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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제목 : 너 하나님의 사람아
원본 설교 : 출애굽 3세대를 위하여
성경 구절 : 사사기 14장 1절~3절
1. 삼손이 딤나에 내려가서 거기서 블레셋 사람의 딸들 중에서 한 여자를 보고
2. 올라와서 자기 부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딤나에서 블레셋 사람의
딸들 중에서 한 여자를 보았사오니 이제 그를 맞이하여 내 아내로 삼게
하소서 하매
3. 그의 부모가 그에게 이르되 네 형제들의 딸들 중에나 내 백성 중에 어찌
여자가 없어서 네가 할례 받지 아니한 블레셋 사람에게 가서 아내를 맞으려
하느냐 하니 삼손이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오니
나를 위하여 그 여자를 데려오소서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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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 뉴스앤조이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디모데전서 6:3-12…하나님의 사람됨을 가늠하는 시금석. 기자명 박득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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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newsnjoy.or.kr

Date Published: 6/2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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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회 메시지]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딤전 6:11-12)

지금 목사님이 중고등부 예배 시간에 성령의 열매에 대해 설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6가지 열매가 나옵니다.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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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12/1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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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 백석대학교회

[설교요약] 딤전 6:11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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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upc.or.kr

Date Published: 4/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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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하나님의 사람아 – 당당뉴스

너, 하나님의 사람아미리 보는 교회력 설교/오순절 후 18 주(20100926) … 개정) 『[11]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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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dangdangnews.com

Date Published: 9/2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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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딤전6:11-16 – 썹목사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경건의 길2- (딤전 6:11-16, 20-21) 2015.5.30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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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ssub2.tistory.com

Date Published: 9/2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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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조준목사] 하나님의 사람아 – 뉴스포유

오늘 주신 말씀 11절이 어떤 표현으로 시작됩니까?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조금 전에 말씀드린 디모데후서 3장 16,17절에서 성경이 어떤 책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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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newsforyou.kr

Date Published: 8/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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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딤전6:11-21) 2008. 6. 22 주일예배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서 3년 간 사역을 한 후 그의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사역을 위임하고 마게도냐 지역으로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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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kccic.org

Date Published: 8/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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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딤전6:11-21) – 네이버 블로그

분류: 새벽기도회 설교. 11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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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4/1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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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 디트로이트 한인연합감리교회

설교일 : 2014.11.02. 설교자 : 할렐루야 본문말씀 : 고린도전서 15: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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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kumcdetroit.org

Date Published: 3/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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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TS2 너 하나님의 사람아 | 분당우리교회 이찬수 목사 [짧은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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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설교

  • Author: JOY 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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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8. 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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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찬호 목사의 강해설교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딤전 6:11-12)

[본문 분석]

1) 하나님의 사람이란(11a)

2) 이것들을 피하라(11b)

3) 열매 맺는 삶을 추구하라(11c)

4)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12a)

5) 영생을 취하라(12b)

6) 부르심의 목적을 인식하라(12c)

7) 증인이 되라(12d)

[본문 묵상]

몇 년 전에 거창교회에 있을 때 겨울 수련회 주제가 “I am Christian”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만나는 애들마다 이렇게 물었던 것이 생각납니다. “Are you Christian?” 그러면 대부분 “Yes, I am.”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런데 제가 “Are you really Christian?” 이렇게 물으면 머뭇머뭇 거립니다.

그러다가 제가 “Are you really Christian to believe in Jesus Christ?”라고 물으면 그냥 도망가 버립니다. 지금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집요하게 묻는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내가 그리스도인인입니다.”라고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몇 년 전에 미국에서 히틀러 생일 때에 고등학교 학생이 총기를 들고 학교에 들어온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그들은 히틀러를 기쁘게 하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은 무참하게 학살했습니다. 그때 마침 도서관에 한 여학생이 기도하고 공부를 하려고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총을 머리에 겨누면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Are You Christian?”

그때 그 여학생은 “Yes! I am Christian.” 이렇게 대답하기가 무섭게 총이 발사되었고 그 여학생은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무섭죠? 지금 우리가 말하고 있는 이 말이 바로 그때 그 여학생이 한 말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여러분들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자신있게 내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여학생의 죽음은 그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여학생의 순교를 통해 학교에 놀라운 회개의 불길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이 여학생의 죽음으로 학교를 위한 기도모임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국기게양대 모임(Sea You at the pole)”입니다.

이 모임은 십대들이 학교에서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모여 기도하는 모임입니다. 주로 국기게양대에서 모였기 때문에 국기게양대 모임이라고 불렸던 것입니다. 이 운동은 지금 전 세계 각국으로 퍼져서 십대들이 국기게양대 앞에 모여 학교와 십대들과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모임이 되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사람이란(11a)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딤전 6:11)”

이번 수련회의 주제가 “너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말은 성경에서는 아주 특별하게 사용된 말입니다. 구약에서는 모세, 사무엘, 다윗, 엘리야, 엘리사 등 정말 영적 권위와 능력을 가진 사람을 가리킬 때에만 사용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너 하나님의 사람아”라고 했는데 신약성경에서는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용된 말입니다. 신약에서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영광스러운 말을 들은 사람은 디모데라는 사람입니다. 디모데는 바울의 둘도 없는 제자로써 바울이 순교당한 후 교회를 맡아 섬겼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말씀은 디모데에게만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성경을 읽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하시는 말씀으로 받아야 됩니다. 이제 디모데만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지 부모님 따라 교회 나오는 수준이 아니라, 정말 예수 믿는 사람답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집니다. 첫째는 소유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것이라는 뜻입니다. “누난 내 여자니까” 이러면 어떻게 됩니까? 누나는 내 것이라는 뜻입니다. “넌 내 남자야” 그러면 “내 남자니까 아무도 손대지 마” 이런 뜻입니다.

내 사람이라고 하면 단지 소유만 하고 있는 정도의 관계가 아닙니다. 정말 나를 사랑하고 나를 위해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는 사람을 내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정말 내 인생이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며,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둘째는 무엇에 정통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얼마 전에 마이클 잭슨이 사망했는데, 마이클 잭슨하면 뭐가 생각납니까? “음악의 사람, 댄스의 사람” 박세리 하면 골프의 사람, 박지성 하면 축구의 사람, 그런데 F4는 뭐죠? “돈의 사람” 이것처럼 “~의 사람”이라고 하면 거기에 온전히 인생을 건 사람을 나타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하면 하나님에 대해서는 전문가가 된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냥 전문가가 된 것이 아니라 평생을 여기에 집중하며 피와 땀을 흘려 훈련을 받은 결과로 전문가가 되는 것입니다. 마이클 잭슨이 그냥 마이클 잭슨이 되었겠습니까? 그 자리까지 올라가기 위해 피와 땀을 흘렸기 때문에 올라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하면 온전히 하나님께 집중하는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워낙 여기에 깊은 관심이 있다 보니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를 않는 것입니다. 음악에 빠진 사람의 눈에 그림이 들어오겠습니까? 박지성과 같이 축구에 빠진 사람에게 야구가 눈에 들어오겠습니까?

다른 것에 한눈을 팔다가는 그 분야에서 세계 최고가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한 분야에 내 인생을 바치는 것입니다. 다른 일을 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할 때 바로 이런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외에는 아무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만 집중하며 살다보니 하나님에 대해서는 전문가가 되어버렸습니다. 사람들이 여러분은 보면 “정말 누구보다 하나님을 잘 아는 사람이다”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누구보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목적을 잘 알고 그 일에 인생을 바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이런 하나님의 사람이 누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바로 네가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하나님의 사람이란 걸 알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이 밤에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것이다. 내 인생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다.”

여러분들이 누구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누구보다 하나님을 잘 아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정말 이번 수련회를 통해 여러분들이 내가 하나님의 것이며, 오직 주님을 위한 삶만을 살겠다고 고집하는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 이것들을 피하라(11b)

우리는 한 번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끝까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변함없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면서 하나님의 사람답게 인생을 마무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리빙스턴은 아프리카 선교사로 16년 동안 헌신한 분입니다. 그분은 살았을 때 늘 이런 고백을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관계없는 것이라면 내가 가진 그 어떤 것이나 그 어떤 소유물에도 아무런 가치를 두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 집중된 인생이 아니라면 아무런 가치가 없는 인생이라는 말입니다.

그가 죽었을 때의 모습은 침대 옆에 기대어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그 앞에는 성경이 펴져 있었고 마태복음 28장 20절에는 이런 메모가 적혀 있었습니다. “존귀하신 분의 말씀” 그 말씀은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는 이 말씀을 존귀하신 분의 말씀으로 여기고 평생을 그처럼 헌신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리빙스턴이 죽자 그의 심장을 조심스럽게 도려내었습니다. 그리고 그 심장을 아프리카에 묻고 시신을 영국으로 보냈다고 합니다. 그는 죽었지만 그의 심장은 아직 아프리카에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통합 교단의 총회장까지 지내신 목사님이 계십니다. 이분은 바람을 피우다가 현장에서 남편에게 발각될 위험에 처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아파트 베란다로 도망가 난간에 스파이더맨처럼 매달려 있다가 떨어져서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시작했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마무리했느냐 입니다.

그러기 위해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사람인 우리들에게 피할 것은 피하고, 따를 것은 따라야 합니다. 이걸 동시에 잘 해야 됩니다. 피할 것만 잘 피한다고 잘 되는 것도 아니고, 따라야 하는 것만 잘 따른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둘 다 성공해야 우리가 마지막까지 성공적인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딤전 6:11)”

오늘 말씀에 무엇을 피하라고 되어 있습니까? “이것들을 피하라” 이것들이 무엇일까요? 본문 앞의 문맥을 살펴보면 3-5절 말씀에서 진리의 말씀이 아닌 거짓된 가르침을 피하라고 되어 있고, 6-10절 말씀에서는 필요 이상의 과도한 물질적인 욕심과 집착을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대개 실패하는 곳이 어디입니까? 피해야 할 곳을 잘 피하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이게 아니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면서도 자꾸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머뭇머뭇 거리다가 당하는 것입니다. 요셉을 한 번 보세요.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할 때 어떻게 했습니까? 빨리 그 자리를 벗어났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제임스 화이트라는 분이 “하나님과 친밀한 사귐”이라는 책을 쓰셨습니다. 거기에 보면 5년 뒤 나의 모습은 지금 읽고 있는 책과 지금 함께 보내는 사람들에 의해 결정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지금 읽고 있는 책, 내가 지금 만나고 있는 친구들, 이게 나의 미래를 결정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책을 읽고 있습니까?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바울이 에베소라는 곳에서 전도를 하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때 이런 사역을 통해 그 도시가 변화되었습니다. 그때 변화된 사람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이 무엇인지 아세요? 바로 마술책을 모아서 불태워버렸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 책값이 은 오만이나 되었다고 말씀합니다(행 19:19). 왜 그들이 마술책을 모아서 불태워버렸을까요? 지금 읽고 있는 책이 자기의 미래를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의 미래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이라면 내가 불태워 없애버려야 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에베소는 마술의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마술이 성행했고 또 우상의 세력들의 공격이 치열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 아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하고 영전전쟁을 싸워야 한다는 말씀이 “에베소서”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런 영적인 상황 속에서 계속 이 책을 들고 있으면 실패할 것이 뻔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불태워 버린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불태워버려야 할 것은 무엇이 있습니까? 음란 CD, 만화 책, 게임 CD, 세상 노래 등등 지금 여러분들이 없애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지금 무엇을 읽고 있느냐에 따라 5년 뒤 여러분의 인생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모습을 한 번 생각해보시고, 5년 전에 내가 뭘 했는지 한 번 생각해보세요. 지금 여러분이 이런 수준으로 살아가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5년 전에 여러분들이 이런 수준의 책을 읽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좀 더 높은 수준의 책을 읽었다면 지금 여러분들의 모습은 정말 달라져 있을 것입니다.

두 번째로 지금 여러분들이 사귀는 친구들이 어떤 친구들인지 한 번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그 친구들의 모습이 5년 뒤 여러분의 모습입니다. 정말 그렇게 되고 싶습니까? 영적이며 건강한 친구들을 만나면 그런 영향을 받게 되고, 악하고 병들게 만드는 친구들을 만나면 싫든 좋든 내가 그렇게 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나는 절대 그렇게 어리석게 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한 번 보세요. 정말 그들과 똑 같은 모습으로 변해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좋은 책을 선별하고, 좋은 친구를 선별할 수 있어야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을이 되면 낙엽이 떨어집니다. 우리 교회 옆 가로수에도 은행나무가 있어서 정말 멋진 낙엽을 볼 수 있습니다. 낙엽이 떨어지는 것은 잎이 나무를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나무가 잎을 버리는 것입니다. 때가 되면 나무도 잎을 버려야 할 때 과감하게 버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게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게 내 영혼을 병들게 만들고, 죄악 된 삶을 살게 만들고, 죽음의 길로 몰아가고 있는 데도 계속 못 끊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이것들을 피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불태워 버려야 할 것은 불태워버리고, 끊어야 할 것은 끊고, 중단해야 할 것은 중단해야 사는 길입니다.

예전에 제가 중고딩 시절에는 수련회 때 은혜받으면 제일 먼저 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집으로 돌아와서 책상 위에 있던 유행가 테입을 모조리 마당으로 들고 나가 불태워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이젠 정말 하나님만 생각하고, 하나님만 위해 살겠다고 다짐하면서 그렇게 했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끊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술과 담배, 음란 사진이나 동영상, 질이 나쁜 친구들, 좋지 못한 언어습관 등등 결국 이런 것들이 내 인생을 실패자로 몰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걸 끊지 못하면 결국 실패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답지 못하게 살다 끝나는 것입니다.

꼭 끊어버리기를 바랍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끊어야 할 것들을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걸 내가 지금 피하거나 끊지 않으면 결국 그것 때문에 내가 실패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과감하게 결단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열매 맺는 삶을 추구하라(11c)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딤전 6:11)”

지금 목사님이 중고등부 예배 시간에 성령의 열매에 대해 설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6가지 열매가 나옵니다.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여기에 따른다는 말은 “범인을 잡기 위해 추격한다(pursue)”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따라가서 잡지 않으면 자꾸 열매가 도망간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가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열매가 맺혀져야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열매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에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열매가 있을 때 하나님의 사람답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의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법적인 의로움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앞장서서 죄를 짓고 살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번에 검찰총장 내정자가 청문회를 통해 하루 만에 물러나고 말았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도덕적으로 흠이 많은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높은 자리에 올라가도 도덕적 흠이 있으니까 결국 지탄의 대상이 되고 그 자리에서 내려와야 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자리에만 가면 되는 줄 압니다. 이제는 시각을 바꿔야 합니다. 그런 자리에 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런 자리에 앉을만한 도덕성과 영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의로운 사람

다니엘을 보시기 바랍니다. 세계 최고의 강대국이 정권이 3번 바뀌었습니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그는 한 번도 낙오되고 제거된 적이 없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도덕적으로 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을 미워하던 사람이 그를 죽이기 위해 몇 번씩이나 청문회를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흠을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 정도로 깨끗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다니엘은 그들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도덕적으로 깨끗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힘을 낼 수 있습니다. 그래야 악한 세상을 향해 할 말이 있는 것입니다.

경건한 사람

둘째로 “경건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경건한 삶이란 경건의 능력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경건의 모양이 아니라 경건의 능력입니다. 예배의 모양, 기도의 모양, 성령의 모양을 내는 것이 아닙니다. 경건의 능력이란 예배의 능력, 기도의 능력, 말씀의 능력, 성령의 능력을 가진 사람을 의미합니다.

여러분들에게 이런 능력이 있어야 세상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세상적인 실력을 가지면 세상은 도리어 미워하고 싫어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파워를 가지면 와서 도와달라고 합니다. 정말 힘들 때 생각나는 사람은 신앙이 깊은 사람입니다. 신앙이 깊은 사람들을 찾아가서 기도해달라고 부탁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

셋째로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이란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언제든지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람, 믿음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을 만나도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굳게 서서 하나님만 의지하며 전진하는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하여 가나안 땅으로 진군할 때 정탐꾼을 보냈습니다. 12명 중에 10명은 땅을 악평하며 자기들이 메뚜기 같다고 불평했습니다. 믿음이 흔들린 것입니다. 상황을 보고, 환경을 보고 안 된다고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물러난 것입니다. 하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은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고백하고,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반드시 우리가 그 땅을 차지할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10명은 그 땅에 못 들어갔고,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 땅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람은 환경을 보며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의 사람

넷째로 “사랑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에 나온 사랑은 아가페 사랑을 의미합니다. 단지 인간의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수준입니다. 이런 사랑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면 할 수 있습니다.

고딩 때 같은 반인데 나를 특별히 싫어하던 친구가 한 명 있었습니다. 얼마나 미워하는지 그냥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말만 하면 공격적으로 말하고, 조금만 틈만 보이면 주먹 들고 설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나를 미워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여러분들에게도 이런 친구들이 한두 명 씩은 꼭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어느 날 갑자기 눈빛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젠 너무 부담스러울 정도로 따뜻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것입니다. ‘이상하다?’ 그래서 알아보니까 그 친구가 교회를 나가기 시작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도 교회를 나가고 있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그때부터 아무 이유 없이 내가 좋아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나도 그 친구가 좋아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은혜를 받으면 원수도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하고 원수까지 사랑하는 사랑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인내의 사람

다섯째로 “인내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인내의 사람이란 힘들다고 도망가지 않고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키는 사람입니다. 무던한 사람, 끈기 있는 사람입니다. 요즘 십대들은 이런 끈기가 없습니다. 조금만 힘들어도 짜증을 내고, 조금만 부담스러워도 포기해 버립니다.

지난해에 제가 교회에서 기타스쿨을 했었습니다. 처음에 모집된 인원이 약 30명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수료한 사람은 7명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게 뭘 의미합니까? 끝까지 인내하면서 끝장을 보려고 하는 승부근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못 배우는 것입니다. 실력도 못 얻는 것입니다.

인내는 승부근성입니다. 끝장을 보겠다는 자세입니다. 인내의 사람은 고난과 역경이 와도 도망가지 않고, 공부가 힘들다고 포기하지 않고, 결혼생활이 힘들다고 가정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인내의 열매가 온전히 맺힐 때에 영향력 있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약 1:5에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현대어 성경은 “인내력을 기르십시오. 여러 문제가 닥쳐올 때 거기서 빠져 나오려고 몸부림을 치지 마십시오. 인내력이 충분히 길러지면 여러분은 완전히 성장해서 어떤 일에도 굴하지 않는 강한 성격의 소유자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인내의 열매가 맺어져 어떤 일에도 포기하지 않고 물러서지 않는 강력한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온유의 사람

여섯째로 “온유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온유라는 말은 길들여졌다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야생마와 같은 인간이 관우가 타고 다녔던 적토마와 같은 사람으로 길들여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주인에게 가장 쓸모 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에 온유라는 말의 뜻입니다.

우리들도 야생마와 같은 존재들이었습니다. 도저히 하나님이 쓰실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니, 하나님이 쓰신다고 하면 야생마처럼 짜증을 내며 도망 다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가 온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길들여졌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야생마와 같은 친구들이 많이 있습니다. 중고등부에서 임원이나 팀장을 시키려고 하면 야생마처럼 반항하는 것입니다. 온유하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으로 성숙해야 합니다. 언제라도 내 삶을 주님께 드린다고 고백하며 주님께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열매는 어떻게 맺어질 수 있을까요? 일반적으로 열매를 맺는 나무들을 보면 어떻게 열매를 맺습니까? 먼저 뿌리를 깊이 내리고, 물을 흡수하고, 영양분을 공급받고, 햇빛을 충분히 받습니다. 때로는 막대기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 가지치기의 과정도 겪으면서 성장했을 때 맺어지는 것입니다.

열매는 절대로 그냥 저절로 맺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성령의 열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깊이 뿌리를 내려야 열매가 맺어질 수 있습니다. 나뭇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어야 하듯이 우리가 주님께 연결된 삶을 살아야 열매가 맺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들을 다시 점검해 봅시다. “의로운 사람, 경건한 사람, 믿음의 사람, 사랑의 사람, 인내의 사람, 온유의 사람” 여러분들이 이 열매를 충실하게 맺어서 정말 여러분들을 보면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모두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예수님의 성품을 가진 친구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4)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12a)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딤전 6:12)”

하나님의 사람은 영적전쟁을 잘 싸우는 용사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에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싸운다는 말은 상을 얻기 위해 경쟁하는 의미입니다. 헬라어는 현재 진행으로 한 번 싸우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평생 지속적으로 싸워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왜 우리가 평생 영적전쟁을 싸워야 합니까? 내가 싸우고 싶지 않아도 마귀가 끝까지 싸움을 걸어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귀와 우리는 결코 휴전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한 시도 방심할 수도 없고, 결코 포기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10년 정도 전에 20대의 청년이 한약상을 하는 부모를 칼로 잔인하게 살해하고, 그것을 은폐하기 위해 석유를 끼얹고 집에 불을 질렀던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청년은 미국에 유학 중이었는데 공부는 안하고 도박에 빠졌습니다. 그러다가 엄청난 빚을 지게 되었고 그 빚을 갚기 위해 부모에게 돈을 요구했는데 거절당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엄청난 범죄를 저지르게 된 것입니다.

저는 우연히 이 학생의 고등학교 시절에 대한 기록을 읽게 되었습니다. “왕의 아이들(King’s Kids)”의 대표인 원 베네딕트 목사님은 이 학생이 고등학교 2학년 때 그 교회의 수련회에 강사로 갔었습니다. 1988년 이 학생은 당시 고등부 회장이었고, 그 부모님은 중고등부 부장집사님이었습니다.

그때 이 학생은 성령을 받고 방언까지 받았습니다. 그리고 100여 명 되는 학생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죄를 자백했습니다. “제가 학생회장인데 술 담배를 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그리고 눈물을 펑펑 흘리며 부모님 앞에 가서 “제가 지금까지 속을 많이 썩여드렸습니다. 이제부터 신앙생활 잘 하겠습니다.”라고 무릎을 꿇고 서원했습니다.

그때 목사님은 이 학생의 가정과 교회에 큰 부흥이 일어나겠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수련회에 은혜 받고 돌아온 이 청년에게 부모님이 했던 첫 마디는 은혜 받은 것도 좋지만 이제 대학 갈 때가 되었으니 공부에만 전념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너무 머니까 당분간 본교회가 아닌 가까운 교회에 나가고, 고등부에는 그만 나가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면서 소위 유명하다는 강남의 고등학교로 전학시켜버렸습니다. 본 교회에 못 나가게 하고 학생 예배에 못나가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집 앞에 있는 교회의 아침 7시 예배에만 참석하게 했습니다.

그 부모님의 메시지는 오직 대학이었습니다. 백만 원짜리 과외를 시키면서 4년제 대학을 가야 된다는 메시지였습니다. 그 부모는 백억 대 재산가였으므로 돈으로 대학을 보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돈이 많았기 때문에 꼭 믿음으로 살지 않아도 된다고 착각을 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청년은 당시 집 앞에 있는 교회의 7시 예배에서 은혜를 못 받으니 예배에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예배가 무너지니까 다시 술 담배를 하게 되었고 방황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4년제 대학에 떨어지고 전문대에 겨우 붙었습니다. 그러자 부모는 이 청년을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버렸습니다.

예배가 무너진 사람은 어디 가도 변하지 않습니다. 유학을 보냈더니 공부는 안하고 매일 도박하고 카드빚을 엄청나게 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도 떠나고, 비전도 없고, 소망도 없고, 예배도 무너져있었습니다. 중간에 부모님으로부터 호출을 받고 엄청나게 야단을 듣고 다짐을 받고 다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예배가 무너진 사람의 삶이 달라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는 더 정신을 못 차리고 마약을 하고 카지노에 가서 슬롯머신을 하다 또 카드빚을 엄청나게 지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부모는 “너는 가능성이 업다. 아예 한국으로 영구 귀국해라.” 불호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전혀 반성하거나 정신 차리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막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아버지 몰래 귀국해서 부모님을 칼로 찌르고 그것을 위장하기 위해 집에 불을 지른 것입니다. 부모는 죽고, 이 청년은 사형언도를 받고, 그 많던 재산은 큰아버지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얼마나 불행해졌습니까?

사형언도를 받은 이 청년을 만나기 위해 원목사님이 대구 교도소까지 갔습니다. 그때 “너. 나 기억하니?”라고 물었을 때 그 청년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럼요. 선교사님.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가 바로 그 고등학교 2학년 수련회였습니다.” 그는 은혜 받았던 그 때를 잊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선교사님은 “너. 하나님은 믿니?” 물었더니 믿는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서 “선교사님. 저도 천국 갈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습니다. 이 청년이 왜 이렇게 무너졌고 비참한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을 못 만났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났지만 환경에 굴복하며 예배가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현재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것이 대학일 수도 있고, 결혼일 수도 있고, 기말고사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끝까지 목숨 걸고 싸워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예배입니다. 이 예배가 무너질 때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 쌓아가는 모든 것은 함께 무너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이 영적싸움입니다. 이 청년이 불행한 인생이 되었던 것은 수련회를 빠져서도 아니었고, 수련회에서 은혜를 못 받아서도 아니었습니다. 영적전쟁에서 실패하고 무너졌기 때문에 불행한 인생이 되고 만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참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려면 영적 전쟁에서 성공해야 합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을 너무나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거대한 몸집에 어려서부터 용사였던 골리앗을 다윗은 믿음으로 승리합니다. 그때 일어난 중요한 현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골리앗이 넘어지자 블레셋의 모든 군사들이 다 무너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은 쉽게 블레셋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주의해야 할 것은 골리앗을 넘어뜨리기 전만 해도 이스라엘은 골리앗 뿐 아니라 블레셋 전체 군대를 두려워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스라엘은 골리앗이 무너지자 블레셋이 두렵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아주 담대하게 블레셋을 향해 달려갔고, 또 너무 쉽게 그들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블레셋의 관점에서 보아도 동일한 결과가 나타납니다. 골리앗이 살아있을 때에는 그들은 이스라엘을 가소롭게 여겼습니다. 하지만, 골리앗이 무너지자 그들은 이스라엘을 두렵게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비웃었던 그들을 이제는 두려워하며 그 앞에서 도망하게 된 것입니다.

죄와의 싸움에서도 동일한 영적 현상이 일어납니다. 우리에게는 수많은 작은 죄들이 있지만, 치명적으로 우리를 무너뜨리려고 위협하는 큰 죄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골리앗 적인 죄라고 부르겠습니다. 우리의 영적 상황은 거의 골리앗적인 이 범죄 때문에 너무 쉽게 무너지고 좌절하게 됩니다.

하나 혹은 두 개의 치명적인 범죄가 늘 우리 곁에서 맴돌며 우리를 무너뜨리고 영적으로 죽게 만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수많은 범죄 때문에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하나 혹은 둘 정도의 치명적인 죄 때문에 무너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늘 이것 때문에 눌리고, 힘들어 하고, 또 쉽게 지쳐버립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골리앗적인 죄를 믿음으로 물리친다면 수 많은 작은 죄악들도 힘을 잃고 물러가게 될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싸움은 바로 이 골리앗과의 싸움입니다. 이 싸움을 피하고도 영적인 평강을 얻기를 바란다면 그는 절대 헛수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답게 살기를 원하고 또 승리하는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이 골리앗과의 싸움은 피할 수 없는 싸움입니다. 만약 죄가 우리를 여전히 가소롭게 여기고 있다면 아직 골리앗이 살아있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있어 골리앗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음란일 수도 있고, 부정일 수도 있고, 고질적인 죄악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과 싸워야 합니다. 믿음으로 싸워야 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물리쳐야 합니다. 그때 진정 참된 평화와 승리를 맛보는 삶을 회복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제가 수련회 광고영상을 만들 때 “트랜스포머 2”를 가지고 영상을 만든 것 기억하세요? 그때 주인공이 마귀의 도전장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주인공은 이 전쟁은 나와 상관없다고 말하면서 그냥 이런 것 무시하고 살 수는 없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런 생각과 상관없이 그들은 쳐들어온다는 것입니다.

싸움을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이 싸움에서 지면 여러분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 수 없고 행복한 삶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답게 영적싸움에서 잘 싸워 이기고 승리하여 주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5) 영생을 취하라(12b)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딤전 6:12)”

오늘 성경에는 “영생을 취하라”고 되어 있는데, 헬라어 성경에는 정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그 영생을 취하라”는 뜻입니다. 그 영생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가진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이 없는데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는 없습니다.

헬라어 성경의 동사를 보면 한 번으로 끝내는 시제를 사용했습니다(아오리스트). 헬라어에는 시제가 두 가지 시제가 있습니다. 하나는 계속 반복적으로 행해지는 시제와 하나는 딱 한 번만으로 끝내버리는 시제입니다. 오늘 본문에 취하라는 동사는 딱 한 번만으로 끝내는 동사 시제입니다.

그러니까 영생을 얻는 것은 계속 얻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한 번 구원을 받으면 영원토록 변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한 번 구원을 받을 때 잘 받아야 됩니다. 이걸 어설프게 해놓으면 계속 여러분들이 헷갈리는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이 나갔다가 들어왔다가 이렇게 출퇴근하는 것입니다.

중국의 중학생 한 명이 언젠가부터 트랜스포머가 되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가 생각한 것이 휘발유를 마시면 트랜스포머가 된다고 믿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5년 동안 상습적으로 휘발유를 마셨다고 합니다. 이 학생은 성적도 좋은 학생이었다고 하는데 어쩌다가 이런 또라이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5년 동안 휘발유를 마시기 위해 정말 지극 정성이었습니다. 차에 있는 휘발유를 빼서 마시다가 경찰에 잡히고, 오토바이에서도 빼 먹고, 평소에 늘 휘발유를 들고 다니며 마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가? 휘발유 중독이 되어 지금 간단한 산수도 못하는 바보가 되어버렸다고 합니다.

5년 동안 열심히 휘발유를 마시면 트랜스포머가 된다고 생각하는 친구가 있는데, 이것보다 더 멍청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조건 교회만 열심히 다니면 생명을 얻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5년이 아니라 100년을 다녀보세요. 천국에 들어갈 수 있나?

우리 중고등부 친구들 보면 생명이 없는 친구들이 많습니다. 지금 나에게 생명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생명이 있는지 없는지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이 기도하는 것, 예배하는 것, 찬양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생명을 얻으면 찬양이 달라지고, 기도가 달라지고, 예배가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주신 생명입니다. 이 생명을 가지고 있어야 여러분들이 살 수 있습니다. 이 생명이 있어야 여러분의 삶이 달라지고, 생명이 넘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내게 강 같은 평화, 내게 강 같은 평화, 내게 강 같은 평화 넘치네. 할렐루야.” 이런 찬양은 생명을 얻은 사람만 부를 수 있는 찬양입니다.

이 생명을 어떻게 얻을 수 있습니까? 성경은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요일 5:11).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이 되십니다. 그래서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요일 5:12).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얻는 자가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후 13:5 말씀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시지 않는다면 나에게 생명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안에 정말 예수님이 계시느냐는 문제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시게 할 수 있습니까? 요 1:12 말씀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면 예수님이 들어오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믿고 영접하면 무조건 들어오십니다.

그런데 제대로 영접해야 됩니다. 어리버리하게 대충 영접하고 영접했다고 안심하고 있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영접할 때에는 항상 3가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첫째는 내가 죄인인 것을 고백해야 합니다(회개). 둘째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어야 합니다(믿음). 마지막으로 주님을 나의 주, 나의 구원자로 초청해야 합니다(영접).

가장 먼저 내가 죄인인 것을 고백해야 합니다. 대충 그냥 형식적으로 내가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수준이 아닙니다. 정말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형편없는 죄인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주님 앞에 자복하며 회개하여 정말 내 죄가 주님의 십자가 보혈로 눈 녹듯이 녹아지는 것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2천 년 전에 일어난 그 사건이 바로 지금 나를 위한 사건임을 깨닫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 외에는 나의 구원자가 없음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보혈로 내 죄가 용서받고, 부활의 능력으로 참 소망을 가지게 된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영접한다는 말은 내 마음의 구주로 모셔 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나를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달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절대 떠나지 않으시고 영원토록 우리의 구주가 되어주시는 것입니다.

이게 분명할 때 우리는 생명을 얻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분명하지 못한 친구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설프게 예수님을 영접한다고 영접기도는 한 것 같은데 정말 내가 주님을 믿는지 안 믿는지 확신이 서지 않는 친구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을 제대로 만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제대로 만난다는 것은 주님 앞에 내가 정말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 외에는 나의 구원자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를 위해 죽으시고,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고 영접하고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걸 대충하면 안 됩니다. 정말 진한 경험을 해야 합니다. 아직 주님과의 만남의 경험이 없는 친구들은 오늘 이 밤에 주님을 깊이 만나기를 바랍니다. 구원의 주님을 만났던 친구들도 새롭게 주님을 만나야 됩니다. 새롭게 만나야 할 이유는 여러분들이 그 동안 딴 길로 샜기 때문입니다.

갈릴리 바다로 도망갔던 베드로처럼 다시 주님을 만나고,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고백하고 회복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이때 여러분들은 풍성한 생명 가운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이 밤에 영생을 취하는 시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6) 부르심의 목적을 인식하라(12c)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딤전 6:12)”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 중에 누구도 하나님의 실수로 태어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 하나님께서 태어나게 하신 목적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Made in Kingdom of God”입니다(not Made in China).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내 인생의 목적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렇게 되면 방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목숨 걸만한 사명이 무엇인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교회 청년들 중에도 대학 졸업을 앞두고도 내가 무엇에 내 인생을 바쳐야 할 것인가를 모르는 선배들이 많습니다. 부모들이 자녀들의 미래를 놓고 고민하며 기도를 부탁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우리 인생의 목적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다른 곳에서 여러분의 인생의 목적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나를 세상에 보내신 분, 곧 하나님을 만나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면 이상하게도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명을 깨닫게 되면 열등감에 빠지지 않고,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방황하지 않게 됩니다. 시간 낭비하는 친구들을 보면 대부분 사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명 없이 대학에 들어가면 아무리 좋은 대학에 들어갔다고 해도 방황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직장에 들어갔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열정적인 인생을 살 수 있는 비결은 사명을 깨닫는 것입니다. 사명을 깨닫고 열정적인 인생을 살기 시작하면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있습니다. “네가 미쳤구나.” 내가 그 일에 미쳤다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소리가 들려야 열정적인 인생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말씀사역에 미쳤다는 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연구하고, 성경을 가르치고, 성경을 정리하는 일에 목숨을 걸었다는 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왜냐고요? 이게 나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이게 나의 사명이기 때문에 다른 일로 시간을 보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저는 다른 곳에 미친 것이 아니라 말씀에 미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래서 저는 매일 새벽마다 성경을 묵상하고 정리하고 있습니다. 우리교회에서는 “복있는 사람”이라는 큐티 책으로 새벽기도회를 인도합니다. 그러면 저는 그 전날에 묵상을 하고, 새벽에 설교를 듣고 정리를 하고, 기도하면서 다시 정리를 합니다.

우리교회 본당이 얼마나 어둡습니까? 거기서 말씀 한 절 읽고 기도를 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으로 기도하게 하십니다. 그러면 그것을 그 어두운 곳에서 책에 기록을 합니다. 이렇게 한절 한절씩 정리한 것을 집에 돌아와서 출근할 때까지 컴퓨터에 정리하고 있습니다. 이걸 매일 하고 있습니다. 미쳤죠?

지금 설교준비하고 있는 현재까지 예레미야만 A4 용지로 426쪽 분량까지 정리가 되었습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정리하고 있습니다. 피곤해서 새벽기도회에 못 나갈 때에도 그래도 아침에 일찍 일어나 출근 시간 전까지 정리를 마칩니다. 저는 다른 곳에 미친 것이 아니라 말씀 사역에 미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또 저는 여러분에게 미쳤다는 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바로 저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하자고 하면 저는 무엇이든 합니다. 작년에 비가 오는데 물놀이를 가자고 합니다. 기상 예보는 틀림없이 비가 온다고 되어 있고, 또 아침에 모여 보니까 비가 오고 있습니다.

그래도 소고기 등심에 로즈마리 뿌리고 와인에 숙성시켜서 출발했습니다. 가면서 기도했습니다. 안전하게 잘 놀고 올 수 있는 적당한 곳을 예비해달라고 기도하면서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곳에 도착해서 너무 잘 놀지 않았습니까? 숯불을 피워서 스테이크 소스에 찍어 먹던 것이 생각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저를 미치게 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미치고 싶은데 여러분이 저로 하여금 미치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과 제자훈련도 하고 싶고, 기도회도 깊이 하고 싶고, 함께 선교여행도 떠나고 싶은데 여러분들이 너무 바쁘게 사는 것 같습니다.

제가 남천교회에 있을 때 대학부를 맡았습니다. 그때 대학부의 영적상태는 그야말로 초토화된 상태였습니다. 그때 저는 4명을 데리고 제자훈련을 시작했습니다. 화요일 저녁 8:00-12:30까지 매주 그렇게 모였습니다. 이 아이들이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이걸 보고 훈련받으려는 한 팀이 또 생겼습니다.

매주 수요일 저녁 예배 후부터 새벽 1시까지 4시간 30분씩 제자훈련을 했습니다. 매주 1시간 정도 찬양하며 기도하고, 1시간 내가 설교하고, 1시간 30분 커리큘럼을 따라 성경공부하고, 마지막 1시간 또 찬양하고 기도했습니다. 제가 지금 생각해도 정말 엄청난 훈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훈련을 받겠다는 친구들이 또 나왔습니다. 그래서 목요일 저녁 팀이 또 생겼습니다. 또 토요일 오후 팀도 생겼습니다. 모든 팀이 4시간 30분씩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제가 한 주 동안 훈련하는 팀이 몇 팀입니까? 그 교회는 금요철야기도도 있는 교회였는데 저녁에 쉬는 날은 월요일 저녁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저의 모습으로 보고 제 아내가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미쳤구나.” 저는 이렇게 미칠 수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미치니까 제자들이 태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34명 되던 대학부가 2년 반 만에 80명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거창교회로 옮긴 뒤에도 꾸준히 성장하여 120명까지 성장했습니다.

그 중에 처음부터 훈련받았던 한 친구는 처음에 기타도 못 치던 형제였습니다. 저에게 기타를 배워 겨우 찬양인도를 하는 정도였는데, 지금은 CBS 방송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Again 1907 경남지부 예배인도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젊은이 사역연구소로 유명한 Young2080 정식강사가 되었습니다.

제가 그때 미치지 않았다면 이런 제자가 나왔겠습니까? 또 그 친구가 이런 미친 강도사님을 따라 죽자 살자 훈련받지 않았다면 이렇게 되었겠습니까? 며칠 전에 이번 여름에 여의도순복음교회 본당에서 찬양인도 하게 되었는데 기도해달라고 전화가 왔습니다. 저는 정말 여러분에게 미치고 싶습니다.

얼마 전에 고미영이라는 여성 산악인이 히말라야 등반하다 사고로 사망하지 않았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히말라야가 목숨을 걸만한 가치가 있느냐고 묻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것 같습니까? 과연 히말라야 등반이 목숨을 걸만한 가치가 있는 곳일까요? 인터넷 댓글을 보니까 정말 악플을 달며 미친 짓이라고 욕까지 하는 것도 보았습니다.

미친 짓이라는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자기 인생을 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저는 그렇게 악플을 단 친구에게 이렇게 댓글을 달아주었습니다. “그러면 너는 어디에 목숨을 걸고 있나요?” 지금 우리가 목숨을 걸고 있는 곳을 한 번 생각해보세요. 다른 사람들이 박수를 쳐줄 일인지, 미쳤다고 할 일인지?

지금 여러분들이 목숨을 걸고 있는 곳은 어디입니까? 우리가 목숨을 걸어야 할 곳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닙니다. 또 내가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좋아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목숨을 걸어야 할 곳은 하나님의 사명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시는 일에 내 인생을 거는 것입니다.

우리의 갈등은 항상 이런 갈등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가는 것보다 내가 원하는 길로 가는 것을 고집하는 갈등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하겠다고 고집을 부립니다. 만약 한다고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겠다고 고집을 부립니다.

이것도 아닌 친구들은 내가 하고 싶은 것 다 한 뒤에 시간이 남으면 그때 하나님이 시키신 일을 한 번 고려해보겠다고 생각하는 친구들도 있을 것입니다.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그런 시간과 그런 물질로만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말입니다. 이런 자세로는 열정적인 인생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위해 무엇을 해주실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가장 소중한 것, 가장 귀한 가치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을 Living Bible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You give him first place in your life”

이렇게 살아갈 때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신다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거창교회에서 고3일 때에도 수련회에 나오면서 중고등부에도 빠지지 않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거창고등학교라는 전교 3-5등 안에 들어야 갈 수 있는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수능 점수를 보니까 서울대에 들어갈 수 있는 성적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성균관대 생명공학과에 들어갔습니다. 본래 이 친구의 비전이 게놈 프로젝트를 연구하는 것입니다. 대부분 신앙생활 열심히 했는데 왜 이렇게 되었느냐고 생각했습니다. 이건 대학이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나 하는 생각입니다.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은 절대 대학이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친구가 대학에 들어가니까 대학이 이 친구를 알아본 것입니다. 분명히 좋은 성적이 나올 수 있는데 실수로 여기에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실수가 자기들에게는 찬스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학생을 키우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님을 학교까지 불러서 제발 부탁이니까 중간에 딴 맘먹고 다른 대학으로 가지 말아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또 4년 동안 전액 장학금 혜택을 주고, 또 졸업하면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주고, 유학을 마치고 오면 우리 대학에서 교수로 채용하겠다고 약속까지 했습니다.

매년 방학이 되면 전공 교수님들이 이 학생을 데리고 세계를 돌아다니며 유명한 세미나는 다 참석시키고, 그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교수들과 인사를 시켜주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하나님이 하시면 일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고3이라고 수련회 안 오고, 중고등부 안 오고 열심히 공부해서 서울대에 갔더라면 그의 인생이 이렇게 되었을까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예비해주십니다. 이런 축복을 경험하는 사람이 무서운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뒤를 봐주는 사람이 진정한 실력자인 것입니다.

늦기 전에 부르심의 목적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지금 내가 중학생, 고등학생으로 있는데 여기에서 하나님이 내가 뭘 하기를 원하시는지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단지 공부만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 시작하면 세상과 친구들은 “네가 미쳤구나”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이런 말을 들어야 됩니다. 이런 말이 들려야 여러분이 잘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꿈과 비전을 이루기 위해 정말 미친 듯이 돌진하는 여러분들의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7) 증인이 되라(12d)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딤전 6:12)”

우리는 죽은 영혼에 대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영혼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저들을 구출하지 않으면 영원히 지옥으로 들어갈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하고 싶은 마음이 충만해야 합니다. 기회만 있으면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영국에서 유학을 하고 계시는 내 친구 목사님 부부가 얼마 전에 잠시 귀국을 하셔서 대전의 저의 집까지 방문을 하셨습니다. 그때 사모님이 하시는 말씀이 지금 영국에서는 “Save(구원)”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Rescue(구출)”이라는 말을 쓴다는 것입니다. 좀 더 전투적인 용어를 사용하셔 적극적으로 영혼을 건져내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마 친구들 중에도 전도를 잘 하고 싶은 친구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전도는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전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전도하신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무릎 꿇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시고 기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일하면 사람만 일하지만

사람이 기도하면 하나님이 일하신다.

전도는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사람을 내가 찾아내는 것입니다. 고구마 전도왕 김기동 집사님에 대해 들어보셨습니까? 전도는 고구마를 삶는 것과 같습니다. 젓가락을 들고 익었나 안 익었나 찔러보아서 익었으면 건져내고 안 익었으면 더 익게 그냥 놔두는 것입니다. 전도도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냥 돌아다니면서 “예수 믿느냐? 교회 다니느냐? 교회 다닐 생각 없느냐?” 이렇게 그냥 물어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익은 고구마들은 안 그래도 내가 교회를 다니고 싶었는데 잘 됐다고 나를 인도해달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안 익은 고구마들은 어떻게 할까요? 욕을 하거나, 조롱을 하거나, 비난을 하겠죠?

그러면 그냥 두면 됩니다. 아직 안 익었기 때문에 익을 때까지 그냥 놔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젓가락을 들고 찔러보는 것입니다. 이게 익었나 안 익었나 테스트하는 것입니다. 이것만 잘 해도 우리는 많은 영혼을 주님 품으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전도는 젓가락 들고 익은 고구마를 찾아다니는 것이 전도입니다.

이때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절대 생고구마들과 논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창조냐 진화냐? 다빈치 코드도 안 봤냐? 선악과는 왜 만들었느냐?” 이런 논쟁을 하면 안 됩니다. 왜 논쟁을 하면 안 될까요? 만약 논쟁에서 이기면 기분 나빠서 교회 안 옵니다. 만약 지면 이건 더 큰 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절대 논쟁하지 말고 이럴 때에는 간증을 하기 바랍니다. 그냥 내가 경험한 하나님에 대해 생생하게 증거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가지고 논쟁을 하면 말싸움이 되지만, 내가 경험한 간증을 하면 아무도 반박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에게 분명한 간증이 있으면 담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이때 간증에 가장 좋은 것은 기도응답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간증이 많으려면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저의 간증을 하나 하겠습니다. 저는 4달 전부터 새벽기도회 때마다 친구가 갑자기 생각이 났습니다. 친구가 생각이 났다는 것은 이 친구를 위해 기도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그래서 그 친구를 위해 기도하는데 무엇을 위해 기도할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 친구의 사역지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친구는 부목사 시절을 굉장히 오래 했기 때문에 이젠 담임으로 나가야 할 시점이었습니다. 합동 교단이라서 담임 자리가 나기는 정말 힘든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기도를 꾸준히 해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몇 주 전에 저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그 친구의 전화였습니다. 갑자기 교회에서 초빙이 들어와서 그 교회로 가게 되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어떤 교회에 목사님이 은퇴하신 후에 목사님이 안 계셔서 그냥 설교 한 번 하라고 해서 그 교회에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설교도 하기 전에 장로님 3분이 영접을 하면서 담임으로 초빙을 하려고 하니까 제발 와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 친구는 설교도 듣기 전에 어떻게 나를 알고 초빙을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약 4달 전부터 목사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직접 조사를 다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날 설교를 하고 2주 만에 그 교회로 옮겨서 지금 사역을 잘 하고 계십니다. 저는 4달 전부터 조사를 했다는 그 말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역사하시기 위해 그렇게 기도하게 하셨구나.’ 어쨌든 내가 믿는 하나님은 내게 기도를 시키시고, 내 기도를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저는 이런 기도응답에 대해 말하라고 하면 할 말이 참 많습니다. 한 가지 더 할까요? 어느 날 새벽에 기도하는데 갑자기 아버님이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아버님이 생각났다는 것은 뭐하라는 말입니까?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각을 주시는 것은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대학이 걱정되고 미래가 걱정됩니다. 뭐하라는 말이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중고등부 임원들이 생각났습니다. 뭐하라?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나라가 생각나고 북한이 걱정이 됩니다. “저러다 전쟁 일으키는 거 아냐?” 뭐하라?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에게 무슨 생각이 나면 가장 먼저 기도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아버님을 위해 기도하는데 그때까지 아버님께서는 교회에 나가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아버님의 구원을 위해 특별하게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니까 하나님께서 눈물도 주셨고, 열정도 주셨고, 힘도 주셨습니다. 그렇게 1주일 동안을 새벽마다 눈물로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1주일 뒤에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영접하셨다는 것입니다. 어머니 고향 후배 중에 목사님이 계시는데 친척 결혼식에 갔다가 만나셨다고 합니다. 거기서 그 목사님으로부터 아들이 목사이고, 사위가 목사인데 아직도 교회 안 나가냐고 야단을 치시더랍니다.

그 전까지 교회 이야기만 나오면 별로 반응이 없으셨던 아버지께서 그때 충격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어머니와 함께 그 목사님 교회로 가셔서 제자훈련을 받으셨습니다. 2시간 강의를 듣고 잠시 쉬고 또 2시간 강의를 듣고 2박 3일을 보냈습니다. 팔짱을 끼고 끝까지 거부하시던 아버님이 이틀째 저녁에 무릎 꿇고 예수님을 영접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신 후에 아버님은 완전히 달라지셨습니다. 목사님의 말씀이 귀에 쏙쏙 들어오기 시작했고, 그때마다 “아멘”으로 대답하시는 것입니다. 그 뒤에 성경을 열심히 읽으시고, 새벽기도에 나가시고, 성경대학과 많은 훈련들을 받으시고 지금은 교회에 집사님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도를 시키시고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놀라운 일을 경험하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이런 간증을 많이 경험하는 것입니다. 내가 분명히 경험한 하나님이 있다면, 전도에 자신감이 있기 마련입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하나님은 살아계신다고 선포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자신감으로 전도에 열심을 내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결론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딤전 6:11-12)”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내가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는 사람이며, 하나님을 위한 삶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피할 것은 확실하게 피하고, 열매를 맺어야 할 것은 확실하게 맺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영적전쟁의 중요성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싸움을 잘 준비하고 멋지게 싸워 이기는 사람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람은 영생을 얻은 사람입니다. 구원의 확신을 가졌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생명력 있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부르심의 목적을 아는 사람입니다. 부르심의 목적을 따라 세상에서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돌진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증거하는 사람입니다. 내가 경험한 하나님을 자신있게 증거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제부턴 정말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누가 “Are you Christian?”이라고 물으면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자리에서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Yes! I am Christian.”이라고 대답할 수 있는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너, 하나님의 사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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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SS 홈 > 영성 > 박성규 설교 너, 하나님의 사람아 미리 보는 교회력 설교/오순절 후 18 주(20100926) 박성규 | [email protected] 입력 : 2010년 09월 24일 (금) 09:52:55

최종편집 : 2010년 09월 24일 (금) 13:05:35 [조회수 : 6206] 오순절 후 제 18 주(20100926)

성서일과/ 시 146; 암 6:1a, 4-7; 딤전 6:6-19; 눅 16:19-31

본문/ 딤전 6:11-16

너 하나님의 사람아

(딤전 6:11-19, 개정) 『[11]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13]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언을 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내가 너를 명하노니 [1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15]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오 [16]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영광을 돌릴지어다. 아멘 [17]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18]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19]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믿는 자의 새 이름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처음 전파될 무렵 복음을 영접하고 예수를 믿은 사람들 중에는 이름을 바꾸는 사례가 흔했습니다.

강화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경외하며, 순종하고, 능력 받아 살자, 그것도 으뜸이 되자 라는 뜻에서 신일, 경일, 순일, 능일 이런 식으로 이름을 바꾼 것은 유명한 일입니다.

제가 전에 목회했던 교회에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그 교회의 역사를 쓰는데 처음 교회를 세우신 분들의 이름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양행의(行義)-의롭게 행하고, 박신도(信道)-십자가의 도를 믿고, 정사천(事天)-하늘의 일을 함과 같은 이름들이었습니다.

부조가 지어주신 이름을 바꾸는 것은 어지간한 결심으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온전히 새사람이 되어 그 이름에 합당하게 살겠다는 굳은 의지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혹시 여러분들이 이름을 바꾼다면 어떤 이름을 택하겠습니까?

오늘 바울은 그의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를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디모데야 해도 되는 데 굳이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디모데 말고도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불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세, 다윗, 엘리야, 엘리사 같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택하여 부르심을 받은 지들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맡은 자들이고, 그 일을 위해 하나님 주시는 능력을 지녔던 사람들입니다.

그 능력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 이긴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살았습니다.

오늘 바울도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또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택함을 받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세상과 싸워 이김으로, 선한 증거 곧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는 길을 찾고, 그 길로 가는 성도들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늘에 속한 사람입니다.

집을 떠나 길을 가는 사람을 일러 나그네라 합니다.

나그네 길은 불안하기 마련입니다.

정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떠도는 길에서 느끼는 평안함은 잠간입니다.

길어야 하룻밤을 넘기지 못하는 법입니다.

나그네는 고향에 돌아가야만 비로소 짐을 풀고, 참된 평안을 찾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믿는 자들을 일러 나그네라 합니다.

(히 11: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본시 그 뿌리가 하늘에 있기에 땅에서 사는 동안은 나그네일 수밖에 없습니다.

나그네는 고향을 그리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히 11: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자기가 나그네임을 알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흙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바울 사도는 디모데를 불러 ‘너 하나님의 사람아’ 라고 합니다.

디모데에게 한정되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이름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첫 사람의 후손, 땅에서 나서 땅으로 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땅에서 났으나 하늘을 더 나은 본향-참된 고향으로 알게 된 사람들입니다.

둘째 사람, 하늘에서 나신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거듭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를 믿는 순간 우리의 이름이 바뀝니다.

사람의 아들, 땅의 사람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본향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땅에 속한 자에서 하늘에 속한 자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새로이 주어진 이름,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사는 자들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땅에 속한 일을 버려야 합니다.

바울이 믿음의 아들이라 칭한 디모데를 향해 새삼스럽게 ‘너 하나님의 사람아’ 라고 부르는 것은 뚜렷하게 구별하기 위함입니다.

무엇과의 구별입니까?

땅의 사람과의 구별입니다.

더 나은 본향을 알지 못하는 사람과의 구별입니다.

본문 11절 말씀에 ‘이것들을 피하고…’ 했는데, 이것들을 피하지 않고 반기는 사람들입니다.

이것들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에 착념(着念)치 아니하는 일입니다.

(딤전 6:3)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 하면』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입니다만 듣는 자가 유념해야 할 요소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다른 교훈이라는 것은 복음에 입각하지 않은 모든 종류의 잘못된 가르침을 말합니다.

바른 말에 착념(着念)치 아니한다는 것은 자기가 말하는 것의 옳고 그름에 대해 상관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익을 따지는 마음 때문에 옳고, 그름을 구별하지 않고 저 좋은 대로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설교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딤전 6:4-5) 『[4] 저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5]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교만한 사람들입니다/ 아는 척하지만 실상은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사람들입니다/ 투기와 분쟁, 훼방과 악한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사람들입니다.

마음이 부패하고 진리를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경건조차도 이익의 재료로 삼아 서로 싸우는 자들입니다.

다른 것들이야 늘 듣는 이야기들이지만 경건조차 이익의 재료로 생각한다는 것은 정말 뼈아픈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장사한다는 말이 아닙니까?

있을 수 없는 일 같지만 허다하게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교만으로 바른 말, 합당한 말을 전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를 유익하게 하는 일에 전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든 종류의 이단들이 그렇습니다.

성도들에게 무조건 복종하기만을 요구하고, 목사를 중심으로 네 편, 내 편으로 갈라 세워서 마침내 교회를 분열시키는 목사들이 그렇습니다.

자기가 세운 교회라고, 자기가 부흥시킨 교회라고 자기 소유처럼 생각하는 목사들이 그렇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바른 말을 싫어합니다.

바른 말을 싫어하는 것은 결국 자기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일에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말하는 자도 그렇지만 듣는 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듣든 것이 아니라 골라서 듣습니다.

이로우면 하나님의 말씀이고, 손해일 듯싶으면 사람의 말로 치부해 버립니다.

몰라서 그런 게 아니라 알 만한 사람이 그런다면 참으로 어렵습니다.

(롬 1:18-20) 『[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19]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 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

경건조차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타락한 세상입니다.

깨어서 진리의 말씀에 굳게 뿌리를 박으시기를 기원합니다.

또 피해야 할 일은 부(富)하려 하는 일입니다.

(딤전 6:9)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사실 바른 말에 착념치 아니하는 일이나 그에 따라서 일어나는 모든 악한 일들이 정욕에서 비롯되는 것이니, 피해야 할 가장 두려운 것은 정욕입니다.

사람이 욕심이 없으면 살 수가 없습니다.

욕심 자체는 인간의 본능입니다.

큰 해악이 없을 것 같은 사소한 욕심도 있습니다.

꽃을 보면 꺾고 싶다거나, 좋은 음악을 듣고 싶다거나 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도를 넘어선 욕심은 죄악입니다.

시험과 올무에 빠지는 길입니다.

바울은 이런 욕심을 일컬어 정욕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땅의 사람들에게 있는 욕심입니다.

흙에 속한 육체를 따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갈 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이런 욕심-정욕은 어리석고 해로운 것입니다.

왜 어리석고 해롭습니까?

정욕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제 몸에 지닌 것-소유를 많게 하려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은 나그네입니다.

나그네는 짐을 가볍게 해야 하는 법입니다.

나그네는 길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이 아닙니다.

나그네의 짐이 많아지면 주저앉게 됩니다.

본향을 잊어버리고, 주저앉은 그 곳으로 고향을 삼게 됩니다.

그 곳에 집과 창고를 짓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눅 12: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

그런데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눅 12: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것이 되겠느냐…』

오늘의 성서일과 중 누가복음 16:19 이하는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이야기입니다.

부자는 죽어 지옥에 가고, 거지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어 위로를 받습니다.

그저 부자였기에 지옥에 가고, 고생했기에 위로를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왜 그렇게 됩니까?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한 가지 있습니다.

부자는 땅에 많은 것을 쌓아 놓은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나그네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땅이 그의 고향이 되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그가 고향을 떠난 것입니다.

그가 죽어서 고초를 당하는 것은 죽은 후에 나그네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나사로는 땅에 쌓아 놓은 것이 없습니다.

그에게는 땅의 삶이 나그네의 삶입니다.

그가 땅을 떠난 것은 나그네로서의 삶을 마치고 본향으로 간 것입니다.

그는 더 나은 본향에서 위로를 받고 평안을 누립니다.

어리석은 자는 알지 못하는 자입니다.

알지 못하고 행하는 일은 해악을 가져오게 됩니다.

잘못 아는 자는 모르는 자보다 더 어리석은 자입니다.

교만에 이르는 어리석음입니다.

모르는 것보다 잘못 아는 것이 더 큰 해악을 불러오는 법입니다.

땅을 고향으로 아는 것은 잘못 안 것입니다.

땅에 영혼을 위한 집을 짓는 자는 영원히 고향을 찾지 못하는 해를 입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가는 육의 욕심을 버려야 하겠습니다.

더 나은 본향을 바라보며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사시기를 기원합니다.

피해야 할 것도 있지만 쫓아야 할 것도 있습니다.

버릴 것을 버리고, 취할 것을 쫓는 일은 싸움입니다.

땅에 속한 자들의 싸움은 무슨 명분을 들이대던 누군가 상처를 입고, 죽임을 당하는 싸움입니다.

그래서 땅에 속한 싸움은 모두가 악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이 싸우는 싸움은 남이 아닌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그래서 선한 싸움입니다.

[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믿음의 선한 싸움은 자기를 구원하는 싸움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도 전에는 땅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늘의 본향에 당도하기 전에는 옛사람의 본성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싸워야 합니다.

육의 고향, 흙으로 향하는 땅의 사람을 영의 본향, 하늘로 향하는 하나님의 사람에 머물게 하기 위한 싸움입니다.

(롬 7:22-23) 『[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모든 종류의 싸움은 강한 자가 이기는 법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강한 자라도 좋은 무기를 당할 수는 없습니다.

맨손으로 칼을 든 자를 당할 수 없고, 칼로서 총을 든 자를 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도 무기를 지녀야 합니다.

그러나 그 무기는 땅에 속한 싸움을 하는 자들의 무기와는 다른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11]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의와 경건과 믿음 그리고 사랑과 인내와 온유가 하나님의 사람이 지녀야 할 무기입니다.

이것들이 없이는 이 싸움에서 이길 수가 없습니다.

땅에서는 종종 불의한 자가 흥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간의 일이지 결코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최후 승리는 의로운 자의 것입니다.

(욥 20:5) 『악인의 이기는 자랑도 잠시요 사곡한 자의 즐거움도 잠간이니라』

땅에 속한 사람들은 이기기 위하여 육체를 단련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강건한 자라도 경건한 자를 이기지 못하는 법입니다.

약한 듯 보여도 강한 것이 경건입니다.

(딤전 4:8)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믿음은 하나님께 속한 자의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믿음으로 싸우면 이기지 못하는 법이 없고, 패하는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믿는 자를 대신하여 싸우시기 때문입니다.

(요일 5: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믿음이 사람의 무기라면 사랑은 하나님의 무기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하심에 힘입어 어떤 싸움에서도 해를 당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사랑으로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창이라면 사랑은 방패가 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원수도 이 사랑을 뚫고, 우리를 해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이기는 것입니다.

(롬 8:35-37)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이 사랑을 잊지 말고, 기억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큰 사랑을 받았으니 작은 사랑이라도 베푸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또 우리의 싸움은 한 번에 끝나는 싸움이 아닙니다.

나그네로 사는 동안 날마다 치러야 하는 싸움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합니다.

(고전 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날마다 죽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땅의 사람을 죽이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시 나는 것입니다.

죽고, 다시 사는 싸움이 날마다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내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이기는 것은 정한 일입니다.

그러나 인내하는 자만이 그 결국을 보게 될 것입니다.

나를 이기게 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시기를 기원합니다.

의를 행하고, 경건한 중에 기도하며. 믿음의 칼을 들고, 사랑의 방패를 지녀야 하겠습니다.

무엇보다 인내하여 땅에 속한 사람의 유혹을 이겨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복된 결국을 눈으로 보며, 이기게 하신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를 돌려 드리는 성도들 다 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결코 외롭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속한 사람들의 주시오, 왕이십니다.

영원한 본향에서 우리를 영접하실 하나님은 나그네 길에도 함께 하십니다.

그 길에서 지키시고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15]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이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주시요 [16]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지어다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이 그를 향하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나그네 길이 힘들고 고단해서 마음이 흩어지지 않을까 염려하시는 분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그를 의뢰하는 자들에게 복을 주실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 임금이 줄 수 없는 은혜까지 베푸시는 영원한 임금이십니다.

공의로 재판해 주시는 왕이십니다.

주린 자에게 식물을 주시는 왕이십니다.

갇힌 자를 해방하시는 왕이십니다.

약한 자의 도움이 되시는 왕이십니다.

병든 자를 치료해 주시는 왕이십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어두운 세상에 빛이 되시는 임금이십니다.

높은 보좌에서 내려와 나그네의 길을 비춰 주시는 임금이십니다.

왕이신 하나님, 영원히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의뢰하고 그에게 소망을 두심으로 이 모든 복을 누리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시 146:5)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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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딤전6: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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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경건의 길2-

(딤전 6:11-16, 20-21)

2015.5.30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 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김춘수의 시 「꽃」이다. 간단하다면 간단하고, 심오하다면 심오한 이 시의 내용처럼 ‘이름’을 ‘부르는’ 것은 상당히 큰 의미가 있다. 이름을 부르기 전에는 서로 아무런 관련도 없고 의미도 없는 사이였지만, 이름을 부르는 그 순간 친구가 되고 애인이 되고 가족이 된다. ‘저기요’와 ‘자기야’는 하늘과 땅 차이다. ‘이봐요’ 하고 ‘여보야’의 차이는 또 얼마나 큰가? 처음엔 ‘남’이었지만, 점 하나를 지워서 ‘님’이 되고, 또 다시 점 하나를 찍어서 ‘남’이 되는 것은 관계에 큰 점 하나를 찍고 지우는 것이다. 이렇게 이름을 부르는 것, 그것도 어떻게 부르느냐에 따라 서로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되느냐 마느냐가 달려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상대방에게 의미 있는 사람, 그래서 잊혀 지지 않는 사람이 되길 원한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디모데의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이었다. 그것도 항상 애정 어린 마음으로, 부드러운 음성으로 디모데의 이름을 불러주었다. 그리고 믿음의 선배이자, 목회 선배로서 축복과 권면을 아끼지 않았다.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딤전1:2)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교훈으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을 선한 싸움을 싸우며 (딤전1:18)

디모데야 망령되고 헛된 말과 거짓된 지식의 반론을 피함으로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라 (딤전6:20)

바울은 디모데를 아들처럼 여기며 사랑했다. 그를 아끼고 존중했다. 목회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를 ‘아들’이라고 불렀고, 그 호칭 속에는 바울의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런데 바울은 인생의 마지막 시절에 기록한 디모데서신을 마무리하면서 디모데를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부른다. 물론 디모데후서에서는 다시 ‘아들’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호칭이 바뀐 것 자체에 지나치게 큰 의미를 둘 필요는 없다. 다만 바울이 디모데를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불렀을 때, 디모데는 ‘아들’이라고 불릴 때와는 또 다른 힘과 용기, 위로와 자부심을 느꼈을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구약)에서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표현은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들에게 사용된 명예로운 칭호였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를 몇 가지 살펴보자.

첫째, 모세에게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칭호가 붙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신33:1),

…하나님의 사람 모세에게 이르신 일을… (수14:6)

둘째, 사무엘에게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칭호가 붙었다.

…이 성읍에 하나님의 사람이 있는데 존경을 받는 사람이라… (삼상9:6)

셋째, 다윗도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의 명령대로… (느12:24)

…하나님의 사람 다윗의 악기를 잡았고 (느12:36)

넷째, 엘리야 역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왕상17:18)

…그가 엘리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왕하1:9)

마지막으로 엘리야의 제자 엘리사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불렸다.

그 여인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아가서 말하니… (왕하4:7)

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모세는 430년간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백성들을 가나안까지 끌고 간 민족 최고의 지도자이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사울과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운 사람이다. 사무엘은 이스라엘 정치 제도의 전환기에 중심에 서 있던 인물이다. 다윗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이스라엘 최고의 왕이자, 전무후무한 전성기를 누렸던 사람이다. 이스라엘의 모든 왕들은 다윗을 기준으로 평가 받는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으며, 다윗의 혈통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신다. 엘리야는 죽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선지자이고, 엘리사는 크고 작은 이적과 예언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과 능력을 선포한 선지자이다.

모세, 사무엘, 다윗, 엘리야와 엘리사는 이스라엘 역사와 신앙에 있어서 한마디로 기라성 같은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표현은 이런 위대한 선조들에게 사용되던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명색이 ‘하나님의 사람’인데 아무한테나 그 이름을 붙여서야 되겠는가? 이 정도 되는 인물에게 붙여야 이름값을 하지 않겠는가? 이외에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표현은 대체로 천사들이나 구약 시대에 나타나신 하나님 혹은 예수님께 사용되었다. 그런데 바울은 이렇게 위대하고 고귀한 호칭을 디모데에게 사용하고 있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11절)

무슨 뜻인가? 바울은 디모데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한다는 뜻이다. 아들 같은 디모데를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하나님의 충성스러운 일꾼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뜻이다. 또한 바울은 이 표현을 통해 디모데를 거짓 교사들과 의도적으로 구분 시키고 있다. 거짓 교사들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지만, 디모데는 그들과는 다른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바울은 디모데가 명칭뿐만이 아니라 실제로도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에서 디모데를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불렀다. 이 시간 ‘하나님의 사람’ 디모데를 향한 바울의 권면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이 걸어가야 할 경건의 길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함께 나누고, 그래서 이제는 우리도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발돋움 하는 은혜가 임하길 원한다.

1.하나님의 사람은 피해야 한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11절)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것들을 피하라’고 권면한다. 디모데가 피해야할 이것들이란 거짓 교사들의 잘못된 가르침, 즉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반대되고, 성도의 경건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3절). 가깝게는 딤전6:1-10에 기록된 탐심을 가리키고 좀 더 넓게는 바울이 디모데 전서 전체를 통해 주의하라고 경고하는 잘못된 것들을 말한다. 바로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4:7), 교만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것,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4절). 디모데는 이것들을 피해야 한다. 그리고 더 넓게 생각하면 성경 전체에 기록된 거룩하지 않은 모든 것들을 의미한다.

여기서 피하다(퓨고)는 말은 ‘도망하다’, ‘달아나다’, ‘없어지다’라는 뜻이다. 이 말씀처럼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되고 경건에 방해가 되는 것이 있다면 그 자리를 피해 달아나야 한다. 가능한 한 멀리, 가능한 한 빨리 달아나야 한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우리가 사회생활도 하지 말고, 불신자와는 어울리지도 말고 수도사처럼 세상을 등지고 홀로 고결하게 살아가라는 뜻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가 피해야 할 것은 ‘사람’이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되는 사고방식, 가치관, 경건에 해가 되는 신념이나 철학이다. 우리는 이것들을 피해야 한다. 다르게 표현하면 따르지 말아야 한다(3절). 물론 때로는 피해야 할 사람과 일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아무튼 이 부분에 대해서는 두 가지 말씀을 기억한다면 이해하기도 한결 수월하고, 이 말씀에 순종하는데도 중요한 지침이 될 것이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12:2)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이나 속여 빼앗는 자들이나 우상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너희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고전5:10)

그러나 우리는 그저 피하는 것만으로는 문제를 해결 할 수 없다. 이것들을 피해서 어디로 갈 것인가? 무엇을 따를 것인가? 사실은 이게 더 중요한 문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은

2.따라가야 한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11절)

하나님의 사람은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라 가야(디오코) 한다. 그것도 단순히 따라 가는 것이 아니라 갈망하는 마음을 가지고, 마치 추격하듯이 따라가야 한다. 즉 끝까지 철저하게 따라가라는 뜻이다. 12절에 기록된 ‘싸우다’는 표현이나, 20절에 있는 ‘지키라’는 명령도 같은 의미를 전달해주고 있다. 결국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철저히 순종하며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디모데는 거짓 교사들의 ‘이것들’을 피하고 바른 것을 따라가야 한다. 즉 돈을 사랑하는 탐심과 그와 관련된 모든 악을 피해야 하고(9-10절), 청년의 정욕을 피해야 한다(딤후2:22). 또한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과 일치하지 않는 모든 것을 피해야 한다. 그 대신 디모데는 의와 경건을 추구해야 한다. 믿음과 사랑으로 행동하며 인내와 온유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은

3.붙잡아야 한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12절)

바울은 하나님의 사람 디모데에게 영생을 취하라고 한다. 하지만 디모데는 이미 영생을 취한(받은,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왜 영생을 취하라고 하는가? 여기서 사용된 취하다(에필람바노마이)는 말은 ‘자신의 소유로 만들기 위해 꼭 붙잡다’, ‘거칠게 움켜쥐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표현이 사용된 다른 성경 구절을 보면 바울의 의도가 좀 더 직접적으로 와 닿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바다 한 가운데에 빠진 베드로의 손을 붙잡고 건져 주셨는데(마14:31). 여기서 사용된 ‘붙잡다’는 표현이 바로 오늘 본문의 ‘취하다’와 같은 단어이다. 또 로마 병사들이 예수님 대신에 십자가를 지고 갈 사람으로 구레네 시몬을 붙들었을 때(눅23:26), 그리고 로마(에베소)의 천부장이 복음을 전하는 바울을 체포 할 때도(행21:33, 빌3:12) ‘취하다’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한마디로 영생을 ‘취하라’는 바울의 명령은 영생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도록 꼭 붙들고 있으라는 뜻이다.

이처럼 디모데는 이미 영생을 소유했지만, 더욱 붙잡고, 움켜쥐어야 한다. 영생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천국에서 뿐만 아니라 이 땅에 사는 날 동안에도 영생을 맛보고, 그 기쁨과 영광을 최대한으로 누려야 한다. 그렇다면 바울의 권면처럼 영생을 취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선 그 무엇보다도 영생이 정말로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영생은 반드시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천국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믿지 않는 사람은 지옥에서 영원한 심판을 받는다. 긍정적인 의미에서든, 부정적인 의미에서든 영생은 정말 있다. 예수님께서는 동생 나사로의 장례를 치르며 슬피 우는 마르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11:25-26).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 바꿔 말하면 영원히 산다. 영생을 얻는다. 마르다에게 질문하신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도 물어보신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영생을 믿는가? 믿으시기 바란다.

만약 여러분이 영생을 믿는다면, 반드시 그 영생을 받아야 한다. ‘취하라’는 말씀처럼 내 것으로 붙잡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주셨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영생을 얻는다. 그러니 하나님이 주시는 영생을 받으라! 물에 빠진 사람에게 구명로프를 건네주면 아무런 망설임 없이 머뭇거리지 않고 붙잡을 것이다. 여기에는 복잡한 생각이나 구체적인 계획, 훈련이 필요 없다. 그냥 손을 뻗어서 잡기만 하면 된다. 그래야 산다. 여러분은 살고자 하는가? 영원한 생명을 얻길 원하는가? 그렇다면 망설이지 말고 주님이 주시는 구원을 받으라.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으라. 뿐만 아니라 우리는 영생을 지켜야 한다. 끌어안고 놓치지 말아야 한다. 마귀 사단은 우리가 영생을 받지 못하도록 막으려고, 혹은 이미 받은 영생을 누리지 못하게 하려고 끊임없이 공격할 것이다. 그러나 내 주지 말라. 끌어안고 꼭 붙잡으라.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은

4.싸워야 한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12절)

바울은 디모데에게 영생을 취하라는 명령에 앞서서 싸우라는 말을 먼저 했다. 그러므로 디모데는 싸워서 영생을 취해야 한다. 누구와 싸워야 하는가? 에베소 교회 안에 있는 거짓 교사들과 싸워야 하고, 그들이 전하는 잘못된 가르침과 싸워야 한다. 이 세상의 권세 잡은 악한 마귀 사단과 싸워야 하고, 자신의 죄악 된 본성과 육체의 정욕과 싸워야 한다. 디모데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는 영생을 취하기 위해서 싸워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성도는 이미 전투복을 입고 전장으로 뛰어든 군사이다(엡6:12). 정상적이고 건전한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면, 싸움을 원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피하려고 하고 좋게좋게 해결하길 원한다. 그러나 선한 싸움은 피할 수 없는 싸움이다. 우리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영생을 취하기 위해 부름 받은 사람들이다(12절). 그러므로 비록 고통스럽고 힘들다 하더라도 우리는 진리를 위해, 영생을 위해, 거룩과 경건을 위해 싸워야만 한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람은 피할 것은 피하고 따를 것은 따라야 한다.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을 붙잡고, 이것을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하나님에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도록(엡4:1), 경건의 길을 걸어가도록 힘써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람은 왜 이런 힘들고 어려운 길을 가야 하는가? 왜 굳이 이렇게 까지 해야 하는가? 그냥 좀 편하게, 흘러 가는대로 신앙생활을 하면 안 되는가? 물론 선택은 여러분에게 달려 있다. 여러분이 ‘나는 지금으로 만족한다. 더 이상은 할 수 없다’고 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만약 여러분이 지금 보다 믿음이 더 자라길 원하고, 예수님을 더욱 닮아가길 바라고, 이 땅에서도 영생을 맛보고 누리길 원한다면,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피하고 따르고 붙잡고 싸워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만물을 살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13절).

하나님은 온 세상 만물을 보존하시고 주관하시고 다스리는 분이시다. 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본디오 빌라도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신 분이시다. 예수님께서 하신 선한 증언이란 무엇인가? 바로 그분이 왕이심을 증언하신 것이다(요18:33-34, 막15:2). 왕이신 예수님께서는 때가 되면 다시 오실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 디모데는 만왕의 왕이시며 만 주의 주이신 하나님 앞에서, 예수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 없고, 책망 받을 것이 없도록 경건의 길을 가야 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14절).

마지막으로 바울은 디모데에게 부탁한 것을 지키라고 당부한다.

디모데야 망령되고 헛된 말과 거짓된 지식의 반론을 피함으로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라 (20절)

여기서 ‘부탁한 것’이란 안전을 위해 다른 사람에게 맡겨 놓은 돈이나 귀중품을 뜻하는 법적 용어(기탁물-라라테케)이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맡긴 귀중품은 무엇인가? 바로 믿음이다(21절, 딤후1:13-14). 디모데는 믿음을 보존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함으로써 지켜 나가야 한다. 이를 위해 헛된 말과 거짓된 지식의 반론을 피해야 한다. 쓸데없는 말다툼을 피하고 오직 하나님께서 맡기신 영광스러운 직무, 곧 믿음을 지키고, 영혼을 구원하는 그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해야 한다.

말씀을 맺겠다. 서두에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호칭은 구약에 등장하는 기라성 같은 믿음의 선배들에게 사용된 명예로운 호칭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바울은 디모데를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불렀다. 더욱 놀라운 것은 신약에서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호칭은 이 본문 외에 딱 한군데서 더 나오는데(이때도 바울이 사용함),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사람을 온전케 한다고 가르칠 때였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딤후3:16-17)

말씀을 통해 온전케 되는 하나님의 사람은 누구인가? 말씀을 읽는 모든 성도들이다. 그렇다면 누가 하나님의 사람들인가? 바로 저와 여러분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 모세와 사무엘, 다윗, 엘리야와 엘리사처럼 위대한 믿음의 선배들을 부를 때 사용되었던 그 호칭이 이제는 우리의 이름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부지런히 경건의 길을 가서 이름에 걸 맞는 인생 살기 바란다.

그러나 우리의 힘만으로는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 수 없다. 우리 힘으론 역부족이다. 그래서 바울은 은혜가 너희(에베소 성도 전체, 그리고 우리)와 함께 있기를 축원하고 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든다. 바울이 편지의 처음(1:2)과 끝을 은혜를 빌어주며 열고 닫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은혜이다. 하나님의 사람 디모데 청년회 여러분! 우리가 경건의 길을 걷도록 이끄시고 붙드시며, 지키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기 원한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도, 다른 성도님들과 세상 사람들로 부터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받고, 그렇게 쓰임 받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 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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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조준목사] 하나님의 사람아

오늘 읽은 말씀에서 느끼게 되는 것은 목회 서신으로서 교회 행정에 관한 이야기보다 하나님의 사람이 어떠한 인격을 가져야 할 것인가 하는데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메시지는 우리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 앞에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하는 일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우선 순위는 언제나 일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의 사람됨에 있습니다.

가령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어떤 책인가를 말하면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우리를 교훈 합니다. 성경은 우리를 책망합니다. 성경은 우리를 바르게 합니다. 성경은 우리를 위로 교육합니다. 그래서 그 다음절인 17절 말씀에 보면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성경은 무엇을 먼저 강조했습니까? “온전”이란 말이 17절에 두번 반복되는데 그 우선 순위에 있어서 일보다는 사람을 먼저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의 특성은 우리의 사람됨만큼 드러날 것이기 때문에 성경은 행위의 문제를 강조하기에 앞서 그 일을 감당해야 할 사람의 인격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오늘 주신 말씀 11절이 어떤 표현으로 시작됩니까?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조금 전에 말씀드린 디모데후서 3장 16,17절에서 성경이 어떤 책인가 하는데 대해서 말하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성경이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대한 최고의 이상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되는 것입니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 말에 선행하는 구절을 다시 한번 주목해 보실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이 무엇을 강조했습니까? 하나님의 사람들이 교리적으로 또는 도덕적으로 직면할 수 있는 유혹의 문제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어떤 사람들이 잘못된 가르침에 빠진다고 하면서 9절 말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여기서 ‘떨어진다’는 말이나 ‘빠진다’는 동사는 어떤 그릇된 대상에 의해서 완전히 포로가 된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9절과 10절 말씀을 통해서 정욕과 돈에 포로가 된 사람들의 삶에 대해 경고한 후에 11절 말씀에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사람인 너는 정욕과 돈의 포로가 되기 쉬운 이 유혹 많은 세상에서 하나님께만 포로가 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시대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돈과 정욕의 포로가 되어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은 생명의 근원이 되시고 우리 삶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에게 포로가 되어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영광입니까.

그래서 바울은 이 마지막 메시지의 중간 부분에서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15절을 보십시오.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했습니다. 우리가 소망하고 순종하기를 원하는 그 하나님이 역사 속에 다시 한번 자신의 영광을 보이시고 나타내시는 그날이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했습니까? 15절 중반에 “하나님은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이며 만 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하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불멸의 하나님, 인간의 도덕적인 경건이 흉내 낼 수 없는 절대적인 거룩함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 영광스러우신 하나님, 이 하나님에게 피조물인 우리가 포로가 된다는 사실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하나님의 사람, 이것은 하나님을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의 궁극적인 소망이라고 해도 지나친 표현은 아닐 것입니다. 구약에도 ‘너 하나님의 사람아’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가령 신명기 33장 1절에 보세요. 이 말씀은 모세가 죽기 직전에 하신 말씀입니다. 평생 동안 하나님을 바라보고 주님께 순종하기 위해서 몸부림치며 살았던 모세.

그가 숨을 거두려 할 때 성령께서는 그에게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죽기 전에”란 말로 표현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다가 생애 마지막 순간에 주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면서 과연 이 영광스러운 칭호를 내리실 수 있을까요?

사무엘상 9장 6절을 보면 이스라엘 나라가 탄생할 무렵 하나님이 선택하신 이 나라의 첫 번째 왕을 찾고 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대답하되 보소서 이 성에 ‘하나님의 사람’이 있는데 존중히 여김을 받는 사람이라 그가 말한 것은 반드시 다 응하나니 그리로 가사이다. 그가 혹 우리의 갈 길을 가르칠까 하나이다” 했습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선지자인 사무엘의 인도함을 통해서 왕이 되는 과정을 밟아 나아가게 됩니다. 정말 그 길을 인도 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이 장면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표현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가를 실감케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있으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고 올바른 대답이 주어질 것이고 상황이 달라질 것입니다.

제가 자란 시골 동네에는 그 당시에는 비교적 큰 교회가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옛날 연희 전문을 졸업하신 분이셨고 학생시절 연희 전문의 축구 선수였었습니다. 이 목사님이 동네 청년들 축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면대항, 군대항 축구 시합을 할 때 이 목사님만 팀에 계시면 마음이 푹 놓이고, ‘보라 우리가 이긴다’는 자신감이 들곤 했습니다. 저는 아직도 어린 때를 생각하면 우리 목사님 생각이 나고 목사님만 계시면 어렵던 문제가 다 해결되고 걱정되던 것도 다 풀려 나가던 그때의 마음 든든함이 있곤 합니다.

역사가 어두어질때 우리가 정말 필요로 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등불이 어두워 질 때마다 하나님의 사람을 찾으십니다.

열왕기상 17장 24절을 보세요.

엘리야라는 하나님의 선지자가 사르밧 과부의 집에서 머물고 있을 때의 일인데, 엘리야가 머물고 있는 과부의 아들이 죽었습니다. 아들이 죽었을 때 이 절망적인 상황을 엘리야에게 호소합니다. 이때 엘리야는 하나님께 부르짖음으로 그 아들이 살아났습니다. 엘리야와 함께 하신 하나님을 발견하고 엘리야를 통해서 나타난 기도의 능력과 그의 경건함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이 여인이 마지막에 그 앞에 엎드려 고백한 말이 24절입니다.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을 아노라 하니라” 얼마나 귀한 고백입니까?

우리가 우리를 잘 알지 못하고 멀리 떨어져 사는 사람들에게는 쉽게 존경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존경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 약점과 내 허물을 다 아는 가까운 이웃들에게 존경을 받는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내 주변에 사는 그리고 나를 자라는 사람이 나의 약점을 알면서도 내 삶속에 나타난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마음을 바라보면서 나를 향해서 ‘당신은 정말 하나님의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으면 얼마나 귀한 일이겠습니까?

느헤미야 12장 24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레위 사람의 어른은 하사뱌와 세레뱌와 갓미엘의 아들 예수아라 저희가 그 형제의 맞은 편에 있어 ‘하나님의 사람’ 다윗의 명한대로 반차를 따라 주를 찬양하고 감사하며” 했습니다. 시간이 많이 흘러 역사의 장이 바뀌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고 예루살렘성을 건축하는 과정에서 다윗이 주었던 메시지를 기억합니다. 이들이 다윗을 어떻게 표현했습니까?

“하나님의 사람 다윗의 명대로” 하고 했습니다.

다윗은 이미 세상을 떠난지 오랩니다. 그러나 다윗의 영향력은 아직도 그 백성들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먼 훗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신앙의 가자 아름다운 귀감이었던 다윗을 회고하면서 “하나님의 사람 다윗”이라고 말했습니다. 정잘 정말 부러운 일입니다.

우리의 후손들이 우리가 없는 당에서 자신들의 삶의 문제를 고민하며 결단을 내릴 때 우리를 회상하면서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는 하나님의 사람이셨어”라고 고백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성공적인 삶이었습니다.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 얼마나 우리 삶에 도전을 주는 이상입니까?

주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의 돈과 권력과 정욕의 포로가 되어 살고 있는 이 세상 속에서 “너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의 아들이었던 디모데가 하나님의 교회를 이끌어 갈 때 정말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기대하면서 마지막 메시지를 주었습니다.

1. “피하라”고 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경계해야 할 가장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는 돈에 대한 유혹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아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필요 이상으로 부에 대한 탐닉을 시작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그치고 마는 것입니다.

20절에 보면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을 피하라”고 했습니다. 필요없는 변론을 피하라는 말입니다. 거짓된 이단의 특성 가운데 하나는 그들이 변론을 위한 변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변론을 위한 변론은 우리에게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공부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지식을 위한 지식이 아니라 삶을 위한 지식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 공부를 하는 것도 말씀 앞에 자신의 삶을 비춰 보고 고민하는 그런 성경 공부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서 내가 어떤 인격이 되어 가고 있는가를 묻는 그리고 그 말씀 앞에 가슴이 깨어지는 고백과 눈물의 회개가 있는 그런 성경 공부라면 우리는 바르게 말씀을 공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께로부터 돌리고 하나님이 기대하는 삶으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하는 변론을 피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유혹의 장소를 피해야 합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에게서 유혹을 받았을 때 그곳에서 피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어떤 상황이 나를 죄에 빠지게 하는 상황이라는 판단이 서게 되면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명예를 위해서 내가 그 자리에 서야 한다면 물러서지 말고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이 주님 앞에 영광되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나의 삶이 그르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되면 피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일꾼이 됩니다. 하나님은 아무 그릇이나 쓰시는 것이 아니라 깨끗한 그릇을 쓰시기 때문입니다.

2. “좇으라”고 했습니다.

11절에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라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은 말하자면 인격의 덕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의가 무엇입니까? 나와 하나님 사이의 바른 관계를 이루는데 필요한 덕목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하나님 앞에서 받는 가장 놀라운 축복 가운데 하나는 의롭다 함을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에 강조된 것이 경건입니다. 의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강조하는 인격적인 덕목이라면, 경건은 그 하나님을 향해 가는 삶의 자세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닮아가는 인격의 특성입니다. 의와 경건은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덕목들입니다.

그리고 믿음과 사랑입니다. 의가 없이 경건이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믿음이 없이는 사랑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과 사랑은 하나님을 향하는 관계보다는 우리 자신에게 있어야 할 덕목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실하고 신뢰할 만한 사람이 갖추고 있는 덕목인 믿음과 희생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 갖추고 있는 덕목인 사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인내와 온유입니다. 이 두 단어는 모두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건이나 상황들과 관련된 것들입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여러가지 상황 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그리스도인답게 인내하고 있습니까? 인내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온유’라는 덕목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인내가 없이 온유함을 드러낸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인내와 온유는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사람답게 절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서는 의와 경건을, 자신과 이웃의 관계에서는 믿음과 사랑을, 그리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 대해서는 인내와 온유를 좇아야 합니다.

내가 어떤 환경, 어떤 처지에 임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상황 속에서 내가 어떻게 반응하고 성숙해 가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억울한 상황에 부딪혀 손해를 보았을 경우 우리가 참으로 주님을 닮아가기를 원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우리는 손해를 본 사실보다는 그 상황에서 나의 인격이 어떻게 형성되어 가는 가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불리한 상황을 통해서 우리가 이웃을 용납하고 용서하므로 주님을 닮아가고 있다면 우리는 결코 손해본 것이 아니라 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싸우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무슨 싸움을 합니까? 오늘 주신 말씀 12절에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사도 바울이 좋아했던 말입니다. 디모데후서는 바울이 마지막으로 쓴 편지인데 그 마지막 장인 4장에 바울이 한 고백이 6절 이하에 이렇게 기록되었습니다.

“관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음이 되고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라고 말했습니다.

여기 ‘싸운다’는 말은 사단에 대해서 혹은 죄와 더불어 싸운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특별히 디모데전후서를 통해서 “싸운다”는 말을 좀더 적극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일을 기꺼이 향할 때 그것이 바로 적극적인 의미의 싸움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마지막 부분에서 다시 한번 강조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18절을 보세요.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누어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무슨 말입니까? “돈을 긁어모으기 위해서 땀 흘리고 몸부림치는 이 세대에서 그대들은 선한 싸움을 싸우시오.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는 자가 되십시오. 이것이 당신들이 싸워야 할 선한 싸움입니다.”하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부요함을 추구하는 것은 승리의 길이 아니라 오히려 패배의 길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언젠가는 주님 앞에 서게 될 터인데 우리가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느냐 하는 것은 전혀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것을 어떻게 사용하며 살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선한 이 싸움을 싸웁니다.

돈의 쓰임새는 그 사람의 인격을 말해 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맡기신 물질을 어디에 쓰고 있습니까? “이것을 사는 것을 주님이 기뻐하실까?” 생각하면서 쓰십니까?

4. “취하라”고 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12절에 “영생을 취하라” 했습니다.

여기 ‘취하라’는 말은 굉장히 강한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냥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튼튼히 붙잡고 누리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누가 영생을 즐길 수 있습니까? 누가 그리스도 안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까? 영생을 얻은 사람은 많지만 영생을 누리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아직도 세상적인 것에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영생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에 감동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누리는 사람들이고 그것을 감격으로 받는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를 구주로 믿으십니까? 영생을 얻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영생을 누리매 즐기시기 바랍니다. 오늘 주신 말씀 19절에 뭐랬어요?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12절의 ‘취하라’는 말이 다시 한번 나옵니다. 18절에 나오는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이 영생을 즐기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내 소망은 여기에 있지 않습니다. 저 나라에 있습니다.”라고 말하면서도 이 세상에서 잘 살기 위해서 발버둥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참으로 영생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소유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기꺼이 내 놓을 수 있는 그리고 그러한 일을 하면서 그 마음에 주님께서 주시는 말할 수 없는 즐거움이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영생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영생을 취하라 영생을 즐기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5. “지키라”고 했습니다.

14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실 때까지 점도 없고 책망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했습니다.

여기 자세히 보세요. ‘점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라는 말씀을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인격을 설명할 때 쓴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런 삶을 추구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기를 원한다는 우리의 고백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주님의 인격을 닮아가기 위하여 얼마나 애씁니까? 이 명령을 지킵니까?

왜 우리가 이 명령을 지켜야 합니까?

주님의 인격을 닮아가는 삶을 살기 위해서 입니다.

언제까지요? 주님이 나타나실 때까지요. 15절에 보면 ‘나타난다’는 말이 한번 더 나옵니다.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여기서 ‘나타난다’하는 말은 본래 새벽에 빛이 밝아 오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새벽의 여명이 밝아올 때 우리 주님 다시 오시고 새로운 역사의 여명이 밝아올 때, 하나님의 나라의 동이 틀 때, 주님의 영광스러운 그 나라가 이루어지는 그 순간까지 이 명령을 지켜야 합니다.

“너 하나님의 사람아”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순간 내가 가장 집요하게 추구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돈이라면 나는 돈의 사람입니다. 그것이 권력이라면 나는 권력의 사람입니다 그것이 정욕이라면 나는 정욕의 사람입니다. 그것이 자존심이라면 자는 자신의 사람입니다. 자존심의 노예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어차피 포로가 되어 산다면 하나님의 포로가 되기 원합니다 예수님의 포로가 되기를 원합니다. 성령에 사로 잡힌바 된 포로가 되기를 원합니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쥐고 갈 수 없는 돈을 위해 그것의 노예로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업을 위해 돈을 사용하며 살아가는 내 삶을 보았을 때 과연 저는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이 시간은 귀한 시간입니다. 우리의 결단을 요구하는 시간입니다. 주님 앞에서 우리의 일생을 결산하는 그날 하나님의 사람으로 저의 생애를 결산하고 싶습니다. 주님, 저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삼아 주세요. 이런 결단, 이런 기도가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박조준 목사

웨이크사이버신학원 명예총장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딤전6:11-21) 2008. 6. 22 주일예배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서 3년 간 사역을 한 후 그의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사역을 위임하고 마게도냐 지역으로 떠났습니다. 디모데는 아직 어린 나이였고 경험도 적었으며 건강도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에 비해 에베소 교회는 그리 만만한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시대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요한계시록에서 보여지는 에베소 교회는 매우 열정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에베소 교회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약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그들의 열심과 열정은 남달랐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에베소 교회에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다고, 회개하고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권면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 보여지는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얼마나 강하고 에너지가 넘쳤던 사람들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 열정으로 신앙의 문제로 토론하기 시작하면 쉽게 논쟁으로 이어졌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치 말라고 하면서 이런 일들은 쉽게 논쟁으로 갈 수 있음을 가르쳤습니다. 바로 그런 교회에 어린 디모데가 목회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빠른 시일 안에 다시 에베소에 와서 디모데의 목회를 살펴보면서 도와주려고 했지만 에베소 방문이 지연되면서 바울은 본 서신 디모데전서를 써서 디모데에게 보낸 것입니다. 이 서신에서 바울이 주되게 강조하는 것 중에 하나는 디모데의 자기 관리입니다.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4:15).’와 같은 내용을 많이 주었습니다.

오늘 본문 11-12절에서도 바울은 디모데가 힘써야 할 점을 언급합니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 사도 바울은 4개의 명령형 동사(피하라, 좇으라, 싸우라. 취하라)를 사용하면서 굉장히 공격적이고 군사적인 용어로 디모데의 전투적 신앙생활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디모데가 처음부터 부름 받은 것은 바로 이런 사람을 살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삶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가지 이어져야 한다(14절)고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매우 강한 영적 도전을 합니다. 바울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바울은 그것을 13-16절에 설명합니다. 디모데를 강하게 영적으로 도전하면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하는 근거는 바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만물을 살게 하신 분’이라고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만물에 생명을 공급하시는 분이십니다. 자연을 보면 계절을 따라 나타나는 생명의 역사가 얼마나 풍성한지 알 수 있습니다. 때로는 큰 풍랑(태풍)조차도 바다 밑바닥에 가라앉은 찌꺼기를 쓸어내고, 그 안에 산소를 공급함으로 깊은 바다 속까지 청소하고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공급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사도 바울은 본디오 빌라도에게 선한 증거를 증거하신 분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는 질문에 “네 말이 옳도다.”라고 말씀하심으로 자신을 유대인의 왕으로, 인류의 메시야로 선포하셨습니다. 주님은 죽은 영혼을 구원하시는 구원자이십니다. 만물에 생명을 공급하시는 하나님, 죄로 죽은 인간을 다시 살리시는 구원자, 메시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선한 영적 싸움을 싸우라고 명령합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명령한 것처럼 오늘 우리 성도들이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왜일까요? 바로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세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은 바로 그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구원의 역사에 참여하는 일입니다.

15-16절에서는 계속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 말씀합니다. 그 분은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이고, 만왕의 왕시며 만주의 주라고 말씀했습니다. 또한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분이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그 분은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그 분은 빛이시며 빛의 근원이십니다. 이 세상에 빛이 없다면 모든 생명이 다 죽을 수밖에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받지 않으면 모든 사람을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생명의 역사, 기쁨과 능력만이 이 험한 세상에서 우리를 온전하게 서도록 합니다.

목회를 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목회도 세상의 그 어떤 일들처럼 스트레스가 있고 말 못할 고민이 있기도 합니다. 목사만이 경험하고 느끼는 고통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목사님들은 그로 인해 받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동료 목사님들을 만나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면서 풀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목회자에게도 회복의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점은 맞습니다. 그러나 목사가 자신에게 쌓이는 어려운 일, 혹은 스트레스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주시는 놀라운 생명의 능력으로부터 회복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목회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목회를 하는 목사는 반듯이 하나님으로부터 절대적인 회복의 은혜를 누려야 할 것입니다.

이 땅에는 목사만 힘든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우리 모두가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인생을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스트레스도 많고 어려움도 많은 세상에 우리가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여러 가지로 이런 문제들을 푸는 방법을 찾아 다닙니다. 미워하고 증오합니다. 험담과 비난, 자기 변론과 언쟁, 시기와 훼방을 일삼습니다. 그렇게 하면 나의 스트레스가 풀리고 고난이 극복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정말 회복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속는 것입니다. 그것은 진정한 회복의 길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려운 삶 속에서 회복하는 진정한 길은 오직 빛이시며 생명이신 하나님께로 나가는 것뿐입니다. 만물을 살게 하시는 하나님, 우리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가는 길만이 우리를 진정으로 회복하고 승리하게 합니다.

17-19절에서 우리가 흔히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어디에서 무엇을 의지하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예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물질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시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재물은 정함이 없는 것입니다. 불확실합니다. 거기에 소망을 두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시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많이 오해합니다. 하나님을 매우 인색하신 분으로 생각합니다. 하자만 바울은 하나님을 후히 주시는 분으로, 그리고 누리게 하시는 분이라고 말씀합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이렇게 후히 주시며 누리게 하시는 분이심을 믿습니까? 바로 그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 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재물에 소망을 두는 일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디로부터 힘을 공급받습니까? 물질입니까? 변명과 변론입니까? 아니면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이십니까? 우리의 삶의 근거를 언제나 하나님께 두는 사람만이 장래에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자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의 삶의 근거를 하나님께 두십시오. 그 분을 바라보시고 그 분으로부터 주시는 힘을 공급받으십시오. 그 분이 주시는 은혜를 누리십시오. 그 분으로부터 받는 놀라운 삶의 능력과 생명을 얻어 살아가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딤전6:11-21)

‣ 일시: 2017. 4. 29. (토) 05:30

‣ 장소: 부곡중앙교회 본당

‣ 분류: 새벽기도회 설교

11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13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언을 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내가 너를 명하노니 1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15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16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

17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18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19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20 디모데야 망령되고 헛된 말과 거짓된 지식의 반론을 피함으로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라 21 이것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어 믿음에서 벗어났느니라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

이제 디모데전서 마지막 본문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말 번역상으로 오늘 본문은 “오직”이라는 말로 시작하는데, 이것은 참으로 어색한 번역입니다. 헬라어 또는 영어 본문에는 “그러나”(δέ; But)라는 접속사로 시작함으로써 바로 앞의 본문과 반대되는 의미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로 앞 단락에서 사도 바울은 돈을 사랑하는 것을 경고하였습니다. 6장 10절에 보면,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그러니까 돈 자체를 죄악시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사랑’하는 것을 죄악으로 경고하는 것입니다. 필요한 곳에 돈을 활용하지 못하고 돈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가 된다고 말씀하면서, 돈을 탐닉하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탈선한다고 분명히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너 하나님의 사람”(you, O man of God) 디모데는 이것들을 피해야 한다고 사도가 힘주어 말합니다. 거짓 교사들은 돈을 사랑하고 돈 때문에 온갖 탐욕과 죄악에 빠져 복음을 모독하지만, “너 하나님의 사람” 디모데는 그러한 것들을 멀리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도는 지금 영적 아비의 심정으로 디모데에게 돈 때문에 생기는 온갖 죄악들을 피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돈에 대한 집착이 매우 강합니다. 고대나 현대나 할 것 없이 누구나 돈을 많이 소유하고 싶어 합니다. 성도라고 해도 예외가 아닙니다. 돈을 많이 가지고 있어야 안정감을 느끼는 존재가 불쌍한 우리 인생들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돈을 사랑하지 말라는 권면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하지 말라고 하면 그것을 더 하고 싶어 하는 반발 심리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아이들이 고집을 부릴 때 그것 자체를 못하게 하면, 보통 더 심하게 고집을 부립니다. 그때 좋은 방법은 아이에게 다른 것에 집중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지금 고집을 부리며 집착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장난감이나 책을 보여 주면, 그 아이는 금방 자기 고집을 꺾어 버립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그것이 자기 눈에 더 좋게 보이기 때문이지요.

신앙생활의 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일을 율법적으로 무조건 금지하고 못하게 하는 것보다, 다른 어떤 영적인 일이 정말 좋다고 보여 주며 그것에 집중하게 만드는 것이 훨씬 효과적입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떤 것을 소유하려는 욕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소유욕 자체는 없애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소유함으로써 자기 존재의 안정감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지금 돈에 대한 소유욕을 다른 것들에 향하게 하고 있습니다. 돈을 소유하는 것보다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는 것”이 훨씬 더 이득이라고 힘주어 말합니다(11절). 다시 말해, 돈을 소유하려는 그 욕망의 방향이 영적인 일들로 향하도록 권면하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우리의 소유욕이 돈이나 세속적인 것으로 향했다면, 이제는 우리의 소유욕이 하나님과 관련된 거룩한 것으로 향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디모데뿐만 아니라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12절 말씀대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욕심으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는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영생을 취하라”는 말씀에 온전히 복종해야 합니다.

이러한 영적 전쟁은 거룩한 일에 대한 소유욕이 강한 사람일수록 능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돈에 대한 소유욕을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는 것”으로 바꿀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런 거룩한 일을 추구함으로써 “믿음의 선한 싸움”을 힘써 싸우며, 영생을 취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영생을 취하라”는 말은 우리가 이 땅에서 선한 싸움을 힘써 싸워서 마지막에 영생을 취하라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이미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소유한 자들입니다. 주님 안에서 믿음으로 소유한 그 영생을 현재 내 삶 가운데 힘써 누리라는 의미가 바로 “영생을 취하라”는 말입니다. 영생을 이미 소유한 자답게 이 땅에서부터 천국의 삶을 맘껏 누려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하여 우리도 디모데처럼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이 땅에서부터 영생을 누리는 삶을 보여 주기 위해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많은 증인들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해야 합니다.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언을 하신” 예수님처럼(13절), 저와 여러분도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선한 증언”을 날마다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15절에서 보듯이,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재림을 보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힘쓰는 선한 증언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주님의 재림을 통해 확인시켜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여러분의 선한 증언을 우리 하나님이 지켜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어제 ‘겨자씨 전도모임’에서도 경험했지만,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선한 증언에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님의 선한 증언을 무시했듯이 말입니다. 그럴지라도 하나님은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15절b)로서 여러분의 선한 증언을 모두 기억하고 계십니다. 복음을 말하는 우리의 선한 증언을 모두 기억하셨다가, 주님이 재림하시는 그날에 우리에게 영광스러운 천국의 보상으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이 사실을 굳게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마지막 부분인 17절 이하에서 부자들에 대한 명령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시작하면서 돈을 사랑하지 말라는 경고로 시작했는데, 마지막 부분에서도 비슷한 말씀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만큼 성도들이 돈의 실체를 분명히 알고 돈을 제대로 사용하라는 뜻입니다. 다 같이 17-18절을 크게 읽어 보겠습니다.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바울은 “하나님의 사람” 디모데에게 막중한 명령을 내립니다. 부자들이 교만하거나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라고 경고하라는 것입니다. 고대에나 지금이나 부자들은 콧대가 높은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좀 더 가졌다는 이유로, 돈이 없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자신의 재물을 과시하는 불쌍한 인생들입니다.

하지만 우리 성도들은 달라야 합니다. 성도들 중에도 하나님의 섭리로 부자가 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교회 안의 부자들은 세상의 부자와 완전히 달라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어야 합니다(18절).

부자 성도들은 교회 봉사를 위한 시간과 상황이 상대적으로 여유롭습니다. 본문 말씀처럼 그들은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위해 선한 일을 많이 해야 합니다. 자신의 물질을 필요한 곳에 과감히 나누어 주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19절 말씀처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부자 성도들이 영생을 소유했다는 증거가 자신에게 주어진 물질을 선하게 사용하는 것에서 입증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르심을 받은 성도 여러분, 이 새벽에 사도가 디모데에게 명령한 주의 말씀들을 여러분의 것으로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돈에 대한 소유욕을 거룩하고 영적인 것에 대한 소유욕으로 바꾸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며, 영생을 이미 소유한 자답게 여유로운 마음으로 살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선한 증언을 헛되지 않게 하실 하나님께 여러분의 소망을 두며,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위해 선한 사업에 힘쓰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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