 있는 현실 또한 목격할 수 있다.어느 것이 정답인지 아직까지는 알 수 없겠지만, 그러한 시도와 실패, 그리고 재도전의 역사가 끊이지 않고 계속되는 한 은 러시아를 넘어 전 인류의 영원한 고전으로 남을 것으로 보인다.

라스콜리니코프와 오늘, 초인의 치외법권적 권능

‘이게 나라냐’라는 구호 아래 국정농단이란 피켓이 광장을 뒤덮었다. 최후의 상식선이 무너졌다는 생각이 170만 촛불로 현현했다. 촛불 정부를 세우고 책임자를 구속 수감한 지 2년. 다시금 양승태 사법 농단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재판도 거래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적폐를 청산해 줄 법이 적폐에 동원된 사회, 이쯤 되면 한국 사회를 적폐 사회로 불러도 무방하리라. 법의 한계인가. 인간 이성의 한계인가. 누가 ‘죄’를 짓고 누가 ‘벌’을 받는가. ‘법’ 없는 ‘법’의 시대에 실존적 곤경을 느낀다.

도포를 뒤집어쓴 그의 머리에 총탄이 박히기 직전, 시베리아 유형이 결정된다. 법이 생과 사를 가르고 철저한 우연에 의해 죽음이 지연되며 삶이 지속된다. 이제 그는 써야 한다. 농노들에게 맞아 죽는 아버지에 대해, 10년간의 유형 생활에 대해, 페테르부르크의 범죄, 사형과 사법제도에 대해,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옙스키는 법학을 전공하지 않은 당대 최고의 법학자였다.

『죄와 벌』(1865년)은 1865년 1월 모스크바에서 27세 청년이 두 여성을 죽인 사건을 모티브로 한다. 사법개혁을 주장했던 그는 합리적 이성이 손쉽게 ‘죄’를 묻고 ‘벌’을 선고하는 과정에 의구심을 갖는다. 농노제를 기반으로 한 제정 러시아는 서구의 자본주의 국가를 모방하며 계급 분화가 첨예해졌다. 그의 작품은 이성의 절대성을 회의하고 유럽 중심적 사고방식을 따라 하는 기존 법질서의 딜레마를 주 소재로 다뤘다. 어떤 면에서 그의 소설은 ‘법’이라는 ‘상징질서’에 대한 공박이며 언어로 위시되는 ‘법’의 심판 앞에 맞선 서사적 자기 진술이라 볼 수 있다. 특히 중범죄를 다루고 있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와 <죄와 벌>은 심문과 선고, 형벌이라는 사법 절차와 재판의 희생자들을 다루고 있다.

『죄와 벌』의 중심 갈등은 법을 전공한 청년이 고리대금업자 노파를 살해해 노파의 돈으로 수많은 사람을 구제한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추악한 ‘이’와 다름없는 인간을 제거해 다수를 이롭게 한다는 라스콜리니코프의 공리는 노파 살해로 이어진다. 라스콜리니코프는 범죄 이론에 관한 논문을 게재하고 ‘초인’ 사상을 내세워 실정법 밖으로 나가고자 한다. 하지만 결국 “나란 놈은 미학적인 이에 불과할 뿐, 더 이상 아무것도”(p. 496) 아님을 깨닫는 동시에 “자신이 살해된 ‘이’보다 훨씬 더 추악하고 더러운 놈일지 모른다”(p. 497)는 생각에 괴로워 자살과 자백의 기로에 선다.

노파는 약자들의 피를 수혈하여 모은 재산을 수도원에 기부해 구원을 받고자 했다 “범죄는 비정상적인 사회구조에 대한 저항이며 오직 그뿐” 슬럼화된 페테르부르크에서도 법은 강자 편이며 약자에겐 늘 위반의 가능성을 내포했다. 한국 사회에 흔한 ‘유전무죄’는 계급 갈등과 분화, 자본주의와 권력의 결탁 속에서 법은 당대 권력 유지에 도구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5.16 쿠데타와 군부독재는 ‘법을 내세운 법의 중단 상태’였다. 군주의 비상상태 발령 하에 지배세력의 변수에 따라 법의 쓸모가 사후적으로 구성되었다. 오랜 시간 언어의 헤게모니를 쥔 자들은 법의 상징폭력을 설계했다. 한국의 근현대사 저변에 깔린 법의 공백은, 일상적 사회적 의미의 이데올로기 속에 부조리라는 질병으로 지금까지 전유되었다.

양승태 국정농단이 폭로되었음에도 언론과 국회는 미온적이었다. 오랫동안 법이라는 상징적 폭력 앞에 영문 모르게 호명 당한 주체가 무산자, 노동자라는 계급적 약자였기 때문이다.

상식이 작동하지 않는 세계에서 해석의 권한을 가진 자는 그들만의 상식을 상정하고 실체 없는 풍문을 유포한다. 양승태 대법원 산하의 전략가들은 ‘정부 운영에 기여한 판결’을 자료화하고 대통령에게 실질적인 상고법원의 통제권을 쥐여줄 재판 거래가 가능함을 어필하기 위해 98건의 문건을 작성한다.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국 사회의 법의 수행력이 권력의 사용처에 있음을 재확인시킨 사건이다.

자본과 권력의 공모관계에 합류한 법관은 라스콜리니코프가 끝내 되지 못했던 ‘초인’이 된다. 쌍용차 노동자와 KTX 승무원 노동자, 전교조, 강제징용 피해자, 국가폭력 피해자, 중소상공인, 그리고 강제 해산당한 진보정당의 의원 사건을 비롯해 수많은 사건, 사안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수십 년간의 호소를 일거에 짓밟았다.

1865년 러시아 사회에서도 주체를 호명하는 법의 부름 앞에 ‘유전무죄’는 통용되었다. 폭력을 통해 자기 이론을 입증하려고 했던 라스콜리니코프는 결국 심리적 파탄에 이른다. 필연적 죄가 발생했고 형법상 체포가 지연될 때, 그는 죄의식이라는 질병에 시달린다. 이는 벌의 지연 자체가 비로소 진짜 ‘벌’임을 상징한다. 위대한 법학자를 꿈꿨던 그는 ‘몽상’에 사로잡혀 고립되다 센냐의 거리로 나왔지만, 결국 그가 세상을 향해 내민 한 발은 ‘플레소토 플레네’. 러시아어로 ‘한 발을 내딛다’라는 뜻을 지닌 ‘죄’였다. 사는 것 자체가 형벌인 계급적 약자에게 실존 자체가 죄인 셈이다.

이성과 정신이 튼튼하고 강한 자가 그들의 지배자라는 걸 알겠어! 많은 것을 감행할 수 있는자, 그가 그들 사이에서는 옳은 거야. 보다 많은 것에 침을 뱉을 수 있는 자, 그가 그들 사이에서 입법자이며, 제일 많은 것을 감행할 수 있는 자, 그가 제일 옳은 거야! – 『죄와벌 2』 (p. 260)

기울어진 세상에서 ‘옳음’을 입증하는 행위 또한 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불평등한 세상에 마지막 보루인 법은 주체의 외부에 있으며, 비상식과의 타협 만이 내부에 있다. 하여 언어를 지배하는 이들에 의해 역사는 흘러왔다. 죄 없는 이의 죄도 ‘있게 한’ 초인의 치외법권적 권능은 사람들 사이에 정의의 가능성을 폐기하고 더불어 최후의 정의에 대한 희망마저 꺾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8년 형을 선고받고 시베리아 유형을 떠난다. 고통의 터널을 지나왔기에 구원이 기다리리라 믿지만, 작품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혹자들은 마지막 6부가 <죄와 벌>의 오류였다고 한다. 하지만 도스토옙스키는 되묻는다. 속죄를 통해 갱생할 수 있는가? 고통만이 자기 구원의 필수적 도정인가? 소설가의 질문은 죄와 벌의 간극에 처한 라스콜리니코프로 육화된다.

그리하여 에필로그는 필요하다. 시베리아행과 고통 속에서 전혀 변하지 않은 오만한 인간을 독자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구원의 가능성이 유예된 자리에 “변증법 대신 삶이 도래했다”(p. 265)라는 고백만 남는다.

라스콜리니코프를 시베리아까지 이끈 것은 이데올로기, 이론, 신이 아닌 소냐였다. “모든 것을 내주고…… 온순하고 조용한 눈으로 바라 본”(p. 497) 소냐는 “정녕 죄스러운 것”(p. 507)은 “과연 하나의 악을 통해 수천, 수만 개의 선을 행하고 나아가 ‘공동의 행복’이 보장되는 유토피아”(p. 508)란 어디에도 없고, 불평등은 인류 전체의 죄이며 그것을 함께 짊어질 누군가 곁에 있다는 메시지를 준다.

죄형 법정주의가 무화된 거짓 상식의 세계, ‘파기’의 권력을 쥔 자가 재편하는 사회 질서가 풍문이 아닌 사실이 되어버린 시대에 위선의 법정에 맞선 위반자만이 법이 종용하는 거짓 앞에 묵비권으로 저항할 수 있다.

양승태 사법 농단의 심부에는 사법부를 단단한 결속으로 묶어 둘 할당된 부정이 예비되어 있었다. 혹여 대법원에 이의를 제기하는 자를 사전에 단속하면서 일사불란한 관료조직을 기획했고, 이를 통솔하는 대법원장의 직권을 남용해 거래에 나서려고 했다.

사실 모든 농단의 변수는 인간이었다. 진실을 재현하고 증언하는 통제 밖의 인간, 말할 수 없을 때 말하고자 하는 미약한 인간만이 권력의 정점에서 재판도 거래할 수 있는 초인을 저지할 수 있다.

진실을 밝히는 데 무능하고 취약한 법은 이제 자기 처벌이 필요하다. 이에 목격자 스스로 진실의 입법자로 나서야 한다. 차라리 고통이 구원의 길로 이어진다는 도스토옙스키의 전언이 맞는다면, 오랫동안 이 세계를 지탱해 온 거짓 법정에 서서, 무죄를 증명해야만 하는 기만적 자유를 짊어진 이들에게 진실을 되찾아 줄 때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 험난한 노정에 함께 해줄 소냐가 필요하다. 구원은 그런 연대에 있는지도 모른다.

인간의 경계 뛰어넘은 ‘자만의 죄’ 고발

김용규의 문학 속 철학산책

도스토예프스키의 을 통해서 본

‘죄’와 ‘벌’의 의미①

1849년 12월 22일, 러시아 세묘노프스키 광장에서는 사형이 집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황제의 특사가 내려 사형 직전의 한 청년이 살아났다. 그는 시베리아에 있는 수용소로 보내져 4년간 혹독한 강제노동을 했다. 간질발작이 시작된 것도 이때부터였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의 날들이 지나갔다. 하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청년이 가장 참기 어려웠던 것은 자신의 신념이 무너져 내리는 것이었다.

수용소에 갇히기 전, 청년은 무신론적 사회주의자과 어울렸다. 그들과 함께 황제를 모독한 죄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런데 수용소 생활을 하면서 생각이 변했다. 왠지 사회개혁을 위해 무릎을 세우고 일어서는 혁명가들보다 쓰러진 자들을 일으키려고 허리를 굽히는 사람들이 더 선하게 여겨졌다. 이성과 과학을 숭배하는 합리적 지식인들보다 그리스도를 숭배하는 바보 같은 민중들이 더 지혜롭게 생각되었다. 그는 그 이유를 스스로 알지 못했다.

그런데 청년은 소설가였다. 그래서 남은 생애동안 바로 이 문제, 오직 이 문제와 싸우며 글을 썼다. 그 결과 위대한 작가가 되었다. 청년의 이름이 도스토예프스키이고, 바로 그 문제를 다룬 첫 장편소설이 이다.

이제부터 ‘죄’와 ‘벌’ 둘로 나누어 살펴볼 이 작품의 줄거리는 매우 단순하다. 상트페테르부르그에 사는 법학생 라스콜리니코프가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고, 우연히 알게 된 창녀 소냐의 권고를 받아 자수하게 된다는 게 전부다. 그런데도 이 작품이 불후의 명작이 된 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심리학자들마저 격찬할 만큼 뛰어나게 인간의 심리를 그려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인간에게 죄와 벌이 과연 무엇인가를 신학자들마저 경탄할 만큼 심오하게 파헤쳐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우선 죄를 보자. 라스콜리니코프는 죄인이다. 이견 있을 수 없다. 하지만 그가 왜 죄인인가? 사람을 죽였기 때문이라고? 아니다. 바로 여기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생각은 달랐다. 그리고 이 다른 생각이 이 작품을 위대하게 만들었다. 그는 라스콜리니코프가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기 이전부터 이미 죄인이었다고 생각했다. 무슨 소리인가 보자.

라스콜리니코프가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는 동기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심리적 억압 때문이다. 도스토예프스키 연구가인 모출스키의 주장처럼, 상트페테르부르그의 무더운 날씨, 어머니와 여동생마저 돌보지 못하는 가난한 자신의 처지가 분명 그를 심리적으로 억압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을까? 아니다. 더 중요한 동기가 따로 있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전당포 노파가 나쁜 방법으로 모은 재산을 자신이 인류를 위해 봉사하게끔 학비로 사용하거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분배하는 것이 사회정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와 같이 들은 들이 지켜야 하는 법률을 위반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니고 있다고도 생각했다. 솔로몬과 마호메트, 그리고 나폴레옹을 예로 들어 자기를 정당화했다. 이들이 그랬듯이 새로운 사회와 법률을 위해서는 낡은 것들을 파괴해야만 하는데, 희생이 불가피하다면 그것이 당연히 허용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라스콜리니코프는 한 점 죄의식조차 없이 전당포 노파와 그녀의 여동생을 도끼로 살해했다. ‘초인사상’으로 일컬어지는 이런 생각을 도스토예프스키는 “공기 중에 유유히 떠다니는 이상하고 온전치 못한 사상”이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인간이 이런 생각을 갖는 것 자체가 ‘범죄 이전의 죄’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 사실인즉 을 썼다.

그는 ‘범죄 이전의 죄’라는 개념을 기독교 종파인 러시아 정교에서 얻었다. 에 서 아담은 뱀이 선악과를 따먹으면 ‘하나님같이’ 된다고 해서 그것을 따먹었다. 그리고 죄인이 되어 낙원에서 쫓겨났다. 원인은 “하나님같이 되리라”였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인간이 신처럼 되려고 자신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을 ‘자만’이라고 부른다. 자만이 곧 ‘범죄 이전의 죄’다. 라스콜리니코프가 진 죄가 바로 이것이다.

에서 ‘죄’라는 의미로 사용된 러시아어 ‘prestuplenie’는 본래 ‘경계를 뛰어넘다’라는 뜻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단어를 ‘법률의 경계를 뛰어넘다’라는 뜻이 아니라, ‘인간의 경계를 뛰어넘다’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인간이 자신의 경계를 뛰어넘는 경우 그의 죄에는 죄의식이 없다. 그의 이성이 모든 것을 스스로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19세기 말,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의 경계를 넘어서는 인간’의 이 무참한 죄를 라스콜리니코프라는 인물을 통해 우리에게 고발하고 또 경고했다. 그런데 돌아보자. 우리가 그로부터 과연 무엇인가 배웠는가를. 20세기 들어 수백만 명을 학살한 독일 나치나 러시아 공산당이 어땠는가를. 그리고 생각해보자. 21세기인 오늘날에는 이처럼 인간의 경계를 넘어서는 일이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를. “공기 중에 유유히 떠다니는 이상하고 온전치 못한 사상”이 없는가를. 한번 생각해보자. 김용규/자유저술가,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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