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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페우스
#그리스-로마_밀의종교
오르페우스교의 모자이크 오르페우스교(Orphism, Orphicism)는 고대 그리스 세계의 밀교다.
기원전 8세기에서 5세기 경에 오르페우스의 가르침을 포교하는 사제들이 그리스 각지를 다녔다 한다.
오르페우스교는 교리에서 육신의 죽음 이후 보상과 벌칙을 강조했고, 이 보상과 벌칙을 받은 뒤에 인간의 영혼은 해방된다고 보았다.
명계(하데스)를 왕래한 전설적인 시인 오르페우스를 개조로 보고 있다.
또, 겨울마다 명계에 내려 봄이 되면 지상으로 돌아오는 페르세포네, 같은 명계를 왕래한 디오니소스 혹은 바쿠스도 숭배되었다.
그 역사적 기원은 기원전 6세기, 또는, 적어도 기원전 5세기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엘레우시스 신비 가르침과 같이, 오르페우스교는 내세의 우위를 약속했다.
일반적인 고대 그리스 종교와 비교해, 오르페우스교의 특징으로 여겨지는 점은 이하와 같다.
그리스의 일반인 혹은 그리스 신화는 사후의 세계에 대한 흥미를 그만큼 나타내 보이지 않았다.
이 점에서 오르페우스교는 특수하고, 그 때문에 연구자 사이에선 사후에 대한 언급을 오르페우스교의 영향으로 돌리는 경향이 존재했다.
그러나 오르페우스의 것으로 여겨지는 서적이나 교의는 빠르게는 헤로도토스, 에우리피데스, 플라톤 등의 언급에 의해 확인되지만, 확실한 교단으로서 언급되는 것은 비교적 후대가 된다.
이러한 극단적인 회의론을 취하는 연구자는 적고, 또 근년의 데르베니 파피루스나 황금판 등의 발견에 의해 회의론은 얼마인가 기세가 약해졌지만, 어느 시대부터,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연구자의 사이에 의견 일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르페우스에 의한 것으로 여겨지는 신화는 헤시오도스의 「신통기」에 모범된 계보적인 신화시에서 말해진 것이다.
이 신화는 근동 제국의 신화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도 있다.
오르페우스교에 특징적인 인간의 본질의 기원을 말하는 이야기는 이하대로이다.
: 제우스와 페르세포네의 아들이며 자그레우스의 영혼의 현신인 디오니소스는 티탄족에 의해 살해되어 그 몸을 데쳐졌다.
하지만 헤르메스가 자그레우스의 심장을 빼앗아 돌려주고 화난 제우스가 티탄족에 번개를 퍼부었다.
그 결과 디오니소스의 몸의 재와 티탄의 몸의 재가 서로 섞여 그 재로부터 죄 깊은 「인류」가 태어났다.
그 때문에 디오니소스적 요소로부터 발하는 영혼이 신성을 가지는 것에도 불구하고 티탄적 소질로부터 발한 육체가 영혼을 구속하게 되었다.
즉 인간의 영혼은 「재생의 윤회(인과응보의 바퀴)」에 묶인 인생으로 반복해 되돌려지는 것이다.
디오니소스의 심장은 한때 제우스의 다리에 꿰매였다.
그 후 제우스는,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인간의 여성인 세멜레의 모태에, 다시 태어난 디오니소스를 임신시켰다.
이러한 이야기에 관련된 많은 상세가, 이하의 고전 문헌에서 산발적으로 인용 언급되고 있다.
근년 발견된 황금판이나 뼈로 만든 정제에 기록된 비문으로부터 디오니소스의 죽음과 소생에 관련된 오르페우스 신화와 내세의 축복으로의 신앙과의 관련성이 읽어내진다.
오르비아에서 발견된 뼈로 만든 정제(기원전 5세기)에는, 이하와 같이 짧게 수수께끼에 쌓인 명문이 새겨지고 있다.
「삶, 죽음, 삶, 진실, 디오(니소스), 오르페우스」. 이 뼈로 만든 정제의 용도는 아직 해명되어 있지 않다.
트리오이 (테리, Thurii), 힙포니움(현재의 비보 바렌트아), 테살리아 및 크레타 섬의 분묘로부터 발견된 황금판(최고의 것은 기원전 4 세기)에는, 이하와 같은 사망자에게의 가르침이 기록되고 있다.
그리고 다른 황금판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다.
오르페우스교의 교의 및 의례에는, 피타고라스 교단과의 유사점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한편이 이제 한편에 얼마나의 영향을 주었는지를 단언하려면, 사료는 아직도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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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페우스교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오르페우스교(Orphism, Orphicism)는 고대 그리스 세계의 밀교다. 기원전 8세기에서 5세기 경에 … 오르페우스교의 모자이크 … 피타고라스 교단과의 관련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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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2/2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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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페우스 – 나무위키

그리스 로마 신화의 영웅. 오르페오라고도 한다. 태양신 아폴론과 뮤즈 중 하나인 칼리오페의 아들[1][2]로 아폴론에게서 리라를 뜯는 법을 배워 리라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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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2/1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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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오르페우스 교단과 피타고라스 교단의 유사성. 19:58. 오르페우스 교단과 피타고라스 교단의 차이점. 21:51. 불멸의 피타고라스. 21:56. 오르페우스 교단과 피타고라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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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0/1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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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고호 원정에 참가/오르페우스교(Orphism)-밀교

확실한 교단으로서 언급되는 것은 비교적 후대가 된다. [신화]. 오르페우스에 의한 것으로 여겨지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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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2/2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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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레 on Twitter: “자연스럽게 고대 그리스의 후기에 이를 때까지 …

내세관을 체계화하려고 시도했던 이들은 후기에 나타난 <오르페우스 교단>이라는 밀교 집단이었는데 디오니소스를 숭배했고, 위 플림노스 이야기도 오르페우스교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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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1/2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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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오르페우스교 vs 유대교

하지만 오, 그대, 로마여, 최고의 권력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법을 배우라. 그대의 위대한 예술은 세상을 영원토록 평화롭게 하리라. 무릎 꿇은 적들은 용서하고 교만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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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종교의 시대에서 철학(哲學)의 시대로 – 컨슈머치

오르페우스가 디오니소스를 개혁하려고 했다면 피타고라스는 오르페우스 교단의 정신개혁을 더욱 혁신하려고 했습니다. 피타고라스는 ‘피타고라스 정리’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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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4/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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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페우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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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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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오르페우스교의 모자이크

오르페우스교(Orphism, Orphicism)는 고대 그리스 세계의 밀교다. 기원전 8세기에서 5세기 경에 오르페우스의 가르침을 포교하는 사제들이 그리스 각지를 다녔다 한다. 오르페우스교는 교리에서 육신의 죽음 이후 보상과 벌칙을 강조했고, 이 보상과 벌칙을 받은 뒤에 인간의 영혼은 해방된다고 보았다.

개요 [ 편집 ]

명계(하데스)를 왕래한 전설적인 시인 오르페우스를 개조로 보고 있다. 또, 겨울마다 명계에 내려 봄이 되면 지상으로 돌아오는 페르세포네, 같은 명계를 왕래한 디오니소스 혹은 바쿠스도 숭배되었다. 그 역사적 기원은 기원전 6세기, 또는, 적어도 기원전 5세기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1].

엘레우시스 신비 가르침과 같이, 오르페우스교는 내세의 우위를 약속했다.

특색 [ 편집 ]

일반적인 고대 그리스 종교와 비교해, 오르페우스교의 특징으로 여겨지는 점은 이하와 같다.

인간의 영혼은 신성 및 불사성을 가짐에도 불구하고, 윤회전생(슬픔의 고리)에 의해 육체적 삶을 반복하는 운명을 지고 있다는 교의.

「슬픔의 고리」로부터의 최종적인 해탈, 그리고 신들과의 교감을 목적으로 하고, 비의적인 통과의례(입신의식) 및 금욕적 도덕률을 정하고 있던 점.

생전에 범한 특정의 죄에 대해, 사후의 벌칙을 경고한 점.

교의가 신과 인류의 기원에 관한 신성한 서적에 근거하고 있는 점.

전거 [ 편집 ]

그리스의 일반인 혹은 그리스 신화는 사후의 세계에 대한 흥미를 그만큼 나타내 보이지 않았다. 이 점에서 오르페우스교는 특수하고, 그 때문에 연구자 사이에선 사후에 대한 언급을 오르페우스교의 영향으로 돌리는 경향이 존재했다. 그러나 오르페우스의 것으로 여겨지는 서적이나 교의는 빠르게는 헤로도토스, 에우리피데스, 플라톤 등의 언급에 의해 확인되지만, 확실한 교단으로서 언급되는 것은 비교적 후대가 된다. 이러한 극단적인 회의론을 취하는 연구자는 적고, 또 근년의 데르베니 파피루스나 황금판 등의 발견에 의해 회의론은 얼마인가 기세가 약해졌지만, 어느 시대부터,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연구자의 사이에 의견 일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신화 [ 편집 ]

오르페우스에 의한 것으로 여겨지는 신화는 헤시오도스의 「신통기」에 모범된 계보적인 신화시에서 말해진 것이다. 이 신화는 근동 제국의 신화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도 있다. 오르페우스교에 특징적인 인간의 본질의 기원을 말하는 이야기는 이하대로이다. : 제우스와 페르세포네의 아들이며 자그레우스의 영혼의 현신인 디오니소스는 티탄족에 의해 살해되어 그 몸을 데쳐졌다. 하지만 헤르메스가 자그레우스의 심장을 빼앗아 돌려주고 화난 제우스가 티탄족에 번개를 퍼부었다. 그 결과 디오니소스의 몸의 재와 티탄의 몸의 재가 서로 섞여 그 재로부터 죄 깊은 「인류」가 태어났다. 그 때문에 디오니소스적 요소로부터 발하는 영혼이 신성을 가지는 것에도 불구하고 티탄적 소질로부터 발한 육체가 영혼을 구속하게 되었다. 즉 인간의 영혼은 「재생의 윤회(인과응보의 바퀴)」에 묶인 인생으로 반복해 되돌려지는 것이다.

디오니소스의 심장은 한때 제우스의 다리에 꿰매였다. 그 후 제우스는,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인간의 여성인 세멜레의 모태에, 다시 태어난 디오니소스를 임신시켰다. 이러한 이야기에 관련된 많은 상세가, 이하의 고전 문헌에서 산발적으로 인용 언급되고 있다.

『 프로트고노스 신통기 』(약 기원전 500년 경 성립. 흩어짐). 데르베니 파피루스에 그 영향을 찾아낼 수 있다.

』(약 기원전 500년 경 성립. 흩어짐). 데르베니 파피루스에 그 영향을 찾아낼 수 있다. 『 에우데모스 신통기 』(기원전 5세기에 성립. 흩어짐). 바쿠스 신앙 및 크레이테스 신앙을 혼합한 문헌.

』(기원전 5세기에 성립. 흩어짐). 바쿠스 신앙 및 크레이테스 신앙을 혼합한 문헌. 『 랩소디즈 (Rhapsodic Theogony)』(헬레니즘 시대에 성립. 그 이전의 시편도 수록. 흩어짐). 후세의 신플라톤주의의 학자에 의한 개요를 통해 알려진다.

(Rhapsodic Theogony)』(헬레니즘 시대에 성립. 그 이전의 시편도 수록. 흩어짐). 후세의 신플라톤주의의 학자에 의한 개요를 통해 알려진다. 오르페우스 찬가. 후기 헬레니즘 시대 혹은 초기 로마 제국 시대의 작품보다 짧은, 6보격의 시 87편.

종말론 [ 편집 ]

근년 발견된 황금판이나 뼈로 만든 정제에 기록된 비문으로부터 디오니소스의 죽음과 소생에 관련된 오르페우스 신화와 내세의 축복으로의 신앙과의 관련성이 읽어내진다. 오르비아에서 발견된 뼈로 만든 정제(기원전 5세기)에는, 이하와 같이 짧게 수수께끼에 쌓인 명문이 새겨지고 있다.「삶, 죽음, 삶, 진실, 디오(니소스), 오르페우스」. 이 뼈로 만든 정제의 용도는 아직 해명되어 있지 않다.

트리오이 (테리, Thurii), 힙포니움(현재의 비보 바렌트아), 테살리아 및 크레타섬의 분묘로부터 발견된 황금판(최고의 것은 기원전 4 세기)에는, 이하와 같은 사망자에게의 가르침이 기록되고 있다.

명계에 내렸을 때 레테의 물(망각)이 아닌 므네모시네의 샘의 물(기억)을 마시도록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지키는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고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대지와 밤하늘의 아들입니다. 목이 마르므로 므네모시네의 샘에서 무언가 마실 것을 제게 주세요.」

그리고 다른 황금판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다.

지금 당신은 죽었다. 그리고 세 번 축복받은 오늘 탄생했다. 페르세포네에 고해라. 바야흐로 바쿠스 스스로가 당신을 구제했다고.

피타고라스 교단과의 관련 [ 편집 ]

오르페우스교의 교의 및 의례에는, 피타고라스 교단과의 유사점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한편이 이제 한편에 얼마나의 영향을 주었는지를 단언하려면, 사료는 아직도 적다[2].

각주 [ 편집 ]

↑ W. K. C. Guthrie, The Greeks & Their Gods (Beacon, 1954), p. 322; Kirk, Raven, & Schofield, The Presocratic Philosophers (Cambridge, 1983, 2nd edition), pp. 21, 30-31, 33; Parker, “Early Orphism”, pp. 485, 497 ↑ Parker, “Early Orphism”, p. 501.

관련 문헌 [ 편집 ]

Albinus, Lars. 2000. The House of Hades. Aarhus.

Betegh, Guthrie. 2006. The Derveni Papyrus. Cosmology, Theology and Interpretation. Cambridge.

Burkert, Walter. 2004. Babylon, Memphis, Persepolis: Eastern Contexts of Greek Culture. Cambridge, MA.

Graf, Fritz. 1974. Eleusis und die orphische Dichtung Athens. Berlin, New York

Guthrie, W. K. C. 1952. Orpheus and Greek religion. London.

Pugliese Carratelli, Giovanni. 2001. Le lamine doro orfiche. Milano.

West, Martin L. 1983. Orphic Poems. Oxford.

Parker, Robert. 1995. “Early Orphism”. In The Greek World, Anton Powell (ed.).

내마음의 보석상자 : 화광동진(和光同塵)

짐승들에 둘러싸여 있는 오르페우스

오르페우스( 그리스어 : Ὀρφεύς)는 그리스 신화 에 나오는 시인이자 악사이다.

전설적인 리라의 명수였다.

호메로스 와 헤시오도스 의 이야기에서 오르페우스라는 이름은 언급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비코스 나 핀다로스 는 오르페우스를 “음악의 아버지”라고 이야기한다.

[ 유년시절 ]

오르페우스는 오이아그루스 와 서사시의 뮤즈 칼리오페 의 아들이다.

일설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는 인간 오이아그루스가 아니라

음악을 관장한 신 아폴론 이었다고도 한다 [1] .

또 오르페우스의 아버지는 트라키아 의 왕이었다고도 하며

그레이 부스 는 오이아그루스를 트라키아 왕이라 말한다 [2] .

하프의 기술은 아폴론에게 전수되었다고도 말한다.

그 기술은 매우 교묘해 그가 하프를 연주하면 숲의 동물들 뿐만이 아니라

나무들이나 바위까지도 그의 주위에 모여 귀를 기울였다고 말해진다.

[ 아르고호 ]

오르페우스는 이아손 이 이끈 아르고호 원정 에 참가하여

하프를 타서 폭풍을 잠재우고,

안테모에사 섬에서 마녀 세이렌 들의 요사스런 노래를

하프 연주로 물리침으로써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던 곳의 위험을 피했다.

이 때 단 한 명 테레온의 아들 브테이스 만이 유혹에 져 생명의 위기에 빠졌지만

아프로디테 (미의 여신)가 그를 빼앗아 리류바이온에 살게 했다 [3] [4] .

오르페우스는 님프 에우리디케 와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에우리디케는 산책을 나갔다가

자신에게 추근대는 양치기 아리스타이오스를 급히 피해 도망치다 뱀에게 물려 죽었다.

오르페우스가 그녀를 애도하는 곡을 하자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마침내 오르페우스는 아내를 이승으로 다시 데려오겠다고 결심하고 저승으로 내려갔다.

오르페우스는 저승의 문을 지키는 수문장 케르베로스 를 음악으로 울려서 복종시키고

저승의 신인 명계(冥界)의 왕 하데스 와 그의 아내인 명계의 여왕 페르세포네 에게

아내를 돌려줄 것을 애원했다.

오르페우스의 연주를 듣고

하데스와 페르세포네는 물론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 까지 눈물을 흘렸다.

페르세포네는 에우리디케가 그의 뒤를 따라갈 것이라고 약속하면서

그 대신 이승으로 나가기 전까지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일렀다.

오르페우스는 약속을 지켜 지상으로 나가는 출구까지 뒤를 돌아보지 않고 올라갔다.

그러나 출구 바로 앞에서 오르페우스는 약속을 잊고

에우리디케가 잘 따라왔는지 뒤를 잠깐 돌아보았다.

에우리디케는 다시 저승으로 빨려들어갔다 [5] .

두 번째로 아내를 잃은 오르페우스는 7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비탄에 젖었다.

[ 죽음 ]

지상에 나온 오르페우스는 여성과의 접촉을 일체 멀리하고 대신

소년들과만 관계를 맺으며 오르페우스교 를 전파하기 시작했다.

디오니소스 (술의 신)가 트라키아 에 방문했을 때

오르페우스는 새로운 신을 존경하지 않고

단지 헬리오스 (오르페우스는 이 신을 아폴론 이라고 불렀다)가 가장 위대한 신이라고 말했다.

이것에 화난 디오니소스는

마케도니아 의 데이온에서 마이나스 (광란하는 여자)들에게

오르페우스를 덮치게 해 마이나스들은 오르페우스를 여덟 조각으로 찢어 죽였다 [6] .

또는 마이나스들이 분노한 이유는

오르페우스가 여성들을 거부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중세와 근대 유럽에서는 오르페우스의 죽음을 동성애자에게 떨어진 천벌의 예로 들었다.

마이나스들은 오르페우스의 목을 헤브로스 강에 던졌다.

그러나 목은 노래를 부르면서 강을 흘러 바다에 나가 레스보스 섬 해안에 당도했다. [7] .

주민들은 예를 갖추어 오르페우스의 머리를 묻었고

그 후 레스보스 섬은 오르페우스의 가호에 의해서 많은 문인을 배출하게 되었다.

또 뮤즈들은 그의 리라를 하늘에 안치했다. 이것이 거문고자리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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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오르페우스교 vs 유대교

모든 길은 로마로

하지만 오, 그대, 로마여, 최고의 권력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법을 배우라. 그대의 위대한 예술은 세상을 영원토록 평화롭게 하리라. 무릎 꿇은 적들은 용서하고 교만한 자들은 땅에 처박아라. —베르길리우스 《아이네이스》6, 848

다른 모든 면에서 이 히브리종교와 헬레니즘철학은 상당한 다르다. 전혀 다른 선조에서 유래하였으며, 자신만의 영역과 시간 속에서 성장했다. 다른 모든 면에서 이들은 다르지만 한 가지는 같다. 그들은 모두 처음부터 글에서 깊이있는 정보를 습득했다. 실제로 이 두 문화는 우리가 오늘날 ‘알파벳’이라고 부르는 기이하고 강력한 기술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데이비드 에이브럼 David Abramn

문자의 영향력이 감소하자 신기하게도 여자들의 운명은 급격히 향상된다. 대부분 문맹에 농사를 짓고 살던 마케도니아인들은 아테네의 민주주의 같은 복잡한 개념은 바로 쓰레기통에 넣고 왕정으로 통일해버린다. 이로써 아테네의 여자들은 자신의 재산과 부를 소유할 수 있는 권리를 되찾았고, 남자들과도 자유롭게 어울릴 수 있게 되었다. 이전에는 허용되지 않던 직업에도 마음대로 종사할 수 있게 되었다. —341

Pax Romana. 절정기 로마제국의 영토는 325만 제곱킬로미터에 달하였으며 인구는 6,000만 명에 달했다.

마케도니아의 승리는 짧게 끝났다. 100년도 되지 않아, 유럽문명의 주도권은 이제 로마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던 전사들의 굳은살 박인 손으로 넘어갔다. 나가는 전투마다 무조건 이기는 천하무적 로마인들은 마침내 오늘날 서양의 전통을 마련하는 데 기여한 기존의 국가들을 모조리 정복해버린다. —343

천하무적 로마인들의 전투모습 Ludovisi Battle sarcophagus

유대인은 로마제국시민 중 12퍼센트나 차지했다. 그들은 대도시에서 모여 살았으며, 제국의 상거래 네트워크에서 핵심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유대인들은 대부분 글을 읽고 썼기 때문에 광대한 로마제국의 관료제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관료 배출집단이었다. —352

지금도 그대로 남아있는 로마인들이 지은 다리. 로마인들의 건축/토목기술은 경이로움을 자아낸다. Wikipedia

그리스, 종교의 시대에서 철학(哲學)의 시대로

[윤성호 칼럼] 누구나 알고 아무나 하는 인문학 ③

안녕하십니까. 여러분과 인문학을 함께 공부할 윤성호라고 합니다.

그간 문학, 역사, 철학 등 소위 인문학으로 불리는 공부를 하며 조금이나마 얻은 지식을 함께 공유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 왔습니다. 이번에 컨슈머치와 함께 독자 여러분을 찾아뵐 좋은 기회를 얻었습니다.

우선 인문학이 무엇인지에 대해 함께 고민해보고, 종교와 예술과 철학이 어떻게 발생됐는지 살펴본 후 동·서양의 철학과 역사, 종교에 관해 고찰해보는 기회를 가졌으면 합니다.

<저자의 말>

그리스, 종교의 시대에서 철학(哲學)의 시대로

종교에서 발원한 통찰력, 철학으로 발전

우리는 철학이 철저한 논리를 통해 필연적인 인과관계를 도출하는 활동이니 철학과 종교는 배타적 갈등 관계에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철학은 논리와는 거리가 먼 주술과 종교에서 비롯됐습니다.

주술의 시대를 거쳐 종교 활동을 시작한 인류의 두뇌는 드디어 가상에서 현실을 분리하기 시작했고, 현실에서 비유의 연관을 벗겨내려고 힘 써 왔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사물의 기원을 규명하고 자연현상에 대한 인과관계를 낱낱이 파헤치려는 노력을 한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엄밀한 논리와 기존의 틀을 과감히 깨는 자유로운 사고가 전제돼야 했습니다. 그런데 엄밀한 논리와 자유로운 사고가 전제가 돼야 하는 철학이, 역설적이게도 논리와는 거리가 먼 종교적 통찰에서 시작됐습니다.

천재적인 몇몇의 사제와 주술사, 달리 표현하면 굿을 하고 점을 보는 무당과 샤먼이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았고 그들의 이러한 직관적 통찰이 철학적 사고의 원형이 된 것입니다. 주술사와 무당 계급이 사물의 본질을 직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충분합니다. 원시시대의 주술사나 제정일치 사회의 사제는 당시 사회에서 지식을 독점하던 최고 엘리트들이었습니다. 당대의 최고지식을 세례 받은 그들이야 말로 사물에서 비유의 연관을 벗겨낼 수 있는 유일한 계층이었을 것입니다. 인류는 이제 종교적 사제의 직관에 힘입어 호모사피엔스(생각하는 사람)라는 이름에 걸 맞는 철학적 사고행위가 가능하게 됐습니다.

고대 그리스, 디오니소스의 주술적 제전이 피타고라스의 철학적 사유로 발전

인류가 본격적으로 철학적 사고를 시작한 곳, 고대 그리스. 고대 그리스에서 최초로 철학적 사유를 했다고 평가받는 피타고라스를 통해 종교와 철학의 관계를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피타고라스는 가상과 현실을 연결한 주술사였고 교단을 이끈 사제였으며 피타고라스 정리를 발견한 수학자이자 세상이 모두 수로 이뤄졌다고 주장한 철학자였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 그 수학자 피타고라스가 주술과 종교적 통찰력으로 철학적 사고의 지평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피타고라스 이전의 시대를 이해해야 피타고라스로부터 기원한 서양철학을 알게 됩니다. 피타고라스 이전 시대에 행해진 디오니소스 제전이 오르페우스를 거쳐 피타고라스로 이어지는 계보를 살피면 주술활동과 원시종교가 철학적 사유로 이어지는 일련의 관계가 파악됩니다.

디오니소스 제전의 광란과 오르페우스의 개혁

그리스의 문화의 원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디오니소스 신화와 디오니소스 축제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다음은 디오니소스 신화와 축제에 대한 설명입니다.

▲디오니소스 신화

제우스는 인간 여인 세밀레와 정을 통해 디오니소스를 낳게 되나, 제우스의 정식 부인 헤라가 세밀레를 질투해 세밀레가 제우스의 번개에 맞아 죽도록 유도했습니다. 제우스는 세밀레가 벼락에 맞아 죽을 때 배 속에 있던 아기를 재빨리 꺼내 허벅지에 감췄고 이 아이는 10개월 후 그의 허벅지에서 태어났습니다. 이 아이가 디오니소스입니다.

또 다른 탄생 신화에 따르면 디오니소스는 제우스와 페르세포네(Persephone)의 아들입니다. 디오니소스는 어렸을 때 제우스의 아내 헤라에게 희생됩니다. 헤라는 타이탄들(Titans)에게 디오니소스를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디오니소스는 타이탄들에게 갈기갈기 찢겨 먹히고 심장만 남게 되나 그 심장을 세밀레가 먹고 임신을 해 그는 결국 두 번 태어납니다.

▲디오니소스(바카스) 축제

고대 그리스인들은 지상에서 태어난 타이탄들이 디오니소스를 찢어 먹고 신성을 얻었다고 생각해 특정한 날이 되면 술과 함께 들짐승을 여덟 갈래로 찢어 먹는가 하면 심지어는 인간 소년을 여덟 갈래로 갈기갈기 찢어 먹는 광란의 축제를 열어 신성을 얻고자 했습니다. 축제에 광적으로 도취해 신의 경지에 들어서면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손에 넣을 수 없는 신비로운 지식(그노시스)를 얻을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지요. 아직까지는 가상과 현실이 혼재된 상태의 축제입니다.

▲오르페우스 신화

오르페우스는 음악의 천재로 아름다운 아내 에우리디케(Eurydice)를 열렬히 사랑했습니다.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가 독사에 물려 사망하자 저승의 지배자 하데스를 찾아가 에우리디케를 구해옵니다. 그러나 오르페우스는 마지막 순간까지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하데스의 말을 무시하고 이승에 발을 딛기 직전 뒤를 돌아봄으로서 에우리디케를 잃게 됩니다. 오르페우스는 아내의 죽음을 몹시 슬퍼한 나머지 다른 여자들을 전혀 돌보지 않았고 그 여인들의 질투를 받아 몸이 찢겨 죽는 최후를 맞습니다.

오르페우스는 디오니소스 축제가 지나치게 광란으로 흐르면서 타락하자 영혼 불멸 등의 정신적 요소를 가미한 오르페우스 비밀교단을 만듭니다. 오르페우스는 인간이 타이탄과 같은 악의 성질을 가지는 동시에, 타이탄이 먹은 디오니소스에서 유래하는 신적인 요소도 갖췄다면서 인간은 타이탄적 요소를 극복하고 신적 요소를 조장함으로써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영적 쇄신을 통해 디오니소스 축제로 대변되는 당시의 육체적 정신적 타락에 대한 일대 반성 및 개혁을 촉구했습니다. 윤회·전생을 전제하고 있어 역시 윤회설을 강조하던 피타고라스 교단과 밀접히 연결돼 있었습니다. 정신적 사유가 감각보다 우선한다는 그리스적 사유문화는 오르페우스 교단으로부터 시작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피타고라스, 철학적 사유의 시작

오르페우스가 디오니소스를 개혁하려고 했다면 피타고라스는 오르페우스 교단의 정신개혁을 더욱 혁신하려고 했습니다. 피타고라스는 ‘피타고라스 정리’를 발견한 수학자이면서 매우 혁신적이고 신비로운 사상가입니다. 또한 세상이 수로 이뤄졌다고 주장한 철학자로서 현의 길이를 3분의 2로 하면 음이 5도 올라가고 2분의 1로 하면 한 옥타브가 올라간다는 사실을 알아낸 음악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피타고라스의 진짜 직업은 수많은 금기와 주술을 계율로 엮어 당시 그리스를 영적으로 개혁하려고 한 피타고라스 교단의 교주였습니다.

피타고라스는 ‘철학자’라는 말을 처음으로 쓴 사람이기도 합니다. 도시국가 플리우스의 왕으로부터 “무엇을 하는 사람이냐?”는 질문에 대해 “필로소포스”라고 대답해 필로소퍼(philosopher 철학자)의 어원이 됐습니다. 피타고라스는 자기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그의 제자 중에 스승의 모습을 직접 본 이가 거의 없는 것으로 전해집니다. 제자들에게 질문을 허용하지 않았으며 누구라도 ‘아우토스 에페’(어른께서 말씀하시되)를 덧붙이면 불변의 진리가 돼 반박할 수 없었습니다.

피타고라스 교단은 금욕생활을 하면서 윤회를 믿고 채식을 한 결속력 강한 비밀 공동체였습니다. 이 교단은 각종 금기사항으로 유명했는데 고기와 콩을 먹지말라, 흰수탉을 만지지 말라, 떨어진 물건을 줍지 말라, 침대의 자국을 그대로 남기지 말라, 잎사귀를 부러뜨리지 말라 등이 있었습니다.

피카고라스는 이 교단을 통해 종교적 통찰을 통한 과학적 사색을 했습니다. 피타고라스가 종교적 사색을 통해 얻은 수리적 신비주의는 고대 그리스 철학의 바탕이 됐습니다. 수리에 대한 탐구정신은 사유가 감각보다 더 고귀하고 사유의 대상이 지각의 대상보다 더 실재적이라는 그리스적 사고방식의 원형이 됐습니다.

철학이 매우 엄밀한 논리와 무전제적인 자유 사고를 과시하는 듯 보이나 그 궁극에 종교적 세계관과 신비적 통찰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철학은 종교를 부정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 종교적 가치관에서 생성된 순수한 사유의 세계라는 사실을 피타고라스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신을 대리해 가상을 현실에 구현했던 사제들은 이제 당대의 지식과 종교적 통찰력을 기반으로 사물에서 비유적 연관을 제거한 본질적 모습을 찾으려 했고 이러한 노력이 결국 철학의 기원이 된 것입니다.

※저자 윤성호

인문학 대중화를 통해 사회공헌을 추구하는 인문학 글쓰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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