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원 의 비유 | 우리는 지금까지 포도원 품꾼 비유를 오해했다. / 하나님 나라 정의는 무엇인가? 상위 115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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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 윤리의 두 축은 사랑과 정의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사랑(은혜)에 대해선 강조를 많이 하였지만, 정의는 외면해온게 사실입니다. 이제라도 복음에서 말하는 정의의 의미를 되새겨 실천해야 할 때입니다.
#비유 #정의 #은혜 #사랑 #하나님나라
참고도서
Blomberg L. Craig, Interpreting the Parables(비유해석학), 김기찬 옮김, 생명의 말씀사, 1996
Ellul Jacques, On Freedom, Love, and Power(자유, 사랑, 능력에 관하여), 전의우 옮김, 비아토르, 2017
Jeremias Joachim, Die Gleichnisse Jesu(예수의 비유), 허혁 옮김, 분도출판사, 1988
Bailey E. Kenneth, Jesus Thought Middle Eastern Eyes(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 박규태 옮김, 새물결플러스, 2016
Stegemann, Ekkehard W., Urchristliche Sozialgeschichte (초기 그리스도교의 사회사), 손성현, 김판임 옮김, 도서출판 동연, 2012
Wright N. Thomas, Matthew for Everyone(part2)(모든 사람을 위한 마태복음2), 양혜원 옮김, IVP, 2010
김학철, 정의롭고 선한 포도원 주인의 비유, 신약논단 23(4), 2016. 12. P895-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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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원 품꾼의 비유(마 20:1-16)와 구원의 이해

주를 좇는 자의 보상을 설명하신 예수님에 대해 기록한 마태는, 그것과 관련된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말씀하신 예수님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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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onhd.net

Date Published: 5/1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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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다 비유 : 포도원 품꾼 이야기>

‘포도원 품꾼의 비유’는 ‘천국은 마치 …과 같으니'(The Kingdom of God is like…)의 전형적인 형태를 띠고 있는 일련의 비유들 가운데 하나로 등장한다. 마태는 자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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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aladin.co.kr

Date Published: 4/1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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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용 목사의 ‘복음 설교’] 포도원의 주인과 품꾼 비유(1)

그 후 예수님은 이 대답이 충분하지 않다고 느꼈는지 부연 설명을 하신 게 오늘의 비유이다. 이 비유의 대략은 이렇다. 어느 포도원 주인이 일꾼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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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kmib.co.kr

Date Published: 5/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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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포도원 비유

마가복음 12장에는 포도원 비유가 나옵니다.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고 농부들에게 맡기고 타국에 갔고 때가 되어 포도원의 소출을 받고자 종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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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elphis.or.kr

Date Published: 11/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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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다 비유3- 포도원 품꾼 이야기 – 두란노서원

22살때부터 하나님을 믿기 시작한 나는 성경을 읽으며 마태복음의 포도원 품꾼 비유가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다. 12시간을 꼬박 일한 일꾼과 1시간 일한 일꾼에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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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duranno.com

Date Published: 7/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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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원 품꾼의 비유 (마 20:1-16) – 네이버 블로그

일찍 온 사람이나 늦게 온 사람이나 똑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다.”고 말합니다. 또한 주인은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하는 것이 옳지 못하느냐”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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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1/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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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까지 포도원 품꾼 비유를 오해했다. / 하나님 나라 정의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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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포도원 의 비유

  • Author: 로고스 커뮤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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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1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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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원 품꾼의 비유(마 20:1-16)와 구원의 이해

최세창 목사 / 1977년 감리교목사안수, 한국성서신학교 출강, 인천여신 출강, 협성대 출강, 훼이스신학대학원객원교수, *28년간의 1250여 주석대조연구로 신약 전권인 『최세창의 신약주석 시리즈』출판 *논문* “바울의 인간이해” “야고보서의 저자에 관한연구”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문제” “고용주와 고용인의 도리” “부부간의 도리” “부자간의 도리” “기도에 관한 성서적 개요” “서원기도에 관한 연구” “칭의에 관한 연구” “바울의 성 이해” “주석과 설교에 관한 소고” “히브리서의 저자 연구” 외 교계 잡지 연재 및 세미나 인도 다수

주를 좇는 자의 보상을 설명하신 예수님에 대해 기록한 마태는, 그것과 관련된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말씀하신 예수님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은 마태의 독특한 기사로 19:30의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에 대한 설명으로 볼 수 있다.

이 기사는 【1】“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주인과 같으니”로 시작된다. 원문의 첫 부분에는 가르(γάρ)가 있어서 앞 구절의 이유를 설명하는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천국”은 3:2의 주석을 보라.

“포도원”①과 관련해서 반즈(A. Barnes)는 “유대의 상당 부분이 포도의 문화에 젖어 있었다. 그러므로 기름지고 잘 경작된 장소를 가리키는 데 종종 포도원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이 관심을 갖고 가꾸시는 포도원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른 아침에”는 해뜨는 시간을 의미한다.“작업 시간은 태양이 비칠 때부터 별이 뜰 때까지 지속된다는 것을 랍비 문헌들에서 읽을 수 있으며, 시편 104:22, 23에서도 이것을 말하고 있다”(E. Schweizer).

“집주인”은 하나님을 의미한다.

집주인이 이른 아침에 나간 이유는 “큰 도시에는 일자리를 구하는 사람들이 오전 6시경에 모이곤 하기 때문이었다”(Eric F. Bishop).②

이른 아침에 나간 집주인이 품꾼들을 만나서 한 약속에 대해, 예수님은 【2】“저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라고 하셨다.

“한 데나리온”(δηναρίου)은 로마의 은화인데 품꾼의 하루 품삯, 또는 군인의 하루 급료에 해당되었다(10:29의 주석과 18:28의 주석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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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서와 주해서에서 인용할 경우 저자의 이름만 밝혔고, 같은 견해를 가진 학자들이 네 명 이하일 경우 본문의 괄호 속에 이름을 밝혔음.

1) 포도원(사 5:1, 3, 4, 5, 7, 27:2, 렘 12:10-)과 포도나무(시 80:8-19, 사 5:2, 6, 렘 2:21, 19:10, 겔 15:2-, 17:6-, 19:10-, 호 10:1)는 이스라엘로 비유되었다. 이러한 구절들은 이스라엘은 순수하고,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민족이라는 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락하여 멸망의 위기를 초래한 민족이라는 점을 서술하고 있다.

2) Eric F. Bishop, Jesus of Palestine(London: Lutter worth, 1955), 203, in R. Earle, 마태복음(비콘 성경 주석,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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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바이쳐(E. Schweizer)는 “정식 절차가 분명히 서술되어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정확하게 행해졌다는 것에 대해서 아무도 의심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얼마 후의 집주인의 행동에 대해, 예수님은 【3】“또 제 삼 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라고 하셨다.

“유대의 날은 해가 뜨는 오전 6시부터 시작됐고, 그 시간들은 오전 6시부터 오후 6시까지 계산되었는데, 오후 6시는 공식적으로 다음 날이 시작된 시간이었다”(W. Barclay). 그러므로 “제 삼 시”는 오전 9시경에 해당되는 것이다.

“장터”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여러 가지 상품을 팔고 사는 장소이다. 얼레(R. Earle)는 “장터(agora)는 중앙의 집회소인데 각 도시에 있었으며, 그 곳에서 어린아이들이 놀기도 하고(11:16), 사람들이 물건을 사기도 하며(agorazo는 사다), 법관들이 재판하기도 하고(행 16:19), 철학가들은 토론을 하기도 하였다(행 17:17).”③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사람들을 만나거나 일자리를 구하기에 좋은 곳이었다.

그러므로 “장터에 놀고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는 일하기 싫어서 놀고 섰는 사람들이 아니라, 일감을 줄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이 사실은 【4】“저희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저희가 가고”로 뒷받침된다.

그 집주인은 그들에게 특정한 품삯을 약속하는 대신에 “상당하게 주리라”, 즉 일한 만큼 보수를 주겠다는 약속을 했고, 약속을 들은 그들은 그 포도원으로 갔다.

그 후의 집주인의 같은 행동에 대해, 예수님은 【5】“제 육 시와 제 구 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라고 하셨다.

“제 육 시”는 정오쯤을 가리키고, “제 구 시”는 오후 3시경을 가리킨다.

집주인은 더 이상 같은 행동을 할 수 없을 것 같은 때에도 같은 행동을 하였다. 이 점에 대해, 예수님은 【6】“제 십일 시에도 나가 보니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7】“가로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섰느뇨 가로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가로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라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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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R. Earle, 마태복음(비콘 성경 주석,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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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십일 시”는 오후 5시경을 가리킨다. 이 시간에 고용되면, 일할 시간이 한 시간밖에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품꾼들이 그 날은 공치는 것으로 단정하고 있었을 것이다.

집주인은 그런 그들에게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섰느뇨”라고 물었고, 그들은 “품꾼으로 써 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는 그들에게 품삯을 정하지 않은 채, “포도원에 들어가라”라고 하였다. 이 품꾼들은 먼저 고용된 품꾼들보다 더 기뻐하고 감사했을 것이다.

일하는 시간이 끝나고 품삯을 지불할 때가 되었을 때에 집주인이 한 일에 대해, 예수님은 【8】“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라고 하셨다.

“저물매”는 오후 6시경을 가리킨다.

‘Red Vineyards at Arles’ (1888) by Vincent Van Gogh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의 “청지기”는 에피트로포(ἐπιτρόπῳ)이며 ‘관리인’, ‘청지기’(마 20:8), ‘장관’, ‘집사’ 등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이다.

집주인이자 “포도원 주인”은 “청지기에게” 모든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라고 하였다. 집주인의 지시는 품삯을 당일에 지불하라고 하는 신명기 24:15을 충실히 따른 것이다. 이때는 최후 심판을 의미하는 것이다(J. A. Bengel).

그런데 맨 나중에 온 품꾼들에게 지불된 품삯이 납득하기 어려웠다. 이 점에 대해, 예수님은 【9】“제 십일 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이라고 하셨다.

“제 십일 시” 곧 오후 5시경에 와서 한 시간 정도만 일한 품꾼들이 와서 하루 품삯인 한 데나리온씩을 받았다. 그들의 마음에 기쁨과 감사가 충만했을 것이다. 집주인은 한 시간 정도만 일한 품꾼들에게 일한 분량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는 대신에 사랑을 베풀어 준 것이다. 이 처사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사랑의 의지의 표현이다.

그들이 한 데나리온씩을 받는 것을 본, 먼저 온 품꾼들의 반응에 대해, 예수님은 【10】“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저희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라고 하셨다.

제 삼 시(오전 9시경)에 온 품꾼들과 제 육 시(12시경)에 온 품꾼들과 제 구 시(오후 3시경)에 온 품꾼들에 대한 언급은 없다.

“먼저 온 자들, 즉 이른 아침(오전 6시경)에 온 자들”은 한 데나리온을 받기로 한 약속을 알고 있었지만, 훨씬 적게 일한 품꾼들이 한 데나리온 받는 것을 보고는 그들보다 “더 받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들과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 받았다.

한 데나리온씩 받은, 먼저 온 자들의 행동에 대해, 예수님은 【11】“받은 후 집주인을 원망하여 가로되” 【12】“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라고 하셨다.

“원망하여”는 계속적인 행동을 나타내는 미완료 과거형인 에공귀존(ἐγόγγυζον)이며 ‘원망하다’, ‘불평하다’, ‘투덜대다’ 등을 의미한다.

포도원에 먼저 와서 약 열두 시간 동안 힘들게 일하면서 더위를 견딘 품꾼들이 원망한 이유는, 맨 나중에 와서 한 시간 정도밖에 일하지 않은 품꾼들과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 받았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먼저 온 품꾼들의 시기와 불평 또는 원망이 당연한 것 같다.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하면 그들의 불평과 원망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질 수 없다. 그 이유는 그들이 약속된 한 데나리온을 받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은 자기들처럼 가난한 품꾼들이 일이 없어 괴로운 마음으로 놀고 있을 때, 그것도 공치는 날로 여길 수밖에 없는 십일 시경(오후 5시경)에 그 품꾼들을 고용해 주고, 게다가 1 시간 정도밖에 일하지 않았는데도 하루 품삯인 한 데니리온을 준 집주인에 대해 감사한 마음과 존경심을 가졌어야 했다. 실상, 집주인의 처사는 잘못된 것이 아니라, 의로웠을 뿐만 아니라 사랑의 실천이었다.

이 점에 대해, 예수님은 【13】“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라고 하셨다.

집주인은 부당하게 투덜대며 원망하는 그 품꾼들 중의 한 사람을 “친구”라고 불렀다. 그리고 자신은 계약한 대로 이행했기 때문에 그에게 잘못한 것이 없다는 것을 밝혔다. 하나님께서는 약속 이행은 물론, 사랑으로 역사하신다. 그러한 “하나님을 부당하게 취급하는 것은 나쁘다. 그러나 더욱 나쁜 것은 자신이 하나님에 의해 부당한 취급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J. A. Bengel). 실상, 더 많은 시간을 일한 것이 더 많은 대우를 받을 필연적 조건은 아니다.

계속된 집주인의 말에 대해, 예수님은 【14】“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라고 하셨다.

집주인은 그 품꾼에게 정당한 그의 몫인 약속된 품삯이나 가지고 가라고 하면서, 나중에 온 품꾼들에게 그와 똑같은 품삯을 주는 것은 자신의 뜻이라고 하였다.

집주인은 더욱 강조하여 【15】“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라고 하였다.

주인이 자신의 것을 가지고 자신의 뜻대로 할 권한이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왜 가난한 품꾼들을 사랑한 선한 주인을 악하게 보느냐는 것이다.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는 정당한 주장이다.

피조물인 인간은 인간과 만물의 창조주인 선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소유로 자신의 뜻대로 하시는 일에 대해 감사함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특히, 구원과 믿는 사람들의 보상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유로운 사랑의 의지에 달린 것이다.

비유를 마치신 예수님의 결론적 말씀에 대해, 마태는 【16】“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라고 하였다. 이 구절은 19:30의 주석을 보라.

※ 출처: 최세창, 마태복음(서울: 글벗사, 2004, 1판 1쇄), pp. 524-529.

[이수용 목사의 ‘복음 설교’] 포도원의 주인과 품꾼 비유(1)

이 비유는 앞 장과 이어지는 내용이다. 앞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른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겠습니까”라고 묻는다. 이에 대한 답변으로 예수님은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마 19:30)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 후 예수님은 이 대답이 충분하지 않다고 느꼈는지 부연 설명을 하신 게 오늘의 비유이다.이 비유의 대략은 이렇다. 어느 포도원 주인이 일꾼을 구하러 아침 9시, 낮 2시, 낮 3시, 낮 5시에 나가서 일꾼을 데리고 왔다. 그런데 모두에게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주자 많이 일한 사람이 원망하는 일이 발생했다.이에 주인이 이것은 불공평한 것이 아니라 본래 처음에 약속한 것을 준 것이라며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는 베드로에게 한 말과 똑같은 얘기로 끝이 난다. 이때 예수님이 모든 것을 희생한 사람에 대한 보상으로 ‘천국’에 대해 설명하셨는데 그 대답이 조금 특이하다. 일반적으로는 천국의 비유를 ‘지역’으로 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인물(포도원 주인)’로 표현했다.(1절)그렇다면 그 주인의 마음, 주인의 의도를 이해하면 보상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은혜’이다. 왜 은혜인가. 1절을 보면 주인이 일꾼을 찾고 또 찾은 이유가 있다. 그것은 포도원의 일이 급해서도 아니고, 사람이 없어서 할 일을 못 해서도 아니다.주인이 일꾼을 찾은 이유는 단 하나, ‘포도원에 들여보내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포도원을 가꾸기 위함도, 포도를 수확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주인은 지금 집 나간 자녀를 찾듯이 일꾼을 찾아다니는데 그 이유는 단 하나, 일을 주기 위해서이다.이 주인의 마음을 이해하면 그가 왜 모두에게 한 데나리온씩을 주었는지 알 수 있다. 당시 한 데나리온은 성인의 하루 품삯이다. 그 돈이 있어야 가족이 하루를 버틸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주인의 관심은 일꾼이 포도원에서 일한 시간이 아니었다. 그 일꾼이 자신에게 부양된 가족을 돌보게 하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다.그것은 일을 마친 후 주인이 돈을 줄 때의 모습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주인은 처음 온 자부터 주지 않았다. 나중 온 사람들부터 주었다. 왜 그랬을까. 주인의 배려이다. 한 시간밖에 일하지 못한 사람은 마음이 심란했을 것이다. 이 저녁에 어디를 가서 나머지 돈을 채워야 하나 하는 걱정으로 마음이 복잡했을 것이다.그것을 주인은 너무나 잘 알았다. 더군다나 처음에 온 사람은 가격을 얘기했는데 나중에 온 사람은 얼마를 주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었다. 그로 인해 몹시 불안하고 초조해하고 있을 것이기에 그들에게 안심하라는 차원에서 먼저 불러서 넉넉한 일당을 지급했다.반면 일찍 와서 내가 주인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했다고 생각하는 일꾼은 감사가 없다. 약속한 대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작다고 느꼈다. 주인이 하루를 살게 해주었다는 은혜는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주인을 위해 무언가를 했다고 생각했다.지금 베드로는 정확히 이 먼저 온 일꾼 같다. 예수님이 처음 베드로를 불렀을 때는 주 앞에 엎드려 죄인이라고 고백했던 그가, 3년이 지난 지금은 예수님에게 보상을 요구한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신 비유가 바로 이것이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내가 주를 위해 무엇을 했다고 생각하는가. 그로 인해 스스로 대견스러운가. 이때 이 말씀을 기억하자. 하나님이 내가 쓸 만해서 부른 것이 아니라 온전히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였음을…. 그것을 기억할 때 원망과 불평 대신 감사로 내 삶이 채워지게 될 것이다.이수용 미국 버지니아 한몸교회 목사

(마가복음) 포도원 비유

마가복음 12장에는 포도원 비유가 나옵니다.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고 농부들에게 맡기고 타국에 갔고 때가 되어 포도원의 소출을 받고자 종을 보내니 때리고 죽이었기에 아들을 보내면 될 것이라 하여 아들을 보내었더니 그 마저도 죽였다는 내용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마태복음 21장과 누가복음 20장에도 나오는 유명한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다른 여느 비유에 비하여 쉽게 보입니다. 씨 뿌리는 비유와 같은 경우 제자들도 이해하지 못하여 예수님께서 별도로 풀이까지 해 주셨던 것에 비하면 이 비유는 듣고 있던 유대인들도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고 하는 것에서 쉬운 비유로 보입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우리는 영화의 스포일러, 즉 줄거리를 미리 알고 보면 내용이 쉽습니다. 그와 같이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요 메시아라는 것을 다 알고서 성경을 봅니다. 그래서 그것에 기초하여 성경을 보기만 해도 많은 부분이 이해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비유를 하실 그 당시의 사람들은 우선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라는 것조차 인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들었으니 이 비유는 상당히 어려운 비유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이것이 자신들에 대한 비유라는 것을 알아들었다는 것은 아주 놀라운 것입니다. 후에 언급하겠지만 오늘날 소위 신학을 했다는 사람들에 비하면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훨씬 더 뛰어난 사람들임이 분명합니다. 오늘날 신학을 공부한 사람들은 자신이 행동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려고 하면서도 그 행동이 기도나 성경 보는 것이라서 율법 신앙이 아니라고 무덤에 회칠하듯 착각하고 있으면서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을 비난할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포도원 비유는 단지 하나님께서 아들을 이 땅에 보냈는데 유대인들이 그 아들을 죽여 버렸다는 의미의 한정된 내용이 아닙니다. 또 종들이 포도원을 차지하려고 했다는 것과 같은 부연 설명도 어리석은 짓입니다. 나중에 포도원 주인이 왔을 때 항거도 하지 못하고 쫓겨날 정도의 존재들이 포도원을 차지할 심산이었다는 자체가 어리석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 포도원 비유에서 우리가 집중해서 보아야 할 것은 ‘왜 포도원인가?’ 하는 것과 ‘농부들은 왜 소출을 주지 않고 오히려 종과 아들을 죽였을까?’ 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난데없이 건축자의 버린 돌에 관한 말씀 인용이 이 포도원 비유에 왜 끼여 있을까?’ 하는 것이 더 궁금하고 의문스러운 것입니다. 혹시 이런 것에 대하여 설교를 들어 보셨습니까? 아마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이 비유의 참 뜻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알아들었지만 오늘날 신학을 했다는 사람들도 이것을 모릅니다. 모르니 설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포도나무는 예수님을 지칭하는 나무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나는 포도나무’라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포도라는 것은 또한 짓이겨지고 상할수록 더 가치가 올라가는 과일입니다. 포도주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포도원을 지은 포도원 주인은 포도를 소출로 얻겠다는 것이니 결국은 그리스도를 얻겠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신 것은 사람에게서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 아들의 성품인 그리스도의 본성이 나오는 것을 원하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따라서 포도원을 만들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셨다는 것을 비유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신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나오는 것을 바라심입니다. 이것에 대하여 바울 사도가 모든 만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오는 것이라고 말씀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을 만드신 본질적인 이유와 목적은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라는 형상을 가진 사람의 삶으로 표현되는 것을 보시고자 세상 곧 포도원을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포도원 주인이 농부에게 포도원을 맡기듯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에게 그 삶을 맡기신 것입니다. 여기서 신학자들이 말하는 ‘자유의지’가 있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자신의 선택에 의하여 하나님의 의를 자신의 의로 순종할 것인지 아니면 자기가 선악을 판단하며 살 것인지에 대하여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그 삶의 소출을 구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인생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성품을 표현한 것이 있는지를 물으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얼마나 지켰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얼마나 밥을 주었는지를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런데 그 포도원을 맡은 농부들이 그 소출을 구하러 보낸 종을 잡아서 때리고 죽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랬던 것은 포도원 주인이 구하는 소출과 그들이 생산한 것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을 설명하시기 위하여 건축자의 버린 돌이 성전 모퉁이 돌이 되었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농부 곧 사람들은 자기가 생각한 소출이 있었는데 주인이 다른 것을 구했다는 것입니다.

건축자가 볼 때는 전혀 쓸모없어서 버린 돌이 되었는데, 성전의 의와 가치로는 그 돌이 주춧돌과 같은 것이라는 말씀은 포도원 주인과 농부들이 소출에 대하여 가진 가치관이 달랐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하나님을 위하여 뭔가를 드리려 하지만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시간 맞추어 기도하는 정성, 새 돈으로 헌금하는 정성, 억지로 일어나서 봉사하는 것을 포도원의 소출로 여겼는데 포도원 주인은 그저 포도만 내어 놓으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절기를 지키고 금식하며 거룩한 행세를 하고 다니며 길에 서서 기도하고 성경을 쓰고 읽고 묵상하며 제사를 지내는 것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소출이라 여겼습니다. 그렇게 공로를 쌓는 가치관으로 보니 예수님이란 돌은 버리는 것이 마땅했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수고와 공로나 제사가 아니라 사람들이 옳다는 것에 의하여 죄인이 되고 종이 되어 섬기고 십자가에 달리는 것을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요 하나님 아들의 성품이며,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시고 사람에게 뜻하신 목적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금식하고 율법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기도하고(사실은 육신의 것을 구함) 성경보고(알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보고 공부하는 것)을 포도원의 소출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이 소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구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농부들은 그것을 구하러 온 종과 아들을 죽인 것입니다. 자기들이 이때껏 포도원 주인을 위하여 온 것을 가치 없는 것이라 하는 것을 참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의 가치관이 건축자와 성전의 안목과의 차이였음에도 말입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동일합니다. 교회에서 경건해야 하고, 예배는 사람들이 정한 격식에 따라 드려야 하며, 기도하고 성경 보는 것을 열심히 해야 사람이 하나님께 바라는 것을 잘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니라고, 하나님의 의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하면 단번에 ‘신학도 안 한 것이 어디?’라고 하거나 ‘네가 목사냐?’와 같은 반발을 합니다. 한 마디로 자신들이 이때까지 쌓은 공로가 무력화 되는 것에 크게 반발을 합니다. 소출을 구하는 종과 아들을 죽이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렇듯 이 포도원의 비유는 세상을 만드신 창세기에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일까지 모든 것이 들어 있는 놀라운 비유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그 명제를 문장으로 아는 것을 가지고 이 비유를 보니 알 것 같다고 쉽게 아는 듯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르는 것입니다. 해외 관광지 사진을 보고 아는 척 하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실 때 알아들은 유대인보다 절대적인 무지 상태인 것입니다.

이 비유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시고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면서 보여주신 하나님 아들의 모습이자 그리스도의 본성이 육신을 가진 인생에게 구하신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성경을 지켜 행하는 것으로 포도원의 소출을 삼으려 한다는 것을 비유하신 것입니다. 성경을 지켜 행한다고 하니 옛날 유대인들 이야기인줄로만 아는 사람들은 참으로 교만한 사람들입니다. 기도 많이 해야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는 그 말이 얼마나 공로주의적인 것인지 꿈에도 모를 것입니다. 바로 그런 소출을 내는 농부들은 그리스도의 본성을 구하는 하나님의 종과 아들을 죽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포도원 비유의 말씀인 것입니다.

포도원 품꾼의 비유 (마 20:1-16)

예수의 비유를 통해본 하나님 나라의 정치경제

주후 1세기 지중해 세계의 긴장(tensions)과 모순(ambivalnce)을 창조한 누가의 경제(economy)를 재구성함에 있다. 특별히 눅 15장의 “잃어버린 아들(Lost Son)”의 비유는 당시 유래를 찾아볼수 없는 아버지(paterfamilias)의 공간이동 및 경계횡단을 그리고 있는데, 그의 끊임없는 넘나들기는 외부와 내부, 방탕한 자녀와 의로운 자녀, 빈자와 부자의 구별을 드러내며, 동시에 그 같은 구별을 모호하게 한다. 그 결과, 전에는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던 이들이 찾아지고, 예외 없이 환영받으며, 살림(οἶκος)의 합당한 참여자로 부상한다. 이렇게 유도된 살림의 방식(οἰκονομία)은 당시 로마의 통치 아래 놓여 있는 백성을 위한 하나님 나라의 한 모델이 되어, 억압과 착취의 세계(οἰκουμένη) 속에서도 자유(liberation)와 변화(transformation)에의 꿈을 실현케 한다. 요컨대, 아버지의 내부와 외부를 넘나들며 맺는 아들들과의 상호 작용은 살림의 경계선을 허물며 당대 지중해 세계에 깊이 드리워 있는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강제로부터 놓임을 약속하는 것이다. 예수의 경제는 경제행위의 숙련(discipline)이나 그로 인한 소득(earnings)이 아닌 “모든 산”과 “모든계곡 의 경계를 평탄케 ” 하시는 하나님의 자비 속에 놓인 실제의 필요들과 실제의 공동체로부터 출범하고 있다. ​ 지중해 세계의 경제(oikonomia)는 세계(oikoumene) 내에 존재하는 살림(oikos)의 형태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신약성서는 살림(oikos)이 그 자체로 상속된 것이든, 혹은 그렇지 않든, 정식화된 규범(“this is the way things are or should be”)을 담지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한다. 본 논문은 특별히 누가의 오이코스 담화(oikos discourse)가 주후 1세기 지중해 세계를 향해 내어놓은 경제(oikonomia)의 도전을 고찰하고, 그 같은 도전이 당시 세계 속 호혜(reciprocity)의 망(network)에서 “타인(the other)”으로 배제되어 있던 하나님의 백성들(the People of God)에게 주었던 의미와 의의를 분석함에 목적을 둔다. 이 같은 목적은 당시 사회와 문화, 정치, 경제의 형성과 실제의 바탕 위에서,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성서본문과의 끊임없는 깊은 대화의 장으로 나아감을 의미한다.

마태복음 19장 마지막 부분에 “먼저 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자가 많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20장 초반에 “마치 천국은 이와 같다”라고 하시면서 계속해서 예수님께서 천국에 관한 비유를 말씀해 주십니다. 성경말씀의 비유 가운데 많은 부분이 천국에 관한 비유로 되어 있습니다.

이 비유의 배경을 보면 19장 16절 이하의 말씀에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이 사람은 부자였고, 젊은이였으며, 다른 성경말씀에는 관원이라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께 “우리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어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에게 하나님 나라에 있는 여러가지 계명들을 이야기해줍니다. 아마 십계명을 중심으로 말씀을 해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때 이 사람이 “내가 어려서부터 이것을 다 지켜서 행했습니다.”라고 자신있게 말합니다. 유대 사람들의 관례에 의하면 6살이 되면 교회당에 보내서 그 때부터 율법공부를 시작하게 합니다. 어릴 때부터 율법공부를 시작하고 지켰으니 이 사람은 자신있게 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 재물을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고 나서 나를 쫓으라.”는 말씀을 하시자 부자 청년은 돈이 많은고로 근심하면서 돌아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청년이 돌아간 다음에 제자들에게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어찌 그리 어려운지 약대가 바늘 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때 제자들 가운데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느냐는 논란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우리의 결과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런즉 무엇을 얻으리이까” 물었습니다. 재물을 많이 얻을 사람도 구원을 못 얻는다면 가난한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겠느냐는 질문이었다고 봅니다.

성경말씀을 통해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지만 재물에 의지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먼 사람들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영토를 상속하리라. 그러나 먼저 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자가 많으리라.”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해 주셨습니다. 베드로가 모든 것을 버린 것에 대해 어떤 도움을 받고 싶어할 때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20장에 있는 비유 말씀을 해주십니다. 이 본문을 해석하는 데 유의할 점이 몇 가지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해석하기 어려운 난해한 귀절이라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어떻게 해서 이른 아침에 온 사람과 마감하기 한 시간 전에 온 사람이 같은 품삯을 받을 수 있겠느냐는 불합리한 점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경제원칙을 설명하는 예수님의 비유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많은 학자들이 성경말씀을 합리적으로 해석 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우리들은 흔히 `세속화’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이 말은 “우리의 사고를 합리적으로 하는 것”을 뜻합니다. 세상에서는 합리적으로 되지 않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토툴리안이라는 학자는 “나는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고 말했습니다.

합리적인 것 같으면 믿음이 필요없을 것입니다. 불합리한 비유를 합리적으로 해석하기는 상당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18,19세기에 합리주의 운동이 많이 일어났는데 심지어는 성경말씀의 해석까지도 합리적으로 해야한다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 결과 오히려 잘못 해석한 예들이 빈번하게 있었습니다. 합리적인 해석의 하나는 “주인은 먼저 온 사람들에게 한 달란트 더 주려고 했었는데 일은 하지 않고 꾀만 부려서 한 달란트만 주었다.”고 합니다. 또 하나는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주었는데 일찍 온 사람들은 금으로 만든 것을 주었고, 늦게 온 사람은 동으로 만든 것을 주었다.”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옳은 해석 방법이 아닙니다. 이런 식으로 했다면 불평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말씀은 만족하지 않고 불평했다고 했습니다. 성경말씀을 볼 때에 본문이 뜻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벗어나서 지나치게 합리적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오히려 잘못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에 경제 상황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아주 절박한 상태였습니다. 장터에는 아침부터 품팔기 위해 기다리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먹고 살 만큼을 벌면 만족하는 경제적인 형편에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품삯을 벌지 못하면 굶어야 하는 비참한 현실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비유의 초점은 공정한 임금을 측정하는 경제학적인 원칙문제가 아니라 고용주이신 하나님의 절대 선과 은혜를 뜻하고 있는 말씀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 당시의 풍경을 보는 것 같은 비유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번째, 예수님의 마음은 일찍 온 자나 늦게 온 자나 동일한 일할 권리와 대가를 가진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유대지방은 포도를 따는 계절이 우리 나라와 비슷해서 9월 중순 전에 포도를 모두 딴다고 합니다. 유대 사람들은 우리 시간으로 아침 6시부터 오후 6시까지가 낮이며 이 시간에 일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른 아침에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을 하게 되었고 어떤 사람은 3시(우리 시간으로 오전 9시)에, 6시(정오)에, 9시(오후3시)에, 11시(오후5시)에 들어갔다고 말씀합니다. 그 당시의 노동시간은 일반적으로 10시간이라고 하는데 11시게 온 사람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차등있게 포도원에 들어왔지만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 품삯을 주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레위기 19장 13절에 “품꾼의 삯을 아침까지 밤새도록 네게 두지말라.”고 하신 이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주인이 그렇게 했다고 말합니다. 또한 보충 설명하는 말씀으로 신명기 24장 15절에 “그 품삯을 당일에 주고 해진 후까지 끌지 말라. 두렵건데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면 죄가 네게로 돌아갈까 하노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구약적인 말씀을 통해서 그 당시에는 해가 지기 전에 품삯을 지불하는 것이 상례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품삯을 받고나서 먼저 온 자들이 불평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 주인은 잘못한 것이 없다, 내가 너와의 약속을 지켰다. 일찍 온 사람이나 늦게 온 사람이나 똑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다.”고 말합니다. 또한 주인은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하는 것이 옳지 못하느냐”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일찍 온 자나 늦게 온 자나 동일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양이 아닌 질을 보시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어떤 분이 말하기를 “많이 일했다고 해서 항상 하나님께서 옳게 보시는 것은 아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많이 한 자나 적게 한 자나 일한 댓가는 마찬가지로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이른 아침에 온 사람만이 불평을 합니다.

랍비의 비유에 보면 늦게 온 자는 일찍 온 자보다 더 많은 땀을 흘렸기 때문에 똑같은 댓가를 준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일을 많이 하고 적게 하고자 문제가 아니라 포도원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보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랍비의 비유와 예수님 비유의 차이점이라고 봅니다. 또한 하나님 나라에는 시간이 빠르고 늦음이 없기 때문에 동일한 권리를 인정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믿었는냐는 것보다 얼마나 열심히 믿었느냐를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계시록 21장 말씀에는 거룩한 성 사면에 각각 세 문이 있다고 말합니다. 윌리암 버클레이라는 학자는 “동편문은 아침 일찍 하나님과 교제하러 온 사람들이고 서쪽문은 황혼 시기에 들어와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람들이다”고 말했습니다. 초대 교부들 가운데 시간을 억지로 해석하려는 분들이 간혹 있었습니다. 유래니우스라는 분이 말하기를 “이른 아침에 온 사람들은 노아 이전의 사람들이었고, 9시에서 12시 사이에 온 사람들은 노아와 아브라함 사이에 왔던 사람들이었으며, 정오에서 오후 3시 사이에 온 사람들은 아브라함에서 모세까지의 사람들이었고, 3시에서 5시사이에 온 사람들은 모세에서 그리스도까지의 사람들이었다. 마지막 오후 5시 이후에 온 사람들은 승천과 재림 때 하나님의 부름을 받게 된 사람들이다.”라고 해석했습니다.

역사적으로 이른 사람과 늦은 황혼 시기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지나치게 시기적으로 구분하여 해석하는 것도 잘못될 수 있다고 봅니다. 예수님께서 동일한 권리를 주신 것은 모두에게 일할 권리가 있다고 것입니다. 일할 수 있는 것은 좋은 특권입니다. 11시에 만난 품꾼들은 주인에게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습니라.”라고 말하면서 종일 서 있었습니다. 한 시간밖에 일할 수 없는 이 사람들에게 주인은 한 시간 일할 권리를 부여해 줍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입니다. 열심히 일하고 땀을 흘린 사람은 쉰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압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일하는 것과 잠자고 쉬는 것의 균형이 맞도록 해주셨습니다. 누가복음 6장 말씀에 한편 손마른 사람의 치유에 관해 나타납니다. 이 사람은 석수였는데 오른손이 마비되어 일을 하지 못하고 가정을 돌보지 못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이 낫고나서 얼마나 기쁜지 일하는 즐거움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초점은 먼저 온 자들의 즐거움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초점은 먼저 온 자들의 잘못된 동기를 나무라고 많이 받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 말라는 것이며 바라고 따르는 자세를 책망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자기의 잘못된 기도를 회개하는 기도문이 있는데 “나는 지금까지 25년동안 교회에서 일했고 봉사했습니다. 집사로서 장로로서 봉사했습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예수를 열심히 믿었습니다. 모태때부터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내가 지금까지 예수 믿은 것으로 보아서 이 기도를 하나님께서는 내가 지금까지 예수 믿은 것으로 보아서 이 기도를 들어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이고, 율법주의적인 생각이며, 공로주의라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했으니까 예수님께서 내 기도를 들으시기 바란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유대 사람 뿐만 아니라 제자들까지도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잘못된 생각이라고 타이르고 계시는 말씀이었습니다.

두번째, 일하는 사람들의 자세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먼저 온 자들과 마지막 11시에 온 자들 사이의 비교로 먼저 온자들이 불평을 합니다. 중간에 온 자들은 불평이 없었습니다. 항상 먼저 일하고 믿은 자들이 불평이 많습니다. 그것은 일하는 것을 봉사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우월감으로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일할 수 있도록 건강과 여건을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교회에 봉사할 때 우월감은 방해가 될 때가 많습니다.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우스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이얼린을 제작한 분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많은 음악가에게 음악적인 재질을 주셨는데 내가 그들에게 악기를 줄수 있다는 것을 감사드립니다.” 이것이 바로 봉사정신이며 이러한 장인정신이 있을 때 명기가 나올 수 있다고 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다른 사람보다 우월한 것을 주셨다면 우월감보다 감사하고 봉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또한 흥정하는 의식보다 감사하는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먼저 온 자들은 주인과 한 데나리온을 받기로 흥정한 후 갔다고 합니다. 우리가 일할 수 있도록 선택되었다는 감사의식보다 흥정의식이 먼저 있을 때 항상 불평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은혜를 알지 못하고 선택된 것에 감격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들에게 적절하게 보상을 주신다고 봅니다. 우리의 땀의 댓가를 주님께서 소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소자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을 주어도 하나님께서는 외면하지 않고 다 기억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갈 어떠한 댓가를 바라고 흥정을 하는 것은 참된 봉사정신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래서 노사문제도 일어난다고 봅니다. 뒤에 온 사람은 조건조차 제시하지 않고 불러준 것만으로도 감사한 심정으로 들어왔을 것입니다.

여러분, 잘못된 동기는 그런 마음입니다. 베드로는 내가 다 버리고 먼저 따랐으니 다른 사람보다는 더 보상을 받아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것입니다. 비교의식보다는 공동체의식으로 일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볼 때 상대적으로 먼저 온 사람의 댓가가 적기 때문에 비교해서 볼 때 상대적으로 먼저 온 사람의 댓가가 적기 때문에 불평하는 것입니다. 한 데나리온은 그 당시의 거의 정해진 하루 품삯입니다. 따라서 10시간 일한 사람들이 한 데나리온을 받았으면 만족해야 합니다. 그런데 한 시간만 일한 사람도 한 데나리온을 받으니까 상대적으로 내 것이 적어보여서 불평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나의 정당한 댓가를 받았으면 되었지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열등하게 생각하고 불평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과다한 욕심은 결국 어리석은 일밖에 되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가 점점 빈부 차이가 격심해지는 이유는 공동체의식보다는 비교의식이 많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가복음 15장 말씀에 탕자와 탕자의 형이 나옵니다. 형은 아버지께, 나는 아버지와 함께 일했고 일도 많이 했는데 나에게는 아무 것도 주지 않고 아우에게만 주느냐고 불평합니다. 자기의 몫을 받은 것에 만족하지 않고 아우와 비교해서 불평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비교의식 속에서 불평이 나오기 때문에 그리스도인 사이에도, 한 민족 사이에서도 많은 갈등이 생기는 것입니다. 죤 번연은 “이상하다, 마귀와 더불어 싸워야 할 성도가 자기들끼리 싸우다니.”라고 말합니다. 자기들끼리 싸운다는 것은 힘의 손실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기보다는 내 일의 정당한 댓가를 받으면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사람들은 채권의식보다는 채무의식을 가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했습니다. 10절 말씀에 “먼저 온 자들이 더 받을 줄 알았더니”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의 공로를 더 생각했습니다. 이 공로의식이 곧 채권의식 입니다. 사도 바울은 “나는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빚진 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채무의식을 가지고 있을 때에 우리 사회가 아름다워질 수 있습니다. 유대 사람들은 공로교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당시의 율법적인 행위에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먼저 온 품꾼들도 공로적인 생각에 익숙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준 것을 기억하지 않는 자와 받은 것을 잊어버리지 않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기억할 것을 기억하고, 감사할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내가 일할 수 있는 것만 해도 감사한데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권리를 주장하고 불평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주인의 무조적인 선함에 대해서 자신들의 조건적인 이기심으로 대항하는 일꾼들을 볼 수 있습니다. 주인에게는 잘못이 없습니다. 벵겔이라는 학자가 “하나님께 잘못하는 것은 악하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잘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더 악하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한 분이므로 결단코 우리들에게 잘못하시지 않습니다.

세번째, 이 비유의 핵심은 주인의 은혜입니다.

주인은 언제나 공평한 정의와 마음으로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했습니다. 당시에 익숙한 공로교리에 대해서 주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사람의 공로에 따라서 적절히 배분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공급을 말합니다. 주인의 행위를 보면 자기 하인들을 시켜서 품꾼을 데리고 올 수도 있지만 친히 나가서 품꾼들을 모아 왔습니다. 예수님의 구원의 능동적인 행위를 말하고 있습니다. 한 시간 전에 온 품꾼들에게도 똑같은 품삯을 주었습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입니다. 은혜받을 가치도 없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계약에 의하지 아니한 은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선에 기인하는 것이고 언제나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한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주인의 포도원에 부름받은 품꾼들입니다. 역사적인 긴 시간으로 볼 때 우리들은 11시에 부름받은 사람들인지도 모릅니다. 개인적인 시간에서 볼 때 이른 아침에 온 사람도 있고 저녁 늦은 시간에 온 사람도 있을 줄로 압니다. 그러나 우리의 품꾼된 다세는 일에 충실하고 주인에게 전적으로 분배를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똑같은 품삯을 주시는 것은 주인의 뜻이고 은혜입니다.

우리의 관심은 품삯에서부터 사명으로 돌리고, 근면하게 봉사하고 받은 것에 만족하는 품꾼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공평하심을 생각하고 마지막 시간에 들어온 사람들에게도 똑같은 품삯을 주시는 하나님 은혜를 잊지 않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일할 수 있는 기쁨과 여건을 허락하시는 사회와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지녀야 될 줄로 압니다.

키워드에 대한 정보 포도원 의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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