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 | 성경이야기[신약]나사로를 살리신예수님 인기 답변 업데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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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 우리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 우리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2020-04-15 하인리쉬 아놀드. Jesus raises Lazarus from the dead 카를 블로흐, 나사로의 부활, 18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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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ruderhof.com

Date Published: 11/2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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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 (요 11:17~37) – 말씀 속에 살자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이 일어난 장소는 베다니입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2~3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예루살렘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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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sanho0324.tistory.com

Date Published: 10/2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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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리신 예수님 요 11:38-44 – 온누리교회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보시고 우신 이유는 나사로가 눈물을 흘릴 만한 가치가 있는 특. 별하고 보배로운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통계를 보면 자살하는 사람이 교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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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onnuri.org

Date Published: 10/5/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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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요 11:1~44) – KMC뉴스

(2) 죽은 나사로를 살리심(17~44) ① 마리아와 마르다의 믿음(17~24) ~ 나사로의 죽음으로 많은 유대인들이 문상차 방문했고 예수께서 나타나심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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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kmcnews.kr

Date Published: 8/3/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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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요한복음11장:죽은 나사로를 살리다,나는 부활이요 생명 …

(요한복음11:35) 신약성경에는 예수님이 세번 우셨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생애 마지막 1주일전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전에 우셨고(누가복음19: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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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11/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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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복음서 대조표 / 나사로를 살리심 – 한국컴퓨터선교회

(요 11:4),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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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cm.co.kr

Date Published: 6/1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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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강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 (요 11) – CGNTV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 요한복음에 기록된 마지막 표적—요한복음의 분. 수령. • 표적의 절정. •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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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image.cgntv.net

Date Published: 11/2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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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 (요한복음 11:1-16) – Daum 블로그

요한복음 11장은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리신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 이야기의 앞부분을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성경은 ‘생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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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8/2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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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

  • Author: 노라모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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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0. 11. 2.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m47wWA0w_Zs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 우리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카를 블로흐, 나사로의 부활, 1870

부활절이 의미하는 바는 단순한 죽음과 부활을 너머 섭니다. 예수님은 사망을 농락하셨을 뿐만 아니라 다시 생명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살아계십니다!

예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우리는 이 말씀을 믿습니까? 이 질문은 오늘 특히 우리의 마음을 찌릅니다. 우리는 죽음과 고통, 두려움의 시간을 살고 있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 대유행은 삶과 의식의 모든 면에 침투했습니다. 수많은 사상자가 생길 거고, 더 많은 사람들이 공포와 슬픔 그리고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죽어갈 것입니다. 그곳에 부활이 올까요?

요한복음 11장에 있는 죽은 나사로의 이야기를 면밀히 살펴본다면,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한 줄기 빛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지극히 사랑하셨던 마리와와 마르다의 형제 나사로가 앓고 죽어간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병이다. 이것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

병과 죽음이라는 재난이 궁극적으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라는 말씀은 놀라운 생각입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이야기를 끝까지 따라가보겠습니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의 의미와 다시 유대 지방으로 돌아가자는 예수님의 말씀이 안전할 것인가에 대한 이러저러한 논의가 있었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나사로는 죽었다. 내가 거기에 있지 않은 것이 너희를 위해서 도리어 잘 된 일이므로, 기쁘게 생각한다. 이 일로 말미암아 너희가 믿게 될 것이다. 그에게로 가자.”

예수님이 도착했을 때 사람들은 슬픔으로 혼란 가운데 있었습니다. 나사로는 이미 죽었으며, 무언가 손을 쓰기에는 너무 늦었습니다.

“주님,” 마르다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라도, 나는 주님께서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하나님께서 다 이루어 주실 줄 압니다.” 예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셨다. “네 오라버니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마르다가 예수께 말하였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 그가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은 내가 압니다.”

바로 이 순간에 예수께서 능력 있는 기쁜 소식을 선포하십니다.

예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예, 주님!” 마르다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은 세상에 오실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가 믿습니다.”

여기서 마르다의 믿음은 비록 칭찬 받지만, 이는 모두 주님이시며 구세주이신 분과 함께 슬퍼하고 눈물 흘린 다음에야 일어났습니다. 자매들은 예수님을 나사로가 묻힌 무덤가로 안내했습니다. 여기서 많은 눈물과 흐느낌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

헨리 오사와 테너, 나사로의 부활, 1896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이제 곧 나사로를 죽음으로부터 살리실 분이며, 죽음을 극복하실 것을 아시는 분도 친구의 죽음이 비통하여 우셨습니다. 이것은 보여주기가 아니고 진정한 애도의 눈물이었습니다. 고통 역시 치유와 부활의 한 부분입니다. 고통과 죽음 그리고 슬픔 없이 부활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 고통을 통과하는 것이 회개이며, 사망에서 생명으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망과 슬픔이 생명으로 바뀔 수 있을까요? 복음서의 말씀이 이를 가장 잘 설명해줍니다.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하게 여기시면서 무덤으로 가셨다. 무덤은 동굴인데, 그 어귀는 돌로 막아 놓았다. 예수께서 “돌을 옮겨 놓아라” 하시니, 죽은 사람의 누이 마르다가 말하였다.

“주님, 죽은 지가 나흘이나 되어서, 벌써 냄새가 납니다.”

예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리라고, 내가 네게 말하지 않았느냐?”

사람들이 그 돌을 옮겨 놓았다. 예수께서 하늘을 우러러 보시고 말씀하셨다. “아버지, 내 말을 들어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아버지께서는 언제나 내 말을 들어주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해서입니다. 그들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고 외치시니, 죽었던 사람이 나왔다. 손발은 천으로 감겨 있고, 얼굴은 수건으로 싸매여 있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그를 풀어 주어서, 가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이 이야기로부터 우리가 죽음과 부활에 대해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나사로의 죽음을 오늘날 코로나바이러스에 의한 죽음과 비교할 순 없습니다. 사상자가 즉각적으로 다시 부활할 것이라 희망하는 것 또한 무리입니다. 그러한 기적을 희망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 아닙니다. 여전히 기적은 일어나고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기도에 귀기울이십니다. 우리는 각자의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자비와 치유를 베푸시길 구체적으로 기도함과 동시에 세상의 고통을 끝내시도록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떠한 경우에서라도 죽은 이들이 지금 여기서 당장에 부활하지 않더라도 결국에는 승리의 삶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분명 죽음은 있을 겁니다. 그리고 우리 가운데 죽어야만 하는 이기심과 허영, 그리고 무의미한 우상숭배들이 있습니다. 우리 사회와 문화 가운데서 사라져야 할 것들도 있습니다. 마약 중독, 폭력, 성매매, 인종차별, 민족주의, 정치적 분열주의, 환경에 대한 불경, 욕심과 물질주의, 전쟁, 기근과 재난, 가난과 희망 없음, 정신질환과 절망 등입니다. 우리가 최후의 원수인 사망을 무찌를 수만 있다면…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으며, 예수님께서 하실 수 있습니다.

사진: Martin Sanchez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부활과 회복이 가능해졌습니다.

희망이 부활하고 이웃을 서로 돕는 상부상조가 살아날 수 있습니다. 자가 격리와 검역이 끝나면 공동체도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교회도 새로워지고, 참된 형제자매들이 빵을 떼는 진정한 교제가 이루어지며 성령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연대와 사랑이 군대와 봉쇄보다 월등하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을 통해 모든 민족과 문화, 종교마저도 새로워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실 것이므로 이 부활절 기간에 기도합시다.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에게 하셨던 것처럼, 무덤을 막고 있던 돌을 옮기시고 감싸고 있던 ‘우리의’ 베옷을 풀러 헤치시고 ‘우리를’ 살려내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살아나셨습니다! 우리도 살아날 것입니다.

하인리쉬 아놀드는 아버지이자 할아버지입니다. 또한 목회자요, 교사, 음악가이기도 합니다. 뉴욕 주 리프톤의 우드크레스트 브루더호프에 삽니다. 트위터로 팔로우하세요. Twitter: @JHeinrichArnold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 (요 11:17~37)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

[요한복음 11장 17절~37절]

17절 –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18절 –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

19절 –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20절 –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21절 –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22절 –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23절 –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24절 –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25절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절 –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7절 –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28절 –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자매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29절 –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30절 –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가 맞이했던 곳에 그대로 계시더라

31절 –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32절 –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33절 –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34절 –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35절 –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36절 –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

37절 –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배경 이해하기]

요한복음에는 공관복음에 나오지 않는 예수님의 일곱 가지 자기 선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6:35), ‘나는 세상의 빛이다’(8:12), ‘나는 문이다’(10:7, 9), ‘나는 선한 목자다’(10:11),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11:25),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14:6), ‘나는 참포도나무다’(15:1, 5). 이중에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은 예수님이 부활과 생명 되심을 나타내는 일곱 번째 표적입니다. 이 표적이 다른 여섯 표적과 다른 점은 나사로의 부활이 바로 예수님 자신의 부활을 예표한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부활은 장차 모든 성도가 경험할 사건임을 나타내는 중요한 표적입니다.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이 일어난 장소는 베다니입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2~3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예루살렘성에서 살 수 없었던 가난한 이들이 모여 살던 지역입니다. ‘나사로’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도우셨다’라는 뜻입니다. 이는 예수님 말씀처럼, 나사로의 병을 통해 하나님이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실 것을 기대하게 합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11:4).

[관찰과 묵상]

1. 예수님이 베다니에 도착하셨을 때 나사로는 무덤에 장사된 지 며칠이 지났나요?(17절)

예수님이 도착하셨을 때 나사로가 무덤에 장사된 지 이미 나흘이 되었습니다.

나사로가 큰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예수님은 베다니에서 약 30킬로미터 떨어진 곳(요한이 처음 세례 베푼 곳, 1:28; 10:40)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에 관한 소식을 들으시고는 곧바로 베다니로 가신 것이 아니라 이틀을 더 머무신 후에 가셨습니다(11:6). 예수님이 베다니에 도착하셨을 때 이미 나사로는 죽어 장사를 지낸 지 4일이 되었습니다. 팔레스타인의 기후는 고온다습해 사람이 죽으면 보통 당일에 매장하거나 아무리 늦어도 3일 이내에 매장했습니다. 그런데 종종 매장하지 않고 시체를 그대로 두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 관념상 죽은 후 사흘 동안은 그 영혼이 시신을 떠나지 않아 소생할 수도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사로가 죽은 지 4일이 되었다는 것은 그의 죽음이 완전한 죽음, 최종적인 죽음으로 확증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나사로의 부활은 완전한 죽음에 들어간 자를 살리심으로 예수님의 완전한 신성을 확증한 사건이 됩니다. 이로써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하나님 아들이 영광을 받게 된다는 예수님 말씀이 이루어집니다(11:4).

적용과 나눔

불가능하다고 여겼는데 하나님이 개입하심으로 역전된 일이 있나요? 하나님의 선하심을 끝까지 신뢰할 이유는 무엇인가요?

우리는 믿음으로 살려고 노력해도 내 생각대로 되지 않을 때, 혹은 소원이 좌절될 때를 종종 경험하곤 합니다. 반대로 다 끝났다고,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일이 역전되어 예상과는 전혀 다른 좋은 결과를 맞이할 때도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신앙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계획하심을 끝까지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릅니다. 또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의 계획보다 높고 크십니다(사 55:8~9). 우리는 이 같은 하나님을 기억하고 신뢰해야 합니다. 전능하시고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십니다. 선하신 하나님은 결코 그분의 자녀들을 악한 길로 이끄시지 않습니다. 내 생각과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나님을 향해 불평하고 불신하는 것은 죄입니다. 우리의 연약한 부분을 틈타 공격하려는 사탄의 전략입니다. 다 끝났다고 쉽게 포기하고 낙심하게 하는 것 역시 사탄의 전략입니다. 참신앙은 매 순간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끝까지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기도하며 감사함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 하나님의 도우심과 능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2. 사람들이 우는 것을 보신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했나요?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예수님은 어떠한 모습을 보이셨나요?(33~35절)

사람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은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을 바라보시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베다니에 도착하신 예수님은 마르다 마리아 자매를 만나시고 드디어 나사로의 무덤 앞에 이르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35절). 그 이유는 나사로의 죽음으로 인해 슬퍼하는 마리아와 마르다 때문이었고, 또 나사로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들 때문이었습니다(33~34절).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신 것을 요한이 특별히 기록한 이유는 예수님의 참사람 되심, 즉 예수님의 인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참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참사람이시기 때문에 인간이 느끼는 슬픔의 감정을 동일하게 느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동정심에서 나오는, 감정이 북받치는 눈물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소망하던 메시아는 눈물 흘리는 분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또한 헬라인들이 만들어 낸 신화에서 묘사되는 신들 역시 인간에 대한 동정심이나 사랑이 전혀 없는 모습의 신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의 처지와 상황을 이해하시고 마음을 다해 인간을 동정하시고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슬퍼하는 사람들과 함께 눈물을 흘리시는 분이고, 사랑의 마음으로 그들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이 흘리신 눈물은 형식적인 눈물이 아닙니다. 본심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눈물이었습니다.

적용과 나눔

내가 슬퍼할 때 예수님도 함께 슬퍼하시며 내 연약함을 동정하십니다. 이러한 사실이 내게 어떤 소망을 주는지 나누어 보세요.

최근 많은 이들이 앓으며 고통을 호소하는 증상이 있습니다. 바로 우울증입니다. 우울증을 치료하는 다양한 방법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우울증 환자의 생각과 말에 공감해 주고 이해해 주는 사람이 곁에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환자는 위로를 받고 우울증의 치료가 이루어집니다. 누군가 나를 이해해 주고, 나와 함께해 주며, 나와 함께 울어 준다면 우울증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 삶에 대해 그 누구보다 충분히 공감해 주시고, 넘치도록 이해해 주시는 분입니다. 이는 그분이 우리가 겪는 슬픔과 아픔 이상의 고통을 경험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히 4:15~16). 한편 성령님은 지금 이 순간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며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고 계십니다(롬 8:26). 살다 보면 말할 수 없는 깊은 탄식과 슬픔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때 그 슬픔을 묵상하며 깊이 빠지지 말고 우리를 충분히 동정하시는 주님 앞으로,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야 합니다. 이는 성도에게 주신 특권이자 은혜입니다.

* 예수님은 신성과 인성을 모두 지니신 분입니다. 신성을 지니신 예수님은 생명의 주요 전능하신 하나님이기에 죽은 나사로를 말씀으로 살리십니다. 인성을 지니신 예수님은 인생의 연약함을 동정하시는 분이기에 나사로의 죽음을 애도하는 이들과 같은 마음으로 울어 주십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모든 고통과 감정을 이해하시고 공감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죄가 없으심에도 우리가 겪는 슬픔과 아픔 이상의 고통을 친히 경험하신 분입니다(히 4:15~16). 전능하신 하나님 아들이 인간의 모든 슬픔과 아픔을 공감하시는 사랑의 주님이라는 사실은 우리 삶에 가장 큰 위로입니다.

[말씀으로 기도하기]

제 모든 상황과 고통을 이해하시고 공감하시는 주님으로 인해 힘을 얻습니다. 제 생각과 경험으로 주님 능력을 제한해 생각지 않고, 모든 것이 합력해 선을 이루게 하실 주님을 끝까지 신뢰하게 하소서.

출처 : 생명의 삶

35.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요 11:1~44)

1) 암송요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5~26절)

2) 본문요약

나사로가 병에 걸려 죽게 되었을 때 예수께서는 일부러 이틀을 유하셨다가 그가 죽은 후에 그의 집을 방문하시여 통분히 여기시며 눈물도 보이시면서 무덤에 있는 나사로에게 명령을 내려 살리심으로 생명의 주가 되심을 입증하셨다.

3) 내용분해

(1) 나사로의 죽음(1~16)

① 베다니의 나사로(1~3) ~ 베다니는 예루살렘 남동 약 2km 지점의 마을로 여리고로 향하는 길이 있는 감람 산 옆에 위치하고 있다. 마리아와 그 형제 마르다의 촌 베다니로 부르는 이유는 세례 요한이 세례를 주던 베레아 지방의 베다니와 구분하기 위해서이다(10:40). 두 자매는 동생 나사로가 병들었으므로 예수님께 사환을 보내어 소식을 전함으로 서둘러 오셔서 고쳐 주시리라 믿고 있었던 것 같다.

②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병(4~6) ~ 병이 든 나사로의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은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죽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고 영생과 대조되는 영원한 죽음에 이르지 않는다는 뜻이다.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라고 하셨는데 이를 통해 자신이 영광을 얻게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여유 있게 이틀을 더 유하셨는데 자신의 때를 위함이었다.

③ 유대로 다시 가심(7~10) ~ 예수께서는 마르다의 집이 있는 베다니로 가자 아니하시고 위험과 고난의 장소인 유대(2:13, 5:1, 7:14)로 가자 한 말씀에서 비장한 각오를 보게 된다. 이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은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나이까 하자 낮의 비유로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행하실 바를 행하셔야 했다. 왜냐하면 실족할 수밖에 없는 밤이 오기 때문이었다(9:4).

④ 나사로가 잠들었도다(11~16) ~ 예수께서는 나사로를 친구로 부르시고 죽은 나사로를 보고 “나사로가 잠들었도다”라고 했는데 성경은 여러 곳에서 죽은 자를 자는 것으로 완곡어법을 쓰는 것은 부활을 전제로 하는 표현이다(삼하 7:12, 욥 3:13, 단 12:2, 마 9:24, 행 7:60, 고전 11:30). “내가 깨우러 가노라” 이는 나사로를 살리러 간다는 뜻인데 제자들을 비롯하여 청중들의 오해를 불러 일으켰다.

(2) 죽은 나사로를 살리심(17~44)

① 마리아와 마르다의 믿음(17~24) ~ 나사로의 죽음으로 많은 유대인들이 문상차 방문했고 예수께서 나타나심에 마르다는 21절의 신앙고백까지 하였으나 이러한 부활신앙은 마르다 뿐 아니라 초대교회 성도들의 신앙이기도 하다(행 23:8). 그러나 말씀의 진의를 깨닫지 못하여 믿지는 못했고 안다는 표현에 불과했다. 때때로 우리가 믿고 있는 신앙내용과 나타나는 행위와의 차이가 많음을 부인할 수 없다.

②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25~27) ~ 나는 부활(ἡ ἀνάστασις)이요 즉 예수님은 부활의 원동력이시고(6:39) 부활 할 모든 이들의 첫 열매이시다(고전 15:20, 23). 부활을 먼저 강조한 것은 부활 자체가 곧 생명(ἡ ζωή)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영생을 소유하게 되는데 이는 그리스도 자신이 죽음을 정복하고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이에 예수님은 이 사실을 “네가 믿느냐”라고 질문 하셨다.

③ 심령에 통분과 민망히 여김(33~35) ~ 동기는 생명의 주가 되는 자신에 대한 불신앙에서 비롯되어 통분히 여기셨는데 예수님은 분노한 마음에서의 감정을 들어내게 된 것이다(막 14:5). 그리고 민망히 여기심은 인성을 지니신 예수께서 나사로의 죽음에 마음의 동요를 일으킴을 뜻한다. 신성을 기록하는 것이 본서의 목적이기도 하지만 요한은 인성도 중요시 했다(ἐδάκρυσεν ὁ Ἰησοῡς, Jesus wept).

④ 나사로야 나오라 명하심(39~44) ~ 세 가지 명령

첫째 : 돌을 옮겨 놓으라 ~ 죽음의 권세를 옮기시는 명령

둘째 : 나사로야 나오라 ~ 자는 자를 깨우는 것처럼 부르심(11:11)

셋째 :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 거듭되는 명령으로 죽음이 끝이 아니라 부활하여 영원한 삶을 누리게 됨을 예시하셨다.

4) 질문

① 본문의 중심 되는 내용은 무엇인가?

② 나사로의 병에 대한 예수님의 진단은 무엇이었나?

③ 예수께서 이틀이나 지체하시고 나사로에게 가신 이유는?

④ 예수께서 통분과 민망히 여기신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⑤ 예수께서 나사로에게 내린 명령은 어떤 것들인가?

5) 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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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요한복음11장:죽은 나사로를 살리다,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다

13. 요한복음11장:죽은 나사로를 살리다,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다

나사로의 죽음과 다시 살리는 사건은 유대 권력자들이 예수님의 체포를 더이상 방관하거나 미룰수없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그 어떤 기적보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명확하게 표현하는 표적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자를 살리신 사건은 모두 세가지였습니다. 야이로의 딸(마가복음5:22~43)과 나인성과부의 아들(누가복음7:11~17)과 나사로(요한복음11:1~44)였습니다. 그러나 야이로의 딸과 나인성 과부의 아들은 죽은지 얼마되지 않은 시간에 발생한 사건으로 일부 부인세력들로 부터 기절상태였다는 견해가 있었지만 나사로의 경우는 무덤에 있은지 이미 4일이 경과한 것(요한복음11:17)으로 이미 그 시체가 부패하고 있는 과정에 있었기 때문에 부활에 대한 경이적인 확신을 준 사건이었습니다. 이 놀랄만한 사건으로 인하여 예수님을 불신하였던 많은 유대인들 가운데 상당수가 예수께 회복하여 믿음을 고백하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요한복음12:11)

1~2. 예루살렘 남동쪽 3km지점에 위치한 베다니라는 마을에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의 3남매가 살고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베다니의 나병환자 시몬의 집을 방문한 예수님께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아 주던 바로 그녀였습니다.(마태복음26:6~13) 지금 그녀의 친오빠가 사경을 헤메고 있었습니다.

3. 마음이 조급해진 마리아와 마르다는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화급을 다투는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그러면 아마 모든 만사를 재치고 자기들의 집으로 올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이전부터 나사로와 그 가족을 친가족처럼 생각하며 극진히 사랑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요한복음11:5,35~36)

4.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은 웬지 달라 보였습니다. 위독한 병세를 듣고도 예수님은 나사로에게 생긴 병이 죽을 병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생긴 병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이것으로 인하여 영광을 받게 하려고 하는 것이라는 전혀 알아 들을 수 없는 말씀을 하신 것이었습니다. 이상한 답변을 들은 나사로의 전달자는 그의 자매들에게 가서 무엇이라고 전해야 할까요?

5. 예수께서는 그 이전부터 마르다와 그녀의 남동생인 나사로와 막내인 마리아를 사랑하셨습니다.

6. 그런데 전달자로부터 나사로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도 예루살렘 인근 베다니에서 이틀을 더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계신 베다니에서 베레아의 베다니까지는 빨리가도 하루가 걸리는 거리였습니다. 전달자가 예수님께 오는데 이미 하루가 지나가 버렸기 때문에 지금가도 3일째가 되는 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급한 사정으로 이틀을 더 계시게 되었는지는 알수 없으나 마르다와 마리아의 입장에서 보면 섭섭함은 이루 말할수 없었을 것입니다.

7~8. 이틀이 지난후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유대로 가자고 재촉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다시 위험에 직면하는 것을 매우 우려했습니다. 조금전에도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돌로 치려는 위험이 있었는데 다시 위험이 도사리는 곳으로 가게 할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나아가는 길이었습니다.

9~10.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면 어두운 죄악세상에도 정오의 낮과 같이 밝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어둠을 비추는 해와 같이 생명의 빛으로 세상을 비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백주대낮에 살인을 저지르는 폭도와 같은 모습을 바리새인들도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11. 예수님은 나사로를 우리의 친구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가 잠들어 있고 예수께서는 잠든 나사로를 깨우러 가신다고 하였습니다. 마르다와 나사로와 마리아가 예수님께 얼마나 정성을 다하여 헌신하였으면 그들이 다급하게 예수님을 찾고, 예수님은 친구인 그들을 위해 위험지대인 베다니로 향하였을까요?

12~14.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나사로가 차라리 잠들어 쉬고 있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지만 예수님은 나사로가 이미 사망하였음을 말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사로가 이미 죽은지 3일이나 경과하였음을 말씀하였습니다.

15. 나사로가 죽은것이 기뻐할일은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앞으로 눈으로 목도하게 될 기적을 바라보며 큰 믿음을 갖게 될것을 생각하며 기뻐하였습니다. 더 나아가 나사로의 죽음과 살리심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예고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므로 제자들이 이것을 깨닫기를 원하였습니다.

16. 헬라어로는 “디두모”, 히브리어로는 “도마”라고 하는 제자는 마태와 쌍둥이 형제입니다.(마태복음10:3,마가복음3:18,누가복음6:15) 도마는 안전을 보장할수 없는 베다니로 향하면서 죽음을 결사하겠다는 비장한 결심을 굳힌 듯 하였습니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에게 함께 각오를 다질 것을 결의하였습니다.

17.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시체와 분리된 영이 3일동안 무덤 주변을 배회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3일의 기간을 애곡의 날이라고 불렀습니다. 그후 4일째가 되면 시체가 부패하기 시작하고 영은 무덤을 떠난다고 믿었습니다. 예수께서 베다니 나사로의 집에 도착했을때에는 나사로가 죽고 무덤에 있은지 이미 나흘이나 지난 후 였습니다.

18~19.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5리 길이 되어 많은 유대인들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문상을 왔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그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과 인정을 베풀며 살았다는 것을 살펴볼수 있는 대목입니다.

20. 예수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접한 마르다는 앞서 나가서 예수님을 맞이 하였지만 마리아는 집에 머물러 있어야 했습니다. 유대전통에 의하면 초상이 나면 그 가정은 모든 의자를 뒤집어 놓고 바닥에 주저앉아 호곡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때문에 장녀인 마르다는 손님을 맞이하고 마리아는 그 자리에 앉아 전통적인 관례를 따라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조금이라도 일찍 올수 있었던 예수님께서 이틀이나 지난후에 오신 것에 대한 속상한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21.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이곳에 함께 계셨으면 남동생 나사로가 죽지 않았을 것을 하는 아쉬움을 표현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원망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22.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줄을 믿습니다라는 마르다의 고백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성령이 마르다에게 임하심으로 말미암아 고백한 신앙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나사로를 살려 주실 것이라는 그런 믿음의 고백은 아니었습니다.

23~24.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에게 나사로가 다시 살아 날 것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지금 즉시 나사로가 살아 날 것이라는 말씀으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부활때에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것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이것은 모든 유대인들이 가지는 가장 기본적인 부활신앙이었습니다.

25~26. 예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니 너는 이 말씀을 믿는가?”라고 마르다에게 말씀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은 죄를 범하였습니다.(로마서3:23) 그로 인하여 사망이 모든 사람들의 왕이 되었습니다.(로마서5:12~14)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망으로 부터 온전히 자유하셨습니다.(사도행전2:24) 그래서 예수께서는 우리의 죄를 위하여 대속물로 사망에 이르게 되었으나(로마서4:25) 부패함을 당하지 않고(사도행전2:27)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하셨습니다.(사도행전3:15) 이와같이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서 영원할 것을 나타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전해야 할 복음의 주체가 되셨습니다.(디모데후서1:10~11) 비록 육신은 죽을지라도 영혼은 죽지 않고 살아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날에 육신은 신령한 몸으로 다시 부활하여 영생할 것입니다.(고린도전서15:44)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죽음이 없습니다. 오직 영생이 있을 뿐입니다.(요한복음3:16)

27. 예수님의 질문에 마르다의 대답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예수님 믿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내가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는 마르다의 얼굴을 바라보며 예수님은 얼마나 행복해 하셨을까요? 이 고백은 베드로의 고백(마태복음16:16)과 함께 모든 그리스도인의 한결같은 신앙고백이 되었습니다.

28~29. 초상집으로 돌아간 마르다는 문상온 손님들과 함께 있는 마리아를 향하여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고 하였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을 종종 랍비라고 불렀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자기들의 영적 스승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급한 마음으로 달려갔습니다.

30. 예수께서는 나사로의 집으로 오지 않았습니다. 조금전 마르다와 함께 대화를 나누던 그곳에 그대로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초상집 안으로 가시지 않은 것은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실 계획으로 확정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관례상 매장 장소는 예루살렘 성 밖에 위치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집으로 갈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31. 마리아와 함께 있던 유대인들이 급히 나가는 마리아를 바라보고 지금 곡하러 무덤에 간다고 생각하며 그를 따라 나섰습니다. 유대인들은 초상이 나면 장사를 지낸후 일주일간은 친지들이 자주 무덤을 찾아 울었습니다. 그래서 문상을 온 유대인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마리아를 따라 나섰던 것입니다.

32. 마리아는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울었습니다. 마리아는 평소에도 예수님 발 아래에 앉아 말씀을 듣기도 하고(누가복음10:39), 향유옥합을 깨뜨려 예수님께 드릴때에도 발앞에 엎드려 있었습니다.(요한복음12:3) 이처럼 마리아는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하고 존경하였습니다. 마르다의 고백과 같이 마리아도 예수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나사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인데 하는 아쉬움을 표현하며 소리내어 울었습니다.

33. 예수님은 마리아와 함께 따라온 유대인들이 우는 모습을 바라보며 심령에 비통함을 느끼셨습니다. 나사로와 이 가족들이 행한 평소의 삶에서 많은 사람들은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들의 한결같은 진심을 보시고 긍휼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34~35.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을 나사로의 무덤으로 인도하였습니다. 나사로의 무덤앞에 서자 예수님은 눈물을 쏟으셨습니다.(요한복음11:35) 신약성경에는 예수님이 세번 우셨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생애 마지막 1주일전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전에 우셨고(누가복음19:41),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때에 크게 통곡하며 우셨으며(히브리서5:7), 그리고 지금 나사로가 죽었을때 그의 무덤앞에서 우셨습니다.

36. 이 모습을 바라본 유대인들이 예수께서 나사로 가족을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저토록 우실까 하며 함께 안타까워 했습니다.

37. 그들중 어떤 사람은 맹인의 눈을 뜨게 한 능력있는 예수께서 나사로가 죽지 않게 할수는 없었을까?하며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들은 이제 예수님의 이적은 소멸된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38. 에수께서 속으로 비통히 여기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로 되어 있어서 입구를 돌로 막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향한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로 인하여 심기가 약간 불편해 있었습니다.

39. 무덤을 보신 예수께서는 지금 즉시 돌을 옮겨 놓으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러자 마르다가 “예수님, 이미 죽은지 나흘이 되어 부패한 냄새가 납니다.” 지금까지 죽은자의 무덤문을 연 사례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죽은 나사로의 모습으로 인하여 예수님과 함께 온 유대인들에게 크게 결례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태도는 분명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나사로에게 애곡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니라 잠자는 나사로를 깨워 다시 살리려고 오신 것이었습니다.

40. 예수께서는 앞서서 마르다에게 하신 말씀을 다시 상기시키며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고 하시며 문을 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믿음은 순종과 직결됨과 동시에 무조건이라는 단서가 함께 적용되어 지는 것입니다.

41~42.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마르다는 무덤의 문을 열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일 같지만 유대교 전통에서 닫았던 무덤문을 다시 개봉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렸던 베드로처럼 마르다 또한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남동생의 무덤문을 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시고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합니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함께 서 있는 유대인들을 위한 것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하여금 믿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는 성부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셨습니다.(마태복음26:39) 마찬가지로 성부 하나님께서도 성자 예수님의 기도를 전적으로 들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신앙생활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생활신앙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43. 기도가 끝난 후 예수님은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너라”라고 외쳤습니다. 로마의 점성술사들이나 유대의 술사들처럼 중얼거리는 주문이 아니라 부활이요 생명의 주이신 권능을 선포하듯 큰 소리로 명령하는 절대 지존자의 음성이었습니다. 원문에도 “나사로야! 밖으로!”라고 되어 있듯이 나사로야 다시 살아나라는 말이 아니라 나오너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인생이 끝난후 우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치시며 “OOO야 나오너라”하는 듯한 감격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44. 그러자 무덤안에서 죽은 나사로가 수족을 베로 동여 맨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쌓여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었습니다. 사실 염이 끝난후 온몸은 베로 묶여 있기 때문에 스스로 걸어 나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명령앞에 순종하는 나사로의 믿음이 나타나는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죄로 메여있는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며 살아나는 예수님의 형상을 보여주는 듯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베로 묶여 있어서 제대로 걸을 수 없는 나사로를 보고 예수께서 나사로를 풀어 놓아 다닐 수 있도록 하라고 말씀 하였습니다. 나사로가 귀신이 되어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일시적으로 기절한 상태도 아니었고 완전히 죽어서 이미 염이 끝나고 모든 숨구멍이 막혀 있는 완전한 죽은 상태의 나사로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죽은자에게 입혀진 베를 걷어내고 나사로는 이제 죽기 전의 나사로로 건강하게 회복하였습니다. 그런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을 바라본 마르다와 마리아와 제자들과 유대인 목격자들은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요? 또한 이미 죽은몸이 되어 있었던 당사자인 나사로는 또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요? 실제로 그 당시의 목격자가 아니라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수많은 목격자에 의해 바로 눈앞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45. 초상집에 문상을 왔다가 상상조차 못할 기적을 목격하게 된 많은 유대인들은 지금까지의 예수님에 대한 모든 선입견과 부정적인 태도를 완전히 불식하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46.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바리새인들에게 달려가서 예수께서 나사로에게 행하신 일을 고발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목도하고도 믿음을 저버리는 어리석은 자들은 끝까지 불신앙을 선택함으로서 예수님과 항구적인 평행선에 놓여 있게 되었습니다.

47. 나사로의 죽음과 다시 살아나는 기적을 목도한 유대인들이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님을 고발하였을때, 유대최고의 법정으로 사두개파의 제사장과 바리새파의 장로들로 구성된 72인의 “산헤드린공회”는 매우 급박한 상황에 도달하였음을 직감하였습니다. 그들에겐 이제 예수님을 그냥 내버려 둘수없는 벼랑끝에 서 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48. 만일 이대로 수수방관하면서 언제까지나 지켜 보고만 있으면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게 될 것이 자명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로마제국이 우리를 군사적으로 점령하려 할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성과 성전마져도 빼앗길 것을 심히 우려하였습니다.

49. 그때 안나스의 사위로 예수님의 재판에 직간접적으로 간여한 대제사장 가야바는 다른 공회원들이 사태 파악이 않되고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고 질책하였습니다.

50. 가야바는 “한사람이 백성을 위해서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유익한 선택인줄 알아야 한다”고 예수님의 십자가형을 기정사실화 하였습니다. 가야바는 자신이 한 말의 의미를 충분히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요한복음18:14) 그러나 그의 말은 십자가 구속에 대한 예언이 되었습니다. 가야바는 단순히 로마의 정치적 이해관계로서 예수의 처형을 표현한 것이었지만 그 말이 그대로 성취되었을때 그리스도의 대속적 희생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교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가야바가 한 이 말은 오늘날 기독교의 구원에 있어서 “대표의 원리”라 명명되었습니다. AD.177년, 순교한 교부 이레니우스(Irenaeus)는 “총괄갱신”(Recapitulation)으로 이해하였으며 새로운 피조물로의 성장을 말하였습니다.

51~52. 가야바의 입에서 무심코 나온 이 말은 자기 스스로 지어 내어 한 말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에 의해 말한 것임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의 죽음은 유대민족 뿐만 아니라 모든 열방을 구속하기 위한 것임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세계 열방 가운데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들을 하나되게 하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대속의 역사적인 사건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53. 그전까지의 회의에서는 예수에 대한 계획을 놓고 의견 대립과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사로를 살리신 일을 계기로 산헤드린 공회는 예수를 죽이기로 결의하였습니다.

54. 에브라임은 예루살렘 북방 32km 지점에 위치한 도시로 벧엘과 인근한 지역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살해음모를 피하여 2개월간 그곳에서 머물러 있었습니다.

55~57. 유대인의 최대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이 다가오자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성결하게 하기 위해 각지에서 예루살렘으로 모여 들었습니다. 예루살렘에 모여든 많은 유대인들의 관심은 유월절이 아니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실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가 나타나면 그 즉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에게 고발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산헤드린공의회가 주최하는 유대인 최대 명절인 유월절을 준비하는 과정속에서 오직 예수님을 잡는데만 혈안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베델 바이블 하우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

요한복음 11:1-16

요한복음 11 장은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리신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 오늘은 이 이야기의 앞부분을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 성경은 ‘ 생명의 책 (Book of Life)’ 이지만 , 그 안에는 죽음에 관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며 , 또 죽음이라는 주제가 매우 자유롭게 다뤄집니다 . 심지어 기독교의 대표적인 상징이 죽음을 의미하는 십자가입니다 . 성경에서 ‘ 죽음 ’ 이 이렇게 쉽게 다뤄지는 이유는 이것이 더 이상 무섭거나 무거운 주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 나사로가 잠들었다 ’ 고 하시며 또 ‘ 내가 깨우러 간다 ’ 고 하십니다 . 생명의 주인이 되시는 예수님께 ‘ 죽음 ’ 이란 잠시 쉬다가 깨어나는 ‘ 잠 ’ 과 같은 것입니다 . 이것은 ‘ 은유적인 ’ 표현이 아니고 , 사실이 그렇습니다 . 그리고 오늘 예수님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통해서 이 진리를 우리에게 증거하십니다 .

베다니라는 유대 마을에 마리아와 마르다 자매 그리고 그들의 오라비인 나사로가 살았습니다. 그런데 오라비인 나사로가 중병에 걸렸습니다 . 이 누이들은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서 이 소식을 알렸습니다 . “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 이들은 예수님께서 이 소식을 듣기만 하면 곧 오셔서 나사로의 병을 치료해 주실 것으로 믿었습니다 .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으신 후에도 이틀을 더 계신 곳에 머무르셨습니다 . 그리고 그 사이에 병든 나사로는 죽고 말았습니다 . 여기까지는 참으로 슬프고 안타까운 이야기입니다 . 죽음이 이 삼 남매의 행복한 가정을 어둠과 절망으로 몰아넣었습니다 . 그들이 믿고 의지하던 예수님도 죽음 앞에서는 위로와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 사랑하는 오라비를 죽음에 빼앗기고 나서 마리아와 마르다는 뼈가 시리도록 깊은 외로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 무덤 속에 누운 나사로와 마찬가지로 , 마르다와 마리아의 영혼 또한 한 줄기 빛도 들지 않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 갇혀 누었을 것입니다 .

하지만 “ 예수님 안에서 ” 의 분위기는 전혀 달랐습니다 .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으셨을 때 “ 아이고 큰일났구나 !” 하며 근심을 하시거나 “ 빨리 가자 !” 하며 서두르시지 않았습니다 . 대신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그림자가 엄습하고 있는 이 다급한 상황에서 “ 하나님의 영광 ” 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 또 5 절에서는 예수님께서 마르다와 마리아와 나사로를 사랑하셨다고 말합니다 . 이 말씀들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 “ 나사로의 죽음 ” 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사랑은 여전히 유효하며 , 또 “ 나사로의 죽음 ” 이 끝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하나님의 영광으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 나사로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여전히 예수님의 사랑 안에 있으며 , 여전히 하나님의 영광의 역사 안에 있는 것입니다 .

물론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죽기 전에 가셔서 그를 낫게 하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심으로써 나사로가 죽도록 내버려두셨습니다 . 이에 대해 15 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 곧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제자들의 믿음을 위해서였습니다 . 당시에 사람들은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 하지만 그들의 믿음은 “ 제한적 ” 이었습니다 . 마르다와 마리아는 “ 나사로가 죽기 전에 ”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를 치료해주시기를 기대했습니다 . 21 절과 32 절에서 각각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께 말합니다 . “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 또 37 절에 보면 어떤 사람이 이렇게 질문합니다 . “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을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 이들은 모두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병을 치료하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 예수님께서 조금만 일찍 오셨더라면 죽음을 피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 하지만 이들의 믿음은 거기까지였습니다 . 이제 너무 늦었습니다 . 나사로가 그만 죽었기 때문입니다 . 나사로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 “ 믿음 ” 도 끝났습니다 . “ 사랑 ” 도 이제 별 의미가 없게 되었습니다 .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 무지막지한 “ 죽음 ” 앞에서 슬픔을 억누른 채 조용히 숨을 죽이고 흐느껴 우는 것뿐이었습니다 .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거기 계시지 아니한 것을 기뻐하신다고 합니다 . 이것은 거의 “ 내가 거기 있지 않아서 나사로가 죽게 된 것 ” 을 기뻐한다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 예수님께서 이를 기뻐하신 것은 , 이제 제자들의 이 “ 제한적인 ” 믿음의 경계를 죽음 너머로 넓히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

마르다와 마리아나 제자들처럼 우리 또한 예수님을 믿지만 우리의 믿음은 자주 “ 죽음 ” 이라는 한계에 부딪혀서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합니다 . “ 죽음 ” 이 꼭 나사로의 죽음처럼 숨이 끊어지고 무덤에 묻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 우리에게 죽음이란 마지노선 (Maginot Line), 곧 더 이상 양보할 수 없는 한계선 ,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최후의 방어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그 선이 무너지면 내 인생도 망할 것 같은 그런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 예를 들면 , 직장이나 , 건강이나 , 가족과 같이 우리의 삶에 소중한 것들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 심지어 그것은 마감일을 넘기거나 , 주차 위반 딱지를 받거나 , 사랑하는 사람의 기대를 실망시키는 사소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 이렇게 크고 작은 문제들은 “ 죽음의 냄새 ” 를 풍기며 우리의 마음을 어둡게 합니다 . 정말 피하고 싶습니다 . 그래서 우리는 제발 이런 문제들이 생기지 않도록 기도하며 , 혹 생기더라도 “ 돌이킬 수 없는 마지노선 ” 을 넘지 않도록 더욱 간절히 기도합니다 . 그리고 우리 눈으로 보기에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 , 우리는 주님을 계속 믿기를 포기하고 , 대신에 “ 만일 주님께서 OO 하셨더라면 ~” 하며 애석해 합니다 . 우리의 믿음은 자주 이런 한계에 갇혀 있습니다 .

우리가 죽음의 한계 안에서 예수님을 믿는다면, 그것은 사실 진정한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 이런 한계적인 믿음으로는 , 우리가 아무리 간절히 예수님을 찾고 부른다고 하더라도 , 우리의 영혼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결국 “ 죽음의 두려움 ” 일뿐입니다 . 더욱 심각한 것은 예수님 조차 이 죽음의 한계 아래 갇혀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 죽음의 문제는 예수님이라도 어쩌지 못할 것이라고 굳게 믿는 것입니다 . 이것은 매우 비극적인 신앙 생활입니다 . 늘 지뢰밭을 걷는 듯한 조마조마한 삶입니다 . 작은 문제에도 소스라치게 놀라는 삶입니다 . 사실은 오늘 말씀에 나오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시기 위해 유대 땅으로 가시려고 하자 제자들이 말했습니다 . “ 랍비여 !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 이들은 며칠 전에 유대 땅에서 나쁜 경험을 했습니다 . 어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한 것입니다 ( 요한복음 10:31). 이 일은 제자들의 마음 속에 깊은 두려움을 심었습니다 . 이제 그들에게 유대 땅은 “ 죽음의 땅 ” 이었습니다 . 그래서 그 땅으로 갈 수 없었습니다 . 이들의 몸은 생명의 주이신 예수님과 함께 있었지만 , 그들의 마음 속에는 죽음의 그늘이 짙게 깔려 있었습니다 .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대신 , 두려움의 소리를 듣고 주저앉았습니다 .

물론 예수님께서 이것을 그냥 두고 보실 리가 만무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한계적인 믿음을 고치시고 , 온전한 믿음을 갖게 하십니다 . 어떻게 그렇게 하실까요 ? 우리가 약한 육체의 생명을 의지하여 사는 대신 , 예수님 안에 있는 참 생명을 의지하여 살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 이것은 마치 허름한 건물을 부수고 그 자리에 견고한 새 건물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 새 건물을 짓기 위해서 건축자가 먼저 해야 하는 일은 이미 있는 낡은 건물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 땅 위에 있는 모든 약한 것들을 남김없이 부수고 제거해야 합니다 . 그리고 새 건물의 기둥들을 모두 단단한 기초 위에 세워야 합니다 . 만일 아까운 마음에 낡은 건물의 일부라도 남긴다면 그 위에 견고한 새 집을 건축할 수 없습니다 . 새로 지은 집이 아무리 튼튼하더라도 , 그 낡은 부문이 무너져 내리면서 건물 전체가 내려앉게 됩니다 .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생명처럼 붙들고 있는 모든 낡은 것들을 다 무너뜨리십니다 . 하나도 남김이 없이 철저히 무너뜨리십니다 . 그것이 나자로가 겪은 “ 죽음 ” 입니다 .

오직 예수님 안에만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님 외에의 다른 것들은 절대로 우리의 생명이 될 수 없습니다 . 9,10 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 “ 낮이 열두 시가 아니냐 ?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 여기서 “ 세상의 빛 ” 이란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을 말합니다 . 요한복음 1:4 절은 예수님을 가리켜 “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 말씀하며 , 또 9:5 절에서 예수님은 “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 하십니다 . 반면에 “ 밤 ” 이란 이 빛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 다시 말하면 생명의 빛 대신 “ 죽음의 두려움 ” 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 그리고 이 어둠 속에 다닐 때 사람이 넘어지게 됩니다 . 흥미롭게도 ,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곧 “ 죽음 ” 을 경험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 혹시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렇습니다 . 오늘 말씀에서 나사로는 죽고 , 그의 자매들인 마르다와 마리아는 이 죽음의 고통을 떠안았습니다 . 또 예수님의 제자들은 죽음의 두려움을 무릅쓰고 유대 땅으로 가야 했습니다 . 이와 같이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은 모두 “ 낡은 옛 사람을 무너뜨리는 ” 죽음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 오히려 이런 과정에서 예수님 안에서 있는 “ 생명의 빛 ” 을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 이제야말로 진정한 생명을 누리며 , 이에 따라서 “ 어두움이 조금도 없는 빛 ”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 오직 예수님 안에만 이 생명이 있습니다 .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의 병이 죽음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 고 하십니다 . 하나님께서 “ 우리 가운데 ” 영광을 얻기를 원하십니다 . 바로 “ 나 ” 에게 칭찬 받기를 원하십니다 . 나의 찬송을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 하나님께서 어떻게 영광을 얻으실까요 ? 성경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사람들로부터 영광을 얻으시는 방법은 한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 그것은 바로 나를 “ 구원 ” 하시는 것입니다 . 출애굽기에 보면 , 하나님께서는 앞으로는 홍해 바다와 뒤로는 맹렬히 추격하는 바로의 애굽 군대 사이에 갇혀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십니다 . “ 내가 바로와 그 모든 군대와 병거와 마병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리라 ” ( 출애굽기 14:17) 하시고 또 “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 (14:13) 하십니다 .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 구원 ” 을 행하심으로써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 그리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 구원 ” 은 우리의 삶을 개선하거나 일상에서 겪는 문제들을 해결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 그런 구원으로는 하나님께 전혀 “ 영광 ” 이 되지 않습니다 . 하나님의 구원은 “ 구원의 소망이 전혀 없는 상태 ” 곧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 오늘 이야기에서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무덤에 도착하신 때는 이미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되어 시체에서 썩는 냄새가 나고 있었습니다 . 말하자면 다시 살아날 가능성이 “ 제로 ” 였습니다 . 최소한 이 정도는 되어야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 예수님께서 이렇게 늦게 오신 것은 그때야 돼서야 비로소 여호와 하나님께서 구원을 행하실 만했기 때문입니다 . 그리고 나로부터 영광과 찬송을 받으십니다 .

오늘 이야기의 소재는 “ 나사로의 죽음 ” 이지만 , 그 주제는 “ 하나님의 영광 ” 이며 “ 예수님의 사랑 ” 입니다 . 예수님께서는 내내 그의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 또 그들에게 “ 죽음의 슬픔 ” 을 압도하는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 이것은 또 우리 각자에게 “ 나의 이야기 ” 이기도 합니다 . 곧 나의 이 땅에서의 삶의 여정을 요약하면 , 죽음이나 혹은 구원의 소망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예수님의 신실하신 사랑을 누리며 하나님의 구원의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 이런 일을 자주 겪다 보면 더 이상 죽음이 죽음이 아니게 됩니다 . “ 부활의 믿음 ” 이 습관이 됩니다 . 나와 내 사랑하는 자들의 형편이 어떠하든 내내 예수님의 생명의 빛 가운데 거하게 됩니다 .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의 구원을 보며 주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 이것이 예수님 안에서 우리 각자가 누리는 행복한 삶입니다 . 이 행복한 삶을 위해 오직 예수님께서 나의 생명의 빛이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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