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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5. 2 (토) [하루 한 장]“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눅24장)
부산 성민교회 새벽기도회
설교자 : 홍융희 목사 (분홍목사)
누가복음 24장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해줍니다
그런데 다른 복음서들과 달리
누가가 강조하는 부활의 소식은
여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또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미처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기록된 구약의 말씀을 풀어주시자
그 마음이 뜨거워지면서 예수님을
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도 나타나셔서
율법과 선지자, 시편에 기록된
본인의 고난과 죽음, 부활에 대해
자세히 풀어주심으로써 제자들을
부활의 증인으로 세우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증명해 낼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기에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소망을 함께 전합시다.
==========================================
* 부산 성민교회 : 부산시 사하구 승학로 201(괴정동). 전화 051-204-0691
http://sungminch.com/
성민교회 홈페이지에 오시면 더 많은 교회이야기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홍융희 목사의 설교 모음 USB구입은 교회 사무실로 전화 문의 바랍니다.
*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고 성경말씀을 깨닫게 하시길 원하십니다.
분홍목사의 설교 영상들을 통해서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확인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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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4장 주석 – Daum 카페
누가복음 제 24장 =====24:1-53 예수의 부활(1-49절) 및 승천(50-53절)에 대한 기사로써 본서를 끝맺고 있는 결론 부분이다.
Source: m.cafe.daum.net
Date Published: 9/2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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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라어 누가복음 24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 인생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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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8/1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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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튜헨리주석997-누가복음 24장 – 네이버 블로그
누가복음 24장. Ⅰ. 부활 24:1-12.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명하는 결정적 증거들이 우리와 우리 자손들에게 밝히 드러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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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5/2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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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누가복음 24장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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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튜 헨리 주석, 누가복음 24장 – HANGL NOCR – 한글 신기관
24:1 부활(누가복음 24:1-12) 어떤 식으로 그리스도의 영혼과 육체가 부활을 통하여 재결합하였는가 하는 것은 하나의 신비적인 일이다. 우리에겐 “알려지지 않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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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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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4장 흐름정리>.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제일 먼저 찾았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생전에 주님과 동고동락한 제자들이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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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 구원받은 백성들도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을 하늘로부터 받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성경대로 오셔서 성경대로 이루시고 성경대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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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디 믿는 마음을 뜨겁게한 말씀(눅24:13~35) – 유평교회
제목: 더디 믿는 마음을 뜨겁게한 말씀 본문: 누가복음 24장 13절~35절 설교자: 조정의. 지난주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살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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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누가 복음 24 장 주석
- Author: 홍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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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Published: 2020. 5. 1.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szm41l9LwZ4
누가복음 24장 주석
누가복음 제 24장
=====24:1-53
예수의 부활(1-49절) 및 승천(50-53절)에 대한 기사로써 본서를 끝맺고 있는 결론
부분이다. 예수의 부활 사건은 각 복음서의 끝을 장식하고 잇는 최종 메시지이긴하지
만 누가의 기록은 (1) 예수의 부활이 허구(虛構)가 이닌 실제 사건임을 강조하며 (2)
그 사건이 지니는 예언적, 구속사적 의미를 분명히 밝혀주고 있다는 특징을 지닌다.
또한 이와 더불어 누가는 보혜사(保惠師)에 대한 예수의 약속 및 승천에 대해 언급하
고 있는데 이는 사도행전에 기록된 성령의 역사와 교회의 태동 및 성장 과정의 배경이
된다.
=====24:1
안식 후 첫날 새벽 – 사복음서가 공통적으로 언급하고있는 부활의 날은 안식일 즉
토요일 다음날인 일요일이었다. 여기서 ‘안식후 첫날'(on the fisrst day of the
week, NIV)는 셈족어의(Semitic) 영향을 받은 것으로(Josephus) 당시 보편적으로 사용
되었던 표현이었다(요 20:19; 행 20:7; 고전 16:2). 하지만 이날은 기독교 역사상 중
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그것은 이후로 기독교인들이 안식일에 예배를 드리던 유대인의
전통을 깨고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 즉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행 20:7). 이것이 곧 오늘날 기독교회가 지키고 있는 주일의 기원이다. 한편 ‘첫날
새벽’은 토요일 저녁 여섯시경부터 일요일 저녁 여섯시경까지가 첫날이므로 일요일 새
벽을 말하는 것이다. 본문에는 언급이 없으나 막 16:1,2에서는 여인들이 안식일을 지
키고 토요일 밤에 향품을 사 두었다가 해돋는 대에 무덤으로 갔다고 언급되어 있는데
그렇다면 23:56에서 언급된 향품은 안식일 다음날의 첫시간대인 토요일 밤에 준비한
것이며 무덤으로 간 시각은 일요일 새벽 동틀 무렵인 것으로 보인다.
=====24:2
돌이…옮기운 것을 보고 – 본서에서는 무덤을 돌로 막았다는 이야기가 언급된 적
이 없었지만 마 27:66에서는 무덤을 돌로 막고 인봉까지 한 후 병사들을 지키게 하였
다고 언급되었으며 막 15:46에서도 무덤을 돌로 막았다는 언급이있다. 그리고 마가에
따르면 여인들은 무덤을 향해 가면서 무덤을 막아놓은 돌을 어떻게 옮길 것인지에 대
해 걱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누가는 그런 언급을 하지 않는다. 이는 누가 특유의 간결
성과 사건 전개의 극적 효과를 상기시켜 준다. 즉 여인들이 무덤 가까이에서 무덤이
열린 것을 발견하였다는 사실을 직접 언급함으로서 그들이 받은 충격과 놀람을 극적으
로 보여주고 있으며, 아울러 예수 부활 사건이 쉽사리 믿어지지 않을 만큼 전대미문
(前代未聞)의 이적적 사건이었음을 복선적으로 암시해 준다(Grundmann). 한편 마태는
무덤의 돌문이 하늘로부터 온 천사들에 의해 지진과 함께 열려졌다고 언급하고 있는데
(28:2) 이는 부활의 사건이 하나님의 개입에 의한 초자연적인 종말적 사건으로 묘사한
마태의 독특한 저작 의도를 반영해 준다.
=====24:3
주 예수의시테가 뵈지 아니하더라 – 부활에 대한 두번째 암시를 주고 있으며 첫번
째 암시보다 훨씬 더 충격적이고 신비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여기서 언급된 ‘주 예수
의 시체'(* , 토 소마 투 퀴리우 예
수)는 23:52의 ‘예수의 시체’라는 말과는 다른 의미를 내포한 표현같다. 즉 어떤 사본
들에는 ‘주'(* , 퀴리우)라는 단어가 삭제되고 그냥 ‘예수의'(*
, 투 예수)만 언급되고 있으나(Marshall), 다른 많은 사본들에는 ‘주 예
수’라는 표현이 나타난다. 이같은 차이는 필사자들의 신학적 차이에 기인한 것으로 이
해한다면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보인다. 즉 예수 앞에 ‘주’라는 말를 덧붙인 것은 부
활한 예수에 대한 새로운 호칭이라는 의미에서 이해되는 것이다(행 1:21; 4:33;
8:16). 따라서 23:52의 ‘예수의 시체’는 부활 이전의 표현이고 여기서 언급된 ‘주 예
수의 시체’는 부활한 에수를 의식하여 나타낸 함축성 있는 표현으로 봄이 타당하다.
=====24:4
이를 인하여 근심할 때 – 예수의 시체가 없어진 사실에 대한 여인들의 반응을 누
가의 독특한 표현법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여인들이 근심하고 있다는 점
에서 이들은 예수의 부활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 같다. 그들이 근심한 것
은 아마도 마 27:64에서 언급된 바처럼 예수의 시체를 누가 가져간 것이 아닌가 하는
이유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 – 에수의 시체가 안 보이는 고로 여인들이 심히 당
황하고 있을 때 갑자기 그들 곁에 나타난 두사람의 정체에 대한 간접적 묘사인 이 구
절은 천사를 암시한다. 막 16:5에서는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라고 언급되고 마
28:2,3에서는 ‘눈 같이 흰 옷을 입은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왔다’고 언급된다.
‘찬란한 옷’을 입었다는 말은 천사들과 하늘에 사는 존재를 표현하는 상징적 어법이다
(행 10:30). 이 같은 표현은 변화산 사건에서도 묘사되고(9:29) 승천(昇天) 사건 때에
도 묘사된다(헹 1:10). 그런데 ‘천사’를 누가는 ‘사람’으로, 마가는 ‘한 청년’으로 언
급하였다. 이는 천사의 모습이 사람의 형상을 한 청년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고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누가는 마태와 마가와 달리 천사의 수효가 두 명임을 밝히고 있는데,
이는 변화산 사건과 예수의 승천에서 나타난 두 사람과 병행시키려는 누가의 독특한
의도로 보여진다(Stuhlmueller). 그러나 요 20:12에서도 두 명의 천사가 언급된다는
점에서 누가만의 독특성이라고 할 수는 없다(I. H. Marshall). 부활에 대한 중대한 증
언을 두 사람으로하는 것은 어떤 일에 보증을 설 때 두 사람으로 하는 것이 한 사람보
다 더 확실성 있는 보증이 된다는 유대인의 전통적 사상(신 19:15)에서 비롯되는 것이
기도 하다.
=====24:5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 갑작스런 천사의 출현에 나타나 여인들의 반응은 놀랍
고 ‘두려운'(* , 엡포보스) 것이었다. 이 같은 두려움은 경이로운 사건
에 대한 놀라움의 표시로서 초자연적 신비감을 강조한다(37절; 행 10:4; 4:24; 계
11;13). 그 놀라움의 표시로 여인들이 얼굴을 땅에 대었다고 묘사되는데 이는 누가만
의 표현이다. 마 28:4에서는 ‘놀라서 죽은 자 같이 되었다’고 묘사함으로 초자연적 사
건에 대한 종말적 두려움을 부각시킨다. 그러나 마가와 누가는 경이롭고 신비로운 사
건에 대한 경이감(驚異感)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누가는 마태와 마가가 언급하는 ‘두
려워’, ‘놀라지 말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 않는데 역시 두려움에 대한 강조를 약
화시키는 반면 하나님의 초자연적 권능을 부각시키려는 누가의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
다.
두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 두 명의 천사가 동시에 말한 것으로 묘사된다. 따라서
마태와 마가가 ‘한 사람의 천사’혹은 ‘한 사람의 청년’을 언급한 것이 누가의 ‘두 사
람’과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두 사람이 동시에 말한 것은 한 사람이 말
한 것과 같기 때문이다. ‘어찌하여’로 번역된 헬라어 ‘티'(* )는 의문 대명사 ‘누
구'(who)라는 뜻과 의문 부사 ‘왜'(why) 또는 ‘무엇'(what), ‘어느 것'(which) 등의
다양한 의미로 쓰여지며 여기서는 ‘왜’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즉 살아 있는 사람을
죽은 자의 무덤에서 찾고 있는 그 이유를 모르겠다는 의미와 함께 부활의 당연함과 그
것이 예정된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 격언조의 이 구절은 상징적 의미를 시사해 준
다. 즉 ‘죽은 자 가운데’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타 톤 네크론'(*
)은 ‘죽은 자들 가운데’라는 뜻이다. 이는 예수의 무덤 안에 여러 ‘시
체들’이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의 ‘죽음’과 ‘무덤’ 그 자체를 상징한다. 다시말해
서 무덤은 유한한 존재인 인간에게 국한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이구절은 예수가 부활하
여 살아 있다는 암시를 주고 있다. 누가는 2,3절에 이어 세번째로 예수의 부활을 단계
적이면서 간접적으로 시시하고 있는 바, 그 자신 특유의 치밀한 구성력(構成力)을 보
여준다.
=====24:7,8
저희가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 두 명의 천사가 예수께서 생전에 직접 하셨던 말
을 여인들에게 상기시켜주자 여인들은 그제서야 깨달았다. 두 천사가 직접 언급한 내
용은 9:22의 에언이엇다(9:22 주석 참조). 다른 복음서와 달리 예수의 예언을 천사들
의 입을 통해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이라는 것을 다시 기억해 내는 누가의 표
현 의도는 예수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이 총제적인 예언의 성취라는 맥락을 나타내고자
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누가의 이 같은 표현 의도는 예수의 부활 사건을 중심한 대
적들의 묵살 음모라는 당시의 정황을 염두에 둘 때 보다 더 분명하게 이해된다. 즉 마
28:13에 따르면 예수의 대적들은 당시 예수의 부활이 그 추종자들에 의해 조작된 사
건이라고 날조(捏造)하며 이를 소문으로 퍼뜨렸던 것이 분명하다. 누가는 대적들의 이
같은 음해적(陰害的) 행위와 소문에 대한 치밀한 반론으로서 이같은 상세한 묘사를 시
도 하였던 것이다. 어쨌든 누가는 예수의 부활이 조금도 의심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
임과 그 사실이 이미 예언되었던 사실이었기 때문에 당연한 사건임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누가는 예수의 말씀을 두 천사가 직접 들려 주었을 때 여인들이 비로서 기억했다
는 언급을 통해 9:22나 18:33에서와 같이 평소 예수의 말씀을 제자들도 이해하지 못하
였고 제자들 이외의 사람들도 그 말씀을 들었으나 믿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24:9
열 한 사도와 모든 다른 이에게 고하니 – 부활을 확인한 여인들은 성안으로 돌아가
열 한 사도와 성내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들이 보고 확인한 바를 전하였는데 부활에 대
한 확신을 갖고 전달한 것인지 아니면 객관적으로 확인된 사건 즉 시체가 없어진 사실
과 천사를 만났던 사실만을 전했는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막16:8에서는 ‘아무에게
아무 말도 못했다’고 묘사하고 있는데 마가의 표현은 놀라움에 강조를 둔 것으로 보인
다. 한편 마태(마 28:8)와 누가는 여인들이 이야기를 전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특
히 누가는 마태와 마가가 공통되게 언급하고 있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지 않다. 즉 마
태와 마가는 ‘예수께서 부활한 후 갈릴리로 갔다’는 사실을 천사가 일러 준 것으로 언
급하고 있는데(마 28:7; 막 16:7) 누가는 이를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또한 마태는
여인들이 제자들에게 달려간 것으로만 언급하는 반면 누가는 제자들과 다른 모든 사람
들로 확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마태에 따르면 예수를 팔았던 가룟 유다는 이미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된 직후 죄책감으로 목매여 자살하였다(마 27:3-5). 누가는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두고 여기서 열한 명의 제자만을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
=====24:10
이 여자들은 – 누가는 예수의 부활을 목격하고 확인한 갈리릴 여인들의 이름을 이
제야 밝히고 있는데 마가는 무덤으로 가기 전에 이 여인들의 이름을 밝히고 있다(막
16:1). 그러나 이름에는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막달라 마리아 – 이 여인은 누가 이외에도 마태와(마 28:1) 마가(막 16:1) 그리고
요한(요 20:1)에 의해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증인으로서 공통적으로 언급되며 일곱 귀
신이 들렸다가 예수에 의해서 나음을 받은 여인이다(8:2).
요안나 –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8:3)로서 예수와 제자들을 섬겼던 여인이며
마가복음에서는 언급되지 않는다.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 , 마리아 헤 야코부)에 해
당하는 헬라어는 직역하면 ‘야고보의 마리아’가 된다. 이는 곧 아고보의 아내를 의미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는 마가가 언급한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는 다른 인물이
된다. 그러나 막 15:40절과 47절을 본다면 ‘야고보의 마리아’를 ‘야고보의 어머니 마
리아’로 해석하는 것이 무리는 아닐 것이다.
저희와 함께 한 다른 여자들 – 앞에서 언급한 사람들과 더불어 무덤에 따라갔던 갈
릴리 여인들이며(23:55, 24:1) 이로써 부활의 증인이 이름을 밝힌 세 명의 여인 외에
더 있음을 말하고 있다. 마가가 언급한 세 명(16:1)보다 확대된 숫자이다.
=====24:11
사도들은…믿지 아니하나 – 여인들로부터 부활 사건을 전해들은 사도들의 반응은
믿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이 나타낼 수 있는 것처럼 의심과 불신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
었다. 즉 그들은 여인들의 증언을 얼토당토 않는 것으로 여겼다. 즉 너무 뜻밖의 일이
었기 때문에 믿어지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제자들의 반응은 이제까지 보
여왔던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반응과도 동일한 것이었다. 즉 평소에 가르쳤던 예수의
말씀을 이해자지 못했던 것처럼(9:45; 18:34) 정작 예수의 부활이 그들의 눈앞에서 실
현되었어도 이를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제자들 역시 여인들처럼 예수의 부활 예언을
기억하고 있지 못했다(6절 주석 참조).
=====24:12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니 – 누가는 앞절에서 언급된 사도들의 불신에 대비
되게 베드로는 무덤으로 달려갔다고 언급하고 있는데 베드로의 권위를 높이려하는 의
도가 엿보인다. 그러나 본문은 많은 사본들에서 언급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이 구절
은 요 20:3-10에 근거한 삽입구로 이해되기도 했으나(Metzger) 많은 학자들은 이구절
을 본래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Lagrange, Jeremias, Gundmann, Ellis, danker, Morris
등).
그 된 일을 기이히 여기며 – 무덤에 도착한 베드로는 빈 무덤 속에 남아 있는 세마
포만 발견하고 ‘이상히 여겨’ 집으로 돌아간 것으로 묘사되는데 여기서 ‘그 된 일’은
여인들과 베드로가 직접 확인한 빈 무덤을 뜻한다. 한편 요 20:1-10에 언급된 평행 본
문은 누가의 것과 많은 차이가 있다. 요한에 의하면 베드로 혼자 무덤에 간 것이 아니
라 예수의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 한 명이 함께 갔고 그가 베드로보다 빨리 무덤에 도
착하였으며, 베드로가 본 것은 세마포 뿐만 아니라 머리 수건도 있었다. 그리고 나서
무덤에 먼저 와 있던 다른 제자도 무덤안으로 들어가 보고 믿었다고 언급된다. 즉 요
한복음에서는 베드로 이외에 익명의 사랑받는 제자를 예수 부활 사건의 목격자로 언급
함으로써 열 한 사도 외의 다른 제자들도 빈 무덤을 확인한 것으로 언급한다. 이렇듯
예수의 부활은 일부의 몇몇 여인들만 목격한 것이 아니요 평소 그분께 관심을 가졌던
제자라면 누가나 가보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객관적, 실체적 사건이었으니 이로
써 하나님 계시의 확실성과 역사성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24:13
그 날에 – 헬라어 성경은 새로운 이야기를 전개시키면서 독자의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보라'(* , 이두)라는 단어로 이 무장을 시작하고 있으나
91:20,31,36; 13:35; 18:31 등) 개역 성경은 이 단어를 번역하지 않았다. 여기 언급된
‘그 날’은 앞에서 언급한 사건이 일어난 ‘안식 후 첫날'(1절)을 가리키는데 관찰자의
시점이 옮겨갔다. 즉 앞에서 언급한 관찰자의 시점은 예수가 부활한 당일이었으나 현
재의 관찰자는 먼 훗날 시점에서 부활 사건이 있었던 그날을 회고하고 있다.
저희 중 둘이(* , 두오 여스 아우톤) – 여기서의 인칭 대명
사 ‘아우톤'(* )은 앞에서 언급된 어떤 이를 지시하는지 불분명하나 여인들
과 열한 사도를 제외시킨다면 9절에 언급된 모든 ‘다른이’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즉 부활 현장을 목겨한 여인들로부터 증언을 들었던 사림들이다.
엠마오라 하는 촌으로 가면서 – 이 장면 묘사는 조금 전까지 있었던 긴박한 사건
묘사와는 매우 대조적이다 . 즉 유월절 축제와 예수의 체포, 그리고 사형 집행과 빈
무덤의 발견으로 나타난 부활의 충격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긴박한 사건 전개와 달리
그 사건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을 떠나 한적한 시골로 향하고 있는 두 사람에 초점을 맞
춘 이 장면 묘사는 이야기의 새로운 국면을 제시한다. 요컨데 이사람들은 이야기의 내
용으로 보아 예수를 열렬히 추종했던 사람들이었음에 틀림없고 유월절 축제에 참여하
기위해 예수와함께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갔던 자들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들은 뜻하
지 않은 예수의 죽음으로 인해 자신들의 기대가 좌절(挫折)된 경험을 안고 힘없이 집
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여기 언급된 ‘엠마오'(* )라는 지명은 정확
하게 고증되지 못하고 있다. 분문에서는 예루살렘에서 이 십 오리 즉 10km 정도의 거
리에 위치해 있음을 말하고 있는데 ‘이십 오 리’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타디우스 혀세
콘타'(* )의 정확한 거리는 약 11.2km이다. 이
정도의 정보로 추정할 수 있는 두 개의 지명이 학자들 사이에 거론되고 있다. 첫째는,
욥바(Joppa)로 가는 방향으로 예루살렘에서 약 32km 지점에 위치한 ‘암와스'(Amwas)로
보는 경우인데(Lagrange, Metzger) 거리가 누가의 언급보다 배가 된다는 점이 문제가
된다. 그리고 이야기하면서 하루를 걸어갈 수 있는 거리로서는 적당하지 못하다는 점
도 문제가 된다. 둘째, 유력한 장소는 예루살렘 서쪽 약 6km의 거리에 위치하였고
A.D.69-70년경 로마 황제 베스파시안의 침입(侵入)으로 인해 식민자가 되었던 ‘칼로니
에'(Kaloniye)이다(Weiss, K.Lake, Harrey). 이 지명 역시 거리의 차이가 문제인데 누
가가 언급한 거리의 절반밖에 안된다는 점이다. 그러나 혹자(Benoit 등)의 말처럼 누
가가 왕복거리로 언급했다고 추정한다면 그리고 하루에 쉽게 갈 수 있는 거리라는 점
에서 첫째 지명보다는 둘째 지명이 훨씬 설득력 있는 주장이라고 할수 있다.
=====24:14
이 모든 된 일을 – 두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던 예수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즉 예수의 성전 숙정을 비롯해 예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빈 무덤으로 대두
된 부활 문제를 서로 이야기했을 것이다.
=====24:15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 두 사람이 열심히 지난 사건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걸
을 때 예수가 그들과 동행하기 시작함을 언급한다. 문맥으로 보아 예수께서 처음부터
동행한 것이 아니라 도중에 나타난 것으로 보이는데 주변에 다른 사람들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여기서 묘사된 예수는 분명히 육체를 가진 사람으로서 ‘함께
걸어가는'(* , 쉼포류오마이) 모습이었다.
=====24:16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 이야기의 내용으로 보아 예수 생전
(生前)에 가까이 있어서 예수의 얼굴을 매우 잘 아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들 옆에 다가
선 예수를 그들은 알아보지 못한 것은 예수가 죽었다는 사실만을 생각했지 정작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그들 곁에 함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가는 그들의 ‘눈이 가리워져 알아보지 못하였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들의 눈이 ‘가
리워져'(* , 크라테오)라는 말은 고정되고 변동이 없음을 뜻하는데 두 사
람의 의식과 시각이 변함없음을 가리킨다. 이 말이 시사하는 의미를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는데 첫째는, 두사람의 의식과 시각이다. 즉 부활한 예수를 만날 수 있는
것은 과거의 의식과 시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차원의 의식 변화 또는
영적 각성이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둘째는, 부활한 예수의 존재 문제인데
똑같은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났지만 일반적인 보통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존재
임을 알 수 있다. 즉 늘 함께 하였던 사람도 면전에서 알아볼 수 없는 전혀 새로운 존
재로 나타나는 것이다. 길 가던 두 사람은 예수가 왔을 때 보통 사람으로서 같은 방향
으로 가는 줄로만 알았을 것이다.
=====24:17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 비로소 부활한 예수와 길가는 두 사람과의 대화가 예
수의 질문으로 시작되고 있는데 예수의 질문 내용은 두사람의 대화 내용이 무엇이냐는
것이었고 그질문에 대한 대답에 앞서 누가는 두 사람의 얼굴 표정을 질문에 대한 반응
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들은 슬픈 표정을 지으며 가던 길을 멈추어 섰다. 이 두 사람
은 예수의 죽음에 따른 깊은 실의(失意)에 빠져 있었으며 부활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
는 상태였다.
=====24:18
글로바라 하는 자 –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의 이름이 ‘클레오파스'(*
)로 밝혀지고 있으나 이 사람의 정체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첫째는, 요
19:25에 언급된 마리아의 남편이라는 견해(Alford, Gilmour 등)이며 둘째는, 교회사가
유세비우스(Eusebius)의 말에 근거하여 초대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 시몬의 아
버지와 동일한 인물이자 예수의 삼촌이라는 설(Origen, Zahn 등)이 있는데 정확한 근
거는 없다. 두 견해의 다른 가능성에서 제시된 인물이 동일인일 수도 있음을 배제할
수는 없다. 어쨌든 이름을 언급한 점으로 보아 당시 누가복음의 독자들은 이 사람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쉽게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름을 밝히지 않은 다른
한 사람은 글로바의 아내이거나 아들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특히 유월절 행사에
참석했었다는 점을 전제한다면 가족이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따라서 동행한 다른
한 사람은 글로바의 아내였을 것이라는 견해가 가장 신빙성있다 하겠다. 아들보다는
아내일 확율이 높은 것은 가족의 구성상 남편과 아내가 기본 구조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에 우거하면서 근일 거기서 된 일을 홀로 알지 못하느뇨 – 예수의 질문에
대한 글로바(Cleopas)의 대답은 핀잔 섞인 어투로 시작되고 있다. 글로바는 부활한 예
수를 예루살렘에 머물렀던 자신들과 같은 나그네로 판단하였다. 그래서 같은 곳에 머
물렀으면서도 그곳에서 일어난 사건을 왜 혼자만 모르느냐는 반문(反問)을 하게 된 것
이다. 따라서 예수에 관한 사건이 예루살렘 안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의 큰
사건이었음을 반증해 준다. 여기서 언급된 ‘근일'(近日)(*
, 타이스 헤메라이스 타우타이스)은 여러 날 동안 예루살렘 안에 머
물렀음을 의미하며 따라서 유월절 축제에 참여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24:19
무슨 일이뇨 – 글로바의 흥분된 반응에 대한 예수는 예루살렘에서 무슨 일이 있었
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식으로 되묻는다. 이 같은 예수의 질문 의도는 예루살렘에 있었
던 일련의 사건을 해명(解明)하기 위한 문제 제기였다. 즉 두 사람이 생각하고 있는
사건 이해에 대한 잘못된 것을 시정하고 바로 잡아주기 위해 그들의 견해를 직접 듣고
자 했던 것이다.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 – 예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시작하면서 예수의 언행에 대한 자신들의 견해를 밝힌다. 그들은 예수를 ‘능력있는 선
지자'(* , 프로페테스 뒤나토스)로 말한다. 이 같은
두 사람의 견해는 당시 일반 대중들의 의견과도 일치되는 보편적인 견해였다(9:19).
그들 두 사람에 의하면 예수가 선지자로 보여진 것은 그의 말과 행동에 권능(權能)이
있었기 때문이며 하나님과 민중으로부터 인정을 받은 사람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24:20
우리 대제사장과 관원들이…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 두번째로 그들은 예수의 처
형에 관한 자신들의 견해를 밝힌다. 그들은 하나님과 민중들로부터 인정받았던 능력있
는 권능의 선지자 예수를 죽이게 한 주범들이 자신들의 종교, 정치 지도자인 대제사장
들과 관원들임을 천명한다. 여기에 빌라도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것은 예수를 처형
한 책임이 전적으로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있다는 누가의 의도와 일치된다. 특히 두 사
람이 ‘우리들의’ 지도자임을 밝힌 사실은 예수 십자가 처형에 대한 유대인의 책임을
더욱 강조하는 느낌을 주고 있다.
=====24:21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 – 그들이 갖고 있었던 세번째 견해는 에수에게 걸어던 기대
였다. 그들은 예수가 악의 세력 아래서 신음하고 있는 민중들을 해방시키고 예수가 선
언하였던 것처럼 하늘나라(The Kingdom of God)가 이루어지기를(막 1:150 기대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에 의해서 새롭게 변화된 다른 세계를 기대하며 예수를 추
종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들이 17절에 언급된 바처럼 얼굴에 슬픈 빛을 할 수밖에 없
었던 것은 그들이 걸었던 기대가 예수의 사형으로 무너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 일이 된 지가 사흘째요 – 그들의 실망은 예수의 죽음 뿐만이 아니라 예수가 죽
은지 사흘이 지났는데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예수를 죽였던 그들이 여전히 세
상의 주인이 되어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이러한 그들의 어투로 보아 그들은 어렴풋하
게나마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던 듯하다. 즉 그들은 예수가 단순히 죽음으로 끝
나지 않고 적어도 사흘째되면 무슨 사건이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었던 듯하
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후 사흘 째까지 희망을 갖고 있었다는
셈이 된다. 그러나 그들은 더이상 자신들의 희망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하소연하고
있다.
=====24:22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 이야기의 전개는 점점 감정을 고조시키면서 뜨거
워지고 있다. 앞절에서 표현되었던 실망감에 덧붙여 경악스럽고 놀라운 사건을 언급하
면서 10절에서 언급되었던 여인들을 소개한다. 여기서 그들은 ‘우리들 중'(*
, 여스 헤몬)이라는 말로써 그 여인들과 자신들의 관계를 언급한다. 그렇다
면 이 두 사람은 10절에서 언급된 여인들과 동향(同鄕), 즉 갈릴리 사람이었을 가능성
이 높고 친분이 있는 관계였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우리’라는 의미로 볼 때 열두 제
자들 외에 예수를 따르던 무리들이 어느 정도 고정된 숫자를 유지하며 공동의식(共同
意識)을 갖고 있었다고 추정된다.
=====24:23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 그들을 놀라게 하고 ‘경악케한’ 일은 1-8절에 언
급된 내용이었다. 여기서 강조되는 내용은 예수의 시체가 없어졌다는 점이다. 그리고
빈 무덤 안에서 천사를 만나고 그 천사로부터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는 믿어
지기 어려운 것이었기 때문에 어처구니 없는 사실로 받아들였을 것이다(11절 주석 참
조).
=====24:24
또 우리와 함께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 여인들에 이어 빈 무덤을 확인하였던 사
람을 언급하고 있는 이 구절은 12절 내용과 조화되지 않는 듯하다. 즉 11,12절에서는
제자들이 여인들의 증언을 믿으려하지 않았다고 언급한 점과 베드로만 무덤에 간 것으
로 언급된 점이 본문과 모순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오히려 본문의 ‘두어 사람'(some
of our companions, NIV)은 요 20:3-8의 내용과 잘 어울린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본
문을 삽입된 문구로 볼 수 있는데(J. Weiss) 꼭 그렇게 단정할 수는 없다. 여기서의
화자(話者)가 열 두 제자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우리들 중’이란 9절에서 언급된 바처
럼 열 한 사도와 그 외의 사람을 포함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12절에 언급된 베
드로 외에 다른 어떤 사람이 무덤을 찾아 갔으리라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따라
서 본문은 12절의 내용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이 같은 진술을 통해 예수
의 무덤에서 예수를 만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여자들만의 증언이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재확인 증언을 통해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빈 무덤 사건을 점한 이들의 관심은 부활
사건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예수의 시체가 없어진 사실에 집중되고 있음을 알 수 있
다. 그 이유는 그들이 그 같은 부활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영적 안목(眼目)이나 믿음
이 전무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예수 자신이 예고했던 수난과 부활에 대한 말씀
을(9:22; 18:32,33) 예수의 의도와는 다르게 이해했다는 결론을 얻게한다. 그래서 그
들은 예수의 죽음과 빈 무덤에만 집착하고 있는 것이다.
=====24:25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 예수에 관한 사건들로 인해 실망과 좌절에 빠진 두
사람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난 예수의 반응은 책망을 하는 투이다. 예수의 책망은
‘오'(* )라는 감탄사로 시작되면서 자신의 감정이 강하게 주입된다. 첫 마디는 ‘미
련하다'(How foolish you are!, NIV)라는 책망인데 그들의 생각이 ‘바보스럽고 무지하
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제까지 진술했던 두 사람의 생각은 매우 잘못된 것임을 선언
한 셈이 된다. 두번째는 선지자의 말을 ‘더디게'(* , 브라데이스) 신뢰
하는 자들이라고 규정하는데 그들이 신뢰하는 선지자의 예언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
을 책망하는 말이다. 즉 예수께서 생전에 자신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구약 예
언자들의 예언 성취로 이루어 질 것이라는 점을 가르쳐 왔지만(18:31; 22:37 주석 참
조), 예수의 가르침은 물론이고 구약 시대의 예언까지 바르게 믿지 못하고 있음을 탄
식(歎息)하는 것이다. 이 말은 예수의 사건을 접한 모든 사람들이 생각하는 바처럼 예
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예수의 활동이 끝장나고 그 추종자들에게 실망과 절
망만이 있을 뿐 아무것도 남은게 없다는 생각을 강하게 꾸짖는 것이다. 즉 전혀 다른
차원으로 예수가 활동하고 있음을 시사해 준다(30,31절).
=====24: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 이제까지 유대인들의 생각해 왔던 그리스도에 대한
고정 관념을 앞절에서 일축(一蹴)한 후 그리스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반문 형식으로
설명한다. 특히 ‘해야 하지않느냐?’라는 반문의 대답이 자명함을 전제로한 질문인데
27절의 장면처럼 구약성경에 그 답이 분명하게 제시되었음을 나타낸다(시 22:6-8, 18;
27:12; 41:9; 사 50:6; 53:3-9; 슥 11:13).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에는 관심하지
않고 영광만을 생각하는 오류(誤謬)를 범하였다. 심지어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조차도
그리스도의 고난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세속적이고 현세적인 영광에만 참여하려는
이기적 야욕(野慾)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그리스도는 영광 이전에 반드시 고난을 겪어
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반드시 겪고 나서
얻게 되는 영광은 칭송받고 높임을 받는 인자(人子)의 영광이다(9:26; 21:27; 빌
2:5-11; 딤전 3:16; 벧전 1:11,21). 약한 사람들로부터 힘없이 처형당해 죽었지만 하
나님에 의해 인정받고 하나님의 아들로 칭송받게 된다는 암시이다.
=====24:27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 앞에서 언급한 그리스도가 고난 받아야
하는 필연성에 관련된 예언들을 하나 하나 인용하면서 설명한 것으로 보이는데 인용된
자료는 모세와 선지자의 글과 모든 성경이라고 누가는 밝히고 있다. 여기서 ‘모세의
글’이란 ‘모세오경’을 가리키는 말이고 ‘선지자의 글’이란 ‘예언서’를 지칭한다. 그리
고 ‘모든 성경’은 그 율법과 예언서 외의 구약성경 일반을 가리킨다 하겠다.
=====24:28
저희의 가는 촌에 가까이 가매 – 엠마오가 그들의 최종 목적지인지 분명하지는 않
지만(왜냐하면 그들은 갈릴리 사람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18절 주석 참조). 그들
이 도착하려고 했던 장소에 거의 다 왔음을 말하고 있다. ‘가까이 가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엥기조'(* )는 ‘도착 했다’와 ‘거의 다달았다’의 두 가지 뜻을
포함한다. 이처럼 도착 시간에 대한 언급은 출발 시각처럼 자세히 언급되고 있지 않으
나 29절의 내용을 보면 날이 거의 저물고 있는 때임을 말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일요
일 즉 안식후 첫날이 거의 끝나는 시각쯤인 것으로 추정된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같이 하시니 – 13절에서 언급한 대로 그들의 목적지 엠마오
에 도착하자 두 사람은 걸음을 멈추고 머물고자 하였을 것이고 예수는 목적지가 엠마
오가 아니어서 더 걸어가겨 했을 것이라는 이해는 쉽게 가능하다. 여기서의 강조점은
예수가 계속 길을 가려고 했다는데 있기 보다는 29절에 나오는 내용, 즉 예수가 그들
두 사람과 함께 머물게 된 동기가 두 사람의 간절한 요청 때문이었음을 뒷받침해 주는
데 있다. 본래 예수는 엠마오에서 유숙(留宿)하려는 계획이 없었음을 암시하여 두 사
람의 강권을 강조하고자 하였다.
=====24:29
저희가 강권하여…유하사이다 – ‘강권하여’로 번역된 헬라어 ‘파라비아조마이'(*
)는 ‘압력을 넣어 강제로 하게 하다’의 뜻을 가진 단어이
나 여기서는 절박한 간청(懇請)으로 봄이 적절하다. 예수가 글로바의 일행과 엠마오에
서 머물게 된 동기는 그 두 사람의 간절한 요청에 의한 것임을 매우 강조하고 있는 것
이다. 따라서 ‘강권이 있었다’는 것은 사양하는 말도 있었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그들
이 이와 같이 예수를 붙잡고 머물기를 간청한 이유는 날이 저물어 더 이상 여행이 어
렵다는 점뿐만 아니라 길을 함께 걸어오면서 나눈 대화 속에서 그들은 어떤 감명을 받
았음에 틀림없고(32절) 존경하는 마음까지 생겨났을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와 함께 유숙하면서 더 많은 가르침을 듣고자 하여 예수를 강권하였을 것
이다.
=====24:30
저희와 함께 음식을 잡수실 때에 – 저녁 식사 때인 것으로 보이는데 앞절에서 날이
저물고 기울었다는 언급이 있었다는 점을 보아 점심 식사라는 주장은(Bornhauser) 적
절하지 못하다. 이 저녁 식사는 글로바 일행이 준비한 것으로 보이며 그들의 집인지
아니면 여관이나 민박하는 집에서 만찬을 베푼 것인지는 정확지 않다. 그러나 이들이
갈릴리 사람이라는 사실을 전제한다면 여관이나 민박일 가능성이 높다. 어쨌든 이 저
녁 식사는 일상적인 평범한 식사이었음에 틀림없다.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주시매 – 이 같은 식사 장면은 오병 이어의 기적
(9:10-17)과 유월절 식사를 연상케 한다(22:14). 글로바 일행은 유월절 식사에 참여하
지 못했다는 점에서(열두 제자들과 예수가 함께한 만찬이었기 때문이다) 이 두 사람은
식사를 주제하는 예수의 모습을 보면서 들판에서 오병 이어의 기적을 으로 배불리 먹
던 그 때가 생각났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31절에서와 같이 이두 사람이 예수를 알아보
게 된 요인(要因)중의 하나가 이 식사에 대한 기억 때문이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
한다.
=====24:31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줄 알아보더니 – 글로바 일행이 예수를 알아보지 못한 이유
가 눈이 가리워져 있었기 때문이었는데(16절) 예수와의 저녁 만찬 도중 눈이 열려지게
되어 부활한 예수를 알아보게 되었다. 개역 성경에서 ‘밝아졌다'(their eyes were
opened, NIV)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 ‘디에노이크데산'(* , 디아노이
고)의 과거 수동형이다. 따라서 눈이 열려지게 된 원인이 타자(他者)에게 있다는 암시
를 주고 있다. 눈이 열려지게 된 원인은 앞절에서 언급된 바처럼 떡을 떼어 주는 행위
가 될 수 있으며 알지 못하는 신비적 능력이 작용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이 모두
가 하나님에 의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I. H. Marshall). 이와같이 글로바 일행이 부활
한 예수를 낯선 여행자로 보지 않고 생전의 예수의 모습으로 보게 된 것은 다음과 같
은 두 가지의 상징적 의미를 함축한다. 첫째, 식사 이전까지는 예수가 낯선 타인으로
보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휼륭한 선생으로도 생각하였을 것이다(29절 주석 참조). 이
는 이제까지의 유대인들이 예수를 이해했던 바를 그대로 보여준다. 그러나 이제 떡 곧
예수의 몸을 진정으로 나눔으로써 그들은 예수를 만나게 되었다. 여기서 떡을 떼는 만
찬(晩餐)을 친교하고 할 수 있다면 친교 속에서 예수를 만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둘
째는, 갑자기 눈이 열려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32절에서 그들이 고백하는 바와 같
이 길을 걸으면서 그의 가르침을 들을 때 그들은 마음이 뜨거워지는 감동을 받았다.
따라서 그들은 그의 가르침을 뜨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였고 그 낯선 길손을 애써 대접
하려고 했다는 것이 예수를 알아 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을 열게 했다. 즉 예수의 가르
침을 열심히 받아들이고 예수와 함께 하기를 간절히 요청하는 마음이 부활한 예수를
만나게 한 동인(動因)이 되었다.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 예수께서 더 이상 시각적으로 포착되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는 본절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암시한다. 첫째, 부활한 예수는 시.
공(時空)에 제한된 존재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은 그들에게도 환상이 아니라
생생한 체험이었다. 부활한 예수는 살아있는 생생한 체험으로 만나되 시각적으로 보여
지는 제한된 존재가 아니라 그것을 초월하는 새로운 존재로 만나게 된다. 둘째는, 우
리가 예수를 만날 때 고유한 일정한 모습으로만 만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모양으로 만
난다는 점이다. 글로바 일행이 경험한 바처럼 낯선 길손과의 만남이 예수와의 만남이
될 수 있고(창 18:1-15) 헐벗고 굶주린 이웃과의 만남이 예수와의 만남이 될 수도 있
다(마 25:31-46). 따라서 이제 예수와의 만남은 시간과 공간의 구분없이 무한적으로
개방되어 있는 초월적 사건인 동시에 어느 대상에 국한됨이 없이 구체적인 우리의 생
활 가운데서 경험되고 찾을 수 있는 내재적 사건이기도 하다.
=====24:32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 낯선 사람이 예수였다는 사실을 아는 순
간 예수는 사라지고 두 사람은 길을 걸으며 느꼈던 감정들을 회고하면서 자신들의 마
음이 뜨겁게 타올랐던 기억을 되살려내고 있다. 그들의 마음이 뜨겁게 감동되었던 것
은 예수가 들려주었던 가르침의 내용이었다. 특히 성경을 ‘해석해’ 주었을 때(27절)
그들의 마음이 뜨겁게 ‘타올랐다'(* , 카이오)는 것을 회상한다. ‘타올랐다’는
말은 어떤 심적인 충동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일반적 마음의 변화라기보다는 밖
으로부터의 어떤 이끌림을 감지하고 감격적 기쁨과 황홀감을 체험하는 초월적 경험이
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주목할 것은 ‘성경을 해석해 줄 때’라는 점이다. 예수를 만나
는 중요한 요인(motive)은 다름이 아닌 바로 주의 말씀을 탐구하는 행위었다. 한편 이
와같은 체험은 두 사람 중에 어느 한 사람만 한 것이 아니라 두 사람 모두 했음을 ‘우
리 속에’라는 말로 확인된다.
=====24:33
곧 그 시로 일어나 예수살렘에 돌아가 – 두사람이 부활한 예수를 만났다는 놀라운
체험을 한 순간 뜨겁게 타오르는 마음이 그들을 그냥 버려두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를
만났다는 사실을 깨닫는 바로 그시각에 이미 날이 어두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박
차고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달려갔다. 이 같은 행동의 즉각성은 회개하는 자세의 모범
이 되기도 하고 성령받은 자의 모습이기도 하다. 참된 회개는 깨닫는 즉시 돌이켜 행
동으로 옮기는 것이다. 이에서 전격적으로 변혁(變革)되는 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으
니 그들은 발길을 달려 예루살렘에 이르게 된다.
열 한 사도와 및 그와 함께한 자들 – 예루살렘에 글로바 일행이 도착하였을 때 열
한명의 사도와 다른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있다. 이 사람들은 9절에 언급되었던
사람들과 동일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예수에 대한 이 놀라운 사건에 대해 열띤
토론을 하였을 것으로 족히 짐작된다. 여인들과 제자들 중 베드로가 예수의 빈 무덤을
목격하고 돌아왔을 때 그들은 의무심에 차 잔뜩 흥분과 조심 속에서 어찌 할 바를 몰
랐었다. 그러나 엠마오 도상에서 예수를 만났다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을 때
베드로의 증언(34절)이 더욱 확실한 것임을 은연중 믿게 되었고 이제까지의 그들의 의
심과 의혹(疑或)을 완전히 떨어버리지는 못한 채 서로 이야기를 주고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24:34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 글로바 일행이 예루살렘에 도착하
여 제자들로부터 들은 소식은 예수가 부활하였다는 사실이엇다. 11절에서 보았듯이 사
도들은 빈 무덤을 부활 사건으로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예수의 부활을
인정하게 되었고 그렇게 믿게 된 결정적 계기는 시몬이 부활한 예수를 경험하였다는
증언 때문임을 시사한다. 여기서 말하는 시몬은 베드로를 말하는데 언제 베드로가 부
활한 예수를 만났는지에 대해서는 복음서 전체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다만 고전 15:5
에서 바울이 증언할 뿐이다. 아무튼 그들은 최초의 빈 무덤을 목격한 여인들의 증언을
들었을 때엔 쉽게 믿으려하지 않았으나 열 두 사도 중 하나요 평소 예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가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였을 때에는 달랐다. 베드로의 증언은 그들 무리 가운
데 새로운 기대와 희망을 갖게 하였고 한 곳에 모일 수 있게 하였다(33절). 한편 이러
한 본절의 내용은 37,41절에 나오는 부활하신 예수의 모습을 보고 두려워하여 이상히
여기는 제자들의 양상과 부합되지 않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당시 제자들의 심리
상태를 염두에 두면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즉 그들 앞에서 처참히 죽으신 예수가 다
시 살아나셔서 그들의 눈으로 볼 수 있도록 실제로 나타셨을 때 그들은 애기치 않은
주(主)의 출현에 간담(肝膽)이 서늘해지거나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예수의 부활은 여태
껏 점진적으로 그리고 단계적으로 제자들에게 확증되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자연
적 사건 앞에 유한한 존재인 인간은 경이와 두려움을 갖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
서 37,41절의 내용은 부활하신 예수를 묘사하고 있는 것이며 본절 내용과는 다른 경험
을 인간 내면에 일어나는 심리적 현상에 투영(projection)시켜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본절과 상치되지 않는다.
=====24:35
두 사람도…말하더라 – 베드로가 경험한 사실을 듣고 글로바 일행도 자신들이 경
험한 사실을 말하면서 길에서 예수와 만나고 마음이 뜨거워졌던 사실과 떡을 떼며 확
인했던 예수를 ‘상세하게 설명하였다'(told what had happened, NIV) 이렇게 함으로써
서로 다른 곳에서의 경험이 한 자리에 모여 서로를 확인해 주고 있다. 누가는 다른 복
음서 기자들과 달리 부활한 예수에 대한 체첨을 확신시키기 위해 단계적으로 그리고
치밀하게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다.
=====24:36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 가운데 서서 – 부활한 예수의 출현이 세번째 언
급된다. 이 이야기는 부활 예수에 대한 체험의 체험적이고 종합적인 묘사라고 할 수
있다. 구성상으로 베드로와 글로바 일행이 각각 경험한 부활 예수의 체험은 이 세 사
람이 한 자리에 있고 아직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까지 증인으로 선 가운데서 종합되고
확인되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의 부활을 최종적으로 선언하려는 누가의 치밀한 의
도를 다시 확인할 수 있다. 글로바가 경험한 부활한 예수가 시.공(時空)을 초월한 영
적 만남을 제시한 것이라면, 여기서의 부활한 예수는 육체적 부활을 증명하는데 관심
을 집중하고있다. 그러나 요 20:19에 따르면 문을 닫아 두었는데도 들어왔다고 표현함
으로써 영육(靈肉)에 구애를 받지 않는 신비한 모습을 말하고 있으며 여기서도 영과
육을 종합하여 영과 육의 부활을 균형있게 언급하려고 하는 듯하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 이 인사는 요 20:19,20에서 두 번 거듭되고 있는데
부활한 예수가 제자들 앞에 나타났을 때 하는 인사의 형태이다. 그런데 이 인사는 단
순한 인사말이라기 보다는 부활한 예수의 시대에 평화(平和)가 임하게 될 것이라는 축
복의 말로 이해할 수 있다. 사실 예수가 태어났을 때 하늘에서 온 천사들이 땅 위의
평화를 노래하였듯이(2:14) 부활한 예수가 머무는 곳 그리고 예수를 만나는 모두에게
‘평화'( , 에이레네)가 있으라는 축복의 말씀이다.
=====24:37
저희가 놀라고 무서워하여 – 그 자리에 모여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 놀라고 공포에
싸여 무서워 했지만 베드로나 글로바 등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을는지도 모른다. 그
러나 본절의 상황으로 미루어 보아 모두 놀랐으리라는 생각이 적절하다 하겠다. 왜냐
하면 그들이 이 같은 놀라운 체험에 익숙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두번째 본 사람이라
할지라도 갑자기 예수가 나타났을 때 놀라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이라 할 수 있다.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 그들이 그렇게 놀라고 무서워한 것은 갑자기 나타난 예수가
‘영'(* , 프뉴마)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예수를 육체가
없는 유령(幽靈)과 같은 존재로 오해하였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어떤 사본에서는 본절
의 ‘영’ 대신 ‘유령'(* , 판타스마)이라고 언급하기도 한다.
=====24:38
어찌하여…의심이 일어나느냐 – 예수의 출현에 대해 놀라고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
는 ‘왜 의심하고 무서워 하느냐’는 반문 형식으로 책망하신다. 이 말은 제자들과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사람들이 예수의 모습을 부활한 예수로 이해하기 보다는 오히려
이해할 수 없는 괴이한 일로 생각하며 부활한 사실을 아직 확신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
임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그만큼 그들은 예수가 말했고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24:39
내 손과 발을 보고 – 부활한 예수를 의심하고 유령으로 오해하는 제자들에게(37,38
절) 예수는 자신이 참으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던 그 예수이며 유령이 아니라 참으로
육신을 가진 완전한 사람임을 확인시키고자 증거를 제시하신다. 증거로 제시된 것은
자신의 손과 발인데 왜 그것이 증거가 되는지 누가는 밝히지 않는다. 그러나 요
20:25-27에 못박았던 자국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나를 만져 보라 – 두번쩨로 제자들에게 확인시키는 것은 육신의 실재(實在)이다.
이것은 자신이 유령이 아님을 나타내려는 의도적 말씀이니 유령은 살과 뼈가 없음을
상기시키고 있다. 따라서 자신의 살과 몸을 직접 확인시킴으로써 유령이 아님을 선언
하신다. 이 같은 부활 증명은 영적인 부활이냐 아니면 육적인 부활이냐 하는 문제를
연상시킨다(고전 15:31-52). 그러나 여기서의 강조점은 영적 부활이냐 육적 부활이냐
하는데 있기 보다는 부활은 완전히 새롭고 전혀 다른 차원의 존재로 나타난다는데 있
다고 보아야 한다. 글로바 일행이 경험바 처럼 부활은 영과 육의 완전히 새로운 차원
의 존재가 되는 것이지 영이냐 아니면 육이냐 하는 일차원적인 선택적 사고로 부활을
이해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육체를 확인 시키는 가장 큰 이유는 육적인
부활을 강조하는데 있지 않고 부활이 유령이나 환각 현상(hallucination)이 아님을 확
인 시키고자 하는데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24:40
손과 발을 보이시나 – 예수가 증거로 제안했던 것은 손과 발 그리고 자신의 육신을
직접 만져 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손과 발만을 보여준 것으로 당시 상황
묘사를 끝내고 있으며 보기만 했는지 직접 만져 확인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
다. 그러나 요 20:20에서는 손과 옆구리만 언급하고 있으며 요 20:24-27에서는 도마의
요구에 의해 예수께서 직접 만져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도마 역시 적접 만져 확인
하였다는 언급이 없다는 점이다. 본문은 사본에 따라 차이가 있는데 어떤 사본에서는
본문이 삭제되고 없고 또 어떤 사본에서는 괄호에 묶어 언급하고 있다(I. H.
Marshall). 아마도 요한복음과의 내용이 일치되지 않아 삭제(削除)하였을 수도 있고
(Jeremias) 앞절(39절)과 중복되는 내용이라고 생각되어 삭제한 것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K. Aland). 그러나 요한복음과의 일치성이 문제되지않고 앞절과 중복된다고 해서
문제가 될 건 없다. 중요한 것은 보여주고 확인시켰다는 점을 강조하는데 있다. 이는
요한복음과 일치하고 있는데 누가는 목격자들의 충격과 의심이 큰만큼 부활한 예수가
유령이나 환상이 아님을 단계적으로 확인시켜 나가고 있다.
=====24:41
너무 기쁘므로 오히려 믿지 못하고 – 손과 발을 확인한 제자들의 반응은 처음으로
긍정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르면서도 그 기쁨 때문에 믿어
지지 않았다. 이 같은 표현은 제자들이 예수의 부활을 확인하면서 느끼는 감격과 놀라
움(amazement)을 강조하는 것이다. 즉 의심에 강조점이 있지 않고 놀라와하며 기이히
여기는 제자들의 기쁨에 강조점이 있다. 이제 제자들은 의심과 두려움의 고개를 넘어
서 기쁨과 놀라움의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이 같은 누가의 묘사는 매우 극적이고
치밀한 문학적 능력으로 평가될 수 있다.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 부활 사실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가 극적으로 제시되
고 있다. 제자들의 기쁨이 터져 나올 때 식사를 제안함으로써 제자들의 확신을 움직일
수 없는 믿음으로 굳히려 하고 있다.
=====24:42
구운 생선 한 토막 – 제자들이 제공한 먹을 것은 구운 생선(broiled fish) 한 마리
였는데 어떤 사본에서는 꿀찍은 떡이라는 구절을 첨가 시키고 있다(Metzger). 아마도
필사자들이 요 21:9에 제시된 음식인 물고기와 떡을 염두에 두고 삽입한 것으로 보인
다(M. Alford). 또한 이 같은 물고기를 언급한 것 때문에 장소를 갈릴리로 볼 수 있는
데(Creed, Klostermann 등) 내륙 지방 예루살렘에도 소금절인 생선을 구할 수 있다는
점에서(Jeremias) 예루살렘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24:43
잡수시더라 – 예수가 생선을 제자들 앞에서 먹어 보임으로써 예수 자신이 유령이나
환상이 아님을 최종적으로 확인시키고 있다. 부활한 예수가 식사를 했다는 사실(30절)
을 두번 언급하면서 누가는 예수가 유령이 아니라 분명 죽었던 나사렛 예수가 되살아
났음을 강조하고 있다. 부활한 예수가 식사를 했다는 점에서 누가의 독특한 강조라고
볼 수 있다.
=====24:44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 예수의 부활에 대한 제자들의 최종 확인 후
예수의 마지막 가르침이 언급되면서 누가복음 대단원의 마지막 국면으로 접어든다. 예
수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말했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한 예고(9:31;
18:31-33; 22:37)를 상기키시면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이 예언의 성취임을 언급하고 있
다.이 같은 예수의 부활 사건을 거듭 설명한 것은 예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구원사적(救援史的) 맥락에서 부각시키고자 한 의도에서였다. 누가는 본문 서두에 ‘이
것들은 내말들이다'(* , 후토이 호이 로고이 무)
라고 말한 후 ‘호티'(* , ‘왜냐하면’)로 시작되는 관계절을 통해 성경의 에언을
상기시키고 있는데 지시대명사 ‘이것'(* , 후토이)이 무엇을 뜻하는지 분명
하지 않다. 그러나 문맥상 예수의 체포에 서부터 부활까지의 사건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예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은 복음의 세계화와 전인류의 구원을 위한
필연적 결과요 하나님의 뜻임을 확언하는 것이다(27절 주석 참조).
=====24:45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 이 구절 역시 27절에 언급된 내용과 비
슷한 내용이며 38절에 언급된 예수의 책망과 대응된다. 즉 두려워하고 의심하던 마음
이 ‘열리다'(* , 다아노이고) 곧 전적인 신뢰와 깨달음으로 전환되었
다는 극적인 대비를 보여 예수의 부활을 강조하고 있다. 이 같은 구조는 글로바 일행
과의 만남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바, 25절의 ‘마음에 더디 믿는’이라는 표현과 31절의
‘저희 눈이 밝아져’라는 표현이 서로 대비되어 부활 확인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이
같은 장면은 그동안 있어 왔던 예수와 제자들 사이의 벽이 무너지고 한마음이 되는 것
을 의미한다. 즉 예수의 교훈과 행동에 대해 늘 깨닫지 못하고 무지했던(11,25,37,38
절; 8:9,25; 18:34; 22:24) 제자들이 비로소 성경의 예언이 뜻하는 바와 예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이해하게 되는 극적인 순간을 맞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누가는
성경을 깨닫게 되었다는 말을 함으로써 성경에 기록되고 에언된 메시야에 대한 메시지
가 예수의 모든 삶을 통해 완전히 성취(成就)되었음을 말하고자 한다.
=====24:46
또 이르시되 – 자신에관한 사건에 대해 설명하면서 두번째는 구체적 성경의 근거를
들고 있다. 때문에 누가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
후토스 게그라프타이)라는 인용 도입 문구를 사용하고 있다. 여기서 인용된 것은 자신
이 직접 예언했던 수난과 부활에 대한 예고이다(9:22; 18:31-33).
=====24:47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게하는 회개 – 여기서 언급된 내용은 렘 31:34에서 인용
된 것으로 보이는데 온 세계에 전파되어야 할 것은 죄사함을 위한 회개임을 말하고 있
다. 누가가 인식하고 있는 기독교의 핵심은 ‘회개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그의 이름'(* , 오노마티 아우누)이 누구를 뜻하는 것인
지 모호하지만 문맥으로 보아 앞절에서 언급된 그리스도, 즉 예수의 이름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스도를 통한 ‘회개'(* , 메타노이아) 운동은 이미
세례 요한에서부터 예견되었고(막 1:15) 그의 모든 사역, 심지어 십자가 수난과 부활
사건에 이르기까지 전생애를 통해 계속된 것이었다. 이 죄사함을 위한 회개 운동은 죄
의식을 높이고 참회하도록 하자는데 강조점이 있기 보다는 죄의식으로부터 해당된 존
재로서 그리고 전혀 새로운 방향을 향해 근본적(根本的)으로 변혁된 새로운 인간으로
서 새롭게 변화된 삶을 살아가도록 추구하는 것이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 본문은 사 2:3; 미 4:1,2에서 인용된
것으로 보이는데 내용상 세 복음서가 공통되게 언급하고 있다. 특히 세 복음서의 결론
부에 해당되는 이 말은 죄사함의 회개운동 곧 복음이 예루살렘에서부터 전세계를 향해
확장 선포되어야 함을 선언하고 있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예루살렘으로부터’보다
‘모든 족속'(* , 판타 타에드네)에 있는데 유대인들의 배타
적인 선민 의식을 깨치고 보편적 구원을 선언하고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이같은
만인 구원 사상은 공관 복음서 모두 공통되게 선언하고 있으나 특히 누가는 보다 더
강조하고 있다(행 1:8).
=====24: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 – 예수의 삶, 즉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목격하였고
그 의미를 성경을 근거로 하여 깨닫고 눈이 열리고(31절) 마음이 열리게 된(45절) 제
자들에게 예수는 47절에서 언급한 지상 최대의 명령(the Great Commission)을 증언하
는 증인이 될 것을 선포하고 있다. 이로써 예수의 모든 활동이 완결부(完結部)에 이르
고 있다. 예수의 일은 지금부터 증인에 의해 새롭게 시작되고 있으며 이 새로운 시작
은 사도행전으로 이어진다.
=====24: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 – 예수의 마지막 약속이 언급되고 있는데
‘보라'(* , 이두)라는 단어로 강조되고 있다. 여기서 ‘내 아버지의 약속한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언급되고 있지 않다. ‘약속'(* , 에팡겔
리아)은 성령과 관계되어 사용되는 경우가 많은데(행 1:4; 2:33; 갈 3:14) 성령에 대
한 언급이 없는 점이 이해를 어렵게 하고 있다. 그러나 행 1:4,5; 2:1-4을 참고한다면
‘성령’을 약속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너희는 위로 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 복음의 증인들에게 약속된 것은 ‘위로부
터'(* , 여스 휘푸스)오는 ‘능력'(* , 뒤나민)이다. 앞
에서 약속한 것이 ‘성령’임을 전제할 때 이는 성령의 성격에 대해서 암시한 것이다.
즉 하늘로부터 오는 능력이 성령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같은 언급은 증인의 활동이
하늘로부터 오는 능력에 힘입어 되어야 할 것임을 시사한다. 이와 같은 능력을 얻기위
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명령하는데 이 사실은 행 2:1-4에서 나타나고 있다. 예
루살렘에서 기다리라고 말한 이유는 47절에서 언급했듯이 선교 활동이 예루살렘에서부
터 시작하여 이방 세계로 확장되어 나감을(행 1:8) 이루게 하기 위함이었다.
=====24:50
저희를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 누가복음의 에필로그(epilogue)에 해당된다
고 할 수 있는 예수의 작별 장면이 예수가 제자들을 ‘이끌고 나감'(* , 여
사고)으로 시작되고 있다. ‘여사고’는 출애굽 사건을 묘사할 때 언급한 70인역의 용어
라는 점에서 볼 때 누가는 예수가 제자들을 이끌어 내는 모습을 통해 또 다른 출애굽
을 상징적(象徵的)으로 나타내려 했다고 볼 수 있다(Lohfink). 이들은 예루살렘 성을
벗어나 감람산 동쪽 기슭에 위치한 ‘베다니'(* )로 나갔는데 이 장소
는(19:29 주석 참조) 승천의 장소로서는 처음 언급되고 있다. 행 1:12에 따르면 승천
의 장소가 감람산이라고 언급되는데 장소의 모순은 발견되지 않는다.
손을 들어 저희에게 축복하시더니 – 제자들을 위한 마지막 기도를 하는 이 모습은
예수를 사제적인 모습으로 기리려고하는 누가의 의도로 볼 수 있기도 하나(Lohfink)
누가는 사제의 모습으로 예수를 묘사하려려 했던 적이 없었다는 점에서 타당하지 않다
(I. H. Marshall). 이 같은 축복의 장면은 증인들의 활동이 인간적인 사역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오는 능력으로 되는 것이며 그 같은 사명을 성공적으로 이루어주기를 바라
는 간절한 요청을 암시하는 것이다.
=====24:51
저희를 떠나(하늘로 올리우)시니 – 누가는 예수가 축복을 할 때 그들로부터 떠났음
을 하늘로 ‘올리워갔다'(* , 아네페레토)는 승천의 묘사로 그리고
있다. 개역 성경은 이 문구를 괄호로 묶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이 구절을 언급하지 않는
사본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 16:18,19과 행 1:2,9에서 언급되는 점으로 보아
삭제하는 것은 타당하지 못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삭제하지 않았을 때 문제가 되
는 것은 부활 후 사십 일 간 지상에서 머물렀다는 행 1:3의 언급과 모순되다는 점이
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승천일이 부활한 날 밤이거나 그 이튿날인 것처럼 묘사되고 있
기 때문이다. 따라서 승천에 관한 기사는 같은 저자의 기록인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사
이에 불일치(不一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막 16;19에서는 누가복음과 일치되고 있
다. 모든 점을 염두에 둘 때 50-53절의 기록은 앞의 이야기와 시간적 간격을 두고 이
해하는 수밖에 없다. 어쨌든 승천에 관한 기사는 분명하게 일치되지만 시간에 대해서
는 분명하게 확인할 수 없는 문제가 남아 있다.
=====24:52
저희가 (그에게 경배하고) – 승천하는 예수가 ‘예배'(* , 프로
수퀴네오)의 대상이 되고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이 같은 묘사는 이제부터 예수의 신
성(神性)이 인정되고 예배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제는 예수가 신적인 존재로
서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거니와 예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은 하나님의 가장 위
대한 이적적 권능으로 인식되고 제자들이 존재하는 근본 의의가 되고 있다. 여기서도
역시 ‘그에게 경배하고’가 괄호로 묶여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누가는 이제
부터의 복음의 내용을 곳곳에서 증언하고 상고하게 될 것임을 이 구절을 통해 언급하
고 있다(행 2:22-24).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 실망과 좌절 그리고 두려움에 빠져 있던 제자들
(17절; 요 20:19)이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있다. 예수의 부
활과 승천 사실이 그들에게 새 힘과 용기를 제공한 것이다. 이 같은 묘사는 53절과 함
께 사도행전에서 나오는 사도들의 활동을 암시적으로 예시해 주고 있다.
=====24:53
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 매우 진지한 신학적 의미를 담고 있는 누가
복음의 마지막 구절은 두 가지 의미를 시사해 주고 있다. 첫째는, 성전 안에서 예수의
명령대로 위로부터 오는 능력, 즉 성령의 충만함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점이다. 누
가에게서 성전이 강조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성전에서의 가르침과
(19:47; 21:37,38) 관련 지어볼 때 기독교의 발생이 구약 전통(傳統)과 성전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니라 구약의 전통에 기초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 둘째는, 그들이 하나님
을 찬송하였다는 점이다. ‘찬송하니라’ 대신에 ‘축복하다'(* ,
율로군테스)는 말로 언급되었든 또는 ‘찬양하고 축복하다'(*
, 아이눈테스 카이 율로군테스)로 되어 있든 각 사본마다의
차이점을 하나로 묶어 주는 것은 예수에 관한 사건 즉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 사건
을 모두 하나님과 관계된 사건으로 확인하였다는 점이다. 그들은 예수의 모든 활동과
삶 전체를 하나님과 관련시켜 이해하게 된 것이다. 누가는 또한 자신의 복음서를 마치
면서 자신의 책에 기록된 예수에 관한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섭리와 능력에 근거된 것임
을 간접적으로 밝히고 있다.
==========================누가복음 주석 끝============================
헬라어 누가복음 24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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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 데 미아 톤 삽바톤 오르드루 바데오스 에피 토 므네마 엘돈 페루사이 하 헤토이마산 아로마타
개역개정,1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새번역,1 이레의 첫날 이른 새벽에, 여자들은 준비한 향료를 가지고 무덤으로 갔다.
우리말성경,1 그 주의 첫날 이른 새벽에 여인들은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으로 갔습니다.
가톨릭성경,1 주간 첫날 새벽 일찍이 그 여자들은 준비한 향료를 가지고 무덤으로 갔다.
영어NIV,1 On the first day of the week, very early in the morning, the women took the spices they had prepared and went to the tomb.
영어NASB,1 But on the first day of the week, at early dawn, they came to the tomb bringing the spices which they had prepared.
영어MSG,1 At the crack of dawn on Sunday, the women came to the tomb carrying the burial spices they had prepared.
영어NRSV,1 But on the first day of the week, at early dawn, they came to the tomb, taking the spices that they had prepared.
헬라어신약Stephanos,1 τη δε μια των σαββατων ορθρου βαθεος ηλθον επι το μνημα φερουσαι α ητοιμασαν αρωματα και τινες συν αυταις
라틴어Vulgate,1 una autem sabbati valde diluculo venerunt ad monumentum portantes quae paraverant aromata
히브리어Modern,1 ובאחד בשבת לפני עלות השחר באו אל הקבר ותביאינה את הסמים אשר הכינו ועמהן עוד אחרות׃
성 경: [눅24:1-53]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빈 무덤]
예수의 부활(1-49절) 및 승천(50-53절)에 대한 기사로써 본서를 끝맺고 있는 결론 부분이다. 예수의 부활 사건은 각 복음서의 끝을 장식하고 잇는 최종 메시지이긴하지만 누가의 기록은 (1) 예수의 부활이 허구(虛構)가 이닌 실제 사건임을 강조하며 (2) 그 사건이 지니는 예언적, 구속사적 의미를 분명히 밝혀주고 있다는 특징을 지닌다. 또한 이와 더불어 누가는 보혜사(保惠師)에 대한 예수의 약속 및 승천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사도행전에 기록된 성령의 역사와 교회의 태동 및 성장 과정의 배경이 된다.
성 경: [눅24:1]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빈 무덤]
안식 후 첫날 새벽 – 사복음서가 공통적으로 언급하고있는 부활의 날은 안식일 즉 토요일 다음날인 일요일이었다. 여기서 ‘안식후 첫날'(on the fisrst day of the week, NIV)는 셈족어의(Semitic) 영향을 받은 것으로(Josephus) 당시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던 표현이었다(요 20:19; 행 20:7; 고전 16:2). 하지만 이날은 기독교 역사상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그것은 이후로 기독교인들이 안식일에 예배를 드리던 유대인의 전통을 깨고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 즉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행 20:7). 이것이 곧 오늘날 기독교회가 지키고 있는 주일의 기원이다. 한편 ‘첫날 새벽’은 토요일 저녁 여섯시경부터 일요일 저녁 여섯시경까지가 첫날이므로 일요일 새벽을 말하는 것이다. 본문에는 언급이 없으나 막 16:1,2에서는 여인들이 안식일을 지키고 토요일 밤에 향품을 사 두었다가 해돋는 대로 무덤으로 갔다고 언급되어 있는데 그렇다면 23:56에서 언급된 향품은 안식일 다음날의 첫시간대인 토요일 밤에 준비한 것이며 무덤으로 간 시각은 일요일 새벽 동틀 무렵인 것으로 보인다.
휴론 데 톤 리돈 아포케퀼리스메논 아포 투 므네메이우
개역개정,2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새번역,2 그들은 무덤 어귀를 막은 돌이 무덤에서 굴려져 나간 것을 보았다.
우리말성경,2 그런데 무덤 입구를 막은 돌덩이가 굴려져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가톨릭성경,2 그런데 그들이 보니 무덤에서 돌이 이미 굴려져 있었다.
영어NIV,2 They found the stone rolled away from the tomb,
영어NASB,2 And they found the stone rolled away from the tomb,
영어MSG,2 They found the entrance stone rolled back from the tomb,
영어NRSV,2 They found the stone rolled away from the tomb,
헬라어신약Stephanos,2 ευρον δε τον λιθον αποκεκυλισμενον απο του μνημειου
라틴어Vulgate,2 et invenerunt lapidem revolutum a monumento
히브리어Modern,2 וימצאו את האבן גלולה מן הקבר׃
성 경: [눅24:2]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빈 무덤]
돌이…옮기운 것을 보고 – 본서에서는 무덤을 돌로 막았다는 이야기가 언급된 적이 없었지만 마 27:66에서는 무덤을 돌로 막고 인봉까지 한 후 병사들을 지키게 하였다고 언급되었으며 막 15:46에서도 무덤을 돌로 막았다는 언급이있다. 그리고 마가에 따르면 여인들은 무덤을 향해 가면서 무덤을 막아놓은 돌을 어떻게 옮길 것인지에 대해 걱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누가는 그런 언급을 하지 않는다. 이는 누가 특유의 간결성과 사건 전개의 극적 효과를 상기시켜 준다. 즉 여인들이 무덤 가까이에서 무덤이 열린 것을 발견하였다는 사실을 직접 언급함으로서 그들이 받은 충격과 놀람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며, 아울러 예수 부활 사건이 쉽사리 믿어지지 않을 만큼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이적적 사건이었음을 복선적으로 암시해 준다(Grundmann). 한편 마태는 무덤의 돌문이 하늘로부터 온 천사들에 의해 지진과 함께 열려졌다고 언급하고 있는데(28:2) 이는 부활의 사건이 하나님의 개입에 의한 초자연적인 종말적 사건으로 묘사한 마태의 독특한 저작 의도를 반영해 준다.
에이셀두사이 데 우크 휴론 토 소마 투 퀴리우 예수
개역개정,3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새번역,3 그들이 안으로 들어가 보니, ㉠주 예수의 시신이 없었다.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주 예수의’가 없음
우리말성경,3 그래서 그들이 안으로 들어가 보니 주 예수의 시신이 없었습니다.
가톨릭성경,3 그래서 안으로 들어가 보니 주 예수님의 시신이 없었다.
영어NIV,3 but when they entered, they did not find the body of the Lord Jesus.
영어NASB,3 but when they entered, they did not find the body of the Lord Jesus.
영어MSG,3 so they walked in. But once inside, they couldn’t find the body of the Master Jesus.
영어NRSV,3 but when they went in, they did not find the body.
헬라어신약Stephanos,3 και εισελθουσαι ουχ ευρον το σωμα του κυριου ιησου
라틴어Vulgate,3 et ingressae non invenerunt corpus Domini Iesu
히브리어Modern,3 ותבאנה פנימה ולא מצאו את גוית האדון ישוע׃
성 경: [눅24:3]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빈 무덤]
주 예수의 시체가 뵈지 아니하더라 – 부활에 대한 두번째 암시를 주고 있으며 첫번째 암시보다 훨씬 더 충격적이고 신비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여기서 언급된 ‘주 예수의 시체'(*, 토 소마 투 퀴리우 예수)는 23:52의 ‘예수의 시체’라는 말과는 다른 의미를 내포한 표현같다. 즉 어떤 사본들에는 ‘주'(*, 퀴리우)라는 단어가 삭제되고 그냥 ‘예수의'(*, 투 예수)만 언급되고 있으나(Marshall), 다른 많은 사본들에는 ‘주 예수’라는 표현이 나타난다. 이같은 차이는 필사자들의 신학적 차이에 기인한 것으로 이해한다면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보인다. 즉 예수 앞에 ‘주’라는 말를 덧붙인 것은 부활한 예수에 대한 새로운 호칭이라는 의미에서 이해되는 것이다(행 1:21; 4:33; 8:16). 따라서 23:52의 ‘예수의 시체’는 부활 이전의 표현이고 여기서 언급된 ‘주 예수의 시체’는 부활한 에수를 의식하여 나타낸 함축성 있는 표현으로 봄이 타당하다.
카이 에게네토 엔 토 아포레이스다이 아우타스 페리 투투 카이 이두 안드레스 뒤오 에페스테산 아우타이스 엔 에스데티 아스트랖투세
개역개정,4 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새번역,4 그래서 그들이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서 당황하고 있는데, 눈부신 옷을 입은 두 남자가 갑자기 그들 앞에 나섰다.
우리말성경,4 그들이 이 일에 대해 어찌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있는데 빛나는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갑자기 그들 곁에 섰습니다.
가톨릭성경,4 여자들이 그 일로 당황하고 있는데, 눈부시게 차려입은 남자 둘이 그들에게 나타났다.
영어NIV,4 While they were wondering about this, suddenly two men in clothes that gleamed like lightning stood beside them.
영어NASB,4 While they were perplexed about this, behold, two men suddenly stood near them in dazzling clothing;
영어MSG,4 They were puzzled, wondering what to make of this. Then, out of nowhere it seemed, two men, light cascading over them, stood there.
영어NRSV,4 While they were perplexed about this, suddenly two men in dazzling clothes stood beside them.
헬라어신약Stephanos,4 και εγενετο εν τω διαπορεισθαι αυτας περι τουτου και ιδου δυο ανδρες επεστησαν αυταις εν εσθησεσιν αστραπτουσαις
라틴어Vulgate,4 et factum est dum mente consternatae essent de isto ecce duo viri steterunt secus illas in veste fulgenti
히브리어Modern,4 ויהי הנה נבכות על הדבר הזה והנה שני אנשים עמדו עליהן ולבושיהם מזהירים׃
성 경: [눅24:4]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빈 무덤]
이를 인하여 근심할 때 – 예수의 시체가 없어진 사실에 대한 여인들의 반응을 누가의 독특한 표현법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여인들이 근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은 예수의 부활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 같다. 그들이 근심한 것은 아마도 마 27:64에서 언급된 바처럼 예수의 시체를 누가 가져간 것이 아닌가 하는 이유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 – 에수의 시체가 안 보이는 고로 여인들이 심히 당황하고 있을 때 갑자기 그들 곁에 나타난 두사람의 정체에 대한 간접적 묘사인 이 구절은 천사를 암시한다. 막 16:5에서는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라고 언급되고 마 28:2,3에서는 ‘눈 같이 흰 옷을 입은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왔다’고 언급된다. ‘찬란한 옷’을 입었다는 말은 천사들과 하늘에 사는 존재를 표현하는 상징적 어법이다(행 10:30). 이 같은 표현은 변화산 사건에서도 묘사되고(9:29) 승천(昇天) 사건 때에도 묘사된다(헹 1:10). 그런데 ‘천사’를 누가는 ‘사람’으로, 마가는 ‘한 청년’으로 언급하였다. 이는 천사의 모습이 사람의 형상을 한 청년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고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누가는 마태와 마가와 달리 천사의 수효가 두 명임을 밝히고 있는데, 이는 변화산 사건과 예수의 승천에서 나타난 두 사람과 병행시키려는 누가의 독특한 의도로 보여진다(Stuhlmueller). 그러나 요 20:12에서도 두 명의 천사가 언급된다는 점에서 누가만의 독특성이라고 할 수는 없다(I. H. Marshall). 부활에 대한 중대한 증언을 두 사람으로 하는 것은 어떤 일에 보증을 설 때 두 사람으로 하는 것이 한 사람보다 더 확실성 있는 보증이 된다는 유대인의 전통적 사상(신 19:15)에서 비롯되는 것이기도 하다.
엠포본 데 게노메논 아우톤 카이 클리누손 타 프로소파 에이스 텐 겐 에이판 프로스 아우타스 티 제테이테 톤 존타 메타 톤 네크론
개역개정,5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새번역,5 ㉡여자들은 두려워서 얼굴을 아래로 숙이고 있는데, 그 남자들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어찌하여 너희들은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찾고 있느냐? / ㉡그, ‘그들이’
우리말성경,5 여인들은 너무 무서워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살아 계신 분을 왜 죽은 사람들 사이에서 찾고 있느냐?
가톨릭성경,5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으로 숙이자 두 남자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
영어NIV,5 In their fright the women bowed down with their faces to the ground, but the men said to them, “Why do you look for the living among the dead?
영어NASB,5 and as the women were terrified and bowed their faces to the ground, the men said to them, “Why do you seek the living One among the dead?
영어MSG,5 The women were awestruck and bowed down in worship. The men said, “Why are you looking for the Living One in a cemetery?
영어NRSV,5 The women were terrified and bowed their faces to the ground, but the men said to them, “Why do you look for the living among the dead? He is not here, but has risen.
헬라어신약Stephanos,5 εμφοβων δε γενομενων αυτων και κλινουσων το προσωπον εις την γην ειπον προς αυτας τι ζητειτε τον ζωντα μετα των νεκρων
라틴어Vulgate,5 cum timerent autem et declinarent vultum in terram dixerunt ad illas quid quaeritis viventem cum mortuis
히브리어Modern,5 ויפל פחד עליהן ותקדנה אפים ארצה ויאמרו אליהן מה תבקשנה את החי אצל המתים׃
성 경: [눅24:5]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부활하신 예수]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 갑작스런 천사의 출현에 나타나 여인들의 반응은 놀랍고 ‘두려운'(*, 엡포보스) 것이었다. 이 같은 두려움은 경이로운 사건에 대한 놀라움의 표시로서 초자연적 신비감을 강조한다(37절; 행 10:4; 4:24; 계 11;13). 그 놀라움의 표시로 여인들이 얼굴을 땅에 대었다고 묘사되는데 이는 누가만의 표현이다. 마 28:4에서는 ‘놀라서 죽은 자 같이 되었다’고 묘사함으로 초자연적 사건에 대한 종말적 두려움을 부각시킨다. 그러나 마가와 누가는 경이롭고 신비로운 사건에 대한 경이감(驚異感)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누가는 마태와 마가가 언급하는 ‘두려워’, ‘놀라지 말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 않는데 역시 두려움에 대한 강조를 약화시키는 반면 하나님의 초자연적 권능을 부각시키려는 누가의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 두 명의 천사가 동시에 말한 것으로 묘사된다. 따라서 마태와 마가가 ‘한 사람의 천사’혹은 ‘한 사람의 청년’을 언급한 것이 누가의 ‘두 사람’과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두 사람이 동시에 말한 것은 한 사람이 말한 것과 같기 때문이다. ‘어찌하여’로 번역된 헬라어 ‘티'(*)는 의문 대명사 ‘누구'(who)라는 뜻과 의문 부사 ‘왜'(why) 또는 ‘무엇'(what), ‘어느 것'(which) 등의 다양한 의미로 쓰여지며 여기서는 ‘왜’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즉 살아 있는 사람을 죽은 자의 무덤에서 찾고 있는 그 이유를 모르겠다는 의미와 함께 부활의 당연함과 그것이 예정된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 격언조의 이 구절은 상징적 의미를 시사해 준다. 즉 ‘죽은 자 가운데’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타 톤 네크론'(*)은 ‘죽은 자들 가운데’라는 뜻이다. 이는 예수의 무덤 안에 여러 ‘시체들’이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의 ‘죽음’과 ‘무덤’ 그 자체를 상징한다. 다시말해서 무덤은 유한한 존재인 인간에게 국한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이구절은 예수가 부활하여 살아 있다는 암시를 주고 있다. 누가는 2,3절에 이어 세번째로 예수의 부활을 단계적이면서 간접적으로 시시하고 있는 바, 그 자신 특유의 치밀한 구성력(構成力)을 보여준다.
우크 에스틴 호데 알라 에게르데 므네스데테 호스 엘랄레센 휘민 에피 온 엔 테 갈릴라이아
개역개정,6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새번역,6 ㉢그분은 여기에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다.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들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해 보아라.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6절 상반절이 없음
우리말성경,6 그분은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다!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너희와 함께 계실 때 하신 말씀을 기억해 보라.
가톨릭성경,6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되살아나셨다. 그분께서 갈릴래아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 기억해 보아라.
영어NIV,6 He is not here; he has risen! Remember how he told you, while he was still with you in Galilee:
영어NASB,6 “He is not here, but He has risen. Remember how He spoke to you while He was still in Galilee,
영어MSG,6 He is not here, but raised up. Remember how he told you when you were still back in Galilee
영어NRSV,6 Remember how he told you, while he was still in Galilee,
헬라어신약Stephanos,6 ουκ εστιν ωδε αλλ ηγερθη μνησθητε ως ελαλησεν υμιν ετι ων εν τη γαλιλαια
라틴어Vulgate,6 non est hic sed surrexit recordamini qualiter locutus est vobis cum adhuc in Galilaea esset
히브리어Modern,6 איננו פה כי קם זכרנה את אשר דבר אליכן בעוד היותו בגליל לאמר׃
성 경: [눅24:6]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부활하신 예수]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 세 번에 걸친 부활에 대한 예비적 언급이 있은 다음 비로소 두 천사의 말에 의해 부활이 직접적으로 선언된다. 그런데 누가는 먼저 무덤안에 예수가 없음을 전제하고 나서 부활을 먼저 이야기하고 무덤 안에 예수가 없음을 말하였다(16:6). 즉 마가는 부활을 강조하고 그 증거로 빈무덤을 제시하는 반면 누가는 예수 부활의 산증거로서 빈 무덤을 강조하였다. 누가의 이 같은 표현은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않은 데 대한 여인들의 반응에 초점을 맞추어 예수의 부활 사건을 묘사한데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즉 여인들이 발견한 바대로 시체가 없다는 점을 먼저 확인하고 그 이유를 설명하고자 한 것이다.
갈릴리에 계실 때…기억하라 – 무덤을 찾아온 여인들이 갈릴이 여인들이었음을 23:55에 이어 두번째 언급하고 있는데 10절에 따르면 여인들의 수는 최소한 5명 이상임을 알 수 있다. 누가는 예수의 부활이 믿을 수 없는 돌발 사태가 아니라 이미 예견된 일이었음을 평소 예수를 따랐던 여인들, 그리고 예수의 죽음을 확인했던 여인들(23:55)을 통해서 확증하고자 한다. 여기서 ‘기억하다'(*, 므네스데테)고 요청하는 내용은 9:22에서 예수 자신이 언급하셨던 바 삼일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예언이다. 마태와 마가는 빈 무덤만을 이야기할 뿐 다른 언급이 없는 데 비해 누가는 치밀한 설득을 통해 부활 사건의 역사성과 하나님의 계시(啓示)의 성취 측면을 확연히 드러낸다.
레곤 톤 휘온 투 안드로푸 호티 데이 파라도데나이 에이스 케이라스 안드로폰 하마르톨론 카이 스타우로데나이 카이 테 트리테 헤메라 아나스테나이
개역개정,7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새번역,7 ‘인자는 반드시 죄인의 손에 넘어가서, 십자가에 처형되고,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야 한다’고 하셨다.”
우리말성경,7 ‘인자가 마땅히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3일째 되는 날에 다시 살아나야 한다’고 하시지 않았느냐?”
가톨릭성경,7 사람의 아들은 죄인들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영어NIV,7 ‘The Son of Man must be delivered into the hands of sinful men, be crucified and on the third day be raised again.'”
영어NASB,7 saying that the Son of Man must be delivered into the hands of sinful men, and be crucified, and the third day rise again.”
영어MSG,7 that he had to be handed over to sinners, be killed on a cross, and in three days rise up?”
영어NRSV,7 that the Son of Man must be handed over to sinners, and be crucified, and on the third day rise again.”
헬라어신약Stephanos,7 λεγων οτι δει τον υιον του ανθρωπου παραδοθηναι εις χειρας ανθρωπων αμαρτωλων και σταυρωθηναι και τη τριτη ημερα αναστηναι
라틴어Vulgate,7 dicens quia oportet Filium hominis tradi in manus hominum peccatorum et crucifigi et die tertia resurgere
히브리어Modern,7 כי צריך בן האדם להמסר לידי אנשים חטאים ולהצלב וביום השלישי קום יקום׃
성 경: [눅24:7,8]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부활하신 예수]
저희가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 두 명의 천사가 예수께서 생전에 직접 하셨던 말을 여인들에게 상기시켜주자 여인들은 그제서야 깨달았다. 두 천사가 직접 언급한 내용은 9:22의 에언이엇다(9:22 주석 참조). 다른 복음서와 달리 예수의 예언을 천사들의 입을 통해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이라는 것을 다시 기억해 내는 누가의 표현 의도는 예수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이 총제적인 예언의 성취라는 맥락을 나타내고자 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누가의 이 같은 표현 의도는 예수의 부활 사건을 중심한 대적들의 묵살 음모라는 당시의 정황을 염두에 둘 때 보다 더 분명하게 이해된다. 즉 마 28:13에 따르면 예수의 대적들은 당시 예수의 부활이 그 추종자들에 의해 조작된 사건이라고 날조(捏造)하며 이를 소문으로 퍼뜨렸던 것이 분명하다. 누가는 대적들의 이 같은 음해적(陰害的) 행위와 소문에 대한 치밀한 반론으로서 이같은 상세한 묘사를 시도하였던 것이다. 어쨌든 누가는 예수의 부활이 조금도 의심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임과 그 사실이 이미 예언되었던 사실이었기 때문에 당연한 사건임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누가는 예수의 말씀을 두 천사가 직접 들려 주었을 때 여인들이 비로서 기억했다는 언급을 통해 9:22나 18:33에서와 같이 평소 예수의 말씀을 제자들도 이해하지 못하였고 제자들 이외의 사람들도 그 말씀을 들었으나 믿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카이 엠네스데산 톤 레마톤 아우투
개역개정,8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새번역,8 여자들은 예수의 말씀을 회상하였다.
우리말성경,8 여인들은 예수의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가톨릭성경,8 그러자 여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 내었다.
영어NIV,8 Then they remembered his words.
영어NASB,8 And they remembered His words,
영어MSG,8 Then they remembered Jesus’ words.
영어NRSV,8 Then they remembered his words,
헬라어신약Stephanos,8 και εμνησθησαν των ρηματων αυτου
라틴어Vulgate,8 et recordatae sunt verborum eius
히브리어Modern,8 ותזכרנה את דבריו׃
카이 휘포스트렢사사이 아포 투 므네메이우 아펭게일란 타우타 판타 토이스 헨데카 카이 파신 토이스 로이포이스
개역개정,8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새번역,8 여자들은 예수의 말씀을 회상하였다.
우리말성경,8 여인들은 예수의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가톨릭성경,8 그러자 여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 내었다.
영어NIV,8 Then they remembered his words.
영어NASB,8 And they remembered His words,
영어MSG,8 Then they remembered Jesus’ words.
영어NRSV,8 Then they remembered his words,
헬라어신약Stephanos,8 και εμνησθησαν των ρηματων αυτου
라틴어Vulgate,8 et recordatae sunt verborum eius
히브리어Modern,8 ותזכרנה את דבריו׃
성 경: [눅24:9]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부활하신 예수]
열 한 사도와 모든 다른 이에게 고하니 – 부활을 확인한 여인들은 성안으로 돌아가 열 한 사도와 성내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들이 보고 확인한 바를 전하였는데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갖고 전달한 것인지 아니면 객관적으로 확인된 사건 즉 시체가 없어진 사실과 천사를 만났던 사실만을 전했는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막16:8에서는 ‘아무에게 아무 말도 못했다’고 묘사하고 있는데 마가의 표현은 놀라움에 강조를 둔 것으로 보인다. 한편 마태(마 28:8)와 누가는 여인들이 이야기를 전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특히 누가는 마태와 마가가 공통되게 언급하고 있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지 않다. 즉 마태와 마가는 ‘예수께서 부활한 후 갈릴리로 갔다’는 사실을 천사가 일러 준 것으로 언급하고 있는데(마 28:7; 막 16:7) 누가는 이를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또한 마태는 여인들이 제자들에게 달려간 것으로만 언급하는 반면 누가는 제자들과 다른 모든 사람들로 확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마태에 따르면 예수를 팔았던 가룟 유다는 이미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된 직후 죄책감으로 목매여 자살하였다(마 27:3-5). 누가는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두고 여기서 열한 명의 제자만을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
에산 데 헤 막달레네 마리아 카이 요안나 카이 마리아 헤 야코부 카이 하이 로이파이 쉰 아우타이스 엘레곤 프로스 투스 아포스톨루스 타우타
개역개정,10 (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알리니라)
새번역,10 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인 마리아이다. 이 여자들과 함께 있던 다른 여자들도, 이 일을 사도들에게 말하였다.
우리말성경,10 (그들은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였습니다. 그들과 함께 있었던 다른 몇몇 여인들도 이 일을 사도들에게 말했습니다.)
가톨릭성경,10 그들은 마리아 막달레나, 요안나, 그리고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였다. 그들과 함께 있던 다른 여자들도 사도들에게 이 일을 이야기하였다.
영어NIV,10 It was Mary Magdalene, Joanna, Mary the mother of James, and the others with them who told this to the apostles.
영어NASB,10 Now they were Mary Magdalene and Joanna and Mary the mother of James; also the other women with them were telling these things to the apostles.
영어MSG,10 Mary Magdalene, Joanna, Mary the mother of James, and the other women with them kept telling these things to the apostles,
영어NRSV,10 Now it was Mary Magdalene, Joanna, Mary the mother of James, and the other women with them who told this to the apostles.
헬라어신약Stephanos,10 ησαν δε η μαγδαληνη μαρια και ιωαννα και μαρια ιακωβου και αι λοιπαι συν αυταις αι ελεγον προς τους αποστολους ταυτα
라틴어Vulgate,10 erat autem Maria Magdalene et Iohanna et Maria Iacobi et ceterae quae cum eis erant quae dicebant ad apostolos haec
히브리어Modern,10 ומרים המגדלית ויוחנה ומרים אם יעקב והאחרות אשר עמהן הנה היו המדברות אל השליחים את הדברים האלה׃
성 경: [눅24:10]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부활하신 예수]
이 여자들은 – 누가는 예수의 부활을 목격하고 확인한 갈리릴 여인들의 이름을 이제야 밝히고 있는데 마가는 무덤으로 가기 전에 이 여인들의 이름을 밝히고 있다(막 16:1). 그러나 이름에는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막달라 마리아 – 이 여인은 누가 이외에도 마태와(마 28:1) 마가(막 16:1) 그리고 요한(요 20:1)에 의해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증인으로서 공통적으로 언급되며 일곱 귀신이 들렸다가 예수에 의해서 나음을 받은 여인이다(8:2).
요안나 –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8:3)로서 예수와 제자들을 섬겼던 여인이며 마가복음에서는 언급되지 않는다.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 마리아 헤 야코부)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직역하면 ‘야고보의 마리아’가 된다. 이는 곧 아고보의 아내를 의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는 마가가 언급한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는 다른 인물이 된다. 그러나 막 15:40절과 47절을 본다면 ‘야고보의 마리아’를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로 해석하는 것이 무리는 아닐 것이다.
저희와 함께 한 다른 여자들 – 앞에서 언급한 사람들과 더불어 무덤에 따라갔던 갈릴리 여인들이며(23:55, 24:1) 이로써 부활의 증인이 이름을 밝힌 세 명의 여인 외에 더 있음을 말하고 있다. 마가가 언급한 세 명(16:1)보다 확대된 숫자이다.
카이 에파네산 에노피온 아우톤 호세이 레로스 타 레마타 타우타 카이 에피스툰 아우타이스
개역개정,11 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새번역,11 그러나 사도들에게는 이 말이 어처구니없는 말로 들렸으므로, 그들은 여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우리말성경,11 그러나 사도들은 여인들의 말이 어처구니없게 들렸으므로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가톨릭성경,11 사도들에게는 그 이야기가 헛소리처럼 여겨졌다. 그래서 사도들은 그 여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영어NIV,11 But they did not believe the women, because their words seemed to them like nonsense.
영어NASB,11 But these words appeared to them as nonsense, and they would not believe them.
영어MSG,11 but the apostles didn’t believe a word of it, thought they were making it all up.
영어NRSV,11 But these words seemed to them an idle tale, and they did not believe them.
헬라어신약Stephanos,11 και εφανησαν ενωπιον αυτων ωσει ληρος τα ρηματα αυτων και ηπιστουν αυταις
라틴어Vulgate,11 et visa sunt ante illos sicut deliramentum verba ista et non credebant illis
히브리어Modern,11 ויהיו דבריהן כדברי ריק בעיניהם ולא האמינו להן׃
성 경: [눅24:11]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부활하신 예수]
사도들은…믿지 아니하나 – 여인들로부터 부활 사건을 전해들은 사도들의 반응은 믿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이 나타낼 수 있는 것처럼 의심과 불신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즉 그들은 여인들의 증언을 얼토당토 않는 것으로 여겼다. 즉 너무 뜻밖의 일이었기 때문에 믿어지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제자들의 반응은 이제까지 보여왔던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반응과도 동일한 것이었다. 즉 평소에 가르쳤던 예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처럼(9:45; 18:34) 정작 예수의 부활이 그들의 눈앞에서 실현되었어도 이를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제자들 역시 여인들처럼 예수의 부활 예언을 기억하고 있지 못했다(6절 주석 참조).
호 데 페트로스 아나스타스 에드라멘 에피 토 므네메이온 카이 파라큎사스 블레페이 타 오도니아 모나 카이 아펠덴 프로스 헤아우톤 다우마존 토 게고노스
개역개정,12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 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새번역,12 ㉣그러나 베드로는 일어나서 무덤으로 달려가, 몸을 굽혀서 들여다보았다. 거기에는 시신을 감았던 삼베만 놓여 있었다. 그는 일어난 일을 이상히 여기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 ㉣다른 고대 사본에는 12절이 없음
우리말성경,12 하지만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몸을 굽혀 안을 들여다보니 고운 삼베 천만 놓여 있었습니다. 그는 이상하게 생각하며 돌아갔습니다.
가톨릭성경,12 그러나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으로 달려가서 몸을 굽혀 들여다보았다. 그곳에는 아마포만 놓여 있었다. 그는 일어난 일을 속으로 놀라워하며 돌아갔다.
영어NIV,12 Peter, however, got up and ran to the tomb. Bending over, he saw the strips of linen lying by themselves, and he went away, wondering to himself what had happened.
영어NASB,12 But Peter got up and ran to the tomb; stooping and looking in, he saw the linen wrappings only; and he went away to his home, marveling at what had happened.
영어MSG,12 But Peter jumped to his feet and ran to the tomb. He stooped to look in and saw a few grave clothes, that’s all. He walked away puzzled, shaking his head.
영어NRSV,12 But Peter got up and ran to the tomb; stooping and looking in, he saw the linen cloths by themselves; then he went home, amazed at what had happened.
헬라어신약Stephanos,12 ο δε πετρος αναστας εδραμεν επι το μνημειον και παρακυψας βλεπει τα οθονια κειμενα μονα και απηλθεν προς εαυτον θαυμαζων το γεγονος
라틴어Vulgate,12 Petrus autem surgens cucurrit ad monumentum et procumbens videt linteamina sola posita et abiit secum mirans quod factum fuerat
히브리어Modern,12 ופטרוס קם וירץ אל הקבר וישקף ולא ראה כי אם התכריכים מנחים שם וישב למקומו משתומם על הנהיה׃
성 경: [눅24:12]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부활하신 예수]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니 – 누가는 앞절에서 언급된 사도들의 불신에 대비되게 베드로는 무덤으로 달려갔다고 언급하고 있는데 베드로의 권위를 높이려 하는 의도가 엿보인다. 그러나 본문은 많은 사본들에서 언급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요 20:3-10에 근거한 삽입구로 이해되기도 했으나(Metzger) 많은 학자들은 이 구절을 본래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Lagrange, Jeremias, Gundmann, Ellis, danker, Morris 등). 그 된 일을 기이히 여기며 – 무덤에 도착한 베드로는 빈 무덤 속에 남아 있는 세마포만 발견하고 ‘이상히 여겨’ 집으로 돌아간 것으로 묘사되는데 여기서 ‘그 된 일’은 여인들과 베드로가 직접 확인한 빈 무덤을 뜻한다. 한편 요 20:1-10에 언급된 평행 본문은 누가의 것과 많은 차이가 있다. 요한에 의하면 베드로 혼자 무덤에 간 것이 아니라 예수의 사랑하시던 다른 제자 한 명이 함께 갔고 그가 베드로보다 빨리 무덤에 도착하였으며, 베드로가 본 것은 세마포 뿐만 아니라 머리 수건도 있었다. 그리고 나서 무덤에 먼저 와 있던 다른 제자도 무덤안으로 들어가 보고 믿었다고 언급된다. 즉 요한복음에서는 베드로 이외에 익명의 사랑받는 제자를 예수 부활 사건의 목격자로 언급함으로써 열 한 사도 외의 다른 제자들도 빈 무덤을 확인한 것으로 언급한다. 이렇듯 예수의 부활은 일부의 몇몇 여인들만 목격한 것이 아니요 평소 그분께 관심을 가졌던 제자라면 누가나 가보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객관적, 실체적 사건이었으니 이로써 하나님 계시의 확실성과 역사성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카이 이두 뒤오 엨스 아우톤 엔 아우테 테 헤메라 에산 포류오메노이 에이스 코멘 아페쿠산 스타디우스 헼세콘타 아포 예루살렘 헤 오노마 엠마우스
개역개정,13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새번역,13 마침 그 날에 그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한 ㉤삼십 리 떨어져 있는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 / ㉤그, ‘육십 스타디아(약 11킬로미터)’
우리말성경,13 바로 그날 그들 중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약 60스타디온 남짓 떨어져 있는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는 중이었습니다.
가톨릭성경,13 바로 그날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
영어NIV,13 Now that same day two of them were going to a village called Emmaus, about seven miles from Jerusalem.
영어NASB,13 And behold, two of them were going that very day to a village named Emmaus, which was about seven miles from Jerusalem.
영어MSG,13 That same day two of them were walking to the village Emmaus, about seven miles out of Jerusalem.
영어NRSV,13 Now on that same day two of them were going to a village called Emmaus, about seven miles from Jerusalem,
헬라어신약Stephanos,13 και ιδου δυο εξ αυτων ησαν πορευομενοι εν αυτη τη ημερα εις κωμην απεχουσαν σταδιους εξηκοντα απο ιερουσαλημ η ονομα εμμαους
라틴어Vulgate,13 et ecce duo ex illis ibant ipsa die in castellum quod erat in spatio stadiorum sexaginta ab Hierusalem nomine Emmaus
히브리어Modern,13 והנה שנים מהם היו הלכים בעצם היום הזה אל כפר הרחק מירושלים כששים ריס ושמו עמאוס׃
성 경: [눅24:13]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예수]
그 날에 – 헬라어 성경은 새로운 이야기를 전개시키면서 독자의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보라'(*, 이두)라는 단어로 이 무장을 시작하고 있으나 91:20,31,36; 13:35; 18:31 등) 개역 성경은 이 단어를 번역하지 않았다. 여기 언급된 ‘그 날’은 앞에서 언급한 사건이 일어난 ‘안식 후 첫날'(1절)을 가리키는데 관찰자의 시점이 옮겨갔다. 즉 앞에서 언급한 관찰자의 시점은 예수가 부활한 당일이었으나 현재의 관찰자는 먼 훗날 시점에서 부활 사건이 있었던 그날을 회고하고 있다.
저희 중 둘이(*, 두오 여스 아우톤) – 여기서의 인칭 대명사 ‘아우톤'(*)은 앞에서 언급된 어떤 이를 지시하는지 불분명하나 여인들과 열한 사도를 제외시킨다면 9절에 언급된 모든 ‘다른이’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즉 부활 현장을 목격한 여인들로부터 증언을 들었던 사림들이다.
엠마오라 하는 촌으로 가면서 – 이 장면 묘사는 조금 전까지 있었던 긴박한 사건 묘사와는 매우 대조적이다 . 즉 유월절 축제와 예수의 체포, 그리고 사형 집행과 빈 무덤의 발견으로 나타난 부활의 충격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긴박한 사건 전개와 달리그 사건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을 떠나 한적한 시골로 향하고 있는 두 사람에 초점을 맞춘 이 장면 묘사는 이야기의 새로운 국면을 제시한다. 요컨데 이사람들은 이야기의 내용으로 보아 예수를 열렬히 추종했던 사람들이었음에 틀림없고 유월절 축제에 참여하기위해 예수와함께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갔던 자들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들은 뜻하지 않은 예수의 죽음으로 인해 자신들의 기대가 좌절(挫折)된 경험을 안고 힘없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여기 언급된 ‘엠마오'(*)라는 지명은 정확하게 고증되지 못하고 있다. 분문에서는 예루살렘에서 이 십 오리 즉 10km 정도의 거리에 위치해 있음을 말하고 있는데 ‘이십 오 리’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타디우스 혀세콘타'(*)의 정확한 거리는 약 11.2km이다. 이 정도의 정보로 추정할 수 있는 두 개의 지명이 학자들 사이에 거론되고 있다. 첫째는, 욥바(Joppa)로 가는 방향으로 예루살렘에서 약 32km 지점에 위치한 ‘암와스'(Amwas)로 보는 경우인데(Lagrange, Metzger) 거리가 누가의 언급보다 배가 된다는 점이 문제가 된다. 그리고 이야기하면서 하루를 걸어갈 수 있는 거리로서는 적당하지 못하다는 점도 문제가 된다. 둘째, 유력한 장소는 예루살렘 서쪽 약 6km의 거리에 위치하였고 A.D.69-70년경 로마 황제 베스파시안의 침입(侵入)으로 인해 식민자가 되었던 ‘칼로니에'(Kaloniye)이다(Weiss, K.Lake, Harrey). 이 지명 역시 거리의 차이가 문제인데 누가가 언급한 거리의 절반밖에 안된다는 점이다. 그러나 혹자(Benoit 등)의 말처럼 누가가 왕복거리로 언급했다고 추정한다면 그리고 하루에 쉽게 갈 수 있는 거리라는 점에서 첫째 지명보다는 둘째 지명이 훨씬 설득력 있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카이 아우토이 호밀룬 프로스 알렐루스 페리 판톤 톤 쉼베베코톤 투톤
개역개정,14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새번역,14 그들은 일어난 이 모든 일을 서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우리말성경,14 그들은 일어난 이 모든 일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가톨릭성경,14 그들은 그동안 일어난 모든 일에 관하여 서로 이야기하였다.
영어NIV,14 They were talking with each other about everything that had happened.
영어NASB,14 And they were talking with each other about all these things which had taken place.
영어MSG,14 They were deep in conversation, going over all these things that had happened.
영어NRSV,14 and talking with each other about all these things that had happened.
헬라어신약Stephanos,14 και αυτοι ωμιλουν προς αλληλους περι παντων των συμβεβηκοτων τουτων
라틴어Vulgate,14 et ipsi loquebantur ad invicem de his omnibus quae acciderant
히브리어Modern,14 והם נדברו איש אל רעהו על כל הקרות האלה׃
성 경: [눅24:14]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예수]
이 모든 된 일을 – 두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던 예수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즉 예수의 성전 숙정을 비롯해 예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빈 무덤으로 대두된 부활 문제를 서로 이야기했을 것이다.
카이 에게네토 엔 토 호밀레인 아우투스 카이 쉬제테인 카이 아우토스 예수스 엥기사스 쉬네포류에토 아우토이스
개역개정,15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새번역,15 그들이 이야기하며 토론하고 있는데, 예수께서 가까이 가서,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우리말성경,15 그들이 이야기하며 토론하고 있는데 예수께서 가까이 가서 그들과 함께 걸어가셨습니다.
가톨릭성경,15 그렇게 이야기하고 토론하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영어NIV,15 As they talked and discussed these things with each other, Jesus himself came up and walked along with them;
영어NASB,15 While they were talking and discussing, Jesus Himself approached and began traveling with them.
영어MSG,15 In the middle of their talk and questions, Jesus came up and walked along with them.
영어NRSV,15 While they were talking and discussing, Jesus himself came near and went with them,
헬라어신약Stephanos,15 και εγενετο εν τω ομιλειν αυτους και συζητειν και αυτος ο ιησους εγγισας συνεπορευετο αυτοις
라틴어Vulgate,15 et factum est dum fabularentur et secum quaererent et ipse Iesus adpropinquans ibat cum illis
히브리어Modern,15 ויהי בדברם ובהתוכחם יחד ויגש ישוע אף הוא וילך אתם׃
성 경: [눅24:15]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예수]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 두 사람이 열심히 지난 사건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걸을 때 예수가 그들과 동행하기 시작함을 언급한다. 문맥으로 보아 예수께서 처음부터 동행한 것이 아니라 도중에 나타난 것으로 보이는데 주변에 다른 사람들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여기서 묘사된 예수는 분명히 육체를 가진 사람으로서 ‘함께 걸어가는'(*, 쉼포류오마이) 모습이었다.
호이 데 옾달모이 아우톤 에크라툰토 투 메 에피그노나이 아우톤
개역개정,16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새번역,16 그러나 그들은 눈이 가려져서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우리말성경,16 그러나 그들은 눈이 가려져서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가톨릭성경,16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영어NIV,16 but they were kept from recognizing him.
영어NASB,16 But their eyes were prevented from recognizing Him.
영어MSG,16 But they were not able to recognize who he was.
영어NRSV,16 but their eyes were kept from recognizing him.
헬라어신약Stephanos,16 οι δε οφθαλμοι αυτων εκρατουντο του μη επιγνωναι αυτον
라틴어Vulgate,16 oculi autem illorum tenebantur ne eum agnoscerent
히브리어Modern,16 ועיניהם נאחזו ולא יכירהו׃
성 경: [눅24:16]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예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 이야기의 내용으로 보아 예수 생전(生前)에 가까이 있어서 예수의 얼굴을 매우 잘 아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들 옆에 다가선 예수를 그들은 알아보지 못한 것은 예수가 죽었다는 사실만을 생각했지 정작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 그들 곁에 함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누가는 그들의 ‘눈이 가리워져 알아보지 못하였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들의 눈이 ‘가리워져'(*, 크라테오)라는 말은 고정되고 변동이 없음을 뜻하는데 두 사람의 의식과 시각이 변함없음을 가리킨다. 이 말이 시사하는 의미를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는데 첫째는, 두사람의 의식과 시각이다. 즉 부활한 예수를 만날 수 있는 것은 과거의 의식과 시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차원의 의식 변화 또는 영적 각성이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둘째는, 부활한 예수의 존재 문제인데 똑같은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났지만 일반적인 보통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즉 늘 함께 하였던 사람도 면전에서 알아볼 수 없는 전혀 새로운 존재로 나타나는 것이다. 길 가던 두 사람은 예수가 왔을 때 보통 사람으로서 같은 방향으로 가는 줄로만 알았을 것이다.
에이펜 데 프로스 아우투스 티네스 호이 로고이 후토이 후스 안티발레테 프로스 알렐루스 페리파툰테스 카이 에스타데산 스퀴드로포이
개역개정,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새번역,17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당신들이 걸으면서 서로 주고 받는 이 말들은 무슨 이야기입니까?”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걸음을 멈추었다.
우리말성경,17 그분께서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당신들이 걸어가면서 서로 주고받는 이 말이 무슨 이야기요?” 그들은 슬픈 기색으로 가던 길을 멈추어 섰습니다.
가톨릭성경,1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한 채 멈추어 섰다.
영어NIV,17 He asked them, “What are you discussing together as you walk along?” They stood still, their faces downcast.
영어NASB,17 And He said to them, “What are these words that you are exchanging with one another as you are walking?” And they stood still, looking sad.
영어MSG,17 He asked, “What’s this you’re discussing so intently as you walk along?” They just stood there, long-faced, like they had lost their best friend.
영어NRSV,17 And he said to them, “What are you discussing with each other while you walk along?” They stood still, looking sad.
헬라어신약Stephanos,17 ειπεν δε προς αυτους τινες οι λογοι ουτοι ους αντιβαλλετε προς αλληλους περιπατουντες και εστε σκυθρωποι
라틴어Vulgate,17 et ait ad illos qui sunt hii sermones quos confertis ad invicem ambulantes et estis tristes
히브리어Modern,17 ויאמר אליהם מה המה הדברים האלה אשר אתם נשאים ונתנים בהם יחדו בדרך ופניכם זעפים׃
성 경: [눅24:17]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예수]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 비로소 부활한 예수와 길가는 두 사람과의 대화가 예수의 질문으로 시작되고 있는데 예수의 질문 내용은 두사람의 대화 내용이 무엇이냐는 것이었고 그질문에 대한 대답에 앞서 누가는 두 사람의 얼굴 표정을 질문에 대한 반응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들은 슬픈 표정을 지으며 가던 길을 멈추어 섰다. 이 두 사람은 예수의 죽음에 따른 깊은 실의(失意)에 빠져 있었으며 부활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아포크리데이스 데 헤이스 오노마티 클레오파스 에이펜 프로스 아우톤 쉬 모노스 파로이케이스 예루살렘 카이 우크 에그노스 타 게노메나 엔 아우테 엔 타이스 헤메라이스 타우타이스
개역개정,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새번역,17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당신들이 걸으면서 서로 주고 받는 이 말들은 무슨 이야기입니까?”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걸음을 멈추었다.
우리말성경,17 그분께서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당신들이 걸어가면서 서로 주고받는 이 말이 무슨 이야기요?” 그들은 슬픈 기색으로 가던 길을 멈추어 섰습니다.
가톨릭성경,1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한 채 멈추어 섰다.
영어NIV,17 He asked them, “What are you discussing together as you walk along?” They stood still, their faces downcast.
영어NASB,17 And He said to them, “What are these words that you are exchanging with one another as you are walking?” And they stood still, looking sad.
영어MSG,17 He asked, “What’s this you’re discussing so intently as you walk along?” They just stood there, long-faced, like they had lost their best friend.
영어NRSV,17 And he said to them, “What are you discussing with each other while you walk along?” They stood still, looking sad.
헬라어신약Stephanos,17 ειπεν δε προς αυτους τινες οι λογοι ουτοι ους αντιβαλλετε προς αλληλους περιπατουντες και εστε σκυθρωποι
라틴어Vulgate,17 et ait ad illos qui sunt hii sermones quos confertis ad invicem ambulantes et estis tristes
히브리어Modern,17 ויאמר אליהם מה המה הדברים האלה אשר אתם נשאים ונתנים בהם יחדו בדרך ופניכם זעפים׃
성 경: [눅24:18]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예수]
글로바라 하는 자 –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의 이름이 ‘클레오파스'(*)로 밝혀지고 있으나 이 사람의 정체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첫째는, 요 19:25에 언급된 마리아의 남편이라는 견해(Alford, Gilmour 등)이며 둘째는, 교회사가 유세비우스(Eusebius)의 말에 근거하여 초대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 시몬의 아버지와 동일한 인물이자 예수의 삼촌이라는 설(Origen, Zahn 등)이 있는데 정확한 근거는 없다. 두 견해의 다른 가능성에서 제시된 인물이 동일인일 수도 있음을 배제할 수는 없다. 어쨌든 이름을 언급한 점으로 보아 당시 누가복음의 독자들은 이 사람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쉽게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름을 밝히지 않은 다른 한 사람은 글로바의 아내이거나 아들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특히 유월절 행사에 참석했었다는 점을 전제한다면 가족이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따라서 동행한 다른 한 사람은 글로바의 아내였을 것이라는 견해가 가장 신빙성있다 하겠다. 아들보다는 아내일 확율이 높은 것은 가족의 구성상 남편과 아내가 기본 구조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에 우거하면서 근일 거기서 된 일을 홀로 알지 못하느뇨 – 예수의 질문에 대한 글로바(Cleopas)의 대답은 핀잔 섞인 어투로 시작되고 있다. 글로바는 부활한 예수를 예루살렘에 머물렀던 자신들과 같은 나그네로 판단하였다. 그래서 같은 곳에 머물렀으면서도 그곳에서 일어난 사건을 왜 혼자만 모르느냐는 반문(反問)을 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예수에 관한 사건이 예루살렘 안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의 큰 사건이었음을 반증해 준다. 여기서 언급된 ‘근일'(近日)(*, 타이스 헤메라이스 타우타이스)은 여러 날 동안 예루살렘 안에 머물렀음을 의미하며 따라서 유월절 축제에 참여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카이 에이펜 아우토이스 포이아 호이 데 에이판 아우토 타 페리 예수 투 나자레누 호스 에게네토 아네르 프로페테스 뒤나토스 엔 에르고 카이 로고 에난티온 투 데우 카이 판토스 투 라우
개역개정,19 이르시되 무슨 일이냐 이르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새번역,19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무슨 일입니까?” 그들이 그에게 말하였다. “나사렛 예수에 관한 일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였습니다.
우리말성경,19 그분이 물으셨습니다. “무슨 일이오?”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나사렛 예수에 관한 일 말입니다. 그분은 하나님과 모든 백성들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능력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
가톨릭성경,19 예수님께서 “ 무슨 일이냐?” 하시자 그들이 그분께 말하였다. “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일입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
영어NIV,19 “What things?” he asked. “About Jesus of Nazareth,” they replied. “He was a prophet, powerful in word and deed before God and all the people.
영어NASB,19 And He said to them, “What things?” And they said to Him, “The things about Jesus the Nazarene, who was a prophet mighty in deed and word in the sight of God and all the people,
영어MSG,19 He said, “What has happened?” They said, “The things that happened to Jesus the Nazarene. He was a man of God, a prophet, dynamic in work and word, blessed by both God and all the people.
영어NRSV,19 He asked them, “What things?” They replied, “The things about Jesus of Nazareth, who was a prophet mighty in deed and word before God and all the people,
헬라어신약Stephanos,19 και ειπεν αυτοις ποια οι δε ειπον αυτω τα περι ιησου του ναζωραιου ος εγενετο ανηρ προφητης δυνατος εν εργω και λογω εναντιον του θεου και παντος του λαου
라틴어Vulgate,19 quibus ille dixit quae et dixerunt de Iesu Nazareno qui fuit vir propheta potens in opere et sermone coram Deo et omni populo
히브리어Modern,19 ויאמר אליהם ומה המה ויגידו אליו מעשה ישוע הנצרי אשר היה איש נביא גבור בפעל ובאמר לפני האלהים ולפני כל העם׃
성 경: [눅24:19]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예수]
무슨 일이뇨 – 글로바의 흥분된 반응에 대한 예수는 예루살렘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식으로 되묻는다. 이 같은 예수의 질문 의도는 예루살렘에 있었던 일련의 사건을 해명(解明)하기 위한 문제 제기였다. 즉 두 사람이 생각하고 있는 사건 이해에 대한 잘못된 것을 시정하고 바로 잡아주기 위해 그들의 견해를 직접 듣고자 했던 것이다.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 – 예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시작하면서 예수의 언행에 대한 자신들의 견해를 밝힌다. 그들은 예수를 ‘능력있는 선지자'(*, 프로페테스 뒤나토스)로 말한다. 이 같은 두 사람의 견해는 당시 일반 대중들의 의견과도 일치되는 보편적인 견해였다(9:19). 그들 두 사람에 의하면 예수가 선지자로 보여진 것은 그의 말과 행동에 권능(權能)이 있었기 때문이며 하나님과 민중으로부터 인정을 받은 사람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호포스 테 파레도칸 아우톤 호이 아르키에레이스 카이 호이 아르콘테스 헤몬 에이스 크리마 다나투 카이 에스타우로산 아우톤
개역개정,20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새번역,20 그런데 우리의 대제사장들과 지도자들이 그를 넘겨주어서, 사형선고를 받게 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우리말성경,20 그런데 우리 대제사장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넘겨주어 사형 선고를 받게 했고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가톨릭성경,20 그런데 우리의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넘겨, 사형 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였습니다.
영어NIV,20 The chief priests and our rulers handed him over to be sentenced to death, and they crucified him;
영어NASB,20 and how the chief priests and our rulers delivered Him to the sentence of death, and crucified Him.
영어MSG,20 Then our high priests and leaders betrayed him, got him sentenced to death, and crucified him.
영어NRSV,20 and how our chief priests and leaders handed him over to be condemned to death and crucified him.
헬라어신약Stephanos,20 οπως τε παρεδωκαν αυτον οι αρχιερεις και οι αρχοντες ημων εις κριμα θανατου και εσταυρωσαν αυτον
라틴어Vulgate,20 et quomodo eum tradiderunt summi sacerdotum et principes nostri in damnationem mortis et crucifixerunt eum
히브리어Modern,20 ואת אשר כהנינו הגדולים וזקנינו הסגירהו למשפט מות ויצלבהו׃
성 경: [눅24:20]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예수]
우리 대제사장과 관원들이…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 두번째로 그들은 예수의 처형에 관한 자신들의 견해를 밝힌다. 그들은 하나님과 민중들로부터 인정받았던 능력있는 권능의 선지자 예수를 죽이게 한 주범들이 자신들의 종교, 정치 지도자인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임을 천명한다. 여기에 빌라도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은 예수를 처형한 책임이 전적으로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있다는 누가의 의도와 일치된다. 특히 두 사람이 ‘우리들의’ 지도자임을 밝힌 사실은 예수 십자가 처형에 대한 유대인의 책임을 더욱 강조하는 느낌을 주고 있다.
헤메이스 데 엘피조멘 호티 아우토스 에스틴 호 멜론 뤼트루스다이 톤 이스라엘 알라 게 카이 쉰 파신 투토이스 트리텐 타우텐 헤메란 아게이 앞 후 타우타 에게네토
개역개정,21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
새번역,21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분이라는 것을 알고서, 그분에게 소망을 걸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런 일이 있은 지 벌써 사흘이 되었는데,
우리말성경,21 그러나 우리는 이스라엘을 구속해 주실 분이 바로 그분이라고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런 일이 있은 지 벌써 3일째 됐는데
가톨릭성경,21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 일이 일어난 지도 벌써 사흘째가 됩니다.
영어NIV,21 but we had hoped that he was the one who was going to redeem Israel. And what is more, it is the third day since all this took place.
영어NASB,21 “But we were hoping that it was He who was going to redeem Israel. Indeed, besides all this, it is the third day since these things happened.
영어MSG,21 And we had our hopes up that he was the One, the One about to deliver Israel. And it is now the third day since it happened.
영어NRSV,21 But we had hoped that he was the one to redeem Israel. Yes, and besides all this, it is now the third day since these things took place.
헬라어신약Stephanos,21 ημεις δε ηλπιζομεν οτι αυτος εστιν ο μελλων λυτρουσθαι τον ισραηλ αλλα γε συν πασιν τουτοις τριτην ταυτην ημεραν αγει σημερον αφ ου ταυτα εγενετο
라틴어Vulgate,21 nos autem sperabamus quia ipse esset redempturus Israhel et nunc super haec omnia tertia dies hodie quod haec facta sunt
히브리어Modern,21 ואנחנו חכינו כי הוא העתיד לגאל את ישראל ועתה בכל זאת היום יום שלישי מאז נעשו אלה׃
성 경: [눅24:21]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예수]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 – 그들이 갖고 있었던 세번째 견해는 에수에게 걸어던 기대였다. 그들은 예수가 악의 세력 아래서 신음하고 있는 민중들을 해방시키고 예수가 선언하였던 것처럼 하늘나라(The Kingdom of God)가 이루어지기를(막 1:150 기대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에 의해서 새롭게 변화된 다른 세계를 기대하며 예수를 추종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들이 17절에 언급된 바처럼 얼굴에 슬픈 빛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들이 걸었던 기대가 예수의 사형으로 무너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 일이 된 지가 사흘째요 – 그들의 실망은 예수의 죽음 뿐만이 아니라 예수가 죽은지 사흘이 지났는데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예수를 죽였던 그들이 여전히 세상의 주인이 되어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이러한 그들의 어투로 보아 그들은 어렴풋하게나마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던 듯하다. 즉 그들은 예수가 단순히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적어도 사흘째되면 무슨 사건이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었던 듯하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후 사흘 째까지 희망을 갖고 있었다는 셈이 된다. 그러나 그들은 더이상 자신들의 희망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하소연하고 있다.
알라 카이 귀나이케스 티네스 엨스 헤몬 엨세스테산 헤마스 게노메나이 오르드리나이 에피 토 므네메이온
개역개정,22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새번역,22 우리 가운데서 몇몇 여자가 우리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우리말성경,22 우리 중 몇몇 여인들이 우리를 놀라게 했습니다. 그들이 아침 일찍 무덤에 갔다가
가톨릭성경,22 그런데 우리 가운데 몇몇 여자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새벽에 무덤으로 갔다가,
영어NIV,22 In addition, some of our women amazed us. They went to the tomb early this morning
영어NASB,22 “But also some women among us amazed us. When they were at the tomb early in the morning,
영어MSG,22 But now some of our women have completely confused us. Early this morning they were at the tomb
영어NRSV,22 Moreover, some women of our group astounded us. They were at the tomb early this morning,
헬라어신약Stephanos,22 αλλα και γυναικες τινες εξ ημων εξεστησαν ημας γενομεναι ορθριαι επι το μνημειον
라틴어Vulgate,22 sed et mulieres quaedam ex nostris terruerunt nos quae ante lucem fuerunt ad monumentum
히브리어Modern,22 והנה גם נשים מקרבנו החרידנו אשר קדמו בבקר לבא לקבר׃
성 경: [눅24:22]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예수]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 이야기의 전개는 점점 감정을 고조시키면서 뜨거워지고 있다. 앞절에서 표현되었던 실망감에 덧붙여 경악스럽고 놀라운 사건을 언급하면서 10절에서 언급되었던 여인들을 소개한다. 여기서 그들은 ‘우리들 중'(*, 여스 헤몬)이라는 말로써 그 여인들과 자신들의 관계를 언급한다. 그렇다면 이 두 사람은 10절에서 언급된 여인들과 동향(同鄕), 즉 갈릴리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높고 친분이 있는 관계였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우리’라는 의미로 볼 때 열두 제자들 외에 예수를 따르던 무리들이 어느 정도 고정된 숫자를 유지하며 공동의식(共同意識)을 갖고 있었다고 추정된다.
카이 메 휴루사이 토 소마 아우투 엘돈 레구사이 카이 롶타시안 앙겔론 헤오라케나이 호이 레구신 아우톤 겐
개역개정,23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새번역,23 그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천사들의 환상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천사들이 예수가 살아 계신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말성경,23 그분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돌아와서 천사들의 환상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천사들이 예수께서 살아 계신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가톨릭성경,23 그분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천사들의 발현까지 보았는데 그분께서 살아 계시다고 천사들이 일러 주더랍니다.
영어NIV,23 but didn’t find his body. They came and told us that they had seen a vision of angels, who said he was alive.
영어NASB,23 and did not find His body, they came, saying that they had also seen a vision of angels who said that He was alive.
영어MSG,23 and couldn’t find his body. They came back with the story that they had seen a vision of angels who said he was alive.
영어NRSV,23 and when they did not find his body there, they came back and told us that they had indeed seen a vision of angels who said that he was alive.
헬라어신약Stephanos,23 και μη ευρουσαι το σωμα αυτου ηλθον λεγουσαι και οπτασιαν αγγελων εωρακεναι οι λεγουσιν αυτον ζην
라틴어Vulgate,23 et non invento corpore eius venerunt dicentes se etiam visionem angelorum vidisse qui dicunt eum vivere
히브리어Modern,23 ולא מצאו את גויתו ותבאנה ותאמרנה כי ראו גם מראה מלאכים האמרים כי הוא חי׃
성 경: [눅24:23]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예수]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 그들을 놀라게 하고 ‘경악케한’ 일은 1-8절에 언급된 내용이었다. 여기서 강조되는 내용은 예수의 시체가 없어졌다는 점이다. 그리고 빈 무덤 안에서 천사를 만나고 그 천사로부터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는 믿어지기 어려운 것이었기 때문에 어처구니 없는 사실로 받아들였을 것이다(11절 주석 참조).
카이 아펠돈 티네스 톤 쉰 헤민 에피 토 므네메이온 카이 휴론 후토스 카도스 카이 하이 귀나이케스 에이폰 아우톤 데 우크 에이돈
개역개정,24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새번역,24 그래서 우리와 함께 있던 몇 사람이 무덤으로 가서 보니, 그 여자들이 말한 대로였고, 그분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말성경,24 그래서 우리 동료 몇 사람이 무덤으로 가 보았더니 그 여인들이 말한 대로 그분을 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가톨릭성경,24 그래서 우리 동료 몇 사람이 무덤에 가서 보니 그 여자들이 말한 그대로였고, 그분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영어NIV,24 Then some of our companions went to the tomb and found it just as the women had said, but him they did not see.”
영어NASB,24 “Some of those who were with us went to the tomb and found it just exactly as the women also had said; but Him they did not see.”
영어MSG,24 Some of our friends went off to the tomb to check and found it empty just as the women said, but they didn’t see Jesus.”
영어NRSV,24 Some of those who were with us went to the tomb and found it just as the women had said; but they did not see him.”
헬라어신약Stephanos,24 και απηλθον τινες των συν ημιν επι το μνημειον και ευρον ουτως καθως και αι γυναικες ειπον αυτον δε ουκ ειδον
라틴어Vulgate,24 et abierunt quidam ex nostris ad monumentum et ita invenerunt sicut mulieres dixerunt ipsum vero non viderunt
히브리어Modern,24 וילכו אנשים משלנו אל הקבר וימצאו כאשר אמרו הנשים ואותו לא ראו׃
성 경: [눅24:24]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예수]
또 우리와 함께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 여인들에 이어 빈 무덤을 확인하였던 사람을 언급하고 있는 이 구절은 12절 내용과 조화되지 않는 듯하다. 즉 11,12절에서는 제자들이 여인들의 증언을 믿으려하지 않았다고 언급한 점과 베드로만 무덤에 간 것으로 언급된 점이 본문과 모순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오히려 본문의 ‘두어 사람'(some of our companions, NIV)은 요 20:3-8의 내용과 잘 어울린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본문을 삽입된 문구로 볼 수 있는데(J. Weiss) 꼭 그렇게 단정할 수는 없다. 여기서의 화자(話者)가 열 두 제자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우리들 중’이란 9절에서 언급된 바처럼 열 한 사도와 그 외의 사람을 포함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12절에 언급된 베드로 외에 다른 어떤 사람이 무덤을 찾아 갔으리라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따라서 본문은 12절의 내용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이 같은 진술을 통해 예수의 무덤에서 예수를 만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여자들만의 증언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재확인 증언을 통해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빈 무덤 사건을 점한 이들의 관심은 부활 사건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예수의 시체가 없어진 사실에 집중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이 그 같은 부활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영적 안목(眼目)이나 믿음이 전무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예수 자신이 예고했던 수난과 부활에 대한 말씀을(9:22; 18:32,33) 예수의 의도와는 다르게 이해했다는 결론을 얻게한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의 죽음과 빈 무덤에만 집착하고 있는 것이다.
카이 아우토스 에이펜 프로스 아우투스 오 아노에토이 카이 브라데이스 테 카르디아 투 피스튜에인 에피 파신 호이스 엘랄레산 호이 프로페타이
개역개정,25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새번역,25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마음이 그렇게도 무디니 말입니다.
우리말성경,25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리석고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게 믿는 사람들이여!
가톨릭성경,25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영어NIV,25 He said to them, “How foolish you are, and how slow of heart to believe all that the prophets have spoken!
영어NASB,25 And He said to them, “O foolish men and slow of heart to believe in all that the prophets have spoken!
영어MSG,25 Then he said to them, “So thick-headed! So slow-hearted! Why can’t you simply believe all that the prophets said?
영어NRSV,25 Then he said to them, “Oh, how foolish you are, and how slow of heart to believe all that the prophets have declared!
헬라어신약Stephanos,25 και αυτος ειπεν προς αυτους ω ανοητοι και βραδεις τη καρδια του πιστευειν επι πασιν οις ελαλησαν οι προφηται
라틴어Vulgate,25 et ipse dixit ad eos o stulti et tardi corde ad credendum in omnibus quae locuti sunt prophetae
히브리어Modern,25 ויאמר אליהם הוי חסרי דעת וכבדי לב מהאמין בכל אשר דברו הנביאים׃
성 경: [눅24:25]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예수]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 예수에 관한 사건들로 인해 실망과 좌절에 빠진 두 사람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난 예수의 반응은 책망을 하는 투이다. 예수의 책망은 ‘오'(*)라는 감탄사로 시작되면서 자신의 감정이 강하게 주입된다. 첫 마디는 ‘미련하다'(How foolish you are!, NIV)라는 책망인데 그들의 생각이 ‘바보스럽고 무지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제까지 진술했던 두 사람의 생각은 매우 잘못된 것임을 선언한 셈이 된다. 두번째는 선지자의 말을 ‘더디게'(*, 브라데이스) 신뢰하는 자들이라고 규정하는데 그들이 신뢰하는 선지자의 예언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책망하는 말이다. 즉 예수께서 생전에 자신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구약 예언자들의 예언 성취로 이루어 질 것이라는 점을 가르쳐 왔지만(18:31; 22:37 주석 참조), 예수의 가르침은 물론이고 구약 시대의 예언까지 바르게 믿지 못하고 있음을 탄식(歎息)하는 것이다. 이 말은 예수의 사건을 접한 모든 사람들이 생각하는 바처럼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예수의 활동이 끝장나고 그 추종자들에게 실망과 절망만이 있을 뿐 아무것도 남은게 없다는 생각을 강하게 꾸짖는 것이다. 즉 전혀 다른 차원으로 예수가 활동하고 있음을 시사해 준다(30,31절).
우키 타우타 에데이 파데인 톤 크리스톤 카이 에이셀데인 에이스 텐 돜산 아우투
개역개정,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새번역,26 ㉥그리스도가 마땅히 이런 고난을 겪고서, 자기 영광에 들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 ㉥또는 ‘메시아’. 그리스도는 그리스어이고, 메시아는 히브리어임. 둘다 ‘기름부음 받은 이’를 뜻함
우리말성경,26 그리스도께서 마땅히 이런 고난을 겪고서 자기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가톨릭성경,26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영어NIV,26 Did not the Christ have to suffer these things and then enter his glory?”
영어NASB,26 “Was it not necessary for the Christ to suffer these things and to enter into His glory?”
영어MSG,26 Don’t you see that these things had to happen, that the Messiah had to suffer and only then enter into his glory?”
영어NRSV,26 Was it not necessary that the Messiah should suffer these things and then enter into his glory?”
헬라어신약Stephanos,26 ουχι ταυτα εδει παθειν τον χριστον και εισελθειν εις την δοξαν αυτου
라틴어Vulgate,26 nonne haec oportuit pati Christum et ita intrare in gloriam suam
히브리어Modern,26 הלא על המשיח היה לסבל את כל זאת ולבוא אל כבודו׃
성 경: [눅24:26]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예수]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 이제까지 유대인들의 생각해 왔던 그리스도에 대한 고정 관념을 앞절에서 일축(一蹴)한 후 그리스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반문 형식으로 설명한다. 특히 ‘해야 하지 않느냐?’라는 반문의 대답이 자명함을 전제로한 질문인데 27절의 장면처럼 구약성경에 그 답이 분명하게 제시되었음을 나타낸다(시 22:6-8, 18; 27:12; 41:9; 사 50:6; 53:3-9; 슥 11:13).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에는 관심하지 않고 영광만을 생각하는 오류(誤謬)를 범하였다. 심지어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조차도 그리스도의 고난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세속적이고 현세적인 영광에만 참여하려는이기적 야욕(野慾)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그리스도는 영광 이전에 반드시 고난을 겪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반드시 겪고 나서 얻게 되는 영광은 칭송받고 높임을 받는 인자(人子)의 영광이다(9:26; 21:27; 빌 2:5-11; 딤전 3:16; 벧전 1:11,21). 약한 사람들로부터 힘없이 처형당해 죽었지만 하나님에 의해 인정받고 하나님의 아들로 칭송받게 된다는 암시이다.
카이 아릌사메노스 아포 모위세오스 카이 아포 판톤 톤 프로페톤 디에르메뉴센 아우토이스 엔 파사이스 타이스 그라파이스 타 페리 헤아우투
개역개정,27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새번역,27 그리고 예수께서는 모세와 모든 예언자에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서 자기에 관하여 써 놓은 일을 그들에게 설명하여 주셨다.
우리말성경,27 그리고 예수께서는 모세와 모든 예언자들로부터 시작해 성경 전체에서 자기에 관해 언급된 것을 그들에게 자세히 설명해 주셨습니다.
가톨릭성경,27 그리고 이어서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
영어NIV,27 And beginning with Moses and all the Prophets, he explained to them what was said in all the Scriptures concerning himself.
영어NASB,27 Then beginning with Moses and with all the prophets, He explained to them the things concerning Himself in all the Scriptures.
영어MSG,27 Then he started at the beginning, with the Books of Moses, and went on through all the Prophets, pointing out everything in the Scriptures that referred to him.
영어NRSV,27 Then beginning with Moses and all the prophets, he interpreted to them the things about himself in all the scriptures.
헬라어신약Stephanos,27 και αρξαμενος απο μωσεως και απο παντων των προφητων διηρμηνευεν αυτοις εν πασαις ταις γραφαις τα περι εαυτου
라틴어Vulgate,27 et incipiens a Mose et omnibus prophetis interpretabatur illis in omnibus scripturis quae de ipso erant
히브리어Modern,27 ויחל ממשה ומכל הנביאים ויבאר להם את כל הכתובים הנאמרים עליו׃
성 경: [눅24:27]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예수]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 앞에서 언급한 그리스도가 고난 받아야 하는 필연성에 관련된 예언들을 하나 하나 인용하면서 설명한 것으로 보이는데 인용된 자료는 모세와 선지자의 글과 모든 성경이라고 누가는 밝히고 있다. 여기서 ‘모세의 글’이란 ‘모세오경’을 가리키는 말이고 ‘선지자의 글’이란 ‘예언서’를 지칭한다. 그리고 ‘모든 성경’은 그 율법과 예언서 외의 구약성경 일반을 가리킨다 하겠다.
카이 엥기산 에이스 텐 코멘 후 에포류온토 카이 아우토스 프로세포이에사토 포르로테론 포류에스다이
개역개정,28 그들이 가는 마을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시니
새번역,28 그 두 길손은 자기들이 가려고 하는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더 멀리 가는 척하셨다.
우리말성경,28 그들이 가려던 엠마오 마을에 다다르자 예수께서는 더 가시려고 했습니다.
가톨릭성경,28 그들이 찾아가던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는 더 멀리 가려고 하시는 듯하였다.
영어NIV,28 As they approached the village to which they were going, Jesus acted as if he were going farther.
영어NASB,28 And they approached the village where they were going, and He acted as though He were going farther.
영어MSG,28 They came to the edge of the village where they were headed. He acted as if he were going on
영어NRSV,28 As they came near the village to which they were going, he walked ahead as if he were going on.
헬라어신약Stephanos,28 και ηγγισαν εις την κωμην ου επορευοντο και αυτος προσεποιειτο πορρωτερω πορευεσθαι
라틴어Vulgate,28 et adpropinquaverunt castello quo ibant et ipse se finxit longius ire
히브리어Modern,28 ויקרבו אל הכפר אשר הם הלכים שמה וישם פניו כהלך לו לדרכו׃
성 경: [눅24:28]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떡을 떼심]
저희의 가는 촌에 가까이 가매 – 엠마오가 그들의 최종 목적지인지 분명하지는 않지만(왜냐하면 그들은 갈릴리 사람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18절 주석 참조). 그들이 도착하려고 했던 장소에 거의 다 왔음을 말하고 있다. ‘가까이 가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엥기조'(*)는 ‘도착 했다’와 ‘거의 다달았다’의 두 가지 뜻을 포함한다. 이처럼 도착 시간에 대한 언급은 출발 시각처럼 자세히 언급되고 있지 않으나 29절의 내용을 보면 날이 거의 저물고 있는 때임을 말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일요일 즉 안식후 첫날이 거의 끝나는 시각쯤인 것으로 추정된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같이 하시니 – 13절에서 언급한 대로 그들의 목적지 엠마오에 도착하자 두 사람은 걸음을 멈추고 머물고자 하였을 것이고 예수는 목적지가 엠마오가 아니어서 더 걸어가려 했을 것이라는 이해는 쉽게 가능하다. 여기서의 강조점은 예수가 계속 길을 가려고 했다는데 있기 보다는 29절에 나오는 내용, 즉 예수가 그들 두 사람과 함께 머물게 된 동기가 두 사람의 간절한 요청 때문이었음을 뒷받침해 주는 데 있다. 본래 예수는 엠마오에서 유숙(留宿)하려는 계획이 없었음을 암시하여 두 사람의 강권을 강조하고자 하였다.
카이 파레비아산토 아우톤 레곤테스 메이논 멛 헤몬 호티 프로스 헤스페란 에스틴 카이 케클리켄 에데 헤 헤메라 카이 에이셀덴 투 메이나이 쉰 아우토이스
개역개정,29 그들이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새번역,29 그러자 그들은 예수를 만류하여 말하였다. “저녁때가 되고, 날이 이미 저물었으니, 우리 집에 묵으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의 집에 묵으려고 들어가셨다.
우리말성경,29 그러자 그들이 예수를 한사코 말렸습니다. “저녁이 다 됐으니 여기서 우리와 함께 계시지요. 날이 다 저물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묵으려고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가톨릭성경,29 그러자 그들은 “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하며 그분을 붙들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묵으시려고 그 집에 들어가셨다.
영어NIV,29 But they urged him strongly, “Stay with us, for it is nearly evening; the day is almost over.” So he went in to stay with them.
영어NASB,29 But they urged Him, saying, “Stay with us, for it is getting toward evening, and the day is now nearly over.” So He went in to stay with them.
영어MSG,29 but they pressed him: “Stay and have supper with us. It’s nearly evening; the day is done.” So he went in with them.
영어NRSV,29 But they urged him strongly, saying, “Stay with us, because it is almost evening and the day is now nearly over.” So he went in to stay with them.
헬라어신약Stephanos,29 και παρεβιασαντο αυτον λεγοντες μεινον μεθ ημων οτι προς εσπεραν εστιν και κεκλικεν η ημερα και εισηλθεν του μειναι συν αυτοις
라틴어Vulgate,29 et coegerunt illum dicentes mane nobiscum quoniam advesperascit et inclinata est iam dies et intravit cum illis
히브리어Modern,29 ויפצרו בו לאמר שבה אתנו כי עת ערב הגיע ונטה היום ויבא הביתה לשבת אתם׃
성 경: [눅24:29]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떡을 떼심]
저희가 강권하여…유하사이다 – ‘강권하여’로 번역된 헬라어 ‘파라비아조마이'(*)는 ‘압력을 넣어 강제로 하게 하다’의 뜻을 가진 단어이나 여기서는 절박한 간청(懇請)으로 봄이 적절하다. 예수가 글로바의 일행과 엠마오에서 머물게 된 동기는 그 두 사람의 간절한 요청에 의한 것임을 매우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강권이 있었다’는 것은 사양하는 말도 있었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그들이 이와 같이 예수를 붙잡고 머물기를 간청한 이유는 날이 저물어 더 이상 여행이 어렵다는 점뿐만 아니라 길을 함께 걸어오면서 나눈 대화 속에서 그들은 어떤 감명을 받았음에 틀림없고(32절) 존경하는 마음까지 생겨났을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와 함께 유숙하면서 더 많은 가르침을 듣고자 하여 예수를 강권하였을 것이다.
카이 에게네토 엔 토 카타클리데나이 아우톤 멭 아우톤 라본 톤 아르톤 율로게센 카이 클라사스 에페디두 아우토이스
개역개정,30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새번역,30 그리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려고 앉으셨을 때에, 예수께서 빵을 들어서 축복하시고, 떼어서 그들에게 주셨다.
우리말성경,30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상에 기대어 앉아 빵을 들고 감사기도를 드린 후 떼어 그들에게 나눠 주셨습니다.
가톨릭성경,30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영어NIV,30 When he was at the table with them, he took bread, gave thanks, broke it and began to give it to them.
영어NASB,30 When He had reclined at the table with them, He took the bread and blessed it, and breaking it, He began giving it to them.
영어MSG,30 And here is what happened: He sat down at the table with them. Taking the bread, he blessed and broke and gave it to them.
영어NRSV,30 When he was at the table with them, he took bread, blessed and broke it, and gave it to them.
헬라어신약Stephanos,30 και εγενετο εν τω κατακλιθηναι αυτον μετ αυτων λαβων τον αρτον ευλογησεν και κλασας επεδιδου αυτοις
라틴어Vulgate,30 et factum est dum recumberet cum illis accepit panem et benedixit ac fregit et porrigebat illis
히브리어Modern,30 ויהי כאשר הסב עמהם ויקח את הלחם ויברך ויבצע ויתן להם׃
성 경: [눅24:30]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떡을 떼심]
저희와 함께 음식을 잡수실 때에 – 저녁 식사 때인 것으로 보이는데 앞절에서 날이 저물고 기울었다는 언급이 있었다는 점을 보아 점심 식사라는 주장은(Bornhauser) 적절하지 못하다. 이 저녁 식사는 글로바 일행이 준비한 것으로 보이며 그들의 집인지 아니면 여관이나 민박하는 집에서 만찬을 베푼 것인지는 정확지 않다. 그러나 이들이 갈릴리 사람이라는 사실을 전제한다면 여관이나 민박일 가능성이 높다. 어쨌든 이 저녁 식사는 일상적인 평범한 식사이었음에 틀림없다.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주시매 – 이 같은 식사 장면은 오병 이어의 기적(9:10-17)과 유월절 식사를 연상케 한다(22:14). 글로바 일행은 유월절 식사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점에서(열두 제자들과 예수가 함께한 만찬이었기 때문이다) 이 두 사람은식사를 주제하는 예수의 모습을 보면서 들판에서 오병 이어의 기적으로 배불리 먹던 그 때가 생각났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31절에서와 같이 이 두 사람이 예수를 알아보게 된 요인(要因) 중의 하나가 이 식사에 대한 기억 때문이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한다.
아우톤 데 디에노이크데산 호이 옾달모이 카이 에페그노산 아우톤 카이 아우토스 아판토스 에게네토 앞 아우톤
개역개정,31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새번역,31 그제서야 그들의 눈이 열려서, 예수를 알아보았다. 그러나 한순간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우리말성경,31 그제야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러나 곧 예수께서 그들의 눈앞에서 사라지셨습니다.
가톨릭성경,31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영어NIV,31 Then their eyes were opened and they recognized him, and he disappeared from their sight.
영어NASB,31 Then their eyes were opened and they recognized Him; and He vanished from their sight.
영어MSG,31 At that moment, open-eyed, wide-eyed, they recognized him. And then he disappeared.
영어NRSV,31 Then their eyes were opened, and they recognized him; and he vanished from their sight.
헬라어신약Stephanos,31 αυτων δε διηνοιχθησαν οι οφθαλμοι και επεγνωσαν αυτον και αυτος αφαντος εγενετο απ αυτων
라틴어Vulgate,31 et aperti sunt oculi eorum et cognoverunt eum et ipse evanuit ex oculis eorum
히브리어Modern,31 ותפקחנה עיניהם ויכירהו והוא חמק עבר מעיניהם׃
성 경: [눅24:31]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떡을 떼심]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줄 알아보더니 – 글로바 일행이 예수를 알아보지 못한 이유가 눈이 가리워져 있었기 때문이었는데(16절) 예수와의 저녁 만찬 도중 눈이 열려지게 되어 부활한 예수를 알아보게 되었다. 개역 성경에서 ‘밝아졌다'(their eyes were opened, NIV)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 ‘디에노이크데산'(*, 디아노이고)의 과거 수동형이다. 따라서 눈이 열려지게 된 원인이 타자(他者)에게 있다는 암시를 주고 있다. 눈이 열려지게 된 원인은 앞절에서 언급된 바처럼 떡을 떼어 주는 행위가 될 수 있으며 알지 못하는 신비적 능력이 작용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이 모두가 하나님에 의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I. H. Marshall). 이와같이 글로바 일행이 부활한 예수를 낯선 여행자로 보지 않고 생전의 예수의 모습으로 보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상징적 의미를 함축한다. 첫째, 식사 이전까지는 예수가 낯선 타인으로 보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훌륭한 선생으로도 생각하였을 것이다(29절 주석 참조). 이는 이제까지의 유대인들이 예수를 이해했던 바를 그대로 보여준다. 그러나 이제 떡 곧 예수의 몸을 진정으로 나눔으로써 그들은 예수를 만나게 되었다. 여기서 떡을 떼는 만찬(晩餐)을 친교하고 할 수 있다면 친교 속에서 예수를 만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둘째는, 갑자기 눈이 열려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32절에서 그들이 고백하는 바와 같이 길을 걸으면서 그의 가르침을 들을 때 그들은 마음이 뜨거워지는 감동을 받았다. 따라서 그들은 그의 가르침을 뜨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였고 그 낯선 길손을 애써 대접하려고 했다는 것이 예수를 알아 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을 열게 했다. 즉 예수의 가르침을 열심히 받아들이고 예수와 함께 하기를 간절히 요청하는 마음이 부활한 예수를 만나게 한 동인(動因)이 되었다.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 예수께서 더 이상 시각적으로 포착되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는 본절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암시한다. 첫째, 부활한 예수는 시.공(時空)에 제한된 존재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은 그들에게도 환상이 아니라 생생한 체험이었다. 부활한 예수는 살아있는 생생한 체험으로 만나되 시각적으로 보여지는 제한된 존재가 아니라 그것을 초월하는 새로운 존재로 만나게 된다. 둘째는, 우리가 예수를 만날 때 고유한 일정한 모습으로만 만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모양으로 만난다는 점이다. 글로바 일행이 경험한 바처럼 낯선 길손과의 만남이 예수와의 만남이 될 수 있고(창 18:1-15) 헐벗고 굶주린 이웃과의 만남이 예수와의 만남이 될 수도 있다(마 25:31-46). 따라서 이제 예수와의 만남은 시간과 공간의 구분없이 무한적으로 개방되어 있는 초월적 사건인 동시에 어느 대상에 국한됨이 없이 구체적인 우리의 생활 가운데서 경험되고 찾을 수 있는 내재적 사건이기도 하다.
카이 에이판 프로스 알렐루스 오키 헤 카르디아 헤몬 카이오메네 엔 엔 헤민 호스 엘랄레이 헤민 엔 테 호도 호스 디에노이겐 헤민 타스 그라파스
개역개정,32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새번역,32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이하여 주실 때에, 우리의 마음이 [우리 속에서] 뜨거워지지 않았습니까?”
우리말성경,32 그들이 서로 물었습니다. “길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어 주실 때 우리 마음이 뜨거워지지 않았느냐?”
가톨릭성경,32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영어NIV,32 They asked each other, “Were not our hearts burning within us while he talked with us on the road and opened the Scriptures to us?”
영어NASB,32 They said to one another, “Were not our hearts burning within us while He was speaking to us on the road, while He was explaining the Scriptures to us?”
영어MSG,32 Back and forth they talked. “Didn’t we feel on fire as he conversed with us on the road, as he opened up the Scriptures for us?”
영어NRSV,32 They said to each other, “Were not our hearts burning within us while he was talking to us on the road, while he was opening the scriptures to us?”
헬라어신약Stephanos,32 και ειπον προς αλληλους ουχι η καρδια ημων καιομενη ην εν ημιν ως ελαλει ημιν εν τη οδω και ως διηνοιγεν ημιν τας γραφας
라틴어Vulgate,32 et dixerunt ad invicem nonne cor nostrum ardens erat in nobis dum loqueretur in via et aperiret nobis scripturas
히브리어Modern,32 ויאמרו איש אל רעהו הלא היה בער לבבנו בקרבנו בדברו אלינו בדרך ויפתח לנו את הכתובים׃
성 경: [눅24:32]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떡을 떼심]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 낯선 사람이 예수였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예수는 사라지고 두 사람은 길을 걸으며 느꼈던 감정들을 회고하면서 자신들의 마음이 뜨겁게 타올랐던 기억을 되살려내고 있다. 그들의 마음이 뜨겁게 감동되었던 것은 예수가 들려주었던 가르침의 내용이었다. 특히 성경을 ‘해석해’ 주었을 때(27절) 그들의 마음이 뜨겁게 ‘타올랐다'(*, 카이오)는 것을 회상한다. ‘타올랐다’는 말은 어떤 심적인 충동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일반적 마음의 변화라기보다는 밖으로부터의 어떤 이끌림을 감지하고 감격적 기쁨과 황홀감을 체험하는 초월적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주목할 것은 ‘성경을 해석해 줄 때’라는 점이다. 예수를 만나는 중요한 요인(motive)은 다름이 아닌 바로 주의 말씀을 탐구하는 행위었다. 한편 이와같은 체험은 두 사람 중에 어느 한 사람만 한 것이 아니라 두 사람 모두 했음을 ‘우리 속에’라는 말로 확인된다.
카이 아나스탄테스 아우테 테 호라 휘페스트렢산 에이스 예루살렘 카이 휴론 에드로이스메누스 투스 헨데카 카이 투스 쉰 아우토이스
개역개정,33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새번역,33 그들이 곧바로 일어나서,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보니, 열한 제자와 또 그들과 함께 있던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우리말성경,33 그들이 즉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가서 보니 거기에는 열한 제자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모여 있었습니다.
가톨릭성경,33 그들이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와 동료들이 모여,
영어NIV,33 They got up and returned at once to Jerusalem. There they found the Eleven and those with them, assembled together
영어NASB,33 And they got up that very hour and returned to Jerusalem, and found gathered together the eleven and those who were with them,
영어MSG,33 They didn’t waste a minute. They were up and on their way back to Jerusalem. They found the Eleven and their friends gathered together,
영어NRSV,33 That same hour they got up and returned to Jerusalem; and they found the eleven and their companions gathered together.
헬라어신약Stephanos,33 και ανασταντες αυτη τη ωρα υπεστρεψαν εις ιερουσαλημ και ευρον συνηθροισμενους τους ενδεκα και τους συν αυτοις
라틴어Vulgate,33 et surgentes eadem hora regressi sunt in Hierusalem et invenerunt congregatos undecim et eos qui cum ipsis erant
히브리어Modern,33 ויקומו בשעה ההיא וישובו ירושלים וימצאו את עשתי העשר ואת אשר אתם נקהלים יחד׃
성 경: [눅24:33]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떡을 떼심]
곧 그 시로 일어나 예수살렘에 돌아가 – 두사람이 부활한 예수를 만났다는 놀라운 체험을 한 순간 뜨겁게 타오르는 마음이 그들을 그냥 버려두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를 만났다는 사실을 깨닫는 바로 그 시각에 이미 날이 어두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달려갔다. 이 같은 행동의 즉각성은 회개하는 자세의 모범이 되기도 하고 성령받은 자의 모습이기도 하다. 참된 회개는 깨닫는 즉시 돌이켜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다. 이에서 전격적으로 변혁(變革)되는 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으니 그들은 발길을 달려 예루살렘에 이르게 된다.
열 한 사도와 및 그와 함께한 자들 – 예루살렘에 글로바 일행이 도착하였을 때 열 한명의 사도와 다른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있다. 이 사람들은 9절에 언급되었던 사람들과 동일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예수에 대한 이 놀라운 사건에 대해 열띤 토론을 하였을 것으로 족히 짐작된다. 여인들과 제자들 중 베드로가 예수의 빈 무덤을 목격하고 돌아왔을 때 그들은 의무심에 차 잔뜩 흥분과 조심 속에서 어찌 할 바를 몰랐었다. 그러나 엠마오 도상에서 예수를 만났다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을 때 베드로의 증언(34절)이 더욱 확실한 것임을 은연 중 믿게 되었고 이제까지의 그들의 의심과 의혹(疑或)을 완전히 떨어버리지는 못한 채 서로 이야기를 주고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레곤타스 호티 온토스 에게르데 호 퀴리오스 카이 오프데 시모니
개역개정,34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새번역,34 모두들 “주님께서 확실히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고 말하고 있었다.
우리말성경,34 이들이 말했습니다. “주께서 참으로 살아나셨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가톨릭성경,34 “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고 말하고 있었다.
영어NIV,34 and saying, “It is true! The Lord has risen and has appeared to Simon.”
영어NASB,34 saying, “The Lord has really risen and has appeared to Simon.”
영어MSG,34 talking away: “It’s really happened! The Master has been raised up–Simon saw him!”
영어NRSV,34 They were saying, “The Lord has risen indeed, and he has appeared to Simon!”
헬라어신약Stephanos,34 λεγοντας οτι ηγερθη ο κυριος οντως και ωφθη σιμωνι
라틴어Vulgate,34 dicentes quod surrexit Dominus vere et apparuit Simoni
히브리어Modern,34 האמרים אכן קם האדון מן המתים ונראה אל שמעון׃
성 경: [눅24:34]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떡을 떼심]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 글로바 일행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제자들로부터 들은 소식은 예수가 부활하였다는 사실이었다. 11절에서 보았듯이 사도들은 빈 무덤을 부활 사건으로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예수의 부활을 인정하게 되었고 그렇게 믿게 된 결정적 계기는 시몬이 부활한 예수를 경험하였다는 증언 때문임을 시사한다. 여기서 말하는 시몬은 베드로를 말하는데 언제 베드로가 부활한 예수를 만났는지에 대해서는 복음서 전체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다만 고전 15:5에서 바울이 증언할 뿐이다. 아무튼 그들은 최초의 빈 무덤을 목격한 여인들의 증언을 들었을 때엔 쉽게 믿으려하지 않았으나 열 두 사도 중 하나요 평소 예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가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였을 때에는 달랐다. 베드로의 증언은 그들 무리 가운데 새로운 기대와 희망을 갖게 하였고 한 곳에 모일 수 있게 하였다(33절). 한편 이러한 본절의 내용은 37,41절에 나오는 부활하신 예수의 모습을 보고 두려워하여 이상히 여기는 제자들의 양상과 부합되지 않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당시 제자들의 심리 상태를 염두에 두면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즉 그들 앞에서 처참히 죽으신 예수가 다시 살아나셔서 그들의 눈으로 볼 수 있도록 실제로 나타셨을 때 그들은 예기치 않은 주(主)의 출현에 간담(肝膽)이 서늘해지거나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예수의 부활은 여태껏 점진적으로 그리고 단계적으로 제자들에게 확증되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자연적 사건 앞에 유한한 존재인 인간은 경이와 두려움을 갖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37,41절의 내용은 부활하신 예수를 묘사하고 있는 것이며 본절 내용과는 다른 경험을 인간 내면에 일어나는 심리적 현상에 투영(projection)시켜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본절과 상치되지 않는다.
카이 아우토이 엨세군토 타 엔 테 호도 카이 호스 에그노스데 아우토이스 엔 테 클라세이 투 아르투
개역개정,35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새번역,35 그래서 그 두 사람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비로소 그를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하였다.
우리말성경,35 그러자 그 두 사람도 길에서 있었던 일과 예수께서 빵을 떼어 주실 때 그들이 그분을 알아본 일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가톨릭성경,35 그들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영어NIV,35 Then the two told what had happened on the way, and how Jesus was recognized by them when he broke the bread.
영어NASB,35 They began to relate their experiences on the road and how He was recognized by them in the breaking of the bread.
영어MSG,35 Then the two went over everything that happened on the road and how they recognized him when he broke the bread.
영어NRSV,35 Then they told what had happened on the road, and how he had been made known to them in the breaking of the bread.
헬라어신약Stephanos,35 και αυτοι εξηγουντο τα εν τη οδω και ως εγνωσθη αυτοις εν τη κλασει του αρτου
라틴어Vulgate,35 et ipsi narrabant quae gesta erant in via et quomodo cognoverunt eum in fractione panis
히브리어Modern,35 ויספרו גם הם את אשר נעשה להם בדרך ואיך הכירהו בבציעת הלחם׃
성 경: [눅24:35]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떡을 떼심]
두 사람도…말하더라 – 베드로가 경험한 사실을 듣고 글로바 일행도 자신들이 경험한 사실을 말하면서 길에서 예수와 만나고 마음이 뜨거워졌던 사실과 떡을 떼며 확인했던 예수를 ‘상세하게 설명하였다'(told what had happened, NIV) 이렇게 함으로써 서로 다른 곳에서의 경험이 한 자리에 모여 서로를 확인해 주고 있다. 누가는 다른 복음서 기자들과 달리 부활한 예수에 대한 체험을 확신시키기 위해 단계적으로 그리고 치밀하게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다.
타우타 데 아우톤 랄룬톤 아우토스 에스테 엔 메소 아우톤 카이 레게이 아우토이스 에이레네 휘민
개역개정,36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새번역,36 그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몸소 그들 가운데 들어서서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어라.”
우리말성경,36 그들이 아직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예수께서 바로 그들 사이에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으라.”
가톨릭성경,36 그들이 이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에 서시어, “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영어NIV,36 While they were still talking about this, Jesus himself stood among them and said to them, “Peace be with you.”
영어NASB,36 While they were telling these things, He Himself stood in their midst and said to them, “Peace be to you.”
영어MSG,36 While they were saying all this, Jesus appeared to them and said, “Peace be with you.”
영어NRSV,36 While they were talking about this, Jesus himself stood among them and said to them, “Peace be with you.”
헬라어신약Stephanos,36 ταυτα δε αυτων λαλουντων αυτος ο ιησους εστη εν μεσω αυτων και λεγει αυτοις ειρηνη υμιν
라틴어Vulgate,36 dum haec autem loquuntur Iesus stetit in medio eorum et dicit eis pax vobis ego sum nolite timere
히브리어Modern,36 עודם מדברים כדברים האלה והוא ישוע עמד בתוכם ויאמר אליהם שלום לכם׃
성 경: [눅24:36]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열 한 제자에게 나타나심]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 가운데 서서 – 부활한 예수의 출현이 세번째 언급된다. 이 이야기는 부활 예수에 대한 체험의 체험적이고 종합적인 묘사라고 할 수 있다. 구성상으로 베드로와 글로바 일행이 각각 경험한 부활 예수의 체험은 이 세 사람이 한 자리에 있고 아직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까지 증인으로 선 가운데서 종합되고 확인되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의 부활을 최종적으로 선언하려는 누가의 치밀한 의도를 다시 확인할 수 있다. 글로바가 경험한 부활한 예수가 시.공(時空)을 초월한 영적 만남을 제시한 것이라면, 여기서의 부활한 예수는 육체적 부활을 증명하는데 관심을 집중하고있다. 그러나 요 20:19에 따르면 문을 닫아 두었는데도 들어왔다고 표현함으로써 영육(靈肉)에 구애를 받지 않는 신비한 모습을 말하고 있으며 여기서도 영과 육을 종합하여 영과 육의 부활을 균형있게 언급하려고 하는 듯하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 이 인사는 요 20:19,20에서 두 번 거듭되고 있는데 부활한 예수가 제자들 앞에 나타났을 때 하는 인사의 형태이다. 그런데 이 인사는 단순한 인사말이라기 보다는 부활한 예수의 시대에 평화(平和)가 임하게 될 것이라는 축복의 말로 이해할 수 있다. 사실 예수가 태어났을 때 하늘에서 온 천사들이 땅 위의 평화를 노래하였듯이(2:14) 부활한 예수가 머무는 곳 그리고 예수를 만나는 모두에게 ‘평화'(*, 에이레네)가 있으라는 축복의 말씀이다.
프로에덴테스 데 카이 엠포보이 게노메노이 에도쿤 프뉴마 데오레인
개역개정,37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새번역,37 그들은 놀라고, 무서움에 사로잡혀서, 유령을 보고 있는 줄로 생각하였다.
우리말성경,37 그들은 유령을 본 줄 알고 놀라며 무서워했습니다.
가톨릭성경,37 그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다.
영어NIV,37 They were startled and frightened, thinking they saw a ghost.
영어NASB,37 But they were startled and frightened and thought that they were seeing a spirit.
영어MSG,37 They thought they were seeing a ghost and were scared half to death.
영어NRSV,37 They were startled and terrified, and thought that they were seeing a ghost.
헬라어신약Stephanos,37 πτοηθεντες δε και εμφοβοι γενομενοι εδοκουν πνευμα θεωρειν
라틴어Vulgate,37 conturbati vero et conterriti existimabant se spiritum videre
히브리어Modern,37 והמה חתו ונבעתו ויחשבו כי רוח ראו׃
성 경: [눅24:37]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열 한 제자에게 나타나심]
저희가 놀라고 무서워하여 – 그 자리에 모여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 놀라고 공포에 싸여 무서워 했지만 베드로나 글로바 등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본절의 상황으로 미루어 보아 모두 놀랐으리라는 생각이 적절하다 하겠다. 왜냐하면 그들이 이 같은 놀라운 체험에 익숙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두번째 본 사람이라 할지라도 갑자기 예수가 나타났을 때 놀라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이라 할 수 있다.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 그들이 그렇게 놀라고 무서워한 것은 갑자기 나타난 예수가 ‘영'(*, 프뉴마)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예수를 육체가 없는 유령(幽靈)과 같은 존재로 오해하였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어떤 사본에서는 본절의 ‘영’ 대신 ‘유령'(*, 판타스마)이라고 언급하기도 한다.
카이 에이펜 아우토이스 티 테타라그메노이 에스테 카이 디아 티 디알로기스모시 아나바이누신 엔 테 카르디아 휘몬
개역개정,38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새번역,38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희는 당황하느냐?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을 품느냐?
우리말성경,38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째서 두려워하며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가톨릭성경,3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영어NIV,38 He said to them, “Why are you troubled, and why do doubts rise in your minds?
영어NASB,38 And He said to them, “Why are you troubled, and why do doubts arise in your hearts?
영어MSG,38 He continued with them, “Don’t be upset, and don’t let all these doubting questions take over.
영어NRSV,38 He said to them, “Why are you frightened, and why do doubts arise in your hearts?
헬라어신약Stephanos,38 και ειπεν αυτοις τι τεταραγμενοι εστε και διατι διαλογισμοι αναβαινουσιν εν ταις καρδιαις υμων
라틴어Vulgate,38 et dixit eis quid turbati estis et cogitationes ascendunt in corda vestra
히브리어Modern,38 ויאמר אליהם מה זה אתם נבהלים ועל מה זה מחשבות עלות בלבבכם׃
성 경: [눅24:38]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열 한 제자에게 나타나심]
어찌하여…의심이 일어나느냐 – 예수의 출현에 대해 놀라고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는 ‘왜 의심하고 무서워 하느냐’는 반문 형식으로 책망하신다. 이 말은 제자들과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사람들이 예수의 모습을 부활한 예수로 이해하기 보다는 오히려 이해할 수 없는 괴이한 일로 생각하며 부활한 사실을 아직 확신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임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그만큼 그들은 예수가 말했고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데테 타스 케이라스 무 카이 투스 포다스 무 호티 에고 에이미 아우토스 프셀라페사테 메 카이 이데테 호티 프뉴마 사르카 카이 오스테아 우크 에케이 카도스 에메 데오레이테 에콘타
개역개정,39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새번역,39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너희가 보다시피, 나는 살과 뼈가 있다.”
우리말성경,39 내 손과 내 발을 보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고 쳐다보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다. 그러나 너희가 보다시피 나는 있지 않느냐?”
가톨릭성경,39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
영어NIV,39 Look at my hands and my feet. It is I myself! Touch me and see; a ghost does not have flesh and bones, as you see I have.”
영어NASB,39 “See My hands and My feet, that it is I Myself; touch Me and see, for a spirit does not have flesh and bones as you see that I have.”
영어MSG,39 Look at my hands; look at my feet–it’s really me. Touch me. Look me over from head to toe. A ghost doesn’t have muscle and bone like this.”
영어NRSV,39 Look at my hands and my feet; see that it is I myself. Touch me and see; for a ghost does not have flesh and bones as you see that I have.”
헬라어신약Stephanos,39 ιδετε τας χειρας μου και τους ποδας μου οτι αυτος εγω ειμι ψηλαφησατε με και ιδετε οτι πνευμα σαρκα και οστεα ουκ εχει καθως εμε θεωρειτε εχοντα
라틴어Vulgate,39 videte manus meas et pedes quia ipse ego sum palpate et videte quia spiritus carnem et ossa non habet sicut me videtis habere
히브리어Modern,39 ראו את ידי ואת רגלי כי אנכי הוא משוני וראו כי רוח אין לו בשר ועצמות כאשר אתם ראים שיש לי׃
성 경: [눅24:39]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열 한 제자에게 나타나심]
내 손과 발을 보고 – 부활한 예수를 의심하고 유령으로 오해하는 제자들에게(37,38절) 예수는 자신이 참으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던 그 예수이며 유령이 아니라 참으로 육신을 가진 완전한 사람임을 확인시키고자 증거를 제시하신다. 증거로 제시된 것은 자신의 손과 발인데 왜 그것이 증거가 되는지 누가는 밝히지 않는다. 그러나 요 20:25-27에 못박았던 자국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나를 만져 보라 – 두번쩨로 제자들에게 확인시키는 것은 육신의 실재(實在)이다. 이것은 자신이 유령이 아님을 나타내려는 의도적 말씀이니 유령은 살과 뼈가 없음을 상기시키고 있다. 따라서 자신의 살과 몸을 직접 확인시킴으로써 유령이 아님을 선언하신다. 이 같은 부활 증명은 영적인 부활이냐 아니면 육적인 부활이냐 하는 문제를 연상시킨다(고전 15:31-52). 그러나 여기서의 강조점은 영적 부활이냐 육적 부활이냐 하는데 있기 보다는 부활은 완전히 새롭고 전혀 다른 차원의 존재로 나타난다는데 있다고 보아야 한다. 글로바 일행이 경험바 처럼 부활은 영과 육의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존재가 되는 것이지 영이냐 아니면 육이냐 하는 일차원적인 선택적 사고로 부활을 이해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육체를 확인 시키는 가장 큰 이유는 육적인 부활을 강조하는데 있지 않고 부활이 유령이나 환각 현상(hallucination)이 아님을 확인 시키고자 하는데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카이 투토 에이폰 에데잌센 아우토이스 타스 케이라스 카이 투스 포다스
개역개정,4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새번역,40 ㉦이렇게 말씀하시고, 그는 손과 발을 그들에게 보이셨다.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40절이 없음
우리말성경,40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그 손과 발을 보여 주셨습니다.
가톨릭성경,4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그들에게 손과 발을 보여 주셨다.
영어NIV,40 When he had said this, he showed them his hands and feet.
영어NASB,40 And when He had said this, He showed them His hands and His feet.
영어MSG,40 As he said this, he showed them his hands and feet.
영어NRSV,40 And when he had said this, he showed them his hands and his feet.
헬라어신약Stephanos,40 και τουτο ειπων επεδειξεν αυτοις τας χειρας και τους ποδας
라틴어Vulgate,40 et cum hoc dixisset ostendit eis manus et pedes
히브리어Modern,40 ואחרי אמרו את זאת הראה אתם את ידיו ואת רגליו׃
성 경: [눅24:40]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열 한 제자에게 나타나심]
손과 발을 보이시나 – 예수가 증거로 제안했던 것은 손과 발 그리고 자신의 육신을 직접 만져 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손과 발만을 보여준 것으로 당시 상황 묘사를 끝내고 있으며 보기만 했는지 직접 만져 확인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그러나 요 20:20에서는 손과 옆구리만 언급하고 있으며 요 20:24-27에서는 도마의 요구에 의해 예수께서 직접 만져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도마 역시 적접 만져 확인하였다는 언급이 없다는 점이다. 본문은 사본에 따라 차이가 있는데 어떤 사본에서는 본문이 삭제되고 없고 또 어떤 사본에서는 괄호에 묶어 언급하고 있다(I. H. Marshall). 아마도 요한복음과의 내용이 일치되지 않아 삭제(削除)하였을 수도 있고(Jeremias) 앞절(39절)과 중복되는 내용이라고 생각되어 삭제한 것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K. Aland). 그러나 요한복음과의 일치성이 문제되지않고 앞절과 중복된다고 해서 문제가 될 건 없다. 중요한 것은 보여주고 확인시켰다는 점을 강조하는데 있다. 이는 요한복음과 일치하고 있는데 누가는 목격자들의 충격과 의심이 큰만큼 부활한 예수가 유령이나 환상이 아님을 단계적으로 확인시켜 나가고 있다.
에티 데 아피스툰톤 아우톤 아포 테스 카라스 카이 다우마존톤 에이펜 아우토이스 에케테 티 브로시몬 엔다데
개역개정,41 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새번역,41 그들은 너무 기뻐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하고 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우리말성경,41 그들은 너무 기쁘고 놀라워 오히려 믿기지 않았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가톨릭성경,41 그들은 너무 기쁜 나머지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하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영어NIV,41 And while they still did not believe it because of joy and amazement, he asked them, “Do you have anything here to eat?”
영어NASB,41 While they still could not believe it because of their joy and amazement, He said to them, “Have you anything here to eat?”
영어MSG,41 They still couldn’t believe what they were seeing. It was too much; it seemed too good to be true. He asked, “Do you have any food here?”
영어NRSV,41 While in their joy they were disbelieving and still wondering, he said to them, “Have you anything here to eat?”
헬라어신약Stephanos,41 ετι δε απιστουντων αυτων απο της χαρας και θαυμαζοντων ειπεν αυτοις εχετε τι βρωσιμον ενθαδε
라틴어Vulgate,41 adhuc autem illis non credentibus et mirantibus prae gaudio dixit habetis hic aliquid quod manducetur
히브리어Modern,41 והם עוד לא האמינו משמחה ותמהו ויאמר אליהם היש לכם פה דבר אכל׃
성 경: [눅24:41]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열 한 제자에게 나타나심]
너무 기쁘므로 오히려 믿지 못하고 – 손과 발을 확인한 제자들의 반응은 처음으로 긍정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르면서도 그 기쁨 때문에 믿어지지 않았다. 이 같은 표현은 제자들이 예수의 부활을 확인하면서 느끼는 감격과 놀라움(amazement)을 강조하는 것이다. 즉 의심에 강조점이 있지 않고 놀라와하며 기이히 여기는 제자들의 기쁨에 강조점이 있다. 이제 제자들은 의심과 두려움의 고개를 넘어서 기쁨과 놀라움의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이 같은 누가의 묘사는 매우 극적이고 치밀한 문학적 능력으로 평가될 수 있다.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 부활 사실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가 극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제자들의 기쁨이 터져 나올 때 식사를 제안함으로써 제자들의 확신을 움직일 수 없는 믿음으로 굳히려 하고 있다.
호이 데 에페도칸 아우토 잌뒤오스 옾투 메로스
개역개정,42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새번역,42 그래서 그들이 예수께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렸다.
우리말성경,42 그들은 구운 생선 한 토막을 갖다 드렸습니다.
가톨릭성경,42 그들이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리자,
영어NIV,42 They gave him a piece of broiled fish,
영어NASB,42 They gave Him a piece of a broiled fish;
영어MSG,42 They gave him a piece of leftover fish they had cooked.
영어NRSV,42 They gave him a piece of broiled fish,
헬라어신약Stephanos,42 οι δε επεδωκαν αυτω ιχθυος οπτου μερος και απο μελισσιου κηριου
라틴어Vulgate,42 at illi obtulerunt ei partem piscis assi et favum mellis
히브리어Modern,42 ויתנו לפניו חלק דג צלוי ומעט צוף דבש׃
성 경: [눅24:42]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열 한 제자에게 나타나심]
구운 생선 한 토막 – 제자들이 제공한 먹을 것은 구운 생선(broiled fish) 한 마리였는데 어떤 사본에서는 꿀찍은 떡이라는 구절을 첨가시키고 있다(Metzger). 아마도 필사자들이 요 21:9에 제시된 음식인 물고기와 떡을 염두에 두고 삽입한 것으로 보인다(M. Alford). 또한 이 같은 물고기를 언급한 것 때문에 장소를 갈릴리로 볼 수 있는데(Creed, Klostermann 등) 내륙 지방 예루살렘에도 소금절인 생선을 구할 수 있다는 점에서(Jeremias) 예루살렘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카이 레본 에노피온 아우톤 에파겐
개역개정,43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새번역,43 예수께서 받아서, 그들 앞에서 잡수셨다.
우리말성경,43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들 앞에서 생선을 가져다가 잡수셨습니다.
가톨릭성경,43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받아 그들 앞에서 잡수셨다.
영어NIV,43 and he took it and ate it in their presence.
영어NASB,43 and He took it and ate it before them.
영어MSG,43 He took it and ate it right before their eyes.
영어NRSV,43 and he took it and ate in their presence.
헬라어신약Stephanos,43 και λαβων ενωπιον αυτων εφαγεν
라틴어Vulgate,43 et cum manducasset coram eis sumens reliquias dedit eis
히브리어Modern,43 ויקח ויאכל לעיניהם׃
성 경: [눅24:43]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열 한 제자에게 나타나심]
잡수시더라 – 예수가 생선을 제자들 앞에서 먹어 보임으로써 예수 자신이 유령이나 환상이 아님을 최종적으로 확인시키고 있다. 부활한 예수가 식사를 했다는 사실(30절)을 두번 언급하면서 누가는 예수가 유령이 아니라 분명 죽었던 나사렛 예수가 되살아났음을 강조하고 있다. 부활한 예수가 식사를 했다는 점에서 누가의 독특한 강조라고 볼 수 있다.
에이펜 데 프로스 아우투스 후토이 호이 로고이 무 후스 엘랄레사 프로스 휘마스 에티 온 쉰 휘민 호티 데이 플레로데나이 판타 타 게그람메나 엔 토 노모 모위세오스 카이 토이스 프로페타이스 카이 프살모이스 페리 에무
개역개정,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새번역,44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나를 두고 기록한 모든 일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였다.”
우리말성경,44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서 나에 대해 기록된 모든 일이 마땅히 이루어져야 한다고 너희에게 말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가톨릭성경,44 그리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말한 것처럼,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
영어NIV,44 He said to them, “This is what I told you while I was still with you: Everything must be fulfilled that is written about me in the Law of Moses, the Prophets and the Psalms.”
영어NASB,44 Now He said to them, “These are My words which I spoke to you while I was still with you, that all things which are written about Me in the Law of Moses and the Prophets and the Psalms must be fulfilled.”
영어MSG,44 Then he said, “Everything I told you while I was with you comes to this: All the things written about me in the Law of Moses, in the Prophets, and in the Psalms have to be fulfilled.”
영어NRSV,44 Then he said to them, “These are my words that I spoke to you while I was still with you–that everything written about me in the law of Moses, the prophets, and the psalms must be fulfilled.”
헬라어신약Stephanos,44 ειπεν δε αυτοις ουτοι οι λογοι ους ελαλησα προς υμας ετι ων συν υμιν οτι δει πληρωθηναι παντα τα γεγραμμενα εν τω νομω μωσεως και προφηταις και ψαλμοις περι εμου
라틴어Vulgate,44 et dixit ad eos haec sunt verba quae locutus sum ad vos cum adhuc essem vobiscum quoniam necesse est impleri omnia quae scripta sunt in lege Mosi et prophetis et psalmis de me
히브리어Modern,44 ויאמר אליהם אלה הם הדברים אשר דברתי אליכם בעוד היותי עמכם כי המלא ימלא כל הכתוב עלי בתורת משה ובנביאים ובתהלים׃
성 경: [눅24:44]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지상 대명]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 예수의 부활에 대한 제자들의 최종 확인 후 예수의 마지막 가르침이 언급되면서 누가복음 대단원의 마지막 국면으로 접어든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말했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한 예고(9:31; 18:31-33; 22:37)를 상기키시면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이 예언의 성취임을 언급하고 있다.이 같은 예수의 부활 사건을 거듭 설명한 것은 예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구원사적(救援史的) 맥락에서 부각시키고자 한 의도에서였다. 누가는 본문 서두에 ‘이것들은 내 말들이다'(*, 후토이 호이 로고이 무)라고 말한 후 ‘호티'(*, ‘왜냐하면’)로 시작되는 관계절을 통해 성경의 에언을 상기시키고 있는데 지시대명사 ‘이것'(*, 후토이)이 무엇을 뜻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문맥상 예수의 체포에서부터 부활까지의 사건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예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은 복음의 세계화와 전인류의 구원을 위한 필연적 결과요 하나님의 뜻임을 확언하는 것이다(27절 주석 참조).
토테 디에노잌센 아우톤 톤 눈 투 쉬니에나이 타스 그라파스
개역개정,45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새번역,45 그 때에 예수께서는 성경을 깨닫게 하시려고, 그들의 마음을 열어 주시고,
우리말성경,45 그리고 예수께서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가톨릭성경,45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
영어NIV,45 Then he opened their minds so they could understand the Scriptures.
영어NASB,45 Then He opened their minds to understand the Scriptures,
영어MSG,45 He went on to open their understanding of the Word of God, showing them how to read their Bibles this way.
영어NRSV,45 Then he opened their minds to understand the scriptures,
헬라어신약Stephanos,45 τοτε διηνοιξεν αυτων τον νουν του συνιεναι τας γραφας
라틴어Vulgate,45 tunc aperuit illis sensum ut intellegerent scripturas
히브리어Modern,45 אז פתח את לבבם להבין את הכתובים׃
성 경: [눅24:45]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지상 대명]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 이 구절 역시 27절에 언급된 내용과 비슷한 내용이며 38절에 언급된 예수의 책망과 대응된다. 즉 두려워하고 의심하던 마음이 ‘열리다'(*, 다아노이고) 곧 전적인 신뢰와 깨달음으로 전환되었다는 극적인 대비를 보여 예수의 부활을 강조하고 있다. 이 같은 구조는 글로바 일행과의 만남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바, 25절의 ‘마음에 더디 믿는’이라는 표현과 31절의 ‘저희 눈이 밝아져’라는 표현이 서로 대비되어 부활 확인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이같은 장면은 그동안 있어 왔던 예수와 제자들 사이의 벽이 무너지고 한마음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예수의 교훈과 행동에 대해 늘 깨닫지 못하고 무지했던(11,25,37,38절; 8:9,25; 18:34; 22:24) 제자들이 비로소 성경의 예언이 뜻하는 바와 예수의 삶과죽음 그리고 부활을 이해하게 되는 극적인 순간을 맞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누가는 성경을 깨닫게 되었다는 말을 함으로써 성경에 기록되고 에언된 메시야에 대한 메시지가 예수의 모든 삶을 통해 완전히 성취(成就)되었음을 말하고자 한다.
카이 에이펜 아우토이스 호티 후토스 게그랖타이 파데인 톤 크리스톤 카이 아나스테나이 에크 네크론 테 트리테 헤메라
개역개정,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새번역,46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곧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으시고, 사흘째 되는 날에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실 것이며,
우리말성경,46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기록돼 있다.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겪고 3일째 되는 날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날 것이며
가톨릭성경,46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영어NIV,46 He told them, “This is what is written: The Christ will suffer and rise from the dead on the third day,
영어NASB,46 and He said to them, “Thus it is written, that the Christ would suffer and rise again from the dead the third day,
영어MSG,46 He said, “You can see now how it is written that the Messiah suffers, rises from the dead on the third day,
영어NRSV,46 and he said to them, “Thus it is written, that the Messiah is to suffer and to rise from the dead on the third day,
헬라어신약Stephanos,46 και ειπεν αυτοις οτι ουτως γεγραπται και ουτως εδει παθειν τον χριστον και αναστηναι εκ νεκρων τη τριτη ημερα
라틴어Vulgate,46 et dixit eis quoniam sic scriptum est et sic oportebat Christum pati et resurgere a mortuis die tertia
히브리어Modern,46 ויאמר אליהם כן כתוב וכן נגזר אשר יענה המשיח ויקום מן המתים ביום השלישי׃
성 경: [눅24:46]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지상 대명]
또 이르시되 – 자신에관한 사건에 대해 설명하면서 두번째는 구체적 성경의 근거를 들고 있다. 때문에 누가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후토스 게그라프타이)라는 인용 도입 문구를 사용하고 있다. 여기서 인용된 것은 자신이 직접 예언했던 수난과 부활에 대한 예고이다(9:22; 18:31-33).
카이 케뤼크데나이 에피 토 오노마티 아우투 메타노이안 에이스 아페신 하마르티온 에이스 판타 타 에드네 아릌사메노이 아포 예루살렘
개역개정,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새번역,47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모든 민족에게 전파될 것이다’ 하였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 ㉧또는 ‘예루살렘으로부터 모든 민족에게 전파될 것이다. 48.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우리말성경,47 또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해 모든 민족에게 그의 이름으로 죄 용서를 받게 하는 회개가 전파될 것이다.
가톨릭성경,47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영어NIV,47 and repentance and forgiveness of sins will be preached in his name to all nations, beginning at Jerusalem.
영어NASB,47 and that repentance for forgiveness of sins would be proclaimed in His name to all the nations, beginning from Jerusalem.
영어MSG,47 and then a total life-change through the forgiveness of sins is proclaimed in his name to all nations–starting from here, from Jerusalem!
영어NRSV,47 and that repentance and forgiveness of sins is to be proclaimed in his name to all nations, beginning from Jerusalem.
헬라어신약Stephanos,47 και κηρυχθηναι επι τω ονοματι αυτου μετανοιαν και αφεσιν αμαρτιων εις παντα τα εθνη αρξαμενον απο ιερουσαλημ
라틴어Vulgate,47 et praedicari in nomine eius paenitentiam et remissionem peccatorum in omnes gentes incipientibus ab Hierosolyma
히브리어Modern,47 ואשר תקרא בשמו תשובה וסליחת החטאים בכל הגוים החל מירושלים׃
성 경: [눅24:47]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지상 대명]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게하는 회개 – 여기서 언급된 내용은 렘 31:34에서 인용된 것으로 보이는데 온 세계에 전파되어야 할 것은 죄사함을 위한 회개임을 말하고 있다. 누가가 인식하고 있는 기독교의 핵심은 ‘회개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그의 이름'(*, 오노마티 아우누)이 누구를 뜻하는 것인지 모호하지만 문맥으로 보아 앞절에서 언급된 그리스도, 즉 예수의 이름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스도를 통한 ‘회개'(*, 메타노이아) 운동은 이미 세례 요한에서부터 예견되었고(막 1:15) 그의 모든 사역, 심지어 십자가 수난과 부활 사건에 이르기까지 전생애를 통해 계속된 것이었다. 이 죄사함을 위한 회개 운동은 죄의식을 높이고 참회하도록 하자는데 강조점이 있기 보다는 죄의식으로부터 해당된 존재로서 그리고 전혀 새로운 방향을 향해 근본적(根本的)으로 변혁된 새로운 인간으로서 새롭게 변화된 삶을 살아가도록 추구하는 것이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 본문은 사 2:3; 미 4:1,2에서 인용된 것으로 보이는데 내용상 세 복음서가 공통되게 언급하고 있다. 특히 세 복음서의 결론부에 해당되는 이 말은 죄사함의 회개운동 곧 복음이 예루살렘에서부터 전세계를 향해 확장 선포되어야 함을 선언하고 있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예루살렘으로부터’보다 ‘모든 족속'(*, 판타 타에드네)에 있는데 유대인들의 배타적인 선민 의식을 깨치고 보편적 구원을 선언하고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이같은 만인 구원 사상은 공관 복음서 모두 공통되게 선언하고 있으나 특히 누가는 보다 더 강조하고 있다(행 1:8).
휘메이스 마르튀레스 투톤
개역개정,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새번역,48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우리말성경,48 너희는 이 일들의 증인이다.
가톨릭성경,48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영어NIV,48 You are witnesses of these things.
영어NASB,48 “You are witnesses of these things.
영어MSG,48 You’re the first to hear and see it. You’re the witnesses.
영어NRSV,48 You are witnesses of these things.
헬라어신약Stephanos,48 υμεις δε εστε μαρτυρες τουτων
라틴어Vulgate,48 vos autem estis testes horum
히브리어Modern,48 ואתם עדים בזאת׃
성 경: [눅24:48]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지상 대명]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 – 예수의 삶, 즉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목격하였고 그 의미를 성경을 근거로 하여 깨닫고 눈이 열리고(31절) 마음이 열리게 된(45절) 제자들에게 예수는 47절에서 언급한 지상 최대의 명령(the Great Commission)을 증언하는 증인이 될 것을 선포하고 있다. 이로써 예수의 모든 활동이 완결부(完結部)에 이르고 있다. 예수의 일은 지금부터 증인에 의해 새롭게 시작되고 있으며 이 새로운 시작은 사도행전으로 이어진다.
카이 이두 에고 아포스텔로 텐 에팡겔리안 투 파트로스 무 엪 휘마스 휘메이스 데 카디사테 엔 테 폴레이 헤오스 후 엔뒤세스데 엨스 휲수스 뒤나민
개역개정,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새번역,49 [보아라,] 나는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낸다. 그러므로 너희는 위로부터 오는 능력을 입을 때까지, 이 성에 머물러 있어라.”
우리말성경,49 보라.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낸다. 그러므로 너희는 위로부터 내려오는 능력을 입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으라.”
가톨릭성경,49 그리고 보라,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을 내가 너희에게 보내 주겠다. 그러니 너희는 높은 데에서 오는 힘을 입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라.”
영어NIV,49 I am going to send you what my Father has promised; but stay in the city until you have been clothed with power from on high.”
영어NASB,49 “And behold, I am sending forth the promise of My Father upon you; but you are to stay in the city until you are clothed with power from on high.”
영어MSG,49 What comes next is very important: I am sending what my Father promised to you, so stay here in the city until he arrives, until you’re equipped with power from on high.”
영어NRSV,49 And see, I am sending upon you what my Father promised; so stay here in the city until you have been clothed with power from on high.”
헬라어신약Stephanos,49 και ιδου εγω αποστελλω την επαγγελιαν του πατρος μου εφ υμας υμεις δε καθισατε εν τη πολει ιερουσαλημ εως ου ενδυσησθε δυναμιν εξ υψους
라틴어Vulgate,49 et ego mitto promissum Patris mei in vos vos autem sedete in civitate quoadusque induamini virtutem ex alto
히브리어Modern,49 והנני שולח עליכם את הבטחת אבי ואתם שבו בעיר ירושלים עד כי תלבשו עז ממרום׃
성 경: [눅24:49]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지상 대명]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 – 예수의 마지막 약속이 언급되고 있는데 ‘보라'(*, 이두)라는 단어로 강조되고 있다. 여기서 ‘내 아버지의 약속한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언급되고 있지 않다. ‘약속'(*, 에팡겔리아)은 성령과 관계되어 사용되는 경우가 많은데(행 1:4; 2:33; 갈 3:14) 성령에 대한 언급이 없는 점이 이해를 어렵게 하고 있다. 그러나 행 1:4,5; 2:1-4을 참고한다면 ‘성령’을 약속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 복음의 증인들에게 약속된 것은 ‘위로부터'(*, 여스휘푸스)오는 ‘능력'(*, 뒤나민)이다. 앞에서 약속한 것이 ‘성령’임을 전제할 때 이는 성령의 성격에 대해서 암시한 것이다. 즉 하늘로부터 오는 능력이 성령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같은 언급은 증인의 활동이 하늘로부터 오는 능력에 힘입어 되어야 할 것임을 시사한다. 이와 같은 능력을 얻기위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명령하는데 이 사실은 행 2:1-4에서 나타나고 있다. 예루살렘에서 기다리라고 말한 이유는 47절에서 언급했듯이 선교 활동이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이방 세계로 확장되어 나감을(행 1:8) 이루게 하기 위함이었다.
엨세가겐 데 아우투스 엨소 헤오스 프로스 베다니안 카이 에파라스 타스 케이라스 아우투 율로게센 아우투스
개역개정,50 예수께서 그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시더니
새번역,50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들을 [밖으로] 베다니까지 데리고 가서, 손을 들어 그들을 축복하셨다.
우리말성경,50 예수께서 제자들을 이끌고 베다니 앞에까지 가시더니 거기서 두 손을 들고 그들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가톨릭성경,50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베타니아 근처까지 데리고 나가신 다음, 손을 드시어 그들에게 강복하셨다.
영어NIV,50 When he had led them out to the vicinity of Bethany, he lifted up his hands and blessed them.
영어NASB,50 And He led them out as far as Bethany, and He lifted up His hands and blessed them.
영어MSG,50 He then led them out of the city over to Bethany. Raising his hands he blessed them,
영어NRSV,50 Then he led them out as far as Bethany, and, lifting up his hands, he blessed them.
헬라어신약Stephanos,50 εξηγαγεν δε αυτους εξω εως εις βηθανιαν και επαρας τας χειρας αυτου ευλογησεν αυτους
라틴어Vulgate,50 eduxit autem eos foras in Bethaniam et elevatis manibus suis benedixit eis
히브리어Modern,50 ויוליכם מחוץ לעיר עד בית היני וישא את ידיו ויברכם׃
성 경: [눅24:50]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예수의 승천]
저희를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 누가복음의 에필로그(epilogue)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는 예수의 작별 장면이 예수가 제자들을 ‘이끌고 나감'(*, 여사고)으로 시작되고 있다. ‘여사고’는 출애굽 사건을 묘사할 때 언급한 70인역의 용어라는 점에서 볼 때 누가는 예수가 제자들을 이끌어 내는 모습을 통해 또 다른 출애굽을 상징적(象徵的)으로 나타내려 했다고 볼 수 있다(Lohfink). 이들은 예루살렘 성을 벗어나 감람산 동쪽 기슭에 위치한 ‘베다니'(*)로 나갔는데 이 장소는(19:29 주석 참조) 승천의 장소로서는 처음 언급되고 있다. 행 1:12에 따르면 승천의 장소가 감람산이라고 언급되는데 장소의 모순은 발견되지 않는다.
손을 들어 저희에게 축복하시더니 – 제자들을 위한 마지막 기도를 하는 이 모습은 예수를 사제적인 모습으로 기리려고하는 누가의 의도로 볼 수 있기도 하나(Lohfink) 누가는 사제의 모습으로 예수를 묘사하려려 했던 적이 없었다는 점에서 타당하지 않다(I. H. Marshall). 이 같은 축복의 장면은 증인들의 활동이 인간적인 사역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오는 능력으로 되는 것이며 그 같은 사명을 성공적으로 이루어주기를 바라는 간절한 요청을 암시하는 것이다.
카이 에게네토 엔 토 율로게인 아우톤 아우투스 디에스테 앞 아우톤 카이 아네페레토 에이스 톤 우라논
개역개정,51 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시니]
새번역,51 예수께서는 그들을 축복하시는 가운데, 그들에게서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하늘로 올라가셨다’가 없음
우리말성경,51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복을 주시는 중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들려 올라가셨습니다.
가톨릭성경,51 이렇게 강복하시며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
영어NIV,51 While he was blessing them, he left them and was taken up into heaven.
영어NASB,51 While He was blessing them, He parted from them and was carried up into heaven.
영어MSG,51 and while blessing them, took his leave, being carried up to heaven.
영어NRSV,51 While he was blessing them, he withdrew from them and was carried up into heaven.
헬라어신약Stephanos,51 και εγενετο εν τω ευλογειν αυτον αυτους διεστη απ αυτων και ανεφερετο εις τον ουρανον
라틴어Vulgate,51 et factum est dum benediceret illis recessit ab eis et ferebatur in caelum
히브리어Modern,51 ויהי בברכו אתם ויפרד מאתם וינשא השמימה׃
성 경: [눅24:51]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예수의 승천]
저희를 떠나(하늘로 올리우)시니 – 누가는 예수가 축복을 할 때 그들로부터 떠났음을 하늘로 ‘올리워갔다'(*, 아네페레토)는 승천의 묘사로 그리고 있다. 개역 성경은 이 문구를 괄호로 묶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이 구절을 언급하지 않는 사본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 16:18,19과 행 1:2,9에서 언급되는 점으로 보아 삭제하는 것은 타당하지 못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삭제하지 않았을 때 문제가 되는 것은 부활 후 사십 일 간 지상에서 머물렀다는 행 1:3의 언급과 모순되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승천일이 부활한 날 밤이거나 그 이튿날인 것처럼 묘사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승천에 관한 기사는 같은 저자의 기록인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사이에 불일치(不一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막 16;19에서는 누가복음과 일치되고 있다. 모든 점을 염두에 둘 때 50-53절의 기록은 앞의 이야기와 시간적 간격을 두고 이해하는 수밖에 없다. 어쨌든 승천에 관한 기사는 분명하게 일치되지만 시간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확인할 수 없는 문제가 남아 있다.
카이 아우토이 프로스퀴네산테스 아우톤 휘페스트렢산 에이스 예루살렘 메타 카라스 메갈레스
개역개정,52 그들이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새번역,52 그들은 ㉩예수께 경배하고, 크게 기뻐하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예수께 경배하고’가 없음
우리말성경,52 그러자 그들은 [예수께 경배하며 기쁨에 넘쳐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가톨릭성경,52 그들은 예수님께 경배하고 나서 크게 기뻐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영어NIV,52 Then they worshiped him and returned to Jerusalem with great joy.
영어NASB,52 And they, after worshiping Him, returned to Jerusalem with great joy,
영어MSG,52 And they were on their knees, worshiping him. They returned to Jerusalem bursting with joy.
영어NRSV,52 And they worshiped him, and returned to Jerusalem with great joy;
헬라어신약Stephanos,52 και αυτοι προσκυνησαντες αυτον υπεστρεψαν εις ιερουσαλημ μετα χαρας μεγαλης
라틴어Vulgate,52 et ipsi adorantes regressi sunt in Hierusalem cum gaudio magno
히브리어Modern,52 והם השתחוו לו וישובו לירושלים בשמחה גדולה׃
성 경: [눅24:52]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예수의 승천]
저희가 (그에게 경배하고) – 승천하는 예수가 ‘예배'(*, 프로수퀴네오)의 대상이 되고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이 같은 묘사는 이제부터 예수의 신성(神性)이 인정되고 예배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제는 예수가 신적인 존재로서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거니와 예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은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이적적 권능으로 인식되고 제자들이 존재하는 근본 의의가 되고 있다. 여기서도 역시 ‘그에게 경배하고’가 괄호로 묶여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누가는 이제부터의 복음의 내용을 곳곳에서 증언하고 상고하게 될 것임을 이 구절을 통해 언급하고 있다(행 2:22-24).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 실망과 좌절 그리고 두려움에 빠져 있던 제자들(17절; 요 20:19)이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있다. 예수의 부활과 승천 사실이 그들에게 새 힘과 용기를 제공한 것이다. 이 같은 묘사는 53절과 함께 사도행전에서 나오는 사도들의 활동을 암시적으로 예시해 주고 있다.
카이 에산 디아 판토스 엔 토 히에로 율로군테스 톤 데온
개역개정,53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새번역,53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날마다 성전에서 지냈다.㉪ / ㉪다른 고대 사본들은 끝에 ‘아멘’이 있음
우리말성경,53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계속 성전에 있었습니다.
가톨릭성경,53 그리고 줄곧 성전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며 지냈다.
영어NIV,53 And they stayed continually at the temple, praising God.
영어NASB,53 and were continually in the temple praising God.
영어MSG,53 They spent all their time in the Temple praising God. Yes.
영어NRSV,53 and they were continually in the temple blessing God.
헬라어신약Stephanos,53 και ησαν διαπαντος εν τω ιερω αινουντες και ευλογουντες τον θεον αμην
라틴어Vulgate,53 (없음)
히브리어Modern,53 ויהיו תמיד במקדש מהללים ומברכים את האלהים אמן׃
성 경: [눅24:53]
주제1: [인자의 부활과 승천]
주제2: [예수의 승천]
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 매우 진지한 신학적 의미를 담고 있는 누가복음의 마지막 구절은 두 가지 의미를 시사해 주고 있다. 첫째는, 성전 안에서 예수의 명령대로 위로부터 오는 능력, 즉 성령의 충만함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점이다. 누가에게서 성전이 강조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성전에서의 가르침과(19:47; 21:37,38) 관련 지어볼 때 기독교의 발생이 구약 전통(傳統)과 성전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니라 구약의 전통에 기초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 둘째는, 그들이 하나님을 찬송하였다는 점이다. ‘찬송하니라’ 대신에 ‘축복하다'(*, 율로군테스)는 말로 언급되었든 또는 ‘찬양하고 축복하다'(*, 아이눈테스 카이 율로군테스)로 되어 있든 각 사본마다의 차이점을 하나로 묶어 주는 것은 예수에 관한 사건 즉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 사건을 모두 하나님과 관계된 사건으로 확인하였다는 점이다. 그들은 예수의 모든 활동과 삶 전체를 하나님과 관련시켜 이해하게 된 것이다. 누가는 또한 자신의 복음서를 마치면서 자신의 책에 기록된 예수에 관한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섭리와 능력에 근거된 것임을 간접적으로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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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튜헨리주석997-누가복음 24장
누가복음 24장
Ⅰ. 부활 24:1-12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명하는 결정적 증거들이 우리와 우리 자손들에게 밝히 드러나 있다. 그 증거들을 여기서 찾아볼 수 있다.
(1)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를 따르던 선한 여자들이 그리스도가 죽고 장사지낸 바 뒤에도 그리스도께 사랑과 경의를 표하는 것을 볼 수 있다(1절). 그들은 안식일이 지나자마자 서둘러 무덤에 갔다. 그들은 시체에 향료를 뿌리고, 얼굴과 머리 그리고 아마 상처난 손과 발에도 향유를 바르며 우리가 흔히 시체나 무덤 주위에 꽃을 뿌리는 것과 같이 시체나 그 주위에 향료를 뿌리려고 했다. 그리스도를 위한 이들 착한 여자들의 열심은 식지 않았다. 그 여자들은 안식일 전날 저녁에 예비해 놓은 향품을 가지고 안식일이 지난 새벽 일찍 무덤에 갔다. 그리스도를 위해 준비한 것은 그분을 위해 쓰라. 이 여자들의 이름이 주목을 받고 있다. 즉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 또한 이들과 함께 있던 다른 여자들도 주목을 받고 있다(1,10절). 그들은 향품을 준비하는 데는 동참하지 않았지만 그들을 따라 무덤에 갔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후 그를 아는 자들이 더 늘어난 것처럼.
(2) 그들은 돌이 굴려 옮겨지고 무덤이 빈 것을 보자 놀랐다(2,3절).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지고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않자 매우 근심했다(4절). 선한 그리스도인들은 가끔 자기들에게 이로가 되고 힘이 될 일을 가지고 근심할 때가 있다.
(3)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천사가 나타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잘 설명해 준다. 천사들을 보자 그 여자들은 두려웠다. 그들은 무덤에서 사랑하는 주님을 찾아보려고 얼굴을 땅에 대었다. 그들은 찬란한 옷을 입은 천사가 아니라 수의를 입은 주님을 찾고 싶었다. 천사들은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는 여자들을 꾸짖었다.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5절). 이로써 그리스도가 살아 계시다는 것을 증거한다. “구주께서 살아계심을 압니다.” 이 사실은 성도들 모두의 위로가 된다. 왜냐하면 그분이 살아계시기 때문에 또한 우리를 살리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찾는 자들은 책망을 받았다(6절). “그분은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다. 그분은 무덤을 떠나셨다.” 천사들은 그 여자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직접 하신 말씀을 환기시킨다.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6절). 그들이 부활의 예언을 믿고 명심했더라면 그 일이 발생했을 때 쉽게 부활을 믿었을 것이다. 천사들은 그리스도가 전에 하신 말씀을 그 여자들이 들을 수 있도록 다시 한번 반복한다.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7절). 예수께서는 자기가 십자가에 못박혀야 한다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들은 항상 이 말씀 뒤에 따라 나오는 말씀 즉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는 말씀을 명심하지 못한 것일까? 하늘에서 내려온 이 천사들은 새 복음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을 생각나게 하며 그 말씀을 어떻게 적용시켜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 준다.
(4) 이 말씀을 듣고 여자들은 만족했다(8절). 그들은 예수의 말씀을 기억했다. 그 말씀을 기억하자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면 더 이상 찾을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적절한 때에 기억하면 하나님의 섭리를 바로 깨닫는 데 도움이 된다.
(5) 그들은 사도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 무덤에서 돌아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모든 다른 이에게 고하니(9절). 잠시 후 그날 아침에 그들 모두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소식을 어떻게 받아들였는가를 말하고 있다. 사도들이 저희 말이 허탄한 듯이 뵈어 믿지 아니하나(11절). 그들은 그 말을 단지 여자들이 환상을 보고 하는 말일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을 상상력으로 돌리고 말았다. 왜냐하면 그들도 또한 그리스도의 말씀을 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다고 몇번씩이나 고백했던 그들 사신 후 영광의 자리로 들어가신다는 말을 수차례나 들었던 그들 아닌가? 그런데도 그 사실을 믿지 못하고 주저하는 제자들의 어리석음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6) 베드로는 이 사실에 대해 조사를 했다(12절). 베드로가 무덤으로 달려간 이야기와 특별히 관련된 요20:1,2을 보면 이 소식을 베드로에게 전한 사람은 막다라 마리아였다. (1) 그 소식을 듣자마자 베드로는 서둘러 무덤으로 갔다. 만약 막달라 마리아가 베드로에게 파숫군이 도망갔다는 말을 해주지 않았다면 그리로 갈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위험하지 않을 때는 발이 빠른 많은 사람들이 위험할 때는 황소 걸음이 된다. (2) 무덤을 살펴 보고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시체를 쌌던 세마포가 벗겨져 곱게 개어 있고 시체는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베드로는 마치 천사들의 증언보다도 자기 눈을 더 믿는 것처럼 꼼꼼하게 살펴 보았다. (3) 베드로는 그 된 일을 기이히 여기며 집으로 돌아갔다. 베드로는 그 사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지를 몰랐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바로 알기만 하면 우리에게 아주 유익한 일들도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를 당황케하는 일이 많다.
Ⅱ.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24:13-35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신 사실을 앞에서도 나왔다. 그러나 앞에서는 언급만 했을 뿐이며(막 16:12) 여기서 비로소 자세히 말하고 있다. 그 사건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첫 달 즉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운 세계가 시작된 그 날 일어났다. 두 제자 중의 한 사람은 글로바였으며 나머지 한 사람은 확실하지 않다. 9절 말씀으로 보아 그는 열 한 사도와 함께 있던 자였다.
(1) 두 제자의 목적지와 대화 내용: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약 2시간 쯤 걸리는 엠마오라 하는 촌으로 갔다(13절). 주님이 부활하신 그날 아침에 전해 들은 이야기를 그들은 허탄한 말로 여기고 있었다. 그들은 엠마오로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했다(14절).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에 대해 의견을 주고 받았다.
(2) 예수님이 오셔서 그들과 동행하시매 그들은 좋은 동료를 만나게 되었다.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15절). 예수께서는 낯선 사람인양 우연히 같은 길로 가게 된 것처럼 꾸며 함께 동행하고 싶다고 말했다. 두 사람이 그러한 일에 열중하고 있는 곳에 그리스도께서는 기꺼이 오셔서 그들 중의 하나가 되신다. 이같이 신앙과 사랑이 잘못된 두 사람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 삽겹줄”이 된다. 그들은 서로 이야기하고 문의하면서 그리스도를 찾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오신 것이다. 그리스도를 찾는 자들은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그들과 함께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처음에 그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 인줄 알아 보지 못하거늘(16절). 어쨌든 그들은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심으로써 그들은 훨씬 더 자유롭게 그리스도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으며 그리스도도 그들에게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3) 그리스도는 그들을 알고 계셨으나 그들이 그리스도를 알아 보지 못하고 주고 받은 대화:친구들이 신분을 감추거나 변장을 하고 만났을 때처럼 그들도 여기서 질문을 주고 받고 있다.
1)그리스도께서 처음 하신 질문은 그들이 슬퍼하고 있는 데 대한 것이었다.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 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17절).
①그들은 슬펐다. 그들은 사랑하는 주님을 잃었으며, 주님께 걸었던 기대가 무너져서 실망하고 있었다. 그들은 근본을 포기했다. 그래서 무슨 수로 그것을 보충해야 할지 몰랐다. 그분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지만 그들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거나 믿지 않았다. 그리고는 여전히 슬퍼하고 있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기뻐해야 할 때인데도 슬퍼할 때가 종종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에 관해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그리스도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 즉 하나님과 하나님의 섭리에 관해서 이야기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다. 좋은 친구와 좋은 대화는 우울증을 치료하는 데 효과가 있다. 슬픔을 밖으로 표현함으로써 평정을 되찾게 된다. 같이 울어줌으로써 서로 위로를 받는다. 같이 울어주는 것이 때로는 가장 큰 위로가 된다.
②그리스도는 그들에게 다가가셔서 그들이 하는 이야기에 대해 물어셨다. 서로 주고 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17절).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승귀의 상태로 들어가셨지만 자기 제자들에게는 여전히 다정하셨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슬픔을 아시며 그들이 당하는 괴로움을 보고 괴로워하신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사교적이 되라고 가르쳐 주신다. 지나치게 소심한 것보다는 건전하나 사고를 즐기는 것이 그리스도인에게 적합하다. 또한 우리에게 동정을 베풀라고 가르치신다. 슬픔 가운데 있는 친구를 발견하면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 같이 그들의 슬픔을 알아 주도록 하자.
2)그 일을 알지 못하는 데 대해서 그들은 물었다. 당신이 예루살렘에 우거하면서 근일 거기서 된 일을 홀로 알지 못하느뇨(18절). 글로바가 그리스도께 정중하게 답변했다. 우리에게 정중한 자들에게 우리는 정중해야만 한다. 그때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매우 위험한 때였다. 그런데 글로바는 이 낯선 사람이 자기들을 해치려고 접근한 것이 아닌가하고 경계하지 않았다. 그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죽음 그리고 그리스도의 수난에 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 의아했다. “아니! 당신이 예루살렘에 살면서 예루살렘에서 우리 주님이 당하신 일을 모른단 말입니까?” 그는 이 낯선 사람에게 그리스도에 관해 알려 주고 싶어한다. 그는 어떤 사람이라도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걸 보고는 그냥 두지 못했던 것 같다. 낯선 사람에게 가르쳐 주려고 했던 자들이 예수께 가르침을 받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리스도는 가진 자와 가진 것을 쓰는 자에게 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글로바의 말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하여 예루살렘이 소란해졌으며, 거기 살면서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던 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3)대답하는 대신 그리스도는 그들이 아는 바에 대해 물으셨다. 가라사대 무슨 일이뇨(19절). 이렇게 해서 자신을 더 낯선 사람처럼 꾸미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앞에 예비되어 있는 기쁨에 비하여 자기가 받으신 고통을 가볍게 여기셨다. 그가 얼마나 태평하게 자신이 받았던 고통을 뒤돌아보는지 살펴 보라. 그분에게는 무슨 일인지 알아야 할 이유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 고통이 그분에게는 너무나 쓰라리고 가혹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무슨 일이뇨’하고 묻는다. 그들은 틀림없이 알고 있는 바를 말해 줄 것이다. 그러면 그리스도는 그 신비를 깨닫게 해 줄 것이다.
4)그러자 그들은 그리스도에 관해 특별한 이야기를 하였다. 19절 이하에서 그들이 말하고 있는 내용을 잘 살펴 보라.
①그들의 말 속에는 그리스도의 생애가 요약 되어 있다.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던 것은 나사렛 예수에 관한 일이었다. 나사렛 예수는 선지자이며, 하나님께서 보내 주신 선생이셨다. 그는 영광스러운 이적 곧 자비의 이적을 많이 베푸심으로써 이를 확증하셨다. 그분은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분이었다. 사람들 앞에서는 대단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능하신 분이었다. 예루살렘에 살면서 이 사실을 모르는 자는 이상한 사람이다.
②그들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말하고 있다(20절).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그들이 그리스도를 비난하지 않은 것이 이상하다.
③그들이 슬퍼하는 이유가 그분께 대한 실망 때문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21절). 그에게 이스라엘의 구속과 위로를 기대하였다. 바라는 것이 늦어지면 실망하게 되지만 바라던 것이 무너지면 절망하게 된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 그러나 그 사람이 바로 이스라엘을 구속한 사람이 아닌가? 그의 죽음으로써 가장 어려운 임무를 마치셨으므로 그들은 어느 때보다 그가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믿어야 하는 것이다.
④그들이 지금 놀라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오늘이 바로 그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지 사흘째 되는 날입니다. 게다가 오늘은 다시 살아나셔서 사흘 전에 수치스러운 모습을 보이셨던 것 같이 영광 중에 모습을 드러내시리라고 기대했던 날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잠잠하기만 합니다.” 그가 살아나셨다는 소문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는 있으나 대단찮게 말하고 있다(22,23절).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저희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으셨다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단지 그들이 환상을 보았을 뿐인 것 같습니다. 왜 흔히 여자들은 그런데 쉽게 빠지지 않습니까?” 그들은 사도들 중 몇 사람도 무덤에 갔다가 무덤이 비어있는 것을 보았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24절). “하지만 그들은 예수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살아나신 것이 아니라고 염려하는 것입니다. 그가 살으셨다면 분명히 그들에게 나타나셨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그가 살아나셨다고 생각할 이유가 더 이상 없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모두 그의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그의 무덤에 묻혔습니다.”
⑤주님은 얼굴로 그들에게 알리시지는 않았지만 말씀을 통하여 그들에게 자신을 알리셨다.
㉠그는 구약을 잘 믿지 못하는 그들을 꾸짖으셨다. 미련하고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25절). 그리스도는 그들을 미련하다고 하셨다. 악한 자라는 뜻이 아니고 연약한 자라는 뜻으로 말씀하셨다. 그들이 미련하다고 책망을 받은 이유는 첫째로 그들이 더디 믿었기 때문이다. 마음에 더디 믿으며 한번도 공정하게 판단하지 않고 선입견으로 멀리하는 자들은 미련한 자들이라고 그리스도는 말씀하신다. 둘째로 선지자의 말을 더디 믿었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성경에 좀 더 정통하고 성경에 나와 있는 만큼만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정통하다면 가끔씩 우리를 사로잡는 당혹함에서 자유를 얻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고난이야말로 그가 영광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며 다른 길로는 그 영광에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신다.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26절). 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여기서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오해를 벗겨 주는 두 가지 사실을 보여주신다. 첫째, 메시야는 이런 고난을 당하셔야만 한다. 그러므로 그가 받으신 고난은 그가 메시야되심을 부정하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그가 메시야됨을 실제로 증거하는 것이다. 고난을 받지 않으셨다면 결코 구세주가 되실 수 없었을 것이다. 둘째, 이런 고난을 당하신 다음 그는 영광에 들어가셔야 한다. 그는 부활하실 때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셨다. 그것을 자기의 영광이라고 하셨다. 그것은 세상이 생기기 전 그에게 있었던 바로 그 영광이다. 그는 먼저 고난을 당하시고 그런 다음에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셔야 한다. 우리에게도 먼저는 가시 면류관을 그 다음에는 영광의 면류관을 기대하라고 명하신다.
㉢그는 구약 성경을 자세히 설명해 주시며 그 말씀이 나사렛 예수 안에서 어떻게 성취되었는가를 보여 주셨다(27절).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면서 자기가 받은 고난을 통해 그 말씀이 성취되었음을 가르쳐 주셨다. 모든 성경에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이 산재해 있다. 예언이든지 약속이든지 기도든지 또는 다른 형식으로든지 그리스도에 관한 것을 얻지 못하고서는 성경 어느 부분도 통달할 수가 없다. 복음의 은혜라는 황금실이 구약이라는 천을 지나가고 있다. 그리스도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있다. 섭리에 따라 그때는 막연했지만 지금은 장막이 벗겨지고 신약이 구약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가장 훌륭한 성경 주석가이시다. 특히 자기에 관한 성경에 있어서 성경을 연구할 때는 조직적으로 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구약의 빛은 점차 밝아지기 때문이다. 하나니께서 얼마나 빈번하게 그리고 얼마나 다양한 방법으로 족장들에게 아들에 관해서 말씀하셨으며 또 그 족장들을 통하여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시는지를 살펴 보는 것이 좋다.
(4) 마침내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나타내셨다. 길을 가면서 제자들에게 하신 설교나 성경 강해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 보았어야 했다. 그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설교와 강해가 퍽 마음에 들어서 여행이 빨리 끝난 것처럼 생각되었다. 또한 사실이 그러했다. 저희의 가는 촌에 가까이 가매(28절).
1)그들은 예수께서 함께 머무시기를 바랬다. 예수는 더 가려하는 것 같이 하시니(8절). 예수께서 더 가겠다고 말씀하신 것은 아니지만 그들에게는 더 가려하는 것 같이 보였다. 만약 그들이 함께 머물러 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다면 예수께서는 더 가셨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시기를 원하는 자들은 그리스도를 초청하며 끈질기게 졸라야 한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서 멀어진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단지 우리가 끈질기게 졸라대는 일을 멀리한 것일 뿐이다. 그들은 아주 간절한 목소리로 강권하여 말했다. 함께 유하사이다.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기쁨을 맛 본 자들은 더욱더 그것을 열망하게 되며, 하루 종일이라도 함께 동행해 주실 뿐만 아니라 밤 중에도 함께 계셔 주시기를 간청하게 된다. 예수는 그들이 조르는 바대로 들어 주셨다. 이에 저희와 함께 유하러 들어 가시니라(29절). 그리스도는 “누구든지 문을 열고 들어오라고 간청하면 그에게로 들어가리라”고 약속하셨다(계 3:20).
2)그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셨다(30,31절). 그는 길에서 시작한 이야기를 계속하신 것 같다.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식사 준비는 곧 끝났을 것이며, 그 식사는 빈약했을 것이다) 그는 제자들을 즐겁게 해 주셨다. 마침내 그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서야 비로소 그들은 자기들과 내내 이야기를 나눈 분이 예수이심을 알게 되었다. 음식을 먹을 때 즉 그가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자 비로소 그분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 음식은 보리떡 다섯 개와 같은 “이적적인” 음식도 아니며 성만찬에서와 같은 “성례적인” 음식도 아니다. 단지 보통 음식일 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때와 같은 행동을 취하심으로써 특별한 의식에서 뿐만 아니라 일반 섭리 가운데서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교제를 계속하라고 가르치신다. 음식을 대할 때마다 그리스도를 식탁의 상좌에 모시며, 음식을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축복해 주신 것으로 알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먹고 마시자. 그가 떼어 주신 음식이 아무리 보잘 것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감사함으로 받도록 하자. 그들은 눈이 밝아져 그가 누구인줄 보게 되었으며 그를 알아 보았다. 안개는 걷히고 장막은 벗겨졌으며 그분이 주님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분은 다른 사람의 모습을 하실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이 그분의 모습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의 모습은 틀림없이 그분에게만 나타난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성령과 은혜로 자신을 알리신 방법에 주목하라. 그는 그들의 마음의 눈을 여심으로써 그 일을 완전히 이루신다. 계시를 주신 그분이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여전히 어두움 가운데 있게 된다.
3)그리스도는 저희에게 얼핏 보이신 후 가버리셨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순간적으로 보게 된다. 즉 우리가 그를 보지만 잠시 후에는 다시 그 모습이 사라지는 것이다.
(5) 제자들은 그리스도와 나누던 대화를 생각하면서 예루살렘에 있는 형제들에게 그 소식을 전한다.
1)그리스도와 대화하면서 받았던 느낌을 각자 돌이켜 본다. 저희가 서로 말하되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32절). 이처럼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하셨던 설교를 돌이켜 보면서 의견을 나눈 것이 아니라 마음을 나누었다. 그들이 비록 설교하시는 분을 보지 못했다 할지라도 그 설교가 능력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 설교는 매우 단순했다. 게다가 그 설교로 인해 그들의 마음 속에는 “거룩한 빛”과 “거룩한 열정”이 생겨났다. 내내 자기들과 같이 이야기를 나누셨던 분이 바로 자기들이 본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셨다는 것을 확실히 믿게 되자 비로소 이 사실에 주목한다. 그러면 어떤 설교가 유익한 설교일까? 그리스도께서 하신 설교와 같이 단순한 설교이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또한 성경적인 설교여야 한다.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 목사들은 교인들에게 성경에 있는 신앙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또한 성경으로 자기들의 지식과 신앙의 원천을 삼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설교를 들어야만 유익한가? 마음이 뜨거워져야 한다. 하나님의 일 특히 우리를 대신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동하며, 그로 인해 우리 마음 속에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생겨나며, 거룩한 소원에 사로잡힐 때 우리 마음은 뜨거워진다.
2)그들은 이 소식을 예루살렘에 있는 형제들에게 전했다(33절). 그들은 곧 그 즉시로 일어났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알리시자 그들은 너무나 기뻐서 식사를 마칠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 저녁 무렵이었지만 그들은 전속력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그리스도를 만난 그들은 다른 제자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해 주어 그들의 흔들리는 신앙을 강건케 하며 그들의 슬픈 마음을 위로해 주어야만 안심할 수가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영혼을 위해 이루신 일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나타내 주신 바 된 사람들이 당연해 해야 할 의무이다. 제자들의 마음은 이 일로 가득차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형제들에게 가서 그 기쁨을 나누어 주었던 것이다. ①그들은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증거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열 한 사도와 평소부터 알고 지내던 자들이 밤 늦게 모여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다가 이 두 사람이 들어가자 기쁨과 환희에 차서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내셨다”고 말해 주었다(34절). 다른 제자들보다 먼저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본 사실은 고전15:5에 나타난다.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천사는 여자들에게 그 사실을 특별히 베드로에게 전해서 그를 위로하라고 명령했다(막16:7). 또한 특별한 기록은 없지만 바로 그날 주님께서 친히 베드로에게 나타나셨을 가능성이 많다. 그것을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에게 이야기했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유의할 것은 베드로가 그 사실을 전하며 자랑하지 않고 다른 제자들이 “주께서 과연 살아나셨다”고 기뻐하며 말한 사실이다. 주님은 여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뿐만 아니라 시몬에게도 나타나셨다. ②그들이 본 것을 말함으로써 부활의 증거를 더 확실히 했다(35절).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을 말하였다. 그리스도가 길에서 그들에게 하신 말씀을 여기서는 길에서 된 일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그 말씀으로 인해 놀라운 일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한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마침내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였다.
Ⅲ. 사도들에게 나타나신 그리스도 24:36-49
그리스도는 부활하신 날에 다섯 번 나타나셨다. 그리스도는 동산에서 막달라 마리아에게(요 20:14),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한 여자들에게(마 28:9), 베드로에게,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그리고 밤 열 한 사도에게 나타나셨다.
(1)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시자 그들은 대단히 놀랐다. 그는 아주 적절한 때에 그들 가운데 나타나셨다. 그때 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증거에 대해서 의견을 교환하고 있었다.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 가운데 서심으로써 그 증거를 확실히 하셨다.
1)그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하셨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36절). 이 말씀으로 보아 지금 그리스도께서 사랑과 우정의 표시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음을 알 수 있다. 제자들은 그리스도를 보았다는 사람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래서 친히 찾아 오신 것이다. 전에 그는 부활하신 후 갈릴리에서 그들을 보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하지만 그는 제자들이 너무나 보고 싶어서 그 약속을 앞당겨 예루살렘에서 그들을 보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는 가끔 자기가 말씀하신 것보다 못하신 적은 없다. 그들에게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라는 말씀이었다. 이런 말씀을 먼저 하심으로써 그는 베드로가 자기를 부인한 것이나 나머지 다른 제자들이 자기를 버리고 달아난 것을 책망하려고 오신 것이 아님을 평화스럽게 오셔서 그들을 이미 용서하셨음을 나타내셨다.
(2) 그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심히 놀랐다(37절). 그들은 영을 보는 것처럼 생각해서 무서워했다. 왜냐하면 자기들이 미처 알아차리기도 전에 그가 자기들 가운데 계셨기 때문이다. 그들이 “유령이라”고 말했을 때 사용한 단어는 허깨비, 귀신이란 뜻을 갖고 있다. 그러나 여기 쓰인 단어는 영혼이란 뜻이다. 육체를 입지 않은 영으로 그들은 생각했던 것이다.
(2) 그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은 대단히 만족했다.
1)그들이 이유 없이 두려워하는 것을 보고 책망하셨다.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38절).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잘 살펴 보라. ①두려워할 때는 언제나 마음 속에 해로운 의심들이 일어나기 십상이다. 때로는 마음에 일어나는 의심 때문에 두려움이 생기기도 하고 때로는 두려워하기 때문에 의심이 일어나기도 한다. 겉으로는 당당하지만 속으로는 두려워한다. ②그리스도를 오해하는 데서 마음을 동요시키는 의심이 생겨난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보고는 영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우리를 깨우치시며 겸손케 하실 때, 그리스도께서 섭리를 통하여 우리를 연단하시며 우리로 회개하게 만드실 때 우리는 마치 그분이 우리를 해치려는 것으로 오해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두려워하게 된다. ③마음 속에 어지럽게 의심이 일어날 때 주님은 언제나 그것을 눈치채신다. 그는 의심하였다고 제자들을 책망하심으로써 의심하면 우리도 책망받는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다.
2)제자들에게 부활의 증거를 보여 주심으로써 그들의 두려움이 사라지게 하셨으며 그들의 신앙을 굳건하게 만드셨다. 그는 제자들에게 두 가지 증거를 보여 주셨다.
①그는 자기의 몸 특히 손과 발을 보여 주신다. “내 손과 발을 보라. 나에게 손과 발 즉 실제 육체가 있는 것을 보라. 못자국 난 손과 발이 보이지 않느냐? 이것은 다른 사람의 육체를 빌린 것이 아니고 너희가 보았던 바대로 십자가에 못박혔던 나의 몸이다.” 그는 영은 살과 뼈가 없다는 원리를 말씀하신다. “너희가 그렇게 친하게 지내고 그렇게도 가깝게 대화를 나누던 바로 나다. 두려워 말고 기뻐해야 할 바로 나란 말이다.” 우선 그는 그들의 시각에 호소하면서 못에 찔린 손과 발을 보이신다. 그리스도의 영화된 몸에는 못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그 못자국으로 자기임을 증명할 수 있었다. 그는 그 못자국을 보이셨다. 후에 그는 도마에게도 그 못자국을 보이셨는데 그것은 그가 우리를 위해 고난 받으신 것을 부끄러워 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그리스도의 고난을 부끄러워하거나 그리스도를 위한 우리의 고난을 부끄러워 할 이유가 없다. 다음에 그는 그들의 감각에 호소하신다. 만져 보라. 그전에 막달라 마리아에게는 만져 보지 못하게 하셨었다(요 20:17) 그런데 여기서 제자들에게는 만져 보게 하셨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선포하고 그로 인해 고난을 받게 될 그들인지라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충분히 납득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들에게 자기를 만져 보게 하심으로써 자기가 영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실히 믿게 하셨다. 기독교 초기에는 그리스도가 실체적인 육신을 입지 않으셨으며 실제로 탄생하거나 수난을 당한 적이 없다고 하는 이단들이 많이 있었다. 감사하게도 이런 이단들은 벌써 오래 전에 매장당했으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이나 유령이 아니라 부활하신 후에도 실제 육신을 입으신 분임을 알고 또한 확신한다.
②자기의 몸이 실체임을 보여 주시려고 함께 잡수셨다. 베드로는 이 사실을 대단히 강조한다.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신 후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행 10:41).
첫째, 저희가 너무 기쁘므로 오히려 믿지 못하고 기이히 여길 때에(41절). 그들이 약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도 부활에 대해 믿기를 주저했다는 사실을 도리어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믿기를 주저했다는 사실은 도리어 그리스도의 부활이 참되다는 것을 확증한다. 대제사장들이 주장한 것처럼 그들은 그의 시체를 숨겨 놓고는 그가 살아나셨다고 거짓말한 것이 아니라 그가 살아나셨는데도 계속해서 그는 살아나지 않았다고 말하려 한다. 후에 그들이 그것을 믿고 거기에 모든 것을 걸게 되었을 때 부활은 무엇보다도 완벽한 증거를 갖게 된 것이다. 이것이 그들의 약점이기는 했지만 용서받을 수 있는 약점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들 앞에 드러난 증거들을 무시하고 믿지 않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너무 기뻐서 믿지 못했다. 그것은 너무도 좋은 소식이라 사실로 생각할 수 없었다. 또한 그들은 기이히 여겼다. 그것은 너무나 좋고 엄청난 일이어서 사실로 믿어지지가 않았던 것이다.
둘째, 그들에게 더 확신을 갖게 하고 용기를 주시려고 주님은 먹을 것을 청하셨다. 주님은 여기서 실제로 그들과 함께 잡수심으로써 그의 육체가 다시 살아난 사실을 증명하셨다. 그들은 주님에게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렸다(42절). 이것은 간소한 식사였다. 그러나 제자들이 그것을 먹는다면 주님께서도 같은 것을 잡수실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에서 제자들은 주님과 같이 먹기 때문이다.
3)주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해 주셨다. 주님이 그들과 함께 계셨을 때 하신 말씀을 상기시키셨다. “이 말씀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 내가 너희에게 들려 주었던 말씀이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만 잘 기억한다면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도 잘 깨닫게 된다. 주님은 구약에서 읽었던 말씀을 인용하신다.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44절). 메시야에 대해서 구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곧 그의 나라에 관한 것뿐 아니라 그의 수난에 대해 기록된 모든 것이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어야 한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라도 다 이루어져야 한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그와 관련된 구약성경을 몇가지 언급하셨다. 즉 모세의 율법과 선지서와 시편, 하나님께서 이미 오래 전에 다양한 방법으로 자기의 뜻을 나타내신 것을 살펴 보라. 곧 주님은 그들의 마음에 역사하셔서 그리스도에 대해 구약에서 예언된 말씀의 의미와 참뜻을 깨닫게 하셨다.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45절). 두 제자와 이야기하시면서 주님은 마음을 여심으로써 성경 본문을 가리운 장막을 걷어내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으로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역사하신다. 성령은 우리 영에 접근하셔서 즉시로 그것을 지배하실 수 있다. 아무리 선한 사람이라도 마음을 여심으로써 성경 본문을 가리운 장막을 걷어내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으로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역사하신다. 성령은 우리 영에 접근하셔서 즉시로 그것을 지배하실 수 있다. 아무리 선한 사람이라도 마음을 열어야 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아무리 어두움 자체는 아니라 하더라도 많은 경우에 있어서 어두운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의 마음 속에 신앙을 심는 방법은 바로 마음을 여는 것이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그는 문을 통하여 사람들의 마음 속에 들어가시는 것이다. 마음을 여는 의도는 우리로 성경을 깨닫게 하자는 것이다. 이 말은 우리로 성경에 기록된 것은 좀 더 잘 깨닫게 한다는 뜻이 아니고 성경에 기록된 것은 좀 더 잘 깨닫게 한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이 세상에서 결코 성경 이상을 배울 수가 없다. 즉 그들은 성경으로부터 계속해서 배워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4)주님은 사도의 신분을 지닌 그들에게 교훈하셨다.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48절). 너희의 본 바를 온 세상에 전하여야 하리라. 너희는 이 모든 일을 확실히 안다. 너희는 이 모든 일의 목격자다. 가라. 가서 세상에 이 모든 일을 확실히 증거하라.
①그들이 전파해야 할 내용:그들은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 그들은 성경을 가지고 다니면서 메시야에 대해서 그리고 그의 나라의 영광과 은혜에 대해서 옛적에 어떻게 기록되었는가를 보여 주며 그 모든 것이 주 예수 안에서 어떻게 성취되었는가를 말해 주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위대한 복음 진리를 사람들에게 알려야만 한다(46절).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이 기록되었으니. 가서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께서 고난받으신 것을 세상에 말하라. 가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하라. 그의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말며 고난받는 예수를 부끄러워 하지 말라.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아야만 했던 것과 세상의 죄를 없이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고난은 필수적이었던 사실을 전하라. 또한 그리스도가 삼일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사실을 전하라.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또한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느니라. 가서 말하라. 죽었던 그리스도가 지금 살아 계시다고. 또한 그리스도는 영원히 시사며 죽음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신 분이라고. 복음이 요구하는 회개의 의무가 인류에게 강조되어야 한다. 죄의 회개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권위로 전파되어야 한다(47절). 가서 사람들에게 말하라. 돌이켜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께 예배하라고. 그들의 심령과 삶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죄사함이라는 엄청난 복음의 특권이 모든 사람에게 제시되어야 한다. 모든 사람에게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명령을 확실히 말해주어야 한다. 가서 죄악된 세상에 희망이 있음을 말해 주라.
②그들이 전파해야 할 대상:그들은 모든 죄인에게 이를 전파해야 한다. 그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가는 곳마다 이 빛을 전하여야 한다. 선지자들은 유대인에게 회개와 죄사함을 전파했지만 사도들은 온 세상에 이를 전해야 하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회개하라는 복음의 의무에서 면제될 수 없으며 어느 누구도 측량할 수 없는 복음의 은혜에서 제외될 수 없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복음의 날이 시작되어야 한다. 그러면 왜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시작해야만 하는 것일까? 첫째, 성경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으므로 그들은 이 방법을 취해야만 한다.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사 2:3). 둘째, 복음의 기초가 된 사건들이 예루살렘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에서 먼저 그 사실들이 입증되어야 한다. 부활하신 구세주의 영광을 비추는 최초의 빛이 너무도 강렬해서 그를 대적하는 대담한 원수들을 대항해서 무색하게 만든다. 셋째,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수를 용서하는 본을 보여 주려고 하시기 때문이다. 복음의 은혜가 제일 먼저 예루살렘에 베풀어진다. 그리고 거기서 잠시 후에 수천명이 그 은혜를 공유하게 된다.
③복음을 전파할 때 그들에게 주어질 능력: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우리라(49절). 주님은 여기에서 잠시 후면 그들에게 성령을 전에 없이 충만하게 부어 주실 것이며 그로 인해 그들에게 맡겨진 막중한 책임을 감당하는 데 필요한 은사와 은혜를 완전히 갖추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성령을 받는 자는 그로 인해 능력을 입게 된다. 만약 사도들이 그런 능력을 입지 못했더라면 그들이 행한 바 주의 복음을 심고 이 세사에 주의 나라를 건설하는 일을 결코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위로부터 온 능력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약속이었다. 그렇다면 그것이 틀림없는 것이며 약속된 것은 말할 수 없이 귀중한 것임이 분명하다. 그리스도의 사자들은 능력을 갖게 될 때까지 머물러야 한다. 아무리 복음 전파가 시급하다고 여겨지더라도 전도자들은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기다려야만 한다.
Ⅳ. 그리스도의 승천 24:50-53
그리스도의 승천에 관한 내용을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다.
(1) 그리스도는 매우 엄숙하게 제자들을 떠나셨다. 주님에게는 양쪽 세상에서 하실 일이 있으셨다. 그래서 주님은 하늘로부터 땅에 오심으로써 성육신하셔서 이 땅에서 하실 일을 온전히 마치셨다. 그리고 그 일을 다 이루신 후에는 하늘로 돌아가셔서 그곳에 거하고 계신 것이다.
1)주님이 승천하신 곳:예루살렘 가까이 감람산과 인접한 베다니에서였다. 그곳에는 주님의 수난이 시작된 동산이 있으며 거기서 주님은 매우 고민하고 계셨다. 베다니는 “슬픔의 집”이란 뜻이다. 천국에 가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고난과 슬픔의 집에서 천국에 가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고난과 슬픔의 집에서 천국에 오르게 된다. 또한 여기서 주님은 얼마 전에 당당한 예루살렘 입성을 시작하셨었다(눅 19:20)
2)주님께서 승천하실 때 목격한 사람들:주님은 제자들이 자기를 볼 수 있게 하셨다. 제자들은 주님이 무덤에서 부활하시는 것을 보지 못했다. 왜냐하면 주님이 부활하신 후에 살아계신 주님을 본 것만으로도 주님의 부활을 증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주님이 승천하시는 것을 보았다. 왜냐하면 달리는 주님의 승천을 증명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3)주님의 작별 인사:주님은 손을 들어 그들을 축복하셨다. 주님은 기분 나쁘게 떠나시지 않으셨다. 주님은 기쁘게 떠나셨다. 주님은 축복을 남기셨다. 주님은 그들을 축복하심으로써 이 세상에 있는 그의 백성들을 사랑하셨던 것처럼 끝까지 그들을 사랑하신 것을 보여 주셨다.
4)주님이 떠나신 방법:축복하실 때에 저희를 떠나(51절). 그렇게 하심으로써 주님은 그들을 떠나신다고 해서 그들을 축복하는 일을 끝내는 것이 아님을 암시하셨다. 주님은 지상에 계실 때 그들을 축복하기 시작하셨으며 하늘에 가셔서도 그것을 계속하고 계신다.
5)주님의 승천에 대한 표현:①주님은 그들을 떠나셨다. 우리를 사랑하며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우리를 가르치는 자들은 반드시 우리를 떠날 날이 있다. 세상적으로 그를 알던 자들도 이제부터는 더 이상 그를 그렇게 알지 않는다. ②주님은 하늘로 올리우셨다. 불병거나 불말이 필요 없었다. 주님은 그 길을 아시기 때문이다.
(2) 제자들은 계속해서 명랑하게 주님을 섬겼다. 주님이 떠나실 때 그들은 주님께 대한 경의를 표했다. 즉 그들은 주님께 경배했다(52절). 주님이 그들을 축복하자 그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그들은 주님께 경배했다. 그들이 부지 못하도록 구름이 주님을 가리웠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님이 그들이나 그들의 예배를 보지 못하신 것은 아니다. 그들은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갔다. 그들은 그곳에 가서 큰 기쁨으로 그곳에 머물렀다. 이것은 매우 놀라운 변화였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떠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을 때는 슬픔이 마음에 가득하던 그들이었건만 그분이 떠나는 것을 본 지금은 기쁨으로 가득차 있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약속을 기대하는 동안 신앙심에 가득차 있었다(53절). 그들은 기도 시간에 성전 예배에 참석했다. 그들은 주님이 예루살렘에 계실 때 그러셨던 것처럼 계속해서 성전에 있었다. 그리스도의 희생이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를 대신한 것을 알았지만 그들은 성전에서 부르는 찬양을 함께 드렸다. 거룩한 기쁨과 찬양보다 더 성령받을 마음의 준비를 훌륭히 시키는 것은 없다. 두려움은 사라지고 슬픔은 가라앉으며 소망만이 남는다. 아멘. 계속해서 그를 찬양할지어다.
#1-12 See the affection and respect the women showed to Christ, after he was dead and buried.
Observe their surprise when they found the stone rolled away, and the grave empty.
Christians often perplex themselves about that with which they should comfort and encourage themselves.
They look rather to find their Master in his grave-clothes, than angels in their shining garments.
The angels assure them that he is risen from the dead; is risen by his own power.
These angels from heaven bring not any new gospel, but remind the women of Christ’s words, and teach them how to apply them.
We may wonder that these disciples, who believed Jesus to be the Son of God and the true Messiah, who had been so often told that he must die, and rise again, and then enter into his glory, who had seen him more than once raise the dead, yet should be so backward to believe his raising himself.
But all our mistakes in religion spring from ignorance or forgetfulness of the words Christ has spoken.
Peter now ran to the sepulchre, who so lately ran from his Master.
He was amazed.
There are many things puzzling and perplexing to us, which would be plain and profitable, if we rightly understood the words of Christ.
#13-27 This appearance of Jesus to the two disciples going to Emmaus, happened the same day that he rose from the dead.
It well becomes the disciples of Christ to talk together of his death and resurrection; thus they may improve one another’s knowledge, refresh one another’s memory, and stir up each other’s devout affections.
And where but two together are well employed in work of that kind, he will come to them, and make a third.
Those who seek Christ, shall find him: he will manifest himself to those that inquire after him; and give knowledge to those who use the helps for knowledge which they have.
No matter how it was, but so it was, they did not know him; he so ordering it, that they might the more freely discourse with him.
Christ’s disciples are often sad and sorrowful, even when they have reason to rejoice; but through the weakness of their faith, they cannot take the comfort offered to them.
Though Christ is entered into his state of exaltation, yet he notices the sorrows of his disciples, and is afflicted in their afflictions.
Those are strangers in Jerusalem, that know not of the death and sufferings of Jesus.
Those who have the knowledge of Christ crucified, should seek to spread that knowledge.
Our Lord Jesus reproved them for the weakness of their faith in the Scriptures of the Old Testament.
Did we know more of the Divine counsels as far as they are made known in the Scriptures, we should not be subject to the perplexities we often entangle ourselves in.
He shows them that the sufferings of Christ were really the appointed way to his glory; but the cross of Christ was that to which they could not reconcile themselves.
Beginning at Moses, the first inspired writer of the Old Testament, Jesus expounded to them the things concerning himself.
There are many passages throughout all the Scriptures concerning Christ, which it is of great advantage to put together.
We cannot go far in any part, but we meet with something that has reference to Christ, some prophecy, some promise, some prayer, some type or other.
A golden thread of gospel grace runs through the whole web of the Old Testament.
Christ is the best expositor of Scripture; and even after his resurrection, he led people to know the mystery concerning himself, not by advancing new notions, but by showing how the Scripture was fulfilled, and turning them to the earnest study of it.
#28-35 If we would have Christ dwell with us, we must be earnest with him.
Those that have experienced the pleasure and profit of communion with him, cannot but desire more of his company.
He took bread, and blessed it, and brake, and gave to them.
This he did with his usual authority and affection, with the same manner, perhaps with the same words.
He here teaches us to crave a blessing on every meal.
See how Christ by his Spirit and grace makes himself known to the souls of his people.
He opens the Scriptures to them.
He meets them at his table, in the ordinance of the Lord’s supper; is known to them in breaking of bread.
But the work is completed by the opening of the eyes of their mind; yet it is but short views we have of Christ in this world, but when we enter heaven, we shall see him for ever.
They had found the preaching powerful, even when they knew not the preacher.
Those Scriptures which speak of Christ, will warm the hearts of his true disciples.
That is likely to do most good, which affects us with the love of Jesus in dying for us.
It is the duty of those to whom he has shown himself, to let others know what he has done for their souls.
It is of great use for the disciples of Christ to compare their experiences, and tell them to each other.
#36-49 Jesus appeared in a miraculous manner, assuring the disciples of his peace, though they had so lately forsaken him, and promising spiritual peace with every blessing.
Many troublesome thoughts which disquiet our minds, rise from mistakes concerning Christ.
All the troublesome thoughts which rise in our hearts at any time, are known to the Lord Jesus, and are displeasing to him.
He spake with them on their unreasonable unbelief.
Nothing had passed but what was foretold by the prophets, and necessary for the salvation of sinners.
And now all men should be taught the nature and necessity of repentance, in order to the forgiveness of their sins.
And these blessings were to be sought for, by faith in the name of Jesus.
Christ by his Spirit works on the minds of men.
Even good men need to have their understandings opened.
But that we may have right thoughts of Christ, there needs no more than to be made to understand the Scriptures.
#50-53 Christ ascended from Bethany, near the Mount of Olives.
There was the garden in which his sufferings began; there he was in his agony.
Those that would go to heaven, must ascend thither from the house of sufferings and sorrows.
The disciples did not see him rise out of the grave; his resurrection could be proved by their seeing him alive afterwards: but they saw him ascend into heaven; they could not otherwise have a proof of his ascension.
He lifted up his hands, and blessed them.
He did not go away in displeasure, but in love, he left a blessing behind him.
As he arose, so he ascended, by his own power.
They worshipped him.
This fresh display of Christ’s glory drew from them fresh acknowledgments.
They returned to Jerusalem with great joy.
The glory of Christ is the joy of all true believers, even while they are here in this world.
While waiting for God’s promises, we must go forth to meet them with our praises.
And nothing better prepares the mind for receiving the Holy Ghost.
Fears are silenced, sorrows sweetened and allayed, and hopes kept up.
And this is the ground of a Christian’s boldness at the throne of grace; yea, the Father’s throne is the throne of grace to us, because it is also the throne of our Mediator, Jesus Christ.
Let us rely on his promises, and plead them.
Let us attend his ordinances, praise and bless God for his mercies, set our affections on things above, and expect the Redeemer’s return to complete our happiness.
Amen.
Even so, Lord Jesus, come quickly.
메튜 헨리 주석, 누가복음 24장
24:1 부활(누가복음 24:1-12) 어떤 식으로 그리스도의 영혼과 육체가 부활을 통하여 재결합하였는가 하는 것은 하나의 신비적인 일이다. 우리에겐 “알려지지 않은” “우리에게 속하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그가 진실로 죽음에서 부활하셨으며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하였다는 그 부활의 “숨길 수 없는 증거”들은 “밝혀져 우리와 우리 후손들에게 알려졌다.” 지금 읽은 구절 속에는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에서 읽었던 내용과 본질적으로 같은 것들이 있다. Ⅰ. 그리스도가 죽어 장자 지낸 후에도 그를 따르던 선한 여인들이 그에게 보여 준 사랑과 존경심을 읽을 수 있다(1절). 그들은 안식일이 지나자마자 서둘러 “무덤에 가서” 그의 시체에 향료를 뿌리려 하였다. 요셉이 싼 세마포를 풀어 시체를 꺼내려는 것이 아니라 머리와 얼굴에, 특히 상처난 손과 발에 기름을 바르고 그의 시체와 그 주위에 향료를 뿌리려고 하였다. 이는 마치 우리가 평소에 친구의 시체나 무덤 주위에 꽃을 뿌려 될 수 있는 대로 무덤의 흉한 꼴을 털어 버리고 또한 그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무언가 쓸쓸한 기분을 없이해 주려는 순수한 의도를 보이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에 대한 이 선한 여인들의 열심은 식지 않았다. 안식일 전날 저녁에 준비했을 이 향유는 값이 대단히 많이 나가는 것이었겠지만 그들은 그것을 지니고 가면서 “무슨 일로 이 비싼 것을 낭비할 것인가?” 하며 생각을 돌이키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날이 새자마자 일찍, 아주 일찍 그것을 가지고 무덤으로 달려갔다. 이것이 곧 자선의 법칙이다. “각각 그 마음의 정한대로 할 것이다”(고후 9:7). 그리스도를 위해 준비된 것이면 어쨌든 그를 위해 쓰도록 하라. 그 여인들의 이름을 살펴보자.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였다. 그들은 대단히 관록 있는 여인들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 또다른 목격자가 있었음을 1절과 10절을 보아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은 향유를 마련하는 일엔 동참하지는 못했지만 그들이 무덤에 간다고 했을 때 함께 따라 나선 자들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후 그를 아는 자들이 더 늘리라는 그의 말씀(요 12:24, 32)과 일치한다. 예루살렘의 여인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여인들이 너무도 열렬히 사모하며 따르는 것을 보고 그들도 함께 그를 알고 싶어하였다. 그래서 여기에 “다른 여인”들이 그 일행 속에 포함된 것이다. 몇몇 사람의 열심으로 다른 사람까지 열심을 내게 할 수 있다. Ⅱ. 돌이 굴러져 있고 무덤이 텅 비어 있는 것을 본 그들은 깜짝 놀랐다(2, 3절). 그들은 이 사실에 대하여 “근심하였다.” 사실 그들은 기뻐해야 할 여러 가지 이유가 이 사실 속에 있었다. “돌이 무덤에서 굴러 옮기우고”(이것을 보면 그는 법적인 석방을 받아 밖으로 나와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것으로 여길 수도 있었다) 그들은 “주 예수의 시체를 보지 못하였다.” 이것은 그가 자신의 능력으로 밖으로 나왔음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이처럼 선량한 그리스도인들은 때로 위로를 받고 서로 즐거워해야 할 일을 가지고 오히려 서로 근심하는 경우가 있다. Ⅲ. 두 천사가 나타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하여 자세히 일러주었다. 그들은 “찬란한 옷”을 입고 여인들에게 나타났다. 단지 흰옷이 아니라 여인들 주위에 광채를 뿌리는 “빛난” 옷이었다. 그들은 먼저 무덤밖에 “한” 천사가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천사는 그제서야 “무덤 안으로 들어 가” 다른 천사와 함께 앉았다. “그들은 예수의 시체가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맡에 다른 하나는 발치에” 앉아 있었다. 이것에 대한 복음서 기자들의 진술은 일치한다. 여인들은 천사를 보고 혹시 그들이 나쁜 소식을 전하지나 않을까 하여 “두려워하였다.” 그렇지만 천사들에게 캐묻는 대신 그들은 무덤 속에 있는 사랑하는 주님을 보기 위하여 “얼굴을 땅에 대었다.” 그들은 “찬란한 옷”을 입은 천사들보다는 “무덤 옷”을 입은 주님을 보게 되길 바라고 있었다. 성도들의 눈에는 천사보다도 죽어가는 예수가 더 아름답게 보일 것이다. 이 여인들은 파숫꾼들에게 발각되었음에도(천사들은 “파숫군”이라 불린다)그 파숫꾼들과 대화를 나눈 것이 아니라 부부처럼 “당신은 내 영혼이 사랑하는 그 분을 보셨나요?”하며 속삭였다. 이에 대하여 천사들은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일러주었다. 1. 천사들은 여인들이 저지르고 있는 어리석은 수색 작업에 대해 깨우쳐 주었다.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5절) 이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신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가 성립되었다. 그리고 그에 대하여 “그는 산 자가 되었다는 증거를 얻게 되었다”(히 7:8). “나는 내 구세주가 살아 계심을 압니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성도들이 받을 위로이다. 그러나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찾는 자들-이방인들처럼 그를 죽은 영웅으로 간주하여 그 가운데서 찾는 자들-그를 형상이나 십자가상, 인간의 손으로 만든 물건 또는 성서에 기록되지 않은 전통이나 인간의 창조물 안에서 찾는 자들에겐 부활의 증거가 납득이 가질 않는다. 진실로 피조물에서 행복과 만족을 구하며 이 세상의 불완전한 상태 속에서 완전을 구하려는 자들은 모두 “죽은 자 가운데서 산 자를 찾는 자”라고 이름 붙여야 할 것이다.
2. 그들은 그가 죽음에서 부활하셨음을 여인들에게 확인해 주었다(6절). “여기에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그는 자신의 권능으로 살아나가셨다. 그는 자기의 무덤을 버리셨으며 다신 이곳으로 돌아오시지 않으리라.” 이 천사들이야말로 합법적인 증인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의 부활을 위해 하늘에서 급히 보냄을 받고 내려 온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보고 역시 거짓이 아님을 확신할 수 있다. 그들이 구태여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3. 그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그들에게 상기시켰다. “갈릴리에 계셨을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그들이 부활에 대한 예언을 믿었거나 명심하고 있었더라면 부활이 일어났을 때 쉽게 믿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전에 그리스도께서 자주 하시던 말씀,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우리라”는 말씀을 천사들을 통해 다시 듣게 되자 그들은 깜짝 놀랐을 것이다. 비록 그 일은 하나님의 예정된 계획과 섭리에 의해 이루어진 일들이지만 그 일들을 처리한 자들이 죄없다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는 또 그들에게 “십자가에 못 박히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들은 그 말씀을 듣고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대로 이루어진 것을 다시는 잊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에 계속된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는 말씀 또한 마음에 새기게 되었을 것이다. 이 천사들이 하늘로부터 어떤 “새로운 복음”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님을 유의하라. 그들은 교회의 사도들이 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말씀을 그들 마음속에 새이게 해 주었으며 어떻게 그 말씀대로 살며 지킬 것인가 가르쳐 주었다. 천사들은 여인들이 저지르고 있는 어리석은 수색 작업에 대해 깨우쳐 주었다.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5절) 이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신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가 성립되었다. 그리고 그에 대하여 “그는 산 자가 되었다는 증거를 얻게 되었다”(히 7:8). “나는 내 구세주가 살아 계심을 압니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성도들이 받을 위로이다. 그러나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찾는 자들-이방인들처럼 그를 죽은 영웅으로 간주하여 그 가운데서 찾는 자들-그를 형상이나 십자가상, 인간의 손으로 만든 물건 또는 성서에 기록되지 않은 전통이나 인간의 창조물 안에서 찾는 자들에겐 부활의 증거가 납득이 가질 않는다. 진실로 피조물에서 행복과 만족을 구하며 이 세상의 불완전한 상태 속에서 완전을 구하려는 자들은 모두 “죽은 자 가운데서 산 자를 찾는 자”라고 이름 붙여야 할 것이다.그들은 그가 죽음에서 부활하셨음을 여인들에게 확인해 주었다(6절). “여기에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그는 자신의 권능으로 살아나가셨다. 그는 자기의 무덤을 버리셨으며 다신 이곳으로 돌아오시지 않으리라.” 이 천사들이야말로 합법적인 증인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의 부활을 위해 하늘에서 급히 보냄을 받고 내려 온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보고 역시 거짓이 아님을 확신할 수 있다. 그들이 구태여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그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그들에게 상기시켰다. “갈릴리에 계셨을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그들이 부활에 대한 예언을 믿었거나 명심하고 있었더라면 부활이 일어났을 때 쉽게 믿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전에 그리스도께서 자주 하시던 말씀,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우리라”는 말씀을 천사들을 통해 다시 듣게 되자 그들은 깜짝 놀랐을 것이다. 비록 그 일은 하나님의 예정된 계획과 섭리에 의해 이루어진 일들이지만 그 일들을 처리한 자들이 죄없다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는 또 그들에게 “십자가에 못 박히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들은 그 말씀을 듣고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대로 이루어진 것을 다시는 잊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에 계속된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는 말씀 또한 마음에 새기게 되었을 것이다. 이 천사들이 하늘로부터 어떤 “새로운 복음”을 가지고 온 것이 아님을 유의하라. 그들은 교회의 사도들이 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말씀을 그들 마음속에 새이게 해 주었으며 어떻게 그 말씀대로 살며 지킬 것인가 가르쳐 주었다. Ⅳ. 이 말씀을 듣고 여인들은 만족하였다(8절). 여인들은 천사들의 말대로 믿기로 했던 것 같다. 그들은 “그의 말씀을 기억해냈다.” 그리고 그 순간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그가 부활하셨다면 더 이상 찾을 필요는 없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제 그들은 제 삼일에는 부활하리라던 그의 말씀을 잊고 제 삼일에 “그의 시체”에 바를 향유를 준비해 온 것이 부끄러웠다. 적시에 그리스도 말씀을 기억함으로 그의 섭리를 올바로 이해하게 된다. Ⅴ. 제자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였다.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그리스도를 따르던 “모든 다른 이에게 고하니”(9절) 그들이 모두 한 곳에 모여 있었던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아마도 둘 셋씩 각기 흩어져 숙소에 머물러 있다가 한 사람이 다른 이에게 전하고 그가 또 다른 이에게 전하여 그날 아침 모두 그 소식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엔(11절) 그들이 어떻게 그 소식을 받아들였는가에 대해 언급되어 있다. “사도들은 저희의 말이 허탄한 듯이 뵈어 믿지 아니하였다.” 그들은 그것이 단지 여인들의 환상이라고 돌리며 그것은 기억상실에 의한 판단 착오일 뿐이라고 몰아버렸다. 그들 역시 그리스도의 말씀을 잊고 있었으니, 그가 얼마 전 갈릴리에서 그들에게 하셨던 말씀 뿐 아니라 최근 그가 배반당하시던 날 밤 제자들에게 “잠시 동안 헤어져 있으면 너희는 다시 나를 볼 것이고 나도 너희를 보리라”던 말씀조차도 마음에 새겨두고 있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 제자들의 우둔함을 볼 때 누구나 경악을 금치 못할 것이다. 그들 자신이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며 참 메시야로 믿는다고 고백을 수차례 하였으며, 그가 죽어야 하며 다시 살아나셔서 영광으로 들어가실 것이라는 말씀도 수차례 듣고, 죽었던 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도 몇 차례 목격했던 그들이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는 데는 이처럼 주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분명히 그후로 그들이 이와 똑같은 의문을 품은 자들을 만났을 때, 그들은 그를 자신이 그들과 똑같은 의심을 지닌 적이 있음을 기억하고 그들을 새삼스럽게 여기지는 않게 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한 말을 누가 믿으려 하겠는가?” Ⅵ. 베드로는 이에 대해 사실을 확인하고자 찾아갔다(12절). 기록한 대로 그들에게 이 소식을 알려 준 이는 막달라 마리아였다. 요한 복음 20장 1, 2절엔 그가 무덤으로 달려갔다는 표현이 특별히 강조되어 있다. 1. 베드로는 소식을 듣자마자 무덤으로 달려갔다. 아마도 막달라 마리아가 자기보다 먼저 그곳에 갔었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부끄러움을 느끼며 달려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여인들이 그런 소식, 특히 “파숫꾼이 도망갔다”는 소식을 들려주지 않았더라면 그때에라도 달려가려고 마음먹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위험이 없을 때엔 “날아갈 듯 달려 가던 자”들의 대부분은 위험이 있을 땐 “황소걸음”이 될 수밖에 없다. 전날 “자기 주인을 버리고 도망쳤던” 베드로가 지금 “무덤으로 달려가고 있다.”
2. 그가 무덤 안을 들여다보았을 때엔 그리스도의 시체를 샀던 세마포는 벗겨져 곱게 개어져 놓여 있고 시체는 어디로 간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천사들의 증언보다는 자신의 눈을 더 신뢰한다는 식으로 눈여겨 살펴보았다.
3. 그는 현명한 자처럼 생각하지 못하고 “그 된 일을 기이히 여기며”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생각나기만 했어도 그것으로 그가 살아났다는 사실을 믿기에 충분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말씀을 잊고 있었으므로 그는 단지 그 된 일을 보고 놀라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고 돌아갔을 뿐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고 그 말씀을 따르기만 하면 우리에게 유익하고 쉽게 받아들여질 것들이 종종 까다롭고 난해한 것으로 여겨질 때가 많다. 베드로는 소식을 듣자마자 무덤으로 달려갔다. 아마도 막달라 마리아가 자기보다 먼저 그곳에 갔었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부끄러움을 느끼며 달려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여인들이 그런 소식, 특히 “파숫꾼이 도망갔다”는 소식을 들려주지 않았더라면 그때에라도 달려가려고 마음먹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위험이 없을 때엔 “날아갈 듯 달려 가던 자”들의 대부분은 위험이 있을 땐 “황소걸음”이 될 수밖에 없다. 전날 “자기 주인을 버리고 도망쳤던” 베드로가 지금 “무덤으로 달려가고 있다.”그가 무덤 안을 들여다보았을 때엔 그리스도의 시체를 샀던 세마포는 벗겨져 곱게 개어져 놓여 있고 시체는 어디로 간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천사들의 증언보다는 자신의 눈을 더 신뢰한다는 식으로 눈여겨 살펴보았다.그는 현명한 자처럼 생각하지 못하고 “그 된 일을 기이히 여기며”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생각나기만 했어도 그것으로 그가 살아났다는 사실을 믿기에 충분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말씀을 잊고 있었으므로 그는 단지 그 된 일을 보고 놀라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고 돌아갔을 뿐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고 그 말씀을 따르기만 하면 우리에게 유익하고 쉽게 받아들여질 것들이 종종 까다롭고 난해한 것으로 여겨질 때가 많다.
24:13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누가복음 24:13-35) 엠마오로 가고 있는 “두 제자”에게 그리스도가 현현(顯現)하셨다는 사실을 다른 복음서에선 간략하게 언급하였으나(막 16:12) 여기에선 비교적 길게 언급하고 있다. 그날은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바로 그날, 그와 함께 부활한 새 세계의 첫날이었다. 그 둘 중의 한 사람은 “글로바” 혹은 “알패오”라 불리는 자로 고대 교부들에 의하면 그는 그리스도의 아버지로 여겨지는 요셉의 형제라 한다. 다른 한 사람은 확실히 알 수가 없다. 어떤 학자는 그가 베드로일 것이라고 한다. 그리스도께서 그날 베드로에게 특별히 나타나셨다는 것만큼은 사실인 듯하다. 그 사실에 대해선 열한 제자가 증언하고 있으며(34절) 바울도 이를 언급하고 있음(고전 15:5)을 보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두 사람” 중의 하나가 베드로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 “두 사람”이 돌아올 때 맞이한 “열한” 제자들 중에 베드로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베드로에 대해선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만약 그가 “두 사람” 중의 하나였다면 글로바가 아니라 그가 “대표적인 목격자”로 지명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는 9절에 언급된 열한 사도와 함께 있던 자들 중의 한 사람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제 이 내용을 좀더 자세히 고찰해 보자. Ⅰ. 이 두 제자들의 “여행”과 “대화”. “그날에 저희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 오리되는 엠마오라 하는 촌으로 가면서” 엠마오는 예루살렘에서 도보로 두 시간 남짓 걸리는 곳에 위치한 촌이었다. 여기에선 이십 오리, 약 7마일 정도라고 기록되어 있다(13절). 그곳에 사업상 가는지 아니면 친구를 만나러 가는지 밝혀져 있지 않다. 필자의 생각으로 그들은 더 이상 이 예수에 대해선 미련을 버리고 갈릴리를 향해 고향으로 가던 중인 것 같다.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 쉴 작정으로 다른 제자들에게 떠나겠다는 말도 하지 않고 허락도 받지 않고 몰래 빠져 나온 것 같다. 왜냐하면 그날 아침 그들은 주님의 부활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되었을 때 그것을 “어리석은 이야기들”로 돌려 버렸기 때문이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들일 재빨리 집으로 돌아갈 길을 모색했다고 해서 이상할 것이 전혀 없다. 그런데 그들은 여행하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였다”(14절). 예루살렘에 있을 대엔 유대인들이 두려워 방금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 “말할” 용기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 유대인들의 귀에서 멀어진 지금엔 아주 자유롭게 그 일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들은 “이 모든 일을 이야기하였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가능성에 대해 서로 따져 보았다. 그 결과에 따라 계속 고향으로 가든 아니면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판이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라면 그들이 함께 있을 때 그의 죽음과 부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눔이 합당한 일임을 명심하자.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서로 남의 지식을 계발시키고 남의 기억을 새롭게 하며 서로의 독실한 사랑을 증진시키게 된다. Ⅱ.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 그들과 함께 하심으로 그들은 도중에서 선한 동료를 만나게 되었다(15절).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아마도 그들은 열띤 논쟁을 벌이고 있었을 것이다. 한 사람은 그들의 주님께서 부활하셨으며, 그의 나라를 세우실 것이라고 주장하고 다른 사람은 부정적으로 나왔을 것이다.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마치 그들과 우연히 같은 방향으로 여행하는 이방인처럼 꾸며 그들이 “기꺼이 동행으로” 받아들이도록 다가섰다. 이 사실을 중시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적인 연대감을 유지하며 그에 대한 대화를 진행시켜 나갈 때 진지하게 말하는 두 사람을 돕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오셔서 제 삼자로 참여하실 것이다. 주님을 두려워하는 자들이 “서로 이야기할” 때에 그는 “귀를 기울이고 들으시며” 진리로 그들과 함께 하신다. 그리하여 신앙과 사랑으로 꼬여진 그들은 “쉽게 끊여지지 않을 삼겹줄”이 된다(전 4:12). 그들은 함께 이야기하고 생각하는 중에 그리스도에 대한 성서 구절들을 비교해가면서 그리스도를 구했으며 좀 더 그를 알기를 원하였다. 그런데 이제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오신 것이다. 그리스도를 찾는 자들은 그를 만날 것이다. 이 점을 명심하라. 그는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자신을 내보이실 것이며 자기들이 지닌 지식을 위한 도구로써 그리스도의 지혜를 구하는 자들에게 그의 지혜를 주실 것이다. 그러나 그들 곁엔 그리스도가 계셨지만 처음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다(16절).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대상”에 변화가 있었으며(마가복음에는 그때 “그는 다른 모습으로 보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감각기관에도 지장이 있었던 것 같다(여기엔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 그들의 “눈이 가리워져”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혹은 다른 주석가가 생각하는 대로 “시야”에 혼동이 생긴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즉 공기가 너무도 탁해 그가 누구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떻게” 해서 그들이 못알아 보았는지는 별로 문제될 것이 없지만 “그렇게” 그들이 “그를 알아 보지” 못하게 함으로써 그들은 그리스도와 좀더 허물없이 이야기할 수 있었으며 그도 그들에게 자유롭게 말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말씀과 그 말씀의 효력은 그의 육체적인 모습에 얽매이는 것이 아님을 보여 주시려 하였으며 그의 육체에 집착했던 제자들도 이제는 그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시려 하였다. 뿐만 아니라 다른 이를 통하여 그들을 가르치고 그들의 마음을 뜨겁게 할 수 있다는 것도 가르치셨다. 그는 그의 영적인 모습을 지니고 그들에게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그의 은혜를 계속 내려 주실 것임을 보여 주셨다. Ⅲ. 그리스도와 그들 사이에 오고 간 대화. 그는 그들을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그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서로 변장을 하거나 신분을 알지 못하게 하고 만나는 친구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와 그들은 서로 문답을 주고받았다. 1. 그들에게 던진 그리스도의 첫 번째 질문은 “그들의” 현재 “슬픔”에 대한 것이었다. 그들의 얼굴엔 그 슬픔이 역력히 들어났다. “너희가 길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17절) 이것은 대단히 친절하고 다정한 물음이었다. 다음 사실들을 고찰해 보자.
(1) 그들은 “슬퍼하고” 있었다. 그들이 슬퍼하고 있음은 이방인에게도 나타났다.
[1] 그들은 사랑하는 주인을 잃고 자신들의 생각에 지나지 않지만 그에 대한 기대가 완전히 빗나갔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들은 처음 생각을 완전히 포기하였으며 무슨 수로 그 손해를 만회할 것인가 걱정하고 있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로부터 그리스도가 떠나가 버릴 때 그들이 슬퍼할 충분한 이유가 있으며, “신랑”이 그들에게서 납치 당했을 때 그들이 “금식”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2] 그가 죽음에서 부활하였지만 그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하였거나 알아도 믿지 못하였기 때문에 계속 슬픔 속에 갇혀 있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종종 기뻐해야 할 이유가 있을 때에도 슬퍼하거나 걱정하곤 한다. 믿음이 약함으로 인하여 그들에게 내릴 위로를 받지 못하곤 한다. [3] 슬픔 가운데 그들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다음 사실을 고찰해 보자. 그들에게 던진 그리스도의 첫 번째 질문은 “그들의” 현재 “슬픔”에 대한 것이었다. 그들의 얼굴엔 그 슬픔이 역력히 들어났다. “너희가 길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17절) 이것은 대단히 친절하고 다정한 물음이었다. 다음 사실들을 고찰해 보자.그들은 “슬퍼하고” 있었다. 그들이 슬퍼하고 있음은 이방인에게도 나타났다.그들은 사랑하는 주인을 잃고 자신들의 생각에 지나지 않지만 그에 대한 기대가 완전히 빗나갔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들은 처음 생각을 완전히 포기하였으며 무슨 수로 그 손해를 만회할 것인가 걱정하고 있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로부터 그리스도가 떠나가 버릴 때 그들이 슬퍼할 충분한 이유가 있으며, “신랑”이 그들에게서 납치 당했을 때 그들이 “금식”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그가 죽음에서 부활하였지만 그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하였거나 알아도 믿지 못하였기 때문에 계속 슬픔 속에 갇혀 있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종종 기뻐해야 할 이유가 있을 때에도 슬퍼하거나 걱정하곤 한다. 믿음이 약함으로 인하여 그들에게 내릴 위로를 받지 못하곤 한다.슬픔 가운데 그들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다음 사실을 고찰해 보자. 첫째,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우리의 마음이 그로 가득 차 있거나 그의 행적이나 그가 우리를 위해 고난받은 사실에 대해 늘 염두에 두고 있다면-사실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하겠지만─하나님과 그의 섭리 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의 은총 및 사랑에 대해서 “마음의 충만한 것을 입으로 말해야 할 것이다.” 둘째, 참된 친구와 참된 대화는 우울증을 치료하는 효과 있는 처방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자기들이 슬플 때 각자 각자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내어보내셨던 것처럼 둘씩 둘씩 흩어졌다. 왜냐하면 한 사람 보다는 둘이 나으며 특히 슬픔의 시기엔 더욱 그러했기 때문이다. 울음을 터뜨리게 한 것이 때로 울음을 그치게도 한다. 그리고 계속 반복해 이야기하는 동안 우리와 친구들은 어느새 좀 맑은 기분을 갖게 될 것이다. 같이 울어 주는 사람은 서로 위로가 된다. 때로 그런 데서 제일 큰 위로를 얻기도 하는 것이다.(2) 그리스도께서 그들 사이에 끼어 들어 그들 대화의 내용을 물어보고 그들이 슬퍼하는 원인을 물었다. “너희가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그리스도는 이제 성별된 상태에 계셨지만 제자들에 대한 사랑엔 변함이 없어 그들을 위로할 생각을 하고 계셨다. 그는 마치 그들의 우울함을 보고 조심하는 것처럼 말씀하신다. “당신들이 오늘 어찌하여 근심 빛이 있나이까?”(창 40:7) 우리 주 예수께선 그의 제자들의 슬픔과 걱정을 아시고 그들의 근심에 함께 참여하심을 명심하자. 여기에서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몇 가지 있다.
[1] “붙임성 있게” 행동하라.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이방인이었으며 그들도 그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를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던 형편에서는 그는 이 심각한 두 제자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었다. 까다롭거나 수줍어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오히려 바람직한 단체에 소속되어 기쁨을 얻도록 하라. [2] “동정심 있게” 행동하라. 우리의 친구들이 슬픔과 걱정에 쌓여 있을 때엔, 그리스도께서 여기 보여 주신 것처럼 그들의 슬픔을 깨닫고 최선을 다해 위로와 조언을 해 주어야 한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어 주라.”2. (그리스도의) 이 말씀에 대하여 그들은 그가 “전혀 모르고 있는 것”에 대해 다시 질문을 던졌다. “당신이 예루살렘에 우거하면서 근일 거기서 된 일을 홀로 알지 못하느뇨?” 다음 사실을 고찰해 보자.
(1) 글로바는 그에게 정중히 대답을 하였다. 그는 “우리가 애기 하는 것에 대해 당신이 상관할 바가 뭐요?”하고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자기 걱정이나 하라고 돌려버리지 않았다. 우리도 우리에게 친절한 자들에 대해서 친절히 대해 주어야 하며 말이나 행동에 있어서 어느 누구에게든지 정중히 대해야 함을 명심하자.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는 당시가 위험한 시기였다. 그렇지만 글로바는 이 이방인이 어떤 음모를 가지고 자기들에게 접근하여 해로운 짓을 하거나 곤경에 빠뜨리려고 하지나 않나 하여 그를 경계하지는 않았다. 자비로운 행동은 “악을 도모하는 것”이 아니다. 이방인에게라도 악을 행해서는 안 된다.
(2) 그(글로바)는 그리스도와 그의 죽음과 수난 등으로 머리에 가득 차 있었다. 자기처럼 생각하지 않는 자가 있다는 것이 이상스러웠다. “도대체 이럴 수가 있소! 예루살렘에 있었으면서 그곳에서 우리 주님에게 일어난 일들을 모르고 있었다니 말이나 되요?” 예루살렘에 있으면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수난에 대해 알지 못한 자들이야말로 진짜 이방인들이었음을 명심하자. “너희가 누구보다도 더 사랑하는 이가 누구냐?”고 물으시던 그리스도에 대해서 거의 아는 바 없이 있었던 그들이 “예루살렘의 딸들”이라 하겠는가?
(3) 글로바는 이 낯선 자에게 그리스도에 대하여 알려 주려고 하였으며 이 문제를 가지고 좀 더 그와 대화를 나누고자 하였다. 그는 그리스도를 모르고 있는 사람의 얼굴만 보면 참지 못하였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에 대해 아는 자들은 최선을 다해 그 아는 바를 퍼지고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알도록 이끌어야 함을 명심하라. 그리고 이 제자들은 낯선 이에게 가르쳐 주려고 열을 올리다보니 그들이 그로 말미암아 가르침을 받게 되었음을 볼 수 있다. 가진 자가 그 가진 것을 유익하게 쓸 때에 그에게 더 많은 것이 주어질 것이다.
(4) 글로바의 말로 미루어 보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예루살렘에서 큰 소란을 일으켰는데 그 도시에 있었으면서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한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임을 알 수 있다. 온 도시 안에 이야기가 퍼졌고 사람들은 모이면 그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와 같이 사건의 진상은 일반적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성령 강림 이후 그 사실은 “설명되었다.”
3. 그리스도께서는 대답 대신에 “그들의 지식”에 대하여 질문하셨다(19절). “가라사대 무슨 일이뇨?” 이렇게 물으심으로 더욱 자신을 낯선 자로 보이게 하셨다. 다음 사실들을 고찰해 보라.
(1)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고통의 보상인 장래에 받을 기쁨과 비교하여 자기가 받은 고난을 가볍게 여기셨다. 이제 그는 자기의 영광으로 들어가셨는데 무슨 이유로 다시 자신의 고난을 돌이켜 보시려는 것일까? “무슨 일이뇨?” 그에게 무슨 일인지 알 이유가 있었다. 그에겐 쓰라린 일이었고 무거운 짐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시 “무슨 일이뇨?”하고 묻고 계신다. 슬픔은 사라졌다. 우리의 구원이 오게 됨으로 기쁨이 임했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약한 중에서도 기쁨을 얻으셨다. 우리도 그를 위하여 그렇게 하도록 가르치시기 위함이었다.
(2) 그리스도에게 가르침을 받을 자는 우선 자기가 지금까지 배운 것이 무엇인지 그에게 시험받아야 한다. 그들은 그에게 자기들이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말해 보아야 한다. 그런 연후에 그는 그들에게 이 일들의 참 뜻을 말해 주며 그 신비에 이르게 할 것이다.
4. 여기에 대해 그들은 그리스도에게 일어났던 기이한 사건과 현재 상황에 대해서 말해 주었다. 그들이 말한 내용을 고찰해 보자(19절 이하).
(1) 그리스도의 “생애”와 “성품”을 요약해 주었다. 그들이 골몰하여 생각하고 있는 “일”은 “나사렛 예수”(평소에 그렇게 불리웠다)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예언자였고” 하늘로부터 온 교사였다. 그는 진실 되고 놀라운 하나의 교훈을 가르쳤는데 그 말씀은 하늘에서 비롯된 것이며 하늘을 향하여 인도하는 말씀이었다. 그는 여러 가지 영광스런 기적, 자비의 기적을 통하여 그 말씀을 보증하심으로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시에 능하신 분”이었다. 즉 그는 하늘의 크신 사랑이었으며 동시에 이 땅에는 크신 축복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입은 자이며 그의 백성들이 존경하던 분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크게 흡족하신 분이었으며 나라 안에서 큰 명예를 입었던 자였다. “모든 백성 앞에서 위대한” 자들은 많다. 그들은 백성들에게 사랑 받지만 보통 “하나님 앞에선” 그렇지 못하다.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이 그런 자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나 백성들 앞에서” 그의 “가르침”에 있어서나 “행위”에 있어서 능하신 분이었다. 예루살렘에 있으면서도 이 사실을 모른 이라면 이방인밖에 없을 것이다.
(2) 그의 죽음과 고난에 대한 겸손한 설명을 하였다(20절). “하나님과 백성들에게 사랑받던 이였으나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하나님과 백성에게 죄를 지으며 그를 로마 권력에 넘겨주어 사형 판결을 받게 하여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그들이 이 사실을 더 과장해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게 한 자들의 죄를 더 신랄하게 공격하지 않는 것은 좀 이상한 일이지만 아마도 그 이유는 아무리 사실이 그렇다 치더라도 전혀 낯선 자에게 이야기할 땐 그들의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에 대해 욕을 하는 것을 삼가려는 의도였던 것 같다.
(3) 여기에 그들이 슬퍼하는 이유로써 그에 대하여 가졌던 기대가 실망으로 끝났다는 암시가 보인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21절). 우리는 그가 모세처럼 예언자이기를 기대했으며 또한 모세처럼 구원자가 되기를 바랐던 자들입니다.” “구속을 바라던” 자들, 그리고 그 속에서 이스라엘의 위로를 바라던 자들은 그를 기대하였고 그가 큰 일을 해 줄 것을 바라고 있었다. 그런데 “기대가 미워지면 마음이 상하는 법” 특히 이와 같은 기대가 수포로 돌아가면 상심하고 만다. 그러나 그들이 실망하는 원인을 자세히 살펴보면 오히려 그것이 그들의 기대에 대한 가장 확실한 근거가 되며 주 예수의 죽으심이야말로 희망의 근거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들은 말하길)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 그런데 이스라엘을 구할 자가 그가 아니면 누구겠는가? 그들의 구속의 값을 치루려고 그가 죽으신 것이 아닌가? 이스라엘을 그 죄에서 구하기 위하여 그가 고난을 받으셔야만 하지 않았는가? 그리하여 이제 이 가장 힘든 과업을 마치셨으니 “이 자야말로 이스라엘을 구원할 그 분이심을 믿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된 셈이 아닌가? 그런데도 그들은 아직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4) 그의 부활에 대해 듣고 놀란 심정을 이야기하고 있다.
[1] “그가 십자가에 달려 죽은 지 오늘이 사흘째요. 오늘이 바로 그가 다시 살아나셔서 영광과 화려함 속에 서셔서 사흘 전에 치욕을 당하신 그대로 이번엔 영광 중에 자신을 내보이시기로 한 날입니다. 그런데 우린 아직 그런 징조를 보지 못했지요. 우리가 기대했던 대로 그를 박해했던 자들을 깨우치고 혼란에 빠트리며 제자들에겐 위로를 가져다 줄 그런 징조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모든 게 조용합니다.” [2] 그가 부활했다는 얘기가 그들 사이에 퍼져 있음을 말하고는 있으나 그들은 그 얘기를 아주 피상적으로 할 뿐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암시를 나타내고 있다(22, 23절).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를 놀라게 하였으니(단지 놀랄 일뿐이다), 그들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시체가 없어진 것을 발견하고 그가 살으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하고 전할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린 그 얘기를 그들이 환상을 본 것이지 사실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천사들이 나타난다면 제자들에게 나타날 것이지 여인들에게 나타났겠습니까? 또 여인들은 쉽게 흥분해 버리기 때문이라.” [3] 그들은 몇몇 제자들이 무덤을 찾아 가 보았을 때 무덤이 비어있는 것을 발견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24절).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그래서 우리는 그가 살아나지 않았다고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만약 다시 살아났다면 그들에게 나타나 보이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상황을 종합해 볼 때, 우리는 그가 살아났다는 확실한 증거를 찾지 못했고 따라서 이제 와서 그를 기다릴 이유도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기대는 그의 십자가에 달려 그의 무덤 속에 묻혀버리고 말았습니다.”(5) 우리 주 예수는 얼굴로는 그들에게 나타내 보이시지는 않으셨지만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심으로 자신을 알리셨다.
[1] 그는 분별력 없고 구약의 예언을 믿지 못하는 그들을 꾸짖으셨다. “미련하고 더디 믿는 자들아”(25절).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형제들에게 “어리석은 자야” 하지 말라고 우리에게 금하신 것은 올바른 책망을 금하신 것이 아니라 정당하지 못한 비난을 하지 말라고 금하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어리석은 자들”이라고 부르신 것은 우리가 마음에 품어선 안 될 “악한 자들”이란 의미에서가 아니라 “약한 자들”이란 의미에서 그렇게 부르신 것이다. 그는 그들을 “어리석은 자들”이라 불러 마땅하였다. 그는 우리의 마음속에 뿌리박고 있는 어리석음, “우리의 어리석음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고 엉뚱한 짓을 하는 자들을 어리석은 자라 부른다. 그러므로 자기의 주님이 살아나셨다는 증거를 보여 주었는데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뿐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얻을 위로까지 포기하는 그들이야말로 어리석은 자들이었다. 그들의 비난받은 “어리석음’이란 그리스도께서 그들 사이에 끼어 들어 그들 대화의 내용을 물어보고 그들이 슬퍼하는 원인을 물었다. “너희가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그리스도는 이제 성별된 상태에 계셨지만 제자들에 대한 사랑엔 변함이 없어 그들을 위로할 생각을 하고 계셨다. 그는 마치 그들의 우울함을 보고 조심하는 것처럼 말씀하신다. “당신들이 오늘 어찌하여 근심 빛이 있나이까?”(창 40:7) 우리 주 예수께선 그의 제자들의 슬픔과 걱정을 아시고 그들의 근심에 함께 참여하심을 명심하자. 여기에서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몇 가지 있다.”붙임성 있게” 행동하라.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이방인이었으며 그들도 그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를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던 형편에서는 그는 이 심각한 두 제자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었다. 까다롭거나 수줍어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오히려 바람직한 단체에 소속되어 기쁨을 얻도록 하라.”동정심 있게” 행동하라. 우리의 친구들이 슬픔과 걱정에 쌓여 있을 때엔, 그리스도께서 여기 보여 주신 것처럼 그들의 슬픔을 깨닫고 최선을 다해 위로와 조언을 해 주어야 한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어 주라.”(그리스도의) 이 말씀에 대하여 그들은 그가 “전혀 모르고 있는 것”에 대해 다시 질문을 던졌다. “당신이 예루살렘에 우거하면서 근일 거기서 된 일을 홀로 알지 못하느뇨?” 다음 사실을 고찰해 보자.글로바는 그에게 정중히 대답을 하였다. 그는 “우리가 애기 하는 것에 대해 당신이 상관할 바가 뭐요?”하고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자기 걱정이나 하라고 돌려버리지 않았다. 우리도 우리에게 친절한 자들에 대해서 친절히 대해 주어야 하며 말이나 행동에 있어서 어느 누구에게든지 정중히 대해야 함을 명심하자.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는 당시가 위험한 시기였다. 그렇지만 글로바는 이 이방인이 어떤 음모를 가지고 자기들에게 접근하여 해로운 짓을 하거나 곤경에 빠뜨리려고 하지나 않나 하여 그를 경계하지는 않았다. 자비로운 행동은 “악을 도모하는 것”이 아니다. 이방인에게라도 악을 행해서는 안 된다.그(글로바)는 그리스도와 그의 죽음과 수난 등으로 머리에 가득 차 있었다. 자기처럼 생각하지 않는 자가 있다는 것이 이상스러웠다. “도대체 이럴 수가 있소! 예루살렘에 있었으면서 그곳에서 우리 주님에게 일어난 일들을 모르고 있었다니 말이나 되요?” 예루살렘에 있으면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수난에 대해 알지 못한 자들이야말로 진짜 이방인들이었음을 명심하자. “너희가 누구보다도 더 사랑하는 이가 누구냐?”고 물으시던 그리스도에 대해서 거의 아는 바 없이 있었던 그들이 “예루살렘의 딸들”이라 하겠는가?글로바는 이 낯선 자에게 그리스도에 대하여 알려 주려고 하였으며 이 문제를 가지고 좀 더 그와 대화를 나누고자 하였다. 그는 그리스도를 모르고 있는 사람의 얼굴만 보면 참지 못하였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에 대해 아는 자들은 최선을 다해 그 아는 바를 퍼지고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알도록 이끌어야 함을 명심하라. 그리고 이 제자들은 낯선 이에게 가르쳐 주려고 열을 올리다보니 그들이 그로 말미암아 가르침을 받게 되었음을 볼 수 있다. 가진 자가 그 가진 것을 유익하게 쓸 때에 그에게 더 많은 것이 주어질 것이다.글로바의 말로 미루어 보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예루살렘에서 큰 소란을 일으켰는데 그 도시에 있었으면서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한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임을 알 수 있다. 온 도시 안에 이야기가 퍼졌고 사람들은 모이면 그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와 같이 사건의 진상은 일반적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성령 강림 이후 그 사실은 “설명되었다.”그리스도께서는 대답 대신에 “그들의 지식”에 대하여 질문하셨다(19절). “가라사대 무슨 일이뇨?” 이렇게 물으심으로 더욱 자신을 낯선 자로 보이게 하셨다. 다음 사실들을 고찰해 보라.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고통의 보상인 장래에 받을 기쁨과 비교하여 자기가 받은 고난을 가볍게 여기셨다. 이제 그는 자기의 영광으로 들어가셨는데 무슨 이유로 다시 자신의 고난을 돌이켜 보시려는 것일까? “무슨 일이뇨?” 그에게 무슨 일인지 알 이유가 있었다. 그에겐 쓰라린 일이었고 무거운 짐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시 “무슨 일이뇨?”하고 묻고 계신다. 슬픔은 사라졌다. 우리의 구원이 오게 됨으로 기쁨이 임했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약한 중에서도 기쁨을 얻으셨다. 우리도 그를 위하여 그렇게 하도록 가르치시기 위함이었다.그리스도에게 가르침을 받을 자는 우선 자기가 지금까지 배운 것이 무엇인지 그에게 시험받아야 한다. 그들은 그에게 자기들이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말해 보아야 한다. 그런 연후에 그는 그들에게 이 일들의 참 뜻을 말해 주며 그 신비에 이르게 할 것이다.여기에 대해 그들은 그리스도에게 일어났던 기이한 사건과 현재 상황에 대해서 말해 주었다. 그들이 말한 내용을 고찰해 보자(19절 이하).그리스도의 “생애”와 “성품”을 요약해 주었다. 그들이 골몰하여 생각하고 있는 “일”은 “나사렛 예수”(평소에 그렇게 불리웠다)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예언자였고” 하늘로부터 온 교사였다. 그는 진실 되고 놀라운 하나의 교훈을 가르쳤는데 그 말씀은 하늘에서 비롯된 것이며 하늘을 향하여 인도하는 말씀이었다. 그는 여러 가지 영광스런 기적, 자비의 기적을 통하여 그 말씀을 보증하심으로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시에 능하신 분”이었다. 즉 그는 하늘의 크신 사랑이었으며 동시에 이 땅에는 크신 축복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입은 자이며 그의 백성들이 존경하던 분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크게 흡족하신 분이었으며 나라 안에서 큰 명예를 입었던 자였다. “모든 백성 앞에서 위대한” 자들은 많다. 그들은 백성들에게 사랑 받지만 보통 “하나님 앞에선” 그렇지 못하다.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이 그런 자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나 백성들 앞에서” 그의 “가르침”에 있어서나 “행위”에 있어서 능하신 분이었다. 예루살렘에 있으면서도 이 사실을 모른 이라면 이방인밖에 없을 것이다.그의 죽음과 고난에 대한 겸손한 설명을 하였다(20절). “하나님과 백성들에게 사랑받던 이였으나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하나님과 백성에게 죄를 지으며 그를 로마 권력에 넘겨주어 사형 판결을 받게 하여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그들이 이 사실을 더 과장해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게 한 자들의 죄를 더 신랄하게 공격하지 않는 것은 좀 이상한 일이지만 아마도 그 이유는 아무리 사실이 그렇다 치더라도 전혀 낯선 자에게 이야기할 땐 그들의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에 대해 욕을 하는 것을 삼가려는 의도였던 것 같다.여기에 그들이 슬퍼하는 이유로써 그에 대하여 가졌던 기대가 실망으로 끝났다는 암시가 보인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21절). 우리는 그가 모세처럼 예언자이기를 기대했으며 또한 모세처럼 구원자가 되기를 바랐던 자들입니다.” “구속을 바라던” 자들, 그리고 그 속에서 이스라엘의 위로를 바라던 자들은 그를 기대하였고 그가 큰 일을 해 줄 것을 바라고 있었다. 그런데 “기대가 미워지면 마음이 상하는 법” 특히 이와 같은 기대가 수포로 돌아가면 상심하고 만다. 그러나 그들이 실망하는 원인을 자세히 살펴보면 오히려 그것이 그들의 기대에 대한 가장 확실한 근거가 되며 주 예수의 죽으심이야말로 희망의 근거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들은 말하길)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 그런데 이스라엘을 구할 자가 그가 아니면 누구겠는가? 그들의 구속의 값을 치루려고 그가 죽으신 것이 아닌가? 이스라엘을 그 죄에서 구하기 위하여 그가 고난을 받으셔야만 하지 않았는가? 그리하여 이제 이 가장 힘든 과업을 마치셨으니 “이 자야말로 이스라엘을 구원할 그 분이심을 믿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된 셈이 아닌가? 그런데도 그들은 아직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그의 부활에 대해 듣고 놀란 심정을 이야기하고 있다.”그가 십자가에 달려 죽은 지 오늘이 사흘째요. 오늘이 바로 그가 다시 살아나셔서 영광과 화려함 속에 서셔서 사흘 전에 치욕을 당하신 그대로 이번엔 영광 중에 자신을 내보이시기로 한 날입니다. 그런데 우린 아직 그런 징조를 보지 못했지요. 우리가 기대했던 대로 그를 박해했던 자들을 깨우치고 혼란에 빠트리며 제자들에겐 위로를 가져다 줄 그런 징조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모든 게 조용합니다.”그가 부활했다는 얘기가 그들 사이에 퍼져 있음을 말하고는 있으나 그들은 그 얘기를 아주 피상적으로 할 뿐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암시를 나타내고 있다(22, 23절).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를 놀라게 하였으니(단지 놀랄 일뿐이다), 그들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시체가 없어진 것을 발견하고 그가 살으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하고 전할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린 그 얘기를 그들이 환상을 본 것이지 사실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천사들이 나타난다면 제자들에게 나타날 것이지 여인들에게 나타났겠습니까? 또 여인들은 쉽게 흥분해 버리기 때문이라.”그들은 몇몇 제자들이 무덤을 찾아 가 보았을 때 무덤이 비어있는 것을 발견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24절).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그래서 우리는 그가 살아나지 않았다고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만약 다시 살아났다면 그들에게 나타나 보이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상황을 종합해 볼 때, 우리는 그가 살아났다는 확실한 증거를 찾지 못했고 따라서 이제 와서 그를 기다릴 이유도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기대는 그의 십자가에 달려 그의 무덤 속에 묻혀버리고 말았습니다.”우리 주 예수는 얼굴로는 그들에게 나타내 보이시지는 않으셨지만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심으로 자신을 알리셨다.그는 분별력 없고 구약의 예언을 믿지 못하는 그들을 꾸짖으셨다. “미련하고 더디 믿는 자들아”(25절).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형제들에게 “어리석은 자야” 하지 말라고 우리에게 금하신 것은 올바른 책망을 금하신 것이 아니라 정당하지 못한 비난을 하지 말라고 금하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어리석은 자들”이라고 부르신 것은 우리가 마음에 품어선 안 될 “악한 자들”이란 의미에서가 아니라 “약한 자들”이란 의미에서 그렇게 부르신 것이다. 그는 그들을 “어리석은 자들”이라 불러 마땅하였다. 그는 우리의 마음속에 뿌리박고 있는 어리석음, “우리의 어리석음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고 엉뚱한 짓을 하는 자들을 어리석은 자라 부른다. 그러므로 자기의 주님이 살아나셨다는 증거를 보여 주었는데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뿐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얻을 위로까지 포기하는 그들이야말로 어리석은 자들이었다. 그들의 비난받은 “어리석음’이란 첫째, “믿기를 더디하는 것”이다. 무신론자, 불신자와 자유주의자들은 신앙인을 어리석은 자로 낙인찍으며, 가장 성스런 신앙을 경거망동한 맹신이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마음에 더디 믿으며” 공정하게 그 신앙을 평가하지 않고 선입견을 가지고 멀리하는 자야말로 “어리석은 자”라고 우리에게 가르치신다. 둘째, “예언자의 말한 모든 것”을 더디 믿는 것. 그리스도는 그들이 여인이나 천사의 말을 더디 믿는 것을 책망하신 것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 “선지자의 말한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것”에 대해 책망하신다. 그들이 구약의 예언자들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고 명심하였더라면 그날 아침(그가 죽은 후 사흘째 되는 날)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확신하듯 그리스도가 “죽음에서 부활하심”을 확신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언”에 의해 이루어진 “사건들의 연속”을 보았다면 이보다 더 확실한 “섭리”의 증거를 찾아 볼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조금만 더 성서의 말씀과 “대화를 나눈다면,” 그리고 성서의 말씀을 통해 들려지는 하나님의 섭리를 알고 있다면 우리를 때때로 곤경에 빠지게 만드는 복잡한 문제에 사로잡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2] 그는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그렇게도 그들에게 걸림돌이 되었으며 그의 영광을 믿지 못하게 하였던 그의 수난이 오히려 영광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었으며 다른 길로는 그것을 이룰 수 없었다는 사실을 말해 주었다(26절).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약속된 메시야는 고난을 받아야 그후 통치하시며, 십자가를 통하여 면류관을 얻을 것이라고 선포되고 이제 그 선포가 밝히 드러나지 않았느냐?” 그들은 이사야 53장이나 다니엘 9장을 읽어보지도 못했는가? 그곳에 예언자들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그 뒤를 따른 영광”에 대하여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벧전 1:11).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제 그는 그 십자가의 비밀을 벗기는 두 가지 사실을 밝혀 주고 있다. 그는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그렇게도 그들에게 걸림돌이 되었으며 그의 영광을 믿지 못하게 하였던 그의 수난이 오히려 영광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었으며 다른 길로는 그것을 이룰 수 없었다는 사실을 말해 주었다(26절).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약속된 메시야는 고난을 받아야 그후 통치하시며, 십자가를 통하여 면류관을 얻을 것이라고 선포되고 이제 그 선포가 밝히 드러나지 않았느냐?” 그들은 이사야 53장이나 다니엘 9장을 읽어보지도 못했는가? 그곳에 예언자들은 “그리스도의 수난”과 “그 뒤를 따른 영광”에 대하여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벧전 1:11).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제 그는 그 십자가의 비밀을 벗기는 두 가지 사실을 밝혀 주고 있다. 첫째, 메시야는 이 모든 일로 고난받으셔야만 했었다. 그러므로 그의 수난은 그가 메시야임을 부정하는 것이 아닐 뿐 아니라 오히려 그 증거가 된다. 이는 마치 성도들의 고통이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명하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그리고 그의 수난은 그들의 기대를 모두 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희망의 진정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 그가 “수난자”가 아니었다면 “구속자”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구원을 위해 행하신 것은 계획에 의한 것이었으나 이를 수행함에는 고난과 죽음이 필수적인 조건이었다. 둘째, 그가 이 모든 일을 끝냈을 때 “자기의 영광에 들어 갈” 수 있었다. 그는 부활로써 그 영광에 들어가셨다. 이것이 위로 향한 그의 첫 발걸음이었다. “자기의” 영광이라고 기록된 것을 주의하라. 그것은 “마땅히 그에게 주어질” 영광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세상이 있기 전에 그가 지니고 있었던 영광이었다. 그는 그 영광에 “들어가야만” 하였다. 고난을 통해서 성서의 말씀이 이루어진 것처럼 그 영광을 통해서 비로소 성서의 말씀이 완성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는 먼저 수난을 받고 다음으로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만” 하였다. 그리하여 십자가의 “치욕”은 이제 영원히 “사라지고” 우리도 먼저 “가시” 면류관을, 그리고 다음으로 “영광”의 면류관을 바라게 되었다. [3] 그는 메시야에 대해 말하고 있는 구약의 말씀을 그들에게 자세히 풀이해 주었다. 그리고 이제 그 말씀들이 나사렛 예수안에서 어떻게 완성되었는가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방금 전에 그들이 그에 대해 그에게 말했던 것보다 더 자세히 그에 대해 그들에게 말해 줄 수 있었다(27절). 구약 최초의 영적인 성서 기록자, “모세와” 차례로 ”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며” 그가 받은 고난이 그에 대해 기록한 예언의 말씀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의 성취라는 사실을 설명하였다. 그는 모세로부터 시작하였다. 모세는 메시야께서 뱀에게 “그의 발꿈치를 물리겠으나” 그로 말미암아 뱀의 머리가 산산조각날것이라는 사실을 소상히 예언한 첫 번째 약속의 말씀을 기록한 자였다. 다음 사실들을 유의하자. 그는 메시야에 대해 말하고 있는 구약의 말씀을 그들에게 자세히 풀이해 주었다. 그리고 이제 그 말씀들이 나사렛 예수안에서 어떻게 완성되었는가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방금 전에 그들이 그에 대해 그에게 말했던 것보다 더 자세히 그에 대해 그들에게 말해 줄 수 있었다(27절). 구약 최초의 영적인 성서 기록자, “모세와” 차례로 ”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며” 그가 받은 고난이 그에 대해 기록한 예언의 말씀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의 성취라는 사실을 설명하였다. 그는 모세로부터 시작하였다. 모세는 메시야께서 뱀에게 “그의 발꿈치를 물리겠으나” 그로 말미암아 뱀의 머리가 산산조각날것이라는 사실을 소상히 예언한 첫 번째 약속의 말씀을 기록한 자였다. 다음 사실들을 유의하자. 첫째, “모든 성서”에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기록된 글들이 산만하게 흩어져 있다. 그것들은 “모아” “연결”하는 것은 참으로 유익한 일이다. 아무도 성서의 어느 한 부분에 깊이 통달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무언가 그리스도와 관련된 내용, 어떤 것은 예언으로 어떤 것은 약속의 말씀으로, 어떤 것은 기도로 혹은 다른 형식의 내용으로라도 만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야말로 구약이라는 “광야에 숨겨진 보물”이기 때문이다. 복음의 은혜라는 황금실이 구약이라는 피복을 가로지르고 있다. 어디를 보나 진리를 꿰뚫어 볼 수 있는 실마리가 있다. 둘째, 그리스도에 관한 기록들은 “설명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유대인이라면 학자라 할지라도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면”(행 8:31) 말씀을 깨달았다고 척해선 안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들의 율법에 의해서 잘못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율법의 장막은 걷히고 신약은 구약을 설명하게 되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제일의 성서 주석가이다. 특히 자신에 관한 말씀에 대해선 더욱 그렇다. 부활 후에도 그는 이런 식으로 제자들을 자신에 대한 신비의 지식으로 인도하고 있다. 성서와 상관없는 새로운 말씀을 들려줌으로써가 아니라 어떻게 성서의 말씀이 이루어졌는가 보여 줌으로 그 말씀을 연구하도록 이끄심으로 인도하고 있다. 요한 계시록 자체도 구약 예언서의 두 번째 변형에 지나지 않는다. 계시록도 계속 구약의 예언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모세나 예언자들을 믿지 못하는 자들”은 구제 불가능한 자들이다. 넷째, 성서를 “연구함”에 있어서 그 말씀들은 질서 있게 다루는 “조직적인” 연구를 함이 바람직하다. 왜냐하면 구약의 빛은 “조금씩” 비추다가 “완성의 날”에 절정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햇빛나는 날”에 어떻게 “다양한 방법으로”(이어지는 예언은 언제나 전에 있었던 예언을 보충하고 빛을 비춘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에 “대해서” 조상들에게 말씀하셨는가 살펴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들(조상들)에 의해 우린 지금 그에 대해 “듣고” 있다. 어떤 사람은 그릇된 목적을 갖고 성서를 펼친다. 그들은 계시록을 먼저 연구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여기에 “모세로부터 시작”하라고 가르치시고 있다. 지금까지 그리스도와 제자들 사이에 이루어진 대화의 내용을 살펴보았다. Ⅳ. 이제 비로소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셨다. 길가는 중에 그들에게 하신 그리스도의 설교나 그가 인용하여 설명한 성경 말씀에 대하여 자세하게 다루는 것이 좋았을 것이나 구태여 그렇게 할 필요는 없었다. 왜냐하면 이미 다른 성경 말씀을 통해 그가 하신 말씀의 본질은 파악되기 때문이다. 어쨌든 제자들은 그 말씀에 매표되어 그들의 여행이 의외로 빨리 끝났다고 여기에 되었다. 사실이 그러했다. “저희의 가는 촌에 가까이 가매”(28절) 그들은 그곳에서 그날 밤을 “지내기로” 계획했던 것 같다. 1. 그들은 그에게 함께 머물기를 바랬다. “예수는 더 가려는 것 같이 하시니,” 그는 더 가겠다고 “말한” 것은 아니나 행동으로 더 가겠다는 표시를 하였다. 그리고 초대받지 않은 이방인이 오면 친절히 대하지 않는 것이 보통의 예이므로 그는 그들이 머물 친구의 집에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그는 그들이 머물기를 청하지 않았더라면 계속 갔을 것이다. 이처럼 여기엔 위선 같은 것은 없다. 방문객이 “주저한다”면 거기엔 이유가 있다. 그것은 당신의 집이나 가족에게 “주제넘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기 때문으로 알아야 한다. 그러나 당신이 그를 당신의 손님이나 동료로 기꺼이 맞아들이겠다는 태도를 보이게 되면 그는 당신의 초대를 쾌히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바로 그리스도께서 “더 가려하는 것같이 하신” 이유가 이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고자 하는 자는 그를 초청하고 끈질기게 졸라야 한다. 때로 “그를 찾지 않는 자가 그를 만나게” 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그를 “찾는” 자는 분명히 그를 “만날” 기회가 올 것이다. 그가 우리에게서 “멀어지는” 것 같다면 그것은 우리의 끈질긴 간구가 사라졌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여기에 “저희가 강권하여”라고 하였다. 그들은 모두 그를 붙잡고 부드럽고 간절한 폭력을 쓰면서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하였다. 그리스도와 함께 교제를 나누는 기쁨과 유익함을 맛본 자들은 좀 더 함께 있기를 바라고, 하루 종일이라도 “함께 갈” 뿐아니라 밤에라도 “함께 유하기를” 강권하지 않고는 못견디게 됨을 유의하자. “한 날이 다 지나도” “저녁이 가까우면” 우리는 우리가 쉴 곳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리스도에게도 눈을 돌려 그에게 우리를 위하여 나타나셔서 우리의 마음에 그를 사랑하고 선한 생각으로 가득하도록 우리를 가르쳐 달라며 “우리와 함께 유하기를” 부탁함이 마땅하다. 그리스도는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이셨다. “이에 저희와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받은 바 은혜로 즐거움을 얻은 그들에게 더 많은 교훈과 위로를 주실 작정이었다. 그리스도는 “누구든지 문을 열고” 들어오기를 간구하면 “그에게로 들어가리가”고 약속하셨다(계 3:20).2. 그는 그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셨다(30, 31절). 아마 그는 처음 동행했을 때부터 시작된 이야기를 계속 그들과 나누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대가 길을 가든지, 집 안에 있든지” 하나님의 일을 말할 지어다. 저녁 식사가 마련되는 동안(그 마을이 작고 초라한 곳이므로 식사 준비는 오래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그들과 “유익하고” “교훈적인” 대화를 계속 나누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음식을 먹으며 앉아 있을 때” 그의 입술은 그들을 “먹이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기들과 함께 이야기하고 있는 이 분이 예수라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가 마침내 그가 자신의 정체를 들어내었을 때에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1) 그들이 “음식을 먹으러 앉을 때,” 그는 제자들에게 행하셨던 것처럼 음식을 나누셨으며 그것을 보고 비로소 그들은 그가 예수인 것을 알게 되었다.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그는 이 일을 평소에 하시던 것처럼 권위와 사랑을 보이시며, 옛날과 같은 태도와 몸짓으로, 떡을 떼어 축사하시고 그것을 그들에게 나누어 주시는 일도 옛날과 같은 형식으로 하셨을 것이다. 이 떡은 보리떡 다섯 개처럼 “기적의” 떡도 아니요, 성만찬에 쓰였던 “성례적인” 떡도 아니라 그저 “평범한” 떡이었다. 그런데도 그리스도는 여기에서도 전에처럼 같은 형식을 취하셨다. 이는 특별한 성례전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은총 안에서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우리를 가르치시기 위함이요, 매일 먹는 양식에 대해 감사하며 축복을 구하도록 가르치시기 위함이요, 잘 사는 가정 뿐아니라 우리 모든 가정에 우리 주님 주 예수께서 손수 일용할 양식을 마련해 주신다는 사실을 깨우치시기 위함이다. 우리도 어디든 가서 “음식을 먹으로 앉게” 되면 비록 음식이 볼품없고 입에 맞지 않더라도 그리스도를 식탁 끝머리에 앉히고 음식은 그가 “우리에게 축복하신” 것으로 알고 그의 영광을 위해 “먹고 마시며” 그가 우리에게 “축사하신” 모든 것을 감사와 기쁨으로 받아야 할 것이다. 믿음으로 그 음식이 그리스도의 손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졌으며 그의 축복이 함께 한 음식임을 알게 될 때 우린 기쁜 마음으로 먹을 수 있을 것이다.
(2) 그때 “저희 눈이 밝아져” 그가 누구인지 보게 되고 “그 인줄 알아보았다.” 지금까지 그를 몰라보게 한 것이 무엇이었든지 이제 그것이 사라져 버렸다. 안개가 사라지고 베일이 걷히면서 그가 그들의 주님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게 되었다. 그는 타당하고 거룩한 목적으로 다른 사람의 형상을 쓸 수도 있으나 다른 사람이 그의 형상을 쓸 수는 결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이 바로 주님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그의 성령과 은혜를 통해 그의 백성들 영혼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는가 알아보자.
[1] 성경 말씀을 펴 주신다. 성경 말씀은 “그 말씀을 구하며” 그 말씀 안에서 그를 찾는 자들에게 그를 증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 성만찬의 예식을 통해 주의 식탁에서 만나게 된다. 일반적으로 성례를 통해 자신을 그들에게 밝히시며 “떡을 떼시는 중에 그들에게 자신을 알리신다.” [3] 그러나 베드로의 회심과 같이 성도들의 마음의 눈을 열고 마음에 끼었던 때를 벗겨버리심으로 그 일은 완전히 이루어진다. 계시를 주신 그 분께서 오성(悟性)을 주시지 않는다면 우린 계속 어둠 속에 머물게 된다.3. 그는 그 순간 사라졌다.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그들은 그에게 함께 머물기를 바랬다. “예수는 더 가려는 것 같이 하시니,” 그는 더 가겠다고 “말한” 것은 아니나 행동으로 더 가겠다는 표시를 하였다. 그리고 초대받지 않은 이방인이 오면 친절히 대하지 않는 것이 보통의 예이므로 그는 그들이 머물 친구의 집에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그는 그들이 머물기를 청하지 않았더라면 계속 갔을 것이다. 이처럼 여기엔 위선 같은 것은 없다. 방문객이 “주저한다”면 거기엔 이유가 있다. 그것은 당신의 집이나 가족에게 “주제넘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기 때문으로 알아야 한다. 그러나 당신이 그를 당신의 손님이나 동료로 기꺼이 맞아들이겠다는 태도를 보이게 되면 그는 당신의 초대를 쾌히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바로 그리스도께서 “더 가려하는 것같이 하신” 이유가 이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고자 하는 자는 그를 초청하고 끈질기게 졸라야 한다. 때로 “그를 찾지 않는 자가 그를 만나게” 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그를 “찾는” 자는 분명히 그를 “만날” 기회가 올 것이다. 그가 우리에게서 “멀어지는” 것 같다면 그것은 우리의 끈질긴 간구가 사라졌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여기에 “저희가 강권하여”라고 하였다. 그들은 모두 그를 붙잡고 부드럽고 간절한 폭력을 쓰면서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하였다. 그리스도와 함께 교제를 나누는 기쁨과 유익함을 맛본 자들은 좀 더 함께 있기를 바라고, 하루 종일이라도 “함께 갈” 뿐아니라 밤에라도 “함께 유하기를” 강권하지 않고는 못견디게 됨을 유의하자. “한 날이 다 지나도” “저녁이 가까우면” 우리는 우리가 쉴 곳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리스도에게도 눈을 돌려 그에게 우리를 위하여 나타나셔서 우리의 마음에 그를 사랑하고 선한 생각으로 가득하도록 우리를 가르쳐 달라며 “우리와 함께 유하기를” 부탁함이 마땅하다. 그리스도는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이셨다. “이에 저희와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받은 바 은혜로 즐거움을 얻은 그들에게 더 많은 교훈과 위로를 주실 작정이었다. 그리스도는 “누구든지 문을 열고” 들어오기를 간구하면 “그에게로 들어가리가”고 약속하셨다(계 3:20).그는 그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셨다(30, 31절). 아마 그는 처음 동행했을 때부터 시작된 이야기를 계속 그들과 나누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대가 길을 가든지, 집 안에 있든지” 하나님의 일을 말할 지어다. 저녁 식사가 마련되는 동안(그 마을이 작고 초라한 곳이므로 식사 준비는 오래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그들과 “유익하고” “교훈적인” 대화를 계속 나누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음식을 먹으며 앉아 있을 때” 그의 입술은 그들을 “먹이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기들과 함께 이야기하고 있는 이 분이 예수라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가 마침내 그가 자신의 정체를 들어내었을 때에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그들이 “음식을 먹으러 앉을 때,” 그는 제자들에게 행하셨던 것처럼 음식을 나누셨으며 그것을 보고 비로소 그들은 그가 예수인 것을 알게 되었다.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그는 이 일을 평소에 하시던 것처럼 권위와 사랑을 보이시며, 옛날과 같은 태도와 몸짓으로, 떡을 떼어 축사하시고 그것을 그들에게 나누어 주시는 일도 옛날과 같은 형식으로 하셨을 것이다. 이 떡은 보리떡 다섯 개처럼 “기적의” 떡도 아니요, 성만찬에 쓰였던 “성례적인” 떡도 아니라 그저 “평범한” 떡이었다. 그런데도 그리스도는 여기에서도 전에처럼 같은 형식을 취하셨다. 이는 특별한 성례전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은총 안에서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우리를 가르치시기 위함이요, 매일 먹는 양식에 대해 감사하며 축복을 구하도록 가르치시기 위함이요, 잘 사는 가정 뿐아니라 우리 모든 가정에 우리 주님 주 예수께서 손수 일용할 양식을 마련해 주신다는 사실을 깨우치시기 위함이다. 우리도 어디든 가서 “음식을 먹으로 앉게” 되면 비록 음식이 볼품없고 입에 맞지 않더라도 그리스도를 식탁 끝머리에 앉히고 음식은 그가 “우리에게 축복하신” 것으로 알고 그의 영광을 위해 “먹고 마시며” 그가 우리에게 “축사하신” 모든 것을 감사와 기쁨으로 받아야 할 것이다. 믿음으로 그 음식이 그리스도의 손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졌으며 그의 축복이 함께 한 음식임을 알게 될 때 우린 기쁜 마음으로 먹을 수 있을 것이다.그때 “저희 눈이 밝아져” 그가 누구인지 보게 되고 “그 인줄 알아보았다.” 지금까지 그를 몰라보게 한 것이 무엇이었든지 이제 그것이 사라져 버렸다. 안개가 사라지고 베일이 걷히면서 그가 그들의 주님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게 되었다. 그는 타당하고 거룩한 목적으로 다른 사람의 형상을 쓸 수도 있으나 다른 사람이 그의 형상을 쓸 수는 결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이 바로 주님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그의 성령과 은혜를 통해 그의 백성들 영혼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는가 알아보자.성경 말씀을 펴 주신다. 성경 말씀은 “그 말씀을 구하며” 그 말씀 안에서 그를 찾는 자들에게 그를 증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성만찬의 예식을 통해 주의 식탁에서 만나게 된다. 일반적으로 성례를 통해 자신을 그들에게 밝히시며 “떡을 떼시는 중에 그들에게 자신을 알리신다.”그러나 베드로의 회심과 같이 성도들의 마음의 눈을 열고 마음에 끼었던 때를 벗겨버리심으로 그 일은 완전히 이루어진다. 계시를 주신 그 분께서 오성(悟性)을 주시지 않는다면 우린 계속 어둠 속에 머물게 된다.그는 그 순간 사라졌다.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Afantoj evge,neto -즉 그는 자신을 감추셨고 갑자기 사라지셨으며 “보이지 않으셨다.” 또는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되었으며” 그들이 알아보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몸은 부활 후에도 그가 고난받고 죽었을 당시와 “같은 몸”이었고 그 흉기 자국까지 그대로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사실은 이미 상당한 변화를 일으켜 그가 합당하다고 여겨질 때엔 “보일 수”도 있고 “안 보일 수”도 있게 변할 수 있는 몸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영광의 몸”이 되는 첫째 단계가 아니었을까 한다. 제자들에게 잠깐 자신의 모습을 비춘 후 그는 즉시 사라지셨다. 그러한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그리스도 환상은 오늘 우리들도 보게 된다. 우리도 그를 본다. 그러나 잠시 후엔 다시 그의 모습이 사라진다. 우리가 천국에 가게 되면 그때엔 그를 영원히 뵐 수 있게 될 것이다. Ⅴ. 이같은 사건을 통해 제자들의 마음에 느낀 생각과 이 사실은 예루살렘에 있는 자기의 형제들에게 보고한 내용이 계속된다. 1. 그리스도께서 그들과 함께 나누신 대화를 통해 느낀 감정(32절).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 하더냐?” “그래, 내 마음은 그랬어” 하고 한 제자가 말하자 “내 마음도 그랬어”라고 다른 제자도 동의하였다. “내가 살아오는 동안 그처럼 깊은 감명을 받기는 처음일세. 이와 같이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하신 설교 말씀에 견주어 “소리”를 비교한 것이 아니라 “마음”을 비교해 보았다. 비록 설교자가 누구인줄 알지는 못했었지만 그 설교는 능력 있는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모든 일을 그들에게 간단하고 자세히 풀이해 주었다. 그리고 특히 더 귀한 것은 그들의 마음이 타오르는 불 속에 던져진 것처럼 그들의 영혼에 “거룩한 빛”과 함께 “거룩한 열정”이 생겨났으며 그들 마음속에 경건하고 간절한 사랑의 불이 붙여진 것이다. 그들의 믿음이 다시 생겨남으로 그들은 그제야 비로소 지금까지 함께 대화를 나눈 그 분이 바로 “예수”였다 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가 누구였는지 좀 더 빨리 알아채지 못했으니 우리 같은 바보가 어디 있을까! 그외에 어느 누군가, 그분의 말씀 외에 어떤 말씀이 이처럼 우리 속에서 마음을 뜨겁게 할 수 있으랴. 마음의 열쇠를 가진 분은 그 분밖에 없다. 아무도 그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다음 사실들을 고찰하여 보자.
(1) 어떤 “설교”가 그리스도가 하신 것처럼 “선을 이루는” 설교인가. “쉬운 설교” 우리의 수준에 맞으며 친근성 있는 설교─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그리고 “성경적인 설교.”─ “우리에게 성경을”─자신에 관계되는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목사들은 신도들에게 성경에 있는 신앙을 보여 주어야만 한다. 성경에 있지 않은 교리를 가르쳐서는 안 된다. 성경의 말씀이 그들의 지식의 샘이며 신앙의 근본임을 보여 주어야 한다. 그리스도에 대해 기록한 성경 말씀을 그들에게 풀이해 주었을 때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지고 그들에게 위로를 주고 동시에 확신을 불어넣어 주었음을 명심하자.
(2) 어떤 “반응”이 “선을 이루는” 반응인가? “마음을 뜨겁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로 인하여 큰 감명을 받았을 때, 특히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큰 감명을 받아 그로 인하여 우리의 마음이 그를 사랑함으로 용솟음칠 때, 경건한 사랑과 헌신으로 사로잡힐 때, 우리 마음은 “우리 안에서 뜨거워진다.” 우리 마음이 앙양되고 용솟음칠 때, 불꽃처럼 하나님을 향하여 “위로 날아오를” 때, 그리고 우리의 마음에 불이 당겨져 뜨거운 열심을 품고 우리 자신이나 이웃 안에 있는 죄를 멀리하게 되며, 어느 정도나마 “심판의 성령”과 “소멸의 성령”으로 죄에서 깨끗함을 입게 되었을 때, 그때 우리는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은 이처럼 불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2. 예루살렘에 있던 형제들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33절). “곧 그 시로 일어나.” 그리스도를 만나 기쁨에 사로잡힌 그들은 식사를 마칠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 이미 어두워졌으나 그들은 전속력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그들에게 그리스도와의 모든 관계를 끊으려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었더라면 지금까지 생각하였던 것들은 순식간에 말끔히 사라져 버리고 다시 제자들에게 돌아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들은 아마 엠시오에서 그날 밤을 지내기로 작정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를 만난 후 그 소식을 제자들에게 알려 주어, 그들의 떨리는 믿음을 굳게 해 주고 “그들이 하나님에게 받은 그 위로”로 슬픈 영혼들을 위로해 주지 않고 편히 쉴 수가 없었다. 그리스도를 만난 자들은 다른 사람에게 그들의 영혼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 알려 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당신이 거듭나고, 위로받고, 교훈 받았다면 당신의 형제를 도우시오. 이 제자들은 이 일로 인해서 “충만”한 상태였기에 형제들에게 돌아가 주님이 부활하셨던 소식을 전할 뿐 아니라 그들의 기쁨을 같이 나누어야만 했다. 다음 사실들을 고찰해 보자.
(1) 그들이 제자들에게 돌아갔을 때, 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다른 증거를 가지고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중이었다. 평소에 낯이 있었던 열 한 제자들은 밤늦게까지 “함께 모여” 함께 기도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위급한 시기에 벌어진 일들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 le,goutaj 원본에 보는 대로 이들은 “두” 제자가 아니라 열 한 제자들이다.)은 함께 “이야기하고” 있었다. 두 제자가 들어오자 그들은 기쁨과 환희에 넘쳐 그들에게 알려 주었다.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34절).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다른 제자들 보다 먼저 만나보았다는 사실은 고린도 전서 15장 5절에 기록되어 있다.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천사가 여인들에게 그리스도가 부활한 사실을 특히 베드로에게 알리라고 한 것을 보아(막 16:7) 그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우리 주 예수께서 바로 그날 “천사들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하여 베드로에게 나타나셨을 것이라는 가정은 상당한 신빙성을 지니고 있다. 베드로는 이 사실을 형제들에게 알렸을 것이다. 그러나 유의할 것은 베드로 자신이 여기서 그 사실을 자랑스럽게 두 제자에게 말해 주지 않고(그는 그렇게 하는 것이 회개한 자로서 합당치 못하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다른 제자들이 기쁨에 겨워 “주께서 과연 그리스도께서 그들과 함께 나누신 대화를 통해 느낀 감정(32절).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 하더냐?” “그래, 내 마음은 그랬어” 하고 한 제자가 말하자 “내 마음도 그랬어”라고 다른 제자도 동의하였다. “내가 살아오는 동안 그처럼 깊은 감명을 받기는 처음일세. 이와 같이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하신 설교 말씀에 견주어 “소리”를 비교한 것이 아니라 “마음”을 비교해 보았다. 비록 설교자가 누구인줄 알지는 못했었지만 그 설교는 능력 있는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모든 일을 그들에게 간단하고 자세히 풀이해 주었다. 그리고 특히 더 귀한 것은 그들의 마음이 타오르는 불 속에 던져진 것처럼 그들의 영혼에 “거룩한 빛”과 함께 “거룩한 열정”이 생겨났으며 그들 마음속에 경건하고 간절한 사랑의 불이 붙여진 것이다. 그들의 믿음이 다시 생겨남으로 그들은 그제야 비로소 지금까지 함께 대화를 나눈 그 분이 바로 “예수”였다 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가 누구였는지 좀 더 빨리 알아채지 못했으니 우리 같은 바보가 어디 있을까! 그외에 어느 누군가, 그분의 말씀 외에 어떤 말씀이 이처럼 우리 속에서 마음을 뜨겁게 할 수 있으랴. 마음의 열쇠를 가진 분은 그 분밖에 없다. 아무도 그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다음 사실들을 고찰하여 보자.어떤 “설교”가 그리스도가 하신 것처럼 “선을 이루는” 설교인가. “쉬운 설교” 우리의 수준에 맞으며 친근성 있는 설교─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그리고 “성경적인 설교.”─ “우리에게 성경을”─자신에 관계되는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목사들은 신도들에게 성경에 있는 신앙을 보여 주어야만 한다. 성경에 있지 않은 교리를 가르쳐서는 안 된다. 성경의 말씀이 그들의 지식의 샘이며 신앙의 근본임을 보여 주어야 한다. 그리스도에 대해 기록한 성경 말씀을 그들에게 풀이해 주었을 때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지고 그들에게 위로를 주고 동시에 확신을 불어넣어 주었음을 명심하자.어떤 “반응”이 “선을 이루는” 반응인가? “마음을 뜨겁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로 인하여 큰 감명을 받았을 때, 특히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큰 감명을 받아 그로 인하여 우리의 마음이 그를 사랑함으로 용솟음칠 때, 경건한 사랑과 헌신으로 사로잡힐 때, 우리 마음은 “우리 안에서 뜨거워진다.” 우리 마음이 앙양되고 용솟음칠 때, 불꽃처럼 하나님을 향하여 “위로 날아오를” 때, 그리고 우리의 마음에 불이 당겨져 뜨거운 열심을 품고 우리 자신이나 이웃 안에 있는 죄를 멀리하게 되며, 어느 정도나마 “심판의 성령”과 “소멸의 성령”으로 죄에서 깨끗함을 입게 되었을 때, 그때 우리는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은 이처럼 불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예루살렘에 있던 형제들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33절). “곧 그 시로 일어나.” 그리스도를 만나 기쁨에 사로잡힌 그들은 식사를 마칠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 이미 어두워졌으나 그들은 전속력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그들에게 그리스도와의 모든 관계를 끊으려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었더라면 지금까지 생각하였던 것들은 순식간에 말끔히 사라져 버리고 다시 제자들에게 돌아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들은 아마 엠시오에서 그날 밤을 지내기로 작정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를 만난 후 그 소식을 제자들에게 알려 주어, 그들의 떨리는 믿음을 굳게 해 주고 “그들이 하나님에게 받은 그 위로”로 슬픈 영혼들을 위로해 주지 않고 편히 쉴 수가 없었다. 그리스도를 만난 자들은 다른 사람에게 그들의 영혼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 알려 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당신이 거듭나고, 위로받고, 교훈 받았다면 당신의 형제를 도우시오. 이 제자들은 이 일로 인해서 “충만”한 상태였기에 형제들에게 돌아가 주님이 부활하셨던 소식을 전할 뿐 아니라 그들의 기쁨을 같이 나누어야만 했다. 다음 사실들을 고찰해 보자.그들이 제자들에게 돌아갔을 때, 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다른 증거를 가지고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중이었다. 평소에 낯이 있었던 열 한 제자들은 밤늦게까지 “함께 모여” 함께 기도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위급한 시기에 벌어진 일들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 le,goutaj 원본에 보는 대로 이들은 “두” 제자가 아니라 열 한 제자들이다.)은 함께 “이야기하고” 있었다. 두 제자가 들어오자 그들은 기쁨과 환희에 넘쳐 그들에게 알려 주었다.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34절).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다른 제자들 보다 먼저 만나보았다는 사실은 고린도 전서 15장 5절에 기록되어 있다.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천사가 여인들에게 그리스도가 부활한 사실을 특히 베드로에게 알리라고 한 것을 보아(막 16:7) 그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우리 주 예수께서 바로 그날 “천사들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하여 베드로에게 나타나셨을 것이라는 가정은 상당한 신빙성을 지니고 있다. 베드로는 이 사실을 형제들에게 알렸을 것이다. 그러나 유의할 것은 베드로 자신이 여기서 그 사실을 자랑스럽게 두 제자에게 말해 주지 않고(그는 그렇게 하는 것이 회개한 자로서 합당치 못하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다른 제자들이 기쁨에 겨워 “주께서 과연 o;ntwj─즉 살아나시고”라고 말했다는 사실이다. 부활은 이미 기정의 사실이었다. 아무도 의심하는 자가 없었다. 여인들에게 뿐 아니라 시몬에게도 나타났으니 말이다.
(2) 두 제자들은 그들이 본 것을 말하여 부활의 증거를 더 보충하였다(35절).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을 말하더라.” 길 가던 중 그들에게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은 그들에게 놀라운 영향을 끼쳐 여기에선 “길에서 된 일”이라고 부르고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말씀은 공허한 소리가 아니라 “영이며 생명이고,” 그 말씀으로 인하여 놀라운 일들이 전혀 예기치 못하던 곳, 그냥 지나쳐 버렸던 곳, “길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한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그때에야 비로소 그를 알아보았다는 사실도 말하였다. 그때 그가 떡을 떼사 축사하시고 그들에게 나누어주실 때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을 열어 그를 알아보게 하셨다는 것도 말해 주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각자 경험하고 체험한 것들을 비교하면 서로 느낀 바와 아는 바를 교환하는 것은 진리를 발견하고 발전시켜 나가는데 있어 큰 유익이 됨을 깊이 명심하자.
두 제자들은 그들이 본 것을 말하여 부활의 증거를 더 보충하였다(35절).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을 말하더라.” 길 가던 중 그들에게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은 그들에게 놀라운 영향을 끼쳐 여기에선 “길에서 된 일”이라고 부르고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말씀은 공허한 소리가 아니라 “영이며 생명이고,” 그 말씀으로 인하여 놀라운 일들이 전혀 예기치 못하던 곳, 그냥 지나쳐 버렸던 곳, “길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한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그때에야 비로소 그를 알아보았다는 사실도 말하였다. 그때 그가 떡을 떼사 축사하시고 그들에게 나누어주실 때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을 열어 그를 알아보게 하셨다는 것도 말해 주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각자 경험하고 체험한 것들을 비교하면 서로 느낀 바와 아는 바를 교환하는 것은 진리를 발견하고 발전시켜 나가는데 있어 큰 유익이 됨을 깊이 명심하자.
24:36 사도들을 방문하신 그리스도(누가복음 24:36-49)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그날 다섯 번 자신을 나타내셨다. 동산에서 막달라 마리아 개인에게 나타나셨고(요 20:14), 제자들에게 얘기하러 가는 여인들에게 나타나셨고(마 28:9), 베드로 개인에게 나타나셨고,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고, 이제 밤중에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시는데 요한복음 20장 19절에도 이에 대한 언급이 기록되고 있다. 다음 사실들을 고찰해 보자. Ⅰ. 그가 그들에게 나타남으로 그들은 크게 “놀랐다.” 그는 아주 “적절한 때에” 그들 가운데 나타나셨다. 그때 그들은 그리스도 부활의 증거를 가지고 분석하고 있었다. “이 말을 할 때에,” 즉 지금까지 보고된 내용을 놓고 그것들이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이 되는지 그 여부를 따지며 앞으로 어떻게 처신할 것인지 “문제 삼고 토론하려는” 순간에 “예수께서 친히 그 가운데 서서 모든 문제들을 해결해 주셨다.” 서로 위로하기에 최선을 다하는 자들에겐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증거하시고 위로하셨듯이) “하나님의 영이 그들에게 증거하시리라”는 보증을 받게 된다. 다음 사실들을 고찰해 보자. 1.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하신 “위로”의 말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은 일반적으로 볼 때 지금 그리스도가 그들을 방문하신 것은 사랑과 우정의 방문이었음을 암시하는 말씀이다. 그가 고난받을 때 비록 그들은 무정하게 그를 버렸지만 그는 그들이 모두 모였을 때 그들에게 나타나시는 은혜를 베푸셨다. 그는 우리 행한 대로 갚으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를 보았다는 자들을 “믿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이 더 이상 불신앙에 매여있지 않도록 이제 “그 자신”이 오셨다. 전에 그는 부활 후에 “그들을 갈릴리에서 보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그러나 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자신을 그들에게 보이고 싶으셔서 약속을 앞당겨 “예루살렘에서 그들을 보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선 때로 자기 말씀보다 더 “선한 것”을 이루신다. 그러나 보다 더 “악한 것”은 결코 이루시지 않는다. 이제 그들에게 하신 첫마디는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였다. 의례적인 인사가 아닌 위안의 말씀이었다. 유대인들 사이엔 평범하게 주고받은 인사말이었다. 그가 비록 지금은 성별된 자리에 들어가셨지만 이처럼 말씀하심으로 그래도 제자들과 가까이 하시려는 평소의 자상함을 나타내셨다. 많은 사람들이 조금만 높아지면 옛 친구조차 잊어버리고 그들을 깔보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그들과 가까이 하심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첫 마디를 던지심으로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부인한 것”에 대해서 베드로와, 자기를 버리고 “도망간 것”에 대해서 제자들과 담판 지으러 오신 것이 아님을 암시하셨다. 그게 아니라 그는 그들을 용서하였으며 그들을 다시 받아들이시려는 의미로 “평강으로 오셨다.”
2. 그로 인하여 제자들은 심히 “놀랐다”(37절). “그들이 영을 보는 것이 아닌가”하여 “놀라고 무서워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아무 인기척도 없이 그들 가운데 들어왔으며 그들이 미처 알아보기도 전에 그들 가운데 서 계셨기 때문이다(마 14:26). 제자들이 “유령이다”고 말했을 때(마 14:26) 쓰인 단어는 fa,ntasma─즉 허깨비, 혹은 요괴이지만 여기에 쓰인 단어는 pneu/ma─즉 영혼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들은 실지 몸을 입지 않은 영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비록 우리가 영의 세계와 비슷하거나 비교되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그 세계에 호기심이 많다 할지라도 물질과 감각의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동안엔 그와 같은 영이 전혀 다른 본질로써 우리에게 나타나 함께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분명 떨리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무언가 전혀 이상한 일이며 이상한 일을 징조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하신 “위로”의 말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은 일반적으로 볼 때 지금 그리스도가 그들을 방문하신 것은 사랑과 우정의 방문이었음을 암시하는 말씀이다. 그가 고난받을 때 비록 그들은 무정하게 그를 버렸지만 그는 그들이 모두 모였을 때 그들에게 나타나시는 은혜를 베푸셨다. 그는 우리 행한 대로 갚으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를 보았다는 자들을 “믿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이 더 이상 불신앙에 매여있지 않도록 이제 “그 자신”이 오셨다. 전에 그는 부활 후에 “그들을 갈릴리에서 보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그러나 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자신을 그들에게 보이고 싶으셔서 약속을 앞당겨 “예루살렘에서 그들을 보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선 때로 자기 말씀보다 더 “선한 것”을 이루신다. 그러나 보다 더 “악한 것”은 결코 이루시지 않는다. 이제 그들에게 하신 첫마디는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였다. 의례적인 인사가 아닌 위안의 말씀이었다. 유대인들 사이엔 평범하게 주고받은 인사말이었다. 그가 비록 지금은 성별된 자리에 들어가셨지만 이처럼 말씀하심으로 그래도 제자들과 가까이 하시려는 평소의 자상함을 나타내셨다. 많은 사람들이 조금만 높아지면 옛 친구조차 잊어버리고 그들을 깔보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그들과 가까이 하심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첫 마디를 던지심으로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부인한 것”에 대해서 베드로와, 자기를 버리고 “도망간 것”에 대해서 제자들과 담판 지으러 오신 것이 아님을 암시하셨다. 그게 아니라 그는 그들을 용서하였으며 그들을 다시 받아들이시려는 의미로 “평강으로 오셨다.”그로 인하여 제자들은 심히 “놀랐다”(37절). “그들이 영을 보는 것이 아닌가”하여 “놀라고 무서워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아무 인기척도 없이 그들 가운데 들어왔으며 그들이 미처 알아보기도 전에 그들 가운데 서 계셨기 때문이다(마 14:26). 제자들이 “유령이다”고 말했을 때(마 14:26) 쓰인 단어는 fa,ntasma─즉 허깨비, 혹은 요괴이지만 여기에 쓰인 단어는 pneu/ma─즉 영혼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들은 실지 몸을 입지 않은 영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비록 우리가 영의 세계와 비슷하거나 비교되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그 세계에 호기심이 많다 할지라도 물질과 감각의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동안엔 그와 같은 영이 전혀 다른 본질로써 우리에게 나타나 함께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분명 떨리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무언가 전혀 이상한 일이며 이상한 일을 징조이기 때문이다. Ⅱ. 그와 대화를 나눔으로 그들은 큰 “만족”을 얻었다. 그 내용을 살펴보자. 1. 이유 없이 두려워하는 그들에 대한 책망. “어찌하여 두려워하는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38절) 다음 사실들을 고찰해 보자.
(1) “두려워” 할 때엔 언제나 “우리 마음에” 우리를 해치는 “의심들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때로는 “우리 마음속에 일어나는 의심들” 때문에 “두려워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슬픔이나 걱정은 자신의 환상이 만들어내는 의심으로부터 생겨났다. 때로는 마음속에 일어나는 의심들은 걱정의 소산인 경우도 있다. 밖으론 놀라고 속으론 두려워하게 된다. 우울하고 마음에 두렵게 하는 것들은 하나님께 욕을 돌리며 자신에게도 동요를 일으키는 “마음속에 일어나는 의심들이다.” “나는 이제 당신의 눈길에서 벗어났습니다. 주께선 나를 버리셨고 나를 잊으셨나이다.”
(2) 우리의 마음을 동요시키는 골치 아픈 의심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오해로부터 생겨난다. 그들은 여기서 그리스도를 보았을 때 “영으로 생각하였고” 그 때문에 두려움을 느끼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가까운 형제”임을 잊고 영의 세계가 우리의 세계에서 먼 것처럼 그를 우리와 멀리 있는 분으로 여겼기 때문에 두려움이 생긴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성령을 통하여 우리를 깨우치시고 시험하실 때, 그의 섭리로 우리를 시험하고 회개시키실 때, 우린 그가 우리를 해치려는 것으로 “오해하고” 그로 인하여 두려워하게 된다.
(3) 우리 마음속에 일어나는 모든 나쁜 의심은 언제 일어나든 주 예수께서는 알게 된다. 일어나는 즉시 알게 되는데 이것은 그를 유감스럽게 만든다. 그러한 “의심”을 품은 제자들을 꾸짖으셔서 우리에게 우리 스스로 그런 의심을 품는 것을 꾸짖도록 가르치셨다. “내 영혼아, 너는 어찌하여 낙심하느냐? 어찌하여 두려워하느냐” 어찌하여 “선도 아니면 진리도 아니고” “근본도 아니고 결과도 아니며” 다만 하나님 안에서 누릴 우리의 기쁨을 방해하며 우리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게 하고 사탄에게만 유익을 주며 우리 앞에 놓인 위로를 얻지 못하게 하는 “의심이 일어나느냐?”
2. 그들에게 자신의 부활의 증거를 보여 주셨다. 그들에게 자신이 “영이 아님”을 보여 줌으로써 그들의 “두려움”을 “없이하셨고” 부활의 “신앙에 대한 확고한 증거”를 보여 줌으로써 그 신앙을 자신을 가지고 전 세계에 전할 수 있도록 해 주셨다. 그 증거는 두 가지였다.
(1) 그는 그들에게 자신의 몸, 특히 “손과 발을” 보여 주셨다. 그들 눈에도 모습, 체격과 외형에 있어서 그들의 주님과 비슷하였다. 그렇지만 이것은 그의 혼이 아닐까? “아니다”고 그리스도는 말씀하신다. “내 손과 발을 보라. 내가 손과 발을 가지고 있음을 보지 않느냐? 진짜 몸이다. 손과 발을 이처럼 움직이는 것을 보지 않느냐? 살아있는 몸이다. 손과 발에 난 칼자국이 보이지 않느냐? 그러므로 이것은 내 몸, 십자가에 달렸을 때 너희가 본 것과 같은 몸, 빌려온 것이 아닌 몸이다.” 그는 다음과 같은 원칙을 밝히셨다. “영은 살이나 뼈를 지니고 있지 않다.” 그것은 우리의 육체처럼 대단히 많은 부분들이 다양한 조직을 이루어 별개의 조직체들이 종합을 이루어 된 것이 아니다. 그는 무엇이 “영”인지 우리에게 말하여 주고 있지는 않지만(그것은 우리가 영의 세계에 들어가서 알아도 늦지 않을 것이다) 어떤 것이 영이 아닌가는 밝혀 주고 있다. “영은 뼈나 산을 지니고 있지 않다.”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바로 나다. 너희가 그렇게도 잘 알고 지내며 그렇게도 가깝게 얘기를 나누던 나다. 바로 나이니 너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기뻐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를 똑바로 알고” 그가 “자신들의” 주님이신 것을 아는 자들은 그가 나타나실 때 갑자기 닥치더라도 하등 두려워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1] 그는 그들의 “시각”에 판단을 맡기셨다. 못 자국이 남아있는 “손과 발”을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입은 몸에 그런 자국을 그냥 남겨 두신 것은 그들이 그것을 증거로 그가 바로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그 자국들이 “보여지기를” 바라셨다. 그는 후에 도마에게도 그 자국들을 보이셨다. 그는 우리를 위해 고난받으신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것을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으며 또한 그를 위한 우리의 고난을 부끄러워할 이유도 없다. 그들을 위한 훈계를 마무리 지으시기 위하여 이처럼 그들에게 상처를 보여 주심으로 그는 또한 하나님의 중개자로서의 역할을 다하셨다는 표시로 아버지에게도 보이신 셈이 되었다. 그는 하늘에서 “죽임을 당한 어린 양”(계 5:6)으로 나타난다. 그의 “피는 말하는 피”이다(히 12:24). 그는 속죄의 희생 제물로 모든 일을 마치셨다. 그는 여기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역시 아버지께도 “내 손과 발을 보소서”(슥 13:6, 7)라고 말씀하신다. [2] 그들에게 “만져 보게” 하신다. “또 나를 만져 보라.” 앞서 막달라 마리아에겐 만지지 못하도록 막았다(요 20:17). 그러나 그의 부활에 대해 전하며 그로 인하여 박해를 받게 될 제자들에겐 만지게 하여 그 모든 일에 자신을 가지고 나갈 수 있도록 하셨다. 그가 “영”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우치기 위하여 “자기를 만지라”고 말씀하셨다. 실지로 영이나 유령 같은 존재가 없었더라면(실제로 제자들은 그러한 존재가 있다고 믿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와 같은 기록이나 다른 기록에서 알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그런 존재는 없다고 말해 주심으로 그들의 헛된 미망을 깨우쳐 주실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러한 유령과 같은 존재가 있었으며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긍정하고 계신 것 같다. 아니라면 구태여 그가 영이 아니라고 변명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고대 기독교 시대엔 상당히 많은 이단자들이 있었는데 내가 보기에 그들은 무신론자에 가깝다. 그들은 그리스도는 어떤 본질적인 육체를 지닌 것이 아니라 일종의 유령과 같은 존재였기 때문에 태어나지도 않고 고통도 받지 않는 존재라고 말하였다. 발렌틴교도(Valentinians), 마니교도(Manichees)들, 그리고 시몬 마구스(Simon Magus)의 추종자들이 그러한 야만스런 주장을 하였다고 한다. 이유 없이 두려워하는 그들에 대한 책망. “어찌하여 두려워하는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38절) 다음 사실들을 고찰해 보자.”두려워” 할 때엔 언제나 “우리 마음에” 우리를 해치는 “의심들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때로는 “우리 마음속에 일어나는 의심들” 때문에 “두려워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슬픔이나 걱정은 자신의 환상이 만들어내는 의심으로부터 생겨났다. 때로는 마음속에 일어나는 의심들은 걱정의 소산인 경우도 있다. 밖으론 놀라고 속으론 두려워하게 된다. 우울하고 마음에 두렵게 하는 것들은 하나님께 욕을 돌리며 자신에게도 동요를 일으키는 “마음속에 일어나는 의심들이다.” “나는 이제 당신의 눈길에서 벗어났습니다. 주께선 나를 버리셨고 나를 잊으셨나이다.”우리의 마음을 동요시키는 골치 아픈 의심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오해로부터 생겨난다. 그들은 여기서 그리스도를 보았을 때 “영으로 생각하였고” 그 때문에 두려움을 느끼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가까운 형제”임을 잊고 영의 세계가 우리의 세계에서 먼 것처럼 그를 우리와 멀리 있는 분으로 여겼기 때문에 두려움이 생긴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성령을 통하여 우리를 깨우치시고 시험하실 때, 그의 섭리로 우리를 시험하고 회개시키실 때, 우린 그가 우리를 해치려는 것으로 “오해하고” 그로 인하여 두려워하게 된다.우리 마음속에 일어나는 모든 나쁜 의심은 언제 일어나든 주 예수께서는 알게 된다. 일어나는 즉시 알게 되는데 이것은 그를 유감스럽게 만든다. 그러한 “의심”을 품은 제자들을 꾸짖으셔서 우리에게 우리 스스로 그런 의심을 품는 것을 꾸짖도록 가르치셨다. “내 영혼아, 너는 어찌하여 낙심하느냐? 어찌하여 두려워하느냐” 어찌하여 “선도 아니면 진리도 아니고” “근본도 아니고 결과도 아니며” 다만 하나님 안에서 누릴 우리의 기쁨을 방해하며 우리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게 하고 사탄에게만 유익을 주며 우리 앞에 놓인 위로를 얻지 못하게 하는 “의심이 일어나느냐?”그들에게 자신의 부활의 증거를 보여 주셨다. 그들에게 자신이 “영이 아님”을 보여 줌으로써 그들의 “두려움”을 “없이하셨고” 부활의 “신앙에 대한 확고한 증거”를 보여 줌으로써 그 신앙을 자신을 가지고 전 세계에 전할 수 있도록 해 주셨다. 그 증거는 두 가지였다.그는 그들에게 자신의 몸, 특히 “손과 발을” 보여 주셨다. 그들 눈에도 모습, 체격과 외형에 있어서 그들의 주님과 비슷하였다. 그렇지만 이것은 그의 혼이 아닐까? “아니다”고 그리스도는 말씀하신다. “내 손과 발을 보라. 내가 손과 발을 가지고 있음을 보지 않느냐? 진짜 몸이다. 손과 발을 이처럼 움직이는 것을 보지 않느냐? 살아있는 몸이다. 손과 발에 난 칼자국이 보이지 않느냐? 그러므로 이것은 내 몸, 십자가에 달렸을 때 너희가 본 것과 같은 몸, 빌려온 것이 아닌 몸이다.” 그는 다음과 같은 원칙을 밝히셨다. “영은 살이나 뼈를 지니고 있지 않다.” 그것은 우리의 육체처럼 대단히 많은 부분들이 다양한 조직을 이루어 별개의 조직체들이 종합을 이루어 된 것이 아니다. 그는 무엇이 “영”인지 우리에게 말하여 주고 있지는 않지만(그것은 우리가 영의 세계에 들어가서 알아도 늦지 않을 것이다) 어떤 것이 영이 아닌가는 밝혀 주고 있다. “영은 뼈나 산을 지니고 있지 않다.”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바로 나다. 너희가 그렇게도 잘 알고 지내며 그렇게도 가깝게 얘기를 나누던 나다. 바로 나이니 너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기뻐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를 똑바로 알고” 그가 “자신들의” 주님이신 것을 아는 자들은 그가 나타나실 때 갑자기 닥치더라도 하등 두려워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그는 그들의 “시각”에 판단을 맡기셨다. 못 자국이 남아있는 “손과 발”을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입은 몸에 그런 자국을 그냥 남겨 두신 것은 그들이 그것을 증거로 그가 바로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그 자국들이 “보여지기를” 바라셨다. 그는 후에 도마에게도 그 자국들을 보이셨다. 그는 우리를 위해 고난받으신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것을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으며 또한 그를 위한 우리의 고난을 부끄러워할 이유도 없다. 그들을 위한 훈계를 마무리 지으시기 위하여 이처럼 그들에게 상처를 보여 주심으로 그는 또한 하나님의 중개자로서의 역할을 다하셨다는 표시로 아버지에게도 보이신 셈이 되었다. 그는 하늘에서 “죽임을 당한 어린 양”(계 5:6)으로 나타난다. 그의 “피는 말하는 피”이다(히 12:24). 그는 속죄의 희생 제물로 모든 일을 마치셨다. 그는 여기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역시 아버지께도 “내 손과 발을 보소서”(슥 13:6, 7)라고 말씀하신다.그들에게 “만져 보게” 하신다. “또 나를 만져 보라.” 앞서 막달라 마리아에겐 만지지 못하도록 막았다(요 20:17). 그러나 그의 부활에 대해 전하며 그로 인하여 박해를 받게 될 제자들에겐 만지게 하여 그 모든 일에 자신을 가지고 나갈 수 있도록 하셨다. 그가 “영”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우치기 위하여 “자기를 만지라”고 말씀하셨다. 실지로 영이나 유령 같은 존재가 없었더라면(실제로 제자들은 그러한 존재가 있다고 믿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와 같은 기록이나 다른 기록에서 알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그런 존재는 없다고 말해 주심으로 그들의 헛된 미망을 깨우쳐 주실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러한 유령과 같은 존재가 있었으며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긍정하고 계신 것 같다. 아니라면 구태여 그가 영이 아니라고 변명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고대 기독교 시대엔 상당히 많은 이단자들이 있었는데 내가 보기에 그들은 무신론자에 가깝다. 그들은 그리스도는 어떤 본질적인 육체를 지닌 것이 아니라 일종의 유령과 같은 존재였기 때문에 태어나지도 않고 고통도 받지 않는 존재라고 말하였다. 발렌틴교도(Valentinians), 마니교도(Manichees)들, 그리고 시몬 마구스(Simon Magus)의 추종자들이 그러한 야만스런 주장을 하였다고 한다. 그런 자들은 Dokh,tai 와 Fantusiastai. 라 불리운다. 이런 이단교리들이 “매장된” 지 오랜 세월이 지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이나 “유령”이 아니라 진짜 몸을 지녔고 부활하신 후에도 그 몸을 지니셨다는 사실을 알고 확신한다.(2) 그는 그들과 함께 “잡수셨다.” 이는 그가 진짜 몸을 지니고 있으며 마치 친구처럼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싶으신 그의 심정을 보여 주시기 위함이었다. 베드로는 이 사실에 대해 특히 강조하고 있다(행 10:41).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신 후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1] “그의 손과 발을 보고” 나서 그들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저희가 너무 기뻐 오히려 믿지 못하고 기이히 여겼다”(41절). “아직” 그를 믿지 못한 것, e;ti avpistou,ntwn auvtw/n ─즉 아직 믿지 못한 자들처럼 믿지 못한 것은 그들의 의지가 약했기 때문이었다. 제자들조차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기를 주저했다는 사실이 오히려 그 부활의 진리를 확증시켜 주고 있다. 그의 시체를 훔쳐내어 대제사장들이 주장했듯 빈 무덤을 보고 “그가 부활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가 부활했음에도 계속해서 “그는 부활하지 않았다”고 말하려고 하고 있다. 그들이 처음 그 사실을 믿지 못하고 계속해서 부활을 증명할 수 있는 확실한 증거를 요구한 것은 그들이 후에 부활을 믿게 되었을 때, 그리고 그 진리에 전적으로 자신을 내맡기게 되었을 때 그 부활이야말로 모든 가능한 일들의 완전한 근거가 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한편 그것이 그들의 약점이기는 했으나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믿지 못한 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증거들을 멸시하는 데서 비롯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그들과 함께 “잡수셨다.” 이는 그가 진짜 몸을 지니고 있으며 마치 친구처럼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싶으신 그의 심정을 보여 주시기 위함이었다. 베드로는 이 사실에 대해 특히 강조하고 있다(행 10:41).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신 후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그의 손과 발을 보고” 나서 그들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저희가 너무 기뻐 오히려 믿지 못하고 기이히 여겼다”(41절). “아직” 그를 믿지 못한 것, e;ti avpistou,ntwn auvtw/n ─즉 아직 믿지 못한 자들처럼 믿지 못한 것은 그들의 의지가 약했기 때문이었다. 제자들조차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기를 주저했다는 사실이 오히려 그 부활의 진리를 확증시켜 주고 있다. 그의 시체를 훔쳐내어 대제사장들이 주장했듯 빈 무덤을 보고 “그가 부활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가 부활했음에도 계속해서 “그는 부활하지 않았다”고 말하려고 하고 있다. 그들이 처음 그 사실을 믿지 못하고 계속해서 부활을 증명할 수 있는 확실한 증거를 요구한 것은 그들이 후에 부활을 믿게 되었을 때, 그리고 그 진리에 전적으로 자신을 내맡기게 되었을 때 그 부활이야말로 모든 가능한 일들의 완전한 근거가 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한편 그것이 그들의 약점이기는 했으나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믿지 못한 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증거들을 멸시하는 데서 비롯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첫째, 그들은 “너무 기쁨으로 오히려 믿지 못하였다.” 요셉이 살아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의 야곱과 같은 형편이었다. 사실치고는 너무도 기쁜 소식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사랑과 욕심이 “과하여” 믿음과 소망이 약해질 때엔 약한 믿음을 배척하지 말고 북돋아 주어야 한다. 둘째, 그들은 “기이히 여겼다.” 그들은 그 사실이 “너무도 기쁘고” “너무도 엄청난” 것이어서 그 순간 성경 말씀도 하나님의 권능도 잊어버리고 사실로 믿어지지가 않았다. [2] 그들에게 확신과 용기를 심어 주시기 위해 그리스도는 “먹을 것을 요구하셨다.” 엠마오에서도 두 제자와 함께 식탁에 앉았으나 그들과 함께 식사하셨다는 기록은 없다. 부활한 후 몸의 상태가 예전과는 달라졌기 때문에 예전처럼 그들과 함께 말하고 먹고 마시지는 못하였으나 이제 그가 실지로 “생명을 되찾았다”는 사실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그들”과 함께 “잡수셨다”(나사로도 부활 후에 생명을 되찾았을 뿐 아니라 예전의 생활 상태대로 돌아가 살다 다시 죽었다). 그들은 그에게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렸다(42절). 간소한 식사였다. 그러나 그것이 제자들의 식사였다면 그들의 주님도 그들과 같은 식사를 드실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아버지의 나라에선 그와 같은 식사를 대접받을 것이며 그의 나라에서 그와 함께 먹고 마실 것이기 때문이다.3.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해 주셨다. 그들은 그 말씀을 읽고 “들었으며”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신앙이 그들 속에 박히게 되었을 때 모든 문제들이 해결되었다.
(1) 그는 그들과 함께 있을 당시 그들에게 “들려주었던” 말씀들을 상기시켜 천사들이 그들에게 해 준 것처럼 그 말씀들을 그들의 마음속에 심게 해 주셨다(44절).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옛날에 몇 번이고 “너희에게 말한 바니라.”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것을 “기억하고” 그 말씀들을 서로 비교해가기만 해도 우리는 그리스도가 “하신” 일을 보다 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2) 그는 구약에서 읽었던 말씀들을 인용해 주었다. 그들은 그가 직접 자기들에게 그 말씀을 들려주신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그들의 기대를 규정지어 주는 하나의 일반적인 힌트를 제시하셨다. 즉 구약에 메시야에 관해 기록된 모든 것─그의 나라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그의 수난에 대한 모든 기록은 그리스도로 성취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선 이 모든 일들을 섭리로써 “함께 매어놓으셨으므로” 서로 “별개의 사건으로 일어난다는 것”은 생각할 수가 없는 일이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아무리 “괴로운” 일이라도 “모든 일은” 성취되어야만 한다. 그는 죽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 일을 거치지 않고는 “다 이루었다”고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그리스도와 관련된 구약의 몇 가지 성경 말씀이 인용되고 있다. “모세의 율법”─즉 모세가 쓴 “다섯”권의 책, 모세 오경을 말한다. “선지자의 글”─순수 선지자들의 글 뿐 아니라 예언자적인 사람의 손에 의해 기록된 역사적인 문서들도 포함한다. “시편”─소위 “헤지오그라파”(Hagiographa)라 불리는 문서들을 언급하셨다. 이처럼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이미 옛날의 뜻을 밝히셨음을 알고 있으라. 이 모든 기록들은 하나의, 영원히 변치 않는 성령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 성령은 말씀을 통해 메시야의 나라가 오심을 알려 주었다. “모든 선지자들은 그의 증인이 되었노라.”
(3) 그들의 마음속에 큰 충격을 준 사건들을 통해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에 대해 예언한 구약 말씀의 참 뜻과 진리를 그들에게 깨닫게 해 주셨으며 그 모든 예언이 그에게서 이루어졌음을 알게 해주셨다. “이에 저희의 마음을 열어 성령을 깨닫게 하시고(45절)” 두 제자들과 말씀을 나누실 땐 성경을 “펴심”으로 성경 말씀의 베일을 거두셨는데 이제는 “마음을 여심”으로 마음에 쳐져있던 베일을 거두셨다. 여기서 다음 사실들을 고찰해 보자.
[1]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영으로 사람들의 마음, 그의 제자된 자들의 마음을 감화 감동시키신다. 우리의 영혼을 충동시키시며 깊은 영향을 끼치신다. 부활하신 후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사람의 “영혼”에 그의 “영을 통하여 새 힘을 불어넣은 주었는가. 그 중요한 두 가지 “실례”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첫째로 제자들의 마음을 여심으로 하나님의 빛에 의해 지적인 깨달음이 있게 되었으며 둘째로 그들의 마음을 하늘의 열심히 뜨겁게 하여 능동적인 힘을 얻게 되었다. [2] 아무리 착한 사람일지라도 자기의 “마음을 열” 필요가 있다. 본성이 “어두운” 자는 아닐지라도 “어둠 속에 있을”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다윗은 “내 눈을 여소서. 내게 명철을 주소서” 하였다. 그리스도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아는 것이 많았던 바울도 계속 더 배워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3] 그리스도께서 영혼 속에 신앙을 심어 주시며 거기서 면류관을 얻으시는 일은 “마음을 열어 주심으로” 믿어야만 하는 일들의 증거를 분별하도록 만들어 주심으로 이루어진다. 이처럼 그리스도는 “문을 여시고” 마음속에 들어오시나 사탄은 도적이나 강도처럼 다른 구멍을 통해 들어온다. [4] 우리 마음을 여시는 목적도 “우리로 성경 말씀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이다. “기록된 말씀보다 뛰어나게 슬기롭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기록된 말씀 안에서 보다 슬기롭게 되어” “그 말씀을 통해 얻는 구원을 슬기롭게 소유할 수 있게” 하시기 위함이다. 말씀 안에 있는 성령이나 마음속에 있는 성령은 같은 말씀을 하신다. 그리스도의 학자들은 이 세상에서 “성경 외의” 것을 배워선 안 된다. 오히려 “성경으로부터” 계속해서 배워 성경 말씀 안에서 “강하고 담대하게” 자라도록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에 대해 올바른 생각을 품으며 그에 대하여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교정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성경 말씀을 깨닫도록 노력해야만 한다.4. 그리스도는 그들을 “사도”로 보시고 그들에게 훈계하신다. 이제 그들은 이 세상에서 그의 나라를 세우는 일에 고용된 자들이었다. 주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던 때에 그들은 각자 영광된 자리를 꿈꾸고 있다가 그가 죽게 되자 실망하고 만 적이 있었다. “아니다, 너희는 세상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48절), 부활의 소식을 온 세상에 들고 나가야 한다. 단지 소식으로 보고하는데 그치지 말고 지금까지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 팽팽하게 대립되어 왔던 싸움의 결과가 이제 분명히 들어났음을 그들에게 확신을 가지고 선포하라. 그 소식을 듣고 세상의 왕들은 넘어지고 쫓겨날 것이다. 너희는 이 모든 일들을 너희 눈으로 똑똑히 보아 알았다. 너희는 이 일들을 귀로 듣고 눈으로 본 증인들이다. 가라, 가서 세상에 그 일들을 전하라. 너희를 깨닫게 한 영이 너희와 함께 동행하며 다른 사람들도 깨닫게 할 것이다.” 이제 그들이 지시 받은 내용을 살펴보자.
(1) “말할 내용.” 그들은 복음을 전해야 한다. “구약”의 완서으로써, 하나님의 계시의 진행과 결과로써 “신약”을 전해야 한다. 그리고 항상 성경을 지니고 다녀야 한다(특히 유대인들에게 전할 땐 꼭 지녀야 한다. 베드로도 이방인들에게 한 그의 첫 설교에서 예언서를 참고하도록 일러주었다. 행 10:43). 그리고 사람들에게 메시야에 대해서, 그의 나라의 영광과 은혜에 대해서 구약이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지 알려주어야 하며, 그들로 확고한 지혜의 기반에서 이 모든 일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어떻게 성취되었는가 말해 주어야 한다.
[1]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복음의 진리”를 사람의 자녀들에게 “선포”해야 한다(46절). 이처럼 영원 전부터 하늘의 비밀 책에 구원의 계약에 대한 비밀이 기록되어 있었으며 밝혀진 것들 중에 구약이란 공개된 책에 이와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다. 하늘의 섭리는 그대로 이루어져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도 땅에 떨어져서는 안 될 것이기에 이에 따라 “그리스도가 고난받으신 것이다.” “가라, 가서 세상에 전하라.” 그들에게 확신과 용기를 심어 주시기 위해 그리스도는 “먹을 것을 요구하셨다.” 엠마오에서도 두 제자와 함께 식탁에 앉았으나 그들과 함께 식사하셨다는 기록은 없다. 부활한 후 몸의 상태가 예전과는 달라졌기 때문에 예전처럼 그들과 함께 말하고 먹고 마시지는 못하였으나 이제 그가 실지로 “생명을 되찾았다”는 사실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그들”과 함께 “잡수셨다”(나사로도 부활 후에 생명을 되찾았을 뿐 아니라 예전의 생활 상태대로 돌아가 살다 다시 죽었다). 그들은 그에게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렸다(42절). 간소한 식사였다. 그러나 그것이 제자들의 식사였다면 그들의 주님도 그들과 같은 식사를 드실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아버지의 나라에선 그와 같은 식사를 대접받을 것이며 그의 나라에서 그와 함께 먹고 마실 것이기 때문이다.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해 주셨다. 그들은 그 말씀을 읽고 “들었으며”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신앙이 그들 속에 박히게 되었을 때 모든 문제들이 해결되었다.그는 그들과 함께 있을 당시 그들에게 “들려주었던” 말씀들을 상기시켜 천사들이 그들에게 해 준 것처럼 그 말씀들을 그들의 마음속에 심게 해 주셨다(44절).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옛날에 몇 번이고 “너희에게 말한 바니라.”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것을 “기억하고” 그 말씀들을 서로 비교해가기만 해도 우리는 그리스도가 “하신” 일을 보다 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그는 구약에서 읽었던 말씀들을 인용해 주었다. 그들은 그가 직접 자기들에게 그 말씀을 들려주신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그들의 기대를 규정지어 주는 하나의 일반적인 힌트를 제시하셨다. 즉 구약에 메시야에 관해 기록된 모든 것─그의 나라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그의 수난에 대한 모든 기록은 그리스도로 성취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선 이 모든 일들을 섭리로써 “함께 매어놓으셨으므로” 서로 “별개의 사건으로 일어난다는 것”은 생각할 수가 없는 일이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아무리 “괴로운” 일이라도 “모든 일은” 성취되어야만 한다. 그는 죽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 일을 거치지 않고는 “다 이루었다”고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그리스도와 관련된 구약의 몇 가지 성경 말씀이 인용되고 있다. “모세의 율법”─즉 모세가 쓴 “다섯”권의 책, 모세 오경을 말한다. “선지자의 글”─순수 선지자들의 글 뿐 아니라 예언자적인 사람의 손에 의해 기록된 역사적인 문서들도 포함한다. “시편”─소위 “헤지오그라파”(Hagiographa)라 불리는 문서들을 언급하셨다. 이처럼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이미 옛날의 뜻을 밝히셨음을 알고 있으라. 이 모든 기록들은 하나의, 영원히 변치 않는 성령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 성령은 말씀을 통해 메시야의 나라가 오심을 알려 주었다. “모든 선지자들은 그의 증인이 되었노라.”그들의 마음속에 큰 충격을 준 사건들을 통해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에 대해 예언한 구약 말씀의 참 뜻과 진리를 그들에게 깨닫게 해 주셨으며 그 모든 예언이 그에게서 이루어졌음을 알게 해주셨다. “이에 저희의 마음을 열어 성령을 깨닫게 하시고(45절)” 두 제자들과 말씀을 나누실 땐 성경을 “펴심”으로 성경 말씀의 베일을 거두셨는데 이제는 “마음을 여심”으로 마음에 쳐져있던 베일을 거두셨다. 여기서 다음 사실들을 고찰해 보자.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영으로 사람들의 마음, 그의 제자된 자들의 마음을 감화 감동시키신다. 우리의 영혼을 충동시키시며 깊은 영향을 끼치신다. 부활하신 후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사람의 “영혼”에 그의 “영을 통하여 새 힘을 불어넣은 주었는가. 그 중요한 두 가지 “실례”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첫째로 제자들의 마음을 여심으로 하나님의 빛에 의해 지적인 깨달음이 있게 되었으며 둘째로 그들의 마음을 하늘의 열심히 뜨겁게 하여 능동적인 힘을 얻게 되었다.아무리 착한 사람일지라도 자기의 “마음을 열” 필요가 있다. 본성이 “어두운” 자는 아닐지라도 “어둠 속에 있을”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다윗은 “내 눈을 여소서. 내게 명철을 주소서” 하였다. 그리스도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아는 것이 많았던 바울도 계속 더 배워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그리스도께서 영혼 속에 신앙을 심어 주시며 거기서 면류관을 얻으시는 일은 “마음을 열어 주심으로” 믿어야만 하는 일들의 증거를 분별하도록 만들어 주심으로 이루어진다. 이처럼 그리스도는 “문을 여시고” 마음속에 들어오시나 사탄은 도적이나 강도처럼 다른 구멍을 통해 들어온다.우리 마음을 여시는 목적도 “우리로 성경 말씀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이다. “기록된 말씀보다 뛰어나게 슬기롭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기록된 말씀 안에서 보다 슬기롭게 되어” “그 말씀을 통해 얻는 구원을 슬기롭게 소유할 수 있게” 하시기 위함이다. 말씀 안에 있는 성령이나 마음속에 있는 성령은 같은 말씀을 하신다. 그리스도의 학자들은 이 세상에서 “성경 외의” 것을 배워선 안 된다. 오히려 “성경으로부터” 계속해서 배워 성경 말씀 안에서 “강하고 담대하게” 자라도록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에 대해 올바른 생각을 품으며 그에 대하여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교정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성경 말씀을 깨닫도록 노력해야만 한다.그리스도는 그들을 “사도”로 보시고 그들에게 훈계하신다. 이제 그들은 이 세상에서 그의 나라를 세우는 일에 고용된 자들이었다. 주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던 때에 그들은 각자 영광된 자리를 꿈꾸고 있다가 그가 죽게 되자 실망하고 만 적이 있었다. “아니다, 너희는 세상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48절), 부활의 소식을 온 세상에 들고 나가야 한다. 단지 소식으로 보고하는데 그치지 말고 지금까지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 팽팽하게 대립되어 왔던 싸움의 결과가 이제 분명히 들어났음을 그들에게 확신을 가지고 선포하라. 그 소식을 듣고 세상의 왕들은 넘어지고 쫓겨날 것이다. 너희는 이 모든 일들을 너희 눈으로 똑똑히 보아 알았다. 너희는 이 일들을 귀로 듣고 눈으로 본 증인들이다. 가라, 가서 세상에 그 일들을 전하라. 너희를 깨닫게 한 영이 너희와 함께 동행하며 다른 사람들도 깨닫게 할 것이다.” 이제 그들이 지시 받은 내용을 살펴보자.”말할 내용.” 그들은 복음을 전해야 한다. “구약”의 완서으로써, 하나님의 계시의 진행과 결과로써 “신약”을 전해야 한다. 그리고 항상 성경을 지니고 다녀야 한다(특히 유대인들에게 전할 땐 꼭 지녀야 한다. 베드로도 이방인들에게 한 그의 첫 설교에서 예언서를 참고하도록 일러주었다. 행 10:43). 그리고 사람들에게 메시야에 대해서, 그의 나라의 영광과 은혜에 대해서 구약이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지 알려주어야 하며, 그들로 확고한 지혜의 기반에서 이 모든 일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어떻게 성취되었는가 말해 주어야 한다.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복음의 진리”를 사람의 자녀들에게 “선포”해야 한다(46절). 이처럼 영원 전부터 하늘의 비밀 책에 구원의 계약에 대한 비밀이 기록되어 있었으며 밝혀진 것들 중에 구약이란 공개된 책에 이와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다. 하늘의 섭리는 그대로 이루어져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도 땅에 떨어져서는 안 될 것이기에 이에 따라 “그리스도가 고난받으신 것이다.” “가라, 가서 세상에 전하라.” 첫째, “그리스도는 그에 대해 기록한 바대로 고난받으셨다. 가라,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전하라. 그의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말라. 고난받으신 예수를 부끄럽게 여기지 말라. 그가 어떤 고난을 받았는지, 그가 어떻게 고난을 받았는지, 그리고 구약의 모든 말씀이 그의 고난으로 어떻게 성취되었는지 그들에게 전하라. 그가 고난을 받아야 했음을 전하라. 이는 세상 죄를 사하기 위함이요, 파멸과 죽음에서 인류를 구하기 위함이었음을 말하라. 나아가서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였음을 전하라”(히 2:10). 둘째, “그가 제 삼이레 죽음에서 부활하셨으며 이로 인하여 십자가를 막던 모든 세력이 무너졌을 뿐 아니라 그가 능력을 지닌 하나님의 아들임을 밝히셨으며 역시 부활로써 성경의 말씀이 이루어졌음을 말하라(고전 15:3, 4 참조). 가서 세상을 향해 너희가 복음에서 부활한 그를 얼마나 자주 보았는지, 그와 얼마나 가깝게 대화를 나누었는가 말하라(요셉이 형제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면서 마치 죽음에서 생명을 얻은 것처럼 그들에게 말하듯). 당신의 눈이 보는 바 당신들에게 이 말을 하는 것은 내 입이라(창 45:12). 가라, 가서 그들에게 말하되 죽으셨던 그 분이 살아셨으며 영원히 살아 계시며 죽음과 은혜의 열쇠를 가지고 계신다고 하라.” [2] “회개의 의무에 대한 복음. 사람의 자녀들에게 강하게 권해야 한다.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는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 그의 권위로 전해야 한다(47절). 어디든지 사람을 다 불러모아 회개하라 명해야 한다”(행 17:30). “가라, 가서 사람들에게 그들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키우신 하나님께서 이 소식을 듣는 즉시 그들이 만든 신들을 섬기지 말고 그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섬기기를 바라며 요구하고 계심을 전하라. 그 뿐만 아니라 세상과 육체의 이익만을 구하는 것에서 헤어나오기를 바라고 계심도 전하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모든 죄악된 행실을 버리고 모든 죄악된 습관을 버려야함도 전하라. 그들의 마음과 생활이 변해져야 하며 전체적으로 그들은 새롭게 소생되어야만 한다.” [3] “죄사함”의 “영광”에 대한 “복음”을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모든 이에게 전하여야 한다. “가라. 하나님의 심판의 저울에 매여있는 죄악 많은 세상에 전하라. 보상의 속죄가 하나님의 법정에 인정받았으므로 회개하고 믿는 모든 이가 그 은혜를 입을 것이며 그들은 용서를 받을 뿐 아니라 택함을 입게 될 것이라고 전하라. 세상에는 아직도 희망이 있다고 말하라.”(2) “말할 대상.” 이 말씀을 가지고 어디로 가야 하나? 그들의 활동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이제 그 내용을 살펴 보자.
[1] “모든 족속”에게 전해야 한다. 그들은 이제 홍수가 끝난 후 노아의 자손들처럼 각자 자기나름대로 어디를 가든 이 빛을 가지고 흩어져야 한다. 예언자들은 “유대인들”에게 “회개”와 “용서”를 전했지만 사도들은 “온 세상”에 그것을 전해야 한다. 어느 누구도 복음이 요구하는 바 “회개”의 책임에서 “면제될” 이는 없으며 마찬가지로 회개한 자가 얻을 수 있는 은혜에서 “제외될” 이는 없다. 단지 자신의 문에 빗장을 걸고 믿지 않겠다고 고집부리는 자는 어쩔 수 없다. [2]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곳에서 “복음의 첫 설교”를 행해야 하며 그곳에 “복음 교회”가 최초로 세워져야 하며 그곳에서 복음의 날이 밝아 그 빛이 온 세상에 퍼져 땅끝까지 이르러야 한다. 그렇다면 하필이면 왜 그곳에서 시작되어야만 할까? “회개의 의무에 대한 복음. 사람의 자녀들에게 강하게 권해야 한다.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는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 그의 권위로 전해야 한다(47절). 어디든지 사람을 다 불러모아 회개하라 명해야 한다”(행 17:30). “가라, 가서 사람들에게 그들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키우신 하나님께서 이 소식을 듣는 즉시 그들이 만든 신들을 섬기지 말고 그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섬기기를 바라며 요구하고 계심을 전하라. 그 뿐만 아니라 세상과 육체의 이익만을 구하는 것에서 헤어나오기를 바라고 계심도 전하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모든 죄악된 행실을 버리고 모든 죄악된 습관을 버려야함도 전하라. 그들의 마음과 생활이 변해져야 하며 전체적으로 그들은 새롭게 소생되어야만 한다.””죄사함”의 “영광”에 대한 “복음”을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모든 이에게 전하여야 한다. “가라. 하나님의 심판의 저울에 매여있는 죄악 많은 세상에 전하라. 보상의 속죄가 하나님의 법정에 인정받았으므로 회개하고 믿는 모든 이가 그 은혜를 입을 것이며 그들은 용서를 받을 뿐 아니라 택함을 입게 될 것이라고 전하라. 세상에는 아직도 희망이 있다고 말하라.””말할 대상.” 이 말씀을 가지고 어디로 가야 하나? 그들의 활동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이제 그 내용을 살펴 보자.”모든 족속”에게 전해야 한다. 그들은 이제 홍수가 끝난 후 노아의 자손들처럼 각자 자기나름대로 어디를 가든 이 빛을 가지고 흩어져야 한다. 예언자들은 “유대인들”에게 “회개”와 “용서”를 전했지만 사도들은 “온 세상”에 그것을 전해야 한다. 어느 누구도 복음이 요구하는 바 “회개”의 책임에서 “면제될” 이는 없으며 마찬가지로 회개한 자가 얻을 수 있는 은혜에서 “제외될” 이는 없다. 단지 자신의 문에 빗장을 걸고 믿지 않겠다고 고집부리는 자는 어쩔 수 없다.”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곳에서 “복음의 첫 설교”를 행해야 하며 그곳에 “복음 교회”가 최초로 세워져야 하며 그곳에서 복음의 날이 밝아 그 빛이 온 세상에 퍼져 땅끝까지 이르러야 한다. 그렇다면 하필이면 왜 그곳에서 시작되어야만 할까? 첫째, 성경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와 같은 식으로 되도록 “계획되어” 있었다. 주님의 “말씀”은 예루살렘에서부터 퍼져나가야” 한다(사 2:3; 욜 2:32; 3:16; 옵 1:21; 슥 14:8 을 참조). 둘째, 복음의 근거가 되는 사건들이 그곳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복음은 우선 그곳에서 입증되어야 한다. 정당한 이유에서라면 그곳이야말로 복음이 옳고 그름을 판가름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구세주의 영광이 너무도 강하고 빛나게 비침으로 그를 모욕적인 죽음에 가두었던 자들의 얼굴을 비추어 그들을 무색하게 만드셨다.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라. 그리하여 대제사장들이 복음에 대항하여 있는 힘을 다하다 스스로 실망하여 분노케 하라.” 셋째, 원수를 용서하라는 말씀의 본보기를 다시 보여 주시기 위함이다. 예루살렘은(관리든 무리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그에게 욕을 돌리었다. 이로 말미암아 이 도시는 용서받을 수 있는 자리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었던 형편이었다. 그런데도 오히려 벌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은혜가 제일 먼저 예루살렘에 제공되게 되었으니 잠시 동안이나마 그 은혜를 입을 수 있는 기회가 수많은 자들에게 주어진 셈이 되었다.(3) 그들이 “복음을 전할 때 얻을 도움.” 지금 그들에게 맡겨진 일들은 대단히 힘든 일임에 틀림없다. 특히 이와 같은 일을 하면서 부닥치게 될 반대와 괴로움을 생각하면 대단히 어렵고 광범위한 일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 같은 이를 감당할 자가 누가 있겠읍니까?”고 당연히 질문할 것이다. 이에 대해 대답은 이미 마련되어 있었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지리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올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49절). 그는 여기서 잠시 후에 성령이 하늘로부터 전에 볼 수 없었던 정도로 그들에게 내려 이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기에 필요한 은총과 선물로 무장하게 될 것을 밝혀 주셨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 일이 이루어지기까지는 일을 시작하지 말고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야만 하였다. 다음 사실들을 고찰해 보자.
[1] “성령을 받은” 자들은 그로 말미암아 “하늘로부터 오는 권능,” 초자연적인 권능, 자신의 능력을 훨씬 능가하는 능력을 받게 될 것이다. 그 권능은 “하늘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에 영혼을 항상 하늘로 향하게 하며 “높은 곳”에 목적을 두도록 해 준다. [2] 이러한 권능으로 무장하지 않았다면 그리스도의 사도들은 지금까지 하던 식으로는 이 세상에서 그의 나라를 세울 수도 없으며 복음을 뿌릴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들이 놀라운 업적을 이룬 것을 보면 능력의 은혜가 그들과 함께 동행했음을 알 수 있다. [3] 그리스도의 오심이 구약의 약속이었듯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이 권능”은 신약의 위대한 약속, “아버지의 약속”이었다. “아버지의 약속”이라면 그 약속이 어긋나거나 약속된 일들이 “쓸모 없는 것”들로 될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4] 그리스도께서는 이와 같은 약속이 성취될 시간이 임박해서 그들을 떠나셨다. 그리스도가 “승천”하신 후 열흘만에 성령이 “강림” 하였다. [5] 그리스도의 대사들은 능력을 받기까지는 그곳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그리고 충분한 훈련과 신임장을 받기 전에 섣불리 대사 임무를 수행해서는 안 된다. 언뜻 생각되기는 지금처럼 시급하게 복음 전파가 요구되는 때는 없다고 여겨지겠지만 그래도 전도자들은 하늘로부터 능력을 받을 때까지 기다려야만 하였다. 비록 위험한 곳이었지만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왜냐하면 그곳이 바로 이 아버지의 약속이 이루어질 곳이었기 때문이다(욜 2:28).그들이 “복음을 전할 때 얻을 도움.” 지금 그들에게 맡겨진 일들은 대단히 힘든 일임에 틀림없다. 특히 이와 같은 일을 하면서 부닥치게 될 반대와 괴로움을 생각하면 대단히 어렵고 광범위한 일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 같은 이를 감당할 자가 누가 있겠읍니까?”고 당연히 질문할 것이다. 이에 대해 대답은 이미 마련되어 있었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지리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올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49절). 그는 여기서 잠시 후에 성령이 하늘로부터 전에 볼 수 없었던 정도로 그들에게 내려 이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기에 필요한 은총과 선물로 무장하게 될 것을 밝혀 주셨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 일이 이루어지기까지는 일을 시작하지 말고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야만 하였다. 다음 사실들을 고찰해 보자.”성령을 받은” 자들은 그로 말미암아 “하늘로부터 오는 권능,” 초자연적인 권능, 자신의 능력을 훨씬 능가하는 능력을 받게 될 것이다. 그 권능은 “하늘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에 영혼을 항상 하늘로 향하게 하며 “높은 곳”에 목적을 두도록 해 준다.이러한 권능으로 무장하지 않았다면 그리스도의 사도들은 지금까지 하던 식으로는 이 세상에서 그의 나라를 세울 수도 없으며 복음을 뿌릴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들이 놀라운 업적을 이룬 것을 보면 능력의 은혜가 그들과 함께 동행했음을 알 수 있다.그리스도의 오심이 구약의 약속이었듯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이 권능”은 신약의 위대한 약속, “아버지의 약속”이었다. “아버지의 약속”이라면 그 약속이 어긋나거나 약속된 일들이 “쓸모 없는 것”들로 될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그리스도께서는 이와 같은 약속이 성취될 시간이 임박해서 그들을 떠나셨다. 그리스도가 “승천”하신 후 열흘만에 성령이 “강림” 하였다.그리스도의 대사들은 능력을 받기까지는 그곳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그리고 충분한 훈련과 신임장을 받기 전에 섣불리 대사 임무를 수행해서는 안 된다. 언뜻 생각되기는 지금처럼 시급하게 복음 전파가 요구되는 때는 없다고 여겨지겠지만 그래도 전도자들은 하늘로부터 능력을 받을 때까지 기다려야만 하였다. 비록 위험한 곳이었지만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왜냐하면 그곳이 바로 이 아버지의 약속이 이루어질 곳이었기 때문이다(욜 2:28).
24:50 그리스도의 승천(누가복음 24:50-53) 이 복음서 기자는 그리스도가 “갈릴리”에서 그의 제자들과 만난 중요한 사건은 생략하고 있다. 그리고 갈릴리에서 그들에게 하신 말씀을 여기에선 부활하신 그날 밤 제자들과 만난 첫 번째 방문의 기록 마지막에다 첨부시키고 있다. 현재로선 그리스도의 승천보다 더 중대한 사건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승천에 대해 우리는 아주 간단한 내용으로 읽게 된다. 그 내용을 살펴보자. Ⅰ. 그리스도는 엄숙하게 제자들과 작별을 고하셨다. 그리스도의 목적은 하늘과 땅을 화해시키고 그 사이에 중개자의 역할을 계속하는 것이었으므로 그의 손을 하늘과 땅에 두시며 그 일을 위하여 “오셨다” 다시 “가셔야”만 하였다. 그에겐 하늘과 땅의 두 군데에서 하실 일이 있으셔서 성육화되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 오셔서 이곳에서 그의 일을 수행하셨으며 이제 그 일을 마치시고 하늘로 돌아가사 그곳에 계시며 우리의 일을 아버지께 고하는 일을 하시게 되었다. 다음 사실들을 고찰해 보자. 1. 승천한 장소. 그곳은 예루살렘 가까운 곳. “감람산”과 연해있는 “베다니”란 곳이었다. 그는 전에 그곳에서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크신 일을 하셨으며 이제 그곳에서 그의 영광으로 들어가셨다. 그곳엔 그의 수난이 시작된 “동산”이 있었으며 그가 고통 중에 빠지게 된 곳이 바로 그곳이었다. 베다니란 말은 “슬픔의 집”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하늘나라에 가고자 하는 자들은 마땅히 슬픔과 고통의 집을 거쳐 그곳으로 가야하며 괴로움을 통하여 기쁨으로 나가야 한다. 감람산은 이미 오래 전부터 그리스도가 승천하실 곳으로 내정되어 있었다. “그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편 감람산에 서실 것이요”(슥 14:4) 그리고 얼마 전 이곳은 그가 예루살렘으로 승리의 입성을 하던 바로 그 장소였다(눅 19:29).
2. 승천을 목격한 이들. “예수께서 저희를 데리고” 승천하는 그를 보게 하셨다. 아마도 그가 승천한 시간은 사람들이 일어나기 전 이른 새벽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부활 후 자신을 공개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신 것이 아니라 “선택된 목격자들”에게만 보여 오셨기 때문이다. 제자들도 무덤에서 부활하는 장면은 보지 못하였다. 그것은 후에 그들에게 나타나 보이심으로 부활이 충분히 증거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승천하는” 그리스도는 볼 수 있었다. 왜냐하면 승천을 보지 않고는 다른 식으로 그의 승천을 증명할 수 있는 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승천하는 그를 볼 목적으로 이끌려 나갔으며 그들의 눈은 승천하는 그에게 고정되었고 다른 곳으로 돌려지지 않았다.
3. 제자들에게 하신 작별의 인사. “손을 들어 저희에게 축복하시더니.” 그리스도는 불쾌하게 떠난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떠나갔다. 뒤에 남아있는 자들에게 축복을 남겨 두고 떠났다. 그는 제사장들이 백성들을 축복할 때하는 것처럼 “손을 들었다”(레 9:22 참조). 그는 권위있는 자로서 축복하였으며 그가 값을 주고 산 축복을 내려 주었다. 야곱이 그의 아들들을 축복하듯 “그들에게 축복하셨다.” 사도들은 이제 열두 지파를 대표한 자들이었으므로 그들을 축복하심으로 그리스도는 모든 그의 영적인 이스라엘을 축복하신 것이며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내리신 것이다. 그는 모세와 야곱이 임종할 때 각기 자기의 아들들과 족속들에게 축복하신 것처럼 그들을 축복하셔서 세상에 있을 때 사랑한 것처럼 끝날까지 사랑할 것을 보여 주셨다.
4. 떠나는 장면. “축복하실 때에 저희 떠나셨다.” 할 말을 다하지 못하고 떠나듯 떠나는 것이 아니라 떠날지라도 그들을 축복하시는 그 축복이 여기서 끝나지 않고 하늘에 오르사 그곳에서 계속 축복을 내리실 것을 암시하시듯 떠나 가셨다. 그는 땅에서 그들을 축복하기 “시작하셨으나” 이제 하늘에 오르사 그 일을 “계속 하시게” 되었다. 이제 그리스도는 사도들을 세상에 보내시면서 “그들 자신을” 위할 뿐만 아니라 그들을 통해 자기를 믿을 “모든 백성”에게 베풀어질 축복을 내리셨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땅 위의 모든 백성들이 축복을 받기로 되어 있다.”
5. 승천에 대한 묘사.
(1) “저희를 떠났다.” 엘리야가 엘리사의 머리 위로 떠나갔듯이 그는 제자들의 머리 위로 떠났다. 가장 절친한 친구는 헤어져야만 된다는 사실을 유의하자.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우리를 가르치던 친구들은 “우리를 떠나야만 한다.” 몸으로 볼 수 있는 그리스도는 이제 더 이상 이 세상에서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육으로 그를 찾던 자들은 이제 더 이상 그를 찾을 수 없게 되었다.
(2) 그는 “하늘로 올리우셨다.” 강제로가 아니라 자신의 능력과 행위로 오르셨다. 부활하셨을 때와 같이 그가 자신의 능력으로 승천하실 때에도 천사들이 둘러 쌓다. 불마차나 화마(火馬)는 필요 없었다. 그는 “하늘에서 오신 주님”이었기 때문에 길을 알고 있었으며 스스로 돌아갈 수 있었다. 마노아가 제사드릴 때 연기 속으로 천사들이 올라간 것처럼 그리스도는 구름 속으로 올라가셨다(삿 13:20). 승천한 장소. 그곳은 예루살렘 가까운 곳. “감람산”과 연해있는 “베다니”란 곳이었다. 그는 전에 그곳에서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크신 일을 하셨으며 이제 그곳에서 그의 영광으로 들어가셨다. 그곳엔 그의 수난이 시작된 “동산”이 있었으며 그가 고통 중에 빠지게 된 곳이 바로 그곳이었다. 베다니란 말은 “슬픔의 집”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하늘나라에 가고자 하는 자들은 마땅히 슬픔과 고통의 집을 거쳐 그곳으로 가야하며 괴로움을 통하여 기쁨으로 나가야 한다. 감람산은 이미 오래 전부터 그리스도가 승천하실 곳으로 내정되어 있었다. “그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편 감람산에 서실 것이요”(슥 14:4) 그리고 얼마 전 이곳은 그가 예루살렘으로 승리의 입성을 하던 바로 그 장소였다(눅 19:29).승천을 목격한 이들. “예수께서 저희를 데리고” 승천하는 그를 보게 하셨다. 아마도 그가 승천한 시간은 사람들이 일어나기 전 이른 새벽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부활 후 자신을 공개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신 것이 아니라 “선택된 목격자들”에게만 보여 오셨기 때문이다. 제자들도 무덤에서 부활하는 장면은 보지 못하였다. 그것은 후에 그들에게 나타나 보이심으로 부활이 충분히 증거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승천하는” 그리스도는 볼 수 있었다. 왜냐하면 승천을 보지 않고는 다른 식으로 그의 승천을 증명할 수 있는 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승천하는 그를 볼 목적으로 이끌려 나갔으며 그들의 눈은 승천하는 그에게 고정되었고 다른 곳으로 돌려지지 않았다.제자들에게 하신 작별의 인사. “손을 들어 저희에게 축복하시더니.” 그리스도는 불쾌하게 떠난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떠나갔다. 뒤에 남아있는 자들에게 축복을 남겨 두고 떠났다. 그는 제사장들이 백성들을 축복할 때하는 것처럼 “손을 들었다”(레 9:22 참조). 그는 권위있는 자로서 축복하였으며 그가 값을 주고 산 축복을 내려 주었다. 야곱이 그의 아들들을 축복하듯 “그들에게 축복하셨다.” 사도들은 이제 열두 지파를 대표한 자들이었으므로 그들을 축복하심으로 그리스도는 모든 그의 영적인 이스라엘을 축복하신 것이며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내리신 것이다. 그는 모세와 야곱이 임종할 때 각기 자기의 아들들과 족속들에게 축복하신 것처럼 그들을 축복하셔서 세상에 있을 때 사랑한 것처럼 끝날까지 사랑할 것을 보여 주셨다.떠나는 장면. “축복하실 때에 저희 떠나셨다.” 할 말을 다하지 못하고 떠나듯 떠나는 것이 아니라 떠날지라도 그들을 축복하시는 그 축복이 여기서 끝나지 않고 하늘에 오르사 그곳에서 계속 축복을 내리실 것을 암시하시듯 떠나 가셨다. 그는 땅에서 그들을 축복하기 “시작하셨으나” 이제 하늘에 오르사 그 일을 “계속 하시게” 되었다. 이제 그리스도는 사도들을 세상에 보내시면서 “그들 자신을” 위할 뿐만 아니라 그들을 통해 자기를 믿을 “모든 백성”에게 베풀어질 축복을 내리셨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땅 위의 모든 백성들이 축복을 받기로 되어 있다.”승천에 대한 묘사.”저희를 떠났다.” 엘리야가 엘리사의 머리 위로 떠나갔듯이 그는 제자들의 머리 위로 떠났다. 가장 절친한 친구는 헤어져야만 된다는 사실을 유의하자.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우리를 가르치던 친구들은 “우리를 떠나야만 한다.” 몸으로 볼 수 있는 그리스도는 이제 더 이상 이 세상에서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육으로 그를 찾던 자들은 이제 더 이상 그를 찾을 수 없게 되었다.그는 “하늘로 올리우셨다.” 강제로가 아니라 자신의 능력과 행위로 오르셨다. 부활하셨을 때와 같이 그가 자신의 능력으로 승천하실 때에도 천사들이 둘러 쌓다. 불마차나 화마(火馬)는 필요 없었다. 그는 “하늘에서 오신 주님”이었기 때문에 길을 알고 있었으며 스스로 돌아갈 수 있었다. 마노아가 제사드릴 때 연기 속으로 천사들이 올라간 것처럼 그리스도는 구름 속으로 올라가셨다(삿 13:20). Ⅱ. 제자들은 그가 떠나갔음에도 계속해서 그를 기쁜 마음으로 섬겼으며 그를 통하여 하나님께 경배드렸다. 1. 그들은 그가 떠나갈 대 그에게 경배를 드림으로 비록 그가 먼 세계로 간다할지라도 계속 그에게 충성을 다할 것이며 언제나 그의 통치를 받기를 원하고 있음을 표현하였다. “저희가 그에게 경배하고”(52절)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축복을 받은 자들로부터 “경배”받기를 원하고 계심을 명심하자. “그는 자기를 예배한다”는 조건으로 그들을 “축복하셨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영광을 새롭게 나타냄으로 그것에서 새로운 지혜와 예배가 비롯된다. 그들은 비록 그가 “그들을 떠났지만” 자기의 예배하는 그들의 행위를 지켜보시며, 보실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가진 구름도 그리스도의 눈을 가릴 수 없어 그들의 예배는 숨기워질 수 없을 것이다.
2. 그들은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갔다.” 성령이 그들에게 내리기까지 그들은 그곳에 머물러 있도록 명령받았다. 그래서 그들은 그곳이 위험한 곳 인줄 알면서도 그곳을 향해 갔다. 그곳으로 가서 그들은 “큰 기쁨으로” 그곳으로 머물렀다. 이것은 놀라운 변화이며 그들의 마음이 열린 결과였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떠나야만 한다고 말씀하실 때 그들의 마음엔 슬픔으로 가득 찼다. 그러나 지금은 그가 떠나가신 것을 보고도 “큰 기쁨으로 가득 찼다.” 이제야 비로소 그리스도는 떠나야만 했으며 그가 보혜사를 보낼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영광은 모든 성도들의 기쁨, 넘치는 기쁨이다.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도 기뻐해야 할 것이다. 하물며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날 그 곳에서 영광 중에 계신 그를 보게 될 때 얻는 기쁨이야 무엇으로 비교할 수 있으랴.
3. 그들은 아버지의 약속을 기다리는 동안 경건한 생활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53절).
(1) 기도 시간마다 성전 예배에 참석하였다. 하나님께서 아직은 성전을 떠나지 않았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계실 때 늘 하셨던 대로 “그들은 늘 성전에 있었다.” “주님께선 시온의 문들을 사랑하시니” 우리도 그래야 한다. 어떤 성서학자들은 그들에게 “좋은 감정을 품은” 몇몇 레위인들에게 속한 성전 방을 빌려 제자들처럼 그들 나름대로의 회당이 있었다고 하지만 또 다른 학자들은 그런 회당은 대제사장이나 “성전관리들”에게 “비밀로 하거나” “묵인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어서 그런 주장은 타당성이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2) 성전 제사는 그리스도의 속죄로 말미암아 필요 없는 것이 되었지만 성전 찬송엔 함께 참여하였다. 우리도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동안엔 찬송으로 그를 맞이하도록 명심하자. 하나님을 찬송하고 감사하는 일은 따로 시간을 정해해야 할 성질의 일이 결코 아니다. 성령을 받을 마음의 준비를 하는데 있어 거룩한 기쁨과 찬송보다 더 나은 준비는 없다. 걱정은 사라지고 슬픔은 위로 받으며 회망만이 계속된다. 끝맺는 “아멘”은 교회와 복음서를 읽은 교인들의 복음의 진리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드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진심으로 마음이 일치됨을 나타내기 위하여 후에 첨부된 듯하다.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를 돌릴지어다. 아멘
그들은 그가 떠나갈 대 그에게 경배를 드림으로 비록 그가 먼 세계로 간다할지라도 계속 그에게 충성을 다할 것이며 언제나 그의 통치를 받기를 원하고 있음을 표현하였다. “저희가 그에게 경배하고”(52절)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축복을 받은 자들로부터 “경배”받기를 원하고 계심을 명심하자. “그는 자기를 예배한다”는 조건으로 그들을 “축복하셨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영광을 새롭게 나타냄으로 그것에서 새로운 지혜와 예배가 비롯된다. 그들은 비록 그가 “그들을 떠났지만” 자기의 예배하는 그들의 행위를 지켜보시며, 보실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가진 구름도 그리스도의 눈을 가릴 수 없어 그들의 예배는 숨기워질 수 없을 것이다.그들은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갔다.” 성령이 그들에게 내리기까지 그들은 그곳에 머물러 있도록 명령받았다. 그래서 그들은 그곳이 위험한 곳 인줄 알면서도 그곳을 향해 갔다. 그곳으로 가서 그들은 “큰 기쁨으로” 그곳으로 머물렀다. 이것은 놀라운 변화이며 그들의 마음이 열린 결과였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떠나야만 한다고 말씀하실 때 그들의 마음엔 슬픔으로 가득 찼다. 그러나 지금은 그가 떠나가신 것을 보고도 “큰 기쁨으로 가득 찼다.” 이제야 비로소 그리스도는 떠나야만 했으며 그가 보혜사를 보낼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영광은 모든 성도들의 기쁨, 넘치는 기쁨이다.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도 기뻐해야 할 것이다. 하물며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날 그 곳에서 영광 중에 계신 그를 보게 될 때 얻는 기쁨이야 무엇으로 비교할 수 있으랴.그들은 아버지의 약속을 기다리는 동안 경건한 생활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53절).기도 시간마다 성전 예배에 참석하였다. 하나님께서 아직은 성전을 떠나지 않았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계실 때 늘 하셨던 대로 “그들은 늘 성전에 있었다.” “주님께선 시온의 문들을 사랑하시니” 우리도 그래야 한다. 어떤 성서학자들은 그들에게 “좋은 감정을 품은” 몇몇 레위인들에게 속한 성전 방을 빌려 제자들처럼 그들 나름대로의 회당이 있었다고 하지만 또 다른 학자들은 그런 회당은 대제사장이나 “성전관리들”에게 “비밀로 하거나” “묵인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어서 그런 주장은 타당성이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성전 제사는 그리스도의 속죄로 말미암아 필요 없는 것이 되었지만 성전 찬송엔 함께 참여하였다. 우리도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동안엔 찬송으로 그를 맞이하도록 명심하자. 하나님을 찬송하고 감사하는 일은 따로 시간을 정해해야 할 성질의 일이 결코 아니다. 성령을 받을 마음의 준비를 하는데 있어 거룩한 기쁨과 찬송보다 더 나은 준비는 없다. 걱정은 사라지고 슬픔은 위로 받으며 회망만이 계속된다. 끝맺는 “아멘”은 교회와 복음서를 읽은 교인들의 복음의 진리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드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진심으로 마음이 일치됨을 나타내기 위하여 후에 첨부된 듯하다.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를 돌릴지어다. 아멘
본문의 주해
누가복음의 대단원인 24장은 예수의 ‘부활’과 ‘승천’을 보도한다. 이 두 사건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은 ‘근심’과 ‘두려움’으로 시작하여(4~5절) ‘놀라움’과 ‘기쁨’으로 이어진 후(37, 41, 52절) 하나님을 ‘경배’하며 ‘찬송’하는 것으로 끝난다(52~53절).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의 끝이 아니었다. 그 뒤를 이은 부활과 승천으로 또 다른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행 1:1~11; 2:32~36). 누가복음 24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분해할 수 있다:
1.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과 베드로(1~12절)
2.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난 예수(13~35절)
3. 예루살렘의 제자들에게 나타난 예수(36~43절)
4. 예수의 마지막 교훈과 당부(44~49절)
5. 예수의 승천(50~53절)
처음 네 단락에서 누가는 예수의 부활을 이야기하되 각각 다른 방식으로 다른 강조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1~12절은 특별히 ‘빈 무덤’에 관심을 집중시킨다. 13~35절은 부활한 예수의 첫 번째 출현을 서술하고 그의 부활이 구약성경에 자세히 예언된 사실임을 강조한다. 36~43절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기의 몸을 만져보라고 청하고 그들 앞에서 음식을 먹음으로써 자신이 환영(幻影)이 아님을 증명한다. 44~49절에서는 구약에 약속된 하나님의 구원을 성취한 예수가 제자들에게 그 구원을 온 세상에 전파하도록 명령하고 위임한다. 마지막 단락(50~53절)은 그리스도의 승천을 부연 설명 없이 짧게 보도한다.
(1)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과 베드로 (1~12절)1
예수의 부활사건의 첫 증인과 메신저는 여자들이었다. 그들은 갈릴리로부터 예수를 함께 따라 온 여인들로서 그의 십자가 처형뿐 아니라 그의 시신이 장사된 무덤까지 따라가 보았던 목격자들이다(23:50~56). 그들은 시간에 쫓겨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던 예수의 몸에 향품과 향유를 바르기 위해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즉 그들이 다시 움직일 수 있는 가장 이른 시각에, 무덤을 다시 찾았다(1절). 그런데 무덤 입구를 막아놓았던 크고 무거운 돌이 굴려 옮겨져 있었고(2절), 그 안에 있어야 할 예수의 시신은 보이지 않았다(3절). 어쩔 줄 몰라 당황하는 그들에게 갑자기 눈부신 옷을 입은 두 남자(천사, 23절)가 나타나 예수는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다고 알린다(4~6절). [그가] 살아나셨다(일으킴을 받았다)는 동사의 부정과거 수동태(gerthe, has been raised)는 이 일이 하나님의 행위로 말미암았음을 암시한다.
천사들은 또한 이 일이 예수 자신의 약속대로 이루어진 것을 상기시킨다: 그가 갈릴리에 계실 때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기억하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6~7절, 비교. 9:22, 44; 13:32~33; 17:25; 18:32~33). 7절에서 사용된 동사 데이(dei, must)는 예수(인자)의 체포와 십자가 처형과 부활이 모두 하나님이 확정하신 계획에 따라 일어난 사건들이었음을 보여준다. 누가는 이 동사를 그의 복음서에서 18번이나 사용하면서 구약성경에 예언되고 예수의 삶으로 성취되어 나가는 하나님의 계획을 강조한다(참조. 26, 44절).2
그 여인들은 천사의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까맣게 잊고 있었던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돌아가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자신들이 보고 들은 바대로 예수의 부활소식을 전했다(8~9절). 하지만 사도들은 빈 무덤과 천사에 관한 그들의 증언이 터무니없게(lros, nonsense) 들려서(개역: 허탄한 듯 뵈어) 믿지 않았다(11절). 이 여인들의 숫자는 율법이 인정하는 증인의 수(신 19:15)를 훨씬 초과했음에도 불구하고(10절,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 참조. 막 15:40; 16:1), 그들의 증언은 그 내용의 비합리성뿐 아니라 당시 유대사회의 여성에 대한 편견 때문에도 더욱 가볍게 취급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들의 말을 그냥 쉽게 넘겨버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바로 이틀 전 예수를 세 차례나 부인하는 과정에서 그의 초월적인 지식과 말씀의 힘을 절감했기 때문에(23:31~34, 54~62) 그의 약속을 상기시키는 그들의 증언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베드로는 곧 무덤으로 달려가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무덤 안에서 시신은 보지 못하고 수의만 발견한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스스로 이상하게 여기면서 집으로 돌아갔다(12절). 여기서 이상히 여기다(thaumazein, wonder)라는 단어는 빈 무덤이 베드로에게 일으킨 질문들과 그 질문들에서 시작된 믿음의 첫 걸음을 암시하는 것 같다.3
(2)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난 예수(13~35절)
이 부분의 기사는 누가의 독특한 자료로서 그의 아름다운 회화적 필체가 가장 돋보이는 대목이다. 여기 등장하는 두 사람의 제자는 예루살렘에서 충격적인 주말을 보낸 후 엠마오의4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그들은 함께 걸어가면서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들에 대하여 서로 이야기하고 있었다(14절). 사실상 그들의 대화는, 15절의 동사(syzetein)가 보여주듯이, 매우 열띤 토론과 논쟁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5 19b~24절은 그들이 벌인 토론의 주제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빈 무덤’의 의미에 대해 논쟁을 벌였을 것이다(22~24절 참조). 이때 그들 앞에 예수가 나타났다. 그는 이야기에 열중하고 있는 그들에게 가까이 가서 그들과 함께 걸었으나 그들은 눈이 가리어서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15~16절). 부활 이후 처음 나타난 예수의 모습은 보통 사람의 외모를 지니고 있었지만 원래 그를 알았던 제자들도 즉시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그렇게 달라져 있었다(비교. 막 16:12; 요 20:14~15).
예수가 그들의 대화 내용에 대해 질문하자 그들은 침통한 얼굴을 하고 멈춰 섰다(17절). 예루살렘에서 겪은 일로 말미암아 매우 낙심하고 슬퍼했기 때문이다. 그들 중 한 사람인 글로바는 도대체 예루살렘에 머물면서 거기서 최근에 일어난 일을 어떻게 알지 못하느냐고 반문했다(18절). 예수는 그것이 무슨 일이냐고 되물었고, 그들은 나사렛 예수에 관한 일들을 바로 당사자에게(!) 소상히 말해 주었다(19b~24절). 즉 예루살렘의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에 힘이 있는 선지자(prophts)(19절)6 예수를 법정에 넘겨주어 사형 선고를 받게 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20절)는 것이다. 사실상 예수를 선지자 이상의 인물로 생각했던 두 제자는 그가 바로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라고 소망했으나 그 소망은 그의 죽음과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21절). 그들은 계속해서 예수의 무덤을 방문했던 여인들이 그의 시신은 보지 못하고 천사를 만났으며, 다른 동료 제자들(베드로 등)도 역시 그의 무덤이 비어 있음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전해 주었다(22~24절).
이에 대해 예수는 그들의 미련함(anotos, foolishness)과7 더디 믿는 마음(bradys ti kardiai tou pisteuein, slow?eartedness to believe)을 책망했다(25절). 그들은 무엇보다 ‘고난을 통해 영광에 이르는’ 그리스도(메시아)의 길을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고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스도가 먼저 십자가의 고난을 받은 후 그의 영광에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반드시 일어나야 할(dei, must) 순서였고(26절), 그것은 또한 예수가 제자들에게 이미 여러 차례 예고했던 내용이었다(9:20~22, 44~45; 18:31~34). 예수는 이제 그들에게 다시 한번 모세와 모든 선지자로부터 시작해 성경 전체에서 자기에 관하여 쓴 것들을 설명해 주었다(27절). 그 결과 구약성경은 그들에게 비로소 열린(dinoigen)8 책이 되었고 그들의 마음이 속에서 뜨겁게 타올랐다(32절).
날이 저물어 목적지에 당도하자 제자들은 예수를 강권하여 그들의 처소에 모셨다(28~29절). 함께 식사할 때에 예수는 빵을 들어 축사한 후 떼어서 그들에게 주었고(30), 그제서야 그들의 눈이 열려서 예수를 알아보았다(30~31a절). 그리고 그 순간 예수는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31b절). 예기치 않은 주님의 출현과 가르침으로 그의 부활을 확인한 그들은 즉시 밤길을 되돌아 달려가서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제자들에게 자신들이 보고 들은 것을 알렸다(33~35절).
(3) 예루살렘의 제자들에게 나타난 예수
(36~43절)
이 단락의 장면은 앞 단락(13~35절)과 그대로 연속된다. 사도들을 포함한 제자들이 한 데 모여 그의 출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예수 자신이 몸소 그들 가운데 나타나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을지어다’라고 인사한다(36절). 이 인사말은 승리로 끝난 그의 사역을 요약하는 축복과 위로의 선포였다. 그러나 제자의 무리는 그를 유령으로 생각하고 놀라며 무서워했다(37절). 그들은 아직도 그가 살아나서 그들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예수는 그들의 당황함과 마음속의 의심을 간파하고(38절) 그들에게 십자가 처형의 흔적이 남아있는 자신의 손과 발들을 보고 만져서 확인하라고 권한다(39절; 비교. 요 20:20, 25, 27). 예수의 부활체는 여전히 물리적 요소를 지니고 있었다. 고린도전서 15장 35~49절이 제시하듯이, 부활의 몸은 영화롭게 변화된 상태이긴 하지만 또한 물리적 신체성의 요소를 계속 보유하는 까닭에 현재의 몸과 유사한 동시에 다른 측면들도 있다. 부활한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정말 살아있음을 확실히 증명해 보이기 위해 그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손과 발을 내보이는 동안에도(40절) 그들은 그의 부활을 완전히 믿지 못하고 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들은 반신반의(半信半疑)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누가는 그들이 아직 믿지 못한 이유를 너무 기뻐서(apo ts charas, because of joy)라고 밝히는데(41a절), 만일 그들이 그를 끝까지 예수와 동일시하지 않았다면 결코 그런 기쁨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정말 죽었던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고 인식하게 되자 잠시 동안 거의 마비된9 채 어찌할 바를 몰랐던 것 같다. 예수는 자신의 육체적 부활을 더욱 확실히 알게 하기 위해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고 물었고(41b절) 그들에게서 받은 구운 생선 한 토막을 그들 앞에서 받아먹음으로써 자신이 한낱 유령이 아니라 분명히 몸을 지닌 실체임을 입증했다(42~43절).
예수가 자신의 손과 발에 남아있는 십자가형의 상처를 암시한 대목(39~40절)과 제자들 앞에서 생선을 먹는 장면(42~43절)은 신자들이 앞으로 갖게 될 부활의 몸의 성격과 조건을 유추하는 성서적 근거로 삼기 어렵다. 이를테면 이 본문을 근거로 신자의 몸이 부활한 다음에도 이전에 손상되었던 신체의 흔적을 간직할 것이고 계속해서 땅의 음식을 먹을(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지나친 추론이다. 고린도전서 15장 35~54절의 진술에 의하면, 우리가 입게 될 부활의 몸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은, 썩지 않고, 영광스럽고, 능력 있는, 하늘의 질서에 속한 몸이다. 그것은 ‘성령’에 의해 생명을 얻고 활력을 공급받는 영의 몸(sma pneumatikon)으로서 현세의 물리적, 신체적, 정신적 제약과 한계를 초월하고 시간과 공간의 장벽을 뛰어넘어 자유롭게 활동하며 존재할 것이다.10 그러므로 본문의 기사들은 어디까지나 제자들에게 자신의 신체적 부활의 진정성을 입증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특별한 자기 계시 방식으로 이해돼야 할 것이다.
(4) 예수의 마지막 교훈과 당부(44~49절)
이제 예수는 제자들에게 지금까지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들과 앞으로의 일들을 설명하기 시작한다. 도대체 그는 어떻게 해서 지금 그들 앞에 다시 서게 되었는가? 십자가와 부활은 그에게, 그리고 또한 그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는 다시 살아난 지금부터 과연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 예수는 십자가 사건 이전부터 그들에게 자기가 겪게 될 일들에 관하여 누누이 예고하였음을 상기시킨다:11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과 시편에 나를 두고 기록한 모든 일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였다(44절). 그는 일찍부터 제자들에게 구약성경 전체(모세 율법, 선지서들, 시편)가 자신에 관하여 예언하고 있으며 그 예언들은 꼭 성취될 것이라고 가르쳤다(4:18~21; 9:30~31; 11:29~32; 18:31~33; 20:17, 42~43; 22:37; 요 5:39).12
여기서 예수는 다시금 제자들에게 성경책을 열어 주었다(비교. 32절).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들로 하여금 성경을 깨닫게 하려고 예수가 먼저 한 일은 그들의 마음을 열어 주는(dinoixen) 것이었다(45절). 그는 자신(그리스도)에 관하여 기록된 구약의 약속들을 세 개의 동사로 요약한다(46~47절): 고난 받다(pathein), 살아나다(anastnai), 전파되다(krychthnai). 즉 그는 그리스도(메시아)로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dei, must) 고난을 받아야 했고(참조. 시 22; 69; 사 52:13~53:12), 살아나야 했으며(참조. 시 16:8~10; 110:1), 그러므로 이제 제자들은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를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해야 한다(참조. 사 40:3-5; 암 9:15).
제자들은 지금까지 예수를 둘러싸고 일어난 모든 사건들의 목격자요 증인이었다(48절). 예수는 곧 그들을 땅 끝까지 파송할 계획을 품고 있었으며(행 1:8), 따라서 그들에게 먼저 필수적인 장비를 갖추어 주어야만 했다. 바로 이 목적을 위해 그는 그들에게 머지않아 성령을 보내 주겠다고 약속하는데(49a절),13 이 성령의 보내심은 또한 그의 아버지께서 이미 오래 전부터 선지자들을 통해 약속하신 것이었다.14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거기에 머물러 있으면서 위로부터 오는 능력을 옷 입는(endyssthe, clothe) 것이었다(49b절; 비교. 행 1:4, 8). 그들을 세상 앞에서 예수의 유력한 증인으로 만드는 것은 그들이 예수의 목격자와 동반자로서 쌓아 온 경력이 아니라 그들에게 와서 능력을 입혀 줄 성령이었다(12:11~12).
(5) 예수의 승천(50~53절)
누가는 예수의 승천을 보도하는 유일한 복음서 기자다. 그는 이 복음서의 마지막을 다음과 같은 일련의 짧은 기사들로 끝내고 있다: 첫째, 예수가 제자들을 예루살렘 밖 베다니까지 데리고 나간 것과 손을 들어 그들을 축복한 것(50절), 둘째, 그들에게 축복하면서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진/ anephereto eis ton ouranon, he was carried up into heaven]15 것(51절; 비교. 행 1:9~11), 셋째, 그들이 [그에게 경배하고/ proskynsantes auton, worshipped him] 크게 기뻐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것(52절), 넷째, 그들이 줄곧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지낸 것(53절) 등이다. 아무런 설명 없이 극히 간결하게 연결된 위의 기사들은 이 복음서의 후편인 사도행전 1장 1~11절의 기사와 자연스럽게 포개지면서 하나가 된다. 본문의 승천 기사에 의하면, 하나님의 구원을 성취한 예수가 이 땅에서 그의 제자들에게 보인 마지막 행위는 축복(eulogein, bless)이었고, 그에 대해 제자들이 마지막으로 보인 응답은 [경배와] 찬양([proskynein, worship]/ eulogein, praise)이었다.
본문의 메시지와 적용
(1) 부활에 대한 불신과 회의
누가복음 24장 본문은 예수의 신체적 부활(bodily resurrection)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메시지를 던져 주고 있다.
첫째로, 사도들을 포함한 모든 제자들은 예수의 부활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불신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을 믿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거듭되는 확실한 증거들이 필요했다. 본문은 1세기의 제자들이 21세기 현대인들과는 달리 복음서의 기적들에 대해 활짝 열린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는 주장을 무력하게 만든다. 부활에 대한 제자들의 처음 반응은 현대인의 반응과 마찬가지로 매우 회의적(skeptical)이었으며 그들은 계속되는 증언과 증거들 앞에서도 결코 쉽사리 설복당하지 않았다.
사도들은 맨 처음 예수의 빈 무덤(3절)과 천사의 메시지(7절)에 관한 여인들의 증언(8~10절)을 들었을 때 그들의 말이 터무니없게(비합리적으로) 들려서 믿지 않았다(11절). 그 다음에 그들은 주께서 과연 살아나셨다는 베드로의 증언을 들었다(34절). 그리고 엠마오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고 돌아온 두 제자의 증언을 들었다(35절).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들 앞에 직접 나타난 예수를 유령으로 여기고 무서워하면서 마음으로 의심했다(37~38절). 더구나 상처 자국이 남아있는 예수의 손과 발을 보고 나서도(39~40절) 그들은 너무 기뻐서 아직 믿지 못했다(41절). 결국 그들을 더 납득시키기 위해 예수는 그들 앞에서 굳이 생선 한 토막을 ‘먹어 보일’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42~43절). 사실상 그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정말로 부활하였고 몸을 지니고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셨다.
제자들이 처음에 보인 불신과 회의는 그들이 당초에 예수의 부활을 기대하거나 소망한 적이 없었음을 가리켜준다. 예수에 대한 그들의 기대와 희망은, 엠마오의 두 제자가 대변하듯 십자가와 함께 모두 사라졌으며, 따라서 그의 부활은 꿈에도 상상치 못한, 현실이라고 믿기에 두렵고 어려운 사건이었다.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는 오히려 여인들이 다른 어떤 제자들의 그룹보다 더 민감하고 신속하게 반응했다. 본문이 부활 사건의 첫 번째 증인들로서 여성들을 내세우고 있다는 점은 여기 기록된 부활 기사의 역사적 신빙성이 매우 높다는 또 하나의 증거가 된다. 왜냐하면 만일 1세기의 교회가 이 기사를 조작했다면, 구태여 당시 사회에서 경시 당하는 여인들을 그 사건의 주요 증인들로 등장시키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부활은 기독교 복음과 신앙의 핵심을 이루는 내용이지만(롬 4:24; 고전 15:1~19), 그리스도의 교회는 처음부터 그 역사적 사실에 대한 증언과 메시지를 신속하게 믿지 못했다. 제자들이 그들에게 누차 예고되고 가르쳐졌던 예수의 부활을 믿기 어려웠다면, 오늘날 신자들에게도 주님의 재림과 그에 따른 신자의 육체적 부활은 여전히 믿기 어려운 교리임에 틀림없다. 바로 그 때문에 제자들에게 성령이 오셔야 했고(행 2:1~13, 32~33) 지금도 성령은 부활의 메시지를 듣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오셔서 일하셔야만 한다(고전 2:10~16).
둘째로, 부활의 복음은 그것을 전하는 사람에게 항상 특별한 인내를 요구한다. 오늘날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유일한 구원의 길로 선포하려는 전도자는 부활의 메시지를 처음 전했던 인물들의 심정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예수가 그의 사역의 중요한 시점들에서 제자들에게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소망을 이야기할 때마다 그들이 보였던 무관심과 몰이해를 생각해 보라. 부활의 첫 증인이었던 여인들이 직접 보고 들은 바를 전했을 때 그들이 곧바로 받아야 했던 냉소와 경시의 눈빛을 상상해 보라. 자신들에게 나타난 주님을 각각 전하고 난 시몬과 글로바 등이 다음 순간 홀연히 나타난 그분을 모든 동료가 유령처럼 두려워하고 의심하는 것을 보았을 때 어떤 심정이었을까 짐작해 보라. 그러므로 우리도 부활의 메시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때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인내를 연습해야만 한다. 그들이 처음에 그 메시지를 듣고 비웃고 돌아선다고 해도 너무 놀라거나 낙심할 필요가 없다. 제자들은 많은 증언과 증거를 접한 후에야 비로소 불신의 장벽을 넘어설 수 있었다. 오늘날 사람들도 그 메시지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성령의 내적 증거와 아울러 그렇게 많은 부활의 증인들이 필요할 것이다.
(2) 하나님의 계획과 약속의 말씀
누가복음 24장은 하나님이 언제나 그의 계획에 따라 행하시며 그 계획은 우리에게 미리 약속의 말씀을 통해 주어진다는 사실을 가르친다. ‘하나님의 계획과 약속’이란 주제는 맨 처음 1~2장에서 강조했던 주제인데 또다시 마지막 장에 도입됨으로써 이 복음서 전체를 괄호로 묶고 있다. 24장에서만 3번 등장하는 동사 dei(must)는 오래 전에 확정되고 구약성경에 예고되었던 하나님의 계획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대로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사실을 매번 강조한다(7, 26, 44절). 그 계획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체포’와 ‘십자가’ 처형과 ‘부활’의 사건을 핵심으로 하며(7, 26, 46절), 그의 이름으로 ‘회개’하고 ‘죄 사함’을 얻는 복음이 예루살렘부터 땅 끝까지 전파될 것을 포함한다(47절).
빈 무덤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던 여인들은 천사들로부터 그[예수]가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기억하라!(6b절)는 책망 섞인 권고를 받았다. 좌절과 낙망 속에서 귀향 길을 가던 엠마오 두 제자는 부활한 주님으로부터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아!(25절)라는 꾸중을 들었다. 거듭된 증언과 증거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활의 사실을 믿기 꺼려하던 모든 제자들은 주님으로부터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과 시편에 나를 두고 기록한 모든 일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느냐는 질책을 받았다(44절). 한마디로, 본문에서 제자들은 하나님/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들을 때 마음에 새겨두지 않고 그냥 가볍게 넘겨 버렸기 때문에 책망을 들었다. 우리 자신도 그런 경솔한 태도를 경계해야 한다. 성경 안에는 우리가 이해하기 어렵고 따라서 받아들이기 힘든 약속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나에게 익숙한 사고의 범주를 따라 그 말씀들을 듣기보다 그 약속을 하시는 하나님의 신실성과 능력을 믿는 마음으로 들어야 한다(롬 4:17b~22).
하나님이 그의 약속을 반드시 지켜 이루신다는 생각은 우리의 믿음과 소망의 기초가 된다. 오늘날 우리가 믿고 기다려야 할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약속들 가운데 하나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동반할 신자의 일반적 ‘부활’이다. 신약성경이 수없이 예고하고 있는 이 약속도16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 속에서 앞으로 우리에게 어김없이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그가 지으신 새 하늘과 새 땅에 그들을 거하게 하실 것이다(계 21~22장). 만일 그러한 세계가 지금도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보이지 않게 다가오고 있다면, 그 세계를 준비하는 일이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우선적인 과제가 돼야 한다. 우리가 그 세계에서 누리게 될 삶은 지금 이 세상에서 누리는 삶과 도저히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길고도 복되기 때문에 그 미래에 관한 일들은 오늘의 어떤 관심사보다도 훨씬 중요하다.
(3) 성경의 중심 주제와 깨달음
누가복음 24장은 또한 우리가 성경을 올바로 읽고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기억해야 할 원리가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부활한 예수가 본문에서 세 번씩이나 강조한 바에 따르면, 구약성경은 전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책이다. 먼저 27절에서, 예수는 엠마오의 두 제자에게 모세와 모든 선지자들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자기에 관하여 쓴 일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었다. 다음으로 44절에서는, 그가 이미 공생애 초기부터 제자들에게 구약성경의 모든 책들 가운데 자신에 관하여 성취될 예언들이 골고루 들어 있음을 가르쳤다고 말한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들과 시편에 나를 두고 기록한 모든 일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했다. 이어서 46~47절에서는, 예수가 자신에 관하여 구약성경에 기록된 모든 예언들의 핵심을 ‘십자가의 죽음’(그리스도가 고난을 겪고)과 ‘부활’(사흘 만에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과 ‘그를 믿어 얻게 되는 죄 사함’(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과 그 믿음의 ‘전 세계적 전파’(모든 민족에게 전파될 것이다)로써 요약한다.
누가복음 24장 본문은 구약성경의 ‘기독론적 이해’, 즉 구약성경을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과 성취의 관점에서 통합적으로 읽고 파악하려는 해석방법론이 후대 교회에서 시작되어 발전한 것이 아니라 원래 예수 자신에게서 시작되어 그의 제자들에게 전승되었음을 가르친다. 신약성경과 아울러 구약성경의 모든 책들이 다루고 있는 중심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 모든 책들이 기록된 목적은 결국 한 가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하여 영생과 구원을 얻게 하는 것’이다(요 5:39; 20:31; 딤후 3:15; 롬 1:2~4; 3:21~22; 16:25~26).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대할 때마다 언제나 이 중심 주제와 목적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성경 가운데 어떤 본문을 읽고 연구하든지 우리의 근본 동기는 항상 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음’으로 ‘죄 사함’과 ‘구원’을 (더욱 온전히) 얻으려는 것이 돼야 한다.
성경의 참된 이해는 그것을 연구하는 사람의 지능과 열심과 노력에 달려 있지 않다. 우리는 그 사실을 신약시대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서 확인할 수 있다. 사도 바울도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그들과 같은 처지에 있었다. 성경 안에서 예수를 자신의 구원자로 만나지 못하는 사람에게 성경은 닫혀 있는 책이다. 오늘날에도 진정한 의미의 (회개, 죄 사함, 믿음, 거듭남을 포함하는) 회심을 거치지 않은 사람들이 성경을 연구대상으로 삼아 열심히 읽고 토론하고 가르치고 그것에 관하여 글을 쓸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본문은 사람들에게 닫혀있던 성경이 어떻게 열리게 되는지 두 가지 과정을 말해 준다. 첫째, 32절에서 엠마오의 두 제자는 길 위에서 만난 주님이 그들에게 성경을 열어 주었고 그때 그들의 마음이 속에서 뜨겁게 타올랐다고 회상한다. 예수가 그들에게 성경을 열어 준 방법은, 27절이 말하듯이, 성경 전체에 걸쳐 기록된 자기에 관한 사항들을 자세히 설명해 준 것이었다. 성경은 그 책의 전체 주제인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의 빛 아래서 비로소 열려지기 시작한다. 둘째, 45절에서 예수는 성경을 깨닫게 하려고 그들[제자들]의 마음을 열어 주었다. 여기서 그가 연 것은 성경이 아니라 제자들의 ‘마음’이었다. 그 목적은 그들이 성경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다. 사도행전 16장 14절에서도 주님은 바울의 설교를 듣고 있던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 믿음으로 반응하게 하셨다. 본문 45절을 앞 뒤 문맥(44절과 46~47절)과 연결해 보면, 이 두 과정이 분리되지 않고 동시에 일어나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경이 오늘도 열린 책이 되기 위해서는 위의 두 가지 과정이 모두 일어나야 한다. 먼저, 성경의 각 책과 본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유기적인 관련 속에서 마침내 한 권의 책으로 통합되고 열려지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누구나 성경 안에서 예수를 자신의 구주로 만난 후에야 그 책 각 부분의 내용들을 새롭고 온전히 깨달아가게 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성경을 그렇게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설명해줌으로써 그 책을 열어준다. 다음으로, 어떤 사람이 성경 안에서 예수를 자신의 구주로 만나기 위해서는, 그래서 그 책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성령이 그 사람의 ‘마음’을 열어 주셔야만 한다. 성경이 우리에게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줄 수 있는 까닭은 오로지 성령의 영감 때문이다(딤후 3:15~17; 벧후 1:20~21). 성경을 포함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모든 것을 분별하기 위해 우리의 마음은 반드시 성령의 조명과 깨우침을 받아야 한다(고전 2:9~16).
(4) 예수의 승천의 의미
부활 이후 40일 동안 여러 장소의 제자들에게 나타났던(행 1:3) 예수는 그들이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라갔다. 이 공개적 승천의 의미는 대략 다섯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첫째, 예수의 지상사역은 끝났다. 부활의 몸을 입은 예수는 분명히 지상을 떠나 하늘로 올라갔다. 따라서 그의 제자들은 더 이상 그의 육체적 출현을 기다려서는 안 된다. 둘째, 예수의 천상사역이 시작될 것이다. 그의 승천은 지상과의 작별인 동시에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권능의 주로서 활동하는 시발점이기도 하다(눅 22:69). 셋째, 성령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교회는 예수가 떠난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이 약속하신 또 다른 보혜사(성령)를 기다렸고(행 1:4), 승천한 예수는 중보자로서 그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었다(행 2:30~36). 넷째, 예수는 승천했던 방식으로 이 땅에 다시 올 것이다. 그의 재림도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가시적으로 일어날 것이다(행 1:9~11; 비교. 눅 21:27). 다섯째, 제자들은 예수의 재림 때까지 이 땅에서 위임 받은 사명을 성취해야 한다. 너희가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행 1:11a)라는 천사의 말은 제자들의 관심사가 땅에 있어야 할 것을, 즉 그리스도의 증인들로서 땅 끝의 모든 족속들에게 나아가야 할 것을 상기시킨다.
주(註)
1. 공관복음(마 28:1~10; 막 16:1~8; 눅 24:1~12)과 요한복음(요 20:1~18)의 부활 기사 사이에는 몇 가지 차이점들이 나타난다. 이 차이점들의 설명에 관해서는 J. Wenham, The Easter Enigma: The Resurrection Accounts in Conflict?(Grand Rapids: Zondervan, 1984); G. Osborne, The Resurrection Narratives: A Redactional Study(Grand Rapids: Baker, 1984), 149 n. 2를 참조하라. 최근에 D. L. Bock, Luke 9:51~24:53, ECNT 3B(Grand Rapids: Baker, 1996=2000), 1885~1888은 이전의 여러 시도들을 비평적으로 검토한 후 보다 그럴듯한 설명을 제안하였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요한은 먼저 자신이 경험한 부활 사건을 자신의 관점에서 이야기하고 나서(요 20:1~10) 마리아의 이야기(11~18절)로 되돌아간다.
2. 눅 2:49; 4:43; 9:22; 11:42; 12:12; 13:14, 16, 33; 15:32; 17:25; 18:1; 19:5; 21:9; 22:7, 37; 24:7, 26, 44.
3. Osborne, The Resurrection Narratives, 114; D. L. Bock, Luke,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Zondervan, 1996), 607~608.
4. 엠마오(Emmaus)의 위치는 아직도 불확실하며 예루살렘과의 거리도 사본들 간에 차이가 있다. 대부분의 사본들은 양자 사이의 거리를 60 스타디아(stadia)[약 11 km]로 기록하고 있다. 이에 관한 자세한 논의는 Bock, Luke 9:51~24:53, 1907~1908을 보라.
5. 눅 22:23; 행 6:9; 9:29에서 사용된 이 동사의 용법을 참조하라.
6. 누가는 특히 ‘선지자’로서의 예수를 자주 언급하고 있다(눅 4:16~30; 7:16, 22~23, 39; 9:9, 18; 13:31~35; 행 3:14~26; 10:38~39).
7. 롬 1:14; 갈 3:1, 3; 딤전 6:9; 딛 3:3을 비교하라.
8. 32b절: s dinoigen hmin tas graphas(그가 우리에게 성경을 열어 주었을 때에; 비교. 개역: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9. Bock, Luke, 620.
10. 고전 15:35 이하의 ‘부활의 몸’에 관해서는 필자의 졸고 ‘죽은 자들이 어떤 몸으로 오는가?’ 고전 15:35~58의 ‘부활의 몸’에 관한 주석적 연구,『성경과 신학』26(1999), 63~132를 참조하라.
11. 눅 9:22, 44; 17:25; 18:31~33; 22:37을 참조하라.
12. 이에 관해서는 R. T. France, Jesus and the Old Testament: His Application of the Old Testament Passages to Himself and His Mission(Vancouver: Regent College Publishing, 1992), 특히 83~163, 259~263을 참조하라.
13. 요 7:39; 14:16~17, 26; 15:26; 16:7~15를 비교하라.
14. 사 32:15; 44:3; 겔 36:26~27; 39:29; 욜 2:28~32를 참조하라.
15. 어떤 사본들(A*, D, 그리고 옛 라틴 사본들)에는 51b절의 kai anephereto eis ton ouranon(그리고 그가 하늘로 올려졌다)란 어구가 빠져 있다. 만일 이 부분이 원문에 포함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여기서 예수의 ‘승천’(ascension)을 말할 수 없고, 단지 그가(31절에서와 마찬가지로) 제자들을 ‘떠나’ 갑자기 사라진 것만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어구가 원문에 포함되었을 가능성은 아주 높다. 위의 어구와 동일한 사본상의 증거를 보이는 52a절의 proskynsantes auton(그들이 그에게 경배하였다)에 대해서도 우리는 같은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Bock, Luke 9:51~24:53, 1949~1950을 참조하라).
16. 마 22:23~33 par.; 요 5:25~29; 6:39~40, 44, 54; 11:24~25; 고전 15:50~54; 고후 5:1~10; 빌 3:20~21; 살전 4:13~17; 계 20:4~6; 20:13.
누가복음 24장
<누가복음 24장 흐름정리>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제일 먼저 찾았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생전에 주님과 동고동락한 제자들이나, 심지어 사지까지 주님을 따르겠다고 고백한 제자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이 여인들의 부활의 증언을 신빙성있게 받아들이지 못한 것도 당연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어쨌든 주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낙망과 불신앙에 빠진 그들을 위로하시고 다시금 복음 사역에 매진할 수 있는 힘을 불어 넣어 주셨다.
<누가복음 24장 줄거리>
1. 두 천사가 무덤에 온 두 여자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을 선포함.
9. 이 소식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짐.
13. 그리스도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친히 나타남.
36. 그후에 예수가 사도들에게 나타나서 그들의 불신을 책망함.
47. 그들에게 사명을 줌.
49. 성령을 약속함.
51. 하늘로 승천함.
<누가복음 24장 도움말>
* 5절 : 얼굴을 땅에 대니.
그 “사람”들이 실제로 하늘에서 온 존재임을 깨닫고, 분명히 두려움과 경외심 가운데 그렇게 했을 것이다.
* 13절 : 그날에.
이때는 부활한 날 늦은 오후였다.
* 16절 : 눈이 가리워져서.
두 제자는 피곤하고, 슬픈 생각에 깊이 빠져 그들과 합류한 예수를 눈여겨보지 않았다. 분명히 이와 비슷한 상황으로 인해, 그날 일찍 예수가 처음으로 마리아에게 가까이 갔을 때 그녀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예수가 부활 후에 나타난 경우, 어떤 때는 즉시 알아보기도 했으나 다른 때에는 쉽게 알아보지 못했다. 이곳과 31절에 누가가 기록한 말들은, 이때 두 제자는 자신들의 생각에 몰두해 있었고 또한 초자연적인 힘에 의해 시야가 가려져 있었음을 암시한다.
* 18절 : 글로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신원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알 수 없다. 글로바는 예수님의 숙부, 곧 요셉의 형제 또는 요한복음 19장 25절의 글로바와 동일인이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 24절 : 두어 사람.
베드로와 요한을 가리킨다.
* 27절 :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
유대인들이 구약을 가리키는 표현법 중에 하나이다.
* 31절 : 눈이 밝아져.
‘영적인 눈이 열려’라는 뜻이다. 그들의 눈은 하나님에 의해 열려졌다.
* 39절 : 나를 만져 보라.
예수는 부활한 후에도 자기가 실제적이고 물질적인 존재임을 제자들에게 확신시키기 위하여 세 가지 감각적인 증거를 주었다. 예수는 시각, 청각, 촉각을 자신이 실제적인 존재요, 유령이나 너무도 긴장한 상상력의 허상이 아니었다는 확신을 제공하는 데 복합적으로 이용했다. 부활하여 영광스럽게 된 예수의 몸 가운데서 우리는 부활 시에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예증을 보게 된다.
* 48절 : 너희는… 증인이라.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수 년간 그와 함께 지냈고, 그들은 그가 가르친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일하였는가를 알았으며, 이제 그들은 부활의 진리에 대한 증인이었다. 그들은 보고 들은 것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증인”들이라고 인정하기를 결코 주저하지 않았다. 그들은 남에게 말해 줄 위대한 이야기가 있었으며, 그것을 말하는 데 결코 지치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는 부활한 구주를 믿는 자들로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의 도에 대하여 보고 들은 것들을 증거할 특권이 있다.
누가복음 24장 13절-35절 엠마오 향한 길에 나타나신 예수님, 성경 배경 주석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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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4장 13절-35절, 엠마오 향한 길에 나타나신 예수님
누가복음 24장 13절
13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60 스타디아는 약 7마일이며, 개역개정성경에는 이십오리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일반적인 거리로는 약 11km 정도입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엠마오가 여러 군데 있는데 마카비1서 3:57과 4:3에서 요세푸스는 본문과는 다른 곳을 엠마오로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가 본문에서 말하는 엠마오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누가복음 24장 14절-17절
14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15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16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두 명의 제자가 엠마오로 내려가는 도중에 다른 유대인이 합류해서 가는 것은 매우 일반적인 일이었습니다. 특히 시기가 유월절 기간이므로, 유월절을 예루살렘에서 지키고 집으로 돌아가는 순례자라고 생각했다면 더욱더 당연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모른 척 하시며 질문하셨다고 해서 예수님이 그 답을 몰랐다는 것은 아닙니다(창 3:9, 11; 4:9-10). 두 제자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사실에 대해서는 24장 31절-35절의 주석을 참조 하시기 바랍니다.
누가복음 24장 18절
18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
소식은 입에서 입으로 매우 빨리 퍼져 나갔으며, 유월절 명절 중에 공개 처형한 사실에 대해서는 대중들이 충분히 이야기 했을 것입니다. 명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을 찾았던 헬라 지역에 거주하는 순례자들 역시 이 소식에 대해 분명히 들었을 것입니다. 글로바가 놀라는 모습은 마치 오랜 세월 동안 잠을 자다가 최근에 깨어나 그간의 일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깜짝 놀라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지난 며칠 사이에 발생한 사건들 중에 예수의 십자가 사건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추측이라 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24장 19절-21절
19 이르시되 무슨 일이냐 이르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20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1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
글로바의 말들은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느꼈을 것이 분명한 혼란이 무엇인지를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에 나타난 선지자였거나 혹은 메시야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그 누구보다도 영접하고 따라야만 했었던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거부하였습니다. 유대 지역에서처럼 제사장 귀족 정치가 시행되지 않았던 갈릴리와 팔레스타인 외부에 살았던 사람들은 성전의 지도자들을 더 높이 존경했음이 분명합니다.
누가복음 24장 22절-24절
22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23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24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24장 6절-12절의 주석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누가복음 24장 25절-27절
25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예수님은 신명기 18:15-18, 이사야 9장과 11장 그리고 53장에 관한 내용들을 언급하시고 계심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구약성경의 여러 곳을 인용하여 자신의 메시야로서의 역할에 대한 원리들을 말씀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랍비 문헌들에서는 일반적으로 예수님이 여기에서 보여 주시는 깊은 성경에 대한 통찰과 이해에 대해 칭찬하곤 하였습니다.
누가복음 24장 28절
28 그들이 가는 마을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시니
두 제자들은 예수님께 자신들과 함께 머물라고 초대하지 않았다면, 예수님께서 계속 걸어 가시려고 하시는 행동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예의가 있는 행동이었습니다. 이러한 행동은 또 상대방이 손님을 접대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한 방법이기도 합니다(창 19:2).
누가복음 24장 29절
29 그들이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이 제자들이 예수님께 제공하는 것는 숙소와 같은 최소한의 모습은, 예수님에 대한 호의를 나타내는 행동입니다. 특히 해가 저물어 가는 오후 시간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밤길에 하는 여행은 강도로 인하여 예루살렘에서 멀어질 수록 위험하였습니다. 고대 근동의 사회 전역에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동족에게 잠자리를 제공하였으며, 강권 즉 끈질기게 권하는 것도 손님 접대의 예의였습니다(삿 19:5-9; 삼상 28:23 참조).
누가복음 24장 30절
30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또한 늦은 저녁 시간이라 할지라도 손님에게 빵을 제공하는 것은 호의를 나타내는 방법 중에 하나입니다(11:5-6 주석 참조). 모두가 오랫동안 걸어 왔었기 때문에, 두 제자들은 아마도 배가 고팠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심으로써, 이 집안의 가장의 역할을 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 사이에서 이와 같은 일들을 행하셨었습니다.
누가복음 24장 31절-35절
31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32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33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34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35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천사들은 때로 자신들의 임무가 끝이 날 때까지 변장을 하고 있다가 마지막에 자신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토빗에서 라헬이 토빗과 토비아에게). 그러나 인간의 경우에는 달랐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죽었다가 다시 생명을 회복하게 된 사람들까지 포함해서 천사들과는 달랐습니다.
두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이유들 중에 하나는, 그들의 눈이 멀어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24:31, 왕하 6:17). 그러나 예수님께서 즉시 사라지신 것으로 볼 때,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종류의 몸, 부활한 이후에 의인에게 약속되어진 몸을 입으셨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Keener, C. S. (1993). The IVP Bible background commentary: New Testament (눅 24:13–35).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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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4장 강해 설교문] “복음의 능력이 입혀질 때까지”(눅24:4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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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누가복음 24장 강해 설교문 중에서 복음의 능력이 입혀질 때까지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복음의 능력이 입혀질 때까지”(눅24:44-49)
♣명제: 예수님의 제자들은 복음의 능력을 하늘로부터 입혀져야 한다.
♣목적: 구원받은 백성들도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을 하늘로부터 받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성경대로 오셔서 성경대로 이루시고 성경대로 오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목적은 특별 은총을 주시기 위해서 주셨습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구속의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 성경을 나에게 주셨습니다. 원죄에 빠진 죄인들은 성경 속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지 못하면 구원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길을 성경 하나로 집합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행위로 나갈 수 있는 길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가 없이는 절대 하나님 앞에 나갈 자가 이 세상에 한 명도 없습니다. 세상의 권력을 가진 대통령이나 큰 회사의 임직원이나 유명한 대학의 교수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죄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구속의 피가 없이는 절대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내가 세상에서 큰 회사의 임직원이 아니라도 좋습니다. 유명한 사람이 아니라도 좋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고 구원의 은혜를 받았다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엄청난 축복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은 복음의 능력을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에 복음을 깨닫고 이 복음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하라는 말씀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마지막으로 복음을 깨닫고 전파하라는 부탁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너희들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내 힘으로 깨닫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조명을 받아야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성령으로 기록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성경에 흐르는 구속의 맥을 깨닫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눅24: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예수님은 부활하신 이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놀라고 두려워하고 있을 때에 말씀을 선포하시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말씀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한 말이 이것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과 재림입니다.
유대인의 성경은 תנך(타나크)라고 합니다. 모세의 율법인 תורה(토라)이며 예언서인 נביאים(네비임)이며 성문서인 כתובים(케투빔)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구약 성경 외에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구약에 모든 말씀이 예수님에게로 집대성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에 예언되신 대로 오셔서 예언되신 대로 부활하셨고 예언되신 대로 이 땅에 다시 오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과 신약에 흐르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맥을 관통하여 복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축자 된 영감이기 때문에 단어 하나에도 하나님의 구속의 영감이 숨어 있습니다.
눅24:45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예수님께서는 구약 성경의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열어’ διανοιγω(디아노이고 1272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단수, 3인칭) 열리다, 설명하다, 해석하다, 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δια(디아 1223) ~을 통하여, ~ 때문에, 라는 뜻과 ανοιγω(아노이고 455) 열리다, 밝아지다, 펴놓다, 라는 뜻의 합성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해주시고 있습니다.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는 것은 성경의 말씀을 해석하여 자세하게 설명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제자들은 구속의 눈이 열렸습니다. 빛 되시는 예수님을 깨닫게 되었고 눈이 밝아진 것입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성경이 열리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의 복음의 말씀이 펴 놓여 있습니다. 이 복음을 깨닫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알 수가 있습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확신하고 믿어질 때에 구속의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눈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신 일이 실제로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들도 현재 복음의 눈이 열린 것은 주님께서 열어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며 선택받은 자들에게 주님께서 복음의 눈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이 시간 나도 말씀을 들으면서 복음을 깨닫게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눈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눅24: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고난을’ ענה(아나 6031 동사, 푸알, 미완료, 남성, 3인칭, 단수) 고난당하다, 욕보이다, 괴로움을 받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고난을 받았다고 직접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욕보임을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이 고난은 사람으로서는 절대 이겨내기 힘든 모욕과 수치를 당하셨고 괴롭힘을 당하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푸알 강조 수동으로 고난을 당하셨으며 미완료로 계속해서 이 고난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엄청난 모욕감과 수치가 십자가에서 있었습니다. 이것은 나를 위한 수치이며 괴롭힘을 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외부의 압박감과 고통과 괴로움과 심적인 중압감에 휩싸였습니다. 이런 고난을 받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받고’ גזר(가자르 1504 동사, 닢알, 완료, 남성, 3인칭, 단수) 자르다, 가르다, 끊어버리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신 것은 몸이 절단되는 듯한 고통과 괴로움에 있었다고 말씀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신 이유는 나의 원죄를 완전하게 끊어버리기 위해서 수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죄악의 끈을 끊어버리기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원죄의 죽음의 사슬을 스스로 끊어버릴 자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십자가에 오르셔서 나의 원죄를 잘라 주셨습니다. 그래서 죽음을 잘라주시고 생명으로 옮겨주신 것입니다.
구원받은 나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심으로 나의 원죄를 끊어주셨기 때문에 살아난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공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읽으면서 이것을 깨닫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바로 나의 죄를 잘라버리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알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나와 전혀 상관없는 것이 아니라 아주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에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다시 이 땅에 나를 데리러 오신 주님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눅24: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예수님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ירושלים(예루살라임 3389) 예루살렘이며 이 단어는 ירואל(예루엘 3385) ‘하나님께서 세우신’을 의미하며 שלם(샬람 7999) 완전하다, 완성하다, 온전하다, 라는 뜻의 합성어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골고다 십자가에 세우시고 구속을 완성하셨으며 온전하신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은 평화의 터전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평화의 복음을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시작하여’ חלל(할랄 2490 동사, 히필, 부정사 절대형) 꿰뚫다, 꿰찌르다, 더럽히다, 시작하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된 주님의 고난의 복음이 모든 이방 민족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원죄에 빠진 자들을 위해 옆구리에 창을 찔림 받았습니다. 나를 대신하여 수치를 당하시고 더럽힘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의로운 분인데 나의 부정하고 추악한 죄 때문에 이렇게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예루살렘의 골고다의 십자가에서 대 못에 꿰뚫림을 받으셨습니다. 십자가 고난의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시작될 것을 주님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이 복음의 말씀을 통해서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세상의 이방민족들에게 전파하여 은혜의 해를 선포해야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원죄의 노예에서 해방시킬 구원자라는 것을 전해야 합니다. 이미 구약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실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구약을 읽을 때에 예수님을 보아야 합니다.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복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이 깨달아지지 않으면 우리는 율법에 매여 있는 것입니다.
고후3:14-15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우리가 구약을 읽을 때에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이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없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율법 안에 매여 있으면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마음을 덮어서 주님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눅24: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증인은 직접 사건을 목격한 사람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직접 목격한 자들입니다. 구원의 복음을 체험한 것입니다.
‘증인이라’ עד(에드 5707) 증인, 이라는 뜻이며 עוד(우드 5749) 증언하다, 반복하다, 권고하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또한 헬라어로 증인은 μαρτυς(마르튀스 3144) 증인, 순교자,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복음의 증인이 되어 온 세상에 복음을 선포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증인의 삶은 실제로 내가 본 것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백성들에게 복음으로 권면하여 죄악에서 의로 돌아오게 하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복음을 전파하다가 순교를 당하게 됩니다. 증인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그것도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우리들도 이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계속해서 선포해야 합니다. 증인의 삶을 살아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체험하고 만나야 합니다.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런 확신도 없이 전하는 것은 위증입니다.
눅24: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러 있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임하면 십자가 복음의 말씀을 깨닫고 선포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게 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모여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러고 난 후에 퍼져나가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고도 떠나지 않으니 하나님께서 야고보를 순교하게 하셔서 각 지역으로 퍼져나가게 하셨습니다. 우리들도 먼저는 성령으로 덧입혀져야 합니다. 그리고 때가 되매 하나님께서 세상으로 나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때까지 열심히 예루살렘 성에 머물러 계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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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디 믿는 마음을 뜨겁게한 말씀(눅24:13~35)
제목: 더디 믿는 마음을 뜨겁게한 말씀
본문: 누가복음 24장 13절~35절
설교자: 조정의
지난주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이 묻히셨던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무덤은 비어 있었고, 예수님의 시체는 사라졌습니다. 무덤을 굳게 막고 있던 2톤에 가까운 돌문은 활짝 열려있었습니다. 이것을 설명할 길은 하나뿐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여러 번 말씀하신 그대로 돌아가신 후 제 삼일에 부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습니다(롬 4:25).
성경은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많은 사람에게 나타나셨다고 확증합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것처럼 예수님은 먼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고(막 16; 요 20:14), 무덤에서 돌아오는 여인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마 28:8~9). 예수님은 또한 오늘 우리가 살펴볼 본문 내용에서 말하듯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고(눅 24:13), 시몬 베드로에게 따로 나타나셨습니다(눅 24:34).
그 후에도 예수님은 도마가 없을 때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에게 나타나셨고(요 20:19), 도마가 있을 때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요 20:26).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던 일곱 제자에게 나타나셨고(요 21:1),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나타나셨으며(고전 15:6), 야고보에게만 나타나시기도 했습니다(고전 15:7). 마지막으로 승천하실 때 감람산에 있던 모든 사도들에게 나타나셨고(눅 24:51), 사도 바울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고전 15:8).
이 많은 장면 가운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가장 극적이고 아름다운 장면이 바로 오늘 우리가 살펴볼 엠마오 길에서 제자들을 만나주신 장면입니다. 슬픈 빛을 띠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두 제자를 주님이 찾아오셨고, 부활을 더디 믿는 두 사람의 마음을 뜨겁게 바꾸어주셨습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의 마음이 뜨거워지기를 바랍니다. 무지하고 믿음이 연약한 제자를 주님이 어떻게 다루시는지 그 자비롭고 인자한 성품을 보고 마음이 뜨거워지기를 바랍니다. 지금도 우리의 체질을 아시고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시며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는 인자하심을 베푸시는 주님으로 인해 가슴이 불타오르기를 기도합니다(시 103:13~14).
그러기 위해 먼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전 엠마오를 향해 가던 두 제자의 마음이 어떠했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1. 더디 믿는 자들의 마음(13~24)
두 제자는 9절에 나오는 “사도와 다른 모든 이들”, 즉 예수님의 제자 중 하나였습니다. 그들 중 하나의 이름은 “글로바”였고 다른 하나는 알 수 없습니다(18절). 그들은 여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알린 “그 날” 즉 주일에 사도들과 함께 예루살렘에서 그 소식을 직접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여인들의 이야기를 그렇게까지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분명 놀랐지만, 도저히 믿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계획대로 고향(아마도) 엠마오로 향하는 길에 올랐던 것입니다.
22절을 보시면 주님의 부활에 대한 그들의 불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22~24절)
이들의 표현을 잘 들여다보면 ‘예수님의 부활을 도저히 믿을 수 없어…’라는 마음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천사를 통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분명히 말씀하셨고 많은 여인들이 이를 확실히 들었다. 베드로와 요한도 확인했다!” 이렇게 분명히 말하지 않고, 부정적으로 이야기를 합니다. “여자들이 시체는 못 봤는데…천사를 봤다고 하더라…”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그들과 함께 한 자 중 두어 사람 곧 베드로와 요한도 무덤에 가서 여인들의 말을 확인했는데 결론은 “예수는 보지 못했다”입니다. 결국은 주님의 부활을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이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을까요? 그들의 믿음이 부족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답은 17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길을 갈 때 예수님이 같은 길로 내려가는 순례자처럼 그들의 여정에 동행하셨는데(15절), 그들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그 질문을 듣고 두 사람은 그 자리에 머물러 섰는데, 17절에 보면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그들이 여인들의 이야기를 믿지 못했던 이유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기 힘들었던 이유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슬픔으로 가득 찼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진실로 따르던 제자였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께 소망을 두었던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로 믿었고, 이스라엘을 구원할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너무나 억울하게 그리고 허무하게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예수님께 소망을 두고 믿었었던지, 예루살렘에서 엠마오까지 이십 오리(11km) 되는 거리를 걸으며, 그들은 계속해서 예수님 이야기를 주고받았습니다. 아마 이런 얘기였을 것입니다.
어떻게 그분이 그렇게 돌아가실 수 있지? 그때 그분이 하신 이 말씀은 어떻게 되는 거지? 그분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이시고 나사로도 살리지 않으셨는가? 그분 말고 정말 메시아가 또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분은 정말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가 아니었단 말인가? 아니면 참 메시아를 우리 지도자들이 죽인 것인가?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고 때론 논쟁하기도 하면서 그들은 오는 내내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습니다. 그만큼 그들의 기대는 온통 예수님에게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대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산산조각 나버렸습니다. 허탈함과 허망함, 슬픔을 가득 안고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무슨 얘길 주고받았냐?”고 물으셨고(17절), 두 제자 중 하나인 글로바가 이렇게 되물었습니다.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눅 24:18)
예수님의 죽으심이 당시 예루살렘 안에서 많은 사람에게 알려질 만큼 떠들썩한 이야기였던 건 사실이지만, “너 혼자만 알지 못하냐?”고 묻는 걸 보면 정말 이 두 제자는 온통 예수님에 대한 생각과 기대로 가득 차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른 모든 사람이 이 일에 대해 당연히 알아야 할 것처럼 생각할 만큼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들 마음 상태를 드러내기 위해 다 알고 계셨지만 “무슨 일이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이렇게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18~21절)
이 대답에서 우리는 두 제자의 슬픈 빛의 근원을 만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분이 하신 말씀과 일에는 분명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했습니다. 하지만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예수님을 사형 판결에 넘겨주고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 즉 구원할 자이신데, 자기 백성이 그분을 몰라보고 죽인 것입니다. 이 일이 일어난 지 벌써 사흘이 지났지만, 제자들은 이 사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라면, 구원자라면 하나님의 약속대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셔야 하는데, 이렇게 자기 백성의 손에 죽어버리다니…예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가 아니었다는 말인가? 하지만 그분의 말씀과 행하신 일에 하나님의 능력이 분명히 나타나지 않았는가? 이 일을 설명할 길이 전혀 없었습니다. 어떻게 이 일을 이해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엄청난 혼란과 커다란 슬픔이 제자들의 마음을 가득 채웠고, 그래서 그들은 여인들의 이야기를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주님이 정말 살아계시는가? 의심할 때가 있습니다. 정말 주님이 살아계신다면, 왜 나에게 이런 일을 허락하시는 걸까? 정말 주님이 살아계신다면, 왜 내가 처한 이 상황에서 고통받는 것을 그냥 지켜만 보고 계신 걸까? 주님이 정말 살아계신다면, 왜 내가 그토록 간절하게 바라는 것을(이기적인 이유로 구하는 것도 아닌데) 지금까지 주지 않으시는 걸까?
주님이 살아계신다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그것을 확실히 믿기가 힘듭니다. 내가 바라보고 있는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혼란과 슬픔은 너무나 크고 현실적이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서쪽으로 해가 지고 있을 때, 주님에 대한 믿음이 점점 더 어둬워지고 있는 두 제자를 주님은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마치 탕자를 회복하기 위해 먼 거리에서 그를 향해 달려갔던 아버지처럼, 예수님은 믿음을 잃고 떠나가는 그들을 붙잡기 위해 그들의 뒤를 따라 걸어오셨습니다.
2. 그 마음을 뜨겁게 한 말씀(25~32)
예수님은 홀연히 그러나 자연스럽게 그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들이 서로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느라 정신없을 때, 그들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셨습니다(15절)
여러분 어쩌면 궁금할지도 모릅니다. 아니, 옆에서 예수님이 함께 걸어가고 있는데 어떻게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는가?
하지만 그들은 눈이 가리어져서 예수님인 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16절). 마가복음 16장 12절에는 예수님께서 “다른 모양”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셨다고 말합니다. 왜 예수님은 그들이 알아볼 수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으셨을까요? 왜 하나님은 그들의 눈을 가리어 예수님인 줄 알아보지 못하게 하셨을까요?
나중에 하나님은 그들의 눈을 밝히셔서 예수님을 알아보게 하셨습니다(31절). 그 일은 엠마오에 가까이 왔을 때 일어났는데, 날이 저물고 어두워질 무렵 예수님과 두 제자는 엠마오에 도착했습니다. 예수님은 마을을 지나쳐 계속 가려고 했고, 제자들은 간절히 청하여 예수님을 집으로 모셨습니다(28~29절).
예수님은 그들의 청에 따라 집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유하며 음식을 잡수셨고 떡을 가져다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셨습니다(30절). 그리고 바로 그때 그들의 눈이 밝아져 예수님을 알아보았고, 그 순간 예수님은 그들에게 보이지 않고 사라졌습니다(31절).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떡을 가져다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는 장면에서 마지막 만찬 장면을 두 제자가 기억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마지막 만찬은 열두 제자 즉 사도들과 나누셨고, 이 두 사람은 사도가 아니었습니다. 33절을 보시면 그들이 예루살렘에 돌아갔을 때 열한 제자가 그들을 맞이했습니다.
누가는 두 제자가 후에 무엇을 보고 예수님을 알아보았는지 분명히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누가가 말하고 있는 것은 처음엔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고(16절) 나중에 그들이 눈이 밝아져 예수님을 알아봤다는 것입니다(31절). 둘 다 수동형으로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눈을 가리시고 하나님이 그들의 눈을 뜨게 하신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질문은 왜 그렇게 하셨는가?입니다. 처음부터 예수님을 알아보게 했다면 그걸로 그들의 슬픔이 한 방에 걷히고 그 마음이 뜨겁게 불타오르지 않았겠냐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런 생각을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내가 원치 않는 상황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이 능력을 보여주시면, 내가 간절히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이 그것을 기적적으로 이루어주시면, 한 마디로 살아계신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증거를 한 방에 보여주시면 혼란과 슬픔이 가득 찬 내 마음이 뜨거운 믿음으로 한 방에 불타오를 수 있을 텐데… 하나님은 왜 그런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시는 걸까요?
예수님을 알아본 순간 그들의 시야에서 예수님은 사라졌고, 두 제자는 서로에게 어떻게 말했습니까?
봤어? 예수님 맞지? 정말 그분은 살아계시구나! 그분을 보고 나니 이제야 마음이 뜨거워진다! 이제야 믿음이 생긴다!
이렇게 말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이 흥분하며 서로에게 외친 말은 다음과 같습니다(32절).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그들의 마음에 가득 차 있던 의심과 혼란과 슬픔을 모두 걷어내고, 그들의 마음을 뜨겁게 만든 건(불타게), 다름 아닌 예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을 예수님이 풀어 주실 때에, 그들의 오해가 말씀으로 바로잡혔을 때, 그들이 보고 있는 상황에 대한 하나님의 설명을 그들이 들었을 때 그들의 마음이 믿음으로 불타오른 것입니다.
그들이 회상했던 길 위에서 있었던 장면을 자세히 살펴봅시다.
그들이 큰 혼란과 슬픔으로 예수님의 죽음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토로했을 때, 예수님은 이렇게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25~26절)
‘미련하다’는 책망은 멍청하다는 경멸의 표현이 아니라, ‘생각과 이해가 부족하다’는 평가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선지자를 통해 너희에게 분명히 말씀하신 것을 너희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구나, 말씀대로라면 그리스도가 마땅히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강해 설교를 시작하셨습니다. 27절을 보십시오.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 모세는 모세 오경을(창세기~신명기), 모든 선지자의 글은 구약의 모든 선지서를 가리킵니다. 그것을 시작으로 모든 성경(구약)에 쓴 그리스도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자세히 풀어 설명해주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직접 전해주신 구약 성경 강해 설교가 얼마나 예리하게 그들의 무지를 제거했을까요?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잘못된 기대를 확실히 바로잡아 주었을까요? 정말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 그리스도의 고난을 미리 말씀하셨고 그리스도는 그 하나님의 뜻대로 죽으시고 제 삼일에 부활하셔야 했다는 것이 아마 더없이 분명해졌을 것입니다. 그들의 혼란이 사라지고 슬픔이 완전히 걷히며 믿음이 굳건해지고 마음이 불타올랐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나서 서로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물론 부활하신 예수님의 얼굴을 다시 보는 것은 그들에게 큰 기쁨을 주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걸로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먼저 그들이 이해할 수 없던 그리스도에 관한 하나님의 분명하신 뜻을 성경 말씀을 통해 확실히 알고 믿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먼저는 그들의 눈을 가리고 그 후에야 눈을 밝히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 속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하기만 하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간절히 원하는 것을 하나님이 주시고, 내가 처한 위기를 하나님이 뒤집으시고, 내 앞에 살아계신다는 증거를 확실히 보여주시면 한 방에 내 연약한 믿음이 불타오를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걸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그런 식으로 자라지 않습니다.
우리에겐 말씀이 필요합니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그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합니다(롬 8:28). 내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으시는 것 같은 환경에서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하신 말씀이 필요합니다(마 6:32). 또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이 말씀이 필요합니다(롬 8:32).
우리는 보이는 것을 바라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보이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믿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히 11:1). 그리고 이 믿음은 오직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납니다(롬 10:17).
저는 베드로후서 3장 18절 말씀을 사랑하여 책에 싸인을 할 때 꼭 그 구절을 적어주는데, 베드로는 이 글귀로 편지를 마쳤습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
이제부터 영원히 살아계신 영광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내리시는 풍성한 은혜 가운데 자라나는 것은 곧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나는 것과 같습니다. 오직 믿음만이 은혜를 받을 수 있는 통로가 되며, 그 믿음을 불타오르게 하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곧 그분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자, 이제 하나님의 말씀으로 슬픔이 사라지고 뜨거운 마음을 갖게 된 두 제자가 어떻게 했는지 마지막 장면을 살펴봅시다.
3. 믿음을 나눔(33~35)
그들은 “곧 그때로 일어”났습니다(33절). 즉각적인 반응이었습니다. 믿음을 거의 포기한 채로 고향으로 돌아와 자리 잡을 계획이었는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았을 뿐만 아니라 왜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셔야 했는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분명한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엠마오에 머물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즉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마 오는 길은 느리고 무거웠을 테지만 돌아가는 길은 빠르고 가벼웠을 것입니다.
가 보니 열한 제자(가룟 유다 제외)와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었는데 그들이 기쁜 소식을 알리기 전에 먼저 그들이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고 말했습니다(34절). 정확히 베드로에게 어떻게 예수님이 나타나셨는지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하늘나라에 가면 아마 그 간증을 즐겁게 듣게 될 것입니다.
엠마오에서 올라온 두 제자도 그 확실한 간증을 나머지 제자들과 나눴습니다. 길에서 있었던 일, 예수님이 떡을 떼며 자기들에게 알아볼 수 있도록 나타나신 일에 대해 나눴습니다. 제가 만일 엠마오에서 온 글로바나 다른 제자였다면 길에서 예수님이 설명하신 성경의 참 의미를 풀어 설명하기 위해 애썼을 것입니다.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구약 39권이 말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하나님의 분명한 뜻, 그것을 다 풀어 설명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나머지 제자들의 마음에 혼란이 걷히고 슬픔이 사라지고 불타는 믿음이 생기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말입니다.
사실 성도가 모여 하는 교제가 바로 이런 교제입니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 그분의 말씀을 의지하며 살아가며 서로의 믿음을 굳건하게 세워줍니다. 살아계신 예수님을 말씀으로 경험하고 불타는 믿음으로 서로를 권하고 붙들어줍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의 교제가 세상 사람들의 교제와 같아서는 안 됩니다. 비방이나 불평으로 끝나는 교제, 염려나 근심만 늘어놓는 교제, 이 땅에서 잘 먹고 잘사는 것에 대해서만 나누는 교제는 그리스도인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부활하여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든 비방과 불평을 막아주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염려와 근심을 모두 맡길 살아계신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우리의 소망은 이 땅이 아니라 저 하늘에 있다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교제는 그 방향으로 흘러가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혼란과 슬픔에 우리가 그대로 빠져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서로의 마음에 뜨거운 믿음을 타게 해줘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교제가 되어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서로에게 뜨거운 마음으로 전했던 제자들처럼 말입니다.
엠마오의 두 제자에게 녹음기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예수님의 강해 설교를 녹음해서 열한 사도와 나머지 제자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들을 수 있게 해줄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예수님이 직접 풀어 설명하신 하나님 말씀 강해, 정말 그들에게 꼭 필요한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36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 말을 할 때에.” 엠마오에서 온 두 제자가 한참 예수님이 나타나시고 길에서 설명하신 것을 말하고 있을 때, “예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샬롬. 인사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44~45절,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예수님의 직강이 시작된 것이죠. 이 이야기는 다음주에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말씀을 마치기 전에 한 가지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 좋은 설교란 단지 듣는 사람의 가슴을 뛰게 하고 눈물을 흘리게 하는 설교가 아닙니다. 좋은 설교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풀어 설명하는 설교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사람들에게 긍정의 힘을 불어넣고, 칭찬과 격려를 하며, 삶의 소중함을 기억하게 하는 일은 꼭 설교자가 아니더라도 세상의 뛰어난 강사들도 다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고 한 것은 “말씀을 전파하는 것”이었습니다(딤후 4:2). 또한 말세에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않고 자기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를 것이라고 경고하였습니다(딤후 4:3~4).
여러분이 듣는 것을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설교라도 정말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 그 정확한 의미를 설명하려고 하는지, 그래서 그 말씀 가운데 담긴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선포하는지, 아니면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성경을 이용해서 하고 있는지 잘 분별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제대로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믿음이 말씀을 아는 것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삶 가운데 살아계신 하나님이 잘 느껴지지 않을 때, 다시 말해 여러분이 처한 환경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연약해지고 큰 혼란과 슬픔이 마음을 채워나갈 때,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믿음을 뜨겁게 불타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게 하는 힘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온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말씀으로 나의 믿음을 세우고, 성도의 믿음을 세워주는 우리가 되기를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말씀,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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