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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 말씀의 참뜻
주는 자로 남지 말고, 받는 자로도 남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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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6:1-4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예수님께서는 먼저 사람에게 보이려고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하라(마 6:1)고 하셨는데 이것이 바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이다.
Source: www.elphis.or.kr
Date Published: 5/1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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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기자의현문우답] 오른손이 한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
그러나 예수님 말씀은 그리 간단치 않습니다. 의미도 더 깊고, 울림도 더 크죠. 바로 좋은 일을 할 때는 ‘남 몰래’가 아니라 ‘나 몰래’하라는 뜻입니다.
Source: www.joongang.co.kr
Date Published: 9/1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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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헬라어 예수님 말씀]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
그런데 이 구제의 말씀을 하시면서 외식하는 자의 본을 받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 주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
Source: rhb-bible.tistory.com
Date Published: 2/12/2021
View: 9249
왼손 모르게 오른손이 행할 때까지 – 에큐메니안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남에게 보이려는 자선, 그 위선을 경계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가르침을 은밀한 교만의 도구로 사용 …
Source: www.ecumenian.com
Date Published: 5/1/2021
View: 3389
“오른손이 한일을 왼손이 모르게” – Daum 블로그
이는 마태복음 6장에 나오는 말인데, 좋은 일을 할 때 주위에 떠벌리지 말고 남모르게 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이를 왼손이 한 일을 오른손 모르게 하라고 …
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11/19/2022
View: 7449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 코이네로 말하라
내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셨는데, 실제 사회사업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물어봤더니, 자신이 하는 일을 세상 사람들이 몰라줄 때 참 …
Source: koinespirit.tistory.com
Date Published: 10/6/2022
View: 2648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마 6:1~4) – 기멀전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자선은 상대방이 굴욕감을 느끼지 않게 만듭니다. 세상은 아름다운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만듭니다. 자선이 …
Source: godpeople.or.kr
Date Published: 7/2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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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아문 TV – 나답게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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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19. 8.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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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6:1-4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이 말씀은 교회에 다니지 않아도 다 아는 말씀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의와 믿음에 관한 것이 아니어도, 도덕적으로나 사회 윤리에 있어 아주 도움이 될 말씀이다. 하지만 이 말씀이 윤리적은 것은 결과적으로 그런 것이지, 그것을 목적으로 하는 말씀이 아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방법론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구제는 <의>에 관한 것이다. 사실 성경의 모든 말씀이 그렇다. 구제하라고 해서 가난한 사람에게 경제적으로 도우라는 말씀이 아니다. 살인이나 간음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고 육신에 관한 살인과 간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에 관한 말씀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경제적인 형편을 최종목적으로 삼지 않으신다. 더 엄밀히는 그것은 하나님의 관심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하여 의를 나타내시려고 하실 때 필요하다면 하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고 생각되면 사람이 곧 굶어 죽을 지경이 되어도 상관하지 않으신다. 성경에서는 의에 관하여 하나님께 반하면 민족을 쓸어버리기도 하시는데, 그깟 경제적 상황이 하나님께 중요한 관점일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구제함도 하나님의 의와 연관된 말씀인 것이다.
그 의를 나눔, 의가 간절하고 가난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의를 나눔에 있어 육신을 가진 사람이기에 나눔에 필요한 재화와 용역을 나누는 것으로 구제가 표현되고 드러나는 것이지, 사람의 육신의 삶에 필요한 재화와 용역을 구제하는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관점이다. 왜냐하면 재화와 용역에 관한 구제랄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는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육신에 관하여는 아무렇게나 해도 되는가 싶은 생각이 들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영지주의다. 사람이 하나님의 의가 자신 안에 있으면 결국 육신의 삶이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기준 조차 지켜내는 , 아니 지킬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성경의 말씀은 바로 그런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사람에게 보이려고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하라(마 6:1)고 하셨는데 이것이 바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이다. 즉 하나님의 의를 사람이 그것을 알아주는 것을 목적으로 나타내거나 전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는 은밀하게 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다 갚으시겠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말씀을 하나님의 의를 숨기려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니까 의를 행하고 그것을 드러내지 않고 감추듯이 하는 것을 미덕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의는 드러내려 한다고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 밑에 있던 백부장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드러난 것이 아니라, 아주 은밀한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은밀한 것은 성령이 보이지 않으심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보고 자신도 감동을 받아 그 하나님의 의를 자신의 생명으로 삼아가는 과정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 아니 영혼 깊이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는 사람의 영혼에서 영혼으로 전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은밀한 것이다. 그리고 그 영혼이 하나님의 의를 전해지는 과정에서 육신의 눈과 감각이 필요한 것이다. 보았기에 그것이 심령 안에서 싹이 나는 것이고, 들었기에 싹이 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다 은밀하게 일어나는 것이다. 이 은밀함이 어떻게 왼손이 알도록 다시 말해서 사람에게 보이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하면 하나님께 상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상을 얻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의롭게, 옳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의가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육신으로 여유가 있어 구제하는 것이야 좋은 일이다. 그리고 할 수 있다면 문자 그대로 은밀히 하면 좋은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상을 받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하지 않음만 못하다. 왜냐하면 돈 잃고 목적도 달성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경제적인 구제는 의를 구제하는 것, 간단히 말해서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수반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자신의 형편에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이를 위하여 구제하고 수고하는 것은 의를 구제하는 것, 곧 복음을 전하다 보니 구제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는 것이지, 하나님께서 상 주신다고 하니 은밀하게 남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은밀하게 구제하라는 것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한다고 하니 신문에 나게 한다는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을 성경은 외식이라고 한다. 즉 내용 없는 행동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가 그 생명이 된 사람이 은밀할 수밖에 없는 성령의 감동으로 생명이 전하는 의의 구제라는 내용 때문에 나타나는 구제가 아닌 구제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고, 왼손이 알게 하는 것이라는 말씀을 하는 것이다.
[백성호기자의현문우답] 오른손이 한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성경(마태복음)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요즘 세상이 어디 그렇습니까. ‘광고의 시대, 홍보의 시대’라고 하지 않습니까. ‘작은 일은 크게, 가벼운 일은 무겁게’ 만들지 못해 오히려 안달입니다.
우연히 한 수녀님(66)을 알았습니다. 남태평양의 파푸아뉴기니에 가서 학교를 세우고 15년간 살았던 분입니다. 거긴 위험천만입니다. 교육은 고사하고, 부모가 돈을 받고 딸 아이를 팔기도 하는 곳이죠. 시설이나 환경도 전쟁을 막 치른 ‘1950년대 한국 사회’수준이라네요. 7년 전에 귀국한 수녀님이 최근 다시 발령을 받았습니다. 이제 그 학교의 이사장으로 간다네요. 이번에는 또 얼마나 머물지 모릅니다.
그래서 인터뷰를 신청했습니다. 그런데 대답은 ‘노(NO)’였죠. “그리 드러낼 일이 아니다. 아무것도 한 게 없다”란 이유였습니다. 당혹감과 따스함, 둘이 동시에 밀려오더군요. ‘요즘 세상에 이런 마음도 있구나.’
한 일화가 떠올랐죠. 중국으로 건너간 달마대사가 양나라 무제를 만났습니다. 나라 안에 엄청난 수의 사찰을 세웠던 무제가 물었죠. “나의 공덕이 얼마나 되오?” 달마대사의 답은 짧았죠. “무공덕(無功德)입니다.”
불교에서는 ‘선업(善業)도 업이고, 악업(惡業)도 업’이라고 합니다. 해도 한 바가 있으면 마음의 짐, 업보가 된다는 거죠. 그래서 달라이 라마는 “오른손이 한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고 했습니다.
성경의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표면적인 해석이야 쉽죠. ‘좋은 일은 남 몰래 하라.’
그러나 예수님 말씀은 그리 간단치 않습니다. 의미도 더 깊고, 울림도 더 크죠. 바로 좋은 일을 할 때는 ‘남 몰래’가 아니라 ‘나 몰래’하라는 뜻입니다. 핵심은 ‘내 마음에 남음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닐까요. 선행을 하고도 할 일을 했다는 마음이 남는다면 ‘오른손’을 ‘왼손’이 아는 거죠.
수녀님은 묵묵하게 비행기에 올랐지 싶습니다. 그래서 당혹스런 인터뷰 사절이 한편으론 아쉽고, 또 한편으론 감사했습니다.
[마태복음 헬라어 예수님 말씀]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마 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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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구제에 대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나의 의를 나타내려고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미 사람들에게 상을 받고 하나님께는 받을 상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팔을 불지 말고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말씀 중에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마 6:1-4)
주님께서는 구제해야 할 것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구제의 말씀을 하시면서 외식하는 자의 본을 받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 주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청중들은 원수를 어떻게 사랑하는 것인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구제의 말씀을 곧이어 하시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그들에게 구제를 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원수에게 구제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원수가 죽어갈 때에 구제하여 그들을 살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제입니다. 주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시고 어떻게 사랑하는 것인지를 말씀을 통해서 가르쳐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우리도 주님의 말씀처럼 원수라 할지라도 그가 죽어가고 있다면 구제하여 주어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상을 하나님께 받는 것입니다.
19절 메 헤아우투스 에크디쿤테스 아가페토이 알라 도테 토폰 테 오르게 게르랍타이 가르 에모이 에크디케시스 에고 안타포도소 레게이 퀴리오스
20절 에안 운 페이나 호 에크드로스 수 프소미제 아우톤 에안 딥사 포티제 아우톤 투토 가르 포이온 안드라카스 퓌로스 소류세이스 에피 텐 케팔렌 아우투
롬12:19-20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는 것입니다. 원수를 갚는 것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럼 사람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원수가 굶고 있으면 음식을 주고 갈증을 내고 있으면 물을 주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원수를 구제한 자는 하나님께 상급을 받고 원수는 머리에 숯불이 올려진 것과 같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도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구제하고 사람들에게 칭찬받으려고 하지 않는 신앙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구제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첫째, 사람에게 칭찬받는 구제를 해서는 안 됩니다.
1절 프로세케테 텐 엘레에모쉬넨 몬 메 포이에인 엠프로스덴 톤 안드로폰 프로스 토 데아데나이 아우토이스 에이 데 메 게 미스돈 우크 에케테 파라 토 파트리 휘몬 토 엔 토이스 우라노이스
마6: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하나님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구제를 하는 자들은 겉과 속이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칭찬을 받고 싶어서 구제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 받을 상이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약 히브리어 성경에는
‘주의하라’라는 단어는 (샤마르 8104 VNMMYP 동사 니팔(수동태) 명령법 남성 2인칭 복수) 지키다, 보호하다, 실행하다, 조심하다, 라는 뜻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말씀하여 경고하고 있습니다. 구제를 할 때에 많은 사람들에게 의를 행하여 칭찬을 받지 못하도록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나를 위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대로 실행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받을 상급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지키고 실행하여 하나님의 상급을 받아 하늘나라에 많은 상급을 받을 수 있도록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나를 말씀으로 보호해 주시고 사람들 앞에서 교만하지 못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하여 반드시 지키도록 하고 있습니다. 어떠한 상황이 있어도 자신의 의를 사람들에게 들어내어 자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명령형을 사용하여 이렇게 사람을 구제하고 하나님께 상을 받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둘째, 구제를 하고 나팔을 불어서는 안 됩니다.
2절 호탄 운 포이에스 엘레에모쉬넨 메 살피세스 엠프로스덴 수 호스페르 호이 휘포크리타이 포이우신 엔 타이스 쉬나고가이스 카이 엔 타이스 휘마이스 호포스 독사스도신 휘포 톤 안드로폰 아멘 레고 휘민 아페쿠신 톤 미스돈 아우톤
마6:2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주님께서는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길거리에 나가서 나팔을 분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구제를 해 놓고 나팔을 불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이렇게 하면 이미 사람들에게 상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받을 상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외식하는 자’라는 단어는 (휘포크리테스 5273) 외식하는 자, 가장하다, ~같이 꾸미다, 속이다, 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극장에서 무대에 오르기 전에 배우들이 얼굴에 분장을 하여 원래의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배역의 사람으로 바뀌는 것을 의미하던 말입니다. 그래서 외식하는 자들은 자신을 배우처럼 꾸미고 자신의 모습을 감추어 사람들에게 화려한 것만 보여주어 사람을 쉽게 속이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구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향하여 구제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모습을 통하여 배우가 무대에서 화려하게 꾸미고 영광을 받는 것처럼 이런 영광을 받기를 원하고 인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럼 히브리적 사고의 외식하는 자는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히브리어로는 (하네프 2611) 경건하지 못한 자, 더럽혀지다, 모독되다, 사악하다, 라는 뜻입니다. 외식하는 자들은 하나님 앞에 경건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구제를 하고 사람들에게 영광을 받거나 인기를 얻으려고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며 마음 자체가 사악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 당시에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제사장들은 이렇게 사람들에게 영광 받기를 원했습니다. 자신들은 구제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많은 사람들에게는 영광과 인기를 받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이미 신성 모독하고 있는 것입니다.
33절 아페크리데산 아우토 호이 이우다이오이 게곤테스 페리 칼루 에르구 우 리다조멘 세 알라 페리 블라스페미아스 카이 호티 쉬 안드로포스 온 포이에이스 세아우톤 데온
요10:33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신성모독으로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많은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했습니다. 그 이유가 신성모독으로 예수님을 돌로 쳐서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신성모독은 사람이 자칭 하나님이라 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하나님의 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깨닫지를 못한 것입니다. 자신들도 사람들을 구제하고 영광을 얻으려고 잘난 체하고 인기를 얻고 있으면서 주님은 하나님께 신성모독 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제를 해놓고 자신의 영광을 받으려고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려고 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약 히브리어 성경에는
‘나팔을’이라는 단어는 (쇼파르 7782) 수양의 뿔 나팔, 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샤파르 8231) 아름답게 되다, 빛나게 되다, 라는 뜻입니다. 주님은 구제를 해놓고 나팔을 불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럼 나팔을 불지 말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 나팔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19절 바이히 콜 하쇼파르 홀레크 비하제크 미오드 모셰 이다베르 비하엘로힘 야아네누 비콜
출19:19 나팔 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즉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
나팔 소리가 커질 때에 모세가 하나님께 말할 때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음성으로 대답하고 있습니다. 나팔은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팔을 통해 자신이 했던 구제의 행위가 하나님께만 영광이 돌려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름답게 하고 주님께 영광을 돌려 빛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나팔을 사람이 영광을 받는 데 사용된다면 하나님은 기뻐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이미 자신들이 세상에서 빛나게 되었고 영광과 인기를 누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주실 상급이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주님께서 원하시는 구제 방법은 무엇입니까? 해답을 말씀을 통해 주시고 있습니다.
셋째,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구제하라는 것입니다.
3절 수 데 포이운토스 엘레에모쉬넨 메 그노토 헤 아리스테라 수 티 포이에이 헤 덱시아 수
마6:3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주님께서는 너희가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씀하시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것을 그때 당시의 문화적 배경을 통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이 말씀의 기본 배경은 성전과 연관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예루살렘 성전의 구조 중에 ‘비밀의 방’이라는 곳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히브리어로는 (마트몬 4301) 숨겨진 창고, 숨겨진 보물, 은밀한 창고,라고 하는 장소입니다. 이곳은 이스라엘 남자들만 들어갈 수 있는 ‘이스라엘의 뜰’이라는 곳의 북쪽 끝에 방이 하나 있는데 이곳이 바로 숨겨진 창고이며, 숨겨진 보물이 있는 은밀한 창고인 ‘마트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제하는 자가 의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구제를 하려고 하면 자신이 원하는 만큼 돈을 숨겨진 보물 창고에 들어가 놓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너무나 힘들어 구제가 필요한 사람은 이 보물이 숨겨져 있는 은밀한 창고에 들어가 자신이 필요한 만큼의 돈을 가지고 와서 구제를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누가 돈을 놓고 갔는지 누가 돈을 가져가서 구제를 받았는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비밀이 철저하게 지켜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아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몰랐던 것입니다. 만약에 구제한 사람이 구제받은 사람을 안다면 자신도 모르게 구제한 사람을 만나면 교만해질 것이며 구제를 받은 사람은 구제한 사람을 보면 미안하여 허리를 숙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만 알고 있으니 구제를 한 사람은 하나님께 복을 받고 구제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와 찬송을 올려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오른손이 한 구제를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왜 오른손이 한 일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일까요?
‘오른손’이라는 단어는 (야민 3225) 오른손, 오른쪽, 이라는 뜻입니다. 오른손과 오른쪽은 하나님의 권능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6절 이미니카 아도나이 네이다리 바코아흐 이미니카 아도나이 티리아츠 오예브
출15:6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원수를 부수시니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오른손의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고 주의 오른손이 원수를 쳐부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른손은 하나님의 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제도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힘과 물질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만 돌려지고 하나님의 행하심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10절 아쎄르 비데헴 지만 비미남 말리아 쇼하드
시26:10 그들의 손에 사악함이 있고 그들의 오른손에 뇌물이 가득하오나
그러나 반면에 사악한 자들의 오른손에는 뇌물이 가득 찼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제를 한다고 하면서 자신들의 능력으로 하는 자들은 결국에는 자신의 손에 뇌물이 가득 채워진 것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사악한 자들의 오른손에는 더러운 재물로 가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면서 구제를 하는 자들은 더러운 뇌물과 같은 것으로 하니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과 힘을 가지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구제를 해야 합니다. 이런 구제야만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4절 호포스 에 수 헤 엘레에모쉬네 엔 토 크륍토 카이 호 파테르 수 호 블레폰 엔 토 크륍토 아우토스 아포도세이 소이 엔 토 파네로
마6:4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예수님께서는 구제할 때에는 은밀하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아주신다는 것입니다. 신약 히브리어 성경에는
‘갚으시리라’라는 단어는 (가말 1580 VQIMZS 동사 칼(능동태) 미완료 남성 3인칭 단수) 은덕을 베풀다, 보답하다, 상주다, 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은밀하게 구제한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모두 지켜보시고 은덕을 베풀어 상으로 보답해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 단어는 엄마가 어린아이에게 젖을 물려주는 것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도 구제한 자들에게 복을 주시며 젖을 물려주듯이 항상 끊어지지 않는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24절 예쉬 미파제르 비노사프 오드 비호세크 미요셰르 아크 리마히소르
25절 네페쉬 비라카 티디샨 우마리베 감 후 요레
잠11:24-25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
27절 노텐 라라쉬 엔 마히소르 우마일림 에나이브 라브 미에로트
잠28:27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자는 궁핍하지 아니하려니와 못 본 체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크리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과 인기를 위해 구제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구제한 자들에게는 복을 주시는데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아낀다고 해서 그것이 모아지는 것이 아니라 가난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제를 좋아하는 자들은 풍족하게 될 것이고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들은 자기도 윤택하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자는 궁핍하지 않지만 못 본 체하는 자들에게는 저주가 크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제할 때에 자신의 재산의 절반 이상이 없어지도록 구제를 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게 과도하게 구제하여 자신도 구제를 받아야 할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구제도 좋지만 너무나 심하게 구제하여 자신도 빚더미에 올라가고 파산에 이르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시간 주님께서 구제에 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구제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살아나게 됩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방법은 구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도한 구제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영광을 가릴 수가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구제했다고 해놓고 과도하게 하거나 자신이 실수하여 사업이 망하고 재산이 탕진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이 볼 때에 저 사람은 하나님 앞에 구제도 많이 하고 헌금도 많이 했는데 왜 사업이 망하고 가정이 파산되어 고난을 당하고 있는가?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구제를 많이 했다고 해서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적재적소에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할 때에 복을 받는다는 것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이제부터 구제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뜻을 위해 하시기를 바라고 헌금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는 것이지 내가 얼마 냈다고 자랑하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시간부터 십일조 헌금이나, 감사헌금이나, 모든 구제헌금을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에스겔 히브리어 설교말씀] 심판하시는 여호와 나카(겔 7:9)반응형
왼손 모르게 오른손이 행할 때까지
“너희는 남을 도울 때에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 생각하지 마라. 그냥 소리내지 말고 은밀하게 도와주어라. 사랑으로 너희를 잉태하신 너희 하나님도 무대 뒤에서 일하시고, 너희를 은밀히 도와주신다.”(마태복음 6:3~4/메시지성경) “너는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자선 행위를 숨겨두어라. 그리하면, 남모르게 숨어서 모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복음 6:3~4/새번역)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남에게 보이려는 자선, 그 위선을 경계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가르침을 은밀한 교만의 도구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 가르침대로 남모르게 선을 행하고 생각합니다. ‘난 진정한 선을 행했구나.’ 그리고 남들이 칭찬하는 어떤 사람의 선행을 바라보며 판단합니다. ‘남모르게 행하는 참된 선을 모르고 저렇게 칭송받으려고 보란 듯이 행하는구나.’ 어떤 진리도 열등감과 인정욕의 손에 붙들리면 기만과 위선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왼손이 모르게 하는 오른손의 선행! 곱씹을수록 의미심장한 비유로 다가옵니다. 오른손과 왼손은 한 몸이니 어찌 모를 수 있겠습니까. 길은 하나뿐입니다. 오른손의 일을 선행으로 여기지 않을 때, 왼손도 선을 행한 줄 모를 것입니다. 사실 음미하면 할수록 ‘내가 너에게 선을 베풀었다’는 문장 자체가 허상입니다. 오직 자신의 뜻과 힘만으로 베풀 수 있는 선이란 불가능합니다.
▲ Gary Price 作 ⓒGetty Image
몸으로 섬기든, 물질로 섬기든 무엇인가를 행하려면 수많은 손길에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돕고 싶다는 바람, 그것도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마음속에서 솟아나도록 주님 선물해주셔야 가능합니다. 마음을 먹었다 해도 시간과 기회, 물질과 건강… 수많은 요소들이 함께 해야 가능합니다. 책 한 권을 선물하려 해도, 그 책을 구입할 돈, 그 돈을 버는데 관련된 직업, 직장, 동료… 그 책을 만든 수많은 손길, 택배, 인터넷 주문… “나” 혼자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관련된 수많은 존재들이 함께 어울려 선이 이뤄집니다. 하나님께서 그 모든 관계를 통해서 선을 이끌어주셨고 다만 그 마지막 자리에 자신이 서 있을 뿐입니다. 작은 선행은 결코 작지 않습니다. 모든 일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거대한 신비가 살짝 반짝였을 뿐입니다.
이런 진실을 알면, 교만은 사라집니다. 은밀하게라도 내가 선을 베풀었다는 의식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오히려 선의 큰 흐름에 참여할 수 있었음이 영광입니다. 그 끝자락에서 손과 발이 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 감사할 뿐입니다. 그럼에도 정작 엉뚱한 것을 모릅니다. 인정욕에 붙들려서 보란 듯이 선을 행하고, 열등감에 붙들려서 자기 과시를 위해 선을 행합니다. 받는 사람의 상처 따위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남들이 행하는 선은 어찌나 잘 꿰뚫어보는지 과시욕, 인정욕, 교만이라고 판단합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기만과 위선은 짐작도 못합니다. 가장 속기 쉬운 함정,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자신을 알고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만날 때, 선을 행한다는 자의식에 속지 않습니다. 그제야 하나님 이루시는 아름다움에 빠져 자기가 사라집니다.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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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손이 한일을 왼손이 모르게”
그제 밤 12시 SBS에서 ‘문제를 맞춘다’고 했습니다. 맞추다가 아니라 맞히다입니다. 그제 밤에 써 놓은 쪽지를 오늘 아침에야 봤습니다. 저희 집에는 곳곳에 쪽지가 있거든요. ^^*
연말이라 그런지 여기저기서 훈훈한 소식이 많이 들리네요. 참 좋은 일입니다. 옛 속담에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이 있죠? 왼손이 알건 오른손이 알건 간에 내가 가진 것을 남과 나누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가만…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건가요, 왼손이 한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는 건가요? 새우 싸움에 고래 등이 터지나요, 고래 싸움에 새우 등이 터지나요? ^^*
경전하사(鯨戰蝦死)라는 말이 있습니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뜻으로 국어사전에도 있는 낱말입니다. 강한 자끼리 서로 싸우는 통에 아무 상관도 없는 약한 자가 해를 입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죠. 그러나 하전경사(蝦戰鯨死)라는 말은 없습니다. 새우 싸움에 고래 등 터진다는 속담은 없는 거죠.
그러나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새우 싸움에 고래 등 터진다.” 를 올리고 “아랫사람이 저지른 일로 인하여 윗사람에게 해가 미치는 경우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풀어놨습니다.
제가 보기에, 고래 싸움에 새우 등이 터지건, 새우 싸움에 고래 등이 터지건 상황에 따라 쓸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 모르게 하라는 좀 다릅니다. 이는 마태복음 6장에 나오는 말인데, 좋은 일을 할 때 주위에 떠벌리지 말고 남모르게 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이를 왼손이 한 일을 오른손 모르게 하라고 하면 안 됩니다. 전통적으로 서양문화에서 오른쪽은 좋고 착한 쪽, 왼쪽은 나쁜 쪽을 뜻합니다.
이런 전통에서 나온 속담이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입니다. 따라서 “왼손이 한 일을 오른손 모르게 하라”고 하면 틀립니다.
속담은 그 유래와, 바탕 뜻 그리고 교훈적이고 비유적인 뜻을 아울러 밝혀야 맛이 난다고 봅니다. 속담의 뿌리는 민속적 배경, 속담이 나온 지역 등을 이해해야 그 뜻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고 봅니다.
하나 더 궁금한 거…
얌전한 개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가 맞나요,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가 맞나요? 얌전한 강아지인가요? ^^*
우리말123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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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6장, 선한 일을 할 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마 6:1-4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과 다른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그 다른 인생의 구분점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이 없는 듯 살고 있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분명한 확신과 체험을 갖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무엇을 해도 하나님이 계시기에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실까? 이것이 핵심입니다.
불신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죠.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의외로 하나님이 안계신 것처럼 살아가는 경우가 참 많은 것을 봅니다. 말로는 하나님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실제 그 삶을 보면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믿는다고 보기에 어려운 행동들을 하는 것을 많이 보게 됩니다.
예를 들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한 번 살펴봅시다. 한 사람이 여리고라는 인적이 드물고 강도가 자주 출몰하는 곳에서 강도를 만났습니다. 제사장도 레위인도 모두 외면하고 가버렸고, 오직 친절한 사마리아 사람만이 그를 도왔습니다. 그런데 만일 이 사람이 강도 만난 곳이 성전 앞이나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시장바닥이라면 어떨까요? 그 때에도 레위인과 제사장들이 모른 척하고 지나쳤을까요?
왜 이런 차이가 나죠?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인간적인 사랑과 동정, 그리고 한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친절을 베풀었습니다. 누가 보든지 아니 보든지. 그는 남이 아니라 선을 행하는 자신이 중요했고, 또 하나님이 중요했습니다. 하지만 이 레위인과 제사장은 사람들의 시선과 인정 그리고 체면과 위신이 이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하나님은 그들의 안중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행동의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이 보고 계시다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선을 행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선을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좋아하시고, 하나님이 칭찬하시니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참 쉽지 않은 일입니다. 내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셨는데, 실제 사회사업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물어봤더니, 자신이 하는 일을 세상 사람들이 몰라줄 때 참 서운하고, 내가 이 일을 더 해야 하는가 회의에 빠지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이 일을 해서 내게 무슨 이익이 되는가? 그것을 따져보다가 이익이 없다고 생각하면 조금 하다가 힘에 부치거나 어려우면 그만 둬 버리는 것이죠.
하지만 하나님이 보시고 있다는 믿음으로 선한 일을 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하나님이 중심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이 아시고,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일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며 하나님께서 필요로 하시는 일이다. 내가 이 일에 쓰임을 받으니 얼마나 좋으냐? 그래서 힘들고 어려울 땐 기도합니다. 주님 도와주세요. 이 일을 하게 해주세요. 그리고 잘 될 때는이렇게 말합니다. 이건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저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조금 도움이 되었을 뿐입니다.
영국정부는 국가적으로 크게 공헌을 한 고든(Gorden,C.G.) 장군을 치하하려고 했습니다. 동상을 세우고 기념비를 건립하려고 했지만 장군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작위 (爵位)를 수여하고 포상금을 지급하겠다고 하여도 거절합니다. 그는 전후 33회나 전진을 누비면서 혁혁한 공을 세워온터라 영국정부는 어떻하던 기념을 하고 싶어서 조그마한 금메달에 그 공을 기록하여 증정했습니다. 그후 장군이 죽은 후 유품을 정리하는데 당연히 있어야 할 메달이 안 보였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이 궁금하여 수소문하여 보았더니 가슴뭉클한 곡절이 숨어있었습니다. 멘체스터에 대 흉년이 들었을 때 장군은 그 메달을 녹여 팔아서 굶주리는 자들을 구제하였던 것입니다. 장군의 일기장에는 이 사실에 대해 단지 이렇게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게 여기던 선물을 그리스도께 바쳤다”
여러분 하나님은 계십니다. 이렇게 말해봅시다. “하나님 아시죠?”
by 코이네 소토교회 박동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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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마 6:1~4)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마 6:1~4)
중국의 유머입니다. 어떤 사람이 좋은 침대를 샀습니다. 이 사람은 이 침대를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습니다. 그래서 꾀를 내기를 자기가 병이 들어 아프다는 소문을 냈습니다. 사람들이 병문안을 오게 되면 자연스레 자기의 고급 침대를 자랑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의 친구가 있었습니다. 이 친구는 속바지를 샀는데 이것을 자랑하고 싶어 미칠 지경입니다. 이 친구가 침대를 산 친구의 병문안을 와서는 한쪽 다리를 들어 침대 위에 올려 속바지가 보이게 하면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자네 무슨 병이 들어 이렇게 누워 있나?”
그러자 침대를 자랑하고 싶던 친구가 한 숨을 쉬며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자네나 나나 앓고 있는 병이 다 같군.”
자랑하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인간에게 누구나 있습니다. 현대처럼 보이지 않는 것보다 보이는 것을 중시하는 물질중심의 사회는 더 그렇습니다. 내적으로 쌓는 정신적 수양이나 하나님과의 은밀한 교제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중요하지 않게 취급합니다. 반면에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돈이나 소유, 학벌, 지위, 성공 등은 크게 생각합니다. 세상 풍조가 이렇다보니 자신의 생각이나 선택보다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인정이 우리 삶의 성공과 실패를 결정하는 척도가 되어버렸습니다. 자기 줏대를 가지고 마이 웨이(My way)를 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숫제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사람들이 인정하는 좋은 길만 가려는 인생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런 시대를 향하여 주님은 너희가 사람에게 보이려고 안달하는 인생이 되지 말고 은밀하게 보시는 하나님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생이 되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5장 13,14절에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며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빛은 드러나게 되어 있고 사람들의 눈에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 말씀에서는 그렇다고 해서 너희가 세상 사람들에게 드러내려는 목적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결코 자기를 드러내려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감추면 감출수록 더 드러나는 것이 또한 제자들입니다.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감출 수 없습니다. 빛이 되지 않으려고 하는데 빛이 되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의 실존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는 말씀과 사람에게 보이려고 너희 의를 행치 말라는 말씀은 결코 모순된 관계가 아닙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진정 세상의 빛으로 살기 위해서는 그 마음 중심에 무엇이 있어야 하는지를 잘 가르쳐줍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우리 인간의 행동을 이끄는 여러 심리적 요인들이 있지만 오늘 예수님께서 경고하신 말씀처럼 강력한 것도 없습니다. 1절 “사람에게 보이려고”와, 2절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하는 심리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입니다. 내가 구제하는 것을 사람들이 알아주었으면 합니다. 내가 선행을 하고, 내가 이만큼 멋있는 사람임을 사람들이 알아주길 바랍니다. 어쩌면 우리가 열심히 공부하고 일해서 성공하려는 이유 중 하나도 사람들의 인정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은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면 그들에게는 자랑하고 싶은 욕구가 없었는가?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의 학식을 자랑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하나님 말씀을 지키다가 가난하게 된 것을 사람들이 인정하고 칭찬해 주었으면 하는 은근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구제를 하면서도 시선은 사람들을 향합니다. 자기는 가난해도 다른 사람을 돕는 대단한 믿음을 가졌다는 것을 시위하기 위해서입니다. 거리에 서서 길게 기도합니다. 자신이 경건한 사람임을 보이기 위해서입니다. 금식하면서는 노골적으로 슬픈 표정을 보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보여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자 이런 사람들의 문제는 무엇일까요?
첫째, 자기 안에 자기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이나 자기 선택보다는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다른 사람들 칭찬하고 인정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입은 옷이나 사는 집이나 자기에게 편하면 그만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다른 사람의 시선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기에게 불편하더라도 사람들이 보기에 좋아하는 옷을 입습니다. 자기의 형편에 맞지도 않은 비싼 옷을 사고 빚이라도 내어서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합니다. 소위 명품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명품이 질이 좋고 자기에게 맞으면 좋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명품은 질보다는 그 이름 때문에 자랑하려는 의도로 소유합니다.
자기답지 않은 것은 불편합니다. 남의 시선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거짓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자기 수준이나 자기 본모습을 감추려하기 때문입니다. 그들 안에는 불평과 분노, 교만과 거짓이 있습니다. 불평하는 이유는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은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으면 결국 그런 세상을 향하여 분노하게 되어 있습니다. 또 이렇게 노력해서 어느 정도 인정받는 단계에 이른 사람은 교만해집니다. 자기처럼 인정받지 못한 사람을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거짓으로 자기를 꾸며야 합니다. 얼마나 부자연스럽습니까?
저는 자연을 보면서 감동을 받는 것이 있습니다. 자연은 누가 보든 보지 않든 자기 길을 가기 때문입니다. 가끔 천혜의 비경이나 태고의 신비라는 수식어를 가진 아름다운 자연이 사람들에게 발견되어 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찾게 됩니다. 주로 석회동굴들이 그렇습니다. 삼척에 가면 환선굴이 있는데 그 안에는 바위들이 샹들리에처럼 펼쳐져 있고, 폭포형태의 석주도 있습니다. 거대한 동굴 광장에 갖가지 모습을 한 만물상이 펼쳐져 있습니다. 어떤 곳에는 에그프라이라 하여 마치 계란을 프라이한 모양의 석순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석회동굴이 이런 모습을 형성하는 데는 5억 3천만 년 정도 걸린다고 합니다. 바위는 수만 년에 1mm씩 자란다고 합니다. 이 굴은 너무 커서 미처 다 발견되지 못했는데 최근에도 발견되어 개방된 동굴도 있습니다(대금굴 2003년). 그러면 이 석회동굴은 사람들에게 드러나기 위해서 이 수 억년을 기다려 온 것인가? 아닙니다. 자연은 단지 자기 길을 가고 있었을 뿐입니다. 이 지구 땅덩어리 속에는 인간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천혜의 비경들이 수없이 많을 것입니다. 그들은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던 다만 자기 길을 갈 뿐입니다.
자기 길을 가는 사람이 아름답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더 이상 사람 눈치 보는 인생을 살지 말라고 하십니다. 자기 생각이 무엇이며, 자기 길이 무엇인지가 중요하지 사람의 시선에 신경 쓰는 그런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맹자 편에서는 대장부를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천하라는 넓은 거처에 살며, 천하의 올바른 자리에 서며, 천하의 큰 도리를 행하며, 지지를 얻으면 사람들과 함께 그 도리를 행하고, 지지를 얻지 못하면 홀로 그 도리를 행한다. 부귀의 유혹도 그 마음을 더럽게 할 수 없으며, 가난의 어려움도 그의 마음을 바꾸어 놓지 못하며, 위세나 무력도 그 마음을 굽히지 못하는 사람, 이런 사람을 일컬어 대장부라고 한다.” 대장부는 자기 확신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생각에 흔들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가 누가 알아주든 그렇지 않든 자기 길을 가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둘째는 사람의 시선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 안에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구제라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것입니까?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것은 가난한 사람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자선을 행하는 사람은 돈을 구제함에 넣으면서도 시선은 ‘이런 착한 나를 누가 보지 않나?’ 하는데 있습니다. 2절 말씀에서는 회당과 거리에서 나팔을 분다고 말씀합니다. 실제 유대교 회당에서는 큰 액수의 돈을 기부하면 뿔나팔을 불어 사람들이 그 사람을 주목하고 칭찬하도록 하였습니다. 구제의 순간 이 사람 마음 가운데는 자기 영광으로 가득 차 있지 하나님은 없습니다. 금식하면서도 내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경건한지 누가 봐주길 원합니다.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면서도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누가 알아주길 바랍니다. 그러니 그 안에 어떻게 하나님이 거할 틈이 있겠습니까?
우리의 행위의 동기가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데 있는지, 아니면 사람의 인정에 있는지 분명히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 열매로 알 수 있습니다. 그 안에 품고 있는 것이 열매로 맺게 마련입니다. 그 열매가 감사와 섬김이요, 그리스도의 인격이라면 그 중심에 하나님이 있는 것입니다. 그 열매가 불평과 교만, 탐욕이라면 그것은 그 안에 하나님이 없는 것입니다. 이는 목회자들이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를 개척하고 교회를 성장시키는 것이 주님의 선교 명령에 순종하는 겸손과 사랑에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자기의 이름을 높이고자 하는 자기 자랑에서 나온 것인지 구분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순수하게 시작했을지라도 죄와 사단은 우리 마음속에서 얼마나 교묘하게 우리를 그릇된 길로 틀어버리는지 모릅니다. 이런 자들을 2절에서는 ‘외식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이 뜻은 ‘위선자’라는 뜻입니다. 이는 원어로 ‘휘포크리테스’라고 하는데 원래는 배우, 광대의 의미입니다. 배우나 광대처럼 자기 본모습을 속이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이런 위선적인 사람이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1:10) 우리 목회나 우리 일이 잘못하면 사람을 기쁘게 하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9:27)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일에서는 성공하고 자기 자신은 정작 버림받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실 여기에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얼마나 중요한 존재로 생각하고 있느냐라는 우리 신앙관을 보여줍니다. 다이아몬드를 캐러 간 사람에게는 금이나 은은 더 가볍게 보일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그리스도에게만 집중하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그리스도만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그리스도만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의 제자는 예수가 너무 소중해서 자기를 잊어버린 사람입니다. 예수를 알고 그와 함께 하는 이것이 가장 소중하기에 세상이나 다른 사람의 시선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태양만 바라보고 있으면 주위의 사물은 다 어두워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그런 존재가 되어 있습니까? 혹시 성공과 부흥, 성장과 규모 여기에 취해 그리스도의 빛은 형편없이 희미해져 버린 것은 아닙니까?
역설적인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에 집중하는 삶을 살 때 우리 인생은 중심이 잡히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나를 잊고 내 안에 그리스도로 가득할 때 우리는 오히려 내 자아에 충실한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10:39) 자기를 잊고 그리스도만을 위할 때 오히려 우리는 더 유명한 사람이 되고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자가 됩니다.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고후6:8-9) 우리가 그리스도라는 태양을 더 집중하여 바라볼수록 우리 또한 빛나는 존재가 됩니다. 우리는 거울과 같습니다. 태양을 정면으로 향할수록 우리 더 반짝이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의 영광을 취하려는 자는 이미 자기상을 받았다고 주님은 말씀합니다. 자기 상을 받았다는 것(아페케인)은 상업적인 용어입니다. 그 뜻은 이미 계산을 다 치루었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다 받았기에 영원한 세상에서 받을 상급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명하게 되고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조심해야 합니다. 땅 위에서 영광을 받는 순간 하늘의 영광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주님은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오른손으로 구제하는 순간 그 사실을 왼손이 모른다는 게 가능합니까? 한 몸인 이상 모를 리가 없습니다. 주님의 뜻은 사람뿐만 아니라 자기도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게 자선을 행하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이런 주님의 요청은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이런 식으로 한다면 누가 구제하겠습니까? TV나 신문에서 광고될 때 사람들은 더 많이 자선을 행하는 것이 실정 아닙니까? 아무리 무명으로 하려고 해도 세상은 그것을 널리 알려 더 많은 후원자를 얻으려 하고 또 이렇게 대접을 받을 때 무언가 보람을 느끼는 것이 우리 인간들이 아닙니까? 이유야 어쨌든 이렇게라도 하면 그 재물로 가난하고 어려운 많은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저는 그래서 차라리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즉각 알뿐만 아니라, 그 순간 나팔을 불더라도 자선을 행하는 일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손이 너무 인색하기 때문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자선과 나눔은 너무 적습니다. 미국 사회에서는 부자들이 자기 재산의 일부를 사회에 환원하고 자선을 하는 것은 하나의 미덕처럼 되었습니다. 빌 게이츠나 워렌 버핏과 같은 기업가들이 한국에도 많이 나왔으면 합니다. 우리 소득의 몇 프로는 이처럼 나눔과 자선에 사용했으면 합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단지 구제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들의 마음 동기가 무엇에 의해서 움직이는지에 대한 문제입니다. 우리의 전반적인 삶의 태도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선을 부지런히 행하되 하나님을 잃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것에는 주님의 여러 가지 의도가 있습니다.
첫째는 은밀하게 행하는 자선만이 상대방을 제대로 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 랍비들은 이런 동기로 은밀한 자선에 대해 주로 이야기 했습니다. 어떤 랍비는 “은밀한 자선을 베푸는 자는 모세보다 크다”고 말했습니다. 자선은 사망에서 자신을 구하는 것만큼의 가치가 있다고 하며 사망에서 구하는 자선은 “받는 자가 누구에게 받았는지를 알지 못하고, 주는 자가 누구에게 주는지를 알지 못하는 자선이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자선하고자 할 때 누가 그것을 줍는지 모르기 위해 돈을 고의로 떨어뜨린 랍비도 있었습니다. “누구에에 무엇을 주어서 그로 부끄럽게 하기보다는 아무 것도 주지 않는 것이 더 낫다”는 말도 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이런 은밀한 자선은 도움을 받는 자를 생각하는 자선이라 할 것입니다.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또 자기를 도운 사람에게 매이게 됩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자선은 상대방이 굴욕감을 느끼지 않게 만듭니다. 세상은 아름다운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만듭니다. 자선이 거래가 아니라 순수한 사랑이 되도록 만듭니다. 성경에 나온 대표적인 인물로는 선한 사마리아 인의 선행이라 할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안 인은 강도 만난 자를 위험을 무릎 쓰고 도와주었습니다. 자기의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시간을 바쳤고 전혀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자기 물질을 드렸습니다. 하룻밤을 묵어가며 정성껏 간호하였고 떠날 때도 그 이후의 치료비까지 계산하는 배려를 보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자기 이름 한자 남기지 않고 사라졌습니다. 그는 단지 어떤 선한 사마리아인이란 이름으로 불리울 뿐입니다.
둘째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한다는 것은 선행이 생활화된 사람의 선행을 말합니다. 선행도 가끔 하면 쑥스럽고 사람을 의식하게 됩니다. 그러나 습관화되면 자연스럽습니다. 무의식적으로 행하기 때문에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이런 모습을 우리는 마태복음 25장의 최후의 심판 비유에서 볼 수 있습니다. 최후의 심판 비유에서 마지막 날 주님의 보좌 우편에서 아버지의 복을 누릴 자들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이런 영광이 주어졌을 때 그들의 한결 같은 반응은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된 지 몰랐다는 점입니다.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마25:37-39)
이들은 구제와 선행이 일상화되어서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주님을 대접하였습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히13:1-2) 주님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오십니다. 평소에 선행을 베풀던 사람이 이런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은 자기가 좋아서 할 때 그렇게 됩니다. 의식적으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려면 얼마나 신경이 쓰입니까? 억지로 하면 이렇게 되지 못합니다. 자기가 선행했던 돈의 액수를 일일이 기억합니다. 그 날짜와 장소까지 기억합니다. 억지로 했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자기 시간과 물질을 다 바치는 선행을 합니다. 어떤 부모는 자기 집을 팔아서, 또 파출부를 해서라도 자식 교육을 위해서 투자합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 일이 좋아서 그렇습니다. 계산하지 않고 기억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선행을 행하는 것이 이처럼 좋아서 행하는 일이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을 섬기는 것도, 봉사하거나 헌금을 하는 것도 좋아서 해야지 마지 못해 하면 괴롭습니다. 주님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를 정도로 우리가 자연스런 선행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는 선행은 자신이 하나님의 청지기임을 분명히 알며 행하는 선행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재물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른 가난한 사람에게 주라고 맡기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주신 것을 다시 흘러 보내는 통로에 불과합니다. 청지기가 매일 창고에 자기 재산이 얼마인지 헤아립니까? 누구에게 얼마나 썼는지 일일이 계산하고 있습니까? 청지기는 주님의 명령을 따라서 베풀 뿐입니다. 자기 것이라고 소유를 주장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계산하기 시작하고 그래서 오른손이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미리 왼손이 알아 버립니다.
우리의 만족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자선을 행할 때도 우리의 만족은 사람의 인정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데 있습니다. 이 순종을 통하여 우리 인격이 그리스도를 닮은 인격이 되고,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주님은 이런 순전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하늘의 기쁨과 은혜로 갚아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향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물질과 명예를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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